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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3(1); 2014 > Article
17세기 후반 우역의 주기적 유행이 기근·전염병·호환에 미친 영향*

Abstract

This study clarifies the causes of the repetitive occurrences of such phenomena as rinderpest, epidemic, famine, and tiger disasters recorded in the Joseon Dynasty Chronicle and the Seungjeongwon Journals in the period of great catastrophe, the late 17th century in which the great Gyeongsin famine (1670~1671) and the great Eulbyeong famine (1695~1696) occurred, from the perspective that they were biological exchanges caused by the new arrival of rinderpest in the early 17th century. It is an objection to the achievements by existing studies which suggest that the great catastrophes occurring in the late 17th century are evidence of phenomena in a little ice age.
First of all, rinderpest has had influence on East Asia as it had been spread from certain areas in Machuria in May 1636 through Joseon, where it raged throughout the nation, and then to the west part of Japan. The new arrival of rinderpest was indigenized in Joseon, where it was localized and spread periodically while it was adjusted to changes in the population of cattle with immunity in accordance with their life spans and reproduction rates.
As the new rinderpest, which showed high pathogenicity in the early 17th century, was indigenized with its high mortality and continued until the late 17th century, it broke out periodically in general. Contrastively, epidemics like smallpox and measles that were indigenized as routine ones had occurred constantly from far past times. As a result, the rinderpest, which tried a new indigenization, and the human epidemics, which had been already indigenized long ago, were unexpectedly overlapped in their breakout, and hence great changes were noticed in the aspects of the human casualty due to epidemics.
The outbreak of rinderpest resulted in famine due to lack of farming cattle, and the famine caused epidemics among people. The casualty of the human population due to the epidemics in turn led to negligence of farming cattle, which constituted factors that triggered rage and epidemics of rinderpest. The more the number of sources of infection and hosts with low immunity increased, the more lost human resources and farming cattle were lost, which led to a great famine.
The periodic outbreak of the rinderpester along with the routine prevalence of various epidemics in the 17thcentury also had influenced on domestic and wild animals. Due to these phenomenon, full-fledged famines occurred that were incomparable with earlier ones. The number of domestic animals that were neglected by people who, faced with famines, were not able to take care of them was increased, and this might have brought about the rage of epidemics like rinderpest in domestic animals like cattle. The great Gyeongsin and Eulbyeong famines due to reoccurrence of the rinderpest in the late 17th century linked rinderpester, epidemics and great famines so that they interacted with each other. Furthermore, the recurring cycle of epidemics-famines-rinderpest-great famines constituted a great cycle with synergy, which resulted in eco-economic-historical great catastrophes accompanied by large scale casualties.
Therefore, the Gyeongsin and Eulbyeong famines occurring in the late 17th century can be treated as events caused by the repetition of various periodic disastrous factors generated in 1670~1671 and in 1695~1696 respectively, and particularly as phenomena caused by biological exchanges based on rinderpester., rather than as little ice age phenomena due to relatively long term temperature lowering.

1. 머리말

모든 인간의 활동에는 생물학적 거래가 수반되며, 생물학적 거래는 인간의 활동과 접촉의 빈도에 비례한다(니키포룩, 2010: 12).1) 이러한 생물학적 거래는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종종 전근대 사회에서 대재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15세기 이후 본격화한 천방의 개발로 인해 천변이 경작지로 바뀌면서 골짜기 안에 주로 위치하여 숲으로 고립되었던 개별 촌락들이 가용공간을 통해 다른 촌락이나 야생동물과 용이하게 접촉할 수 있는 경관의 변화가 나타났다. 여기에 농학과 농업기술, 의학과 의료 기술의 발전 등이 더해지면서 인구가 더욱 늘어나고, 인간의 활동에 수반하는 생물학적 거래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더욱이, 17세기부터 급속히 확대된 화전 개발과 수렵활동으로 인해 사람들의 산림 지역 침투가 가속화되면서 인간·가축과 야생동물 사이의 접촉이 더욱 늘어났다. 여기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왜란과 호란이라는 국제 전쟁이 전개되면서 동아시아에 걸쳐 생물학적 거래가 확대되었다.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심양에서 발생한 새로운 우역의 발생과 확산은 이러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으며, 폐사율과 전염력이 매우 높은 우역의 발생은 당시 조선 뿐 아니라 일본까지 확산되면서 동아시아 각국에 큰 피해를 남기게 되었다(김동진, 2013a; 김동진·유한상, 2013).2)
전통적인 역사학 연구자들에게 17세기 후반에 나타난 대재앙은 주요 관심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이 시기에 집중되어 발생하는 특이한 기후현상, 병충해, 기근이나 전염병이 전통적인 시대에 일상적으로 순환하고 반복되는 현상의 일종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국내의 일부 학자들은 실록 등 방대한 연대기 자료를 섭렵한 바탕에서 서구 학계에서 제기된 소빙기론을 받아들여 17세기 후반의 재난 현상에 대한 새로운 역사학적 해석을 시도하였다(이태진, 1996; 이태진, 1998: 325).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발생한 재난 현상에 대한 연구는 관련 기록을 찾아 읽고 분류하는데 그쳤을 뿐 이들을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최근 이를 다소 보완하여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와 같은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17세기에 닥친 재난의 종류와 양상을 상세히 기술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김연옥, 1996; 김덕진, 2008; 이욱, 2009; 김덕진, 2011a; 김덕진, 2011b; 김덕진, 2012).
이는 서구에서 제시된 소빙기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보다는 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후 이를 조선의 역사적 기록에 적용하여 연역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7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다양한 학문 분야의 발전과 성취가 있었으며, 의학과 농학, 천문학과 역법 분야에서도 큰 발전이 이룩되었다. 기후 현상의 해석에서 필수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역법 개정, 음력과 양력의 차이를 간과한 연구는 신뢰성에 의문이 있다(김건태, 2008; 김문기, 2010). 이는 17세기 후반에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전염병과 기근에 대한 기록을 소빙기에 따른 자연현상으로 보는 역사적 해석이 아직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본고는 인간의 활동을 중시하는 역사학 본연의 특성을 되살리고 전염병으로서 우역의 특성에 대한 수의학적 연구 성과 및 야생동물의 생태적 특성에 관한 최근 연구 성과에 근거한 새로운 가설을 설정하여 입증해 보고자한다. 병자호란 전후 새로운 우역이 발생하여 전래된 사실(김동진·유한상, 2013)에 유의하여 17세기 후반에 발생한 다양한 유형의 재난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우역의 주기적 유행이라는 시각에서 해명을 시도할 것이다. 즉, 경신 대기근(1670∼1671)과 을병 대기근(1695∼1696)이 17세기 전반 새로이 전파된 우역 바이러스가 한반도에서 토착화하는 가운데 17세기 후반 이를 매개로 전개된 독특한 생물학적 순환을 통해 증폭되어 나타난 대재난이라는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17세기 후반 우역 발생과 유행의 특성과 주기적 패턴을 분석함으로써 이것이 토착화한 우역으로 인한 현상임을 밝힐 것이다. 이어 역사적 자료를 통해 우역-기근-전염병이 상호작용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대재난이 현실화하는 과정을 재구성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활동과 우역의 영향으로 범과 표범의 먹잇감인 사슴과 멧돼지 개체군이 감소하고, 이것이 대호환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밝힐 것이다. 이를 통해 17세기 후반 조선에서 진행된 우역-기근-전염병-호환의 전개 과정을 하나의 모형으로 재구성하여 제시할 것이다.
연구에 활용할 사료는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하면서, 『승정원일기』를 보완적으로 활용할 것이다. 연구 대상 시기는 효종 1년(1650)에서 숙종 26년(1700)까지 51년을 대상으로 하되, 필요에 따라 가감할 것이다. 연대기 기록에 나타난 기록 방식의 다양성을 감안하여 기록 내용을 고려하여 다양한 분석 기준으로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표와 그래프를 작성하였으며, 이를 실제 연대기 기록에 나타난 기술적 사료와 대조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추이를 살필 것이다.3)

2. 우역의 주기적 유행과 토착화

병자호란 직전인 1636년 5월 청의 수도 심양에서 발생한 우역 바이러스는 강한 병원성을 지닌 채 곧바로 한반도로 전파되어 큰 피해를 일으킨 후 서일본으로 전파되며 종식되었다(김동진, 2013a; 김동진·유한상, 2013; Spinage, 2003: 489; 山內一也, 2009: 77). 그러나 경신대기근을 전후하여 크게 만연한 우역은 도성에서 처음 시작된 이래 조선의 각지에서 빈번히 발생하였다. 처음 매우 큰 피해를 야기하며 큰 파동을 형성하였던 우역은 토착화진행되면서 점차 파장이 짧아지고 우역에 의한 폐사율이 다소 낮아지며 피해 규모가 줄어드는 등 파동의 크기가 작아지고 전염 범위도 조선 전역으로부터 점차 국지적인 범위로 축소되는 등의 양상이 나타났다.
17세기에 발생한 우역은 바이러스의 병원성과 이에 대응하는 숙주의 면역력이 상호작용하면서 주기성을 갖게 되었다. 우역이 처음 유행했을 때 조선의 농우는 우역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에 강한 병원성을 발휘했고, 이는 높은 폐사율로 이어졌다. 높은 폐사율을 지닌 우역 바이러스는 짧은 기간에 많은 피해를 야기하였지만 곧바로 소멸하였다. 우역에 감염된 후 치료받거나 자연적으로 회복한 개체들은 면역력을 획득한 후 장기적으로 생존하면서 한반도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우역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생물학적 방벽의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발생하여 일시적으로 만연했던 우역이 이후 20여년 가까이 재발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30여년에 이르는 소의 수명과 면역학적 특성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우역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우역은 17세기 후반에 항상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며, 특정한 시기에 다수의 지역에서 시작되어 널리 확산되었다. 이는 우역 바이러스가 각 지역에 잠복하여 지역병으로 토착화 되었음을 뜻한다. <그림 1>은 두 연대기 기록에서 발생한 우역으로 인해 폐사한 소의 수를 시기별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 1>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역은 주기성을 가지며 발생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에 발생한 우역은 17세기 전반에 발생한 우역의 영향으로 일정한 휴지기를 지난 후 발생하는 주기성을 보인다.
17세기 전반 병자호란을 전후(1636∼1638)하여 높은 폐사율과 급격한 확산을 특성으로 하는 매우 큰 파장의 우역이 발생하였고, 이는 조선에서 사육하던 소의 상당부분을 폐사시키면서 그쳤다. 이후 일부 지역에서 매우 미미한 규모의 우역이 발생하였지만 면역력을 획득한 소에 의한 생물학적 방벽에 부딪혀 널리 확산되지 못하고 곧바로 소멸하는 양상을 보였다(김동진·유한상, 2013). 이후 잠잠하던 우역은 현종 1년(1660)에 일부 지역에서 발생하였고, 이후 두 차례의 큰 파장을 그리며 성행한 이후 간헐적으로 발생하면서 소강상태로 이행하고 있다.
병자호란 전후 우역에 대응하여 조선에서는 국가에 의한 소의 무역과 재분배 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었고(김동진, 2013a), 그 결과 우역이 종식된 이후 현종 1년(1660) 함경도 경흥에서 우역이 크게 번지기 전까지 번식을 통해 소의 개체수가 크게 증식되었다. 소의 회복 추이에 대해서는,
  • 1647년: 병자년(1636)에 우역(牛疫)이 전국에 널리 퍼져 소가 거의 멸종되기에 이르렀다. …… (그 후) 축산이 차차 번성하게 되었다.4)

  • 1659년: (요즈음) 시절에 우역이 없으니 소 없는 걱정은 없다.5)

  • 1660년: 정축년(1637) 난리가 있은 뒤로 우역이 크게 번져 농우가다 죽었다. …… 그 뒤 소가 많이 번식되어 도리어 민간의 큰 폐단이 되고 있다.6)

