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군의 군의(軍醫)체계 형성과 군의장교*

The Formation of the Military Medical System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Military Medical Officer*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17;26(3):379-416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17 December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17.26.379
**Research Institute of Comparative History and Culture, Hanyang University
김선호,**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이메일 : musoyu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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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2008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08-361-A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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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was supported by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Korean Government (NRF-2008-361-A00005).

Received 2017 September 05; Revised 2017 October 17; Accepted 2017 November 29.

Abstract

The military medical system of the Korean People’s Army (KPA) first appeared in August 1946 when a central military hospita was established at the headquarters. Inside the KPA, the military medical and veteran services were first established in February 1948. The military medical officers of the KPA were those who were initially engaged in North Korea’s health care sector. Most of the early military medical officers were those who had been trained in the Japanese medical system before liberation and were surgeons.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in September 1948, Lee Dongwha rapidly introduced the medical system of the Soviet army into the KPA. The KPA military medical system was a mix of Soviet, Japanese and Chinese military medical systems. The medical section of the KPA was similar to that of the Japanese army, and the medical section of the lower army was similar to that of the Soviet army. The stretcher platoon of the KPA were similar to those of the Japanese and Chinese armies. The KPA mainly used Japanese medical equipment at the beginning, and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North Korean regime in September 1948, they were gradually replaced with Soviet products. The military medical office of the KPA were equipped with treatment rooms, laboratories, hospitals, pharmacy, and inpatient rooms. The military medical office purchased medical journals and specimens for medical research and set up a separate research fund. In addition, the military medical office was equipped with a laboratory for medical experiments and raised laboratory animals.

The KPA military medical system was specialized in the fields of infectious disease prevention and preventive medicine. At the time, infectious disease in North Korea was mainly caused by bacteria and viruses in unsanitary living environments. The KPA set up a special anti-infectious disease department in consideration of the soldiers living in the collective facilities. The second characteristic of the KPA military medical system is preventive medicine. Since early 1946, North Korea has been interested in preventive medicine and has established various medical facilities and personnel. In line with this history of preventive medicine, the preventive department was installed in the KPA military medical system.

1. 머리말

식민지 조선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해방되었으나,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북위 38도선의 이남과 이북에 진주함에 따라 해방과 동시에 분단되었다. 그 후 남과 북에는 국제관계와 국내정세에 따라 각각 새로운 정치·경제·군사체제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해방 당시 남과 북은 일제 식민통치체제의 강고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조선인들은 일제가 한반도에 남긴 식민지 유산을 활용해 새로운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기형적이며 차별적 지배정책을 시행했고, 이로 인해 식민지 유산은 해방된 조선인들의 삶에 질곡으로 작용하였다.

대표적인 식민지 유산 중 하나는 보건의료시설이었다. 해방 당시 북한의 보건의료수준은 매우 열악했다. 1945년 8월 현재 북한지역에 있는 의료시설은 국영병원 42개, 사영병원 185개, 외래환자진료소 79개가 있었다. 그러나 해방 전까지 이 의료시설은 주로 일본인들이 이용했고, 조선인들은 대부분 돈이 없어 의료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고 약제사(藥劑師)에 의존했다. 이로 인해 해방 당시 북한 주민들은 결핵, 천연두, 콜레라 등 수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해방 당시 북한지역 의사들의 인원과 수준도 열악했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의 국영 의료시설에는 879명의 의사가 있었는데, 이중 감염병·비뇨기·신경·정형·종양 등의 전문의는 한명도 없었다(전현수 역, 2006: 151-3). 북한정치세력은 이같은 보건의료상황을 정상화해 새로운 국가의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고자 구상했다.

북한의 국가건설기 보건의료에 대한 선행연구들은 주로 북한의 보건의료체계와 의학교육을 다루고 있다(박윤재·박형우, 1998; 문옥륜, 2001; 박형우, 2002; 황상익·김수연, 2007; 이성봉, 2009; 김근배, 2015). 이와 함께 북한의 국가건설기 보건의료체계와 의학교육의 토대를 마련한 의료인에 관한 선행연구도 상당히 축적되었다(박형우·여인석, 2007; 지강유철, 2007; 신영전·김진혁, 2014). 북한의 보건의료체계와 의학교육은 북한식 사회주의 의료체계의 기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현재까지 북한의 각 부문별 보건의료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해명한 연구성과는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정권기관·사회단체·군대에 형성된 보건의료체계의 특징과 차이점을 해명한 선행연구는 북한의 정권기관이 구축한 위생방역체계에 관한 연구를 제외하고 거의 없는 형편이다(김진혁, 2014). 특히 조선인민군의 군의(軍醫)체계[1]에 관한 선행연구는 아직 없다.

북한정치세력은 국가건설과정에서 다른 어떤 부문보다 군대 창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된 원인을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이로 인해 해방 전부터 민족군대의 창설을 중시하였다(최용건, 1950: 39). 그러나 해방 당시 창군(創軍)의 토대는 미약했다. 특히 사회 전반에 의료인력과 의료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에 군의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더욱 난관이었다. 북한정치세력은 소련군의 지도와 영향 아래 일제의 보건의료 유산과 중국군에서 활동한 경험을 활용해 군의체계를 창설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의 군의체계는 북한의 보건의료체계와 직접적인 연관 속에서 구축되었으며, 인민군에 다양한 군사적 요소가 등장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

이 글은 북한의 국가건설기에 조선인민군의 군의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첫째, 인민군 군의체계의 특징을 확인하고, 이것이 어떤 군대의 영향을 받았는지 분석할 것이다. 둘째, 군의장교들이 가진 의료경력과 이들이 습득한 의료체계를 확인하고, 이것이 군의체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것이다. 특히 이 글은 군의체계와 군의장교의 구성을 통해 인민군이 일본과 소련의 의료체계를 어떻게 변용(變容)했는지 주목하였다. 이상의 문제의식을 해명하기 위해 이 글은 주로 미군노획문서(鹵獲文書), 주한미군 정보보고서, 소련민정국 문서와 러시아문헌, 일본의 자료와 문헌, 북한문헌을 활용하였다.

2. 군의부대의 창설과 군의체계 : 군의(軍醫)·수의(獸醫)

북한지역에서 처음으로 군대가 출현한 시점은 1946년 8월이다. 물론, 해방 직후에 건립된 북조선행정10국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보안국(保安局) 산하에도 무장부대가 존재했다. 북한정치세력은 1945년 말부터 무력 창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북조선행정10국에 보안국을 설치하고, 보안간부훈련소, 38경비보안대, 국경경비대, 철도경비대, 수상경비대를 창설해 보안국이 관할하도록 하였다(김선호, 2012b: 306-9). 각종 보안무력은 점차 인민군의 병종부대(兵種部隊)[2]로 발전하게 된다.

북한정치세력은 1946년 여름부터 군대 창설을 시작했다. 김일성(金日成)은 김일(金一)과 최현(崔賢) 등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合軍)[3,] 출신을 불러 보안간부훈련소의 창설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1946년 8월에 보안간부훈련소 제1소·제2소·제3소가 창설되었다(김일 외, 1981: 369-370). 북한정치세력은 모든 보안무력을 통합적으로 지휘하기 위해1946년 8월 15일 ‘보안간부훈련대대부(保安幹部訓練大隊部, 이하 대대부)’를 창설하였다(국방부, 1967: 680-2).

대대부가 창설되면서 인민군에 처음으로 군의부대가 조직되었다. 대대부에는 직속부대로 위생소대(衛生小隊)가 조직되었고, 대대부 예하부대에도 각종 군의부대가 조직되었다. 대대부 본부에는 후방부·통신부·공병부와 같은 전문부서가 조직되었지만, 군의과나 군의처처럼 군의부대를 지휘하는 전문부서는 조직되지 않았다(사사키, 1977: 28-9). 이것은 북한의 군대가 창군 초기였고 다른 병과의 육성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이 시기에 처음으로 군사지휘기관에 중앙병원이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이 병원의 이름은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중앙병원”이다. 병원의 진료과목은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외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기본적인 진료과목은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북한지역에는 군의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없었으므로, 중앙병원의 군의들은 북한사회에서 활동하던 의료인력으로 채워졌다. 예를 들어, 김명준은 김일성대학 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재직중이었는데, 1946년 11월 13일부터 대대부 중앙병원 “외과군의”로 전직되었다. 그를 대대부로 배치한 것은 김일성대학 병원이 아니라 북조선노동당(북조선로동당)이었다. 김명준은 북조선노동당 김일성대학 병원 세포위원장이었는데, 11월 12일 “중앙당의 소환”에 따라 대대부 군의로 배치되었다[4].

