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의과대학(龍井醫科大學)의 설립과 운영 - 변경사로서 용정의과대학의 역사: ‘단절’과 ‘연속’의 관점에서 -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Longjing Medical College(龍井醫科大學) - The History of Longjing Medical College as Frontier History: Focusing on its ‘Disconnection’ and ‘Continu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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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Longjing Medial College(龍井醫科大學), established in Longjing, Yanbian, China on September 12, 1945, existed for about 1 year and 6 months until it was renamed as the Medical Department of Dongbei Junzheng Daxue Jilin Fenxiao(東北軍政大學 吉林分校) in April 1947. However, there are only few records and studies on Longjing Medical College in Yanbian as well as in Korea. In order to fill the gap, this study attempted to restore the history of Longjing Medical College built in Yanbian, China immediately after the liberation. In particular, it analyzed how and why the Longjing Medical College was founded and operated, and which relations the college had with the post-war medical educational institutions, focusing on the ‘disconnection’ and ‘continuity’ in the historical sense.
Since the establishment of Manchukuo(滿洲國),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had made it a major “frontier” and actively promoted the mass migration of Japanese and Koreans. For them, the government also set up three Exploitation Medical Schools in 1940. As a part of these three institutions, Longjing Exploitation Medical School(龍井開拓醫學院) educated more than 150 students by 1945, of which about one third was Korean.
After the liberation, the Longjing Educational Alliance(龍井敎育同盟) decided to pursue the return-movement of the Longjing Exploitation Medical School and took over the institution. On September 12, 1945, Longjing Medical College opened at the school site of Longjing Exploitation Medical School. Longjing Medical College was founded by people who had ‘the perspective of Korean nationality’ in an atmosphere where the ‘ethnicity’ of the Koreans exercised considerable power.
Nevertheless, in 1946, when the Chinese Civil War began and the Yanbian region became an important base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the Party began to expand and strengthen their influences in the region. Accordingly, the operation rights of Longjing Medical College were transferred to the Yanbian Administrative offices of Supervision(延邊行政督察專員公署) and Government of Jirinsheng(吉林省政府) which were the administrative institution by the Chinese Communist Party in turns. In the end, Longjing Medical College was reorganized into the Medical Department of Dongbei Junzheng Daxue Jilin Fenxiao (1947. 3) and the first branch of the Chinese Medical College (1948. 1), a medical education institution focused on nurturing the medical personnel required for the Chinese Civil War. In January 1949, the first branch moved to Harbin, merged with the second branch there, and was transformed into Harbin Medical College. Afterwards, the Yanbian Koreans played a major role to establish Yanbian Medical College(延邊醫科專門學校) in a basis of the teachers and buildings left by the moving-out of the first branch(1948. 10. 1). Now, Yanbian Medical College is the official body of Yanbian University Medical Center.
Longjing Medical College, which has such a complicated history, is partially ‘disconnected’ from the Yanbian medical educational institutions in the post-war era in terms of its possession, operation objective, and academic system. However, many of the early members of the Longjing Medical College were not only teachers and students of the Longjing Exploitation Medical School, but also a few of them continued to teach at the Medical Department of Dongbei Junzheng Daxue Jilin Fenxiao, the first branch of the Chinese Medical College, and Yanbian Medical College. Particularly, several members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establishment of each school or in the position of the top leader of the school. Also, all the medical education institutions referred to above used the building and facilities of Longjing Exploitation Medical School until the period of Yanbian Medical College. As such, the history of Longjing Medical College as frontier history, gives us a difficult, but significant question on the meanings of ‘disconnection’ and ‘continuity’ in history and their implications.
1. 머리말
19세기 중엽부터 만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조선인의 수는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급증하였다. 해방 직후 만주지역에는 200만 명이 넘는 조선인[1,]이 살고 있었고, 그 중 약 65만 여명이 연변(延邊)[2,] 5개 현(縣)에 거주하고 있었다[3].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반도로의 귀환을 선택하였지만 삶의 기반이 있는 연변에 남기로 결정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살아갈 연변 일대의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고 정상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 중 하나가 식민지기부터 존재하였던 여러 학교의 운영을 재개하는 일이었다. 연길(延吉)과 함께 연변 조선인의 중심 거주지였던 용정(龍井)에서는 해방 5일 만인 1945년 8월 20일에 용정교육동맹(龍井敎育同盟)이 조직되어, 용정에 있었던 각급 학교들을 접수하고 ‘복교운동(復校運動)’을 전개하였다(延邊朝鮮族自治州檔案館 編, 1990: 115). 이에 따라 용정교육동맹은 8월 26일 용정개척의학원을 접수하여 관리하기 시작하였고, 9월 12일에는 용정개척의학원 자리에 용정의과대학의 설립을 선언하였다(尹宗柱, 2012: 60). 이후 1947년 4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東北軍政大學 吉林分校 醫學院)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약 1년 6개월 간 ‘용정의과대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의과대학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현재 한국뿐만 아니라 연변에서도 용정의과대학과 관련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용정의과대학의 구성원과 교사(校舍) 등은 연변대학 의학부와 적지 않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나, 연변대학의 공식 출판물에서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延邊大學出版社部, 1988; 崔昌海 主編, 2003). 또한 용정의과대학의 후신인 중국의과대학 제1분교를 하나의 축으로 만들어진 하얼빈(哈尔滨)의과대학의 역사에서도 용정의과대학은 등장하지 않는다. 분명 실재하였으나 역사에서 이름을 찾기 어려운 의과대학이 된 것이다.
용정의과대학을 언급하고 있는 몇 편의 연구들, 즉 연변 보건의료를 개괄적으로 소개한 글(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2005), 중국 조선족 교육사(박규찬, 1991) 혹은 연변대학 설립 역사를 정리한 연구(염인호, 2003), 식민지기 연변에서 활동한 관련 인물들에 대한 연구(신영전·윤효정, 2005; 신영전·박세홍, 2009) 등도 역시 이를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다. 연변에서 출판된 문헌들의 경우에는 서술의 분량 자체도 적을 뿐 아니라, 용정의과대학 설립 일시나 창설을 주도한 단체의 이름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사실들을 서로 다르게 기재하고 있어 오히려 혼란을 주기도 한다[4].
그러나 이 같은 문제점들을 대폭 보완한 두 편의 성과가 최근 연변에서 발간되었다(鄭逵昌 主編, 2006; 尹宗柱, 2012). 이 두 저서는 용정의과대학의 설립 배경과 과정, 구성원과 운영 등에 대해 많은 분량에 걸쳐 비교적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용정의과대학에 대한 기초적인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대부분 사료적 근거나 출처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고 사실관계 위주의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필자의 분석과 의미 부여도 빠져 있기 때문에 여전히 보완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따라서 용정의과대학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나 학술적인 연구는 한국과 연변 모두에서 거의 이루어진 바가 없는 셈이다.
이에 이 연구에서는 용정의과대학은 누가, 왜 설립하고 어떻게 운영하였는지, 용정의과대학은 그 전후 연변의 의학교육 기관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등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용정의과대학이 왜 중국의 공식적인 의과대학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식민지기 재만조선인 거주의 중심지였던 용정에 세워진 용정의과대학의 역사는 한국 의학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특별히 이 연구는 두 가지 문제에 집중하였다. 우선 해방 직후 연변이라는 ‘혼란기 변경’의 시공간적 특수성에 주목하여 용정의과대학의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용정의과대학은 왜 중국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 연구는 소유권, 운영 주체, 인적 구성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용정의과대학의 역사가 그 전후의 역사와 어떻게 ‘단절’되고 또는 ‘연속’되는지에 주목하였다.
이상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연구에서는 용정의과대학의 출발부터 소멸까지의 전 과정을 연변의 정치 상황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분석하였다. 또한 당대의 기록인 1차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기존 문헌의 잘못된 서술을 바로 잡고, 선행 연구·문헌에서 밝히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을 복원하였다. 여기에서 활용한 1차 자료는 만주국 시기 유일한 한글 신문 『만선일보(滿鮮日報)』와 식민지조선에서 발행되었던 『매일신보』, 『동아일보』, 해방 직후 연변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한글 신문 『한민일보(韓民日報)』, 『연변민보(延邊民報)』, 『연변일보(延邊日報)』 등이다. 이밖에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허청선 외, 2002) 등의 자료집과 용정의과대학 교수였다가 북한으로 들어가 청진의과대학 교원이 된 여창범(呂昌範)이 작성한 ‘이력서’와 ‘자서전’[5]도 활용하였다.
2. 용정의과대학의 전사(前史): 해방 이전 연변의 보건의료 상황과 용정개척의학원
연변지역에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1907년이었다. 이 해는 일제가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용정에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이하 간도파출소)를 설치한 해였다(이규수, 2006; 이왕무, 2016). 간도파출소는 주민 회유책으로 간도자혜의원(間島慈惠醫院)을 설치하여 질병 예방 및 진료 활동을 추진하였다(朝鮮總督府, 1930: 73-4). 1909년 간도협약으로 간도파출소가 폐쇄될 때까지 이 자혜의원에서 진료한 환자는 13,533명에 달했는데 그 가운데 조선인이 10,641명(78.6%)으로 대다수를 차지하였다[6,]. 간도파출소가 폐쇄된 후 자혜의원은 일본총영사관으로 인계되었다(鶴嵨雪嶺, 1997: 112-3).
조선인의 만주 이주 초기부터 용정에 세워진 의료기관 중 중요하게 언급해야 하는 또 하나는 제창병원(濟昌病院)이다. 캐나다 장로회 총회가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제창병원은 1916년 개원하여 초대 원장으로 외과 의사 민산해(閔山海, 영문 이름은 S.H.Martin)가 취임하였다[7,]. 제창병원은 전문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 의사들을 초빙하는 한편, 무료 의료 봉사 등을 통해 재연변 조선인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연변 조선인 사회에서 제1세대 서의(西醫)가 탄생한 것도 제창병원을 통해서였다(주성화 외, 2014: 124-9). 1940년 국제정세가 악화되면서 캐나다 선교사들이 용정을 떠난 후, 제창병원은 조선인 허상훈(許相勳), 문재린(文在麟) 등의 기독교 계열 인사들이 인수하여 운영하였다[8].
만주국 수립 2년 후인 1934년 일본 외무성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용정이 속한 간도총영사관 관내의 병원 수는 15개였는데 이들 중 무려 10곳이 용정에 몰려 있었다(在滿日本帝國大使館 編纂, 1934: 689, 699-700. 표 1 참고). 즉, 용정은 만주국 수립을 전후한 시기부터 연변 보건의료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전(全) 만주에 세 곳밖에 없었던 개척의학원이 용정에 들어선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만주국은 고학력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취업 공간이 되었다. 조선인 의사들에게도 만주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만주국 정부는 의사법(1936), 국민의료법(1943), 의료단체법(1944) 등을 제정해 전시 의료를 강화했는데, 이러한 수요가 조선인 의사들을 불러 모았다. 1939년 초 만주국에는 의사 등록이 급증하였는데 전체 등록자 2,155명 중 중국인 의사는 1937년 6명, 1938년 13명, 1939년 17명에 불과했던 반면, 조선인은 225명(11.8%)이나 되었다. 이후에도 조선인 의사들은 꾸준히 증가해 1945년까지 전체 의사 2,064명 중 261명으로 약 13%를 차지하였다(한석정, 2016: 120-1).
이에 비해 만주국 정부에서 운영하는 의학교육 기관에 합격한 조선인은 극히 적었다. 후술할 개척의학원을 제외한 만주국 정부 직할 의과대학의 1940~1945년 합격자 수를 보면(괄호 안은 총 합격자), 하얼빈의과대학 5명(277명), 신경(新京)의과대학 3명(94명), 신경의과대학 약학과·수의학과 2명(137명), 가목사(佳木斯)의과대학 1명(5명)이었고, 봉천(奉天)의과대학 등에는 조선인 합격자가 없었다(한석정, 2011: 31-3)[10].
