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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8(3); 2019 > Article
조선 전기 ‘상한’ 관련 문헌의 도입과 활용 연구 : 간행, 인용, 강서 활용을 중심으로

Abstract

The status or role of Shanghan Lun (Treatise on Cold Damage Diseases) in Joseon is quite different compared to neighboring China and Japan. This is a unique aspect that distinguishes Joseon’s medicine from other East Asian countries at that time. Prior studies have conducted research on non-professional books of Shanghan Lun; however, this study aims to analyze the transmission and utilization of professional books of Shanghan Lun.
In the citations of medical books in the first half of Joseon period, the domestic introduction of professional books of Shanghan Lun used at the time occurred mostly from the mid-thirteenth century to the first half of the fifteenth century. In particular, the version of professional books of Shanghan Lun quoted in Euibangyoochui (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 were centered on the Yuan edition. In other words, the acceptance of the theory of Cold Damage Diseases was based on the Yuan’s medicine.
Professional books of Shanghan Lun, which were published separately during the compilation or publication of Euibangyoochui, were intentionally selected. It is important to identify their characteristics. First of all, Shanghan Leishu (Classified Book of Cold Damage) was used as a textbook of Cold Damage in the first half of Joseon dynasty because the author of this book, Yang Shizhen and his practice acted as the basic text. The nature of Shanghan Leishu, which pursued the integration of “several symptoms of internal medicine” and “Cold Damage” instead of pursuing independent medicine of Cold Damage with different internal medicines, may have had some influence in forming the uniqueness of Joseon’s medicine of Cold Damage. Shanghanfu (Harm Caused by Cold: A Poem) was an introduction for easy access to formal Cold Damage’s content. Shanghanfu is presumed to be a medical book made out of prose poems, the core of Shanghanzhizhangtu. Non-professional books of Shanghanlun have also been cited in the first half of Joseon period’s medical texts in relation to Cold Damage. However, these books were not used as textbooks in medical bureaucracy’s education. The exclusion of major Cold Damage-related texts from the medical bureaucracy’s education may have hampered the development of Joseon’s Cold Damage medicine.

1. 머리말

‘상한(傷寒)’이라 함은 넓은 의미로는 여러 가지 급성 전염병을 총칭하며 좁은 의미로는 한사(寒邪)가 외부로부터 몸에 침입하여 발생한 증상이나 증후군을 지칭한다(변정욱, 2018: 19). 이 ‘상한’을 전문적으로 다룬 첫 의서가 바로 『상한론(傷寒論)』으로 동한(東漢) 말기의 중경(仲景) 장기(張機)가 저술하였다. 『상한론』은 『황제내경(黃帝內經)』,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난경(難經)』과 더불어 동아시아 전통 의학의 4대 의서 중 하나이다. 중국의 경우 송나라 교정의서국에서 『상한론』을 교정하여 보급하면서 연구가 활발해졌고, 『상한론』의 저자 장중경은 동아시아 전통의학에서 의성(醫聖)으로까지 자리매김하였다. 일본에서도 고방(古方)파라 불리는 일군의 학파가 형성되면서, 금원사대가 의학 중심의 후세의학파와 더불어 의학계를 양분하여 근대까지도 큰 영향을 주었다[1]. 그러나 조선에서의 『상한론』의 지위나 역할은 이웃 중국 일본과 비교하면 사뭇 다르다. 19세기까지의 『상한론』 연구서가 중국은 840종에 달하고, 일본은 220여종에 이른다(李順保, 2000: 1,723-886). 반면 조선의 경우, 책판(冊版)목록과 기록을 보아도 『상한론』 원본은 간행되지 않았고, 전문 연구서나 주해 주석서 자체도 매우 희소하였다[2]. 이 점은 당시대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의학과 조선의학을 구분 지을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현재 『상한론』은 한국에서 한의사 국가고시의 과목이며, 한의과대학의 주요 기초과목 중 하나이다. 또한 근래 출간되는 임상 한의서에서 많은 분량을 ‘상한’ 관련 서적들이 차지한다. 조선의 전통에 비추어보면 현재의 모습은 전면적인 국면전환이다.
조선의 상한학 전통은 여러 연구자에 의해 설명된 바 있다. 오재근은 『향약집성방』을 검토하여 조선 전기에도 상한에 관한 논의가 활발했음을 논증했다(오재근, 2012: 122-136). 오준호는 『상한론』 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비록 미흡했으나 ‘상한’ 개념 자체에 대한 연구는 꾸준했음을 지적하였다. 오준호는 조선에서 『상한론』 연구가 미진했던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상한론』 처방에 필수적인 마황·계지·감초를 직접 생산하지 못한 조선의 실정이다. 둘째 양감상한(兩感傷寒)을 예로 들어 조선의가가 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내상(內傷)에 머물렀던 때문이라 하였다(오준호, 2012: 6-19). 즉 상한을 내상(內傷)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상한학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오준호, 2012: 19-20). 이경록은 『의방유취·상한문』 분석을 통하여 조선 정부가 ‘상한’을 강조하여 전염병 통제에 대한 의지를 과시하고 상한병을 정점에 두는 질병 인식 체계를 구축하였다고 보았다(이경록, 2012: 475).
이러한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상한학’이 활발하지 못했다는 설에 힘이 실린다. 조선시대에 상한 문헌을 중심으로 하여 뚜렷하게 자기 이론을 만들거나 경전으로 삼아 주석화하는 작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3]. 왜 조선에서만 유독 ‘상한’ 전통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잘 드러나지 않았는지 그 배경을 살핌에 있어, 선행연구들은 비(非) 상한 전문서를 주 분석대상으로 삼은 한계가 있었다. 물론 『상한론』 전문의가나 연구자가 아닌 의가의 문헌에서도 『상한론』 영향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영향이거나 단순하게 조문을 인용한 사전식 배열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비(非) 상한 전문서[4]에 숨겨져 있는 ‘상한’ 관련 내용만을 분석하고 조선의 ‘상한’에 대해 온전한 결론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본고에서는 조선의 상한 전문서 도입과 활용이란 주제로 강학 교재 활용과 간행유무, 의서에서의 인용 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하여 기존 연구의 한계를 보충하고, 나아가 상한 전문서가 아닌 문헌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조사 보완하고자 하였다. 조선 전기는 시기상으로 조선 의학이 『동의보감』의 저술로 동의(東醫)로 구체화되기 이전 시기이다. 이 시기의 『상한론』 수용에 대한 이해는 구체화된 동의의 일면(一面)을 이해함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전근대 의학과 조선 의학을 구분하고, 조선시대 『동의보감』 중심의 전통 의학과 상한학이 다시 중심 체계로 작동하는 현대 한의학의 차이를 이해하는데도 유익할 것이다.

