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원대 의료관원의 선발과 관리 -의호(醫戶)제도와 의학과거제의 실시를 중심으로-
Selection and Management of Medical Official during the Yua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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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lthough the healthcare system of the Yuan Dynasty followed that of the Song Dynasty, there are certain differences between these two dynasties in terms of practices. Including appointing ‘Yihus’ in ‘Zhusehuji’ and setting up ‘Guanyitijusi’ to oversee Yihus, the Yuan Dynasty developed an effective management system for their physicians and, soon after the coronation of Khubilai, built ‘Yixue (Medical school)’ all over its territories in order to establish an organized and substantial medical training system. Moreover, the Yuan Dynasty not only reviv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system system between 1314 and 1320 as well as the medical examination system, but also increased the quota for qualification to twice that of Confucian examination in Song. These changes resulted in producing many brilliant people at the time.
In the second half of the reign of Emperor Chengzong it was decided that the incompetence of the government healthcare organizations and the abundance of charlatans could not be neglected any longer. Existing policies and systems was limited in educating and training proper physicians, and this problem was not restricted to the field of medicine. The need for new systems that could reform the social order led to the restoration of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system.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system for Confucianism and for medicine began in 1314 and 1316, respectively. The purpose of the medical examination system was to select medical officials. The medical examination system which started in 1316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medicine of the Yuan dynasty for many reasons. Firstly, the qualification to apply to the medical examination did not remain constricted to ‘Yixue’ but opened to all ‘Zhusehuji’; and secondly, the examination system did not have a restriction on the number of applicants was not restricted. The most important aspect of the examination system was that the number of test takers that passed the first test was one hundred and the number of passers of the second test were thirty, which were not low compared to the number of passers of the Confucianism examination. As such, the impact of the medical examination on the Yuan society was substantial.
The Confucian examination selected 300 persons to pass the first test. The second test had 100 test takers which was equally divided among the four social classes at 25 percent each. The medical system selected 100 persons in the first test and 30 in the second. What is important is that unlike the Confucian examination system, the medical system was not divided into four classes. Hypothetically, the 30 qualified persons could all be South Chinese. In terms of the number of passers, it was much more promising for the South Chinese to flourish through the medical test than through Confucian examination test.
Such facts support the claim that the Yuan Dynasty emphasized the field of medicine compared to the Song Dynasty. Although the Song Dynasty implement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system early on, the medical system was not implemented until 1115, which started with the founding of ‘Yixue’ across the country and assigning student capacity. During the Song Dynasty, the number of students in the medical system was 15 percent of that in the Confucianism system, and compared to that in Yuan, it raised to 30 percent, which is twofold. The indications of the Yuan Dynasty valuing medicine and making an effort to educate and train medical experts can be seen in the ‘Yihu system’, ‘Guanyitijusi’, Yixuetijusi’, and medical school as well as the ratio of the medical system capacity.
1. 머리말
본 논문은 원조(元朝)의 의호(醫戶)제도에서 출발한다. 의호는 앞 시기의 중국 역대 왕조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였다. 원조는 호(戶)의 종류를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그에 따라 가업(家業)을 한정한다는 제색호계(諸色戶計)를 설정했다. 이 제색호계 제도는 원조의 독특한 요역법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각 호의 성원은 국가에 대한 관계를 세습적으로 규정받았다[1,]. 그 속에 의호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원대에 시작된 의호제도는 이후 명대(明代)까지도 계승되었다[2].
의호제도는 앞 시기 다른 왕조와 구별되는 원조만의 특징적인 의료인구 관리방식이다. 원 정부는 의료인구를 사회 재원으로서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규정과 제도를 초기부터 정비해 나갔다.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관의제거사(官醫提擧司), 의학제거사(醫學提擧司)[3]와 같은 전문 의학기구들을 설립하였으며, 의료인재를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하여 전국 지방마다 의학 교육기구인 ‘의학(醫學)’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원대 의료인재의 선발과 관리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학과거제(醫學科擧制)’의 실시였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송대(宋代) 실시되던 과거제도는 몽골족이 중국을 통치하던 원대에는 초기부터 오랫동안 폐지되었다가 원 인종(仁宗) 연우(延祐)연간(1314~1319)에 부활되기에 이른다. 송대에도 의관(醫官)을 선발하는 고시제도가 있었지만, 의호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의료인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자 했던 원대에는 의학과거에 대한 운영방식과 비중이 송대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원조의 의료관원의 선발과 관리과정이 앞 시기의 다른 왕조와 어떠한 차별적 특성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된 기존의 연구를 살펴보면, 이미 의호, 관의제거사 등에 대한 연구가 존재한다[4,]. 그리고 중국고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각 왕조의 의정제도를 다룬 단행본이 존재한다[5,]. 그리고 삼황묘(三皇廟) 제의(祭儀)가 원대 의학발전에 기여한 측면과, 원대 의학교육에서 임상교육이 상대적으로 비중있게 실시되었음을 밝히는 연구들이 있다[6]. 다만 기존의 연구는 의학 기구 및 의학 제도에 대하여 그 체제·기능·성격·개폐 시기 등을 개별적으로 서술하고 있거나 특정 기구만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한 제도나 기구들이 역사적 맥락에서 어떠한 성격의 변화와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다소 미흡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세조(世祖) 즉위기인 중통(中統) 연간(1260~1264)부터 의학과거제가 실시되는 연우 연간(1314~1319)까지 의학사적 맥락에서 의호 및 여러 의학기구의 성립부터 변화과정을 다루려고 한다. 이 기간을 다시 세 시기로 구분함으로써 의학사적 서술과 맥락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제1기는 의학기구와 제도들이 정비되는 시기로서 세조 재위기(1260~1294)이다. 제2기는 이전 시기에 정비된 의학기구와 제도들이 점차 부실화되어 가고 여러 가지 폐단들이 노출되는 시기로서 성종(成宗)대부터 인종 초(1294~1315)까지이다. 제3기는 인종 연우 3년 의학과거제의 시행 이후(1316~ )이다[7].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연우 연간에 재개되는 의학과거가 갖는 의학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원조의 의료관원 관리제도와 의학 과거가 송조의 그것과 어떠한 차별성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송·원대 두 왕조에서 실시된 의학과거의 지역별 합격자 수인 해액(解額)[8] 비율을 비교해 봄으로써 그 차이를 보다 극명하게 보여줄 것이며, 원대 사회에서 의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을 구체적으로 논증할 것이다. 다만, 본 논문에서는 의료 관원의 선발과 관리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므로 원대 민간 의료인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자 한다.
기초 사료로는 『대원성정국조전장(大元聖政國朝典章)』[9,], 『원사(元史)』, 『지정조격(至正條格)』[10] 등을 이용하였다. 『대원성정국조전장』은 1320년(연우7)에 편찬·간행된 전장으로서 시급한 실무에 참고하기 위하여, 세조 이래 이용된 단행법을 모아 1320년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 초기부터 과거제가 시행된 직후까지 원조의 제도와 규정의 변화를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는 데 매우 유용한 사료이다.
2. 의호(醫戶)와 의학기구의 제도화
원조는 의관에 대한 관심과 비중이 역대 다른 왕조보다 높았다. 원조와 역대 다른 왕조의 의관 최고 품계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당조(唐朝)에서 의관으로서 최고 품계는 상약국장(尙藥局長)인 상약봉어(尙藥奉御)가 갖는 정5품하(正五品下)이다. 최고의 의관이라 할지라도 전체 품계 안에서의 위치를 본다면 그다지 높지 않았다[11,]. 송조에서는 화안대부(和安大夫), 성안대부(成安大夫), 성화대부(成和大夫) 등이 종6품,[12,] 금조(金朝)에서 태의(太醫)는 4품까지 이르렀다[13,]. 명조(明朝)에서는 태의원(太醫院) 원사(院使) 1인이 정5품이었다[14,]. 반면, 원조에서 태의원은 정2품 관청이었다[15] 원조에서 최고 의관의 품계는 다른 왕조보다 월등히 높음을 알 수 있다. 중원 왕조에 비하여 이민족왕조에서 의관의 품계가 높았는데, 이는 북방 이민족들이 상대적으로 한족들보다 의관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인식하였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특히, 원조는 그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원 정부는 형벌만큼이나[16] 의학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인식하였음은 이부(吏部)에서 올린 평양로의 지방관 왕우(王祐)의 아래 <사료 1>에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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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1>
듣건대, 세상에 다급한 사무가 오직 의(醫)와 형(刑)인데, 의(醫)의 사명은 사람에게 있고, 형(刑)은 세상을 바로잡는 데 있다. 오직 사람을 놓고 보면, 풍한서습(寒風暑濕) 때문에 질병을 만나며, 사악함과 사치스러움을 멀리하지 않아 죄에 빠지게 된다. 질병이 깊어지면 모름지기 의를 이용하여 치료해야 하며, 죄에 빠지면 당연히 형을 시행함으로서 끊는다. 그러나 의에 밝음〔明〕과 밝지 못함〔不明〕이 있고, 형에 넘침〔濫〕과 넘치지 않음〔不濫〕이 있다. 의에 혹여 밝지 못하면 혈기의 허실을 훤히 알기 어렵고 약이(藥餌)를 그릇되게 쓴다. 형이 혹여 넘치면 허물과 악함의 경중을 소상히 밝히지 않고 그릇 되게 매질을 가할 수 있다. 약이를 그릇되게 쓰면 이익 없이 반대로 해롭기만 하다. 그릇 되게 매질을 가하면 무고하게 재앙을 받는다. 이익 없이 반대로 해롭기만 하면 죽음과 삶이 서로 멀지 않다. 무고하게 재앙을 받으면, 삶과 죽음이 어떠할지 알지 못한다.
아~ 슬프도다! 죽지 않았으나 이미 죽은 바와 같고, 죽었다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망하지 않았으나 이미 망한 바와 같고, 망했다면 다시 회복할 수 없다. 삼가지 않았도다! 경계하지 않았도다! 이런 까닭에 의를 밝히기 위해서는, 마땅히 선현의 경훈(經訓)을 깊이 이해하여야 한다. 형을 넘치지 않게 하려면 이 왕조의 전장(典章)을 깊이 탐구하여야 한다. 경훈에 정통함은 즉 의(醫)를 위함이다.
전장에 통달함은 즉 이(吏)를 위함이다[17].
국가를 경영한다는 것이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을 살리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공정한 형의 집행과 정확한 의술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의학 경훈에 대한 중요성을 국가 경영의 근간인 전장에 대한 탐구에 견줄 정도였던 것이다. 원 정부에서 위정자들이 의학을 중요하게 여긴 배경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칭기스 칸 이래 몽골인들이 많은 정복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의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료 2>
그해 겨울을 나고, 탕구트 사람들에게 출정하기 위해 새로이 병력을 헤아려 개해(1226)의 가을에는 칭기스 칸이 탕구트 사람들에게 출정했다. 카돈들 가운데 예수이 카돈을 데리고 갔다. 가는 도중에 겨울이 되었다. 아르보카에 이르러 그곳의 수많은 들말을 사냥하게 되었다. 칭기스 칸은 조소토 보로[18]를 타고 있었다. 들말들이 닥쳐오자 조소토 보로가 놀라는 바람에 칭기스 칸이 말에서 떨어졌다. 살이 몹시 아파서 초오르카드에서 야영했다.
그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예수이 카돈이 “아들들, 노얀들이 상의하시오! 칸께서 간밤에 열이 몹시 높았습니다”하고 말했다.
… 중략 … 칭기스 칸이 두 번째로 원정하여 무찌르고 돌아와 돼지해(1227)에 하늘로 올랐다[19].
<사료 3>
뭉케 칸이 앞서 말한 성채를 포위하고 있을 때, 여름이 찾아와 혹심한 더위가 닥치면서 그곳의 물과 공기로 인하여 몽골군 안에서 이질이 돌고 역병이 발생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지상의 제왕은 역병을 막기 위해 포도주를 마셨고 그런 〔습관을〕 계속했다.
