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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6(2); 2017 > Article
1960-70년대 한국 정신의학 담론 연구* - 정신위생학에서 현대 정신의학으로 -

Abstract

This study is to review the emergence of new psychiatrists, scientific rationalization, and popular internalization to reorganize the formation process of modern psychological medicine system. Unlike eugenic psychiatry from the Japanese Colonial Era, the social conditions and contexts forming autonomous system of psychiatry of Korea in the 1960s and 1970s have been concentrated. The discussion approach has been tried to secure two perspectives-treatment and criticism-at the same time and to expand the time and scope of study through the extensive texts such as newspapers, magazines, books, advertisements, and others in the 1960s and 1970s.
Through formation of subject, rationalization, and popularization, this study has surveyed the characteristics of psychiatry in the 1960s and 1970s to accentuate complicated conditions and kinetic steps to systemize psychiatry as scientific field to promote treatment of patients by deviating from mental hygiene approaching national mental health from cleanliness and removal.
The characteristics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as the ethical models of good doctors, medical paternalistic doctors, and non-authoritarian symmetric doctors have been proposed as good psychiatrists by new medical specialists with experience of globality, a new subject emerges. However, there has been illegalization process of unlicensed medical practitioner excluded by the regulatory authority called “clearness.” Second, the rationalization of psychiatry has been accelerated through the dispute of enactment of Mental Hygiene Law, segmentalization of concept of mental illness, and scientific characteristics. Especially, the disputes over enactment of Mental Hygiene Law focused on criminalization of mental patients brought a result to regulate the patients as the target of humanistic treatment and potential criminals at the same time. Third, popularization of psychiatry has embraced invisible mental illness into popular daily life through visual measure called medicine advertisement, and through the discussion about social neurosis, a new paradigm for diagnosis of Korean society has been proposed. Moreover, by focusing on autobiographical works with voices of patients, this article reveals a new doctor-patient relationship.

1. 머리말

이 글은 근대화가 본격화되는 시기에 해당하는 1960-70년대 한국 정신의학의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담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는 세 가지 관점, 즉 새로운 정신과 의사의 등장, 사회적 제도의 구축, 대중적 일상화를 통해 정신의학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1960-70년대 한국의 정신의학이 자율적 체계를 형성하는 환경적 조건과 정신의학이라는 앎의 체계가 구성되는 사회적 맥락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이 연구의 주된 관심이다.
근대 정신의학사에 대한 선행연구는 근대 이전(이나미, 이부영, 1999: 246-264), 1800년대 말-1900년에 이르는 근대 초기(이부영, 1999: 272-281; 이나미, 이부영, 1999: 264-281), 일제 식민지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여인석, 2005; 2008; 이부영, 1994; 이방현, 2012; 2013; 정원용, 1997; 정원용, 이나미, 이부영, 2006; 조형근, 1997; 서울대학교 한국의학인물사 편찬위원회, 2008: 434-456; 이부영, 유석진, 이동식 등, 1989). 서구 정신의학이 소개되기 시작한 17세기부터 한국 정신의학사 연구는 지식 수용사, 병원 및 교육 제도, 치료 연구, 사회적 인식, 인물론 등 다양한 방법론에 의해 연구가 집적되었다. 이를 통해 근대 정신의학의 원형적 특질을 이루는 식민지 시기 정신의학의 구조와 특징이 밝혀졌다. 일제 식민지 시기 정신위생학은 조선총독부 의료시스템 중심으로 성립되었으며, 정신병자를 폭력적이고 위험하며 저열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위생학상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이방현, 2013: 561). 그리고 해방기 및 1950년대 정신의학사 연구는 해방 직후의 이념적 갈등에 대한 기억과 한국전쟁기 군정신의학 중심의 구술사에 집중되어 있다(유석진, 1962: 58-61; 이부영, 1999; 164-166; 이부영, 유석진, 이동식 등, 1989: 20-35). 특히 1950년대 정신의학은 미국의 원조적 성격이 강하고[1], 국가의 부강을 목적으로 하는 정신위생학적 이념이 유지되었으며[2], 미국의 역동적 정신의학이 도입되었고, 정신과가 의사국가고시의 과목으로 편성(대한신경정신의학회 편, 1997: 11) 되는 등 일제 식민지 정신의학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런 점에서 1950년대 정신의학은 혼란기 및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근대화되던 1960-70년대 정신의학에 대한 연구는 국가적 변화에 기반한 사건 중심의 열거나(이부영, 1999: 166-168; 대한신경정신의학회, 2009), 자살 연구를 위한 보조적 사태로 간략하게 다루어졌다(정승화, 2011: 166-195). 이 연구는 1960-70년대 파행적이기는 했지만 제3, 4공화국이 주도한 국가개발 시대에 정신의학이 어떻게 체계화되는지 검토함으로써 정신의학사의 시기와 범주를 확장하고, 그 의미와 한계를 살펴볼 것이다.
기존 정신의학사 연구의 접근 방법을 구분하면, 의학적 진보에 기반한 치료적 관점과(이부영, 1994; 1999; 이나미, 이부영, 1999; 여인석, 2005; 2008; 정원용, 1997; 정원용, 이나미, 이부영, 2006; 서울대학교 한국의학인물사 편찬위원회, 2008: 434-456; 대한신경정신의학회, 2009), 정신병의 규율화라는 비판적 관점으로(이방현, 2012; 2013; 조형근, 1997) 대별된다. 대체로 의학의 진보에 기반한 치료의 관점으로 접근한 연구가 더 많은 편이다. 필자가 보기에 선행연구에서 이루어진 두 가지 관점은 대립적이라기보다 동시적이거나 양가적이다. 따라서 두 관점을 동시에 포착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정신의학이 형성되는 환경을 담론사적으로 접근할 때 그 두 가지 접근법을 포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가령, 당대 정신의학의 필요성이 도출되는 사회적 맥락을 살펴보면 의사의 지위와 환자의 위치가 어떻게 위계화되는지 추론할 수 있다. 이는 치료를 위한 의사의 선한 의지와 함께 권력의지(Foucault, 2014: 205)[3]를 파악할 수 있으며, 동시에 환자의 고통이 어떻게 치료되고 어떻게 무시되는지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담론사적 연구를 통해 정신의학의 치료적 관점과 그 이면의 역설적 논리를 복합적으로 포착하고자 한다.
이 글은 1960-70년대 신문과 잡지, 의사들이 쓴 전문서적과 수필집, 번역서, 논문, 소설, 제약 광고 등을 활용하여 정신의학을 둘러싼 다양한 세력 간의 경쟁적 역학관계 등을 검토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접근법은 한국 정신의학의 체계가 형성, 발전하는 내적 논리와 구조의 변화를 충분히 고찰할 수 없는 한계를 갖는다. 정신의학의 개념과 원리에 내재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담론 연구는 정신의학을 둘러싼 시대적 조건과 맥락을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류 정신의학이 포착하지 못한 의제들을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정신의학의 체계가 형성되는 환경과 조건은 특정 이론서나 국가 기록물, 의사들의 텍스트만으로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이 연구는 폭넓은 텍스트들을 활용하여 1960-70년대 정신의학의 담론적 특징을 귀납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연구의 내용은 정신의학의 ‘주체 형성’, ‘합리화’, ‘대중화’의 세 영역으로 구성할 것이다. 먼저 ‘주체 형성’은 탈후진성의 교두보를 마련한 정신과 전문의의 등장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동시에 이들이 사회적 승인을 받는 과정 이면에 ‘사이비 무면허 의사’의 비합법화 과정이 존재했음을 밝힌다. 둘째, ‘합리화’는 정신병의 개념적 세분화와 실태조사를 통한 과학화의 측면을 다룬다. 그리고 정신위생법 제정 논란을 둘러싼 복잡한 동역학적 상황을 살핀다. 셋째, ‘대중화’는 광고의 시각성과 사회 노이로제 담론의 정치성, 그리고 환자들의 자기 서사를 통해 정신병이 대중들에게 일상화되고 내면화되는지 확인한다. 즉, 이 글은 1960-70년대 주체 형성, 내·외적 합리화, 대중적 일상화라는 세 구도를 통해 주체-제도-대중의 틀로 짜인 정신의학의 형성과정을 조감하고자 한다.

