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This article examines the historical process through which pharmacists, organized through the Korean Pharmaceutical Association, sought to establish their professional status and social roles within South Korea’s changing healthcare system from the 1950s through the 1970s. Drawing on the concept of the “professional project,” it analyzes a series of collective efforts through which pharmacists sought to secure their jurisdiction in the pharmaceutical market while legitimizing their professional status by demonstrating their expertise and social necessity amid competition with various healthcare actors over roles and professional boundaries. The article focuses on three cases in which this process was particularly pronounced. First, in responding to druggists’ demands for the right to subdivide medicines for retail sale and patent medicine sellers’ demands for elevation to druggist status in the 1950s and 1960s, the Korean Pharmaceutical Association defended pharmacists’ market jurisdiction over the handling of medicines and intervened collectively in the legislative process. Second, from the late 1960s onward, through efforts to enact the School Health Act, implement the school pharmacist system, and conduct pollution surveys, the Association applied hygienic knowledge and techniques accumulated within the field of pharmacy to the emerging problem of environmental pollution and presented school health and environmental hygiene as new areas of professional activity for pharmacists. Third, as vacancies in public health center directorships in rural areas became increasingly severe in the 1970s, the Association called for expanding eligibility for these positions to multiple professions and argued that pharmacists, too, were qualified to oversee local health administration. Although these efforts did not all result in stable institutionalization, the Association identified gaps in the contemporary healthcare system as opportunities for new professional activities, linked them to pharmacists’ professional roles, and accumulated experience in responding collectively to other professions and the state. By tracing these processes, this article shows that pharmacists did not merely perform roles assigned to them but actively sought to shape their own professional standing and roles amid social and institutional change. More broadly, through the activities of pharmacists, it demonstrates that South Korea’s healthcare system in the 1950s–1970s constituted a pluralistic arena in which diverse actors competed over roles and jurisdictions and sought to claim new spheres of activity.
1. 머리말1970년 1월, 서울시약사회 회원들은 영등포구, 중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종로구 일대 거리로 나와 흰 가운을 입고 대기 표본을 수집했다. 분광광도기를 통해 분석된 표본 중 이산화황, 일산화탄소, 먼지 농도는 곧 서울 시내 대기오염의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로 발표되었다.1) 이러한 약사들의 행보는 당시 한국 사회가 직면했던 보건의료의 여러 공백과 맞물려 있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농어촌의 의료 공급 부족이 지속되는 한편(신창훈, 2023; 정무용, 2023), 환경오염과 같은 새로운 공중보건 문제가 부상하였다. 서울시약사회의 대기오염 조사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약사 집단이 새롭게 모색한 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본 논문은 1950-1970년대 대한약사회라는 직능 단체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약사 집단과 이들이 당대 보건의료의 지형 속에서 보여준 주체성에 주목한다. 최근 의료사학계는 의사 중심 의료사나 국가 중심 제도사의 시각에서 벗어나, 의료 공급의 불균형 속에서 등장한 다양한 비의사 행위자들의 역동성에 주목하고 있다. 접골사의 지역 의료 활동(박경용, 2013), 농촌 보건진료원 사업을 통한 간호사의 직능 확립(정다혜, 2022), 벽지에서 조산 등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 가족 계획계몽원(Lee, 2024) 등을 다룬 연구들은 각 집단이 당대의 보건의료체계의 공간적 틈새를 어떻게 유연하게 활용했는지 보여줌으로써, 보건의료 지형도의 다원성을 이해하는 지평을 열었다.
해당 시기 약사들이 당대 농어촌과 도시 빈민가의 진료 공백을 메우며 “사실상 1차 진료자”로 활동한 사실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박윤재, 2021: 112). 그러나 약업사(홍현오, 1972)나 약학사(한국약학사발간위원회, 2017) 전반을 다룬 통사들이 일부 분량을 할애하여 대한약사회의 활동을 다루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약사 집단 자체에 초점을 맞춘 독립적 연구는 미진하다. 더욱이 사실상의 1차 진료자라는 역할은 의료 공급의 공백과 의약분업이 정착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형성된 과도적 역할이라는 점에서 이를 약사 집단의 의도적 노력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 논문은 대한약사회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약사 집단이 변화하는 보건의료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전문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전개한 주체적 전략들을 살펴본다.
본 논문은 그러한 노력들을 사회학자 마갈리 사파티 라슨(Magali Sarfatti Larson)의 “집단적 지위 이동 프로젝트(collective mobility project)”의 관점을 빌려 분석한다. 라슨에 따르면 특정 직업의 전문직화 과정은 시장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작업과 그에 걸맞은 사회적 위상 및 신뢰를 인정받는 과정이 긴밀히 맞물리며 전개된다. 가령 서구 의사들이 독점적 권리를 가진 의료 전문직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공익에 대한 봉사와 사심 없는 헌신의 표방은 이들이 배타적 시장 권리를 확보하고 정당화하는 핵심 자원으로 기능했다(Larson, 2013: 66-79).
반면 한국을 포함한 상당수 비서구 사회에서 보건의료 부문의 전문직화는 국가가 이미 제도화된 전문직 체계를 이식하면서 특정 직업 집단에 일정한 법적 지위를 선제적으로 부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Anderson, 2021; 조병희, 1994; 이혜경, 2007). 그러나 국가에 의해 부여된 법적 지위가 곧바로 해당 집단의 실질적인 시장 지배권과 사회적 권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한국의 약사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따라서 약사들은 이를 현실에서 확보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전문직 프로젝트를 전개해야 했다. 가령 1953년 제정된 「약사법」은 약사에게만 약품 소분(小分)의 권한을 부여했지만 약종상들은 관행적으로 약품을 소분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법적으로 부여된 권한을 현실의 시장에서 관철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으며 이를 위해 약사들은 집단 행동에 나서야 했다. 이러한 경쟁의 경험을 통해 약사들은 자신들의 전문직으로서의 지위가 법적 승인만으로 확정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고, 이는 다양한 집단적 실천으로 이어졌다.
