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In recent years, growing attention to the social integration of persons with psychosocial disabilities into their local communities has intensified calls to shift Korea’s hospital-centered mental health system toward a community-based model. Historically, the Korean mental health system has often been framed through the narrative of a “delayed transition,” which suggests that the country is belatedly undergoing the deinstitutionalization experienced in Western societies during the 1960s and 1970s. However, this linear account fails to explain a crucial divergence: during the very decades when deinstitutionalization was being debated and implemented in several Western countries, Korea was rapidly expanding its psychiatric institutions and hospital beds, entrenching a long-term institutional regime.
This article reexamines the 1960s through the 1980s as a critical juncture in the formation of Korea’s mental health system by tracing the debates and strategic interactions among the state, the psychiatric profession, and civil society surrounding the enactment of the Mental Health Act. During the 1960s and 1970s, authoritarian regimes adopted a social defense framework that cast people with mental illness as potential threats, thereby legitimizing a system of confinement. The 1983 “prayer house” (gidowon) scandal, however, publicly exposed the realities of institutionalization and briefly opened a window for communitybased alternatives within the psychiatric profession. The Korean Neuropsychiatric Association adopted community mental health as its official orientation, and in the mid-1980s a community mental health project was carried out on Ganghwa Island. Yet this opening was foreclosed by a convergence of countervailing forces: As the legislative process leading to the 1985 Mental Health Act became structured around a dichotomy between psychiatric nursing homes and hospitals, the psychiatric profession pursued a strategy of transition “from facilities to hospitals,” thereby consolidating an admission-centered system. This strategy aligned with state interests in expanding hospital beds for purposes of social defense while simultaneously curtailing public welfare expenditure. At the same time, the expansion of health insurance and medical aid programs in the 1980s increased service utilization, creating economic incentives for further growth in psychiatric beds. Meanwhile, civil society’s human rights discourse emerged as an extension of resistance to the authoritarian regime and focused on procedural safeguards against involuntary hospitalization; however, it did not lead to a fundamental reconfiguration of the confinement-centered system itself.
Rather than reducing the formation of the Korean mental health system to a problem of developmental delay—often framed as a “fifty-year gap with the West”—this study highlights the multiple possibilities and alternative trajectories embedded in its history and invites a historically grounded rethinking of the current Korean mental health system.
1. 들어가며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탈원화와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보건ㆍ복지 정책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의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신건강 영역 또한 예외가 아니며, 최근 정신장애인 지역사회 통합돌봄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제도 전환의 필요성과 그 구체적 방향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전준희, 2021; 홍선미ㆍ전준희ㆍ하경희, 2022; 변재관 외, 2024).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정신보건체계는 서구가 1960~70년대에 경험했던 탈원화 과정을 수십 년의 시차를 두고 뒤늦게 겪고 있다는 평가가 제기되어 왔다(김연옥, 2010; 김문근ㆍ하경희, 2016).
정신보건의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듯, 지역사회 정신보건(community mental health)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에서 전개된 탈원화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다. 미국에서는 1946년 「정신보건법(National Mental Health Act)」 제정과 국립정신보건연구소 설립, 1963년 「지역사회 정신보건법(Community Mental Health Act)」 제정을 계기로 대규모 탈원화가 추진되었으며(Bloom, 1984; 하경희, 2019), 유럽의 각국에서도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정신병원에서 지역사회로의 이동이 이루어졌다(Mechanic & Rochefort, 1990; Foot, 2014).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서구의 자립생활(independent living) 운동, 정상화(normalization) 및 회복(recovery) 패러다임, 장애의 사회적 모델(social model of disability), 지역사회중심재활(community-based rehabilitation, CBR) 등의 담론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도 빠르게 소개되었다(김용득, 2002).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ㆍ정책적 담론의 유입과는 달리, 한국의 정신보건 현실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장기 거주와 장기 입원이 가능한 정신요양시설과 만성 정신과 병상이 오히려 급격히 증가하였고, 정신장애인의 장기 수용이 구조적으로 고착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조성진 외, 2006; 박종익 외, 2008). 이러한 한국의 사례는, 동시기 서구의 국가들에서 정신병원 중심 체계를 해체하고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로 전환하려는 탈시설ㆍ탈원화 정책이 확산되던 흐름과는 정반대의 궤적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사례로 평가되기도 한다(Hewlett & Moran, 2014: 113). 선행연구가 지적하듯 이러한 괴리가 단순히 ‘정신장애의 특수성’만으로 설명되기는 어려우며, 왜 그에 대한 사회적 대응과 제도적 실천이 이처럼 상이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충분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한국사회복귀시설협회, 2006: 34).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1960~80년대 전 세계적으로 탈시설과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전환이 논의되고 실행되던 시기, 한국이 정반대의 경로를 걷게 되었던 것은 어떠한 사회사적 영향하에서 이뤄진 것인가? 당시 국회와 정부, 학계, 언론은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가? 이들은 정신장애인과 정신보건 제도에 대해 어떠한 상(像)을 그리고 어떤 논쟁을 전개하였는가? 한국 정신보건제도는 다른 경로로 발전할 가능성은 없었는가? 장기수용 중심 구조는 처음부터 예정된 귀결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경로가 상상되고 제안되었으나 제도화되지 못한 결과였는가? 본 논문은 이러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정신보건법 제정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집단 간의 논쟁과 전략을 추적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정신보건체계의 제도적 윤곽이 형성되기 시작한 1960~80년대를 사회사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서구와 한국의 ‘50년의 격차’라는 단선적 진단을 넘어, 제도 형성이 이루어진 역사적 조건과 행위자들의 선택, 그리고 실현되지 못한 대안적 가능성들을 입체적으로 복원할 것이다.
그간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 이전, 특히 1960~80년대 한국 정신보건제도의 형성 과정을 다룬 사회사적 연구는 충분히 축적되지 못하였다. 서구 정신의학의 국내 수용과 일제강점기 정신보건의 역사를 규명한 연구들이 일부 존재하며(이나미ㆍ이부영, 1999; 이부영 외, 1989; 이부영, 1994; 정원용, 1997; 정원용ㆍ이나미ㆍ이부영, 2006; 이방현, 2012; 2013; Yoo, 2016),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 이후의 정책적 변화와 논쟁을 추적한 연구 또한 비교적 풍부하게 축적되어 왔다(김문근, 2019; 하경희, 2019; 이정연, 2021; 허순임ㆍ정연, 2025 등). 특히 2010년대 초ㆍ중반 정신장애 당사자 운동의 부상과 2015년 헌법재판소의구 「정신보건법」상 강제입원 조항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에는 「정신건강복지법」을 둘러싼 규범적 논의가 급증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부터 1995년 이전까지, 즉 제도적 토대가 형성되고 장기입원 중심의 구조가 고착화되던 시기의 전개 과정을 사회사적으로 해명한 연구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한국 정신보건의 역사 전반을 정리하고자 했던 이부영(1999), 백재중(2020), 이상(2023) 등의 작업이 있으나, 이 연구들 역시 전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통사적 서술 속에서 해당 시기를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어, 1960~80년대의 정책 논쟁과 제도 설계 과정에서의 갈등을 입체적으로 밝히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해당 시기를 중점적으로 다룬 예외적 연구로, 임지연(2017)은 1960~70년대 한국의 정신의학 담론을, 김일환(2025)은 1960~90년대의 부산 지역 정신요양원 및 정신병원의 격리수용체계의 변천사를 분석하였다. 그러나 임지연은 정신병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인식 변화에, 김일환은 정신요양원과 정신병원의 지역적 형성 과정에 각각 분석의 초점을 두고 있어, 본 연구가 중점으로 다루고자 하는 정신보건 제도의 형성 과정 속 각 이해관계 집단의 역학을 충분히 해명하지는 못했다.
이에 본 연구는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 이전, 오늘날 정신보건 제도의 구조적 근간이 형성된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말까지의 정신보건법 입법 논쟁의 전개과정을 추적한다. 이를 위해 국회에 제출된 법안과 각 이해관계 집단이 작성한 법안 초안, 국회 소위원회 속기록, 법제 제ㆍ개정 관련 신문 및 잡지 기고문, 전문학회 논문과 발표 기록, 정부 보고서, 정신과 의사들의 회고록 및 인터뷰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ㆍ검토하였다. 자료원으로는 국가기록원, 신문기사 아카이브 및 대한신경정신의학회를 비롯한 주요 전문가 단체의 연보와 회보, 학술지, 회고록 및 인터뷰집, 그리고 보건복지행정 관련 정부 문서를 활용하였다.1)
2. 1960~70년대: 사회방위 수단으로서의 정신보건법1960년대 이전 한국 사회는 농업을 위주로 한 대가족 체제를 중심으로 작동했다. 돌봄의 부담은 가족 단위 내부에서 분산ㆍ흡수되었고, 정신적ㆍ인지적 기능에 제한이 있는 구성원 또한 농업 노동이나 마을 공동체 내의 부분적 역할을 수행하며 생활할 여지가 존재했다. 생산활동이 집약적 기술이나 고도의 규율을 요구하지 않았던 농경사회에서는, 일정한 기능 저하가 곧바로 공동체에서의 이탈로 직결되지 않아 사회문제화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서동우, 2006: 78; 2010: 145).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정신장애는 국가적ㆍ사회적 차원에서 관리되어야 할 ‘공적 문제’로 전면화되기보다는, 가족과 마을 공동체 내부에서 비공식적으로 조정ㆍ흡수되는 사안에 가까웠다. 물론 정신장애인에 대한 낙인과 배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이 대규모 시설화나 국가적 관리 체계의 구축을 요구하는 수준의 사회문제로 구조화되지는 않았다.
1) 1959년 정신위생법안과 1960년대 정신보건 담론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양상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행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되었고, 인구의 공간적 재편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1960년 전체 인구 중 도시 인구의 비율은 28%였으나, 1970년에는 41%, 1980년에는 57%로 증가하여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 인구가 농촌 인구를 초과했다(조애저ㆍ공세권, 1983: 91; Moon, 1996: 9-10). 또한 1960년대 도시 인구의 연평균 증가율은 5.3%에 달했으며, 서울의 경우 1966~70년 사이 연평균 9.4%라는 급격한 인구 팽창을 경험했다(박수영ㆍ권원기, 1992: 154-156).
이와 같은 급속한 도시화는 농촌 기반의 대가족 체계를 해체하였고, 이로써 가족 내부에서 가족 내부에서 분산되던 돌봄 부담이 그대로 노출되어 사회 문제로 가시화되었다. 농업 중심의 느슨한 노동 구조와 달리, 산업화된 도시 속에서 정신장애인의 일탈 행위나 비적응적 행동은 더 이상 공동체 내부에서 조정 가능한 범주로 머무르기 어려웠다. 1960년대 들어, 정신장애인은 가족 내부의 문제를 넘어 도시 공간에서 ‘관리되어야 할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임지연, 2017; 백재중, 2020).
1960년 전후 언론에 등장하는 정신장애인의 형상은 대체로 범죄자와 겹쳐 있었다. 정신장애인은 거리를 배회하며 “닥치는 대로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후 수욕(獸慾)과 물욕을 채우는” 존재, 혹은 “순간적인 발작으로 닥치는 대로 흉기로써 주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존재로 묘사되곤 했다.2) 관련 보도에서는 정신장애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위치시키면서 시설 수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언론과 시민 기고문에서는 “입원 혹은 수용이 필요한 중증장애자가 오만이 넘는데도, 시설은 고작 1천 500명분에 불과”하다는 등, 시설과 병상의 부족에 관한 통계 수치가 반복적으로 제시되었다.3) 이와 더불어 정신장애인의 수용을 위한 법적 근거가 부재하여 국민 생명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는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1960년대 정신보건 문제는 이처럼 ‘위험한 타자’에 대한 수용 관리와 사회방위의 필요성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사회문제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응하여 보건사회부(이하 ‘보사부’) 내부에서도 법제 정비의 필요성이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때마침 1959년 세계보건기구(WHO)가 1960년을 ‘정신건강의 해’로 선포하고 전 세계적인 정신건강 인식 제고 캠페인을 전개하자, 정부 역시 정신보건 영역에 대한 제도적 정비에 착수하였고, 그 일환으로 1959년 「정신위생법」 제정을 시도했다.4) 1959년 법안의 목적은 “정신적 부적응자의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치료 대책과 정신병 환자의 처우 문제, 그리고 정신활동이 심한 사람들의 환경 개선”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설정되었는데,5) 그 구체적 내용은 사실상 일본의 1950년 「정신위생법」을 사실상 번역한 수준에 가까웠다(유석진, 1982: 311).
그러나 당시의 현실적 여건은 법제화를 뒷받침하기에 매우 취약했다. 1960년 전후 국내 정신과 의사는 약 20명에 불과했고, 정신병상은 약 600병상 내외로,6) 법안에 규정된 각종 절차와 보호ㆍ수용 체계를 운영하기에는 인력, 시설, 예산 모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1960년 6월 7일 보사부 주최로 정신위생법 입법안 심의회의가 열리기도 했으나,7) 결국 1959년 정신위생법안은 구체적 입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정부의 입법 추진 움직임과 병행하여, 민간에서도 전문가들이 자발적인 정신위생법 제정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에는 정신과 의사, 보사부 공무원, 법조인, 사회사업가, 심리학 및 교정 전문가 등이 모여 사단법인 「대한정신건강협회」를 결성하였고, 정신보건법 제정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발표하며 제도적 정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8) 협회 발기인이었던 정신과 의사 오석환은 “선진제국에서는 정신위생법이 마련되어 정신병 환자들은 필요하면 국가에서 관리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수용보호를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 정신위생법이 없으므로 많은 정신병 환자들이 노두(路頭)에 방황하고 학대를 받고 있다”고 지적하며 전국적 정신보건법 제정 운동을 촉구했다.9) 그러나 이러한 협회의 요구 또한 정신질환 당사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보다는 대중 계몽적, 사회방위적 문제의식에 더 가깝게 제기되었다. 협회 설립의 배경은 “끔찍한 살인 사건을 비롯하여 자살, 매춘, 음모, 모략 등 모든 범죄와 사회 및 가정 문제는 정신장해 또는 적응이상에서 오는 정신불건강자의 행위”를 치료ㆍ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설정되었다.10) 오석환 역시 정신박약아와 불구 아동 문제를 “인도상ㆍ인권옹호상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악의 처리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11)
이러한 사회방위적 시각 속에서, 이 시기 정신보건 정책 구상은 사실상 정신 장애인을 수용할 시설과 병상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의 논의로 축소되어 다뤄졌다. 보사부에 의해 1965년 발간된 『보건사회백서』는 국내에 “약 20만 명의 주요 정신병 환자가 있고 그중 약 4만 명이 요입원 대상자”라고 추산하면서, “정신 병상은 1,100[병]상뿐이니 요입원환자의 1/40도 못되는 형편”이라며 수용시설의 확대가 매우 절실하다고 진단했다(보건사회부, 1965: 76; <표 1> 참조).
