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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8(1); 2019 > Article
청대 사회의 용의(庸醫) 문제 인식과 청말의 변화

Abstract

"Yong-yi" means "quack" in English, which generally refers to a doctor who does not have good medical skills. In the Ming and Qing dynasties in China, various criticism about "Yong-yi" became popularized, and by the late Qing period, "quacks" had become a serious social issue. The theory of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was developed during the Ming and Qing dynasties, and local medical resources also increased. Moreover, the prevalence of medical book publishing led to the openness and generalization of medical knowledge. As a result, not only the number of doctors increased, but also the number of doctors who lack medical knowledge and clinical experience increased. However, at the outset, "Yong-yi" did not only mean doctors with poor medical skills. "Yong-yi" also reflected conflicts and contradictions between doctors. Doctors consistently criticized quacks in an attempt to maintain their identity as a "good" doctor or a Confucian doctor. In this sense, "Yong-yi" was used among physicians as an expression of discrimination and exclusion. The concept of "quackery" was also determined by the relationship between patients and doctors. In general, itinerant doctors, midwives and shaman doctors were regarded as "Yong-yi"; however, they served the medical needs of various patients. Thus, to some extent, "Yong-yi" were also useful medical resources. On the contrary, in certain situations, "shiyi," physicians who serviced a family for generations and were generally believed to be reliable and as trustworthy doctors, were also labelled as quacks, especially when the patient did not trust them or was not satisfied with the treatment. Therefore, doctors’ thoughts about "Yong-yi" did not always coincide with patients’ thoughts about "Yong-yi." However, by the late Qing period, the description of quacks in media reports found a singular connotation, and the divergent social image of quacks disappeared. By this time, quacks were uniformly described as ignorant and irresponsible Chinese medicine practitioners. Specifically, in one murder case in which a "Yong-yi" was accused as the murderer, the report unilaterally reported the patient’s claims. Consequently, Chinese medicine practitioners who failed in their treatment of patients became labeled as "quack" doctors. In newspaper reports, "Yong-yi" no longer simply referred to individual cases of "quacks" but had come to represent the entirety of the Chinese medicine practitioner community. On the contrary, Western medical doctors who replaced the status of traditional doctors were positively portrayed. Pictorials also had similar perspectives with newspapers, supporting the narrative of the news with ironic drawings and articles. Overall, media reports regarding "Yong-yi" did not focus on reporting facts, but they had the purpose of making quacks a serious social problem.

1. 머리말

명청대 중국의학은 금원(金元)대의 발전을 발판으로 의학 이론의 성숙과 지방의료자원의 보급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시기였다. 특히 청대는 온병학(溫病學) 이론을 계승하여 온역(瘟疫: 열성 전염병)을 전문 연구주제로 발전시켰다. 의학전통의 계승 및 발전과 더불어 의료자원 역시 확대되었다. 국가 주도의 의료기구는 쇠퇴했으나 민간 의료자원과 조직이 그 역할을 대신하여 활약하고 있었다. 그 중 장난(江南)지역은 의료수준이 가장 높은 곳으로, 유명한 의학 가문과 학파가 밀집되었고 각종 민간 자선단체와 의료조직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이 시기에는 의학지식도 보편화되었는데 출판업의 성황에 힘입어 유명한 의학 경전과 서적 및 방서(方書)등이 출판되고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수준이 낮은 의사들에 의한 의료사고가 일종의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중국 사회는 흔히 수준이 낮은 돌팔이 의사를 가리켜 용의(庸醫) 혹은 열의(劣醫), 하의(下醫) 등의 용어로 칭해왔다. 명청대의 지방지, 문집, 소설 등에서는 사회에 용의가 만연함을 개탄하고 이러한 용의가 일으키는 의료사고인 용의살인(庸醫殺人)을 지적하는 글이 자주 나타났다. 청대 말기에는 용의와 용의살인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지적되어, 잡지와 신문에서는 연일 이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 즉 의학이론과 민간의 의료자원이 발달했으나 동시에 용의가 줄곧 사회문제로 지적되었다[1]. 지금까지 명청대 용의와 관련된 사회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연구되었다. 첫째, 용의가 증가하게 된 주요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의학서적의 출판이 성행하며 의약지식이 보편화된 결과 의사의 수가 증가했던 반면, 충분한 의학지식 및 임상경험을 갖추지 않은 의사 또한 증가하여 용의라는 사회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余新忠, 2003: 305-310).
둘째, 명청대 의료 환경에서 두드러졌던 의사와 환자의 갈등이라는 문제에서 용의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다룬 연구이다. 환자들은 양의(良醫)와 용의가 혼재된 상황을 마주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의사를 평가하고 구분하는 다양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용의도 그러한 기준의 하나로서 이야기되었다(邱仲麟, 2012: 260-261). 또한 당시 의사와 환자의 갈등과 불신도 용의 문제를 심각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환자는 의사를 쉽게 신뢰하지 못했고, 의사는 환자가 의사를 불신하는 태도가 용의를 양산한다고 여겼다(祝平一, 2010: 23-34). 의사-환자의 갈등은 의료에 있어서 책임과 윤리에 대한 의사와 환자의 상반된 입장과도 관련이 있었고 용의의 문제도 이와 연관되어 있었다(塗豐恩, 2008: 76-85).
셋째, 용의와 관련된 의료 분쟁 사건의 해결을 다룬 것이다. 롱웨이(龍偉)는 청대 의료 분쟁과 관련된 사료를 통해 용의를 처벌하는 법인 「용의살인율(庸醫殺人律)」의 실제 시행을 분석하고 의료 분쟁이 민간에서 조정되는 모습을 밝혔다(龍偉, 2016). 마진성(馬金生)은 용의살인과 관련된 의료 분쟁의 모습을 통해 용의살인과 관련된 분쟁은 반드시 의학수준이 낮은 의사와 관계된 것이 아니었고, 의사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높았던 것에 비해 의사가 「용의살인율」 대로 처벌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는 것을 밝혔다(馬金生, 2016: 43-63).
넷째, 청말 매체 및 여론의 용의 보도와 개혁론을 분석한 연구이다. 루차이샤(路彩霞)는 청말 용의 문제 해결을 위한 중의 개혁 담론을 베이징과 톈진을 중심으로 분석했다(路彩霞, 2007; 2010). 루차이샤는 청말 매체에서 의도적으로 용의 문제가 부풀려지고 과장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러한 여론이 중의(中醫)에 대한 반성과 중의 개혁으로 이어지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청대에 용의가 사회문제가 된 것은 기본적으로 수준이 낮은 의사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지만, 당시의 의료 환경 및 의사-환자의 불신과 갈등이라는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청대 사회가 용의를 줄곧 사회 문제로 봤던 것은 동일하지만, 청말 매체에 의해 보도된 용의 문제에는 맥락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청대 사회에서 용의는 단지 “의학 수준이 낮은 의사”라는 정의 외에도 다양하고 복잡한 의미와 변화상을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용의를 단지 의학 수준이 낮은 의사로 정의하는데 그치거나 의사와 환자의 갈등관계에서 부수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용의의 다양하고 복잡한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또한 청말 매체에서 드러난 용의 인식의 변화도 청대의 전반적인 모습과 연결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청대 사회의 의료 환경에서 용의문제가 이야기되는 맥락과 용의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서 나타난 상대성과 다양성을 논하고자 한다. 또한 청말 매체에서 나타나는 용의에 대한 보도의 구체적인 속성을 살피고, 특히 화보에서 묘사된 그림과 글을 통해 청말 매체가 대중에게 재현했던 용의 이미지를 분석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용의의 문제가 청대 사회의 의료 문제에 관한 대중들의 인식과 의사 정체성에 대한 복합적인 인식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청대 의료 환경의 변화와 용의 문제

1) 의료 시장의 개방과 용의의 증가

의술이 낮은 의사의 대표적인 명칭인 용의는 명청대에 처음 쓰인 것은 아니다. 가장 이르게는 당대의 『천금요방(千金要方)』, 『외대비요(外臺秘要)』에서 쓰인 예를 찾을 수 있는데, 의술에 밝지 못한 의사를 가리키는데 쓰였다. 그런데 명청대에 이르면 용의와 용의살인에 대한 날선 비판과 이와 관련된 서술이 상당히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명청대 의료환경의 변화가 이전 시대에 비해 높아진 용의와 용의살인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송(宋), 원(元)대는 국가가 비교적 적극적으로 의학 정책에 개입하는 편이었다. 송대는 중앙의 의사선발 뿐만 아니라 지방의 의학교육 및 의사의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의학교육을 국자감에 편입시키고 각 지역의 의사를 선발했다. 또한 의학서적을 체계적으로 편찬하는 등 의학지식의 보급과 정착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梁其姿, 2012: 128-135). 이러한 국가 정책은 원대에도 이어졌고 의사의 선발과 양성에 더욱 많은 신경을 쓰는 모습이 나타났다(김대기, 2017). 요컨대 송원대의 의학정책은 중앙정부가 의학교육과 의학인원선발과 관리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명대 초기의 의정은 원대의 것을 따라 중앙에 태의원(太醫院)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의학제거(醫學提擧)와 의학(醫學)을 두어 의학 정책의 관리와 의료인의 육성을 맡았고 각지에 혜민약국(惠民藥局)을 설치했다. 그러나 중기 이후 중앙의 태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명무실한 제도가 된다. 명말 여곤(呂坤)을 비롯한 관료들은 의학 정책을 개혁하고 각 지방의 약국을 정비하여 지방의 의료 환경을 개선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러한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馬濤, 2000: 135-136; 鄧鐵濤, 2006: 143). 결국 명대에는 중앙의 의학 정책은 지속되었으나 지방은 더 이상 국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청대의 중앙정부는 지방의 의료에 대해 더욱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중앙 정부가 실시하는 의학시험은 오직 태의원과 지방 군현의 의학교의 소수인원을 선발할 때만 실시되었고 나머지 민간의사에 대한 시험이나 평가는 없었다(Che-chia Chang, 1998: 57).
이러한 공백을 메운 것은 민간 조직의 의료활동과 의료자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명대 이후, 중앙의 의료기구와는 별개로 민간 자선단체의 의료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역병과 같은 재해가 발생했을 때 지방관이나 지방의 유력인사는 약국을 세우고 의사(醫社)를 조직하여 환자에게 약과 음식 및 필요한 치료를 제공했다. 지방의 선당·선회(善堂·善會)와 같은 자선단체 역시 약국을 조직하거나 빈민과 이재민의 구휼을 맡았다. 국가 역시 이러한 지역 자선단체의 구휼활동을 인정하고 장려했다(梁其姿, 2012: 147-149).
명대 이후에는 원대 의학 정책의 영향으로 세의(世醫)가문과 의사집단이 성장했는데 이들은 지속적으로 의사를 교육하고 배출하여 지방의학전통을 계승했다. 그 외 독학으로 의학지식을 습득하는 경우도 증가했다. 출판업이 발달하고 의학 서적이 보편화됨에 따라 대중이 의학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유학의 소양과 의학경전의 독해능력을 갖춘 사인(士人)들이 의사로 전향하는 일은 점차 보편적인 일이 되었다. 특히 청대 이후 과거의 과열된 경쟁에서 탈락된 자들이 생계를 위해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梁其姿, 2012: 19-21).
의학 관련 출판물의 종류도 다양해져 전통적 의학 이론서 외에도 초학자들을 위한 입문서와 처방전을 모은 방서(方書)가 활발하게 유통되고 소비되었다. 이때 의학 지식을 간결하게 편집하여 운율을 붙여 암송하기 용이하게 한 가결(歌訣)이나 부(賦) 형식의 글이 유행했는데 입문서에 포함되거나 따로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梁其姿, 2012: 29-47). 이러한 통속의서(通俗醫書)의 출판과 보급은 대중의 의학에 대한 관심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의학에 입문하는 문턱을 낮추는 결과를 낳았고 다양한 수준의 의사가 출현하는데 일조했다. 가문 전승의 세의나 사제전승(師弟傳承)의 의사, 유학적 모델의 이상적인 유의(儒醫)가 양성됨과 동시에 세속적인 직업인으로서의 의사도 대거 출현했다. 또한 상품경제의 발전으로 중점 약재시장이 형성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각지에 상업화된 약포(藥鋪)가 늘어났다(余新忠, 2003: 305-313).
명대의 이러한 사정은 청대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청대 중앙과 지방의 관(官)은 민간의 의료자원이나 의료시장을 통제할만한 기구나 제도를 정비하지 않았고 의학지식의 전승과 발전은 민간의 역량에 의해 이루어졌다. 통속적인 의서의 성행은 청대에도 이어져 더욱 쉽고 저렴한 의학 자습서가 출판, 판매되었다. 이는 대중의 의학지식 습득을 도왔던 동시에 의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의 수준 또한 다양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단기간에 자칭 의사가 되는 자들이 의료시장에 혼재하게 되었다. 간단한 방법으로 단기간에 의학지식을 습득한 자들의 의학 수준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수준 낮은 의술로 환자를 상대했다. “한 제(劑)의 약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손바닥 뒤집듯 쉽지만 환자는 이에 대한 소송이 없고 관(官)은 이에 대한 처벌이 없다”[2]. “경사(京師)에서 병으로 죽는 것보다 (잘못된) 약으로 인해 죽는 경우가 열에 여덟아홉이니 두렵다”[3]. 명청대의 관료 및 사인(士人)들의 기록에서 위와 같은 용의와 용의살인에 대한 날선 비판을 흔히 찾아 볼 수 있고 일종의 사회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빈번한 의료사고와 용의에 대한 묘사 및 풍자는 당시의 소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대표적으로 『금병매(金甁梅)』는 엉터리 치료를 하며 환자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용의에 대해 묘사하고 있고(Cullen,1993; 劉曉林,1999; 秦鑫, 2013), 청대 소설 『쾌사전(快士傳)』에서는 용의의 부도덕과 무능함, 어쩔 도리 없이 당하는 환자의 모습이(祝平一, 2010: 35-36), 『고망언(姑妄言)』에는 신뢰할 수 없는 의사와 용의에 대한 불만, 그럼에도 이들을 처벌할 수 없는 현실이 묘사되었다[4]. 『소부(笑府)』, 『소림광기(笑林廣記)』 등과 같은 풍자적인 성격이 강한 소설에서도 의술이 낮고, 의학이론에 통달하지 않고, 의덕(醫德)이 바르지 않고 용의살인을 저지르는 의사 군상이 표현되었다(楊曉越, 余新忠, 2017). 청말 소설 『의계경(醫界鏡)』 역시 호구지책으로 의업에 종사하는 용의와 이들이 저지르는 의료사고에 대해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2) 용의를 규정하는 다양한 조건

