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기생충에서 시작되었다”* -1960-1980년대 한일 기생충 협력 사업과 아시아 네트워크-
“It All Started from Worms”: Korea-Japan Parasite Control Cooperation and Asian Network, 1960s - 198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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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Korea Association of Health Promotion and Japanese Organization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in Family Planning (JOICFP), and Taiwan’s Chinese Foundation of Health all originated from parasite control organizations. Currently these organizations hold no apparent relations to parasite control activities. However, many of the senior leaderships of these organizations including presidents, have parasitology as their background. Kunii Chojiro (the founder of Japan Association of Parasite Control (JAPC) and JOICFP) explained it as “it all started from worms.” In 1949, Kunii Chojiro established JAPC after personally experienced intestinal parasite infection. The JAPC people conducted mass examination and mass chemotherapy focusing on school children, which allowed them to have sustainable income. In 1965, the Korea Association of Parasite Eradication (KAPE) requested JAPC to assist Korea’s parasite control activity. In 1968, when Korea-Japan cooperation for parasite control activity established, Japan’s operating procedures were directly absorbed by KAPE. With support from JAPC and official development aid through Overseas Technical Cooperation Agency in Japan (now 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Korea successfully controlled parasite infection. Post-war and cold-war geopolitics had a significant impact on Korea-Japan cooperation. In 1960s the president of KAPE, Chong-Chin Lee and Kunii Chojiro were well known figures in population control network. They did understand the importance of population control, but did not agree with the approaches taken by western population control experts. From their point of view, it had to be self-initiated, economically self sustainable grass-root activities rather than top-down activities, as experienced in their parasite control in Japan and Korea. This lead to a new Asian model named “Integrated Program”. Together with their influence in population control network, Kunii and Lee manage to secure the fund from IPPF. Emergence of Integrated Program showed how collective experience of Asia, as well as overlap of networking formed ‘Asian Model’ of public health activities. Kunii and Lee shared the same agenda to enable people to have better life through public health measures. While they funneled money from global population control network, they were more interested in securing sustainability of the parasite control activities. This paper focuses on activities and experiences of Kunii Chojiro and Chong-Chin Lee to show interplay of Cold War geopolitics in Asia led to emergence of Asian network.
1. 머리말
현재 한국의 건강관리협회, 일본의 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Japanese Organization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in Family Planning, JOICFP), 대만의 중화민국위생보건기금회(中華民國衛生保健基金會)는 모두 기생충 관리 사업에서 기원했다. 한국건강관리협회의 전신은 한국기생충박멸협회(이하 기협)이며, 대만의 위생보건기금회는 기생충방치회(寄生蟲防治會),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의 기원은 일본기생충예방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세 기관 모두 현재 주요 활동 내용이 기생충 관리와 큰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생충 관리 사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 지도부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1].
1967년 8월부터 기협 회장을 맡아 전국 단위 검진 사업을 본궤도에 올려둔 이종진(李宗珍, Lee Chong Chin[2,], 1916-1994)은 1971년부터 10년이 넘도록 대한가족계획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대만의 경우, 1959년부터 대만 난터우(南投)에서 시행된 가족계획 시범사업 지구의 행정 담당자이자 기생충방치회를 창립했던 후훼이더(胡惠德)가 1975년부터 2015년까지 40년에 걸쳐 위생보건기금회와 기생충방치회의 이사장직을 유지하고 있었다[3,]. 하지만 “도대체 기생충과 가족계획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145).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의 창립자이자 일본기생충예방회를 조직한 구니이 조지로(國井長次郎, Kunii Chojiro, 1916-1996)는 이를 “모든 것은 기생충에서 시작되었다”(Kunii, 1992)고 표현하기도 했다[4]. 현재 상이한 성격을 띠고 활동하는 세 단체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과 한국, 대만 사이의 긴밀한 기생충 관리 네트워크 속에서 성장하고 변화해 왔다.
최근 냉전 시대라는 지정학적 배경에서 인구 통제를 위해 형성된 서구의 각종 단체들과 이들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다양한 선행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존 디모이아는 해방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육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가 한국의 보건의료사업이 형성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하고 있다(DiMoia, 2013: 115-152). 서구에서 학습한 한국의 전문가들은 보건의료 사업을 시행하면서 서구의 경험을 내재화하고, 서구의 원조를 바탕으로 한 사업을 통해 새로운 학문 후속 세대들을 배출해 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Cho, 2014: 1-14). 가족계획 사업을 위시한 보건의료 원조사업은 일국적인 현상이 아니라 세계사적 관점에서 의사, 인구학자, 인도주의자, 관료들이 모여 광대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인구 관리 사업을 벌여온 과정이었다(Connelly, 2008: 1-17).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서구의 ‘공여자’와 아시아의 ‘수혜자’라는 이분법적 분석의 한계가 있었다(Greenhalgh, 2016: 469-474).
아야 호메이(Homei, 2016: 445-467)는 이 문제의식에 기반해 냉전시기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가 구니이의 가족계획 사업 구상에 미친 영향을 논하면서 서구의 선진국과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을 매개할 수 있는 ‘중진국’의 역할을 일본이 자처해서 맡게 되었고, 이것이 가족계획을 중심으로 기생충 관리가 합쳐진 아시아의 특징적인 개발 원조 방법들을 낳았음을 보여주었다(Homei, 2017: 16-25)[5]. 이러한 선행 연구들은 주요 원조국으로 활동했던 미국이나 일본의 영향에 초점을 맞추면서, 아시아라는 현장에서 사업의 수행 주체로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한국과 대만 등 제3세계 내의 개별 행위자들의 경험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못했다.
본 연구에서는 기생충 협력 사업을 통해 일본의 경험이 한국과 대만에서 재현되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한국, 대만이 함께 아시아적 보건 사업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역의 기생충 사업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재정 자립성을 보장하는 수익 구조를 만들고 ‘집단검진, 집단구충’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모델은 지역 엘리트에 의한 연구조사 사업과 막대한 자금 원조를 바탕으로 하는 수직적 서구식 모델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한국과 대만 역시 일본과의 협력을 통한 기생충 사업의 경험을 아시아적 원조 모델로 변화시켜 다른 개발도상국으로 전파시키는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를 통해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은 ‘수혜자’로서 공여국의 원조와 보건의료 사업 모델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아시아 내부의 협력 사업 경험과 서구의 원조 자원을 함께 활용하여 현재까지 이어지는 아시아적 보건의료 사업모델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2. 한일 기술협력의 지정학적 배경
한국의 기생충박멸사업은 보건 분야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1964년 ‘한국기생충박멸협회’가 설립되었고 1966년에는 ‘기생충질환예방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한국기생충박멸협회는 1969년부터 전국 학교를 대상으로 집단검진과 집단투약을 실시해 불과 15년 만에 80% 수준의 회충 감염률을 1% 이하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김태종 외, 2014: 28). 이러한 성공의 기반으로 항상 등장하는 요소가 바로 일본의 물질적, 기술적 지원이다. 1984년 발간된 『기협20년사』(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86-87)와 2011년 발간된 『한국형 기생충관리 ODA[6,] 사업모델 개발』(채종일 외, 2011: 9)에서는 모두 1969년 기협의 안정적인 활동이 가능해지고 실질적인 기생충 관리가 가능해진 이유를 일본의 지원으로 꼽고 있다.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단(Overseas Technical Cooperation Agency, OTCA)[7,]을 통해 한국에 기생충 관리 사업이 제공된 것은 후속 지원기간 2년을 포함해 1968년 4월부터 1976년 3월까지였다[8,]. 기생충 관리 사업 지원은 한일의료협력 사업 가운데 가장 처음 시행된 사업 중 하나였으며 가장 긴 기간 지속된 사업이기도 했다. 1969년부터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단에서는 차량, 현미경, 약품 등 기자재를 제공했으며, 1970년대에는 일본만국박람회기념사업회와 일본선박진흥회(日本船舶振興会, 현 일본재단) 등 민간단체에서 한국 기협 시도지부 건축 자금을 제공하는 등 한국 기생충 사업을 위해 다양한 지원 활동을 벌여왔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182-256)[9].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인 협력은 당시 아시아가 가지고 있던 지정학적 특성과 연관되어 있다. 1950년대 일본 외교 정책의 목표는 국제 사회의 복귀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아시아 내에서의 신뢰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전후배상이 그 핵심에 있었다(박홍영, 2010: 250-251)[10,].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의료협력은 ‘콜롬보 계획(Colombo Plan)’에 기반하고 있었다. 콜롬보 계획은 1951년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개최된 영연방 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자본원조와 기술협력을 매개하는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했다[11,]. 일본은 콜롬보 계획 가입을 통해 이차대전 이후 배제되었던 아시아 지역 네트워크에 재편입 될 수 있었다. 한국은 콜롬보 계획에서 지칭하던 아시아의 범위를 크게 넓혔으며, 동시에 미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 네트워크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기술 협력과 원조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를 얻게 되었다(Adeleke, 1996: 174-197).
