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This study examines how physicians and scholar-officials of the Song dynasty reconceptualized and medically confronted zhang (瘴)—an uncontrolled and deadly tropical disease endemic to the Lingnan (嶺南) region of southern China. Since ancient times, the expansion of the Chinese cultural sphere toward the south had been shadowed by fears of the region’s hot, humid climate and the “poisonous vapors” (duqi, 毒氣) believed to cause fatal illnesses. These environmental anxieties contributed to the cultural Othering of Lingnan as an uncivilized and perilous frontier, inhabited by “barbarian” peoples and veiled in superstition. While Sui and Tang physicians such as Chao Yuanfang (巢元方) and Sun Simiao (孫思邈) distinguished zhang from cold damage (shanghan) and epidemic fevers (wenyi), their understanding remained theoretical and classificatory, relying on bianbing (辨病, disease categorization) rather than individualized bianzheng (辨證, pattern differentiation). In contrast, Song-period physicians—particularly the so-called ruyi (儒醫, Confucian physicians)—advanced an empirical and practice-oriented medicine. Through direct observation and clinical experience, they transformed zhang from an untamed and supernatural affliction into a diagnosable and treatable syndrome grounded in empirical reasoning. This transformation unfolded within the broader socio-political context of the Song dynasty, when the empire’s political and economic center shifted southward and the development of Lingnan became a national concern. The state’s medical bureaus undertook extensive compilation projects, producing formularies such as the Taiping Huimin Heji Jufang (太平惠民和劑局方) and Shengji Zonglu Zuanyao (聖濟總錄纂要), which aimed to standardize treatments throughout the empire. Yet these texts, rooted in northern medical paradigms, often failed to address the specific climatic and pathological conditions of the Lingnan tropics. In response, scholar-officials and local physicians—including Li Qiu (李璆), Zhang Zhiyuan (張致遠), Wang Fei (王棐), Wang Nanyong (汪南容), and Zhang Jie (章傑)—compiled medical works such as the Lingnan Weisheng Fang (嶺南衛生方). Drawing upon firsthand clinical encounters, they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pulse examination, symptom differentiation, and ecological adaptation in treatment. Their efforts reflected a synthesis of classical medical theory and local medical knowledge, bridging state medicine and regional realities. Ultimately, this study argues that the transformation of zhang from a numinous affliction into a treatable disease signifies a critical epistemological shift in Chinese medical history. By confronting fear through observation, classification, and practice, Song physicians extended the boundaries of both medical rationality and civilization itself. The conquest of the “untamed disease” thus metaphorically represents the taming of the southern frontier and the integration of its environment into the moral and intellectual order of the empire.
1. 머리말고대 이래 중국인들의 거주 영역은 군사적 정복과 문화적 영향력의 확산이 결합된 과정 속에서 확대되었다. 그러나 기후와 풍토의 차이에서 비롯된 각종 질병의 발생은 전근대 중국인들에게 만성적인 난제로 남아 있었다. 특히 중국 남부 지역의 고온다습한 기후로 인한 상시적(常時的) 질병의 위협은 군사적ㆍ문화적 확장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을 여전히 문명의 빛이 완전히 도달하지 못한 ‘야만의 공간’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다음에 제시할 널리 알려진 불교 고사는 남방 지역에 대한 기후적ㆍ문화적 선입견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된다.
오조대사께서는 혜능(慧能)을 꾸짖으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영남(嶺南) 사람이요 또한 갈료(獦獠, 중국 서남부의 이민족)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하셨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佛性은 남북이 없습니다. 갈료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지만, 불성(佛性)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하였다.1)
남종선 육조대사(六祖大師)인 혜능(638~713)은 영남(嶺南)의 신주(新州, 현재의 廣東省 新興縣) 출신으로서 기주 황매현(黃梅縣, 현재의 湖北省 황매현) 빙무산에 있었던 오조대사(五祖大師) 홍인(弘忍)을 만나 배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오조대사는 꾸짖으면서 그가 오랑캐라는 이유로 제자로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화를 나눠본 후 그의 비범함을 알아차린 오조대사는 그에게 허드렛일시키며 지켜보았고, 결국 그가 지은 게송을 보고 그에게 법[돈법(頓法)]과 가사(架裟)를 물려주고 그를 육조대사로 인정하였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전해지는 이러한 고사는 육조대사의 탁월함을 강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그 속에서 당대(唐代) 전반기 영남 지역 사람들에 대한 중원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비록 오조대사는 야만의 땅에서 온 제자의 비범한 재능을 간파하였지만, 당시 일반적으로 영남 사람들은 중원 사람들과는 달리 짐승에 가까운 인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광의(廣義)로 말해 오령(五嶺) 산맥2) 이남에서 베트남 북부에 이르는 중국 남부 지역, 즉 소위 영남(嶺南) 지역은 오늘날의 광서성ㆍ광동성 전역과 호남성ㆍ강서성ㆍ복건성ㆍ귀주성의 일부를 포함한다. 이 지역은 진시황제 시기에 중국 왕조 국가의 통치 범위에 편입된 이후, 독립과 식민화의 과정을 반복하며 중국 역사 속에서 독자적이면서도 긴밀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3) 보다 북쪽에 위치하였던 강남지역이 수ㆍ당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북부로부터 인구와 문화적 유입이 증가하여 문명화된 지역으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영남은 중국인들에게 여전히 오랑캐의 지역이자 두려움의 대상으로 ‘타자화(他者化)’되고4) 그들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수당대 영남지역에 대한 ‘타자화’의 근원에는 호전적인 이민족이나5) 그들의 주술적 신앙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요인도 있었지만, 그 축축하고 더운 영남지역의 기후에서 만연하고 있었던 치명적인 열대성 풍토병인 ‘장(瘴)’에6) 관한 막연한 두려움이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장기(瘴氣), 산람장기(山嵐瘴氣)7), 장려(瘴癘)8) 등으로 불리는 ‘장’이라는 질병에 대해서 수대(隋代) 태의박사(太醫博士)인 소원방(巢元方, 605–616)은 양제 대업 6년(610) 편찬된 그의 병인학 연구인 『제병원후론(諸病源侯論)』 「장기후(瘴氣候)」에서 영남지역에서 생기는 독기(毒氣)라는 오염물질을9) 상정하여 설명한다. 즉 그는 ‘장’과 같은 중국 남부지역에서 주로 발생하는 질병에 대해서 ‘상한’과 그 증상은 유사하지만 그 병인이 한사(寒邪)와 같은 계절적 기후 병인이 아니라 독기와 같은 실체적인 오염물질로 인한 것으로서 상한(傷寒)이나 온역(溫疫)과는 다른 처방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10)
그런데 비록 수당대 의가들에 의해 영남지역의 ‘장’을 상한이나 온역과 구별짓는 것도 그 질병에 한 단계 더 다가가고 있었지만, 이는 ‘장’에 대한 제한적이거나 간접적인 임상적 경험에 기반한 정태적(靜態的) 감별법인 변병(辨病)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한의학의 근간을 이루는 변증논치(辨證論治)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수당대 의가들의 질병 이해는 개별 환자의 증상과 체질, 병인(病因)을 종합적으로 진단하여 병리적 ‘증(證)’을 규명하는 변증(辨證)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유사한 병증 간의 비교와 분류에 머문 제한적 단계에 있었다. 즉 ‘장’이라는 질병에 대해서, 이에 걸린 환자마다의 다양한 증상과 징후 그리고 서로 다른 질병의 경과를 파악하고[변증(辨證)] 이에 기반해서 적절한 치료법을 찾아가는 ‘논치(論治)’에 이르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은 절대적으로 송대 새롭게 등장한 의학자들 특히 의학적 지식을 수집하고 전파하였던 소위 유의(儒醫)라고 하는 사대부 의가들의 공헌이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미지의 치명적 질병에 대한 강렬한 공포를 극복하고, 이에 대한 직접적인 임상 자료를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다양한 증상과 그에 상응하는 치료법을 축적해 나갔던 송대 의가들의 역할에 주목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장’에 대한 두려움의 확산은 인구의 이주와 지역 개발에 따른 결과이고 그 낙후된 지역이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그 두려움은 점차 축소된다는 관점에서 주로 이해해 왔다.11) 그러나 본 연구는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주체적 행위자들, 즉 질병의 극복 과정에 직접 참여한 송대의 의가들에 초점을 맞춘다.12)
이들은 의학적 지식과 실천을 결합하여 치명적인 미지의 질병인 영남의 ‘장’에 대응함으로써, 전통적 지식인의 지식 범주를 확장하고 새로운 유형의 실천적 지식인상을 형성하였다. 본 논문은 이러한 새로운 지식인의 출현이 가능했던 송대의 사회ㆍ제도적 맥락을 고찰하는 한편, 『영남위생방(嶺南衛生方)』을 비롯한 이들의 노력 산물로 축적된 의학적 처방서들을 분석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의와 의학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2. 영남의 ‘장’: 미지의 질병과 막연한 공포‘장’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영남지역을 다녀온 사람들이 겪었던 구체적인 경험이 널리 공유되면서 점차 실체적 두려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후한 광무제 건무 19년(43)에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 기원전14-기원후 49)은 쯩 자매[徵姉妹]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남방의 교지(交趾)[현재의 베트남 북부 홍강(紅江) 삼각주 일대]에 파견되었다.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신식후(新息候)에 봉해졌던 마원은 당시 상황을 회상하면서 그 지역의 독기에 대해서 언급한다.
내가 낭박과 서리 사이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을 적에 아래쪽에는 물이 고여 있고 위쪽으로는 안개가 있어 독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기 때문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날아가던 솔개들도 물속으로 떨어지곤 하였다.13)
여기서 마원이 언급한 독기가 바로 ‘장’이었다. 동일한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다음 해인 건무 20년(44)에 귀환하였는데 ‘장[장역(瘴疫)]’으로 사망한 자가 전체의 40~50퍼센트에 이르렀다고 알려진다.14)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여기서 ‘장(瘴)’이라는 글자가 중국 사서에 사실상 처음 등장한다는 점이다. 정작 마원이 살았던 시기에는 ‘장’이라는 글자가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후한대 허신(許愼)이 저술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장’이라는 글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반면 마원의 고사가 담겨 있는 『후한서』에서 남조 송(宋)의 범엽(范曄)이 ‘장’자를 처음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장’을 영남지역의 열대성(熱帶性) 질병을 총칭하는 데 사용되었으나 당시 문헌에서는 “장(瘴)”과 “장(鄣)”과 “장(障)”자는 함께 사용하였다. 영남지역은 지형적으로 높은 봉우리와 깊은 산림으로 사방이 막혀[鄣, 障] 있어 기후적으로 발생한 습열(濕熱)이 그 지역에 갇혀 ‘장’이라는 독기를 만들어낸다고 인식하였다. 결국 ‘장’이라는 병명은 중국 고대시기부터 교주(交州)와 광주(廣州)의 남쪽 오랑캐[남이(南夷)]를 정복하러 파견된 군대와 같이 영남지역의 열대성 질병으로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에 의해 남겨진 기억에서 유래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남조 시기가 되어서야 영남지역의 열대성 질병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馬強, 2007: 24).
