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This study examines the life and scholarly achievements of Lee Byeong-haeng (李炳幸, 1906–1975), who passed the Qualifying Examination for Korean Medical Doctors in 1954 and subsequently established himself as both a clinician and a theorist. By exploring one dimension of the debate over the “modernization” of traditional Korean medicine in which Lee played a significant role, the study seeks to illuminate the intellectual shifts that shaped the 1960s and 1970s, formative decades in the development of contemporary Korean medicine. The analysis draws on major works by Lee, including Annotation of Midnight-Midday Ebb-Flow Acupuncture 子午流注法註解, Ground and Reground: The Origins and Currents of Acupuncture 鍼道源流重磨, and more than twenty academic articles in journals such as Sylva Medica 醫林 and the Journal of Korean Medicine, along with contemporary medical periodicals and newspapers. These sources allow the study to reconstruct the debate over modernization from multiple perspectives.
Despite the absence of formal university training, Lee established himself as an authority in acupuncture through sustained self-directed study. In 1971, he developed Taegeuk Acupuncture 太極鍼法, a Korean acupuncture method that integrated the visceral theory of Sasang constitutional medicine 四象醫學, as formulated by Lee Je-ma 李濟馬, into acupuncture theory and practice. Defining yin-yang and deficiency-excess 陰陽虛實 as foundational principles, Lee Byeong-haeng emphasized the primacy of traditional clinical practice. As chair of the Academic Committee of the Korean Fellowship of Korean Medicine Practitioners 大韓漢方醫友會, an association of doctors licensed through the Qualifying Examination rather than through university training, he engaged in public debates with younger, university-trained practitioners over research methodology and educational structures. Whereas this younger cohort prioritized scientific modernization through Western medical frameworks and modern diagnostic technologies, Lee advocated for an educational approach grounded in traditional principles and emphasized the development of practical acupuncture techniques. Lee’s career provides an important case demonstrating that the internal logic of traditional Korean medicine could be sustained and developed through clinical practice, even in the absence of systematic state support or formal institutional training. His confrontation with the younger generation illuminates the tensions among practitioners who shared a common professional identity but pursued divergent visions of what the “modernization” of traditional Korean medicine should entail. His case thus offers a valuable historical perspective on the broader trajectory of modern Korean medicine.
1. 시작하는 글“1974년 7월 29일자 『약업신문(藥業新聞)』과 『보건신보(保健新報)』에 [실린] 이병행(李炳幸), 최주약(崔周若)을 한국침술사(韓國鍼術社) 고문으로 추대키로 결정하였다는 기사는 본인 등과 하등(何等)의 관계가 없음을 해명합니다.”1)
1974년 7월 31일 대한한의사협회 기관지 『한의사협보(漢醫師協報)』 제 3면에 위와 같은 해명문이 실렸다. 본인들의 의사와 관계 없이 일방적으로 고문으로 추대됐기에 엄중한 항의문을 보냈으니 회원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침술사는 침구사법 제정을 추진하며 한의사들과 대립하고 있던 한국침술연합회 회장 이우관(李祐觀)이 1974년 각 도의 지부장들과 함께 수립한 주식회사였다(이우관, 2008: 330). 따라서 위 해명문은 이병행(李炳幸, 1906~1975) 그리고 최주약(崔周若, 1912∼?)이 한의사로서의 정체성을 천명하며 침구사와의 연관성을 공식적으로 부정한 문장이자 당시 한의계에 존재하던 직역 간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당시 한의사와 침구사 사이에 존재했던 갈등에 대해서는 조병희가 근대성, 민족주의, 전문화 담론을 활용해 심도 깊게 살펴보았다(조병희, 2003: 87-126). 그리고 이현지는 1970년대 이후 1990년대를 관통하며 한의사가 전문직으로 자리잡는 역사적 과정을 잘 정리해 두었다(이현지, 2008a: 102-145). 이번 연구에서는 침구 영역을 둘러싼 전문직 간 집단 갈등이 아닌 해명문 당사자 이병행 개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2) 1964, 1968, 1972, 1973년, 그 이후에도 침구사 관련 법안이 제출되는 과정에서 곤란을 겪은 인사는 이병행이나 최주약만이 아니었다.3) 한의과대학 교수이자 침구사협회장이었던 이창빈(李昌彬)은 침구사법 제정과 관련된 발언 자체를 취소하는 해명서를 두 차례나 발표해야 했고,4) 경희대학교 한의학부장이자 한방병원장이었던 노정우(盧正祐)는 침구 대학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을 했다가 구설수에 올랐다.5) 침구사법 제정을 둘러싼 갈등은 1960~70년대 한의계의 핵심 현안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이병행을 포함한 여러 인사들이 소명과 해명의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1974년 당시 70세를 바라보던 원로 한의사 이병행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기에 상대 진영이라 할 수 있는 침구사 유관 단체 고문으로 위촉됐으며 그와 관련된 해명서를 발표해야만 했을까?
최근 레이샹린(雷祥麟)은 근현대시기 중국 중의학에 대해 중의학계가 중국 의학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이를 과학의 틀에 맞추어 재조합하려 한 결과 나귀도 아니고 말도 아닌 혼종(混種)의 의학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 그리고 중의학계가 중의학을 개혁하기 위해 수행했던 학문적 노력은 중의학을 국가에 동화시키려는 정치적 목적과 분리해서 살펴볼 수 없다고도 평가했다(레이샹린, 2021: 257-262). 한국의 경우 일제 강점기를 거쳐오면서 서양 의학 위주의 의료 정책이 펼쳐졌고, 해방 이후에도 그 기조는 유지됐다(박윤재, 2011a: 349-355).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추진된 의료 법제화는 국가 기관의 의료인과 국민에 대한 통제, 전문가 주도의 의료 전문화 그리고 자유방임체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이주연, 2010: 427). 다만 한의학과 관련된 의료 정책은 한의사의 자격 요건을 강화하는 것, 불법 의료 행위를 단속하는 것 외에 별달리 추진되지 않았다. 서양 의학에 비해 제도적 지원이 미약했던만큼 정부의 개입이 적었고 그 결과 한의계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황에서 자신들의 의료를 성장 또는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박윤재, 2021: 113). 따라서 한국 한의학에 대해, 중국의 경우와 같이, ‘혼종의 의학’이 탄생됐다거나 국가에 동화되었다거나 하는 식의 단선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결합시키고자 했던 의생 김광진의 사례나 대학 차원에서 두 의학을 융화(融和)시켜 제 3의학을 개척하고자 했던 경희대의 사례도 존재했지만, 집단을 형성해 기존의 전통 의학을 계승하려 했던 사상의학파나 부양의학파와 같은 사례 역시 존재했던 만큼, 한의학의 전통 보전과 서양 의학의 수용 그 사이에서 다층적인 변화 과정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되어야 한다(김태우, 2017: 57; 慶熙30年史編纂委員會, 1982: 218-219; 김현구, 2023: 53-55; 오재근, 2014: 86-89).
한국 근대 의학의 전반적인 변화상 그리고 의사직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신동원, 박윤재, 김영수 등이 상세히 밝혀두었다(신동원, 1997; 박윤재, 2005; 2021: 45-56; 김영수, 2020: 4-24). 그 중 이흥기는 개항 이후 식민지기까지 서양 의학을 전공한 여러 의사들의 생애를 살펴보며 검정시험을 통해 의사가 된 사례를 검토했고(이흥기, 2010), 홍창희ㆍ박승만은 식민지기 그리고 해방 이후까지의 기간 동안 실시된 의사 검정시험 제도 자체를 분석하기도 했다(홍창희ㆍ박승만, 2021: 111-145). 그리고 김두종과 이종형은 통사적 관점에서 근현대 시기 한의계의 전반적인 변화상을 서술해 두었고(김두종, 1981: 495-555; 이종형, 1978: 335-336), 정원희와 김남일은 방대한 규모의 기초 사료를 수집 정리해 두었다(朴台守, 1984; 김남일, 2011). 이밖에 한의사 제도의 성립 과정이나 김영훈(金永勳), 『영소침구경(靈素鍼灸經)』, 침술마취 등과 같은 주요 인물, 서적, 사건 대한 연구 등도 발표되어 있다(박윤재, 2011a: 345-376; 정기용, 2008; 김동율, 2016; 차웅석, 2001: 249-260; 김송이ㆍ김종현, 2017: 136-145; 김남일ㆍ국수호ㆍ한창현, 2024: 67-73). 이상의 연구들을 통해 근현대 시기 한국의 의료 제도 전반 그리고 의사 및 한의사 제도의 형성 과정이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개인 한의사의 생애, 저술, 그리고 사회적 논쟁을 결합해 근현대 시기 한의학의 변화상의 면모를 다각도로 살펴본 연구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바로 이 부분의 공백을 채워보고자 한다. 모두(冒頭)에서 언급한 이병행은 검정시험 출신 한의사였다. 그는 1954년 한의사 국가시험 응시 자격 검정시험과 국가시험에 합격해 한의사 면허를 취득한 뒤, 20여년간 대전 그리고 서울에서 개업 한의사로 활동했다. 대학에서 한의학 정규 교육을 이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침구학 저술과 학술 활동을 통해 동시대 한의계에서 일정한 권위를 확보한 인물이었던만큼, 해방 이후 한의학의 지식 형성 경로가 대학으로 대표되는 제도권 교육 체계 내부에만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병행의 생애와 학술 성과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학술 논쟁을 매개로 1960~70년대 한의계의 동향을 분석하고, 현대 한의학이 형성되는 역사적 맥락과 그 의미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병행이 활동하던 당시 한의학과 관련된 정부 정책을 간단히 짚어본 뒤, 첫째, 이병행의 생애와 저술을 매개로 해방 이후 검정시험 출신 한의사의 학문적 위치를 복원하고, 둘째, 그가 제창했던 태극침법의 이론적 구성과 기존 침구학 전통과의 관계를 검토하며, 셋째, 1970년대에 대한한의사협회 기관지, 『한의사협보』 중에서 진행된 한의학의 ‘현대화’를 둘러싼 신구 논쟁을 분석해 이병행의 주장과 그 학술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병행의 사례가 당시 한의계 전체 모습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일제 시기에 태어나 대한민국의 건립, 이승만ㆍ박정희 정부 시기를 관통하면서 침구학 전문 한의사로 활동했던 점, 검정시험 출신자들로 구성된 한의사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언론지상에 자신의 한의학 연구 및 교육 방법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힌 원고를 여러 편 투고했던 점, 침구학과 관련된 상당 분량의 학술 논문 그리고 전문 저작을 발표했던 점 등은 그의 행적과 관련 자료들이 근현대 시기 한의계의 다층적인 변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주요 단서임을 시사한다. 실제 이병행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0년간(1948~1958) 이뤄진 각 분야의 성과와 주요 인물 정보를 정리한 『대한민국건국십년지』에 실려 있는 얼마 되지 않는 한의계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김남일, 2011: 324).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와 행적은 충분히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에 그가 발표한 논문이나 서적, 기고문 등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학문적 성과를 짚어보는 한편, 당시 신문, 잡지 등에 발표된 기사나 인터뷰, 논쟁문 등을 교차 검토해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시도했다.
