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This study analyzes the influence of the “Taipinghuiminhejijufang” (hereafter “Hejijufang”), an official Song Dynasty medical text, on the formation of Joseon’s Nabyak (year-end medicine) and examines the bidirectional nature of Korea-China medical exchange and the circular process of knowledge. This study confirms that the prescriptions in “Nabyakjeungchibang” and “Eonhaenabyakjeungchibang”, which were specialized medical books on Joseon’s Nabyak, originated from the original Nabyak prescriptions of “Hejijufang”.
This research examines the localization of these original prescriptions across two dimensions: textual knowledge and social function. Regarding textual knowledge, Joseon medical texts exhibited a “standardization reliance” on Chinese medical techniques while simultaneously pursuing a “regional reconstruction” of medical terminology. In terms of social function, Uwhangcheongsimwon and Sohaphyangwon -- universal medicines for treating Feng and Qi disorders -- performed multifaceted roles in Joseon as emergency medicines, imperial gifts, and relief supplies.
Furthermore, the study tracks the case of Uwhangcheongsimwon, where Joseonized knowledge was converted into material form and reintroduced to China. The treasurization of the Joseon Uwhangcheongsimwon in the Qing Dynasty was preceded by the decline in authority of the original “Hejijufang” version within China. Against this backdrop, Joseon-manufactured Uwhangcheongsimwon entered China through diplomatic envoys and became extensively popular.
The factors behind the treasurization of Joseon Uwhangcheongsimwon are as follows: First, its material superiority characterized by outstanding efficacy and high-quality authentic medicinal herbs -- Joseon’s ginseng and bezoar. Second, the psychological tendencies of “valuing the distant over the near” and “preferring the expensive over the cheap” endowed the Joseon medicine with a sense of mystery. Third, attendants of diplomatic envoys sold counterfeit pills, which paradoxically maximized the craving for authentic Joseon products.
In conclusion, the acceptation, reverse inflow, and treasurization of “Hejijufang” prescriptions represent a large-scale practice of the “comigration of knowledge and material”, showing how knowledge that acquired locality in a new space (Joseon) flows back to its original space (China) in the form of material (patented medicine). This vividly proves that medical exchange between Korea and China was not a one-way dissemination from China to Joseon, but a process of creative transformation and mutual circulation.
1. 머리말『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이하 『화제국방(和劑局方)』)은 송나라 정부에서 반포한 중국 의학사상 최초의 성약(成藥, 성형 환약) 전문 의서이다.1) 『화제국방』은 이른바 ‘국방학(局方學)’의 효시로서 후대 방서(方書) 편찬의 전형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盧嘉錫, 1998: 346), 전근대 중국 의학의 제도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화제국방』에 수록된 성약 처방은 조선 납약(臘藥) 전문서에도 빈번히 인용되었다. 조선 왕실에서는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에 오향대제(五享大祭) 중 하나인 납제(臘祭)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국가 의례(儀禮) 와의 연관성은 조선 사회에서 납일의 위상을 보여준다(서금석ㆍ박미선, 2014: 90). 이날 제조되는 납약은 국가가 매년 정례적으로 만드는 제도적 약물인 동시에, 국왕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응급약(應急藥)이었다. 이처럼 조선의 국가 의료 시스템 및 세시풍속과 연결된 납약은 『화제국방』 처방의 수용을 고찰하는 데 있어 의학사적인 가치가 크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납일과 납약이라는 풍속은 정착되지 않았다. 다만 팔관회(八關會)나 연등회(燃燈會) 등 국가 의례에서 약물을 봉하여 태자, 재신(宰臣), 추밀(樞密), 시신(侍臣) 등에게 하사한 사례가 있었고, 하사된 약물은 상비약(常備藥)으로 사용되었다(이경록, 2010a: 227).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 풍속은 점차 제도화되었다.2)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년)에 보이는 납약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의원(內醫院)에서 각종의 환제(丸劑)를 조제하여 바치니, 이것을 납약이라 불렀다. 가까운 측근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는데, 청심원(淸心元)은 폐색(閉塞)을, 안신원(安神元)은 열(熱)을, 소합원(蘇合元)은 곽란(霍亂)을 치료하였으니,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3)
이처럼 조선시대에 정례화된 납약은 위급ㆍ중증 상황에서 사용되는 구급약(救急藥)이었다.4) 『납약증치방(臘藥症治方)』과 『언해납약증치방(諺解臘藥症治方)』은 조선 납약을 기재한 방서로, 이 두 책에는 『화제국방』에서 유래한 처방, 즉 『화제국방』 납약방(臘藥方)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미 『화제국방』이 동아시아에서 유포된 상황에 주목한 바 있다. 하지만 아직은 『화제국방』이 서적(書籍)으로서 한반도에서 전파되는 상황, 특히 간본(刊本) 추적과 피인용 양상에 대한 서지학적인 연구에 그치는 경향이 있다.5) 한편 조선의 납약에 관해서는, 『언해납약증치방』의 저자, 이 의서에 수록된 처방의 출전도 종합적으로 연구되었고,6) 연행록을 결합해 연행사가 가져온 우황청심원(牛黃淸心圓)과 같은 중요한 납약의 청나라 유행 상황도 주목을 받았다.7) 그러나 『화제국방』에 담긴 처방 지식이 한반도에서 어떻게 수용ㆍ변용되었고, 더 나아가 그 처방 지식이 물질화된 약물로 전환되어 다시 중국으로 역유입되는 현상과 그 요인에 대해서는 충분히 조명되지 못하였다.
본문에서는 『납약증치방』과 『언해납약증치방』 중의 납약방을 연구 대상으로 삼되, 이 두 책 이외의 조선 의서들이 납약방의 지식을 어떻게 편집하고 재구성하여 조선 의학의 특성을 유지하게 하였는지, 또 해당 처방을 근거로 제조된 납약이 조선 사회에서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였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텍스트적ㆍ사회적 측면에서 『화제국방』 납약의 수용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어서 중국으로의 역유입이라는 경로를 통해, 조선 지역적 특수성을 띤 물질화된 조선 우황청심원이 어떻게 다시 중국에 진입되어 ‘신성화(神聖化)’되었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납약의 텍스트적ㆍ사회적 측면의 수용을 고찰한 방법론과 유사하게, 『화제국방』 우황청심원 처방이 중국 의서 속의 텍스트적 변천을 추적한다. 아울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토대로 조선 우황청심원의 중국 역유입 양상을 검토하고, 청나라의 사회적ㆍ의학적 심리와 배경에 주목하여 조선 우황청심원의 활용 요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이 연구는 우황청심원으로 대표되는 납약의 전파와 역유입을 사례로 삼아 한중 의료의 쌍방향 교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송나라 『화제국방』의 도입과 조선 납약방의 성립1) 『화제국방』의 한반도 유입과 확산『화제국방』은 성약의 치료 병증, 처방 구성, 제형, 달이는 법, 복용법 등을 상세히 규정하였다. 송나라 이전 역대 처방의 정수를 집대성한 것으로, 약재 선별이 정밀하고 임상 진료에서 뛰어난 효과를 가진 유명한 처방들을 망라하였다(裘沛然, 2002: 386-387). 송(宋)ㆍ원(元) 시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원나라 의가 주진형(朱震亨)이 『화제국방』을 높이 평가한 바가 있다.
『화제국방』은, 증상에 근거하여 처방을 찾고, 그에 따라 약을 쓰면, 의사를 구하거나 약을 제조하지 않고도, 이미 만들어진 약을 찾아, 병을 고칠 수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뜻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다. 송나라부터 지금까지, 관부(官府)는 이를 지켜 법으로 삼고, 의료인은 이를 전하여 업으로 삼으며, 환자는 이를 의지하여 목숨을 세우고, 사람들은 이를 익혀 습관으로 삼았다.8)
『화제국방』은 고려시대에 이미 전래되었으나, 현재까지는 공식 사료에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1226년(고려 고종 13년)에 편찬되어 평양부에서 간행된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에 수록된 135개 처방 중 13개가 『화제국방』에서 유래하였다.9) 이에 적어도 1226년 이전에 『화제국방』이 한반도에서 유통되며 고려 의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화제국방』의 유통 범위는 한층 확대되었고, 그 활용 방식 역시 다양화되었다. 먼저 인쇄 기술의 발전과 함께, 조선에서는 『화제국방』을 여러 차례 중각(重刻)하였다. 현재 확인되는 판본으로는 단종 이전의 간본, 성종 16년(1485) 갑진 활자본, 동활자본, 원대 대덕(大德) 갑진년(1304) 정판본을 저본으로 한 복각본, 연대 미상의 간본, 그리고 『고사촬요(攷事撮要)』 팔도 책판 간본 등이 있다(崔秀漢, 1996: 205-208; 韓毅, 2019: 361-365). 이는 『화제국방』이 조선에서 단발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통된 중요한 중국 의서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화제국방』은 조선시대의 의인 선발 체계에서도 중시되었다. 『화제국방』과 『화제국방지남(和劑局方指南)』은 여러 차례 의과(醫科) 시험의 과목으로 지정되었다. 즉 세종 12년(1430) 3월,10) 세조 4년(1458) 3월11) 및 6년(1460) 5월,12) 성종 2년(1471) 5월13) 및 3년(1472) 3월,14) 그리고 『경국대전(經國大典)』(1485),15) 정조의 『대전통편(大典通編)』(1785),16) 고종의 『대전회통(大典會通)』(1865)17)에서 각각 확인할 수 있다. 덧붙여 『화제국방』은 조선 의서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1399년) 10회(이경록, 2010b: 346-347), 『의방유취(醫方類聚)』(1448년) 99회(張弦, 2013: 46), 『동의보감(東醫寶鑑)』(1610년) 165회가 인용되었다(崔秀漢, 1996: 73).
2) 『증치방』에 인용된 『화제국방』 납약방『납약증치방』18)과 『언해납약증치방』19)(합칭 『증치방』 두 책)은 실용성을 중시하여 처방명, 주치 병증, 금기만을 수록하고, 약재 구성과 포제법은 기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일한 처방명이라도 동일한 내용이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증치방』 두 책의 내용은 『화제국방』을 비롯한 관련 의서들의 유사한 내용과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재까지 『증치방』의 연구로는 허준 편찬설이 유력하다. 여기에 더해, 납약은 대부분 조선 내의원에서 제조되었다. 어의(御醫) 강명길(康命吉)의 『제중신편(濟衆新編)』(1799년)에는 36개 처방이 조선 내의원의 상용방으로서 ‘내국(內局)’이라 표기되어 있으므로 『증치방』 두 책의 처방과 동일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화제국방』 납약방을 고찰함에 있어, 『동의보감』과 『제중신편』까지 아울러 고증할 필요가 제기된다.