위진남북조시대 이후 양쯔강 중하류 지역인 소위 강남지역이 점차 개발되어 대규모 인구가 이주해 가면서 야만의 땅은 더욱 남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비문명의 지역은 중국의 다른 내지와 완전히 고립된 지역은 아니었고, 군사적 파견이나 상인 그리고 관리의 파견을 통해 제한적이지만 정보가 축적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다양한 어렴움과 공포로 인하여 자기 경험을 상당 부분 왜곡하거나 신비화하여 전달하였고, 여기에 일반 대중들의 야만지역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결합하여 중국 남부지역은 가공의 세계로 ‘타자화’되었다.
당대 진주(鎭州)15) 사람 진무진(陳武振)은 집안에 수만 금을 소유하고 (남)해안 諸島에서 큰 부자로 창고에 코뿔소 뿔, 상아, 대모갑(바다거북이 껍데기) 등 수백 수천 점의 보물을 소유하고 있었다. (진무진이 부를 축적한 것은) 이전에 서역 상선이 좌초되어 이곳으로 표류해 오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해안 제도의 사람들은 속칭 득모법(得牟法)라고 알려진 주술에 능숙였다. 대체로 무역선들이 바닷길을 지나갈 때, 바다 가운데 다섯 고을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가, 불행히도 바람에 표류하여 길을 잃고 진주(振州)경내로 들어오게 되면, 진주의 백성들이 즉시 산에 올라 머리를 풀어 헤치고 주문을 외우며 저주하였다[주저(呪咀)]. 그러면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 배는 아무리 움직여도 움직일 수 없어 주문을 외운 곳으로 떠내려가서야 멈췄다. 진무진은 이로 인해 부자가 되었고, 초토사 위공간(韋公幹)이 진무진을 형처럼 대할 정도였다. (후일) 진무진의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 위공간의 집 또한 완전히 사라졌다.16)
호전적인 이민족과 그들의 주술 그리고 막대한 부와 그에 따른 부패와 타락은 영남지역을 포함한 남부지역에 대한 타자화된 이미지로서 농본주의적이고 검소한 생활방식 그리고 유교적 도덕 윤리로 상징되는 중국의 내지(內地)와 선명하게 구별되었다(Fong, 2020: 40-41). 이밖에도 영남 원주민들은 비밀의식을 통해 고독(蠱毒)을 생산한다고 전해지는데, 이 독은 죽음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중독된 사람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독살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고 알려졌다. 이독의 생산과 사용은 중국 역대 왕조의 법률에서 가장 엄격하게 금지하는 범죄였다(Schafer, 1967: 61-69; Fong, 2020: 41).17)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부지역을 공포스럽게 여기도록 만든 것은 바로 치명적인 미지의 질병 ‘장’이었다. 주술이나 고독의 존재를 신뢰하지 않는 이들에게조차, 그 원인조차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치료법 또한 확립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감염자를 발생시켰던 ‘장’과 같은 치명적인 열대성 질병은 심대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영남 지역 전반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혐오의 정서를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치명적이고 두려운 질병이 창궐하는 영남 지역을 방문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피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배[폄적(貶謫)]를 당한 관료나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은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결국 그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당대에 이르러 남해 해상교역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그 중심지인 광주와 교주는 제국의 재정적인 차원에서 점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상인들 역시 위험을 감수하며 영남지역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안록산의 반란 이후 내지번진(內地藩鎭)의 확대와 지방군사세력의 자율화로 인해 중앙의 재정 통제력이 약화되자, 당 조정은 점차 상업적 세입에 의존하는 재정국가로 변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 조정에게는 남해제국(南海諸國)과의 해상 교역을 통해 확보되는 세입이 국가 재정의 중요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당조정은 이 지역에 무역 감독관 사무소인 시박사(市舶使)를 설치하고 지속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남부지역으로 가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였기에 중앙 조정의 입장에서 관리를 파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18) ‘장’에 대한 당대 관리들이 지닌 공포는 당 현종시기의 시인이자 학자-관료였던 왕유(王維)의 시 「송양소부폄침주(送楊少府貶郴州)」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왕유는 유배되어 광동성에 인접한 호남성 남부 침주(郴州)로 부임한 지인 양소부(楊少府)를 염려하며, 특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창궐하는 ‘청초장(靑草瘴)’에 대한 두려움을 시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밝은 날이면 형산(衡山)과 동정호(洞庭湖)에 이르게 될 터인데,
(그곳에서) 가을 달빛 아래 원숭이 울음을 들을 때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북쪽 물가에서 멀리 남쪽의 삼상을19) 바라보며 근심에 잠기고,
남풍이 불어 다섯 량(의 가벼운 배)을 실어 간다고 말하는 것조차 싫구나.
여름 장기[청초장] 극성일 때쯤에는 하구(夏口)를 지나고
흰 거품이는 물살 속에서 분성(湓城)을 나서겠지.
장사(長沙)는 재능 있는 선비를 오래 머물게 하지 않았으니,
왕유는 이 시에서 양소부가 다음 해 여름에 침주에서 임기가 끝나 북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무렵 창궐하는 ‘장’에 걸리지 않을까 염려하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산서성 출신이었던 왕유에게는 미지의 지역이었던 영남지역이 장기가 창궐하는 위험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비교적 안전한 처지에 있던 관료층조차 ‘장’에 대해 분명한 불안감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쟁 동원으로 남부 지역에 파견된 일반 백성들이 경험한 ‘장’에 대한 공포는 그보다 훨씬 심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김현선, 2022: 84-89).
“오래잖아 천보 연간에 군대를 모아, 집집마다 장정 셋에 하나를 지정해서, 사람 모아 어디로 몰아가나 했더니, 무더운 때[오월(五月)] 만 리 먼 길 운남(雲南)으로 보냈다네. 듣자니 운남에는 노수(瀘水)라는 강이 있고, 산초꽃[초화(椒花)]이 질 때면 장기(瘴氣)를 품은 안개[장연(瘴煙)]가 피어오른다더니, 군대가 열탕 같은 물을 건너다가, 열 명에 두세 명이 죽었다고 하네. 남북의 마을마다 울음소리 구슬펐고, 아이는 부모 잃고 남편은 부인과 헤어졌네. 모두가 말하기를 전쟁터로 떠난 사람, 천 명 만 명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았다네.”22)
백거이의 「신풍절비옹(新豐折臂翁)」 즉 ‘신풍현의 팔뚝 부러진 노인’이라는 시는 당현종 천보 13년(754)에 중국 남부 운남성의 남조(南詔)를 공격하고자 전국에 징집령을 내렸지만 당시 24세였던 신풍현23)의 한 주민이 징집을 피하고자 자신의 팔뚝을 스스로 부러뜨렸던 사연을 시로서 묘사한 것이다. 백거이는 이 작품 속에서 전쟁의 참상과 그로 인한 일반 백성의 고통을 신풍현의 한 노인의 증언 형식을 빌려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작품 속 88세의 노인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운남 지역으로 징발되어 갔던 당시의 경험을 두려움과 함께 회고한다. 그가 느꼈던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은 바로 ‘장’이라 불린 풍토병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장기를 품은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를 때마다 행군 중인 병사들 사이에서 대규모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묘사하며, 이를 통해 남방의 혹독한 자연환경과 그로 인한 생명의 위협을 사실적으로 증언한다. 이때 운남에 대한 그의 두려움의 핵심은 바로 ‘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공포스러운 주술을 행하는 호전적인 이민족과 부패와 타락으로 상징되는 영남지역을 더욱 악마화하고 타자화하였던 요소는 바로 ‘장’이라고 하는 미지의 질병이었다. 그러나 중앙 조정의 입장에서 그 지역을 통제하고자 하는 정책은 중단할 수 없었다. 이는 경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중국 황제의 교화에서 벗어나 있었던 미개한 원주민들을 포용해야한다는 계몽주의적 사고의 발로이자, 보다 실질적으로는 그 지역에 준동하는 불온한 세력을 안정화시켜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당덕종) 정원(貞元) 연간(785-805)부터 황동(黃洞)의 제만(諸蠻)이 이반하였는데, 오래도록 평정하지 못하였다. 용주(容州, 현재의 광서장족자치구 용현)와 계주(桂州, 현재의 광서장족자치구 계림시)의 두 관(管)은 약탈로 인한 이익을 탐내고 공훈을 세우기를 원하여, 군대를 합하여 토벌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다. (영남절도사) 공규(孔戣)가 고집스럽게 불가하다고 말했으나, 덕종(德宗)이 듣지 않았다. 강(江)과 호(湖)의 군대를 크게 징발하여 두 관(管)의 군대와 만나 들어가 토벌하도록 하였다. 병사들이 장독(瘴毒)에 걸려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안남(安南)의 병사들이 이 기회를 틈타 도호(都護) 이상고(李象古)를 살해하였고 계관(桂管) 경략사 배행립(裴行立)과 용관(容管)경략사 양민이 모두 공을 이루지 못했고, 죽임을 당할까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직 공규만이 하루아침의 공을 바라지 않은 까닭에 교주와 광주는 편안히 크게 다스려졌다.”24)
