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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0(1); 2021 > Article
조선 후기 의학의 표면과 이면 - 의학 지식 체계를 중심으로 -†,††

Abstract

Many medical books of the late Joseon Dynasty were based on the medical knowledge of Donguibogam. For this reason, most of the studies have explained the medicine of the late Joseon Dynasty focusing on Donguibogam. However, the appearance of medicine in the late Joseon Dynasty is more complex than that. Although the “treatment knowledge” of Donguibogam had a huge impact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medical thought” of Donguibogam was not easily established.
This is confirmed through the knowledge system of medical books in the late Joseon Dynasty. Jejungsinpyeon, published by the government in the late Joseon Dynasty, disassembled the contents of Dongibogam and rearranged it into a knowledge system of Uihagibmun. Injeji, which was made in the private sector, followed the same method. They tried to maintain part of the knowledge system of Donguibogam. Nevertheless, the framework of perception that extends from “human” to “disease,” the central idea of Donguibogam, was not maintained.
This shows that there was a considerable amount of respect for the medicine of Ming Dynas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refore, for a more in-depth understanding of medicine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is necessary to examine in more detail the influences of other medical books such as Uihagibmun, Bonchogangmok, and Gyeongakjeonseo in addition to Donguibogam. This should be understood as a process in which various medical knowledge and systems compete.

1. 머리말

조선 전기에는 향약(鄕藥)의 개발과 보급을 위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집필되었고, 동아시아 의학의 이론과 처방을 집대성하기 위해 『의방유취(醫方類聚)』가 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의학 지식은 크게 함양되었다. 그 역량을 바탕으로 조선 중기에 이르러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저술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허준은 조선의 특성을 반영한 ‘동의(東醫)’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조선 후기에는 『동의보감』을 근간으로 임상의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고, 각종 분과 서적을 통해 본초·침구·소아과·외과 등이 폭넓게 발전하였으며, 실학과 서양학문의 영향도 받았다(김기욱 외, 2006: 301-302). 이와 함께 사적 의료가 성장하고 시장 경제가 발달하면서 많은 향의(鄕醫)가 활동하여 다양한 의서가 저술되었고, 약재의 수급도 용이하게 되어 민간에서도 고급 처방을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신동원, 2006: 1-29; 김성수, 2009: 43-68).
이러한 조선 후기 의약 부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연 『동의보감』의 역할이다. 조선 후기 의서에서 『동의보감』을 참조하지 않은 서적은 매우 희소하다. 이 가운데에는 단순한 참조를 넘어서 『동의보감』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서적도 적지 않다.1) 이러한 현상에 대해 미키 사카에(三木榮)는 “실로 허준이 수립한 의학, 특히 『동의보감』은 조선 중기 의학의 큰 호수이며 여기에서 흘러나온 하천이 조선 말기까지 그 혜택을 주었다.”고 하였고(三木榮, 1963: 184), 신동원은 『동의보감』이 ‘동의(東醫)’의 전통을 개막하여 조선 후기에 그 전통이 확립되었다고 평가하였다(신동원, 2015: 329-332).
그러나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기 마련이고, 모든 현상에는 예상치 못한 이면의 모습이 존재하곤 한다. 『동의보감』이 끼친 막대한 영향이 조선 후기 의학의 표면적인 모습이라면, 그 이면을 엿보는 작업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동의보감』이 수립한 동의(東醫)의 유산이 후대에 수용되는 과정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의학 지식’과 ‘의학 사상’을 구분하여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 사용한 ‘의학 지식’은 낱낱의 치료 정보를 가리키고, ‘의학 사상’은 의학자가 인간·질병·치료에 대해 가진 생각을 의미한다. 동아시아 전통의학에서 의학 지식, 즉 치료 정보는 일단 전해진 뒤에는 크게 변형되거나 달라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학 사상의 경우는 본질적으로 의학자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의서의 경우 의학 지식을 배열하는 방법 및 취사선택한 결과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동의보감』의 의학 지식을 많이 인용했다는 것과 『동의보감』의 의학 사상을 수용하거나 계승했다는 것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앞 시대 의학 지식을 집적한 서적의 경우, 개개 의학 지식의 차별성으로는 책의 특성을 파악하기에 한계가 많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의학 사상’에 집중하였고, 의학 사상의 일단을 읽어내기 위해 ‘의학 지식 체계’에 주목하였다. 본고에서 말한 의학 지식 체계는 의학 지식을 어떻게 정리했는가에 대한 것으로, 의서의 경우 구체적으로 책의 목차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의서에 담긴 저자의 의도는 책을 어떻게 구성하였는가, 어떤 의학 지식을 취하고 어떤 의학 지식을 취하지 않았는가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서문 혹은 범례에 나타난 저자의 생각도 중요한 논거로 삼았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17-19세기 조선 후기 의학자들의 지식 정리 양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에서는 먼저 중국의 명대(明代) 의학자들이 금원시대 의학을 소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그 결과를 담고 있는 『의학입문』과 그것에 반대하여 새로운 체계를 모색했던 『동의보감』을 비교할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동의보감』의 의학 사상을 구체적인 ‘의학 지식 체계’로 환원하여 설명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동의보감』의 영향을 받은 『제중신편』과 『인제지』가 『동의보감』의 목차를 비틀고 변형하는 과정에서 『동의보감』에 내제된 “허준 체계”와 명대 의학을 대표하는 “이천 체계”가 갈등하는 모습을 포착할 것이다.

2. 명대 의학 지식 체계의 성립

1) 금원의학 통합의 과제

  • 위로는 창공(倉公)·진월인(秦越人)으로부터 아래로는 유완소·장종정·주진형·이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가들이 연이어 일어나 논설이 분분하였고 경전에서 실마리를 가져다가 문호를 다투어 세웠다. 그러나 책이 많아질수록 의술은 더욱 어두워져 『영추(靈樞)』의 본지와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다.2)

이정귀(李廷龜)는 『동의보감』 서문에서 위와 같은 말로 의학 지식을 정리해야 하는 당위성을 표현하였다. 헌원(軒轅)·기백(岐伯) 혹은 창공(倉公)·진월인(秦越人) 이후로 많은 의가들이 저마다의 의론을 내세워 많은 책을 세상에 내었으나 오히려 옥석을 가리기 어려워졌다는 요지의 글은 『동의보감』 외에도 금원시대 이후 만들어진 의서 서문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3) 일견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말이지만, 15-16세기 환자를 치료했던 의가들에게는 더없이 절실한 문제였다.
송대(宋, 960-1127)에는 교정의서국(校正醫書局)에서 의서를 간행하는 한편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992)·『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 (11C말)과 같은 대규모 의방서를 편찬하여 의료지식을 집약하고 널리 전파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금원시대(金元, 1115-1368)에 의학 이론이 창발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유완소(劉完素, 약1110-1200), 장원소(張元素, 1131-1234), 장종정(張從正, 1156-1228), 이고(李杲, 1180-1251), 주진형(朱震亨, 1281-1358) 등 걸출한 의가들에 의해 치료 경험들이 의학 이론으로 수준 높게 체계화 되었다.
이들 금원시대 의가들은 『황제내경(黃帝內經)』과 같은 한의학의 전범(典範)으로부터 의학 이론을 이끌어 치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유완소는 육기(六氣)로 발생한 질병이 종국에는 열병(熱病)으로 바뀐다는 점을 중시하여 고한(苦寒)한 성질의 약재로 청열(淸熱)시키는 치료 방법을 주창하였다. 장원소는 오장(五臟)을 기준으로 질병을 이해하였고, 이고는 그의 이론을 심화시켜 중기(中氣)를 치료의 중심에 놓고 치밀하게 약재를 운용하여 오장육부(五臟六腑)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병사(病邪)를 배출하는 것이 치료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던 장종정은 구토시키거나 땀내거나 설사시키는 치료로 탁월한 치료 효과를 거두어 그 내용을 후세에 남겼다. 주진형은 유완소와 같이 발열이라는 증상에 천착하였지만 음(陰)을 보충하는 것이 치료의 관건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한결 같이 『황제내경(黃帝內經)』과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을 근거로 삼았으나 저마다 다른 의학 이론과 치료 방법을 제시하였다.
금원시대를 거치며 의학 이론은 풍성해졌지만 임상 현장에서는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었다. 동일한 병증에 대해서도 치밀한 변증과 다양한 치법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어떤 변증을 적용하여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이 정점에 이른 시기는 금원시대 의학의 성과가 누적된 명(明, 1368-1644) 초기였다. 명대 의학자들은 금원시대의 성과를 소화하여 정리하는데 집중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의학 지식을 정리할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명대 의학의 중요 과제였다.

