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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6(2); 2017 > Article
태평양전쟁기 산토 토마스 수용소 포로들의 생활과 건강 - 맥안리스의『마닐라에서의 전쟁일지 (1941-1945)』 [1]를 중심으로 -

Abstract

When Japan invaded the Philippines, two missionary dentists (Dr. McAnlis and Dr. Boots) who were forced to leave Korea were captured and interned in the Santo Thomas camp in Manila. Japan continued to bombard and plunder the Philippines in the wake of the Pacific War following the Great East Asia policy, leading to serious inflation and material deficiency. More than 4,000 Allied citizens held in Santo Thomas camp without basic food and shelter. Santo Thomas Camp was equipped with the systems of the Japanese military medical officers and Western doctors of captivity based on the Geneva Conventions(1929). However, it was an unsanitary environment in a dense space, so it could not prevent endemic diseases such as dysentery and dengue fever. With the expansion of the war in Japan, prisoners in the Shanghai and Philippine prisons were not provided with medicines, cures and food for healing diseases. In May 1944, the Japanese military ordered the prisoners to reduce their ration. The war starting in September 1944, internees received 1000 kcal of food per day, and since January 1945, they received less than 800 kcal of food. This was the lowest level of food rationing in Japan’s civilian prison camps. They suffered beriberi from malnutrition, and other endemic diseases. An averaged 24 kg was lost by adult men due to food shortages, and 10 percent of the 390 deaths were directly attributable to starvation. The doctors demanded food increases. The Japanese Military forced the prisoner to worship the emperor and doctors not to record malnourishment as the cause of death. During the period, the prisoners suffered from psychosomatic symptoms such as headache, diarrhea, acute inflammation, excessive smoking, and alcoholism also occurred. Thus, the San Thomas camp had many difficulties in terms of nutrition, hygiene and medical care. The Japanese military had unethical and careless medical practices in the absence of medicines. Dr. McAnlis and missionary doctors handled a lot of patients focusing mainly on examination, emergency treatment and provided the medical services needed by Philippines and foreigners as well as prisoners. Through out the war in the Great East Asia, the prisoners of Santo Thomas camp died of disease and starvation due to inhumane Japanese Policy. Appropriate dietary prescriptions and nutritional supplements are areas of medical care that treat patients’ malnutrition and disease. It is also necessary to continue research because it is a responsibility related to the professionalism and ethics of medical professionals to urge them to observe the Geneva Convention.

1. 머리말

제 2차 세계대전 시기 일제의 대동아정책은 태평양전쟁(1941. 12-1945. 8)으로 이어졌다. 일본이 태평양전쟁기에 포로로 사로잡은 연합군 군인과 민간인은 약 36만 명을 상회한다[2]. 거꾸로 연합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은 26만여 명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시작하면서 「포로수용소령」(1941. 12. 23)을 내렸다. 1942년 초, 일본군은 하와이와 필리핀, 버마 등지에서 약 14만 명의 연합군 포로들을 사로잡았고, 이어 상하이와 홍콩, 조선과 일본에도 포로수용소를 추가로 세웠다[3]. 연합국측은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를 통해서 일본에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4]을 상호 적용하자는 뜻을 전달했다. 이에 일본은 “조약의 체결국이기는 하지만 비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제네바조약의 규칙을 준용(準用)한다”는 입장을 폈다(우쓰미아이코, 2007: 124). 더불어 일본의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포로들의 노동력과 기술을 생산력 확충에 활용해서 대동아전쟁을 수행하는데 밑거름으로 삼도록 하라”고 지시했다(1942. 7). 이어 일본군은 조선인과 대만인 포로감시원 수천 명을 동남아시아의 포로수용소에 배속시켰다. 그 중 태국, 버마, 자바의 군인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다(채영국, 2004: 10). 얼마 후 필리핀 바탄 지역의 ‘죽음의 행진’과 군인포로수용소의 참상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졌다[5]. 그러자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포로수용소보다 생활여건이 나은 조선의 경성과 인천 포로수용소를 국제적십자위원회에 공개(1942. 12)하여 국제여론을 되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 관리 하 포로수용소에 있던 13만 여 명의 연합국 포로들의 사망률은 27%로, 독일·이탈리아 측의 연합국 포로 23만여 명의 사망률 4%의 약 6배에 이르렀다. 연합국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 중 포로학대문제가 가장 크다고 판단하여 국제(A급) 및 지역별(B·C급)로 전범재판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전후 도쿄 전범재판에서는 조선 포로수용소에 근무했던 군의들이 포로들의 질병과 사망에 대한 진료에 무성의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장보다 더 많은 형량을 부여 받기도 하였다(조건, 2013: 476-478).
이와 같은 포로수용소들의 실태는 일본과 미국의 군사문서, 적십자 국제위원회 조사 문서, 조선인 포로감시원이나 외국인 포로들의 증언을 통해서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국내에서 포로수용소를 다룬 연구로는 일제 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병사나 포로감시원들의 피해 상황을 다룬 연구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운영과 포로들에 대한 대우를 다룬 연구물들이 축적되어 있다. 이에 비해 ‘군의’의 역할에 관한 연구는 주로 자국 군인들을 위한 의료 체계나 건강관리가 어떠했는지에 집중되어 있다(박영선, 2010). 따라서 적국 포로들의 건강관리를 어떻게 했는지에 관한 정보 공개는 빈약한 편이다. 미국 ‘군의’측 연구로는 미국이 필리핀을 탈환한 1945년 4월 이후 연합국 군인과 민간인 포로들에 대한 단기 검진을 통해 실시한 연구물들이 있다. 이 연구들은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는 시점의 지역별 질병분포와 특성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전쟁 동안 포로들의 일상생활이 건강 상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추적 연구는 부족한 편이다.
한편 태평양전쟁기 필리핀과 중국의 포로수용소에는 조선에서 강제로 추방된 서양인 선교의사와 치과의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의 포로 신분으로 의사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중 맥안리스와 부츠라는 두 명의 선교치과의사가 수용소 생활과 진료에 대한 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맥안리스(John Albert McAnlis)[6]는 마닐라의 산토 토마스 대학교(University of Santo Tomas in Manila) 민간인 포로수용소에서 지낸 39개월을 전쟁일지로 남겼다. 부츠(John Leslie Boots)는 ‘산토 토마스 수용소’와 ‘상하이 애쉬 수용소(Ash Camp)’ 생활을 수필로 남겼다[7]. 태평양전쟁이 시작될 무렵 맥안리스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에서 20년(1921-1941) 근무한 후 일본 경찰들에게 스파이로 몰려 필리핀 선교부로 옮긴 상태였다. 부츠[8] 역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1921-1939)와 베이징협화의학원 치과학부(1939-1941) 근무를 마친 후 일본의 귀국 명령에 따르던 중이었다. 이들은 전쟁 발발로 불가피하게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치과의사로서의 전문성을 지니고 있고, 아시아 의료선교를 자원해 20년 이상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포로들과는 차별성을 지닌 존재였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는 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억류된 미국인을 비롯하여 연합국 시민들이 거주하는 민간인 포로수용소였다. 1942년 1월에서 1945년 2월까지 4,000여 명이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다. 포로들의 구성은 미국인 3,200명, 영국인 900명, 폴란드인 40명, 네덜란드인 30명 등이었다. 미국인은 부부 450쌍을 포함하여 남자 2,000명, 여자 1,200명, 아이들 400명이 있었다. 포로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사업가 중역부터 실무자, 광산 기술자, 은행가, 농장 소유주, 선원, 구두장이, 종업원, 해변 상인, 선교사와 일반 시민들이다. 그 중 선교사는 500여명이었다. 맥안리스의 『마닐라에서의 전쟁일지』에 등장하는 의사는 선교의사 10명과 일반의사 10명 등 20여 명이다. 하지만 다른 의사들의 진료에 관한 내용이나, 수용소 포로들에 대한 체계적인 의료 기록은 찾지 못했다. 다만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 1942년 1월에서 1945년 2월까지 수용되어 있던 4,000명 중 사망자 총 수는 390명으로 전체 수용자 중 9.75%가량 된다는 수치만 알려져 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의 다른 혹독한 강제노동을 수행한 군인포로수용소에서의 평균사망률 27%보다는 낮은 수치이다. 하지만 독일·이탈리아 측 포로수용소의 평균사망률 4%보다는 2.5배나 높은 수치이다. 이렇게 산토 토마스 수용소의 포로사망률이 높았던 이유를 의료적인 측면에서 규명하는 것이 본 연구의 핵심적인 연구 주제이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산토 토마스 민간인 수용소 포로들의 생활이 건강에 끼친 영향을 파악하고자 한다. 더불어 이들 선교치과의사들의 활동이 기존 군의들과 지니는 차별성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하고자 한다. 포로 신분의 의사들은 일본군 군의들과 비슷한 의료업무를 담당하더라도 일본 군의보다 하위의 지위에서 지시와 감호를 받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포로의사들은 포로 집단을 대상으로 치료하는 주체이면서, 스스로가 포로로서 억압받고 대상화되는 객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한 처지에 놓인 맥안리스 일지가 지니는 특징과 한계는 다음과 같다. 1942년 1월초부터 32개월은 하루 일상이 한두 줄로 축약되어 있다. 포로 신분으로 일지를 쓰고 보관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내용은 주요 일과와 날씨, 뉴스, 식사, 가족과의 편지, 종교 활동, 개인적인 진료내역 등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그 안에 주변 정세의 변화가 담겨 있다. 예컨대, 일 군정이 필리핀 괴뢰정부를 세우고, 대동아정책의 물자조달 기지로 삼는 과정에서 수용소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서술되어 있다. 후반부에는 미군의 필리핀 재탈환 전투 상황과 송환 과정에서의 포로들의 생활과 치과의사로서의 진료활동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맥안리스의 일지는 포로인 개인이 하루 빨리 해방되기를 고대하며 포로생활의 결핍과 자신의 활동을 기록한 사적인 글이다. 따라서 포로수용소의 전반적인 의료관리체계나 다른 의사들의 진료 내역, 포로들의 질병에 관한 통계수치에 관한 정보는 기록되지 못한 한계가 있다.
본고에서는 이들 선교치과의사들의 기록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다. 첫째, 산토 토마스 수용소 포로들의 생활환경 및 위생과 관련된 질병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이하 제네바 협약)」(1929)에 근거하여 산토 토마스의 포로들의 건강관리 및 의료 실태가 타 지역 수용소와 비교할 때 어느 정도 조약을 준수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 건강악화와 죽음에 이르게 된 상황들이 「제네바 협약」과 비교해서 「포로 대우에 관한 협약」(1950)과 「전시 민간인보호에 관한 협약」(1950)[9]의 생활환경, 위생, 의료 관련 부분을 개정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검토할 것이다. 둘째, 태평양전쟁기 상하이와 필리핀의 의료 상황 속에서 맥안리스와 부츠와 같은 선교의사·치과의사들의 활동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특히 일본 ‘군의’들이 포로들에게 제공한 의료와, 포로 신분의 민간 의사들이 제공한 의료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셋째, 산토 토마스 포로들에 대한 식량 배급과 질병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포로들의 건강 상태를 악화시키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한 요인이 무엇이며, 의료인들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포로들의 질병과 건강 상태에 관한 통계들은 1944년 10월에서 1945년 9월까지의 전투기간과 전후 미군 군의관들이 미 국무성에 보고한 기록들과 논문들을 참고할 것이다. 태평양전쟁기 동남아시아 지역의 일본군이나 미군이 겪은 질병 양상에는 몇 가지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열대성 풍토병과 영양실조와 전신쇠약 및 정신신체질환이다. 뎅기열이나 아메바성 이질과 같은 토착성 풍토병과 각종 전염성 질환은 산토 토마스의 위생 환경과 관련시켜 다룰 것이다. 영양실조는 산토 토마스 수용소의 식량 배급량과 사망 원인에서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전신쇠약 및 정신신체질환을 산토 토마스 수용소 내에서의 일본군과 미군의 전투상황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자료를 분석하여 태평양전쟁기의 산토 토마스 수용소 포로에게 제공된 생활환경과 의료가 포로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파악하고, 이와 관련된 「제네바 협약」의 변화 추이와 의료인의 역할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2. 산토 토마스 수용소 포로들의 생활 및 의료 실태

