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E-Submission | Sitemap | Editorial Office |  
top_img
Korean J Med Hist > Volume 30(2); 2021 > Article
청대 의약시장의 변화와 ‘가짜 약’ 논란

Abstract

Since ancient times, fake drugs have been on the market in Chinese society. However, during the Ming-Qing Dynasty, this problem intensified as the size of the pharmaceutical market grew, the collection and distribution structure of pharmaceutical products became increasingly complex, and the phenomenon of separation between the prescription and distribution of drugs advanced. Additionally, the government did not manage the manufacturing or quality of drugs and there was no law or institution designed to solve the problem of fake drugs. Furthermore, social opinion also criticized the widespread problem of fake drugs, and patients and doctors had to rely on various pharmacognostic books and medical knowledge to find reliable drugs in the drug market.
Meanwhile, as merchants participated and invested commercial capital in the pharmaceutical industry, large reputable pharmacies began to emerge in large cities and produced drugs. With the commercialization of the pharmaceutical market, the public gained interest in drugs and consumed drugs produced by these pharmacies. Moreover, there were frequent problems in the market as fake drugs imitating popular drugs were distributed and the names of famous pharmacies were stolen. Although fake drugs were a universal social problem, the Qing government was reluctant to strictly control them tried to solve this issue by enforcing banning and punishment through local governments. Prominent pharmacies filed several lawsuits against the government over the theft of fake drugs and drug names. They also advertised the legitimacy and authenticity of drugstore to the public and customers.
Doctors and merchants responded to the problem of fake drugs by following occupational morality, developing drug discrimination, cracking down on organizational discipline, filing complaints with government offices, and advertising their authenticity. However, the fake medicines did not easily disappear despite such a response, as there was no state control or legislation. Evidently, the pharmaceutical market was already highly commercialized and its structure were complex. Moreover, the financial benefits of fake drugs, competition in the pharmaceutical market, and public demand for drugs with similar effects at low prices also affected the popularity of fake drugs. Hence, the distribution of fake medicine in the Qing society can be seen as a phenomenon of separation between the prescription and distribution of drugs, commercialization and consumption of drugs, and competition on the medical market.

1. 머리말

중국 명청시대에는 민간사회의 의료시장이 발달하고 대중이 의약지식에 관심이 높았으며 이와 관련된 저술도 활발하게 출판되었다(陳秀瑗, 2017: 3-4). 또한 청대에는 베이징이나 항저우, 쑤저우와 같은 대도시에 상인이 운영하는 대형 약포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약포에서 제조하여 판매하는 매약(賣藥)은 대중에게 인기가 높았다(余新忠, 2003: 312-313; 梁其姿, 2012: 149-150, 187-188). 즉 청대 중국사회는 의약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그 중 미리 제조해 놓은 형태의 약품인 매약이 일상생활에서 상품으로 소비되었다.
동시에 약에 대한 믿음과 신뢰도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 말 서양의학이 중국에 소개되고 수용되면서 사회 일부에서는 중의(中醫)에 대한 회의와 비판적인 여론이 높아졌는데, 이때에도 중약(中藥)은 여전히 중국인의 신뢰를 받았던 측면이 있다. 청 말 중의폐지론(中醫廢止論)을 주장했던 대표 인물인 유월(俞樾)도 “중의(中醫)는 폐지해도 약(中藥)은 모두 폐지할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중약(中藥)을 신뢰하는 입장이었다.1)
그러나 동시에 가짜 약이 시중에 만연했다는 우려와 비판도 있었다. 가짜 약은 흔히 가약(假藥)이나 위약(僞藥) 등으로 묘사되었고 의료시장에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가짜 약의 종류와 유형도 다양해서 약재의 산지와 품질을 속이거나, 약의 가공과 제조원칙을 지키지 않아 약효를 보장할 수 없는 경우를 지칭하거나, 유명 약포의 상호를 도용하고 약품을 모방하여 제조하는 경우를 가리키기도 했다.2) 이러한 가짜 약의 성행과 유통은 ‘엉터리 의사들(庸醫)’과 함께 청대 사회 의료 환경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의약시장이 발달하고 의약 소비가 활발한 도시를 중심으로 가짜 약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청대의 가짜 약 성행에 대해 본격적으로 언급하거나 연구한 논문은 드문 편이다. 탕팅요는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중국 약업사를 종합적으로 살피면서 동시에 주제별로 연구했는데, 그 중 가짜 약의 문제를 언급하였다(唐廷猷, 2013: 415-416). 청대 유명 약포 상호의 도용문제에 대해서는 몇 편의 연구가 있다. 우선 먼저 베이징 동인당(同仁堂)의 약포명 도용 소송에 대한 연구가 있다. 황신(黃鑫), 황타오(黃濤)는 동인당이 관청에 약포명 도용을 고소하여 승소한 사건을 고찰했고, 이를 통해 동인당이 합법적 권리를 지키고 약포의 지명도를 높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동인당이 승소한 이유에 대해 당시 가짜 약이 횡행하여 사람들에게 해를 미치는 일이 많아 국가가 이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黃鑫, 黃濤, 2004). 반면 장레이(张磊)는 위의 연구와는 다른 견해를 보이는데, 동인당의 약포명 도용사건에 대해 관청이 내린 처벌이 생각보다 가벼웠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청대 정부 역시 가짜 약에 대한 처벌을 엄중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해석하였다(张磊, 2007: 47-48). 반진민은(範金民) 청대 상업계에 전체적으로 상호명 도용과 가짜 상품 유통 문제가 심각했던 현상을 주목하고 분석했는데, 그 중 한 사례로 강남지역 약포명 도용의 문제를 소개했다. 그는 약포 이름의 도용에 대해 약포의 상업적 명성과 이익에 해를 끼치는 행위였고, 각 약포도 이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밝혔다(範金民, 2007: 159-172). 장중민(張仲民)은 청말 민국시대의 의약광고를 분석하여 당시 의약시장에 약의 효과를 과장하고 사실을 조작하는 광고가 팽배했으며, 이런 거짓, 과대광고에서 소개하는 약품 중에는 전혀 효과가 없는 ‘가짜 약’도 상당수 있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가짜 약들은 당시 중국인들의 동아병부(東亞病夫)라는 ‘열등한 신체’를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을 건드리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張仲民, 2014; 2017).
이상의 연구를 통해 청대 가짜 약 유행과 약포명 도용에 대한 상황, 이에 대한 청 정부와 지방 관청의 기본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각 연구에는 여전히 공백이 남아있다. 탕팅요의 연구는 각 시대마다 가짜 약의 문제가 존재했음을 밝혔으나, 가짜 약이 유행하게 된 배경과 청대의 의료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의약업의 발달과 가짜 약의 성행이 공존했던 현상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황신, 황타오와 장레이는 모두 동인당의 약포 도용 사건과 가짜 약의 문제를 다루었으나, 정부와 지방관이 처리한 방식에 대해 서로 다른 평가를 내렸고, 두 연구 역시 약포 명칭 도용과 가짜 약이 성행한 사회배경을 반영하지는 않았다. 반진민은 기존의 연구보다 강남지역 약포의 도용문제를 주목하긴 했으나 상업사의 시각에서 서술했기 때문에 당시 의료 환경에서 나타나는 모순에 입각해서 해석하지는 않았다. 장중민의 연구는 의약시장에 만연한 가짜 약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었으나 주로 청말 민국시기 이후의 사회상황에 집중하고 있으며, 청대 의약시장의 가짜 약과 약포의 소송문제를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청대 사회에 가짜 약이 성행하고 약포 상호의 도용 소송이 난무했던 상황을 당시 의료환경의 상황에 입각해서 해석하고자 한다. 먼저 청대 사회에서 가짜 약이 성행했던 상황이 이전 시대에 비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확인하겠다. 다음으로 당시 의약과 관련된 국가의 법률규정을 살펴보고 이에 근거하여 가짜 약과 약포명 도용 소송을 대하는 국가와 지방관의 태도가 어땠는지, 이러한 태도가 가짜 약의 성행에 미친 영향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마지막으로 청대 사회에 가짜 약이 성행했던 배경에는 어떤 다양한 원인이 있었는지 살펴보겠다. 이를 통해 본 논문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청대 의료 환경의 특징과 의약업의 상황을 이해하고자 한다.

2. 의약 시장의 가짜 약 성행과 혼란

가짜 약(假藥)이나 위약(僞藥)은 중국의 고대 사회에서도 줄곧 존재했고, 사회여론은 가짜 약을 파는 부도덕한 자들을 비판해왔다. 『황제내경 소문·보명전형론(素問·寶命全形論)』에서 이미 가짜 약을 거론하며 독약의 진위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序錄)』에서도 약물의 진위에 대해 논했다.3) 남북조 시대부터는 더욱 명확하게 “가짜 약(假藥)”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도홍경(陶弘景)은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에서 다음처럼 말했다.
  • 대다수의 의사는 약을 식별하지 못하고 시장 상인의 말만 듣는다. 시장 상인 역시 약을 구분하지 못하며 모두 약을 채집하는 자에게 맡긴다. 약을 채집하는 자들은 약을 위조하는 것을 익히니 (시중의)약의 진위와 좋고 나쁨을 가늠할 수 없다.4)

도홍경의 지적에서는 당시 시장에 가짜 약재가 섞여 있는 일이 흔하고 약재의 채집과 판매활동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도홍경은 약재를 잘 알아야 하는 의사와 상인조차 약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세태를 비판했다.
송대의 기록에서도 가짜 약의 문제가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송시기의 문인 이지언(李之彥)은 문집에서 다음처럼 이야기했다.
  • 오늘날의 약재는 저렴한 것도 이전보다 수십 배 비싸고, 비싼 것은 이전보다 수백 배 비싸다. 돈을 가지고 약포를 찾아 약재를 구하려고 해도 얻을 수 없으니 진짜 약이 이토록 얻기 어려움을 누가 모르겠는가. 약포를 개설하여 사람을 불러 가짜 약(僞藥)을 사게 하는 자는 어리석고, 가짜 약을 사고서 병이 낫길 바라는 자 또한 어리석다.5)

비슷한 시대에 『원씨세범(袁氏世範)』의 「처기(处己)」에는 가짜 약과 가짜 약을 팔아 인명을 경시하는 행위가 세상에 만연하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으며 반드시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 시장의 상인들은 형편없는 품질의 물건을 꾸며 새것처럼 하고, 가짜의 것을 꾸며 진실되게 만든다. …… 약재는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하기 쉽다. …… 진실된 약을 파는 자는 곧 가산이 풍족하고, 자신 스스로 영화와 장수를 누리고 자손이 급제하였다. 또한 이전에 내가 보았던 가짜 약을 파는 자는 처음에는 돈을 벌어 자신의 꾀가 통한 줄로 알았으나 암암리에 재산이 떼어 먹히고, 몸에 화를 입거나 자손이 가산을 탕진하였다. 이것은 약을 사는 사람 대다수가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기 때문이다. 효자와 효손은 오직 부모의 병이 낫길 바라는 마음인데 [상인이] 가짜 약으로 남을 속여 사람을 상하게 한 것이다. 인명이 가장 중요한데 무고하게 해를 입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는가?6)

