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Following the signing of a treaty with Japan in 1876, Joseon entered a new international context shaped by the opening of its ports. Through the diplomatic missions dispatched to Japan, Joseon was exposed—albeit indirectly—to Western culture that had already been filtered through Japanese interpretations. This influx of Western knowledge, especially in the sciences, precipitated significant transformations within Joseon society. Among the most notable was the formal introduction of the cowpox vaccination method (udu, 牛痘). Although the technique had been briefly introduced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by scholars such as Jeong Yak-yong, it was through the persistent efforts of Ji Seok-yeong that cowpox vaccination gradually gained traction in Joseon. Ji initially acquired the method at the Jesaeng Hospital in Busan and subsequently deepened his understanding during a stay in Japan. Upon his return, he actively engaged in cowpox inoculation and began consolidating his knowledge into a systematic form, culminating in the compilation of Udusinseol (牛痘新說, New Treatise on Cowpox), as indicated in his autobiographical work Yuyudang Gobaek. Admittedly, Udusinseol was primarily a compendium of selected arguments extracted from various sources, including Jungseomungyeonrok (中西聞見錄), Buyoungsinseol (婦嬰新說), Mangukgongbo (萬國公報), Jongdugwigam (種痘龜鑑), and Yindoulüe (引痘略). Nevertheless, the criteria Ji employed in selecting and arranging these discussions reflect his own perspective on cowpox vaccination. Notably, he rejected superstitious interpretations of smallpox and intentionally omitted central claims found in Yindoulüe, despite its considerable influence in the dissemination of variolation practices across East Asia. Specifically, he excluded the theory that smallpox originated from prenatal toxins (taedok, 胎毒) and the assertion that the Triple Burner meridian (samchokyeong, 三焦經) was a crucial site for inoculation. Instead, he limited his citations from Yindoulüe to prescriptions for treating post-vaccination symptoms. At the same time, Ji appears to have recognized the necessity of transforming public perceptions in order to promote the cowpox method in a society where variolation remained deeply entrenched. This challenge had also been identified by earlier figures such as Dudgeon, Hobson, and Qiu Xi, all of whom had worked to disseminate knowledge of cowpox. From the writings cited by Ji Seok-yeong, three principal advantages of the cowpox method are emphasized: Cowpox vaccination is significantly safer than variolation. It provides complete and lasting immunity. The associated cost is remarkably low.
1. 머리말제국주의 확장을 꾀하던 서양을 통해 19세기 초반 중국과 일본에 우두법이 일찍부터 소개되었다.1) 조선에서도 정약용(丁若鏞)과 같은 인물에 의해 일부 알려졌지만, 국내외적인 문제로 중국·일본과 다르게 보급이 지체되고 있었다.2) 이러한 상황에서 1876년 개항 이후 지석영(池錫永, 1855-1935)에 의한 우두법 도입과 보급, 그리고 우두법을 소개한 『우두신설』의 편찬은 한국 의학사에서 서양 근대의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로 이해되었다.3)
초창기의 한국 의학사 연구자였던 미키 사카에(三木榮)가 1935년 지석영의 타개 직후, 조선에서의 종두 역사와 지석영에 대한 글을 『동경의사신지(東京醫事新誌)』에 연재하고,4) 이를 묶어서 『조선종두사(朝鮮種痘史)』로 펴낸 것이 연구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5) 이후 김두종이 조선에서의 종두(種痘) 역사를 정리하면서 지석영과 우두법 도입이 다시 언급되었고(김두종, 1956: 103-130),6) 그리고 대한의사학회에서 간행한 『송촌 지석영』에서 그의 생애와 우두법 도입의 의학사적 의의 등이 재차 정리되었다.7) 특히 가장 최근의 연구라고 할 하세가와 사오리의 글은 일본 측 자료를 광범위하게 이용하여, 스승 박영선(朴永善)과 지석영이 사신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활동한 내용을 세밀히 서술함으로써 여태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았던 우두법 학습 과정을 소상히 밝혀냈다(하세가와 사오리, 2021; 하세가와 사오리·최규진, 2022).
이처럼 지석영에 의한 우두법의 도입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가 진척되었지만, 정작 지석영이 편찬한 『우두신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두신설』을 편찬하게 된 배경이나, 그 안에 담긴 지석영의 조선 사회와 서양 학문에 대한 인식 등이 개략적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두신설』이 담고 있는 내용과 특징, 최종적으로 지석영이 『우두신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등은 연구된 바가 없다. 그 이유는 먼저 지석영이 우두 도입과 보급에 힘썼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밝혀줄 자료가 매우 부족하고, 특히 이글에서 주목하는 『우두신설』이 사실상 우두와 관련된 여러 글을 편집한 것에 가깝다는 사정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조선에 우두법이 본격적으로 소개·보급되는 과정에서, 『우두신설』의 뒤를 이어 이재하(李在夏)의 『제영신편(濟嬰新編)』(1889), 고조 바이케이(古城梅溪)의 『종두신서(種痘新書)』(1898), 이현유(李鉉有) 등의 『제영신론(濟嬰新論)』(1902) 같은 우두서(牛痘書)가 계속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우두 지식이 넓어지고 시술의 방법도 정밀해지는 상황이 반영되어 있으며, 동시에 우두 보급에서 직면한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하려는 의도도 내재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우두서 편찬을 역사적인 안목에서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시발점이라고 할 『우두신설』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우두신설』을 중심으로 인용 문헌에서 나타난 특색, 그리고 그 안에서 보이는 우두 학설의 채용양상, 마지막으로 우두를 보급하기 위해서 지석영이 특히 주장한 우두의 우수성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서양의 우두법을 도입하기 위한 한 지식인의 사유 구조와 실행을 위한 노력이 드러날 것이며, 동시에 지석영이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과제가 밝혀짐으로써 이후 우두서 편찬의 중요한 계기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한다.
2. 『우두신설』 편찬 시기와 인용의 특색1876년 수신사(修信使)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스승 박영선을 통해 처음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접한 지석영은 이후 우두법의 학습과 우두 접종에 힘썼다. 그리고 그 간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우두신설』을 1885년에 간행했는데, 미키 사카에의 말에 따르면 400부를 간행해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미키 사카에, 2022: 488).
『우두신설』의 간행 시기가 1885년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실제 편찬은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현재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된 「유유당고백(幼幼堂告白)」이라는 글에서 파악할 수 있다. 「유유당고백」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수고본(手稿本) 『우두신설』(이하 수고본)에도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글에서는 수고본을 중심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먼저 수고본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간행된 『우두신설』과 비교했을 때 세부 내용이 거의 동일(同一)하며, 다만 중간중간 붉은색으로 일부 수정을 가한 흔적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특히 『우두신설』에 들어있는 3편의 서문이 없고, 대신 책의 후반부에 「유유당고백」이 첨부되어 있다. 「유유당고백」이 1880년 12월에 작성되었다는 것을 보면, 이 수고본을 토대로 『우두신설』 간행본을 만들면서 「유유당고백」을 삭제하고 세 편의 「서문」을 새로 합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수고본은 『우두신설』을 간행하기 이전에 지석영이 편찬을 완료한 상태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유유당고백」의 중간에 지석영이 우두 관련 글을 이미 1880년 12월 이전에 저술한 정황이 있다.
