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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4(3); 2015 > Article
일제 하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의료와 조선인 의사: 성진과 함흥을 중심으로

Abstract

In East Asia during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overseas mission work by Protestant churches thrived. Missionaries built schools and hospitals and effectively used them for evangelism. In the 20th century when Social Gospel Movement was expanding, medical work has been recognized as a significant mission service in and by itself.
This article reviewed the construction and characteristics of missions work conducted by Canadian Presbytery; missionary doctors and Korean doctors who worked at the mission hospitals; why the missionary medical work had to stop; and career paths taken by Korean doctors upon liberation from Japanese occupation.
The Canadian Presbytery missionaries, unlike other denomination missionaries, were rather critical of Imperial Japan, but supportive towards Koreans. This could have stemmed from the reflection of their own experience of once a colony of British Empire and also their value system that promotes egalitarian, democratic and progressive theology.
The Sung-jin and Ham-heung Mission Bases were a community, interacting organically as a ‘Triangle of Church, School and Hospital.’ The missionaries mobilized the graduates from Christian schools and organized a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YMCA). Some of the graduates were trained to become medical doctors or assistants and worked at mission hospitals.
Missionary doctors’ approaches to balancing evangelism and medical practice varied. For example, Robert Grieson went through confusion and struggled to balance conflicting roles as a pastor for evangelism and also as a physician. Kate McMillan, on the other hand, had less burden for evangelism than Grieson, and focused on medical work by taking advantage of the opportunity that, as a woman, she can easily approach Korean women. Still another case was Florence Murray who practised evangelism within the hospital setting, and successfully carried out the role as a hospital administrator, going beyond ‘women’s work’ as McMillan did.
Korean doctors and assistants who worked at the mission hospitals had seen the spread of Protestantism in their youth; had received modern education; had experienced the fall of own country in 1910 and nationwide protest against Japan in 1919. The majority of them were graduates of Severance Medical College, the hub of missionary medicine at the time. After the resignation from the mission hospitals, 80 percent of them became self-employed general practitioners.
The operations of the mission hospitals began to contract in 1930 due to tightened control by Imperial Japan. Shrine worship imposed on Christians caused internal conflict and division among missionaries and brought about changes in the form and contents of the mission organization. The incidence of the assault of Dr. Grieson brought about the dissolution of Sung-jin mission base and the interruption of the operation of Je-dong Hospital. As the Pacific War expanded, missionaries were driven out of Korea and returned home.
In conclusion, the missions work by Canadian Presbytery missionaries had greatly impacted Protestantism in Korea. The characteristics of Canadian Presbytery were manifested in their support of Korean nationalism movement, openness for Social Gospel, and maintaining equal footing with Korean Christians. Specifically we note the influence of these characteristics in Chosun doctors who had worked in the mission hospitals.
They operated their own hospitals or clinics in a manner similar to the mission hospitals by providing treatment for poor patients free of charge or for a nominal fee and treating the patients in a kind and humanistic way. After the 1945 Liberation, Korean doctors’career paths split into two directions. most of them defected to South Korea and chose the path to work as general practitioners. A few of them remained in North Korea and became educator of new doctors. It is meaningful that former doctors of Canadian missionary hosptal became dean of 2 medical colleges among 3 of all in early North Korea.
This article does not cover the comparative analysis of the medical work by the missionaries of Canadian Presbytery and other denominations. It is desirable to include this analysis of the contents and the comparison in a future study of Korean doctors who participated in the mission hospitals, by denomination and by geographical region.

1. 머리말

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에 진출했던 19세기 후반은 개신교 해외 선교의 부흥기였다[1]. ‘우리 세대에 세계복음화’를 실현하기 위해 영미권 국가의 수많은 청년들이 선교사가 되었다(서정민, 2007: 254-5). 그들은 학교와 병원을 세워 복음 전도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삼았다. 20세기 들어 사회복음운동[2]이 확산되면서 선교의료[3]는 그 자체로 중요한 선교 사업으로 부상하였다(조형근, 2009: 129).
동아시아 각국에서 전개된 선교의료는 제국주의와 어떻게 조우하였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일본은 일찍이 개신교 선교를 금하였으며 국가가 앞장서서 전통의학을 폐기하고 서양의학을 채택하였기에 선교의료가 뿌리내릴 수 없었고,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과 분할 지배로 국가가 의료 영역을 주도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선교의료의 영향력이 큰 편이었다(여인석, 2007: 124-5). 타이완은 선교의료가 본격화되기 전에 일본에 점령되어 일제의 군진의료가 전면적으로 이식되었으며, 조선에서는 선교의료가 초기에 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였으나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후 선교사들은 일제의 견제와 회유, 통제를 감수해야 했다(전우용, 2007: 49-56).
이러한 조선의 특수한 상황을 조형근(2009: 123)은 개신교 선교의료와 일제 공식의료의 협력적, 비대칭적, 제한적 헤게모니 경쟁 관계라고 하였고, 정근식(1997: 25)은 선교의료와 일제의료 사이에 보완적 협력과 경쟁적 대립 관계가 공존한다고 보았다. 김윤성(2004: 290)은 선교의료와 식민의료가 서양 근대의학이 도입되는 두 갈래 수로(水路)였으며, 조선인들은 선교와 식민의 측면보다 과학으로서의 의학 측면만 수용했다고 하였다. Park(2013: 683)은 선교의료와 식민의료 사이에 충돌, 갈등, 협력 관계가 병존하였는데, 식민의료와 달리 선교의료는 해방 후에도 이어졌음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조선에서 선교의료의 내용과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요인은 일제와의 관계였다.
일제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굳혀가고 있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영미권 개신교 교파들은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였다[4]. 그 중 캐나다 장로회[5]는 후발 주자였고 규모도 작았으나 일제와의 관계에서 다른 교파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성을 보였다.
  •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일제의 회유와 소속 선교부의 정치 불간섭 정책 때문에 친일로 기울거나 어정쩡한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함경도와 간도·연해주 지역 선교를 담당하였던 캐나다 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은 비교적 일관되게 반일적 태도와 한국인에 대한 우호적·동정적 태도를 가지고 한국인 선교에 힘썼다(김승태(1999: V).

캐나다 장로회의 그러한 특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가 있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은 외국인 선교사는 총 8명이었는데 그 중 4명이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였다[6]. 전체 선교사 중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의 비중이 5% 남짓[7]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그 의미가 적지 않다.
2장에서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의 그러한 특성이 어디에서 연원하였는지 탐구하였고, 선교의료가 활발했던 성진과 함흥 선교부의 구성, 선교의사[8]의 활동과 특징을 살펴보았다. 캐나다 장로회 조선 선교에 대해서는 김승태(1999), 민경배(2007), 서정민(2007), Ion(1990), Ruth(1995)의 연구를, 선교의료에 대해서는 이만열(2003), MacDonald(2000)의 연구를 참고하였다.
3장에서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병원에서 일했던 조선인 의사에 주목하였다.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북한의 의학교육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북한은 해방 직후 부족한 의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의학교육기관 세 곳을 세웠는데 그 중 두 곳은 함경도 지역에 있었다. 두 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젊은 시절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병원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의사들이었다(허윤정·조영수, 2014: 243, 245, 261).
조선인 의사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희소했다. 보고서, 편지, 회고록 등 선교사들의 기록에 등장하는 조선인 의사들은 대부분 성(姓)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 닥터 홍이...캐나다로 떠났다...닥터 조가 그 뒤를 잇기 위해 부임했고... 함흥에 개업하고 있는 닥터 안이..(머레이, 2009: 177, 181). 양 의사와 총독부의학교를 졸업한 문 의사(Dr. Moon), 정 의사(Dr. Jung) 등의 한국인들이 병원을 운영하였다(이만열, 2003: 436).