2. 해방 이후 한의학 정책과 검정시험 출신 한의사 이병행의 생애한반도를 지배했던 일제 식민 정부는 일본 본국과 동일하게 ‘과학적 의학’이라는 미명하에 서양 의학 중심의 의료 정책을 실시했다(조병희, 1992: 137-138; 신동원, 1997: 383-436; 박윤재, 2005: 233-240). 전통 의학, 곧 한의학을 활용해 임상 의료를 수행하던 기존의 의사(醫士)들은 의생(醫生)으로 전락했으며, 의학강습소, 도립의원 등을 통해 서양 의학을 재교육 받아야 했다(황영원, 2019: 65-93; 박지현, 2016: 163-170). 나아가 일제 식민 정부는 의생의 신규 배출마저 제한했다. 의생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면 새롭게 등장한 한약종상, 침구사, 접골사, 안마사 등이 그 자리를 대체할 예정이었다(조병희, 2005: 85-88). 그러나 당면하고 있던 서양 의료 인력의 수적 한계는 일제 식민 정부로 하여금 의생들의 현실적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했고 또 신규 면허자 배출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박윤재, 2023: 205; 신규환, 2007: 234). 그 결과 한반도는 의사 뿐 아니라 의생, 한약종상, 침구사, 접골사, 안마사 등 다양한 의료 관련 집단들이 혼재된 채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며 한의사(漢醫師) 제도 역시 구비됐다. 기존 의생 중 영년의생(永年醫生)에게는 신규 한의사 면허가 부여된 반면 한지의생(限地醫生)을 비롯한 전통 의학 관련 종사자들에게 경과 조치의 일환으로 한의사 국가시험 응시 자격 검정시험이 시행됐다(박경용, 2009: 75-77; 박훈평, 2024: 17-18). 그런데 한약을 다루는 한약종상들에게 검정 시험 응시 자격이 부여된 것과 달리 침구사들에게는 응시 자격이 부여되지 않았다. 약물과 침구를 모두 다루는 한약종상이 침구만을 다루는 침구사에 비해 한의사 업무 범위에 더 가깝다는 것, 침구사의 교육 수준이 한약종상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 등이 차별의 명분이었다(박경용, 2009: 75-77).7) 이와 같은 제도적 차별은 이후 침구사와 한의사 간 직역 갈등이 폭발하는 뇌관(雷管)으로 작용했다.
한의사 국가시험 응시 자격 검정시험은 대구 동양의학전문학원을 비롯한 사설 교육 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뒤 1, 2부에 걸친 자격 검증 시험, 이른바 검정시험을 통과하고 본시험에 응시하는 것으로 진행됐다(박경용, 2016: 20-21). 현장 의료 종사자들에게 검정 시험 응시 기회를 제공하는 것 외에 한의사 배출을 위한 대학에서의 정규 교육 과정도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1948년에 설립된 한의학 전문 고등 교육기관 동양대학관이 1953년 서울한의과대학, 1955년 동양 의약대학, 1964년 동양의과대학(6년제)으로 명칭을 변경해가며 운영되고 있었으며, 1965년에는 경희대학교에서 동양의과대학을 합병해 의과대학 한의학과를 출범시켰다. 정규 교육 과정과 검정시험 제도가 병존하는 과도기적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검정시험이라는 우회 통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됐다. 1962년과 1963년 마지막 의료인 검정시험이 실시됐으며(홍창희ㆍ박승만, 2021: 140) 이후부터는 6년제 대학 한의학과 졸업생에 한해 한의사 면허 취득을 위한 국가시험 자격이 부여됐다. 요컨대 한의사 검정시험은, 의사 그리고 치과의사 검정시험과 함께, 일정 시기 제도적으로 허용된 의료 전문가 배출을 위한 공식적인 경로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약종상, 침구사, 접골사, 안마사 등은 일제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의료 관련 직업군이었다.8)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으며, 현장 경력이 있거나 사설 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할 경우 자격을 부여받았다. 단 한의사와 달리 별도의 정규 학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자격 시험을 통해서만 존재를 이어갈 수 있었다.9) 그러던 중, 1962년 의료법이 개정되며, 의료유사업자, 침구사, 접골사, 안마사의 신규 자격 부여 근거가 삭제됐다. 의료 제도 재편 과정에서 침구사가 배제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압박은 한의사와 침구사 간 갈등이 더욱 첨예해지도록 했다(노태현, 2010: 19-22). 박정희 군사 정권 하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침구사 관련 단체들이 민간 정부로의 전환 이후 침구사 자격 시험을 준비하던 침구학원 졸업생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침구사 제도의 부활이었다(조병희, 2003: 104-105; 이우관, 2008: 330). 그렇지만 대한의사협회와 대한한의사협회 등 기존 의료 단체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의사협회는 ‘과학적 의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의사협회는 애초에 한의사로부터 분리된 만큼 제도 설립 이후에는 한의사로 단일 통합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10) 침구사법 제정을 둘러싼 갈등은 1945년부터 1970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이어졌다. 일제 식민 정부가 남겨놓은 해묵은 ‘숙제’였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이어진 이승만, 박정희 정부는 전염병 관리, 건강보험 제도 개편 등과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보건 의료 상황 개선을 위한 노력했다. 의료 인력의 경우 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만큼 양적 확보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 그러면서도 의료 인력의 미국 연수, 전문의 제도 도입, 의약 계열 학과의 신설, 제약회사 설립 지원 등을 통해 의료 시장과 약국 시장의 확대에 기여했다. 그러나 한의약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박윤재, 2021: 112-115).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11월 사회부에 한방과(漢方科)가 설치됐지만 8개월 만인 1949년 7월 폐지됐다. 이후 한의약 관련 행정사무는 의정국의 의무과, 의정과, 의료제도담당관 또는 의료제도과에서 수행했다. 1975년 의정국에 의정3과가 신설되어 동양의약 개발 육성 업무를 담당했지만 1981년에는 그마저도 폐지됐다. 시간이 한참 지난 1993년, 보건복지부 의정국에 한의약 업무를 전담하는 한방의료담당관이 설치됐다(기창덕, 1999: 14; 이현지, 2008b: 1133). 한편 1973년 12월 원광대학교에 한의과대학이 설립되기까지 단 한 곳의 사립대학, 경희대학교에서 전체 한의사 인력을 공급하고 있었으며 한약재의 규격화나 유통구조의 근대화 작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조병희, 1999: 205). 보건사회부 내에 치의학을 다루는 치정과(齒政科)는 존재했지만 치과의사 보다 그 수가 많았던 한의사와 그와 유관한 한의학 정책을 다루는 한의정과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11) 정부의 보건 의료 정책이 의료 인프라의 양적 확대와 서양 의학 중심 체계의 정비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만큼 한의약 행정은 상대적으로 주변화되었으며 이는 한의계 내부 갈등을 조정할 제도적 장치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이병행은 1906년 1월 16일 공주에서 출생해서 1975년 3월 31일 서울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건국십년지』와 이병행이 편찬한 저작 중의 기록 그리고 생전에 진행했던 인터뷰 등에 따르면, 어렸을 무렵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수학했고, 1922~1930년 무렵 충남도립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2년 동안 보통학교 훈도로 재직했다. 이후 20년여년 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49년 한약종상 시험 합격에 합격해 대전시 한약업 조합장으로 활동하다가, 1954년 한의사 검정시험과 본 시험을 통과한 뒤 대전 선화동에 선화당 한의원을 개업해 임상 한의사로 활동했다. 한의사가 된 이후에는 폭넓은 외부 활동을 벌였다. 대전시 한의사회 부회장, 대전 한의학강습소 강사, 의림사 대전 지부장, 충남 한약종상 선발시험 위원 등으로 활약했으며, 1958년 무렵에는 서울 종로구 명륜동으로 선화당 한의원을 이전 개업해 활동을 이어갔다(이병행, 1955: 7, 11; 1985: 2; 강진화 편, 1956: 1062; 대한한의사협회40년사 편찬위원회, 1989: 560; 김남일, 2011: 178; S 기자, 1973: 40).12)
이병행이 어떤 이유로 교직을 그만두었는지 또 어떻게 한의계에 투신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위 경력으로 미뤄볼 때 교직 사직 이후 한약종상 업무를 수행하다가 해당 경력을 근거로 한의사 시험에 응시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질문하는 두 차례의 인터뷰에서, 한번은 자신의 신병(身病)을 치료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한번은 가업을 계승하기 위함이었다고 짧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S 기자, 1973: 40).13) 인류학자 박경용은 한약업사, 한의사 등의 한의약계 입문 과정을 분석한 뒤 연고 입문과 개척 입문이라는 두 가지 경로를 제시한 바 있다. 연고 입문은 가족이나 친인척으로부터의 영향으로 한의약계에 입문하는 것이고, 개척 입문은 한의약을 배워 평생의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자각과 결심에 의해 입문하는 것이다(박경용, 2009: 49-57). 이 중 개척 입문은 자신 혹은 가족이 서양 의약으로 고치지 못할 정도의 심한 병을 앓다가 한약으로 거뜬히 치료되는 과정을 접한 후 매료되어 입문하는 경우가 많다. 이병행 역시, “벌써 20년 전의 일인데 그때 병명으로는 고랭증(痼冷症)이었고 인삼, 녹용 등으로도 무효하다가 애저(兒猪)와 부자(附子) 4냥으로 즉효를 보았다”고 밝히고 있어 질병의 이환과 치료 과정이 한의학으로의 진로를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동했음을 시사한다(S 기자, 1973: 40).
