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E-Submission | Sitemap | Editorial Office |  
top_img
Korean J Med Hist > Volume 23(1); 2014 > Article
부양학파, 한국 전통 의학 학술 유파의 탄생과 전승: 이규준, 서병오, 이원세 그리고 소문학회*

Abstract

In this study, I aim to reveal how Lee Gyoojoon (李圭晙)’s medicine has given birth to a current of learning, the supporting yang current of learning (扶陽學派), and describe its historical significance.
First of all, rinderpest has had influence on East Asia as it had been spread from certain areas in Machuria in May 1636 through Joseon, where it raged throughout the nation, and then to the west part of Japan. The new arrival of rinderpest was indigenized in Joseon, where it was localized and spread periodically while it was adjusted to changes in the population of cattle with immunity in accordance with their life spans and reproduction rates.
Before anything, I’d like to throw the question of whether if there were any currents within the traditional Korean medicine. There are no records of medical currents being widely discussed until now in medical history of Korea; however, the current of Lee Jema (李濟馬)’s sasang medicine (四象醫學派) is the most noticeable one. Among the contemporaries of Lee Jema, during the late Chosun (朝鮮), there was also another famed medical practitioner called Lee Gyoojoon. Lee Gyoojoon mainly practiced his medicine within Pohang (浦項), Gyeongsangbuk-do area, his apprentices have formed a group and have succeeded his medical practice. Based on the analyses of Lee Gyoojoon’s apprentices and the Somun Oriental Medical Society (素問學會), which is known as a successor group to Lee Gyoojoon’s medicine today, they are fully satisfying the five requirements to establish a medical current: first, they held Lee Gyoojoon as the first and foremost, representative practitioner of their current; second, they advocate the supporting yang theory (扶陽論) suggested by Lee Gyoojoon, which is originated from his theory of Mind (心學); third, books such as the Major Essentials of Huangdi’s Internal Classic Plain Questions (素問大要), and the Double Grinded Medical Mirror (醫鑑重磨), were being used as the main textbooks to educate their students or to practice medicine. Fourth, Lee Gyoojoon’s medical ideas were being transcended quite clearly within his group of apprentices, including Seo Byungoh (徐丙五), Lee Wonse (李元世), and the Somun Oriental Medical Society. Fifth, Lee Gyoojoon’s apprentices were first produced through the Sukgok School (石谷書堂), however, nowadays they are being produced through medical groups formed by Lee Wonse, the Somun Oriental Medical Society, regarding the propagation of medical theories, compilation of textbooks, publication of academic journals, etc.
Then, what do the existence of the supporting yang current have their significances in history? First of all, Heo Joon (許浚), the great medical practitioner in 16th century Chosun, have revealed through his book the Treasured Mirror of Eastern Medicine (東醫寶鑑, TMEM), that the essence of Eastern medicine differentiated from South and North medicine of China is being transcended in Korean medicine. However, we have not got a clear conclusion on what his views of the essence of Eastern medicine is. The TMEM is the legacy of Neo-confucianism, dominant in the Chosun at the time, and is considered the reference which covers from Taoism to Korean Medicine, that is practical as well as systematical in categorizing illnesses, their respective prescriptions, and herbs. Maybe, it seems that such characteristics of the TMEM naturally led the medical practitioners and Confucian scholars, Lee Jema and Lee Gyoojoon to adopt its principles, and furthermore, possibly contributed in materializing the tradition of Eastern Medicine. Secondly, both currents appeared in the late period of Chosun dynasty. Then, weren’t there any preceding medical currents before them? The bureaucratic and centralized government of the Chosun dynasty demanded and supplied talents through a nationwide examination system (科擧). However, since the late-16th century, a few family from the Chungin (中人) class have come to dominate the important medical positions as inheritance doctors (世醫), bringing about the expansion of the private medical sector, as well as growth in the number of medical practitioners. This naturally brought about fierce competition among the practitioners, and it is probable that the competition sparked the need for standardized groups and societies that follow a single medical doctrine or theory, to differentiate from the others. Probably, the birth of current of learning, which succeeded to Lee Jema and Lee Gyoojoon’s medical theory, exists as an extension of this social background.
The major changes in systems to build a new Chosun in 1894 brought about the abolitions of old and antique institutions. Inheritance doctors naturally collapsed, and every medical practitioners had to compete in an open market. However, Lee Jema and Lee Gyoojoon, as a medical practitioner and Confucian scholar, weren’t from medical families; instead, they have successfully established and led their medical groups. The Sasang medicine current, which first began in the Hamhung (咸興) area, had creative medical theories and excellent practices, naturally led the discourses traditional medicine in the center areas of the Korean peninsula. In contrast, the supporting yang current, more popular in the Youngnam (嶺南) area at one time, struggled to keep their current during the period of Korean War, National Industrialization and Modernization. And it was only Lee Wonse’s personal dedication to the current that made it survive through the times. It was not until the late 1990s, when the apprentices have gathered Lee Gyoojoon’s accomplishments, that formed the Somun Oriental Medical Society as well as the supporting yang current. In summary, the birth and the succession of the supporting yang current clearly depicts how the various traditional medical groups and societies on the periphery have survived and transcended through difficult times. And at the same time, they can provide chance to ruminate the historical flow of traditional medicine in Korea.

1. 시작하는 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대표 저자 허준(許浚) 이후 조선 의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종기를 잘 치료하여 신의(神醫)라고 불리기까지 하였던 백광현(白光玹),1) 정조에게 근래 의원 중에 이들 외에 쓸 만한 사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던 강명길(康命吉)과 주명신(周命新),2) 자신의 이름을 딴 참요(讖謠)가 유행할 정도로 유명했던 이경화(李景華)(李殷相, 1987: 566), 뛰어난 유학자이면서 의학 분야에도 걸출한 성과를 거두었던 정약용(丁若鏞) 등 수많은 의가들을 후보로 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신동원, 2007: 171-224). 1940년대 조선 시대 유명 인물 100명의 생애와 업적을 평가하였던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에서는 의가로는 단 두 명, 허준과 이제마(李濟馬, 1837-1900) 만을 꼽으며, 이제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이제마는 힘이 넉넉히 천근을 들 수 있고, 안목이 충분히 만리를 볼 수 있다 …… 그 때 저술한 것이 사상의서인 동의수세보원 일책(東醫壽世保元一冊)이었다. 이것은 특히 병고로 신음하는 창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에서 하신 일이었다. 문인으로는 김영관(金永寬), 한직연(韓稷淵) 등이 있었으며 구수심전(口受心傳)한 사람도 많았고 이외에 사숙(私淑)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에 사상의학이 천하에 퍼져서 우리 의학계에 한 이채(異彩)를 이루었다(李能和, 1939: 340-6).3)

이제마 의학의 독창성과 이후 한국 의학계 전반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의론(醫論)은 『황제내경(黃帝 內經)』,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상한론(傷寒論)』 등 동아시아 전통 의학 경전의 주요 논지로부터 벗어나 있어 당대 의가들로부터 이단(異端)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李乙浩, 1935: 37-8),4) 1930년대 이후에는 한반도를 풍미하였던 민족주의 열풍으로 인해 다소 과장되게 평가되기도 하였다(Shin, 2006: 159-61).
그렇다면 이제마와 동시대에 활약하며 그와 필적했던 의가로는 또 누가 있었을까? 1930년 3월 15일 동아일보에 「조선역사강화(朝鮮歷史講話)」를 연재중이던 최남선(崔南善)은 철종조의 황도연(黃度淵, 1808-1884)과 고종조의 이규준(李圭晙, 1855-1923)을 조선 말기의 두드러진 의가로 꼽고 있다. 황도연에 대해 최남선은 간요하고 정확한 『방약합편(方藥合編)』을 사방에 보급하여 민간 의료상의 일대 신시기를 그었다는 높은 평가를 내렸지만, 이규준에 대해서는 고종 조를 대표하는 명의라는 짧은 언급 이외에 어떠한 서술도 남기지 않았다(東亞日報, 1930). 과연 이규준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떤 연유로 황도연, 이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규준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연구는 김두종(金斗鍾)에 의해 비로소 진행되었다. 그는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 중에서 이규준의 저서와 손자 이우출(李雨茁)의 구전에 의거하여 “석곡(石谷)은 유학자로서 경사집설(經史集說)에 능통하였을 뿐 아니라 의학에서도 많은 연구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의학 부문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현재까지 유파가 전해지고 있다(김두종, 1981: 463)”라는 기술을 남긴 바 있다. 이 논문은 바로 김두종이 남긴 이규준에 대한 평가와 그의 의학을 전승한 학술 유파가 전해지고 있다는 이 문장을 연구의 실마리로 삼았다.
16세기 조선의 의관 허준(許浚)은 중국에는 남의(南醫), 북의(北醫)의 전통이 있었지만 조선에는 이와 다른 동의(東醫)의 전통이 있었다고 자부하며 자신의 저작을 『동의보감』이라고 칭하였다.5) 그렇다면 허준이 실처럼 끊어지지 않고 흘러왔다고 자부하였던 동의의 전통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또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혹시 동의(東醫)라는 표현이 실체 없는 수사(修辭)이거나 중국의 동쪽이라는 지역적 제한성을 토대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을까? 최근 포커샤이드(Volker Scheid)는 다양한 물길의 갈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본류에 귀착할 수 있듯이, 이념이나 기술, 지역적 친연성, 양식의 유사성, 미적 선호도 등을 공유하고 있는 의학 학술 유파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의학의 원류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Scheid, 2007: 12-3). 그리고 맹하학파(孟河學派) 성립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며 중국 근대 시기 뿐 아니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 현대 중의학(中醫學)의 형성 과정 속에서 맹하학파 구성원들이 수행했던 역할들을 생동감 있게 서술해냈다(Scheid, 2007: 223-355). 이외에 마타 한슨(Marta E. Hanson)은 중국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온병학파(溫病學派) 의가들을 연구하여 온병학은 서양 의학이 유입되는 과정 속에서 중국 의학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근대 시기 중국의 의학자들에 의해 재창조된 것이라는 날카로운 지적을 던지기도 하였다(Hanson, 2011: 107-69). 중국 전통 의학의 학술 유파를 매개로 진행된 이와 같은 연구들은 한국 전통 의학계에 학술 유파라고 불릴 만한 존재가 있었는지, 만약 존재한다면 학술 유파를 매개로 어떻게 동의의 전통을 설명할 수 있는지 등을 되묻는다.
이능화와 김두종이 남긴 이제마의 제자들과 그들의 의학적 영향력 그리고 이규준의 제자와 의학 학술 유파에 대한 기록은 한국 전통 의학계에도 학파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들 학파들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세간에서는 이제마의 의학을 계승한 사상의학파가 한국 전통 의학을 대표하는 학술 유파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사상의학파의 경우 중국, 북한, 남한 등에 사상 의학을 활용하는 다양한 의가 집단이 존재한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 학파의 정립 과정이나 분파 양상 등에 대한 체계적인 고찰이 이루어져 있지 않아 하나의 학술 유파로 인정하기에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6) 반면 이규준의 의학의 경우 한의사 학술 집단인 소문학회(素問學會) 만이 그의 의학사상 계승을 표방하고 있어 학통(學統)이 비교적 단순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이규준, 그의 자제, 제자 집단과 서병오(徐丙五), 이원세(李元世) 등으로 이어지는 이규준의 의학 학맥(學脈)을 검토한 뒤, 이들이 하나의 전통 의학 학술 유파 이른 바 부양학파(扶陽學派)를 형성하였는지 여부에 대해 논의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한국 고유의 전통 의학 학맥을 잇고 있는 하나의 학술 유파가 현존하며, 조선 말기의 한 의가가 주창하였던 의학적 담론이 근현대시기를 지나오면서 어떤 방식으로 전승되고 확산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중심부, 서울이 아닌 주변부,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의학의 전승에 대한 논의는 전통 의학계에 사상 의학 외에 별도의 의학적 담론이 존재하였으며, 하나의 학파가 구성될 수 있을 정도의 지식 생태계(Knowledge Ecosystem)가 구축되어 있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참고로, 논문의 작성을 위해 이규준, 서병오, 이원세와 관련된 1차 사료를 수집하고 분석하였고 생존해 계신 이규준, 이원세의 가족과 제자들을 인터뷰 하였다.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은 이규준의 삼남 이순종의 사남 이우덕, 이원세의 장남 이종섭, 외손 이국형과 이원세의 한의사 제자 황원덕, 김태국, 김명준, 김철성 등과 비한의사 제자 최춘길, 안예섭, 그리고 이원세와 불교를 매개로 교류한 김광하 등이다. 이원세의 동영상 강의록은 이원세의 한의사 제자 피국현이 녹취한 것을 활용하였다.