콜롬보 계획 가입 당시 일본은 ‘일본의 경험’을 강조하며 서구식 개발의 일방적인 적용을 벗어나 ‘아시아의 특수성’을 반영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다(Sato, 2013: 164-172). 하지만 1954년 이처럼 ‘아시아의 특수성’을 강조했던 것은 1950-1960년대 일본의 원조가 전후배상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951년 일본의 전후배상을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는 일본의 배상 조건을 ‘역무배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금전이나 현물이 아닌 자본재나 서비스로 이를 배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배상 조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배상금 부담이 나치 독일의 등장을 불러왔다는 역사적 교훈과, 고조되어가던 냉전체제에서 미국의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었다(이원덕 2008: 19-21). 또한 한국전쟁으로 재정 부담이 심해지고 있었던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의 원자재와 일본의 생산력을 결합해 아시아 지역 내 시장을 형성하고자 했다. 미국의 ‘지역적 경제통합안’은 원조를 매개로 일본이 전후 잃어버린 식민지에 대한 ‘평화적인 대외진출’을 가능하게 했다(조양현, 2010: 24-27). 전후배상을 대체한 원조는 결국 동남아시아의 원자재를 일본에서 가공하여 역무의 형태로 배상하는 경제협력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전후배상은 오히려 일본 기업의 수출 증대 및 원자재 수급이라는 일본의 이익을 반영하게 되었다(박홍영, 2010: 250-251)[12].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은 기술 협력을 담당할 부서로 1962년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단을 지정하고 의료 뿐 아니라, 농업, 공업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 지원을 제공했다. 일본의 원조 사업은 초기부터 자국의 경제적 이해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이코노믹 애니멀”들의 새로운 시장 개척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OTCA, 1969: 215). 의료협력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으로 대표되어 거부감이 높은 ‘하드 파워(hard power)’(김석수, 2015: 84)를 이용하지 않고 “진정한 휴머니즘으로 탄복시킬 수 있는 ‘인도적’ 원조를 할 수 있는”(OTCA, 1969: 215-216) 좋은 도구로 여겨졌다. 특히 상당한 시설을 확보하고 있는 열대의학이야말로 일본이 새롭게 개척하기 좋은 분야로 고려되었다. 일본이 원조를 제공하고 있는 국가들 또한 대부분이 열대 지역에 속해있었다. 또한 열대의학에 대한 사업 경험은 식민지 확장 시기에 획득한 것들이었다(이종찬, 2005: 152-153). 열대의학 분야야말로 ‘일본의 경험’을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기술협력이 아시아 지역에 가지는 강점은 기생충 관리나 가족계획 사업의 성공 경험 뿐 아니라 지리적 특성에도 기인하고 있었다. 일본은 서구에 비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와 비교적 유사한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물자 운송이나 파견에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또한 콜롬보 계획에 따르면 파견 전문가의 체류 비용 등은 수혜국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서구에 비해서는 아직까지 물가가 낮은 편이었기 때문에 수혜국에게 상대적으로 비용 부담이 낮았다는 강점이 있었다(강종원, 1961: 212-215).
3. 아시아적 기생충 관리 모델의 확립
한국과 일본의 기생충 관리 네트워크가 처음 접점을 맺게 된 것은 1965년이었다[13,]. 1965년 국제가족계획연맹(International Planned Parenthood Federation, IPPF)[14,] 서태평양 지역 총회가 서울에서 열리게 되었고 구니이는 일본측 가족계획 대표자 자격으로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15,]. 구니이는 처음 한국을 방문할 당시만 해도 한국 내 기협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설립 초기 사업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던 한국기생충박멸협회는 일본 기생충 관리 사업의 실질적 총책임자인 구니이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항에서 ‘납치’해 한일 협력 사업을 논의했다(Kunii, 1992: 87-89). 첫 한국 방문에서 “허름한 집들이 근교의 산 겉면 전체를 딱지 앉은 것처럼 덮고 있었고, 수도도 없었으며 비가 내리면 변소가 넘쳐 흐르는”(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19) 서울의 모습을 보고 구니이는 전후 황폐해진 일본의 모습과 패전 직후의 상황에서 시도되었던 일본기생충예방회의 사업을 연상했고, 일본의 경험을 통해 한국에게도 “성공의 길을 가게 해주”(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20)고자 했다.
구니이가 전후 한국을 보며 “일본에서의 기생충 예방 경험을 몇 번이나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 일본의 패전 직후 전역한 구니이는 전후복구에 참여하기를 원해 1946년 ‘합작사 운동(cooperative movement)’[16,]에 뛰어들었다[17,]. 하지만 전후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1948년 합작사 운동은 경제적 토대가 취약하여 무너지고 말았다[18,]. 합작사 운동의 실패로 조직의 ‘경제적 자립’이 가지는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구니이는 이를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했다(아시노 인터뷰, 2017. 5. 16)[19,]. 무엇보다 구니이가 기생충 관리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기생충에 감염되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1940년대 말 심한 피로감 때문에 중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하여 입원한 구니이는 십이지장충 감염으로 판정되어 간단한 약물치료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이야말로 구니이가 기생충 관리 사업을 시작하게 된 “인생의 새로운 전기”(Kunii, 1992: 28)라고 자서전에서 회고하고 있다.
구니이는 1949년에 도쿄기생충예방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기생충학에 대한 전문성이 없었으나, 게이오기주쿠대학 기생충학 교수인 고이즈미 마코토(小泉丹, 1882-1952)[20,]의 도움으로 검진 기술과 홍보 지식 제공이 가능해졌다(Kunii, 1992: 28-32). 일본기생충예방회는 초기부터 학교 검진을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자립을 확보하는 방식을 택했다. ‘영업’을 통해 성장한 일본기생충예방회는 초기부터 일관되게 경제적 자립을 매우 중요시 하고 있었다(Kunii, 1985: 20-21)[21,]. 1950년대 일본기생충예방회 직원들의 일과는 대부분 “걷고 걷고 또 걸어”(Kunii, 1985: 26-27) 검진을 시행할 학교를 확보하는 영업의 연속이었다[22,]. 덕분에 1949년 5,000달러 정도에 불과했던 일본기생충예방회의 예산은 1953년 10만 달러를 넘어섰다(Kunii, 1983: 183). 이러한 경제적 안정성을 바탕으로 구니이는 1964년 도쿄 한복판에 640만 엔에 상당하는 본부 건물을 신축하게 되었다(Kunii, 1992: 38-40).
경험과 공감을 바탕으로 구니이는 1965년 10월 도쿄에서 열린 일본기생충예방회 제10차 총회에 당시 기생충박멸협회 회장인 이영춘(李永春, 1903-1980)[23,]과 상무이사 이종호[24,]를 초대하여 한국의 기생충 관리 현황에 대해 발표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25,]. 1966년 10월에는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에서 정식으로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협력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조사단 방문 당시 “일본이라면 중학교 이과교실에서 볼 수 있는 배율 200배 정도의 소형 현미경이 몇 대” 있을 뿐이었고, “검사원이라는 여자 직원 몇 명은 일거리가 없이 빈둥대고” 있어 “월급을 줄 수 있는 것인가” 의문스러운 상태였다(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17).
또한 일본 전문가가 방문했을 때 탑골공원에서 “일본놈이라 하여 삽시간에 군중포위로 공기가 험악”(이영춘, 2004: 143)[26,]해 질 정도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팽배한 한국의 상황, 그리고 안정되지 않은 한국기생충박멸협회의 운영 때문에 일본과의 협력 사업이 곧바로 시행되지는 못했다[27,]. 기협은 1966년 국내 법률 제정에는 성공했으나, 학교 대상 검진을 두고 과당 경쟁을 벌이는 ‘학도보건단’ 등 기타 단체들의 존재, 그리고 운영 경험과 체계의 부재로 정상적인 운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28,]. 그 결과 1967년 8월 지도부의 대대적인 교체가 이루어졌고, 행정력과 조직 운영 능력이 탁월한 것으로 인정되었던 이종진을 회장으로, 서병설을 부회장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지도부를 꾸리게 되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87).
이종진이 1967년 8월 기협의 대대적인 조직 개편으로 신임 회장에 선임되어 민간단체 조직가로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배경과 경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29,]. 이종진은 경성부민병원 재임 당시 전 세브란스의전 교장이었던 오긍선(吳兢善)[30,]이 “손녀를 맡길 터인즉 아내로 삼”으라는 말에 오숙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보건신문사, 1991: 390). 오숙자의 아버지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보건부 장관을 맡았던 오한영(吳漢泳)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전쟁동안 이종진은 보건부 장관 비서관을 지내게 되었고, 후방에서 수행했던 외국 원조기관 유치, 구호병원 설치와 같은 원조와 병원 행정 업무를 경험했다. 1952년에는 세계보건기구의 장학생으로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공중보건학 석사학위(M.P.H)를 받고 1953년 귀국하자마자 최재유(崔在裕) 보건부 장관을 요청을 받아 다시 보건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중반 보건의료계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흔치 않았고, 국제적인 사업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그리하여 1967년 기생충박멸협회의 운영 정상화에 대한 필요성을 정부가 느끼게 되자, 당시 보건국장을 맡고 있던 한상태를 통해 보건행정과 국제관계 경험이 풍부한 이종진에게 기협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 것이다(한상태 인터뷰, 2016. 8. 17)[31,]. 구니이는 이종진을 회장으로 선임한 정부의 인사를 “실로 계략적인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다(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22).
