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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6(3); 2017 > Article
연길 소영자 출토 유물로 본 동아시아 침구류(針具類)의 기원*

Abstract

This article discusses the development of early acupuncture needles as demonstrated by the artifacts excavated from the Northern part of the Yanji district, Jilin, Chin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reported in 1941). Numerous bone needles, stone needles, and other medical devices were found in the Xiaoyingzi excavation. The stone needles from Xiaoyingzi can be categorized into three grades, based on length, of 8cm, 12-15cm, and 18cm. A set of round stones for massage were also discovered, along with obsidian blades. These relics were carefully stored in the middle of the body in the stone coffin. In addition to Xiaoyingzi, stone needles were also excavated along the lower valley region of the Tuman (Tumen, 豆滿) River. These facts indicate that the owner was involved in medical practice, and that medical procedures using stone needles were quite popular at the time. This article carefully investigates that the relics have nothing to do with weaving textile or military use. Current research on the origin of acupuncture has been confined either to stone needles from the prehistoric age or to bronze needles, as well as to literature from the Warring States period to the Han China, during which acupuncture technology was considerably expanded. However, substantial knowledge on the “gap” between stone needles and metal needles has been procured through the analysis of Xiaoyingzi, Yanji. The findings of Xiaoyingzi are also significant in providing a more detailed reconstruction of the development of acupuncture in East Asia and emergence of acupuncture throughout history.
A large amount of medical items (stone and bone needles, cases for needles, massage stone type bianshi, and etc.), have been excavated from Xiaoyingzi and other neighbouring sites, Along with geographic and ecological factors, this archeological data strongly suggests the medical tradition of using acupuncture needles was practiced around Tumen River basin in the Bronze Age (10th century B.C.).

1. 머리말

실제 문헌으로 의료행위가 기록되는 시기는 동아시아의 경우 대체로 중국 기준으로 한나라(B.C. 206-A.D. 220) 이후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선사시대의 의료행위에 대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적 자료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인골에 남아있는 의료행위 또는 수술도구로 의료행위를 분석하는 연구는 이웃 중국은 물론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도 최근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의료용으로 사용된 도구의 기원이나 두개골에 나타난 외과수술의 흔적을 비교하는 연구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사실 의료행위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고고학 자료에도 의학사적인 의의가 있는 유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경우 고고학 자료를 분석하여 의학사의 발전과 적극적으로 비교한 연구는 거의 없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선사시대 침구류(針具類)[1]의 발달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예로 현재 중국의 연길(延吉) 지역 소영자(小營子)유적의 출토품을 살펴 보고자한다. 이 유적은 일제 강점기인 1940년에 경성제대에서 조사한 한반도 동북지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석관묘로 고고학과 고대사학계의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다만, 소영자유적은 일제강점기 때라는 시대적인 한계로 단편적으로 소개된 기존의 보고서(藤田亮策, 1941) 이외에는 기타 연구서(三上次男, 1961: 438-43, 464-5)에서 언급되는 정도였다. 발굴 당시부터 소영자유적에서는 유례가 없게 많은 석침과 골침들이 발견되었지만, 이것들은 화살촉 또는 직조와 관련된 바늘로 막연하게 분류되었을 뿐 그 기능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대부분의 소영자유적 출토의 침구류는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피장자의 배 위에 소중하게 놓여 있는 등 여타 화살촉이나 직조용 바늘과는 다른 귀중한 소지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 연변 일대의 새로운 석관묘 자료들의 조사 결과(강인욱 외 2009: 54-83) 중국의 왕청(汪淸)지역의 금성고분과 백초구유적, 도문(圖們)지역의 하가유적 등 여러 두만강 유역 청동기시대의 석관묘 유적에서 골침과 석침의 부장은 상당히 보편적인 상황임 밝혀지고 있어서 한반도 동북지역 두만강 유역에서 의료용 침구류의 발달을 추정할 단서가 되고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한반도 동북지역, 지금의 연변 일대의 선사시대 골침과 석침에 대해서 의학계에서도 일찍이 주목한 바가 있다. 다만 함경북도 웅기 송평동유적의 석침과 골침의 존재를 언급하고, 고조선 이래의 전통이 유입된 것으로 보는 등, 단편적인 연구가 제시된 바 있다(김두종, 1981: 27; 이정록, 2007: 33-4). 하지만 그것마저 고고학적인 분석을 거치지 않은 채 유물 자체의 형태만으로 추정한 것이어서 그 이상의 논의는 진행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되어 서울대학교에 60년 넘게 소장되어 있던 연길 소영자유물은 최근 강인욱에 의해 재정리 되었다(강인욱 등, 2009). 새로운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출토 유물을 재정리하는 과정에서 석재와 골재로 된 다량의 침과 침통 물론, 의료용으로 추정할 수 있는 둥근 돌도 확인했다. 이에 본문에서는 소영자 출토 유물의 의료기구로서의 가능성을 다각도로 논증하기 위하여, 의학사적 관점에서 침의 유래와 함께 소영자 출토 유물의 의료도구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한다.