이처럼 만주국의 의학교육 기관은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그 곳에서 수학한 조선인 수 역시 매우 적었다. 그러나 1940년 개원한 개척의학원은 조금 달랐다. 하얼빈, 치치하얼(齊齊哈爾), 용정 등 세 곳에 설립된 개척의학원의 조선인 합격자는 전체 합격자 213명 중 25명으로 11.7%였다(한석정, 2016: 121). 이것은 만주국의 조선인 인구 비율인 3.4%와 비교한다면 약 3.5배, 앞서 살펴본 하얼빈·신경·가목사의과대학의 1940~1945년 조선인 합격자 비율 2.1%에 비하면 5배 이상의 수치였다.
그렇다면 개척의학원은 어떠한 배경 속에서 탄생하였을까? 이는 만주국 수립 후 일제가 추진한 ‘개척정책’, 즉 대규모 ‘국책이민’ 정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제는 시험이민 시기(1932~1936년)를 거친 후, 1937년부터 20년 간 만주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100만호의 일본 농민을 이주시킴으로써 만주를 명실상부하게 일본인들의 ‘정착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였다(김기훈, 2002). 만주국의 실질적 경영자였던 관동군이 계획 초기에 상정한 대규모 이민의 주체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1932년부터 시행된 일본인 시험이민이 실패하자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적극적인 만주 이주를 추진하였다(임성모, 2009; 조정우, 2014: 212-3)[11].
이렇게 만주국을 주요한 ‘개척지’로 삼아 일본인과 조선인 등 ‘개척민’의 대량 이주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일제는 개척민들의 보건의료 문제를 단시간 내에 해결하기 위해 ‘개척위생’이라는 이름의 보건의료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민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만주의 추운 기후와 풍토병, 감염병 등에 대한 대책을 마련함으로써, 대량 이민의 입식(入植)에 문제가 없게 하는 것이 ‘개척위생’의 핵심이었다(江田いつみ, 2004). 그리고 이러한 ‘개척위생’의 일환으로 설립이 논의·결정되었던 것이 바로 개척의학원이었다. 개척의학원의 설립 배경과 목적을 잘 보여주는 당시 신문기사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만주로! 만주로! 물결처럼 밀려드는 개척민(開拓民)의 수는 작고 늘어만 가고 잇어 전만 각지에 흩어저 (중략) 대개 이들이 들어가 잇는 곳은 궁벽한 곳이 만흐므로 다른 것도 급하거니와 우선 우환질고(憂患疾苦)에 약 한 첩을 매음대로 써보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이곳에의 의료기관 설비를 관게당국에서 치렴하야 작년 말부터 예의 그 실현안을 협의해오던 바 지난 30일 국무원(國警院: 국무원의 오기임_인용자) 제36회의에서 만주 칙 개척의양성시설확충안(開拓醫養成施設擴大案)을 상정하야 가결되엇으므로 명년부터 곧 실행하기로 되엇다. 그 자세한 내용에 의하면 제1착 가목사(佳木斯)에 의과대학(醫大)을 신설하야 일백오십 명의 생도로서 명년 4월에 개교하야 4개년 수업으로 졸업 후에는 곧 개척의로 배치하기로 되엇고 보다도 한거름 빨른 안으로서는 길림국립의원(吉林國立醫院), 할빈의과대학(哈爾賓醫大), 제제합이시립병원(齊齊哈爾市立病院) 3개소에 개척의학원(開拓醫學院)(假稱)을 부속 설치하야 전문 정도의 기초의학의 수료자를 세 곳에서 모다 50명식 합 150명을 채용하야 강덕(康德) 7년도부터 9년도까지 임상의학을 수득시켜 개척지로 보내어 그네들의 보건위생에 아성이 되게 하리라 한다(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12].
위 기사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개척의학원 설치 입안 당시에는 용정이 그 소재지로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래의 계획과 동일하게 하얼빈과 치치하얼에 개척의학원이 세워진 것과 달리, 길림(吉林)으로 예정되었던 개척의학원만 용정에 설립하는 것으로 변경된 것이다. 그 이면에는 1938년 10월 용정가장(龍井街長)을 중심으로 하는 용정의 유지들이 조직한 동만의과대학설립기성회(이하 동만의대기성회)의 노력이 있었다. 일본인·조선인·중국인 각 3명의 집행위원으로 구성된 이 단체의 목표는 폐쇄된[13,] 용정 일본총영사관 청사에 의과대학(가칭 동만의과대학)을 창설하는 것이었다(전광하 편저, 2000: 178).
동만의대기성회 집행위원들은 기성회 결성 이후 수도 신경으로 가 일본대사관과 만주국 정부의 민생부·총무부·심계처(審計處) 등의 부서에 길림에 건립할 개척의학원을 용정으로 이주하여 설립하자는 의안(議案)을 제출하였다. 당시 간도성(間島省) 성장 차이윈성(蔡運升)도 유관 부서에 거듭 같은 요구를 하며 기성회의 활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의안은 마침내 만주국 참의원에서 동의를 얻었다(鄭逵昌 主編, 2006: 8). 1939년에는 집행위원들이 도쿄(東京)를 방문하여 외무성과 대장성에 일본총영사관 청사를 ‘동만의대’ 교사(校舍)로 불하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고[14,], 끈질긴 노력 끝에 이를 50만 엔에 불하받아 그곳에 의학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것에 대한 승인을 얻어내었다[15].
요컨대 용정의 개척의학원 유치는 이 같은 동만의대기성회가 주축이 된 동만의과대학 설립 추진 운동의 결실이었다. 당시 신문은 용정개척의학원 설립이 “5만 용정 가민(街民)이 주야로 열망하던” 일이며, “5만 가민의 열의와 성의가 중앙 관계 당국을 움직”인 것으로 보고[16,], 만주국 정부가 민간의 여망에 화답한 사례로 평가하였다[17,]. 이후에도 동만의대기성회는 용정개척의학원 개교 문제 등에 깊이 관여하였다[18].
하지만 용정개척의학원의 개교는 여러 차례 난항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초에 1940년 5월 1일을 개교 일시로 확정하였으나[19,], 교사(校舍) 수리 등을 이유로 6월 4일로 연기되었다가 이마저도 미뤄졌다[20,]. 심지어 시험을 통해 합격생을 발표한 후에도 한동안 개교하지 못하고 있었다[21,]. 학교는 문을 열지 않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입학이 예정된 학생들만이 용정에 와서 집을 구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22,]. 결국 용정개척의학원은 「개척의학원 관제(官制)」가 공포(1940. 6. 20)[23,]되고도 열흘 이상 지난 7월에 가서야 개교하였다[24].
용정개척의학원의 학제는 2년의 특과(特科)였다. 초대 원장은 기시다 후쿠마(岸田福馬夫)였고, 1940년 당시 교직원은 17명(이 가운데 일본인이 11명)이었다(鄭逵昌 主編, 2006: 7-8). 용정개척의학원에서는 1941년에 31명, 1942년에 50명, 1943년에 26명, 1944년에 24명, 1945년에 26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이 중 107명을 졸업시켰다(전광하 편저, 2000: 179). 제1기 졸업생의 졸업식은 1942년 3월 21일에 있었다(주성화 외, 2014: 235). 후술하겠지만, 용정개척의학원에 입학하였다가 졸업하지 못한 조선인 중 일부는 해방 후 용정의과대학에서 졸업장을 받기도 하였다. 용정개척의학원 학생의 구성을 살펴보면, 일본인이 2/3를 점하였고 조선인은 1/3 정도였다(鄭逵昌 主編, 2006: 15).
용정개척의학원의 교과 과정은 기초의학과와 임상의학과로 나누어져 있었고, 앞 건물 본관 내에 비교적 완벽한 실험실을 갖추고 있었다(鄭逵昌 主編, 2006: 15). 뒷마당에는 임상의원(개척의학원 부속의원)을 두었는데, 구 용정국립의원이 개척의학원 구내로 이전하여 부속의원이 되었고 국립의원 자리는 간호부양성소로 사용하였다[25,]. 용정개척의학원은 용정 일본총영사관 당시 지하 감옥을 개수한 입원실도 갖추고 있었다[26].
1945년 3~4월경에는 용정개척의학원을 ‘동만의과대학’으로 승격시키고 학제도 6년제(예과 2년, 본과 4년)로 고친다는 구상이 있었지만, 이는 해방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지 못하였다(鄭逵昌 主編, 2006: 8-9)[27]. 해방으로 용정개척의학원은 5년간의 짧은 역사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 소속된 조선인 교사와 학생들은 계속 삶을 이어갔고, 그들 앞에는 해방된 연변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3. 해방 직후 연변의 정세 변화와 용정의과대학의 부침(浮沈)
1) 용정의과대학의 설립과 성격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지 3일 만인 1945년 8월 1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했던 소련군(紅軍)이 연변에 정식으로 진주하였다. 소련군이 들어오자 예전부터 줄곧 연변에 거주하였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곧바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소련군의 허가를 받아 농민동맹·청년동맹·부녀동맹·교육동맹 등의 대중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교육동맹은 폐교되었던 학교를 접수하고 운영을 재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28].
8월 20일 조직된 용정교육동맹은 해방 전부터 용정의 조선인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던 동흥·대성·영신·은진중학교 등을 운영하는 한편, 총회를 소집하여 용정개척의학원의 복교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허청선 외, 2002: 759). 이에 따라 8월 26일 용정교육동맹 임계학(林啓學) 위원장은 용정개척의학원을 접수하였다. 이후 용정교육동맹은 1946년 3월 1일 용정의과대학이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延邊行政督察專員公署, 이하 전원공서) 관할로 넘어가기 전까지 5~6개월 동안 이 학교의 운영 주체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같은 용정개척의학원에 대한 용정교육동맹의 공식적인 접수 이전부터 이곳 출신 조선인들은 스스로 호교(護校)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용정개척의학원 내 조선인 교사와 학생들은 일본인의 수중에서 가능한 한 빨리 교사(校舍)와 기기설비 등을 접수하여 다시 새로운 의과대학을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호교활동단을 조직하였는데,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용정개척의학원 교원 출신 정규창(鄭逵昌)과 학생 임정근(任正根), 신경하(辛京夏) 등이었다. 이들은 8월 19일 소련 홍군을 찾아가 10자루의 총을 수령해 학교를 지켰다(鄭逵昌 主編, 2006: 17-8). 용정교육동맹의 용정개척의학원 접수는 바로 이러한 움직임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9월 12일 용정개척의학원의 교지(校址)에서 용정의과대학 성립대회가 거행되었다.
이후 용정의과대학은 행정관리 인원과 운영기구 및 각 과목 담당 교수 등이 확정되면서 점차 의과대학의 틀을 갖추어갔다. 용정의과대학이 채택한 학제는 본과를 포함한 6년제 장학제(長學制)였다. 이는 용정개척의학원의 2년제 특수과 제도뿐 아니라 만주국 시기 4년제 의과대학제 및 식민지기 조선의 4년제 의학전문학교제와도 구별되는 것으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일본제국대학 의학부의 예과 2년, 본과 4년 과정과 유사한 것이었다(鄭逵昌 主編, 2006: 19).
6년 과정은 전기 2년, 후기 4년으로 나누었는데, 전기에는 전문적으로 예비교육을 진행하였다. 학생은 전기반 1학년에 93명, 2학년에 17명이었고, 후기반 1학년 67명, 2학년 45명, 3학년 3명이었으며, 중국인반도 설치하였다(박규찬, 1991: 214-5). 전기 2년 동안의 학습 과목은 훈련, 인민(정치 포함), 국어, 외국어, 수학, 도학(圖學), 물리, 화학, 생물 등이었다(허청선 외, 2002: 760).