1950년대는 약사의 수가 증가하고 「약사법」에 근거한 대한약사회가 설립되면서 지역 및 전국 단위의 조직이 마련된 시기이기도 했다. 약사들은 자신들의 시장 관할권과 사회적 지위를 집단적으로 주장하고 확대할 수 있는 조직적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1950-1970년대 한국 보건의료체계에 존재했던 여러 공백, 즉 농어촌 지역 의료 공급 부족, 새롭게 부상한 환경오염 문제에 대한 제도적 대응의 미비, 지역 보건행정을 총괄ㆍ관리할 전문인력의 부족 등은 약사 집단이 보건의료 영역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과 전문성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전개된 약사 집단의 전문직 프로젝트를 약종상ㆍ매약상과의 시장 관할권 경쟁, 학교약사 및 환경오염 조사 활동, 보건소장 복수직제화 활동이라는 세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이들 사례를 통해 약사 집단이 약품 시장에서의 관할권을 공고히 하는 한편, 당대 보건의료체계의 공백을 활용하여 보건의료 전문가로서의 사회적 정당성을 구축하고 이를 제도적 권한으로 확장하고자 했던 과정과 그 성과 및 한계를 규명한다. 이를 통해 1950-1970년대 한국의 보건의료 지형을 구성했던 다양한 행위자들의 활동을 복원하고 당시 보건의료의 현실과 변화상을 보다 풍부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2. 약종상ㆍ매약상과의 갈등과 시장 관할권의 공고화대한약사회(이하 약사회)는 대한민국 약사면허를 취득한 자를 회원으로 하는 사단법인으로 1953년 제정 약사법에 근거하여 설립되었다.2) 약사회는 자신들의 연원을 1928년 설립된 고려약제사회로 삼고 있다(대한약사회, 2004: 111). 고려약제사회는 1909년 설립되어 일본인 약제사(藥劑師)들이 정회원 대부분을 차지했던 조선약제사회(창립 당시 명칭은 한국약제사회)와 달리 조선인 약제사들로만 구성된 단체이다(대한약사회, 1970: 21-26).3) 고려약제사회는 대중 강연회 등을 개최하여 당시 조선인들에게 생소한 약사라는 전문직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제약회사에 관리 약사를 두도록 건의하거나 제약회사와 약사의 급여 최저선을 협의하는 등 약업계 내부의 직업적 이해와 권익 조정에 주로 집중되었다(대한약사회, 1970: 21-26, 31-34; 홍현오, 1972: 41-43). 이는 당시 고려약제사회가 약사 집단의 직업적 기반을 조직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약사의 전문성을 보다 광범위한 공중보건 영역과 연결하여 사회적 권위로 확장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해방 후 고려약제사회는 조선약제사회(1946년)를 거쳐 대한약제사회(1948년)로 개칭했으며, 제정 약사법에 따라 1954년 대한약사회로 재창립되었다(대한약사회, 1970: 31-34). 약사법은 약사회의 존재를 법적으로 명문화했을 뿐 아니라 약사회 산하에 특별시, 도약사회를 두어 지역과 전국을 연결하는 체계적인 직능 조직으로 자리 잡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4) 이처럼 지역-전국 조직망을 갖춘 직능 단체로 변모한 약사회는 1950년대 중반 약종상들의 약사법 개정 요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소분 갈등’을 경험했다. 이 과정은 약사회가 약사의 시장 관할권을 확립하기 위한 집단적 대응을 전국적 차원에서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개별 약사들에게 직능 단체로서 대한약사회가 지닌 영향력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약종상(藥種商)은 1912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약품 및 약품영업취체령」을 통해 규정한 약업자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약업자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제를 조합하는 약제사, 약품을 제조ㆍ판매하는 제약자, 매약을 조제ㆍ이입ㆍ수입하여 판매하는 매약자, 그리고 약품을 판매하는 약종상으로 구분되었으며, 1914년 「약종상취체에 관한 규칙」을 통해 한약을 조제ㆍ판매하는 한약종상의 지위가 추가로 규정되었다.5) 약종상은 약제사 면허 없이도 일정한 시험을 통과하고 경찰관서의 허가를 받으면 약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황영원, 2019: 103, 106). 1953년 제정 약사법은 의료 취약지역의 상황을 고려하여 약종상, 한약종상, 매약청매상(賣藥請賣商)(종전 명칭 매약자, 이하 매약상)의 지위를 유지하였다(신규환, 2013: 859). 다만 제정 약사법 27조는 약사만이 “의약품을 소분하여 판매 또는 수여”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약품 판매에 있어 약사와 타약업자 간 중요한 경계를 설정하였다.6) 소분 분쟁은 바로 이 경계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소분 분쟁은 약종상들이 1955년 해당 약사법 조항 개정을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약종상들은 관행적으로 약품을 소분하여 판매하고 있었으며, 해방 이후 대포장된 미군용 약품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이러한 행위는 더욱 보편화되었다(가산약학역사관, 2016: 100). 약사법에 따르면 이는 명백한 불법 행위였다. 약종상들은 약사법을 개정하여 이러한 상황을 합법화하고자 했다. 약종상들은 대한약종상연합회를 조직하고 약사법 개정을 위한 비용을 모금하고 도별 대표단을 선출, 국회의원과 접촉했다(변태건, 1974: 31).
이는 약사회가 처음으로 전국 단위의 결집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5년 7월 약사회 정기총회에는 전국 시도 약사회 대표 92명이 참석하여 대책 마련을 결의하였다. 같은 해 10월 중순 국회 보사분과위원회가 약종상연합회 측 의견을 반영한 약사법 개정 초안을 작성하면서, 약사회는 약사법 개정안 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1955년부터 1956년 내내 조직적 대응에 나섰다(대한약사회, 1970: 59-62, 72-81; 2004: 117-118; 변태건, 1974: 29-35).
소분 갈등의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약종상들이 소분권을 약사에게만 허용한 약사법 조항을 뒤늦게 인식한 데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약사의 수가 늘어나면서 약사와 약종상 간 경쟁이 심화된 때문이었다. 1949년 870명이었던 약종상 수가 1954년 1,105명으로 늘어나는 동안 약사면허 소지자의 수는 1,003명에서 1,499명으로 더 가파르게 증가하였다.7) 약사 집단은 기존 약업 시장 안에서 점차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약사 수의 증가는 해방 이후 약학교육 기관이 급증한 결과였다. 해방 이전 정식 약학교육 기관은 1918년 개교한 조선약학교와 그 후신인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이어지는 한 곳에 불과했다. 해방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약학과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경성약학전문학교가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53년에 다섯 개 대학, 1954년 두 개 대학교, 1955년 세 개 대학, 1956년에 한 개 대학교에 약학과가 설치되었다(대한약학회, 2000: 18-21). 이 13개 약학과 및 약학대학이 계속해서 배출할 졸업생들을 고려하면 약사 수의 증가세는 앞으로 더욱 가팔라질 것이었다. 실제로 1962년부터 매년 천여 명의 약사가 추가로 배출되었다[표 1]. 이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약사 집단은 약종상들에게 실질적인 경쟁자로 다가왔다.
