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E-Submission | Sitemap | Editorial Office |  
top_img
Korean J Med Hist > Volume 31(1); 2022 > Article
강해관 의학 검역의 형성: 1872∼1894년 ‘영국-상하이-조선’으로의 수용과 변용†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process of establishing a quarantine system based on medical inspection by Shanghai Customs. England was the first to introduce a quarantine system based on medical inspection during the nineteenth century; with the majority of the Shanghai Customs administration being English, this system was able to be adopted with ease, and it was later transformed and accepted in Joseon. This paper further investigates the details of the actual medical inspection conducted by the Customs Medical Officer (CMO) who worked at the forefront of the actual quarantine as a medical inspector.
In the nineteenth century, International Sanitary Conferences were held in Paris, Vienna, and Constantinople to discuss the process of quarantine and public health. Furthermore, the Public Health Act was passed in England in 1872. This Act established port sanitary authorities in each of England’s ports to carry out medical inspections. This medical inspection enabled healthy and infected people to be separated from each other instead of conventional isolation. The duties of the CMO would consist of boarding any incoming ship to check for any infected people. Any infected persons would then be sent to a non-quarantine hospital, and the ship was sanitized. This concept of quarantine based on medical inspection was borrowed by Shanghai Customs.
The unique political situation in Shanghai, which consisted of multiple imperial concessions, necessitated the adaptation of England’s medical quarantine concept to suit the special environment in which the Shanghai Customs was located, and by 1875, the Shanghai Customs quarantine medical inspection system was established. In this system, patients found in the Customs quarantine medical inspection were sent to a non-quarantine hospital in the settlement. Due to the extraterritoriality, the extent of the authority of the Customs Medical Officer was dependent on agreements with the possibility to be granted a one-time or temporary position after conferring with the Shanghai local government and consuls in each country. The Treaty Ports of Joseon were similar to Shanghai with regards to the presence of the Customs system alongside different settlements. The Joseon ports went through another transformation when the Commissioner of Shanghai Customs, H. F. Merrill, who also served as the Chief Commissioner of Seoul, accepted the Shanghai Customs’ modified concept of medical inspection in 1887.
The process of acceptance and transformation of the medical quarantine concept leading to the ‘England-Shanghai-Joseon’ connection shows that the concept of medical quarantine in the nineteenth century spread from England to Joseon through Shanghai Customs as a medium.

1. 서론

감염병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이 고안되었고 그중에서도 검역은 상황에 따른 유연한 변형을 통해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아 현재까지도 많은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검역이 국가의 경계라는 지리적 초상 위에서 해외로부터 국내로의 감염병 유입을 막기 위한 주요한 메커니즘으로 작용한 것은 14세기의 라구사(Ragusa)와 베네치아(Venice)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현재 공항이나 항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코 또는 구강에 면봉을 넣어 검체를 채취하여 PCR검사를 하는 것과 같이 ‘의학 검사(Medical Inspection)’를 통해 감염병의 국내 유입을 입국단계에서 차단하는 검역은 19세기 유럽에서, 특히 영국에서 가장 이르게 실제 검역 현장에 적용되었다.
19세기는 기존의 검역방식이 국가의 해상무역에 심각한 금전적인 지장을 초래하기에 더욱 실용적인 조치로 대체되어야 하며 검역 요건이 국가마다 달라 혼란을 야기함에 따라 공통된 기준이나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불러 일으켜진 시기이고, 검역 절차는 의학적이어야 하고 의학적 관점에서 의료계에 종사하는 의료진의 경험과 판단에 따라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 검역의 목적과 절차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Chase-Levenson, 2020: 17; Gensinia et al., 2004: 259).1)
19세기 중국의 경우 해관(海關)에서 검역업무를 맡아 하였고, 중국해관은 영국인 총세무사(Inspector General, 總稅務司) 하트(R. Hart)의 주도 아래에 일부 영국의 제도들을 도입하여 현지화한 후 운영되고 있던 영국인 주도의 행정조직이었다. 영국에서 1871년에 왕립위생위원회(Royal Sanitary Commission)가 각 지방에 공중위생을 목적으로 한 지방 당국이 있어야 하고, 모든 지방 당국은 위생의료관(Medical Officer of Health)을 둬야 한다고 권고했고,2) 1872년 공중위생법(Public Health Act)이 통과되어 이러한 내용이 법제화되자, 항구에도 항구위생국(Port Sanitary Authorities)이 신설되었고 항구위생의료관(Port Medical Officer of Health)이 고용되어 입항하는 선박에 대해 검역 당국인 해관과 협력하여 단순한 격리(isolation)가 아닌 의학 검사를 진행하여 환자를 선별하여 치료하고 소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체계(System of Medical Inspection)가 마련되었다(Maglen, 2002: 421).3) 그리고 상하이(上海) 강해관(Shanghai Customs. 江海關)에서도 같은 해에 영국영사관의 협력으로 최초의 검역이 이루어졌고, 일 년 후인 1873년에는 검역에 관한 임시장정이 제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이 적용한 의학 검사의 개념을 수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강해관의 검역은 하나의 표준이 되어 전국의 지방 해관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검역을 수행하였고(陳詩啓, 2002: 521), 그 후 1930년에 국민정부(國民政府)가 상하이에 항만검역관리처(港灣檢疫管理處)를 설립하여 전국의 검역을 총괄하게 하면서 중국은 전문 검역 당국에 의해 통일된 기준으로 검역이 이루어졌다.
강해관의 검역에 관해서는 1932년에 우롄더(伍连德)가 작성한 항만검역관리처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정리가 되었지만,4) 관련 연구는 1980∼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고 샤먼위생검역소(廈門衛生檢疫所), 난징위생검역소(南京衛生檢疫所), 상하이위생검역국(上海衛生檢疫局), 장자강출입경검험검역국(張家港出入境檢驗檢疫局) 등 중국의 검역 담당 기관에서 먼저 시작하였다(楊上池, 1983: 3-5; 12; 1990: 85, 88-89; 1995: 77-82; 李志雲, 1983: 60-61; 顧金祥, 1983: 6-9; 呂祥寶·顧金祥, 1993: 257-259; 何宇平, 1993: 11-15; 楊錫全, 1993: 19-23, 朱加葉, 2000: 298-301). 이러한 연구는 대부분 『중국국경위생검역잡지(中國國境衛生檢疫雜誌)』라는 역사학 학술지가 아닌 검역 전문 잡지에 발표된 관계로 적게는 2쪽, 많게는 6쪽 분량의 각주가 거의 없는 보고서의 형태로 작성되었지만 이를 통해 검역장정의 제정 배경, 검역장정 한문 번역문의 내용, 기본적인 검역의 전개 상황 등에 관한 기초적인 사실관계가 밝혀졌다. 이후 사학계에서도 강해관 검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지만 주로 전술한 선행연구에서 밝혀진 객관적 사실을 재인용하는 데에 그쳤고, 관련 연구의 시기도 점차 페스트(plague)가 유입된 1894년 이후의 청말과 민국시기에 집중되었다(飯島涉, 2000: 264-266; 陳詩啓, 2002: 521; 上海出入境檢驗檢疫局, 2012: 9-14, 17; 2013: 11-13; 余新忠, 2011: 189-194; 2016: 235-237; 劉岸冰·何蘭萍, 2014: 21-24; 杜麗紅, 2021: 2-25). 따라서 의학사적인 시각에서 이 당시 강해관에서 수용한 검역 개념의 성격과 해관의사(Customs Medical Officer)의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의 절차, 그들이 의사로서 감염병의 해외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진행한 의료·위생의 내용은 아직까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조선 역시 해관에서 검역업무를 맡아 하였고, 1886년에 인천해관(Jenchuan Customs)에서 임시장정을 제정하여 인천항에서 검역을 수행한 것을 시작으로 감염병의 해외로부터 국내 유입에 대응하기 위한 검역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1887년에 총세무사서(Inspectorate General, 總稅務司署)에서 검역업무를 총괄하게 되면서 검역의 범위가 전체 무역항으로 확대되었다(신동원, 1989: 73-75; 1997: 116-124; 박윤재, 2016: 226, 230; 박한민, 2020a: 50-72; 2020b: 4-34; 진칭, 2020b: 1036-1058). 이러한 한국의 검역에 관해서는 이 시기 강해관 현직 해관원들이 조선에 파견되어 조선해관 운영진을 겸임하는 제도가 형성되면서 조선해관과 강해관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조선해관 총세무사(Chief Commissioner, Seoul) 메릴(H. F. Merrill)이 조선으로 파견되기 이전에 강해관에서 운영진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진칭, 2020a: 104-112, 236), 조선해관의 검역체계 구축과정에 강해관의 검역방식이 참고되었을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지만(진칭, 2020b; 1036-1038), 그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본 연구는 상술한 부분들에 대한 종합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강해관이 동시대 영국이 적용한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 개념을 수용하여 해관 의학 검역체계를 구축해가는 과정과 이러한 해관 의학 검역이 조선해관에서 수용되고 변용되는 양상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논지의 전개는 상하이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영국의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 개념을 수용하고 검역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확립되었으며, 검역의 기반이 형성된 이후 해관의사가 검역업무를 수행한 실질적인 검역의 절차와 그 내용이 어떠했는지 분석하고, 조선해관 총세무사를 겸직한 강해관 현직 세무사 메릴이 조선에서 해관 의학 검역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 이것이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었는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강해관에서 처음으로 검역의 필요성이 대두된 1872년부터 검역체계가 구축된 후 페스트에 대응하기 위해 검역방식이 개선된 1894년 직전까지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본 연구는 1차 사료인 중국해관의 디스패치(Despatch)와 메디컬 리포트(Medical Report)를 핵심 사료로 삼았다. 디스패치에는 검역 임무를 수행했던 강해관의 해관의사가 작성한 공문과 보고서, 강해관세무사(Commissioner, Shanghai, 江海关稅務司)가 작성한 공문 등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 쟁점과 업무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 사용한 강해관 검역 관련 디스패치는 모두 서큘러(Circular)에서 발췌한 것이다. 서큘러 문서집은 고본(孤本)이 아니라 상하이에 있는 총세무사서 산하 조책처(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總稅務司署造冊處)에서 활자화시켜 주기적으로 출판한 출판물인데 2013년에 중국의 해관총서(海關總署)에서 영인하였다.5) 또한, 메디컬 리포트는 각 무역항의 해관의사가 자신이 근무하는 무역항의 반년 또는 한 해 동안의 의료·위생 상황을 조사하여 작성한 보고서로서 해관검역 연구에 있어서 그 가치가 상당하다. 메디컬 리포트는 상하이에 있는 총세무사서 산하 조책처에서 이들 보고서를 취합하여 스페셜 시리즈(Special Series)의 두 번째 시리즈로 매년 출판하였는데 2016년에 중국의 국가도서관(國家圖書館)에서 영인하였다.6) 이렇듯 해관에서 생산한 디스패치와 메디컬 리포트는 강해관에서 감염병의 유입에 대응한 역사를 밝히는 데에 가장 기초적인 사료임에도 19세기 강해관의 검역을 연구함에 있어 현재까지 학계에서 한 번도 활용된 적이 없다.
근대의 중국해관은 영문과 양력을 공식 기준으로 삼아 공무를 집행했기 때문에 본 연구는 동일한 사안에 대해 영문 원문 외에 기타 언어로 번역된 사료가 동시에 남아있을 경우 원문인 영문 사료를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양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새롭게 발굴한 사료에 근거한 본 연구를 통해 상하이에서 동시대 영국이 적용한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 개념을 수용하여 해관의사를 주축으로 감염병의 해외유입에 대응하기 위해 쏟았던 노력을 조명하고, 이것이 조선해관에 참고적 역할을 한 부분을 확인함으로써 근대한국이 수용한 검역의 또다른 면모를 확인하여 한국 의학사 연구를 보다 구체화하는 데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2. 영국 의학 검역 개념의 수용과 검역 조건의 확립