2) 1967~70년: 법안의 변형 속 사회방위적 성격의 강화이처럼 정신보건 문제가 수용시설과 병원의 부족 문제로 규정되던 상황에서, 1967년 여름에 발생한 두 건의 살인 사건은 정신보건 입법의 움직임이 재점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67년 7월 2일 경북 칠곡에서는 한 남성이 삽으로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6명을 살해했고, 7월 29일 강원도 원성에서는 농부가 낫으로 마을 주민 5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가해자의 정신질환력에 초점을 맞췄다.12) 언론에서는 “이들의 범죄는 이성이 마비된 미친 상태에서의 범죄기에 더 한층 잔혹하고 끔찍스럽다”며, “살인 사건 중 10% 이상이 정신장애자들에 의한 집단 살인사건으로, 작년에 비해 3.5배나 늘어났다”는 통계와 함께 정신장애인의 위험성을 강조했다.13)
이와 같은 보도는 정신장애를 범죄와 직결된 사회적 위험으로 재현함으로써, 정신보건 문제를 사회방위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여론을 강화하였고, 그 해결책을 시설 및 병상 확충의 필요성으로 수렴시켰다.14) 정부는 이러한 분위기에 대응하여 1967년 8월 초 국립병원 확충과 국립정신위생연구원 설립 계획을 발표하고, 정신위생법 제정을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15)
이러한 정부의 법안 입법 계획이 전해지자, 주요 이해 당사자인 정신과 의사 단체 내부에서도 독자적인 입법 대응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967년 11월 11일, 정신과 의사 단체인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이하 ‘대신정’)는 ‘정신위생법 제정 추진 상임위원회’를 구성하여 자체 초안 마련에 착수하였고(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6: 4; 1995: 28), 완성된 초안은 대한의학협회의 검토를 거쳐 1968년 8월 취지문과 요지문을 첨부한 제6장 36조의 「정신위생법(안)」으로 정리되어 정부에 제출되었다(유석진, 1982: 311; 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5: 4; 1995: 92).16) 이후 대한의학협회는 이를 일부 수정하고 법안의 명칭을 「정신보건법(안)」으로 변경하였으며, 보사부는 다시 이를 수정ㆍ보완하여 1970년 국회에서 심의 절차를 밟게 되었다(한국 정신의학 100년사 편찬위원회, 2009: 127).17)
당시 1968년 대신정안 및 이를 수정한 대한의학협회안은 일본의 1950년 「정신위생법」을 상당 부분 참고한 것이었다.18) 일본의 1950년 「정신위생법」과 1968년 대신정안을 비교하면, 제1조의 목적 조항과 제3조 정신장애자의 정의에서 구조와 문언상의 유사성이 두드러진다[표 2]. 정신장애인의 정의를 내림에 있어 일본법이 규정한 “정신병자, 정신박약자 및 정신병질자”라는 표현을 거의 그대로 원용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어 온 ‘보호의무자 의무’ 조항 또한 일본 「정신위생법」 제20조에 그 기원을 두고 1968년 대신정안 제16조로 거의 변형 없이 이식되었다. 아울러 정신질환자 발견 시 국민의 신고의무(1950년 일본 「정신위생법」 제23조; 1968년 대신정안 제21조; 1970년 보사부안 제5조 제1항)와 경찰관의 통보의무(1950년 일본 「정신위생법」 제24조; 1968년 대신정안 제23조; 1970년 보사부안 제5조 제2항) 역시 조문 체계와 내용 면에서 거의 동일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68년 대신정안과 대한의학협회 수정안, 그리고 1970년 보사부안은 심의ㆍ수정 과정에서 일부 핵심적인 변화를 겪었다. 가장 주요한 변화는 1968년 대신정안ㆍ대한의학협회안에서 1970년 보사부안으로 수정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당시 주요한 참고가 되었던 1950년 일본 「정신위생법」과 1968~70년 사이에 제안된 세 법안의 목적 및 정의 조항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정신장애인에 대한 정의는 1950년 일본 「정신위생법」과 1968년 대신정안 및 대한의학협회안 모두에서 “정신병자, 정신박약자 및 정신병질자”와 같은 방식으로 규정되어, 전반적으로 의료화된 정신병리학적 언어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 보사부안에 이르러서는 그 정의가 정신장애로 인하여 “공안상 위해를 가하는 자 또는 위해를 가할 현저한 사유가 있는 자”로 규정되면서 대상에 대한 정의 방식 자체가 변화했다. 이는 정신보건법의 적용 대상을 질병 중심의 의료적 범주가 아니라 “공안상 위해” 여부라는 사회방위적 기준에 따라 재구성한 것으로, 당시 보사부가 정신보건법과 정신장애인을 어떠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와 같은 관점 전환은 법의 ‘목적’ 조항에서도 드러난다. 1970년 보사부안은 이전 안들에서 제한적이나마 천명되었던 정신장애 당사자의 인권에 대한 고려와, 의사 집단이 견지해 온 ‘치료’ 중심의 논리를 사회방위적 방향으로 재편했다. 제1조에서 1950년 일본 「정신위생법」과 1968년 대신정안, 대한의학협회 수정안은 모두 “정신장애자의 의료 및 보호” 및 “그 예방”을 핵심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 보사부안은 대신정ㆍ대한의학협회안의 목적 조항을 대폭 수정하여 “정신장애자의 의료 및 보호와 공안상 위해를 예방하여 사회의 안녕질서를 도모함”으로 수정했다. 이처럼 ‘공안상 위해’와 ‘사회 안녕질서’를 목적으로 명시한 법의 목적 조항을 통해, 해당 법을 사회방위적 기능을 전면에 내세운 입법으로 재구성하려 했던 보사부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오늘날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보호의무자의 의무’ 규정 역시 1950년 일본 「정신위생법」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일본 정신위생법 제20조; 1968년 대신정안 제16조), 이는 멀리는 식민지기 치안법률과도 연관된다.19) 이는 국가가 부담해야 할 관리와 보호의 책임을 보호의무자로 통칭되는 가족에게 전가함으로써, 정신질환자와 관련된 위험 관리의 부담을 가족에게 귀속시키는 구조를 갖는다. 일본 「정신위생법」 제22조는 “보호의무자는 정신장애자에게 치료를 받게 함과 동시에, 정신장애자가 스스로를 상해하거나 또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도록 감독하고, 또한 정신장애자의 재산상 이익을 보호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규정하였는데, 1968~1970년 사이에 제안된 국내 법안들 또한 이러한 ‘보호의무자’ 개념과 그 기본 구조를 거의 그대로 차용했다.
보호의무자에게 전가된 이러한 책임의 범위는 일련의 수정 과정을 거치며 점차 확대되고, 보다 명시적인 사회방위적 관점으로 재편되었다. 1968년 대신정안에서는 “보호의무자는 정신장애자에게 치료를 받게 하며 정신장애자 신체상의 보호 및 재산상의 이익을 도모하고 타인에 대한 위해를 방지”할 의무만을 부과하였으나, 1968년 대한의학협회안에서는 여기에 더해 시ㆍ읍ㆍ면장에 대한 신고 의무까지 명시함으로써 가족이 정신장애 당사자를 국가에 보고해야 할 의무까지 지도록 했다. 한편 1970년 보사부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호 의무자가 정신질환자의 “공안상 해를 방지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표 3]. 이는 사회방위 중심의 정신보건법 구상과 더불어, 행정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감시와 통제의 책임을 가족에게 부여하려는 당시 정부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신보건법제의 주요 쟁점이기도 한 비자의입원 조항에서도 유사한 양상이 확인된다. 일본 「정신위생법」 제29조의 ‘지사에 의한 입원’은 (1) “진찰의 결과, 그 진찰을 받은 자가 정신장애자”일 것과 (2) “스스로를 상해하거나 또는 타인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을 것을 요건으로 명시했다. 이에 비해 1968년 대신정안은 ‘진단’이라는 명확한 요건을 두지 않았고, 자ㆍ타해 위험 역시 “본인의 안전 보호 및 사회공안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대체하였다. ‘스스로를 상해’하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칠 우려라는 구체적 위험 개념에 비해, ‘본인의 안전보호’나 ‘사회공안상 필요’한 경우라는 표현은 입원의 외연과 자의적 판단의 여지를 현저히 확장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1968년 대한의학협회안에서는 1950년 일본 「정신위생법」과 유사하게 의학적 진단 요건이 다시 추가되었으나, “정신장애자 또는 그 의심이 있는 자”라고 규정함으로써 ‘의심’이라는 또 다른 모호하고 자의적인 범주를 삽입하였다[표 4]. 이는 한편으로는 정신과 전문 인력이 부족했던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자, 정신보건법 규율 대상의 외연을 넓혀 보다 많은 사람들을 수용 관리하려는 의도가 투영된 결과로 파악될 수 있다.
나아가 1970년 보사부안은 1968년 대신정안과 대한의학협회안에서 유지되었던 절차적 권리보장 장치마저 삭제했다. 1968년 대신정안에서는 비록 선언적일지라도 “정신환자의 인권을 최대한으로 존중하기 위하여 강제입원 및 퇴원의 절차를 강력히 규제”할 것이라 그 입안 취지를 설명하였고(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68: 42), 국가에 의한 비자의입원에 대해서는 환자의 재감정 신청을 통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인권 보호 절차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재감정 신청권은 1950년 일본 「정신위생법」에서는 없었던 규정으로, 제한적이나마 환자의 인권 보호를 고려하여 새롭게 신설된 것이었다.20) 그러나 1970년 보사부안에서는 이러한 이의 제기 절차 전반이 삭제되면서, 강제입원에 대한 통제 장치를 사실상 삭제하는 방식으로 수정되었다. 이와 같이 1968~1970년 사이 정신보건법안이 대한의학협회와 보사부에 의해 수정되는 과정은, 초기 기획에서 부분적으로 나마 강조되던 치료와 인권 보장의 색채가 점차 약화되고 사회방위와 행정적 통제의 수단으로 법안이 재편되어 가는 흐름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냉전의 격화와 남북 갈등이 고조되던 당대의 정치ㆍ사회적 분위기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1968년은 1월 12일 김신조 등의 청와대 습격 사건, 1월 23일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10~11월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 해였다. 이어 1969년 7월 25일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고 주한미군이 감축되면서 안보 불안은 지속적으로 증폭되었고, 박정희 정권의 국가적 위기의식을 심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1968~70년은 그 대응 과정에서 향토예비군 창설, 국민교육헌장 선포, 주민등록제도 정비 등 반공 이데올로기와 국민에 대한 감시ㆍ통제 장치가 제도적으로 강화되던 시기였다(박태균, 2005; 홍성태, 2012). 체제 유지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고 내부 질서 유지와 위험 관리의 논리가 정책 전반을 지배하던 1960년대 말의 상황을 고려할 때, 박정희 정권의 정신보건법 수정안이 개인의 치료와 권리보장보다는 사회질서 유지와 잠재적 위험 통제를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기울게 된 배경 역시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당시 보사부는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역량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정신보건을 전담하는 부서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원조 자금이 빠르게 감소하고 국가 재정 기반의 취약성이 심화되던 1970년 무렵, 보건의료 제도 정비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지출하는 것은 정권으로서 크게 부담되는 일이었다(박태균, 2020: 255).21) 여러 언론에서 수용시설 확충을 촉구하는 보도를 내보낸 데 이어 관련 학회에서도 범죄 예방과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정신보건법 제정과 병원 확충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건의했으나, 입법 추진은 지지부진하였다. 결국 예산의 불충분성과 행정적 준비 부족 등으로 인해 1970년 보사부안은 국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22)
3) 정신보건 법제의 공백 속 정신질환자의 시설 내 수용정신보건법의 입법 공백을 실질적으로 메운 것은 빠르게 늘어나던 집단수용시설이었다. 1960~70년대 도심에서 대규모로 발생한 걸인과 부랑아는 “사회악”으로 명명되었고(추지현, 2018),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민간과의 공조 아래 수용시설을 대규모로 확충하며 사회방위의 일환으로 시설 수용을 적극 추진했다(김아람, 2011; 김일환, 2020). 196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의 출범 이후 「생활보호법」, 「아동복리법」, 「윤락행위등방지법」이 제정되었고, 각 시ㆍ도 차원에서 관련 조례가 마련되었으며, 1970년에는 「사회복지사업법」이 제정되면서 시설 설립의 형식적 근거는 점차 갖춰져 갔다. 이에 1960~70년대에는 ‘성인불구시설’과 ‘부랑인시설’ 등 각종 사회복지시설과 다수의 미인가 시설이 빠르게 확산되었으며,23) 정신보건법이 부재한 상황에서 정신장애인의 수용은 사실상 이러한 수용시설들 내부에서 함께 이루어졌다(이용표ㆍ강상경ㆍ배진영, 2022: 47).
그러나 행정기관에 의한 단속이나 비자의적 시설 수용, 그리고 시설 내 감금은 명확한 법률적 근거가 없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그 법적 정당성과 절차적 통제 장치 모두가 취약한 상태였다.24) 이러한 제도적 공백을 보완하고 취약 계층에 대한 통제를 보다 용이하게 수행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1975년 12월 내무부 훈령 제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을 발표했다. 해당 훈령 제1장 제1절은 부랑인 단속의 목적을 “건전하고 명랑한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도시환경을 정화”하는 데 두는 한편, “안보적 측면에서 범법자, 불순분자 등의 활동을 봉쇄”하는 것까지 명시함으로써 그 사회치안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내무부 훈령 제410호는 1972년 유신체제 이후 강화된 총력안보 체제의 맥락 속에서 제정된 것이었다(김재완, 2015: 22;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118-119). 1971년 광주 대단지 사건과 그에 대한 정권의 대응에서 드러나듯, 부랑인 통제는 유신체제 하 사회통제 기획의 핵심적 축 가운데 하나로 기능했다(김원, 2008: 199; 김일환, 2020: 293). 그리고 이러한 대규모 부랑인 단속ㆍ수용 과정에서 다수의 정신장애인들 또한 시설에 함께 수용되었다.