라는 기사에서 확인된다. 병자호란 전후에 걸쳐 발생한 우역으로 그 피해가막대하였음에도 이로부터 10여 년이 경과한 인조 25년(1647) 무렵 사육하는 소의 개체수는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다시 10여 년이 경과한 효종 10년(1659)에는 우역이 없어 소를 농사나 식육으로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늘어났고, 이듬해에는 소가 지나치게 번식되어 백성들이 도리어 폐해를 입는다고 할 정도로 그 수가 늘었다.
새롭게 우역이 발병한 것은 이전에 우역을 경험한 소가 대부분 자연적으로 수명을 다한 시점이었다. 이는 유전을 통해 면역력이 전승되지 않는 전염병의 특성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우역이 종식된 이후 새로 태어난 소는 우역에 대한 면역력을 획득할 수 없었고, 우역에 대한 면역력을 가진 소가 없었기 때문에 우역이 다시 발생하면 큰 피해를 일으키게 마련이었다. 경신대기근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우역의 발생은 이러한 현상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역의 진행 추이는 17세기 전반과 17세기 후반이 유사하다. 우역이 발병하여 큰 피해를 일으키는 1차의 파장에 이어 피해규모가 더 작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작은 파장으로 이어진다. 초기에 발생한 우역에 비해 후속하여 발생한 우역에서는 폐사율이 현저히 감소하는 양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면역력을 획득한 소가 많아진 결과로 볼 수 있다.
<표 1>과 <그림 2>는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제향에 사용하는 흑우가 우역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폐사한 결과를 보고한 기록에서 추출한 우역에 의한 폐사율이다. 17세기 후반에 우역에 대응한 여러 시기의 자료가 남아 있어 우역 바이러스의 병원성이 완화되는 추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진행된 세 차례 큰 파장의 우역이 진행된 양상을 발생 시기와 지역에 유의하면서 미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17세기 전반과 후반에 발생한 우역의 큰 파장은 소의 자연 수명 20년 내지 30년7)의 영향을 받아 주기가 형성되었고, 첫 번째 파장의 우역은 1662년부터 1672년까지 10여 년 동안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우역의 패턴을 엄밀히 살피면 다시 3차례에 걸쳐 구분되는 우역 발생의 피크를 확인할 수 있다.
이어 17세기 후반의 두 번째와 세 번째 파장은 소의 자연 수명 보다 짧은 15년과 7∼8년으로 주기가 줄면서 폐사율도 현저히 낮아졌다. 우역으로 소진된 지역에 조선은 국가적으로 재분배와 소의 도살금지를 통해 농우 회복을 추구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김동진, 2013a). 이는 우역 바이러스가 사멸하지 않은 지역에서 면역력이 없는 소의 개체수가 늘면서 발생하는 우역의 특성으로 최초 발생한 우역에 비해 폐사율이 낮아진다. 이는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도래한 우역 바이러스가 조선에서 병원성이 완화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또한 조선에서 사육하는 소들도 점차 우역에 대한 내성을 가진 개체가 증가하는 양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하나의 생물학적 공진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 우역의 첫 번째 파장은 현종 1년(1660) 7월 함경도 경흥에서 발생한 우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8) 이어 전라도 강진에서 50여 마리가 폐사하였고,9) 9월에는 경기도 부평에서 크게 번졌다.10) 이 시기의 우역은 다소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 전후에 발생한 우역의 확산과정과 달리 특정 지역에서 우역이 시작되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는 17세기 전반에 생성된 우역 바이러스가 한반도의 곳곳에서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형태로 잠복한 상태에서 특정한 계기가 형성된 세 지역에서 우발적으로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17세기 전반 우역이 종식된 이후 전국에서 소가 증식되었고, 당시 면역력을 획득한 소의 대부분이 사멸한 시점에서 우역이 발병할 수 있는 적당한 조건과 계기가 전국적으로 주어진다면 우역이 전국적으로 동시 다발하게 될 것이고, 지역적 환경 조건이 갖추어지면 국지적으로 산발하게 될 것이다. 이는 첫 번째 큰 파장 내에서 두 번째 작은 파장으로 현실화되었다. 특히 현종 4년(1663)에 본격화된 우역은 전국적으로 발생하였고, 소 뿐 아니라 돼지에서도 발생하고 또 야생동물에게도 전파되면서 인간사회와 생태계 전반에 큰 피해를 야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역 바이러스가 가축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가용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야생동물의 생태계와도 활발한 생물학적 거래가 이루어지게 된 17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생태경제사적 활동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야생 생태계에 잠복한 바이러스는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언제든지 다시 인간 사회로 침투할 수 있는 저수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역은 현종 4년(1663)∼현종 6년(1665)에 전국적으로 큰 규모로 유행 후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현종 9년(1668)∼현종 12년(1671)에 다시 크게 번졌다. 다음 8∼9년간의 소강상태를 거치고 난 후 숙종 6년(1680)∼숙종 10년(1684)에 다시 크게 번졌다. 이후 숙종 13년(1687), 숙종 16년(1690), 숙종 19년(1693), 숙종 23년(1697)에 일부지방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하였다.
현종 4년(1663) 우역이 처음 발생한 것으로 보고된 곳은 도성에 있는 전생서였다. 같은 해 6월 이곳에서는 제향에 사용하기 위해 흑우를 사육하고 있었는데, 당시 7마리가 우역에 감염되어 폐사하였다. 이후 두 달이 지난 8월 무렵 경기,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서도 우역이 크게 번졌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이어 9월에는 강원도와 충청도로 확산되었고, 10월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우역이 크게 번졌다.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심양에서 전래된 우역이 그친 후 다시 우역이 발생한곳은 도성이었고, 이곳에서 발생한 우역이 처음에는 황해도 이북의 북삼도로 확산되었고, 이후 강원도와 하삼도로 확산되었다. 대체로 도성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확산되어가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이는 17세기 후반 조선에서 재발한 우역이 만주나 청 등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 아니라 토착화된 바이러스에 의해 발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도성은 조선에서 사람과 물산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으로 생물학적 거래 역시 빈번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특히 우역에 대한 내성이 약한 흑우에서 가장 먼저 발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도성의 흑우에서 우역이 처음 발병한 것은 생물학적 거래와 전염병 만연의 일반적 패턴을 고려할 때 확률적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부분이 현실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종 5년(1664)에는 우역이 양남을 포함한 전국의 여러 우역 발생 지점으로부터 전년도에 우역의 피해를 입지 않았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 우역이 번졌으며 피해규모는 더욱 커졌다. 우역의 시발점이 충청도 해미(5월), 평안도 의주(8월), 강원도 평강(9월) 등 세 곳 이상의 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발생하여 주변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전국적으로 만연하면서 피해 규모가 크게 늘어나는 양상을 보였다.
즉, 현종 5년 5월 충청도 해미에서 시작된 우역은 충청 전라도로 확산되었고, 8월에 의주 등 평안도 북부 지역에서 발병한 우역은 평양(9월)을 거쳐 개성부(11월)에 도달하는 양상을 보였다. 같은 해 9월 강원도 평강(9월)에서 시작된 우역은 추가령 구조곡의 통로를 따라 함경도의 안변부까지 확대되었다. 물론 이들 지역이 현종 4년에 이미 우역이 발생하였다고 보고된 지방의 일부이긴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우역의 만연에 대한 보고는 우역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하며 전파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종 6년(1665)에는 경상도 선산에서 우역의 발생을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 사관은 별도의 사론에서 전국 8도와 제주도까지 우역이 널리 번지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우역으로 폐사한 소는 『조선왕조실록』에서 7,716두였다. 기록이 충실하지는 않지만 현종 7년(1666)에 전라도에서도 사람과 가축이 모두 우역과 전염병으로 매우 많이 죽었고, 이후 하삼도의 우역은 점차 잦아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 첫 번째 우역의 큰 파장에서 세 번째 작은 파장은 현종 9년(1668)∼현종 12년(1671)에 진행되었고, 이 시기에 가장 큰 피해가 발생하면서 이른바 경신 대기근을 유발하였다. 두 번째 작은 파장이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 이후 세 번째 작은 파장의 우역은 함경도에 극심한 피해를 야기한 후 경기 이북 지역을 중심으로 만연하였다.
함경도에서는 이미 현종 8년(1667) 2월부터 12월까지 우역이 만연하였고, 우역으로 죽은 소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이듬해인 현종 9년 9월 보고된 바에 따르면 함경도에서 폐사한 농우는 20,000여 마리에 달했다. 이는 함경도에서 사육하던 농우의 대부분이 폐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정도이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 우역으로 인해 많은 피해의 보고가 있었지만 함경도에서는 우역으로 큰 피해가 발생한 이후 3∼4년이 경과한 현종 12년 11월에야 우역이 다시 발생했다는 보고가 나타나고 있다. 우역이 만연하려면 병원체의 전염력이 강해야 하고 전염될 숙주가 일정한 밀도 이상으로 존재해야 한다. 현종 10년(1669)에 발생한 우역이 치명적 피해가 야기된 함경도에서 계속 번지지 않고 우역으로 소가 많이 희생되지 않은 평안도와 강원도를 경유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함경도에서 평안도를 경유하여 도성과 경기, 강원 이북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우역 피해에 대한 보고를 통해 11월경에 이르면 충청도 지역에서도 올라오며 우역이 전파된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종 12년(1671)에는 세 번째 작은 파장에서 그 동안 우역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던 하삼도에서 우역이 집중적으로 발생하였고, 특히 경상도에 그 피해가 집중되었다. 즉, 황해도와 경기도는 여전히 우역이 발생하였지만 전년보다 피해가 크게 줄었고,11)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도 우역 발생이 가라앉는 가운데 피해 규모는 경미했다.12) 따라서 이 해에 우역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지역은 ‘삼남과 경기, 강원, 황해도’13)로 언급되든가, 혹은 ‘양남과 강원도가 더욱 심한’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14)
10월 무렵 도성과 지방에서 사람들의 전염병이 점차 가라앉았지만 우역은 여전히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특히 양남과 강원도가 심각한 수준이었고,15) 다시 삼남, 강원도, 함경도 지역까지 우역의 피해가 확대되었다.16) 다음 <표 2>에서 우역이 시작된 현종 4년(1663)부터 우역이 어느 정도 그친 현종 12년(1671)까지 각 지방에서 보고한 우역으로 인한 피해 상황을 살필 수 있다.
<표 2>에 따르면 현종 4년(1663)∼현종 12년(1671)에 우역으로 인한 피해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의 피해가 극심했던 것으로 보이며, 평안도, 강원도, 전라도는 피해가 다른 지역보다 가벼웠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적 편차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우역으로 인해 폐사한 소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백성은 농사를 비롯한 생업 활동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현종 11년 10월 강화유수가 올린 보고에서 강화에서 9월에 98두, 10월에 120두가 죽었다는 보고를 올린 후 “더 이상 죽을 소가 살아남아 있지 않다”라고 보고하였다. 우역이 전국을 휩쓴 이후에 “농민들은 소 대신 멍에를 매야했고, 밭을 갈 쟁기도 쓸모없게 되었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17) 이러한 보고들은 우역이 휩쓸었던 각 지역에서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대표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이다.
이후 현종 13년(1672)에서 숙종 6년(1680) 8월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우역이 발생하기 까지는 숙종 즉위년(1674)에 강원도와 숙종 2년(1676)에 전라도에서 크게 번진 것 이외에 다른 지역에서 우역은 발생하지 않았다. 숙종 즉위년 강원도 삼척과 울진에서 발생한 우역은 현종 9년(1668)에 강릉과 울진에서 우역이 유행한 이래 우역의 유행 과정에서 피해를 입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울진 지역에서 토착화하여 잠복했던 우역 바이러스가 재발하면서 삼척 지역까지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태백산맥에 고립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해안의 협소한 지역에서 사육되던 가축들이 피해를 입었고, 그 과정에서 고을에서 기르는 돼지에게도 전염되어 많은 수가 죽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8) 이는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우역을 겪은 후 우역 바이러스가 감염시킬 수 있는 숙주로서 면역력이 없는 소들이 대부분 사멸하고, 살아남은 소들은 대부분 면역력을 획득하면서 나타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전국을 순환하면서 곳곳에서 진행된 우역으로 전국 각지에서 기르던 소가 거의 다 죽었고, 8도의 백성들의 농사일을 나라에서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19)
우역이 다시 전국적인 규모로 크게 재발하여 두 번째 큰 파장을 보여준 것은 숙종 6년(1680)∼숙종 11년(1685)이었다. 숙종 6년(1680)에 우역은 충청, 전라도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숙종 9년(1683) 이후 우역은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어 11월에 전국에서 1,000여 두 가량 폐사하는 데 그쳤고, 숙종 9년(1683)에는 우역이 있은 뒤에 “남은 것이 많지 않다”20)라고 할 정도로 살아남은 농우의 수가 격감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우역은 제주, 옹진 등 도서 지역에서 발생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도서 지역이 생물학적 거래의 지체로 인해 우역에 전파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소가 가장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숙종 10년(1684)에는 우역 발생의 중심이 다시 북부 지방으로 옮겨 갔고, 당시의 우역으로 “북도에 우역이 크게 번져 (소가) 거의 다 죽었다”21)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발생한 우역은 개시를 통해 청의 봉황성 등으로 유출된 소까지 모두 우역에 감염되어 폐사하였다. 이는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만연한 우역이 무역을 통해 만주 일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질병의 생물학적 거래가 한반도가 출발점이 되어 교역을 통해 국경을 넘어 확산되는 경우도 있었다.
초기 우역이 사람과 소가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만연하던 패턴은 이 시기에 이르러 점차 중심부에서 벗어난 외곽 지역에서 발생하고, 토착화한 우역이 국경을 넘어 확산되는 양상도 나타났다. 그러나 피해 규모는 여전히 크다고 할 수 있다.22)
숙종 13년(1687) 이후 우역 발생 규모는 크지 않으며, 발생한 지역이 서로 우역이 전파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는 17세기 후반에 우역이 다시 성행하면서 우역이 전국적으로 토착화하면서 면역력을 갖지 못한 소가 늘어나면 어느 곳이든 우역이 발생한 후 소멸하는 새로운 양상으로 이행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러한 점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과 『승정원일기 』에서 우역과 관련된 사실의 기록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서로의 기록에서 내용이나 경향성의 일치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우역은 각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피해 규모도 소규모화하며, 해안가 등의 벽오지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 우역이 전국에서 토착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우역-기근-전염병의 상승작용

