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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5(2); 2026 > Article
비공식 의료인력의 형성과 재편: 소록도 녹산의학강습소 출신 한센인과 한국 한센병 의료체계(1950-1980년대)†

Abstract

This article examines the Sorokdo Medical Training School (Noksan Medical Training School) and the lives of its graduates, focusing on their role in Korea’s Hansen’s disease healthcare system between the late 1940s and the 1980s. Existing studies have primarily portrayed Hansen’s disease patients as objects of medical intervention, segregation, and state control. While such perspectives have illuminated the history of confinement, stigma, sterilization, and discrimination, they have paid relatively little attention to the active roles that patients themselves played within the healthcare system. By analyzing hospital records, government documents, overseas reports, and oral histories, this study reconstructs the experiences of Hansen’s disease patients who were trained as medical personnel and explores their contributions to the operation of Korea’s leprosy healthcare system.
Established in 1949 at Sorokdo National Hospital, the Medical Training School was designed to address the severe shortage of medical personnel in Hansen’s disease institutions and settlement villages. Graduates were deployed not only to Sorokdo but also to leprosy hospitals and settlement communities throughout the country, where they performed a wide range of medical tasks, including laboratory testing, drug dispensing, wound care, surgery assistance, rehabilitation, and outpatient treatment. In many settlements, where physicians were absent or visited only occasionally, they effectively functioned as the primary providers of everyday medical care. Their activities were therefore essential to both the treatment of Hansen’s disease patients and the implementation of the state’s leprosy control system.
The article argues that these graduates constituted a form of “informal medical workforce” operating within, rather than outside, the state healthcare system. Although they acquired substantial clinical experience and were highly valued in practice, they were never fully recognized as professional medical practitioners. As Korea’s healthcare system became increasingly professionalized from the 1960s onward, their broad medical responsibilities were gradually restricted. Yet their story was not simply one of exclusion. While some lost their positions within medical institutions, others adapted to the changing system by becoming leprosy control workers, laboratory technicians, radiological technicians, medical assistants, or operators of pharmaceutical sales outlets. Their experiences reveal how the professionalization of medicine simultaneously marginalized and incorporated non-professional healthcare workers.
Methodologically, the study combines institutional records with oral histories in order to examine both the administrative position of these workers and their own understanding of medical expertise. The oral accounts show that graduates built practical competence through repeated clinical work, anatomical training, and the transmission of skills among senior and junior trainees, while official records and overseas reports reveal how heavily Hansen’s disease institutions depended on their labor. The study also traces their divergent trajectories after the school was abolished in 1961. Some continued to work in Hansen’s disease hospitals and settlement villages, whereas others moved into newly institutionalized occupations such as leprosy control work, clinical laboratory technology, and radiological technology. These trajectories demonstrate that professionalization did not simply eliminate informal practitioners; rather, it redistributed their skills across newly differentiated occupations and institutional boundaries.
By recovering the largely overlooked contributions of these patient-medical workers, this study challenges physician-centered narratives of Korean medical history and reinterprets Hansen’s disease patients not only as victims of modern medicine but also as active participants in the making of Korea’s healthcare system. The history of the Sorokdo Medical Training School demonstrates that Korea’s leprosy healthcare system was sustained not solely by licensed physicians and state institutions but also by the labor, expertise, and agency of Hansen’s disease patients themselves.

