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먼 시대의 의료 휴머니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비판적 고찰
Medical Humanism in the Posthuman Era: A Critical Examination of its Past, Present, and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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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explores the historical and contemporary significance of medical humanism and its potential value in medical education. Medical humanities emerged as a response to the issues arising from science-driven modern medicine, most notably the marginalization of the individual in medical practice. Medical humanism has evolved to become a guiding ideology in shaping the theory and practice of medical humanities.
However, the COVID-19 pandemic has brought about significant changes in medical humanities, challenging the foundations of humanism beyond medical humanism. The rise of posthumanism raises fundamental questions about humanism itself. The climate crisis, driven by human greed and capitalism’s exploitation of nature, has led to the emergence of viruses that transcend species boundaries. The overflow of severely ill patients has highlighted the classic medical ethics problem of “who should be saved first” in Korea, and medical humanism is facing a crisis. Various marginalized groups have also pointed out the biases inherent in medical humanism.
With this rapidly changing environment in mind, this paper examines the past and present of medical humanism in order to identify the underlying ideology of medical humanism and its future potential in medical education. This paper assumes that there are two axes of humanism: human-centeredness and anthropocentrism. Medical humanism has historically developed along the axis of human-centeredness rather than anthropocentrism, emphasizing the academic inquiry into human nature and conditions, as well as the moral element of humanity.
Furthermore, this paper discusses the challenges that medical humanism faces from post-human centeredness and post-anthropocentrism, as well as the recent discourse on posthumanism. Finally, the implications of this shift in medical humanism for the education of the history of medicine are briefly explored.
1. 들어가는 말
현대의 의료인문학은 과학기술 중심의 현대의학에 의해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점, 특히 의학에서의 개별 인간 소외라는 문제에 대응하여 탄생했다는 점에서 서양의학의 휴머니즘 전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의료 휴머니즘(medical humanism)은 의료인문학의 규제적 이념으로 자리하여 의료인문학 이론과 실천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의료계에 의료인문학이 도입된 맥락이 서구와는 다르지만1) 과학기술 중심의 의학교육에 대한 비판 및 인성 교육의 강조와 더불어 의료인문학의 중요성이 발견되었던 점을 보면 의료 휴머니즘의 중요성은 한국의 의료인문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구나 이는 한국 전통의료에서 강조해 왔던 인술(仁術)과도 맥이 닿아 있는 만큼 의료 휴머니즘은 한국 의료인문학에서도 중요한 방향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 의료인문학이 도입된 지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도 의료인문학의 배후에서 규제적 이념으로 작동하고 있는 의료 휴머니즘에 관한 성찰은 아직 미미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휴머니즘이라는 개념이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 역사적 다의성과 불분명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 그리고 계몽주의의 휴머니즘은 그 의미나 내용이 동일하지 않다. 휴머니즘은 이념적 지향이 서로 다른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모두가 표방할 정도로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의료 휴머니즘은 상대적으로 좁은 의미로만 이해되어 왔다. 즉, 과학기술 중심적이고 산업화, 관료화한 현대 의료 체계 속에서 비인간화되어 가는 의료인을 질병 자체가 아닌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주목하고 아픔에 공감하는 인간적인 의료인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요구로만 이해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포스트휴먼의 거센 물결 아래 의료 휴머니즘을 넘어서 휴머니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자본주의의 끝없는 자연 착취가 초래한 기후위기는 종간 경계를 뛰어넘는 바이러스를 인류에게 선사했다. 넘쳐나는 중증 환자로 인해 촉발된 인적, 물적 자원의 부족은 ‘누구를 먼저 살려야 할까’라는 고전적 의료윤리의 문제가 한국 의료에서도 본격적으로 개진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만큼 의료 휴머니즘은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제 현대의학에서 소외된 다양한 소수자들은 의료 휴머니즘의 편향성을 지적하고 있다. 의료 휴머니즘이 표방하는 휴먼은 과연 어떤 휴먼을 말하는 것이냐고.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는 포스트휴먼을 탈-인간중심주의(humanism)와 탈-인류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의 수렴 현상이라고 말한다. 탈-인간중심주의는 이성적 인간을 보편적 이상으로 두는 것에 대한 비판이고, 탈-인류중심주의는 인간의 종적 우월성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2)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철학에서는 탈구조주의와 해체 그리고 비판적인 반-인간중심주의의 흐름이 생겨났으며, 이런 흐름은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반-인종차별주의, 환경 운동, 장애 운동, 퀴어 이론 등을 비롯한 급진적 비판 이론의 물결과 공명하게 된다. 이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서구의 계몽주의적 이상에 바탕을 둔 인간중심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해체하면서 ‘보편적 인간’ 개념에서 배제되었던 여성, 장애인, 원주민, 성적 소수자 등의 타자를 복권시키고 다양성과 차이를 긍정하려고 한다(페란도, 2021: 13-15). 한편 인간의 탐욕이 과학적 진보와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기후위기, 환경오염, 팬데믹 같은 전 인류 차원의 위험을 야기하면서 그동안 자연화 되었던 타자들 역시 소환되어 재평가되고 있다. 탈-인류중심주의는 각종 동물, 식물, 광물은 물론이고 컴퓨터와 같은 인공물과 심지어 지구와 우주에도 행위자의 지위를 부여하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또 자연/문화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인간과 비인간 타자의 관계적 연결을 추구함으로써 인류중심주의를 폐기하려고 한다(페란도, 2021: 16-18).
