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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0(3); 2021 > Article
해방직후 보건의료체제 논쟁과 통일국가 보건의료정책 구상†

Abstract

Immediately after the liberation, the health care system debate was studied focusing on the orientation of the American and Soviet medical systems, roughly divided into Lee Yong-seol and Choi Eung-seok. However, the existence of people who are not explained in the American and Soviet health care systems’ orientation led to the need to reconsider the existing premise. Therefore, this study identifies the characters that were not explained in the perspective of existing studies, and reevaluates the arguments of Lee Yong-seol and Choi Eung-seok.
This paper raises the following questions: First, what is the background of the policy orientation that Lee Yong-seol and Choi Eung-seok had? Second, if there are people who made different arguments from Lee Yong-seol and Choi Eung-seok, what direction did they set and argue? third, how the orientations of Lee Yong-seol and Choi Eung-seok and etc. converge into the answer to the Joint Soviet-American Commission?
In response to theses questions, this study confirms the following: first, Lee Yong-seol’s and Choi Eung-seok’s health care policies were established based on realism and empiricism. As a policyholder, Lee Yong-seol emphasized withholding medical state administration and raising the level of medical education and medical systems according to the condition at that time, although the American system was mobilized by Lee as the basis for his judgment and administrative assets. On the other hand, Choi Eung-seok aimed for a Soviet-style systems in health care but this was realistically put on hold. Choi insisted on the establishment of the Medical Service Associations and rural cooperative hospitals that appeared in Japan’s medical socialization movement. In summary, immediately after the liberation, Lee Yong-seol’s and Choi Eung-seok’s policy arguments were based on policies that could be implemented in Korea, and the American system and Soviet system served as criteria for the policy resources.
Second, Jeong Gu-chung and Kim Yeon-ju show that the topography of the health care debate immediately after the liberation was not represented only by Lee Yong-seol and Choi Eung-seok. Both Jeong and Kim were consequently led to medical socialization, which was the implementation of a health care system that encompasses social reform, but the context was different. Jeong drew the hierarchy of the health care system, which peaked in the United States, from the perspective of social evolution based on his eugenics, but the representation suitable for Korea was the Soviet model absorbed into his understanding. On the contrary, Kim argued that representations suitable for Korea should be found in Korea. As national medical care, Kim’s idea aimed at a medical state administration that provides equal opportunities for all Koreans.
Third, the aspect of convergence to the Joint Soviet-American Commission reply proposal was complicated. Among the policies of Lee Yong-seol, the promotion of missionary medical institutions and the gradual planning of medical institutions converged into the three organizations’ proposal, and Choi Eung-seok’s policy was almost the same as that of the Democracy National Front and the South Korean Labor Party. However, the medical system of Japan, the colonial home country, appears to have been based on Lee Gap-soo, chairman of the Korean Medical Association in the colonial period, and the plan was in line with the use of the union system of the left-wing organizations’ proposal in the south. It was in accordance with a common task to expand health care from colonial conditions to different status.

1. 서론

해방직후 보건의료체제에 대한 논의는 바로 부상되지 않았다. 해방은 분단을 동반했고 이남에서 좌우갈등은 격화되었다. 남한의 의사단체는 개업의 중심의 조직과 학술조직으로 나뉘었는데 통합된 전국단위 의사단체인 조선의사협회는 1947년 4월 9일 뒤늦게 창립할 수 있었다. 해방 후 좌우갈등을 비롯한 사회혼란 가운데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갈 의사단체의 역량은 충분하지 않았다. 이북에서는 민주기지를 세워 이남을 해방하겠다는 논리 아래 사회개혁조치를 단행했다. 남북 모두 이후 구성할 통일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이 논의되기 어려운 조건에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의 개최는 상황을 바꿔놓았다. 모스크바삼상회의는 한반도에서 신탁통치를 최대 5년간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고 신탁통치 이후 수립될 정부에 대한 논의를 위해 미소공위를 개최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1946년 3~5월 미소공위가 개최되었다가 참여단체 규정에 대한 논란으로 휴회되었고, 1947년 5~10월 재개되었다가 역시 협의대상에 대한 입장 차이로 결렬되었다(정용욱, 2003: 224, 405-407; 심지연, 1989).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임시정부 구성에 대해 논의할 정당 및 사회단체를 우호적으로 구성하기 원하는 가운데 미소공위는 결렬되었고, 한국문제는 유엔(UN)으로 이관되었다.
비록 미소공위는 결렬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향후 구성될 통일정부의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1946년 중후반부터 의사들은 보건의료정책 지향에 대해 잡지에 글을 게재하였다. 특히 제2차 미소공위 기간에는 여러 정당, 사회단체로부터 정부정책에 대한 자문을 받으면서 향후 구성될 정부가 어떤 보건의료체제를 가진 국가가 되어야 하는지 정리가 이뤄졌다.
해방직후 보건의료논쟁은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아왔던 주제였다. 기존의 연구들을 살펴보면, 처음으로 이를 다룬 연구는 남북한으로 수렴된 보건의료체제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용설과 최응석으로 각각 대변되었던 미국식 의료체계 지향과 소련식 의료체계 지향으로 분화된 인식과 판단에 주목했다(신좌섭, 2001). 의료계 내 보건의료논쟁에서도 좌우갈등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미국식 의료는 자유개업의, 소련식 의료는 의료국영이 대표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미군정의 보건후생국장인 우익성향의 이용설과 경성대학 의과대학 ‘좌익’교수 최응석의 대립구도는 보다 분명해졌다(전우용, 2011; 여인석 외, 2018).
이상과 같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보건의료 양측으로 대립된 이해에 기초하여 연구는 심화되었다. 최응석의 생애와 보건의료 지향에 대한 연구(신영전·김진혁, 2014), 최응석의 지향과는 차이를 가지면서도 북한 의료교육의 책임자로서 역할한 최명학과 이남의 이용설의 의학인식에 대한 연구(신규환, 2017), 자본주의체제에서 의료공공성을 추구한 우익성향의 백인제와 그의 재단법인에 대한 연구(박윤재, 2018; 신규환, 2018) 등의 성과가 이어졌다.
이상의 연구들을 통해 좌우익의 보건의료정책이 남북한으로 수렴되어가는 과정에서 해방직후 의사들의 보건의료활동과 인식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도는 백인제와 최명학을 이들이 있었던 지역에서 예외적인 인물로 이해되도록 했다. 하지만 체제와 개인의 지향을 분리했을 때 기존의 논쟁을 달리 이해할 수 있다면, 처음에 이 논쟁에 전제된 구도를 다시 검토해야 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자본주의질서 아래의 이남에서 의료의 공적 역할을 중시하며 의료공공성을 추구하는 중간지대가 남아있었다고 파악(박윤재, 2021: 42)되거나, 이북에서 의료국영에서 이탈한 의식을 가진 의사들이 별도의 경향으로 파악(김진혁, 2015)될 수 있다면, 개별 인물의 지향에 다시 천착해서 기존 대립구도의 핵심적인 인물부터 되짚어질 필요가 있다.1)
이런 측면에서 본 연구는 그간 연구의 전제가 되었던 이용설과 최응석이 각각 미국식, 소련식 보건의료체계를 지향했고, 이용설로 대표되는 우익의 지향이 남한으로 이어지며 최응석의 지향은 결과적으로 소멸된다는 기존의 논의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기존의 구도와 전제를 다시 살핌으로써 해방 이후 보건의료논쟁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여러 주장들과 그 맥락을 좀더 풍성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의료의 공공성이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가치로 한국의료의 발전을 추동했고 그것이 이념과 진영이 좌우할 수 없는 것으로서 한국현대사를 관통(박윤재, 2021: 288)했다는 전제 하에서 이를 살펴본다면, 해방 직후의 보건의료논쟁과 미소공위에 제출된 정부의 정책을 의료의 공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논의에 초점을 두어 다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제기하고자 하는 질문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이용설과 최응석이 가졌던 정책 지향의 배경은 무엇인가. 둘째, 해방 이후 보건의료논쟁에 이용설과 최응석 외 다른 논자들이 있다면 이들은 어떤 지향을 설정하며 주장을 했는가. 셋째, 이용설과 최응석 등의 지향은 미소공위 답신안으로 어떻게 수렴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본 연구는 해방직후 논의에 나섰던 의사들의 발화 내용에 주목하여 맥락을 짚고 그 의미를 파악한다.2)
각각의 질문은 장절에 대응한다. 2장에서는 이용설과 최응석의 정책과 주장을 살펴보고 이들의 인식을 살펴봄으로써 이용설과 최응석의 지향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를 짚을 것이다. 3장에서는 이용설과 최응석 외 논쟁의 참여자들을 포괄하여 각자가 가진 보건의료의 지향과 정책이 이들 자신의 맥락에서 어떻게 소화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기존에 다뤄지지 않은 보건의료논쟁의 지형을 확인할 것이다. 4장에서는 이용설과 최응석 등의 주장이 미소공위 답신서로 어떻게 수렴되었는지 파악함으로써 향후 남북한 정책에 어떤 기반을 제공했는지 확인할 것이다.
사료 발굴과 이에 대한 검토가 충분하지 못했던 것은 과거 연구의 기본적인 구도를 반복하게 만들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는데, 최초 연구인 신좌섭의 연구에서 참조된 『조선의학신보』, 『주보민주주의』를 비롯해 『조선의보』,3) 미군정 자료, 미소공위 답신서, 신문 등 새로운 자료의 검토를 통해 이 논쟁과 담론에 개입된 인물들을 확대하고 흐름을 파악하고자 했다.

2. 보건의료정책의 방향과 개혁의 범위

1) 수준 높은 의사 양성과 급진적 개혁의 보류: 보건후생국장 이용설

본격적으로 보건의료체제 논쟁을 살펴봄에 있어서 중요한 문헌은 『조선의학신보』 제2집이다. 이 지면에는 이남의 보건후생행정 책임자였던 이용설과 월북한 후 북조선보건연맹 위원장을 맡은 최응석의 글이 같은 지면에 실려있다. 이용설의 「保健厚生行政에 對하야」와 최응석의 「現段階 保健行政의 根本的 任務」가 게재된 코너의 제명은 고전의 책 이름이었던 「설원(說苑)」이었다. 「설원(說苑)」은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편찬한 도서로 다양한 해석을 모두 수록한다는 취지를 담은 것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된 가운데 향후 국가가 지향할 보건의료체제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한 『조선의학신보』 편집자의 의도를 담고 있었다.
1947년 5월 『조선의학신보』에 발행된 「保健厚生行政에 對하야」에서 미군정청 보건후생부장 이용설5)은 남한의 보건의료 수준에 대해 평가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이용설, 1947: 17).6) 그는 다음과 같이 글을 시작했다.
  • 보건후생행정은 어떤 나라에서나 중대한 부문이겠지만은 조선에 있어는 더욱 그러하다. 보건은 우리의 건강을 保持하며 나아가서는 향상증진케 함이오. 후생은 우리 사회에 한 사람이라도 헐벗고 굼주리고 노숙하는 이가 없도록 하는 행정을 의미합니다. 그럼으로 사업 범위는 한계가 없으리만키 크며 영속적일 것이다[이하 인용문의 밑줄은 필자].

