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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7(3); 2018 > Article
어느 시골 농부의 ‘반의사’(半醫師) 되기: 『대곡일기』로 본 1960-80년대 농촌 의료

Abstract

This article attempts to review the reality of rural health care in Korea from the 1960s to the 1980s by analyzing the Daegok Diary. There has been two myths about rural healthcare. One is that the absence of institutional medicine was replaced by folk medicine, which could be identified with folk remedies or shamanic healing distinguished from Western medicine. This is a frame that understands institutional and Western medicine as a pair and folk medicine and traditional medicine as another. Another popular belief is that rural healthcare had remained almost nonexistent, and only dramatically improved after the Regional Health Insurance was implemented. Of course, some claim that the Regional Health Insurance was disadvantageous to farmers, but it is generally understood that there was an absence of government policy regarding medical care.
The Daegok Diary, telling many aspects of rural life, is a good source to reflect on these common notions. Unlike other farmers’ diaries, the diary of Shin Kwonsik contains a wealth of medical culture records because he chose unique ways to cure his and neighbors’ illnesses by himself. It can be summarized as the life of “quasi-doctor”. Shin was distinguished from quacks in that he practiced as an intellectual in the village rather than as a profession, and that he learned official medical knowledge and recognized the difference between a licensed physician and himself. Also, he was different from doctors because of the lack of a medical license and the limited range of diseases that he could treat.
The life of quasi-doctor shows the social structure of rural areas in Korea from the 1960s to the 1980s. The reality of rural healthcare can be summarized in two ways. First, the medical vacuum was filled by civilian efforts. There was virtually no institutional healthcare in rural areas, but the government did little to improve the situation . The policy of sending doctors to the countryside proved to be ineffective, and the community doctor system did not work properly. Health Insurance was also a system for city workers rather than farmers. In the late 1970s, the situation only slightly improved due to reasons unrelated to the government policy regarding rural healthcare. These were improvements in traffic conditions and the increasing popularity of private insurance, which improved the physical and economic accessibility to medical institutions.
Second, Western medicine had become a part of folk medicine. Those who could not go to a hospital utilized Western medicine, which had penetrated the folk medical culture. When people were sick, they bought Western drugs from pharmacies, drug dealers, and sometimes quacks. The knowledge of Western medicine also spread widely, with family medical books such as Million People’s Medicine as the medium.
These two characteristics show that the existing myths that regard the absence of government policy as that of medical care and interpret the medical vacuum as the prevalence of folk remedies and shamanic healing are far from the truth. From the 1960s to the 1980s, gaps in institutional medicine was filled by Western medicine which had become part of the folk medicine already, and the accessibility of institutional medicine was improved through civilian efforts.
Of course, the Daegok Diary shows more than the social structure of rural areas. It also reveals a lot about the man who wrote it, Shin Kwonsik. Unlike the others, Shin chose to become a quasi-doctor because of his separation from the tradition and his desire to learn. He grew up alone without parental care and later moved to Seoul by himself. This meant a break with the tradition. He joined the army in the wake of the Korean War and learned how to give injections there. After he was discharged, he devoured many books and newspapers including Million People’s Medicine. In short, the existence of a quasi-doctor like Shin was the result of the combination of the absence of institutional medicine, the predominance of Western medicine, and the characteristic of Shin as a ‘learning modern.’

1. 머리말

이 글은 신권식(申權植, 1929-)의 『대곡일기(大谷日記)』를 바탕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농촌 의료를 조망한다. 농촌 의료를 주제로 한 역사학의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조선농촌사회위생조사회(朝鮮農村社會衛生調査會)가 간행한 『조선의 농촌위생(朝鮮の農村衛生)』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의 농촌 의료를 살펴보거나(이상의, 2014),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한 이영춘(李永春, 1903-1980)의 활동을 조망한 연구가 있지만(이규식, 2001; 박윤재, 2009), 1950년대 이후를 직접 다룬 글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농어촌에 파견되는 보건진료원 제도의 기원을 추적한 연구를 예외로 둘 수 있겠으나, 이 역시 사회적 배경보다는 제도의 형성과 시행 과정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농촌 의료의 현실을 돌아본 연구라 보기는 힘들다(이꽃메, 2009).
하지만 이론이 없더라도, 통념은 존재한다. 농촌 의료에 대한 과거의 통념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제도권 의료의 부재를 민간의료가 대신하고 있으며, 이때의 민간의료란 서양의학과 구분되는 상약(常藥)이나 무속 행위를 의미한다는 생각이다. 여러 연구자 역시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강화했다. 농촌 의료의 개선을 위해 현실 조사에 나섰던 여러 보건학자의 논문과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보고서는 열악한 농촌 의료의 현실과 농민의 ‘비과학적’ 행위를 보여주는 증거로 가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속히 제도권 의료를 공급하여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붙었음은 물론이다(허정, 1962; 한명렬 외, 1963; 송달옥, 1974).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민속학의 연구 역시 이러한 통설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민간의료에 대한 시선과 태도는 정반대였지만, 민속학이 내어놓은 민간의료의 실제 역시 결과적으로는 보건학의 연구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9-1981; 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국립민속박물관, 1985)[1]. 보통 사람들의 의약 문화라는 민간의료에 대한 규정 이면에, 그것을 서양의학과 구분하는 암묵적 가정이 놓여있었던 탓이었다.
이는 반절의 진실이다. 서양의학을 위시한 제도권 의료가 부족한 탓에 민간의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민간의료를 손쉽게 상약 내지 무속과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 역사학계의 논의는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근대 한국을 다룬 여러 연구는 한말 일제초에 서양약품이나 거기에 한약재를 섞은 ‘매약’(賣藥)이 유행하였음을 조망함으로써, 서양약품이 이미 한국인의 의약 생활에 깊이 파고들었음을 드러낸다(양정필, 2006; 박윤재, 2013). 현대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이른바 ‘마이신 신화’ 라거나, 젖을 떼기 위해 말라리아 치료제인 금계랍(金鷄蠟)을 사용했다는 이야기 등은 서양약품의 상약화(常藥化)가 해방 이후에도 여전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농촌 의료의 공백을 책임졌던 민간의료의 영역은 서양의학과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는다. 민간의료는 고정된 실체가 아닌, 시공간적 배경에 따라 내용을 달리하는 역사적 실체이다. 민간의료를 서양의학의 여집합으로 바라보는 과거의 통념은 민간의료의 역사성을 사상(捨象)한 선험적 구도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통념은 농촌 의료가 암담한 상황으로 유지되다가, 지역 의료보험의 실시 이후 극적으로 좋아졌다는 생각이다. 지역 의료보험의 효과를 평가한 여러 보건학자의 글에서, 그것은 농촌 의료의 사정을 개선한 획기적인 계기로 묘사된다(송건용, 박연우, 1988; 박경숙 외, 1990). 반론이 없지는 않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며, 통합 이전의 지역 의료보험은 농민에게 불리한 제도였고, 따라서 그것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문옥륜, 1997; 신영전, 2010). 양쪽 모두 옳다. 지역 의료보험의 실시는 분명 의료의 접근성을 개선함으로써 농촌 의료의 현실을 향상하였으나, 한계 역시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양쪽 모두 지역 의료보험 이전의 농촌 의료를 제도권 의료의 이용이 불가능했던 정체된 상태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후술하겠지만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농민의 제도권 의료 이용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고, 이는 정책 외의 다른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물론 정책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은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변수가 아니다. 정부 정책으로만 역사를 서술하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인을 놓치게 된다.
통념에 문제가 있다면, 현대 한국의 농촌 의료를 직접 들여다볼 방법은 없는가. 농촌의 생활이 오롯이 담긴 신권식의 『대곡일기』는 이를 위한 좋은 통로가 된다. 신권식은 1929년 고령 신씨(高靈 申氏) 집성촌인 오늘날의 평택시 청북면(靑北面) 고잔리(高棧里) 대곡(大谷) 마을에서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 농촌 근대화 등을 오롯이 겪은 인물이다. 정식으로 학교를 다닌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어려서는 한문을 배우고 나이가 들어서는 여러 신문과 책을 탐독하는 등 상당한 학구열과 학식을 갖추었고, 이를 바탕으로 1973년에는 고잔리의 이장을 맡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고령신씨 대종회(大宗會)의 부회장과 『평택신문』 칼럼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일기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쓰기 시작하였으나 전시의 기록을 압수당하며 잠시 중단하였다가, 결혼식을 올린 1956년부터 다시 썼다(김영미, 2012: 277). 서울살이와 한국전쟁 참전으로 잠시 여식(旅食)했던 시절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듬해였다. “뜻 없는 세월이 여류(如流)하는 동안 우리의 후면에 남는 것은 역사의 기록”이라는 문장에서 보이듯 일기에 대한 그의 마음가짐은 어떤 신념에 가깝다[2]. 그러한 덕분인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는 매일 일기를 남겼고, 자신이 겪은 거의 모든 일을 꼼꼼하게 기록하였다[3].
일기에 담긴 수많은 내용 가운데, 농촌의 의료 문화에 대한 기록은 단연 독보적이다. 그저 참거나, 내려오는 민간요법을 이용하거나, 많은 돈을 주고 무리해서라도 의사를 방문했던 다른 농민과 달리, 신권식은 자신이 직접 약을 사와 자신과 이웃의 병을 고치는 다소 독특한 길을 택하였던 덕분이다. 이런 선택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당대의 의료 현실이 놓여있었다. 인력의 부족에서 비롯한 의료의 공백은 ‘무면허 의료인’으로 채워졌다. 비단 돌팔이뿐만이 아니었다. 한지의사(限地醫師)나 약종상 역시도 법으로 허용된 바를 넘어선 의료행위를 하거나 정해진 지역을 이탈하는 경우가 잦았으니, 의사 면허 없이 ‘의사 노릇’을 하는 무면허 의료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무면허 의료인의 성행에도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무면허 의료인을 단속한다고 하여도, 그를 대체할 정식 인력이 없었던 탓이다. 신권식의 활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식 의학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면허도 없던 그가 마을에서 의사와 비슷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부의 묵인 속에 무면허 의료인의 공간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권식에게는 다른 무면허 의료인과 구분되는 특징이 없지 않았다. 본문에서 살펴보겠지만, 하나는 신권식이 의료 활동을 업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었고, 이따금 동네 주민의 요청이 있을 때나 환자를 보곤 했다. 오히려 신권식은 지역의 청년 지식인으로서 의료를 행하였다. 의료 활동을 가장 활발히 하던 1960년대에는 30대에 해당하는 젊은 나이였지만, 사람들은 몸의 불편함을 포함한 이런저런 곤란한 일이 있을 때 신권식을 찾곤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신권식이 정식의 의학 지식을 습득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의사와 자신의 차이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무면허 의료인이라고 하여 모두가 그러하지는 않았겠지만, 개중에는 몇 가지 비방을 익혀 만병통치약인 양 선전하거나 의사를 자칭하는 이가 없지 않았다. 신권식은 스스로 ‘의학 사전’이라 기억하는 가정의학서를 참고서 삼아 의학 지식을 쌓아나가는 한편, 자신이 치료할 수 있는 질병과 아닌 질병을 구분하여 대처하였다. 이런 그를 ‘반의사’(半醫師)라고 불러도 좋겠다. ‘반’(半)이라는 말은 온전한 부정도, 온전한 긍정도 담지 않는 양면적인 말이다. 신권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적인 자격이 전무한 무면허 의료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여느 돌팔이와 구분되는 존재였다. 그런 의미에서 신권식은 의사도 아니고 돌팔이도 아닌, 딱 반만큼의 의사였던 셈이다.
이와 같은 반의사로서의 정체성 덕분에 『대곡일기』에는 여느 농민의 일기라면 어쩌다 한 번 나올법한 의약에 관련된 내용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며, 때로는 오직 ‘반의사’만이 기록할 만한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대곡일기』 혹은 ‘반의사 일기’만의 각별한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중에서도 신권식의 일기를 통해 민간의료의 변화상을 관찰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대곡일기』의 편집에도 참여했던 원보영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여기에서 그는 신권식의 사례를 바탕으로 서양의학이 한국 현대의 민간의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드러낸 바 있다(원보영, 2010). 하지만 이 연구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거시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특정 시기에 관한 구체적인 상을 그려내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무감하다. 신권식이라는 개인 역시 큰 흐름을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로 다루어질 뿐이다. 역사학, 특히 미시사의 접근법이 필요한 지점이다.
물론 신권식의 일기와 삶으로부터 역사를 길어 올리는 일에는 몇 가지 의문이 따를 수 있다. 하나는 일기라는 사적 자료가 갖는 한계이다. 기록 과정에서 자기 정당화를 위한 기억의 취사 선택과 왜곡이 일어날 수 있는 탓이다. 『대곡일기』의 내용 가운데 문제가 되는 지점은 신권식이 돌팔이와 자신을 구분하여 서술하는 부분이다. 농촌의 현실이나 의학 지식의 습득 경로와 같은 지점은 정부 통계나 다른 예를 바탕으로 쉽게 일반화가 가능하지만, ‘반의사’로서의 고유한 특징은 쉽사리 증명되기 힘들다. ‘법으로 안될 일’이었기에 공식 기록이 존재할 법하지도 않고, 도움을 받았던 마을 사람들에게 공정한 평가가 담긴 인터뷰를 바랄 수도 없다[4]. 결국, 가능한 방법은 최대한 거리를 두며 일기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방법이다. 다행하게도 여지가 없지는 않다. 뒤에서 상술하겠으나, 신권식이 의료 활동을 업으로 삼기보다는 마을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행하였다는 점, 또 스스로 반의사와 의사의 차이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 등은 비교적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는 부분이다.
또 다른 의문은 대표성의 문제이다. 반의사라는 독특한 사례로부터 현대 한국의 농촌 의료 전반을 조망하는 일은 가능한가. 『대곡일기』에 신권식 개인의 삶뿐만이 아니라, 청북면 고잔리, 넓게는 한국 농촌에 거주하던 여러 인물의 삶이 기록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신권식의 삶은 당대의 무면허 의료인이 의학 지식을 습득하는 경로나 의약품을 구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동시에, 보통 사람들이 어떤 병으로 고생하고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등을 드러낸다. 특히 반의사가 등장하고 소멸하는 과정은 농촌 의료 정책의 실제를 오롯이 내보이기도 한다. 무면허 의료인의 존재는 제도권 의료의 부재 및 확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신권식의 일기는 ‘개인의 기록을 넘어선 사회의 기록’이다(손현주, 2017: 22). 다시 말해 반의사로 살기를 결심한 신권식의 삶 자체는 독특하고 드물지 몰라도, 그 이면에는 한국 농촌이 처한 보편의 사회 구조, 즉 농촌 의료의 실태를 길어 올릴 가능성의 공간이 존재한다.
이러한 가능성에 주목하여,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신권식의 『대곡일기』를 바탕으로 ‘반의사’의 삶과 그 이면의 사회적 배경을 톺아본다. 우선 반의사가 나타난 제도권 의료의 부재라는 현실을 살핀 다음, 평범한 농민의 아들인 신권식이 의학 지식을 습득하여 반의사가 되는 과정을 조망한다. 이후 신권식이 반의사로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사람들에게 그는 어떤 존재였는지, 본인은 자신을 어떻게 규정했는지 돌아본 뒤, 농촌 의료가 개선되며 반의사 신권식이 일선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서술한다. 다시 말해 이 글은 『대곡일기』를 재구성하여 반의사 신권식의 탄생과 활동, 은퇴를 추적하며, 이를 통해 신권식 개인의 고유한 삶을 보이는 동시에, 당대 농촌 의료의 현실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2. 의료의 부재: 1960-1970년대, 농촌 의료의 현실

