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한국의 회충 감염의 사회사 : 사람과 함께 하는 인룡에서 수치스러운 질병으로*
A Social History of Ascariasis in the 1960s Korea : From a Norm to a Shameful Dis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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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Abstract
Until the 1950s, Ascaris was regarded as an essential part of life which controls every aspect of human physiology among Koreans. Therefore, Ascaris should not be removed from human body. Efforts from medical professionals and the Korean government officials who wished to push forward the parasite control program, had to constantly contest with this perception of Ascaris among ordinary Koreans. In 1966, the ‘Parasitic Disease Prevention Act’ was promulgated and ‘the Korean Association for Parasite Eradication (KAPE)’ established in Korea. From the 1970s, Korea mobilized 15 million people each year to achieve the eradication goal. Such mass mobilization could not be possible without public awareness on necessity of parasite eradication. Until the early 1960s, however, Korean people were not sympathetic to the needs of eradication of parasites, especially that of Ascaris. Then, what changed the social perception towards Ascaris during the 1960s? What contributing factors allowed the mass mobilization and public involvement for that campaign? Employing newspaper articles and periodicals, this paper analyzes how social perception on Ascariasis changed during the 1960s, when the ‘Parasitic Disease Prevention Act’ was established.
During the 1960s, Ascariasis became a shameful disease for Koreans. A series of events made Ascariasis more visible and shameful to Koreans. First event happened with Korean miners who were dispatched to Germany in 1963. When the miners turned out to have been infected with intestinal parasites, they were prohibited from work at the mines by the authorities in Germany and quarantined for several weeks. This humiliating experience of Korean expatriate people having bodies swarmed with parasites became a national shame to Koreans. The parasite infected bodies of Korean workers were revealed to the World through German newspapers. Second event happened when a child died of intestinal obstruction due to Ascariasis. The doctor retrieved 1,063 Ascaris from the bowel of the 9 year-old girl, and the photo of the 1,063 worms was published in several newspapers. It was a shocking visualization of Ascariasis in Korean society. Through these visualizations of Ascariasis, the Korean society began to perceive Ascariasis as a shame of the nation as well as that of an individual.
1. 머리말
1940년대 말, 필자가 농촌지역에서 의원을 개설한 일이 있었는데, 위경련으로 배가 아파 찾아오는 환자가 꽤 많았다. 그 중 노년층일수록 의례 당부하는 말이 있었는데 “선생님! 횟배입니다. 원회(元蛔). 안회(安蛔), 가회(假蛔)만 떨어지는 약을 주시오!”
그럴 때면 나는 원회란 무엇이며 가회는 무엇인가고 되물었다. 하나같이 대답은 “원회는 몸 한가운데 있으면서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기능을 지배하는 중추적 역할을 하는데, 그 원회가 지금 노(怒)하였나 봅니다. 그러니 진정을 시켜야지 약을 먹어 떼어내 버리면 내 활동에 지장을 받게 됩니다.”(소진탁, 1992b: 45)
과거 인간의 중심, “몸 한가운데” 있는 것이 바로 ‘회충(蛔蟲)’이었다. 사람들은 회충이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기능을 지배하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진짜 회충인 ‘원회(元蛔)’는 노(怒)하게 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며, 절대 약을 먹어 떼어내도 안 되는 존재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회충이 아니라 흉내일 뿐인 가짜 회충, ‘가회(假蛔)’일 뿐이다. 이러한 인식 아래 사람들은 배가 아프면 으레 횟배로 자가 진단을 내리고, 성난 회충을 멸하는 대신 조용히 잠재울 방도를 찾았다. 영조 37년 『승정원일기』에서는 영조가 회충을 토한 뒤 이렇게 말한다. “회충은 사람과 함께하는 인룡이다. 천하게 여길 것이 없다[1].” 조선시대 왕의 몸은 국가를 대표하며, 동시에 가장 존귀한 존재였지만, 그러한 몸에서도 회충은 존재했다. 또한 그것이 당연했다. 회충 감염에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었다.
농업이 산업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던 1960년대까지 한국인에게 회충(Ascaris lumbricoides), 구충(Ancylostoma duodenale/Necator americanus), 편충 (Trichuris trichiura)으로 대표되는 장내기생충증(Intestinal helminthiasis) [2,]은 일상이며 보편적인 현상으로, 전 국민의 질병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에서 실시한 장내기생충 감염률 조사 결과는 회충 82.4%, 편충 81.1%, 구충 46.5%로 대부분의 인구가 최소 1종 이상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음을 보여준다(Hunter et al., 1949: 41). 기생충학자들은 한국을 자조적으로 ‘기생충 왕국’(서병설, 1984: 455)이라 부르기도 했다.
1964년 ‘기생충박멸협회’가 설립되고 1966년 ‘기생충질환예방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전국적인 기생충 박멸 사업이 시행되자 장내기생충의 감염률은 빠르게 낮아졌다(김태종 외, 2014: 28) [3,]. 광범위한 대중 동원과 홍보 활동은 사람들의 뇌리에 기생충에 대한 인식을 박멸의 대상으로 깊이 새겨놓았다. 장내 기생충의 감염 위험이 거의 사라진 21세기에도 사람들은 약국에서 종합 구충제를 습관적으로 구입해 먹는다[4,]. 기생충은 수치스러운 것이자 멀리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2005년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검출되었다는 소식 뒤 불안감에 구충제를 사기 위해 약국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현재 사람들이 기생충에 대해 가지는 불안과 공포, 거리감을 잘 보여 준다[5]. 기생충 감염증이 더 이상 심각한 건강 문제로 대두되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도 기생충은 당연히 사라져야할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배 속에 기생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더럽고’, ‘징그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 때문에 예부터 기생충 감염은 사회적 수치였으며, 당연히 몰아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고 생각하기 쉽다.
의료계와 정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회충 감염의 위험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사회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1950년대를 지나며 한국전쟁의 경험과 위생 관념의 내재화, 약품의 발달 같은 경험을 통해 한국인들은 점차 회충과 수치심을 연결짓기 시작했다. 회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가 ‘정상’으로 규정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정상’이 아니라는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사람들은 일찍부터 약점을 숨기는 법을 배워 대부분의 시간을 ‘정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수치심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초기에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노출되고’, ‘경멸받는’ 경험들이 중요하다(너스바움, 2015: 338-395). 이러한 경험들을 기반으로 회충 감염에 대한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은 끊임없이 경합했다. 1960년대 초반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회충 감염 사실을 시각적으로 노출시켜 외부로부터 경멸받는 경험을 한국 사회에 제공했다. 강제된 노출과 외부에서 가해진 경멸은 회충 감염 사실을 당연한 것에서 수치심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기존에 ‘정상’으로 여겨지던 상태를 ‘비정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회충은 체내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공고한 개념을 무너뜨리는데 수치심의 시각화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전국에서 이루어진 기생충 박멸 사업은 연간 검진 인원만 1,000만 명 이상에 달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34) [6]. 또한 검진 사업에서는 개개인이 직접 대변을 채취해와야 가능하므로 대중동원이 반드시 필요했다. 개인이 회충에 감염되어 있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인지하고, 모든 행위자들이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지 않으면 추진될 수 없었던 사업이었다. 즉 사업 시행 이전에 일어난 인식의 전환은, 사업의 원활한 추진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업을 가능하게 했던 대중동원은 어떠한 인식의 기반에서 이루어져 왔을까?
