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E-Submission | Sitemap | Editorial Office |  
top_img
Korean J Med Hist > Volume 34(1); 2025 > Article
가설을 멀리한 실험가? : 프랑수아 마장디의 실험의학에 대한 고찰†

Abstract

The advent of experimental medicine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marked a crucial turning point in history of medicine. Historians unanimously recognize François Magendie (1783-1855), a physician and physiologist, as a pioneer of experimental medicine. Despite his significance, research on Magendie’s achievements and contributions remains limited. This scarcity stems from conflicting evaluations of Magendie's experimental medicine. On one hand, some claim that Magendie avoided hypotheses and simply accumulated individual facts. On the other hand, others argue that he implicitly used hypotheses. These differing views traces back to his disciple Claude Bernard (1813-1878), who believed it was impossible to conduct experiments without hypotheses. If Magendie was a pioneer of experimental medicine, then he must have had hypotheses as well. However, interpretations of his viewpoint on hypotheses vary. This paper aims to clarify this issue. By examining contemporary evaluations of physiology during Magendie’s time, the concept of collaborative research with chemist Antoine-Laurent Lavoisier (1743-1794), and the laboratory environments where these ideas were realized, this study finds new insights into Magendie’s approaches to experimental medicine. Magendie was extremely cautious in formulating his own hypotheses, but he often designed experiments based on the hypotheses of other physiologists. His criticism of Bichat exemplifies this tendency. The conclusions derived from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re is a need to reconsider the current historical understanding of Magendie's experimental medicine; second, the history of early nineteenth century medicine, particularly in the context of large-scale collaborative research, requires a different analytical approach than that applied to earlier periods.

1. 머리말

19세기 초 실험의학의 등장은 의학사의 중요한 분수령이다.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 1904-1995)은 자신의 의학사 연구에서 실험의학이 기존의 의학으로부터 세 가지 주요한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즉, 병원에서 실험실로의 장소 변화, 인간에서 동물로의 실험 대상의 변화, 갈레노스적 약물에서 화학약품으로의 약품 조제의 변화가 그것이다(Canguilhem, 1977: 62). 실험실, 동물실험, 화학약품은 현대의학의 핵심 요소이다. 이러한 점에서 의학사가 샤를 리히텐타엘러(Charles Lichtentaeler, 1920-1995)의 주장에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에 따르면 실험의학은 현대적 의학의 이론과 실천에서 직접적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최초의 의학이며, 따라서 그 등장 시점을 곧 ‘엄밀한 의미에서의 현대적 의학’(médecine proprement moderne)의 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Lichtentaeler, 1978: 409). 그리고 캉길렘과 리히텐타엘러는 공통적으로 프랑수아 마장디(François Magendie, 1783-1855)를 실험의학의 선구자로 지목한다.
현대의학의 단초라는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마장디에 대한 기존 연구를 검토하면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띈다. 2012년 출판된 『프랑수아 마장디, 19세기 실험생리학의 열정적 창시자』(François Magendie, bouillant créateur de la physiologie expérimentale au XIXe siècle)1)의 저자 폴 마즐리악(Paul Mazliak)은 결론에 “마장디, 잊힌 학자”라는 제목을 붙였다. 여기서 마즐리악은 다음과 같이 쓴다. “19세기 이래로 마장디의 책은 한 권도 재출판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한 프랑스에서 이 학자에 대한 책은 한 권도 출판된 바 없다. 마장디에 대한 두 권의 책이 출판되어 있는데, 한 권은 벨기에에서 출판되었으며, 다른 한 권은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대다수의 백과사전에서 그의 이름은 베르나르의 일대기를 서술하던 중 지나가듯 언급될 뿐이다. 어떤 주요 의료기관도 그의 이름을 (기관명으로) 사용하지 않는다(Mazliak, 2012: 189)2).” 요컨대 실험의학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그 선구자인 마장디에 대한 연구의 깊이 사이에는 불균형이 있다.
이 불균형은 마장디의 실험의학에 의학사가들의 엇갈린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편에서 의학사가들은 마장디가 사실의 축적에만 집중했다는 한계를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마장디는 오직 견고한 사실(fait) 위에만 실험의학을 정초할 수 있다는 이념 아래, 추상적 이론이나 문제의식을 무시했으며(Mazliak, 2012: 172)3), 사실에 근거하여 가설이나 이론을 제시하길 기피했다(Lichtentaeler, 1978: 413; Temkin, 1946: 35). 다른 한편에는 마장디가 그가 비판했던 생기론적 생리학자들의 기획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으며(Lesche, 1984: 92-98)4), 그가 설계한 실험에서 현대적 의미의 가설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는 평가(Chico&Recio, 2015)5)가 있다. 반면 마장디의 제자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의 저작에는 실험의학의 목표와 방법을 정초하겠다는 기획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에 따라 실험의학에 대한 고찰은 베르나르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베르나르가 단순히 마장디가 제시한 실험의학의 기획을 이어간 제자였던 것은 아니다. 마장디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형성된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스승에 대한 베르나르 본인의 평가에 이른다. 이에 따르면 마장디는 “가설적(hypothétique), 체계적(systématique) 정신에 대한 유별난 반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평생 동안 선재관념(idée préconçue)없이 실험할 것을 권했다.6)” 베르나르는 선재관념없이 이루어지는 실험의 불충분함을 지적한다. “분명 일단은 실험적 경로에 투신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도 그렇게 했었으며,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이는 마장디 덕분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즉 실험을 하기 위해 실험을 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가 무엇을 하길 바라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해] 복잡한 연구의 한복판에서 오류를 피해가야 한다. 따라서 방법(méthode)을 확립해야 하며, 이것이 나의 몫이다7).”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판단한 베르나르는 스스로 자신이 실험의학을 정초했다고(fonder) 선언한다.8)
이 지점에서 역사적 재검토를 요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베르나르가 자신의 몫인 ‘방법의 확립’에 천착한 것은 『실험의학연구서설』(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médecine expérimentale)에서였다. 베르나르는 여기서 결정론(déterminisme),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동일성 그리고 내부환경(milieu intérieur) 개념을 생명을 탐구하는 연구자가 따라야 할 ‘지도이념’(idée directrice)으로 제시하고, 이를 불가지론과 결합하여 생명 과학에서 사변의 입지를 한정함으로써 실험의학의 정초자가 되었다(박찬웅, 2016).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베르나르는 생명과학에 있어 실험의 의의와 방법, 어려움과 한계, 그리고 실험가의 정신에 대한 다수의 고찰을 제시했다. 그중 다음의 고찰은 주의를 끈다.
모든 실험적 추론(raisonnement expérimental)에 있어 두 경우가 가능하다. 하나는 실험을 통해 실험가의 가설(hypothèse)이 파기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실험을 통해 가설이 확증되는 것이다. 실험(expérience)이 선재관념을 파기시킬 때, 실험가는 자신의 관념을 포기하고 수정해야 한다. 그러나 실험이 선재관념을 전적으로 확증시켜준다 해도 실험가는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것이 의식외적인(inconscient) 진리에 관계된 것인 이상, 이성이 실험가에게 계속해서 반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9)
이 고찰은 현대적 의미의 가설연역적 방법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베르나르가 제시하는 설명은 ‘모든’ 추론에 결부된 것이란 점에서 실험가에게 권하는 규범이 아니라 실험가의 정신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다. 그러므로 실험가에게 선재관념, 가설의 부재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베르나르는 인식 일반에 대해서도 선재관념과 가설이 상존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실험적 의도가 없이 일상적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에도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희미한 실험적 추론이 수반한다.10)
베르나르의 이 기술과 마장디가 스스로 실험가를 자처했으며, 베르나르를 위시한 생리학자와 의학사가들이 그를 실험가로 여겼다는 사실을 연관시켜보자. 그러면 하나의 질문이 제기된다. 마장디가 선재관념이 없는 실험가, 가설을 멀리한 실험가라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실험가가 가설을 멀리할 수 있을까? 일상적 경험에서까지 부지불식간을 논하여 인식에 있어 가설의 상존을 주창하던 수고를 베르나르는 어째서 자신의 스승을 평가할 때는 마다해버리고 마는가?
이처럼 마장디가 ‘가설을 멀리한 실험가’라는 평가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현저한 긴장을 포착할 수 있다. 본 연구의 문제의식은 이 긴장에 관한 것이다. 마장디가 선재관념, 가설, 체계(système), 추측(conjecture)에 대해 강렬한 반감을 표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베르나르가 말했듯 이러한 관념 없이 실험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마장디는 실험가일 수 있었을까? 이제껏 주목받지 않은 어느 지점에 마장디가 이 긴장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든 요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본 논문은 이 요인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2. 당대 생리학의 상황에 대한 마장디의 견해