명청대에는 의업에 종사하는 의사의 수가 증가했으나 그 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 당시에는 중앙의 의관(醫官)을 선발하는 시험은 있었으나 그 외의 의사를 전체적으로 검증하는 제도는 없었다. 대신 의사의 수준과 질을 나누고 평가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어떤 의사가 믿을만한 양의이고 어떤 의사가 반드시 피해야 할 용의인지에 대해 다양한 글이 나타났다. 이러한 글에서는 실제 용의의 증가라는 상황과 더불어 용의를 규정하는 조건이 각자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고 상대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용의는 의학의 기본 지식을 갖추지 못한 자들로 규정되었다. 심지어 글도 모르면서 “간단한 가결(歌訣)만 외우고도 의사노릇을 하는 자들”[5]로 묘사되었다. 엉터리 의사를 지칭하는 용어는 용의(庸醫)외에도 열의(劣醫), 하의(下醫) 등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또한 이러한 의사를 지칭하는 용어도 각자의 기준과 가치관에 따라 다양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명대고생(高生)이라는 사인(士人)은 문제를 일으키는 의사를 다섯 종류로 나누어 설명했다. “큰소리치기 좋아하는 탕의(宕醫), 쉽게 미혹되어 갈팡질팡하는 나의(懦醫), 방(方)에 의지하나 변통할 줄 모르는 용의, 제멋대로 하여 환자를 망치는 학의(虐醫), 사람을 모아 의술을 팔지만 인명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적의(賊醫)가 환자를 해친다”. 명대의 여남(呂楠)은 열의를 일곱 가지 종류로 나누어 용의, 난의(亂醫), 무권의(無權醫), 걸의(桀醫), 세의(細醫), 무능의(無能醫), 경의(輕醫)로 논하기도 했다[6]. 의사 서춘보(徐春甫)는 의사의 종류를 양의(良醫), 명의(明醫), 은의(隱醫), 국의(國醫), 시의(時醫), 용의(庸醫), 무의(巫醫) 등으로 나눴는데 그 중 시의, 용의, 무의가 환자의 생명을 해치는 부류였다[7]. 위의 분류에 따르면 용의와 같은 부류의 의사들은 의학이론의 이해와 임상경험이 부족하고 혹은 방서(方書), 가결(歌訣)과 같이 단편적인 의학지식을 가지고 함부로 환자를 치료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오진을 일삼고 환자에게 해를 끼치며 신뢰할 수 없는 의사들이었다.
명청대에는 호구지책으로 의학을 접하는 사인(士人) 출신 의사들이 늘어났는데 이들 역시 의술이 뛰어나지 않은 의사로 구분되기도 했다. 과거(科擧)에서 실패한 자들이 유학을 포기하고 의학을 선택하는(棄儒從醫) 것은 명청대 사회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 무렵 유학적 지식과 소양을 갖춘 의사를 유의(儒醫)로 칭하고 모범적인 의사의 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과거 준비를 포기하고 의사의 길을 택한 사인들이 유의라는 칭호를 듣고 부와 명예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항상 유의로서 신뢰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의사들은 사인들이 책으로 배운 약간의 의학이론과 경험만을 가지고 의사를 자칭하는 세태를 우려하고 경계했다. 의사들은 “의학을 배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학문을 이룬바가 없는 자가 의학을 호구지책으로 삼는데 어찌 유학을 잘하지 못하면서 의학을 잘하기를 바라는가?”, “하의(下醫)가 되는 것도 용한데 무슨 중의(中醫), 상의(上醫)를 논하는가?” 라고 비판했다(邱仲麟, 2010: 259). 문인들 역시 유학적 지식을 갖춘 자가 의학을 익힌다고 하여 항상 신뢰했던 것은 아니다. 명대 심장경(沈長卿)은 「용의살인설(庸醫殺人說)」에서 섣부른 의술을 행하는 자들을 경계했다. “우수한 수재(秀才)가 의학을 배우면 양의, 명의(名醫), 시의(時醫)가 된다. 그러나 열등한 수재가 의학을 배우면 단지 용의가 될 뿐이다”[8]. 청대에도 호구지책으로 의학을 선택한 자들에 대한 불신이 존재했다. 청말 중국을 경험한 영국 선교의사 벤자민 홉슨(Benjamin Hobson)과 일본의 중국학 학자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는 과거에서 낙방하거나 장사를 하기에 자본이 부족한 자들이 차선책으로 의업을 선택하는 모습과 이들을 극도로 불신하는 사회분위기를 관찰하기도 했다(Che-chia Chang, 1998: 68).
의사가 갖춰야 할 도덕적 기준인 의덕(醫德)도 양의와 용의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명청대에는 뛰어난 의학 지식와 도덕을 갖춘 유의(儒醫)를 바람직한 의사의 형상으로 삼았고 의덕을 갖추지 못한 의사에 대한 사회의 비판이 만연했다. 예를 들어 명말의 문인 손승은(孫承恩)은 양의의 조건으로 지혜(智),예(禮),청렴(廉),신중(慎),인(仁)의 덕목을 강조하며 이러한 의덕이 부족한 의사들이 사람에게 해를 미친다고 평했다[9]. 추적광(邹迪光)은 “세상의 의사라는 자가 이익만을 탐하고 환자가 죽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의서를 읽지 않아 병을 혼동하고 이로 인해 환자를 죽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즉 기본적인 의학지식도 갖추지 못한 의사들과 더불어 의학지식은 갖추었으나 환자를 속여 재물을 취하고, 환자에게 과한 비용을 떠넘기고, 빈부귀천에 따라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고, 환자의 목숨을 소홀히 여기는 의사들 역시 시의 혹은 용의로 생각하고 있다(馬金生, 付延功, 2008). 의덕을 상실한 용의들은 흔히 “의술을 어린아이의 유희로 여기고(以人命爲兒戲),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다(庸醫殺人如草管)”라는 표현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용의에 대한 정의와 비판은 당시 의사들의 치료기록인 의안(醫案)이나 수필인 의화(醫話)에도 자주 등장했는데 이로 보아 당시 의사들 역시 용의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사들은 용의의 폐해를 비판하며 좋은 의사를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 환자에게 조언하는 글을 다수 남겼다. 명대 의사 공정현(龔廷賢)은 환자가 지켜야 할 열 가지 사항을 이야기하며 의사를 신중하게 선택할 것을 첫 번째로 꼽았다[10]. 장경악(張景岳)은 “의사의 열에 아홉은 용의이며 이들은 한(寒)과 열(熱)의 증상을 혼동하여 처방하고 약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좋은 의사는 진중, 총명, 과감, 박식함을 갖추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가 평소에 좋은 의사를 보는 안목을 갖추는 것이고 의사를 신뢰하고 치료에 방해가 되는 갖가지 거짓정보에 미혹되지 않아야한다”고 강조했다[11]. 청대 의사 육이첨(陸以湉)은 의사를 선택할 때 의덕과 의술이 동시에 뛰어난 자를 골라야하며 의사를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는 경우 용의를 만나 피해를 입거나 심지어 사망할 수도 있으니 환자가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12].
청대의 의사 서대춘(徐大椿)은 「섭렵의서오인론(涉獵醫書誤人論)」에서 당시 의학경전 및 통속의서 보급의 성행과 이에 따른 용의 증가의 연관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의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증가했으나 제대로 의서를 이해하고 읽은 자가 드문 현실을 지적했다. 혹은 의서를 접해 약간의 의학지식을 지닌 환자 가족이 의사를 무시하며 참견하거나 심지어 직접 치료하기도 하여 사람을 해치는 일이 적지 않다는 점을 비판했다. 「병가론(病家論)」에서는 환자가 의사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아 치료를 그르치는 경우들을 지적했다. 환자가 주관이 없이 의사의 명성, 입소문, 주변 사람의 소개 등에 의지하여 의사를 선택하는 경우 자칫 용의를 선택하게 된다. 또는 의사를 신뢰하지 않고 함부로 처방전을 바꾸거나, 섣불리 의사를 교체하는 경우 치료를 그르치게 되고, 혹은 돈이 아까워 진료비가 싼 의사를 부르는 경우 용의를 부르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고 보았다[13].
왜 이 시기 의사들은 용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언급했을까. 실제 용의 문제가 심각했기에 의사로서의 책임감에서 나온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글에서 의사의 지위와 정체성 유지를 위해 자신들과 용의를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의사들은 용의를 “의학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자”, “신분이 낮고 호구지책으로 의학을 대충 습득한 자”, “재물을 탐하고 환자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자” 등으로 묘사했다. 과거를 포기하고 의업을 택한 하층 사인(士人)을 용의로 폄하하는 것에서는 의사의 권위가 실추되는 현상에 대한 우려와 경계, 의사의 증가로 인한 의사간의 경쟁과 갈등이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용의들을 피하기 위한 환자의 책임을 강조했는데 좋은 의사를 알아보는 판단력과 함께 의사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당시 의사들은 스스로 도덕적 소양과 태도를 갖추어 이상적인 의사 상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명말의 의사 서춘보(徐春甫)가 조직했던 의학학회인 일체당택인의회(一體堂宅仁醫會)의 22개 강령에서는 이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의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14]. 첫째, 의학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태도를 갖출 것을 강조했다(誠意, 力學, 明理, 講習, 格致, 博學, 法天 知人 醫學之大). 둘째 의료와 관련된 내용으로, 맥을 정확히 파악하고(辨脈), 환자의 상태를 주도면밀하게 살펴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하고(審證), 약의 처방에는 기본원칙을 지켜야 하며(處方), 선대의 처방을 본보기로 삼고(規鑒), 의료현장에서 잊지 않아야 할 기본 사항(醫箴)을 상기하게 했다. 또한 의사가 반드시 피해야 할 환자와 상황을 일깨우고 있다(避晦疾). 셋째, 의사의 도덕 품행과 관련된 조항(存心, 恒德, 體仁, 忘利, 恤貧, 自重, 自得, 戒貪鄙)으로 전체 조항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의(醫)는 인술이다’, ‘의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니 이익을 탐하지 않아야 한다’, ‘부자와 빈자를 차별 없이 대하라’, ‘빈자를 구휼하라’ 등의 권고는 명청대 의덕과 관련된 저서에서 수없이 되풀이되는 주제였다. 이를 통해 의덕은 의사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하며 의학 이론지식이나 의술 못지않게 양의 혹은 유의라는 신분을 유지하고 용의와 자신을 구분하는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상적인 의사의 상(像)과 상반되는 것은 바로 의사가 멀리하고 환자가 신뢰해서는 안 되는 용의에 해당될 것이다. 의사들에게 ‘용의’란 자신을 수준 낮은 의사들과 분리하는 일종의 배제와 구분의 표현이었다. 이들은 용의를 비난하면서 실제 의료현장에서의 문제점을 꼬집고 유교적 지식과 의술, 도덕적 소양을 갖춘 자신들을 무지하고, 탐욕스럽고 책임감이 없는 의사들과 차별화했다. 즉 명청대 환자들이 의사와 용의의 종류를 구분하는 등 관심을 보였던 것은 좋은 의사의 선택이 어려웠던 혼란스러운 의료 상황을 의미하지만, 의사들이 용의를 언급하고 자신과 비교했던 것은 양의나 유의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명성이 높지 않고 학식이 낮은 의사가 항상 용의로 매도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의사들 중에는 진료소와 약포를 가지고 정착했던 의사들이 있는 반면, 떠돌아다니며 의술을 파는 신분이 낮은 의사도 존재했다. 이들은 흔히 강호낭중(江湖郎中), 주방의(走方醫), 영의(鈴醫) 등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주로 향촌에서 활동했고 하층 민중을 상대했다. 이들의 의술은 대개 단순한 기술에 가까웠고, 사용하는 약과 치료의 방법이 기존의 정통의학과는 거리가 있으며 때로는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띠기도 했다. 이런 떠돌이 의사들은 의학수준이 높은 엘리트 의사들의 비웃음과 비난의 대상이었고 흔히 ‘용의’라고 지칭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대중의 환영을 받는 측면이 있었다[15]. 청대의 의학가 조학민(趙學敏)은 주방의(走方醫)의 치료법과 처방을 수집하여 『관아(串雅)』를 저술했는데 서문에서 편찬 동기를 밝히고 있다. “이제껏 의학경전을 늘 가까이 해 왔는데 주방의의 의술이 신묘하고 효과가 빠르다고 하여 관심을 가졌다.……주방의의 기예를 상세히 전해 듣고 전수된 바를 글로 남겨 관아(串雅)라고 하였다. 이후에 그 기술을 익히는 자로 하여금 용속(庸俗)이라고 비난받지 않게 함이다”[16].
『관아』의 서론에서는 주방의의 책략을 엿볼 수 있다. “주방의는 세 가지 비결(三字訣)이 있으니 하나는 저렴함(賤)으로, 약물은 비싸지 않은 것을 취하고, 둘은 효험(驗)으로, 약을 삼키는 즉시 병이 나아야 하며, 셋은 편리함(便)으로 도시가 아닌 곳(山林僻邑)이라도 순식간에 나타난다”. 이들은 저렴한 약의 사용, 즉시 효과를 볼 수 있는 약의 사용, 도시 밖 외진 향촌에서의 활동 등으로 대중이 손쉽게 다가갈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생명을 위협하는 위중한 질병 외에 생활의 불편을 낳는 사소한 일상의 질병들의 경우, 주방의는 상당히 유용한 존재였을 것으로 보인다. “주방의에게는 네 가지 효험(四驗)이 있으니 세간에서 굳게 믿었다. 첫째 발치(取牙), 둘째 사마귀 제거(點痣), 셋째 안과질환 치료(去翳), 넷째 병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벌레의 제거(捉蟲)이다”. 이러한 치료는 비록 수준 높지 않고 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환자가 병의 원인과 치료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예를들어 ‘벌레의 제거’는 어려운 의학이론 대신 단순하고 직관적인 설명을 통해 환자에게 질병의 원인이 사라졌다고 믿게 하는 방법이었다.
즉 주방의와 같이 정통 의학지식이 부족하고 신분이 낮은 의사를 용의로 보는 시각도 있었으나 이들이 항상 용의로 비난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청대의사 육이첨(陸以湉)은 이를 신뢰할 수 없는 책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17] 『관아』가 이후에도 몇 차례 출판되었던 사실은 이 책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주류 의사들은 주방의와 같은 하층의사들을 용의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들은 일반 대중에게 유용한 존재였기에 항상 용의로 매도되지는 않았다[18].
이들 외에도 정통의학의 변두리에서 활동했던 산파 역시 주류 남성의사들에게 용의로 비난받는 존재들이었으나 환자의 입장에서는 접근하기 쉽고 때로는 신뢰했던 의료행위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산파는 여성의 출산을 돕는 대표적인 의료행위자였지만 흔히 잘못된 처방과 조치로 산모와 태아를 위험하게 하는 존재로 묘사되기도 했다(梁其姿, 2012: 201-203; 유연실, 2015: 146-148). 그러나 남성의사가 접근할 수 없는 출산의 현장에서 다년의 경험을 통해 산모를 도왔던 것은 산파들이었다. 환자들이 신뢰하는 한 이들은 유용한 의료인이었고, 그 중에는 부와 명예를 얻은 자도 있었다.
즉 용의라는 표현과 이것이 언급된 맥락에서 미루어 볼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의학 수준이나 경험이 부족하여 오진을 일삼는 용의에 의한 피해가 흔히 있었고 의사들에 대한 불신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용의란 주류 의사들이 유의, 양의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비교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또한 의사들이 자주 용의를 언급하고 자신과 그들을 구분했던 것은 의사의 신분과 지위가 그만큼 안정적이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용의를 규정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의사에 대한 환자의 불신과 원만하지 않은 관계였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던 원인은 앞서 살펴본 대로 다양한 수준의 의사가 혼재된 상황 때문이었다. 흔히 환자가 의사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은 의사의 명성이었다. “삼대(三代)가 지나지 않은 의사의 약은 먹지 않는다(醫不三世, 不服其藥)”라는 표현에서 반영하듯 사람들은 세의 출신의 의사 혹은 경험이 많고 학식이 높은 의사, 태의 출신 등 명망 있는 의사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명성이 높은 의사라도 모든 환자를 낫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용의라는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었다.
또한 의료 현장에서 발생하는 의사와 환자의 입장 차이와 원만하지 않은 관계가 불신을 낳았다. 고염무(顧炎武)는 의사가 환자의 치료를 기피하는 현상에 대해 지적했다. “옛날의 용의는 사람을 죽였으나 오늘날의 용의는 사람을 죽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살리지도 않는다. (그들은) 환자를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 가운데 병이 날로 심해져 죽게 만든다”[19]. 고염무가 비판하는 “환자를 죽이지는 않지만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는 용의”는 실력이 부족하여 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과감하게 치료하지 않아(治之不勇)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의사의 입장에서 이러한 치료의 기피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환자의 책망을 피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특히 자신의 처방으로 인해 환자가 죽는 상황을 피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당시 의사들은 같은 의사들에게 의료상황 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갖가지 위험에 대해 경계하고 보신(保身)의 방법을 찾을 것을 조언했다. 예를 들어 서대춘(徐大椿)은 의사가 처할 수 있는 난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첫째, 환자가 병세가 가벼울 때는 의사를 찾지 않다가 병세가 위독해야 의사를 찾기 때문에 대개 치료하기 힘든 상황이 된다. 둘째, 병이 오래되면 의사를 자주 교체하는데 환자의 병세를 더 악화시킨다. 만약 치료에 실패하면 곧 이전 의사의 잘못까지 뒤집어쓰게 된다. 서대춘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죽을 것 같으면 그 이유와 죽을 날을 예견하고 홀연히 떠난다면 책임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다[20]. 즉, 서대춘은 의사가 신중하게 처신하여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 떠안게 되는 비난과 책임을 피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앞서 일체당택인의회의 강령에도 환자의 잘못으로 인해 이미 치료하기 힘들게 된 질병은 되도록 피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21]. 이때 의사가 치료를 피하는 행위는 환자에 대한 무책임이 아니라 현명한 의사의 선견지명을 의미했다. 의사들의 입장에서는 신중한 처신과 보신에 해당되는 행위이지만 고염무의 비난처럼 환자의 입장에서는 책임의 회피이며 심지어 의덕의 부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즉, 의사의 책임을 요구하는 환자와 자기 보호를 실천해야 하는 의사 사이의 갈등에서 의사가 생각하는 용의와 환자가 생각하는 용의는 항상 일치할 수 없었다.