존 디모이아는 한국전쟁 이후 기생충 박멸 사업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샘플을 채취하고 분석하는 ‘샘플링’이 일상화되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디모이아는 한국에서 정부가 기생충 박멸 사업을 의욕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새로운 연구 분야로서 기생충학의 도입(1954년 서울대학교 기생충학교실 설치), 전국적 공중보건 네트워크의 형성(1964년 가족계획 캠페인), 치료제를 배포할 수 있는 공립학교의 보편화, 국제사회 파트너들의 기술과 기자재 지원(1969년 일본 해외기술협력단 지원 사업) 등 생의학적 기술 개입의 확대에 기인한다는 분석이다(DiMoia, 2013: 145-175). 디모이아의 연구는 박정희 정권 초기에 고도로 군사화된 사회에서 공중보건 전문가 네트워크가 국가 재건에 어떻게 참여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기생충 박멸 사업’이라는 거대한 대중 동원과 협조가 이루어진 바탕에 어떠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부족하다. 기존의 연구들은 대부분 기생충 박멸 사업의 성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감염률 변동 추이에 기반한 역학적, 생물학적 분석을 하고 있다(Hong et al., 2006: 178-181; 김태종 외, 2014: 38-41). 질병의 사회사 연구의 맥락에서 이러한 단선적이며 현재주의적 설명은 기존의 역사적 경험을 풍부하게 살려내기 어렵다. 이 논문은 1966년 기생충질환예방법 도입 이전까지 기생충 감염에 대한 사회적 인식들이 어떻게 경합하였으며 변화해 왔는지를 다룬다[7,]. 즉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기능을 지배하는 중추적 역할”(소진탁, 1992b: 45)을 하는 회충이 어떻게 “한국민의 수치[8]”인 회충으로 바뀌어 갔는지, 그리고 인식의 변화에 어떠한 요인들이 작용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그리하여 회충 감염의 시각화를 통해 대중이 외부적 경멸을 경험하고, 회충 감염에 대한 인식이 전복되어 한국 사회가 이를 수치심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2. 한국전쟁 이전의 인식 : 회충 감염의 일상성
회충 감염이 한반도에서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되어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였다. 1913년 황해도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기생충 감염률 조사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전국을 대상으로 시행한 조사로는 1924년의 조선총독부 방역통계가 유일한데 회충은 54.96%(도에 따라 27.0%~90.92%), 편충은 27.06%(도에 따라 6.66%~93.49%), 구충은 0.04%(도에 따라 14.23%~0%)이다. 그러나 이 조사는 도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나서 조사방법에 문제가 많은 자료로 보인다(서홍관 외, 1992: 47) [9,].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이 남한 각지로부터 표본을 추출해 기생충 감염률을 조사했다. 일제 강점기의 조사 기록들과 해방 이후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회충이 80%에서 82.4%로, 편충이 93%에서 81.1%로, 구충이 65%에서 46.5%로 바뀌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기생충의 감염양상에 커다란 변화가 없었음을 보여준다(Hunter et al., 1949: 41).
한국전쟁 직후에는 전국 단위 표본 검사가 시행되기 어려워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많은 국가들에서 기생충 감염률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사실을 참고할 수 있다. 일본은 회충감염률이 2차 세계대전 전 1940년 37.2%였던 것이 종전 후 1946년부터 1950년까지 57.1%~62.9%로 증가했고, 독일은 1949년에 52%, 네덜란드에서는 1945년에 45%로 나타났다(서병설, 1984: 455).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역시 기생충 감염률이 증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69년 시행된 전국실태조사에 따르면 전 국민의 90.5%가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서병설 외, 1969: 53). 광범위한 검진과 투약 사업이 본격화된 1970년대에 들어서야 회충 감염률은 40% 가량으로 낮아졌다(이순형, 2007: 937-945).
한국과 같이 농사를 지을 때 인분을 비료로 사용하는 지방에서는 전국토가 우리 회충알로 덮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의 50%가 우리 회충을 가지고 있다 하면, 약 1,500만 명이 될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배 속에 기르고 있는 우리 회충의 수는 평균 20마리라 하였으니 암컷의 수를 그 반으로 잡아 10마리라 할 때, 한국 내 여성회충의 총수는 1억 5,000만 마리가 될 것입니다. 암회충 한 마리의 산란수를 하루 10만개라 치더라도 하루에 한국에 뿌려지는 우리 회충알의 총수는 15조개나 됩니다. 이처럼 천문학적 숫자의 우리 회충알이 단 하루분만 한국에 뿌려진다 하여도 끔찍스러울 터인데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요일이나 국경일도 없이 뿌려지며, 이렇게 하기를 이미 단군 개국이래 수백, 수천 년을 계속해 왔으니 한국의 금수강산이야 말로 우리 회충들의 고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한국 안에 우리 회충알이 없는 땅은 한 치도 없을 것입니다(이순형, 1974: 32-33).
한국 안에 우리 회충알이 없는 땅은 한 치도 없다는 말처럼 대한민국 인구 수보다 많은 회충의 편재성은 사람들에게 회충 감염을 ‘당연한 일’로 만들었다(이순형, 1974: 32-33). 오히려 감염되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1950년 제6회 33차 국회정기회의에서 이영준 의원은 세계보건연맹의 보조금 사용처에 대해 설명하며 “대한민국 어른 아이로부터 아마 국회의원 우리까지라도 다 기생충이 많다”(국회사무처, 1950: 4)고 발언했다. 회충 감염에는 남녀노소도, 빈부격차도 따로 없었다.
한국에서는 식단의 대부분이 인분 퇴비를 주어 기른 곡물과 채소로 이루어져 있어[10,] 회충의 생활사가 유지되기 쉬운 환경이었다[11,]. 2011년 서울 시내 발굴 중 획득한 조선시대 사대문 안의 토양 시료 분석에서는 기생충 알이 다량 확인되었다. 개천 바닥이나 골목 배수구 뿐 아니라, 육조거리(현 세종로)나 종묘 광장 등 예부터 번화하고 개방된 곳까지 다수 관찰되었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토양에 다량의 기생충 감염 위험이 누적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기호철 외, 2013: 95-97). 1931년 의사 민병기는 매일 종묘를 지나 병원으로 출근하는 길에 “누구든지 길 가운데 대소변이 즐비하게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좀 주의해 본다면 나가티 직업적 안목 이외라도 회충이나 촌백충[12,]이 대변에 군데 섞여 있는 것을 잘 볼 수가 있다[13]”고 기록했다. 1960년대 이후 이루어진 환경 개선 사업이 있기 전까지 농촌에서는 분변의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주변 환경에 기생충 알 오염이 지속되었다.
회충 알은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또한 높은 염도에서도 오랫동안 살아 있을 수 있으며, 가정에서 흔히 사용하는 세척제와 살균제에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14,]. 따라서 식재료를 끓이거나 가열하는 방법 이외에 일반적인 세척과 염장 같은 조리법으로는 회충 알을 제거하기 어려웠다. 겨우내 절인 야채를 많이 먹고, 회충 알에 오염된 환경이 개선되지 않아 감염의 순환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투약으로 구충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재감염이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15]. 1960년대 이전 한국의 환경은 회충의 전파와 재생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생태적 요인 때문에 한국에서 회충은 흔한 기생충이었으며, 사람들은 회충이 복통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16,]. 회(蛔)는 회충을 의미하기도 했지만[17,], 배 아프면 ‘횟배’라 하던 식의 막연한 진단방식이기도 했다(소진탁, 1984: 45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회충을 생존에 필수적인 존재로 인식했던 것은 장내 회충의 숫자가 많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별다른 증상이 보이지 않는데다, 외과학의 발전 이전에는 회충 감염에 의한 다양한 급성 증상들을 인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회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는 기존 한의학 이론의 영항도 컸다.
1950년대 이전까지 체내에 존재하는 기생충은 주로 인간의 생사나 길흉과 관련된 존재로 인식되었다. 또한 체내 구성 요소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했다. 기생충학자 소진탁은 중국 의서인 『황제내경』을 인용하여 “사람 몸엔 8만의 벌레가 있는데 이들이 없으면 사람 몸이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기생충은 꼭 필요하며 없애서는 아니된다”(소진탁, 1992b: 43)고 1940년대 대중의 인식 기반을 설명했다. 사람들은 기생충을 해로운 것만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운수나 숙명론적, 신화적 입장에서 풀이하였으며, “그 사고방식이 20세기 중반까지도 일반 대중 마음바탕에서 떠나지 않았다”(소진탁, 1992b: 45) [18].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은 회충을 인간 생존과 기능에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다. 회충은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기능을 지배하는 중추적 역할”(소진탁, 1992b: 45)로서, 이것이 “없으면 병신으로까지 인정을 하게 되었다[19,]”. “몸 안에 으레 없어서는 안 될 것처럼 생각해서 회가 동하면 안회를 시킬 지언정 내몰아서는 못[20,]”쓰는 것이며,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회가 있기 때문[21,]”이기도 했다. 1937년 동아일보 기사는 “재래로 이상한 인식이 우리머리에 남아 있으니 사람의 배속에서 회를 근절 식히면 죽는다는 이상스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 마치 회가 많은 덕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들을 하는 이[22,]”들의 인식을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서 “사람은 회충을 전혀 없애면 죽게[23,]” 되니, 회충은 생존의 필수 단위에 준하는 것이었다[24].