나의 말이 망령되지 않으니, 여기에 분명한 증거가 있다. 여러 사람이 말한 바와 접종, 금기 등의 조항을 왼쪽(즉 아래)과 같이 열거하고, 삼가 이에 포고한다. 바라건대, 경외(京外)의 선(善)을 좋아하는 군자들은 이 뜻을 헤아려서 허탄(虛誕)한 말이라 여겨 불신(不信)하지 말고, 선한 일을 도와서 성취하는 것이 나의 커다란 소망이다.8)
그러나 「유유당고백」의 후반부에서 짧게나마 금기는 알려주지만,9) 여러 사람이 말한 바와 접종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현재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이유를 밝혀줄 자료가 없어서 섣불리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유유당고백」을 쓸 시점에 이미 우두법에 대한 글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의 표현대로라면 여러 학설과 접종, 금기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정리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석영이 열거한 내용의 항목이 『우두신설』의 전반적인 내용과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유당고백」을 쓴 1880년 12월은 지석영이 같은 해 5월 김홍집의 제2차 수신사 일행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내무성 위생국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를 방문하고 우두법을 재차 익히고 귀국한 직후였다. 당시 지석영은 유유당을 설립하고 개인적으로 우두 접종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82년 전라도 어사 박영교(朴泳敎)가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자 지석영은 우두국에서 접종법과 두묘(痘苗) 제조법을 가르쳤고, 다음 해에는 충청우도 어사 이용호(李容鎬)가 공주에 설치한 우두국에서도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들을 고려하면 『우두신설』의 편찬은 1880년 일본에서 귀국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유유당고백」을 쓴 시기에 이미 『우두신설』에서 인용한 글 대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유유당고백」에는 스승 박영선에게서 건네받은 『종두귀감』에 대한 서술과 함께,10) 더전(德貞; John Dudgeon)의 『우두고(牛痘考)』,11) 『유문의학(儒門醫學)』,12) 조난정(趙蘭亭)의 『우두삼요(牛痘三要)』,13) 홉슨(合信; Benjamin Hobson)의 『종두론(種痘論)』 등이 언급되고 있었다.14)
이상의 사실로 보아 1880년 후반에 이미 『우두신설』 편찬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1885년에 가서야 『우두신설』을 간행하게 되었는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물론 그때까지 편찬이 완료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우두신설』의 내용이 대부분 다른 글들을 모아서 편집한 형태라는 점을 고려할 때 간행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아무래도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특히 「유유당고백」에서는 일본에 우두가 전래 보급되는 과정과 자신이 일본에서 학습한 과정 일부를 소개하고 있는데,15) 어떠한 이유에선지 이러한 내용을 담은 「유유당고백」은 간행하는 과정에서 아예 삭제되었다. 아마도 1880년 이후 정치적 변란이 이어지고, 그에 따라 지석영 자신의 입지가 계속 변화하는 과정이 간행 지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지석영의 우두국이 폐쇄되기도 했으며, 1884년에는 급진 개화파가 일본의 힘을 빌려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간 상태였다.16) 이러한 정국의 혼란 속에서 지석영이 『우두신설』을 바로 간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7)
조선 사회의 혼란 속에서 어렵게 간행된 『우두신설』 상권과 하권의 내용은 글의 성격으로 크게 구분이 된다. 즉 상권에서는 중국에서 발간된 잡지와 의서 및 우두서의 글을 소개함으로써 우두의 장점을 본격적으로 알리고 있다. 앞서 「유유당고백」에서 소개되었던 더전의 「우두고」와 홉슨의 「종두론」, 그리고 『만국공보』의 글이 해당한다. 그리고 하권에서는 우두와 관련된 기술, 즉 접종법에서 시작해 두묘의 제작, 그리고 방약(方藥)까지 다양한 기술을 소개한다. 이때 상권의 글은 제목과 저자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데, 글이 실렸던 잡지를 확인해서 정리하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상권과는 다르게 하권의 경우 전거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데, 자신이 직접 우두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것을 토대로 작성된 듯하다. 그에 대한 근거로 일본위생국에서 작성한 연감을 보면, 지석영이 1880년 일본의 우두종계소를 방문했을 때 학습한 내용을 정리해서 전달받은 문건의 주요 항목만이 남아 있다. 그것을 『우두신설』 하권과 비교하면 제목이 매우 유사한데, 아마도 당시 받았던 문서를 토대로 『우두신설』의 해당 부분을 작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하세가와 사오리, 2021: 118).
그리고 하권의 마지막 부분에는 방약(方藥)이라고 하여, 마진의 경험방[麻疹驗方]을 덧붙였다. 경험방의 근거를 지석영이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구희(邱熹)가 지은 『인두략(引痘略)』에서 전부 가져온 것이다. 『인두략』은 『인두신서(引痘新書)』라고도 불리는데, 서양에서 전파된 우두법을 중국인의 시각에서 재해석해서 처음으로 간행한 우두서였다. 그리고 그 서문을 지석영은 『우두신설』의 상권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가장 끝에는 친형인 지운영(池雲英, 1852-1935)이 쓴 「우두행」이라는 시(詩)가 있다. 여기서 지운영은 우두 접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행(行)이라는 시 형식이 『인두략』의 영향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본래 조선에서 간행된 서적의 형태를 보면, 통상적으로 맨 앞에 서문이 있고, 맨 뒤에는 발문(跋文)이 있는 것이 널리 알려진 형태다. 그런데 『우두신설』에는 서문이 있으나 발문은 없고, 「우두행」이 발문의 역할을 대신하는 형식이다. 중국에서 『인두략』 (또는 『인두신서』)은 여러 차례 간행되면서 다양한 글이 덧붙여졌는데, 그 가운데 보이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발문처럼 장문의 시를 덧붙이는 방식이었다.18)
이상 지석영이 『우두신설』을 편찬하면서 인용한 서적은 『중서문견록』 『부영신설』 『만국공보』 『인두신서』 『증보우두삼요』 등으로, 이들은 모두 상권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배열 순서를 살피면 인용 서적의 최신 여부와 함께 저자가 서양인 여부가 매우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서양인이 쓴 글들이 모두 앞에 놓이고, 중국인이 저술한 책은 뒤에 배치되었다. 이런 배경에는 지석영이 중국인에 의해서 저술된 우두서에 신뢰가 적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데, 이는 뒤에서 다시 상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한편 「유유당고백」에 『유문의학(儒門醫學)』이 소개되었지만, 『우두신설』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처럼 지석영이 다수의 글을 인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키사카에가 말한 대로 지석영의 집에 『박물신편(博物新編)』 『전체신론(全體新論)』 『내과신설(內科新說)』 등을 포함한 14종의 중국본 한역(漢譯) 과학서와 함께 일본에서 발행된 의학서 6, 7권을 더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三木榮, 1963: 267-268). 즉 지석영은 당시 조선에서 유통되거나, 혹은 구할 수 있는 우두와 관련한 거의 모든 서적을 섭렵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석영이 인용한 글들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더전이 작성한 「우두고(牛痘考)」와 「우두속고(牛痘續稿)」는 『우두신설』의 본문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어서, 지석영이 중요하게 여긴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중국명 덕정(德貞)인 존 헵번 더전(John Hephun Dudgeon, 1837~1901)은 영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인물로, 중국에 선교사로 와서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그레이 해부학(Gray’s Anatomy)과 홀든 골학(Holden’s Osteology)을 모두 18권의 중국어판으로 번역하여 출간한 『전체통고(全體通考, Human Anatomy)』로도 유명했다.
그는 1873년 8월에 발간된 『중서문견록(中西聞見錄)』(Peking Magazine)19) 13호에 「우두고」를 발표했으며, 9월에는 다시 『중서문견록』 14호에 「우두고속고(牛痘考續稿, 이하 우두속고)」를 게재했다.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이 『중서문견록』을 포함한 수백 권의 책을 청에서 수집해서 소장할 정도였다고 하니(신용하, 1985), 그와 친분이 있었던 지석영이 이를 보고 참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두고」와 「우두속고」는 내용상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두의 역사로, 중국에서의 인두법(人痘法) 개발과 제너의 우두 발견, 그리고 마카오를 통해 중국 전래까지 상세하게 소개한다. 두 번째로 우두를 접종한 이후의 경과 및 일반적인 증상과 예외적인 증상, 그리고 위두(僞痘)와 진두(眞痘)의 구분을 설명한다. 세 번째로는 접종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접종 이후의 예후를 설명한다. 네 번째로는 중국에 퍼져 있는 우두 접종법의 문제, 즉 『인두략』의 잘못된 점과 중국인들이 미신을 따르는 습속을 비판한다. 다섯 번째로는 두묘의 저장법을 포함해, 우두와 관계된 작은 문제들을 나열하면서 조목조목 설명했다.
