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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0(2); 2021 > Article
1970-1980년대 한국 구충제 생산 기술 형성과 활용 : 프라지콴텔 국산화와 간흡충 관리 사업

Abstract

The Korean parasite control program is regarded as one of the most successful examples of health care movement in Korea. This ‘Parasite Eradication Program’ which was conducted from 1969 to 1995, involved testing and treating of 300 million people. In cooperation with Japan, parasitologists and activists who participated in the parasite control program formed a common system called the ‘Mass Testing, Mass Treatment.’ This study focuses on the localization process of Praziquantel, Clonorchiasis treatment production and its application in Clonorchiasis control program. Parasitologists rapidly introduced newly developed Praziquantel, and Korean chemists quickly reverse engineered the compound to evade patent issues. This allowed for the mass production of Praziquantel at a lower price, which in turn enabled a nationwide Clonorchiasis control program. At the same time, low price and stable supply opened the private market for Praziquantel. However, acceptance and understanding of the Praziquantel differed significantly among the stakeholders. For the government, it was a means for policy propaganda, and for the health agencies, it was a means for mass scale control program, while for the public, it was a means for maintaining conventional eating habits without risk of infection. This study reveals how the material end of a disease control policy is accepted and interpreted by different actors.

1. 머리말

해방 후 본격화된 전국적인 기생충 관리 사업은 기생충박멸협회를 중심으로 1969년부터 1995년까지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이순형, 2017: 184). 이 시기 전국 단위 검진 및 투약 사업으로 누적 연인원 3억 명 이상, 연간 1천만 명 이상을 동원하여 이루어진 기생충 관리 사업은 한국 현대 보건의료사에 있어 대표적인 성공 사례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보건복지부, 2015: 220). 집중적인 기생충박멸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50년대 일본의 기생충 관리 사업 모델이었던 ‘자립형 민간단체의 운영’과 ‘집단검진 집단구충’ 정책의 도입이 있었다. 그 중 학교를 중심으로 학령기 아동 전원을 대상으로 매년 2회 집중적인 채변검사를 진행하고, 충란 보유자에게 구충제를 투여하는 ‘집단검진 집단구충’ 방식은 일본에서 시작되어 한국과 대만에 자리 잡은 특징적인 기생충 관리 사업 모델이 되었다(정준호 외, 2018). 일본의 기생충 관리 사업 모델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전후 배상처리를 위한 원조의 확대라는 지정학적 특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불어 이 사업은 일본해외기술협력단을 통한 국가 간 사업이기도 했지만, 그 시작과 정착은 사업에 참여한 활동가들의 인간적인 네트워크를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기도 했다(정준호 외, 2018; Homei, 2016). 앞서 연구들은 이러한 거시적인 지정학적 배경과 국제적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기생충 박멸이라는 질병 관리 정책이 어떻게 아시아에서 특징적인 형태를 가지게 되었는지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질병 관리 사업과 정책에 있어 약품은 물질적인 기반으로서, 제도와 정책이 실제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는 통로였다(신규환, 2015; 유연실, 2020:33-35). 예를 들어 채변검사를 통해 기생충 보유가 확인된 아동들은 학급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구충제를 먹어야 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구충제를 통해 기생충 관리 사업을 경험했다. 이처럼 기생충 관리 사업이라는 정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피기 위해서는 혁신적 약품의 등장과 발전 뿐 아니라, 약품이라는 기술을 수용하고 실천하는 전문가들과 대중들의 모습을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에저턴, 2015: 18-20).
이 연구에서는 기생충 관리 사업에서 활용되었던 각종 구충제들이 국내에 도입되고 생산, 적용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프라지콴텔은 주혈흡충증1)과 간흡충증2)을 포함한 다양한 기생충 감염증에 치료 효과와 안전성이 높은 구충제로 현재까지도 주혈흡충증 관리 사업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 프라지콴텔 가격은 90% 이상 하락하여 2008년을 기준으로 약품 가격은 0.07 달러까지 낮아졌다. 가격 인하로 인한 접근성 향상은 집단적인 투약을 전제로 하는 대규모 주혈흡충증 관리 사업이 가능해진 기반이 되었다(Fenwick, 2009: 1720). 세계보건기구 보고서는 1990년대 일어난 프라지콴텔 가격 하락의 주요한 원인을 신공정 도입과 정부의 적극적인 특허권 보호를 통해 약품 가격을 인하한 한국에서 찾았다. 이를 기반으로 신풍제약의 프라지콴텔이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국제적인 공급망을 갖추며 전 세계적인 약품 가격 하락을 주도했다고 분석했다(Reich and Govindaraj, 1998: 1-5). 프라지콴텔 국산화가 1990년대 이후 해외의 기생충 관리 사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음을 고려할 때, 이 사례는 한국 질병 관리 사업을 국제적 맥락에 위치시킬 수 있는 연결고리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는 프라지콴텔의 국산화와 간흡충 관리 사업에서의 활용 및 수용 방식을 관련 행위자들의 이해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1970-1980년대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및 제도적 지원들을 배경으로 해외 신약의 제조 방법을 국산화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프라지콴텔이 개발되고 보급되었던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기술 드라이브 정책이나 상위 정책 결정자들의 의지는 약품이 안정적으로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주목한다. 이를 기반으로 약품이라는 기술적 요소를 분석하여 질병 관리 정책이 구현되는 과정을 보다 세밀하게 살피고자 한다. 이를 위해 프라지콴텔의 개발부터 기생충 박멸 사업 적용까지의 과정에서 기생충학자, 제약회사, 정부, 대중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 약품이라는 기술을 재해석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3) 특히 효과적인 생산 기술의 확보와는 별개로 이러한 기술을 수용하는 대중들은 프라지콴텔에 대해 정책 결정자들과는 다른 해석들을 제시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간흡충 관리 사업의 전개 과정을 살핀다.

