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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5(3); 2016 > Article
제바스티안 크나이프와 독일 자연치유운동 자연주의와 근대의학 사이에서*

Abstract

This study discusse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Natural Cure Movement of Germany, centering on the Kneipp Cure, a form of hydrotherapy practiced by Father Sebastian Kneipp (1821-1897). The Kneipp Cure rested on five main tenets: hydrotherapy, exercise, nutrition, herbalism, and the balance of mind and body. This study illuminates the reception of the Kneipp Cure in the context of the trilateral relationship among the Kneipp Cure, the Natural Cure Movement in general, and modern medicine.
The Natural Cure Movement was ideologically based on naturalism, criticizing industrialization and urbanization. There existed various theories and methods in it, yet they shared holism and vitalism as common factors. The Natural Cure Movement of Germany began in the early 19th century.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and the early 20th century, it became merged in the Lebensreformbewegung (life reform movement) which campaigned for temperance, anti-tobacco, and anti-vaccination. The core of the Natural Cure Movement was to advocate the world view that nature should be respected and to recognize the natural healing powers of sunlight, air, water, etc. Among varied natural therapies, hydrotherapy spread out through the activities of some medical doctors and amateur healers such as Johann Siegmund Hahn and Vincenz Prie β nitz. Later, the supporters of hydrotherapy gathered together under the German Society of Naturopathy.
Sebastian Kneipp, one of the forefathers of hydrotherapy, is distinguished from other proponents of natural therapies in two aspects. First, he did not refuse to employ vaccination and medication. Second, he sought to be recognized by the medical world through cooperating with medical doctors who supported his treatment. As a result, the Kneipp cure was able to be gradually accepted into the medical world despite the “quackery” controversy between modern medicine and the Natural Cure Movement.
Nowadays, the name of Sebastian Kneipp remains deeply engraved on the memories of German people through various Kneipp spa products, as well as his books such as My water Cure and Thus Shalt Thou Live! Wörishofen, where Kneipp had served as catholic priest as well as hydrotherapist for 42 years from 1855, changed its name to “Bad Wörishofen” (“Wörishofen Spa” in German). The Kneipp Cure and the Natural Cure Movement became a source of ecologica l thought which is currently gaining more and more sympathy from German people. It is regarded as a lieu de mémoire (site of memory) reflecting the collective identity of German people.

1. 머리말

제바스티안 크나이프(Sebastian Kneipp, 1821-1897)는 누구인가? 20세기 초 미국에서 빌헬름 2세, 비스마르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3인의 독일인’으로 꼽혔다는 그의 공식 직함은 뵈리스호펜(Wörishofen)이라는 바이에른의 한 작은 마을의 주임사제였다. 하지만 크나이프 신부의 명성은 그의 비공식적 직업인 ‘수치료사’로서의 활동에 기인한다. 『나의 수치료법(Meine Wasser-Kur)』(1887)[1]을 비롯한 그의 대표작들은 당대에도 수십 판을 거듭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출간되고 있다. 크나이프의 이름을 내건 회사에서 생산한 각종 입욕제들은 독일의 일반 슈퍼마켓 진열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며, 해외로도 수출되어 그의 기억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의 치료법을 신봉하는 ‘크나이프 동맹’은 그의 생시보다도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그가 40년 넘게 활동했던 마을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요양과 치료의 도시로 성장했다. 현재는 온천장 내지 휴양지를 뜻하는 ‘바트(Bad)’라는 단어와 결합된 뵈리스호펜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크나이프의 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기적의 의사”(Waibel, 1955), “인류의 조력자”(Burghardt, 1988)로 찬양받았던 슈바벤 출신의 이 평범한 신부가 19세기 독일 자연치유운동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독일인들의 집단기억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크나이프 요법이 오늘날까지 확보하고 있는 대중성에 대한 설명 중 하나는 그의 생애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가난한 직조공의 아들로서 외부의 후원 없이는 정규교육조차 받기 어려웠던 그의 성장환경은 훗날 적절한 의료혜택을 받기 힘든 빈민들에게 물과 허브, 소박한 식사와 운동이라는 손쉬운 치료법을 제시함으로써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인기가 전 사회계층을 아우를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크나이프 요법이 함축하고 있는 메시지가 19세기 후반 독일의 시대정신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수치료를 주축으로 하는 크나이프의 자연요법은 근대화와 산업화에 대한 전반적 비판에서 탄생한 독일 생활개혁운동(Lebensreformbewegung)의 일부로서, 비록 그 자신은 뚜렷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시대의 본질과 과제를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었다.
이 글의 주안점은 크나이프 요법 자체가 아닌, 그 수용의 흔적들을 검토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해석하는 데 있다. 크나이프 요법이 오늘날 독일 ‘기억의 장소(lieux de mémoire)’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독일제국 시기의 자연치유운동이 갖는 생태학적 맥락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된다. 독일 생태운동의 기원들 가운데 하나가 19세기 말의 생활개혁운동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연요법에 대한 관심이 1970년대 이후 빠르게 되살아난 이유 또한 이 시기에 활발해진 환경운동과 더불어 이른바 “생태학의 시대”(Radkau, 2011)로 접어든 독일의 자화상에서 찾을 수 있다. 본론에서는 크나이프 요법과 자연치유운동, 근대의학 사이의 3자관계가 집중적으로 조명될 것이며, 그 속에서 크나이프 운동이 ‘대안’에서 ‘주류’로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크나이프 요법과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남긴 7권의 저서들[2]과 더불어, 그의 동료였던 의사 바움가르텐(Alfred Baumgarten, 1862-1924)이 쓴 전기[3]와 당대의 자연치유운동 관련 사료들을 참조할 수 있다. 그에 대한 기억은 영화[4], 소설(Ortner, 1985)[5], 그리고 여러 편의 전기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크나이프 전기는 그의 대중적 명성에 기댄 것으로, 학문적 차원의 것이라기보다는 ‘찬가’에 가까우며 크나이프 요법 지지자들의 작품인 경우가 많다(Burghardt, 1988; Schomburg, 1985; Pörnbacher, 2004; Klofat, 2009). 따라서 학문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자연치유운동 내지 생활개혁운동의 일부로서 크나이프 요법의 의미를 부각시킨 사회사 연구들로서(Krabbe, 1974; Berg, 1998; Krabbe, 1998), 이들은 ‘대체의학’에 대한 독일 의학사가들의 연구(Rothschuh, 1983; Regin, 1995; Jütte, 1996; Heyll, 2006)와 더불어 크나이프 요법을 19세기 후반 이래의 자연주의적 흐름과 관련짓고 있다. 크나이프와 그의 치료법은 최근 뮌헨 대학교 레이첼 카슨 센터가 주관하는 ‘환경과 기억’ 프로젝트의 일부로서, ‘생태학적 기억의 장소’로 재해석되는 단계에 와 있다(Waltenberger, 2013; Waltenberger, 2014)[6].