북조선노동당이 군사간부의 배치를 결정하게 된 계기는 1946년 10월 21일에 열린 당중앙상무위원회 제9차 회의였다. 이날 당중앙상무위원회는 「간부들의 공작배치 및 이동에 관한 규정」을 결정했으며, 중앙당과 도당에서 취급할 간부를 구분했다. 이중에서 “군대기관에서 일하는 간부들은 하급당부에서 취급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했다(북조선로동당 중앙상무위원회, 1998: 36-7). 이 결정에 따라 노동당원인 의료인력이 중앙당에 의해 선발되어 군의장교로 배치된 것이다.

대대부 예하의 사단과 여단에는 직속으로 병종부대가 조직되었는데, 대표적으로 통신부대·공병부대와 함께 군의부대가 조직되었다. 사단·여단 직속 군의부대의 단위는 알 수 없다. 각 연대를 구성하는 3개 보병대대에는 각각 1개 위생소대가 배속되었고, 사단 직속으로 설치된 독립대대에는 위생중대가 배속되었다(한림대, 1989a: 47).

위생중대와 위생소대에는 군의장교가 배치되었다. 이들의 기본임무는 부대원들의 보건의료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군의장교들은 신병들의 신체검사도 맡았다. 당시 인민군은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1946년 12월 시점에도 여전히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해 탈락하는 병사가 많았다. 다음은 주한미군이 1947년에 인민군 제1보병사단 제1연대 작전장교의 수첩을 입수해 번역한 것이다.

불합격자 인원을 보면, 11월 5일에는 접수병력의 50% 이상, 11월 12일에는 접수병력의 약 30%가 불합격되었다. 특히 11월 12일자 접수병력 2,500명 중 700명은 “질병” 때문에 불합격되었다. 모병된 전체 인원 6,500-6,700명 중에 1,700명, 약 25%가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이에 따라 제1사단 1연대장은 불합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경도와 강원도에 모병장교를 파견했다. 1대대·2대대·3대대에서 각각 상급참모, 2명의 문화장교, 1명의 군의장교가 선발되어 함경북도·함경남도·강원도로 파견되었다(한림대, 1989a: 276). 인민군은 신체검사 탈락률이 지속되자, 현지에 군의장교를 보내서 미리 신체검사를 실시해 불합격자를 줄였다.

북한정치세력은 1947년 5월 17일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개편해 “북조선 인민집단군총사령부(北朝鮮人民集團軍總司令部, 이하 집단군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같은 날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예하의 부대명칭도 변경되었다. 3개 보안간부훈련소는 각각 제1경보병사단·제2경보병사단·제3독립혼성여단으로 개편되었다. 대대부 중앙병원은 ‘집단군총사령부 중앙병원’으로 개칭되었다(국방부, 1967: 91, 682; 사사키, 1977: 30-1). 그러나 집단군총사령부에도 의료부문을 전담하는 군의부서는 조직되지 않았다. 사실 집단군총사령부는 대대부의 전문부서를 그대로 이관받았고, 새로운 부서를 편성하지 않았다[5]. 북한정치세력은 당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고려해 집단군총사령부의 규모를 확대하지 않았다.

인민군의 군사지휘기관에 처음으로 군의부서가 조직된 시점은 1948년 2월이다. 북한정치세력은 2월 8일 공식적으로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다. 인민군이 창설되자 기존의 집단군총사령부와 예하부대는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집단군총사령부는 “인민군총사령부”로 개편되었다. 이와 함께 인민군 제1보병사단·제2보병사단·제3혼성여단이 편성되었다. 집단군총사령부의 중앙병원은 그대로 인민군총사령부에 직속되었다(장준익, 1991: 87).

인민군총사령부에는 후방부가 조직되었는데, 후방부의 9개 과 중 하나가 “군의과(Military Medicine Section, 軍醫課)”였다. 군의과는 전염병방역계 (Infection Prevention)6), 예방계(prophylaxis), 치료계(medical treatment)로 구성되었다. 후방부에는 수의과(veterinary section, 獸醫課)도 있었다. 수의과는 전염병방역계, 예방계, 치료계, 수의치료계(veterinary treatment)로 구성되었고, 별도로 대장간을 보유하고 있었다(한림대, 1989b: 344-6). 후방부 군의과에는 군의과장을 포함해 8명의 군의장교가 배치되었고, 군의과장은 ‘조선인민군 중앙병원’을 직접 관할했다(한림대, 1989c: 158).

인민군총사령부에 군의부서와 수의부서가 동시에 설치된 것은 소련군과 일본군 군의체계의 영향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보병사단에도 군의과(Regimental Medical Section)가 편성되어 있었다. 연대 군의과는 군의장교 4명(치과의 1명 포함), 군의하사관 2명, 위생병 13명으로 편성되었고, 대대 군의과는 군의장교 1명, 군의하사관 3명, 위생병 25명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미군 보병사단에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수의과가 조직되지 않았다(J.J. Hays, 2002: 43).

미군과 달리 소련군과 일본군에는 군의부서와 수의부서가 함께 조직되어 있었다. 첫째, 소련군의 보병연대에는 36명으로 편성된 군의·수의중대가 조직되어 있었다. 인민군의 보병연대에도 30명으로 편성된 위생중대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위생중대의 일부 병력이 연대의 말을 관리하면서 수의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위생중대에서 군의업무와 수의업무를 함께 취급하는 방식은 소련군의 군의체계와 동일했다(한림대, 1989b: 179). 소련군은 독소전쟁시기에 최고총사령부 후방사령관의 지휘 아래 군의업무와 수의업무를 각각 총괄하는 군위생총지휘부와 수의총지휘부를 편성했다. 소련군이 별도로 수의부서를 조직한 것은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騎兵)을 적군(赤軍)의 중요한 전투력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련 지도부는 1919년부터 보병사단의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사단에 1개 기병연대를 편입시켰다. 또한 기병을 대규모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독립병과로 평가해 1926년부터 기병군단과 기병사단을 편성했다(이재훈, 1997: 118, 180-1).

둘째, 일본군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부터 군의부서와 수의부서를 함께 운용했다. 1904년 한성에 설치된 한국주차군사령부에는 군참모부, 군부관부, 군법관부, 군경리부와 함께 “군군의부(軍軍醫部)”와 “군수의부(軍獸醫部)”가 동시에 조직되었다. 군군의부는 주차군의 위생업무를 담당했으며, 육군성 의무국장의 지시를 받았다. 이와 달리 군수의부는 군마위생업무를 담당했으며, 육군성 군무국장의 지시를 받았다.7) 각 사단의 군의체계도 이미 1905년부터 군의부와 수의부로 분리되어 있었다. 사단 군의부는 위생중대를 보유하고 군의·간호장(看護長)·간호수(看護手)·치중병(輜重兵)으로 편성되었고,사단 수의부는 수의·제철공장(蹄鐵工長)·제철공졸(蹄鐵工卒)로 편성되었다[8,] 1918년에 조선주차군사령부에서 개편된 조선군사령부에도 군의부와 수의부는 별도의 부서로 편성되었다[9].

소련군과 일본군은 공통적으로 군사지휘기관에 군의업무와 수의업무를 각각 총괄하는 행정부서를 별도로 조직하였고, 사단과 예하부대에도 군의부서와 수의부서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그런데 인민군총사령부의 군의체계는 일본군의 군의체계 보다 소련군의 군의체계에 가깝다. 소련군최고사령부가 후방사령관의 지휘 아래 군위생총지휘부와 수의총지휘부를 편성한 것처럼, 인민군총사령부도 후방부사령관의 지휘 아래 군의과와 수의과를 편성하였다.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자, 각 사단과 여단에 설치되었던 군의부대도 대대적으로 증편되었다. 각 보병사단에는 사단본부 직속으로 위생대대가 조직되었고, 소좌(少佐)가 대대장으로 배치되었다. 또한, 사단본부에는 위생대대와 별도로 군의소(Military Medicines Bureau, 軍醫所)가 설치되었다. 군의소는 사단 후방부사령관(後方副司令官)이 직접 관할했다(한림대, 1989b: 277). 사단 군의소는 “사단 의무처”라고도 불렀고, 군의소의 책임자는 군의소장 또는 군의장(軍醫長)[10,]이라 불렀다. 사단 군의소는 위생마차와 운송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위생마차를 운용하기 위해 별도로 마차병이 배속되었다(김성림, 1950: 3).

인민군이 정식으로 창설되면서 군의체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소련군의 군의체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첫째, 위생대대에는 소련 고문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인민군의 군의장교들을 지도함으로써 인민군에 소련군의 군의체계를 도입했다. 둘째, 소련군은 연대마다 군의·수의중대를 조직해 군의업무와 수의업무를 함께 취급했는데, 인민군 연대의 위생중대는 인민군 창설 이전까지 수의업무를 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8년 2월 17일 현재 인민군 연대의 위생중대는 군의업무와 수의업무를 함께 담당하고 있었다(한림대, 1989b: 179, 243).

