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Yŏm Sŭngik (廉承益) was a ch’ongshin (寵臣) or court favorite of the late Goryeo dynasty who was recognized for his ability to cure diseases using dhār ī and subsequently appointed prime minister of the country. Yŏm’s quick ascension to such a distinguished post attests to the great significance of dhāraṇī among the people of Goryeo. Memorizing dhāraṇī as a way to obtain one’s desire was a preexisting concept in the Silla period. However, unlike their predecessors, the people of Goryeo preferred the Baoqieyin Dhāraṇī (寶篋印陀羅尼, Precious Casket Seal Dhāraṇī) over the Mugujŏnggwang Taedaranigyŏng (無垢淨光大陀羅尼 經, The Great Dhāraṇī Sutra) as they believed the former text to be a more concise and effective vehicle for serving their needs.
In this article I propose that Yŏm Sŭngik used his understanding of the period’s spiritual and religious beliefs to combine the Baoqieyin Dhāraṇī with the maṇḍala of Esoteric Buddhism to create a new iconographic image in 1276. Sixteen years later in 1292, Yŏm supplemented the original image with spells from the Baoqieyin Dhāraṇī and added other details such as the name of the image’s creator as well as the place and date of production. In this new version of the dhāraṇī-maṇḍala image, the various mantras from Baoqieyin Dhāraṇī are arranged in a circle that is imbued with the power of dhāraṇī and its therapeutic potency. The center of the circle is a maṇḍala composed an eight-petaled lotus as well as the thirty-seven deities symbolizing the birth and source of life. In this way, Yŏm condensed the essential components of Buddhist ideology that most appealed to believers to create a modified dhāraṇī-maṇḍala image that was produced in great quantities and distributed throughout Goryeo. Both the 1276 and 1292 versions of Yŏm’s dhāraṇī-maṇḍala discovered in Buddhist sculpture. However, only the latter image continued to be made after the Goryeo dynasty. One example of the second version was found stamped on a silk chŏgori discovered in the Wooden Seated Child Mañjuśrī statue of Sangwŏnsa Temple in P’yŏngch’ang. Created in 1466, the Mañjuśrī statue was an important commission by the royal court. Thus, the stamped image of Yŏm’s 1292 dhāraṇī-maṇḍala in this example of Buddhist sculpture demonstrates the influence and relevance of a new iconography that had persisted well into the Joseon dynasty.
The dhāraṇī-maṇḍala image conceived by Yŏm Sŭngik in 1292 was worn or kept on the body in the belief that this act alone protected the wearer from affliction. Known as “an old man who practiced thaumaturgy by memorizing spells,” Yŏm created the dhāraṇī-maṇḍala as an iconographic instrument that would cure any sickness that might plague the bearer. Perhaps most importantly, the new dhāraṇī-maṇḍala image was accessible to all as both a convenient and affordable means of healing. Lastly, Yŏm’s dhāraṇī-maṇḍala was also incorporated into the garments of bodhisattva and Buddha statues, which served to amplify their divine powers of dhāraṇī.
1. 머리말인간이라면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꿈꾼다. 무병장수는 고금을 막론 하고 인간의 가장 큰 바람이다. 고려시대(918-1392)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치유 방법은 중국과 달랐던 모양이다. 중국 북송(北宋, 960-1127)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이 1123년에 고려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고려의 옛 풍속은 사람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고 오직 귀신에 빌며 주문을 외워 병을 이겨내려 하였다.”1) 12세기 초 고려의 이야기이다. 고려인들이 약을 먹어 병을 이겨내기 보다는 주문, 즉 다라니를 읊조리면서 극복하려는 모습이 중국인 서긍의 눈에는 특별하게 비쳤을 것이다.2)
고려시대에 다라니를 외워 병을 치료한 이들은 주로 승려였다.3) 고종(高宗, 재위 1213-1259)대 강원도 낙산사 주지 조유(祖猷, 생졸년 미상)가 대표적인데, 그에 대해 『동문선』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선사가 총지(摠持, 다라니)의 법력으로 사나운 전염병을 구제하여 사람을 구한 것이 무릇 얼마인가.”4) 이 기록에서는 승려 조유가 다라니를 외워 전염병을 고치는 능력이 특별했음을 전했다. 승려가 아닌데도 불교의 다라니를 외워 병을 고친 인물이 있다. 바로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고려 후기의 총신(寵臣) 염승익(廉承益, ?-1302)이다. 그는 자신이 병에 걸렸을 때 주문을 외우고, 자신의 손바닥을 뚫어 줄을 꿰어 정성스럽게 노력해 스스로 병을 고쳤다고 한다.5) 그의 치유 능력은 여러 사람에게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염승익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라고 역사서인 『고려사』에서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6) 물론 그의 방법은 정확한 의학 처방이 아니라 다라니 염송을 통한 심리적 위안과 기적을 통해 병을 낫게 한다는 점에서 주술 치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염승익은 결국 고려 제25대 왕인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의 병을 고쳐주면서 왕의 최측근이 되었다. 그런 그가 1292년에 <보협인다라니·만다라> (이하 <다라니·만다라>)를 제작한 것이다[그림1]. 그가 제작한 <다라니·만다라>는 별개의 다라니와 만다라를 하나의 원 안에 넣어 밀도 있게 배치했다. 다라니는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一切如來心祕密全身舍利寶篋印陁羅尼經)』(이하 『보협인경』) 마지막 부분이다. 다라니와 만다라를 하나로 합한 후 <일체여래심전신사리보협팔엽심연삼십칠존종자(만)다라(一切如來心全身舍利寶篋八葉心蓮三十七尊種子(曼)陀羅)>라는 긴 이름을 붙였다.7) 이 글에서 필자는 이를 줄여 <다라니·만다라>라고 부른다. 1292년 <다라니·만다라>는 고려 후기에 염승익이 다라니로 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막으려 했던 사실을 알려주는 실물 자료이며, 목판에 제목, 제작자, 제작 시기를 명시한 대표 사례이다. 이 <다라니·만다라>는 대량으로 생산되었으며, 불상의 복장물(腹藏物) 가운데 하나로 한꺼번에 최소 수십 장씩 발견된다.