3. 용의살인(庸醫殺人)의 문제와 의료분쟁의 해결

용의가 사회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이들이 빈번히 의료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의사의 명백한 잘못으로 환자가 사망하거나 해를 입은 경우, 흔히 용의살인 혹은 용의오인(誤人) 등의 용어로 표현했고 청대의 법률은 용의에 의해 일어난 의료사고를 처벌하는 법을 「용의살인율(庸醫殺人律)」이라고 규정했다.
의사들은 치료가 잘못되어 환자가 사망하거나 해를 입은 경우 “용의살인”의 부담과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치료 중 발생하는 환자의 사망을 무조건 의사의 실수나 치료의 실패로 간주하여 용의살인으로 비난할 수 없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의사가 환자의 사망을 예견하는 경우였다. 이는 전통적으로 의사의 의술이 비범함을 드러내는 소재로 쓰였다. 예를 들어 『사기』의 편작(扁鵲)과 순우의(淳于意) 편은 질병과 사망의 예견을 통해 두 의사의 뛰어난 의술을 설명하고 있다. 명청대의 의안(醫案)과 의사(醫史)의 기록도 흔히 의사의 뛰어난 의술과 선견지명을 설명하기 위해 사망의 예견이라는 소재를 사용했고 이 경우 의사는 용의라고 비난 받지 않았다(馬金生, 2016: 45).
둘째, 인간의 수명은 하늘이 미리 정한 것이라는 전통적인 숙명론 때문이었다. 청대의 의사 서대춘(徐大椿)은 용의를 비판하면서도 환자의 사망이 반드시 의사의 잘못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는 인간의 생사는 정해진 바가 있으며 만약 환자가 사망했다면 이는 의사가 은연중 하늘의 명을 받아 대신 그 벌을 대신 내린 것이니 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22]. 이러한 인식은 의사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어느 정도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운명론이 주도적인 상황에서는 설사 치료로 인해 환자가 사망해도 의사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청대 소설 『지문록(咫聞錄)』은 “병이란 반드시 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사는 단지 고칠 수 있는 병만 고칠 뿐이고 살릴 수 없는 병은 고칠 수 없다(醫藥不死病)”고 하였으며, 청대 필기소설 『용암필기(庸盦筆記)』는 생사나 용의살인도 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의료의 불확실성에 대한 체념의 정서를 말해준다. 환자들은 의사의 무능함을 탓하면서도 병이 위중할 때 생사는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馬金生, 2016: 59; 祝平一, 2010: 38).
셋째, 치료의 선택권이 환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 서대춘은 용의에 의해 환자가 사망하기도 하지만 환자가 의사 선택을 잘못하거나 환자의 주변인이 얕은 의학지식으로 의사를 경시하여 치료를 그르친다고 지적했다[23]. 서대춘이 지적하는 것은 당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상황에서 의사보다 환자나 환자 가족의 의견이 더 중요했고 의사의 권한은 제한적이었다는 점이다.
만약 의사의 처방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되면 환자는 흔히 의사를 교체하거나 여러 의사를 불러 토론하게 하여 가장 좋은 처방을 찾았다. 처방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환자 측은 끊임없이 개입할 수 있었는데, 의학에 소양이 있는 문인계층의 집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져 환자의 가족이 의사의 의견과 다르다면 의사의 말은 절충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묵살 당했다. 의료현장에서 결정권은 환자에게 있고 의사는 단지 중간에 개입하는 자이자 의견제공자인 경우가 많았다. 즉 의사들은 의료의 현장에서 전권이 없었기 때문에 환자의 사망이 발생했을 때 치료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지지 않았고 용의살인으로 비난받지 않았던 면이 있었다(塗豐恩, 2008, 79-80; 雷祥麟, 2005; 476-477).
「용의살인율」의 실제 집행에서도 이러한 의료사고가 용의살인으로 규정되지 않고 의사가 처벌받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먼저 용의살인과 관련된 법률은 다음과 같았다. 명청대는 이전 시대부터 계승된 용의살인율을 따르고 있으나 용의의 증가와 의료 분쟁의 증가를 반영하듯 법률의 내용이 점차 풍부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했다. 명대의 법률인 『대명률(大明律)』은 용의에 의한 의료사고를 다음처럼 정리하고 있다. “용의가 약을 사용하고 침을 놓는데 본방(本方:의서의 치료 원칙)대로 하지 않아 환자를 해치면, 다른 의사로 하여금 사용한 약과 침을 놓은 곳을 조사하게 한다. 만약 고의로 한 것이 아니라면 실수를 한 것으로 간주하고(過失殺人) 더 이상 의료행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고의로 환자를 해쳤거나 재물을 뺏는 경우에는 장물(臟物)을 계산하여 절도로 간주하여 처벌한다. 애초에 고의로 사람을 죽일 목적이었던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24].
청대의 법률은 기본적으로 『대명률』을 따르고 있지만 추가되거나 수정된 부분이 있었다. 우선 의사의 과실로 판명된 경우 보상금(收贖)을 거두어 사망한 자의 집에 준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25]. 또한 고의로 일반적인 처방을 어기고 재물을 탐하는 행위에 상세한 정황을 추가하여 용의살인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처벌하려는 모습이 있었다[26]. 청대 가경(嘉慶) 6년(1801년)에는 무속인, 도사(道士)같은 종교인이 사술(邪術), 이단(異端)의 방법을 사용하여 환자를 해쳤을 경우 교형이나 유배형에 처하는 조항을 추가하여 무겁게 처벌했다[27]. 청대 용의에 대한 법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용의살인 사건이 대개 금전적인 배상으로 처리되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라는 것과 둘째, 의사의 과실보다 종교인의 사술과 관련된 사항이 더욱 무겁게 처벌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의 법률은 의사가 실수로 저지른 의료사고에 대해서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의료사고를 저지르고 잘못이 분명하게 확인된 용의는 법률대로 환자 가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의료행위를 금지당했을까? 실제로 이러한 제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소설 『고망언(姑妄言)』에서는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대명률』에는 비록 용의살인의 죄목이 있으나 이제껏 한번이라도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28] 청대의 문인 팽숭육(彭崧毓)도 “법률에는 용의살인의 조항이 있다. 지금 용의살인이 도처에 있으나 법대로 집행하여 다스리지 못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살인이 무수히 많은데도 관에서는 처분이 없고 불문에 부치니 인명을 중시하지 않는 것이다”[29] 라고 지적한다.
의사가 처벌받지 않았던 이유는 치료과정에서 의사의 잘못을 찾아내고 증거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청대 지방 관리는 인명사건이 발생하면 조사할 의무가 있었는데 용의살인 역시 과실살인(過失殺人) 항목에 해당되었다[30]. 이때 의사가 본방을 어기고 잘못된 치료를 했음을 증명해 줄 증거가 없다면 의사를 법적으로 처벌하기 힘들었다. 롱웨이(龍威)는 청대 쓰촨성(四川城) 바현(巴縣)의 의료 분쟁의 문서를 분석했는데 관의 태도가 소극적이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대개 안건은 사소한 일로 처리되었고 충분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상급기관의 회답문은 “환자는 병으로 죽은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因病身死,並沒別故)”에 그쳤다(龍威, 2016: 21). 또한 의사가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선언한다면 설사 치료과정에서 환자가 사망해도 환자의 가족은 의사에게 불만을 가질지언정 관에 섣불리 고소할 수 없었다(馬金生, 2016: 54).
이와 관련하여 청말 『신보(申報)』의 한 용의살인사건에서 관(官)이 환자 측의 소송을 기각하고 신중을 기했던 사정을 볼 수 있다. “환자 왕(王) 씨의 염이 끝나고 의사 장석곡(张石谷)이 환자의 집에 돈을 주지 않자 이를 이유로 환자의 부친 왕서림(王瑞林)이 상하이 현으로 와서 소장을 접수했다. 상급관은 이를 기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용의살인율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변증이 분명해야 하니, 어떤 잘못이 있는지 밝혀야 비로소 관례대로 처벌할 수 있다. 너의 아들이 대체 어떤 병에 걸렸었고, 의사 장석곡이 어떻게 치료했는가? 당시 다른 의사의 검증을 거치지 않았으면서 늘 터무니없는 말로 고소하는 일이 있으니 어떤 근거로 탄핵하는지, 또한 어찌하여 의사를 굴복시키려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제멋대로 소송하는 것(任意妄訟)에 속하니 (소장을) 허락하지 않는다”[31]. 환자가 억울하게 사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를 기회로 의사에게 금품을 갈취하거나 소송을 남발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관에서 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의료 사고가 실제 소송과 처벌로 이어지기 힘들었던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법에 의해 용의를 처벌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환자의 가족이 취했던 행동은 의사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며 환자 사망의 책임을 묻고 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관에 가서 알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분노한 환자의 가족들이 직접 의사를 찾아 책임을 물었다. 또는 환자의 사망을 빌미로 의사를 협박하여 재물을 강탈할 기회를 노리거나 구타하여 사망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龍偉, 2016: 20). 환자의 가족이 시신을 들고 의사의 집을 찾아가 소란을 피우는 것(扛屍上門)도 의료 분쟁에서 보이는 환자의 흔한 사적 복수의 모습이었다. 이는 관에서 주의할 정도로 사회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청대 관리들의 지침서인 관잠서(官箴書)와 같은 글에서는 이러한 사적인 복수와 폭력에 대한 우려를 볼 수 있다. “만약 인명사고를 관에 고하지 않고 기회를 틈타 군중이 시신을 들고 찾아가 재물을 강탈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면, 배상을 하는 것 외에도 반드시 추궁하여 처벌한다”[32]. 만약 이러한 환자 측의 모욕과 비방에 의사가 자신의 처방이 합당하다고 여기고 참지 않는다면 의사와 환자 쌍방이 고소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33].