1959년 3월 7일, 신권식의 일기는 절박하다. “영호 몸이 불이 되어 울고 보채고 야단이라 약 한 봉 없는 집에서 큰일 났다. 열은 내리지 않고 여전히 끓고 애는 보채고 밖에 비는 나리고 참으로 사람의 간장을 녹인다. 닭이 울고야 좀 덜 보채여 잠이 든다. 처와 나는 밤을 세우다시피 했다”[5]. 영호(英浩)는 이제 갓 네 살이 된 신권식의 첫째 딸이다[6]. 열은 쉽게 내리지 않았다. 이틀 후에도 “영호는 더한 것 같았다. 열이 고도로 오르고 깜짝깜짝 놀라고 울고 보채고 하더니 새벽녁에야 OK 잠이 들었다”[7]. 하지만 의사는 멀었다. 신권식은 어쩔 수 없이 신포(新浦)에서 사온 ‘마이싱’과 ‘네오잉’, ‘원기소’를 먹일 수밖에 없었다[8]. 비슷한 일은 되풀이되었다. 1961년 6월 15일, 신권식의 일기에는 이런 말이 쓰였다. “오후부터 잘 놀던 어린 것이 보채고 울고 하여 웬일인지 몹시 신음하여 사람의 간장을 태우고 있으니 말이나 해야 아픈 곳을 알지 몹시 괴로운 모양으로 보채니 큰일이다”[9]. ‘어린 것’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어린 것’이라는 표현이 둘째 웅호(雄浩)의 탄생 이후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첫째는 대개 이름 ‘영호’로 직접 지칭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 새로 태어난 갓난쟁이 웅호일 가능성이 컸다. 갓 백일이 지난 아이가 끙끙 앓는 모습 앞에서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이번에도 별다른 수는 없었다. 신권식은 이렇게 탄식했다. “병원이나 있어야 급히 가보지”.
당시 신권식이 살던 청북면에서 의료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의사나 치과의사, 한의사는 모두 셋을 넘지 않았다(표 1). 청북면의 중심지 신포(新浦)에서 의원을 운영하며 왕진을 다니기도 하던 한지의사 하나와 약종상 최철용(崔哲龍)을 제외하면, 옹포(瓮浦)에서 “디운데[덴 곳에] 바르는 좋은 …… 가루약”을 팔던 김용호(金龍浩), 청북면에서 멀리 떨어진 발안장(發安場)과 안중장(安中場)에서 약을 팔던 이들, 면허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한의사 정도가 의료인 엇비슷한 이들의 전부였다[10]. 설령 면허가 있다고 하더라도, 약종상이나 한지의사는 기실 무면허 의료인이나 다름 없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탓에 정해진 지역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지만 제한 구역을 벗어나기 일쑤였고, 법으로 허용된 바를 넘어선 의료행위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11]. 가히 무면허 의료인의 시대였다.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다가 신포에 치과의사 노릇을 하는 이가 나타나고, 오늘날의 송탄에 해당하는 쑥고개에 “X[레이]”를 찍을 수 있는 큰 의원이 생긴 이후에야 비로소 조금 나아졌다[12]. 물론 이 역시 턱없는 숫자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의사의 부족은 한국 농촌 전체의 문제였다. 1964년을 기준으로 의료기관의 42.4 퍼센트, 전국 의료인의 56.1 퍼센트가 서울과 부산에 몰려 있었고, 그런 탓에 전국 읍면의 35.8 퍼센트는 단 한 명의 의사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촌(無醫村)이었다[14]. 언론에서도 농촌 의료의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 서울에서는 의사 1명이 900명의 환자를 보지만, 농촌에서는 의사 1명이 30,000명의 환자를 담당한다는 고발성 기사가 심심치 않게 지면을 오르내렸다[15]. 정부 역시 이러한 문제를 분명히 인지했다. 멀리는 일제강점기부터 가깝게는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권 시절부터 지적되어 오던 문제였기에, 오히려 모르는 편이 더 이상했겠지만 말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朴正熙, 1917-1979)는 1962년 1월 5일의 시정방침 연설을 통해 “의료균점 시책[의] 수립”을 다짐했고, 이듬해 초에는 “무의촌해소를 목표로 지방의료기관의 시설 확충”을 약속했다[16]. 1964년의 연두교서는 더 분명했다. 이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보건의료망을 합리적으로 조정 강화하여……의료 시설이 희소한 농어촌까지 질병의 예방과 의료의 혜택을 확대하여, 국민의료 균점에 노력할 것”이라 선언했다[17].
하지만 선언은 선언일 뿐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보건의료에 이렇다 할 재원을 투입하지 않았다. 경제개발이라는 지상목표 앞에 의료는 늘 뒷순위였다. 1963년 11월 5일에는 「사회보장에관한법률」이 제정되고 시행되었지만, “사회보장사업은 국가의 경제적 실정을 참작하여 순차적으로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는 제3조 제3항의 단서가 따라붙었다[18]. 복지국가는 어디까지나 장기적 목표였을 뿐이었다. GDP 대비 복지지출이 박정희 정권 내내 2%를 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그나마 1.9%였던 1979년을 제외하면 나머지 기간은 1.4% 미만에 불과했다(윤홍식, 2018: 200-204; 신동면, 2011: 315-318). 복지 재원이 투입된다고 하더라도, 농촌이 아닌 도시가 우선이었다. ‘농민의 아들’, ‘막걸리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무색하게, 박정희 집권기 내내 농촌은 홀대의 대상이었다. 도시가 ‘압축성장’하는 동안, 농촌은 ‘압축쇠퇴’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조석곤, 2011: 282-287). 이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박정희 정권 말기에 도입된 의료보험 역시 농어민이 아닌 도시 노동자를 중심에 둔 제도였다.
박정희 정권은 정부의 재원 대신 민간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농촌 의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나는 의료기관의 개설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무의촌 해소 대책을 요청한 「내각수반 지시각서 제5호」에 대해 보건사회부 장관 정희섭(鄭熙燮, 1920-1987)은 “현행의료제도는 자유개업을 기본으로 하고 개설신고만 하게되여 있고” 이에 따라 도농 격차가 심하므로, “도시에 있어서 의료기관의 시설과 규격을 규정하는 일방허가제로 함이 의사를 도시로부터 농어촌에 분산시킬 수 있는 방법임을 확신”한다는 보고를 올렸다[19]. 마침 「국민의료법」의 개정이 진행 중이었다. 정희섭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에 출석하여 정책의 의의를 설명하였고, 허가제는 아무런 문제 없이 새로운 의료법에 포함되었다[20].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허가제는 매우 허술하게 작동했다. 입법의 의도는 허가제를 원칙으로 하고 농어촌 지역을 예외로 설정함으로써 사실상 도시는 허가제로, 농어촌은 신고제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의료기관 허가제를 명시한 「의료법」 제39조 제1항에는 “각령으로 정하는 지역을 제외”한다는 단서가 명기되었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의료에 종사하는 의사 1인에 인구 2천……의 비율에 미달하는 구, 시, 읍, 면”을 예외로 규정한다는 「의료법시행령」 제20조 제1항이 제정되었다[21]. 문제는 이 기준이 너무나 낮다는 데 있었다. 1962년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서울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이 예외에 해당했다. 사실상 사문화된 법이었다. 보건사회부는 기준을 개정하지 않다가, 1965년 7월 29일에 예외 조항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22]. 물론 처음부터 실효성이 없는 법안이었다. 법안이 효과를 거두려면 서울시장이나 도지사가 도시의 의료기관 개설 신청을 반려해야했지만, 의사 단체와 척을 지면서까지 그럴 이유는 없었다. 결국, 의료기관 개설 허가제는 현실을 전혀 고려치 않은 채 의도로만 남은 법안이 되었다.
공의(公醫) 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정권은 자유당 정권의 보건사회부가 입안한 무의면 대책을 그대로 물려받아 1962년부터 무의촌에 공의를 파견했다[23]. “병역을 미필한 의사를 농어촌에 근무케하고, 이의 보완책으로서 한의사에게 예방의학 교육을 실시하여 무의면에 배치함으로써, 무의면의 완전 해소를 시도”한 정책이었다[24]. 공의 파견의 법적 근거는 「국민의료법」이 「의료법」으로 개정되는 와중에도 그대로 살아남았고, 이는 곧 공의 제도의 존속을 드러내는 정부의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었다[25]. 그러나 이번에도 의도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공의에 대한 지원은 미비했다. 봉급은 “정기적으로 지급되지 않고 몇 달씩 밀리”기 일쑤였고, 의료기구와 의료시설 또한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26]. 공의의 태도 역시 문제였다. 부임 명령을 받은 채로 다른 곳에서 일한다거나, 대리의사를 보내고 부임지를 무단으로 벗어나는 등의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27]. 정부는 문제를 일으킨 수 명의 면허를 취소하였으나, 강경 대응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28]. 문제는 돈이었다. 도시에서의 개업이 많게는 100,000원의 수입을 보장하는 상황에서, 공의 보수에 만족할 이는 없었다[29]. 정부 또한 이를 인지하고, 1963년 “4,000원 이상 10,000원 이하”이던 공의 보수를 1964년에는 “4,000원 이상 16,000원 이하”로, 다시 1968년에는 “10,000원 이상 30,000원 이하”로 증액하였지만, 이 역시 도시에서 개업한 의사의 수입에는 미치지 못했다[30]. 물론 이는 박정희 정권이 투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이었다. 이렇듯 민간자원을 활용하여 의료인의 부족을 해결하겠다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정책 실현의 의지와 현실에 대한 고려가 모두 부재한 결과였다. 범람하는 무면허 의료인을 단속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뾰족한 대안 없이 그저 원칙을 들이밀 수는 없었다.
의료인의 부족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의료인은 드물뿐더러, 멀고 비싼 존재이기도 했다. 신권식이 있던 고잔에서 ‘약장수’가 있는 안중장과 발안장에 가려면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이상을 걸어야 했다. 도로 사정은 물론 좋지 않았다. 길 대부분은 포장되지 않은 자갈길이었다[31]. 의사와 약종상이 있는 신포가 그나마 가까운 편이었지만, 역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였다. 버스는 없었다. 신포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삼계(三溪)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사실 거기까지 나간 마당에 굳이 돈을 들여 버스를 탈 이유는 없었다. 안중과 발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중 및 발안행 버스를 타려면 다시 신포까지 걸어가야 했다. 게다가 고잔을 기준으로 신포와 안중, 발안은 모두 다 다른 방향이었으니, 신포로 둘러 갈 바에야 처음부터 ‘장길’로 바로 걸어가는 편이 빨랐다. 물론 대안이 없지는 않았다. 어떤 이들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몰았다. 그러나 신권식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겠지만, 신세 지기를 싫어하는 신권식에게 그런 일은 어쩌다 한 번이었다. 고잔은 외딴 섬이었다. 아픈 이에게 걸어서 한 시간의 거리란 천릿길이나 다름없었다. 1962년 10월 25일, 신권식은 떨어져 나온 “풍송기 날개[에]……얼굴”을 맞아 “코 옆이 많이 잘라졌다”. 피가 많이 났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는 또 다시 한탄했다. “병원이 멀게 있으니 어이 할 도리가 없다”[32]. 신권식은 다음 날 “조반식사를 일찍 해먹고 자전거를 얻”은 후에야 비로소 신포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러 갈 수 있었다[33].
의료비 부담은 병원 이용을 가로막는 또 다른 난관이었다. 얼굴의 “상처를 4바늘 꼬매”고 신권식은 120원의 치료비를 내야 했다[34].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또 그리 적은 비용도 아니었다. 여느 농민과 마찬가지로 신권식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담배도 저렴한 ‘파랑새’만 골라 피우던 그였다[35]. 당시 파랑새한 갑이 6원이었으니, 신권식은 병원비로 한 번에 담배 두 줄 값을 쓴 셈이었다[36]. 자상 치료가 한 번에 끝날 리는 없었지만, 다음 날 신권식은 의사를 찾지 않고 “가정에서 손수 치료”하는 길을 택했다[37]. 더 큰 문제는 병원비를 예측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1971년 7월 26일, 신권식은 웅호의 “눈빛이 아주 노랑빛”인데 놀라 급히 신포 의사를 찾았다. “간장념”이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은 지 이틀째, 신권식은 1,500원의 치료비를 통보받았다[38]. 오른 물가를 고려하더라도,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금잔디’ 열 줄, 그러니까 1971년 당시 농가 월평균 소득 29,699원의 5.1 퍼센트에 해당하는 목돈이었다[39].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병원 문턱을 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74년 2월 20일, 신권식은 이렇게 썼다. “오늘 신포 병원에 가기로 작정했으나 또 못 갔다. 나는 병이 깊어만 가는듯하다. 당장 닥친 돈. 돈이란 무엇인가? 돈을 지나치게 생각하다보니 금일까지 병원에 한 번 못 가고 나의 병만 깊어간다. 인생이란 이렇게 돈에 얽매이는 것인가”[40].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전승되어 내려오는 민간요법을 택하거나, 돌팔이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신권식 역시 “오른편 가슴이 아푸”자, 다음 날 “탱자 술을 해 먹었고”, 그 다음 날에는 “꼬추 감주를 해먹고 취안[취한(取汗)]을 했다”[41]. 민간요법의 기록은 다양하다. 소화불량에는 “소곰을 한 홉” 먹었으며, 감기가 들었을 때는 “파국을 해먹고 취안”을 했다[42]. 누군가를 찾아가더라도, 의사는 첫 번째 선택지가 아니었다. 둘째 웅호가 낫지 않자 신권식은 아이를 “고잔으로 데리고 가 아는 사람을 찾아”갔다[43]. ‘아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의사는 확실히 아니었다. 신권식은 기록에 철저한 편이었다. 그는 의사를 만나면 의사를 만났다고, 약종상을 만났다면 약종상을 만났다고 썼다. 그렇다면 ‘아는 사람’은 결국 무어라 규정하기 힘든, ‘의사 노릇’을 하는 돌팔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신권식은 민간요법과 돌팔이의 양자택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선택지, 즉 본인이 ‘반의사’가 되는 길이 있었다. 그렇다면 반의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3. 반의사의 탄생: ‘양약’의 확산과 서양의학 지식의 보급

