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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5(2); 2026 > Article
사리원도립의원(沙里院道立醫院)의 설립 과정을 통해 본 식민지 공공의료의 성격†

Abstract

This paper analyzes the structural limitations of the colonial public healthcare system by examining the establishment of Sariwon Provincial Hospital in Hwanghae Province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In the 1920s, Sariwon emerged as a central city in Hwanghae Province, driven by the development of railway transportation and commerce. However, modern medical institutions and public healthcare facilities remained severely inadequate.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local community of Sariwon initiated a movement to establish a provincial hospital.
The movement, however, faced a crisis as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responded passively due to budgetary concerns. To persuade the Government-General to support the project, the Sariwon community proposed to bear a portion of the establishment costs. As a result, part of the financial burden was transferred to the local residents. These costs were distributed unevenly across different social classes and sub-regions, causing conflicts within the local community.
The establishment of Sariwon Provincial Hospital demonstrates how colonial public healthcare was not a universal welfare system funded by the state, but rather a structure built upon the financial burdens of local residents. While shifting the fiscal responsibility onto the local community,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ppropriated the visible achievement of constructing a modern medical facility as a means to legitimize its colonial rule. In this sense, public healthcare in local communities, represented by provincial hospitals, functioned as a low-cost, high-efficiency mechanism of governance.

1. 서론

일제하 도립의원(道立醫院)은 식민지 조선에서 공공의료 체계를 구성한 핵심 제도 중 하나로, 지역 의료 환경과 식민지 통치의 성격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분석 대상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 의학사에서 도립의원은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어왔으며,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하나는 도립의원 전반을 조망하여 식민지 지역 의료 환경의 전체상을 재구성하는 연구이며(박윤재, 2009; 이방원, 2021; 2022a; 2022b; 2023; 2025), 다른 하나는 개별 도립의원의 설립과 운영 과정을 검토하여 도립의원의 성격을 규명하는 연구이다(한동민, 2004; 박인순, 2016; 김영수, 2021; 이방원, 2022c).
위의 연구를 통해 도립의원이 식민 통치를 정당화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 의료 혜택이 일제가 선전했던 것과는 괴리가 있었다는 점은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나 이러한 공공의료 체계가 어떠한 과정과 논리 구조 속에서 구축ㆍ운영되었는지는 여전히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다. 특히 도립의원 설립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이해관계와 비용 분담 구조, 식민당국과 지역사회 간의 상호작용은 기존 연구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연구사적 한계는 기존 연구가 『朝鮮道立醫院槪況』, 『朝鮮道立醫院要覽』과 같은 관찬 자료나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해당 자료는 도립의원의 현황을 거시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유효하나, 개별 도립의원의 설립 및 운영의 구체적 실상을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 연구에서 활용되지 않았던 국가기록원 소장 자료인 『철원사리원의원신설관계서류』와 『면특별부과금관계서류철』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전자는 사리원도립의원 설립을 둘러싼 황해도 당국과 조선총독부 간의 공문서, 청원서, 설립 계획 및 예산, 부지 선정과 건축 과정 등 설립 전반의 구체적 과정을 담고 있다. 후자는 임시호별할(臨時戶別割) 특별부과금을 통한 재원 조달 방식과 그 부담 구조를 면(面) 단위까지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자료는 기존의 거시적 서술이나 담론 분석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웠던 설립 과정의 실제 양상과 재정 구조를 복원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
연구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식민지 공공성’ 연구와 식민지 지방재정 연구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기존 연구의 방법론적 한계를 극복하고, 도립의원의 연구사적 지평을 지역개발운동 및 지방재정 문제로까지 확장하고자 한다.
‘식민지 공공성’ 연구는 식민지 사회를 지배와 저항의 이분법으로 환원하지 않고, 지역사회가 지역개발을 위해 어떠한 논리와 담론을 구성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식민지 하 ‘정치’의 양상을 새롭게 조명하는 연구 경향이다(윤해동ㆍ황병주, 2010). 특히 도시 인프라 시설과 같은 공공재의 유치 및 공영화(公營化)를 둘러싸고 형성된 공론장에 크게 주목한다(김제정, 2007; 주동빈, 2020; 박정민, 2022). 도립의원 역시 도시의 주요한 인프라 시설일 뿐만 아니라 이를 둘러싼 설립운동이 ‘문화통치’ 이후 형성된 제한적 공론장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식민지 공공성’ 연구로부터 유효한 분석 시각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식민지 공공성’ 연구는 공론 형성에 주목한 나머지 담론이 실제 사업 추진 과정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즉 ‘식민지 공공성’이 어떻게 발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풍부한 설명이 이루어졌으나, 그것이 어떠한 재정 구조와 제도적 장치를 통해 현실화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 지방재정 연구의 성과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松本武祝, 1998; 정미성, 2005). 지방재정은 지역개발을 현실화하는 주요한 정책적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특히 지방재정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재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지역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어떠한 방식을 통해 조달한 것인지, 나아가 조달된 자금을 어느 사업에 투여할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은 지역사회의 주요한 현안이었다. 사리원도립의원 설립 재원의 일부가 임시호별할 특별 부과금 방식으로 조달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과세적 성격과 징세 방식에 대한 분석은 담론의 현실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해명할 수 있는 구체적 단서를 제공한다.
위와 같은 연구성과와 사료를 바탕으로 본 연구는 사리원도립의원을 사례로 다음 세 가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식민지 공간의 재편 속에서 사리원이 어떠한 지역의료 환경에 놓여 있었으며, 이것이 도립의원 설립운동의 배경으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살핀다. 둘째, 설립운동의 주체들이 어떠한 논리와 전략으로 총독부와 지역사회를 설득해 나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갈등이 발생했는지를 추적한다. 셋째, 설립 비용 분담 방식, 즉 임시호별할 특별부과금을 통한 ‘수익자부담원칙’의 실제 운용 양상과 그 구조적 모순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일제하 공공의료의 제도적ㆍ재정적 구조를 재구성하고, 그 속에 내포된 구조적 모순과 한계를 밝히고자 한다.

2. 사리원도립의원의 설립 배경

1) 식민지 공간의 재편과 사리원의 발달

사리원은 동북쪽으로 정방산(正方山) 산맥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재령평야(載寧平野)를 배후에 둔 분지형 평원 지대에 위치하였다. 조선시대 평양과 개성을 연결하는 관로(官路)가 개설되면서 점차 교통 거점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황해도의 정치ㆍ행정ㆍ군사적 중심지는 해주만(海州灣)과 용당포(龍塘浦)를 통해 서해와 연결되는 지리적 이점을 가진 있었던 해주(海州)였으며, 사리원은 봉산군(鳳山郡)의 작은 역원(驛院)에 불과했다(福村淸治, 1936: 159).
사리원의 위상이 본격적으로 변화한 계기는 1905년 경의선(京義線)의 부설이었다. 경의선 본선이 시내를 관통하게 되면서 사리원은 한반도를 종관하는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자, 재령평야의 농산물을 집산ㆍ운송하는 황해도 물류 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식민지 철도망 구축이 초래한 공간 구조의 재편 속에서 사리원이 황해도의 새로운 관문으로 부상하자, 1912년 봉산군청(鳳山郡廳)의 사원면(沙院面) 이전과 1923년 지정면(指定面) 승격 등 행정적 위상 역시 이에 맞추어 재편되었다(福村淸治, 1936: 159).
여기에 1920년대 황해선(黃海線) 부설이 본격화되면서 사리원의 지리적 중요성은 더욱 증대되었다. 황해선은 일제가 황해도의 농업 개발과 농산물 반출을 위해 도내를 종횡하도록 부설한 사설 철도 지선으로, 1919년 사리원-재령(載寧) 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1920년대에 걸쳐 노선망을 확장해 나갔다. 황해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광산물은 사리원을 경유하여 도외로 반출되었고, 반대로 도외의 소비재와 자본재 역시 사리원에 집적된 뒤 황해선을 통해 황해도 각 지역으로 반입되었다(朝鮮鐵道協會, 1930: 67). 즉 사리원은 경의선과 황해선을 연결하는 철도 교통의 결절점으로 기능하면서, 이러한 입지를 기반으로 도시와 지역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켜 나갔다.
반면 전통적 중심지인 해주의 발전은 지체되고 있었다. 1920년대까지 황해선은 신천(信川)과 하성(下聖) 방면까지만 개통되었기 때문에 해주는 도내 주요 지역과 철도로 직접 연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사리원-해주 구간은 1930년 12월에 이르러서야 개통되었으나 해주역이 주요 항구인 용당포와 떨어진 시 외곽에 설치되고, 천혜의 양항(良港)인 용당포의 축항(築港) 공사마저 지연되면서 해주의 유통 구조와 지역경제는 점차 침체되어 갔다(서일수, 2014: 159).
이러한 지역 질서 재편은 도시 인구의 변화에서도 뚜렷하게 확인된다. <그림 2>에서 보듯이 1910년 사리원의 인구는 3,452명으로 해주(15,502명)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으나, 이후 급격히 팽창하면서 1931년 마침내 해주를 넘어섰다. 이처럼 1920년대 철도 부설과 행정구역 개편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사리원은 기존 황해도의 중심지였던 해주의 정치ㆍ행정ㆍ경제적 위상을 위협하는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2) 사리원의 지역의료 실태와 공공의료의 공백