1850년대부터 국제사회는 정기적인 국제위생회의(International Sanitary Conference)를 개최하여 검역, 공중위생 등에 관한 논의를 가졌지만, 여전히 검역의 방식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고 영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찍이 영국은 1663년에 추밀원(Privy Council)에서 검역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면서 처음으로 검역 관련 규제가 마련되었고,7) 1710년에 처음으로 검역법(Quarantine Act)을 제정하였다(McDonald, 1951: 22). 그 후 검역법은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쳐 1825년에 최종 확정되어 1896년에 통과된 공중위생법에 의해 폐지되기 전까지 법전에 남아있었고, 검역법에 명시된 감염병에 관한 검역은 추밀원이 총괄하고 해관에서 집행하였다(Baldwin, 1999: 150-151; Booker, 2016: 12).8)
그러나 1825년의 검역법은 페스트와 황열병(yellow fever) 등 해외유입 감염병(imported infectious disease)만을 명시했고 두창(smallpox), 장티푸스(typhoid), 성홍열(scarlet fever), 홍역(measles) 등 토착 감염병(indigenous infectious disease)은 포함하고 있지 않아 검역 당국인 해관의 소관이 아니었다. 또한 콜레라(cholera)는 1831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에 유입되었기에 1825년에 최종 개정된 검역법은 해외유입 감염병인 콜레라 역시 포함하고 있지 않아 시간이 흐를수록 이 검역법으로는 관련 사안을 처리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Maglen, 2014: 45). 그렇기에 유라시아대륙에서 육로를 통해 유행하던 콜레라가 1865년에 처음으로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 유럽에 접근했을 때도 영국은 경각심을 가졌으나 그 다음해에 영국이 보인 콜레라 방어는 선박의 규제라는 중요한 측면에서 결함이 드러났고 이후 영국의 콜레라에 대한 대비는 해외로부터의 유입 방지에 집중되었다(Hardy, 1993: 254-255).
이러한 배경에서 1871년에 영국 왕립위생위원회가 모든 지방에 공중위생을 목적으로 한 지방 당국이 있어야 하고 적어도 한 명의 법적 자격을 갖춘 의사나 국가에서 공인한 의료 분야의 자격을 갖춘 자를 위생의료관으로 고용해야 한다고 권고하였고, 1872년에 공중위생법이 통과되어 이러한 내용이 법제화되었다.9) 1872년의 공중위생법이 각 지역 위생 당국에 위생의료관으로 활동할 적합한 의료인을 고용하도록 의무화한 것은 전국의 의료계가 더 나은 질병예방을 위해 법률에 의거하여 공식적으로 활용된 최초의 조치였다.10) 공중위생체계 건설이라는 흐름 속에서 1871년에 신설된 지방정부이사회(Local Government Board)는 추밀원을 대체하여 중앙위생기구가 되었고, 1872년의 공중위생법에 따라 항구에 위생 당국을 설립할 권한이 주어졌다(Baldwin, 1999: 149).11) 이에 특정 항구를 항구위생구역(Port Sanitary Districts)으로 구성하고 항구위생국을 신설하였다(Cook, 2000: 136; Maglen, 2002: 422).
항구위생국은 기존의 검역법이 두창, 장티푸스, 성홍열, 홍역 등 토착 감염병과 콜레라를 명시하지 않아 생긴 검역 상의 공백을 메웠다. 이로써 검역은 페스트, 황열병 등 해외유입 감염병을 담당했던 기존 검역 당국인 해관과 신설된 항구위생국의 이원체제에 의해 작동되었다(Maglen, 2002: 422; 2014: 5).12) 입항하는 모든 선박은 해관검역관이 우선 승선하여 검역하였고, 검역법에 명시되지 않은 감염병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선박은 항구위생국의 소관이 되어 승객과 선원에 대한 의학 검사를 통해 환자의 병원 이송, 선박과 승객의 소독, 이상이 없어 하선이 허락된 승객에 대한 모니터링 등 후속 조치를 취했다(Baldwin, 1999: 152; Maglen, 2014: 44). 다만 해외유입 감염병이되 1825년 검역법 제정 이후인 1830년대에 유입되어 검역법에 명시되지 않은 콜레라는 1896년에 검역법이 폐지될 때까지 원칙상 승선 검역과 입항을 위한 검역증(free pratique)은 해관에서 발급하고 감염환자에 대한 의료와 격리는 항구위생국에서 책임지는 방식으로 처리되었지만 검역 권한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Maglen, 2014: 45-46).
이 검역체계 내에서 1873년 중반까지 런던항은 항구위생의료관과 항구위생관(Port Sanitary Officer)을 갖추었다. 이 체계는 선박의 조사 단계에서 항구위생의료관이 해관의 검역관(Quarantine Officer)의 협조를 받아 의학 검사를 진행하고, 항구위생국 소관의 감염병에 감염된 환자의 경우 병원으로 이송하여 격리치료하고 항구위생관이 선박과 화물의 소독 및 의류의 소독, 한탁, 훈증 등에 관한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이상이 없는 사람은 통행을 허락하는 동시에 그들의 이름과 목적지, 예정 거주지 등에 대한 세부 정보를 관련 지방 위생국에 전달하여 잠복기 동안 지방 위생국에서 이들의 건강을 모니터링할 수 있게 하였다(Maglen, 2002: 414, 423; 2014: 37-38, 44; Baldwin, 1999: 141).13) 기존의 검역이 감염환자와 이상이 없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격리시키는 형식에서 벗어나, 이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분리하여 이상이 없는 사람은 통행을 허락하거나 관찰 격리하고, 증상이 있는 환자의 경우 병원으로 이송하여 격리치료하는 방식이었다. 이로써 영국은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체계의 틀을 갖추었고 이후 계속하여 보완되는 과정을 거쳤다.
영국이 감염병의 해외유입을 막기 위해 적용한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 방식은 동시대 다른 유럽 국가에 거대한 논의를 일으켰다. 1874년 비엔나(Vienna)에서 열린 국제위생회의에서도 해양 검역에 대해 위원회는 기존의 격리에 기반한 검역 조치를 폐지하고 원칙적으로 영국의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체계로 대체할 것을 권고했다(Howard-Jones, 1975: 39-40).14) 이에 독일은 1883년에 이르면 증상이 있거나 의심되는 승객은 잠복기 동안 또는 회복될 때까지 격리하고 이상이 없는 승객은 관찰 격리하는 방식을 취하기 시작하였다(Baldwin, 1999: 175). 한편, 프랑스는 1870년대 초반까지 고위 관료들이 여전히 격리에 기반한 검역을 권장하였고, 1874년 비엔나 국제위생회의에서도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이 기존의 검역 방식을 대체하는 사안이 표결에 부쳐졌을 때 12 대 8로 영국, 독일 등 국가는 찬성한 반면 프랑스 등 국가는 반대표를 던졌다.15) 이러한 프랑스의 입장 역시 결국 국제적인 추세를 따라갔는데, 1885년 로마(Rome)에서 개최된 국제위생회의에서 프랑스 대표단은 승객에 대한 의학 검사를 진행하고 확진자만 격리치료하는 의학에 기반한 검역방식을 지지하였다(Baldwin, 1999: 161).
이렇듯 국가마다 정책이 달라 국제적 수준에서의 합의를 달성하기 어려웠던 검역에 관한 논의는 여러 차례의 국제위생회의를 거친 후 1893년이 되어서야 유럽과 미국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Gensinia et al., 2004: 259). 감염병 문제에 대한 영국의 해결책은 국가마다 출발점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거의 모든 서양 국가에서 채택되어 널리 활용된 조치가 되었고(Baldwin, 1999: 531), 검역은 제국이 식민지 인구의 이동을 규제하는 제국 권력의 도구가 되거나 식민지 당국이 요구하는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Chase-Levenson, 2020: 3).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영국의 식민지와 영국영사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도 메디컬 가젯(The Indian Medical Gazette)은 새로 구축된 의학 검사를 기반으로 하는 영국의 검역체계에 관해 자세하게 소개하였고,16) 홍콩(Hong Kong)에서는 기존에 영국에서 검역대상이 아니었지만 새롭게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체계 내에 들어온 두창에 대해서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1872년에 상하이의 영국영사관에서 영국홍콩정부(British Hong Kong Government)로부터 홍콩을 경유해서 상하이에 도착하는 엔터프라이즈호(Enterprise)에 두창 감염자가 탑승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는 전보를 받고 강해관 측에 검역을 요청한 사건도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72년 11월 22일에 상하이 주재 영국영사대행 알러바스터(C. Alabaster)는 영국홍콩정부로부터 홍콩을 경유하여 상하이로 향하고 있는 독일 윤선 엔터프라이즈호가 두창 감염자 한 명을 홍콩에 하선시키고 갔는데 선내에 아직 감염자가 더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전보를 받았다.17) 이튿날 영국영사대행 알러바스터는 바로 이 사실을 강해관세무사 딕(T. Dick)에게 알려 대책을 세울 것을 요청하였다.18) 강해관세무사 딕은 엔터프라이즈호를 검역하기 위해 먼저 강해관감독(Superintendent, Shanghai, 江海關監督)을 겸임하고 있던 소송태도(蘇松太道)19) 선빙청(沈秉成)과 상하이 주재 독일영사 아네크(W. G. A. Annecke)의 인가를 받은 후 이선청(Harbour Master’s Office, 理船廳)에서 검역 임무를 총괄하게 하고, 해관의사를 현장에 파견하여 의학 검사를 기반으로 한 검역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20)