2. 이규준, 부양학파의 개창자

이규준(李圭晙, 1855-1923)은 19세기 후반 영남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이며 의학자이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한국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897년 대한제국 수립,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 등 정치적 격변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조선의 국운이 다해가던 19세기 최제우(崔濟愚)의 동학(東學), 최한기(崔漢綺)의 기학(氣學) 등 종교적 또는 학문적 실험이 시도되기도 하였지만, 영남 지역에서는 유림을 중심으로 이학(理學)을 새롭게 해석하여 시류의 변화에 대응하고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권오영, 2006: 256; 김종석, 2004: 264). 아울러 1894년 봉기한 안동의진(安東義陣) 이래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 이강년의진(李康秊義陣)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병들은 영남 전 지역을 항쟁의 장(場)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규준의 거주지였던 영일(迎日, 지금의 포항) 지역 역시 1906년 3월부터 1908년 7월까지 활동하였던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주요 활동 무대 중 한곳이었다(權大雄, 1998: 218, 244-8).
  • 미친 물결 일렁이는 세상 속에 이 한 곳이 맑으니, 이제 막 정자 앞에 이르러 내 마음을 추스른다. 벽을 가득 채운 그림과 책 밝은 거울처럼 놓여 있어, 백년 영욕마저 한 조각 구름처럼 가볍도다. 산 속은 물처럼 고요하며 텅 빈 배 떠있는데, 바람 많은 바닷가엔 새만 홀로 날고 있다. 어찌하면 충서(忠恕)의 도를 널리 펼쳐, 나라 안에 전쟁 없고 세상모두 평안할까.7)

이규준은 당시 조선에 유통되던 서구 학자들의 천문 및 자연 현상, 세계 지리, 역사와 문명 등에 대한 논의 뿐 아니라 기독교에 대해서도 접하고 있었다(박상영 외, 2010: 68).8) 그러나 그는 서양인의 기계와 기술 만을 취한 채, 본래의 중도(中道)를 따르고 보호하며 옛 가르침을 회복할 것을 강조하였던 유학자이자 영남 유림의 일원이었다.9) 다만 혼란스러운 세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이사기활설(理死氣活說) 만을 강조하며 붕당을 지어 화란(禍亂)을 일으킨 퇴계와 율곡 이후의 조선 유학자들을 비판하였고, 심과 성이 본래 한 가지이므로 리와 기를 나누어 보지 말자고(心性一物, 理氣合體) 주장하며 자신 만의 심학(心學)을 펼쳐냈다(성호준, 2012a:66).10) 특히 그는 기존 조선 유학자들의 논의를 극복하기 위해 오경의 논설을 옮기고 있는 사서(四書) 보다 성인의 큰 가르침을 직접 담아내고 있는 오경(五經)에 집중하였으며,11) 『모시(毛詩)』, 『상서(尙書)』, 『주역(周易)』, 『춘추(春秋)』,『주례(周禮)』, 『의례(儀禮)』의 육경의 주소들을 직접 산정(刪正)하기도 하였다(김두종, 1981: 463). 이와 같은 경학(經學) 학습 경향으로 미루어 볼 때, 의학에 관심을 가졌던 이규준이 성인의 저작으로 알려진 『황제내경』, 『신농본초경』 등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 내가 의학에 대해서는 대부분 옛 의학자의 학설을 고쳤으나, 임상에 실험했을 때 오류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나를 믿었다. 성리학에 대해서는 증거로 삼을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의심하니 이것이 한탄스럽다.12)

이규준은 자신이 주창한 심성론에 입각하여 군화(君火), 즉 심화(心火)의 존재와 역할을 전면에 내세운 의학 이론 부양론(扶陽論)을 제시하였고 성인의 가르침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다(성호준, 2009: 117-30).13) 아울러 신장(腎臟)에는 화(火)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상화(相火)의 실체적 존재를 부정하고, 오른쪽 신장을 명문(腎臟)으로 보았던 『난경(難經)』 이래 명문학파(命門學派) 의가들의 견해와 상화(相火)에 대한 통제를 주장하였던 주진형(朱震亨)의 견해를 비판하였다(黃元德, 1999: 15-53). 그의 대표 의서 『황제내경소문대요(黃帝內經素問大要, 이하 소문대요)』와 『본초경교정(本草經校正)』은 동아시아 전통 의학 경전 『황제내경소문』, 『신농본초경』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반영한 저작이었으며, 『의감중마』는 조선 의서 『동의보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동의보감』, 『방약합편』 그리고 『황제내경』 등을 매개로 자신의 임상의학 성과를 정리한 전문 의학 저작이었다.14) 그의 의학적 성과는 당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1923년 이규준에게 『의감중마』 편찬을 권유했던 김선구(金善久)는 부양론 전문을 시사주보 『동명(東明)』에 기고하여 게재될 수 있도록 하였고(東明, 1923), 1947년 전통 의학 잡지 『동양의학(東洋醫學)』에 『류경(類經)』에 대한 풀이를 연재 중이던 주홍제(朱弘濟)는 원문에 대한 구의(句義)를 위해 이규준의 견해를 활용하기도 하였다(朱弘濟, 1947: 38).
이규준은 자신의 근거지였던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석동에 석곡서당(石谷書堂)을 지어 강학하였으므로 이곳을 기점으로 그의 유학 및 의학 사상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5) 현재까지 유학 제자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없지만, 의학 제자들의 행적은 일부 알려져 있다. 먼저 김두종은 1966년 초간본 『한국의학사』 중에서 이규준의 세 아들 이박종(李泊鐘), 이돈종(李敦鐘), 이순종(李純鐘)과 이 대구 및 경주에서 의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김용석(金容錫), 배을재(裵乙濟), 이문근(李汶根) 등이 대구에서 설국(設局)한 성명 높은 문제(門弟)들 임을 보고하였다(김두종, 1981: 463). 김적 역시 1979년에 발표한 자신의 연구 중에서 이규준의 의학을 계승한 생존 제자로 조규철(曺圭喆), 서성효(徐聖孝), 이원세(李元世)가 있음을 보고하였고, 최근 편찬된 『포항시사(浦項市史)』 중에는 이규준의 의학 제자로 성석표(成錫杓), 서봉원(徐奉源) 등이 올려져 있다(金勣, 1979: 8; 포항시사편찬위원회, 2010: 506, 524). 이외에 석촌(石村), 을재(乙齋), 남곡(南谷) 등의 처방이 이원세가 편찬한 석곡이선생방(石谷李先生方) 『신방신편』 중에 남겨져 있다.
이규준의 차남 이돈종은 1957년 제 7회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하여 대구시 장관동 53번지에서 송은당한의원(松隱堂漢醫院)을 운영하였다(東洋醫學 學術會, 1957: 41; 慶尙北道韓醫師會, 1959: 114). 부자를 많이 써서 아버지 뒤를 이어 이부자(李附子)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그의 한의원은 부자약국(附子藥局)으로 알려져 있었다(박경용, 2011: 86).16) 그리고 삼남 이순종은 1959년 한의사 면허를 획득하였으며 먼저 세상을 떠난 장남 이박종 일가를 보살피며 경상북도 월성군 안강읍 사방리에서 부양당한의원(扶陽堂漢醫院)을 운영하였다.17) 이규준의 제자로 알려진 김용석, 이문근, 성석표 등은 이규준의 초종(初終)과 양례(襄禮)에 참석한 문생(門生) 명단인 문생시도기(門生時到記)와 조선총독부 관보 의생면허(醫生免許) 목록 중에서 그 이름이 확인된다.18) 서봉원은 문생시도기 중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조선총독부 관보 의생면허 목록 중에서 확인되며, 배을재는 문생시도기, 관보 모두에서 확인되지 않는다.19) 김적이 1979년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할 당시 생존하고 있는 제자라고 밝힌 조규철은 서울 하왕십리에서 동선한의원(東仙漢醫院)을 운영 중이었고, 서성효는 대전에서 청은의원(淸垠醫院)을 개업하고 있었으며, 이원세는 대구에서 무위당한의원(無爲堂漢醫院)을 개업 중이었다(金勣, 1979: 8). 요컨대, 이규준은 조선 말기에 활동한 유의로 유가적 심성론에 입각하여 새로운 의학이론인 부양론을 주창하였다. 그는 유학자로서 수많은 저작을 남겼지만, 독창적인 의학 이론과 실제 임상 의학 성과가 맞물리면서 의학자로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자신의 세 아들과 문생들에 의해 의술이 전승되면서 자연스레 의가 집단을 형성하였다.20)

3. 서병오, 이규준 의학을 전달한 중간자

서병오(徐丙五, 1862-1936)는 시서화 뿐 아니라 거문고, 바둑, 장기, 구변, 의술에도 뛰어나 팔능거사(八能居士)로 불리던 문화 예술계의 거물이다. 친부 서상민(徐相敏)과 양부였던 숙부 서상혜(徐相蕙) 모두 만석꾼이었던 탓에 전국에서 손꼽히는 대부호로 명성이 높았지만, 17세 무렵 이미 당대 최고의 권력자이자 예술가였던 이하응(李昰應, 1820-1898)으로부터 석재(惜才) 서신동(徐神童) 그리고 다시 석파(石坡)를 빗댄 아호(雅號) 석재(石齋)를 하사받을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朴根述, 1990: 92-4). 1861년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된 뒤 1896년 관직에 나아갔지만 오래지 않아 그만두고 중국과 일본을 유람하며 포화(蒲華), 오창석(吳昌碩), 제백석(齊白石), 이누카이쯔요시(犬養毅), 토우야마미쯔루(頭山滿)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1922년에는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를 창립하여 영남의 문인 화풍 및 화맥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1)
서병오의 의학 지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제 의술 활동을 실시하였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일본 방문시 사경을 헤매던 토우야마 미쯔루의 아들에게 부자(附子)를 투여하여 구하였다는 일화나 이규준과 공동 연구하여 조제한 통치환(通治丸)이 소화 불량 환자나 허약자를 위한 치료제로 전매 특허를 획득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김항회, 2000: 88; 申大植, 1977: 45-6). 그런데 1909년 자신의 병을 치료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던 중국 화가 포화의 작품 중에 그의 의술을 칭송하는 구절이 남겨져 있어 1912년 이규준을 만나기 이전부터 의학 지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 석재 선생은 조선의 이름난 진사이다. 유람하던 중에 상해(上海)에 이르러 서로 만나서 흔연히 소회를 풀었고, 계림(鷄林)에 투숙하여 나의 병 치료에 함께하였다. 의도(醫道)에 정밀하였던 사람으로 틈이 있는 날이면 시, 글, 그림으로 만났었다(石齋詩書畵集刊行委員會, 1998: 도록 361).22)

