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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5(2); 2026 > Article
불가피한 부작용: 당ㆍ송대 오석산(五石散)의 소멸에 대한 의학사적 고찰†

Abstract

Wushisan(Five-Stone Powder, 五石散) was one of the most widely consumed mineral-based medicines from the Six Dynasties through the Tang period. Modern scholarship, however, has often portrayed it primarily as a symbol of aristocratic decadence and moral excess. This interpretation, shaped largely by the enlightenment discourse that emerged after Lu Xun and reinforced by modern biomedical perspectives emphasizing its toxicity and adverse effects, has tended to overlook why the medicine continued to be used for centuries and the therapeutic rationale and technical foundations that sustained its popularity.
Rather than reducing the rise and decline of Wushisan to an intellectual or cultural phenomenon, this study reexamines its history from the perspectives of the material properties of the drug, contemporary medical practice, and the development of refining and paozhi(炮炙, pharmaceutical processing) techniques for mineral medicines. Drawing upon medical texts such as the Jingui Yaolüe(金匱要略), Ishinpō(醫心方), Zhubing Yuanhou Lun(諸病源侯論), and Beiji Qianjin Yaofang(備急千金要方), together with historical sources including the Shishuo Xinyu(世說新語), Jinshu(晉書), Nanshi(南史), and Zizhi Tongjian(資治通鑑), this article traces changing perceptions of Wushisan from the Six Dynasties period through the Song dynasty.
The analysis demonstrates that physicians of the Six Dynasties regarded Wushisan as a superior medicine(上藥, shangyao) possessing remarkable therapeutic and tonic properties. Adverse reactions were generally attributed not to inherent defects in the medicine itself but to improper methods of administration and failures in post-treatment regimen. Consequently, medical discussions focused less on abandoning the drug than on maximizing its efficacy while minimizing its side effects through appropriate dosage, dietary regulation, and aftercare. During the Sui and Tang periods, however, physicians such as Chao Yuanfang and Sun Simiao began to explain these adverse reactions in terms of more systematic pathological mechanisms, shifting attention from the behavior of the patient to the material properties and toxicity of the medicine itself. This change did not entail a complete rejection of Wushisan but instead encouraged greater emphasis on refining mineral ingredients, improving pharmaceutical processing techniques, and standardizing prescriptions in order to control toxicity.
By the Song dynasty, state-sponsored pharmaceutical standardization and increasingly sophisticated paozhi techniques enabled toxic mineral drugs to be prescribed in safer and more carefully processed forms. As a result, the traditional therapeutic logic of Wushisan, which relied on stimulating the body’s internal release of medicinal potency after ingestion, gradually lost its medical legitimacy, while its therapeutic functions were absorbed into newly refined mineral medicines and standardized pharmacological systems. The disappearance of Wushisan should therefore be understood not simply as the elimination of a dangerous drug but as the outcome of advances in pharmaceutical knowledge, mineral processing technology, and state-sponsored drug standardization aimed at utilizing toxic minerals more safely and effectively.
This study challenges the conventional view of Wushisan as merely a symbol of Wei–Jin cultural excess or the irrationality of premodern medicine. Instead, it reinterprets its historical significance through the evolution of medical knowledge and technological practices designed to regulate both toxicity and therapeutic efficacy, demonstrating that the historical trajectory of a medicine is shaped not only by its pharmacological properties but also by broader transformations in medical knowledge, technical expertise, and institutional frameworks.

1. 머리말

모든 것은 독이며, 독이 없는 것은 없다. 독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용량뿐이다.1)
- 파라켈수스(Paracelsus)(1493-1541) -2)
현대 독물학(毒物學, toxicology)의 기초를 정립한 인물로 평가되는 파라켈수스는 수은과 같은 독성 광물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정제와 용량 조절을 거치면 치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독성과 약효를 상호 배타적인 속성이 아니라 용량과 가공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 관점을 제시하였으며, 이는 기존에 위험한 물질로 인식되던 독성 광물을 의학적 치료 수단으로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유사한 인식은 동아시아 의약 전통에서도 확인된다. 동아시아에서 독성을 지닌 광물질은 단순히 기피하거나 금기시해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되지 않았다. 방사(方士)와 도사(道士)들은 단약(丹藥)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광물의 독성을 줄이고 약효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정제ㆍ가공 기술을 축적하였다. 이러한 기술적 경험은 독성 광물을 위험한 물질로만 배제하지 않고, 적절한 처리를 거쳐 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의약 자원으로 전환하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동아시아 전통 의학에서는 약물을 상ㆍ중ㆍ하의 세 범주로 체계적으로 구분하였다. 즉 상약(上藥)은 인체를 보양하여 수명을 연장하고 생명을 기르는 데 목적이 있으며, 중약(中藥)은 기질과 체질을 조화롭게 다스리는 데 쓰이고, 하약(下藥)은 구체적인 질병의 치료를 담당하는 약물로 이해되었다.3) 이러한 분류 체계는 도교적 생명관을 반영한 것으로, 오늘날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치료 약’은 오히려 가장 낮은 단계인 하약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상약으로 분류된 약재 가운데에 단사(丹砂, 朱砂)와 웅황(雄黃) 등 독성을 지닌 광물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통 의학이 독성 물질을 단순히 제거하거나 배제해야 할 위험 요소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독성을 지닌 광물은 적절한 정제와 가공을 통해 그 독성을 조절하고 약성을 발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이해되었으며,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단순한 질병 치료를 위한 하약을 넘어 생명을 보양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상약의 범주에까지 편입되었다.
다만 독성을 지닌 광물에서 유해 성분을 제거하거나 감소시켜 치료에 적합한 약물로 전환하는 과정은 고도의 정밀성과 숙련을 요구하는 기술적 작업이었다. 고대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에서 이러한 처리 기술은 주로 개별 의가(醫家)나 방사(方士) 집단 내부에서 비밀스럽게 전승되는 경향이 강하였으며,4)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문헌에 충분히 기록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은폐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해 관련 기술의 체계적인 축적과 광범위한 공유가 제한되었고, 표준화된 제조법 또한 장기간 확립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약물의 정제ㆍ가공이나 복용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으며, 이는 불가피한 부작용과 인체 손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위험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관련 약물이 문헌에 등장한 초기부터 지속해서 지적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논의는 해당 약물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의 원인을 약물 자체의 독성보다 부적절한 제조법과 복용법, 그리고 과도한 남용에서 찾았으며, 이를 개선함으로써 약효를 유지하면서도 독성을 최소화하려는 방안이 지속적으로 모색되었다. 다시 말해, 독성 광물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다른 약재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뛰어난 효능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적절한 가공과 사용을 통해 그 효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의약 자원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독성을 지닌 광물의 의학적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전통 동아시아 의학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이러한 물질을 치료의 영역에 편입하고, 그 효능과 위험을 조절하며 활용하는 독자적인 약물학적 전통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서구 근대 과학과 의학이 동아시아에 유입된 이후, 전통 의학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려는 계몽주의적 담론이 확산되면서 방술적(方術的) 성격을 띤 전통 의약 처방들이 주요한 비판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독성 광물의 의학적 활용 또한 근대 과학과 의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었다. 그 결과 독성 광물로 제조한 약물과 그에 수반된 부작용은 전근대 의학의 비과학성과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되었다.
여러 종류의 독성 광물을 혼합하여 제조한 오석산(五石散)은 이러한 비판적 인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처방이었다. 특히 복용 후 나타나는 다양한 부작용과 이를 완화하기 위해 요구되었던 복잡하고 특이한 섭생법은 오석산의 위험성을 부각시켰으며, 나아가 오석산을 전통 의학의 한계와 폐해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로 인식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루쉰(魯迅)은 1927년 광저우에서의 강연 「위진풍도와 문장 및 약과 술의 관계(魏晉風度及文章與藥及酒之關係)」에서 오석산 복용이 한대 이후 분열기의 지식인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고 논하였다. 그는 남조 송대(劉宋, 420-470)에 편찬된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에 수록된 위진(魏晉)시기 명사(名士)들의 기행적이고 방종한 언행의 상당 부분을 오석산 복용의 결과로 해석하면서, 그들의 생활양식과 문화적 풍조를 이해하는 핵심 요인으로 약물의 영향을 강조하였다(김하림, 2000: 37-58). 이와 같이 오석산의 부작용에 주목한 루쉰의 해석은 이후 오석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형성하고 확산시키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5) 특히 근대 중국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전통 문화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중국 근현대사의 위기를 아편 중독의 확산과 그에 따른 사회적ㆍ도덕적 타락과 연결하여 이해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위진남북조 시대로까지 소급되었으며, 당시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퇴폐 역시 아편과 유사한 해악을 지닌 약물로 인식된 오석산의 유행과 관련지어 설명되었다. 이에 따라 오석산을 복용한 위진 명사들의 생활양식과 문화적 기풍은 전통 사회의 병폐와 비합리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오석산의 부작용과 사회문화적 영향에 주목한 나머지, 해당 약물이 실제로 어떠한 의학적 효능을 지니고 있었는지, 그리고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서 어떠한 기술적 조정과 의학적 재해석을 거쳐 변화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 오석산을 둘러싼 비판 담론은 풍부하게 축적된 반면, 그 약물의 치료적 가치와 약물학적 발전 과정에 대한 역사적 검토는 상대적으로 미진하였다(Liu, 2021: 127-146). 본 연구가 주목하는 오석산은 동아시아 의학사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호응과 격렬한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약물 가운데 하나이다. 한때는 장생과 질병 치료를 가능하게 하는 신비로운 묘약(elixir)으로 추앙되었으나, 이후 역사적 무대에서 급격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중요한 역사적 질문을 제기한다. 왜 오석산은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사용되다가 특정 시점을 기점으로 급속히 쇠퇴하였는가.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약물의 독성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의학 지식과 약물 가공 기술, 그리고 제도적 환경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는가.
이에 본 연구는 오석산의 흥망을 단순한 문화사적 현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약물 자체의 물질적 특성과 의학적 실천, 그리고 이를 둘러싼 가공 기술과 약물 지식의 변화라는 복합적인 맥락 속에서 재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본 연구는 독성 광물을 보다 안전하게 활용하기 위한 정제(精製)ㆍ포제(炮製) 기술의 발전과 국가 차원의 약물 표준화가 광물성 약재의 효능과 위험성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방식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검토한다. 나아가 이러한 변화가 오석산의 소멸을 직접 초래한 단일한 원인이라기보다, 그 의학적 필요성과 처방으로서의 유용성을 점차 약화시킨 역사적 배경으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독성과 약효의 관계에 대한 전통 의학의 인식을 재조명하고, 약물 제조 기술의 합리화와 표준화가 특정 약물의 효용과 존속 조건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동아시아 의학사의 맥락에서 새롭게 밝히고자 한다.