그렇다면 교직에 몸을 담았던 이병행은 어떻게 한의학을 학습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질문에 이병행은 전문화된 교육이나 별도의 스승 없이 독학으로 의학을 학습했다고 밝히고 있다(S 기자, 1973: 39). 그가 남긴 저작이나 논문 중에서 인용한 서적을 중심으로 그의 의학적 연원을 살펴보면 중국과 조선의 고전 의서뿐 아니라 일본의 현대 침구 관련 저술과 학술지를 폭넓게 학습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그는 『신응경(神應經)』, 『침구대성(鍼灸大成)』, 『의학입문(醫學入門)』, 『육과준승(六科准繩)』 등과 같은 중국의 침구 및 종합 의서와 『동의보감(東醫寶鑑)』,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등의 조선 의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외에 사와다 겐(澤田健), 시로다 분시(代田文誌), 마나카 요시오(間中喜雄), 나가사와 모또오(長澤元夫) 등이 편찬한 일본 의서 그리고 『의도의 일본(醫道の日本)』 등과 같은 전문 학술지도 살펴보았다.14) 다만 그가 첫번째 저작 『자오유주법주해(子午流注法註解)』를 편찬하며 『의학입문』에 수록되어 있던 자오유주침법(子午流注針法, 이하 자오유주법) 관련 내용 일부를 번역하고 풀이했던 점, 『의학입문』의 한글 번역을 주도하며 직접 번역 작업에 참여했던 점, 그리고 한의학을 공부하기 위한 첩경으로 이태호(李泰浩)가 편찬한 『동의사상진료의전(東醫四象診療醫典)』 곧 『동의사상진료비결(東醫四象診療祕訣)』을 꼽은 점 등을 고려할 때, 그가 주로 참고했던 의서는 조선의 대표 의서 『동의보감』과 함께 『의학입문』, 『동의수세보원』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S 기자, 1973: 40).15) 이밖에 이병행은 대전에서 활동할 무렵 당시 한의계를 대표하는 학술지 『의림(醫林)』을 배포하는 의림사(醫林社) 대전 지부장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서울로 이전한 뒤 학계의 주요 인물인 배원식(裵元植, 1914~2006), 한승련(韓昇璉, 1914~?) 등과 교류하고 의림사에서 개최한 학술 좌담회에 수차례 참여했다. 『의림』은 당시 유통되던 의학 관련 지식을 입수하는 주요 통로 중 하나였다.
이병행은 『의림』, 『대한한의학회지』 중에 20여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20여 편의 문장을 신문에 투고했다. 『동의수세보원』 「성명론」을 주석하고 한글로 풀이한 5편의 연속 논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침구학과 관련된 논문들이었다(곽노규ㆍ오재근, 2026: 69-85). 이병행이 출간한 5권의 의학 저작 역시 대부분 침구학과 관련되어 있었다. 먼저 『자오유주법주해』(1967), 『기경팔법의 신연구(奇經八法의 新硏究)』(1968)를 통해 자신이 주로 활용하던 자오유주법 그리고 기경팔법의 내용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소아마비근치비결(小兒麻痹根治祕訣)』(1969)을 통해 위 치료법을 어떻게 응용하는지 소개했다. 이어 『침구대성』을 부분 번역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부연한 『침도원류중마(鍼道源流重磨)』(1974)와 편찬 작업 전반을 지휘하면서 직접 번역에 참여하기도 했던 『국역편주의학입문(國譯編註醫學入門)』(1974)을 통해 자신이 거두었던 침구학 성과를 정리해 두었다(부록 1).16)
정리하자면 해방 이후 의료법 개정과 함께 한의학 관련 제도 역시 재편됐다. 식민지기에 존재하던 의생은 한의사로 전환됐으며 신규 한의사 양성은 대학에서의 정규 교육을 통해 이뤄졌다. 다만 일시적으로 검정시험을 통해 의료 현장에서의 경력을 인정받고 한의사가 될 수 있었다. 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한의계에 투신한 뒤 검정시험에 합격해 한의사가 된 이병행이 바로 그 사례였다. 한편 이병행은 1969년 10월 26일 창설된 검정시험 출신 한의사들의 친목 단체, 대한한방의우회(大韓漢方醫友會, 이하 한방의우회)의 학술위원장직을 맡아 한의학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한의학 고전(古典)의 정리 그리고 체계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17) 한의학 고전이야말로 이병행과 같은 이른바 검정시험 출신 한의사들에게 임상 현장에서의 의료 행위를 가능케 하고 의료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부여하는 학문적 근거였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국역편주의학입문』과 『침도원류중마』의 발간 역시, 한방의우회 회장 조석봉(趙錫奉)이 밝힌 그대로, 한방의우회 학술 사업의 일환이었다(이병행, 1985: 3).
3. 이병행이 거둔 침구 의학의 성취 그리고 태극침법1900년대 초 국내에서 발간된 침구학 전문 서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18) 1955년에 설립된 동양의약대학 그리고 이를 흡수한 경희대학교에서 이뤄진 침구학 강의 역시 권영준(權寧俊)이 자신의 스승 전광옥(田光玉, 1871~1945)이 편찬했던 『영소회통(靈素匯通)』을 엮은 『정해도입영소침구경(精解圖入靈素鍼灸經)』을 등사해서 교재로 사용할 정도였다.19) 그러나 이병행이 활동하던 1960~70년대 침구학계에는 급진적인 발전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다양한 논의들이 분출되고 있었다. 최주약의 양도락, 김동필(金東匹)의 사암침, 권도원(權度沅)의 체질침, 유근철(柳根哲)의 침술마취 등 개인 한의사들에 의한 새로운 시도가 제안됐을 뿐 아니라 이병행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침구의학회(韓國鍼灸醫學會) 외에 침구사 면허 소지자 중심의 대한침구학회(大韓鍼灸學會),20) 박봉수(朴奉秀)의 지은침구연구회(芝隱鍼灸硏究會), 국명웅(鞠明雄)의 금립침연구회(金粒鍼硏究會) 등 다양한 학술 단체들이 등장해 활동하고 있었다(이종형, 1977: 59-60).21)
역대로 침구학에서 논의되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떤 혈위(穴位)를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침을 놓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전통적으로는 개별 혈위의 위치와 효능을 설명하는 경맥수혈론(經脈腧穴論)과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고 꽉 찬 부분은 덜어내는 침자보사(針刺補瀉) 방법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다(张树剑, 2020: 196). 이중 경맥수혈론은 침구 처방의 구성, 곧 어떤 혈위를 선택하고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고, 침자보사 방법에 대한 논의는 개별 혈위에 침을 놓을 적용하는 수기법에 대한 것이었다.
이병행은 침구 치료가 한의학의 기본 원리인 ‘음양허실(陰陽虛實)’에 기초하여 병인(病因)을 진단한 뒤 혈위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축적된 침구 처방의 단순한 활용 보다 원리에 입각한 혈위 그리고 침구 운용을 강조했다. 그리고 ‘두통에는 어떤 혈, 복통에 어떤 혈’과 같이 증상에 따라 기계적으로 혈위를 배합하는 방식, 이른바 산침법(散鍼法)을 비판했다(이병행, 1974: 60).22) 이병행이 주로 활용했던 침구 혈위 선택 방법은 시간 흐름에 따라 특정 혈위가 개폐한다는 이론에 입각한 자오유주법과 기경팔맥의 혈위를 주로 운용하는 기경팔맥침법(奇經八脈鍼法, 이하 기경팔법) 그리고 침구학의 원리에 사상의학을 결합시킨 태극침법(太極鍼法)이었다.
자오유주법은 중국 명대 의가 이천(李梴)이 최고의 침법이라고 꼽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침구 방법 중 하나였다. 기경팔법 역시 영구팔법(靈龜八法) 등의 이름으로 『의학입문』에서 강조했던 침구 방법이었다.23) 이병행은 “내용이 복잡해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병과 시간을 적절하게 선택함이 번잡하다”는 이유로 외면받고 있던 이 두 가지 침법에 주목했다. 그리곤 자오유주법을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두 가지 작업을 수행했다. 먼저 자오유주법의 핵심 원리라 평가받던 『침구대성』 「서씨자오유주축일안시법(徐氏子午流注逐日按時法)」 전문을 번역하고 주해(註解)했다. 아울러 『의학입문』을 비롯한 기존 의서에 누락되어 있던 개혈(開穴)의 원리와 응용 방법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다(이병행, 1967: 3, 13).24) 이어 『침구대성』 중에 수록되어 있던 기경팔법의 논의를 정리해 『기경팔법의 신연구』라는 침구 서적을 편찬했다. 기경팔법 자체에 대한 창발(創發)은 없었지만 『침구대성』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않았던 만큼 그 중의 논의를 한글로 번역해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25)
68년 5월 7일. 송천동 김○○. 남 62세 와좌자(喎左者).
자오유주법(子午流注法)으로 좌편(左便)은 사자혈(瀉子穴)을 취하고 우편(右便)은 보모혈(補母穴)을 취하되 류침(留針) 일시간(一時間)하고 기경팔법(奇經八法)으로 좌편은 신맥(申脈), 후계(後谿)를 노음수(老陰數)로 사(瀉)하고 우편은 노양수(老陽數)로 보(補)하니 칠일간에 완치되었다(이병행, 1969a: 48).
