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의료사의 연구동향과 전망 (2010-2019): 사회사적 관점의 부상과 민족주의적 이분법의 약화†
Trends and Prospects of Studies on the Modern History of Medicine in Korea: the Rise of Socio-historical Perspective and the Decline of Nationalist Dichot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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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n the 2010s, research on modern history of medicine in Korea has yielded notably outcomes. There have been social historical inquiries investigating the organic relationship between medicine and society, and there has been a study overcoming the traditional nationalistic dichotomous approach. A social historical perspective has been used to analyze the issues of knowledge and politics; the time period of its application was clustered around the colonial period. The condition of colonialism is both important and convenient for analyzing how and to what extent medicine, which is usually deemed neutral, contains a will of authority. Building on existing research, an attempt to understand a subject based on a combination of various elements or from various angles is needed.
Accumulating empirical data is important to further advance related research. It is necessary to verify the accuracy of basic facts and build up verified facts. Sometimes theories are applied to research on the history of medicine. However, they are merely a passive application of existing theories and fail to lead to modification and fortification of the theories based on the case of Korea, let alone the establishment of an independent theory. Accumulating empirical studies would help create a unique theory for the Korean case. To establish a new theory, characteristics of the Korean case need to be identified, which have been formed by the Korean tradition. An understanding of the modern situation inevitably leads to an interest in the tradition. Another necessary effort is to expand territories, and one of them would be to develop interests in patients and consumers.
1. 머리말
2010년 대한의사학회 학술지인 『의사학』 19권 1호에 의료사 연구동향이 특집으로 게재되었다. 주로 한국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가 한국 전근대, 한국 근대, 동아시아, 서양으로 나뉘어 게재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 근대 의학사 연구의 성과와 전망」이었다(박윤재, 2010). 대체로 1990년대 이후 발표된 한국 근대 의료사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글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매년 역사학회의 학술지인 『역사학보』에 각 시기별, 분야별 회고와 전망이 게재되는 것을 고려할 때 10년이라는 세월은 변화된 의료사의 연구 성과를 개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10년 동안 의료사를 둘러싼 환경은 우호적으로 변했다. 2008년 대한의사학회에서 간행하는 『의사학』이 A&HCI에 등재되었다. 이른바 SCI 잡지가 된 것이다. 대학 교원들에 대한 평가기준이 SCI 논문 게재를 중심으로 변해가면서 『의사학』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전보다 많은 논문이 투고되었고, 2012년 연간 2회에서 3회로 발간 횟수가 늘었다. 마침 같은 해 『애산학보』에 김두종 특집호가 기획되어 한국의료사 연구의 개척자인 그의 생애와 업적이 정리된 바 있다(김호, 2012; 송상용, 2012; 신동원, 2012a; 여인석, 2012; 이종찬, 2012). 김두종이 한국의료사의 첫 세대라고 할 때, 그 활동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을 만큼 연구자들의 역량이 성장한 것이었다.
의료사 연구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의과대학의 환경도 전면적이지는 않지만 의료사 연구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변해갔다. ‘전인적인 의사 만들기’라는 목표 아래 인문사회의학에 대한 투자가 요구되었고, 의과대학 인증 평가는 인문사회의학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킨 실질적인 동기가 되었다. 2020년 현재 대다수의 의과대학에는 인문사회의학을 교육할 목적으로 의료인문학 관련 교실들이 설치되어 있고, 소속 교원이나 연구원들에 의해 의료사 관련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연구자들의 의료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2012년 창립된 의료역사연구회는 2018년 “의료사를 역사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는 목적 아래 학술지인 『의료사회사연구』를 창간하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회문화사에 대한 관심이 2010년대에도 지속되었고, 그 결과 의료사에 관심을 가진 역사연구자들이 증가한 결과일 것이다. 그 관심의 반영이겠지만, 인문학 진흥을 목표로 추진된 인문한국사업(HK)에 의료와 연관된 연구단의 숫자가 적지 않다. 강원대 인문치료학, 경희대 통합의료인문학, 원광대 마음인문학, 한림대 생사학 등이 그 예이다. 의료사의 연구가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이 2010년대 접어들어 강화된 것은 분명하다.
이 글은 2010년부터 2019년 사이에 출간된 의료사 관련 논문, 그 중에서 한국 근현대를 대상으로 한 논문의 연구 동향과 성과를 정리하는데 목적이 있다. 나아가 지속되었으면 하는 경향을 전망이라는 이름으로 서술하였다. 글의 정리를 위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하는 『한국사연구휘보』를 활용하였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수록된 논문들을 정리하였고, 이외에 관련 학술지와 개인적으로 정리한 목록을 활용하였다. 하지만 미처 확인하지 못해 이글이 포괄하지 못한 연구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외국에서도 한국근현대의료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 연구 역시 이 정리에 포함하지 못했다. 해당 연구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이 글에서는 의료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영어의 히스토리 오브 메디슨(history of medicine)을 번역한 용어로 의사학은 적절하다. 의(醫)의 역사학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대한의사학회가 자신의 학술지명을 의사학으로 정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학이라는 용어를 한국의료사의 맥락에서 고찰하면 주류 의학, 의사, 학문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그 결과 현실에서 구현되는 의료의 실체가 충분히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주류 의학에 집중한 연구는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여전히 활용되고 있던 비주류 의학의 의미를 간과하기 쉽게 만들고, 의사 중심의 연구는 의료의 다른축이라 할 수 있는 환자나 소비자의 모습을 포착하기 어렵게 만든다. 학문 중심의 연구는 진료라는 중요한 측면을, 의료의 핵심이 진료에 있다는 점을 놓칠 수 있게 만든다. 자리를 바꾸면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용어의 교체는 새로운 풍경을 보려는 시도이다. 의료사는 의사학의 경계를 넘어 의료를 풍부하게 서술하려는 시도이다.