이 글에서는 브라이도티의 관점을 전유하여 휴머니즘에는 인간중심주의와 인류중심주의라는 두 축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의료 휴머니즘은 주로는 인간중심주의를 축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특히 인간의 본성과 조건에 대한 탐구라는 학적 요소와 인간애라는 도덕적 요소가 역사적으로 얽혀왔음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최근의 포스트휴먼 논의와 더불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의 범위가 다양한 비인간 생물과 사물에까지 확장되고 있듯이, 의료 휴머니즘도 탈-인류중심주의에 의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음을 논의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이런 의료 휴머니즘의 변화가 의사학 교육에 갖는 함의를 간략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2. 서양의학의 휴머니즘 전통, 그 흐름
서양의학에서 의료 휴머니즘의 뿌리를 찾는 일은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의학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에서 탄생한 자연 철학은 자연과 우주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사유를 이끌었고 이어서 인간의 영혼과 몸으로 그 사유를 확대하였다(주아나, 2004: 297-298). 히포크라테스 의학은 이런 사유 흐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면서 의료 휴머니즘의 시작을 알렸다.
히포크라테스 의학에서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것은 신성(神性)과의 대립, 즉 세계와 인간이 신적 질서에 속해 있다는 설명 방식의 거부이다(주아나, 2004: 299). 질병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이 점은 두드러진다. 히포크라테스 의학은 4체액설에 바탕을 두고 건강과 질병을 기능적으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신전의학과는 구별되었다. 질병을 신의 분노나 악귀의 침입에 의한 일종의 도덕적 형벌로 여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의 개입, 주술적 치료에 의지했던 신전의학에 비해, 4체액이라는 물리적 실재의 균형과 조화를 중심으로 진단과 치료를 수행했던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합리적, 자연주의적 질병관은 신이 아닌 인간을 중심에 두는 의료 휴머니즘의 모습을 드러나게 했다. 이런 시선은 『신성한 질병에 관하여』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신성한 질병에 관하여』의 저자는 신성한 병은 점액질이 많은 사람에게 많이 발생하고, 주로 차가운 점액이 뜨거운 혈액과 만나 발병한다고 주장하면서 기도, 주문, 정화의식 등 신적인 요소의 개입을 모두 거부하기 때문이다(히포크라테스, 2011: 103; 108; 128).
질병에 관한 시선은 인간의 본성과 조건에 관한 탐구로 확장된다.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에서는 신적 질서 속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환경 속의 인간이 탐구 대상이 된다. 인간의 체질과 질병은 무엇보다도 기후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체액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가변적이다. 자연환경뿐 아니라 관습, 법, 정치 체제 등의 사회문화적 환경 역시 인간의 체질과 질병 발생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탐구 대상이 된다(히포크라테스, 2011: 87-89). 이처럼 인간의 보편성과 개별성 모두를 합리적인 요소를 적용해서 평가했다는 점에서 히포크라테스 의학은 인간의 본성과 조건에 대한 탐구라는 의료 휴머니즘의 본성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히포크라테스 의학은 의사에게 인간애에 입각한 특정한 자세와 태도를 요구했다. 그것은 의사에게 진료 능력을 갖추고 환자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는 의무론적인 요소를 지닌다(존슨, 2013: 25). 자연치유력을 중시하고 공격적인 개입을 자제하며 정확한 예후 판단을 강조했던 것이다. 『유행병 I』에 등장하는 “도움을 주고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Primum Non Nocere)”는 이런 요구를 함축한다(주아나, 2004: 215).
이처럼 히포크라테스 의학은 의료 휴머니즘의 핵심 요소를 확립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조건에 대한 탐구’와 ‘인간애’라는 요소이다. 이 두 요소는 역사적인 시기에 따라 상대적인 우열이 있긴 했지만 대략 19세기까지 큰 충돌 없이 균형을 이루어왔다.
로마제국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로는 인간의 본성과 조건에 대한 탐구라는 의료 휴머니즘의 중요한 요소가 약화하였다. 유일신론의 틀에 맞추어 육체의 건강보다는 영혼의 구원이 우선으로 여겨지면서 고대의학은 신선함을 잃고 점차 수도사나 성직자가 담당하는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고전 의학 문헌은 먼지에 쌓인 채로 수도원의 문서고에 보존되었다(존슨, 2013: 42).