즉 이미 송대에는 시장의 상인들이 가짜 약을 유통시키는 문제가 있었고 이런 사회문제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송대의 정부는 의약에 비교적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수도와 지방에 약소(藥所)를 세워 약의 품질과 가격의 안정에 관여했다(梁其姿, 2012: 139). 이러한 전통은 금·원대에도 이어져 관약국(官藥局)이 약품을 생산하고 품질을 보증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중의 가짜 약의 유통과 제조를 철저히 막을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唐廷猷, 2013: 377).
명대 초기에는 원대의 관약국, 혜민약국의 전통을 계승했으나, 갈수록 지방의 약정(藥政)에 소홀하였고 관약국 역시 쇠락하였다. 그 결과 명 가정연간 이후에 혜민약국은 역병이 발생했을 때만 운영되는 임시성의 기구로 바뀌고 그마저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곳이 많았다(梁其姿, 2012: 143-145). 이와 달리 민간의 약업은 날로 번성하고 있었다. 시중에는 본초서(本初書), 방서(方書)등 의약서적의 출판이 유행했고, 민간의 의사들 중 약포를 운영하는 자가 늘어났다. 약상들은 갈수록 상업루트를 확장하였고 약시(藥市)에서는 각지의 유명약재들이 거래되었다.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민간의 의약업은 날로 성장하였다(梁其姿, 2012: 149-150, 187-188; 余新忠, 2003: 312-313)7). 그러나 이러한 민간 약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가짜 약의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었고 더욱 복잡하게 변했다.
명대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소개된 약재의 설명에서는 시중의 가짜 약에 다양한 종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약의 산지에는 남쪽과 북쪽의 차이가 있고, 절기에는 빠르거나 늦는 차이가 있으며, 뿌리와 싹은 채취 방식이 다르고 제조에는 법도가 있다. 때문에 시장에서 파는 약재들 중 지황(地黃)은 솥에 달여 익히고, 대황(大黃)은 불에 쬐어 말리고, 송황(松黃)과 포황(蒲黃)을 섞어놓고, 장뇌는 용뇌와 섞어놓았으니. 모두 잘못 만든 가짜인 것이다.8)

  • 요동에서 나는 인삼 중에 껍질이 있는 것은 누렇고 윤택하면서 색이 방풍과 같고, 껍질을 벗긴 것은 희고 단단하여 분가루와 같다. 가짜는 모두 사삼(沙蔘), 제니(薺苨), 길경(桔梗)의 뿌리를 채취하여 조잡하게 만든 것이다. …… 사람의 형체와 유사한 것을 해아삼(孩兒蔘)이라 하는데, 가짜가 더욱 많다. …… 근래 어떤 야박한 자들은 인삼을 우선 물에 담가낸 즙을 자기가 먹고 곧바로 햇볕에 말려 다시 팔아먹는다. 이것을 탕삼(湯蔘)이라 하는데 전혀 쓸 수 없으니 잘 살펴야 한다.9)

은주(銀主)에서 나오는 자호(茈胡)는 옅은 흰색이고 부드러우며 쉽게 얻지 못한다. 북쪽의 시호는 약에 넣어도 좋다. 남쪽에서 나오는 것은 뻣뻣하고 단단하여 사용하기에 알맞지 않다. 근래에 시장 사람들이 은주의 자호 대신 거짓으로 충당하는데 거의 다른 점이 없으니 판별하지 않을 수 없다.10)
즉, 이시진에 따르면 시중의 약 중에는 약재의 알맞은 가공방법을 거치지 않아 제대로 효과를 보기 힘든 경우가 있었고, 또한 상인들이 고의적으로 비슷한 약재를 섞거나 상등품의 약과 하등품의 약을 섞기도 하고 여러 차례 재탕한 약재를 다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약재마다 가장 뛰어난 명산지가 있는데 이것을 중국에서는 도지(道地) 혹은 지도(地道) 약재라고 했고 가장 우수한 품질의 약으로 평가했다. 도지(道地) 약재의 개념은 고대부터 축적되어 왔는데, 특히 명대에 의약시장에서 도지약재의 개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唐廷猷, 2013: 409-410). 때문에 저질의 약재를 도지약재라고 속이는 경우도 흔히 나타났다.
가짜 약이 시중에 보편적으로 존재했고 대중에게 익숙했다는 것은 가짜 약과 관련된 속어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청말 민간사회에 통용되었던 수많은 속어와 상인의 전문은어(行語)를 정리하여 엮은 『강호통용절구(江湖通用切口)』와 현대에 편찬된 『중국은어행화대사전(中國隱語行話大辭典)』에는 가짜 약과 관련된 용어가 있는데 각 지역마다 가짜 약, 혹은 가짜 용골, 가짜 인삼 등을 판매하는 자를 가리키는 은어가 다양했다. 예를 들어 북방지역에서는 가짜 약을 汗(한), 가짜 약을 판매하는 자를 挑粘漢(조점한)라고 불렀고, 쓰촨 지역에서는 가짜 약 판매자를 拍丁(박정)이라고 불렀다. 또는 시중에서 가짜 용골(갑골)을 판매하는 자는 淒涼子(처량자), 가짜 인삼을 판매하는 자를 放條子(방조자)라고 부르기도 했다.11)
가짜 약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은 시장의 상인만이 아니었다. 청대의 민담이나 소설에도 가짜 약이나 약을 둘러싼 속임수가 등장하는데, 떠돌이 의사인 강호낭중(江湖郎中)이나 도사들이 주로 가짜 약의 판매자로 묘사되었다. 청대 말기에 출판된 필기문집인 『청패류초(清稗類鈔)』에도 가짜 환약(丸藥)을 파는 도사(道士), 사기꾼 등의 이야기가 묘사되었다.
  • 청 광서(光緒) 기해(己亥)년 북경 근처의 한 사원에 대력환(大力丸)을 파는 도사가 있었다. 그는 대중에게 “이 대력환(大力丸)을 먹으면 칼에 베여도 피가 흐르지 않는다. 만약 팔을 베어 피가 흐르면 당신에게 은(銀)을 주고 피가 흐르지 않으면 나에게 돈을 달라”고 호언장담했다. 실제로 시험해보니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12)

  • 교활한 자들은 걸핏하면 가짜 약을 판매하여 남의 재물을 약탈하니 이는 배 위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난다. 쑤저우에서 목탁(木瀆)으로 가는 배에 손에 심각한 부종을 앓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갑과 을이 대화를 나누는데 갑은 자신이 시장(西藏)지역에서 막 돌아왔으며 그 지역에서만 나는 매우 귀한 신약(神藥)을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 이 약은 …… 사지의 부종이 없어지는 효과가 있는데 다만 가격이 매우 비싸 자신도 소량만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 갑은 화려한 상자 속의 노란 환약을 조심스레 보여주고 곧 배에 있는 사람들도 관심을 보였다. 부종을 앓는 사람이 약을 바르자 곧 심했던 손의 부종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곧 앞다투어 약을 샀다. 배가 도착하자 갑, 을과 약을 발랐던 환자가 곧 내려 사라졌다. 뱃사공은 배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모두 가짜 약을 파는 사기꾼들에게 속았음을 알려주었다.13)

당시 유행하는 대련(對聯)에서도 이런 자들을 풍자하며, “이들은 처방을 말하면서 가짜 약을 파니 절반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4)
청나라 말기에 사회개혁을 목적으로 쓰인 견책소설(譴責小說)인 『이십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에는 가짜 금연약(戒煙藥)으로 이익을 보는 저질삼(褚迭三)이라는 인물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나타난다. 저질삼은 본래 성 안에서 의사노릇을 하던 자였는데, 어느 날 어린아이를 잘못 치료하여 사망하게 하였다. 이후 그는 다시 환자를 보지는 않았으나 대신 각종 방서(方書)를 모아 매약(賣藥)을 제조하여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제조한 약은 문제가 많았고 관청(衙門)에서는 그가 “거짓 약으로 사람을 해친다.”라고 판단하여 칼을 씌우는 형벌인 가호(枷號) 3개월 형에 처하고, 본래 고향으로 쫓아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상하이 조계지로 옮겨가 다시 금연약(혹은 아편 치료제)을 만들어 팔았다. 그는 그의 약(藥膏)이 아편중독에 효과가 좋으며 아편을 피울 때마다 자신의 약을 섞어서 쓰면 점차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 약은 네 덩어리에 양은(洋銀) 1냥으로 아편보다 세 배가 비쌌다. 그러나 그 약은 아편중독을 치료하기는커녕 약에 중독되게 하였다.15)
이렇듯 시장에 가짜 약이 혼재되어 있고 진위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비단 약을 구입하는 환자들만이 아니었다. 가짜 약에 대한 대중의 불안과 불만의 화살은 약을 환자에게 직접 주거나 처방하는 의사들에게 돌아가기도 했다. 가짜 약을 비판하는 여론에서는 가짜 약의 피해가 발생하는 원인의 하나로 약을 다루는 의사들이 부도덕하거나, 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약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경제적 이득을 탐하여 가짜 약을 제조, 사용하는 의사들에 대한 경고는 당시 의사들이 지켜야 할 도덕윤리인 의덕(醫德)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대 초의 공과격(功過格)류의 선서(善書) 중에는 “돈이 들지 않는 공덕(不費錢功德)”이라는 선서(善書)가 유행했다. 이는 각 직업이나 계층에게 상응하는 도덕규범을 열거한 것인데, 열거하는 직종은 관리, 지방사대부, 대중, 사인, 농민, 상인, 의사, 군인, 부녀, 승려와 도사 등 다양한 직업과 계층이 있었고, 각 선서마다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었다. 그 중 의사에 대한 부분에서는 항상 “가짜 약을 팔아 사람을 해치지 말라(不賣假藥誤人病)”는 내용이 포함되었다.16) 또한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과 같이 인과응보를 나열한 선서(善書)에도 가짜 약을 팔았을 경우 의사 자신은 물론이고, 후손도 해를 입을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다. 즉 대중은 의사들이 가짜 약(假藥), 위약(偽藥)을 사용하여 환자에게 이익을 갈취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한편, 명 청대 의사들은 자신 역시 시중에 제조되고 유통되는 가짜 약의 피해자라고 여겼다. 만약 일부 의사들이 약의 진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환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치료를 잘못하여 환자를 죽인 용의살인(庸醫殺人), 혹은 재물을 탐하여 가짜 약을 사용했다는 누명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대의 민담집에는 가짜 약 때문에 용의(庸醫)살인의 누명을 쓸 뻔한 의사의 이야기가 반영되었다.
  • 의사 김양옥(金良玉)은 의학과 의술이 모두 뛰어났으며 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매우 신중하였다. 어느 날 폐풍(肺風)을 앓는 5세의 환자에게 마황(麻黃) 3분(分)을 썼으나 듣지 않자 다시 5분(分)으로 증량하였고, 역시 효과가 없자 7분(分)으로 증량했다. 그러나 갑자기 환자가 땀을 많이 흘리고 상태가 나빠지자 인삼과 오미를 써서 막고 다른 약으로 치료하여 낫게 했다. 조사해보니 처음의 마황이 모두 가짜 약재였고 7분의 마황이 진짜 약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증세가 나빠진 것이었다. 어떤 가게의 주인이 부종(水腫)을 앓아 십조탕(十棗湯)으로 치료했는데, 재차 써도 반응이 없었다. 이전에 가짜 약의 사례를 경험했기 때문에 약을 찾아 검사하니 부패하여 전혀 기미(氣昧)가 없는 것이었다. 즉시 다른 약포에 가서 약을 바꾸니 한 첩의 약으로 곧바로 나았다. 의사 김 씨는 오랜 경험으로 익숙하여 다행히 불행을 면했으나, 또한 애석하다.17)