2. 선한 정신과 전문의의 탄생과 무면허 돌팔이 의사

1945년 해방 당시 한국 정신과 의사는 불과 10여 명이 남았을 뿐이었다(이부영, 1999: 164). 1950년대 정신의학은 한국전쟁기 미8군 후송부대 정신과의 지원 아래 군정신의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실제로 군정신의학 집담회가 10회 정도 지속되고, 121부대에서 정신과 의사 교육이 시행되었으며, 한국군의관의 도미 견학과정이 만들어졌다(정원용, 이나미, 이부영, 2006: 7-9; 한국 정신의학 백년사 편찬위원회, 2009: 90-93). 또한 1950년대에는 일제의 식민지 정신의학 시스템이 존속되다가 미국의 역동적 정신의학이 도입되면서 과도기적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정신의학계는 한국의 후진적 정신의학을 선진화해야 할 근대적 요청에 부응해야 했다. 이 시기 한국 사회의 탈후진 근대화 담론은 우월한 서구를 기준으로 한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여 후진성을 극복해야 할 방법으로 작동하고 있었다(황병주, 2008: 255-257). 정신의학 역시 세계적 경험을 한 해외 연수파 및 유학파 의사를 보유함으로써 의학의 세계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서구의 선진화된 정신의학을 경험한 정신과 의사들은 과거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의사의 새로운 지위를 형성하며 등장하였다. 여기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정신의학의 뚜렷한 이정표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정신과의사 이동식, 명주완, 이부영이 제시한 의사 모델 개념에서 새로운 정신과 전문의의 주체 형성 과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뉴욕대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이동식[4]은 1974년도에 출간한 『노이로제의 이해와 치료』에서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의 풍부한 치료 경험과 이론적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일례로 그는 미국에서 간질병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는 환자의 중얼거림이나 우연한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면담을 계속하면서 환자의 병적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환자의 가족과 의료진의 노력으로 완치했다고 쓰고 있다(이동식, 1974: 51-54). 이동식에게 치료의 핵심은 정신과 의사의 윤리적 태도에 있었다. “정신의는 신체적인 인간 뿐 아니라 심리적 인간, 사회적 인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고, 치료도 물리화학적, 심리적, 사회적 모든 방법을 종합적으로 사용”(이동식, 1974: 54)하는 존재여야 했다. 그는 정신질환은 완치가 가능한 병이라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의사가 환자를 종합적 인간으로 대할 때 가능했다.
의사도 환자와 같이 돌아야 하지 않나 하는 점은 정신의들도 심각히 생각하는 문제이며 환자의 세계가 암흑이라면 훌륭한 정신의는 등불을 한 손에 들고 한 손으로는 환자의 손을 잡고 암흑이 세계를 밝혀 주면서 광명의 세계로 동반하는 실존의 동반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환자의 세계 속에 들어가서 환자를 이해는 해야 하지만 이성의 등불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할 수 있다(이동식, 1974: 116).
이동식은 ‘훌륭한 정신의’를 환자의 손을 잡고 등불을 밝히는 암흑 세계의 동반자로 규정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정신병 환자[5]를 고치려면 같이 ‘돌아야’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하면서 그 질문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사도 같은 경험(이동식, 1974: 157)을 해야 한다는 데 원론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일본의 정신위생학이 실험실 중심의 뇌신경 연구에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 의사-환자의 신뢰관계는 성립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제거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사회는 환자를 혐오와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이에 반해 이동식은 환자의 고통을 종합적으로 이해하여 치료하는 의사를 “따뜻한 심정의 소유자”, “좋은 의사”로 보고,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괴로움을 자유롭게 말하게 해주고 들어 주”는 책임윤리를 제시했다. 근대 정신의학 초기에 활동한 맥라렌은 인도주의적 태도(여인석, 2008)를 보여주었지만, 종교적이고 계몽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이동식의 선한 의사 모델은 환자를 종교적 사랑으로 대했던 과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1960-70년대 한국의 정신의학이 체계화될 수 있었던 동력 중 하나는 해외 정신의학을 체험하고 돌아온 정신과 의사(이동식, 1974: 116; 이부영, 1999: 166)들과, 정신병은 완치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던 체계적 교육을 받은 전문의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문명병, 문화병, 고급병, 현대병, 사치병[6]으로 일컬어졌던 정신질환을 치료해야 할 주체로서 호명되었다. 환자를 실존적 동반자로 여기면서 선한 의사 모델을 제시한 이동식은 한국 정신의학의 긍정적 전형이었다.
식민지 시기에 정신의학을 공부하고 환자를 진료한 명주완[7]은 오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과 의사의 윤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의사가 가져야할 요건은 남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게 폭넓은 상식과 교양, 그리고 높은 품격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위엄’과 ‘복종’의 관계가 서야 진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내가 의사여서 ‘선생님’이란 소리를 독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환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에 대한 복종이 있어야만 치료가 비로소 가능하고 정신과 분야에선 더욱 그렇다[8].
명주완의 의사 모델은 부권주의(Beauchamp and Childress, 2001: 171-185; 이상목, 2014: 214-215 재인용)[9]에 가깝다. 여기서 부권주의는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의사가 환자를 치료한다는 선한 목적을 갖는다는 점에서 절대적 권위와는 다르다. 환자의 치료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의사-환자관계는 위엄과 복종의 관계로 설정된다. 명주완에게 정신과 의사는 아버지처럼 존경받을 수 있는 상식, 교양, 품격을 갖춘 인격자에 가까울 것이다. 이동식과 명주완의 선한 의사 개념은 이동식의 것과 공통적으로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는 의료 윤리적 목표에 부응한다는 점에서 의사의 권위를 긍정한다. 하지만 명주완의 의사 개념은 의사의 선한 목적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의사의 무한 책임에 의해 지탱되는 관계로 설정되었다. 또한 환자의 지위는 약화되고 의사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동식이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관계성을 고려하는 데 반해, 명주완은 의사의 권위와 역할을 부각한다는 차이가 있다.
융 학파의 정신분석의 자격을 취득한 이부영[10]은 의사-환자의 대칭성을 강조한 모델을 제안했다. 당시 정신의학은 정신병은 낫는다는 치료 담론이 중심이었음에도 환자에 대한 섬세한 이해는 부족했다. 이부영은 특권화된 의사의 권위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면서 의사-환자 관계를 수평적 대칭성으로 접근하였다.
내가 인생에 의미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말이 절망에 찬 이 환자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 환자가 체험하고 있는 크나큰 어둠 같은 고독에 비해서 나의 말은 실로 하나의 사치에 불과한 것 같다. 차라리 나는 그 사람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의 고독을 이해해주어야 될 것 같다(이부영, 1976: 63).