서병오는 1924년 2월 29에 발간된 『동서의학연구회월보(東西醫學硏究會月報)』 2월호 중에는 경상북도 회원으로 기재되어 있다(東西醫學硏究會, 1924). 또 같은 해 3월 30일에 발간된 『동서의학연구회월보』 제4호에서는 기량증명서수여자(技倆證明書授與者) 명단 중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1920년대의 의생 단체로 전국 의생 및 의생 조합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동서의학연구회와 교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東西醫學硏究會, 1924).23) 이외에 이원세가 편찬한 『의감중마백병총괄부방약편(醫鑑重磨百病總括附方藥編)』 중에 그의 처방 14개가 전해지고 있다.
이규준의 의학 전승 과정에서 서병오가 수행했던 역할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서병오는 이규준을 스승으로 모셨을 뿐 아니라 그를 학계의 중심 인물로 부각시켰다. 1912년 무렵 고혈압 등의 지병을 앓고 있던 서병오는 신병 치료를 위해 이규준을 만났고 이후 자신 보다 7살 밖에 많지 않던 이규준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申大植, 1977: 69).24) 주자학(朱子學) 일변도의 당대 조선 유학계의 풍토를 비판해오던 서병오는 이규준과 해후하면서 의기 상통하였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수시로 그를 공자 이후 탄생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극찬하였다. 서병오가 자신을 찾아오는 사대부들에게 이규준의 학문을 찬양하고 또 그와 공명(共鳴)하게 되면서 대구를 위시한 전국 각지의 유학자 및 한의학자들 사이에 이규준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申大植, 1977: 67, 45-6). 두 번째, 서병오는 이규준의 저작의 편찬 및 발행에 관여하였으며 그의 제자들과 교류하였다. 이규준의 저작 중 『의감중마』와 『의례주소절요(儀禮注疏節要는 1922년, 『경수삼편(經髓三篇)』은 1923년 영일군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류준경, 2005: 81). 서병오는 『의감중마』 목판본의 저작 및 발행자였으며, 이규준의 문생 배기목(裵基穆)은 인쇄자, 이채연(李埰演)은 발간소 제공자, 그리고 이규준의 집(石谷齋)은 인쇄소였다.25) 또 그는 『모시전주쇄관(毛詩傳注刷管)』, 『상서전소쇄관(尙書傳疏刷管)』, 『주역주전쇄관(周易注傳刷管)』 등 이규준의 유학 저서 표제를 서로 다른 필체로 써가며 서로 간의 각별한 친분을 드러내었다. 이들 저서는 모두 이규준의 문생 김경발(金慶浡)의 부친 김기홍(金璂鴻)이 운영하던 대구의 유명 출판사 겸 서점 재전당서포(在田堂書鋪)에서 1926년에 발행되었다(崔皓晳, 2006: 233-4). 이외에 서병오는 이규준의 또 다른 저작 『구세신교문(救世神敎文)』의 발행을 맡기도 하였다. 세 번째, 이규준의 학통이 이원세에게 전승되도록 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대식은 『석재 서병오』 중에서 서병오의 의학을 전수받은 인물로 달성의 문경수(文敬洙), 영일의 황보준(皇甫浚)과 함께 청도의 이원세를 꼽은 바 있다(申大植, 1977: 45).26) 실제 이원세는 직접 서병오의 집에서 실제 6년 7개월 가량 기거하며 이규준과 서병오로부터 한의학을 수학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원세가 이규준을 처음 만난 17세 무렵, 이규준은 이미 60대 후반의 노인이었으며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규준 생애 말년에 이루어졌던 둘 사이의 교류는 짧았던 만큼 깊은 사승 관계로까지 발전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당대 최고 문인이었던 서병오의 집에 머물면서 서병오로부터 이규준의 의학을 배우고 또 함께 논의하였던 시간들은 이원세가 이규준의 의학을 전승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 석곡을 17살에 만났고 19살에는 장가를 갔다. 석곡한테 배웠고 대구에 있는 석재한테 가서 6년 7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해서 연구했는데 …… 『의학입문』과 뭐뭐뭐 이런 걸 보라고 했다. 책은 그 집에 다 있거든. 그걸 다보고 줄로 그었다. 『소문』의 원리하고 다른 데는 줄을 그어가지고 토론하자고 했다. 한 열흘 동안 보고난 뒤 석재 영감한테 가져가서 토론하는데, ‘『소문』의 원리는 이런데 『동의보감』의 여기는 이렇게 되어 있으니 틀렸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니 석재 영감이 ‘맞다. 맞다’ 했다 …… 그걸 1년 했다. 맥 배우는 것도 1년 배웠다 …… 맥 배우러 가면 ‘봄 기운은 어때? 봄 기상이 어떠노?’이렇게 묻는다. 춘맥(春脈) 배울 때 ‘봄 기상은 어때?’ 이렇게 물으면 아는 대로 ‘봄 기상은 이래 이래 이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고개만 꺼떡꺼떡하고 …… 얼마 있다가 또 가면 다시 ‘봄기운은 어때?’ 또 그렇게 묻는다 …… 지난 번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면 안 되거든. 이러이러합니다라고 다시 이야기 한다. 이런 과정을 세번쯤 한다. 세 번쯤 하면 한 달 더 걸린다 …… 이렇게 연구했더니 뭐가 잡히거든. 간맥(肝脈)이라고 하면 ‘아하!’ 뭐 또렷한 거는 없어도 머리에 잡히거든. 그러니깐 확실히 나중에 되더라. 맥은 그래 배웠다 …… 그 양반도 석곡한테 이론은 충분히 배웠거든 ……27)

생전에 이규준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저작 발행에 직접 참여하며, 또 문생들과 교류하였던 서병오는 자신의 사후 이원세를 이규준의 문생 배을재에게 부탁하였다. 석곡서당의 문생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며 이규준의 의학을 수학하였던 이원세를 이규준의 문생들과 연결시켜주었던 서병오의 배려는 이원세로 하여금 이규준의 제자로 공인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후 이규준의 의학 학통(學統)을 이어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연결 고리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1945년 광복, 1950년 한국전쟁, 그리고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 사회적 혼란, 산업화 과정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이규준의 제자 집단을 대표하여 홀로나마 그의 의학을 전승시켜야 한다는 심적 부담을 안겨주기도 하였다.28)

4. 이원세, 이규준 의학의 계승과 부양학파의 정립

이원세(李元世, 1904-2001)는 1904년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29) 17세 무렵 이규준을 만나 석곡서당을 3개월 가량 출입하였지만, 이규준으로부터 대구의 서병오 자택에서 머물기를 권유받은 뒤 19세부터는 서병오의 자택에 기거하며 일과 공부를 병행하였다. 이규준이 간혹 서병오의 대구 자택을 방문할 때 친자(親炙)를 받았으며, 서병오에게서 의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가르침을 받았다. 1934년 청도로 돌아와 약종상 시험에 합격한 뒤, 15년 동안 청도에서 한약방을 열어 환자를 보았다. 이후 좌우익의 이념 갈등과 혼란스런 정국 통에 1949년 대구 남산동으로 쫓기듯이 옮겨왔다. 1956년 2월 한의사국가시험응시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하여 같은 해 5월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였고 9월 1일 자신의 거처인 대구 대봉 2동에서 무위당한의원(無爲堂漢醫院)을 개업하였다.
이원세는 청도에 있을 무렵부터 자신보다 20여 세 많은 사돈 김보문(金寶文)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보문과 이원세는 동학, 불교, 기독교 등 당대 시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교류하였으며 대구로 옮겨간 후에는 경북 칠곡 송림사(松林寺)를 거점으로 함께 불교에 심취하였다.30) 1976년 한의원을 폐업한 뒤 부산에 머물던 이원세는 1960-1970년대 재가 불교 운동으로 유명하였던 김기추(金基秋)를 스승으로 모시고 마음 공부에 매진하다가 1년 만에 견성(見性)을 인정을 받고 삼무당(三無堂)이라는 법명을 얻었다(李元世, 1977: 12-9; 1978: 7, 28).31) 1985년 부산으로 완전히 내려온 이후에는 제자 육성에 힘을 쏟았다. 『논어(論語)』, 『도덕경(道德經)』 등을 활용한 유불선 강의와 함께 『소문대요』, 『의감중마』 등을 활용한 한의학 수업이 함께 진행되었다.32) 1990년 수업을 받던 한의사를 중심으로 석곡학회(石谷學會)를 발족시켰으며 1년 뒤 이를 소문학회(素問學會)로 개칭하였다.33) 이후 제자들과 함께 『소문대요』, 『의감중마』 등의 교감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신방신편(新方新編)』, 『의감중마백병총괄부방약편(醫鑑重磨百病總括附方藥編』;, 『무위당잡영초고(無爲堂雜詠草稿』 등의 편찬에 힘을 쏟았다.
이원세가 부양학파 정립 과정에 기여한 역할은 크게 4가지 정도를 꼽아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원세는 이규준 및 서병오에게서 의학을 전수 받았으며, 서병오를 매개로 이규준의 제자들과 연결되었다.34) 이원세는 서병오 자택에서 일하며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기에 석곡서당 문도로서 정식적인 수학 과정을 밟지는 못했다. 서병오는 말년에 이규준 사후 그의 의론을 맡고 있던 배을재에게 이원세를 부탁하였고, 이원세 역시 배을재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으나 배을재는 마음을 열고 이원세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한 갈등으로 둘 사이의 관계 역시 틀어지게 된다.35) 분명치는 않지만 이원세가 석곡서당에서 수학한 정식 문도가 아니었던 점이 기존의 제자들로부터 배타적인 대우를 받는 요소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찌되었든 이원세는 이규준의 친자를 받은 사람 중 하나였으며 당대의 명망가였던 서병오에게서 수학한 인물이었다. 서병오와의 논의를 통해 이규준의 의학을 학습하였던 이원세는 기존 이규준 제자 집단과 일부 의학적인 견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실제 석곡서당 학생들의 교재로 활용되었던 『소문대요』의 구결, 『소문구두속해(素問句讀俗解)』와 이원세가 서병오의 집에서 수학하던 중 필사한 이원세 수초본 『소문대요』 중의 구결 간에 차이가 확인된다.36) 『소문대요』 「상고천진론제일(上古天眞論第一)」 중의 동일 문장에 대해 『소문구두속해』는 “하늘이 밝으면 해와 달이 밝지 않아져 사기가 몸의 각 구멍들에 해를 입히게 된다(天明則日月丶不明丷ᄀ邪害孔艱- 曰亽) ”로 풀이되도록 구결을 붙인 반면, 이원세 수초본 『소문대요』는 “하늘이 밝은 것은 해와 달 때문이니, 그렇지 않으면 사기가 몸의 각 구멍들에 해를 입히게 된다 (天明 卩 則 日月丶匕不明丷亻邪害孔戴 丷 已 匕 亽)”로 풀이되도록 구결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규준은 분명 해당 문장 끝에 “하늘은 스스로 밝지 않고, 해와 달에 의해 밝아진다. 심(心) 역시 스스로 밝은 것이 아니라 귀와 눈에 의해 밝아진다”라고 하여 하늘과 심(心)의 연관시키는 주석을 기입하고 있었다.37)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규준의 제자들은 이규준의 주석이 아닌 왕빙(王氷)을 비롯한 여타 의가들의 풀이에 의거한 구결을 붙이고 있었다.38) 이원세는 이를 지적하였고 해당 문장의 구결을 수정하여 이규준의 주석에 따라 문장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원세의 제자 김태국은 이 구결이 바로 이원세가 서병오와 『소문대요』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 속에서 이끌어낸 결과물일 것으로 추측한다.39) 즉, 『소문구두속해』는 이규준의 의학을 전승하기 위해 제공되었으면서도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있었지만, 이에 의문을 품은 이원세와 서병오에 의해 수정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원세는 이규준 의서에 대한 교감 작업을 진행하여 새롭게 발간하였다. 이원세는 서병오 자택에서 기거하는 동안 이규준의 의서 『소문대요』, 『의감중마』 등을 입수하고 1년에 걸쳐 필사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이후 제자들과 수업을 진행할 때는 항상 자신의 수초본 의서 『소문대요』, 『의감중마』를 활용하였는데, 보다 또렷한 글자로 이루어진 책자를 원했던 제자들을 위해 새롭게 『소문대요』, 『의감중마』를 편찬해내기로 결정하고 교감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옛 서적의 판식(版式)을 유지하면서도 이규준의 제지(題誌), 이종순(李鐘淳)의 후지(後識), 간기(刊記), 그리고 맥오층도(脈五層圖)까지도 삽입된 완정한 형태의 『소문대요』를 복원해냈다(오재근, 2013a: 206-16).
세 번째, 이원세는 『신방신편』, 『의감중마백병총괄부방약편』을 편찬하여 이규준 뿐 아니라 이규준의 차남 이돈종, 이규준의 제자 서병오, 배을제, 박희생 등의 처방을 정리하였다. 스스로를 이규준의 문하생(下生)으로 밝힌 박희생(朴熙珄)이 1981년 무렵 남곡(南谷) 해석본 『의감중마』 6권을 편찬한 바 있었다.40) 이후 이원세는 남곡 해석본 『의감중마』 6권에 첨부되어 있던 240 여개의 석곡신방(石谷神方)과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규준, 서병오의 처방, 그리고 당대에 유통되던 이규준 및 그 문도들의 처방을 수집 정리하여 석곡이선생방(石谷李先生方)이라는 부제의 『신방신편』을 편찬해냈다. 이를 통해 630여개에 달하는 이규준의 처방을 잡병, 내경, 외형의 순으로 분류하고, 관련된 『백병총괄』 원문을 기입하는 한편, 각각의 처방 아래 간단한 해설을 기입하여 임상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신방신편』에 이어 이규준 이외에 이돈종, 서병오, 배을제, 박희생, 석촌(石村) 등의 처방 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방까지도 정리한 『의감중마백병총괄부방약편』을 편찬하였다. 『의감중마백병총괄부방약편』은 질병에 대한 설명만 기재되어 있던 『의감중마』 「백병총괄」 원문 아래에 처방의 활용 실례를 나열하여 실제 임상에서의 활용도를 극대화시킨 저술이었다. 이와 같은 의서의 편찬 작업을 통해 이규준의 부양론이 임상 의료 영역에서 처방으로 구체화되고 전승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한편, 남곡 해석본 『의감중마』 석곡신방 중에는 누락되어 있던 서병오의 처방 뿐 아니라 자신의 처방까지도 삽입하여 서병오는 물론 자신 역시 이규준 제자 그룹의 일원임을 공표하였다.
네 번째, 이원세는 자신에게 한의학을 배우러 찾아온 이들에게 이규준의 부양론을 소개하고 이들을 학술 집단으로 결집시켜 이규준의 의학이 전승될 수 있는 인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대구에서 머물고 있을 때부터 자신을 찾아오는 한약업자, 약사, 의사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한의학을 전수하였지만 제대로 전승되지 않는 점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 최춘길 : “그 때는 나 혼자뿐이었거든요. 혼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렸어요. ‘왜 제자들 좀 길러놓지 왜 안 길러놓고 그러십니까?’ 그랬더니, ‘어느 놈이 공부 할라고 하는 놈 누가 있드노.’ 이러세요. ‘전신에 돈벌이 할라고 하는 놈뿐이더라.’ 라고요.41)