위의 이야기에서는 의사들이 가짜약이 제조되고 유통되어 환자와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청대의 의사 서대춘(徐大椿)은 당시 사회여론이 의사를 불신하고 의료사고가 모두 의사 때문에 일어난다는 비판에 대해 항변했다. 특히 그는 약포에서 제대로 약을 분별하지 못하거나 고의로 가짜 약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자들이 많아 사고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세간에 남을 속이려고 마음먹고 가짜 약을 만들어 재물을 취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고의로 해악을 저지르는 것이며, 모르고 죄를 저지른 자들과는 다르다.”18)
서대춘의 지적대로 당시 시중에 가짜 약은 흔했기 때문에 의사들이 항상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의사들은 의학이론의 소양과 임상경험을 갖추는 것도 중요했고, 가짜 약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했다. 특히 가짜 약을 팔아 이익을 얻으려는 상인들을 경계해야 했다. 청대의 의사 정국팽(程國彭)은 의료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잘못을 가결의 형식으로 이야기했는데, 그 중 약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는 「약중오(藥中誤)」에서 가짜 약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다. “약의 문제란 약이 진짜가 아닌 것이니, 약재가 진짜여야 그 효과도 비로소 깊을 것이다. 유명무실한 약이 어찌 효과가 있겠는가? 나쁜 무리들이 의사가 나쁜 마음을 먹게 한다.”19)
그러나 의사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은 가짜 약, 위약의 판별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다. 특히 가짜와 진짜가 섞여 있고 약을 파는 자가 속이는 경우, 의사 역시 가짜 약에 당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했다. 명 말의 의사 진가모(陳嘉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의약의 매매는 시중에서 흔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판별하는 것이 정교하지 않아 착오를 피하기가 어렵다. 속담에서는 ‘약을 파는 자는 눈이 두 쌍이고, 약을 사용하는 자는 눈이 한 쌍이고, 약을 먹는 자는 눈조차 없다’고 하니 과연 빈 말이 아니다. 각종 각양의 수많은 속임수가있다”고 했다.20) 즉, 의사들은 가짜 약을 생산한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들 역시 가짜 약의 피해를 입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스스로의 덕을 함양하고 강조하여 가짜 약의 생산자라는 의심을 피하고자 했고, 동시에 스스로 약재와 약의 판별능력을 기를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 가짜 약의 문제는 약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짜 약이라고 부르는 경우를 정리해보면 첫째, 약물의 채집과 보관의 원칙을 지키지 않아 품질과 효과가 저하된 경우, 둘째, 평범한 약재를 도지 약재(道地藥材)라고 속이는 경우, 셋째, 고의로 약물의 가공, 제조원칙을 위반하여 이익을 꾀하는 경우, 넷째, 저렴하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약재를 비싼 약으로 속이는 경우, 다섯째, 약포의 이름을 도용하여 위조하거나 모방한 약을 판매하는 경우 등이었다. 특히 명청대 이후 관약국(官藥局)이 폐지되고, 국가가 의약의 품질이나 진위 여부에 관여하지 않게 되면서, 환자와 의사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각종 본초서와 의약 지식에 의지하여 시장에서 믿을 수 있는 약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3. ‘가짜 약’에 대한 법적 처벌과 한계

중국의 역대 법률 중 의약에 대한 조항은 주로 용의살상인률(庸醫殺傷人律) 혹은 용의살상률(庸醫殺傷律)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형률 인명(人名)편에 속하며 고의로 잘못된 약을 사용하여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사망했을 경우에 대한 처벌이었다. 그 중 약과 관련된 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률(唐律)에서는 “독약을 사람에게 쓰거나 판매하는 자는 교수형(絞刑)에 처한다. 판매하는 자가 정황을 몰랐을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 독약을 매매하였으나 아직 사용하지 않은 경우는 유배형(流刑) 이천리(二千里)에 처한다. …… 만약 고의로 사람에게 먹이거나 판매하여 사람에게 해를 입히면 강제노역형(徒刑) 일년형(一年刑)에 처하고, 이로 인해 사람이 사망하면 교수형(絞刑)에 처한다”고 정하고 있다.21)
송 대와 원 대의 법률과 조항에는 독약과 고의살상에 대한 기본조항과 더불어 가짜 약에 대한 조항이 추가된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송형통·잡률』에는 “약을 판매하는 자가 본방(本方)대로 하지 않아 사람을 살상(殺傷)하는 경우 고의살상(故殺傷)으로 처벌한다.”는 조항을 볼 수 있다.22)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에는 가짜 약에 대한 일부 내용을 볼 수 있다. 고종(高宗) 소흥(紹興) 6년 10월 4일의 조서(詔)에는 혜민화제국(惠民和劑局)에서 제조하는 약으로 속여 가짜 약을 파는 행위를 처벌했다. “가짜 약을 만들어(관의) 도장(印)을써 붙여 관약(官藥)으로 파는 경우 위조제법으로 처벌한다.”23) 소흥(紹興) 26年(1156년) 1월 19일의 조서(詔)에는 약재를 속여 가짜 약을 판매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이 있다.
  • 듣기로 시중에 숙약(熟藥:조제약)을 판매하는 자가 왕왕 재물을 탐하여 대개 가약(假藥)을 사용하니 이를 먹은 자가 다치고 심지어는 사망한다는 것을 들었다. 이후 약을 판매하는데 감히 다른 약을 대체하여 쓴 자는 자백하게 한다. 만약 몰래 숨졌다가 다른 자에게 고발당한 자는 가짜 약을 판매한 자와 똑같이 단죄하고, 고발한 자는 300관(貫)을 상으로 준다. 범죄자는 벌금형에 처하고 「본방대로 하지 않아 살상한 죄(不如本方殺傷人)」로 처벌한다. 임안부(臨安府)와 각 로, 주, 현(路州縣)에 방을 내리고 효시한다.24)

원대(元代)의 법과 제도가 수록된 『원전장(元典章)』에는 독약 및 가짜 약의 조항을 확인할 수 있다. 지원(至元) 5년(1264년) 중서성(中書省)이 황명을 받들어 가짜 의사와 가짜 약의 처벌을 논했다.
  • 의학과 의약을 모르는 자가 함부로 의술을 행하여 재물을 탐하고 약을 함부로 써서 사람을 해치는 일이 심각하다. …… 일등부인(一等婦人)이라는 자는 낙태약을 다루는 자인데 폐단이 심하다. …… 또한 거리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가짜 약을 판매하고 함부로 의술을 행하는 자가 있으니 모두 엄히 금지하고 처벌한다.25)

지원(至元) 9년에는 비상(砒霜), 파두(巴豆), 오두(烏頭), 부자(附子) 등과 같은 약재를 매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약포가 약을 판매하여 사람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면 해당 약포는 장형(杖)60과 벌금 100냥에 처하고 피해자에게 보상하게 했다.26) 즉, 송대와 원대에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의사와 약을 관리하고 가짜 약에 대해서도 비교적 구체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
명대와 청대에는 이전 시대의 의약에 대한 조항을 계승하고 있었다. 명대의 『대명률(大明律)』의 「인명(人命)」편에는 “독약으로 사람을 살인하는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독약을 샀으나 아직 사용하지 않은 자는 장형(杖刑)일백, 도형(徒刑) 3년형에 처한다. 정황을 알았으면서 독약을 판매한 자는 이와 같은 죄로 처벌한다. 정황을 몰랐던 경우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했고, 청대의 『대청률』 역시 이를 따르고 있다.27)
그런데 가짜 약과 관련된 구체적인 처벌은 주로 비상 등 독약 등으로 인해 사망이 발생하는 경우에 한정되었다. 예를 들어 청대 건륭(乾隆)17년 안휘성의 안건(案)에서는, 약포(鋪號)가 약재를 제대로 변별하지 못하고 잘못 판매하여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해 “용의(庸醫)가 본방대로 치료하지 않는 경우”에 비추어 「과실살인율」로 처벌하고 벌금형에 처했다. 건륭(乾隆) 30년에는 “제색포호(諸色鋪號)가 비상 등의 독약을 판매하면서 약물의 내력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이익을 탐하여 섞어 판매하여 사람의 생명을 해친다면 장형(杖刑) 80에 처한다.”는 조항을 추가하였다.28)
직접적인 인명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에는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건륭, 가경연간의 가짜 약과 관련된 보고를 통해 청 정부의 가짜 약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건륭23년 최응개(崔應階)는 “가짜 삼(蔘)”의 폐단을 엄히 금지하고, 이것을 “사사로이 가짜 은을 제조하는 예(私造假银之例)”에 비추어 엄형에 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최응개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 성회(도시)지역은 상인들이 밀집하여 중개인의 속임수가 필시 많으니, 가짜 삼을 만들어 팔아 재물을 편취하는 일은 시장의 蠧(좀벌레)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지방관이 그때마다 조사하여 엄히 취조하여 처벌하고 금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만약 최응개가 주청한 것처럼 ‘사적으로 은을 주조한 예’에 비추어 처벌한다면, 시중의 가짜 물품들은 하나에 그치지 않으니 어찌 하나하나 비교하여 법 조항을 세우겠는가. 번거로움을 야기할 것이다. 각 순무 등은 하급기관에 조사하도록 명령하여 만약 이러한 폐단이 발생하면 곧 가중처벌하고, 법률에 정식 조항이 없다고 해서 경솔하게 마무리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제멋대로 행동하여 가짜를 팔아 이익을 얻거나 가짜 약으로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게 하라.29)