강해관의사 제이미슨(R. Alex. Jamieson)은 1872년 11월 27일 저녁에 엔터프라이즈호가 장강(長江)과 황푸강(黃浦江)의 합류 지점인 우쑹커우(吳淞口)에 도착하자 승선하여 의학 검사를 하였지만, 선내에서 두창 감염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楊上池, 1983: 3; 楊錫全, 1993: 20; 上海出入境檢驗檢疫局, 2012: 5). 의학 검사 결과 홍콩에서 하선한 환자도 2기 매독(secondary syphilis)을 치료하기 위해 홍콩에 남겨진 것으로 확인되었다.21) 그 후 한동안 항구에서도 두창 감염사례가 확인되지 않았고 딕은 12월 16일에 베이징(北京)의 총세무사 하트에게 이 사건을 정리하여 보고하였다.22) 하지만 실제 해외유입 사례가 발생하지 않아 검역에 관한 장정의 제정 논의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간 기존 연구는 모두 강해관에서 검역을 시작하게 된 배경을 1872년 엔터프라이즈호 사건과 1873년 싱가포르(Singapore)와 방콕(Bankok)에서의 감염병 유행에서만 찾고 있고,23) 가장 최신 연구도 예외는 아니다(杜麗紅, 2021: 2-3). 그러나 세계사적인 배경 없이 이것에만 국한해서 이해한다면 상하이는 1843년에 개항한 이래 감염병의 해외유입은 항상 존재했고 외국 선박이 지속적으로 상하이항에 입항했는데 왜 하필 개항한 지 거의 30년이나 지난 1872년 이 시점에 이 문제가 대두되었는지는 해석할 수 없게 된다. 강해관에서 검역을 하게 된 배경을 홍콩을 경유해 온 엔터프라이즈호에 감염병 의심 환자가 있었던 것만으로 동인을 삼을 것이 아니라, 영국이 의학 검사 체계를 마련하면서 영국홍콩정부와 영국영사관의 검역 요청이 있었고 1872년에 영국에서 적용한 의학 검사를 기반으로 하는 검역 개념을 그 해에 영국인 상하이 검역 관계자가 수용하면서 홍콩을 경유해 온 엔터프라이즈호에 의학 검사가 진행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청말 중국해관은 총세무사 하트를 필두로 영국인이 주도하고 있던 행정조직이었고, 1872년 강해관의 전체 업무를 총괄한 세무사 딕과 의료 및 위생 업무를 책임진 해관의사 제이미슨 역시 영국인이었다.24) 실제 검역 업무를 책임진 강해관의사 제이미슨은 “위생에 관한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권위자”라고 평가한 영국정부의 수석의료관(Chief Medical Officer) 사이먼(J. Simon)의 발언과 영국의 사례를 줄곧 인용하면서 강해관의 검역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세우려고 했다.25) 그렇기에 영국영사관으로부터 선박 검역의 요청이 들어왔을 때에도 강해관은 영국이 적용한 방식인 의사를 선박에 파견하여 상황을 파악하는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1872년에 영국에서 적용한 의학 검사를 기반으로 감염환자를 선별하여 격리치료하고 건강한 자의 감염원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새로운 검역방식은 상하이 조계와 선박 내의 영국 국민의 보호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수단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Li, 2010: 110).26)
그리고 1873년에 영국인 강해관의사 제이미슨이 아직 콜레라로부터 위험 단계가 아닐 때 검역장정의 제정 등 노력을 통해 영국이 적용한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체계를 구축하여 감염병의 유입에 대처할 수 있는 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하였고, 강해관에서 검역 관련 장정을 제정하여 콜레라 감염지역에서 온 선박에 대해 검역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27) 이렇듯 강해관에서 검역을 시행하고 이듬해에 장정을 제정한 것은 각각의 사건에 국한해서 국지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강해관감독 선빙청은 우선 상하이 주재 각국 총영사·영사와 논의하여 해관감독이 임시검역장정을 시행할 수 있는 권한과 해관의사에게 검역권을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데에 합의하여 치외법권에 따른 외교 문제를 해결하였다.28) 외교 문제가 해결되자 강해관세무사 라이트(F. E. Wright)는 강해관감독에게 검역에 관한 임시장정 초안을 제출하고 해관의사 제이미슨을 해관검역관으로 추천하였으며 강해관감독의 비준을 받은 후 1883년 8월에 임시장정을 시행하였다.29) 해관의사 제이미슨은 검역 권한을 부여받은 후 임시장정에 근거하여 8월 한 달간 프랜드십호(Friendship), 럭키호(Lucky) 등 시암에서 온 선박에 대해 검역을 수행하였다.30)
이때 시행된 임시검역장정인 「베이징 고위 관계자 계류 상하이 임시 검역 장정(Provisional Quarantine Regulations Proposed to be adopted at Shanghai Pending Reference to the High Authorities at Peking)」(이하 「상하이 임시검역장정」)은 1873년 8월 15일에 강해관세무사 라이트가 하트에게 올린 디스패치의 부속문서로 현재까지 남아있어 그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31) 총 4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장정은 선박이 황푸강에 진입할 때 지켜야 할 규정, 선박이 황푸강에 진입할 때 해관이 취해야 할 조치, 정박 이후 해관이 취해야 할 선박에 대한 통제 조치, 해관의사의 검역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32)
이러한 「상하이 임시검역장정」이 제정된 이후 강해관 관계자와 상하이 주재 각국 영사는 교섭을 통해 계속해서 검역장정 제정에 관한 입장 차이를 좁혀갔고(杜麗紅, 2021: 3),33) 1874년 6월 9일에 이르러 각국 영사의 대표로서 미국총영사 시워드(G. F. Seward)와 강해관감독은 소송태도아문(蘇松太道衙門)에서 면담을 가져 초안 내용의 기본적인 틀에 합의하였다.34) 그리고 10일 뒤 미국총영사 시워드는 최종 초안의 영문 원문 3부와 한문 번역문 1부를 소송태도아문에 송부하였다.35) 소송태도 선빙청은 이 사안과 관련된 모든 서류를 강해관세무사 글로버(G. B. Glover)에게 전달하여 그에게 자문하였고,36) 글로버는 초안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였다.37) 이에 강해관세무사 글로버는 강해관감독, 조약국 총영사·영사와 주고받은 문서, 강해관에서 제정한 장정의 영문 원문과 한문 번역문 등 검역장정의 시행에 관한 모든 서류의 사본을 총세무사서에 제출하여 베이징의 승인을 받았다.38)
이로써 1874년 7월에 8개의 조항으로 구성된 「상하이 항구 위생 장정(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이 공식 반포되어 상하이 항구에서 새로운 기준에 따라 검역이 이루어졌다.39) 이 장정 인쇄물은 현재 상하이당안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선행연구에서 보여진 적이 없어 그 서두와 말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장정의 내용을 살펴보면, 「상하이 임시검역장정」을 바탕으로 하되, 4개 조항이 추가되었는데, 선박이 황푸강에 진입할 때 지켜야 할 규정, 선박이 황푸강에 진입할 때 해관이 취해야 할 조치, 정박 이후 해관이 취해야 할 선박에 대한 통제 조치, 해관의사가 행사할 검역 임무 등의 기존 내용 외에 격리에 관한 규정, 선내 인원이 지켜야 할 규정, 해관의사의 검역에 관한 권한, 이선청 관계자의 역할 등에 관한 내용이 그것이다.40)
「상하이 항구 위생 장정」이 시행된 이후 입항한 선박에 대한 관리가 강화되면서 기존의 「상하이 항구 장정(Harbour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의 개정 문제도 논의되었다. 1875년 4월 16일에 상하이 공공조계(Shanghai International Settlement, 上海公共租界)에서 열린 각국 영사 회의에서 이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하버마스터(Harbour Master) 비구에르(S. A. Viguier)는 5월 1일의 논의 결과에 근거하여 「상하이 항구 장정」을 개정하였다.41) 「상하이 항구 장정」은 주로 선박의 황푸강에서의 운항, 항구의 출입, 항구에 정박 등에 관한 규정들로 구성되었기에 비록 검역에 관한 내용은 당시 논의의 핵심이 아니었지만,42) 감염병 환자가 있는 선박에 관한 기존의 제9조 내용을 “감염병에 감염된 선박은 항구 수역의 1마일 이내로 접근해서는 안 되며, 노란색 깃발을 전면에 게양해야 하고, 이선청의 허가 없이는 하선하거나 승선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제10조로 개정하였다.43)
그리고 같은 해 10월 26일에 강해관은 해관의사 제이미슨이 작성한 입항한 선박과 격리 중인 선박의 감염병 예방수칙을 반포하였다.44) 이 예방수칙은 강해관세무사 글로버가 게시한 해관공고(Customs Notification)에 수록되어 있어 그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45) 예방수칙의 내용을 살펴보면 주로 식수의 활용 등 물에 관련된 주의사항, 선상에서의 활동에 관한 주의사항, 감염자에 대한 대처 방법 등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46) 강해관은 이러한 조치를 통해 입항한 선박과 격리 중인 선박을 통한 감염병의 전파를 예방하고자 하였다.
이상과 같이 영국은 1872년에 해외유입 감염병에 대해서는 해관 소관으로 격리에 기반한 검역을 수행하고, 토착 감염병에 대해서는 항구위생국 소관으로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을 수행하는 검역체제를 형성하였다. 그 해에 강해관은 영국으로부터 의학 검역의 개념을 수용한 이후 1873년에 「상하이 임시검역장정」을 시행하여 검역업무를 시작하였고, 1874년 「상하이 항구 위생 장정」의 제정과 1875년 「상하이 항구 장정」의 개정을 통해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해관의사 역시 상하이 항구에 입항한 선박과 격리 중인 선박의 감염병 예방수칙을 제정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해관의사를 주축으로 하는 강해관 검역체계를 구축하여 감염병의 해외유입에 대응할 체계를 점차 갖추게 되었다.