갑자기 병마가 그를 덮쳤고 병이 위독하게 되어, ‘모가이일’-1257년 1~2월-에 불길한 성채 아래에서 타계하였다[20].
위의 <사료 2>는 『몽골비사』에 나오는 칭기스 칸의 사망에 관한 글이며, <사료 3>은 『칸의 후예들』에 실린 뭉케 칸의 사망에 관한 글이다. 칭기스 칸은 대하(大夏) 원정길에 올랐다가 낙마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의 손자인 뭉케 칸(원 헌종)은 남송 원정길에 올랐다가 병영에 역병이 돌아 사망했다고 전한다. 몽골인들은 중국인들보다 확실히 실용주의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정복지마다 기술자 등 특수 직업군을 중히 여겼다[21]. 특히, 전장에서 일정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적정한 의료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칭기스 칸도 대하 정벌 과정 중에 낙마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뭉케 칸 역시 남송을 정벌하는 과정 속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뭉케칸을 계승하여 칸에 오른 쿠빌라이 이래 원 정부에서 의료 인재를 가볍게 치부할 수 없는 배경이었을 것이다. 쿠빌라이가 칸에 오른 이후에도 남송병합과 몽골제국 내 여러 세력들 간에 칸위 쟁탈전을 지속적으로 치루면서, 자연스레 의료 인재에 대한 수요와 중요성은 부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 제색호계 안에 ‘의호’ 설정
원 정부의 이러한 인식은 의호를 직업 세습호 성격의 제색호계라는[22,] 체제 안에 설정한 것에도 반영되어있다. 의호제도는 원 정부가 의료 인구를 어떻게 관리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이전의 왕조와 차별되는 매우 특징적이면서도 중요한 제도이다. 제색호계 안에 의호를 설정하고 호적에 등재한 후 그것을 기반으로 의료 인구를 관리하였다. 원대 제색호계제도 설립의 목적은 인민에 대하여 효율적으로 부역을 부과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조 성립 이전 몽골 제국시기에 몽골인들은 정복 과정에서 의사, 특수능력자, 군인, 종교인, 학자 등을 특별히 구별했다. 그리고 종교인, 학자, 의사 등에 대하여 세금과 부역에 대한 면제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의호와 유호(儒戶)는 한지(漢地 :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지역)가 지배 아래에 들어오면서 생겨났다. 제색호계제도에서 호계(戶計)를 변경하는 것은 금지하였으며, 위범자에게는 죄를 더해 원래의 호계로 되돌렸다고 한다. 즉 호계가 세습, 종신토록 유지된다는 것이다[23].
제색호계 제도는 원조의 독특한 요역법으로 규정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민호는 서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농민이다. 이외의 특수 호계는 각자의 직분 자체가 특수 요역이었기 때문에 일반의 요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해당하는 농촌에서의 부역은 협의의 민호에게만 부과된다. 이러한 사정은 주현(州縣)의 지방관의 관할 범위가 협의의 민호에만 한정되고, 특수 호계에는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과 호응한다. 즉, 특수 호계를 위한 개별 관할기관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군호에게는 옥로총관부(奧魯總管府), 장호(匠戶)에게는 민장제거사(民匠提擧司) 등 각각의 총관부가 있어서 민호와는 소속을 달리했다[24]. 의호를 관리하는 개별 관할기관으로서는 ‘관의제거사(官醫提擧司)’를 설치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표 1의 진강로(오늘날 강소성 진강시 지역)와 표 2의 강녕현(오늘날 남경지역)은 원대 강절행성(江浙行省) 북부 장강 하류에 서로 인접한 지역이다. 표 1과 표 2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지역에서 의호의 인구수는 전체 인구수 중에서 비율이 약 0.4~0.5% 정도이다. 즉 인구 1,000명 당 의호의 수는 약 4~5명 정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25]. 이러한 수치는 다른 호의 인구수와 비교해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비율이 높은 편에 해당한다. 궁수호가 제일 비율이 높고 그 다음으로 의호가 위치하고 있다.
대체로 호적에 등재되어 있는 의호는 차발(差發 : 세금과 부역의 의무)하는데, 지세(地稅)와 상세(商稅)를 내는 것 이외에, 군수(軍需)·포마지응(鋪馬祗應)·부역(賦役) 등은 면제하였다[26,]. 만약 관원들이 의료인에게서 약물을 구입할 경우 합당한 가격을 지불해야 하며, 강제로 취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하였다[27].
중국은 송대를 거치면서 의학지식이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의서편찬 사업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의학지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몽골인들은 이러한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의료 업종에 종사하는 가구를 제색호계 안에 의호로 편입시켰다. 몽골인들은 무수히 많은 정복전쟁을 치르면서 몽골제국을 건설해 갔는데, 그 과정 속에서 종교인, 학자와 더불어 의사들을 특별히 보호하였다[28]. 의사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던 몽골인들은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발전된 의료지식과 의료 인구를 제국의 체제 내에 흡수·활용할 목적으로 의호를 설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세조는 안남(安南: 안남은 오늘날 베트남 지역)이 원조에 귀부하자 중통 3년(1262) 9월에 안남왕에게 이듬해부터 매 3년마다 조공을 바칠 것을 명하였다. 조공품목에는 금은귀금속류, 향신료, 약재 등의 다양한 품목이 들어있었다. 주목되는 부분은 의료인, 유사(儒士), 음양복무(陰陽卜筮)에 능통한 사람, 그리고 각종 수공업 장인을 각각 3명씩 선발하여 보내라는 대목이다[29]. 안남지역에서 의료인을 공급받은 이유는 아마도 조공품 중에 안남의 향신료와 약재가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효능과 사용법을 잘 알고 있는 안남출신 의료 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외국으로부터 의료 인원을 지원받은 예는 안남의 사례 외에도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찍이 원과 고려 사이에는 여러 차례 의관의 왕래가 있었는데, 고려로부터 원으로 의관이 입국한 예는 원 세조 지원 22년(고려 충렬왕 11년; 1285)에 있었다. 원 세조가 병이 나서 고려에 좋은 의사(양의: 良醫)를 요청하였다. 고려 충렬왕은 상약시어(尙藥侍醫) 설경성(薛景成)을 원나라에 보내어 원 세조를 치료토록 하였는데, 그 후에도 설경성은 여러 차례 원나라에 왕래하였고 뒤에는 원 성종까지 치료하였다고 한다[30].
이렇듯 필요할 경우 국외에서도 양의를 지원받았다는 것은 첫째, 원조 초기에 아직 원의 의료제도와 의료인원 선발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둘째 그만큼 원조에서는 의료인재를 중하게 여겨 대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의학교류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태의원과 의학 설치
세조가 즉위하자 조정에서는 의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일었다. 세조가 즉위한 해에 중앙에 의학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최고 관청 태의원을 설치하였다. 지원 20년(1283)에 상의감(尙醫監)으로 개칭하고 정4품 관청이 되었다. 지원 22년에 태의원으로 복원되었고, 대덕 5년(1301) 정2품 관청으로 승급된 후 관원수도 증원되었다[31,]. 의학제거사와 관의제거사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태의원에서 전국의 의호를 관리하였다[32]. 이후 전국에 관의제거사가 설치되면서 의호 관리업무를 이관하였다.
원조에서는 의료 인재의 원천을 의호로 삼았다. 의호는 민간에서 의업을 행하면서 세의(世醫) 형식으로 의술을 익히고 전수·세습하던 의인(醫人) 가구들을 제색호계라는 원대 특유의 호적제도에 편입한 것이다. 이들 의호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그들의 의학수준을 제고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의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치하였다. 국가가 제도적으로 의료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의학 설치에 대한 논의와 필요성은 태의원사(太醫院使) 왕유(王猷)의 진언에서 시작하였다[33].
1261년 왕유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듬해 태의원 부사(副使) 왕안인(王安仁)을 파견하여 전국 각로에 ‘의학’을 설치하였다. 의학의 건물은 그 지역 관청의 건물을 활용하였다. 그리고 의학마다 학생들을 교육시킬 의학교수를 배치하였다. 만약 의학교수의 결원이 발생하면, 대개 직위를 세습하지 않고, 별도로 보거(保擧: 일종의 추천제) 방식으로 충원하였다. 의학교수와 의학에 입학한 학생에게는 본인에게 부과되는 검의(檢醫)와 사선(絲線), 포은(包銀) 등의 징발을 면제해 주었다. 의생은 매월 공부한 내용 중에서 어려운 문제를 시험보아야 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차등적으로 장려하기도 하고 벌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설치된 의학에 관한 사무는 전국 로마다 의학제거관을 설치하여 주관토록 하였다[36].
세조 즉위 초부터 전국에 의학·의학교수·의학제거관을 설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의학교육과 의료인재 육성에 대한 원 정부의 관심이 컸고 국가 정책에서 중요한 항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3) 의학제거사와 관의제거사 설치
의학제거사는 제거 1인, 부제거 1인을 둔 종5품 관청으로서 지원9년(1272)에 설치되었다. 이후 지원13년(1276)에 폐지되었다가 지원14년(1277)에 복원되었다. 전국의 의생 교육과정을 감독하였고, 태의원 교관의 시험을 관장하였다. 명의가 찬술한 저서를 교감하였고 약재를 판별·검험하고, 태의의 자제를 교육시키고 전국에 설치된 ‘의학’을 통솔하였다[37,]. 이외에도 의학제거사는 매년 13과 의학과목에 대한 시험문제를 월별로 총 120문제를 만들어 전국 의학교수에게 교부하였다. 의학교수는 이 문제를 받아 학생들을 평가했던 것이다[38].
의학제거사가 의학과 의학생에 대한 사무를 주관하였다면, 의료 인재의 원천인 의호에 대한 사무도 필요하였다. 그래서 설치한 것이 관의제거사였다. 관의제거사는 호적에 등재되어 있는 의호와 약방을 열어 약을 판매하고 의료 행위를 하는 집안의 자손과 친척[제질:弟姪]이 있으면 그 중에서 뛰어난 1명을 선발하여 ‘의학’에 보내는 임무도 있었다. 만약 양가집 자제가 있어, 그 자의 재능이 교육시킬 만하고 그가 원할 경우 ‘의학’에 입학시키는 업무도 관장하였다[39]. 관의제거사 설치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지원20년(1283) 2월에 보인다.
<사료 5>
지원20년(1283) 2월 갑인일, 태의원을 상의감으로 강등시키고 동인(銅印)을 새로 주었다. 강남 등의 지역에 관의제거사를 설립하였다[40].
<사료 6>
관의제거사는 품계가 종5품이다. 의호에 대한 차역〔차발〕과 소송사무를 관장하였다. 지원25년(1288)에 설치되었다. 대도(大都)·보정(保定)·창덕(彰德)·동평(東平) 4로에 제거·동제거(同提擧)·부제거 각 1인을 두었다. 하간(河間)·대명(大名)·진녕(晋寧)·대동(大同)·제녕(濟寧)·광평(廣平)·기녕(冀寧)·제남(濟南)·요양(遼陽)·흥화(興和) 10로에 제거·부제거 각 1인을 두었다. 위휘(衛輝)·회경(懷慶)·대녕(大寧)에 제거 1인을 두었다[41].
<사료 7>
관의제거사는 품계가 종6품이다. 제거 1인, 동제거 1인, 부제거 1인을 두었다. 의호에 대한 차역과 소송 사무를 관장하였다. 지원25년(1288) 하남(河南)·강절(江浙)·강서(江西)·호광(湖廣)·섬서(陝西) 5행성에 각각 1사(司)를 설치하였다. 그 밖의 각 행성에는 관의제거사가 없다[42].