인민군이 창설되자, 각 연대마다 직속으로 위생중대가 조직되었고 대위가 위생중대장으로 배치되었다. 또한, 연대본부에는 위생중대와 별도로 군의소가 실치되었고, 소좌가 군의소장으로 배치되었다. 연대군의소에는 군의소장과 함께 상위(上尉)계급의 수의사가 배치되었다(한림대, 1989c: 207). 연대군의소는 “연대 의무처”로도 불렀고, 연대 군의소장은 “연대 의무장(醫務長), 연대 군의장”으로도 불렀다(김성림, 1950: 2-3).

연대의 위생중대는 30명의 장교·하사관·병사로 편성되었고, 1개 담가소대(擔架小隊, stretcher platoon)를 보유하고 있었다[11,]. 담가소대는 각각 11명으로 편성된 2개 담가분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장교는 군의(대위)·준의(상위)·담가소대장(소위) 각 1명이 배치되었고, 하사관은 특무장·위생중사 각 1명, 담가분대장(중사) 2명이 배치되었다. 연대의 담가소대는 의료업무 뿐만 아니라 수의업무도 맡고 있었다. 담가소대원 중 10명이 연대 군마를 돌보는 업무를 맡았다. 또한, 담가소대원 중 10명은 담가 운반병이었고, 나머지 병사는 연대 군의소에서 근무했다(한림대, 1989b: 179).

인민군 연대에 직속된 위생중대는 소련군 연대에 직속된 위생중대와 병력 규모가 유사했다. 독소전쟁 중이던 1942년 12월 당시 소련군 보병연대에 직속된 위생중대(Medical Company)는 평균 33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다. 이중 장교는 7명, 하사관은 4명, 병사는 22명이었다. 소련군 위생중대가 인민군 위생중대와 다른 점은 장교 7명이 모두 준위(准尉)계급이었다는 점이다(Steven J. Zaloga, 1998: 25). 인민군은 군의·준의·담가소대장에 대위·상위·소위 등 정식 위관장교를 배치함으로써 소련군보다 위생중대의 계급적 위상을 높게 설정하였다. 이것은 인민군이 창설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계급의 장교를 배치함으로써 위생중대의 운용과 병력·물자의 동원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조치로 판단된다.

북한정치세력의 국가건설과정은 1948년 9월 9일 정식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1차적으로 완료되었다. 북한정부에는 군대를 지휘하는 행정부서로 민족보위성이 조직되었으며, 민족보위상에는 동북항일연군 출신 최용건(崔庸健)이 임명되었다(민주조선사 편, 1949: 193-4). 인민군의 군의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바로 민족보위성이 설립된 이후이다. 민족보위성에는 행정부서 중 하나로 인민군 군의체계를 담당하는 군의처(軍醫處)가 설치되었다. 민족보위성 군의처의 부서로는 2개 부서가 확인된다. 군의처에는 “군의부(軍醫部)”가 설치되었고12), “수의부(獸醫部)”도 조직되었다(재정처, 1949: 5-6). 군의처의 장관은 군의처장이었고, 각 사단에는 군의장이 배치되었다(이성배, 1948).

민족보위성의 군의체계는 소련군의 군의체계와 다르다. 소련군최고사령부는 후방사령관의 지휘 아래 군위생총지휘부와 수의총지휘부를 각각 별도로 편성했는데, 민족보위성은 군의업무를 총괄하는 군의처를 조직하고, 그 예하부서로 군의부와 수의부를 편성했다. 민족보위성에서는 소련군에 비해 수의업무를 총괄하는 행정부서의 위상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민군이 무기·장비가 현대화된 제2차대전 이후에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제2차대전 중 자동화기, 전차, 항공기 등이 전투의 주요화력으로 등장하고 기계화장비가 대량으로 도입되자, 기병은 더 이상 전쟁의 주요 기동전력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기병의 역할은 지상군의 기동력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변화했다(이재훈, 1997: 277).

인민군의 군의체계는 기본적으로 소련군의 군의체계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다른 점도 상당부분 존재했다. 대표적인 것이 담가부대이다. 담가부대는 물자와 환자를 나르는 운수부대이다. 소련군은 운수장비가 발달한 관계로 별도의 담가부대가 없었다. 소련군과 인민군의 운수능력 차이는 부대에 지급된 군마의 수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인민군의 보병대대에는 운수용으로 51필의 군마가 지급되었지만, 소련군의 보병대대에는 29필의 군마가 지급되었다(제2대대부, 1950; Steven J. Zaloga, 1998: 25).

반면 소련군과 달리 중국공산당군대와 일본군에는 담가부대가 있었다. 1946년 중국내전기 중국공산당군대에는 사단의 직속부대로 담가대가 편성되었고, 이 담가대는 3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병력은 약 400명이었다(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편집위원회 편, 1992: 444-5). 일본군은 사단의 직속부대로 위생대(衛生隊)가 편성되었고, 이 위생대는 위생중대와 담가중대로 편성되었다. 위생중대 병력은 487명, 담가중대 병력은 187명이었다(第七師團, C13110595300).

이처럼 인민군은 소련군을 그대로 모방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인민군의 군의체계에는 소련군·일본군·중국군의 군의체계가 혼합되어 있었다. 인민군총사령부와 민족보위성의 군의부서는 소련군·일본군의 군의부서와 유사했고, 인민군 예하부대의 군의부서·위생부대는 소련군 예하부대의 군의부서·위생부대와 유사했다. 그리고 일본군·중국군에 담가부대가 있었던 것처럼 인민군에도 담가부대가 편성되었다. 즉 북한정치세력은 먼저 창군에 필요한 모든 군사적 요소를 동원하고, 이중에서 인민군에 가장 적합한 요소를 취사선택해 군의체계를 구축하였다.

인민군의 군의체계가 특히 소련군의 군의체계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와 관계 때문이다. 제25군사령부는 1945년 12월에 내부에 민정부서를 설치하고, 북한의 중앙행정기관에 고문을 파견했다. 무력을 관할하는 북한의 보안국에는 보안·검열지도부장 자그루진 대좌가 파견되었다(기광서, 2004: 218). 그는 보안국장 최용건을 자문하면서 초기부터 군대 창설을 지원하였고, 이로 인해 북한의 무력에 소련군의 군사적 요소가 급속히 도입되었다. 소련군의 민정부서는 1947년 5월에 소련민정국으로 개편되었고, 북한의 사법과 경찰을 담당하는 사법·보안지도부가 조직되었다(기광서, 1998: 135-9).

인민군 군의체계는 처음에 소련군의 민정부서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1946년 8월 이후에는 다른 요소들로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먼저 북한 지역의 무력은 1946년 8월에 대대부가 설립되자 군대와 경찰로 분리되었다. 이후 군대는 대대부가 지휘했고, 경찰은 보안국이 지휘했다. 1946년 8월 이후 소련군사령부 민정부서는 북한의 경찰을 지도했다. 그리고 북한의 군대는 새로 편성된 소련 군사고문단이 지도했다. 소련 군사고문단은 8월에 제25군 소속 장성 3명과 군관 343명으로 편성되었고, 고문단장은 스미르노프 소장이 맡았다. 이들은 보병부대인 보안간부훈련소의 본부와 예하 대대까지 배치되어 부대의 편성과 훈련을 지도하고 자문하였다(기광서, 2004: 230; 한림대, 1989a: 419-420). 인민군의 군의부서와 위생부대는 소련군에서 파견된 군사고문에 의해 육성되었다.

다음으로 소련군 민정부서가 북한의 행정기관에 행사하던 지휘권은 1946년 2월 이후 점차 북한정치세력에게 이양되었다. 행정지휘권은 1946년 2월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소련군사령부가 공동으로 행사했고,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되면서 모두 이 기관에 양도되었다(기광서, 2004: 218). 즉 1947년 2월 이후 북한의 각 부문에서 북한정치세력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북조선노동당은 앞서 1946년 10월에 군사간부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였고, 노동당원인 의료인력을 선발해 군의장교로 배치하였다. 이에 따라 1947년부터 노동당과 군의장교가 군의체계의 형성과정에서 주요 주체로 부상하였다.

3. 군의의 충원과 군의장교 : 일본·만주·소련

인민군 군의체계의 형성과정에서 가장 긴급한 문제 중 하나는 의료인력의 확보문제였다. 북한정치세력은 조선인민군의 창설과정에서 다양한 체계와 경로를 통해 군의를 확보하고 양성하였다. 1948년 2월 8일 인민군이 정식으로 창설되기 전에는 군의병력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군사학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민군 창설 이전에 장교를 양성하던 군사학교는 평양학원(平壤學院)과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北朝鮮中央保安幹部學校)가 있었다. 그러나 두 학교에는 군의를 양성하는 학급이나 교육과정이 없었다(김선호, 2012a: 182-192).