산토 토마스 대학이 수용소가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태평양전쟁 직후 일본은 진주만에 이어, 필리핀 루손 북부 아파리(Apari), 레가스피(Legaspi) 지역 공략에 성공했다(김도형, 2014: 153-196). 맥아더는 코레히도르(Corregidor) 섬에 사령부를 설치한 뒤 마닐라를 ‘비무장도시’로 선포하고, 바탄의 산악지역에서 장기전을 치르려 했다. 하지만 일본은 마닐라를 폭격으로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1942. 1. 3)했다. 일군정은 연합국 국적 소지자들을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 억류하고, 바기오, 로스 바노스(Los Banos) 등에도 수용소를 만들었다(권오신, 2006: 61-94). 아래의 인용문은 부츠와 맥안리스가 산토 토마스 대학 수용소에 수용되는 경위에 대해 쓴 내용이다.
1942년 1월 4일, 부츠는 스페인 성당광장 앞에서 일본군들에게 체포되었다. 지시에 따라 3일간 입을 옷과 음식을 싸서 차에 탔다(Boots, 1996: 65). 1942년 1월 5일, 맥안리스는 지시를 받고, 선교사 일행들과 차를 타고 산토 토마스 대학 수용소로 들어갔다(맥안리스, 『마닐라에서의 전쟁일지』)[10].
위 인용문에 따르면, 마닐라에서 적국 민간인들을 포로수용소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상하이나 대만, 조선에서처럼 연합국 포로들에게 거리행진을 시키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닐라 시민들이 ‘비무장도시’에 연일 폭격을 가하는 일본군들에게 반감을 가졌기 때문에, 포로들은 차로 이송되었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의 생활환경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수용소의 운영체계와 포로들에 대한 대우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억류국가는 전쟁이 끝나서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포로들에게 유리한 자연환경을 제공하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하고, 건강을 돌보아야 한다. 또한 생활환경이 억류국 군대의 숙영조건과 최소한 같거나 더 좋은 것이어야 한다. 『마닐라에서의 전쟁일지』 속 수용소의 기본적인 의식주와 위생 및 의료 환경이 정비되는 수준과 과정을 「제네바 협약」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 숙식과 자치 활동 및 규율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포로에게 수용소 울타리 밖에 나가서는 안 되는 의무를 부과할 수 있고(9조), 수용소 건물과 면적, 침구의 조건은 억류국 군대와 동일해야 한다(10조). 아래 인용문은 수용소의 숙소가 배정되고, 외부와의 경계가 마련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맥안리스를 포함한 25명의 남자들은 주 건물 2층의 작은 교실(6m×12m)에 배치되었다. 4개의 테이블을 붙여 침대를 만들었다. 매트리스는 없었지만 몸을 뻗을 만 했다(1942. 1. 5). 개인별로 경계를 구분할 울타리도 만들었다(1942. 1. 7). 주 건물 주변에 오두막들이 들어서고, 그 밖으로 울타리를 쌓았다. 처음 며칠 간 섰던 장터가 폐쇄되었다. 모든 포로들은 담으로부터 30m 이상 떨어져 있어야 했다. 담 전체를 따라 매트를 놓고, 음식을 얻는 새로운 체계가 도입되었다. 더 이상 담 너머 좀 떨어져서라도 친구나 친척과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1942. 4. 15).
산토 토마스의 수용소에 배치된 포로들은 초기에는 마루 위에 천이나 널빤지만 깔고 잠을 자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노인들은 강당에 배치되고 1인용 간이침대를 제공받기도 하였다. 1944년 1월에 일본군 부대가 배치되기 전까지 운동장에 가족 단위의 오두막들이 세워지기도 했다. 즉 숙소 배정은 혈연, 지연 등의 연고나 성별과 나이에 따라 나뉘었음을 알 수 있다.
식사는 초기 며칠간은 장터가 서고 오두막별로 간단한 취사도구를 갖추고 준비했다. 그러나 곧 장터를 폐쇄하고 중앙 배급식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산토 토마스와 같은 민간인 수용소 포로들은 집단생활 운영에 필요한 식사, 주거 및 시설 정비, 채소 재배 등의 노동만 부여받았다. 따라서 ‘위험한 노동’이나 ‘작전 행동’에 내몰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수용소 내에서는 현지 시장가격으로 의류나 식량과 일상용품을 살 수 있는 수단을 제공받아야 한다(11, 12조). 그런데 장터를 폐쇄하여 식품 및 필수품 조달을 막고 외부와의 의사소통을 막은 것은 조약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규율은 일본군에 의해 정해졌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는 「제네바 협약」 11조에 따라 포로가 담배를 소지하는 것은 허용하되, 침실과 같은 밀폐된 공동구역에서의 흡연은 금지했다. 그러나 아래 인용문과 같이 강제적인 물품 징발이 이루어졌다.
점호는 저녁때 방별로 이루어졌다. 첫날 술과 손전등 등을 압수당했다(1942. 1. 14). 잇따른 전쟁으로 물자결핍을 겪고 있는 일본군들은 포로들에게 몇 가지 필수품을 제외하고는 점차 많은 것들을 빼앗았다. 외부 출입이 허락된 선교의사들의 차나 고가품들도 빼앗았다. 선교의사들은 자전거와 카렌샤로 움직여야 했다(1942. 2. 2).
「제네바 협약」 6조에 따르면 포로는 억류국을 위협하는 무기를 제외하고 개인적인 가치를 지닌 물품을 소지할 수 있다. 또 억류국에 돈을 맡길 때에는 영수증과 계산서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위 인용문에 따르면 일본군들은 초기부터 포로들이 통조림이나 음료 캔, 전등, 의약품을 하나라도 따로 소지하고 있으면 몰수했다. 게다가 개인의 재산권을 침범하고, 진료업무에도 방해가 될 만큼 물품 징발 수위를 점차 높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1950년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 55조에는 점령지역 내의 물품을 징발하여서는 안된다고 규정하였다.
외국인에 대한 규제도 강화되었다. 1942년 11월이 되면서 서양인들은 마닐라 시를 다닐 때 반드시 여권과 통행증을 소지해야 했다. 거리에서 잡힌 사람들은 수용소에 머무르거나 50-100페소의 벌금을 지불해야했다. 수용소 내에서는 국적별로 색깔이 다른 완장을 차야하고 규정을 어기면 벌칙을 주었다.
수용소 내에서도 규칙을 어겨 감옥에 갇히는 사람도 많아졌다. 여자들을 임신시킨 남자들은 한 달간 감옥에서 침대와 모기장 없이 매트리스만 깔고 자야 했다 (1943. 1. 29).
자치 활동은 공동생활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한 포로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기초하였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군의 명령에 대한 복종과 감시체계 내에서 포로들의 자치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강제하였다. 포로들의 자치 활동과 노동에 관해 「제네바 협약」 7조는 포로들의 자치적인 생활을 원칙으로 하고 육체적으로 부적당한 노동에 사역을 시켜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였다. 아래 인용문들은 포로들의 자치 활동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포로들은 오전 7시에 운동장에 모여 체조를 시작했다. 소프트볼이나 아이들의 게임은 자치 활동으로 허락되었다(1942. 1. 12). 하지만 테니스공이나 축구공은 너무 닳아 고무가 말랑해진 것조차 구하기 어려웠다(1943. 2. 1).
가장 힘든 것은 일본군들이 지키고 있는 곳에서 할 일도, 볼 것도, 관심거리나 뉴스도 없이 잠긴 문과 벽을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Boots, 1996: 66).
선교사들은 생일 때마다 수용소 뒷마당에서 서로 축하파티를 해주기로 약속했다. 5명이 1조가 되어 일주일에 1일 세탁하고 3일씩 운동하기로 계획을 잡고 실천했다 (1942. 1. 22).
위 인용문들을 살펴보면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신체운동에 참여할 수 있고(13조), 종교의 자유(16조)도 허용되었다. 그러나 포로들의 일상 속에 이러한 취미활동이나 운동이 지속될만한 프로그램이나 물품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대부분의 수용자들은 벽에 기대앉아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야 했고, 아동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서로를 독려하고 생활의 활력을 얻을 수 있도록 생일파티나 공동생활 계획을 마련해 실천했음을 알 수 있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는 조선의 경성 포로수용소의 도서실이나 영자신문 공급과 같은 후생복지 시설이나 지적 물품 조달(17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조건, 2013: 467). 특히 외부와의 통신 및 방송, 특히 미국 방송 시청이나 신문 열람은 금지되었다.
바탄 지역에서 탈출한 미국병사와 게릴라였던 필리피노 미국인들이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 들어왔다. 그들은 따로 분리된 공간을 마련해서 일본군 눈을 피해 호주와 연결된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1942. 6).
일군정은 수용소 안뿐 아니라 밖에서도 미국 방송 시청을 금지하였다. 미국 숭배 사상을 없애는 것 뿐 아니라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군사적인 정보를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1950년 「전시민간인 보호 협약」 93조에서는 억류국은 수용자들에 대한 지적, 교육적, 오락적 활동과 운동경기를 장려하고, 아동 및 청소년을 위한 교육기관을 필히 확보하도록 규정하였다. 1950년 「포로 대우에 관한 협약」 72조에서 전쟁포로는 게시물, 책 등도 소포로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제네바 협약」 36조에 따르면, 포로들은 자신의 가족과 건강상태 등을 알리는 엽서를 교신할 수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지연되면 안 된다. 하지만 산토 토마스에서는 “1년이나 9개월간 보류되어 있던 전보 600개가 1943년 11월 1일에 한꺼번에 배달되는 등” 적십자 물품 조달이 불규칙하였다. 그 원인으로 태평양전쟁 수행에 따른 정치사회적 불안과 더불어 빈번한 자연재해도 원인이 되었다.
필리핀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고 있어, 지진과 화산, 태풍이 많이 일어나는 지역으로 학교 건물이 있는 산토 토마스 수용인원이 점차 늘어났다. 아래 인용문은 산토 토마스 수용소도 자연재해를 피해갈 수 없었으며, 그것이 불안 요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1942년 건기인 5월에도 무더위에 강도 7-8정도의 지진이 계속되더니, 여름 태풍과 홍수피해를 본 레가스피와 루손 등의 지역에 있는 외국인들이 산토 토마스 수용소로 계속 모여들었다. 미국인 선교사 빌과 브라운은 게릴라가 되어 산으로 들어갔다(1942. 5. 31). 1943년 11-12월에는 겨울인데도 마닐라에 홍수가 났다. 마닐라 시가 물에 잠기고. 보트로 통행해야 했다. 가스가 끊기고 숯이 비싸게 거래되었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 침대 위로도 물이 차올랐으나 숯 한 조각 구할 수 없었다. 겨울이지만 다행히도 이상기후로 인해 산토 토마스는 연일 섭씨 42도였고, 물가는 마닐라에서 최고가 였다.
위 인용문과 같이 빈번한 자연재해는 농작물 피해와 더불어, 산토마스 수용소 내의 생활환경을 더욱 열악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 의무실 운영과 중병 환자 및 외과 환자 이송

