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사랑』과 일제시대 근대병원의 역사적 기록*

YI Kwang Su’s Love and history records of modern hospital und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16;25(3):407-444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16 December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16.25.407
**Dasan University College, Ajou University, Suwon, KOREA
이병훈
**아주대학교 다산학부대학
*이 논문은 2015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2015-31-0683)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NRF-2015-31-0683)
Received 2016 September 30; Revised 2016 October 15; Accepted 2016 November 15.

Abstract

This article aims to evaluate and analyze the description of the modern hospital as history record, which appeared in YI Kwang Su’s novel Love. This novel has mentioned in detail western style clinic, Bukgando Catholic hospital, tuberculosis sanitarium as its main space. Modern hospitals are depicted in the novel has a great significance in historical aspect as well as in literary aspect. The most data on modern hospital is laws, statistics and newspaper archives. These materials are a great help to understand the history and status of the modern hospital. Literary description here is important materials, that specific to reconstruct the appearance of the modern hospital at that time. Literary representations infuse life into the history record. In this regard, Love has special meaning in the history of Korean modern literature.

Before anything else, doctor AN Bin’s clinic as a first space of the novel vividly shows the reality of the Western style clinic and a general practitioner under the colonial period. The establishment of the hospital was based on 「Rules on private hospital」 declar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in 1919. According to this Rules, a private clinic’s founder had to submit the documents to the director of police affairs, in which all the details were written. It included name of hospital, site location and size, floor plan of a nearby building, each size of patient’s rooms, number of steps and emergency exit, bath, toilet, disinfecting room. AN Bin’s clinic was a private hospital with the requirements in the rules. The descriptions of this clinic re-created real situation of private hospitals, specifically scale of hospital, interior space, conditions of patient’s room at the time.

The second modern hospital in the novel is Bukgando Catholic hospital. There is a lot more materials on medical activity and hospital of protestant churches than we thought. But we do not have a lot of information on catholic church’s medical activities and hospital. In this respect, Bukgando Catholic hospital in Love has a great value as historical material. The medical activity of catholic churches was weak than protestant’s one und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ut there were catholic church’s medical activities and hospitals. The catholic church’s professional medical activities are mainly deployed since the 1930s in earnest, especially Bukgando Catholic hospital played an important role. The catholic hospital in this novel is valuable material to understand medical activities of catholic church.

Third form of the modern hospital described in the Love is tuberculosis sanitarium. WADA Tomomi maintained that the model of Bukhan sanitarium was Kyeongseong sanitarium, that was established by the seventh-day adventist in 1936. She thinks, that the adventist church’s treatment is similar to Bukhan sanitarium’s. The therapy of the adventist church, however, was common from tuberculosis treatment at the time and AN Bin was not adventist. And WADA Tomomi said that ‘ozone’ therapy of Bukhan sanitarium came from Kyeongseong sanitarium. But we can find this therapy in Haeju sanitarium. In this respect, AN Bin’s sanitarium is similar to Haeju sanitarium. YI Kwang Su had not modeled his Bukhan sanitarium on certain sanitarium. He had integrated the materials on sanitarium and envisioned Bukhan sanitarium. Here Haeju sanitarium played important role than Kyeongseong sanitarium.

In conclusion, Love has a special meaning as an important historical material, that restore and understand the history of the modern hospital. Literature is worth as a record of the society. In particular, novel infuses human breath into the history record, as if we can see the motion picture.

1. 들어가는 말

이 논문의 목적은 이광수의 장편소설 『사랑』에 나타난 근대병원의 모습들을 역사적 기록으로 평가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소설의 주요 공간으로서 서양식 의원, 북간도 천주교 병원, 결핵요양원 등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소설 속에 묘사된 근대병원은 문학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적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근대병원에 관한 자료들은 법령이나 통계자료, 신문자료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 자료들은 근대병원의 현황과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 자료만으로는 당시 근대병원의 실제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생하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문학적 묘사는 당시 근대병원의 구체적인 모습을 재구성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푸코가 지적하고 있듯이 의료공간은 근대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표상 중 하나이다[1,].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서구적인 의료공간의 등장이 근대화의 지표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기에 근대소설의 공간으로서 서양식 근대병원의 의미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한국 근대소설사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제까지 『사랑』을 근대병원에 관한 자료로 평가하고 분석한 연구는 없다. 그것은 이 작품이 역사적 사료가 아니라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도 엄연히 시대의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사랑』 속에 가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면 문학작품을 역사적 기록으로 평가하고 분석하는 연구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2]. 그럼 이 주제에 관한 연구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랑』에 나오는 주요 무대인 병원을 언급한 연구로는 먼저 김경민의 것을 들 수 있다. 김경민은 병원이 사랑과 연애가 실제로 진행되는 현실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그는 『사랑』에 나타난 연애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근거로 연애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시공간인 병원이 비현실적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안빈과 순옥이 주로 활동하는 병원과 안빈의 집, 허영에게서 피를 뽑아내기 위해 갔던 인천과 옥남의 요양차 갔던 원산 바닷가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시간의 추이도 물론 나타난다. 그러나 안빈과 순옥 사이의 관계 형성과 지속을 위한 공간과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아니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이 둘이 주로 활동하는 병원은 어디까지나 안빈의 연구와 학문을 위한 공적 공간일 뿐 두 사람의 사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행위는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다.”(김경민, 2007:118쪽) 다시 말해 그는 병원을 사랑과 연애가 실현되는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김경민의 연구는 『사랑』에 나타난 병원을 연구하는 하나의 문제의식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병원들의 역사적 의미와 그것의 문학적 의미를 설명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사랑』에 나오는 병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는 와다 토모미(和田とも美)의 견해를 들 수 있다. 와다 토모미는 다양한 과학적 지식과 진화론, 양육을 통한 사회개량 등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을 ‘사이언스 로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와다 토모미, 2014: 355) 그녀는 이광수의 사랑이라는 주제가 작품에 나오는 의료공간 중 하나인 결핵요양원을 통해 잘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와다 토모미는 우선 이광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 “이광수에게 사랑이란 한 쌍의 남녀와 그 연적이라는 폐쇄적인 인물 관계 속에서만이 완성되는 닫힌 세계가 아니다. 배우자를 골라 다음 세대를 생산한다는 목적으로 아득한 미래에까지 이어지는 열린 세계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구제라는 과제는 다음 세대가 수행해야 할 몫이다. 배우자 선택은 이 전제 위에 실행되어야 하고, 그때 발현되는 감정을 이광수는 사랑이라고 부른다.”(와다 토모미, 2014: 364-365) 그녀는 이광수의 사랑에 대한 사상이 에른스트 헥켈(Ernst Haeckel, 1834-1919)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헤켈에 의하면 진화는 오로지 하나의 높은 곳을 지향한다. 이로 인해 모든 생물의 생식욕은 언젠가는 문화적 생식으로 진화하게 되는데, “혈연과 성행위와 무관하게 형성된 소집단을 성장 환경으로 삼아 차세대의 아이들이 양육되는”(와다 토모미, 2014: 402) 결핵 요양원이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육체적 사랑을 초월한 인류애가 결핵 요양원이 지향하는 세계의 기본이념을 구성하는 셈이다. 하지만 와다 토모미의 연구는 『사랑』에 나오는 의료공간 중 결핵요양원의 의미만을 해석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 『사랑』에는 결핵요양원 외에 안빈의 개인병원, 원산 요양원, 북간도 천주교 병원 등이 차례로 나온다. 이중에서 원산 요양원을 의료공간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다른 의료공간은 결핵요양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의 의료공간은 작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공간으로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사랑』에 나오는 근대병원을 당시 기록들과 비교하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2. 『사랑』에 나타난 근대병원의 역사