정부와 의학계는 사회 전반의 인식, 또한 기존의 의학 이론과 경합하며 “회충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배속에서 하는 것은 전혀 모르고[25,]”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회를 한방의생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다 있다”고 말했다며 회충을 꼭 구충해야 하느냐는 독자의 질문에, 내과 의사 이갑수는 “아주 해로운 기생충임으로”, “어리석은 한의(漢醫)의 말을 듯지 말고 속히 치료하라[26,]”고 답했다. 1935년부터 군산 지역 농촌 보건 사업을 진행한 의사 이영춘은 결핵, 매독, 기생충을 3대 민족독(民族毒)으로 규정하고 퇴치에 앞장섰다(박윤재, 2003: 10). 의학계를 중심으로 회충 감염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기사들은 일제 강점기 동안 계속해서 등장했지만, 외과술의 한계와 효과적인 약품의 부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직접 시각화하기는 어려웠다. 더불어 폐흡충이나 말라리아와는 달리 급성 증상을 일으키지 않는 회충의 특성 때문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도 적었다[27,]. 따라서 회충이 생존에 필수적이라 생각하는 ‘정상’을 ‘비정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뱃속에다 회충을 많이 배양하면서 회 일어나는 것만 극력 방지[28]” 하고 있는 대중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3. 한국전쟁 이후 회충의 시각화 : 한 소녀의 신체에 천 마리의 회충이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80% 이상의 한국인들이 회충에 감염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서홍관 외, 1992: 50). 회충 감염은 흔했지만, 사람들이 직접 회충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대변이나 구토를 통해서였다. 장 내에 적은 수의 회충이 있는 경우 자각 증상이 거의 없다. 다른 장내기생충들과는 달리 장 점막에 직접 부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충의 수가 늘어나면 소장 점막에 염증반응이 일어나 복통과 설사가 나타난다. 이때는 성충이 설사와 함께 배출되는 증상도 드물지 않다. 또한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어린이가 여러 마리의 회충에 감염되는 경우 심한 영양 손실로 발육장애나 인지능력 발달 저하가 동반된다(Cook et al., 2009: 1537). 회충에 의한 간접 증상 이외에, 회충의 모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체외로 기어 나오는 회충이나, 외과적 회충증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을 회충 감염과 연계하여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했다.
회충은 주변 환경에 변화가 일어나면 타 장기로 이행하는 특성을 보이는데, 테트라클로로에틸렌(tetrachloroethylene, 1960년대까지 사용된 십이지장충 구충제) 사용 시, 마취 시, 혹은 고열 발생 시 일어난다[29,]. 고열을 동반하며 치사율이 높은 다양한 열성질환이 유행하던 한반도에서 회충이 체외로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고열을 앓는 사람의 체내에서 다수의 회충이 빠져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가 사망하는 모습은, 회충의 제거를 사망과 연결시켜 “사람은 회충을 전혀 없애면 죽는다[30,]”는 인식을 공고히 했을 것이다[31,]. 하지만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실제 배 속에서 위해를 가하는 회충을 본격적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량살상무기의 발달로 복부에 외상을 입는 군인들이 급증했다(황상익, 2010: 232-241). 그리고 복부에 관통상을 입을 때면 어김없이 회충이 모습을 드러냈다.
환자가 장에 관통상을 입은 경우, 예외 없이 기생충이 있었다. 크기는 1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까지 다양했고, “비 온 뒤 길 옆의 웅덩이에 보이는 지렁이처럼 천천히 꿈틀대고” 있었다. 8055 이동외과병원에서 근무했던 외과 간호사 제네비에브 코너스(Genevieve Connors)는 “수술 시작 후 10분 내에 7-8 마리 정도는 나왔다. 기생충들이 기어나올 때면, 그대로 집어 들어 양동이에 던져 넣고 수술을 계속했다”고 증언했다.
존 베스윅(John Beswick)은 이동외과병원 회의에 참여했던 기억을 더듬어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서 기생충에 대한 지식을 처음 습득하게 되었죠. 인구 중 90-100% 가량이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거의 모든 사람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강인하고 튼튼해 보였어요. 그런데도 기생충이 있었던 거죠.”(Melady, 2011: 229) [32]
“기생충들이 기어 나올 때면, 그대로 집어 들어 양동이에 던져 넣고 수술을 계속했던” 한국전쟁에서 ‘눈으로 보여진’ 회충의 존재는 사람들의 뇌리 깊숙이 자리 잡았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외과술이 빠르게 발달하여 기존에는 치료가 힘들었던 외과적 회충증도 치료가 가능해졌다. 자연스럽게 대변에 섞여 나오거나 종종 구토를 통해 입으로 튀어나오던 회충이 아닌, 체내에 있던 대량의 회충을 보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을 통해 외과술이 발달하며 외과적 회충증의 보고가 빈번해지자, 회충 감염의 시각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1961년 회충에 감염된 서울시민 중 “육 개월 동안에 아무런 증세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63퍼센트고 나머지 36.4퍼센트는 일 내지 그 이상의 증세를 가졌는데 가장 빈번히 발생한 10개 증세” 중 3번째가 항문이나 입으로 회충이 나오는 증상이었다[33,]. “항간이나 병원에서 횟배를 앓는 어린이를 흔히 볼 수 있었고 회충을 토출하거나 회충으로 인한 장폐색[34,] …(중략)…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각종 합병증과 후유증을 목격할 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너무 흔한 질환으로 특별히 기록을 남길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자세한 학술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소진탁, 1984: 454). 따라서 실제 임상에서 만날 수 있는 외과적 회충증 사례는 더욱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5 – 1989년 사이 한국에서 보고된 외과적 회충증은 35년간 총 1,299건에 달했다(채종일 외, 1991: 103) [35,]. 1903년부터 2001년까지 보고된 전 세계 외과적 회충증이 총 4,793건이었다(Crompton, 2001: 304). 전 세계 외과적 회충증 보고의 27.1%가 한국에서 보고된 셈이다. 이 시기에 활발한 외과적 회충증 증례보고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의 회충 감염 문제가 심각했음을 반영한다[36].
그리고 1963년, 대중들에게 회충 감염의 모습을 각인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1963년 10월 24일 오후 10시 30분, 9세 아동이 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전주예수병원 응급실에 내원했다. 복통은 내원 30시간 전에 시작되었으며, 복통이 시작되는 시점에 입으로 회충을 토해냈다. 입원하기 전, 오전 3시에 아동은 회충 5마리를 더 토해냈다. 10월 25일 오전 1시 30분, 응급 개복술이 시행되었고, 곧 소장 대부분이 회충으로 가득 차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소장 일부는 괴사 상태에 있었다. 집도의는 소장의 절단 부위를 통해 아동의 장내 회충 대부분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양동이 하나가 거의 다 차버렸다. 수술 후 집계된 바로는 총 1,063마리, 4kg의 회충이 아동의 장에서 제거되었다. 회충 제거는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아동은 회복하지 못하고 수술 후 9시간 만에 사망했다(Crane et al., 1965: 34-35) [37].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1963년 10월이었지만, 처음 기사화 된 것은 1964년 2월 24일, “작년 9월 장폐색증에 걸린 아홉 살 난 한국인 소녀를 수술한 결과 무려 1062 마리의 회충을 긁어냈다[38,]”는 『동아일보』 사설을 통해서였다. 4개월이나 흐른 사건을 뒤늦게 기사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설은 1964년 2월 19일 한국외원단체협의회(Korea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ies, KAVA)의 지원으로 ‘기생충박멸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한 직후에 실렸다[39,]. 기생충 박멸을 지원하는 단체들과 의학계 인사들은 인식의 전복을 꾀할 수 있는 좋은 사례로 여겼을 것이다. 수술을 집도한 전주예수병원 원장이자 외과의사인 폴크레인[40,]은 장 폐쇄증으로 내원한 어린 여자아이를 수술하던 중 회충 1,600마리가[41,] 마치 새끼를 꼰 것처럼 창자 속에 꼬여 있던 것을 목격했다면서, 그 충격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임한종, 2013: 227). 이듬해에는 증례보고에 실린 사진을 전면에 내건 “정양의 뱃속에서 나온 1천63마리의 회충[42]”이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기사와 사진이 보도되었다.
어안이 벙벙한 외국인 의사는 무게를 달아봤다. 5킬로그람.(정양의 체중이 20킬로그람) 이 회충의 연장 길이가 무려 1백 60미터. 정양은 회복을 못하고 장폐색증으로 끝내 죽고 말았다. 비단 정양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95%) 한국인, 그 중에서도 농민들은 전부가 이런 회충 등 기생충 보따리를 뱃속에 두고 음식을 함께 나눠먹고 있는 셈이다[43].
