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This article examines the formation and contested governance of Korea’s two-year premedical course from 1945 to 1979. Drawing on records from the U.S. military government and the University of Minnesota as well as university documents, medical journals, newspapers, and student publications, it asks why this standard route into medical training repeatedly faced proposals for transfer, abolition, and integration. Focusing on Seoul National University (SNU), the article also considers variations by institutional type and region. The functionally hybrid system combined the post-Flexnerian American principle of placing general education and basic science at the university level with a progression model documented at SNU, where completion of the premedical course normally led directly to the four-year medical phase without a second competitive selection. This model more closely resembled the Preparatory Course at Keijō Imperial University and preparatory courses at some Japanese private universities than the old-system higher schools, which did not guarantee admission to a particular imperial university or faculty. No direct transmission is documented; “hybrid” is used here as an analytical rather than genealogical term. “Instability” refers not to the division of authority but to the failure to institutionalize comprehensive and durable coordination across student selection and quotas, administration and student records, curriculum, teaching, and decisions regarding completion and progression. The statutory 2+4 framework persisted even as coordination among these domains remained unsettled.
A two-year standard for premedical education appeared in U.S. military government documents by early 1946. In 1947, Edwin L. Miller, the premedical supervisor, justified the two-year standard and elaborated on it while noting a U.S. trend toward three or four years of premedical study. The 1953 revision of the Enforcement Decree of the Education Act divided six-year medical education into two-year premedical and fouryear medical phases and assigned oversight of the premedical curriculum at comprehensive universities to colleges of liberal arts and sciences. It specified neither the aims of premedical education nor principles for its articulation with the medical phase. A late-1975 revision, effective in 1976, deleted this governance clause without establishing a general framework for curricular oversight. Governance disputes recurred from the late 1950s through the 1970s. In 1957, deans of medical colleges at national universities called for transferring premedical education to their colleges or abolishing the course; a newspaper reported a Higher Education Bureau proposal to place selected basic science subjects under medical-college administration. At SNU, a joint faculty committee coordinated policy in 1961; calls for medical-college governance and an undivided six-year structure resurfaced in the 1970s. A comparative study of premedical curricula at fourteen institutions, using 1976–1978 data and published in 1978–1979, reported administrative affiliation with colleges of liberal arts and sciences in eight cases, with colleges of medicine in five, and joint administration in one, with substantial variation in credits and curricula. Two 1967 tabulations of medical students in Seoul, based on different samples, show, at the aggregate level, both a preference for the course’s affiliation with colleges of liberal arts and sciences and broad curricular dissatisfaction. The editorial board of a 1978 SNU student publication explicitly described a “lack of a clear sense of belonging.” The central issue was not merely duration but who should provide premedical education, where it should occur, and how it should connect with basic and clinical medicine. Curricular integration, unification of the statutory 2+4 structure, and redistribution of institutional authority were distinct but interconnected questions. They remain relevant after the 2024 revision removed the mandatory 2+4 division while retaining the six-year duration, thereby permitting integrated curricula.
1. 서론한국의 의학 교육은 한 세기 만의 학제 전환기에 돌입했다. 2024년 2월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으로 의과대학의 수업연한을 의예과 2년 및 의학과 4년으로 구분하던 규정이 폐지됨으로써 각 의과대학이 6년 범위 안에서 교육과정을 자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게 됐다.1)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가 설치된 지 약 백 년,2) 해방 후 의예과가 의과대학 진입의 표준 경로가 된 지 약 팔십 년 만에 ‘의예과’라는 제도가 해체 국면에 들어선 것이다.3) 그러나 작금의 개편 논의에서 의예과는 주로 극복돼야 할 비효율, 이를테면 예과와 본과의 단절, 저학년 교육의 공동화(空洞化) 등으로 호명될 뿐, 애초에 왜 그런 형태로 형성됐는지, 왜 계속 비판받으면서도 오래 유지됐는지는 거의 묻지 않는다. 주목할 것은, 오늘날 개편론자가 내세우는 진단과 처방, 즉 예과-본과의 단절과 통합 6년제 실시는 이미 1950년대 말과 1970년대에 거의 같은 언어로 제기됐다는 사실이다.
이런 긴장은 비교적 최근까지 이어졌다. 2011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 교육과정개선위원회는 의예과의 시급한 과제 중 하나로 ‘소속 변경’을 꼽으며, 학생 설문에서 절반에 가까운 응답자가 소속 단과대학(자연과학대학)의 타 학과로부터 ‘차별을 느낀다’고 답했다고 보고했다(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교 육과정개선위원회, 2011). 행정적 소속과 직업적 자기규정의 분열이 빚어내는 이 ‘소속감의 불안’은 2011년에 처음 발견된 것이 아니라, 1978년 서울대학교 학생 자료에서 이미 명시적으로 확인된 경험이었다. 따라서 의예과 제도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현재의 제도적 전환이 지닌 가능성과 한계를 전망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고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한국의 의예과는 의과대학 본과 진입을 위한 표준적인 예비교육 과정으로 형성됐음에도 왜 끊임없이 폐지, 통합, 환원, 재조정의 대상이 돼야 했는가?4) 이에 대한 본고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의예과는 단순한 ‘일본식 제도의 잔재’나 ‘미국식 제도의 이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대학 일반교육에 예비교육을 배치하는 미국식 편제 원리와, 적어도 서울대학교 사례에서 확인되는 ‘입학과 본과 진입의 사실상 직결’이라는 예과형 진학 보장 기능이 교차하며 빚어낸 ‘분석적 혼성’의 결과물이었다. 한 축은 ‘플렉스너 보고서’(1910) 이후 미국에서 표준화된 ‘개방형’ 모델, 즉 일반교육과 기초ㆍ실험과학 이수를 의과대학의 입학 조건으로 삼되 본과 진입 시 경쟁을 거치는 방식이고, 다른 한 축은 경성제국대학과 당대 일본 사립대학의 ‘폐쇄형 양성 과정’ 모델, 즉 입학과 동시에 본과 진입이 사실상 보장되는 방식이다. 해방 후 한국은 미국식 ‘premedical’이라는 명칭과 대학 일반교육에 예비교육을 배치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식민지 의학전문학교의 유산과 긴급한 의사 수요 속에서 입학이 사실상 진학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예과적 기능을 존속시켰다.5) 둘째, 이런 혼성적 제도가 낳은 불안정성의 핵심은 의학 전문직 진입권과 일반교육 및 기초과학 관장권의 분리를 조정하는 규칙이 정착하지 않은 데 있었다.6) 적어도 서울대학교에서는 의예과 수료가 본과 진입을 사실상 결정했고, 교육과정과 학사 운영의 상당 부분은 문리과대학이 담당했으며, 의과대학은 미래 의사의 선발과 전문직 형성의 책임을 근거로 관여 권한을 요구했다. 전문직 교육은 해당 전문직이 통제해야 한다는 원칙과 대학의 일반교육 및 기초학문 토대 위에 놓여야 한다는 원칙의 충돌이 해방 직후부터 반복된 의예과 논쟁의 구조였다.
이런 문제의식은 기존 연구의 공백을 드러낸다. 한국 의학 교육사 연구는 대체로 본과 교육과정, 의사 수급과 면허, 임상 수련 제도 등에 초점을 맞춰 왔고, 의예과는 학제 연표의 한 항목으로 언급되는 데 그쳤다. 본고의 실증적 토대를 이루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도 선행 연구는 본과 교육, 병원, 기초의학 지원 등에만 주목했을 뿐, 의예과 문제를 분석의 중심에 두지는 않았다.7) 의학교육학계에서도 의예과 교육의 역사적 전개와 개선 방향을 다룬 바 있지만, 대체로 교육과정 편성의 원리와 당면 개선 과제에 무게를 뒀을 뿐, 제도 형성기의 사료에 기초해 의예과의 불안정성을 구조적으로 해명하려는 작업은 아니었다(예병일, 2017; 정한나ㆍ양은배, 2017).8) 다른 한편으로 해방 후 고등교육사 연구는 문리과대학의 변천을 추적하면서도 그 안의 특수 단위였던 의예과를 본격적으로 조명하지 않았으며, 문리과대학을 일반교육 담당 기구로 재규정한 최근 연구도 의예과를 산하의 여러 단위 중 하나로 취급하는 데 그쳤다(윤해동, 2025). 대학사 편찬물 역시 의예과를 소속 변경의 대상으로서 단편적으로 기록하는 데 머물렀다.9)
결과적으로 의예과는 의학교육사와 일반 고등교육사 모두에서 학술적 논의의 사각지대에 놓였다. 그렇지만 의예과는 의과대학 내에서 완결되는 제도가 아니라, 문리과대학, 교양 교육, 기초과학, 대학입시, 캠퍼스 공간, 전문직 진입 구조 등이 교차하는 접점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어느 한쪽의 시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본고는 기존 의학교육사에서 다뤄진 본과 교육과 고등교육사에서 다뤄진 교양 교육을 ‘의예과’라는 한 제도에서 교차시켜 읽음으로써, 두 분야의 경계에 머물러 온 이 제도를 분석의 전면으로 끌어내려고 한다.
분석 시기는 1945년부터 1979년까지로 한정한다. 1945년은 본과 이전의 예비교육이 경성제국대학에 국한된 예외적 경로에서 벗어나, 모든 의과대학 진입을 위한 보편적 조건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시점이다.10) 종점을 1979년에 두는 근거는 세 가지다. 첫째, 1975년 서울대학교 관악 종합화로 의예과의 제도적 기반이었던 문리과대학 체제가 해체되면서 30년간 의예과를 떠받쳐 온 조직적 토대가 재편됐다. 둘째, 1978∼1979년에 발표된 전국 단위 의예과 교과과정 비교는, 제도가 존속하는 가운데 교육 목표와 관장 주체, 본과 연계가 다시 공개적으로 문제화된 결절점이다. 셋째, 1980년 7ㆍ30 교육개혁과 1981학년도 졸업정원제 도입 이후 의예과 문제는 정원 및 입시 정책이라는 전혀 다른 동학(動學)에 편입되므로, 이전 시기와 구별되는 별도의 분석 틀을 요구한다. 따라서 본고에서 1979년은 제도의 법적 종결이 아니라, 해방 후 의예과 체제의 첫 장기 국면이 일단락되는 분석적 완결의 시점을 뜻한다.
의예과의 원형이 된 문리과대학 관장 구조는 국립서울대학교 창설 과정에서 형성됐고, 이후 1953년 「교육법 시행령」을 통해 종합대학 일반의 법정 편제로 자리 잡았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본고의 서술과 분석은 주로 서울대학교에 무게중심을 둔다. 다만 본고는 서울대학교의 사례를 한국 의예과 역사 전체로 환원하지 않는다. 국립과 사립, 서울과 지방 등 설립 주체와 지역에 따른 전개 양상의 차이를 아울러 추적하며, 특히 6장에서는 ‘의예과 소속 유형론’을 제시하며 제도적 분기를 구체적으로 규명할 것이다.
이런 다층적ㆍ비교사적 접근을 통해, 본고는 의예과 제도가 내포한 근본적 불안정성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의예과가 번역해 낸 두 가지 제도적 논리와 해방 직후의 역사적 조건을 검토하고, 미군정기에 의예과 제도가 도입돼 압축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어 의예과 관장권의 제도화 과정과 논쟁, 1960∼1970년대 개편 담론의 축적 양상, 설립 주체 및 지역별 분기에 대한 전국적 진단을 차례로 검토한 뒤, 끝으로 학생들의 생활세계와 ‘소속감’의 경계성에 비춰 제도가 실제 어떻게 경험됐는지 살핌으로써 의예과의 장기적 불안정성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종합할 것이다.
2. 두 가지 비교 준거와 해방 직후의 조건의과대학 본과 진입 이전에 별도의 예비교육을 두려는 구상은 미군정기에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해방 후 한국 의예과 제도는 크게 두 가지 비교 준거를 통해 해석될 수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일본 근대 의학교육에 뿌리를 둔 ‘예과ㆍ본과형’ 편제다. 일본 초대 의무국장(醫務局長) 사가라 지안(相良知安)이 고안한 「의제약칙(醫制略則)」(1873)과 1874년 공포된 「의제」는 의학교육의 단계적 편제를 명시했다. 즉, 의학교 예과에 어학 및 기초과학 과목(독일어, 라틴어, 수학, 물리학, 화학, 동식물학 등)을 배치하고, 이를 수료한 후 본과에서 기초ㆍ임상의학(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내과, 외과 등)을 가르치도록 한 것이다(厚生省医務局, 1976: 37-38; 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92-93). 이 편제에서 예과는 ‘선발의 관문’이 아니라 ‘진입 후의 양성 과정’이었다.