행정가로서 이용설이 책임져야 했던 보건의료 관계 제 분야는 후생을 포괄하면서 범위가 넓었다. 그가 설명한 후생(厚生)은 ‘굼주리고 노숙하는 이가 없도록’ 방지하는 것이었다. 보건후생부장으로서 이용설은 행정적 차원의 구호를 보건후생의 영역에서 관리해야 했고, 보건후생의 역할은 질병 관리의 차원만이 아니라 피난민 생활보호라는 측면을 포괄했다.7)
해방 이후 약 2백만 명이 중국, 태평양, 일본에서 귀환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처가 우선 이뤄져야 했다. 이용설은 귀환자들에 대한 의식주 해결과 함께 이들이 곧 실업 문제를 야기8)할 것이기 때문에, 집단주택 건설, 도시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 귀농을 유도할 것, 간이 수공업장 지원, 대공업의 시행으로 이들을 흡수할 것, 공장 및 광산업을 지원할 것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대책은 1947년 보건후생부에 배정된 예산에 일정하게 반영되었으나 의료체제 개혁에 관한 조치까지 나아가는 것은 어려웠다.
미군정 보건후생재정의 세목까지 확인할 수 있는 <표 1>의 1947년 구호에 해당하는 비용(구호경비, 보건시설 수용 구호비 보조, 월남민 구호비는 “◎”로 표시)은 총 542,250,000원으로 전체 보건후생재정의 약 70%에 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보건후생부의 활동은 구호활동에 치중되어 귀환민 긴급구호와 보호에 맞춰져 있었다.
이용설은 보건행정의 제일 과제를 전염병에 대한 대책으로 보았다. 다수의 귀환민 유입과 해방 이후 혼란 속 발생한 위생상황의 악화에 대처해야 했다. 급성전염병을 예방하고 전염병 연구소를 설치하여 예방접종에 사용할 백신을 생산해야 했고, 음용수가 하수와 혼입되지 않도록 하는 개선 조치가 필요했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보건의료 전반을 개선할 제도적 조치는 후순으로 밀리게 되었다.
그는 보건의료제도 개편을 이후의 일로 두고 “당분간 인재를 양성”하자고 말하며 의료국영론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현재에 전조선에 정규의사가 3천여인이니 인구 매 만인에 의사 일인쯤 되는 셈이다. 이 의사들도 다 완전한 시설을 가진 이들이 않임으로 중하고 급한 병이 발생하였을 때 안심하고 치료를 받을만한 병원 수라는 것은 매우 소수이다. 조선에서도 의료국영론을 제창하는 이가 있는 모양이나 의료의 現狀으로 보아 당분간 국영은 극히 곤란할 줄 안다. 그 이유로는 제일 국민의 의료를 국가에서 책임지고 담당할만한 시설이 없다. 이런 시설이 없이 국민에게 의료납세를 부가시킬 수 없다. 시설이 부족한 것과 같이 의사수가 부족하다.

보건의료자원의 부족으로 총제적인 난관이라는 판단이었다. 의료시설과 시설에 배치할 의사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세수(稅收)만 부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앞서 <표 1>에서 보듯이 의료시설에 관한 예산(보건소설치에 要하는 경비, 결핵요양소, 나병요양소, 도립병원보조, 나병원비 보조, 보건소설치에 要하는 경비 보조는 “□”로 표시)은 약 13.6%였고 절반가량은 나병요양소에 배정되어 있었다. 의료시설에 투입할 수 있는 재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전체 의료기관 재편이 요구되는 의료국영은 “당분간” “극히 곤란”한 것이었다. 의료자원과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조선의학신보』에 글을 게재하기 1년 전 1946년에 기고한 글에서는 의료자원을 중심으로 좀 더 자세히 논했다. 의료문제 개선에 대한 그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이 글에서 그는 현재 의료인이 부족하지만 당시 7~8백 명의 의사들이 배출돼서 10년 이내에는 문제가 해결되리라 보았다. 양적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던 이용설은 의료의 질적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보건후생부장으로서 의료인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의료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중 하나가 미국으로 보건학을 연수할 유학생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1948년 미군정의 의료에 대한 평가를 보면, 현재 정부병원에서 지급되는 적은 액수의 봉급으로는 제대로 훈련 받지 못한 자격이 의심되는 이들만 모이게 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치료 결과도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Far East Command, 1948a: 10). 이용설은 개업의의 국가시험제도, 연구제도의 개혁, 의학자의 해외유학 등 의료 전문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9)
이용설이 의사들에게 했던 다른 제안은 종합병원 설립을 유도10)하여 낙후한 소규모 의업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미군정에서도 공식적으로 권장하는 것이었다. 보건후생부에서는 도시로 의사들이 과밀화하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지역당국에 지역사회 의사들이 병원을 설립하도록 독려했다(주한미군정청, 1990c). 소규모 의원의 난립은 의업의 경쟁을 심화시켰고 이들을 지역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상급의료기관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11) 의료자원 자체가 부족한 상태에서 규모 있는 병원 운영을 통해 전체 의료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이용설의 처방은 보건후생의 책임자로서 현실에 기반한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교의학교육기관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그의 배경을 감안하여 보면, 그가 참고했을 예를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 있다. 미국에서의 실험들은 이용설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종합병원 설치를 고려하게 한 예시가 될 수 있었다. 1936년 미국 워싱턴주에서 모든 과를 종합망라한 대중병원의 설립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종합병원제도는 환자와 계약관계로 되어 있어서 매달 1.5달러를 지불하면 언제든지 진찰과 치료를 할 수 있게 하는 제도로 의료비의 합리화를 시도하는 조치였다.12) 이후 자발적으로 백인제병원을 개업한 백인제의 경우도 지역의료네트워크를 실험했던 미국 미네소타의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13)
이상에서 검토한 바 이용설이 영리의료를 비판했음은 분명하나 급진적인 정책의 여지가 있는 의료국영론을 지향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14) 다만 당시 지면에서는 이용설과 같이 의료국영에 대해 보류하는 입장을 표명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만이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은 보건후생국장이라는 직위가 가진 위치를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용설 자신의 입장을 표출하는 것을 넘어서 이는 미군정의 정책 반영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의료국영이 사회 전반적인 차원의 처방으로 현실화될 수 없다고 보면서도, 이용설은 이를 전면적으로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보건후생부의 난민구호정책은 기아와 극단적 사유화를 막기 위한 조치들도 기본적으로 포함하고 있었다(Far East Command, 1948b: 38, 52). 자원이 부족한 구호, 사회정책에서 “공유공영하겠다는 정신”을 갖고 “대아를 구원”하며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발휘하자(이용설, 1947: 17)는 대국민 요청은 의료를 넘어 사회 전반의 요구를 받아 안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 전반의 대중적 의견이 산업 전반의 국유화, 국가 관리에 대해 호의적인 상황에서도 비롯했다. <표 2>의 미군정의 여론조사는 이를 반증했다.
<표 2>의 문항은 의료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지만, 산업 전반에 대한 통제방식과 직업별 구분을 두어 설문한 것이었다. 주요 산업에 대한 정부 통제와 소유를 원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10% 내외로 적게 나타났고 모든 산업에 대한 정부 소유, 사적 재산을 제외한 정부 소유, 주요산업에 대한 정부의 관리에 대한 선호가 각각 약 20~40% 사이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중들이 주요 생산기관과 물자에 대한 국가 소유 및 관리를 요구했고, 이것은 해방 이후 사회 공(公)개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대중의식은 국가가 적산(敵産)을 귀속하듯 일본인 병원의 국가관리 요구로 이어질 수 있었고,15) 의료국영화를 지향하는 경향이 높게 나타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이용설이 정책을 구상할 수 있는 폭은 제한되었다. 보건후생행정 책임자의 위치에서 정책 발표는 군정의 정책으로 직결되는 사항이었다. 재정적 어려움은 급진적 정책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하게 했다. 물론 후일을 도모하고 후학을 양성하자는 그의 논리에는 10여 년 이후에는 의사 숫자가 충분하게 된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선택항이 많지 않았던 정책가로서는 의사들의 자원을 유도하여 효율성을 더할 의료체계로 종합 병원을 설립할 것을 권유하는 정도에 그쳤다.16)

2) 농촌보건의료 개선을 비롯한 사회개혁의 전개: 보건운동가 최응석

해방 직후 경성대학 의학부 교수였던 최응석17)은 1946년 10월 말 김일성대학 총장의 초청을 받아 1946년 11월 3일 평양에 도착했다(최응석, 1949).18) 1946년 11월 17일 김일성대학 의학부 부장 겸 병원장으로 취임한 후 그는 이북에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19) 1947년 2월 북한 의료인의 정치사상성을 고양시키는 북조선보건연맹 위원장으로서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이용설과 함께 같은 지면에서 논쟁을 벌였던 최응석은 월북한 상황에서 「현단계 보건행정의 근본적 임무」를 통해 이남지역의 논쟁에 개입했고 이후 임시정부의 정책안을 제시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국가가 모든 개인에 대해 전생애의 건강을 기록하는 “건강관리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모든 개인들이 전생애에 걸친 건강조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행정뿐 아니라 국가의 관리에 귀속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했고 사회보험제도와 의료사회화20)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안으로써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 길은 요원하다”고 본 최응석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논했고 그는 이를 “독립적” 보건 분야에 대한 대책과 전체 대중의 생활 개선을 위한 보건대책으로 나누었다. 후자의 대책은, 첫째 자혜적인 후생시설 개념의 배제, 둘째 노동인민의 자유보건활동의 앙양(昂揚), 셋째 생활 개선과 노동보건방책 확립, 사회보험제도 등 기초 보건분야 발전이었다.21)
그의 보건의료정책 지향은 소련공산당의 인민보건정책의 기본인 예방의학을 기반으로 한 종합적인 건강관리와 위생조치였고, 그 취지 아래 실시되던 소련의 의료제도 등을 소개했다.22) 그런데 그는 일본의료운동의 경험에 입각해서 주요정책을 제시했다. 이것은 일본에서 유학하며 사회운동을 했던 인물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파행적 반봉건적인 일본자본주의 하에서도 도시에서는 실비진료소 노동자건강보험제도 등이 일즉히 발달되였고 농촌에서는 수공업적 개업의제도로부터 산업조합법에 의한 의료이용조합으로써의 종합적 대병원의 조직망이 상당히 진전되였든 것이다. 이 병원을 중심으로 분원 一진료소 一지방순회반 등을 배치하여 농촌진료제도의 조직화를 기도하였든 것인데 의료사회화운동의 거대한 進步이였든 것이다(최응석, 1947: 19).