당조정은 아직 영남지역의 ‘장’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추지 못하였고, 결국 무리한 군사원정을 시도하여 큰 실패를 보았다. 영남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합리적인 태도를 지녔던 것으로 알려진 영남절도사 공규만이 ‘장’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피하고 최대한 무리한 군사적 행동을 자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호전적인 이민족의 존재와 ‘장’과 같은 미지의 질병에 대한 공포가 결합되면서, 중원 사람들은 영남 지역에 대해 막연하면서도 심리적으로 깊은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영남은 문명권의 주변부로서 철저히 타자화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이러한 인식에는 점진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장’에 대한 공포 자체는 여전히 지속되었으나, 국가와 의료인의 주도 아래 새로운 형태의 의학적 대응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남방의 질병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3. 송대 ‘장’에 대한 경험적 접근과 의료적 대응수(隋)ㆍ당(唐)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화북 지역의 의가나 의학적 관찰자들은 영남 지역의 ‘장’에 대해 직접적인 임상 경험을 축적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개별 환자의 상이한 증상을 구체적으로 변증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전해진 처방 자료를 토대로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상한이나 학질(虐疾) 등의 질환과 비교ㆍ분석하는 변병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수ㆍ당대에 이르러 의가들은 ‘장’이 기존의 상한이나 학질과는 달리, 영남 지역의 고유한 습열(濕熱) 환경에 의해 발병한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 수대의 소원방이 제시한 ‘장’에 대한 이해를 계승한 것이었다.25) 이후 당대에 이르러 소위 ‘약왕(藥王)’으로 불린 손사막(孫思邈, ?-682)은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에서 ‘장’에 관한 12가지 처방을 제시하였으나, 그 대부분은 열병(熱病) 계통의 질환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 치료법으로, ‘장’의 특수한 병리와 증상을 별도로 구분하여 논한 것은 아니었다.26) 당대 다른 저명한 의가인 왕도(王燾, 670-755) 역시 유사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당대 이전 방서를 집대성한 『외대비요(外台祕要)』에서 왕도는 “『비급천금요방』에서는 무릇 ‘장’과 학(瘧)을 구분하여 두 가지 (병)명으로 하였는데 사실은 일치하는 것으로 어느 경우에는 오한이 생겼다가 열이나고 혹은 먼저 열이 나고 나중에 오한이 생긴다. 영남에서는 이를 모두 ‘장’이라고 하고 강북에서는 학이라고 통칭하여 부른다. 이는 방언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지 별도의 다른 질병이 아니다. 그러나 남방의 온독(溫毒)으로 인하여 이 병이 더욱 심하다”27)라고 설명한다. 결국 대체로 화북지역 출신으로서 영남지역 ‘장’ 환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임상경험을 지니지 못했던 수당대 의사들은 간접적으로 체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장’을 분석하였고, 유사한 질환에 대한 처방을 통해 ‘장’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점차 공규의 경우처럼 학자-관료들의 직접적인 체험에 기반한 관찰이 증가하면서, ‘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그것에 대처하는 보다 실질적인 경험들이 축적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당대 말기 중원의 전란으로 인해 영남에 수년간 억류되었던 유순(劉恂)은 그 자신이 직접 겪은 ‘장’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영남[영표(嶺表)]의 산천은 (산림이) 굽이치고 울창하여[반울(盤鬱)] (뭉쳐있는 기운이) 쉽사리 풀어지고 소통되지[소설(疏泄)] 않기 때문에 람기(嵐氣)와 안개가 자주 일어나 ‘장’을 만들어낸다. 사람이 이에 감염되면 많은 질병에 걸리고 복부 팽만이 심화되어 고(蠱)로까지 발전하기도 한다. 세간에는 온갖 벌레들이 모여 고를 이루고 사람들을 해치는 독이 형성한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은 습열(濕熱)이 땅을 덮으니 독충(毒蟲)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지, 영남 지역 사람들이 본래 사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28)
유순은 장기간의 거주기간 동안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과 그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토대로 ‘장’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시도하였다. 비록 그의 설명에는 ‘장’의 증상이 고(蠱)의 증상과 유사하다고 추정하면서 여전히 그 신비로운 측면에 대한 언급에 머물고 있지만,29) 영남의 기후 환경에 대한 경험적 관찰로 나름의 결과를 도출하려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그 이전과는 다른 진전이 있었다. 특히 그는 치명적인 고독을 만들어 사람들을 해친다고 알려졌던 영남지역 주민들에 덧씌워진 타자화된 이미지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송대인들이 ‘장’이라 불린 토착 질병에 대해 품었던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唐代 사람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송대에 들어 국가의 정치적ㆍ경제적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그 배후 지역인 영남 개발의 필요성이 점차 강조되었다. 이에 따라 외부 지역과 영남지역 간의 인적 교류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해졌으며, 영남을 직접 방문한 외지인들이 체험에 근거하여 남긴 관찰과 기록은 사회적으로 높은 관심을 받으며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한편 송 조정의 입장에서도 영남지역 개발의 걸림돌이자 지역 주민의 삶을 지속적으로 위협하였던 ‘장’에 대한 해결은 과거에 비해 더욱 시급한 과제로 부상하였다. ‘장’을 비롯한 주요 질병에 대해 송 조정은 국가의 주도하에 치료법을 표준화하고 이를 성문화하여 전국에 널리 배포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후대에 소위 ‘국방(局方)’의학이라고 통칭되는 송대 국가주도의 의서 편찬은 지역사회에 이르기까지 의학의 대중화와 표준화에 있어서 중대한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시대의 변화, 지역 환경의 차이, 그리고 환자 개인마다의 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증상에 대한 변증이 결여되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30)
송 휘종 대에 칙령으로 편찬된 『성제총록찬요(聖濟總錄纂要)』는 송대 국가 주도의 ‘국방’ 의학 체계가 이룩한 주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이 저서는 병인의 분석과 더불어 질병 발생의 환경적 요인을 음양오행론적 논리에 입각해 체계적으로 해명하고자 하였으며, 기존에 개인적 관찰 속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던 신비적ㆍ주술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장’의 지리적 집중 현상을 합리적 이론의 틀 속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하늘은 서북방에 차지 않고, 땅은 동남방에 차지 않으니, 서북지역은 음(陰)이 되어 지형이 높고 두텁고 동남은 양(陽)이 되어 지형이 낮고 얇다.31) 광남(廣南)은 동남지역에 속하여 지형이 낮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낮고 얕은 지형으로 인해 음양의 두 기가 쌓이고 머무르며, 이에 따라 사방의 산들은 높고 웅장하게 둘러싸이고, 모든 강물의 흐름이 모두 이곳으로 흘러들어온다. 가을이 되어도 초목이 시들지 않고, 겨울철인데도 잠복해야 할 벌레들이 숨어들지 않으며, 차고 더운 기운의 독이 쌓여 흩어지지 않고 안개와 이슬의 기(氣)가 쉽게 사람을 해칠 수 있다. 이는 바로 기백이 말한 소위 ‘남쪽은 땅이 낮고 지하의 수기(水氣)와 토기(土氣)가 약하기 때문이니, 대개 안개와 이슬이 모이는 곳이다’라고 하는 바이다. 따라서 장기는 오로지 광남에서만 번성한다.”32)
주로 광남지역에서33) ‘장’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에 대하여, 『성제총록찬요』는 중국 전통 의학의 근간인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에서 제시된 ‘북서동남지기설(北西東南地氣說)’을 이론적 근거로 삼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34) 송대 정부가 편찬한 ‘국방’ 계열의 의서들은 대체로 유가가 정통으로 인정한 고전적 의학 이론체계에 입각하여 질병의 진단과 치료법을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의학서 편찬 사업은 단순히 의료의 실용적 목적에 그치지 않고, 지역 주민들이 무속적 요법이나 주술적 치료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발생하는 폐단을 교정하려는 ‘풍속교정(風俗矯正)’의 의도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김한신, 2022). 나아가 『성제총록찬요』를 비롯한 송대의 국방의서들은 신비주의적 관념에 근거한 민간 처방을 대신하여, 검증된 이론에 기반한 표준화된 의학 지식의 보급을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이들 의서는 새로운 의학 이론이나 처방을 창출하기보다는, 『황제내경소문』이나 후한대 장중경(張仲景)의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 등 기존의 고전 의학 이론을 재해석하여, 그것을 송대의 질병 환경에 적합하게 적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 새로운 역학적 환경, 그리고 환자들의 개별적 체질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북송대의 ‘국방’ 의서류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영남 지역의 ‘장’이 지닌 독특한 발병 양상과 풍토적 특성을 무시한 채, 『상한론』의 이론에 입각한 표준적인 열병 치료법만을 적용하는 방식으로는 효과적인 치료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한계는 남송대에 들어 더욱 두드러졌다. 화북 지역을 금(金)나라에 상실하고 수도를 남쪽으로 이전한 이후, 영남 지역은 더 이상 단순한 변방이나 배후지가 아니라 국가 통치와 사회경제적 재편의 핵심 공간으로 부상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 좌천되거나 유배되어 영남으로 부임한 관원들이 남긴, ‘장’을 두려움과 낯섦의 시선으로 재현하던 비객관적 서술은 점차 그 성격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지역에서의 직접적인 임상 경험을 통해 증상의 변별과 병세의 진단, 즉 ‘변증’의 과정을 수행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국방’ 의서들과는 상이한 새로운 처방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변화는 영남지역의 의가들뿐만 아니라, 지방관으로 파견된 학자-관료들에 의해서도 적극적으로 주도되었다. 그들은 지역 의료인들과 협력하여 풍토병의 임상적 특성을 경험적으로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송대 의학의 지역적 적응과 변용을 끌어냈다.
18ㆍ19세기 유럽의 의학자들이 식민지 개척과 ‘문명화의 사명’을 내세우며 현지에서 열대병과 맞서 싸웠던 것과 유사하게, 남송대의 학자-관료와 의가들 또한 영남 지역 개발의 최대 장애물이었던 ‘장’의 극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송대의 학자-관리들이나 의가들은 영남 지역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면밀히 관찰한 바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고, 우선 주민들이 가장 크게 고통받고 있었던 치명적인 풍토병 ‘장’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해 ‘국방’의서와 같은 공식적인 처방을 민간에 보급하거나 지역 의가들의 의방(醫方)을 수집하였다.35) 그리고 앞선 수당대와는 달리, 남송 시기에는 학자-관료들과 의가들이 직접적인 임상 경험을 토대로 한 변증 과정을 통해 ‘장’의 다양한 증상 유형에 따른 구체적인 치료법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송대 들어서 ‘장’을 다루는 다양한 처방이 담긴 의서(醫書)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36) ‘장’이라고 막연하게 통칭되던 질병을 그 증상에 따라 보다 세밀하게 구분하기[변증] 시작하였고, 그 다양한 증상에 따라 치료법을 달리하고 지역에서 전승되었던 효과적인 치료법이 수집되어 첨가되었다.
남송대 (吳興) 장걸(章傑)은 『영표십설(嶺表十說)』에서 영남의 ‘장’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질병에 대한 진단이 너무 모호하고 따라서 잘못된 치료로 인한 부작용이 많이 발생하였음을 지적한다.