이후 제국대학 의학부의 정규 진학 경로에서는 구제 고등학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4년 「고등학교령」에 따라 고등중학교가 고등학교로 개편된 후, 고등학교는 독자적으로 전문교육을 담당하는 의학부(수업연한 4년)와 제국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3년제 대학예과를 병설하는 구조였는데, 1901년 제1∼제5고등학교의 의학부가 각 의학전문학교로 독립하면서 고등학교에는 대학예과로서의 예비교육 성격만 남게 됐다(文部省, 1972: 367-370, 652). 이때 대학예과는 진학하려는 분과대학에 따라 세 개의 부(部)로 나뉘었다. 제1부는 법과ㆍ문과대학, 제2부는 공과ㆍ이과ㆍ농과대학, 제3부는 의과대학 지망자를 위한 과정이었다(文部省, 1972: 370). 즉, 제국대학 의학부에 진학하려는 자는 고등학교 제3부에서 3년의 과정을 이수해야 했다. 이후 부제(部制)가 폐지되고 문과ㆍ이과 계열로 재편됐지만, 구제 고등학교는 제국대학 의학부 진학을 위한 본과 이전 고등보통교육 및 기초과학교육의 기능을 계속 담당했다.
그런데 홋카이도(北海道)제국대학, 경성제국대학, 대북(臺北)제국대학처럼 대학예과를 둔 제국대학도 있었다. 이에 더해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學)을 비롯한 사립대학 의학부는 본과 4년에 앞서 약 3년의 내부 예과 과정(preparatory course)을 설치해 예과 수료자를 본과로 받아들였다(慶應義塾大學醫學部, 1925; 1930). 따라서 일본의 의학 예비교육은 구제 고등학교, 제국대학 대학예과, 사립대학 내부 예과라는 세 경로를 포함했고, 이들은 본과 진입 이전에 별도의 예비교육을 이수케 하는 단계적 편제를 공유했다. 그러나 대학예과와 사립대학 내부 예과는 입학이 곧 해당 대학 본과 진학으로 이어지는 ‘진입 후 양성형’ 기구였던 반면, 구제 고등학교는 제국대학 진학을 위한 자격 요건일 뿐 특정 학부로의 진학을 보장하지 않았다.11)
두 번째는 플렉스너 보고서(1910) 이후 미국의 의학교육이 표준화한 대학 기반 ‘의학 예비교육(premedical education)’이다. 플렉스너는 의과대학이 “올바르게 운영된다면 대학뿐 아니라 일반 교육체계와도 접속돼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본과 진입 전의 과학 및 교양 교육을 의과대학 내부가 아닌 대학 일반교육에 맡기려 했다(Flexner, 1910: xi).12) 미국 모델에서 의학 예비교육은 대학 일반교육의 일부일 뿐 의과대학 진학을 보장하지 않았고, 별도의 선발 경쟁을 동반했다. 미국 내 일부 의과대학이 예과를 두지 않고 학사 졸업생을 받아 운영한 것도 이 ‘개방형’ 논리의 발현이었다. 요컨대 미국식 모델의 핵심은 본과 이전 교육을 의과대학 외부의 대학 수준(college-level) 교육에 접속하는 개방적 입학 구조에 있었다.13)
해방 후 한국 의예과는 ‘premedical’이라는 명칭과 대학 일반교육과의 연계라는 형식적 측면에서는 플렉스너 이후의 미국식 제도에 접속했지만, 적어도 서울대학교에서는 입학 후 일정 성적을 충족하면 별도의 경쟁 없이 본과로 진학할 수 있었으며, 이 점에서는 일부 제국대학과 일본 본토 사립대학의 예과 체제에 가까웠다. 다만 미군정 교육 당국이 플렉스너를 직접 호명하거나 일본식 예과 모델을 명시적 준거로 삼은 것은 아니므로 두 모델이 역사적 조건 속에서 비의도적으로 접합된 ‘혼성 구조’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본과 진학과 관련해 ‘보장형’의 논리가 우세했던 데에는 당대의 조건이 작용했다. 식민지 의학교육의 주된 경로였던 의학전문학교 체제는 선발과 양성을 단일 기관에서 담당했고, 경성제국대학 예과 역시 입학이 곧 진학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14) 해방 직후 단일 입학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해 이탈 없이 길러내야 했던 행정적 현실, 그리고 극심한 의사 부족 문제를 조속히 타개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맞물렸는데, 이런 조건은 본과 진입 시점에 재차 경쟁을 유도하는 미국식 개방형 체제보다는 최초 입학 시점에 진로가 확정되는 폐쇄형 경로와 강한 친화성을 지녔다. 그 결과 적어도 서울대학교 의예과는 ‘대학 일반교육과 접속한 예비교육’이라는 플렉스너적 외형을 갖추고도, 그 내부에서는 ‘입학=진학’이라는 예과의 작동 방식을 유지했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1950년대에 미네소타 프로젝트 자문관들이 거듭 지적한 ‘본과 진입 시 추가 선별 부재’와 ‘예과 수료로 보장되는 진학’은 이런 비의도적 제도 번역이 낳은 역사적 산물이었다.
다만 이처럼 식민지기의 ‘보장형’ 작동 원리가 해방 후 의예과에 적용됐다고 해서, 당시의 제도가 단순히 연장 및 계승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지점은 제도의 적용 범위다. 식민지 조선에서 본과 이전의 예비교육을 거치는 진학 트랙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라는 극히 제한적인 소수 경로에 불과했다. 당시 의사 양성의 실질적 중심축은 의학전문학교였으며, 이 경로의 학생들은 중등교육 이수 후 대학 수준의 일반교육 없이 곧바로 전문교육에 진입했다. 1946년 미군정의 보건 조사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한국의 의학교육 기관 6개교(국립 2, 도립 2, 사립 2) 중 유일한 ‘대학 수준’이었던 서울대학교만이 2년의 예과 과정을 요구했을 뿐, 나머지 기관은 중등학교 졸업생을 본과로 직행시켰다.15) 따라서 해방 후 의예과 제도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특권적 소수에게만 한정돼 있던 본과 이전 예비교육을, 한국 의과대학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이고 표준적인 필수 요건으로 전면화한 데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가을, 교육 당국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교원과 교재의 절대적인 부족이었다. 기존의 일본어 교재를 한국어 교재로 대체해야 했지만, 1947년 8월 시점까지도 극심한 종이 부족으로 인해 기초 교재 보급에만 수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됐으며, 더욱이 대학 수준의 교재는 수급 계획에 포함조차 되지 못했다.16) 이런 물적 토대의 빈곤은 의예과의 교육 여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의예과 교육과정의 근간인 자연과학과 외국어는 교재, 실험 기구, 담당 교원, 실험실 등의 인프라 결핍에 취약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예과 제도가 띠게 되는 ‘압축성’은 단지 의학교육 내부의 차원을 넘어, 해방 직후 한국 교육 전체를 짓눌렀던 물질적 결핍이라는 조건 속에서 입체적으로 이해돼야 한다.17)
고등교육 전반의 체제 재편 역시 이처럼 척박한 조건 위에서 진행됐다. 미군정은 1946년 이후 3년제 전문학교와 대학예과를 장기적으로 4년제 대학 체제에 흡수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입학 규정과 학점제, 졸업 요건은 물론 도서관, 실험실, 교원 등 인프라 전반이 표준화 대상이었으며, 의예과 커리큘럼 또한 대학 간 협력을 통해 정비해야 할 공동 과제로 명시됐다.18) 그러나 ‘3∼4년의 대학 교육 이수 후 의학교육’이라는 미국식 이상과 ‘4년제 대학 표준화’라는 일반 고등교육의 이상은 모두 1945∼1948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성급하게 도입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 의예과는 채 안정되지 못한 4년제 학부 체제 위에 2년의 예과를 얹는 이중 압축 구조에 놓이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구조가 비단 의학교육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음은 창설기 서울대학교의 구상에서도 확인된다. 일례로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통합 당시 상급 학년의 결원 보충을 위한 편입학이 광범위하게 허용됐으나, 4학년과 더불어 의예과부에는 편입학이 금지됐다(서울大學校二十年史編纂委員會, 1969: 50). 한편, 개교 초기 대학 당국은 ‘인간으로서 또는 국민으로서의 교양’과 ‘전문교육의 기초’ 함양을 내세워 일반교양 교육을 중시했으며, 그 교육의 관장과 교수진의 소속을 문리과대학으로 일원화하고자 했다. 요컨대 의예과가 문리과대학 산하에 편제된 것은, 문리과대학을 대학 전체의 일반교육 및 기초학문 중심 기구로 삼으려 했던 창설기의 구상과 맞물린 결과였다.
이 구상은 문리과대학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도 정식화됐다. 초대 학장 이태규는 1947년 개학식사에서 “우리 문리과대학은 직업교육을 하지 않는다. 진리를 탐구하여 조국문화를 앙양(昂揚)하는 사회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우리 대학의 사명”이라고 선언한 직후, “우리 대학이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직업 교육을 주로 하는 타 대학에서도 1, 2학년 교육을 주로 우리 대학에 일임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서울大學校二十年史編纂委員會, 1969: 25). 이 연설은 본고가 주목하는 예비교육과 전문교육의 분리 구조를 문리과대학의 관점에서 대변한다. 전문직 양성이라는 직업교육의 목적은 배제하면서도 그 전문직 지망생의 1ㆍ2학년 교육은 떠맡는 이 배치 속에서, 예비교육 관장권은 스스로 요구한 권한이 아니라 타 단과대학으로부터 ‘일임’된 책무로 규정된다. 훗날 의과대학이 관장권 이관을 요구했을 때 문리과대학이 교육적 책임을 명분으로 맞설 수 있었던 논리적 기반은 이미 1947년 시점에 마련돼 있었던 것이다.19)
미네소타 프로젝트 자문단의 관찰 기록도 이런 현실을 뒷받침한다. 1955년 자문 보고서에서 베일리(C. H. Bailey)와 맨슨(P. W. Manson)은 서울대학교와 미네소타대학교의 핵심적인 차이로 ‘단과대학 간의 분리’를 지목하며, 의학이나 수의학 등 전문직 단과대학의 기초과목을 여러 단과대학 학생이 공동으로 수강하는 것이 교육의 질과 비용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평가했다.20) 1959년 스토더드(George D. Stoddard)의 고등교육 보고서 역시, 전쟁 피해와 인프라 부족에 시달리는 문리과대학이 일반교육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특히 자연과학 부문이 의예과 교육이라는 무거운 ‘봉사(service)’ 부담을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21) 요컨대 초창기 의예과는 취약한 일반교육 및 기초과학의 토대 위에서, 단과대학별로 분절된 기초교육 운영 구조를 안고 작동했다.
3. 미군정기 의예과 제도의 도입과 압축적 형성(1) 표준화 논의와 2년제 의예과 구상의예과 제도에 관한 논의는 해방 직후부터 전개됐다. 1945년 11월에 조직된 조선의학교육평의회(Korean Council on Medical Education)는 의학교육 및 학교보건 전반에 관해 교육부에 자문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같은 해 12월, 산하 의학교육 소위원회는 대학 내 정규 의예과 과정이 정착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일부 중등학교에 의예과 과정(premedical school)을 설치할 것을 권고했고, 이듬해인 1946년 1월에는 표준화된 의예과ㆍ의학ㆍ간호학 커리큘럼이 승인되기에 이른다.22) 이처럼 입학 자격, 의학 교과과정, 간호교육, 면허 체계 등 제반 제도가 재편되는 흐름 속에서, 의예과 커리큘럼은 의학교육의 새로운 ‘입구’를 정비하는 문제로 다뤄졌다.
이 시기 미군정의 구상은 1946년 1월 30일 보건후생부가 조선교육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확인된다. 이 보고서는 당시 남한에서 “대학 수준이라 할 수 있는 의학교는 하나뿐이며 그 학교는 중등학교 졸업 후 2년의 의예과 수학을 입학 요건으로 요구한다”고 진단한 뒤, 의학교육 개편을 위한 단계적 계획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의 중등 과정을 2년 연장하는 동시에 우선 중등학교 내에 2년제 의예과 과정을 설치해 1948년까지 완성하고, 그 시점에 대학 수준의 의예과 과정을 개설하며, 1950년부터는 연장된 중등학교(12학년)와 2년의 대학 의예과를 이수한 학생만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23) 본과 이전 2년의 예비교육이라는 기준은 이처럼 제도 설계의 출발점에서 자리 잡고 있었으며, 앞서 언급한 1945년 12월 의학교육 소위원회의 중등학교 내 임시 의예과 설치 권고 역시 이런 단계 계획의 일환이었다.
이 표준화 논의의 준거는 플렉스너 보고서 이후 전개된 미국 의학교육 개혁의 논리였다. 1948년 1월에 작성된 의학교육 목표 문서에 따르면, 한국 의과대학의 수준을 미국의 ‘A급(Class A)’ 의과대학(medical school) 수준으로 격상하며, 이를 위해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 의학교육ㆍ병원위원회(Council on Medical Education and Hospitals)의 기준에 맞춰 교과과정을 표준화하고, 의예과 교육을 감독해야 한다고 규정했다.24) 미군정은 같은 시기 점령기 일본에서도 본과 이전의 교육을 의과대학 부속 예과에 두는 대신, 일반대학 수준의 기초교육과 연계하려는 원칙을 강조했다(Sams, 1946: 251-253; 橋本鉱市, 2003: 45).