하지만 중세 기독교 윤리는 고대의 의료 휴머니즘에 새로운 덕목을 덧붙인다. ‘의사 그리스도(Christ Medicus)’라는 이념은 의학적 치료에 아픈 이에 대한 돌봄이라는 의미를 부여했고, 이는 ‘선한 사마리아 인’으로 대표되는 자애로움, 자선, 동정, 박애, 환대라는 덕목을 의료 휴머니즘에 추가했다. 그리고 수도원 공동체에서 설립한 호스피스는 취약한 이들에 대한 돌봄을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했으며, 결국 이것이 초기의 병원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성지 순례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병자를 돌보던 구호기사단 역시 병원의 전신인 여러 시설들을 세워 위험이나 비용에 관계없이 병자를 돌본다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상을 실천했으며, 이는 히포크라테스 의학에서는 찾기 어려웠던 의료 휴머니즘의 새로운 특징이었다(존슨, 2007: 98).3)
14세기부터 시작된 르네상스는 의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상업적으로 활발했던 이탈리아와 알프스 너머의 도시들에서는 그리스 및 로마의 고전 문화 부흥 운동이 활발했고, 화약, 나침반, 인쇄술 등의 새로운 물질문화는 그 토대가 되었다. 의학 인문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 고전 문헌의 새로운 번역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의 작업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1525년에 그리스어로 모두 번역된 최초의 알디네 판 갈레노스 전집과 히포크라테스 총서의 라틴어 판을 출간하기에 이른다(Porter, 1997: 168-169). 1543년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는 『De humani corporis fabrica(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를 출간한다. 기존의 해부 관행을 깨뜨리고 직접 해부를 시행하여 갈레노스 해부학의 오류를 밝히고, 그것을 아름다우면서 정밀한 도해와 함께 출간한 것은 르네상스 의학 인문주의자들의 정신과 태도를 대표한다. 즉, 지식의 근원인 그리스 고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면서도 단순히 고전을 복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관찰과 고유의 해석을 통해 스스로 지식을 검증하고자 했던 것이 르네상스 의학 인문주의자들의 본모습이었다(Cole, Carlin, Carson, 2022: 39). 해부학, 생리학, 약물학에서 자연철학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의학 인문주의자들의 인간의 몸에 대한 새로운 탐구는 의료 휴머니즘과 후대의 과학적 발전의 가교가 되는 중요한 역사적 시발점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에는 근대적 의미의 의료윤리가 탄생하면서 의료 휴머니즘의 인간애적 요소가 강화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의료 시장이 발전하고 자선 의료 기관이 늘어나면서 내과의사와 외과의사 그리고 다양한 치료사들 간의 분쟁이 첨예하게 벌어졌다. 멘체스터 진료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초빙된 토머스 퍼시벌(Thomas Percival)은 1803년에 『의료윤리; 내과 및 외과의사가 전문직으로서 수용해야 할 원칙과 권고에 관한 강령(Medical Ethics; or, a Code of Institutes and Precepts Adapted to the Professional Conduct of Physicians and Surgeons)』을 출간하여 미래의 전문직 윤리 선언의 모델을 제시했다. 퍼시벌에 따르면 의사는 환자나 동료를 대할 때 항상 신사여야 하는데, 신사는 예의 바르고 친절한 태도를 지닐 뿐 아니라 동정심, 인내심, 견실함, 겸손과 권위 등의 미덕을 겸비해야 한다. 이는 자신보다 낮은 계층에 속한 환자를 치료해야 하고 각기 다른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과 복잡하게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18세기의 병원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방식으로 의료 휴머니즘을 변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존슨, 2013: 119-121). 이제 의사는 올바른 예절을 바탕으로 신사다움을 갖춘 전문직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에든버러 대학의 내과학 교수였던 존 그레고리(John Gregory)도 퍼시벌보다 앞서서 의사의 고전적 예의에 관해 논했다. 그는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동감(sympathy) 개념을 차용하여 고통을 경감하고 병을 치료하려는 인간애를 갖춘 도덕적 의사만이 진정으로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존슨, 2013: 124). 이처럼 계몽주의 시기에 이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족적 에토스가 의료 휴머니즘의 중요한 요소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는 특권을 지닌 계층에게 강한 도덕적 의무를 지우는 방식으로, 그 시작은 중세 구호기사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근거한 휴머니즘은 권력과 특권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도전에 직면했을 때는 쉽게 폐기될 수 도 있다는 모순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존슨, 2007: 104).