2. 동향
한국에서 근대가 서양문명의 수용을 통해, 이 글의 목적과 관련하여 이야기하면, 서양의학의 수용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의료사 연구의 중심에 서양의학이 있고, 주요 소재도 서양의학과 관련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한국에서 서양의학 수용이 서양선교사와 일본의사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때, 두 경로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었다. 서양의학 수용의 경로를 열고 넓혔던 인물에 대한 연구(김기주, 2011; 김도형, 2017; 김미정, 2012; 김숙영, 2015; 김연희, 2017; 김태호, 2013; 마쓰다 도시히코, 2014; 문미라 외, 2017; 박윤재, 2018; 박지영, 2019a; 박형우, 2014; 신동규, 2013; 신동원, 2012; 신미영, 2017; 신영전 외, 2014; 2019; 유옹섭 외, 2011; 윤선자, 2014; 이규원 외, 2018; 이꽃메, 2012; 2019; 이만열, 2011; 이방원, 2011; 2018; 이선호 외, 2012; 이영아, 2011; 이영호, 2017; 이충호, 2010; 이현주, 2019; 이희재 외, 2019; 정일영 외, 2016; 최규진, 2016; 최병택, 2011; 최재목 외, 2015; 홍종욱, 2018; CHOI Jaemok et al, 2019; PARK Jae-young, 2016; PARK Yunjae, 2013), 그 의학이 활용된 병원이나 학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김병인, 2010; 김상태; 2010; 문백란, 2014; 서용태, 2011; 2013; 송현강, 2011; 신규환, 2018; 신동규, 2015; 2016a; 2016b; 옥성득, 2012; 정민재, 2011; 최은경, 2016). 인물에 대한 연구는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의과대학 교원이나 선교부 등 직업이나 조직에 대한 연구로 나아갔다(김근배, 2014; 2015; 안남일, 2019; 최병택, 2010; 허윤정 외, 2015).
새로운 흐름의 수용이 인물, 기관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때, 앞으로도 이 소재들은 지속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다만, 관련 연구가 단선적인 발전사관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방식은 개인이나 기관의 역할을 과장하여 의료의 형성에 미친 다양한 요소를 포착하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한국의 경우 1990년대에서 2000년대를 거치며 서울대와 연세대 사이에 소위 뿌리논쟁이 전개된 적이 있다(여인석 외, 2013). 그 논쟁이 한국근현대의료사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킨 점은 분명히 있지만, 저자의 소속기관만으로 관련 연구의 결과를 미리 판정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인물이나 기관에 대한 연구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에 대한 고려는 더욱 필요하다.
2010년대는 경로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었다. 서양의학교육의 매개체로 교과서는 중요했다. 이전의 연구가 흐름을 전체적으로 정리했다면(박형우, 1998; 서홍관, 1994), 2010년대에는 개별 교과서를 분석하는 수준으로 나아갔다. 서양의학이 창조가 아니고 수용된 것이라면, 교과서는 번역을 통해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이 연구들은 번역의 대상이 되었던 원본의 내용, 번역과정, 그 의미를 천착하였다(박준형 외, 2011; 2012). 교과서가 수용할 서양의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 내용은 구체적인 공간을 통해 전수되었다. 2010년대에는 그 공간에 대한 연구가 제출되었다. 건축물에 대한 연구이다(신규환, 2015b; 이규철, 2016; 이연경, 2016; 한동관 외, 2011). 이 연구들은 그 건물이 가진 건축적 측면의 분석뿐 아니라 그 건축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파악하는 수준으로 나아갔다.
서양의학의 상징 중 하나인 위생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는 가운데(강성우, 2015; 2018; 김태우, 2014; 성주현, 2019; 정은영, 2019; 최재성, 2019), 보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보건은 해방 후 위생을 대체한 용어로서 의료에서 탈식민과 독립을 상징했다. 2010년대에는 해방 후 보건 분야의 궤적과 성취를 서술한 책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한국현대의료사의 주요 부분을 정리했다는 의미와 함께 해당 분야 연구자들이 집단 노력한 결과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대한보건협회, 2014).
서양의학의 수용은 한의학에 변화를 강요하였다. 한의학은 서양의학이라는 새로운 경쟁자를 만나면서 그 이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노력을 펼쳐야했다. 자신의 경쟁력을 입증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필요하지 않았던 정체성의 확립에 나서야 했다. 그 시도는 식민지시기 한의학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이 진행되면서 더욱 빈번하고 강하게 이루어졌다. 한의학에 대한 연구는 그 시도들을 살펴보고 있다(박지현, 2016; 오재근, 2019; 황영원, 2018). 한의학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노력은 과학화 시도로 구체화되었다. 과학화는 식민지시기, 나아가 해방 이후 한의학의 생존과 발전을 가늠하는 잣대로 간주되었다(박윤재, 2011; 2014a; 2014b; 전혜리, 2011).
전염병은 의료사에서 전통적이지만 중요한 소재이다. 의료사의 중심에 의료가 있다면, 그 의료를 탄생시킨 가장 큰 배경에 전염병이 있기 때문이다. 2010년대에도 전염병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고(강혜경, 2010; 권오영, 2019a; 김승희, 2015; 김영수, 2014; 2015b; 김재형, 2019a; 박윤재, 2012; 박지영, 2019b; 박지영 외, 2011; 백선례, 2011; 2019; 서기재, 2017; 신규환, 2012; 여인석, 2011; 이정, 2019; 전석원, 2012; 정준호 외, 2016; 2018a; 최규진, 2014; 최은경, 2012, 2013; KIM Kyuri, 2019; PARK Hyung Wook, 2019; PARK Yunjae, 2013; Yeo In Sok, 2015), 범위는 동물 전염병까지 확대되었다(천명선, 2018; 2019; 천명선 외, 2015).
전염병에 대한 연구는, 당연하게 피해를 많이 입은 시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10-1년 사이 만주에서 발발한 페스트, 1918-21년 유행한 스페인 독감, 1919-20년 발생한 콜레라, 한국전쟁 이후 약화되던 추세에서 돌발적인 유행을 보인 1969년 콜레라에 대한 연구가 그 예이다(김승희, 2015; 김영수, 2014; 2015b; 김택중, 2017; 백선례, 2011; 신규환, 2012, LIM Chaisung, 2011b). 성병은 전염병이라는 측면 못지않게 공창제 등 식민 지배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박정애, 2016). 이전의 성병 연구가 식민지시기에 집중되었다면, 2010년대에는 시기가 해방 후로 넓혀지고 있다(강혜경, 2010).
단일 전염병으로는 한센병에 대한 연구가 많았다. 질병에 대한 사회의 대응이 강렬했다는 점에서 한센병은 흡인력이 있다. 한센병 환자를 차별과 배제의 대상으로 삼아 일정한 장소에 격리하는 조치가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정착되었고, 그 과정은 근대국가 형성이 가지는 성격의 일단을 보여준다. 근대국가란 이상적으로 구성원 모두를 국민으로 포함해야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한센병 환자들은 그 현실을 보여주었다.