위 인용문은 1969년 이병행이 학술 잡지 『의림』 중에 보고한 구안와사 환자의 치험 사례다. 현재 『의림』이나 『대한한의학회지』, 『한의사협회보』 등에는 이병행이 남긴 요통, 소아마비, 중풍 고혈압, 구안와사 등에 대한 다수의 임상 사례가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이병행, 1968: 60-62; 1969a: 48).26) 해당 사례 대부분은, 인용문에서와 같이, 자오유주법이나 기경팔법을 활용한 것으로 그가 어떠한 이론적 추론을 통해 침구 처방을 구성했는지 보여준다. 생애 말년인 197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오유주법, 기경팔법을 활용한 임상 결과를 소개하고 있었다(이병행, 1975: 284).
그리고, 1971년 1월, 이병행은 자신의 침구학 전문 저작 『침도원류중마』를 준비하던 중에 태극침법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1개의 혈위로 사상(四象)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고 8개 혈위로 많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침법으로 200여 명의 임상 실험을 통해 정확무결한 효율을 얻었다는 것이 발표 내용의 주요 골자였다.27) 이후 태극침법은 1973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침구학술대회에서 소개됐으며 한국 고유 침법의 하나로 지목되기도 했다(서정철ㆍ남상수ㆍ안병철, 2001: 181).28)
이제마(李濟馬) 선생은 침에도 사상인 침이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였으니 나는 이곳에서 힌트를 얻고 태극침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태극침법이라 함은 태극(太極)을 활용한 것이니 태극이라 함은 천지(天地)가 미판전(未判前) 즉 음양이 분별전의 한 핵심이니 만물은 핵으로부터 생하는 법이라. (중략) 태극은 생 양의(兩儀)하고 양의는 생 사상(四象)하였으니 태극 방법은 일혈(一穴)로 사상을 감별하고 팔혈(八穴)로 사상인을 치료하는 법이며 ……29)
위 인용문 중에서 이병행은 태극침법을 고안하게 된 계기, 과정, 목적 등을 직접 밝히고 있다.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 중에서 “침을 놓는 혈자리[針穴]의 경우에도 태소음양 사상인(四象人)에게 대해 응용할 만한 혈(穴)이 있을 것이며 반드시 승강완속(升降緩束)의 묘함이 있을 것이니 이에 대하여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바라건대 이후 근후(勤厚)하고 활인(活人)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노라”며 사상의학의 원리를 활용한 침구 치료 방법이 등장하기를 기대한 바 있다.30) 이병행은 이제마의 이 언급을 통해 사상인에 대한 침의 적용 가능성을 읽어냈으며 이를 침구학적으로 재구성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태극, 음양으로 대표되는 『주역(周易』의 논의와 사상의학의 논의를 결합시켰다. 한의학, 침구 의학의 기본 원리를 ‘음양허실’이라고 보았던 자신의 기존 주장에 부합하는 접근 방법이었다.
태극침법에서 이병행이 주목한 것은 간심비폐신(肝心脾肺腎) 다섯 장기 중 폐비간신(肺脾肝腎)만을 활용하는 사상의학의 장부론이었다. 그는 빛이 나면서 밝고 맑아[光明瑩澈] 온몸을 주재한다는 이제마의 심장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심장을 태극 그리고 폐ㆍ비ㆍ간ㆍ신을 사상적 분화의 축으로 간주했다(이병행, 1985: 344). 사상의학 장부론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던 심장과 그 경맥을 체질 감별 대상으로 중용한 것은 이병행만의 독창적인 역발상이었다. 예를 들어 태양인(太陽人)의 경우 금기(金氣)가 왕성하다는 전제하에 심(心) 경맥의 화혈(火穴)인 소부(少府)를 보(補)함으로써 태양인의 금기를 억누르고 그 반응을 근거로 체질을 판별하고자 했다. 치료는 한발 더 나아갔다. 태양인(太陽人)의 폐장이 크고 간장이 작다는[肺大肝小] 장부의 특성에 따라 폐장 경맥의 원혈(原穴)인 태연(太淵)을 사(瀉)하고 간장 경맥의 원혈인 태충(太衝) 보(補)하는 것으로 진행했다[표 1]. 한편 보사법은 기존 논의 중에서 가장 간단한 방법을 취했다. 보법은 엄지를 앞으로 전진시키며 9번 돌리는 것이었고 사법은 엄지를 뒤로 밀며 6번 돌리는 것이었다(이병행, 1973: 10; 1985: 344).
이병행은 이제마의 침구학에 대한 제안을 실천에 옮긴 첫 번째 의가였다. 그의 태극침법은 사상의학의 ‘장부론(臟腑論)’과 침구의학의 ‘경맥론(經脈論)’을 결합시키고자 했던 시도였으며, 이는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이나 허임(許任)의 『침구경험방』 이래 조선 침구 의학이 유지해 온 장부론과 경맥론을 결합하는 학문적 전통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32) 그러나 현재 태극침법에 대해서는 오행론적 장부론과 사상의학의 장부 대소 개념을 무리하게 연결시켰다거나 또는 장부의 대소를 경락의 강약으로 단정지었다거나 하는 등의 이론적 결함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있다(최병일ㆍ고병희ㆍ송일병, 1989: 186; 김명균ㆍ박성식, 2008: 16).
음양허실 등의 원리에 입각해 구성된 혈위가 아닌 특정 질병에 대응하는 혈위 조합을 침구 처방으로 활용하는 것을 산침법이라고 한다.33)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병행은 자오유주법, 기경팔법, 태극침법 등을 애용하며 산침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국내외 유명 의가들의 침구 처방을 수집하며 실제적인 경험의 축적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미간행 저술 『침구진수(鍼灸眞髓)』는 일본 의가 사와다겐(澤田健)이 편찬한 같은 이름의 저술 『침구진수』를 처방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었고,34) 또 다른 미간행 저술 『침구험방집(鍼灸驗方集)』은 여러 의서에 수록되어 있던 처방과 자신의 경험 처방을 수집 정리한 것이었다. 이밖에 『기경팔맥의 신연구』와 『침도원류중마』 후반부 중에 「산침법비방집(散鍼法秘方集)」과 「명의험방편(名醫驗方篇)」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침구 처방들을 수록해두기도 했다.
이들 처방은 머리[頭], 어지럼[頭眩], 뒷목과 등[項背], 얼굴[面] 등의 항목에 의거해 분류되어 있으며, 대부분 그 출처가 기재되어 있다. 「옥룡부(玉龍賦)」, 「석홍부(席弘賦)」, 「백증부(百症賦)」 등 『침구대성』에 수록되어 있는 가부(歌賦)들이 다수 포괄되어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침구대성』과 『의학입문』 그리고 허임(許任)의 『침구경험방』이 주된 출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의가 이름으로 출처가 기재되어 있는 침구 처방들이다. 『침구험방집』에는 곽석준(郭錫俊), 김두용(金斗用), 김용호(金龍鎬), 남광희(南光熙) 등 15명 의가의 침구 처방이 수록되어 있고, 『기경팔맥의 신연구』에는 일본 의가 사와다 겐(澤田健), 마나카 요시오(間中喜雄), 나가사와 모또오(長澤元夫)의 침구 처방 그리고 『침도원류중마』에는 시로다 분시(代田文誌)의 침구 처방도 수록되어 있다. 자신의 처방 역시 수록했다. 『침구험방집』에는 이병행의 침구 처방과 침구 경험으로 보이는 우안(愚按)과 우험(愚驗)이 각각 3개, 『기경팔맥의 신연구』에는 우방(愚方)이 7개, 『침도원류중마』에는 우안(愚按)이 2개 실려 있다(부록 2).