1970년에 발표한 이부영의 이 글은 의사-환자 관계를 역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 있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에게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하는데, 그는 자신의 말이 망상증 환자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치에 불과하다고 자책한다. 그리고 환자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고독을 이해하고자 한다. 같은 글에서 이부영은 오히려 환자들로부터 배우는 경우가 있다고 고백한다. 분열증을 앓는 환자의 발언에는 현대인의 자기 소외를 비판하는 태도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의사 자신과 사회 전체를 성찰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신과 의사의 권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의사-환자의 대칭적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부영은 치료의 의미를 기존의 정신의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그는 정신장애를 증세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고 보았고, 인간적 성숙과 성장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이해하였다(이부영, 1976: 17). 그는 치료를 정신위생의 차원에서 비정상적 결함을 제거하여 정상으로 되돌리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삶을 미성숙한 태도에서 성숙한 태도로 이해하는 과정으로 개념화했다. 이와 같은 의사-환자의 대칭성 모델은 1960년대에 그가 스위스의 융 연구소에서 학위를 받고 정신분석의가 되는 세계적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융 학파의 분석심리학을 통해 정신병리 현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환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먼저 학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탈권위적 태도를 습득했다는 것이었다(이부영, 1993: 349-350). 그는 유학 이전부터 이미 환자의 내면을 존재론적으로 접근하는 현상학적 해석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이부영, 1961), 융 학파의 수련 과정을 통해 의사-환자의 윤리를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부영은 정신병이 다른 병에 비해 도덕적인 잘못처럼 오해되고 수치스럽게 생각되는 사회적 인식을 비판하며, “병 앞에 만인은 평등하며 귀한 병, 천한 병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11]. 당대 정신병은 수치와 혐오의 감정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1960-70년대에 정신병이 사회적으로 시각화되는 방식은 폭력과 범죄, 비정상의 이미지였기 때문에 환자에게는 수치심을 내면화하고, 사회적으로는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였다. 이부영은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오해를 정의롭고 선한 의사 모델을 제시하며 수정하고자 하였다. 1975년 동아일보에 6개월간 연재한 이부영의 「의학에세이」는 정신과 의사의 존재론적 지위, 정신병과 치료에 대한 개념, 환자에 대한 인간학적 이해 등을 새롭게 제시한 계몽적 글쓰기였다.
이동식, 명주완, 이부영의 정신과 전문의 모델은 좋은 의사, 부권적 의사, 대칭적 의사 모델이라는 개념적 차이는 있지만, 1960-70년대 정신의학의 주체가 지향하는 방향과 특징이 어디에 있었는지 파악하게 해준다. 이들은 정신병을 제거 대상으로 삼은 기존의 정신위생적 접근법을 넘어서는 윤리적 의사 모델을 중심으로 의사-환자 관계[12]를 제안하고자 하였다. 이들이 제시한 의사 모델은 새로운 정신과 전문의의 주체 형성과 자율성을 가능하게 한 주체적 조건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선한 정신과 전문의 개념과 맞물린 사이비 의사들의 부상과 함께 논의된 가짜 의사 담론이다. 세계적 수준을 확보한 선한 정신과 전문의가 정신의학계의 긍정적 주체가 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사이비 무면허 의사의 비합법화 과정이 동시에 존재했다. 정신과 전문의만이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다는 현대 정신의학적 앎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사이비 무면허 의사와 돌팔이가 부각되었다. 이 진짜-가짜 의사의 대립적 코드화 과정을 통해 정신과 의사는 현대적 정신의학의 주체로 승인되었다.
1963년 7월 신문에 돌팔이 의원을 구속했다는 기사가 났다. 의사 면허도 없이 성동구 행당동에서 의료행위를 한 고○○ 씨를 국민의료법 위반혐의로 구속한다는 내용이었다. 고○○은 정신병자인 홍○○ 씨를 치료해준다고 ‘세파민’, ‘캄파’ 등을 주사했으나 효과가 없자, 전기 치료를 하기 위해 50센티미터 전선 두 줄을 등 소케트에 연결하고 환자의 팔에 접선시켜 감전, 중태에 빠뜨린 혐의로 구속되었다[13]. 1970년에도 무면허 의사 강○○ 씨가 ‘중생의원’이라는 정신병원을 차려 의료행위를 했다는 명목으로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강○○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침대에 묶어 몽둥이질을 했기 때문에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입건된다. 정신병 치료를 했던 수많은 종교인들과 달리, 무면허 의사의 이름은 만천하에 노출되었다. 이는 무면허 돌팔이 의사의 불법 행위를 법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들을 범죄자 및 반인권적 행위자로 다루었으며, 정신의학계는 이들을 정신병 치료를 가로막는 반의학적 세력으로 간주했다.
규모면에서 가장 큰 무면허 의료행위는 불법 사설 수용소였다. 1967년 보건사회부는 사설 정신병자 수용소를 조사한다고 발표했다[14]. 정신병 환자 사설 수용소에서 환자들을 구타하고 밥을 굶기는 등 폐인을 만든다는 정보를 입수한 보건사회부가 전국적인 실태조사에 나서는 한편, 불법 행위가 적발된 수용소들을 의료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법 사설 수용소 단속은 본격화된다. 특히 기독교 사설 치료소에서 이루어진 정신병 환자에 대한 불법 치료와 폭력행위 및 살인 사건이 지속적으로 적발되었다[15]. 세간에 충격을 준 사건은 1970년 삼각산 일대의 무면허 진료소에서 행해진 반인권적 치료 행위였다. 이 사건은 발목에 쇠고랑을 찬 중학교 2학년 소녀가 서대문 경찰서에 신고함으로써 노출되었다. 발목에 묶인 쇠사슬을 풀고 도망친 소녀는 쇠갈고리로 등을 할퀴고 손과 발목에 매를 맞아 멍들어 있었으며, 요양소에서 밥도 굶고 뭇매를 맞아 죽을 것만 같아 탈출했다고 증언하였다. 이 사건은 쇠고랑을 찬 앙상한 소녀의 발목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 되었다[16]. 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며 서울 삼각산의 사설 요양소는 생지옥과 같다는 르포 기사가 신문에 연이어 실렸다. 그런데 환자의 가족들은 오히려 “떠날 곳 없는 환자를 그대로 있게 해달라”고 경찰에 호소했다는 것이다[17].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처한 정신의학적 현실과 보사부의 행정규율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정신의학계는 이 차이에 주목하였다. 이들은 환자들을 위한 치료가 정신과 병원과 전문의에 의해 합법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보사부 및 정부에게 국가적 차원의 복지책을 요청했다.
정신의학계는 일제히 정신병원을 확충하여 반인권적 수용소에 갇힌 환자들을 현대적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언론은 보사부가 정신질환자의 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무면허 의료행위와 불법 사설 수용소는 국가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범법행위로 규정되었다. 1960년대 초부터 박정희 정권은 폭력과 부패, 날치기와 깡패 퇴치 등 치안 확보를 통해 ‘명랑사회’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18]. 정부는 ‘명랑한 사회’의 건설과 조국근대화 논리를 등치시키면서[19], 위생과 보건, 질서와 안전을 내부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경계 논리로 작동시켰다(김지영, 2014: 354). 그렇게 볼 때 무면허 의사나 불법 사설 수용소에 갇힌 환자 모두는 근대화된 ‘명랑 국가’ 건설을 저해하는 세력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국가와 정신의학계는 환자를 보호한다는 공동 목표 하에 무면허 치료자들을 불법화하였다. 명랑하고 건전한 사회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정부는 정신병자 치료를 합법적으로 장려했고, 정신의학계는 의사가 정신병 치료의 주체임을 확증한 것이다.
이와 같이 1960-70년대 선한 의사의 등장은 정신의학의 발전적 좌표에 해당했지만, 그 이면에 사이비 무면허 의사가 비합법화되는 과정이 동시에 존재했다. 이는 국가고시를 통과한 전문의 대 사이비 무면허 의사, 선한 의사 대 나쁜 의사, 유능한 치료자 대 가짜 치료자, 그리고 세계적 수준의 선진적 의사 대 전근대적 돌팔이라는 대립 코드가 형성되면서 현대적 치료기술을 보유한 합법적 전문의가 진정한 주체로 인정받는 과정이었다. 유능하고 선한 의사 모델을 둘러싼 정신의학의 주체 논란은 국가, 사회, 정신의학계의 연대 속에서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정신과 의사들은 ‘진짜’ 주체로 승인 받으면서 현대적 정신의학 체계의 동력을 마련할 수 있었다.