한센병과 관련하여 선교부가 운영한 요양원(최병택, 2010), 미군정의 한센병 정책을 서술한 글도 있었지만(KIM Jane S. H., 2010), 대부분은 소록도자혜의원으로 대표되는 식민 권력에 대한 연구였다. 1910-20년대 초창기의 소록도자혜의원(김기주, 2011), 1930-40년대 소록도갱생원을 중심으로 조선총독부의 한센병 정책을 고찰하는 연구가 있었고(김미정, 2012), 소록도병원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역사를 정리한 책이 발간되었다(국립소록도병원, 2017). 한센병 환자들은 배제와 격리의 대상이었고, 그 과정에 권력뿐 아니라 대중들도 참여하였다. 한센병에 대해 대중들이 가지고 있던 인식과 역할에 대한 연구는 국가와 사회가 한센병에 대한 차별에서 차이가 없었음을 밝혔다(김재형, 2019a; 2019b; 서기재, 2017). 그 차별의식은 한센병 환자에 대한 단종과 낙태가 1990년대까지 지속되는 결과를 낳았다(김재형 외, 2016).
전염병은 아니지만 정신질환은 인문학적 접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다(이방현, 2012; 2013). 나아가 근대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정신질환은 “문명과 ‘근대’에 의해 반응하며 스스로로 부터 생겨나는 정신의 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천정환, 2011). 연탄가스 중독에 대한 연구는 비생물학적 질병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의료사의 영역을 넓히는 시도였다(김옥주 외, 2012).
2010년대 전염병에 대한 연구는 병인론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갔다. 1910-1년 페스트 유행의 경우 폐페스트에 대한 정보가 있었고,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세균학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총독부는 오래된 페스트 지식에 기대어 쥐잡기를 중심으로 한 방역사업을 펼쳤다. 그 이유는 “지식과 경험의 축적과 연관성”에 있었다(김영수, 2015b). 병인론은 방역의 내용과 함께 정책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 요인이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병인론의 전환을 다룬 연구는 세균설의 수용이 방역의 범위를 축소시켰음을 밝혔다. 세균설의 확산은 도시위생론에 결합되어 있던 청결과 토목을 분리시키고, 그 중 청결에 주목하는 결과를 낳았다. 병인론의 전환은 도시위생을 축소시켰다(박윤재, 2017).
전염병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춘 연구가 이어지고 있지만, 전통적인 연구에 대한 필요성은 여전하다. 발병의 계기, 전개과정, 결과 그리고 의미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서술이다. 기초적인 정보 제공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서술이 가지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전염병사』 1, 2가 가지는 의미는 그래서 크다(대한감염학회, 2009; 2018). 이 책들은 한국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이천여 년의 전염병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한국의 전염병 연구가 특정 질병이나 특정 시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점을 고려하면, 그 의미는 더욱 크다. 의료와 역사의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의미는 크다. 1권의 집필자가 대부분 역사학자인 반면 2권의 경우 1부는 시대사로서 역사학자가, 2부는 각 전염병에 대한 각론으로 전염병 전문가가 서술하였다. 의료사가 의료와 역사학의 결합이라고 할 때 좋은 결합의 예로 평가할 수 있다.
자료 발굴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았다(고요한 외, 2018; 곽희환 외, 2018; 김근배, 2015; 김선호, 2017; 김진혁, 2014; 2015; 김진혁 외, 2019; 윤연하 외, 2018; 정준호 외, 2018b; 한선희 외, 2013; 허윤정 외, 2014). 소재도 다양했다. 교육, 이론, 군사, 교류, 위생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남북교류가 활성화된 이후 이전에 가해졌던 자료에 대한 제한은 약화되었지만, 북한체제가 가지는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 새로운 자료에 대한 접근은 여전히 어렵다. 그 속에서도 2010년대의 연구는 해당 소재가 지니는 사회적 의미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고 있다. 예를 들면, 북한에서도 인구를 과학적, 합리적으로 파악하는 생명정치가 이루어졌다는 연구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북한은 인구와 여성의 신체 통제, 보건, 위생, 보육 등의 영역에서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이름 아래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창출하려 노력했다(강진웅, 2014). 인민의 형성에 대한 연구도 흥미롭다. 북한에서 위생방역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대중은 자신의 위생을 책임질 수 있는 주체로 성장해나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은 국가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민의식을 형성해나갔다(김진혁, 2014).
3. 성과
1) 사회사적 관점
2010년대의 연구들은 의료가 독립적이거나 중립적으로 존재하는 학문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활용되는 하나의 구성물임을 밝혔다. 사회적 맥락에서 의료는 결정되지 않은, 즉 유동하는 존재로 파악되었다. 느슨한 의미에서 사회사적 관점이다. 구성주의와 같은 이론적 함의를 내포하기보다 의료와 사회의 관계에 주목한다는 의미에서, 즉 정치사, 경제사와 구분되는 느슨한 의미에서 사회사적 관점이다.
이 관점은 주로 지식과 정치의 문제를 분석하는데 활용되었다. 지식은 기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신의 특징을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시기는 식민지시기에 집중되었다. 중립적이라 간주되는 의료가 권력의 의지를 어떻게 얼마나 담고 있는지 분석하기에 식민지는 한편으로 중요하고 한편으로 편리하다.
경성제대 법의학교실의 혈액형인류학을 분석한 연구는 혈액형 분류라는 의학적 소재를 통해 비백인제국주의국가로서 일본이 가지고 있던 인종주의의 성격을 밝혔다. 일본이 혈액형 연구를 통해 서구인의 인종적 시선을 무력화시키고, 반대로 식민지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과 위계를 정당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정당화가 가능한 배경에는 강력한 과학적 권위가 있었다(정준영, 2012). 과학의 권위는 의료선교사로 하여금 “과학을 통해 종교적 진리를 확신할 수 있고 종교를 통해 과학의 실천이 가능함을 역설”하게 만들 정도로 강했다(김성연, 2015).