한국에서 불상의 내부에 각종 복장물을 봉안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2-13세기부터라고 알려져 있다(정은우, 2007: 53-86).8) 1292년 <다라니·만다라>처럼 다라니와 만다라를 하나로 합쳐 둥근 원 안에 배치한 가장 이른 사례는 13세기의 것이다.9) 이 글은 고려인들이 다라니에 어떤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고 다라니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불상 내부에 붙이거나 봉안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했다[그림2,3]. 이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려 후기 총신이면서 다라니 염송으로 병을 고치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녔던 염승익이 1292년에 목판으로 제작한 <다라니·만다라>이다. 물론 염승익 이전에 다라니를 찍어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전에는 다라니가 설해진 경전 전체를 봉안했다면 염승익의 <다라니·만다라>는 『보협인경』의 마지막 다라니 문구만 선택하여 둥근 원 안에 배치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원의 중앙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만다라까지 추가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 필자는 고려인들이 병을 고쳐 장수하고 죽은 후에는 극락왕생하려는 염원을 하나의 원 안에 모두 담아 크게 유행시킨 계기가 고려 후기 총신인 염승익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며 이 글에서는 이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물론 지금까지 염승익이 다라니를 읊조려 병을 고치려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김수연, 2021: 14-16). 다만 이 글에서는 1292년에 제작한 <다라니·만다라>가 고려의 총신 염승익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대량 제작해 유포한 가장 분명한 실물 사례라는 점에 주목했으며, 이후 이 <다라니·만다라>가 불교적 주술에 의한 질병 치유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2. 고려 후기 총신(寵臣) 염승익의 주술 치료염승익이 주술 치료로 병을 고쳤다는 기록은 사서에 여러 차례 보인다. 특히 그의 의술 행위에 대한 가장 상세한 언급은 『고려사』 열전의 ‘폐행(嬖幸) 염승익’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폐행전은 국왕에게 아첨하여 은혜를 입은 소인들로 구성돼 있으며, 대체로 부정적으로 평가된다(최재진, 1996: 1-29). 『고려사』 폐행전에는 60명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염승익이다. 특히 그는 주술 치료로 명성을 얻어 충렬왕의 총애를 받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료 1) “(염승익은) 일찍이 나쁜 병에 걸렸는데 불교의 신축(神祝)을 외우고 손바닥을 뚫어 동아줄로 꿰는 등 정성스럽게 노력해 질병이 나았으므로, 드디어 다른 사람들의 질병을 기도로 낫게 해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 (염승익은) 이지저(李之氐, ?-1317)의 천거로 충렬왕의 총애를 얻었다. 왕이 일찍이 갑자기 질병에 걸리자 염승익이 시중들었다(밑줄 필자).10)
(사료 2, 1277년) “(충렬)왕의 병이 조금 차도를 보여 천효사(天孝寺)로 이어(移御)하였다. … 당시 정랑(正郞) 염승익이 불교의 주술로 왕으로부터 총애를 얻어(왕의) 병을 간호하고 있었는데…(밑줄 필자)”11)
염승익은 손바닥을 뚫어 동아줄로 꿰어 병을 치료하는 기술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총애를 입어 항상 대궐 안에 거처했다고 한다.12) 심지어 “원에서 술사(術士)를 구하니 왕이 염승익을 추천하였다.”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충렬왕도 다라니 염송으로 병을 치료하는 그의 재주를 특별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13) 충렬왕은 원 황제의 근시조직인 비칙치[必闍赤, 몽골어 bitikchi]를 도입하여 염승익을 그 자리에 앉혔다.14) 왕의 최측근이 된 것이다.
염승익의 출생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277년에 정5품 정랑을 지냈고, 1291-1295년에는 정2품 찬성사를 지냈으니 그의 직위를 고려하면 늦어도 1230년대에는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표 1].15) 1274년에 충렬왕이 즉위하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277년에 정5품 정랑의 지위에 올라 왕의 병을 간호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렬왕 즉위 초부터 그의 다라니 염송으로 병을 고치는 재주가 알려져 이미 왕의 곁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16) 한편, 고려 후기 문신인 조인규(趙仁規, 1227-1308)는 “당시 세간에서는 나를 늙은 통역관이라고 부르고, 염승익을 노주(老呪)라 한다”고 했다.17) 조인규가 “염승익이 노주라 불린다”고 말한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조인규가 본인과 염승익에게 함께 ‘노(老)’라는 형용사를 붙인 것을 보면 그와 비슷한 연배일 가능성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세간에 ‘주문을 외워 주술을 부리는 늙은이’로 알려질 만큼 그는 주문(즉 다라니) 염송이 주특기였다는 점이다. 그는 이 다라니 염송으로 사람들을 치유했고 결국 왕과 공주의 총애를 얻는 자산으로 삼았다(김수연, 2021: 16). 왕과 공주의 최측근이 되면서 권세도 점점 커졌다.
(사료 3, 1283년) “염승익의 권세가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자 대간(臺諫)마저도 감히 그를 문죄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기인(其人) 50명을 사사로이 부역시켜 집을 지었는데, 제국대장공주의 꾸지람을 두려워해 그 집을 헌납하여 대장사경소(大藏寫經所)로 만들겠다고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18)
『고려사』에서는 ‘대장사경소’라 했지만, 『고려사절요』에서는 염승익이 자기집 한 채를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로 삼았다라고 했다.19) 이때가 1281년이다. 그리고 1283년 바로 이 금자대장사경소에서 금과 은을 사용하여 7축의 『법화경』을 사경했다[그림 4,5].20) 『법화경』 권 제7의 마지막 부분 ‘사성기(寫成記)’에는 발원자인 염승익의 이름과 함께 “일문(一門)의 권속(眷屬)은 갖은 병과 고통이 없어지고 무진법계(無盡法界)의 살아있고 죽은 이들은 함께 깨달음을 증득(證得)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염승익은 사경을 통해 국왕과 제국대장공주, 왕실 권속 그리고 본인과 처가 아무런 병고 없이 수명장수하기를 바랐다. 1286년에는 <아미타내영도>도 제작했는데 목적은 비슷했다.21) 왕성하게 일하던 그가 이후 점차 쇠약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1292년 4월에 바로 이 글의 <다라니·만다라>를 제작하면서 무탈하기를 바랐지만, 1295년 1월에 결국 병으로 은퇴했다.22)
(사료 4, 1295-1297년) “염승익이 조금 있다 병으로 사직했으며 또 얼마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하였다. 제국대장공주가 병이 들자 상복을 벗고 궁궐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으니, 법석을 열고 손바닥을 뚫고 부처에게 기도하였다.”23)
염승익이 은퇴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97년 5월 12일부터 제국대장공주가 아프기 시작했다. 원에 다녀온 후에 발병한 것이다. 이때 염승익은 모친의 상중이었으나 공주의 치유를 위해 상복을 벗고 또다시 손바닥을 뚫고 부처에게 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가 잘 먹히지 않았는지 공주는 발병한 지 10일 만에 사망했고, 1302년 그는 승려가 되었다.
(사료 5, 1302년) “염승익은 부처[浮屠]의 가르침을 맹신하여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으며, 숯불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향불을 피워 염불하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24)
1302년 승려가 된 후에도 그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지만, 승려가 된 바로 그해 사망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염승익은 병을 치료할 때 주술을 활용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위 사료에서 제시한 염승익이 벌인 일련의 치병 활동을 보면, 그는 밀교 승려가 아닌데도 다라니 염송을 치유 방편으로 삼고 있다. 다라니 염송을 주특기로 했던 염승익의 치유 방식은 왕과 공주의 총애를 얻을 수 있는 무기였을 것이다. 앞서 세간에서 그를 ‘노주’라고 불렀다는 것을 보면 염승익은 다라니의 신통력에 특별히 의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1292년 그가 제작한 <다라니·만다라>이다.