약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57년 초 상황은 약종상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했다. 1월 14일 국회 보사위원회는 “약종상은 독극약 이외의 의약품을 영매(零賣)할 수 있다”는 개정안을 삽입하는 안을 운영위원회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약사회는 1월 19일 오전 서울대 약학대학에 모여 법안 폐기를 요구하는 전국 약사 총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는 전국 대표 108명이 참석하여 법안이 통과될 경우 전 약사가 “면허증을 반환”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결국 당시 약사회 부회장이자 국회의원이었던 민관식의 영향 아래 해당 법안의 심의는 지연되었고, 법안은 회기 만료로 폐기되었다(대한약사회, 2004: 120; 가산약학역사관, 2016: 99-101).
민관식의 역할은 소분 논쟁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가 이후 1966년부터 1980년까지 14년간 대한약사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약사회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그의 이력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관식(1918–2006)은 1940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교토제국대학 농예화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삼공제약 영등포공장 연구실 차장을 지냈으며, 약학대학 출신이 아닌 이들도 시험을 통해 약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던 1947년 시험에 합격하여 약사면허를 취득하였다. 1953년부터는 『고려시보』 사장으로 일했고, 1954년 제3대 동대문구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58년, 1960년,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다선 의원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강창덕 외, 1997: 141-151, 210; 허진석, 2010: 106-108). 소분 분쟁에서 법안 심의가 지연되고 회기 만료로 폐기되는 데에는 이러한 민관식의 정치적 영향력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의약품 소분권을 둘러싸고 약종상 집단과 벌인 관할권 다툼은 약사들에게 약종상이 단순한 의약품 판매 시장의 경쟁자를 넘어, 관행적으로 수행해 온 소분 행위를 법적 권리로 전환하여 약사의 권한 영역에 진입하려는 집단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약종상 시험 및 매약상 허가제도 폐지가 개별 지방 약사회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인 1958년이었다(대한약사회, 1970: 110). 그러나 여전히 무의촌 문제가 심각했던 현실을 고려하면 약종상과 매약상 제도의 폐지는 당국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이 안건은 한동안 약사회 공식 의제로 전면화되지 않고 경기약사회를 비롯한 지방 약사회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제기되었다.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66년이었다. 다만 이 변화 역시 약사 집단이 먼저 주도적으로 의제를 제기한 결과라기보다, 다른 집단의 요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촉발되었다. 이 해 6월, 국회 보사위원회에는 매약상도 시험을 통해 약종상으로 승격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경북약우회의 청원이 제기되었다. 약사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현재 매약만을 팔도록 허가된 매약상도 시험을 통과하면 약사나 약종상처럼 의약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10)
해당 청원이 국회에서 논의되자 약사회는 회장단 회의를 소집하는 등 즉각 대응에 나섰다. 시도별 약사회에서도 반대 건의가 이어졌다. 약사회는 7월 전국 지역 약사회장 명의로 탄원서를 제출하여, 매약상의 약종상으로의 승격은 “약사의 권익을 침해하는 중대 사태”라고 주장하였다.11) 약종상 및 매약상 허가제의 폐지까지 논의해 온 약사회의 입장에서 명백히 약종상의 증가로 이어질 수 있는 해당 요청은 반드시 저지해야 할 사안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66년 9월 신관우 외 33인의 국회의원은 기존 매약상에게 2년간 약종상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하였다.12) 표면적으로 보면 이는 약사회의 반대 운동이 무위로 돌아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1967년 2월 국회에서 수정되어 논의된, 그리고 결과적으로 통과된 대안(代案)은 의약품판매업의 허가 기준을 규정한 기존 약사법 제37조에서 약종상과 매약상 조항을 아예 삭제토록 했다.13) 이로써 기존 매약상에게는 한시적으로 약종상 시험 응시 기회가 부여되었다. 시험이 치러진 1968년과 1969년 매약상 중 상당수가 시험을 통과하면서 1967년 1,200여 명 수준이던 약종상의 수는 1970년 3,600여 명으로 급증했다[표 1]. 그러나 장기적으로 해당 법 개정은 약종상과 매약상의 신규 진입 경로를 폐쇄하여 기존의 다원적인 의약품 판매자 체계를 약사 중심으로 재편하는 방향을 열었다. 이는 국가가 법적으로 인정하는 의약품 취급자의 위계를 약사 중심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약사 집단이 추구해 온 의약품 취급 영역에서의 배타적 전문직 지위를 제도적으로 공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약사회는 약사들을 대표하는 전국적 직능 조직으로서 동원과 입법 개입을 통해 정책 결정 과정에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험을 축적했다.
1950-1960년대 약종상과의 소분권 분쟁과 매약상 승격 논쟁은 약사들에게 당대의 보건의료 현실이나 다른 직역의 요구에 따라 자신들의 의약품 취급 권한이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단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했다. 동시에 이러한 경험은 의약품 취급에 대한 배타적 권한만으로는 약사의 전문직적 지위를 충분히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드러냈다. 사회학자 노먼 덴진(Norman Denzin) 등이 지적했듯이, 약사의 전문성은 여타 전문직처럼 서비스를 통해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의약품이라는 상품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구조적 긴장을 안고 있다(Denzin & Mettlin, 1968: 378; Anderson, 2021: 14). 이러한 맥락에서 1960년대 중반 이후 약사회는 의약품 취급 권한의 정당화를 넘어 자신들이 한국의 보건의료 현실에 필요한 전문가 집단임을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활동 영역을 모색했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약사회가 앞선 관할권 갈등 속에서 축적한 조직적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부상하던 학교보건과 환경위생 문제에 자신들의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이를 통해 전문직 지위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과정을 살펴본다.
3. 학교보건과 공해조사를 통한 환경위생 전문성의 확장1964년 약사회는 학교약사부회를 신설하고 학교보건 영역에서 약사의 역할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대한약사회, 1970: 258). 학교약사 제도는 당시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던 제도로 1958년 제정된 일본 학교보건법(현 학교 보건안전법)은 대학을 제외한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특별지원학교 등에 학교의 보건 관리와 관련하여 전문적인 기술 지원과 지도 업무에 종사하는 학교의, 학교치과의, 학교약제사를 두도록 했다(山本秀樹ㆍ長田洋一, 2022: 2). 그러나 당시 한국에는 학교약사의 배치를 뒷받침할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약사회는 먼저 학교보건법의 제정을 추진해야 했다.