철도 부설이 초래한 식민지 공간 구조의 재편 속에서 사리원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도시 인프라는 이러한 발전 속도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의료 시설이었다.
<표 1>에서 보이듯이 의료 인력의 핵심인 의사(醫師)의 수는 해주군이 19명인 데 비해 봉산군은 겨우 9명에 불과하였다. 인구 천 명당 의사 수 역시 해주군은 0.10명, 봉산군은 0.08명으로 나타났다. 조선 전체의 비율이 0.09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봉산군의 의사 수는 해주는 물론 조선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를 의료 시설이 밀집된 핵심 지역인 해주면과 사리원면으로 좁힐 경우 격차는 더욱 두드러진다. 해주면의 인구 천 명당 의사 수는 0.80명인 반면, 사리원면은 0.38명으로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즉 사리원은 도시 규모와 발전 속도에 비해 근대적 의료 인프라가 현저히 부족한 상태였다.
반면 전통적 의료 인력인 의생(醫生)의 경우 사리원이 해주에 비해 더 많았다. 이는 사리원이 근대적 의료 인력과 시설의 부족을 의생 중심의 전통 의료 체계를 통해 일정 부분 보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1920년 대 급속히 발전하는 사리원의 위상과 맞지 않는 형태였다. 사리원 주민들은 해주와의 비교를 통해 근대적 의료 시설의 부족을 통감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바로 도립의원의 부재가 존재했다.1)
사리원 주민들이 공공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도내 유일의 도립의원이 위치한 해주까지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해주는 지리적으로 남쪽 해안에 치우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황해선 해주 구간이 개통되지 않아 내륙 교통망과의 연결도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사리원 주민들이 해주 도립의원을 이용하는 것은 지리적ㆍ교통적 측면에서 현실적 제약이 컸다.2) 이러한 문제는 비단 사리원만이 아니라 당시 황해도 전체가 공유하던 지역 공공의료 체계의 문제이기도 했다.3)
이러한 황해도 공공의료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바로 1919년 콜레라 유행이었다. 당시 황해도의 콜레라 환자 수는 4,507명, 사망자 수는 3,101명으로 조선 전체 환자의 약 27%, 사망자의 약 28%를 차지하는 전국 최대 규모의 피해 지역이었다. 이에 당시 언론은 황해도를 “호역(虎疫)의 굴”, “이 세상의 지옥”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백선례, 2021: 57). 그러나 당시 황해도의 대표적 공공의료기관이었던 해주 도립의원(당시 자혜의원)의 전염병 환자 수용 능력은 고작 7명에 불과하였다(朝鮮總督府, 1930a: 51). 더욱이 콜레라 유행의 중심지였던 황주(黃州) 겸이포(兼二浦)와 해주 사이의 지리적ㆍ교통적 거리 역시 신속한 방역 대응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반면 사리원이 위치한 봉산군은 황주군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고 경의선으로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콜레라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8월 26일 황주 겸이포에 첫 환자가 발생한 이후, 불과 4일 뒤인 8월 30일 봉산군 만천면에서 환자가 발생하였고, 이어 9월 2일 사원면, 9월 4일 영천면과 토성면 등으로 콜레라가 급속히 확산되었다(朝鮮總督府, 1920: 68-69). 사리원 주민들은 1919년 콜레라 유행을 경험하면서 도내 공공의료 시설의 부재와 해주 도립의원이 지닌 지리적 한계를 실감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경험은 공공의료의 문제를 사리원 지역사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황해도 전체의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사리원은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도립의원 설립운동 과정에서 다른 지역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3. 사리원도립의원 설립 운동과 지역사회의 갈등

