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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3(3); 2024 > Article
전시되는 근대의학과 일제강점기 위생전람회†

Abstract

In Western society, the World’s Fair has emerged as a significant national festival, serving as a new capitalist ideological device. Countries that hosted the fair often exaggerated their achievements, and Japan, which was at the forefront of modernization, participated in the event by adopting a strategy of differentiation and specialization in response to this momentum. During this process, Japan embraced the Western perspective to cultivate a fair culture characterized by Japaneseization, from which hygiene exhibitions were derived. As part of its efforts to build a modern state, Japan organized hygiene exhibitions aimed at instilling the concept of hygiene among its population. These exhibitions promoted public awareness by presenting visual data about diseases and the human body, thereby fostering a sense of fear. This exhibition culture reflected Japan’s colonial governance techniques. Japan recognized that vibrant and engaging cultural events and exhibitions could captivate the public more effectively than any political framework. Consequently, a hygiene exhibition was held in colonial Korea that combined the themes of fairness and hygiene education. This study examines the history and distinctive activities associated with hosting sanitary exhibitions within the fair culture adopted by Japan during its modernization process. It explores how this cultural phenomenon established a connection with colonial Korea and analyzes the process of integrating fairness culture into Korean society. Additionally, this study investigates the details of the sanitary exhibition, which began in Korea around 1920 and gradually became a competitive event across the Korean Peninsula, touring smaller administrative districts centered around the main area. This examination is supported by contemporary newspapers published at the time.

1. 머리말

이 연구는 일본이 서구의 전시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탄생한 근대의학 관련 전시문화를 탐구함과 동시에 이와 연장선상에서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개최된 위생전람회의 모습과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한국 근대 위생 관련 연구사는 최근 신동원1)이 그간 도출된 방대한 연구자료를 위생총론, 위생제도, 위생론, 각종 위생분야, 도시위생, 위생문화, 민속치병으로 구분하여 정리한 연구를 비롯하여, 박윤재의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도출된 의학사 관련 연구의 동향에서 그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신동원, 2023; 박윤재, 2010; 2020a), 한국 근대 위생 관련 연구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공중위생 정책이나 제도적 측면에서 공중위생 체제의 진보 과정을 설명한 의료 제도사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어, 식민 정책에 기반한 다양한 공적 자료를 분석하고, 제도로서 위생의 도입과정 및 관련 인물의 역할 등을 탐구함으로써 위생 정책의 역사적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2010년대에는 도시사 · 사회사적 관점에서 도시위생에 관한 연구가 적극적으로 이뤄졌으며,2) 이와 동시에 기존의 제도사 분석 대상인 행정 주도의 위생 정책만으로는 위생 관념이 민중에 침투한 양상을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관점에서, 도시, 사회, 민중 생활 등 교육 문화적 측면의 위생 문제를 다룬 연구들이 도출되었다. 박윤재는 2010년대의 의사학 연구가 ‘사회적 맥락에서 활용되는 하나의 구성물’이라는 점을 밝혔다는 성과를 지적하며(박윤재, 2020a: 433), 앞으로는 실질적으로 진행된 의료 내용에 대한 파악, 서구 의학의 한국적 수용, 환자나 의료 소비자인 대중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제언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주목할만한 연구는 근대의 대중과 위생의 접점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로서 학교(학생), 미디어(신문 잡지 등), 지방위생 관리에 천착한 연구이다. 이는 위생 제도가 문명화나 국민화의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자리매김해가는 민중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예를 들어 학교위생에 대하여, 손준종, 이희재, 전민호 · 신현정, 황의룡 · 김태영 등은 총독부의 전략적 관리 대상으로 학생을 두고, 이들의 규율화·정량화를 실현하는 위생 교육의 양상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손준종, 2010; 이희재, 2021; 전민호 · 신현정, 2020; 황의룡 · 김태영, 2013). 또한 당시 영향력이 큰 미디어인 신문이나 잡지 등은 대중의 위생사상을 섭렵하기 위한 주요 자료인데, 예를 들어 김은정은 위생 관련 광고를 통한 대중 유인 전략을, 최은경 · 이영아는 대중의 의학지식 수용 양상, 현재환은 대중의 마스크 착용에 대한 권고 양상 등을 신문 잡지를 이용하여 밝힘으로써, 대중 관리 차원에서 위생 사상의 보급에 대한 문제를 고찰했다(김은정, 2012; 최은경 · 이영아, 2015; 현재환, 2022). 한편 위생 관리 문제를 한반도 지방 도시에 주목하여 탐구한 연구도 다수 진행되었는데, 마쓰모토 다케노리는 위생 계몽 및 방역 사업에서 드러나는 농촌 엘리트의 근대의식을 탐구하였고, 마쓰모토 다케노리 · 정승진은 전라북도 지역 위생사업의 제상에 대해 다루었으며, 김진규는 한국 위생조합이 위생경찰의 관변기구화되는 모습을, 이상의는 지방의 위생환경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소개하였다(마쓰모토 다케노리, 2011; 마쓰모토 다케노리 · 정승진, 2018; 김진규, 2020; 이상의, 2014).
이상과 같은 연구는 일제의 민중 위생을 동원하고 실천해 가는 측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표준화 · 국민화된 신체 형성에 대한 논의를 복합적인 형태로 전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유발한다. 과연 학생들이나 지방의 대중들은 국가의 요구대로 위생 교육의 수신자로서만 존재했던 것일까. 관변화된 기구인 위생조합이나 모범위생부락과 같은 형태가 지방위생 사업을 대표할 수 있는가. 문맹률이 심각했던 농촌 사회, 특히 여성들 개인에게 있어 위생 교육은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신문이나 잡지와는 다른 위생과 대중을 매개하는 다른 형태의 미디어는 존재하지 않는가.3)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 연구는 기존의 교육 문화적 측면의 위생연구가 미디어를 활용하고 대중을 논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비(非)-식자층 지방 대중’이 근대 의료문화와 어떻게 접촉했는지에 대해 다루지 않았다는 공백을 메우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에서 실시되었던 ‘보는 교육’의 일환이었던 위생전람회에 주목한다. 이러한 위생전람회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행사가 과연 어디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깊숙한 지방 도시까지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적 추적이 필요하다.4)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받아들인 박람회 문화 속 위생전람회 개최의 역사와 그 특징적 활동을 살펴보는 것과 동시에, 일제의 강점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의 박람회 문화 수용 역사와 1920년경부터 한반도 전역에 걸쳐 경쟁적으로 개최된 위생전람회의 구체상을 당시 발행 신문을 통해 고찰한다.

2. 일본의 만국박람회와 위생박람회 참가

서구 사회에서는 박물학적 시선의 공간을 새로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연출해 가는 만국박람회를 국가적 제전의 가장 중요한 형식으로 구성하였다.5) 이러한 박람회는 성립 자체가 국가와 자본에 의해 연출된 것으로 관람자 유치를 위한 전략이 제도화된 장치였다. 1798년 파리에서 열린 산업박람회 이후, 1851년 영국에서 개최된 세계 최초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유럽에서는 본격적인 박람회 시대를 맞이했다(吉見俊哉, 2001: 22). 만국박람회는 각국의 생산력이나 문화 소개를 중심으로 새로운 무역 시장 개척을 목표로 열렸다.
이는 서구문화를 일찍이 받아들인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근대화를 지향했던 일본은 세계 속에서 일본은 무엇인가,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중에서도 같은 공간에 다양한 나라의 문화가 동시에 전시되는 박람회 체험은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을 자극하며 일본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하는 통로가 되었다. 에도시기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던 일본은 네덜란드 상관장(商館長)이 보내준 문서를 통해 1853년 만국박람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인이 처음으로 세계 속 일본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사건 중 하나가 1862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였다. 이 대회는 일본이 정식으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 초대 주일공사인 올콕의 개인 수집품이 출품된 것으로(吉田光邦, 1985a: 143), 미술 공예품 중심으로 전시되었다.
일본은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부터 실질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고, 메이지 정부 차원에서의 참가는 1873년 빈 개최 때부터로, 이후 수많은 세계박람회에 참석하여 시행착오를 겪으며 박람회에 대한 체험과 시각을 넓혔다.6) 만국박람회는 그 기원이 시장이나 물산회(物産會)와 같은 성격이었기에 박람회가 거래의 장소가 된다는 주요한 특징이 있다. 이런 박람회에 참가한 일본은 미술 공예품, 절, 신사, 후지산, 일본식 정원, 게이샤 등 문화의 독자성을 과도하게 연출하는 것을 통해 ‘일본’을 주장해 갔다(吉田光邦, 1985a: 144). 스스로가 문명국을 간절하게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여하는 대부분 물품이 서양 국가의 공업 문명의 결과물과 비교하여 형편없었기에, 이들과는 다른 이질성이 드러나는 ‘문화’를 중심으로 한 전시물로 자기 연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서구사회에서 ‘자포니즘(Japonism)’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7)
일본의 세계박람회 참가 의의는 특이한 일본의 문화를 통해 세계를 주목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서양이 구축한 근대문명을 배우고, 일본이 앞으로 생산 · 판매 할만한 물건이 무엇인지 파악하며, 일본 내에서 박람회를 개최할 수 있는 근대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해외 박람회 참가 경험을 통해 관람객이 실물을 확인하는 방법이 가장 높은 교육효과를 보인다는 것을 확인한 메이지 정부는 이를 일본에 적용하고자 했다. 빈 만국박람회에 참석하여 『오국박람회보고서(澳國博覽會報告書)』(1875)를 제출하기도 했던 사노 쓰네다미(佐野常民)는 1880년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 참가 후 일본에서도 국가적 박람회를 개최하여 민중들의 ‘보는 힘’을 육성해야 한다고 제안했고(吉見俊哉, 2001: 121), 이는 일본 내 박람회의 기본 전제가 되었다. 다음 <표 1>은 일본이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세계박람회에 참가했던 내용이다. 이러한 국제박람회 참가는 주로 정부 차원에서 이뤄졌지만, 민간과 공동으로 참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박람회는 크게 종합박람회와 특수박람회로 구분할 수 있는데, 종합박람회는 모든 종류의 물건을 전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 것이고, 특수박람회는 특정 주제를 가진 분야만 단독으로 전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山本光雄, 1970: 169). <표 1>에서도 보이듯이, 1880년 이후에는 특정한 주제의 박람회가 다양하게 열렸다. 이 연구에서 주목하는 위생박람회도 특수박람회에 속하는데, 부국강병 · 식흥산업 · 문명개화를 국가 건설의 기초로 삼았던 메이지 정부에게 이런 특수 박람회는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다. 근대 개국과 함께 개항장을 통한 외부로부터의 병원균 유입, 이동의 자유화, 교통의 활발화, 집단생활의 증가 등 사회생활 변화에 따라 감염병이 반복적으로 대유행하여 위생 관리가 국가의 핵심적 과제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감염병에 대한 대응을 시급한 문제로 여겼고,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 미야케 히이즈(三宅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등의 의사 · 관료들은 의사(醫事)제도와 위생 제도 책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위생 제도는 점차 정비되어 갔지만 과학적인 위생관리 보급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특히 위생사상 보급에 있어 신문과 잡지 등의 미디어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지만 좀 더 많은 대중에게 즉각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새로운 장치가 요구되었고, 위생전람회는 활자 미디어권에 미치지 못하는 대중에게까지 단시간에 ‘위생’을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하는 매개였다. 사노 쓰네다미가 언급했던 ‘보는 힘’은 이러한 위생사상 보급에 활용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위생전람회는 주최자의 위생사상 전파를 위한 확고한 목적, 전시물 준비, 개최를 위한 선전, 각 교육기관 및 소단위 행정단체를 향한 홍보, 일반 대중에 대한 홍보라는 관리 체계를 갖추며 각 거점지역 학생과 대중을 불러 모은 위생 교육의 장이 되었다. 그리고 전람회 장소 자체가 사람이 밀집하는 곳이기에 민감하게 위생 관리가 필요하기도 했고, 그 안에서 위생 교육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이중성을 띤 공간이었다. 또한 디오라마(diorama)8), 모형, 표본, 도표가 사용되고, 이에 대한 설명이 진행되며, 강연이나 활동사진9)이 상영되는 등 다양한 이미지와 소리 그리고 텍스트가 결합한 복합미디어로 기능했다.
<표 1>에서 보이듯이, 일본의 위생박람회 참가는 1884년과 1911년, 일본 정부 주도로 이뤄졌던 것을 알 수 있다.10) 1884년 런던 위생박람회는 영국이 제국주의적인 인식틀과 세계의 리더격인 자기 이미지를 확인하고자 ‘위생’과 ‘교육’이라는 양대 테마를 내걸어 치른 행사였다.11) 이 박람회는 개최 취지를 ‘건전한 정신에 건전한 신체가 깃든다’라고 선전하고, 정치가가 개최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국가적 행사였다. 이러한 영국 위생박람회의 초청에 일본 정부는 두 명의 사무관(위생부문: 永井久一郎, 교육부문: 手島精一)을 임명하여, ‘위생상 개진과 초보 및 전문 교육 방법 개진을 위한 사상교환’을 목표로, 많은 경비를 들여 참가를 감행했다. 그러나 참가 과정에서 일본에서 가져간 물품을 홍콩에서 다른 배로 옮길 때 화재로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남은 물품으로 전시를 마쳤다(永山定富, 1928: 26).
이러한 대중을 상대로 한 위생박람회 개최의 저변에는 근대의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즉 근대 통치 권력이 국민의 유병률 · 사망률에 관여하여 건강과 질병을 관리하게 되었다는 점, 19C 전반에 걸쳐 발생한 콜레라로 인해 공공 방역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는 상황,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도시로 몰려드는 노동 인구로 인해 발생하는 위생환경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요구가 높아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당시 실질적인 사회 요구에 맞춰 도시위생과 환경개선을 위해 공중 위생사업에 대한 도시 주민의 이해와 협력이 불가결했기에 계몽 차원에서 위생박람회는 서구사회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해 갔다.
본격적인 일본의 세계 위생박람회 참가는 1911년 독일 드레스덴 만국위생박람회였다.12) 이 위생박람회의 특징은 종래 특별박람회의 주요한 대상이었던 학자, 의사, 관료, 교원, 기술자 등의 전문가들을 위한 전시와 더불어 새롭게 이러한 전문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전시장도 대대적으로 설치하여 그 내부를 크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村上宏昭, 2016: 87). 그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열린 대중적인 이벤트로, 시각적 효과를 이용하여 위생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효과를 기대했던 행사였다. 이 드레스덴 위생박람회의 ‘인간전시관’은 대중의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그림 1]. ‘인간전시관’은 개인위생 부문에서 인간 신체 모형과 그 내부의 장기 모형, 영양 보급을 다루고 있고, 공중위생 관련 부문에서는 주거, 택지, 의복, 국민병, 직업위생을 주제로 전시물이 진열되었다.13)
이 위생박람회에 일본은 내무, 문부, 육군, 해군 네 곳에서 공동으로 물품을 보냈다. 설치된 ‘일본관’(<그림 2>)은 과거 만국박람회에 참가했던 형식과 마찬가지로 서양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 만한 후지산 모형, 일본인의 전통적 생활 모습 등을 재현한 구조물을 회장 입구에 배치하여 관람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전시회장을 A 공기 · 토양 · 풍토, B 주거 · 상수도 · 화장장, C 식물과 식품, D 의복과 체육, E 전염병, F 병자 구호 · 직업 · 통계, G 아동보호 · 학교위생, H 의학의 역사, I 육군 · 해군, J 대만의 열 개의 부문으로 구분하고, 위생시설이나 감염병연구소 외관 모형, 다양한 약품 표본, 그림을 포함한 의학사 자료, 야전병원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의수(義手)를 한 상이병의 사진 등을 전시했다. 특히 이 전시에서 일본이 의식한 것은 ‘국가의 문명 수준에 대한 평가’ ‘국위 발산’이었다(田中聡, 1994: 14-16). 당시에 발행된 이 전시의 카탈로그14)에 의하면 <그림 3> 전시관 내부 구조에서 논자가 표시한 바와 같이, 전시장 입구에서 출발하여 A에서부터 알파벳 순서로 관람하는 동선 마무리 I-존(zone)에 육군 · 해군 전시가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I의 일본 군사 기반 전시(야전병원, 야전주방 등)를 ‘이키닌교(生人形)’ 15) 를 이용한 디오라마로 꾸몄다는 점이다. 이 이키닌교는 에도시기 민중 오락의 일환으로, 공포스러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만들어진 인형을 말하는데, 이런 인형을 이용하여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군인들의 모습을 전시하여 관람자들에게 강한 임팩트를 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대만 전시실 J가 통로를 지나 별도로 마련된 넓은 공간에 배치됨으로써 전시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를 통해 일본 스스로가 청일·러일 전쟁의 승리자이자 대만이라는 식민지를 보유한 나라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3. 일본의 국내박람회와 위생전람회