글을 통해서 드러나는 전체적인 내용은 우두법이 인두법에 비해 전염 가능성이 없으므로 매우 안전하며,20) 또 분명하게 효과가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두법에서는 가려야 했던 접종 시기나 여타 금기가 전혀 없으며,21) 흥미롭게도 우두 접종을 통해 피부에 난 점을 뺄 수 있다는 장점도 들고 있다.22) 그리고 접종의 법제화를 통해 사회 전반에서 우두의 유행을 막을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23) 그러나 지석영이 더전의 글을 인용하면서, 다른 글과는 다르게 「우두속고」의 내용에서 재접종을 강조한 부분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홉슨의 「종두론」은 앞서 더전이 쓴 「우두고」와 내용상 거의 유사하지만, 「종두론」이 「우두고」보다 먼저 간행되었기 때문에 내용은 「우두고」만큼 상세하지 않다. 그렇더라도 우두의 발견과 중국 전래의 역사, 접종하는 방법, 접종의 효과, 서양에서의 우두 통계, 그리고 우두 접종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나열하는 방식은 유사했다. 이는 중국에 우두를 처음 소개한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咭唎國新出種痘奇書)』 이후 전형적인 서술 형태였다.
세 번째 「논우두내력(論牛痘來歷)」은 광서(光緖) 원년인 1875년 3월 18-24일의 『만국공보(萬國公報)』에 실린 글이다.24) 『만국공보』는 기독교의 선전과 보급을 중심으로, 중국과 세계의 중요한 사회기사(社會記事), 과학논문(科學論文) 등을 게재하여 중국의 변법운동(變法運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잡지로 평가받는다. 『우두신설』에 게재된 「논우두내력」은 『한성순보(漢城旬報)』 1884년 4월 25일 자에도 실려 있는데, 당시에 우두와 관련하여 가장 압축된 정보를 싣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부분은 『만국공보』의 해당 호에는 「논우두내력」 외에도 「조난정선생신편증보우두삼요(趙蘭亭先生新編增補牛痘三要)」25)의 서문 여러 편이 함께 실렸는데, 문겸(文廉), 고문빈(顧文彬), 증망언(曾望顏), 온여괄(溫汝适) 등의 서문이라고 한 점이다. 당시 『만국공보』의 출판의 문제인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때 소개된 문겸과 고문빈의 글은 『증보우두삼요』의 서문이지만, 증망언과 온여괄의 서문은 『우두삼요』의 서문이 아니라 『인두신서』의 서문이었다. 이 때 구희가 쓴 서문은 『만국공보』에서 빠졌는데, 지석영은 구희의 서문을 가져다 『우두신설』에 보충해서 넣었다. 『우두신설』의 방약 부분과 함께, 지석영이 『인두신서』(『인두략』)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 지석영이 인용한 글에서 드러나는 우두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첫째, 우두는 인두(人痘)와 달리 매우 안전한 방법이며, 둘째로 우두 접종을 통해서 얻는 면역26)은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중국에 우두법이 전래되고, 우두 접종 이후 두창 예방에 효과를 거두었다는 경험에 근거했다. 여기에 덧붙여 지석영은 친형의 말을 빌려, 우두에는 비용이 지극히 저렴하다는 장점도 있음을 강조했다.27)
『우두신설』 하권에 실린 우두 기술을 제외한 상권의 내용은 너무 평면적인 이해로 보인다. 실제로 『우두신설』이 다른 글들을 모아서 편찬한 책이기 때문에 나타난 한계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 『우두신설』을 통해 지석영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 이어서는 『우두신설』 가운데 유일하게 별도로 작성된 글인 「우두행」과 더전의 「우두속고」에서 삭제된 부분을 중심으로, 『우두신설』 편찬을 통해 지석영이 의도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도록 한다.
3. 미신 배격과 한의학적 우두 이해 비판두창에 대한 미신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이미 조선 전기 남효온(南孝溫)의 귀신설(鬼神說) 비판도 있었지만, 미신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두창을 치료하기도 어려우며, 미리 예방할 방법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두신(痘神)이 두창을 일으킨다는 인식은 조선 후기에도 여전해서, 지식인들도 자주 두신에게 제사하는 글을 짓곤 했다(김성수, 2010: 29-35). 그리고 인두법과 우두법으로 두창 예방이 가능해진 이후에도, 민간의 미신적 숭배는 그대로 지속되었다(김옥주, 1993).
우두법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려면 무엇보다 이러한 미신 신앙을 극복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는 지석영도 분명하게 의식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사정을 『우두신설』의 맨 마지막에 실린 「우두행」이라는 글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우두행」의 저자는 지석영의 친형인 지운영으로, 그 글에 담긴 생각은 지운영만이 아니라 형제가 공유하는 생각이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칠언절구의 시 형태를 띠고 있는 「우두행」에서, 지운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히 금기(禁忌)는 길흉(吉凶)에 관계가 되니, 마치 신물(神物)이 있어서 좌우하는 듯하네. 이런 까닭에 세속(世俗)에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니, <속설이> 불타오르듯 번지고 말 달리듯 퍼진다. (중략) 어리석은 사내와 아낙은 엎어져 미혹되고, 노인과 아이도 똑같아서 말이 다르지 않구나. 가득 채운 정화수(井華水)를 가져다가, 두동(痘童)에게 봉헌하기를 시동(尸童)처럼 경건히 하네. 목마와 종이우산으로 저녁에 송신(送神)하니, 전별금이 헤아릴 수 없고, 쌀도 역시 넘쳐난다. 대바구니를 긁는 짹짹 소리가 선창하고, 북을 두드리는 둥둥 소리가 울리며 뒤따르네. 바람에 춤추듯 구름을 밟은 듯 두 무녀가 스스로 알지도 못하면서, 미친 듯 꾸짖고 어지러이 떠들어댄다. 새벽종이 울릴 때까지 희롱하다가 말 다루는 사람[僕御]을 부르면, 귀신은 남쪽 길로 돌아간다네. 이 풍습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는 없으나, 연유 없이 항간에 법도가 되었네.28)
지운영이 말한 것처럼, 정화수를 떠다 놓고 밥과 떡을 만들어 기도를 드리고, 두창이 끝나면 목마와 종이우산 등을 만들어 송신례(送神禮)를 하는 관습은 이규경(李圭景)에 의해서도 자세히 소개된 바가 있었다.29) 그 관습이 우두가 도입된 이후에도 계속된 이유를 지운영은 고칠 수 없는 병인 두창이 사람을 속이기 때문이라고 했다.30) 그러나 서양에서 소의 젖을 짜는 여인의 손으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불법(佛法)이 베풀어지게 되고, 무엇보다 부처의 자비로운 보시(報施)와 자비의 항해[慈航]가 제너에게 이루어지면서, 전 세계에 우두법이 퍼지게 되었다고 칭송했다.31)
우두법의 보급은 단순히 전염병의 예방만이 아니라, 민간에 퍼진 미신과 그에 따른 운명론적 시각을 고칠 수 있게 했지만, 우두를 받아들이지 않는 다른 편에서는 여전히 미신에 얽매였다.32) 이에 미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일은 우두의 참 효과를 아는 것이라 강변하면서, 자신이 쓴 「우두행」을 읽으면 미신에 얽매인 풍속을 바꾸고, 정도(正道)를 지키게 하며, 상서(祥瑞)를 내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말했다.33) 우두는 단순한 치병(治病)의 도구가 아니라, 학문(學文)의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대표이자 세상을 구제할 도리가 된 것이다.
미신을 비판하는 일은 서양의 근대학문을 접한 지석영에게 당연한 일이었으며, 이는 전통 의학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끌었다. 물론 완전히 전통 의학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렇더라도 근대학문의 관점에서 미신적 요소라고 이해할 만한 부분은 철저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두략』에 대한 이해였다. 1817년 구희(邱熺)가 편찬하고, 중국에서 수십 차례 간행될 정도로 유행했던 『인두략』을 지석영도 알고 있었다. 이는 『우두신설』 상권에서 『인두략』의 서문만 세 가지를 서술하고 있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그렇지만 지석영은 서문만을 소개할 뿐, 그 내용은 전혀 알려주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두략』의 내용을 계승한 『증보우두삼요(增補牛痘三要)』도 오직 서문 두 편만을 소개할 뿐이었다.