<사료 8>
(1283년 4월 갑오일) 강남 각지의 의학제거사를 감축하고, 4행성에 각각 1개만 존치시켰다[43].
위에 열거된 사료를 보면 <사료 6>과 <사료 7>에서 관의제거사의 품계가서로 다르다. 중서성(中書省)과 요양행성(遼陽行省) 지역 등 북방 지역에는 모두 15개의 ‘로’ 단위 지역에 관의제거사를 설치하였으며, 옛 남송지역에는 ‘행성’ 단위에 관의제거사를 두었다고 보여진다. 두 지역의 품계를 다르게 설정했는데, 북방 지역은 종5품, 옛 남송지역의 5개 행성에 설치된 관의제거사는 종6품이었다. 상대적으로 옛 남송지역보다 북방지역의 품계를 높게 설정하였다.
<사료 5>에는 이미 지원20년(1283년)에 ‘강남 등의 지역’에 관의제거사를 설립하였다고 하는데, <사료 7>의 1288년에 설치되었다는 기사와 시기가 서로 다르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원 시기에 강남행성은 없었다. 강남은 남송 시기 지방행정구역 명칭이다. 남송 시기에는 ‘강남동로(江南東路)’와 ‘강남서로(江南西路)’가 있었다. 원조가 1279년 남송을 병합한 후 1283년에 강남 지역에 관의제거사를 설치했는데, 이때는 아직 옛 남송지역에 행성이확정되기 전이다. 남송 시기 강남지역은 원 시기의 강절행성 지역에 해당한다. 지원13년(1266)에 원조가 강남지역을 평정하고 양절도독부(兩浙都督府)를 설치하였다가 이것을 안무사(安撫司)로 개칭하였고, 지원15년(1278) 다시 항주로총독부(杭州路總督府)로 개칭하였다. 이후 지원21년(1284)에 양주(揚州)에서 강회행성(江淮行省)을 항주로 옮긴 후 강절행성으로 개칭하였다[44].
<사료 8>에서 의학제거사가 설치된 4성은 강회행성(江淮行省)·강서행성(江西行省)·복건행성(福建行省)·호광행성(湖廣行省)일 것이다. 옛 남송지역의 의학제거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감축된 것으로 보인다. 1283년 2월 강남 등지에 관의제거사가 설치된 후, 같은 해 4월에는 이들 지역에 설치되었던 의학제거사를 감축하고 4개 행성에만 존치시켰다. 1305년에 가면 복건지역의 의학제거사도 폐지하였다[45].
원 시기 관료로 입사하는 방법은 여러 경로가 있었는데,[46,], 과거제는 인종 연우연간(1314~1320)에 가서야 시행되었다. 그 이전까지 의관으로 입사하는 길은 대부분 보거 방식이었다. 그러다보니 여러 군데에서 입사와 관련하여 부조리가 횡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승상 화노화손(火魯火孫)과 유몽염(留夢炎) 등의 진언에 따르면, 천하에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적고 하급관리인 도필리(刀筆吏)에47) 의하여 관직을 획득하는 사람은 많다고 하였다. 유학이 이 정도이니 다른 분야도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과거제 시행을 건의한 것을 보면 관인 채용에 부조리가 심각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건의 내용에는 유학만이 아닌, 음양, 의술 분야도 포함되었다. 허형(許衡)도 이 건의에 동참하였다. 세조가 이들의 건의를 존중하였기에 단순히 논의에만 머무르지 않고 과거제의 대강을 이 때 이미 마련하였다[48]. 그러나 아쉽게도 과거제의 시행은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선거제의 도입이 불가능한 이상, 기존의 틀 안에서 의학제도의 내실화를 도모해야 했다.
전국에 설치된 의학 교육을 보다 내실화하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일련의 사업들이 추진되었다. 먼저 지원21년(1284) 12월에 전국 각지의 의학교수들을 소집하여 『본초』를 증보·수정토록 하였다[49,]. 사료에는 『본초』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본초』를 비롯한 여러 의학서적들을 함께 증보·수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근거는 이듬해(1285년) 태의원에서 의학교에 재학 중인 의학생들이 공부할 13개 과목을 제정하고 각 과목마다 경서의 편·권과 방론 조목을 지정한 것이다[50].
태의원에서 지정한 13과목별 경서의 편·권과 방론 조목은 아래와 같다.[51]
① 정시태의합설과목(程試太醫合設科目): 대방맥잡의과(大方脉雜醫科). 소방맥과(小方脉科). 풍과(風科). 산과겸부인잡병과(産科兼婦人雜病科). 안과(眼科). 구치겸인후과(口齒兼咽喉科). 정골겸금족과(正骨兼金鏃科). 창종과(瘡腫科). 침구과(鍼灸科). 축유서금과(祝由書禁科).
② 각과합시경서(各科合試經書):
대방맥잡의과: 『소문(素問)』 일부. 『난경(難經)』 일부. 『신농본초(神農本草)』 일부. 장중경(張仲景) 『傷寒論(상한론)』 일부. 『성제총록(聖濟總錄)』 83권(제21권~100권, 185~187권).
소방맥과: 『소문』 일부. 『난경』 일부. 『신농본초』 일부. 『성제총록』 16권(제167권~182권).
풍과: 『소문』 일부. 『난경』 일부. 『신농본초』 일부. 『성제총록』 16권(제5권~20권).
산과겸부인잡병과: 『소문』 일부. 『난경』 일부. 『신농본초』 일부. 『성제총록』 17권(제150~166권).
안과: 『소문』 일부. 『난경』 일부. 『신농본초』 일부. 『성제총록』 12권(제102권~113권).
구치겸인후과: 『소문』 일부. 『난경』 일부. 『신농본초』 일부. 『성제총록』 8권(제117~124권).
정골겸금족과: 『소문』 일부. 『난경』 일부. 『신농본초』 일부. 『성제총록』 4권(제139~140권/제144~145권)
창종과: 『소문』 일부. 『난경』 일부. 『신농본초』 일부. 『성제총록』 21권(제101권/제114~116권/제125~138권/제141~143권)
침구과: 『소문』 일부. 『난경』 일부. 『동인침구경(銅人鍼灸經)』 일부. 『성제총록』 4권(제191~194권).
축유서금과: 『소문』 일부. 『천금익방(千金翼方)』 2권(제29~30권). 『성제총록』 3권(제195~197권).
위의 내용을 보면 가장 많이 채택된 교재는 『성제총록』이다. 그 다음으로 『소문』, 『난경』과 『신농본초』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정골겸금족과’는 지금의 정형외과와 가까운데, 유목민으로서 낙마로 인한 부상 또는 전쟁을 많이 치룬 원대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과목으로 여겨진다.
한편, 의학생들은 의학경론에 대한 공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사료 9>
지금 의(醫)를 배우고자 하는데, 역시 『사서(四書)』에도 정통해야한다. (『사서』에) 정통하지 못하면 의료행위를 금지한다. 무릇 『사서』는 진실로 배움의 근본이며 덕으로 나아가는 문이다. 무릇 문무의복(文武醫卜)은 함께 마땅히 익혀서 알아야 하는 것으로 어찌 의학에서 그치겠는가? 또 의사가 되려는 자는 반드시 천지의 운기와 본초의 약성에 통달해야 하는데, 운기를 알려면 반드시 『역(易)』의 도(道)의 현미(玄微)함을 알아야 하고, 약성을 알려면 『모시(毛詩)』 · 『이아(爾雅)』의 명물에 통달해야 한다. 의사는 병의 원인을 논하고, 진단으로서 증상을 안다. 무릇 『상서(尙書)』, 『춘추(春秋)』, 『삼례(三禮)』 등의 서적에는 한결같이 통달해야 한다.[52]
그들에게는 유학경서에 대한 지식도 요구되었는데, 이것은 비단 원대 의학만의 특징은 아니다. 송대 의학생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지원22년(1285)에 예부와 상의감에서 의학의 체계를 바로잡고 내실을 기하기 위하여 예규를 마련하였다. 여기에는 의학교수에게도 시험평가를 실시한다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의학과거제의 시행을 건의하면서 의학과거제 시행절차까지 구체적으로 마련하였다[53]. 이 때 마련된 과거제 시행절차는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매 3년마다 1차례 태의 시험을 시행한다. 이에대비하여 13과목을 각로 총관부 감독 아래에서 엄격히 관리하고 각 과목별 의학 경전을 복습한다. 둘째, 시험 기간에 이르러서는 8월내에 로 총관부에서 선발시험을 치르고, 이듬해 봄 2월에 대도에서 성시(省試)를 치른다. 셋째, 선발된 자는 명단을 아뢰고 태의로 충원하여 업무를 승계토록 한다. 넷째, 부시(府試:지방 향시)에 선발된 자는 로의 학관 업무를 담당한다.
지원22년(1285)에 예부와 상의감에서 마련한 ‘의학’의 체계에 대한 내용을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① 이미 ‘의학’이 설립된 곳에서는 교수인원이 학생을 가르친다. 의생은 매년 내려 보내는 13과 제목에 의거하여, 매월 학습한 의학의 중심내용에 대하여 1문제를 시험 본다. 상의감에서는 연말에 우열을 가린 성적표를 보고 받고 검사하여 성적을 확인한다. 이 외에 의학교수에게 (아래 예시 문제와 같이) 3문제를 시험 본다.
a) 가령 어떤 사람이 아픈데, 머리가 욱신거리고 온몸에 경련이 일어 굽혔다 폈다 하기 힘들고, 추위에 몸을 오슬오슬 떨지만 땀은 나지 않아서, 찬 기운은 많지만 열은 적은 편이고 얼굴빛이 애처로워 좋지 않다. 허리와 등뼈가 욱신거려 아프며 손발가락 말단이 조금은 차갑고 저린데 가슴이 답답하지는 않지만 맥이 떠 있고[浮] 뻑뻑하며[緊] 까실까실하다[澀]. 이 경우 어떤 병증이라 이름하며, 어떠한 방법으로 다스릴 수 있는가?[54]
b) 가령 어떤 사람이 아픈데, 온몸이 열이 나고, 머리가 욱신거리고 바람에 오슬오슬 떨어, 열은 많지만 찬 기운은 적은 편이다. 얼굴빛에는 윤기가 있어 나쁘지는 않고, 가슴이 답답하며, 손발이 차지는 않은데, 맥은 떠 있고[浮] 말랑말랑한[緩] 느낌이다. 이 경우 어떠한 병증이라 이름하며, 어떠한 방법으로 다스릴 수 있는가?[55]
c) 가령 봄여름 달에 어떤 사람이 아픈데, 저절로 땀이 나며 추위에 오슬오슬 떨며 온몸이 열이 나고 목이 말라 물을 탐하며, 맥이 작아지고[微] 끊어질 듯하다[弱]. 이 경우 어떠한 병증이라 이름하며, 어떠한 방법으로 다스릴 수 있는가?[56]
별도로 책을 만들어서 본 학교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각 성적표를 연말에 보고하여 검사한다. 비교하여 우열을 가려서 교수로서의 능력여부와 직무의 적합여부를 판단한다.
② 전국 로의 관의제거사 혹은 제령소(提領所)는 정관(正官) 1인이 제조를 전담한다. 동의학교수(同醫學敎授)는 호적에 등재되어 있는 의호와, 약방을 열어 약을 판매하고 의료 행위를 하는 집안의 자손과 친척〔弟姪〕이 있으면 그 중에서 뛰어난 1명을 선발하여 의학에 보낸다. 만약 양가집 자제가 있어, 그 자의 재능과 성품이 교육시킬 만하고 그가 원할 경우 ‘의학’에 입학하도록 한다. 의학생의 본관, 성명, 그리고 학습한 경서 목록, 의학의 중심 내용에 대한 학습 유무를 상의감에 보고 한다. 만약 성취한 바가 있다면 이에 의거하여 임용한다.