‘이알렉산더, 박마리온, 강도가’와 같이 한글과 영어가 조합된 형식의 이름도 쓰였고 영어 표기의 오류로 한글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다[9]. 그들에게 정확한 이름을 찾아주고 그들의 출신 배경, 의학교육의 내용, 선교병원에서의 역할, 퇴직 이후의 경력 등을 추적하였다.
4장에서는 선교의료 후반부에 해당하는 1930년대 이후의 경과를 다루었다. 일제의 간섭과 통제, 선교의료의 위축과 내부 갈등, 선교의사들의 귀국과 이후의 동정, 조선인 의사들의 해방 전후 행적 등을 탐구하여 캐나다 장로회 선교의료의 성과와 영향을 가늠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2.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와 선교의사

1) 선교부의 구성과 특성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870년을 전후하여 인도, 타이완, 중국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나 조선에는 게일Gale), 에비슨(Avison) 등 캐나다 국적 선교사들이 개인 차원, 또는 미국 장로회 등 다른 교파 소속으로 활동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1896년 맥킨지(Mckenzie)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898년 7월, 그리어슨(Grieson, Robert), 맥레(MacRae Duncan), 푸트(Foote W. R.) 세 청년을 조선에 공식 파송하였다. 그들은 캐나다 남동쪽 끝 연해주 노바스코샤[10] 핼리팩스의 파인힐 신학대학 동창이었다. 2달 반의 여정을 거쳐[11] 조선에 온 그들은 미국 북장로회가 관할하던 원산[12]을 넘겨 받았으며 함경남북도 전체를 선교지역으로 배정받았다[13].
  • 그들이 함경도 지역을 맡게 된 것은, 서울에서 가깝고 안전하며 인구밀도가 높은 곳은 앞서 내한한 미국 선교사들이 이미 차지했기 때문이었지만, 캐나다 선교사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고향인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지리 기후가 비슷하여 쉽게 동화되고 쉽사리 한국을 이해해 나가게 되었다. 그들은 캐나다의 비교적 가난하고 덜 개발된 지역 출신들이었고 북한과 비슷한 기후를 가진 지역 출신들이었다(김승태, 1999: 27)

노바스코샤와 함경도는 위도가 같았을 뿐 아니라 바다에 인접한 지형이나 사회경제적으로 낙후한 환경도 유사하였다. 고향에서 농장 일과 대장장이 경력이 있었던 그리어슨과 맥레는 함경도 사람들과 쉽게 친해 질 수 있었다.
1901년에 의사 맥밀란을 비롯한 선교사 3명이 충원되면서 성진(城津) [14]과 함흥(咸興) [15]에 선교부가 세워졌다. 성진은 그리어슨이 선교부로 정하고 맡은 곳으로 일본과 러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였고 훗날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의 근원지였다(김택중, 2011: 39). 함흥 선교부는 맥레와 맥밀란이 맡았다[16]. 선교부는 모두 언덕 위에 자리 잡았는데 초기에 일본군과 갈등을 겪었다.
러일전쟁으로 성진에 전투가 벌어져 그리어슨이 원산으로 피신한 동안 그의 집은 러시아 장군 숙소로, 교회는 마구간으로 쓰였다. 러시아군이 물러나자 일본군 병참대가 교회 옆 마당을 점거하였고 자기 땅을 쓸 수 없게 된 조선인 땅주인으로부터 간청을 받은 그리어슨이 그 땅을 사서 일본군을 힘겹게 내 보내고 욱정교회, 보신학교, 제동병원을 세웠다(그레슨, 1970: 56-8).
함흥 선교부는 1905년 반룡산 중턱 신창리 망덕(望德) 기지에 땅을 마련하였는데 일본군이 무단 점유하여 외교문제로 확대되었고, 통감부와 영국 영사관의 합동조사를 거쳐 해결되었다(서정민, 2007: 287-8). 그 언덕에 신창리교회, 영생학교, 제혜병원이 자리잡았다. 교회는 양옥에 한식 기와를 올려 외관이 수려했다. 영생여학교는 관북지방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었고 붉은 벽돌로 지은 선교병원 건너편에는 여성 숙소가 있었다(머레이, 2009: 23).
그림 1. 성진 선교부 전경
Figure 1. Sung-jin Mission 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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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함흥 선교부 전경
Figure 2. Ham-heung Mission 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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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진에는 의사요 선교사인 具禮善(그리어슨) 목사님(이)... 제중원(병원) [17]과 보신남학교와 보신여학교를 설립하고 시내 한가운데에 T자형으로 꽤 큰 교회도 세우고 산 중턱에 세운 큰 양옥집에서 살았다... 함흥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교회를 세워 성경학교를 운영하고 의료부는 함흥 최고의 女의사인 孟선교사가 제혜병원을 현대식으로 짓고... 사립영생중학교와 영신보통학교를 세웠고... 반룡산 중턱에는 교회, 병원, 학교가 세워지고 선교사 사택도 끼여 있어 10여 채의 洋屋들이 보기에도 황홀했다(김택중, 2013: 46).

성진과 함흥 선교부에서 교회, 학교, 병원은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선교 공동체를 형성했다(김윤성, 1997: 31). 복음, 교육, 의료 - 세 기능의 공동체가 상호 구성원의 교류와 시설의 상호 지원 형태를 보이는 삼각 연결 구조였다(서정민, 2003: 63) [18]. 캐나다 장로회의 해외선교 사업에서 조선은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선교부 규모도 꾸준히 성장하였다[19].
캐나다 장로회는 선교 대상을 조선인으로 국한하였는데, 이 점은 조선에 거류하는 영국인과 일본인까지 선교 대상으로 하였던 영국 성공회와 대조적이었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대부분 옥스브리지 졸업생들로 부유층 출신인 점도 캐나다 선교사들과 대비되었다[20]. 이처럼 두 교파는 선교 방침과 사회적 배경이 서로 달랐고, 1919년 3·1운동 당시 캐나다 장로회는 일제를 강력히 비판하였으나 성공회는 총독부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Ion, 1977: 584-5).
3·1운동 당시 성진에서 그리어슨은 자신의 집을 시위 준비 장소로 제공했고 조선인을 보호하려고 노력했으며 독립운동가들은 치외법권 공간인 제동병원을 적극 활용했다.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은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상황을 파악하였고 교단 총회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선교 교단 중 유일한 사례였다(김승태, 2013: 134-5; 서정민, 2007: 300).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일제에 비판적이고 조선인에게 호의적이었던 배경에는, 1773년 이후 대영제국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역사적 경험이 투영된 측면도 있었다고 본다. 또한 캐나다 선교사들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같은 ‘근본주의적이거나 극단적 교파주의적 성향은 없었으며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이었다’(김승태, 1999; 68-9).

2) 선교의사

(1) 그리어슨(Robert Grieson, 具禮善, 1868-1965)

복음주의 선교에서 의료는 복음을 전달하는 도구였다. 그리어슨은 목사와 의사, 두 역할 모두 충실하려 했으나 예배 인도, 설교, 심방, 순회 전도, 성경 공부 지도, 성경학교 운영, 선교부 행정 등 담임목사 업무만으로도 벅찼다.
숙소 한쪽에 진료소를 차려 놓고 주 1-2회 반나절씩 문을 열었으나 자리를 지키기 어려웠다. 1902년에는 원산에서 맥밀란이 와서 진료소를 지켜 주었고, 그 후로는 조선인 조수에게 일임했다(이만열, 2003: 133-4, 224-5).
20세기 초 북미에서 사회 문제의 해결을 강조하는 사회복음운동이 발흥하면서 의료는 중요한 사회적 서비스로 부각되었다. ‘서양’은 선진적 의학지식과 의료 서비스를 피선교국에 제공해야 하며 원주민 의사를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MacDonald, 2001: 34). 선교 철학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그리어슨은 자신의 정체성이 목사인지 의사인지 혼란스러웠다[21]. 1913년에 조수 김영배(金榮培)를 세브란스의전(이하 세의전)에 입학시킨 후 그리어슨은 목사의 업무를 최소화하고 진료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 의료에 전념할 수 있는 의사 한 명이 보충될 때까지 우리는 의료 사업만 할 것입니다. 의료사업이 지금처럼 불충분하다면 다른 영역의 선교 활동도 제약을 받게 될 것입니다(MacDonald, 2001: 32).

그리어슨은 1914년 안식년에 귀국하여 병원 신축자금 7천불을 모금하고 장비를 구입하였으며(이만열, 2003: 455-6), 교단에 인력 증원을 건의하였다. 그 후 선교의사 마틴(Martin)과 머레이(Murray)가 각각 용정과 함흥에 부임하였지만 성진에는 충원되지 않았고 그리어슨의 업무는 여전히 과중했다.
한편 조선 여성들은 남성 의사에게 진찰받는 것을 꺼렸기에 제동병원의 경쟁력은 여성의사가 있는 제혜병원에 미치지 못했다.

(2) 맥밀란(Kate McMillan, 孟美蘭, 1868-1922)

맥밀란은 볼티모어여자의대를 졸업하고 코넬 의대 3년 수련 후 캐나다 장로회 여성해외선교회 후원으로 1901년에 조선에 왔다. 복음주의에 충실했던 맥밀란도 자신의 역할을 의료에 한정하지 않았다. 여성 선교사의 주요 전도 대상은 여성과 아동이었다. 20세기 초 서양에서 여성은 가정을 벗어나 지역 사회 조직과 관리 영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교육과 의료를 통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선교 사업은 여성의 강점이 부각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맥밀란은 원산을 오가면서 1903년 함흥에 방 2칸 초가집에 진료소를 차렸다. 원산에서 영어와 의술을 가르쳤던 소년을 데려와 조수로 키웠고, 역시 원산에서 온 강도가(Docas) [22]는 맥밀란의 유능한 조수이자 평생 친구였다.
1913년 5월 낙민정(町)에 한·양식이 절충된 40병상 규모의 제혜병원이 완공되었다. 교단의 선교 목표에서 의료 사업의 우선순위가 높아졌던 결과였다. 맥밀란은 병원 운영 이외에 순회전도, 여성 성경공부, 야간 성인 성경공부, 여학교 주간 수업 등 복음전도 활동까지 병행하면서 과로가 누적되었다.
  • 나의 낮 시간은 어디로 갔는지 밤이 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녹초가 됩니다. 11월, 12월은 지방을 다니느라 다 보냈습니다. 우리가 아직 시작도 못 한 일들을 생각하면 마치 높은 언덕을 힘들게 올라가는 것처럼 피곤을 느낍니다(MacMonald, 2000: 86).