1) 일제시대 「의사규칙」, 「사립병원취체규칙」과 안빈의 의원

『사랑』은 1938년에 박문서관(博文書舘)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장편소설은 이광수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자하문 밖 산장에 요양 차 기거하면서 쓴 것으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사랑』에 나오는 병원들은 일제시대 의료제도 및 의료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934년 12월의 조선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총독부에서 세운 국·공립 병원은 51개였고 개인병원은 86개, 기독교 병원은 24개였다...... 1935년 10월의 총독부 발표에 의하면 한국에는 2,300명의 의사들이 있었는데, 이는 인구 10,000명당 의사 1명꼴이었다.”(이만열, 2003: 534-535) 1937년에 일제는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식민지 조선을 병참기지로 활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의료환경은 악화되었고, 조선인 의사들의 지위도 크게 위협받았다. 물론 『사랑』에는 이런 시대적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바로 이점이 춘원의 친일행적과 무관하지 않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병원들은 조선총독부가 반포한 의사 및 병원제도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럼 이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조선총독부는 1913년 11월 15일 조선총독부령 제100호로 「의사규칙」을 반포했다. 이 규칙은 의사에 대한 규정과 함께 면허의 신청, 발급, 폐업 등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과 의사의 준수사항, 금지사항 등이 총 22개 조문과 부칙에 걸쳐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醫師規則, 1913. 11. 15) 이 규칙에 따르면 조선총독이 지정한 의학교를 졸업한 자나 혹은 조선총독이 정한 의사시험에 합격한 자에 대해 의사면허를 부여하며, 또 외국의 의학교를 졸업한 자나 외국인에 대해서도 그에 상응하는 능력과 경력이 인정되면 면허를 부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의사시험에 관한 규정은 의사규정이 반포된 다음해인 1914년에 제정되었는데 이 규칙에서는 의학교를 졸업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정식으로 의학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5년 이상의 경험이 있으면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의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응시자격 부여는 당시 일본을 비롯하여 의사면허시험을 실시하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느슨한 규정이었다.”(여인석, 2015: 124)[3,] 그런데 흥미롭게도 위의 규칙과 규정은 『사랑』의 역사적 배경과 인물들의 성장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여주인공 순옥은 이런 제도 때문에 의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여자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있다가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며 간호부 시험을 쳐서 안빈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재직한다.(이광수, 10, 1963: 24-25)[4,] 그리고 병원에서의 간호사 경력을 인정받아 의사시험에 응시하고 합격하여 결국 정식 의사가 된다. “이는 식민지적 상황에서 특수하게 일어난 것으로 의학교육에 소요되는 많은 비용을 총독부가 부담하지 않고 손쉽게 의사를 양성하는 방안으로 채택된 것이었다.”(박윤재, 2003: 202) 그런데 『사랑』에는 의사시험규칙과는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 연출된다. 순옥이 시험을 봐서 의사가 되겠다며 오빠 영옥과 의논하는 장면에서 둘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 “내가 안 선생 병원에 사년 있었으니깐-몇 달 못 차긴 하지만-시험칠 수 있지오?”

  • “치를 수 있기야 하지. 그렇지만 너 언제 의학 공부했니?”(311)

위 인용문은 순옥이 안빈의 의원에서 간호사로서 4년 남짓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5년 이상 의술을 수련한 자에게 부여되었던 당시 의사시험 자격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옥은 어떻게 의사시험을 보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은 의사시험규칙의 자격조항이 그 후에 완화되었을 가능성이다. 이 시기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를 살펴보면 의사시험규칙은 몇 차례에 걸쳐 개정된다. 하지만 그 개정안은 5년 이상의 경험을 규정한 조항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이 자격규정은 1914년 이후 실시된 의사시험에 줄곧 적용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가설은 규칙과 실제 현실 사이의 간극이 있었을 가능성이다. 자격조건 조항이 개정되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거기에 준하는 경력을 인정받았을 개연성이 있다. 이렇게 가정하고 보면 순옥의 말은 당시 이 자격 조항이 규칙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추측이긴 하지만 안빈은 순옥의 의술 수련을 충분하다고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문서에 서명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정은 식민지 조선에서 자격을 갖춘 의료인들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양성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는 현실에 의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의사시험 자격요건을 현실적으로 지키지 않더라도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을 만큼 의료인의 배출이 시급했던 것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었다.

『사랑』에는 또 순옥이 의사시험을 준비하면서 공부해야할 시험과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나온다. 1914년 의사시험규칙이 공표되었을 때 의사시험은 총 4부로 구성되었으나(醫師試驗規則, 1914. 7. 20) 1917년부터는 3부로 재편되어 시행되었다.(醫師試驗規則 改正案, 1917. 10. 25) 1부 시험은 물리학, 화학, 해부학(조직학 포함), 생리학(생화학 포함), 약물학 등 기초과목에 대한 것이었고, 2부 시험은 병리학(병리해부학, 법의학 포함), 외과학(이비인후과학, 피부과학, 매독학 포함), 내과학(소아과학, 정신과학 포함), 안과학, 산과학, 부인과학, 위생학(세균학 포함) 등 임상과목에 대한 것이었다. 3부 시험은 필기시험인 1, 2부 시험과 달리 실제의 임상시험으로 외과, 내과, 산부인과, 안과에 대한 것이었다. 1933년 간행된 『조선의사치과의사 수험지침(朝鮮醫師齒科醫師 受驗指針)』에도 이와 동일하게 나와 있는 것을 보면 30년대 후반의 의사시험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에서 순옥이 준비해야하는 시험과목과 시험과정은 대체로 위와 유사하기는 하지만 약간의 차이도 있다.

  • “치를 수 있기야 하지. 그렇지만 너 언제 의학 공부했니?”

  • “병원에 있을 적에 책은 보았어요, 선생님 책을.”

  • “무엇, 무엇?”

  • “내과랑, 외과랑, 신부인과랑, 소아과, 또 생리학, 병리학-이런 것 다 보았어요. 해부학도 한 벌 보구.”

  • “그럼 다 보았구나.”

  • “한 일년 내버려 두었으니깐 좀 잊어 버렸겠지만. 그런데, 물리학하구 화학하구요 임상하구 그게 걱정야.”

  • “왜 물리 화학 배웠지, 학교에서?”

  • “그게 언제요? 벌써 십년이나 넘은 걸. 또 우리 학교 선생이 좀 변변치 않아서 물리, 화학을 잘못 배웠어.”

  • “그럼 시험은 언제 쳐보게?”

  • “금년에 아직 안 지나갔지오?”

  • “아직 안 지나갔지. 오월인가 유월인가. 왜 금년에 쳐보게?”

  • “네, 봄에 절반 가을에 절반 그렇지오?”

  • “그런가보드라. 그런데 봄에 치르는 게 아마 물리, 화학이지, 해부학이랑, 가을이 임상이구.”

  • “그렇다나보아요.”

  • (……)

  • “아무래두 안 선생한테 도움을 좀 받아야지. 책두 책이지마는, 임상 진단하는 거랑, 처방하는 거랑 그걸 배워야지. 너 제일기에 합격하드래두, 가을 제이기꺼지 몇 달 남았니? 그때에는 환자를 내어 놓구 진단을 하구 처방을 내라구 그런다. 그러자면 그냥 간호부루 구경만 한 것 가지구는 안되요. 의사한테 설명을 들어 가면서 배워야지. 또 정말 환자의 가슴이랑 배랑 두들겨 보기두 하구 들어 보기두 하고, 그래야 되지. 그러자면 안 선생 병원에서 밖에 할 데가 있어?”(311-312)

위 인용문에 의하면 당시 의사시험은 1년에 두 과정에 걸쳐 시행되었다. 봄과 가을에 시험을 보는데, 봄에는 기초과목에 대한 필기시험이고, 가을에는 임상시험이다. 그리고 의사인 영옥이 봄에 보는 시험이 5월인가 6월인가 하고 되묻는 걸 보면 봄, 가을에 보는 시험일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1914년 가을에 본 의사시험은 9월 15일에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실시되었던(朝鮮總督府告示 第三百九號, 1914. 8. 7) 반면, 1920년 가을 시험은 11월 15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보았다.(朝鮮總督府告示 第三百九號, 1920. 9. 20) 그리고 『사랑』이 발표된 1939년 봄 시험은 5월 4일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실시되었다.(朝鮮總督府告示 第四十一號, 1939. 1. 23) 1939년에 시험 고시장이 2개로 늘어난 것은 당시 전문 의료인들이 필요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의료공간은 안빈의 의원이다. 이광수는 안 의사의 의원 내부와 규모를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안빈이 개원한 이유를 소설 속에서 찾기는 어렵지만 이는 당시 조선인 의사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조선인 의사들은 의료정책을 포함한 국가 시책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 당했다. 진로의 제한은 관리로 진출하는 데만 적용되지 않았다. 관공립병원의 경우 의사를 채용할 때 일본인을 선택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조선인이 채용될 가능성은 ‘천부당 만부당이요’, 하늘이 도와서 채용된다 하더라도 그 자리는 일본인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일 뿐이었다. 차별에 불만을 느낀 조선인 의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주요 대안은 개업이었다.”(박윤재, 2015: 145)

식민지 시기 사립병원의 설립과 규모, 시설에 대한 규정은 1919년 4월 7일에 공표된 「사립병원취체규칙(私立病院取締規則)」에 의거했다[5,]. 규칙 제1조에 따르면 사립병원 설립자는 설립자의 인적사항, 부지 소유자와 설립자의 동일인 여부, 병원 명칭, 부지 위치 및 평수, 부지와 인근 건물의 평면도, 각 병실의 평수와 수용 환자 정원, 계단의 수, 비상구의 수, 화재와 기타 비상 상황시 준비, 전염병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전용 취사장, 목욕장, 변소, 소독장 등을 상세히 적은 서류를 경무부장에게 제출해야만 했다. 그리고 제1조와 제5조(병원의 업무를 상속하거나 계승하려는 자에 관한 조항)의 허가를 받지 못하면 ‘병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으며, 병원이 아닌 곳에서는 환자 10명 이상 또는 전염병 환자를 수용할 수 없었다.(제2조)(私立病院取締規則, 1919. 4. 7) 사립병원 규칙은 특히 전염병실과 전염병환자에 대한 조항들을 상세히 나열하고 있어서 당시 의료시설이 전염병 예방과 치료를 위한 중요한 기관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6]. 이에 관한 주요 조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6조: 전염병실에는 다음과 같은 물품을 구비해야한다.

