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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3(1); 2014 > Article
한국의 세계보건기구(WHO) 가입과정과 1950년대의 사업성과

Abstract

The Republic of Korea(ROK) and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WHO) have done many projects successfully from 1949, in which the government of First Republic joined the WHO. However the relation between the ROK and the WHO have not been studied very much so far. The main purpose of this research, which could be done by the support of WHO, is connected with three questions.
First research point would be “how could the ROK joined WHO in 1949 and what’s the meaning of it? And the what’s the difference in the process for the WHO between the ROK of 1949 and the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of 1973?” The first president of the ROK, Rhee Syngman, who had received his Ph. D.(about international politics) from Princeton University in 1910, was strongly interested in joining international institutes like UN, WHO. The ROK that could join WHO on 17 August 1949, with the approval of Assembly on 25 May 1949, was one of the founder members of the Western Pacific Region. By joining WHO, the ROK could get chance to increase the level of public health and its administration in 1950’s. But the DPRK manage to became a member of WHO on 19 May 1973 and joined the South-East Asia Region. The joining of DPRK was influenced by the easing of the cold war after the Nixon Doctrine and the joining of the China(People’s Republic of China).
Second research point would be “What kind of roll did the WHO take in the First Republic?” Yet the public health administration of the First Republic that had been made in the period of US army military government was been strongly influenced by USA, the roll of WHO was also important in the 1950’s.
Last research point would be “What kind of the projects did the ROK and the WHO take part in during the period of he First Republic? How could evaluate the results?” The ROK and the WHO handled the projects including health services, communicable disease prevention and control, control of noncommunicable diseases, and protection of health. Specially for the efforts to prevent communicable disease, the WHO focused on leprosy, malaria, measles, smallpox, tuberculosis in 1950’s. The First Republic could overcome the bad health condition after the Korea War successfully, supported by WHO.

1. 서 론

최근 국력의 신장으로 남한이 세계적인 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상승하고 있다. 의학부분에서는 세계보건기구(WHO, 이하 WHO로 표기)와의 관계가 대표적인데, 남한은 WHO의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던 국가에서 체계적인 지원을 하는 국가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과 WHO 둘 사이의 초기 관계가 아직 학문적으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 논문은 남한이 WHO에 가입하는 과정을 규명하고, 가입 이후 WHO의 지원 속에서 제1공화국의 보건행정이 큰 영향을 받았으며, 국내의 보건 상황 개선이 상호 협력과 공동 사업을 통해 추진되었음을 밝히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 이 연구의 배경에는 모두 세 가지 목적이 있다. 우선, “남한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WHO에 가입하였으며, 북한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남한의 보건 역사에서 중요하지만 그간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고자 하며, 그 과정에 대해 구체적인 해석을 가하고자 한다. 둘째, “제1공화국의 보건행정은 WHO 가입 이후 WHO와 어떠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이 부분 역시 그동안 거의 연구되지 못하였다. 셋째, “남한은 WHO로부터 제1공화국 시기 어떤 부분에서 지원을 받았으며, 그 성과는 무엇인가?”이다. WHO가 국내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 그간 거의 연구된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별로 알려지지 못한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해방 이후 미군기 보건정책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 성과도 있었다(신좌섭, 2000). 또한 미네소타 프로젝트 등 외국에 의해 제공받은 원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성과들도 있었다(이왕준, 2006). 외국인 연구자에 의한 해방이후 우리나라의 의학사에 대한 연구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DiMoia, 2013). 나아가 국제기구 혹은 국제 보건학에 대한 연구서들도 간행된 바 있다(박재영, 2007; 한상태·김한중·남은우, 2008). 이러한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최근 의학사 교과서와 같은 성격의 연구서도 출간된 바 있다(여인석·이현숙·김성수·신규환·박윤형, 2012). 최근 수행된 이들 연구들은 각기 해당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남한과 WHO의 상기 언급한 주제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행해진 것이 사실상 별로 없는 실정이다. 이는 이와 관련된 사료를 접하기가 어려운 부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제네바에 있는 WHO 본부의 자료에 접근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다가, 남한 정부측 자료 역시 그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이 소실되었고, 이후 여러 정부가 교체되면서 관련된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보관되지 않았기 때문에 WHO와 관련된 역사가 그간 연구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서두에서 언급한 세 가지 부분을 규명하고자 한다.

2. 남한의 세계보건기구 가입

1) 세계보건기구(WHO)의 출범과 남한과의 관계

서론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 우선 WHO에 대해 간단히 고찰해보고자 한다. WHO는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들이 제3세계로 본격적으로 진출함에 따라 전염성 질병이 국제적인 문제로 부상하면서, 그 대응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생기게 되었다. 특별히 그 기원은 프랑스 파리에서 1851년 7월부터 1852년 1월까지 열린 국제위생회의(International Sanitary Conference)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회의에는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그리스, 교황령(Papal States), 포르투갈, 러시아, 사르디니아, 시칠리아 두 국가, 에스파냐, 터키 그리고 투스카니 등 모두 12개 국가가 참여하였다(WHO, 1958: 4).
이후 열린 5번의 국제위생회의에서는 참가국들 사이에 합의점 도달에 실패하였다. 하지만 제7차 회의가 이탈리아 베네치아(1892년), 제8차 회의가 독일 드레스덴(1893년), 제9차 회의가 프랑스 파리(1894년), 제10차 회의가 이탈리아 베네치아(1897년)에서 콜레라와 페스트를 주제로 열리게 되었다(Howard-Jones, 1974: 28, 159-171, 229-247, 369-384, 414-426, 455-470, 495-508). 이들 회의가 근간이 되어 단일한 국제위생회의가 1903년 파리에서 제11차 회의의 형태로 통합되어 열리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국제 협력을 통해 마침내 1948년 4월 7일 WHO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한편 WHO 설립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 보건의 날(World Health Day)이 정해졌다(WHO Regional Office for the Western Pacific, 1998: 3-4).
국제 외교사 및 정치사에서 유엔(UN)을 제외하고 기술되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처럼 국제 의료 역사에서도 WHO의 역할을 제외하고 서술한다는 것은 사실상 힘든 상황이다. 또한 남한의 경우 해방 이후 WHO와 상호 간에 있어 지속적인 원조와 협력 속에서 체계적인 의료 보건 체계를 정립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2) 남한의 WHO 가입과정