일본인 산부인과 의사 쿠도는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했는데, 그의 부인과 지식을 분석한 연구는 쿠도가 조선 여성을 불안정하고 범죄적 성향을 내재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조혼을 범죄를 양산하는 원인이자 조선의 오랜 전통으로 지목하였음을 밝혔다. 그 결과 재현된 조선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국가였다(홍양희, 2013).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조선총독부 결핵통계에 대한 보정 작업을 분석한 연구는 식민권력이 자신의 지배를 구현해나가는 과정에서 과학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밝혔다. 보정은 의생과 지방의 자료를 통계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에서 결핵이 만연한 이유는 조선인의 서양의료 이용 미진과 후진적인 생활양식에 있다고 결론지어졌다(박지영, 2019b).
의학자이자 행정가인 시가 기요시에 대한 연구 역시 의학과 정치의 근접성을 밝히고 있다. 시가는 교장이나 총장 같은 행정가보다 이질균을 발견한 의학자로서 정체성을 더 중요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연구는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 시절의 구보사건과 경성제대 총장 시절의 한센병 연구에서 시가가 보인 모습이 총독부의 정책을 옹호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지(知)와 권력이 결합되는 식민지라는 자장에서 순수한 학문은 가능하지 않다고 결론지었다(마쓰다 도시히코, 2014). 1930-40년대 대중잡지를 분석한 연구는 의학지식이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역할로 기능했다고 주장하였다. “의학지식은 식민권력의 의도와 가치를 충실히 전달하는 통로로 활용”되었던 것이다.(이병례, 2018) 중국 동북지방에 설립된 용정의과대학을 분석한 연구는 학교사가 중화인민공화국의 필요에 따라 집필되었음을 밝혔다. 그 과정에서 공식적인 입장이나 정책에 어긋나는 역사는 버려졌다(문미라 외, 2017).
1950년대 마약문제를 분석한 연구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마약 문제의 원인을 간첩이나 좌익과 연결시키는 간첩마약 담론이 급부상했음을 밝혔다. 반공주의를 대중화하고 정치적 경쟁 세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1950년대 한국의 정치적 지형은 의료 문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박지영, 2016). 1960년대도 마찬가지였다. 1961년 쿠데타 이후 군사 정부는 군 의무요원을 확보하였고, 그들은 징병검사 결과의 타당성에 권위를 부여하였다. 전국민개병제라는 목표는 의료전문가의 동원과 검사 현장에서 권위를 통해서 달성되었다. 의료전문가의 지식은 “전국민이 보편타당하게 병역 의무가 부과되고 있음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최은경, 2015). 의료와 정치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다만, 정치를 국가권력과 관계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서 이루어진 봉한학에 대한 연구는 경락의 실체를 밝히려는 노력이 과학과 기술의 차원뿐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의 구조적인 편견에 맞서고 우호적인 사회세력과 연대하는 정치적인 과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김종영, 2014). 정치의 의미는 사회적인 수준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
사회사적 관점은 의료가 사회에서 독립적인 존재라기보다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된 지식임을 밝힘으로써 의료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가능하게 하였다. 의료는 당파성을 가질 수 있고, 따라서 편파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개입할 근거도 만들어졌다. 의료는 사회의 구성물이고, 그 형성과 성장에 사회의 기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의 개입이나 의미를 강조할 경우 권력이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것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 식민지의 자장을 강조하는 경우가 그렇다. 식민지시기 조선사회의 구성원이 국가권력인 조선총독부의 자장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아가 의료나 의학교육이 일본이 강조하는 과학이나 근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분야보다 식민권력의 개입은 강했다.
하지만 삼일운동이 상징하듯 식민 지배 내에서 저항은 예기치 않게 대규모로 발생했고, 그럴 가능성이 상시적으로 존재했다. 지배의 힘이 전일적으로 모든 구성원에게 작동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자장이 가지는 힘 못지않게 그 자장 속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변이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학 연구나 교육이 식민 지배와 가지는 관계에도 비중이나 역할의 차이는 있었을 것이다. 그 차이를 명료히 할 필요가 있고, 대응에 대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의료와 정치의 관계는 단순하게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해방 이후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적 상황과 의료를 직접 연결시키는데 고민이 필요하다. 의료를 정치에 종속된 분야로 파악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가지는 비중은 컸고 지금도 여전히 크지만, 의료는 종속성과 함께 자율성을 지닌 분야이다. 의료는 일종의 공공영역이다. 의료는 정치적 이념이나 사회적 견해와 무관하게 사회에 구현해야할 가치였고, 지금도 중요한 가치이다.
따라서 정치적 흐름과 연동되면서도 그 흐름에서 일정하게 독립적으로 진행된 의료의 내적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흐름은 한국의료의 궤적을 그리고, 지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의료가 가진 시대적 사회적 맥락이 사회 속에 내재하는 지속적 흐름과 연결된다고 할 때, 그 흐름을 구조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구조는 한국근현대의료사를 일관되게 서술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물론 구조를 상정할 때 서술의 약점도 있다. 구조를 고정화된 실체로 해석할 경우 변화나 전이가 포착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 역시 변화의 과정 속에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2) 민족주의적 이분법의 약화
민족주의적 이분법이란 1960년대 이후 한국사를 내적으로, 발전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입각하여 역사를 민족과 외세, 전통과 근대, 지배와 저항, 수탈과 투쟁으로 구분하여 해석하려는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은 해방 후 식민 유산의 극복과 관련하여 한국사를 주체적이고 전향적으로 해석하려는 흐름 속에서 형성, 강화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근대를 형성했던 한 체제가 붕괴하고 국가 간 경계가 낮아지면서 이런 해석은 그 경직성으로 인해 비판받기 시작했다. 2010년대 한국근현대의료사 연구는 민족주의적 이분법을 넘어 각 소재를 복합적 요소의 결합이나 다양한 분화로 접근하고 있다.
한 사회에 지배적인 담론이 형성된다고 할 때, 그 과정은 유포 주체와 그 내용에 동조하고 가담하는 이른바 대중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런 시각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시기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시각에 따르면, 식민 지배의 하부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인 역시 식민 권력이었고, 권력의 대상이 되었던 대중에는 조선인은 물론 일본인도 포함되었다. 전통적인 민족적 구분으로 이런 상황에 대한 파악은 힘들다.