그 이유는 더전이 쓴 「우두고」와 「속우두고」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에 앞서 『중서문견록』 가운데, 더전이 쓴 다른 글인 「서의고증(西醫考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1871년(同治 10) 동문관(同文館)에 의학을 설치하고, 의학을 교수하면서 느낀 중국 의학의 불비(不備)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세원록(洗冤錄)』에 주목했는데,34) 나중에 『세원록』에 관한 글을 계속 연재하는 시발점이었다.35)
그는 「서의고증」에서 『세원록』이라는 책이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실은 계통이 전혀 없으며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36) 그 원인은 무엇보다 검시(檢屍)라는 불편한 일을 관리들이 직접 하지 않고, 전적으로 오작인(仵作人)에게 맡겨 발생했다고 파악했다.37) 그러다 보니 상세한 것 같지만, 결국에 견강부회하고 허튼소리만 난무한다고 여겼다. 반면 서양에서는 의사가 정해진 법률의 규정에 따라 진행하는 까닭에 그와 같은 폐단이 없다고 말했다.38) 영국에서 의학을 익혔던 더전의 입장에서 중국의 전통 의학은 학문적으로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전문가들에 의해서 실행되지 않는 단점이 분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우두와 관련되어, 더전은 중국인들이 설명하는 우두법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가령 「우두고」에서는 접종 부위에 상관없이 한 곳에 접종해도 충분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중국인들이 우두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돈벌이에 몰두하는 우두 기술자에게 현혹당한다고 말했다.
접종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접종 부위를> 다시 혈도(穴道)에서 취하지 않는다. 경락(經絡)과 혈관(血管)이 있는 곳에는 전부 접종할 수 있다. 【사람의 몸에는 모두 모세혈관[微絲血管]이 있어서다.】 혈관으로 흡인(吸引)된 두장(痘漿)은 온몸에 도달하게 된다. 어깨에 접종하는 이유는 편리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흉터가 생겨 옷으로 가려야 할 때나, 또 두장을 받아서 전달 혹은 접종할 때 옷을 벗어 노출하기 쉽기 때문이다.】 중국[中華]의 우두국(牛痘局)과 아이가 태어난 집에서는 매번 다양한 형태의 금기[多岐]에 미혹(迷惑)되어 있었고, 기술을 가진 자는 반드시 혈도(穴道)를 살펴야 한다면서 돈벌이[居奇]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소락혈(消爍穴)이 접종해야 하는 부위이며, 그 혈에 접종하지 않으면 <태독(胎毒)이> 빠져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에도 손상이 있다는 것이다.】39)
더전은 특별한 혈도, 즉 혈 자리에 접종할 필요가 없다는 근거를 세세하게 설명한다. 어디에 접종하더라도 사람의 온몸에는 모세혈관이 퍼져 있어서 혈관을 통해 두장이 골고루 퍼진다. 또 어깨 부위나 상박에 접종하는 이유는 접종을 위한 피부 노출에 편하며, 혹시 흉터가 생기더라도 가리기 쉽기 때문이지, 중국인들이 말하는 소락혈과 같은 혈 자리를 취할 목적은 아니라는 식이었다.
소락혈에 접종하는 방식은 『인두략』에서 제시한 접종법이다(張嘉鳳, 2007: 783·790).40) 구희는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이 다른 경맥들과 두루 연결되어 있으며, 삼초(三焦)가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중추가 되기 때문에, 삼초경의 혈에다 우두를 접종하라고 주장했다. 즉 삼초혈을 통해 오장에 쌓인 태독(胎毒)에까지 우두의 독이 미쳐 태독을 이끌고 밖으로 배출한다는 것이, 구희의 핵심 주장이었다.41) 따라서 위의 인용문은 더전이 『인두략』에서 제시한 방법을 비판하기 위해서 서술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더전이 중국에 우두법이 전해진 지가 이미 60여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그 보급이 어려운 이유는 헛되이 꾸미기 좋아하는 종사증화(踵事增華)하는 태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타인의 방법을 훔쳐다가 자기의 기법으로 팔고, 억지로 끌어다가 현혹해서 그 기술을 신비화한’ 『인두략』과 같은 전통 의학적인 이해를 극복해야 한다고 여겼다.42) 바로 장문의 「우두고」 「우두속고」를 쓴 이유는, 글의 마지막에서 밝힌 대로 ‘본 의원은 그 기술을 널리 알려 세상에 공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43)
즉 우두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비로 포장된 『인두략』, 나아가 전통 의학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더전의 비판은 「우두고」에 이어 「우두속고」에서도 계속되었다.
중국의 두과서(痘科書)를 살펴보면, 모두 “천화(天花)의 독(毒)은 전부 부모가 정(精)을 섞을 때, 정욕(情慾)의 불길이 치솟아 오른 데서 말미암는다. 태(胎)가 만들어진 후에 소아(小兒)의 명문(命門)에 쌓이는데, 혹은 골수(骨髓) 가운데 쌓였다가 매번 천화가 유행하는 해를 만나면, 불길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이 발생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한 바는 사실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거짓이다.44)
더전은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의 두과(痘科) 의학 전반에 대해서도 부정했다. 태독에 의한 두창 발생은 전통 의학의 기본 입장이었으며, 『인두략』에서 우두의 실효성을 설명하는 주요 근거였다. 그런데 태독설이 그저 사이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중국 의학에서 두창의 원인으로 언급된 태독은 두창 발생이 대부분 사람에게서 발생하며 증상이 유사하다는 보편성, 그렇지만 두창에 걸리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증상의 경중(輕重) 정도가 저마다 다르다는 개별성을 설명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따라서 전통 의학에 익숙한 중국인의 의식을 변화시키려면, 두창이 갖는 이러한 특성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두창 발생의 실체적인 원인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그 원인의 대략을 묘사하고 한편으로 경로를 제시함으로써 논의를 전개했다.
이것은 대개 우주 사이에 <있는> 여역(厲疫)의 기운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두창이 발생하는> 큰 원인[大端]이 3가지가 있으니, 혹은 전염(傳染)으로, 혹은 첨염(沾染)으로 말미암거나 혹은 장액을 가지고 접종[投種]한 것이다. 자종(藉種, 장액으로 접종)하는 기술에 이르면 그것은 진실로 중국의 좋은 방법[良法]이다. 그러나 우두를 접종하는 것처럼 최선[盡善]인 방법과 같지는 않다.45)
이때 그가 여역의 기운이라고 묘사한 것은 두창의 원인을 미아즈마로 파악했던 서양 의학계의 흐름을 보여주며, 더전은 두창에 걸리는 방식을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미아즈마에 의해 넓은 범위로 퍼지는 전염이 있고, 두창에 걸린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감염되는 첨염, 그리고 종두를 통해서 감염되는 경로였다. 그에게 두창은 태독이 아니라, 특정 원인에 노출되어 감염되는 질병이었다.
이상과 같이 더전은 중국의 전통 의학에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중국인의 두창 연구 역시도 미신적인 요소가 많다고 여겼다. 더전의 글을 읽고, 다시 『우두신설』의 첫머리에 실었던 지석영도 유사하게 인식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지석영이 애써 『인두략』의 서문을 3편, 그리고 『증보우두삼요』의 서문 두 편을 실었던 이유는 구희가 제시한 이론을 인정하는 대신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이들 서문에는 구희가 주장한 두창 예방에 대한 이론적 언급은 없고, 중국 내에서 우두 접종을 통해 많은 예방의 효과를 보았다는 경험과 칭송만 가득했다. 따라서 지석영이 『인두략』을 인용한 이유는 구희가 제시한 삼초 접종법을 말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았으며, 중국의 사례를 들어 우두의 우수성을 조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46)
다만 『우두신설』 하권의 마지막 부분에 구희가 『인두략』에서 처음 제시했던 ‘마진험방’을 「방약(方藥)」의 편명 아래에 덧붙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인두략』에 부정적인 태도가 변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우두를 접종한 이후에는 특별히 심각한 증상이 없다고 강조한 더전의 의견을 받아들인 지석영의 이해에서, 굳이 방약을 덧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접종 이후 다양한 이유로 두창 혹은 마진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고, 이에 대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석영은 「방약」 편명 밑에 주석으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47)
그러한 후유증의 원인은 개인적인 차이 등도 있겠지만, 근원적으로는 감염되지 않은 두묘(痘苗)를 충분히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종(傳種, arm to arm)을 하건, 소에게서 사람에게로 접종하건, 감염되지 않은 신선한 두묘를 확보하기란 어려웠다. 특히 초기의 우두 접종이 전종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피부병이나 마진 감염의 우려가 상당히 컸다. 이것이 『인두략』에서 구희가 ‘마진험방’을 제시하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48) 지석영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지석영은 우두가 본격적으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두창에 대한 세속의 미신적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나아가 더전의 「우두고」와 「우두속고」를 통해서 우두법에 대한 전통 의학의 설명 역시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우두의 효과를 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두략』이나 『증보우두삼요』의 서문도 포함했지만, 결코 전통 의학에서 이해하는 우두의 원리를 긍정한다는 표현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마진험방’을 제시한 이유도 혹시 모를 접종 후의 후유증을 대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4. 우두의 우수성 강조와 재접종의 배제19세기 후반 알렌의 언급처럼 우두법이 경쟁해야 할 대상인 인두법이 조선에 널리 보급된 상황에서, 우두의 장점을 널리 알리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였다.49) 『우두신설』에서 지석영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우두의 안전성이었다. 그가 『우두신설』에서 단순히 우두법의 기술을 서술하지 않고, 상권에서 더전의 「우두고」를 비롯하여 다양한 글을 제시한 이유였다.