한국 기협의 대대적인 조직 개편 이후 일본과의 협력 논의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풍부한 국제 협력 경험을 바탕으로 이종진은 회장 임명 직후인 1967년 11월 30일자로 일본 측에 정식으로 ‘원조요청서’를 작성해 발송했다[32,]. 같은 시기 일본에서도 일본기생충예방회의 자체 기금으로는 한국에 대한 국가 단위의 지원이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 정부 차원의 협력이 필요했다. 구니이는 국제 의료협력에 참여하며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일본 정부 관계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기생충 관리 협력 사업을 요청했다. 1967년 구니이는 자유민주당 의료협력위원회와 논의하여 이듬해인 1968년부터 한국과 본격적인 국가 단위 협력 사업을 시행할 것을 약속 받았다(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19). 일본 정부는 기협을 한국에서 정부를 대신하여 기생충 사업을 전담하는 조직으로 인식하고, 1968년 6월 정식으로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단 차원의 조사단을 파견하여 검진차, 현미경, 원심분리기, 구충제 지원을 약속하는 사전 협약을 맺었다(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69: 5-6).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단을 통한 차량과 현미경 같은 본격적인 물자 도입은 1969년 3월부터 이루어져 실질적인 사업 수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사업 방법의 제시나 기생충 검진 기술에 대한 기술적 지원이 한국 기생충박멸협회의 자립과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9년 집단검진에서 셀로판후층도말법(cellophane thick smear technique)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직접도말법이나 부유법, 침전법 등이 사용되었다. 셀로판후층도말법은 유리로 된 현미경용 커버글라스 대신 셀로판지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소요시간이 기존 방법보다 절반 이상 절감되었으며 소모품에 들어가는 비용도 적었다. 이 검사법은 1949년 일본에서 개발되어 1961년부터 일본기생충예방회에 정식으로 채택된 방법이었다. 일본 기생충학자들은 한국에 와서 기협의 검사원들에게 셀로판후층도말법을 교육하고 전수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107-111). 더불어 컨베이어벨트와 건조기를 이용해 가검물을 더 빠른 시간에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가지 장치들도 일본에서 한국에 도입되었다(오가와 인터뷰, 2017. 5. 16). 일본이 지원한 물자와 장비뿐 아니라 기생충 검사법과 같은 기술적 지원들은 1970년대 기협이 한국에서 연간 1,00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을 검진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되었다[33].
기술적 지원을 넘어 ‘집단검진, 집단투약’으로 경제적 자립을 중시하는 “일본식 방법”(APCO, 1998: 361)이 도입된 것은 이후 한국의 기생충 사업을 특징짓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1969년 학교 대상 집단검진이 시작되어 검진 수익이 나기 전까지 기협은 지역 내 회비를 내는 가입자에게 “무료 검사를 하고, 충란이 발견되면 구충약을 무료 제공하는”(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17)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적십자, 나협회, 결핵협회, 수해연금, 산림조합 등 수 많은 단체들이 회비를 요구하고 있었으나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거센 상황이었다[34,]. 가입자 중심의 운영 방식은 회원의 숫자를 확대시키는데 한계가 있었고, 무료 검사와 투약에 소요되는 예산으로 수익성도 높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일 기생충 관리 사업 협력 초기부터 구니이는 한국측에 회비제를 철폐하고 학교 집단검진 수익에 기반한 자립형 조직 구조를 도입할 것을 강조해왔다(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21).
1970년부터 한국, 일본, 대만 사이에 이루어진 인적 자원 교류에서 일본에 초청된 한국 기협 관계자들은 일본측의 활동 과정을 수 주간에 걸쳐 “밀착해서 관찰”[35,]하며 노하우들을 습득했다. 특히 행정, 조직 운영, 인사 관리 등에 대한 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안상옥 인터뷰, 2016. 7. 29)[36,], 1972년부터 기협은 직원 국외연수제도를 정착시켜 일본에서 전문 인력을 교육시켰다(한국건강관리협회, 2005: 262-263). 초기에는 주로 검진 기사 등 기술 인력을 중심으로 시행되던 이 제도는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며 행정 인력의 비중이 늘어나 연간 10-15명가량을 파견하게 되었다. 사무총장은 연간 10여 회 이상 일본을 방문하며 자금 지원 등 행정 업무를 조율해 나갔다. 또한 일본과 대만의 담당자들도 5-10명으로 구성된 시찰단을 파견하여 매년 각국의 사업 성과를 공유했다(한국건강관리협회, 1995: 350-352).
한국은 일본에서 습득한 경험을 그대로 반영했다. 학교 집단검진 사업을 확보하는 공격적인 ‘영업’ 활동 덕분에 “똥장수”(박광서, 1976: 11)라 불리게 될 정도였다. 1969년 문교부가 기협을 초중고교에 대한 공식 기생충검진조직으로 인정하자 사업의 경제적 안정성은 더욱 강화되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91). 결국 일본의 경제적 자립 모델을 도입함으로써 한국 기생충박멸협회는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에 이르러서 기협은 완전히 검사료 수익에 의존하는 형태로 돌아서 “일하지 않으면 경영 위기에 빠진다는 배수진을 의식”해 “일본의 기생충 예방 방식과 비슷”(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21)해져 있었다.
1968년까지는 한국의 기생충 관리 방안은 검진과 투약 뿐 아니라 “인분비료 사용금지와 청정채소 보급사업”(보건사회부, 1968: 1) 같은 지역 위생 개선 사업이 혼재하고 있었다. 즉 1969년 이전까지는 환경 개선을 우선하는 쪽과 집단 투약을 우선하는 쪽이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Cho, 1990, 7-8)[37,]. 일본에서 성공한 집단검진, 집단투약의 성과는 높이 평가되고 있었지만 과연 다른 나라에서도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단검진, 집단투약 사업이 경제적 자립을 보장하면서 1969년부터 학교를 중심으로 한 검진과 투약 방식으로 완전히 재편되었고, ‘일본식 방법’을 한국에서 재현해 내는데 성공했다(그림 1, 그림 2). 구니이는 1971년 조사 보고서에서 “한국의 사업이 성공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일본은 이 ‘한국 방식’을 아시아 제국의 의료 협력법으로” 해야할 것이라 평가했다(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27). 즉 한일 기생충 협력을 통해 일본과 한국은 성공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4. 가족계획과 전환기의 기생충 관리 사업
1950-1960년대 국제 원조의 보건의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사업은 가족계획을 중심으로 한 인구 관리였다. 서구에서는 제3세계의 인구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 세계는 인구 폭발이 제3세계 경제발전의 주요 장애물이며, 경제적 빈곤이 심화될 경우 공산화될 소지가 있어 세계 안보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주요 원조 공여국이었던 미국은 미국인구협회(Population Council), 패스파인더 재단(Pathfinder Foundation), 포드 재단(Ford Foundation) 등 민간단체를 이용하여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배은경, 2012: 88).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가족계획 사업은 국가 전반의 보건의료 사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기생충 사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38].
전후 일본은 급격한 인구 증가를 경험했다. 이에 따라 1948년에는 전문의에 의한 인공임신중절을 형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우생보호법’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공임신중절은 사회적 문제로 언급될 정도였다(Norgren, 2001: 83-85).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구니이는 인구 문제에 인공임신중절이 아닌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39,]. 구니이는 성공한 기생충 관리 사업을 통해 경제적 자립의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고(Kunii, 1992: 64), 여기서 얻어진 자본과 경험을 통해 가족계획 사업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곤 인터뷰, 2017. 5. 15)[40].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전문가들 보다는 직접 민간단체를 조직하고 운영해 대중 속에서 성공해 본 경험이 더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전쟁 직후부터 일본의 인구 문제와 가족계획에 대한 논의는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가족계획 사업에 대한 움직임들이 조직화 되는 것은 1955년 국제가족계획연맹 제5회 총회가 도쿄에서 개최되는 시점을 전후해서 이루어졌다. 1954년 구니이는 일본가족계획홍보회(Japan Family Planning Promotion Society, 현 일본가족계획협회)라는 작은 조직을 만들고 활동을 시작했다. 1954년부터 1957년 사이에는 기생충예방회 설립 초기부터 활동을 같이 해왔던 서너 명의 직원만을 설득해 가족계획 사업에 참여하도록 했으며, 실제로 임금은 기생충예방회에서 충당했다(곤 인터뷰, 2017. 5. 15). 1955년 10월 도쿄에서 열린 국제가족계획연맹 제5차 총회는 구니이에게 국제 네트워크에 진입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 구니이는 국제가족계획연맹 총회에 무급으로 봉사하며 관련 인물들과 친분을 쌓고 신뢰를 얻어갔다(Kunii, 1983: 12-14).
