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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5(1); 2026 > Article
인천부인병원(仁川婦人病院)의 운영과 성격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the Chemulpo Women’s Dispensary to clarify the patterns and historical character of women’s medical work in Inche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Previous studies have made only fragmentary references to the fact that the dispensary was founded in 1921 by Rosetta S. Hall, without sufficiently addressing its practical operations or its relationship with the local community.
The findings reveal that the Chemulpo Women’s Dispensary functioned not merely as an outcome of missionary expansion, but as a regional medical hub that filled a critical gap in specialised healthcare for women and children in colonial Incheon, where public hospitals were largely oriented towards the Japanese population. Its daily operations were not unilaterally directed by Western missionaries; rather, they were sustained through the continuous participation and medical practice of Korean female physicians. This process was closely connected to the formation of women’s social roles as modern medical professionals. Furthermore, the dispensary expanded its activities beyond general outpatient care to include infant welfare, prenatal care, itinerant medical services, and hygiene education, thereby promoting public health awareness and preventative medicine within the local community. Its institutional growth during the colonial period was underpinned by close collaboration with the Methodist Church, particularly through the organisation of support committees and the deployment of Bible Women, which together facilitated the construction of local networks of care.
Although the dispensary’s formal operations were suspended under Japanese repression in the 1940s, it was reopened after liberation and has maintained historical continuity as the Incheon Christian Hospital. By examining the case of the Chemulpo Women’s Dispensary, this study elucidates the localisation of Christian women’s medical institutions and contributes to broadening regional perspectives within the historiography of modern Korean medicine and the history of women’s medicine.

1. 머리말

근대 서양의학이 조선에 도입된 이후, 의료기관의 설립과 확산은 의료체계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제도적 변화나 대규모 병원 발전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강했으며, 개별 지역에서 운영된 의료기관의 실제 운영 방식과 기능에 대한 검토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특히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의료사업의 경우, 근대 의료 확장 과정에서 중요한 영역이었음에도, 그 운영 실태와 지역 사회 속 역할은 충분히 규명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지역 단위에서 전개된 해당 의료 사업에 관한 검토는 근대 의료의 사회적 확산과 수용 과정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료기관의 구체적 운영 양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 의학은 개신교 초기 선교사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말 본격화된 한국 개신교 선교는 이른바 ‘병원’(의료), ‘교회’(전도), ‘학교’(교육)라는 세 축을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선교부와 선교사들은 선교 전략의 실행 과정에서 의료사업이 다른 영역에 비해 특히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1) 일례로 한국 개신교의 개척 선교사 중 한 명인 미감리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스크랜턴(W. B. Scranton)은 1887년 선교 연례보고서에서 “의사가 교사보다 훨씬 효과적이다”라고 언급할 정도였다.2)
실제로 그는 1886년 봄, 서울 정동에 부지를 확보하고, 6월 15일 시병원을 개원했다.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다수가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19세기 말 내한한 서울 주재 초기 의료선교사들은 의료기관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선교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선교 방식은 서울 외 지방에서도 유사한 맥락과 방향 가운데 이루어졌다.
특히 의료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사업을 전개하며 주안점을 두었던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여성의료기관 설립 및 운영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887년 10월, 정동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이다(이희재 · 강문석 · 권복규, 2019: 685). 한국 개신교 선교의 본격적 기점을 1884년 또는 1885년으로 보는 기독교 역사학계 관점에서 볼 때, 여성 전문 의료기관은 이보다 2, 3년 늦게 시작된 선교사업이었다.3) 실제로 제중원(濟衆院)이나 시병원(施病院) 등 남성 선교사들이 주도한 의료기관과 비교할 때, 여성 전문 의료기관의 제도적 출발이 상대적으로 늦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적 차이가 그 역사적 의의의 축소를 의미하진 않는다. 보구녀관 설립은 조선 여성들에게 본격적인 의료혜택을 제공한 기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당 기관은 한국 의료사와 근대사 및 기독교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보구녀관은 여성 외에 어린이와 학생들의 건강도 돌보는 한편, 공중위생과 보건에도 관여하였다(이만열, 2003: 415). 이후 이 기관은 1890년대 동대문에 세워진 볼드윈진료소(Baldwin Dispensary)를 거쳐 동대문부인병원(East Gate Women Hospital)으로 발전했다(김영수, 2021). 한편 이들의 사업은 정동과 동대문 지역에 한정되지 않았다. 특히 동대문부인병원의 로제타 홀(R. S. Hall)은 서울 외에도 여성들이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구상했다.
로제타 홀은 평양, 해주, 서울, 인천 등지에서 여성의료기관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한 인물로, 한국 근대 여성 의료사업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 이와 관련하여 그녀의 활동과 기관을 중심으로 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임안수, 2005; 김성은, 2007a; 2007b; 이방원, 2007; 2008; 탁지일, 2011; 윤선자, 2014; 김향숙, 2015; 이현주, 2019; 윤은석, 2019; 김영수, 2021; 이영아, 2021; 신규환, 2023; 백옥경, 2023; 정다혜, 2024; 김진혁, 2024; 이연경, 2025).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주로 인물 중심에 치우쳐 있으며, 개별 의료기관의 운영과 지역적 맥락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사례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다. 특히 인천부인병원(仁川婦人病院, Chemulpo Women’s Dispensary)(이하 ‘병원’으로도 표기)의 설립과 운영을 지역 사회의 맥락 속에서 분석한 연구는 미진하다.
한편, 일반적으로 한국 의료선교 및 여성 의료기관에 관한 연구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1900년대 전후 시기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1920년대는 기독교 의료사업이 개별 환자의 치료라는 일차적 단계를 넘어, 위생과 유아 복지 등 공중보건 영역으로 지평을 넓혀가던 전환기였다(이만열, 2003: 302-307). 특히 인천은 조선의 관문이자 서울의 길목이라는 지리적 요충지였음에도, 여성과 아동을 위한 전문 의료사업이 공백 상태였다. 1920년대 상황 변화와 인천 지역의 구조적 의료 소외 현상은 인천부인병원이 설립되고, 독자적 활동을 전개할 수 있던 시대적 배경이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인천 지역에서 전개된 여성, 아동 의료사업을 근대 의료기관인 인천부인병원의 설립과 운영에 초점을 맞춰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해당 의료기관이 지역 사회 속에서 어떻게 정착되고, 운영되었는지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고, 나아가 지역 단위 의료기관으로서 수행한 실질적 역할을 고찰하고자 한다.