『경향신문』에 실린 사진은 제거한 회충을 보따리 위에 쌓아 두고 의료진이 수를 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진과 함께 제시된 연장길이 160미터에 5킬로그램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는 사람들에게 배 속의 회충 보따리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배 속의 회충이 구체적으로 시각화되면서, 기사를 본 대중들은 ‘전 국민의 질병’인 회충이 나에게도 저렇게 많을 수 있으며, 우리 역시도 기생충 보따리를 뱃속에 두고 음식을 나눠먹고 있을 수 있다는 동질성을 느껴야 했다. 또한 이미 사건이 일어난지 1년 6개월이 흘러 시의성이 거의 사라진 1965년 4월 10일 발행된 기사임에도 “얼마 전 전주예수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현재 진행형임을 강조했다. ‘지금 우리 안에 이렇게 많은 회충이 있음’을, 그리고 ‘그로 인해 사망할 수도 있음’을 시각화하여 드러내 보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는 기사 하단에 구충제 광고를 전단 광고로 실었다[44].
『동아일보』 사설은 “예로부터 회충이 좀 있어야 어린애들이 밥을 잘 먹는다든가 또는 순하게 자란다는 말이 있거니와, 이 이상 무책임하고 무식한 말은 없을 것이며, 우리 문화의 후진성을 그대로 토로하는 부끄러운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45]”며 회충 감염을 과거의 인식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식하며’, ‘후진적인’ 개념인지를 강조했다. 회충은 더 이상 체내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무고한 아동의 목숨을 앗아간 존재가 되었으며, 한국 사회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요소였다.
이후 회충성 장폐색으로 사망한 아동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기사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가 되었다. 심지어 “어린 소녀의 뱃속에서 회충이 1,069마리 나왔다는 사실은 돌팔이 약장사도 떠들던 말”(이재홍, 1983: 51)이 되었다. 이제 회충은 개인의 무책임함과 무식함을 노출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4. 1960년대 전반기의 인식 변화 : 파독광부와 회충 감염의 수치심
1960년대 수출에 기반한 경제성장이 당면 과제로 떠오르면서 기생충이 걸림돌이 되었다. 1966년 한국외원단체협의회에 참석했던 인사는 “한국 사람들은 기생충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 것” 같으며, “지금까지의 미국 원조를 다 합쳐도 한국인이 뱃속에 기르는 기생충의 피해를 보상하지 못할 것[46,]”이라고 발언했다. 1966년 『경항신문』 기사에서 기생충박멸협회 사무총장 이종호[47,]는 “40여종의 각종 기생충으로 우리나라가 직접 간접으로 입은 연간 피해는 놀라운 숫자이다. 회충만으로 일 년에 약 2천명이 죽고 12지장충에 빨리는 피가 매일 5백60드럼. 연간 약 1백16억8천만CC, 이로 인한 노동생산능률의 감소가 돈으로 해마다 약 4백80억 원이 된다니 우리나라가 부흥하는 길은 이마(魔)의 기생충박멸에서부터[48,]”이며 “치료비, 노동력 저하 등, 이것을 따지니까 연간 무려 2천5백50억 원의 해를 입고 있음이 드러났다[49,]”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1966년 대한민국 수출 총액은 2억 5천만 달러였다[50]. 경제성장을 제1목표로 달려가고 있던 한국이, 사실은 기생충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수치심을 안겼다.
산업 발전을 위해 외화 획득이 절실했던 시기에 진행된 서독 광부와 간호사 파견 사업이 기생충 감염 때문에 취소될 뻔한 사건, 미8군이 한국산 채소 사용을 거부한 일 등은 정부와 대중 모두가 회충 감염을 국가적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중 산업 역군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파독 광부가 회충에 감염되어 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60년대에는 독일 광산의 인력 수요가 컸다. 한국 광부를 통해 인력 부족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는 독일의 필요와 인력 수출을 통해 외화 획득을 노린 한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서독 파견 한국 광부 임시 고용계획’이 탄생했다[51].
파견 이후 예상과 달리 광부들의 갱내 투입은 순조롭지 않았다. 기생충, 특히 회충과 구충(십이지장충) [52,] 감염 때문이었다. 갱도 내부는 온도가 높고 토양이 습해 기생충 알이 부화하고 잔류하기 쉬운 환경이었다. 외부로 나오기 어려운 환경 때문에 갱내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것 역시 기생충 알 오염을 심화시키는 원인이었다. 따라서 갱내 투입 노동자의 기생충 감염 관리는 민감한 문제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파견된 “광부 2백50명중 80% 이상이 회충 보유자이며 30%가 십이지장충 보유자로 판명[53,]”되었다. 파견된 광부들은 숲에 격리되어 잡무를 하며 “전원이 본국에 송환될지도 모른다는 탄광당국의 발표에 초조감이 없지 않았고 이역에서 기생충 환자라는 이름아래 심리적 고충도 적지 않았다[54].” 기생충 감염을 이유로 독일은 한국 광부의 이차 파견을 정지시켰고, 한국 정부에게 철저한 검진을 요구하였다.
당시 독일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얻고 두이스부르크시 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한국인 의사 이종수는 현지의 반응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1964년 4월 17일 독일에서 “그날 신문들은 「한국인은 격리되어 로베르그의 숲에서 일한다」, 「한국인은 전부 기생충 환자」 등등의 제목으로 시작하여 우리 광부들의 십이지장충 이환에 대하여 대서특필”했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실시한 신체검사표에는 이 질환이 없는 것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탄광에서는 한국의료기관은 신임할 수 없으니 서독의료인을 파한하여 앞으로 도독할 광부들의 신체검사를 맡게 하자는 주장”도 있었다[55,]. 이제 장내기생충 감염은 단순히 한국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대외적 수치이자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1965년 『조선일보』가 “기생충도 수출했나?”라는 제목 아래 “한국인에게 기생충이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인력수출에 덧붙여 기생충을 수출한 당국의 서독파견광부에 대한 보건관리가 나라망신을 시켰다[56]”며 국가적 수치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후 파견부터 검사결과에서 기생충이 발견되는 자는 출국을 취소하였다[57,]. 파독 광부, 그리고 이 자리에 지원했던 사람들에게 기생충 감염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퍼져갔다. 나아가 하찮은 기생충 때문에 삶의 기회를 놓치게 된 사람들은 기회의 박탈과 기생충 감염이라는 이중의 수치심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파견된 사람들이 기생충 감염 때문에 입는 피해는 끊임없이 비위생적인 고국에 대한 부끄러움을 상기시켰다(이영석, 2007: 22). “의사 입회하에 회충약[58,]을 먹어야했는데 이 때 느꼈던 부끄러움을 기억”하게 되었고, 기생충 감염이 사회적 기회의 박탈로 이어지는 경험을 했다. 사람들은 “약을 먹을 때마다 충을 가졌다는 열등의식으로 기가 죽어야 했다”(김용출, 2006: 67).
한국의 높은 회충 감염률은 후진성을 상징하는 부끄러운 기록이 되었는데, 이는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할 또 하나의 벽이 되었다. “문화발달과 기생충보유율은 반비례 하며”, “선진국일수록 보유율은 낮아지는 것”이었다. “미국서는 길거리 약국에서 회충약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며, 이웃 일본의 수도 동경 인구의 기생충보유율은 0.5프로에 불과하다[59]”는 사실을 강조하여 선진국, 특히 한국인의 수치심을 자극할 수 있는 일본의 사례를 언급했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주둔하던 “미8군에서는 채소를 우리 시장에서 사지 않고 항공편을 이용하여 주로 일본에서 들여오던 때”(소진탁, 1992a:7)였다. 외화가 절실했던 상황에서는 큰 손실이었다. 1962년 국회 연석회의에서 농림부장관 장형순은 “한국의 토지가 회충이 많다고 해서 우리한테는 사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토지를 불로 구어가지고 충을 없애고 미국 사람들이 그것을 시험해서 이만하면 되었다고 확인을 받고 한 다음에야 납품하게 되었다”(내각기획통제관실, 1962: 6)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미군은 먹지도 않는 채소를 한국 사람들은 먹고 있었으며, 이 사실은 구입 거부라는 형태로 외부에 고스란히 공개되어 수치의 경험을 안겼다[60].