2. 고고학 자료로 본 침구류의 이해

동아시아 의학사는 신석기시대에 석침을 사용했을 것이며, 기원전 600년경 부터는 철제 침이 등장했을 것으로 본다(Lu and Needam 1980: 69-74). 또한,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3세기)에 중국 북방 일대에서 발견되는 청동침을 침구류와 연결시키기도 하며(伍秋鵬, 2014: 113-7), 1985년 중국 광서성 무명(武鳴)에서 춘추시대로 추정되는 청동침이 발견되기도 했다(李經緯 등, 2000: 55). 침구의 기원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침시술의 도구에 주목하기 보다는 『황제내경(黃帝內經)』과 만성한묘(滿城漢墓) 및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 출토의학서 등에 근거하여 침법을 사용한 치료기술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주로 다루고 있다(黃龍祥, 2014: 30-240; 야마다 게이지, 2016: 19-123; 李經緯, 2000: 28-9; 맹웅재 등; 2006: 27-8; Smith et al., 2004: 8). 이 연구들은 주로 침법이 골침이나 폄석 등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하는데 그치고, 주로 중국의 전국시대와 한나라초기에 경락학설의 형성과 함께 침법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고고학과 연결된 연구로서는 중국학계에서 청동기시대에 널리 출토되는 동침을 금속침의 기원으로 보거나(伍秋鹏, 2014: 113-7), 내몽골 신석기시대 두도와(頭道洼)유적의 석침을 침의 기원으로 본다는 견해가 누차에 걸쳐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다(育峰 等, 1993: 17-22). 그러나 정작 두도와 유적은 정식 보고가 되지 않았다. 또 다른 침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프스 산맥에서 발견된 기원전 3천 년경 외찌인(Ötzi)의 문신을 침 시술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데(Moser et al., 1999: 16-7), 문신의 흔적만으로 침 시술의 기원을 보는 것에 대한 반발 또한 적지 않다(Grant, 2005).
즉, 현재의 학계에서 인정되는 침의 기원에 관한 내용은 선사시대 이래로 침의 기원으로 추정되는 폄석의 사용 단계, 그리고 문헌사료 및 실제 의료기구가 분명한 금속침이 등장한 한나라 때 이후로 나뉜다. 이 분야의 연구의 대표자인 야마다 게이지는 침구류의 근원으로 추정되는 폄석과 한나라 이후 즉 침구학에서 경락학설이 형성된 이후의 침구와는 다른 맥락 속에 접근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야마다 게이지, 2016: 27). 경락학설 이전의 침구류의 용도에 대해서는 문헌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아직 명확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문헌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그 이전의 단서들은 결국 고고학적 증거에 기댈 수밖에 없다. 현재 다양한 유적과 유물을 통해 새로운 자료가 증가하는 고고학 연구의 추세를 볼 때 동아시아에서의 침구류의 발달을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고고학 자료를 통하여 침구류의 발달 및 침구학설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로 기타 의료 도구, 의료시술 장면을 묘사한 벽화 및 인형 등 의료 행위와 관련된 자료가 같이 발견된 경우이다. 이 경우는 주로 한대 이후의 여러 자료에서 등장한다. 하북성 만성한묘의 금은제 침, 돈황문헌 속의 ‘구법도(灸法圖)’와 산동성 미산현(微山县) 양성산(两城山) 무덤에서 발견된 화상석에 새겨진 소위 ‘편작행의도(扁鵲行醫圖)’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양성산유적의 편작행의도에는 새의 몸을 한 의사가 침을 놓는 장면이 새겨져있는 데, 이 시기에 이미 의사라는 직업이 신성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인골 또는 미라에 시술의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이다. 대부분의 침술은 뼈 조직까지 뚫지 않기 때문에 인골에 흔적을 남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피부조직이 잘 남아있는 경우는 예외적으로 침술의 흔적이 남기도 한다. 예컨대, 러시아 알타이의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대형 고분인 파지릭유적에서 발굴된 미라의 허리 부분에 남겨진 점 모양의 타투를 침술과 연관짓는 학자도 있다 .
세 번째로는 실제 찌르개 또는 바늘과 같이 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을 경우이다. 신석기시대 이래로 석기 또는 골기 중에서 주로 찌르개 종류를 중심으로 고대의 의료 도구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외에도 석핵, 긁개, 뚜르개 등을 폄석으로 연결하기도 한다(馬繼興 등, 1978: 80-2). 침은 대체로 폄석에서 발달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선사시대 이래 다양하게 발견되는 침 종류의 유물 중에는 실제 침으로 사용된 것도 포함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선사시대의 침은 주로 골침과 석침이며 가끔 도침(陶鍼)도 발견된다. 이런 침과 같은 찌르개는 고고학 발굴 보고서류에서는 대체로 석촉류와 바늘류로 분류된다. 즉, 한쪽 끝에 길다란 대를 끼울 수 있게 된 유물은 석촉류로 분류되며, 뒤쪽이 뾰족한 경우는 바늘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추정한다. 바늘은 한쪽 끝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실을 꿰매는 용도로 사용된다. 하지만 바늘코에 구멍이 없거나 가죽을 뚫기에는 너무 가늘게 만들어져서 실제 바늘로 사용되기 어려운 예도 많다. 유물의 용도는 그와 함께 발견되는 유물과 무덤 또는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의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바늘로 사용된 유물이라면 주변에 방추차와 같은 의복 관련 유물과 같이 출토된다. 또한, 선사시대에 대체로 의복과 관련된 노동은 여성이 담당했기 때문에 여성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가 된다. 반면에 의복 제작을 위한 바늘로 사용하기 어려운 형태(바늘코나 구멍이 없는 경우) 및 손에 쥐고 찌르기 편하게 만들어진 경우(즉, 몸통부분이 납작하게 되어 있는 경우) 등이 있다. 대표적으로 카자흐스탄의 동석기시대 주거유적인 토크산바이(токсанбай)에서 손에 쥐고 쓰기 편하지만, 바늘 코가 없는 골침 류가 대량으로 출토된 바 있다(Самашев и др., 2007: 125). 또한, 발견되는 정황이 복식 관련 유물과 관련 없이 별도로 침통에 담겨서 발견된다면 이는 의료용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유물 자체의 형태에 따른 분류, 출토 정황의 분석 등을 거쳐서 유물이 발견된 유적의 특수한 지리적 환경 등을 고려하여 의료기구로서의 침구류의 사용을 추정할 수 있다.

3. 연길 소영자 출토 유물 검토

1) 유적 개황

소영자유적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시 북쪽의 성자산 서쪽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자락에 위치한 석관묘 유적이다. 1927년에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면서 이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파괴가 된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후 당시 경성제대 교수였던 후지다 료사쿠의 주도로 1938년 7월 2일-18일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藤田亮策, 1941: 5-12). 여기에서는 석판으로 무덤을 만든 청동기시대의 석관묘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그 중 파괴가 덜한 A구역의 석관묘 52기가 조사되었으며, 실질적인 무덤의 중심구역인 B, C구역은 이미 파괴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적어도 2-300여개의 무덤이 파괴된 것으로 보아서 실제 엄청난 규모의 무덤 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三上次男, 1961). 소영자무덤은 30-40도에 이르는 가파른 급사면에 밀집해서 분포한다. 남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는 지형에 대략 동서방향으로 무덤을 설치했는데, 석회암으로 만든 판석을 깔고, 크고 작은 판석을 사방에 세워 만든 장방형의 석관묘로 무덤을 만들었다. 석관 위의 봉토와 괴석 높이는 1m 정도이다. 무덤 바닥에서부터의 높이는 1.5m 정도이며 얕은 것은 80cm 정도이다.
A구역의 석관묘에서는 52기가 발견되었는데, 한 석관 내에 수기의 인골이 있는 것도 발견되었으며 지표에서 수습한 파괴된 인골도 약간 있다. 모두 100여기의 인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부장품 중 토기는 머리 쪽이나 다리 쪽에 놓이며 팔찌는 팔 쪽에, 경식은 목이나 가슴 부위에 놓인다. 기타 유물은 대부분 다리 사이나 오른쪽 어깨에 모아진 형태로 발견된다. 이 소영자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주요한 유물이 대부분 침 종류라는 점이다. 시신의 무릎 근처에 수십 개의 석침과 골침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예는 두만강 유역의 석관묘 유적에서만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소영자유적의 연대에 대해서는 최근에 요동과 연변 일대에서 발견된 석관묘 고증자료를 통해서 기원전 11-9세기정도로 추정한다(강인욱 등, 2009: 14-5).

2) 침구류 관련유물

(1) 석침

소영자유적 출토의 석침은 슴베가 있고 촉의 몸통이 긴 석촉들이다. 석침은 석촉, 몸통, 받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잘 다듬어져있다. 석재는 암회색의 점판암 계통으로 아주 무른 편이며, 석촉의 끝에는 사용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또 다른 석촉은 슴베가 있고, 선단부와 긴 봉부의 신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유물은 화살촉과 달리 촉을 실제로 화살대에 부착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몸통부분이 납작하게 되어서 손으로 쥐고 무언가를 하도록 편리하게 되어 있다. 완형을 기준으로 할 때에 18cm 내외(유물번호 1107)와 15-12cm(유물번호 1106), 8cm 내외(유물번호 1106) 등 3등급으로 나뉜다.