  • 이국형 : “오히려 그만 두시고 부산 내려가니깐 제자들이 생기더라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대구 계실 때는 뜨내기처럼 한의사들, 한약방하시는 분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많이 배우셨어요.”42)

1960년대 초부터 이원세와 교류하였던 한약업사 제자 최춘길은 평소 이원세가 학문을 전승시키려 하였지만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어 아쉬워하였음을 증언한다. 그리고 이원세의 외손자이자 한의사인 이국형은 이원세가 대구에 있을 때는 자신의 제자를 얻지는 못하였고, 말년에 부산으로 내려와서야 제자를 거두었다고 회고하였다고 증언한다. 1988년 부산의 동의학우회(東醫學友會) 소속 한의사들이 이원세를 찾아와 한의학을 전수받기 시작하던 당시 이원세는 이미 85세였으나 1주일에 한 차례씩 수업을 진행하며 학문 전승에 열정을 보였고 그 과정은 2001년까지 이어졌다. 이원세의 한의학 전승 과정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소문대요』를 중심으로 한 기초 이론의 중시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던 겸손함이다. 이원세에게 한의학을 수학하던 한의사들이 『소문대요』 중심의 이론 강의가 반복되자 지루하게 여겼지만, 이원세는 기초 이론을 통달하면 임상 의학은 매우 쉽다며 『의감중마』로 선뜻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은 채 학파의 개창자인 이규준을 앞세워 전승자로서의 책무 수행에 만전을 기하였고 그 결과 이원세가 아닌 이규준의 의학을 내세운 소문학회가 대구, 부산을 넘어 전국 각 지역에서 확산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5. 이규준의 의학, 과연 부양학파를 이루었는가