2. 독일 자연치유운동과 수치료법의 확산

19세기 초에 시작된 독일 자연치유운동은 1880년대 이후 독일제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생활개혁운동[7]의 일부로 포함되었으며 곧 그 대표주자로 부상했다. 그것은 19세기 대체의학의 한 줄기를 형성하는 동시에, 오늘날 독일사회에서 점점 지지자들을 늘려가고 있는 생태주의 사상의 원류이기도 하다.
독일 생활개혁운동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문제의식에서 연원한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자연보호, 고향보호, 동식물보호, 기념물보호, 교육개혁, 종교의 개혁, 복장개혁, 식생활 개혁, 금주, 금연, 채식주의, 나체문화, 생체해부·예방접종 금지운동 등 상이하고 이질적인 일련의 주장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청년운동과 여성운동 등 성인남성 중심의 기성세력에 도전하는 대안 집단들의 움직임까지도 포괄했으며, 사상적으로는 낭만주의, 자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평화주의, 신비주의, 민족주의, 심지어 반유대주의에도 두루 걸쳐 있었다[8]. 이러한 극도의 다양성은 ‘자연친화적 생활방식’을 지향한다는 공통분모 아래 수렴되었다. 전통적인 금기들을 혁파했다는 점에서 자연치유운동을 비롯한 생활개혁운동은 ‘사회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평가받지만(Regin, 1995: 453), 그보다는 근대화가 함축하는 문제들을 비판하고 이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근대성이 갖는 양면성을 잘 보여준다. 한편 그 지지세력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운동은 종래의 통념(Krabbe, 1974)처럼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닌 교양시민층의 문화비관주의에만 연원한 운동은 아니었다(Berg, 1998: 91). 수치료를 비롯한 자연요법에 대한 사회 각층의 호응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자연주의’로 압축할 수 있는 자연치유운동의 사상적 기원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유명한 메시지가 위치한다. 루소는 디종 아카데미 논문 공모전에 제출한 『학문과 예술에 대한 담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1750)에서 자연만이 인간에게 소박함과 덕성, 용기를 부여함으로써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서술했으며, 『에밀(Émile ou de l’éducation)』(1762)에서는 창조주의 손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은 선하다는 명제를 통해 자연의 가치를 강조했다[9]. 그의 견해는 독일 의학계에서 티소(Simon André Tissot, 1728-1797), 프랑크(Johann Peter Frank, 1745-1821), 파우스트(Bernhard Christoph Faust, 1755-1842), 슈트루베(Christian August Struve, 1767-1807) 등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내과의인 후페란트(Christoph Wilhelm Hufeland, 1762-1836)는 건강과 장수를 지향하는 마크로비오틱(Makrobiotik)을 제창함으로써 루소와 19세기 자연치유운동 사이의 가교 역할을 맡게 되었다. 1878년 독일의 유명 시사풍자잡지 『가르텐라우베(Die Gartenlaube)』는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10가지 대체의학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자연요법은 그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다.[그림 1][10] 자연치유운동은 의학계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으나, 세기말이 되면 크나이프 운동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양자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접점이 나타났다.
대체로 1836년 무렵 독일에서 출현한 자연요법(Naturheilkunde)이라는 용어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의학계에서도, 자연치유운동에서도 내놓고 있지 못한 형편이지만, 그 핵심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로 자연을 존중하는 삶의 방식을 중시하는 세계관 소유, 둘째로 물, 공기, 햇빛, 섭식 등 ‘자연스런’ 치료법 선호, 셋째로 건강, 질병, 치료의 본질에 대한 자체 원칙 보유가 그것이다(Rothschuh, 1975: 9-10). 이러한 원칙의 근간에 있는 사유는 이른바 ‘전체론(Holismus)’이다. 전체론에서는 몸의 모든 부분이 연관관계에 있으며, 그 일부에 생긴 결함은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전체론의 또 다른 요소는 몸과 마음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믿음이다. 즉 모든 정신적 장애는 신체 반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자연요법의 주장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나아가 개인은 자연의 법칙 및 사회규범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질병은 이 삼자 간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발생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자연요법의 논리적 전제는 개인·사회·자연 간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다양한 자연요법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랜 것은 수치료법이다. 서양에서 물의 치유효과에 대한 인식은 멀리 히포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는 종교적 의미가 여기에 덧붙여졌다. 17세기에 유럽에서는 히포크라테스적 사유가 부활했는데, 당시에는 이른바 사체액설과 관련하여 충분한 양의 물을 마심으로써 ‘불순한 체액을 희석시키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Uehleke, 2004: 131). 18세기 이래 냉수를 몸의 저항력을 키우기 위한 치료 목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영국과 독일, 네덜란드 등지에서 의사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독일의 경우 수치료법의 발전은 슐레지엔의 의사한 부자(Siegmund Hahn, 1664-1742; Johann Siegmund Hahn, 1696-1773)의 활동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들의 이론에서 주목할 점은 냉수요법을 요양소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활용하도록 권고했다는 것이다. 특히 아들 요한 지그문트 한의 저서 『신선한 물이 인간의 몸에 미치는 효과와 작용에 관한 학습(Unterricht von der Kraft und Wirkung des frischen Wassers in die Leiber der Menschen)』(1738)은 훗날 크나이프가 수치료법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크나이프 이전 19세기 독일 수치료법의 대표자는 외르텔(Eucharius Ferdinand Christian Oertel, 1765-1850)과 프리스니츠(Vincenz Prießnitz, 1799-1851)이다. 안스바흐의 김나지움 교사였던 외르텔이 냉수의 치료효과에 대한 부지런한 집필활동을 통해 수치료법을 이론화했다면, 이를 실제 치료에 적용함으로써 대중화한 인물은 프리스니츠였다.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의 농부였던 그는 1829년부터 그래펜베르크(Gräfenberg)[11]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수치료법과 땀치료법을 시행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치료법은 섭식, 운동, 빛, 공기 등 다양한 ‘자연치유’ 수단과 결합되었으며, 그래펜베르크는 농민층뿐만 아니라 귀족들과 중산층이 방문하는 유럽의 유명 요양지가 되었다. 그의 치료법에 대한 의학계의 관심은 1839년 한 해에만 120명의 의사들이 그래펜베르크를 찾았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Rothschuh, 1975: 72). 하지만 프리스니츠는 약이나 예방접종 같은 의학의 성과들을 거부했으며, 모든 질병은 유해물질이 누적됨으로써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프리스니츠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수치료법의 또 다른 주역인 라우쎄(J. H. Rausse, 1805-1848) 역시 약과 의사를 혐오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자연요법에 대한 의학계의 전반적인 불신을 초래했다. 프리스니츠의 주장은 훗날 자연요법을 ‘의학의 보조수단’으로 제시하는 온건한 입장을 표명했던 크나이프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수치료법의 선구자들이 사망한 1850년대에 이르러 자연치유라는 개념은 점차 대중에게 스며들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이 치료법을 둘러싼 찬반양론도 더욱 뚜렷해졌다. 비판자들은 이들이 근대의학의 성과들을 무시한다는 점을 공격했던 반면, 옹호자들은 자연스런 삶의 방식으로 회귀하는 것이야말로 근대화가 유발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반박했다. 각종 논란에도 불구하고 자연치유 관련 단체들은 점차 대중적 기반을 확보해 나갔고, 독일제국 시기에 이르러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1883년 발족한 자연치유 관련 총괄조직은 몇 차례의 조직개편을 거쳐 1900년 ‘자연스런 삶과 치유법을 위한 독일 동맹(Deutscher Bund der Vereine für naturgemäße Lebensund Heilweise)’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도 활동 중인 독일자연치유동맹(Deutsche Naturheilbund)의 전신인 이 단체는 1차 세계대전 전야인 1913년 885개 지부와 148,000명의 회원을 확보한 대중조직으로 성장했다(Krabbe, 1974: 144)[12].
그러나 개념상 상위에 있는 독일자연치유동맹의 회원이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1만 5천여 명으로 감소한 반면(Gerabek, et al., 2004: 1026), 자연치유운동의 일부이면서도 이와는 별도로 1897년 설립된 크나이프 동맹(Kneipp-Bund)은 16만 명을 웃도는 회원을 보유하는 독일 최대의 자연치유단체로 자라났다[13]. 이러한 역전현상의 바탕에는 ‘물의 의사(Wasserdoktor)’ 크나이프의 기억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3. ‘물의 의사’: 크나이프의 생애와 활동