3. 해관 의학 검역 방식과 해관의사의 역할

영국에서 항구위생당국이 위생담당자로 활동할 적합한 의료인을 고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을 실시하는 등 의학적 관점이 중요해지는 상황 속에서, 강해관에도 영국인 세무사 등을 중심으로 이러한 검역 개념이 수용되었고 상하이의 환경에 맞게 변용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개념 속에서의 검역은 단순한 격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에 해관의사의 역할은 막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강해관에서는 영국인 제이미슨이 1869년에 강해관에 해관의사로 입사한 후 1872년에 첫 검역 임무를 시작으로 1895년에 패혈증(septicemia)으로 사망할 때까지 20년이 넘게 강해관 검역 절차에 있어 의료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제이미슨은 영국 아일랜드(Ireland) 남부에서 태어나 1861년에 퀸즈대학(Queen’s University)에서 학업을 마친 후 1862년에 상하이에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노스 차이나 헤럴드(The North-China Herald)에서 에디터로 근무했다.47) 하지만 1866년에 저널리즘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1868년에 로얄칼리지(Royal college)의 의과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그해 곧바로 상하이로 돌아와서 1869년에 강해관에 해관의사로 입사하여 해관 의료 임무를 맡았다.48)
강해관의 의학 검역 방식과 절차를 살펴보기 위하여 19세기에 UKHO (United Kingdom Hydrographic Office)와 강해관에서 제작한 지도를 바탕으로 필자가 편집한 지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지도를 보면, 황푸강은 장강의 지류이고 장강과 황푸강의 합류 지점이 우쑹커우이다. 선박이 상하이의 항구에 입항하려면 장강 강어귀를 통과하여 장강에 진입한 후 반드시 우쑹커우를 통과하여 황푸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위의 지도를 보면, 지도상 동북쪽이 황푸강의 하류이고 남쪽이 상류이며 동북쪽에 표기된 박선계(Lower Limit, 泊船界)와 남쪽에 표기된 박선계(Upper Limit, 泊船界) 사이 수역이 상하이 항구 수역이다. 근대에 와이탄(外灘)과 베이와이탄(北外灘)에 부두가 즐비해 있었는데 와이탄의 부두에는 주로 소형 선박이 정박했고 베이와이탄의 부두에는 주로 대형 선박이 정박했기 때문에, 검역대상이 되는 선박은 주로 베이와이탄의 부두에 정박하는 선박이었다. 강해관청사는 와이탄에 있었다.
이상의 지리 정보와 「상하이 임시검역장정」, 디스패치의 검역 관련 내용을 토대로 1873∼1874년 상하이항에 입항한 외국선박과 그 입국자의 의학 검사에 기반한 해관검역 과정을 복원해보면 다음과 같다.
외국 선박이 장강과 황푸강의 합류지점인 우쑹커우에 도착하면 우쑹에 상주한 강해관등탑처(Light, Shanghai, 江海關燈塔處)의 조석 담당 직사인(Mate, 值事人)과 등대 담당 직사인(Lightkeeper, 值事人)은 그 선박이 해당 영사관에 의해 감염된 항구로 선포된 항구에서 온 선박인지 여부를 조사하고 만약 감염지역에서 온 선박으로 확인되면 해당 선박은 황푸강을 따라 상하이 항구로 향할 때 노란색 깃발을 게양하도록 하였다.49) 노란색 깃발은 국제관례상 검역기(Quarantine Flag)를 의미하는데 강해관도 이러한 국제관례를 적용한 것이다. 이선청은 노란색 깃발을 게양한 선박이 입항한다는 통보를 받으면 즉시 보트를 제공하여 해관검역관을 겸임한 해관의사가 승선 검역을 할 수 있도록 협조하는 한편, 순하사(River Police, 巡河使)를 파견하여 해관의사가 검역을 마칠 때까지 아무도 승선하거나 하선할 수 없도록 감독하였다.50)
그리고 해관의사는 해당 선박에 승선하여 검역한 후 항해 중 감염병에 감염된 사례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곧바로 선장에게 검역증(pratique)을 발급하였다. 하지만 감염사례가 한 명이라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면 그 선박을 1∼3일간 격리시켰고,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에는 3∼5일간 격리시켰다.51) 그리고 다수의 감염사례가 발생한 경우에는 그 선박을 우쑹커우의 빨간색 부표(Red Buoy) 밖으로 이동하여 정박하게 하여 육지나 다른 선박과의 접촉을 차단시켰는데 감염 정도에 따라 선박과 화물의 훈증 소독 여부와 격리기간을 정했고, 격리기간이 끝나면 검역증을 발급하였다.52) 해관의사는 검역증을 발급하게 되면 검역 정황을 강해관세무사에게 보고해야 했다.53) 이 검역 방식은 그 후 「상하이 항구 위생 장정」의 제정과 「상하이 항구 장정」의 개정, 그리고 해관의사 제이미슨이 감염병 예방수칙을 만들어 실무에 적용하게 됨에 따라 더욱 구체화되었다.
1875∼1894년의 의학 검사에 기반한 해관검역 과정을 앞서 제시한 지리 정보와 「상하이 항구 위생 장정」, 「상하이 항구 장정」, 강해관에서 제작한 감염병 예방수칙, 그리고 디스패치와 메디컬 보고서에 기재된 실제 검역 사례를 토대로 복원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기에는 중국 윤선도 검역 대상에 포함되기 때문에 외국선박이나 중국 윤선이 우쑹커우에 도착하면 우쑹에 상주해 있는 강해관 이선청의 조석 담당 직사인과 등대 담당 직사인은 즉시 각 선박을 조사했는데, 감염지역으로 판정된 항구에서 출항한 선박으로 확인될 경우 황푸강에 진입할 때 노란색 깃발을 앞 돛대의 끝에 게양하게 하고, 「상하이 항구 위생 장정」의 인쇄물 한 부를 선장에게 주어 황푸강에 진입하기 전에 먼저 검역에 관한 규정을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54) 감염병 감염지역은 1875년 이전에는 강해관감독과 각국 영사가 자국 항구에 대해 감염여부를 선포한 것을 따랐지만, 이때부터는 자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감염지역으로 선포한 항구 외에는 강해관감독과 각국 영사가 논의하여 그 여부를 판정하였다.55) 1880년에 고베(神戶)의 경우에도 상하이의 해관 관계자와 각국 총영사·영사들이 이를 콜레라 감염지역으로 판정하자 강해관은 그해 7월 12일부터 9월 17일까지 10주간 고베에서 출항한 선박에 대해 검역을 수행하였다.56) 그리고 1883년에는 강해관감독이 자국의 산터우(汕頭)를 감염지역으로 판정하자 그해 7월부터 12월까지 산터우항에서 온 18척의 선박에 대해 검역하였고 그중의 3척이 해관의사에 의해 격리되어 위생 조치가 취해지고 환자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57) 강해관감독은 각국 영사와의 논의 결과를 강해관세무사에게 알려 이선청이 감염병 감염지역 리스트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의 윤선을 비롯한 중국 윤선의 경우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였다.58)
우쑹커우에서 황푸강에 진입한 후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과정에서는 이선청 지박소원(Berthing Officer, 指泊所)의 도선이 있었다.59) 검역기를 게양하고 있는 외국선박이나 중국 윤선의 선장이 이선청의 지박소원에게 의뢰하여 소형 윤선을 고용하면 지박소원은 반드시 앞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소형 윤선으로 그 선박을 밧줄로 끌어 도선해야 했고, 작업이 완료되어도 지박소원은 이선청의 허가가 있어야만 하선할 수 있었다.60)
지박소원의 도선으로 선박이 황푸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이선청은 이 선박을 베이와이탄 동쪽에 있는 박선계에서 1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현재의 양푸대교(楊浦大橋) 근처의 수역에 닻을 내리게 하였다.61) 하버마스터는 우쑹의 직사인으로부터 노란색 깃발을 게양한 선박이 황푸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는 정보를 받으면 순하사를 파견하여 해관검역관을 겸임한 해관의사의 승선 검역을 협조하도록 하였다. 순하사는 해관의사가 검역을 하는 동안 해관의사의 경호와 선내의 인원이 상륙하거나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영국검역체계를 보완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런던 항구에서는 해관이 그레이브젠드(Gravesend)에서62) 노란색 깃발을 게양한 선박에 승선 검역하여 검역법에 명시되지 않은 두창 등 토착 감염병에 감염된 환자를 발견하여도 토착 감염병 검역을 담당한 항구위생국의 항구위생의료관이 승선할 때까지 해당 선박을 억류할 권한이 없었고, 이 감염된 선박은 아무런 제한 없이 그레이브젠드에서 런던을 향해 항행할 수 있었다(Maglen, 2014: 46).
해관의사는 만약 이 선박이 감염지역에서 출항하였지만 출항 이후 감염사례가 발생하지 않았거나, 또는 감염자가 발생했지만 도중에 하선하여 현재 선내에 감염자가 확인되지 않은 경우에는 검역증을 발급하여 입항을 허락하였다.63) 감염지역에서 출항하기 이전의 상황은 해관의사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심지어 선의(船醫)가 판단한 의심환자가 선내에 있어도 자신의 주관적인 검진 결과에 따라 검역증을 발급하여 해당 선박의 입항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1884년 3월에 나가사키(長崎)에서 출항하여 상하이에 입항한 화물선 한 척이 2월 부산(釜山)에 정박해 있을 때 두창 증상을 보인 선원이 있었는데 선의는 이 선원이 아직 경증 두창에 걸려있다고 판단했으나 검역을 맡은 해관의사가 승선 검역할 당시 해당 선원의 체온이 정상이고 인후통(sore throat)이나 피부 발진(skin eruption) 등 어떠한 질병의 징후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 해관의사는 선박을 ‘감염지역에서 출항 이후 감염사례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하여 검역증을 발급하여 그 화물선이 정박지로 갈 수 있도록 허가했고, 선의는 그 환자를 두창 환자로 판단해 상하이 제너럴 병원(Shanghai General Hospital, 公濟醫院)으로 이송시켰다.64) 한편, 해관의사가 승선 검역을 할 당시 감염자가 없더라도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 사례가 확인된 경우에는 이 선박을 박선계 밖에서 1∼2일간 격리한 후 검역증을 발급하여 입항을 허락하였다.65) 시체는 타르(tar)를 칠한 캔버스(canvas)에 말고 매장하기 전에 클로르 석회(chloride of lime) 표백분을 묻힌 뒤 관을 덮는 방식으로 매장되었다.66)
이상의 경우와는 다르게 해관의사의 조사에서 선내 감염자가 확인되면 감염자를 병원으로 이동시켜 치료하였다. 당시 감염병 환자는 격리전문병원이 아닌 상하이의 조계에 위치한 상하이 제너럴 병원, 세인트 루크 병원(St. Luke’s Hospital, 同仁醫院), 중국계 병원인 체인병원(Gutzlaff Hospital, 體仁醫院) 등 일반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이 중 주로 상하이 제너럴 병원이 수용하였다.67) 항구에서 상하이 제너럴 병원으로 이송된 감염병 환자의 경우 1877년 이전까지는 프랑스조계의 와이탄에 위치한 상하이 제너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68) 1877년에 이 병원이 공공조계의 쑤저우허 북쪽 기슭의 현재의 북쑤저우로(北蘇州路)로 이전된 후에는 환자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69) 런던의 경우 검역단계에서 의학 검사를 통해 발견된 감염병 환자를 항구위생국의 병원선박(hospital ship) 린(Rhin) 등 위생 당국 관할 아래의 의료자원을 이용하여 환자를 수용하여 격리치료를 할 수 있었지만(Cook, 2000: 135-137; Maglen, 2001: 36-39), 상하이의 경우에는 조계에 있는 외국계 병원이나 중국계 민간 병원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강해관에서 조계에 있는 일반병원의 격리병실을 활용한 이유는 강해관에 병원선박이나 부속 격리병원이 존재하지 않아 사실상 조계의 일반병원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행정적인 판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관에서 영구적인 부속 격리병원을 건설할 여건이 안되는 상황에 대해 해관의사 제이미슨은 메디컬 리포트에 영국의 격리병원 건설에 관한 성공적인 사례를 소개하고 조계 당국에 격리병원을 제안한 사실과 공공조계에서 천연두 병동 건설에 관한 제안서가 부결된 사실 등을 적시하며 이 사안에 대한 해관과 조계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고자 하였으나 조속히 실현되지는 못했다.70)
이렇듯 감염자를 병원으로 이송시키는 동시에 해관의사는 선박과 화물을 훈증 소독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선장에게 감염자가 머물렀던 모든 장소와 사용한 객실과 침상을 강력한 석탄산용액(carbolic acid)으로 소독하도록 하였고, 감염자를 병원으로 이송할 때 사용된 삼판(sampan, 舢板)도 철저히 소독 후 이틀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모든 주의사항과 지침을 선장에게 서면으로 작성해주었다.71) 이선청은 이러한 선박을 우쑹커우의 빨간색 부표 밖으로 이동시켜 격리하였고, 격리기간 동안 선내 인원의 외부와의 접촉과 화물의 하역은 금지되었다. 우숭커우의 빨간색 부표 밖에서의 격리기간은 최소 1∼2일이었는데 선내의 감염병 확산 정도에 따라 해관의사는 해당 국가 총영사·영사와 상의하여 격리기간을 연장할 수 있었다.72) 다만 상하이에서 이미 동일한 감염병이 만연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해관의사의 판단에 따라 해당 선박을 우쑹커우로 다시 이동시켜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닻을 내린 지점에서 감염자의 이송과 선박 소독 조치가 모두 끝날 때까지 격리한 후 검역증을 발급하여 입항을 허락하였다.73)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검역증을 발급받았거나, 혹은 감염지역이 아닌 항구에서 온 외국선박이나 중국 윤선은 박선계에서 항구로 입항하기 위해 순역(Watcher, 巡役)의 정례검사를 받아야 했다. 순역은 선박과 화물이 항구의 입항 조건에 부합하는지를 조사하는 권한이 주어졌을 뿐 검역이나 위생 조사를 할 권한은 없었기에 이들 선박이 박선계 내에 진입한 이후에는 감염병 관련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규제할 장치는 없었다. 예를 들어 1883년 3월에 순역이 말라카 해협(The Straits of Malacca)에서 온 한 선박에 정례검사를 위해 승선했는데 화물을 검사하다가 두창에 감염되었고, 교체되어 검사를 진행하던 순역 역시 두창에 감염되었다.74) 두 순역 모두 당시 해당 선박의 화물칸에서 심한 악취가 풍겼다고 호소했고 검역을 맡았던 해관의사도 해당 선박을 박선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지만,75) 당시 현행 제도상 이미 박선계에 진입한 선박에 대해서는 아무런 검역 조치도 할 수 없었다.76)
순역의 검사까지 받고 선박이 부두에 도착하면 선장은 해관 관계자에게 검역증을 제출하고 선원의 하선과 화물의 하역 허가를 받을 수 있었고, 해관 관계자는 선장에게 항구에서의 감염병 예방수칙 인쇄물을 주었다.77)
이상은 1875∼1894년에 외국선박과 중국 윤선이 우쑹커우에서 황푸강을 통해 항구에 입항할 때 시행했던 의학 검사에 기반한 해관검역의 전체 과정이다. 당시 검역은 「상하이 항구 위생 장정」에 근거하여 해관의사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고, 검역 규정을 위반하거나 해관의사의 지시에 응하지 않으면 중국인의 경우 강해관감독을 겸임한 소송태도가 조사한 후 처벌하였고 외국인의 경우에는 치외법권으로 해당 국가의 총영사·영사가 조사한 후 처벌하였다.78) 해관의사는 검역을 마친 후 진행 상황을 정리하여 이선청에 전달해야 했고, 하버마스터 또한 세무사에게 관련 사실을 보고하여 강해관의 세무사와 해관감독 및 상하이 주재 각국 총영사·영사들이 그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야 했다.79)
강해관의 해관의사는 전술한 검역 외에 콜레라에 관한 감염병 예방수칙을 만들어 항구의 박선계 밖이나 우쑹커우의 빨간색 부표 밖에 격리되어 있는 선박 및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의 모든 인원들이 준수하도록 하는 역할도 하였다. 1880년에는 상하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로부터 두창이 번져 봄과 여름 내내 두창이 유행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고, 1882년 겨울에는 콜레라 감염사례의 대부분이 선원들 사이에서 일어났으며, 1886년 여름에 많은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였는데 대부분 선박에서 발생했고, 1887년 여름 역시 총 16명의 콜레라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절반 이상이 선박에서 나왔고, 1894년에는 선내에서 디프테리아(diphtheria) 환자와의 접촉 감염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선박이 닻을 내리고 격리되어 있거나 정박해 있는 동안 감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다.80)
이 감염병 예방수칙은 현장에서 선박의 감독을 맡은 이선청의 순하사와 해당 선장이 응급상황 발생 시 해관의사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해야 하는 응급처치에 관해서도 규정하였다. 이들은 해관의사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 약물로 응급처치를 해야 했는데, 지침에 따라 한 번에 브랜디(brandy)를 큰 스푼으로 2스푼의 양에 40방울의 로더넘(laudanum)을 한꺼번에 투여했고, 설사가 지속되면 해관의사가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 내에 한 번 더 투여할 수 있었다.81) 처음 구토나 경련, 떨림이 나타날 때가 골든타임이므로 환자를 담요로 싸서 뜨거운 물을 넣은 병을 환자 주위에 놓고, 경련이 일어나는 팔다리를 계속 문질러 주며, 대형 머스타드 습포제(mustard poultice)를 올려두거나 2∼3 스푼의 테레빈유(turpentine)가 뿌려진 플란넬(flannel) 조각을 가슴 아래 부분에 올려두어야 했다. 그리고 감염자 아래에 한 국자 분량의 타르를 넣은 용기를 놓아야 하고, 감염자의 분비물에 오염된 옷과 천은 반드시 타르나 석탄산이 용해된 물에 담가 두어야 하였다.82)
이상과 같이 해관의사가 주축이 되어 상하이의 황푸강 수역에 도착한 선박에 대해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이 이루어졌고, 상하이의 경우 영국과 달리 해관의사가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 임무뿐만 아니라 입항한 선박과 격리 중인 선박에 대한 위생 감독 역할도 맡아 하면서 감염병의 해외유입을 방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확인된 감염병 환자는 영국의 경우 병원선박 등 자국 위생 당국의 의료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상하이의 경우 조계에 위치한 의료자원을 활용하여 상하이 제너럴 병원 등 격리병원이 아닌 일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입항한 선박에 대해 영국은 해외유입 감염병의 경우 항구위생국에서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을 하고 토착 감염병은 해관에서 격리에 기반한 검역을 하는 이원체제로 작동한 것과 달리, 강해관은 모든 감염병에 대한 의학 검사와 그에 따른 위생 및 격리 조치를 모두 해관에서 시행하는 해관 의학 검역체계를 구축하였다.