③ 유학의 예를 보면, 전국 각 로에 교수·학록(學錄)·학정(學正) 각 1명, 상주(上州)·중주(中州)에 각각 교수 1명, 하주(下州)에는[57] 학정 1명, 현 단위에는 교유(敎諭) 1명씩을 배치하였다. (유학의 예를 준거로 하여)전국 각 로에 의학교수 1명을 두는 것을 입안하여 칙첩(勅牒)을 받는다. 이외에 학정 1명을 배치한다. 상주·중주·하주에 (학정을) 각 1명씩 배치하는데, 상의감으로부터 차부(箚付)를 받는다. 각 현에는 학유(學諭) 1명을 배치하는데, 관할 로의 의학교수로부터 차부를 받는다.
④ 각 지역의 관청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전국의 의학생, 호적에 등재되어 있는 의호, 의업을 생업으로 하는 자 등 이들 세부류를 모두 삼황묘에 모아, 성전에 분향하게 하고 각기 전공분야별로 치료한 병자, 병인, 시월운기, 사용한 약재의 부합 여부에 대하여 토론하도록 한다. 각자가 어떤 사람을 낫게 하였는지, 병환·치료법·약방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이것을 자기가 속한 로의 교수에게 올리도록 한다. 이외에 주현의 의학인은 매 월 학정·교유에게 보고하고, 연말에는 본로 의학교수에게 보고하면 우열을 비교하여 임용에 대비함으로써 가의(假醫)의 폐단을 혁파한다.
‘의학’은 대체로 ‘유학’의 체제를 준용하여 구체화했음을 알 수 있다. 전국 각 로에 의학교수 1명과 학정 1명을 배치하고, 상주·중주·하주에는 각각 학정 1명씩을 배치하였다. 전국 각 현에는 학유를 1명씩 배치하였다. 이에 대하여 모두 상부기관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했다.
②에 의하면, 의학에 입학할 수 있는 대상은 세 종류이다. 첫째, 호적에 등재되어 있는 의호이다. 둘째, 약방을 열어 약을 판매하고 의료 행위를 하는 집안의 자손과 친척 중 1명이다. 셋째는 선택사항으로 만약 양가집 자제 중에서 교육시킬 만한 재목으로서 그가 원할 경우이다. 그런데 여기서 양가집 자제란 일반적으로 유학, 즉 독서인 계층의 자제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본다면, 독서인 계층의 집안에서도 의학에 입학할 수 있었으므로, 이 조문은 원대 유의(儒醫)가 증가하는 제도적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58].
②에 보면 의학교수를 선발할 때, 의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어떤 경서를 공부했는지도 기록했다. 유학적 지식의 유무도 확인했던 것이다. ④에 보면 로에는 의학교수가 있지만, 주·현에는 의학교수가 없고 학정이나 교유가 있었기에 이들에게 보고하면 연말에 이들이 취합한 것을 관할 로의 의학교수에게 다시 보고하는 절차로 이해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남송 병합지역을 포함하여 행성제도가 완비되면서 북방과 남방 지역에 관의제거사 설치가 1288년에 일단락되었다. 세조 재위기간에 의학기구의 내실화가 상당히 체계를 갖추면서 일단락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당초의 목적이 언제까지 지속적으로 실현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세조 말년에 가면 강서행성지역에서 제대로 된 의료조치를 받지 못해서 죽은 죄수가 1292년 한 해 동안 무려 1,011명에 이르렀다고 한다.59) 각 지방의 감옥에는 옥의가 배치되어 있었음에도 이러한 사고가 났다는 것은, 관할 관청의 직무태만과, 옥의의 함량미달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세조 쿠빌라이가 사망한 이후 의료기구의 부실화 문제는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3. 의학기구의 부실화와 용의(庸醫) 문제
몽골제국시기를 시대구분하면, 전기(칭기스 칸~헌종 : 1206년~1259년), 중기(세조~성종 : 1260년~1307년), 말기(무종~순제 : 1307년~1368년)로 나눌 수 있다. 원 세조 쿠빌라이가 집권하고 남송 지역을 병합한 후, 제국의 여러 제도를 정비해갔다. 그 영향은 성종 대덕연간까지 이어졌다. 이후 중기의 전성기를 지나 무종~순제 시기의 말기는 몽골제국의 여러 모순들로 제국이 붕괴되어 가는 시기이다[60].
몽골제국이 말기로 접어드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재정적 측면과 권력계승구조의 측면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성종 즉위 이래 차츰 유목전통인 막북(漠北: 만리장성 이북의 몽골초원 지역)의 인적·물적 요소가 원조의 체제내로 다시 수렴되면서 세조 이래 집권적 관료제지배를 뒷받침하던 재정구조는 막대한 압력을 받게 된다. 1304년을 전후하여 특히 성종 말기에 북변의 반원(反元) 세력 중 상당부분이 원조에 내부하고 무종이 즉위하면서 원조재정은 파탄의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종은 세조 이래의 구법(舊法)에서 벗어나 유목전통세력의 이해를 체제 내에 수렴하기 위해 관료제의 틀을 파괴하였다[61]. 여러 유목 세력을 원 중심의 제국 질서 내에 포용하기 위하여 ‘사여’(賜與: 황제가 관직, 재물, 토지 등을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 형식으로 관직을 하사함으로서 관직의 작위화와 관직의 남발이 이루어졌다. 같은 맥락으로 재정적 측면에서도 과도한 사여가 이루졌다. 이와 같은 방식은 유목적 전통에 기인한 바가 크다. 즉 농경적 전통은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하다면 이에 비하여 유목적 전통은 분권적·봉건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권력과 재부(財富)의 분할을 통한 느슨한 연대가 곧 유목적 질서를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무종대의 재정운용의 특색은 무절제한 지출도 눈에 띄지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재원창출이었다. 가장 방만하게 재정이 운영된 무종 시기에는 세입 400만 정(錠) 중에 경사(京師: 수도)로 280만 정이 상달되었는데, 오로지 제왕(諸王)과 권신(權臣)에 대한 사여로 사용한 지출이 520만 정에 달하였다. 원조 역대 황제 중에서 가장 어질다고 칭송받는 인종의 치세조차도 세금을 늘리기 위하여 강남 전토에 대한 토지측량 명령이 내려졌을 정도였다[62,]. 그래서 인종은 세조 이래의 구법으로 복귀함으로서 인민생활의 안정과 함께 재정의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려고 하였으나, 막북 지역에 대한 원 정부의 재정 부담은 여전하였다. 제왕과 몽골족에 대한 막대한 사여 때문에 생기는 방만한 재정과 더불어 제위계승의 제도적 확립이 없었던[63,] 까닭에 원조는 구조적으로 권력투쟁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64]. 성종 사후 1307년부터 원 순제 즉위 년(1333)까지 24년간 무종 카이샨의 쿠데타를 시작으로 9명의 황제가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무종 시기 관직의 작위화와 국가 재정의 적자는 통치 질서의 이완을 불러 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가장 먼저 의관 부정 채용 문제에 대한 보고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성종 원정 2년(1296) 강서행성의 보고를 보면 함량 미달 의관의 부정 채용문제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시험 답안지조차 베꼈고, 상부기관의 승인없이 마음대로 의관을 채용한다든가, 돈을 받고 의관을 충원한다든가 하는 예가 보고 되고 있다.[65]
그래서 더욱 강화된 규정을 만들기에 이른다. 의학교수는 시험문제를 임의로 출제하지 못하며, 반드시 관에서 내려 보낸 문제로 출제해야하며, 본인이 친필로 수업 내용 3문제와 치료법에 관하여 1문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시험 결과에 대해서는 관할 총관부에 보고하고, 숙정염방사(肅政廉訪司)에서[66] 직접 검증한 후 태의원까지 보고토록 하였다. 한편으로는 전국 각 로에 설치된 의학제거사에게 보내어 비교·검증토록 하였다. 이러한 강화된 규정을 통하여 폐단을 바로 잡고자 하였던 것이다.
1272년에 의학제거사가 처음 설치된 후, 태의 교관은 시험을 관장하며 전국 로의 의학생 교육과정을 감독하고 전국의 의학을 통솔하는 등의 여러 가지 사무를 맡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서 13개 과목에 대한 문제를 매년 120문제씩 만들어 전국 의학에 교부하면 각 학교에서는 이것을 시험문제로 활용토록 하였다. 그런데 1296년 성종대에 들어서 보고의무가 강화된 것은 그만큼 인사부조리와 의학 내에서 운영상 폐단이 심각해졌다는 것이며, 일선 의학교에서 제대로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용관(冗官)[67,]의 증가 문제도 대두되었다. 도처에서 불필요하게 의관들이 많이 늘어났으니, 그들이 유능한 실력을 갖추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성종 대덕2년(1298) 10월, 조정에서는 용관과 용의의 폐단을 없애고자 아래와 같은 지침을 마련하여 각 행성의 제거사와 제령소에 하달하였다.[68] 그것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주현의 관리는 검의(檢醫)를 징발하고 세금을 신속히 처리하며 의호가 많은지 적은지를 조사한다. 반드시 관구(管勾)를69) 설치해야하는 곳이라면, 제거사가 의서에 밝고 청렴하고 능력 있는 사람 1인을 보선하여 업무를 담당시키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를 규정에 의거하여 채용한다. 그리고 제거사, 제령소가 설립된 곳에는 관구를 설치하지 않는다. 둘째, 부·주· 0사·현에서는 검의를 징발할 때 마땅히 의정(醫正)이 점검한다.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의호 중에서 윤번으로 업무에 배치하되, 소속된 지역의 징발에 혼란을 초래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사리(司吏)[70,]·저후(袛候)[71] 등 하급관리를 배치할 때에는 염방사에 비준을 받는다. 비준된 인원을 초과하여 배치해서는 안 된다. 넷째, 각 지역의 제거사, 제령소에서 설치한 의정·의사(醫司), 제조의호(提調醫戶) 등이 정원을 초과하여 설치되었다면 마땅히 다 고쳐야 한다.
의관은 약물과 의료 인재와 관련된 사무를 다루는데 그 안에는 약물공납사무가 포함되어있다. 대덕8년(1304) 5월, 호광행성의 보고에 따르면, 대덕원년부터 매년 출산지에 따라 약물을 향공(鄕貢)하였는데, 당해까지 연체된 향공 약물 목록이 전혀 보고되지 않고 있었다.[72]
내용을 들여다보면, 1303년과 1304년에 재해와 기근이 빈번하여 제대로 향공 약물을 확보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관에서 비축해야할 의약 물량을 맞추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관할 관청은 신속하게 신선한 약재를 매입하여 보충하도록 했다.