2. 오석산(五石散)의 의학적 효능에 관한 기술

오석산은 3세기 위진남북조 시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10세기 당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약물이다. ‘오석산(五石散)’이라는 명칭은 문자 그대로 다섯 가지 광물 성분으로 구성된 약제를 의미하며, 각 성분은 고유한 치료적 효능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6) 그러나 실제로 이 다섯 가지 광물을 하나의 처방에 모두 포함시켜 복용한 것인지, 혹은 개별 약재를 상황에 따라 따로 복용한 것인지는 문헌에 따라 상이하여 명확히 단정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오석산은 시대적 변화와 의가(醫家)마다의 치료 원칙에 따라 처방의 구성과 약물 조합이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오석산은 일정한 조성을 지닌 단일 처방이라기보다, 시대와 의료적 요구에 따라 유연하게 변형된 유동적인 처방 체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오석산의 복용 방식과 효능, 그리고 부작용을 둘러싼 서술은 의학서에만 국한되지 않고, 문인 일화, 정사(正史), 불교 및 도교 문헌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폭넓게 분포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약물의 치료 효과에 대한 의학적 평가를 넘어, 기행(奇行)과 사회적 풍속, 나아가 도덕적 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과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는 오석산이 단순한 치료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의학적 지식과 사회문화적 가치관, 지적 담론이 교차하는 중요한 문화적 매개체였음을 보여준다.
오석산의 효능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삼국시대 위(魏)의 관료이자 사상가였던 하안(何晏, 자 平叔)의 말에서 확인된다.7) 그는 “오석산을 복용하면 단지 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정신이 열리고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8) 하안은 왕필과 더불어 현학(玄學)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자, 이후 죽림칠현으로 대표되는 위진시기 명사들의 문화의 사상적 분위기를 선도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발언은 오석산이 단순한 치료 약물을 넘어 당시 지식인 사회의 정신적ㆍ문화적 분위기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후한(後漢)의 장중경은 오석산을 갖고서 상한(傷寒)을 치료하였다는9)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석산은 오래된 약이지만 관련된 역사적 자료는 주로 위진남북조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 약은 질병을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체를 강화하고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특히 문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나아가 당시 문인들이 추구하던 몽환적이고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과 결합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생활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10)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본초서(本草書)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서도 오석지(五石脂) 즉 오석산의 탁월한 약성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설명한다. “청석지(青石脂)ㆍ적석지(赤石脂)ㆍ황석지(黃石脂)ㆍ백석지(白石脂)ㆍ흑석지(黑石脂) 등은 맛이 달고 약성은 평하다. 황달, 설사, 장벽(腸澼)으로 인한 농혈, 음식(陰蝕), 하혈(赤白), 사기(邪氣), 옹종(癰腫), 저(疽), 치질, 악창(惡瘡), 두창(頭瘍), 개선(疥瘙)을 치료한다. 오랫동안 복용하면 골수를 보하고 기를 더하며, 몸을 살찌고 건강하게 하고, 배고픔을 느끼지 않게 하며, 몸을 가볍게 하고 수명을 연장한다. 오석지(五石脂)는 각각 그 색에 따라 오장(五臟)을 보한다. 산골에서 난다.”11) 이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까지 오석산을 구성하는 광물성 약재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아직 없지만, 다섯 가지 색의 상징성은 이 약물의 구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한편 오석산은 단순히 복용하는 것만으로 그 약효가 발휘되는 약물이 아니었다. 복용 후 약성을 적절히 발산하고 부작용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하고 숙련된 관리 과정이 필요했다. 다음은 서사백(徐嗣伯)이 오석산 복용자에게 시행한 처치를 통해 이러한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서사백의 자는 숙소(叔紹)로, 그 역시 효행이 뛰어나고 청담(清談)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원랑(正員郎)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특히 임천왕(臨川王) 유영(劉映)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다. 당시에 직합장군(直閤將軍) 방백옥(房伯玉)은 오석산(五石散)을 10여 첩 정도 복용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냉병(冷病)에 걸려 여름에도 늘 옷을 겹쳐 입어야 했다. 이에 사백이 그를 진찰하며 말했다. 「그대는 몸에 열이 쌓였으니, 물로 이를 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겨울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11월에 이르러 얼음과 눈이 크게 성[大盛]했을 때, 사백은 두 사람을 시켜 방백옥을 양쪽에서 끼고 붙잡게 하고 옷을 벗겨 바위 위에 앉혔다. 그리고 차가운 물을 머리부터 붓기 시작했는데, 무려 20석(斛)에 이르렀다. 방백옥은 입을 꽉 다문 채 숨이 끊어진 듯 보였고, 가족들은 울며 멈추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사백은 사람을 시켜 몸둥이를 잡고 문을 지키게 하며, 감히 간(諫)하는 자는 모두 때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다시 100석의 물을 붓게 했고, 방백옥은 마침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그의 등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한 기운이 나타났다. 잠시 후, 방백옥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몸이 너무 뜨거워 견딜 수 없습니다. 차가운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서사백은 그에게 물을 건넸고, 방백옥은 한 번에 한 되씩 마셨다. 그 뒤로 병은 완전히 나았다. 그때부터 항상 열이 났으며, 겨울철에도 홑바지와 홑적삼만 입었고, 몸은 더욱 살찌고 건장해졌다.12)
이 고사는 오석산의 독특한 약리적 특성과 그에 따른 관리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당시 사람들은 오석산이 체내에서 강한 열을 발생시키며, 이 열이 제대로 발산되지 못하고 몸속에 정체되면 오한을 비롯한 여러 이상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반면 서사백의 처치처럼 잠재된 열을 적절히 발산시키면 약성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면서 신체를 보양하는 효능을 발휘한다고 여겼다. 동시에 약물로 인해 발생한 열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차가운 음식을 섭취하는 것도 중요했다. 오석산이 ‘한식산(寒食散)’이라고도 불린 것은 이러한 복용법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오석산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핵심은 체내에서 발생한 열을 신중하게 발산하고 조절함으로써 부작용을 억제하는 동시에 약효를 극대화하는 데 있었다.
후대 학자들의 오석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달리, 위진남북조시대나 당대에 이르기까지 오석산을 둘러싼 대부분의 논의는 그 의약적 부작용이나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에 대한 것보다는 이 약물의 의약적 용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동진시대의 관리이자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던 왕희지(王羲之, 303–361)는 자신의 만성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오석산을 즐겨 복용하였는데, “귀하께서 보내주신 오색석고산(五色石膏散)[오석산]을 복용하니 몸이 가벼워져 움직임이 마치 나는 듯합니다. 혹 다시 한 숟가락[匕] 분량을 더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조제해야 할지는 곧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번거로운 일이기도 하니, 머지않아 강을 건너 직접 찾아가 산약(散藥)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13)라고 하여 그 뛰어나 약효에 대해 매료되어 있었음을 토로하였다.
이처럼 오석산은 단순한 기호품이나 향락의 수단이 아니라, 적절한 복용과 사후 관리를 전제로 강력한 치료 효과를 발휘하는 약물로 인식되었다. 위진남북조에서 당대에 이르는 시기의 사람들은 오석산의 잠재적 위험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그 불가피한 부작용보다는 치료효과와 보양 기능에 주목하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널리 통용되는 ‘오석산=퇴폐와 방종의 상징’이라는 이미지는 당시의 인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러한 이미지는 20세기 이후 근대 계몽적 지식인 사회에서 오석산을 위진 귀족사회의 퇴폐성과 결부하여 해석하는 담론이 형성ㆍ확산되는 과정에서 점차 강화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석산의 복용은 약재 자체가 지닌 독성으로 인해 근본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복용 과정에서는 풍부한 경험과 전문 지식을 갖춘 의가(醫家)의 지도와 관리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독성과 복용상의 제약은 시대가 흐르면서 오석산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진하였고, 기존의 위험한 약물에 의존하기보다 그 치료 효과는 유지하면서도 독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새로운 약물 운용 방식과 보다 정교한 약물 관리 체계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3. 3~8세기 오석산 부작용의 인식과 의학적 재해석