특별히 본 장에서는 “남한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WHO에 가입하였으며, 북한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를 규명하고자 한다. 남한이 WHO에 가입하게된 데에는 모두 세 가지 요인이 그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우선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은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국제 외교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였던 점이다. 비록 학위 취득과정에 있어서 특별한 사정을 인정받아 불과 5년 만에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하기는 하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외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정병준, 2005: 87-91; 최정수, 2011). 일례로 그는 1919년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시도할 정도로 외교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이승만은 1919년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후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장이 되면서 줄곧 적극적인 외교 독립론을 주창한 바 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정부에서 배제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줄곧 외교적인 방법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던 것이다(유영익, 2000; 오영섭, 2012: 1-67; 정병준, 2005: 95-271).
더불어 뒤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는 남북 분단 상황에서 정치, 경제, 국방 문제 등에서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원을 여러 차례 호소한 바 있었다(남정옥, 2010). 이에 상임이사국의 반대가 있으면 가입할 수 없었던 국제연합(UN)과 달리 WHO는 회원국의 찬반 투표로 가입할 수 있었기에 이승만 정부에 있어서 WHO 가입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WHO 가입을 통한 국내 보건의 향상은 민심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효율적인 홍보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제1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직후부터 이승만 대통령은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고자 노력하였는데, WHO의 가입은 중요한 가시적인 성과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정부가 WHO 가입을 서두른 것은 해방 이후 당시 경제 및 보건 부분에서 국내의 보건 상황이 크게 열악하였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공장 등 대부분의 생산 시설이 북한에 있었기에 남한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형평이었지만, 북에서 남으로 이주한 실향민들이 대거 늘어나 인구가 폭증하면서 남한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에 남한의 경우 미군정시기 통화량이 크게 증가할 정도로 경제여건이 좋지 않았다. 이러한 부분에서 보건 상황도 매우 좋지 않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남한에서는 1946년 5월 일어난 콜레라를 비롯해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 창궐하였고, 의료진의 수는 크게 부족하였다(방숙, 2012: 17-21). 그렇기에 이승만 정부는 새로 만들어진 국제기구인 WHO에 가입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셋째, 제1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할 것으로 예상된 것도 이승만 정부가 WHO 가입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였다. 미군정기 동안 대부분의 남한 체제는 일제의 체계에서 벗어나 각 부분별로 이른바 미국화를 지향하게 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이시기 남한은 대규모의 미국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서 상황은 미묘하게 바뀌었고, 이승만 정부 역시 미국의 지원에만 의존하기에는 여의치 않은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남정옥, 2010: 221). 이에 보건 부분에서도 국제협력의 새로운 기관으로 부상한 WHO에 대한 가입은 상당히 중요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남한이 WHO에 가입 및 협정을 맺게 되는 과정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이승만 정부가 WHO 가입을 위해 제반 여건을 확인하던 시기, 둘째 이승만 정부가 WHO 가입을 위해 국내적인 절차를 진행하고 마무리 한 시기, 셋째 이승만 정부가 WHO에 가입한 이후 첫 협정을 맺게 되는 시기 등이 그것이다.
먼저 이승만 정부가 WHO 가입을 위해 제반 여건을 확인하던 시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WHO는 1948년 설립 이후 6개의 지부로 운영되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동지중해 지역(East Mediterranean Area), 서태평양 지역(Western Pacific Area), 동남아시아 지역(South-East Asia Area), 유럽 지역(European Area), 아프리카 지역(African Area), 아메리카 지역(American Area) 등이다(WHO, 1958: 76-77). 따라서 원론적으로 대한민국은 서태평양 지역에 해당되는 국가이다.
주지하듯이 제1공화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수장으로 하여 1948년 8월 15일 출범하였다. 그런데 정식으로 정부가 출범하기 전에 이미 이승만은 WHO 총회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그와 같이 가입을 서둘렀던 것은 비록 첫 정부가 출범하기는 하였지만, 남과 북으로 분리된 상황에서 열악한 보건행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지원이 절실하였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WHO의 제1회 세계보건총회는 1948년 6월 24일에 개막하여 같은 해 8월31일까지 지속되었다(WHO Regional Office for the Western Pacific, 1998: 13). 이에 이승만 정부는 총회에 최창순(崔昌順) 사회부 차관을 파견하여 옵서버로 이 총회에 참가하여 대한민국이 WHO에 가입할 수 있도록 지지해 줄 것을 참가한 국가들의 대표단에게 호소하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 남한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겪고 있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였다(WHO, Official Records, 13, 55). 이는 사실상 남한이 공식적인 보건 상황을 최초로 국제사회에 알린 사건이라고 판단된다. 이에 대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전략) 우리나라는 40년간의 일제 강점기 동안 큰 고난을 겪고 현재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한국의 보건 상황의 개선을 위해 여러분들의 위대한 활약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요구되는 그러한 활동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3천만의 한국 인구 가운데 공인된 의사는 2,000명에 불과합니다. 결핵 사망은 인구 10만 명 당 400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4세 이하 영 유아 사망이 전체 사망률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전염병의 경우에,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디프테리아, 폐렴이 사망의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한편 국가 전역의 성병의 확산은 공중 보건에 있어 중대한 위협입니다.