2) 루영 체계의 대두

금원시대까지의 의서들은 대부분 단순히 치료 정보들을 나열하거나 자신의 논설을 모아 놓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수집된 치료 정보를 정리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원시대가 지나자 의학자들은 의서에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 시기 의학 지식을 충분히 정리해야만 했다. 방대한 분량에 다양한 병증을 포괄하고 있는 종합의서는 금원시대에 풍부해진 의학 지식이 낳은 하나의 현상이다(맹웅재 외, 2006: 266-268). 이런 문제는 금원시대 의학을 종합한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는 『의학강목(醫學綱目)』(1565)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 후세 의사들이 전해진 처방들을 써서 병을 치료하면 효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병명이 같더라도 치법이 다르므로 증상에 맞을 때도 있고 맞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병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오열병(惡熱病)의 경우, 열병(熱病)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치료하는 방법은 다르다. 사군자탕(四君子湯)은 혈실(血實)로 생긴 열을 치료하고, 사물탕(四物湯)은 혈허(血虛)로 생긴 열을 치료한다. 백호탕(白虎湯)은 기실(氣實)로 생긴 열을 치료하고,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은 기허(氣虛)로 생긴 열을 치료한다. 마황탕(麻黃湯)은 체표의 열을 다스리고, 승기탕(承氣湯)은 체내의 열을 다스린다. 사역탕(四逆湯)은 허열을 치료하고, 시호탕(柴胡湯)은 실열을 해소한다. 사청환(瀉靑丸)·도적산(導赤散)·사백산(瀉白散)·자신환(滋腎丸)·사황산(瀉黃散)은 오장(五臟)의 열을 치료하지만 각기 쓰임이 다르다. 각각 맥과 증을 밝혀 핵심을 꿰뚫어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4)

『의학강목』은 금원시대 의학을 폭넓게 정리한 가장 이른 시기의 저술이다.5) 저자 루영(樓英, 1332-1401)은 의학 지식을 종합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 평생 의학 이론을 탐구하였으며, 금원시대 이후까지의 의학 지식을 음양오행이라는 틀에 맞추어 정리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완성된 책이 『의학강목』이다.
루영은 음양(陰陽)과 오장(五臟)(혹은 오행五行)으로 목차를 삼고 관련된 의학정보들을 가감 없이 출전과 함께 인용하였다. 다양한 지식들을 정리하는 틀로 음양오행을 선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간담부(肝膽部)를 보면, 중풍(中風), 현(眩), 치(痓), 파상풍(破傷風), 여풍(癘風), 제비(諸痺), 경계정충(驚悸怔忡), 노(怒), 선태식(善太息), 목질(目疾), 협통(脇痛), 제산(諸疝), 폐륭유닉(閉癃遺溺), 전음제질(前陰諸疾), 근(筋), 두풍통(頭風痛), 다와부득와(多臥不得臥), 인후(咽喉)의 병증들이 담겨 있다. 한의학의 모든 병증을 오장으로 분류하여 다소 억지스럽기도 하고 찾아보기 불편한 점도 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음양오행으로 책의 구성을 고집한 것은 음양오행이 의학 지식 체계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6)
그러나 음양오행이라는 틀을 통해 의학 이론을 정리하려던 루영의 시도는 사실상 반쪽의 성공에 불과했다. 상한(傷寒)에 대해서는 책 후반부에 따로 수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상한(傷寒)의 이론은 육경(六經) 체계로 이루어져서 음양오행의 틀로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루영은 오장으로 지식을 엮고 오장으로 포괄하지 못한 것들을 뒤에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오장-육경이라는 틀로 의학 지식을 정리한 셈이다.(<표 1> 참조)
루영이 당시까지의 의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냈지만, 활용적인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책은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이 의학이론들을 어떻게 적재적소에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해답을 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이론을 두루 모아 두었으니 변증을 잘해서 치료하라는 루영의 방법은 대다수 의사들에게 미봉책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3) 왕륜 체계의 등장

이 문제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은 왕륜(王綸, 15세기 중엽-16세기 초)이다. 왕륜은 “외감병(外感病)은 중경(仲景, 장기張機)을 따르고, 내상병(內傷病)은 동원(東垣, 이고李杲)을 따르며, 열병(熱病)은 하간(河間, 유완소劉完素)을 따르고, 잡병(雜病)은 단계(丹溪, 주진형朱震亨)를 따른다.”라고 하여 임상에서 환자의 병증을 ‘외감’, ‘내상’, ‘열병’, ‘잡병’으로 구분하여 치료하라는 기준을 마련했다. 아래 설명은 『명의잡저(明醫雜著)』(1502) 본문 가운데 가장 처음 등장하는 글로, 왕륜이 자신의 의학 사상을 직접 서술한 부분이다.
  • 어떤 이가 물었다. “중경·동원·하간·단계의 서적 가운데 누구 것이 좋습니까? 의학을 배울 때 어떤 것을 봐야 합니까?”

  • 내가 말하였다. “오로지 『내경』을 공부하고 널리 네 사람의 책을 보면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의학에 있어 『내경』은 유학(儒學)에서 육경(六經)과 같아 익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사람의 의론은 『대학』·『중용』·『논어』·『맹자』와 같이 육경을 이해하는 계단이 되므로 하나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네 사람의 책은 애초에 우열이 없고 각기 한 가지씩 밝힌 것이 있습니다. 장중경은 『내경』에 상한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지만 병이 전경되고 다시 재발하는 정황이 상세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았기에 의론을 쓰고 처방을 만들어 병의 변화를 모두 담아 놓았습니다. 뒷사람이 그의 방법을 따랐으나 전하여 쓴지 이미 오래되어 중경의 본뜻을 점차 잃고 온서병·내상병까지 두루 사용하여 마침내 환자들을 그릇되게 치료하였습니다. 이때 유하간이 나와 온서병의 치료 방법을 비로소 밝혀내고, 동원이 나와 내상병의 치료 방법을 밝혔습니다. 하간의 의론은 『내경』에 있는 오운육기의 뜻이고, 동원의 학설은 『내경』에 있는 음식노권의 뜻입니다. 중경이 온서와 내상을 모른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저술한 책에 상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간과 동원은 상한을 치료할 때 중경의 방법을 따라 쓰고 감히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단계가 여러 의가들이 이룬 것을 모아 음허발열이 외감이나 내상과 유사하며, 습열과 상화가 병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밝히고 증상에 따라 의론을 적었습니다. 이 역시 『내경』의 요지를 밝히고 앞 현자들이 미처 갖추지 못한 것을 보충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외감병(外感病)에는 중경의 방법을 따르고, 내상병(內傷病)에는 동원의 방법을 따르고, 열병(熱病)에는 하간의 방법을 쓰고, 잡병(雜病)에는 단계의 방법을 쓰면 하나로 꿰뚫어질 것이니 이것이 의학의 전부입니다.”7)