4. 해관 의학 검역의 조선에서의 수용과 변용

강해관은 영국에서 출현한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 개념을 수용하였으나, 행정과 사법 자치권으로 인해 청정부가 조계 내에 위치한 항구에 항구 위생 당국을 세울 수 없는 상황에 맞춰 강해관만의 의학 검역체계를 형성하였다. 조선의 경우에도 1885년에 강해관 현직 해관원인 메릴이 조선해관 총세무사를 겸직한 이후 해관 의학 검역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관해서는 조선해관 총세무사 메릴의 이력과 중진 해관원의 강해관과 얽힌 이중적인 신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83년에 톈진(天津)의 북양통상대신아문(北洋通商大臣衙門)의 추천으로 고종에 의해 조선해관 초대 총세무사로 임명된 묄렌도르프는 조선에 오기 전청국의 해관에서 근무한 적은 있었으나 실제 검역이 이루어지던 해관에서 근무한 경험 없이 조선해관을 창설하고, 1885년에 제1차 조·러밀약 사건으로 고종에 의해 파면되기 전까지 그 운영을 맡았다. 조선해관에서 최초로 검역이 논의된 것은 묄렌도르프에 이어 메릴이 1885년에 조선해관 제2대 총세무사직을 맡으면서 이루어졌는데, 1885년에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직의 공백과 더불어 발생할 수 있는 총세무사직의 공백에 따른 인선을 둘러싼 각축전의 결과로 조선해관 총세무사에 대한 인선 추천권이 이전의 톈진의 북양통상대신아문에서 베이징의 총리아문(總理衙門) 산하 총세무사서로 이양되었고, 그 결과 베이징 총세무사 하트가 조선에 파견한 강해관 현직 해관원 메릴이 조선해관 총세무사를 겸직하게 되면서 강해관 현직 해관원들이 조선해관의 운영진을 맡게 되었다(진칭, 2020a, 79-85). 이 시점부터 강해관을 매개로 조·청 양국 총세무사서가 처음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것은 조선해관 의학 검역체계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조선해관에 오기 전 메릴은 이미 검역 업무가 이루어지고 있던 하문관(Amoy Customs, 廈門關)에서 다년간 근무했고 1884년 1월에는 강해관 이등방판후반(Second Assitant: B, Shanghai, 江海關二等幫辦後班)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이후 1년 남짓 베이징의 총세무사서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강해관으로 돌아온 후 1885년 말부터는 조선해관 총세무사직을 겸직하여 조선에 파견된 인물이었다(진칭, 2020a: 110-111).83) 조선에서 해관 의학 검역체계가 전체 무역항으로 확대된 1887년에 강해관 최고의 세무사로 승진한 메릴은 조선해관에 파견되어 오기 전 이미 실제 검역이 이루어지는 현장인 하문관과 강해관에서 검역을 이끌어본 경력이 있었다.
이러한 경력을 지닌 메릴은 1885년에 조선해관에 취임하자마자 베이징의 총세무사 하트와 함께 해관직제개혁을 단행하여 강해관 현직 해관원들이 조선에 파견되어 조선해관 운영진을 겸임하여 맡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조선해관은 총세무사 메릴은 물론이고 서양인으로 구성된 중진 해관원은 모두 중국 강해관 소속 현역 배테랑들로 구성되었다.84) 특히 여기에는 다년간 강해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현직 강해관 두등방판후반(First Assistant: B, Shanghai, 江海關頭等幫辦後班) 쇠니케(J. F. Schœnicke)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인천해관 서리세무사를 겸직한 이후 1886년에 조선 최초로 인천에서 임시장정을 시행하여 검역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강해관 현직 해관원으로서 중국해관에 ‘detached’ 상태로 등록되어 있다는 점인데 이는 해관용어에서 ‘임시 파견된 상태’라는 뜻이다. 즉 중국해관의 입장에서 조선해관의 중진은 모두 강해관에서 임시 파견한 해관원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중국해관의 시각에서 보면 강해관에 본래의 직무를 두고 있는 해관원이 조선해관에 임시 파견되어 겸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진칭, 2020a: 106-109).
이처럼 강해관을 매개로 양국 총세무사서 간의 관계가 강화되던 상황에서 조선해관이 검역체제를 구축해나갔던 사실은 조선해관이 검역체계를 구축해가는 그 역정의 출발점에서 일부 강해관의 의학 검사를 기반으로 한 검역방식이 참고되고 수용되었을 가능성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하다.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선 명문화되어 있는 검역장정을 통해서 이다. 강해관에서 1874년에 제정한 검역장정은 총 8개 조항으로 구성되었고, 조선해관에서 메릴이 1887년에 제정한 전국적인 임시검역장정은 총 11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85) 조선해관에서 1887년에 제정한 임시검역장정의 정박지와 검역기에 관한 제1조, 외부와의 접촉 금지에 관한 제2조, 검역하여 감염 사례가 확인되지 않은 경우에 관한 제3조, 검역하여 감염사례가 확인된 경우에 관한 제4조, 선원·승객의 소독과 검역 업무 보고에 관한 제6조, 규정을 위반한 자의 처벌에 관한 제8조, 감염지역의 판정에 관한 제9조, 장정의 성격을 규명한 제11조 등 8개의 조항은 강해관의 1874년에 제정한 검역장정과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나 같은 취지의 조항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해관의사의 의학 검사를 통해 확인된 감염병 환자의 병원 이송과 시신 처리에 관한 제5조는 강해관에서 시도했으나 무산된 개정안의 일부 조항과 같은 취지의 내용으로, 기존의 연구에서는 간과되었으나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상하이에서 「상하이 항구 위생 장정」이 반포된 후 그 결함이 갈수록 두드러지자 메릴이 강해관에서 이등방판후반을 지내던 1884년에 강해관의사 제이미슨은 영국의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방식을 참고하여 총 25개의 장절로 구성된 기존의 것보다 훨씬 구체적인 장정 개정안을 제출하였고 강해관세무사와 강해관감독 및 각국 총영사·영사 등 상하이 모든 관계자의 승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베이징의 총세무사 하트의 승인까지 받았으나, 결국 총리아문대신(總理衙門大臣)들의 부결로 무산되었다.86) 당시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 파크스(H. S. Parkes)는 그의 반대로 인해 총리아문에서 부결한것이고 본인이 반대한 이유는 이러한 개정안이 항구의 작업 효율을 저하시켜 중·영무역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직접 강해관의사 제이미슨에게 설명하였다.87) 이 개정안은 결국 강해관에서 시행되지 못했지만, 메릴이 강해관에서 근무할 때 제기된 이 개정안의 제7조 제4항, 제5항의 취지는 그가 3년 뒤인 1887년에 조선해관에서 시행한 임시검역장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88) 이처럼 강해관의 검역장정이나 그 개정안에서 조선해관의 임시검역장정과 같은 취지의 조문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양자가 관련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한편, 의학 검사에 대해 선박의 탑승자가 항소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에 관한 제7조, 격리병원의 설치와 운영경비 및 환자의 치료비용 부담 방식에 관한 제10조는 강해관의 검역장정이나 그 개정안은 포함하고 있지 않은 내용이다.89) 메릴은 강해관의 것을 참고하되 새로운 조문의 추가를 통해 해관 의학 검역체계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제정한 것이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감염지역의 판정에 관해 강해관에서는 세무사와 해관감독 및 각국 영사의 공동 합의를 거쳐 결정한다고만 규정하였지만, 조선해관은 그들의 공동 합의를 거쳐 결정하되 다수결의 원칙(majority ruling)을 따른다고 구체화하였다.90) 의학 검사를 통해 선박이 감염병에 감염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면 발급되는 검역증의 경우에도 강해관에서는 ‘pratique’라고 했지만, 조선해관은 현재까지도 통용되고 있는 ‘free pratique’로 지칭하였다.91)
이상과 같이 강해관 현직 해관원으로 조선에 파견된 메릴은 조선해관에서 임시검역장정을 제정할 때 강해관의 해관 의학 검역 개념을 수용하여 조선에서 의학 검사에 기반한 해관 의학 검역체계를 구축하되 조선의 실정에 맞게 변용시킨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양상은 실제 검역 절차와 의학 검사를 통해 확인된 환자의 처리 방식을 분석해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강해관은 해관에서 선박이 감염병 감염지역에서 출항했는지를 확인한 후 감염지역에서 온 선박만 노란색 깃발을 게양하게 하고, 해관원의 협조를 받아 해관의사가 승선하여 의학 검사를 진행하게 하고, 의학 검사 결과에 따라 감염환자나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경우에는 검역증을 발급하여 입항을 허락하고 감염환자가 확인된 경우에는 환자를 조계에 있는 일반 병원으로 이송하여 격리치료하고, 이상이 없는 사람은 선박에서 관찰 격리하고 해당 선박도 소독을 비롯한 위생 조치를 취했다. 조선해관 역시 선박을 감염지역과 비감염지역에서 출항한 선박으로 구분하여 감염지역에서 출항한 선박만 해관의사가 승선하여 의학 검사를 하였고, 의학 검사 결과에 따라 감염자가 없는 선박은 검역증을 발급하여 입항을 허락하고, 감염환자가 확인된 선박은 환자를 항구 앞바다에 있는 섬이나 조계 밖의 육지에 있는 해관 부속 격리병원으로 이송하여 격리치료하고, 이상이 없는 사람은 선박에서 관찰 격리하고 선박에 대해서도 소독 등 위생 조치를 취했다. 따라서 양자 모두 동일한 해관 의학 검역의 원칙 아래에 격리에 기반한 검역이 아니라 의학 검사를 통해 감염환자와 이상이 없는 사람을 구분하여 감염환자는 병원으로 이송하여 격리치료를 하고 이상이 없는 사람은 선박에서 관찰 격리를 하는 해관 의학 검역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의학 검사를 통해 확인된 감염환자를 처리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19세기 상하이에서는 강해관이나 조계 당국에서 감염병이 유행할 때 일시적으로 격리의료시설을 지어 감염병 환자를 수용한 적은 있지만 영구적인 전문 격리병원은 존재하지 않았다(福士由紀, 2010: 58-59; 馬長林 외, 2011: 99-102).92) 해관검역 과정에서 의학 검사를 통해 확인된 감염병 환자는 앞서 언급했듯이 상하이 제너럴 병원, 세인트 루크 병원, 체인병원 등 조계에 있는 일반 병원으로 이송되었고,93) 특히 상하이 제너럴 병원은 1877년에 와이탄에서 쑤저우허 근처로 이전하여 재건한 후 리모델링까지 거치면서 내부 구조도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격리치료는 기대할 수 없었고, 병원 측에서 독립된 격리병동의 건축 계획까지 세운 적이 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94) 이후 1884년에는 나가사키에서 출항하여 상하이 항구에 입항한 선박에 대한 해관 검역의 의학 검사를 통해 발견된 두창 의심 환자가 상하이 제너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격리 병실이 아닌 메인 빌딩의 그라운드 플로어(ground floor)에 있는 병실에서 몇 주간 치료를 받는 사례까지 발생하는 등 혼란은 지속되었다.95)
강해관의사의 입장에서 해관원의 건강을 책임지고 입항하는 선박에 대한 검역을 수행하는 것이 주 업무인데, 검역과정에서 의학 검사를 통해 발견된 환자를 이송할 격리병원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해관원 역시 항상 감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에 격리병원의 건설은 중요한 사안이었다. 해관의사 제이미슨은 1883년에 런던에 신축된 감염병 격리병원인 런던항구위생병원(Port of London Sanitary Hospital)을 사례로 들면서 이 문제는 상하이 제너럴 병원 측에서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공공조계 당국인 공부국(工部局)에서 나서서 넓은 부지를 확보하여 병원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자금 및 병원 유지 비용, 격리병원이 반 년 이상씩 비워질 경우 발생할 시설 노화 등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계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96) 제이미슨은 영국의 노팅엄(Nottingham)과 리버풀(Liverpool)에서 감염병이 원내와 외부로 확산된 사례를 들면서 감염병 격리병원은 외부와 최대한 격리되어 있어야 하고 간호사와 간병인의 원내 기타 병동 및 외부와의 접촉도 차단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97) 노스 차이나 헤럴드에서도 “천연두 환자의 존재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 충분히 외진 곳에 천연두 병원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병동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전염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라는 우려 섞인 기사를 실었다.98) 제이미슨은 완벽하게 격리된 병원은 사실상 별도의 직원을 배치해야 하는데 현재 상하이 제너럴 병원의 두창 부서의 의료진이 가장 적합하고, 현재 단계로서는 콜레라와 두창에 대비해 건설하되 앞으로 발진티푸스(typhus)의 대규모 유행과 다수의 여성 환자의 입원도 미리 고려하여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99)
하지만 해관의사 제이미슨이 인용한 영국 항구의 사례들과는 달리 상하이의 항구는 조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국의 항구 위생 당국이 존재할 수 없었고 항구 환경의 차이로 영국의 경험을 그대로 상하이에 적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강해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조계 밖에 부속 격리병원을 직접 건설하여 의학 검사과정에서 발견된 환자를 수용하거나, 아니면 조계에 있는 외국계 병원이나 중국계 민간 병원으로 이송하는 선택지 외에는 없었다. 실제 강해관은 1885년에 우쑹에 일시적인 격리의료시설을 건설하여 감염병의 해외유입에 대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이후 계속해서 이 시설을 운영했거나 환자를 격리치료 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100) 강해관은 현실적인 문제로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해관은 조계 밖에 부속 격리병원을 설립하여 의학 검사를 통해 발견된 감염환자의 격리치료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메릴 등 강해관 현직 해관원들이 조선해관의 운영진을 맡으면서 강해관을 매개로 격리병원을 중요시하는 영국의 당대 의학지식이 조선에 전파되면서 부산은 1887년 11월 절영도(絕影島)에 부산해관 부속 격리병원이 건설되었고, 인천은 1890년 7월에 월미도(月尾島) 남부에 인천해관 부속 격리병원이 설립되었으며, 원산(元山)은 1892년에 육지의 한인마을에 원산해관 부속 격리병원이 설립되었다(진칭, 2020b: 1048-1049). 선행연구에 따르면, 인천해관 부속 격리병원의 경우 1890년 7월 13일에 서리세무사 존스턴(J. C. Johnston)과 해관의사 이데타 류(出田龍)가 인천 앞바다의 섬들을 답사한 후 월미도 남부에 부지를 선정했고, 총 270멕시코달러의 해관 예산을 들여 최대 6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병원 본관과 별채를 일본인 목수를 고용하여 건설하였으며, 설립 비용과 그에 따른 일비는 조선해관에서 부담하였고, 환자의 음식, 의약품, 간병에 들어가는 일비는 각국 영사를 통해 해당 선박에 부과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진칭, 2020b: 1049).
당시 상하이의 조계에 상하이 제너럴 병원 등 외국계 병원이 존재했던 것처럼, 조선 무역항의 조계에도 제생의원(濟生醫院), 생생의원(生生醫院) 등 일본계 병원이 존재하였지만(박윤재, 2005: 58-59), 메릴은 섬이나 조계 밖의 육지에 해관 부속 격리병원을 설립함으로써 의학 검사를 통해 발견한 환자를 제대로 된 격리의료시설에서 치료할 수 없었던 강해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해관의사 제이미슨이 여러 차례 영국의 사례를 들어 제안하였지만 수용되지 않은 이러한 방식은 결국 조선에서 실현되었고, 이것은 조선해관에서 강해관 의학 검역체계의 한계를 극복한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해관 의학 검역체계의 또 다른 문제점인 치외법권에 따른 해관의사의 제한적인 검역 권한 문제는 조선해관에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런던에는 항구의 검역과 위생 사무를 총괄하는 항구 위생 당국인 항구위생국이 존재하였고 상설직으로서 풀타임제로 검역과 위생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항구위생 의료관을 두었다(Maglen, 2002: 422; 2014: 36). 하지만 강해관의 해관검역관은 치외법권의 존재로 강해관감독과 상하이 주재 각국 영사·총영사의 합의에 의해 일시적으로 임명되는 해관의사가 겸임하는 임시 직함에 불과했고, 해관은 위생 당국이 아니었기에 의학 검역에 따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도 제한적이었다.101) 이에 강해관의사 제이미슨은 1873년에 제한적인 위생 권한과 임시직으로 인해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필요한 권한의 행사가 늦어질 수 있습니다. 항구위생관과 같은 공식적인 직함을 가진 의료인이 당국에 신고하는 것이 유리한 사안인 공중위생과 하천과 관련된 사안들도 많이 있는데 이러한 직함은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이트의 권고로 도대(道台)가 이러한 임시직함을 만들었고, 저는 그 이후로 필요할 때마다 공식적인 임명 없이 그저 신념에 따라 일해왔습니다. 이에 저는 이러한 직함을 신설하는 것에 대한 귀하의 의견을 요청하는 바입니다.102)