일본에서 조직가이자 행정가로서 기생충 관리와 가족계획을 매개한 것이 구니이였다면, 한국에서는 기협 회장이자 가족계획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했던 이종진이 이를 매개했다. 1950년대부터 다양한 국제 행사에 한국 보건부 대표로 참여하기 시작한 이종진은 일찍부터 국제 무대에서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57년에는 중앙의료원 개원 협의를 위한 시찰단으로 3개월간 스칸디나비아 연수를 거쳐 1958년 중앙의료원 개원 당시 초대원장으로 부임했다(보건신문사, 1991: 388-390)[41,]. 그리고 1960년 9월 이종진이 중앙의료원 병원장을 사임한 뒤 가장 먼저 참여하는 민간단체 활동은 가족계획 사업이었다. 당시 보사부 방역국장실에 이종진을 필두로 한 16명의 의학계 인사들이 모여 산아제한 문제를 논의하고 추후 민간단체를 발족할 것을 결의했다[42,]. 1960년 11월에는 국제가족계획연맹의 아시아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조지 캐드버리가 한국을 방문하여 자금 지원을 약속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족계획협회 설립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대한가족계획협회, 1975: 57-58). 한국의 가족계획 사업 시행 초기부터 참여해온 이종진은 다양한 국제 경험을 바탕으로 1960년대 중반 국제가족계획연맹 서태평양지부 부의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IPPF, 1967: 185). 그리고 이러한 국제 협력 사업 경험을 통해 이종진은 일찍부터 일본 및 국제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아왔다[43].
1967년 한국과 일본의 기생충 관리 사업 협력이 시작될 무렵, 구니이는 국제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1967년 런던에 있는 국제가족계획연맹 본부를 방문했던 구니이는 당시 국제가족계획연맹 고문이었던 윌리엄 드레이퍼(William Henry Draper Jr)[44,]와 접촉을 시도하게 되었다[45,]. 드레이퍼는 전후 일본 경제뿐 아니라 1950년대 경제협력에 집중한 일본의 전후배상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특히 1967년부터 국제연합 인구기금 활동 기금을 확대하기 위한 과정에서 드레이퍼가 각 국가들을 설득해 확보한 예산은 4,360만 달러에 달했다. 모금과 예산부분에서 드레이퍼의 영향력은 막강했다(Connelly, 2008: 286-288).
국제 인구 통제 네트워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드레이퍼가 전후 일본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구니이는 드레이퍼가 가족계획에 대한 일본의 국제 원조를 끌어내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Kunii, 1992: 98-100). 구니이는 국제가족계획연맹 본부에서 드레이퍼의 연락처를 얻어 일본 방문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드레이퍼 역시 새로이 떠오르는 원조 공여국인 일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1967년 8월 그의 일본 방문이 성사되었다. 드레이퍼는 구니이의 사무실을 거점으로 일본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과 전 수상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46,]를 만났다. 드레이퍼는 일본이 경제 규모에 걸맞도록 국제 인구 관리 사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야함을 강조했다(Homei, 2016: 446). 일본 정부는 세계 인구 문제 해결에 필요한 자금 지원과 인구 정책 관련 특별 사업을 진행하는 국제연합 인구기금에 1971년 150만 달러에 달하는 지원금을 기탁하며 주요한 원조 공여국으로 빠르게 떠올랐다(Connelly, 2008: 312). 일본의 국제연합 인구기금 지원금은 조건부로 전달되었는데, 기금의 일정 부분은 국제가족계획연맹과 일본의 민간단체에 할당하도록 하는 조건이었다(Kunii, 1992: 102-103). 가족계획 자금 지원 초기부터 기시와 친분을 맺고 있던 구니이는 일본측 자금을 운용할 수 있는 민간단체를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1968년 4월 만들어진 것이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이었다(곤 인터뷰, 2017. 5. 15).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 설립 당시 구니이는 국제연합 인구기금을 비롯한 기존의 가족계획 단체들이 진행하던 하향식 접근법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을 통해 진행되는 국제 협력 사업에 새로운 가족계획 사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언급했으나(곤 인터뷰, 2017. 5. 15), 새로운 사업 모델의 개발에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도 존재했다. 1949년 일본기생충예방회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 도쿄의 학령기 아동 기생충 감염률은 72%에 달했다. 하지만 1952년 가을에는 36.8%로 감염률이 절반 가량 감소했으며, 1955년 가을에는 14.4%로 낮아졌다(Kunii, 1985: 22). 기생충 관리 사업과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경제 발전과 생활환경 개선은 기생충 감염률의 급격한 하락으로 이어졌고, 이는 기생충예방회의 존립을 위협했다. 1950년대 중반 구니이는 이미 안정권에 접어든 기생충 사업 이후를 고려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Kunii, 1992: 64-65). 일본기생충예방회는 1959년 대변잠혈검사를 포함하는 것을 시작으로 1967년 건강검진을 주로 하는 도쿄예방의학협회로 전환되었다[47,48]. 또한 1964년에는 ‘보건회관(保健会館)’으로 명명된 본부 건물을 완공하여 다양한 검사 시설과 단체들을 하나의 공간 안으로 모아 조직의 연속성을 확보하도록 했다(Kunii, 1992: 44-56).
5. 통합사업과 아시아 네트워크
한국의 기생충 관리 경험은 빠르게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베트남전을 통해 다수의 기생충학자들과 예방의학자들을 베트남에 파견하여 장내기생충증 관리에 주로 집중하고 있던 기존의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말라리아를 비롯한 기타 열대질환에 대한 경험을 습득했다(Harrison, 2017: 420-423). 한국에서의 기생충 박멸 사업 경험과 베트남전에서의 경험을 통해 한국의 기생충학은 빠른 발전을 이루었고, 1970년과 1971년에는 연세대학교 열대의학연구소에서 국제 열대의학 세미나도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열대의학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던 국가들 뿐 아니라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참여했다[49]. 한국은 단순히 일본의 모델을 수입하여 적용하는 단계를 지나, 새로운 모델의 스스로 시험해보고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일본은 구니이의 인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기생충 관리 사업의 조직을 가족계획과 국제 협력, 국내 건강검진 사업으로 확장시켜 조직의 지속성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한국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검진 사업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성인 대중을 상대로 하는 건강검진 사업으로 확장하는데 한계가 있었다(김명희 외, 2015: 4-5). 반면 1961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국가 주도하에 시행된 가족계획 사업은 국제 인구 통제 네트워크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수많은 시범사업들을 수행했고, 이를 통해 대중을 상대로 치밀한 조직을 구성할 수 있었다. 특히 1968년에 농촌 및 격오지까지 조직된 가족계획 어머니회는 회원 70만 명이 넘는 거대한 하향식 풀뿌리 조직을 만들어냈다(박형종, 1974: 42-45). 한국의 가족계획 어머니회 조직은 풀뿌리 운동과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족계획 성공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했던 구니이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Kunii, 1983: 34).
기생충 사업에서의 전문성과 가족계획 사업에서의 인적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경험은 대만의 사례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1959년 대만은 미국인구협회의 지원으로 인구 53만 명의 난터우 지역에서 가족계획 시범 사업을 시행하게 되었다(Cernada et al., 1974: 2-3). 구니이는 1970년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단을 통해 조사단을 대만에 파견했고, 1971년 6월부터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단의 지원 하에 난터우 지역에서 회충 관리 사업이 시행되었다(APCO, 1974: 41-42)[50,]. 이미 10년 이상 진행된 가족계획 사업의 지역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검진과 투약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고, 사업 시작 6개월만인 1972년 6월 회충 감염률은 41.6%에서 22.8%로 절반 가까이 낮아졌다(APCO, 1974:43). 대만의 사례는 기생충 관리 사업이 기존의 광범위한 가족계획 사업 네트워크와 결합되었을 때 얼마나 큰 효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51].