「제네바 협약」 14조에는 각 수용소는 전쟁 포로가 필요한 모든 종류의 주의를 기울이는 의무실을 설치해야 하며, 억류국은 치료 장비를 포함하여 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에 따라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는 소수지만 일본 군의와 일본군 선교의사도 배치되었다. 이와 더불어 포로 신분의 의사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진료소도 있었다. 아래 인용문은 포로 의사들의 진료실이 마련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는 개소한지 4일 만에 각종 위원회의 작업을 시작했다. 맥안리스는 의사회의 후 치과회의를 했다. 그에 따라 의무실과 약국, 치과 진료실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각기 진료를 시작했다. 일본군 선교의사인 이요라(Dr. Iyoura)는 맥안리스에게 당분간 치과 사무실로 715번방을 쓰라고 했다(1942. 1. 9).
위 인용문을 살펴보면 포로 의사들의 진료가 일본군 군의나 선교의사의 지시 하에 이루어지는 자치 활동의 일환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운영 실태는 아래 인용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맥안리스는 1942년 1월 9일부터 치과의사 클래슨(Klasson)과 함께 수용소 내에 치과 사무실을 열고 월급제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클래슨은 곧 다른 병원으로 보내져 맥안리스 혼자 치과를 운영했다. 포로가 되기 전 맥안리스의 치과 수익은 월 1-2백만 페소였지만 수용소 월급은 20페소였다(1942. 2. 5).
치과 경영은 초기부터 적자였다. 치과 재료를 구입하고 치과를 운영하는 비용이 치료의 대가로 받는 비용보다 초과되었기 때문이다. 보철이나 보존치료에 필수적인 재료를 사기 위해 환자들에게 돈을 구걸하는 형편이었다. 첫 월급으로 받은 20페소는 외국인 등록증을 얻는데 다 들어가고, 세금도 내야 했다. 게다가 일본 군정의 어음은 신용도가 낮아 인플레이션이 심해 감당하기 어려웠다. 마닐라 근처의 폭격은 계속되었고, 치과 물자를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1942. 2-5월).
위 내용으로 보아 포로인 의사들의 진료비는 유료였으며, 일본군 측의 재정 지원은 없었다. 게다가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의약품 및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포로 신분의 의사들은 포로들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치료를 해 줄 수 있었다. 결국 즉 「제네바 협약」에 따라, 일반 치료비와 기자재 비용을 억류국에서 부담한다는 내용은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1950년의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 55조는 점령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주민의 의료품 공급을 확보할 의무를 지며, 불충분할 경우에는 의료품 및 기타 물품을 수입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보호국은 긴급한 군사적 제한이 없을 경우 언제라도 점령지역 포로들의 식량 및 의료품 공급 사항을 조사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전쟁 포로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의치나 기타 기구, 안경을 포함한 치료비를 억류국 부담으로 규정(「포로 대우에 관한 협약」 30조, 「전시하 민간인 보호 협약」 91조)하였다.
이에 비해 심각한 환자나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위한 군대나 민간 병원으로의 이송은 이루어졌다. 부츠의 경우를 한 예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942년 1월 26일 부츠는 수용소에 들어온 지 3주 만에 몸이 급격히 나빠졌다. 뎅기열에 감염되어 어지럽고 몸이 녹초가 되었다. 중국 베이징에서 수술 받았던 유양돌기 부위에 염증이 재발해서 고름이 많이 나왔다. 이틀간 고열에 시달리던 부츠는 시내 일반병원으로 옮겨졌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치료 가능한 군대나 민간 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부츠가 8개월간 입원해 있는 동안 실제로 받은 치료는 없었다. 매우 무뚝뚝한 일본인 의사가 두 세 차례 보고 지나간 정도가 전부였다. 일본 군의들이 가지고 있는 약은 매우 제한되어 있어, 가장 흔하게 쓰는 약도 구할 수 없었다. 국제적십자위원회를 통해 보내진 미군 약품이 발견되면, 보는 즉시 일본군이 징발해갔다. 하지만 긴 휴식으로 몸은 회복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매우 성공적으로 유양돌기의 농양과 중증 뎅기열을 극복한 환자 취급을 받았다(Boots, 1941: 66).
이상으로 보아 필리핀 내 상급 병원에서 일본 군의들의 의료 행위는 의약품이 부족한 상태에서 형식적인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포로가 수령한 구호품 중 의료용품이 배송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강탈되거나, 수령 후 징발되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1942년 9월 일본 군부가 ‘대동아성(Great East Asia Ministry)’을 설치하여 유통시킨 일본 어음식 화폐의 신용가치가 떨어지면서 각 지역에 급속한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을 유발하였다(김정현, 1994: 75). 중국, 동남아시아 어느 곳에서도 의약품을 구하기 어려웠다. 일본군들이 국제적십자위원회를 통해 전달되는 의약품을 비타민 한 알까지 모조리 압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포로들은 아파도 제대로 약을 먹을 수 없었다[11].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전쟁 중 부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린 포로는 자신의 상태에 필요한 모든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교전국은 특별 협정을 통해 환자가 걸린 질병의 성질과 기간을 고려해 받아야 할 치료에 대한 공식적인 진단서와 포로가 실제로 치료 받은 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기 일본 군의들은 포로들에 대해 의약품이 없다는 이유로 형식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전후 전범처리 당시 포로들의 고발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1950년의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 55조에 점령국은 점령군 및 행정요원 사용과 민간인 수요를 고려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점령지역내의 의료품을 징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56조에는 보건 위생 조치를 시행함에 있어 점령 지역 주민들의 도덕적 윤리적 감정을 고려해 배려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또 1950년 「제네바 협약」 72조에서는 포로에 대한 구호품에 대한 사법절차를 소상하고 규정하고, 특히 의료용품은 원칙적으로 단체 소포로 전하고 확인하는 절차를 추가했다. 이러한 규정을 단 이유는 단체 소포로 전달된 의약품이 실제 포로의 치료에 쓰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이기도 했다.

3) 위생 상태와 풍토성 전염병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억류국은 수용소의 청결 및 위생의 확보와 전염병 방지를 위하여 필요한 모든 위생상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주야로 사용 가능하고 위생규칙에 맞게 항상 청결한 상태가 유지되는 화장실을 설치해야 한다. 그리고 목욕과 샤워가 가능한 시설을 제공받고 충분한 물을 공급받아야 한다(13조). 이 조항에 따라 운동장에 공동 수도와 화장실을 마련하기는 했다.
운동장 중앙에 공중 샤워시설로 사용할 수도를 끌어왔다. 수도시설은 개방되어 있어서 목욕이 가능한 수준이 못 되었다. 또 4,000명의 인원이 사용하기에는 수도 및 편의시설이 부족했다. 며칠에 한 번 씻을 수 있는 차례가 돌아왔다. 식수도 공용시설 1-2군데에서 공급받아야 했다(1942. 1. 8).
산토 토마스 수용소의 수도시설은 동남아시아의 여타 군인수용소보다는 기본 시설은 갖춘 것이었다. 하지만 수용인원에 비해 수도시설이 부족하고, 물의 양과 수도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도 부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점차 위생용품이 조달되지 못해, 청결 유지가 어려워졌다.
수용생활 1년 만에 코코넛 비누와 세제가 떨어져 손 씻기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1943. 2).
화장실 시설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실은 운동장에 구덩이를 파서 썼다. 1년 안에 화장실 휴지가 동이 났다. 풀잎으로 닦거나 조악하게 처리해야 하는 수준이 되었다. 화장실과 숙소를 오가는 통로에는 각종 벌레와 쥐가 들끓었다. 거의 매일 쥐를 잡았다(1943. 2. 16).
운동장 중앙에 자리 잡은 개방식 화장실은 이질과 같은 설사병을 쉽사리 옮겼다. 이질 아메바가 인체에 전염되는 경로는 주로 오염된 식수나 생야채, 대변, 쥐, 파리, 바퀴벌레 등의 생물을 통해서이다. 즉 비누와 화장지가 없고 오물로부터의 격리가 어려운 개방식 화장실은 이질성 아메바 균의 온상이며, 감염의 통로로 작용하였다.
「제네바 협약」 15조에 따르면, 억류국은 포로의 위생 상태, 전염병 검사, 특히 결핵과 성병 등을 감독해야 하고, 전염성 질환이 있으면 격리시켜야 한다고 규정되었다. 산토 토마스에서는 수용 초기 4천여 명의 포로들에게 3차례에 걸쳐 전염병 예방주사를 놓았다. 일본의 법정전염병인 콜레라, 장티푸스에 필리핀의 풍토병인 이질에 대한 예방주사였다. 1차는 1942년 1월 9일, 2차 주사는 1월 15일, 3차 주사는 1월 20일에 놓았다. 그러나 수용소의 생활 3개월 만에 포로들의 면역력은 많이 낮아졌다. 노인과 허약자 십여 명이 죽어 나갔다. 그 중 이질은 포로들의 절반 정도가 앓았다. 열대지역에서 발생하는 아메바성 이질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질은 풍토성 전염병이기 때문에 맥안리스가 1943년 8월에 순회 진료를 나간 해리스 기념의 집(Harris Memorial) 근처의 주민들도 이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다. 아메바성 이질은 ‘바탄의 죽음의 행진’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주요 사인이었다(Pollack, 1969: 270-281). 하지만 일반 농촌이나 산촌 주민들과 포로로 이송중인 사람들, 수용소 내 사람들은 같은 질병을 앓더라도 위생이나 처치, 가료 측면에서의 차이는 컸다. 물과 휴식 공간이 풍부한 일반 주민들과 소아들은 이질에 걸렸을 때 어느 정도 격리와 회복을 위한 가료가 가능하였다. 하지만 수용소 내의 사람들은 좁은 환경에서 집단생활을 하였고, 별도의 격리조치를 하지 못했다. 그들은 위생용품과 일반 약품을 제공받지 못했고, 탈수 방지를 위한 적절한 전해질이나 수분 공급도 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일반 농촌의 주민들과 달리 수용소 안에서 만성 아메바성 이질에 걸린 사람들 중의 일부는 상황이 심각해졌다. 하루 종일 화장실을 드나들다가 일어서 걷지도 못하고 죽기도 했다(1943. 5. 28).
한편 1944년에는 끼니를 잇기 위해 시신이 묻힌 마당에서 자란 무와 양배추를 뜯어 날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어야 했다. 이에 따라 수용소 내에 세균 감염에 의한 디프테리아, 장티푸스, 결핵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감염을 방지할 세제도 없고 물을 끓여 마시거나 소독할 시설과 연료 및 장비가 부족했다. 1944년 10월, 원하는 사람들에게 장티푸스 주사를 한 번 더 접종해주었다. 하지만 맥안리스의 『마닐라에서의 전쟁 일지』에는 그 이외의 예방주사 추가접종이나 전염병에 대한 격리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태평양전쟁기 생산된 항생제는 주로 구미 지역에서 활용되었고, 동남아지역은 미군의 재탈환이 이루어진 이후 소량이 유통되었으므로, 수용소에서 각종 전염성 질환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태평양전쟁기 동남아지역에서 풍토성 전염병 때문에 벌어진 참상 때문에 1950년에는 「포로 대우에 관한 협약」 제28조에는 수용소 매점에 비누 조달, 제29조에는 개인이 화장실과 수도, 옷 세탁에 쓸 수 있는 충분한 수도시설과 시간, 비누와 세제 제공을 추가하였다.
이질과 더불어 산토 토마스 수용소 포로들이 많이 앓은 전염성 질환은 뎅기열[12]이었다. 뎅기열은 1942년에 상반기인 우기에 가장 많이 발병했다. 강의실에 책상을 놓고 집단생활을 하던 방에는 초기에 일본인 포로감시원이 구역 별로 몇 군데 그물 모양의 모기장을 쳐 주기도 하였다. 모기장 설치는 열대지방의 말라리아나 뎅기열을 일으키는 모기에 물리는 것을 예방하는데 효과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1인용 간이용 침대가 보급되면서, 더 이상의 모기장 설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맥안리스와 같이 생활했던 여섯 남자들과 선교사들의 상당수가 뎅기열을 앓았지만, 그 누구도 약을 썼다는 기록은 적혀있지 않다. 누가 언제 어떤 증세를 며칠 동안 앓아 쉬고 나았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알려진 뎅기열 증세보다는 회복일이 좀 더 길고, 체중 감량을 동반하기도 했다. 부츠의 경우처럼 이미 염증성질환을 앓고 있었거나, 수용된 기간이 길어질수록 뎅기열은 장관플루(Intestinal Flu)나 늑막염과 같은 복합질환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남자가 많이 모인 곳에 갑자기 무기력증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와 거의 일치한다(Coates, 1964: 29-49). 하지만 맥안리스의 『마닐라에서의 전쟁일지』에는 수용소와 외부숙소의 여성들도 뎅기열에 감염된 기록들이 있다. 뎅기열은 현재까지도 특별한 예방이나 치료방법이 없고 대증요법으로 보존적 치료를 돕는 수준이다. 따라서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의 뎅기열은 풍토병으로 발행하여 대부분 자연 회복되었으나, 면역력이 낮아지고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일부 환자에게서는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복합질환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뎅기열 예방을 위해서는 살충제를 3-4시간에 한 번씩 노출된 피부에 뿌려주거나 살충제가 뿌려진 모기장 안에서 자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이재갑, 2014: 277-281) 하지만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 별도의 살충제 처리가 된 기록은 적혀있지 않다.
한편 미군이 마닐라를 재탈환한 1945년 4월 잿더미 상태의 마닐라는 전기와 수도를 끊겨 공중위생이 매우 불결했다. 미공군은 DDT를 공중에서 대규모로 뿌려서 말라리아나 티푸스를 일으키는 모기들을 조절하였다. 1944-1945년 미군이 필리핀을 재탈환할 당시의 뎅기열 발병률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표 1 참조). DDT가 살포된 1945년 4월 이후 급격히 발병률이 감소한 후 9월 이후 다시 절반으로 감소했다. 1950년 「포로 대우에 관한 협약」 31조에는 정기검진에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성 질병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탐지하고 예방하도록 적시하였다.