3세기부터 8세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가들과 지식인들은 오석산을 적절하게 복용하는 방법과 그로 인한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다양한 치료법을 모색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의 논의는 오석산의 복용 자체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의 관심은 약효를 효과적으로 발현하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복용법과 관리 방안을 마련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5세기 의가(醫家) 진승조(秦承祖)의 논의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오석산의 효능을 높이 평가하며 그 뛰어난 약성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秦承祖가 논하여 말하였다. 「무릇 한식산이라는 약은 실로 제약(製作)의 정화(精華)이자 여러 처방의 영수(領袖)이다. 비록 능히 구름을 타고 날게 하거나 뼈와 골수를 단련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생명을 돕고 수명을 기르는 데 있어서는 이에 견줄 것이 없다. 그러나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또한 배를 뒤집기도 하며, 한식산은 생명을 보전하기도 하지만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다만 경박하고 편협한 사람들, 식견이 좁고 경솔하게 믿는 사람들이 한 가지 증상에 효과가 있다는 점만 보고, 그 이로움과 위험성을 함께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 결과 화는 예기치 않은 가운데 닥쳐왔으며, 죽음은 발뒤꿈치를 돌릴 틈도 없이 이르게 된다. 이 약의 정묘하고 미세한 이치는 중간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 궁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현안(玄晏)은 냉(冷)을 숭상하였고 늠구(廩丘)는 온(溫)을 우선하였으니, 약성은 본래 하나인데도 두 학설은 크게 서로 달랐다. 오늘날 이를 치료하는 자는 마땅히 그 체성과 본원을 탐구하고, 폐해가 발생하는 원인을 살피며, 증상의 성쇠와 증감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또한 병의 근원을 자세히 진단한 뒤, 두 학설의 의미를 비교하여 취사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환자의 상태에 맞추어 약물의 증감과 처방을 적절히 조절한다면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학설만을 고집하여 끝내 바꾸지 않는다면, 이는 기러기발에 아교를 붙여 놓고 거문고를 타려는 것과 같아, 결코 훌륭한 치료법이라 할 수 없다.」 14)
즉 그의 관점에서 오석산은 생명을 돕고 질병을 치료하는 강력한 약물이었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한 약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는 오석산의 효능만을 맹신하거나 위험성만을 이유로 배척하는 태도를 경계하였으며, 약물의 본질적 성질과 환자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신중하고 유연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그는 오석산의 의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사용에는 엄격한 판단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동일한 시기에 활약한 승려 혜의(慧義) 역시 오석산의 뛰어난 약성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그 약재에 내재된 위험성 또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석산 복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 약물 자체의 본질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복용자의 부주의나 부적절한 복용법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을 그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오석산(五石散)은 상약(上藥)의 부류이다. 참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생명을 기르며, 성정(性情)과 이치(理)를 조화롭게 할 수 있으니, 어찌 단지 질병을 치료하는 데 그치겠는가. 장차 그 조화로움을 얻으면 생명을 기르고 질병을 낫게 할 것이요, 이를 다스리는 방법을 잃으면 천부의 본성을 해치게 되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복용하는 사람의 잘못이지, 약물 자체의 허물이 아니다.”15) 또한 혜의는 더 나아가 오석산의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다스리는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무릇 약석(藥石)이 발(發)하였을 때는 목욕하는 것이 마땅하니, 목욕하면 곧 풀리게 된다. 목욕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오한(惡寒)이 있으면 먼저 냉수(冷水)를 사용하고, 그 뒤에 생숙탕(生熟湯)을 사용한다. 처음에 발열(發熱)이 있으면 먼저 따뜻한 물을 사용하고, 그 뒤에 냉수를 사용한다. 목욕할 때에는 삼가[愼] 먼저 머리를 씻어서는 안 된다. 머리를 감고자 할 경우에는 두세 되(升)의 물을 머리에 끼얹는 정도로 하면 된다.”16) 이 밖에도 그는 “종유(鐘乳)[鐘乳石]가 발(發)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두통을 일으키게 하는데, 뜨거운 술을 마시면 곧 풀린다”17)라고 언급한다. 혜의의 논의는 오석산의 효능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도 그 복용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는 부작용의 원인을 약물 자체의 본질적인 결함에서 찾지 않았으며, 적절한 복용법과 사후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로 이해하였다.
진승조와 혜의의 논의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듯, 위진남북조 시기 의가들은 오석산을 부작용이 수반될 수 있는 약물로 인식하면서도, 그 때문에 사용을 포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절한 복용법과 섭생, 그리고 복용 이후의 관리를 통해 그 위험성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논의는 오석산의 복용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약효를 유지하면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운용 원칙과 관리 방법을 정립하는 데 집중되었다.
물론 오석산이 지닌 독성과 그에 따라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부작용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후대에 전해지는 관련 기록 가운데에는 실제보다 과장되거나 특정한 의도를 반영한 사례도 적지 않다. 특히 오석산의 부작용은 단순한 의학적 현상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적 풍조를 비판하거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오석산이 단순한 치료제를 넘어 위진남북조 당대(當代)의 사회문화적 실천과 담론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부여받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오석산의 복용은 기존의 사회 규범과 관행에서 일정 정도 벗어난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제공하였다. 위진 시기 오석산 복용을 둘러싼 정치ㆍ사회적 맥락에 대해 오드리 스피로(Audry Spiro)는 오석산이 당시 중국의 복식 문화와 유행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일시적으로 활력을 증진시키는 이 약물은 당시의 유행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약효를 유지하고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 복용자는 약을 먹은 뒤 데운 술을 마시고 신체 활동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로 인해 얇고 헐렁한 옷을 입어야 했으며, 피부 병변과 같은 약물의 부작용 역시 이러한 복장을 요구하였다. 같은 이유로 피부 병변을 악화시킬 수 있는 꽉 끼는 신발 대신 나막신이 선호되었다. 오석산의 복용은 특정한 생활양식을 수반하였으며, 이는 궁정의 공식적인 공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막신을 신고 술을 마시며 느슨하게 허리띠를 맨 넉넉한 옷차림으로 거니는 모습은 점차 하나의 문화적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일부 남성들은 실제로 오석산을 복용하였기에 이러한 복식과 행동을 따랐지만, 같은 사회 계층에 속하면서도 오석산을 복용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이러한 생활양식을 모방하였다. 결국 이는 위진 시기를 대표하는 하나의 유행으로 정착하였다”(Spiro, 1990). 이처럼 오석산은 단순한 의약품이 아니라 특정한 생활양식과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매개물로 기능하였다. 따라서 오석산을 둘러싼 부정적 서사 역시 순수한 의학적 평가라기보다는, 당대의 정치ㆍ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재구성된 담론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은 서진 무제(武帝) 시기 황보밀(皇甫謐, 215–282)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황보밀은 여러 차례에 걸친 황제의 출사(出仕) 요구를 사양하면서, 자신의 건강 악화가 오석산의 잘못된 복용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 후 무제(武帝)가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거듭 출사를 독촉하였으나 황보밀(皇甫謐)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황보밀은 상소를 올려 스스로를 초야에 묻혀 사는 신하[草莽臣]이라 칭하며 말하였다. 「…… 신은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이지만, 진(晉)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신하인 만큼, 태평성대를 누리며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던 옛 백성들의 기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경성으로 나아가 궁궐 밖에서 폐하의 만수를 축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인은 불초하여 재앙과 화를 스스로 불러들였고, 오랫동안 위중한 질병에 얽매여 왔습니다. 몸의 절반은 감각이 없고, 오른쪽 다리는 유달리 작아진 상태가 이미 십구 년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한식약(寒食藥)을 복용하면서 절도를 어기고 잘못 복용한 탓에 극심한 고통을 겪어 온 지 이제 칠 년이 되었습니다. 한겨울에는 옷을 벗고 얼음을 먹어야 하였고, 한여름에도 번열(煩熱)과 답답함에 시달립니다. 여기에 기침과 구역질까지 더해져 때로는 온학(溫瘧)과 같고 때로는 상한(傷寒)과 같았으며, 부기가 떠돌아 온 몸이 붓고 사지는 시큰거리며 무거웠습니다. 지금은 쇠약해져 겨우 숨을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와 형은 (제가 길을 떠나는 모습을) 전송하였고, 처자식은 영원한 이별인 듯 작별하였습니다. 황제의 엄중한 명을 우러러 차마 거역할 수 없어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길을 나섰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더 이상 길을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몸을 맡겨 죄를 기다리며, 베개를 베고 탄식할 뿐 입니다.」 ……18)
황보밀은 오래 전부터 풍비증(風痹症) 즉 마비증에 걸려 고통받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석산을 복용하였으나, 그 복용함에 “절도를 어기고 잘못하여” [違錯節度] 병이 더욱 심해졌다고 언급하였다. 즉 황보밀 역시 오석산이라는 약물 자체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적절한 복용이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 사례를 곧바로 오석산의 치명적 위험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이 상소문은 무제의 거듭된 출사 요구를 정중히 사양하기 위해 작성된 정치적 성격의 문서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묘사된 병세와 고통은 실제 경험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동시에 출사를 회피하기 위한 수사적 과장과 정치적 의도가 일정 부분 개입되었을 가능성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위진남북조 시기의 의가들은 오석산의 부작용을 주로 복용자의 잘못된 복용법이나 복용 이후의 부적절한 섭생에서 비롯된 문제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 부작용의 원인을 약물 자체가 아니라 복용자의 행위에서 찾았으며, 그 해결책 역시 올바른 복용법과 철저한 섭생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수ㆍ당대에 이르러 이러한 인식은 중요한 전환을 맞이하였다. 의가들은 더 이상 오석산의 부작용을 복용자의 무절제한 남용이나 부주의한 관리의 결과로만 설명하지 않았으며, 약물 자체에 내재한 약성과 독성, 즉 약물의 물성(物性)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관심은 복용자의 행위를 규제하는 데서 나아가, 약물 자체의 위험성을 의학적으로 조절하고 제거하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우선, 수ㆍ당대에 이르면 오석산을 도가(道家)의 단약(丹藥)으로 이해하여 그 신비로운 효능을 강조하는 서술은 점차 줄어들었다. 대신 의가들은 의학적 관점에서 오석산을 분석하여 그 치료 효과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장기 복용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의 원인과 병리 기전을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수대(隋代) 태의박사(太醫博士)를 지낸 소원방(巢元方, 550-630)은 오석산의 무절제한 장기 복용으로 인해 나타나는 부작용을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기술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오석산 복용의 대표적인 부작용 가운데 하나인 내소병(內消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내소병(內消病)이란 갈증은 없으나 소변이 많은 증상을 말한다. 이는 오석산을 복용하면 그 약의 열기[石熱]가 신장(腎臟)에 맺혀 내부에 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오석을 복용한 사람에게 소변이 잘 나오는 이유는 오석의 성질이 신장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신장이 오석의 약성을 받으면 기운이 충실해지고, 충실해진 신은 수분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소변이 많아진다. 그러나 소변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오장(五臟)이 충분한 윤택과 자양을 받지 못하고, 오장이 쇠약해지면서 여러 질병이 발생한다. 신기(腎氣)가 왕성할 때 이를 절제하지 않고 방종하게 욕정을 충족시켜 정기(精氣)를 지나치게 소모하면, 오석의 열기만 더욱 성해져 내소병의 다뇨 증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갈증은 없지만 소변은 많아지게 된다.19)
소원방의 새로운 인식을 통해 볼 때, 이전 시기에 비해 오석산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의 발생 원인과 병리 기전이 의학적으로 더욱 구체화되었으며, 장기간 복용이 초래할 수 있는 다양한 후유증 또한 상세히 제시되었다. 이는 약물의 잠재적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오석산을 둘러싼 인식의 중요한 전환을 보여준다.20)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오석산 복용 자체를 부정하거나 금지하려는 태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ㆍ당대 의가들은 오석산의 부작용을 약물의 약성과 인체의 병리적 변화라는 의학적 틀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적절한 처방과 복용 규범을 통해 그 위험성을 예방하거나 완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한식산 복용 후 약성이 발현될 때 나타나는 증후(寒食散發候)를 복용자의 맥상(脈象)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무릇 산약(散藥)을 복용한 사람의 맥은 혹은 홍실(洪實)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끊어질 듯 미약하여 마치 죽을 사람의 맥과 같기도 하며, 혹은 세삭(細數)[맥이 가늘고 빠름]하거나 현쾌(弦快)[맥이 팽팽하고 빠름]하기도 한다. 이는 복용 과정에서 범한 금기와 실수가 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맥상은 일정한 양상을 보이지 않으므로, 이를 잘 알지 못하는 의사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체내의 열이 많으면 맥이 현쾌하게 되고, 적체(癖)가 있으면 홍실(洪實)[맥이 크고 힘이 있음]하게 되며, 급성의 통증이 있으면 맥이 끊어질 듯 나타난다. 한식산을 복용한 사람의 맥은 대체로 이와 같은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맥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반드시 위중하거나 죽음의 징조인 것은 아니다. 다만 복용법과 섭생의 절도를 부지런히 지켜야 하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결국 죽음에 이를 수 있다.21)
다시 말해, 이들의 관심은 오석산의 위험성을 이유로 복용을 금지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약효와 독성을 함께 이해하고 이를 의학적으로 조절ㆍ통제하는 데 있었다.22) 이는 수ㆍ당대에 이르러 오석산에 관한 논의가 신비로운 약효에 대한 믿음이나 복용 후 섭생법에 머무르지 않고, 약물의 물성과 그것이 인체에 작용하여 질병을 일으키는 기전을 체계적으로 규명하려는 의학적 논의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비해 그 규모는 크게 축소되었지만, 수ㆍ당대에 이르러서도 상류층의 오석산 복용 사례는 여전히 확인된다. 다만 이 시기에는 오석산이 지닌 효능과 위험성이라는 양면적 속성에 대한 인식이 이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오석산은 다양한 질병에 탁월한 치료 효과를 보이는 약물로 평가되는 한편, 부적절한 복용이나 장기 복용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과 악성 궤양, 광적인 충동, 나아가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약물이라는 인식도 함께 확산되었다.
비록 수ㆍ당대에는 오석산의 효능과 부작용을 의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지만, 이는 오석산에 부여된 종교적ㆍ신비주의적 의미를 완전히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의학적 해석과 종교적 상징성은 일정 기간 공존하면서 오석산에 대한 인식을 함께 형성하였다. 특히 만성 질환의 치료에 대한 기대와 더 나아가 장생불사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은 독성을 지닌 광물성 약재의 복용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부작용의 위험마저 감수하게 만드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당대에도 오석산의 복용은 의학적 효능뿐만 아니라 단약으로서의 종교적ㆍ문화적 상징성에 의해 지속적으로 뒷받침되었으며, 이러한 양면적 성격은 당 무종(武宗, 재위 840~846)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종은 도사들이 진상한 단약을 장기간 복용하였는데, 이들 단약은 오석산과 마찬가지로 광물성 약재를 주성분으로 하는 도교 계열의 약물이었으며,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신선 사상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종은 이러한 단약에 점차 중독되어 결국 이를 복용한 부작용으로 사망하였다. 『자치통감』 등에 따르면, 회창(會昌) 5년(845) 9월 무렵부터 그는 성정이 급해지고 이유 없이 분노를 표출하는 등 심각한 정서적 이상 증세를 보였으며, 결국 약물 중독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렀다.23) 무종 역시 가을부터 이미 자신의 병세를 인지했으나, 도사들은 이러한 건강 악화를 불로장생에 적합한 신체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환골(換骨)’ 현상으로 설명하고, 이를 약물 복용에 수반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주장하였다.
무종의 사례는 광물성 약물이 일으키는 중독 증상이 종교적 논리에 의해 신체 변화의 징후로 재해석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수ㆍ당대 의학에서는 이러한 부작용을 복용 후의 불가피한 반응으로 수용하거나 섭생법으로 관리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약물의 선택과 사용 방식 자체를 재검토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보다 근본적인 접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당대의 의가이자 도사로서 약왕(藥王)이라 불린 손사막(孫思邈)이다. 그는 오석산의 약효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복용 방식이 초래할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한석오석갱생산(寒石五石更生散)의 처방에 대하여 옛 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약의 처방은 상고 시대의 명현(名賢)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았으며, 한말(漢末)에 하후(何侯)라는 사람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황보밀(皇甫謐) 이후이 약을 복용한 사람들 가운데 등에 옹저가 생기고 몸이 손상되어 끝내 화를 입지 않은 자가 없었다. 나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가 된 이래로 조정과 민간의 사대부들 가운데 이 약으로 인해 화를 당한 사람을 한둘이 아니라 직접 목격하였다. 그러므로 차라리 (독초인) 야갈(野葛)을 먹을지언정 오석산은 복용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이는 오석산의 독성이 매우 강하고 맹렬하므로 결코 신중히 다루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처방을 보게 되는 즉시 불태워 없애고 오래 보관해서는 안 된다. 지금 이곳에 처방 자체를 수록하지 않은 것은, 이미 이를 복용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한 대처법만을 남겨 두기 위함이며, 처방은 이미 없애 다시 보존할 필요가 없다. 이는 사람의 생명을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24)
소원방과 마찬가지로 손사막 역시 오석산 복용 후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한 섭생법뿐만 아니라,25) 이미 오석산 복용으로 인해 부작용을 겪는 환자를 대상으로 이를 완화하고 치료하는 다양한 처방도 함께 제시하였다.26) 이처럼 수대의 소원방과 당대의 손사막을 거치면서 오석산에 관한 논의는 이전처럼 그 뛰어난 약효를 강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복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을 어떻게 예방하고 통제하며 치료할 것인가에 점차 초점이 맞추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손사막은 오석산의 독성을 강하게 경고하는 한편, 석약(石藥)의 복용 필요성과 치료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어 그의 약물 인식은 일견 상반되거나 모호하게 보인다.
사람이 석약(石藥)을 복용하지 않으면 여러 일이 순조롭지 못하여 악창(惡瘡)ㆍ개선(疥癬)ㆍ온역(溫疫)ㆍ학질(瘧疾) 등을 해마다 앓게 된다. 잠자고 먹는 일이 편안하지 못하고 일상생활에서도 늘 몸이 좋지 않다. 자신이 건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식을 낳아 기르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석약이 몸 안에 있으면 모든 일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오석산(五石散)만은 절대로 복용해서는 안 된다. …… 평소 꾸준히 석약을 복용하면 손발이 따뜻해지고 골수가 충실해지며, 찬 음식도 잘 소화하고 몸놀림이 가벼워지며,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고 여러 질병에도 걸리지 않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석약은 반드시 복용할 필요가 있다. 다만 모든 석약은 반드시 충분히 정련(熟煉)한 뒤 사용해야 한다. 석약의 부작용이 나타나면 반드시 오한과 두통, 가슴 답답함이 생기며, 일정한 때에 발작하여 마치 온학(溫瘧)과 같은 증상을 보인다. 이러한 조짐이 나타나면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고 찬물을 끼얹어 몸을 식히면 차가워지면서 증상이 멎는다. 모든 음식은 차게 먹어도 좋지만 술만은 따뜻하게 마셔야 하며, 그 밖의 해독법은 뒤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 마음을 잘 다스리고 섭생을 적절히 하면 석약의 효능은 더할 나위 없이 크다. 나는 서른여덟, 서른아홉 살 무렵에 종유석(鐘乳石)을 대여섯 냥 복용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오랫동안 몸소 그 성질을 체험하여 휴식과 섭생의 절도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양생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를 자세히 유념해야 한다. 다만 종유석은 반드시 산지가 맑고 깨끗하며 윤기가 나고, 결이 고르고 새의 깃털 같은 무늬를 갖춘 좋은 품질이어야만 복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산지의 것은 절대로 복용해서는 안 되며,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많아 짐독(鴆毒)보다도 더 심하다. 자석영(紫石英)과 백석영(白石英) 역시 안팎이 모두 투명하고 맑으며 깨끗한 것이 아니면 복용해서는 안 된다.27)
요컨대 손사막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오석산과 정제된 석약을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석산과 석약을 구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손사막은 석약의 구체적인 선별 기준과 충분한 정련(精鍊)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엄격한 선별과 정련 과정을 거친 석약은 복용 과정에서 ‘불가피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으나, 이는 적절한 처방과 복용법을 통해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석약은 질병의 치료뿐 아니라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약재로 활용될 수 있었다. 결국 수ㆍ당대에 이르러 오석산에 대한 위험성이 강조되고 비판이 강화되는 한편, 보다 안전한 석약의 활용을 지향하는 약물 인식이 점차 정착해 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4. 복용 후 관리에서 약성 조절로: 당ㆍ송대 炮炙法의 규범화