한국과 대만의 성공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1971년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단 조사보고서에서 구니이는 향후 제언을 통해 한국, 대만,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기생충 대책 회의’의 조직을 주장했다(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28). 이 조직은 정부, 학자, 민간단체를 주축으로 실질적인 기생충 관리 사업 모델의 전파를 목적으로, 아시아 전역에 일본의 기생충 관리 방법을 전수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구니이는 계속해서 한국과 대만측 대표에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기생충 관리 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 좋은 모델”이 되어 필요할 때 “기술자와 조직가”를 보내 “힘을 합쳐 아시아 사람들의 건강 향상에 노력해야”한다고 역설했다(国井長次郎, 1979: 94). 이처럼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 설립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한국 기생충 박멸 사업에 대한 지원은 구니이가 “아시아에 눈을 뜨게 되는”(Kunii, 1992: 90) 계기가 되었다. 한국도 “기생충 관리의 성공적 사례를 국제적 시선 상에 올려 놓을 수”(서병설, 1991: 34) 있게 되면서 국제적 확장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74년 ‘세계 인구의 해’를 맞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세계인구대회에서는 인구 관리를 위한 행동 강령이 채택되었다[52,]. 그 중 24조 (d)항은 “감염병과 기생충성 질병, 영양부족과 영양실조를 가능한 경우 박멸할 수 있도록 하고, 안전한 식수와 적절한 위생이 충분히 공급될 수 있도록 한다”고 명시했다(보건사회부, 1974: 98). 이 문구는 기생충 관리와 가족계획을 한데 엮은 새로운 “통합사업”(Integrated Project, 家族計画·寄生虫予防インテグレーションプロジェクト)의 확고한 근거가 되어주었다(Kunii, 1992: 114-116). 1974년 10월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Asian Parasite Control Organization, APCO) 제1차 회의에서는 이를 가족계획과 기생충 관리 통합사업의 이론적 근거로 제시했다[53,].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 제 1차 회의는 일본의사회, 일본보건협회, 일본만국박람회기념사업회 등의 지원과 자체 자금으로 진행되었다(APCO, 1974: 116-120).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는 의도적으로 국제단체의 대표자, 특히 인구 단체 대표자들을 참가시켰다.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에는 국제가족계획연맹, 국제연합 인구기금, 아시아재단(Asia Foundation), 포드재단(Ford Foundation) 등 인구 통제 네트워크에 포함되어 있던 국제 단체들이 꾸준히 참석했다.
이종진과 구니이는 가족계획 사업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으나, 직접적인 인구 감소와 통제 보다는 “벌레 덩어리로 방치”된 아시아 사람들의(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286) 전반적인 건강을 향상시키는데 더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도대체 기생충과 가족계획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145)인지를 가족계획 사업 단체들에게 설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구니이와 이종진[54,]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가족계획 분야의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Kunii, 1992: 114-116)[55,]. 특히 1960년대 중반부터 국제가족계획연맹 서태평양 지부 부의장으로 활동해 온(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23) 이종진은 직접 국제가족계획연맹을 설득해 가족계획 사업 자금을 기생충 사업으로 매개해 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287). 1975년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 제2차 회의부터는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 세미나 개최에 국제가족계획연맹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같은 해 시작된 대만 난터우 지구의 통합사업도 국제가족계획연맹의 자금 지원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APCO, 1975: 118-123). 1977년부터 기협 회장을 맡은 서병설[56]은 다양한 현장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종진과 함께 구니이의 통합사업을 지원하는 조언자이자 동료 역할을 했다.
1975년 제2차 회의에는 한국가족계획협회 대표 자격으로 이종진도 참석했다. 이종진은 5일간 이어진 회의에서 기생충 관리 사업과 가족계획 어머니회의 조직 등 한국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며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도 재현이 가능함을 설득했다. 특히 “국민총생산은 증가했지만 사람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았”고, “공중보건 사업으로서 기생충 관리와 가족계획이야말로 국가 발전에 극적으로 기여”해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가져다주는”(APCO, 1975: 15)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 기협 부회장 자격으로 참가한 소진탁은 “기생충 문제는 현재적일지 모르지만 경제 발전과 전반적인 건강 상태의 개선으로 완전히 박멸” 될 수 있으나 “가족계획 문제야말로 인간이 생존하는 한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라며 기생충학자들에게 인식의 전환을 촉구했다. 이종진이 주장한 “구충제가 포함된 경구피임약의 개발”(APCO, 1975: 22)[57]은 이처럼 가족계획 네트워크로 기생충 관리가 적극적으로 편입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진행된 가정보건시범사업[58,]은 인구 5만여 명의 화성군에서 대한가족계획협회와 한국기생충박멸협회, 보건사회부의 민관협동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에서도 대만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가족계획 네트워크가 통합사업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통합사업은 지역사회의 일반 성인 대중을 대상으로 하지만, “기협은 보건소 이하의 일선조직은 전무한 상태인데 비하여 일선요원을 갖춘 가협은 현지민과의 직접 상대가 가능한 편이어서 가족계획사업과 기생충관리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데는 가협측이 효율적인” 상황이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152-153). 때문에 가정보건사업소를 별도로 설치하고 어머니회의 후신인 부녀회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검변의 수집과 투약을 진행했다(김성이, 1983: 59-64)[59,]. 사업 결과는 성공적이었다[60,]. 가족계획 실천율은 1977년 초 56.4%에서 1982년 말 72.4%까지 높아졌고, 기생충 감염률은 같은 기간 50.6%에서 9.0%로 낮아졌다(APCO, 1983: 371-374)[61].
한국과 대만에서 시작된 시범사업과 그 결과들은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를 통해 지속적으로 홍보되었다(APCO, 1980: ix-xi).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친 뒤 이어진 세계적 경기침체는 1980년대 국제 원조 규모를 크게 축소시키고 개발도상국에 구조조정을 강요했다(김지영, 2016: 132-134). 이에 따라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적 독립과 지속 가능성이 보장되지 않는 가족계획 사업에서 눈을 돌려 새로운 사업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의 통합모델은 가족계획 사업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1980년대를 지나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네팔 등 아시아 국가 뿐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까지 통합사업 관련 시범사업이 수행 되었다. 이 시범사업들에서는 기술적 지원 뿐 아니라 ‘경제적 자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행정적 지원이 핵심적인 논의사항이었다(APCO, 1998: 346-363).
‘집단검진 집단구충’과 ‘경제적 자립’으로 대표되는 사업 모델 뿐 아니라 구체적인 사업 방식 또한 지속적인 인적 교류를 통해 공유되었다. 통합사업의 장점은 기생충을 즉각적으로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이를 통해 보건의료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며 가족계획을 전달하는 요원에 대한 신뢰를 높여준다는 데 있다. 일본은 사업 초기부터 의사와 함께 지역사회를 방문하여 치료를 진행하고 체외로 나온 기생충을 씻어 회충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해왔다(그림 3, 그림 4). 그런 면에서 회충은 무엇보다 “훌륭한 보건 교육 자료”였다(하라 인터뷰, 2017. 5. 15)[62,]. 사람들에게 구충된 기생충을 직접 보여주는 방식은 일본 내 모든 지부에 적용되는 공통된 방식이었으며, 이후 통합사업에도 적용되었다(오가와 인터뷰, 2017. 5. 16). 한국에서도 기생충의 시각화를 통해 기생충을 대하던 사람들의 인식을 단시간 내에 바꾸어 놓는 방법이 사용되었다(정준호 외, 2016: 194-196). 즉 통합사업은 “무조건 간단하고 지역 주민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오가와 인터뷰, 2017. 5. 16)[63,]이어야 했다(APCO, 1974: 106-110). 매년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 회의가 끝난 뒤, 각국의 참가자들은 곧바로 한국과 일본, 대만을 연달아 시찰하며 구체적인 사업 방법을 습득해갔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75: 6).
예산이나 출입국의 제약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로 한국의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 참여와 통합사업의 경험은 1980년대에 바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1990년대 이후 기생충 관리 해외원조사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국건강관리협회는 1995년 중국과의 협력을 시작으로, 2000년대에는 라오스, 몽골, 캄보디아, 수단에서 기생충 관리 사업을 지원했다[64]. 특히 이 사업 내역들은 첫째, 기생충 검사 장비, 기자재, 구충제 지원, 둘째, 기생충 관리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기술 전수 및 인프라 구축, 셋째, 한국 전문가 파견과 현지 관계자 한국 연수를 통한 기술 전수 및 학술교류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한국형 기생충관리 사업모델’ 역시 1960년대 한일 기생충 관리 협력의 영향을 보여준다.
1990년대 이후에 건강관리협회 지도부나 기생충 전문가 집단의 인적 구성은 과거 기협의 인물들이었거나 기협의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며, 한일 기생충 관리 협력의 기억과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 역시 기생충예방회에서 활동했거나 이후 한일 기생충 협력 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오늘날 국제 협력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즉 현재 과거 기생충 관리 협력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 한국과 일본이 과거의 경험을 다시 해외에 적용하고 활동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홍성태 인터뷰, 2017. 4. 24)[65].