『증치방』 두 책, 『동의보감』, 『제중신편』과 『화제국방』의 처방을 대비한 결과, 『화제국방』에서 유래한 납약방은 소합향원(蘇合香圓), 신보원(神保圓), 구통원(九痛圓), 온백원(溫白圓), 감응원(感應圓), 해독웅황원(解毒雄黃圓), 기파만병원(耆婆萬病圓), 비급원(備急圓), 승금원(勝金圓), 수자목향원(水煮木香圓), 우황청심원(牛黃淸心圓), 지보단(至寶丹), 우황양격원(牛黃凉膈圓), 최생단(催生丹), 지성보명단(至聖保命丹)으로 총 15개이다. 이들 처방은 『증치방』 두 책 전체 처방의 평균 41.70%를 차지하여 거의 절반에 가까우며, 이는 조선 납약방이 대부분 『화제국방』에 의존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화제국방』에서 채택된 납약방을 ‘『화제국방』 납약방’으로 삼는다.
3. 조선에서 납약의 텍스트적ㆍ사회적 수용1) 조선 의서에 나타난 방제의 의존과 재구성『의방유취(醫方類聚)』(1448년), 『의림촬요(醫林撮要)』(1580년대 초반),20) 『동의보감(東醫寶鑑)』(1610년), 『제중신편(濟衆新編)』(1799년),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1894년)은 조선 의학을 대표하는 주요 의서이다. 『화제국방』 납약방은 이들 의서에 인용되어 있는데, 이를 일목요연하게 표시하면 <표 1>과 같다.
조선 의서의 납약방 수록 상황을 보면, 우황청심원과 소합향원은 다섯 의서 모두에 수록되어 인용 빈도가 가장 높다. 조선에서는 전통적으로 중국 의학에 대한 강한 신뢰와 의존이 지속되었다(김호, 2005: 110). 아울러 중국 의학의 수용 과정에서는 조선의 실정에 맞춘 의학지식의 재구성이 병행되었다. 『화제국방』 납약방의 수용에서도 조선 의서에는 다음과 같은 의존과 재구성 양상이 동시에 나타났다.
첫째, 처방의 문류(門類) 소속 측면에서 볼 때 의존은 『화제국방』 납약방의 문류 배치를 존중하고 차용하는 데 나타나며, 재구성은 문류 소속을 재분류하는 데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의방유취』, 『의림촬요』, 『동의보감』, 『제중신편』, 『동의수세보원』에 수록된 소합향원은 대부분 기병(氣病) 치료 약물로 분류되어 『화제국방』 중의 치기약(治氣藥) 분류 체계를 계승하고 있다. 반면, 기파만병원은 『화제국방』에서 치잡병(治雜病)에 포함되었으나, 『의방유취』, 『의림촬요』, 『동의보감』에서는 주치에 따라 보다 세분화된 적취문(積聚門)으로 재분류되었다.
둘째, 주치 병증의 서술에서 볼 때 의존은 『화제국방』 납약방의 핵심 주치를 유지하는 데 나타나며, 재구성은 주로 1) 조선 의서가 주치 서술을 간결하게 정리하여 더욱 요약하게 만드는 경향, 2) 조선 의서가 일부분 주치 내용을 약화시키고 핵심 주치를 전문화시키는 경향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화제국방』의 소합향원은 광범위한 효능을 가진 약물로, 그 치료 범위는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를 포함하여 축사(逐邪) 기능까지 폭넓게 포함한다.21) 『의방유취』는 『화제국방』의 주치 서술과 거의 유사하지만,22) 『의림촬요』,23) 『동의보감』,24) 『제중신편』,25) 『동의수세보원』26)은 모두 주치 서술을 간결하게 재정리하여 평균 자수가 『화제국방』 처방 글자 수의 ⅓~½ 수준이다. 또한, 핵심 주치의 내용에서도 변용이 나타났다. 조선 의서는 부인과, 소아과 및 축사 관련 내용을 약화시켜 기병(氣病) 혹은 기질(氣疾) 치료에 주목하여 소합향원의 주치 병증을 강조하였다. 구체적으로 『동의보감』, 『제중신편』, 『동의수세보원』에서는 “모든 기질, 중기, 상기, 기역, 기울, 기통을 치료한다”라는 서술을 유지한다. 즉, 소합향원의 기질 치료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화제국방』 중의 광범위한 효능보다 행기약(行氣藥) 성격을 재정립하는 경향을 보인다.
셋째, 약재 사용 측면에서 볼 때 의존은 『화제국방』 납약방에서 사용한 약재를 그대로 답습하는 데 나타나며, 재구성은 주로 약명과 약재를 조선의 의료 현실에 맞도록 수정하는 데 나타난다. 약명 수정에서의 재구성은 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1) 약재가 동일하나 명칭만 조선식으로 변경한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가 가장 많이 나타나며, 조선 의가들이 국내 상용 약명에 따라 수정한 것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오서설(烏犀屑) → 오서(烏犀)ㆍ서각(犀角), 가려륵(訶黎勒) → 가자(訶子)ㆍ가자피(訶子皮), 석석척(石蜥蜴) → 석척(蜥蜴) 등을 거론할 수 있다.
2) 약재가 동일하나 포제 과정을 반영하여 명칭을 세분화하거나 보충한 경우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선 의서에서는 약재 수치(修治)나 포제 과정을 결합해 새로 활용된 첨가물을 약명에서 그대로 반영하거나 추가 열거하는 재구성 방식을 취하였다.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자. 『화제국방』 우황양격원에 열거된 약명은 “남성(南星)”이지만, 포제 과정에서 “남성 우담제(南星牛膽制)”라고 기재되어 있다. 조선 의서는 원처방에 의거하면서도 약명 표기에서는 남성 → 우담천 남성(牛膽天南星)이나 우담남성(牛膽南星)과 같은 세분화 재구성을 한다. 이는 약재 준비에 편리를 꾀하려는 변용이다.
3) 약재가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변경한 경우이다. 약재는 대체로 유사하지만 실제 사용한 약재가 다르다. 이는 조선 의가들이 자신의 임상 인식과 경험에 기반하여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동의보감』에서는 복령(茯苓)을 적복령(赤茯苓)으로 수정한 사례가 두 번 나타난다. 하나는 온백원에서, 다른 하나는 기파만병원에서이다. 『동의보감』의 ‘탕액편(湯液篇)’에서 허준은 “흰 것과 붉은 것 2종류가 있다. 흰 것은 수태음경, 족태양경, 족소양경에 들어가고, 붉은 것은 족태음경, 수태양경, 수소음경에 들어간다. 흰 것은 임계(壬癸)에 들어가고, 붉은 것은 병정(丙丁)에 들어간다고 한 곳도 있다. 흰 것은 보하고, 붉은 것은 사한다”라고 백복령과 적복령을 구분하여 그 효능을 상세히 서술하였다.27) 따라서 복령을 적복령으로 수정한 사례는 허준 개인의 임상 인식에 따른 수정을 보여준다.
2) 조선에서 상비약ㆍ하사품ㆍ진재물로서의 청소이원(淸蘇二圓)납약방은 조선 의서에서 수록되어 그 텍스트 지식이 끊임없는 유통 과정을 걸쳤다. 이와 더불어, 납약은 조선 사회에서도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기록을 종합하면, 우황청심원과 소합향원, 즉 청소이원(淸蘇二圓)은 조선 사회에서 납약 중 가장 빈번히 사용되었다.28) 그 이유는 질병 치료의 보편성, 즉 ‘통치성(通治性)’에 있다.
조선 의학에서는 치풍(治風)과 조기(調氣)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먼저,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에서 볼 때 풍사(風邪)는 외감병(外感病)의 우두머리로서 조선 의서에서 매우 중요시된다.29) 『의방유취』에서는 중풍이 가장 심각한 질병임을 반복해서 강조하였다.30) 또한, 『의림촬요』의 ‘중풍문(中風門)’과 『제중신편』의 ‘풍(風)’은 해당 의서 중에서 모두 병문(病門)의 첫 번째에 위치하며, 『동의보감』의 ‘풍’도 ‘잡병편(雜病篇)’의 첫 번째에 위치한다.
다음으로 질병의 발생, 발전, 변화의 규칙인 병기(病機)의 측면에서 볼 때 기기실조(氣機失調)는 질병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므로, 기의 조절 즉 조기는 질병 치료의 관건으로 간주되었다. 『동의보감』에서는 “기에서 여러 가지 병이 생긴다[氣爲諸病]”라는 내용을 단독적으로 분석하여 “사기(邪氣)가 사람을 상하게 함이 가장 중증에 이른다”라고 언급하였다.31) 조선 의인들은 기가 생명의 근본 동력이며, 내상(內傷)과 외감(外感)이라는 실조가 인체를 병들게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청소이원은 각각 풍병(風病)과 기질(氣疾)의 대표적 치료약으로 인식되었다. 우황청심원은 주로 풍(風)으로 인한 사지 마비 및 운동 장애[諸風緩縱不遂], 어지러움과 눈앞이 캄캄함, 그리고 입과 눈이 비뚤어짐[頭目眩冒 口眼喎斜], 정신 혼미[精神昏憒], 언어 장애[言語謇澀]와 같은 사지류(四肢類), 두수류(頭首類), 신지류(神志類), 언어류(言語類) 등을 치료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陳少婷, 2014: 58-60).32) 그리고 소합향원은 기(氣)의 순환 장애로 인한 중기(中氣), 상기(上氣), 기역(氣逆), 기울(氣鬱), 기통(氣痛) 등 증상을 다스리는 것으로 서술되었다.33) 요컨대, 청소이원은 조선 의료 체계에서 중시되었던 풍병과 기질에 대한 통치약으로 활용되었다.