2. 인천부인병원 설립과 초기 운영

인천은 개신교 선교 초기부터 의료기관 설립의 주요 대상지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었다. 북장로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의 경우, 1885년 말 인천에서 의료선교 사업 개시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출신 의사 스미스(Dr. D. Smith)를 선교사로 임명했다.5) 그러나 해당 계획은 실행에 이르지 못했다. 한편 미감리회에서는 1887년에 스크랜턴이 인천에 의료기관 설립을 시도했다. 그는 인천이 주로 상인과 하위 계층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식자층’(literary men)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보다 의료가 훨씬 효과적인 선교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6) 그러나 이러한 구상 역시 즉각 실행되지 못했다. 서울 지역 의료 사업을 최우선 순위(Seoul occupied first)에 두었던 선교부의 방침이 있었고, 그에 따라 서울 내 사업을 희생하면서까지 인천에서의 의료사업을 전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7) 아울러 이는 의료 인력과 재정의 제약이라는 현실적 조건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8)
두 교파가 인천에서의 사업을 주저하던 사이, 타 기관에서 의료사업을 개시했다. 대표적으로 현 인천의료원의 모태인 인천거류민단립 인천병원(仁川居留民團立 仁川病院)이었다. 1887년 7월 설립된 이 병원은 공립병원으로 1907년에 내과, 외과, 산부인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을 설치, 확장 운영하며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러나 국적에 따라 진료비를 차등 구분했고, 일본인 중심적 운영으로 한국인이 진료받기란 쉽지 않았다(추교찬, 2015: 111-112). 그 외 기독교 계통에서 설립한 병원도 있었다. 1890년 미국인 의사 랜디스(E. B. Landis)가 성공회(Anglican Church) 주교 코프(Bishop C. J. Corfe)와 함께 인천 숙소에서 시작한 성누가병원(St. Luke Hospital)이었다. 1891년 4월 20일, 병원 건물을 착공하고, 10월 18일 입주했는데, 앞선 인천병원과 달리 전반적 시설은 한국인을 배려하는 분위기였다. 병원명은 ‘성 누가의 축일’에 설립되었다는 이유로 ‘성누가 병원’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랜디스는 이것이 한국인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며,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 the Hospital of Joy in Good Deeds)이라 칭했다.9) 1911년 3월에는 여성 의료선교사 보로우(A. N. Borrow)가 합류했고, 1915년부터 운영을 책임졌다.10) 그녀로 인해 인천 지역 여성들에게 유용한 의료활동이 제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병원은 보로우가 인천을 떠나고, 재정 문제로 1917년 6월 폐원했다.11)
결국 인천에서 여성 진료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관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지역 여성들은 자신들의 의료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전문 의료기관 설립을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천 지역 선교를 주도하던 미감리회가 나섰다. 미감리회는 1920년 당시 경기도(서울, 인천, 수원, 이천), 충청도(천안, 공주), 강원도(원주, 강릉), 황해도(해주), 평안도(평양)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인천은 서울을 제외하고 선교거점을 설치한 가장 이른 지역 중 하나였으며, 교세도 평양 다음으로 큰 규모를 보였다. 그럼에도 미감리회가 의료기관을 설치한 지역은 서울, 평양, 공주, 해주, 그리고 원주에 한정되어 있었다.12)
인천은 여성 신자 수만 보더라도 교파 내에서 두 번째 큰 규모였지만, 계통 의료기관은 전무했다. 이는 그간 미감리회 선교부가 지방 선교거점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의료진 없이 내륙에 새로운 선교 지부를 개척하지 않는다는 방침과 일정한 관련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13) 시간이 지날수록 인천은 수도권과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비해 의료선교사 파송의 후순위로 밀려났다. 또한 선교부는 의료선교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안정적인 환자 기반을 중시했는데, 이 점에서 항구 인천은 병원 운영에 일정한 제약이 작용할 것이란 우려도 있었다.14) 여기에 서울과의 지리적 근접성 역시 별도의 의료기관 설립 필요성을 상대적으로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천은 미감리회 선교 구역 내에서 의료기관이 부재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의료기관 설립의 필요성이 점차 증대되었다. 『東亞日報』는 이 상황을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我朝鮮은自來男女의分別이甚하야다른男子는勿論이오自己宗族間이라도所謂寸數만稍遠하면相面을不許하는一種의習慣이有하야不幸疾病에罹하야苦痛할지라도非常한危症이아니면男子醫師의診察을受키不肯하는터이라此로由하야尙今것우리社會中女子界에困難과危險이不少한것은共認하는바이라此를感한京城東大門內홀病院長홀夫人은仁川에婦人病者救援機關이읍슴을慨歎하야15)
전근대적 관습 속에서 여성은 병원 진료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천 주재 선교사 헤스(M. I. Hess)는 1921년 당시를 회고하며, “인천에서 여성 의료 확장의 절실한 요청은 로제타 홀에게 도전으로 다가왔다”고 기록했다(Hess, 1938: 38). 로제타 홀은 일찍이 한국에서 여성의료기관의 필요를 인지하고 있던 의료인이었다(김성은, 2007b: 6; 이연경, 2025: 44; 정다혜, 2024: 6-7). 이러한 배경 아래 동대문부인병원의 로제타 홀이 인천에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미국부인 전도회에서는 일즉이 녀의를 조선에파견하야 평양(平壤)에는 광혜녀원(廣惠女院) 경성(京城)에는 동대문부인병원(東大門婦人病院)을세워 일반부인 환자를 치료하더니 이번에는 다시인쳔(仁川)율목리(栗木里)이ᄇᆡᆨ삼십칠번디에 부인병원을신설하고 명오일부터 진찰을할터인대 녀의계에 유명한‘홀’부인이 감독이 되고 조선녀자의의사두명이보조하리라더라16)
로제타 홀은 1921년 7월, 대지 341평의 인천 율목리 237번지 가옥을 5천 원에 매입했다.17) 건물은 본래 숙박업소 사용되던 한옥이었으나, 병원 운영의 시급성을 고려하여 내부 수리 없이 매입 직후인 7월 5일부터 진료를 개시하였다.18) 그렇게 병원은 동대문부인병원의 ‘분원’(branch) 격으로 출발했다(이만열, 2003: 746). 국한문으로 ‘인천부인병원’이라 표기했지만, 때론 ‘부인의원’(婦人醫 院)이라고도 했다. 반면, 영문표기는 진료소를 의미하는 ‘Chemulpo Women’s Dispensary’, 또는 ‘Chemulpo Dispensary’라 했다. 선교사의 관점에서 외형적 규모가 일반 병원에 미치지 못한 규모였음을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로제타 홀은 동대문부인병원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인천에 상주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인 여의사를 세워 운영 전반을 맡기려 했다. 처음에는 의료진을 두 명 파견할 계획이었으나, 이내 한 명으로 축소되었다.19) 그녀가 청빙한 여의사는 신뢰하던 김영흥(金英興)20)으로, 둘 사이의 인연은 로제타 홀이 평양에 주재할 당시 그곳에서 시작되었다(이영아, 2021: 121). 김영흥은 로제타 홀과 교분을 쌓는 한편, 광혜여원(廣惠女院)의 의료선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당국이 인정한 과정을 거쳐야만 정식 의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그녀는 로제타 홀의 추천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서 수학했다.21) 그 결과 1918년 3월, 학교를 졸업하고,22) 4월 25일, 의사 면허(248호)를 교부받았다.23) 그녀 외에도 김해지(金海志), 안수경(安修敬)이 4월 19일자(244호), 25일자(251호)로 면허를 취득했다.
이들에게 면허가 수여된 것은 한국 여성의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 모두가 국내에서 교육받고 배출된 최초의 여의사였기 때문이다(이영아, 2021: 138). 그런데 세 명 모두 로제타 홀과 인연이 있었다. 김해지는 김영흥과 함께 광혜여원 시절부터 교육을 받던 동료였으며, 의사 면허를 취득 후에는 기홀병원(記忽病院, Hall Memorial Hospital)에서 근무했다. 안수경 또한 면허 취득 후 김영흥과 함께 동대문부인병원에 부임하여 의료활동을 수행하였다.24) 이처럼 로제타 홀과 인연을 맺었던 여의사 김영흥이 인천부인병원의 첫 번째 상주 의료진으로 부임했다. 그녀의 부임은 남존여비 인식이 빈번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 전문직의 활동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설립자 로제타 홀은 한 달에 두어 번 방문하며, 상주자 김영흥의 진료를 지원하는 형식이었다(Hess, 1938: 38). 병원이 인천 지역의 요청과 필요에 부응하여 설립되었기 때문에, 지역 사회는 이 기관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로제타 홀은 지난] 7월에 인천 율목리에 있는 가옥을 오천원 가격에 구입하여 부인의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총독부의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평양시에 병원을 개원해서 부인 사회에서 큰 편의를 주었던 김영흥 여의사를 청빙하여 개업 중이다. 원장 홀 부인은 26일 오후 2시에 근방의 유지 인사를 초청하여 병원 내에서 피로연을 개최하였는데, 감리사 오기선 씨의 개회사와 원장 홀 부인을 비롯하여 김영흥 의사의 의원 설립 취지 및 장래 방침을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고, 내빈 중에서 답사를 들은 후, 다과회를 진행하였다가 오후 3시 30분에 산회하였다.25)
1921년 10월 26일, 병원에서는 홍보와 후원 목적의 모임이 열렸다. 인천 지역 개신교계를 총괄하는 미감리회 인천지방 감리사(監理師)가 개회사를 맡았다. 그 당시 인천지방은 인천과 인근 도서를 관할하는 미감리회 행정조직으로 신자 수가 6,040명에 달했다.26) 이어 로제타 홀과 김영흥 등 의료진의 병원 설립 취지와 운영 방침 설명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지역 기독교계 지도자와 의료진, 지역 유지 등 세 부류가 동석했다. 이를 통해 인천부인병원이 기독교적 정신을 기반으로 지역 사회에 정착하고자 했던 운영 방향과 지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인천부인병원의 설립은 선교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 예로 원주와 평양 등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앤더슨(A. G. Anderson)은 “우리는 다섯 곳의 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중 두 곳은 여성 전문병원이고, 최근 인천에서도 사업을 개시했다”고 소식을 알렸다.27) 인천 주재 선교사 헤스는 로제타 홀과 김영흥의 활동 자체가 인천부인병원 사업의 증거라고 높이 평가하였다.28) 미감리회 조선부인회(Korea Woman’s Conference)에 제출된 보고에도 “우리가 힘쓴 가장 최근의 사업은 로제타 홀 아래, 동대문부인병원 사업의 확장 선상에서 수행된 인천부인병원이며 이는 지역 여성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습니다. 교회와 지역 사회는 병원을 운영하는 김영흥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29)라고 기록했다. 1923년에는 김영흥의 조카가 직원으로 합류하여 업무 전반을 지원했다.30) 이와 같이 병원은 김영흥을 중심으로 초기 운영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KMF는 이 부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1년도 더 전에 로제타 홀이 노력을 기울이며, 우리 도시 안에 한 곳의 병원을 확장 설립하고, 여기에 젊은 한국 여성인 김영흥을 책임자로 세웠다. 김영흥은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한국 여성들을 섬기겠다는 목적을 세우고, 이를 위해 자신의 경제적 부담도 감수하고 있는 중이다. 해당 병원은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31)
초창기 운영에서 김영흥의 존재와 역할은 컸다. 때로는 사비를 지출하며 병원 운영을 감당하던 그녀의 활동은 지역 사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만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지역 기독교계도 병원 사업에 조직적으로 반응했다. 미감리회 인천지방은 병원 설립 이듬해인 1922년부터 ‘인천부인병원 보호위원회’를 조직하며, 교계 차원의 지원 방안을 모색했다.32) 이는 1923년도 미감리회 조선부인회에서도 확인된다. 해당 보고서는 “[인천의] 여성 의료사업은 도시와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점차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 지역의 교회들은 병원을 위해 100엔에 가까운 특별헌금을 드렸습니다”33)라고 기록되었다. 이처럼 의료진의 활동과 인천 기독교계 지원을 바탕으로 병원의 지역 내 위상과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었다.