3. 포로 의사와 치과의사들의 활동

1) 포로 의료인의 거처와 신분보장의 문제

1929년 「제네바 협약」에는 포로 신분 의사의 신분보장과 관련된 조항이 없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 포로 중 의료인과 선교사들은 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면 ‘영구석방서’를 받고 수용소 밖으로 나와서 거주할 수 있었다. 아래 인용문은 ‘영구석방서’의 의미와 실제 효력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기독교 선교사와 의사 중에 스미스, 보스만, 스티븐, 맥안리스는 서약서를 쓰고 산토 토마스에서 영구석방서를 받았다(1942. 4. 18). ‘영구석방’이란 용어의 의미는 필리핀 내에서 적국 포로로서의 신분은 유지되면서, 산토 토마스 수용서 근처에 숙소를 마련하고 통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맥안리스를 포함한 남자 선교의사 6명은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 성경학교 기숙사로 이사했다(1942. 6. 11). 6명이 2층에 있는 긴 베란다에서 잤다. 1층은 부엌과 식당이었다. 7월 9일까지 모두 수용소로 되돌아오라는 통보가 왔다. 하지만 모든 선교부원이 산토 토마스에 가서 다시 영구석방서를 얻을 정도로 방침이 자주 바뀌었다(1942. 7. 9).
위 인용문에 의하면 영구석방서는 수용소 외부에 거주하면서 의료나 선교 업무를 할 수 있지만, 일본군부의 방침에 따라 수용소 복귀와 의료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포로로서의 신분은 유지되는 일시적인 허가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영구석방서 시책은 일군정의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일군정은 필리핀의 모든 산업시설, 공장, 학교, 교회, 병원, 방송 등을 장악하고 감독했다. 미국 선교의사들이 이전에 활동했던 병원인 H. S.와 Home Ec. Building이 일본의 지부병원으로 소속(1942. 5. 3)되었다. P. G. H.의 앰뷸런스도 군대차로 접수했다. 그래서 일군정은 영구석방의 형식으로 수용소 외부 의료기관에 포로 신분의 의사들을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수용소 밖으로 나온 민간인 포로 의사들은 외부 숙소생활에 필요한 식비와 체류비, 교통 및 의료물품 운반 등의 비용은 자체 조달해야 했다. 적십자 구호품을 받을 수 없고, 외국인 등록증 갱신이나 세금 등의 비용 일체를 지불해야 했으므로 외부로 나왔던 의사들이 결국 수용소 안으로 복귀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수용소 안에서는 억류국 군의와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상하관계를 맺어야 했다. 게다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포로의사에 대한 억류국의 대우가 부당하다고 평가되면서, 1950년 「포로 대우에 관한 협약」에는 관련 내용이 별도의 조항으로 다루고 있다. 제32조에 따르면 군의는 아니지만 전쟁포로 중 의사, 외과 의사, 치과 의사, 간호사 또는 보건 행정가는 전쟁 포로의 이익을 위하여 의료 기능을 수행하도록 억류국의 요구를 받을 수 있다. 이 경우 그들의 포로 신분은 유지되지만, 억류국의 의료 요원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제 49조에 따라 다른 어떤 사업도 면제된다. 한편 전쟁 포로 지원을 위해 구금 시설에 들어 온 의료요원 및 군목요원은 전쟁 포로로 간주하면 안 된다. 그들은 「제네바 협약」이 규정한 최소한의 보호와 혜택을 받으며 전쟁 포로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종교적 사역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시설을 부여 받아야 한다. 그들은 작업 분리대에 있는 포로 또는 수용소 밖의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포로를 방문할 권한이 있다. 이를 위하여 억류국은 필요한 수송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13].

2) 정기검진과 선교의사들의 순회 진료

「제네바 협약」 15조에 따르면, 포로에 대한 건강검진이 매달 1회씩 이루어져야 한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 포로 의사들에게 거처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에도 수용소 포로들에 대한 정기검진은 의무적으로 시행되었다. 정기검진은 의약품을 전혀 구할 수 없는 상태에서 포로들의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약품이나 재료가 없어도, 환자에게 생리적으로 적절한 예방 및 통증완화조치를 알려줄 수 있었다.
1943년 2월 맥안리스는 외국인 등록을 하고 세금을 냈다. 3월에는 치과진료소 재정이 더 빡빡해졌다. 칫솔이 작년에는 1페소였는데 3개월 만에 7페소로 가격이 올랐다. 대부분의 보급품도 절반으로 줄었다. 산토 토마스에는 주당 3회 정도 가서 오전 9시부터 5시까지 일했다(1943. 3. 1).
한편 선교의사들은 선교와 의료 목적으로 마닐라 근교 지역에 순회 진료를 다녔다.
정기검진이 없는 그 밖의 요일에는 순회 진료를 다녀야 했다. ‘성령의 집(Holy Ghost)’(1943. 5-7월)에 가서 검진을 했다. 맥안리스는 휴대용 치과장비를 포장했다 풀었다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지역주민들에게 치과진료를 해 주었다 8월에는 호스피코 데 데 산 호스(Hospico de San Jos), 성령의 집, 해리스 기념의 집(Harris Memorial), 컨설러(Consular) 수용소에서 순회진료를 했다. 해리스 기념의 집에서만 35개의 아말감, 27개의 크라운, 8개의 도재치, 3개의 발치를 했다. 10월 1일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온 사람들이 그룹으로 모였는데, 이들의 구강검진을 해주었다.
이러한 선교의사들의 순회 진료는 조선에서도 지속해오던 일이었다. 맥안리스는 한국의료선교사협회 서울지부 회장직을 담당(1934)하여 선교사들이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에서 도왔다[14]. 휴가 때에는 소래 해변에서, 요청이 오면 운산과 원산 광산 등지의 외국인 임상지부의 순회 진료도 지속했다. 하지만 1943년 마닐라의 식량사정은 좋지 않았다. 영구석방서를 받아 수용소 밖으로 나왔던 의사들의 상당수가 다시 산토 토마스 수용소로 돌아갔다.
맥안리스와 선교의사 8명은 진료 수입을 2배로 올리지 않으면 도저히 생활비와 빌린 돈의 수지를 맞출 수가 없었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 여러 해 살았던 사람들은 적십자에서 오는 식료품 기부를 받았다. 하지만 선교사들과 같은 임시 거주자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유료 일반진료는 현격히 줄었다. 선교지부의 자체 경비로 식료품 요금을 지불해야 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베이컨과 계란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선교의사들은 수용소 밖에 머물기로 했다. 그 이유는 수용소 이외에 마닐라 주변의 학교 학생들을 위한 치과진료나 지역주민 구강검진과 같은 비수익 사업을 늘리기 위해서였다(1943. 10. 18).
이렇게 지역 주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검진과 순회 진료 봉사활동은 조선에서도 지속적으로 해오던 일이었다[15]. 즉 선교의사들은 어떤 국가에서나 직업적 사명감을 가지고 지역주민들을 찾아다니며 비영리진료사업을 했던 것이다. 맥안리스는 벨기에인 수용소나 유태인 난민들에게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맥안리스의 형인 내과의사 윌리엄 맥안리스(William W. McAnlis)와 그 부인도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 기거하면서 의료에 복무했다. 1944년 1월, 일본군들이 산토 토마스에 주둔하면서, 모든 수용소에 있는 일반 의무담당자들은 모두 산토 토마스에 근무하던지 주기적으로 방문해야 했다.
1944년 맥안리스는 단 한 명 남은 치과의사이기 때문에 항상 갔다. 2월에 난 홍수로 치과유닛췌어가 고장 났지만 부품을 구할 수 없었다. 3월에는 의료진이 부족해서 테드와 맥안리스가 오하시 과장에게 보고한 후 두 명의 의사와 한 명의 치과의사를 찾아냈다. 산토 토마스 교육 건물 320호를 치과진료소로 쓰도록 허가를 받았다. 7월에는 수용소 내의 17-18세 청년들의 구강검진을 했다. 치태를 중점적으로 보았다.
1945년 1월에도 한 나절씩 치과진료를 했는데, 매일 바쁜 편이었다. 2월 수용소 안에서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가 진행되면서 일상적인 진료를 중단했다.”