6. 맺음말
일본에서는 1950년대 중반 이후 벌써 기생충 감염률이 빠르게 하락했기 때문에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를 통해 통합사업을 보급할 필요가 대두된 1970년대 초반에는 벌써 이에 대한 현재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가 드물었다(다카하시 인터뷰, 2017. 5. 15). 기존 일본 기술협력과 원조에서 강조되던 공통의 ‘개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적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박영수, 2017: 217-224). 이러한 배경에서 현재의 성공 경험을 지니고 있는 한국과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무엇보다 통합사업은 일본에서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방법이었다. 기생충 관리 사업과 가족계획 사업 양쪽에서 각각 성공한 경험은 가지고 있으나, 이를 통합해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화성군 가정보건시범사업이나 대만의 난터우 지구 시범 사업은 타당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현장이 되었다.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학술적 근거를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들 역시 이에 대한 현재적 지식을 지니고 있는 한국과 대만의 학자들이었다. 생생한 개발과 극복의 경험을 지니고 있는 ‘중진국’의 역할을 더 이상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일본은 발전해 있었다. 아시아에 필요한 현재적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역할은 이제 그 뒤를 이어 받은 한국과 대만의 역할이 되었다. 국제원조와 기술협력을 통해 아시아와 서구, 선진국과 후진국을 잇는 ‘중진국’의 역할을 자처했던 일본의 사례처럼, 한국은 1970년대 이미 아시아 내 성공 사례로 자리 잡은 일본과 여타 아시아의 저개발국가의 또 다른 ‘중진국’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집단검진과 집단구충 등 서구에서 실현되지 않았던 모델을 성공시킨 일본의 사례를 또 다른 경험으로 재해석하여 다른 아시아에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종진과 구니이는 제국주의 시대와 전쟁, 냉전을 직접 경험하고, 그 대립과 갈등을 배경으로 하는 기생충과 가족계획 사업 양쪽에 모두 참여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기생충 감염과 같은 풍토병으로 대표되는 ‘열대의학’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서구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라는 지정학적 개념 속에서 형성되고 성장해왔으며, 가족계획은 냉전시대의 이념을 반영하는 초국가적 프로젝트였다. 이들의 활동은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기생충 관리 사업 경험와 가족계획 사업의 자원이라는 기반 위에 아시아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생명정치(biopolitics)가 결합되어 ‘통합사업’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가족계획 사업과 같이 서구의 연구자와 조직을 통해 압도적인 자원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던 보건의료 사업들은 이종진과 구니이와 같은 아시아 현장의 활동가들을 통해 아시아의 지정학적 특성과 아시아의 문화에 부응하게 ‘통합사업’으로 재해석되고 재조직되었던 것이다. 구니이의 말 그대로 아시아적인 사업과 네트워크의 등장은 “기생충에서 시작되었”던 셈이다.
Notes
2017년 현재 한국건강관리협회의 회장은 채종일(서울대학교 기생충학교실 명예교수)이며, 1977년부터 1991년까지는 서병설(서울대학교 기생충학교실 교수), 1994년부터 2000년까지는 임한종(고려대학교 기생충학교실 명예교수),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이순형(서울대학교 기생충학교실 명예교수)이 회장직을 역임했다. 한국기생충박멸협회가 한국건강관리협회로 완전히 전환된 1986년 이후로도 기생충학 전문가가 회장직을 수행해왔음을 볼 수 있다. 「역대회장」, 한국건강관리협회, http://www.kahp.or.kr/cms/doc.php?tkind=6&lkind=28&mkind=50&skind=620. 검색일: 2017. 6. 25.
이종진의 영문명 표기는 현재 사용되는 한국인 성명 로마자 표기법과는 거리가 있으나, 일본에서 C.C. Lee라는 별칭으로 주로 표기되거나 불리고 있음을 감안하여 활동 당시 사용하였던 영문명을 기록하였다.
대만의 기생충방치회는 1990년 위생보건기금회를 설립하고 한국 건강관리협회와 유사하게 건강검진 사업을 주로 하고 있다. 기생충방치회 역시 현재 존속하고 있으나, 위생보건기금회의 건강검진 사업의 일부로 운영되고 있다. 「關於我們 」, 財團法人中華民國衛生保健基金會附設醫事檢驗所, https://www.cfoh.org.tw/about.html#eng. 검색일: 2017. 6. 25; 후훼이더 회장은 2015년 방만한 단체 운영, 이사장직 장기 역임 등이 문제가 되어 사퇴했다. 「寄生蟲防治會 9旬董座月領13萬」, 『自由時報』, 2015. 3. 12.
일본기생충예방회와 구니이의 직간접적 영향 하에 기획되고 성장한 조직으로 도쿄예방의학협회(東京都予防医学協会), 일본가족계획협회(日本家族計画協会),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이 있다. 해당 조직들의 본부는 모두 도쿄의 보건회관(保健会館) 건물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건물 역시 1964년 일본기생충예방회의 자금을 이용해 구니이가 건립한 것이다. 일본 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의 경우 현재 도쿄여자의과대학 국제환경열대의학 교수가 임원으로 임명되어 있다. 「임원 등 명부」, JOICFP, https://www.joicfp.or.jp/jpn/wp-content/uploads/2015/10/93d22ca9e1079b757549c4e0ca555879.pdf. 검색일: 2017. 6. 25; 또한 사무국 내 사무장급 이상 인력들은 구니이와 함께 1970년대 후반부터 기생충 사업과 가족계획 사업을 공동으로 진행했던 인물들이다(다카하시 인터뷰, 2017. 5. 15). 다카하시 히데유키(高橋秀行)는 현재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의 전무이사를 맡고 있으며, 1980년부터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에 참여해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 활동 등을 담당해왔다). 현재 도쿄예방의학협회(일본기생충예방회의 후신)의 사무총장은 과거 일본기생충예방회의 회계 담당이었으며(오가와 인터뷰, 2017. 5. 16), 현 일본가족계획협회 회장은 1945년부터 구니이와 함께 기생충 관리, 가족계획 사업을 같이 해왔다(곤 인터뷰, 2017. 5. 15). 이처럼 위의 조직들은 행정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으나 여전히 구니이를 중심으로 한 인적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1950년대까지 아시아의 원조는 주로 서구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이 새로운 원조 강국으로 떠올랐다(Sato, 2013: 12-16). 지정학적으로 냉전 시기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과 아시아의 중간자로서 공산주의를 막아내는 위치에 있었던 일본은 이차세계대전 패망 후 서구의 원조를 받았던 수원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자신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원조국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는 서구 중심의 공여국의 원조방법이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아시아에서 재구성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차세계대전 이후의 원조 사업은 냉전 시대 국제관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아시아적인 방법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원조 형태가 일본을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는 정부 및 공공기관 등 국가 차원에서 개발도상국이나 국제기구에 원조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단은 차관 등 유상협력을 제외한 일본의 무상 협력 분야를 관장하는 조직으로 1962년 설립되었다. 1974년 관련법 개정에 따라 일본이민사업단(Japan Emigration Service, JEMIS)과 통합되어 현재까지 일본해외협력단(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JICA)으로 활동 중이다(한승헌 외, 2015: 209-210).
1973년부터는 구니이를 매개로 일본 만국박람회기념사업회의 자금 지원을 통해 기협은 7개 시도지부 청사 건설을 완료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170-172).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단을 통해 이루어진 한일의료협력 사업은 기생충 관리 사업(1968.4-1976.3), 연세대 암병원(1968. 7-1973. 3), 카톨릭의대 산업의학센터(1971. 8-1977. 3), 중앙대 임상영양연구센터(1975. 10-1979, 9), 성바오로병원 순환기센터(1979. 3-1983. 3), 순천향대학 모자보건센터(1984. 8-1990. 7), 성심병원 노인보건의료센터(1990. 11-1995. 10)까지 약 30여년에 걸쳐 이루어졌다(国際協力事業団, 1996: 36-42).
전후 일본 개발원조 정책의 형성과 변화에 대해서는 냉전 체재 중 미국에서 받은 원조 경험, 전후 배상 부담에 따른 원조 형태의 배상 지급, 아시아 내 자원과 시장 확보 욕구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이에 대한 논의들은 니시카와 외(2013), Sato et al.(2013), 박홍영(2006)을 참고할 것.
‘계획’이 의미하는 바처럼 그 자체가 협정처럼 강제력을 지니지는 않지만 양자간 협력을 촉진하는 느슨한 의미의 조직이었다(사토, 2013:169-171). 일본은 1954년 구성원으로 참여했으며, 한국은 1962년 가입했다. 본래 초기 콜롬보 계획은 수혜국을 영연방 국가로 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가입은 여러모로 독특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전쟁이나 식민지와 같은 과거의 경험이 원조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현상은 한국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정부는 2010년 국제 협력과 원조를 집중할 26개 중점협력국을 선정했다. 중점 협력국 중 가장 많은 원조를 받은 국가는 베트남, 필리핀, 에티오피아로 전체 지원의 50%를 넘어섰다. 그리고 중점협력국 선정과 지원 규모의 배정에 있어 가장 유의미한 변수는 한국전쟁 참전 여부였다(김석우 외, 2016: 150-152).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기생충학자 중 상당수가 일제강점기 중 고바야시 하루지로(小林晴治郞) 같은 저명한 일본의 기생충학자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1965년 이전부터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개인 단위의 교류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Cho, 1990: 3-4). 하지만 학술적 목적인 아닌 기생충 관리 사업 측면에서 교류가 시작된 것은 1965년 이후로 볼 수 있다.
1952년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를 중심으로 가족계획을 촉진하게 위해 설립된 단체로, 2017년 현재 172개국에서 65,000여개의 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다. 생어는 1916년 처음으로 출산 조절(birth contro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여성운동가이며 주요한 가족계획 운동가이기도 하다.