퍼시벌의 의료윤리는 영국보다는 미국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였다. 1847년에 발표된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 AMA)의 윤리강령은 주로 퍼시벌의 주장에 바탕을 두고 작성되었다. 물론 의사의 의무만이 아니라 환자의 의무도 기술하면서 환자-의사 사이의 계약적 관계를 강조하고, 의사협회가 정한 교육 조건과 기준을 만족하는 의사만을 공인하는 배타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미국식 특성이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신사로서의 의사’라는 계몽주의 시기의 의료 휴머니즘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3. 의료 휴머니즘의 근대적 변화와 의료인문학의 등장
미국의사협회의 윤리강령이 발표되기 한 해 전에 발견된 흡입 마취술은 여러 가지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것은 의료 휴머니즘의 큰 변화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마취제의 효과와 안전성이 불러일으킨 논란은 결국 새로운 의료 기술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과 그것에 따르는 위험 부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어떤 환경에서 마취제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등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전통적인 의료 휴머니즘이 아닌 새롭게 부상하는 임상의학의 수량적 방법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적정한 마취제의 양을 계산하여 정량화하려는 연구가 이어지면서 환자를 위하는 의사의 책무는 객관적으로 개량할 수 있는 정보에 근거해야 한다는 관념이 확립되어 간다(존슨, 2013: 161). 결국 신사로서의 의사가 갖춰야 할 예절, 품위, 동정심 등에 기대어있던 계몽주의적 의료 휴머니즘의 권위에도 과학이 깊숙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를 대표하는 이로 미국의 의사 리처드 캐봇(Richard C. Cabot)을 들 수 있다. 캐봇은 생리학, 병리학, 미생물학 등의 실험과학과 실증적인 병인론 및 진단법의 발전 그리고 치료 결과에 대한 수량적 방법 등에 바탕을 둔 임상 역량(clinical competence)을 갖춘 의사만이 진정한 도덕적 의사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캐봇은 임상 역량을 구성하는 것은 과학적 전문 지식뿐 아니라 환자가 개인적, 사회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하는 역량을 포함한다고 가르쳤다(존슨, 2007: 43). 즉, 의료 휴머니즘은 임상 역량의 장식품이 아니라 임상 역량의 고유한 요소로 인식된 것이다.
당시 서구 의학계에서 존경받던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 역시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흔히 오슬러는 과학주의와 상업화에 물들어가는 서양의학의 비인간화를 개탄하면서 의학의 인문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자주 언급된다. 특히 오슬러는 의사학(history of medicine) 교육, 즉 젊은 의사들에게 위대한 의사와 그들이 남긴 텍스트를 교육함으로써 의료 휴머니즘 전통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슬러에게도 발전하는 과학에 바탕을 둔 임상 역량은 의업의 기본적인 요소였다. 실례로 그는 히포크라테스보다 갈레노스를 더 높이 평가하였는데 그 이유는 과학적 기반을 지닌 연구자이자 실험의학의 선구자로 갈레노스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하위스만, 워너, 2021: 236). 오슬러의 의료 휴머니즘은 과학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을 작동하게 하는 것이었다. 1919년 옥스퍼드의 고전협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했던 강연 『오래된 인문학과 새로운 과학』에서 그는 인문학자들을 개미 둥지에서 보살핌을 받는 유충에 비유한다. 유충이 분비하는 과즙이나 호르몬이 개미 공동체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처럼 인문학자들은 서구 문명의 뿌리이자 종교, 철학, 문학, 민주적 자유의 이상, 예술 및 과학의 기초를 형성한 위대한 지성인 고대 그리스인들의 업적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은 곧 호르몬’이라는 탁월한 비유가 등장한다(Hinohara, Niki, 2001: 77-79). 과학과 인문학이 두 문화로 나뉘어 서로에 대해 무지한 것을 개탄하면서 오슬러는 자유 교육(liberal education)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휴머니즘에 대한 갈망은 기예에 대한 사랑(philotechnia)과 인간애(philanthrophia)의 조화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 점에서(Hinohara, Niki, 2001: 97) 그는 과학과 인본주의가 균형 있게 결합한 의료 휴머니즘을 꿈꾸었던 것이다.
결국 의료 휴머니즘이라는 저울은 인간의 본성과 조건에 대한 탐구와 인간애라는 두 균형추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균형은 시기에 따라 기우뚱한 균형이기도 했는데, 특히 계몽주의 시기 이후부터는 인간의 본성과 조건에 대한 탐구에 과학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결국 19세기 중후반의 과학주의(scientism)4)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과학주의의 이념에 따라 ‘신사로서의 의사’는 ‘과학자로서의 의사’라는 새로운 이상으로 대체되어 갔다. 하지만 캐봇이나 오슬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과학자로서의 의사는 과학주의에 경도되어 의료 휴머니즘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오슬러에게 과학은 인간을 탐구하고 인간성을 계발하고자 하는 휴머니즘의 토대 속에서 발전해 온 것이었다. 따라서 ‘과학자로서의 의사’는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인본주의적 요구를 무시할 수 없을뿐더러 휴머니즘 자체가 과학과 분리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근대 서양의학의 역사는 결국 과학주의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특히 과학과 기술의 결합에 의해 임상적 유용성이 증명되면서 서양의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도 진보의 사다리에 올라타게 된다. 항생제, 항암제, 항우울제를 비롯한 각종 약물의 개발, 의료영상기술의 발전, 수술 기법의 향상 등 20세기의 기술의학(technomedicine)은 질병에 대한 승리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의학교육 역시 플렉스너 리포트(The Flexner Report) 이후로 기초실험과학에 바탕을 둔 임상의학 교육을 통해 과학적 임상 능력을 갖춘 의사 양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해 갔다. 그 결과 아픈 이로부터 질병을 분리하여 질병의 생의학적 속성에만 집중하게 되었고, 질병을 앓는 환자의 고통을 돌봐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이상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본성과 조건에 대한 탐구는 본래 의료 휴머니즘의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제 그것은 오로지 과학적 탐구라는 영역으로 축소되었고, 또 다른 요소인 인간애는 소외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1960, 70년대에는 서구 의료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정치적 환경이 급변하게 된다. 사회가 점점 다원화되면서 전통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고 개인의 권리 의식은 점점 강해졌다. 베트남 전쟁에 따른 민권 운동의 영향으로 환자 및 장애인 권리 운동이 벌어지면서 의사의 권위는 약화하였다. 남성 중심의 의과대학에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들이 점점 입학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과학기술 중심의 의학교육이 빈곤이나 인종 차별, 정치적 억압 등의 문제에 무지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Wailoo, 2022: 196).
