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 영미권의 인삼(Ginseng) 인식*
The Perception of Ginseng in England and America, 160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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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aims to redress serious imbalances in the research on ginseng. Most accounts of ginseng treat it as an exclusively East Asian commodity, and are dominated by the natural sciences. Ginseng, however, was much discussed in England and America in the early modern period: the discussion encompassed not only botanical and medical interests, but also discourses on the commercial marketability of ginseng; ginseng was also an item that embodied European prejudices, symbolizing perceived ‘differences’ between the West and East. As such, ginseng was an ‘indigenous’ item of ‘the East’ that was much discussed in ‘the West’, but one that resisted assimilation into its systems of knowledge.
1. 서언
한국이 한류를 주도할 가장 대표적 상품으로 내세우고 있는 인삼은 사실 최근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대표적인 대체의약품(alternative medicine)이다. 학계에서 인삼을 다루기 시작한 시점은 1950년대로, 성분과 효능에 관한 연구를 필두로 7천 편이 넘는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그런데 인삼연구는 두 측면에서 극심한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첫째[1], 인삼연구의 절대다수가 인삼의 약리작용을 둘러싼 이공계에 분야에 집중된 한편, 인문사회학적 연구는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둘째, 인삼연구가 동아시아출신 학자들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인삼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인삼연구는 1970년대부터야 시작되었으며, 인문사회학 분야에서는 주로 국내상업과 국제무역을 둘러싼 정부정책, 무역현황과 규모를 다루었다. 한국사의 경우 인삼을 주제로 삼은 연구는 기록의 부재로 말미암아 매우 더디게 이루어져왔는데, 2000년 이후 연구자들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특히 여인석과 양정필은 일본학자들이 인삼연구의 정전으로 내세우는 이마무라 도모(今村枉)의 『인삼사』(人蔘史) 등의 주장을 재검토하여 그 내용에 깔린 식민사관적 편견과 왜곡을 짚어낸 바 있다. 또한 중국인삼의 실체가 현재의 진인삼과는 다른 별도의 특정 식물일 가능성을 제안하는 한편, 인삼의 중국 기원설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오히려 조선인삼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한다[2].
그동안 한국사 분야에서 인삼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 영역은 대중국 무역과 인삼정책, 개성삼업의 발달에 관련된 부분이다[3,]. 삼국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삼의 생산과 통제, 대외교역 및 일제의 인삼 수탈은 역사학자들이 가장 많이 다뤄온 주제이고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 및 거대담론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그런데 일제 하 개성상인들이 개성삼업조합을 결성하여 상권을 지켜내었음을 주목한 윤선자의 연구와 상해에서 활동한 인삼상인들의 면면을 재구성한 김광재 등의 연구는 기존의 제도사 및 경제사에서 벗어나 문화사적 전환을 꾀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주목할 만하다[4].
중국에서 인삼에 대한 연구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인삼산업의 발전과 정책 을 다루는 경제 경영학적 접근과 인삼 품종의 개량, 재배, 가공 등 농업기술개 발 관련 접근, 그리고 중의학(中醫學) 분야에서 인삼의 효능, 약리와 임상 등 을 다루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분야에서 인 삼연구는 최근에야 활기를 띠기 시작했는데,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인삼진흥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여기서 하얼빈의과대 학 출신으로 중의학의 입장에서 인삼 연구를 진행해 온 쑹청지(宋承吉)를 대 표적 연구자로 꼽을 수 있다. 그는 본초 문헌 중 중국인삼이 가장 먼저 게재 되어있는 『神農本草經』 이 진한시대에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인삼응용사의 기원을 소급하고『本草經集注』와 『唐·新修本草』의 기록에 기대어 고대 중 국의 인삼 생산지역이 ‘상당과 요동’ 지역이었다고 강조하면서 당시의 인삼이 지금의 五加科人蔘이 아닌 ‘黨蔘’이라는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한다.[5].
그런데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역사학에서도 인삼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한 영역은 교역사 분야일 것이다. 18세기 전후 명조(견직물)-조선(인삼)-일본(은)의 삼각무역을 다룬 연구[6,], 명말 후금이 요동지역에서 변강 무역으로 경제력을 확충하고 세력화하던 상황에서의 인삼의 역할[7,], 청대 변강지역의 봉금(封禁)조치와 그에 따른 조선 등 주변 세력과의 갈등 및 영향[8,], 명·청대 인삼에 대한 관리 문제[9,], 청대 서양삼의 유입과 중미무역에 관한 연구[10,] 등이 눈에 띈다. 한편, 한국에서 생산된 김선민의 논문은 청조의 강역인식에 인삼이 끼친 영향을 녹여 낸 주목할 만한 연구이다[11].
동아시아와 비교해 볼 때 서구의 인문사회학계에서 인삼연구는 걸음마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미 1900년을 전후해 미국을 중심으로 인삼에 대한 간략한 개설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학술적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이 인삼재배업자나 미국 내 주요 인삼생산지와 깊은 이해관계를 맺고 있었다[12,]. 인삼 관련 연구와 출판은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다가 1980년대가 되면서 범세계적으로 대체의학과 건강식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다시 부상하기 시작했다[13,]. 하지만 인삼의 효능이나 재배법에 그 관심이 집중되었고, 역사학 분야에서 생산된 소수의 연구는 북미대륙에서의 인삼발견 및 재배의 역사적 추이, 그리고 북미삼의 대중국 수출이라는 주제에 한정되어 있다[14,]. 유럽사 분야에서는 인삼이 더더욱 찾아보기 힘든 주제로, 최근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에서의 인삼에 대한 관심을 다룬 이혜민의 논문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반가운 성과물이다(이혜민, 2016).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를 제외한 지역, 즉 오늘날 인삼제품을 많이 소비하게 된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삼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인삼에 대한 인식은 알기 힘든 상황이다.
인삼은 17세기에 유럽에 소개되었고, 그 순간부터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세계상품(global commodity)’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삼이 서구사회에 알려지던 과정은 계피나 후추, 정향이나 육두구 등 향신료의 도입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서구 식민주의와 더불어 세계로 퍼져나간 설탕, 커피, 담배 등이 한때 ‘만병통치약’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인삼을 둘러싼 후광 역시 흡사했다. 하지만 왜 인삼은 기타 향신료나 기호식품, 약재와 달리 20세기 후반까지도 그 소비층이 동아시아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약리작용 탐구뿐만 아니라 인삼을 둘러싼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재구성하여 범지구적 차원에서 인삼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은 17-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인삼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가를 주목한다. 영국은 세계 인삼교역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18세기 전반기 인삼을 채취하기 시작해 독립과 더불어 수출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서구 국가들 가운데 일차적 관심을 요한다. 한편, 17-18세기를 주목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1800년을 기점으로 영국이 중국과의 인삼교역에서 퇴출되었다는 일반적 인식 때문이다(설혜심, 2015). 둘째, 영국에서 발표된 유일한 인삼 관련 역사학 연구인 애플비(John H. Appleby)의 논문이 바로 17-18세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Appleby, 1983). 1983년 발표된 애플비의 논문은 영국 왕립학회가 인삼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음을 증명한 중요한 업적이지만 왕립학회의 학술적 논의를 중심으로 삼고 있어 당시 영국사회 전반의 인삼인식을 파악하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뿐만 아니라 왕립학회가 창설된 1660년대 이전 시기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고, 왕립학회 회원(FRS, Fellow of the Royal Society)과의 관련성을 지나치게 의식해 크고 작은 오류가 다수 나타난다[15].