이런 시각은 한센병 연구에 적용되었다. 한 연구는 제국의학이라는 통치자와 제국에 착취당했던 피해자로서 조선인이라는 양분된 구도를 비판하고, 제국의학 형성에 필요한 대중의 동원과 참여를 통하여 일제의 한센인 혐오 담론이 조선인에게 내재화되었다고 보았다(서기재, 2017). 다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인들이 문명화된 근대적 의학지식으로서 세균설과 위생경찰제도를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한센병을 통제할 수 있는 전염병, 즉 환자를 추방하고 격리함으로써 통제할 수 있는 전염병으로 인식하였다고 파악하였다(김재형, 2019a).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단일한 주체로서 조선인이라는 구도는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할 때 대입하기 어렵다. 오히려 총독부와 조선사회는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연합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습은 정신병 환자에 대한 태도에서도 반복되었다.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정신병자는 위험한, 따라서 격리되어야할 존재가 되었다(이방현, 2013).
식민 지배에 대한 단선적 이해의 극복은 현대사와 관련하여 국제적 협력과 교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내적 역사발전에 주목하는 연구경향 속에서 외적 영향은 상대적으로 무시되거나 간과될 가능성이 높다. 기존의 연구가 한국인이 한국 내에서 보인 노력과 실천의 결과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서술에 치중했다면, 2010년 이후 국제적 지원과 협조를 분석하는 연구가 제출되고 있다(박지영 외, 2011; 박지욱, 2010; 신미영, 2017; 신영전, 2013; 이선호, 2013; 이임하, 2013; 2014; 정준호 외, 2018a; 최은경 외, 2016; 현재환, 2019; KIM Kyuri, 2019).
1950년대부터 시작된 미네소트프로젝트 등 미국 의료의 영향을 분석한 연구, 한국인이 국제적 연구자로 성장하기 위해 외국의 연구자들과 지속적인, 하지만 의존적인 협력이 필요했음을 밝힌 연구, 해방 후 한국에서 진행된 대규모 방역사업 중 가장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기생충구제사업에 일본의 협력이 있었다는 연구, 처음 한국인 의사들은 한국인 집단의 유전적 특성 같은 주제를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없었는데 국제 공동연구 플랫폼에 참여하면서 그와 같은 주제를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적한 연구 등이 대표적이다(박지영 외, 2011; 신미영, 2017; 정준호 외, 2018a; 현재환, 2019).
비교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대만과 비교가 이루어졌다(문명기, 2013; 2014; 최규진, 2014). 대만은, 시차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 독재, 민주화라는 동일한 궤적을 걸어왔기에 한국의 특수성을 밝히는데 좋은 비교의 대상이다. 일본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식민지에 적용될 원형은 일본 본국에서 만들어졌다. 변형된 식민지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원형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근대 일본에서 이루어진 매약 단속과 규제책을 살펴본 연구는 일본에서 수입된 매약과 홍보 광고가 효능, 성분, 제조판매원, 약값 등을 필수적으로 기재하면서 형식적인 측면에서 조선 매약 시장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밝혔다(김영수, 2018). 약은 의료를 물질이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수준에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향후 중요한 연구 분야가 될 것이다. “의학 지식과 상업문화, 일상생활, 소비와의 연관성을 검토”하는데 중요한 통로이다. 나아가 약품광고는 그 속에 내재된 의학 지식, 소비자의 욕망, 사회문화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유연실, 2020).
2010년대에 이루어진 한의학 연구 역시 이분법적 시각을 벗어나고 있다. 식민 권력이 한의학을 차별했다는 점은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다. 하지만, 그 시각만을 고집할 경우 놓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능동적 적응과 대응이다. 한의학은 식민권력이 펼치는 서양의학 위주의 의료정책 속에서 생존을 위해 혹은 성장을 위해 능동적인 적응과 대응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근대적 변모가 이루어졌다. 이분법적인 시각을 고집할 경우 식민정책의 이면에서 일어났던 구체적인 적응과 대응, 나아가 변화와 그 의미를 포착하기 힘들다.
구체적으로, 동서의학논쟁을 분석한 연구는 논쟁과정에서 한의학이 자신의 정체성을 서양의학에 대비하여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그 결과 한의학은 자신의 존립 정당성을 서양의학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전혜리, 2011). 동서의학연구회의 활동을 분석한 연구는 이 단체가 서양의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한의학을 식민당국의 위생 방역체제의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켰고, 그 결과 의생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였다고 평가했다(황영원, 2017). 이런 활동은 식민지에서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한의학의 입장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적응과 대응은 개인에게서도 발견되었다. 식민지시기 대구에서 한의원을 개설한 김광진은 서양의학과 양약을 공부하여 활용하였고, 한방과 양방을 겸한 병원을 구상하는 등 적극적으로 근대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박지현, 2016). 나아가 서양의학과 한의학이라는 대립 구도를 넘어 동서의학 결합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였다(오재근, 2019).
이분법적 인식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지역 대상 연구에서도 이루어졌다. 기존의 통념은 농촌의 경우 “제도권 의료의 부재를 민간의료가 대신하고 있으며, 이때의 민간의료란 서양의학과 구분되는 상약(常藥)이나 무속 행위”였다고 보았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1960년대 농촌에서 서양약품은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민간요법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친숙한 존재였다(박승만, 2018). 이런 연구가 식민지시기 지역 의료의 실상을 밝힌 연구와 결합한다면 한국 근현대를 관통하는 통시적인 서술이 가능해질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논점은 변화이다. 의료는 시대를 반영하며 변화하고 있었다.
개인의 연구와 활동을 이해하는데도 민족주의적 이분법은 약화되었다. 식민지시기 대표적인 의학자 윤일선의 경우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민족차별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 학문의 보편성을 향해 분투했다. 식민지라는 조건 속에서 근대의 성취를 위해 노력한 것이다(홍종욱, 2018). 하지만, 여기서 근대란 식민지라는 조건 속에서 변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에 식민성과 근대성이 공존했다는 주장은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다만, 확산은 원론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 각론 단계에서 두 특성이 어떤 교집합, 여집합을 만들고 있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진행 중이다.
한국 근대의료의 특징 중 하나는 식민권력에 의한 일방적 재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데 있다. 식민의료의 경쟁자로 선교의료가 있었다. 선행 연구는 한국 근대의료가 일종의 주도권 경쟁, 즉 헤게모니 경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고 파악하였다(정근식, 1997; 조형근, 2009). 이런 접근은 식민지 시기를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한국의 특수성을 추출할 수 있도록 해준다. 경쟁은 의학교육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된다. 1926년 경성제 국대학의 설립은 일제가 선교 의학교육과 경합, 경쟁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루어낸 결과였다(정준영, 2010).