3. 의료사업의 확장과 발전

1) 의료사업 확장과 공중 모자보건 기능의 강화

병원의 위상이 높아지고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지역 내 정착은 순조롭게 전개되어 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의료 수요의 증가를 완전히 충족할 수 없는 부족함이 나타났다. 이 시기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이하 WFMS)는 “로제타 홀이 서울과 인천에서 의료사업을 맡고 있지만, 큰 규모를 담당하기엔 재정이 충분하지 않습니다”34)라고 보고할 정도였다. 의료진 확보도 문제였다. 김영흥 혼자 환자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로제타 홀의 지원도 매월 한두 차례에 불과했기 때문에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기독교계가 적극 나섰다. 인천지방은 1923년 5월 30일에 개최된 회의에서 선교사 파송 청원을 결의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신홍식, 방훈, 김찬흥, 헤스 등 4인을 위원으로 선임했다.35)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23년, 덴마크 출신 간호사 코스트럽(B. A. Kostrup)이 병원에 합류했다.
그녀의 합류는 병원 운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녀는 간호학교를 졸업한 뒤, 1916년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필리핀 선교 현장에서 6년간 수행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36) 이후 선교지를 변경하여, 1922년 10월 내한했다.37) 초기에는 언어와 문화 습득 등 현지 적응 훈련 과정을 겸했다.38) 이 과정에서 그녀보다 10여 년 앞서 내한한 선교사 헤스가 도움을 제공했다. 그러나 충분한 적응 훈련기간을 거칠 수 없었다. 그만큼 인천부인병원의 의료진 보강은 시급한 과제였다. 결국 1924년 미감리회 조선부인회는 코스트럽을 내리교회 관리 아래 두며, 인천부인병원 간호부장으로 ‘의료 및 공중보건사업’(Medical and Public Health Work)의 책임을 맡겼다.39) 이는 인천부인병원의 운영 성격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즉, 개별 환자 진료에 국한된 성격을 넘어 지역 사회의 공중보건까지 확장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공중보건사업이란 이른바 특수 의료사업으로 산모와 유아를 대상으로 한 복지사업을 의미했다(이만열, 2003: 472). 코스트럽은 운영 과정에서 경제적 사정으로 진료받지 못하는 지역 아동들을 빈번하게 접했다. 그리하여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1924년 봄부터 병원 내에 유아 진료소(baby clinic)를 개시했다(Hess, 1938: 38).40) 첫 대상자는 11명의 유아였지만, 진료가 이어질수록 해당 사업이 지역 사회에 지닌 필요성과 효과는 점차 분명해졌다. 그 결과 유아 진료는 병원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고, 기존 여성 진료와 더불어 병행하는 운영 체제가 형성되었다. 여성과 유아를 연계한 의료 활동은 당시 여성들이 육아를 전담하던 사회적 현실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으며, 이 점에서 일정한 필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여성과 유아를 연계한 의료활동이 이 시기 인천부인병원만의 독보적 시도는 아니었다. 로제타 홀을 비롯한 다수의 선교사가 공통으로 주목하던 영역이기도 했다.41) 그럼에도 이 사업은 병원이 지역에 정착하고 발전해 나가는 데 실질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일정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코스트럽은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천의 복지사업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유아 진료소는 꾸준히 성장하여 현재 인천 두 곳, 강화 한 곳, 총 세 곳의 진료소가 있습니다. 강화에는 작은 야외 진료소도 개설하여 몇 번 갔는데, 많은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현재 등록 아기는 약 75명입니다. 많지 않지만, 최근에 새로운 아기가 많이 왔습니다.42)
코스트럽의 부임으로 유아 진료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병원은 한층 적극적인 외부 진료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김영흥 단독으로 진료를 전담하다 보니 외부 진료에 구조적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23년 이후 코스트럽의 합류로, 소위 환자를 찾아가는 의료서비스가 빈번하게 제공될 수 있었다. 이는 거동이 쉽지 않은 유아들의 특성을 의료 방식에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 1925년 해외여선교회는 “병원은 일반 진료와 유아 복지사업을 전개하고 있는데, 도서 지역 교회들을 방문하고 있습니다”43)라고 보고했다. 코스트럽도 출장 진료를 자신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로 인식할 정도였다.44) 나아가 1927년과 1928년에는 김영흥의 뒤를 이어 여의사 전혜덕(全惠德)과 김해지(金海志, Hattie Kim)가 병원에 부임했다. 그들은 외부 진료보다 병원 내에서 환자를 접했는데,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코스트럽 때문이었다. 결국 코스트럽의 부임은 병원 사업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한결 안정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그녀의 외부 진료가 지역 기독교계와 연계된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녀의 한국 적응을 도왔던 동료 선교사 헤스와의 협력을 통해 전개되었다.
지난 가을에는 헤스와 [인천 부근] 도서의 거의 모든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동할 수 있는 환자들은 모두 교회에 모였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그들을 치료해 주었고, 또 그들이 건강해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건네주었습니다.45)
헤스는 개인 소유 선박으로 도서 지역 순회 선교 방법(ship-based mission work)을 사용했다.46) 이는 당시 인천지방 예하 개체교회 약 3분의 2가 도서 지역에 분포해 있었기 때문이다.47) 이러한 선교 방식에 코스트럽이 동승하며, 외부 진료를 전개했다.48) 인천지방의 지리적 성격을 충분히 고려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전도와 의료가 이동 수단을 매개로 결합하는 협력 구조가 형성되었고, 효과는 상당했다. 한편, 산전 진료(prenatal clinic)도 병원의 주된 사업 중 하나였다. 이는 설립자 로제타 홀이 추구했던 여성 진료 환경 개선이라는 본래 취지와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도 한국 여성들은 여전히 여의사가 아니면 치료를 부담스러워했다.49) 그러한 이유로 인천부인병원이 산전 진료에 관심을 둔 것은 당연했다. 1925년도 해외여선교회 보고서에 “그녀[코스트럽]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유아 복지와 산전 진료입니다”50)라고 언급된 것은 이러한 맥락을 잘 보여준다. 당시 공립병원이 여성과 유아 진료에 상대적으로 소극적 이었던 상황에서, 기독교 계통 의료기관이 이 영역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배경도 함께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51) 이러한 산전 진료의 전개 과정에서 병원은 단순 치료 행위를 넘어, 위생 및 예방의학을 결합한 의료 활동으로까지 확장해 나갔다.
지난 3년간 [병원] 사업의 결과를 정리해 보자면, 특별히 힘을 얻게 되는 세 가지 지점이 있었습니다. 육신과 옷이 더 깨끗해졌다는 점, 발병했을 때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 전염병 위험에 관한 인식이 증대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가 목표를 달성하기엔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이제 막 시작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교육하며 나아갈 것입니다. 곳곳의 모범적인 여성들이 우리와 함께 이 일을 이어갈 것이며, 언젠가는 그 정신이 사람들 마음속 깊이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52)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 병원은 올바른 위생 관념과 자녀 양육에 대한 인식 개선에 힘썼다. 코스트럽도 “저의 주요 업무는 마을로 나가 환자를 치료하고, 어머니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위생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53)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인식 아래 외부 진료가 이뤄질 때마다, 병원은 보건 강좌(health lecture)를 병행 개최하며, 인식 개선에 진력했다.
[병원이 운영하는] 강화읍의 진료소는 눈에 띄게 발전했으며, 그곳의 어머니들은 주의를 기울여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사실 어딜 가나 어린이를 질병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같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랜 세월 그들이 갖고 있던 무지를 떠올리며, 우리가 한국의 어머니들을 계속 가르친다면, 건강한 육신이 건강한 영적 성장을 위한 필수요건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54)
코스트럽의 강좌는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55) 또한 민간요법의 폐해 극복과 올바른 치료 인식 개선에도 초점을 맞췄다. 전통적 동양의학에만 의존하다가 치료 시기를 놓치거나 증상이 악화된 사례들은 병원이 주목한 대표적 대상이었다.56) 김해지도 병원 내 강연을 통해 이러한 계몽 활동에 동참했다.57) 더 나아가 병원은 우량아선발대회(baby contest)를 개최했다. 이는 해당 성격이 개인 차원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공유, 평가해야 할 가치로 제시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58)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지역 사회에서 병원의 사회적 위상을 제고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병원 건물이 초라하고 장비도 충분치 않지만, 심신을 치유하는 일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질병 예방법과 더 나은 건강 습관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코스트럽과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섬김의 영역은 꾸준히 확대되어, 이제는 수많은 가정에 영향을 끼치는 중입니다. 그들이 젊은 어머니들에게 거듭 가르쳐 온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아기가 병에 걸렸을 때 여러 민간요법을 시도하면서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59)
병원이 전개한 사업과 운영은 안정적으로 정착했으며, 지역 사회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병원이 일반 진료에 머무르지 않고, 산모와 영유아 및 공중보건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감리교회도 이러한 상황에 주목했다. 1920년대 발행된 국한문 자료에는 코스트럽의 직무를 단순히 ‘의업’(醫業)으로 기재했지만, 1931년부터는 ‘인천(여)병원과 공중위생사업’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60) 이러한 변화는 감리교회가 1930년대 병원이 전개하던 의료사업의 성격을 한층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을 인천부인병원만의 독자적 특징으로 한정하기는 어렵다. 1920–30년대 국내 기독교 계통 의료기관 전반에서도 해당 사업의 성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황미숙, 2017: 117-118). 따라서 인천부인병원의 지역 내 정착과 확장은 개별 기관의 특수성보다, 당대 기독교 의료선교가 전개되던 공통의 역사적 맥락 가운데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기존 연구는 이러한 공통적 구조를 선교 이념이나 제도적 차원에서 조망하는 데 그쳐, 개별 의료기관의 운영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천부인병원은 기독교 의료기관의 일반적 구조가 지역 차원에서 어떻게 정착되고 확장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실증 사례가 될 수 있다.