마장디가 가설을 멀리하고 실험에 집중하길 요구했던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당대의 의학과 생리학의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분야의 당대 상황은 그에 앞선 역사적 흐름의 귀결이었으며, 이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17세기의 생명 존재11)에 대한 이해에는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기계론적 관점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체의 기능은 영혼과 의지의 명령에 의해 촉발된다 할지라도 기계의 운동이 따르는 역학과 수력학의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 화학자이자 의사였던 슈탈(Georg Ernst Stahl, 1659-1734)은 이에 반발하여 물활론적 생리학을 주창했다. 그는 신체에 연소나 부패와 같은 파괴적 작용을 늦출 수 있는 힘, 즉 ‘영혼’(anima)이 있으며 이것이 순수한 역학적 언어로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12) 18세기에는 물리적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생명 존재에 고유한 법칙이 있다는 슈탈의 이념에 공명하면서도 그보다 더욱 풍부한 사실과 정교한 설명을 추구하는 생기론자들이 등장했다.
생기론적 견해는 독일에서는 발생에 관한 연구를 중심으로 개진되었다. 볼프(Caspar Friedrich Wolff, 1734-1794)는 배의 점진적 구조화를 설명하기 위해 ‘본질력’(vis essentialis)을 요청했다13). 블루멘바흐(Johann Friedrich Blumenbach, 1752-1840)는 볼프의 ‘근본적 힘’을 배에 영양성분을 분배하는 힘으로 한정하고, 이와 구분되는 조직화에 관여하는 원리로서 ‘형성하려는 노력’(nisus formativus)을 제시했다14). 프랑스에서는 몽펠리에 학파를 중심으로 생기론적 전통이 이어졌다. 보르되(Théophile de Bordeu, 1722-1776)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생리학에 근간한 부어하브(Hermann Boerhaave, 1668-1783)의 신체의 모든 분비작용이 기계적 압축에 의해 이뤄진다는 주장을 저작 근육의 압박에 의해 오히려 침샘의 분비가 저하되는 사례를 제시하여 반박했다(Rey, 1991: 46-47). 이어지는 다양한 분비의 기제에 대한 연구 끝에 그는 모든 기관(organe)에 그 기능의 발휘에 관여하는 ‘고유한 힘’(force propre)이 있다고 주장했다. 생명 존재의 존재 원리가 물리-화학적 원인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는 견해를 취했던 바르테즈(Paul Joseph Barthez, 1734-1806)는 이 존재 원리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실험적 원인을 지시할 가설적 개념으로서 ‘생기적 원리’(principe vital)를 제시했다(한희진, 2010: 161). 비샤(Xavier Bichat, 1771-1802)는 생리학적, 병리학적 고찰의 수준을 기관에서 조직(tissu)으로 낮추었다. 그에 따르면 조직은 과민성, 감수성, 탄력성, 수축성과 같은 상이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특성이 나타나는 강도와 그 조합에 따라 20여 가지의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로부터 비샤는 각 조직이 ‘고유한 생’(vie propre)을 갖는다고 주장했다(황수영, 2012: 154).
볼프의 근본적 힘, 블루멘바흐의 형성하려는 노력, 바르테즈의 생기적 원리처럼 학자와 개념을 병치하여 서술되는 역사를 마장디는 생리학이 통과해야 할 과학의 한 단계인 ‘체계적 형태(forme systématique)’15)를 띠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했을 것이다. 1816년 출판된 『기본 생리학 입문』(Précis élémentaire de physiologie)의 초판 서문에서 마장디는 자연과학이 ‘체계적 형태’와 ‘이론적 형태(forme théorique)’를 띨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체계적 형태를 띤 과학은 몇몇 무근거한 전제, 선험적으로 구성된 원리를 토대로 취한다. 사람들은 이 전제와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여기에 기지의 사실을 연결시킨다. 새로운 현상이 발견된다면? 만약 이 사실이 근본원리와 부합하지 않는 경우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해 줄 때까지 사실을 변형시킨다. 학자들은 항상 채택된 체계를 확증하려는 의도에서 실험적 작업에 열중한다. 체계를 전복할 만한 모든 사실이 무시되거나, 식별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찾는다. (…) 이론적 형태를 띤 자연과학은 상기 과학과는 전적으로 반대된다. 이 형태에서는 사실, 오직 사실만이 과학의 토대가 된다. 학자들은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는 데 천착하고, 가능한 한 사실의 수를 늘리고자 한다. 뒤이어 이들은이 현상들 사이의 관계와 이 현상들이 귀속된 법칙을 탐구한다. (…) 애석하지만 다음의 사항을 말해둘 필요가 있다. 과학의 이 일반적 운행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지식의 아주 중요한 영역인 생리학은 오늘날까지도 체계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16)
이처럼 마장디는 생리학이 아직 체계적 형태를 띤 과학이라 진단하고, 생리학적 연구를 수행한 기존의 학자들이 사실에 대해 가진 태도, 즉 근본원리에 필요한 사실만을 취사선택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기본 생리학 입문』의 2판 서문에서도 이와 동일한 진단이 내려진다. 그러나 여기서 마장디는 비판의 대상을 명확히 지목하고 자신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생명에 대한 연구에 실험적 방법을 성공적으로 적용한 인물들이 여러 번 나타났다. 현대의 모든 위대한 발견은 이 같은 노력의 산물이다. 과학은 이러한 부분적 사실들 덕에 풍부해지지만, 그 제반 형태와 연구 방법은 동일하게 유지된다. 순환, 호흡, 근육수축과 같은 현상들 주변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 현상들과 동일한 중요성이 부여된 채로, 이 현상들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는 ‘유기적 감수성(sensibilité organique)’과 같은 순진한 비유, ‘신경 유체(fluide nerveux)’와 같은 상상적 존재, ‘힘(force)’이나 ‘생기적 원리(principe vital)’와 같은 불가해한 단어들을 발견한다. (…) 이 책의 초판을 쓸 때(1813) 나의 주된 목적은 생리학의 상황을 바꾸는 데 공헌하고, 생리학을 전적으로 실험에 귀착시키는 것이었다. 즉 한마디로 말해 물리적 과학(sciences physiques)이 겪은 탁월한 혁신을 이 위대한 과학도 겪게 하는 것이었다.17)
여기서 마장디가 비판적 견지에서 거론하는 ‘유기적 감수성’, ‘힘’, ‘생기적 원리’와 같은 개념은 그에 앞선 세대의 학자들, 즉 보르되, 바르테즈, 비샤를 겨냥하고 있다. 그는 생리학이 아직 ‘체계적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이들이 사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불가해한 단어들’을 제시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마장디는 ‘이론적 형태’를 띤 과학의 전형을 생리학의 외부에서, 생리학보다 먼저 여기 도달한 과학, 즉 물리적 과학에서 찾는다. 이 책의 다른 구절에서 마장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생리학은 뉴턴 이전의 물리적 과학이 도달해 있던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즉 생리학은 최고의 천재가 등장하여,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알렸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명적 힘(force vitale)의 법칙을 발견하길 기다리고 있다.(Magendie, 1816: 15)” 즉 마장디는 생리학이 물리학과 동일한 계기(천재)와 방식(중력 법칙의 발견)으로 진보할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마장디가 거론하는 ‘생명적 힘’이 앞선 세대의 학자들이 제시했던 개념들과는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어지는 다음의 선언에서 이 차이점을 포착할 수 있다. “이 위대한 기하학자[즉, 뉴턴]의 공적은 혹자가 생각하듯 중력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중력이라는] 원인은 뉴턴 이전에도 알려져 있었다. 그의 공적은 중력이 질량에 정비례하여,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작용한다고 주장한 데 있다(Magendie, 1816: 15).” 즉 마장디에게 ‘생명적 힘’ 자체가 무엇인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다만 뉴턴이 중력의 본질을 묻지 않고, 중력의 효과를 인식하는 데 성공했던 것처럼, 생명적 힘의 본질에 대한 정의 없이 그 효과만을 인식하는 데 이르고자 했다. 요컨대 마장디의 실험의학은 물리적 과학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생리학의 지연을 인정하고, 물리적 과학의 진보의 계기와 사유방식을 취하겠다는 결단의 산물이었다.
마장디가 이 결단에 이르게 된 데에는 그가 1809년부터 참석한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에서의 경험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들은 매주 과학 아카데미에 모여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활발히 의견을 교류했다. 마장디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관심을 받는 신진 학자였다.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비교해부학자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는 마장디가 아카데미에 참석하기 전부터 파리 자연사 박물관에서 동물 해부 실습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Mazliak, 2012: 40). 이 경험을 통해 마장디는 생리학적 연구에 있어 비교해부학의 유용성에 대한 확신을 얻고, 생체해부(vivisection)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정신의학의 선구자로 유명한 필립 피넬(Philippe Pinel, 1745-1826) 또한 마장디를 눈여겨보았다. 1813년 마장디는 아카데미에 「삼킴에 있어 후두개의 기능에 대한 논문」(Mémoire sur l’usage de l’épiglotte dans la déglutition)을 제출했다18). 피넬은 외과의사 피에르-프랑수아 퍼시(Pierre-François Percy, 1754-1825)와 함께 이 논문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이 논문에서 개진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마장디가 행한 생체해부 시연에 참석했다. 심사 의견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피넬은 “해부학에 있어서의 정확성이 생리학적 진리에 이르기 위한 가장 확실한 경로”라고 선언한 후, 마장디의 해부 시연을 이를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로 평한다19). 마지막으로 마장디는 과학 아카데미에서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 1749-1827)를 만났다. 젊은 시절 화학자 앙투안-로랑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Lavoisier, 1743-1794)와 호흡과 열에 관한 공동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라플라스는 생리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장디를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된 라플라스는 1814년 마장디에게 내려온 입영통지를 물리는 데 일조했으며(Olmsted, 1944: 58), 1818년에는 마장디가 살페트리에 병원의 의사가 될 수 있도록 힘썼다(Lesche, 1984: 117 note 33).
마장디와 가까웠던 피넬과 라플라스는 당대 생리학의 상황에 대해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피넬은 1813년 이루어진 상기 심사의견 발표를 생리학의 상황을 다음과 진단하며 시작한다. “생리학 교육이 가설적 설명으로 이뤄져 있으며, 생리학 서적이 순전히 상상적인 체계로 가득 차 있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 오늘날의 생리학이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지난 20여 년 동안 얼마나 귀중하고 예기치 못한 발견들이 생리학을 풍요롭게 했는지요!”20) 라플라스는 생리학이 견고한 토대 위에 자리 잡고 있지 않으며, 여전히 뉴턴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다며 마장디에게 유감을 표한 바 있다(Olmsted, 1944: 19-20; Lichtenthaeler, 1978: 414; Mazliak, 2012: 44). 이들의 견해는 앞서 서술한 마장디의 당대의 생리학에 대한 견해와 그리 다르지 않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마장디가 생리학을 혁신하길 결심하는 데에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과의 교류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리-화학적 실험의 방법을 생리학에 적용하는 것이 뉴턴의 등장을 앞당기는 길이라는 관념은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들 사이에서 점점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과학 아카데미의 이 같은 경향은 이는 1818년 뛰어난 실험생리학 연구에 주어지는 몽티용 상(Prix Montyon)21)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3. 공동연구의 관념과 생리학 실험실