그러나 미국식 의학교육 표준을 해방 직후의 한국에 원형 그대로 이식할 수는 없었다. ‘A급 의과대학’이나 ‘미국의사협회 기준’과 같은 표준화 언어는, 심각한 의사 부족 사태와 기존 의학전문학교의 유산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번역’됐다. 즉, 적어도 서울대학교에서는 본과 진입 이전의 예비교육을 2년으로 압축하되, 문리과대학이 교육과정을 관장하고 일정 성적을 충족하면 본과로 진학하는 ‘진학 보장형’ 예과로 정착시키는 타협안이 도출된 것이다. 앞서 확인했듯 본과 이전 2년이라는 틀은 1946년 1월의 시점에 이미 형태를 갖췄고, 후술하겠지만 1947년 미군정 의예과 감독관은 이 2년안을 한국의 특수한 조건에 빗대어 정당화하고 구체화하게 된다. 결국 미군정의 표준화 의지조차도 서울대학교 통합을 둘러싼 갈등, 교원 및 시설의 절대적 부족, 그리고 전문학교 경로가 남긴 관성 앞에서는 원래의 궤도를 이탈해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
(2) 서울대학교 통합 갈등과 본과 입구의 표준화1946년에 단행된 서울대학교 의학부와 서울의학전문학교의 통합은 국립서울대학교 창설을 둘러싼 이른바 ‘국대안(國大案) 파동’이라는 정치적 격동 속에서 추진됐다. 통합 과정에서 교육 당국은 두 기구의 단순한 병존이 의사 배출의 증가를 담보하지 못하며, 희소한 장비를 양분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들어 통합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25) 아울러 통합은 새 학기부터 시행하되 그 완성까지 3년의 과도기가 있을 것이며, 두 학교 간 교육 표준의 격차를 고려해 당분간 별도의 수업을 진행한다는 수습책도 내놓았다.26) 그러나 의학부 학생들은 당국의 결정이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 매몰된 조치라고 비판하며, 공간 부족과 교육 수준의 저하를 문제 삼고 나섰다.27)
이 갈등의 본질은 제도적 위상과 교육 수준, 시설 수용 능력, 학생의 정체성, 나아가 국가의 의사 수급 논리 등이 얽힌 다층적 충돌이었다. 대학형과 전문학교형이라는 상이한 의학교육을 단일한 본과 체제로 묶어내는 과정에서, 통합 의과대학은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본과에 진입시킬 것인지를 새롭게 규정해야 했으며, 의예과가 그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해답으로 떠올랐다. 전문학교 경로로는 대학 수준의 표준화를 달성하기 어려웠고, 반대로 독자적인 예과 기관을 두는 방식은 의과대학에 교원, 시설, 건물 등의 전용 인프라를 추가로 요구했기에 해방 직후의 열악한 조건에서는 채택되기 어려웠다.
2년 과정의 의예과는 이 딜레마 속에서 도출된 절충안이었다. 이 방식이 자원 부족 자체를 근본적으로 해소한 것은 아니지만, 전담 예과 기관을 신설하는 대신 문리과대학의 기존 일반교육 및 기초과학 인프라에 예비교육을 위탁함으로써 확충 부담을 최소화하고, 본과 진입의 새로운 입구를 재정의해 최소한의 공통 학력 기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토대가 된 문리과대학 단위 역시 인적ㆍ물적 결핍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의예과는 출범과 동시에 그 자원 결핍을 물려받았고, 이는 향후 제도의 만성적 불안정성을 배태하는 물질적 조건이 됐다.
(3) 2년 학제의 채택과 에드윈 밀러의 의예과 구상미군정기 의예과 감독관(Premedical Supervisor) 에드윈 밀러(Edwin L. Miller)는 서울대학교 의예과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조정한 인물이다. 그는 미군정 교육부 고등교육국 계통의 교육행정 고문이었고, 그 역할은 본과 이전 예비교육을 한국 고등교육 체제 안에서 표준화하는 데 있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1946년 11월 당시, 서울대학교의 본과 이전 교육은 두 기관으로 양분돼 있었다. 하나는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명맥을 잇는 대학예과(University Preparatory School)였고, 다른 하나는 의과대학이 독자적으로 설치한 의예과(Medical Preparatory School)였다. 대학예과에서는 1, 2학년이, 의예과에서는 주로 1학년이 예비 과정을 이수했는데, 학생들은 중등학교 4∼5년을 마친 후 “전쟁 전 일본 행정 아래에서 운영되던 방식” 그대로 전문 단과대학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다.28) 본과 이전의 예비교육을 의과대학이 직접 관장하는 편제가 이 시점까지는 존속한 것이다.
이 두 예비학교의 1학년 커리큘럼은 물리학, 생물학(동ㆍ식물학), 영어, 독일어, 문학, 심리학, 수학, 역사, 윤리학, 체육 등으로 편성될 예정이었는데, 밀러는 이 교과 구성이 “미국 의예과 학생이 교양대학(Colleges of Liberal Arts and Sciences)에서 처음 2년간 이수하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식민지기 예과 교과와 미국식 의예과 교과 사이의 이런 내용적 유사성을 미군정 측 행위자가 명시적으로 인지했다는 사실은, 향후 이질적인 두 제도가 무리 없이 접합될 수 있었던 조건을 시사한다. 다만 실제 운영의 측면에서는 교원과 실험 기자재, 교재, 화학 및 생물 실험에 필요한 가스와 수도조차 없어 교육의 질이 낮다고 봤다.
예비교육을 문리과대학으로 이관하는 방향은 밀러의 발안이 아니었다. 그가 부임해 상황을 파악한 11월 당시, 이미 문교부와 서울대학교 양측은 이관에 긍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고, 서울대학교 이사회 역시 “적절한 시점에 그런 이관을 하는 데 찬성한다”고 의결한 상태였다. 따라서 밀러의 실제 역할은 이관 자체를 결정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합의된 이관 조치에 수학 기간과 교육과정이라는 구체적인 실질을 부여한 데 있었다.
그는 의과대학 및 문리과대학의 학장과 교수진, 두 예비학교 책임자, 한국인 고등교육국장, 문교부장, 의학교육국장, 총장, 그리고 미군정 문교부 관계자 등과 협의한 끝에 문리과대학의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의예과 2년 과정을 설계했는데,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사항을 우선 고려했다. 첫째, “미국 제도에서 가장 우수한 의예과 교육을 활용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내한 전 미국 20여 개 의과대학의 입학 요건을 조사하고 거듭 회의를 연 바 있었고, 둘째, “오늘날 한국에 존재하는 조건에 적합한” 과정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후자는 이미 제기돼 있던 2년안을 수용하고 정당화하는 논거가 됐다. 그는 2년을 초과하는 의예과 교육과정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단언하며, 그 이유로 “엄청나고 비극적인” 의사 부족, 미군정기의 중등교육 2년 연장, 대학 교원의 “심각하고 거의 극복하기 어려운” 부족, 실험 시설ㆍ기자재ㆍ교재의 부재 등을 적시했다.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는 “제대로 작동하는 2년제 의예과 과정을 수립하는 것만으로도 중대한 성취가 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29)
2년 과정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담을 것인지에 대한 구상도 명시됐다. 밀러는 한국 학생들이 미국 대학의 통상적인 5과목보다 훨씬 많은 과목을 수강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1, 2학년에 각각 7과목을 배치했고, 절대적인 실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국어국문학(2년)과 수학(1년)을 삭감 가능 과목으로 지목했다. 그 결과 권고된 최소 교육과정에서 국어와 수학이 빠지고 독일어는 두 학년 모두에 필수과목으로 남았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1958년 매슈스(Matthews) 보고서가 외국어 축소와 과학 확대를 권고하고 1959년 브라운(Brown) 보고서가 의예과의 과중한 부담 중 특히 외국어 비중이 크다고 지적한 것은 이 출발점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나아가 밀러는 1947년 3월 「의예과 교육의 목적」이라는 보고서에서 의학교육의 지향점을 ‘유능한 의사’ 양성으로 규정했다. 그가 정의한 유능한 의사란 진단과 치료 기술뿐 아니라 건강 증진의 방법론, 과학적 기초, 호기심과 상상력, 그리고 평생의 자기교육 능력을 두루 갖춘 존재였다. 임상 기술 훈련은 의과대학과 병원의 몫이지만, 문화적 소양과 이상주의(idealism)의 형성은 교양대학의 고유 기능으로 설정됐다.30) 그에게 의예과는 기초과학을 이해하는 과학자, 외국어와 교양을 갖춘 지식인, 사회와 공동체를 이해하는 공적 주체, 그리고 임상 기술을 평생 갱신하는 전문가 양성이라는 ‘4중의 층위’를 2년이라는 기간에 압축해 놓은 기획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포괄적이고 이상적인 의사상은 처음부터 그것을 지탱할 물질적 기반과 어긋나 있었다. 당시 학생 파업 보고서가 증언하듯 난방 시설 없는 교실, 부족한 교재, 교수들의 잦은 결석은 1947년 의예과가 직면한 현실이었다.31) 기초과학과 일반교육을 통해 의사를 길러내려는 표준화의 논리는 강했지만, 그것을 실제 수업으로 구현하는 과정은 불안정했다. 의예과의 불안정성은 행정적 편제 문제이기 이전에 이미 강의실과 실험실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다. 밀러의 이상적인 목표와 캠퍼스의 물질적 결핍 사이의 간극은, 이후 장기적으로 전개될 제도적 논쟁의 출발점이었다.
(4) 의예과의 확산과 상이한 운영 조건1948년 7월 현재 남한에서 인가받은 의학교육 기관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의과대학, 대구의과대학, 서울여자의과대학, 광주의과대학,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등 6개교였다. 이 가운데 대구의과대학을 제외한 5개교가 4년 과정의 본과와 더불어 2년 과정의 의예과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었고, 대구의과대학도 이듬해부터 의예과 과정을 신설할 계획이었으며, 당시 전체 본과 재학생은 1,541명, 의예과 재학생은 629명으로 집계됐다.32) 이 양상은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의예과 제도는 서울대학교라는 단일 기관의 특수 사례에 그치지 않고 남한 의학교육 체제 전반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표준 경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둘째, 그럼에도 모든 대학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구현된 것은 아니었다.
2+4년 체제를 구현하려면 본과 진입 이전에 기초과학, 외국어, 일반교양 교육을 제공해야 했지만, 당시 사립대학은 이를 위한 전담 교수진과 실험실을 갖추기 어려웠다(장신, 2023: 485). 의예과 교육을 의과대학 내부에서 감당할 것인지, 아니면 이과계 단과대학이나 외부 기관에 위탁할 것인지는 곧 비용과 인력 배치를 둘러싼 문제가 됐다. 의과대학이 본과와 임상 실습에 자원을 집중할수록 예과 교육은 타 조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의예과 과정은 의학적 맥락과 괴리됐으며, 본과 교수들은 예과 교육의 내용과 수준을 통제하기 어려웠다(이순형, 1985: 18). 의예과 제도의 전국적 확산은 해방 후 의학교육의 대학화와 표준화를 상징하는 이정표였지만, 동시에 제도가 요구하는 자원과 당대의 물질적 토대가 충돌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국 의예과가 품고 있던 태생적 불안정성이 단지 서울대학교 내부의 단과대학 간 단절 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문리과대학 체제와 관장권 논쟁(1) 문리과대학 의예과의 공식화와 교과의 혼합 구조1948년에 제정된 서울대학교 학칙은 의과대학을 의학과 단일 학과로 한정하고 의예과를 문리과대학 소속 ‘의예과부’로 편제했다. 수업연한은 의예과 2년, 의학과 4년으로 공식화됐다(서울대학교 의과대학, 2008: 56). 1955년 발간된 『요람(Bulletin)』은 의과대학 교육과정이 2년간의 의예과 과정과 4년간의 의학과 과정으로 구성됨을 명시하며, 의예과 교과목 전반을 문리과대학에서 이수하도록 규정했다. 졸업에 필요한 총 240학점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80학점이 의예과 수료에 필요한 학점으로 제시될 만큼 그 비중은 작지 않았다.33) 행정적ㆍ학사적 분리는 물리적 공간의 단절로도 이어졌다. 1963∼1964년 당시 의과대학 입학은 여전히 문리과대학의 2년제 의예과 과정 수료자에게만 허용됐는데, 이때 의예과, 치의예과, 문리과대학 이학부 일부는 청량리에,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은 연건캠퍼스에 자리 잡고 있었다(Seoul National University, 1963: 42).
