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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0(3); 2021 > Article
흑사병의 서유럽 전파에 관한 오해와 왜곡: 무시스의 기록을 중심으로†

Abstract

This article aims to critically review de Mussis’s report of the events at Caffa. De Mussi says in his account that Tartars catapulted their dead compatriots infected by the plague into the besieged city of Caffa in order to contaminate the Genoese defending the city and that some Genoese galleys fleeing from the city transported the disease to Western Europe. Some historians interpret his report of Tartars catapulting plague-infected bodies as an act of biological warfare, and others do not trust his account as a reliable historical record, while some works rely on his account, even though they do not interpret it as evidence of biological warfare. This article tries to determine whether his account is true or not, and explain historical contexts in which it was made.
De Mussi was not an eye-witness of the war between the Tartars and the Genoese in the years of 1343 to 1437 in Caffa, contrary to some historians’ arguments that he was present there during the war. In addition, he understands and explains the disease from a religious perspective as does most of his contemporary Christians, believing that the disease was God's punishment for the sins of human beings.
His account of the Tartars catapulting their compatriot’s bodies may derive from his fear and hostility against the Tartars, thinking that they were devils from hell and pagans to be annihilated. For de Mussi, the Genoese may have been greedy merchants who were providing Muslims with slaves and enforcing their military forces. Therefore, he thought that the Tartars and the Genoese were sinners that spread the disease, and that God punished their arrogance. His pathological knowledge of the disease was not accurate and very limited. His medical explanation was based on humoral theory and Miasma theory that Christians and Muslims in the Mediterranean World shared. De Mussi's account that Caffa was a principal starting point for the disease to spread to Western Europe is not sufficiently supported by other contemporary documents. Byzantine chronicles and Villani's chronicle consider not Caffa but Tana as a starting point.
In conclusion, most of his account of the disease are not true. However, we can not say that he did not intentionally lie, and we may draw a conclusion that his explanation was made under scientific limits and religious prejudice or intolerance of the medieval Christian world.

1. 서론

중세 말 흑사병,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 2019년 코로나 19등의 팬데믹(pandemic)은 그 시대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불평등,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사고방식과 태도, 타자에 대한 편견과 불관용 등 여러 구조적 문제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세계적 규모의 전염병이 발생할 때마다 혐오와 공포 조장, 속죄양 만들기, 인포(information +epidemic)라 불리는 거짓 정보와 헛소문 등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팬데믹이 발생했을 경우 이런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거짓 정보는 자주 폭력과 끔찍한 학살로 이어지곤 했다.
14세기 중엽 유럽에서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서 기독교인들을 살해하려 한다는 거짓 소문이 유포되었고(Horrox, 1994: 207), 평소 유대인을 혐오했던 기독교 사회는 이를 빌미로 다수의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최근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1348-1350년 서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학살 행위가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Cohn, 2007: 4). 19세기 후반에 콜레라가 세계 각지에서 극성을 부리자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불행의 원인을 정부와 의료계 사람들에게 돌리고 이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실례로 19세기 이란계 출신의 타슈켄트 사람들은 러시아 의사들이 자신들을 독살하려고 콜레라를 퍼뜨렸다는 음모론에 동요되어 이들을 살해했다(Cohn, 2017: 162-163). 현재도 코로나19로 인한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거짓 정보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발병 초기 중국이 코로나를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어떤 사람들은 ‘우한 코로나’라는 용어 사용을 계속해서 고집한다. 혐오를 부추기는 거짓 소문들은 중국과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런 맥락에서 전염병이 발생하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거짓 소문, 오해, 왜곡, 부정확한 정보 등은 소홀하게 다룰 문제가 아니다. 14세기 중엽 흑사병에 대한 유럽 기독교 세계의 이해와 대응은 이러한 문제들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적합한 사례이다.1) 유대인이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우물에 독을 탔다는 거짓 소문뿐만 아니라, 흑사병이 서유럽 기독교 세계로 전파되는 초기에 정확하지 않은 정보, 종교적으로 편향된 이해와 대응, 편견과 혐오에서 나온 오해와 왜곡 등이 넘쳐났다. 이처럼 부정확함, 거짓, 편견, 오해, 왜곡 등으로 점철된 당대의 기록들은 흑사병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복원하기 어렵게 만든다. 철저한 사료 검증과 비판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는 이탈리아 피아첸차 출신의 공증인 가브리엘레 데 무시스(Gabriele de Mussis)의 증언과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역사해석이다. 그는 1347년 흑해 카파에서 서유럽 세계로 전염병이 퍼져나가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2)
  • 타타르인들을 덮친 병은 군대 전체를 감염시켜, 매일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것은 마치 천국에서 화살이 비처럼 내려 타타르인들의 오만함을 쳐서 부수는 것 같았다. (...) 죽어가는 타타르인들은 병이 초래한 엄청난 재앙에 압도되어 대경실색하고, 이를 벗어날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성전을 계속할 의지를 잃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체에서 나온 견디기 힘든 악취가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시체를 투석기에 넣어 도시 안으로 투척할 것을 명령했다. 산처럼 보이는 시체 더미가 성안으로 던져졌고, 기독교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시체를 바다에 내던졌지만, 시체 더미들로부터 숨거나 도망칠 수 없었다. 곧 썩어가는 시체가 공기를 오염시키고 식수를 상하게 했고, 악취는 너무나 지독해 수천 명 중 한 명도 남아 있는 타타르 군대를 피해 도망갈 수 없었다. 게다가 감염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독을 옮기고,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과 장소를 감염시킬 수 있었다. 누구도 이를 막아낼 방법을 알거나 찾지 못했다. (...) 독성이 강한 병에 감염된 선원 중 소수가 배를 이용해 카파를 벗어났다. 일부 선박은 제노바로, 다른 일부는 베네치아나 다른 기독교 지역으로 향했다.

무시스의 이야기 중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시체투척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무시스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시체투척을 최초의 세균전이나 생물학전으로 간주한다. 지글러는 그의 이야기가 큰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Hankin, 1905: 48-83; Derbes, 1966: 59-62; Biraben, 1975-1976: 1-53; Horrox, 1994: 9; Herlihy, 1997: 24; Wheelis, 2002: 971-975; Balard, 2002: 18; Ciocîltan, 2012: 201; Schamiloglu, 2017; 329; 지글러, 2004: 29). 공성전(1343-1346)을 세균전으로 보지는 않지만, 여전히 무시스의 기록을 흑사병 초기 전파를 보여주는 사료로 신뢰하는 역사가들이 적지 않다(McNeill, 1976: 177; Dols, 1977: 52; Epstein, 1996: 212; Benedictow, 2004: 52-53; Aberth, 2005: 13; Varlik, 2016: 98; Campbell, 2016: 300; Ditrich, 2017: 26-28; Grinberg, 2018: 19-32). 반면 무시스는 공방전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증언을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박하는 사가들도 있다. 올레 베네딕트는 무시스가 신학적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투석기로 시체를 성내로 날려 보냈다는 거짓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해석한다. 최근 한나 바커(Hannah Barker)는 흑사병 초기 전파에 관한 기존 학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Barker, 2021: 97-126). 그녀는 당시 흑해에 거주했던 비잔티움, 제노바, 베네치아, 맘루크 출신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근거로 타나와의 곡물 교역 금지령 때문에 흑사병이 흑해로 퍼져나가는데 1년이나 지체되었으며, 흑사병을 옮긴 주체는 세균 공격이 아니라 곡물 무역이었다고 주장한다(Barker, 2021: 100). 캠벨(Campbell)과 카르포프(Karpov) 등 다수의 학자도 곡물 수송선이 흑사병을 옮긴 매개체였다고 이야기한다(Campbell, 2016; 324; Karpov, 1997: 68; Lenz and Hybel, 2016; 61; Barker, 2021: 106). 그린버그(Grinberg)도 카파 공성전3))이 끝나고 평화가 다시 찾아오면서 재개된 곡물 무역이 흑사병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Grinberg, 2018: 26).
공성전과 시체투척 이외에도 전염병에 대한 무시스의 여러 설명이 정확하지 않거나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시스의 기록은 흑사병이 서유럽에 전파되는 초기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몇 안 되는 사료인 데다가 그 이야기가 역사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정도로 흥미로워서 여전히 흑사병에 관한 핵심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다른 사료가 없음을 고려할 때 무시스 기록에 대한 철저한 사료 비판과 검증이 필요하다(Barker, 2021: 98). 그래서 본 논문은 4가지 측면에서 무시스의 이야기를 신뢰할만한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일차적으로 살펴볼 것이다(Horrox, 1994: 14-26; Tononi, 1884: 144-152). 하지만 본 논문의 최종 목표는 그가 의도적으로 사건을 왜곡했거나 거짓말을 했는지를 밝히는 데 있기보다는, 그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면 그러한 오해와 왜곡이 어떤 시대적 배경과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흑사병의 초기 전파과정을 밝히는 데 치중하고 있는 바커 등의 연구를 넘어서 전염병이 발생할 때마다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점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무시스: 전염병을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간접 목격자