이에 청소이원은 조선에서 풍병과 기질의 상비약으로서 이해되었다. 조선 사회에서 그 활용의 영역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정되었다. 먼저, 납약은 기본적으로 내의원에서 제조되었으며, 청소이원 역시 왕실의 상비약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우황청심원의 사용은 주로 열기가 성할 때,34) 기급(氣急), 기승(氣升), 기역(氣逆),35)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거움[頭痛身重],36) 말소리가 명확하지 않고 탁하게 들림[語音謇澀重濁],37) 정신 혼란[精神昏迷],38) 가래가 막혀 숨이 참[痰喘窒塞],39)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 부위에 불안감이 느껴짐[胸悶怔忡]40) 등의 병증에 많이 활용되었다.
또한, 대부분 복방(複方)으로 구성된 납약은 진귀한 약재를 다량 사용하며 약효가 뚜렷하므로, 조선 왕실에서는 이를 귀중한 선물로 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실 구성원과 관료가 청소이원 하사의 주된 대상이었다. 태종은 양녕대군 이제(李禔)에게 소합원(蘇合圓), 청심원(淸心圓), 양비원(養脾圓), 목향원(木香圓)을 내려 보내고,41) 세종은 소합원, 청심원, 양비원, 보명단(保命丹) 등을 하사하였다.42) 조선 중기의 명신 최립(崔岦)이 박 방백(朴方伯)에게서 납약을 받고 남긴 “청심원은 뜨거운 열을 싹 가시게 하는지라, 답답하게 막힌 가슴이 조금만 먹어도 풀어지고. 소합원은 냉한 속병 내리는 데 특효라서, 뒤틀린 기운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 그만이다”라는 평가는 우황청심원과 소합향원의 약효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보여준다.43) 이를 통해 조선 관료층이 청소이원의 주치 효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군사들도 납약을 하사받는 또 다른 주요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선조는 도원수(都元帥)에게 청심원, 양색소합원(兩色蘇合元), 호합인진환(好合茵陳丸)을 보내었으며,44) 숙종은 청심원 1제를 구급약으로 삼군문(三軍門)에 먼저 보내주었고,45) 영조는 기가 막힌 여사군(轝士軍) 3명에게 청심환을 넉넉히 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46) 이밖에도 국왕이 행차 중에 우연히 만난 부상자에게 하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비교적으로 드문 상황에 불과하였다. 태종은 길가에서 말발굽에 채인 부상자에게,47) 영조는 기창마(旗槍馬)에 짓밟힌 유생에게 청심원을 하사하였다.48)
마지막으로, 청소이원은 전염병 발생 시 중앙에서 해당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진재(賑災)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조선 효종 4년(1653)에 역질이 폭발할 때 청소이원을 하사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여러 도에 창궐하는 역병이 실로 우려되는 바이며, 특히 해서(海西) 지방이 가장 심각하여……경기ㆍ개성부ㆍ황해도ㆍ강원도 및 동ㆍ서 활인서에 배포된 의약품은, 총 1,300여 복의 탕약과, 200여 환의 청ㆍ소원에 불과하였다……지방으로 배분된 실제 수량을 살펴보면, 다소 많은 지역의 경우 한 도에 300여 복, 적은 지역은 100여 복 정도였으며, 청심환은 많아야 15환, 적게는 10환에 그쳐, 그 수가 해당 도 내 군현(郡縣)의 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는 창해일속(滄海一粟)과 같이, 그 형세가 마치 모든 마을에 미치는 것 같아도, 실상은 헛된 지시에 불과하다.49)
청소이원은 비록 역병이 만연할 때 진재물로 사용되었으나, 두 약물은 약재가 방대하고 희귀약재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정부의 제조량은 조정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그쳤다. 따라서 민간의 구료에 미친 실질적 효과는 제한적이고 미미하였다. 조선 납약의 확산 범위에서 보이는 한계라고 평가할 수 있다.
4. 중국으로의 조선 우황청심원 역유입과 ‘신성화(神聖化)’1) 『화제국방』 청심원에 대한 경시 경향조선 우황청심원이 중국 처방인 만큼, 청나라에서 진귀한 외래 약물로 각광받게 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송나라 『화제국방』에서 청대에 이르는 동안에 나타난 그 텍스트 지식의 계승 양상을 검토해야 한다.
우선 『화제국방』에 수록된 우황청심원은 29가지 약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조합은 1580년대 이전까지 거의 절대적인 규범 지위를 차지하였다. 『옥기미의(玉機微義)』(1368년),50) 『수진방(袖珍方)』(1390년),51) 『기효양방(奇效良方)』 (1449년),52) 『명의잡저(明醫雜著)』(1502년),53) 『의학정전(醫學正傳)』(1515년),54) 『의학입문(醫學入門)』(1575년),55) 『의림승묵대전(醫林繩墨大全)』(1584년)56) 등 여러 명나라 의서에 수록되었으며, 주치, 약물 사용, 복용법이 비교적 일치하였다. 『화제국방』 청심원을 답습한 의서는 대부분 우황청심원을 복잡한 풍병과 신지(神志) 실조 치료에 사용하였다.
이후, 공신(龔信), 공정현(龔廷賢) 부자의 『고금의감(古今醫鑑)』(1576, 1589년)에서 『화제국방』 청심원의 텍스트 지식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공 씨는 『화제국방』의 29가지 약물에 처음으로 주사(朱砂)를 첨가하며 “더하면 더욱 좋다[加些尤妙]”라고 표시하였고, 치료 병증으로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거나 울음을 터뜨리며, 어리석거나 멍한 상태에 빠지거나, 귀신이 보이는 듯한 상태, 또는 불안과 공포감에 시달리고, 정신이 흐릿하여 집중력을 잃으며, 꿈을 꾸며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함” 등의 신지 질병을 부각하였다.57) 공 씨는 임상적으로 검증된 실용 처방을 중시하여 효험이 확실한[百發百中] 방제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58) 이와 동시에 명나라 다른 의서에서는 우황청심원의 여러 파생 방제가 나타났다. 특히 만밀재(萬密齋) 『두진심법(痘疹心法)』(1549년)에 등장하는 만 씨 우황청심원이 대표적이었는데, 이 처방은 『화제국방』 청심원과 완전히 다르다.59)
결정적으로 『화제국방』 청심원은 처방 자체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장씨의통(張氏醫通)』(1693년)에서는 먼저 『화제국방』 청심원이 “너무 번잡하다[太冗雜]”라는 점을 지적하며 해당 처방을 인용할 때 단 12가지 약재만 보존하였다.60) 필자가 파악한 청나라 문헌 자료에 따르면, 항세준(杭世駿)의 『정와류편(訂訛類編)』(1746년)은 청나라 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화제국방』 청심원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두 방제 혼기 오류설[兩方混記訛誤說]’을 제기하였다.61)
송나라 심괄(沈括)의 『혜민약국기(惠民藥局記)』를 보자, 우황청심원 한 처방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이 처방에는 모두 29가지 약재가 사용되었는데, 그 약재의 한열(寒熱) 성질이 서로 뒤섞이고 오류가 있어[藥味寒熱訛雜], 이해하기 어렵다. 어느 명의(名醫)의 말에 따르면, 이 처방이 실제로는 앞의 8가지 약재, 즉 포황(蒲黃)까지 그쳐야 하며, 건산약(乾山藥) 이후의 21가지 약재는 모두 보허(補虛)용으로, 그 명칭은 중산우환(中山芋丸)이다. 당시에는 그 연유를 알지 못하고, 잘못하여 이 처방 뒤에 기재한 것이다.62)
이후 청나라 관찬 총서(叢書)인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1782년) 역시 항 씨의 의견에 따라, “그의 말을 인하여 고찰하니, 과연 그러하다”라고 하며,63) 『화제국방』 청심원 처방에 오류가 있음을 공식적으로 지적하였다. 이 견해는 이후 청나라 의인들도 받아들였으며, 온병학가(溫病學家) 왕사웅(王士雄)이 지은 『온열경위(溫熱經緯)』(1852년)에서도 이 설을 인용하여 답습하게 되었다.64) 이를 통해 항세준의 ‘두 방제 혼기 오류설’ 이후 청대 사람들은 『화제국방』 청심원 처방이 약리 배합에 논리적 혼란이 있음을 인식함에 따라, 그에 대한 신뢰를 상실해 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65)
2) 조선 우황청심원의 청나라 유행납약은 희귀하고 값비싼 약재를 많이 사용하며 약효가 뛰어나, 조선 왕실에서는 이를 명ㆍ청 사신에게 보내는 의물(儀物)로 활용하였다. 조선이 명나라 사신에게 청심원을 선물한 최초 기록은 중종 16년(1521)으로, 이는 조선 측이 적극적으로 보낸 경우에 해당한다.66) 그 외 명대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종대는 여전히 『화제국방』 청심원의 권위기였으므로, 명나라 조정과 사신들도 조선의 방약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명ㆍ청 교체 이후 납약의 진납 양상이 뚜렷이 달라졌다. 청 황제의 재위 기간을 기준으로, 조선에서 청 사신에게 납약을 선물한 기록은 순치(인조ㆍ효종ㆍ현종, 1644~1661년), 강희(현종ㆍ숙종ㆍ경종, 1661~1722년), 옹정(경종ㆍ영조, 1722~1735년), 건륭(영조ㆍ정조, 1735~1795년) 시기에 가장 많이 확인된다. 특히, 강희 연간 이후 조선 청심원을 비롯한 납약은 청 사신에게 선물하는 관례적인 의물이 되었으며, 그 수량은 건륭 연간에 정점에 달하였다. <표 2>는 명ㆍ청 사신이 조선 청심원을 구한 상황, 그리고 조선이 사신에게 보낸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순치 연간에 청 사신은 주로 자신이나 집안의 어른이 병을 앓고 있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약을 청한 경우가 많았으며,67) 그 중에서 청심원을 가장 많이 요구하였고, 그 요청 방식은 비교적 완곡하였다. 더 나아가 ‘진품 청심원(眞品淸心圓)’을 구하기 위해 끈질기게 요구한 적도 있었다.68) 강희 연간을 기점으로, 청심원은 인삼, 『동의보감』 등과 함께 청나라 사신의 정례적 구청 목록에 포함되었고, 조선이 청 사신에게 관행적으로 증여하는 물품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관례는 이후 상당 기간 계승되었다. 청심원의 증여 빈도와 수량은 현저히 증가하여, 건륭 연간에 절정에 이르렀으며, 적을 때는 30~50환에서 많을 때는 800환에 달하였고, 심지어 2,000환이나 3,600환을 증여한 경우도 있었다. 이 상황에 정조 시기의 호조판서(戶曹判書) 홍순(弘淳)은 “부칙사는 실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이 있어,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어, 응대할 일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청심환 2,000환을 요구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라고 탄식하였다.69) 이는 조선의 제조 능력을 훨씬 초과한 요구였으나, 조선은 사태를 무마하거나 청나라와의 인적 관계를 잇기 위해 결국 다 보내었다.