용정의과대학의 신입생은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다. 시험은 9월 27~28일 양일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300명에 가까운 지원자가 몰려들었으며 그 중 70명이 합격하였다[29,]. 10월 15~16일에는 3학년, 즉 후기 1학년으로 입학할 보결생 시험도 실시하였다[30,]. 10월에는 본과생 제1기 졸업생 2명을 배출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1944~1945년에 용정개척의학원으로 입학하여 용정의과대학에서 계속 학업을 이어간 사람들이었다. 호교활동을 주도했던 임정근과 신경하도 1945년 4월 개척의학원에 입학한 학생들로, 계속하여 용정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鄭逵昌 主編, 2006: 16, 21). 용정의과대학은 용정개척의학원의 학생들을 그대로 흡수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설립 당시 용정의과대학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이는 당시 연변의 정세와 그곳에 살았던 조선인들의 ‘조국관(祖國觀)’을 이해해야 해명할 수 있다.
앞서 서술하였듯이 해방 당시 만주지역에는 2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살고 있었고, 그 중 연변의 조선인들은 다수가 현지 정착을 선택하였다[31].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도 연변의 조선인을 가능한 한 현지 정착으로 유도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조선인이 연변 총 인구의 8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조선인의 정착은 연변의 안정된 지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연변지역 조선인들에게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다.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국공내전(國共內戰)이라는 전시상태였다. 연변지역은 전쟁수행을 위한 중공의 후방근거지로 지목되었고, 연변 조선인들이 가지는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중공이 연변지역에 대한 확고한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중공의 전쟁 수행에 연변 조선인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연변지역 조선인들이 ‘한반도 조국관[32]’을 가지고 다양한 논의와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연변 조선인들의 ‘한반도 조국관’이 집단적으로 표출된 첫 사례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하 반탁운동)’이었다. 한반도를 반탁운동의 물결에 휩싸이게 했던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은 연변 조선인 사회도 뒤흔들었다. 연변을 포함한 만주 전역에서 조선인들의 격렬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1946년 1월 7일 연길에서 열린 반탁집회에는 3천 명이 모여 애국가를 합창하고 “조선의 완전 독립”이라는 구호를 제창하였다[33]. 이 행사를 주관한 것은 연변인민민주대동맹(延邊人民民主大同盟, 이하 민주대동맹)이었다.
연변지역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1945년 10월 27일에 조직한 민주대동맹은 회원 수 14만 5,000명의 대규모 대중조직으로, 회원 중 94.5%에 달하는 13만 7,000여 명이 조선인이었다. 민주대동맹은 1946년에 하반기 중공의 연변 장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연변 거주 조선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면서 민족성을 강하게 드러내었고, 연변 거주 조선인의 유대와 단합을 도모하였다(문미라, 2014: 138-9). 이러한 행사에서는 태극기와 같은 민족의 상징물이 등장하였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구호와 애국가 제창 등이 행해졌다. 지금의 ‘조선족’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해방 직후에는 가능했던 것이다. 용정의과대학은 이처럼 ‘(조선)민족’이라는 요소가 상당한 힘을 발휘하는 분위기 속에서 탄생하였다.
용정의과대학 창설의 주체였던 용정교육동맹이 이후 민주대동맹의 전신인 연변노농청총동맹(延邊勞農靑總同盟)으로 흡수되고, 용정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민주대동맹 지도부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는 점(문미라, 2014: 142)도 용정의과대학의 ‘민족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민주대동맹이 조직된 후, 용정의과대학에 입학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민주대동맹 위원장의 추천서를 받아야 했을 만큼[34,], 민주대동맹은 용정의과대학의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용정교육동맹 위원장 임계학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東滿區域局) 집행위원 출신이자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바 있는 인물로[35,], 해방 이전부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해온 사람이었다[36].
결론적으로 용정의과대학은 자신의 조국을 한반도라고 생각한 연변 조선인들이 설립한 의과대학이었다. 해방 직후 연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발행되었고, 용정의과대학 입시 소식과 합격자 명단을 꾸준히 보도하였던 『한민일보』가 ‘단군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연변 조선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적어도 전원공서로 그 관리가 넘어가기 전까지의 5~6개월 동안 용정의과대학은 전적으로 연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용정교육동맹과 이를 흡수하여 만들어진 민주대동맹의 주도 하에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공립(公立)으로의 전환과 개칭(改稱)
1945년 11월 12일 이른바 ‘연안(延安)간부단’이 연변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33명으로 모두 중공에 소속된 중국인이었다. 연안간부단은 다양한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었던 연변을 중공 중앙의 구심력 아래로 확고히 끌어들였다. 이들은 제일 먼저 기존의 중공 연변위원회를 해체시키고 중공 연변지방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1945. 11. 15), 위원 7명 중 조선인은 소련에서 온 동북항일연군 출신 강신태(姜信泰)와 연안에서 온 조선의용군 간부 두 사람 뿐이었다(염인호, 2010: 105-6). 이전까지 각지 교육동맹이나 민주대동맹에서 활동하던 연변지역 조선인 공산주의자는 단 한 명도 연변지방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여 연변의 최고 지도자들은 조선인에서 중국인으로 바뀌었다.
연안간부단의 두 번째 조치는 연변의 행정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11월 20일 연길에서 열린 연변인민대표대회에서는 새로운 정권으로서 전원공서 및 정무위원회를 발족할 것을 결의하였다. 전원공서의 책임자인 전원(專員)과 부전원은 모두 중국인이었다[37,]. 전원공서는 이후 연변의 최고 행정기관으로서 연변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임찬혁, 2012). 전원공서가 출범하자 이전까지 연변지역에서 실제 ‘정권’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민주대동맹의 행정부로서의 기능은 중지되었다(문미라, 2014: 158).
용정의과대학이 학교 관리를 전원공서에 넘긴 시기는 1946년 3월 1일이었다(박규찬, 1991: 214). 용정의과대학의 관리 주체가 바뀌었다는 것은 학교의 소유와 운영 주체가 변하였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전원공서는 연안간부단이 주축이 되어 수립한 행정조직이었으므로, 이때부터 용정의과대학은 ‘사립’에서 ‘공립’[38,]기관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용정의과대학의 학생들은 중공이 필요로 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국공내전을 의료적인 측면에서 지원하는 일이었다. 용정의과대학 학생 130명은 단가대(担架隊)를 조직하여 제1차 장춘전투(1945. 4. 15~18)[39,]에서 부상당한 부상병을 이송하고, 3~4학년 학생들의 경우에는 이들을 직접 치료하였다(鄭逵昌 主編, 2006: 21).
이 시기 용정의과대학은 용정시 동명상(東明廂) 길순로(吉順路) 제5패(牌)에 위치한 14,970.463평의 토지와 36동, 8,973.33평방미터의 건물을 자산으로 가지고 있었다(허청선 외, 2002: 758). 하지만 용정의과대학의 재정 상태는 굉장히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표 2> 참고). 아래 표를 분석해보면, 수입 중 학생으로부터 받은 입학금, 수업료, 실습비, 연료대를 모두 합쳐도 전체 수입의 12.4%에 불과했고, 39%를 의료 수입에, 36.9%를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출은 봉급이 차지하는 비율이 59.9%로 가장 컸고, 다음으로 약품비가 18.4%였다. 회계 상태가 보여주는 것은 ①의료 수입이 주수입원이고 학교 재정에서 약품비를 지출목으로 잡은 것으로 보아 진료 기능과 교육 기능이 거의 구별 없이 운영되었다는 점, ②기부금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③보조금이 없으면 적자를 면하기 어려운 재정 상태라는 점 등이다.
용정의과대학 운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경비의 마련이었다. 용정의과대학은 교직원들의 임금도 제대로 줄 수 없어, 교사들에게 개인적인 진료나 의원 운영을 허락하여 스스로 경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용정의과대학 내에서 교육에 종사한 적지 않은 교원들은 의원 또는 진료소를 운영하며 생계를 해결하였다. 예컨대 김광찬(金光燦)은 김씨의원에서, 최관실(崔寬實)은 동인의원에서, 정규창은 정씨의원에서, 김현수(金賢洙)는 치과의원 등에서 근무하였다. 봉급만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겨울에는 학생들을 동원해 땔감을 구해야 할 정도로 용정의과대학의 재정은 전반적으로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鄭逵昌 主編, 2006: 21-2).
이와 같은 재정적 어려움은 학교의 관리를 길림성(吉林省)으로 넘기는 명분이 되었다. 전원공서 전원과 길림성정부 부비서장을 겸임하고 있었던 중국인 쉬위앤취앤(徐元泉)은 1946년 10월 3일 용정의과대학 설립 1주년 기념대회에서 용정의과대학을 ‘길림성립용정의과대학’으로 전환한다고 선포하였다(鄭逵昌 主編, 2006: 107). 이는 학교의 운영권이 전원공서를 거쳐 상급 기관인 길림성으로 이관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재정상의 어려움이 운영권 이관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국공내전의 추이와 이와 연동한 연변의 정치상황 변화였다. 1946년 5월 만주에서는 사평전역(四平戰役)이 발발하여 국민당과 중공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魏碧海, 2000: 102-49). 사평전역에서 패배한 중공은 만주의 중앙부를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8월 17일 중공 길림성위원회, 길림성정부, 길림성군구(軍區)가 모두 연변으로 이전하여 전원공서와 함께 사무를 처리하였다(임찬혁, 2012: 219-20). 이러한 점에 비추어보면, 용정의과대학의 운영권이 전원공서에서 또 다른 성격을 가진 길림성정부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전원공서가 길림성정부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면서 용정의과대학도 자연스럽게 길림성 관할로 바뀐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운영 주체가 길림성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용정의과대학의 재정난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도 재정적 어려움이 운영권 이관의 유일한 이유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학교 측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길림성정부에 보고하였지만, 모든 것을 국공내전에 집중하고 있던 길림성정부는 학교가 처한 경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鄭逵昌 主編, 2006: 22). 결국 1947년 3월 말 길림성위원회, 길림성정부, 길림성군구는 길림성립용정의과대학을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로 인계하여 관리하기로 결정하였고, 4월 초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가 용정의과대학을 정식으로 접수하여 교명을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으로 개칭하였다(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학교력사연구회 편, 2006: 54). 이로써 ‘용정의과대학’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되었다.
3) 용정의과대학 이후 연변의 의학교육 기관
용정의과대학이란 이름이 사라진 이후, 용정과 이곳을 포함한 연변에서는 여러 의학교육 기관이 탄생했다가 소멸하였다. 첫 번째 변화는 앞서 언급한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으로의 합병이다. 그런데 동북군정대학으로의 흡수는 몇몇 조선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던 것으로 보인다. 합병 관련 구체적인 사안을 토론할 때, 학제와 인사배치 및 관리 등의 측면에서 의견의 통일을 보기 어려웠다는 서술이나(尹宗柱, 2012: 67) 합병 이후 일부 교사와 학생들이 군정대학으로의 편입을 반대하여 북한으로 향하였다는 설명(鄭逵昌 主編, 2006: 22)은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갈등의 이유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으로의 개칭이 단순히 교명(校名)의 변화가 아니라 그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군정학교는 해방 전부터 중공이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기관이었다. 중일전쟁기에 설립된 항일군정대학은 해방 후 만주에 옮겨져 동북군정대학으로 새롭게 발족하였다. 이제 여기에 소속된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중공의 방침과 정책을 학습해야 했고, 많은 조선인들이 군정대학 재학 중에 중공에 입당하였다(임찬혁, 2009: 502-10)[42].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로의 통합은 용정의과대학으로 출발한 연변의 의학교육 기관이 중공 영향력 아래로 완전히 귀속되는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용정의과대학이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이 된 후 학교의 운영 목적·운영 조건·강의 내용 및 정치사상 교육 등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선, 이 의학원의 운영 목적은 당시 주요 임무였던 국공내전에 급히 필요한 의료인력을 가능한 한 빨리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학제도 1년으로 단축되었다(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학교력사연구회 편, 2006: 148). 뿐만 아니라 정치사상 교육을 강화하여 자아비판과 같은 활동을 통해 학생들에게 정치 의식을 심어주고, 토지조사·계급조사·성분규정 등의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계급의식을 고취시켰다(尹宗柱, 2012: 69). 요컨대 중공의 국공내전 수행에 가장 걸맞은 의료인력을 배출하는 것이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의 존재 이유였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의 원장과 교육장이 중공에서 파견한 중국의과대학 출신 리전쉰(李震勛), 추이시우한(崔秀漢)으로 변경된 것(尹宗柱, 2012: 67)은 이러한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후술하겠지만, 그 이전까지 용정의과대학의 관할권이 전원공서와 길림성정부로 바뀌는 와중에도 교장은 연변 조선인들이 추대한 김광찬과 노기순(盧基舜)이 계속 역임하고 있었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의학원 소속 학생들의 첫 번째 수원지(水源池)는 예전 용정의과대학의 1~2학년 본과생 및 예과생이었다(鄭逵昌 主編, 2006: 24).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은 1948년 1월에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은 중국의과대학[43,]이 접수하여 중국의과대학 제1분교(이하 제1분교)로 다시금 이름을 바꾸었다. 중국의과대학은 1948년부터 만주에 네 곳의 분교를 연달아 건립하여 각 분교마다 ‘전공과(專科) 중점제’의 1년제 학제를 시행하였는데, 용정의 제1분교는 내과 중심 대학이었다(尹宗柱, 2012: 71)[44].