(2) 골침

연길 소영자유적에서는 다양한 골각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서 의료도구로 주목되는 유물은 골제 송곳, 침통, 바늘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 박물관에는 골제 송곳 14점, 골제 바늘통 4점이 보관되어 있다. 바늘통의 크기는 13-10cm(잔존기준)이며, 그 안에 들어있는 침의 크기는 완형기준 7-8cm내이이다. 골제 송곳은 포유동물의 사지골, 특히 사슴의 중수골 또는 중족골을 세로로 잘라 제작하였으며, 바늘통의 경우 속이 빈 기러기목 조류 사지골의 자연적인 상태를 활용한 것이다. 이 중에 바늘귀가 있는 것은 1점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바늘귀가 없어서 실제 바늘로 사용되기 어려운 것이다.

3) 침구류 관련유물의 출토 상황

고고학 발굴에서 유물과 함께 실제 기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무덤에서의 출토 상황이다. 즉, 비슷한 형태의 유물이라고 해도 출토 위치 및 매장된 인물의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영자유적은 비록 일제강점기에 급하게 발굴되어서 사진 및 도면 등의 자료가 미비하지만 보고서의 설명을 참조하면 기본적인 정황을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47개의 무덤에서 토기와 생활용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유물은 침구류에 해당된다. 또한 남녀 모두에게서 침구 또는 바늘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도구들이 무릎 사이에서 주로 발견되었으며, 바구니 같은 것에 담겨서 무덤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무덤 2기를 살펴보자. 먼저 A16b 무덤은 두 개의 무덤을 아래위로 이어서 만든 것인데, 그 중심인 피장자의 하단에 있는 석관에서 발견되었다. 출토 상황으로 볼 때 시신의 손을 모으고 배 위에 골제 비녀 및 침통을 넣은 바구니를 두었던 것 같다. 아랫배 쪽에 조심스럽게 놓인 부장품은 시신의 부식과 함께 자연스럽게 대퇴골 부위 양다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시신 부근에 토기 및 기타 유물이 있었다. 골제 침통 안의 바늘은 소실되었으며, 골검과 송곳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남자로 추정된다. A23호에서도 모두 4기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가장 하단부에 묻힌 인골의 양다리에서 발견되었다. 침통 1점, 송곳 1점, 골검 2점 등과 함께 마제석촉 88점이 발견되었다. 석촉의 길이는 6.5cm에서 18.3cm에 이르며, 가늘고 긴 동일 계통의 석질인 점판암계이다. 골제 송곳의 경우를 보면 그 끝은 뾰족하게 되어있고 다른 쪽은 사슴 뼈의 원형을 살려서 엄지로 누르기 좋게 되어 있다.
A25호b의 성인 남성 무덤에서는 골제 비녀 1점, 타제돌날 12점, 석촉 1점, 골침 20점 등이 발견되었다. 골침의 길이는 7cm 정도이며 침통은 결실된 채 다발로 발견되었으며, 흑녹색으로 연마된 편평하며 동그란 돌이 같이 발견되었다.
소영자유적에서 침구류 관련유물의 특징은 첫 번째로 전반적으로 골침, 석침이 매우 중요한 유물로 등장한다는 점, 두 번째로 시신의 다리 쪽에서 다른 유물들과 같이 발견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골침의 경우에는 직조용으로 쓰였을 가능성, 그리고 석침의 경우는 무기나 그와 유사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늘 우선된다. 그러나 소영자유적의 출토 정황은 무기나 직 조용도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28호 묘의 경우 88점, 42호 무덤은 34점 등 상당히 많은 양의 석침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이 만약 석촉이나 석창으로 사용되었다면, 그 주변에는 유기물로 만든 대의 흔적이 붙어있다. 그리고 매장 당시에는 길다란 크기이기 때문에 무덤 안에서도 시신의 옆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소영자유적의 석침은 다른 물건들과 함께 바구니 같은 것에 담겨서 시신의 대퇴골 사이에 묻혔다. 즉, 석침의 크기와 길이가 무기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석촉이나 석창의 용도로 쓰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엄청난 양의 골침과 석침이 출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의 직조 관련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직조도구인 방추차의 출토 예는 매우 많지만, 전체 소영자유적에서 방추차로 추정되는 유물은 모두 4점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반면에 골침의 경우 일제강점기 발굴을 직접 담당했던 후지와라 료사쿠의 보고서에는 한 무덤에서만 수백 점씩 발견된다고 기술하고 있다(藤田亮策, 1941: 51-72). 이 정황 또한 소영자유적의 골침의 용도가 단순히 직조도구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세 번째로 골침, 석침과 함께 발굴되는 둥근 돌의 존재이다. 우연히 무덤에 관계없는 돌이 유입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소영자의 경우(그림 5의 16호 묘 참고) 침구류와 함께 둥근 돌이 규칙적으로 발견된다는 점은 이 둥근 돌이 실제 당시에도 중요한 기능을 했음을 의미한다. 중국 장사(長沙) 사하마(沙下麻) 지역의 전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원형의 연마석이 그 좋은 예이다(그림 8). 6cm 정도인 사하마 출토 둥근 돌의 크기 및 한 쪽이 연마된 형태 등이 소영자유적의 둥근 돌과 유사하다(그림 7). 중국의학사에서는 이것을 ‘위석(熨石)’ 또는 ‘안마석(按摩石)’이라하며 불에 달구어 국부에 온열자극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李經緯 等, 2000: 29; 張入文, 2014: 750). 중국의 섬서성 주원박물관(周原博物館)에 춘추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위석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고(그림 9) 마왕퇴한묘에서 출토된 『오십이병방(五十二病方)』에서는 ‘작은 타원형의 돌[小楕石]을 불에 달군 다음 식초에 담금질한 뒤에 찜질한다’라고 되어있다(裘锡圭, 2014: 261). 선사시대의 이러한 둥근 돌을 이용한 온열요법은 쑥뜸법이 보편화된 이후에 자취를 감추었다.
이상의 침구류와 관련된 소영자 출토 유물을 일괄한 결과 크기에 따라서 대형(골제 송곳) 및 중형 골침, 바늘형 골침 등으로 세분된다. 또한 석침의 경우 길이 18cm내외와 15-12cm, 8cm 내외 등 3등급으로 나뉜다. 그 외에도 침통과 환부를 문지르는 둥근 돌 등을 포함한다면 다양한 규격의 침구류가 조합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연길 소영자유적은 근처인 백두산 일대가 흑요석 산지로 다양한 흑요석제의 돌날, 석창, 톱 등도 발견되었다. 이 흑요석은 고대부터 두개골 천공술을 비롯한 다양한 수술의 기구로 사용되었음을 감안하면(Velasco-Suarez et al., 1992: 313) 소영자 출토의 흑요석 또한 의료기구로서의 가능성도 크다고 본다. 다만, 흑요석의 경우는 본고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바, 별고로 살펴보겠다.

