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 한의학 교육과 전통 한의학의 변모 -한의학 강습소를 중심으로-*
Abstract
The modern education institutes play an important role in fostering professional talents, reproducing knowledge and studies, and forming the identities of certain academic fields and vocational communities. It is a matter of common knowledge that the absence of an official Korean medicine medical school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was a severely disadvantageous factor in the aspects of academic progress, fostering follow-up personnel, and establishment of social capability. Therefore, the then Korean medicine circle put emphasis on inadequate official education institutes as the main factor behind oppression. Furthermore, as the measure to promote the continuance of Korean medicine, the circle regarded establishing civilian Korean medicine training schools as their long-cherished wish and strived to accomplish the mission even after liberation. This study looked into how the Korean medicine circl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utilized civilian training schools to conduct the Korean medicine education conforming to modern medical school and examined how the operation of these training schools influenced the changes in the traditional Korean medicine. After the introduction of the Western medical science, the Korean medicine circle aimed to improve the quality of Korean medicine doctors by establishing modern Korean medicine medical schools. However, after the annexation of Korea and Japan, official Korean medicine medical schools were not established since policies were organized centered on the Western medical science. In this light, the Korean medicine circle strived to nurture the younger generation of Korean medicine by establishing and operating the civilian Korean medicine training schools after the annex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The schools were limited in terms of scale and status but possessed the forms conforming to the modern medical schools in terms of education system. In other words, the civilian training schools not only adhered to the standard education of Korean medicine but also aimed to lay their foundation in the education system of the Western medical science by forming the separated curriculum including basic medical science, diagnosis, clinic, drug, and the practice of acupuncture and moxibustion. Furthermore, having contained the basic subjects of the Western medical science - physiology, anatomy, pathology, etc. - in the compulsory subjects shows perceiving the intellectual and systematic hegemony of the Western medical science and satisfying the demand of the colonial power. Such an education system was succeeded and solidified through the training sessions and the training schools operated by the local colonial governments after the 1930s. Korean medicine became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Korean medicine through the establishment and the operation of such training schools.
색인어: 일제시기, 한의학, 교육, 의학교, 민간, 강습소, 한의학의 변화
Keywords: Japanese colonial era, Korean medicine, education, medical school, civilian, training school, changes in Korean medicine
1. 머리말
19세기 말 신·구문명의 대조 구도 속에서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됨에 따라 기존의 주된 의료 방식이었던 한의학은 점차 낙후되고 비과학적인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격하되기 시작하였다[ 1]. 식민지시기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자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한의학을 도태시키기 위한 정책적 규제를 강화하였다[ 2]. 이에 한의학은 일제의 정책적 지향으로 인해 더더욱 ‘근대사회’에 걸맞지 않고, 서양의학의 보급에 따라 자연스럽게 역사의 무대에서 빠져나가야 할 조선인의 관습과 전통으로, 그 사회적 이미지가 식민권력 및 서양의학 측에 의해 생산되었다[ 3]. 이처럼, 오랫동안 조선인의 의료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한의학은 불과 몇 십 년 만에 지적 헤게모니를 상실한 채, 불안정한 의료형태의 지위로 전락하였다.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되었던 서양의학과는 달리 일제가 정책적으로 한의학을 멸시·홀대하였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예는 의사와 의생 면허 및 지위의 구별, 제한적 의생제도[ 4]를 통한 의생 인원수와 개업지역에 대한 규제, 의생들에게 서양의학 지식의 강제적 주입 및 공식적인 한의학 교육기관, 즉 의학교 설립에 대한 제한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일제시기 한의학 의학교는 서양의학이 중심이 된 근대적 의학교가 여러 곳 설립된 것과는 달리 단 한 곳도 설립되지 못하였다. 교육사회학의 기능론적 교육관에서 볼 때 근대 교육기관은 전문화된 인재를 양성하고 지식, 학문의 재생산, 더 나아가 특정 학문·직업 공동체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권정숙 외, 2009: 139; 김병성, 2004: 53-54). 학교의 부재가 한의계에 있어 학문의 발전, 후속 인력의 양성, 그리고 사회적 역량을 구축하는 면에서 상당히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당시 한의계는 자신들의 주된 탄압 요인으로 공식 교육기관의 미비(未備)를 강조해 왔다. 아울러 한의학의 존속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으로 민간 한의학 강습소의 설립을 숙원 사업으로 삼고, 이를 완수하기 위해 해방 이후까지 꾸준히 노력하였다[ 5].
그러나 민간 한의학 강습소가 갖는 이와 같은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간 학계에서는 일제시기 공식 한의학 교육기관이 부재하였다는 인식에 익숙한 나머지, 민간 한의학 강습소를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연구가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물론 일제시대 한의학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다룬 이종형(1997)과 김기욱 등(2006)의 저술에서는 한의계의 내적 시각에서 당시 한의계의 학술 진흥 및 30년대 한의학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동제의학교, 공인의학강습소 및 경기도 의생강습소의 상황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이들 저술은 한의학 교육 자체에 주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제시기에 이루어진 한의학 교육의 전개 양상, 변화 및 그 특징을 조명하지 못하였다. 또한 30년대 이후 도(道) 식민당국에 의해 여러 의생강습소가 설립된 경위를 전시체제의 배경을 들어 간략하고 모호하게 서술하는 등 역사적 사실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한편, 유일한 전문 연구로 볼 수 있는 기창덕(1992: 178-196)의 논문은 초창기의 연구로서 여러 의학강습소의 존재를 조명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지만, 이 연구 역시 의학교육 자체에 천착하지 않았으며 또한 의생단체를 의학교육기관과 혼동하였다는 한계를 가진다[ 6].
일제시기 민간 강습소들이 규모나 체계에 있어 미비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한의계는 이들 민간 강습소의 설립 및 운영을 통해 한의학의 학문 체제를 재확립하는 동시에 서양의학과의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모색·구축하고 있었다. 교육이념이나 교과과정 등 내용면에서는 근대 교육, 특히 서양의학 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1930년대 관변 의생 강습회나 강습소의 주된 기반이 되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오늘날 한의학 교육시스템의 원형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식민지시기 한의학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통 한의학과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특히 서양의학 지식을 수용한 것과 관련하여 신규환이 논한 바와 같이 한의계에게 서양의학 지식은 1910년대 총독부가 강요한 의료질서로 인해 ‘알아야만 하였던 것’이지만 1920, 30년대를 거치면서 ‘알고 싶은 것’과 ‘받아들이고 싶은 것’으로 인식이 전환되었다( 신규환, 2007: 254). 이런 인식의 전환은 과연 한의학 교육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논증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일제시기 공식 한의학 교육기관의 부재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실제로 일종의 준교육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민간 한의학 강습소 및 이와 관련된 관변 의생강습소(회)의 설립 및 운영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근대 한의학 교육 모델의 형성 과정 및 특징을 분석하고, 나아가 일제시기 한의학의 변모 및 학문적 정체성을 조명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2. 전사(前史): 한말 근대 한의학 교육기관 설립의 논의와 동향
근대 이전에도 한의학 교육기관은 존재하였다. 조선시대의 경우, 의학은 태조 2년에는 육학(六學)의 하나로서, 또한 태종 6년에는 십학(十學)의 하나로서 중앙 및 지방 각도에 설치되어 양가(良家)의 자제들에 대한 일종의 교양교육으로 이루어졌다( 손홍렬, 1987: 197). 그리고 전문의원 양성 교육은 중앙에서는 전의감(典醫監)이나 혜민서(惠民署), 지방에서는 각도에 파견된 의학교유(敎諭)를 통해 실시되었다( 손홍렬, 1987: 210). 하지만 상술한 기관들은 의학교육을 겸하였을 뿐, 전문기관이 아니었고, 또한 의학 교육의 규모나 체계 역시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특히 의원 양성을 위한 국가의 의학교육은 중앙 의료기관에 배치될 소수 의료인의 확보에만 치중되었을 뿐, 지방 의원의 양성을 위한 의학 교육은 매우 지지부진하였다( 손홍렬, 1987: 210-214). 따라서 근대 이전 한의학의 전승은 도제식 교육이나 독학에 의한 경우가 더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7].