특히 내무부 훈령 제410호가 규정한 단속 및 수용 대상의 광범위성과 모호성은 정신장애인 수용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훈령은 단속 대상을 ‘부랑인’과 ‘준부랑인’으로 구분하여 규정하였는데, 먼저 부랑인은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정류장 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해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었다.25) 나아가 훈령은 “걸인, 껌팔이 등 부랑인 외에 노변 행상, 빈 지게꾼, 성인 껌팔이 등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 즉 부랑인에 준(準)하는 자까지 단속 대상으로 포함하였다.26) 이처럼 상위법의 명확한 근거 없이 단속과 수용의 대상을 광범위하게 규정함으로써, 현장 집행 기관의 자체 판단에 따라 광범위한 단속과 수용이 가능하도록 되어 사실상의 재량적 권한이 부여되었다.27)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과 자의성은 경찰 등 국가 권력이 도시 하층민과 정신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수용 처분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로 기능했다(유진 외, 2020: 4).
1970년대 부랑인 시설 수용자 중 정신질환자가 차지하는 정확한 비율이나 당시 미인가 시설에 수용된 규모에 대한 공식 통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식 통계 조사가 시작된 1980년대 초 시점에 시설 내 정신질환자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1970년대에도 다수의 부랑인 시설 및 미인가 시설이 사실상 정신장애인 수용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건사회통계연보 및 감사원 보고서를 통해 세부 내역이 확인되는 최초 시점인 1985년 기준으로 보면, 정신요양원 수용인원은 총 11,581명(인가 시설 8,349명, 비인가 시설 3,232명), 부랑인 시설에 수용된 정신질환자는 4,046명으로 집계되어, 당시 정신병원 병상수 3,148개를 크게 상회한다[표 5].
이는 1970~80년대 정신장애인 수용이 병원 중심이 아니라 부랑인 시설이나 정신요양원을 비롯한 수용시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보사부가 1970년 정신보건법안에서 구상한 사회방위적 성격의 정신장애인 수용은, 별도의 정신보건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수용시설을 중심으로 한 행정적 장치를 통해 우회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1980년대 초: ‘격리수용 체제’와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갈림길1) 제5공화국 출범과 정신보건 담론1979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 이후 1980년 9월부터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1970년대 급격한 도시화ㆍ산업화 과정에서 누적된 부조리, 빈부격차, 사회적 불만이 폭발한 결과로 해석했다(박해남, 2019). 이에 신군부는 사회 안정과 질서 회복을 정권 운영의 핵심 과제로 전면에 내세우고, 이를 통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이자 권력을 지속ㆍ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1980년대 국가 주도의 대규모 “사회정화운동”에 착수하였고(사회정화위원회, 1988; 김아람, 2021)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발표하며 이러한 지향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였다.29)
이러한 기조는 제5공화국 출범을 앞둔 1980년 12월 제정된 사회보호법에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사회보호법은 “전통적인 형벌만으로는 개선ㆍ교화되지 않는 상습범과 조직범 그리고 현행법령으로는 규제할 수 없는 고질적인 심신장애(心身障礙) 범죄인”으로부터 “선량한 대다수 국민과 사회를 보호”하고, 나아가 “범죄의 공포서 사회를 해방”한다는 명분 아래 정부 입법으로 제안되었고,30) 1980년 12월 5일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정부 제출안을 거의 그대로 통과시켰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사회보호법의 입법 후 수정 과정에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심신장애자(心身障礙者)’까지도 일응의 보호처분의 대상으로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사회보호법 정부 원안 제2조는 “수개의 형을 받거나 수개의 죄를 범한 자” (제1호),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또는 집단의 수괴 및 간부인 자”(제2호)와 더불어 “금고 이상의 죄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심신장애자ㆍ마약류중독자 및 알코홀중독자”(제3호)를 법률상 보호처분 대상자로 명시했다.31) 그러나 국가보위 입법회의 법제사법위원회의 법률안 수정 과정에서 제3호 속 ‘금고 이상의 죄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이라는 자구가 빠졌고,32) 최종적으로는 “심신장애자ㆍ마약류중독자 및 알코홀중독자” 전반이 사회보호법의 규율 대상이 되었다.33) 이는 범죄력과 상관없이 심신장애인 자체를 범죄와 연관시켜 바라보는 당대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당시 언론 역시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적응능력이 부족한 정신장애자와 마약ㆍ알콜중독자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고 “이들의 무책임한 행동이 사회불안의 한 소지가 돼있다”며, 사회보호법은 “이들[을] 격리수용하여 완치 후 사회에 복귀시키도록 함으로써 복지사회구현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평했다.34) 1980년대 제5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정신장애는 이처럼 범죄예방과 사회정화의 맥락 속에서 격리수용의 대상으로 더욱 공고히 위치되었다.
이러한 사회보호 및 사회정화의 기조 속에서, 전두환 대통령 선출 직후인 1980년 9월, 보사부는 1970년대 이후 중단되었던 정신보건법 제정 추진 계획을 다시 공표했다.35) 이에 대응하여 주요 이해관계자였던 정신과 의사 단체도 신속히 조직적 대응에 나섰다. 대신정은 1980년 11월 4일 임시 이사회에서 ‘정신보건법 특별위원회’를 결성하고(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5: 4),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한시적 기구를 출범시켰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95: 30). 이어 1980년 11월 12일에는 보사부의 의견조회에 대한 공식 회신을 제출하였고,36) 11월 26일부터 총 9차례의 위원회 회의와 한 차례의 공청회를 거쳐 1981년 3월 보사부에 정신보건법안 마련을 건의하는 등 적극적 활동을 전개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0; 1995: 31). 당시 정신과 의사 단체의 주요 인사들은 정권의 격리수용 위주의 정책에 큰 틀에서 동의하는 입장을 취했다. 훗날 대신정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연세의대 신경정신과 유계준 교수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법원이 강제 수용치료를 명령하는 제도가 하루 빨리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 주장하였고, 서울의대 조두영 교수 또한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 가정에 방치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강조했다.37)
그러던 와중 1982년 4월 26~27일, 경남 의령에서 63명이 살해당한 ‘우순경 총기난사 사건’은 우발적 범죄에 대한 사회적 공포를 증폭시켰다. 비록 사건의 가해자는 평소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적이 없었고 음주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으나, 범죄의 우발성으로 인해 다시금 정신질환자 범죄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에 국회는 해당 사건 처리를 위해 1982년 5월 7일부터 11일까지 임시국회를 소집하여 대정부 질의를 진행하고 건의안을 채택했다. 임시 국회 질의에서 보사부 차관 김병수는 정신질환자 대책으로 정신보건법 제정을 추진하고, 국립정신병원의 병상을 증설하며, 각 시ㆍ도에 1개소씩 공립 정신요양원을 설치하겠다고 밝혔다.38) 같은 해 보사부의 「입법추진계획」 역시 정신보건 입법의 필요성으로 “강력범의 발생 등 사회 문제가 대두”했음을 지적하면서, “정신병 환자 강제입원”과 “정신병상의 확장 유도”를 주요 입법 요지에 포함시켜 사회방위적 관점을 한층 강화했다.39)
또한 당시 보사부는 1970년대에 정신보건법안이 좌초된 주된 이유 중 하나였던 예산 소요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의 대응 논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1983년 보사부 내부 문건은 재정 부족 문제를 언급하면서, “선진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국가관리 위주로 인하여 나타나는 재정 압박 등의 문제점을 피하고자 정신질환자의 보호와 의료수용에 중점”을 두고, “보호의무자의 임무를 법 내용으로 [함으로써] 정신질환자의 유기사례 근절”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다.40) 이는 민간시설 수용 중심의 관리와 보호의무자 책임 강화를 통해 낮은 정부 재정 부담으로 다수의 정신질환자를 통제함으로써, 입법 추진의 가장 큰 장애로 지적되어 온 예산 문제를 우회하려던 당시 보사부의 입장을 잘 드러낸다. 이처럼 1980년대 초 정신보건법 제정 논의는 사회정화와 사회보호의 담론 속에서 재점화되었으며, 질병 치료-사회방위-격리수용의 논리가 다시 한번 결합되는 양상을 보였다.
한편 19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정신보건법 입법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같은 시기 정신의료 전문가 집단 내부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또 다른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회방위와 격리를 축으로 한 국가 주도의 통제적 기획과는 다른 방향에서 전개된 흐름, 곧 ‘지역사회 정신보건’을 지향하는 실천적ㆍ이론적 움직임이었다. 1983년 기도원의 비인권적 실태를 폭로한 다큐멘터리 방영은 그러한 두 가지 상이한 흐름이 분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 1983년 기도원 실태의 폭로: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갈림길1983년 7월 24일 KBS 심층취재 프로그램 「추적 60분」은 “긴급 점검 기도원”이라는 제목으로 미인가 정신질환자 수용시설에 대한 잠입 취재 보도를 내보냈다. 방송은 시설 내부에서 이루어지던 가혹행위, 열악한 생활환경, 사망자 발생 이후의 시신 유기 의혹 등을 생생한 영상으로 전달하였고, 이는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기도원 실태를 조명하는 기사들이 주요 일간지 1면을 장식하였고,41) 수많은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그동안 잠재적 범죄자로 표상되어 온 정신장애인이 오히려 수용의 ‘피해자’일 수 있음을 전사회적으로 드러낸 이 사건은, 한국 정신보건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는 정신과 의사 집단 내부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1983년 8월 30일 서울대병원에서 개최된 대신정 제3차 이사회에서는 비의료 정신질환자 수용소 문제와 정신보건법이 주요 안건으로 논의되었고, 10월 21일 추계 학술대회 직후 열린 정기총회에서는 오후 6시부터 7시까지 기도원 관련 영상을 단체 상영하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3a: 3). 같은 자리에서 기도원 실태를 고발한 「추적 60분」 방송인에 대한 표창이 이루어졌으며, 이어 정신과 의사 단체로서의 입장과 지향을 밝히는 결의문(이하 「1983년 결의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3b: 2).
대신정의 「1983년 결의문」의 골자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대신정 회원인 정신과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지역별 정신보건센터를 설치’하도록 독려하자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비의료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정신과 환자 수용시설의 양성화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3a: 3-4; 이부영, 1983: 337). 당시 대신정 회장이었던 이부영은 첫 번째 결의의 취지를 “가난한 사람들이 양질의 의료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정신과 의사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지역사회 정신보건에 참여해야겠다는 것”이라 해설했으며, 두 번째 결의의 취지는 “수용시설의 양성화는 결국 환자의 재활과 사회화를 막고, 서구의 악명 높았던 과거의 주립정신병원식 대형 수감소로 변할 충분한 소지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찾았다(이부영, 1983: 337).
「1983년 결의문」 속에는 격리와 수용의 대안으로서의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지향이 강하게 담겨 있었다. 결의문은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환자를 거대한 폐쇄된 병동에 수용하기보다는 사회복귀를 목적으로 한 각종 치료시설이 구비되고 개방병동 체제를 지향하는 소규모의 정신보건센터를 중심으로 …… 환자를 가족이나 사회와 격리함이 없이 치료할 것을 권장하고 있고, 이것은 세계보건기구의 정신보건계획에서 가장 중요시 되고 있는 사항”이라고 지적하였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3a: 3). 또한 1980년 제정된 사회보호법을 염두에 두며, “위험한 범죄를 상습적으로 저지른 정신장애자의 감호치료에 관해서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사회보호법으로 규정되어 있느니만큼, 정신보건법은 좁은 의미의 사회보호라는 소극적인 자세보다 국민의 정신건강을 향상시키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자세에서 제정되어야 하며, 그러한 이념이 이 법에 최대한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3a: 3-4).
