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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6(3); 2017 > Article
터스키기 실험 사건의 역사적 기원 -미국 공중보건의 딜레마-

Abstract

The Tuskegee Study of Untreated Syphilis in the Negro Male was an observational study on African-American males in Tuskegee, Alabama between 1932 and 1972. The U. S. Public Health Service ran this study on more than 300 people without notifying the participants about their disease nor treating them even after the introduction of penicillin. The study included recording the progress of disease and performing an autopsy on the deaths. This paper explores historical backgrounds enabled this infamous study, and discusses three driving forces behind the Tuskegee Study.
First,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at the Public Health Service was established in the U. S. Surgeon General’s office and was operated as a military organization. Amidst the development of an imperial agenda of the U.S.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the PHS was responsible for protecting hygiene and the superiority of “the American race” against infectious foreign elements from the borders. The U.S. Army’s experience of medical experiments in colonies and abroad was imported back to the country and formed a crucial part of the attitude and philosophy on public health.
Secondly, the growing influence of eugenics and racial pathology at the time reinforced discriminative views on minorities. Progressivism was realized in the form of domestic reform and imperial pursuit at the same time. Major medical journals argued that blacks were inclined to have certain defects, especially sexually transmitted diseases like syphilis, because of their prodigal behavior and lack of hygiene. This kind of racial ideas were shared by the PHS officials who were in charge of the Tuskegee Study.
Lastly, the PHS officials believed in continuing the experiment regardless of various social changes. They considered that black participants were not only poor but also ignorant of and even unwilling to undergo the treatment. When the exposure of the experiment led to the Senate investigation in 1973, the participating doctors of the PHS maintained that their study offered valuable contribution to the medical research.
This paper argues that the combination of the efficiency of military medicine, progressive and imperial racial ideology, and discrimination on African-Americans resulted in the Tuskegee Syphilis Experiment.

1. 머리말

“터스키기 비치료 매독 관찰 실험(A Study of Untreated Syphilis in the Male Negro, 이하 터스키기 실험)”은 1932년부터 1972년까지 40년간 미 연방정부 산하 공중보건국(Public Health Service)이 앨라배마 주 메이콘 카운티의 터스키기 지역 주민 가운데 25세에서 60세의 흑인 남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관찰 실험이다. 이 기간 동안 공중보건국은 439명의 매독 환자와 185명의 비감염 대조군을 선발하여 이들에 대한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했다. 일상생활을 계속할 경우 매독 환자가 겪는 증상과 합병증 등에 대한 조사를 위한 실험이었기에, 공중보건국은 이들에게 40년 동안 실험의 목적이나 감염 중인 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주지 않았고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지 않았다.
1972년 터스키기 실험은 폭로된 즉시 중단되었고, 이후 드러난 이 실험의 면면은 미국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실험 기간 동안 비감염 대조군에 속했던 12명이 추가로 감염되기도 했고, 대다수의 환자들이 질병에 따른 고통과 신체 기형 등을 겪었을 뿐 아니라, 그 결과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더욱이 연구 대상자들이 가난한 흑인이었다는 사실은 이 실험의 인종적 차별의식을 드러냈다고 비판되었고, 무려 40년 동안, 심지어 특효약인 페니실린의 보급 이후에도 이를 제공하지 않고 변함없이 비치료 관찰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의학 실험의 윤리성과 합법성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기에 충분했다.
이 논문은 20세기 최악의 비윤리적 의학실험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터스키기 실험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시도한다. 폭로의 충격 이후 터스키기 사건에 대하여 가장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된 분야는 의학계로, 특히 이 사건이 인간을 실험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있어서 의료 윤리를 재정비하는 데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분석해왔다. 여기에는 연구대상에 대한 탐문 조사의 의미, 의료 윤리 연구 현황, 그리고 터스키기 사건에 대한 인지 여부가 실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 그리고 교육 현장에서의 학습효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들이 파생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구 집단별로 다른 질병에 대한 조사에 터스키기 사건의 충격이 미친 영향과의 비교분석도 등장하고 있다[1].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려는 연구들도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제임스 존스(James Jones)의 『나쁜 피』(Bad Blood, 1981)와 알랜 브랜트(Allen Brandt)의 『마술 총알은 없다』(No Magic Bullet?, 1987)가 실험을 가능하게 한 20세기 초 사회 분위기를 사건의 배경으로 설명하고 터스키기 실험에 참여한 의사와 간호사 등의 증언 및 보고서를 바탕으로 실험 연구의 추이를 상세히 재구성했다. 더 학술적인 연구자로는 수선 레버비가 터스키기 실험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사료와 논문들을 묶어 책으로 편집해 낸 뒤 최근에는 이 실험이 현대 의학계에 끼친 영향을 되짚어보는 연구서도 출판했다(Reverby, 2000; 2009). 또한, 해리엇 워싱턴은 『의학적 아파르트헤이트』에서 이 사건을 식민지시기로부터 현대까지 지속되어 온 흑인에 대한 의학실험의 역사 속에 위치시켜 설명했다(Washington, 2006).
위의 연구들은 터스키기 실험이 20세기 초에 팽배했던 인종적 편견 때문에 시작된 것으로 파악했고, 흑인에 대한 차별의식과 백인 위주의 과학적 의학이 빚어낸 비극이었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흑인에 대한 차별과 인격 무시라는 인종주의가 비윤리적 인체실험이 가능했던 시대적 한계였다고 보는 것이다. 인종주의가 의심할 바 없이 이 사건의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으며, 사건의 폭로가 분명 의료 윤리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지평을 열었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연구서들은 터스키기 실험을 이해하고 그 역사적 중요성과 의미를 밝히는 데에 크게 공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다.
우선, 이 실험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공중보건국은 어떤 곳인가? 터스키기 실험이 특정 카운티에 대해 장기적으로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 바로 연방정부, 즉 보건행정 당국에 의해 집행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흑인을 대상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이며, 왜 연방정부의 기구인 이곳은 그토록 집요하게 실험을 계속했을까? 기존 연구서들은 사건과 연루된 소속 의사들의 활동을 자세히 서술하기는 하지만, 공중보건국이 터스키기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축적해왔던 경험과 실험 대상에 접근하는 태도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터스키기 실험의 관제적 성격과 이념적 맥락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은 터스키기 실험에 나타난 인종주의는 당시 변화하는 미국사회의 새로운 인종관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공중보건국의 흑인에 대한 관념과 태도는 미국 사회의 그것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이민과 해외진출이 활성화되는 시기 미국의 전반적인 인종관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터스키기 실험은 미국에서 공중보건의 정의와 공중보건국의 역할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당시 미국이 국내외에서 수행하던 보건의 인종적 한계가 어떻게 구체적 실험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지 드러내 줄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터스키기 연구는 다른 무엇보다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실험이라는 점에서 환자와 의사 사이의 관계 뿐 아니라 인종의 국가적 의미를 밝혀줄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 논문은 인종주의와 얽혀있던 미국 공중보건의 시대적, 국가적 특성을 국가 이념의 차원에서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에서 흑인을 혁신과 개혁의 대상으로 상정함으로써 실험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국가의 태도를 대변한 것이 바로 공중보건국이었음을 밝힐 것이다.
이 논문은 터스키기 사건을 분석하기에 앞서 그 제도적, 사상적 배경을 구성하게 될 요소들에 대한 분석을 선행할 것이다. 우선 첫 번째 장에서는 미국의 공중보건이 주로 발전시켜 온 두 가지 임무를 설명한다. 그 중 하나는 군사활동의 일환으로서 공중보건을 향상시기고 질병을 차단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외래적 요소에 대한 통제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군인이자 의사였던 공중보건국 관료들은 어떻게 성장했는지 밝힐 것이다. 두 번째 장에서는 해외진출과 이민이 증가하던 20세기 초 미국의 사회개혁 운동인 혁신주의와 빈민 보건의 결합이 어떻게 우생학적 인종주의를 발생시키게 되었는지 알아 볼 것이다. 이로써 흑인을 생물학적 결함이 있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국가에 의한 연구를 강제할 수 있었음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세 번째 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미국적 공중보건의 특성과 혁신주의적 인종관의 결합으로서 터스키기 사건의 전모를 재구성한다. 국가적책무로서 공중보건과 제국의 질병 연구 및 빈민 통제가 종합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난 산물이 바로 터스키기 사건이었음을 분석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터스키기 사건은 미국이 강력한 군사대국으로 발전함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마주치는 불안정 요소를 정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미국 특유의 혁신주의적 공중보건의 성격에서 비롯된 거대한 의학적 비극이었음을 밝히고, 그 역사적 의의를 제시할 것이다.