3. 정신병의 합리화 과정과 정신위생법 담론의 동역학

한국의 정신의학 체계는 앞에서 살펴본 선한 정신과 전문의의 등장뿐 아니라, 정신병의 개념화와 법적 제도화를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60-70년대 정신과 의사들은 반복적으로 “환자가 늘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정신병 환자의 증가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통계학에 근거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정신병자 수와 분포는 의사 유석진[20]의 조사 내용을 토대로 제시되었다[21]. 유석진의 보고는 1960-70년대 행해진 조사 중 가장 큰 규모였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로 자주 활용되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통계 자료가 제시되었다[22].
통계 숫자는 정신의학의 과학성을 담보했다. 의사들의 글 뿐 아니라 기자들이 쓴 기사문에도 정신병 환자의 실태는 통계 숫자로 기술되었다. 정신병의 종류와 비율, 증가율, 중증, 경증에 따른 분포를 통계로 보여주었다. 유석진의 통계를 근거로 환자 수는 전 국민의 1% 미만 30만 명으로 주로 제시되었으며, 학계 추산 90만 명이라는 숫자가 나오기도 하고[23], 노이로제 환자가 국민의 10%인 204만 명, 정신병 환자 0.78%인 18만 6천 명으로 밝혀지기도 했다[24]. 통계 숫자는 정신병 환자를 국가 차원에서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합리적 요청에 대한 표현이었다. 이를 통해 유석진은 국민의 건강한 정신관리가 전국적 단위로 조망되어야 하며, 국가사업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통계 숫자는 정신의학의 과학성과 합리성을 뒷받침하는 논리적 근거로 활용되었다. 일례로 1972년 경희대 의대 정신과 교수 김광일에 의한 농촌 실태조사가 있다. 농촌 주민 379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는 정신병의 원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결과는 주민들의 35.4%가 정신병의 원인을 잡귀 탓 등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고, 17.6%가 양기부족 등 신체적인 이유라고 대답했다. 그 결과 “사람의 뼈나 간을 달여 먹는다”, “해골에 괸 물을 먹는다”는 등 기상천외한 치료법이 다른 질환보다 많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또한 조기에 치료하면 완치될 수 있는 정신병이 원시적인 치료법 때문에 더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25]. 이 실태조사는 환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그에 비해 현대적 치료를 제대로 못 받고 있다는 동일한 결론을 도출하였다. 역설적으로 실태조사는 한국의 정신 치료에 얼마나 비과학적인 요소가 많은지를 드러내기 위한 과학적 방법으로 이용되었으며, 통계 숫자를 통해 제반 정신의학 시스템이 합리화,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또한 정신병의 합리화는 정신병 개념을 세분화하면서 이루어졌다. 1960년대 초반 정신병은 정신분열증, 조울병, 초로성 우울병, 망상증, 정신신경증, 히스테리 전환반응, 공포증, 신경쇠약, 진행성임비, 전간, 알콜 중독, 몰핀 중독, 정신박약으로 구분되었다. 1970년대에는 소아 정신질환이나 노인성 질환이 추가되었으며, 심지어 정신병의 종류는 200여 종이 넘는다고 대중매체에 소개되었다[26]. DSM 진단법을 참조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분류법의 기준이나 근거는 분명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정신병의 원인을 현대화, 문명화, 도시화로 파악하면서, 정신병을 현대인의 위기나 현대사회의 부작용이라는 세계적 보편성의 차원으로 인식했다. 이는 한국 사회가 근대화의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탈후진성의 지표이기도 했다. 또한 의학적 원인으로 유전적인가 후천적인가[27], 심인론인가 체인론인가와 같은 학문적 의제들도 다루어졌으며[28], 각 질환들의 원인도 세세하게 소개되었다. 하지만 원만하지 못한 대인관계[29], 가정환경 등 개인적 요인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에 따른 치료법도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정신요법과 복약요법의 대립적 차이, 관계, 효과, 세계적 추세에 대해서 깊이 있게 소개되었고[30], “과로하지 않고 레크레이숀”을 하는 등 일상생활에서의 처방도 내려졌다[31]. 하지만 완치되려면 정신과 병원과 전문의를 통해야 한다는 결론은 항상 동일했다. 이 시기의 특이사항은 예술치료였다. 작업 치료, 회화 치료[32], 사이코 드라마[33], 음악치료[34]가 실시되었고, 외국 사례로 문학치료[35]가 소개되었다. 특히 사이코드라마는 1950년대 군정신의학에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여(심포지움, 1989: 26), 1970년대에는 보다 전문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비가시적인 개인의 마음이나 문명전체의 산물로 제시되던 당대 정신병은 개념, 종류, 원인, 치료법 등을 세분화하면서 실체를 가시화했다.
흥미롭게도 정신병의 합리적 제도화는 정신위생법 제정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 속에서 불 붙기 시작했다. 정신위생법 제정 논의는 1930대에 이미 시작되었으나(이방현, 2013: 553), 1968-69년을 전후로 정신의학계 뿐 아니라 보사부의 지원과 사회적 요청 속에서 점화되었다. 정신위생법 제정의 목표는 환자를 보호하고, 현대적 시설을 확충하며, 정신 보건 관리를 제도화하면서 국가사업으로 확장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 정신의학의 인도주의적 진보임에 틀림없지만, 정신병 환자의 범죄 사건을 통해 의제화 되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1967-68년에 걸쳐 일어난, 정신병 환자가 저지른 일련의 살인사건은 환자를 방치해서 발생한 ‘발작범죄’로 평가되면서, 정신의학계와 보사부 등에 의해 정신위생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작금 경향각지에서 정신착란자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까닭없이 희생되었다. 지난 29일에는 원성에서 26세 나는 청년이 사람들 일하러 나간 틈에 10여가구를 찾아다니며 식칼과 쇠망치로 잠자는 어린이와 행인을 찔러 4명의 어린이와 1명의 청년을 죽이고 말리는 사람들 20명이나 부상을 입혔다. 같은 달 31일 경주에서는 새벽에 마을 강변에 바람쐬러 나간 동네 노인을 낫을 참사시킨 사건이 일어났고, 서울 중구에서는 어느 부인이 발작을 일으켜 네 자녀를 가위로 마구 찔러 사상을 일으킨 일이 빚어졌다.
이유야 어디에 있든간에 정부로서는 정신위생법 같은 것을 만들어 이에 대한 보호대책을 세워야 하겠다. 발작적인 살인, 방화가 일어난다면 현행 법률로서는 심신장애자를 제지할 수 없는 만큼 사전입법을 강구하여, 강제입원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36].
1967년 여름 정신병 환자에 의한 강력범죄가 원성, 경주, 서울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원성의 한 마을에서 젊은 ‘정신착란자’가 4명의 어린이와 1명의 청년을 살해했고, 20여 명의 주민에게 상해를 입혔다. 이 기사가 나자 한국 사회는 경악했다. “발작한 농부가 낫으로 동네 사람 5명을 참살, 수십명을 닥치는대로 찍어넘긴 강원도 원성 사건”으로 묘사하면서 정신병자의 범죄가 정상인보다 얼마나 무섭고 잔혹한 ‘발작흉행’인가를 보여주었다. 8월 초 치안 당국은 ‘사회악 강력단속기간’을 선포하고 소매치기, 폭력배, 풍기사범을 단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여기에는 “최근 정신병 환자에 의한 살인사건을 필두로 각종 범죄가 발생하여 민심을 불안케 한다[37]”는 진단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 때 보사부는 사설 정신병자 수용소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여 의료법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공포했다. 심리학자들은 32도를 오르내린 무더위 때문에 정신병자들이 자제심을 잃어 원한, 분노, 질투의 감정이 폭발했다는 분석 결과를 제출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정신병자를 방치했다는 것이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 사건들의 원인이 병원과 병상의 부족, 법적 조처의 미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언론은 정신병 환자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 때문이라고 질타했다. 또 유석진은 한국 정신신경계 환자가 전인구의 3% 약 70만 명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병상 수는 1천 1백 개 정도밖에 없음을 개탄했다[38]. 그는 1967년 당시 정신병원의 총 병상 수는 1140개, 정신과 전문의는 57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면서 미국은 총 병상 수 84만 개(인구 2억), 일본은 4만 5천 개(인구 1억)라고 비교했다. 인구 비례로 보았을 때 일본의 수준이 되려면 1만 5천개, 미국의 수준이면 12만 개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는 한국 정신의학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지표였다. 이에 대해 의사들은 한국의 근대화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정신병 환자를 복지 차원에서 인도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는 사회복지법의 차원에서 정신위생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의료 근대화의 논리였다. 현실적으로 1962년 정신과 병상 수는 1059개에서 1979년에는 1915개로 늘어났으며, 정신과 병원 수 역시 4배 이상 늘었지만(경제기획원, 1964: 424; 1978: 343; 1979: 341), 법제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 정책연구실 김성희 의원은 정신 위생법안을 통과시키도록 노력하겠다는 개인적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보사부 의정국은 빠른 시일 안에 정신위생법을 법제처로 넘기겠다고 공표했다[39]. 법조계에서도 수용시설 확충, 전문의의 치료, 국가 보호를 요구했고, 환자의 보호자가 보호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위법 행위에 준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강경론으로 치달았다[40].
그런데 공교롭게도 1968년 하반기에 또다시 정신병자 살인사건이 이어졌다. 순창, 예산, 칠곡, 안동 등지에서 11명이 살해되었다. 정신병 환자에 의한 민간인 살해사건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다시 정신병의 수많은 종류와 함께 정신신경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데이터가 속속 제시되었다. 급기야 정신병은 200여 종이나 되고, 문제성이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30만 명, 간질 환자 15만 명, 마약 및 알콜 중독이 6만 명 이상, 정신박약자 40만 명이 한국에 산재해 있으며, 이와 같은 정신병 환자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더욱 급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반복되었다. 의사들은 환자들의 38.3%가 방치돼 있는 실정이고 대부분 한의원이나 무당, 종교를 통해 치료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럼에도 보사부 당국은 예산 타령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41]. 정신의학계 뿐 아니라 전사회적으로 뜨겁게 정신 위생법 제정을 요청했음에도 이 법은 공전을 거듭하기만 했다. 이는 당대 정치 논리의 복잡한 지형 위에서 정신의학계가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1968년을 기점으로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고, 1970년대는 유신헌법에 의해 통치되던 시기였다. 명랑하고 건전한 사회건설이라는 박정희 정권의 통치 목표는 거리에서 배회하는 정신병 환자들을 과학적으로 관리 및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했으면서도, 정신병을 통치의 수면 위로 가시화하는 법 제정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보사부는 예산 마련이 어렵다는 이유를 대며, 겨우 의료시설을 보완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했다[42]. 이와 같이 정신의학계의 합리적 치료 논리와 국가의 규율 논리는 함께 작동하다가도 특정 지점에서 서로 갈라졌다.
이 시기 정신과 의사 및 교수들의 학술단체인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의 정신위생법 제정 노력은 구체적이고 지속적이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1967년도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정신위생법 초안을 마련하여 보사부에 제출했다. 공식적으로 보사부와 대한의사협회가 공동 마련한 법안의 골자는 ⓛ 정신병 환자에 대한 신고 의무화, ② 국립 정신병원 시설 대폭 확장, ③ 정신보건상담소 설치, ④ 신고된 정신병 환자에 대해서 정신과 의사가 범죄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면 지방 장관이 직권으로 수용소에 강제수용, ⑤ 재판에서 정신병 환자로 인정되어 무죄판결을 받은 자에 대해서도 치유될 때까지 수용소에 강제수용한다는 것이다[43]. 언론에서 발표한 정신위생법의 핵심은 의료시설 확충과 환자의 강제수용 합법화였다. 정신의학계는 국가적 차원의 의료시설, 교육시설, 복지시설 확충을 요구했다. 여기서 환자는 이중적인 의미로 개념화되었다. 하나는 잠재적 범죄자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을 보호 받을 인격체였다. 그러나 정신위생법이 정신병 환자의 살해사건을 중심으로 의제화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환자는 치료를 받아야 할 인격체라기보다 사회로부터 분리시켜야 할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학회가 제출한 법률 초안에는 정신장애자 또는 그렇다고 의심되는 자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정신 위생 감정을 받도록 신청할 수 있으며, 환자의 강제수용은 본인의 동의 없이도 가능하도록 명시했다[44]. 이것은 일본 법안을 참고한 초안이었는데, 환자의 자율권과 인권에 대한 고려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의사들의 비판은 없었다.
그럼에도 정신위생법 제정을 주도했던 주체는 국가 조직인 보사부나 법제처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 및 교수들의 학술단체인 대한신경정신의학회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학회의 법 제정 노력은 195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967년에 ‘정신위생법 제정 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하고, 1968년에 정신위생법 초안을 작성하여 보사부에 제출했다. 이들은 1972년에 ‘정신보건입법 연구분과 위원회’를 재구성하고, 정신보건법 연구분과위원회(1973년), 정신보건향상위원회(1976년)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입법 연구와 정책 및 계몽 활동을 지속하였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95: 90-93)[45]. 이와 같은 정신과 의사 및 교수들의 활동은 한국 정신의학의 주체를 건설하고, 정신의학의 사회적 영역을 공고화하는 효과를 동시에 가져왔다. 이들은 정신위생법을 둘러싼 논의들을 주도하면서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앎의 체계를 설계했다.