중국의 의사학자 셰관(谢观, 1880-1950)은 상고의파(上古醫派), 유하간학파(劉河間學派), 이동원학파(李東垣學派), 장경악학파(張景岳學派), 설립재학파(薛立齋學派), 조헌가학파(趙獻可學派), 이사재학파(李士材學派), 상한학학파(傷寒學學派) 등을 제시하며 당대 중국 전통 의학계에 학술 유파가 존재함을 주장하였다(谢观, 2003: 38-53).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김두종 역시 당대 한국 전통 의학계에 보감파(寶鑑派), 정전파(正傳派), 회춘파(回春派), 입문파(入門派) 등으로 칭해지는 다양한 파류(派流)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고하였다(김두종, 1981: 264). 이후 동아시아 전통 의학 학술 유파의 분류 및 성립 조건에 대한 논의는 중국 연구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학파의 분류 방식은 상한파(傷寒派), 온병파(溫病派), 하간파(河間派), 역수파(易水派), 공사파(攻邪派), 단계파(丹溪派), 온보파(溫補派) 등 7대 의학 유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지만(任应秋, 1980: 18; 裘沛然·丁光迪, 1992: 15; 严世芸, 2003: 12, 任应秋, 2007: 5),43) 학파 성립 조건을 학설 계승 위주로 볼 것인지 (任应秋, 1980: 6), 학술 사상의 계승, 연구 집단, 저작 등의 존재 여부까지 포함할 것인지(陈大舜, 1989: 2) 등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장샤오핑(張笑平)이 제시한 5가지 조건, 첫 번째, 학파를 개창하였다고 평가되는 대표 의가가 있어야 할 것, 두 번째, 공동으로 주창한 기본 학설이 있어야 하며 이 학설은 전통 이론이나 다른 학설과 대치되어야 할 것, 세번째, 기본 학설을 찬발한 대표 의학 저술이 있어야 할 것, 네 번째, 친자·사숙·대표 의학 저술로부터의 적극적인 영향 등과 같은 특정한 형성 과정이 있어야 할 것, 다섯 번째, 일련의 기본 집단이 있어야 하며 그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주창된 학설을 발전시키는데 일정 정도 공헌을 하여야 할 것 등이 가장 포괄적인 것으로 판단된다(張笑平, 1991: 7, 12-3).
이규준과 그의 제자 집단, 그리고 현재의 소문학회는 본 연구 이전에 이미 장샤오핑(張笑平)이 제시한 학파 형성 조건 중 4가지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첫 번째, 조선 말기의 유의 이규준을 학파의 개창자로 추존하고 있었으며, 두번째, 이규준이 자신의 심학(心學)을 근거로 주창하였던 심화(心火) 중심의 의학 이론, 부양론을 기본 학설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부양론은 기존의 상화론(相火論)이나 명문학설(命門學說) 등과 내용상 분명히 구별되는 이규준 만의 의론이었다. 세 번째, 『소문대요』, 『의감중마』 등은 이규준의 대표 의서로 부양론, 기혈론(氣血論) 등 이규준의 의학 논문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규준의 제자 집단과 소문학회 모두 이들 의서에 준하여 의학을 학습하고 임상 의학을 실천하고 있었다. 네 번째, 초기에는 석곡서당 출신 제자들을 중심으로 일련의 학술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최근에는 이원세에 의해 창립된 한의사 중심의 학술 집단 소문학회를 통해 사승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었다. 아울러 소문학회는 『소문대요』, 『의감중마』의 현대식 재간행, 『국역소문대요』, 『약성가』 등 한글 저작의 편찬, 『함벽루 소식』, 『소문학회지』 등 정기 간행물의 간행 등의 학술 활동을 수행하며 이규준의 의학 사상의 정리 및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44) 그렇지만, 학파 성립을 위한 네 번째 조건이자,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의학 사상의 계승 과정이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았었다. 뿐만 아니라 소문학회 창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한 이원세의 경우, 이규준으로부터 친자를 받은 기간이 얼마 되지 않고 석곡서당의 문도로 간주될 수도 없어 이규준의 의학 성과를 진정으로 계승하였는지 여부도 불확실한 상태였다. 금번 연구는 이규준의 자제 및 제자 집단의 실존, 이규준을 스승으로 모셨던 서병오와 이원세의 관계, 그리고 서병오를 매개로 한 이규준 제자 집단과 이원세 간의 연결 등을 통해 이규준의 의학이 그의 삼형제와 제자 집단, 그리고 서병오를 통해 전승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이원세에게 귀결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이원세에 의해 창립된 소문학회가 이규준과 그의 자제 및 제자, 서병오, 이원세로 이어져오던 일련의 의가 집단과 함께 하나의 의학 학술 유파, 이른 바 부양학파를 형성해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제 다시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 보자. 이규준의 제자 집단이 하나의 학술유파인 부양학파를 이루었다면 이를 빌어 어떤 논의를 진행할 수 있는가? 부양학파가 갖고 있는 의학사적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첫 번째,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허준은 조선의 의학을 중국의 남의, 북의와 대비되는 동의라 칭하며 『동의보감』을 통해 동의의 전통을 구현하였음을 밝힌 바 있다. 동아시아 전통 의학이라는 본류에서 흘러나온 지류가 다시 새로운 본류가 되었음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허준에 의해 담고자 했던 동의의 전통이란 무엇이었으며 이후 그 전통은 어떻게 전해져 갔을까? 혹시 『동의보감』이라는 본류로부터 흘러나온 지류, 학파를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는 않을까? 『동의보감』 이후 조선에서 편찬된 『제중신편(濟衆新編)』, 『의문보감(醫門寶鑑)』, 『의종손익(醫宗損益)』 등 많은 의서들이 『동의보감』의 계승을 표방하였지만, 저자의 의론이 뚜렷이 밝혀진 경우가 많지 않아 이들이 동의의 전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계승하였는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동시대에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이제마나 이규준은 이와 같은 측면에서 다른 의가들과 차이를 보인다. 먼저, 이제마는 허준을 편작(扁鵲) 이래 장중경(張仲景), 주굉(朱肱)으로 이어져 오던 의학(醫道)을 전승하고 부흥시킨 인물로 평가하였다.45) 그리고 이규준은 허준에 대해 신농, 황제 이래 원명(元明) 시대까지의 의서를 모아 놓은 동방의 의서, 『동의보감』을 편찬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46) 모두 『동의보감』의 성과와 의학 학술사적인 가치를 언급하며 자신의 의학적 본류가 『동의보감』 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상지인(四象之人)에 대한 새로운 의학 이론을 주창하였던 이제마와 부양론을 내세우며 기존의 의학 이론을 비판하였던 이규준은 『동의보감』의 논의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했다. 이제마와 이규준은 모두 조선 유학의 성과이기도 하였던 성리학적 심성론을 기반으로 인간의 몸과 질병을 재해석하고자 하였고, 조선에서 산출되는 본초를 임상 의학에 적극 활용하였으며(오재근, 2010: 40-54),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제자 집단을 형성하여 하나의 학파를 구성해냈다. 사실 『동의보감』은 조선 시기 내내 의학이나 침구의 취재(取才)를 위한 강서(講書)로 활용되지도 않았으며 의과시험강서(醫科試驗講書)로 채택된 적도 없었다(三木榮, 1962: 295-6). 또한 당대의 조선 의가들은 『동의보감』외에 『의학입문』, 『만병회춘』, 『의학정전』 등의 중국 의서들 뿐 아니라 번역되어 유통되던 서양 의학 지식 역시 섭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마와 이규준은 왜 『동의보감』을 선택하고 추존했던 것일까? 학술사적 성과의 계승 외에 혹시 허준이 『동의보감』을 통해 구현하였다고 밝힌 동의의 전통 속에서 자신들의 의학이 존립할 수 있는 여지를 찾아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최근 조남호는 『동의보감』은 당대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성리학적 이념의 산물로 유가의 관점에서 도교와 한의학을 아우르는 방식을 채택하였으며, 실제 임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실용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질병을 분류하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조남호, 2006: 341, 360).47) 그리고 김호와 오재근은 『동의보감』 중의 본초의 분류, 배치, 처방 일부를 분석하여 그 중에 담겨져 있는 실용성과 성리학적 세계관을 밝혀냈다(김호, 2000: 228-49; 오재근·김용진, 2010: 55-66; 오재근, 2011: 282-6; 오재근, 2013b: 31-4). 『동의보감』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들은 당대의 유학자이자 의학자였던 이제마나 이규준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자신의 의학 이론 구축에 『동의보감』을 활용하도록 유인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허준이 제기하였던 동의의 전통이 이들 두 의가의 손에 의해 저마다의 모습으로 구체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것이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를 새롭게 해석하여 시류의 변화에 대응하고자 했던 당대 유학자들의 지적인 지향점이자 시대적인 한계 아니었을까?
두 번째, 부양학파 나아가 사상의학파 역시 하나의 전통 의학 학술 유파를 이루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들은 왜 조선 말기에 등장하였던 것일까? 『동의보감』 편찬 이후에는 과연 학술 유파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을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은 중앙 집권적인 관료제 국가로 개국 초부터 과거제(科擧制)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였다. 문과, 무과, 그리고 잡과를 통한 관직 진출은 모든 젊은이들의 꿈이었으며 가문과 신분을 지키기 위한 필수 요건이기도 했다(李成茂, 1994: 19-20, 93-112). 의과(醫科) 준비를 위한 학습은 표준화된 의학 지식을 보급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다양한 의학적 담론의 유통을 제약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미 관직에 진출한 의관들에게 특정 학파에 입문하거나 계보에 속하는 것은 자신의 의료 활동을 제약하는 요소이기도 하였다(이기복, 2013: 494-5). 그렇지만, 의관이 중심 역할을 수행할수록 의관 주변에서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논의들이 형성될 수 있었다. 16세기 후반에 접어들게 되면서 전주이씨(全州李氏), 경주최씨(慶州崔氏), 천녕현씨(川寧玄氏) 등 10대 씨족들이 내의원 의관 뿐 아니라 의과 진출을 위한 교두보인 전의감 의학생도(醫學生徒) 마저도 독점하면서 세의(世醫)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이규근, 1997: 10; 이남희, 2012: 65-85; 박훈평, 2013: 5-7). 의관의 배출이 일부 씨족에 독점되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신분 상승의 한계에 직면한 중인 계층의 자구책이었다거나 사사로운 친분을 활용한 의관의 선발 과정 등 때문이었다는 등의 설명이 있지만, 고도의 전문성과 숙련된 기술을 요구하며 도제식의 방법을 통해 전수될 수 밖에 없었던 의학 자체 특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許在惠, 1990: 101-2; 신동원, 2004: 231, 박훈평, 2013: 5-7). 임상 의학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의관의 자제나 친인척, 지인 등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의관 선발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음은 자명하다.48) 바로 이 지점에서 가계를 매개로 한 의학 전승의 특정한 흐름이 형성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현종(顯宗), 숙종(肅宗)의 종기를 치료하여 명성을 날렸던 침의(鍼醫) 백광현(白光炫, 1625-1697)의 치료 기술은 그의 아들인 백흥령(白興齡), 백흥성(白興聲) 뿐 아니라 조카 백흥전(白興銓), 제자 박순(朴淳) 등에게도 전승되었으며(방성혜, 2013), 또한 진맥으로 이름 났던 의관 이수기(李壽祺, 1664-?)의 상용방이자 특효방, 인삼맥문동탕(人參麥門冬湯)은 그의 아들과 이름조차 확인되지 않은 정의원(鄭醫)에게 전승되었다.49) 18세기 무렵 조선의 의료 환경은 점차 민간 의료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의약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약재 시장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의료 시술자가 늘어나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는 등 상업적인 의료가 활성화되어 있었다(신동원, 2005: 475-81).50) 한 환자의 질병 치료 방식을 두고 태의(太醫), 유의(儒醫), 여러 명의 업의(業醫)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자신의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무려 6명의 의원을 내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51) 인조 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에서도 유의(儒醫)를 비롯한 방외의인(方外醫人)들이 어의로 선발될 수 있는 의약동참(醫藥同參)이 실시되어 기존의 내의원 의관들과 의견 대립을 벌이기도 하였다(홍세영, 2010: 108-12). 민간 뿐 아니라 왕궁의 내의원 안에서도 다양한 의론이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을 비롯한 조선, 일본 등 동아시아의 환자와 의사 간에는 “의원이 3대를 이어져오지 않았으며 그 약을 먹지 않는다(醫不三世, 不服其藥)”는 『예기(禮記)』 「곡례(曲禮)」의 경구가 뛰어난 의사를 선택하기 위한 일종의 강령으로 작동하고 있었다(Chao, 2000: 76).52) 따라서 세의 출신이 아닌 일반 의가들의 경우 자신의 학문적 권위와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며 (김성수, 2011: 5), 그 결과는 스승을 모시거나 제자를 길러내는 등 모종의 학맥을 형성해내는 방식으로 이어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조선 말기 이제마의 사상의학파나 이규준의 부양학파의 탄생과 성장 역시 그 연속선 상에 있었다. 아직 『동의보감』 편찬 이후 조선 의학계에 학파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의의 형성 과정 뿐 아니라 민간 의원 등을 통한 의학 전승 과정이 의학 학술 유파의 등장으로 이어졌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53)

6. 마치는 글

19세기 조선은 내정의 몰락과 외세의 침탈이 맞물리면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의 전국 단위의 혁명 시도, 의병의 끊임없는 봉기와 투쟁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이어지던 때였다. 1894년 갑작스레 폐지된 과거 제도는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의 꿈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과거 시험을 통한 관료 선발을 통해 운영되던 기존의 체제 질서를 흔들었다. 의과를 통과한 의관 중심이었던 의학 부분 역시 심각한 변동을 가져왔다. 이규준은 경상도 영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유학자로 시류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성리학의 폐단을 비판하고 자신 만의 심학을 주창하였으며 의학에도 밝아 『소문대요』, 『의감중마』 등의 의서를 편찬하였다. 그에게서 육성된 많은 제자들은 유학자이자 의학자로 영남 지역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그의 의학은 자신의 3형제와 제자들을 통해 전승되어 가며 일련의 유파를 형성하였고 영남 의학의 종주로 불리웠다(김두종, 1981: 463; 三木榮, 1962: 282). 서병오는 대부호의 자손이었지만 뛰어난 학문과 예술적 기량을 바탕으로 당대의 중국, 일본의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다. 자신의 질병 치료를 위해 포항에 거처하던 무명의 학자 이규준을 조우하게 되면서 그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고 학계의 중심 인물로 이끌었다. 이규준의 천거로 서병오의 식객이 된 이원세는 수많은 일꾼 중에 하나였지만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서병오에게서 수학하였다. 이원세에 의해 정리된 14개의 처방 이외에 서병오의 구체적인 의학 성과가 아직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그의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인 지위, 학문적 식견, 예술가로서의 명성, 그리고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 등이 없었다면 이규준과 이원세의 명성은 분명 지금만 같지 못했을 것이다. 이원세는 이규준으로부터 친자를 받았다. 그리고 서병오를 통해 이규준의 의학에 한층 더 다가갔으며 이규준의 제자 그룹과 연결되었다. 아직 서병오 사후 이원세가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규준의 아들인 이돈종과 이순종, 그리고 이규준의 제자인 조규철, 서성효 등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였는지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 식민 지배, 광복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 한국 전쟁 등의 격랑을 헤쳐오면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고민하기도 힘들었던 그 순간 스승, 제자를 찾아 자신의 학문적 정통성을 수립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가당치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원세는 꾸준한 의술 연마와 정진을 통해 자신의 학문의 폭을 넓혀갔고 인생 말년에 드디어 자신 만의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이규준 의서를 교감하고 재발행하는 한편, 이규준과 제자 집단의 의학적 성과를 처방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소문학회를 창립하여 이규준의 의학이 전승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규준 의학사상 전승자로서의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1894년 조선 정부는 새로운 건국을 꿈꾸며 변혁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 동시에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과거 제도는 의관 또는 의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전 의가 중심의 의료 체제가 종식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이제 남겨진 자리는 선교사와 함께 들어온 서구 의학 그리고 식민 지배를 위한 일본 제국주의 의학의 몫이었다. 36년간 지속된 일본의 지배와 광복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진 서양 의학의 이식과 학습 과정은 기존의 전통 의학을 더욱 주변부로 내몰았다. 실제 식민지 조선은 서구식 의료 기반은 충분치 못했을 뿐 아니라 서구식 의료 인력 역시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지방을 비롯한 대다수 민간의 의료는 여전히 의생이나 한약종상 등 한의학 종사자들의 몫이었다(신동원, 2002: 347-65). 이규준과 그의 의학 뿐 아니라 조선의 전통 의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어져오고 있었다. 이규준의 의학을 계승한 부양학파나 이제마의 의학을 계승한 사상의학파는 모두 세의와는 무관한 새로운 의가 집단이었다. 이들은 당대의 유명 의가 이제마나 이규준을 내세워 자신들의 학문적 정체성 또는 의학적 권위를 확보하고 생존해갔지만, 나머지 의관과 세의들은 존재감을 상실한 역사 속에 파묻혀 갔다.54) 특히 함흥에서 활동한 이제마에 의해 창시된 사상의학파는 독창적인 의학 이론, 뛰어난 임상 의학 효과 뿐 아니라 당대의 민족주의 열풍을 타고 한국의 중심부, 서울로 입성하면서 점차 전통 의학계의 핵심적인 논의로 부상하였다. 이와 달리 포항이라는 지방을 중심으로 탄생하고 전승되어왔던 부양학파는 한 때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지만 한국 전쟁, 산업화, 현대화의 격랑 속에서 자신의 학맥(學脈)을 유지하기도 버거웠다. 오로지 이원세라는 개인 의가의 노력에 힘입어 그 의학 사상이 전승되고 전파될 뿐이었다. 199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의학 제자들이 규합되고 이규준을 비롯한 제자 집단의 의학 성과가 정리되면서 지금의 소문학회를 형성하고 하나의 학술 유파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요컨대, 이규준을 필두로 내세우고 있는 부양학파는 하나의 학술 유파로 인정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말기에 태동한 이들은 지금까지도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한국 전통 의학의 학술 유파로서 자리 매김하고 있다. 동일한 의서로 학습하면서도 스승과 제자 관계를 통해 근대 및 현대 시기를 관통하여온 부양학파의 학맥 전승 과정은 한국의 주변부에서 실존하였던 전통 의학계의 많은 일원들이 어떻게 살아갔으며 또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학문을 유지하고 계승해왔는지 그 생생한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 한의학의 본류를 다시 한번 반추해볼 수 있는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Notes

1) 『朝鮮王朝實錄』 肅宗 21年(1695) 12月 9日. 『朝鮮王朝實錄』의 원문 검색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http://sillok.history.go.kr/을 활용하였다. 검색일: 2014. 2. 24.