2. 상한 전문서의 활용과 간행

1)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의 「상한문」 인용 문헌

『향약집성방·상한문』의 인용문헌은 50종인데[5] 이중에 상한 전문서는 10종으로(오재근, 2012: 130) 다음과 같다.
『남양활인서(南陽活人書)』, 『상한론(傷寒論)』, 『상한명리론(傷寒明理論)』, 『상한유서(傷寒類書)』, 『상한유요(傷寒類要)』, 『상한지장도(傷寒指掌圖)』, 『천옥집상한론(川玉集傷寒論)』, 『통진자상한괄요(通眞子傷寒發括要)』, 『활인서(活人書)』, 『활인총괄(活人總括)』
10종의 저술 연대는 한대 1종, 북송 3종, 금대 1종, 남송 1종, 원대 1종, 연대 미상이 3종이다. 『남양활인서(무구자활인서)』는 북송 주굉(朱肱), 『상한명리론』은 금 성무기(成無己), 『상한유서』는 남송 양사영(楊士瀛), 『상한지장도』는 원 오서(吳恕), 『통진자상한괄요』는 북송 유원빈(劉元貧)의 저작이다. 이중에 『상한유요』, 『활인서』, 『활인총괄』은 어떤 책인지 불분명하다. 『활인서』는 『남양활인서』 내지 이지선의 『상한활인서괄』로 보이며, 『활인총괄』은 『상한유서활인총괄』과 같은 책일 수도 있다. 어떤 책인지 불확실한 이들 3종을 제외하면 모두가 『의방유취』의 인용문헌이다. 『향약집성방·상한문』에 인용된 『상한론』은 선행 연구에 따르면 5번의 인용 중 1번을 제외하면 모두 해당 시기의 전래 본에서 발췌 인용하였다(오재근, 2012: 127)[6].
1058년(고려 문종 12) 9월 충주목에서 다른 의서들과 함께 『천옥집상한론(川玉集傷寒論)』을 간행하였는데[7] 국내 상한 전문서 간행 기록으로는 최초이다. 이후 1059년(문종 13) 황해도 해주의 안서도호부사가 『천옥집(川玉集)』 11판(板)을 새겨 바쳤는데[8], 1판이면 좌우로 2면이 새겨지므로 22면 분량이다. 기록상으로 고려 간본 『천옥집』은 충주간본과 해주간본이 있다. 이 고려 판본이 그대로 조선으로 전승되었는가는 불확실하나, 이후 조선 전기 의서들인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에 인용되므로 조선으로도 전승되었을 것이다. 물론 고려본이 아닌 중국에서 유입된 별개의 판본일 가능성도 있다.
『의방유취』의 ‘상한’ 관련 인용은 주로 7번째 문(門)인 「상한문(傷寒門)」에 집중되는데, 「상한문」은 권27-63까지 37권으로 구성되어 91개 문(門)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이다(이경록, 2012: 463). 「상한문」 외에 따로 「제한문(諸寒門)」을 두었다. 전자에서는 외부 한사(寒邪) 침입에 의한 몸의 증상 및 증후군을 기술하고, 후자는 육음(六淫) 중 하나인 한사를 논하였다(변정욱, 2018:18-26). 『의방유취』의 인용 문헌은 총 142종인데 이 중에 상한 전문서는 15종이며 다음과 같다(최환수, 1997: 17-18,22-25)[9].
『무구자활인서(無求子活人書)』,『보명집류요(保命集類要)』,『상한론주해(傷寒論註解)』, 『상한명리론』, 『상한발미론(傷寒發微論)』, 『상한백문가(傷寒百問歌)』, 『상한백증가(傷寒百證歌)』, 『상한심요론(傷寒心要論)』, 『상한유서』, 『상한의감(傷寒醫監)』, 『상한지장도』, 『상한직격(傷寒直格)』, 『상한활인서괄(傷寒活人書括)』, 『천옥집』, 『통진자상한괄요』
15종의 저술 연대는 북송 8종, 금 4종, 남송 2종, 원 1종이다. 이들 인용문헌 중 『의방유취』의 인용 판본이 조사된 경우는 9종이며 북송(北宋)간본이 1종, 원(元)간본이 8종이다. 주굉이 저술한 『무구자활인서(남양활인서)』의 『의방유취』 인용저본은 원(元)간본으로 추정된다(逯铭昕, 2017: 135). 『상한론주해』는 금대 성무기의 주해서로 『의방유취』 인용저본은 원(元)간본과 거의 같은데 일부 오자가 있다(逯铭昕, 2017: 159-160). 『상한론주해』의 『의방유취』 인용저본은 원(元)간본일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여러 판본과의 교감을 거친 별개의 의방유취본 『상한론』으로 보기도 한다(류정아·장우창, 2014:1-7). 같은 저자의 『상한명리론』은 『의방유취』 인용저본은 송간본이다(逯铭 昕, 2017: 170). 북송 허숙미(許叔微)가 저술한 『상한백증가』와 『상한발미론』은 『의방유취』 인용저본이 둘 다 원간본이다(逯铭昕, 2017: 193,199). 북송 전문례(錢聞禮)가 저술한 『상한백문가』의 『의방유취』 인용저본은 원간본과 비슷한데 약간의 원문 출입이 있다(逯铭昕, 2017: 219-220). 남송 양사영이 저술한 『상한유서』의 『의방유취』 인용저본이 원간본과 거의 유사하다(逯铭昕, 2017: 234). 남송 이지선이 저술한 『상한활인서괄(상한활인서)』의 『의방유취』 인용본은 현존하는 판본 계통과 차이가 있는데 원 오서의 『상한지장도』에 합본된 판본과 비교하면 이른 시기의 전승계열로 보인다(逯铭昕, 2017: 213). 『상한지장도』의 『의방유취』 인용저본은 원간본이다(逯铭昕, 2017: 213).
금 유홍(鎦洪)의 『상한심요론』, 금 마종소(馬宗素)의 『상한의감』, 금 유완소의 『상한직격』, 금 장벽(張璧)의 『보명집류요』, 북송 유원빈의 『통진자상한괄요』(실전), 『천옥집』(실전)의 경우, 『의방유취』에 인용된 판본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조사된 인용판본으로 살펴보면 『의방유취』의 상한 관련 인용서는 원대에 간행된 판본이 중심이다. 판본이 조사되지 않은 금대 저작 4종은 시기 상 인용 판본은 원대간본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들 의서의 국내 도입 시기는 13세기 중반에서 15세기 전반 사이이다.
또한 유완소의 『상한직격』 외에 『상한의감』, 『상한심요론』은 하간학파 계열의 저작으로 후대에 『유하간의학육서(劉河間醫學六書)』에 포함되었다(裘沛然, 2002: 94-95). 조선전기에 금원사대가의 저작이 의원의 강서로서 활용된 경우는 1430년(세종 12) 의원 강서인 『제생발수방(濟生拔粹方)』에 포함된 보토파 계열의 저작 13종[10](전체 19종)과 주진형(朱震亨)의 『활법기요(活法機要)』, 1462년(세조 8)의 의학습독관(醫學習讀官) 강서로 활용된 장종정의 『장자화방(張子和方)』이 있다(박훈평, 2016: 4-6).
『의방유취』에 인용된 상한 전문서의 판본은 원대간본 중심이다. 이는 시기상으로 조선 초기와 원대가 가까운 까닭도 있겠으나, 원나라 의학이 우리나라 의학에 미친 영향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11]. 송원대간본은 중국내에서도 실전된 경우가 많아 해당 의서의 원래 모습을 살펴보는 자료가 된다. 또한 하간학파 계열의 저작이 3종(『상한직격』, 『상한의감』, 『상한심요론』)에 달한다. 하간학파의 저작은 비록 의원의 강학 교재로 활용되지 않았지만 『의방유취』에 인용되어 조선의 ‘상한’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2) 조선에서 간행된 주요 상한 전문서