서울대학교 학칙 수준에서 확립된 이 2+4년 편제는 뒤이어 국가 법령으로도 규정됐다. 정부는 1948년 10월 발표한 신학제 방침을 통해 의과 및 이공 계통에 학문의 특수성을 고려해 2년의 예과를 두는 6년제 원칙을 표명했고, 1949년 12월 31일 공포된 「교육법」 제110조는 대학의 수업연한을 ‘4년 내지 6년’으로 명시했다(서울大學校二十年史編纂委員會, 1969: 453). 이어 1952년 4월 23일 공포된 「교육법 시행령」(대통령령 제633호) 제121조는 의과대학의 수업연한을 6년으로 규정했다. 의예과 2년, 의학과 4년이라는 구분이 법령에 명시적으로 도입된 것은 이듬해의 일이다. 1953년 4월 24일 공포된 대통령령 제787호(「교육법 시행령」 제121조 전문개정)는 6년의 교육과정을 “예과를 2년으로 의학과를 4년으로” 구분하고 “전항의 예과의 교육과정은 종합대학에 있어서는 문리과대학에서 관장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예비교육의 관장 주체까지 확정했다.34) 다만 이 관장 규정의 적용 범위는 모든 의과대학이 아닌 ‘종합대학’으로 한정돼 있었다. 종합대학에 속하지 않은 단설 의과대학은 대상이 아니었고, 뒤에서 살펴볼 사립대학 의예과의 다양한 소속 형태도 이런 법적 여백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행령은 기간과 관장 주체를 정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제125조는 대학이 개설해야 할 일반교양 과목군을, 제126조는 의예과 수료 학점을 90학점 이상으로 규정했다. 이 수료 기준은 1956년 대통령령 제1141호가 연 40학점(매 학기 상한 24학점)을 기준으로 ‘기준 학점과 수업연한의 곱 이상’으로 정비하면서 일반적인 2년제 의예과 기준 80학점 이상으로 조정됐다. 이어 1975년 대통령령 제7536호(제120조 제4항)에 이르러서는 원칙적으로 80학점을 유지하되, 문교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졸업 기준 140학점을 적용하는 대학의 경우 예외적으로 72학점을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국가는 이수 학점과 교양 과목군이라는 양적ㆍ형식적 기준은 통제했지만, 정작 의학 예비교육의 고유한 목적이나 예과와 본과를 잇는 교육적 연계 원리는 제시하지 않았다.35)
서울대학교에서 선제적으로 확립된 2+4년 편제와 문리과대학 교육과정 관장은 이로써 종합대학에 적용되는 법정 기준과 일치하게 됐다. 이 법적 테두리 안에서 교육과정 관장을 의과대학으로 이관하려면 단순한 학내 합의를 넘어 「교육법 시행령」 개정이라는 외부 입법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한편 「교육법 시행령」 제정(1952)과 제121조 전문개정(1953)은 한국전쟁의 전화 속에서 부산 피난 정부 주도로 단행됐다. 다만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이 2+4년 구조를 창출했다기보다는 1946∼1948년 시기에 이미 형성돼 있던 절충안이 전시연합대학 체제와 피난지 수업이라는 조건 아래 법정화됐다고 보는 편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이 규정으로 의예과의 법정 수업연한과 교육과정 관장 주체는 명확해졌다. 적어도 서울대학교에서는 일정 성적을 충족해 의예과를 수료하면 별도의 경쟁 없이 본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Maloney, 1956: 29). 즉 의예과는 의과대학 본과의 ‘하위 학년’이라기보다, 문리과대학이 교육과정을 관장하고 그 수료가 본과 진학 요건이 되는 별도의 ‘예비교육 과정’으로 규정된 것이다. 예과 교육과 본과 교육의 조직적 분리는 청량리와 연건동이라는 캠퍼스의 분리로도 이어졌다. 이런 구조가 이후 의학계 내부에서 제기될 이른바 ‘별개 계통의 교육’이라는 비판의 제도적ㆍ공간적 토대였다.
교과 구성에서도 의예과의 경계적 성격이 드러난다. 1968∼1969년 서울대학교 의예과 교과과정은 일반교육 과목(국어, 문화사, 철학개론, 사회과학, 체육 등), 외국어 과목(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그리고 기초과학(수학, 일반화학, 일반물리학, 일반생물학 등) 및 각 과학의 실험 과목이 혼재된 형태였다(서울대학교, 1967: 205-206). 같은 시기 전국 의예과의 교과목도 물리학, 생물학, 화학을 근간으로 하되 국어, 외국어, 철학, 심리학, 사회학개론 등을 포괄하는 양상으로 수렴됐다(閔秉根, 1967: 433). 이는 의예과가 본과 진입을 위한 ‘과학적 토대’를 다지는 동시에 ‘일반 교양과 인간 이해’라는 거시적 목표까지 짊어져야 했음을 의미한다. 이 목표의 이중성은 예비교육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논리였지만, 현실에서는 두 과제를 조화시킬 정교한 조정 장치를 요구하는 까다로운 조건이기도 했다. 따라서 쟁점은 교과의 폭이 아니라 ‘연결 방식’이었다. 예과의 기초과학은 본과의 기초의학과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했으나, 교육과정 내에서 이 접합이 제대로 조직되지 않는 한, 학생들에게는 그저 본과와 무관한 ‘별개의 과목’으로 파편화될 수밖에 없었다.
문리과대학이 채택한 일반교육의 설계 원리 자체도 본과와의 유기적 연계를 제약하는 구조적 요인 중 하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은 “별도의 일반교육 교과목을 설치하지 않았고, 전공교과목의 기초과목을 일반교육의 교과목으로 대체”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그 결과 학생들은 “단지 필수과목으로 규정된 과목 수만 채우면” 그만이었다(윤해동, 2025: 176). 이런 ‘배분 필수(distribution requirement)’ 체제하에서 의예과생이 이수한 일반교육의 상당 부분은 타 학과가 전공 신입생을 위해 개설한 기초과목이었다. 의예과 교과가 본과의 기초의학과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한다는 비판은 이 느슨한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컨대 문리과대학이 일반교육 전담 기구로서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후대의 평가와, 앞서 1959년 스토더드 보고서가 지적한 자연과학 부문의 과중한 ‘봉사’ 부담은 결국 이 제도가 낳은 동일한 사태의 양면이었다(윤해동, 2025: 177).
(2) 1950년대 중반 교육과정 개편과 일반교육의 예과 집중1953년 말부터 1955년에 걸쳐 서울대학교는 대학 전체의 교육과정을 개편했다. 1954년 2월 교양과목을 40학점에서 46학점으로 늘린 데 이어, 1955년 개정 학칙에서는 졸업학점을 180학점에서 160학점으로 단계적으로 낮추는 방침을 반영해 1959년 졸업생부터 160학점을 적용했다. 이 개편 과정에서 의과대학의 일반교양 과목은 의예과에서 이수하게 됐고, 본과에서는 그 학점만큼을 전공과목으로 충당하게 됐다(서울大學校二十年史編纂委員會, 1969: 163-165). 즉, 예과는 일반교육을, 본과는 전공 교육을 전담하는 분업이 학칙 수준에서 명문화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대학교 전체의 상황을 조망해 보면, 문리과대학의 일반교육 관장은 이미 한 차례 후퇴를 겪은 상태였다. 미군정기에는 문리과대학이 교양 교육을 전담했으나 정부 수립 이후 각 단과대학으로 분산됐고, 이것이 “예산의 낭비와 교육적 효과의 저하”를 초래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1956년 문리과 대학 내에 교양과가 신설돼 1957년 5월 교양과정부로 승격됐다(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2006: 491-492). 윤해동은 이 같은 교양 교육 후퇴의 근본 원인을 “전공교육의 시간 수를 늘리려는 다른 여러 단과대학의 요구”에서 찾은 바 있다(윤해동, 2025: 177).
이런 맥락 속에서 의예과의 위치는 자못 예외적이었다. 다른 단과대학들이 전공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반교육을 파편화시키는 동안에도, 의예과만은 문리과대학 소속의 정원제 단위로 존속했다. 1956∼1957년 문리과대학 교양과ㆍ교양과정부의 신설과 의예과 관장권 문제가 동시기에 맞물려 불거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학(全學) 차원의 일반교육 관장이 재편되는 혼란기에도, 문리과대학의 교육과정 관장이 법령으로 정해져 있던 단위 중 하나가 의예과였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시기 의학계 내부에서는 의예과 폐지론과 6년제 통합론이 제기됐다. 의과대학의 교양 교육 부담이 의예과에 집중된 상황과, 의예과의 관장 주체 및 본과 연계 방식이 도마 위에 오른 현상은 궤를 같이한다. 이처럼 의예과 문제는 의학교육 내부의 틀을 벗어나 서울대학교 전체의 일반 교양 교육과 전공 교육의 배분 문제와 맞물려 있었다.
(3) 6년제 전환 시도와 관장권 논쟁1950년대 후반, 의예과를 둘러싼 관장권 논쟁은 단순한 학내 다툼을 넘어 ‘전문직 양성’과 ‘일반교육’이라는 두 가치의 충돌 양상으로 전개됐다. 1956년 전국 의과대학장들이 교원 부족을 이유로 의과대학 수업연한을 6∼8년으로 개편할 것을 건의한 데 이어, 1957년 10월 국립대학교 의과대학장들은 문리과대학 산하의 의예과가 본과와 ‘전연 별개 계통’으로 겉돈다고 비판하며 의과대학 이관, 혹은 폐지 후 이과계 선발을 요구했다.36) 이에 문교부는 전면 이관이 「교육법 시행령」과 충돌하므로 생물학과 화학 등 특정 기초 교과의 학사 행정만 분할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다.37)
그러나 같은 시기에 서울대학교 내부에서는 정반대의 구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1958년 3월 학장회는 ‘교양과정부 설치안’을 채택해 문교부에 건의했는데, 이는 교양과정부의 법규화를 통해 그 연한을 “의학계 2년, 인문ㆍ사회계 및 이학계는 1년”으로 명문화하려는 것이었다(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2006: 492). 이처럼 1957∼1958년의 국면은 예비교육 2년을 둘러싸고 상반된 두 구상이 병존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1959년 서울대학교 신입생 모집에서 의예과가 없어지고 직통 6년제 의과대학(모집정원 50명)이 신설됐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38)
이 갈등의 제도적 구조는 미네소타 자문단의 관찰을 통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39) 멀로니(William F. Maloney)는 1956년 보고서에 당시 서울대학교 의예과의 운영 방식을 상세히 기록했다. 의학생 선발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 문리과대학 주관으로 이뤄지고, 일정 성적만 충족하면 본과 진입이 자동 보장돼 의과대학 차원의 추가 선별은 원천 봉쇄돼 있었으며, 교과과정의 설계부터 학생의학적 기록 보관에 이르는 제반 권한 역시 문리과대학의 소관이었다(Maloney, 1956: 5, 28-29). 매슈스(Matthews)의 1958년 보고서는 의과대학 측이 입학 정책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 탈환을 원했으며, 과도한 외국어 시수를 줄이고 기초과학 시수를 늘리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전한다.40)
1959년 브라운(Brown)의 보고서에 이르면 양측의 논리가 교차한다. 문리과대학 행정가들은 처음 2년의 과목을 자신들이 가르치므로 입학과 행정 권한도 가져야 한다고 여긴 반면,41) 의과대학 측은 미래 의사의 선발권은 응당 본과 교수진의 손에 있어야 한다고 맞섰고, 브라운 자신은 의예과 2년 과정이 112시수에 달해 미국에 비해서도 부담이 과중하며, 특히 외국어 비중이 크다고 평가했다.42)
결론적으로 1957년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국립대학 의학계가 제기한 비판의 초점은 의예과 자체보다 단절을 초래한다고 인식된 ‘문리과대학의 교육과정 관장 구조’에 있었으며, 의과대학 측이 요구한 의예과 이관, 혹은 폐지 후 이과계 수료자 선발이라는 대안은 단절된 본과 연계를 시정하려는 시도였다. 역설적이게도 문리과대학은 의예과를 본과로부터 격리한 행정적 장벽인 동시에, 일반교육과 기초과학교육을 제공해 의예과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떠받친 필수 기반이기도 했다.
(4) 통합 구상과 공동 조정의 모색1959년 입시 보도에 나타난 의예과 폐지 및 직통 6년제 모집 개편안이 실제로 시행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며, 이후 일정 기간 서울대학교 의예과가 문리과대학 소속으로 유지된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같은 시기 치과대학의 학제 개편 과정에서는 상반된 정책적 움직임이 교차하고 있었다. 1959년 1월 문교부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6년제로 개편하며 치의예과 2년 및 치의학과 4년 구조를 지시했고, 치의예과 교육과정 역시 기존 의예과와 마찬가지로 문리과대학이 관장하도록 조치했다.43) 이는 단순히 기존 관행을 준용한 것이 아니라, 같은 해 개정된 대통령령 제1430호가 치과대학을 제121조 적용 대상에 명시적으로 포함한 입법의 결과였다. 즉, 의예과를 의과대학으로 통합하려는 구상이 보도되던 바로 그 시점에, 국가 법령은 오히려 문리대 관장 체제를 치의예과로까지 확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관장 구조가 대학의 자율적 선택이 아니라 국가 법령의 강력한 구속 아래 있었음을 방증한다. 1961년 입시 요강과 1962년 3월 시행된 「국립학교설치령」 별표 1은 여전히 문리과대학 산하에 의예과와 치의예과를 나란히 두고 있었다(서울大學校二十年史編纂委員會, 1969: 292).44)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961년 서울대학교 학내에는 의과대학 교수 5명과 문리과대학 교수 5명으로 구성된 의예과교육과정위원회(Premedical Course Committee)가 설치돼 예과 운영에 관한 행정적ㆍ교육적 정책을 조율하고 있었다.45) 요컨대 1960년대 초반 서울대학교의 예비교육은, 행정 소속과 법정 교육과정 관장은 문리과대학에 놓여 있으면서도 실질적인 정책 권고는 양 단과대학의 공동기구를 통해 이뤄지는 이중 구조를 띠고 있었다.