2. 역공정과 종합구충제의 국산화

한국전쟁 이후 도입된 다양한 구충제들은 사람들이 회충 감염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나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전쟁 이전 효과적인 약품이 없던 때는 “아빠, 배가 아프니 담배 한 대줘”(서병설, 1984: 456)하는 식의 치료법부터 휘발유를 마시기까지 다양한 민간요법이 성행했다. 1950년대까지 주로 사용되었던 구충제는 산토닌(Santonin)과 해인초(海人草)였다(정준호 외, 2016: 189). 해인초는 해초를 끓여 만든 약초 중 하나로 비교적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약물 농도가 일정치 않았으며 구충 효과가 낮다는 단점이 있었다. 두 약품 모두 메스꺼움, 시력장애 등 많은 부작용이 있었고, 독성이 높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영유아가 사망하는 사고도 자주 발생했다(임한종, 2013: 208-210).
그 중 1960년대 초반까지 집단구충 사업에 주로 사용되었던 약품은 산토닌이었다. 산토닌은 물쑥(Artemisia)에서 추출한 유효 성분을 처리한 것으로 1830년 독일 머크(Merck)에서 처음으로 결정 추출에 성공했다. 충체의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약품 복용 후 하제를 함께 복용하여 충체를 배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또한 황시(黃視), 어지러움, 복통 등의 불쾌한 부작용이 많았다(조기목, 1975: 21-23). 1940년대까지 동아시아 지역의 산토닌은 주로 러시아 고원지대에서 생산된 원료를 사용했다.4) 냉전 체제에 접어들며 주요 산지인 동구권의 원료 수출이 중단되면서 약품 가격도 오르게 되었고, 약품 가격의 상승은 집단구충의 중요한 제약 조건으로 작용했다.5) 약품의 품질이 고르지 못한 것도 집단구충을 가로막는 주요한 걸림돌 중 하나였다.
원료 가격의 상승 뿐만 아니라 유효 성분이 거의 함유되지 않은 가짜 의약품이 유통되는 문제도 발생했다.6) 1965년 서울시가 전체 국민학생 대상 투약을 위해 구입한 산토닌 30만정 중 20%가 품질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7) 약품의 정상적인 납품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투약 일정도 차일피일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독성이 높은 산토닌의 경우 과다 복용으로 환자가 사망에 이르는 사례도 꾸준히 보고되면서 대중들 사이에서는 구충제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차라리 기생충과 공생하는 편이 믿을 수 없는 약을 먹는 것보다 낫다”고 할 정도였다. 1967년 미국 국제개발처에서는 산토닌의 사용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8) 1970년대 초반에 들어서는 많은 국가들에서 독성을 이유로 산토닌을 사용 금지 시킴에 따라 점차 생산 면적이 줄어들게 되었다. 1972년에는 주요 수입처였던 일본에서 원료 공급을 중단하면서 국내에서 거의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9)
1960년대부터 해외에서 새로운 구충제들이 개발, 도입되기 시작했다. 일본 해외기술협력단을 통해 지원된 고이즈민은 산토닌에 카이닌산과 하제를 섞어 순응도와 효과를 높인 제품이었다. 더불어 아동들의 복용 편의를 위해 캐러멜 코팅이 된 상품도 개발되었다. 하지만 산토닌을 기반으로 한 약품들은 대체로 회충에만 효과를 보인다는 한계가 있었다(채종일, 2011: 28). 회충은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기생충이었지만, 보다 심각한 임상적 증상을 나타내는 기생충들은 구충, 편충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 구충제가 없었던 것은 초기 기생충 관리 사업이 ‘회충’이라는 특정한 기생충을 중심으로 형성되도록 했다. 또한 집단검진을 통해 선별적 투약을 해온 것은 예산 및 외화 절감의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구충제 원료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1974년 기준으로 연간 구충제 원료 수입에만 백만 달러 이상을 소비하고 있던 상황에서 비선별 투약은 “국고의 낭비”(소진탁, 1975: 14)나 다름없었다(채영복, 1975: 1).
1950년대 개발된 피페라진(piperazine)은 회충 뿐 아니라 요충에도 효과를 보였고 비교적 손쉽게 합성할 수 있는 물질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영세한 한국의 제약회사들은 원료 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은 해외에서 원료 물질을 수입하여 가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제약 원료가 마약이나 부정의약품에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통관 과정이 매우 까다로워 1950년대 후반까지 수입의약품의 90%는 완제품일 정도로 원료 수입이 제한되어 있었다(신규환, 2015: 754). 오일쇼크 이후 적용된 수입물품에 대한 높은 관세는 약품의 단가를 높이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1973년에는 구충제 원료 물질에도 25% 가량의 관세를 부여했다. 기생충 박멸, 결핵, 가족계획을 포함한 국가 중점 의료 시책에 포함된 의약품은 수입 관세를 5% 미만으로 낮춰주기로 했으나, 계속해서 면세 혜택이 미루어지고 있었다.10)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다른 기간사업에 투자하기 위해서 외환의 유출을 제한시켰고 주로 수입 원료에 의존하고 있었던 제약업계는 원료난에 시달리게 되었다(대한약공, 1995: 62). 1966년 외화 절감을 위해 원료 의약품 수입이 중단되자 구충제의 가격이 크게 오르기 시작했다.11) 뿐만 아니라 원료 가격 상승에 따라 유효 함량이 낮은 불량 의약품의 유통이 늘게 되었다. 정부의 주기적인 금수조치와 수입에 대한 각종 제한들로 제약회사들은 원료의약품 국산화를 경영 안정화의 필수 과제로 삼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 원료 국산화를 촉진하기 위해 원료의약품 보호제도를 시행했다(대한약공, 1995: 62). 원료의약품 보호제도는 국내의 신기술로 인정받은 약품에 대해서는 동일 성분의 해외 의약품의 수입을 금지시켜주는 일종의 독점권 부여 제도였다. 당시 영세한 국내 제약업계로서는 막대한 연구개발비와 시설투자를 하기 어려워 원료의 국산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이루어진 조치였다.12) 보건사회부는 1969년 하반기를 시작으로 매년 상하반기 의약품 수출입 허가요령 운영 방침을 발표하여 국내 생산되는 원료의약품 중 일부를 금수품으로 지정했다.13)
1962년 6월 5일 장용택에 의해 설립된 신풍제약은 구충제를 회사의 핵심 판매품으로 삼고 있었다. 초창기 신풍제약의 주력 상품이었던 요충 구충제 ‘필파’는 1965년까지 수입되던 원료 필비늄 파모에이트(pyrvinium famoate)를 자체 합성한 제품이었다(신풍제약, 2017: 85-89).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장용택은 구충제 개발 초기부터 서울대학교 기생충학교실이나 다른 유기화학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장용택은 필파 개발을 위한 기초 조사 과정 중 일본의 동일제제 “뽀킬(ポキール)”을 들고 서울대학교 기생충학교실 전임강사인 임한종을 찾았다.14) 이를 통해 장용택은 약품의 임상적 효과를 확인받을 수 있었으며, 기생충학자들은 연구비와 구충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신풍제약은 필파에 이어 종합 구충제의 개발을 추진했다. 장용택은 당시 1년에 한 번만 복용해도 되는 ‘첨단 구충제’로 알려진 메벤다졸을 다음 구충제 국산화의 목표로 삼았다(신풍제약, 2017: 108-109). 1971년 벨기에 얀센에서 개발된 이 약품은 회충, 구충, 편충, 요충 등 광범위한 장내기생충에 효과를 보였으며, 성충뿐 아니라 유충과 충란도 일부 사멸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Mehlhorn, 2001: 259). 하지만 얀센의 제법을 이용한 메벤다졸 생산은 출발물질의 가격이 비싸고, 이를 중간물질로 치환하기 위해 암모니아를 사용해 밀폐용기 내에서 125~130℃로 가열해야 했기 때문에 고가의 장비가 필요했다. 또한 고온, 고압의 합성 방식은 사고 위험이 높아 대량 생산에 적합하지 않다는 단점도 있었다.15) 신풍제약 연구팀은 1972년부터 1년간 자체적으로 메벤다졸의 새로운 공정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하였으나, 메벤다졸과 같이 고압, 고온을 이용한 합성 방식은 당시 한국 제약업계의 기술 및 장비로는 제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체 연구가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장용택은 1973년 10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유기합성실의 채영복 실장에게 메벤다졸 제조공법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 이후 산업계 위탁연구 사업의 타당성 검토는 1974년 김충섭이 맡게 되었다.16) 김충섭은 듀크대학교 화학과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다가, 1974년 4월 유치과학자 제도를 통해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유기합성연구실에서 막 연구 활동을 시작한 참이었다.17) 산업기술 지원에 초점을 맞춘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두뇌유출을 막기 위해 유치과학자 제도를 시행하여, 해외에서 활동 중인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들이 한국과학기술 연구소에서 ‘시장을 목표로 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문만용, 2006: 245-246). 이러한 정책적 배경 속에 한국으로 귀국한 김충섭은 주로 화학합성의약품, 그 중에서도 기존에 해외에서 개발된 약품들을 역공정(reverse engineering)하여 새로운 공정을 개발하는 부분에 특화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의 특허 제도에서는 약품 원료 물질에 특허권을 부여하는 물질특허가 아닌 제법특허만을 인정하고 있었다. 즉 동일한 성분의 메벤다졸을 생산하더라도 그 제조 공정의 유의미하게 다르다면 별도의 특허로 인정해주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김충섭과 신풍제약의 연구의 핵심 목표는 기존 얀센 사의 제법특허를 침해하지 않고 별도의 메벤다졸 공정법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8)
연구 1년여 만인 1975년, 김충섭은 가격이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아닐린과 벤조일 클로라이드를 출발물질로 사용한 메벤다졸의 신공정 개발에 성공했다(김충섭, 2017: 379).19) 중간 과정에서는 고온, 고압이 아닌 상온에서 반응시킬 수 있는 방식을 활용하였으며, 촉매 역시 팔라디윰과 같은 고가의 금속이 아닌 철분말을 사용해 전반적인 공정의 비용을 낮추었다. 또한 최종 수율 역시 기존 25%에서 73%로 크게 향상시켰다. 이에 신풍제약은 1974년 12월 보건사회부로부터 취득한 원료의약품 합성제조업 허가를 바탕으로, 메벤다졸을 당시 수입가였던 kg 당 170-250 달러에 비해 약 80 달러가 낮은 kg 당 121,780원에 출시했다.20) 메벤다졸 수입량은 1974년 기준으로 625kg, 1975년에는 920kg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21) 수요가 높아지는 메벤다졸을 저렴한 공정으로 생산하여 외화를 절감하고 초과 생산분은 수출을 통해 추가적인 외화 획득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었다.22) 이렇게 출시된 메벤다졸은 제법의 독창성과 경제성이라는 측면에서 우수한 신기술로 평가받아 결핵 치료제 에탐부톨, 항생제 카나마이신에 이어서 세 번째 보호대상 의약품으로 지정되었다.23)
메벤다졸의 국산화를 통해 한국 기생충 관리 사업은 집단구충에 필요한 약품을 비교적 저가에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신풍제약은 메벤다졸의 개발을 바탕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 및 기생충박멸협회와도 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의 관계 역시 장기화되었다. 메벤다졸 개발 이후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신풍제약과의 계약연구를 수행하여 개발한 물질은 세파트리진, 알벤다졸, 프라지콴텔,에톡시벤자미드, 니클로사미드 등 8종이었다(Reich and Govindarj, 1998: 32). 이 과정에서 형성된 신풍제약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김충섭, 기생충학자, 기생충박멸협회 간의 관계는 이후 프라지콴텔의 공정 국산화와 간흡충증 관리사업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다시 작동하게 되었다.