같은 맥락에서, 1983년도 대신정 회장 이부영은 「정신보건법의 이념」이라는 기고문에서 ‘정신질환자 신고 의무화’를 규정한 보사부의 정신보건법(안)과 정신장애인을 범죄 위험 집단으로 묘사하는 언론 보도를 비판하며, 정신보건법은 사회방위나 격리수용의 방침이 아닌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지향을 가지고 제정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정신보건법의 제정은 국가가 국민의 정신건강을 위하여 돈을 염출해서 질환의 예방과 치료, 재활을 여러 가지로 도와준다는 데 의의가 있고, 정신장애로 인한 범법 환자의 치료감호규정을 포함한 사회보호법의 테두리를 훨씬 넘는 이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 [그러나] 외국에서도 문제시되는 법률 내용을 성급하게 도입하다 보면 항상 그들의 잘못을 뒤따라가는 일이 생길 수 있다. …… 우리는 19세기 초에 유럽 각국에서 거리의 부랑자, 병약자, 정신장애자 등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모조리 끌어다가 거대한 수용시설에 집어넣고 버젓하게 병원 간판을 달았던 예를 기억하고 있다. 거리는 「청소」가 되었는지 모르나, 정신병 환자는 쇠사슬에 묶인 채 죽어갔고 유럽의 정신장애는 그로 인해 줄기는커녕 증가를 거듭하였다. …… 현대에 와서는 환자를 거대한 병원에 오래 감금해 두지 말고 그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 속에서 될 수 있으면 소규모의 병원이나 자유개방병동에서 사회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치료하기를 권고하고 있고, 이는 한국을 다녀간 세계보건기구 자문관들이 입을 모아 충고하고 있는 사실이다.42) …… 행정당국이 높은 의자에 앉아서 「유치」하고 「명령」하고 「신고 받는」 듯한 인상을 주면 모처럼 좋은 뜻에서 애써 만든 법안이 악법의 누명을 쓸 가능성이 있다.43)
이처럼 1983년 수용시설 참상의 보도는 정신장애인의 만성 수용은 지양되어야 하며, 정신병원 역시 또 하나의 대형 수용시설이 되지 않도록 지역사회 중심 회복을 지원해야 한다는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관점이 전문가 담론과 제도 논의의 전면에 등장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44) 대신정은 이후 특별소위원회를 구성하여 「1983년 결의문」을 반영한 독자적 법안 작성을 추진하였으며(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3c: 2), 학회측 입장을 대변하는 문건으로 해당 「1983년 결의문」을 국회 보사위원들에게 발송하였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3a: 3; 1983c: 3). 이는 1980년대 초 한국에서 막 태동하던 지역사회 정신보건 담론과 실천을 학회 차원에서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1980년대 중후반 연세의대 정신과학교실을 중심으로 추진된 강화도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에서 구체적 실험으로 이어졌다. 연세의대 예방의학교실은 1975년부터 강화도에서 의료보험조합 사업과 함께 지역사회 의료전달체계 구축을 시도해 왔는데(김일순 외, 1979; 이만홍, 1985; 이만홍 외, 1989),45) 1980년대 중반 정신과학교실이 합류하여 지역사회 기반의 정신보건 활동까지 사업을 확장하고자 했다. 1985년부터의 기획을 거쳐,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과 예방의학교실, 강화병원 정신과가 협력하여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을 진행했으며(신승철ㆍ이호영, 1989; 한국 정신의학 100년사 편찬위원회, 2009: 138), 이는 대학 및 대학병원 차원에서 시도된 국내 최초의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으로 평가된다(Rhi, 1989: 248).46)
당시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북미 유학 경험 등을 통해 1980년대 초에 이미 1960~70년대 서구에서 전개된 탈원화와 지역사회 정신보건 확장의 흐름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국내 역시 그러한 국제적 전환을 따라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강화도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을 담당한 연세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 이만홍은 1985년 논문에서, 서구 선진국에서는 “1950~60년대에 와서는 오히려 주립병원을 비인도적 덩어리, 인간 창고(Warehouse)”로 인식하게 되었고, “1960년대 초를 기점으로 한 지난 20여년 간의 지역사회 정신의학의 운동은 이러한 누적된 무관심과 비인도주의의 시행착오를 고치고자 한 탈원화의 과정”이었다고 진단했다(이만홍, 1985: 30). 그는 1985년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장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였는데, 이는 당시 서구에서 논의되던 지역사회 정신보건 패러다임과 탈원화 담론을 큰 시차 없이 접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47)
(1) 정신과 진료기관은 그 규모가 일정 수준을 지나치면 비기능화, 비인간화하며 관료적인 행정과 규율에 주로 의존하게 되고 획일적인 현상 유지에 많은 에너지의 소모를 초래하여 반치료적이 되므로 환자들의 만성화를 촉진하게 되고 결국 ‘인간창고(Human Warehouse)’로 되기 쉽다.
(2) [미국의] 주립병원처럼 거리가 멀면 입원치료 외의 퇴원 후의 재활과 사회 복귀치료가 어렵게 되는 반면, 지역사회 정신보건센타는 입원치료 외에도, 지역사회 내에서의 부분입원, 외래, 자문, 재활, 직업복귀 등의 제문제를 쉽게 서비스할 수 있게 된다.
(3) 지역사회 정신보건센터는 여러 다양한 서비스를 가능케 함으로써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환자의 추적 치료가 가능케 되어, 재입원, 만성화 등을 방지할 수 있다. (이만홍, 1985: 31)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80년대 초 정부의 기조는 사회방위적 관점에서 정신요양소와 병상수를 확대하는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다. 1981년 보사부는 정신질환자 요양소 6개 신축을 결의하고48) 서울 및 나주의 국립정신병원 병상을 600병상으로 증축했으며, 1982년에는 44억여 원을 들여 정신질환 요양소 2개소를 신축하기로 했다(보건사회부, 1984: 226; 1989: 114). 이러한 정책 방향은 1985년 『보건사회백서』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보사부는 1984년 말 기준 전체 인구의 약 1%인 40만 5천 명을 정신질환자로 추정하고 이 가운데 약 6만 6천 명을 치료가 필요한 인원으로 산정했다(보건사회부, 1985a: 171). 보사부는 당시 총 수용능력은 전문병상 6,280병상과 요양시설 8,200병상을 합해 약 1만 4천 병상에 불과하다고 진단하며, 이에 따라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총 36,500병상을 추가로 확보하되, 그 절반은 정신과 전문병상으로, 나머지 절반은 요양시설 병상으로 확충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보건사회부, 1984; 1985a: 172).
강화도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을 담당하던 정신과 의사 이만홍은 이러한 보사부의 수용 중심 계획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우리가 “미국의 시행착오” (이만홍, 1985: 42)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며, 시설 및 병원의 병상수를 늘리는 보사부의 지향은 서구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정부의 구상의 핵심은 치료든 수용이든 대단위 병상규모의 시설을 마련하여 입원 수용을 위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며, 이는 이제까지 우리가 고찰해 온 지역사회 정신의학적 개념에서 본다면 약 100년 전의 미국으로 되돌아가려는 것과 같다고 생각된다. …… 이미 언급한 대로 이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하며, 뒤늦게나마 지역사회 정신의학의 개념을 시급히 도입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정부가 신규 입원요양시설(소위 거점병원 등)에 투입하려는 막대한 예산을 지역사회 정신보건센타의 설립과 운영으로 전환시켜야 하며, 그렇게함으로써 시행착오를 면할 수 있으며, 아울러 비치료적 인 입원 병상수를 상상 이상으로 줄일 수 있다. (이만홍, 1985: 38; 강조 인용자)
이는 단지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을 수행하던 몇몇 정신과 의사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1983~84년에는 지역사회 정신보건을 제도적ㆍ학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정신과 의사들의 집단적 움직임도 전개되어, 강화도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을 이끌던 연세의대 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 이호영이 초대 이사장을 맡아 1984년 10월 대한사회정신의학회가 창설되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5: 4). 이듬해인 1985년 5월 4일에는 대신정 춘계학술대회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지역사회 정신보건 심포지움이 개최되어 지역사회 정신보건을 주제로 한 다양한 논의가 공유되었고(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5: 35-36), 강화도 사업의 초기 구상 역시 심포지움장에서 발표되었다.
앞선 「1983년 결의문」을 주도했던 이부영의 다음의 글에서도 이러한 1980년대 초 지역사회 정신보건에의 지향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WHO의 권고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적는다.
한국의 정신보건제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WHO에서도 한국이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이념에 따라 환자를 지역사회와 유리(遊離)함이 없이 재활과 사회복귀를 위한 치료를 각 지역의 200병상 규모의 소형 정신보건센터에서 실시하도록 희망하고 있고, 한국에는 아직 일본처럼 대형병원이 없기 때문에 현대적인 지역사회 정신보건을 구현하기에 무척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 그런데 요즈음 신문보도를 보면 국립병원의 병상을 현재보다 250병상 증가시키고 민간수용시설을 지원하며,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정신요양소’를 설치한다는 이야기이고, 소문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1000병상 이상의 정신병원을 세울 구상을 하고 이미 당국과 합의했다는 소식이다. …… [정신질환자들이] 반드시 병상을 점유하고 있을 필요도 없고, 병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낮병원 같은 중간단계의 치료시설이 충분히 활용될 수 있으며, 정신과 의사를 자문의(諮問醫)로 하여 정신과 간호원을 일선에서 활용하면 보건소 중심의 통원가료 혹은 심지어 가정 내 진료가 가능한 것이다. 병상 중심 사고방식은 결국 환자의 수용보호만을 주로 생각하는데서 발현된 것이고, 그 뒤에는 정신병 치료에 대한 심각한 비관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값싸고도 효율적인 소규모 종합정신보건센터의 건립과 운영 모델의 개발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 정신보건법이 부디 선진국의 잘못을 지양한 전진적인 법이 되기를 간곡히 바란다. (이부영, 1983: 337; 강조 인용자)
이러한 흐름은 적어도 정신의학 전문가 집단의 일부에서 1960년대 이래 세계적으로 확산된 탈시설ㆍ탈원화의 동향을 비교적 빠르게 수용하고 실천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서구가 경험한 대규모 시설 수용 중심 정책의 경로를 반복하기보다, 이를 ‘건너뛰어’ 지역사회 중심의 정신보건 체계로 곧바로 이행할 가능성을 모색하는 상상력과 기획이 1980년대 초에 이미 일정 부분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이부영, 1988 참조).
그러나 1980년대를 거치며 이러한 문제의식과 지향은 정책 전환을 견인할 만큼의 제도적ㆍ정치적 역량으로 결집되지는 못하였다. 대신정 역시 초기의 선언적 결의와 달리, 198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지역사회 정신보건을 중심 의제로 밀어붙일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강화도에서 수행된 지역사회 정신보건 실험 또한 1992년을 전후하여 해산에 이르렀고, 전국적ㆍ보편적 모델로 제도화되지는 못했다.49)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는다. 한국의 정신과 의사 집단 내부에서 이미 선진국에서 겪은 수용 중심 정신보건 정책이 지닌 한계와 그 교훈이 공유되고 있었고, 이를 ‘건너뛰어’ 지역사회 정신보건으로 곧바로 이행하자는 전략까지 구상되었음에도, 왜 1980년대 후반 이후 정책의 궤적은 다시 병상 확충과 시설 중심의 방향으로 기울어 갔는가? 왜 한국 사회는 1980년대 초라는 하나의 변곡점에서 지역사회 정신보건이라는 대안적 경로가 아니라 수용 중심적 정신보건의 길을 선택하였고, 서구가 이미 경험한 문제적 경로를 우회하지 못했는가? 다음의 4장과 5장에서는 국가 보건의료 정책의 전개와 의료보험 제도의 정착, 정신요양원과 정신병원 간의 경쟁 구도, 그리고 시민사회의 대응을 종합적으로 추적함으로써 위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도출하고자 한다.
4. 시설과 정신병원 간의 대결 구도 속 인권 담론의 축소1) 미인가 시설 양성화 조치와 그 파장1980년대 중반 이후, 미인가 시설의 인권 침해 사건에 대응하는 정신과 의사 단체의 대응은 ‘격리수용 대 지역사회 정신보건’이라는 문제의식을 상실한 채, 이내 ‘열악한 시설 대 양질의 정신병원’이라는 대체 구도로 점차 수렴하기 시작했다. 논쟁의 초점이 격리수용의 대안이나 지역사회에서의 삶의 가능성에 놓이기보다는, 어떤 수용이 더 ‘적절한’ 수용인가를 가리는 문제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보사부의 미인가 시설 양성화 조치와 이에 대한 정신과 의사 집단의 대응이 자리하고 있었다. 보사부가 1983년 기도원 사태에 대해 제시한 주요 대응 기조는, ‘나쁜 시설’은 적발하여 폐쇄하되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미인가 시설은 제도권 안으로 편입ㆍ관리한다는 것이었다(보건사회부, 1985c). 이러한 양성화 정책의 배경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의 상황을 “전문 치료병상 및 요양시설의 절대부족”으로 진단하고, 병상과 시설의 부족으로 인해 미인가 시설이 난립하는 것이라는 보사부의 확고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보건사회부, 1985b). 즉 문제의 원인을 수용이라는 방식 자체가 가진 근본적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수용시설의 부족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정신장애인의 인권 보장 역시 ‘나쁜 미인가 시설’의 폐쇄 문제로 축소되어 이해되었다. 당시 보사부가 작성한 내부 문건인 「정신질환 관리 대책과 정신보건법 내용」은 정신보건법 제정의 기대 효과로서 “정신질환자의 인권보장”을 언급하면서, 인권보장의 핵심 수단을 “무인가 시설에 대한 처벌”에서 찾았다(보건사회부, 1985b). 인권보장 논의가 수용의 구조나 장기수용 체제 자체에 대한 재검토보다는, ‘부적절한 시설’을 색출ㆍ처벌하고 ‘적정한 시설’을 양성화하여 관리하는 행정적 조치로 환원되어 이해된 것이다.
이러한 정책적 지향에 따라 1983년 보사부는 미인가 시설의 사회복지법인 전환 가능성을 조사하였고, 전체 57개 시설(수용인원 4,583명) 중 12개 시설(수용 인원 2,547명)은 ‘양성화 가능’하다고 발표했다(보건사회부, 1984: 227; <표 7>). 이는 정신장애인 인권보장이 탈원화나 지역사회 기반 지원이라는 대안적 상상력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닌, ‘보다 나은 수용’으로 축소되는 과정을 잘 드러낸다.
보사부의 미인가 시설 양성화 정책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정신과 의사 집단의 입장 역시 점차 협소해졌고, 지역사회 정신보건이라는 지향은 논의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정신과 의사 집단 내에서 논의의 중심은 인가ㆍ비인가 시설로 유입되는 정신장애인을 어떻게 정신의료기관으로 전환시킬 것인지의 문제와, 보사부의 미인가 시설 양성화에 대한 반대라는 보다 수세적인 대응으로 점차 이동했다. 특히 당시 정신과 의사 단체 내부에서는 미인가 시설을 비판하면서도, 환자들이 정신병원으로 유입되지 못한 채 ‘기도원’이나 ‘재활원’ 등으로 흡수되는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회보』에 실린 한 정신과 의사의 토로는 당시 정신과 의사 사회 내에서의 인식을 잘 드러낸다.
[정신병원] 입원실은 비어있는 채로 있고, 모두들 수용소다 기도원이다 아니면 재활원이다 하다 마구 몰려가는 것이 실정입니다. …… 정신장애자 복덕방 사장님들[이] 수만 명의 정신질환자의 향방을 우지좌지 하는 셈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연구나 하고 소위 사회사업가는 정신장애자 복덕방하고, 수용소의 감시원과 기도원의 목사는 정신장애자 치료를 맡고 …… 이런 세상이 오면 복지사회가 되는 것일까요? (유순형, 1984: 8)
2) 정신과 의사 집단 내의 ‘정신요양원 촉탁의’ 논쟁미인가 시설의 양성화와 관리 역량 강화를 위해 정부는 1982년 2월 「정신질환자 수용시설 운영지침」을, 1984년 3월에는 「정신질환자 요양보호시설 운영지침」을 제정하였고, 이후 1989년까지 지침의 세부 내용을 지속적으로 개정ㆍ시달했다.51) 나아가 1984년부터는 41개소 요양시설에 투약비를 지원하고, 종사자 인건비 기준을 상향 조정하며, 공중보건의의 순회진료 및 촉탁의사 채용을 지원하기 시작했다(보건사회부, 1984: 228; 1985a: 172–173).