제바스티안 크나이프는 1821년 5월 17일 슈바벤의 슈테판스리트(Stephansried)라는 농촌에서 가난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2세 때 가정형편 때문에 정규교육을 중단해야 했고, 당시의 관행대로 아버지의 직업을 따랐다. 훗날 자서전에서 그는 학업에 대한 열망이 거듭 무너졌던 소년 시절의 좌절감을 반복적으로 토로한 바 있다. 크나이프는 23세가 되어서야 먼 친척인 메르클레(Matthias Merkle) 신부의 후원 덕분에 딜링엔의 김나지움에 입학할 수 있었다. 1848년 가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딜링엔과 뮌헨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으나, 이미 그의 건강상태는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었고 이듬해 결핵 진단을 받았다.
이 암울했던 시기에 크나이프는 뮌헨의 왕립도서관에서 요한 지그문트 한이 1738년 집필하고 외르텔이 1833년에 새로이 펴낸 수치료법 안내서를 접하게 되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최악의 시기에 접했던 이 책이야말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진정한 새벽별[14]”이었다고 회상한다. 딜링엔으로 돌아온 그는 1849년 11월부터 도나우 강의 강물로 주 2-3회 냉수치료를 시작했으며, 그 밖에도 반신욕과 샤워법을 통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을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씩 적용하기 시작했고, 점차 이 치료법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크나이프는 1852년 8월 6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이후 보스, 비버라흐, 아우크스부르크를 거쳐 1855년 5월 2일 뵈리스호펜에 있는 도미니쿠스 수도원의 고해신부로 부임했다. 이는 크나이프뿐만 아니라 뵈리스호펜이라는 이름을 자연치유운동의 상징으로 만드는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현재 이 수도원의 일부는 크나이프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임 초기에 크나이프는 수도원 소속의 농지 경작은 물론 양조, 양봉, 목축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여 상당한 수익을 냈다. 그는 농업과 양봉에 관한 소책자들을 출간하기도 했다.
수도원의 세탁실에서 조금씩 마을 주민들과 병든 가축들을 치료하기 시작한 그는 “물이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보편적인 치료수단[15]”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으며, 그밖에도 허브와 식초 등을 보조수단으로 사용했다. 그의 치료법의 5대 지주는 물, 운동, 섭식, 허브, 심신의 균형으로 요약된다. 그가 한, 외르텔, 후페란트 같은 수치료법의 선구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자서전에서 그는 “책보다는 경험이라는 학교로부터 대부분의 치료법을 배웠다[16]”고 주장한다. 오늘날 크나이프 운동의 지지자들은 그의 치료법 가운데 냉수법은 10-15%에 불과하며 크나이프 요법의 2/3가 냉수와 온수의 병용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특별히 강조하는데, 이는 ‘경쟁자’인 프리스니츠 요법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인 듯하다.
크나이프는 치료소를 열고 환자를 보기 시작했지만,[그림 2] 처음 30여년 동안 그의 영향력은 지역사회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뵈리스호펜 성 유스티나 성당의 주임사제가 되고(1881)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을 시작한 1887년 이후 그는 순식간에 대서양 양편에서 유명해졌다. 그의 명성을 확립한 저서는 『나의 수치료법』(1887)과 『이렇게 살아야 한다!(So sollt ihr leben!)』(1889)이다. 30년이 넘는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나의 수치료법』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치료제로서의 물의 효과, 2부에서는 젖은 시트법, 목욕법, 증기욕법, 샤워법, 마찰, 붕대법 등 다양한 수치료법, 3부에서는 증상에 따른 수치료의 다양한 적용법에 대해 설명한다.
질병의 원인과 치료에 대한 크나이프의 입장은 단순하다. 모든 질병은 혈액순환의 문제에서 기인하며, 이를 치료하는 물의 기능은 3가지, 즉 병의 원인이 되는 균을 ‘용해’하고, 이를 체외로 ‘배출’시키며, 신체를 ‘단련’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질병에 대한 그의 전체론적 입장은 “육체는 영혼의 보금자리이며, 양자는 서로 종속되어 있다. 사지의 일부에 결함이 생기면 몸 전체가 아프고 정신에 타격을 준다[17]”는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흔히 크나이프 요법은 냉수요법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오히려 지나치게 오랜 냉수의 사용이 건강을 해친다고 경고하면서 냉수와 온수의 적절한 병용법을 증상별로 상세히 서술한다. 초판본 5백 부로 시작된 『나의 수치료법』은 곧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크나이프 생전에 62쇄, 1921년까지 90쇄가 발간되었다[18].
바움가르텐에 따르면 크나이프 요법을 기존의 수치료법과 구분하는 특징은 ‘짧고 순한 물의 사용’과 가정에서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샤워법(Güsse)의 도입이다[19]. 생애 말년으로 갈수록 크나이프는 초 단위의 냉수요법으로도 대부분의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크나이프 요법의 두 번째 특징은 수치료법을 보완하는 허브와 식초의 사용이다. 세 번째 특징은 치료 후 젖은 몸을 닦지 않고 자연스럽게 체온을 올리도록 한 것인데, 이는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Fey, 1954: 10) 자연요법의 또 다른 사상적 지주인 생기론(Vitalismus)적 사유에 근거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학적 차원을 넘어 크나이프의 생활개혁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 준다. 여기에서 그는 의식주와 수면 등 건강을 위한 폭넓은 조언을 하고 있으며 특히 빛과 공기가 심신의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한다[20]. 이후의 책들에서 그는 혈액순환을 위한 최고의 단련법으로 ‘맨발로 걷기’를 제시했으며, 이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1892년부터는 샌들 착용을 권장하기도 했다. 이른바 ‘크나이프 샌들’은 밀짚모자와 더불어 크나이프 지지자들의 상징이 되었다. 크나이프가 질병과 그 치료, 건강법에 관해 저술한 책은 이 두 권의 대표작과 자서전 외에도 네 권이 더 있으며[21], 그는 이 모두를 “고통받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단순하고 꾸밈없는 문체로[22]” 서술했다.
크나이프의 생애 마지막 10년은 그의 삶에서 가장 열정적인 시기로, 엄청난 횟수의 강연과 여행으로 채워졌다. 여기에는 1890년 무렵부터 도처에서 결성되기 시작한 크나이프 단체들의 초청이 상당한 몫을 차지했다. 1890년부터 1896년까지 크나이프는 독일과 유럽 전역에 걸쳐 총 32차례 강연 여행을 했고, 도합 백만여 명의 청중을 동원했다(Klofat, 2009: 70). 그의 여행지는 빈, 취리히, 부다페스트, 잘츠부르크, 파리 등 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망라한다. 1894년에는 로마에서 교황 레오 13세를 접견하고 ‘몬시뇨르(Monsignor)’ 칭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그가 가는 곳마다 새로운 크나이프 협회가 만들어졌다. 뵈리스호펜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는 일요일과 휴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5시에 환자들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계속했다(Waibel, 1955:85-7).[그림 3]
크나이프는 1897년 6월 17일 76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방광과 장 쪽에 생긴 암과 비슷한 종양으로 발표되었지만, 크나이프가 자신의 치료법 외의 모든 외과수술을 거부했기에 정확하지는 않다. 사망 나흘 뒤에 거행된 장례식에는 6천여 명의 조문객들이 모였으며 그들을 수송하기 위해 뵈리스호펜까지 특별열차가 편성되었다. 그의 관은 뵈리스호펜 시립묘지 중앙에 설치된 영묘[23]에 안치되어 있다.

