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의생(醫生)’ 김광진의 황달 투병기 - 김광진의 『치안』, 『치달일기』 분석 -
Traditional Medicine Doctor Kim Gwangjin’s Battle against Jaundi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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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study aims to examine how traditional medicine doctors (醫生)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Korea treated patients and their own diseases with traditional medicine (漢方) and Western medicine (洋方) by analyzing Clinical Cases (治案) and A Diary of Jaundice Treatment (治疸日記) of Kim Gwangjin (金光鎭, 1885-1940). Through this inquiry, this study aims to reveal that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as a time when the traditional medicine and the Western medicine coexisted, and that this period cannot be simply defined as a dualism between “Western medicin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versus “traditional medicine, governed public.”
Kim Gwangjin’s main method of medical treatment was traditional medicine. Clinical Cases include over 60 treatment cases, and they illustrate that he was a typical doctor at the time using traditional medical knowledge. In addition, Kim wrote A Diary of Jaundice Treatment from January 1939 to July 1940, a month before his death. The disease that led to his death was jaundice. He examined the changes in his abdomen every day, and recorded the changes in edema in upper extremities and testicles, urine and feces. While the treatment that Kim used in the early stages of jaundice were herbal medicines, he was not confined to the boundaries of the traditional medicine as he studied Western medicine to obtain a license of traditional medicine doctor from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He took a urine test to confirm whether his illness was jaundice or kidney disease and had X-ray imaging to check for pleurisy at a Western medical hospital in Daegu. Furthermore, he received a procedure to artificially drain bile, took a medicine to excrete bile into the feces, and had injection to treat neuralgia. Mostly, it was diarrhea that bothered Kim, who had been suffering from jaundice. Preventing diarrhea led to edema, and removing edema led to diarrhea again. He managed his symptoms by stopping the herbal medicine treatments and going on a raw food diet. Around this time, Kim relied the most on Ejisan (エヂ散). Ejisan was a type of new medicine mixed with traditional medicine and Western medicine that had the effect of treating edema and digestive disorders. Kim personally manufactured and took the drug until a month before his death, praising it as a necessary drug to treat jaundice.
Kim was a traditional medical doctor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e also had the conventional wisdom that Western medicine was excellent in treating surgical diseases but not effective in internal medicine. However, he used both traditional medicine and Western medicine to treat symptoms of jaundice that have not been treated well and created a new medicine called Ejisan, which combined the two types of medicines. For him, Western medicine was a new medicine that improved the wrong aspects of traditional medicine or the old medicine, but there was still a realm of traditional medicine that Western medicine could not intervene. Furthermore, he published a new theory of traditional medicine called the Principle of Up and Down (升降論), which incorporates some Western medical knowledge.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required traditional medicine doctors to study Western medicine, and traditional medicine doctors had to learn Western medicine in order to survive. In the meantime, traditional medicine doctors such as Kim have brought about new changes by integrating the two medical treatments in the clinical field.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planned the demise of traditional medicine by forcing traditional medicine doctors to study the Western medicine, but the unexpected achievement brought about by traditional medicine doctors, who survived longer than the Japanese Empire and the colonial government, was an attempt to integrate Eastern and Western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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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마취된정면으로부터입체와입체를위한입체가구비된전부를평면경에영상시킴. 평면경에수은을현재와반대측면에도말塗抹이전함. (광선침입방지에주의하여) 서서히마취를해독함. 일축철필과일장백지를지급함. (시험담임인은피시험인과포옹함을절대기피할것) 순차수술실로부터피시험인을해방함. 익일. 평면경의종축을통과하여평면경을2편에절단함. 수은도말2회.
- 「오감도 시제8호 해부」 중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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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六味湯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콤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끊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 「탕약」 중 일부 -
1. 머리말
1934년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은 「해부」를 발표했다(이상, 2014: 94). 그리고 1936년 시인 백석(白石, 1912-1995)은 「탕약」을 발표했다(이숭원, 2006: 122). 서양 의학을 대표하는 ‘해부’와 한의학을 대표하는 ‘탕약’이 당대 문인들의 시적 소재로 활용됐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일제 시기부터 서양 의학과 한의학이 동시에 대중과 함께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 식민 정부가 선택한 의학은 서구에서 발원한 이른바 서양 의학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기존 전통 의사들에게도 서양 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에게 적용되는 의사규칙이 준용됐지만, 의학을 공부하는 생도라는 의미의 의생(醫生)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신동원, 2002: 349). 의생들은 임상 경력을 인정받아 면허를 발급 받았음에도 경찰서 등에서 주관하는 의생강습회에 참석해 새롭게 서양 의학을 교육 받아야 했다. 또 신규 의생 면허 발급을 위해 서양 의학 지식의 숙지 정도를 묻는 면허 시험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신규환, 2008: 114-120; 박지현, 2019: 329). 전통 의학과 서양 의학 혼융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의학과 서양 의학의 병용이 허용되던 일제 시기, 그 경계에 놓여 있던 의생들은 한의약 치료만을 고수했을까 아니면 적극적으로 서양 의학을 활용하려 했을까? 두 의학을 함께 사용하려 했다면 그 결합은 어떻게 이뤄졌고 이를 실천하는 의생들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까?
일본 식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의생들이 서양 의학에 대해 지녔던 태도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당대의 한의학을 대표하는 김영훈(金永勳)이 보여준 기존 한의학 체제를 유지하면서 도구로써 서양 의학을 활용하는 태도다. 김영훈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가장 편리하고 용이하고 이상적이라는 판단 하에 『동의보감』, 『의학입문』 등에서 유래한 한의학 중심의 의료를 실시했다. 그러면서도 2층 벽돌식 건물에 진찰실, 조제실, 대합실 등 현대식 설비를 갖추고 청진기, 체온계 등의 진찰 도구를 사용하며 퀴닌과 같은 서양 의약품을 활용했다(이종형, 1978: 329; 김영훈, 2001: 463) [1,]. 두 번째 남채우(南采祐)가 보인 기존 한의학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양 의학 지식을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다. 남채우의 저작 『청낭결(靑囊訣)』에는 해부도를 비롯한 서양 의학의 해부 및 생리학, 전염병학 지식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동서의학병명도 비교되고 있었지만(남채우, 1933),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으로 대표되는 한의학의 기본 골격만큼은 보전하고 있었다. 세 번째는 도진우(都鎭羽)가 보여준 적극적으로 서양 의학을 수용 태도다. 도진우는 의생 면허 시험 대비 저작 『동서의학요의(東西醫學要義)』를 편찬하며 전염병·소화기·호흡기·순환기·비뇨생식기 등 계통적으로 병명을 구분하고 매 항목마다 한의학과 서양 의학의 내용을 각각 병기했다(도진우, 1975). 기존 전통 의서 체제 또는 한의학 지식 체계로부터 탈피한 것이다.
의생들이 서양 의학과의 관계에서 동서병존이나 동서절충과 같은 다양한 태도를 표출한 것에 대해 신규환은 일제가 서양 의학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외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신규환, 2008: 136). 김남일 역시 일제 시기에 이뤄진 동서의학 병명 대조의 작업은 학술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의생 시험 대비라는 당시의 현실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진행되었음을 지적했다(김남일, 2011: 323). 의료 체제의 경계에 놓여있던 의생들에게 한의학 또는 서양 의학을 학습하고 그 능력을 평가받는 것은 어떻게 생존해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와 별개로 눈 앞에서 신음하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더나은 치료 도구를 확보하기 위해 서양 의학이나 한의학은 끊임 없이 절충되어 왔다[2,]. 한국 근대 의학의 개척자로 평가 받는 지석영(池錫永)의 『우두신설(牛痘新說)』 중에도 두창의 수반 증상을 치료하는 한의학 방제, 패독산(敗毒散)·생기산(生肌散)·금화산(金華散)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실제 지석영은 스스로에 대해 전통 의학을 약간 섭렵하고 서양 의학도 널리 수집한 것으로 자평했으며 1914년 의생으로 등록한 뒤 1915년에는 전선의생회 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대한의사학회, 1994: 145, 225). 이외에 서양 의학을 전공했던 장기무(張基茂)는 쇠퇴해가는 동양 의학의 장점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와다 게이주로(和田啓十郞)의 『의계지철추(醫界之鐵錘)』를 번역해 서양 의학과 동양 의학을 합병 연구해 완성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소개했다(張基茂, 1915: 137). 그리고 조헌영(趙憲泳)은 한의학과 서양 의학 모두 연구 대상을 사람의 몸과 병 그리고 약물로 삼고 있으므로 합치점과 조화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두 의학을 비교하고 조화시키려 했다(조헌영, 1980: 6) [3,]. 기존의 한의학과 새롭게 들어온 서양 의학이 충돌하는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서 새로운 변화들이 꿈틀거리고 있던 것이다(이훈상, 2000: 170).