이러한 정부의 정신요양원 내 공중보건의 순회 및 촉탁의 지정 정책은 정신과 의사 집단 내부의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시설 대 정신병원’이라는 대결 구도가 정신보건 영역의 핵심 갈등 축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정신과 의사 집단 내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순회진료나 촉탁의 자격으로 요양시설에 근무하는 것이 정신요양시설의 제도적 정당성을 강화하고 그 존속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확대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용인정신병원에 근무하던 정신과 전문의 오석배는 정신과 의사들의 협조가 지속될 경우 “정신질환자는 치료보다는 수용만 하면 된다는 식의 잘못된 생각에 젖어 있는 보건 행정당국자들의 생각을 더 오도할 수 있고, 끝내는 공중보건 전문의를 아예 이들 복지시설에 소속시켜 근무하도록 행정조치를 하는 등의 사태로까지 발전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오석배, 1984: 5). 아울러 그는 “이들 복지시설들이 전문의 순회진료 제도를 악이용하여, 자기네 복지시설에도 전문의가 나와 치료, 투약까지 한다고 과대 선전을 하는 경우, 그렇지 않아도 정신병원과 정신수용소의 구별조차 잘 못하는 일반대중을 더 혼란에 빠뜨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정신의학의 발전을 후퇴”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의견에 동조하는 대신정의 일부 회원들 사이에서는 정부의 방침에 대한 정신과 의사 집단 차원의 보다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공유되기도 했다(이호영, 1984: 1-2).
그러나 정신과 의사 집단 내에 이러한 강경한 입장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대신정 내부에서도 정신요양원과의 관계 설정을 둘러싼 의결 불일치와 갈등이 지속되었다. 정신요양원을 양성화하여 정신과 의사가 시설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할 것인지에 대한 대회원 설문에선 “요양소를 병원으로 하여야 한다”, “요양소의 여건만 되면 일을 하겠다”, “학회가 주동이 되어 회원들의 법인체를 만들어 혜택을 보도록 하자”는 등 다양한 의견이 혼재되어 제시되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4: 2). 요양원 순회 및 촉탁 진료의 찬성측에서는 다수의 환자가 이미 시설에 수용된 현실을 고려할 때 의사의 개입 및 감독을 통해 인권 침해를 완화할 수 있다는 명분이 존재했던 한편, 반대측에서는 “공중보건 전문의가 순회 진료라는 명목으로 참여했을 경우, 이들의 불법적인 강제 수용상태를 우리 전문의들이 간접적으로나마 합법화시켜주는 결과”가 된다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오석배, 1984: 6). 다른 한편, 촉탁의 제도는 일부 의사들에게 적지 않은 부수입원이기도 했기에,52) 1980년대 중반 정신요양원에서의 의사 진료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53) 이처럼 시설 촉탁의 문제는 인권 논리와 직역ㆍ경제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이면서, ‘시설 대 정신병원’이라는 대결 구도를 정신과 의사 집단 내부에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논쟁으로 집단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자, 결국 정신과 의사 단체 차원에서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기에 이른다. 1987년 대신정은 「요양원 진료관여에 대한 학회안」을 발표하며, 현재의 정신요양원은 “정신과 의사가 진료의 주체가 되고 그 진료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치료적 환경이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평가했고, 이러한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정신과 의사들의 진료 협조는 “학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정신보건법의 기본 정신에 위배”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학회는 “현재의 반(反)치료적 요양원 진료의뢰에 대한 참여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결론내렸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7: 8).
3) 1985년 정신보건법 입법과 ‘시설 대 병원’ 구도의 고착화1985년 9월, 여러 일간지에 일제히 보도된 이른바 ‘여주 사태’는 주춤했던 정신보건법 입법 논의를 다시 급격히 부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언론을 통해 여주의 한 무허가 기도원에서 32명이 사망하고 일부는 암매장되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고, 검시 과정에서 피하출혈 등 폭행의 정황까지 확인되면서 사건은 전국적 파장을 일으켰다.54) 1983년 기도원 보도에 이어, 1985년의 여주 사태는 그간 지연되어 오던 정신보건법 제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부각시켰다.
1985년 9월 13일, 대신정 정신보건향상위원회는 발빠르게 해당 사건을 논의했고, 9월 25일에는 국회 상정을 앞둔 정신보건법 대책과 함께 학회 차원의 대응 방안을 검토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5: 38; 1995: 95). 보사부 또한 미뤄오던 정신보건법안 성안을 서둘러, 완성된 법안을 1985년 9월 24일부터 10월 4일까지 관보를 통해 입법 예고하고,55) 10월 8일 당정협의를 거쳐 11월 22일 정부 입법안으로 국회에 제출하였다.56)
그러나 보사부의 1985년 법안은 곧바로 큰 사회적 반대에 직면했다. 특히 논란이 된 것은 제2조의 정신요양원의 법적 제도화와 제14ㆍ15조의 의료보호 및 긴급의료보호조치 규정이었다. 제2조는 ‘의료보호시설’의 범위에 정신요양원을 포함시킴으로써 자격 미달의 시설을 양성화하고 법적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제15조는 자타해의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엄격한 절차적 보호 없이 ‘긴급의료보호조치’란 이름의 강제입원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정신과 의사 집단은 보사부의 입법 움직임에 빠르게 대응했다. 입법예고 직후인 1985년 10월 2일, 대신정은 해당 초안에 대한 의견을 보사부와 대한의학협회에 제출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5: 4). 앞선 두 가지 쟁점 가운데 대신정이 주요하게 반대한 것은 긴급의료보호조치 조항보다는, 정신요양원을 법적 ‘의료보호시설’로 포함시키는 제2조 규정이었다. 당시 대신정의 정신보건법안 마련을 주도했던 김이영은 “정신질환 환자의 인권침해는 환자의 강제입원조치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적당한 수용시설에 환자를 맡김으로써 일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하겠다”고 주장했다(김이영, 1988: 1).57) 대신정회장을 역임한 이정균 역시 회고적 인터뷰상에서 “그런 것[입원 절차]이 문제가 아니라, 환자들이 제대로 된 시설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못받고 있는게 그게 문제”라고 하며, “입원절차 가지고 인권문제 따진다는 건 필요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김선미, 1991: 215).
이처럼 불과 수년 전 학회의 공식 입장으로 천명되었던 「1983년 결의문」의 핵심, 즉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지향은 이 시기 급격히 퇴조하였다. 1985년에 이르러 대신정의 입장은 질 낮은 시설을 법적 ‘의료보호시설’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요양원 반대’의 구호로 빠르게 수렴하였고, 지역사회 중심적 전환이라는 초기의 비전은 논의의 전면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이는 1980년대 초 정신과 의사 집단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제기되었던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지향, 즉 입원과 시설 수용을 최소화하고 지역사회 내 치료와 재활을 확대하자는 문제의식이 상당 부분 희석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대신 전문직 내부의 인권 담론은 ‘열악한 비치료적 시설’과 ‘양질의 치료적 시설(정신병원)’ 간의 대조를 통해 후자의 확대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되었다.
정부 입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대신정의 반발은 한층 격화되었다.58) 이에 대신정은 1985년 10월 ‘정신보건법 긴급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10월 18일 부산 정기총회에서 ‘6대 사항’을 결의하였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6: 5).59) 이어 10월 29일 회의에서는 “우리 회원들이 잘 모르는 사이에 …… 보사부의 정신보건 법안이 유관단체와의 협조와 당정협의를 끝내고 관계부처와 협조를 강행하고 있는 중이므로, 전력을 다하여 이의 시정에 노력”하기로 결의하였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95: 95).
이후 대신정은 “역사상 유례없는 예산을 배정”하여 특별위원회를 운영하고, 언론과 국회를 상대로 적극적 대응 활동을 전개했다(오승환, 1986: 1). 고문 변호사와 함께 20페이지 분량의 반박 자료를 작성ㆍ배포했으며, 「정신보건법(안)에 관한 청원서」 또한 제출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95: 95). 나아가 1986년 1월에는 정부에 자체적 정신보건법 수정안을 제출하고, 같은 해 3월과 11월에도 건의서를 잇달아 제출하는 등 공세적인 입법 저지 활동을 이어갔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6: 5; 1987).
5. 1980년대의 급격한 병상수 확대와 지역사회 정신보건 이념의 주변화1) 의료보험의 도입과 병상 수 확대1980년대 중반 이후 정신과 의사 단체의 입장이 빠르게 정신요양원과의 대결 구도로 수렴한 배경에는 의료보험 제도의 정착과 그에 따른 의료시장 구조의 변화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1977년 의료보험법 시행 이후 의료 접근성과 이용량은 급격히 확대되었으며, 의료보험을 통한 정신질환 수진 건수는 1978년 약 3만 건에서 1988년 141만여 건으로 폭증했다[부록 1]. 정신의료 영역이 전국민 의료보험 체계 안으로 편입되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수요 증가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의료 행위량이 수입으로 직결되는 구조 속에서 민간 의료기관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전략으로 입원 진료의 양적 확대를 주요한 방식으로 택했고(김일환, 2025: 284), 이는 의료보험 정착에 따른 국민의 의료 이용량의 급증과 맞물려 병상 증설과 병원 신설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표 9> 및 <그림 1> 참조).
이전 시기인 1960~70년대에는 병상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의료 이용 규모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정신요양원과 정신병원 사이의 직접적인 경쟁 관계는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증가하는 환자 수요와 확대된 병상 공급 속에서 양자는 점차 동일한 환자군을 대상으로 하는 실질적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특히 지역사회에서 다수의 입원 병상을 확보한 민간 정신병원에게 정신요양원과 미인가 시설은, 치료의 질과 전문성의 문제를 넘어 환자 유입과 수익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였다.60)
이러한 맥락에서 1980년대 중반 정신과 의사 단체가 내세운 ‘의료제도권 안에서의 양질의 치료’라는 구호는 단순한 직능 윤리의 표출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반(反)치료적 수용시설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료보험 체제 하에서 재편되는 정신의료 시장에서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제도적 생존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2) 정부와 민간 자본과의 공조1985년 정신보건법안을 둘러싼 격렬한 충돌의 여파로, 정신보건을 둘러싼 논의는 제도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기보다는 ‘정신병상 확충’이라는 행정적ㆍ재정적 해법으로 수렴해 갔다. 대신정의 문제 제기에 대한 회신에서 국회는 “정부에서는 귀회에서 지적하신 바대로 정신질환자 관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코자 …… 정신병원 시설을 보완 확충하기 위한 소요 예산을 확보하였으며, 아울러 특수 민간병원 설립을 지원하는 계획도 마련”하였다고 응답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7: 3).
보사부 역시 같은 방향을 분명히 했다. 보사부는 “절대수가 부족한 정신질환 병상 및 시설의 확보를 위해 연차적으로 전문 진료병상 및 정신질환자를 위한 사회복지시설의 수용능력이 확충되어야” 하며, “민간자본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시설 건립자금에 대한 정부 융자 지원 및 장비도입에 필요한 공공 차관 지원 알선 등 민간정신병원 건립 희망자에 대한 국가 지원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보건사회부, 1984: 228). 이러한 보사부의 입장에 의사 단체도 호응했는데, 1983년 대한의학협회가 보사부에 제출한 「정신보건법(안)에 관한 건의」에서는 전국 종합병원 및 시ㆍ도립병원에 정신과 설치를 의무화하고, “현존 민간 수용시설의 정신과 환자를 점차적으로 양질의 정신병원 시설로 옮기는” 방안을 제안했다.61) 이는 재정 지출은 최소화하며 정신장애인 격리를 통한 사회방위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국가와, 정신요양원에 대한 문제의식과 위기감, 그리고 의료보험에 기반한 진료량 확대의 열망이 있었던 정신과 의사 집단 간의 갈등이 ‘병상 확대’라는 타협안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조는 OECF (일본해외협력기금) 차관을 통한 대형 민간 정신병원 건립 지원으로 구체화되었다(Lee, 2004: 16-17; 정기선, 1986a; 1986b; 홍창희ㆍ박승만, 2023: 75).62) 1986년부터 1988년까지 12개 대형 민간 정신병원이 건립되었고, 이를 통해 2,400개의 전문 정신병원 병상이 확보되었다(보건사회부, 1985b; 1989).
이러한 여러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짐에 따라, 1983년 2,369개에 불과하던 정신병원 병상수는 1987년 4,693개로 증가하였고, 1989년에는 9천 개를 넘어섰으며, 1997년에는 21,513개를 돌파하며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표 9]. 이러한 병상 증가의 대부분은 민간 정신병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그림 1]. 1983년에는 국공립 병원보다 적었던 민간 정신병상 수가 1997년에는 국공립 병상의 세 배를 넘어서는 1만 6천 병상 규모로 대폭 확충되었다. 보사부의 『보건사회 통계연보』에 근거하여 1983년부터 1997년 사이의 정신요양원, 부랑인 시설 내 정신질환자, 국공립 및 민간 정신병원 병상수를 표와 그래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또한 1970년대 후반부터 급증한 민간 정신병상을 실제로 어떠한 환자군이 점유하였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립정신병원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연구팀은 1975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전국 정신병원 입원 환자를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두 시점의 자료를 비교하면 유의한 변화가 확인된다[표 10].
우선 입원 환자의 경제적 지위 구성에 뚜렷한 변동이 나타난다. 1975년 조사에서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하’라고 응답한 비율은 34%에 불과했다. 그러나 1985년에는 그 비율이 49%로 상승하여 입원 환자의 절반가량이 경제적으로 취약한 집단으로 파악되었고, 특히 단과 정신병원의 경우 저소득층의 비율은 60%에 달했다. 나아가 1985년 단과 정신병원 입원 환자의 56%는 의료보호 대상자였는데, 이는 당시 의료보험ㆍ의료보호 제도 시행에 따라 입원 환자의 사회경제적 구성이 저소득층 위주로 재편되었음을 보여준다.