사실 조선ㆍ청나라의 종번(宗藩) 관계를 중시한 건륭제는 즉위 후 조선이 조사(詔使)에게 보내는 의물을 절반으로 감축하고 영원한 법령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진귀한 물건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였던 청 사신은 여전히 조선에서 많은 의물을 받아갔다(張存武, 1978: 25-43; 王薇, 2002: 289-298). 앞서 언급한 청심원을 대량으로 반복해서 요구한 것은 그 대표적 예증이다.
청나라 황실의 임상 치료 의안에서도 조선 청심원이 자주 등장하였다. 『청궁의안집성』의 기록을 분석해보면, 궁정에서 사용된 청심원은 청궁 청심원(淸宮淸心圓)과 고려 청심원(高麗淸心圓) 두 종류로 나뉜다.70) 즉, 청나라에는 비록 황실에서 제조한 청심원이 있음에도, 조선 청심원이 임상 치료와 신하 하사에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청나라 공식 의료 체계가 조선 청심원의 약효를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3) 조선 우황청심원의 ‘신성화’ 요인조선 청심원 처방은 중국 의서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지만, 조선에서 제조한 성약은 오히려 청나라에서도 널리 환영받았다. 조선 사신조차 이해하지 못해 “청심환은 고방(古方) 중약(中藥)이며 약재 역시 중국에 모두 있는 것인데, 왜 반드시 조선에서 만든 것을 요구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할 정도였다.73)
위의 <표 2>에서 특히 유의할 만한 점은, 1746년에 항세준이 『정와류편』에서 ‘두 방제 혼기 오류설’을 제기하며 『화제국방』 청심원이 비판을 받던 시기에도 조선 청심원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꾸준히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이 1746년은 <표 2>의 25번(1738년)과 26번(1748년) 사이에 해당하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조선 청심원은 중국 처방과 구별된 외래의 성약(聖藥)으로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 청심원의 물질적 우위, 청나라의 사회적 심리 및 전기적 상상, 그리고 연행단 하례(下隷) 들의 상업적 활동이 작용한 결과를 종합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첫째, 조선 청심원이 약물로서 지닌 근본 속성은 탁월한 효능과 이 약효를 지탱하는 도지(道地)약재,74) 즉 특산지 약재에 있었다. 사실 조선 청심원은 중국 의서에 흔히 보이는 처방과는 다르다. 조선에서 사용한 청심원의 처방에 대해서는 학계에 통일된 견해가 없지만 『승정원일기』의 한 기록은 그 출처와 약물 사용의 변화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약로(若魯)가 아뢰기를, 내국에서 쓰는 대소 탕약과 환약은 모두 『동의보감』의 처방을 사용하고, 청심환만은 『의림촬요』의 처방을 사용하므로, 한 제(劑)의 양이 『동의보감』보다 열 배나 많으며, 주사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러 의관들이 모두 『동의보감』의 처방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임금이 이르기를, 그런가? 청심환은 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주사가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애석하니, 모두 『동의보감』에 따라 처방을 사용하라.75)
조선 내의원에서 제조한 청심원은 원래 『의림촬요』 처방, 즉 『화제국방』 납약방을 사용하였으며, 그 후 『동의보감』 처방, 즉 주사가 추가된 『고금의감』 처방으로 전환하였다.76) 허준이 공 씨의 개량 처방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한편으로는 허준이 주사의 약효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77)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임상에서 청심원은 주로 열병(熱病) 치료에 사용되었고 풍병 역시 열병에 속하므로 공 씨의 처방이 조선의 임상적 수요에 더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청심원의 효능에 대해서는 『승정원일기』에 많은 기록이 있다. 조선 영조(재위 1724~1776년)는 의학을 즐기고 온보(溫補) 치료법을 선호하여 청심원을 자주 복용하지 않았다.78) 그럼에도 영조는 당시 의관과 청심원의 약효를 논의한 적이 있으며, “항상 먹지는 않다가, 청심원을 한 번 먹으니, 과연 상쾌하였다”라고 청심원의 뛰어난 효능을 칭찬하였다.79) 더욱이 앞서 청나라 궁정 의안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조선 청심원은 청 황실 임상 치료에 자주 사용되었으며, 청궁 청심원마저도 조선 청심원을 대체하지 못하였다. 이는 조선 청심원의 탁월한 약효가 조선 왕실과 청나라 궁정의 일치된 긍정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점은 조선 청심원과 『화제국방』 청심원이 실제 임상 치료에서 쓰인 주치 증상과 주요 기능에 있어서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 청심원은 『화제국방』 이래 그 주치가 종합적 풍병과 번울(煩鬱), 건망(健忘), 전광(癲狂)과 같은 신지병 치료에 집중하였다. 반면, 조선 청심원은 졸중풍(卒中風) 등 위급한 중풍 폐증(閉證) 치료에 활용되고, 의서에서 졸중풍을 치료하는 구급약으로 분류되어 그 구급 속성이 유난히 두드러졌다.
이러한 조선 청심원의 구급 속성은 1826년(순조 26년, 청 도광 6년)에 청나라를 방문한 신재식(申在植)과 청인 이월정(李月汀)의 필담에서 확인된다. 신재식은 조선 청심원이 중국에서 특별히 중히 여겨지는 이유를 묻자, 이월정은 “담궐(痰厥)을 다스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라고 답하였다.80) 이는 명청대 의서에서 언급된 담궐의 위급 증상과 일맥상통한다. 『경악전서(景嶽全書)』(1636년)에서 담궐을 담연(痰涎)이 옹색(壅塞)하고 기가 막혀 정신이 혼미해지는 급한 상태로 규명하며, 먼저 구제해야 할 병증이라고 지적하였다.81) 또한, 『서대춘 회계의안(徐大椿 洄溪醫案)』(1759년)에서도 담궐은 약물을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일시에 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락이 막혀, 주시(周時) 만에 사망에 이르는 증상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82) 따라서, 조선 청심원은 중국 의가들이 간과했던 담궐에 대한 뛰어난 구급 효과를 입증해 보인다. 그의 위급ㆍ중증에 대한 구급 속성은 청나라 의료 실천에서 특별한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청인들의 조선 청심원에 대한 높은 평가는 그 속에 사용된 특산지 약재, 즉 고려삼(高麗蔘)과 동우황(東牛黃)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인삼 문화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단지 평범한 약재에 불과하였다. 명ㆍ청 시기, 특히 건륭ㆍ가경 연간 보약(補藥) 의료 문화가 성행하면서, 인삼은 생명을 구하는 신약(神藥)으로 숭상받게 되었으며 그 약효도 점차 전설화되었다. 부유층부터 시민에 이르기까지 그 약효를 깊이 믿었다(蔣竹山, 2007: 115-120; 2015: 148-170). 청나라 의서에서 인삼 관련 의론(醫論)도 많아졌다. “인삼을 복용하고 사망한 경우, 그 치료가 잘못되었음을 알더라도, ‘인삼을 먹고 죽었다’라고 여기게 되면, 이는 의사가 최선을 다했으며, 자식이 효심을 다했음을 의미하므로, 결국 천명에 따른 결과로 받아들여 더 이상 유감이 없을 수 있다”라는 극단적인 현상을 비판한 글도 보인다.83) 당시 청인들은 인삼의 효능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 내 인삼 수요의 증가를 뒷받침한 동력은 일찍부터 형성된 고려삼의 상품 경쟁력이었다.84) 중국에서 고려삼에 대한 인식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양정필ㆍ여인석, 2004: 186), 특히 고려 말 원(元)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유통량이 증가하였다.85)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교역 구조가 더욱 체계화되면서86) 명ㆍ청의 보약 문화 확산과 맞물려 고려삼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구도영, 2020: 974-979). 이는 조선 연행사의 기록을 통해 생생히 확인된다. 1828년(순조 28년, 청 도광 8년)에 청을 방문한 박사호(朴思浩)는 청인 묘교(卯橋)의 말을 언급한 바 있다.
경사(京師)의 삼포(蔘鋪)는 모두 홍삼(紅蔘)을 상품(上品)으로 삼는데, 가지가 길고 수염이 있는 것이 노산삼(老山蔘)이며, 모두 귀국의 삼이다.87)
이는 조선산 인삼이 북경 시장에서 최상급 인삼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더불어 청대 문인들의 문집과 일기에는 고려삼을 구입하거나 선물로 받은 기록이 빈번히 등장한다. 강희ㆍ옹정ㆍ건륭 삼대에 걸쳐 활동하고 ‘삼조로민(三朝老民)’으로 자호한 김농(金農)은 친구와 함께 병중에 지은 오언시에서 “우잠백출(于潛白朮)과 고려삼(高麗參), 누가 약을 주며 기쁘게 찾아오는가”라고 읊었다.88) 『이성원일기(李星沅日記)』에는 1840년(헌종 6년, 청 도광 20년) 기록에 “월상(月裳)이 고려삼 1근 6냥을 주었다. 호경(虎卿)이 글을 보내 승전을 알리고, 아울러 고려삼 1근 및 녹교(鹿膠), 아교(阿膠) 여러 약을 대신 샀다”라는 내용과 함께 고려삼을 수면 전에 복용한 기록도 확인된다.89)
한편 조선 우황, 즉 동우황이 중국에서 부상한 것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가 당나라에 최소 6회 이상 우황을 진공(進貢)한 사실이 확인된다(于賡哲ㆍ彭李曉, 2024: 200-201). 이러한 지속적인 공납 관계를 통해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가 양질 우황을 생산하는 주요 산지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동우황을 한반도에서 특산되는 별개의 약재로 인식하려는 초보적인 모습이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청나라 말기에 편찬된 『의학충중참서록(醫學衷中參西錄)』(1918~1934년)에서는 동우황의 우수성을 언급하였다.