애플비의 연구는 소수의 매뉴스크립트를 제외하고 총 24건의 인쇄물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디지털 데이터베이스의 발달로 인해 훨씬 많은 자료에의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글은 오늘날 입수 가능한, 인삼을 다루고 있는 17-18세기의 모든 문헌 200여개-의학논고, 약전, 동인도회사 보고서, 식물서, 지리서, 박물지, 알마냑, 서신, 여행기, 사전, 소설, 시, 광고-를 분석한다. 자료의 성격에 구애받기보다는 내용에 주목하여 근대 초 영국과 미국에서의 인삼에 대한 인식을 크게 네 범주-본초학적 관심, 의료행위, 해외무역, 동양성-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2. 본문
2-1. 본초학(本草學)적 관심
인삼은 17세기 초반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과정을 자세히 기술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 동인도회사가 주고받은 서신을 살펴보면 이미 1611년 영국과 네덜란드 선박들이 인삼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을 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Foster, 1901: 18). 흥미롭게도 그 경쟁이 벌어진 곳은 희망봉이었다. 1615년이 되면 희망봉의 항구에 원주민들이 닌진(ningine)[16,]이라는 뿌리를 들고 와서 팔았고[17], 동인도회사 직원들은 그것을 구리조각과 바꾸기도 했다. 심지어 동인도회사 직원들이 직접 근처 산에 올라가 그 뿌리를 찾으러 다녔는데, 막상 찾고 보니 작고 덜 여문 것들이어서 원주민이 가져온 것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1617년 일본 히라도에 주재하던 동인도회사 직원 콕스(Richard Cocks)는 본부에 서한을 보냈다. 희망봉에서 온 인삼을 받았는데, 너무 말라서 아무런 성분이 남아있지 않고, 일본에서는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며 “한국에서 온 매우 좋다는 인삼뿌리와 함께 보내니 비교해 보라”는 주문을 넣기 위함이었다. 인삼이 일본에서 은과 동일한 가치가 있지만 일반 사람이 구하기에는 너무 귀하고, 그런 이유로 황제는 쓰시마 번주에게 한국과 교역할 독점권을 주었으며, 번주는 인삼뿌리만으로도 일본 황제에게 바치는 조공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콕스는 희망봉의 뿌리도 한국의 인삼과 같은 것이겠지만 채집과 건조과정에서 그 질이 형편없어졌다고 생각했다(Foster, 1901: 17-18).
인삼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는 동아시아를 여행한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나오게 된다. 중국에 20년간 체류했던 포르투갈의 수도사 세메도(Alvarus de Semedo, 1585-1658)는 유럽인 가운데 중국인삼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인물로, 인삼을 요동근처에서 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인삼이 중국인들 사이에 최고의 강장제로 통한다고 소개한다. 이탈리아 수도사인 마르티니(Martinus Martini)가 쓴 「만주족의 중국 침략사」(Bellum Tartaricum)에도 인삼이 나타난다. 영국 왕립학회 기관지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의 창간호는 프랑스 과학자 테브노(Melchisedec Thévenot)가 펴낸 인삼에 관한 보고서를 싣고 있다(Thévenot, 1665-6: 249). 인삼은 1파운드당 은 3파운드를 지불할 정도로 귀한 약재로, 놀라운 원기회복제이자 강장제로 통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670년대가 되면 영국의 과학자들이 인삼을 관찰하고, 실험해 본 기록들이 심심찮게 나타난다(Appleby, 1983: 122-126).
몇몇 관심 있는 이들은 직접 인삼을 중국에서 들여와 수집하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1679년 6월 26일 왕립학회 모임에서는 클렌치(Dr. Andrew Clench)와 렌(Sir Christopher Wren)이 중국종이에 싸인 인삼을 회원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실험결과를 보고하기도 했다(Birch, 1737: 490). 이제 유럽에 보급되기 시작한 식물원과 호기심의 방 등에서는 인삼을 주요 수집물 목록에 올리기 시작한다(Curtis, 1783: 44; Murray, 1799: 241)[18,]. 이는 르네상스 이후 자연탐구에 대한 관심의 증가라는 지적 분위기와,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식물이 주로 의학적인 효능 때문에 큰 환영을 받았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파보르드, 2011: 483-484). 특히 본초학의 발달은 매독과 같은 낯선 전염병을 비롯하여 수많은 역병과 전쟁으로 인해 의료에 관심이 커졌던 17세기 유럽에서 국왕을 비롯한 엘리트 계층의 권력의지와도 연관이 깊다(Flaumenhaft and Flaumenhaft, 1982: 147).
영국 국왕의 주치의이자 유명한 수집가로, 첼시에 약초 재배원을 설립하기도 한 슬로언(Hans Sloane, 1660-1753)은 특히 인삼에 관심이 많았다. 13개가 넘는 인삼이 그의 수집품 목록에 들어있는데, 그 가운데 1692년 경에 채집했다는 일본 인삼의 씨와 잎 등으로 인해 슬로언은 일본인삼 전문가로서 독보적인 입지를 누리기도 했다[19]. 그가 소유한 인삼샘플의 일부는 고위공직자로부터 진귀한 선물로 받은 것이어서, 당시 영국에서도 인삼이 귀한 대접을 받았음을 추측케 한다. 1681년 발간된 「왕립학회 주요 수집품 카탈로그」에는 인삼뿌리(The root Ninzin, corruptly called Gensing)에 이런 설명을 붙여놓았다.
맨드레이크나 기타 뿌리처럼 두 개의 다리로 갈라져 있음. 달콤한 맛, 하지만 이곳에 와서는 쓴 맛이 난다. 가장 낮은 온도에서 달았으나 온도가 높아지면서 쓴맛이 남. 야생으로, 어디서나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만 자란다. 또한 통킹, 중국, 일본에서 널리 사용된다. 간질, 고열과 다른 만성질환, 중증질환에 쓰인다. 단독 혹은 약재와 함께 쓰인다. 매우 값비싼 식물로 은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Grew, 1681: 227).