2) 『承政院日記』 正祖 16年(1792) 8月 23日. 『承政院日記』의 원문 검색은 승정원일기 홈페이지 http://sjw.history.go.kr/을 활용하였다. 검색일: 2014. 2. 24.

3) 인용문은 문맥에 맞게 일부 문장을 수정하였음. 이하도 동일함.

4) 이하 『東洋醫藥』, 『東洋醫學』, 『東方醫藥』, 『東西醫學硏究會月報』 등 한의학 잡지의 검색은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한의고전명서 홈페이지 http://jisik.kiom.re.kr/을 활용하였다. 검색일: 2014. 2. 24.

5) 『東醫寶鑑』 卷1 「集例」. 『東醫寶鑑』은 金信根이 편찬한 『韓國科學技術史資料大系』 醫藥學篇에 수록된 간본을 활용하였다.

6) 黃煌은 張文宣의 『朝醫四象醫學發展簡史』를 인용하며 이제마의 사상의학이론이 張鳳永, 杏坡 등에게 전수되었고 이것이 중국 연변으로 전입된 이후 金良洙로 대표되는 龍井派, 鄭基仁으로 대표되는 銅佛派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기술한 바 있다(黄煌;, 1991: 318). 한반도 내에서 이루어진 이제마 의학의 전승 계보 및 현황에 대해서는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7) “狂瀾千里一區淸, 纔道亭前轄我情. 四壁圖書明鏡在, 百年榮辱片雲輕. 山扃如水虛舟泛, 海國多風獨鳥征. 安得大敷忠恕道, 域中無戰世咸平”(『石谷散稿』 「盧訥齋相稷字致八庄上」』). 이하 『石谷散稿』는 孫晋圭에 의해 1981년 慶州에서 발행된 간본을 활용하였다.

8) 『石谷心書』 「至道」, 「敎問」. 이하 『石谷心書』는 安熙濟에 의해 1922년 釜山에서 발행된 간본을 활용하였다.

9) 『石谷散稿』 「與嶠南敎育會員朴晶東李根中等」

10) 『石谷心書』 「性問」 이규준의 생애에 대해서는 金勣(1979), 김창건(2009: 149-62), 신상구 (2013: 169-82) 등 참조. 유학 사상에 대해서는 성호준(2009: 113-23; 2012a, 51-77; 2012b, 81-103) 등 참조.

11) 『石谷心書』 「經說」

12) “甞曰, 吾於醫學, 亦多革古人之說而試之無差, 故人皆信之. 至於心性之學, 則無跡可徵, 故咸懷然疑, 是可歎也”(『石谷散稿』附錄 「墓碣銘」).

13) 『黃帝內經素問大要』 素問附說 「扶陽論」. 이하 『黃帝內經素問大要』는金信根이 편찬한 『韓國科學技術史資料大系』 醫藥學篇에 수록된 간본을 활용하였다. 이규준의 심성론과 의학 이론 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권오민(2010), 김창건(2014) 등 참조.

14) 『소문대요』의 선행 연구 목록은 오재근(2013a: 203)에 정리되어 있다. 이외에 『의감중마』 의 선행 연구로는 오재근·윤창열(2009a: 9-27), 권오민 외(2010: 1-9) 등이 있으며, 『본초 경교정』의 선행 연구로는 오재근·윤창렬(2009b: 321-36) 등이 있다.

15)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석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이규준의 종택은 이규준이 기거하던 안채를 헐고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 앞에 석곡서당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그 흔적 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石谷心書』 중에 「石谷書堂學規」가 수록되어 있으며, 『石谷散稿』 에는 석곡서당과 그 중에 소장되어 있던 만사, 제문, 그리고 기타 원고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16) 이규준의 손자이자 이돈종의 아들인 李雨茁은 1954년 대구시 병구에서 이승만 반독재 투 쟁에 앞장서며 이갑성을 물리치고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초선 당시 무소속이었던 그는 재선을 위해 자유당에 입당하였고 1958년 세칭 올빼미 부정개표 사건에 연루되어 당선이 취소되었다(『전북중앙신문』, 2003; 『경향신문』, 1954, 1956; 『동아일보』, 1959). 이규 준의 손자 이우덕은 이돈종의 한의원에 이규준 관련 자료들이 일부 남겨져 있었지만, 1960년 4·19 당시 분노한 시민들이 한의원과 자택을 습격하게 되면서 이규준과 관련된 자료 뿐 아니라 이돈종의 의학 기록, 약품 및 물품 등도 모두 망실되었다고 증언한다(오재근, 이우덕 인터뷰, 2013년 6월 22일).

17) 1959년 발간된 『慶尙北道韓醫師會會誌』 중에는 이순종이 경상북도 영일군 구룡포읍 구룡 포리 700번지에서 三山堂漢醫院을 개업하고 있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慶尙北道韓醫師會, 1959: 118). 『慶尙北道韓醫師會會誌』 검토는 대구광역시 한의사협회 김종철 사무총장의 도움을 얻었다.

18) 李汶根: 「醫生免許」, 『朝鮮總督府官報』 724號, 1915年 1月 3日; 金容錫: 「醫生免許」, 『朝鮮總督府官報』 723號, 1914年 12月 29日, 成錫杓: 「醫生免許」, 『朝鮮總督府官報』 955號, 1930 年 3월 12日; 1869號, 1933年 4月 5日; 2785號, 1936년 4月 28日; 3638號, 1939年 3月 8日. 이하 『朝鮮總督府官報』의 원문 검색은 조선총독부 관보활용시스템 http://gb.nl.go.kr/을 활용하였다. 검색일: 2014. 2. 24.

19) 徐奉源: 「醫生免許」 『朝鮮總督府官報』 622號, 1914年 8月 27日; 「醫生免許證返納」 『朝鮮總督府官報』 1973號, 1933年 8月 7日.

20) 이규준 제자들의 활동은 이우덕이 소장하고 있는 學契案(1906), 講學契(1912), 門生時到 記(1923), 石洞學契追案(1925), 石洞學契追補案(1938), 石洞契草案(1962) 등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21) 徐丙五의 생애 및 예술 활동과 관련된 선행 연구는 최근에 발표된 김지영(2010: 1-2) 중에 정리되어 있지만 徐丙五의 교남시서화연구회 활동을 살펴본 이나나(2010: 92-7)이인숙 (2009: 345-79; 2010: 463-97) 등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최근 영남일보에서는 2011년 9월 14일부터 2013년 1월 19일까지 30회에 걸쳐 徐丙五의 삶과 작품을 살펴보는 연재 기사를 실어 큰 반향을 얻기도 하였다.

22) “蒲華爲石齋作. 石齋先生, 朝鮮名進士也. 遊歷至滬瀆, 欣然抱晤, 投鷄林, 參療予疾. 盖精醫道者, 暇日以詩書畵見”(『石齋詩書畵集』, 도록 361)

23) 徐丙五의 동서의학연구회 활동에 대한 기록은 마산 성신한의원 황연규 원장의 자문을 받았다. 황연규(2010) 참조.

24) 이우덕과의 인터뷰에 의거하여 일부 내용을 보충하였다(오재근, 이우덕 인터뷰, 2013년 6월 22일).

25) 『醫鑑重磨』 人 「刊記」. 이하 『醫鑑重磨』는 徐丙五에 의해 1922년 大邱에서 발행된 간본을 활용하였다.

26) 皇甫浚은 1911년 4월 이규준과 함께 호서, 호남을 유람하였던 인물로 『石谷散稿』 湖遊日記」와 문생시도기 중에서 이름이 확인된다. 그러나 徐丙五에게서 의학을 수학하였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文敬洙는 문생시도기는 물론 學契案 등에서도 확인되지는 않아 이규준의 문생이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다만 『朝鮮總督府官報』 중에는 醫生으로 기록되어 있다(文敬洙: 「醫生免許」, 『朝鮮總督府官報』 976號, 1930年 4月 8日; 1869號, 1933年 4月 5日; 2769號, 1936年 4月 9日; 3638號, 1939年 3月 8日; 4535號, 1942年 3月 12日).

27) 이원세 동영상 강좌 14 중에서 발췌 후 일부 수정(소문학회, 「영상강좌」, 소문학회 홈페이지, http://www.somun.or.kr/. 검색일: 2014. 2. 24).

28) 1981년 李圭晙의 제자인 鄭滿載를 스승으로 모시던 孫晋圭에 의해 李圭晙의 제자 崔鐘洛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이규준의 유고를 모은 『石谷散稿』가 발간되었다(『石谷散稿』 「發刊辭」). 그러나 『石谷散稿』의 발행 이외에 李圭晙 제자들의 활동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29) 이원세의 호적, 한의사 면허증, 한의원개설허가등록대장 등 공식 문서 중의 출생년도는 1907년이다. 1907년을 근거로 이원세가 언급한 자신의 생애 관련 기록을 확인해보면 들어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아마도 1913년에 이루어진 취적신고 과정 중에 실제 출생 년도와 기록 상의 출생 년도 간 차이가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는 72세에 김기추 선생을 만났다는 이원세 강의 동영상 내용과 1977년 발간된 보림학보 7집을 통해 출생 년도를 추산하였으며, 이원세의 장자 이종섭 및 그의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실제 출생년도가 1904년이었음을 확인하였다(오재근 외, 이종섭 인터뷰, 2013년 8월 18일).

31) 김광하의 구술에 따름(오재근, 김광하 인터뷰, 2013년 3월 25일). 이원세와 보림선원과의 관계는 김광하로부터 자문을 받았다. 김기추의 생애와 그의 재가 불교 운동에 대해서는 진명순(2009: 193-229) 등 참조.

32) 비한의사 제자로는 황정원, 박용성, 안예섭, 박신도, 정선주 등이 꼽히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무위당한의원진료부(총3권)』가 바로 이원세에게 진료를 받은 뒤 약을 지으러 온 환자에게서 당시 약사였던 안예섭이 일일이 수집하여 펴낸 것이다(오재근·김태국, 안예섭 인터뷰, 2013년 1월 22일).

33) 소문학회, 「학회연혁」, 소문학회 홈페이지, http://www.somun.or.kr/. 검색일: 2014. 2. 24.

34) 이우덕은 이원세 생전에 그를 만났을 당시 이원세가 자신을 두고 이규준의 학술 사상을 직접 계승한 제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회고하였다라고 구술하였다(오재근, 이우덕 인터뷰, 2013년 6월 22일).

35) 이원세 동영상 강좌 57-1(소문학회, 「영상강좌」, 소문학회 홈페이지, http://www.somun.or.kr/. 검색일: 2014. 2. 24).