리히텐타엘러는 마장디가 학생이었던 19세기 초 과학계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820년경 파리를 방문한 스웨덴의 화학자 옌스 야콥 베르젤리우스(Jöns Jacob Berzelius, 1779-1848)는 이 도시에 백여 곳이 넘는 실험실이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 오래전부터 물리학자와 화학자는 책의 매 쪽마다 옛 권위자를 인용하길 멈추었다. 이들은 서로의 생각에 체계를 밀어 넣기를 그 만두고 실험실에서 작업하며, 실험 결과를 축적했다. 한 번의 성공이 있을 때마다 과학은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물리학자 앙페르(André-Maris Ampere, 1775-1836)가 전자기학을, 프레넬(Augustin Fresnel, 1788-1827)이 파동광이론을, 카르노(Sadi Carnot, 1796-1832)가 열역학이론을 정초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Lichtenthaeler, 1978: 412).” 이렇게 체계적 형태에서 벗어나 사실의 축적을 통해 진보해 나가는 물리-화학의 모습을 마장디는 과학의 이상적인 전개 과정으로 여겼을 것이다.
앞서 우리는 이 같은 해석을 부분적으로 정당화했다. 마장디는 생리학이 여전히 ‘체계적 형태’를 띠고 있다고 여겼고, 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반면 리히텐타엘러의 묘사에서 실험실에 대한 부분은 아직 입증할 것으로 남아있다. 실험실로 가득 찬 파리의 풍경이 마장디에게 미친 영향이 있었을까? 마장디는 생리학 실험실 또한 개혁해야 할 공간으로 여겼을까?
마장디가 실험실이라는 공간에 대해 남긴 직접적인 고찰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의 글과 강의에서 실험실은 다만 자신이 공개할 연구 성과가 유래하는 공간으로 언급될 뿐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 그가 실험실이라는 공간에서 구체화되는 관념을 생리학 실험실이 부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선취했다는 사실을 보일 수 있다. 나중에 보이겠지만 마장디는 바로 이 관념을 통해서 ‘가설을 멀리한 실험가’가 될 수 있었다.

1) 라부아지에와 화학실험실에서의 공동연구

첫 번째로 접어들 간접적 경로는 라부아지에의 실험실이다. 마장디는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물리-화학적 실험을 통해 생리학적 사실을 밝힌 성공적인 사례로 간주했다. 『기본 생리학 입문』의 2권에서 그는 라부아지에가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진행했던 실험들, 예컨대 라부아지에가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와 함께 수행한 성인 남성의 24시간 산소 소비량 측정 실험, 아르망 세갱(Arman Seguin, 1767-1835)과 수행한 폐와 피부에서 일어나는 증산작용을 구분한 실험, 마지막으로 라플라스와 수행한 열에 관한 실험을 인용한다.22) 마장디는 이상의 실험을 통해 라부아지에가 얻은 성과가 동일한 문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 비해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이로부터 마장디가 라플라스와 라부아지에가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공동연구 논문 「열에 관한 논고」(Mémoire sur la chaleur)를 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라부아지에가 이 논고의 성과를 중요하게 언급하는 『화학 원론』(Traité élémentaire) 또한 필시 읽었을 것이다.
마장디가 인용했던 실험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듯, 라부아지에는 다수의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이는 당시 화학계 전반의 흐름이었다. 단적인 예로 라부아지에는 1779년 겨울 라플라스와 동물의 호흡에 관련된 실험과 연구를 하기 직전에도 식물이 연소되고 남은 재에 상당량의 금이 있다는 발타자르 조르주 사주(Balthasar-Georges Sage, 1740-1824)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 이 실험은 당해 여름 앙투안 보메(Antoine Baumé, 1728-1804)의 실험실에서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라부아지에와 피에르-조셉 마케(Pierre-Joseph Macquer, 1718-1784), 장-밥티스트-미셸 부케(Jean-Baptiste-Michel Bucquet, 1746-1780), 루이 클로드 카데(Louis Claude Cadet, 1731-1799), 클로드-멜시오르 코르네트(Claude-Melchior Cornette, 1744-1794)까지 총 6명의 화학자가 참여했다(Beretta, 2009: 69).
이렇듯 당대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라부아지에가 실험연구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상(像)이 선구적이었다는 점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는 화학자뿐만 아니라 실험기구 제작자들까지도 실험에 참여시키고자 했으며, 실험 기구와 실험 설계 방법을 표준화하여 해외의 실험실에 전파하는 데 열중했다(Bertta, 2009: 64-65, 71). 라부아지에가 이렇게 물적으로나 인적으로나 규모가 큰 연구를 시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금전적, 직업적 상황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는 조세 징수원 활동을 하며 축적한 부를 대규모 실험을 수행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했다. 1775년은 이러한 연구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한 해이다. 라부아지에는 화약 행정기관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실험실과 집이 부속건물로 딸린 파리의 병기창에 정착했다. 라부아지에는 이곳을 수많은 화학 실험용 장비를 갖춘 대규모 실험실로 만들고, 일주일에 두 번씩 파리와 해외의 과학자들을 초대해 실험을 진행하거나 화학에 대해 토론했다(Bertta, 2009, 70-71).
이러한 공동연구에 대해 라부아지에가 어떤 관념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 앞서 언급한 「열에 관한 논고」와 『화학 원론』에 나타난다. 라부아지에는 「동물열에 관한 논고」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 논고는 나와 라플라스씨가 공동으로 행한 열에 관한 실험의 결과이다. 올해 겨울이 그리 춥지 않았기에 우리는 많은 실험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주제에 관한 글을 출판하기 전에 추운 겨울이 와서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가며 실험을 반복하고, 실험 사례를 늘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는 상당히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을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우리가 사용한 방법이 열에 관한 이론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 바가 있고, 이 방법이 정확성과 일반성을 갖추었기에, 이러한 실험을 진행하기에 아주 적합한 겨울이 있는 유럽 북부의 다른 학자들과 이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23)
라부아지에는 일단 자신의 연구가 라플라스와의 공동연구임을 명확히 밝힌다. 다음으로 그는 다른 학자들에게도 자신이 했던 실험을 해볼 것을 제안한다. 그가 특히 유럽 북부의 과학자들에게 이를 제안했던 이유는 이 실험에 얼음열량계(calorimètre à glace)를 이용한 열량 측정법이 사용되기 때문이다.24) 얼음 열량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얼음이 필요한데, 당시엔 이에 필요한 만큼의 얼음을 인공적으로 만들 기술이 없었다. 결국 실험에 쓰일 얼음을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서는 겨울을 기다려야 했다. 따라서 라부아지에는 파리보다 겨울이 더욱 길고 추운 유럽 북부의 학자들에게 자신의 실험을 재현하길 요청했던 것이다.
이러한 협업의 요청은 두 가지 관념적 조건 아래서 가능하다. 첫째는 ‘방법의 일반성’이 동일한 실험의 반복을 가능하게 한다는 관념이다. 일반성을 갖춘 방법에 따라 실험을 진행해도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면, 다른 과학자에게 자신의 방법을 사용하라 요구할 이유가 없다. 둘째는 실험의 반복이 주장의 완전성을 높여준다는 확신이다. 이 같은 확신은 반복을 요청하는 동기에 해당한다. 다른 한편 『화학 원론』의 서문에서 라부아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일 때때로 내가 부지불식간에 베르톨레, 푸르크루아, 라플라스, 몽주, 그리고 나와 동일한 원리를 받아들이는 일반인들의 실험이나 의견을 출처를 밝히지 않고 차용한다면, 이는 서로 생각, 관찰과 소견을 나누며 함께 생활하던 습관에 의해 우리들 사이에 강력한 의견 공동체(communauté d’opinions)가 형성된 탓이다. 이 의견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하기는 우리에게 대체로 어려웠다.25)
이 ‘의견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공간이 바로 앞서 언급한 병기창의 실험실이었다. 이 실험실의 등장은 과거 화학자의 비밀스럽고 내밀한 연구실이라는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Lehman, 2019: 253). 새로운 화학 실험실은 공개적으로 실험이 이루어지고, 끊임없이 의견이 교류되는 공간이었다. 그것도 실험을 촉발한 영감과 실험 과정을 이끌어나가는 의견의 고유성이 식별 불가능해질 정도로 활발히 말이다. 앞선 장에서 우리는 마장디가 라플라스를 위시한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의 영향을 받아 물리-화학을 생리학이 도달해야 할 과학의 전형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보였다. 마장디와 라플라스의 친분과 그의 저서에 나타나는 라부아지에의 연구 성과에 대한 인용을 매개로 우리는 그를 라부아지에의 실험연구와 연관 지을 수 있었다. 이로부터 젊은 마장디가 물리-화학의 영역에서 실로 목격한 것이 무엇이었을지를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여러 과학자와 기술자로 구성된 공동체가 진행하는 연구의 활기와 소란으로 가득 찬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2) 베르나르의 한탄