한편 만성 질환과 장애가 늘어나면서 완치보다는 ‘관리’나 ‘삶의 질’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고 이는 의료비 상승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새로운 의료기술은 의료화(medicalization)를 촉발하면서 생명의 탄생이나 죽음 같은 일상 영역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시험관 아기, 연명의료기술, 죽음의 정의 등과 관련한 새로운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의료는 점점 공공의 개입과 감시가 필요한 영역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들은 모두 현대의학의 질적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실증 과학 중심으로 한 세기 가까이 진행되어 온 서구 의료와 의학교육은 이런 문제에 쉽게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개혁의 바람이 불었고 의료인문학과 생명윤리라는 새로운 학제적 분야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4. 의료인문학의 이념으로서의 의료 휴머니즘의 특징
그렇다면 의료인문학을 탄생시킨 이들은 의료인문학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의료 휴머니즘을 어떻게 맥락화 했으며 또 어떻게 구체화 했던 것일까? 사실 의료 휴머니즘은 의료인문학의 배후 이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탐구되어 왔다. 어찌 보면 의료인문학이 곧 의료 휴머니즘과 동의어처럼 여겨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의료 휴머니즘은 의료인문학의 태동 이전부터 오랜 역사적 흐름을 통해 형성되어왔다. 더구나 포스트휴먼 시대인 오늘날의 세계는 의료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의료인문학에 의문을 제기하고 변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의료인문학의 배후에서 규제적 이념으로 작동하는 의료 휴머니즘의 특성을 밝히는 일은 곧 의료인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 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선 의료인문학의 태동기를 대표하는 의사인 에드문드 펠레그리노(Edmund D. Pellegrino)의 견해를 살펴보자.
의료 휴머니즘에 관한 펠레그리노의 기본적인 견해는 오슬러와 유사하다. 즉, 고전적 의미에서 휴머니즘에는 인간성 함양과 삶의 기예라는 교육적 이상의 파이데이아(Paiedia)와 선한 감정과 관련된 인간애(philantrophia)의 두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 휴머니즘 역시 인지적 측면과 감정적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인지적 측면에서 의사는 말과 예술을 통해 문화적 가치와 이상, 표현 방식 등을 익힐 수 있는 교양을 갖추어야 하며, 감정적 측면에서는 질병으로 인해 실존적 고통을 겪는 이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Pellegrino, 2015: 152). 하지만 펠레그리노는 오슬러가 제시한 대로 고전 교육을 통해 교양 있는 신사로 의사를 육성할 수 있다는 점에는 회의적이다.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전문직 교육에 그러한 귀족적 이상은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외부에서 제시되는 규범이나 의무의 형태로 휴머니즘이 부과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료 휴머니즘의 인지적 측면이나 감정적 측면 모두 형식적인 교육을 통해 수동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임상이라는 맥락에 입각한 교육, 즉 임상에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인문학을 통해 성찰하는 방식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ellegrino, 2015: 160). 특히 그는 의료 휴머니즘의 감정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의학에 내재한 도덕적 특질에 주목한다. 출발점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다. 질병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충분하게 살아낼 수 있는 역량을 감소시키고 방해하여 인간성을 훼손한다. 그런데 이런 질병의 부정적 특성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의사와 도움을 받아야 하는 환자라는 두 주체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깔려있다. 의사는 환자의 훼손된 인간성을 회복시켜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되는데, 이것은 환자-의사 관계 그리고 의사라는 직업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Pellegrino, 2008: 93). 이런 도덕성의 바탕이 되는 연민의 감정과 가치는 의학교육이라는 맥락에서만 효과적으로 교육될 수 있다. 따라서 펠레그리노에게 의학은 과학과 인문학의 가교로서 독자적인 위상과 역할을 지닌 것이다. 그것은 “의학은 가장 과학적인 인문학이고, 가장 경험적인 예술이며, 가장 인문학적인 과학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에 잘 드러나 있다(Pellegrino, 2008: 310). 의학은 과학, 예술, 인문학으로부터 비롯된 지식, 술기, 통찰력, 상상력 등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각각의 영역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자와 의사의 치유적 관계라는 독특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펠레그리노는 신사로서의 의사라는 귀족적 에토스를 폐기하고, 인간의 취약성과 질병에 의한 실존적 고통, 그에 기인한 연민의 감정으로부터 의학의 내적 도덕성과 의사의 의무를 길어 올림으로써 의료 휴머니즘을 갱신하였다. 또한 오슬러가 개진했던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과학으로서의 의학이라는 이상을 이어받아 임상을 중심으로 과학, 예술, 인문학을 포괄하는 의학의 성격을 분명히 함으로써 향후에 전개될 의료인문학의 주요한 흐름을 결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펠레그리노의 의료 휴머니즘은 그보다 한 세대 앞서 유럽에서 전개되었던 ‘의학적 인간학(anthropological medicine)’ 그리고 한 세대 후에 시작된 ‘의료 현상학(phenomenology of medicine)’의 흐름과도 공명한다. 의학적 인간학은 대략 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주로 독일과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뵈이텐디예크(F. Buytendijk), 바이츠제커(V. von Weizsäcker), 겝자텔(V. von Gebsattel), 프뢰게(H. Plügge) 등을 들 수 있는데, 대개 이들은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임상 의사들로 현상학이나 실존주의, 특히 철학적 인간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Ten Have, 1995: 8). 철학적 인간학은 근대 이래 인간에 대한 탐구가 개별 분과 학문으로 구획되어 있는 것을 극복하고 인간의 고유한 본질과 지위를 총체적으로 탐구하고자 했으며,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의 근본 문제인 생로병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철학적 인간학은 자연스럽게 의학적 인간학과 연결될 수 있었는데, 생로병사와 그에 따르는 고통의 이해와 해소에는 의학과 철학의 상호 이해와 협력이 필연적으로 요청되었기 때문이다(진교훈, 2002: 128-132).