무시스의 이야기를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기록자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의 가계 및 활동을 상세히 알려주는 기록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그가 평민 출신이었고, 가족 구성원에 의사, 법률가, 공증인, 성직자 등이 있었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다. 1280년경 피아첸차에서 출생한 그는 20대부터 줄곧 공증인으로 일하다가 1356년경 사망했다(Tononi, 1884: 141). 한마디로 그는 평범한 도시의 부르주아였기에 자신에 관한 기록을 만들어낼 정도의 유명인사가 아니었다. 그나마 그가 라틴어로 전염병에 관한 짧은 글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공증인이라는 직업의 특수성 덕분이었다. 당시 공증인은 이탈리아 속어가 아니라 소수 지식인의 언어인 라틴어로 계약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무시스가 카파 공성전 이야기를 쓴 시점은 전염병이 제노바에 유입되고 나서 몇 년 후였다. 무시스가 작성한 원본은 사라지고 나중에 작성된 필사본만이 전해진다. 후대에 작성된 필사본이 원본과 똑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역사가도 있다.4)
무시스 이야기의 신뢰성을 알아보려면 일차적으로 그가 흑해의 카파에서 사건을 직접 목격했는지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흑사병이 서유럽으로 퍼져나가는 초기 과정에 관한 기록을 남긴 대다수 사람은 직접 목격자가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간접 목격자였다(Horrox, 1994). 그렇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공성전이 벌어질 당시 그가 카파 현장에 있었고,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며, 그가 흑해에서 타고 온 배가 유럽에 흑사병을 퍼뜨렸다고 주장한다(Derbes, 1966: 59-62).5) 반면 사건 당시 무시스는 현장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고 말하는 역사가들도 있다(Henschel, 1842: 34-35; Heyd, 1886: 196; Benedictow, 2004: 51; Ditrich, 2017: 26; Tononi, 1884: 142; Barker, 2021: 99). 구체적인 증거뿐만 아니라 여러 정황도 무시스가 공성전 당시 카파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344년에서 1346년 동안 무시스가 피아첸차에서 거의 매일 작성한 공증 문서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Tononi, 1884: 142). 공성전이 일어났던 1346-7년 당시 그는 67세의 노인이었다는 정황을 고려할 때 먼 이국땅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게다가 그곳은 제노바 상인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시장이었기 때문에 피아첸차 출신의 나이든 공증인이 끼어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무시스는 직접 목격자가 아니라 삼자적 관점에서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듯하다. 우선 자신이 1348년 피아첸차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다고 진술한다. 게다가 무시스는 제노바 사람이 피아첸차에 피신 오면서 전염병이 자신의 도시에 퍼졌다고 말한다. “이미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있었던 한 제노바 사람이 가까스로 피아첸차까지 왔다. 그 제노바 사람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가까운 친구인 풀코 델라크로체를 찾아갔고, 풀코는 그를 자신의 집에 들였다. 제노바 사람은 침대에 눕자마자 사망했고, 곧바로 풀코와 그의 가족 그리고 많은 이웃도 사망했다. 간단히 말하면 그렇게 해서 이 병이 피아첸차에 들어왔다. 나는 이 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울음과 탄식이 온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만약 그가 흑해에서 전염병을 피해 본국으로 돌아왔다면 이렇게 진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추가로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에 전염병을 퍼뜨린 사람도 제노바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6)
무시스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 그가 제노바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근거로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무시스처럼 흑사병이 서유럽에 전파되는 초기 과정을 기록한 동시대 증인들도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간접 목격자들이었다. 투르네의 수도원장 질 르 뮈세(Gilles Li Muisis)도 자신이 할 수 있는한 가장 믿을 만한 이야기와 가장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고 진술한다. 게다가 수도원장은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먼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신빙성 있게 말할 수가 없다고 솔직히 토로한다(Horrox, 1994: 46). 수도원장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에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명으로 아라곤 왕을 알현하고 돌아오는 기사, 콤포스텔라 성지를 다녀온 순례자, 상인, 여행자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제노바 선박이 동지중해로부터 서지중해로 흑사병을 들여왔다는 이야기를 공유한다(Horrox, 1994: 35-45).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몽골 땅에서, 어떤 이들은 터키인들의 땅에서, 어떤 이들은 사라센 지역에서 전염병이 처음 발생했다고 제각각 다른 목소리를 낸다.
무시스의 이야기를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전염병을 종교적 관점에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염병을 신의 뜻을 어기고 잘못을 저지른 인간을 벌하는 신의 분노로 규정한다. 그가 말한 신의 명령이자 징벌은 다음과 같았다(Horrox, 1994: 14-61; Derbes, 1966: 59). 천체가 지구의 공기에 독을 발생시켜, 땅을 부패하도록 만들었다. 날카로운 죽음의 화살이 세상에 떨어져 인간을 급살 하라고 명했다. 남녀노소 없이 어떤 누구도 신의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도 죄인과 함께 죽을 것이고, 어떤 누구도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독화살이 모든 사람에게 떨어지고, 열병은 교만한 자를 쓰러뜨리고, 고칠 수 없는 병은 번개처럼 공격할 것이다. 전능한 신의 울부짖는 창은 모든 곳을 공격했고 인류 전체에게 자비 없는 상처를 남겼다. 화살이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져 타르타르 인들의 교만을 벌했다.
무시스는 흑사병이 본격적으로 유럽을 휩쓸기 전 아시아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재앙을 묘사할 때도 묵시록에 나오는 이야기를 빌려온다. “중국을 포함한 동방에서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징후들이 나타났다고 이야기한다. 하늘에서 뱀과 개구리가 비처럼 떨어져서, 수많은 사람에게 독을 뿜고 이로 물어뜯고, 집어삼킨다. 남쪽 인디아에서는 지진이 발생해 온 땅을 뒤흔들고, 천국에서 떨어지는 불이 도시를 불태운다. 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연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불태운다. 어떤 지역에서는 피의 비가 쏟아지고 하늘에서 돌이 떨어지기도 한다(Horrox, 1994: 25; Tononi, 1884: 151).” 이처럼 묵시록의 알레고리는 동시대인들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골 메뉴였다. 플랑드르 출신의 한 사제도 동양의 대인도 근처에서 개구리와 뱀, 도마뱀, 전갈과 여러 독충이 억수처럼 몰려들었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 사람과 짐승을 불태웠다고 말한다(지글러, 2004: 26).
그런 점에서 무시스가 흑사병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은 중세 유럽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망탈리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흑사병을 인간을 단죄하는 신의 분노라 생각했고, 그래서 신의 징벌을 막아줄 수 있는 성인들에게 자비를 구했다. 무시스도 당시 사람들이 여러 차례의 화살을 막고 순교한 성인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화살로 상징되는 신의 징벌 즉 전염병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준다고 진술한다. 무시스는 구체적인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그 성인은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순교한 성인 세바스티아누스다. 투르네의 수도원장은 프랑스 전역에 전염병이 퍼지자 순교자 세바스티아누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수아송의 메다 수도원(saint Médard)으로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말한다. 실제로 전염병을 막아달라고 세바스티아누스에게 기원하는 노래도 유행했다(Horrox, 1994: 26, 54, 125-126, 111-117).7) 15세기 흑사병을 막아주는 성인으로 새로운 인기를 얻었던 사람은 성 로쿠스였다. 로쿠스는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는 중 감염되었지만, 죽지 않고 환자를 계속 돌본 성인으로 명성을 얻었다.8) 이러한 이야기 덕분에 그는 15세기에 전염병을 막아주는 성인으로 부상했다(Horrox, 1994: 97; 박흥식, 2008).
이러한 심성을 가진 중세 기독교인들에게 인간의 타락을 벌하는 신이 내린 징벌인 전염병을 피하는 방법은 당연히 죄를 뉘우치는 것이다. 이러한 심성을 공유했기에 무시스는 어떻게 회개할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교만한 자는 겸손해야 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지 않은 인색한 자는 부끄러움을 알고, 질투하는 자는 열심히 자선하며, 음탕한 자는 혐오스러운 짓을 그만두고 정직하게 살며, 화를 이기지 못하는 자는 폭력을 삼가고, 식탐이 있는 자는 단식으로 음식을 절제하며, 게으른 자는 일어나 선행을 하는데 나서라.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은 꾸미는 데서 얻은 즐거움을 포기하라고 충고한다(Horrox, 1994: 23). 그는 환영 속에서 신의 경고를 들은 한 성스러운 사람의 이야기로 흑사병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모든 사람이 3일 연속 교회에 모여 각자 손에 촛불을 들고, 큰 신앙심으로 아나스타시아를 위한 미사에 참여해 겸손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라고 충고한다(Horrox, 1994: 25-6). 무시스도 당시 일반 기독교인들처럼 특정 성인들이 흑사병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준다는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관점에서 전염병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흑사병이 신의 징벌이라는 사고는 중세 기독교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중해의 무슬림들에게도 널리 퍼져있는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전염병에 직면한 무슬림들은 이러한 재앙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고, 대다수 학자와 법률가들은 이 전염병을 신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했다. 무슬림 의사들조차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려고 했다(Dols, 1977: 84, 109-121). 그렇지만 세부적인 설명에서는 의견 차이가 있기도 했다. 전염병은 이교도들에게는 신의 징벌이지만 무슬림들에게는 신의 자비이기 때문에 신께서 아끼시는 무슬림 공동체는 감염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한 전염병은 신이 보낸 것이기 때문에 인간 사이의 감염이나 전파는 없다는 신학적 해석도 있었다. 물론 반대의 해석도 있었지만, 전염병으로 죽은 자를 순교자로 간주하기도 했다. 이러한 종교적 해석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1438년 이집트에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술탄 바르스바이(Barsbay)는 법률가들과 학자들을 불러 전염병의 원인에 관해 물었고, 이들은 간음과 매춘을 벌하기 위한 신의 징벌이라고 답했다. 열띤 토론 끝에 술탄은 모든 여성에게 길거리로 나오는 것을 금지했다(Dols, 1977: 114).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인들, 무슬림, 유대인들이 사는 신앙의 바다인 지중해에서 흑사병은 신의 뜻이자 인간의 죄를 벌하고자 하는 신의 징벌이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종교적 관점에서 전염병을 이해하는 무시스의 설명이 객관적이지도 못하고 비합리적일 수 있지만, 당시의 맥락과 기준에서 보면 너무나 일반적인 사고였다.