위생전람회는 산업 전시를 통해 제국을 과시하고, 전시 주체를 광고할 수 있는 시장 역할을 하며, 흥행물로서의 효과(吉見俊哉, 2001: 22-24)를 추구하는 것을 통해 대중의 감각과 욕망을 동원하고 재편했던 서구의 박람회 문화에서 파생되었다. 19C중반부터 서구에서 개최된 박람회에 지속적으로 참가하여 국제 감각을 익힌 일본은, 국내에서도 도쿄, 교토, 오사카 등 대도시를 거점으로 대규모 박람회를 개최했다(山本光雄, 1970: 42). 1871년 교토박람회를 시작으로 매년 일본 각지에서 대규모 박람회뿐만 아니라 소규모의 전람회가 지속적으로 개최되었다. 이러한 박람회 개최는 주로 정부, 공공단체, 공익단체, 신문사 등이 주최하였다.
우선 근대 위생 분야가 박람회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77년 국가적 차원에서 개최된 제1회 「내국권업박람회(内国勧業博覧會)」에서이다.16) 박람회 사무국은 서양 박람회 참가의 성격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시를 추진했다. 즉 골동품이나 진기한 물건전시와는 구별을 둔 형태의 새로운 문명 전달의 장으로서 기술적 선진성을 전시하는 형태로 추진해 갔다. 기술의 진보에서 의학의 진보는 필수 사항이었고, 이 전시장에 프랑스에서 들여온 위생과 관련된 물품을 전시하는 형태로 초기 위생전람회의 모습이 출현한다(田中聡, 2003: 107). 1881년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에서도 소규모로 위생 코너를 마련하여 인체모형이나 태아의 성장 과정 모형을 출품하여 볼거리로 제공했다. 1884년 런던 만국위생박람회와 같은 세계적 위생박람회 참여를 통해 그 효과를 체감한 일본은, 일본 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위생 관련 전시를 포함해 갔다. 예를 들어, 우에노 공원에서 개최된 제3회 「내국권업박람회」(1890)에서는 매우 충실한 해부모형 등의 위생 관련 전시장을 마련했고, 제4회(1895) 교토, 제5회(1903) 오사카의 박람회에서도 의약품이나 위생 및 의료기구가 매우 충실하게 전시되었다. 물론 이러한 박람회 개최 이전에도 「약품회(薬品會)」나 「물산회(物産會)」17)에서 약품류와 함께 인골(人骨)모형 등이 전시된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田中聡, 1994: 20), 실제적으로 위생이 전시의 핵심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 국가적 목표와 결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더욱이 본격적인 위생전람회 개최에는, 20C 전반 일본의 민주주의적 기운, 자본주의의 발달, 백화점으로 대표되는 상업시설이 도시문화를 장식하며 사람들의 소비심리를 부추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개재하고 있다. 이러한 도시문화 전개 속에서 생긴 빈부격차로 도시 주변부에는 열악한 생활환경에 노출된 사람들이 늘어났고, 결핵을 비롯한 감염증 유행도 빈번해졌다. 이에 따라 위생 문제는 개인 차원이 아닌 사회문제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회 의료에 대한 요구가 대두되었고(日本公衆衛生協會編, 1967: 47), 이 시기 질병과 건강 문제를 환경과의 관계에서 인식하려고 하는 공중위생에 대한 개념도 성립한다(西川純司, 2022: 21). 당시 위생과 관련된 내용은 신문이나 가정잡지 등을 통해 접할 수 있었지만, 이런 미디어의 독자는 도시 중간층에 한정되어 그 비율이 인구의 10% 정도에 불과했다(宮坂靖子, 1995: 121). 그에 반해 위생전람회는 다수를 위생과 관련된 계몽의 장으로 끌어올 수 있는 흡인력 있는 행사였다.
박람회 구조물 즉, 건물에 ‘위생’이라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18년의 삿포로에서 개최된, 「홋카이도 개도 50년 기념박람회(北海道開道五十年記念博覧會)」에서의 ‘척식교육위생관(拓殖教育衛生舘)’에서부터이다. 이후 1922년 「평화기념 도쿄박람회」에 ‘위생관’이 설치되었다. 이 위생관을 방문한 기자는, “일반적으로는 보기 어려운 표본이나 모형이 많이 있어서 위생관도 주의 깊게 봐둘 필요가 있다. 영양에 관한 연구나 완구의 선택법, 부인과 아동의 위생 등에 특히 주의하여 마음에 새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병이나 결핵병이나 자궁암, 임신 10개월의 태아 모형과 실물 표본도 거북해하지 말고 봐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斎藤栄, 1922: 145)라며, 아동과 부녀자를 중심으로 한 대중의 관람을 추천한다. 이 위생관은 모든 전시장 중에서 가장 인기관이었다고 한다(田中聡, 1994: 22-23). 이처럼 거대 박람회 속 위생관은 현장 경험을 통해 신체와 질병에 대한 막연한 생각에서 벗어나 눈으로 인체의 내부와 생명의 발생과정, 질병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에게 인기 명소였다.
한편 일본의 거대 박람회 속 위생관 전시와 더불어 살펴봐야 할 단체는 사립위생회(私立衛生會)이다. 위생사업은 어느 특정 도시민만 자각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고, 오히려 농촌이나 지방 소도시 대중들이 함께 참여해야만 실효성을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메이지 정부는 근대의학 체계를 형성하며 감염병과 위생행정 시스템을 마련하는 과정에서18) 주민 조직인 위생 조합 설치를 의무화하고 제도상으로 감염병 예방을 위한 청결법(청소와 소독)도 실시했지만, 그 활동이 정체되어 있었다(中澤恵子, 2014: 50). 이러한 상황에서 일찍부터 일본 열도 각지에 지부를 두고 대중의 위생사상 보급을 실천해 왔던 사립위생회는 국가 및 사회적 측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조직이었다.
특히 사립위생회 단체 중 대일본사립위생회(大日本私立衛生會)는,19) 1887년 위생만을 전문적으로 다룬 「위생참고품전람회」를 도쿄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최초의 단일한 위생전람회로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특수전람회가 대중적이지 않은 시기의 개최이고, 전시에 인체나 식품 등에 대한 생리학적 개설과 감염병과 관련한 병리학적 설명, 그리고 위생적인 주택 설비를 위한 소재 등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소재가 부족했다(田中聡, 2003: 109-114). 오히려 동시기에는 화제성이 있는 전시물이 출품되어 관람자의 감각을 자극했던 거대 박람회 속 위생관의 전시가 인기를 누리며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했다.20)
이와 같은 박람회의 일부분으로 마련된 위생 전시나 위생 전문기관을 통해 전문인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던 역사를 거쳐 본격적으로 대중을 겨냥한 위생전람회가 개최된 것은 1910년대이다(青木純一, 2000: 197). 1910년경 내무성(内務省)은 명령이나 강제에 의해 제도나 규칙을 준수시키는 것보다, 국민 개개인에게 직접 위생사상을 보급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인식해, 그 실천자를 추천하고 활동을 장려하는 등 적극적인 보급 활동을 추진했다(中澤恵子, 2014: 50). 이 시기부터 위생전람회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 것을 <그림 4>21)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가 되면, 박람회 개최 경험이 쌓여 표나 그래프를 전시할 때에도 반드시 그림과 함께 제시하는 등 사람들의 보는 감각을 자극하는 효과에 대해 더 많은 궁리가 이뤄졌고, 일본에서도 인체모형 제작소22)가 생겨 각 대학과 병원, 관청, 학교 등에 납품하였다.
홋카이도에서 1915년 개최되었던 『위생전람회설명서(衛生展覧會説明書)』를 보면 회장을 생육부(生育部), 생리부(生理部), 보건부(保健部), 방역부(防疫部), 의치부(醫治部)로 구분하고 마지막에 결론을 제시하며23) 부록으로 위생숫자노래(衛生數へ歌)24) 를 수록하고 있는데, 이 설명서에 당시 관람자들을 놀라게 했던 전람회에 전시된 인체모형, 장기모형, 골격모형 등의 사진이 삽입되어 있어 당시 전시물의 구체상을 알 수 있다[그림 5,6].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감염병 대책을 최우선시하는 시대가 지나, 좀 더 종합적인 위생 의식에 충실을 꾀해야 한다는 취지하에 다양한 주제의 전람회가 개최되었다(田中聡, 1994: 199). 대일본사립위생회가 처음으로 「위생참고품 전람회」를 개최했던 때의 대표가 사노 쓰네다미였는데, 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후 보고서를 남겼고, 일본적십자사(日本赤十字社)의 전신인 박애사(博愛社)의 창립자였다. 이 일본적십자사는 위생전람회 개최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데(田中聡, 2003: 111), 다음 <표 2>는 일본 유일의 위생박물관인 적십자박물관(赤十字博物館)의 참고관(参考館)에서 1927년부터 1944년까지 개최한 특별위생전람회의 주제이다.
이처럼 적십자박물관은 위생전람회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시기별로 다양한 주제로 전람회를 개최하였고, 부대사업으로 강연회, 전시 해설원, 검진, 상담회, 실연(実演), 활동사진, 환등, 전시 목록 배부, 라디오 강연회 등을 실시하는 것을 통해 전시회에 관람자를 초청하고 도서관이나 강당을 개방하여 교육의 장, 근대 의료 체험 공간 구성하며, 다양한 근대적 미디어를 활용하여 그 활동 영역을 넓혀 갔다(日本赤十字社, 1934: 1-6). 박물관학자였던 다나하시 겐타로(棚橋源太郎)는 박물관 전시가 “학식이 없는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심”(棚橋源太郎, 1930: 261)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했는데, 위생전람회의 전시 내용도 점차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통속위생’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표 2> 내용 중 색으로 강조한 것은 아동과 여성이 직접적으로 관계된 전람회로, 일본 대중 특히 각 가정에 위생사상을 전달하는 것을 통해 근대 국가적 목표와 일본인의 삶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갔다.25)
또한 적십자박물관에서는 인쇄물을 간행하여 각 관청, 각 도부현 도서관, 학교, 전시회 출품자 및 박물관 후원자들에게 배부했을 뿐 아니라, 정부 기관, 신문사, 백화점, 병원, 학교 등에서 개최되는 위생전람회에 자료를 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표 3>은 1933년 1년간 일본 적십자박물관에서 자료를 대출한 기관 및 전람회명이다. 여기에서는 일본 대도시뿐 아니라 각 지방에 위생 자료가 대출된 것을 알 수 있고, 대출 대상으로는 학교인 경우가 많으며, 개최 내용에는 여성 및 아동 위생 교육의 측면(색으로 강조한 부분 참고)이 강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표 4>는 적십자박물관에서 대출 가능한 자료인데, 아동의 위생과 영양 등에 관한 자료가 우선순위에 있고 그 분량도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배경으로, 근대 일본이 ‘양생(養生)’에서 ‘위생’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26) 위생이 국가에 의한 국민의 생명 관리 차원에서 발생했는 점, 나아가 위생이 몸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병에도 지지 않는 강건한 체력을 소유한 적극적인 의미로 정착해 갔던 상황과 더불어,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 관심사로 확대되어 갔던 아동 건강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반영하여,27) 일본에서도 이 생명 관리 국민의 대상으로 아동이 주목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초기 단순 계몽 목적의 위생박람회가 점차 목적과 대상을 내세운 형태로 변화하여 성, 출산, 그리고 생명의 질을 통제하는 미디어(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08: 350)로 정착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의 위생전람회는 대도시뿐 아니라 지방에 이르기까지 대중이 위생에 대해 자각하고 자기관리를 함으로써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이벤트로 자리잡았다. 특히 의료기관의 도시 집중 현상과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병원 방문이 어려운 지방인들의 위생 교육은 중요한 것이었고, 부모 특히 부녀자에게 있어 가정이 병원이었으며 이들은 의사와 같은 역할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당시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의 위생전람회 관련 기사 등을 살펴보면, 1920년 내무성 주최 아동위생전람회가 매우 화제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28)
오는 10월 24일부터 11월 5일까지 오차노미즈(お茶の水)의 교육박물관에서 개최되는 내무성(内務省)주최 아동위생전람회는 이후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무성 내 위생과에서 그 진행 상황을 살펴보니 ‘출산 관련, 소아 영양’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거의 부인의 무대가 된 아동전 준비(殆んど婦人の舞台たる児童展の準備)」, 『読売新聞』, 1920년 9월 14일).
라는 소개로, 이 전람회 개최에 부인들이 적극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서도 이 아동위생전람회는 수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29) 전시품으로는 소아의 질병, 의복, 주거 관련 내용뿐 아니라, 다른 나라 아동의 생활 모습, 임신 관련품 등이 출품되었던 것을 알 수 있고, 전시품 중 아기 기저귀는 부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 외에도 『読売新聞』 신문에는, 「구강위생전람회(口腔衛生展覽會)」(일본 치과전문학우회 주최, 1923년 6월 1일자), 「주택위생전람회(住宅衛生展覧会)」 (三越백화점에서 주최, 1929년 7월 18일자), 「물 전람회(水の展覧会)」(동경 위생시험소 주최, 1928년 6월 18일자) 등 보다 주제와 대상을 특화한 위생전람회가 개최되어 가는 현상을 보인다.30) 이처럼 내무성 산하 위생보급 활동을 담당하는 지방 행정기관 시스템이 일정한 작동 궤도에 오르는 시기 식민지가 된 한국에서도 위생전람회와 관련한 기사들이 1920년부터 시작하여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동 시기 일제 강점하의 한반도 내에서 실시된 위생전람회는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개최되기 시작하여 식민 상황 속에서 한국 대중과 접점을 만들어 갔을까. 이어서 한국의 위생 전시의 출발과 한국에서 개최된 위생전람회를 통해 근대 한국 위생전람회의 전모를 파악하고자 한다.