36) 현재 통행되고 있는 密陽琴川新刊 『소문대요』 목판본의 後識 중에는 초학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하게 句讀를 기록하여 붙여놓았음이 언급되어 있지만, 통행본 목판본 중에서는 구두와 관련된 어떤 기재가 남겨있지 않아 후지의 기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통행본 『소문대요』와 동일한 版式에 자획 및 행수까지도 일치하여 통행본 『소문대요』와 동시에 판각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素問句讀俗解』의 존재가 밝혀진 바 있다. 『素問句讀俗解』에 대해서는 안상우(2001)真柳誠(2004: 25) 등 참조.

37) 『黃帝內經素問大要』 上古天眞論」 “天不自明以日月爲明, 心不自明以耳目爲明, 心不淸淨則邪害空竅, 耳目不聰明耳.”

38) 해당 문장은 『黃帝內經素問』 「四氣調神大論」에서 유래한 것으로 唐代의 王氷이 “大明見則小明滅”라고 주석을 기재한 이래, “明은 萌의 오기이다”, “明은 萌의 가차자이다”, “본래 天明이 아니라 天不明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다른 편에서 잘못 옮겨온 착간이다” 등의 논란이 있어 왔다(李国淸 외 编, 2000: 23-4).

39)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외래교수, 부산 수영구 요산한의원장.

40) 간기가 별도로 기재되어 있지 않아 분명한 출판 년도를 알 수 없지만, 「醫鑑重磨解釋原委」 말미에 기재 년도를 단기 4314년으로 밝히고 있어 이를 근거로 추정하였다. 권오민 외는 『의감중마』의 판본에 대해 1922년 목판본, 朴熙姓이 1981년 현토를 달고 출간한 남곡본, 李元世가 동의보감 편제에 보다 유사하게 편집한 無爲堂本, 그리고 2000년에 초간본의 착간을 다수 교정하여 현대적으로 재출간한 판본, 총 4종이 있다고 밝힌 바 있으나(권오민 외, 2010: 2),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남곡본은 박희생의 현토 및 해석본이며 無爲堂本은 『醫鑑重磨百病總括附方藥編』으로 명명된 이원세의 별도 저작이므로 『의감중마』의 별도 판본으로 볼 수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의감중마』의 간본은 목판본 『의감중마』 2종과 이원세가 교감하여 2000년 대성의학사에서 출간한 이원세 교감본 『의감중마』 1종 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재근(2010: 57) 참조.

43) 黃煌은 외감열병, 내과잡병, 외과 등 질병 분류에 따른 학파 분류 방식을 소개하였으며, 민간 의학파와 더불어 일본의 後世方派, 古方派, 한국의 朝醫四象醫學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黄煌;, 1991: 318). 그리고 严世芸은 병증에 대한 인식과 치료법을 중심으로 학파 구분을 시도하였다(严世芸, 2003: 12). 국내에서는 김두종의 언급 이래 의학 학술 유파와 관련된 논의는 거의 진행되지는 않았다. 다만 최근 김남일이 향약학파, 동의보감학파, 사상체질학파, 의학입문학파, 경악전서학파, 의역학파, 동서의학절충학파, 부양학파, 경험의학파, 동의침구학파, 양생의학파, 동의상한학파, 구급의학파, 소아학파, 외과학파 등 15가지 분류 방식을 제안한 바 있다(김남일, 2004: 23).

44) 소문학회, 「학회소개」, 소문학회 홈페이지, http://www.somun.or.kr/. 검색일: 2014. 2. 24. 소문학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규준의 의학 사상 계승과 학술 집단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연구로는 김태우(2012: 9-18) 등 참조.

45) 『東醫壽世保元』 「醫源論」. 『東醫壽世保元』은 金信根이 편찬한 『韓國科學技術史資料大系』 醫藥學篇에 수록된 간본을 활용하였다.

46) 『醫鑑重磨』 天 「醫鑑重磨序」.

47) 『동의보감』 편찬 무렵 조선에서 있었던 유교적 논의와 관련해서는 성호준(2001: 184-206), 김성수(2007: 55-63) 등 참조.

48) 16세기 이후 醫科 뿐 아니라 譯科, 陰陽科, 律科 등 雜科 모두에서 기술직 관직에 대한 일부 세가들의 독점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에 대해 전문직이었던 만큼 일차적으로 가정에서 학습이 이루어졌으며, 잡과 이전에 취재나 천거를 통해서 기술 관청에 입속하여 실무를 쉽게 익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제기된 바 있다(이남희, 2012: 78, 84).

49) 『歷試漫筆』 54, 79. 李壽祺의 가계 및 『역시만필』의 전승에 대해서는 이기복(2013: 491-2) 참조. 이외에 스승과 제자 관계를 통한 의학 전승 방식에 대해서는 신동원(2004: 237-9), 김성수(2011: 4-6) 등 참조.

50) 조선 후기 민간의료의 성장에 대한 선행 연구 목록은 우인수(2011: 100) 중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 중에 누락된 것으로는 김성수(2009: 43-68), 신동원(2005: 471-520) 등이 있다.

51) 『欽英』 1786년(丙午) 5월; 『歷試漫筆』 45, 56.

52) “醫不三世, 不服其藥”는 조선 시대 문인들의 글 중에서도 의사의 기량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黙齋日記』 「雜說附錄老辣瀡辭」에서는 藥房에 들어온 신참 의사들이 선배 의사와 상의한 뒤 약을 쓰도록 해야 한다는 근거로, 『五峯先生集』 「老醫不孟浪殺人論」에서는 경험 있는 노련한 의사와 젊은 의사 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근거로, 그리고 『山堂集』 「蒸室記」에서는 함부로 다른 사람의 말을 함부로 듣고 蒸室을 지어 병을 고치 려 했다가 몸을 상하게 된 것을 반성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醫不三世, 不服其藥”이라는 경구는 세의가 아닌 의가들에게는 강력한 구속이기도 했기에 醫不三世를 3세대에 걸친 세전 의학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으며(Chao, 2000: 70-82) 조선의 문집 중에서도 治藥, 針灸, 診脉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확인된다(『俛宇先生文集』 「答都敬民」). 문집 자료 검색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 http://db.itkc.or.kr/ 활용하였다. 검색일: 2014. 2. 24.

53) 중국 金元 시대에는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의학 지식이 전달되었기에 사승 관계가 엄격하고 또 확실하여 스승을 중심으로 한 학파가 자연스레 형성되었지만 출판물이 지식 전달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이러한 기조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Wu, 1993-4: 63-5). 그러나 명청 시대에 이르러 민간 의료가 왕성히 발전하게 되자 의서를 통해 의업을 수행하던 儒醫들이 자신의 의학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명 의가를 내세우고 그들의 치료 경험을 정리한 뒤 스스로 그 의학의 계승자임을 자임하면서 새로운 학맥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Furth, 2007: 137-8; Zeitlin, 2007, 170-1).

54) 이제마나 이규준을 내세운 사상의학파나 부양학파의 의학 이론이 기존 한의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들을 내세우던 의가들이 오히려 배척당했다고 해석하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그림 1.

이규준 유영(遺影)과 그의 육필 원고

Figure 1. The surviving photograph of Lee Gyoojoon and his hand-written original transcript
(좌: 소문학회 홈페이지, 우: 이우덕 장서)
kjmh-23-1-57f1.gif
그림 2.

서병오 유영(遺影)과 『상서전소쇄관』, 『모시전주쇄관』, 『주역주전쇄관』의 표제

Figure 2. The surviving photograph of Seo Byungoh, and his hand-writing on Lee Gyoojoon’s books
(좌: 예술의 전당, 1989. 우: 『상서전소쇄관』, 『모시전주쇄관』, 『주역주전쇄관』)
kjmh-23-1-57f2.gif
그림 3.

이원세 유영(遺影)

Figure 3. The surviving photograph of Lee Wonse
kjmh-23-1-57f3.gif
그림 4.

이규준의 제자 집단과 이원세의 구결 비교

Figure 4. Comparison of Gugyeols by Lee Wonse and Lee Gyoojoon’s apprentice group
(좌: 『素問句讀俗解』, 우: 이원세 수초본 『黃帝內經素問大要』)
kjmh-23-1-57f4.gif
표 1.
문생시도기(門生時到記)
Table1. The list of apprentices who had come to Lee Gyoojoon’s funeral
癸亥十月十一日 初終峕 權宜燦 金慶 金敏鐘 金相焄 金石泳 金城達 金容錫 南鴻 朴炳浩 朴世燁 裵基穆 徐相善 徐禹洪 成錫杓 吳汶象 李家源 李肅雨 李淵雨 李鐘珏 李鐘震 李埰演 任洪植 鄭圭濬 鄭致鎔 崔庠錫 崔永樂 崔泰鳳 皇甫炳 皇甫藝 皇甫苑 皇甫禧
甲子四月十九日 襄禮峕 金敏鐘 金相焄 金石泳 金容錫 金鎭浩 金泰玉 南秉鎭 南徽鎭 朴準 朴球陽 朴泰珪 方濼奎 裵基穆 裵永基 徐丙頊 徐相善 徐聖寶 徐禹洪 成錫杓 安東根 安明弼 安殷模 安亨弼 吳汶象 吳鎭汶 吳鎭中 李球演 李汶根 李相建 李璇久 李秀演 李淑雨 李演根 李源祐 李貞演 李鐘珏 李鐘炁 李鐘震 李鐘讚 李埰演 鄭圭濬 鄭武熙 鄭永植 鄭致鎔 崔基達 崔庠錫 許軾 許淸 洪日燮 皇甫幹 皇甫菌 皇甫亮 皇甫烈 皇甫炳 皇甫藝 皇甫苑 皇甫滎
표 2.
박희생과 이원세가 정리한 이규준 및 그 제자들의 처방
Table2. Prescriptions by Lee Gyoojoon and his apprentices, organized by Park Heesang and Lee Wonse
구분 남곡 해석본 『의감중마』 『신방신편』 『의감중마백병총괄 부방약편』
石谷 241 630* 359**
南谷 30 3 7
石齋 - 1 14
石村 5 - 5
松隱 8 1 3
乙齋 1 - 1
無爲堂 - - 54***
287 635 1041

* 동일한 처방이 다른 편에 반복 수재되어있을 가능성이 있음

** 石谷으로 표기되지 않은 처방 중에 이규준의 처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음

*** 김태국의 의견에 따라 출처 표기가 없는 것을 이원세의 처방으로 간주하였지만 그 중에 이원세의 처방이 아닌 것이 섞여 있을 수도 있음

표 3.
한국 전통 의학 학술 유파 부양학파의 학술 유파 성립 조건
Table 3. The standing conditions of the Supporting Yang Medical Current
구분 내용
1 학파 개창 대표 의가 이규준
2 공동 주창 기본 학설 부양론 외
3 대표 의학 저술 『소문대요』, 『의감중마』, 『본초경교정』
4 학술 사상 계승 과정 kjmh-23-1-57i1.gif
5 학술 집단의 존재 석곡서당; 소문학회

REFERENCES

『東醫寶鑑』 『東醫壽世保元』 『石谷散稿』 『石谷心書』『素問句讀俗解』 『歷試漫筆』 『醫鑑重磨』『黃帝內經素問大要』 『欽英』.

京鄕新聞, 戰慄 속의 自由雰圍氣 테로·脅迫·投石等, 京鄕新聞 1954년년 5월월 20일일.

京鄕新聞, 맛을 잃은 소금 李雨茁, 京鄕新聞 1956년년 2월월 2일일.

東亞日報, 李雨茁等 9名에 實刑, 東亞日報 1959년년 9월월 8일일.