왕륜은 루영과 같이 금원시대 의학이 『내경』과 『상한론』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이들 각각이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영이 ‘음양’과 ‘오행’으로 의학 지식의 체계를 수립한 것과 달리, 왕륜은 질병을 ‘외감-내상-열병-잡병’의 4가지 범주로 분류하고 그에 맞는 의학 이론을 적용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는 환자의 질병을 4가지 범주 가운데 하나로 나누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침을 준 셈이다.
왕륜의 이러한 구분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외감-잡병이라는 인식은 금원시대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으며, 이런 인식에 따라 많은 의서들이 전반부에 풍(風)·한(寒)·서(暑)·습(濕)·조(燥)·화(火)의 육기(六氣)가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병증을 논하고, 이어 나머지 병증을 논하는 구조를 보인다. 따라서 왕륜의 해법은 기존 의학계에서 통용되던 인식을 당시의 상황에 맞게 변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의학자들이 쉽게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륜의 주장은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명말 의서로서 조선에 많은 영향을 미친 공신(龔信, 미상)의 『고금의감(古今醫鑑)』(1576), 공정현(龔廷賢, 1522-1619)의 『만병회춘(萬病回春)』(1587), 이천(李梴, 16세기)의 『의학입문』(醫學入門)』(1580경)은 모두 왕륜의 견해를 따랐다. 일례로 공정현은 『만병회춘』 총론에 해당하는 「만금일통술(萬金一統述)」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 하였다. 이 말을 통해 공정현 역시 왕륜 체계를 수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외감병(外感病)은 장중경(張仲景)을 따르고, 내상병(內傷病)은 이동원(李東垣)을 따르고, 열병(熱病)에는 유하간(劉河澗)의 방법을 쓰고, 잡병(雜病)에는 주단계(朱丹溪)의 방법을 쓴다.8)

4) 이천 체계의 확립

『만병회춘』과 거의 동시대에 만들어진 『의학입문』 또한 금원시대 의학의 정수를 정리하기 위해 왕륜이 제시한 외감-내상-열병-잡병 체계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기존 의서들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이 원칙을 책의 편집 형태에 반영하기에 이른다. 왕륜 체계를 책 전체로 확장하여 외감-내상-잡병으로 목차를 구성한 것이다. 의학이론 전체를 왕륜의 틀 안에서 정리하려는 시도였다.
저자 이천(李梴, 16세기)은 자신의 책을 내집(內集)과 외집(外集)으로 구분하였다.9) 내집은 권수에서 권2까지로 책의 목차 및 기초이론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10) 외집은 권3에서 권7까지로 외감(外感)·내상(內傷)·잡병(雜病)·부인(婦人)·소아(小兒)·외과(外科)·괴질(怪疾)·구급(救急)의 내용과 이에 해당하는 처방들로 이루어져 있어 질병 치료의 기술적인 부분을 서술해 놓았다(차웅석 외, 1999: 67-70).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병증을 논하는 외집 부분이다. 외집이 시작되는 권3에는 외감(外感)과 내상(內傷)의 의론과 처방이 실려 있다. 외감은 다시 온서(溫暑)와 상한(傷寒)으로 구분된다. 각각의 서두에는 ‘하간유선생온서찬요(河間劉先生溫暑纂要)’, ‘중경장선생상한찬요(仲景張先生傷寒纂要)’, ‘동원이선생내상찬요(東垣李先生內傷纂要)’를 두어 온서, 상한, 내상을 각각 유하간(유완소), 장중경(장기), 이동원(이고)의 의론에 따른다고 천명하였다. 권4 잡병(雜病) 역시 서두에 ‘단계주선생잡병찬요(丹溪朱先生雜病纂要)’라는 글을 두어 주단계(주진형)의 의학 견해를 위주로 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이천은 종합의서로서는 처음으로 왕륜의 체계를 목차에 적용하였다.
이천은 이 과정에서 왕륜 체계를 외감-내상-잡병이라는 3분법으로 다시 정리하였다. 하간의 온서와 중경의 상한을 외감이라는 틀로 묶을 수 있다고 착안한 것이다. 이는 왕륜 체계의 변형으로 ‘이천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천 체계는 왕륜 체계를 더 정리해냈지만 동시에 왕륜 체계가 내포한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바로 ‘잡병(雜病)’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 왕륜의 논지를 보건대 잡병은 열병·상한·내상으로 특정되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가리킨다.11) 하지만 ‘나머지’라고하기에 잡병은 너무 큰 범주다. 『의학입문』에 정리된 분량에서도 드러나듯 열병·상한·내상 전체를 합한 것보다 양이 더 많다. 왕륜은 잡병을 체계화하는 데까지 사고를 진행시키지 않았지만 이천은 여러 병증을 잡병 안에서 정리해야 했기 때문에 잡병을 다시 외감과 내상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이는 외감과 내상에 대한 개념적인 혼란을 야기하게 되었다. 『의학입문』의 목차구성이 매우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3. 허준 체계의 성립과 동의(東醫)의 선언

『의학입문』은 『동의보감』에 영향을 미친 서적 가운데 하나로, 인용된 의학 지식의 양으로 본다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김중권, 1995: 207-243). 그러나 허준은 『의학입문』에서 제시한 지식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고12) 독자적인 체계를 모색하였다. 『동의보감』은 병의 원인이나 의학자들의 주장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인간의 몸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소재에서 해답을 찾았다.13)
  • 신이 삼가 살피건대, 사람의 몸속에는 오장육부가 있고 겉에는 근골(筋骨)·기육(肌肉)·혈맥(血脈)·피부(皮膚)가 있어 형태를 갖추며, 정(精)·기(氣)·신(神)이 또 장부와 온몸의 주인이 됩니다. 도가(道家)의 삼요(三要)와 석씨(釋氏)의 사대(四大)가 모두 이것을 말합니다. 『황정경』에는 몸 속의 모습[內景]에 관한 글이 있고, 의서에도 몸의 내외의 모습을 그린 그림[內外境象之圖]이 있습니다. 도가에서는 청정(淸靜)과 수양(修養)을 근본으로 삼고 의사들은 약이(藥餌)와 침구(鍼灸)로 병을 치료하니, 도가는 정밀한 것을 얻었고 의문(醫門)은 거친 것을 얻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먼저 몸속 모습[內景]인 정(精)·기(氣)·신(神)·장부(臟腑)로 내편(內篇)을 삼은 다음, 겉 모습인 두(頭)·면(面)·수(手)·족(足)·근(筋)·맥(脈)·골(骨)·육(肉)으로 외편(外篇)을 삼았습니다. 또, 오운육기(五運六氣), 사상(四象)과 삼법(三法), 내상(內傷)과 외감(外感), 온갖 병의 증상들을 나열하여 잡편(雜篇)으로 삼았고, 끝으로 탕액편(湯液篇)과 침구편(鍼灸篇)을 두어 그 변화를 다하였습니다.14)