이미 오래전부터 정부가 염두에 둔 계획, 독립협회를 통해 표출된 개화파 인사 및 일부 민중의 요구, 그리고 지석영의 건의 등 여러 요소가 어우러진 결과로 1899년에 대한제국은 서양의학을 교수하는 전문교육기관인 관립의학교를 설립하였다( 황상익, 2000: 171-180). 이에 대해 1904년 4월 각각 전의(典醫) 및 전의보(典醫補) 출신이었던 장용준(張容駿)과 김병관(金炳觀)은 학부에 상소를 올려 관립의학교 이외에 한의학 교육을 위한 의학교를 별도로 설립할 것을 아래와 같이 청원하였다.
사람의 질환은 모두 체질에 따라 상이하며 지역에 따라 변합니다.……각각의 질병과 약물을 하나의 규범으로 동일시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사람의 체질과 각 지역의 풍토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외국과 풍토가 서로 다르며 질병의 종류가 많아 약을 통일시키기가 어려운데, 현재 의학교는 서양 내·외과 학문만을 오로지 하여 어느 정도 실시됨에, 각종 법률과 제도가 갖추어져서 그 효과가 점차 드러나고 있사옵니다만, 한의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니, 항간에 도는 구결들을 단방(單方)이라고 칭하고 이동원(李東垣), 주단계(朱丹溪)의 의서들은 한갓 문구로 취급하여 약을 처방·조제함에 대강 때려 맞추고, 우연히 그 병이 맞아떨어지면 곧 좋은 약재라 하니 이는 본디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여 외적으로 표방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대한의학교를 설립하고 이를 본부(학부)에 두시옵소서. 학생을 추천·입학시키고, 졸업 이후로 한정하여 재능에 따라 시험을 치른 뒤 등용하시되, 내치는 내과로 하고 외치는 외과로 하여 두 의학교가 의술을 베풀면 곧 모든 것이 갖추어질 것입니다[8].
위 청원서에서 보이듯이 장용준 등은 체질과 풍토가 다르므로 의약을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동서의학 병존에 당위성을 부여하였다. 그러면서 서양의학 교육기관인 관립의학교와 별도로 한의학 교육기관을 따로 설립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들의 청원이 곧바로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으나, 2년 후인 1906년 5월 한의사 강필주(姜弼周), 교육사업에 관심을 가진 이응세(李應世)와 조동호(趙東浩) 등의 발기로 동제학교(同濟學校)가 설립되었다[ 9]. 그간 알려진 바와 달리 동제학교는 한의학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기는 하였으나 한의학 전문교육기관은 아니었다[ 10]. 1906년 5월 학교 설립 당시 보도된 취지서를 보면 이 학교의 성격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다.
무릇 널리 동포를 구제하는 것은 자선사업이고, 영재를 교육하는 것은 문명개화의 급선무이다. 현재 전 세계 열강들이 실용을 강구하지 않음이 없다. 구제·자선(救濟慈善) 사업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의약을 근간으로 하고 다음으로 증상을 살펴봄에 정밀함에 더욱 정밀함을 구하여 반드시 심오함에 이르도록 힘쓰니, 이는 대체로 인명(人命)과 위생(衛生)을 중시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대한제국에 병원·약포(藥鋪)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이 경영하는 것과 관(官)이 설립한 약간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 겨우 ‘입문’[『의학입문(醫學入門)』] 몇 권만을 읽고 쉽게 의사라 칭하며, ‘증맥’[『증맥방약합편(證脈方藥合編)』] 1편을 대강 공부하고 곧바로 약을 처방하니, 그 어리석음과 미련함으로 사람을 잘못되게 함에 더욱이 식자(識者)들의 탄식이 오래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학교의 설립은 가히 완흥(菀興)이라 할 만하나, 여성을 교육함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실시되고 있는 것이 없으니 유감(欠憾)이 없지 않다. 이러한 까닭으로 자선·교육 사업에 뜻을 두고, 자금을 모아 이 학교를 설립하여 동제라 이름하였으니, 동제란 남녀 동포를 아울러 구제한다는 뜻이다. 그 학과 과정은 의학, 국한문, 산술, 외국어학, 물리학 등 여러 과목을 중심으로 한다. 한 학교 내에 두 공간을 만들어 바깥쪽은 남자교사가, 안쪽은 여자교사가 각각 행정과 교육을 담당한다. 특히 본교 내에 별도로 약포 1곳을 설치하여 이로써 널리 구제하는(普濟) 사업을 실시하고, 또한 의술의 진보를 증험하고자 한다. 본교 교과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가르쳐 이로써 개화문명 진보에 바탕이 되게 하고, 위생의 학술을 취하고자 한다[11].
취지서에서 보이듯이 이 학교의 교명은 남녀공제(男女共濟), 즉 남녀공학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의학 교육을 중심으로 하되 국한문, 산수, 외국어(일본어), 물리학 등 기초학문도 아울러 교수하는 기관이었다. 그리고 동제학교의 의학교육은 한의학뿐만 아니라 서양의학도 동시에 포함되었다[ 12]. 학교 설립 이후 교장은 전 위생부장이었던 이근호(李根澔)가 맡았지만, 의학 부문은 장용준이 주관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학교 설립에 있어 장용준을 비롯한 한의계의 공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장용준은 관립의학교와 구분되는 한의학 전문교육기관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과는 달리 결국 동제학교가 동서의학을 아울러 교수하는 형태로 귀결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자료의 한계로 학교의 구체적 운영 상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쉽게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한의계가 이 시기부터 자의든 타의든 간에 한의학 교육에 서양의학 지식을 적극적으로 접목시키기 시작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
동제학교는 설립 이후 3년 만에 재정난으로 폐교되었다[ 13].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한의학 교육기관 설립을 위한 한의계의 노력은 계속 이어졌다. 이는 장용준의 청원서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한의계가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에 자극을 받은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 이전 한의학 교육의 미비의 대한 사회적 비판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였다. 한말부터 한의사들의 수준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자자하였다. 일례로 1898년 11월 지석영은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에게 올린 의학교 설립에 관한 청원서에서 아래와 같이 한의계의 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우리나라 풍속은 의학을 천한 것으로 보고, 의사를 천한 직업으로 대우하니, 이 때문에 의업(醫業)하는 자들의 태반이 곤궁하고 구식(求食)한다.……약방서[方書]는 흩어져 전해지는 경전 약간이고, 약의 재료는 묵은 나무뿌리, 썩은 풀뿌리가 많다. 우연히 경미한 병에 처방이 맞아 떨어져 혹 효과가 있으면, 함부로 명약(峻藥)이라 하여 남발하며 수명을 앞당긴다. 이를 서양과 비교함에, [서양은] 해부라는 명확한 수단으로 지극한 이치의 법을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약재에서 정밀함을 취하니, 그 교묘함과 졸렬함 및 깨끗함과 더러움이 하늘과 땅 차이이고, 또한 가히 부끄럽다 할 만할 따름이다(대한의사학회, 1994: 222).
지석영은 한의계 수준의 저하가 의술을 천시하는 조선 사회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양의학과 한의학은 하늘과 땅의 격차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석영이 신식 의학 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위해 위 청원서를 제출하였다는 점과 한일병합 이후 본인 역시 의생으로 등록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런 표현은 지나치다 여겨질 수 있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한의계의 열악한 상태에 대한 비판은 한의계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었다.
가령 1900년 3월 내부병원 의사로 임명되었으나[ 15] 곧바로 사직한 뒤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에서 개인병원을 개업한 한의사 문창림(文昌臨)은 같은 해 의약을 주관하는 내부(內部)에 현지의 의료 상황을 위와 같이 보고하였다. 즉 문창림은 의서와 처방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소위 만병통치약과 신기한 침술을 가졌다고 허세를 부리는 용의(庸醫, 돌팔이 의사)가 널리 존재하였음을 비판하고 있었다.