3. 프라지콴텔의 개발과 국제적 연구 네트워크

1972년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과 머크는 공동 연구24)를 통해 동물 마취제 후보물질로 개발하고 있던 피라지노이소퀴놀린(pyrazinoisoquinoline) 유도체가 가축의 흡충류와 조충류25)의 감염을 치료하는 데에 효과가 있음을 발견했다(Chai, 2013: 32-43). 흡충류와 조충류는 토양매개선충(회충, 편충, 구충)을 대상으로 하는 메벤다졸 등 주요 구충제로 제거할 수 없었다. 또한 일반적인 토양매개선충보다 심각한 임상증상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약품들은 대부분 부작용이 심각하거나 효과가 높지 않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흡충증과 조충증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부작용이 낮고 효과적인 신약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바이엘과 머크는 여러 후보 물질 중 가장 구충 효과가 높았던 프라지콴텔을 최종 원료 물질로 선정하였으며, 곧이어 구충 범위와 용법이 여러 국가의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1977년에는 독일 연구팀이 쥐 모델에서 프라지콴텔이 주혈흡충 감염에 효과를 보이는 것을 확인했고, 같은 해에 칠레에서 인간의 조충류 감염증 치료에 효과를 보인다는 것을 밝혔다(Gönnert and Andrews, 1977: 129-150). 1970년대 후반 바이엘은 흡충류를, 머크는 조충류를 맡아 프라지콴텔의 적응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임한종, 2013: 212). 흡충 분야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를 발생시키고 있었던 주혈흡충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이를 위해 세계보건기구와 함께 다국적, 다기관 임상시험을 시행했다(Reich and Govindarj, 1998: 16-18). 조충류 연구를 담당한 머크는 학회 등을 통해 각국의 기생충학자와 접촉하여 프라지콴텔을 배포하며 임상연구를 독려했다.26)
한국에서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의 임한종을 중심으로 초창기 프라지콴텔 적응증 연구가 진행되었다. 임한종은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다양한 간흡충증 치료제의 임상 연구를 담당하고 있었다. 1966년에는 수의용 약제로 개발되었던 독일 훽스트(Hoechst) 제약의 헤톨(Hetol)을 이용해 간흡충증 치료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으며 이 연구 결과는 독일의 기생충학회지에도 발표되었다.27) 1968년 9월 이란에서 열린 제8회 열대의학 및 말라리아 국제학회에 참석한 임한종에게 바이엘의 학술부장이 새로 개발한 니클로포란(Nicofolan)의 간흡충증 치료 효과 연구를 부탁했다.28) 1974년에 임한종은 독일 제3차 기생충학회에 흡충류 화학요법에 대한 분과 의장을 맡아 국제 기생충학계에서 활동하게 되었다(임한종, 2013: 81-82). 이처럼 임한종은 1960년대부터 한국의 주요 구충제 임상 연구자로 독일의 제약회사들과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1977년 3월 머크는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프라지콴텔 개발 회의를 열고 임한종을 포함해 조충류가 유행하고 있는 중남미의 연구자들을 다수 초청했다. 당시 이 모임에서 초점을 맞추었던 질병은 낭미충증29)이었다. 머크는 모임에 참석한 연구자들에게 프라지콴텔을 제공하며 실험을 권장했다. 동시에 회사 측에서 의료사고를 책임질 수 없으며 실험을 강요하는 것도 아님을 강조했다(임한종, 2013: 83). 뇌유구낭미충증의 경우 구충제 투약으로 단시간에 많은 기생충이 사멸할 경우 염증 반응으로 뇌압이 상승하거나 쇼크가 올 수 있는 등 투약 부작용 위험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임한종은 고대병원에서 스테로이드 제제인 덱사메타손과 프라지콴텔을 동시에 사용하여 뇌낭미충증 치료에 성공했다(Rim et al., 1979: 67-72). 조충류에 대한 치료 성공은 고무적이었으나 프라지콴텔의 집단적인 사용에는 제약이 있었다. 뇌유구낭미충증의 경우 대변으로 충란이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컴퓨터 단층촬영 등 당시에는 고가였던 진단 장비가 필요했다. 또한 투약 후 사멸한 충체들이 뇌에서 부종을 일으키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투약 기간에는 입원 관찰을 필요로 했다. 임한종은 진단과 치료가 어려운 조충증 보다는 채변검사로 진단이 가능하며 치료에 따른 전신성 부작용이 낮을 것으로 예측되는 간흡충증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간흡충은 그가 오랜 기간 연구해오던 주제로, 한국에서는 조충에 비해 높은 유병률로 인해 중대한 보건 문제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효과적인 치료 약품의 부재로 접근하지 못했던 흡충류와 조충류에 효과를 보이는 원료가 개발되었다는 소식은 한국의 제약업계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특히 1975년 메벤다졸 합성 및 국산화에 성공하여 구충제 생산 분야에서 입지를 다져온 신풍제약은 시제품 확보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79년 신풍제약 회장인 장용택은 임한종을 직접 찾아와 당시 머크에서 시험용으로 제공했던 프라지콴텔을 제공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임한종은 “바이엘에서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내심 불안”(임한종, 2013: 213)해 하면서도 40정을 신풍제약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처럼 임한종을 매개로 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국내 제약 기업은 프라지콴텔이라는 신약 물질과 임상 자료를 빠르게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열악한 한국의 제약산업 수준으로는 프라지콴텔 원료를 국내에서 자체 생산하고 활용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4. 프라지콴텔 제조법 국산화와 정책적 지원

