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의방(醫方) 지식의 전승과 사대부의 역할 -화독배농내보산(化毒排膿內補散)을 중심으로-
Knowledge Transmission of Medical Prescription (醫方) and the Role of the Literati Officials from the Song Dynasty: Focusing on Huadupainongneibusan (化毒排膿內補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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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attempts to examine the spread of medical prescription knowledge during the Song dynasty and the role played by the literati officials through a reconstruction of the transmission of Painongneibusan (排膿內補散), a prescription to treat abscesses.
An examination of the origins of Painongneibusan shows that after being confirmed in the Qianjinyaofang (千金要方), it was passed down through Waitaimiyao (外臺秘要), Taipingshenghuifang (太平聖惠方), Shengjizonglu (聖濟總錄), and Taipinghuiminhejijufang (太平惠民和劑局方). In particular, in the records from Taipinghuiminhejijufang, which was revised and enlarged during the Shaoxing period (1131-1162) unlike transmissions that were almost identical to those from previous periods, we can find a clear increase in the knowledge regarding medicinal effects, medicinal ingredients, administration methods, precautions and so on. However, if we examine the same prescription record included in Hongshijiyanfang (洪氏集驗方) published by Hong Jun in 1170, we can see that the contents are almost exactly the same as those in Taipinghuiminhejijufang and that Hongshijiyanfang had even more content. Through this study, we can deduce that the prescription recorded in these two books were from the same original text. In addition, we can conclude that the original text is likely to be sourced from the knowledge of folk medicine.
According to the records, Hu Quan received this prescription from an “outsider,” and Hu Quan gave this to Hong Kuo, who wrote an introduction and published it as a stone carving in Huizhou. After this, knowledge about this prescription became known far and wide. While Chen Yan criticized the abuse of this prescription, Hong Jun still included it in Hongshijiyanfang, and Hong Mai included it in Yijianzhi (夷堅志), leading to it becoming even more widespread. Due to this spread of the prescription, the transmission of the description that is connected from “Outsider – Ho Quan – Three Hong Brothers” continued to appear in many medical anthologies by literati officials. Whenever this prescription was mentioned, they referred to Three Hong Brothers, and it went as far as to cause the practice to sometimes be called Hongshineibusan (洪氏內補 散).” Chen Ziming continued the criticism of Chen Yan in Waikejingyao ( 外科精要); while the prescription made famous by Hong Kuo had the same contents as prescription in Taipinghuiminhejijufang, the fact that criticism was only directed at Hong Kuo is a proof of his influence in the spread of related knowledge.
In conclusion, this happened during an active time of accumulation, exchange, and competition in the knowledge of prescription, as can be observed in various sources from the Song Period. There were various communications and exchanges between officials, locals, and literati officials, and tensions could also sometimes be found. We can say that the role of the literati officials was to collect, record, publish, and spread the knowledge of medicine taken from various sources. In addition, in relation to the spread of the knowledge of medicine, the influence of the literati officials exceeded Taipinghuiminhejijufang, which was the official text at that time.
1. 머리말
중국 역사상 송대(宋代, 960-1279)는 의학 지식의 발전과 확산이 이루어진 시기라 일컬어지며(范行准, 1986; 甄志亞, 1994; Asaf, 2009) 여기에는 인쇄술의 발전이나 송 조정의 적극적인 의학 정책 외에 송대 사대부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陳元朋, 1997; Asaf, 2009; 薛芳芸, 2012) 송대 사대부들은 의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각종 의방(醫方)[1]을 수집하고 이를 모아 의방서를 편찬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 논문에서는 옹저(癰疽, 종기)에 관한 한 의방의 전승과정을 복원하여 그 과정에서 송대 사대부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중국 의학 지식의 발전과 확산의 역사 속에 송대가 가지는 특징을 재음미해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적지 않은 연구에서 송대 의학지식의 발전과 확산에 대한 사대부 역할 그 중에서도 의방서 편찬을 통한 의학 지식의 확산을 언급하였지만 대체로 사대부들의 의방서 편찬 활동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을 하거나(陳元朋, 1997; 閻瑞雪, 2009), 또는 몇몇 대표 의방서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易素梅, 2016; 최해별, 2016). 그러나 의방 지식의 전파 혹은 확산에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좀 더 미시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이러한 미시적 접근은 우리로 하여금 당시 의학 지식의 확산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여 좀더 구체적인 질문들, 예를 들면 송 조정의 주도하에 간행된 관방(官方) 의서의 영향력에 비해 사대부들이 편찬한 의서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또 양자 간의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 등에 대한 관찰을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남송시기(1127-1279) 우승상(右丞相)을 역임했던 홍준(洪遵, 1120-1174)이 편찬한 『홍씨집험방(洪氏集驗方)』은 저자가 집안에서 내려오는 또는 본인이 수집한 의방들을 모아 편찬한 것인데 각 의방마다 출처 및 입수경로 등을 밝히고 있어 사대부의 의방 지식 교류와 전승을 관찰하는 데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최해별, 2016: 115-156). 특히 그는 강남동로(江南東路, 지금의 南京市, 江蘇省, 安徽省 등 長江이남 및 江西省 동북부)의 명문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당시 사람들은 조정의 고관으로 활약했던 그의 아버지와 삼형제를 일컬어 ‘남송사홍(南宋四洪)’이라 부르기도 했다[2]. 무엇보다도 재상을 역임한 바 있는 그의 형 홍괄(洪适, 1117-1184)과 역시 중앙의 요직에 있었던 동생 홍매(洪邁, 1123-1202)도 모두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이들 홍씨 삼형제(三洪, 이후 ‘삼홍’으로 명명)는 『송대 의학 지식의 축적과 확산에 대한 송대 사대부들의 영향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사례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홍씨집험방』은 옹저의 치료와 관련한 의방들을 따로 모아 「옹저」라는 편명 아래 수록하였고, 홍괄과 홍매도 모두 옹저 관련 의방에 관심을 보인 바 있으며 이들 삼홍의 활약은 옹저 관련 의방지식의 확산과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삼홍이 옹저에 관심을 두게 된 배경과 관련하여 그들이 따로 언급한 바는 없지만 당시 사람들의 언설 속에서 대략적으로 이해해볼 수는 있다. 즉, 당시 옹저의 치료와 관련된 의학 지식이 다른 질병(내과의학)에 비해 그 방론(方論)이 깊이 연구되지 못했던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또한 이 병에 걸리는 환자들은 대체로 부귀한 자들인데 당시 외과적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이들은 ‘비천한 계층(下甲人)’이라는 점도 요인으로 작동했을 것이다[3].
이와 더불어 삼홍이 옹저 치료에 관심을 보인 것은 당시 사대부들이 외과 영역의 의학 지식에 관심이 없었다는 논의를 좀 더 심도 있게 고찰할 수 있도록 한다[4]. 삼홍이 다룬 옹저에 관한 의방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외과 영역 질병에 대한 당시 사대부들의 접근 방식의 특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전한 의방 지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실천 되는 가운데 그들의 활약이 외과 영역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질병의 의료 실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어찌되었든 당시 사대부들 중에 유독 옹저 치료에 관심을 보인 부류가 있었고 그 중 삼홍이 대표적이다. 특히 『홍씨집험방』의 「옹저」편에 제일 처음으로 실려 있는 ‘화독배농내보산(化毒排膿內補散)’은 약재와 복용 방법뿐 아니라 의방의 원 출처 및 전승과정 그리고 치료 사례 등을 상세히 기술하여 『홍씨집험방』에 수록된 의방 중 가장 긴 편폭을 자랑하며 저자 홍준이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아울러 그의 기록은 이 의방 지식의 확산 경로를 추적하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다양한 문헌 기록 속에 보이는 화독배농내보산(이하 ‘배농내보산’으로 약칭)[5]의 전승 과정을 복원하는데, 그 중에서도 송대 사대부들의 사찬 의서 속의 관련 기록을 찾아 이 의방 지식의 전승과정 속에 사대부들이 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배농내보산과 관련한 기존의 연구들은 『홍씨집험방』을 다루면서 화독배농내보산의 서사 방식을 사례로 들어 『홍씨집험방』의 전반적 서술 특징을 분석하는 데 주목해왔으며, 화독배농내보산의 전승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더욱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해 보인다[6,]. 이 외에 배농내보산 자체에 대한 연구로는 80년대 후반 이 의방의 원 출처에 대한 고증을 진행한 것이 유일하다. 이 연구에서는 이 의방의 원출처가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이 아니며 위진(魏晉) 시기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하였고 당송 이래 적지 않은 확충을 거쳐 ‘십육미류기음(十六味流氣飮)’으로 발전하였다고 지적하였다(韓羽山·杜勝濱, 1988: 56). 하지만 ‘당송 이래 적지 않은 지식의 확충’ 과정을 언급하면서도 송대 사대부들의 기록이나 참여를 언급하지 않았다. 추정컨대 그 원인 중의 하나는 그가 주로 참고한 『옥기미의(玉機微義)』 또는 『의방유취(醫方類聚)』의 관련 기록 속에 홍괄이나 홍준 등 배농내보산 의방의 전승에 중요 역할을 한 송대 사대부들의 사찬 의서에 대한 언급 또는 인용이 빠져 있어서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실제 배농내보산의 전승 과정에서 삼홍을 비롯한 송대 사대부들의 역할은 작지 않았으며 이를 복원하는 것은 배농내보산 의방의 전승 역사를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 논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송대 조정의 주도로 교감 또는 출간된 관방 의서에서 배농내보산이 어떻게 전승되어 기록됐는지 확인한 연후, 그 다음으로 홍준을 비롯한 송대 사대부들의 사찬 의방서의 관련 기록을 분석함으로써 사대부들이 주축이 된 또 다른 전승의 경로와 그것에 대한 서사를 복원하고, 마지막으로 그 이후 의서의 기록 속에 반영된 삼홍의 영향을 관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배농내보산 전승과 확산에서 송대 사대부들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영향력이 관방 의서의 영향력과 비교해 어떠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아울러 본 논문의 목적은 배농내보산의 전승과 확산 과정에서 송대 사대부들의 서사와 참여를 복원하는 것이며, 배농내보산의 의학사적 기원을 고증하거나 약재 및 복용 방법 등의 변천을 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다른 지면을 통한 고찰로 보충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 관방(官方) 의서의 내보산(內補散) 관련 기록
배농내보산은 중국 의학사상 그 전승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으며, 송대는 그 전승 과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시기로 파악될 수 있다. 이른 바 ‘관방’ 의서라고 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의서들 중 송 초 조정의 주도하에 교감을 거쳐 새롭게 간행된 것 및 송대 황제의 칙명으로 편찬된 각종 의방서 등을 말한다[7]. 송대까지 관방 의서에서 나타난 배농내보산의 기록을 통해 이 의방의 전승 과정의 대략적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배농내보산의 연원과 관련하여 한 연구는 이 의방의 원 출처가 남북조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하며, 유연자(劉涓子, 약 370-450)가 원가(元嘉) 19년(442)에 편찬하고 공경의(龔慶宣, 생졸년 미상)가 영원(永元) 원년(499) 다시 정리·편찬한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을 그 기원이라고 하였다[8,]. 그러나 본격적으로 ‘내보산’이라 이름 붙은 의방의 등장은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 (이하 ‘『천금요방』’으로 약칭)인 것으로 보인다. 송대의학자로 『삼인극일병증방론(三因極一病症方論)』의 저자 진언(陳言, 1121-1190)은 이 방이 “『천금』내보산”에서 변화하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9]. 당 영휘(永徽) 3년(652) 손사막(孫思邈, 581-682)이 편찬한 『천금요방』에 수록된 의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보산. 옹저 및 발배가 이미 터진 경우 고름을 배출하고 살을 돋게 하는 방. 당귀, 계심(각 두 냥), 인삼, 궁궁, 후박, 방풍, 감초, 백지, 길경(각 한 냥). 이 아홉 가지 약재를 가루 내어 체에 걸러 일방촌시 분량을 술과 같이 복용한다. 낮에는 세 번 밤에는 두 번 먹는다. 차도가 없으면 다시 먹으며 끊지 말라(『외대』에는 방풍, 감초, 백지가 없다)[10].