3) 맥안리스와 부츠의 치과진료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의 맥안리스의 치과진료내역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던 미국식 치과진료를 포괄적으로 시행할 수 있었다. 일군정이 시작되기 이전의 필리핀 연방은 미국의 통치를 근간으로 했기 때문에 마닐라에는 미국식 치과 기자재가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었다.
치료범위는 3대 구강병인 충치, 치주질환, 부정교합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틀니 수선과 보철물 기공이 제법 많았다. 재료구입과 기공작업을 위한 외출은 허가되었다. 보철치료는 환자당 치료시간이 길어, 하루 평균 7명 정도씩 주 단위로 예약이 꽉 찼다(1942. 4. 25). 그 외 개별적인 치태관리, 스케일링, 발치, 보존, 신경치료(silver nitrate사용, 근관절제술 포함), 교정 등 환자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치료를 했다.
위 인용문에서 시행된 진료 내역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과 부속병원 치과(1921-1941)에서 실시했던 것과 거의 유사하다[16]. 그러나 1940년 9월 미국, 영국, 네덜란드가 일본의 석유 수입 통로를 봉쇄한 이후 시작된 일본의 물자통제정책은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중국 상하이, 조선 등지의 치과진료에도 많은 차질을 가져왔다. 특히 필리핀은 전쟁 초부터 치과진료에 필수적인 수은, 금, 인조치아, 기구 등의 보급품의 품귀 현상이 두드러졌다. 수용소 근처로 숙소를 옮긴 맥안리스는 의욕적으로 진료에 임했지만 기자재 품귀현상 때문에 아래 인용문과 같이 곤란을 겪게 되었다.
외부에 있는 치과의사 빌라(Dr. Villa)에게 하누 교합기를 빌려오고 왁스와 인레이를 만들 금속도 구했다(1942. 5. 18). 수용소 포로들은 염증상태가 진행되어 매복치 발치, 급성 염증, 상악동염, 소대 수술 등의 구강외과 수술이 늘어났다. 환자들은 주로 유태인, 일본인, 노르웨이인, 미국인들이 많았다. 치과의자 스프링이 부러졌는데, 마닐라에서 다른 치과 의자나 부품을 구할 곳이 없었다. 일본군들이 빠르게 마닐라 내의 물자를 약탈해가고, 외부의 수입루트도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치과 기공작업도 차질이 생겼다(1942. 9. 5). 1942년 말이 되면서 치과물자도 상당히 비싸졌다. 보존 치료에 필요한 아말감, 금 등의 광물도 구하기 힘들어졌다(1942. 12. 19).
위 인용문과 같은 물자 부족으로 환자들은 치아의 손상을 회복하는 보존이나 보철치료를 제대로 받기 못하고, 예방이나 외과적 처치에 국한된 구강건강관리를 받아야 했다.
한편 상급병원에서 퇴원한 부츠는 미국으로 귀국하기 위한 배를 탈 기회를 얻었다. 1942년 9월 13일 4000톤 화물선을 타고 콜레이돌 항구를 떠나 열흘 만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일본군 점령 하에 있는 상하이 역시 물가가 비쌌다. 일본 군사령부는 10월 초 1000명의 미국인과 영국인들을 미해군 막사로 쓰던 수용소로 몰아넣었다. 그곳에서 국가별로 다른 색의 완장을 채우고, 몇 군데의 수용소로 분산시킨 후 라디오와 오락을 금지시켰다. 부츠는 다시 포로 신분이 되었지만 치과의사로 근무할 수용소를 선택할 수 있었다. 푸동 수용소에서 오라고 했으나, 그곳은 이미 치과의사가 3명이나 있어서 가지 않고 징병 유예신청을 했다. 그 사이 임시 치과의사 자격증을 따서 상하이에서 가장 유명한 치과의사 콜린(Collin)과 함께 환자를 보기도 했다. 그만큼 상하이에서의 외국인 포로 관리는 허술했다. 1942년 11월 상하이도 치과 물자가 거의 없어졌다. 환자는 많은데 알코올, 유지놀, 수은, 함금, 은, 금 등을 일체 구할 수 없었다. 개인치과의원에서도 치과용품을 암시장이나 다른 업자들에게서 조달되는 대로 진료를 해야 했다. 유태인 망명객의 입에서 나온 금합금(Trudent Alloy) 31g이 상하이 지폐 1,300엔, 미화로 15달러였다. 부츠는 1943년 4월까지 미국과 영국 치과의사들과 같이 움직였다. 미국인수용소에는 상하이에 남은 외국인 치과의사의 1/3이 배치되어 있었다. 수용소에 갇힌 영국인들은 미국인들의 3배나 많았지만, 영국인 수용소에는 치과의사가 부족했다. 5월이 되니 대다수의 영국인 수용소에도 치과의사가 1명씩 배치되었는데, 그 중 애쉬 수용소(Ash Camp)에만 치과의사가 없었다. 부츠는 사명감을 가지고 치과진료를 할 수 있는 낡은 치과의자와 손기구와 재료, 모니터 등을 가지고 애쉬 수용소로 갔다.
애쉬 수용소는 이전에 영국군이 쓰던 막사로, 400명의 영국인 여자와 아이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비가 오면 수용소의 반 정도가 물에 잠기는 대신, 공간은 한 방에 2-4명이 기거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보다는 편리하고 시설이 좋았다. 화장실이 여러 개이고 욕실에서 더운 물도 나왔다. 거실에는 피아노도 2대가 있었다. 다만 난로에 불이 잘 피워지지 않았고, 식사로 거친 갈색 밥과 생선, 고기가 붙어 있지 않은 뼈 등만 나왔다. 수용소 밖에는 문이 잠겨있고, 일본군 보초가 있었다. 안에서 별 할 일이 없는 영국인들은 서서히 미쳐갔다. 무슨 일이든 불평과 고통을 토로하고, 국제적 권리를 내세웠다. 늦가을 뜻밖의 행운으로 애쉬 수용소 사람들이 먼저 영국으로 송환되었다(Boots, 1996: 67).
부츠가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송환될 때 가져갈 수 있는 수하물은 총 3개, 27kg이하였다. 부츠는 응급상황에 대비해서 치과진료물품을 챙겼다. 세관은 치과용품을 모두 놓고 가라고 했으나, 매번 사정사정해서 구색이 맞을 정도로 넣어올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테이아 마루(Teia Maru)’호에 탄 8명의 치과의사 중 어느 정도 치과기구를 가진 사람은 부츠 한 명 밖에 없었다. 150명의 승객들은 2년간 각기 다른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치과치료에 대한 요구가 많았다. 선원들도 치료받기를 원했다. 마닐라의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 온 클래슨(Klasson)도 최소한의 기구를 가져와서 사람들의 통증과 불편을 치료해주었다. 배에서의 식사도 밥 한 덩이, 빵 한 조각, 물 한 컵이 전부였다. 그 후 대형 선박인 그립스홀름(Gripsholm)호로 바꿔 탔다. 그 배는 좋은 배였지만, 배 안의 치과장비로는 발치 도구 외에는 치과의자나 모터장치가 하나도 없었다. 뉴욕까지 3200km를 항해하는 동안 412명의 환자들이 다녀갔다. 이렇게 부츠는 1943년 초겨울에 미국으로 돌아갔다(Boots, 1996: 67). 이에 비해 맥안리스는 부츠보다 뒤늦은 1945년 2월 24일 미국으로 송환되는 300명 안에 포함되었다. 미해군 선박을 탈 때 식량과 의복을 줄이고 치과장비를 챙겨 넣었다. 3월 30일 캘리포니아에 도착할 때까지 선박 내에서도 매일 5-6명의 환자를 보았다. 태평양전쟁기 수용소에 갇혔던 민간인들은 염증성 질환을 많이 앓았고, 의료물자의 부족으로 치과치료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부츠와 맥안리스는 언제 어디서나 구강진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정성껏 돌보는 치과의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4. 산토 토마스 수용소 포로들의 식량 배급과 질병

1) 식량 배급 감량과 사망 원인

(1) 포로들에게서 필리핀 국민들로 옮겨간 식량 배급(1943)

「제네바 협약」 11조에 의하면, “포로 억류국은 무상으로 포로를 급식해야 하고, 배급 양과 질은 억류군 군대와 양과 질이 동일해야 한다. 포로들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추가 식량을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받아야 하고, 주방에 고용될 수 있다. 충분한 식수가 공급되어야 한다. 음식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집단 징계조치는 금지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산토 토마스 수용소는 1942년 1월 개소 초기부터 식량 배급량이 적었다.
자체 취사를 담당할 난로가 들어왔다. 35명의 부인들이 다음 날 아침식사로 먹을 곡식을 바구니에 담아 빻아 옮기는데 2시간이 걸렸다. 곡식 가루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매우 거칠었다. 곰팡이 핀 빵이나 쌀벌레보다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다. 몇 달 내에 체력이 고갈된 노인 몇 명이 죽었다(Boots, 1944: 66).
1942년 여름 홍수와 지진으로 곡물 수확이 부족했다. 그나마 군수물자로 공출되거나 게릴라들에게 조달되었다. 전쟁으로 생필품 수입도 끊겼다. 1943년에는 산토 토마스 수용소 뿐 아니라 필리핀 국민들도 식량 배급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수용소 안과 밖의 생활에 큰 차이가 없어졌다.
1943년 5월 선교사 중 빌과 호튼이 산토 토마스 수용소로 돌아갔다. 수용소 안에서는 국제적십자사에서 오는 구호품을 얻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는 꽉 차서 800명이 새로 지어진 로스 바노스(Los Banos)수용소로 이사 가야했다(1943. 5. 14).
일본 군정청은 필리핀 국민의 민심을 얻고자 필리핀에 ‘위성 괴뢰 정부’를 세웠다. 일본이 군사통수권을 쥔 상태에서 라우렐 대통령이 선출되고, 1943년 10월 ‘필리핀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필리핀 제2 공화국 출범 당시 가장 큰 악재는 인플레이션이 현격하게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1달러가 3페소, 4페소, 5페소 등으로 점차 오르다 몇 배수로 급격히 올랐다. 100페소, 500페소짜리도 유통되었다. 화폐가치가 사라지면서 물물교환이 늘어났다.
아무도 필리핀 공화국 탄생에 열광하지 않는다. 왜 필리핀에서 메이지 유신을 기념하는가? 7만 8천개의 적십자 키트가 군대와 마닐라의 시민들에게 탈취되는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다(1943. 11. 8).
식량부족과 더불어 자연재해는 마닐라 시민들을 이재민으로 만들었다. 수용소에는 쌀 배급이 끊겼다.
11월 말과 12월 초에는 홍수가 나서 마닐라 시가 물에 잠기고. 보트로 통행해야 했다. 거리를 달리는 차들은 ‘식사금지’라 적힌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다(1943. 12. 2). 12월 수용소에서 적십자키트가 밖으로 유출되지는 않았지만 1000-1500페소로 되 팔렸다(1943. 12. 17). 12월 말 산토 토마스에 쌀 대신 옥수수가 배급되었다. 쌀이 끊기니 농축된 초콜릿을 먹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늘었다(1943. 12. 18).

(2) 하루 식량 배급 최대 255g에서 하루 800kcal 이하로 축소(1944-1945)

1944년 1월 초, 산토 토마스 수용소 안에 무장한 일본군 사령지부가 들어 왔다. 일본 군부는 태평양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대비하여 포로에게 지급되던 쌀 배급을 끊어 군에 공출했다. 이를 위해 일본군 사령관은 포로들에 대한 통제와 황국신민화 정책 추진을 강화하였다. 포로들에 대한 통제는 점호와 감시를 강화하고, 선교부를 타 수용소로 이동시켜 수용인원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아래 인용문은 산토 토마스 수용소의 이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쌀 배급이 끊기자 수용소 내에는 뇌물수수와 도둑이 급격히 많아졌다. 밤새도록 탐조등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오전엔 일본인 경비들이 건물들을 샅샅이 검사했다. 미국 선교부 명단이 일본군 종교부로 다시 제출되었다. 선교그룹들은 로스 바노스 수용소로 순차적으로 이동하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2월에는 500명이, 3월에는 530명이, 7월에는 406개의 선교그룹이 트럭으로 이동했다. 영국인과 호주인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수용소 경계부근에 있는 판잣집들에 대한 철거지시가 떨어졌다. 판자 집들이 매일 이사를 가서 4월에는 한 집도 남지 않았다.
식량 배급 축소와 함께 수용소를 옮기게 하는 것은 포로들에게는 커다란 생활환경의 변화였다. 이와 더불어 전쟁수행을 위한 포로들의 희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포로들에게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서약서를 작성을 강요하였다.
일본군 오카시(Okashi)가 의사 빌(Bill)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훈시했다. 포로들은 모든 일본군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도록 교육했다. 선교 의사와 치과의사들에게도 서약서 서명을 강요했다. 일본 천황의 생일에 맥안리스는 일본인 사령관의 협박 때문에 서약서에 서명했다(1944. 4. 29).
1944년 5월 초, 일본군은 수용소 내로 들어오는 식품의 종류를 제한하였다.
포로들은 지정된 품목 이외의 식품을 지니고 있거나, 벽 넘어 다른 이들과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매 주마다 처벌을 받았다(1944. 5. 6). 캐롤은 “수용소 내 식량 상황은 더 이상 재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박해다”라고 말했다. 쌀은 봉지 당 700페소이고 설탕은 600페소로 몇 달 동안 가격이 4-5배 올랐다. 그나마 시장에서 판매하는 음식도 점점 줄었다. 맥안리스와 선교의사들의 건강도 전과 다른 형태로 악화되었다(1944. 5. 13). 산토 토마스 수용소 내의 의사들은 일본군 사령관에게 포로들의 식량 배급 부족이 부당하다고 항의했다. 이에 일본군 사령관은 포로들에게 “너희가 더 많이 먹기를 바라면, 수용소 정원에서 더 많이 일하라”고 연설했다(1944. 5. 14).
1944년 5월 6일, 일본 육군차관의 지시로 「식량 등 절약에 관한 건」이란 지시가 내려졌다. 이 지시에 따르면 1일 주식은 현미 540g(또는 건빵 690g), 보리 165g, 합계 705g이었다. 이에 준해 1944년 6월 19일 나온 「포로의 식량 배급 정량에 관한 건」에서 장교와 그에 준하는 자에게 쌀보리 1인당 1일 390g, 준사관, 하사관, 사병과 그에 준하는 자에게 쌀보리 1인당 1일 570g의 배급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포로정보국, 『포로에 관한 제법규율집』). 1944년 8월, 성인 건강 검진 결과 사람들의 체중 감소가 급격해졌다.
맥안리스는 수용소에서 몸무게가 67.5kg, 허리둘레가 48cm 줄어든 상태에서 잇몸이 부어 어쩔 줄 모르는 흑인의 사랑니를 빼 주었다(1944. 8. 18). 배고픈 사람들은 쓰레기통을 뒤져 검게 탄 빵 조각을 집어 먹었다(1944. 8. 24).
1944년 9월부터 산토 토마스 사람들은 한 끼에 일상표준으로 필요한 70g이 아닌 28g의 식량을 받았다. 등급별로 나눠주었는데, 하루에 최대 255g으로 쌀과 옥수수 배급을 제한했다. 쌀을 킬로그램 당 60페소로 거래되었다. 산토 토마스 포로들의 배급량의 변화를 일본군부의 지침에 따른 다른 포로수용소의 배급량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는 민간인 수용소라 별도의 노동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1944년 1월부터 배급량이 다른 포로수용소의 경노동자와 입원 노환자 중간 수준이었다가, 9월부터는 입원 노환자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 수준으로는 병이 나아도 체력을 회복하지 못했다[17]. 또 배급되는 식품의 칼로리와 질도 낮았다[18].
1944년 9월 24일 라우렐이 미군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연일 비상경계경보나 공습경보가 울렸다. 선교의사들은 수용소로부터 2달 간 먹을 보급품을 받았다. 10월 선교의사들은 다시 세 끼의 빈약한 식사로 돌아갔다.
오전에 9g 옥수수 죽, 정오엔 100g, 저녁엔 10g의 밀가루를 푼 고기 국, 티네넘 등을 먹었다. 쓰레기도 없어지자 오리와 돼지들이 죽었다(1944. 10. 10). 운 좋은 몇 명이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 외의 사람들도 쓰레기 드럼통 옆에 서서 누군가가 버린 음식을 조금 얻으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배가 고팠다. 부엌에 있는 여자들은 무엇이든 껍질을 두껍게 벗겨서, 껍질을 집에 가져가는 방식 등으로 식량을 착복했다. 보통 음식 도둑은 15일 간 감옥살이를 했다(1945. 1. 29).
1944년 12월 17일 선교의사들은 체중 감소로 불평하는 포로들을 돌보기 위해 사령관이나 일본군의 눈에 띄지 않게 저울을 사용했다.
12월 31일 맥안리스의 몸무게는 58kg이었다. 이것은 10대 이후 47세가 될 때까지 중 최소의 몸무게였다. 1944년 크리스마스 전에 사람들은 모두가 성격이 팍팍해졌다. 일본군 사령관은 누구도 크리스마스 리플렛 따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했다. 한 명이 칼부림하며 싸우는 사건도 있었다. 난투를 벌이면 30일간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1945. 1. 29).
1944년 12월 한 달 동안 수용소 내에서 16명이 죽었다. 1945년 1월, 모든 포로들은 하루 표준권장량의 1/3이하인 800칼로리 이하로 먹었다[19]. 패전 후 일본인 1일 배급은 324g, 1,100kcal 로 배급에만 의존해서는 아사할 수 있었다(우쓰미 아이코, 2007: 66-70).
어떤 식사는 쌀 대신 캐모트(camote)만으로 했다. 쌀 100g에 360칼로리인 반면 캐모트는 120칼로리다(1945. 1. 3). 필수요원들에게는 조금 더 많은 식사를 주는 체계로 개편되어 의사인 테드와 맥안리스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1945. 1. 12). 그러나 수용된 대다수는 기아로 매우 고생해야 했다. 일본 어음으로 마닐라는 계란 하나에 120페소이다(1945. 1. 22).
1월 31일에 집계한 결과 1월 들어 하루 한 명꼴로, 총 32명이 사망했다. 이렇게 사망률이 늘어난 것은 1944년 1월부터 일본군이 쌀 배급을 끊고, 1944년 5월 이후 곡류 200g 이하로, 1945년 1월에는 하루 800kcal로 낮춘 것이 누적된 결과로 보인다. 포로들이 여분의 식량을 지속적으로 구입하기엔 인플레이션이 너무 급격했다. 계란 1개 가격은 1년 만에 240배로 뛰어 올랐다.