1262년 전국 로에 ‘의학’이 설치된 이래, 세조 재위기간 동안 꾸준히 관리 사무 규정을 정비하고 체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종 대덕 말년에 오면 ‘의학’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었다. 교수·의관의 직무태만, 부실한 수업 등 성립 초기의 본래 취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타성과 인습에 젖어서 ‘의학’은 점차 유명무실화 되어갔다. 아래 대덕9년(1305) 강절행성의 보고를 보면, 각지 ‘의학’이 얼마나 부실해졌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사료 10>
사람을 살리는 기술에는 의술만한 것이 없다. 의(醫)를 도(道)로 삼아 마땅히 배움에 힘쓴다. 대개 의자들은 맥을 밝혀 이(理)를 살피고 약을 이용하여 처방하니, 학문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야흐로 지금 조정은 맑고 깨끗하여 호생지심(好生之心)으로서 의학을 숭상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니, 교관으로 하여금 주관케 한다. 태의원에서 관련 규범을 숙고하여 상신하고, 해당 지역 로의 관리가 책임을 진다. 근래에 황제께서 친히 『성제총록』을 하사하시어 천하에 은혜를 베푸시니, 사람들에게 모두 익혀서 유용토록 할 것이다. 그러나 각지의 학교는 구습을 따르며 대충대충하는 까닭에 능히 성지를 받들 수 없으니, 월별 시험이 거행되지 않고 강의도 모두 실속이 없다. 초하루와 보름이 되어도 대충대충하고, 강의에 물음이 없으니 공허하다. 무리가 모여서 종일토록 기백(岐伯)·황제(黃帝) 의서 한 권을 이해하지 못하니, 일단 백성이 병들면 편안히 앉아 편작(扁鵲)·창공(倉公)의 의술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맥리에 밝지 못하고 약제가 망령되었는데, 백성이 횡사하지 않도록 하고자하나 어려울 뿐이다.[73]
앞에서 의학체제의 규정에서 언급한 바대로, 원래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의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모두 삼황묘에 모여 성전에 분향하고 각기 전공분야별로 치료한 병자, 병인, 시월운기, 사용한 약재의 부합 여부에 대하여 토론하도록 되어 있다. 각자가 어떤 사람을 낫게 하였는지, 병환·치료법·약방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이것을 자기가 속한 로의 교수에게 올리도록 되어 있는데, 이러한 기본적인 사항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의학에서 가르침과 배움이 엄격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매사 인습에 젖어 대충대충해서 의술에 밝은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의학을 규찰해야하는 감찰기관의 태만도 한 몫 하였다. 감찰기관에서 엄하게 조사하여 관련자를 징계하고 처벌함으로서 의학을 바로잡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관과 개인적 인연으로 벌을 주지 않고 관대하게 처리하니 의학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에 의학을 바로잡고자 의학교수와 의관 등 직무태만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하였다.[74] 그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① 각지의 학교는 마땅히 대소(大小)학생을 교육시켜야 한다. 이제부터 바르게 수학하지 않고 유명무실하다면, 1차 적발시 교수는 감봉 1개월, 학록·학정은 중통초(中統鈔) 7량에 처한다. 2차 적발시, 교수는 감봉 2개월, 학정·학록은 앞의 경우의 2배로 처벌한다. 3차 적발시, 교수·학록·학정는 모두 문초하여 별도로 논의한 후 과오를 기록한다. 그 제조관은 교관의 예에 견주어 감등하는데, 1차 감봉 반개월, 2차 감봉 1개월, 3차 감봉 2개월에 처한다.
② 각지의 학교에서 대소학생이 학교에 있음에도 가르치지 않고, 수업을 건성으로 하고 구례를 답습한다면, 1차 적발시 교수는 감봉 반개월, 학정·학록은 중통초 5량, 2차 적발시 교수는 감봉 1개월, 학정·학록은 중통초 7량, 3차 적발시 교수·학정·학록 모두 문초하여 별도로 논의한 후 과오를 기록한다. 제조관은 1차 적발시 감봉 10일, 2차 적발시 감봉 반개월, 3차 적발시 감봉 1개월에 처한다.
의관이 처벌받는 예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의학교가 유명무실해져서 학생을 소집하여 강의를 진행하지 않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의학교가 비록 임무를 수행하나, 교육의 수준이 담보되지 않는 경우이다. 의학교육이 이렇듯 부실한데 좋은 의사〔良醫〕가 배출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용의문제는 이 시기에 만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료 11>
최근 몇 년 이래 일등 용의는 『난경』, 『소문』에 능통하지 못하고, 맥리를 외우하지도 못하면서, 약물군신좌사(藥物君臣佐使)의 배합과 환산생숙포연(丸散生熟炮煉)에 대하여 전수받은 바가 없으니, 어떻게 스스로 깨우칠 수 있겠는가? 혹여 떠도는 처방을 베끼고 풍문으로 그릇된 이론을 듣고서는 늘 시내상점에서 유의를 업신여긴다. 여염집 백성이 불행히 병이 들면 상대가 아는 것이 적은지라, 속여 찾아가는 용의 무리는 오직 이익만 탐한다. 그래서 진료를 하나, 허실과 표본을 알지 못한 채 잘못된 약제를 투약하고 그릇된 혈자리에 침을 놓고선, 요행히 병이 나으면 자신의 능력이요, 오류로 병자가 죽으면 모두 운명으로 돌린다. 기백과 황제의 도가 과연 이와 같은가?[75]
기본적인 약재의 배합원리와 맥리조차도 알지 못하는 의사들이 만연하였는데, 제대로 의학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근본 원인은 의학교육 기관인 ‘의학’이 있었지만 그곳에서 제대로 가르침과 배움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의료 폐해와 부작용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1307년 1월부터 1308년 10월까지 1년 10개월 동안 감옥에서 역병에 전염되어 사망한 죄수의 수가 누적해서 106명에 이르렀다.[76] 이 사건에서 사망자 수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죄수 사망 사례가 1년 10개월 기간 동안 무려 33차례 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감옥에서 죄수가 병에 걸릴 경우, 원조의 법규에 의하면 옥의가 당연히 치료하고 그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수감 중에 사망한 죄수의 수는 곧 관할 관원의 인사고과에도 반영되는 중요사항이었다.[77] 그럼에도 33건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제대로 된 의료 조치를 취하지 않았거나 혹은 옥의가 그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의료수준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옥의 중에 방맥조차 외우지 못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실력을 갖추지 못한 자임에도 옥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의관 임용체계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쯤 되자 함량 미달 옥의를 걸러내기 위한 대책이 강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관의제거사 및 제령은 의인을 징발하는 임무를 담당하는데, 이때 제조형옥관(提調刑獄官)[78,]은 관의제거사 및 제령에게 명하여 반드시 두세 번 시험을 보고 채용토록 하였다. 감찰어사(監察御史)·숙정염방사가 감찰하여, 만약 방맥을 외우지 못하는 자를 채용하여 죄수를 사망하게 하였을 경우라면 제조관 및 관의제령을 반드시 파면시켰다. 더불어 옥의도 엄벌에 처하였다.[79]
죄수의 사망은 단순히 옥의의 함량미달 문제만으로 볼 수 없다. 통치체제의 이완과 의학기구 관리의 부실은 연동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사부조리, 수준미달의 의학교수 채용, ‘의학’ 교육의 부실화, 용의의 배출로 악순환 되는 구조와 연결된다. 즉 국가 의료시스템 전반의 부실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원 말기의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변화양상은 의료기구·의정제도의 변화에서도 읽을 수 있다. 대덕 말년에 이르러 의료기구의 부실화와 용의의 문제는 더 이상 그대로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기존의 제도만으로는 수준 있는 의료인재의 육성과 배출에 한계가 있었다. 이것은 비단 의학인재 육성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분위기를 쇄신할 새로운 제도 개혁이 필요했다. 유명무실화된 교육을 다시 일으키고 그것을 통해 양의를 배출하고 더 나아가 사회 의료수준을 제고할 방안이 요구되었다. 사회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새로운 개혁, 그것은 오래 전부터 제기 되었던 다름 아닌 ‘의학과거제’의 실시였다.
4. 의학과거제의 실시
인종대(1311~1320)에 들어오면 과거제 시행에 대한 건의와 논의가 여러 차례 이루어진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원조에서 과거제가 시행되기 전에는 주로 추천에 의하여 관인을 임용하였다. 그런데 추천제 중심의 관인 임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다. 천거 방식의 관인 임용으로 불법·탈법 또는 가문 배경, 음서, 친분 관계 등으로 능력 미달자가 채용되는 등 법과 제도를 농단한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원대에는 상급관료를 정관(正官), 하급속리를 수령관(首領官)이라 이름을 붙여서 관계를 이분화 했다. 임용에서도 몽골인과 색목인은 장관에, 한인(漢人)은 통판관(通判官)·판관(判官)에 충당시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종래와 같은 과거시험을 행할 필요가 없었다. 정관의 지위가 권세 있는 가문에게 독점된다면 자연히 안일한 기풍이 퍼진다. 문벌에 기반하여 정관의 자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원조 관인층은 과거시험을 치르던 이전 왕조의 관료와 비교해서 교양이 떨어지게 되었다. 수령관은 처음부터 높은 교양을 조건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교양수준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원조 관인층의 낮은 교양과 함께 또 하나의 특징은 정관뿐만 아니라 수령관에서도 고정화의 경향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고정화 현상이 근각(根脚)을[80,] 가진 권세 있는 가문 출신자에 한정된 정관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수령관층에서도 나타났다. 수령관의 자제가 수령관으로 임용되기 쉬웠다는 것이다. 원조의 관인층에서 나타나는 낮은 교양과 고정화의 경향은 그들의 소질을 향상시키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하였다.[81]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고자 그 대안으로서 논의 되었던 것이 바로 과거제도였다.
의관의 경우도 보거방식으로 임용하였지만, 유사(儒士)들과는 차별을 두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조 초부터 전국에 의학을 설치하고 의호를 비롯한 의료 인재들을 입학시켜서 일정 수준이상 교육을 시킨 후, 시험성적을 토대로 차등적으로 궐위가 생겼을 경우 임용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 하에서도 지금까지 논의한 바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통치제제의 이완과 맞물려 의학기구와 의학교육은 점차 부실해져갔다. 의관과 의학생들의 수준이 떨어지고 이것은 자연스레 용의 문제를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의학’ 내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른 후 그 성적을 토대로 임용한다고는 하나, 그 근간은 추천제였기에 추천제에 내재된 한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더 이상 추천 방식으로는 원조의 관료체제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다. 원 인종시기에 부활된 ‘의학과거제’는 원대 의료관원의 선발과 관리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것이 갖는 중요성과 특수성은 송대 의관 선발제도와 비교할 때 더욱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송대 의생 교육기구로는 송대 말까지 기능한 태의국과 나중에 폐지된 의학을 들 수 있다. 송 휘종 숭녕 2년(1103)에 의생 교육을 전문화하기 위하여 국자감에 의학을 설치하였는데, 그 기능이 태의국과 중복되었다. 그러다가 의학은 1120년에 폐지되었다. 의학의 설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의학 교육제도가 시종일관 유학 교육제도와 일치하였다는 것이다. 태의국은 줄곧 남송시기까지 존재하였으며 수도에 설치되었다. 인원수는 송대 내내 300명을 넘지 않았다. 훈련받은 의생은 주로 궁정이나 수도지역에서 복무하였기에 지방의료에 끼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송조에서는 지방에 의관을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학지식을 전파하는 것을 주요업무로 삼았다.
송 효종(孝宗) 건도(乾道) 연간(1165~1173)에 해당 지역의 인구밀도에 따라 의생 파견인원 수를 규정하였다.[82,] 그러나 제도상으로는 지방에 의생을 파견했다고는 하나 실제로 지방 의생의 기능은 유명무실했다. 그래서 지방의 백성들은 병에 걸리면 무축(巫祝)에 의지하는 예가 많았다.[83]
송 휘종(徽宗) 숭녕(崇寧) 연간(1102~1106)에 채경(蔡京)은 국자감 아래 각종 학교 및 지방 각급 학교에 왕안석(王安石)이 창립한 삼사법(三舍法)을 전면적으로 실행하였다. 태의학과 지방 의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의학 삼사의 규모는 상사(上舍) 40명, 내사(內舍) 60명, 외사(外舍) 200명이었다. 지방의학의 인원수에 대한 규정은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에는 공액제(貢額制)를 실시하고 있었기에 전국에서는 각 주마다 해당하는 공액을 참고하여 의학생을 모집하였을 것이다.[84] 태의학의 학생 수는 3,800명 규보였던 태학보다 적었다. 다만 제도는 유사하여 태의학 상사에 입학하면 기본적으로 의관으로 선임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다.