신권식에게 ‘양약’, 즉 서양약품은 그리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양약은 민간요법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친숙한 존재였다. 이는 그가 양약으로 가득한 ‘근대’의 세계에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신권식은 열여덟이 되던 해부터 객지 생활을 시작했다. 집에서는 챙겨주는 사람이 없기에, 차라리 나가사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열네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고, 계모는 이복형제를 키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신권식의 아버지는 새로 맞이한 부인에게서만 일곱 명의 자식을 보았다. 신권식은 열여덟이 되던 1946년에 홀로 서울로 상경하여 선린상업학교에 진학하였고, 이후 휴학과 다른 학교로의 재입학을 반복하다 마지막으로 동양공업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렇게 학교에 다니던 와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군대에 들어갔으니, 기실 신권식은 사춘기 시절부터 양친의 보살핌 없이 성장한 셈이었다[44]. 윗세대와의 단절은 곧 민간요법을 포함한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주변의 친척들에게서 이런저런 치료법을 배우기도 했지만, 그저 몇 가지뿐이었다.
이 무렵 신권식이 살던 서울은 그야말로 양약에 잠식된 공간이었다. 발단은 미군의 주둔이었다. 범람하는 감염성 전염병을 제어하기 위해, 미군은 항생제 ‘마이싱’과 ‘다이아찐’을 들여왔다. 의학적인 효과는 대단했다. 당시는 처음에 들어왔던 “다이아찐만 가지고도 모든 문제가 컨트롤이 될 시기였는데, 페니실린, 스트렙토마이신이 계속 들어오면서, 아주 그때 의사들은, 아 이제 우리 할 일 별로 없어졌다고 할 정도”였다(신규환·여인석, 2010: 109). 높은 효과는 곧 신화로 이어졌다. 새로운 약은 만병통치약이 되었다(박윤재, 2016: 252). 사람들은 “미국제 ‘다이아찐’이면 무슨 병이고 다 낫는다는 바람에 없는 돈을 짜내어” 앞다투어 약을 구입했다[45]. 난리 통을 이용하여 한 몫 단단히 챙기려는 이들은 가짜 약을 팔아댔다[46]. 양약의 유행을 방증하는 또다른 증거였다. 모두가 마이싱과 다이아찐을 소리 높여 찬미하는 양약의 세계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적응은 곧 양약과 익숙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신권식의 상경은 전통으로부터 근대로의, 민간요법의 세계로부터 양약의 세계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었다. 신권식은 마이싱과 다이아찐을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그에게는 여느 사람과 다른 두 가지의 독특한 면이 있었고, 이를 통해 그는 비로소 ‘반의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하나는 신권식이 주사를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약만 줘서는 반의사가 될 수 없었다. 정확함과는 별개로, 투약 자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주사는 달랐다. 뾰족한 침으로 피부를 찔러 약물을 주입하는 주사기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두려움을 느꼈다. 신권식은 바로 이것, 주사기를 사용하는 법을 익힘으로써 보통 사람들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그가 주사를 익힌 곳은 군대였다. 통신부대에 배속되었지만 위생부대의 일에 관심이 많았고, 그 덕에 신권식은 근육주사는 물론이거니와 혈관주사나 봉합술 등을 익히게 되었다(지역문화연구소, 2007: 730). 주사를 놓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자칫하면 신경을 찌를 수도 있었고, 혈관을 터트릴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주사 방법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주사를 놓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었으며, 약물에 따라 근육주사를 놓아야 하는 경우와 혈관주사를 놓아야 하는 경우가 달랐다. 무턱대고 놓았다가는 목숨을 앗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신문에는 종종 돌팔이가 “피하주사 약인 스트레토마이싱을 혈관에 놓아 환자를 즉사케”하는 경우가 보도되곤 했다[47].
신권식의 주사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주사를 놓았다는 기록이 수십여 차례 등장하지만, 사고나 부작용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권식이 일부러 쓰지 않은 탓일까? 그럴 가능성은 작다. 신권식이 사는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았다. 넉넉히 잡아도 두 번만 건너면 모두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작은 마을에서 실수의 소문은 입과 입을 타고 쉬이 퍼지게 마련이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신권식을 찾았다는 사실은 곧 실수의 부재를 의미했다. 1959년 4월 한 달 동안에만 신권식은 주사를 여섯 번 놓았다. “치우(致雨)가 와서 주사(혈관)를 놓”고, “당숙모가 와서 수식(修植)이 주사를 좀 놓아달라해서 건너가 주사를 놓아주”었다[48]. 신권식은 분명 약물에 따른 주사법을 외우고 있었거나, 혹은 약병의 ‘레테르’를 읽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단순히 양약을 사 와서 만병통치약으로 소비하는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여러 약물을 각각에 맞는 정확한 방법으로 주사할 줄 알았던, 조금은 의사에 가까운 존재였다.
지식을 갖추는 일도 중요했다. 아무리 주사를 정확하게 잘 놓는다고 해도, 아무 때나 ‘마이싱’만 놓아 댄다면 반의사가 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병을 진단하고, 그에 따라 약을 쓰는 일도 필요했다. 1960년 4월 14일, 신권식이 얻어 온 동아출판사의 『백만인(百萬人)의 의학(醫學)』이라는 책은 이러한 요구를 채워주는 존재였다[49]. “의사본위로 편집되었던 종전의 계몽의서의 구투를 완전히 벗어나, 일반인이나 환자가 가장 알고자 하는 바를 전문의사에게 묻는다는 입장에서 편집[하여]……머리가 아프다든지, 배가 아프다든지 하는 초보적 증상으로부터 병명을 알아내어 정확한 진단과 치료에의 길을 최신의 의학지식으로써 인도하도록 꾸며진 혁신적인 건강안내서”라는 광고 문구에 어울리게, 『백만인의 의학』은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보통 사람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구성되었다[50]. “제1부 총론 증세로 본 병”에는 “미열이 있을 때”, “머리가 아플 때”,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올 때” 의심할 수 있는 질병의 목록이 쓰였고, 목록 옆에는 각 질병의 “원인과 치료”가 상세하게 담긴 각론의 페이지가 인쇄되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중이 질환의 고막상”이나 “각종 안질”, “구강 및 인후의 질환”, “각종 피부 질환”, 여러 가지 질병 상황의 “영아의 대변”이 “정밀색도판”으로 인쇄되어, 이것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의 간이 진단이 가능할 정도였다[51]. 여기에 덧붙여 “제4부 국민 의학 지식”에서는 “임산부 보건”이나 “육아법”, “수태조절”, “가정간호”, “가정상비약”, “영양개선”, “구충, 구서”, “구급치료”와 같은 정보나, 의사에게 “진찰받는 방법”, “공공의료기관의 이용”, “공중위생” 등이 실렸다. 모두가 생활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손쉽게 알 수 없는 정보였다.
『백만인의 의학』은 대유행이었다. 이와 유사한 학원사의 『가정의학대전』과 동지사의 『육아백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1963년 5월, “이런 류의 생활의학사전은 재판이 번거로울만큼 상당한 독자들을 갖고 있[었]다. 학원사의 것이 12판을 다했고 동아의 것은 이제 6판째”였다[52]. 이는 물론 의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최신 홈닥터”라거나[53], “안방의 종합병원, 건강관리의 특사”와 같은 광고 문구는 의료인이 부족한 상황을 파고든 출판사의 전략을 분명히 보여주었다[54]. 정부 역시 책의 출간을 반겼다. 책 내지에는 제목과 함께 “보건사회 부추천”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인쇄되었고, 보건사회부 장관 손창환(孫昌煥, 1909-1966)과 당시 문교부 장관을 지내던 초대 보건사회부 장관 최재유(崔在裕, 1906-1993)의 추천사가 실렸다. 손창환은 “의학의 연구, 의학지식의 보급, 의료시설 및 의료제도의 정비 등에 정부예산의 상당한 부분이 경주되고 있음”을 언급하여 정부를 변호하는 한편, “국민보건[은]……정부나 공공단체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하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보건에 대하여 부단한 관심과 높은 지식을 갖”출 것을 주문했다. 『백만인의 의학』은 정부와 보통 사람들 모두를 만족시켰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돈한 푼 들이지 않고 의사의 부족을 해결할 수 있었고, 개인의 입장에서는 급할 때 찾아볼 수 있는 책이 생겼으니 그 역시 싫을 리 없었다.
신권식은 『백만인의 의학』을 열심히 읽었다. 그는 배움을 향한 열의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1983년 1월 22일 신권식은 자신의 향학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일직이 어머니를 일은 나는 뒤 도라 보아주는 사람 없이 천하게 자라 공부의 집념은 용소슴쳤으나 돌보아주지 않아 급기야 6·25란 비극의 전쟁으로 군대에 가서도 온갖 책으로 오직 공부만 했다. 나의 불타는 향학열은 누구보다도 읏뜸 같다”[55]. 신권식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책과 신문읽기에 열심이었다. 1960년 3월 2일에는 “자유신문을 신청”했고, 1965년 12월 23일에는 경향신문을 구독하여 기상 예보나 정치, 전염병 유행 등의 시사에 귀를 기울였다. 1978년 3월 23일에는 “백미로 1叺[가마니] 반”에 해당하는 48,000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역사소설 전집을 신청하여 수령하였고, 1989년 1월 17일에는 “세계대백과를 우편으로 신청”하였으며, 1990년 1월 2일에는 “대호가 사다준 해방후사[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었다[56]. 신권식은 『농촌근대화』라는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하고, 여느 농민 일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근대 철학의 이상논”과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하는 식자층 농민이었다[57].
‘읏뜸 가는 불타는 향학열’을 지닌 그에게 『백만인의 의학』은 “꽤 쓸모가 있”는 일종의 “의학 사전”과 같은 책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신권식은 『백만인의 의학』을 펼쳤다. “이런 병에 걸리면 이렇게 된다”는 서술은 진단의 근거가 되었고, “이런 약을 먹어라”는 말은 처방의 지침이 되었다. 여기에 ‘약방’에 걸린 광고 내용을 추가로 학습함으로써, 신권식은 증상과 진단, 처방의 삼박자를 갖출 수 있었다[58]. 이를 바탕으로 그는 기침하는 “어린 것들”의 모습에서 백일해를 읽어내는 한편, “열이 벗석 오르”던 영호에게 “열꽃”이 나는 것을 보고 “홍역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하고, “며칠째 시름시름 괴로운 기색을 면치 않”은 부인의 증상에 대해서는 “요도가 불편한 모양”이라 쓰기도 했다[59]. 아이에게 나타난 붉은 반점으로부터 홍역의 ‘열꽃’을 관찰해내고, 비뇨기계의 불편함을 가리키며 ‘요도’라는 해부학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농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처럼 신권식은 군대에서의 경험에 끝없는 학습을 더하여, 단순히 만병통치약으로서 양약을 쓰는 수준을 넘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의학을 학습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제 반의사의 활동과 정체성을 살펴 볼 차례다. 마을에서 반의사 신권식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4. 활동과 정체성: 의사와 돌팔이 사이의 존재