1922년 2월 25일, 맥밀란이 세상을 떠났다. 영생여학교 기숙사에서 디프테리아에 걸린 학생들 7명을 치료하던 중 자신이 감염된 것이었다. 장례는 서양식과 조선식이 조합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맥밀란은 자신의 전 재산을 선교부에 기부했다[23]. 맥밀란도 그리어슨처럼 과중한 업무에 힘겨웠지만 함흥 선교부에는 담임목사 맥레가 있어서 복음 전도의 책임이 덜했기에 의료와 복음 전도 간에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3) 머레이(Florence (Murray, 慕禮理, 1894-1975)

머레이는 1910년 플렉스너 보고서 이후 시기에 의학교육을 받은 신세대 의사였다. 머레이 역시 노바스코샤 출신으로 부친이 그리어슨과 신학교 동기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조선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1921년 여름 함흥에 도착한 머레이는 병원을 둘러보고 크게 놀랐다. 마취실도 없고 전등, 상하수도, 목욕시설도 없었다. 수술실은 창문이 남향이라 열기로 뜨거웠고 침상 위 돗자리에는 빈대가 기어 다녔다. 분뇨 정화조도 없어 병동 뒤 변기통에 오물이, 그 옆에 피 묻은 붕대를 담은 통과 고름이 가득 찬 그릇에는 파리가 새까맣게 들끓고 있었다(머레이, 2009: 16-8). 맥밀란은 머레이에게 의대 졸업 후 의학서적을 본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고 외과수술은 조선인 의사의 몫이었다(MacMonald, 2000: 93).
  • 그들의 시술 방식에 나(머레이)는 몸서리를 쳤다. 보스톤 인턴 시절에 겪었던 것처럼 환자들이 임상 실험을 당하는 것을 보며, 막을 수도 도와줄 수도 없이 속수무책이었다...여기에서 어떻게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분간이나마 용정에 가 있게 된다니 정말 다행이다(Ruth, 1995: 117).

머레이는 마침 안식년 휴가를 떠나는 마틴의 자리를 대신 맡아 용정 제창병원에 파견되어 병원 행정과 진료를 총괄하는 중책을 경험하였고, 맥밀란 사망 후 함흥으로 돌아와 제혜병원 2대 원장으로 큰 포부를 보였다.
  • 내가 할 일은 아마도 함흥병원을 조선에서 가장 번성하는 선교기관으로 변모시키고, 선교 커뮤니티에서 여성의사는 성미가 고약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MacMonald, 2000: 94).

머레이는 병원 보수와 개축을 지휘했다. 복도를 늘리고 채광창을 달았으며, 작은 방 셋을 합쳐 8인실로 개조하여 큰 병동 2곳을 만들고 나머지 방들은 개인실과 격리실로 꾸몄다. 전기와 위생 용수 시설, 라디에이터와 화로를 설치하였다. 수술실은 건물 북쪽으로 이전하고 침대는 금속제로 바꿔 빈대를 퇴치하였다. 한옥 온돌방에 마루를 깔고 전기 배선, 상하수도, 입식 부엌, 취사용 스토브를 설치하였다. 1923년 병원을 재개원하면서 무료 진료 방침을 바꿔 치료비를 받았다(머레이, 2009: 70-2).
맥밀란은 의료사업과 별도로 복음 전도를 병행하였으나 머레이는 병원 내에서 치료와 간호 업무에 복음 전도를 병행하도록 하였다. 맥밀란은 여성을 위한 여성의 일, 즉 여성과 아동만 진료하였지만 머레이는 남성 환자도 치료하였고 직접 외과수술을 하였으며 유능한 병원장이었다(Ruth, 1995: 103-128).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캐나다 장로회의 조선 선교는 20세기 초 함경도에서 시작되었다. 캐나다 선교사들이 일제에 비판적이고 조선인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출신 지역 환경과 사회경제적 배경이 함경도 및 조선인들의 그것과 흡사했으며, 그들이 겪었던 식민지 경험도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함흥과 성진 선교부의 교회, 학교, 병원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공동체였으며, 복음 전도의 수단이었던 의료사업은 차차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선교의사에 따라 복음 전도와 의료, 두 영역에 두는 비중은 달랐다. 그리어슨은 목사와 의사, 복음주의와 사회복음운동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맥밀란은 복음 전도의 부담이 적고 여성 환자에게 친화적이어서 의료에 집중할 수 있었다. 머레이는 병원 운영에 복음 전도를 포괄하였으며 훌륭한 행정가였다.

3. 선교병원과 조선인 의사

1) 성진 제동병원

제동병원에 근무한 것으로 확인된 조선인 조수와 의사는 8명이었다(표 1). 192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눈다면, 전반부에 근무했던 김영배, 김성우(金聲宇), 양진홍(梁珍弘), 정창성(鄭昌成) 등 4명은 모두 보신학교를 다녔고 성진 기독청년회(YMCA)의 핵심 간부들이었다[24]. 그리어슨은 자신의 제자들로 기독청년회를 조직하고 그 중 일부를 의사로 양성하여 선교병원을 운영한 것이었다. 교회·학교·병원으로 이어지는, 상호 구성원을 교류하고 상호 지원하는 삼각 연결 구조(서정민, 2003: 63)의 전형적 사례로 손색이 없다.
표 1. 성진 제동병원의 조선인 의사, 1902~1934
Table 1. Korean doctors, Je-dong Hospital. 1902~1934
이름 생몰 고향 교육 의학교 근무기간, 직위 주요 이력
김영배 . 함경 보신 세의전 1915 1902~1912 조수 1921 현재 제생의원 개업
1923 성진 청년강연회
1923 보신교우회 간사

김성우 1894~? 함북 성진 보신 협신 영생 경성의전 1928 1914-1918 검사원, 調劑手 1919~1921 징역(3·1운동)
1921-1924 외과 조수 1931   동경제대 외과
1928-1931 외과장 1932~1938 성진 김성우병원
1931-1932 부원장 1938~1942 동경제대 박사

양진홍 1898~? 함남 단천 보신· 영생 경성의전 1918 1923 함흥감옥(군자금모집)
1918-1919 외과 1924 함춘의원 개원(공의)
1921-1923 산부인과 1928 신북청 철도병원장
1934 목단 창덕 국제병원
1939 청진 아세아병원

정창성 . 함경 보신 경성의전 1918 1920-1923 내과 1923 용정 제창병원
1923 보신교우회 간사

김문진 1896~1925 경북 대구 - 세의전 1921 1924~1925 醫員 내과 1921-1923 대구 개업
1925 요양 중 사망

박재복 . 함경 . . 1928~? 외과 1921-25 보신남학교 교원

유석창 1900~1972 함남 단천 경신 경성의전 1928 1929 1931 서울 종로 민중병원

배헌 1908~? . . 세의전 1928 1932 외과 ~1931 세브란스 내과 소아과
1934 북경협화의대 외과
1935. 함북 鏡城 개업
김영배는 제동병원 초기부터 10년 이상 조수로 있으면서 그리어슨이 목회와 행정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진료를 전담하였다(이만열, 2003: 134, 224-5). 그는 1915년 세브란스의전(이하 세의전)을 마치고 의사 시험에 합격하였고[25] 욱정(旭町) 제동병원 부근에 제생의원을 개업하였다(그림 3) [26].
그림 3. 제생의원·제동병원
Figure 3. Jae-sang Clinic, Je-dong Hos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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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제동병원에는 의사 3명, 조수 1명, 간호부 3명, 약제사 1명, 서기 1명, 전도 담당 남녀 각 1명이 있었고, 무료 환자는 3등급으로 구분하였다[27].
김영배의 자리를 이어받아 제동병원에 18년 근무했던 김성우는 그리어슨의 오른팔이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늦게 들어간 보신중학이 문을 닫아서 협신중학에 이어 다녔는데 이마저 폐교되는 바람에 함흥 영생중학으로 전학하여 4년 후배 양진홍과 같이 1914년 봄에 졸업하고 곧바로 제동병원에서 일했다.
  • 學資 곤란으로 귀향하여 1914년 4월 1일부터 성진 제동병원에 3개월 간 서무과원으로, 8개월 간 검사원으로, 12개월간 調劑手로, 그 후부터 조수로 일하다가 의사가 되려는 욕망이 고도에 달하여 부모의 양해 하에서 1918년 9월(24세)에 同院을 辭職코 借金 500円을 기금으로 잡화상을 시작하였으나 學資 저축이 不知何歲月이라 1919년 2월에 광산에 착안하여 採鑛夫와 同事 중 3·1운동으로 全조선에서 만세 소리가 들릴 때 성진만은 침묵 상태에 있음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親友 數三명으로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수천 매 등사하여 배포하며 만세를 高唱 데-모를 연속 시행하다가 3월 11일에 성진경찰서에 留置를 당하였다(김성우, 청진의과대학 교원이력서, 1948).