1713년이 되면 유럽에서 인삼이 알려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문헌이 나타난다[20,]. 프랑스 예수회 수사였던 자르투(Pierre Jartoux, 1668-1720)가 쓴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Jartoux, 1713: 237-247). 자르투는 1709년 강희제의 명을 받고 중국지도를 만들기 위해 만주지방을 여행하던 중 한국과의 국경 근처에서 인삼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인삼이 중국의 저명한 의사들이 칭송하며 거의 모든 약의 처방에 들어가는 것으로, 중국인과 만주인들이 이 뿌리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두는지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서술했다. 스스로도 말에 오르기조차 힘들만큼 피로한 일정 중에 인삼을 복용해 본 결과 큰 효과를 보았으며, 만주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이 차 대신 인삼잎을 우려 마셔본 결과 아주 좋아서 이제 최상급 차보다도 인삼잎차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르투의 문헌은 인삼에 대해 매우 상세한 식물학적 설명을 제공한다. 북위 39-47도, 동경 10-20도 사이에서만 나며, 산속의 그늘진 곳, 수천가지 다른 식물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 개의 잎과 뇌두를 비롯한 뿌리의 형태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마르티니가 쓴 책에서는 인삼이 북경 인근의 산에서 난다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점이다(Jartoux, 1713: 246). 또한 그는 인삼의 꽃을 보지 못했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아주 작은 흰색이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아예 꽃이 없다고 말한다며 궁금해 했다(Jartoux, 1713: 244). 만주사람들은 오직 뿌리만 중히 여기며, 땅에 약 10-15일간 묻어서 보관하거나, 잘 씻어서 표면을 솔로 닦아내고 훈증해 보관한다면서 유럽의 의사들도 인삼의 성분을 정확히 알아서 정확한 양을 처방한다면 큰 혜택을 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스스로는 한 번도 중국에 가 본적이 없지만 예수회 수사들이 보내온 방대한 기록을 수합하여 중국전문가로 통했던 프랑스 예수회 수사 뒤알드(Père Du Halde, 1674-1743)는 유명한 「중국통사」(The General History of China)를 집필했는데(du Halde, 1736), 그 안에 실린 인삼에 대한 정보와 신화는 책의 인기에 업혀 유럽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인삼의 뿌리는 마치 사람처럼 손, 발, 얼굴과 눈도 있고 기운으로 충만하며, 허베이성 산을 최고로 꼽고, 그 다음으로 한국산과 요동산을 알아준다는 것이다. 일본산 인삼도 시중에 나돌지만 하찮게 취급받는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인삼은 황제에게 바치는 중요한 세금이어서 속이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거나 북경에서는 은의 여섯 배 이상의 가격에 팔리기도 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문헌은 종자삼과 맛, 효능, 건조법 및 무려 77가지의 질환에 인삼을 사용하는 용례며 다른 약재와 섞는 법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정보를 제공한다.
한때 캐나다에 머문 바 있었던 자르투는 인삼이 매우 까다로운 자생지를 선택한다며 중국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인삼이 자라는 다른 유일한 지역은 캐나다 정도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내놓은 적이 있다(Jartoux, 1713: 240). 교단의 소식지를 통해 그 내용을 접했던 프랑스 출신 예수회 수사 라피투(Joseph François Lafitau, 1681-1746)는 1716년 몬트리올과 오타와 사이 북위 45.31도 지역에서 비슷한 식물을 발견하게 된다. 1718년 파리에서 발간된 그의 「회고록」(Mémoire)에서 라피투는 이것이 자르투가 언급한 인삼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이로쿼이족(Iroquois) 사이에 이 식물을 부르는 이름이 어린이, 혹은 허벅지를 의미한다면서 중국어로 인삼의 뜻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Lafitau, 1718).
자르투와 라피투의 문헌을 토대로 영국과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인삼의 본초학적 특성에 대해 활발하게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슬로언과 영국의 자연학자 피터 콜린슨(Peter Collinson, 1694-1768)은 한때 영국에서 공부했던 미국의 농장주 윌리엄 버드(William Byrd, 1674-1744)와 서신을 통해 인삼에 대한 많은 정보를 나누었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의 식자층 사이에서 인삼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게 된다. 여기서 버드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인 바트람(John Bartram, 1699-1777)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최초의 식물학자로 일컬어지는 천재 식물학자 바트람은 영국의 조지 3세의 식물학자로 임명되었는가 하면, 영국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엄청나게 많이 영국으로 보냈는데, 여기에는 필라델피아 동부에서 직접 발견한 인삼도 포함되어 있었다(Franklin, 1961: 209-217).
이제 영국의 과학자들은 미국에서 보내 온 인삼을 영국에서 재배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콜린슨은 1740년에 펜실베니아로부터 들여온 인삼을 페컴가든(Peckham Garden)에서 키우고 있었고(Fox, 1919: 197), 1769년 포더길(John Fothergill)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유명한 에섹스의 업톤 가든(Upton Garden)에서 바트람이 보내온 인삼이 아주 잘 자라고 있다고 자랑하기도 한다(Darlington, 1849: 339). 콜린슨과 포더길은 궁극적으로 인삼을 재배하여 교역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옥스퍼드와 에딘버러의 식물원에도 인삼이 재배되고 있었고, 1757년 런던의 플레져 가든(pleasure garden)에서도 ‘현재 꽃피는 식물’의 목록에서 인삼이 나타난다(Miller, 1757: 215). 하지만 메릴랜드로 부터 받은 인삼을 첼시 정원에서 키우던 식물학자 밀러(Philip Miller)는 실패를 맛보았다. 꽃도 피고 씨앗도 완벽했는데, 새싹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3년 동안 묵히며 기다려 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21].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인삼이 중국산과 마찬가지의 효능을 지녔다고 주장했지만 영국인들은 북미산 인삼이 중국산에 비해 효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Payne, 1796: 336). 혹자는 런던에서 구입한 미국산 인삼이 과연 동인도회사가 취급하는 중국산과 같은 효능을 지니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표시했다(Smollett, 1857: 31). “캐나다산 인삼은 색깔, 향기, 투명성뿐만 아니라 함유된 성분과 효능에서도 훨씬 열등하다”는 기록도 있다(Rochon, 1793: 378). 영국 의사 루이스(William Lewis, c.1708-1781)는 미국산 인삼을 난징에서 받은 삼과 비교한 뒤 물질적 차이는 크게 없으나 다만 중국산이 외형적으로 더 색이 엷고 내부는 희다고 말하며, 결국 효능의 차이는 가공과정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가공과정을 거치지 않은 열등한 미국삼이 진짜 인삼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식 인삼건조법에 대한 담론이 팽창하기 시작했다(Lewis, 1769: 393). 그러면서도 “우리는 결코 중국인들처럼 인삼을 가공할 수 없다”는 자조적 발언도 이어졌다(Hill, 1758: 17).
새로운 인삼이 속속 발견되는 바람에 식물학에서 인삼의 자리매김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 박물학의 아버지’라 불리곤 하는 레이(John Ray) 조차도 「식물의 역사」(Historia Plantarum)(1688)에서 인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 채 인삼을 묘사한 바 있고(Ray, 1688: 1338), 캐나다에서 인삼이 발견된 이후 영국과 프랑스 과학자들은 인삼에 세 가지 - 1. 한국과 중국산, 2. 일본산, 3. 캐나다산 - 종류가 있다는 데 동의하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 왕립과학원의 일원이자 퀘벡에 어의로 파견되었던 사라쟁(Michel Sarrazin, 1659-1734)은 캐나다산 인삼을 프랑스 왕립식물원에 보내며 ‘Aralia’라고 이름붙인 바 있다[22,]. 1753년 린네에 의해서 인삼[캐나다산]에 대한 체계적인 최초의 묘사가 이루어졌는데, 그는 이것을 두릅나무과(Araliaceae)의 Panax(만병통치약) genus(속) quinquefolius(다섯 잎)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1780년대가 되면 영국의 식물학 서적에서는 Panax를 1. 잎이 다섯 개인 캐나다 인삼. 2. 잎이 세 개인 버지니아 인삼으로 나누기 시작한다(Abercrombie, 1784: 456; Gordon, Dermer, and Thompson, 1783: 68). 1798년에 발간된 한 백과사전은 Panax Ginseng에 다음과 같은 다섯 종류 있다고 쓰고 있다.
1. Quinquefolium.
2. Trifolium.
3. Fruticosum
4. Arborea
5. Spinosa.
이 가운데 1,2는 북미가 원산지. 1번은 유명한 만주산 인삼과 같다 고 알려진다[23].
이런 과정 끝에 1842년 러시아 식물학자 마이어(Carl Anton Meyer)가 인삼에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면서[24] 진짜 인삼(즉 고려인삼)을 Panax ginseng C. A. Meyer라고 부르며 인삼의 학명이 정리되었다.