1. 머리말

광복 이후 한국 사회는 극심한 의료 공백 상태를 경험했다. 식민지기 조선의 의료체계는 일본인 의사와 제한된 수의 한국인 의사에 크게 의존했음에도 의료 제공이 여의치 않았으나, 광복 이후 일본인 의료인력이 대거 철수하면서 의료인력 부족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여기에 한국전쟁까지 겹치면서 의료시설과 인력의 파괴, 피난과 도시 집중, 전염병 확산 등이 이어졌고, 국가의 보건의료체계 역시 충분히 기능하지 못했다. 특히 농촌과 사회적 주변부에서는 정규 의료만으로 의료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박윤재, 2021; 이주연, 2010: 385-432).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는 다양한 형태의 비공식 의료와 무면허 의료행위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최근 의료사 연구들은 이러한 문제를 국가의 의료통제와 전문직화 과정 속에서 분석하고 있다. 먼저 임지연(2017: 181-214)은 1960-70년대 정신의학 연구를 통해 ‘선한 정신과 전문의’와 ‘사이비 무면허 의사’라는 대립 구도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정신의학의 전문직화 과정은 단순히 새로운 의학지식의 도입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면허 의료인과 사설 수용소를 비합법화하는 과정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즉 국가와 정신의학계는 ‘유능하고 합법적인 전문의’와 ‘전근대적 돌팔이’를 구분함으로써 현대 정신의학의 정당성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주연 역시 1950-60년대 의료법 개정과 무면허 의료업자 문제를 중심으로 국가의 의료 통제를 분석했다(이주연: 2010). 그의 연구는 의료인 단체와 국가가 무면허 의료업자 단속, 의료법 개정, 보건범죄단속법 제정 등을 통해 의료행위의 경계를 재 구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공의제도, 한지의사 제도, 의료보조원법 등을 둘러싼 논쟁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의료인력 부족이라는 현실과 전문직 중심 의료체계 구축 사이에서 어떠한 긴장을 겪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대체로 국가와 전문직의 관점에서 무면허 의료를 어떻게 통제하고 배제했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에 비해 박승만(2018: 397-446)은 1960-80년대 농촌 의료 연구를 통해 보다 다른 측면에 주목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농촌 사회에서는 의료시설과 의료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주민들의 경제적 상황 역시 정규 의료를 이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공식 의료는 단순한 불법이나 일탈이라기보다는 실제 의료 공백을 메우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박승만이 주목한 신권식과 같은 인물은 의료 활동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을 치료하며 지역사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비공식 의료가 반드시 상업적 목적이나 조직적 무면허 의료의 형태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내부의 상호 돌봄과 경험적 치료 실천의 형태로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즉 광복 이후 한국 의료체계 형성 과정은 단순히 정규 의료가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과정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실제 의료현장은 국가의 통제와 전문직화, 의료 공백과 비공식 의료,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들은 여전히 의료인력 문제를 주로 의사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즉 의료인력 수급 문제는 대개 의사 수 부족, 의과대학 확충, 공의 배치, 전문의 양성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반면 실제 의료현장을 유지했던 보다 주변적인 의료인력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다. 특히 병원 조수, 군 위생병, 의료보조원, 환자 출신 의료인력 등은 의료 체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사 서술 속에서는 쉽게 주변화되거나 삭제되었다.
한센병 영역은 이러한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였다. 광복 이후 소록도병원과 여러 한센병 전문병원은 극심한 의료인력 부족 상태에 놓여 있었고, 국가와 병원 당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환자 출신 의료인력을 직접 양성하고 활용했다. 즉 한센병 영역에서는 국가 스스로가 비공식 의료인력을 제도 내부로 편입해 활용했던 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소록도 녹산의학강습소 출신 한센인 의료인들의 생애와 의료활동을 분석한다. 녹산의학강습소는 1949년부터 1961년까지 소록도와 전국 한센인 정착촌의 치료를 담당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운영된 교육기관이었다. 이곳 출신들은 소록도병원을 비롯한 전국의 한센병 전문병원 그리고 한센인 정착마을1)에서 진단, 검사, 수술, 약품 조제, 처치, 순회진료 등을 수행하며 실제 의료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공식 문서 속에서 이들의 역할과 성과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보조 인력이 아니었는데, 공식 기록과 구술자료에 따르면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은 진단, 임상검사, 수술 보조, 약품 조제, 외래진료, 정착촌 순회치료 등 다양한 의료행위를 수행했다. 일부는 웨이드 피부도말검사2)와 레프로민 테스트3) 뿐만 아니라 혈액ㆍ소변ㆍ객담 검사 등 임상병리 업무를 담당했고, 또 일부는 절단 수술이나 충수염 수술 보조, 상처 처치와 봉합, 치과 치료 등을 수행했다. 특히 의료인력이 부족했던 정착촌에서는 이들이 사실상 지역 의료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의 정체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일명 ‘돌팔이 의사’라고 불리는 이들과는 달랐고, 구술자료에 따르면 녹산의학강습소 학생들은 소록도라는 제도 내에서 반복적인 해부 실습과 임상 경험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실무 능력을 축적했다. 당시 소록도에는 수천 명의 환자가 장기간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임상 경험을 충분히 쌓을 수 있었고, 사망자 역시 많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반복적으로 해부 실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부 구술자들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일반 의과대학 학생들보다 더 많은 해부 경험과 임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물론 이러한 발화는 당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의 자부심과 자기정당화가 반영된 서술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단순한 보조 업무나 병원 노동으로 이해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실제로 의료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인식했으며, 일부는 스스로를 사실상의 ‘의사’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는 박승만(2018)의 연구에서 무면허 의료행위를 했던 신권식이 스스로를 의료 전문직과 거리를 두어 인식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의료 제도 속에서 이들의 위치는 매우 모호했다. 병원과 국가가 의료 인력 부족 상황 속에서 이들을 적극 활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들을 정규의사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의료행위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범위 안에서는 묵인되거나 활용되었지만, 법적 자격과 전문직 지위는 부여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한국 의료체계가 법적 자격과 전문직 중심으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지위와 역할은 지속적으로 변화했다. 국가의 의료체계가 정비되면서 이러한 기능은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의료보조원 등 보다 세분화된 전문 영역으로 재조직되기 시작했다. 즉 이전까지 하나의 인력이 포괄적으로 수행하던 의료노동이 점차 여러 전문직 영역으로 분화된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일부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 역시 자신들의 경험과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일부는 임상병리 업무를 담당했고, 일부는 방사선이나 검사 업무를 계속 수행했으며, 또 일부는 의료보조원이나 병원 직원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는 국가가 이들을 의도적으로 배제 후 재편입시켰다기보다는, 의료체계 변화 속에서 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기술과 경험이 활용될 수 있는 새로운 위치를 찾아간 과정에 가까웠다. 따라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의 역사는 단순한 주변부 의료인의 소멸이나 실패의 역사로만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는 한국 현대 의료체계가 형성되고 전문직화되는 과정 속에서 비공식 의료가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되고, 제한되며, 재편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의료 전문직의 경계가 처음부터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의료인력 구조와 국가 정책, 법적 기준, 실제 의료현장의 필요 속에서 역사적으로 재구성되었다는 점 역시 보여준다.
방법론적으로 본 연구는 공식 기록과 구술자료를 함께 활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은 국가의 한센병 관리체계 내부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으로는 주변적이고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 있었기에 이들의 활동은 국가 의료체계의 공식 서술 속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특히 의료사 서술이 오랫동안 의사와 국가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점에서, 환자 출신 의료인력의 존재와 역할은 쉽게 주변화되거나 삭제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소록도연보, 국립소록도병원 자료, 보건사회부 등에는 녹산의학강습소와 그 출신들의 활동이 부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국제기구 관계자들이 남긴 보고서와 기록은 이들의 존재를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러한 공식 기록들은 대체로 행정적ㆍ제도적 관점에서 생산된 것이기 때문에,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의 실제 경험과 자기인식, 일상적 의료실천까지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특히 이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환자 공동체 내부에서 어떠한 위상과 정체성을 가졌는지, 그리고 정규 의료체계와 어떤 긴장 관계 속에 놓여 있었는지는 공식 기록만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구술자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저자는 2014년부터 시작된 『소록도 100년사: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집필 과정에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이때부터 이들에 대한 인터뷰 등 질적조사를 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사회로 복귀한 지 오래이기 때문에 현재 시설이나 정착마을에 거주하는 3명만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삶의 궤적들이 각기 달랐기 때문에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데 충분했다. 게다가 2012년에 정근식 등에 의해서 국립소록도병원에서 출판된 『자유를 향한 여정, 세상에 내딛는 발걸음』 (국립소록도병원 100년 구술사료집)과 2019년에 출판된 『소록도 구술 기억 Ⅰ, Ⅱ』에 의료강습소 출신들의 이야기가 실렸는데 이 역시 본 연구를 위한 자료로 사용했다. 본 연구에서 활용한 구술자료의 구성은 위와 같다[표 1].
본 연구에서 활용한 구술자료는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의 구체적인 의료행위와 노동 과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공식 기록에 충분히 남지 않은 감정과 기억, 자기인식, 공동체 내부의 위계와 문화 등을 드러낸다. 물론 구술자료는 기억의 왜곡이나 과장, 사후적 재구성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루어진 회고에는 현재적 해석과 자기정당화가 개입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구술자료를 사실 확인의 절대적 근거로 사용하기보다는, 공식 기록과 상호 교차 검증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구술에서 언급된 의료활동과 조직 구조, 교육 내용 등은 가능한 경우 소록도연보와 병원 자료, 당시 신문 및 해외 보고서 등을 통해 비교ㆍ확인하였다. 동시에 공식 기록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경험과 감정, 자기인식의 층위는 구술자료를 통해 보완적으로 분석하였다.