재원 기간의 변화 또한 주목할 만하다. 자비 입원이 다수를 차지하던 1975년에는 약 70%의 환자가 3개월 이내에 퇴원하였으며, 1년 이상 장기 입원 환자는 6%에 불과했다. 반면 의료급여 환자가 크게 증가한 1985년에는 민간 정신병원에서 3개월 미만 입원 환자가 36%에 그쳤고, 1년 이상 장기 입원 환자가 33%로 급증했다. 아울러 1985년 당시 단과 정신병원의 병상 중 95%는 폐쇄병동 내의 병상이었으며, 가족에 의한 강제입원 비율도 56%에 달해 대학ㆍ종합병원보다 현저히 높은 수치를 보였다[부록 2]. 이러한 10년 간의 변화 양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80년대 중반 이후 민간 정신병상의 급격한 증가의 이면에는 의료보험 및 의료보호 제도의 확립을 매개로 한 저소득층 정신장애인의 대규모 유입과, 그에 따른 장기입원 구조의 제도적 고착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3) 시민사회의 강제입원 반대 투쟁한편,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과 국가폭력에 대한 경계라는 당대의 사회ㆍ정치적 맥락 속에서, 시민사회와 재야 세력의 정신보건법안에 대한 비판은 주로 강제입원의 남용 가능성에 집중되었다. 특히 1985년 법안 제14ㆍ15조는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 없이도 시ㆍ도지사가 정신과 전문의 2인의 의견을 근거로 강제수용을 명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반정부 인사에 대한 국가권력의 탄압을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시민단체들로서는, 해당 법안이 또 하나의 억압적 통치 수단으로 전용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1986년 8월 23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 등 18개 재야 종교ㆍ인권 단체는 ‘정신법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하고 기자회견을 개최했다.63) 기자회견장에서 대책위 김동완 목사는 “정신보건법은 정신탄압법”이라 규정하며, 정신보건법안이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 도구로 전용될 위험성을 거듭 경고했다.64) 대책위는 「정신보건법안을 규탄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해당 법안이 표면상으로는 국민정신보건의 증진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의료보호조치 명목의 인신구금제도”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단지 행정 명령 하나로, ‘전문의의 의견’이라는 애매모호한 법적 절차만 통해 정부가 구금ㆍ해제를 마음대로 할 수 있”기에 “그 정치적 악용 가능성은 명약관화”하다는 것이었다.65) 나아가 대책위는 이 법안을 1975년 사회안전법과 1985년 학원안정법 입법 시도와 연결 지으며, “노동운동 투사들을 그 끔찍한 살인적 구타의 생지옥, 군부대 내 삼청교육대로 강제 수용시켰던 현행법의 근거가 ‘사회안전법’이었던 것을 아직도 전율로 기억하며, 작년의 ‘학원안정법 제정 기도’가 의미했던 그 음험한 국민대탄압책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며 정신보건법안의 폐지를 주장했다.66)
이러한 비판은 시민ㆍ종교단체에 그치지 않았다. 1986년 10월 7일에는 서울 소재 8개 의과대학 학생 대표단이 성명서를 발표하여 “현 정권의 악법 제정 의도”를 규탄했으며, 대한변호사협회 또한 1986년 12월 8일 정신보건법안에 대한 반대의견서를 국회와 관계 기관에 제출했다.67) 이에 더하여, 국회 내에서도 정신보건법에 대한 야당 의원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1986년 10월 30일에 열린 국회 본회의장에서의 신한민주당 심완구 의원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당시 국회 내 정신보건법에 대한 인식을 잘 대변한다.
이 정권은 앞서 말한 국가보안법 가지고도 부족해 소련 공산 치하의 수용소군도와 정신병동을 연상케 하는 정신보건법이라는 기상천외의 법을 만들어 가지고 온 국민을 정신병원에 가두어 버리려는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벌써부터 소름이 끼칩니다. 이제 와서 수정 운운하고 있지마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도 없이 더구나 가족 등 보호자의 동의도 없이 행정당국의 일방적인 명령 하나만으로 민주인사는 물론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 병자로 몰아 강제로 입원 수감시킬 수 있도록 한 발상 그 자체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고서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국무총리! 국민의 인권이라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위신을 생각해서도 이 같은 가증스러운 악법일랑 처음부터 만들 생각조차 하지 말고 수정이고 뭐고 따질 것 없이 즉각 철회하시기 바랍니다.68)
이와 같은 사회적 반발은 당시 정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권위주의 체제의 경험은 정신보건법 제정을 둘러싼 시민사회의 대응 방향을 규정하는 하나의 경로 의존적 조건으로도 기능했다.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와 억압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던 상황에서, 법안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은 자연스럽게 행정권력의 강제입원 남용 위험을 차단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시민단체와 재야 세력은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입원의 남용 위험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데에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정신장애인 수용 중심 체계 자체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나 지역사회 정신보건이라는 대안적 상상력으로까지 논의를 충분히 확장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시민사회가 바라본 정신보건법안의 ‘인권 문제’는 국가권력의 개입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압축되었고, 정신보건법을 둘러싼 논의 역시 탈시설적 전환이나 지역사회 정신보건 체계의 구축이라는 장기적 과제보다는 ‘입원 조건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절차적ㆍ제도적 쟁점에 수렴되는 경향을 보였다(Hwang, 2024 참조).
4) 1985년 논쟁의 여파: 병상수 확대 기조로의 수렴강제입원에 따른 인권침해 우려와 정신요양원의 법적 지위 인정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자, 정부는 제도적 골격을 유지한 채 절차를 보완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제시했다. 먼저 재야 인사와 시민사회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은 정신보건법안 제15조의 긴급 의료보호조치에 대해서는 정신과 전문의 2인의 ‘의견’을 ‘진단’으로 강화하고, 보호의무자의 동의69)를 추가하는 등 절차적 요건을 보완했다. 또한 비의료시설인 정신요양원을 법안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정신과 의사 단체의 요구에 대해서는, “만성질환인 정신질환자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하여는 입원시설과 장기요양시설이 필요”하다는 논지를 고수하며 정신과 의사 단체와의 협상을 지속했다.70)
결국 1985년 보사부안은 정신과 의사 집단과 시민사회, 야당의 반대에 부딪혀 입법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이후 수년간 정신보건법 논의는 표면화되지 못한 채 유보되었다. 법 제정 논의가 다시 본격화된 것은 1990년 이후였다. 1991년 국회에서 정신보건법안 논의가 재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신정은 같은 해 10월 27~28일 긴급 좌담회를 열어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좌담회에서는 “학회사상 유례없이 밤을 새워가며 진지한 논의”가 이어졌고, 각 지부학회의 의견을 종합한 끝에 「정신보건법 제정에 임하는 우리의 기본자세」(이하 「1991년 기본자세」)라는 통일된 합의를 도출하였다(이근후, 1992: 154-155).
「1991년 기본자세」에서 대신정은 법 제정 자체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되, “현재 전국에 산재해 있는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소위 ‘정신요양원’에서의 탈법적인 의료행위가 근절될 수 있는 규정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현재의 정신요양원의 단순 양성화는 적극 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1980년대 중반의 갈등을 거치며 형성된 입장을 보다 명확히 재확인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기조는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김혜련, 1991: 14-16; 신권철, 2017: 189-191 참조).
이러한 입장은 8년 전 채택된 「1983년 결의문」과 비교할 때 분명한 방향 전환을 보여준다. 「1983년 결의문」이 수용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지역사회 정신보건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며 구조적 재편을 지향하였다면, 「1991년 기본자세」는 ‘문제 시설의 퇴출’과 ‘의료기관 중심 체계의 강화’라는 구도 속에서 보다 방어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1985년 전후의 논쟁은 결국 ‘인권침해적 시설 대 인권적 정신병원’이라는 대비를 정신과 의사 집단 내부 인권 담론의 중심축으로 고착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지역사회 정신보건이라는 대안적 상상은 제도적 논쟁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6. 나가며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80년대 초중반 한국에서는 전세계적 흐름에 조응하여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 특히 1983년 기도원 사태는 1960~70년대에 지배적이었던 사회방위적 인식에 균열을 가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신장애인을 사회공안상의 위험 인물이 아니라 시설화의 피해자로 재인식하는 관점이 확산되었으며, 이는 수용 중심 체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WHO를 위시한 전 세계적 지역사회 정신보건 지향과 맞물리며 국내 정신과 의사 집단 내부의 논의에도 반영되었다. 그 결과 「1983년 결의문」을 통해 정신과 학회 차원에서 지역사회 정신보건에 대한 지향이 공식화되었으며, 그 문제의식은 강화도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과 같은 구체적 사회 실험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85년 정신보건법 제정 논쟁을 기점으로 이러한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지향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그 자리를 정신과 병상의 가파른 증가가 대신하게 되었다. 이는 특정 행위자의 일방적 결정이라기보다, 국가ㆍ전문직ㆍ시민사회가 서로 다른 이해와 전략을 교차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된 절충의 결과였다. 먼저, 국가는 냉전 체제하의 사회방위적 관점에 기초하여 시설 및 병상 확대를 통해 정신질환자 집단을 관리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발전국가적 기조 아래 공적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고자 민간 자본의 시설 투자와 병상 확충을 적극적으로 장려ㆍ지원했다.
한편 정신과 의사 집단은 정신요양원과의 경쟁 구도 속에서 환자를 ‘시설에서 병원으로’ 이동시키는 데 주력했고, 이는 국가의 정책적 이해와 맞물리며 병원 입원 중심의 정신보건체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그 결과 정신장애인의 인권 보호 논의는 ‘ 열악한’ 미인가 시설의 환자를 ‘양질의’ 정신병원으로 이전하는 문제, 다시 말해 수용의 형태를 전환하는 문제로 점진적으로 축소ㆍ재구성되었다. 이로써 정신과 의사 집단 내에서 정신장애인 인권 담론은 사회방위 논리 및 치료의 논리와 결합하여 정신병상 확대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더욱이 1980년대 이후 의료보험ㆍ의료급여 제도의 확산으로 의료 이용이 급증하자, 증가하는 수요를 흡수하기 위한 병원 신설과 병상 확대는 국가와 정신과 의사 모두에게 경제적 합리성을 갖는 선택지로 작동했다.
다른 한편 시민사회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의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과 경계의 연장선상에서 강제입원의 절차적 인권 보장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은 격리ㆍ수용 중심 체제 자체를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으로까지 확장되지는 못했다. 결국 시민사회의 인권 담론 역시 격리수용 체제의 구조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기보다는, 강제입원의 절차적 통제라는 제한된 지평 안에 머무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초의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맹아는 (1) 냉전 체제하에서 취약 계층을 통제 대상으로 간주한 사회방위적 시각, (2) 발전국가적 지향 속에서 사회보장을 민간에 위탁하고 재정을 절감하려 했던 국가의 전략, (3) 의료 보험제도 도입에 따른 민간 병상 확대 유인의 발생, (4) 시설과 병원이 동시적으로 확장되며 형성된 경쟁 구도, (5)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기억 속에서 시민사회의 인권 보호 담론이 강제입원의 절차적 통제에 집중되었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 그 가능성을 충분히 펼치지 못한 채 점차 논의의 중심에서 사라졌다. 대신정 회장으로서 「1983년 결의문」을 주도했던 이부영은 역사의 분기점에서 대안적 경로를 실현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한국 정신의학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제기되는 의문은 ‘만약 그때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하는 무수한 물음이다. …… 오랜 전통으로 훈습되고 유산으로 전승되고 발전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시도되었으면서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이다. (이부영, 1999: 170)
그리고 그 이후에 진행된 정신보건법과 정신보건정책 실시 과정을 보면서, 특히 대형병원의 출현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과정을 보면서 남의 나라 잘못을 알고 미리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일에 ‘월반(越班)’이란 없는가보다 하는 인식이었다. (이부영, 1992: 92)
이부영의 회고가 보여주듯, 한국 사회는 지역사회 정신보건으로의 “월반”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서구에서 탈원화와 커뮤니티 케어가 빠르게 진전되던 바로 그 시기에, 한국은 오히려 격리수용 중심의 정신보건 체계를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1980년대 초ㆍ중반에 잠시 제기되었던 이상이 사라진 이후,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지향은 제도 설계의 핵심 의제로 자리 잡지 못한 채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고 장기적으로 유예되었다. 그 결과 오랜 시간이 흐른 2020년대에 이르러서야, 정신장애인의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하려는 논의가 다시 본격화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의 한계와 후속 연구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본 연구가 채택한 사료와 방법론은 정책의 핵심 당사자인 정신장애인의 목소리와 산 경험을 분석에 포함하지 못했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다. 본 연구가 의존한 정부 문서, 전문학회의 연보와 회보, 학회지, 신문 기사 등은 국가와 전문가 집단에 의해 생산된 기록으로, 당사자의 경험은 이 자료군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그 결과 본 연구의 서술에서 정신 장애인은 제도를 구성하는 주체적 행위자라기보다는 담론과 정책의 ‘대상’으로 주로 재현된다. 사료의 비대칭성이 낳은 이러한 한계를 인지하며, 당사자의 경험을 사회사적 기록으로 발굴ㆍ복원하는 작업은 구술사 등의 방법론을 활용한 후속 연구의 과제로 남겨둔다.