  • 1. 전용집기, 침구, 변기, 예방복 및 의료기구

  • 2. 음식물 및 음식물용 기구를 납품하기 위해 파리를 쫓는 장치(放蠅)가 있는 기구

  • 8조: 전염병실에는 정원 외의 환자 또는 병명이 다른 환자를 같은 병실에 수용할 수 없다.

  • 15조: 전염병환자는 전염병실 외의 다른 곳에 수용할 수 없다. 페스트, 콜레라, 두창, 발진티푸스 및 성홍열 환자는 전염병실을 설치하였다 하더라도, 사립병원에 수용할 수 없다. 단, 경찰서(경찰서 사무를 취급하는 헌병분대, 동 분견서를 포함한다. 이하 상동)의 허가를 받은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 16조: 사립병원에 전염병 환자를 수용하는 때에는 환자의 본적, 주소, 이름, 연령, 병명, 입원년월일, 발병 장소, 발병 및 판정연월일시를 기록하고, 곧바로 경찰관, 헌병 또는 검역위원에게 신고해야 한다. 전 항의 환자가 사망한 경우 또는 치유, 도주, 그 외의 사고에 의해 퇴원할 경우에는 이름, 사유 및 연월일시를 구체적으로 적고, 바로 경찰관, 헌병 또는 검역위원에게 신고해야 한다.(私立病院取締規則, 1919. 4. 7)

안빈의 의원 또한 「사립병원취체규칙」과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물론 소설에서는 위에서 나열한 세목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위 조항들을 염두에 두고 이광수가 묘사한 안 의사의 의원 모습을 떠올리면 당시 의원들의 외형과 내부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사랑』의 첫머리에는 순옥이 안빈의 의원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의원의 외형과 정원 모습이 제시되어 있다. 의원은 이층 벽돌건물이고, 동남쪽으로 발코니가 있으며, 그곳은 환자들이 일광욕을 할 수 있도록 차양을 설치해놓았다. 그리고 건물 밖에는 작은 뜰이 있다.

  • ‘安賓內科小兒科醫院’이라는 흰 뺑끼, 검은 글씨의 간판이 붙고, 다른 기둥에는 ‘醫學士 安 賓’이라는 칠도 아니한 나무쪽 문패가 붙어 있었다. 건물은 심플한 벽돌 이 층으로, 동남쪽으로는 발코니를 넓게 한 것이 아마 환자의 일광욕 소용인 듯하여 걷어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캔버스 차양을 하였고 뜰에는 오동나무 한 그루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오동나무의 퍼렇고 넓다란 잎이 탐스럽게 집 벽을 슬쩍슬쩍 스치고 있었다. 집의 전체의 인상은 병원이라기보다는 검소한 산간의 주택인 것 같았다.(9)

순옥은 인원과 함께 의원으로 들어가고 간호사에게 용무를 말한 다음에 대합실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여기서 작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의원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지는데, 아래 인용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곳이 안빈 의원 내부라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 ‘수부(受付)’라고 써 붙인구멍에 가서 순옥이가 명함을 내었더니 퍽 익살스럽게 생긴 간호부가 눈망울을 굴려서 순옥을 훑어 보면서, “병 보세요?”하는 말은 퍽 퉁명스러웠다. “잠깐 원장 선생님 뵈옵고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읍니다. 지금 바쁘시면 선생님 일 끝나실 때까지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야요.” 순옥은 그 익살스러운 간호부의 입에서 필시 나올 듯 싶은 말을 미리 알아 차리고 방패막이까지 하고는 인원과 함께 대합실에 들어 갔다.

  • 대합실에는 긴 교의가 두어 개 벽에 기대어 놓이고, 가운데는 둥근 테이블 하나, 교의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간 반 남짓한 방이었다. 테이블에는 보는 없으나 신문과 잡지가 있었고, 방 한편 구석에는 화탁 위에 조그마한 자기 화병에 글라디올러스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의 낙관이 있는 전자 횡축이 걸렸는데 ‘病生於亂心心攝而病自瘳’라고 썼다. ‘병은 마음이 어지러워진 데서 생기는 것이니, 마음이 잡히면 병이 저절로 낫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벽에는 역시 그 글씨로 ‘無勞汝形無搖汝精可以長生’이라는 액이 붙었다. ‘네 몸을 곤하게 말고 네 마음을 흔들리게 말라. 그리하면 오래 살리라’는 장자의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다 원장 안 빈의 생각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였다.

  • 순옥과 인원은 창으로 뜰을 바라보았다. 그 창밖에는 바로 아까 밖에서 보던 오동나무의 퍼런 몸뚱이와 넓적넓적한 잎이 보였다. 맞은편에 보이는 돌담은 옛날 유물인 듯하여서 담쟁이덩굴이 성하였다.(9-10)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안빈 의원의 내부는 크게 간호사가 일을 보는 ‘受付’, 환자나 방문객들이 대기하는 장소인 대합실, 그리고 “순옥은 잠깐 머리와 옷매무시를 만지고는 인원에게 기다리고 있으라는 눈짓을 하고는 핸드백을 들고 대합실에서 나와서 진찰실로 들어 갔다.”(12)에서 보듯이 의사가 진료하는 진찰실, 허영과 안빈이 독대를 하는 ‘응접실’(71)로 구분되어 있다. 나중에 순옥이 의사가 되었을 때 안빈의 배려에 의해 대합실은 순옥이가 진찰을 하는 예진실이 되고, 응접실은 대합실로 바뀐다.(338) 그리고 의원 내부의 공간들은 모두 독립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독자는 작품을 읽어가면서 안빈의 의원에 특수한 공간이 하나 더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안빈이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실험하는 공간인 연구실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안빈의 아들 입을 빌려 그곳이 매우 사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병원에, 응응, 아버지 병원에 연구실이 있어. 거기는 아무두 못 들어 가. 정말야. 아버지 밖에 아무두 못 들어 가. 거기 별거 다 있어요. 현미경두 있구. 피두 있구. 들어 감 야단 만나.”(21) 이 공간은 “밑층 병실 하나를 떼어서”(33) 만들었다는 것을 보면 1층에 있는 진찰실 옆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1층과 2층의 대부분 공간은 모두 입원실인 것으로 추정된다. 옥남과 순옥의 대화(95)에서는 8명의 입원환자가 만원이라고 하고, 또 다른 대화, 즉 안빈과 간호사의 대화(262)에서는 입원실이 7호실까지 있는 것으로 소개된다. 앞선 대화에서 순옥은 입원환자들 중에 ‘심장병을 앓는 이’와 ‘폐염을 앓는 어린애’가 있는데, 그 외는 중증환자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안빈의 의원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사립병원으로 소수의 전염병 환자도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립병원취체규칙」 15조에 의거하면 그 환자들은 전염병실에 격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안빈의 의원은 종로통에 위치해 있었지만 격리된 전염병실을 갖추고 있는 병원이었던 것이다.

안빈의 의원은 소설 속에서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제시된다. 그의 의원은 순옥이 개인적으로 안빈을 처음 만난 곳이고(13), 안빈과 순옥이 의사와 간호사로서 근무하는 직장이며(상권), 순옥이 안빈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장소이고(상권), 안빈이 개인적인 실험을 하는 연구실이 있는 공간이며(33), 안빈이 허영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누는 곳(71)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빈의 의원은 또한 그의 이상을 준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인류애를 실현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시내에 있는 병원이 적당치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405) 안빈은 자신의 연구결과와 인류애를 실현할 수 있는 결핵요양원을 계획하는데, 그것은 복잡한 시내를 떠나 깨끗한 자연환경이 갖춰진 장소라야 했다. 이렇게 보면 안빈의 의원은 그의 이상이 실현됨과 동시에 소설의 주요 공간으로서의 위치를 결핵요양원에 내줘야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사랑으로 완성되는 날!”(433)을 위해 안빈은 새로운 의료공간을 준비해야만 했던 것이다.

2) 일제시대 천주교 의료시설과 북간도 천주교 병원

『사랑』에 등장하는 주요 근대병원들은 모두 안빈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가 세운 의원과 북한요양원이 그렇다. 그런데 북간도 천주교 병원은 다르다. 이 병원은 안빈이 있는 경성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공간이다. 여기서 순옥은 안빈의 곁을 떠나 독립적으로 의료 활동을 펼친다. 이 병원의 등장은 순옥이 안빈과 떨어져 독립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경성에서(원산까지 포함해서) 순옥의 삶은 안빈과 불가분의 것이었다. 그녀의 생활은 안빈을 향한 사모의 정을 불사른 것이었다. 하지만 북간도 천주교 병원은 안빈과는 상관없이 순옥의 독립적인 생활이 보장된 공간이다. 비록 그녀는 이곳에서 비극적 삶을 경험하지만 또한 그 난간을 끝내 극복하고 새로운 출발선에 서기도 한다. 이로써 순옥은 안빈을 사모하는 여인에서 그와 함께 인류애를 실현할 수 있는 동지가 된다. 북간도 병원은 바로 순옥의 홀로서기를 가능하게 했던 소설 속 주요 의료공간인 것이다.