4. 노이로제의 가시화와 정치성, 정신의학의 대중화 과정

정신의학의 앎의 체계들이 한국 사회에 내면화되는 방식은 다양한 경로를 통한 대중화 과정에 있었다. 이러한 대중화 과정의 다양한 방식 중 대표적인 것은 정신질환 치료약의 신문 광고라 할 수 있다. 정신의학의 확장과 함께 각종 신문에 정신질환 치료약 광고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1950년대에는 클로르프로마진 제제인 ‘세파민’이 인기가 있었다. “모든 신경병을 완치시키는 약”이자 “페니시링 발견 이후의 최대의 센세이슌”이라는 과장된 광고를 했다. 정신분열증에서 각종 신경증까지 제증에 우수한 성과를 얻고 있는 세계적 약이라는 것이다[46]. 클로르프로마진[47]은 1950년대에 발명된 신약으로서 전세계 정신약리학적 혁명을 일으킨 약물이었다. 한국에서 처음 발매된 국산 클로르프로마진 제재인 ‘세파민’은 모든 정신병을 ‘완치’할 수 있는 우수한 성과를 보여준 세계가 주목하는 약이라고 광고했다. 1950년대 정신병 약 광고는 대형 약국에서 담당했지만, 1960년대에는 일동제약과 같은 대형 제약회사에서 주도했다. 1960년대는 정신의학의 규모가 커지면서 정신병 약을 판매하는 제약회사[48] 역시 성장했으며, 수입 의약품을 국산 의약품으로 대체한 제약업계의 구조 개혁기이기도 했다(신규환, 2015: 775).
1960년대 신문의 약 광고는 주로 노이로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노이로제 증상은[49] “현대인의 악세사리”라는 친근한 문구로 독자의 눈길을 끌었다. 이 시기 노이로제는 해부학적, 병리학적, 생리학적인 변화 없이 심인성으로만 오는 병으로서 마음의 병을 일컫는 용어였다. 즉 심화병, 울화병, 지나친 걱정병 등으로 표현되는 일종의 신경쇠약을 가리키는 증상을 말한다[50]. 노이로제는 전문적인 의학용어는 아니지만, 오작동되는 마음의 병 일체를 지시하는 용어로 정신의학이 대중화될 수 있는 접점으로 작용하였다.
광고는 현대인이라면 노이로제를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녀도 무방하다는 대중적 감각을 드러냈는데, 광고 일러스트도 밝은 표정의 인물로 그려졌다. 정신병은 식민지 시대부터 대중들에게 혐오감과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는 정신병은 사회적으로 가시화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거리를 배회하는 정신병 환자들은 분리 수용됨으로써 비가시적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정신병 약 광고는 비가시화의 영역에 가려졌던 정신병을 일상의 지평 위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1960년대에 인기 있었던 약 ‘트랑키’는 뇌를 위한 영양제 겸 치료제로 널리 알려졌다[51]. 두통약이나 뇌 영양제로 복용할 수 있다는 광고는 정상인들의 뇌건강을 위한 약처럼 보인다. “기분이 우울한 분, 근심 걱정이 많은 분, 피로 권태를 느끼는 분, 머리가 항상 무거운 분, 정신집중, 기억력, 학습력이 부족한 분을 위한 약”이라는 광고는 이러한 증상들이 병적 증세가 아니라 현대인의 생활 감각 정도로 보이게 한다는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즐겁고 명랑하게’라는 문구와 함께 웃는 여성 사진을 배치한 광고를 보는 독자들은 약국에서 ‘에다나닌[52]’을 쉽게 구매했을 것이다. 의사들도 병원에 오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특정 약을 구입해서 복용하라고 처방하였다[53]. 광고는 복용자가 비정상인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정상인이라고 말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는 새로운 의학 지식은 약 광고를 통해 대중들에게 일상적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를 산출했다. “개도 노이로제에 걸린다”(Fink, 1962: 7-21)는 의사의 발언에서처럼 누구나 잠재적 환자가 될 수 있다는 정신의학적 지식이 생활세계로 전이되었다. 광고에서 제시하는 증세가 나타나면 대중들은 자신의 정신 건강 상태를 점검하며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거나 약국에서 트랑키나 에다나닌을 구입해 복용할 수 있었다. 실제 약국에서 파는 신경안정제가 하루판매량의 5분의 1 정도를 차지할 만큼[54] 노이로제는 일상화되었다.
노이로제가 정신의학이 대중화되는 접점으로 작용했던 것처럼, 사회 노이로제 담론 역시 정신병이 한국 사회의 정치 및 사회 분야에 깊이 자리매김하였음을 보여준다. 앞서 확인했듯이 정신과 의사들에 의해 반복 생산된 “정신병 환자가 늘고 있다”는 진단은 노이로제를 정신병의 주요한 증세로 분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이로제가 적용되는 범주의 확장과도 연관되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은 노이로제를 사회 병리의 한 증상으로 바라보면서 사회적 성찰을 시도했다. 노이로제 개념을 한국의 문화, 도덕, 정치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는 장치로 활용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반 정신과 의사들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 전반을 진단하는 좌담회가 열렸다[55]. 이 좌담회에는 정신과 의사 이동식(사회), 남명석, 유석진, 최신해와 심리학자 이진숙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돌았다의 「기준」’을 “그 사람이 속한 사회가 문제가 되는 것”으로 제시하고, 그 기준을 정할 수 없는 ‘모호한 것’, ‘통계적인 것’, ‘상대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이들은 건강 개념이란 사회적 가치가 개입된 것이고 통계 문제이기 때문에, 건강성과 정상성은 개념적으로 다른 층위에 있으며, 따라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사람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56]. 정신병 환자를 사회 적응 실패자로 보았던 일반 견해와는 달리, 이들이 정신 건강을 정의하는 방식은 건강 대 질병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벗어나 있었다.
좌담자들은 과거 ‘이 정권의 수장이었던 대통령’의 정신 상태는 “돌은 것 같”다는 진단을 내리고, “4·19 의거”를 ‘억압된 불안’에 “양심의 명령으로 잠재되었던 공격성이 발동”된 구조로 설명한다[57]. 정치적 문제를 정신의학적으로 해명하는 이러한 입장은 4·19 이후 지식인들의 고무된 정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정신 불건강의 가장 절실한 문제”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부정적으로 진단한다. 이런 그들의 시각은 ‘집을 나간 자유부인, 종로 3가에 우글우글한 스트리이트·걸, 불량청년의 범죄’ 등을 먼저 거론하면서 전후의 변화를 점검하는 데서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악의없는 짓’이 현재는 ‘광폭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전과 전후의 판단 기준을 자의적으로 내리면서 한국 문화의 정신 건강을 병리적인 것으로 평가했다[58]. 그런 점에서 이들은 정치 현상과 대중문화 현상을 위계적으로 분화했으며, 특히 여성 및 청소년을 병리적 대상으로 재위계화하였다. 좌담자들은 한국 대중문화현상을 심각한 병리적 현상으로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학과 대중문화가 만나는 지점은 병리성의 공동 지대를 형성함으로써 치료되어야 할 환자처럼 구조화되었다.
이후 이동식은 지식인 잡지 『사상계』에 「정신의가 본 인생과 사회」라는 제목의 글을 11회에 걸쳐 장기간 연재한 바 있다[59]. 이 시기 자유주의적 정치 평론을 주도하던 『사상계』 지식인 그룹이 정신과 의사를 주목했다는 것은 정신의학이 사회적 지식 체계로서 지도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도가 높기는 했지만, 환자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정신의학계의 위상은 정신분석학과는 현실적 층위에서 조금 달랐다. 문화적 근대화를 지향했던 『사상계』의 입장에서 보면 정신과 의사의 사회 진단과 치료책은 정치 경제 담론이 제시하는 선진성-후진성의 근대화 모델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동식은 정신의학 개념을 통해 전 사회의 병리학적 현상을 짚어냈다. 그는 세계 냉전구도의 희생양인 영국의 콜걸 사건부터 한국 사회의 고부, 부부, 부자 문제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한국인의 갈등 관계를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 구조로 파악한 것이다. 그럼에도 임상적 경험을 토대로 분석하기 때문에 정치구조를 조망하지는 못했지만, 개인의 마음의 문제가 사회 구조와 직결되었다는 시각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로써 정신의학은 개인의 마음이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벗어나 사회, 정치, 문화의 범주로 확장되었다[60]. 이는 정신의학이 한국 사회에서 대중화, 사회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이 시기 정신병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방식 중 하나는 자살과 정신의학의 결합이었다. 1960년대 초반 집단 자살과 개인 자살이 급증했다. 1961년 한국 사회의 자살률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 가족의 집단 자살 사례를 분석한 이도암에 따르면 1961년에서 1964년까지 자살 가족 52가구 228명 중 생활고와 기아로 인한 가족 자살은 38가구 168명으로 전체 70% 이상에 육박하였다[61]. 당시 사회적 빈곤에 의한 사회적 타살로서의 집단가족 자살이 크게 늘었던 것이다. 또한 이유가 분명치 않은 개인 자살도 유행이 될 만큼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 시기 자살은 문명 사회의 부정적 결과였지만, 동시에 문명인이라는 현대성의 지표로 해석되기도 했다(임지연, 2012)[62]. 이와 같은 자살의 논리는 노이로제를 문화병이나 문명병으로 이해하는 시각과 유사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자살을 정신병의 일종으로 진단하고[63], 예방과 치료의 관점으로 대응했다. 분석 결과 자살자 가운데 70% 가량이 정신병 증세 소유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정신병 증세를 치유하지 않는 한 자살을 다시 기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64]. 사회적으로 자살 방지책이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1962년 가톨릭 의과대학 성모병원에 자살예방센터가 설치되었고, 여기에 정신과 의사가 배치되었다[65]. 1960년대 이후 자살은 사회 정신의학의 중요한 연구 과제로 부상하였다. 자살은 미연에 방지하고 치료해야 한다는 시각이 대두하면서 정신의학은 치료의 대상을 확대하였다(정승화, 2011: 152-156, 175-194). 자살과 결부된 빈곤의 문제, 우울감이나 분노 같은 감정 역시 정신의학의 범주로 편입되면서 정신의학의 치료 대상이 폭넓게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정신의학의 대중화가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0-70년대 정신의학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환자들의 목소리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 환자들이 지면을 통해 의사들에게 질문하는 ‘문답란’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 환자들의 목소리가 파편적 형태로 남아 있다. 대체로 의사들에게 증세와 치료법을 묻는 방식이기는 했지만, 환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이라는 점에서 정신의학 담론의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의사-환자 관계를 중시하는 정신과에서 환자의 지위와 병에 대한 자기인식의 단초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답란에 기술된 환자들의 질문을 종합해보면 세 가지 양상을 띤다[66]. 첫째, 자기의 증세가 어떤 병인가 하는 물음, 둘째, 정신과적 증세를 앓는 환자를 둘러싼 가족들의 갈등에 대한 것, 셋째, 자기의 복잡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된 자기 서사 형태의 글이다. 첫째의 경우에서 남의 일에 간섭하고 화를 잘 내고 천장의 무늬가 벌레나 세균처럼 보여 오싹하다는 내용[67]은 의사의 진단 이전에 환자의 고통을 자기화한 글쓰기이다. 의사들이 가장 난감해하는 답변은 두 번째의 경우였다. 가령 의처증 및 의부증을 겪는 부부 사이의 고통, 간질을 앓는 아내와 이혼하고 싶다는 남편 등 환자의 가족들이 경험하는 갈등에 대한 것이다. 의학적 범주를 벗어나는 질문이어서 답변자는 분명한 대답을 내리지 못하고, 전문의를 찾아가 보라는 권고를 반복했다. 세 번째는 복잡한 심리와 환경적 조건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 삶 전체를 기술하는 환자들의 서사이다. 한 문답란에 19세의 청년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삶부터 시작해서 중고등학교 성적이 떨어진 이야기, 기억력이 쇠퇴하여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이야기, 자살하거나 복수하고 싶은 이야기, 생활에 순응한다고 하면서도 집에 불을 지르고 싶다는 이야기 등을 상세하게 썼다. 그리고 “선생님 나의 앞길을 알으켜주십시오”라는 당부 아래 치료 비용과 병원 이름 등 치료와 관련된 정보를 자세하게 묻고 있다[68]. 이와 같은 환자의 이야기는 논리적 서사가 아니라 혼돈스러운 서사적 잔해(Frank, 2013: 123-133)[69]에 가깝지만, 이는 자기 삶과 질병의 연관성을 찾고, 치료하고자 하는 욕망이 표출된 목소리이다. 환자의 이야기에 대해 의사들은 병원에서 치료해야 한다는 동일한 답을 산출했지만, 환자는 질병을 중심으로 자기 삶을 재구성하게 된다. 문답란은 사실상 대화적이지 않으며, 파편적이었다. 그럼에도 규율화된 ‘명랑사회’에서 비가시적 존재인 환자가 자기의 이야기를 스스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의사-환자관계가 정립될 수 있는 지평이 아래로부터 마련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각적 경로로 이루어진 정신병의 대중화는 정신의학이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내면화되는 과정이었으며, 정신의학이 자율적으로 체계를 안정화할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이기도 했다.