1979년 한국의 중소 제약업체였던 신풍제약은 임한종을 통해 프라지콴텔을 입수할 수 있었지만 기존 독일의 공법을 활용하여 제조에 나서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특허법은 원료 물질의 동일 여부에 따라 특허를 적용하는 원료 특허는 적용하고 있지 않았지만, 생산 제법이 동일할 경우 특허권 침해로 인정하는 제법 특허를 적용하고 있었다. 1980년 1월 26일 바이엘은 이미 한국에 독일에서 개발한 제법의 특허를 등록해 놓은 상태였다.30) 신풍제약에 약품을 제공한 뒤 특허권 침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임한종은 바이엘 측에 한국 내에서 프라지콴텔이 제조될 경우 어떤 문제가 일어날지 직접 문의하기도 했다(임한종, 2013: 213). 하지만 바이엘은 한국에서 기존의 생산 공정을 재현하거나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 제조법은 약 100도씨 100기압의 고온, 고압에서 촉매를 통해 수소 이온을 환원하여 중간물질을 합성하는 방법이었다. 이는 한국 제약업체의 설비 수준으로는 안전 및 기술력 문제로 실시가 어려운 공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당 공정에 필요한 고압 수소 이온 환원기계 역시 특허로 보호되고 있는 고가의 장비였다(김충섭 외, 1983: 20-29).
신풍제약의 장용택은 프라지콴텔의 국내 생산을 위해 이전에 종합 구충제인 메벤다졸의 공정을 함께 연구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응용화학연구실장 김충섭을 찾았다. 프라지콴텔의 제법 개발에는 크게 세 가지의 난점이 있었다. 첫째는 기존의 제조 방법에서 핵심적인 이소퀴놀린 중간체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바이엘의 제법 특허에서 제시하고 있는 중간물질과 촉매들은 모두 고가의 재료로 중소 업체에서 활용하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두 번째는 기존의 공정이었던 고온, 고압 하에서의 수소 환원 반응이 국내의 설비에서는 어려운 것이었고, 마지막 난점은 제조공법이 국내에 이미 제법 특허로 등록되어 있어서 동일한 방법으로 국내제조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김충섭 외, 1983: 3-5).
프라지콴텔의 제법 공정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전략은 핵심적인 중간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유도체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김충섭은 기존에 메벤다졸 등 다양한 약제의 역합성에 성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프라지콴텔의 새로운 공법을 개발하고자 했다. 그 방법은 약품의 구조를 “퍼즐처럼 분해한 후 단계별로 최종화합물로 맞추어 가는 것”(김충섭, 2017: 378)이었다. 1981년 9월, 김충섭은 신풍제약과 연구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연구는 1982년 과학기술처의 특정연구개발사업31)으로 지정되었으며, 총 개발비 3,000만원 중 신풍제약이 약 3분의 1을, 정부가 나머지를 융자 형태로 지원했다(Reich et al., 1998: 47-48).
수십 차례의 반복실험을 거쳐 약 5개월만인 1982년 2월, 김충섭 연구팀은 실험실에서 중간물질 합성에 성공했다(김충섭, 2017: 378). 프라지콴텔의 핵심적인 구조는 두 개의 고리 구조인 이소퀴놀린(isoquinoline)환과 피라지노(pyrazino)환이 서로 붙어있는 구조인데, 김충섭은 긴 사슬 중간체를 기반으로 하여 동시에 두 고리가 형성되도록 하는 반응을 고안했다. 이 긴 사슬 중간체는 저가의 간단한 기초물질을 바탕으로 실온 조건에서 합성할 수 있었으며, 염산과 같은 강산 조건 하에서 쉽게 고리화가 이루어져 원하는 1,2,3,4-테트라하이드로이소퀴놀린 유도체를 95% 이상의 수율로 얻어낼 수 있었다(김충섭 외, 1983: 31-51). 김충섭 연구팀이 개발한 새로운 프라지콴텔의 제조공법은 기존의 7-8단계의 반응 과정을 4단계의 간단한 방법으로 압축한 것이었으며, 더 저렴한 동시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식이었다.32)
실험실에서 원료 합성이 성공한 이후,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연구진인 김충섭, 김충협, 이남진은 새로운 제법을 두 개의 특허로 출원했다. 첫 번째 특허는 1982년 7월 8일자로 특허 출원되었으며 1984년 7월 4일 등록되었고, 두 번째 특허는 1983년 5월 31일에 특허 출원되어 1985년 11월 13일 등록되었다.33) 김충섭 연구팀에서 개발한 기술은 신풍제약으로 이전되었다. 이 기간 동안 바이엘 사에서 6명의 경영진을 한국으로 파견하여 생산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며, 특허 논쟁으로 인하여 약품 개발이 약 반년가량 지연되었다. 하지만 김충섭이 개발한 프라지콴텔의 새로운 제법이 독창적인 것으로 인정받아 별도의 제법 특허로 승인되자 바이엘 사는 신풍제약의 프라지콴텔 생산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었다.34)
이후 신풍제약은 공업화를 위한 연구를 자사의 연구실에서 1982년 10월부터 진행했다.35) 신풍제약은 연구 시작 후 약 2-3개월 만에 공업화를 성공하였고, 이는 김충섭이 개발한 새로운 제법이 기존의 제법보다 훨씬 용이한 방식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6) 신풍제약은 1983년 3월부터 부평에 위치한 공장에서의 대량생산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한편, 프라지콴텔 원료 및 완제의약품 품목허가와 보호요청을 제기했다(신풍제약, 2017: 138)[그림 1]. 이에 바이엘 사는 1983년 초 자신들의 특허권을 내세워 외무부를 통해 프라지콴텔의 시장보호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이에 외무부는 3월 17일에 보건사회부에 협력을 요청하는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37)
1983년 3월 4일부터 보건사회부 중앙약사심의위원회에서 보호대상 의약품 심사 소분과위원회를 개최하여 신풍제약의 프라지콴텔 보호의약품 지정에 대한 심사가 시작되었다.38) 심사위원으로는 당시 약무국장을 맡고 있던 이창기,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 정원근과 해당 제법 개발자인 김충섭 등 총 6명이 위촉되었다. 심사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제시되었다. 먼저 임상적 증거에 따른 치료 효과의 우수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했다. 두 번째 조건은 기술성으로, 제조 공정에 대한 신청 사항과 실사 결과가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더불어 예상 수요에 맞출 수 있는 생산 능력을 인정받아야 했고, 개발비와 시설투자비 등 투자 규모에서 현저한 투자가 인정되어야 했다. 또한 한국생산본부에서 인증 받은 원가 계산서를 통해 국제 판매가격과 대비하여 적정한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했다.39)
이를 위해 위원회는 기초 자료 일체를 신풍제약에서 제공받았으며, 4월 18일부터 30일까지는 국립보건원과 합동으로 생산 시설 실사를 진행했다.40) 단순 시설 및 장비 조사 뿐 아니라 제조 공정, 원료 의약품의 분량, 수득률, 생산 능력 등 전반적인 사항을 확인하였으며, 신풍제약 연구원 2명을 실사 기간 동안 차출하여 최종 제품 10kg 분량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를 살펴보았다.41)
2주에 걸친 실사까지 진행한 배경에는 내외부적 요인이 모두 작용했다. 외부적으로는 기존에 프라지콴텔 제조에 대해 특허를 보유하고 있던 머크와 바이엘 등 해외 제약업체의 압력이 계속되었다는 점이 주요 요인이었다. 새로운 제법이 기존 특허에서 인정하고 있는 제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독창성이 인정되어 보호대상 의약품으로 지정할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도 이러한 꼼꼼한 심사는 필수적이었다.42) 내부적으로는 1975년 시작된 보호대상 의약품 지정 제도가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요인이 있었다. 1981년 감사원 감사에 따르면 보호대상 의약품 중 다수는 신약인 원료의약품의 개발 의욕을 고취시키자는 취지와 달리, 해외기술을 그대로 들여와 생산만 국내에서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 존재하는 생산기술이므로 여러 업체에서 동시에 보호대상 의약품을 생산하는 경우도 생겼고, 국내 제약 업체의 육성을 위해 국내에서 소비되는 분량에 대해서는 특정 업체에 독점권을 부여하는 대신 여러 업체에 소규모 생산을 허가함에 따라 과당 경쟁이나 중복 투자의 문제가 심각했다.43) 기존의 제도로는 국내에서 독창적인 생산 기술을 확보하여 국제 경쟁력을 키우기는 어렵다는 우려에 따라 집중적인 실사 조사가 시행되었다.
위원회는 프라지콴텔의 국내 수요가 1982년 220kg에서 1983년 1,000kg, 1985년에는 1,500kg으로, 국외 수출 역시 1983년 3,000kg에서 1985년 3,500kg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44) 이에 따른 외화 절감 효과 역시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 1982년 환율 기준으로 프라지콴텔의 수입 가격은 1kg 당 2,384,130원이었다. 그에 반해 신풍제약의 생산 원가는 997,522원으로 수입가와 비교해 절반 이상 낮았으며, 기타 제반 경비를 포함한 판매 예상 가격 역시 1,400,000원으로 월등히 낮은 것으로 파악되었다.45) 당시 한국에서 생산되고 있던 바이엘의 프라지콴텔 국내 판매 가격은 kg 당 173만원이었다. 신풍제약의 연간 실생산 가능수량인 8,000kg을 생산했을 때 이에 따른 외화 절감액은 연간 12,954,000 달러로 예상되었으며, 1,500kg 정도로 예측된 국내 수요를 초과한 생산분을 수출할 경우 추가적인 외화 획득을 기대할 수 있었다.46)
기술성에 있어서는 국내에서 구입이 쉬운 저가의 화학물질들을 활용할 수 있었고, 종전에 7-8단계에 이르던 공정을 4개로 줄였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제조 공정의 단순화로 생산설비 투자액47) 역시 크게 감소하여 공업화에 용이하다는 점도 “독창적인 신기술”로 인정되었다.48) 임상적 효과에 대해서는 위원회에서 보완을 요구해 1983년 5월까지 서울대학교 풍토병연구소, 고려대학교 열대풍토병연구소, 연세대학교 열대의학연구소에 각각 용역 연구를 맡겼다.49) 그 결과 충란이 완전히 배출되지 않는 충란음전률은 1일 투약의 경우 86.4%, 2일 투약의 경우 100%로 나타났으며, 충란 감소율도 97.9%에서 100%의 높은 치료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제시된 자료들과 실사 결과를 토대로 1983년 7월 5일 보건사회부는 고시 83-27호로 1983년 7월 9일부터 1988년 7월 8일까지 신풍제약 프라지콴텔(제품명 디스토시드, Distocide)을 보호의약품으로 지정했다.50) 프라지콴텔이 받은 5년간의 보호조치는 당시 신약 보호조치가 강화된 이후 가장 긴 것이었으며, 이 기간 동안 동일품목에 대해 국내의 제조 및 수입이 금지되었다.51) 다만 기존에 완제의약품을 판매하고 있던 한국 바이엘의 경우에는 2년간 자가소비용으로 수입 및 생산을 허가하는 유예기간을 두었다.52) 신풍제약의 디스토시드는 1983년 7월 11일에 발매되었으며. 수출을 통해 연간 약 400만 달러의 수입대체 효과 및 한 해 300만 달러의 수출증대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Reich et al., 1998: 46).
바이엘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김충섭이 프라지콴텔의 새로운 제법을 개발한 이후에도 신풍제약과 지속적인 갈등 관계에 있었다. 신풍제약에서 프라지콴텔 원료 시험 생산이 이루어진 이후, 바이엘 사의 화학 담당 전문가들이 고려대학교의 임한종을 방문하여 그에게 신풍제약의 프라지콴텔 샘플을 얻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임한종, 2013: 215). 디스토시드가 별도의 제법 특허로 인정받아 보건사회부에 의해 보호의약품으로 지정되면서, 그동안 한국에 프라지콴텔 원료를 수출하던 독일의 바이엘은 한국 시장에서의 입지가 크게 좁아졌다. 이에 바이엘은 수십만 불에 달하는 거액을 제시하며 신풍제약 측에 기술이전을 요청하였으나 장용택은 “제조방법을 폐기하면 하였지 팔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신풍제약, 2017: 140-141).
프라지콴텔의 제법 개발을 계기로 김충섭은 1983년 각종 과학상을 수상했다. 1983년 7월 19일 정진기 언론문화재단 과학기술상이 제정된 첫 해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50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53) 이어서 같은 해 8월, 김충섭 연구팀은 한국과학기술원에서 과학자상과 함께, 과학계에서 당시 최고액이었던 4,350만 원의 포상금을 수여 받았다.54) 나아가 1983년 11월 22일 기술진흥확대회의에서 전두환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았으며, 1983년도 과학기술유공자 61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대덕연구단지에서 표창장과 대통령 격려금을 받았다[그림 2].55)
김충섭이 동백장을 수여받은 1983년 제3회 기술진흥확대회의에 신풍제약 대표인 장용택도 제약기업의 기술개발 성공사례를 보고하기 위해 참여했다. 장용택은 프라지콴텔 공정 국산화의 경제적 효과 및 약의 효능을 위주로 설명하였으며, 이후 전두환과 장용택은 약의 가격과 효능 및 부작용에 대해서 짧게 문답했다. 장용택은 당시 전두환이 외화절약 및 수출증대 효과에 관심을 갖고 크게 만족하여 치하했다고 회고했다(신풍제약, 2018: 145).
프라지콴텔 제법 개발이 주목을 받았던 것은 당시 전두환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던 기술드라이브 정책과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기존 박정희 정부와의 정책적 차별성을 두기 위해 1970년대 추진되었던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양적 팽창에 집중한 정책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기술의 질적 향상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고 산업 구조를 고도화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기술드라이브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신향숙, 2015: 535-537). 이러한 기술드라이브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행정 기관이 기술진흥확대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대통령을 포함한 전 각료와 산업계, 학계, 과학기술계 대표자들이 참석하여 기술 개발 대책을 논의하고 기술 개발 성공 사례와 해외 동향을 논의했다(신향숙, 2015: 543-544).
김충섭과 장용택이 참석한 1983년 11월 22일 제3회 회의의 주제는 “신기술 투자의 활성화 대책”(한국과학기술연구원, 2006: 219)으로 기술드라이브 정책을 통해 국내에서 개발된 기술 중 상업화에 성공한 사례들이 보고되었다.56) 신풍제약의 성공사례는 기업과 정부출연연구기관이 국가 연구개발사업을 기반으로 하여 선진적 기술을 개발하고, 공업화까지 성공하여 이를 통해 수출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제5공화국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의 핵심적인 전략이었던 기술드라이브 정책과 적절히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기술의 선진화라는 측면을 넘어 개발 직후 상용화에 성공하여 수출까지 가능한 사례는 상위 정책결정자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신풍제약의 디스토시드가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생산 체계를 마련함에 따라, 한국 뿐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한 바이엘 사는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통해서 자사 약품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바이엘 사는 임한종에게 한국에서 인체 흡충류 감염에 대한 국제 심포지엄 개최를 제안했다(임한종, 2013: 216-217). 모든 경비를 바이엘에서 제공하는 조건으로 고려대학교 열대풍토병연구소가 주관하여 1983년 10월 19일에서 21일까지 3일간 경주 보문단지에서 「동북 및 동남아시아에 있어서 인체 흡충류 감염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이 심포지엄에는 독일, 영국, 프랑스, 태국, 필리핀, 인도, 인도네시아 등 42개국 연구자들과 세계보건기구의 관계자들까지 참석했다. 바이엘 사는 이 기간 동안 바이엘에서 생산 중인 프라지콴텔(제품명 빌트리시드, Biltricide)의 우수성에 대해 신문을 통해 대중들에게 적극 홍보하는57) 한편, 심포지움에서는 유럽이나 미국 등 각국에 바이엘 사의 제품이 우수하므로 신풍의 제품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임한종, 2013: 216).
심포지엄 이후에도 바이엘은 주요 선진국 제약기업 특허담당자들과 국제특허대표협회 대표단을 구성하여 경제기획원, 상공부, 특허청 등을 방문하여 물질특허의 도입을 촉구했다(대한약공, 1995: 144). 제법 변경을 통해 프라지콴텔과 같은 신약을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도 생산할 수 있게 되자, 기존에 물질특허를 인정하고 있던 서독, 일본, 미국 등 선진국 정부들은 한국에도 물질특허 제도 도입을 요청하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 들어 지적재산권 보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이러한 선진국 정부들의 압력은 더욱 높아졌다.58) 이러한 압력 속에서 1983년의 1단계 의약품 수입 자유화조치를 시작으로 한국 의약품 시장은 점진적으로 개방되어 1984년 7월 1일 수입자유화 3단계에서는 메벤다졸과 같이 보호대상 의약품에 속해있던 약품들까지 수입 개방 품목에 포함되었다(대한약공, 1995: 111).
1985년 10월 미국 정부는 한국의 지적재산권 침해 사례에 대해 슈퍼 301조를 발동해 광범위한 무역 보복 조치를 시행하였고, 1986년 8월 한미간에 지적 재산권 양해 각서가 체결되면서 한국의 특허 제도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7: 50-51). 특허법 개정안에 따라 1987년 물질 특허가 도입 되었고 의약품 수입 역시 전면 개방되었다. 하지만 제약 산업과 특허 제도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신풍 프라지콴텔은 계속해서 수입금지 품목으로 보호받았으며, 제법 특허 역시 1997년까지 유지되었다(대한약공, 1995: 182-183). 이처럼 외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프라지콴텔 생산이 한국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의 성공 사례로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안정적인 국내 생산을 통해 주요한 보건문제 중 하나인 간흡충증 관리 사업을 진행한다는 목표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5. 디스토시드와 간흡충증 관리 사업