4. 한국의 박람회 개최와 의학 분야 전시

한국의 위생전람회를 파악하기 위해서 역시 한국의 박람회 참가 및 개최 모습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31) 한국의 박람회 참가의 시작은 1881년 일본의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에 신사유람단이 관람한 것에서부터이다.32) 대한제국은 1902년 임시박람회사무소를 설치하였고, 1903년은 ‘임시박람회진열관규정’을 시행했다(이각규, 2010: 61-62). 한국 정부는 주로 일본의 박람회에 참가하였는데, 이미 이 시기 일본은 수차례 해외 박람회 참석 경험을 바탕으로 박람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고, 국내박람회 개최 경험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본에 비해 박람회 참가 후발주자였던 한국은 1903년 오사카에서 개최된 「내국권업박람회」에 참가했는데, 주요 전시물은 일본이 세계박람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의 전통문화를 강조하는 형태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서도 일본 도시 단위에서 개최된 박람회에 ‘조선관’이 구성되어 금강산 모형, 한국인의 삶을 재현한 디오라마, 심지어 전통의상의 한국 여성이 전시물과 함께 배치되었다.33)
한편 1904년 한국에서는 농상공부의 임시박람회사무소 관제를 폐지하고 ‘박람회 권업과(勧業課)’를 신설했다. 그리고 1906년 한국 최초 국내박람회로 「일한상품박람회」(4월)34), 「전조선철도박람회」(8월)가 개최되었고, 경성에서는 1907년 「경성박람회」가 열렸다.35) 이들 행사는 장소만 한국이었지 박람회 개최 핵심은 철도를 장악한 일본인에 의한 상업이었다. 이와 같은 근대 문물을 전시하고 광고와 오락성을 이용하여 물건을 판매한다는 박람회의 공식은 일본에 의해 한반도에 적용되었다. 한국에서 박람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일본의 선진성을 전시한다는 것과 연결되었고 그 효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한반도에서 박람회 개최가 거듭될수록 일본의 선진성과 한국의 후진성 대비 폭은 커졌으며,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전시물 관람을 통해 받는 문화적 충격은 관람자의 내면에 자리 잡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개최된 본격적인 총독부 주도의 대중 상대의 박람회로 주목되는 것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와 1929년의 「조선박람회(朝鮮博覧會)」로, 모두 경성에서 개최되었다.36) 한국 개최 박람회 기획의 모범은 이미 수차례 개최 경험이 있는 일본에서 따왔고, 박람회장 조성과 건축 또한 총독부 산하 일본 건축가들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이를 위해 총독부에서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으며 부족한 부분은 부유한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의 기부를 받았다. 이러한 박람회는 ‘도시 안에 더 진보된 도시’를 건설한 형태로 그야말로 한반도를 들썩이게 했다. 개최 기간에는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조명기구를 이용하여 빛을 통해 환상적 공간을 연출했다. 박람회장 내부뿐만 아니라 남산에 서치라이트가 설치되고, 경성역도 환영의 문구와 함께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남대문과 거리도 장식물을 설치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한 사람들의 마음을 박람회로 쏠리게 했다. 박람회는 경성뿐만 아니라 한반도 각 지방의 관심을 끌었고, 다양한 직업군의 참여가 이뤄져 볼거리로 가득 채워졌다. 또한 ‘부인의 날’ 등을 정해 남자의 입장을 제한하고 부인들이 편하게 관람할 수 있게 하거나, 박람회장에 ‘어린이 나라’를 설치하여 다양한 볼거리나 놀이시설을 갖춤으로써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이각규, 2010: 467-469). 그리고 각 학교의 교사들은 연수의 형태로 박람회장을 방문하였으며, 이것은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을 인솔하여 다시 박람회장을 찾는 것으로 이어졌다. 학교에서는 ‘조선박람회를 안보는 것은 인간의 수치’라는 식의 권고장을 학부형에게 보내기도 했다(이각규, 2010: 335). 그 결과 지방에서 산업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박람회 방문차 고비용을 감수하고 상경하였으며, 박람회 기간중에는 철도국을 포함한 조선우편선회사, 일본우편선회사, 오사카 상선 등의 철도나 선박 운임이 특별 할인되는 등의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박람회에서는 전기적 기계를 포함한 근대식 신문물을 비롯하여 건축, 예술, 유흥 등 기술 및 문화적 진보를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및 서양인, 그리고 각 지역의 한국인과 특산품을 만날 수 있었다. 이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매력적인 공간이자 ‘인간 개화의 장’이라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고 거대 인파를 동원할 수 있었다. 『시정 5주년 조선물산공진회 보고서(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報告書)』(朝鮮總督府, 1916)를 보면, 이 공진회가 사람을 모으는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의 박람회에 ‘보건위생’ 분야가 할당되어 있었다. 「조선물산공진회」의 ‘박애관’에 적십자사가 출품한 긴급구호용품과 병자요양 디오라마 등이 전시되었는데, 이는 한국에서 개최된 초기 형태의 위생전람회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 제11부에 ‘위생 및 자혜 구제’의 파트를 마련하고 있는데, 행사 본부는 자혜 의원의 발전 및 시설 상황에 대한 내용을 출품했다(朝鮮總督府, 1916: 191). 이 시기의 위생 관련물은 비교적 소박하게 전시 소개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 위생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생 관련 전시보다는 수많은 사람의 운집을 빌미로 박람회 속 또 다른 대회를 낳았는데37) 그중 의학 · 약학 · 의생(醫生)38)대회와 같은 전문인들의 대회가 주목된다. 이 조선물산공진회에서는 조선의학회 제5회 총회를 조선총독부의원 내에서 개최하여 경성을 비롯한 각도에서 근무하는 일본 의사들의 연구 발표의 장을 마련했다. 관련 내용은 공진회의 각 대회 중 그 어떤 대회보다도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총독의 축사는 물론이고 10, 11일 양일에 걸쳐 60명에 가까운 연구자들이 연구 발표를 진행했던 대형 학회였다. 특별연설은 도쿄에서 온 의학계의 스타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가 했고, 경성, 부산, 청주, 대구, 인천, 전주, 용산, 평양, 충주, 황해, 진주, 영흥(永興), 줄포(茁浦)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의사(거의 일본인)들이 총집합하고 있다. 발표는 총독부의원 의사들과 한국 각 지방에서 개원하고 있던 의사들이 조사 연구한 내용이었다(朝鮮總督府, 1916: 308-310).
이렇게 성대하게 개최된 의학대회(및 약학대회)와 비교하여 한국 한방의(韓方醫)가 개최한 의생대회는 또 다른 성격을 띠었다. 의학대회는 그야말로 학술적 교류의 장이었던 반면, 의생대회는 한국 한의사들의 생존권 유지와 관련한 대회였던 것이다. 의학대회가 300여 명이 참여한 것에 비해 의생대회는 600명이 넘는 수가 참가하였다.39) 하지만 공진회 보고서를 보면, 의학대회에 대하여는그 내용을 수 페이지에 걸쳐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의생대회는 한 페이지에도 못 미치는 분량이고, 그나마 기술의 대부분이 데라우치 총독의 훈사로 도배되어 있다(朝鮮總督府, 1916: 318). 공진회 보고서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의생 대회의 구체사항은 당시의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40)
1915년의 전람회에는 그 화제성과 화려함, 놀랄만한 볼거리, 전국적 동원 등에 의해 수많은 한국 대중이 다녀갔지만, 의료 분야 전시는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것이 아니었고, 한국과 일본 의료인의 한반도 내에서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전문인들의 장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거대 박람회였던 1929년 「조선박람회」에서는 박람회 직영관으로 ‘사법위생경무관’ 중 ‘위생부’ 코너에 위생 관련 품목이 전시되었다.41) 이와 같은 거대 박람회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각 직업이나 연령 · 성별에 따른 특별 행사를 진행하며,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참가를 독려하고, 숙박이나 교통에 대한 다양한 서비스 등을 제공함으로써 경성 이외의 한반도 거주자들에게 ‘나도 한 번’ 관람해 보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박람회가 개최되는 공간을 넘어, 온 나라를 박람회의 광고판으로 삼아 한국인의 감각을 자극하며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는 개최 형태는 한국의 지방에서 개최되었던 위생전람회가 지니는 성격과 맞물린다. 한국에서 위생이 대중적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인데, 이 시기는 ‘위생’ ‘대회’라는 용어가 대중에게 유행할 정도로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김윤희, 2010: 37). 그렇다면 한국 개최 위생전람회의 구체적인 양상은 어떤 것일까.

5. 근대 한국 위생전람회의 제상

일본에서는 위생전람회 개최와 동시에 관련 자료집이 제작되어 전람회의 배경과 개최 취지 그 내용 등을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과 달리, 현재 근대 한국에서 개최된 위생전람회는 출간 자료집이 확인되지 않고 오직 당시 간행된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위생전람회 개최 기사는 1920년 경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여기에서는 『동아일보』(168건), 『매일신보』(122건), 『시대일보』(9건), 『중외일보』(7건), 『중앙일보』(6건), 『조선중앙일보』(4건), 『고려신보』(1건)을 확인하였고, 일본어 신문으로는 『朝鮮時報』(12건), 『朝鮮新聞』(53건), 『京城日報』(40건), 『釜山日報』(14건)의 기사를 검토했다. 그리고 한국 기사와의 비교 검토를 위해 동 시기 일본의 『読売新聞』(45건), 『朝日新聞』(52) 기사도 살펴보았다.42) 이 절에서는 개최 주체와 대상, 개최 형태와 장소, 홍보방식, 전람회 내용, 참가자 모습 등을 고려하여 위생전람회의 개최 양상을 파악한다.

1) 개최 주체와 대상, 규모 및 지역침투 방식: 지방 최대 행사, 공격적인 순회 개최

위생전람회 개최 주체는 각 도의 경찰부 위생과 및 그 휘하에서 각 지역 경찰서가 그 임무를 담당했는데,43) 이러한 경찰서는 군청이나 위생회와 협업하여 개최하기도 했다.44) 전람회에 있어 관람 대상은 ‘일반(一般)’45)이라는 단어로 지칭되는 대중이었다. 그 개최 규모는 다양했는데, 각 도의 위생과가 주관하는 행사가 각 지방 경찰서 단위에서 개최하는 것보다 규모가 큰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장성경찰서 주최 전람회는 500여 명의 방문이 이뤄졌다는 기사가 보이는데,46) 황해도 경찰부 위생과가 해주에서 개최한 경우는 첫날부터 1,000명이 넘는 입장자 수를 보인다.47) 하지만 전북 위생과가 남원에서 개최한 위생전람회는 5일간 7만 명에 이른다는 기사를 보아,48)도 단위 개최라도 그 규모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경찰서 주최라도 결코 소소한 행사가 아니었다. 전남 강진경찰서 주최 전람회만 보더라도 6,575명이 다녀갔다고 보도되고,49) 평남 강동경찰서 개최 소개에서는 지방으로서 ‘미증유(未曾有)’의 행사50)라고 소개하듯이 위생전람회는 그 마을에서 전례 없던 큰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도시 경성 개최는 초대형 행사를 지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도위생과 개최 관련 기사는 꾸준히 보도되는데, 여기에 스오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이 스오는 1933년 소록도갱생원 제4대 원장으로 부임하여 군림했던 스오 마사스에(周防正季)이다.51) 그는 1921년 3월 경기도 경찰부 위생과에 부임한 해부터 위생전람회 개최 최전선에서 실무를 담당했다. 그가 2회 개최를 지향함에 앞서, 원래 1회 개최부터 ‘전람회’가 아닌 ‘박람회’ 형식으로 개최하고 싶었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52) 앞서의 드레스덴 전시와 같은 국민 생활과 사회, 나아가 국가를 연결하는 위생전람회를 개최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7일간 개최된 이 전람회에 첫날만 13,900명의 입장자 수를 기록하고 있고, 저녁에 개최하는 활동사진회만 하더라도 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방문했다고 한다.53) 스오는 소록도로 부임하는 해인 1933년까지 「위생대전람회(衛生大展覧会)」를 주관했는데,54) 기사에서 ‘대(大)’라는 특별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방과는 다른 대규모의 장으로 마련하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도시만큼은 아니어도 지방의 행사는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차원에서도 지방위생 행정기관에 예산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도지방비의 위생비로 매년 ‘위생사상 보급비’를 계상하여 위생보급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松本武祝, 2005: 73). 충청북도 위생과가 주최하여 청주에서 개최한 전람회만 보더라도 2일간 5천 명이 다녀갔고55) 충청남도 위생과 주최로 논산에서 개최한 전람회도 첫날 8천 명 둘째 날 7천 명이 다녀갔다.56)
한편 위생전람회 소개에 있어 눈에 띄는 것은 순회(巡廻)라는 단어로, 위생전람회가 한 지역에서만 개최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종종 주변 지역을 순회하며 더 작은 단위의 지방을 방문하여 개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북경찰부 위생과에서는 순회 위생전람회” (『매일신보』, 1921년 8월 19일), “장성경찰서에서는 관내 각 주요지에 순회하면서”(『매일신보』, 1923년 5월 12일), “평안남도에서는 수일간 순회 위생박람회를 개최” (『朝鮮新聞』, 1924년 4월 11일) “경북도위생과 위생순회전람회”(『京城日報』, 1924년 3월 5일), “전라남도 위생과에서는 도내 각지에서 순회위생전람회를 개최”(『朝鮮新聞』, 1931년 11월 10일), “영변경찰서에서는 도위생과의 순회전람회 개최”(『매일신보』, 1936년 9월 10일), “전북 위생과에서 순회실시”(『朝鮮新聞』, 1933년 8월 13일), “전라남도 위생과에서는 도내 각지에서 순회위생전람회를 개최”(『朝鮮新聞』, 1933년 11월 10일).
각 도 단위 기관에서 위생전람회를 개최하는 경우, 위생과장이 일본 및 한국인 직원들을 데리고 소단위 지역까지 들어가 방문 개최 함으로써 지역의 위생 사상 고취를 꾀했다. 일본 신문 기사에서는 순회위생전람회 관련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 데 반해, 한국 기사에서는 빈출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전람회 개최가 지방 각 지역에 고르게 분포되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순회의 일부가 아닌 단독으로 개최된 위생전람회 개최지는 전라남도만 한정하여 보더라도 <그림 7>과 같이 군면 단위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57) 이는 경쟁적으로 개최되던 다른 도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위생전람회가 어떤 사람들의 참가에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으로, “특히 가정 부인이 다수 참가한 것은 위생사상이 보급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58) “특별히 부인과 농촌 인사의 입장자가 많았던 것이 가장 효과적”59)이라는 보도 내용은, 농촌사회, 가정의 일원(특히 여성)의 위생사상을 보급에 역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의 농촌 사회는 1940년대에 이르러서도 의료 사각지대였으며 대부분 농민의 삶은 근대적 의료혜택과는 거리가 멀어, 병원이나 의사가 없이 여전히 전통적 치료에 의존하던 사람이 많았다(이상의, 2014: 257). 예를 들어 『전라북도요람(全羅北道要覧)』을 보면, 지방 도시는 “한방의에 의존”하고 있고, “보건위생 시설은 그 유치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위생사상 선전과 위생전람회 개최가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全羅北道, 1933: 268). 그리고 이러한 지방 의료의 열악성 해소 방편으로 1925년부터 ‘구료상자(救療箱)’를 배치하여 “의료기관을 보완”하고 있는데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全羅北道, 1933: 270)는 내용도 보인다. 기껏해야 구료상자 수준에 머물러 있던 지방민을 대상으로 질병과 건강에 관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육성으로 강연하며, 활동사진을 보여주는 등의 행위는 지방 사회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더 깊숙한 의료 사각지대의 사람들을 행사장으로 끌어모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2) 위생전람회의 매개체: 대중의 매개자로서 학교와 학생, 화려한 홍보