이번 연구에서는 전환 시기의 유교 지식인으로서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그리고 의생으로 활동했던 김광진(金光鎭, 海岳, 1885-1940)의 환자 치료 기록 『치안(治案)』과 자신의 병증 치료 기록 『치달일기(治疸日記)』를 분석하고자 한다[4,]. 『치안』은 1925년부터 1930년까지 김광진이 치료한 79개 사례를 기록한 의안(醫案)이다. 전문 의학 기록인 만큼 환자의 일반적인 특징, 병증 분석 및 진찰, 변증 진단, 치료 원칙, 방제 구성 등이 담겨져 있으며 기존의 의안 분석 방법을 통해 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苏礼, 2009: 31). 『치달일기』는 1938년 12월부터 1940년 8월까지 2년이 조금 못미치는 기간 동안 김광진이 자신의 황달 치료 내용을 기록한 일종의 투병 일기다. 황달 진단, 경과, 복용 약물 및 음식 등 의생이었던 저자가 경험한 의학 관련 정보가 꼼꼼하게 기입되어 있어 의료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의안 저작에 대한 분석은 여러 차례 시도됐지만(신동원 외, 2015; 이기복, 2012: 429-459) 김영훈을 제외한 일제 시기 의생의 의학 기록 분석은 여전히 희소한 편이다. 따라서 의안을 통해 일제 시기의 의생들이 어떻게 환자를 치료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 기존에 발표된 김광진의 한의학 이론 저작 『의학승강법(醫學升降法)』에 대한 분석 성과를 기반으로(오재근, 2016: 91-119) 김광진이 저술한 의안과 투병 일기를 동시에 분석해 그가 보이는 임상 의학적 특징을 확인하는 한편 황달이라는 병증을 인식한 일제 시대 의생이 당대의 가용한 모든 자원을 활용해 벌이는 사투(死鬪)를 개인의 신체사, 질병사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동서 의학이 절충되어 가는 모습을 하나의 사례로써 검토할 예정이다[5].
김광진은 의생 시험을 통과한 전문 의료인이었지만 의학을 가업으로 삼는 의관 집안 출신은 아니었다. 전문적인 한의학 교육을 받지도 못했으며, 비교적 늦은 나이인 30대 이후에 의료계에 합류했다. 의료 정보가 집중되던 경성(京城)이 아닌 대구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기에 그의 사례를 당대 조선 한의계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6,]. 다만 그는 신학문을 받아들이고 교육했던 지식인이자 신간회 대구 지부장을 역임했던 사회적 리더였다. 또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의생 이호진(李浩珍, 學圃, 1884-1963), 김관제(金觀濟, 月岡, 1886-1951), 송병학(宋秉學) 등과 친밀하게 교류했던 만큼[7] 새로운 의학 지식, 신의(新醫) 또는 서양 의학(洋醫)를 수용해 기존 의학, 구의(舊醫) 또는 한의학(漢醫)을 혁신하고자 했던 그의 관점은 당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2. 의생 김광진의 한의학을 활용한 질병 치료 : 『치안』 분석
김광진은 경북 의성군 비안면 출신으로 20세까지 유학 경전을 학습하다가 대구 우현서루와 협성학교에서 수학하며 새로운 학문을 접했다.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의 교육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1년 질병으로 귀향했으며 3년 동안 덕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있다가 1924년 대구로 이주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의생 시험에 합격해 산격동에 약점(藥店)을 개업했다. 개업 후 임상 의가 뿐 아니라 신간회 대구 지부장을 역임하며 사회 문화 운동가로서 활동했다(박지현, 2016b: 49-68) [8,]. 김광진의 의학 공부는 1915년 부친의 병을 고쳐보고자 하는 열망에서부터 시작됐다. 초창기 그의 의학은 당대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선 의가 이규준의 의학으로부터 비롯됐지만, 리가오(李杲), 주전헝(朱震亨), 장제빈(張介賓), 천스둬(陳士鐸) 등 중국 의가들의 의학을 습득해가며 그 폭을 확장시켰다. 1932년 병리와 약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뒤 1936년 하나의 기운(一氣)이 오르내리는 승강(升降) 운동을 매개로 인체의 생리·병리 기전, 치료 원칙과 약물의 활용 방법을 설명하는 의학이론 전문 저작 『의학승강법』을 집필했다(오재근, 2016: 103). 김광진 또한 여느 의생들과 마찬가지로 정규적인 서양 의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가 평생 지녔던 서양 의학 지식의 토대는 의생들의 필수 참고서이자 수험서였던 『의방강요(醫方綱要)』였으며[9,], 의생이 된 후 의학강습회, 종두술 강습회 등을 통해 신의학을 학습했다(박지현, 2016a: 164).
34. 여름철에 머리와 온몸이 아프면서 설사를 하거나 마치 학질과 같이 오한하고 땀이 줄줄 흐르는 증상. 1927년 8월. 여성. 60세. 머리와 온몸이 아프면서 설사를 했다. 이것은 한습(寒濕)으로 인한 병이었다. 제습강활탕(除濕羌活湯)에 건강·부자 1돈반, 백출·복령·감초 1돈, 초두구·귤피 5푼을 더해주었다. 2첩을 먹고 좋아졌다. 이것이 내가 제습강활탕을 사용한 첫 사례였다. 이병필(李柄弼)의 아들이 학질에 걸린 듯 머리가 아프고 오한을 하며 땀이 줄줄 흐를 때도 이 처방에 인삼·부자·초과·하수오·황기를 1돈씩 더해 주었다. 5첩에 좋아졌다. 이후 사용할 때마다 모두 효과가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사람이 두 계절을 살아가면서 겨울에는 한(寒)에 손상을 받고 여름에는 습(濕)에 손상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10].
47. 이명이롱. 1928년 10월. 이문희(李文熙)가 귀에서 소리가 나는 이명(耳鳴) 증상이 있은지 이미 1달 째였다. 이제 소리는 멎었지만 5-6일째 귀가 먹어 있었다. 감기 기운도 있어 패독산(敗毒散)에 신장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온신재(溫腎材)를 더해 3첩을 복용시켰다. 효과는 없었다. 이것은 신수(腎水)가 말라 허화(虛火)가 위로 타오르고 있는 것이므로 가감계규탕(加減啓竅湯)으로 치료해야 했다. 3첩을 복용하자 다시 귀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재차 7첩을 복용하자 이롱(耳聾)이 완전히 나았다. 이후에도 이 환자는 이 증상이 발생할 때마다 이 처방을 복용하면 반드시 나았다. 『변증기문』의 이 방제는 정말 신묘하다[11].
이상은 『치안』 중에 실려 있는 2개 임상 사례다. 인용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듯이 『치안』의 내용은 병증 명칭, 진료 날짜, 환자 이름, 병증 분석, 변증(辨證)과 치료 방법, 방제, 예후, 출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부표 1). 병증 분석이나 치료 방법이 매번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치안』 35에서 속을 따뜻하게 덥히고 습기를 제거하기(溫中治濕) 위해 가미출부탕(加味朮附湯)을 사용하거나 『치안』 39, 76에서 담화(痰火)를 치료하기 위해 화담청화탕(化痰淸火湯)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의학의 전통적인 접근 방법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치안』 54에서는 카타르성황달(加答兒性黃疸)로 진단한 뒤 가감팔물탕(加減八物湯)이나 인진으로 감주(甘酒)를 만들어 복용하도록 처방하며 당대에 유통되던 서양 의학 지식을 활용하려는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김광진의 병증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동의보감』에 기반하고 있었다. 41과 65에서는 각각 학질(瘧疾)과 관격(關格)의 병리 증상을 설명하며 『동의보감』의 문장을 그대로 활용했다. 다만 월경혈이 자흑색을 보이는 것을 열증으로 분류했던 주전헝의 견해를 부정하기도 하고[12,], 담화증(痰火證)에 대한 치료 경험을 근거로 장제빈의 견해를 부정하고 주전헝의 견해를 받아들이는[13,] 등 의학 지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치안』 뒷부분에 수록된 「조기법(調氣法)」에서는 자신이 의학적 깨달음을 얻었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초반에는 열성을 지니고 있는 부자(附子)를 자주 사용하며 양기를 북돋워야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는 이규준(李圭晙)의 논의를 받아들였지만, 1928년 자신이 치료하지 못한 병증을 동료 서용범(徐龍範)이 담화(痰火)를 내려주는 방제 10첩으로 치료하는 것을 목도하면서[14,] 의학 지식에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1년 자신 또한 청금강화탕(淸金降火湯)의 효과를 경험하며 담화(痰火)가 병증을 일으킬 수 있음을 믿게 됐다. 이후 리가오의 『비위론(脾胃論)』을 통해 승강(升降)의 이치를 맛본 뒤, 1932년 부종으로 인해 발생한 기침과 호흡 곤란으로 실신 지경에 이르렀던 사람을 기운을 끌어내리는(降氣) 약물만으로 치료하게 되면서 승강의 이치와 기운을 조절하는(調氣) 방법을 깨달았다(오재근, 2016: 103) [15].