강해관의사 제이미슨이 지적한 문제는 주로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위생 권한을 부여받지 못하는 상황과 공식적인 직함으로서 검역과 위생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해관세무사 글로버는 제이미슨의 요구를 받아들여 베이징의 총세무사 하트에게 이에 관해 제안했지만 하트의 비준을 받지 못했다.103) 이후 1874년에 검역장정의 시행을 계기로 강해관은 재차 베이징에 이 사안을 제안했지만 여전히 비준을 받지 못했다.104) 심지어 1875년에는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영국선박 블랙애더호(Blackadder)에 대해 제이미슨이 승선하여 의학 검사를 진행하여 두창 환자를 발견했지만 제한적인 위생 조치만을 취한 후 검역증을 발급한 것이 추후 문제가 되어 베이징에까지 알려졌지만,105) 강해관에 해관위생관이라는 상설 직함이 설치된 적은 없었다.
상하이와 같이 치외법권이 존재하는 조선에서도 해관검역은 감리와 각국 총영사·영사의 합의에 의해 해관의사가 임시로 해관검역관을 맡아 하였기에 검역 권한이 일회성으로 주어지는 것이었고, 의학 검사에 따른 위생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도 조선 자국의 항구 위생 당국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제한적이었다. 이에 당시 서양인들은 임시검역장정에 의해 보장된 항소권을 내세워 해관의사가 취했던 5%의 석탄산을 희석한 석탄산 용액으로 의류를 한탁하거나 따뜻한 물에 비누로 목욕하는 소독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소독법 폐지를 둘러싼 여러 차례의 외교적 분쟁이 있었고,106) 그 결과 조선해관은 서양 국가의 선박에 대해 소독 절차를 면제해주기도 하였다(신동원, 1997: 121-123; 박한민, 2020b: 16-20; 진칭, 2020b: 1047-1048). 외국인에게 치외법권이 없었고 검역 담당자도 각국 영사와의 합의에 의해 일회성으로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위생 당국에 의해 임명된 상설 직함이었다면 의학 검사에 따른 위생 조치는 더욱 강력한 강제력을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조선해관에서 검역에 관한 새로운 논의가 있을 때마다 매번 감리가 해당 항구의 각국 총영사·영사와 연락하고, 독판이 조선 주재 각국 공사·총영사와 연락하여 현재 상황을 알려주거나 협상해야 했다(진칭, 2020b: 1056). 이렇듯 해관의사의 검역 권한은 제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측면에서도 문제가 될 때가 있었다.
이상과 같이 강해관 현직 해관원인 메릴이 조선해관 총세무사를 겸직한 이후 조선에서 강해관의 해관 의학 검역을 수용하여 조선해관의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체계를 구축하였고, 변용 과정을 통해 의학 검사과정에서 발견된 감염병 환자를 격리병원으로 이송하는 사안과 같은 강해관에서 존재했던 일부 문제점들은 보완되었지만, 조계와 치외법권의 존재로 인한 해관의사의 제한적인 검역과 위생 권한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5. 결론

감염병이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고 있고 국제적 교류 역시 확대되어 여행객으로 인한 신종감염병의 국내 유입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에서 감염병의 유입을 입국단계에서 차단하는 검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검역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현시대에서 검역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검체 채취를 통한 PCR검사 등 의학 검사를 통해 증상이 있거나 역학적 연관성이 있는 사람을 분리하여 중증도에 따라 병원이나 치료센터로 이송하는 등 의학적 요소가 수반된 검역은 19세기에 시작되었다. 본 연구가 19세기 검역에 변화가 생긴 그 순간을 모티프로 삼아 ‘영국-상하이-조선’으로 이어지는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의 수용과 변용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에 천착한 것도 현재 한국과 중국의 검역 당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방식의 기원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 새롭게 제시한 내용인 1872년에 강해관에서 의학 검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 특정 선박이나 지역에서 유행한 감염병에 대처하기 위함이 아니라, 동시대 영국이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방식을 적용하자 이것을 영국인 주도 하의 강해관 검역 관계자들이 수용하면서 시행하게 된 것이고, 1880년대 중후반에 해관제도와 조계라는 항구 공간의 성격이 상하이와 유사한 조선에서는 조선해관 총세무사를 겸직한 강해관 현직 세무사 메릴이 해관 의학 검역을 수용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게 변용하여 적용했다는 연구 결과는, 동시대 영국의 의학 지식이 강해관을 매개로 조선으로 전파된 흐름상을 밝혀냈다는 데에 연구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본 연구가 새롭게 밝혀낸 ‘영국-상하이-조선’이라는 의학 검사에 기반한 검역의 수용과 변용 과정은 현대 사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검역이 내포하고 있는 의학적 성격을 새롭게 점검해보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특히 검역의 최일선에서 해관 의학 검역 업무를 수행한 해관의사가 의료인으로서 감염병의 해외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진행한 의료·위생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한 것은 근대 한국과 중국에서 의학의 실행에 참여하는 의료인의 새로운 의료 활동을 조명한 것이며, 검역의 제도적 운영과 의료인의 측면을 서로 결합시켜 역사상을 파악하려고 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또한, 사실관계를 확인함에 있어 검역 당국인 강해관에서 생산한 문서인 디스패치와 메디컬 리포트를 기반으로 하면서 해관검역, 해관의사 등 기존 연구에서는 한번도 활용된 적이 없는 의학사 관련 문서를 발굴함으로써 기존의 연구 사료의 한계를 확장하였다.
강해관은 영국의 검역 체계를 수용하면서 격리에 기반한 해관검역과 의학 검사에 기반한 항만위생국검역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검역 당국을 해관으로 일원화시켜 ‘해관 의학 검역’을 형성하였고, 이로써 그 책임과 지휘권이 한 기관에 집중됨으로써 높은 효율성과 정밀성으로 감염병의 해외로부터의 국내 유입을 완화하여 조계의 도시공간과 배후의 광범위한 중국 향촌공간의 방역 부담을 줄여 국민과 외국인 거류민의 건강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강해관의 의학 검역은 조계라는 특수 공간의 존재로 인해 선박이 조계의 권역인 박선계에 진입하면 검역은 여전히 원칙상 해관의 소관임에도 해관에서 검역 조치를 취할 수 없는 등 사각지대도 존재하였다.
즉, 강해관의 의학 검역은 격리에 기반한 검역이 아니라 당시 19세기 말 국제위생회의에서 권장한 영국의 방식인 의학 검사를 통해 감염환자와 이상이 없는 사람을 구분하여 감염환자는 병원으로 이송하여 격리치료하고 이상이 없는 사람은 통행을 허가하거나 관찰 격리하는 등 국제사회의 시대적 흐름에 맞는 검역방식을 처음으로 동양에서 적용했다는 데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한편, 조계의 존재로 인해 검역 당국인 해관이 서양 국가의 위생 당국과 같은 전폭적이고 영구적인 권한을 부여받지 못해 발생한 검역의 사각지대도 함께 존재했다는 것은 시대적 한계로 평가할 수 있겠다.
본 연구가 근대 검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부분은 분명히 있지만, 강해관의 검역을 다룬다는 본 연구의 일관성 유지를 이유로 강해관과 같은 시기에 검역을 시작한 하문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한계 역시 지니고 있다. 비록 하문관은 상하이, 광저우(廣州), 톈진과 같은 대도시가 아닌 중국 동남부의 샤먼에 있는 하나의 지방 해관에 불과하지만 해관 의학 검역이 조선에서 수용되고 변용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메릴의 강해관 이전의 근무처가 하문관이라는 점은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에 향후 연구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해관 의학 검역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연구를 위해 하문관의 해관검역에 관해 연구해보고자 한다. 또한, 조선에 관해서는 1894년 청일전쟁 이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 이전까지의 시기에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에서 대립하는 과정에서 그 이전 시기의 해관 의학 검역의 어떠한 측면이 계승되고 단절되었는지 살펴보고, 1905년에 통감부 설립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서양인으로 구성된 해관 운영진이 일본인으로 교체된 후 1907년에 해관이 세관으로 조직개편 되는 과정에서는 어떠한 굴절을 겪게 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향후 과제로 삼고자 한다.

Notes

1) E. C. Seaton, “A Brief Account of the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Sanitary Conference Held at Vienna in 1874,” Transaction of the Epidemiological Society of London 3 (1874), p. 566; John Simon, English Sanitary Institutions: Reviewed in Their Course of Development, and in Some of Their Political and Social Relations, 1890, pp. 473-474.

2) John Simon, English Sanitary Institutions: Reviewed in Their Course of Development, and in Some of Their Political and Social Relations, 1890, pp. 326-328.

3) P. G. Stock, “Progress and Problems in Port Health Administration,”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May 24, 1946, p. 26;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74” Medical Reports, No. 7, 1874, p. 39.

4) 伍連德, 「民國十九年前吾國海港檢疫狀況」, 伍連德·伍常耀 編, 『海港檢疫管理處報告書』 第二冊 (南京: 衛生署, 1932), pp. 9-16.

5) 海關總署 編, 『中國近代海關總稅務司通令全編』 (北京: 海天出版社, 2013).

6) 國家圖書館 編, 『海關醫報』 (北京: 國家圖書館出版社, 2016).

7) John Simon, English Sanitary Institutions: Reviewed in Their Course of Development, and in Some of Their Political and Social Relations, 1890, pp. 98-100.

8) Richard J. Reece, “Port Sanitary Administration: Its Development and its Relation to Public Health in England and Wales,” The British Medical Journal 2-3217 (1922), p. 335.

9) John Simon, English Sanitary Institutions: Reviewed in Their Course of Development, and in Some of Their Political and Social Relations, 1890, p. 328.

10) T. J. Dyke, “Who shall be the Medical Officer Of Health?” The British Medical Journal 1-644 (1873), p. 488; “Mr. Simon’s Report on Public Health,” The British Medical Journal 2-708 (1874), p. 123.

11) Hansard HC Deb. vol. 209, cols. 1949, 14 March 1872; Richard J. Reece, “Port Sanitary Administration: Its Development and its Relation to Public Health in England and Wales,” The British Medical Journal 2-3217 (1922), p. 336.

12) P. G. Stock, “Progress and Problems in Port Health Administration,”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May 24, 1946, p. 26.

13) “Local Government And Sanitary Department,” The British Medical Journal 2-660 (1873), p. 244; “The Late Dr. Harry Leach,” The British Medical Journal 2-987 (1879), p. 870.

14) E. C. Seaton, “A Brief Account of the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Sanitary Conference Held at Vienna in 1874,” Transaction of the Epidemiological Society of London 3 (1874), pp. 566-567; P. G. Stock, “Progress and Problems in Port Health Administration,”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May 24, 1946, p. 26.

15)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74,” Medical Reports, No. 7, 1874, p. 39; E. C. Seaton, “A Brief Account of the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Sanitary Conference Held at Vienna in 1874,” Transaction of the Epidemiological Society of London 3 (1874), p. 567.

16) “Minute of the Medical Officer to the Local Government Board,” The Indian Medical Gazette, November 1, 1878, pp. 316-318.

17) Colonial Secretary to H.B.M’s Consul, Hong Kong, 1872.11.22, enclosure in Despatch No. 346, I. G.’s Circulars, 1882-1885, p. 222.