3. 몽골과 제노바 상인에 대한 혐오와 편견

무시스의 이야기 중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공성전과 전염병에 감염된 시체투척에 관한 것이다. 논란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무시스의 기록을 제외하면 공성전 과정에 시체투척이 있었다고 진술하는 동시대인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Grinberg, 2018: 21). 그의 증언처럼 실제로 몽골군대가 공성전에서 흑사병으로 사망한 동료의 시신을 성안으로 던져 넣어 성안의 제노바 사람들을 감염시켜 죽이려고 했을까? 하지만 시체는 전염력이 없어서 몽골군대가 그런 전술을 활용했다고 하더라도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다수의 역사가가 공성전과 시체투척을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동일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대의 기록은 거의 없다. 그나마 소수이지만 공성전이 있었음을 증언하는 사료들은 일부 남아 있다. 투르네의 수도원장 질 르 뮈세와 알메리아의 이븐 하티만(Ibn Khatima)만이 유사한 이야기 즉 몽골군의 공성전 이야기를 들려준다(Barker, 2021: 102). 수도원장은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전해 들은 이야기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1347년 엄청난 수의 몽골군이 기독교인들이 거주하는 도시를 공격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 끔찍한 전염병이 몽골군 내부에 퍼졌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20명 중 한 명도 채 살아남지 못했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몽골군은 모여 논의를 했고, 많은 사람이 죽은 이유는 신의 징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최종적으로 몽골군은 성으로 들어가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할 것을 결정했다. 그에 따라 생존자 중 가장 건장한 병사들이 성으로 들어갔지만, 성안의 기독교인들도 거의 다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죽음이 자신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덮친 사실을 깨닫고 그들은 개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를 유지할 것을 결정했다(Gilles Li Muisis, 1841: 279; Horrox, 1994: 46; Schamiloglu, 2017: 325-343).
수도원장은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는 믿을만한 상인의 이야기를 근거로 1347년에 성지를 점령하고 있었던 터키인들과 다른 이교도와 사라센인들에게도 전염병이 발생했는데 20명당 채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해에 선원들과 여행자들이 해로로 전염병을 서유럽으로 전파했다. 제노바는 어떤 한 성을 공격하고 있는 군대를 돕기 위해 8척의 선박을 보냈는데 그중 2척만 귀환했고, 나머지 6척에 승선한 이들은 귀환 도중 전염병으로 모두 죽었다(Gilles Li Muisis, 1841: 279; Horrox, 1994: 46).
무시스의 증언과 수도원장의 증언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첫 번째는 수도원장의 기록에는 시체를 성안으로 던졌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Horrox, 1994: 46; Barker, 2021: 102). 실제로 1347년 공성전에서 투석기를 사용했다고 증언하는 기록이 없다. 반면 제노바 연대기에 따르면 몽골군대는 1344년 공성전에서 투석기를 사용했으며, 그것은 일반적인 공성용 무기로 사용되었다(Barker, 2021: 102). 아마 무시스가 1차 공성전과 2차 공성전을 혼합하여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 차이는 수도원장은 구체적으로 카파를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흑사병을 서지중해로 옮긴 주체는 동지중해에서 들어온 선원들과 여행자들이라고 말한다. 즉 흑사병이 구체적으로 어떤 항구나 도시로부터 들어왔는지 몰랐기 때문에 대략 동지중해로부터 들어온 선박에 의해서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 점에서 수도원장의 설명이 공증인의 설명보다는 더 정확하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시체를 투척했다는 무시스의 진술은 당시 몽골인들의 장례 전통과 전염병에 대처하는 그들의 일반적인 관행에도 맞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은 가까이 있는 설치류에게서 병이 발생하면 그 지역을 신속하게 떠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오랜 유목 생활에서 얻은 지혜일뿐만 아니라, 병든 설치류는 불행을 가져온다는 미신에서 기인한 전통이었다(McNeill, 1976; 137-138; Grinberg, 2018: 23). 실제로 몽골군대는 전염병의 공격을 받은 막사를 표시해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 몽골과 직접 접촉했던 유럽인들도 이런 관행을 증언한다. 1245년 교황의 명을 받고 몽골 세계를 다녀온 후 여행기를 남긴 카르피니는 “만약 누군가 치유하기 어려운 병에 걸리면 그들은 창을 꼽고 검은 펠트로 그것을 두른 뒤 그때부터는 어떤 외부인도 그가 거주하는 구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죽음의 고통이 시작되면 거의 모든 사람이 그의 곁을 떠나는데, 그 까닭은 그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새달이 뜰 때까지 누구나 황제나 수령의 오르두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Wyngaert, 1929: 42; Dawson, 1980: 12; 김호동, 2015: 60).9) 게다가 몽골인들은 시신을 땅에 묻었다. 카르피니의 설명에 따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면 아무 곳에나 묻었고, 수령의 경우는 주변을 잘 정돈한 다음 구덩이를 파서 그곳에 시신을 매장했다(김호동, 2015: 60-61).
당시 현장에 있었던 제노바 인들이 본국에 보낸 편지보다 카파의 정황을 잘 알려주는 기록은 없을 것이다.10) 카파의 제노바 인들은 1347년 초 3년간의 전쟁을 끝내는 평화협정을 몽골 칸 자니베크와 체결한 후 본국의 수장 조반니 데 무르타(Giovanni de Murta)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평화협정을 먼저 제안한 것은 몽골 칸이었다. 그는 긴 전쟁을 끝내기 위해 1346년 말 제노바 진영과 협상을 시작했고, 1347년 초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몽골 칸이 평화협정을 먼저 제안한 이유는 몽골 진영에 퍼진 흑사병 때문이었다. 1346년 몽골군은 흑사병으로 많은 병력을 잃었고, 공성전을 유지할 상황이 아니었다(Ciocîltan, 2012: 212). 1346년 10-11월 무렵 몽골 진영에 흑사병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Barker, 2021: 119). 반면 협정이 체결된 1347년 초까지 제노바 진영은 흑사병으로 크게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제노바인들은 카파 상황이 여전히 불안정하고 항구적인 평화는 확실하지 않다는 우울한 전망을 본국에 알렸다. 몽골인들이 제노바인들의 방어 비용과 병력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이미 많은 몽골 병사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이 제노바인들의 목숨도 앗아가길 기원하고 있다면서 여전히 불안한 상황을 토로했다.11) 편지의 이야기처럼 1347년 초까지 제노바 진영에는 흑사병이 본격적으로 퍼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346년 카파를 방문하고 서유럽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도 이러한 상황을 증명해준다. 1346년 4월 베네치아 대사는 카파에서 출발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베네치아로 귀환했지만, 전염병을 서유럽에 들여오지 않았다(Barker, 2021: 117). 평화 협상을 위해 1346년 후반 카파를 방문했던 제노바 대사도 본국으로 귀환했을 때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Barker, 2021: 117-118).
