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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9(2); 2020 > Article
마르스(Mars)와 에로스(Eros) 사이: 제1차 세계대전기 영국 육군의 성병 대응 노력

Abstract

“Total War” calls upon combatant countries to mobilize all of their resources and energies for war and their civilians to contribute in their own ways to the “war effort” of their respective governments. Carrying out such war, some governments try to redefine the distinction between the private sphere and the public sphere in their people’s lives. Even sexual life, the most private sphere in people’s lives, may be exposed to various forms of supervision and control from their states in the name of the national “war effort.” In particular, the government in war does not hesitate to scrutinize the most private sphere of their people’s lives when certain aspects of their lives do considerable harm to “war effort” or “national efficiency.”
The British society in the First World War intensively experienced some kind of “social control” due to the increasing spread of venereal disease (VD) both among civilians and troops. Like British society as a whole, the British army, who had primary responsibility to fight the war in the field, had to fight another hard battle against an enemy within VD, throughout the war. During the First World War, VD caused 416,891 hospital admissions among British and Dominion troops. Excluding readmissions for relapses, approximately five percent of all the men who served in Britain's armies in the course of the war became infected. During the war, at least a division was constantly out of action because so many troops had to treat VD. This disease caused a huge drain on the British army's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and consequently undermined, to a considerable extent, its military efficiency. However, a series of measures of the British Army to improve the high rate of infection among their troops have been simply considered ineffective by both contemporaries and subsequent researchers.
This article aims to provide a more balanced perspective on the efforts of the British Army to fight VD during the war and reconsider the existing understandings in regard to their general effectiveness. It argues that the overall measures of the British Army regarding VD have to be examined in the context of the national efforts of British society to fight against VD as a whole. Their supposed ineffectiveness well-reflected the indecisiveness of the overall British society in terms of both how to view VD and how to fight against it.

1. 머리말

  • 귀관은 공동의 적에 맞서 우리의 동지인 프랑스를 돕기 위해 해외로 파견명령을 받은, 폐하의 병사이다. (중략) 모든 과잉으로부터 반드시 자신을 지켜라. 이와 같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귀관은 와인과 여성 모두로부터 유혹을 받을 수 있다. 두 가지 유혹에 결연하게 맞서야 한다. 모든 여성은 완벽히 공손하게 대하되 친밀해지는 일은 피해야 한다.1)

  • 젊은 장병들이 잉글랜드의 참호들을 멀쩡하게 잘 지켜내는 동시에 그들의 순결 또한 지켜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와인과 여성이 없이 전쟁을 치르기를 원하는 자는 환상 속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전쟁에서는 행여 미봉책일지라도 시도해볼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Crozier, 1930: 127).

아직도 많은 영국인들의 인식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기 영국 육군의 장병2)들은 ‘당나귀들(donkeys)’의 지휘를 받아 무모(無謀)하고 무용(無用)하게 사지(死地)로 내몰렸던 불운한 ‘사자들(lions)’로 표현된다. 무능과 무지, 그리고 ‘도살업자’처럼 부하의 희생에 대한 무감각으로 특징지어졌던 당시 장군들과는 달리 그들은 ‘왕과 국가를 위하여’ 전장으로 내달렸던 ‘꽃다운 젊은이들(the flower of youth)’이자 ‘국가의 최고 인재들(the best of the nation)’이었다(강창부, 2012: 66-68). 그들은 영국의 젊은이들을 대표하는 존재였을 뿐 아니라 -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적자(the fittest)’로서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종족(races) 간 투쟁에서 영국인의 종족적 힘과 위력을 표상하는 존재이기도 했다(Mackaman and Mays, 2000: 27).
한편, 전쟁이 한창이던 1917년 4월, 하원에서 프레드릭 게스트(Captain Frederick Guest) 의원은 지난 2.5년간의 통계를 언급하며, 영국 육군 내에서 1개 사단의 규모에 해당하는 장병이 성병3)으로 인해 작전에 투입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전쟁의 압박이 날로 심각해지는 가운데 이는 ‘매우 심각한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개탄했다.4) 뉴질랜드자원자매봉사단(New Zealand Volunteer Sisterhood)을 결성하여 전장에서 활동했던 에티 라우트(Ettie Rout)도 전후에 전쟁 동안 영국 육군 장병 중 4∼5만 명가량이 늘 성병으로 인해 작전에 투입할 수 없는 지경에 있었다고 회고했다(Rout, 1923: 22).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된 ‘총력전(Total War)’은 ‘전쟁노력(war effort)’에 국가가 보유한 힘과 에너지의 총체적인 동원과 전 국민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때문에 많은 경우 총력전은 국민생활에서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간의 전통적인 구분을 재정의한다. 그 결과, 사적 영역에서의 특정한 행동은 애국적이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어 처벌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특히 특정의 사적 행위가 ‘국가적 효율성(national efficiency)’을 실질적으로 손상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 국가는 적극적인 감시와 통제, 나아가 처벌까지 시도하게 된다. 여기에는 사적 영역에서의 건전성이 총력전의 원활한 수행을 뒷받침하는 ‘국가적 효율성’의 유지에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는 인식이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그것은 국민의 도덕성이 총체적인 ‘국민적 사기(national morale)’에도 심대한 영향을 준다는 확신과도 맞닿아 있다.
전쟁은 도덕적 질서를 복원시키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는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일부는 전쟁을 사회적 혼란을 일소하며 도덕을 복원할 기회로 환영했다. 영국의 시인이자 문학비평가 에드먼드 고스(Edmund Gosse)에게 1914년의 전쟁은 ‘최고의 살균제(the sovereign disinfectant)’였으며, 그것이 뿜어대는 붉은 핏줄기는 ‘지식인들의 괴인 물과 꽉 막힌 물길을 청소하는 소독액’이었다(Gosse, 1914: 313). 전쟁 발발과 함께 자원간호지원대(Voluntary Aid Detachment)에서 간호사로서 활동하던 베라 브리튼(Vera Brittain)은 서부전선에서 장교로 참전 중인 남동생에게 쓴 서신에서 그것을 ‘무고한 피가 연거푸 뿌려짐으로 세상의 죄들을’ 씻어내는 ‘거대한 정결제(an immense Purgation)’로 정의했다(Bishop and Bostridge, 1998: 259).
그러나 전쟁은 새로운 악화와 타락을 유발하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기 영국 사회는 성(sex)과 성병의 문제를 놓고 전쟁의 두 번째 얼굴과 씨름해야 했다. 사실상 처음 마주하는 총력적인 전쟁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환경은 영국 사회 내에서 기존의 도덕적 규범을 재정의하게 했다. 특히 성도덕의 쇠락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성병의 문제는 ‘국가적 효율성’의 문제와 한데 얽히면서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성도덕(sexual morality)’과 ‘성건강(sexual health)’은 군사적 승리의 필수요소로 간주되기 시작하였고, 성병은 국가의 군사적, 나아가 ‘종족적’ 힘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우생학자이자 성(性)철학자인 헤이브록 엘리스(Havelock Ellis)는 전쟁으로 인해 장병들뿐 아니라 민간주민들 사이에서도 크게 확산할 수밖에 없는 성병은 전쟁 자체보다도 더 파괴적임을 강조했다(Ellis, 1919: 122). 여성참정권운동가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Christabel Pankhurst)도 전쟁 발발 직전에 ‘성적인 질병은 신체적·정신적·도덕적 타락뿐 아니라 인종자살(race suicide)의 중대한 원인’이라고 쓴 바 있었다(Pankhurst, 1913: vi). ‘성병에 관한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 on Venereal Disease)’ 5)가 86회의 회의, 85회의 증언 청취, 22,296건의 질의 끝에 1916년에 방대한 최종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성병이 감염자 자신이나 그 자손에게 미치는 의학적 영향뿐 아니라 그로 인해 ‘국가에 발생하는 심각한 경제적 손실’까지 지적한 것도 이러한 경각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Royal Commission on Venereal Disease, 1916).