17세기에 인간의 전염병은 일상적으로 만연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우역이 주기성을 띠며 발병하여 가축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축력의 부족으로 유발된 기근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규모로 발생하였고, 이는 사람들의 면역력을 약화시켜 전염병의 만연을 초래하였다. 기근과 전염병에 직면한 사람들이 남은 가축을 도살·분배하거나, 우역으로 죽은 소를 먹거나 방치하는 일이 늘어나고, 돌볼 수 없게 되어 방기된 가축도 생겼다. 이러한 전반적 상황은 가축에서 우역과 같은 전염병이 다시 발생하게 되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토착화된 우역의 빈번한 재등장으로 우역-기근-전염병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연결되었고, 이들이 주기를 반복하며 연쇄를 이루어 상승작용하며 대규모 인명 피해를 수반하는 생태경제사적 대재난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17세기 후반에 발생한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이었다.
17세기 전반 병자호란 전후로 조선에 새로이 전파된 동물 전염병인 우역은 17세기 후반에도 치명적 살상력을 유지한 채 토착화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어느 정도의 주기를 유지하며 발병하였다. 이와 달리 조선의 일상적 전염병으로 정착한 천연두, 홍역 등 사람의 전염병은 오래 전부터 항상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그 결과 새롭게 토착화를 시도하는 우역과, 이미 오래 전에 토착화된 인간 전염병의 발생이 새로이 겹쳐지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면서 전염병으로 인한 인명 피해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동물과 인간에서의 전염병의 종류가 전혀 다르고 우역은 동물에서만, 천연두와 홍역 등은 사람에서만 발생하지만 각각의 발생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생태환경사적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우역 발생은 농우 부족으로 기근을 초래하고, 기근은 다시 사람에게 전염병이 만연하는 원인이 되었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인명의 피해는 다시 병든 가축의 도살, 방기, 고기 분배, 농우 방치를 초래했고, 이것은 다시 우역의 발생과 만연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전염원이 늘어나고, 면역력이 약화된 동물과 인간 숙주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인력과 농우의 손실이 함께 늘어나면서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람과 농우에서 전염병이 발생하고 퍼져나가는 메커니즘은 17세기 후반의 연대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 <그림 3>, <그림 4>는 연대기 기록에서 얻은 자료를 각각의 기준에 따라 분류하여 51년간의 변화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그림 3>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소에게 발생한 우역과 인간에게 발생한 여역 등 각종 인간 전염병에 대한 기록 가운데 전염병의 만연을 나타내는 ‘치(熾)’와 전염병 발생에 대한 기록으로 구분하여 통계처리한 후 각각의 사례 수를 그래프에 표기한 것이다. 동시기에 전개된 전염병의 발생 추이와 기록의 특성을 살피기 위해 두 개의 표를 상하에 나란히 배치하였다.
<그림 3>의 A와 B를 살피면 전염병의 발생과 만연에 대한 기록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추이를 보인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역의 발생과 인간 전염병의 발생에 일정한 패턴이 존재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우선 <그림 3>의 A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우역과 전염병의 만연에 대한 기록을 분석한 것이다. 그래프를 살피면 처음에는 우역과 전염병의 발생에 대한 놀라움으로 기록이 크게 늘어나고, 이후 점차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래프에서 우역과 전염병은 특징적인 패턴을 보인다. 즉, 현종 3년(1662)에서 현종 13년(1672)까지 첫 단계에서 전염병이 발생한 후 우역이 이에 동조하며 발생이 확산되며, 두 번째 단계에서 우역과 전염병이 동시에 만연하고, 세 번째 단계에서 우역이 먼저 피크를 그리며 그친 후 전염병이 1년 가량의 시차를 갖고 피크를 그린 후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초기에는 전염병의 발생을 이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역이 전염병의 발생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패턴은 숙종 5년(1679)에서 숙종 11년(1685), 그리고 숙종 13년(1687)에서 숙종 20년(1694)에 이르는 시기에도 반복되지만 이전 시기에 발생한 우역과 전염병으로 발생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데다 다시 더욱 강력한 피해가 더해지면서 기록과 보고의 시스템이 약화되고, 이러한 일상화된 재난으로 인해 초기와 달리 기록의 양이 현저히 줄어 우역과 전염병의 현황이 상당 부분 축소되어 기록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미한 변화 속에서 이전 시기와 유사한 패턴으로 우역과 전염병이 상호작용하며 진행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림 3>의 B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두 자료에 등장하는 전염병 발생에 대한 모든 기록을 그래프로 표기한 것이다. A의 그래프와 달리 우역이나 전염병이 크게 번진다는 등의 놀라움을 표현하는 기록은 실제 발생 사례수에 비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감소하는 추이를 보인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경신대기근을 전후한 현종 11년(1670)과 현종 12년(1671)에는 만연이라는 표현이 줄고, 우역과 전염병의 발생 사실에 대한 기록이 충실해지는 뚜렷한 양상을 살필 수 있다.
B 그래프를 살피면, 효종 4년(1653) 무렵부터 효종 8년(1657)까지 전염병이 만연한 데 이어 2-3년 간 전염병이 잦아들 무렵인 현종 1년(1660)에 우역이 다시 발생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어 현종 3년(1662) 전염병의 제1피크가 형성되었고, 이어 현종 5년(1664)과 현종 9년(1668)에는 전염병과 우역이 동반하여 피크를 형성하였다. 현종 11년(1670) 우역 3차 피크에 이어 현종12년(1671)에 1년의 시차를 두고 전염병 최대 피크가 형성되었다.
이어 숙종 6년(1680) 전염병 피크가 생성되었으며, 숙종 8년(1682)애는 우역이 피크를 이루며, 숙종 9년(1683)에는 전염병 피크가, 다시 숙종 10년(1684)에는 우역 피크가 형성되어 우역과 전염병의 피크는 순차적으로 나타난다. 이후에도 전염병과 우역의 피크는 대체로 일치하지 않으며, 오직 숙종19년(1693)에 두 전염병의 피크가 일치할 뿐이다.
다음 <그림 4>는 전염병과 우역으로 인한 피해가 사망과 폐사한 수치에 의거하여 그래프를 그린 것이다. 이는 <그림 3>에 나타난 전염병과 우역 발병의 주관적 기록을 <그림 4>의 객관적 기록과 비교하기 위한 것이다.
<그림 4>를 살피면 우역 발생의 첫째 큰 파동, 두 번째 큰 파동, 세 번째 큰 파동이 마무리 되는 최종 단계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폭증하는 양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큰 파동 이후 숙종 22년(1696)∼숙종 25년(1699) 사이에는 가장 큰 인명 피해가 기록되고 있다. <그림 4>의 그래프에서 나타나는 우역과 전염병으로 인한 농우와 인명 피해 발생의 일정한 패턴은 우역과 전염병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밀접히 관련된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숙종 25년(1699)에 기록된 4년간의 대규모 인명피해에 대해 기록한 이른바 을병대기근은 이전 시기에 발생했던 경신대기근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를 2장에서 확인한 소의 수명이 야기하는 우역의 발생의 파동을 고려하면 경신대기근 전후의 우역에서 소가 대량 폐사한 이후 증식된 소가 이후 두 차례 큰 파동의 우역에서 모두 폐사하였고, 이로 인해 전국적 수준에서 최악의 대기근과 전염병의 만연이 중첩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가설은 해당 시기 연대기 기록에 나타난 우역, 기근, 전염병의 발생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검토함으로서 검증할 수 있다.
17세기 전반 즉,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발생한 우역은 3년여 동안 진행된 이후 소멸되었으므로, 매우 큰 위기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의 대유행이나 대기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김동진, 2013a; 김동진·유한상, 2013). 이와 달리 이미 토착화한 우역 바이러스에 의해 곳곳에서 발병한 17세기 후반의 우역은 이전보다 짧은 휴식기를 갖고 발병하는 특징을 보였고, 이는 농우의 증식을 제한하였다. 17세기 후반 농우의 대량 폐사와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는 지속적인 기근을 유발하였다. 이러한 기근으로 인한 굶주림은 사람들의 면역력을 약화시켰고, 이는 전염병(천연두 등)의 대유행을 촉진한 것으로 보인다.
우역이 다시 발생한 것은 현종 1년(1660)이었다. 당시 일상적인 전염병이 만연하는 가운데 새롭게 발생한 우역으로 많은 소가 폐사하였고, 이는 현종3년(1662)의 위기를 초래하였다.23) 현종 3년의 경우 전반적으로 날씨가 좋아 농사를 지은 땅에서는 풍년이었지만, 우역과 전염병이 겹쳐지면서 농사를 짓지 못한 땅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현종 4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우역으로 큰 피해를 입자 좌의정 원두표는 “우역이 몹시 번져 경우(耕牛)가 다 죽어 가을갈이를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씨앗을 뿌려도 흙 속에 들어가게 하기 어려우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24) 라고 하였다. 흙으로 덮지 못한 가을보리의 싹은 겨울을 지나며 동사하게 되고, 이는 다음 해의 소출을 기대할 수 없다. 이듬해인 현종 5년에도 우역이 전국에서 계속 번지는 가운데 기근, 전염병, 우역으로 인한 피해가 중첩적으로 나타났다.
우역이 지닌 병원성으로 인해 우역으로 인한 소의 폐사율은 매우 높았지만, 기근과 전염병이 대량의 기민과 전염병 감염자를 양산했음에도 사망에 이르는 예는 많지 않았다. 이는 기근과 전염병 만연의 초기적 특징으로 예비된 식량, 국가의 구휼정책, 민인의 면역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우역이 발생 초기부터 “올해 우역은 매우 참혹하여 앞으로 종자가 끊기게 될 것이다”25)라거나, “올해의 우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26)라고 표현할 정도로 폐사율이 높았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 시기 각 도에서 발생한 우역으로 폐사한 소는 1,000여 마리에서 3,780여 마리에 이를 정도로 많은 수였다.
현종 5년(1664) 함경도에서 발생한 기근으로 굶주린 사람이 11,843인이었지만, 전염병으로 사망한 수는 65인에 지나지 않았다.27) 현종 6년 11월까지 우역이 크게 번져 1,300여 마리가 폐사하였는데,28) 곧바로 이어진 “전염병 역시 크게 번졌다”고 표현하고 있음에도 사망자는 14인에 지나지 않았다.29) 현종 9년 역시 전염병이 크게 번지는 가운데 도성에서 보고된 사망자는 900여 인으로 보고되는 상황에서 “그 실제의 수는 모두 헤아릴 수 없다”30)라면서 참혹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함경도에서 발생한 우마역으로 폐사한 가축이 18,100∼20,000여 마리임에도 크게 번졌다는 것 이외의 표현은 찾을 수 없다.31) 같은 시기 함경도에서 만연한 천연두로 인해 죽은 사람 역시 900여인에 지나지 않았다.32) 가축보다 사람의 수를 소홀하게 헤아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호적에 등재되지 않은 유리민이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에서 그들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경술년과 신해년에 발생한 경신 대기근은 현종 1년(1660)에 우역이 발생한 이래 10여 년간 세 차례의 우역 전파의 세 차례 작은 파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커다란 파장이 마무리 단계에 도달한 시점에서 발생하였다. 마지막 단계인 현종 11년(1670)과 현종 12년에는 우역으로 인한 소의 폐사 수와 전염병으로 인한 인명 피해의 수가 처음 역전되는 양상이 발생하였다. 즉, 현종 11년(1670) 폐사한 소는 31,743마리였지만, 전염병 사망자는 340인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현종 12년에 폐사한 소가 9,221마리였지만,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35,070인 이상으로 폭증하였다.
이러한 경신대기근의 양상과 심각함은 당대인들이 모두 인식하고 있던 바였다. 영의정 허적은 “경술년과 신해년 두 해의 기근과 전염병은 옛날에 있지 않았던 일이다”33)라고 하여 이전과 전염병 유행양상이 달라졌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대해 집의 조원기는 “근년 이래로 흉년과 전염병으로 이어지는 것이 참혹한 병란을 겪을 때와 같다”34) 라고 하였다. 이는 흉년으로 기근을 겪은 사람들이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전염병이 크게 만연하는 양상으로 진전되었다는 점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신대기근 시기에 연이어 발생한 기근과 전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의 수는 매우 많았는데, 그 수는 10만에서 100만에 이르는 것으로 언급되었다.35) 이러한 사망자의 폭증이 전에 없던 일로, 장기적인 기근이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를 크게 늘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경신대기근을 전후한 시기 연대기 기록에는 우역이 기근의 1차적 원인이라는 점이 잘 나타나 있다. 즉,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소가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이는 기근의 원인이 되며, 기근은 다시 전염병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 도성과 지방의 우역이 또다시 심하게 번져 죽은 것이 이미 많으니 굶주린 백성이 소가 없다면 어찌 땅을 갈고 농사를 짓는단 말인가? 명년의 농사일도 벌써 알 수 있다.36)

  • 삼남, 경기, 강원, 황해도 등에 우역이 크게 번져 연이어 전염되어 죽으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고, 백성들은 농사짓는 것을 바랄 수 없게 되었다.37)

  • 우역이 한번 크게 번진 뒤로 대신 멍에를 매야 하는 백성의 탄식이 있게 되었으니, 밭갈이 할 쟁기도 쓸모가 없게 되어 비옥한 경작지가 장차 황무지가 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38)