5. 맺음말

1960-70년대 근대적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개인들의 정신적 삶에 오작동이 생겼다는 사회적 판단과 함께 요청된 정신 건강 문제는 한국 사회가 새롭게 해결해야 할 현안이었다. 이제 육체적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문제가 될 만큼 한국 사회는 근대화, 문명화, 의료화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1959년 12월 잡지 『사상계』에 그와 같은 시대상을 선취한 한 편의 소설이 발표된다. 김동립의 「대중관리」였다. 「대중관리」는 한 섬유회사의 공장합리화 과정에서 인물들이 심인성 노이로제에 걸려 정신과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과정을 그린 사회비판적 소설이다[70]. 소설이 당대의 복잡한 컨텍스트를 매개하는 기능을 한다고 할 때, 이 소설은 한국의 정신의학이 발생하는 현장에 대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대중관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들이 겪는 심인성 노이로제 증상을 기술하고, 정신과 의사의 진단과 치료를 통해 문제의 해결책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 소설은 당대 한국 사회의 증상을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공한 엘리트들은 왜 노이로제 환자가 되었을까? 환자는 왜 자신의 고통을 내과가 아니라 정신과에 가서 치료하려고 했을까?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지혜롭고 선한 정신과 의사는 누구인가? 그리고 “앞으로 선생님의 지도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라며 의사의 말에 복종하는 환자는 누구인가?
이 글은 1960-70년대 합리적 대중관리의 시대로 급변하던 한국 사회에서 정신의학의 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사회적 맥락과 조건 속에서 탐색하였다. 김동립의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이, 필자는 이 시기를 정신의학의 본격적 형성기라고 판단하여, 근대화가 본격화되는 1960-70년대 한국 사회에서 노이로제가 발생하는 조건, 정신병에 대한 인식, 정신과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게 승인되는가를 살펴보았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정신의학 담론은 정신병을 제거하거나 분리할 대상으로 여겼던 식민지 시기의 우생학적 정신위생학과 1950년대의 과도기적 성격의 정신의학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1960년대부터는 한국인 전문의의 등장과 합리화 및 제도화, 대중화의 영역에서 현대적 정신의학의 체계를 구성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한국의 정신의학이 체계화되는 과정을 주체 형성과정, 제도적 합리화 과정, 대중적 일상화 과정이라는 세 범주에서 탐색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신과 전문의들은 좋은 의사 모델(이동식), 부권주의적 의사 모델(명주완), 대칭형 모델(이부영)이라는 윤리 모델을 제안하면서 정신의학의 긍정적 주체세력을 형성하였다. 흥미롭게도 선한 전문의의 등장 이면에는 ‘명랑’이라는 국가의 규율 권력에 의해 불법화된 무면허 사이비 가짜 의사가 있었다. 선한 전문의 대 가짜 의사의 대립 코드가 작동되면서 정신의학의 주체는 합법적이고 세계화된 전문의들로 승인되었다. 둘째, 정신의학의 합리화 과정은 실태조사를 통한 통계의 과학성과 정신병 개념의 세목화를 통해 성립되었다. 특히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주도한 정신위생법 제정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법적 제도화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환자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은 방향에서 법률 초안이 구성되는 한계를 가졌다. 셋째, 정신의학의 대중화 과정은 노이로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약 광고의 시각화를 통한 대중적 접근이 용이해졌고, 사회 노이로제 개념은 한국의 비판적 담론장에서 독특한 사회분석의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정신의학계에서 소외되었던 환자들의 파편적인 목소리의 흔적은 정신병의 대중화와 일상화의 수준을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1960-70년대 정신의학은 식민지 우생학적 정신의학이나 전후 과도기적 정신의학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세계적 수준의 정신과 의사의 등장과 의학 개념의 과학화 및 법적 안정성에 대한 요구, 정신 건강 관리를 내면화하기 시작한 대중들의 지평 위에서 현대적 정신의학은 한국 사회에서 자율적인 체계를 형성하였다. 이는 정신의학의 진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환자를 잠재적 범죄자화했다는 점, 정신의학의 주체화 과정에서 환자가 하위주체로 밀려났다는 점, 정신위생법 제정 과정에서 국가의 통치 논리가 개입했다는 점이라는 한계를 또한 분명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변화는 특정 목표를 향한 단선적이고 균열 없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한 정신과 전문의가 지향하는 의사-환자 관계, 정신병이 과학의 영역으로 체계화되는 과정, 정상-비정상인은 질적 구분이 아니라는 새로운 의학지식의 확산, 사회 노이로제로 진단한 한국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 생성 방식, 환자들이 기술한 자기 서사의 흔적들은 1960-70년대 정신의학의 체계화 과정에서 산출된 긍정적 의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Notes