1966년 10월 민관식이 제15대 약사회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학교보건법 제정 및 이에 따른 학교약사 제도 시행을 촉구하기 위한 준비가 본격화되었다(대한약사회, 1970: 286-287). 마침 1965년 10월 국회의원 길전식 등이 제안한 학교보건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었다. 이 법안은 학교 보건관리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여 “학교 교육의 능률화”와 “발육기 청소년의 체육보전”을 도모하고 장기적으로 “국가 장래의 국민체질 향상”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또한 학교보건 관련 업무를 담당할 전문가로 “학교의, 약사, 양호교사”를 두도록 했다.14)
계류 중이던 학교보건법안은 1966년 12월 약사회가 학교보건법 제정을 위한 건의서를 제출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약사회는 이 건의서에서 자신들을 “의사, 치과의, 한의사, 수의사 및 간호원과 함께” 국민보건의 일익을 담당하는 집단으로 명시했다. 또한 학교보건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학교보건법 제정을 건의하고 학교보건법 초안을 함께 제출하였다(대한약사회, 1970: 289-291). 학교보건법은 마침내 1967년 1월 19일 제6대 국회 문교공보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15)
문제는 문교공보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완성된 대안에서 정작 약사들의 역할이 배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월 23일 위원회가 의결한 이 대안에서 ‘학교의, 약사 및 양호교사’를 두도록 한 조항은 ‘치과의를 포함한 학교의’와 ‘양호교사’만을 두는 것으로 수정되었다.16) 이에 대응하여 민관식은 학교약사를 포함하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민관식 외 수정안의 의미는 단지 학교약사를 추가한 데 그치지 않았다. 수정안은 문교공보위원회 대안이 의사와 약사의 고유 기술 분야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교실 내 환기, 채광, 조명 등 환경위생 관련 업무를 의사가 관리ㆍ감독하도록 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안이 교사 내 환기, 채광, 조명, 보온 등 비교적 제한된 환경 조건을 규정했다면, 수정안은 여기에 공기오염, 온습도, 식기식품, 음료수, 상하수도, 변소, 오물처리 등을 포함시켰다.17) 즉, 수정안은 학교보건의 범위를 쾌적한 학습 환경의 유지에서 공기, 물, 식품, 폐기물 관리를 포괄하는 환경위생 및 식품위생의 문제로 확장하였다[표 2].
약사회가 요구한 학교약사의 역할은 단순히 학교 내 약품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공기, 물, 식품, 폐기물 등 학교 환경 전반을 관리하고, 그 안전성을 판단할 수 있는 환경위생 전문가로 제시되었다. 특히 “공기오염”을 학교보건의 관리 대상에 포함한 것은 학교보건법의 원형이 된 일본 학교보건법에는 나타나지 않는 요소였다.18) 한국의 학교약사 제도는 일본 제도의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일본 모델을 참조하면서도 196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서 가시화되던 환경오염 문제를 결합한 것이었다. 1960년대 환경 문제는 세계적 의제로 떠오르고 있었고,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 집중을 경험하던 한국에서도 점차 도시민들이 체감하는 일상의 문제가 되었다(신재준, 2021). 약사회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약사의 새로운 역할을 찾아냈다.
환경오염은 1960년대 후반 새롭게 부상한 사회문제였지만, 이를 측정, 분석하고 안전성을 판단하는 지식은 약학 교육과 위생화학 연구 전통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산하에 설치된 위생시험실, 그리고 1937년 이후의 위생시험소는 약품과 식음료의 생산ㆍ유통에 대한 식민 정부의 관리 감독을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기관이었다. 이 기관의 연구자 상당수는 약학을 전공한 이들이었으며, 당시 유일한 약학교육기관이었던 조선약학교와 후신인 경성약학전문학교의 교과 과정은 위생화학과 실습을 포함하고 있었다(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편찬위원회, 2017: 49-50, 96). 위생시험실의 주된 업무는 약품과 식음료의 성분 검사였지만, 이곳의 연구자들은 보유 장비와 연구 역량을 활용하여 “공기와 물” 등 건강과 밀접한 물질에 대한 조사와 실험 연구도 수행하였다(박지영, 2022: 433-440).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위생 관련 지식과 실천은 이어졌다. 위생시험실의 후신인 국립화학연구소는 위생화학과를 두어 수질과 대기 검사를 수행하였다(박지영, 2022: 453). 해방 이후 설립된 약학대학들 역시 위생실험법과 위생화학 등을 전공필수 과목으로 교육하였다(대한약학회, 2000: 24-36, 49). 따라서 약사회가 1960년대 후반 환경오염 문제에 주목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한 것이라기보다 약학계에 축적되어 있던 위생화학의 지식과 실험ㆍ검사 역량을 새롭게 부상한 사회문제에 연결한 것이었다.
해당 수정안은 1967년 3월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별다른 이견 없이 통과되었고, 그 결과 학교약사의 역할을 포함한 학교보건법이 제정되었다.19) 약사회의 노력은 공식적 입법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학교약사부 회장 장금산의 동생이자 박정희 정부 초대 보사부 장관이었던 장덕승, 그리고 서울대 보건대학원장 김인달과의 인적 관계 역시 법안 통과에 영향을 미쳤다.20) 이처럼 학교보건법 제정 과정은 약사회가 국회 내 수정안 제출, 전문직 단체로서의 조직적 건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학교보건 영역 안에 환경위생 전문가로서 약사의 자리를 마련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학교보건법 제정이 곧바로 학교약사 제도 시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문교부가 관련 예산을 배정하지 않아 학교약사 제도는 유명무실한 상태에 머물렀고, 이를 통해 약사의 사회적 기여를 보여주고자 했던 약사회의 시도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사회는 환경위생과 관련된 사회 활동을 지속했다. 이는 약사 수의 급증과 이에 따른 약국 수의 증가, 범람하는 의약품 광고 속에서 약사의 역할이 조제보다는 의약품 판매에 치우치고 있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약사들이 과밀한 “약국의 밀림” 속 “한낱 약품의 세일즈맨”으로 묘사되기까지 하는 상황에서, 약사회는 환경오염 조사와 같은 활동을 통해 약사가 단순한 의약품 판매자가 아니라 환경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임을 보여주고자 했다.21)
약사회가 1970년에 시작한 공해조사사업은 이러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약사회는 1970년 1월 민관식 회장을 위원장으로 한 공해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해당 위원회에는 약사회 임원뿐 아니라 약학을 전공한 서울 시내 대학 교수들이 다수 포함되어 약사 집단의 환경위생 관련 지식 생산과의 긴밀한 연결 고리를 보여준다.22) 위생시험소에서 근무한 바 있는 숙명여대 약대 교수 채례석, 경희대 약대 교수 고인석(가산약학역사관, 2016: 63), 그리고 동경제대 의학부 약학과 출신으로 국립화학연구소 위생화학과 초대 과장을 지낸 바 있는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 교수 권숙표 등이 위원회에 참여했다.23)
본격적인 측정에 앞서 서울 각 지부 약사회 회원들로 구성된 측정 “요원”들은 별도의 교육을 받았고, 사전 측정도 수행하였다.24) 도입부에 언급했듯, 1970년 1월 12일과 13일 양일에 걸쳐 약사회는 “도시민 보건을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서울 시내 일대 대기질 측정 작업을 진행했다.