3. 1292년 염승익 제작 <보협인다라니·만다라>염승익은 1292년에 <다라니·만다라〉 목판을 승재색(僧齋色)에서 제작했다[그림 6].25) 아쉽게도 목판은 남아있지 않지만, 목판에서 인출된 인쇄물은 1295년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해 1302년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고려 후기의 <강릉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 1466년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이하 <상원사 문수동자상>)에 이르기까지 수백 여장 이상 남아있으며, 최소 170여 년 이상 사용되었다[그림 7,8].26)
지금까지 1292년 <다라니·만다라>의 존재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 연구에서는 1292년 승재색 <다라니·만다라>를 염승익이 주관했다고 보지 않았다. 원의 테두리에 적힌 첫 문장의 ‘찬성사염 근시강석(贊成事廉 近侍康碩)’을 두고 염승익과 관련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림 9]. 이를 두고 연구자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달리 읽었다. ①염(廉)을 겸(兼)으로 읽어 ‘찬성사 겸 근시인 강석’으로 읽기도 하고, ②염(廉)으로 읽기는 했으나 염을 성씨로 보지 않고 청렴하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했다.27) 또는 ③염을 성씨로, 강석을 이름으로 읽어 ‘찬성사 염강석’이라 보기도 했다.28) 어떻게 읽든지 간에 ①②③은 모두 주관자가 ‘강석’이 된다. 문제는 강석은 단 한 번도 찬성사의 직위에 있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29) 필자는 ‘찬성사염’은 당시 찬성사였던 염승익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며, 이에 따라 ‘찬성사인 염승익과 근시인 강석’으로 읽어야 한다고 본다.30)
염승익이 1292년 이 <다라니·만다라>를 제작했을 당시 그의 지위는 분명히 찬성사였다<표1>. 1292년 당시 염승익의 지위가 찬성사였음을 알려주는 자료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1291년 문경공(文敬公, 허공) 묘지(墓誌)이며, 다른 하나는 1295년에 세워진 일연(一然, 1206-1289)의 비이다.31) 1291년과 1295년, 두 자료에서는 염승익의 직위가 찬성사라고 적었다.32) 두 자료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291년 문경공(文敬公, 허공 許珙, 1233-1291)의 묘지(墓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허공의) 다음 아들은 조현대부 장군 감찰시승(朝顯大夫 將軍 監察侍丞) 허평(許評)으로, 찬성사 상장군(贊成事 上將軍)인 염승익 공의 딸과 혼인하였다. (중략) 지원(至元) 28년 신묘년(1291) 9월 일 쓰다.”33)
허공의 묘지명에는 1291년 9월, 염승익이 찬성사 상장군이라 했다. 허공이 자신의 사돈인 염승익의 직위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둘째, 민지(閔漬, 1248-1326)가 지은 보각국사 일연의 비, 「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에도 찬성사가 염승익이라고 적혀있다. 비는 충렬왕 21년(1295)에 세워졌는데, 비의 음기에 ‘대광 첨의찬성사 상장군(大匡 僉議贊成事 上將軍) 염승익’이라고 새겨져 있어 적어도 1291-1295년 그의 직위가 찬성사였음을 분명히 알려준다.34) 「인각사보각국사비」를 지은 민지 역시 염승익과 인연이 있다. 1293년 10월 17일에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원에 가는데 염승익과 민지가 동행했기 때문이다.35) 그런 그 역시 염승익의 지위를 정확히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1292년에 제작된 <다라니·만다라>를 주관한 ‘찬성사염’은 찬성사인 염승익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 『고려사절요』에는 1292-1295년 당시 염승익이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였다고 적었다.36) 이런 이유로 ‘찬성사염’이 염승익이 아니라고 보기도 하지만, 당시 판감찰사사는 찬성사와 겸직이었다.37)
1292년 4월 염승익은 판감찰사사이면서 동시에 찬성사였던 것이다[표1].38) 염승익은 그 밖에도 판예빈사(判禮賓事), 상장군(上將軍), 중찬(中贊), 재상(宰相)이라고도 불렸다.39)
염승익은 1292년 4월, 국가의 특별기구인 승재색(僧齋色)에서 10명의 관원을 거느리고 목판을 도안하고 제작했다. 고려인들은 이와 유사한 <다라니·만다라>를 수십 장, 많게는 수백 장씩 찍어 불상의 복장물로 넣기도 하고 불상의 내부에 붙이기도 했다[그림 3]. <다라니·만다라>는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보협인다라니와 만다라를 합한 것이다. 중앙의 꽃 모양은 ‘팔엽심련삼십칠존만다라(八葉心蓮三十七尊曼陀羅)’(이하 만다라)이며, 그 바깥에 둘려진 네 줄의 범자(梵字)는 ‘일체여래심전신사리보협진언(一切如來心全身舍利寶篋眞言)’(이하 보협인다라니)이다.
우리나라에서 『보협인경』만을 단독으로 제작한 목판본은 고려 10-11세기 무렵 등장한다고 알려져 있다(이승혜, 2021: 14; 2015: 53-54; 주경미, 2011: 264-293; 2018: 203-241).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이른 사례는 1007년 개성 총지사 주지인 홍철(弘哲)이 간행한 <보협인경>이다.40) 3장이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 1장은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의 복장에서 발견되었다.41) 1007년 <보협인경>은 전문을 긴 직사각형 판형에 새겼으며, 첫머리에는 경전의 내용을 도해한 변상도도 있다[그림10]. 총지사본은 보살상에 봉안되기는 하였지만, 원래 탑 봉안을 위한 것이었다. 권수(卷首)에 “보협인경판인시보안불탑중공양(寶篋印經板印施普安佛塔中供養)”이라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이처럼 처음에는 『보협인경』 전문을 새겼지만, 이후 13세기가 되면 『보협인경』의 핵심인 마지막의 범자 다라니만을 분리해 원안에 배치했다. 범자 다라니만을 분리해서 시계방향으로 감아 돌아 들어가도록 글자를 배치했다. 범자다라니를 소용돌이 모양으로 적은 원형 보협인다라니 3개와 만다라 1개를 사각형 판에 배치해 하나의 목판으로 제작했다[표2의 ⓐ]. 이를 사건도합인(四件都合印)이라고 부른다. 사건도합인은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하 <개심사 아미타상>)에서 발견되었는데, 함께 발견된 다라니 가운데는 보협인다라니와 만다라를 하나의 원 안에 합한 <다라니·만다라>도 함께 있었다[표2의 ⓑ].42) 이 <다라니·만다라>는 하단에 1276년에 판각했음을 알려주는 연대가 있어 중요한 사례이다.43) 16년 후인 1292년에 염승익은 <표2의 ⓑ>에 진언과 명문을 추가하여 새로 판각했다[표2의 ⓒ]. <표2의 ⓒ>가 바로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염승익 제작 <다라니·만다라>이다.
흥미롭게도 불상의 복장에서는 <표2의 ⓐⓑ>가 함께 발견되기도 하며, <표 2의 ⓑⓒ>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1276년 무렵 사건도 합인인 ⓐ를 하나로 합해 ⓑ를 제작했고, 이후 외곽에 명문을 추가하여 ⓒ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가 ⓒ로 대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에도 ⓑ와 ⓒ는 함께 발견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장 긴 기간 동안 사용되었던 것은 ⓒ이다. 필자는 다라니와 만다라를 합해 하나의 원 안에 밀도 있게 배치하여 간결하면서도 효력이 있는(ⓑ와 ⓒ)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염승익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는 <개심사 아미타상>에서 발견된 것이 가장 이른 사례인데, 바로 ⓑ와 함께 <개심사 아미타상>에서 발견된 문자 자료에 염승익의 이름이 두 번이나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불복장원문일도(佛腹藏願文一道)』의 「구결도우문(求結道友文)」이고, 다른 하나는 『수능엄경환해산보기(首楞嚴經環解删補記)』의 「경상수보도감(經像修補都監)」이다. 「구결도우문」에는 동참한 사람들의 수결(手決) 가운데 염승익의 이름이 있다[그림 11].44) 또 「경상수보도감 명단에도 두 번째로 염승익의 이름이 보인다.45)
<표2의 ⓑ>가 제작된 1276년은 충렬왕 즉위 2년으로 염승익이 자신의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력한 효력을 지닌 다라니가 필요했을 것이며, 이에 기왕의 보협인다라니와 만다라를 하나로 합해 그 효력을 극대화하려했을 것이다. 이후 염승익은 지위는 점점 높아졌지만, 체력은 약해진 1292년에 자신의 이름을 건 표2의 ⓒ<다라니·만다라>를 제작한다. 승재색이라는 공식 기구에서 8명의 근시(近侍), 2명의 승재색 색원(色員)과 함께 제작한 것이다.46) 고려 후기 사람들은 그가 제작한 <다라니·만다라>에 어떤 효능이 있다고 믿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본다.