『천금요방』의 내보산은 배농내보산의 열 가지 약재 중 아홉 가지가 동일하며, 황기(黃耆)가 빠졌다. 또 ‘이미 터진 경우’로 ‘고름을 배출하고 살을 돋게 하는’ 약효를 설명하였다. 『천금요방』에서는 “『외대』에는 방풍, 감초, 백지가 없다”고 하였지만, 당대 천보(天寶) 11년(752) 편찬된 왕도(王燾, 670-755)의 『외대비요(外臺秘要)』의 기록을 보면 『외대비요』와 『천금요방』의 내보산이 매우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내보산이 있다. 주로 옹저 및 발배가 이미 터진 경우 고름을 배출하고 살을 돋게 하는 방. 당귀, 계심, 인삼(각 두 냥), 궁궁, 후박(구운 것), 길경, 감초(구운 것), 방풍, 백지(각 한 냥). 이 아홉 가지 약재를 산으로 만들어 일 방촌시 분량을 술과 함께 복용하고, 낮에는 세 번 밤에는 두 번 먹으며, 상처가 아물지 않을 경우 복용을 멈추지 않는다. 기. 『범왕방』과 동일하다[11].
아홉 가지 약재와 약을 쓰는 단계 및 약효에 대한 『외대비요』의 설명은 『천금요방』의 그것과 동일한데, 인삼의 양이 늘었다. 또한 제일 마지막 부분에 우리의 주의를 끄는 대목은, 내보산이 『범왕방』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범왕방』은 동진(東晉)시기 대신이자 의사였던 범왕(范汪, 308-372)의 저서로서 그 편찬 연대가 4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배농내보산의 원류를, 시기도 한 세기 정도 늦고 약재도 일치하지 않는 5세기 중반의 『유연자귀유방』의 목점사산방(木占斯散方)에서 찾는 것보다 『범왕방』에서 찾는 것이 나을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므로 내보산의 원류와 관련해서는 더욱 구체적인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12].
어찌되었든 배농내보산의 원류는 위진남북조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남아 있는 관방 의서의 기록으로 볼 때, 당대에 이미 당귀(當歸), 계심(桂心), 인삼(人參), 궁궁(芎藭), 후박(厚樸), 길경(桔梗), 감초(甘草), 방풍(防風), 백지(白芷) 등 아홉 종류의 약재로 산을 만들어 술과 함께 복용하는 방제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송 초에 이르면 약간의 변화가 나타난다. 순화(淳化) 3년(992) 완성된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은 관련 의방을 수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옹저 및 발배에 고름과 피가 멈추지 않고 속이 허한 경우 배농생기산방을 복용한다. 당귀(반 냥을 잘게 썰어 살짝 볶는다), 황기(반냥을 잘게 썬다), 인삼(한 냥을 쓰며 노두를 제거한다), 궁궁(반냥), 후박(한 냥을 쓰며 겉껍질을 제거하고 생강즙을 바른 후 구워 향이 스며들게 한다), 방풍(반 냥을 쓰며 노두를 제거한다), 백지(반 냥), 길경(반 냥을 쓰며 노두를 제거한다), 감초(반 냥을 굽고 조금 붉어지면 잘게 썬다) 이 약재들을 가루로 찧어 체에 걸러 산을 만든다. 매번 복용할 때마다 목향탕에 두 돈을 넣어 먹는다. 하루 3-4번 복용한다[13].
당대 내보산과 비교했을 때 고름을 배출하고 살을 돋게 하는 약효는 유사하나 의방의 명칭이 ‘배농생기산방’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황기가 들어가고 계심이 빠졌으며, 약재의 양이 변화했다. 또 술과 함께 복용하는 것에서 목향탕과 함께 복용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이후 정화(政和) 연간(1111-1117) 조정은 민간 또는 여러 의가들의 의방을 수집하고 또 조정에 소장된 여러 의방들을 정리하여 『정화성제총록(政和聖濟總錄)』을 편찬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배농내보산 관련 의방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의방은 ‘발배 및 옹저가 이미 터졌을 때’, ‘고름을 배출하고 살을 돋게’ 하는 약효 및 황기가 빠진 아홉 가지 약재 그리고 공복에 술과 함께 먹는 복용법 등으로 보아, 『천금요방』과 『외대비요』에서 보이는 방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14].
결론적으로, 『천금요방』에서 『태평성혜방』 및 『정화성제총록』으로 이어지는 관방 의서에서의 기록들은 비록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약을 쓰는 단계, 약효, 약재, 용법 등 측면에서 대동소이했다. 모두 발배 및 옹저가 ‘이미 터져’, ‘고름과 피가 날 때’, ‘고름을 배출하고 살을 돋게 하는’ 약효를 설명하며, 약재는 아홉 가지 약재가 대체로 고정되는데 계심을 쓰거나 황기를 쓰는 차이가 있었다. 복용법으로는 술과 또는 목향탕으로 복용하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이러한 관방 의서의 전승 과정에서 송대 원풍(元豐) 연간(1078-1085) 초판 된 후 남송 말까지 지속적으로 증보와 수정을 거쳐 출간된 『태평혜민화제국방』도 이 의방을 수록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보면 상당한 보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이 의방은 ‘소흥(紹興) 연간(1131-1162) 첨가된 의방’이라는 표기와 함께 ‘화농배농내보십선산(化膿排膿內補十宣散)’의 이름으로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소흥 연간 첨가된 처방] 화농배농내보십선산(‘탁리십보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모든 옹저와 창절을 치료한다. 곪지 않는 것은 빨리 사라지게 하고 이미 곪은 것은 빨리 터지게 하여 썩은 고름이 스스로 나오게 하니 손으로 짤 필요가 없고, 썩은 살이 저절로 없어지니 刀杖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며 복약 후에는 통증이 점점 감소하는데 그 효과가 신비롭다.
㉯ 황기(……), 인삼(……), 당귀(…… 각 두 냥), 후박(……), 길경(……), 계심(……), 궁궁(……), 방풍(……), 감초(……), 백지(각 한 냥)
㉰ 위 열 가지 약재에서 귀하고 정한 것을 고르는데 모두 깨끗하고, 햇볕에 말린 것, 불에 쪼인 것, 다 건조시킨 것을 취하여 무게를 단다. 계심을 제외하고 모두 한 곳에 갈아서 가는 가루로 걸러낸 후 계심을 넣고 고르게 섞는다. 매번 삼 돈에서 오, 육 돈까지 복용하는데, 따뜻한 술과 함께 복용하며, 낮과 밤으로 여러 번 복용하는데, 많이 먹으면 좋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복용하며 더 복용한다면 더욱 좋으며, 이전의 손상된 부분을 보충할 수 있고 후환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목향탕을 오래 달여 먹으면 된다. 그러나 술과 함께 먹는 것만큼 효과가 좋지는 않다.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나 많이 마시지 못하는 경우 능히 억지로 사이사이 술과 함께 먹으며 동시에 목향탕을 먹어 술을 해독할 수 있는데 그 효과는 술과 먹는 것보다 모자라지 않다.
㉱ 대저 옹저가 생기는 것은 모두 혈기가 응체되어 풍독이 막히어 나타나는 것으로 치료가 늦어지면 밖에서부터 피부와 살이 썩고 안으로는 장부에 미칠 수 있으니 그 해가 매우 크다. 늦게 깨닫고 복용하기 시작했다면 복용의 횟수를 배로 늘리고, 먹다가 취하면 그 효과가 더욱 빠르게 나타난다. 풍독을 발산시키고, 경락에 [기혈이] 잘 흐르게 하고, 고름을 빼내고 통증을 멈추게 하며 피부가 돋고 살이 자라게 한다. 약성이 모두 온화하니, 노인, 어린이, 부인, 시집 안간 여자 모두 복용할 수 있다[15].
한눈에 보아도 이전 관방 의서들의 기록에 비해 내용이 풍부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옹저 및 발배를 언급했던 이전 의방과는 달리 모든 옹저와 창절을 치료한다고 하였고, 약효와 관련하여 “곪지 않는 것은 빨리 사라지게 하고 이미 곪은 것은 빨리 터지게 하여 썩은 고름이 스스로 나오게” 하는 것으로 그 효력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 다음으로 원래 아홉 가지로 구성되었던 약재가 열 가지로 확정되어 황기와 계심을 모두 포함했고, 각 약재명마다 상세한 소주(小注)를 덧붙였다. 복용법에 대해서는 술과 목향탕을 모두 언급하면서 그 차이를 설명해놓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옹저가 생기는 원인과 이 방제가 이를 해결하는 원리 및 약의 성질에 대한 간략한 설명까지 더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확충은 물론 『태평혜민화제국방』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그 편찬 경위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북송 희녕(熙寧) 9년(1076) 조정은 수도에 ‘태의국숙약소(太醫局熟藥所)’를 설치하고 약의 판매를 전담하게 하였으며, 정화(政和) 4년(1114) ‘의약혜민국(醫藥惠民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원풍(元豐) 연간(1078-1085) 태의국은 여러 표준 의방들을 모아 『태의국방(太醫局方)』을 간행하였다. 숭녕(崇寧) 연간(1102-1106) 화제국(和劑局)이 성립되어 약재와 약제의 관리와 경영을 겸하게 하였고, 당시 『태의국방』이 여러 의자(醫者)들이 제공한 것과 민간에서 구한 의방들을 수록하였던 탓에 오류가 많아 대관(大觀) 연간(1107-1110) 『태의국방』의 교정 정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수정 후 『교정화제국방(校正和劑局方)』이 완성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수정 증보되었다. 소흥(紹興) 21년(1151) 각 주에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게 되면서 국자감에서는 『교정화제국방』을 다시 수정·간행하여 서명도 『태평혜민화제국방』이라 하였는데, ‘소흥 연간 첨가된 의방’은 이때 추가 수록된 것이며 화농배농내보십선산도 여기에 속한다. 이후로도 『태평혜민화제국방』의 수정 보충 작업은 지속되었다.(劉景源, 2007: 1-8; 范磊, 2009: 8)
이렇게 볼 때, 이전 관방 의서의 내용에 비해 화농배농내보십선산의 보강된 내용은 아마도 북송 시기부터 소흥 21년(1151)까지의 배농내보산 관련 의학 지식의 확충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태평혜민화제국방』 편자들이 화농배농내보십선산을 수록할 때 무엇을 참조했는지도 궁금해진다. 더군다나 『태평혜민화제국방』의 「진표(進表)」에서 밝히기를, 모든 방은 혹은 ‘약을 판매하는 사람들(鬻藥之家)’에게서 취하고 혹은 ‘의방을 바친 선비들(陳獻之士)’에게서 취하여 오류가 많다고 밝힌 바 있다[16,]. 또한 『태평혜민화제국방』수록 의방의 출처에 대한 한 연구에서는 기존 의서에서 보이는 의방보다 『태평혜민화제국방』에서 처음 보이는 의방의 수가 배 이상으로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17]. 그러나 그 보충된 내용의 원 출처를 밝히는 것은 자료의 한계상 그리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사대부들의 사찬 의방서에서 보이는 배농내보산의 기록은 많은 논의거리를 제공하며, 관방의 기록과 상당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이기에 흥미롭다.
3. 또 다른 서사: 호권(胡權)과 삼홍(三洪)의 활약
송대 배농내보산에 관한 기록은 관방의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송대 사대부들은 다양한 의서들을 편찬하였고 특히 의방서 편찬에 주력하였다. 사대부들의 사찬 의방서에서 배농내보산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관방의서와는 또 다른 경로의 전승 서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의방 지식의 전승과 확산 과정에서 사대부들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사대부들이 축적한 의학 지식의 특징을 관찰할 수 있다.
남송 건도(乾道) 6년(1170)에 홍준이 편찬한 『홍씨집험방』의 화독배농내보산은 약효나 약재 및 복용방법 뿐만 아니라 이 의방의 원 출처와 홍준이 이 의방을 얻게 된 입수 경로 및 치료 사례까지 더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특히 의방의 출처 및 입수 경로에 대한 서사에서 관방 의서를 참고했다는 언급은 찾을 수 없으며 관방 의서와는 ‘또 다른’ 경로의 전승 과정을 확인할 수 있기에 더욱 우리의 주목을 끈다.
홍준이 이 의방을 얻게 된 입수 경로, 즉 ‘이인(異人) → 지방관(胡權) → 홍괄 → 홍준’으로 이어지는 경로에 관해서는 다른 한 연구에서 언급된 바 있지만(최해별, 2016: 128), 이 경로는 홍준의 서사에서 이미 알 수 있는 내용이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지방관 호권에 대한 설명이나 홍괄의 간행 방식이 무엇이었는지, 또 홍준 이후 그 동생 홍매의 서사와 그 역할 등 이 의방의 입수와 전승 과정에 대한 더욱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해 보인다.