프라지콴텔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간흡충증 치료제들은 대부분 인체 독성이 높거나 치료 효과가 낮아 집단구충 사업에 적용하기 어려웠다. 이처럼 치료 방법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간흡충증 관리 사업 역시도 감염 원인을 회피하는 방법 이상으로는 전개되기 어려웠다. 1971년 제1차 기생충감염률 실태조사에서 전 국민의 4.6%가 간흡충에 감염되었음이 밝혀졌다(보건사회부 외, 1976: 17). 민물고기를 중간숙주로 하는 간흡충의 특성 때문에 유병률은 주요 하천 인근 지역에서 더 높게 조사되었다.1962년부터 한국 정부는 843만 5천 달러 규모의 UN 특별기금 사용 계획 중 간흡충 박멸 사업으로 50만 2천 달러를 배정할 정도로 간흡충증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기초조사 자료조차 없어 UN 특별기금의 원조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정부의 판단에 따라 본격적인 사업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59)
효과적인 치료제나 관리 방법이 제한된 상황에서 보건사회부는 주로 중간 숙주와 주민들의 접촉을 줄이는 계몽 운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보건사회부는 재건국민운동 각 지부를 통해 민물고기의 생식을 줄이는 계몽 운동을 전개했고, 1962년 8월 15일부터 12월 31일까지는 서울시장 및 각 도지사에게 민물고기 회를 파는 각종 음식점을 단속하라는 지시를 하달하기도 했다.60) 1964년 12월 15일 국회 보건사회위원장인 정헌조는 국회본회의에서 방치되어온 “망국병”인 폐·간 디스토마 방역대책 촉구에 대한 건의안을 제출하였고 이의 없이 채택되었다.61)
1964년 한국에서 간흡충증 문제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진 것은 회충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몸 속에 있는 기생충이 국제 교류를 통해 국제 사회의 시선에 노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정준호 외, 2016). 1964년 12월 노동청에서는 2차 서독파견광부 응모자 2,500명을 대상으로 신체검사를 실시했다. 이 중 64%가 불합격 판정을 받았는데, 그 중 질병이 원인이었던 482명(22%) 중 간디스토마가 339명, 폐디스토마 143명에 달했다.62) 이에 이찬우 노동청장은 “국민보건에 획기적인 대책이 서야하겠다”고 요구했다.63)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따라 1967년 정희섭 보건사회부장관은 새해 소신으로 네 가지 주요 사업을 제시하며, 그 중 하나로 간흡충증 관리 사업을 언급하기도 했다.64) 이후 보건사회부는 기존의 민물고기 회 판매 식당 단속 정책을 강화하여 기생충 숙주인 담수어 등의 생식을 금지하는 규정을 기생충질환예방법에 포함시켜 법제화시켰고, 관련 법규를 위반하는 업소에 대해서는 허가취소 등 강력한 행정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65)
1968년 보건사회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서병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소진탁을 중심으로 조사평가반을 편성해 전국의 13개 표본 지역에서 간흡충증 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전 국민의 15%인 약 450만 명이 폐흡충과 간흡충에 감염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66) 1973년부터는 기생충박멸협회가 보건사회부의 요청을 받아 한국 간흡충증 실태조사를 시행했다. 1976년까지 이어진 조사 사업은 간흡충증 박멸 대책의 기초자료를 얻기 위한 것으로, 채변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간흡충증감염 실태를 위주로 조사했던 이전의 조사사업과는 달리 제1 중간숙주 및 제2 중간숙주를 포획하여 감염률을 확인하는 매개체 연구도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78: 13-17).
조사 대상 지역이었던 한강, 낙동강, 만경강, 영산강, 섬진강, 금강 유역에서 거주민들의 간흡충란 보유율은 40%였으며, 특히 김해 지역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조사에서 나타난 감염양상은 남성이 여성보다 약 2배 높았으며, 연령이 증가할수록 대체로 감염률 또한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인구집단 별 민물고기 생식 습관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78: 25). 하지만 이러한 기초 조사사업에도 불구하고, 간흡충증 관리사업은 기존의 장내기생충 박멸사업과 같은 실질적인 인구 단위의 집단구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프라지콴텔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사업에 이용할 수 있는 적절한 흡충용 구충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간흡충증 관리사업은 보건소를 중심으로 한 예방계몽사업과 중환자를 대상으로 한 치료사업에 머물렀다.
하지만 보건교육과 계몽·홍보사업을 통해 오랜 기간 “이미 습관이 되어 지금도 잉어회를 먹지 않고는 못 견”디는 주민들의 생활습관을 변화시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당시 시행되었던 보건교육의 효과는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되었다.67) 기생충박멸협회는 예방계몽사업이 “실제보다 과장되고 협박적이어서 마치 생선회를 먹으면 곧 죽는 듯”이 하여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고 분석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2: 6). 나아가 민물고기 생식을 줄이기 위해서는 “세대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농촌생활이 더욱 바빠지고 다양하여져 민물생선회에 관심이 덜 가게 해야 할 것”이라며 계몽 및 보건교육 자체의 효과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2: 7). 또한 1970년대 한국 기생충 관리 사업은 회충, 구충, 편충 등 토양매개선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적 한계로 집단검진 집단구충의 대상이 어려웠던 간흡충증은 상대적으로 사업의 우선순위가 낮아졌다. 이에 따라 간흡충 감염률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감소하지 않았다. 전국기생충감염률 실태조사에서 따르면 간흡충 충란 양성률은 1971년 4.6%, 1976년 1.8%, 1981년 2.6%로 유의미한 변화를 보였다고 하기는 힘들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129).
프라지콴텔의 간흡충증 치료 효과가 확인된 직후 한국의 기생충 관리 사업 참여자들은 “약효가 증명된 이상 정부는 빨리 이 약품을 수입해 환자에게 투약해야 할 것”이라 촉구했다.68) 이에 따라 보건사회부는 예산을 확보하여 프라지콴텔을 수입하고 1982년부터 간흡충증 치료 시범사업을 시행했다. 기생충박멸협회와 보건사회부는 기존 조사에서 간흡충 감염률이 높았던 지역 중 5개의 면을 선정하여 28,813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하고, 총 2,958명에게 투약을 진행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2: 16-21). 집단구충 사업에서 환자들은 감염 정도에 따라 경감염자, 중간감염자, 중감염자, 위중감염자로 구분되었고 투약 회수도 1회에서 3회로 차이를 두었다. 집단구충 결과 치유율은 92.3%, 충란 감소율은 98.2%로 조사되어 프라지콴텔이 집단구충에도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2: 134-141). 이는 이후 감염강도, 혹은 정책적 목표에 따라 각기 다른 집단구충 지침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69) 시범사업 보고서는 집단구충에서 나타난 프라지콴텔의 뛰어난 임상적 효과와 경미한 부작용을 근거로 하여, 프라지콴텔을 이용한 간흡충 감염의 집단치료 체제를 갖출 것을 건의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2: 37-38).
1980년 바이엘 사는 프라지콴텔을 한국에 빌트리시드라는 상품명으로 정식 출시하였고, 첫 해에만 8억 7,000만 원의 생산 실적을 올렸다(신풍제약, 2017: 137). 하지만 약품의 효과와는 별개로 가격이 문제였다. 당시 판매 가격은 8정당 30,000원으로 1983년 한국 평균 공장 노동자 월급의 9분의 1에 해당해 가격 접근성이 낮았다(Reich et al., 1998: 46). 원료 1kg 당 2,200 달러라는 높은 가격은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사업에 있어서 높은 장벽이었다. 당시 금액으로 1인당 치료에 소요되는 비용이 15,000원 이상으로 예측되었으며, 이로 인해 무상 치료가 아닌 일부 보조 혹은 융자 형식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방식도 검토되었다.70)
간흡충증 관리 사업에 대한 관심이 환기된 것은 프라지콴텔 국산화 기술 확보와 함께 대외적으로 한국의 풍토병이 효과적으로 관리되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김충섭은 프라지콴텔 제법 개발이 가져다 줄 효과 중 하나로 한국이 “기생충 왕국이란 누명”을 벗어 “86년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에 외국관광객을 유치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71) 마찬가지로 보건사회부에서 198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한 간흡충 감염자 무료 투약 사업 역시 “88올림픽 때까지는 간디스토마를 완전 퇴치”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72) 한편 내부적으로는 기술드라이브 정책의 홍보수단으로 신풍 프라지콴텔의 개발 사례를 활용하고자 했던 전두환 정권의 의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전두환은 ‘신풍제약의 프라지콴텔을 소모하기 위해서’ 간흡충증 관리사업을 실시할 것을 관련 부처의 장관에게 지시하였으며, 이로 인해 간흡충증 집중관리사업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73)
신풍제약의 디스토시드가 종전 빌트리시드의 60%라는 낮은 가격에 국내 수요를 충당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으로 공급됨에 따라 간흡충증 관리 사업도 다시 활발히 진행되었다. 1984년부터 시작된 간흡충증 집중관리사업에서 기생충박멸협회는 가검물 검사를 담당했고, 가검물 수집과 투약 치료는 감염자가 거주하는 지역의 관할 보건소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과정은 무상으로 진행되었으며, 사업의 재정은 1984년부터 1986년까지 3년간은 국고에서, 그 이후는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으로 충당되었다(보건사회부 외, 1992: 5-6). 1984년부터 1990년까지 7년간 전국 1,161개 지역에서 1,780회의 사업이 실시되었고, 검사자의 수는 총 300만 명으로 농촌인구의 40%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투약 대상 인원은 총 87,920명이었다(보건사회부 외, 1992: 22-43).
간흡충증과 그 합병증이 기생충 감염에 의한 것임이 보건교육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민물생선의 생식과 충란 감염률은 1980년대까지 감소하지 않았다. 주된 이유는 간흡충증의 초기 감염 증상이 없거나 경미한 경우가 많았고, 만성 증상 역시도 감염량이 축적된 5-20년 이후에나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역주민들은 민물고기 생식의 해악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건사회부는 프라지콴텔 치료 이후, 감염자들이 “숙명으로 알고 지내던” 피로감, 소화불량, 상복부 동통 등이 사라져 자신의 증상이 민물고기 생식으로 인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조사 및 투약 사업의 교육적 효과 역시 커졌다고 분석했다. 또한 기존 간흡충증 유행지의 70% 이상에서 재감염이 감소한 것을 그 근거로 들었다(보건사회부 외, 1992: 40).
하지만 간흡충증 유행 지역의 주민 모두가 정부와 기생충 전문가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프라지콴텔의 도입으로 간흡충증이 난치병에서 약 몇 알만 먹으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성격이 변모하면서, 대중들의 간흡충증에 대한 기존 인식 또한 변하게 되었다. 특히 낚시꾼들 사이에서는 민물고기 회를 먹고 나중에 다시 약을 먹어서 치료하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74) 춘천과 서울 등지에서는 간흡충 유충이 없다고 알려진 이스라엘 잉어 횟집이 늘어나는 등 민물고기 회 섭취는 계속해서 주요한 식문화로 남아 있었다.75) 한편 신풍제약 역시도 신문광고에서 “회 이젠 안심하고 드세요”라는 문구를 사용하며 이러한 대중의 행동을 부추겼다[그림 3].
다른 토양매개선충과 마찬가지로 구충제를 통해 간흡충증을 쉽게 치료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짐에 따라 기생충에 노출되는 생활 습관이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로 인해 일부 지역의 경우에는 오히려 투약 집단이 비 투약 집단보다 더 높은 충란 양성률을 보이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의 주경환은 김해시에서 집단치료를 받은 사람의 감염 양성률이 66.2%로, 비투약군의 양성률 33.7%에 비해 약 2배가량 높게 나왔다는 결과를 발표했다(주경환 외, 1987: 80-93).
기생충 관리 사업 담당자들은 프라지콴텔의 치료 효과와 관련된 지식을 대중들로부터 통제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민물생선 회의 섭취 전후로 프라지콴텔을 투약하면 간흡충증을 예방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학계에 보고되었다.76) 하지만 기생충 사업 관리 담당자들은 이 지식을 전문가 집단에서만 공유하고 일반인에는 전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보건사회부 외, 1992: 36-37).
이미 민물고기를 판매하는 횟집에서는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무료로 프라지콴텔을 나눠주는 행사까지 하고 있을 정도로 민간을 통한 프라지콴텔의 보급은 흔해졌다.77) 안정적인 공급과 가격 저하로 약품에 대한 접근성은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수직적인 기생충 관리 사업은 대중 개개인이 자율적인 판단에 따르는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6. 결론