5. 1960년대 중반의 인식 변화 : 생의학적 개입의 확대와 수치심의 강화
한국 전쟁 중, 그리고 이후 한국 사회가 겪은 다양한 기생충의 경험은 사람들의 인식을 점차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 한국 사회는 과거와 달리 회충을 생존에 필수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적극적인 치료와 개입이 필요한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61,]. 회충약 복용이 일상이 되었으며, 대중들은 개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구충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회충이 아이들의 성장 발달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역 단위로 실시된 집단 투약 사업은 학령기 학생들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더불어 1955년부터 시행된 제1차 교육과정 중 국민학교 교과과정에서는 6학년 자연 과목에 ‘전염병과 기생충은 어떻게 예방할 수 있나?’라는 주제로 ‘전염병(傳染病)과 기생충(寄生 蟲)에 대하여 이해케 하고 그 예방(豫防)에 힘쓰도록’하는 내용을 교육했고, 보건과 과목에서는 ‘위생’ 부문에 1, 2학년에는 ‘회충 구제’를, 3, 4학년에는 ‘전염병 예방’과 ‘기생충의 구제’를, 5, 6학년에는 ‘기생충의 구제’와 ‘학교의 전염병’ 등을 반복하여 교육했다[62]. 이는 회충을 ‘다스리던’ 일상에서, 회충을 ‘제거하는’ 일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며 한국 사회는 뿌리 뽑아야 할 대상이 된 회충에 대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을 갖추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도입된 다양한 약품들은 사람들이 회충 감염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한국전쟁 이전 효과적인 약품이 없던 때는 “아빠, 배가 아프니 담배 한 대줘”(서병설, 1984: 456)하는 식의 치료법부터 휘발유를 마시기까지 다양한 민간요법이 성행했다. 1950년대까지 주로 사용되었던 구충제는 산토닌(santonin)과 해인초(海人草)였다. 해인초는 해초를 끓여 만든 약초 중 하나로 비교적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약물 농도가 일정치 않았으며 구충 효과가 낮다는 단점이 있었다. 산토닌은 해인초보다는 효과가 좋았으나, 원료를 러시아에서 수입해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쌌던 데다, 마비된 회충을 배출하기 위해 하제를 별도로 복용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두 약품 모두 메스꺼움, 시력장애 등 많은 부작용이 있었고, 독성이 높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영유아가 사망하는 사고도 자주 발생했다(임한종, 2013: 208-210) [63]. 1950년대 후반부터 제약회사들이 난립하고 새로운 구충제들이 개발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산토닌에 카이닌산와 하제를 섞어 순응도와 효과를 높인 제품이 출시되었고, 아동들의 복용 편의를 위해 캐러멜 코팅이 된 상품도 개발되었다. 또한 인체 독성이 낮은 피페라진(piperazine)이 등장하면서 안전한 집단 투약도 가능해졌다.
광고 또한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한 가지 지표다. 1956년까지 구충제 광고는 한해 최대 14건(1929년)에 불과했다. 광고 건수는 1957년 27건, 1959년에는 84건, 1962년에는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에만 총 132건의 회충약 광고가 게재되었다[64,]. 또한 주로 소형광고로 게재되었던 광고 위치도 1면 전단광고로 옮겨져[65], 1960년대에 들어 회충약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1960년대 이전 구충제인 마구닌의 광고 문구는 “회충을 속히 업새시요[66,]!” “회충 구제는 건강의 광명[67,]” 같은 단순한 구호였다. 가장 강력한 문구가 “회충 사형, 마구닌 먹는 날이 회충의 사형 받는 날[68,]”이었다. 즉 회충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이를 물리쳐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부분에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광고문구는 점차 수치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간다. 1960년 실린 유한양행 구충제 유피라진시럽의 광고 문구는 “문화인은 연 이회 기생충을 구제합니다[69]”였다. 1961년 1월 1일 서울약품은 4면에 신년 맞이 전단 광고를 실었다. “회충 왕국은 한국민의 수치!”라는 제목이었다[70. 즉 구충제를 먹어 체내에서 기생충을 제거하지 않는 사람은 문화인도, 근대화된 사람도 아니며, 나아가 국가적 수치를 양산해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수치심을 자극하는 구충제 광고는 이후 신문에서 텔레비전 광고로까지 이어졌다. 1971년 방영된 한일약품의 회충약 유비론 광고에는 인기 코미디언인 서영춘이 등장해 회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챙피한 노릇’인지를 역설한다[71].
에이 에이 챙피해. 네? 뭐가 창피하냐고요. 으유 전 국민의 80%가 회충이 있다니 에이 이거 정말 챙피한 노릇입니다. 에이 저리 들어가 들어가. 헤헤헤 하지만 여러분께서야 설마. 헤헤 있을 겁니다. 에 나요? 나 없습니다. 나 없어요 없어요. 잉. 난 한일약품의 유비론을 먹었단 말씀이야. 잉. 좌우간 회충 요충이 싸악 빠집니다. 온 가족이 잡숴보세요. 에이고 잡숴서 남 주나요. 에. 회충 요충엔 유비론. 한일 약품의 유비론. 물약 말고도 또 알약이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정말 싸악 빠져요. 에이 빠져서 남 주나요. 회충 요충엔 한일약품의 유비론[72].
1964년 전주예수병원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사설의 “예로부터 회충이 좀 있어야 어린애들이 밥을 잘 먹는다든가 또는 순하게 자란다는 말이 있거니와, 이 이상 무책임하고 무식한 말은 없을 것이며, 우리 문화의 후진성을 그대로 토로하는 부끄러운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73,]”는 언급과 비교하여, 1966년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거위(회충)가 없으면 말을 못한다, 거위가 없으면 밥맛이 없고 거위가 하나도 없으면 죽는다는 등 옛날 오해는 이제 거의 없어져 간다”고 언급했다. 이 시기에 대중의 두드러진 인식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69년 기사에서는 “67년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기생충 감염률은 회충 80%”로 “회충 하나를 두고 외국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미국의 5%, 일본의 15%와는 아예 이야기도 되지 않지만 태국 대만 등 다른 동남아제국의 40%에 비해도 2배나 된다. 실로 수치스런 ‘세계 제일’이라 할 수 밖에 없다[74,]”며 회충 감염이 국가적 수치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언급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을 지나며 회충 감염은 당연한 것에서, 비정상이자 경제성장의 걸림돌로, 치료의 대상으로, 나아가 근대화되지 못한 국민들의 몸에 대한 부끄러운 치부로 바뀌어갔다[75].
6. 맺음말
동일한 질병이라도 각 시기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지식, 가치, 문화 등에 따라 이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바가 달라진다(김옥주 외, 2012: 282). 1960년대에 들어서 한국 사회의 영양분을 갉아먹고 복통을 일으키던 회충의 생물학적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시기 회충 감염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그리고 질병 경험은 정상과 비정상의 전복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 급진적인 변화를 겪었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을 ‘수치의 문화’, 그리고 미국을 ‘죄의식의 문화’로 분류했다[76,].(베네딕트, 1974: 288-289) 수치와 죄의식의 문화적 차이에 주목한 것은 집단주의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의 차이를 잘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의 정서에 기반한 죄의식과 달리, 수치심은 타인중심의 정서가 발달된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주로 나타난다. 수치심은 죄의식과 달리 위반 사실 자체가 아닌, 위반 사실이 타인에게 알려지는 데 기반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새뮤얼 헌팅턴은 중국 문화대혁명 중 추문 폭로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장치가 되었음에 주목했다. 문화대혁명을 이끈 홍위병들은 자발적으로 과오를 고백해야 했으며, 강박적으로 타인의 추문 폭로에 참여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수치심은 과오에 대한 교정과 더불어 대중동원의 기능을 수행하며 문화대혁명을 가능하게 한 동력이 되어주었다(Huntington, 1981: 132-134).