높은 성병 감염률6)과 전쟁수행을 위해 국가적 효율성을 유지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 사이에서 영국 정부는 가장 사적인 영역인 ‘성’에 관해서도 국가적인 간섭과 통제를 시도했다. 특히 1918년 3월에는, 「국토방위법(Defence of Realm Act ; DORA)」에 40D조(Regulation 40D)를 신설하는 개정을 단행하여 성병에 감염된 여성이 영국군 장병과 성적으로 접촉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였으며, 강제적 검사를 위해 해당 여성을 구금하고 유죄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상당한 벌금(£100까지)을 부과하거나 투옥까지 할 수 있게 하였다.
조직의 역할과 특성으로 인해 사적 영역에 대한 국가적 통제는 군내에서 더욱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장병(특히 병사)들의 성적인 생활은 군법이나 다양한 규정과 지침들로 통제되었을 뿐 아니라 상관들의 공식·비공식적인 감시에도 계속하여 노출되었다. 그러나 군(軍)에게 성병의 문제는 가장 대표적인 난제(難題)의 하나였다. 성병에 감염된 장병의 증가는 우선적으로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인력에 손실이 발생함을 의미할 뿐 아니라 단위부대나 군 전체의 사기와 기율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장병들의 성적 활동을 제약할 수도 없었다. 죽음의 공포가 상존하는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후방으로 이동한 장병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잠, 먹을 것, 그리고 성적 활동의 순(順)이었다(Gibson, 2001: 546). 게다가 육군에서는 성적 활동은 남성에게 필수적이며 자연적이라는 인식이 여러모로 공유되고 있었다(Graham, 1928: 225). 성적 활동에 대한 현저한 제약은 장병들의 사기에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염려 또한 존재했다. 게다가 성병의 감염이 고국이나 프랑스에서 휴가 중일 때, 혹은 전선의 후방에서 민간여성과의 성적 접촉으로 이루어짐을 고려했을 때, 이 문제의 해결은 동맹국과, 다음으로는 국내 시민사회와의 유기적인 협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체계는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 간의 시각차도 작지 않았다.
영국 사회에서 성병의 문제에 대한 역사학적 관심은 ‘성(性)의 역사’에 대한 관심의 증가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를테면 제1차 세계대전기 성의 역사에 대한 첫 저술이라 할 수 있는 피셔(H. C. Fischer)와 뒤브와(E. X. Dubois)의 1937년 연구에서 성병은 결혼, 성매매, ‘에로틱한 생활’ 등과 같은 ‘성적 생활’을 광범위하게 다루는 총 15개의 장들 중 하나를 구성했다(Fischer and Dubois, 1937). 그러나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영국에는 성적 생활의 문제에 대한 ‘침묵의 음모(a conspiracy of silence)’가 존재한다던 그들의 지적(Fischer and Dubois, 1937: 5)에도 불구하고 성의 문제가 본격적인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1990년대의 도래를 기다려야 했다. 당연히 성병 문제에 관한 연구도 비슷한 처지였다. 빅토리아 시대 중반 영국 육군에서 성병을 통제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들을 조명한 1967년의 연구(Blaco, 1967)나, 성병을 마주하는 제1차 세계대전기 미국과 영국의 대응법을 비교한 1976년의 연구(Beardsley, 1976), 그리고 성병과 그 의학적 예방법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반부터 전간기 일부 기간 사이의 보건교육정책을 다룬 연구(Towers, 1980)는 선구적 연구로서의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성병 문제에 관한 학문적 논의의 실질적인 확장에는 미치지 못했다. 성 문제가 갖는 특유의 은밀성과 금기성은 관련 연구들로 하여금 다른 주제들에 비해 훨씬 더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서야 역사학적·사회학적 논쟁의 무대에서 자리 잡을 수 있게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성병 문제도 보다 무게 있는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1990년대의 시작과 함께 나온 리처드 다벤포트-하인즈(Richard Davenport-Hines)의 연구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 영국 사회에서 섹스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태도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했지만, 실상은 동성애와 성병에 집중했다(Davenport-Hines, 1990).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섹스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그것들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 관한 한층 활발해진 여성사, 사회사, 의학사, 사회학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영국사 연구에서 성병의 문제는 여전히 학문적 관심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주목할만한 일부 연구들(Evans, 1992; Tomkins, 1993; Levine, 1994; Harrison, 1995; Eder et al., 1999: 58-75)에도 불구하고 성병 문제는 여전히 ‘성의 역사’에 대한 담론이 발전하는 궤적을 따라가며 그 일부를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2000년 이후에도 이어진 연구들(Gibson, 2001; Davidson and Hall, 2001; Levine, 2003; Payne, 2005)로 제1차 세계대전기 영국 사회에서 성병의 문제에 대한 이해는 그 깊이와 범위를 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기 영국 사회에서 성병의 문제에 관한 연구에서 군(軍)의 사례는 그다지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당시 성병으로 가장 곤욕을 치르던 조직이 총력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최우선적인 과업을 떠안고 있던 군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누락’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국 육군의 사례를 추적한 일부 연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거의 하나같이 성병에 대한 군의 대응을 성병에 대한 당시 영국 사회 전체의 대응이 그랬듯이 실패작으로 평가했다(Beardsley, 1976; Towers, 1980: 77; Harrison, 1995: 148). 그 원인으로는 영국 정부처럼 군 당국 또한 도덕적 접근법을 버리고 의학적 조치들을 과감하게 도입하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점이 주로 지적되었다(Beardsley, 1976; Harrison, 1995; Tomkins, 1993). 일부 학자는 기계(machines)보다는 사기(morale)를 중시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에 젖어있던 군 지휘부가 성병에 대한 대처에서도 일종의 ‘기술혐오증(technophobia)’을 보였음을 암시했다(Harrison, 1995: 134-135).7) 영국 육군의 장군들이 성병에 대해 ‘자유방임적’ 접근법을 취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Towers, 1980: 75-80).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기 영국 사회는 성병이나 그 주된 감염경로로 지목되었던 성매매에 대해 어떠한 유효한 합의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성병에 감염되는 것을 도덕적인 문제로 간주하여 도덕교육을 강화하는 접근법을 취할 것을 주장하는 진영과 의학적 예방 또는 치료법-이 또한 여전히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을 보다 과감하게 적용할 것을 주장하는 진영 간에 논쟁은 사뭇 치열했다. 전시 육군의 성병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논쟁이 집약적으로 재연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다. 게다가 군 조직으로서의 특수성이나 함께 전쟁을 수행하는 동맹군과의 역학관계 또한 엄연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에 육군의 고민과 시름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기 영국 육군 내의 성병 문제에 추가적인 학문적 관심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은 성병에 대응하려는 제1차 세계대전기 영국 육군의 노력 전반을 조명하고 이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재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육군 내 성병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을 좀 더 다각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실패’라는 낙인으로는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나름의 성과와 한계를 균형 있게 짚어보고자 한다. 특히 그러한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혹은 그렇게 보였던) 배경을 이 문제에 대한 당시 영국 사회 전반의 논의와 연결하여 살펴봄으로써 당시 육군의 접근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안적 시각을 제공하고자 한다.