4) 소영자 주변 두만강 일대의 유사유적

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영자유적의 침구류는 의료도구로 일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은 침구류는 소영자유적처럼 체계적이며 대량으로 출토되지는 않지만 나진 초도, 왕청 백초구, 훈춘 신흥동, 신룡 등 두만강 유역의 비슷한 시기의 석관묘 유적에서 다수 발견된다(戴應新 1983: 180-6; 朴龍淵, 1993: 5-11; 王亞洲, 1961: 215-36; 侯莉閩, 1994: 2-14; 黑龍江省文物考古工作隊, 1981: 481-91).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석관묘 문화는 기본적으로 요동지역에서 유입되었다. 하지만 요동지역의 석관묘에서는 비슷한 유물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석관묘 외에 주거지에서도 발굴된 사례가 있는데 소영자유적과 같은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유적에서 발굴된 바늘코가 없는 바늘 유물들이 대표적이다(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1: 281). 이 경우도 의료도구의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으나, 무덤과 달리 주거지 출토의 경우 출토 위치나 맥락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추정은 어렵다.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점은 두만강 일대의 소영자유적과 비슷한 시기의 청동기시대 무덤과 주거지 유적에는 침구류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공통적으로 발굴된다는 점이다. 이는 소영자유적에서 확인되는 침구류를 이용한 의료문화가 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골침의 경우 신석기시대부터 널리 사용되는 유물이기도 하며,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해안가의 패총을 중심으로 널리 발견된다(한강문화재연구원 편, 2014: 108). 하지만 생활 층에서 작살, 낚시바늘 등의 어로도구와 같이 발견되기 때문에 어로구의 일부로 추정된다. 또한 무덤에서 소중하게 부장되는 경우도 없다는 점과 수천 년의 연대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두만강 유역의 침구류 전통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
따라서 소영자유적의 출토품, 그리고 주변지역에서 유사한 침구류 유물의 발견은 기원전 10세기 전후한 시기에 형성된 두만강 유역 청동기시대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된 침구 중심의 의료전통을 시사하고 있으며, 그 선례를 주변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선사시대 침구류 전통이 일찍부터 시작된 지역 중 하나로 가정할 수 있다.

4. 연길 소영자 유물을 통해 본 침의 기원에 대한 논의

1) 침구류의 기원학설과 소영자 침구유물

소영자유적에서 발굴된 침구류 유물이 주는 의의에 대한 평가는 매우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그 유물이 가지는 의의는 매우 크다. 상당부분은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침구학의 전통을 청동기시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가능성이 구체적인 물적 자료를 통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소영자유적에서 나온 골침, 석침이 기존의 동아시아의학의 고대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기존의 통설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기존 연구들은 동아시아 의학이 문명의 발원지였던 황하 유역에서 시작되었다고 가정하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국문명에서 출발점을 찾고 있다. 침구의 기원에 대해서 조셉 니덤 등은 『좌전(左傳)』의 「성공십년(成公十年)」 (B.C. 581)에 주목했다(Lu and Needam, 1980: 69-74). “공격해도 안되고 달하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며 약도 듣지 않는다 (攻之不可 達之不及 藥不至焉)”라고 한 문장에서 “달하려 해도 안된다(達之不及)”는 의미를 침술의 의미로 해석했다. 이 문장에 대해서 서진시대 두예(杜預, 222-284)가 “달은 침을 말한다“라고 주석을 달았다(야마다 게이지, 2016: 22). 그리고 이경위 등은 『좌전』의 「양공이십삼년(襄公二十三年)」(B.C. 550)에서 말한 “맛있는 음식을 즐겨하는 것은 악석만 못하다(美疢不如惡石)”라는 문장에 주목하였는데, 이 문장에서 후한 말엽의 복건(服虔)은 “석(石)은 폄석(砭石)을 말한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즉 기원전 581년과 550년의 기록에서 보이는 ‘달(達)’, ‘석(石)’은 폄석치료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이후에 잠석(箴石), 잠(箴), 침(鍼)으로 변해왔다고 주장했다(李經緯, 2000: 28-9, 야마다 게이지 2016: 29). 침의 근원에 대한 문헌기록을 찾기 위해 금속재료를 암시하는 ‘침’이라는 용어 이전의 ‘석’이라는 용어를 가까운 시대에 주석가들의 표현에 근거하여 폄석의 약어라고 주장하면서 현대의 침구술의 초기 형태로 추정한 것이다. 이어서 『황제내경』의 「이법방의론」은 폄석과 약물치료[毒藥], 구법[灸焫], 침법[九鍼], 안마술[導引按蹻]이 각각 동방, 서방, 북방, 남방, 중앙에서 기원했다고 중국의학 치료기술의 원류를 설명한다(石田秀實, 1987: 577-591). 다음은 『좌전』의 ‘폄석’과 그로부터 진화했다고 하는 ‘구침’에 대한 내용이다.
  • 황제가 물었다.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데 병은 같은데 치료법은 각기 다르다. 그런데도 모두 치료가 된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기백이 말하기를 땅의 기세 때문입니다. 동방은 천지가 생겨나는 곳으로 물고기와 소금이 나는 곳입니다. 해안가에서 물을 끼고 있으며 백성들은 물고기와 소금을 즐겨먹습니다. 한곳에 정착하고 살며 음식을 즐겨하는 편인데, 물고기는 대체로 몸속에 열이 나게 하고 염분은 피에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은 피부가 검고 거칠고 몸에 종기가 많습니다. 치료는 폄석으로 하는 것이 마땅한데 폄석의 치료는 동방에서 유래한 것입니다(石田秀實, 1987: 577-81)[2].

  • 남방은 천지가 길러지는 곳으로 양기가 극성한 곳입니다. 땅은 낮고 무르며 안개와 이슬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곳의 백성들은 신맛의 음식을 즐겨하고 짐승의 내장을 먹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의 피부는 치밀하며 붉은 색입니다. 마비나 저리는 병이 많고 치료는 마땅히 미침으로 합니다. 그래서 구침의 유래는 남방에서 유래한 것입니다(石田秀實, 1987: 586-8)[3].