무릇 좋은 우황은 고려에서 나오니, 고려의 소가 크기 때문에 나오는 우황도 가장 좋다. 이전에 고려 청심환이 매우 좋았으니, 그 속에 우황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동우황이라고 하는데, 그 가격도 비교적 비싸다. 청해(靑海), 서장(西藏) 지역에서도 우황이 다량 산출되나, 그 품질은 동우황에 비해 열등하여, 이에 별도로 서우황(西牛黃)으로 구분하였다.90)
동우황과 달리 청해, 서장에서 생산된 우황이 서우황으로 구분된다는 것은 청대 사회에서 우황의 품질에 서열이 존재하였으며, 조선산 동우황이 고품질의 지위를 공고히 했음을 방증한다.
조선 특산 약재인 고려삼과 동우황으로 만들어진 조선 청심원은 청인들의 신뢰와 숭상을 받게 되었다. 연행사 박제인(朴齊寅)은 1860년(철종 11년, 청 함풍 10년)에 청나라에 사행한 바 있는데 길에서도 청인들에게 청심원을 많이 요구받았다. 그는 조선에서 나는 인삼, 우황이 좋다고 언급하며 이를 청심원의 신성화 요인으로 꼽았다.91)
둘째, 청나라에서 조선 청심원의 신성화는 청대의 사회적 구의(求醫) 심리와 전기적(傳奇的) 상상이 공동 작용한 결과물이었다. 중국 전통 문화에 존재해 온 ‘귀원천근(貴遠賤近)’92)의 심리와 청나라 병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난 ‘호귀오천(好貴惡賤)’93)의 구의 심리는 서로 결합하여, 멀리서 수입된 값비싼 조선 청심원에 신비하고 뛰어난 속성을 부여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청나라 말기의 의학자인 정흠안(鄭欽安)은 근래의 병가(病家)가 고려삼(高麗蔘), 구기(枸杞), 귀(龜) 등 귀한 것을 지보(至寶)로 받드는 반면, 계지(桂枝), 마황(麻黃), 생강(生薑) 등 천한 것을 비상(砒霜)처럼 두려워한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94) ‘귀원천근’ 및 ‘호귀오천’이라는 심리가 이미 청인의 일상 의료에 깊이 스며들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청심원의 높은 가격과 외래성이 오히려 ‘멀고 비싼 약이 곧 좋은 약’이라는 청인들의 심리에 부합하였던 것이다.
청나라에서 조선 청심원이 상상의 대상이 되었던 대표적인 경우는 ‘주안(駐顔, 용모 보존)’ 효능이라는 전문(傳聞)이다. 조선의 연행사 홍대용(洪大容)과 필담하던 청인 반정균(潘庭筠)은 특별히 조선 청심원 속에 “고빙(古氷)”, 즉 “바다 속에 여러 해 동안 녹지 않는 얼음[海中多年不化之氷]”이 들어 있는지 물었다. 비록 홍대용이 이를 “오전(誤傳)”이라고 답했지만,95) 이 ‘고빙 투입’ 소문 자체는 조선 청심원에 대한 청인들의 상상을 반영하고 있다.96)
이는 중국 고유의 ‘호삼률(互滲律)’ 사고 방식과 연결되어 이해할 수 있다.97) 예컨대 “금은 부패하지 않으므로, 만물의 보배가 되어. 술사(術士)가 복식하면, 수명이 길어진다”라는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의 언명에 대해서,98) 사람들은 금석(金石)이 오래 가도 부패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며 금석류 약물을 복식하면 연년익수(延年益壽)할 수 있다고 믿었다(于賡哲, 2019: 118).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들은 청심원을 복용하면, 거기에 들어있는 “고빙”의 “여러 해 동안 녹지 않음”이라는 속성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 더해 청심원은 금박으로 겉을 입혔는데, 금석이 갖는 부패하지 않는 속성과 결합하여, 청심원을 용모를 보존하는 “금단(金丹)”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유헌속록(輶軒續錄)』에는 어느 청나라 노학자가 청심원을 선물로 받은 후 “해 저물어 금단 부질없이 주나니, 다만 흐르는 세월 잡아두고자 함이라”라는 감사 시구를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99) 이는 청인의 시야 속에서 조선 청심원이 노화를 지연시키고 얼굴을 보존하는 영단묘약(靈丹妙藥)으로까지 여겨졌음을 나타낸다.
셋째, 조선 청심원의 품귀 현상은 상업적인 농간으로 인해 강화되었다. 연행사행단의 하례들은 관화(官話)에 능숙하며, 북방 지역의 사정에 정통하고, 나아가 산천 지리와 길목, 시정의 풍문과 민요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파악하였다. 이러한 언어적 우위를 이용하여, 희극화된 방식으로 청심원의 효능을 과장하여 가짜 청심원의 구매를 유도하였다. 하례들은 처음 압록강을 건널 때 의주(義州) 등지에서 “마른 뿌리나 썩은 약초[陳根腐草]”로 만든 환약을 사들였다. 이후 여항(閭巷)에 들어갈 때 동료에게 급성 설사로 근육이 뒤틀리고 경련하는 위급한 증상을 가장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의식을 완전히 잃은 죽음까지 연기하게 하였다. 이때를 틈타 하례는 청심원을 꺼내 물에 갈아 먹인다. 잠시 후 죽은 척했던 사람은 정신이 돌아와 서서히 깨어났다. 이 장면을 본 청인들은 이 약이 참으로 성약(聖藥)이라며 사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조선 청심원의 “성약” 이미지는 입소문을 타고 “한 번 두 번 계속 퍼져나가[一傳再傳]”, “조선 청심원 이름이 청나라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藥名轉播於彼境]”. 이에 청나라에서는 조선 청심원에 대한 구매 열풍이 일었다.100)
청심원 판매의 혼란 상황 속에서, 청나라의 구약자들은 여러 차례 속은 경험을 통해 청심원 진위를 변별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청인들은 일반적으로 진품 청심원이 “주무르면 시원한 느낌이 있다[握之生凉]”라고 믿었으며, 이에 따라 “북경 사람은 다투어 청심원을 구걸하며, 진짜를 찾느라 손에서 한기를 살핀다”라는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101) 이는 청량제(淸凉劑)로서의 청심원이 지닌 생량(生凉) 특성 때문에 진품일수록 한기를 내뿜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102)
민간에서 판매되는 청심원에는 위조품이 빈번하게 유통되었으나, 청인들은 가품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구매하는 상황[不得不買取]”에 처해 있었다. 청인들은 일반적으로 연행 사신이 직접 주는 것은 반드시 진품일 것이라 여겼다. 이에 따라 길가의 객주와 역참에 있는 부녀와 어린아이들, 관광지의 승려와 나그네, 그리고 궁궐 조정의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예의나 절차를 따지지 않고 반드시 사신 앞에 나아가 “대감님, 진짜 고려 청심환을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반면에 비장(裨將)이나 역관(譯官)에게서 얻는 것은 쉽게 진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103)
이상과 같은 여러 요인이 중첩되어 청심원은 조선 납약에서 청나라의 “성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북경 내 가게의 간판 속에 “광동 약재(廣東藥材), 호주 필(湖州筆), 휘주 묵(徽州墨)” 등 유명한 물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지미지물(至美之物)”로 평가되었다.104)
5. 맺음말본 연구는 전근대 한반도에 유입된 송나라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의 처방 지식이 조선의 납약방(臘藥方)으로 수용되고, 텍스트와 사회적 기능 양 측면에서 수용을 거친 뒤, 물질화된 약물이 다시 중국에 역유입되어 ‘신성화(神聖化)’되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화제국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유통ㆍ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의과(醫科) 시험의 정식 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국가 의료 체계 내에서 권위 있는 모범 텍스트로 자리매김하였다. 조선 납약 방서(方書)인 『납약증치방(臘藥症治方)』과 『언해납약증치방(諺解臘藥症治方)』에는 『화제국방』 처방이 대량 수록되어 조선 납약방의 핵심을 이루었다. 『화제국방』에서 유래한 납약방은 소합향원(蘇合香圓), 신보원(神保圓), 구통원(九痛圓), 온백원(溫白圓), 감응원(感應圓), 해독웅황원(解毒雄黃圓), 기파만병원(耆婆萬病圓), 비급원(備急圓), 승금원(勝金圓), 수자목향원(水煮木香圓), 우황청심원(牛黃淸心圓), 지보단(至寶丹), 우황양격원(牛黃凉膈圓), 최생단(催生丹), 지성보명단(至聖保命丹)으로 총 15개였으며, 『납약증치방』과 『언해납약증치방』 두 책 전체 처방의 약 41.70%였다. 『화제국방』은 조선 납약방의 근간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는 조선 왕실이 송나라 의학지식을 국가 의료 체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편입시켰다는 점을 의미한다.
본 연구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의방유취(醫方類聚)』, 『의림촬요(醫林撮要)』, 『동의보감(東醫寶鑑)』, 『제중신편(濟衆新編)』,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등에서는 『화제국방』 납약방이 흔히 인용되고 변용되었다. 이것은 해당 납약방 지식이 조선 의학에서 수용 과정을 걸쳤음을 보여준다. 조선 의서는 『화제국방』 납약방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중국 의학 기술의 분류 체계와 핵심 주치를 의존하는 한편, 세부적으로는 1) 약재 명칭의 현지화, 2) 주치 서술의 간결화 및 중점 재규정, 3) 특정 약재의 변환 등의 측면에서 재구성을 추구하였다.