2. 공중보건과 제국의 사명

터스키기 관찰 실험을 실시한 주체는 연방의무감실(US Surgeon General’s Office)로, 이 부서는 미국의 공중보건을 총괄 담당하는 공중보건국(Public Health Service)을 관장하고 있다. 연방의무감이 관장하는 이 기구는 현재 연방정부의 주요 부처인 보건복지부(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의 차관보 7인 가운데 가장 윗 서열이라 볼 수 있는 보건 담당 차관보(Assistant Secretary for Health) 휘하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특이하게도 연방의무감과 보건 담당 차관보는 전통적으로 대부분 군인 출신이며, 민간 출신인 경우엔 임명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각각 해군 중장과 대장의 계급을 부여받게 된다. 2017년 현재 연방의무감은 휘하에 6천5백 여 건강 및 보건 관련 장교들을 통솔하고 있다.
공중보건을 군사적 명령체계를 통해 관할하게 하는 이러한 체계가 형성된 이유, 즉 연방의무감이 해군 장군인 이유는 미국의 역사에 있다. 미국에서 공중보건의 역사는 1870년 해병대병원(Marine Hospital Service) 휘하에 의무감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지정학적 특성상 대규모 육군은 필요치 않고 아직 공군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미국의 국방은 거의 전적으로 바다를 지키는 것으로 국한되었기 때문에 상설화된 군대는 해군이 유일했다. 그런데 외국에서 근무하다 온 군인이 옮겨오는 질병 또는 외국에서 들어오는 이민이 가져오는 질병은 해군이 막아야 할 일이 되었다. 즉, 바다로부터 적군도 해군이 막아야 하지만,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병균도 해군의 관할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서양과 태평양 양안에서 군사 활동을 하고, 또 그 바다로부터 수많은 이민을 받아들이던 미국의 특성으로 인해 공중보건은 국방, 즉 해군이나 해안경비의 관할권 밑에 소속되었던 것이다.
1879년에 국민 보건을 담당하는 별도의 부서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국립보건국(National Board of Health)이 만들어졌으나, 연방의무감실로부터 견제를 받아 불과 4년 만에 보건행정은 일원화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폐지되었다. 따라서 1884년 연방의무감실이 공중보건을 국가의 책무로서 담당할 하나의 부서로 남게 되었다. 그 후 1940년대에 공중보건국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부여되었고, 그 소속에는 변동이 있었으나 여전히 변함없이 군대조직으로서 국민 보건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2].
20세기 들어서면서 성장하는 국가의 규모와 역량과 더불어 공중보건의 영역에서 국가의 더욱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었다. 특히 미국이 활발한 대외활동을 시작하면서 진출하게 된 쿠바, 필리핀, 파나마 등은 열대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황열병, 콜레라, 말라리아 등의 위협을 미국에게 안겨주었다. 이 낯선 지역에 대한 정복은 강한 전염성을 가진 토착병들에 대한 정복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따라서 제국주의 시기 미국의 군사 작전은 다시금 보건의 영역을 포함하여 수행되게 되었다[3].
윌리엄 크로포드 골가스(William Crawford Gorgas)는 파나마에 운하 건설을 위해 주둔한 군대와 건설 노동자들을 황열병과 말라리아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띤 군의였다. 1905년 그가 부임하던 당시 파나마에서는 미국이 고용한 작업 인부 가운데 3/4이 황열병에 감염되고 그중 다수가 사망하는 등 공포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골가스는 부임과 동시에 각종 열대 질병을 옮기는 모기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방역작업을 지휘했다. 가정방문을 통해 방역 교육을 지도하고, 늪지를 메꾸고, 신선한 식품을 공급하고, 가로수 나뭇잎이 오그라들 정도의 소독 가스를 분사한 결과는 놀라운 성공이었다(Gorgas, 1915: 159-174). 파나마 운하 건설의 완료는 골가스의 업적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평가될 정도였다.
골가스는 파나마 파견 이전에 이미 열대 기후의 경험을 플로리다, 아바나, 쿠바 등지에서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들에 차례로 군사적 진출을 한 미국의 군속 의사로서 활동했고, 나아가 파나마로 이어지는 미국 세력의 확장 현장에 참여하여 늪을 메우고, 훈증 방역법을 전파하고, 모기를 퇴치하고, 상하수도 위생을 개선하는 보건 의료 활동을 담당했던 것이다. 식민지에서의 보건향상 성과로 인해 명성이 높아진 그는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회장을 맡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육군 의무감(Surgeon General of the US Army)을 역임했다(Parker, 2007: 328-331).
사실 골가스의 선임 육군 의무감이었던 조지 토니(George Torney) 역시 의학대학 졸업 후 해군 의사로 취직하여 해군과 육군을 오가며 쿠바, 필리핀, 푸에르토리코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다시 말해, 세기 전환기 미국의 보건분야에서는 군사 활동과 관련된 해외 파견 근무가 경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다. 점령지는 공중보건의 실험장이 되었고, 이렇게 점령지의 보건 문제를 다루면서 익힌 노하우가 미국 내 공중보건에 역수입되었다. 그 과정을 중추적으로 수행한 군의들이 그 경험을 가지고 다시 국내의 보건 분야 중책을 맡아 활동하게 되는 구조였다(Anderson, 2009: 277-287).
골가스가 정년 은퇴를 한 1918년 20세기 전반기의 악명높은 전염병 사례인 이른바 ‘스페인 인플루엔자’가 창궐했다. 스페인 인플루엔자는 미국 내에서 55만 명이라는 큰 희생을 치르게 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전투 중 미국인 사망자가 11만 명 정도라는 것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치명적인 질병이었는지 알 수 있다. 때문에, 해군 보건위생 담당 부서와 첩보기관인 전략지원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서는 독일군이 의도적으로 질병을 유포시키고 있다는 의혹을 보고하기도 했었다. 전쟁 중 이와 같은 치사율 높은 전염병의 발발은 국가의 전쟁 수행에 중대한 차질을 빚을 수 있는 문제였고, 군내의 사기 저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Crosby, 2003: 45-55). 스페인 인플루엔자의 타격은 외래 전염병의 국가적 관리 체계에 대한 경각심을 가중시켰고, 효율적 통제 및 방역에 대한 대중적 요구를 강화시키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에서 전시의 보건행정이 국가 내부에서의 공중보건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군, 관, 민의 총체적 협력 작업으로서 공중보건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연결고리로 윌버 소여(Wilbur Sawyer)를 꼽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하버드 의대를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병원 근무하던 소여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록펠러 재단과 연결되어 재단 내 국제보건부서(RF International Health Division)와 협력 연구를 시작했다. 아직 연방정부가 의료연구에 큰 투자를 하기 전, 민간 부문의 의료연구를 이끌었던 록펠러 재단의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호주 등지의 전염병 방지 및 치료와 관련된 연구를 맡았던 것이다(Farley, 2003: 128-144).