4. 근대의학과 자연치유운동 사이에서: 크나이프 요법의 수용

독일에서 의사 집단의 전문적 권위가 강화되고 의료 활동의 중요성이 사회적 차원에서 각인되는 과정은 184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서히 진행되었다(Stollberg, 1988: 287-8). “사회의 의학화”(Regin, 1995)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의학사상의 키워드로는 1873년 독일제국에서 의무화된 천연두 예방접종, 1883년 도입된 의료보험, 1906년 주트호프(Karl Sudhoff, 1853-1938)가 라이프치히에 세운 세계 최초의 의학사 연구소 등이 있다. 자연과학의 발전에 입각한 근대의학으로의 이행기였던 이 시기는 동시에 수치료를 비롯한 자연요법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얻게 된 때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양자 간의 긴장과 갈등은 불가피했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특히 질병의 원인에 대한 견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연치유운동은 심신의학(psychosomatische Medizin)의 입장에서 질병의 근원을 추적하면서, 19세기 중반 피르호(Rudolf Virchow, 1821-1902)의 세포병리학 수립 이래 질병을 몸의 각 기관, 장기, 심지어는 세포 단위로 특정화하게 된 의학계를 비판했다(Huerkamp, 1986: 168-9). 같은 시기에 진료 관행이 왕진에서 내원 방식으로 바뀐 것 또한 의사들로 하여금 환자의 생활방식 전체를 관찰하기보다는 병의 특수한 증상에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1880년대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제도 도입 이후 전문의의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빈민층은 이렇듯 ‘건조해진’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부담스러워했다. 19세기 후반에 자연요법이 중간계층뿐만 아니라 하층민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게 된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러한 사정에 근거한다.
1880년대 이후 독일 전역에서 성장한 각종 자연치유 관련 단체들이 의학계에 보였던 회의적인 태도는 이 시기에 탄생한 ‘학교의학(Schulmedizin)’이라는 용어에서도 나타난다. 19세기 중엽 자연과학에 기초하여 발전한 새로운 의학[24]이 환자들의 실태에 기반을 두지 않음을 은근히 비판했던 이 용어는 당시 의학계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던 동종요법 지지자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의학계에 대항하는 ‘투쟁 개념’으로 널리 확산되었다(Wölfing, 1974; 157-8). 사실상 자연치유운동 안에는 물, 햇빛, 공기 같은 자연의 치유력에 공감하는 의사들로부터 극단적 채식주의자와 생식예찬론자들에 이르는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전 ‘자연스런 삶과 치유법을 위한 독일 동맹’이 자연요법의 계몽과 의료보험 적용 및 치료허가 획득은 물론 의무적 예방접종 폐지를 목표로 제시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볼 때(Krabbe, 1974: 143), 이 운동과 의학계 사이의 근본적인 간극은 좁히기 힘든 것이었다.
의학계와 자연치유운동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난 것은 ‘무면허 의료행위(Kurpfuscherei)[25]’ 논쟁에서였다.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1869년 5월 25일 북독일연방 영업조례 제29조가 영업의 자유 차원에서 무면허 의료행위 금지를 폐지하면서부터였다. 계몽된 인간은 자신의 교양 및 판단력에 따라 치료자의 능력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한 이 조항은 독일제국의 성립 후 1872년 독일 전역으로 확대 적용되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1869년 당시 피르호를 비롯한 베를린 의사협회의 대표자들이 이 조항의 도입을 요구했었다는 점이다[26]. 그에 따르면 자격증 미소지자들도 ‘의사’ 또는 그에 준하는 호칭을 내걸지만 않는다면 자유롭게 환자를 진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무면허 의료행위가 범람하게 되자, 1880년대부터 독일 의사회는 이를 금지하는 법안을 재차 도입하도록 정부에 반복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Gerabek, et al., 2004: 815; Regin, 1995: 272).
초창기에는 주로 동종요법 쪽을 겨냥했던 의학계의 무면허 의료행위 비판이 본격적으로 자연요법을 향하게 된 것은 1890년대의 일인데, 이는 크나이프 요법을 비롯한 자연치유운동의 점증하는 상승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19세기 후반에 피르호가 확산시킨 공중보건과 위생 분야에서 자연요법이 ‘경쟁자’로 떠오르고 변호사나 교사, 심지어 일부 의사들까지도 이 운동에 동조하게 되자, 이른바 “자연과 자연과학의 대결”(Jütte, 1996: 29), 즉 자연주의적 사유의 대변자들과 근대의학 사이의 논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독일 의사회는 1900년 ‘무면허 의료행위 투쟁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조직했고, 3년 뒤 베를린에서 ‘독일 무면허 의료행위 투쟁협회(Deutsche Gesellschaft zur Bekämpfung des Kurpfuschertums)’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곧 다른 도시들로 확산되었고, 자연치유운동과의 대결은 언론과 출판, 대중강연을 통한 상호 비방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크나이프 또한 의학계로부터 여러 차례 무면허 의료행위로 인한 비판대상이 되었다. 뵈리스호펜에 부임하기 전인 1853년 그는 한 약사로부터 무허가 치료 혐의로 고발당한 일이 있으며, 1854년에도 콜레라에 걸린 하녀에게 수치료를 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물었다. 이 사건은 훗날 그의 자서전에서 빈민들을 위한 치료의 필요성을 각성하게 된 계기로 등장하며[27], 대중적으로는 ‘콜레라 의사’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가 되었다. 1866년에는 슈미트(Schmidt)라는 튀르크하임의 의사가 12년 동안 무면허 의료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그를 고발했다[28]. 결국 무혐의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이 문제는 크나이프 요법의 신뢰도에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무허가 치료사라는 비난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를 길게 서술하며, 자신은 오로지 무해한 허브와 물만 사용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29]. 크나이프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1891년에도 이 지역의 위생담당기관은 “이곳만큼 무면허 의료행위가 번성한 곳은 없다. [누구인지] 굳이 이름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Betz, 2011: 92)고 보고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비난에 대한 크나이프의 첫 번째 대응은 자연치유운동의 주류와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사실 원칙적으로 보자면 그는 일반적인 자연치유론자들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단 한 번도 의학의 성과들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약품 사용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자연치유 관련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았고 채식주의자도 아니었으며, 술과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금주와 금연을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충분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저렴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자연치유운동의 주류로 하여금 크나이프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극단적 자연요법 지지자들은 크나이프의 허브 사용이 모든 종류의 약품 사용을 기피하는 자연치유운동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했다. 특히 프리스니츠를 ‘의학의 코페르니쿠스’로 칭송했던 열렬한 지지자들은 크나이프 요법이 독창적이지 않다고 공격했다. 그 선봉장은 프리스니츠의 사위이자 후계자인 리퍼(Hans Ripper, 1830-1912)로서, 전단 배포와 신문 기고 등 다양한 방법으로 크나이프에게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리퍼는 1893년 9월 크나이프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나의 수치료법』이 프리스니츠를 정당하게 언급하지 않았으며 오스트리아에서 행한 강연에서 ‘선구자’의 업적에 대해 침묵했음을 비난하면서, 크나이프 요법이 ‘완전한 모방’이라고 단언했다(Helfricht, 2006: 292-4)[30].