이 활동은 과학적 측정인 동시에 상징적 행위였다. 약사 가운을 입은 회원들이 서울 도심에서 측정 기구를 들고 표본을 채취하는 장면은 공해 문제를 조사하고 분석하는 전문가로서 약사의 모습을 대중 앞에 제시했다. 동시에 약사회 내부적으로는 약사가 도시민 보건을 위해 봉사하는 전문직이라는 의식을 재확인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약사회의 기관지 『약사공론』이 이 조사의 목적 중 하나가 공해 문제에 대한 약사의 “사명”을 재인식시키는 데 있다고 설명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25)
공해조사 활동은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았다. 1970년 7월 민관식과 권숙표, 그리고 10여 명의 약사회 회원들은 매연과 소음 문제가 제기된 서울 성북구 미아리고개를 방문하여 일산화탄소, 아황산가스, 소음을 측정하고, 그 수치가 위험기준의 두 배를 초과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공해조사 실시를 알리는 플래카드에 적힌 “대한약사회”라는 이름, 흰 가운을 입고 측정 기구를 든 약사회 회원들의 모습은 1월 조사와 마찬가지로 약사들이 공해 문제의 전문가라는 이미지를 가시화하기 위해 준비된 장치들이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기자는 측정을 지켜보던 한 주민이 자신이 거주하는 무악재에서도 측정 작업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목소리는 대기오염 문제가 당시 시민들이 체감하는 생활 속 문제로 부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약사회는 이처럼 시민들이 당면한 환경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집단으로 약사를 부각함으로써, 환경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전문가로서 약사의 역할을 강조하고자 했다.26) 약사회는 이후 1970년대 내내 지역 약사회 회원들이 참여하는 도시별 일산화탄소 농도 측정 등을 지속하며 환경 문제에 대한 약사의 전문성을 확립하고자 했다.27)
1973년, 약사회는 유명무실했던 학교약사 제도를 현실화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회장 민관식이 1971년 6월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1973년 약사회 이사회는 정부 예산이 투입될 때까지 무보수 “자원봉사” 형식으로 학교약사를 위촉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문교부에 건의했다. 이에 따라 같은해 6월 학교약사 배치 대상 학교의 72%에 해당하는 2,708개 학교에 학교약사가 위촉되었다(대한약사회, 2004: 133-134). 약사회는 측정에 필요한 조도계, 건습계, 온도계 등을 직접 구입하여 각 지부에 보급했고, 학교약사 제도 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민관식, 1976). 약사회는 1980년대 초까지 문교부의 예산이 배정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연간 292개 학교의 환경 측정, 57개 학교의 학교수영장 수질검사, 51개 야간학교의 환경 측정, 39개 학교의 우물 수질 검사 등 학교 환경위생과 관련한 활동들을 계속했다(박한규, 1992: 60).
약사회의 학교약사 및 공해조사 활동은 1950년대에 주력했던 시장 내 배타적 권리 확보를 넘어 약사의 사회적 필요성과 전문성을 입증하려는 시도였다. 이를 통해 약사회는 환경위생을 약사의 전문적 활동 영역으로 삼고 약사를 의약품의 조제와 판매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도시 보건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갖춘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그러나 두 활동 모두 장기적으로 지속되지는 못했다. 학교약사들이 조사한 학교환경의 미비점에 대한 지적은 학교장들에게 “잔소리”로 여겨지곤 했고, 조사 결과가 학교 환경의 열악함에 대한 근거 자료로 신문에 보도되면서 결국 1983년 서울시 교육위원회의 압력으로 학교약사 활동은 중단되었다(박한규, 1992: 60; 대한약사회, 2004: 134). 약사회 차원의 대대적인 공해조사 활동도 1980년대에는 위축되었다. 환경 문제가 국가 행정의 공식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80년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헌법에 환경권이 추가되었으며, 환경청(현 기후에너지환경부)이라는 환경 문제 전담 행정 기관도 설립되었다(신재준, 2021: 528).
약사회의 활동이 안정적인 제도화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이는 약사의 전문성을 기존의 의약품 취급 영역을 넘어 확장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이러한 지향이 약사들이 직면한 새로운 압력과 보건소장 충원의 어려움이라는 현실과 맞물려 약사를 보건소장 자격에 포함시키는 보건소장 복수직제의 제도화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된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4. 보건소장 복수직제 논쟁과 지역 보건행정 참여 시도미군정기인 1946년 처음 설치된 보건소는 빠르게 증가하여 1962년 189개에 이르렀다(강재구, 2023: 234). 1956년 제정된 보건소법은 보건소장을 “의사의 자격을 가진 자” 중에서 임명하도록 규정했고 이 원칙은 1962년 개정된 보건소법에서도 유지되었다.28) 문제는 이러한 법적 원칙과 지역 의료 현실 사이의 간극이었다. 1950-1970년대 내내 정부의 주요 과제였던 무의촌 해소 문제가 보여주듯, 의사 인력은 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정무용, 2023; 신창훈, 2023).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를 제외한 지역 보건소에서 의사 면허를 소지한 보건소장을 임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사 보건소장을 임용하기 어려운 지역에 비의사 보건소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965년 12월에 열린 국회 보사위 회의에서 국회의원 조창대는 여전히 “20여 개의 보건소장이 공석”인 상황을 지적하며 “의사를 획득하기 곤란한 경우”에 한해 치과의사, 약사, 보건대학원 졸업자, 또는 보건행정 부문에 오랫동안 종사한 공무원도 보건소장이 될 수 있도록 보건소법을 개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보사부는 보건소장 충원의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법 개정에는 반대했다. 보건소장은 원칙적으로 의사가 맡아야 하며, 의료직 공무원의 기술수당이 결정되면 결원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보사위 위원들은 보건소장 공석 문제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되었음에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정부의 원칙론을 비판하였다. 특히 보사위원장이었던 정헌조는 군사정부가 강조해 온 “의료균점”의 문제를 들어 농촌 현실을 환기했다.29)
여러분들은 예산조치도 하지 아니하고 농촌에는 농민들이 병으로 신음하는 그 정상은 하나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의사 아닌 사람이라도 보건소 장에 임명을 해서 보다 나은 보건행정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만들게 그 길을 터 주는 데에 그렇 게 고집할 필요성이 무엇인가 이것은 분명히 얘기를 해야 합니다. …… 보건소 운영 자체는 의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료행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행정의 책임자인 까닭으로 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30)