오령(五嶺) 너머는 심한 더위로 병이 되는데, 또한 모든 계절에 상한과 온역(瘟疫) 등의 질병도 발생하니 그 종류는 하나가 아니었음에도 원주민들은 그 질병이 무엇인지 따지지 않고 단지 ‘장’이라고 불렀고 (따라서) 치료에 실수가 많았다.37)
장걸은 ‘장’의 증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를 상한이나 온역과 구분하지 않고, 환자 개개인의 다양한 증상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동일한 처방을 내렸기 때문에 효과적인 치료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영표십설』에서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은 ‘장’에 대한 무지와 그로 인한 문제를 남송대에 이르러 더욱 구체적으로 논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3년 동안 광서 지역의 광남서로치제사(廣南西路置制使)로 재직한 범성대(范成大, 1126–1193)였다. 특히 그는 ‘장’의 발생이 지역의 자연환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즉, 지속적인 더위와 열악한 기후 조건이 질병의 주요 원인이자 악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하며, 이를 통해 ‘장’의 역학적 발생 메커니즘을 일정 부분 추론하였다. 또한 장걸이 『영표십설』에서 강조한 바와 마찬가지로, 그 지역의 환경에서 생기는 모든 질병을 일률적으로 ‘장’으로 규정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치료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장’이란 본래 남방의 더운 지역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그곳 사람들은 맥이 느슨하고 기운이 쉽게 새어나가며, 늘 더운 기운에 시달려 피부와 혈맥이 퍼지고 치밀하지 못하다. 또 수십 리, 혹은 수백 리에 걸쳐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나 우물, 여관, 약재 등이 드물어서, 그곳에서 생기는 질병이라고 해서 반드시 모두 ‘장’으로 인한 것은 아니다. 38)
민간에서 ‘장’에 대한 진단과 치료에 있어서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을 넘어 남송대 학자-관료들은 효과적인 치료법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남송대의 주거비(周去非, 1135–1189)는 1174년부터 1189년까지 계림통판(桂林通判)으로 재직하는 동안, 자신이 직접 경험한 광서 지역 및 그 인근 남부 지역의 다양한 풍속과 외국 상인들로부터 수집한 해외 관련 정보를 종합하여 『영외대답(嶺外代答)』을 편찬하였다. 이 저술에서 그는 ‘장’의 증상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이를 증상의 양상과 병리적 특징에 따라 유형별로 세분하여 논하였다.
남방의 병을 모두 ‘장’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중주(中州)[현재의 하남성(河南省)]의 상한과 유사하다. …… 가벼운 경우에는 오한과 발열이 교차하여 나타나 그 증상이 학질과 유사하므로, 이를 ‘냉장(冷瘴)’이라 하였다. 반면 증세가 심한 경우에는 오한 없이 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며, 더욱 중한 경우에는 열이 내부에 깊이 잠복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마치 잿불 위에 누워 있는 듯한 극심한 열감이 지속되므로 이를 ‘열장(熱瘴)’이라 칭하였다.39)
요컨대, 북송대에 국가 주도로 편찬ㆍ보급된 이른바 ‘국방’ 의서들은 표준화된 처방 체계를 확립하고, 이미 검증된 치료법을 체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장’의 인식과 치료에 있어 한층 진전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곧 ‘국방’의서에서 소개한 처방들은 ‘장’의 다양한 증상과 그 환자마다의 특이성이 간과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남송대에 이르러 장걸과 범성대와 같은 학자-관료 및 지역 의가(醫家)들은 ‘장’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적인 임상적 관찰 경험을 축적하였다. 그 결과 환자들의 개별적 증상에 대한 세밀한 변증을 바탕으로 다양한 치료법이 새롭게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치료법들은 남송대 후반에 이르러 보다 체계적인 검증 과정을 거치며 수집ㆍ정리되어, 지역적 경험의학이 점차 학문적 의학 체계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4. 『영남위생방(嶺南衛生方)』의 편찬과 ‘장’인식의 변화남송 말기에 이르러 그동안 의가들의 임상 검증을 통해 효과가 있다고 판명된 처방을 엄선하여 취합한 『영남위생방(嶺南衛生方)』은 ‘장’을 극복하고자 했던 송대 의가들의 노력으로 성취한 결과물이었다. 『영남위생방』은 남송 말기 원대 초기에 활약하였던 의승(醫僧) 석계홍(釋繼洪, 1208-1289)이 1264년 편찬한 것으로서 그 발병원인에 대한 논의에서는 과거와 큰 차이가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다양한 병증을 면밀하게 구분하고 각각의 병증에 알맞은 치료법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열병 증상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상한에 대한 치료법에서 벗어나 영남지역의 환경과 발병원인에 입각한 새로운 치료법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것이다. 『영남위생방』은 석계홍의 개인 저술이자, 송대에 축적된 ‘장’ 치료 관련 의학적 지식과 처방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성과물이다. 그는 기존에 편찬된 여러 의방 중에서 실제 임상 경험을 통해 검증된 처방들을 선별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영남 지역의 환경적 특수성에 대응한 독자적 의학 체계를 확립하였다. 더욱이 『영남위생방』의 저본이 되었던 송대의 여러 의방들이 오늘날 대부분 전래되지 못하고 소실된 상황에서, 이 저서는 유일하게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영남위생방』은 송대 영남 지역에서 ‘장’ 치료법이 형성ㆍ발전해 온 과정을 구체적으로 복원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자료로 평가된다. 구체적으로 『영남위생방』에는 이구(李璆), 장치원(張致遠), 왕비(王棐), 왕남용(汪南容), 장걸(章杰) 등이 저술한 의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중 이구와40) 장치원에41) 대해서는 『송사(宋史)』에 기록되어 있지만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左鹏, 2006). 사서에 기록된 이구와 장치원은 지방관으로서 자신이 부임한 영남 지역에서 주민들에게 위협이 되었던 ‘장’에 대한 경험을 기반으로 ‘장’을 치료하는 의방을 수집하여 의서를 편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42) 특히 남송 초기에 활약하였던 이구의 경우에는 광동지역 영주(英州)와 광서지역 창오(蒼梧)에서 재직하면서 장려(瘴癘)의 창궐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는 또한 의가였던 장인의 영향을 받아 상당한 수준의 의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러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의방을 편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左鹏, 2006: 135). 그는 ‘장’을 하나의 질병 범주로 명확히 다루기 시작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馮翔, 2007), 남송 초기 그는 자신의 경험과 개인적 검증을 바탕으로 『장론(瘴論)』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독립적인 저서에는 남아있지 않고, 후대 『영남위생방』과 같은 의방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이구가 남긴 의학적 성과는 이후 장치원ㆍ왕비ㆍ왕남용ㆍ장걸 등 영남 지역의 학자-관료 및 의가들에게 계승되어, ‘장’ 치료 전통의 발전을 이끄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왕비의 경우에도 자신의 저서 『지미방ㆍ장학론(指迷方ㆍ瘴瘧論)』에서 광서성 일대에서 장기간 관직생활을 하였던 사실을 언급하였다. 왕남용 그리고 장걸의 경우는 생애가 명확히 전하지 않지만, 이들 역시 영남지역에서 지방관으로 재직하였거나 의가로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모두 영남 지역 출신이 아닌 외래 인물로서,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장’에 직면하였거나, 혹은 해당 지역으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던 이력을 지닌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들은 앞서 북송대의 ‘국방’ 의서들이 주로 이미 검증된 기존 의서들에 근거하여 처방을 제시하였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이들은 현지의 임상 경험을 토대로 작성된 이구의 의방을 계승하면서도, 그는 더욱 나아가 현지에서 오랜 임상 경험을 축적한 노의(老醫)들과 교유하였다.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는 한편, 직접 임상 치료를 통해 처방의 효과를 검증하는 등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Chen, 2015: 224).
마지막으로 『영남위생방』의 편찬자인 석계홍은 송대와 원대에 걸쳐서 활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다른 저서인 『담요집험비방(澹寮集驗秘方)』 자서(自序)에서 “젊은 시절 남쪽으로 여행하면서 여러 차례 ‘장’에 관한 다양한 처방을 영남 지방에서 간행한 바 있으며, 당시 어떤 이는 이를 통해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고 평하였다. 이제 평생에 걸쳐 수집한 여러 처방을 주제별로 정리하여 문류 형식으로 편찬하고, 이에 대한 나의 소견을 덧붙여 동지들에게 자문하고자 한다”고 하였다(荣莉, 2004: 8). 그는 남송말기에 영남지역에서 ‘장’에 대한 의방을 수집하고 다녔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후 원나라 초기 해북(海北)에서 처음 간행되었다.