위와 같이 허준은 질병을 논하기에 앞서 ‘인간’과 ‘질병’으로 크게 범주를 나누었다. ‘인간’은 다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안’과 겉으로 드러나는 ‘밖’으로 나누어 내경-외형 체계를 만들었다. 그런 뒤에 질병 전체를 잡병이라는 범주로 묶고, 이를 외감-내상-기타의 순서로 서술하였다. 이렇게 내경-외형-잡병 15)으로 이어지는 논리적인 구성을 세우고(이하 ‘허준 체계’), 각 병증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특히 정(精)·기(氣)·신(神)과 장부(臟腑)를 몸의 주인으로 보았기에 책의 전면에 내세웠다. 이런 원칙 때문에 부인과 질환을 둘로 나누어 월경과 관련된 질환은 내경(內景)의 포문(胞門)에 두고, 임신 출산과 관련된 제반 질환은 잡병(雜病)으로 분리시켰다.
『동의보감』에 나타난 허준 체계 역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송대 편찬된 『삼인극일병증방론(三因極一病證方論)』이나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 가까이 조선의 『의방유취(醫方類聚)』의 목차를 보면, 오장육부와 육기(六氣)를 중심으로 질병을 서술하려는 태도가 드러난다. 여기서 오장육부가 인체를 뜻한다면 육기는 질병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이를 본다면 허준 체계는 이러한 전통을 고도로 체계화시킨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동의보감』이 『의학입문』에서 많은 의학 지식들을 흡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식 체계에 있어서 이천 체계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16) 『동의보감』이 남의(南醫)·북의(北醫)와 다른 동의(東醫)를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자적인 지식 체계를 고안해 냈기 때문일 것이다. 『동의보감』이 매우 이례적으로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도17) 『동의보감』의 이러한 시도가 당대 의가들에게 납득할만한 해답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허준이 집례(集例)에서 자신이 극복한 왕륜 체계의 개창자인 왕절재(왕륜)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 왕절재(王節齋)가, “동원(東垣)은 북의(北醫)인데, 나겸보(羅謙甫)가 그 법을 전수받아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지역에까지 명성이 알려졌다. 단계(丹溪)는 남의(南醫)인데, 유종후(劉宗厚)가 그 학문을 이어받아 섬서(陝西) 지역에까지 명성을 떨쳤다.”라고 하였으니, 의가에서 남북(南北)의 명칭이 있어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동방에 치우쳐 있으나 의약(醫藥)의 도는 면면히 이어졌으니 우리나라의 의학도 ‘동의(東醫)’라고 할 수 있습니다.18)

4. 조선 후기 동의(東醫) 전통의 전개

『동의보감』은 명대 의학자들이 주창한 지식 체계에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와 구분되는 체계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에 허준은 내경-외형-잡병이라는 체계를 고안하여 그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동의보감』에 실려 있는 개별 의학 이론과 치료 지식이 대부분 중국의 그것을 인용하고 있음에도 중국과 다른 동의(東醫)를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독자적인 의학 지식 체계가 정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의가들은 동의 전통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허준 체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동의보감』의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서적들이 많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동의보감』을 추존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작 조선 후기 의서에서 허준 체계의 모습은 그리 뚜렷하지 않다. 오히려 이천 체계를 상당히 의식한 듯 보인다. 이 문제가 더욱 첨예한 이유는 이천 체계로 만들어진 『의학입문』과 허준 체계로 만들어진 『동의보감』이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이 읽힌 의서였다는 점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조선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의서를 통해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제중신편』을 분석하였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유일의 관찬의서로서 『동의보감』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많은 서적들의 모범이 된 서적이다. 다음으로 『인제지』를 고찰하였다. 『제중신편』이 관찬의서로서 임상 활용에 목적을 두고 의관(醫官)에 의해 편찬되었다면, 『인제지』는 민간에서 의료인이 아닌 저자가 『동의보감』을 바탕으로 의학 지식의 확장하여 집적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저작으로서, 성격에 있어서 『제중신편』과 대척점에 있다. 마지막으로 『의종손익』과의 비교를 통해 『제중신편』과 『인제지』의 지식 체계가 이천 체계에 가깝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자 한다.

1) 『제중신편』의 지식 체계

『제중신편』은 내의(內醫) 강명길(康命吉)이 정조(正祖)의 명을 받아 지은 의방서(醫方書)로 정조 23년(1799)에 간행되었다. 이 책은 『동의보감』이 임상에서 사용하기에 번잡하다는 점에 주목한 책이다. 정조는 강명길에게 새로운 의서 편찬을 지시하면서 『동의보감』에 대해 “글이 번잡하고 중복되었으며 병증이 빠진 곳도 있고 써야할 처방들도 실리지 않은 것이 많다”19)고 평가하였다. 이에 강명길은 『동의보감』의 의론과 처방의 내용을 대폭 축소하고 여기에 새로운 내용을 덧붙여 8권으로 구성된 의서를 만들게 된다.
『동의보감』이 하나의 병증에 대해 그 시원(始原)부터 다양한 의학유파의 견해까지 상세하게 다룬 것에 비해, 『제중신편』에서는 병증 치료에 필요한 핵심 요점만 간추렸다. 처방의 종류도 대폭 줄여 선택에 제한을 두었다. 『동의보감』은 금원시대 이후 의학 지식의 통합을, 『제중신편』은 『동의보감』을 토대로 임상에 유용한 치료 지식의 정리를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이다.20) 이를 위해 『제중신편』의 저자 강명길은 『동의보감』뿐만 아니라 『경악전서』·『본초강목』 등 『동의보감』이 포괄하지 못했던 내용을 담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했다.
강명길 입장에서 책을 구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동의보감』의 목차를 그대로 두고 내용을 요약한 다음 거기에 새로운 치료 지식을 덧붙이는 일이었을 것이다.21) 그러나 그는 조금 다른 방법을 택했다. 내상·허로를 중심으로 잡병편(雜病篇)을 둘로 나누고, 그 사이에 내경과 외형의 내용을 옮겨 넣었다.22) 이리하여 『동의보감』에서 잡병 전반부에 두었던 육기(六氣)와 내상(內傷)·허로(虛勞)가 책머리로 나오게 되었고, 이어 내경(內景)·외형(外形)이 뒤따르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다시 잡병(雜病) 후반부에 있었던 곽란(霍亂)·구토(嘔吐)·해수(咳嗽) 등의 내용이 배치되었다.(<표 4> 참조)
『제중신편』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소소한’ 목차 이동의 이유는 무엇일까.23) 책에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그 결과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바가 있다. 『제중신편』의 체계는 일견 『동의보감』의 목차 순서를 잘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육기(六氣)·내상(內傷)·허로(虛勞)를 책 앞으로 옮김으로써 허준이 제시했던 인간에서 질병에 이르는 체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소소한 차이가 거대한 의미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허준 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에서 질병으로 논의를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내경편(內景篇)의 의의는 각별하다. 그러나 『제중신편』에서는 내경의 의미를 축소시켰다. 이는 오장육부 뒤에 놓여 있던 포문(胞門)을 『제중신편』에서는 부인문 뒤에 배치하여 실녀(室女)와 부인(婦人)의 질환을 함께 묶었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임상에 편의성을 고려한 판단이라 사료되지만, 결과적으로 『동의보감』의 특징인 내경(內景)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24)
허준 체계가 해체되면서 드러난 것은 외감-내상-잡병의 이천 체계이다. 『제중신편』의 목차를 허준 체계로 설명하면 다소 모호한 점이 있지만, 이천 체계로 보면 꼭 맞게 설명된다. 『제중신편』 편찬 당시 『의학입문』의 영향이 컸다는 점도 이것이 우연이 아님을 방증한다.25) 이렇게 강명길은 사실상 허준이 만든 체계를 분절하여 이천의 체계로 재배열한 것이다.
강명길의 시도에서 우리가 살필 수 있는 것은, 『동의보감』에서 천명한 동의의 전통이 후대에 순조롭게 수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동의보감』 이후에도 여전히 명대 의서와의 긴장 관계가 존재하였고, 후대 의가들은 그 속에서 자신만의 견해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강명길은 『동의보감』을 바탕으로 의서를 만들면서도 지식 체계에 있어서는 허준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천 체계를 다시 도입하자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2) 『인제지』의 지식 체계