즉, 청 조정에서는 기본적으로 시중에 가짜 약이 만연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동의했으나 인명사건에 연루되지 않는 한, 이러한 행위를 다시 법률 조항에 추가하거나 중형으로 처벌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지방관이 엄격히 단속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
가경 연간에도 비슷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가경(嘉慶) 20년(1815년)에 어사(禦史) 호승공(胡承珙)이 민간에 가짜 약(假藥)으로 혼란을 일삼는 무리를 조사할 것을 청하자, 가경제는 “그 무리들은 단지 약을 팔아 이익을 얻기 위함이니, 지방관이 스스로 처벌하여 금지하게 할 일이고, 성지를 내려 엄히 처벌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30) 즉 청 정부는 가짜 약이 성행하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중앙 정부의 차원에서 관련 법을 정비하거나 엄형을 집행하기보다 지방관이 무마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방의 의학기관 역시 가짜 약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는데, 명대와 청대의 정부가 지방 의학을 관리하지 않으면서 지방의 의학기관이 와해되고 의관이 실제 의약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狄鴻旭, 2014: 47-49; 2015: 62).
청나라 광서제 말에 신정(新政)이 시행되면서 의약과 관련된 법의 조항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 위생처(衛生處)가 신설되고 거리청소, 방역, 음식과 도축의 검사 및 의약물 검사 등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의약에 관련된 법이 위생의 항목에 포함되었고,31) 법을 위반하여 약품을 판매하는 경우는 벌금형에 처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32) 또한 아편전쟁 이후 조계지에 서양약국과 약품이 유입되고 각종 엉터리 아편치료제가 시장에 유행하면서 의약시장에 혼란을 초래했고, 청 조정에서도 이를 막기 위한 법이 제안되었다.33) 또한 신정 당시 중국 내 각종 위조제품을 단속하고 근대 상업제도를 시도하면서 상표의 등록이 추진되었는데(範金民, 2007: 163-164), 이 때 상표권 등록의 대상에 각종 의약품 및 약재, 전통 환산고단 등의 매약이 포함되었다.34) 즉 기존 법률조항에서 의약은 항상 인명살상과 관련되었는데 상업 활동 및 위생의 영역에서 논의된 것이다.
민국시대 이후에는 약상 및 약사, 의약품에 대한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법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1915년 10월 10일에는 북양정부(北洋政府) 내무부가 약상(藥商)을 관리·감독하기 위해 「관리약상장정(管理藥商章程)」 30조를 공포했고, 뒤이어 난징국민정부 위생부에서는 1929년 8월 24일 「관리약상규칙(管理藥商規則)」 29조를 공포하였다. 또한 약의 제조를 담당하는 약사(藥師)를 따로 나누어 1929년 「약사임시조례(藥師暫行條例)」 25조를 반포하여 약제사의 자격조건을 규정하였다. 약품 관리에 대한 법도 마련되어서 1930년 4월 26일과 1936년 12월 4일 남경국민정부 위생부(위생처)에서는 「관리성약규칙(管理成藥規則)」 20조를 공포하고 약품의 품질과 제조를 엄격히 관리할 것을 밝혔다. 이때 환산고단(丸散膏丹)과 같은 중의학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의 매약도 포함되었다. 이후 매약은, 위생부의 「성약허가증(成藥許可證)」을 취득한 약상이나 약사만이 제조 판매할 수 있게 하였다(樊波, 2012: 57-63).
이상 역대 의약과 관련한 법적 처분을 살펴보면, 조정에서 가장 중시하고 무거운 처벌을 내린 것은 비상, 부자와 같은 독약을 써서 사람을 해치는 경우였다. 또한 사람을 해치는 목적으로 독약이 쓰일 것을 알면서도 판매하는 등 고의성을 띈 경우에는 장형(杖刑)으로 처벌했고, 약재를 잘못 판매하여 사람이 다치는 비고의적인 사고의 경우에는 “본방대로 하지 않아 살상한 경우(不如本方殺傷人)”로 처벌했는데, 이는 의사(庸醫)에 대한 처벌과 같은 것임을 볼 수 있다.
그 외, 약을 제조하는데 다른 약재로 대체하여 품질이 낮은 약을 판매하거나 약재를 속이는 경우, 송대와 원대는 중앙정부 차원의 조치가 있었다. 특히 송대에는 혜민약국과 같은 국가의 약국(藥局)에서 약을 제조하고 판매했기 때문에 도장을 위조하여 가짜 약을 판매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이 있었다. 그러나 명, 청대에는 독약의 제조와 판매에 관한 처벌이 있을 뿐, 약의 품질에 대한 관리 및 약의 위조에 대한 처벌은 보이지 않았다. 이는 송, 원대와 달리 명청대 국가가 의약을 직접 관리하지 않았고, 이미 민간의 의사나 상인들에 의해 의료시장이 유지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건륭과 가경연간의 사례에서 보이듯, 정부는 가짜 약에 대한 엄형을 피했고, 중앙정부 차원의 직접적인 조치보다 지방관의 차원에서 해결하게 하는 기본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의약은 국가가 직접 관여하고 통제하는 대상이 아니었고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가짜 약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경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청말 광서제의 신정이 시행된 이후에야 의약이 점차 위생의 영역에 흡수되기 시작하고, 상표등록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고 약재와 환산고단과 같은 매약이 상표권을 가지면서 위조된 약재나 약품을 단속할 수 있는 초보적인 법적 근거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민국시대 이후에는 근대법이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의약법 역시 구체화되고 전문화되기 시작했고 가짜 약과 상표 도용에 대한 구체적인 규제와 처벌의 조항도 등장했다.

4. 의약시장의 변화와 매약의 상품화

앞서 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대부터 중국의 의약시장에는 줄곧 가짜 약의 문제가 존재해왔다. 그런데 명대 이후 의약시장에 나타난 점진적인 변화와 청대 의약시장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매약의 상품화로 인해 가짜 약의 문제가 조금 더 복잡하게 변한 것으로 보인다. 의약시장에 나타난 변화는 유통구조의 분화와 의약 분업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장에서 언급했던 도홍경(陶弘景)의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에서는 의사와 약포의 상인이 약의 채집활동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약을 채집하는 자들이 약을 위조하고 조작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이 말은 이미 남북조시대에 약의 채집과 판매, 처방이 분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홍경은 은연중 이러한 유통구조의 분화를 가짜 약이 시중에 존재하는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명 청대에는 의약시장의 규모가 더욱 커졌고 복잡해졌으며 중간에 개입하는 상인들의 수가 늘어났다. 예를 들어 청대의 의사 오국통(吳鞠通)은 가짜 약의 문제가 심한 원인에 대해 의약시장의 복잡한 유통구조와 연관지어 다음처럼 이야기했다.
  • 옛날의 의사들은 스스로 약을 채집하고 그 형·색·기·미(形色氣味)를 상세히 구분하였고, 여러 차례 시험하여 가장 적합한 것을 찾아 비로소 사람에게 사용하여 치료했다. 지금은 약포가 약행(藥行)에게서 약을 구하고, 약행(藥行)은 객상(客商)에게서 약을 구하고, 객상(客商)은 부두의 좌객(座客)에게서 구하고, 좌객(座客)은 각성(省)의 농민에게서 약을 구한다. (때문에) 그 사이에 발생하는 속임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35)

오국통은 고대에는 의사가 직접 약을 채집하고 다루었기 때문에 가짜 약의 문제가 심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오국통이 살았던 시대에는 이미 약의 채집과 유통에 수많은 중간 상인이 관여했고, 이 과정에서 약재에 조작이 이루어질 기회가 너무나 많았다. 각 성의 농민이 약을 채집하여 좌객(座客)이라고 하는 상인에게 팔고, 좌객(座客)은 다시 외지로 나가 약을 판매하는 상인에게 약재를 판매하고, 각 지역의 약재상인들은 약재가 모이는 유명 약시(藥市)에서 지도약재(地道)를 구하는 전문 약상집단인 약행(藥行)에게 약재를 판매하고, 최종적으로 각 지역의 약포에 약재들이 판매되었던 것이다.
쑤저우 위엔화(元和)현의 진견삼(陳見三) 이라는 의사도 가짜 약의 원인에 대해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 옛날 의사들은 환자를 치료하고 약을 사용할 때 모두 직접 산지에서 약재를 구했으니 그 약들이 모두 진짜였다. 지금 의사들이 환자를 볼 때 모두 시장에서 구한 약을 사용하니 약의 진위 구분이 어렵다. 의사는 의서의 처방대로 하지만 효과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는 반드시 의사의 잘못이 아니며 약이 가짜이기 때문이다.36)

즉, 두 의사가 지적했던 것처럼 당시 의약시장은 전문 약상집단과 중점 약시(藥市)가 발달했고 약재의 유통구조가 단순하지 않았다. 두 의사는 직접 약재를 구하고 가공하여 환자를 치료했던 고대의 의사를 이상적으로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의사는 명청시대의 의약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명대 이후 중국사회에서는 점차 의와 약의 분업(分業)추세가 뚜렷해지고 있었다. 의와 약의 분업이란, 병의 진료와 제약 및 판매가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즉 의사가 직접 약포를 운영한다거나 직접 제조한 약을 환자에게 제공하지 않게 되며,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는 역할만을 맡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탕팅요는 『중국약업사』에서 이미 중국 남북조시대부터 의약의 분공(分工)이 시작되어 일부 의사들이 환자의 진료에만 참여하고 약을 채집하지 않으며 약을 상인에게 공급받았다고 주장했다(唐廷猷, 2013: 75-77). 또 다른 연구자 비엔허는 의약 분업 현상을 더욱 세심하게 분석하여, 의사들이 약을 제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약활동 자체에 참여하지 않는 추세였고, 이런 변화는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청대 이후 두드러졌다고 주장했다(邊和, 2019: 38-70). 이런 의약의 분업 역시 가짜 약의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청대의 의사였던 서대춘(徐大椿)은 의사가 약을 직접 다루지 않는 상황과 가짜 약 문제를 관련지어 이야기했다.
  • 오늘날의 의사는 단지 약방만 처방해 줄 뿐이고, 그 약은 환자가 직접 약포에 가서 구하니 진위 확인이 어렵다. 비록 신의(神醫)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짜 약으로 진짜 병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37)

  • 옛날의 의사는 사용하는 약을 모두 준비하였다. …… 송대 이후 점차 방(처방)을 쓰고 약은 준비하지 않는 자가 생기고, 약은 모두 약포(肆)에서 구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은 모든 곳이 그러하다. 약을 파는 자가 의술을 모를 수는 있지만, 의술을 행하는 자가 약을 전혀 모른다면, 곧 약의 시비진위(是非真伪)를 전혀 따지지 않게 되고, 의사와 약을 상의하지 않으면 처방은 잘못이 없으나 약에 잘못이 많게 된다.38)