4. 청말 매체의 용의 보도

1) 신문과 잡지의 용의 및 용의 살인사건 보도

청말 신문 잡지와 같은 매체는 대중의 여론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청말 대중의 여러 가지 관심사나 주목하는 사건사고, 논쟁들이 언론 매체를 통해 형성되었고 전파되었다. 그 중 용의의 횡포와 부조리, 이들로 인한 사망사고는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 청말 잡지의 용의 보도 중 가장 빈번한 것은 용의에 의한 피해사례를 알리는 기사였다. 대개 어떤 지역의 용의 아무개가 전문적인 지식도 부족한데 함부로 환자를 치료하여 환자가 크게 다치거나 사망했다는 내용으로 이러한 엉터리 의사의 해를 입지 않도록 독자의 주의를 당부하는 말로 끝을 맺었다. “쑹장(松江)의 어떤 사람이 다리에 부종이 생겨 가까운 곳의 모 외과의를 불러 치료했는데 칼을 사용하여 부종안의 물을 빼려고 하다가 피가 멈추지 않아 환자가 사망했다. 환자에게 칼을 쓸 수 있는지의 여부를 어찌 의사가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절박하게 신문에 실어 이 병을 앓는 사람에게 알려 경계하려고 한다”[34]. 이러한 보도에서 용의는 환자의 사망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도망가거나 잡혀서 수속(收贖)이나 장례비를 내고 풀려났다. 또 다른 사례도 비슷한 논조였다. “허난(河南)의 의사 마 씨(馬氏)는 원래 침만 놓으면 환자가 순식간에 낫는다는 것으로 유명한 의사였다. 갑(甲)이라는 자가 풍질(瘋疾)을 앓아 치료했는데 마 씨가 침을 잘못 놓아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마 씨는 곧장 도망가려고 했으나 환자의 이웃에게 붙잡혀 관에 넘겨졌다. 결국 사망한 자의 가족에게 은(銀)100원과 장례비용을 대주고 풀려났다”[35]. 대개 용의사망보도에서는 의사와 환자 간의 분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의사의 이름과 구체적인 지역이 게재되기도 하는데 의사가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자 환자 측이 신문에 직접 고발하는 경우였다.
종종 환자의 가족이 여러 날에 걸쳐 신문에 피해사실을 직접 광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1902년 정신상(程新祥)은 부친을 치료하다 위중하게 한 용의 정수춘(程受春)을 8월 22일부터 8월 24일까지 사흘에 걸쳐 『신보(申報)』에 고발했다[36]. 정신상은 용의 정수춘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표현하며 이후에 다른 사람이 이 용의에게 치료받고 피해를 입지 말 것을 당부하기 위해 신문에 게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1902년 8월 26일에는 부친의 병을 치료하기까지 거쳐 간 의사와 정황을 더욱 자세히 소개하고 용의 정수춘이 처벌을 피하려 교활하게 변명을 한다고 비난하며 신문에 호소하고 있다[37]. 정신상이 신문에 피해사실을 알리고 난 이후 독자들이 편지를 보내 용의 정수춘에게 입은 피해를 추가적으로 증언하기도 했다.
또한 1902년 11월 10일부터 11월 13일까지 항저우(杭州)의 의사 유자영(劉子英)에 관련된 기사가 여러 차례 실렸는데 피해자인 왕신전(王慎旃)은 유자영이 평소 명의를 자처하고 거액을 갈취하였으나 그의 치료를 받고 환자가 한 달이 못되어 사망하였다고 고발하며 용의살인의 문제를 호소하고 있다[38]. 왕신전은 유자영의 의술이 형편없고 탐욕스러우니 믿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편 유자영에 대한 비난을 반박하는 기사도 실렸다[39]. 항저우인 심음정(沈蔭廷)은 유자영이 용의가 아니며 환자 측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다. 유자영은 실력있는 명의이고 왕신전이 주장하는 피해금액은 원래 의사 유자영과 합의된 금액이기 때문에 갈취가 아니다. 또한 환자는 6월경 유자영의 치료로 이미 호전되었고 환자의 사망은 이후 9월에 발생한 이질(痢疾)로 인한 것으로 유자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던 것이었다. 이러한 기사를 통해 볼 때 신문은 환자들이 용의에게 입은 피해를 공개적으로 고발하고 보복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이었고, 용의의 문제를 공공의 문제로 확대시키기에 매우 효과적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유자영의 사례처럼 당시 용의살인으로 보도된 기사가 주로 환자의 입장만을 반영하였기에 실제로는 용의살인의 상황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기사들은 치료에 실패한 중의를 용의로 단정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대비되는 서의의 효과적인 의술을 주목했다. “한 사람이 부인과 아들 셋이 성홍열에 걸려 중의 심한청(沈翰淸)을 불러 치료했는데 둘째 아들이 갑자기 사망했다. 이후 그는 일본 조계의 의사를 소개받고 곧 가족은 수일 만에 완쾌되었다”[40]. “팡현(防縣)의 언생(鄢生)이 오래도록 다리를 저는 병을 앓았는데 영국의원의 의술이 훌륭하다고 하여 찾아갔다. 의사는 완치를 장담했으나 환자는 치료가 두려워서 다시 가지 않았다. 당시 새로 개업한 중의 조견전(趙見田)은 모든 외과 치료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조 씨는 약값 은150냥을 원했고 완쾌를 장담했다……그러나 조 씨는 돈을 받고 거의 신경을 쓰지 않으니 3개월이 지나도록 변화가 없었다. 환자가 화가 나서 따지자 조 씨는 다시 강한 약을 썼는데 곧 환자가 사망하게 되었다. 그의 가족은 이 사건이 용의살인이고 조 씨가 재물을 탐했다고 관에 알렸다. 이에 관은 중재하여 조 씨가 원래 돈의 일부를 돌려주고 장례비도 책임지게 하여 일이 마무리 되었다”[41]. 이러한 기사의 대부분은 환자가 중의의 치료를 받다가 효과가 없거나 병이 악화되어 서의를 찾고 병이 완쾌되거나, 혹은 서의를 찾았을 때는 이미 손쓸 방법이 없어 사망하거나, 서의의 치료를 받지 않고 중의의 치료를 받았다가 해를 입는 등 중의의 무능함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서의(西醫)의 의술을 소개하는 기사는 대체로 호의적인 경우가 많았다.
“서의가 치료하는 방법은 상세하고 빈틈이 없다고 할 만하다.……중의의 지식과 비교해보면 상세하기가 이를 데 없다. 중의는 병이 낫는 여부를 운명에 맡길 뿐이지만 서의는 그렇지 않으니, 생전에는 그 병을 치료하고 사망하면 이를 해부하여 본다. 때문에 사람의 신체와 병의 근원을 연구하여 당대에 가르치고 후세에 전한다”[42]. 서의의 부검이나 해부에 반감을 나타내거나, 중의가 서의에 비해 내과(內科)의술이 뛰어나고 서의가 갖추지 못한 장점이 있으며 서의에 비해 본초지식과 활용이 뛰어나다는 여론도 있으나[43] 이러한 인식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서의는 중의처럼 음양오행 등의 “허무맹랑”한 이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각종 과학적인 도구와 화학 지식을 사용하고 광물과 본초의 약을 배합하여 내과에서도 중의보다 우수한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인식도 제기되었다[44]. 청말의 신문은 외과 수술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45]. 당시 신문을 보는 독자들은 이러한 자세한 서의 외과술의 기사를 통해 호기심을 충족하고 서의에 대해 호감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덕을 갖춘 양의를 묘사하는 전통적인 서술방식으로 서의를 묘사하기도 했다. “중국인 용의는 환자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며 항상 탐욕스럽지만, 편작에 비견할만한 서의는 환자를 살리고도 보수를 거절하고 받지 않고 떠났다”[46].
서의와 비교하여 용의를 무지한 중의로 풍자하는 기사도 있었다. “홍콩에 불치병에 걸린 한 환자가 사망했는데 환자의 가족이 시의원(施醫院)의 서의에게 환자가 어떤 병으로 사망했는지 문의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중의가 자신이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장담했다.……중의는 시신을 목판에 눕히더니 몰약(沒藥)을 죽은 이의 입에 넣고 시신을 흔들어 약이 잘 들어가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서의가 대체 언제 살아나는 것이냐고 물었다. 중의는 “예전에 한 여인이 죽었을 때 내가 이 방법으로 살려낸 적이 있다. 지금은 어째서 효과가 없는 것인가”라고 답했다. 약은 한 가지 종류가 아니고 사망도 한 가지 병에 의해서가 아니니 중의의 고집불통에 웃음을 참지 못한다”[47]. 이 기사에서 묘사하는 중의는 서의 및 병원이라는 공간과 대조되며 용의로서의 면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 외에도 「용의가소(庸醫可笑)」라는 제목의 기사가 자주 나타나는데 대개 허무맹랑한 이론과 치료법을 주장하는 중의를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엉터리 치료를 일삼는 중의 외에도 서구의 학문을 중국의 학문과 비교하며 견강부회하는 중의 역시 ‘용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장쑤성(江蘇省)의 지방행정장관(督撫)은 한 지방의학 의사가 주장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상위안현(上元縣)의 의사(職醫) 화금(華金)이 중의의 전통적인 기학(氣學)의 내용이 서양의 과학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의학교에서도 중의의 기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청했다. 그러나 중의의 기(氣)는 서양 과학에서 주장하는 기(氣)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처럼 자꾸 서양의 학문과 과학으로 중의를 증명하려는 자들이 많으나 대부분 옳지 않다. 이는 모두 그들이 밥그릇을 지키려고 하는 수작들이다”[48]. 그는 이 중의가 중의학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서구의 학문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용의이며 궁극적으로 지방의 말단 중의가 자리보전을 위해 주장하는 바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상의 시각은 매체의 성격이 서양의학을 신뢰하고 중의학에 회의적이거나 기독교계의 입장을 대표할 경우 더욱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의학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매체가 용의문제를 인식하고 언급하는 방식은 어떠했을까. 청말 중의약(中醫藥) 잡지에서는 중의계에 존재하는 용의에 대한 비판을 반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노력과 제도의 개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청말 중의약 잡지인 『의학보(醫學報)』의 논설에서는 중의가 부패하게 된 까닭을 첫째, 의학에 정통한 자가 없기 때문이고 둘째, 이제껏 의학을 중요하지 않은 학문으로 여겨 재능이 있는 자가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며 셋째, 의술을 행하는 자가 단지 생계를 위해 의학을 배워 학문소양이 없고 넷째, 중의를 육성하는 학교와 의사를 선별하는 시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의학교의 개설과 의사시험의 실시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49]. 이른바 중의개량, 중서의회통(中西醫匯通)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중의의 자질 문제에 관한 논설에서도 이러한 반성적 인식과 중의 개량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50]. 단, 중의학계는 이러한 문제가 중의 자체가 열등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고, 중의를 버리고 서의를 선택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과 본질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51].