  • 나는 이번 회의가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기를, 그래서 인류의 건강이 이 국제기구의 활동으로 인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한편 당시 언론에서도 WHO 가입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동아일보는 1948년 12월 5일자 「유엔 보건기구에 한국가입을 고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최영태 박사의 근황을 소개하면서 그의 요청으로 미국보건기구로부터 100만 달러의 보건기금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동아일보는 이 금액은 “당시 세계에서 보건이 제일 좋지 못한 한국아동들을 위해서 사용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둘째, 이승만 정부가 WHO 가입을 위해 국내적인 절차를 진행하고 마무리 한 시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최창순 사회부 차관은 이후 귀국하여 우리나라가 WHO에 반드시 가입해야 할 것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당시 남한 정부가 세계보건기구 가입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1949년 3월 25일 작성된 보건사회부 문서인 「대한민국의 세계보건기구(WHO) 가입의 의의」라는 문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보건사회부, 1949).
  • 우리 대한민국은 UN 승인을 받은 독립국가로서 세계열강과 대오를 같이 하면서 세계인류평화와 문화향상에 공헌할 것을 자처할 진대 UN 기구 회원국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이며 그 분과기구인 UN 세계보건기구에도 응당 가입하여야 할 것이며 이 세계보건기구 가입이 우리 한국에 미치는 의의는 좌기 항목으로 열거된다.

    (1) 대한민국은 널리 세계 각국과 보조를 같이 함으로 교의(交誼)를 후(厚)히 하며 세계인류공존공영의 미덕을 발양한다.
    (2) 세계열강의 지도적 역량을 십분(十分)히 우리 한국에 유도함으로써 국내국민 보건문제를 선(善)히 운영할 수 있다.
    (3) 우리 한국은 세계보건기구헌장의 의무를 이행함으로 국제보건문제에 대한 책임을 수행할 수 있다.”
남한 정부는 1949년 4월 27일 국회에 WHO가입 신청 승인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었다. 이 요청은 5월 25일 국회를 통과하였는데, 당시 국회의장인 신익희(申翼熙, 1892-1956)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와 관련된 내용이 수록된 공문을 5월 30일 발송하였다. 당시 국회는 무소속이 다수를 구성하고 있었다. 친일파 처단, 반공 등의 문제를 놓고 여당 측과 비 여당 측의 갈등이 점차 첨예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조병옥, 1959; 김용직, 2012: 280-282). 이러한 상황에서 여야 간의 신속한 합의는 WHO 가입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남한이 WHO에 가입하기 위해 회원국들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었다. 세계보건을 위한 협력이라는 관점에서 독립된 주권을 확보하였던 남한이 WHO에 가입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WHO 가입의 확정을 위해 1949년 7월 3일 로마에서 열린 제2회 세계보건총회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당시는 이른바 냉전으로 표현되는 대립이 구체화되고 있던 시기였기에 기존의 회원국가들 중 사회주의 국가들의 반발이 상당히 강력하였던 것이다. 이 문제는 실상 국제연합(UN) 가입에 있어서도 남과 북이 대치되는 상황으로 인해 남북 모두 가입할 수 없던 상황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WHO가 국제연합(UN)과 다른 점은 상임이사국에 의한 거부권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에 남한의 가입 여부를 둘러싼 토론이 있은 후 찬반 투표 결과 33대 6으로 가입이 가결됨에 따라, 남한은 WHO의 65번째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하여 WHO 산하의 서태평양 지역(Western Pacific Region)에 속하게 되었다. 남한은 이 지역의 설립 국가들 중의 하나로 1949년 8월 17일에 가입하였던 것이다(WHO Regional Office for the Western Pacific, 1998: 19). 결국 남한의 WHO 가입은 냉전 체제가 시작되고 있던 당시 남과 북의 대치 상황 속에서 양측이 국제적으로 전개한 외교전 가운데 거둔 국지적인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이승만 정부가 WHO에 가입한 이후 첫 협정을 맺게 되는 시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950년 4월에 열린 제3회 세계보건총회에는 당시 남한의 보건부 초대 방역국장이었던 최영태(崔永泰, 1909-1992)가 첫 수석대표로 참가하였다. 처음에는 보건부 차관 이갑수(李甲秀)가 동행 하는 것으로 예정 되어 있었으나 경비관계로 인해 단독 대표로 변경되었다.
비록 한국전쟁의 혼란 상황으로 인해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1951년 9월 1일 남한과 WHO 간에 최초의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을 통해 이승만 정부는 WHO를 통해 필요한 선진 보건 정보 및 기술을 수집하고, 이를 국내에 적용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였다(대한민국 정부, 1951). 이러한 협정 내용 전문은 이승만 정부가 1951년 11월 27일 호외(號外)로 발행한 『관보』를 통해 국문과 영문으로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다. 호외에서는 이승만 정부가 국회의 동의를 얻어 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이 소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공보처, 1951).
상기 내용을 이해하기 이해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1951년의 정치적인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이어서 일어난 한국전쟁 등의 영향으로 사실상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기가 불가능해 졌다. 이에 그는 대통령 연임을 위해 자유당을 창당하고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통령 직선제를 목표로 하는 본격적인 개헌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는 휴전을 추진하고 있던 미국과 갈등이 심화되었던 것이다(김용직, 2012: 280-282). 이와 같은 갈등은 더욱 깊어져 1953년이 되면 이승만 대통령을 실각시키기 위한 쿠데타가 필요하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확산되기도 하였다(언더우드, 2002; 211).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놓고 정국이 혼란을 맞이하고 있던 1951년 당시, WHO와 본격적인 협정을 체결한 것을 전쟁 중의 상황에서 국민에 대한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는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이승만 정부는 1958년 “보건 진보의 10년”(Ten Years of Health Progress)라는 테마 하에 제7회 세계보건의 날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그런데 이 행사에 대해 정부는 해외에 보낸 공문에서 1958년이 세계보건기구 10주년, 유엔 10주년 그리고 동시에 남한정부 수립 10주년이 되는 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인 손창환(孫昌煥, Chang Whan Sohn)은 같은 해 3월 25일 윌리엄 원(Mr. William E. Warne, Economic Coordinator, UNC)에게 공문을 보내 행사에 참석하여 연설을 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상기 내용을 강조하였던 것이다(보건사회부, 1958). 이는 당시 제1공화국 정부가 WHO 가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정부는 이를 기념하여 우표를 발행하였다. 당시 제1공화국 정부는 WHO 가입 자체를 정치적으로 비중 있게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3) 북한의 WHO 가입과정