그가 실비진료소와 노동자건강보험제도, 의료이용조합이 발달했다고 지칭하는 곳은 식민지 조선이 아니었다. 산업조합법에 의한 의료이용조합은 일본에서 1930년대 활성화된 지역의료운동이었고, 최응석은 의료이용조합을 통한 의료망의 확대를 의료사회화운동의 진보라고 보았다. 최응석은 아래로부터의 의료망 확대에서부터 종합적 대병원까지 이르는 조직망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에 반해, 앞서 이용설의 경우는 소규모 의원을 양산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 종합병원의 설치라고 인식했다. 이는 이들이 인식하는 문제 해결의 방향 차이였다.
일본의 의료사회화운동에 관련한 최응석의 구체적인 경험은 그가 1933년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한 이후 울산 달리(達理)에서의 사회위생조사활동에 참가했던 것에 기반했다(신영전·김진혁, 2014: 472, 483).23) 울산 달리에서의 조사보고서인 『조선의 농촌위생』(1936)에 의하면 농민들은 1인당 평균 4.1개의 병을 가지고 있고, 기생충병(98%), 소화기병(66%), 트라코마를 비롯한 안질환(58%)의 순이었다. 이와 함께 농민들이 많이 앓고 있는 「체증」과 「신경통」은 농민들의 노동과 생활 관계에 질병인데 이것은 조선에서만 특수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중국과 일본 농촌에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최응석, 1946: 32-33). 이에 대해서 그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 중국, 조선, 일본을 개괄하여 동양의 농업경영은 봉건체제 속에 있으며 지주의 고율소작료 밑에서 일반 농민은 극단한 빈궁 속에서 그 의식주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즉 「아세아적 정체성」인 것이다. 아세아적으로 정체된 봉건적 생활양식이 지배하는 곳 이곳에 필시 상기 농촌의학의 특수성을 보는 것이다.

아시아 농촌에서 나타나는 봉건적 양식에 의해 “주택의 봉건적 왜소성”, 육류섭취를 못하는 영양상태와 “오염된 백의생활”이 초래되었다는 지적이었다. 따라서 농촌의 노동환경의 변혁, 농촌의 봉건제도 타파, 자작농지 부여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가 보건당국자에게 요청하는 것은 농촌협동조합병원제도의 창설이었다(최응석, 1946: 34). 그가 제안한 농촌협동조합병원은 사회보험과는 구분되는 형태이고 강제적 가입을 의무조항으로 하지 않은 것이었다. 조합비를 농민 소득에 누진하는 원칙 아래 재산보험, 재해보험 등과 함께 건강보험이 포괄되는 협동보험조합을 구성하고, 이러한 재원에 바탕한 조합병원을 운영하는 것이었다(최응석, 1947: 19)
또한 그는 국영화를 지향하나 대중의 의료접근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그 방안으로 일본인 병원을 국영병원으로 재편하여 145개 병원을 확보한 후 1개 군에 1개 인민병원을 설립하고, 이를 협동조합병원 형식으로 촌락병원, 촌락진료대 조직망을 강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소요될 경비는 1년에 1인당 보건비 10원을 갹출하면 전조선에서 2억 원의 재원을 조달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의료종사자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원조를 통해 이들을 농촌지역에 이동시키고 이탈을 방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며, 이를 통해서 의료기관의 도시편재 경향을 개혁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최응석, 1947: 19).
이와 같은 대책은 이용설의 급진적 보건의료정책의 보류와 교육을 통한 후일의 기약과는 상반되며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의 의사 양성정책에 대해서도 최응석은 정반대의 주장을 했다. 이용설은 매년 졸업생 700~800명을 배출하게 되면 10년 뒤 전체 의사 수는 10,000명이 되고 인구 3,000명 당 의사 1명이 된다고 의사의 양적 배출을 늘릴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최응석은 일본은 의사 1인당 의사 수 약 1,000명, 소련은 약 1,000명, 미국은 약 600명이라고 하면서, 10년 뒤에도 의사 수는 모자라고 양적 확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최응석, 1947: 21-22).24) 의사양성에 대한 예상과 그 결과를 두고 이용설과 최응석은 반대의 해석을 하고 있었다.
의료인력의 부족을 염려하는 차원에서 최응석은 의사뿐 아니라 중등 전문학교에서 방역기술자, 산파, 보건부,25) 간호부, 약제원 등을 대량 양성할 것을 제안했다. 더해서 서양의학교육을 한의들에게 실시하여 국영병원과 교육기관에서 제공하는 재교육을 하도록 하며 한지의사(限地醫師)도 마찬가지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최응석, 1947: 22).
또한 그는 “의료국영화를 제창”하는 사람에 대한 경계에 대해 ‘의료사회화’가 급진론이 아님을 밝혔다. 의료의 사회화가 개인병원 폐쇄, 개인개업 금지를 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이 무료로 혹은 실비로 적당한 치료를 받는 책임을 국가와 인민이 지는 것으로서의 실질적 의료사회화라고 부언했다. 다만, 국영의료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영리적 개인개업의를 점진적으로 축소시켜 갈 것이고 국영·공공병원의 근무를 마친 의사들의 이후 개인영업은 허용하며 자유개업의를 통제 아래 허가해야 할 것이라고도 밝혔다(최응석, 1947: 19).26)
최응석은 일제시기 사회주의운동과 연결된 의료운동의 경험 속에서 해방 이후 한반도 보건의료 문제 해결을 주장했다. 소련의 핵심적 보건의료제도인 건강관리제도를 지향하나 당장은 보류하고 국영병원을 증설하는 가운데 농촌에서의 협동조합병원을 설립하여 대중의 의료접근성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에 필요한 인력과 재원 마련에 대해서도 안을 제시했다.
남한 의료계에서 좌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던 이용설과 최응석의 의료국영화에 대한 입장 차이는 분명했다. 이용설은 의료국영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급진적 정책을 보류하고 후일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27) 다른 우익적 성향을 지닌 인물에게서는 나타나고 있지 않았던 이용설의 입장은 보건의료행정가로서 재정이 허락하는 것을 실시하자는 차원의 보수성을 기본으로 해야 했다. 최응석은 의료국영화를 지향하며 협동조합병원 운영을 내세우면서도 그가 경험한 의료운동에서 진보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일제 의료운동에서 활용했던 제도를 제안했다.28) 이용설이 현실론에 입각한 보건의료정책을 제시했다면 최응석은 사회주의 지향과 결합된 그의 경험에 기초한 정책을 내놓았던 것이었다.

3. 보건의료체제의 표상과 의료사회화로의 경도

1) 사회진화론적 인식으로의 소련 모델 흡수: 의학교육자 정구충

이용설과 최응석 외에도 당대 논쟁에 참여한 의사들이 있었다.29) 당장의 개혁 조치를 보류했던 이용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의료계 논자는 의료사회화 개혁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30) 미군정의 보건행정 자문역할을 한 정구충31)도 마찬가지였다. 정구충은 해방 이후 의료계뿐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도 폭넓은 활동을 보여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인민공화국을 설립하자 후생부를 책임졌고, 헌법초안을 작성한 행정연구회의 전문위원에도 포함되었다.32)
1946년 12월 발행된 『조선의보』 1권 1호에서 경성여자의과대학 학장이었던 정구충은 새로운 국가가 지향해야 할 의료제도로 민주주의국가로는 미국, 사회주의국가로는 소련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의학기술 수준, 조직제도, 의료교육제도 및 시설이 세계의 첫 번째라는 그는 세계가 독일의 것은 버리고 미국의 제도를 따라왔다고 보았다(정구충, 1946: 63).33) 이런 인식에서 독일의 방식을 본받았던 일본의 방식도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구충은 미국과 소련의료제도에 대해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어느 한쪽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의 높은 수준을 갈망하는 가운데 본받을 표상을 설정했다.
그의 인식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1935년 우생협회 주최 우생학과 성병의 관계에 대해 강연했던 정구충은 인종과 문명의 위계 관념을 충분히 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34) 물론 이러한 우생관은 그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생협회에 참여한 인사들은 당시 의료계 인사 전반을 망라했고, 이후 제정되는 1951년까지도 법령 논의안에 “민족의 우생적 발전”이 제안될 정도로 공유했던 인식이었다.35) 문명위계에 입각한 우생관은 사회진화론과 결합되기 쉬웠고 이는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우수한 국가의 제도를 최상단에 배치시키며 우열을 가리는 것이었다.36) 제국 독일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위계37)에서 추축국이 연합국에 패배한 이후 미국을 정점으로 한 구도는 다음과 같이 구성될 수 있었다. 미국-소련-(독일-일본)-조선. “독일-일본”이 빠져나간 자리에 조선은 이에 걸맞은 위상으로 올라서야 했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된 조선의 제도는 미국의 제도를 따르면 된다는 것이 그의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는 소련의 제도가 조선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38) 그리고 소련의 모든 계획의 근본이 미국에서 수입한 정책이라고 했다. 소련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미국의 방식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주장하는 의료국영은 미군정에 위협적인 측면이 없었다. 당장은 소련의 형태가 적합하나, 그 정점에는 미국의 시스템이 있는 것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럼 소련은 왜 적합한 모델로 제시되었을까. 체제의 적합성과 민도(民度)에 대한 고려였다. 미국의 의료제도가 조선에 맞지 않다고 보았는데 미국의 경우 민중의 발달(민도의 발달)에 의해서 방임해두어도 운영되는 것이었다면, 소련에서는 여러 국가정책적 개입이 이뤄졌고 이런 형태가 민도가 낮은 민중에게 적합하다는 것이었다(정구충, 1946: 65).
하지만 민도가 낮은 대중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민도가 낮은 대중을 관리할 이들의 문제가 선결되어야 했다. 보건행정망에 배치된 인력들도 일반인들과 차이 없는 수준이었고 이들이 보건지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우선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의료기관의 도시집중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의사들과 시설을 지방에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의학교육 측면에서도 독일식 이론교육의 폐해로 ‘처방전 하나 쓰지 못하는 의사를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실습을 충분히 한 의사들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이에 대한 체계적 준비는 국가에 의해서 보장되어야 했고 ‘보건사(保健士)’에 대한 교육과 지도 또한 필요했다(정구충, 1946: 64).
이처럼 소련의 경험이 소환되는 것은 실질적으로 해방 직후 조선에 필요한 의료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의 맥락 하에 있었다. 정구충이 인식한 소련은 ‘이민족’에 대한 통치에도 최고수준의 의료예방시설을 보급했고, 이를 위한 막대한 사회문화비를 책정·운영한 국가였다. 그에게 소련은 짜르의 제정정치와 비밀주의 등은 차치하고, 170여 이민족을 통치하며 이들에게 보건, 후생을 이용하는 “혜안”을 가진 국가로 인식되었다(정구충, 1946: 64). 대중의 생활 수준을 보편적으로 향상시키고, 위생주택을 보급하며, 의료기관을 균등하게 증가시키면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예방의료의 원칙을 세웠던 소련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정구충은 전체적인 의료제도 개혁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 여러 정당에서 내걸었던 토지분배, 대산업시설의 국가경영에 대해 이론(異論)을 가지지 않았던 그는 사회개혁 조치에 대해 동의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과거 일본인 중심이었던 의료운영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당과 사회단체의 토지문제와 대산업국영에 대한 정책 지향에 발맞춰 의료와 의학의 사회화를 기도해야 한다고 하며, 사회위생학의 발전에 주력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런 개혁에 소련의 방식이 잘 맞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러시아혁명 후 사회주의 국가 수립과정에서의 소련의 난관과 이남지역의 상황은 쉽게 유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해방된 한반도는 급격한 인구이동과 마비된 보건위생 시설로 인해서 전염병이 창궐하던 조건에 있었다.
정구충의 주장은 미국식 의료제도의 우월함을 인정하는 가운데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경험이 당장 유효하기에 이들 제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모델로 하는 제도를 소련으로 설정했지만 조선에 적합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제시기 일본에서 의료사회화가 군국주의 전쟁에 대한 뒷받침으로 결합되었던 것처럼 정구충은 우생관에 결합된 사회진화론에 바탕하여 의료사회화를 흡수하고 있었다. 정구충에게서 소련 모델은 미국과 대립하는 냉전적 근대화 모델 이전에 그의 사회진화론적 인식에서 지향할 대상으로 설정되었다. 이런 그의 인식은 좌우익의 이념적 판단이 사회주의 보건의료제도, 의료국영 지향 여부를 단순히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보건의료정책 지향이 단계적 발전론에 입각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함을 시사했다.