『의방유취』는 15세기 이전 중국의학의 성과를 집적한 결과물이다. 『의방유취』 간행 이후 이를 바탕으로 정리 축약한 분과의서들이 간행되었다. 예를 들어 산과학에 있어 『태산집요』나 두창학에 있어 『창진집』을 들 수 있다. 『의방유취』의 편찬 내지 간행 과정 중에 별도로 간행된 『상한유서』, 『상한지장도』, 『상한부』는 당시대의 위정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상한 전문서였다. 따라서 이들의 성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의방유취』 이후 상한학의 방향을 엿볼 수 있다.
양사영의 『상한유서』는 1264년(남송 경정 5)에 저술된(裘沛然, 2002: 95-96)[12] 상한 전문서로서 1430년(세종 12) 상정소(上定所)에서 의학(醫學)의 취재 과목에 대해 논할 때에 처음으로 언급된다[13]. 1431년 당시 조선에 당본(唐本 중국간본)만 있으므로 주자소에서 간행하게 하는데[14], 당시 간행된 판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경자자 동활자본으로 추정된다. 『의방유취』의 인용 내용으로 보아 당시 “당본”이란 원(元)간본이었다. 『상한유서』는 1433년(세종 15) 『향약집성방』의 인용문헌이 되었고, 1464년(세조 10) 예조에서 의원(醫員) 취재 강서를 정할 때에는 정종(正從) 6품의 과목으로 정해졌다[15]. 또한 1471년(성종 2) 예조에서 의원 취재 과목을 정할 때에는 추등(秋等) 고강 과목으로 정해졌다[16]. 즉 『상한유서』는 세종 조 이후로 성종 초기까지 의원의 고강 과목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1472년 3월에 의원 취재 과목이 정해질 때에는 『상한유서』가 제외되었고[17] 이후 『경국대전』의 규정에서도 빠진다(박훈평, 2016: 2-14).
『상한유서』의 원제는 『상한유서활인총괄(傷寒類書活人總括)』이며 『남양활인서』를 중심으로 여러 상한가 저작의 논설을 계승하고 있어서 새로운 논지를 세운 바는 적다. 다만 장중경과 주굉(『남양활인서』의 저자)을 ‘의학의 공맹(孔孟)’이라 부를 정도로[18] 주굉의 상한 이론을 높이 샀다(逯铭昕, 2017: 241). 『상한유서』의 구성은 전7권으로 각 권의 내용은 권1 활인증치부(活人证治赋), 권2 상한총괄(伤寒总括), 권3 상한증치(伤寒证治), 권4에서 권6은 발열(发热) 등의 증후적증치(证候的证治), 권7은 소시호탕가감법(小柴胡汤加减法), 상한제독증(伤寒诸笃证) 및 상한별명(伤寒别名), 계기(戒忌), 산부상한(产妇伤寒), 소아상한(小儿伤寒) 등이다(杨士瀛, 2015: 1-152). 주요 내용마다 세목(細目) 앞에 가괄(歌括)을 제시하여 이해를 돕고, 온열병(溫熱病)의 변증치료에 대해 상세하게 논하고 중서(中暑)와 하월열병(夏月熱病)의 같고 다름을 지적한 학술성과도 있다(裘沛然, 2002: 96). 루밍신(逯铭昕)에 의하면 『상한유서』는 상한 이론의 측면에서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먼저 격법조례(格法條例)의 강조이다. 이는 기본적인 변증 용약방법을 취하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권2 육경용약격법 (六經用藥格法)」에서는 맥과 증(証)의 합참(合參)을 강조한다[19]. 또한 맥과 증을 함께 봄에 있어 육경과 팔강변증을 중심으로 삼는다. 다음으로 치법은 한(汗), 하(下), 온(溫)법의 3법을 주로 구사한다. 마지막으로 상한병기를 오행생극(五行生克)과 장부생리이론을 결합하여 해석한다(逯铭昕, 2017: 236-238).
『상한유서』가 조선 전기 상한의 교재로 사용된 까닭은 저자 때문으로 추정된다. 양사영의 저술한 『직지방(直指方)』과 『직지맥(直指脈)』 또한 조선 전기 강학 교재로 사용되었다. 먼저 『직지방』은 20권으로 된 방서로 1430년(세종 12) 의학 취재과목으로 언급된 이후 『경국대전』에서도 의과 과목이 되었으며, 1431년 주자소에서 간행하게 한 기록이 있고 그 이후 조선간본도 현존한다. 『직지맥』은 맥학서로 1430년(세종 12)에 의학 취재과목이 되었으며 1478년(성종 9) 의녀 강학 교재로 활용되고, 1543년(중종 38) 간행기록 있고 현존본으로 을해자 동활자본과 광해조 목활자본이 현존한다(박훈평, 2016: 3). 인제(仁齊) 양사영 계열의 저작들은 조선 전기 의학 강습교재로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었다. 조선전기 태산의학에서 두루 활용된 이진공(李辰拱)의 『태산구급방(胎産救急方)』도 그러한 사례이다. 이진공은 양사영의 직계 제자로 본인이 『태산구급방』을 저술한 목적에 대하여 양사영이 따로 태산전문서를 저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태산구급방』은 조선전기 의학서인 『의방유취』, 『향약집성방』, 『태산집요』, 『태산요록』에도 인용되어 조선 태산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박훈평, 2019b: 2-9).
즉 양사영의 의학은 조선 전기에 기본 텍스트로서 활용되었고 『상한유서』도 같은 맥락으로 추정된다. 양사영은 상한가일뿐더러 『직지방』을 저술할 정도로 내외(內外)과의 여러 분과의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고, 당연히 『상한유서』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반영되었다. 양사영은 『상한유서』에서 전체 46종의 내과병증 중 37종에 대하여 상한방을 구사하며, 이로서 후세 ‘상한’과 ‘내과잡증(內科雜症)’의 변증이 뒤섞이는 흐름의 문을 열었다(逯铭昕, 2017: 241)[20]. 조선 후기 상한학이 가진 독특성은 바로 이 상한학의 텍스트가 다른 내과학과 분화 독립된 상한학을 추구하지 않고 ‘내과잡증’과 ‘상한’의 융합을 추구했다는 점에 일정부분 기인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조선에서 상한학이 독자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조선의가의 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내상(內傷)에만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오준호, 2012: 6-19).
1430년(세종 12) 상정소의 의학 취재 과목에 두사경의 『제생발수방』도 거론되는데[21], 이 책은 금원대 명의명저의 저작 19종을 모은 총서이다. 이 총서 안에 호가 운기자(雲岐子)인 금대 의가 장벽의 『보명집류요』가 수록되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운기자보명집론류요(雲岐子保命集論類要)』인데 『상한보명집』으로도 불리며 2권으로 된 상한 전문서이다. 상권에는 변맥삼부구후 (辨脈三部九候), 변상한온병(辯傷寒溫病), 자상한결흉비기(刺傷寒結胸痞氣), 자상한삼양두통(刺傷寒三陽頭痛), 자삼음복통(刺三陰腹痛) 등이, 하권에는 논노상병지(論勞傷幷治), 변수증(辨水證), 갈음수증(渴飮水證), 소아십이증(小兒十二證) 등이 수록되었다(裘沛然, 2002: 97). 『보명집류요』는 『의방유취』 인용서이기도 하다. 『제생발수방』은 세종 12년의 강학도서에만 언급되고 이후 시기에는 강학도서에서 빠지는데(박훈평, 2016: 6), 조선에서의 간행 기록은 없다. 즉 『보명집류요』는 『상한유서』에 비해 텍스트로서의 지위는 낮다. 내용 또한 침자법(針刺法)이나 특정 증후군 위주로 논하여 『상한론』 원문에 대해 보완적인 성격만을 갖는다[22].
1430년(세종 12) 상정소의 의학 취재 과목에는 이지선(李知先)의 『상한활인서괄』도 언급되는데[23], 책의 다른 이름인 『쌍종처사활인서(雙鍾處士活人書)』로 나오며, 쌍종처사(雙鍾處士)는 이지선의 호이다(박경련, 2009: 39; 逯铭昕, 2017: 215). 이 책 또한 『제생발수방』처럼 세종 12년의 강학도서에만 언급되고 이후 시기에는 빠지는데(박훈평, 2016: 6), 『의방유취』의 인용문헌이다. 현존 판본은 『상한지장도』와 합책으로만 전하여 원래 체제를 파악하기 어렵다. 逯铭昕에 의하면 『상한활인서괄』은 주굉의 『남양활인서』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보충한 책으로 주굉의 학술사상을 계승한 의서로 평가된다. 다만 주굉의 설을 맹종하진 않고 임상 변증 부분을 강조하는데, 이외에도 실전된 왕실(王實)의 『증치론(証治論)』과 저자미상의 『신효방(信效方)』을 인용하였다.(逯铭昕, 2017: 218-219).
원대 의가 오서(吳恕)가 1338년(원 지원 4)에 저술한 『상한지장도(傷寒指掌圖)』는 원래 제목이 『상한도가활인지장(傷寒圖歌活人指掌)』인데 1585년(선조 18)의 『고사촬요』 책판목록에 따르면 전주간본이 있다(김치우, 2008:53)(그림 1). 이 판본은 『세조실록』을 참조하면 1456년(세조2) 이전에 간행되었다[24]. 『향약집성방』(1433년)의 인용문헌이므로 1433년 전 시기에 간행되었을 수도 있다. 1568년(선조 1)의 『고사촬요』 책판목록에 보이는 전주간본 『지장도(指掌圖)』는 『상한지장도』와 동일서로 보인다(김치우, 2008: 31).
『상한지장도』의 조선간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중국 판본 3종이 남아있다(裘沛然, 2002: 97). 그런데 이들 판본은 모두 남송 이지선의 『상한활인서괄(상한활인서)』과 합본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판본의 성립은 15세기 중반보다 빠르지 않으므로(逯铭昕, 2017: 213-217), 전주간본은 합본이 아닌 단독서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상한지장도』는 『의방유취』의 인용서인데 시기로 보아 조선간본이 인용 저본일 수 있다. 『의림촬요·역대의학인물』에서도 명의(名醫) 중 하나로 『상한지장도』의 저자 오서를 언급하므로[26] 조선 전기 『상한지장도』의 보급 정도가 추정된다. 『상한지장도』의 현존본은 다른 책과 합본으로만 전하여 원본 형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632년(명 숭정 5) 명대 의가 동양학(童养学)이 『상한지장도』를 정오하여 낸 『상한활인지장보주변의(伤寒活人指掌补注辨疑)』를 보면 3권 1책으로 각 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童养学, 2015:1-80).
권1: 활인지장부(活人指掌賦), 육경전변(六经传变), 정상한방부(正傷寒方附)
권2: 활인지장부(活人指掌賦), 상한변위잡병재후권(傷寒變爲雜病載後卷)
권3: 방제(方剂), 114수(首)
『고사촬요』 책판목록에는 『상한부(傷寒賦)』라는 또 다른 상한 전문서가 나온다. 이 책도 전주간본으로 1568년(선조 1)과 1585년(선조 18)에 “완(剜)” 기록이 있는데(김치우, 2008: 31,53)(그림 1), “완(剜)”이란 책판이 오래되어 훼손된 경우에 많이 사용된 표현이므로, 이 책은 15세기 후반 내지 늦어도 16세기 전반에 초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상한부(傷寒賦)』는 실전되어서 정확히 어떤 책인지는 불확실하다. 14세기 이전 의서에서 같은 제목의 저작이 없으므로(裘沛然, 2002: 89-98), 기존 의서에서 일부만을 뽑은 책일 수도 있고 아니면 조선 의가가 쓴 독창적인 저작일 수도 있다. 그런데 조선전기 활용된 상한 전문서 중에는 가괄(歌括)을 수록한 사례가 다수 있다. 예를 들어 『상한유서』, 『상한백문가』, 『상한백증가』 등이 있다. 따라서 기존 의서에서 일부만을 뽑아 책을 만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17세기 초 조선에 보급된 의서 중에서는 중국의가 이천의 『의학입문』과 허준의 『동의보감』에 이 책과 유사한 편명이 나온다. 『의학입문 제11책 외집권3』에 「상한용약부(傷寒用藥賦)」가 있고 『동의보감 잡병편 권3·한문(寒門)하(下)』 말미에 「상한부(傷寒賦)」가 있는데[27], 두 책의 해당부분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동의보감』의 “상한부”의 인용저본이 무엇인지는 본문 중에 출전인용이 없어서 알 수 없다. 허준은 활동 시기상 전주간본 『상한부』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동의보감 잡병편 권1·진맥(診脈)』을 보면 또 다른 『상한부(傷寒賦)』를 인용한 내용이 있는데[28], 출전내용 끝의 “활인(活人)”기록으로 보아 이 내용의 출전은 바로 송나라 의가 이지선(李知先)의 『상한활인서괄』이나 해당 내용은 『동의보감』의 “상한부”에는 없다.
『동의보감 잡병편』 “상한부”의 출전은 원문을 대조검토하면 바로 원나라의가 오서의 『상한지장도』이다. 『상한지장도』는 앞서 살폈듯이 조선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고 『의방유취』의 인용도서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상한지장도』는 모두 『상한활인서괄』과 합책 본으로만 전해져서 원래의 구성 체제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의방유취』의 인용 내용을 통하여 초기 간본의 내용과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逯铭昕, 2017: 213). 『의방유취 39권·상한문 13』에 수록된 『상한지장도』의 “상한부”를 보면 『동의보감』의 “상한부”와 일부 자구의 차이가 있다. 차이가 나는 부분은 다섯 개의 문장으로 다음과 같다(浙江省中醫學硏究院, 2006a: 341-343).
『상한활인지장』을 정오하여 낸 현존본 『상한활인지장보주변의』로서 『의방유취』의 “상한부”를 대조해보면 내용과 순서와 동일하므로(童养学, 2015: 23-26,48) 『의방유취』 수록 본문이 오류는 아니다. 1436년(명 정통1, 세종 18)에 명대 의가 웅균(熊均)에 의해 편찬된 『유편상한활인서괄지장도론(類編傷寒活人書括指掌圖論)』 10권은 『상한활인서괄』의 현존본 중 하나인데 권1에 “상한부”가 수록되었다. 이를 보면 『의방유취』의 인용 내용과 내용 순서가 거의 같다(逯铭昕, 2017: 215). 따라서 『동의보감』 본문 상의 다른 자구는 허준의 의도적인 변형이거나 착오로 추정된다. 만약 『동의보감』의 “상한부” 내용이 전주간본 『상한부』을 수록한 것이라면 『상한부』 자체의 오류일 수 있으나, 63번째 문장에서 “중경(仲景)”을 “동원(東垣)”으로 바꾼 것은 금원사대가 의학을 도입하여 조선 의학화한 『동의보감』의 취지와 부합하므로 허준 본인의 의도적인 자구 수정으로 보인다.
『상한부』 전주간본의 저본이 무엇인지 확정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현재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상한지장도』의 “상한부” 내용만을 독립된 책인 『상한부』로 간행했을 가능성이다. 『상한부』는 “부(賦)”라는 형식으로 쓰인 저작이므로 의가들이 상한 관련 내용을 쉽게 접근하기 위한 입문서이다. 또한 앞서 살핀 가설처럼 『상한부』가 『상한지장도』의 핵심 내용인 가괄만을 뽑아 만들어진 의서라면 『동의보감』은 조선 전기 ‘상한’ 입문서를 그대로 보존하고 담아서 후대에 전한 셈이다.
『상한유서』를 제외한 조선에서 간행되거나 강서로 활용된 상한 전문서는 모두 초학자용 교재이거나 보충서 성격의 책이다. 그렇다면 『상한유서』를 조선 전기의 ‘상한’ 텍스트라 칭할 만하다. 또한 이 책은 북송의 의가인 주굉의 『남양활인서』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31]. 물론 『남양활인서』 자체가 송대 『상한론』 연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의서이다(逯铭昕, 2017: 128). 그러나 조선 후기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의원론(醫源論)』에 주굉을 장중경, 허준과 함께 3대 의가로 꼽고, 장중경 다음으로 많이 인용함(강미정 외, 2011: 43)은 조선 ‘상한’의 전통에선 어쩌면 자연스런 귀결이다[32].
끝으로 조선전기에 활용된 상한 전문서 중에 명대의 저작은 없다. 『동의보감』 이후 조선의 상한학의 전통이 약화된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은 명대 상한학의 성과로부터 거의 격리된 셈이다. 『상한론』의 착간설을 주장한 방유집(方有執)을 비롯한 명대 상한학파는 그 이전 성과를 계승 심화시켰고 명말 청초 온병학파를 태동시키는 바탕이 된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상한유서』를 비롯한 조선간본 3종은 모두 실전(失傳) 상태이다. 추후 이들 간행본이 발굴되어 기존 판본과의 비교대조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본고에서 다룬 조선전기 상한 전문서는 다음과 같다.