1970-1980년대 한국은 해외 원조를 받는 국가인 동시에 산업화를 통해 선진국을 추격하는 후발주자라는 이중적인 지위에 놓여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국가주의적 태도 위에 서구의 지나친 개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홍성주 외, 2017: 78). 이러한 긴장은 지정학적 변화 뿐 아니라 한국의 기술이 서구권에 근접하면서 보다 공개적으로 표출되었다. 프라지콴텔의 국산화와 특허 갈등은 한국의 과학기술 추격 전략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1960-1970년대 한일 기생충 협력 사업을 진행하며 만들어진 집단구충 사업과 이를 기반으로 한 구충제 임상시험 기반은 이후 프라지콴텔 도입 과정에 있어서도 빠른 시간 내에 국내 사업에 적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더불어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던 임한종은 프라지콴텔 개발 직후 이를 입수하여 한국에 들여올 수 있었다. 기존 한국 기생충 관리 사업을 통해 형성되었던 제약회사와 연구자, 기생충학자의 관계망은 새롭게 도입된 기술이 빠르게 국산화 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일어난 국제적인 특허 논쟁 등의 제약은 한국 정부에서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기술드라이브 정책을 통해 무효화 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프라지콴텔 생산 기술은 성공적으로 국산화되어 안정적인 생산 시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실험실적 연구 및 국내 임상시험을 통하여 신풍 프라지콴텔의 효능을 확인한 기생충 학자들에게 1982년의 시범사업으로부터 시작된 국내 간흡충증 관리사업은 기존의 실험적 과정을 실제 세계로 이식하는 과정이 되었다. 프라지콴텔은 약품 접근성이라는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대규모 간흡충증 관리 사업을 가능하게 했다. 이 사업을 통해 기생충 학자들은 간흡충증의 집단관리 사업을 위한 프라지콴텔 사용법의 지식들을 축적했다.
약품 생산 기술에서의 성공이 질병 관리 사업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13년 발표된 제8차 전국 장내기생충 감염조사 결과에 따르면 간흡충 양성률은 1.86%로 여전히 약 93만 명 이상이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78) 이는 전체 장내기생충 중 가장 높은 비율로 간흡충증 관리 사업이 토양매개선충 관리 사업에 비해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프라지콴텔이라는 기술이 성공적으로 한국에 정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 기술의 구현 대상인 대중의 이해가 기생충 관리 사업 담당자의 이해와는 달리 복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생충 관리 사업 담당자들은 간흡충 감염률 감소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으나, 모든 대중들이 이러한 사업의 목표를 동일하게 수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낚시꾼들을 포함한 대중들은 프라지콴텔을 ‘민물고기 회를 간흡충증 걱정 없이 먹게 해주는 약’으로 인식했다. 즉 약품의 효과적인 보급은 대중들로 하여금 간흡충증을 ‘생활 식습관의 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질병’이 아닌, ‘약품으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질병’으로 그 인식을 변화시킨 것이다. 결국 생산 기술의 성공적인 국내 도입이 역설적으로 장기적인 질병 관리 사업의 효과를 제한하도록 만들었던 셈이다.