한편 침구의 핵심이라고 평가받던 침구보사법(鍼灸補瀉法)에 대해서는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않았다. 기존 침구 의서 중에 기재되어 있는 자침과 호흡, 자침 이후 침의 회전, 자침 이후 침의 출납, 발침 이후 혈위의 안압 여부 등의 내용을 한글로 풀이해 『침구학정해』, 『침도원류중마』, 그리고 『국역편주의학입문』 중에 수록하는 정도에 머물렀다(이병행, 1985: 19-25 李梴, 1974: 866-872).35) 다만 침구보사법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다소 엄격한 편이었다. 보사법을 침구학의 핵심 요소로 간주하며, 이를 정확하게 구현하지 않는 침구 치료 행위를 비판했다. 당시 국내에 유통되고 있던 일본 유명 침구 의가들의 침법에 대한 비판도 침구 보사를 제대로 실시하는지 여부에 입각해 이뤄졌다. 야나기야 소레이(柳谷素靈)에 대해서는 자입 방법에 천지인(天地人)의 구분이 없고, 자입 도중에 천천히 상하로 진퇴 운동을 한다는 설명은 침구 원칙에 위배되며, 1개 주된 혈위로 자신이 없어서 3개의 보조 혈위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혼마 쇼하쿠(本間祥白)에 대해서도 혈위를 뗐다 눌렀다가 하는 제안보사(提按補瀉)와 혈위를 열었다 닫았다가 하는 개폐보사(開閉補瀉)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36) 이어 침에 보법이 없다는 『동의보감』의 논의에 대해 허준(許浚) 선생이 지니고 있던 침법에 대한 미숙함이 드러난 것이라고 평가하며 『황제내경』, 『침구대성』 등의 논의를 활용해 침에도 보사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설파했다(이병행, 1970: 35, 45). 이와 같은 그의 비판은 침구학의 원리적 엄밀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요컨대 이병행은 한의학 고전을 기반으로 자오유주법과 기경팔법을 재해석하고 사상의학과 침구학을 연계시킨 태극침법을 창안했다. 대증치료에 기반한 산침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지만, 침구 보사법에 대해서는 새로운 성취는 없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어떤 혈위를 선택할 것인지 또 어떻게 침을 놓을 것인지를 둘러싼 오랜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으며, 그 답변은 ‘음양허실’로 대표되는 한의학 원리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접근은 『의학입문』, 『침구대성』, 『동의수세보원』 등을 기반으로 임상 의료를 수행하던 한의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1969년 6월 28일에는 대한한의학회, 1970년 9월 7일에는 대한한의학회, 대한한의사협회 경기도지부 주최로 자신의 저서, 『침도원류중마』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기도 했고,37) 허연(許燕)이 회장으로 있던 재경 충남 출신 한의사 중심으로 구성된 화요한의학연구회(火曜漢醫學硏究會), 그리고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고전한의학연구회(古典漢醫學硏究會) 주관으로 침도원류중마, 한국침구의학회 주관으로 자오유주침법, 기경팔맥침법, 동의수세보원, 태극침법 등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38) 태극침법은 “이병행 선생하면 태극침”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였지만 생애 말년에 개발된 만큼 충분히 보급되지는 못했다(송수애, 1975: 42). 이병행 사후, 1975년, 화요한의학연구회 총무 김기배(金己培)가 「태극침법」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발표해 그의 침구 의학 성과를 다시 정리하고자 했으며(김기배, 1975: 8-12), 연구회의 일원이자 대표적인 사상의학 임상의가였던 박인상(朴寅商)은 1991년 재발간된 자신의 저서 『동의사상요결(東醫四象要訣)』 중에 『침도원류중마』 그리고 김기배가 작성한 「태극침법」의 내용을 전재한 뒤 치료 효과가 많으니 시험 삼아 활용해 볼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박인상, 1991: 77). 이는 이병행의 학술적 성취가 개인 수준에서의 지식 습득 또는 경험 축적을 넘어 해방 이후 한의학 일각에 존재하던 기존 한의학 이론을 새롭게 조직하고 실천하려는 지적 모색의 한 단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한의학 그리고 침구학 연구 방법을 둘러싼 신구(新舊) 세대간 논쟁1968년 3월 15일 발간된 『한의사협보』 중에는 주요 한의학 연구 단체에 대한 조사 결과가 실려 있다. 대한한의사협회 산하의 학술 단체인 대한한의학회, 젊은 한의사 주축으로 이뤄진 학술 모임인 한방토요회(漢方土曜會), 1962년 보건사회부에서 실시한 동원보수교육을 통해 서양 의학을 학습한 뒤 무의촌 지역에서 의료 활동을 수행한 공의(公醫)들로 구성된 동서의학회(東西醫學會), 한의학 고전의 현대화를 목표에 두고 설립된 고전한의학연구회 등이 그것이었다. 한방토요회와 동서의학회는 1955년 설립된 동양의약대학과 1965년 이를 인수한 경희대학교를 졸업한 신진 한의사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전한의학연구회의 인원 구성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병행이 회장직을 맡고 있었으며 동양의약대학 출신 한의사들도 다수 가입되어 있었다.39) 그리고 1969년 10월 26일 검정 시험 출신 한의사들의 친목 단체, 한방의우회가 발족했다.40)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병행은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원으로 활동하다가 한의계에 입문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데 익숙했으며 당시 언론인들이 매우 좋아했던 한의계 인사 중 하나였다.41) 그는 당시 한의계를 대표하는 학술지 『의림』 중에 여러 차례 자신의 논문을 투고했을 뿐 아니라 대한한의사협회의 기관지인 『한의사협보』 중에도 수시로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다. 다만 그의 원고는 여러 차례 논란을 불러왔다. 특히 대학을 졸업한 신진 한의사들은 그의 견해와 접근 방법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외견상 대학 교육을 받은 신진 한의사와 기성 한의사의 갈등으로 보였지만, 실은 ‘과학적 의학’의 세례를 받은 신진 세대와 한의학 전통을 고수하려는 기성 세대 간에 벌어진 한의학의 정당성 확보 방법을 둘러싼 방법론적 충돌이었다.42) 그리고 식민지기였던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이어졌던 ‘한의학 과학화’ 논쟁의 후속 버전이기도 했다.43)
이병행이 다른 한의사들과 벌인 지상 논쟁은 크게 두가지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한의학 연구 방법을 둘러싼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대학 내 침구학 교육의 방향에 관한 문제였다.
첫 번째 논쟁은 이병행과 이구협(李求協) 사이에 벌어졌다. 이구협은 한의사 집안 출신 자제로 1957년 동양의약대학 졸업 후 공의(公醫)로 재직하다가 서울에서 개업한 인물이었다(이구협, 1967a: 56-60). 『의림』 중에 수 편의 임상 사례 논문을 발표했으며, 1967년에는 구본홍(具本泓) 등과 함께 한방토요회 창립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다.44) 같은 해, 이병행은 배원식, 이창빈, 이구협 등과 함께 의림사에서 주최한 진료 좌담회에 참석했다. 좌담회 주제는 소아 청변(靑便)의 발생과 치료 방법이었으며 이병행이 발제했다.45) 이병행의 발제 내용은 주로 음양오행, 오장육부 등 『의학입문』에 실려 있는 고전적인 한의학 접근 방법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좌담회에 함께 했던 이구협이 다음 권호 『의림』 중에 다음과 같은 소감문을 발표했다.
“젊은 세대의 한의학도들은 음양오행(陰陽五行),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의 육기(六氣), 희노우사비공경(喜怒憂思悲恐驚)의 칠정(七情), 외감(外感), 내상(內傷) 이런 것에 대하여 재래식인 해설만으로는 아마도 납득하려 들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 이병행 선생의 논증에 모순이 있다거나 불합리점이 있다고 이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이구협, 1967c: 74).”
인용문에서와 같이 이구협은 이병행의 논증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지만, 기존 한의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던 소아 청변에 대한 이해 그리고 설명 방식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감을 표명했다. 2년이 지난, 1969년, 이구협과 이병행은 다시 한번 충돌했다. 당해 2월, 한방토요회 편집부장을 맡고 있던 이구협은 소속 회원들에게서 수집한 임상 경험방을 소개하겠다며 해당 처방의 구성이 ‘군신좌사(君臣佐使)와 같은 것이 파격될 수도 있고 본초약리(本草藥理)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장을 『한의사협보』에 게재했다.46) 해당 기사를 읽은 이병행은 발끈했다. 「한방토요회에 전(傳)한다」는 문장을 기고하며 『한의사협보』의 독자가 한의사 뿐 아니라 국외에도 존재하는데 ‘본초약리’, 곧 약물의 약리 기전을 무시한 처방을 소개하겠다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며 비판했다.47) 이구협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본초약리를 무시하고 군신좌사를 파괴한 처방을 제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방(單方) 기방(奇方)과 같이 이런 것이 꼭 부합되지 않더라도 기묘한 효과를 나타내는 것도 있으니 그런 것 하나라도 발굴해 보자는 의도에서 발언한 것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응수했다.48)
『의림』과 『한의사협보』에서 시간차를 보이며 진행된 이병행과 이구협의 지상 논쟁은 한의학 연구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다. 이병행의 입장은 분명했다. 그는 단순한 경험방이 아닌 한의학적 원리를 탐구할 수 있는 처방이 공개되고 또 공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이병행은 이보다 한해 앞선 1966년 발표 논문 중에서 “중풍(中風)은 그 원인이 한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치료 방법도 한가지가 아닌 것이 원칙이다. 대개 중풍 통치의 비방(秘方)만 구하기에 급급하고 그 원리 탐구는 등한히 하는 경향이 적지 않으니 한의학 발전상 일대 암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며 원칙 없는 경험방 수집을 거세게 비판한 바도 있었다(이병행, 1966: 42). 반면 이구협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한의학적 원리에 입각해 구성된 처방이 아니더라도 경험적인 지식에 의거해 구성됐고 효과를 낼 수만 있다면 그 역시 검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49) 사실 50세 무렵 검정시험을 통과해 한의사가 된 이병행과 대학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개업한 이구협 사이의 임상 연륜 차이는 상당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이구협은 이병행의 논증 그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방토요회에 전(傳)한다」는 것과 같은 소지말엽의 거론의 가치조차 의심스러운 문제에 아무리 샘솟은 정력이오 정열이라고 하드래도 낭비를 삼가셔 잘 저장하여 두었다 한의학의 근본을 흔드는 대문제에 그것을 쏟아주었으면 하는 것은 비단 필자의 소망뿐이 아닐 줄 안다”라고 밝히며 이병행에 대한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50) 이구협의 비판은 단순히 이병행의 결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설명 방식이 현대 학문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반면 이병행은 경험적 효과 이전에 한의학 내부의 원리 체계를 충실히 이해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이상은 이구협과 이병행의 개인 간의 충돌이기도 했지만 한방토요회 편집부장과 한방의우회 학술위원장으로 대표되는 신진 한의계와 기성 한의계 사이의 학술 대립이기도 했다.