이 시기 인삼에 관련된 또 다른 본초학적 논쟁은 ginseng과 ninzin사이의 구별이었다. 많은 문헌이 ninzin을 ginseng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며 동일시하고 있지만, 둘을 구별하려는 노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특히 이 문제에 열을 올린 사람은 힐(John Hill)이었다. 그는 「약물학사」(History of the Materia Medica)(1751)에서 인삼이 그늘진 산속, 위도 39-47도 사이의 지역에서, 만주 뿐 아니라 미국, 한국에서도 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한국산 인삼은 크지만 속이 비어있고, 우리가 언급한 곳들의 것보다는 질이 나쁘다”면서 그 이유가 바로 한국산 인삼이 닌진이라는 다른 뿌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닌진을 다룬 장에서는 닌진이 산형과(umbelliferous)에 속하는 식물이면서도 “모양이나 색깔, 나아가 성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인삼과 별 차이가 없다”는 모순적인 발언을 한다(Hill, 1751: 589-591; Hill, 1759: 25).
하지만 외형적 차이를 강조한 문헌도 있다. “닌진은 큰 뿌리가 장란형이고, 밖은 희끄무레하고 안은 노리끼리하고, 인삼보다 덜 단단하고 덜 쓰다”는 것이다(Millar, 1754: 89). 다른 문헌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둘의 성분의 차이를 논하고 있다. “Ninzin 혹은 Nindsin이 인삼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것은 다른 식물이고, 같은 식으로 건조되고 매우 흡사하지만 약효가 떨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산이나 중국산도 마찬가지다”라고 쓰고 있다(Lewis, 1769: 393). 인삼과 닌진을 구별하는 논의는 특히 약제학 분야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아마도 실제로 인삼을 조제·판매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닌진과 인삼 사이의 혼돈은 “판매자(seller)의 이해관계가 초래한 것”으로, “그 둘이 같아야만 하는 사람들은 약제사들로, [닌진이] 훨씬 싼값에 공급되기 때문”이라는 말은 이 추측을 뒷받침한다(Hill, 1751: 589, 591).
2-2. 의료행위
이 시기 영국에서 인삼이 과연 실제로 의료행위에 사용되었을까? 이미 1680년 익명으로 출간된 한 팸플릿에는 인삼으로 치료에 성공한 사례들이 십여 건이나 나열되어 있다([Simpson], 1680). 요크셔의 헐(Hull)에 살던 이 의사는 당시 선물 받은 인삼 한 꾸러미를 사용하여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랑한다. 오랫동안 고열과 폐종양으로 너무 말라서 ‘완벽한 해골, 뼈만들은 주머니’에 불과했던 마블 씨(Mr. Andrew Marvel, 유명한 시인이자 비평가)에게 붉은 소 우유에 탄 인삼팅크를 매일 아침 먹였더니 어린아이처럼 얼굴에 살이 차오르고 완벽하게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말이다([Simpson], 1680: 3-4). 이 홍보책자는 유명한 과학자 보일(Robert Boyle)도 “인삼이 수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천상에서 보내온 약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로 끝맺고 있다([Simpson], 1680: 7).
매사추세츠에서 활동한 미국의 의사 스턴스(Samuel Stearns, 1741-1810)는 인삼을 만성기침과 폐질환 치료에 자주 사용해 왔는데,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인삼조각이나 가루를 물에 끓여 만든 탕약에 설탕을 섞어서 식자마자 마실 것을 권고한다(Stearns, 1791: 584). 실제로 이 시기 많은 약전(藥典)이나 약품해설서(dispensatory)에서는 인삼을 언급하고 있다(Boerhaave, 1739: 41; Nott, 1794: 41-42; Royal College of Physicians of London, 1796: 29; Brookes, 1773: 42; Buchan, 1797: xxxvi; Elliot, 1791: 12, 78, 91; James, 1764: 164). 아주 간결하게 묘사된 한 예는 다음과 같다.
Panax Quinquefolium. Linn. Ginseng: a small plant growing in Tartary, China, and North America
Part Used: the root
Sens. Prop: Mucilaginous, with sweetness, bitterishness, and some aromatic warmth
Med. Virt: Tonic, obtunding
M. Exhib: Power, Infusion, Extract(Aikin, 1785: 80).
인삼으로 만든 조제약 광고 팸플릿도 출판되었다. ‘앤토니 박사의 아일랜드 알약’이라는 약은 인삼성분으로 만들어져 위장병 치료에 특효약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Devlin, 1790: 1). 어떤 약전에서는 인삼을 약으로 조제할 경우에는 특별히 세 번 우리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Pomet, 1748: 192). 물론 실패사례를 언급하는 문헌들도 있다. 생식기 궤양을 치료하기 위해 독미나리(hemlock)와 인삼으로 만든 탕약을 처방했으나 오히려 궤양이 커진 사례며(Swediauer, 1784: 98-99), 성병감염 성인남성에게 지속적인 인삼치료를 했으나 소용없었다는 보고 등이다(Wallis, 1790: 53-54). 그런데 이런 사례들은 치료 자체의 성패를 떠나 인삼이 실제로 의료행위에 사용되었음을 증명한다.
약전이나 의학논고가 아닌, 소설에서도 인삼을 의료에 사용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던 스몰렛(Tobias Smollett)은 의사이기도 했는데, 그의 피카레스크식 소설 「험프리 클링커의 원정」(The Expedition of Humphry Clinker)에 인삼을 약으로 사용한 사례가 나오고 있다. 마음고생을 하던 화자가 의사가 처방해준 인삼 팅처를 복용한 후 위장이 놀랍도록 편안해졌다는 내용이다(Smollett, 1857: 123).
그런데 인삼이 과연 얼마나 널리, 빈번하게 사용되었는지는 사실 알기 어렵다. 또한 처방을 거치지 않고서 인삼을 사용한 예들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버드는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 사이의 오랜 경계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토지측량에 나섰는데, 힘든 일정을 버티기 위해 걸을 때마다 인삼뿌리를 씹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인삼이 “심지어 못된 마누라를 둔 남자의 마음까지도 회복시켜 줄 만큼” 효능이 있지만 “진실과 공공정신만큼이나 드물게 난다”고 투덜댔다(Byrd, 1901: 211).
그런데 당시 의료인들조차도 인삼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공급이 부족해 구하기 어렵다는 증언들을 귀담아 들을 만하다. 「신약품주해」(The New Dispensatory)의 저자 루이스는 “인삼이 그 엄청난 가치로 인해 [중국에서] 다른 나라로 수출되는 것이 금지되었었지만, 이제 북미에서 발견되어 충분한 양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많은 관심을 가질 만하다”라고 말한다(Lewis, 1782: 146). 같은 맥락에서 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쉽게 처방하지 못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쿨렌(William Cullen)은 단적으로 “인삼은 너무 비싸서 우리가 약으로 쓸 수가 없다”고 기록한다(Cullen, 1789: 161). 시장상황에 따라 가격이 들쭉날쭉한 것도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스몰렛의 소설에는 불과 6개월 사이에 같은 가게에서 파는 인삼 값이 수백 배 차이가 난다며 ‘믿을 놈이 없다’고 불평하는 내용이 나온다(Smollett, 1857: 31). 아래 의학논고는 당시 인삼 처방과 유통상의 또 다른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한 예다.