2) 병원 기능 확대와 시설 진료체계의 변화

병원이 전개한 의료사업은 점차 범위를 확대해 나갔으며, 이는 곧 운영비의 지속적 증가로 이어졌다. 병원은 미감리회에 부속된 의료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운영 재원도 해당 교파와 일정한 방식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실제로 설립 이듬해인 1922년부터 인천지방 차원에서 병원 지원을 위한 소위원회가 구성되었던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나아가 1930년대에는 한미 양국 감리회의 상설 협의기구인 중앙협의회(中央協議會)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61) 이 재원의 출처는 미감리회가 매년 한국에 송금하는 선교비였다. 그러나 교파 차원의 지원만으로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는 어려웠다. 부족한 재원은 진료비를 비롯하여 지역 교회와 학교, 그리고 개인 후원 등을 통해 보완했다.62) 그럼에도 병원은 영리적 목적의 의료기관이라기보다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 운영되었기 때문에, 재정 구조 전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의료진이 사비를 부담하며 운영한 사례에서도 확인된다.63) 재정적 취약성은 의료진 수급과 근속 안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의료진인 김영흥, 전혜덕, 김해지 모두 장기근속과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재정 불안정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을 개연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일반 진료에 더하여 외부와 특수 의료, 복지사업의 확장으로 인해 상당한 재정 지출을 감내해야 했다. 실제로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통계를 보면, 연간 운영 지출이 수입의 약 3배에 달할 정도였다.64) 이러한 구조적 적자에도 사업 축소나 일시적 중단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사업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의료 인력의 확보와 시설 확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는 재정적 제약으로 원활히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시설 개선의 문제는 운영상 가장 큰 난제로 작용했다. 제한된 병상과 낙후된 설비는 병원 기능의 확대를 구조적으로 제한하는 요인이 되었다. 중증 환자의 경우, 시설의 여건상 자체 치료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례가 적잖게 발생했다. 그런 경우 의료진은 환자들에게 서울 소재 큰 규모의 기독교계 병원으로 전원을 권유할 수밖에 없었다.
가엾은 아기는 한의사에게 치료받았는데, 긴 침이 무릎에 깊게 꽂혀, 심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아기는 저를 보자마자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 치며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저는 아기의 무릎을 살펴보았는데,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브란스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받도록 권했습니다.65)
문제의 핵심은 병원의 의술 수준 그 자체에 있기보다, 환자를 충분히 수용할 수 없는 의료 인력 부족과 시설의 낙후성이었다.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의료진은 부득이 타 의료기관으로의 전원을 권유했던 것이다. 굳이 오늘날의 개념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인천부인병원은 보건의료법에 의거한 의료전달체계 중,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모양새였다.
제가 순회 진료를 나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치료 가능한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병원 진료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직접 다루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브란스병원과 동대문부인병원에서 그러한 환자들을 기꺼이 받아 주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와 지방 사람들은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하며, 종종 수술받은 환자들이 우리에게 돌아와 후속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66)
인천부인병원은 자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환자에게 주로 동일한 기독교 계통의 세브란스병원과 동대문부인병원을 소개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당 병원의 의료진을 초청하거나, 의학도들에게 임상실습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도움받는 일도 있었다.67) 이것은 서울로 환자 이송이 어려울 때, 일종의 대안적 진료 방식으로 작용했다. 동시에 무료 진료의 확대 과정에서 인력 및 재정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도 활용되었다. 외부 의료진의 참여나 의학도 임상 실습 활용은 운영을 지속하기 위한 실천적 대응 방식이었다. 이처럼 열악한 의료시설과 부족한 의료 인력은 병원 사업의 확대 및 발전을 제약하는 구조적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겨울철에는 열악한 난방시설로 면역에 취약한 유아 진료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이는 1926년도 조선부인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우리 유아진료소는 점점 발전하고 있지만, 겨울에는 난방이 여의찮아서 석 달 동안 활동이 중단되었는데, 재차 사업을 시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여성들을 위한 강연이나 모임을 열 장소도 여의찮습니다. 이 사업을 계속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건물이 필요한데, 저희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중입니다.68)
사실 시설로 인한 문제는 특정 시기에 국한된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다. 시설 자체가 위생과 안전이라는 의료기관의 기본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Hess, 1938: 38-39). 공중보건과 위생 등을 전개하던 병원에 비위생적 의료시설이란 것은 모순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1928년 “현재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의료 건물을 신축하는 일입니다”69)라는 보고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코스트럽 자신도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진료받을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건물과 시설로 인한 부족함은 개인적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채우고자 합니다”70)라고 책임 의식을 분명히 드러냈다.
사실 이 문제는 재정적 해결이 선행되어야 했다. 물론 해외의 지인과 기관 후원으로 환자 복지 및 치료 환경 개선에 일정 부분 도움 받은 사례도 확인된다(Hess, 1938: 38-39).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구조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독지가 데이턴(Mr. Dayton)의 후원은 병원 신축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71) 마침내 1931년 6월 2일 정초식을 거쳐 서양식 건물을 완공하였다.72) 로제타 홀도 이 소식을 듣고 더 많은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한층 높은 양질의 의료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73) 이후에도 병원은 지속적 시설 개선에 나섰다. 1937년에는 공중보건 사업 강화를 목적으로 관련 시설을 수리하고 증축했으며, 1939년에는 전화 설비를 갖추었다.74) 1935년에는 20대의 박순정(朴順婷)이 새로운 의료진으로 합류하며, 의료 인력 수급에도 힘썼다. 참고로 그녀는 로제타 홀이 설립한 여자의학강습소 1회 졸업생으로 1934년 4월 16일, 의사면허(면허번호: 1312)를 취득한 인물이었다(Hall, 1934: 98).75) 이처럼 1930년대는 한층 개선된 환경과 새로운 의료진의 합류로 안정적 운영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바탕 위에 1940년 봄, 병원은 외과와 부인과, 소아과, 산과 등의 진료과를 운영하며, 하루 평균 40-50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규모로 성장했다.76) 다음은 연도별 운영 현황을 정리한 표이다.
환자 수의 추이를 살펴보면, 성장 양상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1925년 진료받은 환자 수는 약 2,000명 수준이었으나,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15,00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단순한 증가라기보다 기능과 사업 수행의 지역적 범위가 확장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4. 기독교계 네트워크의 활용과 협력