한편 이와 같은 한의사의 부실한 수준에 대한 원인으로 한의학 교육이 뒷받침 되지 않았음을 드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04년 헌병대 군의 이봉순(李鵬淳)이 중추원에 올린 헌의서에서 “의사들은 대체로 번잡한 이로써 ‘본초’(『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가 무슨 경전인지, ‘보감’(『동의보감(東醫寶鑑)』)이 어떤 책인지도 모르고서 침구보사(鍼灸補瀉)를 마음대로 행한다.”고 지적하였다. 아울러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의학의 장정(章程)을 신명(申明)하고 가장 고명한 자를 택하여 『동의보감』과 『의학입문』 및 기타 여러 의서를 통해 총명하고 준수한 자를 교육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고명(高明)한 지경에 도달하게 한 뒤 관청이나 민간에서 의술을 펼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16]. 또한 앞서 서술한 동제학교의 설립취지서 역시 체계적 교육의 부재가 한의사의 부실한 수준을 초래한 것이라고 본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17].
이처럼, 한말 각종 서양식 근대 학교가 세워지는 가운데 한의계 역시 제대로 된 의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달리 학교 교육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한말 근대 교육체제가 조선에 이식된 이후 서양의학 교육기관이 설립된 것과 맥락을 같이 하여 한의학 역시 새로운 교육방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것이다. 또한 이는 전통시대 도제식이나 독학에 의한 한의학 전승 방식을 부정하는 동시에 근대 학교 교육에 의한 한의학 교육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로도 볼 수 있다.
3. 1910-1920년대 민간 한의학 강습소: 전문성, 실용성 및 동서절충의 지향
한일병합 이후 일제 식민정책에 힘입어 관립·사립 서양의학 교육기관은 지적 헤게모니와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지속적으로 설립되었다. 한의학 교육기관에 관한 설립 논의와 호소는 한말부터 꾸준히 존재하였고, 병합 이후에도 한의계는 근대식 한의학 교육기관 설립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의학을 외면하는 식민지배 하에서 근대식 한의학 교육기관은 설립될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18]. 이에 한의계는 우선적으로 강습소를 설립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한의학의 명맥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이 시기 설립된 한의학 강습소들은 식민지 의료체제 하에서 의생에게 부여된 정책적 요구를 반영하는 동시에 근대 학교 교육을 지향하는 시대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일제시기 민간 한의학 강습소는 홍종철(洪鐘哲)이 주도한 공인의학강습소, 평양의약강습회, 한법(漢法)의학강습소, 원산의학강습소, 동성의학연구회 부설 의학강습원, 대성(大成)의학강습소 등이다( 표 1 참조)[ 19]. 이들 강습소는 교육 이념이나 성격을 기준으로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의생시험을 준비하는 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한의학 본위로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다. 이들 두 기관은 설립 취지상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의생시험 준비기관은 한의학 관련 과목을 아예 가르치지 않았다. 1930년대 이전의 의생시험에서는 한의학 문제가 출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인의학강습소 등을 필두로 한 후진양성기관은 한의학 관련 과목을 주된 교육과정으로 삼았다. 본고에서는 교육이념이 상대적으로 결여된 의생시험 준비기관은 논외로 두고 사료의 관계로 이하에서는 공인의학강습소, 동서의학연구회 부설 의학강습원의 구체적 운영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의생 교육의 지향과 특징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1) 공인의학강습소
공인의학강습소는 1908년 1월 홍종철, 이해성(李海盛) 및 조병근(趙炳瑾)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1913년 5월 당국의 인가를 받았다[ 20]. 이 강습소는 1918년에 재정난으로 인해 조선병원 운영자인 이응선(李應善)에게 인계되었다가 1919년 폐소될 때까지 전후 10여 년간 지속되었던 일제시기 가장 대표적인 한의학 교육기관이었다[ 21]. 공인의학강습소는 소장 홍종철[ 22] 등의 주도로 조선의사연찬회(朝鮮醫師硏鑽會), 의학강구회(醫學講究會), 조선의생회(朝鮮醫生會), 전선의회(全鮮醫會) 등 여러 의생단체에 부속되면서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갔다[ 23].
병합 이전 공인의학강습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창립 시절부터 이미 동서의학을 아울러 교수하였다고 한다[ 24]. 이 강습소는 1911년 9월 조선의사연찬회에 부속되었을 때 신구의학강습소의 이름으로 운영되었는데, 신의학과(서양의학, 1년반제)와 구의학과(한의학, 3년제)로 나누어 각각 학생을 모집하여 야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25]. 이 시기 구의학과 교과목 및 담임강사의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 표 2와 같다.
표 2에서 보이듯이 설립초기 강습소의 교육과정은 모두 한의학 과목으로 되어 있으며 기초이론, 진단, 임상처방, 약물학, 침구를 두루 망라하여 어느 정도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다만 경전명(經典名)이 여전히 교과목으로 지정되어 있고 또한 그 중 여러 종합의서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근대적 분과 교육에 대한 의식이 아직 확실하게 자리 잡지 못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6]. 그러나 1910년대를 거치면서 의학강습소의 교육 체제는 점차 변모하게 된다.
표 3에서 보이듯이 이 시기 강습소는 설립 초의 상황과는 달리 전통 한의학을 중심내용으로 하면서도 근대 자연과학의 산술, 물리, 화학 등 기초과목과 서양의학의 해부·생리학, 병리학, 진단학, 외과학, 내과학, 산부인과학, 안이비인후과학, 약물학 등의 과목도 교과과정에 포함시켰다. 설립초기와 대비되는 이 시기 교육과정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학문분과의 체제가 명확하게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통 한의학을 기준으로 한 학문분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의학의 학문분과는 서양의학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행해지고 있었다. 중국의 경우, 위진남북조 시대와 수당 시대를 거치면서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형외과, 침구과 등 여러 분야의 전문 의사가 이미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王振國·張大慶, 2013: 69-72). 또한 당나라 태의서(太醫署)는 의사·침·안마·주금(呪禁)의 4개 학과를 두었고, 그 가운데 의사과의 경우 체료(體療, 내과), 창종(瘡腫, 외과), 소소(少小, 소아과), 이목구치(耳目口齒, 안과·이비인후과·치과), 각법(角法, 외치법(外治法)) 등 전공으로 나누어 교육하는 시스템을 제도적으로 확립하였다( 王振國·張大慶, 2013: 69-72). 이와 같은 의학 분과화는 그 이후 역대 왕조를 거치면서 계속 전승, 확대되어 갔다. 한국의 경우, 조선 세종대부터 외과 분야에서 침구의(鍼灸醫), 나력의(瘰癧醫), 치종의(治腫醫) 등 전문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제생원(濟生院)에서 이들에 대한 분과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손홍렬, 1987: 165). 그 이외에 치종, 부인과 등 전문 분야의 의서도 나타났다.
이와는 달리 서양의학은 중세시기부터 내·외과를 구분하였으나 외과를 상당히 천시하였으며 내과를 우위로 두었다. 서양의학의 학문화 및 전문의의 구분은 17-18세기 자연과학의 발달과 사회분업의 산물이었다. 나아가 의학교육에서의 물리·화학, 생리·해부, 병리, 진단, 내외과 및 기타 분과를 포함한 교과과정의 형성은 18세기 중반 이후에나 행해졌다( 張大慶, 2007: 164-165).
물론 표 3에서의 교육과정 정비는 한의학 학문 분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근대 서양의학 교육체계를 대폭 수용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근대 서양의학 교육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한의계에서 서양의학과 마찬가지로 한의학 학문의 분과화와 전공 세분화에 관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었다[ 27]. 이런 시대적 맥락 속에서 위 교육과정은 근대 서양의학 교육체계 및 교과과목을 채택하는 동시에 서양의학 교육과정 구조에 준하는 한의학 교과과목을 확립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예를 들어 홍종철의 주도 아래 창간되어 호마다 공인의학강습소의 강의록이 게재된 『동서의학보』의 제1호에서는 동의과(東醫科)와 신의과(新醫科)를 나누었으며, 그 중 동의과를 병리학, 진단학, 약물총론, 외과학, 상항론 등 항목별로 세분화하여 한의학의 내용을 새로 체계화 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28].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시기 공인의학강습소는 근대 서양의학 교육체계, 나아가 교과과목까지 수용한 일종의 동서의학 혼합식 교육방식을 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의학 강습소가 이와 같은 교육방식을 선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첫째, 이 시기 한의계는 근대 문명 상징물의 하나인 서양의학을 그대로 외면할 수가 없었고 특히 서양의학의 지적, 제도적 헤게모니가 점차 분명해지는 상황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당시 『동서의학보』의 한 사설에서 잘 드러난다.