그런 점에서 의철학자인 텐 하브(Henk Ten Have)는 의학적 인간학의 주요 이념을 다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Ten Have, 1995: 9-11). 첫째,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거부, 둘째, 총체적인 인간과학으로서의 의학 이해, 셋째, 질병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 의학적 인간학은 현대의학이 몸과 정신의 이분법에 근거하여 인간을 물리적 존재로만 파악하는 것을 비판하며, 더 나아가서는 객관과 주관의 이분법에 근거하여 객관적인 것만을 실재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또한 의학에 도입된 자연과학의 방법론으로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면서 의학에 인격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따라서 질병 역시 병리학적 사실만이 아니라 존재에게 위협을 가하는 의미 있는 사건, 즉 “왜?”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간주한다. 결국 질병은 실존적 위기이며 의학은 이러한 질병 이해에 바탕을 두고 실천되어야 한다.
의료 현상학 역시 몸과 질병에 대한 생의학적 접근법을 비판하면서 질병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주장한다.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이 근대과학의 자연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의식에 주어지는 객관적 현상과 주관의 체험으로 이해되는 현상의 상관성에 주목했듯이, 의료 현상학에서도 몸과 질병에 대한 객관적 설명을 넘어 일인칭 체험으로서의 몸과 질병 이해에 주목한다. 몸과 질병은 물리적이고 양적인 측면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현상이고, 삶의 맥락에서 시간과 공간, 타자, 사회, 문화, 역사 등과 다양한 관계 맺음을 통해 발현되는 의미 있는 사건인 것이다(최우석, 2020: 52-53). 의료 현상학은 몸과 질병이 의료적 맥락에서 갖게 되는 ‘의미’를 밝힘으로써 과학기술 중심의 현대의학이 표출하는 비인간화와 몰개성화를 치유하고자 한다. 결국 의학적 인간학과 의료 현상학은 현대의학에 ‘인격’과 ‘주관성’을 도입함으로써 의료 휴머니즘의 인간애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생의학적 질병관과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질병관에 대한 요구와 의학이 고통의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두 가지 문제 의식으로 이어졌다.
의료 휴머니즘이 요구하는 새로운 질병관은 현대의학의 환원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인 질병관을 극복하고 질병에 대한 전체론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였는데, 엥겔(George L. Engel)은 ‘생물심리사회적 모델(biopsychosocial model)’을 통해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Engel, 1977: 129-36). 현대의학의 ‘생의학 모델(biomedical model)’은 질병의 생물학적 결정 요인 이외에 다양한 심리적, 행동적, 사회문화적 결정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질병이 불러일으키는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이 엥겔의 진단이다. 그는 전통과 규범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던 의료 휴머니즘을 일반 시스템 이론이라는 과학적 토대 위에서 다시 세우고자 했다. 인간은 세포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조직화된 질서 속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시스템 속의 존재이고, 건강과 질병 그리고 의료 역시 시스템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엥겔의 입장이 의료 휴머니즘의 인간학적 토대를 강조하기보다는 새로운 과학의 토대 위에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의료 휴머니즘을 또 다른 과학주의에 빠지게 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엥겔의 ‘생물심리사회적 모델’은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인 생의학의 질병관에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총체적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인간애의 실현이라는 의료 휴머니즘의 이념을 구체화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한편 내과의사인 에릭 카셀(Eric J. Cassell)은 1991년에 출간한 『고통받는 환자와 인간에게서 멀어진 의사를 위하여(The Nature of Suffering and the Goals of Medicine)』이라는 저서를 통해 펠레그리노와 의학적 인간학 진영에서 모두 제기한 고통의 문제를 의료 휴머니즘의 중심부로 이동시켰다. 카셀의 인간관은 인간이란 개성, 과거, 가족, 문화, 사회, 역할, 타인과의 관계, 정치적 위상, 행동, 무의식, 몸, 비밀스러운 사적인 삶, 미래에 대한 신념, 초월적인 차원이 얽혀 있는 매우 복잡한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적 사실의 차원뿐 아니라 가치론적 차원과 미학적 차원도 살펴야 하며(카셀, 2002: 379-380) 이것은 의료 영역에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질병은 인간의 여러 차원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한 인간으로서의 온전성을 파괴하여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이다(카셀, 2002: 346). 더구나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치료에 의해 환자의 고통이 가중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카셀은 현대의학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인간적 차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신체적 증상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한다. 