당대 후반기 이후 사서에서 오석산의 남용이나 이로 인한 부작용과 관련된 기사들이 현저히 줄어들고 송대 이후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북송대 자연과학적 탐구와 실증적 검증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인물로 평가되었던 학자이자 정치가인 심괄(沈括, 1031–1095)은 과거 널리 복용되었던 약물인 오석산(五石散)의 약리와 복용 원리를 과학적 관점에서 고증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의술이란, 진정한 이치를 마음으로 깨닫지 못한 채 단지 책에만 의존하여 치료를 행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오묘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이를테면 삽주(術)[=출(朮), Atractylodes]가 종유(鐘乳)를 발동시킨다는 문제를 보자. 『유석론(乳石論)』에는 종유를 복용하는 사람은 평생 삽주를 금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석산(五石散)의 여러 처방은 종유를 주약으로 삼으면서도 다시 삽주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니, 그 이치가 지극히 모순되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 문제를 노의(老醫)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 뜻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석론』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석약은 성질이 비록 따뜻하지만 그 본체는 무겁고 침중하므로, 반드시 서로 증발하여 엷어지게 된 뒤에야 약효가 발현된다. 그렇다면 석약을 많이 복용한 경우에는 그 자체의 기세로 서로 증발하여 약효가 나타나지만, 여기에 다시 약물로 자극을 가하면 그 발작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반면 오석산은 여러 약물을 섞어 만들기 때문에 석약의 양이 매우 적어 스스로 증발할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외부의 자극을 빌려 약효를 발동시켜야 한다. 이는 마치 불길이 약할 때에는 바람을 받아야 비로소 타오르지만, 불길이 이미 왕성할 때에는 오히려 바람이 해가 되는 것과 같은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손사막은 오석산은 매우 맹렬한 독성을 지녔다. 차라리 야갈(野葛)을 먹을지언정 오석산은 복용하지 말라. 이 처방을 보게 되면 곧바로 불태워 생명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사람이 석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여러 일이 순조롭지 못하지만, 석약이 몸속에 있으면 모든 일이 평안하다. 다만 오직 오석산만은 복용해서는 안 된다고도 하였다. 이는 오석산이 다섯 가지 석약 가운데 해로운 성질만을 모아 외부 자극으로 약효를 발현시키기 때문에, 그 약효가 지나치게 급격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옛사람들이 처방을 만든 대체적인 원리는 이와 같으며, 이 책에서 모두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의방서에는 후대의 위서나 오류가 많이 섞여 있다. 예컨대 『신농본초경(神農本草)』은 가장 오래된 본초서이지만, 그 안에도 잘못된 내용이 특히 많다. 그러므로 의사는 이러한 점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된다.28)
북송대의 심괄은 오석산 처방이 지닌 의학적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는 손사막의 견해를 인용하는 한편, 과거 의서에 나타난 처방상의 모순을 약물의 작용 원리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오석산 처방이 이미 문헌 속에만 전해질 뿐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처방의 원리와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의가(醫家), 즉 노의(老醫)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당 무종이 오석산과 유사한 계열의 도교 단약을 복용한 끝에 사망한 것은 846년이었으며, 심괄이 『몽계필담(夢溪筆談)』을 완성한 시기는 대체로 1086년에서 1093년 사이로 추정된다. 즉, 약 2세기에 걸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오석산은 더 이상 실제 의료 현장에서 사용되지 않게 되었으며, 송대에 이르러서는 문헌 속에만 전해지는 처방으로 남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29)
일반적으로 오석산이 역사 속에서 소멸한 원인으로는 심각한 부작용에 대한 인식의 확산과 귀족층만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비싼 약값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복용 수요가 점차 감소한 점이 지적된다(徐双, 2022: 94-97).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오석산이 오랫동안 사용되다가 당ㆍ송대에 이르러 쇠퇴한 역사적 과정을 충분히 해명하기 어렵다. 손사막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 의가들은 오석산의 위험성을 경계하면서도 광물성 약재 자체의 의학적 효용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독성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약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광물성 약재가 일반 약재로는 얻기 어려운 강력한 치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오석산이 널리 유행하던 시기부터 그 약효에 수반되는 부작용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으며, 이를 완화하기 위한 다양한 처치와 섭생법도 지속적으로 고안되었다. 문제는 광물성 약재의 강한 약성을 조절하고 복용자의 체질과 증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반응을 통제하는 일이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관련 지식과 기술은 주로 일부 의가의 임상 경험과 개별적인 사승 관계를 통해 전승되었으므로, 누구나 재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치료 원칙으로 체계화하거나 표준화하기 어려웠다.
한의학과 중의학에서는 자연에서 채집한 약재를 정선ㆍ건조ㆍ절단하여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열처리나 화학적 처리 등 일정한 가공 과정을 거쳐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한약재의 가공법[법제(法製)]은30) 약재의 편성(偏性)을 조절하여 안전성을 높이고, 약성의 변화를 통해 적용 범위를 확대하거나 반대로 제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또한 동일한 용량에서도 특정 질환에 대한 치료 효율을 높이고 약효를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하였으며, 약효의 손실을 최소화한 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사용의 편의성도 향상시켰다. 나아가 약재 특유의 불쾌한 냄새와 맛을 줄여 복용성을 높이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오늘날 한의학과 중의학에서 널리 활용되는 포자(炮炙)의 기본적인 원리와 방법 역시 이러한 법제 기술이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체계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특히 광물성 약재의 포자법이 당대를 거쳐 송대에 이르러 점차 일정한 규범으로 정착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송대에는 국가와 사대부가 의약의 편찬과 보급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이전까지 일부 의가들에게 비전(祕傳)으로 전해지거나 개인적으로 축적되던 처방과 약물 지식을 광범위하게 수집ㆍ정리하였다. 또한 기존의 의학 경전과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처방과 약물 사용 기준을 체계화하여 공인된 의학 지식을 확립하고자 하였다(최해별, 2018: 89-130; 김한신, 2022: 547-577). 이러한 경향은 약재의 효능과 안전성을 좌우하는 핵심 과정인 법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약재별 가공 방법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규범화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송대에 여러 차례 증보ㆍ간행된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이다. 이 책에는 광물성 약재를 비롯한 여러 약재의 법제 방법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부록으로 수록된 허홍(許洪)의 『용약총론지남(用藥總論指南)』(이하 『지남총론』)은 약재의 성질과 법제의 기본 원칙을 종합적으로 설명한 문헌이다. 『지남총론』은 『뇌공포자론』이나 후대의 『포자대법』ㆍ『수사지남』처럼 포제만을 다룬 독립적인 전문 저작이 아니라, 국가가 편찬한 공식 처방서인 『태평혜민화제국방』에 부록으로 수록된 법제론이다. 그럼에도 이 문헌은 기존의 법제 원리를 토대로 이전 시기부터 축적ㆍ발전해 온 관련 지식과 논의를 폭 넓게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지남총론』의 의의는 새로운 법제를 독자적으로 창안한 데 있기보다, 당시까지 축적된 법제 지식이 남송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체계화되고 보편적인 규범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특히 광물성 약재의 포자법과 관련해서는 약효를 유지하거나 높이면서 독성과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가공 원칙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남송대 포자법이 이전보다 실용적이고 표준화된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우선 본 장에서는 송대 의약 지식의 변화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밝히기 위해, 후한 이후 위진남북조와 수ㆍ당을 거쳐 송대에 이르기까지 독성을 지닌 광물성 약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포자법의 규범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대표적인 광물성 약재인 주사(硃砂)의 포자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주사(硃砂, 朱砂)(Cinnabar)는 단사(丹砂)라고도 하며, 황화수은(HgS)으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광물성 약재이다. 한의학에서는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경궐(驚厥)ㆍ심계(心悸)ㆍ전간(癲癎)ㆍ불면(不眠)ㆍ다몽(多夢) 등 정신신경계 질환의 치료에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주사는 오석산의 구성 약재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성분인 황화수은은 강한 약효와 함께 상당한 독성을 지니고 있어, 적절한 정련과 포자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경우 인체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주사는 독성을 지닌 광물성 약재에 대한 의학적 인식과 포자 기술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기에 가장 적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석산이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던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그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지만 그 긍정적인 작용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졌다. 따라서 그 광물성 약재의 포자법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편이었다. 후한대에서 서진(西晉)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농본초경』에서 단사(丹砂) 즉 주사에 대해서, “단사는 맛이 달고 약간 차다. 몸과 오장(五臟)의 온갖 질병을 치료한다. 정신을 기르고 혼백(魂魄)을 안정시키며, 기를 더하고 눈을 밝게 하며, 정매(精魅)와 사악한 귀신을 죽인다. 오래 복용하면 신명(神明)에 통하여 늙지 않는다. 또한 수은[汞]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산곡(山谷)에서 난다”31)라고 하여 정신안정의 효능에 대해서 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조금 뒤인 남조 양(梁)의 도홍경(陶弘景, 456-536)의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에서도 역시 그 긍정적인 효능을 강조할 뿐 부작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단사에 대해서 “맛은 달고, 약간 차며, 독이 없다. 몸과 오장의 여러 병을 주치(主治)하고, 정신을 기르며, 혼백을 편안하게 하고, 기를 더하며, 눈을 밝게 하고, 혈맥을 통하게 하며, 번만(煩滿)을 멎게 하고, 소갈을 없애며, 정신을 더하고, 사람의 얼굴빛을 윤택하게 하며, 정매(精魅)와 사악한 귀신을 죽이고, ……. 오래 복용하면 신명과 통하여 늙지 않고, 몸이 가벼워져 신선이 되며, 능히 수은으로 변한다”32)라고 하여 『신농본초경』의 서술과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즉 당시 의가들이나 도가의 방사들은 주사에는 신경을 안정시키고 몸의 활력을 되찾아 주어 결국 장기간 복용하게 되면 불로장생할 뿐만 아니라 우화등선하여 신선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같은 남조시대 송(宋)[劉宋]나라 뇌공이라고 불린 뇌효(雷斆)가 작성했다고 알려져 있져 있는 『뇌공포자론(雷公炮炙論)』에는33) 그 약재에 대한 도가적인 언급보다는 그 약성을 효과적이고 안전하게 발현하기 위해 그 광물성 약재의 포자법에 더욱 중점을 두고 설명한다.