전람회 개최 장소는 사람들이 잘 운집하는 곳이 선정되거나, 학교 관공서와 같은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에 마련되었다[그림 8]. 이른 시기 위생전람회 개최로 확인되는 기사는, 1920년 10월 7일 자 『매일신보』에서이다. 이 전람회는 논산에서 장날에 정미소를 빌려 실시하였고, 동 지역의 경찰이나 공무원이 방문자들에게 위생에 관해 설명하는 형태였다. 이러한 시장 외에도, 음악당, 공회당, 백화점 내 공간, 군청 터 등이 개최 장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위생전람회 개최 장소로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은 학교였다.60) 당시 학교는 미디어와 함께 대중의 삶을 선도하고 지식 정보 및 사물(사건)에 대한 견해를 흡수하는 원천이었다(家永三郎, 1985: 286). 앞서 살펴봤듯이 1920년대 일본에서는 아동보호 및 위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관련 사업을 조직적으로 구축하고, 「아동위생전람회」(1920)를 개최하여 부인들을 비롯한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이를 계기로 각종 단체, 각 지역의 ‘아동보호’나 ‘아동애호’ 관련 행사가 왕성해 졌다(大竹聖美, 2023: 1-20). 일본 내무성에서는 지방에서도 아동 위생 관련 이벤트를 실시하도록 통첩(通牒)하였고 이에 따라 민간 조직에서도 학교를 중심으로 한 아동 위생사상 보급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아동 사업의 주도권을 조선총독부가 쥐게 된 당시의 상황(조형근, 1997: 177), 그리고 일본 정부가 ‘조선’을 일종의 ‘일본의 로컬(local)’로 인식하고 통치했던 상황과 맞물리게 된다.61) 당시 아동의 중요도가 급부상하고, 배움이 없는 주부들도 오래된 인습에서 벗어나 근대적 생활을 추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가 강력하게 요구되는 상황에서, 비교적 한반도 전체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초등교육 기관(소학교, 보통학교)은 지방인 경우 위생전람회 개최의 핵심 장소였고, 학생들은 위생사상 전달의 객체이자 주체가 되었다.
· 공립제5심상소학교에서는 25일 오후 1시부터 학부형회 및 위생전람회를 개최할 예정으로, 이미 교사는 수일 전부터 열심히 통계표의 제작 참고품 등을 수집하는 한편, 위생 강화(講話)도 열어(「第五尋常父兄會, 衛生展覽會와 講話」, 『朝鮮時報』, 1921년 6월 24일).
· 경상북도위생과에서는 3월 10일경에 의사위생전람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한 준비로서 내지에서 위생포스터의 참고품을 수집하는 등 대구 부내 각 중등학교 및 소학생도 등이 의장(意匠) 고안에 나서 각종 위생사상 선전의 포스터 등을 모집하고 있다(「衛生展覽會」, 『京城日報』, 1926년 1월 23일).
이처럼 학교는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 교원과 학생 학부형을 행사에 사용할 수 있다는 점, 학교 관련자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 등 위생전람회를 개최하기에 다양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람회 개최 전 교사와 학생들은 전시실을 꾸미며 포스터를 만들고62) 표어나 위생가를 창작하는 등, 많은 사람이 전람회를 공유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그 외에도 학교 관계자들은 개최 장소에 설치되는 다양한 구조물, 전등, 만국기, 홍보 전단 등의 제작에 참여하거나, 거리 홍보 행진에 참여하여 전단지를 배부하는 등 그 어떤 광고보다도 더 확실한 선전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행동의 주체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위생전람회가 전시된 물품이 중심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활동이 물질과 대중을 매개하는 역동적인 역할의 상당 부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중과 전시 공간을 매개하는 학교 건물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은 스스로가 위생문화 창조했던 주체적 행위자였을뿐 아니라, 자신들의 홍보행위를 통해 대중의 ‘문화 욕망’을 채우는 매개자로서도 기능했던 것이다.
또한 대중의 문화 욕망의 충족을 위해, 학교 측의 준비와 더불어 개최 전후로 다양한 대중 유인 장치가 마련되었다. 여기에서 앞서 소개한 공진회나 박람회와 같은 전국적 행사가 인간 흡인을 위해 ‘비일상’을 경험하게 하고 ‘오락심을 유발’하는 장치를 사용했던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전람회장을 일루미네이션 장식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고,63) 제약회사 같은 곳에서는 전람회 기간 중 경기구(軽気球)까지 날리며 자사 상품을 소개하기도 했다.64) 또한 전람회 장소 입구에 아치 구조물을 세우고, 만국기를 화려하게 드리우며,65) 개최 당일에는 ‘위생 전람’이라고 적힌 화려한 색의 깃발을 들고 가두선전을 요란하게 한 후, 경찰의 인도하에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개회식을 치르고 관람이 시작되었다.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몇 가지 예를 들면,
· 역전과 읍내에는 아치를 설치해 야간은 일루미네이션을 점등하고 각 요정의 아름다운 기생이 연일 포장마차를 설치한 곳을 돌고 시내는 전람회 기분이 횡행해 있다(① 「全羅北道, 衛生展覽會」, 『朝鮮新聞』, 1931년 8월 11일).
· 이제 내일 개장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 31일은 오전 11시부터 위생전 자동 차선전대는 7대의 자동차가 늘어서고 악대를 선두로 하여 부내를 돌고 선전 삐라 3만 장을 배포하여 부민의 위생사상 선전 및 위생전람회 선전을 했다(② 「平安南道, 1일부터 개장하는 衛生展覽會」, 『朝鮮新聞』, 1935년 8월 2일).
· 11월 16, 17 양일에 걸쳐 장흥공립보통학교의 강당에서 장흥경찰서 주최의 위생전람회 및 장흥군농회(農會)의 가축품평회, 야채품평회, 장흥공립보통학교 아동작품전람회 그 밖에 분재(盆栽)회를 개최하고 여흥으로는 기생의 춤, 야간은 장흥공립소학교에서 활동사진을 영사하고, 주간 야간에 걸쳐 불꽃놀이를 쏘아 올리고, 방문하는 관람객 편의를 더하기 위해 자동차 할인, 위생전람회 지정 여관 등을 준비했다. 다수의 관람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몰려들어 입장하기 때문에 거리를 특별히 화려하고 활기차게 조성하고 있다(③ 「衛生展覽會」, 『朝鮮新聞』, 1935년 11월 18일).
①은 정읍경찰서 주최 위생전람회를 소개하는 내용인데, 전라북도 정읍이라는 작을 마을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보이는 ‘전람회 기분’이라는 표현을 통해 전람회에 운집하는 사람들의 기대가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흥적 장치가 많은 사람들 끌어들이는 수단이 되었고 온 마을이 전람회의 광고판이 되었다. ②는 평안남도 주최 위생전람회인데, 그 개최 전의 떠들썩함을 엿볼 수 있다. 지방에서 보기 드문 자동차를 이용한 선전과 악대의 행렬, 광고 전단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홍보였다. ③과 같은 경우는 장흥경찰서 주최 위생전람회인데, ‘기생의 춤’ ‘불꽃놀이’ ‘활동 사진’ ‘자동차할인’ ‘여관할인’ 등 경성개최 박람회를 방불케 하는 유흥적 장치를 통해 축제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위생전람회에서 열리는 기생들의 공연, 청년연극, 공동목욕탕 개방, 격검대회, 씨름대회 등 관람자들의 오락심을 자극하는 부대행사는 대중이 당연히 기대하는 요소이었다. 이런 축제의 장에는 먹거리도 판매되었는데, “단양 군밤 제작에 다수의 구매자”66)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장치로, 전기응용장치를 활용하거나 무대식 파노라마 등이 설치되기도 했다.67)
한편 위생선전에 있어 엄청난 활약을 한 것은 활동사진이었다.68) 당시 영화는 “현대인이 환영하는 가장 큰 특징이자 생활에 가장 어울리는 특징”이 있고, “이해가 아닌 납득(자동적, 자연적)이 되고,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山根幹人, 1923: 63-67)이라 여겨져 중요 교화 장치로 취급되었기에, 밤에 진행되는 ‘활동사진회’는 위생전람회 행사의 꽃이었다. 1921년 경성에서 개최된 위생전람회의 활동사진 상영 때 한국인뿐 아니라 재조일본인도 큰 관심을 보여 참여가 많았다는 기사는69) 지방에서 상영되었을 경우 얼마나 큰 관심거리가 되었을 지를 방증한다. 실제로 지방에서의 활동사진 상영은 위생전람회가 개최되기 시작하는 1920년대부터 패전 전까지 사람을 동원하는 핵심 요소로 취급되었다.70) 그 내용은 위생 교육과 관련된 것이 주였지만, 그 외에도 좋은 경치나 서사가 있는 내용도 상영되었고 이는 한국인들이 첨단 미디어를 경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이처럼 위생전람회는 학교와 학생이 주체가 되어 전람회를 홍보하는 다양한 요소를 생산하고 전시하는 역동적인 미디어이자 ‘일상 공간’ 안에 ‘유희 공간’을 작동(大塚英志, 2017: 26)함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축제적 공간으로 기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람회의 기능은 전시장이라는 단일한 공간에만 한정되지 않고 개최되는 지역 전체가 ‘전람회 분위기’를 발산한다는 확장성을 가지고 있었고, 마치 경성 개최 공진회나 박람회의 지방판(地方版)으로 여겨질 만큼 지방인의 근대 문화 욕망을 자극하는 전략적 공간으로 구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 전시 내용과 전람회 참가자들: 눈으로 보는 교육, 몸으로 참가하는 근대 의료