『치안』 79개 의안에서 활용된 97개 방제 중 출처가 확인되는 것은 15개 정도다. 구체적으로 『치안』 79에서는 거악산(去惡散)과 소식산(消蝕散)을 합방해서 만든 거악소신산(去惡消蝕散)의 유래를 “『보감』 「거악육방(去惡肉方)」”으로 명기하고 있다[16,]. 그 외 7개 의안에서 천문(喘門), 창문(瘡門), 담음문(痰飮門) 등의 『동의보감』 항목을 표기하고 있으며, 실제 『동의보감』 해당 항목에서 동일 명칭의 방제를 확인할 수 있다[17]. 『동의보감』 외에 『치안』 9의 사미사양음(四味四陽飮)과 78의 시진전(柴陳煎)은 장제빈의 의서, 47의 가감계규탕(加減啓竅湯)은 『변증기문』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31의 오별탕(烏鼈湯)은 이규준, 65의 팔미회양음(八味回陽飮)은 김관제, 44의 사물안신탕(四物安神湯)은 권석채(權碩采)에게서 유래했고, 60의 청금강화탕(淸金降火湯)과 70의 소래소거산(笑來笑去散)은 환자가 가르쳐준 것을 전재하고 있다. 물론 『치안』 중에는 김광진 자신이 만든 방제의 효과나 개별 방제에 대한 효과 역시 수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치안』 48에서는 자신이 만든 리요탕(利腰湯)의 사용 경험을 기재하고 있고, 4에서는 인후통 치료에 필용방감길탕(必用方甘桔湯)을 사용해 그 때마다 효과를 얻었다거나, 15에서는 유종(乳腫)에 가미지패산(加味芷貝散)을 써서 그 때마다 효과를 얻었다는 등의 내용을 기재해두기도 했다. 일부 방제의 출처 만이 확인되어 김광진 임상 의학의 주된 경향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동의보감』의 의학 정보에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전헝, 장제빈, 천스둬 등과 같은 중국 의가와 이규준, 김관제, 권석채, 서용범 등 당대 조선 의가들의 경험 그리고 환자와의 교유를 통해 실제적인 임상 의학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고 자기화해갔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치안』은 김광진이 1924년 말 개업 이후 1930년까지의 환자 진료 기록으로, 1932년 병리와 약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이전, 자신이 효과를 거두었던 치험 사례가 정리되어 있다. 그의 핵심적인 의학 이론인 승강론에 대한 논의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한의학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병증을 서술하고, 진단하며, 방제 및 약물을 운용해 해당 병증을 치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덧붙여 단 1개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카타르성황달과 같이 서양 의학 질병명으로 진단한 병증 역시 한약 처방으로 치료하려 시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의생 김광진의 동서의학을 활용한 황달 투병 : 『치병일기』 분석
『치병일기』 권1, 권2는 1938년 12월 16일부터 1940년 8월 5일까지 2년간 기록된 김광진의 실제 투병 기록이다. 그 중에는 황달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했던 한의약, 서양 의약, 음식물 등에 대한 정보가 자필로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18]. 50대 중반 무렵이었던 1939년, 황달에 걸렸음을 확인한 뒤, 자신의 병증이 심상치 않음을 인지하고 기록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하에서는 『치병일기』의 병증에 대한 대처와 경과를 중심으로 황달임을 확인한 초기, 황달 및 수반 병증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던 중기, 더 이상 관리되지 못하고 악화되어가는 말기의 세 개 시기로 구분하고 시기별 특징을 살펴본다.
1) 황달의 진단과 한약 활용(1939년 1월-5월)
1938년 겨울 김광진은 소변을 통해 자신이 황달을 앓고 있음을 확인했다[19,]. 황달은 소변 뿐 아니라 피부와 눈자위가 모두 노랗게 되는 병증이었기에 포착해내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아들 김영소(金永韶)가 1938년 3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해 대구 동산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기에(김광진, 2013: 468) [20,] 그곳으로 소변을 보내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빌리루빈(ビリルビン)이 함유되어 있기는 했지만 수치가 높지 않았다[21,]. 김영소가 집에 와서 롯구액(ロツク液)을 주사했다. 이후 대변으로 담즙을 배출시키는 아고비린환(アゴビリン丸)을 복용했으며 포도당(葡糖) 주사를 맞기도 했다[22]. 사망 직전까지 아고비린환은 몇 차례 복용하지 않았지만 포도당 주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발병 초기 김광진은 황달과 함께 주로 부종을 치료하고자 했다. 『변증기문』 중에 비달(脾疸)을 치료한다고 기재되어 있는 출부탕(朮附湯), 신달(腎疸)을 치료한다고 기재되어 있는 제수탕(濟水湯)이 처음 선택됐다[23,]. 얼마 지나지 않아 가려움이 그를 괴롭혔다. 1939년 2월 2일부터 시작된 가려움은 점점 심해져 이제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했다[24,]. 정맥 주사를 통해 투여한 포도당은 가려움 해소에 도움이 되었지만 포도당을 주입할 때마다 찾아오는 강력한 오한(惡寒) 증상 때문인지 한약에 주로 의존했다[25,]. 스스로 처방한 부강향부탕(附干香附湯) [26,], 부강탕변방(附干湯變方) 등은 효과를 내지 못했다[27,]. 대구읍성에서 활동하던 의생 김관제로부터 대보탕(大補湯) 가감방을 처방 받아 복용해야 했다[28,]. 대보탕을 복용한 뒤, 2월 20일 무렵부터는 가려움증은 서서히 잦아들었다[29,]. 김광진은 왜 가려움이 발생했는지 또 왜 감소했는지 궁금해 했지만 명확히 답변해내지는 못했다. “담즙이 피부를 자극해 가려움증이 발생했다. 소변을 자주 보면 반드시 가려움증이 발생했는데 이제는 가려움도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도 모두 줄어든 것 같다” [30,], “잠잘 때 땀이 나는 증상이 시작되면서 가려움이 줄어들은 것 같다” [31]고 짐작할 뿐이었다.
김광진의 하지 부종이 감소하지 않고 등에서 오한까지도 발생하자 의학을 공부하던 둘째 아들 김영소와 셋째 아들 김영삼(金永三)은 모두 신장염이 아닌지 의심했다[32,]. 다시 대구 동산병원으로 소변을 보내 검사해보았지만 신장염은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33,]. 김관제가 처방했던 십전대보탕 21첩을 모두 복용한 뒤 2월 21일부터는 스스로 부강백출탕(附干白朮湯)을 처방해 복용하기 시작했다[34,]. 음식 소화가 잘 되지 않고, 하루에 대변을 오전, 오후, 저녁, 그리고 한밤중에 이르기까지 총 4번씩 보았다. 뱃속에 가스(瓦斯)가 차기 때문이었다[35,]. 3월 3일부터는 처방을 대보원전(大補元煎)으로 바꾸고 배꼽 아래 위치한 혈자리 관원(關元)에 하루에 5장씩 뜸을 떴다[36,]. 대보원전은 이전의 대보탕과 비슷했지만 택사, 적복령을 빼고 산약, 산수유, 구기자를 추가한 처방이었다. 설사를 막지는 못했다. 3월 17일 부강탕(附干湯)에 향부자를 제거하고 백출과 인진호를 더하는 쪽으로 변경됐다[37,]. 그리고 3월 20일 물설사(水泄)가 겨우 줄어들었다[38,]. 관원에 뜸을 뜨던 치료는 3월 9일부터 3월 26일까지 이어지다가 기운을 과도하게 소진시켜 소변을 더욱 자주 보도록 만든다고 여겨져 중단됐다[39].
자신의 병증이 황달임을 알게 된 1938년 12월부터 생식을 시작하기로 결정한 1939년 5월 25일까지의 기록 중 처방이 변경되고 있는 날짜와 방제의 구성 약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표 1). 5개월간 매일 같이 한약을 복용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황달 치료에 인진호가 좋다는 것은 의학 고전 『상한론』 이래 한의계의 정설이었다. 김종일(金鐘壹), 이수환(李守煥) 등을 통해 인진호를 활용한 치료 경험담을 전해 들었지만[40,], 자신은 위장이 약해 인진호 만을 복용할 수는 없다며 대보탕 중심의 처방을 선택했다[41,]. 한편 황달로 인해 발생한 설사를 멈추기 위해 열성 약물(熱藥)인 부자, 건강을 지속적으로 복용했다. 그래도 설사가 완전히 멎지는 않았다. 김광진 스스로도 의아해했다[42]. 이후 복용한 유삼산(硫參散), 삼부탕(參附湯), 금궤신기탕(金匱腎氣湯) 등은 여전히 열성 약물로 구성된 설사 치료 방제들이었다.
2) 소화불량, 부종에 대처하기 위한 생식 그리고 에지산(1939년 5월-1940년 6월)
황달의 경우 단단하고 질긴 음식과 지방이 많은 음식을 피하고 죽, 묽은 고깃국, 차, 우유 등을 복용하라는 것은 의생들의 서양 의학 교재인 『의방강요』중에 실려 있던 정보였다(朝鮮總督府警務總監部衛生課, 1918: 68). 김광진 역시 1938년 12월부터 반년 동안 이어진 투병 생활을 통해 황달과 음식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체득하고 있었다[45,]. 1929년 1월 27일 우측 배꼽 부분이 뚜렷하게 팽대되고 누르면 아픈 것이 전과 달랐다며 복부 변화에 주목한 이래[46,] 음식 섭취 후 변화하는 복부 증상과 대변 양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교묵(蕎墨) 때문에 복부 팽창이 발생한 것은 아닌지[47,] 쑥떡이 소화되지 않아 설사가 발생한 것은 아닌지[48,] 계곽갱(鷄藿羹)과 대두채(大豆菜)가 소화 되지 않아 대변을 하루에 4번씩 보는 것은 아닌지[49,] 음식을 과도하게 먹어 대변 횟수가 증가한 것은 아닌지[50,] 등을 살폈다. 4월 27일부터는 복부 검사를 뜻하는 ’검복(檢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51]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우선 복부 변화부터 챙겼다.
마을에서 나와 같은 병을 앓다가 죽은 사람이 3명이었다. 정성진, 서상윤, 임원재가 그들이다. 저들은 죽었는데 나만 홀로 살아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지식에 달려 있다. 이 병과 매일 세끼 음식은 절대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음식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알지 못한채 약만 복용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이다. 4월 26일부터 밤에는 음식을 먹지 않고 아침 5-6시면 빈속의 배를 진찰해 그릇 모양과 몽둥이 모양이 높아지는지 낮아지는지에 따라 음식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살폈다[52].