침법의 기원에 대해서는 석기시대의 폄석을 막연하게 기원지로 삼고 있고(馬繼興 등, 1978: 80-82), 『좌전』에서 의학적인 맥락 속에서 ‘석’이라고 표현되는 내용, 그리고 고대의 사가들의 주석 및 「이법방의론」의 폄석의 내용까지 일련의 과정들이 있다. 이경위는 폄석이 후대에 재질의 변화를 거쳐서 폄석(砭石) → 잠석(箴石) → 잠(箴) → 침(鍼)의 순서로 발달했다고 하였지만 (李經緯, 2000: 28), 야마다 게이지는 폄석이 침법의 기원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폄석치료와 침치료는 다른 계통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야마다 게이지, 2016: 27-57). 폄석에 대해 당나라 때의 왕빙(王冰)은 「이법방의론」에 주석을 달면서 “여기에 나오는 폄(砭)은 돌로 만든 침이며, 『산해경(山海經)』의 「동산경(東山經)」에 나오는 고씨산(高氏之山)에서 옥(玉)과 잠석(箴石)이 많이 나온다”라는 문장을 인용하여, 폄석은 “그러한 돌로 만든 침”이라고 설명했다. 곽박(郭璞)은 『산해경』에 주를 달면서 “이것은 옹종을 치료할 때 쓰는 것이다(砥鍼 治癰腫者)”라고 했다(石田秀實, 1987: 580). 『황제내경』의 저작 시기는 여러 주장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략적으로 전국시대 이전으로까지 올라가지 않는다(龍伯堅, 1988: 28-45).
폄석은 마계흥(馬繼興)의 연구나(그림 10), 『중국의학통사(中國醫學通史)』 도보(그림 5)를 볼 때,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정교함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 쪽이 뾰족한 손도끼 형태의 도구에서 시작하여, 피부를 가르고 종기를 쨀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금속제 침의 모양과는 구분된다.
한편 「이법방의론」에 나오는 구침은 9가지의 침의 종류를 말한다. 뾰족하거나 가늘거나 하는 등의 다양한 외과술에 사용했을 법한 침구도구들을 모아 둔 것인데, 『황제내경』의 「구침십이원(九鍼十二原)」에 구침에 대해서 형상과 효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황제내경』의 특성상 「이법방의론」과 「구침십이원」의 저술시기가 일치하고 같은 구침을 설명하고 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대체로 구침은 여러 종류의 침도구였을 거라는 것은 일치된 의견이다.
폄석과 침법이 다른 계통이라고 주장하는 야마다 게이지는 「구침십이원」의 구침의 종류에서 참침이 폄석의 형태를 피침은 폄석의 용도를 계승했다고 했다(야마다 게이지, 2016: 36). 즉 구침은 종기를 째는 것에서 시작하여 고름을 빼내는 것, 특정부위를 눌러서 자극한 것, 또는 찔러서 자극하는 것, 찔러서 피를 빼내는 용도로 개발된 의료용 소도구들이다. 한편 1984년 내몽고 포두(包頭)시 아선(阿善)유적에서 발굴된 골침을 『중국의학통사』 도보에서는 의료용 침도구로 소개했다(그림 12). 소영자유적의 골침과 매우 흡사한 형태이지만, 이 출토물은 현장에서 확인해본 결과(그림 13) 바늘귀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직조용으로 봐야한다. 아선유적을 발굴한 보고서에서도 골침이라고만 하였고 의료용 직조용이라고 세밀하게 고증하지는 않았다(包頭市文物管理所 等, 1984: 103).

2) 소영자 출토 골침과 석침의 용도에 대한 고찰

소영자에서 출토된 골침과 석침은 형태상으로 전형적인 폄석과 다르고, 재질상으로 구침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침에서 말하는 원리침이나 호침의 원시적인 형태라고 해야 타당할 것이나, 이를 방증할 만한 문헌사료 및 연구결과는 아직 미흡하다. 침법의 기원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침구를 이용한 의료행위가 경락학설 같은 침구학설과 결부되면서 체계화되는 시점의 이야기에서부터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중국의 호남성 장사지역 마왕퇴(馬王堆)와 호북성 장가산(長家山)의 전한시대 무덤에서 초기 형태의 경락에 관한 문헌이 출토되고, 중국의 하북지역 만성한묘에서 금제와 은제의 침이 발견되면서부터인데(伍秋鵬, 2014: 113; 張立劍 등, 2011: 343), 이 시기의 고고학적 발견과 함께 『황제내경』이 편찬되기 때문에 침술이 중국에서 본격적으로체계화되었다고 했다(야마다 게이지, 2016: 23, 41-57). 소영자유적의 골침과 석침은 후대 금속침 형태와 유사하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경락학설을 이용한 침법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치료를 포함하여 종기를 째는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했다고 보기에는 발굴된 유물의 형태가 매우 일관된다. 그리고 두만강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다량으로 발굴되었다는 것은 종기를 째는 것이 아닌 아픈 부위이거나 특정부위를 찌르는 용도로 특화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관된 형태의 의료도구가 그 지역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다량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무덤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석침 골침의 치료가 단순한 우연이나 일부에서 사용하던 기술이 아닌 나름의 의학문화 또는 지식체계에 기반하여 폭넓게 그리고 상당기간 오래 동안 이루어진 석침 골침의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지식체계가 어떤 체계였는가에 대해서 현재 연구된 바는 없으나 동아시아 가장 오래된 문헌인 마왕퇴한묘의 『오십이병방』에 폄석을 이용한 다음과 같은 사례가 등장한다.
  • 퇴증에는 먼저 고환을 들어 올리고 고환피부를 아래로 끌어당기고 폄석으로 그 옆쪽을 뚫어 고름을 빼낸 다음 술을 발라주고, 폄석상흔에 뜸을 떠준다. 바람이 들지 않도록 해준다면 쉽게 낫는다. 태음과 태양에 뜸을 떠준다(裘錫圭, 2014: 257)[5].

고환이 부었을 때 고환을 들어 올리고 그 아래 피부를 폄석으로 뚫어서 고름을 빼내고 술로 씻어주고 그 상처에 뜸을 뜬다고 했다. 그 폄석이 어떤 형태인지는 명시되어있지는 않지만, 시술자가 고환의 피부를 뚫어서 고름을 빼낼 수 있는 정도의 아주 짧지도 그리고 아주 길지도 않은 형태의 시술도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국의학통사』에서 소개한 뭉툭한 형태의 폄석(그림 11)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치료기술이며, 소영자유적에서 발굴된 골침의 용도가 거의 여기에 해당한다. 『오십이병방』의 이 치료방법은 경락학설과 같은 침구이론에 기반하지 않은 순수 경험에 의한 골침 석침의 활용사례이다. 위와 같은 한 건의 사례만으로 소영자유적에서 보여주고 있는 골침 석침의 의료의 지식체계를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52종만 수록된 처방서에 기록될 정도의 당시 매우 유용했던 기술의 도구가 소영자유적에서 다수 발견되었다는 점은 이 도구를 활용해서 다양한 병증을 치료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만 추정한다.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문화에서 침술의 흔적은 러시아 알타이 고원지역에서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대형 고분인 파지릭유적에서 발굴된 미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산악 유목민족의 족장인 이 고분의 주인공은 영구동결지대에 매장된 덕택에 피부조직이 잘 남아있는 미라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미라의 몸에는 다양한 문신이 새겨져있는데, 특히 요부의 하단부에 점처럼 찍힌 문신이 확인되었다. 유목민들은 장기간 말을 타는 풍습 때문에 관절 및 요추에 많은 질환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러시아 학자는 이 요추의 점처럼 찍힌 문신을 침술과 비슷한 효과를 보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폴로스막, 2016: 328-49). 동아시아에서는 이것을 ‘아시혈(阿是穴)’이라고 하여 아픈 부위에 직접 침을 놓는 형태로, 개념적으로는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현대까지도 남아있는 중요한 침구시술기법에 해당한다(楊維傑, 2007: 412-7).
한편 소영자유적의 침구유물은 대부분 석관묘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매우 가늘고 날카로우며 침통에 담겨져서 소중히 보관되었다. 게다가 다른 의복관련 유물(방추차 등)과는 달리 무덤 주인공의 아랫배 쪽에 소중히 놓여있었다. 직조용도 아니며, 군사용은 더더욱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에 같이 발굴되는 안마석과 함께 의료용이었을 가능성을 매우 높게 가정하고 있다. 석관묘에 매장될 만한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남성이 부장품의 대부분이 의료용 도구였다는 점은 군주, 제사장, 의료인의 직분이 원래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던 시대에서 점차 분화되어가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3) 소영자유적 일대의 생활풍습과 침구의 새로운 동방기원설에 대한 가설