결국, 이 편지는 공성전 당시 시체투척이 없었음을 증명한다. 몽골 진영은 제노바 진영에도 전염병이 퍼지기를 기대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협정 체결 시점인 1347년 초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무시스의 이야기처럼 공성전 중에 시체투척이 있었고 그로 인해 흑사병이 제노바 진영에 퍼져서 제노바 사람들이 배를 이용해 탈출했다면 편지에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명 나와야 할 것이다. 현장에 있던 제노바인들이 끔찍한 공격을 받고 있다고 본국 동포들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재정 지원뿐만 아니라 공성전을 돕기 위한 군사적 원조도 좀 더 수월하게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무시스는 몽골군대가 공성전에서 투석기를 사용해서 전염병에 감염된 시체를 던졌다고 말했을까? 아마 몽골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그로 인한 편견과 혐오가 자극적인 이야기를 만드는데 일정정도 효모 역할을 했을 것이다. 큰 전염병이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책임을 전가할 대상과 필요하다면 희생양을 찾곤 했었다. 사실 유럽인들에게 몽골은 지옥에서 온 사자로 불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13세기 중반 영국 출신 베네딕투스 수도사 매튜 파리스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몽골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탄의 끔찍한 백성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타타르인은 마치 지옥에서 악마들이 나오듯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암벽으로 가려진 그들의 땅에서 밖으로 나왔다. (...) 지상을 뒤덮은 메뚜기 떼처럼 그들은 동방세계를 불과 칼로 파괴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나무는 잘려져 버리고 정원은 뿌리째 뽑혔으며, 도시나 농촌의 사람들은 살해되었다. (...)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괴물이었다.” 몽골 인들에 대한 공포로 원래 몽골계 부족을 칭하던 타타르(Tatar)라는 용어는 라틴어에서 지옥을 뜻하는 타르타루스(tartarus)로 변형되었다. 몽골인들은 지옥에서 나온 사자가 되었다. 나르본 출신의 성직자 이보는 타타르인들이 인육을 먹는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몽골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부추겼다(Andrea, 2020: 15848-15961). 게다가 금장한국의 칸 우즈베크가 14세기 초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함으로써, 몽골은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섬멸해야 할 이교도가 되었다. 무시스는 이 전염병은 지옥의 사자들인 몽골족의 거만함을 벌하기 위해 신께서 내린 징벌이라고 말한다.12)
무시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신의 징벌을 받은 몽골족으로부터 서유럽 기독교인들에게 전염병을 퍼뜨린 사람은 제노바 상인들이었다. 무시스 외에도 제노바 상인들이 전염병을 퍼뜨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흑사병에 관한 기록을 남긴 비잔티움 황제 요안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Cantacuzenos)는 물론 자신의 백성을 탓하기도 하지만 그 잘못을 제노바인들에게 돌린다. 구체적으로 이슬람교도들이 로마 제국의 도시(콘스탄티노플)를 점령하는 데 제노바인들이 도움을 줬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벌을 내린 것이라고 제노바인들을 질책한다(Dols, 1977: 52-3). 프란체스코 수도사 미켈레 다 피아짜(Michele da Piazza)도 전염병은 하느님께서 제노바인들의 죄를 벌하려고 내린 성스러운 징벌이라고 말한다. 수도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1347년 10월, 신이 내린 신성한 징벌을 피해 도망 온 12척의 제노바 선박이 메시나 항구에 들어왔고, 이 제노바인들의 몸 안에 끔찍한 질병이 있어서 이들과 접촉한 사람들은 감염되어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Horrox, 1994: 36).
제노바 상인들이 흑사병을 퍼뜨렸다고 비난받았던 이유는 그들이 이교도들과 교역을 하고, 이를 통해 ‘더러운’ 돈을 버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질투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거래 자체가 하느님을 즐겁게 할 수 없는 직업인데, 여기에 더해 이교도들에게 전쟁 물자까지 공급하는 제노바 상인들에 대한 시선이 고울 수가 없었다. 특히 흑사병의 진원지로 지목되었던 흑해는 제노바 상인들이 이교도와의 활발한 교역을 해서 막대한 부를 얻는 탐욕의 땅이었을 것이다.
흑해를 주 무대로 활동했던 제노바 상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니었다. 제노바 상인들이 흑해로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계기는 1261년 비잔티움 황제와 체결한 님페아 조약 덕분이었다(Papacostea, 1979: 201-202). 4차 십자군으로 수도를 상실한 비잔티움 제국은 님페아 조약에서 제국 수복을 위해 제노바로부터 해상 원조를 받는 대가로 여러 특혜를 약속했는데 그중 하나가 흑해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이탈리아 상인의 흑해 진출을 막아왔었지만,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양보를 했다. 그 덕분에 제노바 상인들은 몽골 평화 시기 흑해 교역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고, 흑사병 당시 공성전이 벌어졌던 카파는 제노바 상인들의 활동 중심지였다(Balard, 1978: 215). 이곳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페라, 키오스와 함께 제노바 상인들에게 제일의 해외 상업 거류지였다. 사실 흑사병이 발발했을 당시 카파는 형식적으로는 몽골의 영토였지만, 사실상 제노바 지배하에 있었다. 카파에서 제노바 상인들이 주로 거래했던 대표적인 상품은 노예였다(Heyd, 1886: 555-563; Epstein, 1996: 179). 노예무역 자체보다는 이 노예를 기독교 세계의 적인 이집트 맘루크 제국에 공급했다는 사실이 기독교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쉬웠다. 특히 14세기 초반 세기 동안 교황청은 노예를 포함한 전쟁 물자를 맘루크 제국에 공급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Balard, 1978: 290-302; Ashtor, 1983: 3-63; Barker, 2019: 178-183). 그런 연유로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제노바 사람들은 돈과 이익에 눈이 멀어 기독교 형제를 저버리고 이교도인 이슬람을 돕는 악덕 상인들이었다. 14세기 초 기욤 아담은 흑해의 제노바 상인들이 노예를 포함한 여러 상품을 이슬람 국가에 공급함으로써 큰 죄를 짓고 있으며, 이들은 지옥의 관리자이자 가짜 기독교인들이라고 꾸짖었다(Adam, 2012: 29).
무시스와 같은 보통의 유럽 기독교인들은 저주받을 이교도이자 지옥의 사자인 몽골과 돈밖에 모르는 제노바 상인들이 신의 징벌을 먼저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자 신의 섭리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4. 흑사병에 대한 부정확한 병리학적 지식