「우두고」의 한 대목에서 더전은 인두법이 남송 시대에 개발되어 서역에 전해졌는데, 터키에 주재했던 영국 대사의 부인에게 인두법을 시술하여 유럽에 퍼지게 되었음을 먼저 언급한다.50) 그러나 인두법의 유행으로 오히려 두창이 퍼지는 일이 생겨나는 폐단도 있었음을 함께 서술했다.
비록 저절로 발생한 두창과 비교하면 가벼웠지만 【그런 이유로 서양에서 두창이 없던 지역에서도 접종 기술이 신기하다고 듣고는 접종받기를 원했는데, 사람들이 혹시나 뒤로 밀릴까 걱정하여 다툴 정도였다.】, <종두의> 두창 독을 따라서 <두창이 없던> 지역에도 전염시켰다. 두창 유행의 경중이 해마다 같지 않은 데도 종두를 한 이유는 중한 것을 피하고 가벼운 것을 취하려는 것인데, 두창을 만나서 죽는 사람을 계산해 보면 서양에서 1년에 약 50만 명이나 되었다【서양의 여러 나라에서는 매년 사망자와 신생아의 수를 세어서 해마다 기록했기 때문에, 그 기록을 살피면 국민의 수를 전부 알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방법이 날로 점차 줄어들고 서양의 각 나라에 불신을 얻어서 드디어는 금지되기에 이르렀다.51)
처음 유럽에 인두법이 전래될 때만 하더라도 그 방법을 신기하게 여겨서 두창이 발생하지 않는 지역의 사람들마저 경쟁하듯 종두를 받으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종두로 인해 두창이 오히려 유행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종두의 취지가 두창을 가볍게 앓아서 면역을 얻으려는 것인데, 도리어 그 피해가 속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종두를 받으려는 사람이 줄어들고, 마침내 국가에서 금지하는 상황까지 전개되었다.
『우두신설』에 실린 홉슨의 「종두론」에서는 수치를 통해, 인두법의 효과를 말하면서도 그 부작용을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150년 전 터키[土耳其]를 거쳐 영국에 인두법이 전해졌을 때, 두창으로 죽은 자가 10명 중에 두세 명이었지만, 이 방법(인두법)을 사용하자 100명 중에 한두 명이 죽었다. 대개 발열이 심하지 않고 알갱이가 극히 드물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뻐했다. 다만 묘두(苗痘)가 널리 퍼지면서 두창을 나오게는 하지만, 그 우환을 바로 끊을 수는 없었다. 비록 <인두를> 접종한 경우가 저절로 나온 두창 보다는 비교적 가벼웠지만, 이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어 두창이 나오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때로 두창의 독이 접종하는 의사로부터 전염되어 죽은 자가 도리어 예전보다 많을 때도 있었다.52)
인두법이 접종받은 사람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거나 사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접종으로 인해 두창이 퍼질 수 있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우두법은 그런 걱정이 전혀 없었는데, 이유는 두창은 기운으로 전염되지만, 우두는 직접 접촉에 의한 점염(霑染)53)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인두법을 사용하면 사실상 두창을 앓게 되어 치료가 필요한 것과 달리, 우두는 그런 걱정이 없는 큰 장점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두는 실패나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 없는 안전한 예방법인 것이다.
우두를 고찰해 보면, 천화(天花, 두창)와 같지 않은 곳이 있다. 그 전염(傳染)과 점염(霑染)의 다름이 있다. 【천화는 기운으로 전염되지만, 우두는 그렇지 않다.】54)
종두(우두, 필자)는 특별히 의약을 쓸 필요가 없고 다만 추위와 더위만을 피하고 음식을 조절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비정상으로 열이 나는 사람은 열을 내리는 약을 쓴다. 혹 접종한 자리가 부어 열나는 것은 차가운 것으로 적시면 효과가 있다.55)
「우두고」의 저자인 더전은 여러 차례 인두보다 우두가 안전하다고 강조했고, 따라서 지석영 역시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와 다르게, 지석영이 유독 강조하는 대목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우두를 접종함으로써 두창을 완전히 예방할 수 있다는 이해였다. 이는 지석영이 더전의 「우두속고」를 전부 인용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지석영은 더전의 「우두고」나 홉슨의 「종두론」 등의 내용을 그대로 실었던 반면에, 「우두속고」에서 유일하게 인용하지 않은 대목이 있었다. 그 결과 한 번의 접종으로 두창을 예방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될 소지가 매우 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두고」와 「우두속고」는 크게 몇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우두속고」 후반부에서 더전은 재접종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바로 이 단락을 지석영이 삭제한 것이다. 더전은 해당 항목의 서두에서, 제너의 우두법이 널리 퍼지게 되면 두창의 근원이 제거되리라 기대했지만, 천재(天災)라는 것이 때때로 변화하고, 기수(氣數)가 일정하지 않아서 완전히 근절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언급했다.56) 즉 우두법이 널리 알려지면 두창이 사라져야 했지만, 실제로 두창이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 보급이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57)
그처럼 다양한 이유로 우두법이 시행된 지가 70여 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두창은 유행했다.58) 게다가 우두를 접종받은 사람도 다시 두창에 걸리는 경우가 빈번했는데, 다만 사망에 이르지 않았고, 처음 두창을 앓는 사람에 비해서 그 증상은 매우 가벼웠다.59) 따라서 두창의 피해를 완전하게 막기 위해서는 결국 재접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미 우두를 접종받은 아이라면, 천재가 심하지 않을 것 같으면 <두창이> 다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았다. 서양에서는 <이미 접종 받은> 소아가 8세 이내인 경우, 두창을 만나서 감염된 경우는 매우 적었으며, 어린아이 때부터 약관의 나이에 이를 때까지 감염 환자가 가장 많았다. 대개 우두법이 처음 나왔을 때는 모두가 우두를 한 번만 접종해도 종신토록 두창의 걱정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겼다. (중략)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니, 1차례의 종두만으로 두창의 걱정을 피할 수 없다. 비록 두창의 혹독함은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만전(萬全)의 방법은 아니어서 오히려 전염을 만연시킬 우려가 있다. 그런 까닭에 재차 법을 두어서 이미 접종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접종하게 하였으니, 그렇게 하면 아마도 <두창에 걸릴> 걱정이 거의 사라질 것이다.60)
그리고 이 주장의 근거로 영국의 스코틀랜드[蘇格蘭]의 사례와 프랑스의 마르세유[瑪勒蹇喇],61) 런던[倫敦]에서 있었던 두창 발생 통계를 예로 들었다. 스코틀랜드는 1818-19년의 두창 유행 때의 통계이며, 프랑스는 1829년 발생한 유행의 사례이다. 당시 마르세유 지역에서는 어린아이에서부터 20세 전후까지 4만 명 가운데 우두를 접종한 경우가 3만 명. 감염자가 2천 명이 발생했다. 이때 우두를 접종받지 않았으나, 두창이 나지 않은 사례가 8천여 건에 달했다. 이상의 숫자를 포함해, 두창에 걸린 적이 없거나 미접종인 경우, 과거 두창에 걸렸던 경우, 우두를 접종한 경우를 각기 1만 5천명씩 파악해서 통계한 것이다. 따라서 조사건수는 총 4만 5천건이 된다. 한편 런던의 경우에는 1841년부터 10년간 두창 환자를 수용하는 병원으로 보이는 천화원(天花院)에 들어온 4,091명을 대상으로 한 통계였다.