크나이프의 사후에도 논란은 그치지 않았는데, 이러한 상황은 크나이프의 대중적 인기에 대한 자연치유운동가들의 의구심에서 온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게다가 크나이프가 의학계와 대립하지 않으려고 했던 태도는 자연치유운동가들에게 ‘배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나이프가 거둔 놀라운 성공의 요인 중 하나는, 당대인들의 평가에 따르면, 성직자이자 의사로서 영혼과 육체의 치유자라는 이중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킨 데 있었다[31]. 오늘날의 관점에서 평하자면, 환자들에게 보인 탁월한 감정이입 능력이야말로 그의 성공비결이었다(Pörnbacher, 2004: 84).
크나이프가 1890년대 이후 엄청난 대중적 명성을 확보하자, 의학계 일각에서는 그가 젊은 시절 결핵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오로지 환자를 끌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1897년 그가 사망한 직후, 크나이프의 지지자들이 그의 병력을 입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체를 부검 의뢰하는 해프닝마저 벌어졌다(Waltenberger, 2013: 56). 다른 한편 크나이프의 허브 사용은 ‘무면허 의료행위’에 반대하는 의사들로부터, 크나이프를 비롯한 자연치유운동 역시 ‘약품’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증거로 언급되기도 했다(Regin, 1995: 325).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크나이프는 자신을 조롱하거나 최소한 무시하는 의학계의 반응에 직면해야 했다. 1890년 뮌헨 의대 교수 침센(Hugo von Ziemssen, 1829-1902)의 “크나이프 식 주문 따위에 흥분할 필요는 없다. 그 따위는 무시하면 된다”(Betz, 2011: 104)는 발언은 당시 의학계 주류의 입장을 대변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말은 크나이프 요법이 대중적 호응을 얻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허가 의료행위’라는 비난에 대한 크나이프의 두 번째 대처방법은 보다 적극적인 것으로, 전문가로서 의사들의 능력을 존중하고 자신의 치료법에 공감하는 의사들과 협진하는 것이었다. 그는 『건강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한 유언(Mein Testament für Gesunde und Kranke)』(1895) 서문에서 점점 더 많은 의사들이 자신의 치료법에 관심을 갖고 뵈리스호펜을 찾아온다고 밝힌 바 있다[32]. 크나이프는 자신이 기존의 의학적 방향을 거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직접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은 의사에게 보냈으며 “의학계와 경쟁하려 한 적이 없다”고 반복적으로 강변했다[33]. 1887년부터 그는 상담시간에 의사들과 동석하기 시작했는데, 베른후버(Friedrich Bernhuber), 클라인슈로트(Franz Kleinschrod), 타케(Max Tacke), 베르밍하우젠(Karl Werminghausen)이 그들이다. 이들 간의 역할분담은 의사들이 병을 진단하면 크나이프가 치료법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크나이프의 마지막 ‘동업자’이자 의학계와 크나이프 운동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담당한 의사는 앞에서 언급한 바움가르텐이다. 1892년 8월부터 크나이프와 함께 일했던 그는[그림 4][34] 최초의 크나이프 전기를 저술했으며, 2천여회에 이르는 크나이프의 강연문을 7권으로 편집했다. 이로써 바움가르텐은 크나이프 요법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고 그의 업적을 알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훗날 그는 크나이프 사후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에서, 크나이프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문가 집단, 즉 의사들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했다.
1894년 2월 2일 이른바 ‘크나이프 의사’ 25명이 바움가르텐의 주도 하에 ‘국제 크나이프 의사협회(Internationaler Verein Kneipp’scher Ärzte)를 결성했다[35]. 이 조직의 존재는 자연치유운동 측을 더욱 분노하게 했으며, 바움가르텐은 동료 의사들에게 “돌팔이 의사들의 조력자”로 매도당했다(Betz, 2011: 48, 56). 크나이프의 사후에도 그는 뵈리스호펜에서 진료, 강연, 저술활동을 계속함으로써 크나이프 요법의 확산에 이바지했으며, 이를 의학의 성과들과 접목시키려고 노력했다[36]. 바움가르텐과 1899년부터 협업했던 의사 숄츠(Adolf Scholz, 1870-1952)까지를 일명 ‘1세대 크나이프 의사’로 분류하며, 이들은 크나이프 요법이 의학계에 점차 수용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의학계와 자연치유운동의 주류 양쪽으로부터 견제를 당했던 크나이프 요법은 1896년 처음으로 의학교과서에 수록되었다. 하지만 의학계 주류의 태도는 여전히 크나이프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바루흐(Simon Baruch)라는 의사는 수치료법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크나이프 요법에 대한 불신을 표명했다(Waltenberger, 2013: 85-6).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점차 바뀌고 있었다. 1899년 빈 의대에 자연요법 전공 최초의 교수직이 설치되어 빈터니츠(Wilhelm Winternitz, 1834-1917)가 임명되었으며, 1900년 베를린 의대를 시작으로 괴팅엔, 예나, 슈투트가르트 의대에 수치료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의 정점은 1913년 3월 개최된 자연요법 관련 학회에서 의사들이 수치료법을 정식으로 인정한 것이었다(Regin, 1995: 300-1; Helfricht, 2006: 297).
독일에서 자연요법이 대학교육에 정식으로 포함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1920대에 베를린 대학교에서는 쇠넨베르거(Franz Schönenberger, 1865-1933)가 최초로 자연요법 전공 교수가 되었다. 1925년에는 예나 대학교에도 동일한 전공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자연요법이 조금씩 의학계에 용인된 것과는 별개로, 크나이프 요법이 정규 의학교육과정에 진입하기란 쉽지 않았다. 1892년 크나이프는 후원자인 바이에른의 섭정대공 루이트폴트에게 바이에른 내 3개 의과대학에 수치료 전공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의학계의 반대에 부딪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크나이프가 제시한 단련법이 점차 예방의학과 재활의학의 방법으로 평가받기 시작하고 1920년대 이후 독일에서 의사들의 직업적 안정성이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면서, 크나이프 요법에 대한 의학계의 태도도 조금씩 유연해졌다. 1923년 6월 10일 학생들과 바트 뵈리스호펜을 답사했던 뮌헨 의대 교수 뵘(Gottfried Böhm)은 의학자들이 크나이프 요법에 냉담하거나 거부하는 시기는 지나갔다고 선언했다(Waltenberger, 2013: 95). 현재 ‘제바스티안 크나이프 연구소’가 주관하는 크나이프 요법 프로그램은 의사들을 위한 평생교육과정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5. 크나이프 운동의 대중화