18) Officiating as Consul to Commissioner of Customs, Shanghai, 1872.11.23, enclosure in Despatch No. 346, I. G.’s Circulars, 1882-1885, p. 221.

19) 소송태도는 쑤저우, 쑹장(松江), 타이창(太倉) 등 세 곳을 관리하는 관원이고, 쑹장의 상하이 현성에 상주하였으며, 강해관감독을 겸직하였기 때문에 명의상 강해관의 책임자이다.

20) Commissioner of Customs to H.B.M’s Officiating Consul, Shanghai, 1872.11.28, enclosure in Despatch No. 346, I. G.’s Circulars, 1882-1885, p. 222.

21) R. A. Jamieson to T. Dick, Shanghai, 1872.11.28, enclosure in Despatch No. 346, I. G.’s Circulars, 1882-1885, pp. 222-223.

22) Despatch No. 346, Customs House, Shanghai, 1872.12.16, I. G.’s Circulars, 1882-1885, p. 221.

23) 주로 다음의 선행연구가 있다(陳邦賢, 1937: 273, 楊上池, 1883: 3; 1990: 88; 1995: 78; 顧金祥, 1983: 6; 李志雲, 1983: 60; 呂祥寶·顧金祥, 1993: 257; 楊錫全, 1993: 19; 何宇平, 1993: 11; 朱加葉, 2000: 299; 余新忠, 2011: 191; 2016: 237; 上海出入境檢驗檢疫局, 2012: 9; 2013: 11; 杜麗紅, 2021: 2-3).

24) China Imperial Maritime Customs Service List, Second Issue, 1876, pp. 1-12.

25)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74,” Medical Reports, No. 7, 1874, pp. 39-41;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3,” Medical Reports, No. 26, 1883, p. 6;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84,” Medical Reports, No. 27, 1884, p. 38.

26) Decennial Reports on the Trade, Navigation, Industries, etc. of the Ports open to Foreign Commerce in China and Corea, and on the Condition and Development of the Treaty Port Provinces, 1882-1891, p. 331.

27)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73,” Medical Reports, No. 6, 1873, p. 58.

28) Despatch No. 276, Customs House, Shanghai, 1873.8.15, I. G.’s Circulars, 1882-1885, pp. 223-224.

29) Ibid.

30) Despatch No. 421, Customs House, Shanghai, 1873.12.18, I. G.’s Circulars, 1882-1885, pp. 226-227.

31) 이 임시검역장정은 소송태도아문에서 한문으로 번역한 버전(「各國商船從有瘟疫海口來滬由關派醫查驗料理以免傳染章程」, Despatch No. 276, I. G.’s Circulars, 1882-1885, p. 225)과 신보사에서 직접 한문으로 번역한 버전(「上海縣防備海洋船隻帶來疫疾新例」, 『申報』, 同治十二年七月十一日)이 있는데, 이 둘의 번역본은 서로 다르다. 본 연구가 동일한 사안에 대해 영문 원문 외에 기타 언어로 번역된 사료가 동시에 남아있을 경우 원문인 영문 사료를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것도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32) “Provisional Quarantine Regulations Proposed to be adopted at Shanghai Pending Reference to the High Authorities at Peking,” enclosure in Despatch No. 276, I. G.’s Circulars, 1882-1885, p. 224.

33) 「江海關監督各國領事公議洋船從有疫海口來滬查辦章程」, 七月廿一日; 「美總領事西函覆」, 甲七月廿六日, enclosure in Despatch No. 264, I. G.’s Circulars, 1882-1885, pp. 232-234.

34) 「沈道臺來函」, 五月初十日, enclosure in Despatch No. 264, I. G.’s Circulars, 1882-1885, p. 229.

35) 「美總領事西來函」, 甲五月初六日, enclosure in Despatch No. 264, I. G.’s Circulars, 1882-1885, pp. 230-231.

36) 「沈道臺來函」, 五月初十日, 「稅務司去函」, 五月二十日, enclosure in Despatch No. 264, I. G.’s Circulars, 1882-1885, pp. 229-230.

37) 「稅務司去函」, 五月二十日, enclosure in Despatch No. 264, I. G.’s Circulars, 1882-1885, pp. 229-230.

38) Despatch No. 264, Customs House, Shanghai, 1874.7.7, I. G.’s Circulars, 1882-1885, p. 228.

39) Despatch No. 299, Customs House, Shanghai, 1874.7.30, I. G.’s Circulars, 1882-1885, p. 235.

40)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上海檔案館 所藏, U1-16-2877) #0010-0011.

41) Despatch No. 11, Harbour Master’s Office, Shanghai, 1875.5.1, I. G.’s Circulars, 1882-1885, p. 228.

42) Despatch No. 142, Customs House, Shanghai, 1875.5.4, I. G.’s Circulars, 1882-1885, p. 239.

43) “Harbour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Harbour Master’s Office, Shanghai, 1875.5.1, enclosure in Despatch No. 142, I. G.’s Circulars, 1882-1885, pp. 240-241.

44) Despatch No. 321, Custom House, Shanghai, 1875.10.27, I. G.’s Circulars, 1882-1885, p. 244.

45) “Notification,” Custom House, Shanghai, 1875.10.26, enclosure in Despatch No. 321, I. G.’s Circulars, 1882-1885, pp. 244-245.

46) “Precautions,” Custom House, Shanghai, 1875.10.26, enclosure in Despatch No. 321, I. G.’s Circulars, 1882-1885, p. 245.

47) The North-China Herald and Supreme Court & Consular Gazette, July 26, 1895, p. 126.

48) Ibid.

49) “Provisional Quarantine Regulations Proposed to be adopted at Shanghai Pending Reference to the High Authorities at Peking,” enclosure in Despatch No. 276, I. G.’s Circulars, 1882-1885, p. 224.

50) 「上海口河泊所酌擬各國商船從有瘟疫海口來滬由關派醫查驗料理以免傳染章程聽候總理衙門及各國駐京大臣核示遵行」, enclosure in Despatch No. 276, I. G.’s Circulars, 1882-1885, p. 225.

51) “Provisional Quarantine Regulations Proposed to be adopted at Shanghai Pending Reference to the High Authorities at Peking,” enclosure in Despatch No. 276, I. G.’s Circulars, 1882-1885, p. 224.

52) R. A. Jamieson to G. B. Glover, Shanghai, 1873.12.17, enclosure in Despatch No. 421, I. G.’s Circulars, 1882-1885, pp. 222-223.

53) Despatch No. 421, Customs House, Shanghai, 1873.12.18., I. G.’s Circulars, 1882-1885, pp. 226-227.

54)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上海檔案館 所藏, U1-16-2877) #0010-0011;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Customs House, Shanghai, 1874.7, enclosure in Despatch No. 299, I. G.’s Circulars, 1882-1885, pp. 235-238.

55) 「美總領事西來函」, 五月初六日, 「美總領事西函覆」, 甲七月廿六日, enclosure in Despatch No. 264, I. G.’s Circulars, 1882-1885, pp. 230-233.

56)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80,” Medical Reports, No. 19, 1880, p. 19.

57)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3,” Medical Reports, No. 26, 1883, p. 17.

58) The North-China Herald and Supreme Court & Consular Gazette, July 27, 1883, p. 99; 「美總領事西來函」, 五月初六日, 「美總領事西函覆」, 甲七月廿六日, enclosure in Despatch No. 264, I. G.’s Circulars, 1882-1885, pp. 230-233.

59) Chinese Maritime Customs Service List, Second Issue, 1876, p. 64. 한편, 중국해관 공문서상 ‘Berthing Officer’와 ‘Berthing Office’의 공식 한문번역은 모두 ‘指泊所’이다. 하지만 한문상 ‘指泊所’는 부서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람이나 직함을 지칭하기에 적합한 번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고는 기관을 지칭할 경우에는 ‘지박소’라는 해관의 공식 한문번역을 따르되, 사람이나 직함을 지칭할 경우에는 ‘지박소원’으로 번역하였다.

60)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上海檔案館 所藏, U1-16-2877) #0011;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Customs House, Shanghai, 1874.7, enclosure in Despatch No. 299, I. G.’s Circulars, 1882-1885, p. 238.

61) Despatch No. 149, Custom House, Shanghai, 1875.5.7, I. G.’s Circulars, 1882-1885, p. 242.

62) 그레이브젠드는 영국의 템스강(River Thames) 어귀 남안에 위치한 도시로서 오랫동안 수도 방어의 최전선에 있었다. 템스강을 거슬러 런던에 도착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 도시는 템스강으로 들어가는 배들이 상류로 이동하기 위해 도선사를 태우는 곳이었다.

63) The North-China Herald and Supreme Court & Consular Gazette, July 29, 1879, p. 99;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上海檔案館 所藏, U1-16-2877) #0010-0011;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Customs House, Shanghai, 1874.7, enclosure in Despatch No. 299, I. G.’s Circulars, 1882-1885, p. 237.

64)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84,” Medical Reports, No. 27, 1884, p. 38.

65)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上海檔案館 所藏, U1-16-2877) #0010-0011;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Customs House, Shanghai, 1874.7, enclosure in Despatch No. 299, I. G.’s Circulars, 1882-1885, p. 237.

66)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3,” Medical Reports, No. 26, 1883, p. 17.

67) The North-China Herald and Supreme Court & Consular Gazette, July 27, 1883, p. 99; March 30, 1893, p. 453;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3,” Medical Reports, No. 26, 1883, p. 17;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91,” Medical Reports, No. 41, 1891, p. 43.

68)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74,” Medical Reports, No. 7, 1874, p. 34;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75,” Medical Reports, No. 10, 1875, p. 55;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76,” Medical Reports, No. 11, 1876, p. 49;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77,” Medical Reports, No. 14, 1877, p. 39.

69)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78,” Medical Reports, No. 15, 1878, p. 4.

70)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3,” Medical Reports, No. 26, 1883, pp. 6-8;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84,” Medical Reports, No. 27, 1884, p. 38.

71) R. A. Jamieson to S. A. Viguier, Shanghai, 1875.5.6, enclosure in Despatch No. 149, I. G.’s Circulars, 1882-1885, p. 243;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3,” Medical Reports, No. 26, 1883, p. 17.

72)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上海檔案館 所藏, U1-16-2877) #0010-0011;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Customs House, Shanghai, 1874.7, enclosure in Despatch No. 299, I. G.’s Circulars, 1882-1885, p. 237.

73) Despatch No. 12, Harbour Master’s Office, Shanghai, 1875.5.7, I. G.’s Circulars, 1882-1885, p. 242.

74)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84,” Medical Reports, No. 27, 1884, p. 38.

75) Ibid.

76) 청의 주권이 닿지 않는 조계의 권역 내에 있는 항구 공간에 대해서는 조계 당국과 협상해야 했는데, 당시 공공조계의 경우 1870년부터 1897년까지 헨더슨(A. Henderson)이 공부국 위생관을 맡았고, 1897년에 그랜트(T. Grant)가 이 직책을 몇 달간 맡다가 1898년에 공부국 위생처가 신설되어 스탠리(A. Stanley)가 초대 위생처장을 맡았다(馬長林 외, 2011: 81-82).

77)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76,” Medical Reports, No. 11, 1876, p. 50.

78) 「美總領事西來函附件」, 五月初六日, enclosure in Despatch No. 264, I. G.’s Circulars, 1882-1885, pp. 231-232.

79) R. A. Jamieson to S. A. Viguier, Shanghai, 1875.5.6; Despatch No. 12, Harbour Master’s Office, Shanghai, 1875.5.7, enclosure in Despatch No. 149, I. G.’s Circulars, 1882-1885, pp. 242-243.

80)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0,” Medical Reports, No. 20, 1880, p. 33;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82,” Medical Reports, No. 23, 1882, p. 43;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6,” Medical Reports, No. 26, 1886, p. 4;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7,” Medical Reports, No. 34, 1887, p. 22;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94,” Medical Reports, Nos. 47-48, 1894, pp. 82-83.

81) “Precautions,” Custom House, Shanghai, 1875.10.26, enclosure in Despatch No. 321, I. G.’s Circulars, 1882-1885, p. 245.

82)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76,” Medical Reports, No. 11, 1876, p. 49.

83) Z/230, Peking, 5th September, 1885, Archives of China’s Imperial Maritime Customs Confidential Correspondence, vol. Ⅱ, pp. 224-225; Appointment of Sir Robert Hart as H.B.M. Minister at Peking: Interchange of Telegrams, Documents illustrative of the Origin, Development, and Activities of the Chinese Customs Service, vol. 7, p. 116.

84) 메릴 시기 조선해관 운영진의 명단과 이력에 관해 정리한 표는 다음의 선행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진칭, 2020a: 232-240). 각 개인의 인적사항에 관해서는 다음의 단행본을 참고할 수 있다(관세청 운영지원과, 2017: 117, 141, 187, 189, 191, 195, 240, 246, 251).