2. 소록도의 위기와 녹산의학강습소의 설립

1916년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에 자혜의원이 설립된 이후 소록도병원의 규모는 점차 확대되었다. 1917년 2명의 의사가 배치된 이후 의사 수는 증가해 1939년에는 17명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1933년 스오 마사스에(周防正季)가 소록도자혜의원 원장으로 부임해 확장공사를 추진하면서 수용 환자 수 역시 빠르게 증가했다. 그러나 환자 수 증가 속도에 비해 의료인력 증가는 충분하지 못했다. 1940년의 경우 소록도병원의 수용 정원은 5,770명이었지만 실제 수용인원은 6,136명에 달해 심각한 과밀 상태였다. 의사 수 역시 1934년 5명에서 1940년 15명으로 증가했지만, 여전히 의사 1명당 약 400명의 환자를 담당해야 했다. 이는 같은 시기 일본 국립요양소인 나가시마 애생원(長島愛生園)의 의사 1인당 환자 수가 약 194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였다(瀧尾英二, 2001: 31). 수용인원과 의사 수의 장기적 변화는 다음과 같다[그림 1].
더구나 당시 소록도갱생원4)은 단순히 의사와 직원들의 노동만으로 운영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소록도는 장기 수용과 격리라는 구조 속에서 환자들의 노동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병동 관리, 위생과 소독, 청소, 취사, 농업과 축산, 시체 운반 등 시설 운영의 상당 부분이 환자들의 노동을 통해 유지되었다. 특히 중증 환자나 시각장애인 등에 대한 돌봄은 환자가 담당했다. 즉 소록도갱생원은 의사와 직원들의 관리 아래 환자들의 노동을 조직함으로써 유지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료행위 자체는 여전히 의사와 간호사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고, 환자들은 병동 보조와 돌봄 노동을 수행했지만, 의사나 간호사를 대신해 진단과 처치, 수술 등을 담당하지는 않았다. 대신 소록도갱생원은 부족한 의료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1937년 간호부양성소를 설치했다. 간호부양성소는 정원 20명 규모로 운영되었고 교육기간은 2년(4학기)이었지만, 이곳은 환자가 아니라 직원 간호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었다(小鹿島更生園年報, 1937: 415~420). 즉 식민지기 소록도에서 환자노동은 병원 운영의 핵심 요소였지만, 의료 전문직 영역은 여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료 인력의 증원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제대로 된 치료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강제노동 등 각종 인권침해로 인해 환자들의 사망률은 높아만 갔다.
광복 이후 의료인력의 부족 문제는 더욱 악화됐다. 일본인 의사들이 철수한 뒤 1952년 소록도병원에는 환자 5,413명에 의사는 불과 3명만이 근무하여, 의사 1인당 약 1,800명의 환자를 담당해야 했다(갱생원, 1952). 특히 광복 이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강점기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한센병 환자를 단속하고 격리했으며, 그 결과 소록도에는 더 많은 환자가 수용되었다. 그러나 치료와 돌봄의 질은 오히려 악화되었고, 환자들의 탈출 역시 급증했다. 실제로 1960년대 한센병 전문병원에서 병상 100개당 의사 수와 간호사 수를 비교해보면, 한국은 각각 0.16명과 0.19명에 불과해 필리핀(0.54명/0.66명), 대만(1.09명/3.82명), 일본(0.89명/4.96명), 미국 카빌요양소(2.92명/16.78명)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오중근ㆍ유준, 1970: 1-28).
이러한 이유에서 광복 직후 소록도에서는 이른바 ‘일반 직원’들이 일본인 의사들에게 배운 경험적 기술을 바탕으로 환자 치료를 담당하기도 했다. 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간단한 치과치료부터 절단 수술과 단종수술까지 수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만으로는 5,000명에서 6,000명에 이르는 환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소록도 당국은 환자들을 직접 교육시켜 의료인력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녹산의학강습소였다. 하지만 녹산의학강습소의 설립 시점에는 다소 논란이 존재한다. 1952년 갱생원 연보에 따르면 김상태 원장에 의해 1949년 공식적으로 설립되었으며, 1949년에 입학한 학생들 역시 자신들을 1기생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여수애양병원 자료에 따르면 그보다 앞선 시기부터 환자 대상 의료교육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일제강점기 여수애양원 원장이었던 로버트 윌슨(Robert M. Wilson)은 미군정기 남한으로 돌아와 소록도병원에서 활동했는데, 이 시기 일부 대학교육을 받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즉 환자를 의료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광복 직후부터 존재했으며, 1949년 김상태 원장 시기 녹산의학강습소라는 형태로 공식 제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정근식ㆍ김재형ㆍ채규태, 2017: 84).
하지만 1949년 설립된 녹산의학강습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으로 인해 운영이 중단되었고, 1952년 8월이 되어서야 제1기생 16명이 졸업하게 되었다(소록도갱생원, 1952: 58). 이후 녹산의학강습소는 보건사회부의 지도 아래 전국 요양소와 정착마을의 환자들을 선발해 교육했다. 환자들의 입장에서 녹산의학강습소 입학은 단순한 기술 습득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장기간 격리와 차별 속에서 제한된 삶을 살아야 했던 한센인들에게 녹산의학강습소는 비교적 안 정적인 직업과 사회적 권위를 획득할 수 있는 드문 경로였기 때문이다. 1957년 녹산의학강습소 6기에 입학한 A씨는 당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이 “한센인 사회에서 미래가 보장된 최고의 엘리트”였으며, 녹산의학강습소는 “소록도의 서울대 의대”라고 불렸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소록도뿐 아니라 전국 한센인 정착촌 출신들도 녹산의학강습소 입학을 목표로 소록도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대구애락원 출신 B씨 역시 정착촌 의료부장이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인 것을 보고 동경해 소록도로 들어왔다고 증언한다. 이는 녹산의학강습소가 단순한 직업 교육기관이 아니라, 한센인 공동체 내부의 제한된 사회적 상승 통로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신입생 모집은 보건사회부의 지원 하에 이뤄졌기 때문에 환자들은 이 과정이 공신력이 있는 것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컸다(국립소록도갱생원, 1958: 25).
녹산의학강습소의 교육 기간은 2년이었다. 1년 차에는 이론교육이, 2년 차에는 병원 내 여러 진료과를 순환하는 실습교육이 이루어졌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의 자료를 비교하면 녹산의학강습소의 교과과정과 강사진은 매년 동일하게 유지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원무개황』에도 여러 의학 과목과 담당 강사가 편성되어 있었고, 1951년 『원무개황』에는 세균학, 간호학, 해부학, 약리학, 생리학이, 1952년 『갱생원 연보』에는 수신, 진단학, 약리학, 안과학, 조제학, 해부학, 외과학, 세균학, 이비인후과학, 생리학, 내과학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처럼 일부 과목은 새롭게 편성되거나 다음 해 자료에서 사라졌지만, 약리학, 해부학, 세균학, 생리학은 1950년대 초의 자료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이는 이들 과목이 녹산의학강습소 교육의 비교적 지속적인 기초를 이루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반면 그 밖의 교과목은 해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변화에는 당시 강의를 담당할 수 있는 의료인력의 구성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동시에 초기의 교육 경험이 축적되면서 필요한 과목을 추가하거나 교육 내용을 세분화하는 등 교육과정 자체가 계속 조정되고 정비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중앙나요양소, 1950: 20; 1951: 31; 갱생원, 1952: 58).
강사진 역시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1952년에는 김상태 원장이 현재의 의료 윤리에 해당하는 ‘수신’을 담당했고, 의무관, 약제관, 기사, 의무사가 진단학, 약리학, 안과학, 조제학, 해부학, 외과학, 세균학, 이비인후과학, 생리학, 내과학 등을 나누어 가르쳤다. 그러나 이 과목별 담당강사 표가 당시 녹산의학강습소 교육에 참여한 모든 강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김계한과 안부호는 1952년 제1기생 졸업 기념사진에는 강사로 등장하지만 같은 해 과목별 담당강사 표에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1957년에 입학한 A씨는 ‘수신’을 의사가 아니라 직원에게 배웠으며, 의사 김계한과 하용마에게도 배웠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녹산의학강습소에서는 병원의 인력 구성과 교육상의 필요에 따라 담당강사와 과목이 비교적 유동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
한편 A씨에 따르면 한국어로 된 교재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 일본어, 한자를 익혀야 했으며, 선배들이 정리해 놓은 노트도 중요한 학습자료였다. 이러한 기록과 증언을 종합하면 녹산의학강습소는 처음부터 완성된 교육과정을 그대로 반복한 기관이라기보다, 약리학ㆍ해부학ㆍ세균학ㆍ생리학과 같은 기초의학을 일정한 축으로 삼으면서, 병원의 의료인력과 실제 진료의 필요, 그리고 해마다 축적된 교육 경험에 따라 교과목과 교육 내용을 조정하고 확대해 간 2년제 의료 실무교육기관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1950년부터 1952년의 과목과 강사 구성은 다음과 같다[표 2].
1년간 이론 강의를 한 이후, 2년 차에 녹산의학강습소 학생들은 실습을 했다. 학생들은 병원 내 실습 과정에서 반복적인 해부 실습과 임상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 당시 소록도에는 5,000명가량의 환자가 장기간 수용되어 있었고 사망자 역시 많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반복적으로 해부 실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부 구술자들은 자신들이 일반 의과대학 학생들보다 더 많은 해부 경험과 임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한국 의과대학들이 해부용 시신 부족 문제를 겪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경험은 매우 특수한 것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때때로 전남대학교 의대생들이 소록도에 와 함께 해부 실습을 하기도 했다.
교육을 마친 학생들에게는 국립소록도병원 원장 명의의 수료증과 청진기가 지급되었다.6) 이는 병원이 이들을 단순한 병원 보조 인력이 아니라 실제 의료행위를 수행할 인력으로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졸업생들은 소록도와 한센병 전문병원, 정착마을에서 검사ㆍ처치ㆍ조제와 환자 관리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법적 면허와 전문직 지위는 부여되지 않았다. 이들은 국가 의료체계 밖의 존재라기보다, 국가의 한센병 관리체계 내부에서 필요에 따라 활용된 ‘제도 내부의 비공식 의료인력’이었다.