2) 조선의료의 주체성 회복과 사회개혁 지향: 사회단체활동가 김연주

해방을 맞아 간행된 『朝鮮齒界』의 창간 축하변에서 경기도치과의사회 위원장 문기옥(文箕玉)39)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모리 미풍소속(美風蘇俗)이 조흘지라도 미소의 식민지가 아닌 이상 가마귀(鳥)가 공작이 될랴드시 허영심에 날뛰어 그 풍속만을 모방하지 말” 것과 “미풍소속(美風蘇俗)을 모방하랴는 망국적 행동을 빨이 근절하야” 기현상을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는 말도 바꿔버린 해방정국의 사회분위기에서 그는 미국과 소련을 추종하는 것에 경종을 울렸다(文箕玉, 1946: 41). 미국과 소련의 것이 새국가 건설에 유익하지 않으니 조선에서 비롯한 것으로 돌아가자는 말이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조선적십자사 구호부장 겸 보건부장 김연주40)는 『조선의보』에서 조선의료계만의 방향을 개척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일제시기의 의료가 영리를 취하기 위하여 도시로 집중되었던 현상과 사회문제를 만들어내게 한 자유개업의제도를 비판하였고, 조선의학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했다.
  • 조선의학은 미국이나 쏘련의학의 수입 모방으로서 건설완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의학이 “씨”도 조선 안네 있을 것이고, 자라기도 조선에서 자랄 것이요 (마치 독립을 남이 주는 것이 아님과 같이) 조선민족의학 완성만이 전인류 의학완성에 공헌하는 길인 것이다(김연주, 1948: 37).

김연주에게 “조선의료”의 길은 미국의 의료나 소련의 의료를 통해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남북 단독정부로의 귀결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반도 통일국가를 수립할 가능성은 남아있었다. 이남은 좌우 이념투쟁으로 혼란했고 이북은 인민위원회체제 중심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미국과 소련 사이 양자택일을 거부하며 끝내 남북협상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 조선의 의료가 미국과 소련의 것으로 수렴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김연주도 주체적 입장에서 그 방향을 강구하고 해답을 “조선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보건의료체제의 표상을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36년간의 식민지 아래에서 조선의료는 일본의료의 파생적 존재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조선의 식민지성 이전에 그는 일본의료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일본의료는 서구의학의 수입에 주력하면서 근대의학의 전통을 잇는 기반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농촌과 도시에서 각각 의료의 파행이 점철되어 기형화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영향이 조선의료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그는 자유개업의 제도의 존속을 비판했다. 수공업적 개업의는 구매력을 잃은 농촌을 떠나 의사의 도시 집중을 가중시켰고, 조선인들에게 의료는 영리에 따라 차별하는 유해한 존재가 되었다고 했다(김연주, 1948: 36).
따라서 그는 사회혁명으로서 봉건적 잔재와 반민주주의를 배제해야 하며 사회의 요청을 대변해야 할 의료는 의료혁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의료의 민주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보았고, 반대로 의료는 사회의 민주화를 이끄는 책임적 지위에 있다고 주장했다(김연주, 1948: 35-36). 그것은 의료가 사회발전의 동력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건설을 가로막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식은 질병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전제한 것이었다. 질병은 사회생활 양식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책임도 국가와 사회가 가지게 되며 이 정책에 의해 실현된 혜택은 균등히 나눠져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의료제도의 개혁이 필요하고 이것은 실현 가능성을 따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로서 요구되는 것이었다(김연주, 1948: 38).
이러한 그의 판단에서 지향해야 할 “민족의료”의 정책과 방침은 의료기회 균등정책과 의료국영론이었다. 균등한 의료기회를 통해서 계급사회에서 볼 수 없는 위대한 발전을 기할 수 있고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의료로서 전민족을 치료하는 민주주의적 의료를 표방할 수 있다고 했다. 의료기회의 균등정책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국가재정에 의한 의료시설의 확충, 사회보건의 강행, 생활낙오자를 위한 특별조치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더불어 그의 의료국영론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각도에는 국립병원, 각군에는 국립병원의 분원, 읍면에는 진료소, 리동에는 출장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건소를 면마다 1개소씩 배치하고, 협동조합을 활용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실질적인 의료사회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김연주, 1948: 37-38).
김연주의 자주적 조선의료는 민족의료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일제시기 기형화된 일제 의료의 영향을 받아 나타났던 것을 의료의 사회적 역할을 회복하고 수행하는 가운데 새롭게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의 민족의료는 의료기회 균등정책과 의료국영론으로 모든 대중이 의료를 실질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상을 정리해볼 때 당시 논쟁에 참여했던 위의 논자들 중 의료국영을 옹호하지 않은 입장에 섰던 인물은 이남의 보건후생 책임자였던 이용설 외에는 없었다. 물론 그 역시 앞서 짚었듯 보건후생재정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바가 일차적인 이유였다. 또한 소규모 개업의가 의료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있기에 의료자원의 효율화와 수준의 향상을 위해 의사들에게 종합병원을 설립할 것을 권장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 의료논쟁의 논자들은 모두 해방 직후 이남 지역에서 의료영리화 경향, 소규모 자유개업의, 병의원 및 의사들의 도시 편중을 우려하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향은 각기 차이를 보였는데, 이 장에서 살펴본 정구충과 김연주는 보건의료의 문제 해결에는 사회개혁이 동반되어야 함에 동의하고 있었다. 특히 모델이 되는 국가 설정에 관해서 정구충은 사회진화론적 차원에서 미국과 소련의 모델 중 소련의 모델이 조선의 현실에 적합함을 주장했다. 그가 가진 우익적 성향과는 달리 생활 수준의 향상과 의식주 문제의 해결에도 주안을 두는 통합적 보건의료정책을 주장했다. 그와 달리 조선의학의 주체성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던 김연주는 소련과 미국의 모델을 따를 것이 아니라 식민성을 가진 조선의학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이 필요하며 의사의 의료민주화 책임을 강조했다. 의(醫)의 사명을 가진 사회개혁가로서 의사의 역할이 부여되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해방직후 보건의료논쟁의 지형은 <표 3>과 같이 분류된다. 우선 이용설은 의료교육과 종합병원 설치를 통해 후일을 도모하자는 입장이었고, 그 외에 사회개혁이 필요하다는 측의 입장은 의료수요자의 입장에서 의료접근성의 확대, 대중생활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회의 개혁, 개조가 필요한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 같은 입장에 다수의 논자들이 포함되었는데 최응석, 김연주와 의학계 중진인 정구충도 여기에 속했다. 이들 논자들과 미군정기 여론조사를 미뤄볼 때 이들이 대중적 의견을 대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앞서 장에서 이용설과 최응석은 이들의 현실과 경험에 기반한 보건의료정책을 제시했다면, 이번 장에서 살펴본 정구충과 김연주는 이들 각각 조선에 필요한 보건의료체제의 표상을 조선 내외부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정구충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소련의 모델의 적합성을 그의 문명관에 입각해서 주장했고, 김연주는 조선 내의 민족의료를 강구했다. 이 둘의 접근은 달랐으나 의료국영, 의료균등정책을 비롯한 제 사회개혁으로 모두 수렴되어 나타났다. 무엇보다 정구충과 김연주 같은 인물들의 주장은 해방직후 보건의료논쟁이 이용설과 최응석으로만 대표되지 않음을 확인시킨다.