4. 염승익의 <보협인다라니·만다라>와 주술 치유염승익은 승려가 아니지만, 승려에 버금가는 불심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다라니를 외워 병을 고치고, 결국 말년에 승려가 되었으니 그의 깊은 불심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염승익에게 다라니는 매우 중요한 치유의 도구였을 것이다. 그는 수많은 경전 가운데 『보협인경』, 그것도 마지막 부분의 범자다라니(즉 보협인다라니)를 선택해 판각했다. 물론 염승익만 다라니를 선호했던 것은 아니다. 고려인들이 다라니를 몸에 지니거나 읊조리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여겼음은 앞서 이야기했다.47) 이 때 치유는 정확한 의학 처방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다라니를 통한 심리적 위안과 기적을 통해 병을 낫게 한다는 점에서 주술 치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8) 고려인들 만이 아니라 신라인들도 다라니를 좋아했지만, 고려시대에는 다라니의 종류도 다양하고, 수량도 압도적으로 많다. 신라인들의 선택이 『무구정경』이었다면, 고려인들은 특히 『보협인경』, 『수구즉득다라니(隨求卽得陀羅尼)』를 선호했다.49) 이 가운데 『보협인경』은 8세기 전반 인도 출신 승려인 불공금강(不空金剛, 705-774)이 한역한 짧은 경전이다.50) 중국에서는 10세기 오월국(吳越國) 시대부터 『법화경(法華經)』을 비롯한 경전과 함께 『보협인경』을 탑 안에 봉안하기 시작했다(주경미, 2011: 275-293). 『무구정경』도 『보협인경』도 모두 원래 탑 안 봉안용이었지만,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다.51) 탑에서 발견된 고려의 사례는 10-11세기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보협인경』, 1038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의 『보협인경』이 대표적이다.52) 불상에 있었던 가장 이른 사례가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에서 발견된 1007년 『보협인경』 전문임은 앞서도 밝혔다.
『보협인경』은 본문은 2801자, 마지막부분의 범자 다라니는 253자인 짧은 경전이다. 본문에는 『보협인경』의 효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법요와 다라니를 탑상(塔像) 속에 안치하면 우리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그 방처를 항상 따라다니면서 모든 때에 신통력과 서원력으로 가지(加持)하고 호념할 것입니다.”53)
“탑과 부처님 형상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여래의 신력으로 가호를 받기 때문에 그 곳은 태풍·번개·우레·천둥·벼락의 피해를 당하지 않으며, 또 다시 독사·독충·독수(毒獸)에게 손상당하지 않으며, 악성(惡星)·괴이한 새·앵무·구욕(鴝鵒)새·벌레·쥐·호랑이·벌·전갈에게 상해(傷害)되지 않으며, 야차·나찰·부다(部多)·비사차(比舍遮)에게 당하거나 미치거나 경풍의 두려움이 없으며, 또 모든 한기와 열기의 모든 병·악창·부스럼·독창·옴·병이 나지 않으며, 만일 어떤 사람이 (『보협인경』이 납입되어 있는) 이 탑을 잠깐이라도 보면 모두 낫는다.”54)
“또한 사람·말·소의 질병과 동자(童子)와 동녀의 역질도 없고, 또한 비명에 요절하지 않으며, 또한 칼·막대기·물·불에 손상당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적의 침입을 받지 않으며, 기근에 핍박당하지도 않고, 염매(厭魅)와 저주의 기도가 기회를 얻지 못한다.”5)
위의 『보협인경』 내용에 따르면 병든 사람이 이 경을 잠깐이라도 보기만 하면 낫는다고 했다. 물론 치병의 효과는 『보협인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라 통일기에 크게 유행했던 『무구정경』도 병든 이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고려시대에는 『무구정경』보다 『보협인경』을 훨씬 선호했다. 그 이유에 대해 『무구정경』에 비해 『보협인경』이 방식과 절차가 훨씬 간편하면서도 그 효험은 『무구정경』에 못지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곽승훈, 1996: 125-127).56) 보협인다라니는 효과도 크지만 간편하기까지 하여 훨씬 더 대중적이다. 단순히 서사(書寫), 수지(受持), 독송(讀誦)만 하여도 99억 여래의 경전을 서사, 수지, 독송한 것과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57)
염승익은 『보협인경』의 마지막 범자다라니에 각종 액운을 막을 수 있는 진언, 즉 「육자대명진언(六字大明眞言, o ma i padme hū)」, 「결정왕생정토진언(決定往生淨土眞言)」, 「상품상생진언(上品上生眞言)」 등을 덧붙여 1292년에 ⓒ<다라니·만다라>를 승재색에서 판각했다.58) 잘 알려진 것처럼 실제로 고려 후기 약사신앙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은 개인의 장명(長命)과 정토왕생에 대한 기원이었다.59)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치병(治病), 업장소멸과 함께 오래 살고 죽어서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바람이었으며, 특히 약사신앙에서 이 둘은 서로 맞물리는 것이어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보협인다라니에 극락왕생 관련 진언을 덧붙이고, 중앙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팔엽삼십칠존만다라’를 배치했다.
즉, ⓑ와 ⓒ<다라니·만다라>의 중앙에 자리잡은 ‘팔엽삼십칠존만다라’는 원형 만다라 단(壇) 위에 금강계 37존 제불보살의 종자(種字)와 태장의 8엽(葉)을 합한 것이다.60) 금강계 37존과 태장의 8엽을 합해 원 안에 배치하고 ‘팔엽삼십칠존만다라’라고 이름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중앙의 비로자나여래를 중심으로 사방에 배치된 37존의 불보살은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며, 8엽 또한 생명의 근원인 심장의 모양을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를 두고 『금강정경』과 『대일경』, 즉 금강계와 태장의 ‘양부(兩部)’를 하나로 합해 도상화한 것이라고 본다(이선용, 2018: 263-264; 손희진, 2022: 99-131).61)
염승익은 다라니(보협인다라니와 진언)와 만다라(금강계 37존, 태장 8엽), 이 모두를 밀도있게 하나의 원 안에 배치하여 효과를 극대화했다. 직경 25cm가량의 원형 다라니 한 장을 손에 넣기만 해도 굳이 어려운 다라니를 모두 외지 않아도 그 효력은 충분했다. 1292년 특별기구였던 승재색에서 <다라니·만다라>를 제작해 불상 복장으로 곳곳에 봉안했지만, 그 효험이 오래가지 않았는지, 1295년 염승익은 병으로 사직했고, 얼마되지 않아 모친상을 당했다.62) 그 와중에도 제국대장공주가 병에 걸리자 상복을 벗고 달려가 법석(法席)을 열고 손바닥을 뚫고 부처에게 기도했지만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했다.63)
좀 더 구체적으로 ⓑ와 ⓒ<다라니·만다라>는 고려 후기 사회에서 어떻게 활용되었을까? ⓑ와 ⓒ<다라니·만다라>는 제작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복장에서 다량 발견되기 때문이다.64) 그것도 약사여래, 아미타여래에 봉안되었다. 예를 들면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그림 12-14>을 비롯해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그림 15>, 1295년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1302년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그림 16>, <서산 일락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등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에서 발견된다. 물론 조선시대가 되면 1466년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에 납입되는 등 외연이 넓어지지만,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약사여래, 아미타여래에 국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라니·만다라>는 약사여래, 아미타여래의 복장에 수 십장 이상 봉안되었으며, 발원자의 이름을 수기로 적은 판본도 발견된다[그림 17,18]. 대표 예가 <서산 일락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에서 발견된 ⓒ<다라니·만다라>이다. 인쇄본의 좌측상단에 “윤씨이씨 동생안양(尹氏李氏 同生安養)”이라 적었는데, 같은 이름이 적힌 다라니 3장이 <서산 일락사 금동아미타여래상>의 복장에서 발견됐다[그림 17,18]. 윤씨와 이씨가 누구인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함께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인 안양에 가기를 바랐다. 이처럼 염승익의 <다라니·만다라>는 병이 기적처럼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얻고 죽어서는 극락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특히 충렬왕대 주술치료로 이름을 떨친 염승익이 발원하고 제작한 <다라니·만다라>는 그 효능이 특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불상 안에 봉안된 보협인 다라니는 붓다의 진신사리와 동일한 위력과 치유의 공능이 기대되는 법사리였다. <다라니·만다라>에 붙여진 <일체여래심전신사리보협팔엽심연삼십칠존종자(만)다라(一切如來心全身舍利寶篋八葉心蓮三十七尊種子(曼)陀羅)>라는긴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보협인다라니는 붓다의 진신사리와 동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그림 19].