동시에 용의가 중의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라기보다 기타 사회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당시 엉터리 약포와 가짜 약의 유통, 판매가 횡행했는데 의사가 제대로 처방을 해 줬는데도 약포상(藥鋪商)의 무지로 인해 환자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52] 광둥의 약포에서 판매하는 유명한 약을 모방한 가짜 약이 시중에 유통되어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많아 주의를 당부하는 기사가 연속 실리기도 했다[53]. 신문 기사에서는 이러한 약포를 단속할 수 있는 법이 필요하며 가짜 약의 경우 용의살인보다 오히려 한층 더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54]. 『소흥의약학보(紹興醫藥學報)』의 논설에서도 약포의 약의 관리와 판매에 문제가 많으며, 약포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난 환자의 사망이 중의의 잘못으로 귀결되는 현실을 비판했다[55].
또한 중의학계는 기타 매체에서 중의에 의해 발생한 환자의 사망사고를 용의살인으로 보도하는 행태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중의 정자량(丁子良)은 이에 대해 “만약 중의에 의해 환자가 한 명이라도 사망하면 각 신문에서는 대서특필하여 용의살인이라고 보도하고 삼일(三日)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곳곳에 널리 알려진다. 그러나 서의가 중국인 여러 사람을 죽여도 보도하는 경우가 없다”[56]라고 말했다. 물론 정자량의 지적대로 당시 『신보(申報)』 및 서의를 지지하는 매체에서는 중의가 저지른 용의살인을 부각하여 보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의에 의한 중국인 환자의 사망사건이 사회적으로 전혀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주장은 과장된 면이 있다. 당시 서양선교의사 역시 중국인 환자가 사망하는 의료사고와 이에 따른 분쟁을 피하기 위해 위험한 수술이나 치료하기 힘든 환자를 꺼렸기 때문이다(雷祥麟, 2005: 468). 다만 중의를 비판하거나 심지어 폐중의(廢中醫)를 주장하는 매체에서는 서의에 의한 사고보다 중의에 의해 일어난 의료사고를 주목했고 편향된 시각으로 보도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매체의 성격에 따라 보도의 태도는 달랐지만, 중국 의료현실의 열악함을 부각하고 이에 대한 반성과 개혁을 주장하는데 용의가 핵심 소재로 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용의의 문제는 곧 중국 의학의 병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재이자 개혁의 당위성을 뒷받침했다. 용의를 사회문제로 인식하는 시각은 청말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당시의 ‘용의’는 의학을 제대로 접하지 않고 의덕을 쌓지 않은 개인의 문제, 혹은 일부의 문제였다. 그러나 청말의 용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중국 의학의 구조와 환경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연스레 중의와 서의의 대립적인 우열(優劣)의 구도를 만들고 있었다.
한편 중국의 의정(醫政)제도에 본래 의사양성과 시험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현재 용의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옛 의정제도가 유명무실하기 때문이며, 서구의 의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옛 의정제도 의의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대개 서구의 의학은 의원(醫院)이 있고 관의 시험을 거쳐 합격한 후에 비로소 의업을 할 수 있으니 양법미의(良法美意)가 중국의 상고시대와 닮아있다”[57]. “부디 현명한 관리가 송대의 의학시험의 법을 본받아 정돈하기를 바란다”[58]. “주나라의 관(周官)이 특별히 의사(醫師)의 직을 설치하고 시험을 거쳐 다섯 등급으로 정하였다.……그 봉록 또한 이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이를 통해 의사(醫事)를 옛 사람들이 중요시했음을 볼 수 있다”[59]. “내가 일전에 듣기로 서구의 의사는 반드시 국가의 시험을 통해 합격하여 증명을 받아야 비로소 의업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학이 정밀하고 의사의 수 또한 적은 것이다. 이 법은 곧 우리 중국의 주례(周禮)에서 의사(醫事)를 헤아렸던 뜻이다. 오늘날 중국이 진실로 의학에 시험의 제도를 두어 시행할 수 있다면 곧 과거 성현의 선정(善政)을 실추하지 않으면서 또한 각국의 좋은 본보기에 필적할 수 있을 것이다”[60].
이전에도 용의의 문제가 심각함을 지적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시험의 실시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의사 서대춘(徐大椿)은 의술을 호구지책으로 여기는 용의들의 증가와 의술을 중시하지 않는 세태를 비난하고 고대의 의사시험제도를 본받아 의사를 다시 엄격히 시험해서 우수한 자만 의술을 행하게 하자고 주장했다[61]. 청대에는 의사시험을 국가의 제도로 실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옹정(雍正)연간 한림원(翰林院) 시독학사(侍讀學士) 척린상(戚麟祥)은 용의의 폐해가 심각함을 걱정하여 모든 의사를 시험보게 하여 성적에 따라 태의와 지방의 의학기관에 속하게 하고 나머지는 각 지방에 등록시켜 의사를 하게 하는 개혁안을 냈다[62]. 이 개혁안은 옹정제의 인가를 받았으나 실제로 시행되어 제도로 자리잡지 못했다. 청대에도 용의가 사회문제로 지적되었고 시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중의 일부의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에 시험론 역시 국가 정책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지 못했다.
용의의 근본적인 원인이 시험을 거치지 않고 의사가 양산되기 때문이라는 문제인식은 명청대와 청말 개혁의 논의에서 모두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청 중기 사회가 용의살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의사시험의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점은 청말의 논의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청말 개혁의 논의에서 나타난 용의에 대한 문제인식과 의사시험의 요구는 지향점에 차이가 있었다. 서대춘이 주장하는 의사의 시험은 주례, 송대와 원대의 의학제도의 뜻을 본받는 것이며 고대 의학 본연의 이상적인 면모를 되살리자는 것이었다[63]. “치료는 옛 법(古法)을 따를 것이고 학문에 근거가 서고 사승(師承)이 끊이지 않음”이 서대춘이 의사시험을 통해 바라는 이상이었을 것이다. 청중기에 계획된 시험론도 용의 및 용의살인을 줄이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
그러나 청말의 중의시험론의 목표는 단순히 용의와 관련된 문제를 줄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중의시험은 중의의 대표적인 병폐인 용의살인을 없앨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의와 중국의 의료현실 나아가 중국사회전체의 개혁과 연관된 제도였다. 또한 청말 이전과 이후의 시험론이 모두 중국 고대의 의사시험과 의사양성제도가 존재했음을 언급하고 있으나 이전의 논의는 고대의 이상적인 의정을 회복하자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고, 청말의 논의에서 언급하는 과거의 의정제도는 궁극적으로 서구식의 근대적 의정으로 변모하기 위한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근거에 불과했다. 톈진(天津)의 의원(醫院) 설치와 양저우(楊州)의 의사시험 실시에 관한 『신보(申報)』의 기사는 당시 상하이에서 의사시험을 실시했으나 관리의 부족으로 용의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흐지부지 되었던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64]. 즉 단순히 의사시험을 도입 시행하거나 의사를 늘린다고 해도 국가의 근대적 제도와 적절한 감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용의 및 중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용의를 보도하는 신문기사는 구체적인 사실을 근거로 작성되는 경우도 있으나 소문을 근거로 하는 경우가 많고 장소나 시간 및 기타 정황이 애매모호하게 작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등장인물은 대개 중의였으며 의사의 잘못인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아도 제목은 대개 용의살인(庸醫殺人)으로 붙여졌다. 이러한 기사들은 주로 환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었고 의환 쌍방의 의료분쟁이 아닌 용의살인의 관점에서 보도되었다. 의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환자와 의사의 주장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자세히 소개하는 기사는 드물며 용의의 허무맹랑한 치료와 책임감 없고 탐욕스러운 태도를 부각하는 자극적인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이 시기 용의살인의 기사가 있는 그대로를 반영한다고 하기도 힘들 것이다. 이러한 보도 태도에 대해 중의계의 입장은 비판적이었다. 중의약 잡지의 논설에서도 나타나듯 중의계 역시 용의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중의에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중의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서의의 장점을 흡수하여 용의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중의를 개조하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독자는 신문에 반복되어 실리는 용의살인 사건의 자극적인 기사를 접하며 중의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용의의 문제가 적지 않으니 마땅히 의학과(醫學科)를 세워야 한다」는 제목의 사설에서도 빈번한 용의살인의 소식에 대해 개탄하며 신문에 실리지 않는 용의에 의한 피해는 더욱 심할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65]. 특히 도시를 중심으로 급증한 신문의 발행과 파급력을 고려해볼 때 용의의 문제는 실제보다 과장되고 확대 재생산되었던 측면이 있고 여론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청말 매체에서 용의의 문제는 피해를 입은 개인이나 일부 중의의 자질 문제에 그치지 않고 중의계 전체의 근본적인 문제로 서술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매체의 성격이 서양의학을 신뢰하고 중의학에 회의적인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신문이라는 새로운 여론 분출의 공간은 대중들이 용의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게 했고 중의에 대한 의심으로 확산되게 했다. 매체에서 용의에 대한 언급이 증가하고 부각된 원인은 용의의 수와 용의살인 사고가 갑자기 증가했다기보다, 기존에도 존재했던 용의의 문제가 재인식되며 중의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고 의학 개혁 논의의 핵심 소재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화보에서 표현하는 용의