이 같은 상황 변화의 배경 역시 국공내전의 격화였다. 당시 중공의 입장에서 만주는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지역이었고, 단기간 내에 국공내전에 필요한 의료인력을 대량으로 배양할 필요가 절박하였다. 이에 따라 중공의 통일적 지도를 받는 중국의과대학 분교 체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1분교에서는 정치사상 교육도 더욱 강화되어, 학생들에게 미소(美蘇) 문제, 공산당과 국민당, 토지개혁, 혁명과 반(反)혁명, 계급투쟁, 혁명적 인생관, 당(중공)의 지도 견지 등의 내용을 가르쳤다(鄭逵昌 主編, 2006: 28).
이처럼 연변에 있던 기관과 사람 등 모든 것이 국공내전의 승리에 동원되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조선인들의 ‘민족’ 지향성은 억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연변지역 조선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국공내전의 전황이었고, 이 전쟁을 수행하는 중공의 입장이었다. 용정의과대학 역시 국공내전의 수행에 초점을 맞춘 의학교육 기관인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과 제1분교로 재편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주에서의 국공내전이 중공의 승리로 귀결되자 연변의 의학교육 기관은 다시 한 번 재편되었다. 1949년 1월 말 중공은 용정에 있던 제1분교와 하얼빈 소재 제2분교를 합병하여 하얼빈의과대학을 새로 건립할 것을 결정하고, 제1분교 구성원들에게 가능한 빨리 학교를 하얼빈에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45,]. 이후 제1분교는 즉각 이사 작업에 투입되었고, 일부 기기와 실험 용품 등을 싸서 1949년 3월 초 전차로 용정을 떠나 3월 12일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4월 16일, 제1분교와 제2분교의 합병 개학식을 거행하였고, 이와 동시에 하얼빈의과대학의 성립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鄭逵昌 主編, 2006: 29-30).
제1분교의 이전으로 연변지역 의학교육에는 공백이 생겨났다. 또 제1분교가 이사를 갈 때 남은 교원들은 여전히 용정에 있었고, 구 교사(校舍)와 남겨진 기기설비 및 시료와 도서 등도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鄭逵昌 主編, 2006: 44). 이를 기반으로 용정의과대학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학교가 4년제의 ‘연변의과전문학교’이다(이하 연변의전). 연변의전 설립 당시 연변은 중공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지만, 이 학교의 개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중공과 그들이 파견한 인사가 아니라 연변의 조선인들이었다.
그간 국공내전으로 위축되어 있던 연변 조선인 사회는 1948년 중반에 들어 또 한 번 변화를 맞는다. 이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공내전에서 만주의 전황(戰況) 변화이다. 중공은 1947~1948년에 걸친 하계·추계·동계 공세를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고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제 연변에 밀집되어 있던 중공의 군대와 중국인 간부들은 연변을 떠나 관내(關內) 지역에서의 국공내전을 준비해야 했다. 중국인들이 떠나자 그 자리를 다시 조선인들이 담당하게 되었고, 연변 조선인 사회의 위상도 향상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전원공서의 전원도 조선인 임춘추(林春秋)[46,]가 맡게 되었다(염인호, 2010: 179-81).
더욱 중요한 계기는 한반도의 정세 변화였다. 주지하듯이 1948년 한반도에서는 남북에 각각 다른 정부가 들어섰다. 특히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인해 연변의 조선인 사회는 점차 북한의 영향력 속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북한의 영향력을 연변에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임춘추였다. 북한은 정부 수립을 계기로 연변 조선인 사회에서 ‘조국’ 정부 수립 축하행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그들 사이에서 ‘(북한에 대한) 조국애’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북한 정부 수립 10일 뒤인 9월 19일에 연길에서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정부수립 경축좌담회’는 애국가 연주로 행사의 시작을 알렸고, 북한 국기와 김일성의 초상화가 내걸렸다(염인호, 2010: 189-94). 중공이 연변을 장악하기 전인 1946년 초의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이런 정세를 배경으로 하여 연변의전 창립이 추진되었다. 먼저 1948년 7월 7일 연변의 유지 30여 명이 모여 그 해 가을부터 민간이 운영하는 연변의학교(가칭)를 운영할 것을 결정하고, 그 이튿날 전원공서 교육과의 동의를 얻었다. 임춘추도 “그것은 참 시기에 적합한 공작”이고 “정부로서도 열정적으로” 돕겠다고 그들을 격려하였다[47,]. 이어 8월 1일 연변의학원창립기성회(이하 연변의전기성회) 결성식을 거행하고 기성회 주임으로 임민호(林民鎬)를 선출하였다[48,]. 이즈음 학교 명칭에 대한 토론이 벌어져, 몇몇 사람들이 ‘용정의과대학’이라는 이름을 회복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연변의과전문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이 결정되었다(鄭逵昌 主編, 2006: 43)[49].
연변의전기성회가 공식 활동에 착수한 이후부터 연변의전 설립 준비는 연변 조선인들의 많은 지지와 관심을 받으며 진행되었다[50].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연변일보』는 세 차례에 걸쳐 연변의전 학생 모집 광고를 실었다. 광고에 따르면 모집 인원은 본과 50명과 전수과(專修科) 50명이었고, 4년제인 본과는 4년제 중학 졸업 혹은 동등 학력을 가진 17세 이상 25세 미만인 자, 1년 과정의 전수과는 2년 이상의 의료 경력을 가진 25세 이상 35세 미만인 자가 응시할 수 있었다. 입학시험은 9월 23~25일 3일에 걸쳐 실시하고, 합격자 발표는 시험 종료 바로 다음날인 9월 26일에 있을 예정이었다.51) 학생 모집 광고 전문은 아래와 같다.
延邊醫科專門學校 學生募集 廣告
一. 목적 : 신민주주의 보건위생 사업의 전문 인재의 양성을 목적으로 함
二. 科別 : 1. 本科 2. 專修科
三. 수업 연한 : 1. 본과 4년 2. 전수과 1년
四. 모집 인원 수 : 1. 본과 50명(남녀) 2. 전수과 50명(남녀)
五. 응모 자격
1. 정치상 순결하고 신체 건강하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기 원하는 자
2. 4년제 중학 졸업 혹은 동등 학력을 가진 자로서 17세 이상 25세 미만 자
3. 전수과는 2년 이상의 助醫공작 경험을 가진 자로서 25세 이상 35세 미만 자
六. 응모 수속
1. 졸업증서나 학력증명서(출신 학교나 市區정부의 것), 거주증명서, 입학지원서, 건강진단서를 제출할 것(단 입학지원서와 이력서 용지는 본교에서 이를 발급함)
2. 전수과는 2년 이상의 조의공작증명서(자격 의사의 것)와 이력서를 제출할 것
3. 응모자는 반드시 각 해당 구 이상 정부기관의 紹介信을 제출할 것
4. 시험비 5천원(단 시험 시의 筆△ 숙식 등 費는 학생이 自擔)
七. 응모 기간 : 9월 1일부터 9월 12일까지
八. 응모 장소 : 연변의과전문학교기성회(인민광장 서측, 전화 504번)
九. 시험 과목
1. 본과 : 수학(代數 幾何), 물리, 화학, △文, 口試, 신체검사
2. 전수과 : 各科 기본학력의 查定, 口試, 신체검사
十. 시험 시일 : 9월 23, 24, 25 3일간 매일 오전 9시부터
十一. 시험 장소 : 연길시 중앙소학교
十二. 합격 발표 : 9월 26일
十三. 수업 기간 중의 서적, 숙식 △費는 일체 학생 자담으로 하는 하에 형편에 따라 월사금을 받음. 단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는 월사금의 반액 혹은 전액을 면제함
十四. 본교는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에서 직접 △△함
十五. 교사는 당분간 연길시 조양△元천주교당으로 함
1948년 8월 28일 연변의과전문학교
예정대로 실시된 시험에서는 본과 지망생 140명 이상, 전수과 지망생 46명이 지원하였고, 이 가운데 본과 64명, 전수과 15명, 후보생 21명을 최종 합격시켰다[52,]. 학생 모집을 마무리한 지 5일 후인 1948년 10월 1일, 연변의전은 임시 교사(校舍)인 연길 천주교회 건물에서 정식으로 개교식을 가졌다. 전원공서 전원 임춘추, 부전원 문정일(文正一) 등 전원공서와 중공 연변지방위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다수 참석한 개교식에서는 연변의전기성회의 “승리적 해소”를 선언하고, 앞으로 학교는 동사회(董事會)에서 운영할 것을 선언하였다[53].
연변의전은 현재 연변대학 의학부의 공식적인 전신이다[54,]. 학교가 만들어진 지 6개월 만인 1949년 4월 연변대학이 설립되면서 연변대학 의학부(5년제)로 편입되기 때문이다. 연변대학은 연변의전뿐 아니라 연변고등사범학교, 연변공업학교 등 이미 연변지역에 세워져 있던 학교들을 토대로 설립되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연변의전 교장이었던 노기순은 연변대학주비위원회(延邊大學籌備委員會)의 위원으로 연변대학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염인호, 2010: 208-39).
주목해야 할 것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에도 연변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연변대학 창설 움직임이 있었고(염인호, 2003: 152-4), 이때 연변대학의 기반이 될 학교로 지목된 것이 용정의과대학이었다는 점이다[55,]. 즉, 연변에 민족대학 설립 논의가 있을 때 용정의과대학과 연변의전은 모두 그 토대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용정의과대학의 임무와 역할이 그대로 연변의전으로 이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용정의과대학은 사라졌지만 그것이 가졌던 의미는 연변의전과 이를 전신으로 삼는 연변대학의 설립으로 계승되었다[56].