대저 주사(硃砂)를 수치[修事]할 때에는 먼저 한 조용한 방 안에서 향을 피우고 재계하고 목욕한 뒤 사(砂)를 취한다. 향수로 씻어낸 다음에 닦아 말리고 곧 부수어 찧는다. 그 뒤 사발[鉢] 안에서 다시 삼복시(三伏時) 동안 곱게 갈아야 한다. 끝나면 하나의 도자기 솥에 갈아 놓은 주사를 넣고 감초(甘草)ㆍ자배천규(紫背天葵)ㆍ오방초(五方草)를 각각 썰어 그 주사의 위아래에 놓고 동류수(東流水)로 삶되 역시 삼복시 동안 하며 물과 불이 끊어지지 않게 한다. 시간이 차면 세 가지 약초를 제거하고 또 동류수로 씻어 깨끗하게 한 뒤 말려 다시 가루처럼 간다. 작은 자기 병에 담고 또 청지초(青芝草)와 산수초(山須草) 반 냥을 넣어 덮고 아래에서 열 근의 불로 소성[煅]한다. 사시(巳時)부터 자시(子時)까지 하여 그때 비로소 그치고 식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가루처럼 간다. 만약 복용하려 하면 곧 졸인 꿀을 넣어 환을 만들어 가는 참깨만 한 크기로 한다. 공복에 한 환을 복용한다. 만약 약 속에 넣어 사용할 때에는 곧 이 법에 따른다. 무릇 소성할 때에는 불이 자연히 그치게 한다. 매오 냥의 주사에는 감초 두 냥, 자배천규 한 일(鎰), 오방초 자연즙 한 일을 사용하며, 동류수는 충분히 취한다.34)
비록 이러한 포자법의 목적이 무엇인지 즉 그 가공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독성이 제거되거나 어떠한 이유로 약효가 더욱 효과적으로 발현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상당히 체계적인 절차와 신중한 가공을 통해 안전하고 효과적인 복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한편 오석산의 독성이 위험성을 강하게 경고하였던 당대의 손사막은 주사를 비롯한 독성을 지닌 광물성 약재의 포자에 대해서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무릇 약을 사용할 때에는 먼저 가려내고 볶고 포제하는 일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무게를 달아 사용해야 하며 생것 그대로 달아서는 안 된다. 무릇 석약과 옥류의 약물을 사용할 때에는 모두 쌀알 크기처럼 부수어 솜으로 싸서 탕약이나 술 속에 넣는다. 무릇 종유 등 여러 석약은 옥망치로 물에 갈아 사흘 밤낮 동안 표련하여 반드시 지극히 미세하게 만든다. 무릇 은설(銀屑)은 수은과 섞어 진흙처럼 만들어 사용한다.”35) 특히 주사에 대해서는 “무릇 탕약 가운데 단사와 웅황을 사용할 때에는 이미 가공한[炮炙] 가루를 가루처럼 곱게 만들어 약을 복용할 때 탕 속에 넣고 저어 고르게 섞이게 한 뒤 그것을 복용한다.”36)
「지남총론」에서 허홍은 뇌공과 손사막의 포자법을 더욱 정형화시킨다. “옥석부(玉石部)에 속하는 단사(丹砂), 웅황(雄黃), 자황(雌黃)은 대체로 사용할 때, 먼저 잘게 부수고 곱게 갈아 수비(水飛)한 뒤, 재를 바른 사발[灰碗] 안에 종이를 깔아 물기를 스며 빠지게 하여 말린(滲干) 다음, 비로소 약에 넣어 사용한다. 만약 별도로 제련(煉)하는 법이 있으면 각각 해당 처방의 방법을 따른다.”37) 허홍은 이러한 광물성 약재 포자의 전반적인 원칙하에서, 약재마다의 고유한 포자법을 설명하는데, 예를 들어 “적석지(赤石脂)와38) 백석지(白石脂)는39) 대체로 사용할 때, 반드시 숯불 속에서 붉게 달아오를 때까지 가열한 뒤, 꺼내어 식히고, 곱게 갈아 수비(水飛)하여 그 다음에야 약에 넣어 사용한다. 완급(緩急)에 따라서(상황이 급한 경우) 아주 곱게 갈기만 하고 수비하지 않아도 된다”라고40) 하여 독성이 적은 광물성 약재의 경우에는 수비와 같은 포자의 방식을 생략하여도 무방하다고 설명한다. 또한 허홍의 포자법에서는 그 각각의 가공 시간까지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 광물성 약재의 포자법을 보다 구체화하고 이를 표준화하고자 하였다. “활석(滑石)을 사용할 때에는 다음과 같이 한다. 먼저 칼로 긁어내고, 목단피(牡丹皮)와 함께 한 복시(一伏時) 동안 끓인다. 그 다음 꺼내어 동류수(東流水)를 사용하여 갈아 수비(水飛)한 뒤, 한낮의 햇볕 아래에서 말려 비로소 약으로 사용한다. 만약 급히 사용할 경우에는 단지 곱게 갈아서 사용해도 된다.”41)
요컨대 독성이 강한 광물성 약재인 주사(단사)의 사례를 통해서, 위진남북조시대에는 그 독성에 대한 특별한 인식을 갖지 못했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그 약재의 독성을 제거하는 방법들이 등장하고 점차 체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당대 손사막은 그 약재의 독성으로 초래되는 부작용을 강하게 경고하고 약재의 포자 가공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송대의 허홍은 당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다양한 포자법을 표준화하고 이를 체계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주사와 같이 독성이 있는 광물성 약재를 포자 가공하는 방법의 역사적 변천 속에서, 그 부작용을 우려하여 그 약재의 복용을 완전히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그 부작용을 완화시키고 더 나아가 그 약재의 효능을 강화하려는 것에 포자법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주사에 대한 포자법을 제시한 것 이외에도, 「지남총론」은 석약을 구성하는 광물성 약재의 포자법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허홍은 「지남총론」에 ‘논포자삼품약석유례(論炮炙三品藥石類例)’편을 독립적으로 수록하여, 각종 약재의 포자 원칙과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여기에서 제시된 포자법은 임상에서 약물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요구를 중심에 두고, 기존의 번잡한 공정을 과감히 생략하여 실용성과 조작성을 크게 높였다. 더욱이 단순히 포자 방법만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부 약재에 대해서는 포자의 목적과 약리적 근거를 함께 설명함으로써 약재를 관리하고 포자하는 자들이 그 필요성을 이해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작업하도록 하였다. 이는 단순히 조작 절차만을 나열하던 앞선 의서들의 포자법들과 비교할 때 중요한 진전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석약의 사례는 아니지만, 이러한 특징은 다른 약재의 법제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먼저 반드시 심(心)을 제거한 뒤 불에 쬐어 말려 사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번민(煩悶)을 일으킨다. 또한 감초탕(甘草湯)에 하룻밤 담갔다가 말려 사용하면 더욱 좋다”라고 하여, 포제의 목적이 부작용을 예방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설명하였다.42) 반하(半夏)의 경우에는 끓는 물에 반복하여 침지ㆍ세척한 뒤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여전히 인후를 자극하는 경우에는 생강과 함께 다시 법제하도록 규정하여 약재의 자극성을 최소화하도록 하였다.43) 이밖에도 반묘(斑蝥)의 경우에도 법제의 목적과 주의사항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또한 반묘(斑蝥)에 대해서는 다리와 날개를 제거한 뒤 찹쌀과 함께 볶아 사용하도록 하면서, 생것을 그대로 사용할 경우 구토와 설사를 유발한다고 명시하여 법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44) 이처럼 「지남총론」은 법제의 구체적인 방법뿐 아니라 그 목적과 의학적 근거까지 함께 설명함으로써, 법제를 단순한 경험적 조작 기술이 아니라 약물의 안전성과 효능을 확보하기 위한 체계적인 의학 지식으로 정립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물론 「지남총론」의 ‘논포자삼품약석유례’편에 제시된 포자법은 800여 년 전 남송 시기에 성립한 문헌으로서, 당시 관약국(官藥局)의 실제 포자 상황을 반영하였으며 이미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표자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의법포제(依法炮製)’의 원칙을 제시한 점과45) 포자가 중의학의 변증논치(辨證論治)를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로서 임상 치료 효과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46) 인식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지침적 역할을 하고 있다(唐廷猷, 2015).
요컨대 위진남북조 시기까지 주로 뛰어난 의가들의 경험과 비전(秘傳)에 의존해 전승되던 광물성 약재의 포자법은, 약재의 독성과 부작용을 완화하려는 노력 속에서 『뇌공포자론』의 편찬을 계기로 문헌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수ㆍ당대에 이르러 점차 수집ㆍ정리되었다. 남송대 허홍의 「지남총론」에 제시된 포자법은 허홍이 새롭게 창안한 독자적인 방법이라기보다, 이전 시기부터 축적ㆍ발전해 온 포자 지식과 기술이 당시 의학계에서 이미 널리 공유되고 보편적으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지남총론」이 약재의 선별과 포자, 계량과 배합의 원칙뿐만 아니라 포자의 목적과 의학적 근거까지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광물성 약재를 더욱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지식과 실천이 남송대에 이르러 상당한 수준으로 정리되고 표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체계적인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포자법이 규범화되면서, 뛰어난 약효를 지니는 동시에 불가피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었던 광물성 약재는 적절한 선별ㆍ정련ㆍ포자를 거쳐 임상에서 더욱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현재 남아 있는 사료만으로 포자법의 발달과 규범화가 오석산의 소멸을 직접 초래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단순한 금지 조치나 약값의 상승, 혹은 광물성 약재의 독성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오랫동안 사용되던 오석산이 송대에 이르러 소멸한 현상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포자 기술의 발전은 오석산의 치료적 효능을 개별 광물성 약재의 정제와 적절한 배합을 통해 더욱 안전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 결과 이러한 변화는 불가피한 부작용과 이를 완화하기 위한 까다로운 복약법을 수반하던 오석산이라는 복합 처방을 해체하고, 그 약효를 정제ㆍ가공된 개별 약재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포자법의 규범화와 오석산의 소멸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는 없더라도, 당시의 의학적ㆍ약물학적 변화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이는 오석산이 송대 이후 쇠퇴하고 소멸한 가장 개연성 높은 원인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남총론」과 같은 포자법의 규범화를 보여주는 저술들은 오석산의 소멸을 직접 초래한 문헌이라기보다, 오석산이 지녔던 약물학적 장점을 더욱 안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던 송대 의학의 발전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본 연구는 오석산(五石散)의 흥망을 위진 지식인 문화의 일탈이나 근대 계몽주의적 비판 담론의 산물로만 설명해 온 기존의 시각을 재검토하고, 약물 자체의 물질적 특성과 이를 둘러싼 의학적 실천, 그리고 당ㆍ송대 포자법(炮炙法)의 규범화 과정 속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였다. 오석산은 분명 강한 독성과 불가피한 부작용을 수반한 약물이었지만, 동시에 당대인들에게는 다른 약재로 쉽게 대체할 수 없는 현저한 치료 효과를 지닌 강력한 치료제이자 보양약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중세 중국의 의료인들과 복용자들이 문제 삼았던 것은 약물 자체의 존재가 아니라, 그 약성을 어떻게 조절하고 부작용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러한 점에서 오석산의 역사는 단순히 “위험하고 값비싼 약물이 결국 도태되었다”는 직선적인 서사로 환원될 수 없다. 오히려 초기에는 개별 의가와 방사 집단 내부에서 비전(秘傳)으로 전승되던 독성 광물 약재의 처리 기술이 수ㆍ당대를 거치며 점차 체계화되기 시작하였고, 송대에 이르러서는 국가 주도의 의약 지식 정리와 표준화 속에서 『태평혜민화제국방』 속에 부기된 허홍의 「지남총론」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보다 명시적이고 규범적인 포자법으로 정착하였다. 다시 말해 오석산의 쇠퇴는 단순한 거부나 금지의 결과라기보다, 독성 광물 약재를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기술적ㆍ제도적 전환의 산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과거 오석산이라는 불가피한 부작용을 동반하던 광물성 약재는 점차 개별 약재 단위로 재편되었으며, 표준화된 포자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의약 체계 안으로 편입되었다.
결국 오석산의 역사적 퇴장은 특정 약효를 지닌 물질의 완전한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약효를 둘러싼 독성을 통제하고 효능을 극대화하는 방식이 변화한 결과였다. 다시 말해 오석산이 지녔던 치료적 가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포자법의 발달과 약물 운용 방식의 변화 속에서 보다 안전하고 합리적인 형태로 계승ㆍ재구성되었다. 따라서 오석산의 역사는 전근대 의학의 단순한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니라, 위험한 물질을 치료 가능한 약으로 전환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축적된 의학적 경험과 기술적 혁신의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Notes