소영자유적에서 청동기시대에 의료도구로서의 침구류가 발견된 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고고학적 발굴사례에 비해서 매우 이른 시기이다. 「이법방의론」에서 폄석의 기원을 동방이라고 하였고, 이것을 침구의 기원이라고 보는 학설에 근거하여 본다면, 본고에서 고찰하는 소영자, 즉 두만강 일대가 「이법방의론」에서 말하는 동방이 아닐까 추정해 볼 여지는 있으나, 현재까지 연구된 것에 근거하자면 그 가능성은 매우 낮다. 우선은 야마다 게이지 동방의 폄석과 남방의 구침은 다른 계열이라는 주장을 반박해야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함께, 중국의학서인 『황제내경』에서 말한 동방이 과연 두만강 유역까지를 의미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고증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소영자유적에서 출토된 골침 석침류는 「구침십이원」에서 말하는 호침 원리침의 형태와 비교적 가까운 편이고, 소영자유적의 골침 석침을 이용한 가장 가능성있는 치료기록이라고 보여지는 마왕퇴한묘 『오십이병방』의 출토지역도 「이법방의론」에서 말하는 남방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다만 「이법방의론」에 동방의 폄석 기원을 설명하면서 부연한 그 지역의 생활습관에 대한 단서, 그리고 소영자유적 시대의 당시의 두만강 일대의 생활 풍습, 그리고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대대로 한반도 일대의 침법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몇 가지의 사료는 소영자유적이 「이법방의론」에서 말하는 동방이 아니라 하더라도 종기나 외상에 대한 나름의 침치료 지식체계를 가진 문화권이었다는 새로운 동방기원설에 대한 가설을 가능하게 한다. 현재까지의 연구와 발굴사료만으로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동방기원설에 대한 직접적이고 분명한 증거들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두만강 일대의 당대인들의 생활습관과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한반도의 침법이 대대로 유명했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와 단편기록들은 추후 연구를 위한 하나의 사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법방의론」에서는 폄석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그 백성들은 피부가 검고 거칠고 몸에 종기가 많으며 치료는 폄석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했다. 생활습속에 의해서 빈발하는 질병군이 있었고,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폄석 치료가 특화되었다는 설명이다[6]. 두만강 유역의 고대 식생활에 대해서는 동북아에서 가장 동쪽에 거주했었던 옥저와 북쪽으로 연접한 읍루에 대한 『삼국지(三國志)』의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소영자가 위치한 지역은 후에 옥저의 문화가 널리 분포한 것이다. 고구려와 유사한 예맥 계통에 속했던 옥저의 세력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남하한 읍루 세력에 의해 약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남하한 읍루 세력은 일부 옥저의 문화를 흡수했다. 이러한 상황을 고고학으로 보면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가 읍루(폴체) 문화와 결합하여 ‘연해주의 폴체 문화’또는 ‘올가 문화’로 변천되는 것에 해당된다(강인욱, 2008: 18-82). 즉, 「위지동이전」의 읍루에 대한 기록은 두만강 지역 주민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에 따르면 동이족 중에 가장 북쪽에 사던 읍루 족들은 땅을 깊게 파서 아홉 계단을 타고 지붕을 따라서 출입하며 화장실도 집안에 두었다. 화장실이 집안에 있었다는 것은, 읍루족이 오줌을 빨래와 소독, 때로는 약으로 섰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줌에 들어있는 요소는 곧바로 암모니아로 바뀌어 심하게 악취를 풍기지만, 약알칼리성으로 세탁을 하는 데에 좋은 재료가 된다. 이로 인해 오줌은 모피의 무두질과 세탁에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한대지역에 거주했던 읍루와 숙신족들은 고대 이래로 모피의 가공과 교역에 종사했으니, 그들에게 오줌은 주요한 자원이었다.
읍루인들의 집안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18-19세기까지 캄차카와 알래스카의 사람들 사이에 남아있다. 길고 긴 겨울날에 대부분의 시간은 집안에서 살았고, 화장실도 집안에 있었다. 오줌은 따로 모아두었다가 세탁하고 가죽옷을 무두질 하는데 썼다. 불결한 생활습관, 거기에 더한 한랭한 기후는 피부가 갈라지는 등, 종기를 자주 유발했을 것으로 추정한다[7].
「위지동이전」에는 읍루인들의 추위를 피하기 위한 습속으로 돼지기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읍루인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돼지기름을 몸에 바른다(豬膏塗身)”고 나와있다. 돼지기름은 본초학에서 보면 종기, 동상, 육독을 다스리는 데에 특효약이라고 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동물성 기름은 지(脂)와 고(膏)로 나뉜다. ‘지’는 덩어리진 비계 덩어리요, ‘고’는 무정형의 연고와 같은 형태이다. 즉, 연고형태로 돼지기름을 뽑아내서 발랐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에서는 방고(肪膏)라고 하였고, 피부를 윤택하게하기 때문에 손발이 터지고 갈라지는데 외용한다고 했다[8].
이와 같이 한랭한 두만강 유역의 습속, 즉 모피를 이용한 의복생활, 모피 가공을 위한 소변의 재활용, 추위를 피하기 위한 돼지기름 도포 등은 당시 이지역사람들의 피부에 종기가 빈발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황제내경』의 「이법방의론」에서는 종기의 원인을 어패류 위주의 식습관과 과도한 염분 섭취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읍루인들의 추위를 견디고 모피가공을 하면서 생기는 습속과는 다르다. 그러나 종기를 유발한다는 점에서는 결과적으로 같기 때문에, 읍루인들이 「이법방의론」의 동방인들처럼 피부의 종기에 소영자유적의 골침과 석침을 이용한 독자적인 의료문화를 설명할 하나의 단서는 된다고 볼 수 있다.
소영자유적의 골침과 석침을 이용한 지식체계의 형성, 즉 침구류의 새로운 동방기원설에 대한 또 다른 방증 사례로, 한반도의 침구술을 들 수 있다. 한반도의 침구술은 예로부터 동아시아 일대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나라 때의 단성식이 쓴 『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위나라 때 고구려 객이 침을 잘 놓았다. 1촌 되는 머리카락을 10토막으로 끊어 이를 침으로 꿰어 연결시켰다”라고 적혀있다(여인석 등, 2012: 51-2). 『일본서기』에도 고구려에 침술을 배우러 유학했던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여인석 등, 2012: 53-4). 이외에도 동아시아 의학사에서는 고대의 한반도의 침구술에 대해서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소영자유적의 침구유물은 이 전설 같은 이야기들의 실체에 근접해가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소영자유적의 출토품, 그리고 주변지역에서 발견된 유사한 침구류 유물은 기원전 10세기 전후 두만강 유역에서 골침과 석침을 이용한 의료 전통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와 같은 형태는 최소한 고고학적으로는 주변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다. 동방인들이 폄석치료기술을 발전시켰다는 「이법방의론」의 사례, 그리고 로프노르유적의 마황 상용 사례는 해당 지역의 환경 및 생활에서 비롯된 질병 치료에 대한 독자적인 노하우가 의료문화로 발전해갈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두만강 일대 거주민들의 독특한 생활습속, 그로 인해 빈발했을 종기 등의 질환, 그리고 그것을 치료하기 위한 독자적인 의료기술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며, 소영자유적의 골침, 석침, 그리고 기타 의료용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은 그 가능성을 확인시켜 줄 구체적인 물적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만강 일대를 포함한 한반도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져온 우수한 침구술에 대한 기록들은 이 전통이 지속적으로 후대 의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방증할 자료 중 하나이다.