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Martha Nussbaum)은 수치심을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정의했다. 너스바움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특정 사람을 정상으로 지정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자신의 모습이 규범에 부합하지 않을 때에는 수치심이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사회적 수치심을 초래하는 많은 경우는 신체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77]. 즉 수치심이란 타인에게 보여지는, ‘시각화’ 과정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회충의 경우 한국에서 1950년대 이전까지는 그다지 수치스러운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회충 감염은 일상이었으며, 다스려야할 존재이지 없애서는 안 될 것이었다. 여기에는 회충을 신체 구성물의 일부로 본 과거부터 내려온 의학 이론도 영향을 미쳤고, 반복적인 재감염으로 약물을 통한 감염 통제가 어려웠다는 점, 효과적인 구충제가 없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따라서 회충과 장내기생충 감염을 박멸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정부의 노력은, 1950년대 이전까지 대중의 인식과 계속해서 경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량의 회충이 체내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게 된 상황은 한국 사회 전반의 인식을 점차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한국전쟁이 죽음을 한국인 주변 가까운 곳에 끌어다 놓고, 세균과 바이러스들이 일상 속에 깊이 파고들며, 미군이 가져온 의약품들이 세균과 박테리아, 기생충 감염을 치료 하는 데 유일무이한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현대의학과 접촉해 보지 못했던 국민 대다수가 전쟁 중 입대 과정, 혹은 피난민 수용소 내에서 위생교육을 일상적으로 받게 되면서 청결과 위생 담론을 내면화 하게 되었다(전우용, 2011: 292-295). 1955년 1차 교육과정에서 도입된 보건 위생 교육도 회충 감염에 대한 전후 세대의 인식을 차츰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 지상과제로 도래한 경제발전은 회충에 대한 국가 개입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다. 사회의 인식 전반에서 회충 감염이 수치스러운 일이 된 배경에는, 회충 감염의 문제가 대외적으로 시각화되었다는 점도 있었다. 파독 광부들의 기생충 감염 사건과 이에 따른 파견 취소 위협은 회충을 전근대적이며 낙후된 한국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기생충 왕국’이라는 국가적 수치는 개인의 수치로도 치환되었다. 광고들은 “회충 왕국은 한국민의 수치[78,]”임을 강조했다. “선진국들은 감염자가 0%에 가까워서 외국의 읫과대학에서 한국읫과대학에 기생충표본을 주문하는 부끄러운 자랑거리[79,]”도 생겼다. 기생충 표본 수출은 파독 광부 기생충 감염 사건과 더불어 “기생충도 수출했나[80]?”라는 비판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수치심이 중국 문화대혁명에서 대중동원의 기능을 수행하며 주요한 추진 동력이 되어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주의적 문화를 가진 한국에서 회충 감염의 수치심은 부끄럽지 않은 국민이 되기 위해 사람들이 범국가적 사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당위를 제공해준 셈이다. 파독 광부들의 기생충 감염은 한국의 기생충 감염 사실이 국외에 공개적으로 ‘노출되고 보여지는’ 사건이었으며, 한국, 또한 한국인들에게 공개적인 수치심을 안겼다. 외국에서는 회충 감염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동시에 우리가 ‘비정상’임도 알게 되었다.
아동의 회충성 장폐색 사망 사건은 대중들이 수치심의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완치의 기쁨을 온몸으로 나누는 파독 광부들의 모습이 외부에의 노출을 시각화했다면, 우리의 배 속에서 양식을 나눠 먹는 1,063마리의 회충 보따리는 사람들에게 수치심의 원인을 시각화했다. 회충 감염의 인식에 있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전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감염의 시각화, 그리고 시각화를 바탕으로 한 수치심이었다. 우리 배 속에도 저 많은 기생충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동질감은 수치심을 강화시켰다.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기능을 지배하는 중추적 역할을 하는 회충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정상’으로 규정하던 상황에서, 회충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국민의 수치”인 “회충 왕국”으로, 정상과 비정상이 전복되었다.
국가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1966년 ‘기생충질환예방법’을 도입해 더욱 적극적으로 정상을 규정했다[81,]. 동시에 전국적 박멸 사업 도입으로 시민들을 수치심으로부터 보호하는 보루를 제공했다. 회충 감염의 수치심이 시각화되던 초기에는 국가의 개입이 적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공유하기 시작한 이후, 국가는 대중을 박멸 사업에 참여시키기 위해 수치심을 주요한 장치로 사용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에서는 수치심의 시각화를 통해 정상과 비정상의 전복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73년 새마을 사업의 보건 강좌에는 기생충 “실물표본공람을 통하여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계몽하고”, 기생충이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수치스러운 것임을 교육하는 과정이 있었다[82].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서는 구충제를 복용한 뒤 대변을 통해 빠져나온 회충을 마주한 아들과 어머니의 대화를 그리고 있다.
“워매, 요것이 뭐시다냐!”
막내 옆으로 다가서던 월하댁은 질겁을 하며 물러섰다.
큰 감만한 것, 그것은 회충의 덩어리였다. 희읍스름한 회충들은 서로 뒤엉켜 느리게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어찐가? 비암보담 더 무섭제?”
어머니도 놀란 것에 만족한 선진이는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쌕 웃었다.
“워따, 시상에나 징허고 징해라. 저것이 다 니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여? 글 안 해도 잘 묵도 못하는 속에 저런 잡것들이 들앉어 진기럴 뽈아내니 항시 히놀놀해갖고 지대로 크기럴 허냐, 지대로 피기럴 허냐, 개잡녀러 것들!”
월하댁은 저주하듯 세차게 침을 내뱉고는 돌아섰다.
…(중략)…
“나넌 회가 시물네 마리나 나왔는디 누나는 멧 마리나 나왔냔 말여.”
“워메, 징상시럽고 드러라. 니 시방 고것 자랑허잔것이여? 빙신이 넘세시런지도 몰르고.”(조정래, 2003: 74-76)
1940년대 후반까지 정상으로 여겨지던 회충 감염이었지만, 불과 20여년 뒤인 1969년에는 전국 규모의 기생충 감염률 조사와 투약이 진행되었다. 그때 4,099,502명의 검사자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69: 12-13)이 이를 수용하고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 바로 수치심이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과 1960년대 초반 파독 광부 기생충 감염 사건, 전주예수병원 장폐색 아동 사망 사건들을 지나며, 회충은 당연한 일상의 동반자에서 수치스럽고 “징상시럽고 드러”우며 “넘세시런” “개잡녀러 것들”로 변화했다.
Notes
『승정원일기』 67책 영조 37년 12월 14일, 「上曰, 此是人龍, 不必陋矣」, 국사편찬위원회, http://sjw.history.go.kr/id/SJW-F37120141-00800. 검색일: 2016년 6월 25일.
장내기생충 중 회충 암컷은 길이 20-49cm, 두께 3-6mm, 수컷은 길이 15-31cm, 두께 2-4mm 가량으로 장내기생충 중에서도 크기가 큰 편이다(Roberts et al., 2009: 433). 비교적 크기가 작은 편충(30-50mm)이나 구충(5-9mm)에 비해 눈에 쉽게 띄어 예부터 많은 기록이 남아 있으며, 장내기생충을 대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1989년에는 회충 감염률이 0.3%까지 낮아졌고, 인분 사용이 거의 사라져 사실상 재감염이 일어나기 어려운 생태 구조로 재편되었다.
약국에서 일반의약품으로 판매되는 ‘종합 구충제(알벤다졸, 플루벤다졸 등)’는 회충, 편충, 구충, 요충에는 효과가 있으나, 현재 한국에서 주로 유행하고 있는 간흡충이나 고래회충 등에는 효과적이지 않다. 즉 현재 대중의 구충제 복용 양상은, 실제 한국의 기생충 유행 양상과 큰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기생충 알 김치’파동… 약국 구충제 불티」, 『국민일보』, 2005년 10월 23일.
당시 전국 단위 기생충 검사는 학생 뿐 아니라 일반인 검진도 진행되었으며, 춘계와 추계로 연 2회 진행되었다. 1984년 기준으로 연간 검진 건수는 2,200만 건 이상이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기생충 질환인 말라리아 역시 개항기 이전까지 한반도에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개항기를 기점으로 치료제인 키니네가 수입되고,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의학이 도입되면서 질병이 다루어지는 방식과 사회적 인식이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여인석, 2011: 54-78).
「회충 왕국은 한국민의 수치!」, 『동아일보』, 1961년 1월 1일.
1969년 전까지 한국 내 기생충 알 검사 방법은 직접도말법, 부유법, 침전법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때문에 검사 방법에 따라 검출되는 알의 종류에 차이가 있어 결과에 편차가 있었다. 1969년 집단 검진이 시작되면서 통일된 검사법이 필요해졌고, 이에 따라 셀로판지를 사용해 준비 시간이 짧고 경제적인 셀로판후층도말법이 도입되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108-111).
「이렇게 회충을 없애자」, 『동아일보』, 1955년 5월 11일.