2) 기아와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

동남아시아와 일본에서 평균 3년 이상 포로 생활을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심한 영양 결핍과 다양한 질환을 앓았다. 생존한 남성의 66%가 각기병, 58%는 이질, 43%는 말라리아, 20%는 피부질환, 19%는 폐렴, 14%는 펠라그라, 6%는 결핵, 9%는 영양 결핍과 기타 질환을 앓았다(Harris and Stevens, 1945: 913-917). 맥안리스의 『마닐라에서의 전쟁일지』에는 “1945년 1월까지 산토 토마스 수용소 성인 포로들의 대부분은 체중 감소, 전신쇠약, 부종, 이상감각, 각기병을 경험했다”고 적혀있다(1945. 1. 30). 이 다섯 가지 증상들은 모두 영양 결핍과 굶주림에 의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1) 각기병

맥안리스 일지에 의하면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는 1942년 3월부터 각기병이 발견되고, 9월에는 환자수가 늘어났다.
새로운 캠프로 이동하게 된 필리피노 미국인들(Filipino-American)들은 매우 혹독한 강제포로수용소를 거쳐서 이곳으로 왔다. 그 동안 이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몽고 콩이 들어 간 밥과 소금을 배급받았을 뿐이다. 의료혜택은 거의 받지 못했다. 모두들 상당한 각기병(Beriberi) 환자들이다. 이질과 말라리아도 많았다. 불량한 위생, 영양 결핍, 실제적 굶주림과 열사병도 죽음의 원인이었다. 그래서 하루에 300명 이상이 죽어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1942. 6. 8)
위 인용문 속의 필리피노 미국인들은 ‘바탄의 죽음의 행진’에 참여한 군인들로 행진 후 루손 섬 남부의 카바나투안(Cabanatuan) 수용소와 오도넬(O’Donnell) 수용소 두 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이다. 이 두 수용소의 생활 환경은 1942년 3월에서 10월까지 필리핀의 군인포로수용소 중 최악이었다(Pollack, 1968: 272). 해리스와 스티븐스(Harris and Stevens)의 연구에 따르면 카바나투안 수용소 포로들의 75%가 비타민 B군 결핍에 따른 각기병 증상인 발에 화끈거리는 통증을 앓았다. 각기병은 필리핀 지역에 파견된 군대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포로가 되면 3개월 만에 각기병이 생겼다. 여기에 시간이 지체될수록 다른 비타민 결핍증들이 부가되었다. 부종을 동반하는 경우(wet beriberi)는 77%, 동반하지 않는 경우(dry beriberi)는 50%로 두 증상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호흡곤란을 동반하는 부종이 사라졌을 때 마른 각기병이 시작되었다. 마른 각기병의 증상은 딸꾹질이 멈추지 않고, 발이 불타오르듯 매우 아파 밤에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설사보다는 방대한 이뇨가 많았다. 피부괴저가 심해지면 살갗 밑으로 뼈가 드러나고, 심장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Pollack, 1968: 274). 따라서 각기병이나 다른 영양 결핍의 후유증 역시 질병과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었다(Pollack, 1968).
산토 토마스 수용소의 일본인 군의인 니시무라는 각기병 치료를 위해 선교의사 테드를 통해서 적십자사가 보내준 비타민 B 알약을 얻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1945. 1. 15). 그 후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 각기병의 증상이 심화된 심장병 사망자가 발생했다.
맥안리스는 의사 프란시스가 쉬는 오전에는 일반 환자을 진료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각기병을 앓고 있었다. 각기병으로 사지가 붓고, 무력감, 어지럼증, 기억혼미 등의 다양한 증세가 나타났다. 죽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1900년대 초반 이후부터 필리핀 섬에서 지내온 남자들이다. 맥안리스는 이들의 주 사망 원인을 심각한 각기병과 과도한 흡연으로 적었다(1945. 1. 30).
한편 태평양전쟁기 일본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미군들이 일본군이나 적십자구호품으로 받은 식품들에 대한 기록도 발견되었다. 일본본토에서는 식량 배급의 대부분이 주식인 쌀과 녹색 채소였다. 콩과 단백질은 매우 적고, 비타민A, 비타민C, 철분도 부족한 상태였다(Pollack, 1968: 274). 이러한 문제는 필리핀 농민과 수확기의 유목민에게도 존재했다. 필리핀 지부에서 지역병원의 군무원들에게 영양조사를 수행한 결과 영양 결핍, 말라리아, 결핵, 장내 기생충의 건강문제가 나타났다. 특히 일본에 의해 식량소출을 많이 당했을 때 영양 결핍은 더 심했다. 이와 같이 흔한 각기병은 비타민 B1을 투약해서는 잘 낫지 않고 입원해서 장기적으로 치료해야 나았다.

(2) 굶주림으로 인한 체중 감소

산토 토마스 수용소의 한 의사는 1945년 1월 남성 포로들의 평균 몸무게가 산토 토마스에 있는 3년 동안 24kg 줄었다고 보고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북유럽 쪽과 영국 군인들은 주로 적십자에서 보내준 초콜렛 바가 소화기 질환을 일으켜 설사로 8-20kg 정도 줄었다. 아래 인용문은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의사 팬튼의 사례를 적고 있다.
미국인 의사 팬튼(Fanton)의 경우 과도한 흡연과 체중 감소로 건강이 악화되자 더 이상 환자를 보지 못했다. 수용소로 들어올 때 그의 체중은 90kg이었는데, 3년 만에 44.5kg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는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하기 좋은 옛 모습으로 돌아갔다(1945. 1. 29).
필리핀 군인수용소 포로들이 일본군이나 국제적십자구호품으로 받은 식품들을 매일 기록(1942-1945)한 것이 있다. 군인들이 영양 결핍으로 집단적인 저단백혈증(hypoproteinemia)[20]이 나타난 것은 1944년 10월과 11월이다. 이 때는 부종(edema) 때문에 평균 몸무게가 일시적으로 늘어나기도 한다. 지방도 권장량의 15%까지 떨어지면 피부는 건조한 비늘로 덮인다. 그러나 곧 뼈와 가죽만 남는 체중 감소의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뎅기열이나 이질과 같은 풍토병에 걸리면, 체중 감소는 더 급격해진다. 즉 필리핀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나 포로들의 건강을 악화시킨 가장 큰 요인은 단순한 비타민이나 단백질 부족이 아니라 일본군에 의한 배급량 감소, 즉 칼로리 부족이었다. 젊은 남자들도 칼로리가 부족해지면 심신이 성가셔진다. 몇 달 후 근육이 줄어 들고, 눈이 멍해지고, 운동이 둔해지고, 걷기 싫어하고, 신경질적이고, 근육통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피곤해서 게으르게 쉬거나 자고 싶은데 불면증 상태에서 추위를 타고 손이 떨린다. 어지럽고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면서 혼미할 때 말기의 근육소실이 급격해진다. 눈이 쾡 해 지고 입안과 입술이 바짝 마르고, 아세톤 숨 냄새가 나고, 건반사가 소실되고, 몸의 중심을 잃기 시작한다. 하지만 칼로리 부족에 대한 치료효과는 매우 빠르고 드라마틱해서 몇 시간 내에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즉 동남아지역에서 포로가 되었던 미군들의 가장 중요한 영양 문제는 칼로리 결핍이었다.