무시스를 포함한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에 대한 병리학적 지식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흑사병이 에르시나 페스티스(Yersinia pestis)라는 쥐벼룩에 상주하는 병원균이 중간 숙주인 쥐를 통해 인간에게 감염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흑사병을 지칭하는 구체적인 명칭조차도 없었다. 무시스는 죽음을 뜻하는 라틴어 용어 모르스(mors)로 흑사병을 불렀다. 게다가 그는 몽골인들을 덮친 이 죽음을 설명할 수 없다고 솔직히 토로했다(Tononi, 1884: 144). 그는 흑사병을 ‘죽음(mors)’이나 ‘죽음(mortalitas)’이라는 용어로 지칭했을 뿐이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이 전염병을 죽음을 가져오는 재앙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pestilentia(pestilenza)로 부르기도 했다(Tura del Grasso, 1993: 552; Villani, 1991: 1578; 박흥식, 2008: 199).
물론 현대 병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당시 유럽인들이 흑사병에 관해 알고 있는 의학 지식은 대부분 부정확했지만, 당시 사람들도 나름 전염병의 원인과 발생 과정을 밝히고 치료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무시스는 부패한 공기가 전염병을 옮긴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당시 의학계의 공통 견해였다(Horrox, 1994: 100). 1348년 흑사병의 원인을 알아보라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요청에 대한 답변서에서 파리 의학부는 목성, 토성과 화성이 1345년 3월 물병자리와 일치하게 되면서 사악한 공기를 만들었고, 이 공기가 전염병의 원인이었다고 답했다(De la Haye, 1888: xvi-xvii; 홍용진, 2021). 코르도바 출신의 의사 알폰소는 월식으로 인해 발생한 지진과 유독한 공기가 전염병의 원인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Coville, 1938: 367-369).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천체 운동의 이상이 부패한 공기를 만들고 그로 인해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의학계 소견은 널리 유포되었다. 흑사병이 기승을 부릴 당시 다수 의사는 전염병을 다룬, ‘흑사병 논고(plague tractate)’라 불리는 책자를 저술했고 그 덕분에 일반 대중들도 전염병의 발생원인, 예방 및 치료 등에 관해 상당한 지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Wheelis, 2002: 972; 박흥식, 2008: 184-185). 무시스도 이러한 논고들에서 얻은 정보에 근거해 전염병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염병에 대한 무시스의 병리학적 설명이 1348년 10월에 발표된 파리 의학부 소견과 여러 흑사병 논고에 나오는 내용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13)
그의 증언에 따르면 부패한 공기는 차갑고 딱딱한 화살이 몸을 찌르듯이 몸 속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감염된 환자가 내뿜는 독기가 다시 공기와 물을 오염시킨다. 무시스는 이렇게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감염된 병자의 증상과 병의 진행 과정을 체액 이론에 근거해 설명한다. 파리 의학부는 뜨겁고 습기가 많은 체질의 사람들이 전염병에 쉽게 걸리며, 이는 체액이 쉽게 부패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Horrox, 1994: 163). 체액 이론은 중세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널려 공유된 의학 상식이었다.14) 체액 이론에 따르면 신체를 구성하는 피, 황색 담즙, 검은색 담즙, 점액이라는 4가지 체액이 있고, 각각의 체액은 차거나 따듯하거나, 건조하거나 습하거나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체액이 서로 균형을 이루면 신체가 건강하고 체액의 불균형이 생기면 몸에 이상이 생기고 최종적으로 병이 생긴다. 이렇듯 체액 이론은 이해하기 어려운 의학 이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이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무시스는 체액 이론과 용어를 활용해 병의 증상과 진행 과정을 설명할 수 있었다. 우선 엉겨 붙는 체액(coagulato humore)이 몸과 겨드랑이(corporibus et in iuncturis)에 종기를 만들고, 종기에서는 악취와 열(febre ptrida)이 발생한다. 종기가 생기는 곳의 체액은 부패하게 되고, 이렇게 부패한 체액이 신체 내부에서 부풀어 사지를 마비시키면 그것은 죽음의 신호다(si humor ille tumens duriciem ostendebat, exterius nulla super veniente molicie signum mortis est)(Tononi, 1884: 150-151). 물론 병이 난 부위에서 체액을 빼내면 환자는 기적적으로 살 수도 있다(evacuatione humoris, pacientes graciam sanitatis habebant) (Tononi, 1884: 151).
무시스가 이야기한 치료법 중 하나인 사혈은 당연히 체액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상체에 증상이 있으면 팔에서 피를 뽑고, 하체에 증상이 나타나면 발의 힘줄에서 피를 뽑으라고 조언한다. 종기가 커지면 아욱으로 만든 고약을 발라 종기가 여물게 한 다음 종기에서 체액을 빼내고 종기를 제거하라고 말한다.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던 테리아카(theriac)도 전염병에 효험이 있다고 이야기한다(Horrox, 1994: 25).
기독교 세계뿐만 아니라 지중해의 이슬람 세계 또한 전염병이 오염된 공기로 전파된다는 공기 전파설과 체액 이론에 근거해 흑사병의 병리학을 설명했다. 당시 지중해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부패한 공기를 뜻하는 미아스마(miasma)가 인간, 동물, 물과 식물을 오염시켜 병을 초래한다고 믿었다. 이 공기 전파설15)과 체액 이론은 고대 지중해를 대표하는 두 명의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이론이었고, 이븐시나 등의 중세 이슬람 의사들이 이 공기 전파설을 수용했고, 이후 중세 이슬람 의학은 다시 기독교 세계에 유입되었다. 이븐시나는 오염된 공기를 흡입한 쥐나 지하 생활을 하는 동물들이 지상으로 도망 나오는 현상을 전염병이 온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로 생각했다(Dols, 1977: 85-109). 이러한 의학 지식의 전파와 수용 덕분에 중세 지중해인들이 전염병의 발생과 확산에 대한 동일 병리학적 지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체액 이론에 근거한 이런 처방들은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것 이외에는 전염병을 막거나 치료하는 데 효과가 없었다. 병리학적 관점에서 무시스의 이야기 중 유일하게 정확한 부분은 병의 외형적 증상에 관한 설명이다.16) 흑사병 환자에게 나타난 외형적 증상은 누구나 확인할 수 있었기에 동시대인들의 증언은 일치한다. 가장 흔하게 나타난 증상은 겨드랑이나 사해에 생기는 종기였다. 이 종기가 딱딱해지면서 열과 두통 그리고 악취가 발생한다. 각혈이 있기도 하고, 종기가 더 크게 부풀러 오르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술 취한 사람처럼 인사불성이 되어서 깨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체가 검게 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실 흑사병이라는 이름이 붙인 이유가 신체가 검게 변했기 때문인데 정작 그러한 증상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아비뇽 교황의 주치의였던 기 드 숄리아크(Guy de Chauliac 1300-1368)도 종기, 열과 각혈, 악취 등의 증상을 증언한다. 그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하나는 두 달 동안 계속 열이 나면서 피를 쏟는 증상이었는데, 사흘 만에 죽는 사례도 있었다. 또 하나는 발열과 함께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에 등창이 생기는 것이다. 이 증세로 닷새 만에 죽은 자도 있었다.”라고 증언한다(지글러, 2004: 32). 14세기 피렌체에서 흑사병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보카치오는 “이 병은 사해나 겨드랑이에 종기가 생긴다. 어떤 것은 사과만큼 커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달걀 정도인데 이는 가보촐로(gavocciolo)라 불렸다. 이 치명적인 가보촐로는 곧 증식하여 사방으로 마구 퍼져나갔다. 그 후 증세가 변하면서 검은 점이 팔이나 허벅지 등에 나타났는데 큰 반점이 몇 개 나타나거나 작은 반점이 무수히 돋아나거나 했다. 가보촐로가 죽음이 다가온다는 절대적인 신호이듯이 이 점들 역시 그러한 신호였다.”라고 『데카메론』에 기술하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당시 사람들이 신의 징벌이나 공기 전파설이나 체액 이론이라는 관점에서 전염병을 이해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당시 몽골군대가 세균이나 생화학 무기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는 해석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세균이나 생화학 무기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시대에 이를 무기로 사용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일부 역사가는 사체를 던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균전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심리전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행동이었을 것으로 해석한다. 게다가 오늘날에 밝혀진 의학 지식에 따르면 흑사병으로 사망한 주검은 전염병을 옮기지 못한다(Barker, 2021: 101; Benedictow, 2004: 52-53; Barzilay, 2016). 그러나 중세인들은 시체의 악취가 공기를 오염시켜 전염병을 옮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체투척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즉 현대적 기준의 세균전은 아니더라도 당시 정확하지 않은 의학 지식에 기반한 전술로 볼 수는 있는 것이다.