두 번째 논쟁은 이병행과 대학 소속 교원 그리고 대학원생 사이에서 벌어졌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이병행이었지만, 1955년 『의림』에 첫번째 학술 논문을 발표한 이래, 1966년 『동의수세보원』 「성명론」에 대한 첫번째 주석 작업을 실시하고, 1967, 1968, 1969년 매년 침구 전문 저작을 발간했던 만큼 한의계 내부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곽노규ㆍ오재근, 2026: 71). 수십명의 대학 출신 한의사들이 그의 지도를 받을 정도였다.51) 그러던 그가, 1969년 2월 28일, ‘침도(鍼道)와 침술(鍼術)은 다르다’는 문장을 『한의사협보』에 투고했다. 현재 대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침구학 교육이 경험방에 의거해 진행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으니 침구학 원리에 입각한 교육으로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52) 그의 공개적인 지적은 논쟁의 도화선이 됐다. 경희의대 침구과 주임교수였던 최용태(崔容泰, 1934~2017)가 대학은 특정 개인이 발견한 학설이나 주장하는 학설을 소개하는 사설 강습소나 학원과 달리 모든 학설을 소개해 학생 각자가 충분히 연구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치료 방법은 통계적인 자료로서 수집된 결과를 중심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이병행이 지적한 경험방 교육은 극히 소수의 처방만을 소개하는 정도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라고 반론하며 논쟁에 뛰어든 것이었다.53)
최용태의 반론을 접한 이병행은 자신을 ‘대학 교문에 가지도 못한 바지저고리 한의사’라고 겸칭(謙稱)하며 『한의사협보』에 총 3회에 걸친 장문의 재반론을 기고했다. 대학에서 진행되고 있는 침구학 교육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문제 의식은 한국 침구학이 퇴보하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위 기고문 중에서 그는 일부 대학 출신 한의사들이 침을 잡거나 놓을 줄 모르고 침구보사법에 대해서도 복잡다단할 뿐 신빙성이 전혀 없다고 여기고 있으며 심지어 침을 전혀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학교 교육에서 찾았다. 당시 교재로 사용되던 『정해도입영소침구경』의 오류를 꼬집으며, 득기(得氣) 여부를 침 끝 느낌만으로 확인하려 한 점, ‘돌리기[轉]’, ‘밀치기[搓]’, ‘꼬기[撚]’의 구별을 명확히 하지 않은 점,54) 용호교전법(龍虎交戰法), 적봉영원법(赤鳳迎源法), 창구탐혈법(蒼龜探穴法) 등의 수기법을 제한된 혈위에서 운용하는 것으로 소개한 점 등을 지목했다.55) 이를 근거로 저자인 고(故) 권영준 선생이 침도원류(鍼道源流)에 정통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첫번째, 음양허실(陰陽虛實), 보사론(補瀉論) 등 침구학의 기본 원리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할 것, 두번째, 침구학 수업 시간을 전 과목의 1/3 이상 배분할 것, 그리고 재야의 권위자를 학교 교수로 등용할 것 등을 제안했다. 아울러 여러 가지 침구 방법을 소개하는 수준에 그치지 말고 교문을 나오는 날부터 침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침구학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6)
이병행의 재반론에 대해 최용태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소속 교실의 대학원생이었던 김병운(金秉雲)이 이병행의 주장을 ‘재래 사랑방 어른식 독단 자위하는 논조’라고 평가 절하하며 하나밖에 없는 연구 기관인 대학과 그 졸업생 전체 전망을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논설로 가로막고 있다고 반박했을 뿐이었다.57) 그리고 4년이 지난 1973년, 세계침구학술대회가 마무리된 뒤, 최용태는 현행 침구학 교육의 문제점과 그에 대한 대책을 『약업신문』 중에 발표했다.58) 그 내용은 해부학, 조직학 외에 경혈학, 경혈학실습, 침구학, 침구 임상 등이 포함된 1,650시간의 침구학 교육 프로그램을 구성할 것, 이어 교안 작성을 100% 완료하고 수시로 연구 발표회를 개최해 질적 향상을 꾀할 것, 교수 교환과 같은 국제적인 학술 교류를 실시할 것, 대한한의학회 산하 침구 분과 위원회에서 개업의를 대상으로 한 보수 교육을 실시할 것, 침구 치료에 현대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 활용할 것, 해외 진출을 위해 영어 교육을 강화할 것 등이었다. 최용태 역시, 이병행과 마찬가지로, 현행 침구학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대책은 한의학 원리에 따른 침구학 교육과 임상 실천 능력 강화를 주장했던 이병행의 그것과 달랐다. 최용태의 제안은 침구학 내용을 ‘현대화’하고 그 내용을 ‘과학적 근거’로 입증하기 위한 방편을 수립하는 것을 향하고 있었다. 임상 의가였던 이병행은 한의학 고전 지식을 현대적으로 번역, 분석, 체계화하면서 동시에 임상 기술의 숙련을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 그런 입장에서 그는 당시 대학에서 진행되던 교육이 침구학 원리에 대한 탐구 보다 경험 처방의 전달에 치우쳐 있다고 보았다. 반면 현직 대학교수였던 최용태는 대학에서의 한의학 교육은 표준화된 교육 과정, 통계 분석 그리고 학술 교류를 통해 검증된 지식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논쟁은 침구학 그리고 침구학 교육에 대해 지니고 있던 서로의 관점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1930년대 동서의학 논쟁 이후, 1947년, 한의계의 염원이었던 한의학 전문 교육기관 동양대학관이 설립됐다. 1964년 6년제 학제를 갖춘 동양의과대학으로까지 승격했다가 이듬해 경희대학교에 인수되어 의과대학 한의학과로 변경됐다. 고등교육기관을 통한 한의사 전문직 육성에 성공한 것이었다(조학준, 2020: 66-68).59) 이병행과 같은 검정시험 출신 한의사들은 대학에서 제공하는 ‘현대화’된 또는 ‘과학화’ 된 교육을 통해 육성된 후배 한의사들이 자신들보다 더욱 발전한 전문 지식과 생산 수단을 지니길 바랬다(배원식, 1955: 9-11).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의학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고전(古典)의 정리와 체계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다만 이태형이 밝힌 것처럼, 1960년대 한의계 내부에서 동서의학의 상호협조, 현대진단기기의 활용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지만 서양 의학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이태형, 2013: 97). 당시 국내 유일의 한의학 교육 기관이었던 경희대는 동양의과대학의 교과과정을 계승하면서도 서양의학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과학주의에 기반한 일반 교육 체계와 접목되어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 결과는 한의학과 함께 서양 의학 교육을 병행 편성하는 이중 커리큘럼 구성으로 이어졌다(백유상, 2017, 145; 전종욱ㆍ신동원, 2025: 202). 그리곤 제 3의학 개척이라는 목표하에 한의학의 체계화, 과학화, 현대화를 내세우며 한의학 분야에 현대 의학의 지식, 기술, 연구 방법을 도입했다(慶熙30年史編纂委員會, 1982: 218-219). 교육의 후과는 명확했다. 대학에서 진행된 이른바 ‘과학적 의학’에 경도된 한의학 교육을 받았던 한의사 이구협, 대학원생 김병운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존의 한의학 연구 방법과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물론 모든 대학 출신 한의사들이 이병행을 비판했던 것은 아니었다. 공의(公醫)로 활동하며 일본 의서 『황한의학(皇漢醫學)』을 번역했던 주갑덕(朱甲悳)은 태극침법이 사상인 감별에 대한 공헌이 있다고 평가했고(주갑덕, 1977: 6), 대한한의학회 분과학회로서 새롭게 출범한 대한침구의학회 회장 임종국(林鍾國) 역시 당시 침구학 분야에 손꼽을 만한 학자로 박봉수, 이창빈 그리고 이병행을 꼽기도 했다.60)
요컨대 ‘바지저고리 한의사’ 이병행과 대학 교육을 받은 한의사 이구협, 김병운, 대학교수 최용태 모두 한의학의 현대화를 주장했다. 이병행과 한방의우회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은 한의학 고전(古典)과 그 원리에 입각한 임상 의료 실천을 강조했다. 반면 이구협, 최용태 등 대학 출신 또는 대학 소속 한의사들은 과학적 검증 과정에서 축적된 자료 그리고 그에 기반한 임상 의료 실천을 주장했다. 이상의 논쟁은 한의학 현대화 담론 내부의 분열된 지향이자 기성세대와 신진세대가 지닌 ‘동상이몽(同床異夢)’의 한 단면이었다.
5. 마치는 글1973년 9월, 서울에서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가 개최됐다. 의학 분야로서는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국제 규모의 학술행사였다.61) 보건사회부 장관이 참여해 국무총리 명의의 개회사를 발표할 정도로 정부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으며 침구학 그리고 한의학에 대한 전국민적 관심이 증폭되는 계기가 됐다. 원광대학교에 두 번째 한의학과가 설치되고, 정부 부처인 보건사회부 내에 한의학 관련 행정을 전담하는 의정 3과가 설치된 것도 학술대회 이후에 비롯된 일이었다(유근춘 외, 2004: 36). 세계침구학술대회는 침구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침구사법 제정 논의와 맞물리며 직역 갈등이 재점화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학술대회 종료와 함께 전국관인침구학원 동창회가 주도한 침구사 관련 법안이 국회에 청원됐다.62) 1974년 7월 31일 『한의사협보』에 실린 이병행과 최주약의 해명 기사는 바로 이러한 중층적인 상황 속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병행과 최주약이 어떤 연유로 침구사 관련 단체, 한국침술사의 고문으로 위촉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병행과 함께 해명문을 발표한 최주약은 늦은 나이에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국가시험을 통과해 한의사가 됐다. 침구사 출신이었던 만큼 침구사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S기자, 1974: 41). 반면 이병행은 약종상 출신으로 검정시험을 통과해 한의사가 되었던 만큼 침구사 단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심지어 1973년에는 침구사법 제정 저지 성금을 내며 해당 법률에 대한 반대 의견을 이미 피력해둔 상태였다.63) 다만 이병행과 최주약은 모두 한의사로 활동하며 각각 한국침구의학회 회장 그리고 대한경락의학회 회장직을 수행했기 때문에 침구학을 매개로 침구사 측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이병행과 최주약은 한국침술연합회 기관지 『한국침술』 창간호에 동시에 원고를 기고하기도 했다.64) 1974년 정기국회에서의 의료법 개정안 처리를 앞두고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한의계는 그 무렵 침구사 단체의 고문으로 위촉된 두 원로 한의사를 내버려두지 않았다.65) 급기야 이병행과 최주약이 함께 공동 해명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이병행은 한의학과 관련된 여러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보인 행적은 대부분 학술적인 내용과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높은 학구열을 지닌 임상 한의사였다. 다만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이병행의 한의학 연구 방법은 재래의 그것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것이었다. 간장은 좌측에 있고 폐장은 우측에 있다는 ‘좌간우폐론(左肝右肺論)’, 침에는 보충하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침무보법론(鍼無補法論)’에 대한 풀이를 시도했던 점, 『의학입문』이나 『침구대성』 등과 같은 한의학 서적의 번역에 뛰어들었던 점, 모두 그의 학술적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행보들이었다(이병행, 1969b: 6; 1970: 34, 45). 이병행 스스로도 “나의 소술은 창작과 발명이 아니고 다만 선철들의 제설을 조리적으로 분석 해설한” 것이라고 밝힐 정도였다(이병행, 1965: 20). 한의학 고전을 기반으로 자오유주법과 기경팔법을 재해석하거나 임상 의료 과정에서 한의학 원리에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 당시 이병행만이 지니고 있던 독자적인 태도나 연구 방법은 아니었다. 1968년 11월 대한한의학회에서는 한의학을 현대화하고 과학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의보감』 번역 또는 한의학 술어 제정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었으며,66) 한의사들에 대한 보수 교육 내용에도 단순한 임상 경험이 아닌 한의학 경전에 입각한 기본 원리를 추가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내기도 했다.67)
1964년부터는 일본과 중국 의학의 성과가 『의림』지 중에 본격적으로 게재되기 시작했다. 중국 측의 원고는 투고자도 일률적이지 않고 게재도 부정기적으로 이뤄진 반면 일본 측에서는 오오쯔카 게이세츠(大塚敬節), 야카즈 도우메이(矢數道明), 후지하라 켄(藤平健) 등 일본 한방 의가의 대가로 꼽히던 이들의 원고가 정기적으로 게재됐다. 이병행은 중국 및 일본의 의학 서적 뿐 아니라 『의림』, 『의도의 일본[醫道の日本]』 등과 같은 학술지를 통해 중국과 일본의 침구학 연구 동향을 탐색했다. 그리곤 중국 침구계는 특정 질환에 효능이 있는 기혈(奇穴)을 발굴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일본 침구계는 원리에 입각하지 않은 채 대증 치료 방법에 의거한 산침법(散鍼法)을 활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이병행, 1974: 60-61).68) 중국, 일본에서 이뤄지고 있던 침구학 연구 동향은 이병행으로 하여금 자신이 주관성(主觀性)을 가지고 파악한 침구학 원리에 입각한 침법 개발을 자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이병행, 1985: 9). 실제 1971년 이병행은 사상의학과 침구학을 결합한 독자적인 태극침법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론적 완결성에 대한 비판은 존재했지만, 생애 말년에 성취한 가장 주목되는 학술 성과였다.