4. 변경사로서 용정의과대학의 역사: ‘단절’과 ‘연속’
1) 용정의과대학 구성원과 그 전후의 경력
용정의과대학은 해방 후 한 달도 안 된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곳의 교사들은 해방 이전부터 연변이나 그 주변 지역에서 의료 분야에 종사하던 사람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용정의과대학의 제1대 교장(1945.9~1946.8)은 용정 금산의학원 원장이었던 김광찬으로, 용정에서 다년간 의사로 일한 연변의 매우 명망 있는 외과 의사였다(尹宗柱, 2012: 62)[57,]. 김광찬은 1896년 10월 3일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에서 태어나 1924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함경북도립의원 의원(醫員)에 임명되어 회령(會寧)에서 근무하다가 1932년 2월 의관(醫官)으로 승진한 인물이었다[58,]. 그가 언제부터 용정에서 금산의학원을 운영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34년부터 1937년까지 함경북도립의원 용정출장원진료소에서 근무한 것이[59] 용정으로 이주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광찬에 이어 제2대 교장(1946.10~1947.3)으로 부임한 사람은 노기순이었다[60,]. 노기순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교 부원장, 제1분교 교수를 차례로 역임하다가 연변의전 교장으로 부임하였고(尹宗柱, 2012: 67, 73-5), 1957년 6월 사망할 때까지 연변대학 의학부 부장 겸 생물화학 교수로 근무하였다. 해방 이후 연변의 의료교육 기관은 통폐합되고 그 명칭이 계속해서 달라졌지만, 노기순은 이 모든 기관에서 지도급 인사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노기순은 해방 후 연변 의료교육 기관의 역사 그 자체였다. 현재 연변대학 의학부에서는 노기순을 자신들의 ‘창시자’ 5인 중 한 명으로 기리고 있다(鄭鳳霞 主編, 1995: 24).
교장 바로 다음 지위였던 학감(學監)은 이기봉(李基鳳)이 맡았다. 1933년 3월 25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이기봉은[61,] 1936년 충청남도립 대전의원에서 의원으로 근무하다가 1937~1939년에는 평안남도립 진남포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62,]. 그 역시 언제 연변으로 거처를 옮겼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만주국 시기 연길에 있었던 간도성립 제1의원 안과 과장을 역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尹宗柱, 2012: 64). 이기봉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63,]. 1946년 당시 용정의과대학 교직원들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64].
위 표의 용정의과대학 교직원을 의사 출신 중심으로 정리해보면, 교수 3명 중 2명이 40대 이상이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 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이다. 조교수의 대부분은 30대로, 만주국 시기의 신경의과대학과 하얼빈의과대학 출신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더욱 젊은 11명의 강사 중 3명은 의사검정고시를 합격한 사람이었으며 용정개척의학원과 용정의과대학 출신이 각 1명씩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원적을 확인할 수 있는 29명 중 1명을 제외한 28명의 원적이 한반도였으며, 그 약 62%가 함경북도 출신이었다. 즉, ①용정의과대학의 교장을 비롯한 의사 출신 교수 중 대다수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고, ②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을 졸업한 이들이 용정의과대학의 운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용정의과대학이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에 흡수된 이후에도 용정의과대학 출신 교원들은 여전히 지도급 인사로 배치되거나 교사로 근무하였다. 의학원의 원장은 연안에서 온 중국의과대학 출신 리전쉰으로 변경되었지만 부원장은 용정의과대학의 교장이었던 노기순이 맡았다(尹宗柱, 2012: 67, 69). 또한 정규창, 김세창, 여일범 뿐 아니라 용정의과대학의 일본인 교원들도 1947년 3월부터 12월에 걸친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 시기에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鄭逵昌 主編, 2006: 23-4)[66].
이와 같은 상황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제1분교 시기부터였다. 이 때부터는 학교 지도급 인물 중에서 용정의과대학 출신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제1분교의 교장은 중국의과대학 총교(總校)에서 파견한 중국인 런궈샹(任國祥)이었으며, 바로 직전까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 부원장을 맡고 있었던 노기순은 더 이상 학교 지도자 직책을 담당하지 않고 단지 교원 신분으로 수업 업무만을 맡았다(尹宗柱, 2012: 72). 또한 중국의과대학은 21기 졸업생을 대거 만주로 파견하여 제1분교에서 업무를 맡아보게 하였다(이화림 구술, 2015: 361)[67]. 이로써 원래부터 연변지역에서 의료 분야에 종사했던 인물들이 제1분교 교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연변의전 시기부터 다시금 연변 조선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연변의전의 교장은 노기순이었는데, 개교 직후 처음 며칠간은 노기순이 용정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윤(楊尹)[68,]이 임시로 대리교장을 맡았다. 노기순은 1948년 10월 중순 제1분교에서 전근 수속을 밟아 연변의전 교장직에 정식으로 부임하였다(尹宗柱, 2012: 75). 용정개척의학원 교원 출신으로 해방 직후 호교활동을 주도하고 용정의과대학교원으로 근무했던 정규창은 연변의전의 의학전공 주임이 되었다(崔昌海 主編, 2003: 2). 이밖에 연변의전 초기 교원으로 원일우(元逸愚), 이정재(李楨宰), 최관실, 신경하, 이만숙(李萬淑), 박재순(朴在淳), 조웅길(趙雄吉) 등이 있었다(崔昌海 主編, 2003: 4)[69]. 이들은 연변대학 의학부에서도 그대로 교원직을 이어갔다.
이상에서 살펴본 인물 중 용정의과대학의 성격이나 그 전후의 인적 연속성을 특히 잘 보여주는 사람으로 노기순, 정규창, 신경하, 최관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 가운데 이미 연구가 나와 있는 노기순[70]을 제외한 세 명의 경력을 다시 정리하고,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여 설명한 후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짚어보자.
우선 정규창은 1941년 10월 신경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용정개척의학원에서 임상의사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다(鄭逵昌 主編, 2006: 15).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는 용정의과대학 조교수,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 교원을 거쳐 연변의전 의학전공 주임이 되었다[71,]. 정규창은 연변대학 의학부 부학부장(1953), 부속의원 원장(1956. 9), 연변의학원 부원장(1979. 11) 등 연변대학 의학부 시기에 더욱 큰 역할을 맡았고, 연변대학 의학부 ‘창시자’ 5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鄭鳳霞 主編, 1995: 105)[72]. 용정개척의학원 호교활동에 앞장서면서 용정의과대학 창립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정규창이 연변대학의학부의 창설과 교육활동에도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정규창과 함께 용정개척의학원 학생으로서 호교활동을 주도했던 신경하는 1945년 4월 용정개척의학원에 입학하여 용정의과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갔고, 용정의과대학의 졸업증서를 받았다(鄭逵昌 主編, 2006: 21). 그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에서도 학습하였고 1948년 3월 제1분교를 졸업한 후 연변의전 교원으로 임명되었다. 신경하 역시 연변대학 의학부 시기에 안과 주임(1956. 3) 등을 거쳐 1980년 12월에는 부속의원 원장 겸 의료계 주임이라는 고위직에 올랐다(鄭鳳霞 主編, 1995: 105).
용정의과대학에서 진단학과 산부인과학을 가르쳤고 연변의전과 연변대학의학부 교원을 역임한 최관실은 제창병원 산부인과 의원이라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鄭鳳霞 主編, 1995: 178). 1932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최관실은 1년 동안 모교에서 임상 연구를 하다가 용정으로 이주하여 동춘의원이라는 개인 병원을 운영하였다. 당시 그는 의술이 뛰어난 의사로 매우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73,]. 민간 의료기관의 의사였던 최관실이 용정의과대학 교원으로 초빙된 것은 이런 뛰어난 의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정의과대학 이후의 의료교육 기관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최관실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연변의전 창설 움직임이 있던 시기이다. 그는 연변의 전기성회가 결성되기 이전인 1948년 7월, 연변의전 설립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30여 명 중 대표(5인)로 선출되어 전원공서와 연변의전 설립에 관한 교섭을 진행하였다[74]. 최관실의 이 같은 이력은 연변 조선인이 주축이 되어 창립된 용정의과대학과 연변의전이 연변에서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민간 의료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처럼 용정의과대학 시기 이후까지 연변에 남아 계속 의료계통에 종사한 교원이 있었던 반면 북한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 현재 확인되는 사람은 이기봉과 여창범이다. 이 중 여창범은 1948년 11월 23일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이력서’와 ‘자서전’을 남겼다. 여기에는 여창범의 출생지, 학력 및 경력 가족관계 등의 정보가 망라되어 있다[75]. 자서전에 따르면 여창범은 1920년 7월 11일 연길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용정으로 이주한 여창범은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하얼빈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42년 12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설비와 급료 대우가 좋은 병원에서 일하기 위해 만주국 고등문관시험 기술직에 응시하여 합격하였고, 1943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하얼빈시립병원, 흑하(黑河)성립병원에서 근무하였다. 용정의과대학 교원 중 만주국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출신이 있었다는 것은 이전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1945년 9월 고향이나 다름없는 용정으로 돌아온 여창범은 용정의과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부속병원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1946년 12월까지 용정에서 근무하다가 1947년 1월 청진으로 들어왔다. 여창범이 용정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입북한 이유는 다소 뜻밖인데, 그것은 처가의 청진 이주와 아내의 간청 때문이었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여창범이 북한 청진중앙병원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주선한 인물이 용정의과대학 제1대 학감 이기봉이라는 사실이다. 이기봉이 언제 입북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당시 조선인민군 군의처 군의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여창범의 사례는 용정의과대학을 매개로 한 인연이 북한으로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용정의과대학의 출신이 연변뿐 아니라 북한 의료인력으로서도 활약하였음을 확인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2) 용정의과대학 전후 의학교육 기관과의 관계
이 절에서는 용정의과대학과 그 전후 연변 의료교육 기관과의 관계를 소유권, 운영 주체, 운영 목적이라는 기준에 기초하여 단절과 연속의 관점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 것과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용정의과대학의 성격을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용정의과대학이 보여주는 단절과 연속은 변경사로서 용정의과대학의 역사를 더욱 두드러지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용정개척의학원과의 관계이다. 만주국 정부가 개척지 의사 양성을 목적으로 운영하던 용정개척의학원은 해방과 함께 ‘용정의과대학’이라는 새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학교의 소유와 운영 주체, 운영 목적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구체적으로, 만주국 민생부에서 용정교육동맹(1945. 9. 12~1946. 2), 전원공서(1946. 3. 1~9), 길림성(1946. 10. 3~1947. 4)으로 소유 및 관할 주체가 바뀌었고, 운영 주체도 일본인 교장과 교수에서 연변 조선인 지도부와 교원 중심으로 전환되었다[76].
그러나 모든 것이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용정개척의학원의 2년제, 만주국 시기 4년제 의과대학제 및 식민지기 조선의 4년제 의학전문학교제와도 구별되는 용정의과대학의 6년제 학제는 용정개척의학원을 동만의과대학으로 승급하고 학제를 6년제로 개정할 것을 준비하던 구상과 관련이 있었다(鄭逵昌 主編, 2006: 19). 무엇보다 정규창(교원), 신경하(학생)로 대변되는 인적 연속성은 매우 강고한 것이었다. 이 두 사람 외에도 백남룡(白南龍, 용정개척의학원 미생물 실험실 조수), 임웅일(林雄一, 용정개척의학원 실험실 주임) 역시 용정의과대학에서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鄭逵昌 主編, 2006: 16).
인적 연속성은 용정의과대학과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제1분교의 사이에서도 확인된다. 용정의과대학 교장 노기순의 존재는 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와 제1분교 소속 학생 중 상당수가 조선인이었다는 점도 용정의과대학과 유사하다. 또 두 학교 모두 용정의과대학의 건물을 이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영 목적, 학제의 측면에서는 용정의과대학과 단절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과 제1분교는 국공내전에 필요한 의료인력을 단기간 내에 대량 육성하는 것이 제1의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교육기간도 1년으로 줄였다.
하얼빈의과대학과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다. 제1분교를 제2분교와 합병하여 하얼빈의과대학으로 만드는 것은 중공의 공식적인 결정이었다. 일부 교원과 시설들도 하얼빈으로 옮겨갔다. 따라서 행정상으로 제1분교가 하얼빈의과대학의 전신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하얼빈의과대학과 용정의과대학의 관계인데, 하얼빈의과대학의 역사에는 제1분교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용정의과대학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77].