이후 소여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록펠러 재단을 대표하여 연방의무감과 함께 질병관리 대책을 논의했고, 연방 정부 산하의 국립열대질병연구위원회(Subcommittee on Tropical Diseases of the National Research Council)에서 일했다. 록펠러 재단의 직위를 유지한 채, 육군과 해군의 전염병 조사국의 국장을 겸직하기도 했다. 소여와 같은 의사에게 전쟁은 경험을 넓히고 풍부한 임상사례를 확보할 뿐 아니라, 군대식 행정의 체계를 몸에 익히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미국 역사의 특성상 보건행정이 군사적 필요에 의해 발전되었고, 그 수장직을 군인이 맡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특히 전시의학계와 군대의 협력관계 구축이 중요했고, 때문에 의사의 군인으로서의 경험이 풍부해졌으며, 해외 정복지는 중요한 임상 실험장이 되었다. 군 경험을 했던 의사는 다시 민간으로 복귀하여 야전의 경험을 병원으로 가져왔다. 이와 같은 보건 의료 분야의 발전 과정에서 그 명령체계의 정점에 있는 연방의무감과 공중보건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제국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또다른 외래적 요소가 국가적 차원의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으니, 이들은 바로 20세기 초 미국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빈민 집단인 외국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들이었다. 1880년에서 1920년 사이 40년 동안 연평균 60만 명의 이민이 미국에 도착했다. 1920년 경 1억을 넘긴 미국 인구에서 약 1천 4백 5십만 명이 외국에서 태어나 이민을 온 사람들이었고, 또 다른 1천 7백만 명 이상이 미대륙에서 태어났으나 외국 출신 부모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 시기 이민 가운데 동유럽이나 남유럽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그들의 이질적인 외모와 생활방식, 그리고 종교적 차이 등이 미국적인 것을 희석시키거나 미국의 순수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여겨지게 되었다(Jacobson, 1998: 39-90).
이런 우려 속에 미국의 우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민 제한 및 통제를 주장하는 이들이 성장했다. 매디슨 그랜트(Madison Grant)의 『위대한 인종의 소멸』(Passing of the Great Race, 1916)은 이러한 이들을 대변하는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책이었다. 여기서 그랜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그리고 그보다 조금 뒤늦게 독일과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모두 우월한 노르딕 인종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반면 19세기말부터 쇄도하고 있는 이탈리아, 러시아, 유대계 등의 ‘비 노르딕 인종’은 열등하다고 보았다. 그랜트는 비 노르딕 인종과 흑인 등은 미국의 진보를 막고 백인의 순수성을 타락시키는 종자이므로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Grant, 1916).
위대한 인종이 소멸되는 것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시 반이민 시민 단체인 이민제한연대(Immigration Restriction League)의 회장 프레스콧 홀(Prescott Hall)은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병균의 차단과 같은 방식의 인구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테리아의 침입을 차단하듯...열성 인종을 그 서식지에 격리시켜...그 안의 제한된 영역에서만 번식하도록...결과적으로는 그 숫자와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이러한 차단 정책이 전 세계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Hall, 1919: 125-127).
캘리포니아에서는 이미 1884년부터 중국인의 이민을 금지시켰고, 20세기에 접어들자 가장 많은 이민을 보내고 있던 멕시코와 일본에 대한 제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민을 제한 또는 통제하기 위해 공중보건 공무원들은 이 인종들이 “무지한 집단”이며, “비위생적인 생활 태도로 인해 질병을 퍼뜨리고 있고, 그리고 빠르게 번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Molina, 2006: 51-60). 1907년 이민이 미국 사회에 끼치고 있는 영향을 조사한 상하원 합동조사단 딜링햄 위원회(Dillingham Commission)는 이들이 수많은 사회 문제의 원인이며 경제적으로 미국의 양분을 빼앗아가고 있다고 결론지었다(Bennet and Dillingham, 1911).
공중보건국은 바로 이러한 이민 통제 정책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891년 이민법은 공중보건국으로 하여금 증기선에서 내리는 이민에 대한 신체검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다. 1915년 부의무감이 기고한 논문은 그동안 공중보건국이 얼마나 많은 성과를 냈는지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이에 따르면, 1915년 당시 공중보건국은 94명의 보건 장교를 엘리스 섬에 파견한 상태였으며, 이들은 1898년부터 6년간 미국에 도착한 7,544,452명 가운데 179,557명에게서 질병을 확인하고 되돌려 보내는 쾌거를 이뤘다고 썼다. 이들이 발견한 질병에는 트라코마, 결핵, 매독, 임질, 그리고 정신질환 등이 있었다(Cofer, 1915: 170-174).
더 확실한 이민 통제를 위해 1917년에는 문자해득시험을 필수로 하는 이민법, 그리고 1920년대에는 출신 지역별 쿼터제에 입각한 이민제한법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공중보건국은 실무를 담당하는 동시에 이념적인 뒷받침까지 제공했다. 공중보건국 소속의 의사이자 장교였던 찰스 데븐포트(Charles Davenport)는 제1차 세계대전 중 군의무대(Sanitary Corps) 근무를 통해 질병과 인종에 대한 현장 학습을 거쳐 공중보건국 성병관리부에서 성병의 유전적 성격 연구 및 이민 규제 정책 수립의 임무를 수행했던 인물이었다. 1923년에 출판된 글에서 그는 동쪽 해안으로 유입되는 남유럽과 동유럽 이민들이 그 전에 미국을 구성했던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인들보다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주장했고(Davenport, 1923), 이러한 근거에 바탕을 두고 공중보건국의 검사 지침을 만들었다.
데븐포트는 엘리스 섬에서 이민의 출신지 별 질병 비율을 만들어 보고하게 하여 1924년 “이민법”(Johnson-Reed Immigration Act)의 통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데븐포트가 파견한 헨리 고다드가 작성한 이 보고에 따르면, 남유럽 동유럽 출신 이민 중에 문제적 질병 환자들이 많았다. 특히 이탈리아,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도착한 이민의 80-90%는 정신착란, 정신박약이거나 범죄 경력이 있다는 것이었다(Goddard, 1917).
이와 같이 공중보건국은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미국의 우수한 인종을 지키기 위해 열등한 요소를 최대한 차단하여 미국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울러 공중보건국의 전문가들은 제국의 인종관을 형성하는 데에 뒷받침이 될 조사와 연구를 제공했고, 그리고 군사적 기능의 일부로서 군의, 의무장교 등의 역할을 통해 미국 공중보건의 기능을 확립시켰다.