이는 당시 농업 관행에서 소가 차지하는 중요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소가 없으면 백성이 농사일을 할 때에 100배에 달하는 노동력을 들여야 겨우 수확을 할 수 있는 실정이었기에 우역으로 인한 피해는 심각한 것이었다.39) 숙종 2년(1676) 경기도 적성(현 파주)에 사는 출신 유익성은 당시 우역으로 소가 없어져, 폐농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법으로 소를 잡는 자 1명을 죽여 한 마리의 소를 살리면 1,000명의 백성을 살리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40)
우역의 첫 번째 파장의 큰 주기가 끝날 무렵 우역으로 인한 소의 부족으로 이미 현종 11년(1670)에 농사를 짓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었고, 이는 현종 12년에 기근과 전염병이 더욱 만연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41)
현종 12년(1671)에 경상도에서는 굶주린 사람들 중에 무려 5,100여 명이 전염병에 감염되었고, 감염된 사람 중 200여 명이 사망하였다.42) 그리고 경기도에서는 한 달 사이에 전염병 사망자가 170여 명, 우역으로 인한 소의 폐사 수가 30여 마리로 우역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전염병 사망자가 우역으로 인한 폐사수를 넘어섰다.43) 전염병이 더욱 만연하는 가운데 충청도 옥천에서는 굶주린 백성 69명이 죽었고,44) 경상도에서는 무려 38,967명이 아사하는 가운데 평안도와 경상도에서 전염병으로 각각 59명과 300여 인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45) 경신 양년까지 피해가 컸던 우역으로 인한 소의 폐사가 줄어드는 추세 속에서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규모가 대폭 확대되었다.
기근에 이은 전염병의 만연은 전국이 공통적인 것이었고,46) 왜란 당시의 피해보다 참혹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현종 12년의 전염병 만연은 “천촌만락에서 전염이 안 된 곳은 하나도 없다,”47)거나 “이때 팔도에서 기근과 여역때문에 살아 남은 자가 얼마 안된다”48)라고 하는 데서 이전보다 피해가 더욱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는 기근에 이은 전염병의 만연을 막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모색하였지만, 우역이 촉발한 전염병과 기근이 겹쳐지자 이전에 국가와 수령들이 마련하여 사용하던 대응책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전염병의 만연을 목도하게 되었다.
경기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은 매몰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비록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기력이 다한 처지였기 때문에 시신을 깊이 묻기 어려웠다. 그 결과 노상에서 사망한 유리민의 시신은 가볍게 흙으로 덮이는 예가 많았고, 이로 인해 소나기가 쏟아진 후 다시 드러나는 일이 빈번하였다.49) 전염병의 확산이 차단되지 않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또한 기근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면서 사람들은 닭, 개 뿐만 아니라 소와 말까지 모두 잡아먹고 있었다.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들이 고기를 먹자 이질로 사망하는 예가 많았으며, 심지어 굶주림 끝에 우역으로 폐사하여 매장한 사체를 야음을 틈타 파먹고 죽는 수도 매우 많았다.50) 현종 12년 7월 경상감사 민시중은 “또 각 고을의 굶주린 백성이 날마다 구름처럼 모이고 있으나 진휼할 밑천이 이미 떨어져서 보리죽을 먹이고 있으므로 구제되기를 바라기 어려운데 여역·이질이 전염되면 즉시 죽습니다”51) 라고 하였다. 당시 굶주린 사람들은 천연두, 홍역 등 비교적 치명적인 전염병 뿐 아니라 다른 시기와 달리 이질과 같은 질병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역 이후 대기근과 전염병 만연으로 이어지는 패턴은 17세기 우역의 두번째 큰 파장의 시기에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 5년(1679)과 숙종 6년(1680)에 시작된 우역은 숙종 10년(1684)까지 전국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야기하면 정점에 도달하였다.
숙종 10년 함경도 안변 등지에서도 우역과 전염병이 겹쳐 만연하고 있었는데, 전염병에 감염된 사람의 수가 160여인으로 조사되었을 당시 폐사한 농우는 600여 두에 달할 정도로 피해는 농우가 압도적이었다.52) 그러나 숙종 14년(1688)에 이르면 우역으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 줄어든 것과 달리 사망자가 10,000여 인에 이를 정도로 전염병에 의한 인명 피해가 압도적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숙종 16년(1690)에서 숙종 23년(1697)에 이르는 간헐적인 우역이 지난 숙종 24년에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다시 막대한 인명의 피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숙종 24년(1698) 11월에는 이미 4년간의 흉년을 지나 전염병이 만연하고 있었다.53) 연말에 공식적으로 파악된 전국의 사망자는 23,128명이었다.54) 또한 숙종 25년(1699)에 호구 장적을 작성한 후 사관은 당시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를 을해년에서 기묘년에 이르기까지 4년이 경과하면서 호수는 1,546,474에서 1,293,083로 16.4%가 감소하였고, 인구는 7,188,574에서 5,772,300으로 19.7%가 감소하였다고 기록하였다.55) 이러한 수치가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된 값이므로 유리민을 포함한 실제 인명의 피해는 이 수치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현종 1년(1660)에 한반도에서 병자호란 전후의 우역에서 면역력을 획득했던 대부분의 소들이 자연 수명을 다하면서 토착화된 우역이 각지에서 재발하는 가운데 면역력을 획득하지 못한 신생우의 수가 일정한 비율 이상으로 증가하면 다시 각 지역에서 우역이 만연하는 현상이 17세기 말까지 지속된 결과였다. 우역으로 소가 폐사하면 농사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이는 곧 기근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기근의 발생은 일상적 수준의 전염병에 대해 사람들이 정상적인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면역력이 약화되면서 대규모 인명피해로 이어졌고, 전염병으로 인한 대규모 인명 피해는 다시 농사와 가축의 정상적 사육을 가로 막으면서 다시 기근과 전염병을 극단적인 수준으로 만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7세기 말에 발생한 대규모 인명 피해는 토착화한 우역이 촉발한 기근-전염병의 연계 고리를 통해 상승작용하며 가속화한 결과였다.