한편 이병행은 당시 대학에서 이뤄지고 있던 침구학 교육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신진 한의사들이 지니고 있던 한의학 연구 방법에 대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4년제 동양의과대학이나 6년제 경희대학교를 졸업한 한의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검정시험 출신 한의사로 기성세대 한의사들의 대표적인 친목 단체인 한방의우회의 학술위원장을 맡아 학술 사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의 문제 제기 이후 이구협, 김병운 등 일부 대학 출신 신진 한의사들은 이병행의 연구 방법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명했다. 이들은 대학 교육 과정에서 습득한 연구 방법, 이른바 ‘과학적 의학’을 활용해 한의학을 ‘현대화’하고자 했으며, 한의학 기본 원리보다 실질적인 ‘임상 경험’의 축적을 추구했다. 따라서 한의학의 기본 원리인 ‘음양허실’에 입각해 침구 치료를 수행하고 그 성과를 신문지 상에 발표하며 심지어 공개적인 침구 치료 대결을 제안하기까지 했던 원로 한의사 이병행은 상당히 불편한 존재였다.69)
요컨대 이병행은 해방 이후 근현대기, 침구학 분야를 대표하는 임상 한의사 중 하나였다. 다만 그는 한의약 임상 현장에서의 활동 경력을 인정받아 국가시험 응시 자격 검정시험과 국가시험을 통과한 속칭 ‘바지저고리’ 한의사였다. 이병행은 대학에서 전문적인 한의학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의학입문』, 『침구대성』을 비롯한 한의학 고전 그리고 『의림』지와 같은 학술 잡지를 통해 독학으로 한의학을 학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권의 학술 저작과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태극침법이라 불리는 자신만의 침법을 발표하는 등의 학문적 성취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성과는 한의과대학에서 ‘과학적 의학’에 입각한 한의학 전공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신진 한의사들과 구별됐다. 심지어 일부 신진 한의사들과는 한의학 연구 및 교육 방법 등을 둘러싼 충돌을 빚기도 했다. 특히 대한한의사협회 기관지 『한의사협보』상에서 진행된 이병행 그리고 이구협, 김병운 그리고 최용태 사이에 벌어진 지상 논쟁은 개인을 넘어 검정시험 출신 한의사와 대학 출신 한의사 사이에 벌어진 일종의 한의학 ‘현대화’ 논쟁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 중의학의 현대화 과정은 중의학을 국가에 동화시키는 과정과 분리해서 살펴볼 수 없다. 이와 달리 검정시험 출신 한의사 이병행의 행적과 그의 임상 의료 그리고 학술 활동은 대학에서의 정규 교육 또는 한의학의 국가적 지원과 별개로, 한국의 전통 의학이 임상 의료 현장에서 자신의 기존 논리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일제 식민지기, 대한민국 건국 등 굵직한 정치 체제 변동이 있었지만, 이제마, 이규준 등으로 대표되는 한의학 학술 유파의 존재와 함께 이병행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동의보감』과 같은 한의학 고전 또는 ‘음양허실’로 대표되는 기존 한의학의 논리에 입각한 의료 및 학술 활동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의학의 현대화 과정은 단일한 경로가 아니라 상이한 지향이 병존하는 복수의 경로를 통해 진행되고 있었다.70)
Notes1) 「李炳幸, 崔周若씨 解明書發表」, 『漢醫師協報』, 1974년 7월 31일, 3면. 이하 『한의사협보(漢醫 師協報』는 『한의신문』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했다. 출처: 『한의신문』 https://www.akomnews.com/. 검색일: 2026. 4. 22. 신문 및 저서 중의 인용 문장은 가능한 원문 그대로 수록했다. 가독력 향상을 위해 한자의 한글 표기 등과 같은 일부 표현을 수정했다. 2) 최주약은 함경북도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귀순한 뒤 52세에 동양의대에 입학해 한의사로 활동했다. 침구학 특히 양도락 연구에 매진했으며 대한양도락의학회, 한국경락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최주약에 대해서는 김남일의 연구 참조(김남일, 2011: 198, 338-339). 3) 침구사법 제정 청원의 경과에 대해서는 조병희의 연구 참조(조병희, 2005: 98-99). 7) 조병희는 침구사에게 한의사 자격 검정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나 기회를 부여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의생과 한약종상은 집단의 정체성을 같이 하고 있던 반면 침구사는 세력화 정도가 작고 집단 정체성도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조병희, 2003: 102). 8) 식민지기 안마사의 자격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주윤정의 연구 참조(주윤정, 2012: 66-108). 9) 약종상의 경우 1983년 이후 한약업사 자격 시험이 중단되어 1990년대 한약학과가 설치되기 이전까지 신규 한약 업무 종사자는 배출되지 않았다. 접골은 정형외과 의사, 침구는 한의사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안마는 맹인들의 생업을 위해 그대로 존치됐다(조병희, 2003: 106). 11) 1960-70년대 초 한의사협회의 현안과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는 「保社堂局의 漢醫協 푸대접에 輿論沸騰」, 『漢醫師協報』, 1971년 2월 28일, 2면, 「社說 行政府의 漢醫學育成方針에 建議」, 『漢醫師協報』, 1974년 1월 30일, 2면 참조. 1962년 국민의료법 개정과 동양의약대학의 폐교 위협 그리고 학교ㆍ학생ㆍ보건사회부의 대응에 대해서는 이태형의 연구와 『의림』 편집부의 기사 참조(이태형, 2013: 40-43; 編輯部, 1964: 57-59). 12) 「書齋巡禮 晩齋李炳幸先生」, 『漢醫師協報』, 1973년 6월 15일, 4면. 본문에 기재한 자료에 따르면 이병행은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20세부터는 투병 생활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가 1906년에 태어났음을 감안해보면 1926년 이전에 공주사범학교에 재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사범학교는 1938년 공주여자사범학교로 출범해 1951년 공주사범학교로 개칭했다. 따라서 이병행이 졸업했다고 밝힌 공주사범학교는 그 이전에 존재하던 충남도립사범학교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충남도립사범학교는 1922년 도립특과사범학교로 개교했으며 특과(特科) 3년제 50명, 강습과(講習科) 2년제 60명을 선발했다. 1928년에 폐교해 1930년까지 유지됐다(우용제ㆍ안홍선, 2006: 197). 이병행의 유족 중 한 명인 7남 이기태(李基台)의 도움을 얻어 이병행의 학적 기록을 확보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기태는 어머니가 당시 대전 은행동에서 14개의 방을 갖춘 동양여관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아버지가 교직을 그만두었더라도 금전적으로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구술한다. 아울러 자신이 국민학교 4학년 무렵 큰 누나 이기순(李基順)이 이화여대에 합격하게 되면서 서울로 이사 오게 됐고, 어머니가 막내인 자신과 함께 “왔소. 왔소. 계룡산의 명의가 왔소. 선화당 한의원입니다”라고 하며 시장 바구니에 담긴 전단지를 뿌렸다고 구술한다(이기태 인터뷰 녹취, 2026년 5월 9일). 15) 이병행은 『대한한의학회지』에 기고한 「중풍론(中風論)」 등의 학술 논문 중에서 『동의보감』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이병행, 1965: 20-22). 16) 이병행의 7남 이기태는 이병행의 미간행 원고 『침구학정해(針灸學精解)』, 『침구험방집(針灸驗方集)』, 『침구진수(針灸眞髓)』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이 중 『침구학정해』는 저자 서문 뿐 아니라 침을 놓는 방법, 보사법, 수법 등을 다루고 있는 어느 정도 완정된 형태의 침구 서적이다. 다만 그중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 대부분이 『의학입문』, 『침도원류중마』 중에 포함되어 있어 집필 중이거나 중간 단계 원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화요한방』 창간호(1972)에 실린 출판 예정 안내 중에 이병행의 저작 『만재금낭비장(晩齋錦囊秘藏)』, 『동의수세보원주해 부태극침(東醫壽世保元註解 附太極針)』, 『맥결(脈訣)의 신연구(新硏究)』 등이 소개되어 있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여러 가지 책의 출간을 기획했던 것으로 보인다(火曜漢醫學硏究會, 1972). 17) 「檢定出身漢醫師 大韓漢方醫友會創立總會」, 『漢醫師協報』 42 (1969. 10. 31), 2면; 이학준, 「現代에의 階段, 大韓漢方醫友會 創立을 보고」, 『漢醫師協報』 43 (1969. 11. 15), 4면. 이병행은 대한한방의우회 학술위원장 외에 한국침구의학회 회장, 고전한의학연구위원회 회장, 한국동통의학회(韓國疼痛醫學會) 고문, 대한경락학회(大韓經絡學會) 고문, 화요한의학 연구회 고문, 동서의학연구회(東西醫學硏究會) 이사 등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세계침구대회 자문위원, 세계침구대회 논문심사위원, 중국침구학회 고문 등으로 이름을 올렸다(이병행, 1985: 2). 