그와는 반대로 의료의 목표는 고통의 완화가 중심이 되어야 하며 질병을 설명하는 것에 더해 질병을 앓는 방식에 관해서도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질병이 아닌 아픈 사람 중심의 의료가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의료 휴머니즘의 핵심 이념들을 가장 잘 집약하여 이론적, 방법론적 틀을 제시한 것으로는 서사의학(narrative medicine)을 들 수 있다. 서사의학은 의사이자 문학자인 리타 샤론(Rita Charon)에 의한 제안된 것으로, ‘아프고 취약한 이의 이야기를 잘 인식하고, 흡수하고, 해석하고, 감동할 수 있는 서사기술을 바탕으로 수행되는 의학’을 말한다. 그 핵심은 의료에 담겨있는 서사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훈련을 통해 습득된 서사적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인간 중심의 정의로운 의료를 실현하자는 데 있다. 서사의학은 현대의학에 대한 의료 휴머니즘의 여러 가지 비판 지점을 공유하는데, 특히 주관과 객관에 분리에 바탕을 둔 과학주의에 경도된 현대의학이 몸의 물리화학적 요소에 집중하고 전체로서의 몸 경험을 소홀히 여긴다는 의료 현상학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좋은 의료를 위해서는 서사를 통해 질병에 의해 개인의 세계가 변화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탐구해야 하며, 환자와 의료인의 만남은 상호주관적인 영역임을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서사는 의학교육과 의료 현장에서 인간애를 실현할 수 있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서사를 통해 현대의학에서 소외되는 환자와 의료인의 주관적 영역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사를 잘 이해하고 흡수하여 실천하기 위해서는 훈련을 통해 습득된 서사적 역량(narrative competence)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서사적 역량을 익히기 위해 문학 비평 이론에서 차용한 ‘꼼꼼히 읽기(close reading)’와 ‘창의적 글쓰기(creative writing)’ 방법을 주로 활용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5)
서사의학은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훈련을 통해 타인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말하지 않은 부분도 파악해 낼 수 있는 서사적 역량을 키우며, 창의적 글쓰기를 통해 타인의 상황에 대한 상상력을 기르려고 노력한다. 또한 타인과 글을 공유하여 서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더함으로써 환자-의사 관계의 상호주관적, 윤리적 측면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서사의학은 질병을 겪는 환자와 돌보는 의료인의 주관적, 상호주관적, 윤리적 측면을 서사를 통해 이해하고 흡수하여 교육과 실천에 활용할 수 있는 이론적, 방법론적 틀을 제공함으로써 펠레그리노 이후 강조되었던 의료 휴머니즘의 인간애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의료인문학을 태동시키고 발전시킨 의료 휴머니즘은 인간애를 강조하면서 몸, 정신, 질병 등으로 분절될 수 없는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에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몸과 질병의 생물학적 차원뿐 아니라 심리적, 사회적, 실존적 차원을 두루 이해하고 돌볼 수 있는 인간적인 의사 양성이라는 실용주의적 목표로 구체화되면서 의학교육에 접목되었다.
5. 의료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
과학기술 중심의 의학교육에 다양한 인문사회과학의 개입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면 인간적인 의사 양성이라는 의료인문학의 목표는 달성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현실에서 분출되는 다양한 요구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특히 의료인문학이 태동한 미국에서는 인간적인 의사 양성이라는 실용주의적인 목표와는 별개로 환자의 경험이나 인간의 사회문화적 조건에 대한 관심이 날로 깊어갔다. 이런 변화에는 에이즈를 둘러싼 격렬한 사회문화적 갈등이 큰 영향을 끼쳤다. 전 지구적인 에이즈의 전파는 바이러스 생물학이나 역학뿐 아니라 성적 관행, 종교적 믿음, 동성애 정체성, 제3세계의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인간의 조건에 관한 의학과 보건학, 사회과학, 인문학의 통합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주제로 급부상하였다(Wailoo, 2022: 196-197). 에이즈 문제는 의료가 사회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에 의해 얼마나 큰 영향을 받는지 새삼 일깨워주면서 의료 휴머니즘이 놓여있는 맥락에 대한 비판 의식이 싹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과도한 과학기술 중심의 교육이 압도적인 의학교육 환경에서 의료인문학은 인간적인 의료인의 양성이라는 의제를 놓을 수 없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최근에는 의료인문학의 배후에 있는 의료 휴머니즘의 이념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의료 휴머니즘이 회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총체성이라는 관념 자체에도 서구 형이상학의 도그마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의철학자인 제프리 비숍(Jeffrey P. Bishop)은 서사의학을 비롯한 의료인문학의 도구화에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의료인문학의 이념인 의료 휴머니즘은 서구 형이상학의 핵심인 몸/정신, 이론/실천, 주관/객관의 이원론과 현대의학에 내재된 ‘효율성의 형이상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Bishop, 2008: 16).