미음으로 음식 섭취량을 줄이고[53,] 닭고기 회를 먹어가며 설사 조절을 시도했던[54,] 김광진은 5월 25일 급기야 생식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51세부터 66세까지 흰쌀을 갈아 먹으며 천식(喘滿)을 치료하던 이재숙(李在淑) 노인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55,]. 화식(火食)을 물리고 동화약수(桐華藥水)에 쌀을 담근 뒤 갈아서 만든 생쌀즙(生米汁)을 먹기 시작했다. 닭고기회가 설사를 줄이는 데 효과를 보이는 것 같자 소고기도 회로 먹기 시작했다[56,]. 6월 5일 아침, 문득 생식으로 황달을 치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57,]. 이후 소금에 절인 청어[58,], 배추 멸치국[59,], 생미나리[60,] 등도 시도해보았다. 효과는 썩 좋지 않았다. 아침을 먹다가 설사를 하기도 하고[61,], 낮잠을 자다가 갑작스럽게 설사가 나와 옷을 버리기도 했다[62,]. 찹쌀즙을 먹어보기도 하고, 오이를 먹어보기도 했다[63,]. 날 것으로 생식을 하자니 설사와 복통이 괴로웠고, 익혀서 숙식을 하자니 황달이 심해지면서 부종이 발생하는 것이 괴로웠다[64,]. 지속적으로 설사를 한 탓인지 기운이 없고 정신이 혼미했다[65,]. 그래도 꿋꿋이 생식을 이어갔다. 개고기 탕[66,], 우유[67,], 토마토[68,], 돼지고기탕[69,], 삼계탕[70,], 우혈갱(牛血羹) [71,], 대구(大口魚) [72,], 현미[73,], 방합(䖫) [74] 등이 시도됐다.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은 소의 피로 만든 우혈갱과 현미 가루였다.
9월 처음 우혈갱을 먹으면서 대변이 1일 2회가 되었고, 지난 13일 오후 3시에는 단단한 대변을 1회 보았다. 14일 오후 3시까지는 만 24시간 동안 대변이 전혀 나오지 않아 과한 것이 아닌가 우려할 정도였다[75].
흰쌀을 현미로 대체하게 된 것은 황달 치료를 위해 56세부터 8년 동안 생식을 진행했던 김덕숙(金德淑) 노인을 만나면서부터였다[76,]. 12월 28일 저녁부터 김덕숙 노인의 가르침에 따라 현미가루 6숟가락과 흰 김치(白沈菜), 말린 고기(乾脯) 만으로 한끼 식사를 마쳤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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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으로 현미 가루 아홉 숟가락을 먹고 방합(䖫) 4개를 먹었다.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몰라 두려웠다. 밤이 되자 소변은 붉어지고 양은 적게 나왔다. 과연 해로운 음식이었다. 이후 생식법에 따라 음식을 먹으며 몸을 실험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되겠다[78].
이제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면(氣降)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음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도 알았다. 징험해보니 설사를 하면 기운이 아래로 까라진다. 대구는 설사를 일으키지만 명태는 설사를 일으키지 않는다. 채소 중에서 시금치, 부추, 파는 설사를 일으키지 않지만 미나리는 많이 먹으면 설사를 일으킨다. 술과 흰죽은 상반된다. 기운이 위로 올라가면(氣升) 정신이 맑아진다(神悅). 쌀가루(米粉)는 기운을 오르내리도록 하는 것이 완전하다[79].
김광진이 2년 동안 황달 투병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혹독한 음식 통제에 있었다[80,]. 그는 무려 1년 동안 생식을 유지하며 설사와 부종을 통제했다. 그에게 있어 음식은 또다른 치료 약물이었다. 주변에서 얻은 이야기를 토대로 가짓수를 조심스레 늘려가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이로운지 또는 해로운지를 탐색했다. 판단 기준은 복부 증상 및 소변, 대변의 변화였다. 또 위의 두 번째 인용문처럼 개별 음식이 일으키는 신체 반응과 자신이 세운 승강 이론을 집요하게 결부시키고자 했다. 의학을 전공한 아들 김영소는 날 음식이 오히려 해를 일으킨다며 생식을 반대했지만[81,] 김광진의 닭고기 회 섭취는 사망하기 두 달 전인 1940년 6월 27일[82,], 현미 가루 복용과 우혈(牛血)의 섭취는 6월 30일까지 이어졌다[83].
앞서 언급했다시피 김광진이 생식을 시작했던 계기는 설사 때문이었다. 소화력이 떨어져선지 추어탕의 짜고 매운 양념이나 개고기탕의 채소나 무청과 같은 자극적이거나 단단하고 질긴 음식을 먹으면 바로 설사를 했다[84,]. 설사를 하면 기운이 빠졌다[85,]. 생식을 하면서 설사는 줄어들었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복부 중에 늘 몽둥이 또는 그릇을 엎어둔 것 같은 간장과 담낭의 팽창 증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소화는 여전히 잘 이뤄지지 않았다. 더구나 설사가 멎게 되자 상하지, 음낭 등에서 부종이 발생했다[86,]. 화식(火食)을 할 때는 간장 부근에서 팽창감이 느껴지면 곧바로 부강탕(附干湯)을 복용했지만 생식을 시작한 이상 변동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87,]. 물약(水藥)인 한약 전탕액이 배속을 불안하게 만들어 설사를 유발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88]. 이러한 김광진의 고민을 덜어준 것이 바로 에지산(エヂ散)이었다.
음낭 부종이 거의 사라졌고, 피부 인설(皮鱗)도 사라졌으며, 두 발등에 부종도 없다. 이것은 에지산(エヂ散)의 효능이다. 밤에 잠들기 전 소변색이 희고 양이 많아진 것을 보니 음식을 소화시키고 수분을 배출시키는 효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지산은 황달의 대증 치료에 꼭 필요한 약물이다[89].
배를 살펴도 그릇 엎어둔 것 같은 그리고 몽둥이 같은 것이 노출되지 않고 눌러도 아프지 않으니 에지산의 효능이 찬탄할 만하고 놀랄 만하다[90].
에지산은 김광진이 1939년 7월 13일 처음 만들어 복용하기 시작한 소화제(消化藥)로 1939년 9월 9일 스스로 ‘에지산(エヂ散)’이라고 명명했다. 1940년 2월까지 거의 매일 같이 복용했으며, 1940년 7월 14일까지 사망 한 달 전까지 복용이 이어졌다. 그러는 도중 “이제 병이 다 나았다” [91]는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1월에서 8월말까지 대변을 하루에 3-4회 보고 살이 빠지고 머리카락도 빠져 사람들이 나보고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감개무량하다. 9월 들어 서늘한 바람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우혈갱을 먹은 뒤 대변이 점차 굳어져 3번 보던 것이 2번, 2번 보던 것이 1번, 1번 보던 것이 24시간 동안 대변을 보지 않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부종은 간간히 생겼다. 단단하고 질긴 음식을 물리치면서 조절하고 치료한 효과가 이와 같았다[92].
생식을 시작하며 설사가 줄고 에지산의 도움으로 소화 불량과 부종 등에 대처할 수 있게 되자 다리에 힘이 붙었다. 걸을 수도 있었고 도랑도 뛰어넘을 수도 있었다[93,]. 하지만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여전히 어딘가에 좋은 약(良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94].
3) 부종, 설사의 악화 그리고 사망(1940년 6월-1940년 8월)
1940년 4월 8일, 동산병원 손인식(孫仁植), 천종화(千鐘華)에게서 고무추를 쓸개 부위에 도달하게 해 담즙을 끌어내는 시술을 받았다. 담즙이 축적되어 쓸개가 팽창하는 바람에 복부 중에 그릇 엎어둔 것 같은 그리고 몽둥이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95,]. 끌어낸 담즙 중에 간디스토마(간흡충, Clonorchis sinensis) 충란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다[96,]. 김광진의 연보를 기록한 김영소는 아버지의 질병을 간디스토마에 의한 황달이었다고 기재했지만(김광진, 2013: 481) [97], 4월 8일 이후, 물론 그 이전에 작성된 『치달일기』 중에도 간디스토마에 대한 언급은 전혀 등장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김광진이 간디스토마를 황달의 원인으로 인지했는지 또는 간디스토마를 치료하려했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1940년 4월 19일 무렵 늑막염 증상이 나타났다. 가래 기침이 일고, 갈빗대 부위에 통증과 부종이 발생했다[98,]. 『의방강요』를 살펴보며 건성 늑막염일 것이라고 추측하고[99,], 외용약인 옥도정기(沃丁)를 발랐다[100,]. 5월 12일에는 남산의원(南山醫院)에서 X선 촬영을 한 뒤 원장 김재명(金在明)에게서 피하늑간농양은 아니며 모세관과 폐문임파선이 좋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카피라루산(カピラルサン)과 호루몬(ホルモン) 주사를 맞았다[101,]. 5월 26일 밤 10시 그 날의 세 번째 대변을 보았다. 물 설사였다. 밤 12시, 12시 10분 물 설사가 연달아 나왔다. 급기야 구토까지 발생했다[102,]. 다음날 복부에 그릇 엎어둔 것 같은 그리고 몽둥이 같은 것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통증도 무척 심했다[103].