1) 미국 KCAC(한국민간원조사령부)와 미8군 등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국립구호병원이나 시립병원이 세워지면서 부분적으로 정신병 환자를 구호할 수 있는 시설이 생겼다. 「노량진 구호병원 1일 개원」, 『경향신문』, 1954년 7월 2일; 「시립병원 곧 완비」, 『동아일보』, 1955년 3월 5일.

2) 「정신보건기구를 설립하고」, 『동아일보』, 1959년 12월 9일. 1950년대 말 한국 사회는 횡행하는 범죄, 잔인, 부정, 방종, 나태, 낙오, 실망 등의 원인이 모두 정신이상에서 오는 것이라고 진단하고, 국가와 사회, 가정을 집단 주체로 묶어 정신위생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3) 광기를 근대의 규율권력으로 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한 푸코는 본질적으로 정신의학의 권력을 현실을 조작하는 기능, 강화하는 기능, 현실에 대한 초권력으로 규정한다.

4) 이동식은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경정신과에서 공부한 이후 서울대 의과대학 신경정신과 조교로 있었다. 1954년 미국으로 가 뉴욕대 신경정신과 레지던트로 근무, 뉴욕 윌리암알란손화이트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정신분석 과정을 마치고, 아이오와주 체로키 정신건강원과 켄터키 주립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한 후 1958년에 귀국했다. 그가 한국전쟁 중 우연히 미군 정신의를 만나 미국으로 가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동식, 「정신의가 본 인생과 사회④ 외국인과 우리의 주체성」, 『사상계』 (1964. 4).

5) 1950년대에 정신 질환자는 정신변질자, 정신병자, 정신 환자, 정신이상자, 정신병 환자 등으로 불렸는데, 1960-70년대에는 대체로 정신병 환자로 명명되었다. 필자는 정신병 환자를 대표 용어로 선택하여 사용할 것이다. 여기서 정신병 환자란 기질적 정신병을 포함한 정신병, 인격장애, 알코올 및 약물중독 그리고 기타 비정신병적 정신장애를 앓는 자를 포함하며,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 제4판(DSM-IV)의 분류기준에 해당하는 자를 지칭한다.

6) 「문명병 노이로제」, 『동아일보』, 1962년 4월 15일; 김동순, 「정신병 치료의 새 경향」, 『동아일보』, 1963년 2월 19일; 「노이로제, 민병근 박사에 듣는다」, 『동아일보』, 1972년 6월 23일; 「여적」, 『경향신문』, 1970년 7월 4일; 민병근, 「의학계 권위들의 임상노트(46) 신경정신질환」, 『경향신문』, 1975년 4월 22일.

7) 명주완은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약물학과 신경정신의학을 공부하고, 1938년 교토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 정신과의원인 ‘성북병원’을 개업하여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조선신경정신의학회를 조직하였으며, 한국전쟁 중 군에 입대 군정신의학 활동을 한 후 1952년 한국 군의관 도미연수과정으로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6개월간 신경학 과정을 연수했다. 1960년 서울의대 신경정신과에서 교수로 활동을 한 후 교육자로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명주완의 활동에 대해서는 1974년 경향신문 2월에 연재한 「노교수와 캠퍼스와 학생」 (111-120) 참조.

8) 「노교수와 캠퍼스 학생(112) 비장한 결심으로 정신과의원 개업」, 『경향신문』, 1974년 2월 2일.

9) 부권주의(paternalism)는 아버지가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결정을 하듯이, 의사가 환자를 위해 판단과 결정 모두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의사는 이익을 위한 관리인으로서 환자의 선호와 무관하게 의사가 환자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행한다.

10) 이부영은 서울대 의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62년 스위스 융 연구소에 입학하였다. 융 학파 F. Riklin과 융의 수제자였던 Marie-Louise von Franz 여사에게 교육 분석을 배웠다. 1966년 Diplom 논문 「한국 무속에서의 사자(死者)와 “살(殺)”」을 제출하고, 융 학파 정신분석의 자격을 취득하였다. 1967년 이후 Sanatorium Bellevue 병원에서 근무하였으며, 융 연구소에서 「샤머니즘 심리학」을 강의한 바 있다. 1969년부터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한국 융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60년대 이부영의 융 연구소 유학 시절에 대한 경험은 다음의 자료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부영, 1987)

11) 이부영, 「정신과」, 『동아일보』, 1973년 11월 8일.

12) 최근 신경정신의학에서 의사-환자 관계를 능동-수동형, 지도-협력형, 공동참여형, 우정형 모델로 구분하고 있는데(대한신경정신의학회 편, 1997: 18-19), 이 유형에 따르자면 이동식과 이부영의 모델은 공동참여형에 가깝고, 명주완의 모델은 지도-협력형에 가깝다.

13) 「성동경찰서는 고광천을 국민의료법 위반혐의로 구속」, 『조선일보』, 1963년 7월 9일.

14) 「환자 때리고 밥까지 굶겨」, 『동아일보』, 1967년 8월 16일.

15) 「안찰기도하다 정신병자 치사」, 『조선일보』, 1970년 5월 1일; 「원시가 난무하는 사각지대 사설 정신병치료소」, 『경향신문』, 1973년 1월 8일.

16) 「정신병 치료한다고 사형(私刑)」, 『경향신문』, 1970년 7월 2일.

17) 「악취의 골방에 쇠고랑 채워 발작하면 심한 매질로 막아 먹지 못해 모두 영양실조에 보호자들 오히려 단속 원망」, 『경향신문』, 1970년 7월 3일.

18) 「치안 확보로 명랑사회를」, 『동아일보』, 1962년 2월 8일.

19) 「연두교서의 역점」, 『조선일보』, 1966년 1월 19일.

20) 유석진은 1944년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시 정신과 군의로 근무하다가 1952년 미국 육군병원정신과에서 6개월간 연수과정을 이수했다. 1953년 서울 수도육군병원 정신과 과장으로 임명, 군정신과 의사 양성에 힘썼다. 1955년 베드로 신경정신과 의원을 개설하여 정신병 환자 진료를 하였으며, 서울아동상담소를 개설하여 무료상담을 실시하였다. 1970년대에 사이코드라마, 댄스치료, 음악치료, 미술치료에 관심을 가진 그는 한국정신의학의 태두로 평가받고 있다. 유석진의 생애와 의학 활동에 대한 내용은 조두영의 논문(2012) 참조.

21) 사회정신의학에 관심을 둔 유석진은 집단조사 및 역학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그는 1956년부터 1960년까지 5년 동안 농어촌 6개 지역 주민 총 11,974명에 대해 정신병 조사를 시행했다. 조사대상 총 인구 중 166명, 즉 1.38%가 정신질환자로 진단되었고, 주요 정신병은 93명으로 0.77%에 해당된다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지역별, 연령별, 성별, 교육정도 및 직업별 등으로 비교 관찰한 결과 주요 정신질환은 대체적으로 외국의 발생빈도와 대차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정신병의 종류도 다른 나라에 비해 특이하게 다른 것은 없으며, 증후상과 증상발생의 역동적 경로 역시 대개가 동일하다는 결과를 발표했다(Yoo, 1962b).

22) 1961년 이화여대 심리학과 학생들이 정신과 병원(청량리 뇌병원, 수도의대 정신신경과, 서울대 의대 정신신경과, 베드로병원)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총 환자 1,778명 중 정신분열증 환자 602명 34%, 병명 미상 265명 16%, 조울병 139명, 전간 112명 순으로 조사되었다. 「정신병의 종류」, 『동아일보』, 1963년 2월 19일; 식민지 시기 실태는 최신해에 의해 파악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1944년 제주도 남부 약 3만 명을 조사하였다고 한다. 「건강진단 정신위생」, 『동아일보』, 1961년 5월 22일.