4. 미소공동위원회 답신서에 수렴된 보건의료체제 지향 : 식민본국 일본의 보건의료제도의 등장과 조합적 지향의 공유

제1차 미소공위(1946년 3월 20일 개최)에서 제2차 미소공위(1947년 5월 21일 개최)를 전후하는 시기 이상과 같이 여러 논자들은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입장을 피력했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은 다시 개최된 회의에서 제 정당, 사회단체의 논의로 수렴될 수 있었다. 제2차 미소공위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해 협의할 단체들에게 답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참여할 단체에 대해서 임 시정부가 지향할 방향에 대한 설문을 담은 미소공위 제5호, 제6호로 발표하여 자문받았다.41)
이때 제출하도록 했던 자문내용 제6호는 경제, 정치, 사회를 망라했다. 구체적으로는 일제잔재 청산방법, 토지소유 형태, 노동과 물가정책 등이 제시되었고 마지막 “사”항(項)에는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의 교육 문화정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당 항에는 성인층 문맹교육, 초등·중등·고등교육의 발전 계획, 정치경제 등의 분야에 필요한 전문가양성 계획이 포함되었고 마지막 목(目)에서 “사회보건사업 계획 및 대책여하”에 대한 정책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 1947: 152-157). 435개의 단체가 답신서를 제출하였고 이 답신서를 기초로 제2차 미소공위에 참여할 단체를 추려야 했다(정병준, 1998: 17).
제출된 답신안은 많았지만 각 사회단체들은 연합체를 구성했고, 연합체들 사이에서도 같은 입장으로 합치를 보고 정책을 공동 결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공유했다.42) 따라서 몇 가지 주요단체의 내용으로 좁혀볼 수 있다. 새한민보사의 설의식(薛義植)43)은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이하 임협),44) 시국대책협의회(시협),45)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의),46)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47)으로 분류했으나, 보건의료정책에 관해서 민전을 제외하고 다른 단체들의 답신은 동일했다. 민전은 좌익, 시협은 중간파, 임협은 우익, 그리고 입의는 우익과 중도의 혼합적 성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48) 남한의 중도세력 단체와 우익 단체들은 합의된 내용을 제출하였으나 이남 좌익 성향단체인 민전과 남조선노동당, 이북 북조선노동당의 답신서 내용의 입장은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이것은 다음의 <표 4>와 같이 정리된다.
이들 단체들이 제출한 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이전에 답신서를 준비했던 인물을 살펴보고자 한다. 의료계 인물 중에서 정치적 활동이 두드러지며 좌익 성향이 뚜렷했던 최응석은 민전과 강하게 연결되었다. 그는 민전 중앙위원과 남조선노동당 당원이었고, 이런 영향에 의해 민전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의 정책은 그의 입장과 공유하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남조선노동당의 내용의 경우 그의 글에서 사용했던 용어들도 일치하여 그가 답신 작성자거나 최응석이 작성한 글을 기반으로 정리한 답신서를 제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임협, 시협, 입의 3단체(이하 3단체)에는 속한 단체의 숫자가 많았다. 하지만 연합단체의 답신안 준비와 승인시기를 보면 작성자를 추적할 수 있다. 입의에서는 1947년 5월 19일 미소공위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6월 12일 답신안 작성에 착수했다. 입의에서 가장 빨리 움직였고 성안 이후 다른 단체들에서도 일부 부분에서 차이가 있으나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은 답신안을 결정했다. 입의에서 답신안이 만들어지고 답신안이 임협에서 승인된 후 다른 단체들에서 그 안에 대해서 동의를 받는 형식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입의의 문교후생위원회에서는 자문내용 제6호의 제“사”항에 대해 구체적인 성안을 작성했다.49) 문교후생위원은 1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보선으로 선출된 이갑수(李甲洙)50)가 포함되어 있었고,51) 문교후생위원 중 의료인은 이갑수 외에는 없었다. 아쉬운 점은 그가 남긴 글이 많지 않은 탓에 그의 생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일제시기 조선의사협회 간사장(회장)을 장기간(1932-1939년) 역임했고 해방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간부회의 23개 분과 중 후생연구분과에 책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정치사회활동을 왕성히 했다는 것을 통해서 그가 의료정책을 제출할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52) 이에 비춰볼 때 입의가 제출한 답신안 자문내용 제6호의 제“사”항의 보건의료정책은 이갑수가 기초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갑수는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남한의 의료계 핵심인물 중 하나였다. 그가 일제시기 조선의사협회의 간사장을 맡았던 시점은 의료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높았던 때였다. 그는 실비진료소나 시료시설 확충 문제에도 관여하면서 조선의 의료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했는데, 당시 조선의사협회의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결론은 실비진료소의 운영이 기존의 “제대병원”이나 “의전병원”보다 환자들에게 진료비 경감의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며, 시료소 설치를 요구하는 것이었다.53) 그 외에는 그의 정책 지향에 대해 뚜렷한 지향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식민지의 구조적인 한계는 제도적인 차원의 개혁을 논의하거나 요청하기 어렵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일제 식민본국에서 의료사회화운동이 전개되었던 때였고, 일제 본국에서 실시되었던 정책이 식민지에서 실현되지 못한 아쉬움은 미소공위 답신서의 3단체 안으로 반영될 수 있었다.
3단체와 민전 및 남조선노동당, 북조선노동당의 핵심주장은 <표 4>의 “보건의료체계 조직 및 계획”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우선 이남지역의 제 정당,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이남지역의 3단체와 민전 및 남조선노동당의 가장 큰 차이점은 보건의료체계의 구성이었다. 3단체의 경우 일제 관립 및 공립병원, 일본인 병원의 몰수와 국영화를 명시하지 않았다. 미군정에서는 대병원을 제외하고 중소규모의 일본인병원은 적산 불하를 하는 상황이었다. 이남지역 좌익과 북조선노동당은 이와는 반대로 이들 기관들을 공영, 국영화하는 정책을 제출했다. 3단체의 의료국영 혹은 국가 중심의 의료체계 강화에 대한 의지는 민전이나 남조선노동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3단체들이 구조적인 대책을 소극적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민전 및 남조선노동당이 국립병원, 협동조합병원, 개인개업의 3종체계(이하 3종체계)를 명시하고 국립병원과 협동조합병원을 주축으로 삼을 것으로 제시했다면, 3단체는 국가행정기관에서의 보건행정 독립화, 군립병원 및 보건소 설치를 근간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관영 및 군단위의 의료공제조합제도, 건강보험법의 현실화 제안에서 나타났다. 군립병원을 설립하기 위해서 의료공제조합제도를 운영하겠다는 것인데, 도(道) 병원의 하부조직으로 국영이면서도 공영의 형태로 운영하겠다는 취지였다. 식민지 본국에서 국민의료법이 실시되기 이전에 구현되었던 의료공제조합이 해방 이후 남한의 의료비 경감과 지역의료기관 설립을 위해서 등장하는 것이었다. 지역단위 기반의 의료공제조합은 이후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이름을 바꿔 의료이용조합으로 이 답신안에 제시한 1면 1개소의 보건소와 결합되었고, 1950년대 남한의 기층 보건의료조직으로 구성해나가고자 했다.54) 이것은 식민지부터 해방 직후까지 보건후생 측면에서 요청되었던 내용인 행정의 정비, 의료 수혜 지역의 확대 등의 요구를 잘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의료공제조합제도와 함께 제시된 건강보험법도 특기할 것이다. 건강보험도 역시 식민본국 일본에서 국민의료법 제정 이전에 실시되었던 제도이며 조선에서는 이 제도가 실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건강보험에 대한 지향은 미군정 시기에 표출되지 않은 상태로 보건의료계에 내재되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답신안을 통해서 중도부터 우익성향의 집단까지 건강보험법에 합의할 수 있을 정도의 인식을 공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의료공제조합, 건강보험법 모두 1930~1940년대 식민 본토인 일본에서 실시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의료공제조합는 일부 직장에, 보건소는 예외적으로 한두 곳에 설치된 정도였다. 1면 1개소의 보건소 설치, 건강보험법의 현실화 등의 조치는 일제시기 조선에서 실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실현한다는 의미를 가졌다.55) 식민지시기 식민권력이 조선인들에게 부여하지 않은 기층단위의 보건의료조직과 구성형태, 국가단위의 건강보험이 해방 이후에 답신안을 통해서 이후 정부의 정책으로 구현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이북에서 실시되었던 제도와 비교하면, 이북에서 간이진료소를 설치(北朝鮮人民委員會, 1987)56)하며 사회보험법을 실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이남의 정책은 이북에서 실시하는 정책과 큰 틀의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민전안의 3항(남조선노동당안 3항)에 해당하는 국가원조 하에 농촌지역에 협동조합병원을 설립, 이를 통해 급속히 의료조직망을 건설한다는 것은 국가 주도에 의한 의료공급의 재편과 관리, 무의촌 지역에 의료수혜의 확대라는 맥락에서 닿아있는 것이었다. 남조선노동당안 3, 4항에서는 협동조합의 운영형태와 그 의미에 대해서 좀더 상술하였는데, 협동조합병원은 촌락병원, 촌락진료소, 이동진료대의 형태로 조직되며, 국가의 원조 하 협동조합의 부속사업으로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남조선노동당의 안은 국영병원과 협동조합병원이 의료제도의 중심이 되며, 이 협동조합병원은 협동조합의 부속사업이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앞서 3단체 안의 3, 6항과 교차하는 지점이 있었다. 3단체는 의료공제조합제도에 의한 군립병원을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국가에서 일부 출자할 수는 있지만, 의료공제조합의 실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지역단위 공제조합의 특성은 주민들의 출자를 기본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그 병원의 성격은 민전안에서 제시한 협동조합병원과 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3단체안에서 협동조합병원에 대응하는 것은 보건소였다. 보건소 설치와 관련해서는 지역단위 보건의료기관의 확대 및 해당 기관의 명시라는 차원에서 제시되었다. 미군정기 남한 전체에 10여 개의 보건소가 설치·운영되었지만, 지역단위의 보건의료기관의 확대는 이후 정부가 해야 할 내용을 담은 답신서였던 만큼 이후의 과제로 주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무의면 퇴치라는 측면에서 특히 남한에서 지속적인 과제로서 남겨지는 일이기도 했다.
보건의료행정 조직의 차원에서 3단체 안과 민전·남조선노동당의 정책이 성격상 유사성을 띠는 것은 보건의료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제출될 수 있는 정책이 크게 다를 수 없고, 이들의 제안도 식민통치의 경험적 기반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전안의 1항의 국영병원, 협동조합병원, 개인개업의의 3종체계 규정은 3단체안에서 전면화되지 않았을 뿐 의료공제조합을 기반으로 한 병원 설치를 통해서 지역에서의 의료문제 해결이라는 공통문제에 대처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다만, 3단체안의 10항에서 “의료기관의 기획화”는 의료기관계획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마련하겠다는 것으로 당장은 그 형태를 분명히 제시하지 않는 것이었다. 점진적으로 추진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전안과 같은 3종체계 규정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좌익 성향의 단체들에서의 3종체계론, 북조선노동당의 국영의료 중심성을 보여주었던 안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용설이 작성작업에 3단체안 작성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장기적 정책으로서의 기획의 필요는 급진론에 대한 경계와 맥락이 같았다.
그런데 이용설이 말했던 자선의료기관 장려는 3단체안 7항에 포함되어, 그가 제기한 정책의 취지가 수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사업적 자선의료기관을 확충하는 것은 미군정의 정책으로도 유지되었던 것이었고, 구호후생사업으로 고아원, 탁아소, 양로원 등을 확충한다는 기조도 계속되었던 것이었다. 이남의 3단체안이 자선활동에 의한 병원 설립을 장려하고 있었던 반면 민전이나 남·북조선노동당은 자선병원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사회주의 지향의 입장에서 자선의료기관은 비판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57) 국가 중심의 의료체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던 이북에서 자선의료기관은 국영으로, 사회단체병원으로 재편하고 통합해야 할 조직이었다.
이상의 내용에서 핵심은 3단체안에 식민본국 일본의 의료제도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3단체안의 작성자는 식민지시기의 실현하지 못한 제도에 대한 아쉬움을 담았을 이갑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이 제도들은 새로운 정부의 정책으로 고려될 수 있었다. 사실 이용설과 미군정의 정책은 급진안에 대한 경계였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후 정부의 정책이 되는 것은 어려웠다. 다만 의료기관의 기획화, 자선의료기관의 장려는 이용설이 이전에 제기한 주장이 답신안에 수렴되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아래에서는 마지막으로 이남 좌익단체와 북조선노동당 간의 차이에 대해 살펴본다. 북조선노동당 대책의 핵심은 “국가의 시설로써 인민보건사업 조직”이라는 것에 있었다. 국가의 시설이라는 것은 국영의료기관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인민을 위한 보건사업을 만들겠다는 말이었다. 이북 당국은 국영의료체계의 구축을 의도하고 있었고 이것은 ‘인민보건사업을 조직’하는 과정을 내포했다.
이북에서는 ‘인민보건사업’ 조직을 명목으로 1947년 시점 이후로 국영의료기관의 비중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었던 사실과 민전 및 남조선노동당의 정책과 마찬가지로 일본병원을 몰수하여 국영화하자는 안을 공유하고 있던 것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자신감은 답신안에 반영되었다. 민전과 남조선노동당의 입장이 38선 이북에서 실시되고 있는 인민민주주의 개혁과 보건의료개혁 그리고 의료국영이라는 지향과 유사하였지만, 정책 실시에서의 급진성에서 차이가 나타났다. 북한에서 협동조합병원은 1950년 이전까지 이북에서 나타나지 않았는데 국영의료기관의 증가, 사회보험제도의 적용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협동조합병원이 등장할 정책적 공간은 사라졌다.58)
의료 불균형 해소에 대한 명시에도 차이가 있었다. 민전안 4항은 “개인개업의의 균포”할 대책을 찾는 것이었고, 남조선노동당안 5항도 “개인개업의 지방 분산”에 대한 것이었다. 민전안의 4항(남조선노동당안 5항)은 5항, 7항과 모두 일맥상통하는 내용으로 노동자들이 많은 광산 및 공장에 병원을 확대 설립하고, 개인개업의의 도시 집중 방지 및 이들에 대한 균포 대책 강구가 필요하다고 제시한 것이었다. 즉, 의사가 부족한 지역인 농촌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 있는 의사만으로는 충분한 의료인력이 부족하니 자학(自學)한 의사들도 검정자격시험을 치러 정규자격의사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의료가 필요한 곳에 의사들을 충분히 공급하자는 보건의료 확대의 지향에 부합하는 것이며, 이러한 체제를 국가가 주도해서 만들어내려는 지향이었다. 민전안은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의료체계를 개혁해야 함을 제안했고, 의사의 도시집중 방지, 의사자격증이 없던 의료인, 즉 의생, 한지의사 등에게 시험자격을 주고 의료인을 확충시키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북조선노동당안은 지면 할애가 적었다. 민전과 남조선노동당안이 직접적으로 의사에 대한 배치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던 데에 반해 북조선노동당안 4항에서는 “공장과 농촌에 의료기관을 설치”하는 것과 “순회진료”를 제시했다. 북조선노동당안은 의료 필요 및 소외지역에 대한 시설 설치, 순회 진료를 통해 의료 공백을 메우는 조치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것은 북조선노동당의 입장이 소외지역 의사 배치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기보다 국영의료체제 내로 의사들을 포섭하는 상황에서 의사들은 국가에 의해 고용된 의사로 자연스럽게 재편되기 때문에 이들의 배치에 관해서 별도의 논의가 필요 없는 상황을 발생시켰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국가의 명령에 의해서 이들은 자동적으로 균포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조선노동당의 답신안은 민전과 남조선노동당에 비해 전반적으로 계획이 상세하지 않았다. 민전이나 남조선노동당에서 제시한 협동조합병원의 설치나 개인개업의에 대한 조치를 별도로 명시하지 않았다. 3단체의 보건소 그리고 민전과 남조선노동당의 협동조합병원(촌락병원, 촌락진료소, 이동진료대)의 새로운 중심기관이 될 형태를 제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북조선노동당안은 상대적으로 소략했지만 대책을 제시하기 전에 서설을 길게 넣어 보건의료정책의 맥락이 식민체제 비판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다만, 그 내용은 다소 일방적인 지적이었는데 조선인을 위한 보건시설과 방역대책이 전무했다는 비판에서 그러했다.
민전·남조선노동당 안이 최응석 주장과 매우 유사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들과 북조선노동당과의 차이는 최응석의 주장이 북한의 정책으로 그대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최응석은 한반도 전체를 조망하면서도 이남지역의 조건에 기초한 조합 중심의 병원을 중시했지만, 북조선노동당의 안은 이남지역에서 의료국영의 급진성을 비판하는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상을 통해서 미소공위 답신안이 이용설, 최응석의 안으로 일률적으로 수렴된 것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답신서 작성 이전에 논의되지 않았던 식민본국 일본의 보건의료제도는 다시 이갑수를 통해 3단체안으로 등장했고 자선의료기관 장려 및 의료기관 기획의 점진적 추진 등으로 이용설의 제안도 함께 수렴되었다. 그리고 조합적 형태로의 의료문제 해결이라는 것은 민전과 남조선노동당의 안에서도 공유되었다. 좌익안에 대해서 기존에는 민전안에 대해서만 확인하고 최응석의 제안이 모두 이어진다고 보았지만, 민전,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 안에는 차이가 있었다. 최응석은 월북한 상태였지만 그의 제안이 북조선노동당의 안으로 흡수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이남지역의 좌익단체와 정당의 안으로 남게 되었다. 북조선노동당은 민전과 남 조선노동당의 안과는 구별되는 급진성을 가지고 있었다.