2. 영국 육군 내 성병 감염률과 그 영향

1) 성병 감염률과 감염경로

영국 육군 내에서 성병이 문제가 되어온 역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앞서는 것이었다. 1864년 제정된 ‘성병방지법(Contagious Diseases Act)’은 19세기 전반부터 급격하게 높아지는 군내 성병 감염률8)에 대한 국가적 염려가 반영된 결과로서, 영국 사회 내에서 성병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는 첫 계기였다. 이 법은 육군이 주둔하는 11개 도시와 항구에서 성매매를 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여성을 경찰이 체포하여 의학적 검사를 강제할 수 있게 했으며, 감염이 확인된 경우 최대 3개월까지 치료를 위해 전문병원(lock hospitals)에 구금할 수 있게 했다. 1866년과 1869년에는 적용 대상에 7개 도시와 항구를 추가하고 구금의 한도도 9개월로 늘리는 개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조세핀 버틀러(Josephine Butler)가 이끄는 장기적이고도 격렬한 반대 운동에 직면하였으며, 1886년에 결국 법률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Blaco, 1967; Petrie, 1971; Hamilton, 1978; Walkowitz, 1980; Barry, 1995: 91-121; Fischer, 1996). 그들은 ‘악에 대한 국가적 규제(state regulation of vice)’에 저항했다.9)
이후에도 영국 정부는 형법의 관련 조항을 개정(1885년, 1911년)하고 다양한 성격의 위원회를 운영하여 성병의 실태를 진단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했다(Royal Commission on Venereal Disease, 1916: 1-3). 1913년 왕립위원회의 출범으로 그러한 노력은 절정에 달했으며, 자연스럽게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논쟁 또한 커졌다. 그러나 총력전의 발발은 높은 성병 감염률을 한층 더 심각한 국가적 위협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전례가 없는 수준의 도덕적 위기감을 유발했다. 코스모 랭(Cosmo Lang) 요크 대주교가 밝혔듯이, 직면한 전쟁은 ‘도덕적 정의(moral right)’를 다투는 것으로, 영국의 관심은 ‘시장이나, 영토나, 유럽 지도의 새로운 배열을 확보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자유, 정의와 세계평화와 부합하지 않는 정신을 깨뜨리는’ 데 있었다.10) 문제는 ‘도덕적 쇠퇴((moral decline)’가 앞서 진행되는 한 영국의 ‘전투정신’은 지탱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11) 나아가 전쟁은 ‘국내의 윤리와 국가적 번영 간의 밀접한 관계’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읽혔으며, 때문에 시민의 일상적 삶은 ‘혈류가 몸 전체에 대해 그렇듯이 국가의 안녕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Pendlebury, 1918: 4). 결국 개별 국민의 사적 행실은 그의 애국심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국가의 전쟁노력과 승리의 가능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높은 성병 감염률은 영국 정부뿐 아니라 대중 사이에서도 전에 없는 수준의 위기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전쟁을 수행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체인 군의 성병 문제는 더 이상 그들만의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육군(자치령군 포함12)) 내에서 성병으로 인해 입원한 경우13)는 총 416,891건에 달했다.14) 재발로 인한 치료의 경우를 제외하고도 이는 전쟁 동안 영국 육군에서 복무한 총인원의 약 5%가 성병에 감염되었음을 의미했다. 전쟁 중 전투가 아닌 상황에서 발생한 부상이나 질환으로 입원한 총 6,185,767건 중 성병으로 인한 경우는 6.7%였다. 가장 주요한 전장이었던 서부전선(프랑스와 플랑드르 전구)만 해도 성병으로 인한 입원은 153,531건에 달했다. 같은 전구에서 전쟁 동안 전투가 아닌 상황에서 발생한 부상이나 질환으로 입원한 총 3,528,486건의 사례 중 성병은 4.4%를 담당했다. 같은 전구에서, 미증유의 오랜 참호전으로 인해 발생한 질병이었던 참호족(trench foot)이나 동상으로 치료를 받은 74,711건과 비교해보면 성병은 두 질병보다 두 배나 군 의료진을 바쁘게 만든 셈이었다(Mitchell and Smith, 1931: 14-15, 72-79, 88).
서부전선의 경우 1914년 8-12월 간에 성병으로 입원한 경우는 3,291건(1,000명 당 17.32명)에 달하였다. 이듬해에는 17,525건(1,000명 당 29.65명), 1916년에는 24,108건(1,000명 당 18.23명), 1917년에는 48,508건(1,000명 당 25.60명)으로 증가했으며, 전쟁의 마지막 해에는 60,099건(1,000명 당 32.36명)으로 감염률이 절정에 달했다(Mitchell and Smith, 1931: 73). 이 수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감염자의 수는 계속하여 증가했다. 그러나 전체 병력에서 감염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다소 다른 경향을 보여주었다. 특히 1916년에는 그러한 비율이 전년 대비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듬해에도 비율이 높아지지는 않지만 1915년이나 1918년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성병에 관한 왕립위원회가 최종보고서를 발표하며 이 문제에 대한 국가적·사회적 대응이 본격화하는 시점이 1916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나름의 의미가 있는 변화라 할 수 있다.
프랑스 전장에서 1917년 전 기간을 통틀어 성병으로 입원한 장병의 수가 가장 많은 날의 인원은 8,392명이었으며, 이는 급식병력(ration strength)15) 1,000명당 5.5명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18년에는 이 수치가 약 11,000명으로 증가했다(Mitchell and Smith, 1931: 75). 당시 1개 보병사단의 규정된 병력 규모가 18,073명(장교 585명, 사병 17,488명)(General Staff, 1917: 6)임을 고려해보면, 1개 사단의 병력이 성병으로 작전에 계속하여 투입되지 못하는 실정이라던 주장은 상당한 근거를 갖춘 것이었다.
장병들이 성병에 감염되는 장소로는 프랑스와 영국이 거의 비슷한 비율을 보였다. 1915년 1월부터 1918년 5월까지 프랑스에서 성병으로 새롭게 입원한 91,231건 중에 약 45%는 프랑스에서, 42%는 영국에서 감염된 것이었다(<표 1> 참조). 1917년 8월부터 10월까지 제3호주사단의 경우에도 알려진 135건의 성병 중 83건은 프랑스에서, 52건은 영국에서 감염된 것으로 보고했다(Gibson, 2001: 548). 영국에서 감염되는 비율이 상당했던 점은 장병들이 주로 휴가 중에 감염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성병 감염의 경로로 우선하여 지목된 것은 성매매였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인가된 성매매업소(maisons de tolérance)들이 운영되고 있었다. 잘 감독될 수만 있다면 성매매는 불가피하며, 나아가 사회적으로는 필요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그 기반이었다. 1915년의 경우에도 35개 도시에 137개의 업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곳의 여성들은 우선은 업주(madame)가, 다음으로는 의사들이 주 2회 검진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검진이 피상적이거나 오히려 위생적이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고 성병을 조기에 발견해내는 데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Harrison, 1995: 142-143).
감독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아마추어’ 성매매 여성들은 더욱 위험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에서 피난을 왔거나 전쟁으로 가족이나 거처를 잃은 여성들이 영국원정군이 오가는 마을이나 항구로 모여드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다양한 사연으로 성매매를 시작했다. 연합군 장병들이 서부전선으로 오가는 대표적인 관문이었던 마르세이유(Marseille)의 경우, 등록된 성매매 여성은 700∼800명이었던 반면, ‘아마추어’는 7,000명에 달했다(Hirschfeld, 1946: 195-196). 호텔, 레스토랑, 카페, 작은 술집(estaminets) 등이 그런 목적에 사용되었다.
전선에 가까운 곳에서는 민가를 이용한 숙박(“billeting”)이 장병들에게 민간여성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Beckett and Simpson, 1985: 166-191). 특정의 한 주 동안 보고된 성병 중 30∼40%가 영국에서, 또 다른 30∼40%가 파리와 병참선 상의 도시들(특히 아미앵(Amiens)과 정기기항항구들(base ports))에서 감염되었던 데 반해, 나머지 30%는 전선 인근의 마을들에서 감염된 것으로 보고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Gibson, 2001: 548). 특히 군사적 활동이 비교적 소강상태로 유지되었던 겨울 동안에는 특정 대대가 전선의 같은 구역을 장기간 관할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장병들은 같은 민가를 몇 주간 숙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은 일자리는 희소하고 국가의 지원은 미약한데 인플레이션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상황에 처한 많은 여성들의 처지와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했다(Gibson, 2001: 555).
감염의 약 1/3은 휴가 중에 발생했다(Winter, 1978: 150).16) 제4군 사령관 헨리 롤린슨(Henry Rawlinson) 장군은 휴가를 위해 오가는 기차역들이 장병들이 성병에 감염되는 첫 관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Payne, 2005: 58). 그러나 감염의 가장 큰 경로는 런던이었다. 런던 중심지는 오래전부터 성매매로 악명이 높았다. 실제로 요크셔경보병연대(Yorkshire Light Infantry)에서 장교로 복무하던 스튜어트 클루티(Stuart Cloete)는 당시 런던에서는 성매매가 매우 성행했음을 지적하면서, 어느 날 밤 런던의 피커딜리(Piccadilly)와 버클리 스트리트(Berkeley Street) 사이를 걸어가는 동안 16차례나 호객행위에 맞닥뜨렸었다고 회고했다(Cloete, 1972: 271). 고향이 멀어 휴가를 런던에서 보내곤 했던 자치령 장병들이 감염되는 경우가 크게 빈발하면서17) 자치령 정부와 장병의 부모들이 대책을 강력히 요구하기도 했다(Beardsley, 1976: 198). 캐나다군 의무감실(醫務監室)의 존 아다미(John Adami) 대령도 런던이 성매매의 거대 중심지로서 휴가 중인 장교와 사병 모두가 성병에 감염되는 온상이 되고 말았다면서 영국 당국의 소극적 대응을 신랄하게 성토했다. 그는 주말마다 런던에서 ‘육군의 고향’인 솔즈베리(Salisbury)로 80∼100명의 ‘헤픈 여성(loose women)’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폭로했다(Adami, 1919: 99).
여성의 성도덕이 평시보다 현저하게 이완된 것도 장병들의 성병 감염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로 지적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흥분, 장병에 대한 낭만적 생각, 전시에 여성이 수행하는 역할이 확대됨에 따라 함께 증대된 생활의 자유가 이런 흐름에 기여했다. 특히 전쟁 초기에 영국 전역에서 집중적으로 관찰되었던, 어린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이 군복을 입은 남성들에게 보여주었던 성적 흥분 상태 - ‘카키색 열병(khaki fever)’-는 장병들이 여성들과 성적 접촉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 것으로 지적되었다(Wollacott, 1994). 실제로 영국 장병이 성병에 감염된 수천 건의 사례 중 60% 이상은 금전적 거래를 동반하지 않는, 일반 여성들과의 성적 접촉에 따른 결과였다(MacPherson et al., 1923: 121).
프랑스에서나 영국에서나 할 것 없이 성병 감염률은 장병들이 대도시에 얼마나 가까우며 그곳에 얼마나 쉽게 접근할 있는가에 좌우되었다. 더 큰 인구 중심지에 가깝게 접근할수록 감염률도 높아졌다. 전쟁의 어느 한 시점에 프랑스에서 감염되어 입원한 5,987건 중에 3,202건(53.5%)은 루앙(Rouen ; 1,617건), 하브르(Havre ; 680건), 불로뉴(Boulogne ; 357건), 칼레(Calais ; 139건), 디에프(Dieppe ; 140건), 마르세이유(Marseille ; 269건)와 같은 도시나 주요 항구들에서 감염된 것이었다(MacPherson et al., 1923: 119). ‘도시 질병(town disease)’으로서의 성병의 이러한 특성은 왕립위원회의 결론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Royal Commission on Venereal Disease, 1916: 18).