1) 인천부인병원 위원회 조직과 활동

환자 수의 증가는 병원이 지역 사회에서 실질적 의료 거점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했던 원인 중 하나는 기독교와의 연관성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인천부인병원이 수행한 의료사업의 지역적 확장은 인천의 지리, 사회, 경제적 특성과 연결된다. 당시 인천은 주변 도서지역과 함께 하나의 포괄적인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인천 지역 선교를 전담하던 미감리회 역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유사한 선교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병원의 의료사업은 동일 권역을 형성하던 지역 기독교계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병원은 인천에 국한되지 않고, 도서 지역까지 활동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따라서 병원의 운영과 성격은 설립 초기부터 기독교적 배경을 배제하고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인천부인병원은 미감리회의 선교 구역에 설립된 의료기관으로서, 해당 교파의 선교 정책 및 행정 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이는 병원이 단순한 의료기관을 넘어 특정 교파의 선교 방향 속에서 기능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일방적인 선교부 중심 운영에 그치지 않고, 인천 지역 감리교회 및 지역 신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예가 앞서 언급한 ‘인천부인병원 보호위원회’ 조직으로, 이는 지역 교회와 인사들이 병원 운영에 일정 부분 관여하는 통로로 기능했다. 병원이 지역 사회와의 연계를 통해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위원회는 개원 1년 뒤인 1922년 인천지방 차원에서 구성되었는데, 그 주요 목적은 병원 운영을 위한 재정적 후원에 있었다. 즉, ‘ᄆᆡ년부활쥬일은인쳔부인병원쥬일로뎡ᄒᆞ 고특별연보ᄒᆞ기로ᄒᆞᆷ’이란 취지에 따라 조직하게 된 것이다.77) 실제로 위원회가 처음 조직된 그해 지방회에서는 매년 부활절을 ‘인천부인병원 주일’로 정하고 특별연보 실시를 결의했다. 1923년에는 예하 개체교회에 연보 통지서를 위원회 명 의로 발송하여 후원을 적극 유도했다.78) 이러한 성격의 내용은 1925년 KMF에 “우리 지방 김[찬흥] 감리사는 이 [의료]사업을 적극 지지하고, 지방 내 목사들과 협력하여 환자를 소개하며, 재정 후원으로 돕고 있다. 며칠 전 그는 사업을 돕기 위해 특별히 부활절 헌금을 계획 중이라고 귀띔해 주었다”라고 쓰인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79) 이 외에 인천지방은 위원회의 주도 아래 병원에 ‘성미’(誠米)를 제공80)하기도 하는 등 물적 후원을 병행하며 병원과 협력관계를 지속해 나갔다. 참고로 인천지방회록에는 1924년부터 1931년까지 위원회 활동을 매개로 예하 개체교회들이 병원을 지원한 구체적 현황이 보고되어 있다. 다음의 표는 그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위원회를 매개로 병원에 제공된 재정 지원 규모는 예하 개체교회마다 일정한 편차를 보였다. 이는 각 교회의 재정적 여건과 지역적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당시 병원과 지리적으로 가장 인접했던 내리교회의 후원은 규모와 지속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두드러졌다. 한편, 위원회는 1923년부터 ‘인천부인병원 위원회’로 변경되었고, 1931년부터는 ‘사회사업위원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는 병원의 의료사업이 일반 진료를 넘어 공중보건 사업 등으로 확장되었던 과정과 맞물려 나타난 변화였다. 위원 수도 최대 30명에 이를 정도로 조직 규모 역시 확대되었다.
위원회는 병원과 지역 기독교계 사이의 제도적 매개 기구로 기능하였다. 의료진 코스트럽도 1925년 인천지방의 정식 회원이 된 이후 1931년부터 위원으로 활동하며, 매년 병원의 구체적 사업 현황과 운영 상황을 위원회에 공유했다. 이러한 참여는 병원 운영의 투명을 제고하는 한편, 지역 교회의 지속적 관심과 협조를 끌어내는데 기여했다. 여기에는 코스트럽이 1930년대 내리교회 유년(幼年) 부장을 겸직한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하다.81) 이는 병원과 교회 조직이 인적 차원에서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양자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더 나아가 이 점은 당시 기독교계 의료기관의 운영 상황을 고려할 때 의미 있게 평가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다수의 기독교계 의료기관은 운영상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는 일제의 의료사업 규제와 압력뿐 아니라, 선교 본국의 관심 약화에 따른 재정 지원 감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이만열, 2003: 531-543).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비춰볼 때, 인천부인병원도 여타 의료기관과 마찬가지로 운영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병원이 1930년대에 이르러 시설 개선과 활동 범위의 확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역 기독교계와의 유기적 결속, 즉 기독교 네트워크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인천부인병원이 지역 기독교계와 인적, 제도적 차원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점은 의료사업의 유지와 확장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2) 전도부인의 활동

병원과 지역 기독교계가 형성한 긴밀한 소통 구조를 제도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바로 전도부인(Bible Woman)의 존재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윤리가 고수되던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을 전담하던 기독교 종사자들이었다. 해방 이전까지 기독교계 의료기관에서 전도 부인의 활약은 상당히 두드러진 현상이었다(이만열, 2003: 162). 그들의 역할이 1927년부터 인천부인병원 사업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한 친구의 호의로, 이제 우리 병원에 전도부인이 함께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아침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교제하고, 오후에는 가정을 방문하며 환자들과 어머니들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있습니다. 이는 사역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82)
이렇게 하여 김유의(金有義)와 박신애(朴信愛)가 병원 전도부인으로 사업에 동참했다. 그들의 주된 활동 목적 중 하나는 포교였다. 환자 가운데 비기독교인의 비중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83) 전도부인은 비기독교인 환자들을 교회 공동체로 연결하는 데 주력했다. 1930년 미감리회 조선부인회 보고에 따르면 김유의의 영향력과 기도로 많은 이들이 교회에 인도되었다고 언급될 정도였다.84) 전도부인의 활동이 포교에서 가시적인 효과를 보이자, 기독교계도 이들의 역할에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원목 활동에 비견할 수 있는 병원 내 종무(宗務) 담당자의 존재는 선교 초기부터 전개되고 있던 모습이었다. 제중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890년대 이후의 병원 책임자 에비슨(O. R. Avison)은 진료실과 분리된 대기실을 마련하고,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를 비치했다(김일환, 2025: 44). 이 곳은 의료 활동과는 별도로, 병원 내부에서 기독교 포교가 가능했던 선교적 공간이었다. 인천부인병원은 주된 환자층이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남성 중심의 목사나 선교사가 아닌 전도부인을 종무 담당자로 배치했다.
그러나 인천부인병원의 해당 제도는 여타 기독교계 의료기관과 구별된 특징이 있었다. 1929년부터 인천지방이 주관하여 병원에 전도부인을 기존 성직자들과 동등한 지위로 정식 파송했다는 사실이다(Williams & Bonwick, 1928: 43). 이는 그 역할을 비공식적 보조 인력이 아닌, 제도적으로 승인된 인력으로 격상시킨 조치였다. 동시에 그들을 병원과 지리적으로 가장 인접한 내리교회 소속으로 편제하며, 교회와 병원 사이의 매개가 되도록 했다.85) 병원 내 종무 담당자로서의 중요성과 책임을 제도적으로 강화한 조치였다. 동시에 그들의 활동을 지역 기독교계가 파송한 공적 사업으로 명시하면서 병원의 기독교적 성격을 더욱 분명히 했다. 다음은 전도부인의 명단이다.
한편 전도부인이 병원에 상주한 이유와 그 업무는 단순 포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코스트럽은 “우리가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이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 가운데에서도 점점 확산되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86)라고 언급하며, 기독교적 박애 정신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병원 사업이 특정 신앙 공동체 내부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넓은 지역사회로 확장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도부인이 병원에서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지점도 여기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의료진은 진료에 집중해야 하는 구조 속에 있었기 때문에, 환자의 생활 환경이나 가정 배경을 세밀하게 파악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반면, 전도부인은 병원 대기실과 환자 가정을 오가며, 의료적 처치 이후의 삶과 돌봄의 필요를 살피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로 KMF 1940년 5월호에는 “[인천부인병원의] 전도부인은 종종 도움이 필요한 가정을 발견하며, 우리는 그러한 자들에게 도움 주는 일을 귀하게 여긴다. 그들은 병원 대기실에서 귀한 일을 하며, 또한 가정을 방문하기도 한다”87)라고 기록되어 해당 역할과 성격에 대해 알려준다. 이처럼 전도부인은 병원이 지역 기독교계의 인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표적 사례였다. 그리고 그 활동의 성격과 범위는 단순한 포교를 넘어 치료 이후의 돌봄과 복지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5. 맺음말