4. 우역의 야생동물 전파와 대호환

17세기 후반 기근에 직면한 사람들은 식량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과거 범과 표범, 사슴의 서식지로 간주되는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거나 농지의 개간활동을 크게 늘렸다. 15세기에 본격화된 천방을 중심으로 한 저습지의 개간은 17세기에도 지속되었고,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직면한 17세기 후반 영세한 소농은 비교적 적은 노동력으로 쉽게 농경지를 마련할 수 있는 화전의 개발에 주력하였다(이경식, 1989). 이런 가운데 당시 새로 만연한 우역이 야생동물에까지 전파되면서 대호환을 야기하였다.
17세기에는 화전으로 인한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고, 국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처럼 화전이 국가적인 이슈로 논의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림 5>은 15∼18세기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천방과 화전에 대한 논의 추이를 살펴 본 것이다(김동진, 2013b).
천방의 지속적인 개간과 화전에 의한 삼림 지대의 대규모 개간은 야생동물의 서식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겨울과 여름 사이에 저지대와 고지대를 중심으로 먹이활동을 하고, 봄과 가을 사이에 양 지역을 이동하는 습성을 지닌 사슴56)의 모든 서식지가 인간의 가용 공간에 전면적으로 노출되었다. 그 결과 봄과 가을에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의 주변을 통과하는 시기뿐만 아니라, 과거 인간들과 분리되었던 공간에서도 인간이 사육하는 가축과 접촉을 늘렸고, 이는 인간 가용공간의 외연에 서식하던 사슴 집단에게 소에 만연한 우역 바이러스를 전파시켰다.57)
즉, 우제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역 바이러스는 소의 힘에 의지하여 경작지를 확대하는 인간의 활동에 의해 확장된 가용공간에 노출된 야생동물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가운데 범과 표범의 주된 먹잇감58)이며, 무리를 이루어 먹이활동을 하고 번식하는 사슴과 멧돼지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입혔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가운데 연대기에 기록이 풍부한 사슴을 중심으로 살피면 우역이 확산된 병자호란 이후 사슴을 사냥할 수 있는 곳은 연해와 도서 지역, 백두산과 개마고원 일원의 고산지대로 축소되었으며, 이곳의 개체수는 급격히 감소하였다(세로셰프스키, 2006: 144; 김동진·이항, 2012: 83-84). 멧돼지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인다.
우역의 전파는 병명에 포함된 것과 같이 소의 대량 폐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우역 바이러스에 민감한 우제류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17세기 이전부터 만연하였던 각종 전염병에 우역이 더해지면서 그 피해는더욱 증폭되었고, 이는 다양한 야생동물에 영향을 미쳤다.
현종 4년(1663) 10월에 시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국왕과 대신은 당시 번지는 전염병과 우역으로 인한 피해 양상을 이조 참판 조복양은 “우역으로(소만 죽은 것)이 아니고, 물고기와 자라도 다 죽고 심지어는 성 안의 까마귀와 까치도 드뭅니다. 이는 바로 보통 재변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의심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59) 라고 하였다. 비록 우역 바이러스가 물고기, 자라, 까마귀와 가치 등을 감염시키지는 않았겠지만, 우역 바이러스를 포함한 다양한 병원체가 특정의 요인에 의해 도성의 가축과 야생동물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60) 현종 12년(1671) 5월 함경도에서는 “함경도 각 고을에 말과 소의 돌림병이 크게 번졌고, 개 돼지까지도 모두 연이어 전염되어 죽었다”61) 라고 하여, 당시 우역을 포함한 각종 전염병이 개와 돼지까지 감염시키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상은 숙종 즉위년 강원도 삼척과 울진에서도 고을에서 기르는 돼지가 우역에 감염되어 폐사한 사실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62) 우역 바이러스가 소와 돼지에게 모두 감염되었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병원체가 야생의 생태계에 확산될 경우 무리 생활을 하는 사슴과 멧돼지 개체군의 감소를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우역이 새로이 도래한 이후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한반도 야생 생태계에서 야생동물의 개체수는 급격히 감소하였고, 몇몇 종은 더 이상 찾기 어렵게 되었다. 현종 11년(1670) 전라감사 오시수(吳始壽, 1632~1681)는 “한 번 조총(鳥銃)이 널리 사용된 뒤로는 산림연수(山林淵藪)와 해중도서(海中島嶼)에 길러지는 짐승으로 남은 것이 없습니다. …… 꿩·토끼·노루[牙獐]는 비록 사슴이나 멧돼지를 얻기 어려운 것이 이른 것은 아닙니다63)” 라고 하였다. 야생동물의 감소가 급격히 시작된 것은 조총이 널리 사용된 시기와 일치하는 것이며, 가장 많이 감소한 것은 사슴과 멧돼지였다. 오시수가 태어난 것이 인조 10년(1632)이었음에 비추어 그가 관찰한 조총이 널리 사용된 시기와 우역이 도래한 시기는 일정하게 겹쳐진다. 또한 17세기에 가장 급격히 감소한 야생동물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우역에 잘 감염되는 사슴과 멧돼지였다. 이러한 점에서 17세기 야생동물의 개체수의 급격한 감소에서 조총으로 인한 사냥과 함께 우역이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은 것이었다.64) 더욱이 기근에 내몰린 농민들이 사냥과 화전 개발에 대대적으로 나섬으로 인해 조총에 의한 수렵의 영향을 더욱 심화시켰고 인간과 야생동물의 접촉 빈도를 높였다.
실제 17세기에 사슴을 사냥한 지역이 이동하는 양상을 살피면 개간에 의한 가용공간의 확장에 상응하여 사슴의 서식지가 점점 격오지로 축소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초 사슴이 서식하는 지역은 전국의 도서 지역과 지리산, 백두산 등 큰 산의 산록이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는 서남해안의 도서 지역과 제주 지역에서 사슴의 개체수는 크게 줄어드는 가운데 국내의 주요한 사슴 사냥은 지리산과 백두산 일원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국내 수요의 충족을 위해 일부 모험적인 사냥꾼들은 압록강을 넘어 청의 봉금지대에서 사슴 사냥을 하다 발각되어 조-청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먼저 17세기 전반 국가의 긴급한 사슴 수요를 충족하는 주요한 사냥터였던 경기도 일원의 도서지역의 사슴 서식지는 점차 사슴의 서식 개체수가 크게 줄어들었고,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훨씬 먼 바다의 섬에서 사슴을 사냥하게 되었다.
17세기 전반에는 비록 이전과 달라진 규정이긴 하지만 병영에 표범의 사냥을 맡기면서 수영에는 사슴의 사냥을 책임지울 수 있었고,65) 청에서 도래할 칙사를 대접하는 데 사용할 노루와 사슴을 근교의 여러 섬에 도감포수를 보내 사냥하여 마련하게 했다.66) 이는 근교에 아직 국가에서 긴급히 필요로 하는 사슴을 충분히 공급할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우역이 경기 일원을 휩쓸고 지나간 인조 15년(1637) 11월에 훈련도감과 총융청의 선방 포수를 경기도 남양의 대부도와 자월도67)로 보내 사냥을 하게 하였다. 당시 보고에 따르면 두 곳에서 잡은 것이 사슴 38마리와 노루 1마리였고,68) 이 해에 잡은 것은 전체적으로 100마리를 넘어섰다.69) 이러한 사정때문에 인조 16년 국왕은 “사냥을 한다면 노루와 사슴을 잡을 수 있다면 제향에 쓰는 중포를 사냥하여 쓰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고, 호조판서 심열(沈悅)은 “사냥하는 것이 좋을 듯하며, 중포는 사냥하여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여 사슴 사냥에 어려움이 없었다는 점을 밝혔다.70)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남양의 대부도와 인천의 자연도에서는 더 이상 사슴을 사냥하여 진상할 수 없게 되었다. 17세기 전반 두 섬은 사는 백성이 적어 매우 많은 사슴을 잡을 수 있었지만, 이후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슴이 멸종하였다.71) 서해 도서 지역에서 발생한 생태환경의 변화에 조응하여 조선 정부는 대부도와 자연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과하였던 사슴을 사냥하여 진상하는 의무를 영구히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17세기 중엽 이후 근교의 도서지역에 서식하는 사슴이 사라지면서 사냥은 점점 어려워졌고,72) 이후 사슴의 사냥터는 바다를 향해 더 멀리 떨어진 황해도 옹진군의 덕물도(현 옹진군 덕적도)와 같은 곳으로 옮겨졌다.73)
이러한 정황에서 17세기 말에 이르면 사슴이 남아 있는 몇몇 고을의 수령이나 사냥꾼들은 사슴의 사냥에 더욱 진력하였다. 숙종 6년(1680) 전라감사 전라감사 유명현(柳命賢)은 지리산 자락의 남원부에서 사슴 사냥을 하면서 속오군을 함부로 지나치게 사용하였다는 사유로 조사받았다.74) 이는 전국적으로 사슴이 희귀해지는 가운데 지리산에 서식하던 사슴 무리를 잡아 큰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였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면 한반도에서 사슴을 사냥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사라졌다. 경종 즉위년(1720) 사복시의 관원이 올린 보고에 따르면 전라도 나주의 감목관에 속한 자은·장산·안정·기좌 등의 4개 섬은 과거에 사슴 사냥이 이루어졌지만, 18세기 전반에는 섬에 거주하는 사슴 사냥 대신 매호에 ‘사슴 사냥 몰이군 가미[獵鹿山行驅軍價米]’ 3두와 ‘결전 가미(結箭 價米)’ 7두를 거두어 모두 매년 쌀 10두 씩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75) 이는 과거 이들 섬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사슴 사냥에 필요한 몰이꾼의 역과 사슴 사냥에 사용될 울타리를 엮는 역을 면하는 대가로 값을 내게 한 결과였다. 그러나 17세기 말 ∼ 18세기 초에 더 이상 한반도에서 사슴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슴을 얻으려는 자들이 월경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17세기 후반 삼수군76)과 피아의 국경을 구분하기 어려운 백두산 일대에서 시작된 사슴의 월경 사냥의 문제77)는 18세기 초에 이르러 아예 국경을 확연히 넘어 사냥하는 사태로 진전되고 있었다.78) 청이 중원에 입관한 이후 만주 일원에 설정된 봉금지대가 사슴에게 최적의 서식지로 변모한 탓이었다(강석화, 2007: 33-34).
광범위한 우역, 화전 개발, 과도한 수렵 등으로 인한 사슴의 서식지 축소 및 개체수 감소는 17세기에 전례 없는 새로운 사회적 현상을 야기하였다. 17세기 중엽 이후 시전의 상인들은 값을 주고도 녹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예가 빈번했으며, 지방관들은 사슴과 관련된 제반 물품을 진상하지 못하거나, 하자있는 물품을 진상했다는 이유로 추고를 받는 예가 빈번해졌다.
화전으로 서식지를 잃고, 사냥되거나 가축과의 접촉을 통해 우역 바이러스가 야생동물에게 전파되면서 야생에서 사슴이나 멧돼지와 같은 우제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79) 줄어든 서식지와 먹이량으로 굶주리게 된 범과 표범은 서식지로 깊숙이 침투한 채 전염병에 감염되어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손쉬운 먹잇감으로 삼았다. 범과 표범은 이전과 달리 마을과 마을 사이를 횡행하면서 사람과 가축에게 엄청난 규모의 피해를 일으켰다.80) 이로 인해 이 시기의 역사적 기록에서 나타나는 호환은 더욱 극단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17세기 후반, 그 가운데 특히 경신대기근을 전후로 한 시기에는 사람과 가축에게 전염병이 만연하는 가운데 호환의 빈도와 양상 역시 극단적이었다.
우역이 본격화되기 이전의 호환은 15∼16세기에 진행된 호환과 특별히 차별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효종 8년(1657)의 기록에는 “강원도 춘천·횡성·홍천·원주 등 고을에 사나운 범이 이곳저곳 출몰하며 마을의 민가에 드나들면서 우마(牛馬)와 사람을 잡아먹었다”81)라고 하였다. 당시 범은 민가에서 사람과 가축을 만날 수 있었고, 이들이 호환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사람들의 주거지 주변 여기저기에서 출몰할 정도로 범과 표범의 서식지와 인간의 가용 공간은 상호 교차하고 있었으며, 범들은 민가에 대한 출입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범과 표범이 오랫동안 굶주렸을 때 보이는 매우 예외적인 먹이활동의 행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우역의 첫 번째 큰 파장이 시작된 현종 1년(1680) 이후 경신대기근이 본격화할 때까지 발생한 호환은 주로 인명의 살상이 중심이었고, 가축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다음 <그림 6>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호환의 사례수로서 경신 대기근을 전후한 시기는 조선 전시기를 통틀어 가장 격심한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호환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림 7>은 경신 대기근을 전후하여 발생한 시기에 호환의 피해는 조선 전시기에 발생한 호환에서 특히 인명의 손상이 가장 많은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그림 8>는 경신 대기근을 전후한 시기의 호환에서 가축의 피해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인명의 피해 혹은 여타 시기의 호환에서 가축이 입은 피해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경미한 것이라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우역으로 인해 이미 너무 많은 가축이 희생되었으므로 상대적으로 범과 표범의 먹잇감이 될 만한 가축의 수가 크게 줄어든 데 1차적 원인이 있었다. 여기에 기근과 전염병의 만연으로 병약한 사람들이나 죽은 시신들을 빈번히 접하게 됨으로써 굶주린 범 중 사람을 먹이로 삼는 습성을 가진 개체들이 늘어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종 10년(1669) 9월 개성에서 발생한 호환에서는 연이어 3명이 물렸는데 1명이 즉사하고, 2명이 크게 다쳐 치료를 받던 중 죽었다.82) 같은 해 11월에 도 범이 횡행하면서 사름을 물어죽였을 뿐 가축의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다.83)
17세기 후반 첫 번째 대규모 우역의 파장이 형성되고 있을 때 호환은 주로 “호환으로 인명을 손상하였다”84) 혹은 “범이 물어 죽은 사람 또한 많다”85)라고 표현되는 바와 같이 가축의 손실에 대한 기록은 일반적이지 않다. 호환으로 인한 인명의 손상은 “범이 (사람을) 물었다는 보고가 연속하여 들린다”86)라고 언급하는 가운데 “가축인 소가 전염병[疫]으로 폐사한 것 역시 모두 헤아릴 수 없다”라고 하여 우역으로 폐사한 가축은 인명의 손실과 구분하여 별도로 언급하고 있다.87) 현종 12년 11월 30일(정축)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전염병에 의한 인명 손실과 우역으로 인한 가축 손실,88) 호환으로 인한 인명 손실89)을 각각 분리하여 기록한 것은 당시 발생한 호환이 주로 인명을 대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었다.90)
당시 사람을 공격하는 호환 양상을 세밀히 살피면 다의 범과 표범이 굶주림에 지치거나, 혹은 다쳐서 정상적인 먹이 활동이 어려운 개체들의 행동특성을 보인다. 호환이 전국의 곳곳에서 빈발하였다.91) 일부 범은 강화도와 같은 육지에서 가까운 섬까지 헤엄쳐 들어가 호환을 일으켰으며,92) 범이 한번 출몰하면 적어도 2∼5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였다.93) 일부 범은 사람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던 사람을 그대로 놓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94)
물론 전라도 순천의 목장에서 국마 25필이 물려 죽거나,95) 의주를 찾은 칙사가 가져온 말 19필이 당한 호환의 경우처럼96) 우역의 피해를 입지 않아 가축이 남아 있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가축에 호환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과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경신대기근을 전후하여 집중된 호환이 인명 피해가 중심이었고, 가축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다.

5. 맺음말

지금까지 17세기 후반 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사료상에 빈번히 등장하는 우역, 기근, 전염병, 호환이 경신 대기근과 을병 대기근 시기에 중첩하여 발생한 원인을 밝히고,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을 밝혔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우역은 1636년 5월 만주 일원에서 발생하여 조선에 전파된 이후 조선 전역을 휩쓴 후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우역 바이러스는 이후 조선에 토착화되면서 소의 수명과 번식률에 따라, 그리고 면역력을 가진 개체수의 비율의 변화에 따라 조응하고, 국지화되고, 주기적으로 유행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경신대기근을 전후하여 크게 만연한 우역은 도성에서 처음 시작된 이래 조선의 각지에서 빈번히 발생하였다. 처음 매우 큰 피해를 야기하며 파동을 형성하였던 우역은 토착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파장이 짧아지고 우역에 의한 폐사율이 다소 낮아지며 피해 규모가 줄어드는 등 파동의 크기가 작아지고 전염 범위도 조선 전역으로부터 점차 국지적인 범위로 축소되는 등의 양상이 나타났다.
17세기 전반에 새로이 도입된 우역은 17세기 후반에도 치명적 살상력을 유지한 채 토착화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어느 정도의 주기를 유지하며 발병하였다. 이와 달리 조선의 일상적 사람 전염병으로 정착한 천연두, 홍역 등의 전염병은 오래 전부터 항상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그 결과 새롭게 토착화를 시도하는 동물 우역과 이미 오래 전에 토착화된 인간 전염병의 발생이 새로이 겹쳐지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면서 전염병으로 인한 인명 피해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우역 발생은 농우 부족으로 기근을 초래하고, 기근은 다시 사람에게 전염병이 만연하는 원인이 되었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인명의 피해는 다시 병든 가축의 도살이나 방기, 고기 분배, 농우의 방치를 초래했고, 이것들은 다시 우역의 발생과 만연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었다. 전염원이 늘어나고, 면역력이 약화된 숙주가 많아질수록 인력과 농우의 손실이 늘어나면서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토착화된 우역의 빈번한 재등장으로 우역-기근-전염병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연결되었고, 이들이 주기를 반복하며 연쇄를 이루어 상승 작용하여 대규모 인명 피해를 수반하는 생태경제사적 대재난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17세기 후반에 발생한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이었다.
17세기 후반 기근에 직면한 사람들은 식량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과거 범과 표범, 사슴의 서식지로 간주되는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거나 농지의 개간활동을 크게 늘렸다. 15세기에 본격화된 천방을 중심으로 한 저습지의 개간은 17세기에도 지속되었고,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직면한 17세기 후반 영세한 소농은 비교적 적은 노동력으로 쉽게 농경지를 마련할 수 있는 화전의 개발에 주력하였다. 이는 당시 새로 만연한 우역이 야생동물에까지 전파되면서 대호환을 야기하는 핵심적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17세기 한반도에는 이전과 달리 우역 바이러스가 전파되었고, 인구와 소의 사육이 늘어나는 가운데 격리되어 있던 인간의 가용공간이 천방과 화전 개간으로 인해 숲에서 개방되었다. 이로 인해 범과 표범, 사슴의 서식지가 감소하면서 사람과 동물의 접촉 빈도와 수렵 기회를 크게 증가시켰다. 이에 따라 가축-야생동물 간의 병원체 교류도 촉진되었고, 우역 바이러스는 주기적으로 가축에서 야생동물로, 야생동물에서 가축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우제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역 바이러스는 소의 힘에 의지하여 경작지를 확대하는 인간의 활동에 의해 확장된 가용공간에 노출된 야생동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 가운데 범과 표범의 주된 먹잇감이며, 무리를 이루어 먹이활동을 하고 번식하는 사슴과 멧돼지는 결정적인 피해를 입었다. 실제 우역이 확산된 병자호란 이후 사슴을 사냥할 수 있는 곳은 연해와 도서 지역, 백두산과 개마고원 일원의 고산지대로 축소되었으며, 이곳의 개체수는 급격히 감소하였고 사슴들은 거의 절멸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한반도 남부에서 범과 표범은 이전과 달리 마을과 마을 사이를 횡행하면서 사람과 가축에게 엄청난 규모의 피해를 일으켰다. 기근에 당면하여 유리걸식하며 굶주리는 사람들과 전염병으로 사망한 후 버려지는 사람들은 굶주린 범의 손쉬운 먹이감이 되었고, 이는 다시 호환을 증폭시켜 대호환을 유발하였다.
따라서 경신 대기근(1670∼1671)과 을병 대기근(1695∼1696)은 각각 경인년과 신사년, 을해년과 병자년이라는 시기에 당시 발생하고 있었던 다양한 재난 요인의 주기성이 중첩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Notes

1) 앤드류 니키포룩은 “세계무역이 순수하게 상품과 신기한 기계만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거래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제 행위의 일환으로 시도되는 모든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생물학적 거래’가 수반된다”라고 하면서 인간의 경제 활동에 ‘생물학 적 거래’가 수반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또한 미국 뉴욕대학교의 ‘더티 머니 프로젝트’ 에서 분석 결과 “1달러짜리 지폐 80장에서 각종 박테리아와 세균, 곰팡이, 꽃가루, 동물 분 비물 등 무려 3000종의 유전자가 검출됐다”고 한다. 따라서 위생학자들은 세계를 가장 활발 히 돌아다니는 지폐가 전염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월스트리트저널』, 2014년 4 월 19일; 『한겨레』, 2014년 4월 21일).