3. 비(非) 상한 전문서의 활용과 간행

1) 『향약집성방·상한문』의 인용 문헌

상한 전문서는 아닌 ‘상한’ 관련 『향약집성방』의 인용서는 40종이다(오재근, 2012: 130). 밑줄 그은 문헌은 『의방유취·상한문』에서 인용되지 않은 문헌이다. 두 책에 모두 인용된 문헌은 18종이다.
『간이방(間易方)』, 『거가필용(居家必用)』, 『경험비방(經驗秘方)』, 『경험양방(經驗良方)』, 『경험방(經驗方)』, 『담료방(澹療方)』, 『당본주(唐本註)』, 『두문방(斗門方)』, 『득효방(得效方)』, 『매사방(梅師方)』, 『맹선(孟詵)』, 『발수방(拔粹方)』, 『백일선방(百一選方)』, 『병부수집(兵部手集)』, 『본조경험(本朝經驗)』, 『본초(本草)』, 『삼인방(三因方)』, 『성제총록(聖濟總錄)』, 『성혜방(聖惠方)』, 『손용화(孫用和)』, 『손진인(孫眞人)』, 『수진방(袖珍方)』, 『승금방(勝金方)』, 『식의심감(食醫心鑑)』, 『신효명방(神效名方)』, 『연의(衍義)』, 『연하성효방(烟霞聖效方)』, 『영류검(永類鈐)』, 『옥룡가(玉龍歌)』, 『외대비요(外臺秘要)』, 『용어하도(龍魚河圖)』, 『위생방(衛生方)』, 『자생경(資生經)』, 『장자화(張子和)』, 『제병원후론(諸病源候論)』, 『주후방(肘後方)』, 『진장기(陳藏器)』, 『천금방(千金方)』, 『향약혜민방(鄕藥惠民方)』, 『화제방(和劑方)』
『매사방』은 수대 매심사(梅深師)의 저술, 『외대비요』는 당대 왕도(王燾)의 저술, 『병부수집』은 당대 군진의학 관련 저술, 『식의심감』은 당대 구단(咎段)의 저술, 『맹선』은 당대 맹선의 『식료본초(食料本草)』, 『진장기』는 당대 본초서 『본초습유』이다. 『손진인(孫眞人)』은 손사막의 『손진인천금방(孫眞人千金方)』을 말한다[33]. 『손용화(孫用和)』는 북송 때의 의학자로 『전가비보방(傳家秘寶方)』을 남겼다. 『용어하도』는 북송 시기 백과전서 『태평어람』의 일부, 『백일선방』은 북송 왕구(王璆)의 저술, 『연의』는 북송 구종석(寇宗奭)의 『본초연의』, 『장자화』는 금원사대가 중 한 명인 장종정의 저술인 『장자화방(유문사친)』이다. 『거가필용(居家必用)』은 원대의 저작, 『자생경』과 『옥룡가』는 중국의 침구전문서이다. 우리나라 의서로는 『본조경험』과 『향약혜민방』이 있다. 연대 미상의 문헌으로는 『경험방』, 『당본주』, 『두문방』, 『위생방』, 『승금방』이있다(김중권, 2006: 200-206; 오재근, 2012: 130)[34].
『향약집성방』은 조선에서 수급 가능한 약재로만 구성된 방서이다. 따라서 당시 토산화되지 못했던 감초(甘草) 등이 들어간 처방은 제외되었고, 그 결과 본래의 『상한론』 처방도 상당수 수록되지 못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향약집성방·상한문』 수록처방 중에 『성혜방』이 43회, 『성제총록』이 28회를 인용 횟수 상위 1, 2위를 차지한다(오재근, 2012: 130). 물론 두 방서의 ‘상한’ 변방(變方)이 다양하게 수록된 양적 규모에서 빚어진 결과이겠다. 그러나 조선의 ‘상한’ 첫걸음 단계에서 약재의 제약과 그에 따른 임상 적용의 한계라는 현실은 조선의가들이 태양·양명·소양·궐음·소음·태음병이라는 육경병(六經病) 중심의 병리학으로 나아감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을 것이다.