약재상이 약초를 사두고 오래되면 성분이 다 변해서 효능이 떨어진다……인삼은 매우 큰 원기회복 효능이 있지만, 엄청나게 비싸서 잘 처방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효능을 잃는다. 그래서 우리는 인삼을 재배하는 법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야생상태의 식물이 더 나은지, 재배종이 더 나은지 우리는 알 수 없다(Stillingfleet, 1759: 179-180).
한편, 이 시기 인삼처방과 관련하여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조언이 있다. 첫째는, 아무리 좋다할지라도 과용할 경우 치명적이라는 경고이다. 이것은 1617년 일본에 주재하던 동인도회사 직원의 보고서 때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이다(Foster, 1901: 17-18). 같은 맥락에서 “부자는 매일 아침 아주 적은 양을 먹는다”라는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Rochon, 1793: 379). 또 하나는 젊은이와 다혈질 체질에게는 처방하지 말라는 충고이다(Hill, 1751: 591; Rochon, 1793: 379; Croker et al., 1765). 인삼의 성질 자체가 몸을 따뜻하게 만들기 때문에 허약체질의 노인에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담론과 일맥상통한다.
2-3. 해외무역
이 시기 인삼을 언급한 또 다른 종류의 담론은 무역에 관련된 내용이다. 특히 미국 대륙에서 인삼이 발견된 후 인삼의 해외수출 담론이 폭발적으로 나타난다. 사실 미국삼을 중국에 팔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들은 1720년대 프랑스인 모피장수들이었다(Kalm, 1770: 114). 네덜란드 상인들도 동양으로 인삼을 수출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에 가세해 인디언들을 동원해 캐나다와 미국의 산속을 뒤지게 하였다.
앞서 언급한 미국의 식물학자 바트람과 영국의 포더길은 인삼을 판매할 방법을 본격적으로 강구해 나갔다. 이들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던 콜린슨은 영국 땅에서 재배를 꾀했을 뿐만 아니라 상인집안출신이라는 배경과 국제적 인맥을 동원하여 중국에 미국삼을 팔겠다고 나섰다. 결국 1739년 콜린슨은 중국에 인삼을 보냈고, 바트람으로 하여금 다음 선적을 위해 상품을 잘 준비해 둘 것을 지시했다. 콜린슨이 보기에 미국삼과 중국삼은 몹시 흡사하여 무역이 성사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 보내는 인삼을 “미국산이라고 밝히지 말라”며 이번 거래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다 줄 테니 절대 비밀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Darlington, 1849: 125-127).
바트람은 1743-4년에도 계속 콜린슨에게 인삼을 보냈다. 콜린슨은 이를 중국에 팔아 엄청난 수입을 올린 것으로 나타난다. 중국 인삼상인들은 중국 내 인삼이 워낙 비쌌던 터라 질이 떨어지는 미국산을 터무니없는 가격에도 구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중국인들이 미국산 인삼에 높은 값을 매겼다 해도, 중국산에 비해서 헐값인 것은 분명했다. 1762년 도즐리(Robert Dodsley)는 “중국인은 자신들 인삼만 높이 평가하고 미국에서 난 것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Dodsley, 1762: 155). 미국삼의 품질에는 문제가 분명히 있었고, 이는 유럽인들도 의식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1753년 「젠틀맨스 매거진」(The Gentleman’s Magazine)은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인삼이 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도 향후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기에 채집되고, 중국방식으로 건조하는”기술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논평했다[25].
1747년 매사추세츠의 스톤브리지에서 많은 야생삼이 발견되면서 미국 곳곳에서는 서부의 금광개발과 흡사한 삼찾기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18세기 미국의 지리서, 여행기, 알마냑, 심지어 교과서 등은 매사추세츠, 버지니아, 메릴랜드, 노스캐롤라이나, 펜실베이니아, 버몬트,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등의 지역에서 인삼이 발견된 사실을 특종에 가까운 뉴스로 보도하거나, 인삼을 그 지역의 ‘특산품’이나 대표적인 ‘수출품’으로 등록하기 바빴다(Whitney, 1793: 98; Whitworth, 1776: lii; Smyth, 1784: 190; Burke, 1757: 204; Burnaby, 1775: 21; Morse, 1790: 87; Carey, 1790: 15, 126-128, 295, 301). 삼찾기 열풍은 애팔레치아 서쪽으로 퍼져나갔으며, 그 과정에서 인삼을 채집하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모럴 해저드에 빠지기도 했다. 교회출석을 거부하는가 하면, 인삼을 팔아 번 돈으로 온갖 비행을 저지르곤 했다(Schorger, 1969: 67).
1780년대에는 미국 서부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는 항로를 선택한 영국 상선들이 미국 북서부와 심지어 알래스카에서도 인삼을 채취하여 수출할 가능성을 타진했다(Adams, 1790: 164). 혹자는 “미국에서도 이쪽의 인삼은 동쪽의 것보다 선호되며, 중국에도 더 가깝다. 그래서 유럽의 수출품 중 최고의 인삼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Meares, 1790: lxxi). 하지만 곧 이런 열풍은 무분별한 채취로 이어지고, 인삼의 멸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실제로 인삼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지역들도 많았다. 18세기 중반 캐나다의 상황은 이러했다.
내가 캐나다에 머무는 동안 퀘벡과 몬트리올의 상인들은 프랑스로부터 인삼을 보내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 여름에 유달리 많은 주문이 오고 있다. 따라서 이 뿌리는 가능한 부지런함을 총동원해 채집되었다. 특히 인디언들은 산에 올라가 할 수 있는 만큼 인삼을 다 모아와 몬트리올의 상인에게 팔았다. 이 도시 주변 인디언들이 모두 이 사업에 뛰어들어서 프랑스 농부들은 수확기인데도 단 한명의 인디언도 구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채집하다가 씨가 말라버릴까 걱정이다. 이게 사실인 이유는 과거에는 몬트리올 주변에 이 식물이 참 많이 났지만 어찌나 열성적으로 파냈는지 지금은 한 뿌리도 없고, 그래서 이번 여름 인디언들은 영국 영토 안까지 들어가서 채취하는 실정이다(Kalm, 1770: 116-117).
1786년 마샬(Humphrey Marshall)이 영국의 뱅크스(Joseph Banks)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같은 걱정이 나타난다(Darlington, 1849: 561).
귀하가 요청한 백 파운드 정도의 인삼을 구하는 데는 돈이 많이 든다. 나는 내 조카를 고용해서 이곳[Chester County, 펜실베이니아에서]에서 2백마일 정도 서쪽으로 갔다. 거기서 인삼은 판매용으로 파내졌거나 돼지들이 너무 많이 파먹어서 이제 사람이 사는 곳에는 거의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이제 몇 년 안에 완전히 사라질 듯하다.
다량채취와 대량수출이 불러온 또 다른 문제는 가격하락이었다. 1752년 경 프랑스계 캐나다 상인들은 100,000달러어치의 인삼을 중국에 팔고 있었는데. 공급과다로 인해 1754년에는 수입이 6,500달러로 급락했다.
프랑스 상인들은 처음 이 무역을 시작했을 때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곧 인삼을 중국에 계속 보내면서 가격이 폭락했고, 또한 프랑스와 캐나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기대하며 이 행위를 지속하고 있다. 1748년 1파운드의 인삼은 6프랑에 팔렸다(Francs, or Livres, at Quebec). 하지만 여기서 보통 가격은 100 Sols, 혹은 5 Livres이다(Kalm, 1770: 116-117).