즉 의사들이 환자의 병을 진료하고 처방하고, 환자는 의사의 처방을 가지고 약포에서 약을 구입하는 의약분업이 보편화되는 추세였고, 서대춘은 이런 의약분업과 가짜 약의 문제가 무관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일부 의사들은 여전히 약의 제조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고 특히 위중하거나 세심하게 치료해야 하는 경우에는 의사가 환자의 탕약 제조와 복용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대 이후 의사들은 점차 환자에게 약을 직접 제공하지 않았고 특히 환산고단(丸散膏丹)과 같은 매약을 직접 제조하지 않게 되었다(邊和, 2019: 63-64). 특히 명대 이후 의사들이 유의(儒醫)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게 되면서 환산고단(丸散膏丹)과 같은 손기술이 요구되는 약의 제조를 꺼리게 되었다(王雨濛, 2013: 79).
명청대 이후 약포는 점차 의사 대신 환자들에게 약을 제공하고 환산고단과 같은 약을 전문으로 제조하는 곳이 되었다. 특히 청대 이후에 상인들의 약포 경영은 이런 의약분업의 추세 및 의사들의 환산고단 제조 기피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청대 의약시장에서 상인들의 영향력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고 약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청대 이후에는 치저우(祁州), 바이촨(百泉), 장수(樟樹)와 같은 전국 범위로 발전한 약시(藥市)가 등장하는 것과 함께 중소도시에도 소규모의 약시가 등장하였다. 각지의 상인은 약재의 교역을 위해 중심 약시로 모였고 전국적 상업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또한 상인이 운영하는 약포의 규모와 수량이 증가하고 상업자본이 투자되었다. 베이징, 항저우, 쑤저우, 광저우 등 인구가 밀집된 도시는 약물의 제조와 소비의 중심이었는데, 청대 중후기 무렵에는 상인이 운영하는 조직이 체계화되고 기업화된 대형약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항저우의 호경여당은 상인 호설암(胡雪巖)이 창건하였는데 그는 염업, 전장업등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러한 자본을 바탕으로 대형약국인 호경여당을 개설하였다. 호경여당은 100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하고 직책과 부서를 세분화하여 운영되었다(安冠英, 1993: 228).
약포들은 약재 이외에도 각종 환산고단의 매약을 제조하여 판매했는데, 그 중 가장 잘 팔리는 매약은 다른 지역에도 이름이 알려졌고 약포를 대표하는 상품이 되었다. 저명한 약포는 매약을 제조하고 판매하면서 적지 않은 수익을 올렸다. 특히 유명한 대표 약품은 전국에 이름이 알려질 정도였다. 예를 들어 항저우의 유명한 약포인 방회춘당(方回春堂) 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약방으로 소아회춘단(小兒回春丹)을 제조하여 판매했는데 이 약 덕분에 약포가 명성을 얻게 되었고 집안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9) 상하이의 강연택당(薑衍澤堂) 역시 보진고(寶珍膏)라는 매약 상품의 성공 덕에 약포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40)
문제는 환산고단과 같은 매약은 모방되고 위조된 것을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매약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윤이 컸기 때문에 이러한 약을 암암리에 모방하거나 위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환산고단의 제형 자체가 약재를 가공한 것이기 때문에 진위를 구별하기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쑤저우 장주현(長洲縣)의 약포와 관련된 비문에서는 환산고단을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본래 음편(飲片:약)에 문제가 있으면 바로 교환하는데 환산고단(丸散膏丹)의 경우 여러 약을 갈아서 만들거나 혹은 달여서 제조하기 때문에 …… 색깔이 모두 비슷하여 다른 것들과 구분하기 어렵다. 때문에 약포에서는 단환(丹丸)의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 교환해주지 않는 규칙이 있다. 근래 시정잡배(無賴)들이 외상으로 약을 사거나 환산고단을 강제로 환불하니 좋은 말로 사정을 이야기해도 막무가내로 야만스럽게 군다. …… 올해 11월 태화당(太和堂)에 어떤 자가 약환을 사갔는데 곧 돌아와 교환을 요구했다. 주인이 바꿔줄 수 없다고 하자 그자는 곧 크게 소리를 질러 다들 이 일을 알게 하였다. …… 주인은 곧 원래 돈을 돌려주고 보내고 노여움을 참고 일을 마무리하였다.41)

위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환산고단의 약은 한번 가공을 거치기 때문에 비슷한 약은 구분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약포의 고객들이 환산고단 등의 매약을 구매한 뒤 교환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약이 위조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장주현(長洲縣)의 약포상인들은 단환(丹丸)과 같은 매약은 교환해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즉 청대 이후 주로 약포에서 매약을 생산하고 판매하기 시작했고, 수익성이 뛰어난 매약의 경우 약포의 대표 상품이 되면서 이를 모방하고 위조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때문에 약포의 매약 생산과 매약의 상품화 추세는 가짜 약들이 더욱 유행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5. 약포의 상호명과 매약 도용 소송

1장과 2장에서 살펴본 대로, 사회에서 가짜 약의 주범으로 지적했던 것은 약을 판매하는 약포의 상인들이었다. 근대 이전 중국에는 의사나 약포를 검증하는 어떠한 시험이나 제도가 없었다. 때문에 약간의 의학지식이 있으면 누구나 의약업에 종사할 수 있었고, 이러한 환경에서 엉터리 의술로 인명사고를 일으키는 의사인 용의(庸醫)가 사회 문제가 되었다. 약포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약 상인을 검증하는 시험이나 자격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갖가지 약포들이 시중에 난립하였고 약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인이 있었을 것이다.
청말 민국 초기의 언론기사에는 약의 기본적인 성질과 제약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엉터리 약이나 가짜 약을 만들어 환자에게 피해를 주는 약포에 대한 비난을 종종 볼 수 있다. 약포상인 중에는 약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이 단편적인 의학 지식을 가지고 약을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윤을 탐하여 가짜 약을 섞어 파는 자들도 있어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당시 신보와 근대 의약잡지에서는 중국의 약포가 의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중의처럼 약 판매 상인에게도 시험과 자격증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아래 신보의 기사에서는 중국의 약포가 가짜 약을 판매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다.
  • 국가의 법에는 용의살인률(庸醫殺人律)이 존재한다. 그러나 가짜 약으로 사람들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명문도 없다. 각종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의 생명을 해치니 그 죄는 마땅히 용의살인과 같다. 용의는 본디 사람을 살리려고 했으나 의술이 부족하여 사람을 해쳤다면, 가짜 약은 고의로 사람을 해치려는 것이니 그 죄가 용의살인보다 더욱 무겁다. 환자는 병이 낫기를 기대하여 약을 샀는데 가짜 약을 먹고 사망했으니 가짜 약을 판매한 사람이 살인한 것이 아니겠는가?42)

그런데 청대 약포의 소송기록을 살펴보면 약포의 상인들도 가짜 약의 피해자들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 지역에서 저명한 약포인 경우 약포에서 제조하여 판매하는 매약이 종종 모방되어 비슷한 모습의 가짜 약으로 시중에 유통되는 경우가 있었고, 심지어 약포의 이름 자체가 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가짜 약과 약포 상호의 도용은 약포의 명성에 적지 않은 피해를 끼쳤다.
약을 다루는 상인들에게 신용은 사업의 지속을 위한 중요한 문제였다. 쑤저우(蘇州) 태화공소(太和公所)의 비문에는 청 말 이 지역의 약상들이 공소(公所)를 만들고 조직의 결속과 발전을 다짐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때 약재의 정직한 선별과 제약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던 것을 볼 수 있다.
  • 매 해 삭망(朔望)에 공소에 동업자들이 모여 향을 태우며 명산지의 약의 채집(采藥)를 논하고 정교한 약의 제조(炮制)를 연구한다. 소홀하여 기만하지 말고, 거짓된 것을 만들어 재난을 만들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 말씀에 이르기를, “수합(修合, 약재의 채집과 가공, 배합, 제조의 전 과정)은 비록 다른 사람이 보지 않더라도 그 마음은 자연히 하늘이 알게 마련이다(修合雖無人見,存心自有天知).”라고 하였다. 무릇 우리 동업들은 이 말을 지켜 도리에 맞게 돈을 벌어 역사가 오래되기를 바란다(光緒18年歲在元默執徐孟夏之月同業公建張鏡書).43)

즉, 약상 조직의 발전과 사업의 안정을 위해서 약의 품질에 대한 신용은 중요했다. 때문에 약상 역시 약재의 진위 선별을 중시했고 도덕적 의무감을 가졌다. 만약 약포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 약이 시중에 유통되어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약포의 신용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청 중후기의 적지 않은 약포들은 약포의 이름이 도용당하거나 약포에서 판매하는 매약의 유사상품이 시중에 유통되는 피해를 입었다. 때문에 이와 관련된 소송이 적지 않았다.
황실에 약을 납품하는 어약국(御藥局)으로 명성이 높았던 베이징의 동인당(同仁堂) 약포와 청말 항저우에 개설된 호경여당(胡慶餘堂)은 여러 차례 매약의 위조와 약포명 도용의 피해를 입는 대표적인 곳이었다. 동인당과 호경여당은 약포에서 제조하여 판매하는 매약을 정리하여 각각 『동인당약목(同仁堂藥目)』과 『호경여당약목(胡慶餘堂藥目)』으로 정리했는데, 이러한 『약목(藥目)』의 서문에는 두 약포가 여러 차례 가짜 약이나 약포명 도용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리고 약포를 찾는 손님에게 주의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동인당의 약목 서문에는 청대 동인당을 둘러싸고 발생한 매약 위조와 약포 이름 도용의 사례가 나와 있다.
동인당 약목은 맨 처음 강희45년 동인당의 주인 악봉명(樂鳳鳴)이 출판했고, 이후 광서15년(1889년)에 재간되고 다시 민국12년(1923)에 석인(石印)되었다. 강희 45년본의 서두에는 악봉명의 자지(自志)를 통해 선조 존육(尊育)의 유훈에 따라 동인당 약포를 설립했다는 건립 취지를 밝혔다. 그런데 광서 15년의 동인당 약목에는 악봉명의 서문 외에도 동인당의 약을 위조한 가짜 약이 유통되고 약포의 이름이 도용되는 일이 빈번하여 이를 관에 고발하고, 엄중히 경고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함풍2년과 동치8년의 구체적인 두 안건이 소개되었다.
첫째, 함풍 2년 3월 6일, 동인당이 관청에 서신을 제출하여 가짜 약과 상호명 도용을 고발한 사건이다. 동인당이 제출한 서장에 따르면, 위다(于大),위얼(于二)은 동인당 문표를 사적으로 새겨 가짜 약을 제조하고, 객점과 회관과 결탁하여 동인당에서 훔친 약을 싸게 판다고 속여 팔았다. 이러한 행위가 여러차례 계속되자 동인당이 위 씨 형제를 관청에 고발하였다. 이에 북경의 중성찰원(中城察院)에서는 동인당의 표시가 있는 약품을 모두 압수하여 동인당에서 검사하게 하고 위다, 위얼에게 칼을 채워 하루 종일 군중이 보게 하였다. 함풍 2년 3월 11일, 관청은 가짜 약과 상호 도용을 금지하는 방을 붙여 다음처럼 엄중히 경고하였다. “만일 이번 처벌과 금지를 알고도 같은 범죄를 저지른다면, 가중 처벌하고 용서하지 않겠다.”44)
둘째, 동치 8년 무렵 베이징의 양매죽 거리(杨梅竹斜街)에 동인당(同仁堂) 약포의 이름을 교묘하게 도용한 동인당약포(同人堂藥鋪)가 개설되었다. 이들은 동인당의 이름을 새겨 가짜 약을 판매하였고, 이 때문에 가짜 약의 피해를 입은 자들이 생겼다. 이에 동인당이 도찰원에 고발하였고 도찰원은 즉시 관원을 파견하여 관련된 자들을 조사하고, 동치 8년 3월 초3일, 상호 도용을 엄중히 금지하고 처벌한다는 공문을 베이징 전 성에 알렸다.45) 이후 동인당약국의 약목에는 분점이 없다는 사실을 다음처럼 명시했다.
  • 원컨대, 곳곳의 관리와 상인들은 동인당호는 결코 분점(分店)이 없다는 것을 살펴주기를 바라며, 찾아주는 고객은 반드시 본당으로 직접 와서 교역해주기를 바란다. 대리구매의 경우도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통해야 하니, 소인배에게 미혹되지 말라.46)