그렇다면 남한과 달리 북한의 경우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WHO에 가입하게 되는지 남한의 경우와 차이점을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경우 1973년 5월 19일 WHO 동남아시아 지역에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WHO Regional Office for the Western Pacific, 1998: 18).
하지만 여기에는 조금 더 고민해 볼 복합적인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실지 1948년 WHO가 창립되었을 당시 중국의 대표는 장제스(蔣介石, 1987-1975)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대만 정부였다. 당시 장제스 정부는 제1회 세계보건총회에는 참석하였지만,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중국 공산당군과 내전에 들어감에 따라 제2회와 제3회 세계보건총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주지하듯이 이 내전은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중국 본토는 마오쩌둥 정부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장제스 정부는 1951년부터 1971년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로 WHO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72년 5월 10일부터 발효된 제25회 세계보건총회의 선언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이 1973년부터 중국을 대표하여 WHO에서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서태평양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WHO Regional Office for the Western Pacific, 1998: 18).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닉슨 독트린 이후 미국의 닉슨(Richard Milhous Nixon, 1913-1994) 대통령이 1972년 2월 21일 중국 본토를 방문하고 공산당 정권과 화해의 물결을 연 것이 그 단초가 되었다.
그런데 남북한의 경우 상황이 이와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우선 비록 북한 정부가 분명한 국가적인 실체를 지니고 있었지만,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쉬운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북한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실제 WHO에서 활동하게 되는 1973년을 맞아 가입 국가들의 합의 하에 5월 19일 WHO에 가입은 하되, 대한민국이 활동하는 서태평양 지역에 속하는 것을 피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과 북한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속하는 다소 이상한 형세가 되었다. 참고로 남북한이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이 있는 국제연합(UN)에 동시 가입한 것은 노태우(盧泰愚, 1932-현재) 정부시절인 1991년의 일이었다.
추가로 검토할 부분은 이미 WHO의 회원국이었던 남한이 북한의 가입신청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였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1973년 4월 26일 우리 정부의 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작성한 「WHO 교섭 종합보고」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 대사관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수석대표 및 대표자 명단을 보고하면서, 오스트리아가 WHO에서 정치문제 토의가 부당하다는 대한민국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하였다. 하지만 정치, 경제적 유대가 각별한 서독의 전례에 비추어 기권선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하고 있다. 즉 이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 오스트리아는 동독이 WHO에 가입하는 것에 대한 서독 측 연기 방안에 대하여도 기권한바 있다면서 이번 총회에서도 오스트리아는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기권 선에서 머무를 것으로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보고서에서 우리정부는 오스트리아의 미국, 일본 대사관이 북한의 WHO 가입 문제에 대해 오스트리아 정부가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고 있다. 그렇기에 남한은 냉전 체제 하에서 북한의 가입에 대해 사실상 반대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문서는 생산당시 3급 기밀문서로 분류되었다(대한민국 주오스트리아 대사관, 1973). 북한의 WHO 가입은 냉전체제하에서 당시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정부가 외교적인 채널을 동원하여 촉각을 곤두세울 정도로 중요한 정치, 외교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3. 1950년대 와 상호 전개한 협력사업