따라서 인민군의 군의병력은 주로 기존에 북한사회에서 보건의료부문에 종사하던 인물 중에서 충원되었다. 해방 당시 북한의 의학교육기관은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함흥의학전문학교가 있었고, 2개 학교의 조선인 학생은 80명이었다(박윤재·신규환, 2012: 390). 평양의전과 함흥의전은 1946년 9월부터 5년제 대학(평양의학대학·함흥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46년 8월 21일에는 청진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었고 10월 1일에는 김일성대학이 설립되면서 의학부가 설치되었다. 그 결과 1946년 8~10월부터 본격적으로 의사·구강의사·약사가 양성되기 시작했다(허윤정·조영수, 2014: 250-4). 그러나 이 의학교육기관은 1948년 9월 북한정부 수립 때까지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다. 따라서 북한지역의 의료인력은 대부분 해방 전에 의학교육기관을 졸업하고 북한사회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다.

인민군에 군의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군사학교가 처음 설립된 시기는 1948년 2월이다. 2월 8일 인민군이 정식으로 창설되면서 총사령부 직속으로 “군의학교”가 설립되었다. 총사령부 직속 군의학교는 1948년 9월 9일 민족보위성이 수립되면서 보위성에 직속되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민족보위성 군의학교”로 명명되었다(육군정보국, 1952: 109-110). 현재까지 민족보위성 군의학교의 체계와 교육과정은 확인되지 않는다.

인민군의 군의병종은 군대의 계급에 따라 구별되었고, 각 계급마다 일반부대의 군인과 다른 계급명칭이 부여되었다. 인민군의 군의장교는 군의(軍醫)와 준의(準醫)로 구별된다. 군의는 군인으로서 군대에 복무하는 의사를 의미하며, 준의는 의사보다 한급 낮은 기술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의사에 준할만한 의료인력을 뜻한다. 인민군의 준의는 북한사회의 펠셀(조의사)에 해당한다(사회과학출판사 편, 1992a: 345; 사회과학출판사 편, 1992b: 311, 869)[13,].) 인민군의 군의하사관으로는 위생특무장·위생상사·위생중사·위생하사가 있고, 병사계급에는 위생병이 있다[14,]. 군의하사관이 부대와 치료기관에서 사업하는 중급 군의성원이라면, 위생병은 초급 군의성원이다(한림대, 1989b: 179; 사회과학출판사 편, 1992b: 1780).

인민군에서 군의하사관과 위생병으로 활동한 인물은 확인되지 않지만, 상급 군의장교로 활동한 인물들은 확인할 수 있다. 군의장교의 이름을 최초로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은 1946년 8월 15일 대대부가 창설된 이후이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중앙병원 초대 원장은 이병훈(李丙勳)이다. 그는 1902년 2월 1일 경성에서 이응구(李應九)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22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전공은 외과였다. 그는 1933년에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경성에 있는 우에무라(植村)병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 후 조선총독부의원 의원(醫員),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조수(助手), 도립의원 의관(醫官) 등을 역임하고, 1936년 경성에서 개업했다(帝國秘密探偵社 編, 1943: 115). 그는 1940년 말에 평양에서 이병훈외과병원을 개업했고 평양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북한문헌에 따르면, 그는 해방 이후 개인병원을 기증하고 1946년 10월부터 대대부 “직속병원” 초대 원장을 맡았다(백과사전출판사 편, 1999: 189-190).

대대부에서 군의로 활동한 또다른 인물은 김명준이다. 그는 “보안간부훈련 대대부 중앙병원”에서 “외과군의”로 근무했다. 김명준은 1917년에 평남 대동군에서 태어났으며, 1942년에 평양의전을 졸업했다. 그는 1942년부터 1945년 1월까지 평양도립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재직했고, 2월 1일부터 8월 14일까지 조선주둔군 평양육군병리보급창 대동군 부산면탄약소 의무실에서 의사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김명준은 1945년 9월까지 대동군 부산면 신흥치안대에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6년 6월에 북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1946년 10월에 “김일성대학병원” 외과의사로 배치되었고, 1946년 11월부터 1947년 3월까지 대대부 중앙병원에서 외과군의로 근무했다. 그 후 1947년 4월부터 북조선특별병원 외과의사로 재직했다[15].

김명준의 경력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해방 이전에 일본군 군의로 근무했고, 해방 직후 치안대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북조선노동당이 창당되기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일본군 군의로 근무했기 때문에 군의체계를 알고 있었고, 치안대 활동과 공산당 입당으로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검증된 인물이었다. 비록 대대부의 군의는 김명준 밖에 확인할 수 없지만, 군의들은 해방 이전에도 군의로 근무했거나 정치사상적으로 검증된 인물들이 선발되었을 것이다. 또한 군의는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지방인민위원회뿐만 아니라 당을 통해서도 충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대부 이후 군의장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은 1948년 2월 8일 인민군총사령부 창설 이후이다. 3월 11일 당시 인민군총사령부 후방부 군의과장은 이동영(李東英)이 맡았다. 그는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 보건국장을 겸임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인민군에서도 사복을 입고 있었다. 수의과장은 장석호 중좌였다. 그는 평북의 의주농업중학교와 장춘의 대동학원을 졸업했고, 해방 이전에 만주국 정부에서 관료로 활동했다. 수의과 부과장은 함인복 소좌였다. 그는 수의과장 장석호의 친구이며 평북의 의주농업중학교를 졸업했고, 해방 이전에 평북 희천군의 농업협회에서 기술자로 근무했다(한림대, 1989b: 348-9).

군의과장 이동영은 1895년에 평북 박천군에서 태어났으며, 1922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전공은 외과였다. 그는 졸업 후 경성의전 세균학교실에서 연구하다가 1922년에 충남도청 위생과 기수(技手)로 취직했으며, 1923년부터 경북 김천도립의원 외과주임으로 재직했다. 1927년부터 조선총독부 의관(醫官)으로 근무했고, 재직시 규슈제국대학 제2외과교실과 도쿄제국대학 외과교실 등에서 연구했다. 1929년에 경성에서 개업했다(醫事時論社編, 1941: 47).

그는 해방 직후 민족주의정당인 조선민주당에 가입했다. 민주당은 1946년 2월에 지도부가 완전히 개편되었는데, 이때 초대 당수 조만식(曺晩植)의 측근들이 축출되고 최용건이 당지도부를 장악하였다. 이동영은 이 지도부 개편때 신임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김선호, 2006: 294-7). 그는 1946년 2월부터 민주당에서 최용건계열로 활동하였고, 이같은 경력이 반영되어 최용건이 총사령관을 맡은 인민군총사령부에 군의과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러나 이동영은 보건국장으로 재직할 당시 조직적 지도경험이 부족해 사업을 원활히 집행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소련군사령부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황상익·김수연, 2007: 48).

제2대 군의과장은 1948년 5월부터 이동화(李東華) 중좌가 맡았다. 그는 소련에서 성장하고 해방 이후에 입북한 고려인이었다. 제2대 수의과장은 1948년 5월부터 장진호 중좌가 맡았다. 그는 도쿄수의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이전에 만주국 정부의 보충마부서에서 직원으로 근무한 인물이다. 그는 해방 이후에 만주의 조선의용군 리홍광지대(朝鮮義勇軍 李紅光支隊)[16,]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12월에 입북해 보안간부훈련대대부에 배치되었다. 인민군총사령부 중앙병원 원장은 이병훈 소좌가 맡았다(한림대, 1989c: 22)[19,]. 그는 1922년에 경성의전을 졸업했으므로 초대 군의과장 이동영의 경성의전 동기생이다. 그가 중앙병원 원장으로 임명된 데에는 이동영의 역할과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병훈은 이후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 계속해서 조선인민군 중앙병원 원장을 맡았다(백과사전출판사 편, 1999: 190).

1948년 9월 9일 북한정부가 수립되면서 군대를 지휘하는 행정부서로 민족보위성이 조직되었는데, 민족보위성 군의처장은 인민군총사령부 군의과장이었던 이동화가 맡았다. 정부수립 전에 인민군총사령부 초대 군의과장이었던 이동영은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이후 활동공간을 북조선민주당으로 옮겼다. 그는 9월에 북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한국전쟁 때까지 계속해서 민주당에서 활동했다(일본외무성, 1967: 36-7).

민족보위성 군의처 군의부장은 1948년 11월 23일 당시 “리기봉”이 맡고 있었다[18,]. 이기봉(李基鳳)은 1933년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제4회로 졸업했다(경성제국대학동창회, 1976: 203). 그는 1940년 11월 1일 당시 만주길림성 연길성립의원(延吉省立醫院)에서 의관(醫官)으로 재직했다(만주국, 1940.11.1). 이기봉은 만주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1945년 9월 12일 연변에 용정의과대학이 설립되자 제1대 학감(學監 : 敎育長에 해당)을 맡았고, 교수로서 안과학 과목을 가르쳤다. 용정의과대학은 해부학, 미생물학, 병리학, 진단학, 내과학, 외과학 등 11개 학과를 설치하고 225명의 조선인 학생을 입학시켰다. 이기봉은 제1대 학감 겸 교수로서 연변지역의 보건의료체계와 의료인력 양성사업을 주도하였다[19].