인천부인병원은 1921년 설립 이후, 일제강점기 인천과 인근 도서 지역 사회에 정착해 나갔다. 그러나 1940년 후반에 이르러 병원 운영은 위기에 직면했다. 선교사들의 강제 철수와 기독교계 지도부의 어용화로 병원 재정의 핵심을 이루던 외부 지원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40년 11월 16일, 코스트럽이 철수한 것은 병원 운영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인천지방 내 병원 관련 기록도 1941년 이후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병원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공식적인 운영을 중단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 당국은 병원 자산을 1944년 인천부(仁川府)에 강제 매각했다.88) 그러다가 감리회 선교부 재산 관리권을 위탁받았던 양주삼(梁柱三)이 해방 이후, 재산 환수에 진력했다. 그 결과 자산을 되찾아 전처럼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 명의로 등기를 마쳤다. 그리고 1947년 9월, 기존 부지에 산부인과, 소아과, 내과를 갖춘 ‘감리교회 부속 인천부인의원’ 간판을 걸며, 소속 의료기관으로 복귀시켰다.89) 병원은 한국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지만, 감리교 해외구제위원회(Methodist Committee on Overseas Relief)의 원조로 재개원했다.90) 이후 인천 지역 사회의 중추적 의료기관으로 발전했고, 그 역사적 흐름은 오늘날의 인천기독병원으로 이어졌다.91)
초기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여성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활란(金活蘭)은 1934년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감리교와 한국 여성의 발전’이란 주제로 글을 발표했다.92) 그녀는 이 글에서 감리교회의 한국 여성계에 대한 기여를 내부적 시각에서 평가하며, 이를 여성병원(Woman’s Hospitals)과 유아 복지(Baby Welfare), 보건소(public health centers) 사업이라 정리했다. 특히 그녀는 인천부인병원을 해당 범주에 포함되는 대표적 사례로 제시함으로써, 해당 병원이 당대 기독교 선교와 지역 의료사업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사실에 대해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은 선교사 헤스가 이 병원의 사업을 ‘커다란 물결’(more than a ripple)로 비유하며 강조했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Hess, 1938: 38).
그러나 이러한 내부적 평가와 달리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는 인천부인병원의 실체와 구체적 활동상이 충분히 규명된 바 없다. 기존 연구는 대체로 로제타 홀이 1921년 인천에 여성 전문 의료기관을 설립했다는 단편적 서술에 머물 뿐이다. 이는 병원이 지녔던 의료, 사회적 성격과 지역적 맥락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관련 사료가 전무한 것도 아니다. 기독교계, 특히 미감리회 관련 문서를 중심으로 검토할 경우, 병원 설립 배경과 운영 실태, 성격 등 상당 부분 추적이 가능하다. 이에 본 연구는 관련 사료를 토대로 일제강점기 인천 지역에서 전개된 여성 의료사업, 그중 인천부인병원의 설립과 운영에 초점을 맞추며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지역 의료사의 한 단면을 구체적으로 조명함과 동시에, 여성 의료와 기독교 의료 선교가 지역 사회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확장되었는지 조명하고자 했다. 이 과정을 바탕으로 아래에서는 인천부인병원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다.
먼저, 인천부인병원은 단순히 기독교 선교 확장의 결과로 설립된 기관이 아니었다. 공립병원이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되던 식민지 시기, 인천에서 여성과 아동을 주요 대상으로 한 전문 의료기관의 부재는 지역 사회의 구조적 의료 공백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병원은 여성 진료를 중심으로 의료 접근성을 전개하며 지역 사회의 실질적 의료 거점으로 기능했다. 이는 여성 전문 의료기관이 단순한 보조적 시설 개념이 아닌 일제강점기 지역 의료 체계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음을 시사한다. 그와 같은 과정 가운데 출발한 병원의 운영은 서양 선교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도되지 않고, 한국인 여의사들의 지속적인 참여와 헌신이 결합하여 유지되었음을 확인했다. 물론 로제타 홀과 코스트럽이 병원 설립과 운영에 기여한 상당 부분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영흥, 전혜덕, 김해지, 박순정 등 한국인 의료진은 병원의 일상 진료와 운영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며, 의료 전문직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구체적으로 구현해 나갔다. 이는 여성 전문 의료기관이 단지 여성을 위한 공간에 머문 것이 아니라, 한국 여성 전문직 형성과 의료 실천의 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인천부인병원은 한국 근대 여성의학사에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이 병원은 일반 진료를 넘어 유아, 산전, 외부 순회, 위생 교육 등 공중보건 영역으로 의료사업을 점진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특히 도서 지역을 포함한 외부 진료와 보건 강좌는 항구라는 인천 지역의 지리적, 사회적 특성을 반영한 의료적 실천이었다. 동시에 의료와 선교, 종교계와 지역 사회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복합적 활동의 사례였다. 이러한 사업은 그 시대 여타 기독교계 의료기관과 마찬가지로 근대적 위생 관념과 예방의학적 인식을 지역 여성 및 가정 단위로 확산시키는 통로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인천부인병원은 운영 과정에서 재정 부족과 의료 인력의 한계, 시설의 상대적 낙후라는 제약에 직면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병원은 자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중증 환자를 세브란스병원과 동대문부인병원 등 서울 소재 대규모 기독교계 의료기관으로 전원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들과 달리 선교사들이 인천부인병원의 영문 표기를 일관되게 ‘병원’(hospital)이 아닌 ‘진료소’(dispensary)라고 사용한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 지점은 일제강점기라는 현실 속에서 지역 기독교계 의료기관이 사업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즉, 인천부인병원은 감리교 계통의 기독교 네트워크와 긴밀히 결합함으로써 사업의 지속성과 확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병원 운영은 인천지방을 비롯하여 해외여선교회, 중앙협의회 등 감리교 관련 기관들의 조직적 지원 아래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다층적 네트워크는 병원 의료사업이 지속되고 확장될 수 있던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이것은 인천부인병원이 의료 영역에 국한된 단일 기능의 기관이라기보다 종교, 복지, 지역 사회 조직이 상호 교차하며 작동한 복합적 구조 속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천부인병원은 일제강점기 인천 지역에서 여성과 아동의 의료 접근성을 확장한 지역 의료기관이자, 한국인 여의사의 의료 실천이 구체적으로 전개된 공간이었다. 더 나아가 기독교 네트워크와 연계되어 유아 진료와 위생 교육, 예방 중심의 공중보건 활동이 어우러진 지역 의료 현장이었다. 다시 말해, 이 병원은 일제강점기 기독교계 여성 전문 의료기관의 지역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연구는 기존 기독교계 여성 의료 연구의 시야를 지역 단위에서 검토하여, 그 성격을 구조적이고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Notes

1) Annual Report of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하 ARPCUSA), (1886), pp. 148-149.

2) Annual Report of the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이하 ARMEC), (1887), p. 316.

3) 보구녀관 이전에도 제중원(濟衆院) 내에 부녀과(female department)가 설치된 바 있다. 이는 1886년 7월에 내한한 북장로회 소속 엘러스(A. J. Ellers)가 담당했다. ARPCUSA, (1887), p. 157.

4) 「朝鮮의醫學界를爲하야 四十三年을 貢獻한홀夫人」, 『監理會報』 (1933. 11.), 13쪽.

5) ARPCUSA, (1886), pp. 148-149.

6) ARMEC, (1887), pp. 315-316.

7) ARMEC, (1887), p. 316; (1888), p. 344.

8) ARMEC, (1893), p. 250; (1896), p. 236.

9) “Hospital Naval Fund,” The Morning Calm, (1892. 5.), p. 56.

10) “The Mission Staff,” The Morning Calm, (1916. 1.), p. 1.

11) Report of the Year 1919 of 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 (1920), p. 40.

12) “Appointments,” Minutes of the Korea Annual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이하 KACMEC), (1923), pp. 243-247.

13) ARMEC, (1902), p. 315.

14) ARMEC, (1893), p. 250.

15) 「仁川에婦人病院」, 『東亞日報』, 1921년 10월 30일.

16) 「仁川에도女醫院」, 『東亞日報』, 1921년 7월 4일.

17) 「仁川에婦人病院」, 『東亞日報』, 1921년 10월 30일.

18) 이만열은 제물포 부인진료소가 1923년 개설되었다고 하지만(이만열, 2003: 416), 『東亞日報』 1921년 7월 4일자 기사에 근거할 때 사실과 다르다. 「仁川에도女醫院」, 『東亞日報』, 1921년 7월 4일.