총 3개의 표로 작성된 사례를 하나의 표로 통일해서 보면 <표 2와> 같다.62) 이때 A는 우두를 접종받지 않았고, 두창이 발생한 적도 없었던 환자이다. B는 과거 두창을 앓았는데, 두창 유행 시기에 다시 두창이 발생한 사례이고, C는 우두를 접종받았는데도 두창이 발생한 경우였다. 유일하게 런던의 통계에서는 우두를 접종받은 흔적이 없는 경우와 상흔이 있는 경우를 구분하여, 각각 C와 D로 나누었다.
어느 지역이나, 시기를 막론하고 우두를 접종받지 않았거나 두창을 앓은 적이 없었던 사람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사망률은 25%를 웃돌았고, 감염률도 역시 높았다. 그리고 B 항목인 두창에 걸렸던 사람도 다시 두창에 걸릴 확률, C 항목인 우두 접종 이후에도 다시 두창에 걸릴 확률도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스코틀랜드의 경우만 매우 낮은 수치를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 특별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통계가 말하는 것은 과거 두창에 걸렸거나 우두를 접종했더라도, 두창이 유행하는 시기에 다시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근거로 더전은 가능하면 재접종을 하는 편이 좋다고 주장했다.
대개 다시 접종해야 하는 이유는 여역의 기운이 일정하지 않아서, <두창의 기운에> 반응하면 즉시 두창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한 차례의 접종으로 종신토록 전염의 걱정을 면할 수는 없다. 이러한 까닭에 이미 접종하였더라도 다시 접종해서, 전염병의 기운이 기회를 엿볼 틈을 없애야 한다.63)
그리고 재접종의 효과를 실례로 든다. 프로이센[布國]의 사례로, 1835-1852년 사이에 군인들을 대상을 재접종한 기록이었다. 총 457,581명 가운데 재접종으로 피해를 줄인 사례가 191명이고, 두창에 걸린 환자는 13명이어서, 백분율로 환산하면 1/2,00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15년 전만 하더라도 군영에 두창 환자가 많았던 사실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다름 아닌, 법률로 군인들에게 모두 재접종을 강제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다른 나라에서도 이를 근거로 자국에서도 재접종을 따라 하는 상태였다.64)
이상 더전의 설명을 따른다면, 재접종은 필수적인 과제였다. 그런데도 더전의 글 전체를 인용했던 지석영이 이러한 사실을 『우두신설』에서 삭제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석영이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지만, 한 번의 우두 접종도 어려운 상황에서 재접종을 말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지석영이 재접종을 말한 대목이 있기는 하다. 『우두신설』 하권에서, 매우 짤막하게 접종이 사실상 불선감(不善感)인 실패한 가두(假痘)거나, 선감(善感)인 진두(眞痘)거나 상관없이 5-6년 지나면 다시 접종하라고 썼다.65) 그러나 그에 대한 주석으로 최초의 접종에서 선감의 진두였다면 두창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접종의 횟수와 관계없이 선감이 한 번만이라도 있으면 두창 발생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와 달리 피부병으로 인해서 발생하거나, 혹은 오래되어 효력이 떨어진 두묘(痘苗)를 접종했을 때 발생하는 가두의 경우에는 당연히 재접종이 필요하다.66) 마찬가지로 접종 기술의 부족이나 아이의 체질로 인해 발생했을 때도, 재접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67)
『우두신설』의 하권이 일본 우두종계소에서 작성해 준 노트를 토대로 했다고 추정되는 상황에서, 지석영이 재접종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실제 일본 의학계에서 재접종의 필요성은 충분히 알려진 상태였는데, 박영선이 건네주었던 『종두귀감』에서도 그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종두귀감』의 저자인 고가 가쓰아키(久我克明)는 아예 「재접종에 대한 설」이라는 글을 별도로 작성하여, 재접종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서양의 통계를 들어 설명한다. 처음 접종한 우두의 성질이 점차 쇠퇴해서 두창을 막는 힘,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면역이 사라지는 것인지 의문이 있다고 하면서, 그 의문을 서양의 우두 접종 통계에서 찾는다.
1848년 프로이센 병사 28.859명에게 우두 재접종을 시험하였다. 그중 6,373인은 종두의 흉터가 이미 사라져서, 종두 여부가 분명하지 않았다. 28,859인의 증세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6,862명은 수포가 발생하였고, 4,404인은 수포의 발생이 가지런하지 않았으며, 7,593인은 불감이었다. 다시 재접종한 결과 수포가 난 사람이 1,579인이었다.68)
이러한 통계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한 번의 접종으로 두창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다르게, 면역을 획득하지 못한 경우가 매우 많다는 점이었다. 즉 28,859명을 재접종하였더니 16,862명은 수포가 발생, 즉 면역력이 없어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대상으로 재접종했음에도 1,579인은 여전히 수포가 나서, 면역을 얻지 못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고가 가쓰아키는 “죽을 때까지 두창의 위험을 피하고 싶다면 반드시 재접종을 해야만 한다.”69)고 말했던 반면에, 『종두귀감』도 보았던 지석영은 이러한 사실을 일부러 회피하는 듯한 모습이다.
물론 이러한 서술이 지석영의 무지나 우두법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불식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굳이 재접종까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꺼렸는지도 모른다. 우두 시행이 시작되고 20여 년이 지난 후, 1908년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는 과거 인두를 접종하던 종두의가 우두를 접종하면 다시 두창이 발생한다고 선동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70)
인두이건 우두이건 재감염의 위험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굳이 우두의 재접종을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우두에 대한 불신을 키울 우려가 있었다. 그보다 지석영에게 시급한 문제는 우두의 우수성을 알리고, 한 번이라도 빨리 우두를 접종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게다가 19세기 후반까지 여전히 두묘가 부족한 상황에서 재접종도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처럼 냉엄한 현실 앞에서 지석영은 서양의 기술로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는 우두 보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우두의 효과를 과장하려고 의도적으로 재접종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 맺음말1876년 일본과 조약을 맺은 조선은 개항이라는 새로운 국제적인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를 통해서, 일본에 의해 한번 걸러졌지만, 서양의 문화를 본격적으로 접하였다. 개항으로 촉발된 서양 문화, 특히 과학 지식은 조선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우두법의 본격적인 도입이었다.
조선 후기 정약용과 같은 지식인을 통해 간신히 소개되었던 우두법은 지석영의 노력으로 조선 사회에 점차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는 부산의 제생의원에서 일차로 우두법을 학습하고 다시 일본에서 이차로 익힌 이후, 본격적으로 우두 접종에 나셨다. 그리고 그 무렵 「유유당고백」을 통해서 보이듯, 자신이 이제껏 접했던 다양한 지식을 총정리하여 『우두신설』의 편찬에 나섰다.
물론 『우두신설』은 『중서문견록』 · 『부영신설』 · 『만국공보』 · 『종두귀감』 · 『인두략』 등에서 중요한 논설을 뽑아서 인용한 서적에 불과했지만, 각 서적에서 논설을 취사 · 선택하는 가운데 우두 보급을 위한 지석영의 고민을 살펴볼 수 있다. 지석영은 두창에 대한 미신적인 이해를 배격하고, 한편으로 동아시아 우두법 보급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인두략』의 대표적인 견해도 배제했다. 즉 두창의 원인은 태독이며, 우두 접종의 부위로 삼초경이 중요하다는 논의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다만 우두 접종 후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증상의 치료를 위해 제시된 처방만을 인용하였다.
한편 인두법이 널리 퍼져 있던 조선에 우두를 보급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정은 더전이나 홉슨, 나아가 구희 등이 우두를 알리려 했을 때, 가장 힘쓴 대목이었다. 지석영이 인용한 글에서 드러나는 우두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첫째, 우두는 인두법에 비해 매우 안전한 방법이며, 둘째로 우두 접종을 통해서 얻는 면역은 완전하며, 셋째 비용이 지극히 저렴하다는 점이었다.