2) 성병 감염이 전투력에 미친 영향

성병은 군의 인적 자원에 뜻하지 않은 유출을 가져왔다. 성병으로 인한 입원을 ‘사상(casualty)’에 비유하여 불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특히 전선의 지휘관들에게는 크나큰 근심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1916년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에서 대대장으로 전투를 지휘했던 프랭크 크로지어(Frank P. Croizer)는 사병들 사이에서 성병 감염이 이어지는 게 전선에서의 손실보다 더 큰 염려가 되었다고 회고했다(Crozier, 1930: 127).
정확한 통계는 불가능했지만, 1915년의 경우 성병으로 입원한 장병은 보통 임질은 28.6일, 매독 37.6일, 기타 성병은 31.3일을 병원에 머물러야 했다(Mitchell and Smith, 1931: 75). 감염된 특성에 따라 보다 다양한 치료법이 적용되기 시작한 전쟁 후반기에는 치료 기간이 더 길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선과는 먼 영국 내에 위치한 병원들에서 치료 기간이 길었다. 병원에 따라서도 편차가 컸다. 예를 들어 통상적인 임질 치료의 경우, 맨체스터(Manchester) 병원에서는 44.5일이 소요되었는 데 반해 월링엄(Warlingham)에서는 65일이 걸렸다. 세척과 망간액 주사를 통해 치료하는 경우에도 맨체스터에서는 52.8일이 걸렸는데 월링엄에서는 76일이 소요되었다(MacPherson et al., 1923: 150-156). 설령 성병 자체에 대한 의학적 치료는 끝났다 하더라도 장병이 작전에 다시 투입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하는 데는 추가적으로 몇 주 또는 몇 달이 필요했다. 게다가 류머티즘, 눈 질환, 전반적 쇠약 등과 같은 후유증이 남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Adami, 1919: 99). 1917년 3월에 하원에서 육군 담당 정무차관(Under-Secretary of State for War) 제임스 맥퍼슨(James Macpherson) 경은 성병을 치료하는 데 실질적으로는 2년이 소요된다고 답변했다.18)
문제는 성병의 치료를 위해 ‘사상자 목록(casualty list)’이나 ‘질환자 목록(sick list)’에 포함되어 작전에 활용할 수 없는 인원이 가장 주요한 전구인 서부전선에서도 매년 1개 사단의 규모였다는 점이다. 이는 전투력의 약화로 직결되었다. 전선에 배치할 수 있는 사단의 수를 최대치로 유지하고자 했던 육군 지휘부는 장병들이 치료를 위해 장기간 부대를 떠나있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육군이 발작이나 황달과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는, 살바르산(salvarsan)과 수은(mercury)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치료법을 일시적으로나마 적용했던 것은 그런 조직적 위기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Towers, 1980: 77).
장병의 성병 감염이 전투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그들이 치료를 위해 본연의 직무에서 이탈해 있는 실질적 시간을 추정하는 방법으로 표현되곤 했다. 성병에 관한 왕립위원회는 성병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노동력 손실(loss of working power)’의 맥락에서 분석하면서 1912년의 통계를 활용해 육·해군에 관해서도 분석결과를 제시했다. 그 결과, 해군의 경우 성병으로 인한 노동력 손실은 269,210일에 달했으며, 육군에서는 평균 593명이 지속적으로 감염된 상태로서 총 216,445일간의 손실이 발생했다(Royal Commission on Venereal Disease, 1916: 32).
성병은 장병의 충원이나 인적 관리에도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원칙적으로 입대 전 신체검사 시 유전적 매독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병 감염자도 입대를 거부당하지는 않았다(Winter, 1980: 211-244). 이는 성병 감염자도 군내 치료를 통해 최단기간 내에 복무에 적합한 자원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19) 감염자로 판명된 입대자는 검사를 진행한 병역판정위원회(National Service Medical Board)에 의해 모병관에게 통보되었으며, 입대와 동시에 병원치료를 받게 한 뒤 훈련이나 작전에 투입하도록 권고되었다. 이러한 체계는 충분한 병력 확보가 시급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군의 병력 관리와 의료체계에는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입대는 했으나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는 없는 자원이 늘 존재했을 뿐 아니라, 성병을 치료하기 위한 체계나 설비가 충분히 갖춰지지 못한 군내 의료체계에도 부담은 적지 않았다.
복무기간의 만료가 다가오는 감염 장병의 처리 문제도 간단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국가기관 간의 입장이 대립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왕립위원회는 감염된 장병이 제대하여 민간사회에 성병을 확산시키는 사태를 막기 위해 복무기간의 만료가 임박한 장병의 경우에는 군이 해당 장병에게 치료가 완료된 후 제대하도록 설득해줄 것을 권고했다(Royal Commission on Venereal Disease, 1916: 63). 이러한 입장은 하원에서도 상당한 동의를 얻어 1917년 ‘성병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그와 같은 장병에 대해서는 제대를 강제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육군성에게 부여하는 조항을 신설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육군은 치료 기간이 실질적으로는 2년이 소요된다는 점과,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병원시설 또한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특히 육군이 특정 질병의 ‘격리캠프(segregation camp)’로 전락하게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표명되었다.20)

3. 눈 가리고 아웅? : 육군의 성병 대책

전쟁 직후에 아다미 대령은 영국 내 성병에 대한 논의가 그동안 ‘침묵, 은폐, 금기(silence, concealment, and taboo)’라는 ‘구체제(old régime)’ 하에 놓여왔음을 지적하고, 왕립위원회의 활동이 이를 깨뜨리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정책(policy of ostrich)’이 지속되고 있다고 비난했다(Adami, 1919: 98-99). 한편 제1차 세계대전기 영국과 미국의 성병에 대한 대응을 비교한 연구자는 주요 교전국들 중에서도 영국이 특히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성병에 대한 대응책을 효과적으로 세우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영국이 ‘시민의 자유(civic liberties)’에 너무 신경을 썼던 점과 영국군이 국내 시민사회와 단절되어 있고 고유한 가치를 중시했던 점, 그리고 의학적 접근법을 경시하는 고위 성직자나 상류계급 도덕주의자들로부터 과도한 영향을 받았던 점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Beardsley, 1976: 189, 202). 그러나 이들의 관점은 전시 군내에서 성병 문제가 갖는 복잡한 역학관계를 무시하거나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대처하기 위한 육군의 노력을 과도하게 평가절하하고 있다.

1) 감염자에 대한 처우와 처벌

전쟁 전부터 원칙적으로 영국 육군은 성병에 감염된 자체만으로는 장병을 처벌하지 않았다. 『육군 규정과 명령(King's Regulations and Orders for The Army)』은 모든 장병에게 성병에 감염되었을 때 즉시 보고하도록 규정했을 뿐이었다. 이를 어겼을 때는 『육군법(Army Act)』 제11항에 따라 대대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2년간의 중노동에 처할 수 있었다.21) 이처럼 감염 자체보다 은폐를 처벌한 것은 오랜 경험이 영국 육군의 지휘부에게 처벌적인 조치들은 은폐를 증가시킬 뿐이라는 점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었다(MacPherson et al., 1923: 123).22)
그러나 성병 문제가 전쟁을 수행하는 군의 역량을 현저히 손상할 뿐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과 압력도 크게 증가함에 따라 군 지휘부는 여러 방식으로 감염자에 대한 제재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전에 없던 처벌적인 조치들도 포함되었다. 지휘부는 그것이 예방적 효과를 발생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감염된 장병은 우선 상당한 불명예와 ‘낙인효과(stigma effect)’를 감내해야 했다. 그렇게 입원하는 장병은 입원공제(hospital stoppages, 하루에 장교는 2s. 6d., 사병은 7d.)의 대상이 되었다.23) 급료에서 일정액을 삭감하는 이 조치는 수당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공상(公傷)으로 판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입원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성병과 알코올중독을 제외한 모든 질환은 복무 중 감염된 것으로 간주되어 치료되었다는 점이다(MacPherson et al., 1923: 123). 성병으로 인한 입원은 금전적 손실에 더해 그 자체가 불명예였다.
더 큰 문제는 성병으로 입원하는 경우 그 가족(또는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통보되었다는 점이다. 원래 이는 입원과 함께 장병의 가족에게 지급되던 별거 수당(separation allowance)24) 또한 중지됨에 따라 그 사유가 통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해당 장병이 감내해야 하는 불명예와 수치, 그리고 ‘낙인’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급기야 성병으로 입원한 사실이 아내에게 통보되었음을 알게 된 한 소령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고 난 뒤인 1916년에서야 이러한 조치는 중단되었다(Payne, 2005: 32-33; Harrison, 1995: 139-140; Fuller, 1990: 75-76).25)
육군은 휴가에도 손을 댔다. 1917년 1월부터 성병에 감염된 장병은 누구든지 퇴원 후 1년간 휴가를 부여받지 못하게 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조치는 장병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휴가를 제한하여 성병 감염의 ‘억제제(deterrent)’로 기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병이 군에서 가족 또는 민간사회로 전파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의도 또한 겸하고 있었다(MacPherson et al., 1923: 123; Beckett and Simpson, 1985: 186; Ellis, 1989: 155). 아울러 성병 감염의 주요 경로를 휴가로 파악하고, 적어도 감염의 전력이 있는 이들에게는 다시 또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여지를 원천적으로 없애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비록 휴가가 금지된 기간 내에 부상이나 다른 질환으로 본국으로 후송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 그러한 조치의 실효성은 제한되는 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이 장병들에게 가하는 심리적 압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1918년 4월 상원에서 육군 장관 더비 백작(Earl of Derby)도 성병에 감염된 장병이 감내해야 하는 ‘커다란 처벌(a big penalty)’인 급료상의 불이익을 열거한 뒤에, 그에 추가하여 ‘훨씬 더 큰 처벌(a still bigger penalty)’로서 휴가 제한까지 강제됨을 강조했다.26)