3.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의 의료행위와 자기인식

1949년부터 1961년까지 운영된 녹산의학강습소는 7기에 걸쳐 총 21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의 활동을 이해하려면 녹산의학강습소 출신과 정규 의사가 서로 다른 근거로 전문적 권위를 주장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은 반복적인 임상 경험, 한센병 환자의 신체와 생활에 대한 이해, 특정 처치와 검사에 축적된 숙련을 자신들의 전문성의 근거로 삼았다. 반면 정규 의사는 면허와 체계적인 의학교육, 종합적인 의학지식, 병원 조직의 공식 권한을 근거로 권위를 행사했다. 의료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와 장소에서는 숙련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이 광범위하게 활용되었지만, 이는 대체로 의사의 관리와 병원 조직 안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된 것이었다. 두 집단의 관계는 대등한 전문직 관계라기보다 의료 공백 속의 의존, 전문성을 둘러싼 긴장, 업무의 위임과 통제가 교차하는 관계였다. 외국인 전문가의 보고서는 이러한 구조적 의존을 보여준다.
1950년대 한국을 방문한 국제적으로 저명한 영국인 한센병 전문가 로버트 코크레인(Robert G. Cochrane)은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의 역할을 보고 2년간의 훈련을 받은 ‘나병 의사(leprosy doctors)’들이 병원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실제 의료행위를 담당하고 있으며, 정작 공무원 의사들은 상황을 바꾸지 못한 채 한 쪽으로 물러나 있다고 평가했다(Cochrane, 1956: 19-28). 한국의 한센병 정책 변화를 조언한 코크레인의 평가(김원중, 2020: 159-190)는 이들이 정규 의사와 동등한 존재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당시 한국 한센병 의료체계가 실제로는 이들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의 노동과 숙련 위에서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1966년 한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한센병 전문가인 다멘드라(Dharmendra)는 보고서에서 당시 정부와 민간단체를 포함해 한센병 관리 체계 안에 있는 의료인력은 의사 29명, 세균검사원 36명, 간호사 44명, 훈련된 음성자 210명이라고 기록했다. 이 훈련된 음성자가 바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으로, 정부의 한센병 통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집단이었다(Dharmendra, 1966).
실제로 녹산의학강습소 졸업생들은 소록도병원에서 이뤄지는 의료활동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소록도병원의 1958년 연보에 따르면 병원은 내과,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치과, 약제과, 방사선과의 8개과로 구성되어 있다. 내과는 환자들에게 가장 많이 발생하는 “신경통, 간장질환, 관절염, 폐결핵, 신장염, 빈혈 등” 질환을 담당했고, 외과는 “결핵성질환, 간장질환, 사지절단 등” 뿐만 아니라 “산아제한을 위한 정관수술”을 담당했다. 안과에서는 환자들에게 자주 발생하는 “홍채모양체염, 각막염 등”을 치료했으며, 때에 따라서 안구적출 수술들도 담당했다. 이비인후과는 “비폐쇄, 축농증, 인후부질환으로 인한 호흡곤란” 등의 질환을, 치과는 “나성치주염, 나성구내염 등”을 담당했다. 당시 소록도에 수용되었던 환자는 총 5,856명이었는데, 외래환자 연간치료 상황을 살펴보면 치과는 약 1만 명, 이비인후과는 20만 명, 안과는 25만 명, 외과는 31만 명, 내과는 49만 명가량이었다. 하지만 당시 소록도에 있었던 의사는 원장 1인, 의무관 1인에 불과했으며, 간호부장 1인에 간호부는 정원 6명에 현원 4명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다만 소록도 직제에 포함되지 않았던 촉탁의사 5명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의사들은 주로 행정 일을 보았고, 치료는 거의 보지 않았다. 즉 소록도에서 거의 모든 의료행위는 이들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이 담당했다(국립소록도갱생원, 1958: 10-28).
A씨는 여러 과를 돌아다녔는데, 제대로 된 치료는 이때 선배들로부터 배우거나 스스로 터득했다고 증언했다. 예를 들어 치과의 경우 당시 치과 의사 한 명이 왔었는데,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고, 없다고 하면 구입해 주는 역할만을 담당했으며, 치과 기술은 선배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한센병 환자 중 손의 변형으로 인해 칫솔질 등 치아 관리를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센병 치료에 있어서 치과 치료는 중요했다. 또한 한센병으로 인한 치조염이나 구내염 역시 방치하면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치과 치료에 대한 환자들의 요구는 매우 컸다. A씨는 치과에서 주로 발치와 의치를 담당했다고 한다. 치과는 다른 과보다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치료해주고 뒷 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배워가지고 1년 정도 되니까 조금 해주고 돈 벌만 하니까 어느 놈이 나를 치고 올라왔다. 돈을 안 주니까 밀려서 이비인후과 가라니까 오마도 갔다.” 치과에 배치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인원 배치를 담당하는 책임자에게 뒷돈을 주는 경우가 심상치 않게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A씨는 뒷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치과에서 이비인후과로 배치되었다고 한다.
A씨는 “안과는 죽어난다”고 표현했다. 1958년 국립소록도갱생원 연보에 나타난 것처럼 1년간 안과 외래환자는 25만 명이었다. 한센병은 홍채모양체염, 각막염 등 다양한 안과 관련 질환을 동반할 수 있다. 다음은 A씨가 묘사하는 안과에서의 치료이다. “눈 세척해줘야. 계속. 식염수, 붕산수로도 하고. 테라코마 걸리면 초산은으로 지져. 테라코마라고 눈 위에 좁쌀같이 나면 초산은으로 태워. 새까맣게 태우면 생리식염수로 씻어. 익산치편(익상편, pterygium) 정도는 우리가 수술했다. 익산치편은 여기서부터 새 날개같이 눈동자로 자라나. 그 정도는 우리가 수술했어.” 안과 수술법 역시 의사들에게는 이론적인 것만 배우고 실제 기술은 선배들에게 배웠다고 한다. 그는 약제과도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이 담당했다고 말했다. “그것도 책보고 다. 일본 책으로 조제학도 있고. 우리가 다해. 대왕중조, 물약, 소화제도 우리가 만들었지. 연고도 우리가 다 조제하고.” 안과 수술법과 약품 조제의 실제 범위는 구술만으로 모두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의 설명은 이론교육과 별도로 선배에게서 실무기술을 전수받고 반복적인 처치를 통해 숙련을 형성한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아침에 나가면 저녁까지 쉬지를 못 해. 하루에 안과, 내과는 150명 정도는 보통. 그러니 안과는 서로 안 가려고 하지. 이걸 계속 서가지고 하면 죽을 지경이야. 나합병증 중 눈이 제일 많아. 그 다음에 소화계질환, 그 다음에 외상, 상처. 그런 거는 치료실에서 해. 외과는 다리 자르는 거. 손가락, 발가락은 부락 치료실에서 했어.
세균검사는 한센병의 진단과 치료 경과, 당시 시설에서의 외출과 퇴원 판정에 중요한 절차였다. A씨의 회고에 따르면 1958년경 검사실에서 의료행위 직후 환자가 사망하고 이에 대한 항의가 발생한 뒤 일부 검사 업무가 녹산의학강습소 6기생에게 맡겨졌다. 그가 사용한 ‘연구 주사’라는 표현과 사망 원인, 당시 의료행위의 정확한 성격은 구술만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사건을 의사에게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으로 ‘권력이 이전된’ 계기로 단정하기보다,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갈등 뒤 검사실의 실무가 재배치되었다고 구술자가 인식한 사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의학강습소 출신이 피부도말검사와 레프로민 테스트, 혈액ㆍ소변ㆍ객담 검사 등을 담당했다는 회고는 병원 당국이 의료 공백 속에서 일정한 검사 실무를 이들에게 위임했음을 시사한다.