1) 유지단체와 지방의회를 통한 설립 청원

사리원도립의원의 설립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20년대 초 총독부가 공공의료기관 확장 계획을 발표한 시점부터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통치’로 식민지 통치 방침을 전환한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불만을 유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의료 환경의 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이방원, 2022a: 398). 이에 따라 1925년까지 전국에 자혜의원(慈惠醫院) 13개소의 증설을 계획하고 709만 엔의 예산을 배정했다(朝鮮總督府, 1937: 2-3). 이 과정에서 황해도 자혜의원의 유력한 증설 후보지로 사리원이 거론되었다.4)
그러나 1922년 반동공황과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재정에 큰 타격이 발생하면서 자혜의원 증설 계획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이어 1924년 총독부의 행ㆍ재정정리가 시작되면서 자혜의원의 운영은 총독부 특별회계에서 도지방비 경영으로 이관되었고, 1925년 「조선도립의원관제(朝鮮道立醫院官制)」 및 「도립의원규정(道立醫院規程)」이 공포되면서 자혜의원은 도립의원으로 개편되었다(朝鮮總督府, 1937: 3). 이처럼 자혜의원 증설이 중단되면서 사리원 자혜의원 설립 역시 무기한 연기되었다.5) 이후 총독부가 사리원도립의원 설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사리원 주민들은 더 이상 총독부의 ‘자혜(慈惠)’만을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사리원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도립의원 설립 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도립의원 설립 운동의 중심에는 사리원 실업협회(이하 실업협회)가 있었다. 실업협회는 사리원의 실업가ㆍ유지ㆍ관리들로 구성된 유지단체로, 회장은 사리원운수창고주식회사(沙里院運輸倉庫株式會社) 사장 콘도 치카(近藤近), 부회장은 사리원 금융조합(金融組合) 조합장 이덕기(李德基)가 맡고 있었다. 이 밖에도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던 유지들과 실업가들이 역원으로 참여하였으며, 군수ㆍ군서기ㆍ경찰 등 지역 관리들이 고문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사리원(大沙里院)’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도립의원, 재판소, 황해곡물검사소, 종묘장(種苗場), 양잠기업소(養蠶機業所), 운하(運河) 등 주요 기관의 이전과 도시 인프라 확충을 추진하였다. 이 가운데에서도 도립의원 설립은 가장 시급한 과제로 인식되었다. 이는 도립의원이 단순한 의료기관을 넘어 사리원을 황해도의 새로운 중심지로 성장시키기 위한 핵심 기반 시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실업협회의 도립의원 설립 운동은 총독부를 대상으로 한 청원서 제출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25년 실업협회는 「자혜의원설립청원서(慈惠醫院設立請願書)」를 작성하여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제출했다(조선총독부, 1928~1931: 1231-1236). 실업협회는 청원서에서 사리원도립의원의 필요성을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제시하였다.
첫째, 사리원과 황해도 서북부 지역의 의료 수요 증가에 비해 기존 의료 체계가 이를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원서에 따르면 사리원은 철도 교통의 발달과 인구 증가로 인해 황해도 내에서도 인구 밀집도가 높은 지역으로 성장하였으나, 기존 의료기관들은 설비가 미비하고 진료비와 약값 또한 비싸 주민들이 충분한 의료 혜택을 누리기 어려웠다. 또한 도내 유일의 공공의료기관인 해주 도립의원은 지리적으로 접근성이 낮아 인근 군 주민들이 이용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일부 환자들은 오히려 철도를 이용해 평양(平壤)이나 경성(京城)의 병원을 찾고 있었으며, 경제적 여유가 없는 환자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하였다(조선총독부, 1928~1931: 1231-1236).
둘째, 실업협회는 재령강(載寧江) 개수사업(改修事業)과 같은 국가 주도의 토목 사업을 근거로 사리원도립의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청원서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가 동원되는 재령강 개수 공사를 언급하며, 이들을 위한 의료기관의 설치가 시급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도립의원이 단순한 공공의료 시설을 넘어 식민지 개발 사업 수행을 뒷받침하는 기반 시설이라는 논리를 제시한 것이었다(조선총독부, 1928~1931: 1231-1236).
셋째, 실업협회는 사리원 주민들이 도립의원 설립 비용의 일부를 부담할 의사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주민들은 의원 부지로 사용할 1만 평의 토지를 제공하기 위해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총독부의 승인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리원 측이 부지 제공이라는 현실적 협상 수단을 제시한 것이었다(조선총독부, 1928~1931: 1231-1236).
이처럼 실업협회는 해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 황해도 공공의료 체계의 한계를 비판하는 동시에, 사리원을 새로운 공공의료 중심지로 부상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도립의원 문제를 단순히 사리원 지역의 이익 차원이 아니라 황해도 전체의 공공의료 문제로 확장함으로써 설립의 당위성, 즉 ‘공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사리원도립의원 설립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한편, 1925년 사리원에서 도립의원 유치운동이 본격화되자 해주 지역사회 역시 대응에 나섰다. 해주 주민들은 10만 엔의 기금을 조성하여 기존 해주 도립의원의 개수 운동을 추진하였다. 해주 측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낀 실업협회와 사리원 주민들은 1926년 1월 23일 주민대회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봉산군의 도평의회(道評議會) 의원(議員)인 나카가미 키스케(中上喜助)와 김홍봉(金弘鳳)을 통해 사리원도립의원 설치 건의안을 황해도지사(黃海道知事)에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다.6)
나카가미와 김홍봉이 1926년 2월 1일 개회한 도평의회에서 해당 건의안을 상정하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7) 주목되는 점은 찬반의 구도가 지리적으로 뚜렷하게 갈렸다는 사실이다. 건의안에 찬성하여 연명한 지역은 봉산ㆍ황주ㆍ재령ㆍ곡산(谷山) 등 대부분 황해도 서북부의 경의선 연선에 위치한 반면, 해주를 위시하여 반대하거나 관망한 지역은 평산(平山)ㆍ옹진(甕津)ㆍ장연(長淵) 등 남서부 해안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8) 전자는 사리원과 지리적ㆍ교통적으로 가까워 도립의원 이용이 상대적으로 용이했지만, 후자는 사리원과의 접근성이 낮거나 기존 해주 도립의원과 가까웠기 때문에 설립의 필요성을 크게 체감하지 못하였다. 즉 철도 부설이 초래한 식민지 공간의 재편은 단순한 도시 성장의 문제를 넘어 황해도 내부의 지역 질서와 이해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치열한 논쟁 끝에 건의안은 표결에 부쳐져 다수의 찬성으로 황해도평의회를 통과하였다. 그 내용은 실업협회가 제출한 청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중요한 점은 해당 건의안이 도평의회를 통과했다는 사실 자체였다(조선총독부, 1928~1931: 1228). 이는 제2도립의원 설립의 필요성과 그 적지(適地)가 사리원이라는 점이 황해도 내부에서 공인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도립의원의 필요성을 단순히 사리원의 발전과 의료시설의 확충이라는 차원을 넘어 황해도 전체의 발전과 의료 공공성 확보로까지 확장한 사리원 측의 논리적 승리였다. 이후 건의안은 황해도 당국에 전달되었고, 사리원 주민들은 마침내 도 당국으로부터 사리원도립의원 설치에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얻어낼 수 있었다.9)
황해도 당국 역시 사리원도립의원 설립에 대해 두 가지 이유에서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첫째, 급격한 인구 증가로 사리원의 도시 과밀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의료기관 부족이 도시 위생과 지역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둘째, 1919년 콜레라 유행과 같은 대규모 감염병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공공의료 시설의 확충이 필요했으며, 그 입지로는 지리적ㆍ교통적 조건을 고려할 때 사리원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 1928~1931: 1156). 즉 황해도 당국 역시 큰 틀에서 사리원측의 논리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리원 입장에서는 도립의원 설치를 둘러싼 중요한 고비를 넘었음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재정 문제였다. 황해도는 사리원도립의원 설립에 건설비로 15만 엔, 연간 경영비로 2만 5천엔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도(本道)의 지방비 재정은 재원에 여력이 없고, 이미 정해진 계획을 수행하는 것조차 고심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정도로 황해도의 지방재정은 취약한 상태였다(조선총독부, 1928~1931: 1225). 결국 총독부의 재정 지원 없이 지방비만으로 도립의원을 설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러한 재정 문제로 인해 도립의원 설립의 최종적인 결정권은 사실상 총독부가 쥐고 있었다.

2) 주민운동을 통한 당국 압박

황해도평의회의 결의와 황해도 당국의 긍정적인 검토에도 불구하고 사리원 도립의원 설치는 총독부의 보조금 지원이 결정되기 전까지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2년간 별다른 진척이 없었던 도립의원 문제는 1928년 사리원 운하 굴착(掘鑿) 계획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사리원에서는 ‘대사리원’ 건설의 일환으로 도립의원 설립과 운하 굴착 사업이 병행 추진되고 있었다.10) 운하 계획은 재령강 개수 사업의 혜택을 입지 못해 반복되던 사리원 일대의 침수ㆍ하수 문제를 해결11)하는 동시에, 황해도 최대 미곡 생산지인 재령평야의 미곡을 사리원 시가지와 사리원역까지 효율적으로 수송할 수 있는 교통망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12) 나아가 재령강 하류에는 공업도시 겸이포와 서북선 최대 규모의 항만시설을 갖춘 진남포(鎭南浦)가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운하를 통해 재령강 수계와 연결될 경우 사리원은 배후 공업지대와 항만도시의 경제적 이익까지 흡수할 수 있었다(福村淸治, 1936: 159).
문제는 두 사업이 총독부 예산 안에서 경합하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운하 굴착에는 약 100만 엔의 공사비가 예상되었는데, 이는 12~15만 엔 수준이던 도립의원 설립비를 크게 상회하는 규모였다.13) 총독부는 빠르면 1928년, 늦어도 1929년 운하 공사에 착수할 계획 아래 1928년도 예산안을 편성하고 있었다. 제국의회(帝國議會) 통과 또한 확실시되는 상황이었으나, 해당 예산안에 도립의원 설치비는 포함되지 않았다.14) 사리원 측 입장에서는 운하와 도립의원 모두 지역 발전을 위한 핵심 사업이었지만, 총독부의 우선순위는 어디까지나 운하 굴착에 있었던 것이다.
도립의원 설치비가 예산안에서 제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실업협회는 대응 방안으로 사리원 주민대회 개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인과 일본인 각각 10명씩으로 구성된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준비위원회는 주민대회 준비와 병행하여 2월 18일 개회 예정이던 황해도평의회와 총독부에 준비위원 10명을 파견해 도립의원 설치를 진정하기로 결정하였다.15)
2월 18일 개최된 사리원 주민대회에서는 주민들이 “열광적으로 운집”한 가운데 각계 인사들은 연단에 올라 “대사리원을 건설함에는 일치 협력하여 필사(必死)의 활동을 하자”라는 열변을 토했다.16)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대회는 도립의원 설립, 재판소 설치, 시구개선(市區改善) 등 세 가지 요구사항을 담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17) 또한 참석자들은 설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상설 조직으로 ‘도립병원 설치 촉진기성회’(道立病院設置促進期成會, 이하 기성회)를 조직하고 즉석에서 역원을 선출하였다.18)
기성회에 대해 당시 언론은 “도립병원기성회라는 것은 실업협회의 후위단체이고, 실업협회는 기성회의 전위대”라고 평가하였다.19) 실제로 기성회 회장 아와 히로시(阿波弘司)와 부회장 이덕기ㆍ나카마에 이노스케(中前伊之輔)는 모두 당시 실업협회의 회장 및 부회장을 겸임하고 있었으며, 이외의 위원 구성 또한 상당 부분 중복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도립의원과 관련된 주요 의사결정이 여전히 실업협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기성회는 독립적인 조직이라기보다 주민동원과 지역 여론의 결집, 그리고 사리원 지역사회의 대표성을 대외적으로 부각하기 위한 외곽조직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기성회 명의로 황해도와 총독부에 전달된 결의안에는 도립의원 설립이 “2만 인구를 가진 당지(當地, 사리원) 주민의 존립에 관한 문제”이며 모든 주민이 그 실현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1929년 내로 “도립의원의 설립이 반드시 실현될 수 있도록 거듭 고려”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조선총독부, 1928~1931: 1193). 이와 동시에 실업협회 및 기성회 부회장이자 봉산군의 도평의회의원인 나카마에는 1928년 2월에 개최된 황해도평의회 석상에서 도당국에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였다(조선총독부, 1928~1931: 1198). 그러나 이러한 전방위적인 운동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의 대응은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결국 총독부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였다.