2) 선행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하 본고에서 지칭하는 ‘牛疫’은 당대의 사료를 그대로 인용할 것이다. 17세기 기록에 나타난 ‘牛疫’은 19세기 후반에 밝혀져 명명한 ‘牛疫(rinderpest)’를 포함한 소의 전염병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로서는 17세기에 발생한 우역의 병원체를 명백히 구분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rinderpest virus’의 영향을 부정하기 어려우므로 역사적인 용어인 ‘우역’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rinderpest virus’와 관련성이 깊은 병원체의 작용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또한 우역에 대한 수의학적 연구 성과, 의학사적 의의, 농업사적 측면의 연구에 대해서는 필자가 참여한 선행의 두 연구를 원용할 것이다.

3)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우역과 관련된 기사가 각각 94개와 299개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실록, 일기)의 순서로 각 왕대에 나타난 사례 수를 확인하면 중종[3, -], 인종[0, -], 명종[1, -], 선조[0, -], 광해군[0, -], 인조[9, 42], 현종[22(개수 24), 59], 숙종[21, 73], 영조[10, 102], 정조[0, 7], 순조[0, 0], 헌종[0, 1], 철종[0, 0], 고종[4, 11]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김동진·유한상의 선행연구(2013)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인조대에 발생한 우역이 이전에 발생한 우역과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심양에서 새로 전래된 것이며, 영조대 이후 피해 감소는 17세기 후반 새로 전래된 우역의 토착화가 진행되면서 나타난 공진화 결과이다.

4) 『仁祖實錄』 卷48,仁祖 25年 2月 癸酉.

5) 『承政院日記』 155冊, 孝宗 10年 潤3月 癸亥.

6) 『顯宗改修實錄』 卷4, 顯宗 1年 8月 庚子.

7) 농촌진흥청 전문가에 따르면 한우의 평균 수명은 15 내지 20년이다. 그러나 과거 농경사회에서 일소로 주로 사육되던 소는 이보다는 더 오래 살았으리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고, 특별한 경우 40년까지 산 일소(다큐멘터리 ‘워낭소리’의 주인공 소)의 경우도 알려져 있어 대략 20년 내지 30년을 조선시대 소의 일반 수명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한겨레』, 2009년 2월 10일).

8) 『顯宗實錄』 卷3, 顯宗 1年 7月 辛巳.

9) 『承政院日記』 164冊, 顯宗 元年 9月 壬申.

10) 『承政院日記』 164冊, 顯宗 元年 9月 辛巳.

11)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1月 甲寅, 戊辰;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9月 戊寅.

12)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3月 乙亥.

13)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9月 戊寅.

14)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10月 丁未.

15)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10月 丁未.

16) 『顯宗實錄』 卷20, 顯宗 12年 11月 丁丑.

17) 『顯宗改修實錄』 卷26, 顯宗 14年 2月 乙巳.

18) 『承政院日記』 241冊, 肅宗 卽位年 9月 丁卯.

19) 『承政院日記』 239冊, 顯宗 15年 4月 丁酉.

20) 『肅宗實錄』 卷14, 肅宗 9年 1月 庚午.

21) 『肅宗實錄』 卷16, 肅宗 11年 8月 庚子.

22) 다만 숙종 10년(1684)에 발생한 우역은 이전의 우역들이 대부분 6∼8월 경에 발생하여 1∼2월 경 소강 국면에 들어간 후 재발한 것과 달라 2∼5월 사이에도 만연했다는 점은 이전의 우역의 만연 양상과는 다소 패턴을 달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3) 『顯宗實錄』 卷5, 顯宗 3年 8月 甲辰.

24) 『顯宗改修實錄』 卷9, 顯宗 4年 10月 己亥.

25) 『顯宗實錄』 卷7, 顯宗 4年 9月 己卯.

26) 『顯宗改修實錄』 卷9, 顯宗 4年 9月 己卯.

27) 『顯宗實錄』 卷8, 顯宗 5年 5月 甲子.

28) 『顯宗實錄』 卷11, 顯宗 6年 11月 癸卯.

29) 『顯宗實錄』 卷11, 顯宗 7年 1月 丁未.

30) 『顯宗實錄』 卷14, 顯宗 9年 4月 丙申.

31) 『顯宗實錄』 卷14, 顯宗 9年 5月 乙巳; 『顯宗實錄』 卷15, 顯宗 9年 9月 乙卯.

32) 『顯宗實錄』 卷16, 顯宗 10年 3月 癸卯.

33) 『顯宗實錄』 卷20, 顯宗 13年 3月 己酉.

34) 『顯宗實錄』 卷20, 顯宗 13年 10月 戊辰.

35) 『肅宗實錄』 卷7, 肅宗 4年 9月 辛亥.

이태진은 정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총 기민수를 680,993명, 동사 및 아사자 58,415명, 전염병(여역) 사망자 34,326명으로 집계한 바 있다(이태진, 1998: 357).

36) 『承政院日記』 220冊, 顯宗 11年 8月 戊申.

37)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9月 戊寅.

38) 『顯宗改修實錄』 卷26, 顯宗 14年 2月 乙巳.

39) 『顯宗改修實錄』 卷26, 顯宗 14年 2月 乙巳.

40) 『承政院日記』 250冊, 肅宗 2年 1月 丁酉.

41)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9月 己巳.

42)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1月 乙卯.

43)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1月 戊辰.

44)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2月 癸巳.

45)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2月 乙未.

46)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2月 辛亥.

47)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3月 甲戌.

48)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8月 癸未.

49)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6月 丁酉.

50)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7月 甲寅.

51)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7月 甲寅.

52) 『肅宗實錄』 卷15, 肅宗 10年 2月 癸亥.

53) 『肅宗實錄』 卷32, 肅宗 24年 11月 甲午.

54) 『肅宗實錄』 卷32, 肅宗 24年 12月 戊辰.

55) 『肅宗實錄』 卷33, 肅宗 25年 11月 庚戌.

56) 최근 일본 등에서 전파발신기를 이용한 사슴의 이동에 관한 연구 결과는 이들이 저지대와 고지대 사이를 계절에 따라 이동함을 보여준다(Takii et al. 2012: 127-137).

57) 한반도에 서식하던 사슴(sika deer)은 우역 바이러스에 감염 후 자연 상태에서 10일 이내에, 실험실에서 3∼6일 사이에 죽었다(Ono & Kondo, 1923: 158-161).

58) 최근 극동러시아 연해주 야생에 남아있는 아무르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의 먹이량 조사결과에 의하면 멧돼지와 사슴류(말사슴, 꽃사슴, 노루)가 호랑이 전체 먹이량의 대부분(96%)를 차지한다. 최근 유전자 연구결과, 아무르호랑이와 한반도산 호랑이는 같은 아종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은 그 생태적 특성도 유사할 것으로 생각된다. 연해주와 한반도의 동물 분포가 비슷하지만 연해주와는 달리 한반도에는 말사슴이 거의 분포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과거 한반도에서 호랑이의 주 먹잇감이었던 초식동물은 멧돼지와 사슴(꽃사슴), 노루였다(Lee et al., 2012: 48-53; Miller et al., 2013: 845-855)..

59) 『顯宗改修實錄』 卷9, 顯宗 4年 10月 己亥.

60) 우역이 직접 새나 물고기 등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낮지만 우역과 함께 다른 질병이 만연 하여 우제류의 야생동물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하면서 야생생태계 전반에 큰 변화를 야기 했을 가능성은 높으며, 이 시기에 이러한 상황이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61) 『顯宗改修實錄』 卷19, 顯宗 12年 5月 丙寅.

62) 『承政院日記』 241冊, 肅宗 卽位年 9月 丁卯.

63) 『顯宗改修實錄』 卷23, 顯宗 11年 11月 癸亥.

64) 『承政院日記』 292冊, 肅宗 8年 8月 甲申.

65) 『承政院日記』 70冊,仁祖 17年 8月 戊戌.

66) 『承政院日記』 73冊,仁祖 18年 3月 甲申.

67) 『承政院日記』 266冊, 肅宗 4年 10月 庚午.

68) 『承政院日記』 61冊,仁祖 15年 11月 戊辰; 『承政院日記』 53冊,仁祖 15年 11月 庚午.

69) 『承政院日記』 69冊,仁祖 17年 10月 丁酉.

70) 『承政院日記』 63冊,仁祖 16年 1月 戊辰.

71) 『承政院日記』 266冊, 肅宗 4年 10月 庚午; 『肅宗實錄』 卷7, 肅宗 4年 10月 庚午.

72) 『孝宗實錄』 卷10, 孝宗 4年 2月 辛丑.

73) 『承政院日記』 131冊, 孝宗 5年 4月 乙亥. 덕적도는 영종도에서 남서 방향으로 40km 가량 떨어진 서해상에 있다.

74) 『承政院日記』 277冊, 肅宗 6年 7月 癸巳.

75) 『承政院日記』 526冊, 景宗 卽位年 9月 己巳.

76) 『承政院日記』 311冊, 肅宗 11年 10月 辛丑.

77) 『承政院日記』 356冊, 肅宗 20年 3月 辛酉.

78) 『景宗實錄』 卷5, 景宗 1年 11月 甲午.

79) 비록 많은 정황적 증거들이 17세기 우역이 야생 사슴과 멧돼지에게도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지적하지만, 야생에서 우역 때문에 죽은 사슴이나 멧돼지가 대량 폐사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폐사된 동물 사체가 포식동물에 의해 신속히 해체되어 사람에게 발견되기 어려웠거나, 설사 발견된다 할지라도 자연에서의 야생동물 폐사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80)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동아프리카에 우역 바이러스가 주기적으로 만연하면서 소 떼, 야생 물소와 우제류가 동아프리카에서 크게 줄어들었고, 이로 인한 굶주린 사자의 식인이 대규모로 뒤따랐다고 한다. 1898년에는 차보의 식인 사자가 인도 노동자 28명을 잡아먹어 우간다의 철도공사가 중단되었다. 1920년대 우간다는 다시 우역이 성행하자 인위적으로 야생 우제류를 모두 죽였다. 굶주린 사자 중에는 40명과 84명의 사람을 잡아먹은 사자도 있었다. 1940년대에 잠비아에서는 우역을 막기 위해 야생동물을 죽였고, 이후 15년 동안 1,500명이 식인 사자에게 잡아먹혔다(Phoofolo, 1993: 112-143; Spinage, 2003: 497-691; 니키포룩, 2010: 115).

81) 『孝宗實錄』 卷18, 孝宗 8年 3月 乙卯.

82) 『承政院日記』 216冊, 顯宗 10年 9月 辛亥; 『顯宗實錄』 卷17, 顯宗 10年 9月 辛亥.

83) 『顯宗實錄』 卷17, 顯宗 10年 11月 癸卯

84) 『承政院日記』 219冊, 顯宗 11年 3月 壬戌.

85)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2月 辛亥.

86)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6月 己酉.

87)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8月 戊申;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9月 戊寅.

88) 『顯宗實錄』 卷20, 顯宗 12年 11月 丁丑.

89) 『顯宗改修實錄』 卷25, 顯宗 12年 11月 丁丑.

90) 『顯宗實錄』 卷20, 顯宗 12年 12月 丁未.

91) 『承政院日記』 251冊, 肅宗 2年 2月 乙卯; 『承政院日記』 251冊, 肅宗 2年 2月 乙卯; 『承政院日記』 273冊, 肅宗 5年 10月 丁卯.

92) 『承政院日記』 251冊, 肅宗 2年 2月 乙卯.

93) 『承政院日記』 255冊, 肅宗 2年 7月 庚子; 『承政院日記』 287冊, 肅宗 8年 1月 壬申.

94) 『顯宗實錄』 卷22, 顯宗 15年 7月 丙寅.

95) 『顯宗實錄』 卷20, 顯宗 13年 7月 丁卯.

96) 『承政院日記』 312冊, 肅宗 11年 12月 辛卯.