다음으로 『영남위생방』에 수록된 다양한 처방들을 살펴보면, ‘장’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 대해 ‘변증’이 이루어진 뒤, 각기 다른 증상에 따라 치료법을 제시하는 이른바 ‘변증논치’의 절차를 거쳐 처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과거와 같이 표준화된 치료법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던 방식에서 한 단계 진전된 의학적 접근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영남위생방』에 인용된 왕비의 『지미방ㆍ장학론』은 ‘장’을 그 경중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왕비는 책을 읽는 틈틈이 의학에 관심을 기울여, 다행히도 그 전승을 이어 받아, 처방과 맥진[방맥(方脈)]에 대해서도 상당히 통달하게 되었다. 이후 남방으로 부임하여 이 병에 관한 의서의 이론과 실제 증상을 함께 연구하였다. 계림에 이르러 한 노의를 초빙해 그 병의 원인과 치료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그가 말한 바는 자신이 평소에 들은 바와 다름이 없었다. 의서[방서(方書)]에 이르기를 “남방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모두 ‘장’이라 부르며, 대체로 약을 복용하지 않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낼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상황을 살펴보면 과연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 계림 이남 지역에는 의약이 없고, 남방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땀이 많아 상부가 가득 차 있고 하부가 허약한데, 약을 쓸 때 함부로 발한시키거나 토하게 하거나 설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의업(醫業)을 하는 자들은 드물고, 또 그릇된 경우가 많다. 혹자는 함부로 발한(發汗)ㆍ구토[토(吐)]ㆍ설사[사하(瀉下)]의 방법을 사용하니, 이는 실한 자를 더욱 실하게 하고, 허한 자를 더욱 허하게 하여, 보해야 할 사람을 오히려 손상시키고, 부족한 자를 보충하지 못하는 꼴이 된다. 맥의 상태와 증상[맥증(脈證)]을 살피지 않으니, 그 화가 곧 눈앞에 닥칠 것이다. 요절[횡요(橫夭)]하는 사람에게는 본디 다양한 원인이 있기 마련인데, 어찌 광남지역의 풍토만이 사람을 죽게 한다고 하겠는가. 이제 의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방은 하늘의 기운이 덥고 습하며, 땅의 기운이 울체되어 증기처럼 치솟는다. 그 결과 음기는 대체로 막혀서 머무르고, 양기는 대체로 밖으로 흩어져 발산된다. 이 때문에 초목과 물과 샘물 모두가 사악한 기운을 품게 되며, 사람이 그 가운데서 살면 원기(元氣)가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 사기(邪氣)에 감응하면 병이 생기는데, 이것을 ‘장’이라 한다. 그 증상이 가벼운 경우에는 오한과 열이 번갈아 나타나 ‘학질[해학(痎瘧)]’과 유사하므로, 이를 ‘냉장(冷瘴)’이라 부른다. 중한 경우는 열기가 가득하여 낮과 밤에 마치 숯불 속에 누워 있는 것 같으니, 이를 ‘열장(熱瘴)’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한 경우에는 병이 들면 목소리를 잃게 되며, 그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이를 ‘벙어리 장[아장(啞瘴)]’이라 한다. ‘냉장’에 걸리면 목숨을 잃는 일은 없다. 그러나 ‘열장’은 병이 오래가면 결국 죽게 되고, 벙어리 ‘장’에 걸린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 죽는다. 이는 의서에 나오는 설명이다. 그러나 내 어리석은 생각으로 보건대, 소위 ‘벙어리 장’이란, 혹시 상한으로 인해 목소리를 잃는 증상이 아니겠는가? 또한 중풍(中風)으로 인해 말하지 못하게 되는 증상이 아니겠는가? 치료의 도리를 제대로 얻는다면, 간혹 또한 살릴 수 있는 경우도 있는데, 어찌 이를 “죽지 않는 자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43)
이 시기에 이르러 영남지역의 ‘장’은 막연하게 단일한 증상으로만 묘사되던 것에서 그 경중에 따라 냉장ㆍ열장ㆍ아장의 세 가지 증상으로 점차 구분되어 변증되었다. 왕비는 남방 지역에서 유행하던 ‘장’ 질환에 대한 당대의 잘못된 통념과 민간의 무지한 인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러한 질환이 반드시 지역의 사기(邪氣)나 기후의 악함 때문만은 아니며, 오히려 병의 원인과 증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발한ㆍ구토ㆍ설사 등의 처치를 남용한 의사들의 잘못된 치료 행위가 더 많은 사망을 초래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북부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상한 치료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영남지역의 고온다습한 환경과 주민들의 체질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 지역적 특성과 인체의 생리적 차이를 고려한 새로운 치료법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위생방(衛生方)』에서 말하길: “대개 장병을 앓은지 1~2일째에는 그 증상이 증한장열(憎寒壯熱)44), 신권두통(身倦頭痛)45), 구역번조(嘔逆煩躁)46), 흉격불리(胸膈不利)에서47)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지금의 실제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어찌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몸소 겪거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토록 자세히 알 수 있었겠는가? 또 말하기를 “병자는 상격(上膈, 가슴 윗부분, 위ㆍ식도 부위)이 울체되어 답답하고 흉격(胸膈, 가슴부위)이 번거롭고 초조하니, 스스로 열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한 것은, 더운 지역[염방(炎方)]의 환자들이 병에 걸리는 까닭이 양기(陽氣)가 제대로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양기가 내려가지 않으므로 허리와 무릎이 무겁고 아프며 다리와 발이 차고 궐증(厥症)48)이 있다. 이때는 비록 몸이 뜨겁지만 아래에는 이미 陰證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자는 발한제나 전리약(轉利藥)을 사용하여 치료하려 하지만, 이는 곧바로 사망에 이르게 하며 열 명 중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다. 이 점을 명확히 이해한다면, 『지요(指要)』에서 인용된 청룡탕(青龍湯), 마황탕(麻黃湯), 시호탕(柴胡湯), 승기탕(承氣湯) 등은 본래 상한를 치료하기 위한 처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처방을 가지고 만일 ‘장’이나 학(瘧)의 치료에 사용한다면, 어찌 인명을 그르치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실제로 시험하고 경험한 바를, 여러 의서에 기록된 내용과 서로 맞혀 보니, 장병을 치료하는 법은 오직 속을 따뜻하게 하고[온중(溫中)], 상역하는 기운을 안정시키며[진하(鎭下)], 정기(正氣)의 균형을 회복시키는[화해(和解)] 데 두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열이 많은 경우는 가장 치료하기 어렵다. 사기에서 비롯된 열[사열(邪熱)]을 점차 물러나게 하고, 정기를 안정되게 하여 편하게 만들 수 있다면, 단사(丹砂)와 부자(附子)와 같이 귀하고 자극적인 약물을 과하게 쓸 필요가 없다. 바로 이러한 것이 올바른 치료의 법이라 할 수 있다[득법(得法)]. 혹 열이 다소 늦게 가라앉거나, 혹은 하루걸러 한 번씩 오한과 발열이 번갈아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는 충분히 견딜 수 있고 다스릴 수 있는 일이다. 또 무엇이 해롭겠는가?49)
저자는 ‘장’에 대한 직접적인 임상 경험을 기반으로, 증상은 상한의 열증과 유사하지만, 그 병인이 다르기 때문에 기존의 상한의 처방과는 전혀 다른 것을 사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즉 ‘장’은 본디 남쪽의 무더운 지역[염방(炎方)]에서 유래했으므로 비록 몸에 열이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상한의 증상과는 달리 신체 아래에는 음증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서 강제로 열을 낮추려는 처방보다는 속을 따뜻하게 하고 올라오는 기운을 안정시키며 몸 전체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함을 강조한다.
『영남위생방(嶺南衛生方)』에서는 발열의 경중뿐만 아니라 맥의 상태[맥상(脈象)]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누고, 변증할 때는 맥상과 증상을 결합하여 판단해야 함을 강조한다. 아울러 여기서는 ‘장’의 치료에 있어 맥상의 정확한 인식과 해석이 가능한 전문 의가(醫家)의 진단에 근거하여 처방을 내리는 것이 치료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점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병을 치료할 때에는 맥상과 증상 중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약을 쓸 때는 반드시 맥상을 근거로 해야 한다. 또 만일 병자에게 외적인 증후가 양증[양후(陽候)]으로 나타나는데, 맥에서 음맥(陰脈)이 보일 경우에는 (차게 하는) 음약(陰藥)을 써서는 안 되며, 외적인 증후가 음증[음후(陰候)]으로 나타나는데, 맥에서 양맥(陽脈)이 보일 경우에는 (열을 돋우는) 양약(陽藥)을 써서는 안 된다. 만약 외증만을 의지해 약을 사용하면 열에 다섯이나 여섯은 실패하지만, 맥을 근거로 약을 쓰면 환자가 신뢰하고 나아가니(따르니)[향(向)], 만 번에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다. 『경심록(經心錄)』에서는 “상한병, 장려병, 전염병에 있어 치료가 잘못되면 그 화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순식간에 닥친다”고 하였고, 또한 옛사람이 말하기를, “병이 있어도 함부로 약을 쓰지 않더라도, 그 또한 중의(中醫)[‘정도(正道)에 선의사’]로서의 도리를 잃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을 일러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그 뜻을 말한 것이다.50)
『영남위생방』의 편찬 단계에서는, 장기간의 임상 경험과 전문적 의학 지식을 축적한 의가들에 의해 ‘장’의 병리적 특성을 정밀하게 구분하는 증상 분류 체계와 이에 대응하는 특수한 치료법이 체계적으로 구축되었다. 더 나아가 석계홍은 학질치료[치학(治瘧)]에 사용되는 상산(常山)의 효용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상산은 그 부작용으로 인하여 사용을 꺼려해 왔는데, 그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까지 제안하고 있다(荣莉, 2003: 58). 또한 『영남위생방』에 제시된 치료법들은 현대 약리학적 관점에서도 일정 부분 과학적 타당성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며, 이는 단기간의 지식 축적이 아닌 송대 의가들의 장기적 임상 실천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축적의 결과, 석계홍에 이르러서는 영남 지역의 환경적 특수성을 고려한 ‘장’의 예방법과 예방약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영남위생방』과 같은 지역에 특화된 의서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직접적인 임상 치료를 수행했던 수많은 남송대 관료와 의가들의 헌신적 노력의 산물이자, 국가적 의학 지식이 지역적 실천 속에서 재구성된 대표적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이후 『영남위생방』은 명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증보되어 영남지역을 넘어서 습열로 인한 질병 치료를 위해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의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후세에 온보학파(溫補學派)의 대표적인 의가로 추앙받는 명나라의 명의 장개빈(張介賓, 1563-1640)의 『경악전서(景嶽全書)』에는51) 「장기(瘴氣)」(권14)편에서 영남지역의 ‘장’의 증상과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다. 장개빈은 자신이 활동하였던 명나라 말기까지 역대 명의들의 정수를 널리 취하여 『경악전서』를 완성하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중 「장기」편에서 ‘장’과 관련해서 인용된 「대량(大梁)」(이구의 「이대제장학론(李待制瘴瘧論)」), 『지미방ㆍ장학론』(王棐), 그리고 「영표십설」(章杰) 등은 『영남위생방』에 인용된 바와 동일하다. 더 나아가 「치장속설(治瘴續說)」에서는 석계홍의 변증과 처방이 거의 원문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52) 따라서 『경악전서』의 명성과 함께 여기에 적극 인용된 『영남위생방』은 이후 ‘장’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이론적 해석과 처방의 원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5. 맺음말영남의 ‘장’은 고대부터 중원인들에게 단순한 풍토병을 넘어선 미지의 공포로 인식되었다. 그 실체는 자연 환경에 기인한 감염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호전적 이민족, 주술, 그리고 죽음을 초래하는 독기의 형상으로 재현되며 타자화되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이러한 미지의 질병에 대한 대응은 근본적인 전환을 맞는다. 특히 송대의 유학자-관료와 지역의 의가들은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관찰을 통해 기존의 모호한 질병 범주를 보다 구체적이고 구분 가능한 병증으로 분화시켰고, 그에 상응하는 다양한 치료법을 마련하였다.
송대 정부는 표준화된 의료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였고, 이는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 『성제총록찬요』, 『화제국방』 등 ‘국방’ 의서의 편찬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들 의서는 획일화된 처방의 한계 속에서 지역 질병의 복잡성과 환자들의 개인차를 고려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송대 남부지역에서 활동한 의가들의 직접적 경험과 ‘변증’에 기반한 임상 기록들이며, 이는 이후 『영남위생방』과 같은 종합적 의서로 결실을 맺는다.