6시 15분 발등과 좌측 장딴지, 음낭의 부기가 더욱 심해졌다. 슬프다. 내가 이것을 고칠 수 있을까? [104]
다시 한약 복용이 시작됐다. 부온탕(附溫湯), 위관전(胃關煎), 승양탕(升陽湯), 십전탕(十全湯), 강부육군자탕(干附六君子湯), 지황탕(地黃湯), 신기탕(腎氣湯), 팔미탕(八味湯), 부강향부탕(附干香附湯) 등이 투여됐다. 간간히 에지산도 복용하고, 포도당 및 호르몬 주사도 맞았지만 증상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갔다.
12시 한밤중에 설사 부종의 원인에 대해 깨달았다. 6월 15일 설사가 시작되어 7월 정도에 설사가 멎었었다. 지금 부종이 발생하는 것은 소변이 잘 나가지 않기 때문이고, 하초가 허약해지고 차가워졌기(下焦虛寒) 때문이다. 육미탕에 부자 2돈을 쓰고, 인진부자탕에 인진과 부자를 각 1냥으로 동일하게 해야 한다. 오랫동안 설사를 하면서 몸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실제로 하초가 허약해지고 차가워지면 소변이 잘 나가지 않게 된다.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 연소시킬 수 있는 열(燃燒熱)이 발생해 소년처럼 소변이 잘 나가게 된다. 나는 가만히 앉아만 있다 보니 위장이 약해졌다. 몇 점의 고기에 채소만 복용할 뿐이니 어디서 연소열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105]
7월 4일부터는 아침에는 따뜻한 밥을 배불리 먹고 저녁에 쌀가루를 2-3 숟가락 먹으며 오전에는 고기를 먹고 오후에는 채소를 먹는 것으로 식이 요법을 전환했다[106,].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무거워 움직이기 힘들었고 정신이 혼탁하고 눈앞이 혼미해 주변 사람과 이야기 나누기도 힘들었다[107,]. 13일 새벽 2시 45분 첫 번째 설사, 아침 5시 반 두 번째 설사, 아침 7시 세 번째 설사를 보았다. 강부육군자탕을 복용했지만 네 번째 설사가 나왔고 정오에 다섯 번째 설사, 오후 1시 반 여섯 번째 설사, 오후 3시 15분 일곱 번째 설사, 밤 10시 11시 12시 여덟, 아홉, 열 번째 설사를 보았다[108].
1938년 겨울, 자신이 황달에 걸렸음을 확인한 김광진은 초기에는 한약으로 치료하려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약물 대신 황달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여러 가지 음식을 섭취하며 황달에 수반되는 증상인 부종과 설사를 관리했고 심지어 생식까지도 감행했다. 투병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포도당 주사를 맞았고, 황달, 변비, 통증 치료를 위해 몇 가지 서양 의약품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깊이 의존하지는 않았다. 다만 에지산 만큼은 증상 관리를 위해 애용했다[111]. 1940년 5월 복부 및 설사 증상이 악화되어 다시 한약을 찾았지만 걷잡을 수 없었다. 2년에 걸친 의생 김광진의 황달 투병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4. 김광진의 황달에 대한 인식과 처치
황달과 그에 수반되는 부종, 설사 그리고 복부 증상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지면 알 수 있기 때문에 병증 인식을 위해 반드시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증상 변화를 포착하고 그 기전을 파악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그가 어느 정도의 의학 지식을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떤 의학적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가 드러나게 된다.
『치달일기』를 기록하기 이전이었던 1936년, 김광진은 장딴지 근육의 통증과 마비감, 힘이 없어 땅에 주저앉을 듯한 병증을 앓았다. 의생 김광진과 김관제는 모두 습비(濕痹)로 판단했다. 김관제는 기운을 소통시키고 습기를 제거하는(行氣治濕) 약을 처방했다. 반면 대구에 있던 서양식 의원인 남원(南院)의 김재명과 동원(東院)의 한 여의사는 모두 각기(脚氣)로 진단했다. 그리고 김재명은 빠라스토린(パラストリン) 주사를 처방했다. 한약을 복용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김광진은 이틀에 걸쳐 빠라스토린 주사를 맞았다[112,]. 하지에서 발생한 한 가지 병증을 두고 한의학과 서양 의학 간에 병증에 대한 인식과 치료법 상의 차이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서로 간에 경쟁을 하고 있던 것이다. 황달은 조금 달랐다. 김광진이 학습했던 『동의보감』 등의 한의학 저작들은 황달의 원인을 습열과 소화되지 않고 정체하는 숙식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황달과 쓸개즙과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살피지 않았다[113,]. 명대의가 장제빈이 담황(膽黃)을 언급하며 황달과 담액(膽液)을 연관시키기는 했지만 해부생리학적인 지식에 기반한 것은 아니었다(张伯臾, 1997: 392-393). 따라서 김광진은 황달과 쓸개즙과의 관련성을 『의방강요』를 비롯한 서양 의학 저작을 통해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朝鮮總督府警務總監部衛生課, 1918: 65-66). 다만 그는 황달로 인해 발생한, 설사, 부종과 자신이 수립한 승강(升降) 이론을 결부시키며 쓸개, 담(膽)에 대한 새로운 풀이를 제시했다.
『내경』에서는 십이장(十二臟) 모두가 담(膽)에서 결단을 취한다고 했는데, 이제 그 이유가 담이 몸의 저울추에 해당하기 때문임을 알았다. 저울대(權)는 저울추가 있기 때문에 오르락내리락(升降) 할 수 있다. 이제 나의 담병(膽病)이 저울추의 병임을 알았다. 승강에 문제가 발생하여 설사를 하지 않으면 붓는 것이다. 기운이 위로 올라가면 화기(火)가 위로 떠올라 자주 분노하고 건망하게 된다.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 수기(水)가 아래로 내려가면 정신이 맑아진다[114].
특기할 만한 것은 승강의 원동력으로 담(膽)을 지목한 것이다. 기운의 승강운동으로 몸의 생리 및 병리 기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김광진은 심(心), 비위(脾胃), 명문(命門) 등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논의와 달리[115,] 담을 전면에 내세웠다. 결단(決斷)을 담당하는 장기로 간주되던 『황제내경』의 고전적인 논의로부터 벗어나[116], 설사, 부종, 분노, 건망 등을 일으키는 중요 장기, 곧 저울추로 인식했다.
1933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이와이(岩井) 내과 교실에서 편찬한 학술 잡지 『임상내과학』 중에는 44세 남성 환자의 황달 치료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 환자는 황달과 가려움을 주로 호소하며 입원한 뒤, 혈액·위액·담즙에 대한 이화학적 검사, 위장 및 창자에 대한 엑스선 검사 등을 거친 이후 간디스토마에 의해 유발된 기계적 황달로 진단을 받았다. 치료를 위해 구충의 효과를 지닌 아메친(アメチン) 및 안티몬(アンチモン) 제제를 사용했고, 담낭과 담관의 반사 작용을 일으켜 디스토마 충란을 배출시키는 십이지장 존데(ゾンデ) 요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입원 1달 만에 호전되어 퇴원할 수 있었다(柳錫均, 1933: 29-33). 위의 사례는 간디스토마 특효약이 개발되기 이전 1930년대 식민지 조선 최고의 병원에서 이뤄진 치험 사례 중 하나였을 것이다. 김광진 역시 동산병원에서 고무추를 쓸개 부위에 도달하게 해 담즙을 끌어내는 시술을 받았다. 『의방강요』를 비롯한 서양 의학 저작 중에 기록된 담즙과 황달과의 관련성을 지식이 아닌 온몸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광진은 자신의 황달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서양 의학의 내과 치료를 불신하고 있었다. 사실 한의학은 내과 질병 치료에 뛰어나며 서양 의학은 외과 질병 치료에 뛰어나다는 것은 김광진을 비롯한 일제 시기 다수의 의생들이 지니고 있던 통념이었다(김영훈, 2001: 460; 張基茂, 1915: 13).
서양 의술(洋醫術)은 외과 병증을 치료하는 양의(瘍醫)가 발달하여 사용하는 약물이 모두 광물질, 금석 종류이다. 한방 외과에서 다섯 가지 독성을 지닌(五毒) 금석 재료를 전문으로 사용하는 것과 의미가 동일하다. 양의(洋醫)는 외과 병증은 치료할 수 있지만, 내과 병증은 돌아볼 가치조차 없다. 금번에 달증(疸症) 치료에 시험해보면서 양방을 한 푼도 신용할 수 없음을 알게 됐다[117].