23) 「의학계 권위들의 임상노트(68)」, 『경향신문』, 1975년 6월 6일.

24) 「문명병 노이로제」, 『동아일보』, 1962년 4월 15일.

25) 「정신 질환에 어두운 농촌」, 『경향신문』, 1972년 4월 6일. 조사 지역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제주도 등이다.

26) 「서둘러야 할 정신위생법 제정」, 『경향신문』, 1968년 11월 30일.

27) 「건강진단 정신위생」, 『동아일보』, 1961년 5월 22일; 민병근, 「의학계 권위들의 임상노트(47)」, 『경향신문』, 1975년 4월 23일; 이규동, 「정신병과 유전」, 『동아일보』, 1975년 8월 21일; 「의학에세이(203) 정신병과 결혼」, 『동아일보』, 1975년 8월 5일.

28) 유석진, 「추구된 인류의 정신건강=제3차 세계정신의학회를 다녀와서」, 『경향신문』, 1961년 7월 24일.

29) 「정신병 치료의 새 방안, ‘낮병원’ 여의도 성모병원서 첫 실시」, 『동아일보』, 1976년 1월 27일.

30) 「정신병자와 그 치료」, 『동아일보』, 1960년 2월 20일; 김동순, 「정신병 치료의 새 경향」, 『동아일보』, 1963년 2월 19일; 「도전받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법 “치료에는 부적당”」, 『경향신문』, 1979년 8월 21일.

31) 「정신위생이란 무엇인가」, 『경향신문』, 1960년 11월 21일.

32) 「1회 작품전시회 국립정신병원서」, 『조선일보』, 1973년 12월 15일; 「정신과 환자들의 작품모아 바자회」, 『동아일보』, 1979년 12월 13일.

33) 「연극으로 정신치료 사이코드라마 등장」, 『동아일보』, 1973년 9월 17일; 「정신병 환자 치료위한 사이코드라머에 의사와 탤런트 함께 출연 국립정신병원에서」, 『경향신문』, 1976년 12월 28일; 홍문화, 「신동의보감(79) 연극 요법」, 『경향신문』, 1974년 10월 2일.

34) 「정신병 음악요법」, 『동아일보』, 1972년 1월 8일. 고대의대 이병윤이 도입, 치료방법으로 실시했다.

35) 「시익혀 정신병 치료 “인디애나 대학선 학위까지”」, 『동아일보』, 1972년 3월 16일; 「문학으로 정신치료」, 『경향신문』, 1973년 1월 11일.

36) 「횡설수설」, 『동아일보』, 1967년 8월 2일.

37) 「사회악의 강력단속」, 『경향신문』, 1967년 8월 11일.

38) 「정신위생」, 『경향신문』, 1967년 8월 9일.

39) 「방치된 광심의 흉기」, 『경향신문』, 1967년 8월 2일.

40) 「정신위생」, 『경향신문』, 1967년 8월 9일.

41) 「서둘러야할 정신위생법 제정」, 『경향신문』, 1968년 11월 30일.

42) 「5개병원 신설 정신병 보호책으로」, 『매일경제』, 1970년 5월 8일.

43) 「환자신고 의무화」, 『동아일보』, 1968년 12월 20일.

44) 「방치된 광심의 흉기」, 『경향신문』, 1967년 8월 2일.

45) 정신보건위원회는 의료보험과 정신보건법 문제를 국가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조사를 하였고(1977년), 신경정신과 의료사고, 의료보험 수가, 정신질환 실태조사를 통해 입법화 과정에 참여하고(1978년), 사이비 의료행위 규제 및 처벌과 정신보건법 입법 추진의 필요성을 보사부에 건의 하였다(1979년).

46) 「모든 신경병을 완치시키는 약」, 『동아일보』, 1958년 7월 1일.

47) 클로르프로마진은 1950년 프랑스의 제약회사 롱프랑이 합성하여 항구토제나 피부염 치료제로 사용하다가 우연히 정신병 환자에게 적용하여 놀라운 효과를 발견하게 된다. 미국에서 ‘소라진’이라는 상표로 팔리기 시작한 이 약은 세계적인 정신약리학적 혁명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게 되었다(Scull, 2017: 541-546). 한국에서는 1956년경부터 서울의대부속병원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이부영, 1999: 9).

48) 1966년 새해 첫날 1면 광고에 일동제약은 새해에도 여러분의 기대에 약의 효과로 보답하겠다는 기업광고를 게재했다. 일동제약이 내세운 3가지 약은 아로나민, 비오비타, 트랑키였다. 이 중 트랑키는 1960년대 가장 대표적인 정신병 약이다. 『동아일보』, 1966년 1월 1일.

49) 1960-70년대 정신의학은 정신병을 크게 중증과 경증으로 분류하였다. 중증은 정신분열증으로, 경증은 노이로제를 중심으로 다루었는데, 이 두 층위의 분류법이 논리적으로 활용되는 방식은 달랐다. 정신분열증은 주로 정신병 범죄와 연결되어 정신위생법 제정을 위한 논리로 활용되었고, 노이로제는 정신병의 일상적 대중화로 귀결되었다(이종규, 1973: 1-4).

50) 이종규, 위의 책, pp.4-6.

51) 「신경쇠약에서 오는 두통」, 『동아일보』, 1964년 1월 24일.

52) 「즐겁고 명랑하게 우울, 초조, 불안, 신경쇠약, 기억력장해에 삼성신약주식회사/ 에다나닌정」, 『경향신문』, 1963년 6월 5일.

53) 이동식은 가난한 형편 탓에 병원에 다닐 수 없는 환자에게 “약으로 피스같은 것보다 클로르프로마진이나 리브리움 등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정신위생문답실 앞」, 『사상계』(1964. 5), 236면.

54) 「정신질환자가 늘고 있다」, 『동아일보』, 1978년 9월 14일.

55) 좌담회, 「한국인의 정신상태를 진단한다」, 『사상계』 (1961. 1).

56) 좌담회, 위의 글, pp. 244-245.

57) 좌담회, 위의 글, p. 241, p. 247.

58) 좌담회, 위의 글, pp. 245-246.

59) 이동식이 『사상계』에 연재한 「정신의가 본 인생과 사회」 목록은 다음과 같다. ① 사회노이로제의 시대(1963년 11월), ② 워드와 킬러의 심리학(1963년 12월), ③ 노이로제와 친자관계(1964년 1월), ④ 외국인과 우리의 주체성(1964년 4월), ⑤ 노이로제와 부부관계(1964년 5월), ⑥ 종교의 정신분석(1964년 6월), ⑦ 노이로제에 걸린 학생들(1964년 7월), ⑧ 꿈이란 현상과 노이로제(1964년 8월), ⑨ 노이로제와 고부관계(1964년 10월), ⑩ 내부독재와 패배의식(1964년 11월), ⑪ 형제·형수관계와 노이로제(1964년 12월).

60) 정신과 의사들의 한국 사회 진단은 일반 정치사회학자들이 분석하는 근대화 논리, 탈후진성의 논리와는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정치, 문화 현상을 노이로제, 불안, 불합리, 욕망 등 정신의학의 프리즘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한국 사회를 선진-후진, 근대-비근대, 독재-저항이라는 명료한 이중적 틀을 벗어나 해석할 수 있게 한다. 이는 근대화를 지향한 지식인 담론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61) 이도암, 「한국 사회의 집단자살분석」, 『청맥』 (1965. 6), pp. 93-104. 각 국가별론 자살률을 기록한 도표를 보면 한국(27.2%)이 아메리카(10.8%), 일본(21.3%), 서독(18.7%), 핀랜드(20.4), 항가리(24.9%), 오스트리아(23.0%) 중 가장 높다.

62) 1962년 원인이 분명치 않은 K여고 세 여학생의 연쇄자살사건을 비롯하여 1960년대 초반부터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자살사건이 계속 발생했다.

63) 「자살이라는 정신병」, 『경향신문』, 1966년 10월 3일.

64) 「자살명세서」, 『동아일보』, 1966년 10월 3일.

65) 자살예방센터는 정신과의 4명, 내과의 3명, 임상심리학자 1명, 사회사업가 1명으로 구성되었다. 「생명을 위하여」, 『동아일보』, 1962년 10월 3일.

66) 문답란은 『동아일보』, 『경향신문』, 『사상계』(이동식, 「정신의가 본 인생과 사회」에 같이 실린 「정신위생문답실 앞」)의 내용을 주로 분석하였다.

67) 「정신적인 충격 후유증으로 계속 고생」, 『경향신문』, 1974년 3월 13일.

68) 「정신위생문답실 앞」, 『사상계』 (1964. 10), pp. 239-241.

69) 서사적 난파는 아픈 자들이 고통 속에서 피로, 불확실함, 고통, 공포의 상태에서 말해지는 질병에 대한 이야기로서, 폭풍우에 의해 난파된 느낌처럼 중단되면서 이어지는 무질서한 서사를 말한다.

70) 김동립, 「대중관리」, 『사상계』 (195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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