정헌조의 발언은 이 시기 보건소장 충원 문제가 단순히 의사 인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쟁점은 보건소장의 자격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보건소장이 어떤 일을 수행하는 자리인가에 대한 상이한 이해가 놓여 있었다. 보사부가 보건소장을 의사의 전문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의료직으로 이해했다면, 정헌조는 보건소장을 지역 보건행정을 책임지는 행정적 직위로 보았다. 그의 표현처럼 보건소 운영이 “의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의사 아닌 보건 관련 인력에게도 보건소장직을 열어두는 것은 농촌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논의는 1962년 개정되어 1963년부터 시행된 보건소법에 드러난 보건소의 성격 변화와도 맞물려 있었다. 기존 보건소법이 보건소의 관할 사항을 전염병 예방진료, 모자보건, 학교보건, 환경위생과 산업보건, 보건통계, 보건사상 보급 등을 규정했다면, 개정법은 영양 개선과 식품위생, 의료사업의 향상과 증진, 보건에 관한 실험과 검사, 공의 지도, 의약 지도, 모자보건과 가족계획 등을 포함하였다[표 3]. 그간 시ㆍ군에서 취급하던 각종 허가와 단속 등 보건사무도 보건소 관할로 이양되었다(강재구, 2023: 257). 즉 보건소는 적어도 법적으로는 단순한 치료기관이 아니라, 위생, 영양, 가족계획, 의약 지도, 보건행정을 포괄하는 기관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성격 변화에도 불구하고 의료 접근성이 낮은 농촌 현실 속에서 보건소는 여전히 치료 중심 기관으로 작동하였다(강재구, 2023: 258-260). 보건소가 지역 주민들에게 사실상 일차 진료기관으로 기능하는 한 의사 보건소장 원칙은 쉽게 흔들리기 어려웠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보사위는 보건소법 6조 2항에 다음과 같은 단서를 신설하는 개정법률안을 의결하였다: “의사의 자격을 가진 자를 임명하기 곤란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보건사회부장관이 따로 정하는 자격을 가진 자 중에서 임명할 수 있다.”31)
이 시기 약사회가 보건소장 문제를 자신들의 주요 의제로 삼았다는 흔적은 뚜렷하지 않다. 더구나 해당 보건소법 개정안은 접골사, 침사, 구사, 안마사의 법적 자격과 업무를 규정하는 의료유사업자에 관한 법률안과 함께 논의되면서 대한의학협회(이하 의협)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의협은 두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면허를 반납하겠다고 격렬히 반발하였고, 의협의 물밑 노력이 더해지며 결국 두 법안은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32)
약사회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보건소장 결원 문제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가운데 보사부는 벽지 보건소장 특별수당 지급, 군의관 임시 파견, 보건소장 근무 의사에 대한 해외출국 허용 등 여러 유인책을 내놓았다.33) 그러나 의사 보건소장 충원 문제는 오히려 심화되었다. 1974년에는 전국 195개 보건소 가운데 93개 보건소에 보건소장이 없었고, 충남 지역 보건소장 충원율은 24%에 불과했다.34)
약사회는 이러한 상황을 중요한 기회로 받아들였다. 1970년대 초 약사회는 계속되는 약사 수 증가와 더불어 의약분업 논의의 재부상이라는 새로운 압력에 직면하고 있었다. 의약분업은 1953년 제정 약사법에 원칙으로 규정되었지만, 열악한 병의원 접근성 속에서 약사의 임의조제와 의사의 조제가 현실적으로 지속되었다. 1966년 보사부가 설치한 의약분업추진연구회는 한 차례의 회의도 없이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 국회 보사위 국정감사반에서 의약분업 실시를 촉구하면서 보사부가 해당 위원회를 재발족하고, 해외 의약분업제도 현황 조사, 병의원 약국 실태 조사, 의약분업 제도의 단계적 추진 방향 등이 조사되었다. 결과적으로 두 차례에 걸친 의사회, 약사회 간 회의가 이견 끝에 해산되었지만(이규식ㆍ김정덕, 2012: 30-33), 약사들은 이를 계기로 약국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수행해 온 실질적인 처방과 조제, 판매의 결합 방식이 재편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의약분업을 내부적으로 중요한 안건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대한약사회, 2004: 135-136). 이런 맥락에서 보건소장 복수직제 요구는 약사가 약국 밖에서도 보건의료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또 다른 시도였다.
약사회는 1971년부터 매년 보사부와 내무부 등 관계 부처에 약무직의 보건소장 복수직 충원을 건의하였다. 약사회가 내세운 논리는 두 가지였다. 첫째, 현행 보건소장직에 의사를 충원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문제, 둘째, 현행 보건소 업무의 상당 부분은 의사의 진료 행위라기보다 약무직이 담당할 수 있는 보건행정 업무라는 주장이었다. 약사회는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1973년 6월과 1974년 2월 정부에 제출한 건의안에도 보건소장 복수직 충원 요구를 포함시켰다.35)
보건소장 결원이 더욱 심각해지자, 1974년 보사부는 의료계에 의사 보건소장 충원을 압박했다.36) 한편으로 의사 보건소장 원칙을 고수하던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보건직 공무원을 보건소장 및 보건지소장으로 임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개정을 검토하였다. 보사부가 제시한 근거는 의사의 전담 기능인 진료 업무에 비해 비진료 업무, 즉 일반 보건행정 업무가 증가하고 그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으로 약사회의 건의 방향과 조응하고 있었다.37)
의협은 한지의사 활용 가능성 조사, 시도의사회 가용자원 파악 등을 통해 대응했지만, 신속한 충원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38) 결국 정부는 1974년 7월 10일 보사부와 내무부 장관 연석회의를 통해 의사 외에 약사 및 보건직 공무원을 잠정적으로 특채 형식의 직무대리로 임명하도록 결정하고, 이를 시ㆍ군에 하달하였다. 7월 13일에는 문교부가 시도 보건소장 요원 특별임용대상자 추천 공문을 의과대학뿐 아니라 약학대학과 치과대학에 발송하였다.39)
약사회는 정부 조치를 적극 환영했다. 약사회는 회장 민관식 명의로 담화를 발표하고 보건소장 복수직제화가 “현실에 맞는 조치”라고 평가하였다. 약사회는 현행 보건소법이 규정한 13개 업무 가운데 의사만이 수행할 수 있는 진료 행위를 제외하면, 보건사상의 계몽, 보건통계, 영양 개선과 식품위생, 환경위생과 산업보건, 학교보건과 구강위생, 보건관계 실험과 검사, 의약에 관한 지도 등 8개 사업은 “오히려 약무직이 담당해야 할 전문사업”이라고 주장하였다.40) 약사회는 약사의 전문성이 약국에서의 조제와 판매에 한정되지 않고, 지역 보건행정의 여러 영역을 총괄하고 조정하는 데까지 미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약사회는 곧바로 보건소장 결원 지역을 파악하고 산하 시도지부에 후보자 선정을 지시하였다. 후보자의 기준도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약사회는 35세 이상 45세 미만의 약사면허 소지자, 해당 보건소 소재지와 연고가 있는 인물, 보건 대학원 출신자, 행정 지도 능력을 갖춘 자를 우선적으로 추천하도록 하였다.41) 약사회는 약사가 보건소장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적절한 인력 추천을 통해 증명하려 하고 있었다.