이 의방의 원 출처 및 입수 경로에 대한 삼홍의 서사에 주목하기에 앞서 『홍씨집험방』에 수록된 화독배농내보산의 약효나 약재 및 복용 방법 등에 대한 내용부터 먼저 검토하여 관방의서와 비교해 본 후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홍씨집험방』 권2 「화독배농내보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독배농내보산(승상 형이 이 방을 휘주에서 간행하였다. 나도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시료해보았는데 모두 효과가 있었다)
㉮ 모든 옹저와 창절을 치료한다. 곪지 않는 것은 빨리 사라지게 하고 이미 곪은 것은 빨리 터지게 하여 썩은 고름이 스스로 나오게 하니 손으로 짤 필요가 없고, 썩은 살이 저절로 없어지니 칼자루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며 복약 후에는 통증이 점점 감소하는데, 이는 그것을 일찍이 시험해 본 효과이다.
㉲ 흡현 현승 호권이 처음 이 방을 도성 아래 이인에게서 얻었다. 당시 등에 생긴 종기 70여 개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자가 있었는데, 여러 약을 두루 사용해도 효과가 없어 이에 이 의방을 보여주었다. 여러 무리의 의사가 빙 둘러 섰는데 서로 보더니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이 어찌 옹저에 사용되는 약이란 말이오?” 이에 호권이 그들에게 간곡하게 말하였다. “옛날 사람들의 처방은 본래 그 뜻이 있을 것이오. 그 처방이 사용한 약재의 약성이 온화하니 설사 이미 있던 병은 고칠 수 없더라도 반드시 병을 악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니 그것을 먹어 본들 무슨 해가 있겠소?” 이에 약을 조제하여 먹게 했는데, 따뜻한 술 반 승 정도에 약 5, 6돈을 먹게 했다. 조금 후 통증은 10의 7로 줄었고, 여러 차례 복용한 후에는 종기가 크게 터져 고름과 피가 흘러 없어졌는데, 마치 무언가 안에서부터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복용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종기 상처는 마침내 아물었는데, 마치 일찍이 아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구제 받은 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니 그 대략을 잠깐 기록하여 이 처방을 모르는 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 대저 옹저가 생기는 것은 모두 혈기가 응체되어 풍독이 막히어 나타나는 것으로 치료가 늦어지면 밖에서부터 피부와 살이 썩고 안으로는 장부에 미칠 수 있으니 생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이 의방이 사용한 약재를 상세히 살펴보니 모두 풍독을 발산시키고, 기와 혈을 흘러 통하게 하며, 고름을 빼내고 통증을 멈추게 하며, 피부가 돋고 살이 자라게 하는 등의 약이다. 오독을 시험해 보지 않고 앉아서 양의의 십전지공을 받은 것이니 가히 중시할 만하다. 지금 본초를 살펴 하나하나 약재 마다 약성의 따뜻함과 차가움 및 그 치료되는 바를 대략 설명해 놓고자 하니 비록 이 처방의 오묘한 뜻을 속히 알 수는 없겠으나 창졸간에 그 약재 사용의 큰 뜻을 알 수 있으므로 복용하는 데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인삼(……), 당귀(……), 황기(……), 궁궁(……), 방풍(……), 후박(……), 길경(……), 백지(……), 계(……), 감초(……).
㉰ 위 열 가지 약재에서 귀하고 정한 것을 고르는데 모두 깨끗하고, 햇볕에 말린 것, 불에 쪼인 것, 다 건조시킨 것을 취하여 무게를 단다. 인삼, 당귀, 황기는 각 두 냥, 나머지는 각 한 냥을 취한다. 계를 제외하고 한 곳에서 가늘게 가루낸 후 계를 넣고 고르게 섞는다. 매번 3돈에서 5, 6돈까지 복용하는데, 따뜻한 술과 함께 복용하며, 낮과 밤으로 여러 번 복용하는데, 많이 먹으면 좋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복용하며 더 복용한다면 더욱 좋으며, 이전의 손상된 부분을 보충할 수 있고 후환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목향탕을 오래 달여 먹으면 된다. 그러나 술과 함께 먹는 것만큼 효과가 좋지는 않다.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나 많이 마시지 못하는 경우 능히 억지로 사이사이 술과 함께 먹으며 동시에 목향탕을 먹어 술을 해독할 수 있는데 그 효과는 술과 먹는 것보다 모자라지 않다[18].
『홍씨집험방』의 화독배농내보산과 『태평혜민화제국방』의 화농배농내보십선산을 비교해 보면, ㉮약효, ㉯약재, ㉰복용 방법의 내용이 모두 일치하고, ㉱병의 원인 및 주의사항 부분은 약간의 어구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유사하다. ㉯약재의 경우 소주(小注)의 설명은 지면의 한계상 본문에서 인용을 생략하였지만 원문을 확인해보면, 『홍씨집험방』의 것은 약재의 약성과 효과, 고를 때 주의사항 그리고 조제방법을 상세하게 적었고, 『태평혜민화제국방』의 것은 이 가운데 고를 때 주의사항과 조제방법만을 적고 있다. 물론 그 내용은 『홍씨집험방』의 것과 일치한다[19,]. 전체적으로 『태평혜민화제국방』과 『홍씨집험방』의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이 의방의 출처와 치료 사례를 매우 상세히 적고 있다는 것이다(㉲ 부분). 특히 양자의 ㉮, ㉯, ㉰, ㉱의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면, 사용된 어휘와 어구 및 표현 방식이 거의 일치한다. 그저 내용의 구성 상 서술 순서가 조금 다를 뿐이다. 서술 순서를 비교하여 보면 아래 〈표 1〉과 같다.
내용의 유사성 뿐만 아니라 사용된 어휘나 어구 및 표현방식이 일치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홍씨집험방』의 화독배농내보산과 『태평혜민화제국방』의 화농배농내보십선산이 동일한 원 출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추정하게 한다. 두 기록이 사용한 어휘나 어구 및 표현 방식의 일치성은 두 의서의 편찬자가 반드시 동일한 책은 아니더라도 같은 내용을 담은 원 텍스트를 참고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당에서 북송 중기에 이르는 다른 관방 의서와는 달리 『태평혜민화제국방』의 수록 의방에서 보이는 내용의 확충은 그리고 그것의 『홍씨집험방』과의 유사성(일치성)은 소흥 연간(1131-1162) 『태평혜민화제국방』의 편찬자들이 참고했던 자료와 건도 2년(1170) 홍준이 참고한 자료가 동일한 계통의 것임을 말해주며, 『태평혜민화제국방』은 원전을 좀 더 발췌해서 수록하였고, 『홍씨집험방』은 원전의 내용을 원형 그대로 상세하게 적었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위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적어도 당시 관방의서의 편찬자들과 의학에 관심 있는 사대부들 집단이 남송 소흥 연간까지 이루어진 배농내보산에 대한 축적된 자료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홍씨집험방』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 의방의 출처와 전승 경로에 대한 서사를 통해 소흥 연간 및 그 이후 시대 배농내보산에 대한 지식의 축적과 확산에서 사대부의 역할이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바로 홍준이 의방명 아래 소주(小注) 형식으로 밝힌 입수 경로와 원문의 ㉲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홍준은 “승상 형이 이 처방을 휘주(徽州)에서 간행하였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승상 형은 홍괄을 의미한다. 즉, 홍준은 이 의방을 형 홍괄을 통해서 알게 된 것으로 홍괄은 이 의방을 휘주에서 간행하였다. 홍괄이 이 의방을 휘주에서 간행하게 된 경위는 “흡현(歙縣) 현승(縣丞) 호권(胡權)이 처음 이방을 도성 아래 이인(異人)에게서 얻었다”는 ㉲의 첫 번째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이후 흡현승 호권이 이 의방을 홍괄에게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순희 원년(1174) 진언이 편찬한 『삼인극일병증방론』 중 ‘옹저(癰疽)’에 관한 언급에서 배농내보산과 관련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근래 호승은 방 하나를 얻었는데 매우 소중하게 보관하다 가지고 홍 승상에게 가서 바쳤다. 승상은 그에게 서문을 써주었는데 과도하게 세상에 알려져 이미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그 방은 『천금』 내보산에서 황기를 추가하였고, 인삼의 용량을 늘렸으며 계를 줄인 것이다[20].
여기서 ‘호승’은 흡현승 호권을 이르며 호권이 이 의방을 승상 홍괄에게 바쳤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홍괄은 서를 써주었고, 그 덕에 이 의방 지식이 널리 쓰이게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호권(1094-1173)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으며 소흥 18년(1148) 진사에 급제하였고[21,], 이후 흡현승 등 관직을 역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목할 만 한 점은 『송사·예문지(宋史·藝文志)』에 호권의 저서라고 명시된 『치옹저농독방(治癰疽膿毒方)』의 서명이 보인다는 것이다[22]. 이 책은 전해지지 않으므로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알 수 있는 기록을 통해 추정하면, 호권은 소흥 18년(1148) 이후 흡현의 현승을 역임했을 때 이인에게서 얻은 방과 이와 관련한 치료 사례를 기록하여 책을 썼고 이를 홍괄에게 바쳤으며, 홍괄은 서문을 써주어 호권이 휘주에서 이를 간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송사·예문지』에 실린 호권의 『치옹저농독방』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홍준은 건도 6년(1170) 『홍씨집험방』을 편찬할 때 휘주에서 간행된 호권의 책을 참조하여 화독배농내보산을 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호권이 바친 기록에 서문을 써주고 간행을 할 때 그 간행 방식은 석각(石刻)이었다. 이는 오언섭(吳彥夔)이 순희 7년(1180) 경 편찬한 『전신적용방(傳信適用方)』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는 “이 방은 흡현승 호권이 이인으로부터 얻은 것인데 휘주에 석각이 있다”고 하였다[23,]. ‘석각’을 진행했다는 것은 이를 어딘가에 세워 지나가는 백성들이 보고 널리 활용할 수 있게 했다는 뜻이다. 석각의 방식은 지방관으로서 송대 사대부들이 의학 및 의방 지식을 지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흔히 썼던 방법으로[24], 홍괄은 종기 치료에 효과적인 이 의방의 빠른 전파를 위해 석각했을 것이고 실제로 이 덕분에 빠른 시간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흡현 현승 호권이 이인에게서 받은 의방을 홍괄에게 보여 준 시기 및 관련 기록의 간행 시기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한 가지 가능성은 홍괄이 흡현을 관할하는 휘주(徽州, 지금의 安徽省 徽州) 지사를 역임한 시기가 소흥 28년(1158) 이후이기에 그 편찬 시기 역시 이즘이 아닌지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25]. 적어도 호권이 진사 급제한(1148) 이후 홍준이 『홍씨집험방』을 편찬한 건도 6년(1170)이전의 어느 시점일 것이다.