2) 『의방유취·상한문』의 인용 문헌

상한 전문서가 아닌 ‘상한’ 관련 『의방유취』 인용서는 총 60종이다. 여기서 『발수방』은 19종으로 이루어진 총서로서 그 중에서 3종이 인용되었고, 『비예백요방』, 『간기방』은 내용에 책제(冊題)만 있고 내용이 빠졌으므로 합하면 60종이 된다(浙江省中醫學硏究院, 2006a: 목록 1-19; 浙江省中醫學硏究院, 2006b: 목록 1-33,519).
『간기방(簡奇方)』, 『간이방』, 『경험비방』, 『경험양방』, 『관견대전양방(管見大全良方)』,『구선활인심(臞仙活人心)』, 『금궤구현(金匱鉤玄)』, 『금궤방(金匱方)』, 『남북경험방(南北經驗方)』, 『담료방』, 『담헌방(澹軒方)』, 『대전본초(大全本草)』, 『동원시효방(東垣試效方)』, 『세의득효방(世醫得效方)』, 『발수방』, 『비예백요방(備豫百要方)』, 『사림광기(事林廣記)』, 『사시찬요(四時纂要)』, 『산거사요(山居四要)』, 『삼인방』, 『선명론(宣明論)』, 『성제총록』, 『성혜방』, 『소씨병원(巢氏病源)』, 『쇄쇄록(瑣碎錄)』, 『수역신방(壽域神方)』, 『수월노반경후록(修月魯般經後綠)』, 『수진방』, 『시원단효방(施圓端效方)』, 『시제의방(是齋醫方)』, 『신교만전방(神巧萬全方)』, 『신효명방』, 『십형삼료(十形三療)』, 『어약원방(御藥院方)』, 『어의촬요(御醫撮要)』, 『엄씨제생방(嚴氏濟生方)』, 『연하성효방』, 『영류검방(永類鈐方)』, 『옥기미의(玉機微義)』, 『왕씨이간방(王氏易間方)』, 『왕씨집험방(王氏集驗方)』, 『유문사친(儒門事親)』, 『운화현추(運化玄樞)』, 『위생보감(衛生寶鑑)』, 『위생이간방(衛生易間方)』, 『의림방(醫林方)』, 『의방대성(醫方大成)』, 『이간방(易間方)』, 『잡기구문(雜記九門)』, 『주씨집험방(朱氏集驗方)』, 『조도방(助道方)』, 『주후방』, 『직지방』, 『천금방』, 『천금익방(千金翼方)』, 『치법잡론(治法雜論)』, 『치병백방(治病百方)』, 『해상선방(海上仙方)』, 『화제국방(和劑局方)』, 『화제지남(和劑指南)』
60종 가운데 중국 문헌은 총 57종이며 저술 시대별로 보면 당대(唐代) 이전 저작은 6종으로 후한 장중경의 『금궤방』, 진나라 갈홍(葛洪)의 『주후방(주후비급방)』, 수나라 소원방(巢元方)의 『소씨병원(제병원후론)』, 당나라 손사막(孫思邈)의 『천금방』과 『천금익방』, 당나라 한악(韓鄂)의 『사시찬요』이다. 북송대 저작은 9종으로 『성제총록』, 『대전본초』, 왕회은(王懷隱) 등의 『성혜방』, 허홍(許洪)의 『화제지남』, 유원빈(劉元賓)의 『신교만전방』, 전우(錢宇)의 『해상선방』, 진사문(陳師文)의 『화제국방』, 진자명(陳自明)의 『관견대전양방』, 온혁(溫革)의 『쇄쇄록』이다.
남송대 저작은 8종으로 진언(陳言)의 『삼인극일병증방론(삼인방)』, 엄용화(嚴用和)의 『엄씨제생방』, 주좌(朱左)의 『주씨집험방』, 왕구(王璆)의 『시재의방』, 온대명(溫大明)의 『조도방』, 여민수(黎民壽)의 『간이방』, 양사영의 『직지방』, 왕석(王碩)의 『왕씨이간방』이다. 금대 저작은 7종으로 유완소(劉完素)의 『선명론』, 이고의 『동원시효방』, 장종정의 『유문사친』, 『치병백법』, 『십형삼료』, 『잡기구문』, 『치법잡론』이다. 원대 저작은 총 15종(실제는 17종)으로 『사림광기』, 『신효명방』, 나천익(羅天益)의 『위생보감』, 이중남(李仲南)의 『영류검방』, 저자미상의 『담헌방』, 『의림방』, 『경험비방』, 진자정(陳子靖)의 『의방대성』, 왕여무(汪汝懋)의 『산거사요』, 허국정(許國楨)의 『어약원방』, 위역림(危亦林)의 『득효방(세의득효방)』, 계홍(繼洪)의 『담료방』, 왕동야(王東野)의 『왕씨집험방』, 두사경(杜思敬)의 『제생발수방(발수방)』, 한인(韓仁)의 『연하성효방』[35]이다. 금원의서 19종의 총서인 『제생발수방』의 경우 인용이 원대 왕호고(王好古)의 『차사난지(此事難知)』, 『의루원융(醫壘元戎)』, 『음증약례(陰證略例)』에서 이루어졌다. 명대 저작은 총 6종으로 주숙(朱橚)의 『수진방』, 유순(劉純)의 『옥기미의』, 호몽의 『위생이간방』, 대원례(戴元禮)의 『금궤구현』, 주권(朱權)의 『수역신방』과 『구선활인심』이며, 연대 미상 저작은 7종으로 『수월노반경후록』, 『시원단효방』, 『남북경험방』, 『경험양방』, 『운화현추』, 『이간방』이다(최환수, 1997: 22-27).
인용 문헌 중 한국 문헌은 3종인데 모두 고려 의서로 최종준의 『어의촬요(御醫撮要)』(1226년), 『비예백요방(備豫百要方)』, 『간기방(簡奇方)』이다. 그런데 『어의촬요』의 경우 “벽온신명단(辟溫神明丹), 삼요탕(三拗湯)” 두 개의 처방 이름만 쓰여 있고, 『간기방』과 『비예백요방』은 책제목만 있고 수록 내용이 없다(浙江省中醫學硏究院, 2006b: 519)[36]. 즉 고려의 독자적인 ‘상한’ 처방이 있었음은 분명하나, 독자적인 상한학적 성과는 미약했다.
중국에서 ‘상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가 송대 이후이므로 송, 원시기 저작들이 인용문헌의 상당수를 차지함은 당연하다. 원대가 『의방유취』 간행과 가까운 시기인 까닭으로 원대저작들이 많은 까닭도 설명된다. 이는 원나라 의학이 우리나라 의학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이다. 특히 이들 의서 중 『성혜방』은 『의방유취』 권29 일부와 권46 일부에서 권52 일부에 걸쳐 인용되어 가장 많은 분량이 인용되었는데, 권46에서 권52부분은 처방 인용이다(浙江省中醫學硏究院, 2006a: 목록 3; 浙江省中醫學硏究院, 2006b: 목록 1-10). 그 다음은 『영류검방』으로 『의방유취』 권39하(下)에서 권42, 권62 일부에 걸쳐 인용되었는데, 권62 일부만 처방인용이다(浙江省中醫學硏究院, 2006a: 목록 15-17; 浙江省中醫學硏究院, 2006b: 목록 29). 『영류검방』은 조선간본은 목판으로[37] 세종조의 춘천간본(1425년)과 진주간본(1438년)이 알려져 있다. 이들 대형방서의 ‘상한’ 관련 내용은 원래의 책으로 간행되어 보급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간행되었던 『의방유취』, 『향약집성방』에도 인용되어 당시 조선 의가들의 ‘상한’ 인식에 분명 영향을 주었다.