5. 맺음말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 중국 연길시 북쪽에서 발굴된 연길 소영자유적의 출토품을 통하여 동아시아에서 침술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연길 소영자유적은 기원전 12-10세기에 만들어진 이 지역 고대 주민의 석관묘인데, 무덤에서는 다수의 골침과 석침이 발견되었다. 소영자의 침구류는 대형(골제 송곳) 및 중형 골침, 바늘형 골침 등으로 세분된다. 석침의 경우 길이 18cm내외와 15-12cm, 8cm 내외 등 3등급으로 나뉜다. 또한 침통과 환부를 문지르는 둥근 돌과 예리한 백두산제 흑요석 돌날 등이 한 세트를 이루어서 시신의 한가운데에 소중하게 놓여있는 점 등이 소영자 출토품을 의료용 침구류로 보는 이유이다. 무덤에서 침구류가 대량으로 발견되는 현상은 연길 소영자를 비롯하여 두만강 유역의 여러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이제까지 침구류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선사시대의 폄석, 또는 침술이 상당히 정비가 된 전국시대 말기에서 한나라 대의 청동제 침과 문헌자료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연길 소영자의 분석을 통하여 청동기시대에 사용된 의료용 석기와 골기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침구류의 등장에 대한 지리적, 생태적 요인을 고고학적인 자료로 분석해서 구체적인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Notes

1) 여기에서는 의료도구인 침과 관련된 도구들을 통칭하여 침구류라 한다. 침구(針灸)와 오인될 수 있는 데, 본문에서는 서술하는 침구류는 별도의 표기가 없으면 침구류(針具類)를 의미한다.

2) 『黃帝內經』 「異法方宜論」 “黃帝問曰 醫之治病也 一病而治各不同 皆愈何也 岐伯對曰 地勢使然也 故東方之域 天地之所始生也 魚鹽之地 海濱傍水 其民食魚而嗜鹹 皆安其處 美其食 魚者使人熱中 鹽者勝血 故其民皆黑色踈理 其病皆爲癰瘍 其治宜砭石 故砭石者 亦從東方來”

3) 『黃帝內經』 「異法方宜論」 “南方者 天地所長養 陽之所盛處也 其地下 水土弱 霧露之所聚也 其民嗜酸而食胕 故其民皆緻理而赤色 其病攣痺 其治宜微鍼 故九鍼者 亦從南方來”

4) 『黃帝內經』 「九鍼十二原」 “九鍼之名, 各不同形. 一曰鑱鍼, 長一寸六分. 二曰員鍼, 長一寸六分. 三曰鍉鍼. 長三寸半. 四曰鋒鍼, 長一寸六分. 五曰鈹鍼, 長四寸, 廣二分半, 六曰 員利鍼, 長一寸六分. 七曰毫鍼, 長三寸六分. 八曰長鍼, 長七寸. 九曰大鍼, 長四寸. 鑱鍼者, 頭大末銳, 去瀉陽氣. 員鍼者, 鍼如卵形, 揩摩分間, 不得傷肌肉, 以瀉分氣. 鍉鍼者, 鋒如黍粟之銳, 主按脈勿陷, 以致其氣. 鋒鍼者, 刃三隅以發痼疾. 鈹鍼者, 末如劍鋒, 以取大膿. 員利鍼者, 大如氂, 且員且銳, 中身微大, 以取暴氣. 毫鍼者, 尖如蚊虻喙, 靜以徐往, 微以久溜之, 而養以取痛痺. 長鍼者, 鋒利身薄, 可以取遠痺. 大鍼者, 尖如梃, 其鋒微員, 以瀉機關之水也. 九鍼畢矣.”

5) 『五十二病方』 穨(㿗), 先上卵, 引下其皮, 以(砭)穿其【隋(月)】旁; □□汁及膏□, 撓以醇□. 有(又)久(灸)其痏, 勿令風及, 易瘳; 而久(灸)其泰(太)陰, 泰(太)陽□□. 【●】令.

6) 이 설명의 진위와 인과관계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것과는 별개로, 중국 신장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의 로프노르 유적(小河墓地)에서는 한랭 건조한 기후와 모래바람에 견디기 위하여 마황(麻黃)을 상용했다(강인욱, 2016: 46-55). 마황은 오한 증상에 사용하는 동아시아의학의 대표 약재이며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양기를 소통시켜 외부의 찬 기운을 물리친다”고 했다(허준 저, 2005: 2170). 역대로 마황을 주재료로 하는 마황탕은 따뜻한 지역이나 따뜻한 날씨에 사용했을 때 부작용이 자주 보고되어 송나라 의학자 주굉은 “여름에 사용하면 황반이 생기는 부작용이 생긴다고 하여 겨울과 봄에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고(朱肱 原著, 1987: 289), 송나라 의학자 방안시는 여름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모나 황백 같은 차가운 성질의 약재를 더해서 써야한다고 했다(陳大舜 등, 2006: 39). 마황은 추운지역이나 추운 계절에 적합한 약재였고, 마황을 상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추위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의료 습속으로 이해할 수 있다.

7) 읍루인들과 유사한 생활을 유지하는 캄차카반도의 주민들의 경우 습기가 가득 찬 수혈 주거지 내에 생선을 건조시키며 오줌을 주거지 안에서 받아서 사용하여 매우 불결했다는 기록이 18세기 러시아인들의 기록에 남아있다(유리 세묘노프, 1992). 게다가 겨울이 반 년 이상 지속되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은 필연적으로 피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8) 肪膏(방고) 비계 ① 悅皮膚. 作手膏, 不皸裂. ② 主諸惡瘡, 癰疽, 殺蟲. 宜煎諸膏藥用. ③ 解斑猫, 芫靑毒. ④ 臘月亥日取之, 勿令中水, 經年不壞.『本草』 ⑤ 又治五疸, 下胞衣, 易産.『入門』 (허준, 2005: 2061)