19세기 후반 혼란의 시대를 직면한 젊은이 지석영에게 선택의 갈림길이 있었다. 서양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처럼 소극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정치적 판단을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지석영은 우두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분명하게 드러냈다. 『우두신설』의 논설 중 가장 앞에 제시한 더전의 「우두고」와 「우두속고」가 바로 그 대답이었다. 그랬던 까닭에 『인두략』이 담고 있었던 전통 의학적 우두 해석을 배제했다.
Notes2) 이에 대해서 우두법이 천주교와 연관성이 있어서 정치적인 이유로 금기시되었던 점이 일찍이 지적되었다(권복규‧황상익‧지제근, 1997). 한편 신규환은 소수 지식인에 의해서만 우두법이 공유되었으며, 우두묘의 제조와 관련한 술기의 어려움이 있었고, 우두 지식을 확산시킬 네트워크가 부족한데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신규환, 2022; 2023). 3) 우두법 도입에 있어서 지석영의 공헌과 그의 일생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들은 가장 먼저 정리한 것은 미키 사카에(三木榮)였으며, 이후 기창덕과 허정에 의해서 재차 정리되었다(三木榮, 1963: 261-263; 奇昌德, 1994; 許程, 1994). 특히 미키 사카에는 『우두신설』이 최초의 우두 전문서이며, 동시에 최초의 순수한 서양의학서라고 평가했다(三木榮, 1963: 263). 5) 이때의 글은 다시 『京城日報』 「朝鮮種痘史話」 1935년 7월 3일, 4일, 5일, 6일, 9일, 11일에 연재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간행된 『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도 거의 그대로 다시 실렸다. 8) 『牛痘新說(수고본)』 卷下, 「幼幼堂告白」, “非我言妄, 玆有明訂, 敢采諸衆所論, 及接種, 禁忌等款, 條例於左, 謹此佈告, 仰祈, 京外樂善諸君子, 諒察此意, 勿以虛誕而不信, 助成善事, 是所厚望” 10) 『牛痘新說(수고본)』 卷下, 「幼幼堂告白」, “往在丙子, 余始得見其書【信使隨員, 朴永善氏携來, 該書云, 道光二十九秊己酉, 阿蘭醫, 門尼幾者, 始至長崎, 敎日人恭氏】”. 여기서 말한 모니케(門尼幾)에 의해 일본에 우두법이 전래된 사실이 『종두귀감』에서도 확인된다. 해당 자료는 다음과 같다. 『種痘龜鑑』, “嘉永己酉, 和蘭醫有門尼幾者, 始載痘苗, 至長崎, 授之柴田氏” 13) 『牛痘新說(수고본)』 卷下, 「幼幼堂告白」, “天台趙蘭亭, 牛痘三要序【顧文彬所著】曰, 余之子若孫, 共十餘人, 自幼皆種牛痘, 迄今四十餘年, 從未有重出之患, 此尤成效之著於親歷者” 15) 『牛痘新說(수고본)』 卷下, 「幼幼堂告白」, “今夏道園金公【弘集】之奉使日本也, 余要究此術, 執鞭而從之矣. 因外務省指引, 七月十五日, 始訪牛痘種繼所, 醫士菊池【康庵】氏, 包我駑劣許我誠心, 曲軫指授, 懇懇不怠” 16) 1887년 서행보(徐行輔)가 지석영의 처벌을 상소하면서, 갑신정변에서 지석영이 박영효를 도왔으며 우두를 빌미로 도당(徒黨)을 유인했다고 주장했다. (『高宗實錄』 卷24, 高宗 24年 4月 26日 癸未) 결국 개화파 인사들과 지석영이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17) 한편 지석영이 1882년과 1883년에 각각 전주와 공주에 설치된 우두국에서 우두를 교수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두서 간행을 서두를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두신설』의 간행이 지체된 원인을 쉽사리 단정하기는 어렵다. 18) 이러한 예는 1847년 간행된 『인두략합편(引痘略合編)』에 보이는데, 오진유(吳珍儒)가 지은 장문의 「우두가(牛痘歌)」가 있다. 이는 『우두신설』 전체에서 나타나는 지석영의 사상적 지향성이나 지운영의 알려진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내용 면에서는 서양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면에서 여전히 전통의 모습을 따르고 있는 측면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19) 『중서문견록』은 1872년 7월(양력 8월) 북경에서 처음 간행된 후 1875년 1월 제29호까지 발행되었다. 『중서문견록』에 대해서는 曾虛白 編, 『中國新聞史』上冊 (臺北: 國立政治大學新聞硏究所, 1966), 137쪽 참조. 21) 『牛痘新說』 卷上, 「牛痘續稿」, “酷暑不種, 嚴寒不種, 嬰兒在百日内不種, 膏粱之家, 問卜擇吉, 求瞽推筭, 小兒命相, 倘時日不佳, 皆不得濫行, 施種委遷延, 往往自誤, 良可歎也【吾西國, 自創興以來, 無此避忌, 亦未聞與小兒有害也】” 22) 『牛痘新說』 卷上, 「牛痘續稿」, “或小兒, 身面生而有記者 施痘漿亦可, 攅種於記上, 收黶結痂時, 其記卽可因之而脫去也【嘗有記, 生於顯處者, 令人見之, 頗不雅觀, 可籍其痘漿, 密種於記上, 結痂脫落後, 則其記失矣】” 23) 『牛痘新說』 卷上, 「牛痘續稿」, “英國, 曾將此條, 增入國律, 如有父母, 不欲種其子女者, 有重罰, 倘中國, 軫念赤子, 消彌災疢, 飭令各直省, 廣設痘局, 則惠愛黎庶之恩, 於罔極矣” 25) 『증보우두삼요』는 청나라의 의원 조개태(趙開泰)가 1870년 지은 의서인데, 우두를 삼초(三焦)의 혈에 접종해서 선천(先天)의 여독(餘毒)을 제거하는 논의를 중심으로, 총 9편에 걸쳐 두장을 채취하고 보관하는 등의 우두 관련 기술과 복약의 제조법 등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中國醫籍大辭典』 下, 上海: 上海科學技術出版社, 2002, 946쪽) 『증보우두삼요』는 현재 국내외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서 원문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중국의적대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인두략』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의서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27)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된다. 지석영 역시도 1903년 우두를 권하는 글을 『황성신문』에 발표하면서, 우두를 접종받는데 5냥에서 10냥이면 충분한데, 이를 아끼다가 천연두에 걸리게 되면 약값과 송신례로 적게는 4~5백 냥에서 때로는 3~4천 혹은 7~8천 냥에 이르는 돈을 허비하게 된다고 말했다. (池錫永, 「寄書, 勸種牛痘說」 『皇城新聞』 1903년 3월 24일) 28) 『牛痘新說』 卷下, 「牛痘行」, “就中禁忌關吉凶, 如有神物左右之. 