요컨대, 『태평혜민화제국방』 편찬자들이 소흥 21년(1151) 화농배농내보십선산을 보충 수록할 때 또 홍준이 『홍씨집험방』을 편찬하면서 화독배농내보산을 실을 때 그들이 참조한 원 자료는 같은 책은 아닐지라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을 확률이 크며, 전자는 이를 좀 더 축약해서 후자는 이를 원형에 더욱 가깝게 수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홍준이 참조했을 자료는 호권이 홍괄의 도움으로 휘주에서 간행한 저서일 것이므로 이 원 출처는 분명 호권의 『치옹저농독방』일 가능성이 크며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호권이 습득하여 정리한 자료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홍준의 동생 홍매는 『이견지(夷堅志)』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 의방을 수록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적어도 홍매의 서사 속에서는 이러한 확충된 지식의 원류가 호권과 이인에게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흡현승 호권은 도성에서 이인을 만났는데 옹저를 치료하는 내탁산방을 주면서 [이인이] 말하길, “㉮나의 이 약은 곪지 않은 것은 빨리 사라지게 하고, 이미 곪은 것은 빨리 터지게 하여 썩은 고름이 스스로 나오게 하니 손으로 짤 필요가 없고 썩은 살이 저절로 없어지니 칼이나 돌침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며, 그것을 복용한 후에는 고통이 점점 감소한다. 그 조제법은 ㉯인삼, 당귀, 황기는 각 두 냥을 쓰고 궁궁, 방풍, 후박, 길경, 백지, 감초는 각각 그 반을 써서 ㉰모두 가늘게 가루를 내어 분으로 만들고 따로 계심 가루 한 냥을 넣어 고르게 섞는다. 매 번 3, 5돈 정도를 따뜻한 술에 타서 그것을 복용한다. 많이 먹으면 좋다. 술을 마실 수 없는 자는 목향탕으로 대신하여도 좋으나 그 효과는 술의 효력의 신묘함만 못하다”라고 했다. ㉲도성 사람 중 등의 종기 70여 개로 고통스러워하는 자가 있었는데……[26]
홍매는 두 형을 통해서 이 의방에 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다. 주목할 것은, 홍매는 흡현승 호권이 도성에서 만난 이인에게서 이 의방을 얻었다고 전하면서 이인이 이 의방을 호권에게 전할 때 했던 말을 직접 인용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인 즉, ㉮ “곪지 않은 것은 빨리 사라지게 하고, 이미 곪은 것은 빨리 터지게 하여”로 시작되는 약효를 설명하는 부분, ㉯열 가지 약재, ㉰복용 방법 등 모두 이인이 직접 전한 말이다. 그리고 이 모두는 『태평혜민화제국방』과 『홍씨집험방』의 ㉮, ㉯, ㉰와 어구 및 표현 방식이 거의 일치한다. 결국 홍매가 이인의 말을 직접 화법으로 인용한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사대부들의 서사 속에서는 『홍씨집험방』이 참고하고 인용한 원 자료가 이인으로 묘사되는 출처와 호권을 통한 입수와 전승으로 이어진 어떤 원전으로 파악될 수 있는 듯 하며, 더 나아가 호권의 『치옹저농독방』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다만 ‘이인’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부분일 것이며, 『홍씨집험방』이 ‘경험방’의 성격이 강하므로 이인 서사를 특정 의방의 효험을 강조하고 치료 사례를 통해 이를 증명하는 장치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27,]. 다시 말해 이인을 두고 이 의방의 원 출처에 관한 정보를 직접적으로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의방의 원 출처와 관련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해 보이며, 앞서 언급한 대로 삼홍과 같은 시대 사람인 진언은 이를 『천금요방』 내보산에서 원류한다고 밝혔고 당송 시기 의서의 기록 속에 면면히 전승되고 있으므로 그 원류는 이들 관방 의서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28]. 다만 송대 사대부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전승 서사를 쓰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우며 이러한 그들만의 전승 서사는 이 의방 지식의 확산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는 듯 보인다.
결론적으로, 흡현승 호권은 도성에서 이인으로부터 이 의방을 받았고, 이인의 설명과 함께 의방의 내용 및 치료사례와 관련된 내용을 책으로 썼다. 그는 이 책을 홍괄에게 바쳤고, 홍괄은 서문을 써주어 흡현의 관할 주인 휘주에서 석각의 형태로 발간하게 하였으며, 아마도 이 책이 호권의 『치옹저농독방』일 가능성이 있다. 건도 6년(1170) 홍준이 『홍씨집험방』에서 화독배농내보산을 수록할 때 이것 또는 이와 관련된 자료를 참조하였다. 이후 홍매는 호권이 이인에게서 의방을 받은 경위를 더욱 상세하게 적으면서, “나의 두 형은 신안(新安)·당도군(當涂郡)에서 이를 새겼다”고 지적하였다[29]. 신안은 휘주를 이름이고 당도는 태평주(太平州) 당도현(當涂縣)을 가리킨다. 전자는 홍괄이 휘주에서 간행한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홍준이 고숙(姑孰, 즉 當涂縣)에서 『홍씨집험방』을 간행한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홍매 자신은 이를 『이견지』에 수록하여 더욱 널리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견지』는 홍매가 지방관을 역임하던 중 다양한 지역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집록한 필기소설류에 해당하므로 더욱 다양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었을 터이며 이 의방의 『이견지』 수록은 관련 지식의 전파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남송 소흥 연간까지 배농내보산의 기록과 전승의 서사를 살펴보건대, 『천금요방』에서 『태평혜민화제국방』으로 이어지는 관방 의학에서의 전승이 있었고, 이와는 다르게 이인과 호권 및 삼홍으로 이어지는 사대부가 구성한 또 다른 전승에 대한 서사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천금요방』에서 『태평성혜방』 및 『정화성제총록』까지와는 다르게 『태평혜민화제국방』의 지식의 정비와 확충이 이들 사대부의 서사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태평혜민화제국방』의 관련 지식의 정비와 확충 및 비슷한 시기 삼홍의 서사에서 반영된 사대부들이 축적한 의학 지식이 그 출처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양자 간의 연관성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후 배농내보산의 전승 속에 삼홍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는 점이다. 이인을 등장시키고, 홍괄이 호권에게 서문을 써주고 간행을 도운 일, 게다가 석각을 통한 홍보 및 홍준이 『홍씨집험방』에 이를 수록하고 홍매가 『이견지』에 이를 수록한 것은 분명 배농내보산의 확산과 활용에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어떤 점에서는 관방 의서의 영향력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4. 삼홍(三洪)의 영향
배농내보산에 대한 지식의 확산에 삼홍의 간행과 출판 활동은 실로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영향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진언의 언설은 상당히 중요해 보인다. 순희 원년(1174) 발간된 그의 저서 『삼인극일병증방론』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근래 호승은 방 하나를 얻었는데 심히 귀하게 보관하다 가지고 홍승상에게 바쳤다. 승상은 그에게 서를 써주었고, 과도하게 세상에 알려져 이미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내보산은 마땅히 제4단계에서 복용해야 하며, 그 전에는 안으로 삭히는 약을 먹고 고름이 다하는 단계까지 이르러 바야흐로 이 의방을 처방할 수 있다. 만약 오로지 이것만을 사용한다면 역시 이른 바 한 가지 법만을 고수하는 것이 된다. 공자는 잘 모르는 약은 먹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진실로 그 뜻이 여기에 있다. 사대부는 심히 이 말을 되새겨 가벼이 의방을 믿어 천하와 후세를 잘못되게 하지 말라.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30].
진언은 흡현승 호권이 얻은 이 의방이 널리 행해지게 된 데는 홍 승상이 써준 서문의 영향이 컸음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이 의방은 옹저의 병증이 제4단계 즉, 고름이 다할 무렵에 이르렀을 때 복용해야 하며 그 전에 이것을 계속 복용하면 피해가 클 수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대부들에게 의방을 가벼이 믿어 천하와 후세에 해를 끼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홍 승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의 언설은 홍 승상의 영향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할 수 있게 한다. 홍 승상에 대한 그의 비판을 분석하기에 앞서 진언이 주목한 홍 승상의 영향력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송대 사대부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언급되는 논의 중 하나는 남송 시기 사인들은 중앙 조정으로 진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보다 그들이 속한 지역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제고하는 데 주목했고 지역사회에서의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Hymes, 1986). 물론 남송 시기 사대부들이 ‘지역화’ 되었다는 논의에 반론을 제기하는 연구도 있지만(包偉民, 2005), 대체로 송대 사대부들의 기층 사회에서의 역할과 영향력은 공통적으로 논의되는 부분이며 더불어 당시 사대부들은 인정(仁政)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의학의 중요성을 알았기에(진원붕, 1997; Asaf, 2009; 薛芳芸, 2012), 지역 사회의 의학 문화를 구성하는 데 있어 사대부들의 역할과 영향은 작지 않았을 것이다. 배농내보산 지식의 확산과정에서 삼홍의 영향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서, 사대부들이 당시까지 축적된 의학지식을 지역사회에 확산시키는 데 그들의 간행 작업과 편찬 활동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미시적인 관찰을 할 수 있게 한다.
진언은 홍괄의 경솔함을 비판하면서 역설적으로 당시까지의 홍 승상의 파급력을 드러냈지만 정작 그의 비판은 당시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이후의 기록들은 당시 사람들이 대체로 홍괄과 홍준 및 홍매의 기록을 적극 받아들였던 것을 보여준다. 삼홍에 의해 배농내보산의 내용과 다양한 치료 사례가 전해진 이후 각종 사찬 의서에서 배농내보산을 언급할 때 홍괄 또는 홍씨 형제들을 언급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배농내보산의 확산에서 삼홍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먼저 상술한 바 있는 오언섭은 민간에서 전승되는 경험방을 모아 의방 전승자의 성명 및 치료 사례를 기록하여 순희 7년(1180) 경 『전신적용방』을 편찬하였는데 역시 배농내보산에 대해 약효와 약재 및 복용방법 등을 기록하고 있다.
화독배농내보십미산. 모든 옹저와 창절을 치료한다. 곪지 않은 것은 빨리 사라지게 하고, 이미 곪은 것은 빨리 터지게 하여 썩은 고름이 스스로 나오게 하니 칼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며 복약 후에는 통증이 점점 감소한다. 이는 그것을 일찍이 시험해 본 결과이다. 가슴의 종기, 장의 종기 및 다른 종독에 대해 모두 일찍이 치료하여 나은 바 있다. 이 방은 흡현승 호권이 이인으로부터 얻은 것인데 휘주에 석각이 있고 또 홍매의 『이견지』가 기록한 바가 매우 상세하므로 여기서는 중복하여 서술하지 않겠다.…… [31]
오언섭은 이 의방의 약효를 설명하고 다양한 옹저 치료에 효과적이라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의방은 호권이 이인에게서 얻은 것이라 명시하고 휘주의 석각과 홍매의 『이견지』의 상세한 기록을 운운하며 본인은 그 치료 사례에 대해 중복하여 서술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바로 약재와 복용 방법을 쓰고 있다.
오언섭이 이 의방을 수록하고 치료 효과를 설명할 때 치료 사례를 일일이 중복 서술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휘주의 석각과 『이견지』 등을 통해 그 치료사례에 대해 이미 알고 있거나 앞으로 알 수 있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순희 7년(1180) 오언섭은 이미 삼홍의 노력과 그 전파력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대 ‘유의(儒醫)’로 많은 연구자들에게 회자된 장고(張杲, 1149-1227)가 순희(淳熙) 16년(1189) 편찬한 『의설(醫說)』에서도 이 의방과 관련한 서사를 빼놓지 않았다.
흡현승 호권은 도성에서 이인을 만났는데, 옹저를 치료하는 내탁산방을 주면서 [이인이] 말하길, “나의 이 약은 곪지 않은 것은 빨리 사라지게 하고, 이미 곪은 것은 빨리 터지게 하여 썩은 고름이 스스로 나오게 하니 손으로 짤 필요가 없고 썩은 살은 저절로 없어지니 刀砭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며, 그것을 복용한 후에는 고통이 점점 감소한다. 그 조제법은……”[32]
장고는 홍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유의(儒醫)’로 알려져 있는데(Hinrics, 2013), 배농내보산의 서사에서도 홍매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즉 흡현승 호권이 이인에게서 이 의방을 받았고, 이 의방을 받을 때 이인이 했던 말을 직접 인용의 형식으로 쓰고 있다.
이후 대리시평사(大理寺評事)를 역임했던 이신(李迅) 은 외과 의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배저(背疽)의 치료에 중점을 두어 평소 관련 의방을 수집하였고 직접 시료를 해서 효험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는 경원(慶元) 2년(1196) 수집한 의방들을 모아 『집험배저방(集驗背疽方)』을 편찬하였다. 그는 「옹저용약대강(癰疽用藥大綱)」편에서 옹저의 의방을 소개하면서 배농내보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 다음으로 홍씨배농내보산을 먹으면 된다. 구역질 증상이 없으면 술과 함께 먹으면 좋고, 구역질 증상이 있으면 목향탕과 함께 먹는 것이 좋다. 옹저의 상황에 부합하면 시종 복약하고 그만 두어서는 안 된다[33].