3) 강서로서의 활용과 간행

상한 전문서가 아닌 『의방유취·상한문』 60종 인용문헌 중에 12종은 조선간본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세의득효방』, 『성혜방』, 『화제지남』, 『사시찬요』, 『영류검방』, 『화제국방』, 『산거사요』, 『어약원방』, 『어의촬요』, 『옥기미의』, 『대전본초』, 『구선활인심』이다. 『의방유취』 편찬이 당시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의약 관련 문헌들을 정리 조사하는 작업임을 감안할 때에 이러한 간행서의 비중은 결과적으로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나 이 문헌들이 비록 상한 전문서는 아니지만 간행과 함께 보급·전파된 그 안의 ‘상한’ 관련 지식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영류검방』과 『성혜방』의 경우 『의방유취』 인용 비중에서 볼 수 있듯이 ‘상한’ 관련 주요한 텍스트가 되었다.
60종 인용문헌 중에 『발수방』, 『성혜방』, 『대전본초』, 『직지방』, 『천금익방』, 『화제국방』, 『화제지남』, 『어약원방』, 『세의득효방』, 『장자화방』의 10종은 강서교재로 활용되었고 특히 『발수방』, 『천금익방』, 『어약원방』, 『장자화방』을 제외한 6종은 『경국대전』에서 의과과목으로 규정되었다. 1430년(세종 12) 상정소에서 정한 의학 취재 과목에 『발수방』, 『성혜방』, 『연의본초』, 『화제국방』, 『화제지남』, 『어약원방』, 『세의득효방』, 『천금익방』, 『직지방』이 있고[38], 세조대에 이 중 『발수방』, 『천금익방』, 『어약원방』은 제외되고 『장자화방(유문사친)』이 새로 들어갔다(박훈평, 2016: 6-7).
앞서 『성혜방』과 『영류검방』의 ‘상한’ 관련 내용이 『의방유취』에 많이 인용되었음을 살폈는데, 『성혜방』은 세종조에 한해서만 의원 강서로 활용되었고 『영류검방』은 활용된 적이 없다. 즉 의학 관료 양성 과정에서 이 들 책이 교과서로서 활용될 기회는 적었다. 간행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한’ 지식의 전파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감초의 국산화는 성종대 이후 성과가 있었으므로(이경록, 2015: 444-447) 약재 수급의 문제는 일정 부분 해결되었다. 그러나 세종조에 주요 ‘상한’ 관련 텍스트들이 의학 관료 양성 과정에서 제외되었고 성종 초년에 마지막으로 유일한 상한전문서인 『상한유서』마저 교과서에서 제외되었다. 국가적으로 책을 간행하여 보급하지도 않고, 의무적인 교육 과정도 폐지되어 제도권 내에서 배제된 셈이다. 교과서는 단순한 의원 양성 과정의 수단이 아니다. 교과서는 그 과정을 거친 의원들의 지식 체계의 일부가 되어 임상을 실천하는 의원들의 세계관을 형성한다. 따라서 상한 관련 서적들이 교과서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은 이후 조선의 상한학이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상한’ 관련 텍스트들이 점차 강서에서 배제된 이유는 무엇일까. 16세기의 ‘상한’은 한사(寒邪) 개념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혼재됨을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조성환·김동율, 2019: 84). 즉 독립적인 ‘상한’ 질환에 대한 인식은 퇴보하고 ‘내과잡증’으로 통합되어 가는 추세였다[39]. 상한과 한사(寒邪)를 각기 구분하려는 『의방유취』의 관점에서(변정욱, 2018: 25-26) 『동의보감』처럼 ‘상한’ 관련 내용도 「한문(寒門)」에서 다루어 이 둘을 종합하는 식으로 변천해간다(변정욱, 2018: 19). 그 사이의 과도기에는 개념의 혼재가 있음을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 齋日記)』 사례를 분석한 선행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조성환·김동율, 2019: 84). 이경록의 『의방유취·상한문』 분석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상한병을 정점에 두는 전염병 인식 체계를 구축하였다(이경록, 2012: 475). 이 주장에 따르면 ‘상한’ 관련 텍스트들의 점차적인 배제는 전염병 인식 체계의 전환을 의미한다. 『창진집』 의 의과 과목화[40]와 『창진방촬요』 등의 여러 천연두 치료 분과의서 간행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시급한 전염병 문제가 천연두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여러 『구급방』 서적의 보급과 의과 과목 유지는 민간의 약재 수급 부족으로 인한 선택이었다[41].
즉 조선 초기의 상한학은 분리되어 따로 발전해갈 가능성이 있었지만, 약재 수급과 그에 따른 임상 적용의 어려움 등 현실적인 이유로 독립되지 못하였다. 이후 약재 관련 현실적 이유가 해소되었지만, ‘상한’ 보다는 천연두 치료가 더욱 시급한 의료적 수요로 등장했다. 그런 와중에 의과 과목 배제 등 제도적인 이유로 상한학의 발달이 더욱 더디었다. 결국 『동의보감』의 완성은 그나마 남아있던 독립적 상한학의 흐름마저 단절시킨 계기가 되었다. 조선후기 『동의보감』 체계가 가지는 굳건한 안정성은 ‘상한’에 대한 다른 목소리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한학 전통은 어디까지나 허준의 후학들이 나아간 길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그 이전의 『향약집성방』, 『의방유취』가 그러했듯이 당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중에 나온 뛰어난 결과물이다. 또한 상한학의 발달이 주변 동아시아 국가에 비해 더디었다고 더 열등한 의학이 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표 3.
전문서가 아닌 조선 전기의 ‘상한’에 관한 문헌 일람
Table 3. List of a Non-specialized Literature of Cold Damage in the First Half of Joseon
(당 이전)
책 이름 저작시기 조선 간행 강학 교재 의방유취 인용 기타
『금궤방』 × ×
『주후방』 × ×
『소씨병원』 × ×
『사시찬요』 × 농서(農書)
『천금방』 × ×
『천금익방』 ×
(북송)
『관견대전양방』 북송 × ×
『대전본초』 북송 의과 과목
『성제총록』 북송 × ×
『쇄새록』 북송 × × 잡기(雜記)
『신교만전방』 북송 × ×
『태평성혜방』 북송 ×
『해상선방』 북송 × ×
『화제국방』 북송
『화제지남』 북송
(남송, 금)
책 이름 저작시기 조선 간행 강학 교재 의방유취 인용 기타
『간이방』 남송 × ×
『삼인방』 남송 × ×
『시재의방』 남송 × ×
『엄씨제생방』 남송 × ×
『왕씨이간방』 남송 × ×
『조도방』 남송 × ×
『주씨집험방』 남송 × ×
『직지방』 남송 의과 과목
『동원시효방』 × ×
『선명론』 × ×
『십형삼료』 × × 장종정 저술
『유문사친』 × 상동
『잡기구문』 × × 상동
『치법잡론』 × × 상동
『치병백법』 × × 상동
(원)
『경험비방』 × ×
『담료방』 × ×
『담헌방』 × ×
『사림광기』 × × 잡기(雜記)
『산거사요』 × 농서(農書)
『세의득효방』 의과 과목
『신효명방』 × ×
『어약원방』
『영류검방』 ×
『왕씨집험방』 × ×
『위생보감』 × ×
『의림방』 × ×
『의방대성』 × ×
『제생발수방』 × 총서(叢書)
『연하성효방』 × ×
(명)
책 이름 저작시기 조선 간행 강학 교재 의방유취 인용 기타
『구선활인심』 ×
『금궤구현』 × × 주진형 원저
『수역신방』 × ×
『수진방』 × ×
『옥기미의』 ×
『위생이간방』 × ×
(연대 미상)
『경험양방』 미상 × ×
『남북경험방』 미상 × ×
『수월노반경후록』 미상 × ×
『시원단효방』 미상 × ×
『연하성효방』 미상 × ×
『운화현추』 미상 × ×
『이간방』 미상 × ×
(고려)
『간기방』 고려 × ×
『비예백요방』 고려 × ×
『어의촬요』 고려 ×

4. 맺음말

본고를 통해 상한 전문서와 전문서가 아닌 ‘상한’ 관련 문헌의 국내 도입과 활용의 측면에 있어 강학 교재 이용과 간행, 의서에서의 인용 등을 분석하였다.
조선전기 의서의 인용문헌을 살펴보면 당시에 활용된 상한전문서의 국내 도입 시기는 대개 13세기 중반에서 15세기 전반 사이로 좁힐 수 있다. 특히 『의방유취』에 인용된 상한 전문서의 판본은 원대간본 중심이다. 즉 조선전기 ‘상한’ 이론의 수용은 명대 이전 의학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명대 상한학의 성과로부터 단절되게 된다. 조선의 상한학은 『동의보감』 이후 쇠퇴하기 때문이다.
『의방유취』의 편찬 내지 간행 과정 중에 별도로 간행된 『상한유서』, 『상한지장도』, 『상한부』는 의도적으로 당시대 위정자들에 의해 선택되어진 상한전문서로서 이들의 성격을 살필 필요가 있다.
먼저 『상한유서』가 조선전기에 상한의 강학교재로 사용된 까닭은 저자에게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양사영의 의학은 조선 전기에 기본 텍스트로서 작 용했고, 『상한유서』도 같은 맥락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상한학이 가진 독 특성은 『상한유서』가 다른 내과학과 분화 독립된 상한학을 추구하지 않고 ‘내과잡증’과 ‘상한’의 융합을 추구했다는 점에 일정부분 기인할 것이다.
『상한부』는 “부(賦)”라는 형식으로 쓰인 저작이므로 의가들이 상한 관련 내용을 쉽게 접근하기 위한 입문서 성격을 지닌다. 『상한부』는 『상한지장도』의 핵심 내용인 가괄만을 뽑아 만들어진 의서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동의보감』은 조선 전기 ‘상한’ 입문서를 그대로 보존하고 담아서 후대에 전한 셈이다. 『상한유서』를 빼면 조선에서 간행되거나 강서로 활용된 상한 전문서는 모두 초학자용 교재이거나 보충서 성격의 책이다.
상한전문서는 아니나 『성혜방』과 『영류검방』의 ‘상한’ 관련 내용은 조선 전기 의학서에 많이 인용되었다. 그런데 『성혜방』은 세종조에 한해서만 의원 강서로 활용되고 『영류검방』은 활용된 적이 없다. 즉 의학 관료 양성 과정에서 이들 책이 교과서로서 활용되진 못했다.
성종대 이후 ‘상한’ 약재 수급의 문제는 일정 부분 해결되었으나, ‘상한’ 보다는 천연두 치료가 더욱 시급한 의료적 수요로 등장하였다. 그러면서 상한 전문서를 비롯한 주요 ‘상한’ 관련 텍스트들이 의원 양성 과정에서 제외되었던 일은 이후 조선의 상한학이 독자적으로 발전해 감에 저애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초기의 상한학은 분리되어 따로 발전해갈 가능성이 있었지만, 약재 수급과 그에 따른 임상 적용의 어려움 등 현실적인 이유로 독립되지 못하였다. 이후 약재 관련 현실적 이유가 해소되었지만, 의과 과목 선정 등 제도적인 이유로 다시금 상한학의 발달이 더디었고, ‘상한’과 한문(寒門)을 종합시킨 『동의보감』의 완성은 그나마 남아있던 독립적 상한학의 흐름마저 단절시킨 계기가 되었다.
연구를 통해 ‘상한’ 텍스트의 도입과 활용은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왜 당시 조선에서 ‘상한’을 이러한 모습으로 바꾸어갔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 상한학과 관련된 전염병학에 있어서도 18세기 중반 조선의 의학계는 ‘상한’을 내과 질환으로 종합시킨 것과 유사하게 『동의보감』 사유의 틀에서 홍역과 천연두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개인 문집 등을 통한 당시 ‘상한’ 인식의 실체에 대한 분석이 더욱 요구된다. 그러나 이 분석의 대상이 되는 자료는 의학에 대한 비전문가에 의해 쓰였다는 한계가 분명 있다. 덧붙여 조선의가들이 이상적인 단일한 의학 체계를 추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현재로서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근거는 없다. 후일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Notes