A씨에 따르면 이들 의학강습소 출신들은 약품도 조제했다. “화상연고 우리가 다 만들었다. (중략) 소록도에서 들어온 것. 몰핀 입수된 거 한 창고로 있었다. 치료소에다가 주면 처치 곤란이야. 중독된 사람도 많고.” 당시 소록도는 약품은 정부와 미군에서 공급해 줬기에 풍부했다(김재형, 2019: 5-40). 하지만 실제 치료에 필요한 약품은 의학강습소 출신들이 조제하고 사용했다고 한다. 한편 외과 수술 중 절단 수술도 많이 해야 했는데, 이 역시 선배들로부터 배우거나 스스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절단, 혈관 묶는 걸 제일 먼저 개발했어. 절단을 해놓으면 묶으니까 죽어. 해부학을 보니까 혈관 8개를 묶어 꼬매서 안 묶어도 되더라.” 이들은 충수염 수술 및 단종수술도 도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진술은 이들이 자신들의 숙련을 독자적인 의료능력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정규 의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위험도가 높은 의료행위까지 비공식 인력에게 맡겨질 수 있었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C씨와 B씨는 녹산의학강습소를 수료하고 각각 대구와 익산의 한센병 병원으로 갔는데, 이들의 활동은 A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C씨는 대구 동산기독병원 내 애락보건병원에서 치료를 시작했는데, 이는 원래 그가 애락원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C씨는 애락보건병원에서 의사가 진단을 맡고 자신이 처치와 수술의 상당 부분을 수행했다고 회고했다. 한편 B씨는 녹산의학강습소를 1959년 수료하고, 1962년부터 한센병 전문 병원인 익산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서 업무를 시작했다. B씨도 익산병원에서도 의사는 행정을 맡아서 할 뿐이지 치료를 하지는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들의 진술만으로 두 병원의 공식 업무분장을 확정할 수 없지만, 정규 의사가 소수였던 한센병 전문병원에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의 숙련이 의사의 관리 아래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C씨는 애락보건병원을 떠난 뒤 1969년 경상북도 칠곡의 가톨릭피부과의원으로 옮겨 장기간 근무했다. 그에 따르면 병원에는 피부과 의사가 있었지만 한센병 후유증과 관련한 외과적 처치의 상당 부분은 자신이 담당했다. C씨는 병원에서 자신이 인정받은 이유를 애락보건병원에서 정형외과과장에게 ‘힘줄 수술’을 전수받았기 때문이라고 회고한다. 이 ‘힘줄 수술’의 정확한 의학적 명칭과 적응증은 현재 구술만으로 특정하기 어렵지만, 한센병 후유증으로 발생한 손발의 변형과 기능장애를 완화하는 데 매우 유용한 기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국 여러 지역에서 이 수술을 받기 위해 환자가 찾아왔다고 회고했지만, 환자의 지역별 유입과 수술 건수를 확인할 병원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평가하는 것처럼 그의 능력이 ‘전국적으로 공인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회고는 그의 의료활동이 한센인 공동체의 비공식적인 의뢰망을 통해 널리 알려졌음을 시사한다.
한 40명, 입원할 수 있는 곳에 많을 땐요, 100명씩 입원했어요. 예, 그러니까 수술을 많이 할 때는 하루에, 밀릴 때는 한, 두 사람씩 했어요. ……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분들, 대부분 다 대구에서 왔습니다. 서울에 있는 그 성모병원, 알지요? 그 성모-병원에 그 그것도, 지금은 여기 있는, 피부과 과장이 성모병원에서 근무했던 분이 있거든요. …… 나환자의 치료는 안 해줘요. 나환자라 그러면 무조건 대구로 가라 소리. …… 나자로, 그, 안양, 안양에 있는 그 나환자 병원이 있거든요. 연구원, 연구원이 거기 있고. 그때는 옛날에는 연구원은 그 외과 환자를 치료 안 하고, 양성 환자만 치료했어요. 그러니까 어떨 때 외과 환자들은 무조건 대구로 다 보냈어요. …… 강원도 원주, 다 대구로 왔어요. 여기 같은 그 소록도병원이 있어도 전라도에 있는 분들도 다 왔어요. 네, 그 나주에 있는 그, 그 나환자 병원이 큰데, 두 군데 있거든요? 현혜원하고 호혜원이라고. 그때 그 두 군데, 다 이 대구로 왔어요. 전주에는 그 소생원이라는 큰 병원이 있어요. 네, 거기에 있는 분들도 대구에 왔거든요. 그러니 전국에서 다 대구에 왔어요. …… 그러니까 1년에 보통, 이틀에 한 사람 꼴로 치료를, 수술을 했으니까. 네, 그러니 일 년에 보통 한 180명, 150명씩 보통 그 수술 했어요.
C씨는 자신이 시행하기 어려운 수술은 애락보건병원이나 여수애양병원으로 의뢰했다고 회고했다. 이는 그의 활동이 모든 외과수술을 독자적으로 담당하는 방식이 아니라, 병원과 전문기관 사이의 업무분담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1960년대 이후 효과적인 치료제로 완치자가 증가하면서 한센병 후유증에 대한 재활과 기능 회복의 필요성도 커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의 활동은 정규 인력이 부족한 재활 수술의 영역에서도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달에, 실컷 일 시켜 먹고 여기 200(만원)밖에, 그 정도밖에 안 줬는데. 그 사람들, 와 봐요. 얼마를 줘야 돼요? 절대 천만 원은 생각해 줘야 하는데. 그러니까 내가 정년이 96년도, 1996년이 정년인데. 정년인데 정년 끝나고 그 대신 쭉-인자. 보자, 79살까지 인제 거기서 근무했으니까. 더, 일 더 했지요. 그 나보고는 인자, 원장이 바뀌어도 나보고는 나가라고 한 사람이 없었고, 그랬더니 “하고 싶은 데까지 일하다가 그만큼, 그만하겠다고 하면은 그때가, 나가시오.” 그래 됐거든요. 그래가지고 인자, 그때 79살쯤 돼가지고 “인자 그만 하겠습니다. 나, 갑니다”하고, 그렇게만 한 마디만 하고는 와 버렸는기라요.
(국립소록도박물관 한센병박물관 소장)
C씨는 자신이 수행한 업무와 근속기간에 비해 임금과 퇴직 과정에서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인식했다. 당시 임금 수준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자료가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저히 낮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병원은 한센병 합병증의 처치에 숙련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을 고용함으로써 별도의 전문의 충원 없이 외과적 처치 수요의 일부를 충당할 수 있었다. 이들의 숙련은 병원 운영에 활용되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전문직 지위와 의사결정 권한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례는 녹산의학강습소 출신과 정규 의사의 관계가 단순한 협력이나 대립 가운데 하나로 환원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은 환자의 생활과 신체에 대한 이해, 반복적인 임상 경험과 특정 기술의 숙련을 내세워 자신의 권위를 주장했다.
반면 정규 의사와 한센병 전문가들은 면허, 체계적인 의학교육과 종합적인 의학지식을 전문성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일부는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의 지식과 기술 수준을 의료사고의 원인으로 비판했다(유준, 1960: 71-73). 다미안재단에서 소록도병원에 파견된 의사 반드로겐브록(Van Droogenbreck)은 1967년에 보건사회부에 “적절한 치료로써 능히 치유될 수 있는 궤양을 의사가 아닌 환자가 집도해 많은 불구자를 만들고 있다”고 시정을 요청했다. 반면 소록도병원 당국은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는데, 이는 비공식 의료인력의 숙련을 둘러싼 평가가 병원 안팎에서 충돌했음을 보여준다(대한나관리협회, 1988: 263-264). 의료공백이 심한 시기에는 이들의 경험적 권위가 실제 진료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의료체계가 전문화될수록 정규 의사의 관리 아래 허용되는 업무의 범위는 좁아졌다. 이들이 기대한 대등한 관계는 성립하지 않았으며, 양 집단의 관계는 필요에 따른 의존과 전문적 위계가 동시에 작동하는 불균형한 타협이었다. 의학강습소 제1기생과 당시 강사진의 모습은 다음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림 2].7)