2) 성매매 업소와 여성 관리

영국 육군의 많은 지휘관들은 장병의 사기가 성적 활동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Harrison, 1995: 142; Beardsley, 1976: 190). 그들은 남성은 성적 출구를 찾아야 신체적·정신적 해(害)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한 병사는 당시 ‘육군의 공식적 관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성교(性交)는 남성들에게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의학적 관점일 뿐 아니라 육군의 공식적 관점이기도 했다. 우리는 강연에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질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출해내기 위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보호수단과 예방책을 쓰는 것뿐이라는 얘기를 흔하게 들었다(Graham, 1928: 225).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육군은 프랑스 내의 인가된 성매매업소에 장병들이 출입할 수 있게 했다.27) 사실 이러한 조치는 관리와 감독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아마추어’ 성매매 여성들로부터 장병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 또한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업소들의 존재는, 한계가 없지는 않았지만 장병들의 성병 감염을 억제하는 방안으로서 나름의 효과를 내고 있었다. 하브르에 있는 업소들을 1915-1916년의 57주간에 출입했던 171,000명 중 성병에 감염된 인원은 243명에 불과했다. 루앙과 같은 다른 지역의 경우에도 상황은 유사했다(Ward, 2013: 148). 실제로 루앙의 경우, 이러한 업소에 출입이 금지되기 전 4개월 동안에 감염자는 670명이었는데 비해 금지 후 4개월간에는 834명으로 증가했다(MacPherson et al., 1923: 125).
그러나 1918년 4월에 내각은 이러한 업소에 장병들이 출입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규제된 성매매(regulated prostitution)’를 폐지하라는 시민사회의 압력이 크게 증대된 데 따른 것이었다. 1918년 3월에 영국 육군이 하브르와 카이외-쉬흐-메르(Cayeux-Sur-Mer)와 같은 항구도시에 자체적으로 성매매업소를 운영 중이라는 사실이 폭로된 이후, 반대의 목소리는 훨씬 거세졌다. 당연히 가장 격렬한 반대는 교회로부터 나왔다. 랜들데이비슨(Randall Davidson)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는 상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종교적·윤리적 관점을 설파하였을 뿐 아니라, 과학적인 분석의 결과까지 인용하며 인가된 업소의 운영이 가져올 폐해를 역설했다. 그는 그런 업소의 존재가 악을 조장하여 ‘사악한 습관(the habit of vice)’을 오히려 증가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규제’된 업소라는 점이 젊은 이들에게 잘못된 안전감을 제공하여 악을 습관화하도록 조장하고, 일단 습관화되면 더욱 악화할 뿐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28) 솔즈베리 경(Lord Salisbury)도 성매매의 공인이 ‘전쟁의 신성한 명분’이 아니라 전쟁은 ‘악(惡)과 풍기문란의 도구’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건전한 국민들 사이에서 ‘저주받은 전쟁’에 대한 염려를 키울 것이라 주장했다(Robb, 2002: 80). 여성금주협회(Women's Temperance Association)나 어머니연맹(Mother's Union)과 같은 여성단체들의 저항 또한 격렬했다. 그들은 그것을 여성만을 대상으로 국가적 규제를 공식화했던 ‘성병방지법’의 부활로 간주했다(Harrison, 1995: 144).
그러나 그러한 내각의 조치는 육군의 야전 지휘부와 충분히 교감한 결과가 아니었다. 육군의 인사행정감(Adjutant-General) 허버트 크리디(Herbert J. Creedy) 장군은 그러한 조치가 수백 명의 장병을 전투임무에서 업소 지역을 감시하는 경찰임무로 전환하게 만들 것이라며 반대했다. 미국의 경우 유사한 조치가 취해지고 난 뒤 강간이나 여성에 대한 ‘부적절한 행동(unbecoming behaviour)’이 눈에 띄게 늘어났던 점도 지적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조치가 ‘아마추어’ 성매매 여성을 증가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성병 또한 악화시킬 것이라는, 프랑스의 강력한 항의도 숙고해야 했다(Harrison, 1995: 144-146). 그러나 격화되는 반대에 직면하여 내각은 이 문제가 더 이상 군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가 되어버렸다고 판단하고, 다른 선택지가 없는 가운데 전면적인 금지조치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맥퍼슨 육군 담당 정무차관은 하원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면서 그러한 업소들을 설치한 것도, 그곳에 여성들을 공급한 것도 영국군 당국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그러한 금지 조치가 군내 성병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조치가 군 당국의 동의가 없이 이루어진 게 맞는지를 묻는 말에는 ‘동맹군의 동의’로 이루어졌다고 답했다는 점이다.29)
전선에서는 성병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거나 그렇게 확인된 성매매 여성에 대한 격리도 시행되었다. 1915년 초에 하브르에 있는 제9기지병원은 성병으로 새롭게 입원하는 모든 장병을 인터뷰하여 감염원을 특정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한 장교에게 부여했다. 그렇게 특정된 여성은 때때로 군사경찰의 협조까지 받아 검진했다. 이렇게 시작되어 확대된 조치는, 감염된 장병이 감염의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을 지목할 수 있는 경우 해당 여성에게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하고, 감염이 확인되는 경우에는 그를 해당 지역에서 추방했다. 지목된 여성들이 감염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이러한 조치는 감염된 다수 여성을 군이 주둔하는 인근에서 제거하는 데 이바지했다(MacPherson et al., 1923: 123-124).