3. 우생학적 인종관과 흑인의 피

미국이 제국으로 발돋움하던 이 시기는 또한 시어도어 루즈벨트나 우드로우 윌슨과 같은 대통령들로 대표되는 혁신주의(Progressivism) 시대로 일컬어진다. 혁신주의적 세계관은 사회의 개선과 진보를 믿고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진보적인 이념으로, 자본주의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사회 문제들과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법의 제정을 통해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상이다. 대표적으로 도시 슬럼 철거, 주거환경 개선과 식품 위생 개선, 아동노동금지, 여권신장, 정경유착의 철폐, 대기업 규제와 같은 정책이 바로 이때 시작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보적 이념은 차별주의와 손을 잡을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분리와 차별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과학적 인구 관리의 수단이 될 수 있었으며, 백인 엘리트의 방식이 우월하다면 이것이 다른 집단에 강제되는 것 역시 사회의 진보를 위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식이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더 나은 미국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논리로 수많은 혁신주의자들이 이민 규제 정책에 찬성하기도 했고, 때로는 인종 분리와 차별에도 지지를 보냈다.
만일 규제나 분리를 통해 사회를 개선, 진보시킬 수 있다면, 이미 들어와 있는 내부의 열성 요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미국인이지만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시 주도적 사회사상인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에서는 이를 제거하거나 적어도 확산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제국 외부로부터의 외래적 요소에 대한 차단에 동원되었던 논리는 바로 제국의 내부에 존재하는 열성에 대한 우생학적 정책에도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미국 내 타인종이나 열성집단 역시 정복하고 통제해야 할 내부의 식민지였던 셈이다.
대법원의 벅 대 벨(Buck v. Bell) 판결은 우생학이 정책화되었을 때 벌어질수 있는 오류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캐리 벅은 정부가 공중보건을 이유로 강제적 불임수술을 집행할 수 있다는 버지니아 주 법에 따라 본인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강제 수술을 당한 17세의 백인 여성이었다. 이때 벅에게 강제 수술을 집행할 수 있는 근거로 보았던 질병은 저능, 즉 ‘정신박약(feeble-minded)’이었다. 주 보건 당국에서는 캐리 벅의 엄마와 캐리 벅의 딸까지 저능이므로 3대째 저능이 유전되고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밝혔다. 대법원에서는 이에 따라 캐리가 더 이상 자녀를 출산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중보건에 도움이 된다고 판결했다[4].
1924년부터 1979년 사이 버지니아 주에서는 주법에 근거하여 도합 7,325명이 유전병을 이유로 캐리 벅과 같은 강제 거세수술을 집행 당했다. 전국적으로는 30여개 주에서 이와 같은 강제적 불임수술법에 따라 6만여 명의 자녀 출산 권리가 부정되었다. 여성의 피임할 권리 증진 운동에 앞장섰던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도 여권주의자로 오인되었으나, 실은 그녀 역시 우생학도로서 열성 인종의 요소를 막기 위해 피임법 설파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빈민, 특히 흑인의 피임이 미국 도시에 만연한 사회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Sanger, 1919: 11-12).
우생학적 가르침은 학생들로 하여금 특정 질병의 원인이 인종에 있다고 믿게 했고, 이를 과학적 지식으로 만들기 위한 실험을 했다. 특히 흑인이 특정 질병에 취약하다는 가설을 미리 설정하고, 그를 입증해줄 증거를 모으기 위해 실험을 했고, 그 결과를 가지고 그들이 열등하다는 증거를 확인하는 식으로 결과론적인 논리를 전개했다. 터스키기 실험 역시 애초에 그러한 방향성을 가지고 실시되었던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특정 질병은 흑인들의 인종 병이라는 생각은 당시 수많은 해당분야 전문가들이 공유하고 있던 과학적 ‘지식’이었다. 예컨대 이들은 낫적혈구 빈혈(sickle-cell anemia)을 ‘깜둥이 피(negro blood)’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고, 그들의 연구에서 과학적 용어로 사용했다. 이미 1920년대부터 백인에게서도 비슷한 질병이 나타났지만, 이는 오로지 흑인병이 다른 인종으로 감염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혼혈이 빚어낼 수 있는 해악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리고 의사들은 백인의 유사 질병에는 “지중해 빈혈(thalassemia)”이라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 백인인 지중해성 빈혈 환자가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 당국은 선대에 혼혈이 되었던 결과라고 발표했고, 심지어 한니발의 스페인과 이태리 정복이나 무어인의 남부 스페인 침략 등이 흑인 피 감염의 기원이라고 주장했다(Wailoo, 1996: 305-320).
흑인의 피가 생물학적 결함을 가진다는 믿음은 결핵이나 성병 역시 흑인에게서 더 빈번하게 발견된다는 주장으로 확산되었고, 혈액 관련 질병을 모두 흑인피의 문제로 동일시하려는 과학적 노력이 계속되었다. 1920년대 의학저널에 실린 한 논문은 “매독 감염의 경우 백인 환자와 흑인 환자 사이에 유전으로 결정되는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논문은 “깜둥이에게서 매독이나 임질이 더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들의 성적 문란과 개인위생에 대한 무개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Zimmerman, 1921: 87-88; Woody, 1924: 787). 이러한 주장은 매독과 같은 성병이 흑인에게 특징적인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의 성적 태도나 위생 문제 역시 인종적으로 결정된 특성이라고 이중으로 매도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주장은 매우 과학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메이콘 카운티 흑인이 대상 집단으로 선정되기까지 매독은 곧 흑인병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매독을 흑인병으로 만드는 구조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민제한법의 제정 과정에서 백인이 다른 인종이나 민족 집단에게 덧씌우던 인종적 카테고리의 역학관계와 동일하다. 즉 이탈리안은 저능, 러시안은 혁명분자, 아이랜드인은 알코올중독이라는 식의 근거없는 짝짓기가 과학으로 불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은 성적 문란 및 매독과 연결되었다. 실제 임상기록에서 통계를 내어보면 흑인은 그저 아주 조금 높은 비율로 매독에 감염되었을 뿐이거나, 때로는 백인과 비슷한 비율로 감염되었을 뿐이었다(Hazen, 1914; Boas, 1915). 그러나 공중보건국 의사들은 통계가 뒷받침해주지 않는 잘못된 믿음을 지속했다.