원대(元代) 초기에 편찬된 『영남위생방』은 영남 지역의 풍토병으로서 막연한 공포의 상징이던 ‘장’을 체계적인 병리 개념으로 전환시킨 대표적 성과로, 송대 의학이 이룩한 인식론적 전환과 그 성과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저술이다. 이 의서는 단순히 처방을 나열한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지역적, 임상적 맥락을 고려하여 병증을 분류하고 각기 다른 처방을 제시한다. 이는 기존 ‘상한’ 중심의 열병 치료 모델을 극복하고, 지역의 특수성과 질병의 다변성을 반영한 실증적 지식체계를 확립하려는 의학적 시도였다. 이 책에 수록된 송대 의가들의 처방과 진단 체계는 이후 영남 지역의 풍토병 치료에서 표준적 준거로 기능하였으며, 원ㆍ명대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명대의 저명한 의학자 장개빈이 편찬한 『경악전서』이다. 그는 ‘장’에 관한 병증과 치료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원대 초의 『영남위생방』을 주요 인용 자료로 활용하였다. 이는 송대에 형성된 영남 의학의 지역적 경험과 임상 지식이 단절되지 않고, 원ㆍ명대를 거쳐 중국 의학의 보편적 체계 속에서 재맥락화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결국, 송대의 ‘장’에 대한 대응은 단지 의료기술의 진보로서뿐만 아니라, 알려져 있었으나 길들여 지지 않은 질병을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지식 체계로 편입하려는 지적 도전이었다. 이는 송대의 지식인들이 중국 남방지역의 문명화와 실용적 통치의 하나로 의료를 재편하고, 그 중심에 인간 경험과 합리적 분석을 두고자 했던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장’은 더 이상 미지의 재앙이나 피해야 할 저주의 기운이 아니라, 병리학적으로 규정되고 상당한 수준으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의학 지식의 진보가 인간의 인식과 활동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역사적 과정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후 원대 대표적인 시들을 모아놓은 『원시선(元詩選)』에 실려 있는 다음의 두 시구는 ‘장’에 대한 변화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돌아갈 짐을 바라보니 평범하지 않고, 장(瘴)의 고장[장향(瘴鄉)]에서 샘물을 마시며 읊었던 시가 있구나.54)
새벽에 안개와 장[장기(瘴氣)]이 걷히니 천 겹의 산이 드러나고, 봄기운이 가득한 시내와 연못에는 물이 한 장대로 차 있네.55)
위의 두 시구에 나타난 ‘장’의 표현은 원대에 이르러 ‘장’이 막연한 공포의 질병, 즉 실질적 위협으로만 인식된 것이 아니라, 영남 지역의 기후와 환경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관습적 어휘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원대에도 ‘장’에 대한 두려움은 곳곳에 만연해 있었지만, 앞서 살펴본 후한시기 복파장군 마원이나 당대(唐代)인들의 ‘장’에 대한 묘사와는 확연한 차이가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는 ‘장’에 대한 의학적 이해와 치료 체계가 정립되면서, 질병에 대한 통제 가능성이 크게 향상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장’은 더 이상 불가해한 재난이나 초자연적 질환으로 인식되지 않고, 의학적으로 진단ㆍ치료 가능한 범주의 질병으로 편입되었다.
Notes2) 오령산맥 혹은 南嶺산맥이라고 부름. 越城嶺ㆍ都龐嶺ㆍ萌渚嶺ㆍ騎田嶺ㆍ大庾嶺의 다섯 산맥으로 이루어져 “오령산맥”으로 불린다. 南嶺산맥은 화중 지방과 화난 지방을 분리한다. 산맥의 남쪽은 열대 기후로 쌀의 2기작이 가능하다.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많아 동식물 자원이 풍부하다. 3) 이 지역은 당대에는 嶺南道라고 불리었고, 영남은 오령산맥 남쪽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862년 영남도는 영남동도와 영남서도로 각각 분할되었다. 971년 오대시기 南漢이 멸망한 뒤 宋의 영토가 되었다. 997년, 송에서 이 지역에 대한 행정구역을 구획할 때 廣南路를 廣南東路와 廣南西路로 분할하였으며, 이것이 현재의 廣東省과 廣西省이라는 명칭의 시초가 되었다. 4) ‘타자화(othering)’: 집단의 구성원과 비(非)구성원을 구분하는 용어는 매우 다양한데 이러한 사회적 구분은 차이(difference)의 구성에 의존하며, 이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한다고 분류된다. 이런 구분은 흔히 이항적 또는 대립적 쌍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이주민과 비이주민’, ‘정규 난민과 비정규 난민’과 같은 식이다. 이러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타자(the Other)’에 대한 다양한 서사를 구성하며, 이를 통해 ‘비(非)소속’의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소속의 구성 과정은 사회 그 자체를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근본적 역할을 수행하며, 넓게 말해 ‘소속’이라는 개념(예: 국가적ㆍ민족적 소속의 구성)은 뚜렷하게 구분 가능한 동질적 집단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낳게 된다. 이러한 구성된 개념들은 집단 소속의 사회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관점에 따라 다양한 용어와 접근이 집단 소속의 구성 과정을 설명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타자화(Othering)’ 개념이다. 이 개념은 오늘날 공중보건을 비롯한 여러 학문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타자화’는 단순한 범주화(categorization)나 차별(discrimination) 개념을 넘어서는 강력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개념의 강점은 지식 구조, 권력 관계, 범주화 과정을 서로 연결된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들이 서로 다른 수준에서 미치는 영향을 분석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또한 타자화 개념은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고려하여 권력 관계를 드러내고 가시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나아가 타자화 개념은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ism theory)과 이론적으로 양립 가능하다는 점에서 학제 간 연구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Akbulut & Razum, 2022: 1). 5) 위진남북조 시기 남조의 (劉)宋에서는 영남지역의 이민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광주(廣州)의 여러 산에는 모두 俚族과 獠族이 살고 있으며, 그 종류가 번성하고 번잡하다. 예로부터 여러 차례 침탈과 약탈을 겪었고, 세대를 이어 고통받아 왔다.” 『宋書』 卷97, 「夷蠻ㆍ南夷ㆍ林邑國」 p. 2379, “廣州諸山並俚ㆍ獠, 種類繁熾, 前後屢爲侵暴, 歷世患苦之.” 6) ‘장(瘴)’이라는 용어는 영어권 학계에서 흔히 미아즈마(miasma) 또는 말라리아(malaria)로 번역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문맥에 따라 장이 유해한 독기[장기(瘴氣)]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남방 지역에 고유한 것으로 간주된 다양한 질병이나 증상을 지칭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기존 번역어를 그대로 수용하는 데 신중을 기하게 만든다. 더 중요한 것은, 송대 저자들이 ‘장’이라는 용어 아래 분류한 증상과 질환의 범위가 지나치게 다양하여 이를 단순히 말라리아로 번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통상적인 영어 번역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장’이라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욱 무난할 것이다(Chen, 2015: 212). 그 밖에도 양빈(楊斌, Yang Bin)과 장 총 엘런(Cong Ellen Zhang) 역시 중국의 ‘장’을 주제로 발표한 논문들에서 전통적인 영어 번역어 사용을 지양하고 있다(Yang, 2010; Zhang, 2011). 한편 ‘장’이라는 용어가 다양한 질병들을 포괄하고 광범위한 지리적 영역에 걸쳐 사용된 점을 고려할 때, 좌붕(左鵬)은 3세기 이래 장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발생한 여러 질병을 포괄하는 혼성어(portmanteau term)로 기능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左鵬, 2002: 261–272). 9) 독기와 같은 오염물질과의 접촉에 의해 질병에 감염된다는 病理學的 인식은 동양과 서양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였다. 1880년 학계에서 완전히 폐기되기 전까지 서양에서는 콜레라, 클라미디아, 흑사병 등 질병의 발병원인이 ‘미아즈마’(Miasma, 고대 그리스어: μίασμα, “오염”)라 불리는 ‘나쁜 공기’에 있다는 주장이 정설로 널리 받아들여졌었다. 