이상과 같은 전람회를 위한 홍보와 유희적 요소가 지방 대중 사회에 있어 일상에서 경험하기 쉽지 않은 근대적 문화 체험을 가능하게 하고 이에 대한 경탄을 불러일으켰다면, 이러한 흥분된 정동(情動)의 연장선상에서 본격적으로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전시물이 관람자들에게 선사한 것은 일종의 ‘공포심’이었다. 위생전람회에서는 학생들이 참가하여 선정된 위생표어나 위생가, 위생 포스터, 통계, 도표도 전시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인체 구조와 관련된 모형을 비롯하여, 병균체의 다양한 표본과 질병에 걸린 사람 모형, 태아의 발달 과정 모형 등으로, 그 그로테스크함은 관람자들을 발길을 멈춰 서게 했다.
· 회장의 좌측에는 무료진료소와 환자를 위한 장소를 설치하고, 우측에는 소의 병치료 상담소의 천막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으며, 회장의 내외에는 홍등 만국기 등으로 번화한 장식을 하였다. 제1회장에는 호실 입구에 현미경 2대, 식물 분석 표본, 해부 그림, 2호실에는 하이디스토마 사리蟹(해), 모쿠스蟹 등의 참고품 이것들의 해부학 그림, 각종 사진, 피부병의 모형 수십 종으로 채웠고, 제2회장은 1호실은 대장, 회(廻)장, 간(間)장, 파리의 전염병 매개의 모형의 파리의 작용을 유감없이 표시하고, 제 2호실은 호열자, 두창병, 장티푸스(保腸窒扶) 이렇게, 균 병자의 모형 수십 종, 제3실은 병든 소, 쓰러진 소에 관한 위생적 선전 그림, 광견병에 대한 주의의 그림, 제4호실은 부인병을 주로 미세균의 그림과 모형 등, 비밀물건을 진열하여, 20세 이하의 남자에게는 관람을 허락하지 않았다(「盛况을 極한 忠北衛生展覽會」, 『매일신보』, 1927년 8월 8일).
· 제2회장의 위생전람회장에 들어가는 벽에는 각종 통계나 사진 삐라를 채워 수백 점의 위생기구 및 모형은 잘 정리하여 배열하여 특히 관람자의 눈길을 끈것은 이상적 개량변소의 모형과 특별실의 매독환자의 모형이었는데 특히 매독 환자 모형은 일반인의 마음에 깊이 주의를 준 것을 넘어서 공포심을 일으키기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통계에서는 각도 위생비 비교표와 우역 발생 상황표는 또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그 외 활동사진을 이용하여 위생선전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고 그 외 도의원 의관 출장하여 위생상담소 및 위생검사실 등을 설치하여 유의미한 시설이라고 인기가 좋다(「各種品評會와 衛生展覽會」, 『朝鮮新聞』, 1930년 10월 14일).
이상의 인용은 각각 충청북도와 충청남도에서 위생과에서 개최한 전람회 전시실 풍경인데, 그 전시물 소개에서, 다양한 해부학적 인체모형 등이 특히 관람자의 이목을 끌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 대중에게 있어서는 여태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시각적 충격을 일으켰을 것임이 틀림없다[그림 9, 10, 11].
한편 전람회 개최에 있어, “동경에서 개최된 것을 참작 모방하여 모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새로운 구성”71)으로 기획하고자 하는 의도를 비치는 기사도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에서 개최된 위생전람회의 특이점을 좀 더 살펴본다. 앞서 <표 2>, <표 3>의 일본에서 개최된 전람회 명에도 보이듯이 어머니, 아동, 유아, 소년, 가사, 교육, 영양 등 초기 권업박람회의 위생 전시와 비교하여 좀 더 주제와 대상을 특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특화된 주제로 한 전람회가 개최된 사례는 있다.72)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한국 위생전람회는 ‘지역명 + 위생전람회’의 형태로 해당 지방을 대표하는 행사처럼 소개되었고, 지역적 특성을 살려 농업이나 임업,73) 축산74) 수산업75) 등 산업과 협업의 형태로 행사 규모를 확대해 가거나, 병원 개원 기념일, 학교나 건물 낙성식을 축하하기 위한 곁들임 행사로도 열렸던 것을 알 수 있다.76) 한편 전시물에 있어서 일본의 위생전람회에서는 보기 어려운 ‘미신 치료 용구’나 ‘한약’이 전시되기도 했는데,77) 미신 치료 용구는 그것의 사용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한약 같은 경우, 전람회 약품 전시 코너에 종종 등장하는 데,78) “약초에 관한 지식을 대중에게 보급한다”는 취지를 내세워 한약만을 주제로 한 전람회도 개최되었다.79) 당시 근대 의료시설과 서양의학 종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한국 내에서 매약업이 성황을 이루었고, 한국과 일본 매약업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약업계에서 활동했던 상황(양정필, 2006: 202)이 이러한 전람회 개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여름의 위생가(夏の衛生歌)」라는 표제어로 실린 내용을 보면,
위경련에는 밥이나 구약나물을 쪄서 위를 따뜻하게 하라/ 설사 때 노관초를 그늘에서 말린 것을 달여 마시면 바로 멈춘다/ 때때로 마늘을 먹으라, 마늘은 십이지장 병이 원인을 막는다/ 식중독으로 가슴과 배에 통증을 느끼면 진한 소금물을 마시면 독을 토해낸다(「夏の衛生歌」, 『朝鮮新聞』, 1938년 8월 23일).
라고 되어 있는데, 앞서 일본 위생가(각주 24)의 근대 위생을 장려하는 내용과 비교되는 형태로, 전통의학적 치료법이 위생가로 소개되고 통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외 순화원(順化院)의 모형도 및 각종 위생시설을 축도로 한 것이 전시되기도 했고, 장내에서는 이발관을 설치하여 무료로 이발을 해주었으며,80) 개량변소의 모형을 통해 근대적 화장실을 소개하기도 했다.81)
특히 위생전람회에서 인기있었던 것은 피검사나 객담검사, 기생충 검사, 혈액, 수질 검사 및 장티푸스 예방주사의 무료 실시와 더불어 ‘병 진찰의 실연’ ‘무료 진단 및 치료’ 등 대중 스스로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근대의학 체험 행사였다. 의사들이 출장을 나와 위생상담소나 위생검사실이 운영된 것82)은 ‘보는 것’을 넘어 참가자들이 의사와 만나 근대의학을 직접 체험하는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이처럼 위생전람회의 전시와 의료 체험은 그간 교육기관이나 문자 해독을 통해 접근 가능했던 근대 의료에 대한 지식이, 한반도 ‘비-식자층 대중’으로 하여금 이러한 교육 절차가 없이도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공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좀 더 전람회장의 분위기를 살펴보자.
·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전북위생과에서 순회실시 중의 하기 위생전람회는 3일부터 5일간 남원에서 개최되었는데, 첫날은 모인 사람이 2만 수천 명으로 집계되고 5일간 총 7만여 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번 해는 특히 각지로부터 새로운 재료를 풍부하게 모아 전시하였다는 것과 여흥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 입장자에게 복권을 부여하여 1등상 소 한 마리, 2등상 돼지 한 마리 이하 각각의 상품도 있기에 엄청난 인기를 얻어 백열적(白熱的) 성황을 이루고 기요미즈(清水)위생과장 이하 위생과원이 총동원되어 한더위에도 불구하고 매우 분주하게 지내고 있는데, 1일부터 3일간 장수(長水)에서 개최중이고 나머지는 17일부터 7일간 진안(鎭安)에서 하는데, 모두 성황을 예상하고 있다(「全羅北道,覽會各地에서 白熱的盛况, 夏期衛生展」, 『朝鮮新聞』, 1933년 8월 13일).
· 함남도 위생과 주최의 의사(醫事)위생전람회는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지난 21일부터 함흥 부청사에서 개최되었는데 당초 3일간 예정되었던 것을 각 지방 관계자의 희망에 의해 2일간 연장하여 25일까지 5일간으로 마쳤다. 입장 인원은 제1일에 1만 명을 돌파하고 그 후에도 매우 인기가 있어 5일간 총 입장 인원이 31,780명에 달하여 대성황을 이루는 동시에 가정 위생사상 보급 및 역병 전염병 방알(防遏) 등에 많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관측된다(「衛生展覽會延長」, 『매일신보』, 1932년 5월 29일).
이상의 인용 외에도 전람회 풍경으로, “참관자는 첫날에도 불구하고 회장 앞에 무려 수천 명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장내에 눈사태처럼 쏟아져 나와 경찰서원이 총출동하여 장내 정리도 손이 부족할 정도 성황”,83) “수만의 관중은 인산인해”,84) “넓은 광장도 문자 그대로 발 디딜 틈 없이 매우 성황리에 다대한 효과를 거두어 무사히 종료”85) “사람의 바다를 이루었다”86)는 등, 기사마다 거의 빠짐없이 기술되어 있고 심지어는 전람회를 연장했다는 기사도 종종 보인다. 이를 참고하여 볼 때 지방에서 위생전람회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국 분위기와의 비교를 위해 일본에서 열린 위생전람회 기사를 보면,
본 후지(富士署)경찰서에서는 구민 일반 및 소학 아동 등에 대하여 공중위생사상을 촉진하기 이번에 홍고(本郷)구청과 협의하여 오는 27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홍고소학교에서 위생전람회를 개최할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재료를 모집하고 있다고 한다(「衛生展覧会開催」, 『読売新聞』, 1920년 3월 4일).
고 되어 있는데, 앞서의 한국 기사는 내용이 많아 일부만 발췌한 것인데, 이 일본의 기사는 보이는 것이 전문(全文)으로, 그 내용이 간단한 정보전달 정도로 한국 기사와 같은 대중의 열기를 보도하는 기사가 거의 없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20년대 이후 도쿄의 아동위생전람회 개최를 계기로 아동과 부인 관련, 혹은 물, 공기 등 주제를 특화한 전람회 보도가 주를 이루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위생전람회에서 보이는 한국 지방인의 모습은, 경성(중앙)에서나 개최될 법한 다채로운 행사가 자기 고장에서 실현되는 것에 대한 호응이자 근대 의료에 대한 호기심을 어렵지 않게 채울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열렬한 반응일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과정으로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 지방의 특성을 반영한 개최 주최의 준비(기관 및 학교 동원을 통한 홍보와 전시물 수집, 다른 행사와의 협업)--대중의 감각을 자극할 만한 다양한 장치 동원(화려한 쇼와 유흥심 자극)--공포심(질병 상태의 인간)을 자극하는 전시물과 더불어 참가자가 근대 의료 현장에 실천적으로 참여하는 행위가 개재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전시하는 사람이 전시물을 관람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고, 근대 의료를 바라보는 사람이 근대 의료 행위에 참가하는 주체가 되는 형태로, 위생전람회 전시장은 보고(관람자)/보이는(전시물) 이분법적인 공간이 아니라 양자가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으며 혼재되어 작동함으로써 관람자들에게 각각 다른 경험을 선사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에서 개최된 위생전람회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비-식자층 지방 대중’이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에서 각자의 감각으로 위생에 대해 경험하고, 근대적 의료환경을 체험하는 독보적인 미디어였다는 점에 있다.

6. 맺음말

박람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구에서 시작되었다. 박람회를 개최하는 나라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과장되게 전시했고 근대화에 첫발을 내디딘 일본은 그 기세에 눌려 차별화 특수화하는 형태로 박람회에 참가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서양의 ‘눈’을 답습하여 일본화하는 형태로 일본 및 식민지의 박람회 문화를 구축해 갔다. 일본은 근대 국가 구축 과정 속 국민 관리 차원에서, 질병과 인체에 대한 시각적 자료를 앞세워 사람들의 공포심을 조장하여 위생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체화할 수 있도록 위생전람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위생전람회는 시류에 부합한 주제를 제공하며 상업적 공간에서부터 사회적 교육적 공간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개최하여 일본 각 지방의 대중이 근대 의료를 경험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정착해 갔다.
한편 전시문화는 일본의 식민 통치 기술로도 발휘되었다. 일제는 화려하고 흥미로운 문화행사와 전시가 어떤 정치적인 틀보다도 더 강력하게 대중을 사로잡는다는 점을 확인하고, 식민지 획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진회를 통해 한반도를 들썩이게 했다. 이러한 거대 행사 속에서 의학 분야도 포함되었는데, 이 시기는 대중보다는 의료 전문가들을 위한 장으로 마련되었다. 본격적으로 한반도 내에서 위생전람회가 활발하게 개최되는 것은 박람회의 화제성과 위생 교육을 접붙인 형태, 즉 사람을 불러 모으는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거기에 위생 전시를 하기 시작한 1920년경부터이다. 이러한 오락과 교육의 기능을 동시에 수반한 위생전람회는 각 거점지 및 소단위 마을에까지 순회하는 형태로 진행된 지방 대표 행사였다.
이러한 위생전람회 개최 장소는 주로 학교가 사용되었으나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적극적으로 방문하는 형태로도 이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수의 대중을 끌어들인 요인은 개최 전후로 실시된 홍보활동이었다. 학교에 미리 알려 학생들이 홍보물을 출품 경연하거나 위생전람회가 개최되는 지역은 지역단위의 축제 행사로 규모를 확대하여 가두선전이나 구조물을 구축하여 위생전람회 개최 소식을 알렸고, 홍보에 지역민의 동참(사람이 왕래하는 상업지구에 포스터 부착 등)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화려하고 환상적으로 연출된 회장에서 근대적 문화 및 문물을 총집산한 개최 내용을 보여주는 쇼와 특별한 절차 없이 다양한 검사와 진료에 참여할 수 있다는 문턱을 낮춘 근대 의료 체험은, 방문자들에게 마치 근대인이 되는 듯한 효과를 안겨주었다. 또한 큰 비용을 들여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거점지역에서 누릴 수 있다는 합리성은 지방의 대중에게는 획기적인 일이었고, 그에 대한 방증으로 수천, 수만 단위의 방문객이 ‘눈사태처럼’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든 ‘엄청난 인파’가 ‘사람의 바다’를 이루어 ‘다대한 성과’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한국 개최 위생전람회는 위생사상 보급에 있어, 감각을 자극하는 미디어를 통해 그 미디어를 경험하고 미디어 안에 스스로가 포함되는(전시물을 제작하거나 스스로가 의료를 체험하는)형태로 각 지방의 산업구조나 관심사에 따라 지방 맞춤형으로 전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비-식자층 지방 대중’의 접근성이 크다는 성격으로 인해 수많은 인파를 불러 모으는 지방 최대의 행사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이것이 한순간의 체험으로 끝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서 근대 위생에 대한 자기관리를 철저히 한다면 이는 위생전람회 개최 주체가 식민지 개인을 직접 관리하지 않더라도 근대 신체 규율의 내면화가 이뤄지는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위생적 사고를 체화한 개인의 구체적 사례를 아직 확인하기 어렵지만, 한국 지방민의 근대의학과의 만남은 학교 교육 시스템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나아가 이를 초월하는 형태로, 시각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들로 구성된 문화 행위 가운데서 이뤄졌던 것을 알 수 있다.

Notes

1) 신동원은 「한국 근대 시기 대상 의사학 연구의 지형」의 ‘위생에 대한 연구 지형’에서 한국 근대 위생에 관한 논저를 망라하고 있다(신동원, 2023: 191-193).

2) 위생 정책을 도시 · 사회사적 관점에서 고찰한 연구로는 구경모, 김영미, 김은진, 박윤재, 이연경 · 김성우 등의 연구가 주목되며(구경모, 2010; 김영미, 2007; 김은진, 2020; 박윤재, 2019; 이연경 · 김성우, 2012), 박윤재는 이러한 연구사를 통합 정리한 「한국 근현대 도시위생사 연구의 성과와 전망」을 기술하였다(박윤재, 2020b).

3) 유종원은 조선총독부 통계자료(1929-1939)를 통해 한국인들의 한국어 신문 구독률이 가구당 3-5%이고, 일본어 신문 구독률은 1-2%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특히 전라남도와 같은 지방은 이러한 전국 구독률의 절반 정도로 낮다는 점을(유종원, 2022: 181-182) 지적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활자 미디어를 넘어선 미디어의 역할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보인다.

4) 이 연구는, 보편적 · 사회적 담론으로 발전한 위생개념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로 확산된 과정속 (신규환, 2022)에 한국과 일본이 있고, 1877년 김기수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일본 근대제도를 둘러본 것에서 한국의 위생개념이 형성되었다는 신동원의 논의를 바탕으로(신동원, 1997) 일제강점기 통치 주체인 일본의 위생전람회의 개최의 궤적 속에서 근대 한국 위생전람회의 제상을 탐구한다.

5) 관련 연구로는 요시다 미쓰구니(吉田光邦)와 요시미 야(吉見俊哉)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요시다 미쓰구니는 『도설 만국박람회사(圖說萬國博覽會史)』(京都: 思文閣出版, 1985a), 『개정판 만국박람회(改訂版萬國博覽會)』(東京: NHKブックス, 1985b), 『만국박람회연구(萬國博覽會研究)』(京都: 思文閣出版, 1986) 등의 연구를 통해 기술사적 입장, 건축사와 디자인사, 상업 발달사의 관점에서 고찰하였고, 요시미 야는 『박람회의 정치학, 시선의 근대(博覧會の政治学ーまなざしの近代)』(東京: 中公新書, 2001)를 통해 박람회에 모인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적 경험의 역사(전시품이 표상하는 세계상과 그 수용 방식)를 파악했다.

6) 이러한 박람회 참가를 통해 메이지 정부가 목표로 삼은 것은 다음 5가지였다. “① 정예의 양질 물품을 수집 · 전시하여, 일본 국토의 풍양(風様)과 사람들의 솜씨를 해외에 알릴 것, ② 서양 각국의 물산과 학예의 정밀함과 뛰어남을 보고 배우고, 기계 기술을 전수받을 것, ③ 일본에도 박물관을 창건하고, 박람회를 개최할 기초를 갖출 것, ④ 각국에서 일본의 제품이 일상용품이 되어 수출 증가를 가져올 실마리를 찾을 것, ⑤ 각국의 제품 원가, 판매가와 결핍 수요의 물품을 조사하여, 앞으로의 무역 이익으로 삼을 것”이었다(田中邦男 · 平山成信, 1897: 11-13).

7) 이처럼 만국박람회는, 유럽 사회가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가장 정확한 것으로 여겼던 근대 시기, 가시성에 대한 신앙을 그대로 체현하는 방식으로 만들어 낸 이벤트였다. 박람회에 전시된 일본 전통미를 살린 오브제는 근대 유럽 시선의 욕망을 객관화한 대상이었다(村上宏昭, 2016: 83).

8) 전시물과 그 주변 환경, 배경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9) 이 활동사진에 대하여, “인간의 오감 중 가장 정확하고 미세한 감각을 전하는 것은 눈이다. (중략) 백 장의 포스터보다 한 편의 필름을 영사하면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든다. 이 사실은 명백하다. 활동사진으로 사람을 모으고 흥미를 일으킨 다음 사회교화로 유도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당시 파급력이 막강한 미디어였다(山根幹人, 1923: 55, 73).

10) 일본은 이 런던 참가 이전, 1883년 베를린에서 위생을 주제로 한 박람회 개최 때 내무성의 시바타 쇼케이(柴田承桂)가 시찰을 나갔다.

11) 영국은 과거 개최 만국박람회(1851, 1862)에서 빅토리아 왕조의 경제적인 번창을 과시하고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 영국제국이 세계적인 패권국가가 되어 ‘세계의 경찰관’ 역할을 했던 시기, 열강끼리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했던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의 절정을 구가했는데, 1870년대를 기점으로 불황에 빠지고 영국의 해외경제 패권에 대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도전이 강해짐에 따라 피지배지의 저항이나 식민지쟁탈전이 격심해져 제국 체제 유지 확대가 갑자기 불안해져 갔다. 이러한 위생박람회와 같은 전문박람회 시리즈가 1880년대 중반 영국에 출현한 배경은 영국의 제국주의 구가에 대한 위기의식과 맞물려 있다(平田諭治, 2003: 64-65).