5. 결론

지금까지 해방직후 보건의료논쟁을 재검토하고 미소공위 답신서를 통해 보건의료정책 지향이 어떻게 수렴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서론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한다.
첫째, 이용설과 최응석의 보건의료정책은 각각 현실론과 경험론에 근거하여 제기되었다. 이용설은 미국식 제도를 지향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정책가로서 현실론에 따라 의료국영을 보류하고 의학교육 및 의료제도의 수준을 높이는 것을 중시했다. 다만, 미국식 제도는 이용설에게 그의 판단 근거와 행정적 자산으로 동원되었다. 그것은 그가 종합병원의 설치를 고려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실험으로서 미국식 제도, 유학생을 파견할 지역으로서 미국이 상정되는 것으로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최응석은 건강관리제도 등과 같은 소련식 제도를 지향하나, 이는 현실적으로 보류되었다. 그는 일본의 의료사회화운동에서 나타났던 의료이용조합, 농촌협동조합병원의 설치를 주장했다. 그의 의료국영 또한 점진론에 가까웠다. 정리하면 해방직후 이용설과 최응석의 정책 주장은 조선에서 실시할 수 있는 정책에 기반했고, 그 정책적 자원에 미국식 제도, 소련식 제도는 준거로서 작용되었다.
둘째, 정구충과 김연주는 해방 직후 보건의료논쟁의 지형이 이용설, 최응석만으로 대변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정구충과 김연주는 모두 결과적으로 사회개혁을 포괄하는 보건의료제도 실시인 의료사회화로 경도되었지만, 그 맥락은 달랐다.
정구충은 그의 우생관에 입각한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보건의료제도의 위계를 그렸으나, 조선에 적합한 표상은 그의 입장으로 흡수된 소련의 모델이었다. 김연주는 반대로 조선에 맞는 표상을 조선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의료로서 조선민족 모두가 누릴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의료, 의료국영을 지향했다.
셋째, 미소공위 답신안에는 이용설, 최응석의 주장이 수렴되었으나, 3단체안에는 이갑수가 기초한 것으로 보이는 식민본국 일본의 의료제도가 등장했고, 이들의 안은 이남의 좌익단체의 안과 조합제도의 활용에서 상통했다. 식민 치하의 조건에서 벗어나 지역으로 보건의료를 확대하기 위한 공통된 과제에 따른 것이었다.
의료공제조합, 건강보험 실시 그리고 보건소 설치 등의 3단체안은 식민본국 일본에서 실현되었던 정책들로 조선의사협회 간사장이었던 이갑수는 이 제도를 등장시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용설의 주장은 선교의료기관 장려, 의료기관의 기획화 등에서 수렴되었다. 최응석의 주장은 민전과 남조선노동당 안으로 수렴되었고 농업협동조합병원 등의 설치는 조합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3단체안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었으나, 의료국영의 급진성을 가졌던 북조선노동당안과는 차별성을 띠는 것이었다.
본 연구는 해방직후 보건의료논쟁을 통해 식민지기와 해방 이후 사이 보건의료체계의 변형과정에서 의사들의 체제 전망과 지향을 살펴보고자 했다. 다만 전반적인 흐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개별 인물들의 개념 사용의 용례나 그 의미에 대해 섬세하게 짚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런 한계는 개념사 연구를 비롯해서 개별 인물의 생애사 연구가 이뤄지는 가운데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Notes

1) 체제를 일면적으로 이해했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남한의 병원체제를 개업의 중심 혹은 사립병원 주도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는 비판(신규환·서홍관, 2002)이 있었고, 우익 인사들에게도 의료국영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신영전·김진혁, 2014: 493-494)는 언급도 있었다.

2) 이 글은 인물사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해방 이후 보건의료에 대한 논의와 지형을 살피기 위한 것이다. 이는 개별 인물사를 통해서는 파악하기 어렵고 당대 발화자 전반에 대한 검토 가운데 가능할 것이다.

3) 조선의보는 문교부 의학교육과에서 발행하였던 『조선의사시보(朝鮮醫事時報)』를 김두종의 조선의보사가 인계하였고 구성을 재편하여 『조선의보』로 개명 창간한 것이다(김두종, 1946.12: 쪽수 없음).

4) 『조선의학신보』 제2집은 아단문고 소장본으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에서 해당 기관에 의뢰하여 소장한 파일을 확인한 것이다.

5) 이용설(李容卨, 1895-1993): 평북 희천 출생. 1919년 세브란스 졸업 및 3·1운동 참여. 1920~22년 베이징협화의학원, 1924-1925년 시키고 노스웨스턴의대 수련(1926년 미국 M.D. 취득). 1925년 이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외과교수 근무, 1937년 경성제대 의학부 의학박사 취득. 1940년 동우회 사건으로 종로 견지동 외과개업. 1945년 미군정 보건후생부장,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1956~61년 세브란스병원장을 역임하였다. 이용설의 이력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신유섭ㆍ신재의ㆍ유형식, 2014: 8-9)를 참조.

6) 이후 이용설의 주장은 해당 기고문을 주로 참조한 것이다.

7) 미군정은 일제 행정기구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1945년 9월 24일 공중보건국(Bureau of Public Health)을 설치했고, 1945년 10월 27일 경무부 및 학무부 산하의 후생(Welfare)기능을 담당하는 과들을 통합하여 보건후생국[Bureau of Public Health and Welfare, 이후 부(Department)로 개편]으로 재편했다(Far East Command, 1948a: 1).

8) 식민지시기 조선인은 토막민, 화전민, 실업자 등으로의 하방분화가 이뤄졌고 해방 이후 귀환민의 증가는 대중생활 문제를 전사회적인 문제로 가중시켰다. 식민지시기 빈민생활과 총독부의 대응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강만길, 2018)를 참조.

9) 「今後朝鮮의 醫療政策」, 『경향신문』, 1946년 11월 17일.

10) 행정자원의 경감을 위해 자선이라는 방식은 종합병원을 설립할 수 있는 국내 재원이 없는 상황에서 자선병원은 해외선교회로부터의 기독자선병원을 의미한다고 지적(여인석, 2012: 15)되기도 하였다.

11) 「今後朝鮮의 醫療政策」, 『경향신문』, 1946년 11월 17일. 종합병원 설립이라는 말로 인해서 이용설은 자본주의 국가형태의 미국식 의료를 지향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는 다음의 연구(신좌섭, 2001)를 참조.

12) 「醫療데파트出現」, 『동아일보』, 1936년 8월 11일.

13) 1946년 설립된 백병원은 이를 현실화시킨 사례였다(박윤재, 2018: 120).

14) 이용설이 의료국영을 주장한 것으로 보는 입장(신규환, 2017)도 있다.

15) 의료인들 사이에서 일본인 적산의 소유권 문제가 발생해서 행정적 어려움을 부과하고 있었다(이원규, 1999: 94).

16) 그의 보수적 태도는 미군정이 급진적 정책의 실시를 부담스러워 했던 것에도 관련되었다. 미군정 초기 의료법에 대해 검토했던 법제과의 바이스만(Weissman) 중위는 미군정의 일반정책이 향후 세워질 정부의 정책을 제약하는 것을 우려했고 미군정의 조치는 본질적으로 임시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RG 332, USAFIK,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Records Regarding the Okinawa Campaign, USAMGIK, Box No. 19, Interview with 1st Lt. A. Weissman, Legal Section, Bureau of Public Health and Welfare, 1946.1.6., p. 3.

17) 최응석(崔應錫, 1914-1998): 평양 유정 출생. 1926년 평양중학교 입학, 1930년 도쿄제국대학 예과 입학, 1933년 같은 대학 의학부 입학, 울산 달리 사회위생조사 활동. 1943년 같은 대학 박사학위 취득. 1944년 요코하마 사건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1945년 경성대학 의학부 제2내과 교수 재직, 조선산업의학회, 조선과학자동맹 참여. 서울시의사회 학술부장 및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1946년 11월 김일성대학 의학부 부장 및 병원장. 북조선보건연맹 위원장을 지냈다. 다음의 연구(신영전ㆍ김진혁, 2014)에서 참조.

18) 그는 월북 이후 두 편의 글을 이남지역 잡지에 게재했다. 최응석, 「血漿蛋白과 臨牀: 血漿蛋白體의 由來: 綜說. 1」, 『조선의학신보』 1, (1946.12); 최응석, 「현단계 보건행정의 근본적 임무」, 『조선의학신보』 2, (1947. 5). 「현단계 보건행정의 근본적 임무」에서 그는 소속과 지위를 전 경성대학 의학부 교수로 밝히고 있다.