송대에는 의학 중에 우수한 졸업생은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의료기구의 관원으로 임명되었다. 상사생 가운데 우수한 사람은 상약국에 궐위가 생길 때마다 차례대로 선발되어 의사가 되었다. 상등은 종사랑(從事郎)으로 의학박사(醫學博士)·정록(正錄)85)에 제수되었다. 중등은 등사랑(登仕郞)으로 의학 정록 혹은 외방 지역의 의학교수에 제수되었다. 하등은 장사랑(將仕郎)으로서 여러 주(州)·군(軍)[86,]의 의학교수에 제수되었다[87].
송 휘종 정화(政和) 원년(1111)과 정화 3년에 반포한 규정에 의하면 지방의관도 ‘제거학사사(提擧學事司)’의[88,] 관리 아래 있었다.[89] 즉, 송대에도 의학을 관리하는 제거학사사라는 직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의학만이 아니라 지방교육에서 비중이 가장 높았던 유학을 중심으로 한 주현의 교육학사행정 전반을 관리·감독·감찰하는 직책이었다는 점에서 원대와 비교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원대에는 중앙과 지방의 의학교육과 의학정책 전반을 담당하는 의학제거사, 그리고 의호 관리 업무를 전담하는 관의제거사를 별도로 설립하였다. 그럼으로써 원대는 송대보다 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의학정책과 의료인원 교육·관리 체계를 구축하였다.
한편, 원 정부에서는 1284년에 과거제에 관한 건의가 등장하면서 과거제의 기본 골격이 이미 마련되었다. 하지만 이후 30년 간 과거제는 채택되지 않았다. 원 인종 황경(皇慶) 2년(1313) 10월에 중서성에서 과거제에 대하여 논의를 재개하였고, 그 해 11월에 황제가 ‘1314년 8월 천하 각 군현에서 유능한 현자를 불러모아 유관 부문에서 준비하여 1315년 2월 경사에서 회시를 보라’는 내용의 과거 시행에 대한 조(詔)를 내렸다.[90] 과거는 매 3년 1회, 거인은 원적지의 관부에서 제색호 안에서 추천하며 연령은 25세 이상으로 하였다.
유학과거는 1314년에 향시가 그리고 1315년에 회시가 실시되었다. 반면 의학과거는 이보다 늦은 연우 3년(1316)에 시행되었다.[91] 연우 3년 3월 26일, 중서성에서는 태의원에서 입안한 문건에 기초하여 의학과거제도 시행을 반포하였다. 의학과거의 목적은 의관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태의·제거·의학교수의 선발도 모두 이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태의원에서는 의학과거제를 통하여 실력 있는 의관을 선발하고자 하였는데, 과거제를 시행하기 이전에 이미 임용된 의관에 대하여 한 차례 시험을 쳐서 정리하였다. 당연한 것이 과거제는 실력 있는 의관을 채용하여 국가 의료 사무의 질을 제고하고자 함인데, 기존에 임용된 의관 중 수준 미달자에 대한 정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시험을 실시한 결과 태의 중에서도 실력이 못 미치는 의관이 있었던 것이다.
태의를 먼저 정리한 후 전국 각지에 있는 의관 중에서 실력 없는 의사를 추려내기 시작하였다. 기존에 임용되어 전국 각지에 파견된 제거·제령은, 100일 이내에 관련 제목을 완성해서 태의원에 평의를 보내야 했다. 시험에 합격하면 임무를 수행하나, 불합격이면 단지 의호를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할 뿐, 의료 행위를 할 수는 없도록 하였다. 만약 거짓이 있다면 염방사가 직접 조사하도록 하였다.
의학과거는 3년 1회 실시하였다. 시행 첫 해(1316) 가을 전국 각 로에서 제1단계 시험에 해당하는 향시를 치르고, 이듬해 가을에 경사(수도)에서 제2단계 시험에 해당하는 회시를 치렀다. 의학과거에서는 로·부·주·현 의호와 제색호계 안에서 선발하였다. 의학에 밝고 실력을 겸비하였으며, 고장에서 효우신의(孝友信義)가 두드러지며 여러 사람을 두루 위한다는 소리를 듣는 이를 향시에 보증하였다. 혹여 과거시험에 응하지 않는다면 감찰어사와 염방사가 직접 조사토록 하였다. 향시에 응시하는 인원수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각 과목을 합쳐서 100명을 선발하여 경사에서 치르는 회시에 응시케 하였다. 그 중에서 약 30인을 선발하였다. 제1단계 시험에서는 경의(經義) 1문제, 치법(治法) 1문제, 제2단계 시험에서는 경의 1문제, 약성(藥性) 1문제로서 글자 수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시험 응시자 중 30인내에서 제1갑은 태의, 제2갑은 부제거, 제3갑은 교수로 충원하였다.[92]
원대 의학과거제를 실시한 이후 이 제도를 통하여 입사한 의관의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연우3년(1316) 시행된 의학과거제가 이후 원대 의학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첫째, 의학과거의 응시자격이 의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제색호계에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제1단계 시험인 향시에서의 응시인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향시 합격인원 100명과 제2단계 시험인 회시 합격인원 30명이라는 수치이다. 이것은 원대 유학과거제 합격자 수와 비교해 볼 때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이유로 당시 시행된 의학과거가 원대 사회에 불러온 파장은 적지 않았다고 본다.
과거제의 부활 목적이 한지(漢地) 문화를 이해하는 몽골·색목인 고급관료를 양성하는 데 필요한 중국인 관리를 구하는 데 있었기에 한인 · 남인의 관직 진출 기회 증가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는 해석이 있다.[93] 이러한 해석은 유학과거에 적용시켜 볼 때 타당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의학과거의 측면에서는 다르게 볼 수 있다.
유학과거를 보면, 향시는 11행성,[94,] 선위사(宣慰司) 2곳,[95,] 직예성(直隸省)분로(分路) 4곳에서[96,] 전부 300명을 선발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회시를 거쳐 100명을 선발하였는데, 각기 4계급별(몽골·색목·한인·남인)로 인원수가 25%씩 배정되었다. 즉 각 계급별로 향시에서는 75명씩, 회시에서는 25명씩 선발하였다.[97] 1290년대 강북 : 강남의 인구 비율이 대략 1 : 2인 것을 감안하면, 남인들에게 유학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다는 것은 다른 계급에 비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거시험 방식과 과목(교재)에서도 몽골·색목인에 비하여 한인·남인은 훨씬 어려운 조건이었다.
의학과거는 유학과거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의학과거는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향시에서 100명을 선발하였다. 그리고 회시에서 30명을 선발하였다. 중요한 것은 유학과거와 달리 4계급에 구분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98,] 극단적으로 말하면 남인이 30명에 모두 포함될 수 있다는 얘기다. 즉, 합격자 수만 놓고 보았을 때, 남인의 입장에서든 다른 여타 계급의 입장에서든 유학과거보다 의학과거를 통하여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더 수월할 수 있다. 더구나 의학과거로 관직에 진출하여 태의원 원사가 될 경우 원조에서 거의 최상위 관품인 정2품까지 오를 수 있었다.[99]
송대에는 과거제를 일찍부터 시행하였지만, 의학과거는 휘종 정화 5년(1115)에 전국 주·현에 의학을 설치하고 공액(貢額)을 정하는 것에서 비롯하였다.[100,] 그런데 의학이 설치된 후, 의학에 배정된 인원은 유학의 15%로 정하였다.[101] 원대 유학과거 대비 의학과거의 공액 비율은 30%에 해당하므로 이 수치는 송대의 2배이다. 원 정부에서 의학을 중시하고 의료인재를 중용·육성하고자 한 노력들은 의관 최고 관품, 의호제도, 관의제거사, 의학제거사, 의학 등의 제도와 더불어 의학과거의 공액 비율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 시기, 모든 의호·의료인이 의학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며, 그리고 의학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은 모든 학생이 의관이 되었던 것도 아니다. 원 시기 내내 얼마의 의호가 존재했는지는 일부 지방지에 나오는 기록을 통하여 0.4~0.5%라는 통계수치를 얻는데 머무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의학’과 ‘의학과거’를 통하여 입사한 인원수를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유학과 의학 공액 수의 비교를 통하여 그 비중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과거제가 폐지된 원대에 일반 유생들은 사회적으로 몰락하여 장사를 하거나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서회(書會)나[102,] 와사(瓦肆)에서[103,] 설서(說書)나[104,] 창, 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인종이 다시 과거제도의 부활을 선포하였을 때 이것은 유생들에게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일대사건이었다. 남송 말년의 진사였던 진대유(陳大有)는 당시 70여 세의 고령으로 원대의 첫 과거시험에 참가했을 정도였으니, 원대 과거제도의 부활이 당시 사인(士人)들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05] 그런데 의학과거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유학과거보다 입사의 문호가 상대적으로 넓었기에 한인과 남인 출신의 사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유학과거 못지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원조의 의료관원 선발 및 관리 제도를 통하여 의호 및 의학에 재능이 있는 이들은 혜택을 받았으며, 이는 자연스레 사회 전반적으로 의학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대 사회에서는 과거제 폐지와 남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로 독서인 계층이 관직 진출의 길이 막히자 다수가 의업으로 전환하여 유의가 되었다고 한다. 의학과거가 실시된 이후 유학과거와 의학과거 합격자 수 비교에서 의학과거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사실은 원대 의학지식의 발전과 확산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5. 맺음말
원조는 송조의 의학제도를 모델로 삼았지만 그 실행과정에서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원조는 ‘의호’를 ‘제색호계’ 안에 설정하고 그들을 전담 관리하는 ‘관의제거사’를 설치하는 등 의료인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管理)제도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의학교육 및 의학정책 전반에 대한 전담 관리 기구인 ‘의학제거사’를 설치함으로서 의학제도에 관해서 송조보다 세분화·전문화된 체제를 갖추었다. 특히, 세조 쿠빌라이 즉위 초부터 전국에 ‘의학’을 설치하여 체계적이고 내실있는 의학교육제도를 마련하였다. 더 나아가서 연우 시기(1314~1320) 과거제도를 부활하여 ‘의학 과거제도’도 함께 실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합격자의 수에 있어서도 송대와 비교하여 ‘유학 과거제’ 대비 2배에 가까운 인원을 배정함으로써 우수한 인재를 의학과거에 유인하는 효과를 낳았다.
원 성종 집권 후반기, 정부의료조직의 부실화와 실력없는 돌팔이 의료인〔용의:庸醫〕의 문제는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기존의 제도만으로는 유능한 의료인재를 육성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것은 비단 의료인재 육성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사회 분위기를 쇄신할 새로운 제도가 필요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거제도의 실시였다.
유학 과거제도는 1314년에 시작되었고 의학 과거제도는 1316년에 시행되었다. 의학과거제도의 목적은 실력있는 의료 관원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1316년부터 시행된 의학 과거제가 이후 원대 의학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첫째, 의학과거의 응시자격이 ‘의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제색호계’에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제1단계 시험인 향시 응시인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향시 합격인원 100명과 제2단계 시험인 회시 합격인원 30명이라는 수치이다. 이것은 유학 과거시험 합격자 수와 비교해 볼 때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다. 당시 시행된 의학과거가 원대 사회에 불러온 파장은 적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원대 유학 과거제도를 보면, 제1단계 시험에서는 300명을 선발하였다. 그리고 제2단계 시험에서 100명을 선발하였는데, 몽골인·색목인·한인·남인 각기 인원수가 25%씩 배정되었다. 즉 각 계급별로 제1단계 시험에서는 75명씩, 제2단계 시험에서는 25명씩 선발하였다. 1290년대 강북 : 강남의 인구비율이 1 : 2인 것을 감안하면, 남인들에게 유학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한다는 것은 다른 계급에 비해 매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과거시험 방식과 시험과목에서도 몽골인·색목인에 비하여 한인·남인은 훨씬 어려운 조건이었다.