하얼빈의과대학이 자신의 역사에서 용정의과대학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용정의과대학이 자신의 전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제1분교에 대한 언급이 이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여기며 단순히 ‘편의상’ 제1분교 이전의 역사를 말하지 않을 뿐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하얼빈의과대학의 역사에서 용정의과대학을 중요하게 간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용정의과대학을 제1분교의 전신이라고 할 경우, 적어도 행정적으로 용정의과대학은 하얼빈의과대학의 전신이 된다. 뿐만 아니라 용정의과대학의 교원 출신 일부와 제1분교에서 사용하던 용정의과대학의 시설, 물자 중 일부가 하얼빈의과대학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은 두 학교가 전혀 무관한 관계가 아님을 보여준다.
제1분교가 하얼빈으로 떠나가자마자 연변에서는 다시 연변의전을 설립하였다. 연변의전의 소유 및 운영 주체는 연변의전기성회가 발전적으로 해체한 후 조직한 동사회였다. 연변의전은 전원공서의 허가와 지도를 받았지만, 공식적으로는 민간인이 경영하는 사립학교였다. 이렇게 또 한 번 학교의 소유권과 운영 주체가 변화하였다. 또한 용정의과대학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1분교가 하얼빈의과대학으로 합병되었으므로, 연변의전과 용정의과대학은 행정적으로 단절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학교 사이에서도 많은 부분에서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연변의전은 용정개척의학원, 용정의과대학,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 제1분교의 건물을 사용하였다[78]. 더욱이 조선 출신 의사와 연변 조선인이 중심이 되어 설립했고 조선인 의료인력 양성을 시작했던 용정의과대학 교원 상당수가 연변의전에서 교육을 계속했으며, 특히 노기순, 정규창 등 일부 인사들은 학교의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서 활약하였다.
역사에서 연속과 단절의 문제는 중요한 이슈이다. 최근 한국 내에서 불붙은 소위 ‘건국절’ 논쟁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과 단절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부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의학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자신의 개교기념일을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 개교기념일로 삼아, 식민지기의 역사와 공식적으로 ‘단절’하고 있다[79,]. 그러나 최근 개편된 홈페이지에는 학교 소개에 그 시작을 1885년 제중원까지 소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 경성의학전문학교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역사를 ‘연속선상’에서 함께 소개하고 있다[80,]. 한국과 같이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타이완의 타이베이국립의과대학은 식민지기에 만들어진 타이베이제국대학 의학부를 공식적인 자신의 전신으로 간주하여, 설립일을 제국대학 의학부 창설일로 하는 등 이 두 학교의 역사를 연속으로 보고 있다(福永肇, 2014).
전술한 용정의과대학 역사와 그 전후 의료교육 기관과의 단절·연속 문제는 관점에 따라서, 그리고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 이에 대한 확정적인 ‘정답’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용정의과대학의 설립과 운영의 역사는 연변 조선인들의 역사라는 것이다. 또한 변경사로서 용정의과대학의 역사는 ①해방 전후 연변이라는 ‘혼란기 변경’과 그곳을 무대로 삶을 영위하였던 연변 조선인의 존재를 한국의 역사에서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②역사에서 ‘연속’과 ‘단절’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중요하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제기야말로 변경사로서의 용정의과대학 역사의 중요한 특징이자 의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역사에서 ‘변경’, ‘연속과 단절’이라는 문제에 대한 더 많은 연구와 논의를 필요로 한다. “세계사는 경계 위에서 가장 잘 관측될 수 있다”는 피에르 빌라르의 말처럼(Vilar, Pierre, 1985: 23), 용정의과대학으로 대변되는 해방 전후 연변 보건의료의 역사는 당시 동북아시아 의학사를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역사의 조각인지도 모른다. 그 역사를 복원하고 보다 풍부한 해석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국사(一國史)를 넘어서는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5. 맺음말: 한국 보건의료사에서 가지는 함의를 중심으로
이상에서 논의한 용정의과대학의 역사는 연변사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특정 지역·기관의 역사이므로 이 시기 연변사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또한 용정의과대학의 설립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에, 특히 지역의 책임있는 조직, 예컨대 전원공서와 같은 기구가 만들어져 역할을 하기 이전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용정의과대학과 관련된 자료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해방 후 연변 최초의 한글 신문인 『한민일보』가 용정의과대학이 호교활동으로 태동되기 시작한 지 한 달 가까이 뒤인 1945년 9월 18일에서야 발행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관련 자료의 빈약함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은 자료 역시 용정의과대학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이들이 저술하고 보관하여 전한 것이 많다. 더욱이 1950년대 후반 반우파투쟁과 민족정풍운동, 1960~70년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연변 조선인의 조국은 중국으로 정리되었고(염인호, 2010: 22), 그들을 칭하는 명칭도 ‘중국 조선족’이 되었다. 따라서 당대 이후의 연변 조선인 관련 기록과 진술들은 중공의 공식 입장과 정책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특히 ‘한반도 조국관’을 가지고 활동했던 시기의 역사 중 상당 부분은 설 자리를 잃었거나 ‘중화인민공화국의 필요’에 맞게 다시 쓰였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제한점에도 불구하고 용정의과대학의 역사는 해방 직후 한반도를 자기 조국으로, 그리고 자신들을 ‘조선인’으로 여기고 있었던 연변 조선인들의 움직임 중 하나를 확인하게 해준다. 그리고 용정의과대학의 교원·학생들은 같은 자리에 있었던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 제1분교, 연변의과전문학교 운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울러 이 의학교육 기관들은 해방 이후 수많은 조선인/조선족 의료인을 양성해냈고, 현재도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간 한국과 중국 모두에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용정의과대학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의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첫째, 용정의과대학의 역사는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연변 조선인들, 특히 연변지역을 무대로 활동했던 의료인들과 그들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를 통해 한국의학사 논의의 지리적 공간을 조금 더 확장시킬 수 있었다. 둘째, 이 연구는 혼란기 변경의 역사에 대한 기술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어려움과 상관없이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연변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삶과 의학의 역사를 만들어갔다는 사실도 함께 보여준다.
해방 이후 연변 조선인의 역사는 오랜 기간 한국사의 영역으로 편입되지 못한 채 중국의 역사로만 다뤄져왔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역사서술 체계와 방향에 맞지 않는 연변 조선인의 활동은 합당한 역사적 평가나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이 연구는 이러한 공백을 메우고 한국사와 한국 보건의료사 연구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시도하였다. 용정의과대학을 포함한 연변 조선인의 역사는 ‘일국사’ 혹은 ‘민족사’의 틀로는 시야가 닿지 않았던 곳에 존재하고 있던 주변적인 삶이라는 점에서, 다시 말해 ‘민족국가’의 영토적 경계를 넘나드는 ‘초국적’ 역사라는 점에서 ‘변경사’(연구)로서의 의미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식민지기에 평안북도 숙천(肅川)에서 태어나 3살 때 용정으로 이주한 이후, 1942년 신경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인’ 의사로 연변지역 의료교육 기관에 몸담기 시작하였다가, ‘중국 조선족’ 의사로서 그 역할을 계속한 정규창의 회고를 들어보자(鄭逵昌 主編, 2006).
저는 연변 고등의학교육의 전 과정을 몸소 경험하였습니다. 60여년의 세월입니다.
저는 해방 전 만주국 시기 용정개척의학원 교원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당의 지도 아래에서 용정의과대학 건립에 참가하였습니다. (이 학교는_인용자) 국공내전 시기, 용정의과대학과 동북군정대학이 합병하여 동북군정대학 의학원이 되었고, 이후 중국의과대학 제1분교가 되었습니다. 1948년 저는 또 연변의과전문학교를 만드는 공작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연변대학 성립 때 연변대학 의학부가 되었고, 이후 독립된 연변의학원 시기를 거쳐 또 다시 연변대학 의학부가 되었습니다. (중략)
저는 동료들과 함께 당의 의학교육 사업과 의료공작을 위해 일생동안 분주히 지냈습니다. 현재 많은 수의 동료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들이 연변 의학교육 사업에 남기고 간 혁혁한 공로와 존경할 만한 분투의 일생을 회고해봅니다. 그 중의 다수는 조선족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학과 의료사업에 불멸의 공적을 남겼습니다. (후략)
정규창
2006년 3월 18일
정규창의 생애와 그것이 함축된 위와 같은 그의 회고는 연변이라는 공간에서 용정의과대학의 역사가 가지는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한국사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는 변경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Notes
현재 한국에서 무비판적으로 쓰이는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한인계중국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1949년)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탄생(1952년)을 거치면서 새롭게 정의된 중국인의 일부이다. 이 용어 속에는 조선족=중국인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李振翎, 2002). 따라서 이들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이전인 1945~1948년의 역사를 주요 연구대상으로 하는 이 논문에서는 이들을 조선족이 아닌 ‘조선인’이라고 칭할 것이다. 이 시기까지 이들은 스스로를 조선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고, 중국공산당도 이들에 대해 한국인(韓國人), 동북조선인민(東北朝鮮人民), 동북조선민족(東北朝鮮民族) 등의 호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연변지역은 현재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부 지역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를 가리킨다. 이 지역은 만주국 성립 후 간도성(間島省)으로 편입되었다. 이때의 간도성은 연길(延吉)·화룡(和龍)·왕청(汪淸)·훈춘(琿春)·안도현(安圖縣)을 묶은 행정구역명으로,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돈화현(敦化縣)을 제외한 지역이다. 이 논문은 만주국 시기와 해방 직후를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의 연변지역이란 주로 만주국의 간도성 일대를 지칭한다.
기사 제목 불명, 『韓民日報』, 1945. 10. 26. 현재 필자가 확보하고 있는 해방 이후 연변에서 발간된 신문은 인쇄 상태가 매우 좋지 않기 때문에 기사 대부분의 게재 면수를 확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해방 후 연변에서 발간된 신문을 인용할 때는 부득이하게 게재 면수 표기를 생략하였다.
예컨대 용정의과대학의 설립일시는 1945년 8월(김문섭, 1993), 9월 10일(허상림 편저, 2006), 9월 12일(延邊朝鮮族自治州檔案館 編, 1990) 등으로 문헌마다 차이가 있고, 용정의과대학 창설을 주도한 단체의 이름도 용정교육인동맹(박규찬, 1991), 용정교육동맹위원회(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2005), 교육동맹주비위원회(崔昌海 主編, 2003), 민주대동맹 교육위원회(허상림 편저, 2006) 등으로 통일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력서’와 ‘자서전’은 대략 1948~1949년 사이에 북한에서 생산된 것이다. 당시 북한 당국은 각종 기관에 소속된 구성원들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본인에게 직접 ‘이력서’와 ‘자서전’ 작성을 요구하였는데, 그 대상이 된 사람들은 그간 자신의 삶을 A4 2~5장 분량의 자필로 써서 제출해야 했다. 이 ‘이력서’와 ‘자서전’은 한국전쟁 시기 미군에 의해 노획되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문서군(RG242)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는 그것들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간도자혜의원의 설치 명분은 조선인에 대한 진료였으나 그 재원은 모두 군부에서 나왔고, 중국과의 경계인 연변지역을 의학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군사적 성격을 갖는 것이기도 하였다. 연변뿐 아니라 한일병합 전까지 조선에 세워진 자혜의원 13곳에 임명된 의사는 모두 군의들이었다. 물론 자혜의원은 조선인에 대한 무료진료 등을 통해 조선인의 호의를 획득하고자 하였지만, 그 근본 목적은 어디까지나 군 자원의 활용과 의료를 통한 군사적 통치의 강화에 놓여 있었다(최규진, 2016: 59-61). 한편 청나라 정부는 간도자혜의원에 대응하기 위해 1908년 6월 천진(天津) 학의학당(學醫學堂) 의관 리샤오량(李紹良)을 파견하여 용정에 연길변무의원(延吉邊務醫院)을 설립하였다(延邊朝鮮族自治州檔案館 編, 1990: 27).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의료 활동에 전반에 대해서는 허윤정·조영수(2015)를, 이를 제창병원 중심으로 고찰한 연구로는 김승태(2011)를 참고할 것. 이 연구들에 따르면 캐나다 장로회에서 설립한 의료기관은 ‘제(濟)’자를 돌림자로 하였다. 즉,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는 조선의 성진(城津)에는 제동병원, 함흥(咸興)에는 제혜병원, 용정에는 제창병원을 세운 것이다. 또한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은 다른 교파들과 달리 일제에 대해 비판적이고 조선인에게 호의적이었다는 특징을 보이는데, 삼일운동 당시 성진의 조선인들이 치외법권 공간인 제동병원을 적극 활용하였다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제창병원 역시 반일사상을 가진 조선인들의 아지트로 사용되었고, 삼일운동의 영향으로 용정에서 전개된 조선인들의 3·13 반일시위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도 제창병원 지하실이었다(주성화 외, 2014: 127). 제창병원의 반일적 활동에 대해서는 김승태(2011: 13-23) 참조.