다라니 주술 치유로 세간에 유명했던 염승익은 치유의 공능, 나아가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대하며 1292년 승재색에서 <다라니·만다라>를 판각하고 유포했다. 불상 조성 발원자는 <다라니·만다라>를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복장에 납입하며 심리적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그의 주술 치료 과정에서도 단 한 장이면 해결되는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다라니·만다라>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경문(經文)에 단순히 몸에 지니기만 해도 그 효과가 엄청나다고 했으니 단 한 장만 몸에 지녀도 심리적 편안함을 느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65) 아쉽게도 고려 후기 당시 실제로 이 <다라니·만다라>를 몸에 지녀 병이 나았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전염병이 만연했던 시기가 12-13세기이며, 전염병 치유를 위한 불교의례가 집중된 때도 바로 이 시기라는 점에서 염승익의 주술 치유에 대한 대중의 의존도가 높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66)
5. 맺음말고려 후기의 총신 염승익은 다라니로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재상에까지 올랐다. 이는 그만큼 고려인들이 다라니에 의지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다라니 염송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으려는 마음은 이미 신라부터 있었다.67) 그러나 고려인들은 이전에 쓰인 『무구정경』보다 간결하면서도 “시공간을 모두 초월한 모든 여래의 전신사리(全身舍利)”라고 여겼던 『보협인경』을 선호했다. 이 글에서 필자는 그 마음을 잘 읽어낸 염승익이 1276년 무렵 보협인다라니와 만다라를 하나의 원 안에 넣어 새로운 도상의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고 추정했다. 16년이 지난 후인 1292년에는 보협인다라니에 새롭게 각종 진언을 추가하고, 또 가장자리에 제작자, 제작 장소, 간기 등을 적어 넣어 또 다른 <다라니·만다라>를 만들어냈다. 치병에 효험이 있는 보협인다라니에 강력한 힘을 지닌 각종 진언을 덧붙이고, 중앙에는 생명의 탄생이자 근원을 상징하는 37존과 8엽 만다라 형식으로 배치한 것이다. 염승익은 핵심만을 뽑아 하나의 원 안에 압축해 넣은 <다라니·만다라>를 대량으로 생산해 유포했다.
1276년 본(ⓑ)과 1292년 본(ⓒ)은 이후에도 불상에 함께 납입되었지만, 조선시대로 넘어가면 ⓒ만 남아 1466년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비단 저고리에도 찍혔다. 염승익이 1292년에 제작한 <다라니·만다라>는 이것을 몸에 지니고 외기만 해도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세간에 ‘노주’라 불렸던 염승익이 바로 이 <다라니·만다라>를 제작했고, 큰 경제적 부담없이 지니기만 해도 병을 고쳐주는 주술의 도구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염승익은 조선 성종(재위 1469-1494)대에 다시 소환된다. 1475년 성종이 야대(夜對)에 나아가 『고려사』를 강(講)할 때 조선 전기의 문신 현석규(玄碩圭, 1430-1480)가 염승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기 때문이다. “염승익은 주자(呪者)로서 벼슬이 재보(宰輔, 재상)에 올랐으니, 이때의 일을 알 수 있습니다.”68) 결국 고려 후기 총신 염승익은 ‘(다라니로) 주술을 행하는 자’로 조선인들의 기억에 남았고, 그런 그가 당시 재상에까지 올랐으니 문제가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래도 그가 제작한 <다라니·만다라>가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모양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비단 저고리에도 바로 이 <다라니·만다라>가 찍혔기 때문이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은 1466년 의숙공주(懿淑公主, 1441?-1477)가 남편 정현조(鄭顯祖, 1440-1504)와 함께 발원한 상이다. 부부는 문수보살처럼 지혜로운 아들이 속히 태어나고 왕과 왕비가 만수무강하기를 바랐다. 1453년에 혼인했지만, 십 년 넘게 자식이 없으니,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상의 복장물 가운데 비단 저고리 2점이 발견되었고, 이 중 1점에 바로 1292년 <다라니·만다라>가 찍힌 것이다[그림 8]. 앞판에 2번, 뒤판에 4번 찍었다.69) <상원사 문수동자상>이 1466년에 조성됐으니 자그마치 174년 이후에도 염승익의 <다라니·만다라> 목판은 계속 사용된 것이다. 물론 <다라니·만다라>는 이후에는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꾸준히 조판되어 10종 이상을 헤아린다.70) 그럼에도 염승익이 제작한 1292년 <다라니·만다라>는 여전히 특별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왕조가 조선으로 바뀌어도 그 명성이 유지되었으니 말이다.
염승익은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여러 다라니 가운데 『보협인경』을 선택했다. 이 글에서는 염승익이 『보협인경』의 다라니에 각종 주문, 그리고 생명을 상징하는 만다라를 하나의 원 안에 함축해 자신의 주술 치유 도구로 사용했으며, 대중은 이를 지님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염승익이 제작한 <다라니·만다라>는 고려 후기 다라니 주술 치유 양상
Notes2) 陀羅尼(혹은 摠持, dhāranī), 眞言(mantra), 呪(vidyā)는 원래 별개의 어원을 지녔지만, 통상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Shinohara, Koichi. 2014: 324). 이 글에서는 사료에서 ‘주문’이라고 언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라니’를 사용한다. 3) 고려시대 불교 승려의 치유에 대해서는 (김영미, 2010: 165-177; 김수연, 2021: 1-34; Kim, 2000: 43-70) 참조. 7) 승재색 <다라니·만다라>에 대해 언급한 연구는 (최성은, 2008: 118; 정은우·신은제, 2017: 116; 손희진, 2021: 46-53; 엄기표, 2023: 189-192)이 있다. 이 가운데 승재색 <다라니·만다라>에 대해서는 손희진의 글이 가장 상세하다. 8) 잘 알려진 것처럼 동아시아에서 제작 연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복장물 납입의 가장 이른 사례는 985년 일본 <교토 세료지석가여래입상>이다. <세료지석가여래입상>에 관한 최근 연구 성과는 (데시마 다카히로[手島 崇裕], 2020: 40) 참고. 우리나라에서는 불상에 복장을 납입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문헌 사료는 1313년에 國淸寺의 석가여래좌상을 조성하면서 민지가 지은 閔漬, 「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 『東文選』 “腹藏諸物欲安置”가 있다. 9) 물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을 필사하거나 목판으로 찍어 탑 안에 봉안한 사례는 이미 <황복사지 삼층석탑>, <불국사 삼층석탑>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탑이 아닌 불상 내부에 복장물로 봉안된 사례에 주목한 것인데, 불상 내부에 복장물을 봉안하려면 내부의 공간을 확보해야 하므로 가장 쉬운 것은 역시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불상이었다. 14) 『高麗史節要』 권20, 충렬왕 4년 10월, “新置必闍赤, 以朴恒金周鼎廉承益李之氐等爲之.” 비칙치는 왕권 강화를 위해 충렬왕대에 측근 세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인사행정의 핵심 기능을 맡은 기구이다. 비칙치에 대해서는 (이정훈, 2018b: 345-382) 참조. 15) 1277년에 정5품 정랑을 지냈고(이 글의 각주 11과 사료 2 참조), 1291-1295년에 염승익이 찬성사 지위에 있었음은 이 글의 제3장 ‘1292년 염승익 제작 <보협인다라니·만다라>’ 및 이 글의 <표1> 참조. 20) 7축으로 이뤄진 <감지은자 『묘법법화경』> 사경은 1915년에 개성시 덕암동에 있던 <개성 남계원터 칠층석탑>(이하 <남계원탑>)을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권희경, 2003: 1-22)[그림 5]. 1283년 7월 6일 충렬왕은 염승익에게 <남계원탑>을 수리하게 했는데, 염승익은 탑을 수리한 후 안에 <감지금니 『묘법법화경』>을 사경해 넣은 것이다. 남계원 석탑을 수리하라고 한 내용은 『高麗史』 권29, 세가 권제29, 충렬왕 9년 7월 “命廉承益·孔愉, 修玄化寺, 又修南溪院·王輪寺石塔.” 