의학 과거제도는 유학 과거제도와 상황이 다르다. 의학 과거제도는 제1단계 시험인 향시에서 100명을 선발한다. 그리고 제2단계 시험인 회시에서 30명을 선발하였다. 중요한 것은 유학 과거제도와 달리 4계급에 구분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합격자 수만 놓고 보았을 때, 남인의 입장에서든 다른 계급의 입장에서든 유학 과거시험보다 의학 과거시험를 통하여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더 수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의학 과거시험을 통과하여 ‘태의원’의장관이 될 경우 정2품까지 오를 수 있었으니, 이것은 원 정부에서 거의 최상층부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 정부는 의학을 중시하였다고 했는데 송대 과거제와 비교하면 이러한 주장에 더욱 힘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송대에는 과거제도를 일찍부터 시행하였지만, 의학 과거제도는 1115년에 전국 지방에 ‘의학’을 설치하고 공액이라는 인원수를 배정하는 것에서 비롯하였다. 송대 ‘의학’에 배정된 정원 수는 유학의 15%로 수준으로 정하였다. 반면, 원대에는 유학과거와 비교하여 ‘의학과거’의 합격정원 수 비율은 30%에 해당하였다. 이 수치는 송대의 2배이다. 원 정부에서 의학을 중시하고 의료인재를 중용·육성하고자 한 노력들은 ‘의관의 최고 관품’, ‘의호 제도’, ‘관의제거사’, ‘의학제거사’, ‘의학’ 등의 제도와, 그리고 ‘의학 과거제도’의 합격정원 수 비율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 정부의 의학제도는 사회 전반적으로 의학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대 사회에서는 과거제 폐지와 남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로 독서인 계층이 관직에 진출하는 길이 막히자 다수가 의학 업종으로 전환하였다고 하는데, 의학 과거제도가 실시된 이후 유학 과거제와 의학 과거제 합격자 수 비교에서 의학과거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사실은 원대 의학지식의 발전과 확산에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Notes
제색호계는 일종의 직업 세습호의 의미이다. 원조의 제색호계제도에서는 광의의 민호(民戶) 일반을 군호(軍戶)·장호(匠戶)·민호(民戶)·참호(站戶)·타포호(打捕戶)·응방호(鷹坊戶) 등 수십 종의 세밀한 직종으로 정교하게 분류하고, 각각 국가에 대한 봉사를 명령했다. 제색호계제도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였다. 大島立子, 「元代戶計と徭役」, 『歷史學硏究』第484号(1980); 李玠奭, 「元代 儒戶에 대한 一考察-戶籍을 중심으로」, 『東洋史學硏究』第17輯(1982); 오타기 마쓰오 지음, 윤은숙·임대희 옮김, 『중국의 역사-대원제국』(서울: 혜안, 2013); 박원길, 「대몽골(원)제국의 백성분류체계」, 『몽골학』 제41호(2015).
의호제도는 명말까지 계승되었지만, 명대 중기부터 의관의 직위는 기타 관직과 마찬가지로 연납(捐納)이라는 일종의 매매 방식을 통한 취득이 가능해졌다. 이에 세의(世醫) 집안의 유지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의호제도의 역할은 크게 약화되었다.(황영원, 「명청시대 의사와 지역사회-강남지역 유의(儒醫)를 중심으로」, 『延世醫史學』 20-1(2017), pp.97-115.
관의제거사와 의학제거사에 대해서는 제2장 제3절을 참고.
辛元昌, 「論元代醫戶的義務和權利政策」, 『佳木斯大學社會科學學報』第34卷 第1期(2016); 韓曉雯 外, 「從官醫提擧司看元代醫政管理模式」, 『中華醫史雜志』第45卷 第4期(2015).
王振國 主編, 『中國古代醫學敎育與考試制度硏究』(濟南: 齊魯書社, 2006); 劉齊, 「元朝的醫學教育教学與管理制度」, 『醫學與哲学』第34卷 第12A期 總第490期(2013a).
劉齊, 「元朝醫學教育的興辦背景與主要特點」, 『南京中醫藥大學學報(社會科學版』第14卷 第3期(2013b); 薛磊, 「元代三皇祭祀考述」, 『元史論叢』第13輯(天津: 天津古籍出版社, 2010).
세조 쿠빌라이(재위: 1260~1294)는 중국을 통일하고 각종 제도와 체제를 완비하였다. 세조의 치세는 다음 황제인 성종(재위 : 1294~1307. 세조 쿠빌라이의 손자) 시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무종(재위 : 1307~1311. 성종 테무르의 형인 타르마발라의 아들)은 세조 시기의 구법(舊法)을 벗어나 유목전통세력의 이해를 체제 내에 수렴하면서 원조 체제에 변화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재정이 악화되면서 오히려 원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무종의 뒤를 이은 인종(재위 : 1311~1320. 무종 카이샨의 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유학 교육을 받았으며, 중국적 전통을 존중하였다. 인종은 즉위 후 기존의 중국적 관료선발제도인 과거제도를 전격 실시함으로써 그 동안 노정되어왔던 원조의 관리선발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송대에는 태조 개보(開寶) 6년(973)부터 과거시험을 실시하였다. 모두 3단계로 실시하였는데, 1단계 발해시(發解試), 2단계 성시(省試), 3단계 전시(殿試)가 그것이다. 해액(解額)은 응시자들 중에서 각종 발해시를 통과한 후에 예부(禮部)에서 실시하는 2단계 성시에 참가할 수 있었던 인원수를 말한다. 즉 1단계 발해시의 합격인원 수이다. 태종(太宗) 대도(大道) 3년(997)에 비례해액제를 실시하다가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2년(1009)에 고정해액제로 변화되었다. 해액은 각 지역별로 차등적으로 분배되었는데, 각 주군(州郡)의 인구수, 문물의 성쇠, 등제자 수의 많고 적음 등이 고려되었다. 과거시험에서 합격자 수를 지역별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방식은 명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裵淑姬, 『宋代科擧制度와 官僚社會』(서울: 三知院, 2001, pp.22-30).
陳高華 等 點校, 『大元聖政國朝典章』1~4(天津: 中華書局·天津古籍出版社, 2011). 이하 『元典章』으로 약칭함.
韓國學中央硏究院 編 校註本, 『至正條格』(2007).
金澔, 「唐代 醫療從事者의 지위」, 『史叢』 82(2004); 『舊唐書』 卷44, 「職官」3.
陳邦賢, 『中國醫學史』(臺灣商務印書館, 1977), p.135; 『文獻通考』, 「職官考」.
『金史』 卷52, 志 第33, 選擧2, 文武選. 保宜大夫 從四品上, (『金史』卷55, 志 第36, 百官1, 吏部).
陳邦賢, 앞의 책, p.200; 『明史』, 「職官志」.
『元史』卷88, 「百官」4.
중국을 통일한 원 세조는 “유형지휼(惟刑之恤)”이라 하여 형법을 제정한 것은 위엄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다스림을 보조하기 위해 한 일이다고 인식하고, 『서경(書經)』을 인용하여 “관리가 백성을 공정한 형벌로 제어해 오직 덕을 가르칠 뿐이다”라고 하였다. 원조는 이전 시기의 중국 왕조보다 형벌을 가볍게 함으로써 중국 통치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원사(元史)』·「형법지(刑法志)」 휼형조(恤刑條)에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김대기, 「元代 恤刑과 罪囚에 대한 醫療 救恤」, 『인문과학연구』 제47집(2015), p.437).
『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醫學科目>.
황갈색 점박이 잿빛 말.
유원수 역주, 『몽골비사』(파주: 사계절, 2011), pp.279-283.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역주, 『칸의 후예들』(파주: 사계절, 2005), p.345.
데이비드 O. 모건 지음, 권용철 옮김, 『몽골족의 역사』(서울: 모노그래프, 2012), pp.152-157.
제색호계는 문헌에 제항호계(諸項戶計) 또는 제색호(諸色戶)로 나오는데, 보통 ‘여러가지 호계’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몽골제국이 최초로 특정한 집단을 호적 안에서 따로 구분한 것은 을미년(1235) 호적조사 때였다. 하지만 의사·장인·학자·군사·종교인 등 특정한 집단에 대한 몽골인들의 배려의 조치는 이보다 훨씬 이전인 칭기스 칸 시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李玠奭, 「元代 儒戶에 對한 一考察-戶籍을 中心으로」, 『東洋史學硏究』 第17輯, 1982, pp.88-90).
大島立子, 앞의 논문, pp.23-32.
오타기 마쓰오 지음, 윤은숙·임대희 옮김, 앞의 책, pp.214-215.
禮部 卷之5, 典章32,「醫學」, <醫戶免差發事>, 中統 3년(1262), 皇帝聖旨.
禮部 卷之5, 典章32,「醫學」, <免醫人雜役>.
大島立子, 앞의 논문, pp.25-27.
『元史』 卷209, 列傳 第96, 外夷2, 安南. 世祖 中統 3年 9月.
孫弘烈, 『韓國中世의 醫療制度硏究』(서울: 修書院, 1988), pp.146~147; 宋春永, 「元 干涉期의 自然科學-醫學을 중심으로」, 『國史館論叢』 第71輯(1996); 『高麗史』 世家, 忠烈王 11年 3月, 戌子條.
『元史』 卷88, 「百官」4.
『元史』 卷6, 本紀 第6, 世祖3, 至元3年(1266) 5月 乙未.
『元史』 卷81, 志 第31, 選擧1, 學校(世祖 中統 2年(1261) 夏5月).
원대에는 중앙에 중서성이 있고 지방에는 최고 행정단위로 행중서성(줄여서 ‘행성’이라고 부른다)을 두었다. 그리고 행중서성 아래 로(路), 부(府), 주(州), 현(縣)을 두었다.
『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設立醫學>.
『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設立醫學>; 『元史』 卷5, 本紀 第5, 世祖2, 中統3年(1262), 8月, 丙午.
『元史』 卷88, 「百官」4.
『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保申醫義>.
『元典章』, 吏部 卷之3, 典章9, 「醫官」, <選醫學敎授>.
『元史』 卷12, 本紀 第12, 世祖9, 至元20年.
『元史』 卷88, 「百官」4.
『元史』 卷91, 「百官」7.
『元史』 卷12, 本紀 第12, 世祖9, 至元20年 夏4月, 甲午.
『元史』 卷62, 志第14, 地理5, 江浙等處行中書省.
『元史』 卷21, 本紀 第21, 成宗4, 大德9年 秋7月 癸丑.
원 시기 관직 진출 경로는 과거(科擧), 천벽(薦辟), 음연(陰緣), 잡도(雜途), 군공(軍功), 귀부(歸附) 등이 있었다. 잡도류에는 환자(宦者), 방기(方技), 영행(佞倖), 자납(貲納), 통역(通譯), 회유(懷柔)가 있었다. 의학은 천문, 음양학 등과 더불어 방기에 속해 있었다(주채혁, 『元朝 官人層 硏究』(서울: 정음사, 1986) 참조).
공문서를 관리하는 하급관리. 아전을 얕잡아 일컫는 말.
『元史』 卷81, 志 第31, 選擧1, 科目.
『元史』 卷13, 本紀 第13, 世祖10, 至元21年(1284) 12月, 癸酉.
『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醫學科目>.
후에 13과목이 10과목으로 통합되었다(『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醫學科目>, 大德9年(1305), 江浙行省准中書省咨).
『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醫學科目>.
『元典章』, 吏部 卷之3, 典章9, 「醫官」, <選醫學敎授>.
假令有人病頭疼, 身體拘急 惡寒無汗, 寒多熱少, 面色慘而不舒, 腰脊疼痛, 手足指末微厥, 不煩燥, 其脈浮而緊澀者, 名爲何證 何法治之(『元典章』, 吏部 卷之3, 典章9, 「醫官」, <選醫學敎授>).
假令有人病身體熱, 頭疼惡風, 熱多寒少, 其面光而不慘, 煩燥, 手足不冷, 其脈浮而緩者, 名爲何證, 何法治之(『元典章』, 吏部 卷之3, 典章9, 「醫官」, <選醫學敎授>).