이런 제도적 긴장이 한국만의 고유한 현상은 아니었다. 전후 일본의 신제(新制) 대학 초기에도 의ㆍ치학부 진학을 위해서는 타 학부나 타 대학에서 2년 이상의 일반교육(‘진학 과정’)을 이수해야 했고, 진학 과정 수료자의 선발 방식을 둘러싸고 유사한 ‘접속의 혼란’이 불거진 바 있다.46) 일본은 이 문제로 단계 간 진학 자격을 법정화했다. 1954년 3월 공포돼 1955년 4월 시행된 학교교육법 개정(법률 제19호)을 통해, 의ㆍ치학부의 수업연한을 ‘진학 과정’ 2년 이상과 ‘전문 과정’ 4년을 합친 6년 이상으로 규정한 것이다.47) 물론 이 개정도 단계의 구분을 유지했으며,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진학 과정을 의ㆍ치학부 밖의 다른 학부에 둘 수 있도록 했다.48) 1957∼1959년 한국에서 제기된 문제들 역시 일본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진통이었지만, 양쪽의 궤적은 달랐다. 한국의 의예과는 이후로도 본과와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채, 조직적으로 분리된 ‘경계 과정’으로 고착했기 때문이다.
5. 의학교육 개편론과 고등교육 재편 속의 의예과(1) 1960년대의 자기비판과 기초의학 교육론1959년 직후 의학교육계의 논의는 학술지 지면으로 이어졌다. 1960년 8∼9월 심상황과 장기려는 정원과 교원, 시설, 교육 연한, 전문의 수련 등 의학교육 전반을 아우르는 논점을 제기했는데, 특히 장기려는 6년제 일관 의과대학 구상을 지지하면서도 당장 본과 교수진과 시설이 부족하다는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며 의예과 학사 행정의 의과대학 이관이라는 최소한의 절충안으로 물러섰다(沈相煌, 1960; 張起呂, 1960). 이는 1957년에 등장했던 타협안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음을 보여준다.
이때 주목할 것은 비판 담론의 무게중심 이동이다. 1960년 논의의 초점이 주로 정원, 교원, 시설이라는 외적 운영 조건에 머물렀고, 관장권 역시 학사 행정의 이관이라는 절차적 수준에서 다뤄졌다면, 1967년 『대한의학협회지』의 의과대학 교육제도 특집에 이르러서는 비판의 초점이 교육 내용, 즉 예과 교과와 본과 지식의 연계 방식으로 옮겨 간다. 기초의학 교육론이 주창한 단계 간 연계, 오늘날의 용어로 ‘종단적 통합(vertical integration)’의 관점에서 예과의 기초과학은 단순한 선이수 과목이 아니라 본과 지식으로 이어져야 할 필수 준비 과정이었고, 의예과가 본과와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은 이런 관점의 성장과 함께 설득력을 얻었다(柳駿, 1967; 閔秉根, 1967: 433).
요컨대 의예과 문제가 운영 주체에서 교육 내용 및 연계 방식으로 확장되면서, 의과대학의 관장권 요구는 행정의 언어를 넘어 교육과정상의 근거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970년대의 예과-본과 통합론은 ‘실험대학’이라는 국가 정책의 충격에 대한 갑작스러운 반응이 아니었다. 1960년대 의학계의 자기 비판이 그에 앞서 나타나며 논리적 접점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지역사회 의학론ㆍ통합교육론과 개편 요구의 축적1969년 이후 의학계는 의학교육을 변화하는 사회, 지역사회 의료, 그리고 의사의 사회적 역할과 연결해 논의하기 시작했고(정일천, 1969; 梁在謨, 1970; 孫澈, 1972), 이런 관점에서 의예과에 배치된 교양ㆍ사회과학ㆍ기초과학의 효용은 재평가의 대상이 됐다. 직접적인 담론 계승은 아닐지라도 1940년대에 의예과 감독관 밀러가 문화와 이상주의, 사회 제도의 언어로 다뤘던 예비교육의 목표가 1970년대 들어 ‘지역사회’와 ‘인간 교육’이라는 시대적 언어로 변주돼 제기된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당대 의학 매체들의 논조는 대비를 이뤘다. 『대한의학협회지』가 ‘지역사회 의학’이라는 적극적 의제를 통해 의예과의 교양 및 사회과학 기능을 재정당화하려 했다면, 『의협신보』는 제도의 파행을 질타했다. 1971년 조규상은 한국 의학교육이 “국가시험 합격만을 목표로 하는 느낌”이라 비판하며 “의예과와 본과는 통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언했다(曺圭常, 1971). 이처럼 ‘목표 상실’과 ‘예과–본과 단절’이라는 부정적 진단과 재정당화 시도가 결합하면서 1970년대 전반의 개편론이 형성됐다. 다만 당대의 ‘의예과 무용론’이 곧 ‘일반교육 무용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판의 핵심은 일반교육과 기초과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의학적 맥락’ 없이 제공된다는 데 있었고, 따라서 학계에서는 폐지론과 더불어 의예과를 ‘더 의학적으로’ 재구성하자는 요구가 동시에 분출했다.
본과 교육과정 개편 흐름 역시 이런 재구성 요구에 추동력을 제공했다. 1972년 『대한의학협회지』 좌담회에서 통합 강의와 블록 강의가 본격적으로 논의됐고(대한의학협회, 1972),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1971년부터 통합 강의를 개설하며 ‘의학은 하나’라는 새로운 개편 원리를 제시했다(서울대학교 의과대학, 2008: 102, 170).49) 본과의 지식 체계가 장기ㆍ계통ㆍ문제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재편될수록, 예과의 기초과학도 기존처럼 개별 분과 학문의 논리만으로는 존립하기 어려워졌다. 1970년대의 ‘의대 관장론’은 바로 이 교과과정 내적 논리 위에서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3) 실험대학, 관악 종합화와 의예과의 예외적 위치같은 시기 고등교육 전반의 재편 흐름 속에서 의예과의 예외적 지위는 오히려 뚜렷해졌다. 신입생을 계열 단위로 모집해 기초ㆍ교양과정 이수 후 전공을 배정하는 ‘실험대학’ 정책의 틀에, 입학 시점에 진로가 확정되는 의예과는 들어맞지 않았다.50) 1974학년도 서울대학교 모집 요강에서 의예과는 일반 자연 계열에 포함되지 않은 ‘비계열 특수 모집 단위’로 분류됐고, 이 지위는 1978학년도까지 유지됐다(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2006: 445-448). 1968년 재설치된 교양과정부가 규정상 의예과ㆍ치의예과의 교육과정과 학적을 관장하면서도, 정작 수용 능력의 한계를 이유로 이들을 실제 수용 대상에서 제외했던 사정 역시 의예과의 모호한 경계적 처지를 방증한다(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2006: 492-493).
문제는 이런 일련의 재편이 의예과 관장권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실험대학은 어디까지나 신입생 모집 단위와 교양과정의 개혁이었을 뿐 단과대학 간의 권한 배분 규칙을 다루는 정책이 아니었고, 의예과는 비계열 예외로 남으면서 개혁의 무풍지대에 놓여 있었다. 나아가 1975년 ‘관악 종합화’ 조치는 기존 문리과대학과 교양과정부를 해체하고 기본 학문과 전문 학문 대학의 구분을 강화했지만, 이는 단지 관장 조직을 없애 의예과의 행정 소속을 신설 ‘자연과학대학’으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했다(서울大學校三十年史編纂委員會, 1976: 842).
더욱이 4장에서 살펴봤듯, 같은 시기 시행령 개정으로 종합대학 문리과대학의 일률적 관장 조문마저 삭제되면서 제도의 공백은 더욱 커졌다. 국립대학 일반교양과정에 관한 별도 규정은 남아 있었지만, 의예과를 둘러싼 다섯 가지 권한 영역을 지속적이고 포괄적으로 조정할 거버넌스는 확인되지 않는다. 결국 의예과는 자연과학대학에 편제된 채 본과와 병원 임상 교육이 남은 연건캠퍼스와 분리됐고, 제도의 행정적 단절은 관악과 연건이라는 물리적ㆍ공간적 경계로 다시 표면화했다. 요컨대 관악 종합화는 갈등을 조율할 규칙이 부재한 상태를 유지한 채, 제도를 새로운 조직과 공간 속에 재배치한 것이었다.
(4) 의과대학 관장론과 6년제 통합론1974년 11월,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권이혁이 의예과 교육에 의과대학의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고 주장한 데 이어, 1975년 『의협신보』 신년 좌담회에서는 의예과의 의과대학 관장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모였다(權彛赫, 1974).51) 이어 1976년 윤덕선은 예과와 본과의 구분을 없앤 ‘통합 6년제’ 운영을 제안했다(尹德善, 1976). 같은 해 12월 『대한의학협회지』가 주최한 「의예과 교육의 개선」 좌담회에서 두드러진 대목은 의예과의 ‘목적’을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대한의학협회, 1976). 즉, 의예과가 본과 진입을 위한 단순한 학점 이수 과정에 불과한지, 아니면 장래 의사에게 요구되는 기초과학 지식과 인간에 대한 이해, 사회적 시야를 형성하는 과정인지에 대한 성찰이었다. 참석자들이 본과 교육과의 연계 및 조기 의학 접촉의 중요성을 강조했듯, 의과대학의 관장권 요구는 단순한 행정적 관할권 다툼이 아니라, 예과 교육이 본과와 겉돌 때 발생하는 ‘분리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제도적 요청이었다. 아울러 이 좌담회는 통합 6년제가 도입되더라도 교육 목표와 교과 내용, 교수 참여, 그리고 학생의 실질적 경험이 혁신되지 않으면 기존의 문제가 반복되리라는 인식도 드러냈다.
여기서 1970년대 의학교육 개편 논의에 적어도 세 가지 층위가 겹쳐 있었음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첫째, 본과 교과를 장기ㆍ계통 중심으로 재편하고 이를 예과의 기초과학과 연계하려는 교육과정 차원의 종단적 통합, 둘째, 법정 2+4년제라는 제도적 구분 자체를 철폐하려는 학제 차원의 통합, 셋째, 예과 교육의 관할권을 문리과대학 등 타 단과대학에서 의과대학으로 이관하려는 관장권 차원의 재배분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논의는 같은 지면상에 병존하며 논리적 접점을 형성했지만, 어느 한 가지가 다른 것을 직접 견인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 경로도 서로 달랐다. 교과 통합은 본과 교육과정 내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수용됐고, 법정 2+4년 학제는 유지됐지만, 타 단과대학의 관장 규칙은 1975년 말 시행령 개정을 통해 삭제되는 등 각기 독자적인 변화를 겪었다. 더불어 국립대학 측 논의에서는 타 단과대학의 관장과 본과ㆍ병원 공간의 물리적 분리가 핵심 문제로 지적된 반면, 사립 및 지방대학 측 논의에서는 기초과학 교원, 실험실, 교재의 만성적 부족이 주된 쟁점으로 거론됐다. 요컨대 당시의 통합론은 단일한 마스터플랜을 갖춘 제도 개혁안이었다기보다, 대학마다 처해 있던 서로 다른 결핍을 ‘의학교육의 연속성’이라는 공통의 학술적 언어로 타개하고자 했던 해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6. 설립 주체 및 지역별 운영의 분기와 전국적 진단(1) 사립ㆍ지방 의예과의 양상지금까지의 분석은 주로 서울대학교 모델을 중심으로 전개됐지만, 당시 의예과를 운영한 주체가 국립대학만은 아니었다. 1948년 7월 기준으로 6개 공인 의학교육 기관 중 세 곳(세브란스, 서울여자, 이화)이 사립으로서 2년 과정의 의예과 커리큘럼을 운영하거나 도입 중이었고,52) 1959년의 한 징집연기 공고는 국립과 사립을 막론하고 전국 의과대학이 ‘의학과’와 ‘의예과’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53) 즉, 의예과는 이미 1950년대에 전국적이며 범(汎) 설립 주체적인 제도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동일한 명칭의 제도가 곧 동일한 방식의 운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세브란스의과대학은 1946년 의예과를 신설한 뒤, 연희대학교와의 합동을 전제로 1949년부터 의예과 교육을 연희대학교 이공대학으로 이관했다(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백년 편찬위원회, 1986: 7, 140). 이는 사립 종합대학 내에서도 의예과가 의과대학 소속이 아닌 일반 학문 계열에 편제된 사례로, 서울대학교의 ‘문리과대학 관장’ 모델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진입권과 관장권의 분리’를 보여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단설 형태에 가까웠던 가톨릭대학 의과대학은 처음부터 의학교육의 시야 안에서 의예과 교과과정을 자체적으로 다뤘고, 이화여자대학교 역시 의예과를 의과대학 내 ‘예과부’로 소속시키며,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지역사회 보건 및 예방의학 현장실습을 예과 2학년 필수과목으로 도입하는 행보를 보였다(閔秉根, 1967).54)
한편, 지방 국립대학의 사례는 관장권을 둘러싼 갈등이 비단 서울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1960년 5월, 전남대학교 의예과 학생 약 280명은 예과를 문리과대학이 관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동맹휴학에 돌입했다.55) 같은 해 9월에는 정원 초과 모집과 치의예과와의 합반 수업에 반발해 재차 맹휴를 결행하고 문교부에 직접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56) 5월의 항의가 ‘관장 구조’라는 제도적 권한을 겨냥했다면, 9월의 항의는 ‘과밀과 합반’이라는 교육 현장의 운영 실태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는 의예과 체제를 둘러싼 내부적 불만이 권한의 층위와 실무 운영의 층위 양면에서 폭발한 상징적 사건이다.