반의사 신권식은 마을의 사람들이 아플 때마다 가장 먼저 찾는 존재였다. 의사는 귀했고, 멀었으며, 비쌌다. “발찌”, 즉 목 뒤편 머리털 난 가장자리에 부스럼이 난 아버지도, “종기[로] 고생”하는 조부도 모두 의사가 아닌 신권식을 불렀다. 신권식은 발찌에는 “주사를 놓아드리고 고약을 드리였”고, 종기에는 “약을 같고 가 발라드리고 왔다”[60]. 바로 곁의 부인도 담마진(蕁痲疹), 그러니까 두드러기의 치료를 남편에게 맡겼다. 신권식은 부인에게 “주사를 놓아주고……약을” 주었으며, 차도가 없자 다음 날 신포에서 다른 약과 주사를 사와 먹이고 놓아주었다. 다행하게도 “저녁엔 좀 차도가 있”었다[61]. 가벼운 병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병에도 신권식을 불렀다. 1960년 3월 17일에는 “오후 늦게 처가에서 기별이 왔”다. “장모가 대단하시니 급히 오라는” 소식이었다[62]. ‘대단하다’는 신권식이 자주 쓰는 표현으로, 병이 위중함을 에둘러 드러내는 말이었다. 1962년 11월 23일에는 “할먼님이 대단하시다고 해서 고잔”으로 건너갔고, 1965년 1월 3일에는 “용호모친이 졸도 했다고 와보아 달라고 해서 보니 인사불성”이라 “진통제와 잠파을 놓아주고 왔다”[63].
반의사의 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예방 접종 역시 신권식의 몫이었다. 1962년 7월 4일, 장티푸스가 돈다는 소식에 “고잔[에] 가서 주사를 맞고”온 신권식은 주사약을 얻어 와 ‘동리’(洞里) 사람들에게 직접 주사를 놓았다[64]. 고잔에 온 이들은 보건소에서 파견된 방역반이었다. 이들은 지역 유지인 데다가 마침 주사도 놓을 줄 아는 신권식에게 접종액과 주사를 건네, 마을의 예방접종을 맡겼다[65]. 보건소 직원들이 신권식에게 접종을 일부 위임했다는 사실은 반의사가 갖는 동네에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한편, 반의사는 반수의사이기도 했다. 동네 주민들은 동물이 아플 때도 신권식을 불렀다. 사람을 고칠 줄 알면 동물도 어련히 고칠 줄 알 것이라는 생각과, 사람이 아플 때도 의사를 찾지 않는데 굳이 수의사까지 불러야겠느냐는 생각이 결합한 결과였다. 1960년 4월 6일, 고잔 작은집에서는 “소가 백미 일두(찹쌀)을 먹었다”며 신권식을 불렀고, 그는 “하오(下午) 늣게까지 관게치 않고 쌀애기 똥을 누어 관게치 않을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66]. 신권식은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도야지 주사”를 놓아주었고, 돼지콜레라가 유행할 때는 직접 예방주사를 놓으러 다니기도 했다[67]. “등에 상처가 많이” 난 ‘도야지 새끼’를 “꼬매여 주”는 것도 신권식의 몫이었다[68].
법적으로 반의사 신권식은 돌팔이나 진배없는 존재였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니었다. 신권식이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마을의 지식인으로서 의료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을 기준으로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젊은 나이였지만, 신권식은 마을의 중추를 맡고 있었다. 마을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서울살이와 공무원의 경험, 그리고 신문과 독서로 쌓은 넓은 견문 덕이었다. 신권식이 지역 정치인으로부터 선거 활동을 자주 부탁받았음은 이를 드러내 보이는 한 가지 근거였다. 4·19 혁명과 5·16 쿠데타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의 시기, 신권식의 집에는 선거운동원을 권하는 이들이 찾아오기 일쑤였다[69]. 사람들은 이런 그에게 곤란한 일의 해결을 부탁하곤 했다. 신권식이 서른하나가 되던 1959년에는 술장사를 하는 “농꼴 류씨 부인 가(家)”에 “기자란 사람”이 와서 괜한 트집을 잡고 돈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기자를 돌려보낸 이도 다름 아닌 신권식이었다[70]. 반의사로서의 의료 활동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신권식이 가진 주사 기술과 의학 지식은 ‘배운 청년’으로서의 권위를 강화하는 또 다른 근거였고, 이러한 권위는 의료 활동으로 다시 공고해졌다.
신권식이 치료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옹포에서 “디운데[덴 곳에] 바르는 좋은……가루약”을 파는 김용호 같은 이들과 달리, 의료 활동을 생업으로 삼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71]. 물론 생업일 수도 없었다. 신권식이 사는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았고, 그런 탓에 의료 활동의 빈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신권식은 베푸는 편이었다. 약값이 만만치 않았던 탓에 약이나 주사제를 무료로 줄 수는 없었지만, 그 외의 사례는 일절 받지 않았다. 주사를 놓는 일도, 상처를 꿰메주는 일도,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를 오고 가는 일도 모두 보수 없이 이루어졌다[72]. 사람들은 이런 그에게 감사의 뜻으로 식사를 대접하거나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셋째 조모네에서는 “주사 놓으러 다녔다고 수고했다”며 떡과 ‘개국’을 주었고, 덕균(德均)의 집에서는 술상을 차렸다[73]. “오전에 고잔 덕균(德均) 처가 와 도야지가 똥을 못 눗는데 걱정이라고 하며 좀 가보아 달라고 해서 관장기를 같고 가 관장을 해”준 일에 대한 보답이었다[74].
그렇다고 해서 신권식을 의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때로 반의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의사를 찾았다. 1960년 5월 22일, 맹식(孟植)은 장식(莊植)을 데리고 “수원병원에 갔다왔다. 장식이 가는 귀 먹은 것을 보러 같다”오는 길이었다[75]. 같은 해 7월 8일에는 “둘째할머님 家[댁] 아주머니가 중풍이 되어” 병원에 갔다[76]. 차마 청력 이상이나 중풍은 맡기지 못하겠다는, 의사와 반의사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한 행동이었다. 신권식 역시 본인을 의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들보다야 의술을 많이 닦았지만, 감히 의사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존재, 그것이 신권식이 생각하는 자신의 위치였다. 환자를 볼 때마다 신권식은 눈앞의 질병을 자신이 치료할 수 있을지 여부를 고심했다. 그에게 세상의 질병은 두 가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뉘었다. 웅호가 열이 올라 경기를 할 때, 신권식은 그 어떠한 치료도 시도하지 않았다. 신권식은 아이를 데리고 바로 병원에 다녀 왔다[77]. 큰어머니가 신경통으로 병원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권식은 본인이 치료하겠다 나서지 않고 그저 큰어머니를 “신포에까지 모시고 같다왔”을 뿐이었다[78].
물론 두 범주 사이의 경계는 그리 분명치 않았다. 의사와 반의사의 구분은 때로 자의적이었다. 웅호의 “눈빛이 아주 노랑 빛”인 것을 보고, 신권식은 웅호를 “급히 서둘러 신포 병원에 데리고 같”고, “간장염(황달)”이라는 진단과 함께 치료를 받고 나왔다[79]. 처음 며칠만 해도 신권식은 의사의 말에 순응했다. 그는 다음 날에도 웅호를 데리고 “신포 병원에 같다” 왔다[80]. 셋째 날은 달랐다. 그는 “웅호를 데리고 신포에 갔”음에도, “병원에 안 들리고 약방에 들려 약을 사고 벵(닝겔) 2병을 사 갖고 와 집에 와 놓아”주었다[81]. 굳이 신포까지 나갔다가 병원에 들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금전적인 걱정이었을까. 일단 의사에게 진단과 치료를 받고 급한 불은 넘겼으니, 이제는 자신이 치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사람의 진심은 급한 상황에서 나온다. 신권식이 웅호를 데리고 병원을 향했을 때, 그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이 병은 반드시 의사에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게다. 이듬해, 흉통을 호소하는 부인에게 신권식은 다시 병원에 갈 것을 권했다[82]. 이처럼 신권식은 의술을 업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돌팔이가 아니었고, 자의 반 타의 반 치료의 범위가 정해져 있었다는 점에서 의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한 ‘절반의 의사’였다.
그렇다면 돌팔이도 의사도 아닌 반의사는 어디에서 약을 구했을까? 면허를 받은 의사가 아니었기에 신권식은 의료인이 이용하는 의약품 유통망에 접근할 수 없었고, 따라서 다른 방법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약을 구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포에 사는 약종상 최철용이었다. 약종상은 1954년 8월 3일에 제정되고 시행된 「약종상, 한약종상, 매약청매상허가규정」에 따라 만들어진 직종으로, “특별시장 또는 도지사의 허가를 받어 지정된 장소에서 의약품을 판매하는 자”를 가리켰다[83]. 이들은 약사와 달리 약을 직접 지을 수는 없고, 다만 이미 만들어진 약만을 팔 수 있었다. 영업이 가능한 지역 역시 제한되었다. 약종상 제도를 둔 이유는 분명했다. 의사나 약사가 없는 무의무약(無醫無藥)한 곳에서도 쉬이 약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의사와 마찬가지로 약사의 도시 집중 역시 심각했다. 1964년을 기준으로 전국에는 8,519명의 약사가 있었고, 그중 4,062명은 서울에 있었다. 반절에 해당하는 수였다[84]. 평택군도 그러하였다. 같은 해 평택군에는 27개의 약국이 개설되었지만, 이 중 23개는 평택읍과 송탄읍에 위치했다. 청북면에는 1974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약사가 들어왔고, 나머지 면에는 이마저도 없었다[85]. 약사를 볼 수 없던 상황에서, 약종상은 약사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유용한 존재였다. 신권식은 약을 구하기 위해 신포의 최철용을 자주 찾았다. 잦은 거래 덕분이었는지 어느덧 둘은 외상 거래가 가능할 정도로 신뢰가 쌓인 관계가 되었다[86].
또 하나의 경로는 발안장이나 안중장 등의 시장에서 약을 파는 이들이었다. 이들의 존재는 분명치 않다. 신권식은 그들의 이름이나 직종을 언급하지 않은 채, 그저 장에서 약을 샀다는 식의 기록만을 남겼다[87]. 아마 그들은 매약 청매상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약종상과 한약종상 아래의 일종의 약장수 같은 존재였다. 매약청매상 제도가 만들어진 이유 역시 약종상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53년에 「약사법」을 제정할 당시만 해도 ‘장돌뱅이’ 같은 이들을 제도에 포함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약사는 물론이거니와 약종상마저도 가지 않는 산간벽지에 약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매약청매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신규환, 2013: 862-864). 약종상이 약사의 빈자리를 대신했듯, 매약청매상은 약종상과 약사가 채우지 못한 나머지 빈틈을 메웠다. 약종상이 없던 진위면(振威面)과 서탄면(西炭面)에서는 매약청매상이 약을 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88]. 물론 약종상이 있는 면의 주민도 매약청매상을 찾았다. 매약청매상은 장에 다녀온 김에, 관공서에 들른 김에, 나들이하러 나간 김에 가볍게 찾을 수 있는 존재였다. 신권식 역시 부인이 장에 갈 때면 필요한 약의 목록을 써주었고, 신권식의 부인은 “마라리야 주 1갑, 소화불량 주 1갑, 백일해 주 3병, 알콜 대 1병” 등을 사 오곤 했다[89].
물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방법도 있었다. 같은 집안의 상식(上植)은 약의 또 다른 공급처였다. 약종상이나 매약청매상만큼 자주는 아니었지만, 신권식은 이따금 상식을 찾았다. “발바당에 상처”가 났을 때는 상식에게 “약을 얻어바르”고, “어린 것”이 설사로 고생할 때는 “상식 가(家)에 가서 설사약을 사”왔다[90]. 바로 다음 달에는 “상식에게 원기소 1병을 1400환”에 사기도 했다[91].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신권식은 상식에게 약을 얻을 때마다 약값을 지급했으며,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상식은 약종상도 매약청매상도 아니지만 약을 쟁여 놓고 판매했던 일종의 약장수와 같은 존재였을 가능성이 컸다. 상식이 마을 내에 기거하는 상주 약장수라면, 마을을 떠돌아다니는 약행상(藥行商)도 있었다. 1963년 9월 7일, 고잔에는 “약선전원”(藥宣傳員)이 찾아왔다. “도장을 같고 오면” “무료로 약을 나누어” 준다는 이들이었다. 신권식은 저녁에 약장수를 찾아가 “위보롱이란 위약을 한 봉 타고 신기환(腎氣丸)이란 보약을 사같고 왔다”[92]. 왜 약을 타는 데 왜 도장이 필요했는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들이 약이 귀하던 당대의 실정을 파고들었다는 점, 그리고 공짜 약을 미끼로 다른 약을 판매하여 수익을 올렸다는 점, 이 두 가지 만큼은 분명하다. 신권식은 이들에게 외상으로 보약을 구매하는데, 이는 약행상의 방문이 일 회로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다시 보지 않을 이에게 외상을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65년 11월 10일, 신권식은 또 다른 약행상에게 “어린이 보약 노젤정”을 구입하였다. 이때도 약값은 외상이었다[93]. 그러나 이렇게 반의사가 약을 구하고 의술을 행하는 동안, 상황은 계속해서 달라졌다. 어느덧 은퇴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5. 은퇴: 1970년대 후반, 민간의 노력과 농촌 의료의 개선