1) WHO에 보고한 제1공화국 초기의 보건상황

본 장에서 다룰 부분은 “제1공화국의 보건행정은 WHO와 어떠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는가?”이다. 서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시대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들은 제1공화국과 WHO 사이의 협력 사업에 대해 체계적인 기술을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미군정 시기 이후 남한의 보건체계 및 상황이 미국적인 것을 대폭 수용하였고 큰 원조를 받은 것으로 묘사하여 왔다.
물론 이러한 분석은 상당 부분 당시의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당시 국제연합(UN)이 미국의 주도로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른바 유엔군이 미국군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제1공화국의 보건행정이 미국의 도움과 이를 모방함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졌다고 분석하는 데에는 애로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WHO의 역할이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WHO와 남한이 이 시기 어떠한 관계를 구축하였는지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대 동안 WHO의 서태평양 지역회의에 적극 참여하였고, WHO로부터 보건행정에 대해 여러 자문을 얻었으며,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지원을 받아 함께 협력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제1차 서태평양 지역회의는 1951년 5월 18일에 처음 열렸는데, 창립총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 서태평양 지역에서 참석한 나라는 호주, 캄보디아, 일본, 라오스, 뉴질랜드, 필리핀, 남한, 베트남이었다. 회의에서 가장 큰 논제는 어느 지역에 서태평양 지역 사무소를 둘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마닐라, 싱가포르, 그리고 서울이 후보지로 제시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서울을 거점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전쟁 중의 상황이었기에 서울이 채택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결과 투표를 통해 7표를 획득한 마닐라가 최종적으로 선정되었다(WHO, Official Records, 13, 263).
이러한 부분은 이승만 정부가 WHO 지역 사무소를 서울로 유치하는 것을 1951년의 국내 정치적 상황에 활용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UN, 소련, 중국 등이 참전하여 국제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 속에서 서울에 지역 사무소를 두자는 제안이 서태평양 지역회의에서 채택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가 이를 강행한 것은 앞서 분석한 1951년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국민에 대한 일종의 홍보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국내의 보건위생환경은 매우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전시 상황이지만 WHO의 지원을 받기 위해 1951년 9월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서태평양 지역회의에 『대한민국의 보건상황』(Public Health in Korea)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이 문서는 구영석 의사(M. D.)가 1951년 4월에 작성한 26쪽 분량의 것으로, 남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쟁 당시 국내의 보건상황을 정리하여 WHO에 제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간 이 보고서는 학계에 체계적으로 알려지지 못하였다(Republic of Korea, 1951).
이 보고서에 나타난 당시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미군정 시기, 제1공화국의 출범 시기, 전쟁 발발 이후 등을 분석해 보면 갈수록 보건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제1공화국 시기 정부차원의 조직은 분명히 미군정 시기의 강한 영향을 받아 미국식 체제로 변화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전쟁으로 그러한 상황이 크게 악화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군정 철수 이후, 나아가 한국전쟁 이후 제1공화국의 보건의료행정은 큰 폭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후술하겠지만 그러한 변화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WHO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보고서는 당시 남한의 보건상황 전반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한국 보건행정의 발전, 행정조직, 보건부 관련법령, 행정인력, 예산, 의료행정, 공중보건의 제도, 응급의료, 예방 의료 행정 등 9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보고서 중 “무의촌 지역(의사가 없는 지역)” 항목이 제6장 “의료행정” 부분에 이어 같은 번호로 부여되어 있다. 또한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에 전쟁의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시설이 파괴되었기에 WHO의 적극 지원을 호소하는 결론 부분이 있기에, 이 보고서는 사실상 11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제1장 “한국 보건행정의 발전”에서 일제 시기 보건행정은 경찰국에서 담당하였으나 미군정 시기인 1945년 9월 24일 조인된 포고령 제1호에 의해 일반 행정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남한 정부 출범과 함께 보건조직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간략히 기술하였다. 제2장 “행정조직”과 제3장 “보건부 관련법령”에서는 제1공화국 초기의 보건행정조직이 미군정 시기의 것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그 조직 및 법령에 대해 설명하였다(Republic of Korea, 1951: 1-6).
제3장 “행정인력”과 제4장 “예산” 부분에서는 미군정 시기 이후 인력이 변화하는 모습과 예산에서 보건행정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정 시기 779명에 달하는 보건 인력이 1951년 당시 전쟁으로 인해 320명으로 줄어들었음과, 1950년 4월 당시 보건행정 예산액이 보건부 중앙이 총 653,275,500원, 보건부 산하 제 기관합계 653,275,200원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당시 정부 예산의 불과 1.3%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 예산도 전쟁의 발발로 일반 보건행정을 위해 421,693,300원을 책정하고, 부상병 혹은 상이용사들을 위해 245,853,300원을 책정하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Republic of Korea, 1951: 6-7).
제5장 “의료행정”과 제6장 “공중보건의 제도” 부분에서는 보건인력의 변화상을 분석하고 있다. 이 분석 내용에 따르면 정규 의과대학 졸업자와 비정규 교육을 받은 의사를 포함하여 전쟁 전 등록 의사는 4,375명이었으나 전쟁 발발 후에는 2,321명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대비로 보면 5,500명당 의사 1명의 꼴로 미국(700명당 1인)이나 일본(1,395명당 1인)에 크게 못 미쳤다. 이 보고서에서는 당시 의과대학으로는 국립인 서울의대(539명), 대구의대(301명), 광주의대(280명)가 있었고, 사립으로 세브란스의대(232명), 이화여대 의학과(91명), 기타(438명) 등이 있어 1,881명의 의대생이 있었으나, 그 중 30%는 북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납북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치과의사는 755명에서 404명으로 줄었으며, 전쟁 이전 1,657명이었던 간호사 가운데 절반가량이 북한군에 의해 납치, 복무, 사살, 혹은 구금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전쟁 전 약사는 1,003명으로 인구 20,200명당 1인 꼴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그 수는 613명으로 줄어들었다(Republic of Korea, 1951: 7-11).1)
“무의촌 지역(의사가 없는 지역),” 제7장 “응급의료,” 제8장 “예방 의료 행정” 등에서는 무의촌 지역 및 당시 전국 병원의 실상과 환자들 수, 전염병 등에 대한 예방 작업과 의약품 확보 현황 등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다만 보고서 중 보건의료사업의 부족현상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곳은 접근도가 약한 농어촌과 벽지 및 오지었다. 1951년 당시 남한에는 1,531개의 읍, 면 등이 있었는데 그 중 55%, 인구 700만 이상의 지역이 의료시설이 전무한 상태였다. 당시 무의촌 수는 모두 757개로, 경기도 87개, 충청북도 42개, 충청남도 54개, 전라북도 104개, 전라남도 122개, 경상북도 144개, 경상남도 160개, 강원도 40개, 제주도 4개 등이었다. 또한 결론 부분에서 대한민국 보건당국은 전쟁의 참상으로 인한 피해 상을 언급하면서 WHO가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전개해 줄 것을 강조하고 있다(Republic of Korea, 1951: 11-26).