2년 6개월 복역을 마친 그는 다시 제동병원 외과 조수로 취직했고 그리어슨 장녀의 주선으로 경성의전에 입학, 34세에 의사가 된 후 제동병원 외과장, 부원장을 역임하고 1932년에 퇴직하여 성진에 개업하였다[28].
단천 출신의 양진홍 역시 보신중학에서 전학했던 영생중학을 졸업하기 직전인 1914년 2월에 함흥자혜의원에서 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 강습생 입학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의학강습소가 경성의전으로 승격하는 바람에 1918년에 경성의전 2회로 졸업했다. 제동병원 외과의로 2년 일한 후 동경제대 산부인과 선과(選科)를 이수하고 다시 제동병원 산부인과장으로 부임했다. 1923년 광복단 군자금 모집 사건[29]으로 체포되어 6개월 복역하였다.
석방 후 그는 그리어슨 주례로 욱정교회 유치원 선생과 결혼하고 함남 이원에 함춘의원을 개업하였으며, 1928년 신북청철도병원을 운영하던 중 장남을 결핵성 뇌막염으로 잃는 큰 불행을 겪었다.
  • 아- 천지는 캄캄해지고 아무 일할 元氣도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신봉하던 기독교도 신의 존재를 의심 안 할 수 없게 되어 아해 시체와 함께 땅 속 깊이 파묻어 버렸다(양진홍, 청진의과대학 교원 이력서, 1948).

그는 아들 사망 직후 단신으로 독일로 떠나 프라이부르크대에서 ‘결핵과 리파제의 관계’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중국 목단강시와 함북 청진에서 개업하였다. 정창성은 양진홍과 경성의전 동기였으며 제동병원 내과 근무 중 1923년 말에 용정 제창병원으로 부임했다(동아일보 1923 12. 31).
1920년대 중반 이후 제동병원에 부임한 의사는 김문진(金文軫), 박재복, 유석창(劉錫昶), 배헌(裵憲) 등 4명이었는데 대부분 타지 출신이었다. 정창성의 후임 김문진은 대구 출신으로 세의전 재학 중이던 1919년 2월, 만세시위운동 모의에 관련하여 기소된 전력이 있었다(동아일보, 1920. 6. 24). 대구에 개업하던 중 1924년 초 제동병원에 부임하였으나(동아일보 1924. 1. 18), 이듬해 지병으로 대구에서 요양 중 사망하였다(동아일보 1925. 11. 11). 박재복은 1921년에 보신남학교 교원이었으며 의사가 되어 1928년부터 제동병원에서 외과를 담당하였다(그레슨, 1970: 185).
유석창은 김성우의 경성의전 동기로 함남 장진 공의(公醫)로 있던 중 폐결핵에 걸린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김성우의 알선으로 1929년 제동병원에 취업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사망한 후 사임하고 1931년 종로에 중앙실비진료원(민중병원 전신)을 개설하였다(황상익, 2000: 102-3). 배헌은 1928년 세의전을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 내과와 소아과에 근무하였고 1932년에 사임한 김성우 후임으로 제동병원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34년 북경협화의대에서 연구 후 1935년 함북 경성(鏡城)에 개업하였다(동아일보 1937. 12. 29).

2) 함흥 제혜병원

제혜병원에 근무하였던 것으로 확인된 조선인은 총 13명으로, 맥밀란 원장 시기에 4명, 머레이 원장 시기에 9명이었다(표2). 맥밀란은 조선인 조수를 양성하여 의사로 키우는데 관심을 쏟았으며. 머레이는 병원 규모와 수준을 높이려고 과(科)별로 의사를 채용하였기에 조선인 의사의 수가 많았다.
표 2. 함흥 제혜병원에 근무하였던 조선인 의사들, 1903~1942
Table 2. Korean doctors, Je-hye Hospital, 1903-1942
이름 생년 고향 교육 의학교 근무기간, 직위 주요 이력

맥밀란 원장 시기(1903~1922)
모학복 1892~? 평북 정주 선천 신성 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 1912 1921 함제의원 개업
1903~1908 조수 1923 함흥기독청년회장
1912-1921 醫員 1927 영흥 에메친 사건 조사위원
1930 ~1933 함흥府 의원

이상종 - - - 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 1911 1915~1919? 醫員 1914 북청 대수병원
1920~1925 홍원 제중의원 (공의)
1930 경기 송파 (공의)

유칠석 - - - 세의전 1916 ~!1913 조수 1916~1917 대만 맥케이 기념병원
1917-1921 의사 1921 함흥 삼성의원 개원
1930 함흥부(府) 학교평의원

박성호 1898 - - 세의전 1918 1913 약제사, 조수 1919 징역(3·1운동)
1918~1922 醫員 1923 함흥 개업

머레이 원장 시기(1923~1941)

홍승한 1898 충남 공주 - 경성의전 1924 1926~1928 내과 1924. 공주 병원 근무
1928. 트랑킬, 해밀튼州 결핵병원
1930. 뉴욕시립결핵요양원
1932. 함흥 홍승한요양원
193? 함흥 府의원

고병간 1899~1966 평북 의주 - 세의전 1925 1927-1935 외과 1934 교토제대 박사
1941-  원장 1936 세의전 교수

안상철 1898 - - 세의전 1926 1929~1936 내과 1936 함흥 황금정 개업
    소아과

이준철 1901- - - 세의전 1931 1931 소아과 1931 흥남 제혜의원 분원
1940 흥남 중앙의원

조창호 - 배재 세의전 1933 193?~ 1939 내과 193? 진주 배돈병원 내과
1939 교토제대

최명학 1898~1961 - 영생 세의전 1926 1917 약제사, 서기 1928-30 교토제대
1936-1937 외과 1931~1936 세의전 강사, 교수
1937 함흥 개업

김효순 - - - 동경여의전 1938 1938 부인과 영생여자중학교 우등 졸업
  결핵병동

서형수 1913 전남 나주 - 세의전  경기도립 안성의원
 충북 무극광산 의무실
1944 충주 동인산부인과

이택선 1915 - 배재 세의전 1938 1938 이비과 1943 함흥 개업

(1) 맥밀란 원장 시기(1903~1922)

  • 신창리에 있는 제혜병원은... 조선 사람의 병자를 구제하는데 자선하는 마음으로 貧寒한 사람은 1푼의 수수료와 半푼의 약값을 받지 않고 친절히 하므로 함흥 一郡의 병자 뿐 아니라 함남 一境의 환자가 많이 오는 고로 의사와 간호부는 밤낮으로 눈코 뜰 새가 없이 번망하고... 의사는 영국사람 맹미란과 조선 사람 모학복, 이상종이 2명이며, 간호부는 영국부인 1명과 조선부인 4명[30]이며....(매일신보. 1915. 9 26).

    4명의 됴선 남녀를 敎道 유학케 한 바 모학복(함제의원 의사)씨는 총독부의원에, 유칠석 삼성의원 의사와 박성호 제혜의원 의사는 세브란사의전, 車永惠여사는 정신여학교에 각각 졸업케 하여(동아일보 1922. 3. 7).
맥밀란 시기 조선인 4명 중 조수 출신은 3명이었다. 모학복(毛鶴福, 그림 4 뒷줄 흰 옷)은 조수로 6년, 의사로 10년을 근무했던 맥밀란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평북 정주의 한의사 모봉민의 아들로 1894년 청일전쟁을 피해 부친과 형 모학수를 따라 원산으로 이주하였다. 모학복은 원산에서 맥밀란에게 영어를 배우고 함흥에 가서 조수로 일했으며, 1912년 3월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를 우등으로 수료하고[31] 제혜병원으로 돌아왔다. 1917년 8월 맥레의 아들 알렉산더가 디프테리아를 앓을 때 그가 치료하였다. 1917년 함흥 기독청년회 창립될 때 모학복은 부회장이었으며[32], 1923년에 회장이 되었다(매일신보 1923. 5. 5).
그림 4. 제혜병원 조선인 직원
Figure 4. Korean Staffs of Je-hye Hos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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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제혜병원을 사직한 모학복은 형 모학수와 같이 신창리에 양방과 한방을 같이 보는 함제의원(咸濟醫院)을 개업했다[33]. 그는 1927년 영흥 에메친 주사중독사건 조사위원이었고(동아일보 1927. 4. 3), 1930년 함흥 부의원(府議員)에 당선되 었다(매일신보, 1930. 11. 22).
이상종(李商鍾)은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겸 공립 평양 동인의원 부속 평양의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5월 의술개업 인허장을 받았다[34]. 1914년 함남 북청군 대수병원(大壽病院)에 있었고 1915년부터 제혜의원에서 근무하였다. 1920년 함남 홍원 제중의원 공의(公醫)였고(동아일보. 1920. 8. 23). 홍원청년회 강연회(동아일보. 1920. 8. 21) 등 사회 활동도 활발했다(황상익, 2013: 764). 1930년 초 본적을 변경, 송파에서 공의로 결핵예방활동을 하였다.
유칠석(劉七石)과 박성호(朴聖浩)는 1913년 제혜병원을 신축했던 시기에 조수로 일하다가 맥밀란의 주선으로 세의전에 들어가 의사가 된 경우이다. 유칠석은 타이완 맥케이기념병원[35]에서 1년 근무 후 함흥에 개업하였으며 함흥부 학교평의원 선거에 최고득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동아일보. 1930. 12. 3). 박성호는 제혜병원 재직 중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10개월 형을 받았다. 1922년 맥밀란 사망 후 박성호는 강도가와 함께 여성 숙사 사감을 겸하면서 병원을 수습하였다.