반의사의 활동은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급격히 줄어들었다. 반의사의 은퇴였다. 청북면의 의료 상황이 좋아졌다거나, 의료비가 내려갔다거나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청북면은 여전히 무의촌이나 다름없는 곳이었고, 지역의료보험은 아직이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계속되었다. 농촌의 의료기관은 도시의 의료기관보다 더 많은 인구를 담당해야 했다. 세월이 흐르며 농촌의 의료기관당 인구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인구가 많이 늘어나지 않아 발생한 착시에 불과했다. 1980년 당시, 경기도에는 여섯 개의 시와 열아홉 개의 군이 있었다. 시 단위의 병의원 하나가 6,215명의 인구를 담당했다면, 군 단위의 병의원은 1.5배에 해당하는 9,093명의 인구를 담당해야 했다[94]. 의료 공급의 불균형은 동일한 행정 구역 안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남부의 중심지인 평택읍과 북부의 중심지인 송탄읍에서는 의료기관 하나가 2,000여 명의 환자를 담당했지만, 나머지 면 단위에서는 의료기관당 인구수가 적게는 3600여 명, 많게는 7,200여 명에 달했다(표 2, 3). 어쩌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의사들의 입장에서야 굳이 인구 밀도도 낮고 경제력도 빈약한 농촌에서 개업할 이유가 없었다.
의료비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았다. 1970년대 말이 되면서 농가의 수입, 특히 신권식의 사정은 분명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의료비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어쩌다 ‘맹장’, 그러니까 충수염이라도 걸리면 농가의 평균 한 달 치 수입에 육박하는 6만 원에서 7만 원의 돈이 들었다[97]. 이마저도 의료보험을 적용받을 때의 가격이었다. 1988년까지 농촌은 의료보험 대상 지역이 아니었다. 의료보험은 빈틈투성이였다. 1977년 7월부터 500인 이상 근로자가 있는 사업장에 대한 직장의료보험이 실시되었고, 1979년 1월부터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직원을 대상으로 한 공교의료보험이 시행되었지만, 그뿐이었다[98]. 도시에 사는 이들 중에서도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가 다수였고, 농촌과 어촌에 사는 이들은 그마저도 없었다. 지역의료보험은 여전히 시범사업 단계였다. 1981년 7월 제1차 시범사업이 시작된 강원도 홍천군과 전라북도 옥구군, 경상북도 군위군, 그리고 1982년 7월 제2차 시범사업이 시작된 경기도 강화군과 충청북도 보은군, 전라남도 목포시를 제외하면, 농어촌에서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99]. 이후 1988년부터 지역의료보험이 시행되었으나, 그 역시 완전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의료보험은 조합식으로, 농민층의 부담이 컸다. “생산직 노동자는 생산직 노동자끼리, 사무직은 사무직끼리, 농민은 농민끼리 하나의 조합을 만들어”야 하는 탓에, “소득재분배 효과는 애당초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한미선, 1988: 99). 농민은 도시에 사는 직장인보다 세 배나 높은 보험료를 내야했다(조홍식, 1992: 268). 농민을 위한다는 농민 의료보험이 “농민[을] 수탈”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이준희, 1991: 152).
상황이 여전했다면, 과연 무엇이 반의사의 은퇴를 종용하였을까? 하나는 신권식 개인의 경험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큰 수술을 받으며, 신권식은 의술에 대한 경외를 느꼈다. 1977년 6월, 신권식은 같은 집안의 철우(轍雨)가 휘두른 괭이에 머리를 맞았다. 발단은 치도 사업이었다. 농로 정리는 이따금 분쟁을 일으켰다. 좁은 시골길을 넓히려면 누군가는 땅을 내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철우는 “땅[을] 배스느니[뺏느니] 등등” 불만을 쏟아내다 “술[이] 취했는지 괭이로” 신권식을 내려치고 말았고, 신권식은 이튿날 “정신을 일고” 영등포에 있는 한강성심병원에 실려갔다. 큰 수술이었다. 일차 수술이 끝나고, 집도의는 5개월 이후 또 한 번의 수술을 해야한다고 말했다[100]. 예정된 재수술을 치르고 난 이튿날, 신권식은 이러한 소회를 남겼다. “옆에 있던 환자는 배을 수술, 창자를 10여 군대나 이였는데, 많은 차도가 있어 일어나 앉으니 의술이 이토록 발전이 있나 십다”[101]. 아마도 자신의 처지가 투사되었을 이 말 속에는 의학에 대한 경탄이 담겨있었다. 이는 또한 반의사의 한계에 대한 절감이기도 했다. 수술, 특히 머리를 열고 흩어진 장을 잇는 수술은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다.
사망 원인의 순위 변화는 또 다른 이유였다. 수술과 마찬가지로, 새로이 문제가 된 여러 질병 역시 반의사 신권식의 의술로는 감히 어찌해볼 수 없는 존재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감기 등의 열성 감염병이나 소화불량, 근육통과 같은 급성 질환이 사람들을 괴롭혔다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람들은 반의사 신권식의 능력을 넘어서는 암이나 뇌혈관질환, 고혈압 등의 만성 질환에 시달렸다(이문호 외, 1989: 283). 1976년에 유명을 달리한 고잔의 지식(祗植)은 “6년간 간경화증으로 고생”했고, 농꼴에 사는 홍명언은 55세가 되던 1978년에 “뇌출혈로 5일만에 세상을 떠났다”[102]. 1982년에는 “수원의 작은아번님이 고혈압으로 별세하시였”고, “행궁리의 고모부가……고혈압으로 별세하시였다”[103]. 그리고 1984년에는 고대 구로병원에서 아버지가 “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아,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104]. 그야말로 만성 질환의 시대가 열린 셈이었다. 이처럼 뇌수술의 경험과 사망 원인의 변동은 반의사의 은퇴를 부추기는 심리적, 보건학적 요인이었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만성 질환의 시대라 하여, 반의사가 주로 다루던 급성 질환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언가 다른 이유로 인해, 급성 질환에 걸린 이들이 더는 신권식과 같은 이를 찾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반의사의 은퇴에 종지부를 찍은 결정적인 원인은 병의원 접근성의 개선이었다. 먼저 교통수단의 확충은 면에 거주하는 사람이 읍의 의료기관을, 군에 거주하는 사람이 시의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발판이 되었다. 1977년 1월 6일, 신권식은 오토바이를 샀다. 36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105]. 그러나 오토바이는 그 이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신권식은 오토바이를 타고 안중을 들락거렸고, “방조제 구경” 차 대호를 “오토바이에 싣고 남양만”에 다녀오기도 했다[106]. 이전 같았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듬해 겨울, 신권식은 “염증 또는 위계양”으로 고생하는 부인에게 ‘수원 병원’을 권했다. 버스를 타려면 삼계까지 나가야 했지만, 이제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신권식은 아침 일곱 시에 부인을 “오토바이에 싣고 삼계정류장에 같다주고 왔다”[107]. 1981년 3월 4일에는 오토바이의 구입에 비견될 만한 또 다른 일이 일어났다. “삼계-고잔 간 뻐쓰 개통”이었다[108]. 버스가 동네까지 들어오니, 오토바이로 삼계까지 나갈 일도 없었다. 버스 노선이 연장된 지 네 달이 되던 때, 신권식의 부인은 관절통을 치료하기 위해 “7시 첫 차로 병원에 같다”. 오토바이는 “차를 노처 못가고 삼계까지 걸어가게” 되었을 때나 필요할 뿐이었다[109]. 이처럼 오토바이와 버스는 물리적 공간을 압축했고, 도시의 의료기관은 주변의 농촌 지역을 모두 포괄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는 농촌 지역에 의료기관을 설립할 이유를 도리어 없애버리는 역설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농촌에 사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병원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일단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교통의 개선이 물리적 거리를 줄였다면, 사설 보험의 확산은 금전적 부담을 해결했다. 여러 보험회사에게 의료보험의 빈틈은 곧 커다란 기회를 의미했다.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성인병 보험이나 임산부 보험, 부인병 보험 등의 질병보험 상품이 출시되기 시작했고, 1978년에는 보험시장의 과열로 손해보험과 생명보험 사이의 영역 다툼이 벌어질 정도였다[110]. 의료보험과 유사한 ‘종합질병상해보험’이 출시된 것은 1982년의 일이었다. 대한, 제일, 동방, 흥국, 교보, 동해 등 당시 존재하던 모든 생명보험 회사가 뛰어들 만큼 큰 시장이었다. 이듬해에는 농협에서도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못하는 농민들의 의료비를 지원키 위해 의료보험과 유사한 ‘입원공제’를 새 상품으로 개발”하여 판매하였다[111]. 의료보험 혹은 그 엇비슷한 상품에 대한 요구는 엄청났다[112]. 유행을 타고 가짜 상품을 파는 사기꾼이 판칠 정도였다[113]. 사람들은 없는 살림에 너도나도 사설 보험에 가입했다. 그나마 병원비보다는 보험료가 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신권식 역시 “의료보험회사의 직원”을 만나 저녁을 함께하고, 다음 해 보험에 가입했다. “의료보험료가 154,500원이라 다소 비싼감이 있”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114].
신권식은 1983년 1월 16일에 보험카드를 받았다. 보험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신권식은 “보험카드를 쓰니 현금을 내지 않”아 “편리”하다고 썼다[115]. 물론 가장 큰 이점은 돈이었다. 1983년 말의 경험은 극적이었다. 1983년 11월 27일 신권식은 복통을 호소하며 잠에서 깨었다. “새벽이 되여 일어나 진통제를 먹었”고, 괜찮은 듯 싶다 마침 “경기병원에 위준섭군이 입원하고 있다해 문병도 갈 겸 진찰도 갈 겸 같다가 진찰을 해보[고] 맹장”이라는 진단을 받았다[116]. 수술은 바로 그 날 오후에 진행되었다. 수술을 마치고 4일 뒤 “까스가 안 나와 걱정이더니 오후에서야 까스가 나왔”고, 그로부터 이틀 뒤인 12월 3일에는 “아침 회진에 실밥을 빼고 수속”을 했다[117]. 병원비는 놀라웠다. 총 입원 수술비는 50만 원이었지만 의료 보험 35만 원을 제하고 나면 자기부담금은 15만 원 정도였다. 신권식은 보험 덕에 7할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돈이란 무엇인가? 돈을 지나치게 생각하다보니 금일까지 병원에 한 번 못가고 나의 병만 깊어간다”고 하소연하던 신권식은 이제 병원에 가는 일을 편하게 생각하게 되었다[118]. 예전 같았으면 그저 소화제를 먹였겠지만, 소화가 안 된다는 말에 신권식은 바로 대호를 “병원에 데리고” 갔고, 마침 가는 길에 “철우도 발의 종기로 간다 해 같이” 갔다[119].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는 부인에게도 신권식은 별다른 고민 없이 “병원에 같다 오라 했다”[120]. 이제 병원은 “평택 가는 김에……들려오라”고 할 만큼 편한 장소가 되었다[121]. 사람들 역시 신권식을 찾지 않고 바로 의사를 찾았다. 1981년 1월 1일 12시경, 신권식은 관식(寬植)에게 백모(伯母)의 사망을 전해 들었다. 상황이 위급하여 “안중(安仲) 누님이 의사을 데리고” 왔고, 심장마비라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122]. 이전 같았으면 친척 어르신의 위급 상황에 가장 먼저 불려갔을 그였다.
의사 노릇이 뜸해지면서 의술은 점점 쇠퇴했다. 군대에서 익혀온 주사법은 1980년이 되자 거의 불능에 가까워졌다. “저녁나절 함성배군이 앓는다고 포도당 주사을 사 같고 와 노아 달라”지만, 신권식은 “오래 만에 놓이 안 되여 못 노와 주”고 말았다[123]. 신권식의 기록에서는 어떤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주사를 놓은 마지막 기록은 1983년 6월 4일의 일기다. 이날 그는 “안식구의 약을 먹[이]고 주사을 주었으나 잘 약효를 받어 완케되기를 바랜다”고 썼다[124]. 아마 이것은 혈관주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혈관주사만큼은 다른 주사와 반드시 구분해서 기록하는 그였다. 다시 몇 년 후인 1985년 2월 7일, 신권식은 또 한 번 혈관주사를 요청받지만 이내 포기했다. “오후에는 아번님의 기력이 떨어저 약을 사라같다 와 주사을 노아달라 했으나 현관[혈관] 주사이라 못 놓아 드리였다”[125]. 신권식은 이렇게 반의사의 상징과도 같았던 주사기를 내려놓게 되었다.
은퇴한 반의사 신권식은 보약으로 눈을 돌렸다. 아플 때면 언제나 마음 편히 의사를 찾을 수 있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며 최대한 의사에게 가지 않는 일이 새로운 목표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인생은 황혼을 향했다. 1978년 12월 22일, 신권식은 쇠약해진 건강에 대한 걱정을 내비쳤다. “나는 전일 夜[밤]에 병이나 종일 누워 있었다. 몸이 쇠약해서인지 늙거갈랴는 것인지 자주 자리에 눕게 된다”[126]. 그리고 1981년 10월 17일, 신권식은 건강을 위해 “생전 처음으로 보약을 사왔다”[127]. 그러나 “웬일인지 가을비가 잦아 추수가 늦어지”는 탓에 “집가리를 손질”하는 등 일이 바빠 바로는 먹지 못하고, 11월 2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약을 달이기 시작했다[128]. 드디어 11월 3일, 신권식의 일기에는 약간의 설렘이 담겨있었다. “모처럼만에 전야부터 보약을 먹었다. 나의 생전 처음의 보약 복용이다. 안식구도 같이 먹기 시작했다”[129]. 같은 해 1981년 12월 15일부터는 “안식구의 권류”를 받고, “조경[조깅]을 간단히 시작해서 청용부리까지 뛰여같다 와 간단한 체조”를 했다[130]. 이후로 신권식은 자주 보약을 찾았다. 1984년 8월 30일에는 “인제(仁齊)한의원에 [가서]……십전대보탕”을 지었고, 1987년 3월 29일에는 “성동구 제기동 약전 골목에 가 십전대보탕에 안식구 부인병, 나의 속병 등 관게 되어 있는 약을 구입, 138,000원어치을 사 같고” 돌아왔다[131]. 신권식은 이제 반의사가 아니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6. 맺음말