3) 비용 분담 제안과 부지 매수를 둘러싼 갈등

1925년 자혜의원이 도립의원으로 전환되면서 공공의료 운영 부담은 지방재정으로 전가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식민지기 지방재정은 구조적으로 취약하였기 때문에 지방비만으로 도립의원 설립 비용을 충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총독부의 재정적 보조는 필수적이었다. 도립의원 체제가 지방재정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설립 여부에 관한 최종 결정권이 총독부에 집중되어 있었던 배경에도 이러한 재정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재정 문제로 인해 도립의원 설립이 계속 지연되자, 사리원 측은 총독부를 설득하기 위한 방안으로 설립 비용의 일부를 지역사회가 직접 부담할 것을 제안하였다. 비용 분담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설립 부지의 제공이었고, 다른 하나는 건설비 일부를 주민 기부금으로 충당하는 방식이었다.
먼저 부지 제공부터 살펴보면, 이는 사실 1923년 총독부가 자혜의원 증설안을 발표했을 당시부터 추진되던 사안이었다. 사리원 주민들은 자혜의원 유치를 위해 구시가와 신시가를 연결하는 북리(北里)에 약 1만 평 규모의 부지를 제공하겠다고 총독부에 약속하였다(조선총독부, 1928~1931: 1168). 문제는 토지 매입 비용이었다. 해당 부지는 사리원 시가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당시뿐 아니라 향후에도 지가(地價) 상승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시가(時價)대로 토지를 매입할 경우 그 비용은 주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를 가능성이 컸다.
이에 사리원 측은 사리원 개발의 ‘공공성’을 강조하면서 토지 소유자들에게 상당한 희생을 요구하였다. 구체적으로 1평당 0.35엔이라는 낮은 가격에 양도하도록 압박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토지 소유자들은 결국 해당 조건으로 양도 계약을 체결하였다.20)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부지를 확보한 사리원 측은 총독부에 자혜의원 설립 청원과 함께 부지 제공 계획을 제출했다. 총독부는 측량계원(測量係員)을 파견하여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해당 부지가 설립 예정지로서 적당하다는 판단을 내렸다(조선총독부, 1928~1931: 1168). 물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자혜의원 설립이 중단되면서 사업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부지는 이후 1928년 다시 본격화된 도립의원 설립 국면에서 사리원 측의 주요한 협상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다음으로 건설비 기부 문제를 살펴보자. 당시 총독부와 황해도가 예상한 도립의원 건설비는 약 12만 엔 수준이었다. 그러나 총독부가 재정 부담을 이유로 도립의원 설립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사리원 측은 건설비 가운데 2만 엔을 분담할 의사가 있음을 전달했다. 이후 실업협회 주도하에 사리원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기부금 모집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조선총독부, 1928~1931: 1189).
황해도 당국은 사리원 측의 재정 분담안을 근거로 다시 한 번 총독부 설득에 나섰다. 황해도는 사리원도립의원 설치 문제가 “1923년 이래 현안이자 지방민의 요망(要望)”으로 “도치(道治) 상의 필요”에 따라 여러 차례 설치계획을 상신했음에도 총독부의 “확실한 지시가 없어” 사업이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어 사리원 주민들이 부지 제공과 건설비 분담까지 감수하며 도립의원 설립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도치 상 이제 와서 이를 억지할 수 없기 때문에 1929년에는 반드시 이것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총독부의 승인을 요청했다(조선총독부, 1928~1931: 1178).
이처럼 황해도 당국이 적극적으로 총독부를 설득한 배경에는, 사리원도립의원 설립이 계속 지연되거나 무산될 경우 그 여파가 도정(道政) 운영 전반에까지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하고 있었다. 즉 단기적인 재정부담을 이유로 사업을 미룰 경우, 오히려 지역 여론 악화와 행정 불신 등 더 많은 통치 비용을 지불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사리원의 적극적인 대응과 황해도 당국의 설득 끝에, 사리원도립의원 설립 계획은 마침내 1929년도 총독부 예산안에 편성되었다. 이는 수년간 전개된 사리원도립의원 건립 운동이 마침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순간이었다. 그러나 도립의원 공사의 첫 삽을 뜨기도 전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번에도 문제의 중심에는 사리원 운하가 자리하고 있었다.
1929년 착공 예정이던 사리원 운하가 도립의원 예정 부지 한가운데를 통과하게 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는 곧 사실로 확인이 되었다.21) 만약 예정대로 운하 공사가 진행될 경우, 도립의원 부지는 사실상 둘로 절단되어 정상적인 활용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컸다. 물론 일각에서는 도립의원 부지를 보존하기 위해 운하 노선을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2) 그러나 현실적으로 도립의원 건립을 위해 운하의 물줄기를 변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식민지에서는 산업 개발의 필요성이 언제나 지역의료의 ‘공공성’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설립 부지 문제로 인해 도립의원 공사가 진전을 보이지 못하자, 1928년 9월 기성회는 운하 문제 해결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논의 끝에 운하로 인해 제외되는 5천 평 대신 인근 토지 5천 평을 새롭게 편입해 총 1만 평 규모를 유지하는 방안이 채택되었고, 기성회는 이를 추진하기 위한 기지교섭위원(基地交涉委員)을 구성했다.23) 그러나 부지 매입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923년 평당 0.35엔에 제공하기로 했던 토지는 1928년에는 평당 5엔 수준으로 가격이 급등했다(조선총독부, 1928~1931: 1188). 사리원 도시 개발의 진전으로 지가가 크게 상승했기 때문이다. 결국 기성회로서는 토지소유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매수 가격을 인상하는 것이 불가피하였다.
일부 토지 구역의 변경과 매수 가격의 인상은 사리원 측이 예측하지 못한 커다란 변수였다. 1929년에 기공하기 위해서는 1928년 말이나 늦어도 1929년 초에 부지 매입이 완료되어야 했지만, 1928년이 지나갈 때까지 기성회의 교섭위원들과 토지소유자 간의 교섭은 전혀 진척이 없었다. 부지 매수가 지연되면서 실업협회와 기성회에 대한 지역사회의 불만도 커졌다.24) 1929년 1월에는 기존 실업협회를 비판하는 새로운 유지 단체인 번영회(繁榮會)가 창설되었고, 실업협회는 창립 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25)
여기에 실업협회가 배포한 선전물이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26) 선전물에는 도립의원 건설비를 주민 기부로 충당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실제로는 특별부과금 형태의 징수가 내부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27) 사전에 알려진 바와 다른 내용이 실업협회의 명의로 배포되자 사리원 일대에서는 비용 부담 방식에 대한 혼란이 야기되었다.28) 게다가 선전물 배포가 실업협회 내 일본인 역원들의 독단으로 인해 전개된 사안이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실업협회의 내홍이 심화되었다.29)
이 사건으로 실업협회 운영을 둘러싼 조선인과 일본인 유지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조선인 유지들은 일본인들의 독단적인 협회 운영을 비판하며 부회장 이덕기를 중심으로 결집했고, 별도의 조직 구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30) 결국 실업협회는 조선인과 일본인 세력으로 분열되며 사실상 기능이 정지되었다. 그러나 도립의원 설립 자체는 중단되지 않았다. 1929년 6월 총독부의 최종 인가가 내려졌고, 이후 도립의원 관련 의사결정은 면협의회(面協議會), 실업협회, 상공협회(商工協會), 기성회, 시민대표, 기자 등 16인으로 구성된 협의회가 담당하게 되었다.31) 협의회는 비용 분담과 공사 입찰 등을 추진하며 사업을 이어갔다.32)
하지만 가장 큰 문제였던 부지 매수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기성회는 장기간의 협상 끝에 매수 가격을 평당 1.4엔 수준까지 낮추는 데 성공했으나(조선총독부, 1928~1931: 1156), 기부금 모집이 부진해 매수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33) 이에 기지교섭위원장 아와 히로시와 부위원장 최건호(崔健鎬)가 미납 기부금에 대한 지불보증을 자청했고, 다른 위원들도 이에 동참했다.34) 이들의 책임 보증으로 부지 매수 문제가 최종 해결되면서, 1923년부터 이어진 사리원도립의원 설립 운동은 1929년 12월 공사 착공으로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었다.