2) WHO의 지원과 남한의 보건행정 변화

이 장에서는 “남한은 WHO로부터 제1공화국 시기 어떤 부분에서 지원을 받았으며, 그 성과는 무엇인가?”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우선 이 시기 이승만 정부와 WHO는 보건행정 구축을 위한 자문, 보건인력 양성 후원 프로그램 운영, 전염병 예방 사업, 결핵퇴치 사업, 한센 병 예방 및 치료사업, 말라리아 박멸사업, 기생충 예방사업, 보건진료소 활성화사업, 모자보건사업 등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1공화국은 체계적인 보건행정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고,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었으며, 각 질병에 대해 구체적인 사업에 착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WHO는 매년 각 지역사무소별로 회원국들의 구체적인 질병상황을 통계로 작성하여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왔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남한 역시 국제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체계적인 보건행정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WHO는 이승만 정부가 보고한 대한민국의 실상을 접하고 즉각적인 지원에 나섰다. 우선 구체적인 지원을 위한 부분별 예산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에는 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이 내한하여 한국의 보건사정을 시찰하였다. 당시 남한 정부가 여러 난관 속에서도 보건 행정에 대해 기울인 노력에 감명을 받은 WHO의 조지 맥도날드 위원은 최재유(崔在裕, 1906-1993) 보건부 장관에게 WHO 한국보건계획 위원 표창을 수여하였다.2)
특히 WHO는 제1공화국 당시 정부에서 현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이를 통해 보건 발전을 위한 중장기 목표를 수립할 수 있도록 기술지원을 하였다. 또한 각 부분별로 전문가들이 양성될 수 있도록 교육 지원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사실상 WHO가 제1공화국의 보건행정에 사실상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WHO는 각 사업별로 예산을 배정하여 제1공화국의 보건행정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였던 것이다.
우선 WHO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전쟁 중이던 이승만 정부가 적절한 보건행정을 수립할 수 있도록 전문가 양성에 집중적인 지원을 하였다. 특히 전쟁 중인 상황을 고려하여 군의관과 장교에 대한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 이는 WHO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대한민국을 후원하기 위해 수립한 다음의 예산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WHO는 1950년 남한에 대한 지원을 위해 252,288 달러를 배정하였다(WHO, Official Records, 31, 39).
그리고 남한에 대한 WHO의 지원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다만 전쟁이 끝난 1954년 이후에는 군대 내 전문가 지원에서 일반 보건인력 지원으로 방향이 바뀌었고, 결핵과 풍토성 전염병과 관련된 인력 양성 및 행정지원에 집중하게 되었다. 또한 결핵에 대한 통제가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이게 되자 한센병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게 되었고, 간호사 양성을 위한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변화상은 WHO가 남한을 지원하기 위해 1960년 당시 수립한 예산안을 검토하면 확인할 수 있다(WHO, Official Records, 31, 39).
WHO가 남한에서 전개한 전문인력 양성은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되었다. 첫째, 1950년대 초반 전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현실적으로 시급하고 보다 실현 가능한 것은 WHO 전문 인력의 파견이었다. 이를 통해 WHO의 분야별 담당 자문관이 지속적으로 남한을 방문하여 의료 정책 입안을 자문하고, 해당 질병 별로 상황을 파악하였다. 또한 이를 위한 국내 인력 양성을 지원하였던 것이다(WHO, Official Records, 31, 39).
따라서 1950년대 WHO의 대한민국 보건지원활동은 주로 한층 열악해진 보건행정을 정비하고 현장인력을 훈련하기 위한 자문 및 현장 프로젝트로 이루어졌다. 이를 위하여 한국에 보건요원을 훈련할 중앙보건소 설치에 관한 협약을 체결 하였으며 이를 통해 보건요원 훈련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들이 이후 보건 분야 발전에 크게 공헌 하게 되었다(대한민국 정부 보건사회부, 1957).
일례로 급성전염병 관리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전염병 예방관리 사업과 예방접종이었다. 당시 이러한 사업을 진행하는데 있어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기관은 바로 국립방역연구소였다. 국립방역연구소는 원래 일제강점기 경무국 위생과 소속으로 세균검사와 종두 약 생산 업무를 담당하던 세균 실이 전신이었다(朝鮮總督府, 1922). 해방 후 1949년에 정부가 이를 국립방역연구소로 확대 개편하면서 전염병 및 풍토성 질환에 대한 조사, 연구, 교육 업무 및 관련된 백신 생산까지 담당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WHO는 당시 전염병 예방사업 강화를 위해 국립방역연구소에 1955~1957년 예산을 배정하여 지원하였다(WHO, Official Records, 44, 50, 1954-1955). 또한, 1955년 3인의 연구 인력이 12개월간 연수를 다녀올 수 있도록 했고, 1956년에는 한국의 전염병 관리사업 지원을 위해 전염병 전문학자 한명을 연구소에 파견하였다. 또한 한 명의 연구 인력이 미국에 연수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WHO, Official Records, 44, 50, 1956-1957). 이를 통해 국립방역연구소는 방역 및 위생 분야 정책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도움을 받았고, 이후 국립보건원으로 개편된 뒤, 현재는 질병관리본부가 그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3)
둘째, WHO는 국내의 전문가들을 분야별로 육성할 수 있도록 펠로우쉽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이를 통해 국내의 의료진들이 해외의 유수한 기관에서 1년 이상 집중적인 훈련을 받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 박사과정까지 후원을 받은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인력들은 귀국 후 보건행정 각 분야에서 정책을 주도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기대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남한의 보건체계 및 의료상황은 1950년대에 점차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당시 남한에 대한 보건 및 의료부분 지원은 WHO 이외에도 유니세프(UNICEF), 유엔 한국 부흥기관(UNKRA), 미네소타 프로젝트, 차이나 메디컬보드 등 국제기구와 미국 등에 의해서도 진행되었다. 