이광수가 안빈이 거주하는 경성 바깥에, 그것도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멀고 낯선 곳에 순옥이 일하는 병원을 설정한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순옥의 홀로서기를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작가의 상상력이 도달했던 가장 그럴듯하고 먼 곳이 북간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병원이 천주교 병원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당시 북간도는 천주교 병원보다 개신교 병원이 일찍 의료선교활동을 시작한 지역이기 때문이다[7,]. 이것은 식민지 시대 북간도 지역의 의료선교활동에 대한 연구사를 일별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김두종은 개신교의 의료사업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지만 천주교의 경우에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에 의하면 천주교의 의료사업은 “近世朝鮮의 종말기에 가까운 純祖 및 哲宗 때부터 藥局을 설치하여 고아들을 求療하는 데 힘써” 왔고, “1894年의 淸日戰爭 이후에도…… 修道院의 附屬事業으로서 保育院과 施藥所를 경영하였”지만 “新敎派처럼 중앙 및 지방을 통하여 傳道醫療事業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키지 않고 주로 救護事業에 힘을 기울였다.”(金斗鐘, 1966: 493) 한국기독교의료사의 대표적인 연구자 중 하나인 이만열의 연구에서도 천주교 병원에 대한 언급은 다음 인용문이 전부이다. “가톨릭 교회도 1939년 현재 다음과 같은 의료사업을 하였다. 프랑스의 성바울수녀회(St.Paul Sisters)가 서울에서 병원 1개, 경기도 지역에서 진료소 3개, 대구에서 1개의 병원과 진료소를 운영하였으며, 의료진으로는 2명의 프랑스 수녀와 4명의 한국인이 일하였다. 독일 가톨릭 교회는 원산에서 20개 병상의 병원을 운영하면서 1년에 2,920명의 입원환자를 치료하였다. 진료소에서는 한 해 동안 10,950회의 외래진료를 하였다. 미국의 미국수녀회(American Sisters)는 결핵요양원 1개, 진료소 3개를 운영하였다.”(“Summery of Social Service”, 1939: 65. 이만열, 2003: 733에서 재인용) 이것은 당시 개신교의 의료사업 규모와 비교하면 극히 적은 규모였다. 이만열은 『사랑』에서 언급되는 용정의 대표적인 의료사업으로 천주교가 아니라 개신교의 일파 중 하나인 캐나다 장로회의 의료사업을 예로 들고 있다[8,]. 이것이 유명한 용정 제창병원이다. “제창병원(성앤드루병원, St.Andrew’s Hospital)은 1936년 현재 25병상, 1941년 현재 30개의 병상으로 그리 큰 규모의 병원은 아니었지만 간도 굴지의 병원으로 계속 성장해 나갔다. 병원은 다른 병원과 마찬가지로 수술실, X선 촬영기, 그리고 수술에 필요한 충분한 장비를 갖춘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 1936년 현재 병원직원 21명 중 의사선교사 1명, 간호선교사 1명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인이었다.”(이만열, 2003: 720-721)

서굉일의 연구는 독자들에게 제창병원에 대한 보다 생생한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1910년대 북간도에는 조선 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의료시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경제적 궁핍 때문에 보건위생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고, 병에 거리면 굿을 하거나 한방의를 찾는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연길현 용정촌 카나다 장로파 선교부 경영 제창병원은 한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의 근대식 의료기관으로서 선교사들의 의료사업은 이주 한인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당시 간도의 신식 의료기관으로는 용정촌에 간도병원과 두도구, 국자가에 일인 의사 각 1명과 국자가와 용정촌에 중국 관의원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주 한인들에게는 혜택이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이용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선교부의 제창병원은 1회 진찰료로 5전을 받았고, 약 값은 통상 실가를 받았으며, 빈곤자는 감가하였다. 시료를 베풀 때에는 입원료, 왕진료 등이 정하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자력 정도에 따라 결정하였다. 매일 평균 약 40명 정도의 환자가 치료를 받았는데 유아와 부인병 환자가 많았다.”(서굉일, 1986: 474) 제창병원은 1914년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 바커(A.H.Barker) 부부가 용정촌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제창병원은 일반 환자에게 실비로 진료했고, 빈곤자에 대해서는 무료 시료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순회 의료선교를 시행하여 오지에 있는 한인 이주촌를 찾아다니면서 환자들을 치료하였다.(서굉일, 1986: 475) “병원은 193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진료활동이 지속적으로 신장되어 갔다. 1935-1936년은 재정이나 의료진 면에서 모두 어려운 해였으나 매일 30-60명을 진료하였다. 1936-1937년은 진료환자가 19%, 입원환자가 12% 증가하여 1935년-1936년보다 약 2배의 환자를 치료하는 최고의 해가 되었다. 그러나 1939년부터 병원은 불안한 국제정세, 생필품값 및 치료비용의 앙등 등으로 곤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제 1롤의 가격이 거의 6배(80센에서 4엔 50센으로)나 폭등하였던 것이다. 선교부가 철수키로 결정한 1940년에도 환자는 줄어들지 않았으나 그 후 무료치료는 감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1935-1936년 현재 제창병원 환자들의 80%는 한국인이었고 나머지 20%는 만 주인, 일본인, 러시아인 등이었다.”(이만열, 2003: 721) 제창병원은 1930년대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발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1939년부터 일제의 제국주의 전쟁과 불안한 국제정세로 인해 병원은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1940년에 문을 닫게 되었다.

이렇듯 북간도 천주교 병원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북간도에서 있었던 천주교 의료활동이 개신교와 비교해 규모는 작았지만 활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대 한국 천주교의 의료활동은 초기에는 부설 시약소 수준에 머물렀지만 외국 수도회의 진출을 계기로 그 규모를 확장시켜 나가면서 점차 독립적인 사업의 성격을 띠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처음에 고아원이나 양로원의 부속 시설로 설치되었던 시약소는 일반인들을 위한 진료소로, 진료소는 다시 의원으로 그 시설을 점차 확대해 나갔고, 의료종사자도 소수의 비전문가에서 자격을 갖춘 전문의료인들로 그 수를 조금씩 늘려나갔다.”(성모병원의 설립배경과 목적, 2009: 9) 당시 대표적인 외국 수도회로는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를 비롯해 메리놀외방전교회와 수녀회, 베네딕토회 등을 들 수 있다. “메리놀외방전교회와 수녀회는 평안남북도를 관할하는 평양교구에서, 베네딕토회의 3개 남녀수도회는 함경남북도를 관할하는 원산교구와 만주의 간도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길교구에서 교육활동과 의료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수도회들이 주로 북한지역에서 활동한 덕택에 남쪽보다는 북쪽에 더 많은 진료소(시약소)가 설립되었다. 1931년 4월 말까지 한국 천주교회에서 운영한 무료진료소는 서울과 제물포 2개소 이외에도 평양교구에 의주, 영유, 비현 등 3개소, 원산교구에 원산, 덕원 등 2개소, 연길교구에 4개소 등 전국 11개소가 있었다.”(성모병원의 설립배경과 목적, 2009: 13)

위의 자료를 보면 1931년 당시 연길교구에는 시약소 4개가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1920년대 천주교의 의료활동이 아직도 시약소와 무료진료소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시약소와 진료소가 북한 지역에 더 많이 설립되어 있었던 만큼 의원시대를 주도한 곳도 북쪽의 세 교수(원산, 평양, 연길)였다. 이러한 발전은 의료활동의 양적, 질적 설장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일제 식민 통치 이후 정식 자격증을 취득한 의사와 그 처방 없이는 시약소와 무료진료소를 운영하기가 어려워진 탓도 있었으며, 동시에 당시 활발한 사회사업을 기반으로 급속히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던 개신교의 성장에 자극을 받은 탓도 있었다.”(성모병원의 설립배경과 목적, 2009: 13)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천주교 병원은 1928년 원산 교구에서 문을 연 덕원병원이다. “독일 베네딕토회 선교사들이 1926년 덕원에 설치한 시약소는 1928년 의사 자격증을 획득한 그라하머(J.Grahamer) 수사가 부임하면서 그해 5월에 병원(정확히는 의원)으로 확장, 개원”되었다.(성모병원의 설립배경과 목적, 2009: 14) 하지만 의사 면허증을 취득한 천주교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의원을 열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였다.(성모병원의 설립배경과 목적, 2009: 21)