(3) 포로 사망의 원인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 들어온 포로들의 상당수가 바탄 지역에서 온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정치군사적 목적에 의해 식량 배급을 줄이는 학대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로들의 사인이 각기병에 의한 것이냐, 굶주림에 의한 것이냐에 대한 의학적 연구도 진행되었다.
연구 결과 필리핀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건강을 악화시킨 가장 큰 요인은 칼로리 부족과 체중저하였다. ‘바탄의 죽음의 행진’에서 볼 수 있듯이 군인들의 생명과 건강유지에 중요한 순서는 물과 소금의 비율, 적정한 칼로리 섭취, 단백질 대사의 적정성, 비타민 섭취로 나타났다(Johnson, 1947).
칼로리 부족으로 혈 내 질소균형을 잃게 되면 풍토성 전염병으로 인한 급성 혹은 만성 염증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저항력이 떨어진다. 특히 각기병이나 욕창으로 인한 상처, 이차감염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진행되는 것은 막을 수 있는 면역력이 떨어진다. 그 과정에서 체내의 삼출물이나 분비물 등을 통해 단백질이 많이 누출되면서, 탈수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때 뎅기열이나 말라리아에라도 감염되면 급성 염증으로 인한 체액감소에 요구되는 영양분을 조달하지 못한다. 수용소 재탈환 전투 과정에서 복합외상을 입은 수용자는 3-7일 뒤에 단백뇨를 많이 배출한다. 회복기의 사람들은 하루에 3,600kcal 이상 단백질은 150g 섭취해야 한다. 하지만 수용소 안에서 음식물 섭취 부족으로 하루에 질소가 30g이상 부족해지면 체중 감소와 근육소실이 심해지고, 심신쇠약상태로 간다. 혈중 단백질 양도 줄어들고, 혈장알부민 유출도 생긴다(Pollack, 1968: 234-238). 그러면 유산소 생명활동을 위한 에너지 생성을 위해 단백질을 대사하는 미토콘드리아의 단백질 필요량을 보충하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산토 토마스에서 칼로리 부족을 사인으로 기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1945년 1월 28일 필리핀에 있는 모든 수용소의 의학부장을 담당하고 있는 일본군 수석의사 노기(Nogi)가 선교의사 대표를 맡고 있는 테드를 불렀다. 노지는 더 이상 ‘영양실조’나 기아‘를 직·간접적인 사망 사유로 적지 말라고 명령했다. 만약 테드가 그 말을 따르기 싫으면 선교 수석의사직을 사임하라고 협박했다. 테드는 사인(死因)을 조작해 허위 진단서를 쓰라는 조항은 「제네바 협약」에는 없다며 다음 날 사임했다. 2월 1일 테드는 사령관 집무실에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 테드는 사망진단서에 사인을 ‘영양실조’나 ‘기아’라고 쓰지 말라는 일본인의 지시에 응하지 않았다고 자백했다. 그 결과 수용소 내 일본인 감옥에 20일간 갇혀 있었다. 일본군들이 테드를 악명 높은 산티아고(Santiago) 수용소로 보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복역을 마친 테드는 총검을 찬 일본인 군인이 수행하는 조건으로 몇 가지로 제한된 진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테드가 복귀하자 사람들은 ‘수용소는 의사 없이는 유지될 수 없어’라고 말했다.
산토 토마스에 1942년 1월에서 1945년 2월까지 수용되어 있던 4,000명 중 사망자는 390명이고, 그 중 사인이 굶주림으로 기록된 것은 40명 정도였다. 선교의사 테드가 일본 군의의 허위 진단서 작성 명령에 따르지 않아 교도소에 갇힌 위의 사례를 감안하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들은 그 이상일 것으로 생각된다. 영양실조의 직접적인 원인은 배급량의 감소였다. 식량 배급 감량에 항의하고, 일본군의 허위진단서 요구를 거부하고, 「제네바 협약」 준수를 촉구하는 포로 의사들의 행동은 의료윤리와 전문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전후 미국 군의들의 적절한 식단처방과 영양제 보충은 수년간 포로생활동안 앓아왔던 영양 결핍질환을 해소하고, 질병으로부터 회복할 체력을 보충해주었다.
한편 식량 배급 감량과 질 저하로 인한 문제가 지속되지 않도록 1950년 「포로 대우에 관한 협약」 26조에는 포로들의 건강유지와 체중 감량이나 영양 결핍 예방을 위해 일일식량 배급의 양, 품질, 품종이 좋은 식단에 관한 기록을 남기도록 했다. 또 31조 정기검진에 의료진은 체중을 기록하고 포로의 영양 상태도 감독하도록 하였다. 33조에서는 테드와 같은 불공정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 진영의 수석의료책임자는 의료요원 해당 등급의 주제에 관한 적대 행위 발생 시에 합의를 하도록 되어있다. 포로 신분이거나 보호국 쪽 수석 의료관은 자신의 의무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 억류국 수용소 관할 당국과 협의할 권리가 있다. 군 당국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5. 미군의 산토 토마스 수용소 재탈환 전투과정에서의 정신신체질환

1944년 여름 미군이 사이판과 괌을 탈환하면서 필리핀 제도가 일본 본토 방위의 최전선이 되었다. 맥아더가 1944년 10월 17일 레이테(Leyte)섬을 공략하고[21], 루손의 미군이 1945년 1월 9일 마닐라로 진격할 때까지, 일본군은 ‘가미가제’ 형식으로 맞섰다[22].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기대가 반복되면서 심신이 쇠약해져 염증반응이나 정신신체질환을 앓았다[23].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다가 농가진(impetigo)이라는 피부염을 앓았고, 어른들은 건초염과 정맥염, 열병 등을 앓았다. 수용소 의사들은 배농처치 후 휴식을 통한 자가 치유를 권장했다. 미연합군이 필리핀을 재탈환하던 시기에 미군 주도로 페니실린 근육주사 및 설파다이아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24].
병원에 있는 포로들의 몇 명이 미쳐가기 시작했다. 1944년 12 성탄절, 맥아더의 생일(1944. 1. 28), 루즈벨트 대통령의 생일(1944. 1. 30)마다 “수용소 포로들을 구출한다”는 삐라가 떨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포로들은 지쳐서 둔감해졌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지친 포로들 사이에는 알코올 중독과 과다 흡연이 많이 나타났다.
암시장에서 술과 담배는 항상 매매되었다. 수용소 안에는 음식 대신 술과 담배, 코카인을 사는데 돈을 쓰는 남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호품에 중독되면 식욕이 줄어든다. 기아상태에서도 자포자기의 취한 상태로 생활하는 남자들이 늘어났다. 노름꾼, 주류 밀매자들은 유죄가 밝혀지면 30일간 교도소에 갇혔다(1944. 1. 15).
1945년 1월 이후 포로들은 아래 인용문처럼 전쟁피로증(combat fatigue)을 나타냈다.
이센버그가 미군들이 남쪽 먼 곳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어젯밤 담당 너머 도망갔다. 이곳 소년들은 큰 관심과 더 큰 근심으로 두통을 호소한다(1945. 1. 17). 미군은 매우 가깜고 우리의 뉴스는 아직 부정확하다. 결말이 빨리 나길 희망한다(1945. 1. 20).
전쟁피로증은 지속적인 두통, 허리통증과 근위축, 재발성 소화불량과 위궤양, 관절염, 현기증, 손발 저림, 자율신경반응 항진, 모발둥지굴(pilonidal sinus)의 화농, 콧물, 시야굴절이상, 오한, 기능적인 호흡곤란 등이다. 1945년 2월3일 미군이 마닐라에 입성하였고, 다음 날 밤 9시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 미국 탱크가 들어왔다. 일본군 80여 명은 교육동 2, 3층에 있는 수용인 240명을 인질로 삼고, 미군과 전투를 벌였다. 7일 미군과 일본군이 대치한 상태에서 15번 가량 폭격이 가해진 후 포로 60명이 다치고, 10여 명이 사망했다. 일본군들의 피해는 더 컸다. 8일 미군이 산 토마스 수용소를 차지했다. 아래 인용문은 전투 과정을 겪은 포로들이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폴리의사(연합교회 목사)는 죽고, 부인은 팔을 잃었다(1945. 2.7). 몇 번의 일본군 탄피가 3명 이상의 포로들을 다치거나 죽게 만들었다. 탄피가 우리에게 떨어지지 않도록 바라는 웅얼거림과 칭얼거림에 잠을 잘 수 없다(1945. 2. 11). 조용한 밤에는 공중에서 터진 폭격이 터지는 것 같은, 아직도 그런 곳에 있다는 것 마음이 반복해서 든다. 어떤 플래시는 매우 생생하다(1945. 2. 12).
산토 토마스 수용소 포로들처럼 39개월간 필리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1,617명의 남자들에 대한 신경정신학적 연구에 의하면, 정신증(psychosis)은 5명, 정신신경증(psychoneurosis)은 0.7%가 앓아 예상 사망률(expected mortality)은 1% 미만이었다. 그 외 심한 불안 증세와 혼란을 겪는 사람이 12,7%, 말초신경장애가 13% 나타났다(Brill, 1946: 429-438). 포로들을 대상으로 한 신경정신학적 연구에서 정신신체질환 중 중증 환자의 비율은 높지는 않지만 적절한 예방 및 치료가 요구되었다. 그래서 1950년 전시 민간인 보호를 위한 협약 91조에는 정신병에 걸린 환자들을 위한 격리조치를 포로 대우를 위한 협약 110조에는 직접송환을 명시하였다.

6. 결론

이상과 같이 태평양전쟁기 마닐라에 있는 산토 토마스 대학교 민간인 수용소 포로들에게 제공되었던 생활환경과 의료 실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일본의 대동아정책이 교전국 사회와 포로들의 건강에 끼친 영향을 파악해보았다.
산토 토마스 민간인 수용소는 「제네바 협약」을 준용하여 진료소와 의료진, 정기검진, 전염병 예방주사접종, 위험환자 상급병원 이송체계 등을 갖추었다. 이것은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의 군인포로강제 노동수용소보다는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포로 4,000명가량이 좁고 밀집한 공간에서 공동수도와 개방식 화장실을 이용하는 비위생적인 환경이었다. 비누나 화장지, 소독제 등의 생필품 및 위생용품도 부재해 풍토성 전염병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포로들은 질병 치료와 치유에 필요한 의약품과 기구 및 기자재를 제공받지 못했다. 포로들의 치과진료비는 유료였으며, 돈이 있어도 기자재가 조달되지 않아 보철기공이 어려워졌다. 환자들의 염증성 질환은 점차 늘어났지만 간단한 외과적 처치와 안정 가료 등의 보존적 처치에 집중해야 했다. 이에 1950년 「제네바 협약」에서는 억류국에 충분한 수도시설과 위생용품, 약품과 기자재를 조달하고 효과적인 방역과 예방접종 및 처치와 치료비를 부담할 것을 명시하였다.
한편 일본 군의들은 포로 신분의 의사들을 관리했다. 포로의사들은 서약서를 쓰면 민간지역 통행과 거주이전도 가능했다. 하지만 정기검진을 위한 방문과 귀소 명령을 받으면 수용소에 복귀하는 형태로 포로 신분이 유지되었다. 수용소 밖에 머무는 선교의사들은 인근지역주민과 학생, 타 외국인 포로수용소의 정기검진과 순회 진료 등을 통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 생활에서 포로들을 위협했던 가장 큰 문제는 식량 배급량이었다. 개소 시점인 1942년 1월 초부터 식량 배급량이 다른 수용소의 경노동자나 노약자 수준으로 적었다. 1944년 1월에는 산토 토마스 수용소 안에 일본 군부의 막사를 설치하고, 포로들에 대한 쌀 배급을 끊었다. 대신 신사참배와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 서약을 강요했다. 이어 일본 군부는 1944년 5월 태평양전쟁 전 지역의 포로 배급량을 줄이도록 명령했다. 1944년 9월 필리핀 본토의 전쟁이 재개될 때 산토 토마스 수용소 포로들의 식량 배급량은 일당 1,000kcal 이하, 1945년 1월에는 일당 800kcal이하로 감량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중국과 대만, 조선, 일본 등지에 세운 민간인 포로수용소 식량 배급량 중 최하수준이었다. 이에 대해 맥안리스와 포로의사들은 일본군 사령관에게 포로들에 대한 식량 배급을 늘리고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식량 배급 감량을 지속해 산토 토마스 수용소의 성인 남자들은 평균 24kg의 체중 감소를 보였다. 포로의 대다수가 각기병과 영양실조, 아메바성 이질과 뎅기열, 전신쇠약 증세를 보였다. 일본 군의들은 식량 배급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포로들이 필요로 하는 의약품 및 의료서비스를 공급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와 더불어 포로들의 사인이 ‘영양실조’라는 진단서를 쓴 의사를 투옥하거나 협박하는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이를 은폐하려 하였다.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는 총 390명이 사망하였는데, 식량 배급이 최소화되고 포로석방이 지연되는 1944년 말부터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수용소 안팎에서 전투가 지속되면서 과도한 불안이나 무기력증, 두통, 중독과 같은 정신신체질환을 겪은 포로들도 많았다. 이에 1950년 「제네바 협약」에서는 정기검진에 체중기록과 영양 감독을 의무화하고, 각 진영의 수석 의료책임자들이 적대행위 발생 시에 합의와 관할당국의 협의할 권리를 지님을 명시하였다.
이와 같이 산토 토마스 수용소에서는 3년 이상의 식량 배급 감량과 위생시설 부족으로 포로들의 9.75%가량이 사망했다. 전시하 의사들의 정기검진과 식이 처방, 체중기록, 위생관리, 풍토성 전염병 등의 예방 및 치료는 포로들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의료의 영역이다. 따라서 전시하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의료인들의 전문성과 윤리와 관계된 책무라 할 수 있다. 포로들이 더 이상 이러한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의학사적인 연구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Notes

1) John Albert McAnlis, War Days in Manila, 1941-1945 (이하 『마닐라에서의 전쟁일지』로 칭함). 이 문서는 별도의 출판 없이 맥안리스 가족들이 대대로 보관했다가 2016년 6월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에 기증한 일지 형식의 글이다.

2) 「第81回 帝國議會貴族院 兵役法中改正法律案特別委員會議事速記錄」, 第2號, (1943. 2. 2).