생각해 보건대, 서의가 동래(東來)한 이후로 비로소 동의, 서의의 명칭이 생기고 또한 신의(新醫), 구의(舊醫)의 구별이 생긴 것이다. 세균학, 해부학이 새롭고 본초경, 소문경이 낡은 것이나 새로운 것은 좋다고 하여 이에만 치중해서는 안 되고 낡은 것은 진부하다고 하여 모두 포기해서도 안 된다.……본초, 소문 등 옛 경전과 세균, 해부 등 신학문을 서로 참조, 입증한다면 우리 의학은 더더욱 정미한 단계로 도약하고 금상첨화(錦上添花)의 새로운 빛을 드러내는 동시에 전일의 동의, 구의의 명칭에서 벗어나 나아가 반도강산(半島江山)에 일종의 독특한 의학을 산출(産出)하리로다[29].
이 글은 서양의학 전래에 따른 한의학의 타자화를 언급한 뒤, 한의학에 서양의학의 세균, 해부 등 학설을 접목시킴으로써 일종의 독특한 의학, 즉 제3의 의학을 창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논조는 『동서의학보』의 취지를 계승한 『조선의학계』에서도 확인된다[ 30]. 공인의학강습소는 기존의 한의학을 토대로 하면서도 서양의학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겠다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한의학의 활로를 찾으려고 하였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1918년 봄철에 행해진 토끼 마취 및 해부이다. 공인의학강습소는 이 조치를 ‘한의학 진보, 쇄신의 신기원을 시작’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31]. 근대 서양의학의 기초인 해부학은 전통 한의학에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는 한의학의 근본적 약점으로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강습소 소장 홍종철이 저술한 교재인 『경락학』에는 한의학 경전에서 볼 수 없었던 해부지식이 반영된 해부장기도(解剖臟器圖)가 실리기도 하였다( 그림 1 참조).
둘째, 서양의학 과목을 교수하는 것은 당시 실시되고 있던 의생시험을 고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인의학강습소는 단순한 시험 준비기관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진료를 보기 위해서는 의생면허를 취득해야 했고 이를 위해 의생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제도적 장치를 완전히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교육을 통해 수강생들로 하여금 시험에 합격하여 의생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동 강습소가 내세웠던 목표이자 홍보 슬로건이었다[ 32]. 1930년대 전후까지 의생시험 문제는 모두 서양의학을 기준으로 출제되었기 때문에 공인의학강습소는 “시험에 응대(應對)할만한 신의학을 학습하므로 타인보다 면허증을 용이히 수(受)하는지라.”라고 하여 서양의학 과목을 교수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33].
이처럼, 공인의학강습소는 한의학의 존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과 의생면허제도에 대한 대비책이라는 명목으로 서양의학 교과목을 교과과정에 적극적으로 편입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습소는 어디까지나 한의학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또한 당시 조선에서 유일한 의생양성기관임을 내세웠다[ 34].
2) 동서의학연구회 부설 의학강습원
1918년 11월 재정난으로 소장이 홍종철에서 조선병원장 이응선(李應善)으로 교체된 공인의학강습소는 2년 뒤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결국 폐소되었을 것이다[ 35]. 이후 동 강습소의 이념은 동서의학연구회에 의해 계승되었다. 동서의학연구회는 1920~40년대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의생단체로서 발족 이후 일찍부터 경성에 의생 양성기관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36]. 1924년 1월 동서의학연구회 회장 김성기(金性璂)는 아래와 같이 전통 한의학 교육방식의 문제점을 논하면서 한의학 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김성기는 전통시대 민간에서 널리 행해지던 한의학의 도제식 전승방식과 근대 학교의 교육 방식을 대조시켰다. 즉 도제식 전승방식은 소수 정예만 배출할 수 있으므로 대부분의 학습자는 독학에만 의존한 나머지 한의학 전체의 수준이 떨어지고 점차 위축되었다고 하여, 신식 한의학 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런 논의 끝에 1928년 동서의학연구회 부설 의학강습원(혹 공인의학강습원)이 설립되었다. 동 강습원은 남녀공학과 야학의 형식으로 예과와 본과를 각각 두었고 예과는 2년, 본과는 1년의 학제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공인의학 강습소와 마찬가지로 강의 내용을 『동서의학연구회월보』에 게재하여 통신강의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38]. 당시 「의생규칙」 제2조에 의하면 의생면허를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은 3년 이상 의업을 수습한 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39]. 동 의학강습원은 이런 규정을 의식하여 본 강습원에서 3년 공부를 마치면 의생면허신청 자격이 부여된다고 강조하였다[ 40]. 식민지시기의 의생은 그 이전과는 달리 면허를 취득하지 않으면 의업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한의학 교육 역시 당국의 의생면허제도와 궤를 맞추어야 하였다.
한편, 동 의학강습원은 동서의학연구회에서 부설한 것으로 동서의학연구회가 내세운 취지, 즉 “동의학을 본위로 하고 서의학을 대조하여 사상과 면목을 일신케”[ 41] 하고 “동양의학의 부족한 점은 서양의학에서 보충하고 서양의학이 조선인에게 불합당한 것은 동양의학으로 보충하여 동서의학을 연구”[ 42]한다는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들 이념은 당시 의학강습원의 교과과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표 4에서 보이듯이 의학강습원은 한의학의 이론, 임상, 약물, 침구를 교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양의학의 생리, 해부, 병리 등의 교과목도 교육과정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1916년 공인의학강습소의 교육과정과 비교해 볼 때, 두가지 변화가 있었다. 첫째, 서양의학 임상 관련 과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전염병, 응급처치법 등 과목이 새로 추가되었다. 이들 과목이 추가된 것은 전염병에 관한 지식이 의생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상식’이기도 했고, 나아가 동서의학연구회가 내세웠던 조직 목표의 하나가 바로 “의생들에게 법정(法定) 전염병 예방법 및 소독법을 숙지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44].
둘째, 한의학 관련 과목 중에서도 침구 관련 내용이 다시 강화되었다. 한의학의 전통에서 침구술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황제내경·소문』의 이법방의론(異法方宜論)에서는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각종 치료법을) 섞어서 써 다스림에 각각 그 마땅한 바를 얻습니다(故聖人雜合以治, 各得其所便宜).”라고 주장하였다. 장중경(張仲景), 손사막(孫思邈), 진자명(陳自明)을 비롯한 역대 명의들 역시 침구술을 중요하게 여겼다. 즉 침구술은 한의학에서 흔히 말하는 ‘일침이약(一針二藥)’ 혹은 ‘일침이구삼약(一針二灸三藥)’이라는 전통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李健强, 2005: 1370). 이런 전통은 조선에도 존재하였다[ 45]. 게다가 약물은 잘못 쓰면 부작용이 발생하거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우려가 있어 약물치료가 결코 만능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는 일제시기 조선 민간에서 “침은 능히 사람을 치료하고 약은 능히 사람을 죽인다.”라는 속어가 존재하였던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46].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한방의학을 배척하는 방침을 취하는 가운데 침구술에 대해 1874년 7월의 「의제(醫制)」에서 1911년 8월의 「침술구술(灸術)영업취체규칙」에 이르는 일련의 법령을 통해 그것을 한방의학에서 분리시켜 서양의학 지식에 바탕을 두게 하는 동시에 맹인직업교육에 포함하여 그들에 대한 구제수단으로 활용하였다( 濱田淳·長尾榮一, 1994: 53-55). 일제는 본토의 이러한 예를 따라 조선에서 1914년 11월 「안마술, 침술, 구술 영업취체규칙」(경무총감부령 제10호)을 제정, 반포하여 침구술을 의료행위가 아닌 유사의료시술이나 전문 서비스업으로 독립시켰다[ 47]. 이는 일제가 전통한의학에서 중요한 침구술을 ‘인위적으로’ 분리시킴으로서, 전통 한의학을 왜곡시킨 중요한 대목이다. 당시 의생들에게 되도록 침구술을 사용하지 말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48].
공인의학강습소의 경우, 침구학이 1911년 당시까지만 하여도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1914년 상술 제도 실시 후인 1916년 시점에는 사라지게 되었다( 표 2, 표 3 참조).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시기 강습원의 교육과정에 침구술이 다시 추가된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당시 이 강습원은 일제의 방침을 감안하여 학생 모집 광고에서 한의과와 별도로 침구술도 배울 수 있다는 식으로 홍보함으로써 침술·구술 면허 준비생까지도 강습원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49].