19) 박정희는 『東亞日報』 1921년 7월 4일자 기사에 근거하여, 개원 당시 2명의 한국인 여의사가 근무했다고 기술하지만(박정희, 2015: 438-439), 사실과 다르다.

20) 일부 자료는 설립 초기 부임한 한국인 의사를 김애희(金愛嬉)라 기술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평양 출신 김애희는 중국 베이징(北京)의 의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뒤, 기홀병원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도미하여 유학했다. 「헤스」, 내한선교사사전 편찬위원회 편, 『내한선교사사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22), 1331쪽; 「海內 海外에 헛허저 잇는 朝鮮女醫師 評判記」, 『別乾坤』 (1927. 3.), 71쪽.

21) “Editorial Notes,” The Korea Mission Field(이하 KMF) (1918. 6.), p. 115; 「海內 海外에 헛허저 잇는 朝鮮女醫師 評判記」, 『別乾坤』 (1927. 3.), 71쪽.

22) 「最初의女醫三名」, 『每日申報』, 1918년 3월 27일; 「卒業者」, 『朝鮮總督府官報』, 1918년 4월 1일, 17쪽.

23) KMF에는 김영흥이 3월 26일 학교 졸업과 동시에 의사면허를 취득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졸업과 의사면허 교부는 별개의 일자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구분해야 한다. 또한 『每日申報』는 그녀의 면허 발급 일자를 4월 26일로 보도하고 있어, 25일로 공고한 총독부의 공식 기록과는 하루 차이가 난다. 본 연구에서는 면허 발급 주체인 총독부 기록에 따른다. 「卒業者」, 『朝鮮總督府官報』, 1918년 4월 1일, 17쪽; 「兩女醫就職」, 『每日申報』, 1918년 4월 30일; 「醫師免許」, 『朝鮮總督府官報』, 1918년 5월 18일, 266쪽; “Editorial Notes,” KMF (1918. 6.), p. 115.

24) 「兩女醫就職」, 『每日申報』, 1918년 4월 30일.

25) 「仁川에婦人病院」, 『東亞日報』, 1921년 10월 30일.

26)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1), 19-21쪽.

27) A. G. Anderson, “The Ministry of Healing,” KMF (1922. 5.), p. 94.

28) M. Hess, “With the Island Women of Chemulpo District,” KMF (1925. 5.), p. 113.

29) “East Gate Hospital Report,” Annual Report of the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이하 KWC), (1922), p. 19.

30) “Chemulpo Evangelistic Report,” KWC, (1923), p. 23.

31) M. Hess, “With the Island Women of Chemulpo District,” KMF (1925. 5.), p. 113.

32)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2), 3쪽, 9쪽.

33) “Chemulpo Evangelistic Report,” KWC, (1923), p. 23.

34) “Medical Work,” Annual Report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이하 WFMS), (1924), p. 85.

35)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3), 18쪽.

36) 「코스트럽」, 내한선교사사전 편찬위원회 편, 『내한선교사사전』, 1064-1065쪽.

37) “Notes and Personals,” KMF (1922. 10.), p. 256.

38) WFMS, (1924), p. 81.

39) “Appointments,” KWC, (1924), p. 25.

40) “Medical Work,” WFMS, (1924), p. 85.

41) “Medical Work,” WFMS, (1924), p. 85.

42) B. A. Kostrup, “Chemulpo Dispensary Report,” KWC, (1925), pp. 10-11.

43) “Medical Work,” WFMS, (1925), p. 85.

44) B. A. Kostrup, “A Letter from Chemulpo,” KWC, (1926), p. 11.

45) B. A. Kostrup, “A Letter from Chemulpo,” KWC, (1926), p. 11.

46) WFMS, (1938), p. 58.

47) “Chemulpo District,” KACMEC, (1922), p. 184.

48) 한 예로 M. I. Hess, “A Week’s Log of the ‘Cincinnati’,” KMF (1925. 12.), pp. 268-269; (1926. 1.), pp. 17-19 등 참조.

49) M. I. Hess, “Medical Work on Chemulpo District,” KWC, (1928), p. 11.

50) “Medical Work,” WFMS, (1925), p. 85.

51) C. C. Amendt, “Kongju District,” KACMEC, (1926), p. 220.

52) A. Kostrup, “Chemulpo Public Welfare Work,” KWC, (1927), p. 15.

53) B. A. Kostrup, “A Letter from Chemulpo,” KWC, (1926), p. 11.

54) B. A. Kostrup, “A Letter from Chemulpo,” KWC, (1926), p. 13.

55) M. I. Hess, “Medical Work on Chemulpo District,” KWC, (1928), p. 12.

56) B. A. Kostrup, “A Letter from Chemulpo,” KWC, (1926), pp. 11-12; 「仁川부인병원에감샤함」, 『基督申報』, 1928년 2월 15일; A. Kostrup, “Chemulpo Dispensary and Infant Welfare Work,” KWC, (1930), pp. 5-6 등 참조.

57) M. I. Hess, “Medical Work on Chemulpo District,” KWC, (1928), p. 12.

58) B. A. Kostrup, “Chemulpo Dispensary Report,” KWC, (1925), p. 10; M. I. Hess, “Medical Work on Chemulpo District,” KWC, (1928), p. 12.

59) M. I. Hess, “Medical Work on Chemulpo District,” KWC, (1928), p. 11.

60) 1937년부터는 ‘인천지방 전도사업 및 공중위생’으로 변경 표기되었다. 『耶蘇敎美監理會 朝鮮年會錄』, (1923-1926); 『朝鮮基督敎美監理敎會年會會錄』, (1927-1929); 『基督敎朝鮮監理會 中部年會會錄』, (1931-1939) 참조.

61) 「第十一回 中央協議會狀況大要」, 『監理會報』 (1934. 2.), 6쪽.

62) 간혹 지역 내 기독교 계통 학교 학부모회(the Parent Association)로부터 후원을 받는 일도 있었다. B. A. Kostrup, “A Letter from Chemulpo,” KWC, (1926), p. 14.

63) M. Hess, “With the Island Women of Chemulpo District,” KMF (1925. 5.), p. 113; “Medical Work,” WFMS, (1924), p. 85 등 참조.

64) 1929년 1년 지출은 3,424원이었으나 수입이 1,119원에 불과했으며, 1930년은 2,904원 지출에 1,168원 수입이었다.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9-1930), 통계표 참조.

65) B. A. Kostrup, “A Letter from Chemulpo,” KWC, (1926), pp. 11-12.

66) A. Kostrup, “Chemulpo Public Welfare Work,” KWC, (1927), pp. 13-14.

67) A. Kostrup, “Chemulpo Public Welfare Work,” KWC, (1927), p. 14; R. S. Hall, “Medical Work,” WFMS, (1930), p. 76.

68) B. A. Kostrup, “A Letter from Chemulpo,” KWC, (1926), p. 13.

69) “Medical Work,” WFMS, (1928), p. 65.

70) A. Kostrup, “Chemulpo Dispensary and Infant Welfare Work,” KWC, (1930), pp. 4-5.

71) A. Kostrup, “Chemulpo Public Welfare Work,” KWC, (1927), p. 15.

72) 洪淳倬, 「仁川地方監理師洪淳倬報告」, 『基督敎朝鮮監理會 東部 · 中部 · 西部 第一回聯合年會會錄』, (1931), 160쪽.

73) “Medical Work,” WFMS, (1931), p. 81.

74) WFMS, (1937), p. 52; (1939), p. 62.

75) 「醫師免許」, 『朝鮮總督府官報』, 1934년 5월 5일, 62쪽; 「半島醫藥界大觀 」 『三千里』 10권 1호, (1938. 1. 1.), 41쪽.

76) A. Kostrup, “A Public Health Aeroplane Trip form North to South in Korea, Conducted by Methodist Women Missionaries,” KMF (1940. 5.), p. 81.

77)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2), 9쪽.

78)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2), 3쪽; (1923), 3쪽 참조.

79) M. Hess, “With the Island Women of Chemulpo District,” KMF (1925. 5.), p.113.

80)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7), 17쪽.

81) 「兒童들의크리스마쓰 仁川內里敎會嬰兒部主催」, 『監理會報』 (1934. 1.), 7쪽.

82) A. Kostrup, “Chemulpo Public Welfare Work,” KWC, (1927), p.13.

83) B. A. Kostrup, “Christmas at the Chemulpo Dispensary,” KMF (1934. 11.), p. 240.

84) A. Kostrup, “Chemulpo Dispensary and Infant Welfare Work,” KWC, (1930), pp. 4-6.