그런데 비록 WHO가 지원한 금액 규모가 비교적 작을 수 있지만, WHO가 당시 남한의 보건행정의 개편에 있어서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WHO는 이들 기구들과 함께 연합하여 사역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해외 기관들이 남한에 지원한 보건 의료 부분의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1945-1948년 사이 미국 점령지역 행정구호(GARIO)에서 4억 939만3천 달러(교육부분 79만 달러), 1949-1952년 사이 유엔사령부 경제협조본부(ECA & SEC)에서 2억186만7천 달러(교육 부분 없음), 1950-1959년 사이 유엔 한국 부흥기관(UNKRA)에서 1억2208만4천 달러(교육 부분 1090만7천 달러), 1950-1956년 사이 유엔 민간구호(CRIK)에서 4억5737만8천 달러(교육 부분 없음), 1953-1961년 사이 미국 해외운영본부(FOA)와 미국 국제협력본부(ICA)에서 17억4992만9천 달러(교육 부분 2026만5천 달러), 1955-1961년 사이 미국 공법 480 원조(PL480)에서 2억264만8천 달러(교육 부분 없음)를 남한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상기 지원은 남한 전체 분야에 대한 지원이며 그중 교육 부분에 대한 지원은 없거나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교육 부분 중 보건 행정부분 및 의학교육 부분은 더 적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 교육 부분에 투입된 예산 중 상당 부분은 전쟁 중 파괴된 학교 건물 복구 및 신축, 장비구입 등에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이왕준, 2006: 19).
WHO는 1950-1960년 사이 보건 행정부분 및 의학교육 부분에 56만5천 달러를 남한에 지원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WHO는 모두 60명의 연구진에게 펠로우쉽 프로그램을 제공하였다. 구체적인 분야는 보건행정, 농촌보건, 환경위생, 위생기술, 마취과학, 결핵 교육과정, 한센병 관리, 기생충학, 모자보건, 성 매개 질환과 관리, 말라리아 박멸과 관리, X선 장비 유지 등과 관련된 부분들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국내에서 보건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WHO, 1947-1950: Work of WHO , 1950; 1952-1960: RCM Final Report, each year). 이러한 금액은 분명히 여타 기관들에 의해 지원된 총액 기준을 참고할 때 상당히 적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당시 미국 해외운영본부(FOA)와 미국 국제협력본부(ICA)가 제공한 교육 부분 2026만5천달러 중 일부를 바탕으로 진행한 미네소타 프로젝트 중 보건 의료 분야와 비교해도 될 만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국립서울대학교 협력사업”으로 명명되어 진행되었는데, 전제 학문 분야에 대한 시설복구, 장비지원, 펠로우쉽 제공 등이 망라된 내용이었다. 그 중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의해 서울대학교 의대, 간호, 보건대학원, 병원행정직 등, 보건 분야에 지원된 펠로우쉽은 모두 77명이었다(이왕준, 2006: 77). 서울대학교는 1966년에 발간한 책에서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1955년부터 1957년까지 3년간 서울대학교사상 유례없는 획기적인 발전을 기록하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서울대학교, 1966: 162).
따라서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국립 대학교”의 체계적인 지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면, WHO의 지원은 “공적인 보건행정 부분”의 체계화와 장기적으로 “공적인 보건전문 인력”을 양성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프로젝트는 큰 틀에서 볼 때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당시 WHO의 지원은 비단 남한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 대만 등 서태평양지역 내 여러 회원국들에게도 1950년대 동일한 시스템이 적용되고 있었다(WHO, 1947-1950: Work of WHO , 1950; 1952-1960: RCM Final Report, each year). 다만 남한의 경우 전후 복구 과정에서부터 WHO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의 지원을 유치할 수 있었고, 국제적인 기준에서 체계적인 보건인력 양성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WHO의 남한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으로 이승만 정부는 구체적인 보건행정개선에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건과 관련된 여러 부분에서 새로운 법령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특히 WHO는 남한의 보건사업 전달체계를 강화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WHO/UNKRA의 1954년도 건강계획업무(Health Planning Mission)에 의한 보건진료소 활성화 프로그램으로 나타났다. 그 프로그램은 궁극적으로 370개소의 보건소를 농촌과 중소도시 지역에 설치하여 각각 5만에서 7만 인구를 담당하는 지역 보건 센터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서울 근교에 설치하여 국제적인 전문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 모범보건소 사업을 제안하기도 하였다(WHO, Official Records, 44, 50). 그 결과 1956년 12월 13일 법률 제406호로 「보건소법」이 이승만 정부에 의해 제정되었던 것이다. 또한 WHO는 의약품 지원에 있어서도 여타기구와 협력하여 남한에 대한 원조를 늘려갔다. 일례로 1962년 11월 16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WHO는 이 해에 유니세프(UNICEF)와 협력하여 결핵치료제인 비시지(BCG) 50만 명분을 남한에 지원하기도 하였다.
WHO 장학금으로 후일 박사학위를 취득한 한달선(韓達鮮,, 1939-현재) 전 한림대학교 총장은 1960년대 이후 체계적으로 추진된 보건소 사업이 WHO의 지원 및 상호 협력 속에서 추진된 프로젝트였을 증언하였다. 이후 최근까지 계속된 보건소 및 1차 보건의료체계 구축사업에 대한 WHO의 기여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이경식, 1995; 김창엽, 2011; 지역보건의료발전을 위한 모임, 2012; 인제대학교 국제보건연구소, 2013).
WHO가 제1공화국 시기 남한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고, 이를 통해 육성된 인원들이 역으로 혼련을 받은 이후 WHO에 기여하는 상호 협력적인 관계는 이에 연관된 인물들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195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박형종(朴亨種, 1930-현재)은 “1959년 설립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이 교수들의 교내활동에만 만족하지 않고 눈을 외부에 돌려 일찍이 WHO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수립하였으며, WHO와의 협력 및 기술지원을 위하여 WHO 자문관을 초청하여 학교에 상주시킴으로써 WHO와의 기술적 협력관계를 유지하였으며 WHO의 지원에 의한 교수들의 유학의 길을 모색하였을 뿐 아니라 세계보건대학원장 회의 참석을 포함한 대학원의 대회활동의 기회를 마련하기도 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971년 8월부터 뉴델리에 있는 WHO 동남아 지역 사무처에서 인도네시아의 보건교육 자문관으로 위촉받았으며, 이후 1984년부터 1989년까지 WHO 마닐라 사무소에서 근무한 바 있다. 이후 그는 인제대학교 보건대학원장 및 부총장으로 1989년부터 1997년까지 근무하였다(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2009: 436-437).