『제중신편』이 의학 지식의 요점을 추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면, 『인제지』는 『동의보감』 이후의 의학 지식을 증보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인제지』는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저술한 『임원경제지』 16지(志) 가운데 하나로, 『임원경제지』 총 113권 중 28권을 차지하는 의학 분야 유서(類書)이다. 『인제지』는 임상의서와는 달리 『동의보감』이 포괄하지 못한 의학 지식에 주목하여 『동의보감』의 내용을 대부분 수록하면서 여기에 『경악전서』나 『본초강목』의 의학 지식을 새로이 추가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제중신편』과 달리 『인제지』의 분량은 『동의보감』을 넘어선다.26)27)
『인제지』의 목차는 거시적으로 『제중신편』의 체계와 상당히 닮아 있다. 『동의보감』의 잡병 내용을 ①육기, ②내상·허로, ③나머지 부분으로 나눈 다음, 내상·허로(②)와 내경편 내용을 합치고, 나머지 부분(③)과 외형편 내용을 합쳤다. 이는 강명길의 아이디어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차이점도 적지 않다. 먼저 내경편 전반부 내용을 보양지로 대거 편입시키고 『인제지』에는 되도록 질병과 직접 관련된 부분만 남겨 두었다. 그리고 나서 외감-내상-잡병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내상-외감-잡병으로 순서를 바뀌었다. 서유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내인(內因), 외인(外因), 내외겸인(內外兼因)이라는 외피를 입혀 지식 체계의 의미를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인제지』의 이러한 목차 체계를 『삼인방(三因方)』(『삼인극일병증방론』의 약칭)에서 착안하였다고 하였다.28) 하지만 그가 고안한 ‘내인-외인-내외겸인’은 『삼인방』 체계와 큰 차이가 있다. 『삼인방』의 삼인(三因)은 내인(內因)·외인(外因)·불내외인(不內外因)을 가리키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육음(六淫)은 자연에 항상 있는 기운으로, 이에 감모되면 먼저 경락을 통해 흘러들어 안에서 장부에 미치게 되니 외인(外因)이다. 칠정(七情)은 사람에게 항상 있는 본성으로, 이것이 요동치면 먼저 장부에서 울결되었다 퍼져나가 겉으로 몸에서 드러나게 되니 내인(內因)이다. 음식을 굶었거나 지나치치게 먹은 것, 소리를 질러 기운을 상한 것, 과도하게 마음을 쓴 것, 지나치게 몸을 피곤하게 한 것, 성생활을 부적절하게 한 것 및 맹수나 독충에게 물린 것, 금속에 베인 것, 사특한 기운에 쓰인 것, 흙더미에 깔렸거나 물에 빠진 것 등은 보통의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불내외인(不內外因)이 된다.”29)

『삼인방』에서 외인(外因)은 ‘육음(六淫)’으로, 경락으로 침입하여 장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내인은 ‘칠정(七情)’으로, 장부에서 시작되어 몸 밖으로 증상이 발현된다. 음식(飮食)이나 노권(勞倦), 기타 외상 등은 육음과 칠정으로부터 생긴 병이 아니므로 모두 불내외인(不內外因)으로 보았다. 삼인방은 질병을 내인과 외인이라는 이분법으로 가르고, 여기에 넣을 수 없는 것을 불내외인으로 묶은 것이다. ‘삼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인(二因)’ 분류인 셈이다.
『인제지』의 ‘내외겸인’은 『삼인방』의 ‘불내외인’과 개념적으로 반대 지점에 있다. 불내외인은 내인과 외인이 아닌 나머지를 가리키지만, 내외겸인은 내인과 외인으로 특정할 수 없는 질환, 내인과 외인이 섞인 모든 질병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인제지』의 내외겸인은 왕륜이나 이천이 말한 잡병(雜病)을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 서유구가 『삼인방』에서 얻은 것은 삼인(三因)에 대한 개념이라기보다는 질병을 3가지로 분류하는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서유구가 의도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는 결국 이천 체계를 따른 결과이다.
이천 체계의 흔적은 더 있다. 서유구는 『동의보감』과 달리 적취(積聚)를 내인(內因)으로, 각기(脚氣)를 외인(外因)으로, 대소변의 문제를 내외겸인(內外兼因)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는 모두 『의학입문』 세부 목차 구성과 일치한다. 허준은 기(氣)·혈(血)·담(痰)을 내경편에 두고, 울증(鬱證)은 적취(積聚) 속에 포함시켜 잡병편에 따로 두었다. 그러나 이천은 단계학파의 주요 학설인 기혈담울(氣血痰鬱)의 논리가 드러날 수 있도록 잡병편에서 이들을 차례로 설명하였다. 허준은 각기(脚氣)를 외형편에 두었지만, 이천은 유상한(類傷寒)을 설명하면서 상한(傷寒) 부분에 두었다. 대소변과 관련된 질환의 경우에도, 허준은 대변과 소변을 인체 내부로 여겨 내경편에 두었지만, 이천은 외감이나 내상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잡병에 두었다. 강명길이 『동의보감』의 세부 목차 순서를 크게 변경하지 않은 것과 달리, 서유구는 세부 목차를 변경하여 이천 체계를 더 부각시켰다.
강명길과 서유구는 모두 『동의보감』을 출발점으로 삼아 저술을 만들었지만, 동의(東醫)를 천명하며 고안된 허준 체계보다는 명대 의학 성과인 이천 체계를 더 중요시하였다. 다만 강명길은 『동의보감』의 세부 목차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서유구는 이천의 외감-내상-잡병의 틀을 따르면서도 내인을 앞쪽에 배치시켜 『동의보감』의 내경-외형-잡병의 틀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일부나마 허준 체계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하였다.

3) 『의종손익』의 지식 체계

『제중신편』은 관찬의서로서 의학 지식의 간략함을 추구했고, 『인제지』는 민간의서로서 의학 지식의 확장을 추구했다. 이렇게 이 두 책의 목적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동의보감』을 모태로 하면서도 허준의 지식 체계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내경-외형-잡병으로 안착된 허준 체계를 나누고 비틀어 이천 체계로 대표되는 명(明) 의학 체계를 내포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렇다면 허준 체계를 따른 의서는 없는 것일까? 『의종손익(醫宗損益)』은 허준 체계를 따른 의서로서 『제중신편』과 『인제지』의 이러한 노력이 실용적인 이유30) 때문만은 아니며 다분히 의도적인 것임을 대비하여 보여준다.
『의종손익』은 황도연(黃度淵)이 지은 종합의서로 1867년에 원고를 완성하고 이듬해 출간되었다. 『의종손익』은 『동의보감』의 내용을 요약하고 새로운 의학 지식을 추가하여 만들어졌다. 임상 활용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제중신편』의 편찬 의도와 유사하고, 새로운 의학 지식을 대폭 추가했다는 점에서는 『인제지』와 성격이 비슷하다. 실제로 『의종손익』은 『제중신편』의 편제와 내용을 잘 따르고 있다. 병증을 설명할 때 『제중신편』의 편제를 따라 맥법(脈法)· 증치(證治)·처방(處方)의 순서로 기술하였고, 전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제중신편』의 내용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싣고 있다.31) 『의종손익』은 『동의보감』을 모태로 하고 있지만, 『제중신편』을 증보한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의종손익』은 목차에서 만큼은 『제중신편』을 따르지 않고 『동의보감』을 따르고 있다.32) 『의종손익』은 사실상 『제중신편』의 내용을 증보하고 있기 때문에 『제중신편』의 목차를 따르는 것이 가장 쉬운 접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중신편』이 이천 체계를 크게 받아들인 것과 달리, 『의종손익』에서는 허준 체계에 따라 『동의보감』의 대목(大目)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다.33) 이에 대해 황도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의사들이 익숙한 의서로서, 그 목차가 매우 상세하다. 그러므로 이 책의 목차도 『동의보감』과 같게 하여 임상에 편리한 지침서가 되도록 하였다.34)