「龍井三機關移管: 恩眞中學, 明信高女, 濟昌病院 等」, 『매일신보』, 1941. 4. 3, 3면.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최관실은 용정의과대학의 주요 구성원이다.
이 가운데 만주국 수도에 있었던 신경의과대학은 원래 신경의학교였다가 1938년 국립의과대학으로 개칭하였다. 신경의과대학의 중국인 학생은 매년 30%를 넘을 수 없었고, 일본인이 40% 이상을 점했다. 교수는 모두 일본인으로 약 50명이었고, 학생은 약 400명이었다(김경일 외, 2004: 239).
관동군과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조선인 만주 이주 정책을 둘러싸고 계속해서 대립·갈등하였다. 대립의 핵심은 만주국으로의 이민 주체를 조선인으로 할 것인가 일본인으로 할 것인가에 있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임성모(2009), 정안기(2011), 조정우(2014)를 참고할 것.
「醫療施設을 擴大, 僻地開拓村에 派遣」, 『동아일보』, 1939. 11. 4, 4면.
일제는 ‘독립국가’로서의 만주국을 강조하기 위해 그 이전까지 일본인(조선인 포함)이 누리고 있던 치외법권을 1937년에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각지에 존재하였던 일본영사관들이 문을 닫았고, 용정의 일본총영사관도 1938년 3월 31일 폐쇄되었다. 만주국의 치외법권 철폐에 관해서는 신규섭(2003), 정안기(2014)를 참고할 것.
「東滿醫大陳情代表報告慰勞會開催, 龍井의 發展策도 座談」, 『만선일보』, 1939. 12. 7, 3면.
「龍井의 東滿醫大 五月初旬頃開校乎: 中央과의 事務協定 順調로히 進陟, 近近 正式으로 內容 發表」, 『만선일보』, 1940. 1. 19, 3면.
「龍井開拓醫學院 六月四日에 開院, 民生部大臣도 參席할 터」, 『만선일보』, 1940. 5. 12, 3면. 정규창과 주성화는 용정 일본총영사관이 50만 엔에 불하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鄭逵昌 主編, 2006: 8; 주성화 외, 2014: 235), 이 기사에 따르면 일본총영사관의 최종 불하액은 45만 엔이었다.
「社說: 兩醫科大學과 開拓醫學院의 開校」, 『만선일보』, 1940. 1. 28, 1면.
「開拓醫學院 開校準備에 奔忙, 田村敎育司長一行 來龍」, 『만선일보』, 1940. 2. 2, 3면. “(만주국 정부 측_인용자) 일행은 3일 연길에 가서 省公署에서 성 당국자와 동만의대 유치의원과의 사이에 개교 준비 회의를 개최하리라는 바 회의는 3일 간에 긍하리라 한다. 이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개학 일자 등이 결정 발표될 것이다.”
「龍井開拓醫學院 五月一日開校確定: 生徒 六十名 募集, 今年 經費는 七十萬圓」, 『만선일보』, 1940. 2. 14, 3면.
「龍井開拓醫學院 開院을延期, 正確한日字追後發表」, 『만선일보』, 1940. 6. 4, 7면.
「開拓醫學院入學 龍井에서 四十名, 開學은五月一日豫定?」, 『만선일보』 1940. 4. 28, 3면. 개척의학원 입학시험은 각 소재지별로 따로 치러진 것이 아니라 통합하여 실시되었다. 시험은 1940년 3월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에 걸쳐 신경, 도쿄, 후쿠오카(福岡) 등지에서 시행되었고, 4월 12일 만주국 민생부가 합격자 112명을 발표하였다. 1회 입시 합격자 중 90명이 일본인, 13명이 조선인이었다(「開拓醫學院合格者 百十二名을 發表, 그中 鮮系는 十三名이 合格」, 『만선일보』, 1940. 4. 14, 2면). 그 가운데 용정개척의학원에는 49명이 배치되었다(「龍井開拓醫學院 六月四日에 開院, 民生部大臣도 參席할 터」, 『만선일보』, 1940. 5. 12, 3면).
「龍井開拓醫學院 六月四日에 開院, 民生部大臣도 參席할 터」, 『만선일보』, 1940. 5. 12, 3면.
「開拓醫學院 官制公布」, 『만선일보』, 1940. 6. 21, 7면. 개척의학원 관제는 총 7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제1조는 “개척의학원은 민생부대신의 관리에 속하며 개척지에 의사를 양성하는 곳으로 함”이다.
용정개척의학원의 개교일은 1940년 7월 1일(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2005: 358; 전광하 편저, 2000: 179)과 7월 2일(趙曉紅, 2008: 252; 주성화 외, 2014: 235), 7월 20일(鄭逵昌 主編, 2006: 8)로 문헌마다 차이가 있다. 가장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신문에서는 용정개척의학원의 개교일이나 개교식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없어, 현재로서는 개교일에 대한 기록이 각기 다르다는 점만 언급할 수 있는 상황이다.
「龍井國立醫院 開拓醫學院內로 移轉」, 『만선일보』 1940. 9. 4, 5면.
「龍井開拓醫學院 五月一日開校確定: 生徒 六十名 募集, 今年 經費는 七十萬圓」, 『만선일보』, 1940. 2. 14, 3면.
전광하는 동만의과대학이 설립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전광하 편저, 2000: 180), 정규창은 그런 구상만 있었을 뿐 실시되지 못하였다고 기술하였다.
「명신교 발족 維持위원회」, 『한민일보』, 1945. 10. 4; 「동흥재출발」, 『한민일보』, 1945. 10. 13; 「영신교부활」, 『한민일보』, 1945. 10. 13; 「튀여나는 育英門 동명중학교 설립」, 『한민일보』, 1945. 10. 21; 「화룡지구 교육협회 결성」, 『한민일보』, 1945. 10. 24.
「龍井醫科大學合格及候補者發表」, 『한민일보』, 1945. 10. 7. 이 기사에는 합격자 명단이 실려 있는데, 신문의 인쇄 상태가 좋지 않아 판독할 수 있는 사람은 36명 정도이다.
「地方短信: 醫大補缺生 合格者 發表」, 『한민일보』, 1945. 10. 31.
해방 당시 약 230만 명의 조선인 중 80여만 명이 한반도로 귀환하였고 나머지는 정착하였는데, 정착한 조선인들은 대부분 연변지역과 같이 중공이 지배하는 이른바 ‘해방구’에 거주하던 사람들이었다. 반면 중국국민당(이하 국민당)의 통제 아래에 있던 소위 ‘수복구’에 거주하였던 조선인은 국민당의 조선인 구축정책에 따라 대부분 귀환하였다(김춘선, 2004).
‘한반도 조국관’은 염인호가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한반도 조국관’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염인호(2010) 참고.
「朝鮮信託에 對한 延邊朝鮮人民의 분怒: 各黨各派를 總網羅하여 朝鮮獨立促進協議會 結成」, 『연변민보』, 1946. 1. 8.
「龍井醫大 豫科生 募集」, 『연변민보』, 1945. 11. 2△(△는 판독 불능 글자. 이하 동일). “룡정의과대학에서는 오는 12월 중으로 예과생을 모집할 예정인데 응모 대상은 다음과 같다. 1. 중등학교 졸업자. 2. 소속 기관장의 추천을 받은 자. 3. 민주대동맹 위원장의 추천을 받은 자.”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a_4494_3486. 검색일: 2017. 5. 4.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과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에 대해서는 최병도(2017)를 참고할 것.
구체적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이후 임계학은 북으로 건너가 평양 조선중앙도서관 관장을 역임하였다(강만길·성대경, 1996: 395). 하지만 이 자료에서 임계학의 행적은 해방전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을 뿐, 그가 해방 직후 용정교육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는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延邊人民代表大會會議錄」(1945. 11. 20), 延邊朝鮮族自治州檔案局(館)編, 『中共延邊吉東吉敦地委 延邊專署重要文件匯編 1(1945.11∼1949.1)』(1985: 299). 이 책은 연변지역에 있었던 중공의 지방조직과 행정기관에서 반포한 중요 결정들이나 지시문, 포고문 등을 모아 편찬한 일종의 자료집이다.
여기에서는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조직을 의미한다.
제1차 장춘전투에 대해서는 하경적(1992: 267-77)과 염인호(2010: 118-20) 를 참고할 것.
사료에는 합계 금액을 633,577.50원으로 기재하고 있으나, 수입 전체 항목(입학금부터 종두대까지)의 금액을 모두 더하면 623,577.50으로 10,000원의 오차가 있다.
각주 40)과 마찬가지로, 사료에는 지출 합계 금액을 595,106원으로 적고 있으나 지출 전체 항목의 금액을 모두 더하면 594,606원으로 500원의 오차가 있다.
연변지역의 군정학교는 처음부터 하나의 실체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여러 군정학교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이 학교는 연변에 있었던 조양천교도대와 길동군정대학, 1946년 6월 국민당의 공세를 피해 연변으로 철수한 화전군정대학,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 등이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중국의과대학은 중공이 창건한 첫 의과학원으로 전신은 중국공농홍군군의학교와 중국공농홍군위생학교이다(주성화 외, 2014: 236).
제2분교는 이비인후과 중심으로 하얼빈에, 제3분교는 통화(通化)에, 제4분교는 평곡지구(平谷地區)에 세워졌다.
만주국 시기 하얼빈의과대학 및 하얼빈개척의학원과 해방 이후 하얼빈 소재 의료기관과의 계승/단절 문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이는 추후의 연구과제로 남긴다.
임춘추는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해방 직후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주보중(周保中)의 요청과 김일성(金日成)의 지시를 받아 연변으로 와서 1948년 3월부터 1949년 3월 13일까지 약 1년 동안 전원직을 수행하였다(염인호, 2004: 312). 임춘추는 북한으로 돌아간 이후 사망할 때까지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연변의학교 설립에 박차, 오는 8월 1일 설립기성회를 결성키로」, 『연변일보』, 1948. 7. 14; 「연변의 의사 배양코저 연변의학교 설립 계획, 금년 내로 개학키로 각계에서 노력」, 『연변일보』, 1948. 7. 16.
「연변의학교기성회 지난 1일 드디어 성립」, 『연변일보』, 1948. 8. 6. 임민호는 연변대학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연변대학이 1949년 4월 개교한 이래 17년 동안 실질적인 교장(총장)을 맡았다. 임민호는 연변대학 설립운동을 하면서 재정이 부족하자 북한 부수상이었던 김책(金策)에게 편지를 보내 금품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김책은 차량 한 대 분량의 시멘트를 제공하였다(염인호, 2010: 37, 225-6).