85)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9), 10쪽; 『基督敎朝鮮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32), 19쪽; (1933), 21쪽; (1934), 19쪽; (1935), 24쪽; (1936), 26쪽; (1937), 29쪽; (1938), 30쪽; (1939), 32쪽; (1940), 27쪽; (1941), 36쪽.

86) B. A. Kostrup, “Christmas at the Chemulpo Dispensary,” KMF (1934. 11.), p.240.

87) A. Kostrup, “A Public Health Aeroplane Trip form North to South in Korea, Conducted by Methodist Women Missionaries,” KMF (1940. 5.), pp. 81-82.

88) J. S. Ryang’s letter to R. E. Diffendorfer, 1948년 4월 20일.

89) 『婦人新報』, 1947년 9월 27일.

90) 김광우, 「사회국 보고서」,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 · 중부 · 남부연회록』, (1956), 200쪽.

91) 참고로 현 인천기독병원은 1952년 5월, 강석봉이 설립했다고 하며, 인천부인병원과의 역사적 연속성에 소극적이다. 그러나 1956년 감리회에 제출된 사회국 보고서에는 인천기독병원을 ‘본래 여선교부 직영병원’으로 규정하며, 기원을 인천부인병원에 두고 있다. 이는 1956년 3월 20일, 개최된 중앙협의회 실행부위원회(Central Council Executive Committee) 회의자료에도 보고되었다. 또한 강석봉 재임 시인 1961년, 감리회에서 간행한 요람에도 인천기독병원이 1920년대 ‘감리교 여선교부’에서 설립된 기관으로 명시되어 있다. 결정적으로 강석봉이 1974년 10월, 감리회 감독 윤창덕에게 보낸 공문에서 병원이 감리회 선교부 유지재단으로부터 이양받은 재산이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사료를 종합하면, 인천기독병원의 역사성이 인천부인병원과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오늘날 병원 측이 역사 계승에 소극적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 이후 진행된 감리회 선교부 재산의 이양 과정, 감리회 내부 상황 및 재산 관리 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봐야 한다. 이는 추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Minutes of the Central Council Executive Committee, (1956. 3. 20); 박신오 편, 『1960년 기독교 대한 감리회 요람』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총리원, 1961), 160쪽; 『학교법인 새빛학원 및 인천기독 병원장 강석봉이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에게 발송한 공문』, 1974년 10월 17일.

92) Helen K. Kim, “Methodism and the Development of Korean Womanhood,” Within the Gate, pp. 77-83.

표 1.
미감리회 계통 의료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지방별 예배당 및 신자수 (1921년 통계)
Table 1. Chapels and Membership by District with Medical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21 Statistics)
연도 인천지방 경성지방 평양지방 공주지방 해주지방 원주지방
예배당 66 30 88 52 58 18
신자 6,044(1,075) 4,884(861) 10,990(2,178) 2,918(420) 3,770(677) 1,173(184)

(『耶蘇敎美監理會 朝鮮年會錄』 1921)

* 괄호 안은 입교(入敎)한 여성 신자 수임.

표 2.
연도별 인천부인병원 운영 상황
Table 2. Annual Operating Status of the Chemulpo Women’s Dispensary
연도 의사 간호사 환자총수
왕진 횟수 1년 경비 수입합계
기존 신규
1925 2,079 (3,163) 165
1927 4,466 (유아 867)
1928 6,560
1929 2,227 983 135 3,424 1,119
1930 2,047 869 194 2,904 1,168
1931 1 2 5,967
1932 1 2 5,068 3,690 3,690
1933 1 2 14,157
1934 1 2 15,088
1935 1 2 13,490
1936 1 2 12,889 6,445.45
1937 1 2 10,508 (12,334)
1938 2 2 11,894 7,200
1939 1 2 10,914 7,594

(梁柱三, 1932: 38; 1936: 86; WFMS, 1939: 58; KWC, 1926-1930;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6-1930; 『基督敎朝鮮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31-1941)

* 1925년도 환자총수 중 괄호 안은 외부 진료받은 자를 모두 합한 수.

* 1928년도 환자총수는 1927년 7월부터 1928년 9월까지의 환자 수.

* 1937년도 환자총수 중 괄호 안은 Fifty Years of Light에 기재된 환자수.

* 수입합계는 미감리회 선교부의 보조를 제외한 금액.

표 3.
연도별 감리회의 인천지방 내 교회별 인천부인병원 지원 현황
Table 3. Support Status for the Chemulpo Women’s Dispensary by Circuits(Churches) in the Incheon District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부평 富平 부천 富川 교동 喬桐 강읍 江邑 신도 信島 강서 江西 강남 江南 영흥 永興 삼산 三山 덕적 德積 화도 花島 인천 仁川 주문 注文 합계 合計
1924 4.50 5.20 4.18 10.00 4.00 2.50 10.00 2.00 1.00 1.29 3.00 10.00 10.00 67.67
1925 예산 수입 4.00 3.80 3.00 7.00 4.00 1.50 2.00 1.50 7.00 7.00 40.80
4.00 3.80 3.00 1.50 7.00 19.30
1926 3.00 4.30 1.00 3.00 2.00 3.00 3.50 2.90 5.00 3.00 30.70
1927 2.10 2.00 1.00 2.00 3.00 2.00 3.00 5.00 7.00 27.10
부천·부평 강읍 강서 강남 영흥·대부 덕적 화도 인천 주문 합계
1931 6.00 1.50 1.50 1.00 1.00 1.30 2.00 5.50 2.50 20.30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4-1927; 『基督敎朝鮮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31)

* 1925년도 환자총수 중 괄호 안은 외부 진료받은 자를 모두 합한 수.

* 1928년도 환자총수는 1927년 7월부터 1928년 9월까지의 환자 수.

* 1937년도 환자총수 중 괄호 안은 Fifty Years of Light에 기재된 환자수.

* 수입합계는 미감리회 선교부의 보조를 제외한 금액.

표 4.
연도별 미감리회 인천지방 인천부인병원 관련 위원 명단
Table 4. List of Committee Members Related to the Chemulpo Women’s Dispensary of Incheon District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연도 위원회 명칭 위 원
1922 인천부인병원 보호위원회 김찬흥, 신홍식, 김현호, 리진형, 박성대 (5인)
1923 인천부인병원 위원회 신홍식, 리진형, 김현호, 김성대(위원장), 김찬흥 (5인)
1924 金燦興, 申洪植, 李鎭亨, 朴成大, 金顯鎬(회계) (5인)
1925 부인병원위원회 김찬흥, 신홍식, 리진형, 김성대, 김현호 (5인)
1926 김찬흥, 신홍식, 김성대, 김제은, 김규량 (5인)
1927 김찬흥, 신홍식, 김성대, 리동응, 조상문 (5인)
1928 김찬흥, 박순병, 조상문, 김태진 (4인)
1929 김태진, 김찬흥, 박순병, 조상문 (4인)
1930 김현호, 윤성심, 박신애, 리천국 (4인)
1931 사회사업위원회 장윤백, 고수도, 정등운 (3인)
1932 정등운, 고수도, 장윤백, 윤성심 (4인)
1933 윤대석, 문현일, 리태준, 박신애, 고수도 (5인)
1934 윤대석, 문현일, 고수도, 유정순 (4인)
1935 윤대석, 고수도, 한용수, 박신애, 허영생, 김치준 등 (8인)
1936 허영생, 고수도, 장윤백, 박신애, 전승반, 유정순 등 (14명)
1937 리갑석, 박신애, 장윤백, 전승반, 림진산, 조종순 등 (11인)
1938 리갑석, 고수도, 박신애, 장윤백, 전승반, 림진산 등 (26인)
1939 리갑석, 고수도, 박신애, 장윤백, 전승반, 림진산 등 (30인)
1940 리갑석, 고수도, 박신애, 장윤백, 림태선, 리명예 등 (18인)
1941 사회사업위원회 폐지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2-1930; 『基督敎朝鮮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31-1941)

표 5.
연도별 인천지방의 인천부인병원 전도부인 파송 명단
Table 5. Annual List of Bible Women Appointed by District to the Chemulpo Women’s Dispensary
파송연도 이름 비고
(1927) 1929-1935년 김유의 * 1929년은 전도부인이 아닌 권사(勸士, Exhorter) 신분임.
* 1930, 1931년도 지방회의록에는 병원 전도부인이 기재되어 있지 않음.
(1928) 1935-1941년 박신애 * 1930년 및 1933년부터 지방 내 병원 관련 위원회 활동 겸임함.

(Williams & Bonwick, 1928: 43; 『耶蘇敎美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29-1930; 『基督敎朝鮮監理會 仁川地方會錄』 1931-1941)

* 괄호 안 연도는 지방에서의 정식 파송을 받기 이전 활동임.

참고문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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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Minutes of the Central Council Executive 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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