4. 의료체계의 재편과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의 재흡수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은 광복 이후 한센병 의료체계의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1960년대 이후 이들을 둘러싼 환경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핵심은 한국 의료체계가 점차 전문직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광복 직후와 한국전쟁 시기 극심했던 의료인력 부족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완화되어 정부에서 의료법과 전문직 체계를 중심으로 의료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도시를 제외한 농촌 지역과 한센병 영역에서는 의료인력 부족 현상은 여전히 심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료제도의 정비는 한센병 영역과 함께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즉 한센병 전문병원과 한센인 정착마을 역시 이전처럼 비공식 의료인력에 광범위하게 의존하기 어려워졌고, 그 결과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의 위치 역시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이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한센병 전문가들의 인식 역시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1961년 소록도병원에 부임한 최재위 원장이 “이제 소록도는 요양소가 아니라 병원이므로 병원은 병원다워야 한다”며 병원의 모든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그 과정에서 녹산의학강습소는 폐지되었고, 대신 ‘의료조무원양성소’가 설치되었다. 의료조무원양성소도 환자를 위한 의료교육기관이었지만 의사의 역할을 기대했던 녹산의학강습소 출신과 달리 의료조무원에게 맡겨진 업무는 보조간호사 정도의 역할이었다. 그래서 의료조무원양성소에서의 교육은 녹산의학강습소와는 달리 단기간에 비교적 간단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소록도 연보에 비교적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었던 녹산의학강습소와 달리, 의료조무원 양성소는 이것이 설치되었다는 정도로만 기술되어 있다. 의료조무원의 교육은 현장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E씨의 증언에 따르면 의료조무원은 소록도 내각 마을에 설치되어 있는 치료실에서 근무했는데, 현장에서 선배들로부터 의료 기술을 전수받았다. 환자 치료를 담당했던 환자들의 지위는 격하되었지만, 그렇다고 전문 의료인력이 바로 증원된 것은 아니었고, 소록도는 1970년대 중반까지 심각한 의료인력 부족에 시달렸다(국립소록도병원, 1996).
소록도병원 내 지위와 처우의 저하로 인해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은 점차 소록도병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B씨나 C씨처럼 다른 한센병 전문병원으로 간 이들은 드물었고, 대부분은 전국에 있는 한센인 정착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센병 전문병원은 국가의 한센병 정책의 변화로 인해 차츰 폐쇄되었기 때문에 이곳에 있었던 이들은 한센인 정착마을로 다시 이주경로를 밟았다. 효과적인 치료제의 등장으로 한센병의 완치가 가능해지면서 완치환자들의 퇴원과 이들의 사회복귀가 중요해졌다. 그 결과 전국에 음성한센인 정착마을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었다(김아람, 2021: 53-87; 김재형, 2019: 5-40). 하지만 정착마을에 있는 한센인들은 주변에 의료기관이 없거나, 낙인과 차별로 인해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은 언제나 환영받았다.
이 과정에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은 정착마을에서만 의료행위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A씨는 일반적으로 외떨어져 있는 정착마을 주변에는 병원이 없었기 때문에 인근 마을의 주민들도 그에게 치료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1960년대는 농촌 지역의 의료인력 부족 문제가 심각한 시기였기 때문에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이 정착마을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A씨는 자신이 그 지역에서 ‘명의’로 평가받았다고 증언했다. 즉 녹산의학강습소에서 배운 의료기술 덕분에 A씨는 다른 완치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사회복귀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A씨는 정착마을을 떠나 일반 사회로의 복귀를 시도했다. 인근 면소재지에 치과를 내었는데, 입소문이 나서 많은 환자가 이곳을 찾았고, 그의 병원은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1960년 이후 한국에서는 점차 ‘돌팔이 의사’라 불리는 무면허 의사를 사회에서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는 이들이 발생시키는 의료사고와 그들을 처벌하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기사가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8) 1951년 국민의료법 제정의 핵심 내용은 무면허 의료업자의 추방이었으나, 1950년대에는 이들의 추방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1961년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부정의약업자에게 계엄법을 적용하겠다고 포고했고, 곧 196건의 부정의약업자가 잡혀 최고 1년형이 언도되었다(이주연, 2010: 420-421). 또한 1962년에 제정된 의료법은 제25조에 ‘무면허자의 의료업무 금지’를 규정했다. 이에 근거해 1960년대 초반 의료인들은 중앙 및 지역 의사회를 중심으로 부정의약업자 단속에 나섰다(이주연, 2010: 419). 하지만 당장 의료 인력이 확충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단속이 무면허 의사를 바로 사회에서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면허 의사들은 지역 유지들을 등에 업고 이러한 단속에 항의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지역 보건소나 경찰들도 단속에 소극적이거나 심지어는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의사가 아예 없는 무의면에서는 여전히 무면허 의사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67년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3월 7일 “서울 시내 3천여 병원 가운데 무면허 또는 대진9)하고 있는 엉터리 병원이 전체의 3분의 1인 1천여 개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병원을 단속해야 할 9개 보건소가 공공연히 이 사실을 묵인하기도 했다.10)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의 의료행위도 사회적으로 문제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료행위를 지역사회에서 바라보는 눈이 ‘명의’에서 ‘돌팔이’로 변했던 것이다. 다음은 1970년의 기사로 농촌 지역에서 의료활동을 하던 한센인이 돌팔이로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진주) 부정의료업자의 단속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하고 있는 당국의 시책에도 불구, 계속 돌팔이 등 부정업자가 난무하고 있는 요즘 음성나환자마저 이곳 저 곳을 전전하며 돌팔이 행각을 해오고 있어 뜻있는 주민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진양군 대평면내촌에 사는 음성 나환자인 정모씨는 이곳 각 부락을 전전하면서 피부병을 치료해준다고 선전, 돌팔이 행각을 벌여오고 있다. 진양군 보건관리에 위협을 주고 있는 돌팔이 행각을 외면한 채 단속치 않고 있어 많은 주민들로부터 감시 업무가 허술하다는 빈축을 받고 있다.11)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의 의료행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A씨는 1963년 개원한 치과가 무면허 의료 단속으로 폐원된 뒤 다시 의료행위를 시도했지만, 기자의 협박을 경험하고 활동을 중단했다고 회고했다. 익산병원에서 근무했던 B씨도 1968년 병원 폐쇄 뒤 정착마을과 인근 지역에서 치료 활동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가 낙태수술을 시행했다는 진술은 소록도와 한센병 의료기관에서 습득한 기술이 일반 지역사회로 이전된 사례인 동시에, 무면허 인력이 고위험 의료행위를 수행했던 문제를 보여준다. 구술에 따르면 그는 사회적 단속과 위험을 인식하면서 낙태수술부터 중단하였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활동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은 변화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A씨는 낙담하여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갔다. 하지만 의사가 없던 그곳에서 다시 의료행위를 하게 되면서 다시 생의 의지를 되찾았고, 누군가의 권유로 1969년 도립병원에 임상병리사로 입사했다. 그가 한센병 전문병원이 아닌 일반 병원에 입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관리요원 훈련 중 세균검사 교육이 포함되어 있어 이 수료증으로 임상병리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63년부터 정부는 정착마을을 중심으로 신환자의 조기발견과 ‘기지환자(음성나환자)’의 규칙적인 치료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케이스 워커(case worker)라는 보조원 제도를 만들었다. 케이스 워커는 1950년대 필리핀에서 한센병 이동진료사업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완치 환자를 활용한 제도를 배워온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들 완치 환자가 정착마을과 재가환자들을 잘 이해하고 이들과 관계도 잘 쌓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여 이러한 제도를 만들었다. 정부는 1개 또는 2개 군마다 한 명의 케이스 워커를 두었는데, 주로 녹산의학강습소를 수료했거나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이들 중에 선발해 한 달간의 사전교육을 시키고 현장에 배치했다. 1964년 여름 한국의 한센병 관리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내한한 WHO 서태평양지역 전염병 관리책임자인 도널드 허긴즈(Donald Huggins)는 당시 주한 나고문관 트라프만(Trappmann)과 함께 이 제도의 성과를 확인한 후 이 사례를 WHO 나관리 시책으로 채택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케이스 워커는 곧 나관리요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967년 5월부터 정부는 전국 102개 보건소에 나병관리요원을 배치했는 데 당시 이 사업은 보건사회부의 한센병 통제 사업 중 핵심이 되는 것이었다. 정착마을에 머물렀던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은 대부분 나관리요원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대한나관리협회, 1988: 212-213; 보건사회부, 1970: 5).
1967년 연보에 실린 ‘나병관리요원훈련’에 관한 부분을 보면 의료조무원들은 2주 동안 나병관리요원들과 같이 소록도병원 의사인 차윤근, 전종기, 반드로겐브록, 유경운, 문태주 등에게 교육을 받았다. A씨는 1964년 8월 3일부터 10월 3일까지 90일간 소록도에서 나관리요원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머물렀던 정착 마을에서 나관리요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관리요원은 소록도병원에서 총 78시간의 훈련을 받아야 했는데, 여기에는 나병학 및 나력지기록 12시간, 해부학 16시간, 세균검사 10시간, 세균검사실습 18시간, 나병관리 6시간, 나병역학 16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임상병리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도립병원에서 보건사회부장관 명의로 발급된 나병관리요원훈련 수료증을 임상병리사 자격증으로 갈음해 준 것이었다(국립소록도병원, 1967: 79).
도립병원에 입사한 A씨는 임상병리사뿐만 아니라 여러 치료 활동에도 투입되었다. 병원에서는 심지어 방사선 촬영도 맡아 달라고 요구했고, 이를 위해 그는 1971년 부산대병원에서 3개월간 방사선과 교육을 받고 방사선 촬영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3년간 일한 후에는 자격증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1963년 7월 18일 통과된 의료보조원법 덕분이었다. 이 법은 부족한 의료인의 수를 확보하기 위해 임상병리사, 엑스선사(방사선사),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치과기공사, 위생시험사를 양성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이주연, 2010). 의료보조원법에 의해 초급대학 이상의 교육과정 이수자나 3년 이상 위생시험 업무종사자는 국가시험을 통해 엑스선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A씨는 이 제도를 통해 엑스선사 자격증 시험에 도전했다.
하지만 A씨에게 엑스선 기사 시험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그는 1973년도에 두 달 동안 서울 ‘고대우석병원’에서 의사에게 특강을 들었다고 한다.12) A씨는 강의실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상당수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다른 ‘돌팔이’, 즉 무면허 의사들이었던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A씨는 전문용어나 영어가 어려워 강의를 따라가기 힘들어, 결국 비슷한 처지의 한의사나 스님 등과 소수의 그룹을 만들어 정식 의사에게 과외를 받았다. 그는 같이 과외를 받은 이들 역시 ‘돌팔이 의사’였다고 증언했다. A씨가 국가시험에 합격해 엑스선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은 녹산의학강습소에서 형성된 비공식 숙련이 새로 마련된 의료보조직 자격 체계 내로 들어갔다는 의미가 있다.13)
한편 B씨는 익산병원이 폐쇄된 이후 1970년대까지 정착마을 주변에서 ‘돌팔이 의사’로 활동했다. 1969년 제정된 ‘보건범죄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근거해 부정의료업자는 “무기 또는 2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100만 원 이상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 데다가, 재범자는 특수가중처벌 조항을 두어 “죄로 형을 받아 그 집행을 종료하거나 면제를 받은 후 3년 내에 다시 죄를 범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거주하던 지역은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1970년대에도 의료행위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더는 의료행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 대안으로 1980년대 초 약판매소를 개업했다. 1963년 개정된 「약사법」 제35조 (의약품판매업의 허가) 2항은 보건사회부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서울특별시장ㆍ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로부터 약종상ㆍ한약종상ㆍ매 약상 또는 의약품매매상의 허가를 받은 자는 약사가 아니라도 의약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B씨는 약사 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약 조제는 할 수 없되, 판매는 할 수 있는 매약상으로서 약판매소는 열 수 있었던 것이다.14)
마지막으로 소록도병원에 머물렀던 녹산의학강습소 출신 D씨는 의학강습소가 폐지되고 점차 자격증을 갖춘 의료인들이 늘어나면서 담당 업무가 점차 축소되어 사라졌고, 소록도 내 사회적 지위가 하락했다. 1974년부터 전남대학교 병원과 광주기독병원에서 수련의가 파견되어 치료를 담당했고, 공의제도가 실시되면서 전문의가 되려면 6개월간 의사가 없거나 의료기관 시설이 없는 의료 취약 지역에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소록도에 ‘공식’ 의사들이 들어오기도 했다. 또 1978년부터는 ‘국민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이 실시되면서 소록도병원도 공중보건의사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한편 1978년에 소록도에 간호보조원양성소가 설립되었고 정식 간호보조원들이 간호보조업무를 점차 전담하게 되면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뿐만 아니라 의료조무원들 역시 치료의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되게 되었다(정근식ㆍ김재형ㆍ채규태, 2017: 196-199).