19) 이병행, 「針灸學敎室에 答하는 글(完)」, 『漢醫師協報』, 1969년 5월 15일, 3면; 안상우, 「고의서 산책 1130 『靈素匯通』①」, 『민족의학신문』, 2024년 12월 7일. 출처: 『민족의학신문』 http://www.mjmedi.com/. 검색일: 2026. 4. 22. 20) 1971년 대한침구학회 회장은 이창빈이었다. 이창빈은 1955, 1960년 동양의약대학에서 침구학, 한방생리학 등을 강의했을 뿐 아니라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한의학 교육계의 중요 인물이었다(정우열, 1999: 182-183; 김남일, 2011: 111). 본래 대한침구학회의 회원 자격은 침구사 면허 소지자였으나 1971년 11월 17, 18일 개최된 정기총회를 통해 침구사 면허 소지자 외에 대학원 한의학과에서 침구를 전공했거나 기타 의료인으로서 침구를 연구했다고 인정되는 자로 정관을 개정했다(「大韓鍼灸學會總會」, 『漢醫師協報』, 1971년 11월 30일). 1972년 이창빈의 대한침구학회와 이병행의 한국침구의학회는 병합을 시도했지만 서로 간의 라이벌 의식 등을 이유로 병합이 성사되지 않았다(「鍼灸會 병합 瓦解」, 『藥業新聞』 1972년 1월 24일, 12면; 「各서클 結合 모색」, 『藥業新聞』, 1972년 1월 27일, 12면). 한편 세계침구학술대회를 앞둔 1973년 7월 대한한의학회에서는 한의계 학술 역량 결집을 내세우며 기존 학회를 모체로 7개의 대한한의학회 산하 분과학회 구성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1973년 8월 대한침구의학회가 창립됐으며 초대 회장은 임종국(林鍾國)이었다(「漢醫学会 各分科学会 組織着手」, 『漢醫師協報』, 1973년 7월 31일). 24) 『동의보감』이나 『침구경험방』에서는 자오유주법에 대해 소략하게 언급됐지만 해당 침법은 일부 의가들에 의해 꾸준히 전승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재근의 연구 참조(오재근, 2025: 107-111). 25) 한의학 서적 전문 출판사인 행림서원에서 1943년 이래 1956, 1963, 1967, 1973년까지 수차례 『침구대성』을 간행했지만 모두 국역이 아닌 현토 교정본이었다. 국역본은 이병국에 의해 2004년에 발간되었고 주해 및 국역본은 홍도현에 의해 2016년에 발간되었다. 26) 이병행, 「子午流注法에 依한 腰痛治驗例」, 『漢醫師協報』, 1968년 8월 12일, 2면; 「漢醫學 宣揚에 收穫, 「태양醫院」 김원장의 中風 治療」, 『漢醫師協報』, 1969년 5월 30일, 4면; 이병행, 「針灸學敎室에 答하는 글(完)」, 『漢醫師協報』, 1969년 5월 15일, 3면. 27) 「鍼道의 革新, 太極鍼法發見」, 『漢醫師協報』, 1971년 1월 15일, 4면. 논문 심사 과정에서 태극침법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의료적 유효성 평가를 구분할 것을 요청 받았다. 본문에 기재된 태극침법의 효과에 대한 평가는 이병행 자신이 수행한 것이며 제3자 또는 제3의 기관에서 검증한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30) 『東醫壽世保元』「少陰人泛論」 “盖針穴, 亦有太少陰陽四象人應用之穴, 而必有升降緩束之妙, 繫是不可不察, 敬俟後之謹厚而好活人者.” 『동의수세보원』 원문은 전국한의과대학 사상의학교실, 『사상의학』 (서울: 집문당, 1997)을 활용해 검토했다. 31) <표 1>은 1973년 세계침구학술대회 종료 후 발간된 『논문초록집(論文抄錄集)』 중에서 이병행 원고 「태극침법(太極鍼法)」의 일부 내용을 활용해 저자가 직접 구성했다.. 32) 『침구경험방』 이래 조선에서 진행된 침구 의학의 전통에 대해서는 Oh, ChaekunㆍShin Dongwon의 연구 참조(Oh & Shin, 2024: 310-348). 34) 이병행의 『침구진수』에 사와다 겐의 침구 처방만 수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침구대성』, 『옥룡가』 등의 의서나 지은침구연구회 박봉수에게서 유래한 침구 처방 역시 수록되어 있다. 36) 이병행, 「針灸學敎室에 答하는 글(完)」, 『漢醫師協報』, 1969년 5월 15일, 3면. 이병행이 비판했던 야나기야 소레이(柳谷素靈)와 혼마 쇼하쿠(本間祥白)의 보사법에 대해서는 해당 저작의 기술 참조(柳谷素靈, 1955: 21-22; 本間祥白, 1976: 222). 38) 「火曜硏究會 學術講義」, 『漢醫師協報』, 1971년 2월 28일, 2면; 「鍼道源流重磨講義」, 『漢醫師協報 1970년 11월 30일, 4면; 「2월부터 太極鍼法講義」, 『漢醫師協報』, 1972년 1월 30일, 4면. 39) 「漢醫學硏究의 分布」, 『漢醫師協報』, 1968년 3월 15일, 5면. 고전한의학연구회에 대한 정보는 충분치 않으나 1967년 이병행, 신길구, 배원식, 조기동이 발족한 고전한의학번역연구위원회(古典漢醫學飜譯硏究委員會)와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古典漢醫學飜譯硏究委員會」, 『의림』 59 (1967), 68쪽). 42) ‘과학적 의학’은 조병희가 19세기말 국내에 들어온 서양 의학을 지칭하던 표현에서 가져왔다(조병희, 1989: 15). 43) 1930년대, 해방 이후, 1960년대에 진행된 한의학 과학화 논쟁에 대해서는 각각 임병묵, 박윤재, 이태형의 연구 참조(임병묵, 1996; 박윤재, 2011b: 308-324; 이태형, 2013: 28-71). 44) 「漢方土曜會結成」, 『의림』 65 (1967), 25쪽. 이구협은 1963~64년까지는 동원한의사(動員漢醫師), 공의(公醫)의 신분으로 『의림』 중에 투고하였으나 1967년부터는 서울 동서한의원장 신분으로 투고했다(이구협, 1963: 46-48; 1967b: 62-64). 49) 한의학 처방에 둘러싼 이와 같은 의견 대립은 한국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재근의 연구 참조(오재근, 2019: 31, 69). 51) 이병행, 「針灸學敎室에 答하는 글(中)」, 『漢醫師協報』, 1969년 4월 30일, 3면. 이병행의 7남 이기태는 이병행에게 수학한 한의사 제자로 강명자(꽃마을한의원), 전현철(뉴욕 경희한의원), 박동원(전 경희대 교수) 등이 있었다고 구술한다(이기태 인터뷰 녹취, 2026년 5월 9일). 54) 『漢醫師協報』에 투고한 이병행의 원고 중에는 ‘転, 차, 연’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앞뒤 맥락과 『침도원류중마』의 표현을 참고해 ‘돌리기[轉]’, ‘밀치기[搓]’, ‘꼬기[撚]’로 수정 기입했다(이병행, 1985: 43-47). 55) 『精解圖入靈素鍼灸經』의 관련 문장은 동은선생(東隱先生)의 저작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전광옥(田光玉)이 저술하고 권영준(權寧俊)이 해석을 더해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東隱先生, 1956: 341-350; 김송이ㆍ김종현, 2017: 139). 56) 이병행, 「大學針灸學敎室에 答한다(上)」, 『漢醫師協報』, 1969년 3월 31일, 3면; 이병행, 「針灸學敎室에 答하는 글(中)」, 『漢醫師協報』, 1969년 4월 30일, 3면; 이병행, 「針灸學敎室에 答하는 글(完)」, 『漢醫師協報』, 1969년 5월 15일, 3면. 59) 전문직으로 확립된 다음 유지를 위해 수행해야 할 목표로는 자신만의 관할 권역 확보, 전문직 업무의 정당성 확보, 전문직 생산자를 생산하는 일에 착수 등이 꼽힌다(맥도널드, 1999: 279, 324). 64) 「韓國鍼術창간 한국침술사서발행」, 『藥業新聞』, 1974년 5월 9일, 16면. 『한국침술』 창간호에 이병행은 「침의 발상지는 한국이다」, 최주약은 「경혈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제목의 원고를 게재했다. 70) 이병행의 개인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한 만큼 본 연구 결과를 1960-70년대 한의학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확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검정시험 출신 한의사 집단 전체의 동향, 혹은 대학 교육을 받은 신진 한의사들의 다양한 입장을 포괄하지 못한 점도 이번 연구의 한계다. 향후 관련 연구가 축적되면 이 시기 한의계의 전반적인 학술 경향이나 광복 후 한의학 현대화 과정의 구조와 성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 과정에서 이병행의 존재는 한의과대학 설립 이전부터 존재했던 한의학의 흐름을 실증하는 중요 사례이자 연구의 기점이 될 것이다. 그림 1.이병행의 사진(좌)과 대한한방의우회 창립 총회 사진(우)
Figure 1. Lee Byeong-haeng (left) and the Inaugural General Meeting of the Korean Fellowship of Korean Medicine Practitioners (right)
표 1.이병행의 태극침법 구성
Table 1. Composition of Lee Byeong-haeng’s Taegeuk Acupun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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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부록 1.이병행의 연구 저작 및 논문 목록Appendix 1. List of Books and Academic Articles by Lee Byeong-haeng
부록 2.이병행의 침구 저서에 기재된 침구 처방의 상위 인용 서적 및 횟수Appendix 2. Sources and Frequencies of Acupuncture Prescriptions Cited in Lee Byeong-haeng’s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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