다만 서양 의학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은 발병 초기에 국한되어 있었다. 김광진은 황달, 변비, 복통 및 협통 치료를 위해 메다포린(メダポリン) [118,], 모르핀(モヒ) [119,], 토안민(土安民) [120,], 카피라루산(カピラルサン)과 호루몬(ホルモン), 칸(カン) [121,] 등을 주사 맞았고[122,], 마게네시야(マゲネシヤ) [123,], 에지마쿠산(エヂマク散) [124,] 등의 양약을 복용했을 뿐 아니라 포도당의 경우 1939년 1월 10일부터 사망 한 달전인 1940년 7월 14일까지 26차례 정도 정맥 주입했다. 일기 중에 개별적인 서양 약물 복용과 주사제 주입을 누가 처방하고 지시했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치달일기』 중에 설사를 치료하는 양약 광고지와 한약 처방전이 별도로 첨부되어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그림 2) 김광진 스스로 한의학 뿐 아니라 서양 의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의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광진의 황달 치료에서 가장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에지산(エヂ散)의 운용이다. 그는 에지산의 효능을 “부자(附子), 유황(硫黃) 만큼 대변을 부드럽게 만들어 소통시킬 수는 없지만 소화를 돕고 수분을 배출시키는 효능은 뛰어나다” [125,]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스스로 직접 만들기도 하고[126,] 셋째 아들 제록(濟錄) [127,] 또는 손자 방영(邦榮)과 함께 만들거나[128,] 만들게 시키는 등[129,] 제작과 관련된 총 11차례의 기록이 남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치달일기』 중에는 에지산이 어떤 약물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또 어떻게 만드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남겨져 있지 않다. 에지산을 만들려했는데 “안식향산이 부족했다” [130,], “셋째 아들 영삼(永三)이 안식향산을 사왔다” [131,], “괴로움을 견뎌가며 당재(唐材)를 골랐다” [132,], “에지산이 없어서 에지마쿠산(エヂマク散)을 복용했다” [133,]는 기록을 통해 양약과 한약이 혼합된 약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1900년을 전후로 국내에서는 동화약방(同和藥房)·제생당(濟生堂)·화평당(和平堂) 등의 대형 약방이 출범했다. 동화약방에서는 인소환(引蘇丸)·백응고(百應膏)·활명수(活命水)·개안수(開眼水) 등 한약 재료를 기본으로 하면서 양제(洋製)와 신법(新法)을 혼합한 약물을 제조 및 유통하고 있었으며, 활명수는 한약재인 아선약, 계피, 정향, 현호색, 육두구, 건강, 창출, 진피, 후박 그리고 서양 약물인 클로로포름과 멘톨을 배합해 판매하던 대표적인 신약 중 하나였다(박윤재, 2013: 240, 247, 250) [134]. 충분한 정보가 확보되어 있지는 않지만 에지산 역시 위의 흐름에 편승한, 한약과 양약을 혼합한 신약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 김광진이 진료하던 침산동 한의원에는 한약 외에 신약을 진열하는 신약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의생 시험을 준비하면서 기본적인 서양 의약 지식을 습득했고 신문이나 의학 잡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둘째 아들 김영소를 통해 새로운 의약 정보를 받아들이기도 했다(박지현, 2016a: 176-177). 김광진의 의학 연구 기록인 『해악의연(海岳醫硏)』에는 서양 의학 병명, 병증 설명 말미에 사용 가능한 한의학 방제가 수록되어 있지만 한약 외에 양약 또는 에지산과 같은 한약과 양약을 혼합한 신약을 환자에게 투여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저 부인의 흉통 치료를 위해 에지산을 주었다는[135] 간단한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세균학은 근래 들어 알려지기 시작해 세균의 범주에 속하는 병들은 세균으로 치료할 수 있다. 그 외 세균에 속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앞 사람들의 논의가 어찌 모두 틀리고 허망하기만 할 것인가. 그리고 지금 사람들의 견해가 어찌 홀로 뛰어날 수만 있겠는가. 풍한병(風寒病), 어혈병(瘀血病)과 같이 세균에 속하지 않는 질병들은 옛 처방(古方)을 찾아본다면 무한한 쓰임이 있을 것이다[136].
과거 의사들은 소변이 소장의 아랫부분에서 분리된다고 여겨 설사가 발생하면 소변을 분리해내는 것을 주된 치료 방법으로 여겼다. (중략) 소변을 분리시켜 설사를 멎게 하는 것은 옛 의사들이 누차례 경험했던 것이기에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소변은 이미 승강작용을 통해 변화가 되어버린 것인데 소변을 분리시켜 설사를 그치게 한다는 이 논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중략) 소변을 배출시켜 신장과 방광에서 소변으로 이어지는 부위를 말려버린다면, 대장 중의 수분이 어떻게 홀로 아래로 내려가 설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소변을 배출시켜 설사를 그치도록 한다는 것은 이러한 이치인 것이다. (중략) 『소문』, 『난경』, 『영추』 중에는 앞이 안보이는 맹인이 더듬어가는 듯한 논의가 말할 수 없이 많이 실려 있다. 초창기 의학은 그러할 수 밖에 없었다[137].
전통 의학을 학습하고 실제 임상 의료를 수행했던 김광진이 지니고 있던 한의학과 서양 의학에 대한 태도는 대체로 위의 인용문과 같았다[138,]. 우선, 당대에 새롭게 소개되고 있는 과학, 의학의 새로운 성취를 존중하고, 동아시아의 의학 경전 중에 기재된 의학적 오류와 한계를 인정했다. 한센병, 폐결핵, 콜레라, 성홍열, 두창, 마진 등의 질병이 모두 세균과 관련되어 있음에 대해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139,] 경성제대 오자와(大澤) 교수가 발표한 뜸에 대한 실험적 성과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140,]. 그렇다고 해서 과거 의사들이 누차례 경험했고 지금 자신도 활용하고 있는 의학적 경험을 홀시하지는 않았다. 풍한병(風寒病), 어혈병(瘀血病) 등 여전히 설명되지 못하고 있는 전통 의학의 치료 영역과 그 가능성을 존중했다. 그리고 서양 의학의 새로운 성과를 활용해 생리, 병리 및 치료 이론과 관련된 한의학 저작의 오류를 혁신하고자 했다(오재근, 2016: 102-108). 두 번째 인용문 중에는 소변이 소장 아랫부분에서 분리되므로 소변을 배출시키면 설사를 치료할 수 있다는 한의학 치료법과 서양 의학 지식을 근거로 그 오류를 수정하고자 했던 김광진의 의학관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서양의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동아시아 전통 의학과 서양 의학 지식을 병렬하는 수준에 그쳤던 도진우의 『동서의학요의』를 넘어 적극적으로 동서 의학의 이론적 결합을 시도했던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김광진의 의학은 서양 의학을 전공한 그의 아들 김영소에 의해 고전을 연찬한 결과 새로운 의론을 세우고 후세를 계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김영소, 1985: 3).
5. 에필로그 : 일제 시기 한의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이상과 백석 그리고 김광진은 모두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했다. 폐결핵으로 고생했던 시인 이상은 서양 의약 치료를 받으며 환자의 용태, 수술대, 평면경 등에 대한 시를 남겼고, 향토와 고향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시인 백석은 한약 육미탕을 소재로 한 시를 남겼다(소래섭, 2019: 85). 김광진은 이상과 백석이 남긴 서양 의학과 한의학 두 가지 의료 행위를 동시에 실천했던 의생이었다. 환자 치료를 위해 자신의 장기인 한의학을 활용했을 뿐 아니라 서양 의학을 학습해 한의학 이론의 혁신을 꾀하기도 했다. 그 역시 병마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다. 생애 말년, 자신을 괴롭히는 황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든 치료 수단을 동원했다. 끊임없이 음식을 테스트 했고, 현미 가루 만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부자와 같은 독성이 강한 한약을 복용했을 뿐 아니라 오한에 시달리며 포도당 주사를 맞고 괴로움을 참아가며 인위적으로 담즙을 제거해보기도 했다. 심지어 한약과 양약을 혼용한 새로운 약물, 에지산(エヂ散)을 제작해 복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황달을 앓던 의생 김광진의 몸은 일제 시대 가용할 수 있던 모든 의료 자원이 집약되던 치료 현장이었다. 자신의 몸을 실험 도구까지 사용하던 목숨을 건 그의 도전은 의료 행위에 대한 단순한 보상, ‘돈’을 준다고 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앞둔 의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일제 시대의 의생이었던 그에게 의사에 관한 규정이 준용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광진은 별다른 제약 없이 의약품, 심지어 모르핀까지도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의 조건을 활용해 2년 간 투병했다. 그 사이 황달을 앓았던 의생 임홍재는 개복 수술을 받고 사망했으며[141,], 한 동네에서 같이 살던 정성진, 서상윤, 임원재 역시 세상을 떠났다[142].
서양 의학의 진작과 한의약의 궁극적 부정은 일본 제국의 일관된 논리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한의약을 점진적으로 폐지시키겠다는 것이 바로 일본 식민 정부의 한의학 정책이었던 것이다(신동원, 2002: 345). 불충분한 의사 숫자, 농촌 지역 조선인들의 의생에 대한 의존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던 일본 식민 정부는 위생 행정에 동원하기 위해 의생들에게 서양 의학 기초 지식을 가르쳤다. 그 의도가 의생의 전문성을 제고하거나 의술의 질과 신뢰성을 보장하려는 것에 있지는 않았다(황영원, 2018, 73-99). 어쨌든 의생이 이미 되었거나 그리고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의방강요』와 같은 서양 의학 교재를 필수적으로 학습해야 했다(신규환, 2008: 114-115). 강요된 동서의학의 결합이었다. 그렇지만 의생의 자연 소멸을 기획했던 식민 정부의 의도는 적중하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일본 제국이 패망했고 일본 식민 정부 역시 몰락했다. 이제 한반도에는 서양 의학을 전공한 의사와 함께 한의학은 물론 기초적인 서양 의학 지식도 학습한 의생이 남겨져 있었다. 한편 광복을 이룬 대한민국 정부는 이원적 의료 체제를 선택했다. 새롭게 제정된 의료법은 한의사의 존재를 인정하고(이현지, 2008: 102-145) 대학 교육을 통한 한의사의 배출은 허락했지만, 한의사들이 서양 의학에서 유래한 치료 도구 및 의약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의학적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한 일종의 의학적 퇴행이었다. 의생 김광진이 온 삶을 통해 보여준 의학적 성과 뿐 아니라 식민지 한반도에서 수십년 동안 진행되었던 의료 통합의 프로세스는 수면 아래로 침잠해 들어 갔다.