(2) 머레이 원장 시기 (1923~1941)

용정에서 함흥으로 돌아온 머레이는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머레이의 조선어 선생 안상철(安尙哲)과 통역 이준철(李俊喆) [36]은 세의전에 입학하였고 새 조선어 선생은 비서, 구매, 영업, 마취사 역할까지 했다(머레이, 2009: 72~75).
  • 의료사업을 좀 더 확장하기로 결정하자 다른 병원에 있는 동료 선교사가 유능한 내과의사인 닥터 홍을 추천했다. 내가 수술 및 행정, 또는 산부인과 업무로 바쁠 때 그가 병원 일을 맡아 주었다(머레이, 2009: 138).

머레이는 내과, 외과, 소아과, 이비과, 부인과로 나누어 의사를 두었는데 첫 번째 내과 담당이 홍승한(洪承漢)이었다. 그는 1927년 당시 ‘공공위생의 가장 큰 적’이었던 폐결핵 연구에 뜻을 두고 캐나다 해밀튼 주립결핵병원, 뉴욕결핵병원 등에서 연수 후 귀국하여 1932년 결핵전문요양원을 개원하였다[37]. 그러나 나중에 그는 상업적 광고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38].
고병간(高秉幹)은 1927년 안상철의 천거로 머레이가 직접 찾아가 영입한 인재였다. 그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39] 1925년 세의전 졸업 후 2년간 수련을 마친 외과의사였다[40]. 그는 1935년 머레이의 안식년에 실질적인 원장 역할을 하였고 이듬해 동경제대 유학 후 1937년 세브란스병원으로 부임하였다.
안상철은 세의전 졸업 후 1929년 제혜병원에서 내과, 소아과를 담당하다 1936년 함흥 황금정에 개업하였고, 이준철은 결핵 요양으로 졸업이 늦어져 1931년에 흥남 제혜의원 분원을 열었다[41]. 조창호(趙昌鎬)는 1933년 세의전 졸업 후 진주 배돈병원을 거쳐 제혜병원 내과를 맡았고 1939년에 교토제대로 떠나(매일신보, 1939. 8. 25), 194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매일신보. 1944. 6. 1).
1936년에 고병간이 떠나간 외과에 최명학(崔明鶴)이 오게 되었다. 그는 성진의 양진홍, 김성우과 영생중학을 같이 졸업했던 막역한 사이였으며, 1917년에 제혜병원 서기 및 약제사로 있던 중 1919년 3·만세시위로 징역 10개월 복역한 바 있다. 1922년 맥레의 후원으로 세의전에 들어가 1926년에 졸업 후 해부학을 연구하여 1932년 교토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교수로 재직 중 1936년 돌연 사임하고(박형우·여인석. 2007: 89) [42] 고향에 온 것이었다.
이듬해 최명학이 사직하고 함흥에 개업하자 세브란스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 2년을 마친 젊은 의사를 보내주었는데 평소 우울증을 앓던 그는 얼마 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다시 새로 온 외과의사 역시 경험과 훈련이 부족하여 머레이는 조수석에서 수술을 가르쳐야 했다(머레이, 2009: 259~61).
제혜병원의 유일한 조선인 여성 의사 김효순(金孝順)은 영생여학교 다닐 때 노래도 풍금도 잘 하고 졸업식에서 대표로 고별사를 낭독했던 우등생이었다. 의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조선에는 여성을 받아주는 의학교가 없어 동경여의전을 1938년에 졸업하고 부인과와 결핵 병동을 담당했다.
서형수(徐炯洙)는 제혜병원 근무 후 경기도립안성의원, 충북 무극광산 의무실 등에 근무하였고 1944년 충주에 개업하였다. 이택선(李宅善)은 세의전 졸업 후 제혜병원 이비과(耳鼻科)에 재직하였고, 1939년 북경협화의대에서 연구 후 1943년 함흥에 개업하였다.

3) 조선인 의사의 구성과 특성

선교사들은 인력과 재정의 제약 속에서 조선인 의사 양성에 공을 들였다. 성진과 함흥 선교병원에 근무했던 조선인 조수 및 의사는 각각 8명과 13명이었다. 제혜병원에 조선인 의사가 더 많았던 것은 함흥이 성진보다 인구, 병원 규모, 입원 및 외래 환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병원 운영 기간도 제동병원보다 훨씬 길었던 점이 반영된 것이다[43].
그들 대부분은 면허를 받은 후 선교병원에 근무하였으나 6명(성진 2명, 함흥 4명)은 조수 또는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추후에 의사가 되었다. 조수 6명의 근무 시기가 1900~1910년대 초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그 시기에 조선인 의사의 배출 자체가 희소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제동병원의 김영배와 김성우, 제혜병원의 모학복 등 선교병원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들은 모두 조수 출신이었다. 조수 6명 중 4명은 면허 취득 후 선교병원으로 돌아왔으나 성진의 김영배와 함흥의 유칠석은 의사가 된 후 바로 개업하였다.
조선인 의사들의 다녔던 의학교육기관은 사립 세의전이 57%, 관립 총독부 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및 경성의전 출신이 33%였다. 선교의료에 복무할 조선인 의사 양성에 세의전이 큰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제동병원에 경성의전 출신 비율이 높은 것은 개별적 요인의 영향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44].
선교병원에서 사임한 이후의 진로는 개업이 80%애 달하여서 당시 조선인 의사에게 진로 선택의 폭이 극히 좁았던 것을 보여준다(김근배, 2014: 463).
선교의사들마다 오른팔 역할을 하였던 조선인 의사가 있었음은 특기할 만 하다. 그리어슨과 김성우, 맥밀란과 모학복, 머레이와 고병간이 그들이다. 선교병원에서 같이 있었던 기간으로 한정하더라도 그들 사이의 관계는 짧게는 11년, 길게는 19년 간 이어졌다.
표 3. 성진과 함흥 선교병원 조선인 의사의 구성과 특성
Table 3. Composition and Characteristics of Korean Doctors at Mission Hospitals, Ham-heung and Sung-jin
제동병원(명) 제혜병원(명) 전체(명) 전체(%) 비고
인원 8 13 21

조수 출신 2 4 6 29% 직원 포함

출생년 1890~1899 5 7 12 57%

1900~1909 3 4 7 33%

1910~1919 0 2 2 10% 서형수, 이택선

출생지 함경/평안 7 10 17 81%

기타 1 3 4 19% 대구, 공주, 나주

의학교육 관립, 경성의전 4 3 7 33%

사립 세의전 3 9 12 57%

일본 0 1 1 5% 동경여의전 김효순

미확인 1 0 1 5% 박재복

의사면허 취득 시기 1910년대 2 3 5 24%

1920년대 6 5 11 52%

1930년대 0 5 5 24%

선교병원 이 후 진로 개업 6 10 16 80%

취업 1 2 3 15% 정창성, 고병간, 조창호

미확인 0 1 1 5% 김효순(김문진 제외)
선교병원에 재직했던 조선인 의사들의 90%는 1890년~1909년 사이에 태어났다. 그들은 청소년기에 개신교 교세의 확산을 보았고 근대 교육의 혜택을 받았으며 망국의 아픔을 체험했고 1919년에 민족주의 세례를 받은 세대였다.
10%에 해당하는 1910년대 출생자의 세대 경험은 윗세대와 달랐다. 연배가 가장 어렸던 이택선은 목사[45]의 아들이었으나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 나의 유년기로부터 청년기까지 종교적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중학교 3, 4년 때부터 종교에 대한 회의와 비판적 사색을 가지게 되고 이 때 동창생의 권유로 유물사관, 변증법적 유물론, 기타 수 책의 사회과학 서적을 읽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사상은 유물적으로 되고 무신론을 주창하게 되어 기독교 목사인 나의 부친과는 가끔 언쟁이 있었다(이택선, 함흥의과대학 교원이력서, 1948).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성진과 함흥의 선교병원에 근무했던 조선인 의사들 중 상당수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를 다녔고 기독청년회(YMCA)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일부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거나 이후 독립운동 지원 등으로 실형을 받기도 하였다. 그들 반 이상이 사립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였으며 선교병원에서 사임 이후의 진로는 대개 개업을 택하였다.