이 의사들은 흑인에게 빈번한 발병 요인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이나 추론을 추구하지 않았다. 만일 흑인이 실제로 성병에 많이 감염되어 있었다면, 그것은 영양 결핍, 치료 불충분, 그리고 300년 이상 노예 상태에서 축적된 유전과 전염의 총체적 결과물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흑인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제대로 치료도 행해지지 않았고, 이것이 세대를 거쳐 여러 가지로 변형되거나 심화되어 온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생학적 인종주의, 인종병리학은 당시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수용되는 사상이었다. 1942년에 출판되어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교과서로 쓰였던 병리학자 줄리안 헐만 루이스(Julian Herman Lewis)의 『흑인의 생태』(The Biology of the Negro)는 흑인 인종을 생물학적으로, 즉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있어서 질병을 그 주요 소재로 삼았다. 의료와 의상 실험을 통해 수집된 실제 자료를 가지고 분석했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표현하며, 이로써 흑인종의 생태학, 특히 병리학을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루이스는 질병에 대한 인종별로 차별적인 반응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역시 낫적혈구 빈혈은 다른 인종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흑인의 병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해부학 권위자인 또 다른 흑인 몬타구 콥(Montague Cobb)은 유색인지위향상위원회(NAACP)의 기관지인 『위기』(The Crisis)에 이를 비판하는 서평을 썼다. 콥에 따르면 루이스는 환자의 다른 병력이나 유전요인, 혹은 병 노출이나 감염 기간 등을 고려하지 않고 ‘인종’만이 특정 질병의 요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그가 사용한 샘플들이 병원의 환자에서 채집되었다는 점, 백인에게서 나타나는 유사한 질병과의 유사성을 분석하지 않았다는 점 등 때문에, 낫적혈구 빈혈이 곧 흑인병이라는 동일시는 위험한 것이라 주장했다(Cobb, 1942: 394).
발견된 환자들의 케이스를 가지고 특정 인종의 병이라 일반화시켰다는 점에서 이제는 사회적 태도와 과학의 유착관계가 빚을 수 있는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지지만, 루이스의 책은 당시에는 교과서로 쓰였다. 시대적 상황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 정황을 알려준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도 미군은 흑인의 피를 백인에게 수혈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를 논쟁하고 있었다. 1947년에도 『미국의학회지』(JAMA)는 낫적혈구 빈혈을 흑인의 피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종병이라고 정의내리는 편집인의 글을 싣고 있었다(JAMA, 1947: 33).
이처럼 흑인의 피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논리는 일종의 ‘과학적 인종주의’로서 사회에 받아들여졌고, 공중보건국은 이를 공식 채택하여 생체 실험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터스키기 사건과의 연결고리에는 또 하나의 요소, 즉 버지니아 의과대학이 존재했다. 터스키기 실험을 주도했던 핵심 인물들 가운데 연방의무감이던 휴 커밍(Hugh Cumming), 의무감보였던 탈리아페로 클라크(Taliaferro Clark), 레이몬드 본더러(Raymond Vonderlehr) 등은 버지니아 대학의 의과대학 동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학연의 중요성은 버지니아가 당시 우생학 연구와 교육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Lombardo and Dorr, 2006: 300-306).
이들의 스승은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근무했던 폴 브랜든 배링어(Paul Brandon Barringer), 하비 어니스트 조단(Harvey Ernest Jordan)과 그의 동료 아이비 포만 루이스(Ivey Foreman Lewis) 등인데, 이 시기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인종 질병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과학적 인종주의를 설파했던 가장 대표적인 우생학자들이었다. 이들과 더불어 적어도 도합 7명의 의대 교수가 20세기 초반 버지니아 대학에서 우생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발언과 집필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계몽과 혁신, 그리고 진보의 길로서 우생학 실천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가르쳤다(Jordan, 1913: 577-579; Dorr, 2000: 257-264). 따라서 버지니아가 적극적 강제 거세 정책을 채택하고 또 바로 앞에서 살펴본 캐리 벅과 같은 사건이 발생했던 곳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터스키기 실험을 시작하는 연방의무감인 휴 커밍은 바로 버지니아 의과대학에서 그와 같은 가르침을 받고 졸업한 뒤 공중보건국에서 커리어를 쌓아 온 의사이자 군인이었다. 그는 1906년부터 1909년 일본 요코하마에 근무하면서 이민 문제와 검역 질병 관계 업무를 담당했던 경력이 있었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 기에 해군의 위생문제 자문을 맡아 장티푸스 억제 임무를 수행했고, 1920년에 연방의무감으로 부임해서 1936년까지 연임했다. 그가 재임 중이었던 1932년 터스키기 실험은 시작되었다[5].
그가 연방의무감에 임명되었던 당시 대통령도 버지니아 출신의 혁신주의자인 우드로우 윌슨이었고, 커밍의 전임 연방의무감인 루퍼트 블루(Rupert Blue) 역시 남부 출신으로 버지니아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은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커밍이 의무감에 취임한 후로 버지니아 대학의 동문들을 요직에 발탁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공중보건국 내에서는 이 대학이 가장 큰 인맥을 형성했다. 버지니아 대학의 예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우생학을 정상 과학으로 여겼던 교수들에 의해 제자 세대로 이 같은 사상을 계승시키게 되었고, 이들의 학맥이 연방 공중보건국의 행정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터스키기 사건으로 연결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Lombardo and Dorr, 2006: 310-314).
매독을 흑인병으로 규정하는 것이 혁신주의적 우생학, 과학적 인종주의의 덫이었다면, 장기간의 비치료 관찰실험을 가능케 한 것은 우생학으로 교육받고 군대식 공중보건 체제의 규율과 효율성을 갖춘 인물들과의 결합이었을 것이다.