앞서 살펴본 이들을 제외하고, 조선인민군 군의로 근무한 인물 중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김기철, 김춘실, 조기진이 있다. 김기철(金基哲)은 함경북도에서 1918년에 태어났다. 그는 정규의학교육기관 졸업생이 아니라 의과검정시험에 합격한 인물이다. 김기철은 만주에서 성립의원 의관으로 재직했으며, 1945년 9월부터 용정의과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했다(허청선 외, 2002: 757). 김기철은 1946-1947년 사이에 용정의대 강사를 사직하고 입북한 것으로 보인다. 김기철과 함께 용정의과대학 강사(세균생화학)로 재직한 송유섭은 1946년 3월에 입북했는데, 김기철이 1948년 11월 “현재 인민군대 군의”라고 기록하였다.20 김기철은 용정의대 강사로 근무하다가 송유섭이 입북한 이후 북한으로 들어와 인민군에 군의로 배치된 것이다.

김춘실은 노동당원으로 평양의학대학병원 의사 최창수가 입당할 때 입당보증인이었고, 조기진은 최창수의 해방 이후 이력에 대한 증명인이었다. 두 사람은 1948년 11월 현재 “인민군 군의”로 근무하고 있었다. 최창수는 만주의과대학 출신이었는데, 1945년 9월부터 1946년 7월까지 평양의전 부속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했다[21]. 따라서, 김춘실과 조기진도 해방 이전에 의학전문학교나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김기철·김춘실·조기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군의과장·군의부장·중앙병원장 등 상급군의 이외에 다른 인민군 군의들도 해방 이전에 일본식 의학전문학교와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인물들이었다.

인민군의 군의장교들은 몇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군의장교 중에서 이동화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만주·일본·조선의 의학교육기관을 졸업하고 해방 전까지 만주와 일본의 의료체계를 토대로 운영된 의료기관에서 활동한 인물들이다. 대대부 중앙병원 군의 김명준은 평양의전 졸업생, 대대부 중앙병원장 이병훈과 초대 군의과장 이동영은 경성의전 졸업생, 군의부장 이기봉은 경성제대 졸업생이었다. 군의부서에 배치된 간부와 달리수의부서에 배치된 간부는 주로 수의학교와 농업학교 졸업생이었다. 초대 수의과장 장석호와 부과장 함인복은 의주농업학교 졸업생, 2대 수의과장 장진호는 도쿄수의학교 졸업생이다.

둘째, 민족보위성 군의부장 이기봉(안과학)을 제외하고 대대부 중앙병원군의 김명준, 초대 군의과장 이동영, 2대 군의과장 겸 인민군총사령부 군의처장 이동화, 중앙병원장 이병훈은 모두 외과학 전공의였다. 인민군이 주로 외과학 전공의를 군의장교로 발탁한 것은 제2차대전부터 부상 후 사망자의 양상이 달라진 것과 관련있다. 제1차대전까지 부상 후 사망자는 대부분 전투로 인한 손상이 아니라 상처의 감염, 감염병, 내과적 합병증으로 인한 병사자였다. 그러나 1910년대 이후 출혈과 감염에 대항할 수 있는 항응고제·항균제·항생제(페니실린)가 개발되면서 감염병 사망자와 전상 사망자의 비율이 제1차대전 당시 4:1에서 1:10으로 급격히 변화했다. 그 결과 제2차대전부터 군진의학에서 외과학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김석화, 2013: 69-70). 결국, 인민군의 창설과정에 투입된 군의장교는 대부분 만주와 일본의 의료체계를 습득하고 외과학을 전공한 의사들이었다.

셋째, 일부 군의장교는 해방 이전에 만주국 정부와 만주국이 설립한 의료기관에서 재직했고, 해방 이후에는 연변에 설립된 용정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가르쳤다. 민족보위성 군의부장 이기봉은 연길성립의원 의관을 역임했고, 인민군 군의 김기철도 성립의원 의관을 역임했다. 제1대 수의과장 장석호는 만주국이 고위관료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한 대동학원을 졸업했고, 해방 전까지 만주국 정부에서 관료로 활동했다. 제2대 수의과장 장진호는 만주국 정부의 보충마부서에서 직원으로 근무했다. 해방 이후 이기봉은 용정의대 제1대 학감을 맡았고, 김기철은 용정의대 강사로 재직했다.

용정의대는 1940년 7월에 용정에 설립된 개척의학원(開拓醫學院)의 후신이다. 개척의학원은 2년제로 2/3이 일본인학생이고 1/3이 조선인학생이었으며, 1945년까지 10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로 진출하자, 개척의학원의 조선인 교수·학생들과 용정교육동맹은 일본인들로부터 개척의학원을 접수하고, 9월 12일에 이를 6년제 용정의과대학으로 개편하였다(문미라·신영전, 2017: 225-8). 이기봉은 경성의전 출신 김광찬(金光瓚) 교장, 조선의용군 제5지대 출신 박송파(朴松波) 행정처장과 함께 용정의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들은 용정의대의 조직·학제·학과를 새로 결정했으며, 조선인 의사들을 교원으로 초빙했다. 그 결과 용정의대는 6년제 학제를 바탕으로 11개 학과를 갖추게 되었다. 인민군 군의 김기철은 용정의대 중국인반에서 “약물성 서약(藥物性 西藥)”을 가르쳤다(鄭逵昌 主編, 2006: 20, 90; 허청선 외, 2002: 757). 이들은 만주의 보건의료체계에 익숙한 인물이었고, 해방 이후 조선인 의료인력을 양성한 의사였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1946년부터 진행된 북·중 의료협력의 결과로 북한 의료계에서 활동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용정의대의 운영주체는 1946년 3월과 10월에 조선인에서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연변전원공서와 길림성으로 전환되었다. 용정의대 제1대 학감 이기봉은 1946년에 북한으로 귀국했는데, 그는 용정의대 조교수 여창범(呂昌範)이 1947년 1월에 청진중앙병원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문미라·신영전, 2017: 231-3, 251). 용정의대 교수진의 입북은 중국공산당의 지시나 허가 아래 진행된 것이다. 반대로 북조선노동당도 의료인력을 중국내전에 파견하였다. 노동당은 1946년 8월에 평양의학전문학교 외과의사 최창수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그는 1948년 3월까지 “동북인민해방군 리홍광지대”에서 위생부 의무과장으로 근무했다(김선호, 2017: 135-6). 즉 북조선노동당과 중국공산당은 건국과 내전에 필요한 의료인력을 서로 지원하였고, 만주에서 입북한 의료인력은 그곳에서 체득한 의료경험을 인민군에 전파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군의장교와 달리, 2대 군의과장과 민족보위성 군의처장을 맡은 이동화는 전혀 다른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1948년 2월 8일 인민군총사령부에 처음으로 군의과가 신설되었을 때 군의과장은 이동영이었으나, 그는 불과 3개월만에 교체되었다. 정부수립 이전의 군의장교들이 인민군의 군의체계를 육성한 사람들이었다면, 이동화는 정부수립 이후에 인민군의 군의체계를 실질적으로 정착시킨 인물이다. 다음은 이동화의 의료경력과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이동화는 소련에서 태어나 성장한 대표적인 고려인이다. 그는 1923년에 제3베르흐네우진스크 보병연대에 입대해 처음으로 소련 적군(赤軍)에 편입되었고, 1년 4개월 동안 병사로 복무하다가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왔다. 이동화는 1929년 치타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소련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후 10년 동안 의학전문학교·의학대학·외과대학원을 다니면서 외과의사로 성장하였다. 이동화는 1939년에 처음 소련군 군의로 배치된 이후, 군사병원과 보병여단에서 약 5년간 군의로 근무했다.

이동화가 북한지역으로 파견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시점은 1944년이다. 그는 그해 5월에 소좌계급을 달고 소련극동군 소속 제88여단에 군의소 소장으로 배치되었다. 제88여단은 1942년 6월에 소련군이 대일전을 대비해 만든 정찰부대였으며, 조선인 103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주요인물은 김일성, 강건, 김책, 안길, 최용건, 최현 등이었다. 이동화는 제88여단의 조선인들 중 최고계급자였다[22].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해방 직후에 북한의 정치 질서를 주도한 핵심 정치세력이었다. 제88여단의 활동과 경험은 이동화가 해방 이후 공산당 간부부장을 역임하고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진출해 북한정계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이었다.