연길교구에서는 1931년 성 베네딕토회 올리베따노 수녀회가 진출하면서 의료사업이 활발해졌다. 당시 연길교구장 브레허 주교는 수녀들이 간호교육을 수료하고 한국에 진출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연길교구의 의료시설도 1935년 독일에서 평신도 의사를 파견하기 전까지는 간이진료소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의 연길교구에서의 의료사업은 스위스로부터 6명의 올리베타노 수녀들이 도착한 직후부터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1931년 12월의 일이었다. 이 해 11월에 연길에 도착한 수녀들이 1개월도 못 되어 의료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수녀원과 병원 건물이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료진료소에 불과했으나 ‘병원’으로 불리던 조그마한 건물에서 수녀들은 매일같이 40명 내지 5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1932년 5월 1일까지 반 년도 못 되는 동안에 4,000명을 치료하고, 만 명에게 약품을 무료로 주었다. 이르멘트루디스 마이어(Irmentrudis Meier)와 루가 엘틴(Lukas Eltin)이란 2명의 간호수녀가 치료와 간호를 담당하고 있었고, 2명의 한국인 수녀 청원자들이 그녀들의 조수 역할을 하고 있었다.”(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 1988: 46) 간호사 일에 헌신적이었던 이 두 수녀들의 활동은 실제로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브레허 주교는 이들의 재능과 기품을 높이 평가했으며, 특히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르멘트루디스 수녀를 진심으로 걱정하기도 했다. 이르멘트루디스 수녀 또한 자신의 편지에서 ‘간호의 성과’가 기대 이상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매일 40명가량의 환자가 연길에서 가장 유명한 의료진인 우리 간호수녀들을 찾아온다. 우리는 이곳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어서 몇 시간 떨어진 먼 마을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병들고 다친 중국인과 한국인을 한번 와서 보아라. 우리 건물은 단층의 검은 벽돌집이고 방은 넷이다. 첫째 방은 작은 시약소, 그리고 검사실과 수술실이 이어진다. 이르멘트루디스 수녀와 루카 수녀는 벌써 간단한 수술을 직접 했고, ‘그는 모든 것이 잘되도록 하신다’는 성경 말씀대로 ‘주임의사’(하느님)는 이들의 수술을 축복해 주셨다.”(Sr.DOLOROSA FÜGLISTALLER, 1932,9. 요하네스 마르, 2009: 786-787에서 재인용)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간호수녀들의 의료활동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동시에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간호수녀들이 할 수 있는 의료활동의 한계치는 ‘간단한 수술’ 정도였다. 그들의 표현대로 자신들은 ‘주임의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연길수도원의 의료활동은 아직 시약소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길교구의 의료활동에도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1933년 연길교구의 브레허(Th. Breher) 교구장은 그간의 의료활동의 놀라운 성과를 자세히 보고하는 한편 수녀들이 포교상 또는 의료적으로 완전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의료 선교사와 병원이 불가피함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관심을 유럽의 은인들에게 간절히 호소하였다. 그 결과 1935년 뷔르츠부르크(Würzburg)의 의료 선교원에서 루드비히 레너(L. Lehner)란 독일인 의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는 수녀들에게 실제적인 병자 간호를 지도하여 주었고, 또한 한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한 강의도 해주었다.”(가톨릭중앙의료원 50년사, 1988: 46) 연길수도원은 전문 의료인이 옴으로써 “선교 활동의 두 축인 교육과 의료가 마침내 전문성을 띠게 되었다.”(요하네스 마르, 2009: 821)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랑』에 나오는 북간도 천주교 병원은 1935년에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연길수도원의 병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광수가 묘사하고 있는 북간도 천주교 병원의 모습이다. 소설 속 병원은 천주교의 기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먼저 북간도 병원의 구성원들부터 살펴보자.

  • 칸트 신부란 육십이나 된 노인으로 조선에 이십년, 만주에 십 오년이나 와 있는 이로, 조선인의 풍속과 습관을 연구하여서 독일문으로 책을 저술하여서 학계에 이름이 있는 이요, 에른스트 수녀라는 이는 아직 나이 사십이 다 못 된 젊은이로서, 역시 조선에 십여 년, 만주에 오기는 순옥보다 이삼년 먼저 와서 고아들을 기르고 있는 이다. 이 병원에 수간호원이라는 에카르트도 수녀로, 그는 이 병원 창립 때부터 베크 원장과 같이 와서 나이 오십이나 된 이다. 이들 중에 내외가 갖춰서 가정 생활을 하는 것은 오직 베크 원장뿐이요, 그 밖에는 혹은 신부 혹은 수녀로 제 것이라고 할 것은 옷과 책상과 책뿐이라고 할까? 그것도 그들이 죽거나 다른 데로 가거나 하면 다음에 오는 사람이 쓰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전혀 제 것이라고는 가진 것이 없는 그들이었다.(443)

위에서 보듯이 북간도 천주교 병원의 주요 구성원은 칸트 신부, 베크 원장 부부, 에른스트 수녀, 에카르트 간호수녀, ‘약제사’(450) 등이다[9]. 여기에 한국인 의사가 2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여의사인 순옥이고 다른 이는 이씨 성을 가진 남자 의사이다.(437) 여기서 베네딕토 수도회의 자료에 나타난 실제 인물들과 『사랑』의 허구적 인물들을 비교하면 칸트 신부는 블레허 교구장, 베크 원장은 독일인 의사 레너, 에카르트 ‘간호원장’(449)은 이르멘트루디스 수녀에 해당한다. 천주교의 자료에는 한국인 의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지만 이광수는 거기에 한국인 의사 2명을 허구적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이중에서 특히 순옥이라는 인물은 여러 정황상 부자연스런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먼저 지적해야할 것은 순옥의 종교적 신념과 그녀의 북간도 천주교 병원 활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광수는 순옥을 안식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로 그리고 있다. 순옥의 어머니가 안식교 세례를 받아 자식들도 모두 안식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 안식교의 엄격한 종교 생활이 순옥이와 및 그 형제들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큰 힘을 준 것은 말할 것이 없다. ‘깨끗한 생활, 하느님 다운 생활, 성경대로의 생활.’ 이것이 안식교도들의 생활의 목표요, 준칙이었다. 순옥은 비록 안식교의 교리 중에서 여러 가지 점에 대하여 신앙을 잃었다 하더라도 그 생활 방식만은 순옥의 것이 되고 말았다.(149)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순옥은 안식교의 특정한 교리에 대해서는 신앙을 잃었지만 생활만큼은 안식교인의 그것을 철저히 따르고 있었다. 다시 말해 순옥이는 아직도 안식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광수는 이런 순옥이 북간도 천주교 병원에서 의사로 활동했다고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당시 북간도 지역에서 한국인 여의사가 활동했을 가능성인데, 이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양의 다양한 개신교와 천주교파들도 이 지역에 수녀들을 파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30년경만 해도 중국 북동부 지역으로 여성을 데려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유럽 언론은 불안한 정치 상황을 보도했고, 사람들은 중국, 러시아, 일본이 만주 지배권을 두고 곧 전쟁을 벌일 것이라 믿었다.”(요하네스 마르, 2009: 821)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광수가 순옥을 북간도 천주교 병원과 연결시킨 것은 물론 소설적 필요에 의한 것이다. 순옥에게 북간도는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특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북간도 천주교 병원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의료활동을 했는지는 현실과 소설이 크게 다르지 않다. 겨울이 오자 북간도에는 악성 유행성 감기가 돌았다. 연길에 유행성 인플루엔자가 돈 지 3주가 되자 묘지에는 새로운 무덤이 늘고 골목골목에 곡성이 들리는지 않는 데가 없었다.(449) 당시로서는 치사율이 매우 높았던 이 감염병에 제일 먼저 쓰러진 사람은 에른스트 간호원장이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순옥 조차도 인플루엔자를 피해가지 못했다.

  • 둘째로 앓는 사람이 이 의사의 부인인데, 그는 임신 중이언마는 용하게 살아 났다. 다음에 누운 것이 이 의사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 한씨가 열을 발하고, 또 며칠 아니하여서 허 영 부자가 열을 발하였다. 그 이튿날 베크 원장이 누웠다. 또 병원 직원으로 아직 몸이 성하여서 걸어 다니는 사람은 순옥과 간호부 둘과 약제사 뿐이었다. 앓지 않는 수녀들은 임시로 간호부가 되어서 병 구완할 사람 없는 집으로 순회하고, 신부와 수사들도 거진 호별 방문을 하다시피하여서 구제에 힘을 썼다. 오직 한 사람뿐인 의사인 순옥은 아침부터 지녁까지 잠시도 쉬일 새가 없었다. 집에는 낮 동안에 세 번씩 들르기도 하고 밤이면 집에 있어서 거진 눈을 붙일 사이가 없었다...... 이러한 생활을 계속하기 근 일주일에 순옥은 어떤 날 아침에 피를 뱉았다. 초가을부터 오후면 몸이 오싹오싹하고 밤낮 감기나 든 것과 같음을 느끼면서도 참아 왔다. 식욕이 떨어지고 때로 기침이 나고 오한이 나는 수도 있었다. 그것이 그동안 과로에 마침내 못 견디어서 터지고 만 것이라고 순옥은 생각하였다.(450)

순옥은 북간도 천주교 병원에서 인생 최대의 고비를 경험한다. 위에서 보듯이 순옥은 이곳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 상황에 놓여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허영 가족과의 질긴 악연에서 벗어난다.(454) 그리고 그녀는 이런 경험을 통해 안빈에 대한 사적인 애정을 더 큰 인류애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다. 요컨대 북간도 병원은 순옥이 이전의 사적인 애증을 모두 털어 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무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순옥이 생명을 건 위태로운 상황을 통과하고 나서야 얻을 수 있었던 상처투성이의 전리품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북간도 천주교 병원은 안빈의 의원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안빈의 병원이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현하는 공간으로서 부족함이 있었다면 북간도 병원은 그에 한층 근접한 또 다른 면모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순옥은 안빈을 사모하는 여인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의 동지로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은 북간도 병원이 안빈의 이상을 실현하는 중간단계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3) 식민지 시대 요양원 시설과 북한요양원[10]

와다 토모미는 『사랑』에 나오는 북한요양원의 모델이 1936년 재림교회가 경성에 설립한 요양원이라고 보고 있다. 그녀는 그 근거로 요양원의 치료방법이 안식교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고 있는데, 예를 들어 환자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쐬게 하고 일광 속에서 치료를 받게 하는 것과 전기 치료, 수치(水治) 자연치료가 그것이다. “이러한 안식교 요양원 특유의 치료방침은 1938년 『사랑』에서 안 의사가 설립한 북한요양원에 그대로 등장한다. 북한 요양원에서 환자는 수영복 과 같은 모양의 일광복을 입고 등 의자에 누워 일광욕을 한다.”(와다 토모미, 2014: 377)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를 살펴보면 와다 토모미의 주장이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다음은 기사의 전문이다.