크나이프가 제시했던 저렴하고 손쉬운 ‘대안’은 의학계보다도 일반 대중의 기억에 더욱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자연치유운동 안에서 프리스니츠가 당대에 거둔 성공에 비해 사후 영향력이 급감했음에 반해 크나이프가 독일 기억문화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크나이프의 생전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집필한 수치료법 관련 책들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1921년까지 2백만 부가 넘게 팔렸으며, 1890년부터 시작한 강연 여행은 그의 이름을 유럽 곳곳에 각인시켰다.
크나이프 요법의 명성이 독일의 경계를 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두 여성이 있다. 뵈리스호펜 출신인 바이벨(Vera Waibel, 1866-1900)은 탁월한 외국어 구사능력을 바탕으로 외국인 환자들의 통역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해외에 크나이프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해외 잡지에 크나이프 운동에 관해 기고하고 1893년 『뵈리스호펜 신문(Wörishofener Zeitung)』을 창간했으며 파리에서는 『크나이프주의자(Le Kneippiste)』를, 베른에서는 3개 국어로 『위생(L’Hygiène)』을 발행했다(Waibel, 1955: 89). 한편 1893년 환자로서 뵈리스호펜을 찾았던 슈바이처(Louise Marie Schweitzer)는 1896년 파리에서 크나이프 강연집을 출간했으며, 뉴욕 이주 후 『독일-미국 크나이프 회보(Deutsch-Amerikanisches Kneipp-Blatt)』를 발행했다.
하지만 크나이프 요법이 ‘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체는 따로 있었다. 전장에서 서술한 국제 크나이프 의사협회가 전문가 집단에게 끊임없이 구애했다면, 크나이프 요법의 확산을 목표로 설립된 일명 ‘크나이프 협회(Kneipp-Verein)’들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했으며 따라서 그 파급력도 컸다. 최초의 크나이프 협회는 1891년 9월 15일 ‘크나이프 의사’ 클라인슈로트와 출판업자 아우어(Ludwig Auer)의 발의로 뵈리스호펜에서 발족했으며 크나이프 자신이 명예회장직을 맡았다. 창립 당시 86명의 회원으로 출발했던 이 단체는 뵈리스호펜을 찾는 환자들의 숫자가 급증함에 따라 숙소 알선과 진료시간 조정의 편의를 제공했으며, 후에는 언론을 상대하는 업무도 담당했다. 그 기관지인 『크나이프 회지(Kneipp-Blätter)』는 운동의 확산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매체였다.
크나이프의 명성이 널리 전파됨에 따라 1890년대에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발족한 관련 단체들은 1897년 8월 25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크나이프 동맹(Kneipp-Bund)으로 통합되었다. 창립 당시 동맹은 45개 지부를 확보하고 있었다. 동맹은 크나이프 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뵈리스호펜의 협회와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대중운동으로서의 크나이프 운동은 두 조직으로 분리 전개되었다. 하지만 몇 차례에 걸친 통합 시도가 무산되고 1차 세계대전 와중에 양쪽 모두 회원의 숫자와 재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자, 마침내 동맹과 협회는 1921년 11월 뵈리스호펜에 본부를 둔 ‘크나이프 동맹’으로 단일화되었다. 통합 시점에서 동맹은 66개 지부와 8천 9백여 명의 회원을 거느렸고, 크나이프 요법을 확산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28년 동맹은 283개 지부와 42,243명의 회원을 보유하게 되었다(Waibl, 2004: 111; Waltenberger, 2013: 34)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크나이프 동맹의 성장 속도는 독일자연치유동맹의 그것을 추월했으며 크나이프 의사협회와의 협조도 빈번해졌다. 회장 루츠(Josef Lutz)는 탁월한 조직력의 소유자로, ‘크나이프 의사’들을 강연회에 초빙하고 치료사 양성과정에 참여시켰다. 대중운동으로서 크나이프 운동의 성공은 생전의 크나이프가 그러했듯이, 이처럼 전문가들과의 연대를 택한 전략에도 상당부분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대중에게 각인된 크나이프의 이미지는 그의 생존 당시부터 상품화된 무수한 입욕 및 건강 관련 제품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입욕제로부터 ‘개혁복(Reformkostüme)’이라고 불렸던 간소한 의복, 연고, 커피, 신발, 심지어 ‘크나이프 빵’으로 통용되던 통곡물빵에 이르는 다양한 상품들에 붙여졌다. 크나이프는 자신의 이름이 지나치게 상업화되는 것을 경계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매체, 즉 주식회사와 결합함으로써 결정적으로 확고해졌다. 1891년 뷔르츠부르크의 약사 오버호이슬러(Leonhard Oberhäusler)가 세운 크나이프 회사가 그것으로, 이 회사는 크나이프의 이름을 상표로 등록하고 특허를 취득했다[37]. 한편 그와 연관된 또 하나의 대표적인 상품은 ‘크나이프 맥아커피’이다. 뮌헨의 카트라이너(Kathreiner) 주식회사가 1892년 상품화한 이 대용 커피는 곧 회사의 주력상품이 되었다. 크나이프는 1890년 메밍엔의 한 속옷 회사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기도 했다. 1895년 뵈리스호펜을 찾은 어느 방문객은 맨발 또는 ‘크나이프 샌들’을 신은 남녀들과 ‘크나이프 속옷’, ‘크나이프 커피’를 파는 가게들로 가득한 거리의 인상을 『가르텐라우베』에 기고한 바 있다[38].
현재 독일에서 크나이프 기억문화의 면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억의 장소’는 뵈리스호펜이다. 뵈리스호펜의 ‘크나이프 도시’로의 성장은 『나의 수치료법』 출간 이후 이곳을 찾는 환자들이 쇄도하면서 부족해진 치료소 건립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뵈리스호펜에 크나이프 요법을 시행하는 치료소가 최초로 세워진 것은 1888년의 일이었다. 1890년에는 크나이프의 발의로 성직자 치료소가 신설되었다. 1889년부터 크나이프가 사망하는 1897년까지 뵈리스호펜에는 무려 132개의 호텔 겸 치료소가 신축되었는데, 이는 점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다[39]. “거대한 세계가 작은 마을로 왔다”(Wolf·Burghardt, 1965: 77). 이로써 평범한 농촌이었던 뵈리스호펜의 외관은 몇 년 만에 극적으로 변모했다. 1890년대에 크나이프가 뵈리스호펜에 세운 대표적 치료소는 제바스티아네움(Sebastianeum, 1891), 아동보호소(Kinderasyl, 1893), 크나이피아눔(Kneippianum, 1896)으로, 이 세 기관은 크나이프 운동의 지주가 되었다[40].
쇄도하는 환자들의 물결은 치료소 외에도 다른 부대시설을 요구했다. 오늘날 이 도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드넓은 치료공원(Kurpark)은 1890년에 첫 선을 보인 후 점차 확장되었다. 처음 크나이프의 후원자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의 이름이 붙여졌던 이 공원에는 크나이프의 단련법을 직접 시행해 볼 수 있는 시설들이 있다. 1895년 개관한 아르티스(Artis) 박물관은 숙박객들에게 음악회, 전시회, 공연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같은 목적으로 스케이트장, 테니스장, 카지노, 레스토랑 등이 들어섰다. 건설 열풍의 정점은 철도 부설이었다. 종전에는 북쪽으로 5㎞ 떨어진 튀르크하임에서 우편마차 또는 도보로 이동해야 했던 환자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크나이프 자신이 철도회사를 설립했으며, 그 결과 1896년 8월 15일에는 튀르크하임과 뵈리스호펜을 잇는 단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같은 해 2월 7일에는 점증하는 전력수요로 인해 발전소가 설립되었다.
크나이프 사망 이후 뵈리스호펜 곳곳에는 바움가르텐과 크나이프 협회의 주도로 크나이프 기념물들이 속속 들어섰다. 1897년 가을 치료공원 북동쪽에 ‘크나이프 분수’가 완성되었고 1899년 크나이피아눔 전면에 그의 대리석 흉상이 설치되었으며, 1903년에는 제바스티아네움 인근 광장에 거대한 동상이 건립되었다. 그밖에도 뵈리스호펜은 물론 독일 도처의 거리와 광장에 크나이프의 이름이 붙여졌다. 1915년 5월 27일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3세는 뵈리스호펜에 크나이프 요법을 상징하는 물과 자연친화적 생활방식을 의미하는 보리수 가지로 이루어진 문장을 하사했다. 크나이프가 40년 넘게 자연요법의 대가로서 활동했던 이 마을은 1920년 3월 6일 바트 뵈리스호펜으로 개명되었다. 온천이 없는 지역임에도 붙여진 ‘바트’라는 단어는 ‘물의 의사’ 제바스티안 크나이프의 기억을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흔적으로, 지금까지도 독일과 세계에서 수치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러 모으고 있다.