21) 이 불화에 대해서는 (김정희, 2001: 144-146) 참조. 25) 승재색은 신문색과 마찬가지로 관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승재색은 經像修補都監이 승재색으로 이름을 바꾼 것인지 아니면 경상수보도감 아래에 별도로 승재색을 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동일 기관 혹은 유관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최연식, 2023: 154). 26) <강릉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고려 후기 추정)과 <상원사 문수동자상>(1466년)은 서로 제작 시기가 다르지만, 1599년에 조각승 원오에 의해 함께 중수되었으며, 두 상 모두 1292년 <다라니·만다라>가 발견되었다. 이 문수보살상의 복장 유물에 대해서는 (유근자, 2022: 476-523) 참조. 27) ① 兼으로 읽은 연구는 정은우·신은제, 2017: 116, ② ‘청렴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본 연구는 (손희진 2021: 50) 참조. 28) ③의 견해는 (남권희, 1991: 60; 2002: 318) 참조. 29) 강석은 성은 廉이 아니라 康이며, 경상수보도감에 7번째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그의 직위는 內侍左右衛保勝郞將이다. 경상수보도감에 염승익은 2번째 이름이 적혔으며, 正議大夫千牛衛攝上將軍判大僕寺事이다(이 글의 표1 참조). 한편 익명의 심사자 가운데 ‘관직명+성’으로 표현된 다른 사례가 있다면, 함께 제시해 주면 좋겠다는 지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찬성사염’과 마찬가지로 ‘관직명+성’으로 이뤄진 또 다른 사례는 찾기 어려웠다. 다만 염승익의 경우 그가 당시 워낙 유명한 인물이어서 ‘찬성사염’이라고만 적어도 충분히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이름이 『고려사』에만 26회, 『고려사절요』에도 21회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31) 1291년 허공의 墓誌石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묘지석의 크기는 가로 63.5cm, 세로 79cm, 두께 3.5cm이며, 소장품 번호는 신수 5867이다. 1295년 「麟角寺普覺國師碑」는 현재 군위 인각사에 있다. 32) 찬성사는 정2품에 해당하며, 1275년에 평장사를 찬성사로 고쳤다. 『고려사』 志 卷第三十 百官一 “贊成事成宗置內史侍郞平章事·門下侍郞平章事. 文宗定門下侍郞平章事·中書侍郞平章事, 各一人, 又於中書門下各置平章事, 並秩正二品. 忠烈王元年, 改爲僉議侍郞贊成事·僉議贊成事.” 33) 「文敬公之墓誌」, “評娵賛成事上将軍廉公承益之女.” (김용선, 2006: 660). 34) 민지, 「군위인각사보각국사탑및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고려시대 사료 DB, https://db.history.go.kr/goryeo/gskoCompareViewer.do?levelId=gsko_001_0760, 검색일: 2024.12.18. 36) 염승익이 1292년에 판감찰사를 지냈음은 『高麗史節要』 권21, 충렬왕 18년 4월 “判監察事 廉承益,” 1295년에 판감찰사사를 지냈음은 『高麗史節要』 권21, 충렬왕 21년 1월 “判監察司事 廉承益” 참고. 37) 1292년 염승익이 判監察司事였기 때문에 <다라니·만다라>의 제작자가 염승익이 아니라 鄭可臣(1224-1298)으로 본 연구는 (손희진, 2021: 50의 각주 115) 참조. 찬성사가 다른 관직과 겸직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찬성사는 判監察司事, 判版圖司事, 世子貳師와 겸직으로 ‘찬성사 판감찰사사’, ‘찬성사 판판도사사’, ‘찬성사 세자이사’로 불린다(『고려사』 권 31 세가 권제31 충렬왕 23년 8월). 印侯(1250-1311) 역시 찬성사와 판감찰사사를 겸직하여 ‘重大匡 僉議侍郞贊成事 判兵曹·監察司事’였다(『高麗史』 世家 卷第三十三忠宣王 卽位年 7月). 한편 익명의 심사자 가운데 한 분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에서 찬성사와 판감찰사사를 겸직한 인물들은 대체로 두 관직명이 함께 기술되어 있는데, 염승익은 ‘찬성사 판감찰사사’가 아니라 ‘판감찰사사’만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이다. 이에 대해 관직명을 모두 기술한 경우는 “누구누구를 임명하다”와 같은 공식적인 인사 기록인 반면, 임명 관련 기록이 아닌 경우에는 대표 관직명으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염승익의 관직명을 언급한 기사는 1292년 “사건이 발각되었음에도 다행히 모면하고는 판감찰사 염승익에게 붙어,” 1295년 “판감찰사사 염승익이 병이 들어서 면직되었다”와 같이 사사로운 기록이어서 전체 직명을 모두 서술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표 1] . 원간섭기 감찰사의 지위 상승과 역할에 대해서는 (이정훈, 2018a: 5-39) 참조. 38) 정2품 판감찰사와 정2품 찬성사는 계급 서열에 큰 차이가 없어 겸직이 가능하지만, 근시는 정4품으로 찬성사와 겸직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앞선 연구자의 의견대로 ‘찬성사 겸 근시강석’으로 읽기는 어렵다고 본다. 이 글의 각주 27 참조. 39) 고려 후기 충렬왕, 충선왕대의 독특한 복수 관직, 동시 복무 관행에 대해서는 (이강한, 2019: 293-341) 참조. 41)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 발견된 1007년 <보협인다라니경>에 대해서는 (서병패, 2009: 75-79) 참조. 42) <개심사 아미타상>은 제작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바닥 봉함목에 적힌 묵서를 통해 1280년 승재색에서 중수한 사실이 밝혀졌다. <개심사 아미타상>에 대해서는 (최성은, 2008: 111-151) 참조. 43) 1276년 <다라니·만다라>는 <개심사 아미타상> 이외에도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에서 발견되었다. 44) 글의 끝부분에 수백명의 동지 이름이 手決로 적혔는데, 1/3 지점에 염승익의 수결이 보인다. 염승익의 수결을 찾아 알려준 최연식 교수께 이 글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46) 1292년 승재색 <다라니·만다라>의 명문에 등장하는 염승익을 비롯한 11명에 대한 분석, 그리고 염승익이 발원한 불교미술 등에 대해서도 「1292년 승재색 제작 <보협진언·팔엽삼십칠존만다라>와 염승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예정이다. 48) 고려시대 의학 처방에 따른 실질적인 의료 행위에 대해서는 (이현숙, 2007: 7-45; 이경록, 2022a: 123-151; 2022b: 235-265). 특히 중세 민간 의료인을 영리적 의료행위자인 業醫와 비영리적 의료행위자인 知醫 구조로 이해한 연구 성과가 주목된다 (이경록, 2022b: 235-265). 49) 신라인들의 『무구정경』 선호에 대해서는 (박광연, 2023: 28-36). 50) 『寶篋印經』은 동일 경전이 1022A,1022B 두 권이 있으며, 이 가운데 범자 다라니가 나오는 경전은 1022A이다. 이 글에서는 중국과 한국에서 유통됐던 T1022A본의 경문을 인용하였다. 51) 『무구정경』과 『보협인경』을 비교하여 『무구정경』은 망자의 왕생을 기원하는 경우가 많지만, 『보협인경』은 현세의 안정을 희망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본 연구는 (곽승훈, 1996: 135) 참조. 52)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보협인경』은 모두 全文을 한자로 찍은 것이어서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다라니·만다라>와는 차이가 있다. 월정사의 『보협인경』은 2004-2006년 보존처리 후 분리를 시도했으나 경전 종이가 너무 얇아 해체를 중단한 상태이다. 53) 『寶篋印經』(T19 1022A: 712a05-08), “若有善男子善女人, 安此法要, 安置此陀羅尼於塔像中者, 我等十方諸佛, 隨其方處恒常隨逐, 於一切時, 以神通力及誓願力加持護念.” T는 『大正新脩大蔵経』 즉 Taishō Tripi aka의 약어이며, 순서대로 권, 경전번호: 쪽수를 가리킨다. 58) 다라니의 배치, 진언의 이름 등을 세심하게 밝혀준 방정란 선생님께 이 글을 빌어 감사드린다. 이 내용 역시 필자의 별도의 논문에서 상세히 밝힐 예정이다. 한편 <다라니·만다라>에 추가된 「육자대명진언」 「결정왕생정토진언」, 「상품상생진언」은 망자 추선을 위한 성격이 분명한데 치유와 관련있다고 볼 수 있느냐는 심사자의 의견이 있었다. 위의 세 진언은 고려 후기에 유행했는데, 대표 사례는 고려 후기의 문신 양택춘(梁宅椿, 1172-1254)의 묘지명 뒷면에 새겨진 「상품상생진언」, 「육자대명왕진언」, 「결정왕생정토주」가 있다(허흥식, 1984: 143-148). 염승익은 <보협인다라니·만다라>를 제작하면서 당시 유행했던 위의 세 진언을 포함하여 그 효과를 배가하려 했으며, 살아있는 자의 치유 목적과 함께 망자의 극락왕생을 염원했을 것이다. 치병과 정토왕생을 함께 기원하는 약사신앙에 대해서는 이 글의 다음 각주 참조. 59) 시대를 막론하고 治病, 長命, 淨土(=極樂)往生은 약사신앙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다. 『佛說藥師如來本願經』, T14 0449:406b “若欲往生西方極樂世界阿彌陀如來所者 由得聞彼世尊藥師 琉璃光如來名號故 於命終時 有八菩薩乘空而來 示其道徑 即於彼界種種異色波頭摩華中 自然化生.” 60) 팔엽삼십칠존만다라의 도상에 대해서는 (손희진, 2021: 6-31). 