Notes

1) 주혈흡충증(Schistosomiasis)은 민물 속의 유충과 접촉하여 감염되는 기생충 질환으로 달팽이를 중간숙주로 한다. 크게 방광을 손상시키는 방광 주혈흡충과 간을 손상시키는 만손 주혈흡충이 있으며 만성적인 감염은 방광암이나 간부전을 유발할 수 있다.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주로 유행하고 있으며 현재 연간 2억 명 이상의 감염자와 2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주요한 기생충 질환이다. WHO, 「Schistosomiasis Factsheet」, WHO, https://www.who.int/news-room/fact-sheets/detail/schistosomiasis. 검색일 : 2021년 8월 2일.

2) 간흡충(Clonorchis sinensis, 간디스토마, 간지스토마)은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을 종숙주로 하여 기생하는 기생충이다. 간흡충의 제1 중간숙주는 왜우렁이며, 제2 중간숙주는 민물고기이다. 사람이 간흡충의 유충에 감염된 민물고기를 먹으면 그 유충은 간 내의 작은 담관으로 올라가 성장하여 성충이 된다. 이들은 담관에서 수년에서 30년까지도 기생하며 주변 정상 조직을 손상시킨다. 이러한 감염이 만성화되면 황달, 간 비대, 간농양, 간경변, 복수, 심지어는 간과 담관의 악성종양 등을 일으킬 수 있다.

3) 기생충학자와 제약회사에 대한 분석을 위해 주로 사용된 사료는 최초로 프라지콴텔을 들여온 기생충학자 임한종, 국산화 및 상용화를 담당한 신풍제약 대표인 장용택의 회고록을 주로 활용하였다. 이들의 기록은 약품의 상업화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한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출간 논문 및 약품 허가 심사를 위해 제출한 자료들과 비교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였으며, 다른 기생충학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용을 검토하였다.

4) 「산토닌 쑥 재배 성공」, 『매일경제』, 1967년 8월 4일.

5) “Berger to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RG 469. Office of the Deputy Director for Operations (1953-61). Office of Far Eastern Operations, Entry 422, Korea Subject Files, 1950-61, 1960-61. Box 152. (국립중앙도서관 해외 한국 관련 기록물).

6) 「국산약품 양약 틈에 수많은 조제품」, 『동아일보』, 1963년 8월 26일.

7) 「국민교 방학 후에야 구충제 뒤늦게 지급」, 『동아일보』, 1965년 7월 28일.

8) 「망각 지대를 <10> 조악상품 몰아내자 (10)」, 『매일경제』, 1967년 2월 11일.

9) 「구충제 생산 줄어 원료 계속 품귀로」, 『매일경제』, 1973년 3월 30일.

10) 「의약계 지적 질병퇴치 막는 고율관세」, 『동아일보』, 1973년 10월 6일.

11) 「하반기의약품수출입 허가 방침」, 『매일경제』, 1966년 7월 4일.

12) 이창기(전 보건사회부 약정국장), 「원료의약품의 보호지정 성과와 뒷이야기」, 『약업신문』, 2018년 4월 13일.

13) 「하반기의약품수출입허가방침」, 『매일경제』, 1966년 7월 4일.

14) 임한종은 195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사를 마치고, 1963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 교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부터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아 한국에서 유행하는 풍토병성 기생충질환 특히 간, 폐, 및 장흡충증의 분포와 발생기전 및 치료제 개발에 관한 연구와 그 질병퇴치에 전념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대한기생충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세계기생충학자연맹 부회장을 맡았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는 한국건강관리협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다(임한종, 2013: 3-7).

15) 특허공보 공고번호 75-298, 「메틸-(5-벤조일-벤지미다조일)카바 메이트의 제조방법」, 출원일 1975년 2월 25일, 공고일자 1975년 8월 18일.

16) 김충섭은 1965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델라웨어 대학교에서 1971년 유기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4년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연구실장을 하며 구충제, 항생제, 소염효소제 등의 의약품 원료 국산화를 이루었다. 이후 유한양행, 제일제당 중앙연구소장을 역임하였으며, 2005년까지 한국화학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한국공학한림원에서 펴낸 한국산업기술발전사에서는 김충섭을 화학합성의약품의 대표 연구자로 소개하기도 했다(한국공학한림원, 2019: 39).

17) 유치과학자 제도에 대해서는 문만용(2017: 115-117, 126)을 참조.

18) 당시 유치과학자로 미국에서 막 귀국하였던 김충섭 박사가 여러 사업 중 구충제였던 메벤다졸의 공정 개발을 선택한 것에는 개인적인 경험도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장용택 추모사에서 메벤다졸 제법 개발에 참여하였던 당시를 “또한 나에게는 나의 어린 시절에 산토닌 복용 부작용으로 기억되어 훗날 회충약 연구의 꿈을 가졌던 소원이 신풍제약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 회고했다(김충섭, 2017: 379).

19) 특허공보 공고번호 75-298, 「메틸-(5-벤조일-벤지미다조일)카바 메이트의 제조방법」.

20) 「원료의약품 허가 심사사항」,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메벤다졸) 약무 1442-74311』, (1975).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6767)

21) 「원료의약품 허가 심사사항」,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메벤다졸) 약무 1442-74311』, (1975).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6767)

22) 「사업계획서」,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메벤다졸) 약무 1442-74311』, (1975).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6767)

23) 이창기(전 보건사회부 약정국장), 「원료의약품의 보호지정 성과와 뒷이야기」, 『약업신문』, 2018년 4월 13일.