요컨대, 동서의학연구회 부설 의학강습원은 병합 이후 공인의학강습소에 의해 축적되어 왔던 한의학 교육의 경험을 이어받아, 조선의 유일한 한의학 교육기관으로 자임하여 한의학 본위의 교육을 지키는 동시에, 의생 면허 취득의 현실적 고려와 한의학의 혁신과 변화에 대한 능동적 추구에서 동서의학을 아울러 교수하는 교육체제를 견지하였다. 한의계의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식민당국은 찬성하는 태도를 내비쳤다. 예를 들어 조선총독부의원장,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의 총장을 두루 역임하였던 식민관학자 시가 기요시(志賀潔)[ 50]는 1928년 공인의학강습원 소장을 맡고 있던 김해수가 쓴 『의방대요(醫方大要)』라는 책에 서문을 써 주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동서의학에 대한 자신 내지 당국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스스로 생각건대, 의술이라는 것은 적합함인 즉, 동양의술은 원래 동양인에게 맞는 것이다. 그러나 풍토, 기후, 사람은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옛날의 방식을 고수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물며 개별 증상에 맞춰 치료함에는 서양의술 또한 동양의술에 지지 않는다. 이 말은 결코 내가 배운 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찌 이것[동양의술]을 하찮게 여기겠는가? 내가 원하는 바는 동양·서양을 일괄함에 있어 그 장점을 취하는 것이다. 진실로 정신·문명은 동양의 이상을 활용하고, 물질·진화는 서양의 성과[事功]를 취하는 것과 같이 능히 세상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면 족하다. 그러므로 내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한약에 뜻을 둔 연구자를 머물게 한 것은 진실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때에 친구 김해수씨가 『의방대요』라는 책을 저술하여 그의 포부 및 경험을 발휘하였는데, 그의 뜻은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있다. 김씨는 동양의술을 주업으로 하는 자이고, 자못 동서의술의 조화에도 뜻을 두고 있으니, 이 때문에 내가 기꺼이 그를 위하여 이와 같은 서문을 쓰는 것이다(金海秀, 1928: 1-2).
시가는 의술이 해당 풍토, 기후, 체질에 맞아야 한다는 당시 한의계의 일반적 논리를 차용하여 한의학 존재의 당위성을 인정해 주면서도 풍토, 기후, 사람의 체질 역시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으니 서양의학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동서의학 각각의 장점을 모두 취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고 말하였다. 시가는 의생에 대한 ‘계몽’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진 인물로서 당시 동서의학연구회의 고문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가 동서의학연구회 의학강습원 소장 김해수에게 써 준 서문은 김해수 개인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의학강습원 내지 전체 한의계가 추종하는 동서의학 절충의 방향성을 수긍하는 메시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51].
4. 민간에서 관립으로, 1930년대 이후 한의학 교육 체제의 공식화와 공고화
일제시기 서양의학과 달리 공식 한의학 의학교가 존재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공인의학강습소나 동서의학연구회 부설 의학강습원은 의생의 ‘재생산’과 한의학의 전승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것이 곧바로 졸업생의 의생면허 취득 비율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아래 표 5에서 제시된 공인의학강습소의 졸업생 상황을 보면 전체 졸업생 중에 최종 의생면허를 취득한 비중은 그리 높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결과는 당시 의생시험 통과율이 저조한 것과 신규 의생 면허 발급에 대한 당국의 제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52]. 서양의학 내용으로 출제되었던 의생시험은 김영훈의 표현대로 통과하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이’ 어려웠으며 식민당국은 도회지의 신규 면허 발급을 되도록 제어하고, 농촌지역 역시 배치 의생의 정원을 제한하였기 때문이었다[ 53]. 그러나 두 기관이 교실 교육에서 나아가 기관지를 통해 광범위하게 통신교육을 실시하였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실제 두 기관이 학문연구를 활성화시키고 한의학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54].
이처럼 한의학이 냉대 받는 분위기 속에서도 민간 한의학 강습소는 나름대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8년 설립되었던 강습원이 1931년 폐쇄되면서 민간 한의학 교육은 고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55]. 당시 의학강습원은 경성에 위치하고 있었고, 조선 유일한 한의학 교육기관으로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930년대에 들어선 후 한의학을 향한 사회적 분위기와 식민당국의 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서양의학 국부치료에 대한 회의와 비판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한약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일본 국내에서도 이를 계기로 한방부흥운동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조선에도 파급되었다[ 56].
특히 서양의학 의료기관이 조선 대부분의 농촌에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식민당국은 무의촌을 해결하기 위해 비용이 저렴한 한의학에 주목하였다. 한의학을 향한 식민당국 정책의 변화는 일차적으로 한의학 교육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간 민간에서 수행해 오던 한의학 교육이 1930년대 이후 각지 식민당국의 주관 하에 행해진 것이다. 함경북도와 충청남도의 위생과에서는 의생 양성을 목적으로 단기 의생강습회를 개최하였고 경기도와 강원도는 도립 의생강습소까지 설립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식민당국이 직접 의생 양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는 사실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제가 한의학을 탄압, 말살하였다는’ 도식화된 통설과 부합하지 않는다[ 57]. 이하에서는 1930-40년대 각도 식민당국에서 운영하였던 의생 강습 기관의 설립 경위를 검토하고, 이것이 민간 한의학 교육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식민당국은 1910년대부터 ‘위생행정’을 목적으로 각 지방 경찰서를 단위로 하여 정기적으로 의생들에게 해부, 생리, 전염병, 소독법 등 서양의학 지식을 주입시키는 ‘의생교양(醫生敎養)’을 실시하였다. 이들 의생교양은 의생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교육의 내용이나 취지 면에서 보면 의생의 한의학 소양 제고와는 관련 없는 것이었다( 警務總監部衛生課, 1917: 101-102). 게다가 1년 중 교육기간이 10일 내외였기 때문에 실제 교육이라기보다는 의생에 대한 식민당국의 훈계와 규율의 장치로 활용되었던 측면이 컸다.
하지만 1930년대 전후 일제의 의생교양 방침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1929년 9월, 함경북도는 최초로 3개월 기간의 단기 의생강습회를 개최하였다[ 58]. 그리고 1932년 12월부터 의생강습의 내용을 서양의학에서 한의학으로 변경하여 처음으로 한방의학강습회를 열었다[ 59]. 이 한방의학강습회는 20명 내외의 의생과 의생 지망자를 대상으로 함북 나남도립의원에서 3개월의 기간으로 진행되었는데, 강습회의 수강이 의생면허 신청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의생 지망자가 몰려 시험을 통해 교육 대상을 선발하기도 하였다[ 60].
한편, 주최 측인 함경북도 위생과는 한말부터 한의계 주요 단체에 몸을 가담해 왔고 또한 당시 ‘조선 한방 대가’로 불렸던 전광옥(田光玉)을 이색적으로 제1회부터 수회에 걸쳐 담당 강사로 초빙하기도 하였다[ 61]. 전광옥은 강사를 맡으면서 1933년 강습회를 위한 교과서로 『의학통속법요의(醫學通俗法要義)』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田光玉, 1933). 1933~1934년 사이에 3회에 걸쳐 위 강습회를 참석한 뒤 의생면허를 취득한 박동호(朴東浩)는 뒷날 강사 전광옥을 추모하는 글에서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회고한 바가 있다.
특히 『통속의학요의(通俗醫學要義)』[62]는 선생님께서 처음 강사로 오셨을 때에 당시 도 위생과장 나가와 토미히토(長和智海)라는 일인(日人)이 한의학을 숭상(崇尙)함으로서 금후에 한의학 발전을 위하여 선생님에게 저서(著書)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선생님께서는 고인(古人)도 의술의 깊은 진리는 마음으로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고(醫者, 意也) 하시며 의사는 책을 저술하지 않는다(醫不著書)라고 겸손하게 사양(謙謝)하시다가 여러 학생(諸生)의 간청(懇請)도 있어서 부득이하게 집필하사 3개월 강습 기간 중에 선생님은 불면불휴(不眠不休)하시고 편찬하여 탈고된 것입니다. 나가와라는 도위생과장은 읽고 나서 대단히 좋아하니(讀奇好) 즉시 도비를 변출(辨出) 인쇄하여 도내의생에게 배부하고 일본에도 과장의 친지 의사에게 부송하였다 합니다[63].