假如春夏月有人病自汗惡寒, 身熱而渴, 其脈微弱者, 名爲何證, 何法治之(『元典章』, 吏部 卷之3, 典章9, 「醫官」, <選醫學敎授>).
원대에는 주(州)를 규모에 따라 상·중·하로 구분하였다.
유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저를 참고바람. 황영원, 앞의 논문; 梁其姿, 『面對疾病-傳統中國社會的醫療觀念與組織』(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12); 祝平一, 「宋明之際的醫史與“儒醫”」,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輯刊』 77-3(2006); 陳元朋, 『兩宋的“尙醫士人”與“儒醫”-兼論其在金元的流變』(國立臺灣大學出版委員會, 1997).
『至正條格』卷33, 「獄官」, 恤刑.
몽골제국시기 시대구분은 주채혁, 앞의 책을 따랐음. 몽골제국의 시기 구분에 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존재한다. 대만 학자 소계경(蕭啓慶)은 이미 성종 연간부터 쇠망의 조짐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개석에 따르면, 무종의 개혁정치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세조는 중국식 전통을 상당 부분 수용하였다. 1260년 몽골의 대칸에 오른 후, 1271년 중국식 국가 명칭인 원(元)을 개국하고 역시 중국식 연호인 지원(至元)을 채택했다. 반면 무종은 세조가 성립한 중국적 노선을 폐기하고 유목적·초원적 전통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제도와 관행을 성립하였다. 그러므로 무종 시기의 이러한 변화를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종 시기에 막북 초원 세력을 제국 질서 내에 포용하기 위하여 막대한 재정이 지출되었고 이것은 14세기 초 자연재해와 겹치면서 원정부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무종 시기의 이러한 변화는 그의 사후 곧 취소되었다. 중원의 문화에 적응한 인종이 새로 즉위함으로서 중국적 노선이 추구되었고 이것은 13세기 말 이후 원조체제를 떠받치는 물질적 기초로서 강남의 역할 증대와 14세기 초 원조 정권 내의 한인과 남인의 요구가 밖으로 표출된 것으로 해석된다(李玠奭, 「漠北의 統合과 武宗의 ‘創治改法’」, 서울大學校 東洋史學硏究室 編, 『近世 東아시아의 國家와 社會』(서울: 지식산업사, 1998), pp.133-212).
李玠奭, 「元朝 中期의 財政改革과 그 意義」, 『慶北史學』第19輯(1996), pp.325-368 참조.
오타기 마쓰오 지음, 윤은숙·임대희 옮김, 앞의 책, p.245.
쿠릴타이에서의 제왕·장령의 결정권이 대폭 남아 있었다.
오타기 마쓰오 지음, 윤은숙·임대희 옮김, 앞의 책, pp.246-252.
『元典章』, 吏部 卷之3, 典章9,「醫官」,<考試醫官敎授>.
숙정염방사는 원대에 지방의 감찰업무를 담당하던 지방관청이다. 줄여서 염방사라고 칭하기도 한다.
필요한 인원 수보다 과다하게 초과 채용된 관원.
『元典章』, 吏部 卷之3, 典章9, 「醫官」, <醫官合設員數>.
관구는 송대에 생겨난 관직으로서 원대에는 8~9품의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관청의 문서를 주로 처리하던 하급관리(아전)이다.
원대에 로·부·주·현 각 관부에 설치된 관직으로서 使令의 업무를 받아보던 하급관리(아전)이다.
『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鄕貢藥物趁時收採>.
『元典章』 禮部5, 「醫學官罰俸例」.
『元典章』 禮部5, 「醫學官罰俸例」.
『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禁治庸醫>, 至大4년(1311) 11월.
『元典章』, 刑部 卷之2, 典章40, 「繫獄」, <病囚考證醫藥>.
김대기, 앞의 논문 참조.
지방의 사법·감옥 사무를 관장하던 관리.
『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試驗獄醫>.
근각이란 유서(由緖: 전해오는 까닭과 내력)라는 의미로, 구체적으로는 몽골 조정과의 세습관계를 가리킨다. 몽골은 정복을 통해 국가를 형성했기에 특히 군신관계를 중시했다. 자발적으로 투항한 자〔好投拝戶〕와 어쩔 수 없이 투항한 자〔不投拝戶〕사이에 완고할 정도로 심한 차별이 존재하였다. 즉 군신관계의 가깝고 먼 것에 따라 처우가 달라졌다는 의미이다(오타기 마쓰오 지음, 윤은숙·임대희 옮김, 앞의 책, pp.210-211).
오타기 마쓰오 지음, 윤은숙·임대희 옮김, 앞의 책, pp.224-227.
수도 및 상(上)·중주(中州)에 의조교(醫助敎) 각 1명 배치하고 의생의 인원수는 수도와절진(節鎭)에 10명, 나머지 주에는 7명, 만호 현에 3명을 배치하는데, 매 만호 증가 시 1명씩 증원하여 최대 5명까지 증원한다. 그 나머지 현에는 2명을 배정한다(梁其姿, 앞의 책, pp.127-132).
梁其姿, 앞의 책, p.129.
삼사법의 주요 특징은 학교를 등급으로 나누어 각종 상설 시험을 통하여 사별(舍別) 승강(昇降)을 결정하는 것이다. 태의학 삼사 고시제도와 태학 삼사는 공시(公試)와 사시(私試) 두 종류의 고시를 치른다는 점이 동일하다. 사시는 매 계절 1회 각각 3場〔차례〕으로 시행되었는데, 매월 1차례씩 실시하였다. 공시는 매년 1회 봄철에 2장 실시하였다. 매 고시마다 상·중·하로 성적을 평가하여 공시와 사시를 종합한 결과로 삼사의 승강을 결정하였다. 주(州)단위 지방 의학에서 삼사법에 의한 승강을 실시하였는데, 태의학에서 공시와 사시 결과를 종합하여 승강을 결정하는 예를 따랐다. 주(州) 의학의 공·사시는 주(州) 유학과 함께 진행하였다(王振國 主編, 앞의 책, p.225).
정록은 학정과 학록을 일컬음.
주(州)와 군(軍)은 각각 송대 지방행정 단위이다.
李弘祺 지음, 姜吉仲 옮김, 『宋代 官學敎育과 科擧』(진주: 경상대학교 출판부, 2010), p.116.
‘제거(提擧)’는 송대 ‘차견(差遣: 관리(官吏)가 실제 관직 보임을 맡는 것)’의 명목 중 하나이다. 송 정부는 교육을 지방관원 직책의 일부분으로 간주하였다. 송대는 전임관원을 파견하여 학사업무를 관리한 첫 번째 왕조이다(李弘祺 지음, 姜吉仲 옮김, 앞의 책, p.145).
李弘祺 지음, 姜吉仲 옮김, 앞의 책, p.116.
『元史』 卷81, 志 第31, 選擧1, 科目.
『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試驗醫人>.
『元典章』, 禮部 卷之5, 典章32, 「醫學」, <試驗醫人>.
주채혁에 따르면, 중국 농민을 통제하기 위하여 주자가 집대성한 주자학을 원조의 체제교학으로 삼고, 이를 익힌 몽골·색목인 관료를 절실히 필요로 했기에 과거제를 재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인종 시기가 원조에서 하나의 전환기 성격을 갖는다고 평가했다. 몽골제국 중기인 세조대에 중국 정복왕조로서의 기틀이 잡힌 원 제국이 그동안 체제운영의 경험을 축적하면서 그 나름대로 하나의 지배유형을 형성하는 시기로 보았다. 1320년(연우7년)에 강서아관에서 『대원성정국조전장』을 편찬·간행했던 사실도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高柄翊, 「元代의 法制」, 『歷史學報』第3輯(1953); 주채혁, 앞의 책, 1986, p.21에서 재인용).
하남(河南)·섬서(陝西)·요양(遼陽)·사천(四川)·감숙(甘肅)·운남(雲南)·영북(嶺北)·정동(征東)·강절(江浙)·강서(江西)·호광(湖廣)행성.
하동(河東)·산동(山東)선위사.
진정(眞定)·동평(東平)·대도(大都)·상도(上都)로.
『元史』 卷81, 志 第31, 選擧1.
『元史』 卷81, 志 第31, 選擧1에 보면, 유학과거에 대한 인원 규정만 보일 뿐 다른 과거에 대한 인원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유학 과거를 통하여 한인과 남인이 중앙정계 고위직에 진출하는 것을 제어하기 위함이었지만, 기타 다른 전문분과에 해당하는 잡과의 경우에는 실용적 관점에서 출신의 차별없이 능력위주로 인재를 선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주채혁의 연구에 따르면 의학이 포함된 잡도류(雜途類)를 통하여 입사한 관인의 수는 몽골제국시기를 통틀어 49명으로 집계하였다. 이 연구의 표본집단은 『원사』, 『몽올아사기(蒙兀兒史記)』, 『신원사(新元史)』의 열전에 등재된 황족일계를 제외한 인물들이다. 총 표출인물수가 3,419명인데 이중에서 잡도류는 49명 집계되었다. 잡도류 중에서도 의학이 포함된 방기(方技) 분야 입사자 수는 7명에 불과하니 그 중에서 의학 입사를 수는 더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이 연구가 갖는 한계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그 표본집단이 열전에 등재된 인물들로 국한되었기에 정확한 전체 입사자 수를 알기 어려우며 통계비율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 둘째, 연구자도 밝히고 있지만, 방기로 입사하였을지라도 유사(儒士)로 신분이 밝혀지는 인물은 방기에서 제외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실제 의학과거를 통하여 입사한 사람의 수는 이 비율보다는 훨씬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주채혁, 앞의 책 참조).
『宋史』 卷21, 徽宗3, 政和5年 正月 乙丑. 송대에는 각 지역에서 치러지는 제1단계 시험〔해시〕합격자 인원수를 지역단위 인구밀도를 고려하여 지역별로 차등적으로 배정하였는데 이를 해시 합격자 수라하여 ‘해액’이라고 칭하였다. 해액수는 곧 제2단계 시험〔성시〕에 응시할 수 있는 지역별 인원수이기도 하다. 송대에는 남방지역이 북방지역보다 해액수가 많았던 까닭에, 이는 북방지역민들에게 불만의 대상이었으며 송대 당쟁의 한 원인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제2단계 시험〔성시〕에 응시할 수 있는 인원수가 당연히 남방지역이 북방지역보다 많았기에 그 합격 가능성 측면에서도 남방지역이 높다고 보았기 때문이다(李弘祺 지음, 姜吉仲 옮김, 앞의 책 참조).
송대에는 과거고시 때 각 지역별로 고정된 공액이 있었다. 휘종이 과거를 폐지한 후, 승공액은 여전히 원액(原額)에 의거하였다. 정화 8년 태의학에 보고된 3년 응공(應貢) 인원수는 733명인데, 이것은 문사(文士) 공액 4892명의 15% 수치에 해당한다(『宋會要輯稿』 崇儒3; 王振國 主編, 앞의 책, pp.233-234에서 재인용; 章如愚, 『群書考索』, 文淵閣四庫全書, 子部, 類書類; 金基郁외, 「兩宋時期의 醫政史에 관한 연구」, 『大韓韓醫學原典學會志』 Vol.19-3(2006), p.92에서 재인용).
서회란 송원시대에 설화인과 희곡 작가 및 예인들 사이에 만들어졌던 조직이다.
와사란 송원명시대의 도시에서 민간 오락과 잡화 판매가 집중되어 있던 곳을 말한다.
설서란 역사고사 등의 이야기를 연출하던 민간의 연행예술을 일컫는다.
진정(金諍) 지음, 김효민(金曉民) 옮김, 『중국 과거 문화사』(서울: 동아시아, 2003), pp.229-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