1961년 가족계획이 국책사업으로 채택되며 한국은 인도, 파키스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인구 통제를 국가 시책으로 채택한 국가가 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된 가족계획사업은 인구성장 억제를 통한 경제성장 및 조국 근대화라는 수단의 의미를 띄기도 했지만, 동시에 개발을 위한 외국 원조와 지원을 끌어들이는 파이프 역할을 하기도 했다(배은경, 2005:274).
합작사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경제적 약자 집단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조직하는 경제제도로 볼 수 있다. 서구의 협동조합에서 유래하기는 했지만 중국과 일본 등에서는 사회주의국가 건설이라는 보다 광의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박경철, 2011: 1019-1019).
후쿠시마 지역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구니이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게이오 기주쿠 대학에 입학해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본래는 소설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자신의 재능은 소설가가 아닌 조직가나 선동가에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아시노 인터뷰, 2017. 5. 16).
이에 대해 초기부터 구니이와 일했던 곤 야스오(近泰男)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러나 이 합작 협회도 3년여 만에 해산해 버린다. 이유는 당시 급격히 상승한 인플레 압박에 쫓겨서 이 사업을 이해하던 사람들의 기부금에만 의존하여서 사업 자금이 고갈된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3 년간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했으며 그 이후 사업에 중요한 것을 남겼다. 운동단체에서 경제적 자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배운 귀중한 경험이었다”. 「(8)合作社運動から寄生虫撲滅運動へ」, 『家族と健康』, (2011. 3).
아시노 유리코(芦野由利子)는 1969년부터 구니이의 전담 비서로 일해왔으며, 현재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의 이사진 중 한 명이다. 주로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와 관련된 가족계획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 일본기생충예방회의 후신, 혹은 구니이가 직간접적으로 조직하여 운영했던 조직들인 도쿄예방의학협회, 일본가족계획협회,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의 책임자들은 경제적 자립을 조직의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 도쿄예방의학협회는 현재 한국건강관리협회와 유사한 건강진단 수익을 통해 운영되고 있으며, 일본가족계획협회는 성교육 교재 판매를 주요 수익원으로 하여 경제적 자립을 유지하고 있다.
고이즈미는 게이오 의대 기생충학 교수로 말라리아와 의용곤충학의 전문가였다. 1920년대에는 대만에서 진행된 말라리아 매개 모기 관리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Setoguchi, 2007: 170-171).
일본 기생충관리협회, 예방의학중앙회, 가족계획협회 등 구니이의 영향을 받은 조직의 담당자들은 현재에도 자립성을 핵심적인 가치로 반복해서 언급했다.
당시 검진 비용은 학생 한 명당 15엔이었다. 이는 가장 저렴한 담배 한 갑에 해당하는 비용에 불과했지만, 한 학교 당 1,000명이 넘는 학생이 있었기 때문에 수익은 15,000엔에 가까웠다. 또한 하루에 3-5곳의 학교를 검진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하루 수익은 50,000엔을 넘어설 때도 있었다(Kunii, 1983: 183).
이영춘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나와 교토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해방 후에는 군산 농촌위생연구소와 개정중앙병원을 설립한 대표적인 지역의료보건 활동가로, 초대 기협 회장을 지냈다(박윤재, 2003: 4-6).
초대 기협 상무이사(현 사무총장 직책)를 지낸 이종호는 보건사회부 마약과장으로 재임했던 경력이 있다. 1966년 기생충질환예방법 입법을 위한 로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조승열 인터뷰, 2016. 7. 22. 조승열은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 교수로 재직했으며, 1977년 시행된 한국 화성군 통합사업에서 기생충 관리 부분의 실험 설계를 맡기도 했다). 1967년 기협 내분 당시 횡령 혐의로 구속 되었으나(「기생충협상무 이종호씨 구속」, 『경향신문』, 1967. 8. 8), 개인적으로 착복한 것은 아니며, 입법 로비 과정에서 무리한 예산 소요가 일어나 경영난이 악화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을 보인다(이순형 인터뷰, 2016. 7. 12). 이종호가 직접 작성한 ‘기협수난기록(조승열 아카이브, 1967)’이라는 기록물에서 이에 대한 전후 배경을 살펴 볼 수 있다. 이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韓国の寄生虫について」, 『寄生虫予防』, 1965. 8. 25. 『寄生虫予防』은 1949년 일본기생충예방회의 전신인 도쿄기생충예방회의 설립 당시부터 구니이가 직접 편집, 발간한 월간 신문이다.
『나의 교우록』(2004)은 쌍천 이영춘 박사 기념사업회에 의해 200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나, 본래 이영춘이 1977년 일간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둔 것이다.
당시 보건사회부 의정국장을 맡고 있던 한상태는 기생충박멸협회 내부의 분쟁 때문에 국제협력의 적절한 주체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국외 원조를 정부 차원에서 유보하였다고 설명하기도 했다(한상태 인터뷰, 2016. 8. 17).
“똥물에 튀겨 먹을”(한상태 인터뷰, 2016. 8. 17) 정도의 파행적인 운영과 심각한 재정난으로 기생충박멸협회는 국정감사에 언급되어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이 필요할 정도였다. 「부정약품 횡행」, 『동아일보』, 1966. 11. 11; 「기생충협에 부정」, 『경향신문』, 1967. 5. 30.
이종진은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넉넉지 않은 집안 살림 때문에 본래는 사범학교에 진학해 아버지를 도우려 했으나, 그의 탁월한 재능을 아깝게 여긴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평양으로 유학을 하게 되었다(보건신문사, 1991: 388-390). 1939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해 1945년 경성제국대학 약리학교실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44년부터는 경성부민병원 소아과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오긍선(1878-1963)은 한국인 최초의 피부과 의사로 1934년 세브란스의전 학교장을 역임했다(기창덕, 1997: 90-91).
한상태는 1955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해 1967년 보사부 보건국장과 의정국장을 역임했다. 1967년부터는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역사무처에서 일했으며, 1989년에는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에 올랐다.
「援助要請書」, 『寄生虫予防』, 1967. 12. 25.
구니이는 “악취와 더러움이 싫어서” 계속해서 이전해야 했던 일본과 한국의 경험을 공유하며 악취 때문에 “5분도 검사실에 있”을 수 없고 “엉덩이도 붙이고 앉아야 할 만큼 좁은”(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28) 한국 기협의 건물을 개선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구니이의 요청에 따라 본래 1970년에 종료될 예정이었던 일본해외기술협력사업단의 한국 지원은 3년이 연장되며 건물 지원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각종 잡부금 규제」, 『경향신문』, 1967. 1. 9.
「韓国寄生虫対策協力報告会」, 『寄生虫予防』, 1970. 2. 25.
안상옥은 재무부 출신의 관료로 1967년 기협 조직 개편 당시 재무관으로 기용되어 기존 기협이 가지고 있던 채무 처리 업무를 담당했고, 1980년부터 1986년까지는 기협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60년대 세계보건기구의 장내기생충증 전문가 협의회에서도 환경 개선을 중점으로 고려하는 쪽과 집단 투약을 주장하는 쪽이 대립하고 있었다. 특히 서구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전문가 협의회에서는, 서구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환경 개선을 우선 고려하고 있었다(WHO, 1967: 56-65). 하지만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성공을 거둔 집단검진, 집단 투약의 경험은 이러한 사업 방법이 아시아에서 재현 가능하며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었다.
1970년부터 1983년까지 국제연합 인구기금(UN Population Fund, UNFPA)가 민간단체에 지출한 금액은 1억 1100만 달러에 달하며, 정부에 지원한 금액은 2억 4,500만 달러에 달했다(Connelly, 2008: 302-304).
곤 야스오의 회고록에 의하면 구니이는 쇼와29년(1954년) 정월 후생성 젊은 사무관으로부터 일본의 가족계획 분야의 민간단체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말을 들었다. “민간단체는 그게 얼마는 있어요. 하지만 국가적 견지에서 단체 같은 것은 한 개도 없어요. 항상 견해가 좁고, 종파주의입니다. 게다가 약하고 작은 것입니다. 이 분야에는 세간에서 유명한 지도자들도 있고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도 스스로 잘났다 잘났다 하면서 전혀 협력하지는 않아요. 왜 일본 학자들이란 자들은 이런 것일까요?”, 『家族と健康』, 2011. 7.
곤 야스오는 현재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의 특별 고문이자 일본가족계획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45년 합작사 운동 당시부터 구니이와 함께 일해왔으며, 기생충예방회와 가족계획 사업을 거쳐 구니이와 평생을 함께 일해왔다.
이종진은 스칸디나비아 협력 사업을 담당하면서 국제적 기술 협력과 원조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중앙의료원의 개원은 일제강점기의 일본이나 군정기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지원 받는 형태가 아니라 한국의 의료진이 주도적으로 “자신의 의학지식을 넓힘은 물론 우리나라의 의학 수준을 향상시키는”(이종진, 1958: 112) 계기가 되었다. 또한 “환경과 조직이 허락한다면 선진제국에 못지않게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질 수 있게”(이종진, 1960: 5) 되었다. 이종진은 보건의료에 대한 원조를 한국 자체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의학계인사 16명이 산아제한논의」, 『경향신문』, 1960. 9. 23.