이와 더불어, 실체화된 납약 특히 청소이원(淸蘇二圓)으로 합칭된 우황청심원(牛黃淸心圓)과 소합향원(蘇合香圓)은 조선 사회에서 다원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청소이원은 풍병(風病)과 기질(氣疾)의 ‘통치약(通治藥)’으로 인식되었는데, 이는 조선 의학에서 ‘치풍(治風)’과 ‘조기(調氣)’가 갖는 근본적 중요성과 맞닿아 있다. 그 우수한 약효와 귀중한 재료에 청소이원은 조선 왕실의 상비약(常備藥)으로 활용되었고, 왕실 구성원, 관료, 군사, 심지어 길거리 부상자에게 내려지는 하사품(下賜品)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역병이 폭발할 때 조선 중앙에서 지방으로 보내는 진재물(賑災物)로 구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성약(成藥)이면서 구급약(救急藥)이라는 납약의 속성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변용된 의학지식은 물질적 형태로 중국에 역유입되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였다. 중국에서는 우황청심원이 『화제국방』 청심원의 권위 획득 → 공씨(龔氏) 『고금의감(古今醫鑑)』의 주사(朱砂) 추가, 만 씨(萬氏) 청심원의 유행 → 『화제국방』 청심원에 대한 문헌고증학적 비판 과정을 밟았다. 반면 조선 청심원 처방은 『의림촬요』 및 『동의보감』(곧 『고금의감』 처방)을 통해 주사가 포함된 처방으로 전환되면서 급성 중풍에 탁월한 구급 효과로 재규정되었다. 중국에서 『화제국방』 청심원의 본래 주치 영역이었던 종합적인 중풍과 신지(神志) 병증과는 달라진 부분이었다. 때문에 중국 청심원의 권위가 흔들리는 동시에, 조선 청심원은 별개의 외래 약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조선 청심원은 고려삼(高麗蔘)ㆍ동우황(東牛黃) 등 우수한 특산지 약재를 사용하여 제조되었다. 당시 청대 사회의 ‘귀원천근(貴遠賤近)’, ‘호귀오천(好貴惡賤)’ 같은 사회적 구의(求醫) 심리에 더하여 고려삼과 동우황에 대한 청인들의 신뢰와 선호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호삼률(互滲律)’ 사고 방식과 결합되어, ‘고빙(古冰) 투입’의 소문과 ‘금박위의(金箔爲衣)’의 외형은 조선 청심원에 ‘주안(駐顔, 용모 보존)’의 신비로운 효능을 상상하게 하였다. 또한, 연행 사행단 하례들의 가짜 청심원 방매 행각은 청인들의 진품 청심원에 대한 갈망을 부추겼다. 이는 청심원의 신성화와 품귀 열풍을 심화시켰다. 따라서 명ㆍ청 교체기 이후, 특히 청 건륭 연간에 이르러 청심원은 조선에 요구하는 의물(儀物)로 정례화되었으며, 그 수량은 50환(1649년)에서 3,600환(1777년)으로 급증할 정도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송나라 『화제국방』 납약 지식의 한반도 유입 과정에서 조선 의학은 중국 의학 기술을 채용하면서 자국의 의료 환경과 수요를 충분히 고려하였다. 이처럼 텍스트와 사회적 기능 측면의 수용이 조선 의학에서 납약이 차지하는 의학사적ㆍ사회적인 의미였다. 아울러 조선 의학의 특수성이 나타난 우황청심원은 다시 중국으로 역유입된 이후 ‘신성화’ 국면을 맞이하였다. 그 신성화 요인은 중국 처방과 조선 약물에 대한 신뢰도의 차이였다. 이는 한중 의료교류가 지식과 물질, 사회가 얽힌 역동적인 과정임을 보여주었다.
Notes1) 『화제국방』은 북송 태의국 숙약소에서 사용되었던 성약 처방집으로, 『태의국방』이라는 서명으로 1080년(고려 문종 34년, 송 원풍 3년)에 처음으로 반포되었다. 이후 숭녕(1102~1106년), 대관(1107~1110년) 연간에 증보ㆍ교정되었고, 다시 가정 원년(1208년), 보경(1225~1227년), 순우(1241~1252년) 시기에 지속적으로 증보되었다(莊文元, 2023: 18-173). 2) 조선 『경도잡지』(1807년 전후), 『열양세시기』(1819년), 『세시기속』(1821년), 『세시풍요』(1843년) 등의 각종 세시기에는 납약 관습이 수록되어 있다(서금석, 2016: 71-72). 3) 洪錫謨, 『東國歲時記』, 臘, 臘藥,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https://kyudb.snu.ac.kr/book/text.do. 검색일: 2024.12.20. “內醫院造丸劑各種以進, 名曰臘藥. 頒賜近密, 淸心元主憫塞, 安神元主熱, 蘇合元主霍, 三種爲最要.” 4) 사향, 우황, 용뇌, 산삼, 녹용 등 진귀한 약재가 많이 사용되고 그 중의 상당수는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된다(신동원, 2000: 24). 5) 한반도에서 『화제국방』의 유입 양상에 관하여, 중국의 연구자 韓毅는 『화제국방』의 조선 판본과 재인용 양상을 정리하였다. 관련 연구성과는 그 책이 일본 의료에 미친 영향에 주목한 반면, 한반도 의료에서의 수용 상황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韓毅, 2019: 361-365; 2021). 6) 신동원, 이정화는 『언해납약증치방』이 허준의 저작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다. 먼저, 「태의선생안」에는 “허준……『동의보감』, 『창진집』, 『구급방』, 『태산집』, 『벽온방』, 『납약증치방』을 편찬하였다”라고 기록하여, 『납약증치방』이 허준의 저술임을 밝혔다. 또한 허준은 선조 29년(1596)에 『동의보감』의 편찬을 시작하여 광해군 2년(1610)에 완성하였는데, 『납약증치방』의 납약방이 『동의보감』에 수록 처방과 90% 이상 일치하였다. 『납약증치방』에는 35종 처방이 수록되어 있고 『언해납약증치방』에는 기존의 35종의 처방에 2종의 처방을 증보하여 총 37종의 처방이 수록되었다. 『언해납약증치방』과 『동의보감』을 비교해 볼 때, 『동의보감』에 없는 처방은 2종뿐이다. 그리고 『증치방』 두 책과 『동의보감』의 처방 주치와 금기를 대비해 살펴보면 동일한 처방의 서술이 상당히 일치하다는 경우도 많다. 나아가 『언해납약증치방』의 언해 양식이 허준의 다른 언해본과 비슷하다는 사실도 보인다(신동원, 2000; 이정화, 2013). 崔秀漢은 『언해납약증치방』을 중심으로 37가지 납약방이 쓰인 병증, 기원한 의서, 약재 구성에 대해 종합적으로 분석하였지만 납약방의 출전에 있어서 사소한 오류가 보인다(崔秀漢, 1992). 7) 최식은 연행록을 중심으로 특히 조선 청심원이 중국에서 추앙받고 진위 감별이라는 사회적 풍경을 제대로 복원해냈다(최식, 2020). 陳明은 청심원과 흡독석을 각각 조선과 서양의 의학을 상징하는 약물로 설정하고 청나라 강희ㆍ건륭 시기 북경 내 연행사와 서양 선교사의 약물 교류에 주목하였다(陳明, 2009). 張曉蘭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텍스트로 삼아 청심원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태도와 전문을 통해 건륭 시기 중국 사회의 단면을 고찰하였다(張曉蘭, 2019). 王婧璇은 조선 사신이 휴대했던 청심원이 중국 각계각층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과정을 분석하였고, 특히 청심원의 유행을 청대 양생 관념의 변화와 연결하려 시도한 점이 돋보인다(王婧璇, 2022). 이 연구들은 조선 청심원에 관한 연구로서, 청나라에서 불러온 청심원 열풍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연행록 기록에 주로 의존하여 청심원의 유행 현상만 서술함으로써 조선 청심원 처방의 성립, 더 나아가 청심원이 어떠한 요인으로 중국인의 신뢰를 얻었는지에 대한 의사학적ㆍ사회적ㆍ역사적 분석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8) 朱震亨, 『格致余論 局方發揮』(中國醫藥科技出版社, 2011, 65쪽). “《和劑局方》之爲書也, 可以據證檢方, 卽方用藥, 不必求醫不必修制, 尋贖見成丸散, 病痛便可安痊. 仁民之意可謂至矣. 自宋迄今, 官府守之以爲法, 醫門傳之以爲業, 病者恃之以立命, 世人習之以成俗.” 9) 13개 처방은 至寶丹, 牛黃淸心圓, 摩挲圓, 薄荷煎圓, 硼砂圓, 解毒雄黃圓, 七氣湯, 生氣湯, 理中圓, 養脾圓, 耆婆萬病圓, 神功圓, 麻仁圓이다(이경록, 2010a: 358-366). 13) 『成宗實錄』 卷10, 成宗2年 5月 25日 丁酉. “禮曹啓: ‘曾下校正廳單子, 一時遵行, 不載《大典》條件, 開坐以啓, 請令該曹, 仍舊奉行從之……一. 醫員……秋等……和劑方, 考講取才……” 15) 『經國大典』 卷3, 禮典, 諸科, 講書條, 取才條, 한국의 지식콘텐츠, https://www.krpia.co.kr. 검색일: 2024.10.30. 이하 『大典會通』 출처는 동일하다. 19) 許浚, 『諺解臘藥症治方』, 한국한의학연구원, https://mediclassics.kr/books/45/volume/1#content_1. 검색일: 2025.10.7. 이하 의서 『東醫寶鑑』, 『濟衆新編』, 『東醫壽世保元』 출처는 동일하다. 20) 『의림촬요』 초간본은 선조의 명을 받아 양예수가 편찬하였으므로, 선조 즉위년(1567)부터 양예수가 사망한 1600년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간행 시기를 더 압축해 보면 1580년 대 초반에 간행되었을 수 있다(이경록, 2014). 