4. 터스키기에서 과테말라까지

터스키기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1932년부터 1972년까지 40년간 공중보건국은 앨라배마 주 메이콘 카운티 터스키기 지역에 거주하는 25-60세의 남성 가운데 412명의 매독 환자와 204명의 대조군을 선발하여 ‘비치료 생체실험’을 했다. 공중보건국 소속의 의사들은 이들에게서 정기적으로 채혈을 하고, 뇌척수액을 채집하여 검사했으며, 그 변화상을 기록했는데, 일상생활에서 질병이 일으키는 변화를 관찰한다는 실험 목표를 철저히 수행하느라 이들에게 어떠한 치료도 제공하지 않았다. 심지어 페니실린의 보급 후에는 지역 의사들에게 공문을 보내 피험자들의 이름을 알리고 이들의 치료를 금하기까지 했다(Rockwell et al., 1964).
이 관찰실험의 문제점은 여러 차원에서 축적되었다. 우선 터스키기의 피험자들은 전원 흑인이었으며, 대부분 문맹의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193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메이콘 카운티 인구의 82%는 흑인이었고, 1931년 초등학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어린이 대부분이 하루에 한끼 정도의 식사를 할 뿐이었다. 1970년까지도 이 지역은 인구 절반이 빈곤선 이하, 3분의 1은 집안에 상수도가 없는 정도로 빈곤층이었다. 어른들은 교육 수준이 낮았고, 의료 서비스는 이 동네에 미치지 못했다. 식생활에 쓸 돈이 없는데 의사를 보러 갈 비용이 있을 리 없었다(Parran, 1937: 170; Johnson, 1934: 201-203).
두 번째로 보건국의 의사는 이들에게 ‘나쁜 피(bad blood)’라는 병에 걸려 있으니 정부에서 치료를 해 준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쁜 피는 당시 흑인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로, 그들이 겪고 있는 여러가지 증상을 포괄하는 용어였다. 각종 피부병과 퇴행성 질병, 그리고 관절이나 근육이 쑤시고 아픈 경우에도 흑인들은 그것이 나쁜 피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따라서 보건국 의사들이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흑인들로 하여금 매독을 특정시켜 이해하지 못하게 했고, 되도록 많은 흑인들이 거부감 없이 참여하게 만들었고, 그 치료법이나 경각심 등을 모호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것이 그들의 피, 즉 생물학적 열성인자 때문이라는 미묘한 인종적 편견을 주입시키는 효과까지 노렸던 것이다[6].
공중보건국에서는 매독이 성적인 질병이며, 흑인의 성적 문란과 부도덕성 비윤리성 때문에 퍼져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흑인이 곧 “지독한 매독 감염인종(a notoriously syphilis-soaked race)”이라고 낙인찍었다(Luche, 1916: 395). 그러나 실제로 메이콘 카운티의 매독 환자 가운데 61%는 성적 경로가 아닌 선천성 수직감염 등의 이유로 감염된 것이었다. 보건국에서는 “흑인은 어차피 치료를 원치 않으며, 치료에 저항한다”고 거짓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것을 근거로 이들이 치료가 아닌 관찰 및 실험 대상으로 적합하다고 결론내렸다[7].
인종적 편견 및 차별정책은 연구 대상자인 흑인들에게 혈액 검사 뿐 아니라 정기적인 척수 추출에 응하도록 유인했다. 척추 축수술을 통한 척수 추출은 신체적 고통과 건강상의 위험 뿐 아니라 엄청난 후유증까지 일으키는 검사였지만, 보건국에서는 마취제도 사용하지 않고 이 검사를 실시했다. 겁에 질린 흑인들에게 마지막 치료 기회라고 거짓 강조하여 척수 추출에 응하도록 했다. 때로 흑인을 유인하기 위해 치료와는 관계없는 비타민이나 아스피린을 처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비소나 수은을 처방하여 다른 부작용까지 유발하기도 했다(Washington, 2006: 163). 그러나 공중보건국의 클라크(Taliaferro Clark)나 본더러(Raymond Vonderlehr), 웽어(Oliver C Wenger) 등이 걱정한 것은 오로지 비용이었다[8].
1933년부터 12월을 시작으로 관찰 중이던 환자가 사망하기 시작하자, 본더러는 시신을 확보하고 지역 의사의 협조를 얻어 부검을 진행했다. 본더러는 매독 환자가 죽어서 부검이 되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주요 장기가 신속히 이송되어 검사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연방의무감인 커밍 역시 증상의 진단을 확정짓고 신체기관에 남겨진 질병의 영향의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체의 부검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터스키기 실험은 아무런 치료행위 없이 환자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셈이 되었다. 공중보건국 직원 웽어는 “죽기 전에는 이 환자들에게 관심이 없다”며 부검 결과 매독으로 인한 사망이 확실하다는 것을 밝혔다는 것을 “성과”라고 자랑했고, 지역 의사로서 부검에 참여했던 디블(Eugene Dibble)은 “검시를 얼마나 즐겼는지 모른다”며 “나중에 또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기쁘게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9].
공중보건국의 의사들은 연구 대상자들이 실험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해 흑인 간호사인 유니스 리버스(Eunice Rivers)를 채용했다. 1932년부터 20년간 리버스는 연구 대상자들을 추적하여 실험에 참여시키고, 가족을 설득하여 부검을 승낙하도록 했다. 환자와 가족의 친구로 상담을 해주고 신뢰 관계를 구축하여 낯선 의사들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실험에 적극 가담하도록 설득했던 리버스는 무려 145건의 사망 가운데 단 한건만을 빼고 모두 부검시키는 성공을 거두었다. 심지어 터스키기 실험 지역에 새로운 의사가 부임할 경우에는 리버스를 조수로 배치해서 실험 대상자들에 대한 치료를 차단하도록 했다. 그녀는 이 실험에서 완충지대이자 가교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Jones, 1981: 151-163)[10].
리버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실험이 폭로된 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녀는 피험자를 “친구이자 가족”으로 이해한다고 증언했고, 그들이 실험대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특혜 집단이 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아무 관심이나 치료도 받지 못할 사람들이 하다못해 아스피린과 관찰 및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니 그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리버스는 실제 유효한 치료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치료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으니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Jones, 1981: 161-165; Smith, 1996: 105-108).
검시를 통해 매독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결과를 확보하게 된 공중보건국 의사들은 이를 학계에 보고했다. 본더러를 포함한 여러 의사들이 터스키기 실험의 내용과 중간결론을 주요 의학저널에 게재했다. 내용은 매독이 여러 가지 합병증을 유발하고 장기를 손상시키며 피부 기형 및 퇴화를 악화시켰다는 것이었고, 매독 감염 기간이 길수록 그 증상이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환자의 검시를 통해 확보된 사실임을 숨기지 않았으나, 이 논문들에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11].
공중보건국은 터스키기 실험이 중도에 방해받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다. 1941년에 세계대전이 다시 발발했을 때는 실험 대상자들이 징집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징집될 경우 군의무대에서 치료받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3년에 페니실린이 등장하고 성병관리부 부장으로 본더러의 후임인 존 헬러(John Heller)가 부임했으나 그도 이 실험을 계속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페니실린의 등장으로 인해 오히려 “터스키기 연구 대상자 풀과 같은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것이므로 실험의 중요성이 더해졌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은 소중한 실험 대상이며, 혹여 이들에게 페니실린이 보급되어 “데이터가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Peters, et al., 1955: 130). 군인이자 의사였던 이들은 집요하게 실험에 집착했고, 연방 기구가 가지는 권한은 이를 효율적으로 실행하게 해주었다.
1951년에도 이 사업을 계속할지 중간 심사를 했으나 이때도 관련 의사들은 이미 20년간 의 투자와 인력, 그리고 그간 축적된 연구결과의 기반 위에 더욱 쌓일 데이터의 소중함에 대해 역설했다. 실험 기간이 길수록 더 확실한 정보를 가질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또한 대상자들이 노령화됨에 따라 성병과 노화와의 관련성을 입증할 가능성까지 있어 실험의 가치가 높아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Shafer, et al., 1954). 비인간적인 생체 실험을 경고하는 뉘른베르크 강령(1947)에 이어 1964년에는 생체 실험시 실험 대상자의 동의를 중시하는 헬싱키 선언이 채택되었으나, 거슬러 올라가 터스키기 실험의 절차를 재고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한때 진보 단체인 민주사회를위한학생회(Students for Democratic Society)에서 터스키기 실험에 대한 반대 시위가 있었고, 몇몇 의사의 문제제기도 있었지만, 공중보건국은 이를 무시하고 실험을 계속하였다(Jones, 1981: 179-182).
한 개인의 용단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 실험이 언제까지 계속되었을까. 1966년 공중보건국의 조사원 한사람이 이 실험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표를 썼다. 6년에 걸친 항의에도 효과가 없자 1972년 그는 신문기자에게 이 실험에 대해 폭로했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기사화되기에 이르렀다(Heller, 1972). 보도가 나가자 미국 사회는 경악했고, 바로 이듬해인 1973년 봄, 실험은 중단되었다. 생존한 환자들은 치료를 받기 시작했지만 이미 피험자 가운데 28인이 매독으로 사망, 100명은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부인 40명이 감염되었으며, 자녀 19명이 선천성 매독을 가지고 태어났다.