1764년 콜린슨은 북미인들의 탐욕으로 인해 중국과의 인삼교역이 손해를 입고 있다면서 가격하락을 초래한 미국과 캐나다의 과도한 수출을 비난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인삼 찾기 광풍(a rage after Ginseng)’에 대해 논하며 “내가 광풍이라고 부르는 것이, 모든 산과 들판이 이 귀한 뿌리를 찾느라 샅샅이 파헤쳐지고, 큰 통들에 꽉꽉 채워 영국으로 수입되고, 중국의 시장은 이 뿌리로 공급과잉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인삼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던 이유는 “중국인들에 의해 예술적으로 숨겨져 공급되며, 위대한 사람들에게만 은밀하게 판매되어온 탓이었는데, 이제 너무 많아지다 보니 사기라는 것이 밝혀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사태를 초래한 미국인들을 ‘등신(loser)’이라고 불렀다(Dillwyn, 1843: 37).
미국독립 후 인삼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독립국가 미국이 내세우는 특산품으로 자리 잡은 것은 물론, 이들을 수출하기 위한 새로운 교역거점을 확보해 나갔던 것이다. 이제 “희망봉, 모리셔스 섬, 봄베이, 바타비아, 광둥은 우리의 쇠고기, 돼지고기, 베이컨, 버터, 치즈, 목재, 인삼을 받기 위해 최근 문을 활짝 열었다”고 선전했다(Morse, 1792: 182). 반면 미국삼의 수출에 타격을 받은 쪽은 영국의 동인도회사였다. 인삼은 동인도회사의 주요 수출품 가운데 하나였고(McCalman, 1787: 67)[26,], 특히 미국독립 전에는 사무역(private trade)으로 거래되면서 엄청난 수익을 올렸던 품목이었다(East India Company, 1793: 25, 32). 그런데 과거 충분한 양을 공급하지 못했던 인삼이 미국 독립이후 중국시장에 너무 많이 보내지자 결국 중국에 무역의 주도권을 내주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East India Company, 1793: 32). 동인도회사의 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시장만큼 변덕스런 곳이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들이 지닌 편견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가장 강력한 요소다. 인삼만큼 이것을 놀랍게 증명할 품목(article)은 없을 것이다. 평상시보다 많은 양이 공급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리고 이전부터 거래한 사람이 아닌 사람이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이 품목은 팔 수 없는 것이 된다. 위원회는 이제 미국삼이 그 후 중국에서 결코 팔리지 않을 것임을 믿어도 된다(East India Company, 1793: 34).
그런데 미국 내에서 인삼은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되었으니, 다름 아닌 차와 관련된 것이었다. 18세기 미국-중국 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은 차였는데, 차를 동인도회사가 독점하여 공급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심각한 무역격차가 발생했다(Coxe, 1791: 5, 60). 독자적으로 중국에 갖다 팔 물건을 고심하던 미국인들은 인삼을 통해 국제교역에 뛰어들어보려는 아이디어를 낸다(Wang, 2011: 114). 이 상황을 아마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 글은 필라델피아의 경제학자 캐리(Mathew Carey, 1760-1839)의 논설일 것이다. 그는 동아시아 교역을 독점하는 영국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뒤, “미국인들에게는 차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전제한다(Carey, 1790: 126). 그런데 미국인은 자기 땅에서 나는 ‘쓸모없는 품목들’을 이용해 ‘이 우아한 사치’를 즐길 수 있는 엄청난 이점이 있다며 중국에 인삼을 팔아 더 많은 이익을 취할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7]. 드디어 1784년 독립국가 미국의 최초의 상선 「중국황후」(Empress of China)호가 성공적으로 중국 광둥에 닻을 내렸고 미국산 인삼, 가죽, 모피를 팔고 중국 상품을 수입하여 1,500%에 달하는 수익을 내었다. 인삼은 당시 전체 선적의 60%를 차지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담론과 더불어 다른 담론들도 나타났다. 즉, 인삼이 미국에서 발견되었듯이 차 역시 미국에서 발견되거나 재배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중국 북경 동쪽이 원산지인 인삼은 세계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지만 미국대륙에서 자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위도상 같은 위치에 놓인 지역들 가운데서도 토양이나 생태 측면에서 중국과 가장 흡사한 곳이 미국이지 않겠느냐는 나름 합리적인 추론이었다(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771: v; Carey, 1787: 177).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의 차가 인체에 몹시 해롭고, 그것을 미국에서 나는 인삼으로 만든 차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삼차는 중국인이 차와 같은 방식으로 잎과 뿌리를 이용해 만드는 음료라는 유비적 시각, 어차피 똑같은 차인데 다만 적게 사용할 수 있어 좋다는 경제적 관점, 나아가 바탕에 깔려 있던 ‘우리 것’이라는 배타적 민족주의 수사가 표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Carver, 1779: 4-5). 사실 중국인들도 차보다는 인삼차를 더 좋아한다면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서서히 독살하는 차’의 폐해를 알면서도 외국에 갖다 팔기 위해 멋진 이름들을 붙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Adair, 1775: 361-363).
1786년 벨칭젠(Count Belchingen)과 코프(A. Cope)라는 두 의사가 집필한 「인삼차의 장점과 특성에 관하여」(Essay on the Virtue and Properties of the Ginseng Tea)는 대서양 양안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에세이는 차의 부작용에 따른 치명적인 사례들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한편, 이를 대체할 인삼차는 모든 허약함을 치료할 강력한 치료제라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인삼차는 오랜 기간 항해하는 선원들의 괴혈병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예방책이므로 널리 사용해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한다(Belchingen and Cope, 1786: 8). 이들이 보기에 인삼차는 “신의 섭리가 가장 호의적으로 발현된 것”이었다(Belchingen and Cope, 1786: 6). 같은 맥락에서 미국의 한 의사는 차로 인해 건강을 망친 환자들에게 인삼을 이용한 관장법으로 건강을 되찾아주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자신뿐만 다른 여러 의사들이 이 방식을 사용하고 있고, 큰 효과를 보았다고 말한다(Adair, 1775: 362).
사실 차의 폐해와 차를 대치할 인삼에 대한 관심은 미국과 영국에서 공히 나타난 현상이었다(Carver, 1779: 4-5). 저명한 의사들은 차를 상용하는 것이 ‘매일 고통 받는 해악’을 끼치며 연간 1인당 차와 설탕의 소비에 드는 돈이 빵값의 1/2에 달한다고 주장하며(College of Physicians of London, 1775: 9-20), 차를 끊고, 인삼차를 마시면서 정상생활을 찾게 된 사례들을 나열했다.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향사(鄕士) 에드워드 몰튼의 딸 해리어트 몰튼양은 지속적으로 울고 웃는 히스테리에 시달리고 목이 붓고 복부통증이 계속되었으며 극렬한 두통과 시력감퇴, 이급후중(裏急後重)에 시달렸다. 그런데 인삼차 한 가지만으로도 행복하게 건강을 되찾았다.
증인
Edward Moulton, Esq.
Wm, Henry Winsor, Esq.
Ed. Norton Hayes, Esq.
Geo. Henry Duncore, Esq(College of Physicians of London, 1775: 26).