1) “Alle Ding’ sind Gift, und nichts ohn’ Gift; allein die Dosis macht, daß ein Ding kein Gift ist”

2) “본명은 Philippus Aureolus Theophrastus Bombastus von Hohenheim이고 필명으로 파라켈수스(Paracelsus)라고 불림. 독일계 스위스인 의사이자 연금술사. 후기 연금술과 화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갈레노스의 의학 철학 권위를 비판하고, 의학에 화학적 방법을 도입하였으며, 로저 베이컨이 말한 경험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최초로 수은을 이용하여 매독을 치료하였던 것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3) 『抱朴子』 「內篇」 仙藥, “抱朴子曰: 神農四經曰,上藥令人身安命延, 昇爲天神, 遨游上下, 使役萬靈, 體生毛羽, 行廚立至. 又曰, 五芝及餌丹砂、玉札、曾青、雄黃、雌黃、云母、太乙禹餘糧, 各可單服之, 皆令人飛行長生. 又曰, 中藥養性, 下藥除病, 能令毒蟲不加, 猛獸不犯, 惡氣不行, 衆妖並辟.” “『포박자』에서 말하길: 「신농사경(神農四經)에서는 상약은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편안하게 하고 수명을 연장하게 하며, 나아가 천신으로 상승하여 상하를 유람하고 만령을 부리며, 몸에 털과 깃이 나고, 신선을 따라 다니는 주방[行廚]이 곧바로 이르듯 (음식이 저절로 갖추어지게) 한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오지(五芝) 및 단사ㆍ옥찰ㆍ증청ㆍ웅황ㆍ자황ㆍ운모ㆍ태을 우여량을 복용하면 각각 단독으로도 복용할 수 있으며,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을 날고 장생하게 한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중약은 성정을 기르고 하약은 질병을 제거하며, 능히 독충이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맹수가 범하지 못하게 하며, 사악한 기운이 행하지 못하게 하고 온갖 요괴를 물리친다고 하였다.」”

4) 『全唐文』 卷926, 「吳筠, 金丹」, “金丹大藥, 文字縱載, 互有隱顯, 看文不如口訣, 口訣不如眼見, 眼見不如手傳.” “금단대약(金丹大藥)은 비록 문헌에 널리 기록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이 서로 뒤섞여 있습니다. 글을 읽는 것은 구결(口訣)을 듣는 것만 못하고, 구결을 듣는 것은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며, 눈으로 보는 것은 손에서 손으로 전수받는 것만 못하다.”

5) 가와하라 히데키(川原秀城)는 오석산에 대한 근대의 부정적 인식이 형성된 기원을 근대 문학가이자 계몽주의적 사상가였던 루쉰(魯迅)의 강연과, 청말 이래 활동한 학자 위자시(余嘉錫, 1884–1955)가 주석한 『세설신어전소(世說新語箋疏)』에서 찾는다. 이러한 근대 계몽주의적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위진남북조시기 지식인들의 타락을 주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고, 가와하라 역시 이러한 근대 계몽주의적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오석산으로 초래된 역사적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우선 가와하라는 위진남북조기에 오석산이 유행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후한 말 유교적 합리주의의 쇠퇴에서 찾는다. 이에 따라 당시의 문인과 지식인들이 불로장생을 추구하며 약이(藥餌)에 몰두하였고, 그 과정에서 약물을 장기간 복용하는 구복약(久服藥)에 중독되어 심한 경우 죽음에까지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가와하라는 그 폐해에 대해 소위 ‘한식산화(寒食散禍)’ 즉 한식산의 재앙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그는 논의의 범위를 오석산 복용이 지속되었던 당대(唐代)까지로 한정하였으며, 이후 오석산이 쇠퇴하게 된 과정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히데키, 2009).

6) 오석산의 조성 성분은 『금궤요략(金匮要略)』 卷下, 『천금익방(千金翼方)』 卷10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성분으로는 종유(鍾乳), 적석지(赤石脂), 자석영(紫石英), 백석영(白石英) 등 여러 종류의 광물 약물이 포함되어 있어 ‘오석산(五石散)’이라고도 불렸다. 후한에서 서진 시기 장중경의 『傷寒雜病論』의 잡병부분인 『금궤요략』에서는 자석영을 주재로로 하는 紫石寒食散에 관한 처방이 기록되어 있다. 『金匮要略』 卷下, 「雜療方」 第23, “治傷寒, 令愈不復, 紫石寒食散方: 【見《千金翼》.】 紫石英、白石英、赤石脂、鍾乳(研鍊)、栝蔞根、 防風、桔梗、文蛤、鬼臼, 各十分;太一餘糧十分(燒);乾薑、附子(炮, 去皮)、桂枝(去皮), 各四分. 右十三味, 杵為散. 酒服方寸匕.” “상한(傷寒)을 치료하여 나은 뒤 다시 재발하지 않게 하는 자석한식산(紫石寒食散)의 처방이다. 【《천금익방(千金翼方)》에 보인다.】 자석영ㆍ백석영ㆍ적석지ㆍ종유석(갈아 정련한 것)ㆍ괄루근ㆍ방풍ㆍ길경ㆍ문합ㆍ귀구는 각각 10分, 태일여량은 10分(불에 구운 것), 건강ㆍ부자(포제하여 껍질을 제거한 것)ㆍ계지는(껍질을 제거한 것) 각각 4분을 쓴다. 이상 13味를 찧어 가루로 만든다. 술에 타서 방촌시(方寸匕) 1술을 복용한다.”

7) 가와하라 히데키는 위진시대의 하안을 ‘한식산화(寒食散禍)’의 원흉이라고 설명한다. 즉 한식산 복용의 약품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바로 하안이며 다수의 중독사(中毒死)를 초래한 책임은 의심할 바 없이 그에게 있다고 설명한다(히데키, 2009: 136).

8) 『世說新語』 「言語」, “何平叔云: 「服五石散, 非唯治病, 亦覺神明開朗.」”

9) 『備急千金要方』, “張仲景紫石寒食散治傷寒已愈不複方. 紫石英、白石英、赤石脂、鍾乳(煉).” “장중경(張仲景)의 자석한식산(紫石寒食散)은 상한(傷寒)이 이미 나았으나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증상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약재는 자석영(紫石英), 백석영(白石英), 적석지(赤石脂), 그리고 정련한 종유석[鍾乳]이다.”

10) 吳筠, 「金丹」, 董誥 等編, 『全唐文』 卷926, “其藥也, …… 飄飄大素, 歸虛反真. 體造化之所成, 以刀圭入口, 共天地齊壽, 可與雞犬同飛, 室宅拔上, 謂之靈聖真人感應也.” “이 약이라는 것은 …… 아득히 흩날리는 태소(太素)의 상태로 나아가, 허무로 돌아가 참됨을 회복하게 합니다. 조화(造化)가 이루어낸 바를 체현한 것으로서, 소량(刀圭)을 입에 넣으면 천지와 더불어 수명을 같이하게 되고, 닭이나 개와 함께 날아오르며, 집과 거처마저도 함께 들어 올려지게 됩니다. 이를 일러 영성한 진인의 감응이라 합니다.”

11) 『神農本草經』 中卷, “青石赤石黃石白石黑石脂等 味甘平. 主治黃疸、洩利、腸澼膿血、陰蝕、下血赤白、邪氣、癰腫、疽痔惡瘡、頭瘍、疥瘙. 久服補髓益氣, 肥健, 不饑, 輕身, 延年. 五石脂, 各隨五色補五臟. 生山谷.”

12) 『南史』 卷32, “嗣伯字叔紹, 亦有孝行, 善清言, 位正員郎, 諸府佐, 彌為臨川王映所重. 時直閤將軍房伯玉服五石散十許劑, 無益, 更患冷, 夏日常複衣. 嗣伯為診之, 曰:「卿伏熱, 應須以水發之, 非冬月不可. 」至十一月, 冰雪大盛, 令二人夾捉伯玉, 解衣坐石, 取冷水從頭澆之, 盡二十斛. 伯玉口噤氣絕, 家人啼哭請止. 嗣伯遣人執杖防閤, 敢有諫者撾之. 又盡水百斛, 伯玉始能動, 而見背上彭彭有氣. 俄而起坐, 曰:「熱不可忍, 乞冷飲. 」嗣伯以水與之, 一飲一升, 病都差. 自爾恒發熱, 冬月猶單褌衫, 體更肥壯.”