4. 설립 비용의 분담 구조와 ‘수익자부담원칙’

1) 임시호별할(臨時戶別割) 특별부과금 도입과 비용 조달

1929년 사리원도립의원 예산안이 최종 편성되면서 본격적인 설립에 들어갔다. 설립 예산은 총 116,800엔 규모로, 국고보조금 66,000엔(57%), 지방비 30,800엔(26%), 지역 주민 기부금 20,000엔(17%)으로 구성되었으며, 1929년과 1930년에 걸쳐 두 차례로 나누어 지급ㆍ징수될 예정이었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581). 기부금 규모 자체는 이미 유치 과정에서 주민들이 2만 엔의 부담을 약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조달하고 분담할 것인가에 있었다.
당초 계획은 주민들의 자발적 기부를 통해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595). 그러나 1928년 정무총감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郎)가 하달한 통첩이 상황을 바꾸었다. 이케가미는 공공사업 재원 마련을 위한 기부금 모집과 이에 대한 지방관의 직ㆍ간접적 개입이 “부담의 공평과 중정(中正)을 방해”한다고 비판하면서, “진정의 자발적인 독지(篤志) 기부”를 제외한 일체의 기부금 모집을 금지하고 이미 진행 중인 모집 역시 원칙적으로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다만 그는 이를 대신할 방안으로 “부담 능력에 따라 특별세, 제한외부과(制限外賦課), 불균등 또는 일부 부과 등에 의하여 재원을 구해야 한다”고 명령했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1088-1089). 즉 비공식적 기부금 대신 특별부과금이라는 제도적ㆍ공식적 경로를 통해 재원을 조달할 것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는 기부금 모집에 수반되던 각종 폐해를 방지하려는 조치로서 일정한 의미를 지녔으나, 궁극적으로 조선 사회가 지역개발의 비용을 부담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특별부과금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면 재정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7년 면제(面制) 시행 이후 면은 식민지 지방통치의 최말단 행정기관으로서 행정ㆍ토목ㆍ산업ㆍ위생 등 다양한 사무를 담당하며 그 재원을 자체적으로 확보해야 했다. 면 재정의 재원은 교부금, 면 재산, 잡수입, 기부금, 면부과금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면 재산 확보는 조선 사회의 저항으로 쉽지 않았고 교부금 역시 국세(國稅)ㆍ도세(道稅)에 연동되어 세입 확대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면 재정은 면부과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1920년대 면부과금은 전체 면 재정의 76.5%를 차지했다. 면부과금은 지세할(地稅割)과 호별할(戶別割)이 전체의 95%를 점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호별할은 각 가구의 담세력(擔稅力)을 기준으로 차등 부과하는 누진세(累進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정태헌ㆍ박우현ㆍ주동빈, 2023: 413).
이케가미의 통첩이 하달되자 사리원 역시 면특별부과금 방식을 적극 검토하게 되었다. 사리원면은 1929년 8월 5일 면협의회를 개최하여 「면특별부과금 임시호별할 신설의 건(面特別賦課金臨時戶別割新設ノ件)」을 상정했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601). 의장을 맡은 면장 우사미 세이코(宇佐見盛光)는 도립의원 설립 비용의 일부를 면민(面民)이 부담하는 것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편익을 받는 수익자의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원칙적으로는 국고보조금과 지방비로 충당해야 하나 지방재정의 한계로 주민 부담이 불가피하며, 기존의 기부금 모집은 형평성 문제와 각종 폐단이 존재할 뿐 아니라 정무총감 통첩의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특정 유지들의 자발적 기부에 의존하기보다 면이 직접 특별부과금을 신설해 공평하게 재원을 조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다만 그는 생활고로 부담 능력이 없는 주민은 부과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덧붙였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602-603).
우사미의 발언은 ‘수익자부담원칙’을 정당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물론 ‘수익자부담원칙’ 자체는 당시 지역개발사업에서 흔히 활용되던 재원 조달 논리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적 관행에 가까웠을 뿐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재정 구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를 적극 강조한 것은 식민지 지방행정을 대표하는 면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표 2>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 사리원면 재정 수입의 중심은 면영(面營) 전기 수입(42%)과 면부과금(20%)이었다. 반면, 기본재산 수입과 사용료ㆍ수수료, 교부금은 모두 합쳐도 4.2%에 불과했다. 더욱이 전기 수입의 60%는 운영비로 지출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조세 수입으로서의 의미는 제한적이었다. 우사미의 표현대로 사리원면은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여유가 없으며, 달리 특별히 적당한 재원도 없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특별부과금 신설 외에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우사미는 “기부금의 성격”과 “민간의 선의적 부담”을 고려하여 호별할을 특별부과금 세목으로 신설하고자 했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602-603). 임시호별할 등 호세(戶稅) 계통의 세금은 1934년 개인소득세제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누진적인 세금으로, 각 가구의 소득과 재산을 기준으로 등급을 구분한 뒤 상위 등급으로 갈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구조였다.35) 따라서 이 세목을 채택했다는 것은 고소득층이 설립 비용을 더 많이 부담하겠다는 의미였다. 이후 도 당국에 제출된 「특별부과금 임시호별할 신설 사유서(特別賦課金臨時戶別割新設事由書)」에서도 “영속성이 부족한 하층 주민으로서 그 생활에 곤궁을 겪는 자에 대해서는 이를 부과하지 않는 것이 실정에 적합”하다고 밝혀 그 선택 이유를 분명히 했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595).
빈민층에게 부담을 전가하지 않는 것은 사업의 정당성과 추진 동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문제였다. 또한 담세력이 없는 계층에까지 부과할 경우 조세 저항에 직면할 가능성도 컸다. 그런 점에서 오랜 지역 현안이었던 도립의원 설립을 큰 마찰 없이 신속하게 추진해야 했던 사리원 측에게 임시호별할 특별부과금은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재원 조달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안건은 출석 면협의원 전원의 찬성으로 만장일치 통과되었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604).
이후 사리원은 「면특별부과금 임시호별할 부과 징수 규정(面特別賦課金臨時戶別割賦課徵收規程)」을 제정하여 징수 방식을 구체화하였다. 특별부과금은 1929년과 1930년 2년에 걸쳐 징수되며, 대상은 “독립된 생계를 영위하며 연액 1,100엔 이상의 소득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로 한정되었다. 또한 “소득, 자산 또는 생계 정도에 따라 등급”을 구분하여 차등 부과하도록 하였으며, 각 등급과 구간별 부과액은 “면 협의회의 자문을 거쳐 면장”이 결정하도록 규정하였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600). 행정적 절차가 마무리되자, 사리원을 비롯한 봉산군 각 면은 본격적인 특별부과금 징수에 착수하였다.