1) 일본 고방파는 선진양한 시기의 문체를 추구하는 진한고문파의 영향을 받은 오규 소라이 등의 영향을 받는데, 조선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에 진한고문파가 성립되긴 하지만 그런 흐름은 남인 특히 성호학파에 의해서만 주로 계승되고 정치의 주류였던 노론계 학술전통에선 거의 단절되었다. 금원사대가를 비판하며 선진의학을 추구하는 명대 고학적 경향이 조선에서 힘을 얻지 못한 이유이다(조성산, 2015: 458-459). 이는 조선후기 ‘상한’ 연구가 중국이나 일본처럼 이루어진 못한 결과와도 일부 관련이 있다.

2) 조선시대의 『상한론』 관련 책판 기록은 『상한부』와 『상한지장도』 전주간본 뿐이다(정형우·윤병태, 1979: 216). 이외 간행 기록은 『고려사 세가』, 문종 12년(1058) 9월 1일(기사)과 문종 13년(1059) 2월 9일(갑술) 기사에 나온 『천옥집상한론』 목판 간행,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 5월 11일 (갑술) 기사에 나온 『상한유서』 동활자본 간행 기록이 있다.

3) 통신사행 의원들과 일본의가와의 문답인 창화집류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719년 기해사행에서 백흥전(白興詮)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상한 서적으로 별다른 주석은 없고, 배우는 사람들은 항상 중경의 본의를 얻는 데에 힘쓸 뿐 주석을 열심히 찾지는 않습니다.”, “상한방은 장중경의 『금궤옥함경』이 있고, 왕숙화, 성무기, 도화 등 여러 사람이 발명한 것을 모아서 한 권으로 만들었는데 『중경전서』라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었을 뿐입니다.”하였다. 1764년 갑신사행에서 李左國은 중경의 『상한론』을 구하면서 송판(宋板)을 선본으로 여긴다(김혜일 외, 2015: 202-203). 『금궤옥함경』은 북송 교정의서국의 교정을 거친 『상한론』 판본으로 『금궤요략』과는 다르다. 교정의서국 교정을 거친 『상한론』 판본은 8권본의 『금궤옥함경』과 10권본의 『상한론』이 있다.

4) 본고에서 “상한전문의서”란 『상한론』을 텍스트 삼아 자신의 논설을 더한 문헌, 내용을 가감하고 편제를 다시 한 문헌, ‘상한’ 처방을 중심으로 쓰인 임상서를 총괄하는 개념으로 2차 텍스트이다. 반면 “상한론”은 원문만을 교감하거나 복간한 경우, 장중경의 원저작을 지칭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5) 오재근은 53종으로 인용문헌으로 분석했는데 내용상, 『장중경』은 『증류본초』 속 상한 조문에 불과하고, 『천옥상한론』은 『천옥집상한론』, 『맹선』은 『식료』와 동일서이므로, 3종을 제외하여 50종으로 하였다.

6) 18세기 통신사행 의원 문답인 창화집을 보면 또한 18세기 조선에 보급된 『상한론』 판본이 송판 『금궤옥함경』, 명판 『중경전서』이다(김혜일 외, 2015: 203). 1599년(명 만력 27)에 조개미(趙開美)가 간행한 『중경전서』는 현재 전하는 송판 『상한론』을 담고 있는 유일한 판본이다(眞柳 誠, 2009: 25-30).

7) 『고려사 세가』, 문종 12년(1058) 9월 1일 (기사). 『천옥집상한론』은 북송 이숭경(李崇慶)의 저작으로 추정된다(오재근, 2012: 126-128).

8) 『고려사 세가』, 문종 13년(1059) 2월 9일 (갑술).

9) 최환수는 『상한심요여론(傷寒心要餘論)』을 별개의 문헌으로 구분하였는데 『상한심요론(傷寒心要論)』에 속한 글이므로 본고에서는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10) 장벽(張璧)은 장원소(張元素)의 아들로 보토파 의가로 볼 수 있다. 원 논문에서는 10종으로 되어있으나 장벽의 저술 3종을 더하여 13종으로 추산한다.

11) 참고로 17세기 초에 저술된 『동의보감·인용서목』에서 상한 전문서는 8종인데 『상한론』, 『천옥집』, 송 한지화(韓祗和)의 『상한미지론(傷寒微旨論)』, 송 전을(錢乙)의 『상한지미론(傷寒指微論)』, 송 이지선의 『상한활인서괄(傷寒活人書括)』, 송 유원빈의 『통진자상한괄요』, 금 주진형의 『상한변의(傷寒辨疑)』, 명(明) 도화(陶和)의 『상한쇄언(傷寒瑣言)』(1445년 저술)이다(박경련, 2009: 39-42).

12) 1260년(남송 경정 1)에 저술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杨士瀛, 2015: 교주설명 1).

13) 『세종실록』, 세종 12년(1430) 3월 18일 (무오).

14)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 5월 11일 (갑술).

15) 『세조실록』, 세조 10년(1464) 1월 2일 (을묘).

16) 『성종실록』, 성종 2년(1471) 5월 25일 (정유).

17) 『성종실록』, 성종 3년(1472) 3월 14일 (경술).

18) 유학에 있어 공자와 맹자의 역할을 의학에 있어 장중경과 주굉이 했다는 말이다.

19) 맥에 근거하여 증을 증험하고 증을 물어 맥을 대조하여, 증이 이러하고 맥 또한 이러한데, 같다면 조례에 의하여 약을 쓰고, 대략 비슷하다면 그 틈만큼 약을 가감한다. “據脈以驗証, 問証而對脈, 証如此, 脈亦如此, 一依條例用藥, 証與脈略同, 則加減于其間.”

20) 2장 3절에서 논의했듯이 양사영은 맥과 증의 상참(相參)을 강조하면서 육경과 팔강변증을 동시에 구사한다. 양사영의 『인재직지방론 권1·문병론(問病論)』에서도 “脈之與証相依而行.”라 하여 이를 강조하고 있다(逯铭昕, 2017: 237). 그러한 결과 팔강변증 중심의 내과잡증에 대해서도 상한처방이 구사될 가능성이 생겨난다. 『직지방』과 함께 양사영의 또 다른 저작인 맥학서인 『직지맥』 또한 조선에서 활용된 의서였다. 평소 양사영의 의서를 텍스트 삼아 배우던 조선의 의원들에게 양사영의 맥증상참의 의학사상은 조선 특유의 상한 관점을 세워가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1) 『세종실록』 세종 12년(1430) 3월 18일 (무오).

22) 이 책 이외에 『제생발수방』에 장벽의 저작이 2종이 더 수록되었는데 『운기자논경락영수보사법(雲岐子論經絡迎隨補瀉法)』과 『운기자칠표팔리구도맥결논병치법(雲岐子七表八裏九道脈訣論倂治法)』은 침구경락서에 속한다(박훈평, 2016: 4). 장벽은 보토파를 대표하는 장원소(張元素)의 아들이다.

23) 『세종실록』, 세종 12년(1430) 3월 18일 (무오).

24) 『세조실록』, 세조2년(1456) 8월 26일 (계해). 기사 내용에 책판 소재읍으로 하여금 간행하게 하였으므로 그 이전에 초판되었을 것이다.

25) 흰색 원안에 “상한부”와 “상한지장도” 표기. “상한부” 다음줄 중반부 “문장궤범” 아래에 “以上剜” 기록이 있다.

26) 『醫林撮要』, 歷代醫學姓氏 名疑. “오서는 자가 여심이고 호는 몽재이다. 원나라 인화 사람인데, 『상한지장도』를 저술하였다.”(吳恕 字如心, 號蒙齋. 元之仁和人, 著傷寒指掌圖). 『의림촬요·역대의학인물』. 『의림촬요』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이 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DB를 활용했다(http://db.itkc.or.kr).