21) 太平惠民和劑局, 『太平惠民和劑局方』 卷3, 治一切氣 附脾胃 積聚(劉景源 整理, 人民衛生出版社, 2007, 63쪽). “療傳屍骨蒸, 殗殜肺痿, 疰忤鬼氣, 卒心痛, 霍亂吐利, 時氣鬼魅, 瘴瘧, 赤白暴利, 瘀血月閉, 痃癖, 疔腫, 驚癎, 鬼忤中人, 小兒吐乳, 成人狐狸等病.” 22) 金禮蒙, 『醫方類聚』 卷87, 諸氣門2, 和劑局方, 一切氣(重校本第5分冊, 盛增秀 外重校, 人民衛生出版社, 2006, 89쪽). “療傳屍骨蒸, 殗殜肺痿, 疰忤鬼氣, 卒心痛, 霍亂吐利, 時氣鬼魅瘴瘧, 赤白暴利, 瘀血月閉, 痃癖丁腫, 驚癎, 鬼忤中人, 小兒吐乳, 大人狐狸等疾……昔有一婦人, 因憂戚中忽然氣厥, 牙噤涎潮, 裏醫作中風用藥, 以大通利藥下之, 大泄數行, 一夕而卒, 可不戒之.” 23) 鄭敬先, 『醫林撮要』 卷3, 氣證門19(梁永宣 外校對, 科學技術文獻出版社, 2005, 126쪽). “治傳屍鬼氣, 卒心腹痛, 霍亂時氣, 瘴瘧, 暴利赤白, 月閉痃癖, 小兒吐乳, 大人狐狸等疾, 大能順氣化痰.” 24) 許浚, 『東醫寶鑑』, 內景篇卷1, 氣, 通治氣藥. “治一切氣疾, 及中氣, 上氣, 氣逆, 氣鬱, 氣痛.”; 雜病篇卷7, 邪祟, 邪祟尸疰治藥. “治疰忤鬼氣, 一切邪祟, 及鬼魅, 狐狸等病.” 27) 許浚, 『東醫寶鑑』, 湯液篇卷3, 木部, 茯苓. “有白, 赤二種. 白者入手太陰經, 足太陽經, 足少陽經, 赤者入足太陰經, 手太陽經, 少陰經. 又云, 色白者入壬癸, 色赤者入丙丁. 白色者補, 赤色者瀉.” 29) 병증의 원인을 설명하는 病因論은 外感論과 內傷論으로 나뉜다. 외감론에서는 몸 밖의 邪氣인 六邪에 주목한다. 육사는 風ㆍ寒ㆍ暑ㆍ濕ㆍ燥ㆍ火라는 六氣가 사기로 변화한 것이므로 육사로 인한 외감병을 치료하려면 대부분 풍을 우선으로 치료해야 한다. 30) 『의방유취』에서는 『천금방』, 『담료방』, 『의방집성』을 인용하여 중풍의 심각성을 강조하였다(이경록, 2013: 213). 32) 『화제국방』에서는 우황청심원을 諸風門에 분류하였다. 조선 의서에서는 諸風門, 傷寒門, 雜病門 風, 風에 분류하고, 특히 『의방유취』, 『동의보감』, 『제중신편』에서는 이를 治諸風 또는 卒中風救急의 통용약으로 서술하였다. 33) 『화제국방』에서는 소합향원을 治一切氣에 분류하였다. 조선 의서에서는 諸氣門, 氣証門, 氣에 분류하고, 『의방유취』, 『동의보감』, 『제중신편』에서는 소합향원이 기질 통치약의 첫 번째 또는 졸중풍 구급의 통용약으로 서술하였다. 34) 『承政院日記』 卷32, 仁祖9年 1月 21日 乙未,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검색일: 2024.12.6. 이하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그리고 조선시대 문집의 출처는 동일하다. “熱勢甚盛, 至於屢度升降云, 此時症候, 何如?……答曰, 四五更間, 淸心元進御, 昧爽, 菉豆粥進御, 而嘔吐矣.” 35) 『宣祖實錄』 卷217, 宣祖40年 10月 9日 戊辰. “上良久不寤, 淸心元, 蘇合元, 薑汁, 竹瀝, 雞子黃等藥, 迭爲進御後, 上氣稍定.”; 『承政院日記』 卷156, 孝宗10年 5月 4日 甲子. “自上氣甚不平, 淸心元, 竹瀝, 薑汁, 連續入之.” 37) 『中宗實錄』 卷105, 中宗39年 11月 4日 己亥. “朝則脈度比昨浮緊尤重, 熱氣加發, 語音似澁,呼吸急促. 卽進和淸心元.”; 『承政院日記』 卷175, 顯宗3年 8月 14日 甲寅. “頭部右邊微重, 玉音亦似重濁, 恐是汗後表虛之時, 微襲今朝寒凉之氣而然. 先以金銀花濃煎茶, 和淸心元進御.” 38) 『承政院日記』 卷90, 仁祖23年 4月 24日 丙子. “至夕時, 寒氣始解, 煩熱繼作, 精神昏迷, 進淸心元, 稍得鎭定.”; 『承政院日記』 卷189, 顯宗6年 7月 5日 己丑. “猝然精神昏憒, 口眼喎斜, 言語艱澁, 不省人事, 右臂不能運用, 症似類中〈風〉, 以淸心元等相當藥物, 多般救療.” 40) 『承政院日記』 卷523, 肅宗46年 6月 7日 壬寅. “上曰, 胸中甚沓沓矣……聖徵曰, 淸心元, 和進蔘茶, 如何? 上曰, 依爲之……上擧手, 使內侍扶起. 頤命曰, 起坐似難, 何必起坐乎? 上曰, 沓沓矣……頤命曰, 蔘茶, 和淸心丸來矣.” 49) 『承政院日記』 卷126, 孝宗4年 3月 6日 壬申. “諸道癘疫之患誠爲可慮, 而海西尤甚……則分送京畿ㆍ開城府ㆍ黃海道ㆍ江原道ㆍ東西活人署者, 服藥一千三百餘服, 淸蘇二百餘丸……而外方分送之數, 則多處則一道三百餘服, 小處則僅一百餘服, 淸心丸多者十五丸, 小者十丸, 其丸數不滿道內郡縣之數. 此則有同滄海一粟, 勢雖遍及於村閭, 實涉浮文.” 59) 만밀재는 『두진심법』에서 두진 치료에 사용된 經驗諸方을 기재하였고, 그 중에는 단 6가지(黃連, 黃芩, 山梔仁, 鬱金, 朱砂, 牛黃) 약물로 구성된 우황청심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치는 “痘疹熱陷心包, 心熱神昏”에 집중되어 있었다(萬密齋, 『痘疹心法』 卷22,古今經驗諸方, 36牛黃淸心丸(傅沛蕃 編, 『萬密齋醫學全書』, 中國中醫藥出版社, 2015, 832쪽)). 만 씨 우황청심원으로 불린 처방은 명ㆍ청 시대 특히 온병학이 흥기한 후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어 『경악전서』, 『온열경위』에도 수록되었다. 61) 사실 『화제국방』 청심원에 대한 의문은 일찍이 송나라 『계신잡지』에서 언급되었으나, 『화제국방』의 권위로 인해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周密, 『癸辛雜識』, 別集上, 和劑藥局(楊瑞 校, 浙江古籍出版社, 2015, 210-211쪽)). 청나라에 이르러, 고증학이 성행하여 건륭, 가경 연간(1736~1820년)에 전성기에 도달하였으며 乾嘉學派라고도 부른다. 문인들은 고증을 추구하지 않음이 없었다(葛榮晉, 1994: 637-653). 이러한 배경에서 『정와류편』은 고인의 행사와 고서의 오류를 발췌하여 상호 考訂한 저술이다. 관찬 의서인 『화제국방』 처방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은 자연히 청대 문인의 중시를 받게 되었다. 62) 杭世駿, 『訂訛類編』 卷4, 書訛, 297丸方訛(陳抗 校, 中華書局, 2006, 144쪽). “宋沈括惠民藥局記, 且以牛黃淸心丸一方言之. 凡用藥二十九味, 其用藥味寒熱訛雜, 殊不可曉. 嘗見一名醫云,此方止是前八味至蒲黃而止, 自乾山藥以後凡二十一味乃補虛, 名中山芋丸. 當時不知緣故, 誤寫在此方之後.” 65) 『화제국방』 청심원에 대한 비판은 중국 내부 처방에 대한 불신을 낳았고, 이는 역설적으로 조선 청심원이 수용될 공백을 제공하였다. 조선 내의원이 제조한 약물의 공식성과 이국성은 새로운 신뢰의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전환이 청대 의료 풍토 및 조선 사절단의 상업적 행위와 맞물려 전개되는 과정은 후반부에서 상술한다. 66) 『中宗實錄』 卷43, 中宗16年 12月 14日 壬辰. “承旨金希壽來復命, 仍啓曰: ‘追至金郊驛, 見天使, 言上敎之意, 天使云: ‘殿下之言, 實孚於俺等之意也.’ 臣仍給賜送筆墨及至寶丹, 淸心圓, 人參等物, 上天使曰: ‘夫禮, 稱情而爲之節者也. 俺等旣受法帖, 又何敢多受?’ 副使曰: ‘惠送厚意, 不敢辭謝, 筆墨各一受之何如?’ 上天使固辭不受, 但令頭目, 柝見至寶丹, 淸心圓等藥, 而受之, 其柝見者, 疑其金塊而然也.” 68) 『承政院日記』 卷145, 孝宗8年 4月 9日 辛巳. “大通官李一善, 欲得好品淸心丸, 懇請不已云. 再昨發行臨時, 因通官等, 求索淸蘇, 令醫司各數十丸覓給矣, 至於中路, 稱以品味不好, 更求眞品淸心元.” 70) 陳可冀, 『淸宮醫案集成』, 科學出版社, 2009, 223쪽; 1021-1023쪽. “嘉慶八年 (1803) 六月十七日,李承緖, 段繼善請得三阿哥六合定中丸十丸, 高麗淸心丸一丸.”; “恭親王, 光緖, 年閏三月十四日辰正一刻吃高麗淸心丸半丸……閏三月十五日申正二刻吃高麗淸心丸半丸……四月初九日戌正二刻十分吃高麗淸心丸半丸.” 71) 孟軻, 『孟子』 卷5, 滕文公章句上,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https://ctext.org/wiki.pl?if=gb&chapter=477680#滕文公章句上. 검색일: 2025.3.30.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矣.” 73) 李田秀, 『入瀋記』,(九月)初七日乙未 晴, 林基中 編, 『燕行錄叢刊』, 한국의 지식콘텐츠, https://www.krpia.co.kr. 검색일: 2025.3.30. 이하 연행록 출처는 동일하다. “淸心丸是古方中藥, 材料亦是中國所有, 而此中必要我國所制者, 何也?” 본고에서 번역한 ‘中藥’은 현대의 ‘中醫藥’과는 구별되는 18세기적 맥락을 지닌다. 본래 『신농본초경』에서 독성 유무에 따라 三品分類法으로 단일 약재를 上藥ㆍ中藥ㆍ下藥으로 범주화하였다. 우황청심원처럼 上ㆍ中ㆍ下 삼품 약재가 섞인 복합 처방이나 성약을 ‘중약’으로 지칭하는 것은 본초학적 관습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李田秀가 사행한 시기인 1783년 북경의 의료 환경을 볼 때, 金鷄納霜이 1693년에 청 황실에 진상된 이후 18세기 중엽부터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1765년에 편찬된 『본초강목습유』에는 이미 36종의 외래 약물이 등재되어 있었다(周禎祥, 2014: 32-33; 蕭雄, 2020: 55). 이러한 중ㆍ서 의료 교류의 배경 아래, 조선 사절은 서양 약물과 대비되는 중국의 처방과 재료를 ‘중약’ 즉 ‘中華의 약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74) 약재에는 품질이 가장 뛰어난 명산지가 존재하며, 중국에서는 이를 道地 또는 地道 약재로 칭하여 가장 우수한 품질의 약으로 평가하였다. 도지약재의 관념은 고대부터 축적되어 왔는데, 특히 명대에 이르러 의약 시장에서 그 개념이 광범위하게 정착되며 상업적 기준으로 정립되었다. 