또한, 본 연구는 보사부와 대신정을 중심으로 주요 이해관계 집단의 입장과 그 변화 양상을 분석하였으나, 각 집단 내부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갈등이 있었으며 그 갈등이 어떻게 봉합되어 공식적 입장으로 정식화되었는지는 충분히 추적하지 못하였다. 예컨대 정신과 의사 집단 내부에서도 지역사회 정신보건 담론의 발흥과 좌절 가운데 여러 논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남아 있는 공식 사료의 한계로 인해 각 집단 ‘내부’의 논쟁은 입체적으로 밝히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은 당시 논의를 주도했던 행위자들에 대한 구술사적 후속 연구를 통해 보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한국이 서구 선진국에 비해 ‘50년의 지연’을 겪었다는 단순 비교의 틀을 넘어, 한국 정신보건의 역사 속에 잠재해 있던 복수의 가능성과 선택지를 밝히고, 이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했다. 또한 오늘날 탈시설ㆍ탈원화 및 지역사회 통합돌봄 논의가 직면한 구조적 제약과 반복되는 논쟁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함으로써, 현재의 정책적 전환을 보다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토대를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역사적 성찰은 과거의 경로를 숙명으로 전제하기보다, 실현되지 못했던 대안적 가능성들과 그 현재적 의미를 재사유하도록 요청한다. 결국 본 연구의 의의는 과거의 분기점을 복원함으로써, 앞으로의 정책적 선택이 또 다른 장기적 유예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비판적 성찰의 지평을 여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Notes1) 국가와 전문가 집단이 생산한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당시를 살아간 당사자의 구술과 경험이 분석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은 본 연구의 방법론상의 주요한 한계에 해당한다. 사회적 안전망과 권리보장이 부재했던 1960~80년대의 시대적 제약 속에서, 정책의 대상이 된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입장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거나 공론화하기는 구조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사료의 비대칭성이 낳는 분석상의 한계에 대해서는 결론부에서 다시 논할 것이다. 8) 「精神保健機構를 設立」, 『朝鮮日報』, 1959년 12월 9일. 대한정신건강협회의 초대 사무총장은 정신과 의사 유석진이었으며, 발기인으로는 보사부 보건과장 김용성, 아동과장 구자헌, 서울 지방소년부지원장 판사 권순영, 정신과 의사 오석환, 김현우, 이봉기, 심리학 교수 성백선, 서명원, 김기석, 사회사업 관련 하상낙, 최복림, 이보희, 문교부 장학관 현병진, 교정 관련 방희병, 권기주가 참여했다. 9) 「늘어가는 노이로제」, 『朝鮮日報』, 1959년 12월 10일. 정신과 의사 오석환은 1951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재직하며 1974년부터 2년 간 부산의대 학장을 역임했다. 이후 1976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제31대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1978년부터는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로 옮겨 은퇴하였다. 12) 「農民連鎖慘殺: 酒氣에 휘두른 狂亂」, 『朝鮮日報』, 1967년 7월 5일; 「保護法 만들어야」, 『京鄕新聞』, 1967년 7월 31일; 「횡설수설」, 『東亞日報』, 1967년 8월 2일; 「放置된 精神衛生」, 『東亞日報』, 1967년 8월 17일. 14) 「서둘러야 할 精神衛生法 제정」, 『京鄕新聞』, 1968년 11월 30일. 해당 기사에서는 “인구 10만명 당 433개(미국), 353개(영국), 200개(일본) 등의 비율을 갖고 있는 외국의 실정에 비해, 우리는 4개꼴의 병상만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라며,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설 및 병상 확충을 위한 법제 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16) 1968년 12월 20일에는 보건사회부 관료, 학계 인사, 개업의 등으로 구성된 「정신위생법 심의위원회」가 조직되어 1968년의 대신정안을 검토하였다. 당시 정신위생법 심의위원회에는 보사부 의정국장인 홍종관,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회장인 이병윤, 국립정신병원장 진성기, 서울대학교 사회사업학과 교수 하상락이 소속되어 있었다(「國立病院 대폭 擴張」, 『慶南每日新聞』, 1968년 12월 21일). 17) 당시 대신정과 대한의학협회가 어떠한 관계 속에서 정신위생법안을 공유하였는지, 그리고 보사부가 이들 의사 단체의 안을 수정ㆍ보완하는 방식을 택한 경위가 무엇인지는 현재 확인 가능한 사료만으로 충분히 해명하기 어렵다. 이러한 사료의 한계로 인해, 본고는 각 법령 조문의 내용과 그 변화 과정에 분석의 초점을 두고, 이를 통해 각 단체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추정하고자 한다. 18) 보사부의 내부 문서에는 1980년대 초까지도 일본 정신위생법을 번역한 뒤에 국내 정신위생법/정신보건법안과 대조하며 참고했던 흔적이 관찰된다(보건사회부, 「精神衛生法」, 『정신보건법관계철 1982-1983』 (국가기록원 DA0873471), n.d.). 19) 1912년 제정된 조선총독부훈령 제41호 「경찰범처벌규칙(警察犯處罰規則)」에서는 “위험의 우려가 있는 정신병자의 감호에 소홀하여 옥외에 배회하게 한 자”는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이방현, 2013: 547), 이는 전후 일본 정신위생법의 보호의무자의 의무 조항으로, 이어서 한국의 정신위생법ㆍ정신보건법안으로 수용되었다. 20) 1968년 대신정안 제28조에서는 “입원수용된 환자는 30일 간격으로 재감정을 요구할 수 있다. 또 시설의 장은 병상(病狀)이 호전되어 퇴원이 가능하다고 인정될 때 지체 없이 퇴원을 명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68: 44). 일본법은 후생대신에 대한 소원권(제32조)과 지사의 심사(제37조)를 두고 있으나, 이는 행정적 불복 및 행정 주도의 심사 절차에 해당할 뿐, 환자의 신청에 따른 정기적 재감정 권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1968년 대신정안은 입원 필요성을 환자의 신청에 따라 주기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는 절차를 도입함으로써, 제한적이나마 환자의 절차적 권리보장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2) 1970년대에 작성된 보사부의 내부 문건에서도 정신보건법의 제정의 주요 문제점으로 예산 부족의 문제가 반복하여 언급된다. 1979년 보사부의 내부 문건에서는 정신보건법안의 주요한 문 제점으로 (1) “병원 및 요양소 신설에 따른 소요재원 과중(소요예산 344억 원)”, (2) “병상의 부족으로 인한 강제입원 조치 능력 미흡(민원야기 우려)”, (3) “정신감정의 부족”을 꼽는다(보건 사회부, 「精神保健法(案)」, 『정신보건법관계철 1982-1983』 (국가기록원 DA0873471), 1979.). 23) 전후 복지시설의 주요 재원이었던 해외 원조 자금이 감소하는 가운데 1970년대 ‘사회복지법인’이 등장하고, 국가와 민간의 이해관계가 결합되면서 1970~80년대에 걸쳐 사회복지시설의 민간화ㆍ영리화가 진행된 과정에 대해서는 김일환(2019; 2021)을 참고할 수 있다. 24) 1960년대 집단수용시설의 설립 및 운영을 뒷받침한 사회복지 관련 법률과 조례를 분석한 연구로는 김재형(2023)을 참고할 수 있다. 그는 이 시기 법령 정비를 통해 집단수용시설이 제도화되는 한편, 국가 내부에 “통치와 복지의 이중체계”가 형성되었다고 지적한다(김재형, 2023: 175). 즉, 형식적으로는 취약계층의 복지 증진을 표방하는 사회복지 법제가 구축되었지만, 실제 정책 목표는 이들에 대한 통제에 있었으며, 그 결과 법률의 규범적 지향과 국가의 실제 행위 사이에 내적 긴장과 모순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해당 연구는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를 이러한 이중적 구조 속에서 발생한 긴장을 통제 중심으로 재정렬하고,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온 행정기관의 단속에 명시적인 법적 근거를 부여한 조치로 해석한다(김재형, 2023: 190). 27) 검찰과거사위원회에서는 내무부 훈령 제410호가 법률유보의 원칙 및 명확성의 원칙, 적법절차의 원칙, 영장주의의 원칙 등 다수의 원칙에 어긋나는 위헌적 행정규칙이었다고 판단했다(검찰과거사위원회, 2018: 120-126). 29) 「國保委의 社會惡 일소 特別措置 발표 全文」, 『京鄕新聞』, 1980년 8월 4일. 취약 집단을 집단 수용시설에 수용ㆍ격리하는 조치는 이러한 사회정화운동을 구성하는 핵심 축 가운데 하나로 작동했다(김재형 외, 2022: 34). 1981년 4월 10일 전두환 대통령은 거리의 걸인 및 부랑아 단속을 지시하는 「총리지휘서신」을 하달했고, 경찰은 해당 명령에 따라 1,813명을 수용 조치했다. 이어 같은 해 10월 행정조정실은 내무부 및 보사부와의 공조 하에 「구걸행위자보호대책」을 수립하였는데, 해당 대책에 기반하여 수용시설 확충 및 민간 위탁 방안 등 전두환 정권의 수용 체제 형성의 골자가 형성되었다(국무총리행정조정실, 「구걸행위자보호대책」, 『구걸행위자관계철 1981-1982』 (국가기록원 BA0883735), 1981. 10. 8.). 36) 1980년 대신정 회신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조속한 정신보건법 제정에 찬성하되 충분한 연구와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 둘째, 법 제정 이전이라도 기존 관계 법규를 활용하여 정신보건 향상을 위한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때의 ‘정책’에는 시ㆍ도립병원 내 신경정신과 설치, 보건소에 정신질환자 관리를 위한 인력 배치, 교도소 및 소년원에 정신과 자문의 제도를 제도화하는 방안 등이 포함되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95: 94). 41) 「政府ㆍ民正, 기도원 사건 계기 精神보건법 마련」, 『京鄕新聞』, 1983년 8월 10일; 「民韓ㆍ국민 당서 聲明, 不法기도원 엄단을」, 『東亞日報』, 1983년 8월 10일; 「精神질환자-老人 감금 학대 不法기도원 수사」, 『朝鮮日報』, 1983년 8월 10일. 42) 「1983년 결의문」을 비롯하여 1980년대 국내에서 생산된 지역사회 정신보건 문건들은 WHO의 가이드라인 및 자문으로부터 상당 부분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78년 WHO에서는 세계 각국의 정신보건 법제를 비교하고 정신보건법 제개정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The Law & Mental Health: Harmonizing Objectives을 발간하였는데(Curran & Harding, 1978), 이 문헌은 당시 국내 정신보건 제도를 구상하던 정신과 의사들에게 지역사회 정신보건의 지향과 국제적 동향을 참고하는 주요 자료로 폭넓게 활용되었다(유석진, 1982: 311). 대표적으로, 1960년 대한정신건강협회 창설을 주도한 유석진은 1982년 기고문에서 해당 WHO 문헌을 자세하게 분석하며 “대개의 선진국가에[서] …… 강제 입원제도[가] 지금 와선 여러 가지 결점이 많다는 것이 드러남에 따라 …… 방향을 바꾸어 될 수 있는 대로 재원환자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어가고 있으며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법도 맞추어 가는 경향에 있음”을 지적한다(유석진, 1982: 312). 또한 1983년에는 WHO 컨설턴트 자격으로 일본의 정신과 의사 사사키 유지(佐々木雄司)가 한국을 방문하여 지역사회 정신보건에 대한 WHO의 정책적 지향을 소개하였으며, 당시 대신정 회장이었던 이부영을 비롯한 국내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보건법 제정 방향을 설정하는 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Rhi, 1989: 249). 이후 1980년대에 걸쳐 WHO 서태평양 지역사무소(Western Pacific Regional Office, WPRO)와 한국 정신의학계는 긴밀한 교류를 지속하였으며, 이와 관련해서는 당시 WPRO의 정신보건 및 약물의존 분야 지역자문관(regional advisor)을 맡았던 신후쿠 나오타카(新福尚隆)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Shinfuku, 1992: 17-18). 44) 1983년 대신정 회장을 역임한 이부영은 “1983년에는 KBS의 추적 60분이라는 푸로[프로그램]에서 정신장애자 수용시설의 비참한 실태가 낱낱이 고발되었다. 그것은 굉장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정신보건법을 수용 위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입증된 셈이다”라고 회고한다(이부영, 1992: 91). 45) 연세의대에 의해 수행된 강화 지역사회보건 사업은 독일의 ‘개신교 개발원조 중앙기구(Evangelische Zentralstelle für Entwicklungshilfe, E.Z.E.)’와 미국의 ‘아시아 기독교 고등교육 지원재단(United Board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in Asia, U.B.)’에 의해 재정지원을 받았다(김일순 외, 1979: 10). 당시 강화 지역사회보건을 기획했던 예방의학자들은 자신들이 주되게 참고했던 선행 지역사회보건 모델을 다음의 네 가지로 밝힌다. 첫째는 1960년대 의료 선교의 일환으로 수행된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이며, 둘째는 필리핀 세부의과대학의 지역사회 의학교육 계획, 셋째는 인도의 나랑왈 지역 농촌의료연구소 사업, 넷째는 나이지리아의 이메시 지역의 5세 미만 아동 대상 보건서비스 프로그램(The Under Five Services in Imesi)이다(김일순 외, 1979: 10). 그중 1960년대 거제에서 수행된 지역사회건강사업과 관련한 선행연구로는 정다혜(2021)를 참고할 수 있다. 46) 강화도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에서는 정신보건 의료전달체계의 구축, 기존 기관(보건소 및 보건지소, 병원 정신과, 정신요양원)과 지역사회 간 연속적 치료체계의 확보, 지역 출신 일차 정신보건요원의 양성과 활용, 지역 주민 대상 정신보건 교육 및 홍보, 중독 환자에 대한 방문 관리 등 다양한 세부 사업이 시도되었다. 해당 사업의 구체적 목적과 내용에 대해서는 이호영 외(1988)를, 실제 수행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서는 당시 연세의대 정신과학교실 연구강사로 참여했던 김병후의 회고를 참고할 수 있다(김병후, 2011: 67-74). 47) 강화도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은 당시 교실 주임교수였던 이호영과 조교수 이만홍의 학문적ㆍ실천적 궤적 속에서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호영은 연세의대에서 의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61년 도미하여 국내 최초로 미국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당시는 케네디 행정부의 지역사회 정신보건 운동이 미국 정신의학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하던 때였다(Bloom, 1984). 그 영향하에 이호영은 뉴저지주 퍼스 앰보이(Perth Amboy) 소재의 지역사회 정신보건센터의 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84년 귀국 이후에는 연세의대 정신과학교실 및 아주의대 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로서 다양한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에 관여하고 관련 분야 후학을 양성했다(이호영, 2011: 49-50; 정한용, 2023). 또한 이만홍은 1976년 신촌 세브란스병원 레지던트 3년차 시기 캐나다 토론토대학 교육수련병원인 토론토 웨스턴 병원(Toronto Western Hospital)에서 2년 간 연수를 하며 당시 활성화되어 있던 데이케어센터 시스템을 경험했다. 그는 귀국 후 1980년에 원주기독병원에 취직하여 낮병동 시스템, 치료적 공동체(therapeutic community) 및 환경치료(milieu therapy) 개념을 이식하였고(이만홍ㆍ정영기, 1983), 1985년 연세의대로 이직한 이후로 강화도 사업에 합류했다(이만홍과의 구술 인터뷰, 2026년 4월 13일). 