자신이 『동의보감』의 목차를 따른 것에 대해, 우리나라 의사를 ‘동의(東醫)’로 지칭하며 동의가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제중신편』의 역시 『동의보감』의 세부 목차가 남아 있기 때문에 『동의보감』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활용하는데 크게 어려운 점은 없다. 그렇다면 동의에게 익숙하다는 말의 행간에는 『동의보감』에서 천명한 동의의 의미를 잇기 위해서는 허준 체계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동의(東醫)라는 표현을 다시 곱씹어 보자. 이는 조선 후기 의서에서 서명(書名)이 아니라 조선의 의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최초의 용례이다.35) 그는 아울러 “땅의 풍토와 남쪽과 북쪽의 환경이 서로 다르고, 사람의 타고난 체질에 따라 따뜻한 성질의 약재와 찬 성질의 약재가 각기 적합성이 있으며, 특히 과거와 지금의 상황이 변화하여 큰 차이가 있다.”36)라고 하면서 허준이 천명한 동의의 의미를 잇고자 하였다. 황도연의 이러한 인식은 『동의보감』, 『제중신편』, 『의종손익』으로 이어지는 의학 지식 체계의 변화가 책의 저술 목적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5. 맺음말

조선 후기 많은 의서들이 『동의보감』의 ‘의학 지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좀 더 내밀한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동의보감』에서 제시된 내경-외형-잡병의 ‘허준 체계’와 『의학입문』에 채용된 외감-내상-잡병의 ‘이천 체계’(혹은 왕륜 체계) 사이의 갈등이 드러난다. 이는 『동의보감』의 ‘의학 지식’이 조선 후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과는 달리, 『동의보감』의 ‘의학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 체계는 쉽게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후기 의서의 지식 체계(목차 체계)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제중신편』은 『동의보감』을 임상에 맞게 간추리는데 그치지 않고 『동의보감』의 목차를 해체하여 외감-내상-잡병의 이천 체계로 재배열하였다. 『인제지』는 『제중신편』의 방법을 참고하여 내상(내인)-외감(외인)-잡병(내외겸인)으로 목차를 세웠고, 더 나아가 『의학입문』의 목차에 따라 세부 목차를 조정하였다. 물론 『제중신편』은 『동의보감』의 세부 목차 순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인제지』는 내상(내인)을 앞쪽에 배치하여 『동의보감』의 내경-외형-잡병 체계에 조금 더 근접시키는 방식으로 허준 체계와의 절충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의(東醫)를 선언할 수 있었던 허준 체계의 핵심, 즉 인간으로부터 질병으로 확장되는 내경-외형-잡병이라는 틀은 유지되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 의학 내부에서 허준 체계와 이천 체계가 공존하며 갈등하고 있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동의보감』과 『의학입문』은 조선 후기에 의학을 배우는 이들이 가장 많이 읽었던 의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명길과 서유구가 자신의 저작에 채용한 지식 체계는 허준 체계와 이천 체계를 두고 교묘하게 의도한 것일 수도 있고, 오랜 수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쪽이었든, 분명한 것은 『동의보감』의 지식 체계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동의보감』으로 개막된 ‘동의’의 전통이 조선 후기 의가들에게 크게 환영 받기만 하지도 않았으며 순탄하게 수용되기만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조선 후기 의서들이 『동의보감』의 의학 지식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이들 서적에 대한 평가를 『동의보감』 일변도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의학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의보감』 이외에 『의학입문』, 더 나아가 『본초강목』, 『경악전서』와 같은 명대 의서들이 미친 영향을 더욱 상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허준 체계와 이천 체계의 갈등 구도는 조선 후기 의서를 바라보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논의를 발전시켜 나간다면 조선 후기 의학을 다양한 의학 지식과 의학 체계가 경쟁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조선 후기 의학 이면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그 원인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후속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다만 조선 후기에 동의의 전통 못지않게 ‘명의(明醫)’37)에 대한 존중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에서 제시한 의학 지식 체계의 문제와 함께, 조선 후기에 ‘동의(東醫)’라는 표현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동의보감』이 정작 의과 취재 교과서로 채택되지 않았다는 점(박훈평, 2016: 15), 그리고 청대 의서가 거의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함께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들은 앞으로 조선 후기 지성사에 나타난 명·청에 대한 인식과 함께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Notes

1) 김남일은 『동의보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일군의 의서를 ‘동의보감학파(東醫寶鑑學派)’로 규정한 바 있다(김남일, 2004: 7-8).

2) 『東醫寶鑑』 序 “上自倉越, 下逮劉張朱李, 百家繼起, 論說紛然, 剽竊緖餘, 爭立門戶, 書益多而術益晦, 其與靈樞本旨不相逕庭者鮮矣.”

3) 일례로 『만병회춘(萬病回春)』 서문에서 공정현(龔廷賢)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황제와 기백이 나온 뒤로 『내경(內經)』이 만들어져 세상에서 의학을 말하는 이들이 종주로 삼았다. 창공과 진월인 이래로 유완소·장종정·주진형·이고 등이 각기 문호를 세워 가장 뛰어나다 칭송받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책은 분량이 많고 내용도 깊어 쉽게 살필 수 없고, 또 하나에 얽매인 이는 그 핵심을 파헤치지 못하고 종종 증에 맞지 않는 약을 투여하여 고황의 병을 가중시킨다. [自軒岐出而『內經』作, 世之譚醫者宗焉. 倉越而下, 如劉·張·朱·李, 各擅專門, 非不稱上乘也. 第其書浩翰淵微, 未易窺測, 且執滯者, 不能迎刃以中其肯綮, 往往投之非症, 反以重其膏盲.]”

4) 『醫學綱目』 自序 “故后世用歷代之方治病, 或效或不效者, 由病名同治法異, 或中其長, 或不中其長故也. 姑舉一病言之, 設惡熱病, 熱病之名同也, 其治之法異, 四君治血實之熱也, 四物治血虛之熱也, 白虎治氣實之熱也, 補中治氣虛之熱也, 麻黃治表熱也, 承氣治裏熱也, 四逆治假熱也, 柴胡治眞熱也, 瀉青, 導赤, 瀉白, 滋腎, 瀉黃治五臟熱而各異也, 各能洞燭脈證, 而中其肯綮, 則皆效.”

5) 책은 주진형 사후 20여년만인 1380년 완성되었으나 간행은 1565년에야 이루어졌다.

6) 『醫學綱目』 自序 “의학이라는 학문은 길이 넓고 뜻이 깊으며 책이 많지만 요점은 음양오행에 지나지 않는다. …… 젊은 시절부터 의학에 깊이 마음을 두고 『내경』에서부터 역대 성현들이 전한 책과 이름난 방서까지 낮에 읽고 밤에 생각하다 끼니를 거르고 잠을 잊은 지 30여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무수한 병의 모습이 모두 음양오행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혈기·표리·상하·허실·한열은 모두 음양이며, 오장·육부·십이경맥·오운육기는 모두 오행이다. [醫之爲學, 其道博, 其義深, 其書浩瀚, 其要不過陰陽五行而已. …… 英爰自髫年, 潛心斯道, 上自『內經』, 下至歷代聖賢書傳, 及諸家名方, 晝讀夜思, 廢餐忘寢者三十余載, 始悟千變萬化之病態, 皆不出乎陰陽五行. 蓋血氣也, 表裏也, 上下也, 虛實也, 寒熱也, 皆一陰陽也. 五臟也, 六腑也, 十二經也, 五運六氣也, 皆一五行也.]”