3) 성병예방교육과 ‘대체문화(alternative culture)’ 조성

사실 감염을 줄이기 위해 왕립위원회가 정부에게 가장 강력하게 권고한 것은 성병과 그 위험성에 대한 지식의 확산을 위한 교육의 강화였다. 이를 위해 먼저 관련 과목을 의무과목으로 운영하여 의료인 사이에서 성병에 관한 전문지식을 증진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대중 또한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심각한 악(grave evils)과 그것이 현재와 미래의 국민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다 폭넓은 지식’을 갖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왕립육군의료단(Royal Army Medical Corps, 이하 “의료단”으로 칭함)에 소속된 군의관에 대한 전문교육을 강화할 것, 입대하는 모든 장병에게 최단 시일 내에 성병의 심각한 위험성에 대해 교육할 것, 그리고 최소 1년 마다 그러한 교육을 반복할 것도 요구했다(Royal Commission on Venereal Disease, 1916: 59-66).
이에 따라 ‘성병대책위원회(National Council for Combating Venereal Disease, 이하 “NCCVD”로 표기함)’ 30)는 장병교육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이 위원회는 엄선한 강사들로 전쟁 동안 영국 내에서 총 1,621,943명의 장병을 대상으로 1,956회의 강연을 시행하여 성병의 위험성을 경고했다(MacPherson et al., 1923: 120-121). 강연에는 통상적으로 아래의 10가지 요점이 포함되었다(Payne, 2005: 203). 중요한 점은, 강사들은 당국으로부터 화학적 예방법에 대한 소개나 그것의 사용을 옹호하는 내용을 강연에 일절 포함하지 않도록 분명한 지시를 받았다는 점이다(Bone, 1994: 225-226).
장병 대상 강연의 요점
① 자기제어의 중요성, ② 방탕한 생활의 해악, ③ 순결(남성 답지 않은 것도, 건강에 해로운 것도 아님을 홍보), ④ 임질과 매독에 대한 소개, ⑤ 감염을 예방하는 방법, ⑥ 성병의 치료법, ⑦ 장병들이 지켜야 할 3가지(건강한 여성을 감염시키는 것은 범죄다 / 처녀를 유혹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다 / 성매매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은 위험하다), ⑧ 성병을 막는 안전책(레크레이션 등), ⑨ 인력 유출을 막는다는 점에서 장병의 건강 유지가 갖는 중요성, ⑩ 본국과 해외에서 장병들이 마주할 수 있는 유혹들
1919년 10월에 창설되는 ‘성병예방협회(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Venereal Disease ; SPVD)’는 이처럼 도덕교육을 골자로 하는 NCCVD의 접근법에 존재하는 분명한 한계를 지적하며 의학적 예방법의 전면적인 적용을 주창했다. 의료단의 군의관들도 종교적 색채가 짙은 강연들이 총체적으로 비효과적이었다고 생각했다(Mackaman and Mays, 2000: 32-33). 실제로 강연자들은 전선의 장병들이 특수하게 직면해있는 감정적 압박이나 스트레스뿐 아니라, 성적 행동과 장병의 사기 간의 관계에 대한 군의 고유한 인식과 문화 또한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며 강연의 효과를 저하시키기도 했다(Payne, 2005: 204).
그럼에도 교육의 강화를 통한 예방의 효과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성병으로 입원하는 장병의 비율이 1915년에 1,000명당 29.65명(17,525건)에서 이듬해에 18.23명(24,108건)으로 크게 떨어졌을 때, 성병에 관한 왕립위원회의 위원이자 NCCVD의 집행위원이었던 말콤 모리스(Malcom Morris) 경은 그러한 변화를 일구어낸 일등공신으로 새로운 진단과 치료법을 찾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의료단을 지목했다. 그러나 그는 도덕적 교육 또한 나름의 못을 감당했음을 분명히 했다(Morris, 1917: 58). 특히 장교들과는 달리 종교적 열의가 기껏해야 간헐적이었던 사병들 사이에서(Baynes, 1969: 202-205) 강연은 성병에 대한 도덕적 경각심을 고취하는 효과를 내기도 했다(Mackaman and Mays, 2000: 33).
성적 활동에 대한 장병들의 관심을 전환시킬 수 있는 ‘대체문화’를 조성하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이는 장병들의 주의를 성적 유혹으로부터 ‘유익하고 깔끔한 재미(good, clean fun)’로 전환시키려는 것으로서, 다양한 레크레이션, 스포츠 이벤트, 극장 공연,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게 골자였다. 특히 장병들 사이에서 집단의식과 자긍심을 고양할 수 있는 레크레이션의 제공이 권장되었다(Pusey, 1918: 8). 이는 NCCVD의 권고와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장병들이 ‘게임과 연습’에 흥미를 느끼게 함으로써 ‘유혹을 계속하여 멀리하게’ 할 것과, 장병들이 술집, 영화관, 거리로 나갈 필요가 없도록 YMCA나 처치아미(Church Army)31) 등이 레크레이션을 제공할 것을 권고했었다. 그들은 장병이 밤거리를 목적 없이 배회하는 일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여가시간을 쓸 수 있는 다른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유혹을 피하는 데 강력한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Otto, 1916: 6). 장병의 마음과 몸을 순결하게 유지하는 게 순수하지 않은 생각에 잘못 이끌릴 기회를 차단하는 길이라는 게 그들의 인식이었다.32)

4) 「국토방위법」을 개정을 통한 사법적 노력

장병의 성병 감염을 억제하고자 하는 정부의 노력은 사법적인 부문으로 확대되었다. 영국이 전쟁에 뛰어든 지 불과 4일 뒤에 의회는 ‘공공안전의 확보와 국토방위를 위해’ 「국토방위법」을 통과시켰다.33) 이 법률은 정부에게 ‘전쟁노력(war effort)’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동원을 강제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노력을 방해하는 제반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게 했다.34) 전시내각은 1918년 3월 22일에 40D조를 추가한 이 법률의 개정안을 공표했다. 이 조항은 성병에 감염된 여성이 영국의 장병을 유인하거나 그와 성교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했다. 사실 내각은 이미 1916년 1월에 같은 법률에 13A조를 추가하여 성매매 여성들로부터 장병들을 보호하고자 했었다. 이 조항은 성매매업소를 운영, 관리 또는 지원하는 것과 관련되었거나 성매매로 유죄가 인정되었던 사람이 장병들이 결집하거나 주둔하는 인근에 거주 또는 왕래할 수 없게 했다. 육·해군 당국에게는 이를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35) 이 조항의 추가에는 캐나다를 비롯한 자치령 정부들의 요청이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무고한’ 자신들의 장병이 ‘부도덕한 여성들의 유혹에 부당하게 노출되어’ 있다고 주장했다(Bone, 1994: 222). 실제로 이 법률의 집행에 상당한 적극성을 보였던 캐나다군은 시행 한 달만에 자신들이 주둔하던 폴크스톤(Folkstone)에서 37명의 여성을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Levine, 2003: 162). 그러나 이러한 조치의 한계는 그 적용 대상을 ‘영국의 부대가 주둔하는 장소나 그 인근’으로 한정했다는 점에서 곧 드러났다. 서부전선에서 휴가를 나온 장병들이 오가는 주요 지점이었던 워털루 역(Waterloo Station)과 빅토리아 역(Victoria Station) 부근이 1916년 중반부터 성병의 주요 감염지로 지목되어도 런던의 중심부에는 이 조항을 적용할 수 없었다.
교회를 비롯한 국내의 요구도 없지 않았지만, 40D조의 신설에는 보다 강력한 조치를 바라는 자치령들의 지속적인 요구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17년 4월에 열린 제국전쟁회의(Imperial War Conference)에서 뉴질랜드의 윌리엄 매시(William Massey) 총리는 ‘런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해외 장병들에 대한 유혹’을 거론했다. 캐나다의 로버트 보든(Sir Robert Borden) 총리도 런던 중심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성매매를 통제하는 데 영국 정부가 실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성병에 감염된 여성의 구금을 요구했으며, 영국 정부의 무능이 자치령들의 전쟁노력을 손상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나아가 자치령의 지도자들은 영국이 계속하여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 장차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재고할 수도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Bone, 1994: 230). 1917년에 미국군이 연합군으로 합류하면서 한층 커진 요구는 영국 정부로부터 더 이상 물러설 수 있는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36)
그러나 40D조는 상당한 반대와 저항을 불러왔다. 1918년 6월 초까지 육군성에는 300개 이상의 항의문이 도착했으며, 내무성이 받은 것도 200개에 달했다. 같은 달, 이에 반대하는 의원들과 약 56개 조직의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남녀 간에 평등하지 못하며, 그 적용에 있어서는 부당하고, 군내 성병을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비효과적인’ 조항의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문이 발표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조항이 이전의 ‘성병방지법’과 같이 여성만을 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다시 한번 ‘악에 대한 국가적 규제’를 합법화하고 있다는 비난이 거셌다. 무고한 여성에 대한 기소나 협박을 양산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매우 컸다(Bone, 1994: 235-239).
더 중요한 점은, 육군 지휘부 또한 이러한 조치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국원정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경은 육군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정부가 ‘육군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그 구성원들로부터 간음을 줄이는 것밖에 없는’ 이들에게 항복하고 말았다고 비난했다. 아울러 그러한 조치가 오히려 더 많은 프랑스 여성들로 하여금 장병들을 유혹하기 위해 거리로 몰려들게 만들어 성병감염률은 더 높아지고 영국의 전투력은 저하될 것이라고 지적했다(Beardsley, 1976: 199).37)