이동화는 해방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 “보건국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는데, 1947년 5월에 그 직책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2월 8일 창립 당시부터 부국장을 맡았을 것이다[23,]. 그는 1948년 5월에 인민군총사령부 군의과장으로 임명되면서 적십자협회 위원장을 사임했는데, 후임 위원장은 인민군총사령부 초대 군의과장이었던 이동영이 맡았다(전현수 역, 2006: 57-8). 이동영이 3개월만에 군의과장에서 물러난 것은 군의경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정치세력은 인민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자 소련군의 군의체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소련 의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소련군 군의장교로 근무한 이동화를 군의과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초대 군의과장 이동영과 인민군 중앙병원 원장 이병훈은 둘 다 경성의전 졸업생으로 평양에서 개업의를 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일본식 의학교육을 받았고 일본의 의료체계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이동화는 이들과 달리 29세부터 45세까지 소련의 의학과 군진의학을 교육받고, 대학병원의 의사와 소련군사병원·군의소·보병여단의 군의로 근무했다. 그는 북조선인민위원장 김일성과 인민군 총사령관 최용건 등 동북항일연군 출신과 정치·군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고, 이들의 후원을 받아 인민군총사령부 군의과장과 민족보위성 군의처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인민군 창설 이후 군대에 소련군의 군의체계를 정착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4. 군의부대의 운영과 예방의학

인민군의 군의부대는 기본적으로 북한정부의 예산에 따라 운영되었다. 군의부대의 예산은 민족보위성에서 편성하였고, 민족보위성의 예산은 민족보위성 재정처에서 수립했다. 1949년 1월 19일에 비준된 『민족보위성 예산과목 일람표』에 따르면, 민족보위성의 예산은 봉급, 양식·사료비, 일반경리비, 공영·건설공사비, 전투·체육훈련비, 병기·전투기재 구입비, 문화비 등 모두 24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군의처의 예산은 제6항 군의비와 제7항 수의비였다. 군의비는 군의처장이 담당했고, 수의비는 군의처 수의부장이 담당했다. 군의비와 수의비를 통해 인민군의 군의부대 운영현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예산 내역은 다음과 같다.

군의비는 크게 시설비, 장비·기구 구입비, 경상비로 나눌 수 있다. 예산 내역을 보면, 인민군 군의처가 치료실, 실험실, 병원, 약국, 병실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의처는 군의를 위해 의학잡지·포스터·의학참고서적·의학표본을 구입했고, 군의들의 의학연구를 보조하기 위해 별도로 연구비를 책정하고 있었다. 군의처는 의료실험을 위해 실험실 설비를 갖추고 실험용 동물을 구입해 양육했다. 그리고 군의처는 지방에서 의사를 초빙했는데, 이는 새로운 의학을 학습하거나 군의들이 치료하지 못하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군의비에는 인민병원 치료비가 책정되어 있는데, 이는 군의부대에서 치료하지 못하는 환자를 인민병원으로 보내는 사례가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군의처의 수의업무는 군의처 수의부에서 담당했다. 수의비는 마필비와 수의비로 구분되었다. 군의처는 수의업무를 위해 수의 비품·약품·붕대·실험용동물·서적·표본을 구입했다. 또한, 필요한 경우 지방에서 수의를 초빙했는데, 이는 군의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수의학을 학습하거나 수의들이 치료하지 못하는 군마를 치료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의부는 군마를 구입하는 한편, 군마를 양성하기 위해 별도로 농장을 운영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수의부대는 소련군·일본군·중국군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군의체계이다. 인민군의 수의는 소속부대가 보유하고 있는 군마를 치료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인민군의 각 부대에는 대부분 군마가 지급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소속을 알 수 없는 제2대대에는 총 51필의 군마가 지급되었다. 3개 보병중대에는 각 2필, 위생소대·통신소대에는 각 1필, 공급소대에는 6필, 반포(反砲)소대에는 9필, 박격포소대에는 13필, 중기(重機)중대에는 15필이 지급되었다. 제2대대의 수의들은 모든 말에 ‘백호, 습격, 돌파, 진군, 연승, 도하, 격멸’ 등 각각 이름을 붙였고, 군마마다 나이와 품종을 기록하였다. 이들은 군마를 말의 몸에 있는 특징적인 털모양이나 털색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수의들은 마적부(馬籍簿)에 말의 용도와 키를 기록했는데, 말의 용도를 포마(砲馬), 기마(騎馬), 차마(車馬), 모마(䡚馬) 등으로 구분했다(제2대대부, 1950).

그러나 인민군 군의부대나 병원·군의소 등의 의료시설은 매우 열악한 형편이었다. 미군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인민군 군의부대나 병원·군의소는 복잡하거나 심각한 질병이 접수되었을 경우, 모두 민간의료시설을 이용해 치료하고 있었다(한림대, 1989c: 158). 또한 각 연대에 군의소와 위생중대가 있었지만, 연대 군의소는 사소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장비만 갖추고 있었다. 환자수용능력도 20명에 불과했다. 연대 군의소는 특별치료가 필요한 심각한 질병의 경우에는 개천(价川)의 제1사단 병원으로 후송하였다. 연대 군의소에서 사용하는 의약품들은 대부분 남한지역에서 가져온 구 일본군 약품과 미군 약품이었다. 1948년 2월 당시 인민군에서 사용되는 약품 중 1개만 소련에서 원조한 것이었다. 이 약품의 이름은 “산토닌(Santonin)”이다. 산토닌은 유럽쑥 산토니카(Santonica)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제조한 구충제였다. 이 약품은 인민군에서 회충과 요충의 치료에 사용되었다(한림대, 1989c: 158).

1948년 초반의 시점에도 군의부대·병원·군의소의 의료시설이 열악했던 이유는 다양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소련으로부터 의료지원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1947년까지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을 본격화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인민군은 물론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의 의료시설도 매우 열악했다. 1947년 6월에 평양의 소련군병원을 방문했다가 월남한 인물에 따르면, 당시 소련군의 의료장비는 초보적 수준이었고 그것마저도 부족한 상태였다. 또한 소련군병원은 당시에도 주로 일본제 의료장비와 약품을 사용하고 있었다(한림대, 1989b: 180). 소련의 의료지원은 1948년 9월 북한정부 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소련은 “의료기구와 의약품들을 대량으로” 보내주었고, 북한 각지에 설치된 “적십자병원”을 통해 북한의 보건의료사업을 지원하였다(문화선전성, 1949: 25).

인민군 군의체계의 특징은 감염병 방역을 중심으로 예방의학(Preventive Medicine)이 특화되었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민군총사령부 후방부 군의과와 수의과는 공통적으로 전염병방역계, 예방계, 치료계로 편성되었다(한림대, 1989b: 344-6). 인민군이 특별히 감염병 방역분야를 특화한 이유는 해방 이후 북한지역에서 급성 감염병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1944년부터 1948년까지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급성 감염병의 환자 수는 다음과 같다.

해방 전후를 비교해 보면, 북한지역에는 해방 직후에 감염병이 급증하고 있었다. 1946년의 감염병 환자는 일제시기인 1944년보다 3.5배가량 증가했다. 해방 직후 북한지역은 감염병에 대한 관리체계가 거의 붕괴되었고, 이로 인해 감염병의 발병률이 남한지역보다 높았다. 특히 1946년에는 귀환동포 등 인구이동으로 인해 콜레라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북한지역의 감염병 환자는 1946년에 최고조에 달했고, 1947년에는 약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1947년부터 감염병 환자가 대폭 감소한 것은 소련의 방역지원, 위생방역체계의 구축 때문이었다. 특히 소련군은 방역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유행병 전문의사로 구성된 의료지원단을 북한의 각 지역에 파견하였다(김진혁, 2014: 257-263).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에 감염병 환자는 1947년보다 약 2,400명이 증가하였다. 인민군이 창설되고 민족보위성이 설립된 이후에도 감염병 문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국가건설기에 발생한 주요 급성 감염병은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천연두 등이었다. 이 감염병들은 모두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사람의 분비물·피부, 식품·음료수, 이·집파리 등을 통해 전파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발병시에는 기력상실·고열·요통·복통·발진·패혈증, 편도선·인두·비강 병변, 복막염 합병증, 신경조직·장기 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북한에서 가장 많이 발병한 감염병의 치명률을 보면, 발진티푸스의 치명률은 10-40%, 장티푸스의 치명률은 10%, 천연두의 치명률은 심한 경우 25%에 육박한다(배시애·이택구, 2007: 58-60, 78, 107).

제1차대전을 거치면서 군인들의 천연두·디프테리아·파상풍·장티푸스 등은 백신을 통해서, 곤충에 의한 질병은 DDT 등의 살충제로 일정 정도 해결되었다(김옥주, 2013: 51). 그러나 북한지역에서 백신은 1946년도에 처음으로 콜레라예방백신, 장티푸스예방백신, 천연두예방백신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1947년에 들어서 3종 종합백신이 생산되었지만, 나머지 감염병에 대한 백신은 1948년까지 생산되지 않았다. 따라서 감염병 예방접종도 위의 3개 급성 감염병에 한정해 실시되었다(전현수 역, 2006: 158-9). 또한, 인민군에서 DDT를 보유하거나 사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인민군 창설 당시 북한지역에서 유행하던 급성 감염병은 주로 비위생적인 생활환경 속에서 세균과 바이러스가 사람·음식·곤충을 매개로 인체에 침입해 발생하는 감염병이었다. 군인들은 개인주택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달리 집단시설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중대단위로 병실(兵室)이라 불리는 내무반에 거주했고, 모포·베개·마다라스(매트리스)로 구성된 침대에서 생활했다. 또한, 이들은 물·변소·선면실(세면실)·식당·취사장·피복건조실 등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인민군은 위생과 방역을 위해 병영마다 매일 소제당번(掃除當番)을 두었지만, 이들은 청소도구로 병영을 쓸고 닦을 뿐 정기적인 소독은 없었다. 침구는 1주일마다 청소했으나 먼지를 털고 일광소독을 하는데 그쳤다(박찬목, 1949). 문제는 군인들의 개인 위생상태가 매우 열악했다는 점이다. 북한주둔 소련군의 보고에 따르면, 1946년 12월 현재 북한 군인들은 모두(100%) 몸에 이가 득실거리고 있었다(전현수 역, 2004: 44).