회충은 인간의 소장, 공장, 회장 상부 장관 내에 기생하면서 하루 최대 20만개의 알을 산란해 대변과 함께 밖으로 내보낸다. 배출 이후 분변과 함께 흙 속에 섞여 발육해 인간을 감염시킬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오염된 채소 등과 함께 유충이 들어있는 알을 섭취하면 소장에서 소화액에 의하여 껍질이 터지고 유충이 나온다. 알에서 나온 유충은 소장 벽에 침입하여 혈관을 통해 간으로 이동한다. 약 1주일 후 간을 통과하여 폐로 이동하고, 이 과정에서 두 번 변태하여 제3기 유충으로 자란다. 제3기 유충은 폐모세혈관을 지나면서 혈관을 찢고 폐포 안으로 빠져 나온다. 유충은 기관지와 기관을 거슬러서 식도로 이동해 소장으로 내려간다. 여기서 2회 더 탈피하여 성충이 된다. 알 섭취부터 산란기 성충에 이르는 데는 전체 10주 가량이 소요되며, 사람에 기생하는 성충은 약 1년 6개월의 수명을 지닌다(Roberts et al., 2009: 434-435). 회충의 알을 먹어 사람이 감염된다는 사실은 1879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폐를 거쳐가는 단계까지의 생활사가 온전히 밝혀진 것은 1922년에 들어서였다(Grove, 2013: 11-14).
촌백충(촌충) 역시 3-5만개의 알을 담고 있는 마디가 떨어져 나와 대변과 함께 배출되는 경우가 있다. 각 마디는 약 2cm 가량에 운동성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의 눈에 자주 띄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기가 회충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 회충만큼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기생충에 대하여 (2)」, 『동아일보』, 1931년 12월 18일.
「사람을 좀먹듯하는 회충의 박멸과 예방 (하)」, 『동아일보』, 1938년 11월 22일.
「채소의 봄 표백분에도 쉬이 죽지 않는 회충의 간단한 예방법」, 『동아일보』, 1933년 4월 16일.
회충은 고대부터 인류에게 잘 알려져 있는 기생충이었다. 대변에 섞여 나오는 회충에 대한 기록이 기원전 이집트, 로마, 그리스, 중국 의술서에 등장한다. 로마시대 저술가인 켈수스(Aulus Cornelius Celsus, BC 25-AD 50)는 “때때로 벌레들이 배 속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항문을 통해 기어 나오기도 하며, 더 심하게는 입으로 나올 때도 있다”고 기록했다. Grove(2013: 6-7)에서 재인용.
회충은 사람들의 눈에도 잘 띄었던 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蛔蟲(회충), 蛕(회), 거위, 고충(蠱蟲, 기생충을 의미하기도 함), 공이(경상 방언), 꺼갱이(경상 방언), 꺼꾸(강원 방언), 회(충북 방언), 우충(蚘蟲, 북한어)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려왔다. 회충의 언어학적 고찰에 대해서는 곽충구(1995)를 참조하라.
17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의서인 동의보감에도 기생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충부(蟲部)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생충은 삼시충(三尸蟲)이다. 이 기생충은 실제로 존재하는 기생충이 아니라 도교적, 신화적 성격을 띠고 있다. 삼시충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몸에 살고 있다가, 경신일이 되면 몸을 빠져나와 하늘에 올라가 그 사람이 행한 악한 일을 하늘의 신에게 낱낱이 고해바친다(여인석, 1993: 114-121). 현대의학에서 이야기 하는 기생충과는 다른 존재이나, 신화적 성격이 강한 기생충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기생충을 길흉화복이나 신화와 연계하여 생각하는 인식이 질병으로서의 기생충이라는 인식과 혼재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생채소를 먹는 시절에 회충을 경계합시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2일.
「사람을 좀 먹듯하는 회충의 박멸과 예방(상)」, 『동아일보』, 1938년 11월 21일.
「기생충을 박멸하자 (3)」, 『동아일보』, 1932년 12월 27일.
「생채소를 먹는 시절에 회충을 경계합시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2일.
「조선사람과 기생충」, 『동아일보』, 1939년 4월 12일.
대중들이 남긴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회충이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인식은 대부분 대중의 인식을 비판하는 신문기사나 전문가의 글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글들은 대중의 인식을 온전히 드러내는데 한계가 있으나, 대중과 전문가 집단, 그리고 국가의 인식이 경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생채소를 먹는 시절에 회충을 경계합시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2일.
「가뎡고문」, 『동아일보』, 1928년 4월 27일.
1886년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는 한반도에 기생충 감염이 만연한데도 불구하고 외래 환자 중 기생충 감염 환자가 적은 이유를 “회충과 촌충 같은 장내기생충증은 매우 크게 고통을 받거나 의사가 묻지 않으면 별 치료를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박형우 외, 1999: 28). 일제 강점기 당시 시행한 장내기생충 감염 전국 조사는 1924년의 검사가 유일하며, 다른 조사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비교한 논문이나, 한국에 파견된 일본의 기생충학자들이 일부 지역만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들이 발표되어 있다.
「조선사람과 기생충」, 『동아일보』, 1939년 4월 12일.
회충이 타 기관으로 이행하는 경우 장천공, 급성 췌장염, 간병변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마취 시 일어나는 회충의 이행은 기관 폐쇄로 인한 저산소증 등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유행 지역에서는 고열 발생 시, 혹은 마취 이전에 구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Cook et al., 2009: 1537).
「조선사람과 기생충」, 『동아일보』, 1939년 4월 12일.
과도한 수의 회충이 존재하는 경우 장폐색이나 장천공을 일으켜 급성 복증으로 진행되기도 하며 담도에 진입하여 담도회충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담도회충증은 폐쇄성 황달과 극심한 복통을 일으킨다. 회충이 스스로 빠져나오기는 어려워, 죽어서 담석으로 변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장폐색이나 장천공처럼 외과적 처치가 요구된다. 영조의 사례처럼 회충을 입으로 토해낸다는 기록 역시 장외 회충증에 속한다. 만성 위염 등으로 위산 분비가 줄어드는 사람의 경우 회충이 위로 이동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위로 진입하면 대부분 구토하여 입으로 배출하게 된다(채종일, 2015: 306).
존 멜라디(Melady, 2011)의 책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캐나다 군인과 의료진들의 회고를 담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파병되었던 군인들은 한국 파병 중 장내기생충 감염에 주의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또한 미국과 캐나다의 군진의학 분야에서 외과적 회충증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Russell, 1954: 388).
「건강진단 (6) 의료」, 『동아일보』, 1961년 5월 21일.
회충성 장폐색의 사망률은 5%가 넘고, 10세 미만 아동에서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데, 장관이 작은 데 비해 회충의 개체수가 많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 회충 관리 사업이 끝나갈 무렵 외과적 회충증에 다시금 학자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이유는, 전국적인 관리사업의 결과로 국민들이 얼마만큼 직접적인 혜택을 입었는지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감염률의 감소만으로는 의학이나 건강 문제에 대한 혜택을 온전히 반영하기 어렵기 때문에, 또 다른 평가지표로 외과적 회충증의 감소가 활용되었다(채종일 외, 1991: 101).
1932년 경성제대 이와이(岩井)내과 김동익 박사는 외과적 회충증 “증세로 인하여 복부수술을 아니치 못 하게 된 것을 일 년에도 평균 삼사 인을 보게”된다고 말했다. 의사들은 신문에 관련 증례를 기고하며 “사십여 세 된 여자를 해부하니까 입 속에 오십 마리, 코 속에 십이 마리, 식도에 이십팔 마리, 바른편 긔관지에 두 마리, 위 속에 열 마리, 십이지장에 십팔 마리, 담도에 여섯 마리, 창자에 사백칠십구 마리의 회충”이 있었다며 회충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들은 보통 “회충을 그다지 무서워하지 아니하”였다. 「환절긔에 무엇보다 주의할 어린아이들의 기생충 (2)」, 『동아일보』, 1930년 10월 14일.
이 증례보고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외과학 잡지인 Annals of Surgery에 실렸다. 크레인 박사가 제1저자였으나, 당시 한국인이 공동 저자로 참여해 한국의 사례를 해외 학술 잡지에 실을 수 있었던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증례보고에는 사망한 아동의 얼굴이 그대로 실렸으며, 심지어 수술 직후 침대에 누워있는 아동 바로 옆에 제거한 회충을 늘어놓은 사진도 등장했다(Crane et al., 1965: 35). 이 사진들은 신문 기사에 고스란히 다시 사용되었다.
「한 소녀의 신체에 천 마리의 회충이」, 『동아일보』, 1964년 2월 24일.
「기생충박멸운동 보사부서」, 『경향신문』, 1964년 2월 21일.
크레인은 한국외원단체협의회 회원으로 당시 보건사회부에 한국의 기생충 감염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기생충 박멸 사업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Annals of Surgery에 실린 원논문에는 1,063마리로 명시되어 있으나, 이후의 기록물들에서는 필자에 따라 1,062마리에서 1,600마리까지 다양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는 기억의 오류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정양의 뱃속에서 나온 1천63마리의 회충」, 『경향신문』, 1965년 4월 10일.