2) 특별부과금 분담의 계층적ㆍ지역적 불균등

설립 비용의 징수 방식과 함께 주요하게 논의된 사항은 각 지역의 비용 분담 비율이었다. 이에 대해 봉산군을 비롯한 황해도 각 군은 협의를 거쳐, 총 2만 엔 중 1만 5천 엔은 봉산군 내 각 면이 부담하고 나머지 5천 엔은 재령ㆍ신천ㆍ안악(安岳)ㆍ송화(松禾)ㆍ평산ㆍ서흥(瑞興)ㆍ황주 등 인접 7개 군이 분담하기로 결정하였다. 구체적인 특별부과금 규모는 도립의원이 설립되는 봉산군이 전체의 75%, 나머지 군들이 각각 약 1~4% 수준을 분담하였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581). 이들 7개 군은 모두 봉산군과 인접한 지역으로, 사리원에 도립의원이 설립될 경우 의료 접근성이 크게 개선될 수 있는 곳들이었다.
그렇다면 전체 설립 비용의 75%를 부담한 봉산군 내부에서는 비용이 어떻게 분담되었을까.이에 대해서는 <표 3>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주목되는 점은 도립의원이 설립되는 사리원의 특별부과금 부담 비율이 8.5%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리원이 약 1만 4천 엔상당의 부지를 제공한 점을 고려하여 특별부과금 부담액을 경감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지 대금까지 포함할 경우 사리원의 총 부담액은 1만 5천 엔을 상회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가장 큰 비용을 부담한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도립의원이 설립될 경우 사리원이 그 편익을 제일 크게 누리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고려하면, 이러한 배분은 일정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각 면별 특별부과금 규모를 살펴보면, 사인면이 1,702엔(11.4%)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고, 이어 초와면 1,630엔(11%), 사리원 1,270엔(8.5%), 산수면 1,135엔(7.6%), 구연면 1,043엔(7%) 순이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부담 규모가 작은 지역은 만천면(4.6%), 문정면(5%), 영천면(5.4%) 등이었다.
<표 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봉산군 각 면이 부담한 특별부과금은 많게는 1,702엔에서 적게는 693엔까지 두 배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격차가 발생한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봉산군이 어떠한 기준에 따라 지역별 분담금을 산정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호별할은 소득과 자산 등 담세력을 기준으로 가구별로 차등 부과되는 누진세였기 때문에, 실제 부담은 각 면의 상위 계층에 집중되었다. 실제로 <표 4>에서 보이듯 특별부과금은 각 면의 전체 호수 가운데 상위 호수에게만 부과되었는데, 납세 호수는 적게는 88호에서 많게는 486호까지 상당한 편차를 보였다. 이를 다시 납세 1호당 부과액으로 환산해 보면, 부지 대금을 부담한 사리원을 제외할 경우 초와면이 9.3엔으로 가장 높았고, 산수면ㆍ서종면ㆍ덕재면은 3.5엔으로 가장 낮았다.
그러나 특별부과금의 산정 기준을 납세 호수에 한정하지 않고 면세(免稅) 호수까지 포함한 전체 호수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된다. 사리원을 제외한 모든 면의 1호당 부과금 규모가 1엔 수준으로 수렴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면특별부과금 임시호별할 부과 징수 규정」 제1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당 규정은 “부과금 총액은 1호당 1엔 이내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각 면의 부담액이 전체 호수를 기준으로 산정되었음을 의미했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600). 실제로 봉산군 역시 호별할 산정 방식에 대해 “호수를 표준으로 하여 균등한 비율에 따라 각 면(面)에 배부”했다고 설명하고 있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579). 즉 특별부과금은 “(전체 호수×1엔) / 부과 호수”라는 수식으로 산출되었던 것이다. 이는 도립의원 설립의 편익을 봉산군 모든 면이 누린다는 점을 고려하여 지역별 분담금을 균등하게 배정한 결과였다.
문제는 이러한 산정 방식이 각 면의 경제적 조건과 담세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호별할이 본래 담세력에 따라 차등 부과되는 누진세였음을 고려하면, 각 면에 할당되는 부담액 역시 지역 간 경제력 격차를 반영해 조정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체 호수를 기준으로 기계적으로 부담액이 배정되었고, 그 결과 경제력이 높은 부유면(富裕面)에 비해 경제력이 낮은 영세면(零細面)의 실질적 조세 부담이 훨씬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럴 경우 영세면은 할당된 특별부과금을 충당하기 위해 면세점을 낮추거나 부과 호수의 부담액을 높이는 방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표 5>에 나타난 면세점의 차이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잘 보여준다. 같은 봉산군 관내임에도 각 면의 면세점은 180엔에서 1,100엔까지 큰 격차를 보였다. 가장 낮은 지역은 동선면으로 면세점이 180엔에 불과하였으며, 이어 토성면 300엔, 문정면ㆍ사인면ㆍ초와면 400엔, 구연면ㆍ덕재면 500엔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사리원과 영천면은 모두 1,000엔 이상의 높은 면세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동선면과 사리원의 면세점을 비교하면 그 차이는 무려 6배에 달했다. 봉산군 전체 평균 면세점은 563엔 수준이었는데, 평균 이상을 기록한 면은 전체 14개 면 가운데 5개 면에 불과하였다.
1929년 조선인 일용직 노동자의 연평균 임금이 약 491엔 수준이었다는 점을고려하면, 상당수 지역들의 면세점은 매우 낮게 설정되어 있었다(정태헌, 1996: 343). 특히 동선면의 면세점인 180엔은 당시 평균 임금은 물론 최소한의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곽건홍, 2005: 40). 이는 특별부과금 도입 당시 내세웠던 “생활이 곤궁한 하층민에게는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는 취지와도 배치되는 결과였다(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595).
이처럼 각 면의 면세점 격차가 컸던 이유는 특별부과금이 지역 간 경제력 차이를 반영하지 않은 채 인구 규모에 비례해 기계적으로 배분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구는 많지만 경제력이 취약한 영세면일수록 더 큰 조세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영세면은 할당된 특별부과금을 납부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주민을 과세 대상에 포함시켜야 했고, 이 과정에서 면세점은 평균 임금 이하 수준까지 낮아졌다. 결국 저소득층까지 특별부과금의 과세 범위에 편입되면서, 제도 도입 당시 강조했던 “민간의 선의적 부담”이라는 취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소득 구간별 납세 호수와 납세 금액의 분포에서도 확인된다. 영세면인 동선면의 경우 납세 호수의 90%, 토성면은 약 85%가 700엔 이하 소득층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면 부유면인 사리원과 영천면은 납세 호수의 100%, 기천면은 납세 호수의 56%가 1,000엔 이상의 소득 구간에 분포하고 있었다. 납세 금액의 구성에서도 차이는 뚜렷했다. 사리원과 영천면은 전체 납세 금액의 대부분이 1,000엔 이상에서 나왔던 반면, 동선면과 토성면은 상당한 비중이 700엔 이하에서 부담되었다. 이는 경제력이 낮은 면일수록 특별부과금을 충당하기 위해 과세 범위를 하층민까지 확대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애초에 도립의원 건설비를 기부금 대신 임시호별할 특별부과금으로 조달하고자 했던 이유는, 기부금 방식이 지닌 불투명성과 과도한 사회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서였다. 즉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누진적인 성격을 가진 호세 계통의 세금을 활용함으로써 공공사업 비용의 부담을 일정 수준 이상의 유산층에게 한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운영 과정에서는 지역 간 경제력 격차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채, 단순 인구 비례 방식으로 부담액이 배정되면서 제도 설계 취지와 점차 괴리되어 갔다.