당시 신문에서도 연변의전기성회 결성 소식을 전하는 1948년 8월 6일 기사까지만 해도 ‘연변의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8월 15일 이후의 기사부터는 ‘연변의과전문학교’라는 이름으로 보도하고 있다. 즉, 8월 7~14일 사이에 학교 명칭에 대한 토론이 있었고, 연변의과전문학교로 부를 것을 결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지와 관심은 기부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기초 잡히는 연변의전, 인민의원과 인민건재국 접수, 조양구 유지들은 5백만 원 희사」, 『연변일보』, 1948. 8. 15; 「연변의전에 모여드는 기부금, 신영조씨 천만 원 희사」, 『연변일보』, 1948. 8. 17; 「룡정시 송청송씨 의전에 현미경 기부」, 『연변일보』, 1948. 8. 31). 연변의전 창설이 기부에 의존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재정 압박이 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사실 재정 문제는 학교 창설의 최대 현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연변의전 첫 달 운영에 필요한 최소 비용은 2천만 원으로 추산되었는데, 이 금액의 조달은 연변의전기성회 위원들이 전적으로 책임지기로 하였다( 「연변의학교기성회 지난 1일 드디어 성립」, 『연변일보』, 1948. 8. 6). 뿐만 아니라 개교 후 예산 편성에 대한 보고에서 한 달에 4,432만 원의 적자가 예상되었지만, 전원공서에서는 “당분간 경제 방면에 있어서 정부의 도움을 의뢰하지 말고 자기의 손으로 경영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연변의전 개학식 앞두고 董事會 成立, 문부전원으로부터 금후 발전 방향을 지적」, 『연변일보』, 1948. 10. 2). 학교에 대한 행정 지도는 전원공서 관할이었지만(鄭逵昌 主編, 2006: 43), 학교의 운영 자체는 “민판(民辦: 민간에서 운영_필자)”임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고등 醫療人材 배양의 殿堂 延邊醫專 開校式 盛行: 지위 부장은 강화 중 앞으로 절대 지지할 것을 언명」, 『연변일보』, 1948. 10. 3).
「延邊醫科專門學校 學生募集 廣告」, 『연변일보』, 1948. 8. 31. 같은 광고가 8월 30일과 9월 4일에도 실렸다.
「연변의과전문학교 초대 입학시험 승리 완료 : 합격자 본과 64명, 전수과 15명, 후보생 21명」, 『연변일보』, 1948. 9. 28. 본과는 계획보다 많은 학생을 선발한 반면, 전수과는 계획보다 훨씬 적은 수를 뽑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연변의전 개교식을 전하는 기사에는 본과 64명, 전수과 38명의 학생이 최종 입학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수과에 한하여 추가 모집을 실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등 醫療人材 배양의 殿堂 延邊醫專 開校式 盛行: 지위 부장은 강화 중 앞으로 절대 지지할 것을 언명」, 『연변일보』, 1948. 10. 3. 동사회는 중앙상무위원 9명과 감찰위원 3인을 중심으로 구성하되, 연변을 5개 구로 편성하여 매 구에 중앙위원 3명씩을 정하고, 각 구에 분회를 두며 분회 밑에 간사를 두는 조직 체계를 갖추었다(「연변의전 개학식 앞두고 董事會 成立, 문부전원으로부터 금후 발전 방향을 지적」, 『연변일보』, 1948. 10. 2).
현재 연변대학이나 연변대학 의학원 측에서 출판한 공식적인 교사(校史)에는 모두 연변의전을 전신으로 기술하고 있다(鄭鳳霞 主編, 1995: 3;崔昌海 主編, 2003: 1-2).
「延大準備進陟」, 『한민일보』, 1945. 10. △. “연변을 중심으로 한 최고학부가 생겨날 기운은 필연적으로 빚어진 것으로 용정의과대학(龍井醫科大學)을 필두로 간도시(間島市)에는 연변대학 건립 태동과 이에 따라 얼마 전 간도교육협회(間島敎育協會) 회의석상에서도 종합대학 설치의 건의가 있어…”
1950년 8월 용정의과대학 자리에 있던 연변대학 의학부는 연길시로 이전하여 용정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연변에서 출판된 논저에는 김광찬의 연변 거주 시절 경력만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연구에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해방 이전 김광찬의 기록을 찾아 정리하였다. 다만, 김광찬이 용정의과대학 제1대 교장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연변 문헌 어디에서도 그가 왜 교장을 그만두었는지, 그 이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한 서술은 없다.
「신흥지북선사」, 119쪽.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itemId=im&ynonym=off&chinessChar=on&position=0&levelId=im_101_40059. 검색일: 2017. 5. 17.
「조선총독부직원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setId=13&totalCount=13&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A%B9%80%EA%B4%91%EC%B0%AC&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A%B9%80%EA%B4%91%EC%B0%AC&searchKeywordConjunction=AND. 검색일: 2017. 5. 17.
1893년 2월 2일 황해도 옹진군(甕津郡)에서 태어나 조선총독부 부속 의학강습소를 졸업(1919. 3. 30)하고 조선에서 임상활동에 종사하다가, 1929년 일본 규수제국대학 의학부 대학원생과에 입학하여 1932년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36년 7월 만주국으로 이주하여 목단강(牡丹江), 도문(圖們) 등지에서 의사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신영전·박세홍, 2009).
「新學士百廿二名中 朝鮮人四十三名 : 今日 京城帝國大學 卒業式, 法文醫學部 今年 出身」, 『동아일보』, 1933. 3. 26, 2면.
「조선총독부직원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2&setId=52&totalCount=52&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C%9D%B4%EA%B8%B0%EB%B4%89&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8%B0%EB%B4%89&searchKeywordConjunction=AND. 검색일: 2017. 5. 17. 안과의사였던 이기봉은 대전에 근무할 당시 ‘안경에 대한 상식’이라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하기도 하였고(「眼鏡에 對한 常識(三)」, 『동아일보』, 1935. 4. 2, 6면), 1939년에는 안과 의술 연구를 위한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기도 하였다(「眼科醫術硏究코저 平壤서 眼科集談會」, 『동아일보』, 1939. 12. 11, 4면).
1946년 용정의과대학 교직원 명단에서는 학감이 박송학으로 기재되어 있고(허청선 외, 2002: 756), 현재까지 검토한 모든 문헌에서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부터 연변대학의학부 시기까지 이기봉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기봉은 북으로 들어간 뒤 조선인민군 군의청 군의부장을 맡았다.
<표 4>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정규창의 저서에는 가목사대학 출신 최희영(崔熙英, 교무과장), 권(權)씨(사무과장), 정(丁)씨(남만의학당 출신) 등을 추가로 언급하고 있다.
연변에서 출판된 중국어 저서에는 이기봉의 이름이 李奇奉으로 나와 있으나, 이 글에서는 식민지기 동아일보에 나온 이기봉의 한자 이름(李基鳳)을 따랐다. 여러 자료를 교차 검토한 결과, 두 사람이 동일 인물임은 명확하다.
정규창은 여창범도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 교원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이는 오류이다. 이후 서술하겠지만 여창범 1947년 1월 북한 청진(淸津)으로 넘어간다.
정규창은 중국의과대학 21기 졸업생들을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 교사 진영에 넣어서 설명하고 있으나(鄭逵昌 主編, 2006: 24), 정규창 자신도 이들이 전근 온 시기를 1947년 12월로 밝히고 있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은 이들이 전근을 온 직후인 1948년 1월부터 제1분교로 명칭을 바꾸었으므로, 이들이 실제로 업무에 투입된 것은 제1분교 시기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양윤의 본명은 양봉근(楊奉根)이다. 1897년생인 양봉근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1922년 졸업하였다. 그는 삼일운동과 신간회 등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그 일환으로 보건운동을 전개하다가 1933년을 전후하여 만주로 이주하였다. 양봉근은 장춘(長春, 당시 신경)에서 의원을 운영하다가 해방을 맞았고, 이후 연변의전 부속의원 원장, 연변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신영전·윤효정, 2009).
이 가운데 용정의과대학 구성원은 교원이었던 최관실과 학생이었던 신경하가 있다. 이들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주요 약력은 다음과 같다(약력은 모두 鄭鳳霞(1995)를 근거로 정리함). 원일우: 1915년 9월 17일생. 1939년 12월 하얼빈의과대학 졸업. 해방 후 조선의용군 제3지대 위생대장, 중국인민해방군 제164사단 위생과장 등 역임. 연변의전 이후 연변대학 의학부 부학부장(1949. 4), 연변의학원 부속의원 원장(1945. 9), 연변의학원 부원장(1959. 9) 등 고위직 역임. 이정재: 1900년 3월 25일생. 1920년 5월 경성약학전문학교 졸업. 1934년 7월을 전후하여 용정으로 이주한 후 교사로 활동. 해방 후 연길 조양천근민중학교 교무주임과 부교장, 연변교육출판사 편집위원 등 역임. 연변의전에서 화학 객좌교사를 맡았다가 연변대학 의학부가 설립되자 강사에 임명됨. 이만숙: 1918년 3월 4일생. 1948년 제1분교 졸업. 박재순: 1922년 1월 22일생. 1947년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에서 학습. 1948년 3월 제1분교 졸업. 조웅길: 1903년 9월 19일생. 1948년 3월 제1분교 졸업 후 용정 23후방의원에서 군의로 근무.
신영전·박세홍, 「노기순(盧基舜)의 생애: 한국 보건의료의 변경사」, 『의사학』 18-1 (2009)을 참고할 것.
이밖에 기존 논저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당시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그의 경력으로 용정의과대학 부속의원 내과의장이 있다. 「傳染病에 注意하자, 龍井醫大 鄭逵昌氏談」, 『한민일보』, 1945. 10. 28.
정규창은 1949년 7월 북한의 교육기관을 시찰·참관하는 “연변대학 부조(赴朝: 조선으로 가다_인용자) 고등교육 시찰단”에 의학부 대표로 참가하여,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였다(崔昌海 主編, 2003: 9).
「螢雪功의 成果: 各校의 卒業式」, 『동아일보』, 1932. 3. 19, 7면; 「刀圭界의 彗星: 同春醫院崔寬實氏」, 『동아일보』, 1937. 12. 4, 5면. 鄭鳳霞(1995)에는 최관실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연도가 1927년 3월로 나와 있지만, 당시 기사를 볼 때 이는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연변의 의사 배양코저 연변의학교 설립 계획, 금년 내로 개학키로 각계에서 노력」, 『연변일보』, 1948. 7. 16. 하지만 최관실은 연변의전기성회 위원에 포함되지 못하였고, 鄭鳳霞 저서(1995)를 비롯한 어떤 연변 문헌에서도 그가 이러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려창범履歷書」·「려창범自敍傳」(1948. 11. 23). 여창범은 여기에서 함께 용정의과대학 교원으로 근무했던 여일범을 사촌형으로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여창범과 여일범을 형제로 기록한 정규창의 논저(2006: 127)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전광하는 용정개척의학원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통치 정책의 산물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①학교 운영권이 일본인의 손에 있었고, ②교원 중 핵심 역량이 일본인이었으며, ③모집 대상 학생 역시 기본적으로 일본인이었고, ④졸업생들 대부분이 일본인 개척단을 위하여 봉사하였다는 점을 들었다(전광하 편저, 2000: 179-80).
하얼빈의과대학 홈페이지 ‘역사연혁’ 항목, http://www.hrbmu.edu.cn/h_hyjj/h1_lsyg.htm. 검색일: 2017. 6. 6.
연변의전은 처음에 연길시 구 천주교회 건물을 교사(校舍)로 사용했으나, 1949년 3월 8일 소재지를 용정의과대학 건물로 옮겼다가 연변대학 의학부로 합병된 이후인 1950년 11월 다시 연길의 연변대학 교내로 이사하였다(崔昌海 主編, 2003: 243, 246).
서울대학교 역시 1946년을 개교일로 보고, 2006년에 60년사, 2016년에 70년사 책자를 발간하고 기념행사를 치렀다. 하지만 해방 이전 시기의 역사를 ‘전사(前史): 서울대학교의 기원’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함께 기술하고 있다(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2016: 3-16).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홈페이지, http://medicine.snu.ac.kr/sub1/introduction/index_3.htm. 검색일: 2017. 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