약목에서 드러나듯 어약방으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동인당 약포의 약을 흉내내거나, 약포명을 도용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있었던 것을 볼 수 있고, 관청도 개입하여 처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동인당의 명성을 이용한 모방행위는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동인당은 약목(藥目)에 관청의 포고문을 포함시킴으로써 당포의 정통성과 권위를 광고했다.
호경여당의 약목 서문에도 이러한 가짜 약을 경계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호경여당의 창설자인 호설암은 “대개 약의 진위는 판별하기 어려우니, 매약(丸散膏丹)의 경우는 더욱 분별하기 어렵다. 약의 진위는 그 마음의 진위에 달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익만을 꾀하는 무리는 가짜를 진짜로 속이니, 그 마음가짐은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설령 진심으로 약을 채집한다고 해도 돈 들이는 것을 아까워하고, 약의 배합시에 제조에 소홀하거나 치밀하지 못하면, 그 마음이 어떻든 간에 잘못이 생기니 약포의 주인과 직원은 모두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주의를 당부했다.47)
동인당 외에도 기타 장난(江南) 지역 약포들의 사례에서 가짜 약과 약포 이름 도용 및 이와 관련된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 도광(道光) 9년(1829년) 강남 쑤저우부(蘇州府)의 위엔화현(元和縣)에는 심단계당(沈丹桂堂)의 약을 모방하여 가짜 상표를 붙이고 판매하는 일이 있어, 후손 심립방(沈立芳)이 관청에 고발하였다. 심단계당(沈丹桂堂)은 약포명과 매약이 도용당한 사례와 관청이 이러한 행위를 금지시키고 처벌한다는 금령을 내렸다는 것을 함께 비석에 새겨 사람들에게 알리고 경고하였다.
  • 심립방(沈立芳)이 진술하는 바, 심씨가문이 선조의 유지대로 백옥고, 단(白玉膏,丹)을 제조했는데, 심단계당패도기(沈丹桂堂牌圖記)를 증표로 대대로 임둔로(臨頓路) 소일휘교(小日暉橋)에 가게를 열고 판매해왔다. 이 백옥고,단(白玉膏,丹)은 하퇴궤양(裙瘋臁瘡,정강이에 난 부스럼,궤양), 모든 종기(腫毒)에 효과가 좋은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근래 염치없는 무리가 본 약당의 상표를 거짓으로 모방하고, 혹은 같은 음의 글자를 차용해 이름을 바꾸어 함부로 모방하여 이익을 꾀했다. …… 이에 (도용행위에 대한) 금지를 관청에 청한다……”, “이에 따라 서면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 외에 함께 금령을 공포(示禁)한다. …… 이후 어떤 무리가 감히 심단계당패도기(沈丹桂堂牌圖記)를 거짓으로 모방하거나 혹은 같은 음의 글자를 차용하여 함부로 약을 판매한다면, 곧 이름을 기록하여 현(縣)에 알리고 이를 근거로 추궁할 것이다.……48)

쑤저우 지역의 유명한 약포인 당로일정재(唐老一正齋)의 사례에서도 약포명 도용과 가짜 약에 관한 분쟁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로일정재는 강희 초년 1662년 창립되었고 만응고(萬應膏)라는 고약으로 유명했는데 근육통, 타박상, 관절염 등의 여러 증상에 효과가 좋은 약으로 알려졌다. 지역의 관리나 사대부가 편액을 써준 이후 일정재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는데, 예를 들어 하운(河運) 장사(長沙) 총독 진붕년(陳鵬年)이 치수사업을 담당할 때 관절통증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일정재의 고약을 바르고 낫자 답례로 편액을 써 준 이후로 약포가 더욱 유명해진 것이다. 즉 당로일정재의 고약은 상품성과 유명세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당로일정재는 수차례 약포의 상호명 도용과 만응고를 모방한 가짜 약에 시달렸고 수차례 소송을 벌여야 했다. 당로일정재의 기나긴 소송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당로일정재는 약포명 도용의 문제로 모조승 포목점(茅兆升布店)과 장기간 분쟁을 벌였다. 당로일정재가 기반을 잡기 전 모조승 포목점(茅兆升布店)의 이름을 빌려 고약을 팔았는데, 점차 고약이 유명해지자 모조승 포목점(茅兆升布店)은 모조승(茅兆升)의 이름으로 모방한 약(가짜 약)을 판매하였다. 이에 일정재는 강희54년(1715년) 모씨를 고발하고 소송을 했고, 관청에서는 모씨가 약품을 판매한 돈을 당씨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건륭24년(1759년) 모씨 일족은 또다시 일정재와 비슷한 이름이나 똑같은 이름으로 약포를 개설하고 만응고를 팔았다. 다시 일정재가 소송을 하였고 쑤저우부가 모조승의 도용을 다시 금지하였다.
둘째, 당씨 가족 내부의 분쟁과 관련된 가짜 약과 약포 이름 도용의 문제이다. 당씨의 인척이었던 포(包)씨는 당로일정재의 운영에 개입하면서 당씨 일족과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란을 일으켰다. 이후 포씨는 독단적으로 일정재의 이름을 도용하여 외부에 포씨의 당로일정재를 개설하였다. 때문에 당씨와 포씨 사이에 50년이 넘는 소송이 지속되었다.
당씨 가족은 모씨와 포씨와의 갈등 및 기타 당로일정재를 모방한 가짜 약 문제에 대해 가족내의 명망있는 자들을 앞세워 관청에 고발했다. 건륭24년에는 당운표(唐云彪)가 모씨의 도용을 관에 고소하고, 건륭28년에는 감생 당병울(唐炳蔚)이 일정재의 매약을 도용하여 제조, 판매하는 자들을 고발하였다. 도광27년에는 감생 당보봉(唐宝峰)이 일정재의 상호명 도용을 다시 고발하였다. 1868년 당씨 일족의 진사(進士) 당목(唐沐)이 관청에 호소하였고, 동치8년(1869년) 단도현이 다시 상세히 조사하여 마침내 단도현(丹徒县)에서는 포씨가 일정재점포를 개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고, 당로일정재는 이상의 도용사례 및 고발, 관청에서 내린 금령을 비석에 새겨 널리 알리려고 하였다.49)
또 다른 쑤저우의 유명약포 유경당(裕慶堂)의 사례에서는 약포 이름 도용과 매약의 위조를 둘러싸고 발생했던 다년간의 분쟁의 상세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유경당은 기관지 관련 질병에 효과가 좋은 과제반하(戈制半夏)라는 매약을 제조하는 곳으로 유명했는데, 과(戈)씨 일가가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씨 가족은 약포명 도용과 가짜 상품의 유통판매를 여러 차례 관청에 고발하고 금지를 청원하였다. 청 광서(光緒) 12년(1886년)의 비문에는 당시의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 과일량(戈日梁)이 청원하는 바, 선조 과씨(戈氏)는 오현(吳縣) 풍진(楓鎮) 장읍(長邑)에서 유경당(裕慶堂)을 개업하고 과제반하(戈制半夏)를 만들어 팔아 지금까지 백 여년 동안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쑤저우의 전란을 피하기 위해 부친 창선(昌善)이 상하이로 장소를 옮겨 과로이방유경당반하호(戈老二房裕慶堂半夏號)를 열었다. 이후 과씨 가족은 다시 쑤저우로 돌아와 원읍(元邑)임둔로(臨頓路)에서 점포를 열고 영업을 했다. 그러나 종족과 상관없는 사람이 약방(方藥)도 모르고 포제(炮制)도 암기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을 속여 이익을 얻는 일이 있었다.50)

즉, 과(戈) 씨 일가 외의 사람들이 이름을 빌려 가짜 약, 유사약품을 팔았던 것이다. 과일량(戈日梁)에 따르면 동치5년(1866)에 위엔화현(元和縣)에서 이를 금지하는 명령이 있었으나, 20여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도용행위가 나타났다.51)
이후 광서(光緒) 24년(1898년)에도 상하이 현의 금령이 공포되었다. 과씨의 부인 서씨(徐氏)는 상하이현(縣)에 유경당과제반하(裕慶堂戈制半夏)의 도용문제를 청원했다. 과씨의 유경당(裕慶堂)은 동치시기 태평천국 전란을 피해 상하이로 이주하여 과로이방유경당반하호(戈老二房裕慶堂半夏號)를 개설했고, 이후 유경당과제반하(裕慶堂戈制半夏)의 정식점포는 오직 쑤저우 임둔로(臨頓路)와 상하이서 서제팔가(西第八家)에 있었다. 그러나 도광(道光), 동치(同治), 광서(光緒)년간 쑤저우, 상하이 등 지역 곳곳에서 꾸준히 상표를 도용하고 가짜 약을 판매하는 일이 발생했다.
광서(光緒) 24년 9월에는 호춘계(胡春溪)라는 자가 상하이 과로이방(戈老二房)호를 도용하여 삼패로(三牌樓)에서 조잡한 가짜 약을 파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과씨는 회계사(司账)를 보내어 따지고 호씨의 점포를 닫게 하였다. 그러나 호씨는 도리어 그를 관에 고발하였다. 다행히 관청은 사실을 명백히 조사하여 호씨를 체포하고 점포를 폐쇄하였다. 과씨의 부인 서씨(徐氏)는 “조악한 약재를 사용하고 엉터리 배합과 가공을 한 약은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해치니 결코 가짜 약이 팔리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상하이 현에 약포 이름의 도용과 가짜 약 금지를 다시 청원했다.52)
위에서 살펴본 유명 약포 이름을 베끼는 상호명 도용과 가짜 약 제조의 문제는 각기 지역은 다르지만 비슷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지명도가 높은 대형 약포일수록 이러한 도용과 위조의 피해를 많이 받았다. 앞서 살펴본 각 지역의 여러 약포들은 약의 우수한 품질은 물론이고 어약방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지위가 있거나 지역 사대부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개인이 운영하는 영세한 소규모 약포의 수준을 벗어나 여러 대를 걸쳐 부와 명성을 갖춘 약포였다.
이런 약포에서 생산하는 매약은 외지의 객상들에게도 인기가 높았고, 몇 대표적인 매약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대형약포가 등장하며 이들을 둘러싼 도용과 가짜 약의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것은 청대 의약 시장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약포상인에게도 약재의 분별은 어려운 문제였고 특히 알약이나 가루, 물약의 형태로 판매되는 매약의 경우, 약재가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진위를 분별하기 어려웠다. 진위구분이 어렵다는 것은 가짜 약을 판매하는 자들이 더욱 쉽게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약포를 도용하거나 가짜 약을 생산하는 자들은 약포의 영수증, 상호명, 약포의 도상 등을 모방하거나 동인당의 예처럼 같은 음운을 이용한 유사상호를 만들고 진품을 모방한 가짜 약을 제조하여 판매했다. 약포들은 이러한 가짜 약들이 사람을 해치는 일이 심각하다고 비판하였다.
셋째, 이러한 도용문제에 대해 유명약포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동인당은 어약방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관청에 도용 문제를 적극적으로 호소했고, 당로일정재와 유경당은 오랜 시간 여러 차례의 소송을 불사하였다. 관에서는 가짜 약을 몰수하고 가짜 약포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약포들은 관에서 공포한 도용금지의 명령을 비석에 새겨 약포를 오가는 고객들에게 알렸다. 또한 유경당의 경우 약포에서 생산한 약품에 약포의 인장을 찍어 가짜 약과 구분하여 피해를 줄이려고 하였고, 도용한 가짜 약포를 발견하고 직접 사람을 보내 항의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약포명 도용과 가짜 약의 문제에 있어서 왜 가짜 약과 도용의 문제가 끊이지 않고 발생했는지를 생각해볼만 하다. 우선, 모방한 약이 가져다주는 상업적 이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약포가 출판한 약목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약포의 판매 약품 중 매약의 비중이 매우 컸다는 점이다. 이는 매약이 가져다주는 이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만약 유명 약포의 약을 저렴한 재료로 모방한 가짜 약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면 괜찮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관에서는 유명 매약을 모방한 가짜 약을 몰수하고 약포를 폐쇄하는 조치를 했으나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도용약포와 약을 모두 제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정식 약포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가짜 약을 판매하거나 약포 이름을 도용하는 것을 일일이 감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경당이 약포 도용의 문제를 고발한 광서12년의 비문에서도 밝히듯, 한커우나 목독 등지에서 약포를 모방하고 가짜 과제반하를 판매하는 경우처럼,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이러한 행위가 일어난다면 막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울러 거듭된 처벌에도 불구하고 약포의 이름이 도용되고 모방한 매약이 끊임없이 생산되었던 배후에는 값싼 약품을 유통하여 상업적 이윤을 얻고자 했던 자들과, 값싸고 효과있는 약을 원했던 소비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약포에서는 이러한 모방약을 위험한 가짜 약으로 비판했지만, 사실 약포는 상호를 도용한 약포 및 위조약과 끊임없이 경쟁하는 구조였다.
유명 약포명의 도용과 관련된 소송에서는 의약에 대한 전문법이 제정되거나 상표권 보호법이 적용되기 전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볼 수 있다. 당시 유명한 약포인 동인당, 호경여당, 당로일정재, 유경당은 거듭된 고발과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약포의 매약이 위조되거나 이름이 도용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약상들은 이러한 가짜 약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관에 고발소송을 하고 심지어 무력행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약목을 출판하여 매약 목록과 특징들을 널리 알려 약포의 명성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러한 가짜 약은 당시 약포의 매약 생산과 상품화, 청대 사회의 의약품 소비, 청대 의약시장의 경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6. 맺음말