(2) 의예과 소속ㆍ주관의 유형론이상의 사례와 자료에서 확인되는 의예과의 소속ㆍ주관 형태는 대표적으로 다음 네 가지 양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문리과대학 소속ㆍ관장형(서울대학교, 1975년 이전)으로, 교양 교육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의학교육을 전담하는 본과와의 괴리가 커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둘째, 자연과학대학 소속형(서울대학교, 1975년 관악 종합화 이후)으로, 단과대학 개편에 따라 자연과학대학 산하로 편제됐지만, 의예과가 ‘이과 계열의 한 학과’로 취급되며 일부 의예과생은 차별을 호소했다. 셋째, 이과ㆍ공과대학 이관형(세브란스의과대학-연희대학교, 1949년 이후)으로, 사립 종합대학 내에서 의과대학의 교육 기능을 타 이공계열 단과대학에 위탁한 변형적 모델이다. 넷째, 의과대학 행정 소속 보고형(1976∼1978년도 자료 기준)으로, 당시 조사에서 다수의 사립대학이 예과 주관처를 의과대학으로 보고한 경향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유형이다. 다만 이 네 양상은 상호배타적이거나 완결적인 유형이 아니며, 전국 조사에서 확인된 공동 주관 1개교처럼 복수 조직에 권한이 나뉜 경우도 존재했다.
이런 운영 방식의 분기는 거시적 조사 자료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문교 당국과 주한미국경제조정처(USOM)가 공동으로 진행한 1960년 전국 국립 고등교육 조사는 국립대학의 예과 과정 운영이 문리과대학 중심으로 결정되고 의과대학 교수진과의 협의가 충분치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57) 그러나 사립대학에서 의과대학이 예과를 직접 주관한다고 해서 예과-본과 단절이 바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부 사립대학의 경우 기초과학 전담 교원, 실험실, 교재, 그리고 재정 전반의 심각한 결핍이 지적됐고, 이런 기본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의과대학이 행정상 예과를 직접 관장하더라도 실제 교육은 외부 강사 위촉과 시간강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국립대학 모델의 핵심 모순이 ‘진입권과 관장권의 분리’로 나타났다면, 사립대학 모델에서는 이것이 ‘관장권의 통합과 자원의 결핍’이라는 문제로 변주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58)
(3) 1970년대 말 전국 조사와 존속 내의 문제화5장에서 살펴본 1974∼1976년의 통합ㆍ관장 논쟁과 이 장에서 정리한 전국적 분기 양상은 1978년 하나의 공개적 진단으로 수렴했다. 최삼섭이 1976∼1978년도 자료를 바탕으로 전국 14개 의예과의 교과과정과 조직을 비교ㆍ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행정적 소속은 문리과대학 계열(8개교), 의과대학(5개교), 공동 주관(1개교)으로 나뉘었는데, 국립 6개교는 모두 문리대 계열에 속했고, 사립 8개교 중 5개교는 의과대학 주관으로 보고됐다(崔三燮, 1978; 1979a; 1979b). 이를 바탕으로 그는 예과-본과의 유기적 연계 강화와 의예과 교육위원회의 상설화를 제언했다.59) 편차는 행정 소속에만 그치지 않았다. 동일한 법정 학제 아래에서도 총 이수학점(79∼105.5학점), 예과 전공 비중(18.1∼62.9%), 예과 단계의 의학 과목(0∼39학점)에 이르기까지 대학 간 격차가 크게 나타났다[표 1]. 최삼섭 스스로가 이를 두고 “대학 교육의 자주성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문제점이 있다”고 못 박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崔三燮, 1978: 190).60)
이런 편차의 배경에는 1975년 말 문리과대학 관장 조항 삭제라는 법적 변화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법령이 이수학점 등 양적ㆍ형식적 기준만 정했을 뿐, 의예과의 교육 목표나 예과-본과 연계 원리를 규정하지 않은 데 있었다.61) 의예과 도입 30년 만에야 첫 체계적 비교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간의 표준화 지체를 시사하며, 교육위원회 상설화 제언 역시 책임 주체의 부재라기보다는 당시 현장에서 상설 조정 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의학교육 개편 논의는 1979년 말까지 이어졌다. 연세대학교 원주분교가 예과와 본과를 잇는 6년 통합 과정으로 운영을 시작하는 등 구상이 실제 실행에 옮겨진 사례도 등장했다(金近鎬, 1979;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백년 편찬위원회, 1986: 223).62) 충남대학교, 전북대학교 등 의과대학 신설이 이어지는 가운데 의예과는 법정 학제로서 존속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존속 내에서 교과 내용, 본과 연계, 관장 주체, 그리고 6년제 통합 여부가 재차 도마 위에 올랐다. 요컨대 1979년은 의예과 체제가 실패해 소멸한 시점이 아니라, 제도의 틀을 유지한 채 그 목적과 관할, 연계의 문제가 새롭게 공론화된 역사적 변곡점이었다.
7. 의예과 학생의 소속 인식과 경계성의예과를 둘러싼 긴장은 행정과 법령의 층위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이 장에서는 학생 간행물과 설문 자료가 당시의 ‘분리 편제’를 어떻게 서술하고 인식했는지 살펴본다.63) 1950년 『진학』 5월호에 실린 소개문은 ‘문리과대학 의예과부’라는 명칭 아래, 의예과를 본과 진입을 위한 단순한 대기 과정이 아니라 장래 의학도에게 요구되는 품성과 지식의 도야 과정으로 규정했다(韓용徹, 1950: 74). 일간지 공고란에서도 의예과생은 구별되는 독자적 학생 범주로 호명됐다.64)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 학생들이 발간한 『혈맥(血脈)』 창간호(1959)는 암기 위주 학업의 고충과 동기 간의 열등감부터, 다방 문화의 낭만과 인문학적 갈증에 이르기까지 예과생의 내면과 일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서울大文理大醫豫科, 1959). 이 기록을 통해 학생들은 문리과대학 소속으로 생활하면서도 스스로를 장차 의학의 길로 나아갈 ‘의학도’로 정체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의예과는 일반 문리과대학 생활과 의학 전문직 진입 사이의 ‘중간 위치’에 있었고, 이는 공간의 분리로도 이어졌다. 의예과생은 본과 선배나 임상 교수진이 있는 연건동 임상 공간에 조기 편입되는 대신, 시기에 따라 동숭동, 청량리, 공릉동, 관악 등 문리과대학이나 교양과정부 공간에 머물며 2년의 세월을 보냈다(서울大文理大醫豫科, 1959: 10; 서울大學校三十年史編纂委員會, 1976: 37).
주목할 점은 학생 자료에 나타난 인식이 단일한 ‘의대 관장론’으로 수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67년 서울 소재 의과대학 본과생 260명의 응답에서는, 의예과 소속에 대해 ‘폭넓은 교양을 위해 문리대가 좋다’는 의견을 포함한 문리대 선호(55.0%)가 의대 선호(39.2%)보다 오히려 높게 나타났다[표 2].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예과 교과과정이 ‘부적당하다’는 응답은 본과생 303명 중 240명(79.2%)에 달했다. 그 이유로는 인문ㆍ사회 과목의 부족, 본과 학업과의 연계성 부족, 예능 과목의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꼽혔다[표 3]. 두 문항 간의 교차분석 자료가 없어 동일 응답자가 양가적 태도를 보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같은 시기 서울 소재 의과대학 본과생 집단 내에서 ‘문리대 소속에 대한 선호’와 ‘실질적인 교과 개편 요구’라는 두 가지 경향이 공존했음은 확인된다.
무엇보다 학생 자료에 나타난 언어는 ‘소속감’이라는 핵심어로 집약된다. 1978년 서울대학교 의예과 학생 간행물 편집부는 1975년 관악 종합화 이후 발생한 ‘소속 대학의 애매함’ 때문에 학생들이 “소속감 불명(不明)”과 “심한 소외감”을 겪고 있다고 진단하고, 그 해법으로 의예과의 소속을 변경하거나 “관계 대학으로 구성된 예과운영위원회”를 상설화할 것을 촉구했다(含春苑 編輯部, 1978: 25-28). 이 소속감의 언어는 거시적인 행정 편제 논쟁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을 드러낸다. 1957년 의과대학장들의 ‘별개 계통의 교육’이나 1976년 좌담회의 ‘본과와의 연계’ 논의에서 단과대학과 교수회가 주어였다면, 1978년 편집부의 서술은 의예과의 분리를 학생의 일상적인 ‘소속 경험’으로 제시했다. 자신을 ‘의예과 학생’이라 부르면서도 행정상으로는 문리과대학생, 다시 자연과학대학생으로 분류되는 이중의 호명 속에서, 의예과생은 자신이 어느 공동체에 속하는지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소외와 이탈의 언어로 토로한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2011년 설문 조사의 요약(‘소속감이 약하다’, ‘차별을 느낀다’)이 보여주듯, 이런 언어는 수십 년이 지난 후대에도 나타났다. 이는 적어도 서울대학교 의예과의 경우, 소속감의 결여가 단순하고 일시적인 불만이 아니라 ‘분리 편제’라는 제도적 구조에 기인하는 경험이었음을 시사한다. 요컨대 의예과 제도의 정당성 문제는 위로부터의 행정적 통합ㆍ폐지 시도와는 별개로, 학생들의 구체적인 ‘생활세계’ 차원에서도 반복적으로 제기됐던 것이다.
8. 결론한국의 의예과 제도는 해방 후 의학교육을 대학 수준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탄생했지만, 안정된 체제로 출발하지 못했다. 플렉스너 보고서 이후 확립된 미국식 의학교육의 표준화 모델을 지향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식민지기 의학전문학교 체제와 일부 제국대학ㆍ사립대학식 ‘보장형 예과’ 체제, 그리고 해방 및 전쟁 이후의 척박한 인프라와 타협하며 ‘2년제 압축형 예비교육’으로 번역됐다. 의예과는 본과 진입의 필수 관문이었지만, 교육과정 관장과 학사 운영의 권한은 대학과 시기에 따라 문리과대학, 교양과정부, 자연과학대학, 의과대학 등에 나뉘어 있었다. 따라서 의예과의 역사는 한국 의학교육의 ‘입구’와 ‘기초’가 어떻게 형성되고 또 흔들려왔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의예과가 겪은 장기적 불안정성의 근본 원인을 ‘전문직 진입권’과 ‘일반교육 관장권’의 분리 그 자체보다도, 그 분리를 조율할 제도적 규칙이 끝내 정착하지 못했다는 데서 찾았다. 늦어도 1956년 무렵 서울대학교의 경우, 일정 성적만 충족하면 별도의 경쟁 없이 의예과에서 본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이 ‘보장형’ 구조 아래에서 의예과 운영의 여러 권한을 누가 행사하는가의 문제는, 곧 의학 전문직 형성의 시작점을 누가 통제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됐다. 의과대학의 권한 이관 요구는 전문직 교육의 통제권을 본과 이전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였고, 반대로 문리과대학의 교육과정 관장 구조는 전문직 교육 역시 대학의 보편적 일반교육과 기초학문 위에 놓여야 한다는 전후 대학 체제의 원칙을 대변했다. 의예과의 미결 상태가 학장 건의, 문교부 판정, 학생 맹휴, 전국 비교 조사라는 명시적 갈등으로 거듭 표면화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후 일본이 1954년 법 개정을 통해 진학 과정과 전문 과정의 접속을 원칙상 ‘의ㆍ치학부 내 6년 구조’로 제도화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2+4년제가 법제화된 뒤에도 교육과정과 권한의 분리를 조정하는 규칙이 더 오래 정착하지 못했다.
이런 구조적 긴장은 다음의 네 가지 차원에서 입체적으로 발현됐다. 첫째, 제도적 준거의 차원에서, 당시 미국에서는 의학교육 진입 전 대학 교육이 3∼4년으로 연장되는 추세였으나, 한국에서는 긴급한 의사 수요와 인프라 부족 속에서 2년의 최소 예비교육이 채택됐다. 둘째, 관장과 자원의 차원에서, 동일한 2+4년 체제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일부 국립대학에서는 문리과대학 계열의 교육과정 관장으로, 일부 사립ㆍ지방대학에서는 기초과학 교원과 실험실의 물리적 결핍으로 각각 굴절돼 나타났다. 셋째, 교과의 차원에서, 일반교육ㆍ외국어ㆍ기초과학ㆍ사회과학으로 구성된 예과 교과와 본과 학업의 연계 부족이 여러 대학에서 반복적으로 비판됐다. 넷째, 생활세계의 차원에서, 1978년 서울대학교 의예과 학생 간행물 편집부는 자연과학대학과 의과대학 사이에서 생긴 애매한 처지를 ‘소속감 불명’과 ‘심한 소외감’으로 서술했다.