박동호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함경북도 위생과장 나가와 도모히토는 한의학을 숭상하는 식민 관리로서 전광옥에게 한의학 서적을 저술할 것을 먼저 요청하였고, 또한 『의학통속법요의』가 탈고된 후 이 책을 도비로 간행하여 도내 의생뿐만 아니라 일본 친지에게까지 널리 배포하기도 하였다. 일제시기 의생면허의 허가, 발급의 집행 주체가 각 지방이었던 만큼 의생 행정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권력 기구는 중앙이라기보다 각 지방의 도위생과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64]. 이런 점에서 박동호의 표현처럼 한의학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위생과장 나가와 도모히토의 존재는 당시 한방의학강습회의 개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 이후 함경북도의 의생강습회는 상례화 되어 매년 1~2회로 194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65]. ( 그림 2, 그림 3 참조)[ 66]
이처럼, 1930년대 이후 함경북도에서는 도위생과의 주최로 최초로 한의학 대가를 초청하여 의생의 실력 향상과 신규 한지 의생의 배출을 위한 한방의학강습회를 개최하고 나아가 이를 위해 필요한 교과서까지 편찬, 출판하였다. 이것은 한의학을 향한 지방 식민권력의 태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식민권력에 의한 한의학 교육의 시작을 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런 현상은 함경북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충청남도에서는 1936년 5월 기존의 의생시험 출제 방침을 변경하여 서양의학뿐만 아니라 한의학도 시험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에 도위생과의 외곽단체인 충남의약조합은 의생 지망자들에게 향후 생리, 해부, 전염병에 관한 지식뿐만 아니라 한의학 내용도 아울러 공부할 것을 당부하였다[ 67]. 아울러 충청남도 위생과는 1938년 7월 충남의약조합에서 도위생과 산하기관으로 부속된 충남한방의약협회를 통해 제1회 한방의학강습회를 개최하였다[ 68]. 이 강습회는 3개월 단위로 한방의술에 기반을 둔 의생의 양성을 목적으로 내세웠다[ 69]. 또한 강습회의 수강생을 의생시험의 학술시험과 실지시험을 통과한 자로 한정함으로써 예비 한지면허 의생을 위한 사전 교육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70].
아래 표 6과 같이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개최된 총 5회 강습회의 교육과정으로 미루어 볼 때 충남 의생강습회는 비록 연중 3개월의 단기 과정에 불과하였지만 일정한 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표 6에서 보듯이 강습 내용은 서양의학과 관련하여 기존의 의생교양에서 교수하였던 생리, 해부, 전염병, 의료 법령 등의 과목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아울러 이제까지 의생교양 과목에 없었던 한방병리학, 부인소아과, 본초, 침구, 상한의 5개 한의학 과목을 새로 추가하였다. 또한 교과 시수로 볼 때 한의학 관련 과목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의생들에게 서양의학 지식만을 강조하였던 식민당국이 이 시점에서 태도를 달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단서는 1938년 9월 제1회 의생강습회 종료식 석상에서 당시 충남 경찰부 사무관이자 한방의약협회장 도리야마 스스무(鳥山進)가 한 발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위 의생의 제도는 초근목피(草根木皮)에 의한 한방의생의 후계자 단절을 고려하여 장래에 한방의(漢方醫)를 존속하려 하는 취지에서 나온 관계상, 그 면허는 특히 한방의술의 소양(素養) 우수한 자에 한하였습니다. 그런데 종래의 예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방침하에 면허를 취득한 의생으로서 면허 후 이 취지를 위반하야 양방의술의 전용을 하게 되는 자가 적지 아니합니다. 원래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일반의 욕구와 사회의 추세에 순응하는 등 상당의 이유는 있기는 있으나 의생면허의 제도 존속의 이유와 면허방침으로 볼 때 심히 유감을 사유하는 바입니다. 본 년 의생면허 자격고사에서 상술한 취지를 감안해, 특히 한방의술의 소양 우수한 자를 선발하고, 한방의술에 대한 강습회를 개최해 지식의 향상을 도모해 장래 우수한 한방의생을 육성하고자 합니다[71].
도리야마 스스무는 한의학을 존속시키기 위한 의생제도의 본래 취지와는 달리 면허를 취득한 의생이 한방의술뿐만 아니라 양방의술까지 다루도록 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이를 감안하여 의생시험 출제 방침을 변경하고 한방의술에 관한 이들 강습회를 개최함으로써 우수한 의생을 육성하고자 한다고 설명하였다. 앞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이전 일제는 서양의학 중심의 정책을 취해왔고, 1920년대 동서의학연구회가 의생들에게 ‘동서의술의 병용과 서양의술 치료 기계의 사용’을 권장하였던 것도 식민당국의 지지와 무관하지 않았다[ 72]. 그리고 당시 언론에서도 보도되었듯이 일부 의생들은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양약, 내지 서양 의술을 남용하기도 하였다[ 73]. 의생들의 양방 의술 남용으로 인한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자 충남 도위생당국은 양약 사용 기능시험을 통해 소수 합격자에만 한하여 양약 사용을 허가하는 반면 그 이외의 대부분 의생에 대해 양약의 사용을 절대로 금지하고 한의학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74].
물론, 충남 의생강습회가 1938년부터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시체제기라는 시대적 요인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도리야마 스스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시국 속에서 “인적 자원의 충실과 지심한 관계를” 가진 의생의 직책이 더더욱 중요해진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75]. 일례로 1940년 10월 19일 제3회 한방의학강습회 종료식 석상에서 충남 경찰부 사무관이자 한방의약협회장 천라 사다노리(淺原貞紀)는 아래와 같이 의생의 직책을 강조하였다.
천라는 의생들에게 산간벽지에서 개업한다고 해서 스스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당국은 의생이 각 지방에서 유일한 의료기관으로서 일반 질병의 치료, 예방 및 방역에 지극히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자로서 기대하는 바 역시 상당히 크다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전시체제기에 접어든 후 식민당국은 서양의학 의료기관이 지극히 궁핍한 지역사회에서 의생이 수행하는 의료인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인식하게 됨에 따라 이전까지 그저 과도기의 일시적 존재로만 취급해 오던 의생에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동원, 2003: 122-123; 박윤재, 2008: 84-85).
한편, 한방의학강습회의 개최를 통해 한의학 교육에 직접 나선 도 당국의 움직임은 충남 한의계에 있어 일대 고무적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제2회 한방의학강습회 수강생 박윤화(朴閏和)는 한방의학강습회의 개최와 의생시험 출제 방식의 변화를 한의학 부흥의 징조라며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77]. 또한 충남의 의생 서성효(徐聖孝)는 “황공하오나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은(聖恩)하에서 한방의학의 전수(專修)기관과 한방의자(醫者)의 칭호, 대우를 양방과 동일하게” 해 줄 것까지 주장하여 의생과 의사를 차별대우 해 오던 당국의 시책을 시정할 것을 완곡하게 제기하였다[ 78]. 1938년을 기준으로 관공립에서 사립에 이르기까지 총 6개의 서양의학 의학교가 설립되어 있었다. 이와 달리, 한의계는 공식 교육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오직 민간에서 강습소의 형식으로만 간신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으므로 식민당국의 한의학 교육을 크게 반겼던 것이다.
이처럼 1930년대 중반, 특히 중일전쟁 발발 이후 각 지방 위생당국의 주도에 의한 한의학 교육이 널리 전개되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이런 현상이 전시체제기 ‘총후보건(銃後保健)’이라는 식민권력의 당면 과제와 깊이 관련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관주도의 한의학 교육일지라도 그것의 실현 및 운영은 조선인 한의계 인사들의 적극적 협조와 참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때로는 한의계의 요구와 교섭이 관주도의 한의학 교육을 이루는 데 중요한 촉매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1937년 4월 경기 도립 의생강습소(이하 경기도 의생강습소)의 설립에서 잘 드러난다.