19세기 후반 중국에는 문자 위주의 신문 매체 외에 삽화와 간단한 글이 실린 화보(畵報)의 출판이 성행했는데, 1875년 최초의 화보가 출판된 이후 1919년까지 간행된 화보가 약 118종에 달했다. 특히 1880-90년대 석인(石印)기술의 발달과 『점석재화보(點石齋畫報)』 성공의 영향을 받아 초기 외국인이 주도했던 화보출판에서 중국인이 출판하는 화보의 수가 급속히 증가했다(陳平原, 2001: 6-7). 화보는 그림이 의미의 주요 전달 수단이었으며 짧은 글이 보조역할을 했다. 이 시기 각종 화보에서도 용의 및 용의살인과 관련된 기사가 다수 실렸음을 볼 수 있는데 신문과 비슷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으며 화보라는 매체의 특징이 잘 반영되었다. 화보의 사례를 통해 청말의 매체가 용의에 관련된 보도에서 어떤 점을 추구했는지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청말 화보 창간이 유행한 배경은 대중의 국제 정세의 파악과 시사에 대한 강렬한 관심에서 연원하고 있다[66]. 이에 호응하여 화보는 대중에게 흥미로운 소식과 새로운 지식 및 학문을 전파하고 때론 계몽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화보에서 주로 다뤘던 주제는 기이한 현상, 인과응보, 새로운 지식, 시사(時事) 등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서학동점(西學東漸)의 성향을 지녔다. 그림이라는 매개가 가지는 특성상 화보는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 예를 들어 비도시인, 하층 노동자, 여성, 어린이 등을 대상으로 하는 계몽적인 내용이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신보(申報)』의 한 사설은 화보의 창간과 대중 계몽의 목적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상하이는 통상(通商) 이후 줄곧 서구의 법을 따라 일간(日刊)과 일보(日報)가 출간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세상의 일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그러나 중국에 글을 아는 사람은 드물고 모르는 자가 많으니 어찌 모두가 신문을 읽고 알 수 있을 것인가?……지금 화보를 사는 사람은 글자를 알던 모르던 모두 식견이 늘었다”[67]. 『점석재화보(點石齋畫報)』의 발간사는 화보의 주요 독자인 아동에 대한 교육의 효과와 서구에서 회화(繪畫)가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대중을 계몽시켰다는 역할을 강조했다. 화보를 접했던 독자의 수와 판매량, 파급력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가장 대표적인 화보인 『점석재화보』를 예로 들면, 대도시는 물론 각 중소도시에 『점석재화보』지점과 점석재 석인국(石印局)의 분점이 있었다(陳平原, 2001: 8). 1920년대 이후에는 사진이 그림을 대체하고 석인본(石印本)이 쇠락하면서 화보의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청말 도시거주민 및 신지식에 관심이 많던 대중에게 익숙하고 널리 읽히는 매체였던 것은 분명하다.
용의 관련 기사는 위의 화보의 특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화보의 목적이 더 많은 대중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고 계몽하는 것인 만큼 독자의 흥미를 끌만한 그림과 글로 구성되어 있었다. 화보에서 표현하는 용의는 『신보(申報)』의 시각과 마찬가지로 책임감 없고 의료사고를 일으키며 무지하고 탐욕스러운 중의가 대부분이었고 그림 속의 용의는 이 점을 강조하여 희극적으로 표현되었다. 화보는 일반 대중의 계몽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화보 속의 글은 신문에 비해 문체가 평이하고 단순하여 이해하기 쉬운 편이었고 여기에 저자의 주관적인 평론이 더해진 것이었다. “예기(禮記)에서 이르기를 삼대(三代)에 걸친 의사가문이 아니면 약을 함부로 먹지 말라고 하였으니, 의사가 환자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상하이(上海) 장 씨(張某)의 진료소에서 외상을 입은 아이를 치료하였는데 장 씨는 의술을 모르는 자로서 칼을 함부로 써서 환자의 피가 멈추지 않아 현장에서 아이가 사망하였다. 이러한 인명을 어린아이 장난으로 아는 의사는 인지상정에 어긋나는 것이다”[68]. “용의살인은 마땅히 인과응보가 있는 법이다”[69]. 이러한 서술방식은 화보가 용의보도에 있어서 정확한 사실전달의 목적보다 용의가 일으키는 사회문제를 부각하고 독자를 계몽시키려는 목적이 더 컸음을 보여준다. 또한 화보의 글에서 전달했던 것은 사건이 발생한 구체적인 시간, 장소, 인물, 경과 등이 드러난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가 아닌 저자의 주관적인 편집을 거친 정보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문의 용의보도 역시 항상 명확한 사실관계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화보의 그림과 글은 용의비판이라는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하여 표현하거나 특정부분이 강조되는 정도가 더욱 두드러졌다. 화보의 용의보도의 주제는 새롭고 다양한 내용보다 비슷한 유형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 “용의살인”이라는 주제나 제목으로 의료사고를 일으킨 중의를 묘사하는 기사가 빈번했는데, 화보에서 이런 용의들은 대개 엉터리 의술로 환자를 해치고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거나 환자 가족의 추궁을 피해 무책임하게 도망가는 자들로 묘사되었다. “떠돌이 의사 진한주(陳漢洲)가 진신지(陳新之)를 치료했는데 차가운 성질의 약(凉藥)을 멋대로 써서 환자가 어제 죽고 말았다. 환자의 가족은 뒤늦게 처방이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고 의사에게 따지려고 했으나 의사 진 씨는 이미 도망 간 뒤였고 지금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모르겠다”(그림 1)[70]. “톈진 남문(南門)의 한 아이가 전염병에 걸려 의사를 청했다. 의사는 아이에게 침을 놓고 약을 먹게 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사망했다. 이에 아이의 부모가 의사를 찾아와 따지고 말다툼이 발생했다. 의사는 “나는 다만 병을 치료할 뿐 수명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그림 2)[71].
또한 이런 용의살인의 주제는 환자의 항의 및 사적인 복수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보(申報)』에서 용의살인 기사의 내용은 “의료사고를 일으킨 중의와 이에 항의하는 환자”로 구성되었는데 화보의 경우 환자의 집단 항의와 사적인 복수의 장면에 치중해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싱(嘉興) 동문(東門)에 용의 왕(王) 씨가 새로 왔는데 광고를 붙이고 스스로를 과장해서 선전했다. 환자 왕(汪) 씨가 이를 믿고 치료를 맡겼고 용의 왕 씨는 치료를 장담했다. 그러나 약 한두 첩을 먹고 환자 왕 씨가 사망했다. 사망한 왕 씨의 후 처는 상심하여 원한을 품고 용의를 속여 집으로 초대해 그를 시신의 옆에 무릎 꿇게 하고 뺨을 때렸다. 이후 주위에서 말려 용의 왕 씨는 겨우 얼굴을 가리고 달아났다”(그림 3)[72]. “난징(南京)의 의사 사(佘) 씨가 치료비로 거금을 요구하며 김(金) 씨의 종창을 치료했는데 갑자기 환자가 죽고 말았다. 다음날 환자의 처첩이 용의 사 씨의 집으로 몰려와 간판과 기물을 부수고 칼로 협박했다. 또한 사 씨를 끌고 도로 한복판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망신을 주었다. 사씨가 용서를 빌고 치료비를 돌려주고서야 소동이 마무리되었다(그림 4)”[73].
화보는 신문의 기사나 관련 소식을 다수의 독자들에게 재전달하는 이차 창작물이었다. 이때 중심소재와 표현 방식은 창작자의 주관에 의해 정해졌는데 용의의 경우 구체적인 의료사고의 정황보다 용의살인에 대한 인과응보가 중심소재였고 풍자의 의도가 두드러졌다. 특히 명청대 풍자소설에서 등장하는 환자의 사적 복수와 용의에 대한 조롱 등의 장면과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사실 그대로의 재현이 아닌 창작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이나 독자가 원하는 취향으로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용의는 몰락한 중의로 표현되거나(「용의귀감(庸醫龜鑑)」), 성실하지 않은 태도로 환자를 대하고 재물을 탐하여 웃음거리가 되거나 환자의 비난을 받는 모습(「용의소병(庸醫笑柄)」, 「명의수군(名醫受窘)」) 등의 주제로 반복되어 표현되었다[74]. 이러한 전형적인 용의의 묘사에서 중의에 대한 불신을 의도적으로 그려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용의의 비교대상은 전통적인 중국인 명의가 아닌 뛰어난 의술을 지닌 서의(西醫)인 경우가 많았다. “푸저우(福州)의 임(林) 씨가 치질을 앓았는데 자칭 외과를 전문으로 한다는 용의 당(唐) 씨의 엉터리 처방으로 통증이 오히려 심해졌다. 급히 서의를 불러 치료하게 했으나 이미 환자의 상반신이 자주빛으로 변하고 곧 숨이 끊어졌다. 용의 임 씨는 이미 소문을 듣고 도망갔다.
서의에 말에 따르면 용의 임 씨가 쓴 약은 단장초(斷腸草)로 치명적이라고 한다(그림 5)”[75]. “서(徐) 씨의 처 고(高) 씨가 분만을 못해 그 지역에서 저명한 의사 손(孫) 씨와 곽(郭) 씨를 급히 불렀다. 두 의사가 치료했으나 이틀이 지나도 효과가 없었다. 서 씨는 상하이의 여성 서의를 불렀는데 여의사가 단언하여 말하기를 중국의사가 잘못하여 태아가 사망했다고 했다. 서의는 죽은 태아를 밖으로 빼내고 산모의 회복을 위해 산후조리의 처방을 했다. 그런데 서씨는 손과 곽 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들을 다시 불러 산모를 치료하게 했는데 그날 밤 산모가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사망하고 말았다”(그림 6)[76]. 화보는 중의의 엉터리 치료로 위험에 빠진 환자를 서의의 치료로 살리거나, 서의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중의의 잘못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는 광경을 주로 묘사했다. 이때 환자의 사망은 전적으로 중의에게 책임이 있었고 서의는 중의의 잘못을 지적하는 역할이었다. 이러한 화보의 표현방식은 전통적인 용의와 명의(名醫)의 대비를 용의와 서의로 바꿈으로써 서의가 명의의 형상을 대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보에서 서의의 뛰어난 의술은 주로 외과술로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독자들이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부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의 한 환자가 스스로 배를 갈라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의사는 내장을 잘 집어넣고 배의 상처를 봉합하여 환자를 살렸다”[77]. “서의가 병을 치료하는 것은 신술(神術)이니 요즘 중국인들은 즉시 효과가 나타남을 보고 서의를 믿게 되었다. 광둥성(廣東省)의 한 부인이 난산으로 산파도 속수무책이었고 생명이 위험했다. 그 남편은 마땅히 서의를 찾아가야 한다며 박제의원(博濟醫院)으로 데려갔다.……제왕절개를 하면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 것이니 천명에 달린 것이었다. 의사는 마취약을 사용하고 배를 갈라 내장을 통과하여 아이를 꺼내니 딸이었다. 다시 봉합하고 약을 발라 환자를 보살폈다. 수일 후 환자가 나아 모녀가 퇴원했다”[78]. “푸저우(福州)의 서양의사는 안과에 뛰어나 이미 눈이 먼지 9년이 지난 환자의 시력을 회복시켰다. 서의가 모든 병을 치료함으로써 세상의 불완전함을 메우는 것이 아니겠는가”[79]. 이러한 서술은 모두 서학동점(西學東漸)의 태도로 서의 외과술의 우수함을 묘사했고, 수술의 현장을 극적으로 그려낸 삽화는 독자의 호기심을 충족시켰을 것이다. 또한 서의에 대한 중국인의 호감과 신뢰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화보에서의 서의 묘사가 항상 사실에 근거한다고 보기 어렵다. 용의의 묘사에서도 드러나듯 화보의 서술과 표현방식은 정확성을 추구하기보다 독자의 흥미에 중점을 두거나 창작자의 의도에 영향을 받았다. 서의에 대해서도 이러한 접근 방식은 동일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술신기(醫術神奇)」는 사람과 동물간의 혈관 이식 수술을 소개하는데 당시 중국인의 서양 외과술에 대한 환상을 엿볼 수 있다. “영국의 한 의사가 혈류(血瘤)를 앓는 환자의 다리에서 혈관을 잘라내고 즉시 살아있는 양의 혈관을 잘라 환자의 다리에 이어 붙였는데 본래 있던 혈관과 다를 바가 없었다”(그림 7)[80]. 『점석재화보』의 「격치유해(格致遺骸)」에서는 “서양에서는 시신을 그대로 땅에 묻는 것은 여러모로 낭비라고 생각하여 다시 유용한 물질로 바꾸는 일이 흔하다.……중국에서는 시신을 지극한 예로 모시고 장례를 치르지만 서구에서는 시신을 다시 유용하게 재활용한다.……이러한 차이는 중국과 서구의 격치(格致)가 전혀 다른 방향이기 때문이다”(그림 8)[81]라고 전하고 있으며, 시신을 재활용하는 공장의 그림을 곁들였는데 다소 자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런 종류의 화보들은 서구에 대한 그릇된 정보가 전달된 결과이지만 당시 대중이 느꼈던 서양의학에 대한 낯설음과 이질감 내지 호기심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인다. 화보의 이러한 묘사는 당시 대중의 서구의학에 대한 상상의 산물이자 중의와의 대조를 위한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용의는 보통 의술이 밝지 못하고 실력이 없는 의사를 가리킨다. 용의는 어느 시기에나 있어왔으나, 청대 용의의 문제는 기존 시대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다. 명대부터 중국사회에는 용의와 용의 살인에 대한 비판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청대에는 의사에 대한 불신과 사회문제로 확대되었다. 청대 말기에는 근대사회로의 진입이라는 변화 속에서 용의의 문제가 일부 중의의 문제를 넘어서 중의와 중의학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는 변화가 나타났다. 명청대 중국은 의학이론이 성숙하고 지방의 의료 자원이 보급되는 발전이 있던 시기였다. 또한 의학 출판이 성행하여 의학 지식이 개방되고 보편화되었던 시기였는데, 그 결과 의사의 수가 증가했을 뿐 아니라 의사의 수준 또한 다양해졌다. 즉 의학지식과 임상경험이 부족한 용의가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중국사회의 용의의 의미는 단순히 의학 수준이 낮은 의사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용의는 경쟁이 심했던 의사 사이의 갈등이 반영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의사들은 끊임없이 용의를 비판하며 자신을 그들과 구분하여 양의나 유의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즉 용의는 의사들에 의해 구분과 배제의 표현으로 쓰였다.
용의는 환자들과 의사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개념이기도 했다. 사회에서 용의라고 매도하는 떠돌이 의사나 산파, 무속의 등은 다양한 환자의 각종 의료 수요를 만족시키는 자들이었다. 반면, 일반적으로 좋은 의사, 믿을만한 의사의 표본인 세의나 유의도 경우에 따라서 믿을 수 없는 용의로 비난 받기도 했다. 환자들이 이들의 의술을 신뢰하지 않거나 치료에 만족하지 않으면 곧 용의라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의료 현장에서의 발생하는 환자와 의사 사이의 갈등도 용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 환자는 치료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의사를 무책임한 용의라고 비난했지만, 의사의 입장에서 치료의 회피나 포기는 의료사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현명한 자기 보호의 방법이었다. 즉 의사가 생각하는 용의와 환자가 생각하는 용의는 항상 일치할 수 없었다.
용의살인의 문제도 ‘수준 낮은 의사가 저지른 의료사고’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의사의 사망 예측이 곧 훌륭한 의술로 인식되거나 인간의 수명에 대한 숙명론 때문에 의료에서 발생한 사망이 곧 용의의 문제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또한 치료의 선택권이 환자에게 있었다는 점도 의료사고의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했고 의사가 사망의 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인식은 의료사고와 관련된 법률의 적용과 의료 분쟁의 해결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법률은 의사의 과실에 대해 온건한 입장이었고 의료 분쟁은 흔히 중재와 금전 배상으로 마무리 될 뿐 의사를 직접 처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청대 말기의 매체에 등장하는 용의와 용의살인 보도에서는 이에 관련된 다양한 서사가 흐릿해지고 용의 인식이 매우 단순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용의는 무지하고 책임감 없는 중의로 획일화되어 묘사되었고, 용의살인도 환자와 의사 쌍방의 입장이 아닌 환자의 일방적인 주장만 보도되어 치료에 실패한 중의를 곧 용의로 단정했다. 반면 서의의 의술을 소개하는 기사는 호의적인 경우가 많았고 용의와 대비되는 의사의 형상은 양의(良醫)에서 서의로 대체되었다. 물론 중의계의 입장을 반영하는 매체는 이러한 서술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용의의 문제를 중의의 병폐로 인식했으나, 중의의 본질이 잘못된 것은 아니며 의학교와 의사 시험의 실시 등 중의의 개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매체의 성격에 따라 서술의 차이는 있으나 용의는 의사 개인의 타락을 넘어 중국 의학의 문제를 보여주는 상징이자 개혁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소재로서 이용되었다. 화보에는 이러한 신문의 특징과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용의에 대한 희극적이고 자극적인 이미지는 신문의 서사를 강조하고 뒷받침했다. 화보는 신문을 근거로 하지만 주제의 선택에나 표현방식에 있어서 창작자의 주관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용의보도의 경우 구체적인 의료사고의 정황보다 중의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음을 볼 수 있다. 즉 청말 매체에서 용의문제가 자주 등장했던 것은 실제 용의살인사건이 증가했다는 의미보다 사회여론에서 용의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만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용의와 용의살인의 문제는 청말 중의 개혁 및 중의시험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되는 소재이고 중의의 무능함과 병폐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문제이자 중국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사회의 개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Notes