「기생충」, 『경향신문』, 1965년 4월 10일.
「한번으로 완전구충!」, 『경향신문』, 1965년 4월 10일.
「한 소녀의 신체에 천 마리의 회충이」, 『동아일보』, 1964년 2월 24일.
「구급신호 국민보건 (5) 기생충」, 『동아일보』, 1966년 4월 16일.
여기서 인용한 1966년 경항신문 기사는 이종호를 기생충박멸협회 회장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 협회 회장은 농촌위생연구소 소장이자 개정중앙병원 원장이었던 이영춘이었다.
「기생충」, 『경향신문』, 1965년 4월 10일.
「기생충과 우리생활」, 『경향신문』, 1966년 4월 27일.
K-stat, 『한국무역통계 수출입 총괄』, 한국무역협회, http://stat.kita.net/. 검색일: 2016년 6월 25일.
협정은 1963년 12월 7일 발효되었다. 해외 출국 규제가 엄격했던 시기,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100여 개의 자리에 2,500명이 몰려들었으며, 고등학교 및 대학교 졸업자가 60% 이상이었다. 주한독일대사관 서울, 『파독 광부 간호사』, 주한독일대사관, http://www.seoul.diplo.de/Vertretung/seoul/ko/04-Politik/Jubil_C3_A4umsjahr2013/Gastarbeiter-s.html. 검색일: 2016년 6월 25일.
구충 역시 십이지장충, 채독벌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1960년대에는 주로 십이지장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현재 구충으로 명칭을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다.
「광부 80%에 회충」, 『경향신문』, 1964년 1월 29일.
「해외출가와 기생충 서독파견광부의 경우」, 『동아일보』, 1964년 6월 5일.
「해외출가와 기생충 서독파견광부의 경우」, 『동아일보』, 1964년 6월 5일.
「[색연필] 기생충도 수출했나? 서독의 한국인 노동자 기생충 많아」, 『조선일보』, 1965년 7월 25일.
「석탄가루로 뒤범벅된 빵 씹으며 하루 종일 노동」, 『월간조선』, 2009년 5월.
파견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된 기생충은 ‘구충(십이지장충)’이었지만, 광부들은 추후 ‘회충’으로 기억했다. 한국에서 장내기생충 중 가장 흔한 종이 회충이었으며, 사람들이 기억하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수치심의 대상은 구충에서 회충으로, 그리고 장내기생충 전반으로 퍼져갔다.
「한 소녀의 신체에 천 마리의 회충이」, 『동아일보』, 1964년 2월 24일.
기생충박멸협회는 60년대 중반 이후 청정채소 운동, 즉 인분 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화학비료만을 사용한 ‘기생충예방 시범부락’을 설치 및 운영했다. 여기에 ‘고등채소’라는 이름을 붙여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군부대에 ‘청정채소’로 공급 할 수 있게 되었다(서효덕 외, 2013: 115).
“벌써 가을이라 애들 회충약 먹을 때가 되었군. 내일은 약방에 가서 회충약을 사와야겠다. 그러려면 또 몇 천환은 날라가는 판이로구나.”「〔수필리레〕 회충약을 사와야지?」, 『마산일보』, 1960년 10월 2일.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교육령에 따른 교과 과정에는 체조과, 혹은 체련과에 위생 교육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는 기생충 감염 관리를 신체의 청결이라는 세목 아래 간략히만 다루고 있다. 해방 후 1차 교육 과정 이전까지는 초중등학교 과학 5학년 교과의 소주제 중 하나로 ‘전염병과 기생충’을 한번만 다룬다. 국가교육과정정보센터, 『우리나라 교육과정 1차시기』, 국가교육과정정보센터, http://www.ncic.re.kr/mobile.index2.do. 검색일: 2016년 6월 25일.
시대별로 사용된 구충제로는 초기에 산토닌, 해인초, 피페라진, 피란텔 파모에이트, 메벤다졸, 알벤다졸 등이 있다. 이 외 다양한 구충제들이 등장했으나 독성이나 가격 문제로 빠르게 사라져갔다(임한종, 2013: 208-210).
『동아일보』, 『경향신문』에 실린 구충제 광고를 기준으로, 회충, 구충, 구충제로 검색하였다. 검색 결과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의 결과를 토대로 하고 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hn. 검색일: 2016년 6월 25일.
「회충은 허약아를 만든다!」, 『경향신문』, 1962년 5월 5일.
「회충을 속히 업새시요!」, 『동아일보』, 1929년 11월 28일.
「회충구제는 건강의 광명」, 『동아일보』, 1934년 3월 14일.
「회충구제에 마구닌」, 『동아일보』, 1934년 3월 25일.
「문화인은 연이회 기생충을 구제합니다」, 『경향신문』, 1960년 10월 12일.
「회충 왕국은 한국민의 수치!」, 『동아일보』, 1961년 1월 1일.
서영춘을 시작으로 1990년대 초반까지 구충제 광고에는 배우 김수미, 코미디언 심형래 등 인기 연예인이 출연하는 약품이 되었다.
「한일약품 회충약 유비론 서영춘편 1971년」, 한국광고총연합회 광고정보센터, http://www.adic.co.kr/ads/list/showHomeTvAd.do?ukey=69136&oid= . 검색일: 2016년 6월 25일.
「한 소녀의 신체에 천마리의 회충이」, 『동아일보』, 1964년 2월 24일.
「청정채소와 기생충의 박멸」, 『경향신문』, 1969년 4월 17일.
1970년대에는 기생충 감염의 경제적 문제가 강조되고, 기생충박멸협회의 적극적인 홍보 사업이 이루어지며 기생충에 대한 담론은 수치를 넘어 혐오의 감정으로 이어졌다(박영진, 2016: 43-43).
루스 베네딕트는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문화적 특성을 연구하며 일본 문화에서 나타나는 온(恩)과 기리(義理)에 주목했다. ‘온’은 호의를 받았을 때 느끼는 감사의 마음이자 부채의식을 느끼게 감정이며, 기리는 ‘온’을 베푼 사람에게 꼭 답례를 해야 하는 외면적 강제성을 말한다. 베네딕트는 ‘온’과 ‘기리’에 따라 집단을 의식한 수치심이 일본 문화의 규범을 유지하며, 수치의 문화를 형성한다고 분석했다(베네딕트, 1974: 129-293).
마사 너스바움은 사회의 법체계 중 많은 부분이 수치심이나 혐오 같은 ‘감정’에 기반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너스바움은 사람들이 감정을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감정 역시 신념의 집합체로서 대상에 대한 많은 사고를 수반하는 인지적 산물이며, 공적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감정은 경험하는 사람이 대상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며, 감정에 수반된 사고가 감정의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 안에 대상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수치심은 사회적 ‘정상’이라 규정되는 평가에서 벗어나면서 나타나는데, 여기서의 ‘정상’은 통계적으로 빈번하다는 의미(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거나 행하고 있는 것), 혹은 바람직하거나 규범적이라는 관념(적절한 것이며, ‘부적절’하거나, ‘나쁘’거나, ‘수치’스럽지 않은 것)을 담고 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수치스럽거나 나쁘거나 ‘비정상’인 것으로 치부된다. 여기서 ‘정상’은 철저히 규범적인 개념이다. 이처럼 너스바움이 여러 감정의 범주 중 혐오와 수치심에 주목한 이유는, 다른 감정과 달리 인간의 근원적 나약함을 숨기려는 욕구를 지녀 타자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며 배척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완전무결함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심리적 경향에서 인간은 타인의 부족함을 혐오하게 되고 이는 차별과 배제, 억압이라는 사회적 행동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너스바움, 2015: 317-507).
「회충 왕국은 한국민의 수치!」, 『동아일보』, 1961년 1월 1일.
「기생충과 우리생활」, 『경향신문』, 1966년 4월 27일.
「[색연필] 기생충도 수출했나? 서독의 한국인 노동자 기생충 많아」, 『조선일보』, 1965년 7월 25일.
국가 주도의 대규모 박멸 사업은 1960-1970년대 이어진 쥐잡기사업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쥐잡기운동은 정치권력의 의지와 이해가 깊이 담긴 사업이었으며, 당시 사회정화운동과 연계하여 이를 강화하는 기제로 쓰이기도 했다(김근배, 2010:121-124).
「제언. 새마을 사업의 능률화. (5) 과총련전문가들의 현장조사 보고」, 『매일경제』, 1973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