4. 선교의료의 중단과 조선인 의사의 진로

1930년대에 들어 선교부와 선교병원의 운영이 위축되었다. 그 첫째 요인은 일제의 간섭과 견제였다. 선교학교에 대한 총독부의 규제와 감독, 신사참배의 강요 등은 선교부 내부에 긴장과 갈등이 야기하였고, ‘풍부한 시설과 인력을 갖춘 식민지 의료기관의 등장’으로 선교병원의 경쟁력은 떨어졌다(여인석, 20007: 131).
둘째, 선교 사업의 형식과 내용이 달라졌다. 1925년 캐나다 장로회 소속 교회 대부분과 감리교 등이 캐나다 연합교회로 통합되면서 조선에 있던 캐나다 선교사들은 재배치되었다[46]. 용정 선교부의 스코트(Scott, William)가 연합교회 조선선교본부 총무로 함흥 영생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기존 복음주의 신앙에 충실했던 교인들은 스코트의 자유주의 신학에 거부감을 보였다[47].
셋째, 선교사업의 물적 인적 기반이 취약해졌다. 해외 선교를 자원하는 청년은 줄었고 대공황으로 선교 기금이 급감하여 선교 사업은 위축되었다[48].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30년 초에 발생한 그리어슨의 우발적 폭행 사건은 성진 선교부의 존립을 흔들었으며, 신사참배 문제와 태평양 전쟁으로 선교사들은 귀국하고 선교의료는 중단되었다. 선교병원에 몸담았던 조선인 의사들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각자의 길로 나아갔다.

1) 성진, 그리어슨 폭행 사건과 제동병원 운영의 중단

총독부는 ‘자격 있는 교사가 1명도 없는’학교는 인가할 수 없다고 압박하였고[49], 보신학교 교장 그리어슨은 조선인 교사 김세위에게 교육을 받아 자격을 갖추게 하고 선교부에서 교육 비용을 부담하였는데 그가 막상 자격을 딴 후에 퇴직하고 공립학교로 가고 말았다. 제동병원에서 김세위를 마주 친 그리어슨이 그와 언쟁 중 ‘턱에 한 대 먹인 것’이 큰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기독남자청년회(YMCA)를 비롯한 기독교 단체들이 그리어슨 축출을 결의했다(동아일보 1930. 1. 14.). 그리어슨 옹호파와 방축파가 서로 충돌하였다(동아일보 1930. 2. 6). 방축파는 교회의 소수 청년들이었고[50], 노년층과 부녀 등 다수의 옹호파는 청년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동아일보, 1930. 2. 14). 결국 1931년 초 교회는 분열했다(동아일보, 1931. 1. 11).
이 사건의 여파로 제동병원 부원장 김성우가 1932년 3월에 사임하였다. 그는 ‘교회분란사건에 원장에게 배서파(排西派)라는 오인을 받고 경성의전 재학 당시의 학자금 전부를 변제하고 퇴직’하여 성진에 개업하였다(김성우, 청진의과대학 교원이력서, 1948). 1934년 5월 그리어슨은 67세로 은퇴하고 귀국하였다(동아일보 1934. 5. 31). 이듬해 제동병원은 조선인 의사들의 사임과 재정난 등으로 운영이 중단되었다[51].

2) 함흥, 신사참배 논란과 선교사의 철수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대한 캐나다 연합교회의 방침은 다른 교단과 달랐다. 연합교회 선교회를 대표하는 스코트는, 신사참배가 미국 선교사들이 주장하듯이 학교를 닫을 만큼 중대한 문제가 아니며, 학교를 통해 기독교 운동이 이어지는 것이 더 중요하며, 일반학교의 대안으로 선교학교가 존속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캐나다 선교사 중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맥레는 예산 감축에 따라 1937년 귀국했다(이창승, 1999a: 193-4; 맥레, 2010: 395).
함흥 제혜병원은 83병상에 직원 70명 규모에 달했으나(신규환, 2015: 136-7)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선교사 추방이 시작되었다. 1941년 머레이는 조선인 위주로 병원이사회를 구성하고 병원을 존속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이만열, 2003: 863-4).
  • 혹시 일본인들이 외국인인 나를 원장 직위에 있지 못하게 할지도 모를테니 그럴 경우 나카하시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고 박사에게 병원 책임을 맡겨야겠다는 것까지도 생각해 두었다...얼마 뒤 병원운영위원회의 동의가 내려오자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던 고 박사는 기꺼이 함흥으로 돌아왔다(머레이, 2009: 270).

1941년 5월, 고병간이 제3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이만열, 2003: 865). 머레이와 스코트는 1942년 6월에 마지막으로 추방되었다(김승태, 2011: 24) [52].

3) 해방 전후 조선인 의사들의 진로

식민지 시기 조선인에게 교육의 기회는 극히 제한적이었으나[53]. 함흥과 성진의 선교병원에 근무했던 조선인 의사들은 해방 당시 30대~50대로 풍부한 임상 경험과 다양한 잠재력을 갖춘 엘리트들이었다. 일찍이 서양의 근대의학과 문화를 체득했고[54], 양·한방 협진병원을 운영한 사례도 있었다. 해방 후 행적이 미확인된 5명을 제외하면 그들은 고향에 남거나 월남하였다.
해방 후 고향에 남은 것으로 확인된 의사는 성진의 양진홍과 김성우, 함흥의 최명학과 이택선 4명이었다. 해방 당시 모두 개업 중이었던 그들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 이재민(罹災民) 구호, 보건동맹 등의 활동에 전념했다.
양진흥은 개업 중이던 청진에서 해방 직후 동료 의사들과 함께 간이진료소를 차려 이재민을 구호하였고 1946년 청진의전 교원과 1948년 청진의대 학장, 청진중앙병원 산부인과장, 북조선보건연맹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어슨의 오른팔이었던 김성우는 성진 제1병원장, 인민병원장, 성진시보건동맹위원장, 청진의전 교원을 역임했다[55].
최명학은 해방 직후 함남건국준비위 부위원장을 거쳐 조선민족함경남도집행위원회(후에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및 보건국장, 1946년 함흥의대 학장을 역임했다. 1948년 10월 국가학위 수여위원회 위원, 평양의대 장기려와 함께 국가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북한 정권 수립 이후 함남 정치보위부의 검증을 거쳤다(김규형, 2001: 294-7). 1952년 창립된 과학원에서 의학 분야의 유일한 과학원사로 임명되었으며(국민보. 1952. 12. 17), 북한 의학부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택선은 함흥의과대학 이비과 교원이 되었다.
표 4. 성진과 함흥 선교병원에 근무했던 조선인 의사들의 해방 전후 진로
Table 4. Life Course of Korean Doctors after the Liberation 1945, who worked at Mission Hospitals, Sung-jin and Ham-heung.
인원(%) 성진 함흥
재북 4명 (27%) 양진홍 청진의대 학장, 산부인과 최명학 함흥의대 학장. 해부학

김성우 청진의대 외과 이택선 함흥의대 이비과


월남 11명 (73%) 김성우 민중병원 모학복 부산 개업 (1950)

김영배 야구전(1947, 서울) 박성호 부산교통병원 의무관(1952)

박재복 덕제병원 원장 고병간 세브란스, 대구의대, 숭실대

유석창 민중병원(1931) 이준철 재 캐나다, 소아과

배헌 장성의료원 원장 서형수 충주 동인산부인과

이상종 송파

김효순 육아

미확인 5명 정창성 유칠석, 홍승한, 안상철, 조창호
월남한 것으로 확인된 의사들은 11명으로 대부분 이남에서 개업하였다. 제동병원의 첫 조수였던 김영배는 일찍이 월남하여 1947년 7월 조선야구협회가 주최한 도시대항 야구전에 미군정청 인사들과 나란히 참가했다(자유신문, 1947. 7. 24). 박재복은 덕제병원을 운영하였고 배헌은 1950년대 말 대한석탄공사 부속 장성의료원 원장을 거쳐 개업하였다. 제혜병원 맥밀란의 조수였던 모학복은 1950년 흥남철수 때 월남하였으며 박성호도 1952년에 부산교통병원 의무관으로 근무하였다. 고병간은 1945년 10월 대구의대 학장을 시작으로 문교부차관, 경북대 총장, 연세대 총장, 세브란스병원장, 숭실대학 학장 등 평생을 교육자로 일관하였다. 이준철은 맥레의 딸 헬렌과 결혼하여 캐나다에 살았고, 서형수는 충주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하였다. 김효순도 남한에서 2남 3녀를 키웠다.
이처럼 함흥과 성진의 선교병원에 근무했던 조선인 의사들은 해방 후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행적을 남겼다.