그러나 2010년대 연구는 식민권력과 의료선교사의 관계에서 경쟁 못지않게 협력이나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서양나병원이던 여수애양원은 소록도보다 앞서 한센병 환자에 대한 단종수술을 실시했고(김재형 외, 2016), 해주구세요양원을 설립하고 운영했던 의료선교사 셔우드 홀은 항결핵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식민권력의 경쟁자이자 협력자로 활동했다(PARK Yunjae, 2013). 식민권력과 조선인이라는 구도를 넘어 보다 다양한 매개자들에 주목하는 연구도 이루어졌다. 이 연구에 따르면, 1910년 조선총독부의 위생정책은 조선귀족, 한방의회, 일본인의사회, 서양인 선교사 등의 민간 부분과 대립, 교섭, 경쟁하는 과정에서 결정되었다(이형식, 2012).
문제는 이분법적 시각을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아직까지 단편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인물, 단체,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보편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 인물이나 단체 혹은 지역이 대표성을 가진다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쉽게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례를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 필요한 태도는 현상을 꿰뚫는 본질이 있다는 전제를 가지는 것이다. 다양한 현상의 이면에 공통된 본질이 존재한다는 전제는 사례 연구가 분산적으로 진행되는 문제를 막을 수 있다. 다만, 본질을 고정된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4. 제안
1) 실증의 축적
역사학이 사료와 해석의 결합을 통해 형성된다고 하지만, 출발은 사료이다. 역사학은 일종의 사료학이다. 새롭고 중요한 주장도 사료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역사학의 성과로 인정받기 힘들다. 따라서 새로운 자료의 발굴은 중요하다. 각주가 없어 아쉽지만, 한국 근현대 한의학의 인물, 단체, 학술을 정리한 책은 연구의 진척을 위한 하나의 기초로 활용될 수 있다(김남일, 2011). 19세기 말 전라도 강진에 있던 박약국(朴藥局)에 대한 연구는 약재 매입과 판매 장부를 이용하여 약국의 운영상황을 살피고 있다(김덕진, 2013; 2017; 2018). 일상에서 의료는 약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나아가 19세기 말이 상대적으로 자료가 부족한 시기라는 점에서 이 연구의 의미는 깊다. 식민지시기 대구에서 활동했던 김광진의 자료도 발굴되어 활용되고 있다. 그는 의학서적과 진료기록을 남겼고, 그 자료에 의거한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되고 있다(박지현, 2016; 오재근, 2019). 그 연구들을 통해 식민지시기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한의학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조선시기를 넘어 근대에 이르는 동안 병을 규정하는 개념은 풍부하게 변화했다. 그 궤적을 추적한 연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료집 역할을 하고 있다. 나아가 글을 쓰며 참조할 수 있는 사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신동원, 2013). 한국현대사도 마찬가지이다. 독일에 이주한 한국인 여성 간호사에 대한 연구는 한국현대사의 성공 이면에 있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고(나혜심, 2012), 1970-80년 사회의학연구회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시민운동이 약한 의료 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비판적 사회운동이 형성, 발전해왔음을 밝히는 일종의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최규진, 2015). 치료제에 대한 연구는 의료사 연구의 수준을 고양시킬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새로운 의미에서 자료 축적이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대책이 격리에서 수용으로 변화된 이유를 대풍자유 혼합제, 디디에스제 등의 개발과 활용에서 찾은 연구가 예가 될 수 있다(김재형, 2019c). 자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의료사 연구에서 이론을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생체권력과 같은 서양의 정립된 이론을 활용하는 경우이다. 이런 연구는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구체적 사례를 보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평가하고, 그 의미를 보편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는 장점이 있다. 한국의 사례를 분산되고 독립적으로 바라보기보다 서양의 다른 예와 연관시켜 고찰할 수 있는 장점이다. 이론의 활용을 통해 전통적인 소재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고, 하나의 사례에서 다른 사례와 연관시킬 수 있는 보편성을 추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는 이론의 소극적 적용에 머물 뿐 한국 사례를 통한 이론의 수정이나 보완, 나아가 독자적 이론 정립을 위한 노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상이다. 서양에서 정립된 이론이 한국에 적용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수준이지, 한국사회가 가진 특수성의 확인이나 그 확인을 통한 비판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까지 연구에서 한국은, 어떤 의미에서, 서양 이론이 가지는 정당성을 확인하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준다. 한국이 가지는 특수성을 파악하려는 노력보다 이론의 보편성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그 결과 한국사회는 시대성이나 지역성을 상실한 하나의 예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런 적용은 이론을 하나의 우상으로 간주하는 태도이고, 그 결과, 이론은 분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구체를 재단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론의 적용 못지않게 실질적으로 진행된 의료의 내용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1940년 조선농촌사회위생조사회가 편집한 『조선의 농촌위생』은 식민지시기 농촌의 위생상황을 민간의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이 자료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농촌은 의료의 사각지대에 지나지 않았으며, 농민 대다수는 근대의학 발달의 혜택에서 외면당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이상의, 2014). 호남 지역을 대상으로 근대의료가 지역 단위에서 어떻게 조직화 되었는지 살펴본 연구 역시 식민지 위생규율의 지방농촌에 대한 침투와 관통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연구는 위생조합, 모범위생부락의 사례 분석을 통해 근대적 위생규율이 제도적으로 정착하였음을 밝히는 동시에 조선인 전염병환자의 낮은 검병 수준을 고려할 때 실질적인 지역사회의 조직화는 부족했음을 밝혔다(마쓰모토 다케노리 외, 2018). 규율화가 이루어졌다 해도 농민들은 병원과 같은 공간이 아니라 방역사업이나 계몽사업을 통해 위생과 질병에 대한 지식만을 습득하고 있었을 뿐이다(마쓰모토 다케노리, 2011).