그리고 이어서 화독배농내보십선산을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탈구가 돼 있어 통행본에서는 『태평혜민화제국방』에 근거하여 이를 보충하였다[34]. 중요한 것은 이신이 옹저의 치료에서 배농내보산을 언급하면서 『태평혜민화제국방』의 것이 아닌 ‘홍씨배농내보산’을언급한 것이다. 이신은 대리시평사로 있을 때 조정에 소장된 의서를 많이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가 『태평혜민화제국방』 등 의서를 몰랐을 리 없을 터인데도 홍씨배농내보산이라 명시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법은 같은 저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보이는데, 침사탕(沉麝湯)을 언급하면서도 “또 홍씨내보산을 복용하며 많이 먹으면 많이 먹을수록 좋다”고 하였다.35) 이는 당시 사대부들에게 있어 배농내보산을 언급할 때 ‘홍씨내보산’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삼홍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호권에게서 이 의방이 원류되었음을 명확히 한 표현도 보인다. 남송의 왕집중(王執中, 약 1140-1207)은 건도 5년(1169) 진사가 되어 지방의 하급 관원으로 전전하다 침구 의학으로 이름을 남겼는데 그가 가정(嘉定) 13년(1220) 전후로 간행한 『침구자생경(針灸資生經)』의 「장통(腸痛)」 부분에는 “호권내보십전산이 장옹을 치료하는 데 매우 효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36].
물론 옹저 관련 전문의서는 아니지만 장옹을 치료하는 데 배농내보산의 효과를 설명하면서 ‘호권내보십전산’이라 명명한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당시 침구 의학에 관심 있던 사대부들이 이 의방을 지칭할 때 호권의 이름을 운운한 것은 호권의 전승 서사가 그들 사이에서 널리 인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홍괄의 서문과 석각으로의 간행 그리고 홍준의 『홍씨집험방』에의 수록 및 홍매의 『이견지』 수록은 이 의방의 전승에서 삼홍의 활약을 보여주며 실제로 그들의 영향은 이후 사찬 의서들에서 확인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후 『외과정요(外科精要)』 등에 영향을 끼친 『집험배저방』 이나 침구학 저서 『침구자생경』에서 배농내보산이 언급된 것은 그들의 영향력이 다양한 의학 영역에서 확인됨을 말해 주며, ‘홍씨내보산’이나 ‘호권내보십전산’이라는 표현의 등장 역시 그들의 영향력을 반증한다. 상대적으로 이러한 전승 기록 속에 『태평혜민화제국방』의 언급은 찾기 어려웠다.
이러한 지식의 확산에 기여를 했던 요소를 짚어 보면, ‘이인의 전수’가 주는 신비주의가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대부들이 기록에서 호권이 이인으로부터 받았다는 서사를 빼놓지 않은 것은 그 서사가 가지는 효과를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진언도 언급했던 승상 홍괄의 서문일 텐데 이는 홍괄의 정치적 지위 및 지역에서의 위상 등에 힘입은 것이다. 또한 석각이라는 간행 방식과 매체의 특징이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석각이라는 매체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지방관으로서의 정치적 지위가 있었기에 가능한 터였을 것이다. 아울러 그들이 강조했던 치료 사례 역시 관련 지식의 전파에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홍괄의 석각 및 홍준의 『홍씨집험방』 및 홍매의 『이견지』는 모두 치료 사례를 상세히 적었다(㉲ 부분). 아울러 홍준 및 홍매와 같은 사대부들의 출판을 통한 홍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겠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각 요소들은 조정 주도의 관방 의서 기록과는 다른 특징을 드러내며 또한 지역의 전문 의자(醫者)들이 실현하기는 어려웠던 사대부만의 고유한 특징일 수 있기에 남송 시기 지역 사회에서 의학 지식의 전파에 송대 사대부들이 했던 역할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런데 13세기 중반에 이르면 배농내보산의 전파과정에서 외과 영역에 속한 의자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게 되는데 이 비판 대상의 중심에 ‘홍 승상’이 서게 되며 이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삼홍의 영향력이 재차 확인되기도 한다. 삼대에 걸쳐 의업에 종사한 집안 출신의 진자명(陳自明, 1190-1270)은 남송 말 경정(景定) 4년(1263)에 발간된 『외과정요』에서 배농내보산의 용법에 대한 주의사항을 언급하며 홍괄의 ‘악영향’을 제기하고 그를 비판하였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와 비판을 진자명이 처음 한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순희 원년(1174) 진언에 의해 이미 주장된 바 있었으나 크게 영향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 진자명의 주장을 보기 전에 먼저 진언의 문제제기의 핵심을 살펴보면서 그가 비판을 하게 된 경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언은 호승이 이인으로부터 의방지식을 전수받아 홍 승상에게 바치고 홍승상이 서를 써주어 “과도하게 세상에 알려져” 행해지게 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한 후 이 의방은 기실 ‘『천금』내보산’이며, “내보산은 마땅히 제4단계에서 복용해야 하고, 그 전에는 안으로 삭히는 약을 먹고 고름이 다할 때까지 기다려 바야흐로 이것을 처방할 수 있다”고 하였다[37,]. 소위 ‘제4단계’는 그가 설명한 바 있는 옹저 증상의 각 단계에서도 가장 마지막 단계를 이르며[38], 이른 바 고름이 다하는 때를 기다려 이를 처방하라는 것이다.
먼저 진언이 의방의 원류를 『천금요방』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비록 ‘호권 → 홍 승상’으로 이어진 전승 경로가 있다고 하지만 이 의방의 진짜 원류는 『천금요방』임을 강조함으로써 홍 승상의 영향으로 빚어진 당시의 남용 실태를 지적하고자 한 의도가 아닌가 한다. 이는 당시 문제가 되었던 복용 시기 문제와도 직결되는데, 즉 복용 시기와 관련하여 『천금요방』이래 관방의서의 기록과 『태평혜민화제국방』 및 『홍씨집험방』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천금요방』에서 『태평성혜방』까지의 기록을 보면, 모두 ‘옹저 및 발배가 이미 터진 경우’ 또는 ‘옹저 및 발배에 고름과 피가 멈추지 않고 속이 허한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즉 진언이 말한 제4단계랑 유사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태평혜민화제국방』과 『홍씨집험방』의 기록을 보면 “모든 옹저와 창절을 치료한다. 곪지 않는 것은 빨리 사라지게 하고 이미 곪은 것은 빨리 터지게 하여”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곪지 않은 경우라도 복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혀질 수 있으며, 진언이 복용단계를 문제 삼은 당시 실태도 이러한 기록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진언은 같은 책에서 배농내보산에 관한 처방을 수록할 때 ‘『천금』내보산’으로 명기하고 이 의방을 수록하였는데, 주목할 것은 먹는 시기를 언급할 때 ‘썩은 피부가 다 없어지지 않았을 때’ 이것을 복용하면 ‘썩은 피부가 사라지고 살이 새로 자란다’고 하였다[39]. 이는 『천금요방』에서 ‘옹저 및 발배가 이미 터진 경우 고름을 배출하고 살을 돋게 하는 방’이라 설명한 것과 유사하다. 또한 『태평혜민화제국방』 및 『홍씨집험방』 이후 등장한 ‘곪지 않는 것은 빨리 사라지게 하고 이미 곪은 것은 빨리 터지게 하여’라는 다소 포괄적인 설명과는 분명 다르다. 진언은 이 의방의 복용 시기가 제4단계임을 강조했고 그래서 그는 『태평혜민화제국방』이나 삼홍의 기록이 아닌, 『천금요방』에 원류한 내보산을 강조했고, 그의 책에서도 ‘『천금』내보산’으로 수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언이 언급한 내용은 당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 같고 이신과 같이 옹저를 전문적으로 다룬 의서를 편찬한 이도 그의 의견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울러 약효를 묘사할 때는 “곪지 않는 것은 빨리 사라지게 하고 이미 곪은 것은 빨리 터지게 하여”라는 설명이 항상 쓰였다. 그러나 진언의 견해는 이후 외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저서를 편찬한 의자에 의해 계승되어 이 후 시기 이 의방의 전승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비판의 핵심은 복용 시기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진자명(陳自明, 1190-1270)은 경정 4년(1263) 『외과정요』를 발간할 때 그 서문에 옹저 관련 ‘양의(瘍醫)’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당시 외과 관련 의학 현실의 상황을 언급하였다. 또한 당시 옹저 치료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배농내보산의 복용 문제를 다루었다.
또, 먼저 복용해야 하는데 후에 복용하는 경우, 마땅히 나중에 복용해야 하는데 먼저 복용하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발병이 되었다 하면 처음에 바로 배농내보십선산을 복용하게 하여 그 병을 더욱 돋우게 한다. 이 약은 [고름이] 터진 후 고름을 내보내고 손상된 것을 보충하는 약이다. 그런데 ‘홍내한’이 용약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망령되이 서와 발을 써주어 천하 후세들이 잘못 [복용]하도록 한 경우가 많다. 진무택[진언의 호]은 말하길, “마땅히 제4단계에서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하였다[40].
당시 사람들이 발병만 하면 바로 배농내보십선산을 복용해 문제가 심각하며 진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약은 제4단계에서 복용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 약은 [고름이] 터진 후 고름을 내보내고 손상된 것을 보충하는 약’이므로 고름이 터졌을 때 사용함이 옳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사람들의 이러한 복용 습관 즉, 발병만 하면 바로 배농내보십선산을 복용하는 것은 ‘홍내한’ 즉 홍괄이 이 약을 잘 모르면서 홍보한 데 원인이 있다고 분명히 지적한다. 그는 진언보다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데, 그가 ‘용약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망령되이 서와 발을 써주어 천하 후세들이 잘못 [복용]하도록 했다’고 꼬집었다. 또한 진자명은 같은 의서에서 옹저를 치료하는 의방으로 배농내보십선산을 수록하였는데, 약효와 약재 및 복용법은 이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서도 그 뒤에 복용 시기와 관련한 그의 생각(愚按)을 덧붙였다[41].
그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남송 말 경정 4년(1263) 무렵이 되면 사람들은 옹저가 발병하기만 하면 배농내보산을 복용하였을 정도로 이 의방이 널리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분명 홍괄의 영향이다. 중간에 진언이 복용 시기와 관련해 한 번 경고를 하였지만 여전히 이러한 용약 실태는 사라지지 않았고, 이를 목도한 진자명이 경정 4년(1263) 서문에서 대대적으로 홍괄의 무지와 경솔함을 비판한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진언과 진자명의 비판이 모두 ‘홍 승상’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태평혜민화제국방』의 배농내보산에 대한 기록 역시 동일하게 “곪지 않는 것은 빨리 사라지게 하고 이미 곪은 것은 빨리 터지게 하여”라고 적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혜민화제국방』의 관련 의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진언과 진자명은 실제 이 의방의 복용 문제에서 홍괄의 ‘악’영향을 언급하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사람들이 실제 옹저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배농내보산을 활용하였고 이는 삼홍의 영향이 컸음을 반증한다.