  • 안식교(安息敎)에서 경영하는 경성요양병원(京城療養病院)은 휘경정(徽慶町) 산六번지에 부지 十二만평에 총공비 八만원을 드리여서 三칭양옥의 훌륭한 병원을 건축하고 쪼지.에취.루우 박사가 일반환자를 치료하리라 한다. 동병원은 지금으로부터 五년전에 장곡천정(長谷川町) 경성삘팅에서 소규모의 병원을 설치하고 일반 환자를 치료해왓는데 원체 장소가 좁고 만흔 환자를 수용할 수 없어서 三년전에 인사정(仁沙町)으로 옴겻다가 금번에 전기 휘경정으로 옴기게 된 것은 환자들에게 신성한 공기와 일광 속에서 치료할 목적에서 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동병원의 특색으로는 전기치료와 수치(水治) 자연치료(自然治療) 등이라 하며 현재 낙원정(樂園町) 一四一에 동병원의 출장소가 잇어서 오후 二시부터 五시까지 루우박사가 일반환자를 진찰하야 교통이 좀 불편한 시내환자들의 편의를 보게 되엇다는데 입원할 사람은 전부 전기 휘경정에 잇는 동병원에 입원시키게 되엇다 한다. 그리고 동병원의 기본금으로는 미국서 八만원, 조선서 二만원의 기부를 합하야 총액 十만원의 기본금이 잇다 하며 一반 빈곤환자에게는 무료치료의 특전도 잇다 한다. 동 경성요양병원에서는 오는 十五일 오후 三시 동병원에서 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한다 한다.(『동아일보』, 1936. 6. 10)

『사랑』에 나오는 북한요양원이 안빈의 의원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보면 그것 또한 재림교 선교병원의 역사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재림교의 선교병원이 조선에 처음 세워진 것은 1908년 평안남도 순안이다. 하지만 순안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해 있지 않아서 교단은 선교본부 및 선교병원을 경성으로 이전해야만 했다. 1932년 재림교 선교병원은 서울로 옮겨와 경성요양의원, 경성요양원을 거쳐 1947년에 서울위생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재림교 선교병원의 경성시대를 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의사 조지 루(George H. Rue, 柳濟漢)이다. 그는 1929년 순안병원장으로 내한하여 1931년 6월 경성요양의원을 세워 재림교 선교병원의 경성시대를 열었다. “경성요양병원은 조지 루에 의해 1931년 하세가와초長谷川町(현 중구 소공동)에 있는 2층 셋집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1년 후에는 인사동(파고다 공원 옆)으로 이전하여 경성요양의원이란 간판을 붙이고 활동하였는데 환자가 계속 늘면서 발전하게 되자, 교단 본주는 1933년 3월 22일에 회기리 합회 본부 근처에 새 병원기지 12,000평(20에이커)을 14,531원에 구입한 후 1934년 9월부터 터를 닦고 건축공사를 하여 1936년 2월 15일 경성요양병원(The Seoul Sanitarium Hospital)으로 명명하”였다.(이국헌, 2015: 173-174) 『사랑』에 의하면 안빈의 의원은 종로통에 있었다. 그리고 그 의원은 더 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공간인 북한요양원으로 발전하는데, 이는 재림교 선교병원의 역사와 닮아있다.

  • 당시 경성요양병원은 40병상의 2층 벽돌건물에 엑스레이 시설 등 첨단 의료시설을 갖춘 현대식 병원으로, 낙성식 때에 조선총독부 관리들은 물론이고 서울 거주 외국인 단체 대표들과 감리교 신학대학장 빌링스 등 국내외 내빈 300여 명이 참석할 만큼 명소가 되었다. 경성요양병원 본관이 완성된 후 그해 4월에 간호원 양성과를 신설하여 의료인 양성의 토대를 놓았으며, 그 다음 해인 1937년에는 폐결핵 환자들을 위한 병동도 신축되었다. 이처럼 좋은 시설에 훌륭한 의사와 간호사들이 봉사함에 따라 경성요양병원은 한 해에 2만여 명의 환자가 치료를 받는 국내의 유수한 병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이국헌, 2015: 174-175)

하지만 안식교의 치료요법이 당시 일반적인 결핵 치료요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안빈이 안식교인이라고 볼만한 확실한 근거를 작품에서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와다 토모미의 주장은 좀 더 보완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먼저, 와다 토모미가 주장하듯 북한요양원의 치료방침이 안식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우리는 이런 점을 당시 신문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각 요양실의 벽우에는 二十四 시간을 합리적으로 안배한 일과표(日課表), 좌우명(座右銘), 요양자규정(療養者規定) 등등이 붙이어놨다. 그에는 요양의 네가지 큰 원측이라하야 첫째 공기요법, 둘째 안정요법, 셋째 영양요법, 넷째 일광요법이 배렬되어 잇다. 신선한 공기는 폐결핵균을 죽이는 힘이 만흠이오, 안정은 심장의 급격한 활동을 따라서 혈액속으로 섞이어 들어가는 결핵독소를 정지 시킴에 잇고, 영양이 잇는 음식물은 생리적기능(生理的機能)이 앙진되어 앓는대를 좁힌다는 것이나 위장의 능력과 식욕의 여하를 보아서 할 것이오, 일광은 약처방에 독극약을 쓰는 것과 같아서 열이 없는이에게만 필요하다.(『동아일보』, 1934. 8. 22)

위 기사에서 보듯이 해주요양원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결핵환자 치료요법은 당시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결핵치료에 대한 의학적 방법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와다 토모미는 북한요양원의 치료요법이 안식교만의 특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결국 그녀의 주장은 안식교를 과도하게 작품해석에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두 요양원이 모두 경성이라는 공간에 있다는 점이 와다 토모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지만 이것 또한 추측에 불과하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경성요양원은 경성 시내와 떨어진 휘경정에 위치해 있었고, 3층 서양식 건물이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랑』에서 묘사되는 북한요양원은 같은 경성이라도 전혀 다른 지역에 위치해 있다. 소설 속에서 안빈은 북한요양원의 지리와 건물배치도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안빈이 영옥에게 요양원의 설계도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응, 난 요양원을 하나 해보겠는데. 장마만 지나면 건축에 착수를 할 생각이야. 설계도 다 되었어.”

  • 하고 안 빈은 일어나서 책장 문을 열고 청사진 한 뭉텅이를 내어 놓는다.

  • 영옥은 그 청사진을 뒤적거린다.

  • “위치는 창의문 밖이야. 세검정 보았나?”

  • “가 보왔어요.”

  • “거기서 한참 올라 가면 북단이라는 데가 있지. 게가 단양허구 수석두 좋구. 자동차 길이 없는 것이 흠이지마는, 거기다 지어 볼라구. 청부 업자 말이 명년 사월꺼지에는 낙성이 된다는데, 그때면 자네 학위 얻는 일두 끝날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자제 남매가 이 병원을 맡으란 말일쎄. 난 요양원에 있구.”

  • ......

  • 이렇게 말하면서 안 빈은 설계의 대략을 설명하여 주었다.

  • “어떤가? 설계가 괜찮지?”

  • “좋은 것 같습니다.”

  • 하고 영옥은 산 밑, 시냇가에 띄엄띄엄 벌려 있는 소쇄한 이십여 채의 조선 집 본인 적은 집의 무리와 전면에 있을 본관과, 그리고 그 사이에 있을 잔디밭들, 꽃밭들, 나무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아름다운 풍경일 듯하였다.

  • “맑은 일광과, 깨끗한 공기와, 좋은 물과, 고요한 환경과, 자연의 풍경과 이것을 마음껏 이용하자는 것이야. 도회 사람들이 굶주린 것이 이것 아닌가? 이것을 굶어서 병이 난 것이니까.”