6. 맺음말

크나이프 요법과 그 수용의 역사는 19세기 후반 의학계와 자연치유운동 사이의 복잡미묘한 긴장관계를 압축한다. 그것은 수치료법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요법의 발전과 넓게는 생활개혁운동의 배경 속에서 탄생했으면서도, 의학계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자연치유운동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길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크나이프는 의도치 않게 자연치유운동을 개혁했고, 의학계와의 마찰을 넘어 그 안으로 접근했다. 이로써 크나이프 요법은 자연치유운동의 과도기 내지는 변혁기를 불러오게 되었다. 제3제국 시기에 크나이프 동맹이 독일민족건강동맹(Deutsche Volksgesundheitsbund)으로 ‘획일화’되고 크나이프가 ‘독일 치료법의 개척자’로 예찬받았던 전력(Heyll, 2006: 259) 때문에 전후 동독에서 크나이프 운동은 단절되었지만, 재통일과 더불어 다시금 독일 전역에서 신속하게 뿌리를 내렸다.
크나이프 요법의 궁극적인 성공 비결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그 것이 근대의학의 성과에 배타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크나이프 요법이 대중적 호응을 얻었던 19세기 말은 자연치유운동의 상승기인 동시에 ‘자연과학적’ 의학이 전통의학을 극복하고 근대의학의 체계를 수립하는 시기였으며, 따라서 양자 간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이 갈등은 반세기가 넘게 지속된 ‘무면허 의료행위’ 논쟁으로 폭발했는데, 크나이프는 의학계 안에 자신의 동조세력을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극복했다. 두 번째는 크나이프 요법을 지지하는 대중운동과 의학계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크나이프 사망 직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 빚어진 갈등은 대중조직인 크나이프 협회와 동맹, 그리고 전문가 집단인 크나이프 의사협회가 협조하게 됨으로써 점차 잦아들었다. 크나이프 요법이 다른 자연치유요법을 압도할 수 있었던 마지막 이유는 상업적 대중화에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크나이프 생전에 시작된 크나이프 요법과 상업자본의 결합은 크나이프에게는 그의 치료법을 확산시키는 경제적 토대가 되었고,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름을 독일 기억문화에 각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찍이 프레콧(Jonas Frecot)은 독일 생활개혁운동을 교양시민층의 이상주의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도 아닌, 복고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제3의 길”로 정의한 바 있다(Frecot, 1976: 138-9). 이러한 평가가 나왔던 1970년대는 서독이 68운동 이후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야기한 문제들에 대한 전면적인 대안을 모색하면서, 독일 역사의 생태주의적 기원을 탐구했던 시기였다. 크나이프 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의학의 근대화가 초래한 의사와 환자 간의 거리를 자연스런 삶으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메우면서도 근대의학의 성과들을 부정하지 않았고, ‘사회개혁’의 목소리가 드높았던 시기에 ‘자기개혁’의 가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자조’를 중시했던 근대의 일부이기도 했다. 따라서 크나이프 운동은 생활개혁운동 일반이 그러하듯이 과거지향과 미래지향을 동시에 내포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지닌다. 그럼에도 크나이프 요법이 여전히 대중적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이유는 특유의 온건한 사회비판과 대안 제시에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 운동의 모태가 된 근대 산업사회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현 시대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Notes

1) Sebastian Kneipp, Meine Wasser-Kur (Kempten: Verlag der Jos. Kösel’schen Buchhandlung, 1887). 대다수의 크나이프 관련 문헌은 초판본 간행년도를 서문의 날짜를 기준으로 1886년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자이츠(Reinhard H. Seitz)는 아우크스부르크 시립도서관에서 발견한 판본을 근거로 이를 1887년으로 정정했다(Seitz, 2004: 123-4). 이 글에서는 함부르크의 제베루스(Severus) 출판사에서 2012년 간행한 영인본을 참조했다.

2) 3장 내용 및 각주 [21] 참조.

3) Alfred Baumgarten, Sebastian Kneipp, 1821-1897. Biographische Studie (Berlin, 1898). 이하 제베루스 출판사의 2015년도 영인본을 참조했다.

4) 리베나이너(Wolfgang Liebeneiner)가 감독한 〈제바스티안 크나이프: 위대한 생애(Sebastian Kneipp: Ein großes Leben)〉(1958)는 오래된 작품임에도 현재 시중에서 〈제바스티안 크나이프: 물의 의사(Sebastian Kneipp: Der Wasserdoktor)〉란 제목으로 유통되고 있다. 그밖에도 그라프(Bernhard Graf)가 감독한 두 편의 기록영화 〈제바스티안 크나이프와 그 시대(Sebastian Kneipp und seine Zeit)〉(1997)와 〈‘물의 의사’의 무죄판결, 크나이프 재판과 그 결과(Freispruch für den “Wasserdoktor”, Die Kneipp-Prozesse und ihre Folgen)〉(1998)가 있다.

5) 1938년에 처음 나온 이 소설은 1994년까지 12판이 발간되었다.

6) 환경사가 위쾨터(Frank Uekötter)는 1980년대 이래 역사서술의 화두가 된 ‘기억의 장소’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생태학적 기억의 장소(Ökologische Erinnerungsorte)’ 개념을 제창했다. 발텐베르거의 연구는 그 프로젝트의 일부이다.

7) ‘생활개혁’이라는 용어 자체는 1896년에 처음 등장했으나, 여기에 해당되는 사상 및 운동의 본격적인 출현은 대략 1880년대로 소급할 수 있다.

8) 바를뢰지우스(Eva Barlösius)는 자연치유운동/생활개혁운동을 북동부, 도시민 중심의 운동으로 규정하지만, 이는 다분히 프로테스탄트-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역사서술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Barlösius, 1996: 217). 크나이프 운동의 사례는 그의 주장에 대한 완벽한 반례를 제시한다.

10) 그림의 인물들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각각 대증요법, 동종요법, 광천요법, 전기요법, 냉수요법, 채식주의, 종교적 기적요법(루르드의 성모상), 민간요법, 약초요법, 자연요법을 상징한다.

11) 현재 체코의 예제닉(Jesenik)을 말한다.

12) ‘동맹’은 자체 출판사를 갖추었고 기관지 『자연의사(Der Naturarzt)』를 발행했다. 이 잡지의 발행부수는 1906년을 기준으로 14만 부를 넘었다. ‘독일자연치유동맹’으로 개칭한 것은 1945년의 일이다.

13) 크나이프 동맹 웹사이트, https://www.kneippbund.de/wer-wir-sind/historie-sebastian-kneipp/. 검색일: 2016. 7. 27.