진자명이 비록 홍괄의 영향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그가 『외과정요』를 편찬할 때 주로 참고했다는 이신의 저서는 이 의방을 홍씨내보산이라 칭하며 수록하고 있고[42], 또 그 스스로 『외과정요』를 편찬할 때 복용 시기와 관련한 주의 사항을 추가하면서까지 홍 승상을 통해 확산된 배농내보십선산을 수록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외과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옹저 관련 의학 지식의 전승과 의료 실천 속에 어떤 식으로든 홍괄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당시 배농내보산의 확산이나 전파 그리고 이에 대한 사대부들과 의자들의 논쟁의 중심이 된 것은 호권이 입수하고 삼홍에 의해 전승 및 확산된 화독배농내보산이었다. 적어도 배농내보산의 지식의 확산과 활용에 있어서 삼홍의 영향력은 관방의서인 『태평혜민화제국방』을 능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 남송 시기 각 지역의 의학 지식 확산 및 담론의 구성에 있어서 사대부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유사한 시기 관방의서 『태평혜민화제국방』의 화농배농내보십선산의 수록과 호권과 홍 승상의 화독배농내보산의 간행이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같은 계통의 원 자료를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삼홍의 활약으로 지역에서는 화독배농내보산의 확산이 있었고, 이후 사대부 사찬 의서에서는 ‘이인 → 호권 → 삼홍’으로 이어지는 서사를 중시하며 의방의 전승과 확산 및 활용이 이루어졌다. ‘이인옹저방’, ‘홍씨내보산’, ‘호권내보십전산’ 등의 명칭은 이를 잘 말해준다. 당시 진언이나 외과 계통의 의자 진자명이 ‘『천금』내보산’을 운운하고 복용 시기를 무시한 남용 실태와 관련한 비판이 있었지만 비판의 중심에 『태평혜민화제국방』이 아닌 ‘삼홍’이 있었다는 것은 관방의서를 넘어서는 삼홍의 영향력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5. 맺음말
송대 사대부들은 의학에 관심이 많았고 송대 의학지식의 축적과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송대 옹저를 치료하는 배농내보산의 전승 과정에 대한 복원을 통해 이 시기 의방 지식의 확산과 전승에서 송대 사대부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배농내보산의 원류를 살펴보면 『천금요방』에서 이미 거의 유사한 약재로 이루어진 의방이 확인되며 이후 『외대비요』, 『태평성혜방』, 『정화성제총록』 및 『태평혜민화제국방』등 다양한 관방 의서에서 기록이 확인된다. 특히 남송 소흥 21년(1151) 증보된 『태평혜민화제국방』에서 보이는 의방은 그 이전 시기 관방 의서에서의 대동소이했던 전승과 달리 약효, 약재, 복용 방법 그리고 주의사항 등에서 확연한 지식의 확충이 있었다. 한편 남송 건도 6년(1170) 홍준이 편찬한 『홍씨집험방』에는 동일한 의방이 수록되어 있는데, 약효와 약재 그리고 복용방법 및 주의사항에 관한 내용에서 그 표현 방식이나 사용한 어구와 어휘가 『태평혜민화제국방』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며 그 외 『홍씨집험방』의 내용이 훨씬 더 풍부했다. 이를 통해 두 의방은 반드시 동일한 서적은 아닐지라도 같은 계통의 원전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고, 당시 사대부들은 관방의서와 같은 계통의 원전을 공유·흡수하며 의방 지식의 축적과 정리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홍준의 입수경로를 살펴보니 흡현승 호권이 이인으로부터 이 의방을 받았고, 이를 홍괄에게 가져가 보여주니 홍괄이 마침내 서를 써주며 휘주에서 석각으로 간행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후 이 의방 지식은 널리 알려지게 되어 진언 같은 사람은 그 복용 시기와 관련하여 이 의방의 남용 실태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준이 이를 『홍씨집험방』에 수록하고 홍매가 이를 『이견지』에 수록하여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후 적지 않은 사대부들의 사찬 의서에서는 ‘이인 → 호권 → 삼홍’으로 이어지는 서사에 대한 전승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의방을 언급할 때마다 『태평혜민화제국방』보다는 홍씨 형제들이 회자 되었고, 심지어 ‘홍씨내보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확산의 과정에서 경정 4년(1263) 진자명은 『외과정요』에서 진언의 견해를 이어 이 의방의 복용 시기가 중요함을 강조하였고 이 의방의 남용 실태에 대해 그 원인을 의방의 확산에 큰 역할을 했던 홍괄의 경솔함과 무지에서 찾았다. 홍괄이 알린 의방은 『태평혜민화제국방』과 동일한 내용이었지만 비판의 화살이 줄곧 홍 승상을 향한 것은 관련 지식의 확산과 활용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호권의 기록과 삼홍의 간행 및 출판으로 널리 확산된 화독배농내보산의 전승 과정은, 이 의방이 『천금요방』에서 보이고 이어 『태평혜민화제국방』과 동일한 기록을 공유했다는 측면에서 관방의 기록과 전통을 흡수한 측면도 보이지만, 삼홍의 서사가 이후 전승에서 관방 의서보다 더 큰 영향력을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사찬 의서를 통한 의방 지식의 확산을 이끈 사대부들의 활약상을 드러낸다. 남송 시기 지역사회에서의 의방지식 확산에 관방의서를 대신한 사대부들의 역할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간행된 『태평혜민화제국방』과 삼홍의 관련 저서는 이후 전승 과정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남송까지는 호권과 삼홍으로 대표되는 사대부들의 간행 활동이 그 확산에 영향력을 미쳤다면, 관방의서인 『태평혜민화제국방』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인 원·명대 이후 점차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43].
송대에 나타난 ‘『천금』내보산’, ‘이인옹저방’, ‘홍씨내보산’, ‘호권내보십전산’ 등의 명칭은 송대 배농내보산의 전승 역사 속에 관방 의서와 사대부 사찬의서 및 전문 의자들의 다양한 서사가 있었던 것을 보여주며 송대 의학 지식의 축적과 확산에 드러난 활기 그리고 그 안에 맴도는 긴장감을 보여준다. 이러한 활기나 긴장감 등은 관방의 기록을 흡수하며 그들만의 서사를 구축하여 의방 지식의 확산에 힘쓴 송대 사대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대체로 송대 사대부들의 의학 경향은 침구학이나 외과 지식을 홀시하였고 문헌 중심적 전승의 특징을 가지며 이는 이후시대까지 지속된다고 설명된다. 이와 관련하여 호권이나 삼홍이 다룬 옹저 관련 의방이 옹저를 치료하는 외과 ‘술’이 아닌 내복약에 중점을 둔 내과적 치료라는 측면에서 기존의 이해가 과히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외과 영역의 질병에 대한 당시 사대부들의 접근 방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의방 지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실천 되는 가운데 당시 침구학 관련 의서나 외과 의서인 『외과정요』 등에도 호권이나 홍괄이 회자 되었던 것을 보면 사대부들이 전승한 의방 지식이 외과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질병의 의료 실천에 다양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Notes
본 논문에서 지칭하는 ‘醫方’은 處方을 의미하는 당시 사람들의 용어로, 협의적으로는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方劑의 의미 즉, 병의 증세에 따라 여러 종류의 약재를 일정한 비율과 원칙에 따라 조제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 그리고 광의적으로는 약재 및 조제 방법뿐만 아니라 다양한 치료 방법, 치료 시 주의사항 및 각종 치료 사례 등을 모두 포함한다.
洪遵의 아버지 洪皓(1088-1155)는 禮部尙書를 역임했고, 남송 초 금에 사신으로 갔다가 15년간 억류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여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松漠紀聞』을 남겼다. 형 洪适과 동생 洪邁는 송대 博學鴻詞科에 합격하여 형은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동생은 中書舍人 및 翰林學士 등을 역임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 홍씨 四父子를 두고 ‘四洪’이라 일컬었고, 아버지 홍호를 뺀 홍씨 삼형제를 두고 ‘三洪’이라 부르기도 했다.
남송대 외과 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바 있는 陳自明은 『外科精要』를 편찬하면서 序文에서 당시 옹저 치료와 관련된 외과 의료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무릇 옹저의 질병은 다른 병에 비해 가장 고통스러워 성인들은 이를 잡병의 우두머리로 여겼다. 옛날부터 비록 ‘瘍醫’라는 한 과가 있었고 또 『劉涓子鬼遺方』 등 논저가 있었지만, 후대 사람들은 깊이 연구하지 못했고, 이에 이 방들은 잊혀 없어졌으며, 왜곡되고 어그러졌으며 미혹되고 막혔다. 지금 향촌과 마을에는 대부분 비천한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이 과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병에 걸리는 사람은 또한 대부분 부귀한 자로 『내경』에서 이르길, “대저 옹창은 대부분 살찐 고기와 좋은 곡식을 먹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대방맥을 진료하였는데 매번 이 병에 걸리는 사람들을 보면 열 명에 한 두 명만이 살아남으니 대개 의자들 중 우수하고 훌륭하여 능히 방론을 연구할 수 있는 자가 적은 것이다” (陳自明,『外科精要』序: “凡癰疽之疾, 比他病最酷, 聖人推爲雜病之先. 自古雖有瘍醫一科, 及鬼遺等論, 後人不能深究, 於是此方淪沒, 轉乖迷塗. 今鄉井多是下甲人, 專攻此科. 然沾此疾, 又多富貴者. 『內經』云: 大凡癰瘡, 多失於膏粱之人. 僕家世大方脈, 每見沾此疾者十存一二, 蓋醫者少有精妙能究方論者”,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82, 1쪽). 물론 진자명의 『外科精要』 (1263)는 남송 말기에 편찬된 저서이지만 위의 언급은 당시 옹저 치료의 현황을 알려주는 좋은 기록이며 이로부터 약 백여 년 전인 ‘삼홍’이 옹저 관련 의방에 관심을 보인 데도 유사한 문제의식 때문일 가능성도 있겠다.
梁其姿의 논의에 따르면, 송대 의학 지식의 전승이 문헌 중심의 또는 진맥이나 처방 중심의 ‘학술적’ 의학 중심으로 발전하여 저서의 편찬을 통한 학설의 논증과 전파에 주목하는 ‘학술성 의학’이 발전하였고, 이와 동시에 외과나 안과 및 침술 등 기술적 지식으로 여겨지는 부분은 俗醫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하였다. 학술적 의학 전통은 방서 편찬 및 상한 이론에 집중하였고, 외과적 치료 기술이나 침술 등은 하층의 의료종사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Leung, 2003).
『홍씨집험방』 권2 「옹저」에 수록된 ‘화독배농내보산’은 현재 ‘十宣散’이나 ‘排膿內補散’ 등으로 불리며 人參·黃耆·當歸·厚朴·桔梗·肉桂·川芎·防風·白芷·甘草 등 약재를 사용한다. 옹저가 벌겋게 붓고 단단하며 아프면서 채 곪지 않았거나 곪았으나 터지지 않는데 또는 곪아터진 다음에 고름이 잘 나오지 않으면서 잘 아물지 않는 데 쓰인다(한의학대 사전편찬위원회, 『한의학대사전』, 서울: 도서출판 정담, 2001, 929). 송대 다양한 의서 속에 ‘화독배농내보산’의 명칭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논문에서는 각 의서의 구체적 내용을 언급할 때는 그 의서에서 사용한 의방명을 사용하되 그렇지 않을 경우 편의상 ‘배농내보산’이라는 현재 통용되는 의방명을 사용하고자 한다.
최해별은 『洪氏集驗方』을 분석하면서 화독배농내보산의 전승 즉, 저자 홍준의 입수 경로에 대해 다룬 바 있다. 하지만 『洪氏集驗方』 수록 의방의 전체적 특징을 다루다 보니 화독배농내보산 자체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소략하여 그 내용이 관방 의서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언급하지 않았고, 홍준의 입수 경로 역시 저자의 기록을 근거로 설명하는 데 그쳤으며, 삼홍 이후 전승에서 삼홍의 영향을 다루지 않았다(최해별, 2016: 125-128).
송 仁宗 嘉祐 2년(1057) 조정에서는 編修院 내에 校正醫書局을 설치하고 의서를 아는 학자와 太醫들로 하여금 시중의 의서를 교정하여 재 간행하게 하였다. 1057-1069년 간 교감하여 간행된 의서로는 『神農本草經』, 『靈樞』, 『太素』, 『甲乙經』, 『素問』, 『廣濟方』, 『千金要方』, 『外臺秘要』, 『脈經』, 『千金翼方』, 『傷寒論』, 『金匱要略』 등이다. 이 외에 조정의 명으로 새로 간행된 의서로는, 송 태종이 王懷隱 등에게 명하여 『太平聖惠方』을 편찬하게 하여 淳化 3년(992) 완성되었다. 휘종 시기 裵宗元, 陳師文, 陳承 등이 칙령을 받아 大觀 연간 (1107-1110) 태의국 소속 藥局에서 편찬한 방서를 교정하여 『화제국방和劑局方』을 교정·간행하였고, 남송 소흥 18년(1148) 약국이 太平惠民局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증보 교정하여 『太平惠民和劑局方』으로 간행하고 전국에 배포하였다. 휘종 政和 연간(1111-1117) 曹孝忠 등이 칙령을 받아 『정화성제총록(政和聖濟總錄)』 편찬하였는데, 간행 직전 금의 침략으로 중지되었고, 이후 금 대정연간(1161-1189)에 간행되었다. 남송에는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韓羽山·杜勝濱은 이 방이 劉涓子의 『劉涓子鬼遺方』에 있는 ‘木占斯散方’에서 연원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韓羽山·杜勝濱, 1988: 56) 그 방의 원문을 보면, 龔慶宣, 『劉涓子鬼遺方』 卷四 「相癰知有膿可以破未」: “治癰消膿, 木占斯散方: 木占斯, 桂心, 人參, 細辛, 敗醬, 幹薑, 厚樸, 甘草(炙), 防風, 桔梗(以上各一兩). 右十味, 搗篩酒服方寸匕”, 叢書集成初編本, 北京: 中華書局, 1985, 47쪽.
陳言, 『三因極一病症方論』 卷14 「癰疽敍論」: “其方乃『千金』內補散添黃芪, 加人參, 減桂.”,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57, 199쪽.