이론의 적용 가능성에 대해 회의를 표시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식민지시기 조선과 대만의 공의제도를 비교한 연구가 그 예이다. 이 연구는 공의의 운영 빈도, 페스트와 두창 등 주요 질병의 사망자 수 등의 통계 비교를 통해 두 지역이 가지는 의료상황의 차이를 밝혔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에는 “의료적 규율을 경험할 수 있는 ‘장(場)’ 자체가 협소했다”고 주장하였다(문명기, 2014). 1990년대 이래 의료적 규율화를 강조하는 연구가 이루어져 왔는데, 그 연구들이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없이 한국에 단순 적용되었다는 의심을 제기하는 연구이다.
이론의 활용에서 비판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사료에 대해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료에 대한 비판적 활용이 필요한 것이다. 사료 활용과정에서 작성 주체를 고려한 사료비판은 필수적이다. 누가 작성했느냐에 따라 그 내용에 일정한 지향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시기를 분석하면서 총독부 출간 자료를 이용할 경우 식민권력의 행위와 선택을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선교의료를 파악할 때 선교사의 기록만 이용할 경우 그 결과는 선교의료에 대한 합리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신문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사적 접근을 위해 신문이 활용되는데, 작성 주체와 시대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신문에 게재된 기사가 그 자체로 객관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1990년대 대중의 시대가 열리기 이전 신문은, 구체적으로 기자들은, 계몽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근대의 편에 서있었다. 이런 경향성이 사료를 해석할 때 고려될 필요가 있다.
2) 한국 사례의 이론화
실증의 축적은 이론의 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국적 이론의 형성이다. 한국의 근현대는 타율적 개항, 식민지, 해방과 내전,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세계사의 일반적인 궤적을 따라 전개되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나타난 한국적 특징은 비제국주의국가의 근대화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의료가 근대의 중심에 있었다면, 한국근현대의료사에서 나타난 특징은 한국 근대를 설명하는 중요 요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의 구축을 위해 먼저 필요한 단계는 한국적 수용에 대한 고찰이다. 2010년대 이루어진 연구는 그 고찰을 진행하고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의사들의 개업양상을 추적하여 서양의료의 확산과정을 분석한 연구, 세균학 용어인 결핵이 한국사회에 수용되는 과정을 분석한 연구, 제중원에서 사용된 의학교과서를 분석한 연구가 그 예이다(박준형 외, 2011; 2012; 이흥기, 2010; 최은경, 2012). 이 연구들을 통해 양약국 역시 한약국의 전통 속에서 업무를 진행하였고, 의학용어의 번역은 어디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졌으며, 번역에서 유교지식과 기독교를 접목시키는 모습이 나타났음이 밝혀졌다. 위의 연구들이 조선 말기, 대한제국기에 집중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를 포착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식민지시기도 약해지기는 했지만 기존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할 이유가 없다. 1920년대 진행된 피병원 설립운동에 대한 연구는 참여 인사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운동의 기원을 조선시기와 연결시키고 있다. 선비가 자율적인 규약인 향약을 주도했듯이 피병원 설립운동 역시 “선비가 자율적 영역에서 주도하는 문제해결의 방식”이었다고 주장한다(배우성, 2014). 참여자에 대한 풍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지만, 식민지시기 한국인의 의료적 실천을 중세와 연결시키려는 노력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화와 관련하여 식민지 근대성은 주요한 대상이 될 수 있다. 의료에서 식민지 근대성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파악된다면, 추상화를 거쳐 하나의 이론으로 구현이 가능할 것이다. 그 파악을 위해 고려할 변수는 식민권력, 의료선교사, 한의학이 될 것이다. 의료선교사는 서양의학의 관철이라는 점에서 식민권력과 같은 쪽에 서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쟁자였다. 그들은 한국에 서양의학을 전하는 별도의 통로로 작용했고, 식민권력이 의료인력 육성을 위해 일본 본국보다 적은 자원을 투자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의료선교는 식민화가 관철되는 과정에 변형을 가하는 요소였다.
거대하거나 명료하지는 않더라도 한국적 특징은 파악이 가능하다. 그 특징을 만든 것은 한국의 전통이었다. 근대에 대한 파악은 전통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전통 중 하나가 한의학일 것이다. 식민지시기 한의학은 일본 본국과 달리 주류는 아니지만, 공식 의학으로 살아남았다. 나아가 식민지라는 조건에 적응하고 대응해나갔다. 그 변화를 근대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의학 자체가 가진 유용성, 나아가 한의학을 활용하려는 식민권력의 의도 등이 합쳐지면서 근대화의 범위나 내용이 만들어졌다. 한의학은 의료에서 식민지 근대성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해방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한의학은 중국의 중의학, 일본의 한방의학과 달리 다양한 학파가 존재한다. 의서 중심으로 혹은 개인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어 있다. 중의학이 표준화, 과학화, 병원화 되었다면, 한의학은 그 정도가 약하다. 공식 제도가 가지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고, 민간의 비중이 크다(김태우, 2019; 김태우 외, 2012; 오재근, 2014). 이런 특징은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이 약한 가운데 한의학이 생존과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실천한 결과일 것이다. 그 궤적 자체가 한의학의, 나아가 한국 의료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다만, 한의학의 전통 역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통이 고정되었다는 생각은 한국적 특징을 과장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적 특질이 외부의 영향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과장이다. 나아가 한국적 특징이 한국만의 고유한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근대는 세계사적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대만, 중국과 비교 연구가 필요한 이유이다.