5. 카파, 서유럽으로 흑사병이 퍼지는 출발점?

무시스는 유럽 전역으로 흑사병이 퍼져나가는 출발점이 카파라고 말한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배를 이용해 카파를 빠져나간 사람 중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었다. 일부 배들은 제노바로, 다른 배들은 베네치아와 다른 기독교 항구도시들로 귀환했다. 탈출에 성공한 수천 명의 선원 중 제노바와 베네치아까지 죽지 않고 도달한 사람은 겨우 10명 정도였다. 10명의 무사 귀환자를 반기는 가족과 친척 그리고 이웃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로 포옹했고, 그 과정에 병이 퍼졌다. 대화 중에 입에서 입으로 독 기운이 옮겨갔다. 이렇게 감염된 사람들은 3일 만에 사망했다.
무시스의 설명처럼 카파에서 전염병이 서유럽으로 퍼져나갔을까? 그의 설명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여러 의문점이 남아 있다. 첫째로, 무시스는 카파를 출발한 배가 제노바와 베네치아로 갔다고만 말하지 중간 기항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당시 선박과 항해 기술로는 그 먼 거리를 직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도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 크레타, 시칠리아 등에서 기항했을 것이다. 실제로 흑해에서 나오는 대다수 선박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기항했다(Barker, 2021: 109, 121; Barry and Gualde, 2008: 468). 둘째로, 어떻게 흑사병에 걸린 선박이 흑해 북쪽 크리미아반도에서 출발해 중간에 여러 기항지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제노바와 베네치아에 도착하는 긴 항해에 성공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보통 흑해에서 제노바까지 항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2달 정도이고, 흑사병에 걸린 사람의 생사는 2달 이내에 결정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긴 항해에 살아남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흑해의 카파와 서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흑사병이 발생한 시간 차이를 고려할 때 카파를 흑사병이 서유럽으로 확산되는 바로 직전 단계의 출발점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프란체스코 수도사 미켈레 다 피아짜는 1347년 10월에 12척의 제노바 선박이 메시나 항구에 입항했고, 그들과 함께 전염병도 들어왔다고 말한다. 메시나 주민들은 제노바 선원들이 전염병을 옮긴다고 생각하고 이들을 항구에서 쫓아냈지만 이미 전염병은 퍼져있었다. 미켈레가 자신의 기록 마지막 부분에서 9월부터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이야기한 점을 고려할 때 흑사병은 9월에 이미 시칠리아에 도착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Horrox, 1994: 36). 아비뇽에서 브뤼헤로 보낸 1348년 4월 27 일자 편지에 따르면 아비뇽에서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한 시점은 1347년 9월이었다. 시칠리아보다 아비뇽에서 흑사병이 먼저 퍼졌다는 것은 지리적 위치를 고려할 때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시칠리아에 흑사병이 들어온 시점은 10월보다는 좀 더 이른 시기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다.
그런데 아비뇽에서 브뤼헤로 보낸 편지는 1347년 9월이 아니라 몇 달 후에 제노바 선박이 남부 프랑스 항구에 입항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편지에 따르면 1347년 12월 31일 향신료와 다른 상품을 선적한 3척의 갤리선이 제노바 항구에 입항했고, 제노바인들은 선원들이 감염된 사실을 알고 불화살을 쏘아 선박을 항구에서 몰아냈다. 이렇게 쫓겨난 한 선박은 마르세유 항구에 입항했지만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다(Horrox, 1994: 41-42). 이후 이 선박은 바다를 떠돌던 나머지 두 선박과 함께 대서양으로 향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여러 기록을 비교 분석하면 흑사병이 서지중해로 들어오는 시점을 명확히 특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대략 1347년 9월 무렵이나 조금 이전에 시칠리아섬에 전염병이 전파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부 독일 출신의 프란체스코 수도사 헤르만 기가스(Herman Gigas)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1347년 흑사병이 베네치아, 볼로냐, 마르세유, 몽펠리에, 아비뇽 등지에서 퍼졌고, 하루에 천명이 죽었다고 말한다(Horrox, 1994: 207; Barker, 2021: 109). 그리고 시칠리아에 전염병을 들여온 것은 동지중해로부터 온 선박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지중해에서 시칠리아로 들어온 선박이 계속해서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의 여러 항구를 경유 하면서 전염병을 서유럽 세계로 확산시켰다고 가정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전염병에 감염된 선박이 긴 항해를 견뎌내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항지에서 다른 선박에 전염병이 옮겨갔고, 이 새로운 선박이 다시 다른 항구로 전염병을 실어 날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카파를 서지중해와 서유럽으로 전염병이 퍼지는 출발지로 간주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이러한 비교분석과 추정이 설득력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당시 흑해와 동지중해 항로에 가장 많은 선박을 투입했던 제노바와 베네치아 선박의 운항 주기와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시스 또한 카파를 떠난 선박 중 일부는 제노바로, 일부는 베네치아로 향했다고 말한다. 중세 말까지도 지중해에서의 선박운행은 특정 계절과 시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흑해와 서지중해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선단은 베네치아가 운영했던 갤리 선단이었다. 로마니아(Romania) 행 갤리 선단으로 불렸던 흑해와 베네치아를 연결하는 베네치아 갤리 선단은 매년 7월경 베네치아 항구를 떠나 12월 말이나 다음 해 1월 초순에 귀환했다. 이러한 운행 주기를 고려할 때 베네치아 선단이 시칠리아나 서지중해로 전염병을 실어왔을 확률은 낮다. 게다가 1347년 베네치아 정부는 흑해로의 선단 파견을 금지했다. 1343년 카파에서 몽골과 제노바 간의 전쟁이 발생하자, 베네치아 정부는 선단 운영에 안전 조치를 강화하고, 타나 등의 위험 지역 입항을 금하고, 때론 운항 자체를 금지했다(Stôckly, 1995: 107-108: Nicol, 1988: 295; Thiriet, 1979: 43).17) 1347년 4월 24일에서야 베네치아 정부는 몽골과의 교역 금지령을 수정했고, 베네치아 선단은 흑해로의 운항을 재개할 수 있었다(Barker, 2021: 119).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베네치아 선박이 흑해에서 1347년 9월 시칠리아에 전염병을 들여왔을 가능성은 낮다.18)
제노바 선박운행 주기도 베네치아 선단의 운행 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노바 선박들은 일 년에 두 번 흑해로 운행했다. 3월이나 4월에 제노바 항구에서 출발해 흑해로 가는 선박은 10월경에 본국으로 귀환하거나, 7월이나 8월 무렵 제노바를 떠나 흑해에서 겨울을 보내고 다음해 4월 무렵에 본국으로 귀환했다. 1347년 9월 무렵에 흑사병이 시칠리아섬에 도착한 사실을 고려할 때, 1347년 봄에 제노바에서 출발해 흑해를 갔다 온 선박이 시칠리아로 전염병을 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1347년 봄까지 제노바 곡물 선박은 흑해 북쪽의 항구들을 들르지 않았다(Balard, 1978, 583; Barker, 2021: 109, 118). 1347년 3월 무역 금지령이 해제되고 나서야 흑해로의 선박운행이 재개되었다.19)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흑해로의 선박운행이 정상화 된 시기는 1347년 가을부터일 것이다. 그렇다면 1347년 10월 무렵 시칠리아섬에 입항한 12척의 제노바 선박들은 어디에서 온 선박일까?(Horrox, 1994: 38). 빌라니는 흑해로 갔던 8척의 제노바 선박 중 4척만이 제노바로 귀환했다고 말한다(Villani, 1991: 1578). 하지만 빌라니는 카파가 출발점이라고 특정하지는 않는다.
무시스의 증언과는 달리 당시의 기록들은 카파가 아니라 스키타이 지방이나 타나를 흑사병이 흑해 그리고 지중해로 퍼져나가는 출발지로 이야기한다. 비잔티움 제국 연대기 작가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Nicephoros Gregoras)는 심각한 전염병이 1346년 초봄 스키타이와 타나에 출현했고, 이곳으로부터 흑해 전역으로 퍼졌고, 다음 해인 1347년 에게해 섬들을 덮쳤고, 그다음에는 로도스와 사이프러스 섬으로 퍼져나갔다고 말한다(Bartsocas, 1966: 395; Barker, 2021: 97, 102). 그는 전염병이 흑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그리고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만 이야기하지, 카파를 중요한 전파 중심지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당시 비잔티움 황제였던 요하네스 6세도 비슷한 증언을 한다. 황제는 북쪽에 있는 스키타이인들에게서 시작된 전염병이 흑해 연안 지역을 덮쳤고, 소아시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뿐만 아니라 그리스, 이탈리아, 이집트, 리비아, 유대와 시리아 지방으로 퍼져나갔다고 말한다. 황제의 아들 안드로니쿠스는 1347년 6-9월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덮친 전염병에 감염되어 사망했다(Bartsocas, 1966: 395; Barker, 2021: 102, 109; Grinberg, 2018: 26; Ditrich, 2018: 26). 먼 이탈리아 도시의 공증인보다 현장에 가까웠던 두 사람이 흑사병의 초기 전파과정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두 사람 모두 카파 공성전을 언급하지도 않으며 카파를 중요한 흑사병 진원지로 지목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전염병이 남부 러시아의 스키타이와 돈강 하구의 타나에서 출발해서 흑해 그리고 지중해 전역으로 퍼졌다고 말할 뿐이다(Bartsocas, 1966: 395). 피렌체 출신의 연대기 작가 조반니 빌라니(Giovanni Villani)도 흑해 북쪽의 타나와 소아시아의 트레비존드를 흑사병 전파 중심지로 언급한다(Aberth, 2005: 20; Barker, 2021: 102).20)
여러 사료를 비교 분석하면 전염병이 선박을 통해 흑해 북쪽으로부터 지중해로 퍼져나갔음을 추정할 수 있지만, 카파를 서지중해로 퍼지는 출발점으로 특정하기에는 여전히 사료 증거가 부족하다(Ditrich, 2017: 26).