일제 시기 한의학을 해석하는 지배적인 관점 중의 하나는, 일본 식민 정부가 제국과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서양 의학을 선택하고 활용했으며 식민지의 전통 의학이자 민족 의학이었던 한의학을 탄압했다는 것이다(이종형, 1978: 283-288) [143,]. ‘서양 의학, 일제 식민 정부 vs. 전통 의학, 피지배 민중’이라는 대립 구도는 광복 이후 현재까지 주변 의학으로 평가 절하 되어 온 한의계의 현재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논리적 수사(修辭)는 될 수 있지만 근대 이후 숨가쁘게 변화해온 한국 의료의 다양한 변화상을 충실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서양 의학을 전공한 의사들 역시 일제 시대, 광복 이후, 한국전쟁, 경제 부흥기 내내 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희생하고 노력했다. 말라리아, 신증후군출혈열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질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을 뿐 아니라(여인석, 2011: 53-82; 신미영, 2017: 95-124) 2006년 11월 7일에는 서태평양 지역에서 최초로 홍역을 퇴치했다는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이종구·최원석, 2008: 16). 더욱이 일본 식민 정부의 의도는 의생, 전통 의학의 자연 소멸에 있었지만, 김광진을 비롯 한 일부 의생들은 옛 의학(舊醫)과 신의학(新醫), 양의학(洋醫)과 한의학(漢方)이라는 대립 구도를 넘어 동서의학 결합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실제 한의학을 전공한 의생 김광진은 아들 김영소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보내 서양 의학을 전공한 의사로 키워냈다. 최신식 의료 기구를 구비한 병원을 개업해 한약부(漢藥部)는 자신이 맡고 양약부(洋藥部)는 아들이 맡는 것이 김광진의 본래 계획이었다(박지현, 2016a: 178). 김광진의 죽음과 함께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됐지만, 아들 김영소는 아버지 김광진의 전통 의학 유작을 정리해 그의 새로운 의학 이론, 의학승강론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도록 이끌었다. 구한말에서 일제 시기까지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무지개’와 같던 기간으로 단순 이원론으로 이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2019년 다시 한번 의료 일원화 논쟁이 일고 있다[144,]. 이 논쟁은 조선 정부에 의해 잠시 시도되었다가(신동원, 1997: 76-104; 박윤재, 2005: 38-47) 일제 시기 식민 정부에 의해 강제 진행한 동서 의학 결합의 연장선 상에 놓여 있다. 서양 의학과 한의학은 오랜 기간 다른 문명권에서 발전해오며 나름의 학문적 논리를 구축한 만큼 그 차이를 억지로 좁힐 수 없다. 다만 두 의학이 학문적 또는 임상적 필요에 의해 협력하거나 경쟁할 수 있는 중간 지대는 필요하다. 근대 시기 동서의학을 넘나들며 목숨을 건 투병을 이어갔던 김광진의 삶이 논쟁의 시금석이 되기를 고대한다.
Notes
김영훈의 생애, 의학 사상, 저술, 진료 기록, 빈용 방제 등에 대해서는 상세한 분석이 이뤄져 있다. 관련 연구 목록은 김동율·정지훈·차웅석의 연구 참조(김동율·정지훈·차웅석, 2015: 143-158). 위의 목록에 누락된 것으로는 신동원과 오준호 등의 연구가 있다(신동원, 2014: 850-855; 오준호, 2016: 63-74). 김영훈의 퀴닌 활용은 그의 진료기록를 분석했던 세명대 김동율 교수 전언에 의거했다.
皮國立은 최근 저작에서 1980년대 이후 대만과 중국에서 발표된 중서의학융합 관련 연구성과를 정리해 소개한 바 있다(皮國立, 2006: 7-17).
장기무에 대해서는 박형우·박윤재, 「이런 의사도 있었다… “한의학이여, 부활하라!”」 『프레시안』 2009년 9월 3일 기사 참조. http://www.pressian.com/. 검색일: 2019. 5. 1.
김광진의 황달 투병기 1권은 『치달일기(治疸日記)』, 2권은 『치병일기(治病日記)』로 표제되어 있다. 1권은 1938년 12월 16일부터 1939년 10월 23일, 2권은 1939년 10월 24일부터 1940년 8월 5일까지의 연속 기록이나 표제 변경에 대한 설명은 실려 있지 않다. 각주에서는 『치달일기』, 『치병일기』를 구분 기재해 출처를 표기했지만, 본문에서는 독자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치달일기』로 통일했다. 『치달일기』, 『치병일기』 필사본은 모두 학교법인 춘해학원 춘해보건대학교 역사관에 소장되어 있다.
논문 작성 이후 익명의 심사위원으로부터 『의학승강법』 분석 논문(오재근, 2016)과의 차이를 기술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의학승강법』 분석 논문은 승강론으로 대별되는 김광진의 의학 이론을 주로 분석한 반면, 이번 연구에서는 임상 의료 기록인 『치안』, 『치달일기』를 매개로 1930년대를 살아간 의생 김광진이 실제 환자를 어떻게 치료했는지 그리고 황달 투병을 하는 과정에서 동서의학은 어떻게 활용됐는지를 사례 분석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의학적 추론과 실제 임상 의료에서의 적용 여부는 의학사 연구의 고전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논문 후반부의 동서의학에 대한 인식과 결합 부분은 『의학승강법』 분석 본문의 성과를 기반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혀둔다. 중국 대만의 의사학자 리젠민(李建民)은 성생활과 관련된 약방(藥方)을 수집한 청말의 문인 왕도(王韜)의 일기를 분석해 개인의 질병사, 신체사 또는 사대부의 생활사 연구 성과를 소개한 바 있다(李建民, 2005: 37-47).
황영원은 김광진과 같은 사례는 드물기 때문에 이를 전체 의생의 상황으로 일반화하기까지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황영원, 2018: 12).
1938년 이호진, 김관제, 송병학은 경북의생회 이사를 역임했다(김남일, 2012). 1940년 4월 4일 임홍재의 사망으로 김관제가 임시회장에 임명되었다가 4월 15일 투표를 통해 이호진이 경북의생회 신임 회장으로 선출됐다(『治病日記』 권2 1940년 4월 15일). 이후 이호진은 대구한의사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박훈평, 2017: 240).
김광진의 저술과 그에 대한 분석은 박지현·이훈상의 연구 참조(박지현·이훈상, 2015, 2017).
『治案』 34. 夏節頭身痛泄瀉或惡寒流汗如瘧狀. 丁卯八月, 有女年六十, 頭身痛泄瀉, 此寒濕之病也. 用除濕羌活湯, 加乾附戈半, 朮伏甘一戈, 艸久橘皮五分, 二貼而安. 此余用除濕羌活湯之始也. 又李柄弼子, 頭疼惡寒流汗如瘧狀, 亦以此方, 加參附艸果何首黃芪一戈, 五貼而安. 其後累用皆驗, 因思人生兩間, 冬則傷於寒, 夏則傷於濕.
『治案』 47. 耳鳴耳聾. 戊辰十月, 李文熙, 耳鳴已滿一朔, 今鳴止而聾已五六日, 又有感冒氣, 以敗毒散加溫腎材, 服三貼, 無驗. 此腎水枯涸, 虛火上炎也, 以加減啓竅湯治之. 初服三貼, 則耳更鳴, 更服七貼, 耳聾全愈. 其後此人累發此症, 服此方則必愈. 此辨證奇聞方, 眞神妙之劑.
『治案』 23.
『治案』 39.
『治案』 39.
『治案』「調氣法」.
『治案』 79.
구체적으로 『치안』 21의 신비탕(神秘湯)은 『동의보감」「수천(水喘)」, 22의 가미소요산(加味逍遙散)은 「해혈수혈타혈각혈(咳血嗽血唾血咯血)」, 52의 소감패독산(消疳敗毒散)은 「음식창(陰蝕瘡)」, 56의 연교음(連翹飮)은 「제창(諸瘡)」, 66의 삼소온폐탕(蔘蘇溫肺湯)은 「풍한천(風寒喘)」, 76의 화담청화탕은 「조잡(嘈雜)」, 78의 영계출감탕(苓桂朮甘湯)은 「담음(痰飮)」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투병 기록이 위의 기간 동안에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성홍열』로 표제되어 있는 기록물에서는 「나의 병(吾病)」과 「복약일기(服藥日記)」를 통해 1929년 자신이 앓았던 오한, 설사, 어깨와 등 부분의 근육통, 음주 후 치은종통 등의 병증과 그에 대처하기 위해 복용한 이음전, 패독산, 보중익기탕 그리고 명칭 없이 약물로만 구성된 무명 방제들을 짤막하게 기록해두기도 했다.
『治病日記』 권2 1939년 5월 20일; 관련된 시문과 설명이 『해악문집』 중에 실려 있다(김광진, 2013: 390).
『治疸日記』 일기 중에는 동원(東院)으로만 기재되어 있으나 김영소의 기록에 따라 동산병원으로 기재했다.
『治疸日記』 권1 1938년 12월 16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1월 12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1월 17, 26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2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1월 31일. 김광진은 포도당을 주입할 때마다 찾아오는 오한 증상으로 무척 고생했다. 1939년 5월 26일에는 포도당 주입 이후 발생한 이빨이 부딪히는 오한의 고통을 잊기 위해 모르핀 주사를 맞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주사 도구의 소독이나 포도당 및 칼슘에 깨끗하지 못해 발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간(干)은 건강(乾薑)의 건(乾)의 약자로 사용된다. 본문에 기재된 부간(附干)의 경우 부자와 건강을 의미하는 것이며, 생강 3편 대추 2개 ‘干三召二’이라고 기재하는 것에 근거해 ‘건(乾)’이 아닌 ‘강(薑)’으로 표기했다.