因此世俗多傅會, 熾然其說行如馳. (중략) 愚夫愚婦顚倒惑, 老少同稱無異辭. 盈盈汲取井華水, 奉獻痘童敬若尸. 杻馬紙傘送神夕, 贐錢無筭共米滋. 刮籠磔磔聲先唱, 撻皷鼕鼕響復隨. 舞風蹈雲二女巫, 狂喝亂囂不自知. 弄到曉鐘呼僕御, 神之歸兮且南爲. 不知此習出何據, 無端閭巷成一規” 29)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1, 人事類2, 疾病, 「痘疫有神辨證說」,“我東則痘神, 曰胡鬼媽媽. 又稱客至, 嶺南稱西神. 兒痘, 則取淨盤, 設井華水一碗, 每日鐺飯甑餠以供禱焉. 及經痘終, 盛其紙幡·杻馬·捆載享神之物以餞之, 名曰拜送” 34) 『中西聞見錄』 9, 「西醫考證」, “同治十年辛未之冬, 因同文館添設醫學, 貞濫竽充數, 妄厠賓席, 教授醫學, 始自全體而發論, 繼由臟腑以相因, 至於人身之骸骨, 次序名目, 中西逈别, 莫或折衷, 乃取中華洗寃錄, 察閱人身骨格全圖, 與其部位名目, 考覈之餘, 而訛謬歧出, 不勝慨然” 35) 더전은 「서의고증」을 필두로, 『세원록』에 관한 글을 총 3편 게재하였다. 『中西聞見錄』 9, 「洗寃新說」; 『中西聞見錄』 12, 「洗寃新說續稿」; 『中西聞見錄』 14, 「洗寃新說續稿」. 37) 『中西聞見錄』 9, 「西醫考證」, “蓋緣居刑官者, 多以惻怛爲心, 祝網泣辜, 意存於卹, 而胸魔吉祥者, 又每每惡其穢骨, 或見屍身腐爛, 蠅蚋攢集, 皮糜肉脫, 臭惡難近, 旣所委之以相騐之責, 不得不免強從事, 監臨遠視, 一任仵作妄言喝報” 39) 『牛痘新說』 卷上, 「牛痘考」, “至於施種之術, 更無取於穴道, 凡有經絡血管之處, 皆可下種【緣人身皆有微絲血管】, 由血管, 吸引痘漿, 以達全體, 其所以專種於臂上者, 無他取其便也,【爲其疤㾗有衣遮盖及傳漿施種之時, 易於袒露也】 嘗見中華牛痘局, 與生兒之家, 每每惑於多岐, 操其技者, 必按穴道以居奇.【所謂消爍穴者, 方可施種, 若非其穴種之, 非但不出, 抑且有損】” 41) 『引痘略』 「引痘說」, “三焦者, 人身最關要之俯, 如天地之三元, 總領五臟‧六腑‧營衛‧經絡, 通內外‧左右‧上下之氣, 三焦通, 則內外‧左右‧上下皆通, 得其關要之處引之, 直從皮毛‧血脈‧肌肉‧筋絡, 同時直傳而入, 使縱有胎毒深藏於腎, 亦自然同時引挈而出” 42) 『牛痘新說』 卷上, 「牛痘續稿」, “中華之人, 喜踵事增華者, 每多裝點附會, 然實非泰西, 立法之本意耳, 至其所云, 刺種之處, 必須按定, 消濼穴以投漿, 斯之謂攘他人之法, 衒自已之奇, 穿鑿眩惑, 以神其術” 44) 『牛痘新說』 卷上, 「牛痘續稿」, “考中國痘科書中, 皆云, 天花之毒, 咸由於父母媾精, 慾火昌熾, 結胎後, 蘊於小兒之命門, 或云蓄於骨髓之中, 每遇天花流行之年, 如石投火觸之卽發, 然而其所論定者, 似是而實非也” 45) 『牛痘新說』 卷上, 「牛痘續稿」, “斯盖由宇宙間, 厲疫之氣而然者焉, 其大端有三, 或由傳染, 或由沾染, 或由藉漿以投種, 至於藉種天花之術, 誠爲中華之良法, 乃不若種牛痘, 尤爲盡善者也” 46) 구희가 쓴 서문에서는 우두의 원리가 태독을 밖으로 끌어내는 방법이어서 종두와 같다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기는 하다. (『牛痘新說』 卷上, 「引痘新書序(邱熹)」, “牛痘之理, 原包種痘, 諸法之中, 雖種之法, 有不同, 而其爲善方, 引導於外, 則一也”) 또한 온여괄(溫汝适)이 쓴 서문에서는 소의 이가 두창에 효과가 있다는 『본초강목』의 설명을 통해 우두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대목도 있다. (『牛痘新說』 卷上, 「引痘新書序(溫汝适)」, “余觀本草綱目, 見其稀痘方, 用白牛虱, 以此虱業緣牛身, 食飽自墜, 用之能稀痘, 卽取其中, 有牛血耳, 牛虱尙能稀痘, 則牛痘必稀, 用其苗以種, 宜獲十全之效, 理有固然, 無足恠者”) 그러나 이는 우두가 전통 의학에도 근거가 있다는 부가적인 설명에 그칠 뿐, 실제로 구희가 제시한 우두 접종의 방법을 기술한 대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48) 구희는 『인두략』에서 두묘를 채취할 때, 피부병 등의 유무를 충분히 살피라고 했다. (『引痘略』, 「次在認識瘋疾」, “父母愛子之心, 人人皆同, 粵東地勢卑濕, 不無瘋疾, 來求種痘者, 恐一同混雜, 誤取其漿, 傳之無疾小兒, 爲害不淺, 以此告知洋行諸公, 呈請有司, 派令養濟院認識瘋疾之人, 具結存案, 逢期到局伺候, 凡來種者, 先令驗過, 然後取苗, 自無貽誤”) 49) 조선 후기 종두법에 관한 연구들에서 언급되듯이, 인두법은 조선의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보급된 상황이었다. (김호, 2016) 50) 『牛痘新說』 卷上, 「牛痘考」, “南宋, 始有藉痘痂種花之說,【阿非理加○西域以及中國皆有其法】 自康熙五十六年, 有英國欽使, 曾駐土爾其國京【土爾其回回國也, 在西域西南界】, 有國醫種天花於其使之夫人【大抵其法, 由中華傳, 至西域者】, 嗣後英使夫人, 隨傳其術於本國, 於是, 其法倡行於歐洲” 51) 『牛痘新說』 卷上, 「牛痘考」, “較自出者爲輕【然而泰西幹, 有不出痘之境界, 聞其籍種之術, 神奇因而求種之, 人莫不爭先恐後者也】, 隨其痘癘之毒, 傳染其境堆, 原癘毒之流行, 歲有重輕之不同, 而種痘之理, 原爲避重就輕, 起見覈計人數, 遭癘毒而斃者, 大西洋一年, 約有五十萬之衆【泰西列國, 按每年皆有彙計死生人數, 目逐年綜核紀錄, 是以備悉國人之數】, 由是其法, 日漸寢息, 乃不信於泰西, 各國隨出示禁止矣” 52) 『牛痘新說』 卷上, 「種痘論」, “前一百五十年, 土耳其傳此法, 入英國, 初時出痘死者, 十中二三, 自用此法, 百人中偶有一二死者, 大槩發熱不重, 痘粒稀少, 人多喜悅, 但苗痘如布種, 能令其出, 不能漸絕其患, 雖種者, 視自出者較輕, 但因此傳染於人, 受染而出者更多, 有時痘毒卽從種苗痘之醫傳來, 死者反多過曩時” 60) 『中西聞見錄』 14, 「牛痘續考」, “嘗見已種牛痘之兒, 若非天災甚厲, 則不能復出, 察西國小兒在八歲以內, 雖遇天花而染之者頗少, 每在童年以後, 及弱冠時, 而染患者最多也, 蓋立法之初, 僉謂種牛痘一次, 可免終身永無天花之虞 (중략) 窃嘗考之, 種痘一次, 仍不免天花之患, 雖可以彌天災之烈, 究非萬全之術, 尤恐滋蔓傳染, 所以復增截法, 迺已種而再種之, 則庶乎可以已矣” 64) 『中西聞見錄』 14, 「牛痘續考」, “至成豐二年, 凡在軍籍行伍中, 飭令復種者, 計四十五萬七千五百八十一名之衆, 有因復種而消彌其災者, 一百九十一名, 有染患天花者, 十三名, 綜核其數, 計二千之一, 昔在十五年前, 其軍營有報痘癘者甚衆, 嗣後隨編入國律, 通諭軍兵, 咸復種之, 至今遞傳不絕, 如天下各國, 皆仿效而復種之, 斯亦遏絕天花之一術云爾” 67) 『牛痘新說』 卷下, 「假痘」, “痘苗, 雖善良接種得宜, 兒體之天質, 缺其感受性者, 亦不感染眞痘旣出之後, 天花永不復出, 卽再引之, 亦無復出者, 假痘及初種不感者, 則仍要再種【一二月後, 可以再種】” 표 1.『우두신설』의 세부 제목과 인용 전거
Table 1. The Detailed Subheadings and Sources of Citation in Udusinseol 牛痘新說)
표 2.유럽 도시의 두창 환자 발생과 사망률 통계
Table 2. The incidence and mortality statistics of smallpox in European c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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