12) 1911년은 일본에서 ‘일본사회법인박람회협회’가 창설된 해이기도 하다(山本光雄, 1970: 173).

13) 이 박람회는 1911년 5월에서 10월까지를 회기로, 55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아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전시는 크게 대중부문 · 과학부문 · 역사부문 · 산업부문의 4부 구성으로 되었고, 각 부문에 주거 식수 · 식량 · 감염증 등의 테마를 취급하는 부스나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과학부문에는 ① 빛 · 공기 · 토지 · 물, ② 도시 건설 · 가옥과 주택 · 조명 · 환기와 난방 · 급수 체제 · 도시 청소 · 매장 방법, ③ 영양론 · 고기 섭취 · 유제품 섭취 · 야채류와 기호품 · 식량 연구, ④ 의복 · 입욕 · 신체 훈련, ⑤ 생리학과 노동의 위생학 · 업무용 독물 · 특수한 직업위생 · 노동 복지, ⑥ 미생물학과 기생충학 · 면역학과 예방 접종 · 감염증 동물 역병 · 역병 박멸· 소독, ⑦ 간호 · 구명, ⑧ 유아 보호 · 학교위생 · 청소년 보호, ⑨ 도로와 철도 · 선박 교통 · 숙박시설, ⑩ 육군 · 해군, ⑪ 열대 위생, ⑫ 통계로 구성되었고 이외 5개의 특별 그룹으로, ① 결핵, ② 암, ③ 성병, ④ 알코올 중독, ⑤ 치과 질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村上宏昭, 2016: 91, 102).

14) Internationale Hygiene-Ausstellung, “Katalog der von der Kaiserlich Japan Regierung ausgestellten Gegenstände, Japan Kaiserlich Pavillon” invaluable.com, 18 Nov 2023. https://www.invaluable.com/auction-lot/katalog-japanischer-pavillon-beig-347-c-d214ed9af2?objectID=183630270&algIndex=archive_prod&queryID=64c3b0bb263e4f113adae52647614e64. Accessed 13 Dec 2024.

15) 이러한 인형은 일본의 쇄국 체제 속에서도 외국과의 교류 통로였던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의 네덜란드 상인이나 의사들이 종종 수집했다. 마쓰모토 기사부로(松本喜三朗, 1825-1891), 야스모토 가메하치(安本亀八, 1826-1900)는 이러한 인형 제작 명장으로 여겨져 해외에서 인기를 얻었다. 에도시기나 메이지 시기 이 인형들의 사실적이고 정교함에 매료된 서구인들은 일본을 방문하여 이를 주문하여 소장하기도 했다(石原あえか, 2014: 30).

16) 이 박람회는 1877년 8월 21일-11월 30일까지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열렸다. 「내국권업박람회」의 출품자는 주로 전국 각지의 상공업자층이었는데, 이 시기 박람회의 주요 인기 물품은 약품, 도자기, 직물, 생사, 양품, 문구, 통계나 이학기기, 제사기계, 인쇄기계, 증기기관이나 군함의 모형, 선풍기 등이었다(吉見俊哉, 2001: 126-127).

17) 엑스포지숑을 「박람회」라고 번역한 메이지 시기의 신문기자 구리모토 조운(栗本鋤雲)이 막부 말기에 프랑스 공사(公使) 로슈로부터 만국박람회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약품회(薬品會)를 떠올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에도시기에는 각지로부터 물산을 모아 전시하는 행사가 에도나 오사카의 박물학자들에 의해 자주 열렸다. 그 효시는 1757년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가 스승 다무라 란스이(田村藍水)를 모임의 우두머리로 하여 개최한 약품회이다. 이 약품회는 21명이 180종의 약품을 출품했다. 1758년에는 다무라를 주최자로 제2회 물산회가 열려 출품인 34명 231종의 출품물이 있었다. 1759년에는 겐나이 자신이 주최하여 제3회, 1760년에는 마쓰다 조겐(松田長元)을 중심으로 제4회 물산회가 열렸다. 1762년에는 제5회 동도약품회(東都薬品會)가 겐나이에 의해 개최된다. 이때 출품된 물품은 1300여 종(약물 및 천연산물)으로 큰 규모였다. 출품자도 에도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국적으로 출품하였다. 이후 1780년대에도 다무라 란스이의 아들 모토나가(元長)와 문하생 기리야마 소테쓰(桐山正哲)에 의해 에도에서 수차례 열렸으며, 19세기 이후는 교토의 야마모토 보요(山本亡羊), 오사카의 이와나가 겐소도(岩永玄昌堂), 나고야의 이토 게이스케(伊藤圭介), 에도의 이가쿠칸(医學館)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약품회나 물산회가 거의 매년 개최된다. 이 약품회는 어디까지나 민간 박물학자들의 행사이며 광범위한 대중동원의 문화장치의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吉見俊哉, 2001: 142-143).

18) 메이지 초기 서양의학에 근거한 의사의 양성 · 의료제도의 확립을 긴급한 과제로 삼아, 1874년에 「의제」가 정해졌다. 한편, 각종 감염병 예방 대책도 급한 과제였다. 일본의 위생 관계 제도 · 규칙이나 지방에 있어서 위생행정 제도는 콜레라가 전국적으로 대유행한 1879년부터 본격적으로 정해져 콜레라가 유행할 때마다 정밀한 내용으로 개변되었다. 1900년경에는, 위생 관계의 법률 · 규칙이 거의 정돈되어, 촌락에 이르기까지 위생행정의 틀이 생겼다. 이와 같은 메이지 정부의 위생보급 활동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이 완벽하게 정비되지 않은 다이쇼기 이전 단계까지 사립위생회의 활동은 적극 장려되었던 것이다(中澤恵子, 2014: 50).

19) 이 단체는 급속하게 유행하는 콜레라에 대한 대책이 중앙의 지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판단하에 민간과의 협력 체제를 이루며 계몽활동을 위해 조직된 반관만민(半官半民)의 조직으로 1883년에 창설되었다. ‘강한 국가 형성을 위한 건강한 국민이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 일반 사람들에게 위생사상을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한 이 조직은, 의사를 중심으로 교원 등 계몽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었다(田中聡, 2003: 109-110).

20) 하지만 이러한 거대한 국가적 행사로서 내국권업박람회는 6회 개최가 무기한 연장되어 사무국이 폐지됨에 따라 1903년 5회를 마지막으로 개최가 종결되었다(山本光雄, 1970: 42).

21)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이 제공하는 디지털화 자료의 OCR텍스트화 사업의 성과물인 전문 텍스트를 활용한 서비스를 이용하여 논자가 텍스트 데이터로부터 출판 연대별 출현 빈도를 시각화한 자료이다.

22) 대표적으로 야마코시공작소(山越工作所)가 있는데, 이 공작소 경영자 야마코시 조시치(山越 長七)는 1877년 동경제국대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해부학사 이마이 아즈미(今井東)에게 교육을 받아 인체 해부 및 모형제작을 연습하고 이를 습득하여 1880년 인체 해부 표본 제작회사를 설립하고 각 대학과 병원 관청 학교 등에 납품하였다(吉村浩一, 2014: 101).

23) 전시 내용은, ① 생육부(임신, 임산부의 섭생법, 육아의 마음가짐) ② 생리부(국가와 개인 건강, 인체 골격, 인체 근육, 인체 피부, 인체 혈액, 인체 심장, 인체 폐장, 인체 위장, 인체 신장, 인체 신경계, 치아와 충치) ③ 보건부(주거지와 가옥의 관계, 공기와 햇빛, 토지와 물을 불결하게 하는 원인, 공기를 불결하게 하는 원인, 의복의 목적과 위생상의 주의, 물과 위생, 음식물, 소화와 조리, 기호품, 음식 기구, 청량음료수, 균류, 착색료, 이발 위생, 중독) ④ 방역부(소화기의 해부, 병독 전파자, 폐결핵, 트라홈, 한센병, 광견병, 화류병, 소독용품) ⑤ 의치부(인체기생충, 각기병 및 그 예방, 응급처치, 일반적 간호의 마음가짐)로 구성되어 있다(阿野蘇堂, 1915: 1-92).

24) 하나, 사람들은 지키라 위생을, 건강은 부귀의 어머니가 된다. 지켜서 소홀함이 없게 하라/ 둘, 언제나 집 청소를 하여 먼지가 쌓이지 않게 하고, 공기가 잘 통하게 하라/ 셋, 몸의 청결에 신경써서 깨끗한 의복을 입고, 손톱과 발톱을 깨끗하게 하라/ 넷, 야간에 덧문를 열어 놓아 잘 때 몸이 차가워지지 않게 신경써라/ 다섯, 항상 식사는 적당히 하여 폭식 폭음을 주의하라, 간식은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여섯, 무리한 일을 하지마라, 병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시간을 정하여 기상과 취침을 하라/ 일곱, 물에서 잡은 생선은 굽거나 쪄서 먹는 것이 좋다. 양치하는 물도 주의하라/ 여덟, 병이 들면 그대로 놔두지 말고 직접 의사에게 보이고 민간 치료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홉, 아이 어른 차별 없이 병은 간호가 제일이요, 간호는 의사의 명령에 따르라/ 열, 부도 지위도 풍월도 생명이 있고 나서 존재하는 것이다. 반드시 위생에 주의하라(阿野蘇堂, 1915: 86).

25) 이러한 위생전람회의 테마는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신경쇄약이나 자살자들 증가가 사회적 문제일 때는 「정신위생전람회」, 건강 붐 속에서 중장년의 건강법이나 불로장생법이 화제가 되었을 때는 「초로장지전람회」, 기생충예방법 공포의 해에는 「인체유해동물전람회」가 개최되었다. 또한 1934년의 「구료사자료전람회」에서는 일본에서도 고대부터 박애 정신이 있었다는 것을 전시하였고, 1935년 「도시위생전람회」에서는 에도시대의 상하수도와 온천 등을 부각하여 도시문제의 해답을 전통에서 찾으려 했다. 1936년 「호르몬 비타민전람회」 같은 경우는 민간 의료의 재평가하는 차원의 전람회였는데, 몽매한 지식도 과학적인 근거가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1937년 일본관광협회와 공동개최한 「관광일본 공중위생전람회」는 외국인 접대와 외국인의 취향, 기차 안에서의 매너 등이 설명되어 있는데 이것은 1940년 개최 여정인 올림픽에 준비하는 차원이기도 했다. 중일 전쟁 장기화로 올림픽 개최가 어렵게 된 1940년 11월 10일에는 기원 2600년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는 데, 이때 적십자박물관에서는 「위생일본 회고전람회」를 열어, 일본 고래 위생의 역사를 사료, 그림, 인형 디오라마들을 엄청난 준비과정을 거쳐 전시하기도 했다(田中聡, 1994: 201-203).

26) 이 위생이라는 단어는 기존의 양생이라는 단어와 질적으로 다르다. 양생이란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믿는 것을 소중하게 돌보려는 것이며, 위생은 생명의 유지에 해가 있는 것을 박멸해, 병원이나 병소로 보이는 것을 논리적으로 추구하여, 미리 소멸하려는 의지적 태도에 속한다(高取正男, 1976: 186).

27) 일본 내무성 『아동의 위생(児童の衛生)』 발간사에는, “구미 선진국에서는, 이전부터 아동 위생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쇄신과 개선에 노력해 왔기 때문에, 그 효과로 유아사망률이 점차 감소하게 되었다. 세계 대전 후, 모든 나라가 국민의 위생 상태를 한층 더 양호하게 할 것을 고심하고, 제2 국민의 육성 양호를 점점 중요시하게 되었다. (중략) 도쿄 교육박물관에서 「아동 위생전람회」를 개최해, 아동에 관한 위생 사상의 보급을 꾀하고자 한다.”고 되어 있다(内務省, 「発刊の辞」, 『児童の衛生』(1921), (大竹聖美, 2023: 7)의 글에서 재인용).

28) 「오늘부터 시작되는 아동위생전람회로부터(今日から始まる児童衛生展覧会)」, 1920년 10월 24일; 「아동위생전람회로부터 유아사망률(児童衛生展覧会から幼児死亡率)」, 1920년 11월 11일; 「노동계급의 아이가 없는 것은 유감, 아동위생전람회에서(労働階級の子供の少ないのは 遺憾と児童衛生展覧会で)」, 1920년 11월 10일; 「아동위생전람회로부터 아동의 요구(児童衛生展覧会から児童の要求)」, 1920년 11월 4일, 등 다수 확인된다.

29) 『朝日新聞』 기사도 역시 이 아동전람회가 아동의 보호자가 직접 참가하는 것을 매우 의미있게 보도하고, 많은 전람회 개최 환영 기사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각하여 번창하는 아동검사, 내무성도 이 기운을 타고 매일 밀려드는 아동전으로(親達が眼ざめて繁昌の子供検査 内務省も大気乗りで毎日押返す児童展に)」, 1920년 10월 27일; 「오늘도 화제: 도쿄 시내에 화물저택, 가와구치(河口)의 반박, 결핵 치아 데이, 데라우치(寺内) 1주기, 유학생 조선인대운동회, 꽃 전차(사진)(今日の話題, 東京市内に化物屋敷 河口師の反駁 結核齲歯デ- 寺内伯一周忌 留学鮮人大運動会, 花電車 <写>)」, 1920년 10월 28일; 「투서, 아동위생전람회(鉄箒, 児童衛生展覧会)」, 1920년 10월 29일; 「투서, 아동전람회 환영(鉄箒, 児展歓迎)」, 1920년 11월 8일 등 관련 기사가 10건이 넘는다.

30) 『朝日新聞』에서도 1920년 이후 구강위생전람회(1923년 4월 12일자), 시민위생전람회(1924년 6월 13일자), 출산과 육아 위생전람회(1926년 2월 20일자), 민족위생전람회(1928년 5월 1일자), 공기전람회(1929년 11월 17일자) 등의 전람회 개최 보도를 확인할 수 있다.

31) 한국의 근대적 박람회 개최에 관한 연구는 한국의 세계박람회 참가 역사와 그 의미, 한국에서 개최된 물산공진회에 대한 소개 등 제국주의 장치 효과에 대해 2000년대 이후 활발하게 연구되었다(김영나, 2000; 김태웅, 2002; 박성진, 2003; 박천홍, 2003; 신주백, 2004; 염복규, 2018; 주윤정, 2003; 최석영, 2001; 최정무, 2000; 朴美貞, 2010; 李泰文, 2003; 山路勝彦, 2008). 이러한 연구를 통해 박람회 건축물의 구성과 전시 내용을 파악할 수 있고, 박람회가 일본의 경제 문화의 발달 사항을 피식민자에게 과시하는 행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행 연구는 주로 경성에 집중한 박람회 문화공간에 주목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박람회 문화와 밀접하게 연계된 위생전람회가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양상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32) 그 후 1883년 민영익을 비롯한 조선보빙사(報聘使) 일행이 미국 보스턴 기업 박람회를 관람하였다. 이는 국제사회 속에서 한국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한국인의 근대적 삶으로의 변화에 대한 의지도 불러일으켰다. 이 이후 한국의 본격적인 국제박람회 참가는 1893년의 시카고 세계박람회부터였다. 이 국제대회에 참가한 한국은 홍보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진보적인 산업발달 결과물이 없었기에, 곡물과 식품, 남녀의복, 일상용품과 수공예품, 조총과 투구 및 갑옷, 400년이 된 호준포 등을 출품했다. 한국은 이 대회 참가 의의를 독립국(중국에서 일본에도 속하지 않은)이라는 것을 알리는 데에 두고, 앞서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서양과는 다른 전통문화의 특징이 드러나는 물품으로 한국이라는 국가를 전하고자 했다. 1900년의 파리 박람회에는 민영찬이 주도하여 프랑스인의 자본을 바탕으로 대한제국관을 조성하였다. 참여한 품목은 비단, 도자기 장롱 자개장, 병풍, 금속제품, 그림, 책 등과 프랑스인이 모은 한국 관련 개인 소장품 등이었다(이각규, 2010: 5-53).