61) 이전 연구에서는 ‘금강계만다라’라고 불렀으나, 중앙의 만다라를 금강계와 태장의 결합이라고 본 연구는 (이선용, 2018: 263-264; 손희진, 2022: 99-131)이 있다. 63) 『高麗史』 권123, 열전 제36, 嬖幸 廉承益, “公主病, 命脫衰入內, 設法席, 穿掌祈佛.”; 『高麗史』 권31, 세가 권제31, 충렬왕 23년 5월 “壬午, 公主薨于賢聖寺, 王移御僉議府.” 64) 불상 조성 이후 여러 차례 개금이 이뤄지면서 처음에 총 몇 매의 ⓒ<다라니·만다라>를 납입했는지 분명히 알기 어렵다. 개금 과정에서 최초 복장물이 교란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알려진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에서는 모두 64장이 발견되었다. 67) 익명의 심사자로부터 염승익의 <보협인다라니·만다라> 제작과 주술 치유가 유명해지기까지 역사적 맥락을 다루어 주어야 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즉 신라의 혜통 및 밀교의 전통적 질병치료가 어떻게 유구하게 내려왔는지에 대한 설명, 신라 통일기 밀교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흥륜사의 呪師라는 존재, 그리고 주술적인 방식으로 질병을 고치는 방식이 약과 침뜸을 사용하는 의승들의 치료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해왔음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없어 아쉽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며 주어진 지면 내에서 염승익의 주술 치유에 집중하다 보니 역사적 맥락을 짚지 못했음을 밝혀 두며, 후속 논고에서 이를 보완하도록 하겠다. 69) 불복장 안에 의복을 넣는 관습의 원인에 대해서는 (김연미, 2017: 165-196) 참조. 70) 손희진은 14종 265매로 파악했다(손희진, 2021: 6). 그림 1.고려 1292년 판각 <다라니·만다라>, 목판인쇄, 1302년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 여래좌상> <그림 16>의 복장물, 원의 직경 24.4×24.6cm, 문경 대승사
Figure 1. Printing Woodblock of Dhāraṇī·Maṇḍala in Figure 16, Goryeo 1292, Excavated Relics of Gilt-bronze Seated Amitabha Buddha, Mun’gyŏng Taesŭngsa Temple, diameter of a circle, 24.4×24.6cm, Taesŭngsa Temple, Mun’gyŏng
(국가유산청: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below CHA)
![]() 그림 2.<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1346년, 청양 장곡사
Figure 2. Gilt-bronze Seated Bhaisajyaguru Buddha of Ch’ŏngyang Changgoksa Temple, 1346, Changgoksa Temple, Ch’ŏngyang
(국가유산청: CHA)
![]() 그림 3.<그림 2>의 내부에 부착된 <다라니·만다라>, 청양 장곡사
Figure 3. Printing Woodblock of Dhāraṇī·Maṇḍala is attached inside the sculpture in Figure 2, Changgoksa Temple, Ch’ŏngyang
(국가유산청: CHA)
![]() 그림 4.<개성 남계원 칠층석탑> 발견 『법화경』 사경 권제7 도입부, <그림 5> 가운데 1축(좌)과 왼쪽 그림의 표시 부분(우)
Figure 4. Transcription no.7 of Lotus Sutra (Puṇḍarīka Sūtram, 妙法蓮華經) from Sevenstory Stone Pagoda, Namgyewŏn Temple Site, Kaesŏng, 1 of 7 rolls, ca.1283, Korea National Museum (Left) and Marking of Left Figure
(국립중앙박물관: Korea National Museum)
![]() 그림 5.<개성 남계원 칠층석탑>, 1283년 수리, 유리건판사진(좌)과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 발견 『법화경』 사경 7축, 1283년경, 유리건판사진(우)
Figure 5. Seven-story Stone Pagoda from Namgyewŏn Temple Site, Kaesŏng, ca.1283, Dry Glass Plate Negative(Left) and Transcription 7 rolls of Lotus Sutra (Puṇḍarīka Sūtram, 妙法蓮華經) from Namgyewŏn Temple Site, Kaesŏng, ca.1283, Dry Glass Plate Negative
(국립중앙박물관: Korea National Museum)
![]() 그림 7.고려 1292년 판각 <다라니·만다라>, <강릉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복장물, 고려 후기, 강릉 보현사
Figure 7. Dhāraṇī·Maṇḍala from Wooden Seated Manjusri Bodhisattva of Pohyŏnsa Temple, Kangnŏng, 1292, Printing Woodblock, Pohyŏnsa Temple, Kangnŭng
(필자: Author)
![]() 그림 8.<명주저고리>,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의 복장물, 1466년, 전체 길이 65.0×197.5cm, 월정사 성보박물관(좌)과 고려 1292년 판각 <다라니·만다라>, 왼쪽 그림의 부분, 1466년, 평창 상원사
Figure 8. Silk Chŏgori [upper garment], Excavated Relics from the Wooden Seated Child Manjusri of Sangwŏnsa Temple, P'yŏngch'ang, 1466, 65.0×197.5cm, Wŏlchŏngsa Museum (Left) and Printing Woodblock of Dhāraṇī·Maṇḍala in Left Figure, 1466, Wŏlchŏngsa Museum
(월정사 성보박물관: Wŏlchŏngsa Museum)
![]() 그림 10.고려 1007년 판각 『보협인경』, 목판인쇄,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물, 안동
Figure 10. Baoqieyin Dhāraṇī Sūtra from Wooden Seated Avalokitesvara Bodhisattva of Pogwangsa Temple, An-dong, 1007, Printing Woodblock, Pogwangsa Temple, An-dong
(국가유산청: CHA)
![]() 그림 11.염승익의 수결, 『불복장원문일도』의 「구결도우문」 부분, 1264년
Figure 11. Sign of Yŏm Sŭngik, Kugyŏltoumun in Pulbokchangwŏnmunilto, 1264, Excavated Relics of Gilt-bronze Seated Amitabha Buddha, Mun’gyŏng Taesŭngsa Temple
(국가유산청: CHA)
![]() 그림 12.<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상 높이 90cm, 봉화 청량사
Figure 12. Dry-lacquered Seated Bhaisajyaguru Buddha, Ponghwa ch’ŏngnyangsa, H.90cm
(국가유산청: CHA)
![]() 그림 14.<그림 13>의 <다라니·만다라>
Figure 14. Printing Woodblock of Dhāraṇī·Maṇḍala in Figure 13
(국가유산청: CHA)
![]() 그림 15.<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상 높이 200cm, 13세기, 충남 서산 개심사
Figure 15. Wooden Seated Amitabha Buddha, Sŏsan kaeshim Temple, H. 200cm, 13th century
(국가유산청: CHA)
![]() 그림 16.<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1302년, <그림 1>이 납입되어 있던 불상
Figure 16. Gilt-bronze Seated Amitabha Buddha, 1302, Mun’gyŏng Taesŭngsa Temple
(국가유산청: CHA)
![]() 그림 17.묵서가 있는 <다라니·만다라>, 충남 서산 일락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목판인쇄, 고려 1292년 판각, 원의 직경 24.4×24.6cm, 수덕사근역성보관 소장
Figure 17. Printing Woodblock of Dhāraṇī·Maṇḍala, Goryeo 1292, Excavated Relics of Gilt-bronze Seated Amitabha Buddha, Sŏsan Illaksa Temple, diameter of a circle, 24.4×24.6cm, Sudŏksa Museum
(국가유산청: CHA)
![]() 그림 19.<그림 1>의 명칭 부분, 1292년
Figure 19. Title of Printing Woodblock of Dhāraṇī·Maṇḍala, Goryeo 1292, Mun’gyŏng Taesŭngsa Temple
(필자: Author)
![]() 표 1.염승익의 직급
Table 1. Position of Yŏm Sŭngik
참고문헌 REFERENCES1. 『高麗史』.