13) 『全晉文』 卷26, 王羲之5 雜帖5, “服足下五色石膏散, 身輕, 行動如飛也. 足下更與下匕致之不? 治多少, 尋面言之. 委曲之事, 實亦□人, 尋過江言散.” 왕희지의 오석산에 대한 태도와 관점에 대해서는 Richter & Charles, 2017; 佐藤利行, 2005.를 참조할 것.

14) 『醫心方』 卷19, “秦承祖論云: 夫寒食之藥, 故實制作之英華, 群方之領袖, 雖未能騰雲飛骨、練筋骨髓, 至於輔生養壽, 無所與讓. 然水所以載舟, 亦所以覆舟;散所以護命, 亦所以絕命. 其有浮薄偏任之士, 牆面輕信之夫, 苟見一候之宜, 不複量其夷險, 故禍成不測, 斃不旋踵. 斯藥之精微, 非中才之所究也. 玄晏雅材將冷, 廩丘溫為先, 藥性本一而二論碩反, 今之治者唯當務尋其體性之本源, 其致弊之由善候其盈縮, 詳診其大淵採撮二家之意, 以病者所便為節消息斟酌, 可無大過. 若偏執一論, 常守不移, 斯膠柱而彈琴, 非善調之謂也.”

15) 『醫心方』 卷19, “五石散者, 上藥之流也. 良可以延期養命, 調和性理, 豈直治病而已哉. 將得其和, 則養命瘳疾;御失其道, 則夭性, 可不慎哉. 此是服者之過, 非藥石之咎也.”

16) 『醫心方』 卷19, “凡藥石發宜浴, 浴便得解. 浴法:若初寒, 先用冷水, 後用生熟湯. 若初熱, 先用暖湯, 後用冷水. 浴時慎不可先洗頭, 欲沐可用二三升灌矣.”

17) 『醫心方』 卷19, “鐘乳發令人頭痛, 飲熱酒即解.”

18) 『晉書』 卷51, p. 1415, “其後武帝頻下詔敦逼不已, 謐上疏自稱草莽臣曰: 「…… 臣惟頑蒙, 備食晉粟, 猶識唐人擊壤之樂, 宜赴京城, 稱壽闕外. 而小人無良, 致災速禍, 久嬰篤疾, 軀半不仁, 右脚偏小, 十有九載. 又服寒食藥, 違錯節度, 辛苦荼毒, 于今七年. 隆冬裸袒食冰, 當暑煩悶, 加以咳逆, 或若溫瘧, 或類傷寒, 浮氣流腫, 四肢酸重. 於今困劣, 救命呼噏, 父兄見出, 妻息長訣. 仰迫天威, 扶輿就道, 所苦加焉, 不任進路, 委身待罪, 伏枕歎息.」 ……”

19) 『諸病源候論』 卷之5-10, “內消病者, 不渴而小便多是也. 由少服五石, 石熱結於腎, 內熱之所作也. 所以服石之人, 小便利者, 石性歸腎, 腎得石則實, 實則消水漿, 故利. 利多不得潤養五髒, 髒衰則生諸病. 由腎盛之時, 不惜其氣, 恣意快情, 致使虛耗, 石熱孤盛, 則作消利, 故不渴而小便.”

20)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은 소원방이 오석산 복용으로 인한 강중병(強中病)을 설명하는 방식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강중병의 원인을 더 이상 복용자의 부주의만으로 환원하지 않고, 오석의 열성이 신(腎)에 미치는 병리적 작용을 통해 설명하였다. 『諸病源候論』 卷之5-10, “強中病者, 莖長興盛不痿, 精液自出是也. 由少服五石, 五石熱住於腎中, 下焦虛熱, 少壯之時, 血氣尚豐, 能制於五石, 及至年衰, 血氣減少, 腎虛不復能制精液. 若精液竭, 則諸病生矣.” “강중병(強中病)이란 음경이 길게 발기한 채 쇠하지 않고, 정액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증상을 말한다. 이는 젊었을 때 오석(五石)을 복용한 데서 비롯된다. 오석의 열이 신장(腎臟) 속에 머물러 하초(下焦)에 허열(虛熱)이 생기게 된다. 젊고 혈기가 왕성할 때에는 혈기(血氣)가 아직 충분하므로 오석의 열기를 억제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 혈기가 쇠하면 신(腎)이 허해져 더 이상 정액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정액이 고갈되면 온갖 질병이 발생하게 된다.”

21) 『諸病源候論』 卷之5-10, “寒食散發候. 夫散脈, 或洪實;或斷絕不足, 欲似死脈: 或細數: 或弦快坐所犯非一故也. 脈無常投, 醫不能識. 熱多則弦快, 有癖則洪實, 急痛則斷絕. 凡寒食藥率如是. 無苦, 非死候也. 勤從節度, 不從節度則死矣.”

22) 『諸病源候論』 卷之5-10, “欲服散, 宜診脈候;審正其候, 爾乃畢愈. 脈沉數者, 難發;難發當數下之. 脈浮大者, 易發也. 人有服散兩三劑不發者, 此人脈沉難發, 發不令人覺, 藥勢行已, 藥但於內發, 不出形於外. 欲候知其得力, 人進食多, 是一候;氣下, 顏色和悅, 是二候;頭面身癢瘙,是三候;策策惡風, 是四候;厭厭欲寐, 是五候也. 諸有此證候者, 皆藥內發五髒, 不形出於外, 但如方法服散, 勿疑. 但數下之, 則內虛, 當自發也.” “산약(散藥)을 복용하려면 먼저 맥상을 진찰하여 병후를 자세히 살펴야 하며, 그 증후를 정확히 파악한 뒤에야 비로소 완전한 치료를 기대할 수 있다. 맥이 침(沉)하면서 삭(數)한 사람은 약성이 쉽게 발현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여러 차례 하법(下法)을 시행하여 약성이 발하도록 해야 한다. 반면 맥이 부(浮)하고 대(大)한 사람은 약성이 쉽게 발현된다. 어떤 사람은 산약을 두세 첩 복용하고도 약성이 발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 사람의 맥이 침하여 약성이 밖으로 드러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약력은 이미 몸 안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다만 그 작용이 외형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약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첫째 음식 섭취량이 늘어나는 것, 둘째 기운이 아래로 소통되고 안색이 화평해지는 것, 셋째 머리와 얼굴 및 온몸이 가렵고 소양감이 생기는 것, 넷째 오싹오싹하며 바람을 싫어하는 것, 다섯째 나른하여 졸음이 오는 것을 살펴야 한다. 이러한 증후가 나타난다면 모두 약성이 오장(五臟) 내부에서 발현되고 있으나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이므로, 처방의 방법대로 계속 산약을 복용하면서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하법을 여러 차례 시행하면 속이 허해지게 되므로, 그때에는 약성이 자연히 외부로 발현될 것이다.”

23) 『資治通鑑』 卷248, 唐紀64 武宗會昌5年(845), p. 8020.

24) 『備急千金要方』 卷 73, “寒石五石更生散方, 舊說此藥方, 上古名賢無此, 漢末有何侯者行用, 自皇甫士安以降, 有進餌者, 無不發背解體, 而取顛覆. 余自有識性以來, 親見朝野仕人遭者不一, 所以寧食野葛, 不服五石, 明其有大大猛毒, 不可不慎也. 有識者遇此方即須焚之, 勿久留也. 今但錄主對以防先服者, 其方已從煙滅, 不複須存, 為含生害也.”

25) 『醫心方』 卷19, “服石人皆須大勞役, 四體無得自安. 如其不爾, 多有發動, 亦不得道便恣意取暖稱適已情, 必違欲以取寒凍. 雖當時不寧, 於後在身, 多有所益, 終無發動之慮也.” “석약(石藥)을 복용한 사람은 반드시 몸을 크게 움직여 힘써 노동해야 하며, 사지를 편안하게 쉬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약기운이 발작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자신의 뜻대로 따뜻한 곳을 찾아 몸을 덥게 하거나 편안함만을 추구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고 일부러 추위와 한랭한 환경을 견뎌야 한다. 비록 당시에는 몸이 편치 않더라도, 이후에는 몸에 이로운 점이 많아져 결국 약의 발작(發動)을 걱정할 일이 없게 된다.”

26) 『備急千金要方』 第21, “論曰: 夫內消之為病, 當由熱中所致, 小便多於所飲, 令人虛極短氣. 夫內消者, 食物皆消作小便, 又不渴. 貞觀十年梓州刺史李文博, 先服白石英既久, 忽房道強盛, 經月餘, 漸患渴, 經數日, 小便大利, 日夜百行, 百方治之, 漸以增劇, 四體羸, 不能起止, 精神恍惚, 口舌焦乾而卒. 此病雖稀, 甚可畏也. 利時六脈沉細微弱, 服枸杞湯即效, 但不能長愈. 服鉛丹散亦即減, 其間將服除熱宣補丸.” “논하였다. 내소(內消)라는 병은 대개 속에 열(熱)이 생겨 발생하는 것으로, 소변량이 마시는 물의 양보다 많아져 사람을 극도로 허약하게 만들고 숨이 짧아지게 한다. 내소란 먹은 음식물이 모두 소변으로 변해 배출되는 병으로, 오히려 갈증은 심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정관(貞觀) 10년(636)에 재주(梓州) 자사(刺史) 이문박(李文博)은 오랫동안 백석영(白石英)을 복용한 뒤 갑자기 성욕이 매우 왕성해졌는데, 한 달 남짓 지나면서 점차 갈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며칠 뒤에는 소변량이 크게 늘어나 밤낮으로 백여 차례나 소변을 보게 되었고, 온갖 방법으로 치료하였으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마침내 사지가 몹시 쇠약해져 일어나거나 움직일 수 없었고, 정신은 혼미해졌으며 입과 혀가 심하게 말라 결국 사망하였다. 이러한 병은 드물지만 매우 두려운 질환이다. 이때의 맥은 육맥(六脈)이 모두 침세(沉細)하고 미약(微弱)하였다. 구기탕(枸杞湯)을 복용하면 곧 효과가 나타나지만 오래도록 완치되지는 못하며, 연단산(鉛丹散)을 복용해도 곧 증상이 경감된다. 그 사이에는 열을 제거하고 허한 것을 보하는 제열선보환(除熱宣補丸)을 함께 복용해야 한다.”

27) 『備急千金要方』 第21, “論曰︰人不服石, 以庶事不佳, 惡瘡疥癬, 溫疫瘧疾, 年年常患, 寢食不安, 興居常惡, 非只己事不康, 生子難育, 所以石在身中, 萬事休泰, 要不可服五石也. ……. 所以常須服石, 令人手足溫暖, 骨髓充實, 能消生冷, 舉措輕便, 複耐寒暑, 不著諸病. 是以大須服之. 凡石皆熟煉用之. 凡石之發, 當必惡寒頭痛心悶, 發作有時, 狀如溫瘧, 但有此兆, 無過取冷水淋之, 得寒乃止. 一切冷食唯酒須溫, 其諸解法備如後說. 其發背疽腫(方見二十二卷中). ……. 如法持心, 將攝得所. 石藥為益, 善不可加. 余年三十八九嘗服五六兩乳, 自是以來深深體悉, 至於將息節度, 頗識其性, 養生之士宜留意詳焉. 然其乳石必須土地清白光潤, 羅紋鳥翮一切皆成, 乃可入服. 其非土地者, 慎勿服之, 多致殺人. 甚於鴆毒、紫石、白石極須外內映澈, 光淨皎然, 非爾亦不可服.”