5. 결론

사리원도립의원의 설립 과정은 ‘식민지 공공성’이 단순한 담론 차원을 넘어 현실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경의선 연선에 위치한 사리원은 교통ㆍ지리적 이점을 지렛대로 황해도 제2도립의원 유치에 나섰으며, 해주 도립의원의 지리적 편중과 1919년 콜레라 유행을 핵심 논거로 삼았다. 지역의료의 ‘공공성’을 강조한 이러한 논리는 황해도 지역의료 강화와 사리원 지역개발이라는 이해관계를 일치시킴으로써 봉산군, 나아가 황해도 전체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사리원도립의원은 지역의료 강화라는 차원에서 일정한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공공성’이 물리적 형태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지역 차원의 공감대, 그 이상이 필요하였다. 지방재정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총독부의 인허가와 재정 지원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황해도 지역사회와 지방행정 당국의 지지를 확보했음에도 도립의원 설립은 오랜 기간 지연되었으며,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경합 속에서 도립의원은 운하 굴착에 우선순위를 내주었다. 식민지 조선의 개발-수탈을 핵심 과제로 삼았던 총독부에게는 공공의료보다 산업ㆍ토목 개발이 더 중요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설립이 무산될 위기에 봉착하자 사리원 주민들은 돌파구로서 ‘수익자부담원칙’을 제시하였다. 부지 대금과 건립 비용 일부를 지역사회가 부담하겠다는 제안을 통해 비로소 총독부의 전향적 자세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인허가 이후에도 부지 매수와 토지 소유자 설득, 부지 변경 문제, 실업협회 내부 갈등, 특별부과금의 분담 문제 등 수많은 난관이 이어졌다. 결국 사리원은 숙원을 실현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경제적ㆍ사회적 비용을 감수해야 했다.
공공의료는 보건과 의료를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가 보장해야 할 기본권으로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취약계층과 의료 접근성이 낮은 지역의 주민에게도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핵심 인프라였던 도립의원의 설립과 운영은 마땅히 국가 혹은 지방자치단체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었다. 그러나 식민지의 공공의료는 기본권이 아닌 오직 통치의 영역에서만 사고되었다. 총독부는 철저히 통치상의 비용ㆍ편익의 관점에서 접근했으며, 재정적 비용보다 통치상의 편익이 더 크다고 판단될 때에만 제한적으로 이를 추진하였다. 그렇기에 지역사회가 아무리 ‘공공성’의 논리를 내세우더라도, 총독부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결국 공공의료에 필요한 비용 자체를 낮추는 방법밖에 없었다. 지역사회가 도립의원 설립 비용을 분담함으로써 비용을 낮추고 편익을 높이자, 총독부는 비로소 움직였다.
총독부는 ‘수익자부담원칙’을 통해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의료시설 건립이라는 외형적 성과를 식민 통치의 근대성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 식민지의 공공의료는 지역 주민들의 필요와 헌신을 통해 구축되었음에도 식민 권력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통치 기제로 귀속되는 모순적 구조를 띠게 되었다. 공공의료의 주체여야 할 총독부는 지역적 열망을 이용하여 그 책무를 지역사회에 전가함으로써, 공공의료를 저비용ㆍ고효율의 통치술로 전환시켜 나갔다.
본 연구는 사리원도립의원의 설립 과정을 통해 도립의원의 제도적ㆍ재정적 구조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그 속에 내포된 구조적 모순을 밝힘으로써 식민지 공공의료의 성격과 한계를 규명하였다. 다만 단일 사례를 중심으로 한 분석이라는 점에서 식민지 도립의원 전반의 상을 일반화하기에는 한계를 지닌다. 이는 향후 다른 지역 도립의원의 설립 과정과 재정 구조, 지역사회의 대응에 대한 비교 연구를 축적함으로써 보완해 나가고자 한다.

Notes

1) 「沙里院住民의 慈惠醫院設置運動」, 『朝鮮日報』, 1926년 1월 31일.

2) 「沙里院住民의 慈惠醫院設置運動」, 『朝鮮日報』, 1926년 1월 31일.

3) 「黃海道議(一)」, 『東亞日報』, 1928년 2월 29일.

4) 「醫療機關擴張」, 『朝鮮日報』, 1921년 3월 6일.

5) 「醫院增設中止」, 『朝鮮日報』, 1923년 12월 17일.

6) 「沙里院住民의 慈惠醫院設置運動」, 『朝鮮日報』, 1926년 1월 31일.

7) 「鳳山郡沙里院 慈惠醫院設置案」, 『朝鮮日報』, 1926년 2월 2일.

8) 「沙里院住民의 慈惠醫院設置運動」, 『朝鮮日報』, 1926년 1월 31일.

9) 「鳳山郡沙里院 慈惠醫院設置案」, 『朝鮮日報』, 1926년 2월 2일.

10) 도립의원 설립과 마찬가지로 운하 굴착 역시 1920년대 초부터 사리원 지역개발의 주요한 담론이었다. 「沙里院運河工事」, 『朝鮮日報』, 1925년 6월 5일.

11) 「沙里院運河は可能性がある, 市民から道知事へ熱心に要望」, 『京城日報』, 1925년 12월 12일.

12) 「黃海關門 沙里院에 運河와 都市 計劃」, 『東亞日報』, 1927년 6월 18일.

13) 「百萬圓豫算의 沙里院運河問題」, 『東亞日報』, 1927년 6월 16일.

14) 「沙里院運河 四年度에 實現?」, 『東亞日報』, 1928년 2월 11일.

15) 「沙里院 實業協會는 諸施設을 爲하야 市民大會를 準備」, 『朝鮮日報』, 1928년 2월 16일.

16) 「沙里院市民大會 十八日當地旭座에서 開催」, 『朝鮮日報』, 1928년 2월 23일.

17) 「沙里院市民大會 道立病院, 裁判所設置와 市街地整理速成을 運動」, 『朝鮮日報』, 1928년 2월 22일.

18) 「沙里院市民大會 十八日當地旭座에서 開催」, 『朝鮮日報』, 1928년 2월 23일.

19) 「沙里院時話 實業協會의 責任」, 『東亞日報』, 1928년 12월 14일.

20) “지역민들은 토지 소유자 등에 대해 1평 35전으로써 언제라도 양도하도록 상호 사리원 개발에 대해 희생적으로 계약을 체결했다”(조선총독부, 1928~1931: 1168).

21) 「沙里院道立病院 明年에 工事着手」, 『東亞日報』, 1928년 8월 18일.

22) 「沙里院時話 無誠意한 工事」, 『東亞日報』, 1928년 8월 29일.

23) 「沙里院에 建設할 道立病院基地」, 『東亞日報』, 1928년 8월 29일; 「沙里院 道立醫院敷地 購入交涉」, 『朝鮮日報』, 1928년 10월 3일.

24) 「沙里院時話 實業協會의 責任」, 『東亞日報』, 1928년 12월 14일.

25) 「繁榮會發起 沙里院에서」, 『東亞日報』, 1929년 1월 21일.

26) 「쓸데없는 『삐라』로 問題를 惹起」, 『東亞日報』, 1929년 2월 18일.

27) 「病院, 運河等 今年內實現?」, 『東亞日報』, 1929년 1월 27일.

28) 「『삐라』 問題中心 實業協會內訌」, 『東亞日報』, 1929년 2월 21일.

29) 「쓸데없는 『삐라』로 問題를 惹起」, 『東亞日報』, 1929년 2월 18일.