이 글은 ‘반의사 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신권식의 『대곡일기』를 재구성하여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한국 농촌 의료를 다시 조망하려는 시도이다. 현대 농촌 의료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어쩌다 구한다 해도 대개 의료 공급자 혹은 정책 입안자의 시선에서 작성된 통계 자료가 대부분이다. 그러한 탓에 농촌 의료의 통계는 많은 부분이 사상된 현실의 편린만을, 그것도 조사자가 설정한 범주를 통하여 굴절된 결론만을 담아낼 뿐이다. 그리고 이는 때로 기존의 통념을 뒷받침하여 그것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각고의 노력으로 통계 자료의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끄집어낼 수도 있겠으나, 쉽지 않다. 일기 자료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다. 일기는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인 동시에, 통계로 환원되지 않은 여러 요소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날 것의 기록이다. 집단이 아닌 개인의 기록이기에 대표성의 문제가 따라붙지만,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아무리 특이한 선택이라도 그 배경에는 그러한 행위를 배태한, 그리고 그러한 행위가 매개하는 사회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반의사’의 삶을 담은 『대곡일기』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 농촌이 처한 보편의 사회 구조를 보여준다. 당대 농촌 의료의 실태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민간에 의해 메워진 의료의 공백이다. 일기에 나타난 농촌 의료의 현실은 처참했다. 의사는 드물고, 멀며, 비쌌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정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정부가 한 일은 거의 없었다. 의료기관의 개업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어 농촌에 의사를 보내겠다는 정책은 현실적으로 사문화된 법령일 뿐이었고, 공의 제도는 제대로 운용되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시작된 의료보험 역시도 농어촌이 아닌 도시를 위한 제도였다. 197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조금씩 개선된 이유는 정부 정책 바깥에 있었다. 오토바이의 구매와 버스 노선의 확충으로 교통 사정이 좋아지며 농촌에서도 도시의 의료기관을 이용하게 되고, 의료보험의 부재를 파고든 사설 보험이 유행하여 진료비 걱정이 줄어들면서 의료기관의 물리적, 경제적 접근성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이를 새마을운동 등이 가져온 농촌 소득의 개선에서 비롯한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 농촌 소득의 증가 폭이 도시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결과적으로 농촌이 직면한 의료의 부재는 정책의 미비에 기인하였으며, 그 빈자리는 정부가 아닌 민간의 노력으로 채워졌다.
그렇다면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기 전까지는 어떤 방식으로 의료를 이용하였는가. 『대곡일기』가 보여주는 농촌 의료의 두 번째 특징은 민간의료가 된 서양의학이다. 병원의 문턱이 여전히 높던 시절, 사람들은 민간의 의약문화를 파고든 서양의학을 활용하였다. 개항과 함께 시작된 서양약품의 유행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하였다. 특히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군의약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여러 항생제가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될 정도였다. 서양약품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높아져, 사람들은 병을 앓을 때면 약국이나 약종상, 매약청매상, 때로는 돌팔이 약장수를 찾아 이런저런 약을 사 먹었다. 약뿐만이 아니었다. 서양의학의 지식 역시 널리 확산하였다. 매개는 『백만인의 의학』과 같은 가정의학서였다. 여러 출판사는 의료인의 부족을 노리고 아플 때마다 손쉽게 참고할 수 있는 책을 기획하였고, 사람들은 ‘최신 홈닥터’를 구비하여 의학 상식을 갖춤으로써 급한 상황에 대비하였다. 이는 의료의 부재를 민간의 과제로 떠넘겨버린 정부로서도 싫을 리 없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특징은 정부 정책의 공백을 의료의 공백과 동시(同視)하는, 그리고 의료의 공백을 상약 혹은 무속의 성행으로 해석하는 기존의 통념이 사실과 다름을 보여준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농촌 의료는 제도권 의료의 공백 일부를 민간의료가 된 서양의학이 대신하고, 민간의 노력으로 제도권 의료의 접근성을 개선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대곡일기』는 한국 농촌 의료의 보편, 그 이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신권식이라는 개인에 대해서도 많은 점을 드러낸다. 개인에 대한 기록은 사회에 대한 기록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각 개인은 저마다의 경험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결단을 내리기에, 동일한 사회구조라 하더라도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농촌 의료 역시 마찬가지다. 의료가 부재한 상황에서 서양의학이 민간의료의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한들, 모두가 ‘반의사’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신권식이 다른 이들과 달리 반의사의 길을 택한 배경에는 개인사에서 비롯한 전통과의 단절과 특유의 학구열이 있었다. 그는 사실상 양친의 보살핌 없이 성장하여 홀로 상경하였고, 이후 한국전쟁의 발발로 군대에 입대하여 이십 대의 절반을 보냈다. 민간요법은 어깨너머로 전해지기 마련이었지만, 그에게는 넘어볼 어깨가 없었다. 신권식은 전통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채 입대하여 주사법을 배웠고, 제대 이후에는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백만인의 의학』을 탐독하였다. 요컨대, 반의사라는 존재는 제도권 의료의 부재와 서양의학의 유행이라는 시대 상황, 여기에 ‘학습하는 근대인’이라는 신권식의 성정이 결합한 결과였다.
아쉬움도 없지 않다. 하나는 『대곡일기』의 일부가 누락되었다는 점이다. 신권식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전시에 작성한 부분을 모두 압수당하고, 결혼하게 된 1956년부터 다시 기록을 재개하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이유인지 1956년부터 1959년까지의 일기는 전해지지 않으며, 1966년과 1969년, 1970년에 해당하는 부분도 망실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의 의료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잃은 셈이다. 특히 1969년과 1970년은 한국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였던 시기이기도 하기에, 안타까움은 배가 된다. 또 다른 하나는 가족계획에 관한 내용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재해석을 거치지 않은 생생한 기록이라 하지만, 일기는 작성자의 생각과 경험을 거울처럼 비추지 않는다. 일기에는 작성자 내면의 검열관을 통과한 내용만이 기록되며, 본인이 보기에 중요하지 않거나 차마 쓸 수 없는 일은 검열 과정에서 삭제된다. 이상하게도 반의사 신권식은 가족계획에 대해서 만큼은 철저하게 침묵했다. 마을의 유지로서 다양한 정책을 주도했던 그였기에, 더욱 의문스러운 지점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망측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남자의 일’이 아니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이러한 지점에 천착하여 가족계획을 향한 당대의 시선, 더 나아가 젠더 의식을 드러낼 수도 있겠으나, 이는 추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둔다.

Notes

1)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과 그 후신인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총서」는 지역을 기준으로 엮은 전반부의 출판물과 주제를 기준으로 엮은 후반부의 출판물로 대별된다. 지역별 총서는 1969년의 제1권 전라남도 편을 시작으로 1981년의 제12권 함경남북도 편까지, 주제별 총서는 1982년의 제13권 농악, 풍어제, 민요 편을 시작으로 2002년의 제30권 불교민속놀이 편까지 출간되었다. 이 가운데 민간의료에 해당하는 내용은 지역별 총서 각 권의 ‘민간의료 및 금기’ 부분과 주제별 총서의 제26권 민간의약 편을 참고할 수 있다.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제1-12권 (서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9-1982);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제26권 민간의약 (서울: 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2) 『대곡일기』, 1962년 1월 1일. 신권식의 일기는 경기도 지역문화연구소에서 편집하여 출간한 단행본을 참고하였다. 지역문화연구소, 『평택 일기로 본 농촌생활사: 평택 대곡일기』, I-III (수원: 경기문화재단, 2007-2008). 인용은 단행본의 쪽수가 아닌 일기 원문의 일자를 기준으로 삼았다. 가독성을 위해 한자는 대부분 한글로 풀었으나, 맞춤법에 어긋나는 부분은 정서(正書)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다만 의미가 불분명한 경우에는 대괄호 안에 해설을 함께 적었다.

3) 신권식의 『대곡일기』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다. 『대곡일기』에는 의료에 대한 내용 외에도 다양한 주제가 담겨 있고, 연구자들은 저마다의 관심에 따라 의례와 민간신앙(안혜경, 2011), 자연에 대한 인식(안승택, 2015), 과학 기술의 수용(문만용, 2013), 정치의식(이송순, 2016), 유신 체제와 공동체(김영미, 2012; 2013), 새마을운동(왕연, 2016) 등의 주제를 탐구하였다.

4) 이는 전화 인터뷰에서 신권식이 과거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그는 지난날 ‘반의사’로서의 활동에 대하여 “아주 답답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라 말하면서도, “법으로 안 될 일”, “불법”, “내세울 건 아닌 일”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한다. 이는 일기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태도인데,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과거와의 거리 두기가 일어난 결과로 보인다(2018년 11월 19일, 16시~16시 30분).

5) 『대곡일기』, 1959년 3월 7일.

6) 신권식은 자식의 생일을 양력과 음력의 두 가지 방식으로 표기했다(지역문화연구소, 2007: 25). 문제는 이렇게 표기된 두 날짜가 서로 들어맞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웅호의 생일은 양력으로는 1961년 1월 11일, 음력으로는 1959년 11월 25일이라고 표기되었는데, 음력 생일을 양력으로 변환하면 1959년 12월 24일이 된다. 둘 중에서 옳은 것은 양력이다. 1961년 4월 21일의 일기에 “어린 것의 백일”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부인 이민애(李敏璦)의 생일은 음력으로만 기억하는 신권식이 자식의 생일만큼은 양력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은 근대화의 일면을 드러내는 시사적인 지점이다. 실제로 신권식은 1961년 2월 15일의 일기에서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세어 전세계와 같이 날을 세야가”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신문물’에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7) 『대곡일기』, 1959년 3월 9일.

8) 각각 항생제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과 네오마이신(neomycin), 그리고 서울약품에서 판매한 영양제 원기소(元氣素)로 추정된다.

9) 『대곡일기』, 1961년 6월 15일.

10) 약종상 최철용, 가루약을 팔던 김용호, 발안장과 안중장에서 약을 팔던 이들, 그리고 한의사에 대한 기록은 다음에서 발견된다. 『대곡일기』, 1959년 7월 26일, 1960년 2월 11일; 1961년 12월 12일; 1962년 11월 25일, 1962년 1월 11일; 1959년 1월 12일.