5) 의학적 예방과 치료

교육을 비롯한 이러저러한 예방책이나 처벌만으로는 성병에 충분히 대처할 수 없었다. 감염을 억제하거나 조기에 진단하여 치료할 수 있는 의학적인 방법이 반드시 필요했다. 정부와 육군 지휘부가 군내 성병의 문제에 대해 도덕주의적이거나 사회적 통제에 의존하는 접근법을 취하고 있을 때, 의학적 조치들을 과감하게 도입할 것을 강력하게 주창한 존재는 의료단이었다. 그들은 미국과 캐나다 등의 접근법을 참조하여 모든 성매매 여성에 대한 강제적인 검사와 치료, 모든 감염자에 대한 강제적 치료, 모든 주요 도시의 중심부에 응급치료센터 설치, 모든 감염자에 대한 기록 유지, 감염된 장병의 급료 1/2 삭감, 휘하 장병 사이에서 감염률이 특정 수준을 상회하였을 경우 해당 지휘관 해임, 특수병원과 이동식 클리닉 설립, 성교 후 스스로 소독할 수 있도록 전 장병에게 ‘예방패킷(prophylaxis packets)’ 38) 지급 등을 요구했다(Adami, 1919: 98-101).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성병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영국 사회 전반에서 ‘도덕론자’들과 ‘의학론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던 시점에서 나온 것이었다(Towers, 1980: 70-87; Tomkins, 1993: 382-398). 때문에 의료단의 노력은 사회적 격론과 얽히면서 쉽게 실현되지 못했다. 의학적 예방법의 과감한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에 맞서 도덕론자들은 그러한 예방법이 ‘비정상적’이고 난잡한 성행위를 합법화하고, 방탕한 행위에 가해지는 자연적인 형벌을 제거함으로써 부도덕한 행위를 조장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보건성의 범부처 위원회도 ‘자기소독을 위한 패킷’의 지급이 바람직하지도 실용적이지도 않음을 지적하며 조기치료와 도덕교육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보고했다(Towers, 1980: 80). 원칙적으로, 육군도 NCCVD와 보건성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공식적 입장 내에서 나름의 대응 방안을 선택해가야 했다.
개인의 성적 절제와 성도덕을 강조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를 상속한 육군 지휘부의 기본적 입장(Harrison, 1995: 144-145)은 의료단이 직면했던 또 다른 난관이었다. 그들도 의학적 접근법의 효과성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방패킷’의 보급과 같은 조치가 장병들의 성적 절제와 그 도덕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적잖이 염려했다. 그러나 악화되는 전장의 상황과 성병으로 인한 가시적인 전투력 손실은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의학적 접근법으로의 점진적 전환을 도모할 수밖에 없게 했다.
실제로 의료단의 노력은 육군 내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불러왔다. 1916년 초에 각 부대에는 1:3,000 과망간산칼륨 용액과 염화제일수은 연고가 구비되어 있는 세척기가 놓인 격실(隔室)이 설치되었다. 성병에 노출된 장병은 이곳에서 자가소독하도록 강력하게 권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격실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타 장병에게 노출될 가능성이나 노출에서 소독까지의 적정시간이 지나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게 그 주된 원인이었다. 이에 이듬해에 의료단의 해리슨(L. W. Harrison) 중령은 장병들에게 수은크림이 도포(塗布)된 튜브를 개별적으로 공급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학적 자기예방법이 육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채택되기에는 또 한 해를 더 기다려야 했다. 1918년 들어 한층 더 악화된 인적 위기와 그해 3월에 감행된 독일의 대공세로 발생한 사기 저하는 육군으로 하여금 성병으로 인한 인력 유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여러 방면으로부터의 여전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된 육군은 1918년 초부터 영국 내에 주둔하고 있던 장병들 부터 대상으로 하여 순차적으로 개인용 예방패킷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개인적 예방법을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실험에 착수했던 아치달 리드(Archdall Reid) 경의 성공사례는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17년 초부터 2년 4개월간 소량의 과망간산칼륨 용액(1:1,000)과 면봉, 그리고 자세한 사용안내서를 장병에게 지급하여 개인적으로 적용하도록 하는 실험을 하여 2만 명 중 7명만이 성병에 감염되는 고무적인 결과를 경험했다(Reid, 1920: 130).
앞서 성병에 관한 왕립위원회는 최종보고서에서 영국 전역에 걸쳐 성병의 조기 진단과 치료를 위한 시설을 확충할 것을 권고한 바 있었다. 이를 위해 종합병원에 무료 치료센터를 부설할 것, 진단실험실을 확충할 것, 의사들에게 살바르산을 무상으로 공급할 것 등을 요구했다(Royal Commission on Venereal Disease, 1916: 45-48). 육군도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1915년부터 성병 치료를 위한 특수병원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종합병원의 일부 시설이 그런 목적으로 전용되기도 했다. 전쟁 동안 그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영국 내에만 해도 성병 치료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20개 병원(병상 약 11,000개)이 운영되었으며, 그런 시설을 별도로 운영하는 병원도 14개(병상 약 1,000개)에 달했다. 전선이 형성된 프랑스에도 하브르, 칼레(Calais), 에타플(Etaples), 루앙에서 총 4개의 대규모 병원이 운영되었으며, 그와는 별도로 4개의 소규모 병원이 운영되어 약 9,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이탈리아나 이집트 등에서도 그와 같은 시설이 운영되어 영국군 전체적으로는 약 23,900개의 병상이 그런 목적에 활용되었다(MacPherson et al., 1923: 130).

4. 맺음말

총력전은 많은 경우 그것을 수행하는 국가로 하여금 국민생활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재정의하게 만든다. 특히 그것이 ‘국가적 효율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 성생활과 같은 지극히 사적인 활동도 더 이상 사적 영역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애국심, 도덕성의 문제와 얽히면서 ‘전쟁노력’이라는 관점에서 국가의 개입을 재촉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기 영국 사회는 성병의 문제로 이와 같은 ‘사회적 통제’를 톡톡히 경험했다. 영국 사회의 높은 성병 감염률은 전쟁의 발발이 낳은 결과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과 함께 성병은 총력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의 효율성을 심각하게 손상하는 주범의 하나로 지목되었고, ‘침묵, 은폐, 금기’의 영역이던 성생활과 성병의 문제는 사회적 ‘커밍아웃’을 통해 국가적·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사회는 성병을 어떻게 볼 것인지,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것을 어떻게 예방하거나 치료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어떤 실질적 합의에도 이르지 못했다. 자기제어(self-restraint)에 기초하는 도덕성을 강조하며 성병을 ‘신이 내린 징벌(God's punishment for sin)’로 간주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관과 여전히 동거하고 있던 영국 사회는 심화하는 성병의 문제에 직면하여 도덕적 접근법과 의학적 그것 사이에서 심하게 요동쳐야 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종교, 여성, 의학, 교육 등이 매우 복잡하게 한 데 얽힌 문제였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시급한 군사적 문제이기도 했다.
전쟁 내내 성병은 1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치료를 위해 계속해서 전선을 이탈해 있게 함으로써 영국 육군 내에서 심각한 인적 유출을 야기했다. 이는 곧 전투력 손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에 대한 육군의 대응은 성병에 대한 영국 사회 전체의 대응과 마찬가지로 실패사례로 단정되어왔다. 416,891건에 달하는, 전쟁 동안 성병으로 입원한 장병의 전체적인 규모 자체가 그러한 판단을 정당화해주는 ‘스모킹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단정은 이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당시 이루어졌던 노력의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맥락과 면모를 감춰버린다. 무엇보다도 전체적 규모에만 지나치게 함몰되면 전체 병력 중 입원자의 비율(병력 1,000명 당 입원자 비율)이 감소하는 1916년의 사례는 놓치기 쉽다. 이러한 누락은 또 성병을 완화하려는 다양한 노력의 효과를 부당하게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실패’의 원인 또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여전히 ‘기술’보다 ‘사람’을 중시하던 전통에 젖어있던 육군 지휘부가 ‘패킷체계(packet system)’로 상징되는 의학적 예방법에 본능적 반감을 보인 결과가 아니었다. 그들이 성병에 관한 왕립위원회나 NCCVD의 권고를 따라 도덕적·교육적 해법만을 고수했던 결과는 더더욱 아니었다. 의학적 예방법을 좀 더 과감하고 전면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던 게 실패의 가장 결정적인 근원으로 단정하는 것은, 당시 군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었던 시대적 고민과 그들이 취하는 조치가 갖고 있었던 고유의 맥락을 무시하는,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재단(裁斷)이다. 기존 이해와는 달리 왕립위원회나 NCCVD 자체도 도덕적·교육적 노력과 더불어 치료센터의 광범위한 설립과 같은 의료적 노력 또한 주요한 전략으로 제시했으며, 결과적으로 그러한 제안이 성병 대응에 의미 있게 기여했다는 점은 기존의 도식적인 이해가 갖는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Evans, 1992: 413-433).
당시 육군의 대응은 성병 문제에 관한 영국 사회 전반의 논의가 보여준 비결정성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육군의 대응은 민간사회의 그것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결국 육군의 대응법은 육군만의 것일 수 없었다. 우선 육군은 민간사회의 다양한 집단이 가하는 압력에 계속하여 노출되었다. 이견이 적지 않았지만, 당시 성병에 대한 영국 사회의 관점과 처방을 대표하는 것은 왕립위원회와 NCCVD의 그것이었다. 그들의 접근법은 영국 정부가 선택한 관점과 대응 방향이기도 했다. 육군도 그들이 권고한 틀안에서 나름의 대응책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왕립위원회는 최종 보고서에서 군을 포함하여 성병의 실태를 분석하고 그 대책을 제시하였으며, NCCVD도 활동 대상에 적극적으로 군을 포함했다. 그런가 하면 종교계나 여성계가 기한 부단한 압력도 육군의 선택지를 더욱 제한하였다.
정부–심지어 군정(軍政)을 담당하는 육군성-와 야전 지휘부 간의 이견도 성병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접근법의 발전을 더디게 했다. 특히 인가된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는 문제나 「국토방위법」의 개정을 추진하는 일에 관해 양자가 보여주었던 분명한 입장차는 당시 성병에 대한 해법을 강구하는 과정이 육군의 자율성을 충분히 인정해주지 못하는 경로를 밟았음을 보여준다.
육군 내부에서도 성병에 대한 관점과 대응전략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야전 지휘부와 의료단이 의견을 달리했다. 대체로 전자는 일단 도덕적 접근법을 선호했다면 후자는 의학적인 길을 집요하게 주창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점은, 그러한 접근법 간에 더디기는 하지만 절충이 발생하여 교육 강화와 의학적 예방법을 결합하는, 보다 유효한-그러나 상당 부분 평가절하된-대책이 발전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Notes

1) 육군 장관(1914. 8. 5. - 1916. 6. 5.)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 원수가 프랑스 전장으로 향하는 영국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 BEF) 장병들에게 내린 훈시로, 각 장병에게 지급된 급료장부(Soldier's Pay Book for Use On Active Service)에 부착되어 있었다.