30) 「實業協會內訌 朝鮮人은 脫退」, 『東亞日報』, 1929년 4월 24일.

31) 「沙里院道立醫院 補助金이 又問題」, 『朝鮮日報』, 1929년 6월 23일.

32) 「黃海道沙里院에 道立病院設置」, 『朝鮮日報』, 1929년 8월 9일.

33) 「사리원 도립병원 기지 문제 낙착」, 『東亞日報』 1929년 10월 22일.

34) “사리원 면장은 그 위원들의 책임 문제를 담보한다고 하였다는 바, 수년 전부터 숙제의 도립병원의 설치는 시민 일동과 각 위원들의 열성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더라.” 「사리원 도립병원 기지 문제 낙착」, 『東亞日報』 1929년 10월 22일.

35) 마쓰모토 다케노리(松本武祝)에 의하면 호세 계통의 세금은 지방세입의 40%, 조세 수입 전체의 20%에 육박하는 비중을 차지했으며, 누진세의 성격상 면의 상위 소득자에게 과세가 집중되었다. 1928년 어느 면에서는 과세대상 1,075호 중 상위 6개 가구가 전체 호세의 35%를 부담하기도 했다(松本武祝, 1998: 69).

그림 1.
1926년 기준 황해도 철도 노선
(帝國記念協會, 1922)
Figure 1. Railway lines in Hwanghae Province as of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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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910~32년간 해주ㆍ사리원 인구 추이 비교 (단위 : 명)
Figure 2. Comparison of population trends in Haeju and Sariwon from 1910 to 1932 (number of per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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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1930년 해주와 사리원 의료 종사자 비교(단위 : 명)
Table 1. Comparison of medical personnel in Haeju and Sariwon in 1930 (number of persons)
구분 의료 인력 수
인구 천명당
조선 전체 해주군 봉산군 조선 전체 해주군 봉산군 해주면 사리원면
의사 1,993 19 9 0.09 0.10 0.08 0.80 0.38
의생 3,704 21 23 0.17 0.12 0.21 0.88 0.96
표 2.
1928년 사리원면 세입ㆍ세출 총액 및 주요 5대 항목 구성(단위: 엔)
Table 2. Total Amount and Composition of Major 5 Revenue and Expenditure Items of Sariwon-myeon in 1928 (Unit: Yen)
세입 세출
기본재산 179 0.2% 사무비 29,705 42.7%
사용료ㆍ수수료 2,143 2.2% 전기비 24,128 25.3%
전기 수입 39,964 41.9% 토목비 15,670 16.4%
교부금 1,681 1.8% 권업비 1,852 1.9%
부과금 19,684 20.6% 위생비 4,880 5.1%
세입 총액 95,333 100.0% 세출 총액 95,333 100.0%
표 3.
1929ㆍ30년간 봉산군 각 면별 특별부과금(단위 : 엔)
Table 3. Special levies by myeon in Bongsan-gun, 1929–1930
면명 1929 1930 합계
사리원(沙里院) 635.25 635.25 1,270.5 (8.5)
동선면(洞仙面) 497 497 994 (6.6)
토성면(土城面) 488 488 976 (6.5)
산수면(山水面) 567.5 567.5 1,135 (7.6)
구연면(龜淵面) 521.5 521.5 1,043 (7)
덕재면(德在面) 519 519 1,038 (6.9)
쌍산면(雙山面) 510.5 510.5 1,021 (6.8)
기천면(岐川面) 444.5 444.5 889 (5.9)
초와면(楚臥面) 815 815 1,630 (10.9)
문정면(文井面) 378 378 756 (5)
서종면(西鍾面) 519.5 519.5 1,039 (6.9)
영천면(靈泉面) 406.5 406.5 813 (5.4)
만천면(萬泉面) 346.5 346.5 693 (4.6)
사인면(舍人面) 851.25 851.25 1,702.5 (11.4)
합계 7,500 7,500 15,000 (100)

(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582-583)

* 괄호는 점유율, 단위 %

표 4.
봉산군 각 면별 특별부과금 산정 기준(단위: 호, 엔)
Table 4. Criteria for special levies by myeon in Bongsan-gun (Unit: Households, Yen)
구분 전체 호수(a) 납세 호수(b) 부과금(c) 납세 1호당 부과금(c/b) 전체 1호당 부과금(c/a)
사리원 3,645 486 1,270.5 2.6 0.3
구연면 1,054 235 1,043 4.4 1.0
기천면 900 246 889 3.6 1.0
덕재면 1,051 298 1,038 3.5 1.0
동선면 1,007 179 994 5.6 1.0
만천면 700 88 693 7.9 1.0
문정면 764 148 756 5.1 1.0
사인면 1,720 286 1,702.5 6.0 1.0
산수면 1,150 327 1,135 3.5 1.0
서종면 1,050 296 1,039 3.5 1.0
쌍산면 1,035 237 1,021 4.3 1.0
영천면 822 160 813 5.1 1.0
초와면 1,647 176 1,630 9.3 1.0
토성면 988 233 976 4.2 1.0
표 5.
봉산군 각 면별 특별부과금 면세점(免稅點) 및 소득 구간별 납세 호수ㆍ금액
Table 5. Tax exemption threshold for special levies and the number of taxpaying households and amount by income bracket across myeon in Bongsan-gun
구분 면세점(엔) 소득 구간별 납세 호수(호)
소득 구간별 납세 금액(엔)
1,000엔 이상 1,000~700엔 700엔 미만 1,000엔 이상 1,000~700엔 700엔 미만
사리원 1,100 486 (100) - - 1,271 (100) - -
구연면 500 71 (30.2) 39 (16.6) 125 (53.2) 743 (71.3) 98 (9.4) 202 (19.3)
기천면 700 138 (56.1) 108 (43.9) - 731 (82.3) 158 (17.7) -
덕재면 500 45 (15.1) 110 (36.9) 143 (48) 435 (41.9) 349 (33.6) 254 (24.5)
동선면 180 8 (4.5) 11 (6.1) 160 (89.4) 459 (46.2) 104 (10.5) 431 (43.3)
만천면 550 11 (12.5) 37 (42) 40 (45.5) 512 (73.8) 114 (16.4) 67 (9.7)
문정면 400 19 (12.8) 64 (43.2) 65 (43.9) 431 (56.9) 220 (29.1) 105 (13.9)
사인면 400 82 (28.7) 24 (8.4) 180 (62.9) 1,258 (73.9) 97 (5.7) 348 (20.5)
산수면 600 131 (40.1) 140 (42.8) 56 (17.1) 850 (74.9) 217 (19.1) 67 (5.9)
서종면 550 85 (28.7) 64 (21.6) 147 (49.7) 735 (70.7) 117 (11.2) 188 (18.1)
쌍산면 700 50 (21.1) 187 (78.9) - 610 (59.8) 411 (40.2) -
영천면 1,000 160 (100) - - 813 (100) - -
초와면 400 22 (12.5) 27 (15.3) 127 (72.2) 813 (100) 140 (8.6) 264 (16.2)
토성면 300 14 (6) 19 (8.2) 200 (85.8) 309 (31.6) 132 (13.5) 537 (55)

(조선총독부 지방행정, 1929: 640-857)

* 괄호는 점유율, 단위 %

참고문헌 REFERENCES

1. 『東亞日報』, 『朝鮮日報』, 『朝鮮總督府官報』.

2. 福村淸治, 「沙里院邑」, 『朝鮮』 255 (1936).

3. 朝鮮鐵道協會, 「黃海線槪況」, 『朝鮮鐵道協會雜誌』 9-2 (1930).

4. 朝鮮總督府, 『大正8年虎列刺病防疫誌』 (朝鮮總督府, 1920).

5. 朝鮮總督府, 『朝鮮道立醫院槪況』 (朝鮮總督府, 1930a).

6. 朝鮮總督府, 『國勢調査報告:黃海道』 (朝鮮總督府, 1930b).

7. 朝鮮總督府, 『朝鮮道立醫院要覽』 (朝鮮總督府,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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