2-4. 동양성
인삼을 언급하는 문헌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은 ‘중국에서 엄청나게 높이 평가되는 인삼’이라는 말이다. 이는 미국에서 인삼이 발견된 후 미국인들 사이에서 자랑스러운 국산품으로 홍보되고, 수출하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머리말처럼 붙는 수사였다. 이것은 얼핏 원산지를 예우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인삼의 효능을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중국의 권위에 기대어 설파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삼을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인 ‘중국’이라는 이방의 영역에 묶어두는 것일 수 있다.
중국, 혹은 동아시아라는 영역은 유럽 사람들의 세계와는 다른 기준과 작동원리를 가진 곳이다. 사실 인삼을 먹고 큰 효험을 보았다는 기록조차도 말미에는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효과가 크지 않고 온건한 효과를 보인다’는 내용이 붙어서 나타난다(Woodville, 1792: 272; Quincy, 1782: 61). “인삼은 섬세한 성질이 지닌 유약함 때문에 약(medicine)의 자리에 놓을 수 없다”는 단호한 발언도 있다(Cullen, 1772: 276). ‘만병통치약’이라고 하는데 그런 명칭에 비해서는 효능이 낮고, 인삼은 본질적으로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강장제’에 가깝다는 말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빈번하게 나타났다(Brookes, 1773: 42; Munro, 1788: 119; Cullen, 1789: 161). 유럽에 널리 읽혔던 뒤알드의 「중국통사」가 인삼이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을 77가지나 나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영국의 의학담론에서는 인삼을 가지고 가장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을 ‘발작, 현기증, 신경질환’ 세 가지로 제한하곤 한다(Croker et al., 1765). 심지어 19세기 초가 되면 “인삼은 만주, 중국인에게 지나치게 극찬 받지만 유럽 의사들에게는 당연히 별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것은 불필요한 품목이다”라는 서술까지 약전에 등장했다(Pearson, 1802: 125).
그런데, 인삼을 두고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예외적 질환이 있었으니, 바로 성기능 장애다. 버드는 찰스 2세와 루이 14세가 시암의 대사들이 바친 인삼을 먹고 효과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그런데 자신이 보기에 인삼이 정력제, 혹은 최음제적 성격을 갖고 있지는 않다면서 바다를 건너오면서 온갖 효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Byrd, 1966: 292). 힐의 「약물학사」는 인삼을 “동양에서는 여자를 너무 밝힌 나머지 발기부전이 된 남자를 회복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언급한다(Hill, 1751: 591). 사실 인삼의 정력제적 성격은 당시 상당히 널리 퍼져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핸버리(William Hanbury)의 원예학서조차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핑계로 인삼을 “부정한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Hanbury, 1770: 690).
하지만 많은 다른 문헌들은 좀 더 진지하게 그 효과를 부정한다.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자로 흄(David Hume)의 주치의였던 쿨렌(William Cullen, 1710-1790)은 “인삼이 엄청난 정력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설은 빈약하거나, 아니 실제로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Cullen, 1772: 276)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알고 지내는 중년의 어떤 신사는 몇 년 동안 날마다 이 뿌리를 상당히 많이 씹었는데도 생식기능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증언한다(Cullen, 1789: 161). 이런 담론은 종종 ‘만병통치약이라는 인삼이 유럽 사람들에 의해 그저 평범한 뿌리임이 밝혀졌다’로 이어지며 중국 사람들이 말이나 판단력, 혹은 문화를 믿을 수 없다는 평가로 이어진다(Bankes, Blake, and Cook, 1790: 221; Dwight, 1791: 13; Hanbury, 1770: 358). 스코틀랜드 역사가 거쓰리(William Guthrie)는 인삼이 유럽에 들어온 후 치료효과가 미미했다며 “이 사례만으로도 우리는 중국인들이 쓴 기록을 읽을 때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지 잘 알 수 있다”고 말했다(Guthrie, 1792: 691).
그런데 이런 평가가 본초학이나 의학의 영역을 넘어, 일상생활이나 지식의 영역에서 일종의 메타포로 쓰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인삼’은 때때로 특정 문화권에서 엄청나게 칭송받는 귀중한 물건을 의미하거나[28,], 그 물건을 통해 단기간에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사례로 언급되었다(Elibank, 1758: 28; [Goldsmith], 1762: 96-97). 하지만 동시에 다른 문화권에서 들어 온 물건에 덧입혀진 상상적 효능(Anderson, 1802: 143), 혹은 별것 아닌데 지나치게 젠체하는 이름을 붙인 경우를 의미하기도 했다(Huxham, 1767: 241; Salmon, 1739: 20). 그 이면에는 중국인들을 허풍선이, 혹은 자신들이 최고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객관성을 잃은 사람들로 멸시하는 시선이 깔려있다.
미국삼을 중국에 보내면서 바트람은 중국인들을 “존 불(John Bull-영국인을 지칭함)의 머리와는 달리 자기들 것만 최고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인간들”이라고 폄하한다(Darlington, 1849: 125). 「철학회보」에서는 “인삼을 파는 중국의 약제사는 유럽 연금술사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금을 만들어 줄뿐만 아니라 영생을 준다고 약속하는 이들이다”고 비꼬는 논설도 나타났다[29,]. 아일랜드의 소설가 존스톤(Charles Johnstone, c. 1719–1800)은 “영생을 준다는 인삼의 효능 때문에 중국 역사가 세상의 역사보다 긴 5만년을 지속해 온 것이 아닌가?”라는 냉소적인 대사를 쓰기도 했다(Johnstone, 1781: 167). 동아시아에서 인삼이 최고의 명약으로 대접받는 이유란 그곳의 의학이 매우 낙후되었기 때문에 인삼과 같은 약초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나름의 합리적인 가설도 등장한다(Mickle, 1776: 469). 스몰렛은 “일본의 의학은 너무 낙후된 나머지 특정한 종류의 약수나 약초에 의지하는데, 특히 중국에서 온 인삼이 그렇다”고 말한다(Smollett, 1769: 15). 스몰렛 본인은 정작 유럽 구석구석을 돌며 약수(광천수)를 찾아다니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비록 의학은 낙후되었을지 모르지만, 중국인들은 매우 영리한 사기꾼으로 묘사된다. 오래된 뿌리는 뇌두가 말라 상품성이 떨어지므로 중국의 심마니들은 미리 옹이를 잘라내는 예방책을 쓴다던가, 벌레가 갉아먹은 인삼뿌리를 노란색 가루로 메우는데 그 작업이 가히 예술이라거나, 무게를 늘이기 위해 뿌리 안에 납 조각을 넣는 일이 빈번하니 주의해야 한다는 기록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Rochon, 1793: 378; Hill, 1751: 589; Hill, 1759: 25; Stearns, 1791: 45; Croker et al., 1765). 또한 상당수의 문헌이 자르투가 묘사한 중국에서의 인삼을 채집과정을 싣고 있는데,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된 그 광경은 엄청난 동양적 전제성(專制性)을 담지하고 있다.
1709년 황제는 만주족에게 인삼을 채취해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 사람이 2온스를 황제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은으로 바꿔준다. 계산해 보니 황제는 이번 해만 2만 파운드어치의 인삼을 소유하게 되는데, 그가 지불하는 돈은 아마 시세의 1/4정도 될 것이다……이 채취과정에 동원된 이들은 구역을 나누어 직선으로 전진하면서 인삼을 캔다. 한 부대는 100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0명씩 줄지어 각자 거리를 두고 걸어가면서 산을 뒤지는 형식이다…… 이 불쌍한 사람들은 이 탐색에서 너무 지쳐있다. 텐트도, 이부자리도 없이 나무 밑에서 낙엽을 덮고 자고, 무거운 짐을 메고 산을 기어오르며, 먹을 것도 각자 해결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6개월 동안 일만 명이 동원된다[30].