7) 『明醫雜著』 卷1 「醫論」 “或問, 仲景東垣河間丹溪諸書孰優, 學之宜何主. 曰宜專主內經, 而博觀乎四子, 斯無弊矣. 蓋醫之有內經, 猶儒道之六經, 無所不備. 四子之說, 則猶學庸語孟, 爲六經之階梯, 不可缺一者也. 四子之書, 初無優劣, 但各發明一義耳. 仲景見內經載傷寒, 而其變遷反復之詳未備也, 故著論立方, 以盡其變. 後人宗之, 傳用旣久, 漸失其眞, 用以通治溫暑內傷諸症, 遂致誤人. 故河間出而始發明治溫暑之法, 東垣出而始發明治內傷之法. 河間之論, 卽內經五運六氣之旨, 東垣之說, 卽內經飮食勞倦之義. 仲景非不知溫暑與內傷也, 特其著書未之及. 河間東垣之于傷寒, 則遵用仲景而莫敢違矣. 至于丹溪出, 而又集諸醫之大成, 發明陰虛發熱類乎外感內傷, 及濕熱相火爲病甚多, 隨症著論, 亦不過闡內經之要旨, 補前賢之未備耳. 故曰外感法仲景, 內傷法東垣, 熱病用河間, 雜病用丹溪, 一以貫之, 斯醫道之大全矣.”

8) 『萬病回春』 卷1 「萬金一統述」 “外感, 法張仲景也, 內傷, 法李東垣也, 熱病, 用劉河間也, 雜病, 用朱丹溪也.”

9) 『의학입문』은 모두 7권 19책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권1 앞에 권수(卷首)가 있고 권2는 두 번 반복되게 편집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모두 9권이 된다. 각 권은 다시 상중하(上中下, 혹은 上下)로 나누어져 있어 모두 19책에 이른다.

10) 의학의 총론에 해당하는 기초이론 부분은 다시 수양(修養)이나 의학역사 같이 임상과 거리가 먼 전반부 내용과 운기(運氣), 경락(經絡), 장부(臟腑), 진단(診斷), 침구(鍼灸), 본초(本草) 등 임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후반부 내용으로 구분된다.

11) 왕륜 체계는 주로 주진형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주창하였다. 이를 보면 대부분의 질병은 주진형의 방법을 따르되, 열병·상한·내상과 같은 경우에 각각 유완소·장중경·이고의 방법을 따르라는 말로도 풀이된다. 이렇게 보면 잡병은 열병·상한·내상으로 분류되지 않는 모든 질병을 가리킨다.

12) 차웅석 역시 편제 측면에서 본다면 『동의보감』에서 『의학입문』의 색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차웅석, 2016: 159).

13) 본고에서는 『동의보감』 목차를 중심으로 논지에 필요한 부분만 간략히 서술하였다. 『동의보감』에 담긴 지식 체계에 대해서는 김남일의 연구에 자세하다(김남일, 2016: 15-68).

14) 『東醫寶鑑』 集例 “臣謹按人身內有五藏六府, 外有筋骨肌肉血脈皮膚, 以成其形, 而精氣神, 又爲藏府百體之主. 故道家之三要, 釋氏之四大, 皆謂此也. 黃庭經有內景之文, 醫書亦有內外境象之圖, 道家以淸靜修養爲本, 醫門以藥餌鍼灸爲治, 是道得其精, 醫得其粗也. 今此書, 先以內景精氣神藏府爲內篇, 次取外境頭面手足筋脈骨肉爲外篇, 又採五運六氣, 四象三法, 內傷外感, 諸病之證, 列爲雜篇, 末著湯液鍼灸, 以盡其變.”

15) 『동의보감』은 본래 내경-외형-잡병-탕액-침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의학 지식 체계를 살펴보기 위해 여기에서는 내경-외형-잡병이라는 범주에 주목하기로 한다.

16) 차웅석은 “『의학입문』과 『동의보감』은 동일한 인간의 질병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판이하게 다르다. …… 서로 판이한 의학의 관점을 야기하는 것이다.”(차웅석, 2000: 117)라고 하였다.

17) 신동원은 “중국의 문물이 조선에 유입되어 큰 효과를 일으킨 것이 대부분이었고, 반대의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동의보감』은 …… 이 드문 반대의 사례에 해당된다.”(신동원, 2015: 14)라고 하였다.

18) 『東醫寶鑑』 集例 “王節齋有言曰, 東垣, 北醫也, 羅謙甫傳其法, 以聞於江淅, 丹溪, 南醫也. 劉從厚世其學, 以鳴於陝西, 云則, 醫有南北之名尙矣. 我國僻在東方, 醫藥之道不絶如線, 則我國之醫亦可謂之東醫也.”

19) 『濟衆新編』 跋文 “우리 조선의 의서로 허준의 『동의보감』이 상세하다고 하나 글이 번잡하고 중복되었으며 병증이 빠진 곳도 있고 써야할 처방들도 실리지 않은 것이 많다. 요점을 아는 사람은 한 마디로 끝나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은 끝도 없이 헤매게 된다고 내경에서 하지 않았던가. 너는 널리 여러 의서를 모아 번잡한 것을 버리고 요점을 취해 따로 의서를 만들어 들이라. [我朝醫書,惟許浚寶鑑,雖稱詳悉然,文或繁冗,語或重疊,證或闕漏,而應用之方,亦多有不錄者,內經不云乎,知其要者一言而終,不知其要者流散無窮,汝其廣取諸方,芟其煩而取其要,別作一方書以進.]”

20) 『동의보감』의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임상에 필요한 요점만 간추리고자 하였던 욕구는 조선 후기 의서에서 자주 관찰된다. 『제중신편』 이외에 『익감(翼鑑)』, 『의문보감(醫門寶鑑)』, 『춘감록(春鑑錄)』, 『의종손익(醫宗損益)』 등 적지 않은 서적들이 이와 같은 목적 아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1) 『제중신편』 편찬을 명한 정조(正祖)는 직접 『동의보감』을 토대로 『수민묘전(壽民妙詮)』을 저술하였다. 따라서 『수민묘전』은 『제중신편』의 원형에 해당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수민묘전의 목차는 『제중신편』과 달리 『동의보감』의 목차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22) 이 외에 『동의보감』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포문(胞門)을 부인문 뒤에 배치하여 실녀(室女)와 부인(婦人)의 질환을 함께 묶었고, 신형 뒤에 있던 양로(養老)를 소아(小兒) 뒤에 배치하여 남녀노소(男女老小)라는 구도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23) 『동의보감』과 『제중신편』의 구성 차이에 대해 선행 연구자들은 임상에서의 실용성을 이유로 보았다. 지창영은 “『동의보감』의 체계가 실제 임상에서 활용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여타 의서들의 체계로 과감하게 복귀시키고자 한 것이었다.”(지창영, 2008b: 136)라고 평가하였고, 김성수는 “『제중신편』의 내용은 많은 부분 『동의보감』에서 나왔지만, 임상에 있어서는 인체를 중심으로 이해하였던 『동의보감』과는 다르게 주로 질병을 중심에 두고 우선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의서를 구성하였다.”(김성수, 2016b: 140)고 평가하였다.

24) 이에 대해 신동원은 다른 견해를 보인 바 있다. “정조나 강명길이 비록 『동의보감』의 내용을 덜고 보완한 점은 있으나 책을 구성하는 범주가 거의 대부분 『동의보감』의 체계를 따르고 있다.”라고 하며 이러한 점을 “‘동의 패러다임’의 정착”(신동원, 2015: 330-331)이라고 하였다.

25) 지창영은 『제중신편』 목차와 『의학입문』 체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제중신편』 편찬에서 『의학입문』이 중요하게 사용되었음을 지적하였다. “특히, 『의학입문』은 범례에서 말한 ‘補漏’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의서이다. 『동의보감』과 다른 처방경향이나 변증시치에서 단방요법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지창영, 2008a: 85)

26) 『인제지』와 『동의보감』의 비교는 전종욱(전종욱 외, 2012: 403-448) 및 박상영(박상영, 2013: 531-575)의 연구에 상세하다.