4. 결 론

이 논문에서는 세 가지의 문제점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제기된 문제는 “남한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WHO에 가입하였으며, 북한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남북한의 WHO 가입은 당시 국내적인 정치 상황은 물론 세계적인 흐름과 밀접한 연관성 하에서 진행되었다. 남한에는 제1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적인 분야의 전문가로서 WHO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적극적인 가입 노력에 나섰던 것이다. 그 결과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이 있는 국제연합(UN)과 달리 비록 사회주의 국가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남한은 국회 동의의 과정을 거쳐 1949년 8월 17일 WHO에 정식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한은 서태평양 지역에 속한 1950년 이후 WHO의 체계적인 지원과 상호 노력에 의해 선진적인 보건체계를 확립하는 동인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 시기 가입신청을 하지 않았고, 그 이후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상당기간 WHO에 가입할 수 없었다. 북한은 닉슨 독트린으로 냉전이 완화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륙을 대표하여 WHO에 가입한 이후 1973년 5월 19일 WHO에 동남아시아 지역의 일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 제기한 두 번째 문제는 “제1공화국의 보건행정은 WHO 가입 이후 WHO와 어떠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는가?”였다. 제1공화국의 보건행정이 미군정 시기 확립된 체제의 영향을 분명히 강하게 받았지만, 1950년대 이후 장기 지속적인 관점에서 보건부분은 미국과 함께 WHO의 역할이 상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남한 정부는 서태평양 지역 사무소 유치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WHO가 주관한 국제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끝으로 이 논문에서 제기한 문제는 “남한은 WHO로부터 제1공화국 시기 어떤 부분에서 지원을 받았으며, 그 성과는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WHO는 1950년 이후 제1공화국 당시 대한민국의 체계적인 보건행정 구축을 위한 자문, 보건인력 양성 후원 프로그램 운영 등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전염병 예방 사업, 결핵퇴치 사업, 한센병 예방 및 치료사업, 말라리아 박멸사업, 기생충 예방사업, 보건진료소 활성화사업, 모자보건사업 등을 진행하였다. 다만 그 진행은 한국전쟁기, 전후 복구기, 1950년대 후반 등으로 상황이 변화되면서 차등 있게 시행되었다. 또한 이러한 노력이 남한과 북한의 이후 보건행정이 차이가 나는 동인이 되었다.
한편 남한은 1949년 8월 17일 WHO에 가입한 이후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체계적인 원조를 하는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WHO Regional Office for the Western Pacific, 1998: 19). 남한은 1978년 10월 28일과 같은 해 11월 10일 두 차례 공문을 통한 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소의 요청에 따라 1979년 2월 10일 베트남에 대해 말라리아 매개모기 방역활동을 위한 DDT 스프레이 2만 달러 상당의 물품을 지원하였던 것이다.4)
또한 1989년부터는 한상태(韓相泰, 1928-현재)가 임기 5년(1989-1994)의 WHO 서태평양 지역 사무처장(Regional Director, Western Pacific Regional Office, WPRO)으로 선출된 이후 재 선출되어(1994-1999) 2회의 사무처장직을 수행하는 등, WHO 내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WHO Regional Office for the Western Pacific, 1998: 338). 이후 남한이 WHO에 제공한 후원금은 더 강화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종욱(李鍾郁, 1945-2006)이 2003년부터 WHO의 수장 격인 사무총장(제6대)이 되어 2006년 5월 22일 작고할 때까지 활동한 것도 WHO에서 남한의 위상이 변화하게된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Notes

1) 한편 정부에서는 현재 "국무총리 소속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관련한 조사내용은 2015년 6월경에 발표될 예정인데, 향후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면, 1950년 당시 정부가 작성하여 WHO에 알린 내용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6ㆍ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시행 2013.03.23] [법률 제11690호, 2013.03.23, 타법개정].

2) 「한국보건실정을 시찰 세계보건기구 횅 박사 내한」, 『동아일보』, 1952년 3월 25일.

3) 이동우(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 감염병 관리과 연구관/의사) 씨는 WHO의 기여에 대 해 질병관리본부 내부에서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이선호, “이동우 인터뷰” (2014. 2. 15).

그림 1.
가입 10주년 기념우표
Figure 1. A Commemorative Stamp by the Republic of Korea for the 10th Anniversary of the Jo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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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우리나라 분담금 현황
Table 1. The Contribution Fund for by the Republic of Korea
(단위: 천 달러)
연 도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분담금 4,118 4,118 4,171 5,062 7,818 7,817 8,020 8,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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