『治疸日記』 권1 1939년 1월 29일, 2월 5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9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20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4월 28일. 가려움은 지맥(遲脈)과 함께 황달의 대표적인 수반 증상으로 담즙색소와 혈 중에 저류되어 있던 담즙산에 의한 중독 현상으로 설명되고 있었다(朴鐘璿, 1933: 155).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20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10, 11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17일. 김광진의 소변 검사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진행됐다. 1938년 3월 18일 소변 검사에서 황달 기운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1938년 4월 6일에 실시한 대소변 검사 결과 소변에서 황달 기운은 확인됐지만 신장염 증후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변에서 이질균이나 아메바가 확인되지도 않았다.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21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20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3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17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20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25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1일, 3월 6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6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17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19일. “去十二月二十九日, 疸症最盛之中, 服附干湯九貼而腹硬之症漸消. 吾病可溫補不可凉瀉明矣.”
『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18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5월 25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1월 27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11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18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21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14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4월 27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15일. “其間, 村中與吾同病而死者三人. 丁聲振, 徐相胤, 林元宰是也. 彼死而吾獨甦生何哉. 人之死生, 在於知識. 此病與每日三時飮食, 有絶對關係. 不知飮食之利害, 則服藥皆虛事也. 故自四月二十六日以後, 夜不飮食, 晨朝五六時空腹, 診服見杯棒之高低, 驗飮食之利害.”
『治疸日記』 권1 1939년 2월 3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18, 20일.
『治病日記』 권2 1939년 12월 20일. 관련된 시문과 설명이 『해악문집』 중에 실려 있다(김광진, 2013: 390).
『治疸日記』 권1 1939년 5월 27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5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9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14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16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23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24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29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30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30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1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7월 8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7월 9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7월 12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7월 29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4일.
『治病日記』 권2 1939년 12월 31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1월 28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3월 4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15일. “九月初食牛血羹以來, 大便一日二回, 去十三日, 午後三時硬便一回. 十四日, 午後三時, 滿二十四時間, 大便終不來, 慮其太過.”
『治病日記』 권2 1939년 12월 20, 22일.
『治病日記』 권2 1939년 12월 28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3월 4일. “夕食玄米粉九匕, 食䖫四个, 不知利害畏之. 夜尿赤量少, 果是害也. 今後生食法食, 不可以身爲實驗器.”
『治病日記』 권2 1940년 6월 23일. “今覺氣降則神昏, 與食物大有關係, 驗泄者氣降. 大口魚泄, 明太不泄, 菜類中菠薐韭玉葱不泄, 芹多食則泄, 酒與白粥相反, 氣升神悅, 米粉升降兩全.”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15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1월 15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6월 27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6월 30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1일, 6월 7일, 9월 7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5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5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5월 29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23일, 4월 6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10일. “陰囊浮腫皆消, 皮鱗脫. 兩足背無浮氣, 此エヂ散之功也. 此藥一日服三包, 夜臥尿色白多量, 消食利水之功甚大. 疸症對症療法必要之藥也.”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13일. “診腹杯棒不露, 壓之不痛, エヂ散之功, 可嘆可驚.”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21일.
『治病日記』 권2 1939년 10월 26일. “自一月至八月末, 大便一日三四回, 肉脫鬚落, 人謂我必死, 自料亦難生, 回顧過程感慨無量. 入九月以來, 凉風稍生. 食牛血羹, 大便漸固, 三回者, 二回者一回, 一回者或過二十四時間無大便. 浮氣間生. 牢却堅靭之物調治之功如此而已.”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15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5월 2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1월 22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4월 8일.
1936년 4월 26일 김광진이 김영소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대소변 검사 결과 소변에 단백질이 없고 대변에는 간디스토마가 약간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家信』 1936년 4월 26일). 그러나 1938년 황달 발생 이전에 간디스토마 치료를 받았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치달일기』에서는 1938년 4월 6일에 대변 검사를 실시했으며 이질균이나 아메바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간디스토마 원충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家信』은 동아대 박지현 교수로부터 제공 받았다.
『治病日記』 권2 1940년 4월 19, 29일, 5월 2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4월 29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5월 5, 6, 10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5월 12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5월 26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5월 27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6월 7일. “六時十五分, 足背左脛, 陰囊浮氣尤甚. 嘆. 吾其醫乎.”
『治病日記』 권2 1940년 7월 6일. “十二時夜半, 悟泄瀉浮腫之因. 六月十五日以來泄始, 七月□泄瀉止. 今日浮腫以尿不善出也, 下焦虛寒之故也. 六味湯當用附子二錢, 與茵陳附子湯, 茵附各一兩間也. 見長期泄瀉, 而疑身中有何變動矣. 實因下焦虛寒, 小便不善出也. 飽食有燃燒熱, 然後少年尿善出也. 吾靜坐胃弱, 數點肉菜燃燒熱, 何處起乎.”
『治病日記』 권2 1940년 7월 4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7월 6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7월 13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7월 15일. “泄瀉, 腹痛, 泄瀉. 不復有回數. 神昏不復日記.”
『治病日記』 권2 1940년 8월 5일. “浮腫滿身, 吾立死線. 始服附干香附湯加木通.”
서양 의약품 특히 에지산의 활용에 대해서는 다음 4장에서 별도 분석할 예정이다.
『家信』 1936년 4월 26일.
『東醫寶鑑』「雜病篇」「黃疸」「黃疸之因」.
『治病日記』 권2 1940년 7월 4일. “內經云, 十二臟皆取决於胆, 今悟胆者身之錘也. 權有錘故升降由之. 今吾胆病即錘病也. 升降失常, 不泄則腫. 氣升火浮多怒忘, 氣降水流神思淸.”
중국 의학의 서열화 된 인체관에 대해서는 파울 U. 운슐트의 연구 참조(파울 U. 운슐트, 2010: 98-99, 230-231). 중국 의학의 심 중심의 의학관은 김희정 그리고 명문 중심의 의학관은 林殷의 연구 참조(김희정, 2008: 240-250; 林殷, 1999: 144-165).
『黃帝內經素問』「靈蘭秘典論」.
『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8일. “洋醫術是瘍醫之發達, 故其所用藥, 皆鑛物質金石之類. 與漢方外科, 專用五毒金石之材, 意味同. 洋醫可治外科而已, 在內科治療無一顧之價値. 今番吾疸症試驗知洋方無一分信用 ”
『治疸日記』 권1 1939년 4월 25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5월 26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5월 27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6월 11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5월 27일, 6월 8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5월 12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10월 11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10월 14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17일.
『治病日記』 권2 1939년 12월 19일, 1940년 1월 6, 15, 24, 27일, 2월 4일, 3월 2, 13일.
『治病日記』 권2 1939년 12월 19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3월 27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6월 25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1월 24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1월 27일.
『治病日記』 권2 1939년 12월 19일.
『治病日記』 권2 1939년 11월 4일.
한국에서 생산된 근대적 매약과 그 특징에 대해서는 김영수의 연구 참조(김영수, 2018: 183-187). 위의 약물 정보는 1912년 경무총감부 허가 사항에 기재된 약물과 그 구성이 다르다. 활명수 허가 사항과 관련해서는 예종석의 연구 참조(예종석, 2009: 18).
『治病日記』 권2 1940년 2월 18일.
『醫學升降法』 권2 (1936), No.92. “細菌之學, 始明於今日, 病之屬於細菌者, 可以細菌治之. 其外不屬於細菌者, 前人之論, 豈盡謬妄, 而今人之見, 豈獨凌駕乎. 如風寒病, 瘀血病, 凡不屬於細菌者, 求之古方, 有無限之用矣.”
『醫學升降法』 권2 (1936), No.60. “前醫旣認小便分爲小腸下口, 故見泄瀉則以分利小便爲主治. ... 分利小便則泄止者, 前醫累見累驗, 故用其法也. 小便旣爲升降所化, 今利小便而泄止者, 何也. ... 今利小便, 則腎與膀胱 小便所係之部乾涸, 腸中水液, 安得獨爲下行而爲泄乎. 利小便而泄止者, 由此理也. ... 素難靈樞盲揣之論, 不遑枚擧, 草創之醫學不得不然.”
위의 첫 번째 인용문은 『의학승강법』 분석 논문에서 활용된 바 있다(오재근, 2016: 106). 김광진의 동서의학에 대한 인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판단해 재차 활용했다.
『醫學升降法』 권2 (1936), No.70.
김광진의 『치달일기』 중에는 경성제국대학 오자와(大澤) 교수가 개구리 피부에 뜸을 뜬 뒤 피부에서 火毒을 방어하는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루-히스타민 히스토톡신(Histotoxin)이라고 명명했음이 인용 기록되어 있다(『治疸日記』 권1 1939년 3월 9일).
『治病日記』 권2 1940년 4월 4일.
『治疸日記』 권1 1939년 9월 15일.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대한한의사협회에서 유튜브에 공개한 「한의학은 어떻게 일제의 말살 정책을 이겨냈는가」라는 동영상은 위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 검색일: 2019. 5. 1.
2019년 1월 7일 한의사협회장(최혁용)은 의료일원화, 의료통합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이자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라는 논지의 신년사를 한의신문에 게재했으며 취임 후 의료일원화와 관련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최혁용, 「일차의료 통합의사 길을 개척할 것」, 『한의신문』 3면, 2019.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