이종진과는 “기생충박멸협회 회장이 되기 이전부터 가족계획 상에서 나의 친구”(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23)였다는 구니이의 기록으로 보아 1965년 국제가족계획연맹 서태평양지부 조직을 전후하여 구니이와 안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1959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별사절단인 ‘미군사원조계획위원회’ 의장으로 방문한 것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드레이퍼는 1948년 미 육군 차관으로 일본 전후 복구 시찰단에 참가해, 일본의 경제 부흥이 아시아 전반과 연계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재건을 해칠 정도의 경제 조치나 재벌 해체, 무리한 배상 부담 등은 적절하지 않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미국 육군차관 드레이퍼의 일본 경제 부흥에 대한 보고」, 『국제신문』, 1948. 11. 16). 1960년대 미 육군에서 전역하여 인구 통제 활동에 참여하게 된 드레이퍼는 국제연합인구위원회(UN Population Commission)에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미국 대표로 있었으며, 1965년에는 인구위기위원회(Population Crisis Committee)를 조직했다(Connelly, 2008: 286-288).
기시는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 수상을 지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일본의 대미협력에 주요한 인물이 될 것으로 판단되어 불기소 처분을 받고, 1952년 다시 정계에 돌아왔다. 이후 대미자립과 군비확충을 근간으로 하는 ‘대국주의’를 표방한 보수 노선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고, 1950년대 후반 일본과 아시아 국가간의 전후배상 교섭을 주도하면서 개발주의에 기반한 경제외교협력 체제를 만든 인물이었다(임성모, 2009: 262-270). 냉전시기 일본의 인구 관리 네트워크 참여와 기시의 영향에 대해서는 Homei(2016)를 참고할 것.
「協会概要」, 東京都予防医学協会, http://www.yobouigaku-tokyo.or.jp/gaiyo/. 검색일: 2016년 6월 25일.
1982년 설립된 한국 건강관리협회가 기존 “알토란 같은” 기협의 재산(이순형 인터뷰, 2016. 7. 12)과 인력, 장비를 그대로 흡수하여 1986년 완전히 통합된 것 역시 일본과 비슷한 경로를 보인다.
1973년 열대의학 세미나는 동남아시아문부상기구(Southeast Asian Ministers of Education Organization, SEAMEO)가 주최하는 세미나로 이어져 아시아 기생충 네트워크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동남아시아문부상기구는 1965년 동남아시아 지역 내 교육, 과학, 문화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다. 기구 내 분과 중 열대의학과 공중보건 훈련을 담당하는 ‘열대의학 네트워크(TROPMED Network)’는 1966년 만들어져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About the network」, SEAMEO TROPMED, http://seameotropmednetwork.org/about_vision.html. 검색일: 2017. 6. 25; 「열대의학 연구 현황 교환-연세대서 칠개국 60여 학자 참가 세미나」, 『동아일보』, 1971. 6. 3.
1960~1970년대 일본과 대만의 기생충 관리 협력 사업에 대해서는 井上弘樹(2016)를 참고하라.
대만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집단검진 집단구충이라는 일본식 방법을 채택했지만, 시행 주체에 있어서는 매우 다른 형태를 보였다. 일본과 한국은 검진과 투약이 주로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대만은 보건부에서 직접 사업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인적 구성은 1975년 기생충 관리를 전담하는 준민간기구인 기생충방치회가 설립된 뒤에도 이어져, 전체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공무원으로 충당되었다(한남석, 1989: 45-47). 이러한 조직 형태는 한국과 일본에서 보여주었던 재정 자립성을 보장하기 어려웠지만, 반면 기존 가족계획 사업과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1974년 세계인구회의에서는 인구 억제가 급선무라고 주장하는 서구와 경제개발이 우선되어야 인구 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개발도상국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나타났다. 20세기 중반에 걸쳐 진행되던 세계적 인구 관리 정책과 네트워크에 전환점을 가져온 중요한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다(Connelly, 2008: 312-314).
처음 구니이가 통합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계기는 1970년 경 필리핀에서 구충제를 들고 가정방문을 다니던 가족계획요원을 본 것이라고 회고했다(国井長次郎, 1979: 219-221). 첫 번째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 회의에서 구니이가 통합사업의 개념을 처음 제시한 발표 제목 역시 “구충제를 든 가족계획요원”이었다(APCO, 1974: 106).
가족계획 사업과 기생충 관리 사업에서 함께 오랜 시간 활동해온 이종진을 구니이는 “동지”이자 “죽이 잘 맞는 상대”(海外技術協力事業団, 1971: 23)라고 표현했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가족계획과 기생충 관리라는 민간단체를 전후의 어려운 환경에서 조직하고 이끌어 본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은 인구 관리 네트워크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찾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이것이 서로를 끈끈한 “친구”(아시노 인터뷰, 2017. 5. 16)로 만들어 주었다.
1975년부터 이종진은 아시아 지역 통합사업 적용을 위한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의 사전 조사팀에 국제가족계획연맹의 대표자로 참가하였다(APCO, 1975: 40). 이는 이종진이 국제 네트워크에서도 상당한 대표성을 띄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병설은 1954년 한국 최초로 설립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977년부터 1991년까지는 기협 회장을 역임했다(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 1994: 55-57). 구니이와 이종진이 행정과 조직 측면을 담당했다면 서병설은 학술과 연구를 담당하고 있었다. 서병설은 또한 세계보건기구 기생충연구협력기구 책임자를 맡고 있는 등 국제적 명성도 높았다.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에서 서병설은 전문가로서의 조언뿐 아니라 회의 진행과 회의록 정리까지 담당했다(하라 인터뷰, 2017. 5. 15).
1960년대부터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경구피임제는 배란을 억제하는 호르몬제를 21일간 먹고 7일간은 쉬도록 되어 있으며, 쉬는 7일간은 생리로 출혈이 시작된다. 1970년대에는 모자 보건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던 빈혈을 관리하기 위해 출혈이 일어나는 7일간 철분제를 섭취할 수 있도록 디자인 되었다. 이종진은 철분제를 섭취하는 기간에 구충제를 추가로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
기생충 관리와 가족계획을 통합한 ‘Integrated Program’은 한국에서 ‘가정보건사업’으로 불렸고, 일본에서는 ‘합작사업’이나 ‘합동사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이미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던 다른 통합보건사업과의 혼동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968년 대한가족계획협회를 통해 조직된 가족계획 어머니회는 본래 경구피임약을 손쉽게 배포할 수 있도록 조직되었다(대한가족계획협회, 1975: 57-58).
1980년대 들어 현저히 낮아진 기생충 감염률 때문에 기존의 집단검진, 집단구충에 기반한 기생충 관리 사업의 타당성과 합리성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기생충박멸협회의 재정적 자립 기반을 담당하고 있던 학생 검진을 연 2회에서 연 1회로 축소하자는 주장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검진 대상자가 학생임을 감안하면 이는 연간 검진 수익이 절반으로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 2회 검진에 연 6회까지 투약을 실시하고 있던 시범사업의 자료를 기반으로 당시 회장이던 서병설은 연 2회 검진의 중요성을 설득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기생충박멸협회는 재정 안정성을 확보하고 건강관리협회로의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84: 150-151).
1982년 종료된 화성군 가정보건시범사업은 장기적인 사업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지역사회의 다양한 보건 수요를 통합하는 사업들이 미국 인구 관리 단체의 지원으로 이미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은 춘천시 지역사회 보건사업(보건대학원 30년사 편찬위원회, 1989: 225-228)이나, 연세대학교 예방의학교실의 연희동 지역사회의학 시범사업, 1974년 설립된 강화지역사회보건원은 모두 가족계획과 감염병 관리, 환경위생 관리 등을 포괄하고 있는 사업들이었다(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2005: 134-138). 1974년 강화도 지역사회 보건사업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강화군 자체 기생충 검사 실시”, “십이지장충 집단 구충사업”들을 담고 있다(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2005: 142-143).
다카기 하라(原隆昭)는 전 일본기생충예방회 고문이자 일본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 이사였다. 1953년 기생충예방회에 참여해 주로 투약 및 박멸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후 통합사업과 아시아기생충관리기구에도 참여했다.
노보루 오가와(小川登)는 현재 도쿄예방의학협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1962년 기생충예방회에 회계 담당으로 입사했으며, 직접 검변 수집 사업부터 경험해왔다.
「해외보건의료지원」, 한국건강관리협회, http://www.kahp.or.kr/cms/doc.php?tkind=4&lkind=23&mkind=68. 검색일: 2017. 6. 25.
홍성태는 2017년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교실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한국건강관리협회에서 수행 중인 수단 주혈흡충증 퇴치사업을 담당하고 있으며, 1990년대 중국 기생충관리시범사업, 이후 우즈베키스탄 기생충조사사업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