東明, 扶陽論, 시사주보 『東明』 2 임시호 1923년년 4월월 15일일.

東西醫學硏究會, 會員名簿, 『東西醫學硏究會月報』 2 1924년년 2월월 29일일.

東西醫學硏究會, 技倆證明書授與者, 『東西醫學硏究會月報』 4 1924년년 3월월 30일일.

방 성혜, 조선 후기 실존인물 백광현의 행적(3), 민족의학신문 2013년년 10월월 17일일.

안 상우, 고의서산책 71 『素問句讀俗解』, 민족의학신문 2001년년 5월월 28일일.

임 광순, 이야기로 풀어가는 정치야사 <28>, 전북중앙신문 2003년년 5월월 15일일.

최 남선, 朝鮮歷史講話 51, 東亞日報 1930년년 3월월 15일일.

황 연규, 조선시대 儒醫의 산실-경북 대구 지역 한의계 열전(1), 한의신문 2010년년 4월월 15일일.

소문학회 홈페이지(http://www.somun.or.kr/).

승정원일기(http://sjw.history.go.kr/).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조선총독부 관보활용시스템(http://gb.nl.go.kr/).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한의고전명서(http://jisik.kiom.re.kr/).

오 재근, 김광하 인터뷰, 2013년년 3월월 25일일.

오 재근, 이우덕 인터뷰, 2013년년 6월월 22일일.

오 재근·김 태국, 안예섭 인터뷰, 2013년년 1월월 22일일.

오 재근·김 태국, 이국형 인터뷰, 2013년년 2월월 24일일.

오 재근·김 태국·피 국현, 최춘길 인터뷰, 2013년년 1월월 12일일.

오 재근·김 태국·정 태욱·피 국현·황 원덕, 이종섭 인터뷰, 2013년년 8월월 18일일.

소문학회, 이원세 동영상 강좌 14, 57-1.

慶尙北道韓醫師會, 慶尙北道漢醫師會會員名簿, 『慶尙北道韓醫師會會誌』 창간호 (1959).

權 大雄, 韓末 嶺南 儒學界의 의병 활동 『민족문화연구총서 21권』 1998).

권 오민, 石谷 李圭晙의 人間觀과 醫學論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권 오민·박 상영·한 창현·안 상영·김 진희·안 상우, 『醫鑑重磨』의 판본 및 구성에 대한 연구, 韓國韓醫學硏究院論文集 16-1 (2010).

권 오영, 19세기 嶺南 理學의 전개와 그 실천적 성향, 국학연구 9 (2006).

김 남일, 韓國韓醫學의 學術流派에 關한 試論, 韓國醫史學會誌 17 (2004).

김 두종, 한국의학사 (서울: 탐구당, 1966).

김 성수, 16~17세기 朝鮮 儒學者들의 人體에 대한 理解, 한국의사학회지 20 (2007).

김 성수, 朝鮮後期 私的 醫療의 성장과 醫業에 대한 인식 전환, 醫史學 18 (2009).

김 성수, 朝鮮時代 醫員의 변화와 自己意識 형성,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17 (2011).

金 勣, 李圭晙의 生涯와 學說에 관한 고찰,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9).

김 종석, 한말 영남 유학계의 동향과 지역별 특징, 국학연구 4 (2004).

김 지영, 石齋 徐丙五(1862-1936)의 書畵 硏究,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김 창건, 石谷 李圭晙의 생애에 대한 연구, 2009년 대한한의학원전학회 정기학술대회 논문집. 2009).

김 창건, 石谷心書를 통해 본 黃帝內經素問大要의 독창성 연구, 대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김 태우, 과거의 의서에서부터 당대의 실천까지, 韓國醫史學會誌 26 (2012).

김 항회, 내가 아는 石齋 徐丙五, 월간까마 3 (2000).

김 호,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서울: 일지사, 2000).

東洋醫學學術會, 第七回漢醫師國家試驗合格者名單, 東方醫藥 3 (1957).

류 준경, 達版 坊刻本 연구, 한국문화 35 (2005).

박 경용, 전통의료 구술자료 집성 1: (서울: 경인문화사, 2011).

朴 根述, 石齋의 生涯 硏究, 한양여자대학논문집 13 (1990).

박 상영·한 창현·안 상영·이 준규·권 오민, 石谷 李圭晙의 『浦上奇聞』과 石谷의 對西洋認識, 韓國韓醫學硏究院論文集 16 (2010).

박 훈평, 19세기 후반 典醫監 醫學生徒에 대한 고찰, 韓國醫史學會誌 26 (2013).

石齋詩書畵集刊行委員會, 石齋詩書畵集 (서울: 이화문화출판사, (1998).

성 호준, 『東醫寶鑑』의 儒學的 배경에 대한 이해, 東洋古典硏究 15: 2001).

성 호준, 조선 후기 石谷 李圭晙의 유학과 의학, 동양철학연구 60 (2009).

성 호준, 조선 후기 儒醫 李圭晙의 心에 관한 연구, 東洋文化硏究 9 (2012a).

성 호준, 儒醫 李圭晙의 『大學』 理解, 退溪學論叢 20 (2012b).

申 大植, 石齋徐丙五 (대구: 正文出版社, 1977).

신 동원, 1910년대 일제의 보건의료 정책, 한국문화 20 (2002).

신 동원, 조선후기 의원의 존재 양태, 한국과학사학회지 26 (2004).

신 동원, 조선후기의 의학과 실학, 한국실학사상연구 4 과학기술편 (서울: 혜안, 2005).

신 동원, 유의儒醫의 길: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 다산학 10 (2007).

신 상구, 石谷 李圭晙의 삶과 시세계, 포항문화유산해설사 양성과정자료집 2013).

예술의전당, 石齋徐丙五回顧展 (서울: 예술의 전당, 1989).

오 재근, 이규준 의서 『황제내경소문대요』의 유통본과 그 저본이 된 조선 간본 『황제내경소문』, 大韓韓醫學原典學會誌 26 (2013a).

오 재근, 약 하나로 병 하나 고치기(用一藥治一病), 醫史學 22 (2013b).

오 재근, 조선 의서 『동의보감』은 왜 본초 부문을 「탕액편」이라고 하였을까, 醫史學 20 (2011).

오 재근, 조선 의서 수재 藥性歌에 대한 연구, 대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오 재근·김 용진,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湯液篇)」의 본초(本草) 분류에 대한 연구, 大韓韓醫學原典學會誌 23 (2010).

오 재근·윤 창열, 醫鑑重磨의 약성가에 대한 연구, 素問學會誌 12 (2009a).

오 재근·윤 창열, 本草經校正(필사본)의 서지학적 고찰 및 내용 분석, 大韓韓醫學原典學會誌 22 (2009b).

우 인수, 조선후기 상주 존애원의 설립과 의료 기능, 대구사학 104 (2011).

이 규근, 조선 후기 內醫院 醫官 연구, 朝鮮時代史學報 3 (1997).

이 기복, 18세기 의관 이수기(李壽祺)의 자기인식, 醫史學 22 (2013).

이 나나, 문인화의 연원과 근대 영남문인화 형성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李 元世, 寶林禪院哭笑子述, 寶林禪院, ed. 寶林學報 7 (1977).

李 元世, 李元世任, 寶林禪院, ed. 寶林學報 8 (1978).

이 인숙, 석재 서병오(1862-1936)와 교남시서화연구회의 재인식, 民族文化論叢 45 (2009).

이 인숙, 20세기 “대구문인화파(大邱文人畵派)”의 형성과 변천 연구, 嶺南學 18 (2010).

이 남희, 조선후기 잡과의 위상과 특성, 韓國文化 58 (2012).

李 能和, 李濟馬 方應謨, ed. 朝鮮名人傳(二), (서울: 朝鮮日報社, 1939).

李 成茂, 改正增補 韓國의 科擧制度 (서울: 집문당, 1994).

李 殷相, 朝鮮讖謠考, 李 允宰, ed. 韓國現代隨筆集資料叢書 5 鷺山文選 (서울: 태학사, 1987년 재발행).

李 乙浩, 四象醫學論, 東洋醫藥 2 (1935).

조 남호, 『동의보감』의 이론적 구조와 그 성격, 東方學志 134 (2006).

朱 弘濟, 張氏類經演繹第一回, 東洋醫學 1 (1947).

진 명순, 거사불교운동의 내용과 의미, 동아시아불교문화 4 (2009).

崔 皓晳, 大邱 在田堂書鋪의 出版 活動 연구, 語文硏究 34 (2006).

포항시사편찬위원회, 浦項市史 (포항: 포항시사편찬위원회, 2010).

許 在惠, 18세기 醫官의 經濟的 活動樣相, 韓國史硏究 71 (1990).

홍 세영, 왕실의 議藥, 韓國醫史學會誌 23 (2010).

黃 元德, 석곡 이규준의 扶陽論에 관한 硏究, 大韓原典醫史學會誌 12 (1999).

裘 沛然, 丁 光迪, ed. 高等中医院校 敎学参考丛书 中医各家学说 (北京: 人民卫生出版社, 1992).

谢 观, 中国医学源流论 (福州: 福建科学技术出版社, 2003).

严 世芸, 新世纪全国高等中医药院校规划敎材 中医各家学说 (北京: 中国中医药出版, 2003).

李 国淸 外, 内经疑难解读 (北京: 人民卫生出版社, 2000).

任 应秋, 全国高等医药院校试用敎材 中医各家学说 (上海: 上海科学技术出版社, 1980).

任 应秋, 高等医药院敎材 中医各家学说 (上海: 上海科学技术出版社, 2007).

張 笑平, 现代中医各家学说 (北京: 中国中医药出版, 1991).

陈 大舜, 中南五省中医学院 中医基础系列敎材 中医各家学说 (武汉: 湖北科学技术出版社, 1989).

黄 煌, 中医临床传统流派 (北京: 中国医药科学出版社, 1991).

三木 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大阪: 自家出版, 1962).

真柳 誠, ソウル大學奎章閣の古醫籍書誌(二), 茨城大学人文学部紀要 人文学科論集 42 (2004).

Chao Yuanling, The Ideal Physician in Late Imperial China East Asian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 17 (2000).

Furth Charlotte, Producing Medical Knowledge Furth Charlotte, Zeiltin Judith T., and Hsiung Ping-chen, eds. Thinking With Case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

Hanson Marta E., Speaking of Epidemics in Chinese Medicine (New York: Routledge, 2011).

Scheid Volker, Currents of Tradition in Chinese Medicine (Seattle: Eastland Press, 2007).

Shin Dongwon, Nationalistic Acceptance of Sasang Medicine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9 (2006).

Wu Yiyi, A Medical Line of Many Masters: A Prosopographical Study of Liu Wansu and His Disciples from the Jin to the Early Ming Chinese Science 11 (1993-4).

Zeitlin Judith T., The Literary Fashioning of Medical Authority Furth Charlotte, Zeiltin Judith T., and Hsiung Ping-chen, eds. Thinking With Case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

TOOLS
PDF Links  PDF Links
PubReader  PubReader
ePub Link  ePub Link
Full text via DOI  Full text via DOI
Download Citation  Download Citation
  Print
Share:      
METRICS
1
Crossref
0
Scopus
15,120
View
174
Download
Related article
Editorial Office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partment of Humanities and Social Medicine, College of Medicine, 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222 Banpo-daero, Seocho-gu, Seoul, Korea (06591)
TEL: +82-2-3147-8306   FAX: +82-2-3147-8480   E-mail: medhistory@hanmail.net
About |  Browse Articles |  Current Issue |  For Authors and Reviewers |  KSHM HOME
Copyright ©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veloped in M2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