18) 그밖에도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헝가리어, 뵈멘어, 폴란드 어로 번역되는 등 유럽에서 크나이프 돌풍을 일으킨 이 책은 자연요법에 관한 책 중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꼽힌다. 한국어판은 2010년에 출간되었다.

19) Baumgarten, Sebastian Kneipp, p. 91ff.

20) 예컨대 그는 몸을 옥죄지 않는 편안한 옷이 건강에 미치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모든 옷은 자신이 입는 사제복처럼 어깨에 걸쳐서 몸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아야 하며, 가장 좋은 옷은 직접 짠 옷감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크나이프의 견해는 복장개혁에 대한 빌헬름 제국 시기 생활개혁운동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책에는 자녀교육에 대한 조언도 담겨 있는데, 주로 건강상의 조언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당시 등장했던 개혁교육학의 주장과도 유사하다.

21) Sebastian Kneipp, Kinderpflege in gesunden und kranken Tagen (Donauwörth: Adriane Fach Verlag, 1891); Rathgeber für Gesunde und Kranke (Donauwörth: Auer, 1891); Mein Testament für Gesunde und Kranke (Kempten: Kösel-Verlag, 1895); Codizill zu meinem Testamente für Gesunde und Kranke (Kempten, 1896).

22) Kneipp, Mein Testament für Gesunde und Kranke, p. 6.

23) 영묘는 1937년 크나이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고, 1987년 6월 17일 크나이프 사망 90주기를 맞아 재정비되었다.

24) 피르호는 1873년 비스바덴에서 열린 의사들과 자연과학자들의 공동 학회에서 “자연과학적 방법이 의학에 도입되면서 모든 사람들의 머리와 말과 생각에 박힌 2천년 된 전통이 무너졌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의학계의 ‘패러다임 전환’이 그만큼 어려웠던 당시 상황을 반증한다(Jütte, 1996: 28).

25) 직역하면 ‘돌팔이 치료행위’라는 비하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단어는 의과대학에서 전문적 수련을 받지 않았거나 해당 국가자격증이 없는 사람들의 치료행위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여기에는 민간요법, 동종요법, 자연요법 등을 사용하는 치료사들과 산파 및 간병인, 대학 과정을 거치지 않은 치과의사, 외과의를 겸한 이발사, 안경사, 약사, 최면술사, 마사지사 등의 준 의료행위가 포함되었으나, 엄격한 개념정의는 어려웠다. 1869년의 영업조례에 따르면 법적으로 자격증을 갖춘 의사에게만 허용된 의료행위는 예방접종 정도였다.

26) 이는 종래의 무허가 의료행위 금지조치가 유명무실했던 경험 외에도 의료행위에 대한 국가 간섭을 거부하고 빈민층에 대한 무료 치료의 의무를 종식시킴으로써 업무 부담을 경감시킨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바탕으로 했다.

27) Kneipp, Aus meinem Leben, p. 24.

28) Baumgarten, Sebastian Kneipp, p. 78.

29) Kneipp, Aus meinem Leben, pp. 27-30.

30) 이러한 비판은 사실이 아니다. 크나이프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서문에서 프리스니츠의 이름을 언급한 바 있다. Kneipp, So sollt ihr leben!, p. Ⅵ. 그러나 일부 프리스니츠 지지자들은 지금까지도 크나이프가 프리스니츠의 그늘에서 활동했을 뿐이라고 비난한다(Sauer, 1999: 96-7).

32) Kneipp, Mein Testament für Gesunde und Kranke, p. 10.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세계 각지에서 뵈리스호펜을 찾은 의사들은 310명에 이른다. 나라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독일(134), 오스트리아-헝가리(75), 스위스(23), 프랑스(14), 미국(14), 러시아(12), 이탈리아(7), 스웨덴(7), 영국(7), 네덜란드(4), 스페인(4), 벨기에(4), 노르웨이(3), 루마니아(3), 덴마크(1), 포르투갈(1), 불가리아(1), 룩셈부르크(1), 인도(1), 오스트레일리아(1). 크나이프 박물관 전시내용 참조. 확인일: 2016.7.17.

33) Kneipp, Meine Wasser-Kur, p. Ⅲ.; Kneipp, So sollt ihr leben, p. Ⅷ.

34) 1895년 뮌헨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된 자우터(Georg Sauter)의 〈크나이프 신부의 진료(Sprechstunde bei Pfarrer Kneipp)〉는 크나이프가 바움가르텐 및 다른 의사들과 함께 목발을 짚은 소년을 진료하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환자의 어머니와 상담하고 있는 그림 왼쪽 세 번째 인물이 바움가르텐이다. 오른쪽 끝의 인물은 1892년 10월부터 크나이프의 조수 역할을 맡았던 사제 라일레(Max Reile)로, 훗날 크나이프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바움가르텐과 경쟁했다.

35) 이 단체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제3제국 시기에도 명칭을 바꾸어 계속 존속했으며, 1948년 12월 10일 ‘자연건강요법 의사협회―크나이프 의사동맹(Ärztliche Gesellschaft für Physiotherapie―Kneipp-Ärztebund e.V.’)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36) 바움가르텐은 1898년 3월 자신이 운영하던 치료소에 당시로서는 신발명품이었던 X레이 촬영기를 도입했는데, 이는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의 발명 후 채 3년도 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다. 크나이프 사망 직후 위축되었던 크나이프 의사협회의 활동은 바움가르텐의 노력 덕분에 1908년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37) 이 회사는 오버호이슬러의 후손들이 경영하다가 2001년 파울 하르트만 주식회사로 지분이 넘어간 뒤 세계를 무대로 공격적 판매 전략을 취하고 있다.

39) 크나이프 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뵈리스호펜을 찾은 환자들의 수는 1892년 12,107명으로 정점을 찍었고 이후 약간의 감소세를 보였다(Baumgarten, Sebastian Kneipp, pp. 66-7). 크나이프가 사망한 1897년 뵈리스호펜은 3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을 갖추게 되었는데, 당시 이 마을의 인구가 2천 4백 명을 밑돌았음을 감안하면 인상적인 숫자라고 하겠다. 1900년이 되어서야 뵈리스호펜의 인구는 3천 명에 이르렀고, 이는 1871년 당시 942명의 세 배에 이르는 숫자였다.(Waibl, 2004: 99) 크나이프의 사망 직후 환자들의 숫자는 일시적으로 반감되었으나, 크나이프 협회들과 의사들의 활동에 힘입어 1900년부터 조금씩 회복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 뵈리스호펜의 치료소는 전시병동으로 사용되었고 따라서 수치료만을 목적으로 한 환자들의 수는 감소했으나, 1920년에는 다시 12,240명으로 크나이프 생시를 능가했고 이후로도 계속 증가했다.

40) 인세, 강연료, 상표권을 비롯한 크나이프의 수입 대부분이 여기에 쓰였다. 크나이프가 치료소 건립을 위해 기부한 금액은 90만 마르크를 넘는다.

[그림 1] 19세기의 대체의학(1878)
Figure 1. Alternative medicine bof the 19th century(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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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크나이프의 치료(1892)
Figure 2. Kneipp’s Cure(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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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뵈리스호펜에서 강연하는 제바스티안 크나이프(1895)
Figure 3. Speech of Sebastian Kneipp in Wörishofen(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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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크나이프 신부의 진료(1894/95)
Figure 4. Consultation by Father Kneipp(18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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