그림 1.
소영자유적의 위치
Figure 1. Location of Xiaoyingzi tomb
kjmh-26-3-339f1.tif
그림 2.
소영자유적의 석침류
Figure 2. Stone needles from Xiaoyingzi
kjmh-26-3-339f2.tif
그림 3.
소영자유적 골침류
Figure 3. Bone needles from Xiaoyingzi
kjmh-26-3-339f3.tif
그림 4.
소영자유적 골침 및 골통
Figure 4. Bone needles and cases for needles from Xiaoyingzi
kjmh-26-3-339f4.tif
그림 5.
소영자 16호묘 골침 및 안마석 출토
Figure 5. Bone needles and massage stone from tomb no. 16, Xiaoyingzi
kjmh-26-3-339f5.tif
그림 6.
소영자 20호묘 발굴 사진. 인골의 배와 대퇴골 주변에 골침들이 흩어져서 발견됨
Figure. 6. Bone needles, scattered around the femur of dead body in the tomb no. 20, Xiaoyingzi
kjmh-26-3-339f6.tif
그림 7.
소영자유적 출토 안마석
Figure 7. Massage stone from Xiaoyingzi
kjmh-26-3-339f7.tif
그림 8.
사하마 전국시대묘 출토 안마석
Figure 8. A round massage stone from the tomb of Warring States in Shahema, Changsha, China
kjmh-26-3-339f8.tif
그림 9.
중국 섬서성 보계시 주원박물관에 소장중인 위석(熨石)
Figure 9. A soothing stone (yunshi), exhibited in Zhouyuan Museum
kjmh-26-3-339f9.tif
그림 10.
마계흥의 논고에 실린 중국의 폄석
Figure 10. Various stones(bianshi) from China, suggested by Ma Jixing
kjmh-26-3-339f10.tif
그림 11.
『중국의학통사』에 실린 신석기시대의 중국의 폄석
Figure 11. Stone of Neolithic period in China, presented in Zhongguoyixuetongshi
kjmh-26-3-339f11.tif
그림 12.
『중국의학통사』에 실린 중국의 골침
Figure 12. Bone acupuncture needles, presented in 『Zhongguoyixuetongshi』
kjmh-26-3-339f12.tif
그림 13.
중국 내몽고 포두시 아선유적에서 발굴된 골침
Figure 13. Bone needles, exhibited in Museum of Baotou city, China
kjmh-26-3-339f13.tif
Table 1.
표 1. 그림 2에 수록된 소영자유적 석침의 제원
Measurements of stone needles, presented on figure 2
유물번호 잔존 상태 크기 (cm)
비고 도면
길이 너비 두께
역1106(1) 선단부 일부 결실 (12.2) 0.5-0.6 0.2-0.3 사용흔 3-8

역1107+1109(5) 선단부·경부 일부 결실 (17.6) 0.5-0.6 0.2-0.4 사용흔 3-2

역1107+1109(7) 선단부 일부 결실 (12.9) 0.5-0.7 0.2-0.3 3-4

역1107+1109(8) 선단부 일부 결실 (18.3) 0.4-0.8 0.2-0.3 3-1

역1106(9) 완형 15.3 0.5-0.8 0.2-0.3 3-5

역1106(13) 선단부 일부 결실 (11.5) 0.4-0.9 0.2-0.4 3-7

역1106+1109(15) 완형 12.8 0.5-0.7 0.2-0.5 3-6

역1106(16) 선단부 일부 결실 (15) 0.4-0.8 0.2-0.3 3-3

(강인욱 등, 2009: 10)의 제원을 기반으로 수정

Table 2.
표 2. 그림 3과 그림 4에 제시된 소영자유적 골침의 제원
Measurements of bone needles, presented on figure 3 and 4
유물번호 종류 소재
잔존 상태 길이 (cm) 그림
동물종 부위
역1087(5) 골제 송곳 사슴 중수·중족골 일부 결실 21.0 4-1

역1123(3) 골제 송곳 사슴 중족골 완형 19.7 4-5

역1087(1) 골제 송곳 사슴 중족골 선단 결실 19.0 4-2

역1087(3) 골제 송곳 사슴 중수골 선단 결실 17.9 4-3

역1116(2) 골제 송곳 사슴 중족골 완형 16.5 4-6

역1087(2) 골제 송곳 사슴 중수골 일부 결실 14.7 4-4

역1112(1) 골제 바늘통 기러기목 척골 완형 13.1 5-①

역1112(2) 골제 바늘통 기러기목 척골 완형 12.9 5-②

역1112(3) 골제 바늘통 기러기목 경부골 일부 결실 9.6 5-④

역1091 골제 바늘통 조류 사지골 일부 결실 10.3 5-③

역1113 골제 바늘 (7점) 포유류, 조류 - 일부 결실 본문 참고 5-⑤-⑪

(강인욱 등, 2009: 29)의 제원을 기반으로 수정

Table 3.
표 3. 소영자유적 주요 무덤의 유물 출토 상황
Stone cist tombs and its associate materials from Xiaoyingzi
무덤 번호 피장자 성별 침구류 관련유물 기타 유물 유물 위치
A16b 남성(?) 침통1 토기 하반부
송곳

A23호 침통 1점, 송곳 1점, 마제석촉88

A25호b 남성 골제 비녀 1점, 타제돌날 12점, 석촉 1점, 골침 20점 피장자의 발 근처
환석

39a,b호 남성 마제석부 2점 타제석창편 1점 돌톱 1점,
마제석촉 2점 타제돌날 7점.
연마석 2점. 멧돼지 이빨제 장식 2점,
골제 송곳 7점 조개팔찌 편 5점, 조가비 1점.
골침 1 점. 방추차 2점
골제 침통 1점 골제 단검 3점

42호묘 골침통 1, 골침 5, 석촉 34점 이빨장식, 석제고리 골검 1점

47호묘 골제 침통편 1점, 골제 침 1점, 골제 송곳 2점, 연마석 1점, 토기편 2점.
흑요석 타제석창 1점, 흑요석제 타제석촉 2점

(藤田亮策, 1941: 12-47)내용을 근거로 정리

Table 4.
표 4. 두만강 유역에서 발견된 골침 및 석침류
Stone and bone acupuncture needles from Tumen region of Yanbian, China
유적 시기/성격 소장된 골침 참고문헌
나진 초도 청동기시대/주거지 kjmh-26-3-339i1.tif 도유호 등, 1956

혼춘 신흥동 청동기시대/석관묘 kjmh-26-3-339i2.tif 王培新, 1992: 3-9

길림 연길시 전와창(甎瓦廠) 청동기시대/주거지 kjmh-26-3-339i3.tif 侯莉閩, 1985: 29-32

러시아 연해주 말라야 포두세치카 철기시대/주거지 kjmh-26-3-339i4.tif 극동과학원 극동민족역 사고고연구소 부설 박물관(필자 촬영)

용정시 금곡 석관묘 청동기시대/석관묘 kjmh-26-3-339i5.tif 연변시박물관(2016.05 필자 촬영)

왕청 백초구 신화려 청동기시대/석관묘 kjmh-26-3-339i6.tif 상동

연변 민주 철기시대/주거지 kjmh-26-3-339i7.tif 상동
Table 5.
표 5. 구침의 명칭, 형태 및 용도[4]
Names, features and uses of nine needles
구침의 명칭 형태 용도
참침 길이 1.6촌, 앞쪽은 크고 끝은 예리함 양기를 제거하는데 사용

원침 길이 1.6촌, 알의 모양 근육을 안마하는데 사용, 근육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기를 조절하고 빼냄

제침 길이 3.5촌. 끝이 좁쌀처럼 예리함 맥을 누르는데 사용하여 기를 이르게함

봉침 길이 1.6촌. 3각으로 날이 있음 오래된 병을 치료함

피침 길이 4촌, 너비2.5촌, 끝이 검끝처럼 생김 고름을 빼내는데 사용

원리침 길이 1.6촌, 터럭크기이며 둥글도 예리함, 가운데는 약간큼 폭기(暴氣)를 제거함

호침 길이 3.6촌, 모기입처럼 끝이 날카로움 서서히 침을 놓고 약간 오래 놔둠. 저린 증상을 치료함

장침 길이 7촌, 끝은 예리하고 가운데는 얇음. 원비(遠痺)를 치료함

대침 길이 4촌, 끝은 막대기모양임 끝은 약간 둥글어서 수기를 빼는데 사용함

(東京中醫硏究會, 1981: 581)의 내용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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