미국 상원은 인체실험에 관한 청문회를 개최했지만, 터스키기 실험에 직접 참여했던 의사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실험이 시작될 당시에는 좋은 치료제가 없었고, 페니실린이 나온 다음에도 이 약으로 효과를 보기에는 환자들의 매독이 이미 심각하게 진행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며, 환자들이 가난하고 무지하므로 어차피 자발적으로 치료할 가능성이 없었다고 항변했다. 40년에 걸친 실험 기간 동안 공중보건국은 매독이 심혈관 질환, 정신질환, 조기 사망을 초래할 수 있는 치명적 질병임을 인식했지만, 이를 알게 된 것이 바로 이 실험 덕분이라는 논리로 실험을 지속해야 할 정당성을 주장했다(The Final Report of the Tuskegee Syphilis Study Ad Hoc Advisory Panel, 1973).
한편 의학계에서도 공중보건국의 실험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다. 유수한 의학대학의 교수이자 유명 연구자들 중에도 터스키기 연구 대상자들에 대한 치료가 생명을 연장시켰을 것이라는 증거가 없고, 실험 동의의 법적 근거와 같은 원칙은 나중에 세워진 것이기에 이 실험의 윤리성 검토는 시대착오적이며, 무엇보다도 이 실험이 결과적으로 의학발전에 기여했기 때문에 정당하며 가치 있다고 주장했다(Kampmeier, 1974; McDonald, 1974). 이들에게는 의학발전을 위해서는 흑인 연구 대상자 몇 명의 인권은 유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실험 책임자들과 일부 의학계에서 실험의 정당성과 공헌에 대해 계속 주장했지만, 다수의 미국인들은 터스키기 실험에 대한 윤리적 심판을 유보할 생각이 없었다.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대한 각성과 함께 향후 터스키기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후속 조치가 이루어졌고, 1997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피해자와 가족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Mitchell, 1997).
하지만, 터스키기에 대한 반성과 각성이 일단락될 즈음, 공중보건국의 또 다른 사업에 대한 충격적인 고발이 이루어졌다. 2005년 터스키기 실험에 참가했던 한 의사의 개인 자료를 조사하던 연구자가 공중보건국이 1940년대에 과테말라에서 매독 감염 및 치료 실험을 진행했음을 발견했다. 공중보건국은 원래 미국 내에서 페니실린의 효용성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했었는데, 위험 요소가 많아 중단하게 되자 이 실험을 과테말라로 옮겨 확장해서 진행했던 것이다. 드러난 바에 따르면, 미국 공중보건국은 과테말라의 교도소, 정신병원 등에 수감된 1천6백여 명에게 매춘부를 이용하여 고의로 매독균을 감염시킨 후, 페니실린을 주입하여 그 효용을 검증했다(Reverby, 2012: 7-10). 제국주의 시기와 다르지 않은 배타적인 인종관이 이처럼 과테말라를 대상화한 실험을 가능케 했을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과테말라 실험을 지시한 커밍의 후임 연방의무감 토마스 파란 2세(Thomas Parran Jr.)의 행적은 이 사건을 접하는 이들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파란 2세는 전후 의학과 군대 사이의 연관관계 강화에 기여함으로써, 미국 현대 의학의 발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기에 외국에서도 위생 보건 사업을 시작했을 때 이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바로 1944년 공중보건법 통과 이후 조직 구도를 구축하는 중심인물이기 때문이다. 파란 2세는 전후에는 군대의 연구 실험 결과를 재빨리 공중보건국으로 가져와 민간에 적용시키는 데에 집중했고, 은퇴와 동시에 피츠버그 대학교에 공중보건대학을 설립하여 이를 교육에 적용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그런데 그는 원래 공중보건국에서 남부 농장지역의 위생 문제를 담당하다가 플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가 뉴욕의 주지사였던 시절 주 위생 및 보건 자문으로 영입된 진보적 인사였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파란은 행정부에 진입했고 결국 1936년 연방의무감에 취임했으니, 대표적인 ‘뉴딜러’ 중 한사람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바로 그가 터스키기 실험의 지속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1946년에는 과테말라에서 터스키기의 확장판에 해당하는 악명높은 매독 감염 및 치료 실험을 승인했던 의무감으로 역사에 기록된다(Hook, III, 2013: 281-282).
파란 2세는 흑인의 질병은 결국 백인의 책임이라고 보았고, 그러므로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군인답게 그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믿었다. 흑인에게 통할 말로 설명해서 그들을 실험에 유인하는 것은 필수적인 전략이라는 태도였다(Parran, 1937: 160-181). 세상을 개혁한다는 혁신주의가 백인 위주의 인종주의와 결합하고, 그것이 다시 군사행정의 효율과 합작을 하여 빚어낸 비극이었다는 것이 터스키기에서 과테말라로 이어지는 실험의 본질이었음을 파란이 입증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군 보건행정의 관료주의와 의료 우선주의의 결합이 인종주의적 우생학에 입각한 인체실험을 냉전기에까지 해외에서 끈질기게 이어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5. 맺음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쟁을 통해 확대된 연방정부의 공공보건은 의과대학 교육에 팽배해 있던 우생학과 인종병리학을 수용했다. 의학계와 연방 공공보건국은 이를 통해 인종적 담론을 만들고 보건 영역에서 실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갔다. 미국이 팽창주의를 실천하며 키웠던 사명감과 서양 중심적인 개혁의지가 군대식 보건행정과 결합하여 빚어낸 비극이 바로 공중보건국이 주도한 터스키기 실험이었다. 이때 형성된 이와 같은 의학 실험의 이념과 구조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 과테말라로 이어졌던 것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는 의지가 인종적 우열성에 대한 인식과 잘못 결합되고 국가의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정당화될 때 나올 수 있는 최악의 결과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가장 역설적인 사실은 이 실험에 붙은 “터스키기”라는 이름이다. 수많은 흑인 지역 가운데 이곳이 공중보건국의 첫 번째 실험지로 결정된 이유는 이곳에 바로 부커 티 워싱턴이 설립한 흑인 직업학교 “터스키기 인스티튜트”가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1881년 터스키기 흑인 사범학교에서 인스티튜트로, 그리고 터스키기 대학으로 진화하면서, 이 교육기관은 흑인의 자아 개발과 자율적 생활을 가능케 할 직업 훈련을 시키는 곳이었다. 이 지역의 매독 문제에 처음 주목한 로젠월드 기금(Julius Rosenwald Fund)은 흑인의 자립을 위해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연구를 시작했다(Clark, 1932). 그러나 대공황으로 연구가 단절되었고, 그 실험을 이어간 것은 공중보건국이었으며, 그 결과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이 흑인을 실험의 대상으로만 삼는 위험한 것이었다.
터스키기 피해자와 가족들의 정부 상대 소송과 승소, 정부의 보상과 사과가 이루어졌으나, 이 사건의 더 큰 유산은 의료윤리에 대한 각성이었다. 1974년, 국회는 “생명의학 및 행동학 연구에서의 연구 대상자 보호를 위한 국가위원회”(The National Commission for the Protection of Human Subjects in Biomedical and Behavioral Research)를 설치하여 임상시험 피험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연방정부 차원의 규제를 마련해 나갔고, 비로소 1979년에 이 위원회의 결과 보고서인 “벨몬트 보고서”(Belmont Report)를 발간하였다. 벨몬트 보고서는 헬싱키 선언을 미국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결과물로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읽어야 하는 지침서로 향후 모든 임상연구의 기초가 되는 세 가지 기본 윤리 원칙인 “인간존중, 선행, 정의”를 정하고 있다. 여기에 속한 것이 바로 정보에 기초한 동의서의 확보, 위험의 최소화, 피험자 선정의 공정성 등이다(Levine et al., 2012).
그러나 이러한 반성과 각성에도 불구하고 흑인에 대한 생체실험이나 의료차별은 지속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앞서 인용한 워싱턴의 책에 따르면,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실험이 여전히 가능하고, HIV 테스트나 신약 실험도 흑인을 상대로 이루어진다. 또한 빈민 가정의 어린이에 대한 심리학적 사회학적 조사들이 인종에 대해 이미 만들어져 있는 정형화를 강화하는 현상도 지속되는데, 이를테면 청소년 범죄 기록이 있는 가정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연구가 흑인의 범죄 경향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반면 인간 게놈 유전자 지도 작성에 이용되는 데이터는 백인의 것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흑인은 여전히 의학적으로 소외되거나 차별되는 구조라는 것이다(Washington, 2006: 244-346).
워싱턴의 우려와 경고는 법만으로는 완전히 격파되지 않는 인종주의의 생태를 고려할 때 새겨들을 만한 것이다. 우생학 자체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자행된 나치의 만행으로 인해 과학적 학문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유전적 능력이나 결함에 대한 섣부른 판단에 대한 경각심이 사회적으로 공유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생학은 ‘사회생물학’ 혹은 ‘발생학’ 등의 탈을 쓰고 과학적 지식으로서 물밑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으며, 전체를 위한 것이라는 명목으로 특정 집단을 차별하거나 불이익을 강요하는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터스키기 사건은 그저 흑인이라는 특정 집단에 대한 이제는 청산된 과거사가 아니라, 여전히 경각심을 가지고 그 배경과 이념을 살펴봐야 할 살아있는 경고이다.