11) 권한을 넘어선 약종상이나 한지의사의 불법 의료행위는 언론에도 자주 보도되곤 했다. 여러 약종상은 의사 노릇을 하며 심지어 낙태 수술을 하기도 했고, 한지의사의 지역 이탈 역시 일상다반사였다. 『경향신문』, 1956년 12월 5일, 1959년 6월 26일, 1961년 10월 10일, 1962년 11월 28일.

12) 『대곡일기』, 1968년 7월 24일, 1972년 4월 22일. 1968년 7월 24일 신권식은 “신포치과에 가 이을 해 끼우었다”고 썼다. 그러나 ‘신포치과’가 정식 의료기관인지 아닌지는 불명확하다. 평택시에서 발간한 『통계연보』에 따르면 당시 청북면에는 등록된 치과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신포치과’ 역시 ‘치과의사 노릇’을 하는 돌팔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13) 1961년부터 1985년까지의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표이다. 1986년부터의 통계에는 면 단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1986년에 평택읍이 평택시로 승격하여 평택군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면 단위 지역에 대한 통계를 수집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1962년의 기록은 누락되어 구할 수 없으며, 간혹 집계의 오류가 있는 경우에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바로잡았다. 소수점의 경우,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

14) 보건사회부, 『보건사회백서: 국민보건과 사회복지』, 1964년판 (서울: 보건사회부, 1965), 39-47쪽.

15) 『경향신문』, 1963년 3월 13일.

16) “시정방침 연설”, 1962년 1월 5일, 『박정희대통령연설문집』, 제1집: 최고회의편 (서울: 대통령비서실, 1973), 165쪽; “시정방침 연설”, 1963년 1월 5일, 『박정희대통령연설문집』, 제1집: 최고회의편, 363쪽.

17) “대통령 연두교서”, 1964년 1월 10일, 『박정희대통령연설문집』, 제2집: 제5대편 (서울: 대통령비서실, 1973), 33쪽.

18) 「사회보장에관한법률」(법률 제1437호, 1963년 11월 5일 제정, 1963년 11월 5일 시행), 『관보』, 제3581호, 1963년 11월 5일.

19) 보건사회부장관, 「내각수반 지시각서 제5호 중 무의촌 해소대책에 관한 사항」, 1961년 10월 20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084284)

20) 『국가재건최고회의상임위원회회의록』, 상임위원회 제17차 회의, 1962년 3월 5일.

21) 「의료법」(법률 제1035호, 1962년 3월 20일 전부개정, 1962년 3월 20일 시행), 『관보』, 제3100호, 1962년 3월 20일; 「의료법시행령」(각령 제659호, 1962년 4월 14일 제정, 1962년 4월 14일 시행), 『관보』, 제3122호, 1962년 4월 14일.

22) 「의료법시행령」(대통령령 제2184호, 1965년 7월 29일 일부개정, 1965년 7월 29일 시행), 『관보』, 제4105호, 1965년 7월 29일.

23) 공의 제도는 무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당 정권이 내어놓은 핵심 대책이었다. 자유당 정권은 1959년 공의 배치 계획을 입안한 뒤 당해 333개 면에 공의 배치를 완료하였고, 1960년에는 4개년 계획을 세워 1961년까지 모든 무의면에 공의를 배치한다는 계획을 공표하였다. 이 계획은 장면 정권을 거쳐, 5·16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정권에 그대로 이어졌다. 보건사회부, 「단기4292년도 보건사회부 주요시책」, 1959년 1월 19일(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085186); 보건사회부, 「4개년 보건사회부 주요시책」, 1960년 1월 28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084232).

24) 보건사회부, 『보건사회 행정의 실적과 전망: 보건사회행정백서』 (서울: 보건사회부, 1971), 183쪽.

25) 공의 강제 배치의 법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국민의료법」(법률 제221호, 1951년 9월 25일 제정, 1951년 12월 25일 시행), 『관보』, 제534호, 1951년 8월 25일, 제46조 제1항 “지방의 의료시설 또는 무의촌의 의료보급상 필요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주무부장관은 지방에 의사의 자격을 가진 자로서 공의를 배치할 수 있다”; 「의료법」(법률 제1035호, 1962년 3월 20일 전부개정, 1962년 3월 20일 시행), 『관보』, 제3100호, 1962년 3월 20일, 제52조 제1항 “지방의 의료시책 또는 무의지역의 의료보급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보건사회부장관은 그 지방에 의사의 자격을 가진 자를 공의로 배치할 수 있다”.

26) 『동아일보』, 1962년 3월 13일; 『경향신문』, 1963년 3월 13일.

27) 『동아일보』, 1962년 7월 30일.

28) 『경향신문』, 1963년 3월 13일.

29) 『경향신문』, 1968년 8월 5일.

30) 「보건사회부령제126호」, 『관보』, 제3581호, 1963년 11월 5일; 「보건사회부령제130호」, 『관보』, 제3710호, 1964년 4월 11일; 「보건사회부령제230호」, 『관보』, 제5035호, 1968년 8월 29일.

31) 신권식의 일기에는 치도(治道) 사업에 관련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신작로 출력(出力) 가서 자갈을 하고 왔다”는 표현에서도 보이듯, 마을 길 대부분이 자갈만 깔린 비포장도로였기 때문이다. 『대곡일기』, 1959년 3월 18일. 사람들은 주로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인 3월과 추수 전인 8월, 9월에 치도 사업에 동원되었으며, 나가지 못할 때는 소를 대신 내보내기도 했다. 『대곡일기』, 1968년 4월 15일.

32) 『대곡일기』, 1962년 10월 25일.

33) 『대곡일기』, 1962년 10월 26일.

34) 『대곡일기』, 1962년 10월 26일.

35) 『대곡일기』, 1962년 12월 6일.

36) 『경향신문』, 1962년 8월 1일. 신권식을 비롯한 농민 대부분은 저렴한 담배를 피웠다. 가장 값싼 담배는 ‘풍년초’로 100개비에 6원이었지만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스무 개비 한 갑에 6원이었던 ‘파랑새’가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파랑새’는 ‘사랑새’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농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동아일보』, 1962년 1월 20일; 『경향신문』, 1962년 8월 29일.

37) 『대곡일기』, 1962년 10월 27일.

38) 『대곡일기』, 1971년 7월 26일, 1971년 7월 27일.

39) 『대곡일기』, 1971년 1월 25일. 1970년대에도 신권식은 저렴한 ‘금잔디’와 ‘아리랑’을 골라 피웠다. 한 갑에 10원밖에 하지 않는 ‘새마을’도 있었지만, 1960년대의 ‘풍년초’와 마찬가지로 구하기 쉽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농민들은 한 갑을 기준으로 15원, 20원 하는 ‘금잔디’나 ‘아리랑’ 등을 ‘금잔디’ 대용으로 삼았다. 『동아일보』, 1970년 8월 31일. 농가 월평균 소득은 다음을 참고했다. 경제기획원, 『한국의 사회지표』, 1979년판 (서울: 경제기획원, 1979), 50쪽.

40) 『대곡일기』, 1974년 2월 20일.

41) 『대곡일기』, 1961년 4월 9일, 10일, 11일. 취한은 병을 다스리기 위해 땀을 내는 일을 말한다.

42) 『대곡일기』, 1959년 9월 28일; 1961년 12월 14일.

43) 『대곡일기』, 1961년 6월 15일.

44) 신권식의 개인사는 다음을 참고하였다. 지역문화연구소, 『평택 일기로 본 농촌생활사: 평택 대곡일기』, I, 24, 503-505쪽.

45) 『경향신문』, 1946년 12월 21일.

46) 『동아일보』, 1946년 11월 8일; 『경향신문』, 1947년 7월 30일.

47) 『동아일보』, 1958년 3월 16일.

48) 『대곡일기』, 1959년 4월 3일, 1959년 4월 15일.

49) 김상문 엮음, 『백만인의 의학』 (서울: 동아출판사, 1959).

50) 『경향신문』, 1959년 2월 21일.

51) 『동아일보』, 1959년 10월 10일.

52) 『경향신문』, 1963년 5월 11일.

53) 『동아일보』, 1965년 5월 12일.

54) 『동아일보』, 1969년 5월 29일.

55) 『대곡일기』, 1983년 1월 22일.

56) 『대곡일기』, 1960년 3월 2일, 1965년 12월 23일, 1978년 3월 23일, 1989년 1월 17일, 1990년 1월 2일.

57) 『대곡일기』, 1976년 9월 1일, 1979년 5월 21일.

58) 이상의 내용은 『대곡일기』에는 나오지 않으며, 전화 인터뷰로 새로 알게 된 부분이다(2018년 11월 19일, 16시~16시 30분).

59) 『대곡일기』, 1963년 3월 15일, 1965년 3월 5일, 1961년 8월 27일.

60) 『대곡일기』, 1962년 12월 24일, 1964년 2월 17일.

61) 『대곡일기』, 1963년 2월 20일, 1963년 2월 22일.

62) 『대곡일기』, 1960년 3월 17일.

63) 『대곡일기』, 1962년 5월 13일, 1965년 1월 3일. ‘잠파’가 무슨 약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64) 『대곡일기』, 1962년 7월 4일.

65) 당시 청북면에는 공의가 없었고, 의사 대신 ‘대여섯’ 명의 보건소 직원이 “죽 나와서 주사놓고”하는 방식으로 예방 접종이 시행되었다(2018년 11월 19일, 16시~16시 30분).

66) 『대곡일기』, 1960년 4월 6일.

67) 『대곡일기』, 1962년 8월 18일, 1962년 9월 24일, 1962년 11월 13일, 1963년 5월 21일; 1963년 3월 10일.

68) 『대곡일기』, 1963년 4월 18일.

69) 『대곡일기』, 1960년 7월 11일, 1960년 7월 22일, 1963년 11월 11일. 196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선거의 연속이었다. 1960년 3월 15일에는 부정선거로 밝혀진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그해 7월 29일에는 제5대 국회의원 총선이, 8월 12일에는 간선으로 다시 치러진 제4대 대통령 선거가, 그리고 12월에는 지방 선거가 있었다. 여기에 1962년 12월 17일에는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가 있었고, 1963년에는 10월 15일의 제5대 대통령 선거와 11월 26일의 제6대 국회의원 총선이 치러졌다. 당시 신권식은 마을 청년층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그러하기에 정치권의 적극적인 유인 대상이었다(김영미, 2013, 408-412).

70) 『대곡일기』, 1959년 5월 11일.

71) 『대곡일기』, 1961년 12월 12일.

72) 이는 전화 인터뷰로 확인한 내용이다(2018년 11월 19일, 16시~16시 30분). 『대곡일기』에도 사례를 받았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73) 『대곡일기』, 1959년 4월 18/19일, 1963년 5월 28일.

74) 『대곡일기』, 1962년 8월 19일.

75) 『대곡일기』, 1960년 5월 22일.

76) 『대곡일기』, 1960년 7월 8일.

77) 『대곡일기』, 1965년 3월 10일.

78) 『대곡일기』, 1967년 8월 24일.

79) 『대곡일기』, 1971년 7월 26일.

80) 『대곡일기』, 1971년 7월 27일.

81) 『대곡일기』, 1971년 7월 28일.

82) 『대곡일기』, 1972년 4월 20일.

83) 「약종상, 한약종상, 매약청매상허가규정」(보건부령 제22호, 1954년 8월 3일 제정, 1954년 8월 3일 시행), 『관보』, 제1150호, 1954년 8월 3일.

84) 보건사회부, 『보건사회통계연보』, 1964년판 (서울: 보건사회부, 1964).

85) 평택군기획실 엮음, 『평택군 통계연보』, 1965, 1975년판 (평택: 평택군, 1965, 1975).

86) 『대곡일기』, 1960년 1월 16일, 1960년 2월 11일. 신권식은 이후 최철용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장지까지 따라가기도 했다. 둘 사이의 인간적인 유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곡일기』, 1987년 9월 8일.

87) 신권식은 이들을 “약사도 아닌 사람이 시장 같은 데에서 도매로 약을 가져다가 팔고 했”던 존재로 기억한다(2018년 11월 19일, 16시~16시 30분).

88) 평택군기획실 엮음, 『평택군 통계연보』, 1965년판 (평택: 평택군, 1965).

89) 『대곡일기』, 1962년 7월 26일. “주”는 주사약을 뜻한다.

90) 『대곡일기』, 1959년 8월 28일; 1962년 2월 18일.

91) 『대곡일기』, 1961년 3월 12일.

92) 『대곡일기』, 1963년 9월 7일.

93) 『대곡일기』, 1965년 11월 10일.

94) 경기도, 『경기통계연보』, 1981 (수원: 경기도, 1981).

95) 1960년부터 1985년까지의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표이다. 평택군 전체에서 평택읍과 송탄읍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대상으로 삼았다. 1962년의 기록은 누락되어 구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간혹 집계의 오류가 있는 경우에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바로잡았다. 소수점의 경우에는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 송탄면은 1963년 송탄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승격되기 이전부터 평택읍보다 인구가 더 많은 지역이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면 단위로 분류하지 않았다. 팽성면 역시 1979년 팽성읍으로 승격되나, 여기에서는 자료의 연속성을 위해 포함하여 계산하였다. 포승면의 승격이나 안중면의 신설 및 승격은 이 도표가 대상으로 하는 범위 이후의 일이다.