5. 맺음말

이상과 같이 19세기 말 함경도에서 시작된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업의 구성과 특성, 성진과 함흥 선교병원의 선교의사와 조선인 의사들, 그리고 선교의료의 중단과 해방 전후 조선인 의사들의 진로 등을 살펴보았다.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다른 교파 선교사들과 달리 일제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조선인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사회적 배경과 출신 지역의 환경이 조선인과 함경도의 그것과 유사했던 점, 그들이 겪었던 대영제국의 식민 지배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투영, 그리고 평등주의적 민주적 진보적이었던 그들의 신학적 가치 등이 융합되어 발현된 특성으로 보인다.
함흥, 성진 선교부의 트라이 앵글 - 교회, 학교, 병원 -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공동체였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근대 문명과 기독교 신앙을 체득한 기독청년들은 선교부의 일꾼이자 지역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조선 선교 초기에는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에 충실하였으나 1910년대 중반 이후 교육, 의료 등 사회적 서비스를 중시하고 사회 문제의 해결에 노력하는 사회복음운동이 새로운 원칙이 되었다. 초기에 의료는 복음 전도의 수단이었으나 사회복음운동의 맥락에서 의료 자체의 중요성이 확대되었다.
선교의사 세 명은 복음 전도와 의료, 두 영역에 대해 각각 다르게 접근하였다. 그리어슨은 목사의 역할과 의사의 역할, 복음주의와 사회복음운동 사이에서 갈등과 혼란을 겪었다. 맥밀란은 그리어슨보다 복음 전도의 부담이 적었고 조선 여성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어 상대적으로 선교의료에 집중할 수 있었다. 머레이는 복음 전도를 병원 내에서 실천하였으며, 여성의 영역에 머물렀던 맥밀란과 달리 선교병원 전반을 관장하는 유능한 책임자였다.
1930년 이후 캐나다 장로회 선교의료는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간섭과 견제에 따른 선교부 내부의 갈등, 선교조직의 형식과 내용의 변화 및 선교 환경의 악화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어슨 폭행 사건이 확대되어 성진 선교부의 분열과 제동병원의 운영 중단을 초래하였고, 신사참배를 둘러싼 갈등과 태평양 전쟁의 확전에 따라 선교사들은 귀국하였다.
선교병원 출신의 조선인 의사들은 해방 후 두 갈래로 나뉘었다. 대부분은 고향을 떠나 월남하여 주로 개업하였고, 일부는 고향에 남아 의학교육기관의 장(長) 또는 교원이 되어 새로운 의사들을 양성하였다.
결론적으로, 캐나다 장로회 선교의료의 성격과 그것이 조선인 의사들에게 투영된 영향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그리어슨은 1912년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찾아왔을 때 그를 전도사로 중용하였고 그가 러시아로 망명할 때 국경까지 동행하여 호위하였다. 보수적 복음주의자 그리어슨이 기독교 사회주의자 이동휘를 적극 지원하고 보호했던 것은 놀라운 포용력이었다.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 사회구원을 지향하는 열린 신학, 조선인 교인들과의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 등 캐나다 장로회의 성격은 한국 개신교의 지형에서 큰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특히 캐나다 장로회 선교병원에 근무했던 조선인 의사들이 선교의료의 어떤 면을 수용하고 어떻게 실천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 지배 시기 조선인 의사들에게 진로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아서 ‘임상분야 치중, 높은 비율의 개업의, 개인주의 성향, 계서화(階序化)’등의 특징을 보였다(김근배, 2014: 461). 함흥과 성진 선교병원 출신 조선인 의사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선교병원에서 퇴직 후 80%가 개업의가 되었다.
선교병원에서 서양근대의학을 익힌 그들이 ‘선교’는 외면하고 ‘과학으로서의 의료’, 또는 ‘근대 문명에 대한 동경’에 주목한 경우도 물론 있었을 것이나(김윤성, 2004: 290; 조형근, 2009: 129).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선교병원은 가난한 사람에게 ‘1푼의 수수료와 半푼의 약값을 받지 않고 친절히 하였고’(매일신보. 1915. 9 26), 흥남에 제혜병원 분원을 운영했던 이준철은 ‘노동자에게 진찰비는 무료, 약값은 절반’을 받았으며, 제동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그리어슨의 영향을 받았던 유석창은 1931년에 민중병원의 전신인 중앙실비진료원을 구상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다(황상익, 2000: 102-3).
어려서부터 캐나다 선교의사들을 지척에서 보면서 자랐던 청년 의사들이 원숙한 중년이 되었을 때 해방을 맞았다. 그들 중 일부는 자영(自營)을 정리하고 의학교육기관의 교원 또는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북한에서 새로운 의료 ‘일군’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의학교육기관 세 곳 중 두 곳의 학장을 캐나다 선교병원 출신 의사들이 맡았다는 점은 함의하는 바가 적지 않다. 월남한 의사들 중에도 무료 혹은 실비 진료 형태의 병원을 운영한 사례도 있었고 남한의 의학교육계에 크게 기여한 인물도 있었다.
이처럼 캐나다 장로회 선교병원 출신 조선인 의사들이 보여 주었던 사회적 실천은 캐나다 장로회 선교의료의 영향과 성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의 한계는,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의료를 다른 교파의 선교의료와 비교 분석하지 못 하였다는 점이다. 교파별, 지역별 선교병원의 선교의사와 조선인 의사에 대한 연구가 병행될 때 캐나다 선교의료의 성격과 그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아 이를 향후 과제로 삼고자 한다.

Notes

1) 미국의 팽창주의 외교정책에 개신교의 해외선교운동이 결합하면서 미국인 선교사의 규모는 1890년 934명에서 1920년대 말 12,000명으로 급증했다(조현범, 2002: 34).

2) 복음주의(evangelism)는 개인 영혼 구원을, 사회복음운동(social gospel movement)은 사회 문제의 개선을 통한 사회구원을 추구하였다(MacDonald, 2001: 41-7).

3) 여인석(2007: 106)은 ‘의료선교’와 ‘선교의료’를 구분하였다. 전자는 의료를 선교의 수단으로 여기는 개념이라면, 후자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의료라는 개념으로, 의료가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활동이라는 점을 중시하였다.

4) 교파 명칭과 선교개시연도는 다음과 같다. 미국북장로회(1884), 미국북감리회(1885), 호주장로회(1889), 영국성공회(1889), 미국남장로회(1892), 미국남감리회(1896), 캐나다장로회(1898), 러시아정교회(1900), 안식교(1904), 성결교(1907), 구세군(1908).

5) 1925년에 캐나다 장로회 소속 교회 대부분과 감리교 등이 통합하여 캐나다 연합교회(Canada Unification Church)가 되었으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캐나다 장로회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6) 그리어슨(성진), 버커(용정), 스코필드(경성), 마틴(용정). 버커를 제외한 3명은 의사였다.

7) 1945년 이전 조선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총 1,529명 중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는 82명(5.4%)이며 선교사 중 의사 총 133명 중 캐나다 장로회 소속 의사는 7명(5.3%)이었다.

8) ‘의료선교’라는 용어 보다 ‘선교의료’용어를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의료선교사’보다 ‘선교의사’용어를 사용하였다.

9) Kim Yong Pai(김용배)와 Kim Yiong Pai(김영배)는 동일인(이만열, 2003: 224, 455).

10) Nova Scotia(새로운 스코틀랜드)라는 지명이 보여 주듯 캐나다 장로회의 뿌리는 18세기 말 북미대륙으로 이주했던 스코틀랜드 개신교였다.

11) 기차로 대륙 횡단, 밴쿠버에서 ‘Empress of India’호로 항해하여 도쿄, 요코하마, 나가사키를 거쳐 동래, 제물포, 마중 나온 에비슨과 서울에 도착(맥레, 2010: 44-7).

12) 원산에는 청일전쟁을 피해 이주한 평안도 개신교인들이 있었다(박용규, 1994).

13) 이후 선교지 분할협정(敎界禮讓)으로 선교지역이 간도(용정), 연해주까지 늘어났다.

14) 함북 남단 해안에 위치, 1899년 개항되었고 1945년 성진시, 1951년 김책시가 됨.

15) 함남 도청 소재지. 관북의 행정, 물산, 교통 및 문화의 중심지.

16) 천연두와 콜레라의 유행, 러일전쟁 등으로 함흥선교부의 본격적인 운영은 1905년까지 지연되었고 맥레와 맥밀란은 원산에 머물러 있었다(MacMonald, 2000: 37).

17) 서정민(2007: 309-10)은 그리어슨이 언더우드와의 인연에서 제동병원을 작명하였다고 보았다. 언더우드가 애착을 가졌던 제중원의 앞글자를 따서 ‘동쪽에 있는 제중원’이라는 의미로 ‘제동병원’이라 하였고, 제혜병원과 제창병원도 같은 돌림자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18) 서정민(2007: 354)은 이를 트라이앵글 메소드(triangle method)라고 이름 붙였다.