2) 이 글에서는 장군을 제외한 장교, 부사관, 병사를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육군은 가장 주요한 전구인 서부전선(프랑스, 벨기에)에서 독일군에 맞섰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살로니카(Salonika)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불가리아군에, 그리고 중동에서는 주로 터키군에 맞서 전투를 수행했다.

3) 오늘날은 ‘성매개감염병(sexually transmitted disease ; STD)’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 글에서는 당시 사용되던 용어인 ‘성병(venereal disease ; VD)’을 쓰기로 한다.

4) Hansard, HC Deb 23 April 1917, vol. 92, cc 2091-2092.

5) 이 위원회는 영국 내에서 성병이 확산한 정도와 그것이 공동체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그러한 효과를 완화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수단을 조사하여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1913년에 출범했다.

6) 성병에 관한 왕립위원회는 1916년 최종보고서에서 매독(syphilis)의 경우 감염자의 비율이 대도시 전체 주민의 10% 이상에 달할 것으로 판단했다. 임질(gonorrhea)의 경우에는 그 비율이 훨씬 더 높을 것으로 추정했다(Royal Commission on Venereal Disease, 1916: 23).

7)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육군의 장군들을 ‘당나귀’나 ‘서툰 직공과 도살업자’로 비판하는 이들은 영국원정군(BEF) 총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Douglas Haig)를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이 사기, 정신력, 애국심과 같은 인간적·정신적 요소들을 가장 중시하여 기관총, 탱크, 항공기와 같은 무기체계들로 상징되는 기술적 변화를 수용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전쟁을 장기화하고 젊은 장병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8) 예를 들어 1862년에 본국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육군 전체 병력의 33%가 성병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Spiers, 1980: 162).

9) 버틀러를 비롯한 ‘폐지론자(Abolitionists)’들은 이동의 자유나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의학적 검사를 받을 수 있는 권리 등과 같은, 성매매 여성의 기본적 자유를 제약하는 국가적 규제에 저항했다.

10) 1916년 12월 31일 요크에서 있었던 설교 내용(The Times, 1 Jan. 1917).

11) 코스모 랭 대주교의 진술(1915년 4월 21일)(Ferris, 1993: 77).

12) 대영제국을 구성하던 자치령(Dominions)들도 많은 병력을 파견하여 영국의 전쟁노력에 실질적으로 기여하였다. 1918년 11월 1일까지 캐나다 458,218명, 호주 331,814명, 뉴질랜드 112,223명, 남아프리카 76,184명, 뉴펀들랜드 6,173명이 다양한 전선에서 영국군과 더 불어 전투에 임하고 있거나 이를 위해 훈련 중에 있었다. 이를 당시 각 자치령에 거주하던 백인 남성의 규모와 대비하면, 캐나다 13.48%, 호주 13.43%, 뉴질랜드 19.35%, 남아프리카 11.12%에 해당했다(War Office, 1922: 363).

13) 전쟁기 군내 성병 감염률을 추정해볼 수 있는 공식적인 자료는 입원통계가 유일하다. 감염 사실을 감추거나 부대 내에서 은밀히 치료하는 경우도 많았음을 고려했을 때(Harrison, 1995: 75), 실제 성병 감염 장병의 비율은 상당 정도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14) 감염 장병 중 66%는 임질, 24%는 매독, 나머지(10%)는 기타 성병이었다(MacPherson et al., 1923: 118).

15) 급식의 대상이 되는 장병의 전체 규모를 의미한다. 전투병력 외에도 비전투병력과 각종 지원병력까지 포함한다.

16) 휴가는 병사의 경우 보통 1년에 1회(10일간), 장교는 6-8개월마다 고향을 방문할 수 있었다(Ellis, 1989: 157).

17) 예를 들어 1916년에 본국에 주둔하던 영국 육군의 감염률이 1천 명 당 36.7명이었음에 반해 캐나다군은 209.4명이었다. 1917년에도 영국 육군은 32명이었는데 호주군은 85명이었다(Ellis, 1989: 153).

18) Hansard, HC Deb 27 March 1917, vol. 92, cc 382-383.

19) Hansard, HC Deb 12 July 1917, vol. 95, c 2132W

20) Hansard, HC Deb 27 March 1917, vol. 92, cc 382-383.

21) The King's Regulations and Orders for the Army: 1912, p. 107, paragraph 462 ; Army Act, 1907, Sec. 11(Neglect to obey garrison or other orders).

22) 성병에 감염된 사실은 이러한 규정에 따라 우선적으로 해당 장병의 자발적인 보고에 의존하여 확인되었다. 그러나 군의관의 정기적인 검진이나 소속 중대 장교들이 실시하는 위생 검사로 감염이 추정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군의관은 해외의 전선에서 복무하기 위해 이동하는 선상에서부터 병사들을 엄격하게 검사하여 감염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War Office, 1890: 32).

23) 여기에 더해 지휘관의 재량으로 숙련수당(proficiency pay)도 지급되지 않을 수 있었으며, 장교나 준사관의 경우에는 입원해 있는 동안 야전수당(field allowance)도 박탈되었다.

24) 예를 들어 1915년 3월에 변경된 지침에 따르면, 아내와 두 자녀를 두고 있는 준사관은 매달 31s. 6d.를 별거수당으로 가족에게 보내줄 수 있었다. 당시 보병 중령의 매월 기본급이 28s. 0d.이었다.

25) 1916년 이후에는 그 가족에게 ‘아직 정확히 진단되지 않은 질환으로 입원’했다고 통보되었다.

26) Hansard, HL Deb 11 April 1918, vol. 29, cc 684-685.

27) 청등(靑燈)이 켜진 업소에는 장교들이, 홍등(紅燈)에는 사병들이 출입했다.

28) Hansard, HL Deb 11 April 1918, vol. 29, cc 669-670.

29) Hansard, HC Deb 19 March 1918, vol. 104, cc 787-788.

30) 이 위원회는 1914년 11월에 출범하였으며, 1916년 왕립위원회의 최종 권고 이후 성병 관련 지식과 자문 제공을 위한 독립적이고 권위 있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31) 1882년에 윌슨 칼라일(Wilson Carlile)에 의해 창설된, 영국국교회의 전도단체이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본국과 프랑스 등지에서 장병들을 위한 레크레이션 장소를 제공해, 하루에 2만 명의 장병을 수용하기도 했다. 구급차와 이동식 매점 등도 운영했다.

32) 장병들의 정신적 복지를 위한 노력도 강화되었다. 사단별 1명의 군목(혹은 사제)를 운영하던 독일 육군의 경우와는 달리 영국 육군에서는 각 사단에 3명의 군목이 배치되었다(Ellis, 1989: 155-156).

33) London Gazette (Supplement), 1 September 1914, 6968–6969.

34)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이 법률은 6회 수정되었다. 이 법률에 근거하여 ‘이적행위’로 전쟁 동안 10명이 처형되었다. Hansard, HC Deb 22 May 1940, vol 361, cc 185-186.

35) London Gazette, 28 January 1916, 1118.

36) 제국전쟁회의에서 논의를 거쳐 1918년 7월에 40D조는 미국군에게도 적용되도록 개정되었다.

37) 「국토방위법」 은 1918년 11월 25일에 폐지되었다.

38) 장병 개인이 직접 사용할 수 있게 만든 휴대품으로서, 염화제일수은(calomel)과 석탄산(carbolic acid)을 주로 하는 ‘Metchnikoff's Formula’나 과망간산칼륨(potassium permanganate)으로 만들어진 ‘Condy's Fluid’가 채워져 있었다.

Table 1.
Fresh Admissions to Hospital in France for VD, showing Country in which disease was contracted (Jan., 1915 ∼ May 1918).
표 1. 성병으로 새로 입원한 장병들의 감염 장소(1915년 1월 ∼ 1918년 5월)
임 질 (%) 매 독 (%) 기 타 (%) 총계 (%)
프랑스 27,180 (46.79) 5,847 (36.05) 7,793 (46.05) 40,820 (44.74)
영 국 24,665 (42.46) 7,821 (48.22) 6,076 (35.90) 38,562 (42.27)
기타 국가 1,834 (3.16) 804 (4.96) 580 (3.43) 3,218 (3.53)
불명(不明) 4,410 (7.59) 1,746 (10.77) 2,475 (14.62) 8,631 (9.46)
총 계 58,089 16,218 16,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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