고대부터 중국 사회에는 가약(假藥), 위약(僞藥)과 같은 가짜 약이 시중에 있었으나 명청대 이후에는 의약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약재의 채집과 운반, 판매 등의 유통구조가 복잡해지며 의약분업의 현상이 진전되는 등 변화가 일어나면서 가짜 약의 문제가 더욱 심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관약국이 폐지되고 국가가 의약의 제조나 품질을 관리하지 않았으며 지방의학이 유명무실하게 되면서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법이나 기관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글에서 인용했듯이 당시 사회여론도 가짜 약이 만연한 문제를 우려하였고 환자와 의사들은 각종 본초서와 의약 지식에 의지하여 의약시장에서 믿을 수 있는 약을 구해야 했다.
한편 청대에는 민간 의료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대중은 의약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도지약재와 같은 명산지의 약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또한 약포에서 생산하는 매약을 활발하게 소비하였다. 청대 이후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약포 개설에 참여하고 상업자본을 투자하면서 베이징이나 항저우, 쑤저우와 같은 대도시에는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는 유명한 약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약포에서 제조하는 대표적인 매약은 유명한 상품으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동시에 시중에는 유명한 매약을 모방한 가짜 약이 유통되고 유명 약포의 이름이 도용되는 문제가 빈번히 발생했다. 환산고단과 같은 매약은 약재를 가공하여 만든 약이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특히 힘들었으며 인기가 많고 수익성이 높은 매약의 경우 도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청대 가짜 약의 문제는 용의(庸醫)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즉, 국가가 통제하는 전문 의약법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점이나. 의학지식이 부족한 자들이 아무런 제약없이 누구나도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짜 약은 보편적인 사회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약과 관련된 법은 주로 고의적인 독약으로 인한 사망에 치중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사건은 비고의성 과실살인이나 상업적 분쟁에 그치고 있었다. 당시 청 정부는 가짜 약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으나 엄형에 처하는 것을 꺼려했고 관할지역 지방관이 그 때마다 금지하고 단속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약포의 상인들은 환자나 의사들에게 가짜 약의 근원으로 비판받았지만 이들 역시 가짜 약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입장이기도 했다. 유명한 약포는 이름이 도용되거나 매약이 위조되는 문제에 시달렸고, 이를 관청에 고발하거나 여러 차례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대중 및 고객에게 적극적으로 약포의 정통성과 정직을 광고하고 약목을 출판하여 명성과 재산을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의사와 상인의 가짜 약에 대한 대응은 직업 도덕의 준수, 약의 진위분별 능력의 신장, 조직의 규율단속, 고발, 소송 및 적극적인 광고라는 방법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단속에도 가짜 약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가짜 약 시장이 가져다주는 상업적인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미 의약의 채집, 유통과 제조가 복잡하게 분화되어 하나하나 파악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불어 전국적으로 알려진 대형 약포와 상품화된 매약 등은 가짜 약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즉 청대 가짜 약의 유통과 약포 이름의 도용은 청대 사회 의약의 상품화와 소비, 의료 시장의 경쟁 등 의료 환경의 일면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Notes

1) (清)俞樾, 「醫藥說」, 『春在堂全書』 第3冊 (南京: 鳳凰出版社, 2010), pp. 856-858.

2) 중국 학자 탕팅요(唐廷猷)는 『중국약업사(中國藥業史)』 11장과 13장에서 고대부터 중국 사회에 존재했던 가짜 약의 문제 및 이에 대한 조치들을 간략히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가약(假藥)와 위약(僞藥)이라는 단어는 고대부터 나타났고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가약(假藥)와 위약(僞藥)의 다양한 상황과 종류를 통틀어 ‘가짜 약’이라고 칭하겠다.

3) 「寶命全形論」, 『黃帝內經素問』 卷8 (北京: 中醫古籍出版社, 1997), pp. 42-43.

4) (南朝梁)陶弘景編, 「序錄」, 尚志鈞, 尚元勝輯校, 『本草經集注(輯校本)』 卷1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94), p. 33.

5) (南宋)李之彥, 『東穀所見』, 上海師範大學古籍整理研究所編, 『全宋筆記』 第8編4 (鄭州: 大象出版社, 2017).

6) (宋)袁采, 「戒貨假藥」, 『袁氏世範』, 樓含松主編, 『中國曆代家訓集成 2』 (杭州: 浙江古籍出版社, 2017), p. 736.

7) 명대에는 송원대 시행되었던 국가의 의학정책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지방의 의학기구와 혜민약국과 같은 기관은 명대 이후 청대까지 유명무실하였고, 지방의학의 의관(醫官)이 본래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을 담당하는 타직화(他職化)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명대 이후 국가가 지방의 의학기구와 의약에 대한 관리에 방임주의적인 태도를 보인 원인에 대해 위신중과 량치즈 등의 연구자는 지방 정부의 여력 부족과 효율 저하등의 원인과 함께 민간의료자원의 보편화와 의약시장의 성장 등으로 설명하였다. 狄鴻旭, 「清代基層社會官方醫療機構初探—以華北方志爲中心」, 中華中醫藥學會第十六次醫史文獻分會學術年會暨新安醫學論壇 (2014), pp. 47-49; 「清代“醫學署”初探」, 『滿族研究』 2 (2015).

8) (明)李時珍, 『本草綱目』 卷1, 「序例上·神農本經名例」, 劉衡如, 劉山水校注 (北京: 華夏出版社, 2008), p. 37.

9) (明)李時珍, 『本草綱目』 卷12, 「草部·人蔘」, op.cit., p. 490.

10) (明)李時珍, 『本草綱目』 卷12, 「草部·茈胡」, op.cit., p. 547.

11) 金老佛編著, 『三教九流江湖秘密規矩』 (石家莊: 河北人民出版社, 1990), p. 140; 曲彥斌主編, 『中國隱語行話大辭典』 (沈陽: 遼寧教育出版社, 1995), p. 189, 246, 610, 615, 452, 748.

12) (淸)徐珂, 『清稗類鈔』 11, 棍騙類, 「道士賣大力丸旗人」 (北京: 中華書局, 1986), p. 5432.

13) (淸)徐珂, 『清稗類鈔』 11, 棍騙類, 「賣假藥」, op.cit., pp. 5433-5434.

14) 李光照編, 『古今實用對聯精編』 (長沙: 嶽麓書社, 2012), p. 232.

15) (清)吳趼人, 『二十年目睹之怪現狀』 (北京: 華文出版社, 2018), p. 604.

16) (清)熊勉庵, 「寶善堂不費錢功德例」, 『訓俗遺規』 卷4, (淸)陳弘謀, 『五種遺規』 (北京: 線裝書局, 2015), p. 306.

17) (清)許仲元, 「偽藥致誤」, 樂鈞, 『三異筆談』 卷4 (重慶: 重慶出版社, 1996), pp. 102-103.

18) (清)徐大椿, 「醫者誤人無罪論」, 劉洋校注, 『醫學源流論』 卷下 (北京: 中國中醫藥出版社, 2008), p. 100.

19) (淸)程國彭, 閆志安等校注, 『醫學心悟』 首卷, 「醫中百誤歌」 (北京: 中國中醫藥出版社, 1996), p. 4.

20) (明)陳嘉謨, 『本草蒙筌』 (北京: 中醫古籍出版社, 2008), pp. 12-13.

21) (唐)長孫無忌敕修, 袁文興, 袁超注譯, 『唐律疏義注譯』 卷18 (蘭州: 甘肅人民出版社, 2016), p. 513.

22) (宋)竇儀等撰, 薛梅卿點校 『宋刑統』 卷26, 「雜律·醫藥故誤殺傷人」 (北京: 法律出版社, 1999), p. 466.

23) (清)徐松輯, 劉琳, 刁忠民,舒大剛校點, 『宋會要輯稿』 6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4), p. 3744.

24) (清)徐松輯, 劉琳, 刁忠民, 舒大剛校點, 『宋會要輯稿』 14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4), p. 154.

25) 「禁毒藥」, 『刑部十九·諸禁』, 陳高華, 張帆, 劉曉等校, 『元典章』 卷57 (天津: 天津古籍出版社, 2013), p. 1924.

26) 「禁毒藥」, 『刑部十九·諸禁』, 陳高華, 張帆, 劉曉等校, 『元典章』 卷57 (天津: 天津古籍出版社, 2013), p. 1925.

27) 『大明律』 卷19 刑律二, 「人命·造畜蠱毒殺人」.

28) 鄭曼青,林品石編著, 李煥燊, 陳太義校訂, 『中華醫藥學史』 (台北: 台灣商務印書館股份有限公司, 1982), pp. 347-350.