그림 1.
연대기에 나타난 17세기 후반 우역 유행 양상
Figure 1. The pattern of the spread of rinderpest in the late 17th century as recorded in the Chron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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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7세기 후반 典牲署祭享所用 黑牛의 우역 폐사율 변화
Figure 2.Changes in the mortality of rinderpest in black cattle raised at Jeonsaeng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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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17세기 후반 전염병과 우역의 발생에 대한 기록의 양적 추이
Figure 3. The quantitative pattern of the outbreaks of epidemics and rinderpest in the late 17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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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17세기 후반 전염병 사망자와 우역 폐사수 변화 추이*
Figure 4. Changes in the casualties of epidemics and rinderpest in the late 17th century as recorded in the Joseon Dynasty Chronicle*
*B 그림은 A 그림에서 1698∼1690년의 전염병 피크 기간을 제거하고 사망자 수 스케일을 줄임으로써 더 세부적인 상황을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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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15∼18세기 『조선왕조실록』의 천방과 화전에 대한 논의 추이
Figure 5. The development of discussions on Cheonbang (making paddy fields by building bank along a stream) and Hwajeon (making fields by slashing and burning a forest) in the 15th-18th-century Joseon Dynasty Chron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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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경신대기근 시기의 호환
Figure 6. Tiger disasters during the Gyeongsin famine as recorded in the Joseon Dynasty Chron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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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경신대기근 시기의 호환 사망자
Figure 7. The human casualties of tiger disasters during the Gyeongsin famine as recorded in the Joseon Dynasty Chron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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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경신대기근 시기의 호환 피해 가축수
Figure 8. The animal casualties of tiger disasters during the Gyeongsin famine as recorded in the Joseon Dynasty Chron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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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17세기 후반 典牲署 祭享所用 黑牛의 우역 폐사율 변화
Table 1. Changes in the mortality of rinderpest in black cattle raised at Jeonsaengseo (a government office in the Joseon Dynasty in charge of raising animals to be sacrificed at national memorial services)
시기
전체 폐사 병중 생존
발병율 폐사율 전거 (『承政院日記』)
유형 년도 병후 미병
우역 1627 黃牛 3 0 0 0 3 0 0% 인조 5년 10월 9일(임인) 19책
黑牛 5 1 2 0 2 60% 20%
小計 8 1 2 0 5 38% 13%
우역 1637 654 (499) - (155) 76% 인조 15년 12월 30일(갑자) 62책
1637 21,000 太半(10,500) - - - - 50% 『朝鮮時代史草』 I, 史草 上 丁丑 12월 신유
* 전생서 제향용 소 아님 제주도 우역 피해 보고
제1우역 (경신대 기근) 1669 黑牛 10 5 0 0 5 50% 50% 현종 10년 1월 8일(임인) 212책
1672 黑牛 11 10 - - 1 91% 91% 현종 13년 9월 17일(기축) 230책
小計 21 15 0 0 6 71%
제2우역 1679 黑牛 13 3 - - 10 23% 23% 숙종 5년 11월 13일 (갑진) 274책
1680 黑牛 9 5 1 (1) 2 78% 56% 숙종 6년 10월 4일 (기축) 279책
1681 黑牛 15 3 3 0 9 40% 20% 숙종 7년 10월 4일 (계미) 285책
1684 黑牛 9 (順天白也島) 9 0 0 0 100% 100% 숙종 10년 2월 18일 (갑인) 302책 (발병지역통과중)
小計 46 20 4 1 21 54% 43%
제3우역 1689 黑牛 10 7 2 0 1 90% 70% 숙종 15년 8월 29일 (임진) 337책
1690 黑牛 18 5 5 0 8 56% 23% 숙종 16년 9월 21일 (무신) 342책
1691 黑牛 8 4 0 1 3 63% 50% 숙종 17년 3월 7일 (계사) 344책
小計 36 16 7 5 12 67% 44%
103 51 11 6 39 66% 50%
18세기 1748 黑牛 32 25 3 0 4 87.5% 78% 영조 24년 9월 6일 (정사) 1034책
표 2.
현종 4년(1663)∼현종 12년(1671) 연대기 기록에 나타난 지역별 우역 피해 두수
Table 2. The casualties of rinderpest by area during the period from the 4th to 12th year of King Hyeonjong (1663-1671)
지역 피해수 지역 피해수
함경 20,000두 경기 9,193두
평안 2,885두 충청 6,219두
황해 23,473두 전라 3,221두
강원 2,154두 경상 7,279두

* 수치로 표기된 값만을 대상으로 함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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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부록 1.

17세기 후반 우역 발생 지역과 피해규모

Appendix 1. The areas and casualties of rinderpest in the late 17th century
시기 피해지역
피해규모(폐사*) 전거
군현
현종 4년(1663) 6월 도성 전생서(제향용 흑우) 7두 『顯宗實錄』 卷6, 顯宗 4年 6月 戊戌.
8월 평안 - 大熾 1,000두 이상 『顯宗改修實錄』 卷9, 顯宗 4年 8月 戊申.
『顯宗改修實錄』 卷9, 顯宗 4年 8月 戊申.
『顯宗改修實錄』 卷9, 顯宗 4年 8月 戊申.
『顯宗改修實錄』 卷9, 顯宗 4年 8月 戊申.
함경 - 大熾
황해 - 大熾
경기 - 大熾
9월 강원 - 大熾 『顯宗實錄』 卷7, 顯宗 4年 9月 甲申.
『顯宗實錄』 卷7, 顯宗 4年 9月 甲申.
충청 - 大熾
10월 황해 해주, 곡산 1,000두(소)다수(돼지) 『顯宗實錄』 卷7, 顯宗 4年 10月 丙午.
경기 도성 大熾 『承政院日記』 181冊, 顯宗 4年 10月 己亥.
『承政院日記』 181冊, 顯宗 4年 10月 己亥.
『承政院日記』 181冊, 顯宗 4年 10月 己亥.
전라 - 大熾
경상 - 大熾
12월 강원 - 1,770두 『顯宗實錄』 卷7, 顯宗 4年 12月 丙午.
현종 5년(1664)5월 충청 해미 『承政院日記』 183冊, 顯宗 5年 5月 丙子.
6월 전라 고부 등 7읍 『顯宗實錄』 卷8, 顯宗 5年 6月 乙巳; 『顯宗實錄』 卷8 顯宗 5年 閏6月 己卯.
7월 전라 전주 등 14읍 296두 『承政院日記』 184冊, 顯宗 5年 7月 戊申.
충청(전라에서 전파) 석성 등 5읍 大熾 285두 『顯宗實錄』 卷9, 顯宗 5年 7月 14日(癸); 『承政院日記』 184冊, 顯宗 5年 8月 庚申.
8월 전라 모든 고을 1,239두 『顯宗實錄』 卷9, 顯宗 5年 8月 戊寅; 『承政院日記』 184冊, 顯宗 5年 8月 戊寅.
충청 은진 등 13읍 1,000여 두 『顯宗實錄』 卷9, 顯宗 5年 8月 壬戌; 『承政院日記』 184冊, 顯宗 5年 8月 壬午.
평안 의주, 안주, 증산 우역 시작 『承政院日記』 184冊, 顯宗 5年 8月 戊寅.
9월 평안 중화, 평양 등 11개 고을 여역과 우역 동시 발생 『顯宗實錄』 卷9, 顯宗 5年 9月 癸丑.
강원 평강 『顯宗實錄』 卷9, 顯宗 5年 9月 癸丑.
10월 충청 모든 고을 3,780여 두 『顯宗實錄』 卷9, 顯宗 5年 10月 丙寅.
함경 안변부(평강에서 확산) 『顯宗實錄』 卷9, 顯宗 5年 10月 己卯.
11월 경기 개성부(평안에서 확산) 『顯宗實錄』 卷9, 顯宗 5年 11月 壬辰.
현종 6년(1665)7월 경상 선산 『承政院日記』 189冊, 顯宗 6年 7月 己酉.
12월 전국 8도와 제주 (사관의 기록) 7,716두 『顯宗實錄』 卷11, 顯宗 6年 12月 丙子.
현종 7년(1666)12월 전라 - 우역·여역/사람·가축 다수 폐사 『顯宗改修實錄』 卷16, 顯宗 7年 12月 癸丑.
현종 8년(1667)2월; 12월 함경 - 致斃無數 『顯宗實錄』 卷13, 顯宗 8年 2月 辛亥; 『承政院日記』 205冊, 顯宗 8年 12月 壬申.
현종 9년(1668)7월 강원 안협·춘천·철원 등 104두 『承政院日記』 209冊, 顯宗 9年 7月 癸亥.
8월 평안 - 牛疫 大熾 『承政院日記』 209冊, 顯宗 9年 8月 己丑.
황해 금천 100여 두 『承政院日記』 209冊, 顯宗 9年 8月 戊寅.
경기 풍덕·통진 등 6읍 100여 두 『顯宗實錄』 卷15, 顯宗 9年 8月 己巳; 『承政院日記』 209冊, 顯宗 9年 8月 己巳; 『承政院日記』 209冊, 顯宗 9年 8月 癸酉; 『承政院日記』 209冊, 顯宗 9年 8月 辛巳.
개성 100여 두
9월 함경 - 20,000여 두(우마역) 『顯宗實錄』 卷15, 顯宗 9年 9月 乙卯.
『顯宗實錄』 卷15, 顯宗 9年 9月 乙卯.
평안 - 200여 두
강서 등 3읍 209두 『承政院日記』 210冊, 顯宗 9年 9月 丙辰.
황해 평산 등 10읍 108두 『承政院日記』 210冊, 顯宗 9年 9月 壬戌; 『顯宗實錄』 卷15, 顯宗 9年 9月 癸亥; 『承政院日記』 210冊, 顯宗 9年 10月 庚寅.
10월 평안 - 560두 『承政院日記』 211冊, 顯宗 9年 12月 戊辰.
경기 양근 등 19읍 809두 『承政院日記』 210冊, 顯宗 9年 10月 壬申.
전라 무장·고창·부안 등 73두(10여 일간) 『承政院日記』 210冊, 顯宗 9年 10月 乙未.
11월 평안 - 480두(추가) 『承政院日記』 211冊, 顯宗 9年 12月 戊辰.
강원 강릉·울진 큰 피해 『顯宗實錄』 卷15, 顯宗 9年 11月 甲辰
경기 - 1,665두(누계) 『承政院日記』 211冊, 顯宗 9年 11월 甲辰.
현종 10년(1669)1월 도성 전생서 10두 중 5두 『承政院日記』 212冊, 顯宗 10年 1月 壬寅.
8월 황해 신계·평산·금천·토산 大熾 『顯宗實錄』 卷17, 顯宗 10年 8月 壬戌.
9월 평안 - 145두(기세 약화) 『顯宗實錄』 卷17, 顯宗 10年 9月 辛丑.
10월 경기 개성부 大熾 『顯宗實錄』 卷17, 顯宗 10年 10月 癸亥; 『顯宗實錄』 卷17, 顯宗 10年 10月 己卯.
충청 - 大熾 『顯宗實錄』 卷17, 顯宗 10年 10月 乙亥.
11월 충청 - 大熾 『顯宗實錄』 卷17, 顯宗 10年 11月 丁酉.
현종 11년(1670)7월 황해 신천 등 4읍 897두 『承政院日記』 220冊, 顯宗 11年 7月 乙亥.
경기 개성부 23두 『承政院日記』 220冊, 顯宗 11年 7月 癸酉; 『顯宗實錄』 卷18, 顯宗 11年 8月 己亥.
풍덕 등 114두 『承政院日記』 220冊, 顯宗 11年 7月 甲申.
전국 - 8도 만연, 황해도 尤甚(2,600여 두) 『顯宗實錄』 卷18, 顯宗 11年 8月 辛丑; 『顯宗改修實錄』 卷23, 顯宗 11年 8月 辛丑.
8월 황해 - 8,000여 두 『顯宗實錄』 卷18, 顯宗 11年 8月 壬子.
9월 평안 평양 등 14읍 291두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9月 丁卯.
황해 평산 등 13읍 8,418두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9月 戊寅.
강원 금성 55두(초순)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9月 丁卯.
원주 2두(초순), 17두(중순)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9月 辛未;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9月 甲戌
금화 17두(중순)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9月 甲戌
평강 27두(중순)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9月 甲戌
고성 80두(중순)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9月 甲戌
철원 82두, 감염 30두(중순)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9月 丙子
경기 개성부 95두 『承政院日記』 220冊, 顯宗 11年 9月 丁卯; 『承政院日記』 220冊, 顯宗 11年 9月 乙亥.
장단 등 26읍 3,253두
강화 98두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9月 戊寅.
10월 경기 강화 120두(더 죽을 것 없음) 『顯宗實錄』 卷18, 顯宗 11年 12月 辛丑.
- 1,100두(더 많음)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10月 癸.
경상 밀양 10두 『承政院日記』 221冊, 顯宗 11年 10月 辛亥.
11월 황해 - 2,350두(9-11월) 『承政院日記』 222冊, 顯宗 11年 11月 辛未.
강원 평강 962두 『承政院日記』 222冊, 顯宗 11年 11月 癸亥.
경기 - 1,730두 『承政院日記』 222冊, 顯宗 11年 11月 己未
충청 - 660두 『承政院日記』 222冊, 顯宗 11年 11月 乙丑.
전라 만경 등 9읍 157두 『承政院日記』 222冊, 顯宗 11年 11月 庚午.
경상 합천 등 2읍 143두 『承政院日記』 222冊, 顯宗 11年 11月 己巳.
12월 경기 - 64두(11∼12월 중순) 『承政院日記』 222冊, 顯宗 11年 12月 辛丑.
경상 - 300여 두 『顯宗實錄』 卷18, 顯宗 11年 12月 壬子.
현종 12년(1671)1월 강원 - 大熾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1月 己巳.
경상 - 여러 전염병 만연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1月 乙卯.
6월 전라 함평 147두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7月 甲戌.
7월7월 전라 장흥 등 17읍 1,309두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8月 丁酉.
경상 각읍 大熾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7月 甲寅.
8월 강원 - 355두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8月 癸巳.
충청 - 779두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8月 甲午
경상 (각읍) 6,826두 또는 6,806두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8月 戊子; 『顯宗改修實錄』 卷24, 顯宗 12年 8月 戊子
10월 강원 - 大熾 『顯宗實錄』 卷19, 顯宗 12年 10月 丁未.
양남 - 大熾
11월 함경 - 大熾 『顯宗實錄』 卷20, 顯宗 12年 11月 丁丑.
강원 - 大熾
삼남 - 大熾
숙종 6년(1680)8월 충청 - 220두 『肅宗實錄』 卷10, 肅宗 6年 8月 庚申.
전라 - 435두 『肅宗實錄』 卷10, 肅宗 6年 8月 戊午
윤8월 제도 - 熾盛 『肅宗實錄』 卷10, 肅宗 6年 閏8月 丁亥.
10월 전라 - 4,100여 두 『肅宗實錄』 卷10, 肅宗 6年 10月 辛卯.
숙종 7년(1681) 전국 - 熾盛 『肅宗實錄』 卷12, 肅宗 7年 8月 癸卯.
8월 경기 광주 등 13읍 200여 두 『肅宗實錄』 卷12, 肅宗 7年 8月 甲申.
9월 경기 광주 등 13읍 2,378두(중순까지) 『肅宗實錄』 卷12, 肅宗 7年 9月 癸亥.『肅宗實錄』 卷12, 肅宗 7年 9月 癸亥.
7도 - (약 19,000여 두)
12월 충청 천안 등 5읍 300여 두 『肅宗實錄』 卷12, 肅宗 7年 12月 甲午.
경상 - 300여 두 『肅宗實錄』 卷12, 肅宗 7年 12月 丙申.
숙종 8년(1682)1월 전라 - 1,500여 두 『肅宗實錄』 卷13, 肅宗 8年 1月 戊寅.
윤6월 전라 제주 10,000여 두 『肅宗實錄』 卷14, 肅宗 9年 閏6月 庚戌.
9월 황해 옹진 등 7읍 140여 두 『肅宗實錄』 卷14, 肅宗 9年 2月 丁酉.
11월 전국 - 1,000여 두 『肅宗實錄』 卷13, 肅宗 8年 11月 己酉.
숙종 10년(1684)8월 평안 - 거의 다 죽음(盡斃) 『肅宗實錄』 卷16, 肅宗 11年 8月 庚子.
함경
2월 평안 숙천 등 30읍(2∼3개월간) 3,479두 『肅宗實錄』 卷15, 肅宗 10年 2月 戊申.
함경 안변 등 5읍 600여 두 『肅宗實錄』 卷15, 肅宗 10年 2月 癸亥.
4월 평안 태천 등 24읍 1,950여 두 『肅宗實錄』 卷15, 肅宗 10年 4月 乙巳.
5월 평안 - 1,600여 두 『肅宗實錄』 卷15, 肅宗 10年 5月 丙子.
6월 함경 홍원 등 남관 400여 두 『肅宗實錄』 卷15, 肅宗 10年 6月 癸亥.
7월 함경 홍원 등 남관 400여 두 『肅宗實錄』 卷15, 肅宗 10年 7月 己丑.
8월 경기 장단 등 7읍 700여 두 『肅宗實錄』 卷15, 肅宗 10年 8月 戊午.
숙종 11년(1685)1월 황해 문화, 안악 熾蔓 『肅宗實錄』 卷16, 肅宗 11年 1月 丁丑.
숙종 13년(1687)8월 강원 철원 389두 『承政院日記』 323冊, 肅宗 13年 8月 戊辰.
숙종 16년(1690)10월 경기 - 500여 두 『肅宗實錄』 卷22, 肅宗 16年 10月 壬午.
경상 밀양 등 14읍 1,200여 두 『肅宗實錄』 卷22, 肅宗 16年 10月 丁卯
11월 경기 - 1,700여 두 『肅宗實錄』 卷22, 肅宗 16年 10月 壬午.
강원 - 『肅宗實錄』 卷22, 肅宗 16年 11月 丁未.
전라 - 『肅宗實錄』 卷22, 肅宗 16年 11月 丁未.
숙종 19년(1693)5월 함경 종성 240여 두 『肅宗實錄』 卷25, 肅宗 19年 5月 壬申.
10월 충청 직산 등 6읍 熾蔓 『肅宗實錄』 卷25, 肅宗 19年 10月 己丑
숙종 23년(1697) 4월 전국 處處竊發 1,403두 『承政院日記』 371冊, 肅宗 23年 4月 壬戌
경상 영해 등 읍 35두 『承政院日記』 371冊, 肅宗 23年 4月 丁丑
5월 경상 청하 熾發 『承政院日記』 371冊, 肅宗 23年 5月 乙巳
6월6월 전라 진도 1,100여 두 『承政院日記』 372冊, 肅宗 23年 6月 乙卯.
경상 동래, 흥해 193두 『承政院日記』 372冊, 肅宗 23年 6月 丁丑.
숙종 25년(1699) 경상 양산 11두 『承政院日記』 386冊, 肅宗 25年 潤7月 壬寅.
부록 2.