물론 30년 넘게 유지된 제도라면, 그 지속 자체가 당대 조건에 대한 일정한 기능적 적합성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의예과는 의사 양성 경로를 고정하고 일반교육 및 기초과학 자원을 타 학과와 공유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기능적 적합성이 곧장 예과-본과 연계나 권한 배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낳지는 못했다. 즉, 한국의 의예과는 지속과 미정착이 위태롭게 양립해 온 역사였다. 결론적으로 한국 의예과의 장기적 불안정성은 단순한 행정상의 혼선이나 일시적 정책 실패로 볼 수 없다. 그것은 ‘의학을 배우기 전에 어떤 지식을 어디에서 배워야 하며, 그 과정을 누가 통제할 것인가’라는 본질적 문제의 제도적 표출이었다. 나아가 그 배경에는 장래 의사에게 요구되는 과학적ㆍ임상적ㆍ인문적ㆍ사회적 요소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둘러싼 교육적 논의가 놓여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본고는 현재의 학제 개편 논의에 직격하는 함의를 갖는다. 2024년 시행령 개정으로 ‘의예과’라는 낡은 제도의 형식은 해체할 수 있게 됐지만, 본고가 추적한 역사는 학제의 통합이 곧 의학 예비교육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교과의 통합, 학제의 통합, 권한의 재배분은 서로 다른 문제였고, 과거에도 각기 다른 궤적을 그렸다. 오늘날의 통합 6년제가 과거의 2+4년제가 드러낸 한계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예과와 본과의 구분을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다음 세 가지 물음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첫째, 일반교육과 기초과학을 누가 어떤 조직과 자원으로 담당할 것인가. 둘째, 기초과학, 기초의학, 임상의학 교육을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연결할 것인가. 셋째, 학생의 소속감과 전문직 정체성을 어떤 생활세계 속에서 배양할 것인가. 이 근본적인 물음은 제도의 형식을 바꾼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으며, 새로운 6년제의 공간 안에서 또다시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Notes1)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25조 제1항은 2024년 2월 20일 개정 전 “제31조 제1항 제1호에 따라 대학의 의과대학ㆍ한의과대학ㆍ치과대학 및 수의과대학 학사학위과정의 수업연한은 6년으로 한다. 이 경우 그 교육과정은 예과를 각각 2년으로, 의학과ㆍ한의학과ㆍ치의학과 및 수의학과를 각각 4년으로 운영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정 이후 “제31조 제1항 제1호에 따라 대학의 의과대학ㆍ한의과대학ㆍ치과대학 및 수의과대학 학사학위과정의 수업연한은 6년으로 한다”는 내용으로 정비됐고, 이에 따라 의과대학 교육과정을 의예과 2년과 의학과 4년으로 분리 운영하도록 한 문구가 삭제됐다. 개정 이후 다수 의과대학이 의예과를 폐지하거나 6년 통합 교육과정으로 재편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2)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해방 후 의예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지만, 의예과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그것은 학부 진학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일본 본토의 구제(舊制) 고등학교를 대신해 제국대학 학부 진학자를 길러낸 기관이었다. 다만 대신한 것은 예비교육 담당 기능이었을 뿐, 진학 보장 여부에서 양자는 달랐다(2장 참조). 흔히 의예과의 문제를 ‘일제 잔재’로 규정하지만, 뒤에서 논의하듯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구조적으로 맞닿는 주로 본과(전문 과정) 진입을 사실상 보장하는 작동 방식이며(2장 및 4장 참조), 예과 교육의 이념과 그 보편적ㆍ제도적 확산, 즉 본과 이전 예비교육을 모든 의학교육 기관 진입의 일반 조건으로 삼은 것은 미군정기 정책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해방 후 의예과는 식민지 유산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두 계보가 접합된 혼성 제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3) 의예과가 자동으로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별로 의예과를 유지하거나 6년 교육과정으로 재편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열린 것이다. 다만 현시점에 대다수 의과대학이 통합 6년제를 실시하고 있거나 실시할 예정이다. 4) 본고는 의예과를 단순한 교과과정이 아니라 ‘의학 예비교육 체제’로 파악한다. 의학 예비교육 체제란, 본과 진입 이전에 요구된 지식, 학습 기간, 선발 기준, 교육 담당 기관, 공간적 배치, 학생 정체성, 장래 의사상 등을 함께 묶는 역사적 장치를 뜻한다. 5) 본고는 이 두 모델을 한국 제도가 의식적으로 조합한 ‘원형’이 아니라 한국 의예과의 ‘혼성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비교의 준거로 사용하며, 그 관계를 직접적 영향이 아니라 구조적 유사성과 제도적 기능의 중첩으로 본다. 6) 여기서 ‘불안정성’은 학생 선발과 정원, 행정 및 학적 관리, 교육과정 결정, 실제 수업 제공, 수료 판정 및 본과 진학 처리 등의 경계와 이견 조정 절차가 반복적으로 재논의되면서도 이를 포괄적ㆍ지속적으로 조정하는 방식이 정착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논란의 대상이었던 의예과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1970년대 후반에는 정원이 증가하며 전국적인 제도로 확대됐다. 즉 본고는 의예과의 불안정성을 제도의 ‘존속’이 아니라 ‘정착’의 문제로 다룬다. 7)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관한 대표적 연구로는 이왕준의 연구(이왕준, 2006)를 참고할 것. 본고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전체상을 다루지는 않되 자문 보고서에 기록된 의예과의 관장, 선발 구조 등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8) 특히 의예과 학사조직을 이과대학이나 자연과학대학에서 의과대학으로 옮기려는 반복된 시도를 지적하는 정한나ㆍ양은배의 논의는 본고의 ‘관장권’ 분석과 맞닿아 있지만, 그 분석의 축은 교육과정 편성 원리에 놓여 있다. 의예과 교육을 본과ㆍ전문직이 직접 책임지지 않고 사실상 외부에 위탁하는 구조를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빗댄 이성낙의 비판도 그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이성낙, 2010). 9) 의예과의 연원을 정면으로 다루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장신은 한국형 의예과의 기원을 추적하고자 했지만, 의예과라는 제도의 형성을 뒷받침할 1차 사료의 빈곤에 부딪혀 그 계보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으며, 해방 후 의예과 제도의 기원은 사실상 미해명의 공백으로 남겨졌다(장신, 2023). 본고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미군정기 행정 사료와 대학 자료를 통해 이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명시적으로 제기한 질문은 왜 미군정이 4+4의 8년제가 아닌 2+4의 6년제로 결정했는가였고, 그가 도달한 잠정적인 답변은 해방 전후를 통틀어 기초과학을 가르칠 교수 요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3장 3절에서 살펴보듯 미군정 의예과 감독관 에드윈 밀러(Edwin Miller)의 1947년 보고서는 이 추론을 문서로 뒷받침한다. 밀러는 2년을 넘는 과정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근거 중 하나로 대학 교원의 “심각하고 거의 극복하기 어려운 부족”을 들었다. 10) 본고는 1945∼1948년을 ‘형성기’로, 1954∼1959년을 ‘1차 동요기’로 설정하며, 그 사이의 1949∼1953년은 건국 초기와 한국전쟁을 포괄하는 ‘전시 이행기’로 규정한다. 이 이행기는 전쟁이라는 예외적 상황 속에서도 「교육법」(1949)과 「교육법 시행령」(1952) 제정을 통해 학제의 법정화가 이루어진 시기로서, 형성기에 마련된 의예과의 제도적 골격이 법령 차원에서 확정되는 연장 국면에 해당한다. 11) 법문학부를 둔 후발 제국대학은 고등학교 출신만으로 정원을 채우기 어려워 전문학교 출신 등 방계(傍系) 지원자에게도 문호를 넓히기도 했지만, 의학부에서는 그 폭이 매우 좁았다. 일례로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졸업생 3,706명 중 극소수의 학사 입학자와 검정 합격자를 제외하면 거의 전원이 고등학교 출신으로 추정된다(永島広紀, 2014: 11). 즉 의학 분야 진학의 경우 구제 고등학교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지만, 의학부 진학의 단선적 보장을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예비교육 간의 구조적 차이는 해방 후 한국 의예과의 기원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국 의예과의 ‘입학=진학’ 보장 기능은 구제 고등학교의 경쟁 선발 구조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서 실제로 작동했던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편제 및 기능과 훨씬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경성제국대학 초대 예과부장을 역임한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는 경성제국대학 창설 당시 고등학교가 아닌 예과를 둔 배경에 대해, 고등학교 졸업 후 시험을 통해 대학 입학을 허가하면 조선인의 입학이 어려울 수 있으므로 예과를 설치해 이를 졸업한 자를 바로 대학에 진학시키도록 했다고 회고했다(京城帝国大学創立五十周年記念誌編集委員会, 1974: 20). 요컨대 고등학교 경로가 지닌 진학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예비 교육과 학부를 안정적으로 직결시킨 제도적 장치가 바로 예과였던 셈이다. 13) 1970년대 한국 의학계의 비교 논의에서도 이 차이가 반복적으로 지적됐다. 이를테면 이순형은 미국에서는 “아예 의예과제도를 채택하지 않고 이과계통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입학하도록, 말하자면 의과대학을 대학원 과정으로 운영하는 학교가 더 많다”고 언급했다(이순형, 1985: 16-17). 14) 1924년에 설치된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문과와 이과로 편제됐으며, 이과(의학ㆍ자연계 지향) 수료자는 별도의 선발 고사 없이 학부로 직행했다. 특히 설립 이후 상당 기간 경성제대의 이과계 학부는 의학부가 사실상 유일했기에, 예과 이과 입학은 곧 의학부 진학을 의미했다. 이는 입시의 실질적인 경쟁 관문이 학부가 아닌 예과 입학 단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특정 계열 진입이 학부 진학을 담보하는 구조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 의예과에서 작동한 ‘입학=진학’ 원리의 식민지적 구조적 선행 형태를 이룬다. 다만 이때의 진학 보장은 어디까지나 계열(트랙) 단위의 경로였을 뿐, 예과 과정 내에서의 낙제나 중도 탈락까지 유예해 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15) “14 Medical Personnel and Facilities - Korea, 1946 / Adjutant General’s Office,” Administrative Services Division, Operations Branch, Foreign (Occupied) Area Reports, 1945-1954, E(NM3)368B, Box 2070, RG 407,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p. 3 (국립중앙도서관 영인본). 16) “Dept. of Education History: Text Books /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USAFIK: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1945-1948, E1256(A1), Box 35, RG 554, NARA, p. 1 (국립중앙도서관 영인본); “Dept. of Education History: Personal Interviews /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USAFIK: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1945-1948, E1256(A1), Box 36, RG 554, NARA, p. 1 (국립중앙도서관 영인본). 17) 미국의 본과 이전 예비교육 기간 변천에 관해서는 Abraham Flexner, Medical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A Report to the Carnegie 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Teaching (Boston: D. B. Updike, The Merrymount Press, 1910), Kenneth M. Ludmerer, Learning to Heal: The Development of American Medical Education (New York: Basic Books, 1985), Kenneth M. Ludmerer, Time to Heal: American Medical Education from the Turn of the Century to the Era of Managed Ca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등을 참조할 것. 플렉스너는 최소 2년의 대학 예비교육을 기준으로 제시했으나, 이후 미국에서는 의학교육 진입 전 대학 교육의 권고 기간이 3년 이상으로 늘었고, 1940년대에는 실제 입학생 다수가 3∼4년의 대학 교육을 이수했다. 18)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IV, “Chapter IX: Education in South Korea under United States Occupation, 1945–1948,” VII, “Specialized Advanced Education,”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ID husa_004_0020_0080. 19) 이런 배치가 관련 주체들 사이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친 결과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국립서울대학교 창설 과정에서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폐지되고 의학 예비교육의 관할이 문리과대학으로 이관됐지만, 정작 이 교육을 누가 어떤 원칙에 따라 전담할 것인가를 두고 정면으로 논의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질문은 제도 설계 단계에서 명시적 합의 없이 행정적 편제로 봉합됐고, 1950년대 이후 본격화한 관장권 논쟁에서 쟁점화된다. 20) “Seoul National University Reports: Agricultural, Medicine and Public Administration, 1956-1957,” UA-00286, Box 2, Folder 20, University Archives,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Minneapolis, MN, p. 6. 21) “Seoul National University, 1956-1960,” UA-00902, Box 15, Folder 20, University Archives,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Minneapolis, MN, p. 22. 22) “Weekly Summarys: Nursing, Medical and Veterinary,”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p. 1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69_051); 「醫科大學을 新設」, 『동아일보』, 1945년 12월 4일. 23) “Report for Korean Educational Commission,” Records of the Adjutant General’s Office; Administrative Service Division, Operations Branch, Foreign (occupied) Area Reports 1945-1954, Box No. 2056, Folder 5, RG 407, NARA (国立国会図書館請求記号 FOA 06557), pp. 1-2. 24) “Aims and Objectives of Medical Education,”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p. 1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51_054). 25) “Medical College Will Be Taken Over by Seoul University,”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p. 1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48_059). 26) “Medical College Will Be Taken Over by Seoul University,”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p. 1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48_059). 