이처럼 강화도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례는 1960~70년대 한국 엘리트가 북미 유학을 매개로 학습한 지식과 실천 모델이 귀국 이후 한국 의료체계에 이전ㆍ정착되고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이기도 하다. 49) 당시 연세의대 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였던 이호영은 강화도 정신보건 사업이 정부의 재정지원 없이 교직원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존해 운영되었으며, 그 결과 초기 사업비가 소진된 이후에는 동력을 상실한 채 해산에 이르렀다고 회고한다(오병훈, 2011: 38). 한편 1993년에는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을 주도하던 이호영이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의 초대 주임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강화도 사업에 참여했던 연세의대 정신과학교실 레지던트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였다(이호영, 2011: 191-205). 이로써 강화도 사업에서 축적된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는 수원으로 이전되어, 199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지역사회 정신보건 형성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집단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50) <표 7>에서 특기할 점은 전체 미인가 시설 수용인원 가운데 충남(1,824명, 39.8%), 전남(934명, 20.4%), 충북(636명, 13.9%) 소재 시설의 비중이 70%를 상회한다는 점이다. 우선 충북의 경우 전체 미인가 시설 수용인원 636명 중 600명이 ‘양성화 가능 시설’로 분류된 단일 시설에 집중되어 있어, 대규모 시설의 존재가 높은 비중을 설명하는 주요 요인으로 보인다. 전남 역시 양성화 가능 시설로 분류된 2개 시설에 803명이 거주하고 있어 유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충남의 경우 총 1,824명의 수용인원이 분포하고 있어, 이를 일부 대규모 시설의 존재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충남 지역에서 미인가 시설의 절대적 규모가 실제로 컸던 것인지, 아니면 행정적 조사 과정에서 특정 지역에 대한 점검이 상대적으로 집중된 결과인지, 혹은 이전 시기의 지자체의 시설 현황 파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미인가 상태로 분류된 시설이 과대하게 드러난 것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충남 지역에서 미인가 시설의 절대적 규모가 실제로 컸던 것이라면, 당시 충남 지역에서 미인가 시설의 설립을 촉진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인가ㆍ미인가 시설의 지역별 분포와 그 편차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를 해명하는 체계적인 후속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51) 뒤늦은 운영지침 제정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60~70년대 ‘정신요양원’으로 통칭되었던 정신질환자 시설의 설립, 수용, 투약의 제도적 근거는 모호한 것이었고, 제도적 정비는 사후적으로 이루어졌다(김일환, 2025: 267 참조). 52) 학회의 공식 입장에 반해 요양원 진료를 지속하며 사적 이익을 추구한 회원들에 대해서는 강한 내부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8년 대신정 회장을 역임한 이병윤은 1991년 인터뷰에서 “이럴 때 일수록 학회 회원들이 골고루 협조를 해서 보사부의 수용소 정책에 편승하지 않도록 해야되는데, 이 회원 중에는 보사부의 그 수용소안에 개인적인 이득을 볼 목적으로 협조한 사람이 더러 있다”고 들었다며, 이들을 “배반자”라 칭하며 강하게 비판했다(홍기선, 1991: 190). 53) 이러한 순회진료나 촉탁의 제도는 부랑인 시설과 정신요양원, 정신병원의 상호 착종 속에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시설 운영주체가 사업의 영역을 넓혀 부랑인 시설과 정신요양원 혹은 정신병원을 사실상 같은 재단 내에서 운영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예컨대 형제복지원의 경우 1960년 최초 설립시에는 미인가 후생시설로 시작하여 1972년 부랑아 시설로 유형이 바뀐 뒤, 1984년부터는 ‘형제정신요양원’을 원내에 추가로 개원하였으며(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23: 64), 다른 인천의 모 시설 또한 부랑인 시설과 의사가 고용된 정신요양원을 연계하여 운영했다(김재형 외, 2022: 119-121; 김관욱, 2023: 137). 이러한 ‘시설 복합체’ 속에서는 정신과 의사의 ‘원내’ 진료와 ‘원외’ 진료는 사실상 혼재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사회복지법인의 시설 증설 및 영역 확대와 관련하여서는 김일환(2025)을 참고할 수 있다. 54) 「無許 기도원서 잇단 의문의 죽음」, 『東亞日報』, 1985년 9월 10일; 「진생기도원 부원장 “6명 암장” 자백」, 『京鄕新聞』, 1985년 9월 12일; 「진생기도원 시체검안 산부인과 病院長 立件」, 『東亞日報』, 1985년 9월 21일. 57) 김이영의 이와 같은 입장은 불과 5년 전인 1983년, 그가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도 미국처럼 전문병원 등을 신설, 수용시설을 늘리는 것보다 시-도립병원이나 지역단위의 보건소에 정신과를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던 것으로부터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精神疾患(…)획기적 對策 없나」, 『朝鮮日報』, 1983년 12월 6일). 58) 당시 대신정 부회장이었던 배대균은 “돌연 정신보건법안이 국회에 제출됨으로써 우리 정신과 의사들은 뒷통수를 얻어 맞고 말았다”며, “정신질환 수용소가 양성화되기까지 본 학회는 29년의 역사 속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던 것”이라 비판했다(배대균, 1987: 1). 59) 당시 대신정의 요구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제2조 제2호에서 정신요양원을 ‘의료보호시설’에 포함하는 규정을 삭제할 것. (2) 제14조의 의료보호조치에서 정신과 의사의 진단 없이도 강제입원이 가능해질 우려를 시정할 것. (3) 제15조의 긴급의료보호조치에서 전문의 2인의 ‘의견’이 아니라 2인의 일치된 ‘진단’을 요구하도록 할 것. 이후 보사부의 법안 수정 과정에서 마지막 세 번째 요구는 수정안에 반영되었다. 60) 1987년 초, 후술할 OECF 차관을 통해 큰 규모의 민간 정신병원을 개원한 한 정신과 전문의는 “현재 본인이 운영하고 있는 병원의 병상가동율은 40%가 약간 넘는 수준으로 아직도 적자운영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전문진료권 밖의 값싼 수용시설에 많은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고 있다는 데에 그 주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구술하기도 했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88: 35). 이는 1980년대 중반, 정신요양원 및 미인가 시설과 경제적 경쟁 관계에 놓여 있던 민간 정신병원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62) 「安養에 國內 최대 신경정신病院: 5百병상 갖추고 내년 1월 開院」, 『京鄕新聞』, 1986년 10월 20일.보사부는 OECF 제2차 차관사업의 일환으로 정신병원 건립을 추진하였고, 의료장비 지원으로 병상당 약 5천 달러, 건축비 지원으로 병상당 약 3천 달러를 융자해 주었다(정기선, 1986a: 4). 해외로부터의 차관이 한국의 민간병상 확대로 이어진 역사적 맥락과 관련하여서는 홍창희ㆍ박승만(2023)을 참고할 수 있다. 63) 「精神보건법 저지 공동대책위 발족」, 『東亞日報』, 1986년 8월 23일; 보건사회부, 「精神保健法沮止運動動向」, 『정신보건법관계철 1983-1986』 (국가기록원 DA1046714), 1986. 9. 3. 정신법 저지 공동대책위원회에의 참가 단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한국교회사회 선교협의회, 한국기독청년협의회, 기독여민회,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민중불교운동연합,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민주통일ㆍ민중운동연합 인권위원회,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주교육운동협외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상 총 18개 단체)였다. 공동대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의 조준희 변호사와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의 진관 스님이 맡았다. 66) 정신법 저지 공동대책위원회, 「정신보건법은 정신탄압법이다: 정신법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하며」, 『정신보건법관계철 1983-1986』 (국가기록원 DA1046714), 1986. 8. 23. 69) 보사부 원안에는 제15조에 명시된 “자타해 위해 우려” 및 “정신과 전문의 2인의 의견”에 더하여 “보호의무자의 동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무부는 법안 초안에 대한 검토의견 회신에서 “동의가 없는 한 극히 위험한 반사회적인 정신질환자를 방치하게 되는 결과가 되어 정신보건법 제정 취지에 반하므로 이를 삭제함이 상당함”이라는 의견을 냈고, 이러한 법무부의 의견에 따라 보호의무자의 동의가 생략되었다(법무부, 「의견회신」(법심 2301-14259), 『정신보건법관계철 1983-1986』 (국가기록원 DA1046714), 1985. 11. 12.). 그러나 시민사회 및 여러 재야 단체들의 반대 속에서 1986년 개선안에서는 다시 보호의무자 동의가 삽입되었다.주목할 점은, 이 시기 강제입원 절차를 둘러싼 논의 지형이 오늘날과는 상당히 달랐다는 사실이다. 2020년대 들어 보호의무자 제도를 폐지하고 국가에 의한 정신보건심판원이나 사법입원제도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것과 달리(신권철, 2023), 1980년대 중후반의 시기에는 오히려 국가에 대한 깊은 불신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에 ‘긴급의료보호조치’에 가족의 동의를 요건으로 추가하는 방식이 국가권력에 의한 자의적 구금을 막는 권익보호적 대안으로 논의되었다. 권위주의 정권의 국가폭력의 경험은 국가를 보호자가 아닌 잠재적 가해자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가족이 당사자를 국가권력으로부터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로 상정되는 역설적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정신보건법 제정의 역사는 2020년대의 보호의무자 규정 폐지 여부를 둘러싼 논쟁(대법원 2021. 7. 29. 선고 2018다228486 판결; 정다영, 2022; 홍순건, 2024 참조)의 기원이 되었다. 70) 보건사회부, 「精神保健法 沮止運動動向」, 『정신보건법관계철 1983-1986』 (국가기록원 DA1046714), 1986. 9. 3. 보사부는 법안의 국회 통과를 위해 다각도의 전략을 병행했다. 당시 보사부 내부 문서에 따르면, 보사부는 법안의 입법 취지에 대하여 야당의원을 설득하고, 대신정과 협의하며, 대국민 홍보 등을 통해 “동법의 순수한 입법취지”를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보사부가 정신보건법에 대해 “인권의 침해 문제는 있을 수 없으며, 단지 난폭 정신질환자에 대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한 대목에서 드러나듯, 범사회적으로 홍보하고자 한 ‘순수한 입법취지’란 정부가 1970년대부터 취해 왔던 사회방위적 관점을 강하게 전제한 것이었다(보건사회부, 「정신보건법에 대한 기장 일부 교역자 반대 투쟁에 대한 의견」, 『정신보건법관계철 1983-1986』 (국가기록원 DA1046714), n.d.). 그림 1.정신요양원ㆍ부랑인 시설 수용인원 및 정신병원 병상수 추이 (1983~1997)
Figure 1. Trends in the Number of Residents in Psychiatric Nursing Homes and Vagrancy Facilities, and in the Number of Psychiatric Hospital Beds (1983–1997)
(『보건사회통계연보』, 각 연도)
표 1.정신병원 및 정신병상 수 (1964년)
Table 1. Number of Psychiatric Hospitals and Psychiatric Beds (1964)
표 2.1950년 일본 「정신위생법」과 1968~70년 국내 법안들과의 비교 (I): 목적 및 정의
Table 2. Comparison of Japan’s 1950 Mental Hygiene Act and the 1968–70 Korean Legislative Bills (I): Purpose and Definitions
(竹島正, 2000: 82-88; 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68: 41-45; 유석진, 1982: 315-317; 강조 인용자) 표 3.1950년 일본 「정신위생법」과 1968~70년 국내 법안들과의 비교 (II): 보호의무자의 의무
Table 3. Comparison of Japan’s 1950 Mental Hygiene Act and the 1968–70 Korean Legislative Bills (II): Duties of the Person Responsible for Protection
(竹島正, 2000: 82-88; 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68: 41-45; 유석진, 1982: 315-317; 강조 인용자) 표 4.1950년 일본 「정신위생법」과 1968~70년 국내 법안들과의 비교 (III): 비자의 입원 요건
Table 4. Comparison of Japan’s 1950 Mental Hygiene Act and the 1968–70 Korean Legislative Bills (III): Criteria for Involuntary Hospitalization
(竹島正, 2000: 82-88; 대한신경정신의학회, 1968: 41-45; 유석진, 1982: 315-317; 강조 인용자) 표 5.정신요양원, 부랑인 시설 및 병원 수용인원 (1985년)
Table 5. Number of Residents in Psychiatric Nursing Homes, Vagrancy Facilities, and Psychiatric Hospitals (1985)
(『보건사회통계연보』, 1985; 감사원, 1985) 표 6.보건사회부의 전문병상 및 요양복지시설 확충계획(1985~1991)
Table 6. Expansion Plan for Psychiatric Beds and Psychiatric Instututions, 1985–1991
표 7.보건사회부의 인가 및 미인가 시설 조사 내역 (1983년)50)
Table 7.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Survey of Unlicensed Facilities (1983)
표 8.1985년 정신보건법안 제2조 및 제14ㆍ15조
Table 8. Article 2 and Articles 14–15 of the 1985 Mental Health Act Bill
표 9.정신요양원ㆍ부랑인 시설 수용인원 및 정신병원 병상수 (1983~1997)
Table 9. Number of Residents in Psychiatric Nursing Homes and Vagrancy Facilities, and Number of Psychiatric Hospital Beds (1983–1997)
표 10.1975년, 1985년 간 정신병원 입원환자 특성의 변화
Table 10. Changes in the Characteristics of Psychiatric Inpatients between 1975 and 1985
(이근후ㆍ박문희, 1975: 21-23; 박문희 외, 1985: 13-126의 자료를 재구성) 참고문헌 REFERENCES1. 『慶南每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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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부록 1.의료보험상 ‘정신질환’ 수진 건수 (1978~1990)Appendix Table 1. Number of Medical Insurance Claims for Mental Disorders (1978–1990)
부록 2.정신병원 유형별 입원 환자의 특성 (1985년)Appendix Table 2. Characteristics of Inpatients by Type of Psychiatric Hospital (1985)
(박문희 외, 1985: 13-126의 자료를 재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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