정부 조치가 급물살을 타자 의협도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의협은 7월 16일 긴급 시도의사회장 회의를 소집하고, 임시총회를 열어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결의했다. 의협은 보건소의 기능이 국민 건강관리, 환경위생, 보건계몽, 질병 예방과 진료에 있으며, 이러한 업무는 “전문적 학식과 경험을 지닌 의사”가 아니면 수행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비의사 보건소장 기용은 부실한 국민의료를 초래하고, 별도의 촉탁의사를 필요로 하므로 예산을 이중으로 소모한다는 것이 의협의 논리였다. 병원협회 역시 수련의를 보건소장으로 임용하는 방안을 제안하며 비의사 충원 계획에 반대하였다.42)
그러나 언론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했다. 『경향신문』과 『조선일보』는 의사들이 농어촌 보건소장 취임을 기피해 온 상황을 지적하며, 의협의 반발을 농어촌 보건 현실을 외면한 직역 방어로 묘사했다.43)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의협에 8월 15일까지 공석 보건소장으로 근무할 의사를 선정하도록 요구하고 그때까지 의사 추천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약사나 치과의사, 또는 보건직 공무원”을 보건소장으로 임용하겠다고 통보했다.44) 이는 정부가 의사 보건소장 원칙을 즉각 포기했다기보다, 의사 집단에게 충원을 압박하는 동시에 결원 문제에 대응할 현실적 대안을 확보하려 한 조치였다.
의협의 대응은 8월까지 86개의 보건소 공석 가운데 29명만을 추천하는 데 그쳤다. 이에 약사회는 각 시도지부로부터 의사가 추천되지 않은 지역을 중심으로 약사 후보자 63명의 명단을 작성하여 보사부와 내무부에 제출했다.45) 그러나 약사회의 의욕적인 참여에도 불구하고 10월 25일 보사위 5인 소위원회는 보사부가 제출한 보건소법 개정안에 대한 심의를 보류했다.46) 이로써 약사들이 지역 보건행정의 책임자로 진입하려던 시도는 당장의 제도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의사 집단의 강한 반대는 중요한 제약이었다. 1970년대 무의촌 문제는 점차 정치적으로도 중대한 사안이 되어갔고, 정부는 이를 의사 인력을 동원하는 일련의 정책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신창훈, 2023: 1060-1063; 장원모ㆍ박승만, 2025: 441).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의사 집단의 강한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보건소장 복수직제를 추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1976년 정부가 선택한 방법은 「보건소법」의 개정이 아니라, 대통령령인 「보건소법 시행령」을 통해 의사 보건소장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의사를 충원하기 어려운 경우에 한해 ‘보건직공무원’을 보건소장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제한적인 예외를 마련하는 것이었다.47)
이로써 비의사 보건소장 임명을 위한 법적 통로가 마련되었고, 약사 출신 보건직공무원이 보건소장으로 임명되는 것 역시 가능해졌다.48) 그러나 이는 약사 면허 자체를 보건소장 임용자격으로 인정하는, 약사회가 요구했던 형태의 복수 직제화와는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2024년 「지역보건법」 개정을 통해 치과의사ㆍ한의사ㆍ간호사ㆍ조산사ㆍ약사를 보건소장으로 임용할 수 있다고 법률에 명시되었을 때도 의사 우선 원칙 자체는 유지되 었다.49)
1970년대 약사회의 보건소장 복수직제화 요구는 50여 년이 흐른 뒤에야 현실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사회의 역할 역시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사례는 약사의 전문적 역할을 약국 내부의 조제와 판매에 한정하지 않고, 지역 보건행정을 총괄ㆍ관리할 수 있는 보건의료 전문가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약사들이 자신들을 지역 보건행정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전문직으로 상상하고 그러한 가능성을 정부와 사회에 적극적으로 제시한 예시였다.
5. 맺음말본 논문은 1950-1970년대 대한약사회를 중심으로 한국 약사 집단이 전문직으로서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를 구축해 나간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았다. 특히 약사들이 당시 한국 보건의료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자신들의 전문성과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고 정당화했는지에 주목했다. 1953년 「약사법」의 제정은 약사에게 배타적 조제권과 의약품 취급에 관한 일정한 법적 권리를 부여했지만, 이러한 규정이 곧바로 현실의 시장 관할권과 사회적 권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약사들은 인접 약업 집단과의 경쟁 속에서 시장 관할권의 유동성을 경험하는 한편, 당시 보건의료체계 속 공백을 자신들의 전문적 역할을 확대할 기회로 활용하면서 전문직 지위를 지속적으로 구성하고 정당화해 나갔다.
먼저 약종상과의 소분권 분쟁 및 매약상 승격 논쟁은 약사 집단이 법적으로 보장된 의약품 취급 권리가 현실에서는 협상과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경험한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약사회는 전국적 조직망을 활용하여 약사의 시장 영역을 방어하고, 입법 과정에 개입하는 직능 단체로서의 경험을 축적했다. 그 결과 개정된 1967년 약사법은 단기적으로 약종상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장기적으로는 약종상과 매약상의 신규 진입 경로를 축소하고 국가가 인정하는 의약품 취급 체계를 약사 중심으로 제도화하는 성과를 남겼다.