96) 1960년부터 1985년까지의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표이다. 평택읍과 송탄읍을 대상으로 삼았다. 1962년의 기록은 누락되어 구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간혹 집계의 오류가 있는 경우에는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바로잡았다. 소수점의 경우에는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 상기하였듯이 송탄면은 1963년 읍으로 승격하고, 1981년에 다시 시로 승격하여 평택군에서 분리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자료의 연속성을 위해 읍으로 승격하기 이전과 시로 승격한 이후의 자료를 모두 포함하여 계산하였다.

97) 『동아일보』, 1977년 6월 9일. 농가 월평균 소득은 1970년에는 21,317원이다가 1975년에는 72,744원, 1980년에는 224,425원으로 증가했다. 상승세가 뚜렷했지만, 그렇다고 마음놓고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경제기획원, 『한국의 사회지표』, 1991년판 (서울: 경제기획원, 1981), 58쪽.

98) 1977년 7월에 실시된 직장의료보험의 법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의료보험법」(법률 제2942호, 1976년 12월 22일 전부개정, 1977년 1월 1일 시행), 『관보』, 제7531호, 1976년 12월 22일; 「의료보험법시행령」(대통령령 제8487호, 1977년 3월 14일 전부개정, 1977년 3월 14일 시행), 『관보』, 제7579호, 1977년 3월 14일. 의료보험 전반에 대한 계획은 1976년 9월 27일 보건사회부가 제96회 국회의 보건사회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국민보건 향상을 위한 의료시혜 확대방안」으로 요약하여 보고하였다.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 제96회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제1차 회의, 1976년 9월 27일. 1979년 1월에 실시된 공교의료보험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공무원및사립학교교직원의료보험법」(법률 제3081호, 1977년 12월 31일 제정, 1978년 7월 1일 시행), 『관보』, 제7840호, 1977년 12월 31일; 「공무원및사립학교교직원의료보험법시행령」(대통령령 제9073호, 1978년 7월 1일 제정, 1978년 7월 1일 시행); 「공무원및사립학교교직원의료보험법의시행일에관한규정」(대통령령 제9072호), 『관보』, 제7989호, 1978년 7월 1일.

99) 처음 계획은 1981년과 1984년 사이의 제1차 시범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1982년 7월부터 1984년까지 6개 군을 추가 선정하는 것이었으나, 사업의 부진에 따라 제2차 시범사업은 3개 군으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보건사회부, 「농촌지역 제2종의료보험 시범사업 실시계획(안)」, 1981년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DA0577505); 보건사회부, 「제2종의료보험 추가시범사업 세부 지침」, 1982년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DA0578525); 의료보험연합회 엮음, 『의료보험의 발자취: 1996년까지』 (서울: 의료보험연합회, 1997), 361-403쪽.

100) 『대곡일기』, 1977년 6월 25일, 1977년 7월 15일.

101) 『대곡일기』, 1977년 12월 3일.

102) 『대곡일기』, 1976년 4월 23일, 1978년 3월 10일.

103) 『대곡일기』, 1982년 1월 4일, 1982년 5월 16일.

104) 『대곡일기』, 1984년 11월 22일, 1985년 4월 8일.

105) 『대곡일기』, 1977년 1월 6일.

106) 『대곡일기』, 1977년 1월 27일, 1977년 11월 13일.

107) 『대곡일기』, 1978년 2월 22일, 1978년 2월 23일.

108) 『대곡일기』, 1981년 3월 4일.

109) 『대곡일기』, 1983년 7월 11일, 1983년 7월 13일.

110) 『매일경제』, 1976년 11월 10일, 1977년 5월 15일, 1977년 8월 13일. 손해보험과 생명보험의 영역 문제는 이후 「보험업법」(법률 제3043호, 1977년 12월 31일 전부개정, 1978년 3월 1일 시행)의 개정으로 정리되었다. 개정된 법은 보험사업의 겸영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였으나, 제10조 제3항으로 예외를 두어 질병보험과 같이 “인보험과 손해보험으로 구분하기 곤란한 보험으로서 재무부장관이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하는 보험”의 경우에는 겸영을 허가하였다. 『관보』, 제7840호, 1977년 12월 31일.

111) 『경향신문』, 1982년 1월 30일, 1983년 7월 2일.

112) 도시에서는 유사 의료보험을 미끼로 당원을 모집하는 경우가 보고되기도 했다. 1983년 12월 9일,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과 민주한국당(民主韓國黨) 국회의원 몇몇이 지역구 당원들에게 진료비 할인이 보장되는 ‘당원진료증’ 또는 ‘당원복지수첩’을 배포한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명목상으로는 ‘당원 복지’ 차원에서 진행된 사업이었지만, 물론 실상은 금품을 이용한 정치 운동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12월 12일, 보건사회부에서 관계 정당과의 합의 끝에 유사 의료보험을 규제할 것을 발표했으나, 단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려 “통반장 이장 새마을지도자들”에게까지 당원복지수첩이 나누어질 정도로 사태는 커져만 갔다. 이 사건은 정치화되어 1984년 3월 8일에는 여당과 야당이 본회의장에서 서로를 소리 높여 힐난하는 데에 이르렀으나, 이 자리에서 보건사회부 장관 김정례(金正禮, 1927-)는 “국민개보험을 실시하지 못한 과도기에서 오히려 적극 확대시켜나가야 할 것”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정당의 자금력이나 조직력을 고려할 때, 사실상 자신이 속한 집권 여당의 편을 든 것이었다. 당원복지수첩은 이후 1985년에 치러진 제12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이 유권자를 포섭하는 주요 도구로 활용되었다. 『동아일보』, 1983년 12월 9일, 1983년 12월 12일, 1984년 1월 21일, 1984년 3월 8일, 1985년 1월 26일.

113) 가짜 의료보험 상품의 예는 끝없이 발견된다. 1982년에는 대구의료보험조합과 한밭의료보험조합, 무등의료보험조합 등이 단속되었고, 1984년과 1985년에는 한국불교교화원 보건복지회와 백의복지회의 운영자가 구속되었다. 1985년을 기준으로 이런 사이비 보험조합은 100여 개에 달하여, 이를 고발하는 특집 방송 프로그램까지 편성될 정도였다.『매일경제』, 1982년 1월 5일, 1985년 9월 6일; 『동아일보』, 1984년 10월 13일, 1985년 5월 8일, 1985년 11월 2일.

114) 『대곡일기』, 1982년 10월 20일, 1983년 1월 16일.

115) 『대곡일기』, 1984년 6월 19일.

116) 『대곡일기』, 1983년 11월 27일.

117) 『대곡일기』, 1983년 12월 1일, 1983년 12월 3일.

118) 『대곡일기』, 1974년 2월 20일.

119) 『대곡일기』, 1983년 8월 11일, 1983년 8월 12일.

120) 『대곡일기』, 1984년 4월 21일.

121) 『대곡일기』, 1984년 5월 28일.

122) 『대곡일기』, 1981년 1월 1일.

123) 『대곡일기』, 1980년 7월 5일.

124) 『대곡일기』, 1983년 6월 4일.

125) 『대곡일기』, 1985년 2월 7일.

126) 『대곡일기』, 1978년 12월 22일.

127) 『대곡일기』, 1981년 10월 17일..

128) 『대곡일기』, 1981년 10월 24일, 1981년 10월 25일, 1981년 11월 2일.

129) 『대곡일기』, 1981년 11월 3일.

130) 『대곡일기』, 1981년 12월 15일.

131) 『대곡일기』, 1984년 8월 30일, 1987년 3월 29일.

Table 1.
Medical Institution Statistics and Demographics of Cheongbuk-myeon, Pyeongtaek-gun, 1961-1985
연도 병의원 (A) 치과병 의원(B) 한의원 (C) 보건소 및 공 의 진료소 (D) 의료기관 총수 (E=A+B+C+D) 인구 (F) 의료기관당 인구수(F/E)
1961 0 0 2 0 2 12,208 6,104.0
1962 - - - - - - -
1963 0 0 3 0 3 12,895 4,298.3
1964 0 0 2 1 3 13,059 4,353.0
1965 1 0 1 0 2 13,338 6,669.0
1966 1 0 1 0 2 13,031 6,515.5
1967 0 0 1 0 1 12,627 12,627.0
1968 0 0 1 1 2 12,773 6,386.5
1969 0 0 1 1 2 11,921 5,960.5
1970 0 0 0 1 1 11,642 11,642.0
1971 1 0 0 1 2 11,440 5,720.0
1972 1 0 0 1 2 11,466 5,733.0
1973 1 0 0 1 2 11,564 5,782.0
1974 1 0 0 1 2 11,694 5,847.0
1975 1 0 0 1 2 11,539 5,769.5
1976 1 0 0 1 2 11,285 5,642.5
1977 1 0 0 1 2 11,147 5,573.5
1978 0 0 0 0 0 11,219 -
1979 0 0 0 1 1 10,393 10,393.0
1980 0 0 0 0 0 10,251 -
1981 0 0 0 0 0 10,288 -
1982 0 0 0 1 1 10,368 10,368.0
1983 0 0 0 1 1 10,369 10,369.0
1984 0 0 0 1 1 10,383 10,383.0
1985 0 0 0 1 1 9,554 9,554.0

*출처: 평택군기획실 엮음, 『평택군 통계연보』, 1962-1986 (평택: 평택군, 1962-1986)

Table 2.
Medical Institution Statistics and Demographics of Myeon Regions in Pyeongtaek-gun, 1961-1985
연도 병의원 (A) 치과병 의원(B) 한의원 (C) 보건소 및 공의 진료소 (D) 의료기관 총수 (E=A+B+C+D) 인구 (F) 의료기관당 인구수 (F/E)
1961년 5 0 9 0 14 96,984 6,927.4
1962년 - - - - - - -
1963년 7 1 9 0 17 105,043 6,179.0
1964년 10 1 13 3 27 107,633 3,986.4
1965년 9 1 17 0 27 111,102 4,114.9
1966년 10 1 14 0 25 113,061 4,522.4
1967년 8 1 13 3 25 110,882 4,435.3
1968년 9 1 14 5 29 111,107 3,831.3
1969년 5 0 19 6 30 108,330 3,611.0
1970년 6 0 9 4 19 109,952 5,786.9
1971년 14 0 9 7 30 108,547 3,618.2
1972년 13 0 9 8 30 111,858 3,728.6
1973년 12 0 9 8 29 114,201 3,938.0
1974년 10 0 7 6 23 115,737 5,032.0
1975년 12 1 6 6 25 116,143 4,645.7
1976년 11 1 6 7 25 116,514 4,660.6
1977년 10 1 6 5 22 115,081 5,231.0
1978년 4 1 5 5 15 115,452 -
1979년 5 2 5 4 16 116,388 7,274.3
1980년 8 2 4 4 18 109,538 -
1981년 8 1 4 4 17 111,432 -
1982년 8 1 2 6 17 112,823 6,636.6
1983년 8 2 2 8 20 113,370 5,668.5
1984년 7 2 2 8 19 114,069 6,003.6
1985년 8 2 2 7 19 108,895 5,731.3

*출처: 평택군기획실 엮음, 『평택군 통계연보』, 1962-1986 (평택: 평택군, 1962-1986).

Table 3.
Medical Institution Statistics and Demographics of Eup Regions in Pyeongtaek-gun, 1961-1985
연도 병의원 (A) 치과병 의원 (B) 한의원 (C) 보건소 및 공 의진료소 (D) 의료기관 총수 (E=A+B+C+D) 인구 (F) 의료기관당 인구수 (F/E)
1961 17 6 7 1 31 58,845 1,898.2
1962 - - - - - - -
1963 18 6 10 1 35 67,429 1,926.5
1964 20 6 9 1 36 68,213 1,894.8
1965 22 7 12 1 42 71,107 1,693.0
1966 23 5 16 1 45 75,954 1,687.9
1967 23 6 18 1 48 74,623 1,554.6
1968 22 5 19 1 47 82,313 1,751.3
1969 25 6 17 1 49 83,940 1,713.1
1970 23 5 17 1 46 93,177 2,025.6
1971 25 5 15 2 47 93,876 1,997.4
1972 25 5 15 2 47 96,810 2,059.8
1973 26 5 15 2 48 98,931 2,061.1
1974 28 5 15 1 49 105,596 2,155.0
1975 27 6 14 1 48 108,892 2,268.6
1976 27 6 15 2 50 111,320 2,226.4
1977 29 6 13 2 50 116,149 2,323.0
1978 29 6 12 2 49 117,442 -
1979 28 6 12 2 48 121,733 2,536.1
1980 30 8 12 2 52 124,595 -
1981 18 5 8 1 32 60,510 -
1982 21 5 8 1 35 61,937 1,769.6
1983 21 5 9 1 36 67,201 1,866.7
1984 21 6 9 1 37 68,875 1,861.5
1985 21 9 11 1 42 71,628 1,705.4

*출처: 평택군기획실 엮음, 『평택군 통계연보』, 1962-1986 (평택: 평택군, 1962-1986); 송탄시 엮음, 『송탄시 통계연보』, 1982-1986 (송탄: 송탄시, 1982-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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