두 번째로 접어들 간접적 경로는 베르나르의 생리학 실험실에 대한 견해이다. 자신의 스승과 달리 베르나르는 실험의 물질적, 제도적 조건인 실험실에 대한 다수의 견해를 남겼다. 만약 생리학 실험실이 유의미한 생리학적 사실을 실험을 통해 확정하는 장소를 의미한다면 생리학 실험실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프랑스에 공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마장디를 위시한 19세기 초의 생리학자들 뿐만 아니라 18세기의 생기론자들도 과학적 주장을 할 때면 실험적 사실을 근거로 제시했다. 보르되는 침샘의 자극이 오직 기계적 압박에 의해서만 일어난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캉길렘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물학적 실험의 대체물’(Canguilhem, 1966: 17)인 병리적 사례를 참조했다(Rey, 1991: 51). 비샤 또한 자신의 막(膜)에 대한 고찰을 생체해부실험에 근거하여 제시했으며, 슈탈과 바르테즈가 생명체에 대한 고찰을 위해 원리로부터 출발했다고 비판하며 실험이 제공하는 사실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황수영, 2012; 160).
또한 베르나르는 1867년 정부에 제출한 『프랑스에서의 일반생리학의 진보와 전진에 관한 보고서』(Rapport sur les progrès et la marche de la physiologie générale en France)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마장디에 앞서 라부아지에의 시대에 나뮈르의 프티(François Pourfour du Petit, 1664-1741), 우세(Étienne-François Housset, 1747-1845), 르갈루아(César Leallois, 1774-1814), 비샤와 같은 프랑스의 실험가-생리학자들이 있었다26).” 당장 베르나르가 1843년 발표한 위와 장에서의 소화에 있어 췌액의 역할에 대한 본인의 연구도 화학자 펠루즈(Théophile Jules Pelouze, 1807-1867)의 실험실에서 수행된 실험에 근거한 것이었다(Legée, 1988: 232). 실험이 이루어졌고, 실험가도 있었다. 실험가의 실험은 당연히 실험실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베르나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물리학과 화학과 같은 물체(corps bruts)에 대한 실험적 과학은 오래전부터 카비네(cabinet)27)과 실험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생체(corps vivants)에 대한 실험적 과학, 즉 생리학은 지금까지도 그에 필수적인 실험실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확정적이고 합법적인 생리학 실험실의 설립을 기다리고 중이다. 반면 해외에서 생리학 실험실은 완벽하게 정비되었다.28)
베르나르 자신이 실험실에서 실험했던 생리학자이면서도 실험실이 없다고 개탄하는 이 역설은 그의 실험실에 대한 언급을 면밀히 검토하면 해소될 수 있다. 앞서 인용한 『프랑스에서의 일반생리학의 진보와 전진에 관한 보고서』에서 베르나르는 자신이 실험조교(préparateur)도, 실험실도 없이 십여 년간 연구를 계속해 왔으며,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고 토로한 후, 실험실에 대한 일종의 분류를 제시한다.
실험실을 공개 강연이 이뤄지는 단순한 부속기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과학적 실험실(laboratoires scientifiques)은 강의를 위한 설명이 이뤄지는 실험실(laboratoires de démonstration des cours)과는 엄연히 다르다. 기초 과학을 보급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공개 강연이 아닌 과학적 실험실을 설립하는 것이 매우 유용할 것이다. (…)
학자는 항상 두 가지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재의 과학을 진척시키기 위한 작업을 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과학을 발전시킬 젊은 학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교육과정의 선행 연구를 통해 충분히 교육받고 준비된 젊은이가 어떤 작업을 하거나 실험생리학에서의 경력을 쌓길 바란다면, 과학적 지도가 이뤄지는 실험실에서 이를 위한 물질적 수단을 갖춰야만 한다. 교수는 자신이 불어넣은 영감에 의해서나 자신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작업에 말하자면 과학적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수와 학생들의 공동작업(travaux réunis)이 매년 출판되는 다수의 해외 생리학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29)
요컨대 세 가지 종류의 생리학 실험실이 있었다. 첫 번째 종류의 실험실은 마장디 이전의 실험가-생리학자들이 실험했던 곳이자, 마장디가 강의할 사실을 발견했던 여러 아침을 보냈던 곳이며, 베르나르가 췌액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던 펠루즈의 실험실과 같은 사설 실험실(laboratoire privé)이다. 사설 실험실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실험공간과 실험도구를 갖추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특히 생체실험을 중시하는 실험생리학의 경우 실험동물을 구하고 기르는 데에 적잖은 비용과 노동력이 들었다. 1840년대 중반까지도 베르나르를 포함하여 이러한 여건을 갖춘 실험실을 가질 수 없었던 젊은 생리학자들은 여유가 있는 학자들이 세운 사설 실험실을 전전하며 교육받고 연구했다(Bange&Bange, 2010: 54). 두 번째는 공공 실험실(laboratoire public)로, 이는 다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강연이 이뤄지는 실험실이며, 마장디가 세운 콜레주 드 프랑스의 실험실이 이에 해당한다. 마장디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를 실험을 통해 알아낸 사실을 구두로 발표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수행했던 실험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그는 경우에 따라 청중들 앞에서 즉흥적으로 다른 실험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이로부터 새로운 사실들을 이끌어내기도 했다(Mazliak, 2012: 127). 이러한 의미에서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연장은 주로 강의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단순한 강의실이 아니라 일선의 연구가 이뤄지는 실험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베르나르가 ‘과학적 실험실’이라 부른 유형의 실험실이 있다. 이 실험실의 과업은 교수와 학생의, 달리 말해 중진 과학자와 신진 과학자의 공동연구를 통해 젊은 세대의 과학자를 길러내고, 과학을 진전시키는 것이다.
이상의 분류를 염두에 두고 보면 베르나르의 역설적인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생리학계에는 사설 실험실과 강의가 이뤄지는 실험실은 있었지만 여러 과학자들이 모여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과학적 실험실은 없었다. 베르나르는 바로 이 점에 대해 한탄했던 것이다. 베르나르가 만족할 만한 수준의 과학적 실험실이 파리에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Bange&Bange, 2010: 56). 즉 1855년 타계한 마장디는 공동연구가 진행되는 실험실을 생전에 보지 못했다.