27) 『동의보감』에 새로운 의학 지식을 덧붙이고자 했던 시도는 『인제지』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임원경제지』 전체의 맥락에서 본다면, 『인제지』는 임상을 고려한 서적이라기보다는 의학 지식의 정리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앞의 서적들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28) 『仁濟志』 仁濟志引 “이것이 『삼인방』의 목차를 본떠 의가들의 말을 간략히 묶고, 아울러 부인과 소아과 외과를 두어 모두 28권으로 엮은 이유이다. [此所以略綴醫家言, 倣三因方之目, 而兼以婦幼外科等目, 總爲二十八卷耳.]” 재인용(서유구 저 정명현 외 역, 2012:1129).

29) 『三因極一病證方論』 卷2 「三因論」 “然六淫, 天之常氣, 冒之則先自經絡流入, 内合于臟腑, 爲外所因. 七情, 人之常性, 動之則先自臟腑鬱發, 外形於肢体, 爲内所因. 其如飮食飢飽, 叫呼傷氣, 盡神度量, 疲極筋力, 陰陽違逆, 乃至虎野狼毒蟲, 金瘡折, 疰忤附着, 畏压溺等, 有背常理, 爲不内外因.”

30) 김성수는 “18세기 의학계의 흐름은 『동의보감』을 여전히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임상의 효율성을 강화하는 측면에서 『동의보감』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김성수, 2016a: 14)고 하였다.

31) 『의종손익』의 의학사상, 『의종손익』과 『제중신편』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이진철의 연구(이진철, 2017: 1-116)에 자세하다.

32) 『의종손익』 목차 구성은 『동의보감』과 대동소이하므로 따로 제시하지 않는다.

33) 이에 따라 포문(胞門)도 부인문에서 분리되었다.

34) 『醫宗損益』 凡例 “寶鑑爲東醫之習熟, 而名目頗詳, 令次如之, 以便臨症之指南.”

35) 신동원은 “황도연은 조선후기의 본격적인 의학 서적 내에서 최초로 ‘동의(東醫)’라는 말을 썼다.”(신동원, 2015: 331)고 하였다. 그의 지적처럼 조선 후기 의서에서 책 이름 이외에 조선의 의학 혹은 의사를 동의(東醫)라고 지칭한 용례는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의도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제중신편』에는 『동의보감』이라는 서명을 언급하기 위해 “동의”라는 표현이 1번 등장할 뿐, 책 전체에서 동의라는 표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36) 『醫宗損益』 自序 “矧且地之風土南北之政相懸, 人之禀質溫凉之劑各適. 尤有古今之變, 大不齊焉.

37) 명대(明代) 의학자 혹은 의학을 의미한다.

Figure 1.
그림 1. 『의학입문』의 목차
Contents of Uihagibmun
kjmh-30-1-69f1.jpg
Table 1.
표 1. 『의학강목』의 의학 지식 체계
Medical Knowledge System of Uihaggangmog
『의학강목』 체계 내용
권1-권9 陰陽臟腑部 (일반론)
권10-15 肝膽部 五臟(五行)
권16-20 心小腸部
권21-25 脾胃部
권26-27 肺大腸部
권28-29 腎膀胱部
권30-33 傷寒部 六經
권34-35 婦人部 (婦人)
권36-39 小兒部 (小兒)
권40 內景運氣類注, 附錄 (기타)
Table 2.
표 2. 『의학입문』 외집(外集)의 구성과 의학 지식 체계
Medical Knowledge System of Uihagibmun
구분 모두(冒頭) 표제 분류 내용 해당권책
外感 河間劉先生溫暑纂要 溫暑 病機19條 卷三上
仲景張先生傷寒纂要 傷寒 六經, 五法, 正傷寒, 類傷寒, 初證, 雜證, 變證, 瘥證, 危證, 婦人傷寒
內傷 東垣李先生內傷纂要 內傷 內外傷辨, 內傷辨, 脾胃虛實傳變論 卷三下
雜病 丹溪朱先生雜病纂要 外感 風類, 寒類, 暑類, 濕類, 燥類, 火類 卷四上, 卷四下
內傷 內傷類, 氣類, 血類, 痰類, 虛類
Table 3.
표 3. 『동의보감』의 의학 지식 체계
Medical Knowledge System of Donguibogam
구분 분류 해당권책
인체 內景篇 內景篇1-4
外形篇 外形篇1-4
질병 外感 雜病篇 雜病篇2-3
內傷 雜病篇4
기타병증 雜病篇5-9
부인소아 雜病篇10-11
Table 4.
표 4. 『제중신편』의 지식 체계와 기존 체계 비교
Comparison Between the Knowledge System of Jejungsinpyeon and the Previous Systems
이천 체계 『제중신편』의 지식 체계 허준 체계
外感 1卷 風, 寒, 暑, 濕, 燥, 火 雜病(1)
內傷 2卷 內傷, 虛勞
2卷 身形, 精, 氣, 神, 血, 夢, 聲音, 言語, 津液, 痰飮 內景
3卷 五臟, 六腑, 蟲, 小便, 大便
雜病 3卷 頭, 面, 眼, 耳, 鼻, 口舌, 牙齒, 咽喉 外形
4卷 頸項, 背, 胸, 乳, 腹, 臍, 腰, 脇, 皮, 脈, 手, 足, 毛髮, 前陰, 後陰
4卷 霍亂, 嘔吐, 咳嗽 雜病(2)
5卷 積聚, 浮腫, 脹滿, 消渴, 黃疸, 痎瘧, 瘟疫, 邪祟, 廱疽, 諸瘡, 諸傷, 解毒, 救急, 雜方
雜病 (婦人小兒) 6卷 婦人, 胞 雜病/內景 (婦人小兒)
7卷 小兒, 痘疹, 麻疹
- 7卷 養老 內景
- 8卷 藥性歌 湯液
Table 5.
표 5. 『인제지』의 의학 지식 체계와 기존 체계 비교
Comparison Between the Knowledge System of Injeji and the Previous Systems.
이천 체계 『인제지』의 지식 체계 허준 체계
內傷 內因 권1 內傷, 虛勞 雜病
自汗 內景
권2 遺泄, 驚悸, 癲癎, 少睡, 瘖瘂, 痰飮 內景
권3 諸氣, 失血總方, 吐血, 衄血,咳血, 尿血, 便血 內景
積聚 雜病
諸蟲 內景
外感 外因 권4 中風, 風痹 雜病
권5 傷寒, 中寒, 中暑, 山嵐瘴氣瘴濕 雜病
권6 燥澁, 火熱, 痎瘧 雜病
脚氣 外形
瘟疫, 邪祟 雜病
雜病 內外兼因 권7 頭痛, 眼疾 外形
권8 耳聾. 鼻塞, 齒痛, 頸項痛, 腰脚痛, 臂脇痛, 筋骨痛, 心腹痛 外形
권9 霍亂, 噫噯, 嘔吐 雜病
泄瀉, 痢疾, 便秘 內景
권10 淋病赤白濁, 癃閉 內景
咳嗽, 咳逆 雜病
雜病 內外兼因 권11 疝氣 外形
浮腫, 脹滿, 消渴, 黃疸 雜病
- 婦科 권12 (생략) 雜病
幼科 권13-15 (생략)
外科 권16-21 (생략)
備急 권22-23 (생략)
附餘 권24-28 (생략) 湯液 鍼灸

References

『東醫寶鑑』, 『萬病回春』, 『明醫雜著』, 『三因極一病證方論』, 『醫宗損益』, 『醫學綱目』, 『醫學入門』, 『仁濟志』, 『濟衆新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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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Education of the History of Medicine in the Korean Medical Schools  1995 June;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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