19) 이북에서 북조선분국이 설립된 이후 조선공산당 2차 당대회가 진행되면서 조선공산당 지도부에서 리더십을 둘러싼 경합이 이뤄졌고 이남지역의 사회주의 지도부는 월북한 상태에서 운동을 지도했다. 이에 따라 이남에서 좌파세력의 지도급 인사, 인텔리들도 평양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946년 중반부터 조선공산당은 신전술로 미군정의 탄압에 역공세로 전환되었고 남로당 계열의 수장인 박헌영은 1946년 10월 월북한 이후 이북에서 이남지역의 사회운동을 지도했고 이남 조선공산당 세력의 중심은 이북으로 이동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연구(김무용, 1997; 유영구·정창현, 2010: 99)를 참조.

20) 일본에서 전개되었던 의료사회화운동에 관련해서는 다음의 연구(佐口貞, 1964; 川上武, 1965)를 참조.

21) 그 외의 사항은 노동법제상 개혁으로 8시간 노동제, 14세 이하 유년공의 육체노동 금지, 연차 휴가 2주일 제정 등이었고, 부녀해방에 관한 생활개선은 온돌 폐지, 주택의 전기 사용, 양복제, 공영주택, 조혼폐지 공창제 폐지 등을 전사회적 개혁을 망라했다. 이와 함께 의료보험, 일시 노동능력 상실에 대한 수당, 폐질·노령·실업 등 보험에 대해서도 제안했다(최응석, 1947: 18-19).

22) 최응석이 말했던 주요 내용의 상당 부분은 소련의 보건의료체계를 기초한 쉐마쉬코의 내용과 전반적으로 일치한다. 쉐마쉬코에의 보건의료정책은 다음의 역서(N. A. 세마쉬코, 2017)를 참조. 소련공산당의 기본정책은 이 책의 17쪽 참조.

23) 그의 활동은 도쿄제대 의학부에서 1926년 설립된 사회의학연구회의 영향을 받았고 단적으로 울산 달리 보고서의 서문은 일본의 사회위생학자 테루오카 기토가 쓴 것이었다.

24)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이 추진했던 서울대학 의학부 통합안은 “타당하지 않은 망상(妄想)”에 지나지 않으며 여러 의학전문학교를 서울대학 의학부와 같이 각각 승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5) 보건부는 일제시기 식민 본토에서 실시되었던 제도였다. 준전시체제에서 장정의 체위 문제가 중시되었고 그러한 시책으로서 무의촌에서 의사를 대신하여 농촌보건문제, 유아사망 문제를 해결할 역할을 맡았다. 보건부의 양성은 1939년(소화 14)부터였다(川上武, 1965: 424).

26) 의료국영화의 급진성을 경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볼 김연주도 같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다. 의료국영화가 모든 개인병원 폐쇄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전 국민이 무료 또는 실비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고, 의료의 책임을 국가 또는 국민이 지는 의료의 실질적 사회화의 차원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김연주, 1948: 38).

27) 이용설이 의료국영화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된 바 있다(신규환·서홍관, 2002: 104). 이용설이 미국식 의료를 지향하고 의료국영화를 반대했다는 지적은 다음의 연구(신좌섭, 2001)를 참조.

28) 북한에서 제시하는 정책과는 차이가 있다. 이후 미소공위 답신서를 통해 확인할 것이다.

29) 기존에는 최응석과 유사한 입장으로 박영서, 이부현(신좌섭, 2001)이 간략히 소개되었다. 의료사회화(의료민주화) 주장을 했던 인물들은 이 장에서 다루는 정구충, 김연주 외에 박영서, 정근양, 이부현 등을 찾아볼 수 있으나, 본 연구에서는 체제 지향의 표상에 초점을 맞춰 정구충과 김연주를 조명했다.

30) 해방 이후 최응석 등 사회주의 보건의료체제를 지향하는 이들의 월북 이후 미군정기 사회의학의 전통은 제거되거나 단정 수립 이후 공백으로 남겨진 것으로 파악되었다(최규진, 2016; Han et al, 2017). 하지만 급진적인 개혁을 지향하는 이들이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 의료사회화 지향은 아래 김연주를 비롯해서 우익적 성향의 정구충에게서도 나타날 정도로 보건의료 문제에 대한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31) 정구충(鄭求忠, 1895-1986): 1895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1913년 한성고등보통학교 졸업. 관비유학생 자격으로 일본 오사카의과대학을 1921년 졸업한 이후, 동대학 부속병원에서 외과수련. 1923년 경상북도 안동도립병원 외과과장, 1925년 황해도 해주도립병원 외과과장, 1927년 평안북도 초산도립병원 외과과장 역임 후, 1928년 오사카의과대학에서 결핵연구소 연구원 재직, 1932년 의학박사 취득. 1935년 한성의사회 회장. 193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외과교수. 1945년 경성여자의과대학 학장, 건국준비위원회 자문위원, 군정청 후생부 자문위원, 문교부 자문위원(의학교육), 문교부 의학교육심사위원 등 활동. 1946년 대한외과학회 회장, 1948년 보건부 독립촉성위원회 부회장, 대한적십자사 조직위원, 1953년 대한 적십자사 서울지사장. 1959년 대한의학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유승흠 편, 2007: 67-70).

32) 여운형과 안재홍이 주재했던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공화국으로 재편되자 정구충은 최영재 차장, 이문세, 정운근과 같이 후생부를 책임졌다. 한편 1945년 12월 17일 소집되어 헌법의 기초안을 준비한 단체인 행정연구회에는 후생 부문 전문위원으로 최동, 정구충을 포함했다(정구충, 1985: 339; 김수용, 2008: 25, 26).

33) 경성제국대학 위생학교실에서 독일식 의학지식보다 미국식을 따르는 경향이 1930년대 이후 나타났다는 지적(박지영, 2019)도 있다.

34) 정구충의 강연은 『우생』(1936) 2권에 「우생학상으로 본 화류병」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種族改良의獅子吼 今夜의優生大講演」, 『동아일보』, 1935년 1월 23일.

35) 국민의료법 초안의 총칙에는 “본법은 민족의 우생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야 국민의 보건 향상과 국민의료의 적정을 기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문장이 기재되었다(國會事務處, 1951: 1).

36) 파시즘은 경제지상의 기치 아래 정치영역을 삭제했는데, 이것의 기초에는 우생관이 있었다. 해방 후 이남에서 제3세계 식민지경험을 가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사상적 분화도 분명하지 않았고 정치사상적 저변에 파시즘이 가진 영역이 넓었음은 다음의 연구(후지이 다케시, 2012)에서 지적되었다.

37) 1937년 세계의학을 시찰한 세브란스병원 산부인과 의사 조동협은 수술은 독일이 제일이고 설비는 미국이 세계 제일이라고 평했다. 이 당시에 이미 미국이 설비의 측면에서 독일과 일본을 10년 가량 앞서 있다고 그는 보았다. 「設備는米國 手術은獨逸 趙東浹醫師歐米視察談」, 『조선일보』, 1937년 11월 4일.

38) 의학계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그의 판단은 과학기술계 인사들에게서도 나타났다. 그 이유에 대해서경제성장을 위한 총동원체제가 일본과 소련에서 유사하게 나타났다는 것이 지적되었다(홍성주, 2010: 27-30).

39) 문기옥은 1938년 한성치과의사회 임원, 종로제일청년단 명예단장을 지냈다. 1956년 서울시 시의원(종로구)에 당선되었으나, 1957년 사망했다. 「서울市議當選者」, 『경향신문』, 1956년 8월 15일; 「鍾路第一靑年團役員改選」, 『동아일보』, 1938년 11월 12일; 「八日中에結果判明」, 『경향신문』, 1957년 5월 8일; 「漢城齒醫任員改選」, 『동아일보』, 1938년 2월 21일.

40) 김연주(金鍊珠, 1922-1995): 1936년 평양의학전문학교 7회 졸업. 1946년 경기도 보건후생국 예방의학과장, 1947년 6월 조선적십자사 구호부장과 보건부장(~1949년 말). 1950년 보건부 보건 및 위생과장(~1958년), 1955년 미시간대학교 보건학 석사, 1958년 국립 오류동 구호병원장(~1960년), 1961년 대한적십자 보건부장, 구호부장, 섭외부장.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에서 첫 번째 수석대표 및 본회담 실무회의 교체수석대표를 역임했다. 權彛赫, 「내가 아는 平医 同門들」, 『平医』 9, 1978, 143쪽; 「金鍊珠 前남북회담대표」, 『경향신문』, 1995년 12월 21일.

41) 「美蘇共委第五號第六號諮問에 主要政黨의 答申比較」, 『경향신문』, 1947년 7월 6일.

42) 463개 정당과 사회단체가 미소공위 참여를 신청했고, 435개 단체가 서면 답신서를 제출했다. 허위 단체인 3개를 제외하고 미군정에서 분류한 432개의 단체성향은 우익 222개(51.4%), 중간파 81개(18.7%), 좌익 129개(29.9%)였다(심지연, 1989: 84).

43) 설의식(1900-1954): 함경남도 단천 출생,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학과 졸업. 1922년 동아일보 입사 후 주일특파원, 편집국장 역임. 해방 후 동아일보 주필, 부사장 역임. 1947년 순간(旬刊) 새한민보 창간. 한국학중앙연구원, 「설의식」, 한국민족대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5329&cid=46668&categoryId=46668, 검색일: 2021.9.27.

44) 「임정」은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이 「미소 공위」와의 협의에 참여하기로 당론을 정하고 난 후 「한민당」이 주도적으로 결정한 단체이다.

45)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를 본 후인 1946년 10월11일에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 좌우합작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려 했고 마침내 1947년 7월3일 결성된 단체이다.

46) 1946년 12월 12일 개원한 미군정시대의 입법기관으로서 1946년 5월 「미소 공위」가 무기한 휴회하자 미군정에서 구성한 과도입법의원이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에 대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 「하곡수집법」, 「미성년자노동보호법」,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 등을 제정하였다.

47) 1946년 2월 15일 조직된 좌익통일전선이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인민당」 등 좌익계 정당 및 「조선공산당」의 외곽단체를 총망라한 좌익 통일전선체를 구축하였다.

48)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 등 단정수립에 나선 이승만을 경계하던 미군정은 온건한 우익 정치지도자 김규식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재편하려고 했고 그 결과가 과도입법의원의 설치였다.

49) 「共委對策委員會를結成 77次立議本會議에서遂決定」, 『경향신문』, 1947년 5월 21일; 「共委에建議書提出決議 立議에서答申案作成에着手」, 『경향신문』, 1947년 6월 15일.

50) 이갑수(李甲洙, 1893-?): 서울 관수동 출생, 1912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1917년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 졸업, 1919년부터 3년간 교토제국대학 생리학교실 조수로 연구생활, 1926년 경성제대 의학부 생리학교실 조수로 연구 후 1930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박사 졸업. 1931년부터 해방 이전까지 경성제대 의학부 강사. 1930년 조선의사협회 창립, 1932년부터 7년간 간사장 역임. 1947~1950년까지 서울의대 학장 역임. 1945년 조선생리학회 창립 및 제1~6회 회장 역임.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 경성여의전 이갑수(李甲秀)와는 다른 인물이다(한국의학원, 2009: 7-10).