따라서 인민군의 병영에 감염병이 발생한다면 전염의 속도와 규모가 주민들 보다 빠르고 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북한지역에는 감염병을 예방할수 있는 백신도 종류가 적었고 부족했다. 특히 이 감염병들은 병사들이 정상적인 교육·훈련을 받을 수 없거나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한 증상을 동반하고 치명률이 10~40%에 달했기 때문에, 발병했을 경우 전투력에 심각한 차질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인민군은 집단시설에서 공동으로 생활하는 군인들의 특성을 고려해 특별히 감염병 방역부서와 예방부서를 설치해 질병을 예방하려 하였다.

인민군의 군의체계에서 예방의학이 특화된 것은 북한의 의료체계가 기본적으로 소련의 의료체계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46-1947년 북한의 보건국은 소련민정국 보건부의 지도하에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였다(기광서, 1998: 135). 소련 의료의 기본원칙은 “질병 발생 예방을 목적”으로 한다. 이 원칙에 따라 소련의 보건의료사업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뿐만 아니라 환자의 생활공간 조건을 분석함으로써 질병의 원인 자체를 없애는 것에 중점을 두고 조직되었다(세마쉬코, 2017: 26-7)[25,].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건국은 이미 1946년 5월 25일에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각 도 소재지마다 1개씩 인민소독소를 설치했으며, 보건위생을 개선하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각 군에 1개씩 인민보건소를 신설했다(윤기녕, 1987: 576-7).

북한정치세력은 이미 1946년 초부터 예방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각종 의료시설을 설치해왔다. 인민군 군의체계의 감염병 방역부서와 예방부서는 이같은 예방의학에 대한 관심의 결과였다. 인민군에 설치된 군의부서는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군부대와 군사학교에서 예방접종과 건강검진 등을 실시했다. 대표적으로 집단군총사령부는 1947년 9월 사령부 직속 특별부대 병사들을 대상으로 콜레라 예방접종을 실시하였다. 또한 초급장교를 양성하는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의 군의소는 1947년 4월에 장교후보생들을 대상으로 예방 의료사업과 건강검진을 실시하였다(한림대, 1989a: 464; 김일성, 1992: 429).

5. 맺음말

북한정치세력은 해방 직후부터 국가 건설을 목표로 각 부문에 걸쳐 새로운 체계를 만들었다. 특히 보건의료는 주민들의 건강과 일상생활을 보장함으로써 이들을 국가 건설의 주체로 동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북한정치세력은 사회적으로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는 한편, 새로 창설하는 군대에도 군인들을 위해 군의체계를 구축하였다. 조선인민군은 처음 창설되는 군대였으므로, 군의체계의 형성과정에는 기존에 있던 의료적 요소와 새로운 의료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인민군의 군의체계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첫째, 인민군의 군의체계는 1946년 8월 대대부시기에 처음으로 군사지휘기관에 중앙병원이 설치되면서 출현하였다. 그리고 1948년 2월 인민군총사령부시기에 처음으로 군의과와 수의과가 설치되면서 형식을 갖추었고, 북한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면서 민족보위성에 군의처가 설치되었다. 인민군의 군의체계는 소련군·일본군·중국군의 군의체계가 혼합되어 있었다. 북한 정치세력은 먼저 창군에 필요한 모든 군의적 요소를 동원하고, 이중에서 인민군에 가장 적합한 요소를 취사선택해 독자적인 군의체계를 구축하였다.

둘째, 인민군의 군의장교는 창군 초기에는 주로 북한사회에서 보건의료부문에 종사하던 인물들로 충원되었다. 인민군의 창설과정에 투입된 군의장교는 대부분 해방 전에 만주·일본·조선의 의학교육기관을 졸업하고 만주와 일본의 의료체계를 습득한 인물들이며, 전투시 가장 많은 환자가 발생하는 외과를 전공한 의사들이었다. 이들과 달리 1948년 9월 북한정부가 수립된 이후 인민군의 군의체계를 책임진 이동화는 소련의학을 교육받고 소련군에서 군의로 근무했던 인물이었다. 즉 이들을 통해 일본·만주·소련의 의료체계가 창군시기 인민군의 군의체계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조선인민군은 1946년 8월부터 편성되기 시작해 1948년 9월 9일에 공식적으로 국가체계에 편입되었다. 북한정치세력이 약 2년 만에 군의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유산과 소련의 지원 때문이었다. 이들은 초기에 일본의 의료체계를 습득한 의료인력과 일본이 남겨놓은 의료시설을 활용해 군의체계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이것이 일정한 궤도에 오르자 소련의 의료체계를 습득한 의료인력과 소련제 의료시설로 대체하였다. 일본 의료체계의 연속과 단절, 그리고 소련 의료체계의 도입과 정착은 ‘혁명’처럼 급속히 진행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즉 인민군의 군의체계에는 일본과 소련의 의료체계가 연속·단절·변용의 방식으로 수용되었다.

이 글은 북한의 국가건설기에 인민군의 임상의학에 대한 연구·치료의 현황을 다루지 못했다. 인민군에 형성된 군의체계는 주로 임상의학을 통해 군대에서 발현된다. 따라서 인민군의 군의부대가 실제 운영과정에서 수행한 임상의학의 현황을 파악한다면 인민군의 군의체계가 보다 풍부하게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인민군의 군의체계는 한국전쟁시기에 전장에서 실제로 구현되고 변화했다. 인민군은 전쟁 중 군의부대를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응급의료시설인 야전병원을 운영했다. 이같은 전지의학은 전후 인민군의 군의체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상의 주제는 지면상 향후 연구과제로 남긴다.

<표1> 제1보병사단 제1연대의 모병 현황(1946년 11-12월)

Current status of recruitment of the 1st division 1st regiment (November to December 1946)

<표 2> 이동화의 의료경력과 활동

LEE Dongwha’s medical career and activities

<표 3> 민족보위성 예산과목 일람표

List of budget subjects of the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표 4> 1944-1948년 북한지역의 감염병 환자수24)

Number of infectious disease patients in North Korea from 1944 to 1948

Notes

1)

일반적으로 군대에서 적용하는 의학을 지칭하는 용어는 군진의학이다(사회과학출판사편, 1992a: 343). 그러나 인민군에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군진의학의 개념이 도입되지 않았다. 다만, 인민군은 戰時 군대의 의학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戰地醫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2)

병종부대는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전투행동을 전개하는 부대를 뜻한다. 육군은 보병, 탱크병, 포병 등의 병종으로 구성된다(사회과학출판사 편, 1992a: 1407).

3)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이 1935년에 만주에서 활동하던 각종 항일부대를 연합해 편성한 민족연합군대다.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대표적 인물은 김일성, 최용건, 김책, 강건 등이다(조선로동당출판사 편, 1957: 77).

4)

김명준, 「리력서·자서전」(평양의학대학, 1949). 이 자료는 노획문서로 별도의 쪽수가 없어 작성자의 이름으로 표기하였다.

5)

집단군총사령부는 문화부, 포병부, 후방부, 작전부, 간부부, 통신부, 공병부, 정찰부, 대열부, 정치보위부, 검찰소 등으로 구성되었다(장준익, 1991: 53-4; 주영복, 1991: 73; 최태환, 1989: 45-6).

6)

현대 의학에서는 세균, 바이러스 등이 생체 내에 침입해 증식하는 질병을 감염병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이 질병을 “전염병”이라고 불렀다(김일성·강량욱, 1987: 595-7). 이 글에서는 당대 자료를 인용한 부분에는 “전염병”이라는 용어를, 필자가 서술한 부분에는 “감염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7)

이 자료는 일본국립공문서관이 운영하는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https://www.jacar.go.jp)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관의 자료는 소장번호로 표기하였다(陸軍大臣, A03020680700).

8)

치중병은 군수품의 운송을 담당하는 병력이며, 제철공장과 제철공졸은 군마의 편자를 만들고 관리하는 병력이다(第七師團, C13110595300).

9)

다음 자료에 들어있는 “朝鮮軍司令部編制表”에서 확인하였다(朝鮮軍参謀長, C01004599300).