19) 1923년 해외선교예산 58.5만불 중 11만불(20%)이 조선에 배정되었다. 선교부 규모는 선교사 50명, 조선인 목사 24명, 예배당 276곳, 교인 21,113명, 보통학교 91곳(학생 5,298명), 고등보통학교 8곳(학생 1,009명), 병원 3곳(Lee, 2013: 18)

20) 게일 등 초기 캐나다 선교사들은 토론토대학 YMCA, 즉 학생들의 후원으로 선교를 시작했고 후원이 끊어지자 미국 개신교단 소속이 되었다((Ion, 1977: 583-4).

21) ‘의사인가, 목사인가?’선교의사의 정체성은 중국과 조선의 선교의사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논쟁했던 주요한 주제였다(조정은, 2014; 여인석, 2007).

22) 원래 양반집 마님이었던 강도가는 자식 셋을 모두 병으로 잃는 고통을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하였고 남편마저 사별한 후 함흥으로 맥밀란을 따라 왔다.

23) 제혜병원 1,510원, 신창리교회 1,510원, 중하리교회 1,510원, 영신학교 800원.

24) 회장 그리어슨, 총무 양진홍, 회계 및 智育部 위원장 정창성, 사교부 위원장 김영배, 간사 김성우(동아일보 1921. 7. 3).

25) 조선총독부 관보 제853호(1915. 6. 8), 조선총독부 관보 제914호(1915. 8.19).

26) 직원으로 조수 金基律, 趙允植. 간호부 馬敬一, 趙化實(동아일보 1921. 3. 17).

27) 원장 구례선, 외과 양진홍, 내과 정창성, 조수 김성우, 간호부 최柔謙 張有羅, 金誠淳, 약제사 鄭義澤, 서기 李孝根, 남전도 姜雲鶴, 여전도 金美廉, 入院隨意 施療 1, 2, 3等(동아일보 1921. 3. 17).

28) 그는 1938년 동경제대 의학부에서 약물학을 연구, 194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29) 함경도 개업의사 등에게 독립운동자금 모금이 드러난 사건(동아일보 1921.5.29).

30) 전도부인 강도가와 한도가, 간호부 이종설과 박마리온(이만열, 2003: 458).

31) 毛鶴福, 黃潤, 金麟用, 金贊洙, 張景祿, 康秉燦 6명이 총독부의원장 명의의 졸업증서 받음(기창덕, 1995: 139; 매일신보 1912. 3. 26; 총독부관보. 1912. 8. 23. 21호).

32) 회장 맥레, 부회장 모학복, 서기 李舜基, 이사 金昶濟, 許憲, 崔榮鶴, 洪基鎭 등. 김창제는 지방 YMCA 육성을 위해 1917년 영생학교 학감으로 부임하였음.

33) 모학수가 외지에서 활동하였기에 모학복은 조카들을 함흥에 데려와 키웠다(박용규, 1994). 조카딸 모윤숙은 1925년 영생보통학교, 모기윤은 1937년 연희전문을 졸업했다. 모학복의 장남 모기성은 1935년에 세의전을 나와 함흥질소병원 소아과의사, 월남 후 용문동에 개업하였고, 2남 모기서는 1940년에 경성치전을 졸업하였다.

34) 실제로는 대한제국 시기 대한의원에서 4년 의학교육을 수료하였고 면허는 총독부로부터 받았다(총독부관보 224호 1911. 5. 31). 의적 등록 71호(기창덕, 1995: 137-8)

35) 1871년에 대만에 온 최초의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 맥케이(Mackay G. L, 1933~ 1901, 馬偕)를 기념하여 1912년에 설립되었으며 현재 대만 최대 규모의 병원임.

36) 이준철은 맥레 선교사 가족을 도와주던 이만옥의 아들로 함흥 선교부에서 李알렉산더로 불리웠다. 후에 맥레의 딸 헬렌과 결혼하였다.

37) 당시 결핵환자 수용시설(인원)은 해주 救世요양원(51), 원산 山川의원 분원 臨海莊(29), 병원 결핵 병실은 경성제대 부속의원(6), 세브란스 병원(1), 평남도립병원(12), 함흥 제혜병원(18), 함흥 홍승한병원(9), 용산철도병원(9), 경성 한강통 原ㅇ병원(2), 경성 서소문정 田中丸병원(8), 청주도립의원(5), 진천 愛人병원(2), 광주도립의원(4), 흥남조선질소비료회사 부속병원(3명) 등 총 192명이었다(매일신보. 1935. 7. 18).

38) “라너야”이 약은 피부 홀몬 主劑로 되야 남녀노소를 勿論하고 面上이나 피부에 발느면 현저히 更小되고 折傷, 打傷, 蟲傷, 훼상, 水蟲凍傷 등과 기타 피부염에 특효가 있다. “훗게도메”이 약은 머리 비듬에 특효약으로 머리가 가렵든지 비듬이 盛하든지 머리가 빠지는데 발느면 卽治神效한 良藥...(동아일보, 1937. 10. 31).

39) 그는 선천 신성중학 재학 시 3·1 만세시위운동으로 1년 6개월 복역하였다.

40) ‘그의 부임은 개인적 선택이라기보다 제혜병원 정상화를 위한 선교부 측의 결정이었던 듯하다’(서울대학교 한국의학인물사 편찬위원회, 2008: 361).

41) ‘노동자에게 진찰비는 무료, 약값은 절반’(동아일보, 1931. 7. 3). 이준철은 1940년 함흥 천기리에 이준경(李俊景)과 같이 중앙의원을 개원하였다.

42) 그의 사임은 당시 사회적 이슈였다(조선중앙일보 1936. 7.29-8.2; 한겨레신문, 1991. 12. 13; 서울대학교 한국의학인물사 편찬위원회, 2008: 441-2; 김근배, 2012: 451).

43) 제혜병원은 1942년, 제동병원은 1934년에 문을 닫았다.

44) 양진홍과 김성우는 영생학교 동기, 김성우와 유석창 및 양진홍과 정창성은 의학교 동기, 양진홍과 유석창은 단천 출신 등, 각각 지연과 학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45) 이익모(李益模 1869~1944). 평남 용강. 1913년 협성신학교 졸업, 상동교회 등 담임.

46) 연합교회로의 통합에 반대하는 일부 장로회 조직은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선교 대상으로 삼고 일본으로 이전하였다. 역시 통합에 반대하는 푸트 선교사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영(Young) 선교사는 일본으로 갔다.

47) ‘신학의 빈곤, 사회 부재의 영혼 구제, 정치 무관의 정숙주의, 합리성의 상대적 결여, 이원적인 신’등이 복음주의의 한계로 지적되었다(민경배, 2007, 150).

48) ‘전도국에서 외국선교비 10만 불을 감할 터인데... 조선에서 4만불을 감할 예정이라 한다... 선교사 중... 여섯 가족은 소환될 터이고..’(동아일보, 1935. 8. 7).

49) 일제가 私學을 통제하기 위해 1915년에 공포한 ‘개정사립학교규칙’적용의 유예기간(민경배, 2007: 356-7)의 최종 시점.

50) 1920년대 후반 조선 각지에는 ‘선교사들의 非行이 거듭 신문에 폭로 형식으로’보도되어 사회 여론이 비등했는데, 그 배경에는 사회주의 단체의 反개신교, 反선교사 선동과 일제의 분열 정책이 작동하였다(민경배, 2007: 413-9).

51) 1957년, 그리어슨(89세)은 김성우을 통해 예천여고 교장이던 김세위(52세)에게 화해의 편지를 보냈고 그가 보내 온 사과의 답장을 그의 手記 마지막 장에 수록하였다. 1975년 그의 사망 1주기에 그의 手記 한글판이 출판되었다(그레슨, 1970: 162-3).

52) 1947년 머레이는 다시 조선(남한)에 왔다. 1950년에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있었고 1959년에 원주기독병원을 세웠으며 1964년 세브란스병원 의무기록실을 담당하였다. 제혜병원은 해방 후 인민병원이 되었고 1950년 전쟁 중 부상병을 수용했다. 인민군이 퇴각할 때 심하게 불에 탔으나 건물 형태는 망가지지 않았다(이창승, 1999b: 264-5). 맥레의 傳記는 딸 헬렌이 썼다. 함흥이 고향인 헬렌은 1975년 남편 이알렉산더와 같이 방한하여 모학복 박사와 영생학교 옛 친구 등을 상봉했다.

53) 1944년 현재 조선인의 86%(여성 96%)가 無學이었으며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조선인은 1%를 넘지 못 했다(이향규, 2006: 8).

54) 모학복은 맥밀란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최명학의 ’명강의는 학교 전체에서 유명하였으며, 강의 중 유창한 영어‘는 제자들에게 회자되었다(박형우 ·여인석, 1992: 90).

55) 김성우는 이후 월남하여 유석창과 같이 1954년 사단법인 民衆病院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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