51) 문교후생위원회는 다음의 최명환(崔鳴煥), 백남용(白南鏞), 장면(張勉), 김법린(金法麟), 유진희(兪鎭熙), 정광조(鄭廣朝), 황신덕(黃信德), 황보익(廉廷權), 염정권(廉廷權), 하경덕(河敬德), 김용모(金溶模), 김광현(金光顯) 12명으로 구성되었으나, 이후 보선에 의해 선출된 이갑수를 포함한 10명으로 재조직되었다. 기존 인원에서 제외된 인물이 누구였는지 상세히 파악되지 않는다. 다음의 회의록(秘書處, 1947a: 1947b)과 기사들을 참조. 「分科委員氏名」, 『조선일보』, 1947년 1월 10일; 「各分科常任委員數 卅四次立議서決定」, 『동아일보』, 1947년 3월 21일.

52) 「한민당,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고 책임위원 선출」, 『서울신문』, 1946년 5월 4일.

53) 「施療所設置要望」, 『동아일보』, 1932년 11월 13일. 이후 이갑수 등 의학자들은 『조선가정의학전서』의 발간, 위생계몽강연 등을 하는 등 의학지식 보급에 나섰다. 이와 관련된 1930년대 초 경성부 의료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이순영, 2019)를 참조.

54) 「醫療利用組合組織 無醫村落一掃」, 『동아일보』, 1950년 3월 23일.

55) 건강보험법은 일본에서 실시했던 것과 명칭도 일치한 것이었다.

56) 보건소는 보건행정의 말단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보건소는 보건진료소의 형태로 우선 구축되었다(강재구, 2021).

57) 북조선노동당의 기관지 『노동신문』에서는 구호, 자선에 대해서 선교활동에 의한 학교, 병원 건설을 해외원정 사업의 하나로서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조미관계사에 나타난 미제국주의의 배신행위」, 『노동신문』, 1948년 1월 10일(김광운, 2018: 113).

58) 1946년 노동자, 사무원에 대한 사회보험제도의 실시한 이후 병원 구분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보험지정 여부였다. 1952년부터는 무상치료가 적용된다.

그림 1.
『조선의학신보』 제2집 「설원(說苑)」4)
Figure 1. Seol-Won, Chosun-Uihak-Sinbo Vol.2
(조선의보사, 1947.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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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Expenditure Budget for the Health and Welfare Expenses in 1947 (Unit: KRW, %)
과목 세목 금액 및 비율
일반 경상비 보건후생부 본부* 52,370,200 6.70
보건소설치에 要하는 경비 □ 2,134,000 0.27
결핵요양소* □ 6,683,200 0.86
나병요양소* □ 48,166,000 6.20
항만검역소설치에 要하는 경비 5,126,800 0.66
방역연구소* 10,951,200 1.40
화학연구소* 3,452,500 0.44
가축연구소* 16,224,900 2.09
후생시설비* 6,380,700 0.82
일반경상비 총액 151,489,500 19.50
일반 임시비 生政통계사업에 要하는 경비 2,400,000 0.31
도립병원보조 □ 15,523,700 2.00
나병원비 보조 □ 15,400,000 1.98
방역에 要하는 경비 25,000,000 3.22
보건소설치에 要하는 경비 보조 □ 2,825,000 0.36
생약생산장려비 보조 2,000,000 0.26
가축전염병 예방 및 질병치료에 要하는 경비 13,484,000 1.74
유육(乳肉)위생비 보조 3,119,200 0.40
구충비 보조 2,400,000 0.31
구호에 要하는 경비 ◎ 210,400,000 27.08
보건시설 수용 구호비 보조 ◎ 32,850,000 4.23
일반임시비 총액 325,401,900 (340,510,300)* 41.89
응급비 남하동포구제대책에 要하는 경비 ◎ 300,000,000 38.62
합계 776,891,400 (791,999,800)* 100.00

(조선은행조사부편, 1948: Ⅰ-268, Ⅰ-274)

* 주1. 위 『연감』의 Ⅰ-274은 <1947년도 본예산세출명세표>, Ⅰ-268에는 <1947년도 세출중요과목명세표>가 기재되어 양자 간 과목과 액수의 차이가 있다. <본예산>에 추가된 내용과 차이는 (*)로 표시했다. 강조는 필자.

* 주2. 비율은 소수점 둘째자리 반올림.

Table 2.
Survey on the Industrial Nationalization (%)
사업·전문직 계층 노동 계급 농민 계급 경기도(가중치 부과) 남한(가중치 부과)
모든 주요 산업의 정부 소유, 그러나 기타 재산의 제외 41 28 36 33.3 34.1
순전한 사적 성격의 재산(주택, 가구, 기타)을 제외한 모든 재산(산업, 토지, 건물, 기계, 광산, 기업체, 기타)의 정부 소유 14 27 21 22.7 22.3
모든 주요산업의 정부 통제, 그러나 소유하지 않음 32 31 35 33.1 33.9
주요 산업에 대하여 정부가 통제나 소유하지 않음 13 14 8 10.9 9.7
합계 100 100 100 100 100

* 출처: 한국 서울주한공보국, 「농지분배와 산업 및 기타 재산의 국유화에 관한 한국인들의 여론조사」, 서울역사편찬원 편, 『미군정방첩대 서울문서』, 2019, 247쪽에서 수정.

* 1946년 3월 5일~11일 서울과 그 주변에서 수집한 2,647명에 대한 설문조사.

* 주: 모든 재산은 산업, 토지, 건물, 기계, 광산, 기업체, 기타를 포함

Table 3.
Outline of the Health and Medical Debate
개혁 대상 개혁 방법 해결방안 인물 거취
의료제도 의료교육 의료의 질적 향상을 위한 유학, 종합병원 설치 이용설 이남
의료제도와 사회제도 의료정책 및 의료사회화 소련 모델에 기반한 전사회 개혁 정구충
민족의료 추구와 의료균등, 의료국영 김연주
식민본국 일본의 의료사회화운동에 기초한 사회주의 보건의료제도 추구 최응석 월북
Table 4.
Survey on the Plan and Measurement of the Social Health Program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시국대책협의회·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주주의민족전선 남조선노동당 북조선노동당
보건의료체계 조직 및 계획
1. 보건행정의 강화 1. 의료제도는 국립병원, 협동조합병원, 개인개업의의 3종으로써 조직한다. 1. 의료제도는 국립병원, 협동조합병원, 개인병원의 3종으로 조직한다. (일제시기 조선인을 위한 보건시설은 없었고 농촌에는 무의촌을 양산함, 미신의 팽배, 방역책 전무. 이상 서설 줄임)
보건행정의 강화에 관하야서는 중앙정부지방(시도군읍 및 면) 행정기관내의 행정부문을 독립단일체로 한다. 2. 국립병원은 일본 통치시대의 관립병원, 공립병원 및 일본인 소유 대병원으로써 한다. 2. 국립병원은 1945년 8·15 이전에 있든 관-공립병원과 일본인 소유의 대병원으로서 광범위하게 조직한다.
3. 보건소의 설치 1. 민족적 건강을 회복 향상시키며 인민들의 의료를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의 시설로써 인민보건사업을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
보건소를 1면 1개소까지 추진 점차 설치한다. 3. 협동조합병원은 농촌에 대한 급속한 의료조직망을 건설키위하야 협동조합사업의 부속된 사업으로써 국가 원조 하에 그 설립을 촉진하여야 한다. 3. 협동조합병원은 농촌에 있어서의 의료기관 즉 촌락병원, 촌락진료소 또는 이동진료대 등은 급속히 또 광범위하게 조직하기 위하여 국가의 적극적인 원조하에 협동조합의 부속사업으로서 설립한다.
6. 군립병원설치 2. 몰수된 이전 일본병원들은 확장하여 개선하며 새로운 진료소와 의료기관을 신설하여 인민들로 하여금 이것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 도병원의 하부조직을 군립병원까지 추진 설립한다. 단 관영 및 군단위의 의료공제조합제도를 실시한다. 4. 개인개업의의 도시집중을 방지하고 이를 균포하는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7. 사회사업적 의료기관의 확충 5. 공장, 광산 등의 병원을 확대하여야 한다. 4. 국영병원과 협동조합병원은 상호협조하여 이 국립병원과 협동조합 병원이 중추가 되어 지방 각지에서의 의료망을 조직하여 의료제도의 기본이며 중심체로 되게 하여야 한다.
건강보험법의 현실화와 자선의료기관을 장려한다. 4. 각 공장과 농촌마다 의료기관을 설치하는 동시에 순회진료를 수행할 것이다.
8. 국영 또는 공영의 고아원 탁아소, 양로원 등을 확충한다. 7. 의사를 급속히 대량 양성할 필요가 있음으로 학교를 증설하고 한편에 있어 자학(自學)의사의 국가시험제도를 실시하여야 한다. 5. 개인개업의는 과도로 도시에 집중되고 있고 더구나 개인개업의의 과반수가 서울에 집중되고 있음으로 이를 지방에 분산시킬 대책을 취하여야 한다.
10. 의료기관의 기획화
상기 제반 의료기관은 장래 국가적 기획화를 목표로 하야 점진적으로 추진케 한다.
전염병 및 위생 대책
2. 사회보건에 관한 질병의 대책확립, 급성전염병 및 만성전염병 특히 결핵병, 성병, 나병 등과 정신병에 대한 예방 및 치료에 관한 제 대책을 확립한다. 6. 폐질 기타 전염방지를 위한 특수한 치료원을 증설하여야 한다. 3. 결핵, 성병 등 사회적 질병을 근본적으로 퇴치하고 전염병을 철저히 방지하기 위하여서는 세균학연구실과 방역소독소, 결핵요양원 등을 설치할것이며
5. 공중위생시설의 완비
상하수도 및 오물처치 등을 개선한다.
대중위생교육
9. 공중보건위생교육의 철저 9. 체육의 선수편중제도를 청산하고 체육인민화 방면으로 지도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광]범히 체육지도기관을 창설하야 경제적 소비[를] 과중히 부담치 않는 체육종류를 선택하야 그 보편화를 지도하여야 한다. 6. 체육의 선수편중제도를 청산하고 체육대중화 방향으로 지도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는 광범히 체육지도기관을 창설하야 경제적으로 과도히 부담치 않는 체육종류를 선택하야 그 보편화를 지도할 것이다. 4. 임시정부는 인민대중 속에 의학상 지식을 보급시키며 중견 의료간부를 시급히 양성하는 동시에
ㄱ. 문교부를 통하야 중등, 초등학교에까지 보건위생교육의 과목을 다량 취재케한다.
ㄴ. 일반시민 및 농민에 대하야 광범위로 차에 관한 교육 및 선전에 노력한다.
기타
4. 보건위생통계의 정비 8. 의약품 생산을 확장하여야 한다. 5. 제약설비를 확장하여 근로인민에 대한 의료구호를 더욱 향상시켜야 할 것이다.

(새한민보社, 1947: 39. 73, 101, 120; 심지연, 1989: 322-323; 北朝鮮勞動黨 中央委員會, 1947: 27-28)

* 주. 답신내용의 번호는 답신서에서 기재된 순서이며, 북조선노동당의 답신서는 필자가 숫자로 구분함. 밑줄과 강조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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