17세기 후반 우역의 발생 추이(지역별)

Appendix 2. The outbreaks of rinderpest in the late 17th century (by area)
시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년도 재위년 기록 수 도의 수 군현 수 폐사 수 기록 수 발생 도 군현 수 폐사 수
1650 효종 1 0 0 0 0 0 0 0 0
1651 효종 2 0 0 0 0 0 0 0 0
1652 효종 3 0 0 0 0 0 0 0 0
1653 효종 4 0 0 0 0 0 0 0 0
1654 효종 5 0 0 0 0 0 0 0 0
1655 효종 6 0 0 0 0 0 0 0 0
1656 효종 7 0 0 0 0 0 0 0 0
1657 효종 8 0 0 0 0 0 0 0 0
1658 효종 9 0 0 0 0 0 0 0 0
1659 효종 10 0 0 0 0 0 0 0 0
1660 현종 1 1 1 1 0 2 2 2 50
1661 현종 2 0 0 0 0 0 0 0 0
1662 현종 3 0 0 0 0 0 0 0 0
1663 현종 4 7 6 2 3,770 3 1 0 5
1664 현종 5 14 5 53 4,880 6 3 17 2,820
1665 현종 6 6 5 33 7,716 1 1 1 0
1666 현종 7 1 1 0 0 0 0 0 0
1667 현종 8 1 1 0 0 1 1 0 0
1668 현종 9 5 4 10 24,460 14 5 50 3,869
1669 현종 10 6 4 4 145 1 1 1 5
1670 현종 11 7 4 0 11,020 26 7 122 20,723
1671 현종 12 13 7 0 9,216 1 1 1 5
1672 현종 13 0 0 0 0 0 0 0 0
1673 현종 14 0 0 0 0 0 0 0 0
1674 현종 15 0 0 0 0 1 1 2 0
1675 숙종 1 0 0 0 0 0 0 0 0
1676 숙종 2 1 1 0 0 0 0 0 0
1677 숙종 3 0 0 0 0 0 0 0 0
1678 숙종 4 0 0 0 0 0 0 0 0
1679 숙종 5 0 0 0 0 2 1 0 12
1680 숙종 6 4 2 0 4,755 2 1 1 5
1681 숙종 7 5 8 18 3,178 3 8 0 3
1682 숙종 8 2 1 0 2,500 16 8 1 0
1683 숙종 9 2 3 7 10,140 2 0 0 0
1684 숙종 10 7 4 66 9,399 2 2 10 3,809
1685 숙종 11 2 2 2 0 3 8 0 0
1686 숙종 12 0 0 0 0 0 0 0 0
1687 숙종 13 0 0 0 0 2 2 2 3,087
1688 숙종 14 0 0 0 0 0 0 0 0
1689 숙종 15 0 0 0 0 1 1 1 9
1690 숙종 16 3 4 14 3,460 1 1 1 10
1691 숙종 17 0 0 0 0 3 1 1 4
1692 숙종 18 0 0 0 0 0 0 0 0
1693 숙종 19 2 2 6 240 0 0 0 0
1694 숙종 20 0 0 0 0 0 0 0 0
1695 숙종 21 0 0 0 0 0 0 0 0
1696 숙종 22 0 0 0 0 0 0 0 0
1697 숙종 23 0 0 0 0 7 4 26 1,403
1698 숙종 24 0 0 0 0 0 0 0 0
1699 숙종 25 0 0 0 0 2 1 2 11
1700 숙종 26 0 0 0 0 0 0 0 0
부록 3.

17세기 후반 전염병과 우역의 전개 추이

Appendix 3. The pattern of the outbreaks of epidemics and rinderpest in the late 17th century
시기 牛疫

熾(실록)
기록 폐사 기록 사망
년도 재위년 실록 일기 실록 일기 실록 일기 실록 전염병 牛疫
1650 효종 1 0 0 0 0 0 0 6 8 14 0 4 0
1651 효종 2 0 0 0 0 0 0 3 8 11 0 7 0
1652 효종 3 0 0 0 0 0 0 0 2 2 0 2 0
1653 효종 4 0 0 0 0 0 0 8 6 14 0 6 0
1654 효종 5 0 0 0 0 0 0 7 10 17 0 6 0
1655 효종 6 0 0 0 0 0 0 8 13 21 200 6 0
1656 효종 7 0 0 0 0 0 0 4 11 15 0 0 0
1657 효종 8 0 0 0 0 0 0 1 7 8 0 0 0
1658 효종 9 0 0 0 0 0 0 1 6 7 0 2 0
1659 효종 10 0 0 0 0 0 0 0 5 5 0 0 0
1660 현종 1 1 2 3 0 50 50 1 8 9 0 6 1
1661 현종 2 0 0 0 0 0 0 2 11 13 0 3 0
1662 현종 3 0 0 0 0 0 0 9 28 37 1,353 7 0
1663 현종 4 7 3 10 3,770 5 3,775 12 10 22 270 9 3
1664 현종 5 14 6 20 4,880 2,820 7,700 33 15 48 683 39 12
부록 4.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현종 12년(1671) 기근·전염병·우역으로 인한 피해 현황

Appendix 4. The casualties of famine, epidemics and rinderpest in the 12th year of King Hyeonjong (1671) as recorded in the Joseon Dynasty Chronicle
지역 기근
전염병
우역
전거
기민 아사 감염 사망 감염 폐사
咸鏡道 4,869 - - - - - 2月 乙酉
5 - - - - - 2月 庚子
- - - - - 40 3月 乙亥
平安道 21,648 - - - - - 2月 乙酉
- - - 59 - - 2月 乙未
黃海道 - - 癘疫牛疫竝發(竝熾) 1月 甲寅
15,500 (개)5,500 - - 40 - - 2月 丁未
江原道 - - - 67 一向熾盛 - 1月 己巳
119 2月 庚子
- - - 70 - - 3月 己巳
- 74 - 336 (개)236 - 355 8月 癸巳
京畿 - - - 170 - 30 1月 戊辰
- - - 1 - - 2月 乙酉
- - - 100 - 2月 戊子
9,490 - - 119 - - 2月 庚子
- - - 50 - - 2月 庚子
- 13 - 147 - - 3月 壬子
- - - 80 - - 3月 丙寅
45,600 - - 80 - - 3月 戊辰
京中 - - - 1,460 - - 6月 己酉
- - - 40 - - 9月 戊寅
- - - 10 - - 10月 丁未
各道 - - - 14,490 - - 6月 己酉
- - - 1,840 - - 9月 戊寅
- - - 540 諸路牛疫轉熾 兩南及原 襄道尤甚 10月 丁未
- - - 1,470 三南及原襄 咸鏡等道 牛疫愈熾 致斃甚衆 11月 丁丑
- - - 2,900/2 - 忠淸道
全羅道 - - - 220 - - 1月 癸丑
- - - 43 - - 1月 癸酉
- - - 554 - - 1月 壬午
- 69 - - - - 2月 癸巳
- - - - - 779 8月 甲午
全羅道 - - - 670 - - 1月 癸亥
- 239 - 1,752 - - 2月 乙酉
133,590 (개)132,590 270 - 1,730 (개)1,930 - - 3月 辛酉
172,200 - - - - - 3月 甲戌
- 725 - 3,534 - 147 7月 甲戌
- 2,279 11,281 2,743 - 1,039 8月 丁酉
慶尙道 5,100 - - 200 一向熾蔓 - 1月 乙卯
23,553 - - - - - 2月 乙酉
38,967 (150) - (150) - - 2月 乙未
- - - 200 - - 2月 甲辰
74,850 90 - - - - 2月 辛亥
115,670 - 無一乾淨之地 - - - 3月 丁卯
163,149 557 - - - 6,826 (개)6,806 8月 戊子
濟州 - - - 437 - - 2月 丁酉
824,191 4,466 11,281 35,070 - 9,216 -

* 숫자로 명시된 기록만을 집계함

**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의 기록이 다른 경우, 『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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