물질이 부패하여 악취가 나는 곳은 주로 병원균이 번식하고 전염병이 창궐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미아즈마’이론은 정설로 취급되며 매우 신빙성 있는 학설로 받아들여졌지만, 세균의 존재를 몰랐던 당시에 질병 원인을 병원균이 아닌 악취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론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질병을 막기 위해 악취를 제거해야 한다는 기존의 인식 탓에 정부 차원에서 도시 환경미화에 노력을 기울이는 등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10) “영남의 청초장(靑草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발생하는 瘴)과 황망장(黃芒瘴: 黃茅瘴. 가을에 초목이 노랗게 변할 때의 瘴)은 嶺北의 상한과 같다. 남쪽 지방은 따뜻하므로 태음(太陰, 즉 늦가을~겨울)의 때에도 초목(草木)이 누렇게 시들어 떨어지지 않고, 겨울잠을 자야 할 벌레들이 제대로 숨지 못하고, 따뜻한 기운 때문에 잡다한 독기[잡독(雜毒)]가 생겨난다. 여러 가지 독이 따뜻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까닭에 영남은 중춘에서 중하(음력 2월에서 5월)까지는 청초장이 유행하고, 계하에서 맹동(음력 6월에서 10월)까지는 황망장이 유행한다. 쓰는 약과 사람의 체질을 헤아려 보면 영남의 상한은 절기(節氣)가 대부분 따뜻하므로 찬 약을 쓰더라도 영북보다는 덜 차게 쓰며, 때로 더운 약을 쓰더라도 또한 그 중량을 줄여 3분의 1을 쓴다. 다만 이 병은 겉으로 증상이 더디게 나타나기는 하나 경락(經絡)을 통하여 전해지는 점은 상한과 같다. 그러나 음양이 병을 받아, 표리(表裏)가 함께 발현되니, 반드시 환자의 병의 근원을 밝히고 알아야 하며, 탕약이나 뜸 치료를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諸病源候論』 卷之十, 「瘴氣候」, “夫嶺南靑草黃芒瘴, 猶如岭北傷寒也. 南地暖, 故太陰之時, 草木不黃落, 伏蟄不閉藏. 雜毒因暖而生, 故岭南從仲春訖仲夏行靑草瘴. 季夏訖孟冬, 行黃芒瘴. 量其用藥體性, 岭南傷寒, 但節氣多溫, 冷藥小寒於岭北, 時用熱藥, 亦減其錙缽, 三分去二. 但此病外候小遲, 因經絡之所傳, 與傷寒不異. 然陰陽受病, 會同表裏, 須明認患源, 不得妄攻湯艾.” 11) ‘장’의 실체에 대한 깊이 있는 본격적인 연구로서, 蕭璠은 ‘瘴’을 곧 말라리아로 규정하고, 운남ㆍ귀주 및 영남 지역에서 ‘瘴气’가 발생한 원인은 남방의 지리 환경, 특히 산지ㆍ구릉 등의 지형과 식생 등 자연 요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蕭璠, 1993). 그리고 인구의 이주와 지역 개발로 인한 장병의 확산의 관계에 대해서 范家偉는 이주민 유입, 농업 개발, 군사 정벌, 여행과 상업 활동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인구 이동과 ‘장’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면역력이 없는 집단이 영남으로 유입된 것이 ‘장’ 감염 확산의 근본 원인이라고 보았다. 특히 당대에 영남 지방병을 전문적으로 다룬 의서가 출현한 것은 북방 인구의 영남 이주와 개발, 그리고 지방병에 대한 인식이 심화된 결과로 해석한다(范家偉, 1998: 27-58). 보다 장기간의 관점에서, 龚胜生 등은 중국의 瘴域(‘장’ 발생 지역) 변천사는 인구 증가, 토지 개간, 경제 발전에 따른 환경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瘴气=말라리아’라는 입장을 취하며, 악성 말라리아 분포 지역이 점차 축소된 현상은 인간이 자연을 이용ㆍ개조하여 자연환경을 개선해 온 결과를 반영한다고 보았다(梅莉ㆍ晏昌贵ㆍ龚胜生, 1997). 한편 문명화 과정 즉 문화의 확산의 관점에서 左鹏은 송ㆍ원 시기의 ‘瘴病’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역사적으로 남방에 유행한 ‘瘴疾’과 화하(華夏) 문화 확산 간의 관계를 논의한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송ㆍ원 시기 ‘瘴疾’의 분포에 비교적 안정된 핵심 지역이 존재하였으며, 그 분포 범위의 변동은 중원 왕조 세력의 진퇴와 흥망을 반영하고, 각 지역에서 나타나는 ‘瘴情’의 경중 차이는 중원 문화의 영향력 강약을 반영한다고 본다(左鹏, 2004). 12) 송대 ‘장’에 대한 사대부들의 저술의 확산과 ‘장’에 대한 담론의 확산 현상을 필기류 장르의 유행의 관점에서 살펴본 연구로는 Cong Ellen Zhang의 연구가 가장 대표적이다(Zhang 2011: 191-225). 여기서 더 나아가 陳韻如는 ‘장’과 관련된 필기류 장르의 범람 속에서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개인 검증 방식(personally-verified approach)’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장’에 대한 의학적 접근이 더욱 정교화되어 갔다고 설명한다(Chen, 2015). 15) 북송 大觀 元年(1107년)에, 북송 정부는 하이난(海南)의 려모산 중심부에 진주를 설치하였다. 주의 治所는 현재의 하이난성(海南省) 東方市 려족 자치현(黎族自治縣) 동남쪽 廣壩 지역에 위치한 鎭寧縣이었다. 진주는 廣南西路에 속하였다. 이후 政和 元年(1111년)에, 광남서로의 轉運副使 陳仲宜가 진주를 폐지할 것을 상주하여, 해당 지역은 昌化軍에 편입되었다. 16) 『太平廣記』 286, 「幻術」 3, 陳武振, “唐振州民陳武振者, 家累萬千, 爲海中大豪. 犀象玳瑁倉庫數百, 先是西域賈漂泊溺至者, 因而有焉. 海中人善咒術, 俗謂得牟法. 凡賈舶經海路, 與海中五郡絕遠, 不幸風漂失路, 入振州境內, 振民即登山披髮以咒咀. 起風揚波, 舶不能去, 必漂於所咒之地而止, 武振由是而富. 招討使韋公幹, 以兄事武振, 武振沒(沒原作犀象. 據明抄本改.)入. 公幹之室亦竭矣.” 18) 예를 들어 唐太宗 貞觀 초에 盧祖尚은 交州都督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영남의 瘴癘에는(장려에 걸리면) 모두 매일 술을 마신다고 합니다. 신은 술을 마시는 것이 불편하오니 간다면 돌아올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당태종은 그를 朝堂에서 참수하게 된다. 비록 뒤에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여 관직을 복권해 주었지만, 이러한 고사는 당시 영남지역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이 느꼈을 공포와 조정의 어려움을 방증하고 있다. 『舊唐書』 卷 69, 「盧祖尚傳」, p. 2522, “對曰: 「嶺南瘴癘, 皆日飲酒, 臣不便酒, 去無還理.」 太宗大怒曰: 「我使人不從, 何以爲天下!」 命斬之於朝, 時年三十餘. 尋悔之, 使復其官蔭.” 19) 三湘: 호남성 남부의 湘江 유역을 가리키며, 특히 洞庭湖 남쪽의 세 지류(資ㆍ沅ㆍ澧)가 합류하는 지역을 뜻한다. 고대에는 이 일대를 “三湘之地”라 하여, 남방의 깊은 습지와 역병이 많은 지역, 즉 ‘장’이 발생하는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三湘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멀고 위험한 남방 유배지의 상징적 표현이다. 20) 前漢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젊은 나이에 천거되었으나 讒訴를 받아 장사로 좌천되었다가 결국 33세에 요절했다. 그는 그곳에서 『吊屈原賦』를 지어, 자신과 같은 신세의 굴원을 조문했다. 21) 「送楊少府貶郴州」 “明到衡山與洞庭, 若爲秋月聽猿聲. 愁看北渚三湘遠, 惡說南風五兩輕. 靑草瘴時過夏口, 白頭浪裏出湓城. 長沙不久留才子, 賈誼何須弔屈平.” (沈德潛, 2013). 22) 白居易, 『白氏長慶集』 卷3, 「新豐折臂翁」, “無何天寶大徵兵, 戶有三丁點一丁, 點得驅將何處去, 五月萬里雲南行, 聞道雲南有瀘水, 椒花落時瘴煙起, 大軍徒涉水如湯, 未過十人二三死, 村南村北哭聲哀, 兒別爺娘夫別妻, 皆云前後征蠻者, 千萬人行無一回.” 24) 『新唐書』 卷163, 「孔戣傳」, pp. 5009-5010, “自貞元中, 黃洞諸蠻叛, 久不平. 容ㆍ桂二管利虜掠, 幸有功, 乃請合兵討之. 戣固言不可, 帝不聽, 大發江ㆍ湖兵, 會二管入討. 士被瘴毒死者不勝計, 安南乘之, 殺都護李象古, 而桂管裴行立ㆍ容管陽旻皆無功, 憂死; 獨戣不邀一旦功, 交ㆍ廣晏然大治.” 25) 이 병은 岭南에서 생겨났는데, (영남은) 山瘴의 氣로 둘러싸여 있다. 그 증상은 오한발열이 일어나되 때때로 그쳤다가 일어난다.(그치고 일어나는 데에 때가 있다). 대개 산과 하천의 근원지인 산봉우리에서 (나오는) 濕하고 독기가 있는 기체[와사(瓦斯)]가 그 원인이다. 또한 그 병은 더위로 인한 학질보다 더 심하다. 『諸病源候論』 卷之十, 「山瘴瘧候」, “此病生於嶺南, 帶山瘴之氣. 其狀, 發寒熱, 休作有時, 皆由山溪源嶺嶂濕毒瓦斯故也. 其病重於傷暑之瘧.” 26) 예를 들어 大鱉甲湯(큰 자라의 등껍질 탕)의 효능에 대해서, 山水瘴氣의 熱毒 이외에도 사지가 약하고 경련이 있고, 풍독이나 온독 등의 질환의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備急千金要方』 卷7, 「湯液第二, 大鱉甲湯」, “治腳弱風毒, 攣痺氣上, 及傷寒惡風, 溫毒, 山水瘴氣熱毒, 四肢痺弱方.” 29) ‘蠱毒’에 대한 언급 이외에도 유순은 “영남에서는 하늘에서 물체가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처음에는 彈丸처럼, 점차적으로 수레 바퀴(車輪)처럼,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그 것을 접하게 된 사람들은 병이 생기는데, 이를 瘴母(瘴氣)라고 한다”라고 하여 ‘장’의 신비성을 강조한다. 『嶺表錄異』 卷上, “嶺表或見物自空而下, 始如彈丸, 漸如車輪, 遂四散. 人中之即病, 謂之瘴母.” 30) 송대 정부는 효험이 검증된 역대의 처방을 수집하여 이를 표준화된 관방의료기구용 처방집, 즉 ‘국방’ 서적으로 편찬ㆍ배포하는 데 주력하였다. 992년 칙명을 받아 왕회은(王懷隱) 등이 편찬한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과, 1078년 태의국(太醫局)에서 편찬된 『太醫局方』을 토대로 하여, 이후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송 휘종 대관(大觀) 연간(1107~1110)에 배종원과 진사문이 이를 개정ㆍ편찬하여 『太平惠民和劑局方』(이하 『화제국방』)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1151년에 다시 간행되었으며, 1208~1252년 사이에 증보되어 『增註太平惠民和劑局方』으로 확장 출판되었다. 