3) 마장디와 공동연구 관념

라부아지에와 베르나르의 실험실에 대한 견해를 경유하면 마장디가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마장디는 라부아지에를 통해 공동 연구의 관념이 구현된 화학 실험실을 보았지만, 베르나르의 한탄을 통해 알 수 있듯 여기 상응하는 생리학 실험실은 보지 못했다. 마장디는 라부아지에와 베르나르 사이에 위치한다. 이 중간적 위치가 마장디가 선구자이지만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마장디는 공동연구의 관념적 조건에 기반하여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고, 더 나아가 생리학계에 이를 전형으로 삼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선구자였다. 이 요구가 라부아지에의 협업 요청을 위한 관념적 조건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기본 생리학 입문』에 나타나는 언명을 통해서도 입증할 수 있는 바이다. 다시 인용하자면, 마장디는 과학이 “부분적 사실들 덕에 풍부해지지만, 그 제반 형태와 연구 방법은 똑같이 유지된다”고 썼으며, 이론적 형태를 띤 과학에서는 “사실, 오직 사실만이 과학의 토대가” 되고 “학자들은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는 데 천착하고, 가능한 한 사실의 수를 늘리고자” 한다고 썼다. 이처럼 방법의 일반성과 사실의 축적에 대한 가치 부여는 라부아지에에게서나 마장디에게서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마장디는 공동연구를 상정할 때만 가능할 생리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견해를 일관되게 견지했다. 1836년부터 진행된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를 모아 1842년 출판된 『생명의 물리적 현상』(Phénomènes physique de la vie)에서 이 견해는 『기본 생리학 입문』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 강의에서 마장디는 천재(génie) 혹은 천재성에 대한 견해를 자주 피력한다. 그는 예컨대 갈렌(Claude Galien, 129-201), 실비우스(Franciscus Sylvius, 1614-1672), 비샤 등을 천재로 거론하는데30), 그중에서도 비샤를 자주 언급한다. 마장디는 비샤에게 ‘자연으로부터 비밀을 빼돌려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박식하고 활력있는 해부학자’의 면모가 있다고 말하며, 이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마장디는 ‘천재’라는 단어를 양의적으로 사용한다. 마장디는 뒤이어 곧바로 비샤가 ‘자신의 희망(rêves)을 현실로 간주하고, 정밀한 관찰의 엄격함을 희망으로 대체하는 체계적 인물’이었다며 개탄한다.31)
마장디에 따르면 천재는 현실을 희망으로 대체하는 상상력을 지닌 인물이다. “지칠 줄 모르는 상상력을 타고난 비샤는 자신의 저작 대부분에 자신의 천재성을 각인시켜 두었습니다.”32) 마장디는 정맥에 주입된 물질이 유기체에게 이롭건 해롭건 간에 모세혈관을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단한 실험을 통해 입증한 후, 이토록 간단한 사실이 왜 논란거리가 되었는지를 자문한다. 그는 비샤가 천재적 상상력으로 제시한 혈관벽의 ‘유기적 감수성’이라는 개념이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혼동을 유발할 수 있는 천재는 경계의 대상이다. “평범한 저자가 잘못된 의견을 제시한다면 그 파급력은 미미할 것입니다. 현세대를 지배하는 천재들에 대해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오류는 높은 곳에서 올수록 그 영향이 해롭고, 사람들에게 강력하고도 유해한 여파를 남깁니다.33)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천재의 상상력에 대응해야 하는가? 바로 실험을 통해서이다.
(회귀신경을 절단하면 동물이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갈렌이 밝힌) 이 사실은 실험가에게 나타났던 그대로 과학에 남아 있습니다. 시간은 사실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고, 그로부터 아무것도 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페르가몬의 의사[즉, 갈렌]의 천재성에서 비롯된 수천의 학술적 희망은 반박했죠. 실비우스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요? 그가 산성 췌장액의 질병에 있어 알칼리성 담즙에 부여했던 역할에 대해서요? 이 효소 이론은 의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후 무너졌습니다. 그에 관한 실험을 해보자마자 무너져버려야만 했죠. 살아있는 동물에서 추출한 췌즙을 분석해 보시죠. 췌장액은 산성이 아닙니다! 상상력이 그처럼 어렵사리 만들어낸 체계들의 이토록 기묘한 운명이라니! 자신의 전 생애를 그 천재성이 후대에 전하길 바라던 건축물(édifice)의 재료를 고생스럽게 모으는 데 바치는 과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자신의 영광이 영원히 보장되었다고 믿는 순간에, 가장 평범한 사람이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 이 화려한 비계(échafaudage)를 무 너뜨려버립니다.34)
여기서 ‘건축물’을 완성했다고 믿었던 과학자가 천재들이라면, ‘가장 평범한 사람’은 마장디 본인을 포함하는 무명의 실험가이다. 마장디는 스스로 ‘갈고리를 들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넝마주이’35)를 자처한 바 있다. 이는 본인이 과학에 남아있을 사실과 그렇지 못한 사실을 간단한 실험으로 가려내는 데 전념하는 실험가임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의학사가들이 평가해온 것처럼 사실만을 목적으로 삼는 맹목적인 작업이 아니다. 이 작업을 통해서 종래엔 천재가 상상력으로 축조한 건축물이 붕괴되며, 이로써 기존의 건축물이 실상 비계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즉 실험가는 천재의 체계를 반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장디가 ‘건축물’을 ‘비계’로 바꿔 지시하는 대목은 상당히 흥미롭다. 비계는 건축물을 짓는 과정에서만 필요한 구조물이며 건축물이 완성된 후에는 폐기된다. 즉 과거의 체계는 폐기됨으로써 소용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비계였다면 이를 활용하여 완성되는 또 다른 건축물이 있을 터이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이 간단한 실험을 통해 만들어낼 이론적 형태를 띤 생리학이자, 실험의학이다.
강의에서 마장디는 건축물의 비유를 자주 사용했다. 다음의 문단에서도 이 비유가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비계를 부수는 ‘평범한 인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어째서 그렇게나 많이 구축되었던 의학적 건축물이 그토록 여러 번 무너져야 했을까요? 왜냐하면 의학에서 모두가 건축가(architecte)가 되길 바랐고, 그 누구도 의학을 견고하게 위치시키기에 적합한 재료를 모으는 데 필수적인 인내심, 지식, 능력을 겸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통상 자신이 지지는 견해를 제시할 때는 스스로를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인간 정신에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하세요. 정신 고유의 환상을 현실(réalité)로 바꾸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입니다! 당신이 설득하기를 바라면 스스로 설득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의 미래가 달려있을지도 모를 소송에서 공명정대해지려 노력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당신의 작업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오직 깨어있는 대중(public éclairé)에게 속한 일입니다. 깨어있는 대중만이 당신의 작업에 대한 승인을 허가하거나 거부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36)
의학에서 모두가 ‘건축가’가 되길 바란다는 것은 재료를 모으는 작업, 즉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고, 가능한 한 사실의 수를 늘리는’ 작업과 이 재료로 건축물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작업, 즉 사실로부터 ‘현상들 사이의 관계와 이 현상들이 귀속된 법칙을 탐구하는’ 작업을 한 사람이 모두 다 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인내심’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과가 나기를 고대하는 건축가에게는 희망을 현실로 왜곡할 우려가 있다. 앞서 이 왜곡을 제한할 주체로 ‘평범한 사람’이 제시되었다면, 여기서는 ‘깨어있는 대중들’의 판단이 제시된다. 마장디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연의 청중 대다수가 프랑스와 해외의 생리학자, 의사들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봤을 때(Mazliak, 2012; 127) 이 ‘깨어있는 대중들’은 실험가‘들’, 마장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과 같은 넝마주이‘들’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실험의학은 분업과 협동의 기획이다. 캉길렘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 바 있다. “간단히 말해 마장디는 ‘실험의학을 창조하자’고 권유함으로써 집단적 행위(action collective)를 촉구한다(Canguilhem, 1994; 133-134).” 그러나 베르나르의 한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마장디가 활동할 당시의 생리학계에는 과학적 실험실이 없었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마장디는 공동연구의 진행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혼자서 대규모 공동연구의 성과를 보일 수도 없었다. 만약 실험의학의 기획을 순수하게 관념적 차원에서만 평가한다면 마장디는 이론의 여지없이 선구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노력을 관념을 현실에 가닿게 하는 실험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기획을 관념적 차원에서만 평가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지 않은가? 실험의학의 기획 아래에서 개념, 체계, 가설에서 사실을 가려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이 기획 자체가 실험실로 현실화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아간 마장디의 역설, 이 역설이 그에게 한계점이 있다는 평가의 원천일 것이다.
우리는 앞서 마장디가 생리학 실험실이 부재한 상황에서 실험실을 통해 구체화되는 어떤 관념을 선취했으며, 이 관념을 통해 ‘가설을 멀리한 실험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 이에 대해 말할 때이다.
이 관념은 바로 공동연구의 관념이다. 만약 마장디의 이름을 학자의 이름과 개념을 병치해가며 서술되는 역사에 기입하기 위해 그의 저작을 읽는다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마장디는 실로 자신의 작업 전반을 특징지을만한 개념이나 체계, 가설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관념에 대한 뚜렷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로부터 마장디가 ‘가설을 멀리한 실험가’라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이는 그 정당성을 따져볼 평가이기에 앞서 해명해야 할 역설이다. 이 역설은 마장디를 그가 자처했던 그대로, 즉 과학자로 이루어진 의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중에서도 사실을 수집하는 넝마주이로서 바라볼 때에 해소될 수 있다. 이 공동체에는 기실 가설을 제시한 생리학자들이 많았다. 넝마주이가 거기서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을 가려내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지듯, 마장디는 실험 과학의 재료가 될 만한 사실을 얻기 위해 다른 생리학자의 가설을 반증할 실험을 설계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해 마장디는 가설을 멀리한 실험가가 아니었다. 그는 입증할 ‘본인의 가설’을 제시하는 데는 지극히 신중했지만, 입증하거나 반증할 목적으로 ‘다른 학자의 가설’을 과감히 취하는 실험가였다.