28) 『夢溪筆談』 卷18, 「技藝」, “醫之為術, 茍非得之於心, 而恃書以為用者, 未見能臻其妙. 如術能動鐘乳, 按《乳石論》曰:「服鐘乳, 當終身忌術. 」五石諸散用鐘乳為主, 復用術, 理極相反, 不知何謂. 余以問老醫, 皆莫能言其義. 按《乳石論》云: 「石性雖溫, 而體本沈重, 必待其相蒸薄然後發. 」如此, 則服石多者, 勢自能相蒸, 若更以藥觸之, 其發必甚. 五石散雜以眾藥, 用石殊少, 勢不能蒸, 須藉外物激之令發耳. 如火少, 必因風氣所鼓而後發; 火盛, 則鼓之反爲害, 此自然之理也. 故孫思邈云: 「五石散大猛毒. 寧食野葛, 不服五石. 遇此方即須焚之, 勿爲含生之害. 」又曰: 「人不服石, 庶事不佳; 石在身中, 萬事休泰. 唯不可服五石散. 」蓋以五石散聚其所惡, 激而用之, 其發暴故也. 古人處方, 大體如此, 非此書所能盡也. 況方書仍多偽雜, 如《神農本草》最爲舊書, 其間差誤尤多, 醫不可以不知也.”

29) 당 무종의 사례 외에도, 오대십국 시기 남당(南唐)의 초대 황제인 이변(李昪, 재위 937–943) 역시 말년에 도사들이 제조한 단약(丹藥)을 과도하게 복용한 끝에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그가 복용한 단약을 곧바로 오석산과 동일한 약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약물 모두 광물성 약재를 주성분으로 하는 석약(石藥) 계열에 속하며, 복용 후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일정한 연속성을 보여준다. 특히 이변의 사례는 당시 사용된 단약이 충분한 정련(精鍊) 과정을 거치지 않았거나 약물의 독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따라서 위진남북조 시기에 성행하였던 오석산 자체는 점차 쇠퇴하였더라도, 광물성 석약을 이용한 치료와 양생의 전통은 도교 단약이라는 형태로 계승되었으며, 그와 유사한 약물 문화는 적어도 북송 성립 직전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資治通鑑』에서는 이변의 임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資治通鑑』 卷283, “唐主謂璟曰: 「吾餌金石, 始欲益壽, 乃更傷生, 汝宜戒之,」 是夕, 殂. <年五十六.> ” “당주(烈祖 이변)가경(璟)에게 말하기를, 「내가 금석(金石)의 단약을 복용한 것은 본래 수명을 늘리고자 함이었으나, 도리어 생명을 해치게 되었으니, 너는 마땅히 이를 경계하라.」 하였으며, 그날 밤 붕어하니(향년 56세였다),”

30) 한약재 가공법을 의미하는 법제(法製)는 문헌에 따라 포제(炮製)ㆍ포자(炮炙)ㆍ수제(修製)ㆍ수치(修治) 등 다양한 용어로 지칭된다. 이들 용어는 모두 약재를 세척ㆍ가열ㆍ연마ㆍ정제하는 등 일정한 방법으로 가공하여 약효를 조절하고 독성을 완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다만 본 논문에서는 연구 대상이 주로 광물성 약재이며, 이러한 약재의 가공 과정에서 특히 불을 이용한 처리 과정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관련성이 가장 높은 용어인 포자(炮炙)를 중심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 밖에도 법제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물로 처리하는 것(水製), 술에 처리하는 것(酒製), 기름에 처리하는 것(油製), 식초에 처리하는 것(醋製), 약즙에 처리하는 것(藥汁製), 불에 튀기는 것(燙製), 불에 달구는 것(煅製), 발효법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 밖에 한약재에 들어 있는 잡물과 약재로 쓰이지 않는 부분을 없애며 추출에 편리하게 자르거나 가루 내는 것도 법제에 포괄된다. 법제 방법들은 오랜 역사적 시기를 거쳐 축적된 경험적인 방법들인 만큼 한의학에서 제기되는 약재의 법제 방법과 그 의의를 과학적으로 밝혀 내는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한의학대사전편찬위원회, 2001).

31) 『神農本草經』 中卷, “丹沙, 味甘微寒. 治身體五臟百病. 養精神、安魂魄、益氣、明目, 殺精魅邪惡鬼. 久服通神明不老. 能化爲汞. 生山谷.”

32) 『本草經集注』 「新修」 p. 4,「大觀」卷三,「政和」 p.79, “味甘, 微寒, 無毒. 主治身體五臟百病, 養精神, 安魂魄, 益氣, 明目, 通血脈, 止煩滿, 消渴, 益精神, 悅澤人面, 殺精魅邪惡鬼, ……. 久服通神明不老, 輕身神仙, 能化爲汞.”

33) 그러나 『雷公炮炙論』은 실제로는 대략 수에서 당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앞서의 두 의서에 비해 후대의 저작이라고 판단된다(河洪基ㆍ金基郁ㆍ朴炫局, 2011).

34) 『雷公炮炙論』 上卷 「硃砂」, “夫修事硃砂, 先於一靜室內焚香齋沐, 然後取砂, 以香水浴過了, 拭乾, 即碎搗之, 後向缽中更研三伏時; 竟, 取一瓷鍋子, 著研了砂於內, 用甘草、紫背天葵、五方草各銼之, 著砂上下, 以東流水煮, 亦三伏時, 勿令水火缺失; 時候滿, 去三件草, 又以東流水淘令淨, 干曬, 又研如粉; 用小瓷瓶子盛, 又入青芝草、山須草半兩蓋之, 下十斤火煅, 從巳至子時方歇, 候冷, 再研似粉. 如要服, 則入熬蜜, 丸如細麻子許大, 空腹服一丸.如要入藥中用, 則依此法. 凡煅, 自然住火. 每五兩硃砂, 用甘草二兩、紫背天葵一鎰、五方草自然汁一鎰, 若東流水, 取足.”

35) 『備急千金要方』 卷1, “凡藥治擇熬炮訖, 然後秤之以充用, 不得生秤. 凡用石藥及玉, 皆碎如米粒, 綿裹內湯酒中. 凡鍾乳等諸石, 以玉槌水研三日三夜, 漂鍊, 務令極細. 凡銀屑, 以水銀和成泥.”

36) 『備急千金要方』 卷1, “凡湯中用丹砂、雄黃者, 熟末如粉, 臨取內湯中, 攪令調和服之.”

37) 『太平惠民和劑局方』 「指南總論」 卷上, “玉石部丹砂、雄黃、雌黃 凡使; 先打碎, 研細水飛過, 灰碗內鋪紙滲干, 始入藥用. 如別有煉, 各依本方.”

38) 赤石脂(적석지)는 규산염 광물 다수고령토(Halloysite) 계열로, 주로 붉은색 덩어리 형태로 채취되는 약재. 전통적으로 설사(澁腸), 지혈(止血), 상처 아물기(敛疮) 등에 쓰였고, 현대 자료에서는 흡착ㆍ점막 보호 작용이 언급됨.

39) 규산염 광물인 카올린(Kaolinite) 계열을 약재로 이용하는 전통약재로, 삽장고탈(澁腸固脫)과 지혈(止血) 효능이 전통적으로 언급됨.

40) 『太平惠民和劑局方』 「指南總論」 卷上, “赤石脂、白石脂 凡使; 須於炭火中 通赤, 取出放冷, 研細水飛過, 方入藥用.如緩急, 則研令極細, 不飛亦得.”

41) 『太平惠民和劑局方』 「指南總論」 卷上, “滑石 凡使; 先以刀刮下, 以牡丹皮同煮一伏時, 取出用東流水研飛過, 日中曬乾, 方入藥用. 如急用, 只研細亦得.”

42) 『太平惠民和劑局方』 「指南總論」 卷上, “遠志 凡使:先須去心, 焙乾, 方入藥用. 如不去心, 令人煩悶, 更能以甘草湯浸一宿漉出, 焙乾用, 尤妙.” “원지(遠志)는 무릇 약으로 사용할 때에는 먼저 반드시 심(心)을 제거한 뒤 불에 쬐어 말려 약으로 사용해야 한다. 만약 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번민(煩悶)을 일으키게 한다. 또한 감초탕(甘草湯)에 하룻밤 담갔다가 건져내어 불에 쬐어 말려 사용하면 더욱 좋다.”

43) 『太平惠民和劑局方』 「指南總論」 卷上, “半夏 凡使; 先以沸湯浸, 候溫, 洗去滑, 如此七遍方用. 如入湯劑, 切片完用. 或尚戟人咽喉, 可杵爲末, 以生姜等分搗, 研和爲劑, 淹一宿, 捏作餅子, 焙乾使. 如更杵爲末, 再以姜和劑淹之, 焙乾尤佳, 此用合湯妙.” “반하는 무릇 약으로 사용할 때에는 먼저 끓는 물에 담갔다가 물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린 뒤, 씻어서 미끄러운 성질[滑]을 제거한다. 이러한 과정을 일곱 번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다. 만약 탕제(湯劑)에 넣어 사용할 경우에는 얇게 썰어 그대로 사용한다. 혹 아직도 사람의 인후를 자극하는 경우에는 절구에 찧어 가루로 만든 뒤, 생강(生薑)과 같은 양을 함께 찧어 고루 섞어 반죽하고, 하룻밤 재워 둔다. 그런 다음 이를 짜서 떡 모양으로 만든 뒤 불에 쬐어 말려 사용한다. 만약 다시 이를 찧어 가루로 만들고, 또다시 생강과 함께 반죽하여 하룻밤 재운 뒤 불에 쬐어 말리면 더욱 좋다. 이러한 방법으로 포제한 것은 탕제에 사용할 때 특히 효과가 뛰어나다.”

44) 『太平惠民和劑局方』 「指南總論」 卷上, “斑蝥 凡使; 先去足、翼, 用糯米同炒熟, 方可入藥用, 生即吐瀉人.” “반묘는 무릇 약으로 사용할 때에는 먼저 다리와 날개를 제거하고, 찹쌀(糯米)과 함께 충분히 볶은 뒤에야 비로소 약으로 사용할 수 있다. 생것을 그대로 사용하면 사람에게 구토와 설사를 일으킨다.”

45) 『太平惠民和劑局方』 「指南總論」 卷上, “方入藥用凡有修合, 依法炮制, 分兩無虧,勝也.” “무릇 약을 조제하고 배합할 때에는 반드시 법도에 따라 포제(炮製)해야 하며, 약물의 분량에도 조금도 차질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가장 뛰어난 처방이 된다.”

46) 『太平惠民和劑局方』 「指南總論」 卷上, “凡合和湯藥, 務在精專, 甄別新陳, 辨明州土, 修制合度, 分兩無差, 用得其宜, 病無不愈. 若真假非類, 冷熱相乖, 草石昧其甘辛, 炮炙失其體性, 篩羅粗惡, 分劑差殊, 雖有療病之名, 永無必愈之效. 是以醫者必須殷勤注意, 再四留心, 不得委以他人, 令其修合.” “무릇 탕약(湯藥)을 조제할 때에는 반드시 정밀하고 전념해야 한다. 약재의 신품(新)과 묵은 것(陳)을 가려내고, 산지(州土)를 분명히 구별하며, 포제(修制)를 적절하게 시행하고, 약물의 분량에 조금도 차이가 없도록 하여 마땅하게 사용한다면 낫지 않는 병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약재의 진위(真假)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종류가 서로 뒤섞이고, 한열(寒熱)의 성질이 서로 어긋나며, 초약과 석약의 감미(甘味)와 신미(辛味)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포자(炮炙)가 약물의 본래 성질을 잃게 하거나, 체질(篩羅)이 거칠고 불량하며, 약물의 배합과 용량이 서로 어긋난다면, 비록 병을 치료하는 약이라는 이름은 있을지라도 결코 반드시 병을 낫게 하는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의사는 반드시 부지런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거듭 마음을 써야 하며, 약의 포제와 조제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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