  • 하고 안 빈은 만족한 듯이, 설계의 전체의 평면도의 한편 끝을 가리키며,

  • “여기가 시낸데 말야, 여기를 막아서 먹을 물 저수지를 만들자는 거야. 그리구 겨울에는 시냇물이 마를 염려가 있으니까 여기다가 큰 우물을 하나 파구. 신선한 냉수-이것이 또 병인에게는 큰 약이어든”(404-405)

안빈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요양원은 세검정을 지나 북한산 언저리에 기우제를 지내던 북단(北壇)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다[11]. 요양원은 자동차가 다니는 길에서 떨어져 “맑은 일광과 깨끗한 공기와 좋은 물과 고요한 환경과 자연의 풍경”이 있는 곳이다. 요양원은 산 밑에 위치해 있고 주변에는 시냇가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20여 채의 조선식 집과 본관 건물이 있고, 주위에 단잔디밭, 꽃밭,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안빈은 시냇물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겨울에 식수가 마를 것을 염려해 큰 우물을 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북한요양원의 이런 모습은 와다 토모미가 주장하는 경성요양원보다는 오히려 해주요양원을 닮았다. 해주요양원은 1930년대 조선에서 가장 큰 요양원 시설을 가지고 있었고, 그 명성도 자자했다. 『동아일보』는 1934년 8월 18일부터 8월 28일까지 해주요양원에 관한 특집 연재기사를 게재하고 있는데, 이런 사실은 해주요양원의 당시 평판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당시 지식인과 작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신문에 연재된 해주요양원의 모습이다.

  • 굵고 높게 해주읍을 둘러싼 수양산(首陽山)의 한가닭인 남산(南山)이 예서부터는 더욱 곱고 밝다. 한폭의 그림이다. 오른쪽으로 남산봉수대는 소매를 걷은 거인의 주먹처럼 내밀엇다. 그리고 왼쪽으로 발아래 깔린 늦은 경사지-울창한 송림을 실은 채로 十만정보는 되리라, 무산무녀의 예상(霓裳)이 동정호(洞庭湖) 상에 끌리듯, 호호양양한 황해수(黃海水) 우로 비스듬이 담그고 잇다. 양지바르고 바람잠기는 그 경사지의 중복, 그 송림의 사이로 동, 서양식의 아홉채 건물이 신기루(蜃氣樓)처럼 예저기 나타나 잇다. 무시로 내뿜는 ‘데레멘징’의 향기, 천연적으로 풍부한 ‘오존’을 맡고 마시기에 얼마나 알맞은 지대랴! 이곳 해주 구세요양원이다. 해주역에서 예까지 자동차로 七분.(『동아일보』, 1934. 8. 18)

  • 요양원은 총 면적이 약 二만五천평이다. 입원사(入院舍)-요양사는 본관(本館), 여자관(女子館), 특별관(特別館), 산상관(山上館), 산하관(山下館) 등에 신축중인 세채를 합하야 아홉채다. 이 아홉채는 양옥이 네채, 조선식 일본식이 합 다섯채로 어느 것이나 새로 지은 집이다. 그리고 약三十간씩의 간격을 두어 서로 보이지 안는다. 그러나 바다는 한없이 보인다. 요양실이 五十이오 모다 남향이다 …… 요양원의 전구역이 사토(沙土)를 섞은 석비례라 지질한 장마의 뒤끝이언마는 숲사이 길거리도 깨끗하기 이를대 없다. 요양사의 정원-요양실의 창앞에는 풀꽃이 떨기를 지엇다. 나팔꽃, 백일홍, 코쓰모쓰는 열어제친 창넘어로 고적한 솜틀을 위로한다. 고적한 솜틀의 하얀 병상, 아니 침대는 보는이의 눈이 부시 지경이다. 정원의 다른 한편에는 잔디가 선을 물럿고 히노데까시야가 열을 지엇으며 새막같은 정좌대(정좌대)가 예저기 잇고 긴 안락의자가 한둘씩 노엿다...... 한 정원을 지내면 숲길이오 한 숲길을 따라 돌면 또한 정원이다.(『동아일보』, 1934. 8. 19)

위에서 보는 것처럼 안빈이 구상하고 있는 북한요양원의 실제 모습은 해주요양원과 흡사하다. 요양원 주변의 자연환경, 예컨대 풀꽃, 정원, 숲길 등은 두 요양원 모두의 공통된 환경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요양원이 경성 요양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하다. 그리고 와다 토모미가 북한요양원의 모델이 경성요양원이라고 믿는 결정적 근거 중 하나인 ‘오존’에 대한 언급이 해주요양원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언급되어야 한다.(와다 토모미, 2014: 377) 이상의 논의에서 살펴본 것처럼 와다 토모미의 주장은 추측에 가깝다. 이렇게 보면 이광수는 특정 요양원을 북한요양원의 모델로 삼은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당시 여러 요양원들에 관한 정보들을 종합해서 북한요양원을 구상하고 묘사했을 것이다. 이중에 경성요양원도 하나였겠지만 그보다 해주요양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북한요양원이 앞서 나온 안빈의 의원, 북간도 천주교 병원과 다른 점은 이 세 곳을 유일하게 경험한 순옥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순옥은 북한요양원이 전혀 차원이 다른 의료공간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 순옥이가 다른 환자보다도 몇 갑절, 아마 수없는 갑절, 이 북한요양원의 따뜻함과 기쁨을 느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순옥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환경은 이 세상에서는 다시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연길 선교사 사회의 분위기가 심히 맑고 엄숙하였으나 그것은 마치 고딕 건물 모양으로 좀 무겁고 음침한 것 같았다-북한의 그것과 비교하면. 순옥이가 느끼기에 북한요양원의 공기는 예전 안 빈 병원의 그것보다도 더욱 밝고 더욱 맑고 더욱 따뜻하고 더욱 향기로운 것 같았다. 순옥은 그 원인을 생각하여 보았다. 서울 시내가 아니요, 북한의 산속이라는 것도 한 원인일 것 같았다. 그러나 땅이 무슨 상관이랴? 선인이 사는 곳은 지옥도 극락이요, 악인이 사는 곳은 극락도 지옥이다. 이 고요한 밝음은 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란 안 빈과 인원과 수선과 및 그들의 빛을 받는 사물들이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순옥은 안 빈의 빛이 지나간 사 년 동안에 커졌음을 깨달았다. 그의 수염과 머리카락에 센 터럭이 느는 대로 빛이 늘고 그의 얼굴에 주름이 느는 대로 향기로운 따뜻함이 는 것 같았다.(495)

순옥의 눈에 북한요양원이 다른 공간과 질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빛’이다. 다시 말해 의료시설이나 자연환경보다 ‘사람’이 북한요양원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안빈의 ‘빛’, 즉 더 큰 사랑을 실천하는 인류애를 말한다. 순옥은 인원과 수선이 “어머니나 누나의 애정으로 자식이나 동생을 간호하듯이”(460)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는다. 그것은 사적인 관계를 넘어선 더 큰 사랑의 실천이며, “마치 고딕 건물모양으로 좀 무겁고 음침한 것”과는 다른 “향기로운 따뜻함”이다. 순옥은 그들의 사랑 실천을 자신이 간호부로 일할 때 환자를 대하던 태도와 비교한다. “순옥도 애정을 가지고 친절하게 하노라고는 하였으나 도저히 인원이나 수선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460) 순옥이 보고 느낀 대로 북한요양원은 안빈의 이상을 실현하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북한요양원은 『사랑』에 나오는 다른 의료공간들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면서 동시에 구별되는 작가의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다.

3. 결론

『사랑』은 근대병원의 역사를 이해하고 복원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문학작품이 사료와 마찬가지로 당대 사회의 생생한 기록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소설은 역사적 기록에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어 마치 활동사진을 보듯 실제 이미지들을 재현한다. 엥겔스가 19세기 전반기 프랑스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수많은 역사기록을 뒤지는 것보다 발자크의 소설을 읽은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12].

본론에서 언급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안빈의 의원에 대한 묘사는 「사립병원취체규칙」과 더불어 식민지 시대 개인병원의 실제 모습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손색이 없다. 그리고 순옥이 의사가 되는 과정 또한 당시 「의사규칙」과 「의사시험규칙」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 지를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북간도 천주교 병원에 대한 묘사는 천주교 의료사업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당시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기록으로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북간도에는 천주교에서 설립한 연길수도원 병원이 있었는데, 『사랑』에 나오는 천주교 병원은 이와 매우 흡사하다. 우리는 이를 통해 북간도에 있었던 천주교 병원의 실체와 마주할 수 있다. 셋째 북한요양원에 대한 묘사 역시 식민지 시대 결핵요양원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료이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요양원이 이광수의 친일 이데올로기를 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안빈에 의해 실현되는 보편적인 인류애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회피하고픈 이광수의 사상적 곡절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요양원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인 것이다. 이것은 북한요양원에 대한 묘사가 다른 의료공간에 대한 묘사보다 비현실적이며 심지어 환상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곳에서 1년간 치료를 받은 시인은 북한요양원을 ‘낙원’이라고 칭송하고 있을 정도다.(495) 즉, 북한요양원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관념 속의 세계인 것이다. 이광수는 근대병원의 공간을 통해 자신의 근대적 이상을 드러냈지만 결국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했다.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현하겠다는 의도로 빚어놓은 환상적인 공간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광수에게 안빈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심리적 대리자, 즉 초자아(superego)였는지도 모른다.(이병훈, 2016: 55)

이 연구는 앞서 지적했듯이 이광수의 『사랑』을 통해 일제시대 근대병원의 모습을 복원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은 당시 근대병원에 관한 다양한 자료의 발굴이 시급하다는 점이다. 1930년대 말에는 일제가 조선을 병참기지화하여 조선인의 의료환경이 열악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 의료선교 사업의 실태를 봐도 알 수 있다[13]. 그런데 이런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은 개신교와 천주교 계통이 대부분이다. 물론 종교와 관련된 의료사업이 많은 부분 당시 조선의 의료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종교병원 이외의 자료들은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본 연구에서도 이런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연구는 민간병원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들을 발굴하여 더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이 연구가 소설 속에 나타난 근대병원의 역사적 기록을 정리한 최초의 시도라는 사실 자체에서 연유하는 한계이다. 이런 접근방법이 아직은 매우 낯선 것이어서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그것은 소설이 기본적으로 허구라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 속 묘사는 허구이기도 하지만 당시 현실을 반영하는 기록이라는 측면도 있다. 실제로 한국 근대문학사에는 『사랑』 외에도 일제시대 근대병원을 다룬 작품들이 여럿 있다[14]. 물론 그중에서 『사랑』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근대병원의 모습이 복원되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이런 점에서 이런 작업은 후속 연구에 의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The situation of Korean Catholic in 1931 (1930. 5. 1. - 1931. 5. 1.)