1) 명청대에 수준이 낮은 의사 혹은 엉터리 의사를 지칭하는 용어는 용의(庸醫)외에도 열의(劣醫), 하의(下醫), 시의(時醫) 등 다양했으나, 이 논문에서는 용의를 대표로 사용하였다. 당시 법률에서 이러한 의사가 일으키는 의료사고를 가리켜 용의살인(庸醫殺人)이라고 정의했고, 현재 중국에서 쓰이는 일반적인 표현 또한 용의(庸醫)이기 때문이다.

2) 呂坤, 『呂新吾先生去偽齋文集』, 醫館劉誠菴手卷序. (『四庫全書存目叢書』, 集部161, pp.158-159)

3) (明) 沈長卿, 『沈氏弋説』 卷5, 庸醫殺人說.; 『四庫禁毀書叢刊(影印本)』 子部21 (北京: 北京出版社, 2000), pp.643-644.

4) (清)曹去晶, 『姑妄言』 第2回, 錢貴姐遭庸醫失明, 竹思寬逢老鴇得偶.; 鄭福田 主編, 『姑妄言』 (北京: 金城出版社, 2000), p.58에서 재인용. 고망언에서는 “환자가 완쾌하면 의사가 자신의 의술 덕에 살았음을 주장하며 금품을 요구하고, 환자가 죽는다면 본래 환자의 명이 짧은 것을 탓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대명률에는 비록 용의살인의 죄목이 있으나 거의 사용된 예가 없다”고 용의에 대한 불만이 사회에 만연함을 표현했다.

5) 徐渭, 『徐文長三集』 卷19, 贈餘醫師序.; 『徐渭集』, (北京: 中華書局, 1983), pp. 516-517에서 재인용.

6) 『崔氏洹詞』 卷2, 贈高生序.; 『四庫全書存目叢書(影印本)』 集部56 (濟南: 齊魯書社, 1995), p.34에서 재인용; 呂楠, 『涇野先生文集』 卷1, 贈正斎蕭君序.; 『四庫全書存目叢書(影印本)』 集部60 (1995), pp. 496-497에서 재인용.

7) 徐春甫, 『一體堂宅仁醫會錄』, 醫有名實之異.; 『古今醫統大全』下, (合肥: 安徽科學技術出版社, 1995), pp. 1194-1196.

8) (明) 沈長卿, 『沈氏弋説』 卷5, 庸醫殺人說.; 『四庫禁毀書叢刊(影印本)』 子部21 (2000), pp.643-644에서 재인용.

9) (明) 孫承恩, 『文簡集』 卷36, 良醫說.; 『景印文淵閣四庫全書(影印本)』 集部1271 (台北: 台灣商務印書館股份有限公司, 1986), p.474에서 재인용.

10) 龔廷賢, 『雲林暇筆』, 病家十要; 龔廷賢, 『萬病回春』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84), pp. 489.

11) 張景岳, 『傳忠錄』卷2, 時醫論; 病家兩要說; 張景岳, 『景岳全書』 (北京: 中國中醫藥出版社, 1996), pp.39-40.

12) 陸以湉, 『冷廬醫話』, 求醫.; 曹炳章 原輯, 『清代名醫醫話精華』 (北京: 農村讀物出版社, 2007), p.165.