해방 후 한의계 원로 인사 신길구와 김영훈의 회고에 따르면 경기도 의생강습소의 설립에 있어서 당시 회장 김명여(金明汝)를 필두로 한 동서의학연구회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40년 의사시험과 더불어 한지 의생시험 역시 폐지되리라는 소문이 돌자, 1937년 2월 동서의학연구회 임원회는 김명여의 제안으로 그 이전까지 경기도 각지 무의면 300개 곳에 한지의생을 배치할 것을 당국과 교섭, 요구하는 결의안을 결정하였다. 즉 무의면에 한지의생을 배치할 것을 내세워서 의생의 인원수를 확충하자는 계획이었다.
이에 동서의학연구회는 경기도 위생과장 아마기시(天岸敏介)를 초청하여 경기도 관내 무의면 의료시설에 관한 당국의 방침을 타진하였다. 아마기시는 “당국에서는 유위한 청년을 선발하여 5개년 계획으로 매회 50명씩 1년간 강습을 하되 한의학과 양의학의 생리, 해부를 강습한 후 무의면에 배치할 방침이나 여기에 대한 예산이 없어서 유의막수(有意莫遂)하여 실로 유한(遺恨)”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김명여는 한의학 강습 과목은 동서의학연구회 임원들이 자진하여 무료로 담당하겠으며 기타 일절 소모품 비용 역시 감당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자 아마기시는 “그렇다고 하면 당국에서도 고려하겠으니 한의학 과목은 무엇으로 할지 정하고 강사 될 분을 물색하여 그 명단을 수일 내로 위생과에 제출하여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동서의학연구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79].
그 후 경기도 위생과는 동서의학연구회가 제출한 한의학 강습과목과 담당 강사에 관한 방안을 그대로 채택하였고 같은 해 4월 20일 경기도 의생강습소가 열리게 되었다[ 80]. 경기도 의생강습소는 매년 30~50명 내외의 강습생을 선발하여 1~2년 단위로 한의학은 상한, 잡병(雜病), 맥학(脈學), 부인과, 소아과, 침구, 한방약물학, 한방총론 등, 서양의학은 생리, 해부, 병리, 진단, 약리, 위생법규 등 과목을 각각 교수하였다[ 81]. 그리고 졸업생에게 한지면허를 부여하여 경기도 내 각 무의면에 배치하였다. 경기도 의생강습소는 1944년까지 총 6회에 걸쳐 250여명의 의생을 배출하여 애초 계획하였던 ‘사명’을 완수한 뒤 곧 폐소되었다[ 82].
식민당국이 무의촌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해 의생강습소를 설립하려 한 것은 한의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일종의 기회가 되었다. 당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의생이 되고자 하였던 최건희(崔健熙)는 뒷날 회고하기를 “마침 가업을 이어 한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도래한 셈이었다.”고 하였다( 崔健熙, 1991: 84). 그는 선발을 통과하여 제1회 경기도 의생강습소에 입소하였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동기생 32명이 “모두 훌륭한 의원이 되겠다는 의욕에 넘쳐 있어 학업태도가 진지하였다”( 崔健熙, 1991: 87). 아래 그림 4와 그림 5는 바로 당시 제1회 강습생과 강사들의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경기도 의생강습소의 설립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 한의학 교육기관의 설립은 의료인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무의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식민당국의 의지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으나, 당국의 이러한 의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의생강습소의 설립을 위해 협상, 교섭에 나섰던 한의계의 대응 역시 크게 작용하였다[ 83]. 그리고 비록 충남 의생강습회나 경기도 의생강습소가 식민 권력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교육 과정을 살펴보면 그 이전의 민간한의학 교육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는 한의학 과목은 모두 민간 한의계 인사들이 담당하였고 또한 경기도 의생강습소의 설립 과정에서 보이듯이 교육과정의 편성에 있어 한의계의 의견 역시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84].
요컨대 식민당국이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무의촌 문제를 완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전과 달리 직접 한의학 교육을 실시한 것은 20여 년 동안 축적된 민간 한의학 강습소의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나아가 1930-40년대 식민권력이 행한 한의학 교육에 의해 그간 형성된 민간 한의학 교육의 체제는 공식화되어 더욱 공고해졌다. 즉 한의학 교육은 서양의학 교육 체제를 모델로 하여 기초의학-병리-진단-임상-본초-침구 등의 분과 교육을 실시하며 서양의학의 기초가 되는 생리, 해부 내지 병리 등 과목을 필수화한 것이다. 신길구의 회고에 따르면 1939년 동양의약협회는 한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지만 결국 총독부 측의 반대로 무산되어 버렸다. 이에 당시 회장 김명여는 당국의 계획대로 장래 경기도립 의생강습소가 폐지될 때 그것을 인수하여 전문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해 미리 동양의약협회 산하 의생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이 강습소에서는 한의학 과목은 경기도 의생강습소의 출강 강사들에게 위탁하고 해부, 생리 등 서양의학 과목은 경성제대 출신 의사가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 강습소는 나중에 동양의약협회 이사였던 채대식(蔡大植)이 소장이 되면서 경성황한의학원(京城皇漢醫學院)으로 이름이 변경되어, 해방 이후 1948년 3월 설립된 한의학 대학인 동양대학관(東洋大學館)으로 맥을 이어갔다[ 85]. 자료의 한계로 추후 더욱 자세하게 고찰해야겠지만, 일제시기 형성된 한의학 교육의 체계는 이처럼 해방 이후까지 이어져 오늘날 한의학 교육 모델 형성에 밑거름이 되었던 것으로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86].
4. 맺음말
의학은 생명을 대상으로 하는 실천의 학문으로서 그 존재의 정당성과 가능성은 결국 환자를 치료하는 유효성 여부에 달려 있다. 즉 한의학의 치료 효과가 없었다면 19세기 이래 제국주의의 팽창과 궤를 같이 하여 동아시아 각국에 확산되어 오늘날까지 급속도로 발전해 온 서양의학과의 경쟁 속에서 일찌감치 도태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근대 한중일 삼국의 역사를 봤을 때 한의학과 서양의학 지위의 급속한 역전은 치료 효과나 지적 헤게모니의 자연적 경쟁에 의해 판가름 난 결과라기보다는 충분한 검토와 비판 없이 서구 근대 문명을 급급하게 추구하였던 국가권력이 개입한 산물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 식민지시기 국권을 상실한 한국은 조선인들의 주체적인 결정권이 결여된 상태에서 식민권력의 힘이 발휘한 영향력이 더더욱 컸다.
박윤재가 지적하였듯이 일제가 한의학을 탄압하였다는 사실은 해방 직후 한의학 재건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박윤재, 2011: 363). 한의학, 특히 의생에 대한 일제의 홀대는 그 시대를 살았던 한의계 인사들의 실감이자 공통 기억이었음은 틀림없다[ 87].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 탄압에 방점을 찍는 일제시기 한의학 역사의 서사 경향은 이제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이런 서사는 치료의학으로서 실효를 발휘해 왔던 한의학의 진가를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일제시기 한의학 자체의 능동적인 대응, 근대적 변모 내지 왜곡 등 다양한 역사상을 사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다룬 일제시기 한의학 교육에서 알 수 있듯이 한의학은 서양의학 의학교와 같은 공식 교육기관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간 한의학 강습소를 통해 꾸준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특히 이들 강습소는 상한, 잡병, 진맥, 본초, 침구 등 한의학의 주된 내용을 골자로 하면서도 전통 한의학 교육과 달리 근대 서양의학의 교육 체제를 모델로 기초의학-진단-임상-약물(본초)-침구 등의 분과 교육 시스템을 형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생리, 해부, 병리 등 서양의학의 기초과목을 한의학의 기초의학 과목으로 필수화하였다.