6. 결론

무시스의 증언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해서 얻은 결론은 그의 이야기 중 사실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거의 유일하게 사실로 간주할 수 있는 부분은 흑사병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에 대한 묘사 정도이다. 하지만 그의 기록을 계속해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역사가들이 있다. 이는 무시스의 증언을 비판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검증하지 않고 관행적으로 이전 해석을 답습하기 때문이다.21)
본 논문의 최종 목적은 무시스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흑사병에 대한 중세 서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이해와 인식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무시스의 이야기와 다른 동시대인들의 증언을 비교해서 얻은 결론은 그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무시스는 대다수 동시대의 기독교인처럼 불행이나 재앙을 신의 징벌로 생각하는 종교적 심성, 타 종교와 민족에 대한 강한 혐오와 편견, 낮은 의학 지식, 정확하지 않은 정보 등을 기반으로 흑사병을 이해하고 설명했을 뿐이다.
그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아니고,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 소문과 정보에 근거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 시대의 정보 유통 인프라를 고려할 때 정확한 정보를 얻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흑사병에 관한 기록을 남긴 대다수는 소문이나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에 의존했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대 지중해 사람들은 자연현상과 사회를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이 아니라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해했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이슬람 교인들도 기본적으로 흑사병을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내린 징벌이라고 생각했다. 병리학적 측면에서 그는 그 시대에 널리퍼져있는 기본 의학 지식인 체액 이론과 전문적인 의학 소견을 근거로 흑사병의 원인과 증상을 설명했다. 종교적 관용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타 종교와 인종에 대한 편견과 혐오라는 동시대인들의 일반적인 불관용의 사고와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심성으로 몽골과 사라센으로 상징되는 이슬람교를 흑사병을 전파한 주범으로 간주했다.

Notes

1) 흑사병(Black Death)이라는 용어 자체도 잘못된 정보에서 나온 오해이다(D'Irsay, 1926: 328-332). 흑사병 환자의 사지가 까맣고 딱딱하게 된다고 해서 검은 죽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실제로 14세기 흑사병으로 사망한 환자 중 이런 모습을 보인 경우는 드물었다. 이런 증상을 초래하는 폐혈성 페스트는 당시에는 드물었다.

2) 무시스 이야기의 원제목은 “1348년에 있었던 병 즉 죽음의 역사이다(Historia de morbo sive mortalitate quae fuit Anno Domini MCCCXVVIII)”(Tononi, 1884: 144-152; Horrox, 1994: 14-26). 토노니(Tononi)의 논문에는 라틴어 원문이, 호록스(Horrox)의 책에는 영어 번역문이 실려 있다. 이 논문에서는 라틴어 원문과 영어 번역본을 함께 참조하였다.

3) 카파 공성전을 촉발한 시발점은 1343년 베네치아 상관이 있었던 타나(Tana)에 베네치아 상인이 몽골 상인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살해에 대한 복수로 몽골인들은 타나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상인을 약탈하고 학살했다. 이후 몽골 칸 자니베크는 향후 5년 동안 타나에서 이탈리아 상인을 추방했고, 흑해에 있는 다른 이탈리아 상관들도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몽골은 카파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던 제노바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Grinberg, 2018: 20).

4) 후대 필사본은 1842년 폴란드 브로츠와프(Wroclwaw)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Grinberg, 2018: 22; Ditrich, 2018: 26).