33) 1903년 오사카 내국권업박람회의 ‘학술인류관’에는 타이완, 류큐, 아이누인 등과 함께 한국 여인 2명(기생)이 전통의상 차림으로 한국식 주거 앞에 앉아 있었다. 1907년 도쿄 권업박람회의 ‘조선관’도 부속으로 오락이나 여흥을 목적으로 설치한 수정관에 한국 남녀가 전시되었다(이각규, 2010: 70, 75). 이는 기존 세계박람회를 통해 서양인의 ‘눈의 욕망’을 체득했던 일본이 자국의 권업박람회에서 ‘인종 전시’라는 차별적 시선이 작동하는 공간에 한국인들을 밀어 넣고 식민 욕망을 과시한 것이다.

34) 부산에서 개최된 「일한상품박람회」는 일본의 공산품 한국의 특산품이 전시되었는데, 이 박람회에 77,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참가하여 대규모 행사로 진행되었다(국학자료원, 1999: 894).

35) 이 박람회는 “거류지 개발 촉진, 일반의 지식 진보 향상, 한일 양 국민의 융화 친목”을 그 개최 취지로 내세우고 있다(京城府, 1930: 586).

36) 그 후 1940년, 경성일보사가 주최하고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조선대박람회(朝鮮大博覧會)」가 청량리역에 회장으로 하여 개최되었다.

37) 이 박람회에는 한국 각지 및 일본뿐만 아니라 대만, 북경 등에서 동종업계의 사람들이 모여들므로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각종 산업관련자를 비롯하여, 요식업, 종교, 언론, 의학 · 약학 대회가 개최되었다(朝鮮總督府, 1916: 287-318). 이 조선물산공진회 주최 측은 “이 호기회를 이용하여 각종 대회가 한양 성내에서 개최되고 방문하는 자가 끊이지 않는다”(朝鮮總督府, 1916: 287)며 공진회와 더불어 개최된 각종 대회를 소개한다.

38) 의생 제도는 1914년부터 시행되었다. 의생들을 자신들의 애매한 위치를 매우 초조하게 여겼고, 1915년의 경성공진회를 계기로 전선(全鮮)의회를 구성하였다(1917년 5월 17일 해산). 전선의회에서는 회장에 지석영(池錫永), 부회장에 최동섭(崔東燮), 총무에 김수철(金壽哲), 임원에 조병근(趙炳瑾), 경도학(景道學), 김영훈(金永勳) 등을 선임하였다(정지훈, 2004: 231).

39) 한국 각 지방의 한방의생들은 공진회도 구경하고 총독부의원도 방문하였고, 의생대회 발기에 앞서 조직에서는 지방의 의생들에게 철도 할인권도 보내주었다(『매일신보』, 1915년 10월 14일). 의생들은 의생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의생대회결의안에 보이는 3대 과제는, ① 의생대회를 조직하고, ② 의학회보를 발행하며, ③ 약재수용(需用)의 개량(『매일신보』, 1915년 10월 27일)을 꾀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항목인 약재의 수급과 사용의 문제가 중요시된 부분을 보아, 일본인들의 학술적 발표와 질문의 장이었던 일본인들의 의학대회와는 대조적으로 의사로서의 생계를 어떻게 이어갈지에 초점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40) 각 기사는 『매일신보』에 게재되었는데 그 제목은, 「醫生大會 발기, 공진회를 기회삼아」, 1915년 9월 17일; 「醫生大會와 賜金」, 1915년 10월 27일; 「醫生大會, 寺內正毅(총독) 임장)」, 1915년 10월 24일; 「醫生大會와 결의안」, 1915년 10월 27일; 「醫生大會준비: 회장은 창덕궁 내 비원, 철도는 할인권을 발송」, 1915년 10월 14일; 「醫生大會 절차」, 1915년 10월 9일; 「全鮮醫生大會」, 1915년 10월 6일; 「全鮮醫生大會」, 1915년 9월 27일; 「社說: 告 醫生大會」, 1915년 10월 27일로, 수차례에 걸쳐 광고하였으며, 철도할인권을 발송하는 등 그 모집에 열심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醫生대회 발기-공진회를 기회삼아」를 보면, 의생대회의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대회는 경성 한방의인 최동섭 등을 중심으로 의생대회가 발기되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 훈화하고, 강화회(講話會)가 열렸는데, 사토(佐藤)가 소독 및 방역에 대해, 모리야스 렌키치(森安連吉)가 감염병에 대해, 무로야 슈타로(室谷脩太郞)가 최근의 외과학에 대해, 지석영이 한약학의 유래와 발전에 대해, 조병근(趙炳瑾)이 의학과 생명에 대해, 지의찬(池義燦)이 의계 습관 개량에 대해 강연하였다. 강연 내용은 의학대회에 비해 추상적이며 계몽운동에 가깝다.

41) 이 조선전람회에는 ‘전조선약업대회’(경성약업조합)은 개최되었으나, 의학대회도 의생대회도 개최되지 않았다(朝鮮博覧會京城協賛會, 2017: 1-360).

42) 한국어 신문은 한글로 일본어 신문은 한자로 표기한다. 일본어 신문의 번역은 논자에 의한 것이다.

43) 근대 한국의 위생경찰 관련 역사적 계보는 정근식의 연구에 자세한데,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의 위생업무는 독립적인 위생행정 기구가 아닌 경찰이 담당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이 식민지형 위생경찰 제도의 특징이다. 1919년 이후에는 지방제도 개편을 통해 경무부 위생과 과장에 원칙적으로 의사가 임명되었고, 지방의 위생 문제는 경무국장의 지시와 매년 경무국에서 열리는 도 경찰 부장회의의 결정에 따라 도 경찰부 위생과가 업무를 수행했다(정근식, 2011: 239-240, 248-249).

44) 그 외에는 적십자 애국부인회,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자혜의원(함남, 대구), 신문사(경성일보), 오노다(小野田)시멘트 위생조합, 충남도농회(道農會) 및 축산조합연합회, 평양의학전문학교, 강원도결핵예방협회 등에서도 개최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5) 신문기사에는 거의 모든 기사에 이 일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이들의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내용도 덧붙이고 있다. 예를 들어 “일반의 위생사상 향상”(『매일신보』, 1922년 8월 19일), “일반의 주의를 환기”(『京城日報』, 1925년 6월 18일), “일반에게 편의”(『朝鮮新聞』, 1926년 10월 1일), “일반인의 인기”(『매일신보』, 1927년 6월 20일), “일반인의 마음에 깊이 주의를 끈 것”(『朝鮮新聞』, 1930년 10월 14일), “일반인으로부터 다대한 호평”(『朝鮮新聞』, 1933년 9월 28일), “일반의 관람에 기여”(『매일신보』, 1936년 9월 10일) 등 대중 관람자가 주요 타깃이었다.

46) 「長城署의 衛生宣傳」, 『매일신보』, 1923년 5월 12일.

47) 「海州 衛生展覽會」, 『매일신보』, 1923년 10월 29일.

48) 「全羅北道,覽會各地에서 白熱的盛况, 夏期衛生展」,『朝鮮新聞』, 1933년 8월 13일.

49) 「康津衛生展覽會」, 『매일신보』, 1935년 8월 8일.

50) 「衛生展覽會」, 『京城日報』, 1924년 4월 10일.

51) 경기도 위생과가 개최하는 위생전람회에 스오 마사스에의 실명이 종종 등장한다. 그는 1909년 아이치 현립의학전문학교(愛知県立医学専門学校)를 졸업하고 개업하였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16년 시가(滋賀)현 기사 위생 주사(技師衛生主事), 1919년 아이치현 기사 학교 위생 주사 등을 역임하며 야학으로 설계, 제도, 건축을 배울 정도로 의사를 넘어선 정치를 꿈꾸었다. 결국은 출세를 위해 한반도 행을 택했고 식민지 위생행정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다. 그의 출세욕은 성공의 가도를 달리며 유럽의 위생 시찰(1926년 9월-1927년 7월), 개성 자혜병원 의관, 경기도 마약 중독 환자 치료소 등을 관리하는 역할 끝에 소록도갱생원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생전람회 구체적인 개최 상황과 경기도 위생과의 스오와 관련된 논고는 현재 준비 중이다.

52) 「이다음에는 대규모로 위생박람회개최」, 『매일신보』, 1921년 7월 5일.

53) 「晝夜入場者, 萬餘名, 衛生展覽會에」, 『매일신보』, 1921년 7월 5일.

54) 「衛生展覽會에 의한大防疫陣展會」, 『朝鮮新聞』, 1933년 7월 29일.

55) 「盛况을 極한 忠北衛生展覽會」, 『매일신보』, 1927년 8월 8일.

56) 「忠淸南道, 양돈(養豚)품평회와 축산위생전람회」, 『朝鮮新聞』, 1930년 10월 14일.

57) 광주를 비롯하여, 강진, 광양, 고흥, 곡성, 구례, 나주, 담양, 순천, 여수, 영광, 영암, 목포, 보성, 장성, 장흥, 해남 및 당시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였던 제주도까지 위생전람회가 개최된 것을 알 수 있다.

58) 「康津衛生展覽會」, 『매일신보』, 1935년 8월 8일.

59) 「靈光衛生展覽會盛況」, 『매일신보』, 1938년 7월 27일.

60) 이러한 위생전람회 개최 장소로서 학교는 주로 초등교육기관, 즉 소학교(이리소학교-『釜山日報』, 1925년 11월 25일), 청주소학교-『朝鮮新聞』, 1926년 10월 1일)나 보통학교(보성군공립보통학교-『매일신보』, 1924년 3월 21일), 홍원공립보통학교-『中外日報』, 1927년 8월 6일)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 고등보통학교(평양남신정 제2여자보통고등학교-『매일신보』, 1922년 8월 19일), 고등여학교(목포고등여학교-『매일신보』, 1926년 11월 10일) 등에서도 개최되었다. 개최 지역은 앞서도 살펴본 바 있지만 전국 각지와 더 작은 단위의 소도시까지도 선정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61) 1920년 사이토 미노루(斎藤実)총독의 시정(施政)연설의 키워드가 ‘내선융화(内鮮融和)’였는 데, 이는 일본에 ‘조선문화’와 ‘조선인’을 이해시키는 형태로(박광현, 2013: 78) ‘중심과 주변으로 구성된 하나의 일본’을 구축하고자 하는 문화정치의 취지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62) 「위생포스터 전(衛生ポスター展)」, 『朝鮮新聞』, 1939년 2월 6일; 「병도 경성을 청산, 전염병 퇴치를 위해 도와 부가 협력하여, 다음 달 조선 최초 위생주간」(病都京城を淸算, 傳染病驅逐の 爲道と府が協力して, 來月朝鮮初めて衛生週間), 『京城日報』, 1933년 7월 16일.

63) 「함흥 구 부청사 터에 醫事衛生展覽會」, 『釜山日報』, 1932년 5월 8일.

64) 「위생선전에 경기구를 날리다(衛生宣傳に輕氣球を飛ばす)」, 『朝鮮新聞』, 1926년 3월 26일.

65) 「各種品評會와 衛生展覽會」, 『朝鮮新聞』, 1930년 10월 14일.

66) 「各種品評會와 衛生展覽會」, 『朝鮮新聞』, 1930년 10월 14일.

67) 「파노라마로 위생사상을 선전, 조선박람회에 출품하다, 경찰국 위생과의 시도」, 『京城日報』, 1929년 3월 28일; 「전남도 위생과에서 화류병 예방 선전」, 『釜山日報』, 1932년 3월 26일.

68) 「영화와 강연의 밤 개최, 위생사상을 선전」, 『매일신보』 1938년 2월 6일; 「장질부사 예방코자 위생 당국 총동원, 예방약과 선전영화를 가지고」, 『조선중앙일보』, 1935년 9월 8일; 「방역 주간 제 3일 위생시설 개선일, 변소와 위생통을 수리하라, 활동사진 무료 공개」, 『매일신보』, 1934년 6월 6일; 「衛生活動写真會」, 『매일신보』, 1921년 7월 9일; 「衛生活動写真會」, 『朝鮮新聞』, 1925년 8월 2일; 「京畿衛生課 活寫衞生宣傳 모의 환자와 發疹病豫防」, 『중외일보』, 1927년 3월 12일; 「映畵와 講演의 밤 開催: 衛生思想을 宣傳 忠南道衛生課에서」, 『매일신보』, 1938년 2월 6일.

69) “밤에는 활동사진이 매일 밤 계속 있어서 전체 관람자는 낮에 관람하러 오는 사람만 계산한 것으로 밤은 따로 계산하는데, 매일, 밤 만여 명에 달하는 중으로, 스오 위생과장의 말에 의하면, 밤에 활동사진을 영사할 때에는 일본과 조선인이 반씩이나 낮에는 일본인이 십분의 일밖에 안 된다고 말하더라”(『매일신보』, 1921년 7월 5일).

70) 지방 소도시 위생전람회에서 상영된 활동사진의 대중 동원 차원의 막강한 능력에 대하여는, 1920년대 초기 기사부터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장성(長城)경찰서(『매일신보』, 1922년 12월 16일), 진해경찰서(『朝鮮時報』, 1923년 3월 17일), 황해도 경찰부 위생과에서 주최하고 해주(海州)에서 열린 위생전람회(『매일신보』, 1923년 10월 29일) 평남 강동(江東)경찰서(『京城日報』, 1924년 4월 10일) 등, 관련 기사가 1940년대 개최까지 꾸준히 보인다. 위생전람회 개최에 활용되었던 선전 장치 및 영화에 관한 구체적 연구는 현재 준비 중이다.

71) 「第五尋常父兄會, 衛生展覽會와 講話」, 『朝鮮時報』, 1921년 6월 24일.

72) 주제를 특화한 전람회로는, 도 위생과가 주최한 방역전람회, 결핵전람회, 애아(愛兒)전람회, 파리(蠅)전람회, 약초한약전람회 등의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73) 삼림조합연합회가 주관하여 황해도에서 개최한 위생전람회 같은 경우, 참가하는 6개(殷栗, 安岳, 信川, 載寧, 鳳山, 黃州) 지방이 각 지방의 특성에 맞게 전시실을 디자인했으며, 여기에는 위생품 전시와 더불어 “국화품평회, 불꽃놀이, 보물찾기, 아동작품 발표, 수렵대회, 연료절약경기회, 임업 강연, 임업활동사진 영사” 등을 펼쳤다고 보도된다(『朝鮮新聞』, 1930년 10월 26일; 『釜山日報』, 1932년 10월 7일).