이런 변화는 물론 당시 의생제도 하에서 한의계가 의생시험에 대비해야 하고 식민당국으로부터 부여된 방역 등 공중위생 관련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외적 요구에 부합하려던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한의학을 본위로 하면서도 시대에 따라 서양의학 기초지식을 한의학에 접목시키려는 한의계의 동서의학 절충 지향에서 비롯된 산물이기도 하였다. 교육은 학문 후속 세대를 양성하고 나아가 해당 직업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일제시기 한의학은 바로 이러한 민간 교육의 실천을 통해 전통 한의학과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편, 1930년대에 접어든 후 각도 식민당국은 의생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한의학 교육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 물론 식민당국의 이런 조치는 노동력 재생산, 더 나아가 전시 하 인적자원의 확보를 위해 무의촌 문제를 완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그간 강습소의 설립을 통해 축적된 민간 한의학 교육의 경험이 계승, 공고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향후 일제시기 한의학 역사 쓰기의 방식을 전환해야 함을 시사해 준다. 즉 단순히 일제가 한의학을 억압하였다는 단선적 서술보다 한의학에 대한 일제의 정책 및 태도가 처음부터 완결성을 지닌 것도 아니고 시기에 따라 스스로 모순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였던 모습, 다시 말해 일제가 애용하였던 ‘과학’의 명분과 맞지 않는 비합리성을 폭로하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88].
그림 1.
한의학 교재 『경락학』에 등장한 서양의학 해부장기도
Fig. 1. Anatomized Organ Map of Western Medical Science Appeared in the Korean Medicine Textbook Meridian-collateral Theory (經絡學)
그림 2.
함북 제7회 의생강습회 수료식 기념사진
Fig. 2. Commemoration photo of the 7th Medical Student Training School Graduation Ceremony in North Hamgyong Province
그림 3.
함북 제8회 의생강습회 수료식 기념사진
Fig. 3. Commemoration photo of the 8th Medical Student Training School Graduation Ceremony in North Hamgyong Province
그림 4.
경기 도립 의생강습소 제1회 졸업생 (일부) 사진
Fig. 4. Photo of the 1st graduates of Gyeonggi provincial medical student training school
그림 5.
경기도립의생강습소 개성 답사 기념 사진(개성박물관 앞, 1937.10.31.)
Fig. 5. Photo Commemorating Gyeonggi Provincial Medical Student Training School Visiting Gaeseong (in front of the Gaeseong Museum, 31 Oct, 1937)
표 1.
민간 한의학 강습소 일람표
Table 1. List of Civilian Korean Medicine Training Schools
설립연도 |
명칭 |
소재지 |
설립목적 |
1908 |
공인의학강습소 |
경성 |
후진양성 |
|
1913 |
평양 의약강습회 |
평양 |
의생시험 |
|
1913 |
평양 한법의학강습소 |
평양 |
후진양성 |
|
1915 |
원산 의학강습소 |
원산 |
후진양성 |
|
1925 |
의생시험 야학예비강습소 |
평양 |
의생시험 |
|
1928 |
동서의학연구회 부설 의학강습원 |
경성 |
후진양성 |
|
1936 |
대성의학강습소 |
대전 |
후진양성 |
표 2.
조선의사연찬회 부설 의학강습소 구의학(한의학)과 교육과정 (1911년 9월)
Table 2. Curriculum of Medical Training School Former Medical Department (Department of Korean Medicine) Attached to Joseon Doctors Academic Group (September 1911)
순번 |
교과목 |
담임강사 |
순번 |
교과목 |
담임강사 |
1 |
경악전서(景岳全書) |
홍종철 |
5 |
황제소문(黃帝素問) |
김해수(金海秀) |
|
2 |
유주내경(類注內經) |
서병림(徐丙琳) |
6 |
의학입문(醫學入門) |
장기학(張起學) |
|
3 |
본초강목(本草綱目) |
원용참(元用參) |
7 |
침구 |
이완규(李完珪) |
|
4 |
맥경(脈經) |
김현정(金顯貞) |
8 |
|
|
표 3.
공인의학강습소 교육과정 (1916년 1월)
Table 3. Curriculum of Approved Medical Training School (January 1916)
학년 교과목 시간 |
제1학년
|
제2학년
|
제3학년
|
시간수 |
과정 |
시간수 |
과정 |
시간수 |
과정 |
수신 |
1 |
수신요지 |
1 |
수신요지 |
1 |
수신요지 |
|
국어 |
3 |
회화, 작문 |
3 |
회화, 작문 |
2 |
회화, 작문 |
|
산술 |
2 |
주산, 산술 |
2 |
주산, 산술 |
|
|
|
이과 |
2 |
물리, 화학 |
|
|
|
|
|
장부(臟腑), 경락(經絡)학 |
4 |
동의학 |
|
|
|
|
|
맥학(脈學) |
2 |
동의학 |
2 |
동의학 |
|
|
|
해부, 생리학 |
4 |
서의학 |
|
|
|
|
|
병리학 |
|
|
3 |
서의학 |
|
|
|
상한(傷寒)학 |
3 |
동의학 |
2 |
동의학 |
2 |
동의학 |
|
잡병(雜病)학 |
3 |
동의학 |
2 |
동의학 |
2 |
동의학 |
|
진단학 |
|
|
2 |
동·서의학 |
3 |
동·서의학 |
|
외과학 |
|
|
2 |
동·서의학 |
4 |
동·서의학 |
|
부인, 산과학 |
|
|
|
|
4 |
동·서의학 |
|
소아과학 |
|
|
|
|
2 |
동·서의학 |
|
약물학 |
|
|
2 |
동·서의학 |
2 |
동·서의학 |
|
안이비인후과학 |
|
|
|
|
2 |
서의학 |
|
내과학 |
|
|
3 |
서의학 |
2 |
서의학 |
|
사상(四象)학 |
|
|
|
|
2 |
동의학 |
|
계 |
24 |
|
24 |
|
24 |
|
표 4.
동서의학연구회 부설 의학강습원 교육과정(1919)
Table 4. Curriculum of medical training academy attached to the Society of The East and West Medicine (1919)
학년 |
교과목 |
교과구분 |
강의시수(매주 단위로) |
예과 |
의학입문 |
동의학 |
3 |
|
본초 |
동의학 |
3 |
|
침구대성(鍼灸大成) |
동의학 |
3 |
|
맥경 |
동의학 |
2 |
|
해부 |
서의학 |
2 |
|
생리 |
서의학 |
2 |
|
병리 |
서의학 |
1 |
|
전염병 |
서의학 |
2 |
|
합계 |
18 |
|
본과 |
맥경 |
동의학 |
2 |
|
운기(運氣) |
동의학 |
2 |
|
장부 |
동의학 |
2 |
|
상한 |
동의학 |
2 |
|
잡병 |
동의학 |
2 |
|
부인·소아 |
동의학 |
1 |
|
본초 |
동의학 |
1 |
|
침구 |
동의학 |
1 |
|
외과 |
서의학 |
1 |
|
생리 |
서의학 |
1 |
|
해부 |
서의학 |
1 |
|
병리 |
서의학 |
1 |
|
응급법 |
서의학 |
1 |
|
합계 |
18 |
표 5.
공인의학강습소 졸업횟수 및 졸업생 상황
Table 5. Number of Graduations and Graduates of the Approved Medical Training Schools
졸업횟수 |
제1회 |
제2회 |
제3회 |
제4회 |
제5회 |
제6회 |
합계 |
졸업연월 |
1912.4 |
1914.3 |
1915.3 |
1916.3 |
1917.3 |
1918.3 |
|
|
졸업생수 |
17 |
5 |
12 |
49 |
41 |
65 |
189 |
|
의생면허수 |
12 |
1 |
3 |
5 |
- |
- |
21 |
|
실습자수 |
23 |
17 |
25 |
60 |
- |
- |
125 |
표 6.
충남 한방의학강습회 1~5회 교육과정
Table 6. 1st to 5th Curricula of South Chungcheong Province Korean Medicine Training School
제1회 (1938.7~9) |
제2회 (1939.7~9) |
제3회 (1940.7~9) |
제4회 (1941.9~12) |
제5회 (1942.9~12) |
과목 |
시수(394) |
과목 |
과목 |
시수(393) |
과목 |
과목 |
|
해부·생리 |
46 |
해부·생리 |
해부·생리 |
20+35 |
해부·생리 |
해부·생리 |
|
관계법규 |
16 |
관계법규 |
관계법규 |
7 |
관계법규 |
관계법규 |
|
|
|
전염병학 |
|
|
전염병학 |
전염병학 |
|
한방기초의학 및 부인과 |
126 |
한방병리학 |
한방병리학 |
86 |
한방병리학 |
한방병리학 |
|
부인소아과 |
부인소아과 |
89 |
부인소아과 |
부인소아과 |
|
본초 |
109 |
본초 |
본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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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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