2. 『高麗史節要』.
3. 『東文選』.
4. 『寶篋印經』.
5. 『宣和奉使高麗圖經』.
6. 『成宗實錄』.
7. 곽승훈, 「고려 전기 『一切如來心秘密全身舍利寶篋印陀羅尼經』의 간행」, 『아시아문화』 12 (1996), 117-136쪽.
8. 권희경, 「사경원과 염승익 발원의 사경 『묘법연화경』 7권본 1부」, 『한국기록학회지』 3 (2003), 1-22쪽.
9. 김수연, 「고려시대 밀교 치유 문화의 양상과 특징」, 『의사학』 30-1 (2021), 1-34쪽.
10. 김수연, 「고려-조선 전기 불교계의 전염병 대응과 대민 구료」, 『불교학연구』 71 (2022), 95-132쪽.
11. 김연미, 「불복장 의복 봉안의 의미 -상원사 문수동자상의 저고리와 전설을 중심으로」, 『미술사학』 34 (2017), 165-196쪽.
12. 김영미, 「고려시대 불교와 전염병 치유문화」, 『전염병의 문화사 -고려시대를 보는 또 하나의 시선』 (서울: 혜안, 2010).
13. 김용선,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강원: 한림대학교 출판부, 2006).
14. 김정희, 「고려 왕실의 불화제작과 왕실발원불화의 연구」, 『강좌미술사』 17 (2001), 127-153쪽.
15. 남권희, 「1302년 아미타불복장 인쇄자료에 대한 서지학적 분석」, 온양민속박물관, 『1302년 아미타불복장물의 조사연구』, (충남: 온양민속박물관, 1991).
16. 남권희, 『고려시대 기록문화 연구』 (청주: 청주고인쇄박물관, 2002).
17. 데시마 다카히로[手島 崇裕], 「입송승 조넨[奝然] 사제와 優塡王思慕像: 여러 의미의 請来를 둘러싸고」, 『일본역사연구』 53 (2020), 37-59쪽.
18. 박광연, 『전쟁의 종식과 신라 불교기의 변화』 (서울: 혜안, 2023).
19. 서병패,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전적 연구」, 불교문화재연구소,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서울: 국가유산청 · [재]불교문화재연구소, 2009).
20. 손희진, 「고려시대 불복장 八葉三十七尊曼陀羅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 학위논문, 2021.
21. 손희진, 「고려시대 불상의 腹藏 阿字圓相隨求陀羅尼 연구」, 『불교미술사학』 34 (2022), 99-131쪽.
22. 엄기표, 『한국의 범자 역사와 문화』 (파주: 경인문화사, 2023).
23. 유근자, 「강릉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의 복장 유물과 중수발원문의 분석」,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서울: 불광출판사, 2022).
24. 이강한, 「고려 충선왕대의 관직운용 양상 연구 -충렬왕대와의 비교 검토-」, 『역사와현실』 113 (2019), 293-341쪽.
25. 이경록, 「고려시대 민간 의료인의 존재양상 -業醫와 知醫의 두 계열-」, 『한국사연구』 197 (2022b), 235-265쪽.
26. 이경록, 「고려시대 환자들의 질병 대응양상과 동아시아의학의 대중화」, 『수선사학』 81 (2022a), 123-151쪽.
27.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서울: 혜안, 2010).
28. 이선용, 「한국 불교복장의 구성과 특성 연구」,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8.
29. 이승혜, 「10-11세기 중국과 한국의 불탑 내 봉안 『寶篋印經』 재고」, 『이화사학연구』 62 (2021), 1-42쪽.
30. 이승혜, 「고려의 吳越板 『寶篋印經』 수용과 의미」, 『불교학연구』 43 (2015), 31-61쪽.
31. 이정훈, 「고려후기 必闍赤의 설치와 그 변화」, 『사학연구』 132 (2018b), 345-381쪽.
32. 이정훈, 「원간섭기 監察司의 지위와 역할」, 『역사와실학』 65 (2018a), 5-39쪽.
33. 이현숙, 「고려시대 官僚制下의 의료와 民間의료」, 『동방학지』 139 (2007), 7-45쪽.
34. 정은우, 「고려 후기 불상의 복장물과 후원자」, 『고려후기 불교조각 연구』 (서울: 문예출판사, 2007).
35. 정은우 · 신은제, 『고려의 성물, 불복장』 (파주: 경인문화사, 2017).
36. 주경미, 「8-11세기 동아시아 탑내 다라니 봉안의 변천」, 『미술사와 시각문화』 10 (2011), 264-293쪽.
37. 주경미, 「吳越國과 한반도의 불교문화 교류 新論」, 『역사와 경계』 106 (2018), 203-241쪽.
38. 최연식, 「환암 보환의 행적과 개심사 아미타여래좌상의 수보배경」,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복장유물 가치 조명 학술대회』 (2023), 145-169쪽.
39. 최성은, 「13세기 고려 목조아미타불상과 복장묵서명」, 『한국사학보』 30 (2008), 111-151쪽.
40. 최재진, 「『고려사』 열전의 폐행전 연구」, 『동서사학』 2 (1996), 1-29쪽.
41. 허흥식, 「高麗의 梁宅椿 墓誌」, 『문화재』 17 (1984), 143-148쪽.
42. Kim, Sooyoun. “Dhāraṇī, Maṇḍala, and Talisman: The Rediscovery of Buddhist Faith in the Goryeo Dynasty.”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25 (2000), pp. 43-70.
43. Shinohara, Koichi. Spells, Images, and Maṇḍalas: Tracing the Evolution of Esoteric Buddhist Ritual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