孫思邈, 『備急千金要方』 卷二二 「發背第三」: “內補散. 治癰疽發背已潰, 排膿生肉方. 當歸, 桂心(各二兩), 人參, 芎藭, 厚樸, 防風, 甘草, 白芷, 桔梗(各一兩). 右九味治下篩, 酒服方寸匕, 日三夜二. 未差更服勿絕. (外臺無防風甘草白芷)”,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1, 402쪽.
王燾, 『外臺秘要』 卷二四 「發背方四十一首」: “又內補散, 主癰疽發背, 已潰排膿生肉方. 當歸, 桂心, 人參(各二兩), 芎藭, 厚樸(炙), 桔梗, 甘草(炙), 防風, 白芷(各一兩). 右九味爲散, 酒服方寸匕, 日三夜再, 瘡未合, 服勿停. 忌.(范汪同)”,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96, 666쪽.
이와 관련하여 丹波康賴, 『醫心方』 卷15 「治癰疽有膿方第三」 “范王方”(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55, 34쪽)에서 유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太平聖惠方』 卷61 「治癰內虛諸方」: “治癰發背, 膿血不止, 內虛, 宜服排膿生肌散方. 當歸半兩剉微炒), 黃耆(半兩剉), 人參(一兩去蘆頭), 芎藭(半兩), 厚朴(一兩去粗皮塗生姜汁炙令香熟), 防風(半兩去蘆頭), 白芷(半兩), 桔梗(半兩去蘆頭), 甘草(半兩炙微赤剉). 右件藥, 搗細羅爲散. 每服, 以木香湯調下二錢. 日三四服.”,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82, 1928-1929쪽.
『聖濟總錄』 卷131 「癰疽門·發背潰后」, “治發背癰疽已潰, 排膿生肉. 當歸散方. 當歸(剉焙), 桂(去粗皮), 人參, 防風(去叉各一兩), 芎藭, 厚朴(去粗皮生薑汁炙), 甘草(炙剉), 白芷, 桔梗(剉炒各半兩). 右九味, 搗羅爲細散, 每服二錢匕, 空心溫酒調下, 日晚再服.”,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62, 1533-1534쪽.
『太平惠民和劑局方』 卷8 「化膿排膿內補十宣散」: “(紹興續添方) 化膿排膿內補十宣散(亦名折[托]裏十補散) 治一切癰疽瘡癤. 未成者速散, 已成者速潰, 敗膿自出, 無用手擠, 惡肉自去, 不犯刀杖, 服藥後, 疼痛頓減, 其效如神. 黃芪(以綿上來者爲勝, 半如箭竿, 長二·三尺, 頭不叉者, 洗淨, 寸截, 槌破絲, 擘, 以鹽湯潤透, 用盞盛, 蓋湯餅上一炊久, 焙燥, 隨衆藥入碾成細末, 一兩)人參(以新羅者爲上, 擇團結重實滋潤者, 洗淨, 去蘆, 薄切, 焙幹, 搗用)當歸(取川中來者, 擇大片如馬尾狀, 滋潤甜辣芬香者, 溫水洗, 薄切, 焙幹, 各二兩)厚朴(用梓間者, 肉厚而色紫, 掐之油出, 去粗皮, 切, 姜汁罨一宿, 爁熟, 焙燥, 勿用桂朴) 桔梗(以有心·味苦者爲真, 無心·味甘者薺苨也, 主解藥毒, 切勿誤用. 洗淨, 去頭·尾, 薄切, 焙燥)桂心(用卷薄者, 古法帶皮桂每兩只取二錢半, 合用一兩者, 當買四兩, 候衆藥罷, 別研方入, 不得見火)芎藭(以川中來者爲上, 今多用撫芎大塊者, 淨洗, 切, 焙)防風(擇新香者淨洗, 切, 焙)甘草(生用)白芷(各一兩). 上十味, 選藥貴精, 皆取淨, 曬, 焙, 極燥方秤, 除桂心外, 一處搗, 羅爲細末, 入桂令勻. 每服自三錢加至五六錢, 熱酒調下, 日夜各數服, 以多爲妙. 服至瘡口合, 更服尤佳, 所以補前損, 杜後患也. 不飲酒人, 濃煎木香湯下, 然不若酒力之勝也. 或飲酒不多, 能勉強間用酒調, 並以木香湯解酒, 功效當不減於酒也. 大抵癰疽之作, 皆血氣凝滯, 風毒壅結所致, 治之不早, 則外壞肌肉, 內攻臟腑, 其害甚大, 才覺便服, 倍加服數, 服之醉, 則其效尤速. 發散風毒, 流行經絡, 排膿止痛, 生肌長肉, 藥性平和, 老人·小兒·婦人·室女, 皆可服之.”,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2007, 214-215쪽.
『太平惠民和劑局方』 「進表」: “所有之方, 或取于鬻藥之家, 或取于陳獻之士, 未經參訂, 不無舛訛”, 13쪽.
章健, 李洪濤의 연구에서는 1959년 인민위생출판사 간행 판본을 기준으로 통계를 진행한 결과, 총 788수 중 같은 방인데 이름만 다른 것 5개, 같은 방인데 중복 수록된 것 14개를 제외한 769수 중 234수가 기존 의서에서 확인되는 의방이며, 526수가 이 책에서 처음 출현한 의방이라 하였다(章健, 李洪濤, 2002: 212).
『洪氏集驗方』 卷2 「癰疽·化毒排膿內補散」(丞相兄刊是方於徽州, 予屢以施人, 皆效.) “治一切癰疽瘡癤, 未成者速散, 已成者速潰, 敗膿自出, 無用手擠, 惡肉自去, 不犯刀杖. 服藥後, 疼痛頓減, 此其嘗試之效也. 歙丞胡權初得方於都下異人, 時有苦背瘍者七十餘頭, 諸藥遍試不效, 因出是方示之. 眾醫環立, 相目而笑曰∶“是豈癰疽所用藥耶.” 固謂之曰∶“古人處方自有意義, 觀其所用藥性平和, 縱未能已疾, 必不至壞病, 服之何害.” 乃治藥與服, 以熱酒半升許, 下藥五六錢. 少頃, 痛減七分, 數服之後, 瘡大潰, 膿血流迸, 若有物自內托之. 服之經月, 瘡口遂合, 若未嘗有所苦者. 又有苦腹疾者, 其痛異常, 醫者莫曉時意. 此藥頗能止痛, 試以餌之, 當日下膿二三椀許, 痛亦隨止, 乃腸癰也. 又一老人, 忽胸間發腫, 根脚甚大, 毒氣上攻, 如一瓠然, 斜插項右, 不能轉動. 服藥, 明日毒腫既散, 餘一小瘤, 如栗許大. 又明日, 帖然如故. 又一人發腦, 疑此方不服, 既殞於庸醫之手. 明年, 其子復苦此, 與父之狀不異, 因懲父之失, 縱酒飲藥, 遂至大醉, 竟日袞臥地上, 酒醒病已去矣. 又一婦人發乳, 焮腫疼痛, 不可堪忍, 自謂無復生理. 又二婦人, 股間發腫, 大如杯椀, 服此皆脫然如失. 蒙濟者不可悉數, 姑敘大略, 以示未知此方者. 大抵癰疽之作, 皆氣血凝滯, 風毒壅結所致, 治之不早, 則外壞肌肉, 內攻藏府, 去生遠矣. 詳味此方其所用者, 皆發散風毒, 流行氣血, 排膿止痛, 生肌長肉等藥. 五毒不試, 而坐收瘍醫十全之功, 其可尚已. 今按本草, 於逐味下聊疏藥性溫涼, 與所治療, 雖處方妙指不可遽曉, 庶倉猝之際, 可以見其用藥大意, 而服之不疑. 人參(微溫, 無毒. 主補五藏, 除邪氣, 通血脈, 破堅積, 療心腹鼓痛, 胸脅逆滿. 今以新羅者爲上, 擇團結重實滋潤者, 洗淨去蘆, 薄切, 焙乾)當歸(大溫, 無毒. 主溫中止痛, 除客血內塞, 客氣虛冷, 補五藏, 生肌肉, 治一切風, 一切勞, 破惡血, 養新血. 又『外台』·『金匱』等方, 皆謂大補不足, 決取立效之藥. 凡氣血昏亂者, 服之即定, 謂能使氣血歸所. 當歸制名之義, 宜出於此. 今取川中來者, 擇大片如馬尾狀, 滋潤甜辣芬香者, 溫水洗, 薄切, 焙乾)黃耆(微溫, 無毒. 主癰疽久敗瘡, 排膿止痛, 逐五藏間惡血, 補丈夫虛損五勞, 羸瘦, 煩悶熱毒, 活血. 以綿上來者爲勝, 狀如箭簳, 長二三尺, 頭不叉者. 洗淨, 寸截, 槌破懸壁, 以鹽湯潤透, 用盞盛, 蓋湯缾上一炊久, 焙燥, 隨衆藥入碾, 即成細末)芎藭(溫, 無毒. 主中風入腦, 頭痛寒痹, 筋攣拘急. 除腦中冷痛, 面上遊風, 治一切風, 一切氣, 一切血, 一切勞損, 諸寒, 心腹堅痛, 中惡, 卒急腫痛, 腰脚軟弱, 半身不遂. 壯筋骨, 調衆脈, 破癓結, 治癰疽發背, 排膿消瘀, 養血長肉。以川中來者爲上, 今多用撫芎. 大塊者淨洗, 切焙)防風(溫, 無毒. 治心腹痛, 四肢拘急, 經脈虛羸. 主骨節風, 男子一切勞劣. 補中益神, 通利五藏關脈, 五勞七傷, 羸損盜汗, 心煩體重. 能安神定志, 勻氣脈. 擇新香者, 淨洗, 切焙)厚樸(大溫, 無毒. 主中風寒熱, 血痹死肌, 溫中下氣. 去留熱, 止煩滿, 厚腸胃, 去結水, 破宿血, 消化水穀, 止五藏一切氣痛. 宜用梓州來者, 肉厚而色紫, 掐之油出. 去麄皮, 切, 薑汁窨一宿, 爁熟, 焙燥, 切. 勿用杜·朴)桔梗(微溫, 有小毒. 主胸脅痛如刀刺, 腹滿腸鳴, 利五藏, 補血氣, 除寒熱, 破血消積, 止心腹脹痛。補五勞, 養氣除邪, 又養血排膿, 補內漏, 療胸中寒. 肺脈數, 咽噪不渴, 時時出濁唾腥臭, 吐膿如粳米粥, 是肺癰. 治之用桔梗甘草各二兩, 水三升, 煮取一升, 分再服, 朝暮吐膿血即差. 今所在有之, 以有心·味苦者爲真. 無心·味甘者薺苨也, 主解藥毒, 恐於衆藥不利, 切勿誤用. 洗淨去頭尾, 薄切焙燥)白芷(溫, 無毒. 破宿血, 長新血. 治乳癰瘰癧, 腸風痔瘰, 排膿止痛生肌)桂(大熱, 有小毒, 一曰∶溫, 無毒. 爲諸藥先聘, 主溫中, 利肝肺氣. 去心腹寒熱, 補五勞七傷, 通九竅, 利關節, 破痃癖癓瘕, 消瘀血, 續筋骨, 生肌肉. 筒厚者, 宜入治藏及下部藥;輕薄者, 宜入治頭目發散藥. 今宜用卷薄者. 古法帶皮桂, 每兩止取二錢半, 合用一兩者, 當買四兩. 候衆藥罷, 別碾方入)甘草(平, 無毒. 主藏府寒熱邪氣, 堅筋骨, 長肌肉, 解毒, 溫中下氣, 倍力. 生用)上十味, 選藥貴精, 皆取淨, 曬焙極燥方秤. 人參·當歸·黃耆各二兩, 餘各一兩. 除桂外, 一處爲細末, 入桂令勻. 每服自三錢, 加至五六錢, 熱酒調下, 日夜各數服, 以多爲妙. 服至瘡口合, 更服爲佳. 所以補前損, 杜後患也. 不飲酒人, 濃煎木香湯下, 然不若酒力之勝也. 或飲酒不多, 能勉強間用酒調, 幷以木香湯解酒, 功效當不減於酒也.”,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86, 125-128쪽.
각주 15), 각주 18) 해당 부분 참조.