5. 맺음말

이 연구는 1949년부터 1961년까지 운영된 소록도 녹산의학강습소와 그 졸업생들의 활동을 통해 광복 이후 한국 한센병 의료체계가 어떻게 유지되고 작동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은 소록도병원뿐 아니라 전국의 한센병 병원과 정착마을에 배치되어 진단, 검사, 약품 조제, 외과적 처치, 재활치료 등 다양한 의료행위를 수행했다. 특히 의료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광복 직후와 한국전쟁 이후 시기, 그리고 적어도 1970년대 초반까지 이들은 한센병 환자의 치료뿐 아니라 국가의 한센병 통제정책을 현장에서 실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착마을에서는 의사 등 의료전문가가 없는데다가 병원의 접근조차 불가능했고, 대부분 한센병 병원에서도 실제 치료와 처치를 담당할 의사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광복 이후 한국의 한센병 의료체계는 정규 의료인력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과 같은 환자 출신 의료인력의 노동과 숙련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었다.
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그동안 한센인을 근대의학의 객체이자 국가 정책의 피해자로만 바라보았던 시각을 넘어, 이들이 국가 의료체계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의료를 수행했던 행위자였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기존 연구들은 강제격리, 단종수술, 인공임신중절수술, 차별과 낙인 등 한센인을 둘러싼 억압과 폭력의 역사에 주목해 왔다. 이러한 연구들은 한센인들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한센인들이 국가의 한센병 관리체계 속에서 수행했던 역할과 실천을 충분히 조명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은 단순히 의료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들은 국가가 구축한 한센병 의료체계 내부에서 의료지식을 습득하고, 실제 진단과 치료, 재활과 검사 업무를 수행하며 의료체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이들의 활동은 의료인 중심으로 생산된 공식 기록 속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으며, 그 결과 한국 의료사와 한센병사 서술에서도 주변화되어 왔다. 본 연구는 병원 기록과 해외 보고서, 그리고 구술자료를 교차 분석함으로써 그동안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이들의 존재와 역할을 복원하고자 했다.
한편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의 역사는 한국 의료체계가 전문직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비공식 의료인력이 어떠한 위치에 놓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1960년대 이후 의료법 체계가 정비되고 무면허 의료행위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의학강습소 출신들이 수행하던 포괄적 의료행위는 점차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의료행위는 의사, 간호사,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등 보다 세분화된 전문영역으로 분화되었고, 의학강습소 출신들이 담당하던 역할 역시 점차 축소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역사는 전문직화 과정 속에서 주변부 의료인력이 배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단순히 배제되거나 소멸한 존재로 이해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국가가 한편으로는 무면허 의료행위를 통제하고 의료 전문직의 경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보건의료 영역을 지속적으로 창출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병관리요원 제도였다. 특히 정착마을에 거주하던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병관리요원으로 활동하며 환자 관리와 조사, 약물 전달, 보건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또한 일부는 임상병리사와 방사선사, 의료보조원 등의 새로운 직종으로 이동했고, 또 다른 일부는 약판매소를 운영하거나 기존의 경험과 기술을 활용해 의료 관련 영역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즉 이들은 전문직화 과정 속에서 수동적으로 밀려난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제도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자신들의 경험과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위치를 찾아갔다. 이는 국가가 이들을 단순히 배제한 것이 아니라, 의료체계의 분절화와 전문화 과정 속에서 부분적으로 흡수하고 재배치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소록도병원에 남았던 녹산의학강습소 출신의 경험은 달랐다. 공의와 공중보건의사, 간호보조원과 의료기사 등 자격을 갖춘 인력이 공급되면서 이들이 수행하던 업무는 점차 정규 전문직 영역으로 이관되었다. 소록도에 남은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은 오랫동안 병원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나, 그 숙련은 국가와 의료전문가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그 결과 전문직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이들은 소록도병원에 남아 한국 한센병 의료체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의료사의 서술 속에서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갔다.
따라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의 역사는 단순한 배제의 역사도, 성공적인 전문직 진입의 역사도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한센병 통제체계가 비공식 의료인력의 노동과 숙련에 의존해 유지되었던 역사이자, 전문직 중심 의료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들이 배제와 포섭, 인정과 주변화 사이를 오가며 재배치된 역사였다. 이러한 점에서 녹산의학강습소 출신들의 경험은 한국 현대 의료체계 형성 과정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줄 뿐 아니라, 의사와 국가 중심으로 서술되어 온 한국 의료사의 빈틈을 보완하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Notes

1) 1940년대 후반 도입된 효과적인 치료제로 인해 1950년대 완치 환자가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사회복귀가 정책적으로 중요해졌다. 하지만 이들은 낙인과 차별 때문에 일반 사회로 복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정부는 정책적으로 이들을 위한 한센인 정착마을을 만들어 정착하도록 했다. 당시 정식명칭은 ‘음성나환자촌’이었지만, 현재는 한센인 정착마을로 불린다.