13) 徐大椿, 『醫學源流論』, 涉獵醫書誤人論; 病家論.; 徐大椿 著, 劉洋校注, 『醫學源流論』 (北京: 中國中醫藥出版社, 2008), pp. 97-99.

14) 徐春甫, 『一體堂宅仁醫會錄』, 醫會條款.; 徐春甫, 『古今醫統大全』下 (1995), pp. 1189-1194.

15) 주방의(走方醫)는 본래 의료행위의 방식이고 의술의 고저와 신분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당(唐), 송(宋)대 이후로는 유의라는 개념과 집단의 등장으로 점차 신분이 낮은 의사라는 일종의 신분정체성이 되었고 신분 구분의 표준이 되었다(許三春, 2012: 40). 청대 주방의는 왕징의 연구를 참고(王靜, 2012; 2013; 2019).

16) 趙學敏, 『串雅內外騙』, 原序.; 趙學敏, 『串雅全書』 (北京: 中國中醫藥出版社, 1998), pp.5-6.

17) 陸以湉, 『冷廬醫話』, 今書.; 曹炳章 原輯, 『清代名醫醫話精華』 (北京: 農村讀物出版社, 2007), p.69.

18) 왕징(王靜)의 연구에서는 청대 사회에 주방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함과 동시에 주방의가 민간 의료자원으로서 유용한 면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청 옹정(擁正)연간 장시성(江西省)의 허(許) 씨 일가는 약재 및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법으로 개발한 고약을 타지에서 팔았다. 관(官)에서 조사한 결과 적지 않은 환자가 고약의 효험을 보았고 이들에 대한 신뢰가 높았다(王靜, 2019: 73).

19) 顧炎武, 『日知錄』 卷5, 醫師.; 顧炎武, 『日知錄校注』, (合肥: 安徽大學出版社, 2007), pp.258-259.

20) 徐大椿, 『醫學源流輪』, 名醫不可爲論.; 徐大椿 著, 劉洋校注, 『醫學源流論』 (2008),

21) 徐春甫, 『一體堂宅仁醫會錄』, 避晦疾, “斯人斯病, 醫和見之即走, 故曰晦疾當避, 其惟明醫乎!”.; 徐春甫, 『古今醫統大全』下 (1995), p1194에서 재인용.

22) 徐大椿, 『醫學源流輪』, 醫者誤人無罪論.; 徐大椿 著, 劉洋校注, 『醫學源流論』 (2008), pp.100-101.

23) 徐大椿, 『醫學源流輪』, 涉獵醫書誤人論.; 徐大椿 著, 劉洋校注, 『醫學源流論』 (2008), pp.97-98.

24) 『大明律』 卷19, 刑律二, 人名, 庸醫殺傷人.; 懷效鋒點校, 『大明律點校本』 (沈陽: 遼沈書社, 1990), pp.154-155.

25) 『大清律例』 卷26, 庸醫殺傷人, “依律收贖給付其家”,; 田濤, 鄭秦 點校, 『大清律例』 (北京: 法律出版社, 1999), p.438.

26) (清)朱軾, 『大清律集解附例』 卷19, 刑律, 人命, 庸醫殺傷人, 清雍正三年內府刻本.

27) (清) 沈家本, 『大清現行新律例』 卷24, 刑律, 人命, 庸醫殺傷人, 清宣統元年法律館鉛印.

28) (清)曹去晶, 『姑妄言』 第2回, 錢貴姐遭庸醫失明, 竹思寬逢老鴇得偶.; 鄭福田 主編, 『姑妄言』 (2000), p.58에서 재인용.

29) (清) 彭崧毓, 「罪庸醫議」,; (清) 盛康, 『皇朝經世文續編』 卷32, 戶政4, 養民, 武進盛氏思補樓刊版에서 인용.

30) 『刑幕要略』, 人命.; 官箴書集成編纂委員會編, 『官箴書集成』 第5冊, (合肥: 黃山書社, 1997), pp.15-16.; 『祥刑典』 卷144, 聽斷部雜錄.; (清)陳夢雷, 『古今圖書集成』 經濟彙編, 清雍正銅活字本.

31) 「瀆控不准」, 『申報』, 1884년 6월 1일.

32) 『祥刑典』 卷144, 聽斷部雜錄.; (清)陳夢雷, 『古今圖書集成』 經濟彙編, 清雍正銅活字本, p.9.

33) 롱웨이는 바현(巴縣)의 9건의 의송안 중 4개의 의송이 의사와 환자 상호 소송의 경우였고 모두 의사가 주동이 되어 진행되었다고 설명했다 (龍偉, 2016: 20).

34) 「庸醫殺人」, 『申報』, 1881년 1월 3일.

35) 「庸醫殺人」, 『申報』, 1886년 5월 2일.

36) 「庸醫殺人罪不容誅」, 『申報』, 1902년 8월 22일; 1902년 8월 23일; 1902년 8월 24일.

37) 「庸醫程受春重誓狡辨欲蓋彌彰」, 『申報』, 1902년 8월 26일.

38) 「杭州劉子英庸醫殺人」, 『申報』, 1902년 11월 10일; 1902년 11월 11일; 1902년 11월 13일.

39) 「中人難做」, 『申報』, 1902년 11월 25일.

40) 「有病之家不可不看」, 『大公報』, 1907년 6월 26일.

41) 「庸醫殺人」, 『字林滬報』, 1893년 11월 28일.

42) 「醫論」, 『申報』, 1872년 5월 23일.

43) 「論中西醫之異」, 『申報』, 1887년 7월 31일; (淸)薛福成 著, 鍾叔河 編, 『出使英法義比四國日記』 (長沙: 嶽麓書社, 2008), p.161; 『出使日記續刻』 卷10, 光緒二十年四月, 十二日記, 清光緒二十四年刻本.

44) 徐壽, 「醫學論」, 『格致彙編』 第1年 第2卷, 1876년 3월.

45) 「醫院治病記」, 『申報』, 1895년 8월 1일.

46) 「收場入腹」, 『點石齋畫報』 子二,; 陳平原 選編, 『點石齋畫報選』, (貴陽: 貴州教育出版社, 2014), p.216.

47) 「庸醫固執」, 『上海新報』, 1871년 2월 2일

48) 「江蘇-嚴斥庸醫作怪之督批」, 『廣益叢報』 164期, 上篇, 正事門, 記聞 (1908), pp.3-5.

49) 李嘯雲, 「論太醫院不宜改良用西醫」, 『醫學報』 第109期 pp.2-3.; 『中國近代中醫藥期刊彙編』第1輯, 第6冊, (上海: 上海辭書出版社, 2011), pp.297-299.

50) 「醫家十要」, 『醫學報』 第58期, pp.4-5,; 『中國近代中醫藥期刊彙編』 第1輯, 第4冊(2011), pp.328-330.

51) 「醫賊」, 『醫學報』 第101期, p.7,; 『中國近代中醫藥期刊彙編』 第一輯, 第6冊(2011), p.172.

52) 「原假」, 『申報』, 1881년 10월 13일; 「勾麗錄事」, 『申報』, 1886년 9월 16일.

53) 「請莫再害人」, 『申報』, 1894년 6월 14일; 1894년 7월 2일; 1894년 7월 9일; 1894년 7월 16일; 1894년 7월 23일.

54) 「原假」, 『申報』, 1881년 10월 13일 p.1; 「客述醫藥之弊」, 『申報』, 1887년 7월 26일, p.1.

55) 「庸藥誤病甚於庸醫殺人論」, 『紹興醫藥學報』 第35期卷 p.2.

56) 『竹園叢話』 第8集, 創議醫藥研究會章程, pp.139-140,; 『回族典藏全書』122 (蘭州: 甘肅文化出版社, 2008), pp.529-530.

57) 「書中西醫學淺說後」, 『字林滬報』, 1883년 11월 9일.

58) 「醫學考試輪」, 『申報』, 1886년 11월 30일.

59) 「庸醫殺人」, 『申報』, 1886년 9월 25일.

60) 「論報紀招考官醫其, 甚善宜充類行之」, 『申報』, 1896년 12월 25일.

61) 徐大椿, 『醫學源流論』, 考試醫學輪.; 徐大椿 著, 劉洋校注, 『醫學源流論』 (2008), pp.93-94.

62) 翰林院侍讀學士戚麟祥奏請鼓勵醫教折,『雍正朝漢文朱批奏折彙編』 第一冊, 江蘇古籍出版, 1989, pp.837-838. 루차이샤는 청 중기의 이러한 시도들은 청말 의사시험의 실시가 무조건 서구의 의정(醫政)을 모방한 결과는 아니며 자체의 발전맥락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路彩霞, 2010: 27-28).

63) 徐大春, 『醫學源流論』, 考試醫學輪.

64) 「論天津增設醫院並及楊州考試醫生事」, 『申報』, 1881년 11월 1일.

65) 「庸醫誤人非淺, 宜開醫學科說」, 『益聞報』, 1044期 (1891), pp.85-86.

66) 「點石齋畫報緣起」, 『點石齋畫報』 第1號, 1884년 5월 8일.

67) 「論畫報可以啟蒙」, 『申報』, 1898년 8월 29일.

68) 「庸醫殺人」, 『點石齋畫報』 第2期 (1884), p.16.

69) 艮心, 「庸醫自殺」, 『點石齋畫報』 第334期 (1893), pp.15-16.

70) 「庸醫殺人」, 『民呼日報圖畫』 卷9 (1909年 6月初), p.1.

71) 「庸醫」, 『神州日報』, 1901년 7월.

72) 「庸醫受辱」, 『輿論時事報圖畫』 第4卷, 第25期 (1909), p.2.

73) 明甫, 「庸醫受辱」, 『點石齋畫報』 第267期 (1891), pp.16-17.

74) 蟾香, 「庸醫龜鑑」, 『點石齋畫報』 第403期 (1895), p.2; 吳嘉猷, 「庸醫笑柄」, 『點石齋畫報』 第236期 (1890), pp.12-13; 「名醫受窘」, 『時事報館戊申全年畫報』 宣統元年.; 國家圖書館分館編, 『清末民初報刊圖畫集成(影印本)』 (北京: 全國圖書館文獻縮微複制中心, 2003), p.6562에서 재인용.

75) 「庸醫殺人(福州)」, 『時事報圖畫雜俎』 第156期卷 (1908), p.1.

76) 「庸醫殺人」, 『輿論時事報圖畫』 4卷 (1910年 6月初), p.3.

77) 子琳, 「收腸入腹」, 『點石齋畫報大全』 子集2 (1910), pp.4-5.

78) 明甫, 「剖服出兒」, 『點石齋畫報大全』 竹集9, (1910), pp.11-12.

79) 符節, 「瞽目複明」, 『點石齋畫報大全』 匏集1, (1910), pp.11-12.

80) 「醫術神奇」, 『輿論時事報圖畫』 第9卷, 第27期 (1909)

81) 艮心, 「格致遺骸」, 『點石齋畫報大全』 卯集12 (1910), pp.1-2; 비슷한 내용의 기사도 있다. 「格致遺骸」, 『畫圖新報』 第9卷, 第6期 (1888), pp.14-15.

그림 1.
용의살인(庸醫殺人)
Figure 1. Murder Case by Quack
kjmh-28-1-191f1.jpg
그림 2.
용의(庸醫)
Figure 2. Quack
kjmh-28-1-191f2.jpg
그림 3.
용의가 모욕을 당하다(庸醫受辱)
Insulted Quack
kjmh-28-1-191f3.jpg
그림 4.
용의가 모욕을 당하다(庸醫受辱)
Insulted Quack
kjmh-28-1-191f4.jpg
그림 5.
용의살인(庸醫殺人)
Murder Case by Quack
kjmh-28-1-191f5.jpg
그림 6.
용의살인(庸醫殺人)
Murder Case by Quack
kjmh-28-1-191f6.jpg
그림 7.
의술신기(醫術神奇)
Marvelous surgery
kjmh-28-1-191f7.jpg
그림 8.
격치유해(格致遺骸)
Scientific recycling of Corpse
kjmh-28-1-191f8.jpg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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