10)

군의소는 부대나 연합부대 등에 조직되는 치료기관을 뜻한다. 군의장은 부대나 연합부대의 군의사업을 조직하며, 군의부대의 활동을 전문·기술적으로 지도·관리하는 군인을 뜻한다(사회과학출판사 편, 1992a: 345).

11)

북한의 의학용어 중 담가는 “들것”을 뜻하며, 담가대는 들것으로 사람이나 물건을 나르는 대오를 뜻한다(사회과학출판사 편, 1992a: 715).

12)

려창범, 「자서전(1948.11.23)」(청진의과대학, 1949).

13)

펠셀(Feldsher, 조의사)은 대학의학부나 의과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도 시험에 합격하면 진료행위를 할 수 있는 의료인력이다. 북한 보건국은 1947년 8월에 의료인력을 속성으로 양성하기 위해 펠셀시험규정을 제정했다. 펠셀시험은 1·2부에 걸쳐 구두시험으로 시행했고, 북한은 1948년 말까지 336명의 펠셀을 양성했다(이동영, 639-640; 보건성, 1949: 12).

14)

인민군의 계급은 다음과 같다. 병사(전사), 하사관(하사·중사·상사·특무장), 위관(소위·중위·상위·대위), 좌관(소좌·중좌·대좌·총좌), 장관(소장·중장·대장·차수·원수).

15)

김명준, 「리력서(1948.11.23)」(평양의학대학, 1949).

16)

조선의용군 리홍광지대는 1945년 말에 남만주에서 조선의용군 제1지대를 모체로 만들어진 조선인부대이다(료녕민족출판사 편, 1986: 1).

17)

이병훈에 관해 북한문헌에는 그가 개인병원을 기증하고 자의로 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주한미군 정보보고서에는 이병훈이 모든 재산과 자택·병원을 몰수당한 채 월남했었고, 그 후 재산을 찾기 위해 평양에 돌아왔다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후자가 사실일 것이다.

18)

려창범, 「자서전(1948.11.23)」(청진의과대학, 1949).

19)

이 내용은 『延邊大學醫學部早期歷史』에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이기봉의 이름이 李奇奉으로 나오며, 경력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성립제1의원에서 근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군의부장 이기봉과 동일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한자명은 『滿洲國政府公報』에 실려있는 것이 정확하다고 판단했다(鄭逵昌 主編, 2006: 19-20).

20)

송유섭, 「리력서(1948.11.23)」·「자서전(1948.11.23)」(청진의과대학, 1949).

21)

최창수, 「리력서(1948.11.18)」(평양의학대학, 1949).

22)

제88독립보병여단의 소련군 계급을 보면, 김일성·김책·안길은 대위였고, 이영호는 중위였으며, 기타 인물들은 하사관이나 병사였다(김국후, 2008: 56-67).

23)

현병근은 1947년 5월에 소련에서 귀국했는데, “북조선보건국 부국장 이동화 선생에게 추천서를 전달”하였다(현병근, 「자서전(1948.10.28)」 (평양의학대학, 1949)).

24)

1945-1948년 통계는 소련민정국 자료이고, 1946년도는 북한자료를 추가했으며, 1944년도는 일본자료이다. 1946년도 소련과 북한의 통계를 비교해 보면, 발진티푸스·장티푸스·재귀열의 통계에 큰 차이가 있다. 선행연구는 소련민정국 자료에 1946년도 콜레라 환자수가 각각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황상익·김수연, 2007: 68). 이 차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북한자료가 추가로 발굴될 필요가 있다. 전현수의 번역본에는 “возвратный тиф”가 간헐티푸스로 번역되어 있으나, 정확한 병명은 재귀열이다(전현수 역, 2006: 159).

25)

세마쉬코는 레닌의 혁명동지로 1917년 10월혁명 이래 소련의 보건의료체계를 직접 설계하고 구축한 인물이다. 그는 1918년부터 1930년까지 소비에트연방 보건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28년간 모스크바국립대학 의학부에서 사회위생부 교수로 재직했다(세마쉬코,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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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표1> 제1보병사단 제1연대의 모병 현황(1946년 11-12월)

Current status of recruitment of the 1st division 1st regiment (November to December 1946)

모병집단 병력접수일 접수병력(명) 불합격병력(명) 모병지역
집단1 1946.11.05 1,800 1,000 함경도

집단2 1946.11.12 2,500 700 강원도, 함경도

집단3 1946.11.20 400 0 강원도, 함경도

집단4 1946.11.25 900 0 강원도, 함경도

집단5 1946.12.12 400~500 0 강원도, 함경도

집단6 1946.12.15 500~600 0 강원도, 함경도

합계 6,500~6,700 1,700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북한정보요약(1947.7.15-31)」 No.41(한림대, 1989a: 276).

Table 2.

<표 2> 이동화의 의료경력과 활동

LEE Dongwha’s medical career and activities

시기 경력 시기 경력
1901.12.27 연해주 아무르주 예까쩨린니꼴스크 부근에서 출생 1941.12 소련 적군에 재징집

1915~1921 블라고슬로벤느촌 초·중학교 재학 1941.12~1942.9 극동전선군 정치사령부 특수 선전과 교관

1923.2~1924.6 제3베르흐네우진스크(현 울 란우데) 보병연대에서 복무 1942.9~1944.5 아무르주 스보보드니군사병원 외과 주임의사(3급 군의)

1927~1929.6 소비조합 판매원 및 조합장 1944.5~1945.8 극동전선군 제88독립보병여단 군의소 소장(소좌)

1927 소련공산당 입당 1945.9 김일성과 함께 평양 도착

1929~1930.6 치타의학전문학교 재학 1945.10.13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간부 부장

1930.4~1936.4 이르쿠츠크의학대학 재학 1945.11.14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

1936.4~1939.4 이르쿠츠크의학대학 외과대학원 재학 1946.8.31 북조선노동당 상무위원

1939.5 할힌골전투 당시 소련 적군에 징집 1947.9.1~1948.3.30 북조선인민위원회 보건국 부국장, 김일성대학 공중위생과 초빙교원

1939.5~12 치타전투병원 지부 3급 군의 (대위) 1948.2.1 조선적십자협회 위원장

1940~1941 이르쿠츠크의학대학 외과병원 조수 1948.3.30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Д.В. ШИН 외, 2011: 271; 김광운, 2003: 169, 223, 247, 375, 500, 600).

Table 3.

<표 3> 민족보위성 예산과목 일람표

List of budget subjects of the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항목 과목 예산 내역 예산 장악
제6항 군의비(軍醫費) 16. 군의비 치료실, 실험실 설비 및 군의위원회의 비용. 기계 및 비품의 소(小)수리, 실험용금수(禽獸) 구입 및 양육비. 수혈자의 보수 및 의족의수비(義足義手費), 인민병원에서의 치료비. 지방의사 초빙시의 보수. 연구비. 의학잡지, 포스다, 의학참고서적대(貸) 및 의학표본, 약품, 의료세탁물, 의료기구 및 약국용 기구 구입비. 고정 및 이동식 의료용 기구 구입, 병실(病室), 실험실 경리물품대(貸). 담가대(貸). 방역비. 소독시설비 군의처장

제7항 수의비(獸醫費) 17. 수의비 수의비품 및 기구, 보충구입비 및 수리비, 약품, 붕대 구입비. 실험용금수 및 양육비. 수의서적, 포스다비, 표본. 수의부장

18. 마필비(馬匹費) 마필을 부대에 인계할 때까지의 사양비. 필요한 시의 마필치료, 장제비. 필요에 응하여 지방수의(地方獸醫) 보수. 마필인계와 관련된 기타비용. 군마양성비. 마필구입비 및 치료비, 육성(育成)경영에 필요한 경리 및 기타의 비용. 육성마에 대한 농장경영. 수의부장

(재정처, 1949: 5-6).

Table 4.

<표 4> 1944-1948년 북한지역의 감염병 환자수24)

Number of infectious disease patients in North Korea from 1944 to 1948

병명 1944년 1945년 1946년
1947년 1948년
① 소련 ② 북한
발진티푸스 2,485 18,286 14,158 9,782 6,135 8,869

장티푸스 4,935 11,574 9,354 14,179 5,530 6,303

재귀열(再歸熱) - 3,334 4,281 1,381 2,580 2,204

파라티푸스 538 - 753 753 423 658

이질(痢疾) 1,067 - 2,074 2,074 776 1,086

천연두(天然痘) 986 - 10,527 10,527 3,611 2,209

성홍열(猩紅熱) 52 - 563 163 305 121

디프테리아 508 - - 996 2,153 2,380

뇌염(腦炎) - - 365 49 161 263

뇌척수막염(腦脊髓膜炎) 387 - 49 365 30 43

아시아콜레라 - - 1,235 1,235 18 -

합계 10,958 33,194 43,359 41,504 21,722 24,136

(УСГАСК, 1948: 290; 한림대, 1994: 132-3; 김진혁, 2014: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