2) 웨이드 피부도말검사(Wade skin smear)는 한센병 진단과 치료 경과 관찰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세균학적 검사이다. 주로 귓불, 병변 가장자리 등의 피부를 작은 절개로 긁거나 절개한 후 조직액을 채취하여 슬라이드에 바른 다음 균을 관찰하는 검사방법이다.

3) 레프로민 테스트(Lepromin test)는 환자의 면역반응을 평가해 병형을 판독하는 검사이다.

4) 1916년 개원한 소록도자혜의원은 1934년에 소록도갱생원으로 개칭했다. 광복 이후 1949년 중앙나요양소로 개칭했다가, 1951년에는 갱생원, 1957년에는 소록도갱생원, 1960년에는 국립소록도병원, 1977년에는 국립나병원, 1982년에 다시 현재의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개칭했다.

5) 1952년 『소록도갱생원 연보』의 직원 정원ㆍ현원표에는 의무관이 정원 6명에 현원 2명, 약제관이 정원 1명에 현원 1명, 기사가 정원 2명에 현원 4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연보의 녹산의학강습소 담당강사 표에는 의무관 문병렬ㆍ신정식, 약제관 홍연호, 기사 남천우ㆍ최시룡뿐 아니라 직원 정원ㆍ현원표에서는 별도의 항목으로 확인되지 않는 ‘의무사’ 이홍덕이 등장한다. 또한 남천우와 최시룡은 실제로 의료행위를 수행한 의사였음에도 강사표에서는 ‘기사’로 기재되어 있어, 당시 연보에서 사용된 직명이 오늘날의 전문자격이나 의료인 면허의 종류와 그대로 대응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김계한과 안부호처럼 1952년 녹산의학강습소 졸업사진에는 강사로 등장하면서도 같은 해 과목별 담당강사 표에는 나타나지 않는 인물도 있다[그림 2]. 따라서 직원 정원ㆍ현원표와 녹산의학강습소 강사표 사이의 차이는 단순한 오류라기보다, 당시 소록도의 인사상 직명과 실제 의료ㆍ교육 역할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으며 각 자료 역시 특정 시점과 목적에 따라 인력을 다르게 기록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6) 청진기, 수료증, 그리고 당시 녹산의학강습소 학생들이 사용했던 해부학책은 2021년 국가등록유산(제809호)으로 지정되었다.

7) 앞 줄에는 당시 소록도병원에서 녹산의학강습소 강사를 역임했던 의료진이 앉아 있고, 뒷줄에는 녹산의학강습소 출신 한센인들이 서 있다.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앞줄 오른쪽부터 의사 김계한, 최시룡, 신정식(소록도병원 22대 원장), 문병렬, 김상태(소록도병원 8대 원장), 안부호이다.

8) 「가난과 질병에 죽어가는 ‘섬사람’들 진도, 장흥, 남해도, 거제도 등의 실정」, 『경향신문』, 1960년 10월 8일; 「1962년 ‘돌팔이’ 구속, 복막염 고치다 치사」, 『조선일보』, 1962년 6월 25일; 「돌팔이 구속, 정신병 고친다고 환자를 굶겨 죽여」, 『조선일보』, 1962년 7월 6일; 「환자 죽자 뺑소니친 인술」, 『조선일보』, 1962년 8월 23일; 「정신병 고친다고 처녀에 전기 찜질」, 『조선일보』, 1963년 7월 9일; 「산모 죽인 ‘무허’」, 『조선일보』, 1963년 9월 4일. 여기서 ‘대진’은 무면허 업자가 의사면허를 빌려 영업하는 것을 의미한다. 「돌팔이 병원 일제 수사」, 『동아일보』, 1967년 3월 7일.

9) 무면허 업자가 의사면허를 빌려 영업하는 것을 의미한다.

10) 「돌팔이 병원 일제 수사」, 『동아일보』, 1967년 3월 7일.

11) 「나환자가 의료행위: 진양군내 당국에선 외면」, 『후생일보』, 1970년 7월 10일.

12) 고려중앙학원이 1971년 12월 우석학원을 합병하면서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편입되었고, 병원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우석병원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76년 3월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됐다. 그러므로 A씨가 1973년 다녔던 ‘고대우석병원’의 당시 정식명칭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우석병원이지만, 당시에는 고대우석병원으로 부르기도 했다.

13) A씨는 도립병원에서 엑스선 기사로서 1년 더 일한 이후에 같은 지역의 개인병원으로 ‘스카웃’되어 이직했다. 그는 이 병원에서 수완을 발휘해 사무장까지 역임했고, 이 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지역 유지가 되어 라이온스클럽 회장까지 역임했다. 그럼에도 그는 철저히 자신의 병력을 숨김으로써 낙인과 차별을 피했다. 하지만 은퇴 후 다시 소록도로 돌아온 이후에야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력을 알렸고,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강선봉이다.

14) 1935년생인 B씨는 2026년 8월 현재까지 약판매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자녀 3명을 모두 잘 길러냈다. C씨는 약 조제는 못하지만 그가 판매하는 피부병약은 그 지역 일대에 소문이 자자해, 저자가 인터뷰하던 2021년에도 남원에서도 피부병을 사러 온 사람이 있었다.

그림 1.
소록도자혜의원(갱생원) 수용인원 및 의사 수의 변화(1917년-1943년)
Figure 1. Changes in the Numbers of Patients and Physicians at Sorokdo Charity Hospital (Sorokdo Rehabilitation Hospital), 1917-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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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녹산의학강습소 제1기생 졸업 기념사진(1952년 9월 14일)
Figure 2. Commemorative Photograph of the First Graduating Class of the Noksan Medical Training School (September 1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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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구술자료 목록
Table 1. List of Oral History Materials
이름 출생연도 성별 면담자 면담일 출처
녹산의학강습소 출신
A 1939 남 김재형 2015.1.13. 『소록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의료편』 (2017)
황은주 등 2019.11.18. 『소록도의 구술 기억 Ⅰ』 (2019)
김재형 2021.11.10. 개인연구
B 1935 남 박성은 등 2019.10.5. 『소록도의 구술 기억 Ⅱ』 (2019)
김영희 등 2019.10.20.
황은주 등 2019.10.27.
황은주 등 2019.11.17.
C 1939 남 유경남 2012.11.30. 『국립소록도병원 100년 구술사료집 2』 (2012)
김재형 2017.9.3. 개인 연구
김재형 2021.11.10. 개인 연구
D 1937 김재형 2022.7.8. 개인 연구
비녹산의학강습소 출신
E 1947 여 김영희 등 2019.11.18. 『소록도의 구술 기억 Ⅰ』 (2019)
소록도 의사 출신
하용마 1929 남 김재형 2016.1.20. 『소록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의료편』 (2017)

(각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저자 작성)

표 2.
녹산의학강습소 과목 및 강사 명단(1950-1952년)
Table 2. Courses, Instructors’ Positions, and Instructors at Noksan Medical Training School(1950-1952)
1950
1951
1952
과목 직명 성명 직명 성명 직명 성명
수신 원장 김상태 원장 김상태 원장 김상태
진단학 의무계장 안부호 의무관 문병렬
약리학 약무계장 유종원 기사 신정식 의무관 신정식
안과학 의무관 신정식
조제학 약제관 홍연호 약제관 홍연호
해부학 기사 홍남대 기사 남천우 기사 남천우
외과학 기사 남천우
세균학 의무과장 김영규 기사 김계한 기사 최시룡
이비인후과학 기사 최시룡
생리학 기사 최시룡 의무관 안부호 의무사 이홍덕
내과학 의무사 이홍덕
간호학 의무과장 김영규 기사 최시룡
영어 서기 최영우

참고문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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