陳言, 『三因極一病證方論』 卷14 「癰疽敘論」, “近胡丞得一方, 甚寶秘之, 持以獻洪丞相, 丞相與之作序, 言重於世, 已遍行矣. 其方乃『千金』內補散添黃芪, 加人參, 減桂.”, 199쪽.
『紹興十八年同年小錄』 “第五甲”에서 “第一百四人胡權處州縉雲縣美化鄕崇丘里”, 『(影印)文淵閣四庫全書』 448, 臺北: 商務印書館, 1988, 356쪽.
『宋史』 卷207 「藝文志」: “胡權『治癰疽膿毒方』 一卷”, 北京: 中華書局, 5316쪽.
吳彦夔, 『傳信適用方』 卷下 「化毒排膿內補十味散」: “此方歙縣丞胡權得之於異人, 徽州有石刻……”, 『(影印)文淵閣四庫全書』 741, 臺北: 商務印書館, 1988, 783쪽.
皇祐 元年(1049) 王安石이 浙江 鄞縣 현령이었을 때 『慶曆善救方』을 돌에 새겨 현 관아의 대문 앞에 세워 지나는 백성들이 널리 알 수 있게 하였다. 『臨川先生文集』 卷84 「善救方後序」를 보면 전문을 비석에 새긴 것으로 쓰여 있다. 이후 嘉祐 6년(1061) 福州 지주였던 范師道는 복주 관할 12개의 현에 『慶曆善救方』을 석판에 새겨 현 대문 앞에 세우라 명하기도 하였다.(韓毅, 2015: 48-49).
홍괄은 소흥 28년(1158) 전후로 휘주 지주를 역임했고 이후 提舉江東路常平茶鹽公事, 中書舍人 등을 거쳐 건도 원년(1165) 승상에 올랐다. 『宋史』 卷373 「洪适傳」 등 참조.
洪邁, 『夷堅志』 丙志 卷16 「異人癰疽方」: “歙縣丞胡權, 遇異人都下, 授以治癰疽內托散方, 曰: “吾此藥能令未成者速散, 已成者速潰. 敗膿自出, 無用手擠. 惡肉自去, 不假刀砭. 服之之後, 痛苦頓減.” 其法用人參·當歸·黃芪各二兩, 芎窮·防風·厚樸·桔梗·白芷·甘草各半之, 皆細末為粉, 別入桂末一兩令勻, 每以三五錢投熱酒內服之, 以多為妙. 不能飲者, 前木香湯代之, 然要不若酒力之奇妙. 京師人苦背瘍七十餘頭, ……”, 北京: 中華書局, 1981, 505쪽.
‘異人’으로의 출처 표기는 『홍씨집험방』에 수록된 다른 의방의 출처를 설명할 때도 등장한다. 그 예로 『홍씨집험방』 권2 「靈寶膏」“楊池州傳云: 是方得之異人”, 129쪽을 들 수 있다(최해별, 2016: 129). 다만 이러한 ‘이인’ 서사가 어떤 문화적 현상을 반영하는지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해 보인다. 易素梅는 북송시기 심괄과 소식이 쓴 『蘇沈良方』에 관한 연구에서, 당시 사인들이 의사나 方士 및 異人에 대해 사인들과 동일하게 대하지는 않았지만 민간의사나 민간에서 유전되는 텍스트 및 경험의 의학지식에 대해 상당한 포용성을 지닌다고 언급한 바 있다(易素梅, 2016: 96).
다만 홍준의 『홍씨집험방』에서 보이는 배농내보산과 관련한 약효, 약재, 복용방법, 치료 사례 등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홍괄이 서문을 쓰고 간행을 도운 胡權의 저서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아마도 호권『治癰疽膿毒方』일 것으로 추정). 혹 호권 또는 삼홍 이전 시기의 사대부 사찬 의서에서 관련 기록이 확인되는지 찾아보았지만 찾기 어려웠다. 송대 관방의서가 아닌 사대부가 개인적으로 편찬한 의서에서 배농내보산과 관련한 가장 이른 기록이 무엇이고 그 특징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면밀한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의방유취』 권173 「癰疽門四」“和劑局方”에 기록된 “化毒排膿內補十宣散”에는 남송 이후 원, 명대까지의 다양한 사찬 의서에서 보이는 ‘배농내보산’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의방유취』 권173 「癰疽門四」,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2006, 제8책, 246-247쪽). 이중 주목할 것은 가장 마지막에 인용된 『急救仙方』이며 이 가운데 ‘許學士云’으로 표기된 재인용의 내용도 있다. 『急救仙方』은 북송 시기 도교 계통의 의서로 알려져 있으며, 통행본으로는 『사고전서』본과 『道藏』 본이 있다. 북송 시기 것이므로 사찬 의서 중 배농내보산과 관련된 가장 이른 기록으로 보이지만, 현재의 통행본에서 배농내보산과 관련한 기록을 찾아보면 『의방유취』에 인용된 부분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통행본의 배농내보산과 관련한 기록은 매우 완정하고 또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어 아마도 후대 간행되는 과정에서 증보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許學士云’ 부분을 보면 許叔微의 저서로 알려진 『普濟本事方』 (약 1132년 간행)에서는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었고, 후에 『普濟本事方續集』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普濟本事方續集』이 허숙미의 저작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편찬 시기도 더 늦다. 무엇보다도 『의방유취』의 저자들이 참고한 인용서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명대 『비전외과방』 (1395)에는 『急救仙方』 이하 ‘許學士云’ 부분의 내용이 모두 수록되어 있고 내용도 일치한다. 『의방유취』 저자들은 이를 참고하여 인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洪邁, 『夷堅志』 丙志 卷16 「異人癰疽方」: “予兩兄以刻於新安·當涂郡”, 505쪽.
陳言, 『三因極一病證方論』 卷14 「癰疽敘論」: “近胡丞得一方, 甚寶秘之, 持以獻洪丞相, 丞相與之作序, 言重於世, 已遍行矣. 其方乃『千金』內補散添黃芪, 加人參, 減桂. 間有輕者, 服之稍效, 若真癰疽, 爲害反甚. 內補散當用在第四節, 當前服內消等藥, 俟膿盡, 方得投. 苟專用之, 亦所謂守一法也. 孔子不嘗未達之藥者, 良有旨哉. 士夫當深味斯言, 無輕信醫方, 誤天下後世. 謹之謹之.”, 199쪽.
吳彦夔, 『傳信適用方』 卷下 「化毒排膿內補十味散」: “治一切癰疽瘡癤, 未成者速散, 已成者速潰, 敗膿自出, 不犯刀仗, 服藥後疼痛頓減, 此其常試之效也. 如妳癰·腸癰及其它腫毒, 皆嘗治愈. 此方歙縣丞胡權得之於異人, 徽州有石刻及洪景盧『夷堅志』所載甚詳, 茲不復錄. 人參(去蘆), 當歸(酒浸), 芎藭, 防風, 厚朴(製), 桔梗, 白芷, 桂(去麄皮, 不見火), 甘草(炒), 黃耆(蜜浸). 一方加黃苽蔞壹兩, 去皮秤. 右拾味選藥貴精, 皆取淨, 曬, 焙, 極燥方秤, 人參, 當歸, 黃耆各貳兩, 餘各壹兩, 爲細末, 每服自參錢加至陸錢, 熱酒調下, 日夜連進數服, 以多爲妙, 至瘡口合更服爲佳, 所以補前損·絕後患也. 不能飮者, 間以木香湯調服, 但不若酒力之勝耳”, 『(影印)文淵閣四庫全書』 741, 783쪽.
張杲, 『醫說』 卷6 「治癰疽方」: “歙丞胡權, 在都下遇異人, 授以治癰疽內托散方. 曰: ‘吾此藥, 能令未成者速散, 已成者速潰, 敗膿自去, 無用手擠, 惡肉自去, 不假刀砭, 服之之後, 痛苦頓減. 其法用人參·當歸·黃芪各二兩, 芎藭·防風·厚朴·桔梗·白芷·甘草各半之, 皆細末, 別入桂末一兩, 令均, 毎以三五錢, 熱酒調服, 以多爲妙, 不能飲者, 木香湯調, 然不若酒服爲奇.’”, 北京: 中國中醫藥出版社, 2009, 215쪽.
李迅, 『集驗背疽方』 「癰疽用藥大綱」: “一, 次合洪氏排膿內補散, 無嘔逆之證, 用好酒下, 有嘔逆之證, 合用木香湯下此一藥, 合與癰疽相爲始終服餌, 不可輟.”, 福州: 福建科學技術出版社, 1986, 22쪽.
李迅, 『集驗背疽方』, 22-23쪽.
李迅, 『集驗背疽方』 「癰疽用藥大綱」 “沉麝湯”中, “又合服洪氏內補散, 多服爲妙”, 42쪽.
王執中, 『針灸資生經』 卷3 「腸痛」 “胡權內補十全散治腸癰神效”, 서울: 일중사, 1991, 35쪽.
陳言, 『三因極一病證方論』 卷14 「癰疽敘論」: “近胡丞得一方, 甚寶秘之, 持以獻洪丞相, 丞相與之作序, 言重於世, 已遍行矣. 其方乃『千金』內補散添黃芪, 加人參, 減桂. 間有輕者, 服之稍效, 若真癰疽, 爲害反甚. 內補散當用在第四節, 當前服內消等藥, 俟膿盡, 方得投. 苟專用之, 亦所謂守一法也. 孔子不嘗未達之藥者, 良有旨哉. 士夫當深味斯言, 無輕信醫方, 誤天下後世. 謹之謹之.”, 199쪽.
陳言은 옹저의 단계를 初覺, 已潰, 農盡, 惡肉盡으로 구분하였다. 陳言, 『三因極一病證方論』 권14 「癰疽敘論」, 198쪽.
陳言, 『三因極一病證方論』 卷14 「癰疽證治」: “千金內補散. 治癰疽, 發背, 惡肌不盡, 服此, 消肌生肉. 當歸, 桂心(各二兩), 人參, 川芎, 厚樸(薑製炒), 防風, 甘草(灸), 白芷, 桔梗(各一兩). 右爲末, 每服二錢匕, 酒調, 空腹服. 不能飮酒, 以木香湯調下.”, 202쪽.
陳自明,『外科精要』序: “……又有當先用而後下者, 當後用而先下者. 多見一得疾之初, 便令多服排膿內補十宣散, 而及增其疾. 此藥是破後排膿內補之藥, 而洪內翰未解用藥之意, 而妄爲序跋, 以誤天下後世者衆矣. 陳無擇云∶當在第四節用之是也.”, 1쪽.
陳自明, 『外科精要』 卷下 「論癰疽服藥捷徑第五十二」: “排膿內補十宣散(一名十奇散, 一名內補散, 治瘡傷未成速散, 已成速潰, 膿毒自去, 其效如神.) 人參, 當歸, 粉甘草(炒), 川芎, 黃芪(鹽水炒各二兩), 防風, 厚朴(薑製), 桔梗(焙各一兩), 香白芷(五錢), 官桂(三錢). 上爲末, 每服三錢, 無灰酒下. 日夜數服, 愈後再服, 以杜後患. 木香湯亦可. 愚按: 前症若陽氣陰弱, 風寒鬱滯, 而不能潰散, 宜用此方. 若熱毒壅結而不能潰散, 宜用托裏消毒散. 若氣血虛弱而不能潰散, 宜用參芪托裏散.”, 77쪽.
진자명은 서문에서 名醫 李嗣之(李迅), 伍起予, 曾孚先 등의 책을 참고하여 새로이 정리했다고 편찬 경위를 밝히고 있다. 陳自明, 『外科精要』 序文, 2쪽; 이신과 관련해서는 각주 33) 참조.
예를 들면, 명대 劉純(1363-1489)이 1396년에 편찬한 『옥기미의』에서는 ‘局方托里十補散’을 실었는데 의방 명칭에서 이미 ‘국방’이 표기된다. 『옥기미의』 권15 「辛溫發散之劑」“局方托里十補散” 233쪽. 조선 세종조 1445년에 완성된 후 교정을 거쳐 1477년에 간행되어 배포된 『醫方類聚』 「癰疽門」 역시 이 의방을 다루고 있는데, ‘『화제국방』’ 항목 아래 ‘화독배농내보십선산’을 수록하고 있다.『의방유취』 권173 「癰疽門四」“和劑局方” “化毒排膿內補十宣散”, 2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