4. 마장디의 비샤에 대한 비판 사례

이상의 견지에서 마장디의 저작을 살펴보면 그가 다른 학자들의 주장을 실험을 위한 가설로 취하는 경우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본 장에서는 그중 대표적인 사례로 마장디의 비샤에 대한 비판, 특히 비샤의 기관의 미세공(pore)에서 이뤄지는 액체 흡수에 대한 견해 비판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장디의 여러 선배 생리학자들 중에서도 비샤에게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는 비샤의 『막(膜)에 관한 논설』(Traité des membranes)에 본인의 주해를 실어 재판을 출판했을 정도였다. 또한 앞서 서술했듯 마장디는 비샤를 천재로 간주했다. 그러나 마장디에게 천재라는 표현은 양가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는 생리학의 진보를 위해서는 뉴턴과 같은 천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천재의 상상력을 경계하여 깨어있는 대중에게 천재의 가설에 대한 판단을 요구했다. 이러한 점에서 마장디의 비샤라는 천재에 대한 비판은 그가 생각했던 의견 공동체에서 이뤄지는 작업의 양상을 보이기에 적합한 사례이다.
이를 살펴보기에 앞서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용어상의 문제가 하나 있다. 마장디의 저작에서 ‘가설’이라는 용어는 양면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 ‘가설’은 문제적인 상상력의 작용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예를 들어 마장디는 과거의 학자들이 대뇌에 감각을 전달하는 미세동물(animalcule)을 받아들였다고 비판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이 권위자로 떠받드는, 당대의 모든 깨달음에 통달했던 인물들도 이를[미세동물]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책에서 가장 엄격한 진리의 옆에 이를 기록하기도 했죠. 한 번 가설의 영역에 발을 들이면, 상상력은 자리 잡지 못한 채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멈추는 것은 인간의 자존심에 반하는 일입니다. 심지어 자연이 인간에게 너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말이죠.”37) 여기서 ‘가설’의 영역은 한 번 들어서면 인간의 상상력이 통제할 수 없이 활개치는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다른 한 편 ‘가설’은 실험을 통해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간명한 추측을 의미한다. 마장디가 심장잡음의 발생이 혈액과 혈관벽의 충격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가설’이라 지시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38) 이 경우 마장디는 대체로 ‘가설’이라는 용어에 ‘간단한(simple)’이라는 수식어를 더한다. 즉 그가 가설에 대해 언급할 때는 그 가설이 ‘상상력의 방황을 유발하는 가설’과 ‘간단한 가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39)
비샤는 『막에 관한 논설』과 『생과 죽음에 대한 생리학적 연구』(Recherches physiologiques sur la vie et la mort)에서 기관의 흡수구(orifices absorbants)의 유기적 감수성(sensibilité organique)에 따라 액체의 생체로의 흡수 양상이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흡수구는 그 본질과 기능에 부합하는 액체만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액체이나 유해 물질은 차단한다.40) 『막에 관한 논설』에서 비샤는 이 주장을 뒷받침할 실험적 근거를 제시한다. 염색액을 하복부나 흉강에 주사하면 장막(membrane séreuse)은 동일한 색으로 물들지만, 림프는 여전히 투명하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생체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유기적 감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간주했다. 따라서 비샤는 죽은 후에도 짧은 시간 동안 이와 같은 흡수 현상이 관찰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사체에서도 15시간, 30시간, 48시간 동안 흡수 현상이 관찰된다는 파올로 마스카니(Paolo Mascagni, 1755-1815)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라며 비판한다. 마장디는 자신의 주해가 실린 『막에 관한 논설』의 재판에서 이 대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각주를 남겼다.
이 절의 모든 부정확하고 심지어 잘못된 사항들은 비샤가 소위 흡수관(absorbans)이나 발산관(exhalans)이라고 명명된 관의 생명적 작용(action vitale)에 의해 모든 흡수나 발산(exhalation)이 이루어진다고 썼던 시대 상황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현상들이 대부분 물리적인 것이며, 침윤성(propriété d’imbibition)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이 침윤성을 다수의 실험을 통해 증명한 바 있다.41)
여기서 마장디는 비샤의 용법에 따르자면 능동적 함의가 담긴 ‘흡수’라는 용어를 피하고자 침윤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침윤을 액체의 점도나 관의 두께와 같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조건에 귀속된 현상으로 간주했다.42) 마장디가 이 침윤성을 보이기 위해 수행했던 실험은 비샤의 가설, 즉 막의 종류에 따라 액체가 선택적으로 흡수되며, 이것이 유기적 감수성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가설을 반증한다.
이제 액체의 성질에 관계없이 그 흡수가 생체 조직 표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증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이 토끼의 복강에 이 요오드-요오드화 포타슘 수용액을 주입하는 것을 보시지요. 액체가 침윤될 시간 동안 잠시 실험을 멈추도록 합시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방치하면 순환하는 혈액에 휩쓸려가 이 액체를 찾아볼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주의하도록 하세요. 열려있는 동물의 복부에서 주입된 액체에 의해 염색된 내장의 장액성 피막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는 액체가 혈관벽을 통해 침윤했기 때문이죠. 만약 제가 동일한 수용제를 아직 살아있는 동물의 위(胃)에 주입한다면, 동일한 기제에 따라 발생하는 동일한 흡수 현상을 목격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마전자(馬錢子, noix vomique) 알콜 용액을 토끼의 늑막에 주입해 보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독이 장액성 막에 닿자마자 동물은 강직 경련을 보이고 죽습니다.43)
마장디가 제시한 첫 번째 실험, 즉 토끼의 복강과 위에 요오드-요오드화 포타슘 수용액을 주입하면 장액성 피막의 색상이 변화하는 것을 보이는 실험은 비샤의 주장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비샤는 하복부나 흉강에 주입된 염색액이 장막의 색은 바꾸지만, 림프의 색상은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막이 액체를 선별적으로 흡수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염색액에 의해 특정 막의 색이 변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반면 마장디의 두 번째 실험, 즉 마전자 알콜 용액 주입실험은 비샤의 가설을 반증한다. 마전자 알콜 용액은 어느 막을 통해 흡수된다 해도 유해한 물질이다.44) 따라서 늑막이 이를 흡수한다는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막의 유기적 감수성이 유해 물질을 선별한다는 비샤의 주장을 반증할 수 있다.
비샤가 가설을 제시하고, 마장디가 실험적 사실을 통해 이 가설을 기각하는 일련의 과정은 마장디가 가설과 관계맺는 방식을 보여준다. 마장디는 비샤가 상상력을 발휘해 제기한 가설, 혹은 가설적 개념인 ‘유기적 감수성’을 복막에 독을 주입하는 말 그대로 ‘간단한 실험’을 통해 반증한다. 실험가는 가설과 두 가지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 실험가는 가설을 실험을 통해 입증할 대상으로 취할 수도 있고, 반증할 대상으로 취할 수도 있다. 여기서 전자의 관계만을 고려한다면, 마장디만큼이나 가설과 멀었던 실험가도 없었을 것이다. 반면 후자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그의 시대에, 그만큼이나 다수의 생리학적, 의학적 가설과 가까웠던 생리학자를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45)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과학적 생리학과 실험의학의 도래를 앞당기는 주체가 의견공동체일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마장디는 자신의 가설을 건축하기보다는 다른 학자의 가설에서 쓸만한 사실을 추려내는 넝마주이를 자처하는 데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5. 맺음말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마장디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는 그가 실험의학의 선구자라는 평가, 그가 스스로 주장했던 바와는 달리 가설을 사용했다는 평가, 그리고 가설을 멀리하고 사실에만 집착했다는 평가가 공존한다. 이 중 마지막 평가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마장디의 제자였던 베르나르에 이른다. 그런데 베르나르는 실험은 가설 없이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수없이 많은 실험을 수행한 마장디를 가설을 멀리한 인물로 간주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장디 본인이 가설, 개념, 체계, 추측 등에 대해 분명한 반감을 드러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로부터 어떻게 마장디가 실험가이면서도 가설을 멀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마장디가 실험의학의 기획을 제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았다. 마장디는 그에 앞선 생리학의 역사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생리학이 물리-화학에 비해 뒤처져 있으며, 생리학의 진보가 물리-화학에서 성공을 거둔 실험적 방법의 도입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교류하던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이 생리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입장과 상통한다. 마장디는 아카데미 회원들 중에서도 특히 라플라스와의 친분이 깊었는데, 라플라스는 젊은 시절 라부아지에와 함께 생리학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바 있다. 이 사실과 마장디의 저서에 나타나는 라부아지에에 대한 긍정적 인용을 근거로 우리는 그를 라부아지에와 화학계에서 이뤄지던 연구의 양상에 연관지었다.
라부아지에가 수행한 실험연구를 살펴보면 18세기 말 화학계에 공동연구의 풍토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공동연구는 방법의 일반성과 반복 실험의 가치를 인정하는 학자들의 의견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졌다. 반면 생리학계에는 이러한 풍토가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 이는 공동연구가 이루어지는 과학적 실험실의 부재에 대한 베르나르의 한탄을 통해 알 수 있는바이다. 마장디의 저작에 나타나는 과학에 있어 천재와 범인에 대한 비교와 본인과 쓰레기를 뒤지는 넝마주이와의 비유는 그가 본인이 의견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이라는 의식을 갖고 연구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공동연구의 관념을 상정하면 마장디가 어떻게 가설을 멀리하면서도 실험가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의견 공동체에 속한 실험가는 반증하려는 의도에서 다른 실험가의 가설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가설 없이도 실험할 수 있다.
우리는 마장디가 수행한 반증 실험의 사례로 막의 침윤성을 보이는 실험을 살펴보았다. 이 실험은 특정 막이 그 속성에 부합하는 액체만을 선별적으로 흡수하며, 그렇지 않은 액체나 유해한 액체는 흡수하지 않고, 이것이 유기적 감수성에 의한 것이라는 비샤의 가설을 반증한다. 마장디는 어느 막으로 흡수되어도 유해할 독인 마전자 알콜 용액이 늑막을 통해 침윤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보여준다. 엄밀히 말해 여기서 마장디는 비샤의 가설을 토대로 본인의 실험을 설계했다. 그러나 이러한 엄밀함은 라부아지에가 출처 표기 없는 차용에 미리 양해를 구하던 이 시대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의견공동체를 상정한 채 실험을 수행하던 마장디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가설에 따라 실험을 진행하지 않았지만, 다른 학자의 가설을 취해 실험을 수행한 마장디를 가설을 멀리한 실험가라 평할 수는 없다.
본 연구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마장디의 사례는 유럽 의학사 서술에 있어 상이한 접근법이 필요한 시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소수의 실험적 사실로부터 추론과 직관을 통해 어떤 결론에 이르는 연구, 그 추론과 직관의 고유함과 대범함이 한 명의 천재로 주의를 끄는 연구들은 서로 영합하고 분기한다. 이러한 종류의 연구가 이뤄지는 시대에 대해서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서술이 가능할뿐더러 적절하다. “비샤는 슈탈과 바르테즈를 계승하는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황수영, 2012: 152)” 여기선 ‘학자-개념’ 혹은 ‘학자-가설’이 역사적 서술의 단위가 된다. 반면 실험을 통해 밝혀진 사실들은 비판과 계승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 사실들은 축적된다. 리히텐타엘러는 마장디 사후 의학에 큰 영향을 미친 물리-화학적 발견의 목록을 제시하는데, 여기에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요소의 합성(1828, 뵐러), 촉매 반응(1835, 베르젤리우스), 위액 내 펩신에 의한 알부민 소화(1836, 슈반), 광학 이성질체(1848, 파스퇴르), 4차 탄소(1858, 케쿨레), 분자와 원자의 정의(1858, 카니차로), 스펙트럼 분석(1859, 키르초프, 분센), 콜로이드와 투석(1860/61, 그래햄), 벤젠의 육각 구조(1865, 케쿨레), 삼투(1897, 페페), 전해질 분해(1884, 아레니우스), 엑스선(1895, 뢴트겐), 방사선(1896, 베크렐), 라듐(1898, 퀴리부부), 양자 에너지(1900, 플랑크), 광자 에너지 가설(1905, 아인슈타인), 산도(ph)의 정의(1909, 쇠렌센), 동위성(1910, 소디), 유기화합물 미량분석(1912-14, 프레글)(Lichtenthaeler, 1978: 429)’. 이 ‘학자-사실’로 서술된 역사에 계승되거나 비판되는 것은 없으며, 따라서 엄밀히 말해 이는 역사적 서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목록이다.
이처럼 의견 공동체의 공동연구가 수행되는 시기에는 두 개의 층위, 사실이 축적되는 층위와 역사적 서술의 층위가 분리된다. 여기서 역사적 서술의 단위는 의견 공동체에서 공유되고 유통되는 개념, 이론, 지도 이념, 그리고 본 논문을 통해 보였듯 공동연구라는 연구의 수행 방식에 대한 관념과 같은 비개인적 요소들이다. 물론 한 학자는 자신의 경력과 연구 속에서 이 요소들을 정합적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주어진 요소들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이차적인 것이다. 의견공동체가 등장하고 일차적인 것, 즉 비개인적 요소들이 여기 녹아드는 시기를 다룰 경우, 이 요소들을 면밀히 파악하지 않고 평가를 시도한다면 ‘가설을 멀리한 실험가’ 같은 역설을 그 자체로 용인하게 될 위험이 크다.
본 연구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는 마장디가 다른 학자의 가설을 실험을 통해 반증하는 사례로 비샤에 대한 반박 사례 하나만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가 실험이라는 시험대에 올린 가설은 이보다 더욱 많았다. 더 많은 반증 사례들을 검토함으로써 본 논문에서 개진된 주장들 또한 시험대에 올려볼 필요가 있다. 둘째로 우리는 마장디의 실험의학과 경쟁 관계에 있던 병원 의학을 다루지 않았다. 병원 의학이 집중한 대량의 자료 축적과 취합에 근거한 통계적 방법은 공동 작업을 요했다. 본 논문의 요지와 관련하여 이 공동 작업의 양상에 대해 마장디가 취한 입장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마장디가 의사로서 행했던 임상 실천을 살펴보지 않았다. 마장디는 진료실에서의 치료가 실험실에서의 지식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실험의학을 정초하기 위한 사실이 아직 부족하다고 간주했다. 엄밀하게 검증된 사실이 축적되길 기다리는 태도와 긴급하게 제기되는 치료의 필요성 사이에 마장디가 택했던 전략을 살펴보는 것은 현대적 의학의 실천에 대해서도 던져주는 교훈이 있을 것이다. 이상의 한계들을 보완할 후속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Notes