약종상의 소분권과 매약상 승격 시험을 둘러싼 논쟁의 경험은 약사회로 하여금 약사가 갖는 의약품 취급 영역에서의 관할권이 고정적이고 영구적인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했다. 이에 약사회는 조제와 판매를 넘어 보건의료체계에 기여하는 전문직으로서 약사의 사회적 역할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학교보건법 제정과 학교약사 제도 도입, 그리고 공해조사 활동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약사의 전문성을 기존의 의약품 관리 영역에서 환경위생 등 새롭게 형성되는 보건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전문직 역할의 재구성 노력은 보건소장 복수직제 논쟁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났다. 보건소장 공석 문제가 시급한 보건행정 현안으로 부상하고 보건소의 역할이 진료를 넘어 위생, 영양, 환경, 의약품 관리 및 지도 등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약사회는 보건소를 다양한 보건 행정 업무를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기관으로 규정하고 약사 역시 이를 총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약사의 역할을 약무 중심의 실무에서 지역 보건행정의 책임자로 확대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들은 당대 한국 보건의료체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되거나 충분히 제도화되지 않았던 보건 영역을 포착하고, 이를 약사의 전문적 활동 범위에 포함시키려 했던 약사회의 적극적인 대응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학교약사 활동은 학교 현장에서의 갈등 속에서 중단되었고, 보건소장 복수직제 역시 의사 중심의 보건의료체계와 의사 집단의 반대 속에서 약사회가 요구한 형태로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공중보건의사 제도 도입, 의료보험제도 확대, 환경청의 설립 등으로 보건의료의 여러 영역은 점차 국가의 제도적 관리 아래 편입되었고, 그에 따라 여러 직역이 제도화되지 않은 영역에 진입하여 새로운 역할과 관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가능성 역시 점차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1950-1970년대 전문직 프로젝트는 대한약사회가 전국적 조직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전문적 이해관계를 집단적으로 제기하는 경험을 축적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약사회는 이 과정에서 약사의 역할을 의약품의 조제와 판매에 한정하지 않고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맞추어 새롭게 정의하고, 그러한 역할을 공공에 대한 봉사로 정당화하는 여러 전략을 모색하고 시도하였다. 이 시기에 형성된 경험과 전략이 이후 한약분쟁과 의약 분업 논쟁 등 여타 의료직군과의 관할권 논의에 있어 어떠한 방식으로 계승되고 변형되었는지는 후속 연구의 과제로 남긴다.
Notes3) 약제사는 약사의 전 용어로, 1953년 제정 약사법을 통해 약사로 변경되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약제사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조선약제사회 창립 당시 조선인 정회원(약제사 면허 소지자)으로는 동경약학교를 졸업하여 약제사 면허를 취득하고 대한의원 약제관 및 교수로 근무하였던 유세환이 있다. 그 외 34명의 찬조회원(약학자 또는 약업자로서 정회원의 소개로 입회한 자) 중 29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한국약학사발간위원회, 2017: 51). 5) 약종상은 1991년 약사법 개정 시 부칙을 통해 명칭이 약업사로 변경되었으나, 본 논문에서는 당대 법령 및 용례에 따라 약종상으로 표기한다. 약종상과 구분되는 한약종상 지위는 조선 특유의 것으로 일본에서는 약종상이 한약(일본에서의 명칭은 和漢藥)을 함께 취급하도록 하여 한약종상이 존재하지 않았다(황영원, 2019: 106-108). 9) 1972년의 약종상 수 2,954명은 1971년과 1973년 수치를 고려할 때 집계상 오류로 추정되나 『보건사회연보』(1974년, 1976년, 1977년판)에 모두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어 원사료에 따라 그대로 기재한다(보건사회부, 1974; 1976; 1977). 13) 개정 전 약사법 제37조 1항은 다음과 같다. “약종상 ㆍ 한약종상 및 매약상은 보건사회부령으로 정하는 지역에 한하여 이를 허가하되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약종상 ㆍ 한약종상 또는 매약상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허가한다.” 해당 개정안에서 약종상과 매약상 허가 규정은 삭제되었으나 한약종상에 대한 규정은 유지되었다. 「약사법중개정법률안(대안)」, 의안번호 061159, 1967년 2월 2일 제안, 1967년 2월 6일 의결; 「약사법」, 법률 제1694호, 1965년 4월 3일 일부개정, 1965년 6월 4일 시행. 18) 「学校保健法」, 法律第56号, 昭和三十三年四月十日(1958년 4월 10일) 공포. 「日本研究のための歴史情報: 法令データベース」 https://jahis.law.nagoya-u.ac.jp/lawdb/l/333a0056. 검색일: 2026년 8월 13일. 26) 「고갯길 매연에 못견디겠다」, 『조선일보』, 1970년 7월 15일; 「공기오염으로 인한 병발증」, 『조선일보』, 1970년 7월 16일; 「위험기준보다 2배 넘어」, 『약사공론』, 1970년 7월 20일; 「기자수첩」, 『약사공론』, 1970년 7월 20일. 28) 「보건소법」, 법률 제406호, 1956년 12월 13일 제정, 1956년 12월 13일 시행; 법률 제1160호, 1962년 9월 24일 전부개정, 1963년 1월 1일 시행. 32) 「국회 통과하면 의사면허 반환, 의협 보건소법 반발」, 『경향신문』, 1966년 7월 5일; 「노교수와 캠퍼스와 학생121: 명주완14」, 『경향신문』, 1974년 2월 13일. 33) 「벽지의 보건소장에 특근수당 지급키로」, 『동아일보』, 1969년 11월 3일; 「무의보건소에 군의」, 『동아일보』, 1970년 6월 23일; 「해외유학 지망 의사 35명, 보건소장임명」, 『동아일보』, 1970년 8월 11일. 35) 「약사보건소장 길 트도록」, 『약업신문』, 1973년 6월 21일; 「약사 보건소장 임용추진, 대한약사회, 사업계획등 마련」, 『의협신보』, 1974년 2월 4일; 「약사도 보건소장직에 임명」, 『약사공론』, 1974년 7월 18일. 38) 「의사 보건소장 충원이 시급」, 『의협신보』, 1974년 4월 18일; 「한지의사 실태조사 착수」, 『의협신보』, 1974년 6월 10일; 「보건소장 실태조사 요청」, 『의협신보』, 1974년 7월 8일. 42) 「보건소장 보내기 운동 벌이기로」, 『의협신보』, 1974년 7월 18일; 「의협서 반대성명서」, 『의협신보』, 1974년 7월 22일; 「병협 비의사충원계획 반대성명」, 『의협신보』, 1974년 7월 25일. 48) 약사 출신 보건소장으로 1994년 안양보건소장으로 임용된 이순우, 2002년 김포시보건소장에 임용된 백정혜 등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수도권 인사」, 『동아일보』, 1994년 5월 26일; 「여약사 보건소장 탄생-김포 백정혜 소장」, 『데일리팜』, 2002년 4월 15일, https://www.dailypharm.com/user/news/292527. 검색일: 2026년 8월 14일. 표 1.1946-1979년 연도별 약사, 약종상, 한약종상, 매약청매상 등록자 수 (단위: 명, 참고: - 는 통계 부재)
Table 1. Annual Numbers of Registered Pharmacists, Druggists, Herbal Druggists, Patent Medicine Sellers, 1946–1979 (Unit: Persons, Note: – indicates unavailable statistics.)
표 2.1967년 학교보건법 대안 및 수정안
Table 2. Proposed and Revised Versions of the 1967 School Health Act
표 3.보건소 관할 사항에 대한 제정 보건소법과 1962년 개정 보건소법
Table 3. Jurisdiction of Public Health Centers under the 1956 Public Health Center Act and Its 1962 Re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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