3) 1942년 6월에는 조선·대만 및 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자바·보르네오에 포로수용소를 추가로 설치하기로 하였다(軍令陸甲 제41호, 제45호). 늘어난 연합군 포로수용을 위해 경성을 비롯한 7곳에 추가건설을 결정했다는 신문보도도 발표되었다(『매일신보』, 1942년 8월 23일, 1944년 12월 1일; 조건, 「일제 강점 말기 조선주둔일본군의 조선인 포로감시원 동원과 연합군 포로수용소 운영」,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 455, 481쪽에서 재인용).

4) 1929년 외교회의에서는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Geneva Convention Relative to the Treatment of Prisoners of War, 27 July 1929)은 채택되었고, 「적국 민간인 보호 협약 초안」은 발의만 되었다가 1934년 제15차 적십자국제회의(동경)에서 승인되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조약으로 채택되지 못한 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서는 적국 민간인에게 1929년 「포로 대우협약을 제규정」을 준용하도록 하고, 11,070회 가량 각 교전국의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억류국 입회인 없이 포로 대표 및 포로 개인들을 면담하였다(이용호, 2008: 95-97).

5) 필리핀의 루손 섬의 바탄 지역에서 3개월간 일본군과 연합군의 전투가 있은 후 1942년 4월 9일 미군이 일본군에게 항복한다.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마닐라의 산토 토마스 대학 수용소로 보냈다. 군인들은 바탄 남쪽 끝 마리벨레스에서 산레르난도까지 88km, 카파스에서 오도넬(O’Donnell) 수용소까지 13km를 강제로 행진하게 했다. 이것을 ‘죽음의 행진’이라 부르는데, 물과 식량을 배급하지 않으면서 낙오자를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방식으로 포로 학살을 자행했다. 폴락(Herbert Pollack)은 1만 4천 명에서 1만 6천여 명의 미군과 6만 명의 필리핀 군인들이 오도넬 수용소까지 가는 60일 동안 1천 5백 명 이상의 미군들과 2천 7백명 이상의 필리핀인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또 이들이 수용된 오도넬 수용소와 카바나투안(Cabanatuan) 수용소가 필리핀 군인수용소 중 식량 배급 및 의료시설 등이 가장 열악했다고 기록하였다(Pollack, 1968: 272).

6) 존 맥안리스(John Albert McAnlis, 1897-1979)는 노스웨스턴 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미군 치과진료소인 루이스 캠프에서 5달 동안 견습하였다. 그는 1920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921년에는 캔자스 주 웰링턴에서 개인 치과를 열었다. 1921년 맥안리스는 부인 플로렌스(Florence, 1896-1967)와 아들 도널드(Donald)와 함께 한국에 왔다. 간호사 출신인 플로렌스는 세브란스병원(1921-1927)에서 간호사 교육과 훈련을 담당했고, 한국간호졸업생연합회 비서, 세브란스 직원 사택 친목위원회 회장을 역임했다. 1940년 11월, 플로렌스와 그의 자녀들만 미국으로 우선 대피하였다. 맥안리스는 산토 토마스 수용소 생활(1942. 1. 5-1945. 2. 23) 후 1945년 3월 30일 미국에 도착하였다. 그는 1946년 8월 1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패서디나(Pasadena)에서 개인 치과의원을 운영하면서 패서디나 웨스트민스터 북장로교와 연합하여 한국을 돕는 ‘남캘리포니아 한국 클럽’을 조직하고 자신들을 ‘Koreaites’라 불렀다.

7) J. L. Boots, “Delayed Return, There was no equipment, no motor, no chair, no instruments for extraction, no supplies,” The Alumni Journal of the University of Pittsburgh Dental School (1944); Yonsei University College of Dentistry, Dr. John Leslie Boots and His Life in Korea (Seoul: Yonsei University College of Dentistry, 1996), pp. 65-68.

8) 존 부츠(John Leslie Boots, 1894-1983)는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Pennsylvania State College, 1915-1918)과 피츠버그 치과대학(University of Pittsburgh College and Dental School 1919-1921)을 졸업하였다. 그는 피츠버그대학과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수련을 거쳤고, 1928년에는 M. S.와 F. A. C. D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921-39년까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에서 선교의사로 활동하였고, 1939년부터는 베이징협화의학원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41년 중국에서 축출되어 마닐라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는 1942년 상하이 외국인 수용소를 거쳐 1943년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1943-52년에는 패서디나에서 1952-1962년에는 샌디에고(San Diego)에서 개인 치과를 열었고, 1970년부터는 피츠버그 치과대학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9) 1950년 10월 21일 발효된 「포로 대우에 관한 협약」은 제3협약(Convention Ⅲ)으로 1929년의 포로 대우 협약을 대체하는 협약이다.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은 제4협약(Convention Ⅳ)로 같은 1950년 10월 21일에 발효되었다. 제4조약은 충돌 당사국 내의 외국인 및 점령 지역 주민과 민간인 피억류자 등 특정 민간인의 보호에 역점을 둔 것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이 협약의 부재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것을 감안한 조약이다(이용호, 2008: 114-115, Geneva Convention relative to the Treatment of Prisoners of War, 75 U. N. T. S. 135, entered into force Oct. 21, 1950).

10) John Albert McAnlis, War Days in Manila, 1941-1945, 1942년 1월 5일. 이후 본 논문의 인용문은 대부분 맥안리스의 『마닐라에서의 전쟁일지』에서 따온 것이다. 두 번째 인용문부터는 날짜(연, 월, 일)나 기간(연, 월-연, 월)만을 표기하도록 하겠다.

11) 중국의 산둥 수용소에서도 1944년 2월 중국인 게릴라를 통해 몰래 반입된 설파닐아미드 덕분에 2차 감염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약품이 부족했다(랭던 길키, 2013: 119).

12) 뎅기열은 세계의 열대·아열대 지방에 널리 퍼져 말라리아와 함께 대표적인 열대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필리핀은 세계 최초로 뎅기열 환자에 대한 의학적 보고가 제출된 나라이다. 최근 위생시설이 잘 갖추어져 말라리아가 거의 퇴치된 싱가포르나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서도 종종 유행할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의학적 소견은 다음과 같이 밝혀져 있다. 잠복 기간은 4일에서 7일이며, 발병 초에는 오한과 무기력감을 동반한 고열이 3일 정도 계속된다. 근육통, 관절통과 같은 강한 통증을 동반하기 때문에 영어로는 “break bone fever”라고도 부른다. 그 밖에 두통, 안와 통증, 식욕부진, 복통, 변비를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 발병 후 3-4일 후에 가슴, 사지, 안면으로 발진이 퍼지고 가렵기도 하다. 이러한 증상은 보통 5-7일 정도로 자연 소실되므로 치료법은 대증적 요법이다. 환자를 격리할 필요는 없고 집중적인 수액 공급과 적극적인 보존적 치료를 시행해야 한다. 말라리아나 황열병에 비해 사망률은 훨씬 낮으나, 면역력이 낮아져 뎅기 출혈열이나 뎅기 쇼크가 발생할 경우 집중적인 치료를 해야 치명률이 1-2.5%이다. 대규모 발생일 경우 의료자원이 고갈되어 저개발 국가일수록 사망률이 높다. 이재갑, 「뎅기열」, 『대한내과학회지』 86-3, 2014, 277-281쪽.

13) 오늘날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는 의무요원(종교요원 포함)은 그 억류기간 동안 포로로 간주되지 않는다. 의무요원은 최소한도 본 협약상의 이익과 보호를 받으며, 포로들에게 의료상의 간호와 종교상의 봉사를 제공함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편의를 부여 받는다(「포로 대우에 관한 협약」 제33조 1항, 이용호, 2008: 180).

14) 맥안리스, 「북장로교선교연례보고서」, 1934-1935.

15) 맥안리스는 선교지부가 운영해 온 여자고등학교가 총독부지정을 받도록 했고, 부인 플로렌스 함께 200여 명의 조선인 어린이들이 있는 고아원에서 10여 년 간 일요학교를 열었다.

16) 맥안리스, 「북장로교선교연례보고서」, 1924-1925, 1925-1926, 1926-1927, 1927-1928, 1938-1939; 이주연, 『한국근현대치과의료체계의 형성과 발전』, 167쪽, <표14>에서 재인용.

17) 수마트라의 팔렘방 비행장 건설노동에 투입된 포로들은 1943년 10월까지는 중노동자는 1일 쌀 700g, 경노동자는 500g을 지급받았다. 그러다 「포로에 관한 제법규율」이 내려오자 팔렘방 현지 포로수용소장은 장기 지구전을 예상해 배급량을 더 줄였다. 비행장 건설을 할 때에는 중노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1일 쌀 400g, 가벼운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300g, 입원 노환자에게는 180g을 지급하였다. 1944년 5월 이후 줄어든 식량으로 인해 1년이 지나자 포로들은 사자의 대열에 합류되었다.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 전반적인 피로, 심장병 등이었다(우쓰미 아이코, 2007: 66-70).

18) 일본군은 태평양전쟁기 100g의 쌀은 약 340kcal, 밀가루는 약 310kcal, 옥수수는 113kcal로 계산했다. 이에 비해 맥안리스는 쌀 100g을 약 360 kcal로 계산했다.

19) 2차 세계대전 시기 다른 수용소의 식량 배급량과 비교해보았을 때, 중국의 산둥수용소는 1944년 말부터는 빵 배급량이 하루 1200kcal로 줄어들었다(랭던 길키, 2013: 196).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우는 수용 초기 하루에 5온스 빵 한 조각이 배급량의 전부였다(빅터프랭클, 2005: 36).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5년 1월 나치에 의해 파괴된 구소련의 재건을 위해 루마니아에 살던 17-45세의 독일인들이 강제로 수용되었던 우크라이나 수용소(Gulag)의 경우도 “빵은 아침에 하루치를 한꺼번에 받았다. 경노동자는 600g, 중간층은 800g, 최고층이 1000g을 받았다. 4년 동안 334명이 숨졌다(헤르다 뮐러, 2010: 124, 285).

20) 혈액 속의 단백질이 소변으로 빠져나가서 생긴다. 성인은 식사성단백질 섭취부족(기아, 영양불량), 간에서의 알부민의 합성장애, 소모성질환으로 알부민 분해항진, 혈장 알부민의 체외누출이 있다.

21) James A. Huston, The Sinews of War: Army Logistics, 1775-1953 (Washington D. C.: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6), p. 544.

22) Maurice Matloff ed., American Military History Vol. 2: 1902-1996 (Da Capo Press, 1996); Dod, Karl Christian, The Corps of Engineers: the War against Japan Vol. 6 (Washington D. C.: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US Army, 1969), pp. 512-521.

23)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저자는 사람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다가 절망에 빠져 저항감이 줄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빅터 프랭클, 2005: 136)

24) Luman A. Brewer, “Initial Wound Surgery”, J. B. Coates ed., Surgery in World War Ⅱ: Activities of Surgical Consultants Vol. I (Washington, D. C.: the Medical department of the United States Army, 1962), pp. 296-7.

Table 1.
Incidence of dengue in U. S. Army personnel in the Philippine Islands, November 1944 to December 1945 (Rate expressed as number of cases per 1,000 average strength)
년도/달 환자 수 천 명당 발병비율(%) 년도/달 환자 수 천 명당 발병비율(%)
1944/11 652 39.8
1944/12 1,360 49.1

1945/1 1,023 31.8 1945/7 930 16.4
1945/2 893 24.8 1945/8 1,140 15.2
1945/3 1,214 25.7 1945/9 439 7.9
1945/4 857 19.9 1945/10 294 6.3
1945/5 913 19.6 1945/11 285 6.3
1945/6 839 13.4 1945/12 89 4.1

1945년 합계 8,926 15.7
1944년 합계 10,938 17.9

※ 출처: Oliver R. McCoy and Albert B. Sabin, “Dengue”, J. B. Coates ed., Preventive Medicine in World War Ⅱ Vol Ⅶ: Communicable Disease (Washington, D. C.: the Medical department of the United States Army, 1964), p. 38.

<그림 1> 존 맥안리스
Fig. 1 John Albert McAnlis, 1897-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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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존 부츠
Fig. 2 John Leslie Boots, 1894-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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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1945년 마닐라 상공에서 C-47항공기에서 DDT살포
Fig. 3 C-47 aircraft spraying DDT over Manila in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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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심한 각기병 환자들의 일반적인 자세
Fig. 4 Typical postures of the patients with severe beriberi dis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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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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