5) 데르베스(Derbes)가 인용한 사료 중 하나인 시에나 연대기는 제노바 갤리선이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왔다고 말한다. <Le galee de' Genovesi tornaro d'oltramare e da la città di Romani a dì.... di novenbre e tornaro con molta infermità e corutione d'aria la quale era oltremare, inperochè in quel paese d'oltremare morì in questo tenpo grande moltitudine di gente di morbo e pestilentia. Essendo gionte a Gienova le dette galee tenero per per la Cicilia e lassorovi grande infermità e mortalità, che l'uno non potea socorare l'altro: così gionti a Gienova di fatto v'attacoro il morbo grandissimo e morivavi molta gente, e durò questo più semane e continuo cresceva il detto morbo e per questo tutti quelli navili furono tutti cacciati di Genova, e così si partiro quelle maledette galee e vennero a Pisa a dì .... di gienaio. Queste maladette galee de' Genovesi venivano e aveano aiutato a' Saraceni e al Turco a pigliare la città di Romania che era de' Cristiani che non féro I Turchi, e per questo si tenea che Dio avea mandato tanta mortalità a I detti Genovesi e a' Cristiani e in Turchia, e morì in Saracina e' tre quarti e così de' Cristiani.> (Tura del Grasso, 1934: 552-553).

6) <Verum qui placentinus plus de Placentinis scribere sum hortatus quid acciderit Placencie, MCCCXLVIII, ceteris inotescat>. (Horrox, 1994: 21; Tononi, 1884: 148).

7) Oratio facta ad sanctum Sebastianum, pro mortalitate quae viguit anno MCCCXLIX O sancte Sebastiane Semper vespere et mane Horis cunctis et momentis Dum adhuc sum sanae mentis Proteg me et conserva Et a me, martyr, enerva Infirmitatem noxiam Vocatam epidemiam. (Li Muisis, 1841: 385-386).

8) 전염병을 막아주거나 치료하는 것으로 인기를 얻었던 성인들에 관해서는 박흥식의 논문을 참조하라(박흥식. 2019: 1-31).

9) <Quando aliquis eorum infirmatur ad mortem, ponitur una hasta, et circa illam filtrum circumvolvitur nigrum et ex tunc nullus audet alienus terminos stationum eius intrare. Et quando incipit agonizare, quasi omnes recedent ab eo, quoniam nullus de hiis qui morti eius assistunt, potest ordam alicuius ducis vel Imperatoris usque ad novam lunationem intrare.> (Wyngaert, 1929: 42)

10)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평화협정과 편지의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날짜가 나오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발비(Balbi)는 편지의 내용을 기반으로 대략 1347년 초에 편지가 작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편지는 1347년 2-3월 무렵에 작성되어, 5월 중순 무렵에 제노바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네치아 원로원 기록도 1347년 초에 협상이 체결되었음을 시사한다. 1347년 6월 19일 베네치아 원로원은 자니베크에 파견할 두 명의 대사를 선발했기 때문이다. 원로원 회의록에 따르면 대사를 선발한 이유는 자니베크가 제노바와 평화협정을 체결해서, 베네치아도 자니베크와 협정을 체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Barker, 2021: 101; Balbi, 1978: 217-222). <quoniam nova habemus quod imperator Zanibech cum Ianuensibus est concordatus et cum Dei auxilio sit sperandum quod aconcium et concordium obtinemus etiam nos.> (Ciocîltan, 2012: 212)

11) <Cum locus Caffa fuerit longevis temporibus expugnatus omni artificio quo terror potest incuti et, dante Deo, ad finem honorabilem pervenimus cum illo qui toto mondo dominari se credit, ex quo sequuta est pax, licet incerta et non secura.......Quia Tartari oculum non habent nisi dumtaxat quod espensse deficiant et locus bellatoribus denudetur, maxime quia sperant de infinita pestilencia mortalitatis, que infinitos bellatores prostravit, et taliter sunt consumpti quod pauci remaneant viri.> (Ciocîltan, 2012: 212; Petti Balbi, 226; Barker, 2021; 100-101).

12) “병은 몽골군대 전체로 퍼져나갔고, 매일 수천의 몽골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것은 마치 화살이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지는 것 같았고, 몽골인들의 거만함을 타격하고 분쇄해 버렸다.” (Horrox, 1994: 17).

13) 휠리스(Wheelis)는 무시스가 흑사병에 관한 이야기를 저술한 시기가 1348년이나 1349년 초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저술 시기는 1350년대일 가능성이 더 높다(Wheelis, 2002: 972; 박흥식, 2008: 184-185).

14)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도 흑사병을 체액 이론에 근거해 설명했고, 썩은 공기를 흑사병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간주했다(Arvide Cambra, 2018: 1).

15) 히포크라테스는 “공기가 해로운 독기(miasma)에 의해 더럽혀지면 언제나 인간은 병에 걸린다.”라고 말했다. 더러운 공기인 미아스마(miasma)는 말라리아(malaria)라는 이름에도 영향을 주었다. 말(mal)은 나쁘다는 의미이고, 아리아(aria)는 공기를 뜻한다. 즉 말라리아는 나쁜 공기라는 뜻이다(Jouanna, 2012: 121-136; 반덕진, 2013: 145-163).

16) 건강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남녀는 네 번의 큰 신체적 타격을 입어야 병에 쓰러진다(Existentes sani, utriusque sextus, nec mortis pericula formidantes, IIIjor Ictibus asperimus carnibus vexabantur). 첫 번째 타격은 찬기이며, 날카로운 화살이 찌르는 느낌을 준다. 그다음은 딱딱한 종기가 나타나는데 공포를 준다. 어떤 이는 사해에 어떤 이는 겨드랑이에 생긴다. 종기가 더 딱딱해지면서 열이 나고 열 때문에 두통과 악취가 난다. 이 과정에서 여러 증상이 나타나는데 그중에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기도 한다. 각혈이 있기도하고, 부패한 점액이 있는 등, 가슴과 넓적다리 부위가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술 취한 사람처럼 인사불성이 되어 깨어나지 않는다. 부종은 하느님이 보낸 경고 신호이다.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곧 죽는다(Horrox, 1994: 24; Tononi, 1884: 150). 어떤 사람은 감염된 날에 사망했고, 어떤 사람은 다음 날, 나머지 대다수는 3일과 5일 사이에 사망했다. 이러한 설명은 잠복기라는 개념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일 것이다(Horrox, 1994: 24-25). 병자 중에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종기가 부풀어 오르거나 악취가 나는 경우는 대다수가 사망했다. 열만 나는 경우는 회복되기도 했다.

17) <Impedita navigation Tane et Maris Maioris de quibus partibus nostri mercatores consequebantur maximan utilitatem et lucrum quia ibi erat fons totus mercimoniorum> (Morozzo della Rocca, 1962: 267).

18) 베네치아에 흑사병이 본격적으로 퍼진 시점은 1348년 3월 무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43년 3월 30일 3명의 위생 조사관이 선출되었기 때문이다(Brunetti, 1909: 289-290).

19) 어떤 역사가들은 1347년 봄 베네치아와 제노바 갤리선이 카파를 출항했으며, 이 선박들에 의해 1347년 5월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전염병이 유입되었다고 말한다(Benedictow, Cessana, & Bianucci, 2017: 15-17).

20) <E gli uomini e femine che scamparono del fuoco, di pistolenz morivano. E alla Tana, e Tribisonda, e per tutti que' paesi non rimase per la detta pestilenza de' cinque l'uno, e molte terre vi s'abandonaro tra per pestilenzia, e tremuoti grandissimi, e folgori.> (Villani, 1991: 1578).

21) 몽골 시대 흑해 무역 전문가인 치오칠탄(Ciocîltan)은 1345년 카파 공성전에서 몽골군이 시체를 던져 넣었다고 말한다(Ciocîltan, 2012: 201; Heyd, 1886: 196; Grousset, 1939: 483; Petti Balbi, 1991: 175).

그림 1.
타타르인들의 주연, 매튜 패리스의 책에 나오는 삽화
Figure 1. A Tartar cannibal feast.
(Lewis, 1987: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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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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