또한 휘종 정화 연간(1111~1118)에 출간한 『聖濟總錄纂要』 등도 송 정부가 배포한 대표적 국방 서적이다. 이러한 국방서적의 출간과 배포는 국가의 권위와 국가기관의 운영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당시 복잡화하고 있는 처방을 단순화하여 적용하려는 실용화 경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국가에 의해 1076년 買藥所가 세워지고 1103년 5개의 매약소가 추가로 세워져서 화제국에 의해 만들어진 약들을 판매하였다. 이들은 국방서적의 처방에 따라 미리 제조해 놓은 약들을 시장의 3분의 2 가격으로 팔았다. 이러한 제도는 남송에서도 이어져서 1148년 여러 도시에 惠民藥局이 세워졌고 이는 원대에까지 이어졌다(민병희, 2023: 1091-1092). 31) 동서의 지형적 불균형에 대한 관점은 일찍이 前漢 시기 淮南王 劉安(179~122 BCE)이 지은 『淮南子』 「天文訓」에서도 확인된다. “옛날에 共工이 顓頊과 천자(帝)가 되려고 다투다가, 성을 내어 不周之山을 건드렸더니, 하늘의(하늘을 떠받치던) 기둥이 꺾이고, 땅의(땅을 매달고 있던) 끈이 끊어졌다. 하늘이 서북으로 기울었기에, 해와 달과 별들이 그 쪽으로 쏠리게 되었고, 땅이 동남으로 차지(滿) 않게 되었기에, 빗물과 더러움과 티끌이 그리로 모이게 되었다.” “昔者共工與顓頊爭爲帝, 怒而觸不周之山. 天柱折, 地維絕. 天傾西北, 故日月星辰移焉; 地不滿東南, 故水潦塵埃歸焉.” 한편 『黃帝內經素問』 「陰陽應象大論」에서는 이러한 지형적 불균형의 관점을 확대하여, 인체의 좌우 불균형문제와 연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하늘은 서북방이 부족하므로, 서북은 음의 방위가 되고, 사람의 오른쪽 귀와 눈은 왼쪽만큼 밝지 못한 것이다. 땅은 동남방이 차지 않으므로, 동남은 양의 방위가 되고, 사람의 왼쪽 손발은 오른쪽만큼 강하지 않다.” “天不足西北, 故西北方陰也, 而人右耳目不如左明也. 地不滿東南, 故東南方陽也, 而人左手足不如右强也.” 32) 『聖濟總錄纂要』 卷5, “天不滿西北, 地不滿東南, 西北陰也. 土地髙厚; 東南陽也, 地土卑下. 而廣南屬東南, 則土地之卑下可知矣. 以土地卑下, 而陰陽二氣所藴積, 是以四圍之山崇髙相環, 百川之流悉皆歸赴. 及秋草木不凋瘁, 冬令蟄蟲不伏藏, 寒熱之毒, 藴積不散, 霧露之氣, 易以傷人. 此岐伯所謂南方地下水土弱, 葢霧露之所聚也. 故瘴氣獨盛于廣南.” 34) “의가가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 한 가지 病임에도 治療가 각각 같지 않았는데도 모두 낫게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岐伯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地勢 때문입니다.” “醫之治病也. 一病而治各不同皆愈何也.歧伯對曰: 地勢使然也.” 또한 『黃帝內經素問』에서는 남방의 병리학적 특성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남방은 천지가 기운을 키우고 기르며 陽氣가 盛한 바의 곳으로 그 땅이 낮고 물과 흙이 약하며 안개와 이슬이 모이는 곳이니, 그 백성들이 신맛[산(酸)]을 좋아하여 삭힌 것을 먹으니, 그러므로 그 백성들이 모두 피부결[주리(腠理)]이 치밀하고 얼굴빛이 붉으며, 주로 경련과 마비[연비(攣痺)]의 병을 앓는다. 이러한 질병은 섬세한 침[미침(微鍼)]으로 치료하는 것이 마땅하니, 바로 이러한 까닭에 九鍼의 기술 또한 남방에서 비롯된 것이다.” 『黃帝內經素問』 「異法方宜論」, “南方者, 天地所長養, 陽之所盛處也, 其地下, 水土弱, 霧露之所聚也, 其民嗜酸而食胕, 故其民皆緻理而赤色, 其病攣痺, 其治宜微鍼, 故九鍼者, 亦從南方來.” 35) 송 조정의 ‘국방’의서 편찬에 대해서는, (Goldschmidt, 2007)를 참고할 것. 36) 李璆의 『瘴瘧論』이나 章傑의 『嶺表十說』과 같은 영남의 ‘장’에 관한 전문적인 논저가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소식과 심괄의 『蘇沈良方』, 송휘종시기에 칙명으로 편찬된 『聖濟總錄纂要』, 唐慎微의 『政和新修經史證類備用本草』, 許叔微의 『類證普濟本事方』, 陳師文의 『太平惠民和劑局方』, 張杲의 『醫說』, 陳自明의 『婦人大全良方』과 같은 송대 폭발적으로 출간된 다양한 의서 속에 ‘장’과 관련된 질병을 다루는 항목을 독립적으로 갖추고 있었다(馬强, 2007: 25). 39) 『嶺外代答』 卷6, 「風土門」, “南方凡病, 皆謂之瘴, 其實似中州傷寒. …… 輕者寒熱往來, 正類病瘧, 謂之冷瘴. 重者純熱無寒, 更重者蘊熱沉沉, 無晝無夜, 如臥灰火, 謂之熱瘴.” 42) 장치원은 관직에서 은퇴하기 직전 영남지역인 광주(廣州)에 지사로 부임하였다. 『宋史』 卷 376, “(張致遠) 八年正月, 再召爲給事中. 出知廣州. 尋以顯謨閣待制致仕. 十七年卒, 年五十八.”; 이구는 상소를 올려 조정과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여 영주(현재의 廣東省 英德市)와 청계진(현재의 廣東省 東莞市)으로 폄적당하여 부임하였다. 『宋史』 卷377, “及燕既平, 責監英州清溪鎮.” 43) 『嶺南衛生方』 「指迷方ㆍ瘴瘧論」, “棐讀書之餘, 留意醫學, 幸得其傳, 頗識方脈. 就闢入南, 研究此證與方書. 至桂林, 延一老醫與議, 則所說無疑於所聞. 方書謂: 南人凡病皆謂之瘴, 率不服藥, 惟事祭鬼. 自今觀之, 豈不信然. …… 桂林以南無醫藥. 且居南方之人, 往往多汗, 上盈下虛, 用藥者不可汗, 不可吐, 亦不可下. 其業醫者, 既鮮且謬, 或妄發汗吐下, 是謂實實虛虛, 補有餘損不足. 不察脈證, 其禍可立而待也. 橫夭者固多端, 豈獨廣之能殺人哉. 今觀方書之說, 皆謂南方天氣溫暑, 地氣鬱蒸, 陰多閉固, 陽多發泄, 草木水泉, 皆稟惡氣, 人生其間, 元氣不固, 感而爲病, 是爲之瘴, 輕者寒熱往來正類痎瘧, 謂之冷瘴. 重者蘊熱沉沉, 晝夜如臥炭火中, 謂之熱瘴. 其尤重者, 一病則失音, 莫知其所以然, 謂之啞瘴. 冷瘴必不死, 熱瘴久而死, 啞瘴無不死者. 此方書之說也. 然以愚意觀之, 所謂啞瘴者, 非傷寒失音之證乎? 又豈非中風失語之證乎? 治得其道, 間亦可生, 安得謂之無不死者耶.” 49) 『嶺南衛生方』 「指要方續論」, “衛生方云: 凡瘴病一二日, 其證不出於憎寒壯熱, 身倦頭痛, 嘔逆煩躁, 胸膈不利. 今驗之. 何嘗不然. 非身履目擊. 能知其詳盡如此耶.又曰: 病者上膈鬱悶. 胸膈煩躁. 便自以爲有熱. 殊不知炎方受病者. 陽氣不降而然.陽氣不降. 故腰膝重疼. 腿足寒厥. 此時雖身熱. 而陰證已具在下也. 或者用發汗轉利藥. 則不旋踵受斃. 十無一生. 明此. 則指要所引青龍ㆍ麻黃ㆍ柴胡ㆍ承氣湯. 豈不但是治傷寒法耶? 若用之治瘴瘧. 豈不誤人? 愚以所試. 而會諸方書所言. 治瘴之法. 只當溫中鎮下. 正氣和解. 其間熱多者. 最爲難治. 能使邪熱漸退. 正氣就安. 不甚費丹砂ㆍ附子. 是爲得法也. 或熱退少遲. 或分爲間日寒熱. 尤是可耐可理之事. 又何傷乎?” 50) 『嶺南衛生方』 「張給事瘴瘧論」, “凡治病, 脈與證不可偏廢. 用藥須憑脈. 且若病人, 外證是陽候, 脈見陰脈, 不可用陰藥. 外證見陰候, 脈見陽脈, 不可用陽藥. 若憑外證用藥, 十失五六; 憑脈用藥, 病人信向, 萬不失一. 經心錄曰, 傷寒瘴癘時疾, 錯療禍如反掌. 且古人云, 有病不藥, 不失爲中醫者, 此之謂也.” 51) 『경악전서(景岳全书)』는 명나라의 장개빈(張介賓)이 지은 총 64권으로 이루어진 의서로서, 이 책은 『내경(內經)』, 『난경(難經)』, 『상한론(傷寒論)』, 『금궤요략(金匱要略)』 등의 논설을 우선적으로 채택하고, 역대 명의들의 정수를 널리 취하여 저자의 경험과 결합함으로써 독자적인 체계를 이룬 저작으로 평가된다. 금원(金元) 시대 이후, 명대에는 많은 의가[시의(時醫)]들이 하간(河間, 유완소)과 단계(丹溪, 주진형)의 학설을 계승하면서도 각기 하나의 설만을 고집하고, 기존의 처방을 답습하며 한랭하고 공벌적인(寒凉攻伐) 약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비록 설기(薛己) 등을 중심으로 한 온보(溫補) 이론이 이미 대두되었지만, 그 폐단은 여전히 뿌리 뽑히지 않았다. 장개빈의 의학 이론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배경으로 등장하였다. 그는 유완소나 주진형의 주장에 반대하여, “양이 반드시 남는 것이 아니며, 음은 항상 부족하다”(陽非有餘. 陰常不足)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52) 『景岳全書』 卷14, 「瘴氣」 治瘴續說, 繼洪曰: “予寓嶺南旣久, 愈知瘴疾不易用藥. 若病人身熱而復寒, 謂之‘冷瘴’, 不換金正氣散主之. 若身熱ㆍ胸痞, 或嘔ㆍ或噎, 大便不利者, 嘉禾散. 若病輕而覺有食積, 兼用些少感應丸, 無積者不可用. 若病重者, 不可妄用轉利, 惟當溫中固下. 若冬末春初, 因寒而作大熱者, 小柴胡湯; 夏月因暑氣者, 六和湯. ○若身極熱, 而頭極痛, 脈數者, 爲熱瘴, 宜用南人挑草子法, 亦不可不服藥. 第此症病深, 最爲難治, 蓋凉藥多不可用, 惟宜熱藥, 須得法以用之. 如附子湯冷服者是也, 然, 此非工巧以處之則不可. 如身熱ㆍ汗不多, 頭痛未解, 或且與和解散. 如腰以上極熱, 腰以下稍凉, 胸膈煩渴, 腰腿重疼, 或大便溏滑, 其脈數而按之不實, 此陽浮陰閉也, 惟李待詔生薑附子湯最妙, 凡初病者, 以生薑ㆍ附子能發散耳. 若病經去汗旣多, 虛煩潮上, 則惟恐其不歛ㆍ不降, 宜用熟附ㆍ乾薑ㆍ沈香而冷服之, 若便利, 則不必沈香; 如煩甚, 則少加竹茹; 渴甚, 多加人蔘ㆍ五味; 咳逆加丁香ㆍ淡竹葉. 若煩躁而有異象, 眩惑, 夜不安寢, 可略與溫膽湯, 惟大便利者, 不可服. 若煩渴大作, 宜奪命散, 或用冷湯, 倍加人蔘ㆍ附子. 若煩熱, 大便自利, 或小便不澁, 不可以赤爲熱, 或膝脛以下稍凉, 此乃病邪所激, 氣血俱虛, 表熱無以養中, 故水熱而內虛也. 可急服薑附湯之類, 及灸氣海ㆍ足三里. 若至四肢厥冷, 兩足冷甚, 頭額虛汗, 或時咳逆, 脈數而促, 其證多危, 惟以三建湯之屬, 能歛心液, 能壯眞陽, 可以更生也. ○又有啞瘴, 卽熱瘴之甚者. 醫書謂: ‘血得寒則凝泣, 得熱則淖溢’, 故熱瘴, 面赤ㆍ心熱, 舌破ㆍ鼻衄, 皆瘴熱沸其血上湧所致. 故宜用挑草子法. 甚則血上塞其心竅, 故昏不能言, 或但噫噫作聲, 卽啞瘴也. 治此者, 當散其血, 用《局方》黑神散, 立見神效. 其或涎迷心竅, 而舌强者, 亦有之, 却非眞啞瘴也. 及兼風痰之症者, 俱當審察而後用治”(本論有無稽之方, 俱削去不錄). 참고문헌 REFERENCES1. 歐陽修ㆍ宋祁, 『新唐書』 (北京: 中華書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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