식민의 유산은 해방을 거치면서 해소되지 않았다. 미국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하면서, 나아가 새롭게 탄생한 대한민국을 설계하면서 그 유산은 변형, 활용되었다. 식민지시기에 성장한 의사들의 궤적을 추적하여 해방 후 그들이 구현한 학문을 혼종성으로 파악한 연구는 중심을 지속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주변으로서 한국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현재환, 2015; HYUN Jaehwan, 2017). 혼종성에 대한 관심은 한의학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변화, 성장한 한의학을 진료실과 실험실이라는 구체적인 현장을 통해 분석한 연구는 “한의학의 근대는 혼종적 근대”라고 정리하였다. 한의학의 근대화, 즉 제도화, 전문화, 과학화, 산업화, 세계화는 이질적인 행위자들이 갈등, 합의, 창조하는 복합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김종영, 2019). 혼종성이라는 용어가 자칫 일관된 이해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지만, 한국의 사례를 이론화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론의 구축을 위한 의도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그 중 하나는 단행본의 출간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근현대의료사의 연구가 양적인 면에서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논문에 비해 저서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다. 단행본이 출간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기존의 글들을 모은 형태이다. 일관된 문제의식으로 하나의 시기를 관통하는 서술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단독 저서가 힘들다면, 협업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글들의 편집본이 이론의 구축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환자와 소비자에 대한 관심
의료사에서 의료인이나 국가가 아닌 환자나 소비자에 대한 관심이 피력된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루어진 한국근현대의료사 연구는 여전히 국가나 의료인 같은 공급자의 모습이 주로 그려졌다. 2010년대 연구에서 대중의 모습을 통해 수용자의 모습을 밝히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김미정, 2012; 김재형, 2019a; 백선례, 2011; 서기재, 2017). 1930년대 신문에서 이루어진 독자와 의사의 상담을 분석한 연구는 그 과정을 거치며 서양의학 지식이 권위를 획득했음을 밝혔다. 나아가 당대의 의학 지식이 의사에서 환자라는 일방향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 증상을 해석하여 전달하는 역방향도 있었음을 확인하였다(최은경, 2018; 최은경 외, 2015). 의료를 실행한 비의료인에 대한 접근도 이루어졌다(박승만, 2018; 이주연, 2010). 중요한 성과들이다. 특히 기생충박멸사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수치심에 주목한 연구는 방역이 수용되는 기반으로 국민의 정서와 인식, 그 중에서 시각이 가지는 의미를 포착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정준호 외, 2016).
수용자의 목소리를 찾는 노력은 지속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의사학』 22권 2호에 실린 구술사 특집은 의미가 깊다. 구술사는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다. 문헌에 없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문헌자료에 있는 사실이라도 심도 있는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김옥주, 2013). 조산사, 한약업사, 한센인, 원폭이나 세균전 피해자에 대한 구술은 소수자의 시각에서 사회상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한다(신규환, 2013a). 의료인, 그 중에서 의사가 아닌 비의사 중심의 역사, 나아가 환자나 소비자 중심의 역사 서술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이런 서술은 의료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치나 능력의 문제로 인해 기록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역사를 풍부하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구술사는 미래 역사학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구술은 새로운 자료 발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수용자의 모습을 찾기 위해 구술 이외의 자료를 찾으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자료는 일기와 편지이다. 개인의 생생한 삶과 생각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지방 대도시에서 활동한 의생의 일기를 통해 1930년대 치료의 구체적인 현황을 확인한 연구, 외국 연구자와 교환한 편지를 통해 한국의 의학자가 국제적 인물로 성장하는 과정을 천착한 연구, 농촌 지식인의 일기를 통해 1960-80년대 지역의료의 실상을 파악한 연구, 한국 의료를 성장시킨 주요한 계기를 편지를 통해 확인한 연구가 그 예이다(박승만, 2018;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2010; 신미영, 2017; 오재근, 2019).
환자와 소비자라고 일반화시켜서 이야기했지만, 내부 구성을 구체적으로 분류해 접근할 필요도 있다. 서양의 경우 의료사는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의료인으로서 여성, 특히 여성 의사는 근대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미가 있다. 나아가 출산이 의료화 되었다는 점에서도 여성에 대한 관심은 필요하다. 어린이의 경우 건강과 복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이상덕, 2020). 환자와 소비자의 구성은 더 다양해질 수 있다.
환자와 소비자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의료에서 담당했던 역할을 복원하는 노력이자, 새로운 의료를 기획하는 시도이다. 건강권이라는 개념이 이미 1970년대부터 논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는 여전히 의료인, 특히 의사들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다. 최근의 여러 문제, 즉 의료영리화, 원격의료, 의대 정원 등이 주로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 현실을 알려준다. 현실은 현실 그대로 인정해야 하지만, 변화는 필요하다. 역사가 과거 경험의 복원을 통해 그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와 소비자에 대한 강조가 의료를 의료인과 환자라는 단순한 구도로 접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가 건강보험제도의 형성과 성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듯이 의료인과 소비자 이외에 의료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환자와 소비자에 대한 강조가 의료인에 대한 과소평가로 이어져서도 안 될 것이다. 의료에서 지식과 기술의 역할은 어느 분야보다 중요하다. 스스로가 건강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매력적이지만, 이상적이다. 현실에서 의료는 의료인과 환자의 관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5. 맺음말
2010년대 이루어진 한국근현대의료사의 성과는 적지 않다. 의료를 사회와 유기적 관계에서 파악하려는 사회사적 연구, 민족주의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넘어서는 연구는 중요한 성과로 간주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한국에서 의료사가 재도약한 이후 한국근현대의료사는 다양성을 확보했고, 그 분화는 계속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사실의 단순한 정리만을 추구하는 글은 찾기 힘들다. 설령 정리를 목적으로 한다 해도 궁극적인 귀결은 그 사실이 가진 의미의 천착으로 나아가고 있다.
향후 연구의 진척을 위해 실증의 축적은 중요하다. 기초적인 사실의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고 그 사실들을 축적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의료사의 주제였던 인물이나 기관에 대한 연구는 확장되어야 한다. 전염병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 한국의 전통 중 지금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한의학은 한국의 전통과 근대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소재이다. 실증적인 연구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 연구들이 축적될 때 한국적 이론의 창출이 가능할 것이다. 새로운 영역의 개척과 확대도 필요하다. 그 중 하나는 환자나 소비자에 대한 관심이다.
다만, 위에서 서술한 사항들이 2010년대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2010년에 쓴 글에서 이미 지적한 사항들이다. 따라서 2010년대는 2000년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변화는 있었다. 2010년에 지적한 내용, 예를 들면, 한국의 역사학이 민족주의의 강한 자장 아래 있다거나,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고민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서술은 폐기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의 힘은 약화되었고, 그 결과이지만 식민지 근대성의 존재를 부인하는 연구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의 강도는 새로운 정리를 요구할 만큼 강하지 않은 것 같다. 21세기 시작된 변화는 201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의료사 연구자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새로운 잡지나 조직도 출범하였다. 단행본 분량의 연구가 논문에 비해 적은 점은 아쉽지만, 양적으로 연구는 앞으로도 증가할 것이다. 서양과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성과들이 한국의 연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관련 분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연구도 늘 것이다. 이런 연구들이 축적될 때 한국근현대의료사는 이론을 창출하는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다. 2020년대 의료사 연구가 정리될 때 한국적 이론의 성과와 의미를 평가하는 서술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