1783년 인삼이 대중에게 회자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1783년 3월 리버풀에서 출발해 중국으로 향하던 「제국의 동인도인」(Imperial East Indiaman)호가 아이리시해의 더블린 만 근처에서 좌초한 것이다. 이 배에는 상당량의 은과 납이 실려 있었다. 에딘버러 출신의 엔지니어이자 잠수부인 스팰딩(Charles Spalding, 1738–1783)은 배 안의 화물을 건지기 위해 선주와 계약을 맺고 사고현장에 도착했다. 6월 1일 스팰딩은 조카와 함께 자신이 개조한 다이빙 벨을 타고 42피트 해저로 세 차례나 잠수하여 납 등의 화물을 건져 올렸다. 하지만 다음날 잠수를 시작한 지 1시간 15분이 되어도 신호가 없자 다이빙 벨은 끌어올려졌고, 두 사람은 그 안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두 사람의 장례식은 사고 후 7일째가 된 6월 8일에야 치러졌다. 시신의 색도 변하지 않고 모습이 너무 멀쩡했기 때문에 장례가 늦춰졌다는 보고도 있다. 그런데 이전에 이 배에 접근했던 잠수부들은 배 근처에서 매우 끔찍한 냄새가 났다며 그것이 화물 가운데 하나였던 인삼이 썩어서 나는 악취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안은 신문에 보도되며 큰 관심을 끌었는가 하면[31,], 영국 내 과학자들 사이에 회자되며 왕립학회에서도 두 차례나 논의될 정도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인삼은 향기롭고 소금물에서 쉬 썩지 않기 때문에 인삼이 사인이 아닐 것이라는 항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배 안의 시신들이 부패하면서 생긴 독한 악취, 혹은 다량 적재하고 있던 인삼의 부패로 인한 독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검시재판이 열렸지만 결국 두 잠수부의 사인은 정확히 밝혀낼 수 없었다. 산소통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가능성, 시그널 로프가 꼬여 있었을 것이라는 등 사고원인을 둘러싼 추측이 난무했지만 결국 인삼의 악취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우세했고, 오늘날까지도 ‘기이한 약초’는 비극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Bevan, 2005).
3. 결어
인삼은 흔히 동아시아의 전유물로 생각되지만 17세기 유럽에 전해진 후 곧 세계상품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인삼을 둘러싼 후광과 엄청난 이윤은 영국과 미국에 인삼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담론이 생산되었다. 실제로 의료에 투입되기도 했던 ‘중국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이 뿌리’는 본초학적 관심의 대상으로, 해외무역에서 중요한 품목으로, 나아가 무역적자를 해소할 수 있는 애국상품으로 논의되고, 분석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삼은 동아시아에 대한 환상과 편견을 만들어 낸 주제이자 메타포였다.
이 시기 인삼을 둘러싼 담론은 ‘신비한 동양의 만병통치약’과 근대 서양의학에 포섭되지 않는 ‘불가해한’효능 사이의 길항관계를 보여준다. 그 안에는 가공과 같은 기술적 차원에서 중국인에 결코 범접할 수 없었던 서구인의 열등감, 해외에 내다 팔기에 급급해 내수화는 요원했던 상황, 정량을 결코 도출해 낼 수 없었던 ‘표준화 중심적’인 서양의학의 한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한계는 거꾸로 제국주의적 시선으로 포장되어 자국산 물건의 우수성은 고양하면서도 스스로가 그것과 똑같다고 주장하는 타국산 물건에 문화적 낙후성을 부여하는 모순으로 나타난다. 그 모순은 비단 인삼만이 아닌, 비서구를 원산지로 갖고 있는 수많은 사물이 겪어온, 혹은 겪고 있는 부당한 경험일 수 있다.
그런 부당한 시선은 단순히 물건에 그치지 않고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과 공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식의 지형에서 끊임없이 자와 타를 구별해 낸다. 그리고 그런 구별 짓기의 심성은 이른바 ‘객관적인 실험결과’로 쉽게 교정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다. 오늘날 거센 세계화의 조류 속에서 제대로 균형 잡힌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인삼과 같은 물건의 ‘사회적 삶’을 ‘약리작용’ 등의 ‘현재적, 상업적 효과’를 넘어 인문사회학, 특히 세계사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Notes
현재 널리 통용되는 인삼은 크게 아시아인삼(Panax ginseng)과 미국과 캐나다 인삼(Panax quinquefolius)이며, 주요 활성성분으로 사포닌(saponin) 또는 진세노사이드(ginsenosides)라고 불리는 복합 탄수화물(알코올 또는 페놀과 당의 복합체)의 포함여부로 특징지어진다. 인삼 약효의 주성분으로 알려진 사포닌 배당체의 작용에 대한 연구와 인삼의 생체단백질 및 DNA 합성촉진작용·항암작용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주로 한국,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연구가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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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나 출처 등 표기상의 오류도 많지만 사실관계의 오류도 많다. 한 예로 왕립학회 회원 로버트 위티(Robert Wittie)의 책이라고 소개한 Some Observations Made Upon the Root called Nean, or Ninsing, imported from the East-Indies (London, 1680)는 요크셔에서 의료행위를 둘러싸고 위티와 갈등을 빚었던 라이벌 의사 윌리엄 심슨(William Simpson)의 글로 보아야 한다. 위티와 심슨의 갈등은 설혜심, 『온천의 문화사』 (서울: 한길사, 2001), pp. 153-156을 참조하라.
Ninzin, ningine, ninsi 등은 17-18세기 인삼을 부르는 또 다른 말이었다.
흔히 ‘kanna’라고도 불리던 이 뿌리를 두고 많은 문헌들은 이것이 중국으로부터 온 인삼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실제로 기운을 북돋우는 놀라운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으며, 원주민들 사이에도 아주 귀한 대접을 받았다. John Payne, Universal Geography Formed into a New and Entire System, 2 vols. (London, 1791), vol. 1, 368; Thomas Salmon, Modern History: or, the Present State of All Nations vol. 27 (London, 1735), p.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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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s of the Missionary Jesuits (Paris, 1713). 1713년 『철학회보』는 자르투의 보고서 가운데 인삼에 관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실음으로써 영국 과학자들의 인삼에 관한 관심을 증명했다.
Anon., Encyclopaedia; or,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and Miscellaneous Literature vol. 8 (Philadelphia, 1798), pp. 689-690.
Anon., Encyclopaedia, pp. 689-690 [s. v. “ginseng”].
Panax quinquefoliate는 북아메리카에서 자라고, Panax trifoliate 는 북미와 캐나다에서 발견되고, 진짜 인삼은 헤이룽 강 중간, 동쪽으로는 사할린 섬과 일본, 남쪽으로는 한국 남부와 중국의 산시성과 허베이 성에 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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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는 1786년 1800피컬(picul, 약 60.48 킬로그램)의 인삼이 중국에서 팔리고, 그 가운데 1/5가 미국선박에 의해 운송되었다며, 계속 공급량이 증가함에도 판매가 지속된다는 사실은 중국에 언제나 인삼에 대한 충분한 수요가 있고, 미국삼이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Mathew Carey, ed., The American Museum, or, Universal Magazine, vol. 7 (Philadelphia, 1790), pp. 126-127 [Remarks on the commerce of America with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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