청대에 들어 민간 의료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대중의 의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도지약재와 같은 특산지 약재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최지희, 2021: 283-284; 唐廷猷, 2013: 409-410). 75) 『承政院日記』 卷1075, 英祖27年 10月 23日 乙卯[丙辰]. “若魯曰, 內局劑用大小湯丸皆用東醫寶鑑方文, 而淸心丸用醫林撮要方文, 故一劑之多十倍於東醫寶鑑, 而朱砂則不入. 諸醫皆以爲宜用東醫寶鑑方文云……上曰, 然乎? 淸心丸不但數多, 朱砂不入可惜, 一依東醫寶鑑劑用.” 76) 조선 왕실 청심원의 처방은 송대에서 명대 지식으로의 이행을 보여주지만, 이를 송대 『화제국방』 체계로부터의 단절로 보기는 어렵다. 명대 『고금의감』 처방은 사실상 『화제국방』 처방을 근간으로 삼아 재구성된 파생 처방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청심원 처방은 송대 이후 다양한 파생 처방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송대 『화제국방』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것으로 파악된다. 77) 『동의보감』에서는 “性微寒……主百病, 養精神, 安魂魄, 益精神……鎭心安神, 殺精魅邪惡鬼, 中惡心腹痛”라고 주사의 효능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許浚, 『東醫寶鑑』, 湯液篇卷3, 石部). 78) 『承政院日記』 卷738, 英祖8年 1月 16日 甲戌. “上曰, 予性不喜支離之藥, 雖淸心元之屬, 未嘗長御.”; 『承政院日記』 卷967, 英祖20年 1月 2日 庚辰. “上曰, 一年盡邁, 而淸心元之屬, 不爲進服.”; 『承政院日記』 卷989, 英祖21年 8月 10日 己酉. “上曰, 淸心丸, 知其甚好, 而尙不服矣.” 80) 申在植, 『筆譚』(張伯偉, 徐毅, 陳俐 編校, 『朝鮮時代文獻所見筆談資料彙編』, 鳳凰出版社, 2022, 837쪽). “仍問曰: ‘我國淸心丸緣何最見重於內地也?’ 月汀曰: ‘治痰厥甚效.’” 81) 張景嶽, 『景嶽全書』 卷11, 從集 雜證謨, 厥逆, 論治(夏之秋 外校, 中國中醫藥出版社, 1994, 138쪽). “痰厥之證, 凡一時痰涎壅塞, 氣閉昏憒……此不得不先救其急也.” 83) 徐大椿, 『醫學源流論』 卷上, 方藥, 人蔘論(萬芳 整理, 人民衛生出版社, 2007, 38-39쪽). “服蔘而死, 卽使明知其誤, 然以爲服人蔘而死, 則醫者之力已竭, 而人子之心已盡, 此命數使然可以無恨矣.” 84) 원래 중국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지던 인삼은 山西省 上黨 지역에서 산출되는 상당 인삼이었다. 송나라 관찬 類書인 『태평어람』은 『범자계연』을 인용하여 “인삼은 上黨에서 나오는데, 사람을 닮은 모양이 좋다”라고 하였다(李昉, 『太平御覽』 卷991, 藥部8, 人蔘(中華書局, 1960, 4385쪽)). 가장 유명한 산서 상당 인삼은 장기간의 남벌로 인해 점차 멸종되어 이후 동북 지방의 遼蔘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희ㆍ옹정ㆍ건륭 연간에 번갈아 실시된 제한적 채굴 정책으로 인해, 고려삼은 중국 시장에서 요삼 다음가는 上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趙杏ㆍ陳琦, 2023: 278). 85) 당시의 교역 양상은 1346년(고려 충목왕 2년)에 작성된 중국어 회화 교과서인 『노걸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고려 상인이 인삼, 모시, 말 등을 元에 판매하고 蘇木 등을 구입하는 거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가상의 사례이지만 이를 통해 고려삼이 원나라에서 교역품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경록, 2023: 119). 86) 조선 초 국가적 차원에서 조선산 인삼은 明과의 외교에서 필수적인 진헌품으로 활용되었다. 그 규모는 연간 수백 근 수준으로 집계되었으나 실제 유입량은 훨씬 이를 상회하였다(박평식, 2008a: 219-224). 특히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명나라에서 本草醫學이 발달하면서 조선 인삼의 수요는 급증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조선에서는 인삼을 ‘把’ 단위로 묶어 규격화한 把蔘이 등장하였고, 이는 대중국 무역의 주종 상품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박평식, 2008b: 128-136). 89) 李星沅, 『李星沅日記』, 道光二十年 初十日(袁英光ㆍ童浩 整理, 中華書局, 1987, 54-55쪽). “月裳貽高麗參一斤六兩. 虎卿以書來報捷, 並代買高麗參一斤及鹿膠, 阿膠諸藥.” 90) 張錫純, 『醫學衷中參西錄』附錄, 答王肖舫質疑(山西科學技術出版社, 2003, 627쪽). “蓋牛黃之好者出於高麗, 因高麗之牛大故所出之黃亦最美. 從前高麗淸心丸甚佳, 以其有牛黃也. 特別之曰東牛黃, 而其價亦較昻. 靑海, 西藏之地亦多出牛黃, 其成色亞於東牛黃, 故又別之曰西牛黃.” 91) 朴齊寅, 『燕槎錄(燕行日記)』, 附錄. “蓋彼人之必以高麗淸心丸爲貴者, 惟其材料中人蔘, 牛黃以高麗所産爲佳, 且大豆黃卷尤獨爲高麗之所産故耳.” 조선산 양질 고려삼 및 동우황 외에도, 조선에서만 산출되는 대두황권이 청심원의 신성화에 기여한 요인으로 박제인의 연행일기에서 언급되고 있다. 대두황권은 황두나 흑두를 발아시켜 말린 것으로 약재 자체의 경제적 가치는 고려삼과 동우황에 비하여 높지 않다. 대두는 중국 전통 오곡 중 하나로서 식용ㆍ의료용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약효는 『신농본초경』에 기록된 이후 송나라 『증류본초』와 명나라 『본초강목』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서술되어 왔다. 따라서 대두황권 자체가 청심원 신성화의 주도적 원인이라기보다, 조선산 약재의 독특한 지방성을 보여주는 요소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92) ‘귀원천근’의 심리에 기반하여, 공간적 거리감은 희소성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殊方異物’이 비범한 효능을 가질 것이라는 상상을 부추겼다(陳明, 2007: 13-14). 94) 鄭欽安, 『醫法圓通』 卷1, 用藥弊端說(唐步祺 釋, 巴蜀書社, 2006, 239쪽). “近之病家, 好貴惡賤, 以高麗參, 枸杞, 龜……等品奉爲至寶, 以桂, 麻, 薑……等味畏若砒毒.” 96) 우황청심원 처방에는 龍腦(별칭 氷片)가 들어가 있다. 『본초강목』, 『본초휘전』, 『본초비요』, 『본초구진』 등 명청대 주요 본초서에 따르면, 최상품 용뇌는 “白瑩如氷, 及作梅花片”하여 “氷片腦”와 “梅花腦”로 불렸다. 『본초강목습유』의 실제 처방 기록에서도 “梅花氷片”이라는 표현이 확인된다. 따라서 조선 청심원에 “고빙”이 들었다는 청인들의 인식은 실로 존재하는 약재 명칭에 기반했다기보다, 조선 약물의 신비성을 극대화하는 想像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100) 朴齊寅, 『燕槎錄(燕行日記)』, 附錄. “始於越江之時, 賣取淸心丸於義州等處……陳根腐草也……古有此漢輩, 以其丸藥, 周行村閭……則引其同類……佯作霍亂轉筋, 角弓反張之譎態, 昏絶不省……一漢取出自己槖中所存淸心丸一丸, 磨以冷水, 灌之死人口中. 少頃, 微有氣息……漸次甦醒……彼人輩……此藥眞是聖藥, 莫不有願買之意. 一傳再傳……藥名轉播於彼境.” 102) 이러한 감별법에 대해 연행사가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 李田秀, 『入瀋記』, 雜俗. “華人辨淸心丸眞假之術, 握之良久, 掌有凉意則稱善, 丸熱掌如舊者擲之云, 而淸心丸雖淸劑, 握之, 豈有生凉之理也? 恒帶之丸, 入掌必溫, 久勞之手, 握丸易凉. 專用此辨, 斯彼屢哄.” 표 1.조선 의서에 수록된 『화제국방』 납약방 현황
Table 1. Inclusion of Hejijufang(和劑局方) Nabyak(臘藥) Prescriptions in Joseon Medical Texts
(『太平惠民和劑局方』; 『醫方類聚』; 『醫林撮要』; 『東醫寶鑑』; 『濟衆新編』; 『東醫壽世保元』) * 『醫方類聚』와 『醫林撮要』 우황청심원은 송나라 『和劑局方』 처방을 계승하고 29가지 약재(白芍藥, 麥門冬, 黃芩, 當歸, 防風, 白朮, 柴胡, 桔梗, 川芎, 白茯苓, 杏仁, 神曲, 蒲黃, 人蔘, 羚羊角末, 麝香, 龍腦, 肉桂, 大豆黃卷, 阿膠, 白蘞, 乾薑, 牛黃, 犀角末, 雄黃, 乾山藥, 甘草, 金箔, 大棗)로 구성된 반면, 『東醫寶鑑』, 『濟衆新編』, 『東醫壽世保元』 우황청심원은 명나라 『古今醫鑑』 처방을 따라 朱砂가 첨가된 30가지 약재로 구성되었다. 이에 <표 1>에서 전자는 ‘◯’, 후자는 ‘△’으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표 2.사신(使臣) 의물(儀物)을 통한 명ㆍ청으로의 조선 우황청심원 유입 현황
Table 2. Introduction of Joseon Uhwangcheongsimwon (牛黃淸心圓) into the Ming and Qing Dynasties via Diplomatic Gif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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