Notes

2)

이광수의 『사랑』은 작가가 쓴 최초의 전작소설이자 춘원의 말대로 “내 인생관을 솔직히 고백한” 최초의 소설이다.(李光洙, 16, 1963: 310) 이런 사실들을 고려하면 『사랑』이 이광수 작품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의미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의외로 이 작품에 대한 소설 미학적 연구는 많지 않다. 우리는 그 이유를 우선 이광수의 친일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작가의 삶에 새겨진 ‘주홍글씨’가 작품 해석의 절대적인 잣대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이광수의 사상적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알리바이가 적혀있는 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랑』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은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의 또 다른 측면은 이광수 작품의 연구사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제일 먼저 주목할 인물은 김동인이다. 김동인은 「春園과 ‘사랑’」(1939)이라는 글에서 “『사랑』을 小說로 볼 것이 아니다...... 이 小說은 作者의 고민의 기록으로 볼 것이며, 따라서 作中人物의(모순으로 充溢된) 行路는 전혀 보지를 말고 단지 對話 形式으로 된 安醫師의 敎說만을 볼 것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金東仁, 6, 1976: 618) 여기서 김동인은 춘원의 고민이 “思想的 고민이 아니라 去就에 대한 고민”이라고 결론지으며 작품을 과소평가했다. 이런 고민들이 과도하게 나타나서 작품에 무리가 생겼고, 결국 모순투성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김동인의 주장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이던 간에 그의 지적은 『사랑』에 대한 연구에서 중요한 한 가지 방법론이 되었다. 요컨대 『사랑』은 ‘소설’이 아니라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김윤식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사랑』에 대한 연구가 세 가지 차원에서 가능하다고 전제하면서 그중 하나로 김동인의 입장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김윤식은 이것 외에 『사랑』을 소설로서 보는 차원과 이광수 소설 전체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고찰하는 차원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김윤식 또한 『사랑』을 소설로서, 더 구체적으로 말해 근대소설로서 읽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작품은 비현실적이고 설화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서 근대소설로서는 치명적인 결격사유를 지니고 있다.(김윤식, 1999: 292) 이렇게 보면 문제의식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김동인과 김윤식이 『사랑』을 근대소설로 높게 평가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춘원 연구에서 이 두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해본다면 그동안 왜 『사랑』에 대한 소설 미학적 연구가 미진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김윤식은 『사랑』이 이광수 소설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측정하는 일이 다른 차원보다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는 “『무정』에서부터 일관된 것이 자기 자신을 주인공의 모델로 설정했다는 점, 즉 자전적이자 자기 완성의 길이었다면” 『사랑』의 “새로운 것은 춘원 자신의 성자에 대한 꿈을 안빈에게 투영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안빈은 사회적 지위로나 인생의 경험으로 보아 어디까지나 완숙된 주인공이다. 춘원의 사춘기적 소설과 『사랑』이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이점이다”라는 것이다.(김윤식, 1999: 292) 김윤식은 『사랑』의 새로움을 ‘춘원의 인간적 성숙’과 ‘춘원의 친일에 대한 진짜 명분’과 연결시킨다. 다시 말해 소설 자체로서의 평가보다는 이광수의 사상적 변화과정에서 『사랑』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김윤식이 춘원의 이후 작품들, 예컨대 『원효대사』와 『세조대왕』을 『사랑』의 연장선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김윤식, 1999: 293-294) 결국 김윤식의 생각을 요약하면 『사랑』은 소설로서는 낙제점이지만 작가의 사상과 작품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기록’)라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은 소설로서는 그리 사랑을 받지 못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중요한 연구 중 또 다른 하나로 서영채의 것을 들 수 있다. 『사랑』에 대한 그의 평가는 크게 보면 김윤식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하지만 서영채는 『사랑』이 어떻게 이광수의 세계관을 소설 미학적으로 구현하고 있는지 주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서영채의 연구는 『사랑』에 대한 본격적인 소설 미학적 탐구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랑』의 가장 큰 특징으로 ‘사랑의 정신성’을 들고 있다. “『사랑』의 세계가 보여주는 무엇보다 큰 특징은 이광수가 사랑의 정신성을 절대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서영채, 2004: 113) 이어서 서영채는 사랑의 정신성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구조화하고 있는지, 또 그것이 소설의 서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상세히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이 이광수가 꿈꾸었던 이상주의, 즉 ‘민족이라는 주체의 자기보전’으로 수렴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광수는 사랑에 대해 말을 하고 있지만, 그가 정작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운명이었다는 것, 곡 민족이라는 주체의 자기 보존이라는 것이다. 이광수가 만들어놓은 모든 사랑의 서사와 담론들은 오로지 이 지점으로 수렴되고 있다.”(서영채, 2004: 127) 다시 말해 『사랑』의 주제는 남녀간의 배타적인 사랑이 아니라 민족의 공동체적 연대로서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3)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醫師試驗規則」, 『朝鮮總督府官報』(1914. 7. 20)를 참조할 것.

4)

이하 본문에 인용된 작품은 쪽수만 표시한다.

5)

개항기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제중원이다. “개항 이후 일본은 개항지인 부산, 인천, 원산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인 병원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개항지에서 활동하는 일본인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목적으로 일본인 군의(軍醫)들이 설립한 것이다. 1877년 2월 일본 해군 관할 아래 제생의원(濟生醫院)이 설립되었다. 1880년 원산에 설립된 생생의원(生生醫院)은 일본육군의 관할이었다. 1883년에는 인천과 서울에서 영사관부속의원과 일본관의원 등이 설치되었다. 이들 일본식 서양병원들은 일본인의 질병치료 및 건강증진을 도모하고 부수적으로 식민지배의 정당성 선전이라는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으로 설립된 것으로, 본격적인 서양의학의 도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1885년 4월 설립된 제중원은 서양 선교의사들이 주축이 되기는 했지만, 순전히 조선인을 위해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인 병원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여인석 외, 2012: 242)

7)

북간도는 중국, 러시아와의 접경에 위치한 한국인 거주지역을 말하며, 연길과 용정은 북간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9)

위 인용문(443)에서 부부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이는 베크 원장뿐이라고 하지만 다른 장면에서는 칸트 신부 또한 부인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칸트 신부는 또 ‘원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칸트 원장 부인이 청한 시간에 순옥은 원장의 집으로 갔다.”(444)

10)

여기서 ‘북한요양원’은 『사랑』에 나오는 결핵요양원의 고유명칭이다. 이 명칭은 요양원이 북한산 근처에 위치한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11)

북한요양원이 있었던 ‘북단’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지금의 세검정 근처인 것으로 보인다.

12)

엥겔스는 1883년 12월 13일 로라 라파르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말이 난 김에 말이지만 내가 앓아누워 있어야만 했을 때, 발자크 작품 이외에는 거의 읽을 것이라곤 없었고, 이때 이 위대한 늙은이를 철저히 즐겼단다. 그의 책에는 볼라벨류나 카프피그류, 루이 블랑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책에서 보다 훨씬 나은 1815년에서 1848년까지의 프랑스 역사가 들어있다. 얼마나 대담했는지! 그의 시적 정의에는 혁명적인 변증법이 요동치고 있었단다!”(마르크스·엥겔스, 2015: 351)

13)

이에 대해서는 이만열, 『한국기독교의료사』(아카넷, 2003)의 5장 “의료선교 상황의 악화와 한국인 의료진의 역할 강화(1924-1940)”를 참고할 것.

14)

이중 대표적인 작품은 염상섭의 첫 번째 본격 장편소설인 『사랑과 죄』(1927-1928)를 들 수 있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순영은 간호부로 나오고, 병원은 작품의 주요 공간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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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The situation of Korean Catholic in 1931 (1930. 5. 1. - 1931. 5. 1.)

교구 경성교구 대구교구 원산교구 평양교구 연길교구 합 계
사업
영해원 2 1 3 6
남녀영해 201 46 9 256
교인집에부친영해 82 69 151
수양자간영해 4 4
시약소 2 2 3 4 11
원내치료 16,724 49,000 7,655 4,300 77,679
왕진치료 6,616 1,130 7.746

자료: <천주교회보> 1931년 10월 1일자, 4면(박태봉, 1985: 861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