27) “Students of Seoul University Object to Addition of Medical College,”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p. 1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49_071); “Medical College Will Be Taken Over by Seoul University,”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p. 1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48_059). 28) “Progress Report on Premedical Education Seoul National University,”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51_052). 이하 밀러보고서의 내용은 이 문헌에 근거한다. 29) 밀러는 “미국에서는 의학교육이 거의 200년간 발전한 끝에야 대다수 의과대학이 2년 이상의 의예과 교육을 요구하게 됐고, 최근 15년 동안은 3년 내지 4년의 의예과 과정을 촉구해 왔다”며 당시 미국의 학제적 기준도 보고서에 병기했다. 즉, 2년이라는 기간은 당시 미국에서 인정되던 최소한의 자격 요건이었을 뿐, 밀러 자신이 전한 3∼4년으로의 확대 추세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격차를 묵인하며 2년안을 고수한 핵심 명분은 앞서 언급한 한국의 척박한 조건이었다. 의예과의 소속 문제에 관해서도 그는 실용적인 논리를 내세웠다. 그는 한국에서 의예과 과정을 교양대학에 두면 의과대학은 진정한 의학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적어도 밀러 자신에게 의예과의 문리과대학 배치는 일반교육의 이상을 실현하기보다는 의과대학의 부담을 덜어 본과의 전문교육 시간을 확보하려는 방편적 성격이 짙었다. 2년안은 관련 교수진, 의과대학과 문리과대학 학장, 총장, 의학교육위원회, 문교부장, 그리고 미국인 고문의 승인을 차례로 거쳐 1946년 12월 둘째 주 서울대학교 이사회의 정식 의결을 통과했다. 이와 동일한 ‘2+4년’ 구조는 이후 1948년의 학칙과 1953년 「교육법 시행령」 개정에서도 확인되며, 이후 법정 학제로 굳어져 2024년까지 존속했다. 30) “Premedical Education I: Objectives of Premedical Education,”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p. 1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51_051). 31) “Special Report on Student Strike,”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p. 1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51_029). 32) “Medical Schools in South Korea,”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p. 1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46_017). 33) “Korea: Bulletin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1955,” UA-00922, Box 81, Folder 48, University Archives,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Minneapolis, MN, p. 7. 34) 이 조항은 이후 1975년 12월 31일 공포된 대통령령 제7928호(1976년 3월 1일 시행)로 삭제됐다. 개정된 제115조(의과대학 등의 수업연한)는 “의과대학ㆍ한의과대학ㆍ치과대학의 수업연한을 6년으로 하되, 그 교육과정은 예과를 2년으로 의학과ㆍ한의학과ㆍ치의학과를 4년으로 구분한다”고 규정하고 종전의 문리과대학 관장 문장을 삭제했다. 임한종은 이 변화를 “의예과가 어디에 속한다는 말은 없”어진 것으로 해석했다(대한의학협회, 1976). 35) 이 시점에서 본고가 ‘관장’이라는 용어로 포괄해 온 개념을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의예과 운영을 둘러싼 권한은 구체적으로 다음 다섯 영역으로 구별된다. ① 학생 선발과 정원 배정, ② 행정 소속, 학적 관리, 생활지도, ③ 교육과정 결정, ④ 실제 수업 제공, ⑤ 수료 판정과 의학과(본과) 진학 결정이 그것이다. 시행령의 문언이 명시적으로 확정한 것은 종합대학에서의 교육과정 관장, 즉 ③뿐이며, 나머지 네 영역의 귀속은 개별 대학의 학칙과 실제 운영 자료를 통해 별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뒤에서 다룰 멀로니와 브라운의 기록은 서울대학교에서 문리과대학이 입학 사무와 학생의 학적 기록까지 관리했음을 보여 주며, 1957년의 ‘부분 관장안’이나 1961년의 ‘공동위원회’ 구성은 이 권한들이 언제든 분할되고 재배치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하에서 본고가 명명하는 ‘관장권 논쟁’은 이 다섯 가지 권한 영역이 여러 조직에 파편적으로 배분된 가운데 그 경계를 획정하고 이견을 조율할 제도적 장치가 끝내 정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빚어진 구조적 분쟁을 뜻한다. 단순히 논쟁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제도의 미정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일한 권한의 경계가 반복해 쟁점화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이관 요구와 한시적 공동기구가 거듭 등장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바로 그 불안정성의 판정 기준이 된다. 36) 「醫大修業年限 延長을建議 全國醫大學長들」, 『동아일보』, 1956년 1월 20일; 「現醫大學制是正을 建議」, 『조선일보』, 1957년 10월 13일; 「醫豫科의 學事行政 醫大서 管掌할듯」, 『경향신문』, 1957년 11월 20일. 39) 다만 미네소타 자문단의 보고서는 미국식 의학교육 기준과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정당화 언어를 동반한 행위자의 문서이기도 하다. 본고는 이를 당대 제도 현실에 대한 증언으로 활용하되, 그 평가와 권고가 특정한 규범적 준거에서 나온 것임을 함께 고려한다. 40) “Final Report of Observations and Recommendations Concerning the College of Medicine, Seoul National University by James H. Matthews, M.D., 1958,” UA-00849, Box 65, Folder 05, University Archives,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Minneapolis, MN, pp. 19-20. 41) 브라운의 보고서에 인용된 문리과대학 측의 논리는 1959년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며, 앞서 언급한 1947년 문리과대학 초대 학장 이태규의 개학식사에도 유사한 정당화 언어가 나타난다. 문리과대학의 입장에서 의예과 관장은 특정 전문직 양성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 전체의 ‘일반교육’ 책무를 이행하는 보편적 사례 중 하나에 불과했다. 따라서 의과대학 측이 제기한 ‘본과와의 연계’ 요구는 그들의 체계 내에서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양측의 대립은 단순한 행정 권한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충돌을 넘어, 예비교육을 ‘보편적 일반교육의 일부’로 볼 것인지 ‘전문직 형성의 첫 단계’로 볼 것인지를 둔 우선순위와 관점의 충돌이었다고 할 수 있다. 42) “Report of Observations and Activities as Adviser in Medicine to College of Medicine, Seoul National University by E. B. Brown, Jr., Ph.D., 1959,” UA-00849, Box 65, Folder 12, University Archives,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Minneapolis, MN, pp. 15-17. 45) “Observations and Comments on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Attached Hospital School of Nursing and School of Public Health by N.L. Gault, Jr., M.D., 1961,” UA-00849, Box 64, Folder 25, University Archives,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Minneapolis, MN, p. 33. 위원회 위원 중 의과대학 소속은 김홍기(이비인후과학 조교수), 이승훈(병리학 부교수), 권이혁(예방의학 조교수), 이동기(소아과학 교수), 이진순(생화학 부교수) 등 5명이었다. 46) “Medical Education,” GHQ/SCAP Records, Civil Information and Education Section, Education Division, Higher Education Branch, Topical File, 1945-51, Box No. 5644, Folder No. 26, RG 331, NARA (国立国会図書館請求記号 CIE(C) 03566-03567). 47) 전후 일본 의ㆍ치학부 학제 개편은 「학교교육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学校教育法の一部を改正する法律)」(1954년 법률 제19호, 1954년 3월 31일 공포, 1955년 입학생부터 시행)에 따른 것이다. 다만 이 ‘6년제’가 곧 오늘날과 같은 6년 일관 교육과정을 뜻하지는 않았으며, ‘진학 과정’과 ‘전문 과정’의 구분 자체는 유지됐다. 48) 여기서 유의할 점은 단계와 조직의 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일본의 접속 규칙이 정착하지 못했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본고는 일본의 사례를 조직의 ‘분리’ 자체와 제도의 ‘불안정성’을 엄밀히 구별하기 위한 비교 준거로 삼는다. 49) 통합교육의 언어는 이미 1958년 매슈스 보고서와 1961년 골트 보고서에서 본과 교육과정 개편(강의 축소, 실습 확대, 합동 컨퍼런스 등)으로 관찰된 바 있다(“Final Report of Observations and Recommendations Concerning the College of Medicine, Seoul National University by James H. Matthews, M.D., 1958,” UA-00849, Box 65, Folder 05, University Archives,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Minneapolis, MN, pp. 28, 132-133; “Observations and Comments on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Attached Hospital School of Nursing and School of Public Health by N.L. Gault, Jr., M.D., 1961,” UA-00849, Box 64, Folder 25, University Archives,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Minneapolis, MN, p. 51). 50) ‘실험대학’은 문교부가 1973년부터 도입한 대학 교육 개혁 정책으로, 소수 대학에 시범 적용된 뒤 1970년대 후반까지 대다수 대학으로 확대됐다. 핵심은 학생을 개별 학과가 아니라 계열(단과대학) 단위로 광역 모집해 1∼2학년의 기초ㆍ교양과정을 이수하게 한 뒤 전공을 배정하는 방식으로, 학점제, 부전공제, 전과(轉科) 허용 등 이수 방식의 유연화와 대학 운영의 자율화 및 현대화를 지향했다. 52) “Medical Schools in South Korea,”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p. 1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46_017). 54) “HLS 1-1: Medical Schools FY ’71,” Records of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E179, Box 1-2, RG 286, NARA, pp. 20, 27 (국립중앙도서관 영인본). 57) “Report on Survey of National Higher Education in the Republic of Korea, 1960,” UA-00849, Box 64, Folder 12, University Archives,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Minneapolis, MN, pp. 128-129. 58) 이 대비는 전국 조사와 학술지 논의라는 간접 자료에 의존하는 가설이며, 개별 사립 및 지방대학의 학칙, 요람, 교무 자료에 의한 사례 연구로 검증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전남대학교 사례는 ‘문리대 관장–학생 저항’의 동형(同型) 구조가 지방 국립대학에서도 나타났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울대학교 중심 서술의 한계를 일부 넘어선다. 59) 최삼섭의 조사는 1976∼1978년도 자료에 근거하면서도 서울대학교 의예과의 행정적 소속을 ‘문리과대학’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의예과는 1975년 관악 종합화로 이미 자연과학대학 소속으로 재편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 분류는 실제 편제와 다른 집계 기준을 따랐거나, ‘문리과대학’이라는 명칭을 자연계 일반 학문 단과대학을 통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한 결과로 보인다. 아울러 해당 조사의 표는 전체 대학을 국립과 사립으로 집계할 뿐, 개별 대학명에 따른 관장 주체나 구체적인 권한 행사 실태를 명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각 대학 의예과의 실질적인 권한 귀속 여부는 당시의 개별 학칙과 요람을 통한 후속 검증 과제로 남는다. 60) 단, 이 조사 자료의 해석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 대학들이 보고한 ‘행정적 소속’이라는 범주만으로는 앞서 구별한 다섯 가지 권한 영역 중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특정하기 어렵다. 둘째, 표본상 국립대는 대부분 지방에, 사립대는 대부분 서울에 편중돼 있어 설립 주체의 효과와 지역의 효과를 엄밀히 분리할 수 없다. 즉, 이 조사는 권한 귀속의 전모가 아닌 ‘운영 편차의 단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61) 관장 조항 삭제 이후에도 국립대학에는 일반 교양 과정에 관한 별도 규정이 남아 있었다. 「국립학교설치령」(대통령령 제3303호, 1967년 12월 14일 개정)은 서울대학교에 교양과정부를 두어 일반 교양 과정 교육을 맡기면서 의과대학예과ㆍ치과대학예과에 관한 특례를 뒀고, 대통령령 제4473호(1969년 12월 24일 공포, 1970년 3월 1일 시행)는 이 규정을 국립대학교 일반으로 확대했다. 따라서 1970년대 국립대학에서 ‘문리과대학이 의예과를 관장했다’는 서술은 어느 권한을 가리키는지 특정하지 않으면 부정확해지며, 1978년 조사의 ‘문리과대학’ 집계도 각 대학의 실질적 관장 구조를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볼 수 없다. 표 1.전국 14개 의예과의 교과과정 실태(1976∼1978)
Table 1. Curricular Profiles of Fourteen Premedical Courses in Korea (1976∼1978)
표 2.서울 소재 4개 의과대학 본과생 대상 의예과 귀속 설문조사 결과(1967, n=260)
Table 2. Survey Results on the Institutional Affiliation of the Premedical Course among Medical Students at Four Medical Schools in Seoul (1967, n=260)
표 3.서울 소재 5개 의과대학 본과생 대상 예과 교과과정 평가 결과(1967, n=303)
Table 3. Evaluation of the Premedical Curriculum by Medical Students at Five Medical Schools in Seoul (1967, n=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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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Progress Report on Premedical Education Seoul National University,”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51_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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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Seoul National University Reports: Agricultural, Medicine and Public Administration, 1956-1957,” UA-00286, Box 2, Folder 20, University Archives,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Minneapolis, MN.
63. “Special Report on Student Strike,”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51_029).
64. “Students of Seoul University Object to Addition of Medical College,”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49_071).
65. “Weekly Summarys: Nursing, Medical and Veterinary,” USAFIK: Military Government-Chief Adviser (Civilian), 1945-1948,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36, RG 332, NARA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AUS179_01_05C0169_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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