85) Temporary Regulations for the Prevention of the Introduction of Infectious Diseases at the Corean Treaty Ports (해당 인쇄물은 奎 23486 문서철 중간에 수록되어 있음);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上海檔案館 所藏, U1-16-2877) #0010-0011;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Customs House, Shanghai, 1874.7, enclosure in Despatch No. 299, I. G.’s Circulars, 1882-1885, pp. 235-238. 두 장정의 각 조항의 내용에 관해서는 다음의 선행연구도 참고할 수 있다(박한민, 2020b: 12-13; 上海出入境檢驗檢疫局, 2012: 13-14).

86) “Draft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enclosure in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88,” Medical Reports, No. 35, 1888, pp. 12-14.

87)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88,” Medical Reports, No. 35, 1888, pp. 11-12. 일본에서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영국공사 파크스의 이러한 입장은 영국정부가 격리를 강조하는 유럽의 대륙국가들과 달리 의학 검사 개념에 기반한 검역과 경제활동 간의 밸런스를 강조했기 때문이다(脇村孝平, 2021: 51).

88) Temporary Regulations for the Prevention of the Introduction of Infectious Diseases at the Corean Treaty Ports (奎 23486); “Draft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enclosure in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88,” Medical Reports, No. 35, 1888, pp. 12-14.

89) 제7조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에 관해서는 다음의 선행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신동원, 1997: 121-123; 박한민, 2020b: 92, 16-20; 진칭, 2020b: 1047-1048).

90) Temporary Regulations for the Prevention of the Introduction of Infectious Diseases at the Corean Treaty Ports (奎 23486)

91) Ibid.

92) Quarantine Station at Woosung (1899-1931) (上海檔案館 所藏, U1-3-2675) #0001-0003

93) The North-China Herald and Supreme Court & Consular Gazette, March 30, 1893, p. 453.

94)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83,” Medical Reports, No. 25, 1883, pp. 21-22;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3,” Medical Reports, No. 26, 1883, p. 5;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1st March, 1884,” Medical Reports, No. 27, 1884, p. 38; “Shanghai General Hospital Report,” The North-China Herald and Supreme Court & Consular Gazette, March 1st, 1882, p. 236.

95)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3,” Medical Reports, No. 26, 1883, p. 8.

96)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3,” Medical Reports, No. 26, 1883, pp. 6-7.

97) Ibid., pp. 7-8

98) The North-China Herald and Supreme Court & Consular Gazette, February 21, 1883, p. 199.

99)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3,” Medical Reports, No. 26, 1883, p. 8.

100) Quarantine Station at Woosung (1899-1931) (上海檔案館 所藏, U1-3-2675) #0001-0003; “Dr. Alexander Jamieson’s Report on the Health of Shanghai for the half year ended 30th September, 1885,” Medical Reports, No. 28, 1885, p. 13.

101) Despatch No. 170, Custom House, Shanghai, 1875.5.19, I. G.’s Circulars, 1882-1885, p. 244.

102) R. A. Jamieson to G. B. Glover, Shanghai, 1873.12.17, enclosure in Despatch No. 421, I. G.’s Circulars, 1882-1885, pp. 222-223.

103) Despatch No. 421, Customs House, Shanghai, 1873.12.18, I. G.’s Circulars, 1882-1885, pp. 226-227.

104) Despatch No. 264, Customs House, Shanghai, 1874.7.7, I. G.’s Circulars, 1882-1885, p. 228.

105) Despatch Nos. 12 and 149, Harbour Master’s Office, Shanghai, 1875.5.7, R. A. Jamieson to S. A. Viguier, Shanghai, 1875.5.6, I. G.’s Circulars, 1882-1885, pp. 242-243.

106) 일본과의 마찰 역시 빈번했는데 일찍이 검역을 둘러싸고 조·일 간에는 1879년에 일본영사관 측에서 절영도에 격리병원을 설치하려고 하면서 마찰이 있었고(신동원, 1997: 116-117), 1886년 이후부터는 부산과 원산의 해관청사와 항구가 일본조계 내에 있었기 때문에 해관의 일본조계 내에서의 검역권 행사를 둘러싸고 양국은 또다시 마찰이 있었다. 일본과의 마찰에 관해서는 다음의 선행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박한민, 2020a; 2020b; 진칭, 2020b).

그림 1.
「상하이 항구 위생 장정」의 서두
Figure 1. The Beginning of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kjmh-31-1-129f1.jpg
그림 2.
「상하이 항구 위생 장정」의 말미
Figure 2. The End of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kjmh-31-1-129f2.jpg
그림 3.
황푸강 지도 (1859)
Figure 3. A Map of Huangpu River in 1859
kjmh-31-1-129f3.jpg
그림 4.
상하이 항구 지도 (1889)
Figure 4. A Map of the Port of Shanghai in 1889
kjmh-31-1-129f4.jpg

References

1. 國家圖書館 編, 『海關醫報』 (北京: 國家圖書館出版社, 2016).

2. 伍連德, 「民國十九年前吾國海港檢疫狀況」, 伍連德·伍常耀 編, 『海港檢疫管理處報告書』 第二冊 (南京: 衛生署, 1932).

3. 海關總署 編, 『中國近代海關總稅務司通令全編』 (北京: 海天出版社, 2013).

4. 『申報』 (1872-1894).

5. Hansard, Parliamentary Debates (1872-1894).

6. John Simon, English Sanitary Institutions: Reviewed in Their Course of Development, and in Some of Their Political and Social Relations (London, Paris, New York and Melbourne: Cassell & Company, 1890).

7.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1946).

8. Quarantine Station at Woosung (1899-1931) (上海檔案館 所藏, U1-3-2675).

9. Sanitary Regulations for the Port of Shanghai (上海檔案館 所藏, U1-16-2877).

10. Second Historical Archives of China Institute of Modern History and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s eds., Archives of China’s Imperial Maritime Customs Confidential Correspondence Between Robert Hart and James Duncan Campbell 1874-1907, vol. 1-4 (Beijing: Foreign Languages Press, 1990-1993).

11.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ed., Chinese Maritime Customs Service List (Shanghai: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1875-1894).

12.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ed., Decennial Reports on the Trade, Navigation, Industries, etc. of the Ports open to Foreign Commerce in China and Corea, and on the Condition and Development of the Treaty Port Provinces, 1882-1891 (Shanghai: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1892).

13.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ed., Inspector General’s Circulars, 1882-1885 (Shanghai: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1887).

14.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ed., Medical Reports (Shanghai: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1871-1910).

15.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ed., Returns of Trade at the Treaty Ports and Trade Reports (Shanghai: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1887-1894).

16.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ed., Documents Illustrative of the Origin, Development, and Activities of the Chinese Customs Service (Shanghai: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 G. of Customs, 1937-1940).

17. Temporary Regulations for the Prevention of the Introduction of Infectious Diseases at the Corean Treaty Ports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奎 23486).

18. The British Medical Journal (1872-1894, 1922).

19. The Indian Medical Gazette (1878).

20. The North-China Herald and Supreme Court & Consular Gazette (1872-1894).

21. Transaction of the Epidemiological Society of London (1874).

22. 관세청 운영지원과, 『개항과 함께한 구한말 해관 직원들(1883∼1905)』 (대전: 관세청, 2017).

23. 박윤재, 「한말 일제 초 방역법규의 반포와 방역체계의 형성」,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 편, 『한국 근대의학의 탄생과 국가』 (서울: 역사공간, 2016).

24. 박한민, 「1886년 조선 내 콜레라 유행과 개항장 검역」, 『의사학』 29-1 (2020a).

25.    , 「갑오개혁 이전 조선정부의 검역규칙 제정과 개정문제의 대두: 「朝鮮通商口防備瘟疫暫設章程」을 중심으로」, 『사림』 72 (2020b).

26. 신동원, 「조선말의 콜레라 유행, 1821-1910」, 『한국과학사학회지』 11-1 (1989).

27.    , 『한국근대보건의료사』 (서울: 한울, 1997).

28. 진칭, 『1880년대의 조선해관과 메릴(H. F. Merrill)의 개혁』,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a.

29.   , 「조선해관의 검역체계 구축과정과 감염병 해외유입에 대한 대응(1886∼1893)」, 『의사학』 29-3 (2020b).

30. 顧金祥, 「我國海港檢疫史略」, 『中國國境衛生檢疫雜誌』 1-1 (1983).

31. 杜麗紅, 「晚清上海的「海關檢疫」」, 『近代史研究所集刊』 113 (2021).

32. 馬長林·黎霞·石磊, 『上海公共租界城市管理研究』 (上海: 中西書局, 2011).

33. 上海出入境檢驗檢疫局, 『上海衛生檢疫發展史』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2).

34.          , 『中國衛生檢疫發展史』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3).

35. 楊錫全, 「上海海港衛生檢疫回顧」, 何宇平, 「中國國境衛生檢疫法規演變史」, 顧金祥 主编, 『紀念上海衛生檢疫一百二十週年論文選編』 (上海: 百家出版社, 1993).

36. 楊上池, 「120年來中國衛生檢疫」, 『中華醫史雜誌』 25-2 (1995).

37.    , 「試論我國早期檢疫章程的特點」, 『中國國境衛生檢疫雜誌』 13-2 (1990).

38.    , 「我國早期的海港檢疫」, 『中國國境衛生檢疫雜誌』 1-1 (1983).

39. 呂祥寶·顧金祥, 「中國國境衛生檢疫120年」, 『中國國境衛生檢疫雜誌』 16-5 (1993).

40. 余新忠, 「主權, 防疫, 權利: 晩淸檢疫制度的引建及其權力關系硏究」, 『영남학』 19 (2011).

41.    , 『清代衛生防疫機制及其近代演變』 (北京: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16).

42. 劉岸冰·何蘭萍, 「近代上海海港檢疫的歷史考察」, 『南京中醫藥大學學報(社會科學版)』 15-1 (2014).

43. 李志雲, 「解放前我國衛生檢疫工作概況」, 『中國國境衛生檢疫雜誌』 1-1 (1983).

44. 朱加葉, 「海港船舶衛生檢疫的歷史與發展現狀」, 『中國國境衛生檢疫雜誌』 23-5 (2000).

45. 陳邦賢, 『中國醫史學』 (上海: 商務印書館, 1937).

46. 陳詩啓, 『中國近代海關史』 (北京: 人民出版社, 2002).

47. 飯島涉, 『ペストと近代中国: 衛生の「制度化」と社会変容』 (東京: 研文出版, 2000).

48. 福士由紀, 『近代上海と公眾衛生: 防疫の都市社会史』 (東京: 御茶の水書房, 2010).

49. 脇村孝平, 「疫病の地政学: 19 世紀のコレラパンデミックと検疫問題」, 『アジア研究』 67-4 (2021).

50. Alex Chase-Levenson, The Yellow Flag: Quarantine and the British Mediterranean World, 1780-186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51. Anne Hardy, “Cholera, Quarantine and the English Preventive System, 1850-1895,” Medical History 37 (1993).

52. G. C. Cook, “Harry Leach MRCP (1836-1879): Control of Scurvy in the British Mercantile Marine, and First Port Medical Officer for the City of London,” Journal of Medical Biography 8-3 (2000).

53. Gian F. Gensinia, Magdi H. Yacoub and Andrea A. Conti, “The Concept of Quarantine in History: from Plague to SARS,” Journal of Infection 49 (2004).

54. J. C. McDonald, “The History of Quarantine in Britain During the 19th Century,” Bulletin of the History of Medicine 25 (1951).

55. John Booker, Maritime Quarantine: The British Experience, c. 1650-1900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16).

56. Krista Maglen, “‘The First Line of Defence’: British Quarantine and the Port Sanitary Authorities in the Nineteenth Century,” Social History of Medicine 15 (2002).

57. ____________, “Intercepting Infection: Quarantine, the Port Sanitary Authority and Immigration in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y Britain,” PhD diss., University of Glasgow (2001).

58. ____________, The English System: Quarantine, Immigration and the Making of a Port Sanitary Zone (Manchester and New York: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4).

59. Norman Howard-Jones, The Scientific Background of the International Sanitary Conferences, 1851-1938 (Geneva: World Health Organization, 1975).

60. Peter Baldwin, Contagion and the State in Europe, 1830-193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61. Shang-Jen Li: “Eating Well in China: Diet and Hygiene in Nineteenth-Century Treaty Ports,” Angela Ki Che Leung and Charlotte Furth ed., Health and Hygiene in Chinese East Asia, Policies and Publics in the Long Tweentieth Century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0).

TOOLS
PDF Links  PDF Links
PubReader  PubReader
ePub Link  ePub Link
Full text via DOI  Full text via DOI
Download Citation  Download Citation
  Print
Share:      
METRICS
0
Crossref
0
Scopus
5,158
View
86
Download
Related article
Editorial Office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partment of Humanities and Social Medicine, College of Medicine, 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222 Banpo-daero, Seocho-gu, Seoul, Korea (06591)
TEL: +82-2-3147-8306   FAX: +82-2-3147-8480   E-mail: medhistory@hanmail.net
About |  Browse Articles |  Current Issue |  For Authors and Reviewers |  KSHM HOME
Copyright ©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veloped in M2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