1) 앞 문단과 이 책의 제목을 보면 ‘실험의학’과 ‘실험생리학’이라는 용어의 구분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캉길렘과 마즐리악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마장디나 베르나르 같은 학자들도 이 두 표현을 명확한 정의 없이 번갈아 사용한다. 연구에 있어 이러한 정의의 부재는 문제적이다. 한기원은 논문을 통해 이를 지적하고 자신의 견해를 개진한 바 있다(한기원, 2010: 515-516). 본 논문에서는 이 두 용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사용할 것이다. 상기 두 용어에서 ‘실험’은 방법에, ‘의학’은 치료라는 목적에, ‘생리학’은 생명체의 정상상태라는 대상에 결부되어 있다. 즉 실험의학은 실험적 방법을 통해 치료라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실천이며, 실험생리학은 실험적 방법을 통해 생명체의 정상상태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는 탐구이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치료와 생리학적 지식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은 없다는 것이다. 마장디와 베르나르는 이 연관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이들이 공유하는 특징적 견해에 근거한다. 이 두 학자는 콩트 철학의 영향이 강했던 시기에 활동했다(Mazliak, 2012: 175-181; Canguilhem, 1966: 23-66). 콩트에 따르면 행위는 지식으로부터 도출되는데, 의학의 영역에서라면 이는 치료행위가 생명체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마장디와 베르나르는 생리학을 생명체에 대한 지식의 토대로 간주한다. 즉 이들에게 있어 치료라는 행위를 이끌어낼 생명체에 대한 지식은 실험생리학을 통해 얻어진 지식이다. 따라서 실험생리학이 완성되면 실험의학은 그로부터 도출된다. 이러한 점에서 마장디와 베르나르에게 실험생리학과 실험의학은 하나의 동일한 기획의 상이한 실현 단계를 지시하는 용어였다. 마장디는 병리적 현상이 변형된 생리적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병리학도 생리학이라 간주했다(François Magendie, Phénomènes physiques de la vie, Tome II, p. 14). 베르나르는 경험주의 의학의 시대가 끝나면 생리학을 토대로 병리학과 치료학이 통합될 것이며(Claude Bernard, L’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médecine expérimentale, pp. 6-7), 해부학은 생리학에 있어 물리-화학과 같은 보조 과학(sciences auxiliaires)이라 여겼다.(Ibid., p. 128.)

2) 여기서 두 권의 책은 올름스테드(J.M.D. Olmsted)와 루시앙 들루아예(Lucien Deloyers)의 책을 의미한다. J.M.D. Olmsted, François Magendie. Pionner in experimental physiology and scienctific médicine in XIX century France (New Yors: Schuman’s, 1944); L. Deloyer, François Magendie. Précurseur de la médecine expérimentale (Bruxelles: Presses universitaires de Bruxelles, 1970). 마장디에 대한 연구가 미비하다는 사실이 지적된 것 자체가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프랑스 의사학회(Société française d’histoire de la médecine)가 1983년 마장디 탄생 200주년을 맞아 개최한 학회의 개회사에서 장 테오도리데스(Jean Théodoridè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장디에 관련된 세 권의 책이 있다. 첫째는 올름스테드의 책으로, 미국인이 영어로 쓴 책이다. 둘째는 들루아예의 책으로 프랑스어로 쓰였으나 저자는 벨기에인이며 브뤼셀에서 출판되었다. 세 번째는 펠리치아노 구티에레즈(Feliciano Gutiérrez)의 책으로, 카탈루냐어로 쓰였다. 즉 근자에 프랑스에서 출판된 마장디에 관련된 책은 한 권도 없다.” 즉 테오도리데스와 마즐리악 사이의 30여 년 동안 마장디에 대한 연구는 정체되어 있었던 것이다.

3) 마즐리악의 마장디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마즐리악은 생기론자에 반해 실험적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한 마장디의 공적을 인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즐리악은 마장디에게 생리학의 과학적 전개 과정에 대한 전반적 고찰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평가한다(Mazliak, 2012: 172). 마즐리악에 따르면 이러한 한계가 마장디가 명성에 걸맞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 즉 본인의 결론의 제목에서 썼듯 ‘잊힌’ 이유이다.

4) 이 점에 대해선 인용된 존 레쉬의 저서 Science and Medicine in France. The Emergence of Experimental Physiology, 1790-1855에 대한 윌리엄 알버리(Willam Albury)의 서평 또한 참조하라. 이 서평에서 알버리는 레쉬가 마장디가 ‘사실 넝마주이’라는 베르나르의 평가에 도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Albury, 1984: 1230). 후술하겠지만 베르나르의 이 평가가 최초로 마장디의 한계를 지적한 사례이다.

5)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은 이 발표문에서 루스 치코(Ruth Chico)와 호세 레시오(José Récio)는 마장디가 『기본 생리학 입문』에서 언급한 실험들, 그중에서도 특히 7가지 실험(발성에 관한 실험, 유미(chyme)의 형성에 관한 실험, 정맥 흡수에 관한 실험, 혈액의 색상 변화에 관한 실험, 폐의 증산작용에 관한 실험, 동맥에서 정맥으로의 혈액 이동에 관한 실험, 동물의 체온조절에 관한 실험)을 분석한다. 이들에 따르면 마장디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가설에 입각하여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두 저자는 그가 가설을 멀리한 실험가가 아니며, 실험생리학을 정초한 공은 베르나르가 아니라 마장디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Chico&Recio, 2015).

6) Claude Bernard, Principes de médecine expérimentale, p. 81.

7) Ibid., p. 48.

8) Ibid., p. 129.

9) Claude Bernard, 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médecine expérimentale, pp. 91-92.

10) Ibid., p. 23.

11) ‘생명 존재’라는 용어의 함의에 대해서는 한희진의 논문 「조르주 캉귈렘(1904~1995)의 생명 존재에 대한 이해」, 특히 156-158쪽을 참조하라.

12) G. E. Stahl, De vera diversitate corporis mixti et vivi, Halae, 1707, §49.

13) Caspar Friedrich Wolff, Theoria generationis, Halle, 1759. §4

14) Johann Friedrich Blumenbach, Über den Bildunstrieb, Göttingen, 1791, p. 32.

15) 여기서 ‘체계적’이라는 표현은 사실에 대한 실험적 확인을 등한시하고 전제와 원리들 사이의 정합성만을 고려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아래 인용한 『기본 생리학 입문』서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6) François Magendie, Précis élémentaire de physiologie, Préface à la première édition.

17) François Magendie, Précis élémentaire de physiologie, Préface à la deuxième édition.

18) F. Magendie, Mémoire sur l’usage de l’épiglotte dans la déglutition. 총 36쪽인 이 소책자에는 12쪽 분량의 마장디의 논문과 14쪽 분량의 퍼시와 피넬의 논문 심사평, 실험 시연 참가 후기가 포함되어 있다.

19) Ibid., p. 13.

20) Ibid., p. 14.

21) 몽티용 상에 관해서는 한기원의 논문 513쪽의 5번 각주를 참조. “1818년 제정된 몽티용 상은 실험생리학 분야를 위해 특별히 제정된 것이었다. 당시 아카데미를 주도하던 라플라스와 퀴비에는 특히 마장디와 플루랑을 염두에 두고 이 제도를 만들었다. 이들 두 젊은 생리학자들의 실험적 연구 경향은 모든 자 연과학 분야를 물리학과 화학의 예를 따라 실험과학화하려던 아카데미의 의도에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당시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곧 마장디와 플루랑은 각각 콜레쥬 드 프랑스와 자연사 박물관의 교수로 임용되었고,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지원은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되었다(한기원, 2010: 513).”

22) François Magendie, Précis élémentaire de physiologie, Tome II, p. 286, 358, 397.

23) Lavoisier et Laplace, “Mémoire sur la chaleur”,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p. 355.

24) 얼음열량계의 구조와 용법에 대해서는 권복규 외의 논문 5쪽 각주 16번을 참조. 얼음열량계는 “삼중의 통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바깥과 중간 통의 사이에는 열평형을 유지하기 위한 얼음이 들어 있고 중간 통과 안쪽 통 사이에는 열용량을 재기 위한 얼음이 들 어 있다. 외부와 열평형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안쪽 통에 동물을 넣고 밀폐하면 안에 있는 공 기를 사용하여 동물이 호흡을 하면서 발생하는 열이 안쪽 통과 중간 통 사이의 얼음을 녹여 그 물이 흘러 나오게 된다. 이 물의 무게를 측정하여 발생한 열의 용량을 재게 된다(권복규 외, 1997: 5).”

25) Antoine-Laurent Lavoisier,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 p. XXVIII.

26) Claude Bernard, Rapport sur les progrès et la marche de la physiologie générale en France, p. 153.

27) 불어 카비네는 화학 혹은 물리학 실험실을 의미하지만, 환유적으로 실험실에 비치된 모든 기구를 총칭하기도 했다. 이에 관해선 불어 사전 TLFi의 ‘Cabinet’ 항목을 참조(https://www.cnrtl.fr/definition/cabinet). 인용문의 ‘카비네’는 바로 뒤에 실험실이 언급되므로 실험실에 비치된 기구 일체, 혹은 기구 일체가 비치된 공간을 의미한다.

28) Ibid., p. 143.

29) Ibid., pp. 235-236.

30) François Magendie, Phénomènes physiques de la vie, Tome II, p. 13.

31) Ibid., p. 96.

32) Ibid., p. 128.

33) Ibid., p. 96 .

34) Ibid., pp. 13-14.

35) Claude Bernard, Fr. Magendie, Leçon d’ouvertur du cours de médecine au Collège de France, pp. 12-13. 베르나르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첫 강의를 스승 마장디에게 바쳤다. 넝마주이라는 표현은 베르나르가 스승과 나눴던 대화를 회상할 때 등장한다. “마장디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스스로를 자신의 분야에서 다소간 위대한 이들, 예컨대 아르키메데스, 미켈란젤로, 뉴턴, 갈릴레이, 데카르트와 같은 이들에 빗댄다. 루이 14세는 스스로를 태양에 비유했다. 이보다 훨씬 겸손한 나는 스스로를 넝마주이에 빗댄다. 나는 손에는 갈퀴를 들고, 등에는 망태기를 진 채로 과학의 영역을 돌아다니며 내가 발견한 것들을 그러모은다.”