27) 『동의보감』(1613년 초간본)과 『의학입문』(1820년 내의원완영중간본) 원문은 모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자료를 활용하였다.(http://www.nl.go.kr/nl)

28) 『동의보감』, 잡병편 권1. “상한부(傷寒賦)에, “맥에 근본이 있으니 반드시 태계맥과 충양맥을 진찰해야 한다. 대개 태계맥은 족소음신경의 혈이다. 남자는 우신(右腎)을 명문으로 삼고, 여자는 좌신(左腎)을 명문으로 삼으니 이것이 생사를 주관하는 요체이다. 환자가 명문맥이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는다. 충양은 족양명위경의 혈이다. 사람은 수곡에서 기를 받는데, 수곡이 위(胃)에 들어가서 오장육부로 전해진다. 이렇게 장부는 모두 위(胃)에서 기를 받고 위(胃)는 수곡의 바다가 되어 사계절의 공급(稟)을 주관하므로 모두 위기(胃氣)를 근본으로 한다. 이것을 ‘사시의 병의 변화와 생사를 결정하는 요체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진맥을 하여 위기(胃氣)의 유무를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활인》” (傷寒賦云, 有根有本, 必診太谿衝陽. 盖太谿, 是足少陰腎之經. 男子以右腎爲命門, 女子以左腎爲命門, 主生死之要. 病人有命門脈卽活, 無卽死. 衝陽, 是足陽明胃之經. 人受氣於穀, 穀入於胃, 乃傳與五藏六府. 藏府皆受氣於胃. 胃爲水穀之海, 主稟四時, 皆以胃氣爲本. 是謂四時之變病, 生死之要會, 故必診之, 以察胃之有無也. 《活人》). 본고에서 해당 『동의보감』 원문과 번역은 한국 한의학연구원의 한의학고전DB를 활용하였다(https://mediclassics.kr).

29) 어조사만 바뀐 것으로 위 문장과 해석상의 차이는 없다. 이하 인용문장에서도 별 차이가 없는 경우 별도로 해석하지 않았다.

30) 금원사대가의 한명인 이동원과 『상한론』을 저술한 장중경은 각각 저자의 강조하는 의가이므로 이 단어의 차이는 중요하다.

31) 또한 세종 때 의학 강서로 활용된 이지선의 『상한활인서괄』도 주굉의 상한이론을 계승한다.

32) 중국의학사에서 ‘상한’ 관련 연구가 활발했던 시기는 크게 두 번이 있다. 첫 번째 시기는 북송 교정의서국에서 보급 간행하면서 주굉의 『남양활인서』를 비롯한 다수의 주석서와 연구서들이 쏟아졌던 시기이며 앞서 살핀 조선전기의 ‘상한’ 관련 문헌들 다수는 이와 관련이 있다. 두 번째 시기는 명말 청초 온병학파의 성립과 관련이 있는데 전국적인 유행병 이환으로 인한 의가들의 대처 방식에 따라 학파들의 논쟁과 활발한 연구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이러한 중국의학의 성과는 수용되지 못하였다. 늦어도 18세기 전후에 인두종법을 비롯한 청의 전염병학이 조선에 보급되므로(박훈평, 2019a: 214-216), 상한과 관련된 온병학 등이 같이 수용되지 못한 까닭은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조선후기 천연두 치료의 대표적인 저작인 박진희의 『두창경험방』에 대하여 김상현은 내용상 『동의보감·소아문』과 『언해두창집요』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하였고(김상현, 2016: 40-42), 이후 조선의 치료서들도 『두창경험방』 체제를 따르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허준의 ‘상한’에 대한 인식과 온병학의 수용되지 못한 결과가 서로 관련 있을 개연성은 있다.

33) 『천금방(千金方)』은 일반적으로 송대 교정의서국의 교정본을 지칭하며 『손진인천금방』은 교정을 거치지 않은 채 전해진 판본을 말한다.

34) 『의방유취·상한문』에도 인용된 문헌에 대한 설명은 『의방유취·상한문』의 인용문헌에 기술했다.

35) 이경록은 『연하성효방』 저자를 원대 한인으로 추정하였다(이경록 역, 2018: 310).

36) 안상우 등의 『어의촬요』 복원연구에서도 확인된다(안상우·최환수, 2000: 37). 이경록은 고려말 조선초에 ‘상한’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짐을 살폈다. 고려시대에는 ‘상한’ 개념이 분명하지 않다가 향약의서에서 왕왕 ‘상한’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러다 『향약집성방』, 『의방유취』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중시되었다(이경록, 2012: 470-471).

37) 『단종실록』, 단종3년(1455) 4월 4일 (기묘), 『세조실록』 세조2년(1456) 8월 26일 (계해).

38) 『세종실록』, 세종 12년(1430) 3월 18일 (무오).

39) ‘상한’이라는 다른 의학 체계를 부정한 셈이다. 조선 후기 조선의 의학계는 상한학과 관련된 전염병학에서 ‘상한’을 내과 질환으로 종합시킨 것과 유사한 반응을 하였다. 18세기 중반 이후 홍역과 천연두의 대유행을 맞아 청대 전염병학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동의보감』 사유의 틀에서 해결하려던 『두창경험방』 등의 시도가 이어진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름 감안하면 조선의학은 이상적인 단일한 의학 체계를 추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현재로서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근거는 없다.

40) 『창진집』은 1462년(세조 8) 의서습독관의 강서가 되었고, 1464년에는 의원 취재의 강서가 되었으며 이후 『경국대전』에서도 의과 과목으로 규정되었다(박훈평, 2016: 6,8).

41) 비록 『의방유취』의 간행은 성종 때이나 세종과 세조 때에 미간행 편찬본이 나왔음을 감안하면, 『의방유취』의 내용은 성종 시대 이전의 조선 위정자들의 생각을 상당부분 담고있다.

그림 1.
『고사촬요·책판목록』(1585년)의 “전주”[25]
Figure 1. “Jeonju” in woodblock for the books of the Kosachalyo
kjmh-28-3-649f1.jpg
표 1.
『상한지장도』와 『동의보감』의 상한부 문장 비교
Table 1. Comparison of Shanghanfu’s Sentences between Shanghanzhizhangtu and Donguibogam
문장 순서 『상한지장도』 『동의보감』
13번째 “발광은 속에 축혈이 있거나 대변이 차 있기 때문이고, 황달은 속에 열이 쌓인 데다 소변이 잘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發狂爲血蓄于內又 大便之極實, 發黃爲熱積于中兼小便之不利.) 發狂爲血蓄于內又大便之極實, 發黃爲 熱積於中兼小便之不利[29].
14,15번째 약간 숨이 찬 것은 표가 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숨이 차오르고 오한이 없을 때는 설사시 키면 낫는다. 약간 번증이 있는 것은 양이 상승하기 때문이며, 번증이 극심하다 도리어 궐증이 되는 것은 음이기 때문이다.(微喘緣表之未 解, 喘滿而不惡寒者當下而痊, 微煩爲陽之相 勝. 煩極而反發厥者乃陰所致) 약간 숨이 찬 것은 표(表)가 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약간 번증이 있는 것은 양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숨이 차오르고 오한이 없을 때는 설사시키면 낫고, 번증이 극심하다 도리어 궐증이 되는 것은 음이기 때문이다.(微喘緣表之未解, 微 煩爲陽之相勝. 喘滿而不惡寒者當下而 痊, 煩極而反發厥者乃陰所致.)
19번째 코피가 나는 것은 병이 나으려는 것이나 음혈이 동(動)하는 경우 혈이 다하여 궐증이 될 우려가 있고, 일반적인 설사라도 도리어 잘 먹으면 제중(除中)을 조심해야 한다.(衄血雖爲欲解動陰血者爲厥竭之憂, 厥利雖若尋常反能食者有除中之忌.) 衄血雖爲欲解動陰血者有厥竭之憂, 厥利雖若尋常反能食者有除中之忌.
63번째 이렇게 하면 중경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으니, 이 간곡하고 자세한 말을 저버리지 말라.(庶幾 可登仲景之堂, 不負乎諄諄之語.)[31] 이렇게 하면 동원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으니, 이 간곡하고 자세한 말을 저버리지 말라.(庶幾可登東垣之堂, 不負乎諄諄之語.) [30]
표 2.
조선 전기에 활용된 상한 전문서 일람
Table 2. List of Professional Books on Cold Damage Utilized in the First Half of Joseon
책 이름 저작시기 판본시기 강학 교재 의방유취 인용 조선 간행
『남양활인서』 북송 × ×
『보명집류요』 원(?) ×
『상한론주해』 × ×
『상한명리론』 × ×
『상한발미론』 북송 × ×
『상한백문가』 북송 × ×
『상한백증가』 북송 × ×
『상한심요론』 원(?) × ×
『상한의감』 원(?) × ×
『상한직격』 원(?) × ×
『상한유서』 남송
『상한활인서괄』 남송 ×
『상한지장도』 ×
『상한부』 미상 미상 × ×
『통진자상한괄요』 북송 미상 × ×
『천옥집상한론』 북송 미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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