74) 인용문에서도 이러한 측면이 보일 뿐 아니라, 가축위생에 대하여는 위생전람회에 “방역실, 가정실, 학교위생실, 가축위생실, 체육위생실, 중독실, 특별실로 나누어 각 실 모두 풍부한 참고품”을 진열(『朝鮮時報』, 1934년 8월 1일)하는 식으로 삽입되었고(『釜山日報』, 1926년 3월 30일; 『朝鮮新聞』, 1940년 1월 13일), 아예 적 극적으로 도농회(道農會) 및 축산조합연합회가 주최가 되어 위생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朝鮮新聞』, 1930년 10월 14일).

75) 목포에서 개최된 위생전람회는 농어촌의 특성을 살려 수산과 축산 회장을 설치하며, 비행기와 군함까지 동원되었던 공진회와 함께 개최되기도 했다. 전남 목포와 같은 소도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전람회 기사로, 「목포만(木浦灣) 앞을 압도하는 2대 공진회장: 기일의 절박과 함께 인기는 최고조에 달하다」, 『釜山日報』, 1926년 10월 23일; 「목포만 앞을 압도하는 2대 공진회장: 기일의 절박과 함께 인기는 최고조에 달하다, 수산과 축산의 상세 제2회장에 집주되다」, 『釜山日報』, 1926년 10월 24일; 「목포만을 압도하는 2대 공진회장; 기일의 절박과 함께 인기 최고조에 달하다; 비행기와 군함(軍艦) 특파(特派): 교육품전람회, 위생전람회: 운임 할인 기차기선증 발급」, 『釜山日報』, 1926년 10월 27일 등 연달아 나오는 기사를 통해, 지역 전체가 동원된 행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76) 「大邱慈惠醫院의 위생전람회」, 『朝鮮新聞』, 1924년 9월 22일; 「낙성식(落成式)과 위생전람회」, 『京城日報』, 1924년 6월 12일.

77) “충청북도 위생과 주최 위생전람회는 (중략) 창고 132평을 채우는데, 보건위생에 관한 각종 모형과 표본, 전염병과 그 외의 각종 모형과 표본, 가축전염병의 표본, 미신 치료 용구, 특별실로 화류병, 피임 용구, 각 월별 태아 표본, 소독약과 그 외 약품, 한약, 특히 결핵 예방에 관한한 구역을 설치하기로 되었다”(『매일신보』, 1936년 10월 8일).

78) “함남 약령시 개최를 계기로 하여 함남위생과 함남위생회 합동주최의 약초한약전람회”(『매일신보』, 1934년 12월 15일) “제천에서 위생전람회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진열품은 모형, 표본, 도표, 통계, 포스터, 약초, 한약 등으로”(『釜山日報』, 1939년 3월 17일), “약초 실물에 하나하나 쉽게 설명을 달아 참고하기 쉽게 하고” (『朝鮮新聞』, 1940년 1월 13이) 등이다.

79) 「咸南衛生課主催藥草漢藥展覽會」, 『매일신보』, 1933년 9월 4일.

80) 「衛生展覽會」, 『매일신보』, 1933년 7월 19일.

81) 「各種品評會와 衛生展覽會」, 『朝鮮新聞』, 1930년 10월 14일.

82) 「咸鏡北道, 道警察部主催衛生展覽會」, 『朝鮮新聞』, 1933년 8월 4일.

83) 「全羅北道, 衛生展覽會」, 『朝鮮新聞』, 1931년 8월 11일.

84) 「光陽展覽會 衛生과 敎育品」, 『동아일보』, 1932년 5월 20일.

85) 「全羅南道, 衛生思想普及宣傳의 衛生展覽會」, 『朝鮮新聞』, 1935년 8월 31일.

86) 「求禮各種展覽會」, 『동아일보』, 1933년 11월 18일.

그림 1.
독일 만국위생박람회 ‘인간전시관’과 입장객 사진(「호기심 많은 사람들」)
Figure 1. Photo of the ‘Human Exhibition’ and visitors at the World Hygiene Expo in Germany, 「Massenandrang der Wißbegieri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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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드레스덴 만국위생박람회 일본관
Figure 2. Japan Pavilion at the Dresden World Hygiene Expo
(Internationale Hygiene-Ausstellung, “Katalog der von der Kaiserlich Japan Regierung ausgestellten Gegenstände, Japan Kaiserlich Pavillon” invaluable.com, 18 Nov 2023. https://www.invaluable.com/auction-lot/katalog-japanischer-pavillon-beig-347-c-d214ed9af2?objectID=183630270&algIndex=archive_prod&queryID=64c3b0bb263e4f113adae52647614e64. Accessed 13 Dec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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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드레스덴 만국위생박람회 일본관의 내부 배치도
Figure 3. Interior layout of the Japanese Pavilion at the Dresden World Hygiene Expo
(Internationale Hygiene-Ausstellung, “Katalog der von der Kaiserlich Japan Regierung ausgestellten Gegenstände, Japan Kaiserlich Pavillon” invaluable.com, 18 Nov 2023. https://www.invaluable.com/auction-lot/katalog-japanischer-pavillon-beig-347-c-d214ed9af2?objectID=183630270&algIndex=archive_prod&queryID=64c3b0bb263e4f113adae52647614e64. Accessed 13 Dec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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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일본 국립국회도서관(国立国會図書館) NDL Ngram Viewer에서 키워드(위생전람회) 검색결과
Figure 4. Search results for keyword ‘hygiene exhibition’ in the National Diet Library of Japan NDL Ngram Viewer
(日本国立国會図書館 NDL Ngram Vie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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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위생전람회에 전시되었던 임신 태아 발달 순서 모형과 임신 자궁 모형
Figure 5. Model of the developmental sequence of the fetus and model of the pregnant uterus displayed at the hygiene exhib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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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1912-1935년까지 야마코시 공작소에서 제작한 인체 모형
Figure 6. Human body models produced by the Yamakoshi Workshop from 1912 to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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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전라남도 내 위생전람회 개최지역
Figure 7. Areas where hygiene exhibitions are held in Jeollanam-do
(신문기사를 참고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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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충북 청주위생전람회 회장 입구의 한복 차림의 남녀
Figure 8. Men and women in Korean traditional costume at the Chungbuk Cheongju hygiene exhibition hall entrance
(『釜山日報』, 1926년 10월 3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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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전시 설명자 앞 학생과 남녀의 모습
Figure 9. Students and a man and woman in front of the exhibition guide
(『매일신보』, 1925년 6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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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태아의 성장 과정
Figure 10. The growth process of the fe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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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감염병 매개충과 감염병에 걸린 사람
Figure 11. Moulage of vectors and people infected with infectious dise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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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Japan’s participation in World Expos from the Meiji Restoration to 1945
연도 개최지 명칭 참여주체
1 1867 프랑스 파리 파리 만국박람회 막부
2 1871 미국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시 공업박람회 도쿄부
3 1873 오스트리아 빈 빈 만국박람회 정부
4 1873 영국 런던 영국 경상(経常)박람회 정부
5 1875 오스트레일리아 멜번 멜번 만국박람회 정부
6 1876 미국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 민간
7 1878 프랑스 파리 파리 만국박람회 정부, 민간
8 1879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시드니 만국박람회 민간
9 1880 오스트레일리아 멜번 멜번 만국박람회 민간
10 1880 독일 베를린 베를린 만국어업박람회 정부
11 1881 독일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 광천학(鑛泉學)만국박람회 정부
12 1881 미국 애틀란타 애틀란타 만국면업(綿業)박람회 정부
13 1882 오스트리아 토리에스토 내국공업박람회 정부
14 1883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식민지산물 및 일반수출품박람회 정부
15 1883 미국 보스턴 보스턴 기술공예박람회 민간
16 1883 영국 런던 만국어업박람회 정부
17 1884 영국 런던 만국위생박람회 정부
18 1884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만국원예박람회 정부
19 1884 영국 에딘버러 만국삼림박람회 정부,
20 1884 미국 뉴올리언즈 만국공업 겸 목화 백년박람회 정부, 민간
21 1885 영국 런던 만국발명품박람회 정부, 민간
22 1885 독일 뉴런베르크 금공(金工)만국박람회 민간
23 1888 스페인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 정부, 민간
24 1889 독일 함부르크 만국상업박람회 정부
25 1889 프랑스 파리 파리 만국박람회 정부, 민간
26 1890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만국감옥박람회 정부
27 1893 미국 시카고 콜롬부스 만국박람회 정부, 민간
28 1900 프랑스 파리 파리 만국박람회 정부, 민간
29 1901 영국 글라스고 영국 만국박람회 민간
30 1902 프랑스 불령 하노이 동양농공기예만국박람회 민간
31 1904 미국 센트루이스 루이지애나 구매기념 만국박람회 정부, 민간
32 1905 미국 포틀랜드 루이스클락백년기념 만국박람회 민간
33 1905 벨기에 리에지 리에지 만국박람회 민간
34 1906 이태리 밀라노 밀라노 만국박람회 정부
35 1907 미국 제임스타운 제임스타운 만국박람회 민간
36 1908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만국장식기술 및 가구 박람회 민간
37 1909 미국 시애틀 알래스카 유콘 태평양박람회 정부, 민간
38 1910 영국 런던 일영(日英)박람회 정부, 민간
39 1911 이탈리아 로마 토리노 만국산업박람회 정부, 민간
40 1911 독일 드레스덴 만국위생박람회 정부
41 1912 덴마크 코펜하겐 만국발동기박람회 민간
42 1914 네덜란드 스마란(인도네시아 자바섬) 남양(南洋) 스마란박람회 정부, 민간
43 1915 미국 샌프란시스코 파나마태평양 만국박람회 정부, 민간
44 1922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브라질 백년기념만국박람회 정부, 민간
45 1925 프랑스 파리 만국현대장식미술공예박람회 정부, 민간
46 1926 미국 필라델피아 미국 독립백오십년기념만국박람회 정부, 민간
47 1930 벨기에 리에지, 안토와프 만국과학공업해양식민박람회 정부, 민간
48 1933 미국 시카고 진보의 세기 박람회 정부, 민간
49 1937 프랑스 파리 파리 만국박람회 정부, 민간
50 1939 미국 뉴욕 뉴욕 만국박람회 정부, 민간

(博覧會資料COLLECTION)

Table 2.
Special hygiene exhibition theme
참고한 관보명칭 개최 연도 특별전 일람
参考館報 1927 영유아보건전람회/겨울 위생전람회(乳幼児保健展覧會/冬の衛生展覧會)
1928 민족위생전람회/정신위생전람회(民族衛生展覧會/精神衛生展覧會)
1929 영양개선전람회(栄養改善展覧會)
1930 조로 방지 전람회/영유아애호전람회(早老防止展覧會/乳幼児愛護展覧會)
1931 인체유해동물전람회/부인위생전람회(人体有害動物展覧會/婦人衛生展覧會)
1932 아동을 중심으로 한 치아위생전람회 /중독 방지 전람회(児童を中心とした歯の衛生展覧 會/中毒防止展覧會)
赤十字博物館報 1933 여름 위생전람회/결혼위생전람회(夏の衛生展覧會/結婚衛生展覧會)
1934 구료사료전람회(救療史料展覧會)
1935 결핵지식전람회/도시위생전람회(結核知識展覧會/都市衛生展覧會)
1936 출산전람회 /호르몬 비타민 전람회(お産の展覧會/ホルモン・ビタミン展覧會)
1937 관광일본공중위생전람회/소년적십자전람회/방공법 철저 강화 방호전람회(観光日本公衆衛生展覧會/少年赤十字展覧會/防空法徹底強化防護展覧會)
1938 국민체력 향상전람회/학동영양자료전람회(国民体力向上展覧會/学童栄養資料展覧會)
1939 대륙개발위생전람회/일본민족우생전람회(大陸開発衛生展覧會/日本民族優生展覧會)
1940 근시예방 눈의 과학전람회/위생 일본의 회고전람회(近視予防目の科学展覧會/衛生日本の 回顧展覧會)
1941 시난 극복 전시 국민식전람회(時難克服戦時国民食展覧會)
1942 전시 피복 전람회(戦時被服展覧會)
1943 응급 간호 전시회(救急看護展覧會)
1944 필승불패신방공전전람회(必勝不敗新防空戦展覧會)
1945 영양실조전람회(栄養失調展覧會)
Table 3.
Names of institutions and exhibitions that have loaned materials from the Red Cross Museum
주최 전람회명 주최 전람회명
1 日本大学附属幼稚園 满十周年記念展覧會 23 静岡県浜名郡北浜村 北浜少年赤十字団展覧會
2 日赤神奈川支部 衛生展覧會 24 陸軍造兵廠火工廠 衛生展覧會
3 工政會 万国婦人子供博覧會 25 満州大連市 満州大博覧會
4 出品協會 シカゴ進歩一世紀万国博覧會 26 新潟三起デパ-ト 探凉展覧會
5 白木屋百貨店 少年「ファシスト」展覧會 27 旭川商工會議所 衛生展覧會
6 宮崎女子高等技芸学校 衛生展覧會 28 北海道庁 北海道国防博覧會
7 日赤宮崎支部 凱旋記念衛生展覧會 29 北海道留萌町 産業博覧會
8 東京日日新聞 子供健康展覧會 30 日赤朝鮮本部 落成記念衛生展覧會
9 文部省 万国婦人子供展覧會 31 熊本県人吉中学校 創立十周年記念衛生展覧會
10 岡山民報社 非常時博覧會 32 静岡県清水市立病院 衛生展覧會
11 日赤神奈川支部 文化料理會員展覧會 33 横浜本願寺 母と子供展覧會
12 鳥取県警察部 衛生展覧會 34 帝国教育會 近世教育展覧會
13 日赤產院 乳児健康展覧會 35 日赤福岡支部 小学校衛生展覧會
14 日赤神奈川支部 児童愛護展覧會 36 福島県真野小学校 衛生展覧會
15 浅草寺病院 衛生展覧會 37 品川高等女学校 家事衛生展覧會
16 日赤病院 母の日展覧會 38 帝国教育會 教育衛生展覧會
17 日赤石川支部 育児展覧會 39 向島高等女学校 家事衛生展覧會
18 日赤静岡支部病院 開院記念衛生展覧會 40 警視庁 健康週間
19 愛情館「セットルメント」 社會事業展覧會 41 日赤京都支部 少年赤十字展覧會
20 東京府歯科医師會 ウシ予防展覧會 42 東京羽根田第二小学校 栄養展覧會
21 福島県女子師範学校 衛生展覧會 43 日赤病院 救護員養成用
22 東京慈恵病院 開院記念衛生展覧會 44 静岡県焼津西小学校 衛生展覧會
Table 4.
Materials for loan outside the Japanese Red Cross Museum
자료명 대출가능 갯수
1 乳幼兒及學童の衛生資料 8세트(組)
2 榮養改善資料 1세트
3 早老防止資料 1세트
4 結婚並民族衛生資料 1세트
5 婦人衛生資料 1세트
6 夏の衛生資料 1세트
7 精神衛生資料 1세트
8 中毒防止資料 1세트
9 赤十字事業資料 2세트
10 少年赤十字參考資料 2세트
11 博愛救療史料 1세트

참고문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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