36) François Magendie, Phénomènes physiques de la vie, Tome II, pp. 48-49.

37) Ibid., p. 16.

38) François Magendie, Phénomènes physiques de la vie, Tome I, pp. 266-267.

39) 마장디 본인도 ‘간단한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Ibid., p. 144.). 여기서 마장디는 장티푸스에 걸린 경우 조직 실질 내 삼출물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장티푸스가 전염병이 아니라 혈액 자체의 점성(viscosité)이 변화하는 질병은 아닐지 자문한 후, 이를 ‘간단한 가설’이라 칭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발진티푸스, 황열병, 괴혈병과 같은 전염병도 혈액의 점성이 변화하는 병은 아닐지 자문한다(Ibid., p. 102). 이는 마장디가 본인의 가설을 제시하는 드문 사례 중 하나이다. 183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1842년 출판된 이 강의에서 그는 이 가설을 매우 신중한 어조로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후일 이는 다소 급진화되고 마장디는 ‘반전염병론자’로서의 입장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1848년 설립된 프랑스 공중보건 고등위원회(Conseil supérieur d’hygiène publique de France)의 위원장으로 임명된 이후 그는 반전염병론에 입각하여 정책을 제안했다(Mazliak, 2012: 163). 이러한 태도 상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40) 이에 관해선 다음을 참조하라. Xavier Bichat, Traité des membranes, Nouvelle édition, p. 109. 마장디의 주석; Ibid., p. 119. 비샤의 장액막에 관한 서술; Xavier Bichat, Recherches physiologiques sur la vie et la mort, Nouvelle éidition, p. 365. 로랑 스리즈(Laurent Cerise, 1807-1869)의 주해; Paul Mazliak, François Magendie, Bouillant Créateur, pp.133-136.

41) Xavier Bichat, Traité des membranes, op.cit., p. 109, Note 1.

42) François Magendie, Phénomènes physiques de la vie, Tome I, p. 18.

43) Ibid., p. 21.

44) 마장디는 마전자 알콜용액의 치사량과 사람에게 투여했을 때의 효과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François Magendie, La préparation et l’emploi de plusieurs nouveaux médicaments, pp. 3-6.

45) 치코와 레시오도 이와 유사한 결론을 제시한다(Chico&Recio, 2015). 그러나 이들의 결론은 세부적인 차원에서 본 논문의 결론과는 다르다. 첫째로 이들이 분석한 마장디의 7가지 실험 중 마장디가 본인의 가설을 직접 제시하는 경우는 ‘발성에 관한 실험’하나이다. 다른 실험에서 마장디는 자신의 가설이 아니라 실험으로 입증/반증 가능한 형태로 변환된 다른 학자의 가설을 사용한다. 즉 마장디는 여전히 ‘자신의 가설’로부터는 거리를 둔다. 본 논문은 그가 이러한 태도를 취한 이유에 대한 정황적 설명을 제시한다. 둘째로 베르나르의 실험가-생리학자에 대한 언급을 통해 알 수 있듯, 마장디 이전에도 실험적 방법에 근거한 생리학 연구를 수행한 학자들은 존재했다. 따라서 마장디의 의학사적 기여가 생리학의 실험 방법을 정초했다는 데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본 논문은 그의 기여가 공동연구의 관념을 상정한 생리학 연구를 주창한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발표문은 참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후에 이 발표문이 정식으로 출판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참고문헌 REFERENCES

1. Bernard, Claude, Fr. Magendie, Leçon d’ouverture du cours de médecine au Collège de France (Paris: Baillière, 1856).

2. Bernard, Claude, 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médecine expérimentale (Paris: Baillière, 1865).

3. Bernard, Claude, Rapport sur les progrès et la marche de la physiologie générale en France, (Paris: L’Imprimerie impériale, 1867).

4. Bernard, Claude, Principes de médecine expérimentale, Ouvrage posthum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47).

5. Bichat, Xavier, Traité des membranes (Paris: Méquignon-Marvis, 1802); Nouvelle édition revue et augmentée de notes par M. Magendie (Paris: Méquignon-Marvis, 1827).

6. Bichat, Xavier, Recherches physiologiques sur la vie et la mort (Paris: Brosson, Gabon et Cie., 1799); Nouvelle édition précédée d’une notice sur la vie et les travaux de Bichat, et suivie de notes par Laurent Cerise (Paris: Charpentier, 1852).

7. Lavoisier, Antoine-Laurent, Pierre-Simon Laplace, “Mémoire sur la chaleur”,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Année 1780 (Paris: L’Imprimerie royale, 1784).

8. Lavoisier, Antoine-Laurent,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 (Paris: Chez Cuchet, 1789).

9. Magendie, François, Mémoire sur l’usage de l’épiglotte dans la dégulutition (Paris: Méquignon-Marvis, 1813).

10. Magendie, François, Précis élémentaire de physiologie, Tome I (Paris; Chez Méquignon-Marvis, 1816); 2e édition (Paris: Méquignon-Marvis, 1825).

11. Magendie, François, Précis élémentaire de physiologie, Tome II (Paris: Méquignon-Marvis, 1817).

12. Magendie, François, La préparation et l’emploi de plusieurs nouveaux médicaments (Paris: Méquignon-Marvis, 1822).

13. Magendie, François, Phénomènes physiques de la vie, Leçons professées au Collège de France, Tome I-IV (Paris: Baillière, 1842).

14. 권복규 외, 「호흡 개념의 역사적 변천 과정」, 『의사학』 6-2 (1997), 241-250쪽.

15. 박찬웅, 「끌로드 베르나르는 생기론자인가 – 실험의학연구서설을 중심으로」, 『의철학연구』 22 (2016), 3-30쪽.

16. 한기원, 「클로드 베르나르의 일반생리학: 형성과정과 배경」, 『의사학』 19-2 (2010), 507-552쪽.

17. 한희진, 「폴-조제프 바르테즈(1734-1806)의 생기론」, 『의사학』 19-1 (2010), 157-188쪽.

18. 한희진, 「조르주 캉귈렘(1904~1995)의 생명 존재에 대한 이해」, 『철학연구』 96 (2013), 153-179쪽.

19. 황수영, 「자비에르 비샤의 의학사상: 프랑스 생기론의 역사적 맥락에서」, 『의사학』 21-1 (2012), 141-170쪽.

20. Albury, William, “Magendie and His Milieu”, Science 224 (1984), pp. 1229-1230.

21. Bange, Christian, Bange, Renée, “À l’hombre ou en marge de Claude Bernard: la physiologie à Paris à la fin du XIXème siècle(1878-1905)”, Bulletin d’histoire et d’épistémologie des sciences de la vie 17 (2010), pp. 51-68.

22. Beretta, Marco, “Big Chemistry: Lavoisier’s Design and Organisation of His Laboratories”, Marta Lourenço, Ana Carneiro, eds., Space and collections in the History of Science (Lisbon: Museum of Science of the University of Lisbon, 2009), pp. 65-80.

23. Canguilhem, Georges, Le normal et le pathologique, 1re édition “Galien”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66).

24. Canguilhem, Georges, “L’idée de médecine expérimentale selon Claude Bernard”, Études d’histoire et de philosophie des sciences (Paris: Vrin, 1968); 7e édition augmentée (Paris: Vrin, 1994).

25. Canguilhem, Georges, Idéologie et rationalité dans l’histoire des sciences de la vie, (Paris: Vrin, 1977); 2e édition (Paris: Vrin, 2000).

26. Chico, Ruth García, Recio, José Luis González, “François Magendie: From Dogmatic Empiricism to the Practice of Experimental Reasoning”, PhilSci Archive, https://philsci-archive.pitt.edu/11556/ Accessed 2024.10. 27.

27. Lehman, Christine, “Les lieux d’activité du chimiste Pierre-Joseph Macquer(1718-1784): laboratoires et instruments”, Revue d’histoire des sciences 72 (2019), pp. 221-254.

28. Lesch, John, Science and Medicine in France. The Emergence of Experimental Physiology, 1790-1855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4).

29. Lichtenthaeler, Charles, Histoire de la médecine (Paris: Fayard, 1978).

30. Legée, Georgette, “La physiologie française pendant la première moitié du XIXe siècle”, Gesnerus 45 (1988), pp. 211-238.

31. Mazliak, Paul, François Magendie, bouillant créateur de la physiologie expérimentale au XIXe siècle (Paris: Hermann, 2012).

32. Olmsted, James Montrose Duncan, François Magendie. Pioneer in Experimental Physiology and Scientific Medicine in XIX Century France, (New York: Schuman’s, 1944).

33. Rey, Roselyne, “La théorie de la sécrétion chez Bordeu, modèle de la physiologie et de la pathologie vitalistes”, Dix-huitième Siècle 23 (1991), pp. 45-58.

34. Temkin, Owsei, “The Philosophical Background of Magendie’s Physiology”, Bulletin of the History of Medicine 20 (1946), pp. 10-35.

35. Théodoridès, Jean, “Introduction”, Histoire des sciences médicales 17 (1983), p. 321.

TOOLS
PDF Links  PDF Links
PubReader  PubReader
ePub Link  ePub Link
Full text via DOI  Full text via DOI
Download Citation  Download Citation
  Print
Share:      
METRICS
0
Crossref
0
Scopus
223
View
20
Download
Related article
Editorial Office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partment of Humanities and Social Medicine, College of Medicine, 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222 Banpo-daero, Seocho-gu, Seoul, Korea (06591)
TEL: +82-2-3147-8306   FAX: +82-2-3147-8480   E-mail: medhistory@hanmail.net
About |  Browse Articles |  Current Issue |  For Authors and Reviewers |  KSHM HOME
Copyright ©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veloped in M2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