24) 당시 머크와 바이엘은 연구개발비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약품 후보 물질들을 공유하는 협약을 맺고 있었다. 인간 대상 약품을 주로 개발했던 머크와 동물 대상 약품을 대상으로 했던 바이엘에서, 서로에게 적합하지 않은 후보물질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방식이었다. 머크에서 개발한 피라지노이소퀴놀린 유도체는 초기에 인간 대상 마취제로 개발되었으나 기존 마취제보다 투여량이 높아 바이엘로 넘겨졌다. 1975년 이와 연관된 400개의 화합물 중 가장 구충에 효과적이었던 프라지콴텔(2-cyclohexylcarbonyl (1,2,3,6,7,11b) hexahydro-4H-pyrazino (2,1-a) isoquinolin-4-one)이 최종 약품 원료 물질로 선정되었다(Reich et al., 1998: 14-16).

25) 흡충류는 디스토마로도 불렸으며 국내에서는 간흡충, 폐흡충 등이 주요한 흡충증으로 유행했다. 조충류는 촌충으로도 불리며, 국내에서는 유구조충(돼지흡충)과 무구조충(소촌충)이 대표적이다.

26) 프라지콴텔은 출시 이전 머크의 영문 이니셜 EM과 바이엘의 앞 글자 BAY를 따와 Embay 8440이라 불렸다(임한종, 2013: 212).

27) 「간디스토마 치료에 개가」, 『동아일보』, 1966년 9월 14일.

28) 헤톨은 치료 효과는 높았으나 1967년 빈혈과 같은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독성실험에서 밝혀져 생산이 중단되었다. 니클로포란 역시 흡충류에 대한 다른 치료제가 없을 때 일부 사용되었으나, 독성이 강하고 부작용 비율이 높아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Hong et al., 1982: 49-52; 임한종, 2013: 67-68).

29) 주로 돼지에 기생하는 촌충인 유구조충은 충란을 섭취하는 경우 장벽을 통과하여 혈류를타고 뇌, 근육 등의 장소에 기생하며 포낭을 형성하게 된다. 뇌와 같은 주요 장기에 포낭을 형성하는 경우 심각한 손상이 발생할 수 있으며 시력장애, 간질발작 등의 증상이 일어날 수 있다(Rim et al., 1982: 169).

30) 「참고자료」,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관리번호 BA0128485).

31) 특정연구개발사업은 1980년대 핵심 과학기술 정책 중 하나로, 공공기술과 산업기술을 사용 대상에 따라 정부와 민간 주도로 구분하여 기술 개발 단계에 따라 대학, 정부출연연구소, 기업이 역할을 분담하는 방식을 말했다. 기존에 주로 정부출연연구소에 집중되어 있던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을 산업계와 학계로 확대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를 통해 80년대 기업과 대학의 연구개발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신향숙, 2015: 530-531).

32) 「올해 과학상 휩쓴 김충섭 박사」, 『경향신문』, 1983년 11월 24일.

33) 「특허출원 1982-0003036」 (1984); 「특허출원 1983-0002418」 (1985).

34) 「올해 과학상 휩쓴 김충섭 박사」, 『경향신문』, 1983년 11월 24일.

35) 「신기술기업화 <7> 디스토마치료제」, 『매일경제』, 1983년 4월 29일.

36) 「정진기 언론문화재단 영예의 제1회 과학기술상 수상자」, 『매일경제』, 1983년 7월 19일.

37) 「프라지콴텔 5년간보호」, 『매일경제』, 1983년 7월 26일.

38) 「회의결과보고」,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8485).

39) 「회의록 1983.3.4.(15:00)」,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8485).

40) 「생산공정동 실사지시」,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8485).

41) 「생산공정동 실사지시」,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8485).

42) 「회의록 1983.3.4.(15:00)」,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8485).

43) 「프라지콴텔의 보호지정 신청검토 참고자료」,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8485).

44) 「생산규모 및 능력」,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8485).

45) 「원가계산서」,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8485).

46) 「사업계획서」,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8485).

47) 바이엘의 3억 6,800만원과 비교하였을 때, 신풍제약은 개발비 3,500만원을 포함해 1억 8,500만원이 소요되어 비용을 절반으로 낮추었다.

48) 「기술성」,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8485).

49) 「보완자료제출」, 『의약품제조품목허가(신풍프라지콴텔). 약무 1442-41964』 (1983), 보건사회부 약정국 약무과,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128485).

50) 보건사회부, 「보호의약품지정(보건사회부고시 제83-27호)」, 『관보 제9486호』 (1983년 7월 9일), 11쪽.

51) 「프라지콴텔 5년간보호」, 『매일경제』, 1983년 7월 26일.

52) 보건사회부, 「보호의약품지정(보건사회부고시 제83-27호)」, 『관보 제9486호』 (1983년 7월 9일), 11쪽.

53) 「과학기술상의 두 위업」, 『매일경제』, 1983년 7월 20일.

54) 「4천만원 포상금 탄 김충섭박사 기생충왕국 오명 씻을 수 있었으면」, 『경향신문』, 1983년 8월 6일.

55) 「과학기술유공자 61명 표창」, 『경향신문』, 1984년 1월 23일; 「김충섭박사 등 서훈」, 『매일경제』, 1983년 11월 22일.

56) 「공기부양선 국내 첫개발, 기술진흥회의에 보고된 성공사례 2건」, 『경향신문』, 1983년 11월 22일.

57) 「위험!간디스토마 비상!」, 『경향신문』, 1983년 10월 19일.

58) 김충섭, 「기술개발 새 쟁점 물질특허제」, 『동아일보』, 1983년 11월 8일.

59) 「기술청 신설을 구상」, 『경향신문』, 1962년 2월 16일.

60) 「생선가게 단속」, 『경향신문』, 1962년 8월 3일.

61) 「간 및 폐디스토마 방역대책촉구건의」, 『동아일보』, 1964년 12월 15일.

62) 「왜 이렇게 되었는가」, 『경향신문』, 1965년 1월 27일.

63) 「왜 이렇게 되었는가」, 『경향신문』, 1965년 1월 27일.

64) 「새해소신 (15) 정희섭 보건사회부장관」, 『매일경제』, 1967년 1월 21일.

65) 「기생충숙주인 담수어등 생식을 금지」, 『동아일보』, 1967년 3월 27일.

66) 「디스토마 이환자 주민의 40%」, 『동아일보』, 1969년 1월 23일.

67) 「놀라운 디스토마 감염률 낙동강유역」, 『동아일보』, 1973년 12월 21일.

68) 「간디스토마특효약 서독서 수입 300만명 집단구충키로」, 『동아일보』, 1981년 3월 13일.

69) 보고서에서는 집단관리의 목표를 간흡충증의 유행을 최소한으로 유지시키며 장기적인 관리를 하는 것으로 설정할 경우 1년 혹은 2년에 1회 체중 1kg당 40mg을 1회 투여하고, 개개인의 완전치료를 목표로 하며 치료 사업의 간격을 5-10년으로 설정할 경우, 30mg/kg로 2회 투여할 것을 권고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2: 35-36).

70) 「간디스토마특효약 서독서 수입 300만명 집단구충키로」, 『동아일보』, 1981년 3월 13일.

71) 「신기술기업화 <7> 디스토마치료제」, 『매일경제』, 1983년 4월 29일.

72) 「보건사회부 간디스토마 감염자 무료 투약」, 『매일경제』, 1984년 6월 23일.

73) 홍성태 인터뷰, 2019년 12월 11일.

74) 「민물고기회 먹어도 되나요」, 『동아일보』, 1985년 1월 19일.

75) 「멋과 맛의 고향 <12> 이스라엘서 이민 온 잉어 강원 춘성의 향어」, 『동아일보』, 1985년 6월 19일.

76) 당시의 이러한 실험결과는 보유 숙주의 감수성 차이 때문이었으며, 프라지콴텔은 간흡충 감염에 대한 예방효과가 없음이 추후 밝혀졌다. 홍성태 인터뷰, 2019년 12월 11일.

77) 홍성태 인터뷰. 2019년 12월 11일.

78) 보건복지부. 「제8차 전국 장내기생충 감염실태조사 결과 발표」, http://www.mohw.go.kr/react/al/sal0301vw.jsp?PAR_MENU_ID=04&MENU_ID=0403&page=269&CONT_SEQ=286642, 검색일: 2020년 5월 1일.

그림 1.
1983년 신풍제약 부평공장 프라지콴텔 원료 생산 시설.
Fig. 1. Praziquantel manufacturing facilities in Shinpoong Pharma’s Bupyeong factory in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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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프라지콴텔 제법 개발한 김충섭에 1983년 제3회 기술진흥확대회의서 ‘모란장’ 수여.
Fig. 2. Kim Choong-sup, developer of new praziqualtel manufactuing process, awarded Moran Award in Expanded Assembly for Techonology Pro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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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신풍제약이 낸 프라지콴텔 광고. “회 이젠 안심하고 드세요.”
Fig. 3. Praziquantel advertisement by Shinpoong, “It is safe to have sushi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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