Notes

1) 이러한 연구는 천여 건 이상 검색되는 바, 일일이 여기에 기록을 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판단한다. 다만 대표적으로 B. Lee Green, et al., “Detailed Knowledge of the Tuskegee Syphilis Study: Who Knows What? A Framework for Health Promotion Strategies,” Health Education & Behavior 38-6 (2011): 629-636; Vicki Freimuth, et al., “African Americans’ Views on Research and the Tuskegee Syphilis Study,” Social Science and Medicine 52(2001): 797-808; S B Thomas and S C Quinn, “The Tuskegee Syphilis Study, 1932 to 1972: Implications for HIV Education and AIDS Risk Education Programs in the Black Community,”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81-11 (November 1991): 1498-1505.

2) 1944년 공중보건법의 통과로 공중보건국(PHS)과 산하 공중보건서비스부대(US Pubic Health Service Commissioned Corps)의 조직이 정비되었다. 이로써 공중보건국은 연방의무감의 지휘 하에 국민 보건에 관련된 여덟 개의 부서들을 총괄하게 되었고, 병원을 확보하고 위생적 환경을 형성하고 보건 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필요 인력을 양성하고 더 효과적인 진단 및 치료법을 연구할 임무를 부여받았다(Snyder, 1994). 공중보건국은 1953년에 신설된 보건교육복지부(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를 거쳐 1980년부터는 그 후신인 보건복지부 산하에 자리 잡고 있다.

3) 미국 제국주의의 발전 양상은 이 글에서 다루기에는 방대한 연구 분야로, 여기서는 공중보건과 관련된 부분에 집중했다. 미국 제국주의의 성격과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분야의 고전을 참고할 수 있다. Walter LaFeber, Inevitable Revolutions: The United States in Central America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1993); William Appleman Williams,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 50th Anniversary Edition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2009).

4) Buck v. Bell, 274 U. S. 200. 그러나 당시 저능을 판단하는 기준은 모호하고 정확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캐리의 엄마의 엠마 벅은 거주지가 불분명하고 매독 환자라는 이유로 저능 판결을 받았으며, 캐리는 성적문란과 불손함이 저능의 근거였다. 캐리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판단은 그녀가 강간에 의해 임신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1927년 재판 당시 생후 6개월이었던 캐리의 딸 비비안의 경우는 후일 성장하여 학교에 진학했을 때 우등생이 되었다. 캐리 모녀 3대는 그저 보호자가 없는 가난한 빈민으로, 거대한 국가 권력과 권위주의적인 제도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는 불행한 처지였을 뿐이다(Lombardo, 2008).

6) Vonderlehr to Clark, January 28, 1933, Records of the United States Public Health Service Venereal Disease Division, Record Group 90, National Archives, Washington National Record Center, Suitland, Maryland(이후 NA-WNRC); Jones, 1981: 72에서 재인용.

7) Wenger to Clark, September 29, 1932; Wenger to Clark, October 3, 1932, NA-WNRC; Washington, 2006: 160-163에서 재인용.

8) Vonderlehr to Clark, January 22, 1933; Vonderlehr to Wenger, July 18, 1933; Deibert to Vonderlehr, November 26, 1938, NA-WNRC; Reverby ed., 2000: 80-82, 83-84, 89-90에서 재인용.

9) Wenger to Vonderlehr, July 21, 1933, NA-WNRC; Washington, 2009: 47에서 재인용; Dibble to Vonderlehr, December 18, 1933, NA-WNRC; Jones, 1981: 149에서 재인용.

10) 리버스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련인물 인터뷰와 각종 자료를 종합하여 서술한 존스의 해석을 전반적으로 따랐으며, 흑인 여성사의 시각에서 조망한 스미스의 견해도 참고하여 재구성했다.

11) Vonderlehr, et al., 1936; Heller, et al., 1946; Deibert and Bruyere, 1946; Pesare, et al., 1950; Rivers et al., 1953; Peters, et al.,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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