29) 「乾隆二十三年戊寅十二月上」, 『清高宗純皇帝實錄』 8卷 576, 『清實錄』 第16冊 (北京: 中華書局, 1986), p. 343.

30) 「嘉慶二十年四月」, 『清仁宗實錄』 5卷 305, 『清實錄』 第32冊 (北京: 中華書局, 1986), p. 53.

31) 『大淸光緖新法令』 第2類, 官制1, 京官制.

32) 『大淸光緖新法令』 附錄, 「法典草案二·刑律」 pp. 54-55.

33) 『大淸光緖新法令』 第四類, 「外交三, 通商稅則」,「外務部奏與各國議允定期禁止販運莫啡鴉辦法摺」; 「稅務大臣咨行各省督撫錄送禁運瑪啡鴉之藥針章程文」; 「照錄署總稅務司申呈禁運莫啡鴉章程」.

34) 『大淸光緖新法令』 第十類, 「實業·注冊」, 「商部奏擬訂商標注冊試辦摺」; 「商標注冊試辦章程細目」.

35) (淸)吳鞠通, 『醫醫病書點注』, 「僞藥論」 (北京: 中醫古籍出版社, 2007), pp. 232-233.

36) (清)吳德旋, 「初月樓問見錄」, 田代華主編, 『中醫攬勝』 (濟南: 山東科學技術出版社, 1992), pp. 283- 284.

37) (淸)徐大椿著, 劉洋校注, 『醫學源流論』 卷上, 「藥性變遷論」 (北京: 中國中醫藥出版社, 2008), p. 42.

38) Ibid., p. 45.

39) 周旭霞等編, 『穿越時空的杭商』, 「三百年國醫國藥館—方回春堂」 (杭州: 浙江工商大學出版社, 2016), pp. 119-121.

40) (清)薑衍澤堂編, 『薑衍澤堂發記丸散膏丹錄』 (北京: 北京科學技術出版社, 2017), pp. 3-4, p. 11.

41) 「長洲縣爲各藥鋪藥料丸散務須照方逐一點交免致舛誤如有無賴借換藥之名圖詐尋釁許各該藥鋪指稟究懲碑記」, 平江區志編纂委員會編 『平江區志』 第23卷, 「綜錄」 第三章, 碑文輯存 (上海: 上海社会科学院, 2006), p. 1745.

42) 『申報』, 「原假」, 1881年 10月 13日.

43) 「藥皇廟太和公所記」, 江蘇省博物館編, 『江蘇省明清以來碑刻資料選集』, (北京: 生活·讀書·新知三聯書店, 1959), pp. 221-224.

44) 「欽命巡視中城察院鹹豐2年3月11日告示」, 樂鳳鳴撰, 伍悅, 林霖, 楊建宇點校, 『同仁堂藥目』, (北京: 學苑出版社, 2010), p. 6.

45) 「欽命巡視中城察院爲嚴禁曉諭 事奉都察院劄(劄)開准 同治8年 3月 初3日」, 樂鳳鳴撰, 伍悅, 林霖, 楊建宇點校, 『同仁堂藥目』, op.cit., p. 8.

46) 樂鳳鳴 撰, 伍悅, 林霖, 楊建宇點校, 『同仁堂藥目』 op.cit., pp. 5-7.

47) 金久寧, 黃晶晶校注, 『胡慶餘堂丸散膏丹全集』 (北京: 中國中醫藥出版社, 2017), p. 13.

48) 「發沈丹桂堂碑示禁」; 「元和縣示禁保護沈丹桂堂碑」(清道光9年9月6日), 『平江區志』 第23卷, 「綜錄」 第三章, 碑文輯存, p. 1743.

49) 「欽加同知銜署江蘇鎮江府丹徒縣正堂加七級紀錄十次,奉憲勒石永禁」, 安冠英等編, 『中華百年老藥鋪』華東卷 (北京: 中國文史出版社, 1993); 「三百年老店——唐一正齋」, 『鎮江文史資料』 第6輯 (1983), pp. 90-91.

50) 「吳縣嚴止奸徒假稱戈制半夏在鄉鎮分鋪發兌朦混漁利碑」, 「示發戈老二房裕慶堂勒石」(光緒 12年6月初6日), 『平江區志』 第23卷, 「綜錄」, 第三章, 碑文輯存, p. 1746.

51) 「吳縣嚴止奸徒假稱戈制半夏在鄉鎮分鋪發兌朦混漁利碑」, 「示發戈老二房裕慶堂勒石」(光緒 12年6月初6日) op.cit., p. 1746.

52) 「上海縣永禁外姓假冒戈老二房牌號出售戈制半夏碑」,「發戈老二房裕慶堂勒石遵守」(清光緒 24年) op.cit., p. 1748.

References

1. (唐)長孫無忌敕修, 袁文興, 袁超注譯, 『唐律疏義注譯』 卷18 (蘭州: 甘肅人民出版社, 2016).

2. (南朝梁)陶弘景編, 尚志鈞,尚元勝輯校, 『本草經集注(輯校本)』 卷1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94).

3. (南宋)李之彥, 上海師範大學古籍整理研究所編, 『全宋筆記』 第8編4 (鄭州: 大象出版社, 2017).

4. 樓含松主編, 『中國曆代家訓集成 2』 (杭州: 浙江古籍出版社, 2017).

5. (宋)竇儀等撰, 薛梅卿點校, 『宋刑統』 卷26 (北京: 法律出版社, 1999).

6. (明)賈所學撰, 李延昰補訂, 王小崗, 鄭玲校注, 『藥品化義』 (北京: 中醫古籍出版社, 2012).

7. (明)李時珍, 劉衡如,劉山水校注, 『本草綱目』 卷1 (北京: 華夏出版社, 2008).

8. (明)陳嘉謨, 『本草蒙筌』 (北京: 中醫古籍出版社, 2008).

9. (清)薑衍澤堂編, 『薑衍澤堂發記丸散膏丹錄』 (北京: 北京科學技術出版社, 2017).

10. (淸)戴新民編, 『本草便讀』 (啟業書局, 1981).

11. (淸)徐珂, 『清稗類鈔』 11 (北京: 中華書局, 1986).

12. (淸)徐靈胎著, 劉洋校注, 『醫學源流論』 (北京: 中國中醫藥出版社, 2008).

13. (淸)樂鈞,許仲元, 『三異筆談』 (重慶: 重慶出版社, 1996).

14. (淸)樂鳳鳴 撰, 伍悅, 林霖, 楊建宇點校, 『同仁堂藥目』 (北京學苑出版社, 2010).

15. (清)俞樾, 『春在堂全書』 第3冊 (南京: 鳳凰出版社, 2010).

16. (淸)吳鞠通原著, 『醫醫病書點注』 (北京: 中醫古籍出版社, 2007).

17. (清)吳趼人, 『二十年目睹之怪現狀』 (北京: 華文出版社, 2018).

18. (淸)陳弘謀輯, 『五種遺規』 20 (北京: 線裝書局, 2015).

19. (清)許仲元, 『偽藥致誤』, 樂鈞, 『三異筆談』 卷4 (重慶: 重慶出版社, 1996).

20. 江蘇省博物館編, 『江蘇省明清以來碑刻資料選集』 (北京: 生活·讀書·新知三聯書店, 1959).

21. 平江區志編纂委員會編, 『平江區志』 (上海社會科學院, 2006).

22. 『黃帝內經素問』 卷8, 「寶命全形論」 (北京: 中醫古籍出版社, 1997).

23. 『清實錄』 第16冊, 『清高宗純皇帝實錄』 8卷, (北京: 中華書局, 1986).

24. 『大淸光緖新法令』.

25. 曲彥斌主編, 『中國隱語行話大辭典』 (沈陽: 遼寧教育出版社, 1995).

26. 金久寧, 黃晶晶校注, 『胡慶餘堂丸散膏丹全集』 (北京: 中國中醫藥出版社, 2017).

27. 金老佛編著, 『三教九流江湖秘密規矩』 (石家莊: 河北人民出版社, 1990).

28. 唐廷猷, 『中國藥業史』 第3版 (北京: 中國醫藥科技出版社, 2013).

29. 樊波, 「民國衛生法制硏究」, 中國中醫科學院 博士學位論文 (2012).

30. 範金民, 『明清商事糾紛與商業訴訟』 (南京大學出版社, 2007).

31. 邊和, 「誰主藥室: 中國古代醫藥分業曆程的再探討」, 余新忠主編, 『新史學(第9卷)』 (北京: 中華書局, 2017.

32. 安冠英等編, 『中華百年老藥鋪』 華東卷 (北京: 中國文史出版社, 1993).

33. 梁其姿, 『面對疾病——傳統中國社會的醫療觀念與組織』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12).

34. 余新忠, 『清代江南的瘟疫與社會:一項醫療社會史的研究』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3).

35. 王雨濛, 「刀針, 膏貼與湯藥:清代的外科」, 南開大學碩士學位論文 (2013).

36. 龍伯堅編著, 『現存本草書錄」, (北京:人民衛生出版社, 1957).

37. 張磊, 「清代北京中醫醫療模式研究」, 中國中醫科學院博士學位論文 (2007).

38. 張仲民, 「晚清上海藥商的廣告造假現象探析」, 『中央研究院近代史研究所集刊』85 (2014).

39. 張仲民, 「當糖精變爲燕窩—孫鏡湖與近代上海的醫藥廣告文化」, 『社會科學研究』 第1期 (2017).

40. 狄鴻旭, 「清代基層社會官方醫療機構初探——以華北方志爲中心」, 中華中醫藥學會第十六次醫史文獻分會學術年會暨新安醫學論壇 (2014).

41. 狄鴻旭, 「清代“醫學署”初探」, 『滿族研究』 2 (2015).

42. 田代華主編, 『中醫攬勝』, (濟南: 山東科學技術出版社, 1992).

43. 鄭曼青, 林品石編著, 李煥燊, 陳太義校訂, 『中華醫藥學史』 (台北: 台灣商務印書館股份有限公司, 1982).

44. 周旭霞等編, 『穿越時空的杭商』, 「三百年國醫國藥館—方回春堂」 (杭州: 浙江工商大學出版社, 2016).

45. 陳秀瑗, 『中藥炮製技術』 第3版 (中國醫藥技術出版社, 2017).

46. 黃鑫, 黃濤, 「『同仁堂藥目』和清末藥肆的官司」,『中華醫史雜誌』 第34卷 第3期 (2004).

TOOLS
PDF Links  PDF Links
PubReader  PubReader
ePub Link  ePub Link
Full text via DOI  Full text via DOI
Download Citation  Download Citation
CrossRef TDM  CrossRef TDM
  E-Mail
  Print
Share:      
METRICS
0
Crossref
0
Scopus
169
View
6
Download
Related article
Editorial Office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partment of the History of Medicine and Medical Humanit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103 Daehak-ro, Jongno-gu, Seoul 03080
TEL: +82-2-740-8376   FAX: +82-2-765-5110   E-mail: medhistory@hanmail.net
About |  Browse Articles |  Current Issue |  For Authors and Reviewers |  KSHM HOME
Copyright ©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veloped in M2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