의학은 특정한 이론과 실천을 통해 건강의 회복과 질병의 퇴치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효율성의 형이상학을 대표한다. 또한 이원론은 의료 인문학의 질병관에도 녹아있다. 물리적, 신체적 질병과 그것을 앓는 이가 생산하는 서사나 의미의 이분법이 그것이다. 의료인문학은 질병이 만들어내는 서사와 의미를 대상으로 하여 현대의학의 과학주의를 극복하려 하지만 사실과 의미를 엄격하게 구분 짓는 이분법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이원론은 도구적 사고에 바탕을 둔 효율성의 형이상학에 봉사한다. 서양 형이상학은 영혼, 정신, 마음, 신성 등 동물로서의 인간을 뛰어넘어 인간됨을 완성시키는 무언가를 항상 덧붙여 왔는데, 의료인문학 역시 현대의학에 유사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Bishop, 2008: 19).
의료인문학이 효율성의 형이상학을 따르면서 의학에 특정한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로서만 기능한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특정한 효과란 바로 의료 휴머니즘의 핵심 목표인 인간애를 갖춘 의사 양성을 뜻한다. 그러다 보니 정량적인 방법으로 의료인문학의 효과를 측정하여 의학교육에서 의료인문학의 가치를 입증하려는 덧없는 노력까지 이루어진다. 비숍은 이원론과 효율성의 형이상학이 표방하는 특정한 인간관에 기대어 있는 의료 휴머니즘과 의료인문학은 결국 의학에 봉사하는 도구로서만 기능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반-휴머니즘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Bishop, 2008: 22-24).
이와 같은 의료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에서 최근 영미권을 중심으로 소위 2세대 의료인문학이라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데, 비판적 의료인문학(critical medical humanities)과 건강 인문학(health humanities)이 그것이다.
비판적 의료인문학이나 건강 인문학은 비숍의 주장과 결을 같이하면서 1세대 의료인문학이 인간적인 의사 양성이라는 실용주의적인 목표에 집중한 나머지 의학교육의 보조적 혹은 도구적 역할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물론 1세대 의료인문학이 현대의학의 과학주의에 대항하여 서사의 중요성을 일깨우거나 환자-의사 관계의 인간적 측면을 강조한 점, 건강과 질병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고 의료와 의학교육에 문학과 예술을 도입한 점 등은 여전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현대의학의 근본 문제인 환원적이고 기술 중심적인 패러다임은 그대로 둔 채 부정적 측면을 순화하는데 도움을 주는 ‘동반자’나 ‘친구’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Viney, Callard, Woods, 2015: 3). 의료인문학의 ‘비판’은 현대의학이 작동하는 사회정치적, 문화적 맥락을 살피고 현대의학에 의해 소외되는 다양한 주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노력이다. 1세대 의료인문학이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문화적인 것의 이분법 위에 세워졌다면 비판적 의료인문학과 건강 인문학에서는 건강과 질병은 물론 인간도 생물-문화적(biocultural)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현대의학에서 특정한 주체들이 소외되고 특정한 지식만이 생산되는 구조적 불평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Viney, Callard, Woods, 2015: 4). 이들은 과학기술학, 장애학, 퀴어 이론, 문화 연구, 미디어 연구 등과의 연합을 통해 건강과 질병, 의료가 놓여 있는 다문화적, 전 지구적 맥락과 네트워크를 비판적이면서도 창의적으로 재 개념화 하려고 노력한다.
의료가 아닌 ‘건강’을 강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건강 인문학은 1세대 의료인문학이 의사 중심의 위계적인 의료체계를 그대로 용인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건강과 질병 경험에 대한 비 의료인과 대중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건강과 웰빙은 계급, 교육, 직업, 인종, 낙인 등 다양한 사회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며 의료는 그런 결정 요소의 하나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Jones 외, 2017: 932–935). 따라서 건강과 웰빙, 질병 경험에 관여하는 대중의 예술적, 인문학적 활동을 권장하며 다양한 표현 양식에 대해서도 훨씬 포용적이다. 1세대 의료인문학에서 많이 활용되었던 소설, 시, 미술, 사진 등의 예술 형식은 물론이고 만화, 춤, 음악, 건축, 요가, 무술, 실뜨기, 요리 등의 매우 다양한 표현 양식을 통해 의료인문학에 접근한다. 예술과 인문학을 통한 이런 건강 증진 활동을 건강 인문학에서는 ‘창의적 공중 보건(creative public health)’이라고 부르면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이분법과 위계를 깨뜨리려고 노력한다(Crawford, Brown, Charise, 2020: 3). 예술과 인문학 활동은 의과대학뿐 아니라 의료와 관련 있는 병원, 의원, 학교, 감옥, 보호 시설 같은 장소들까지 확장되었으며, 특히 여러 대학 학부에 관련 강좌를 개설하여 의료의 틀을 벗어나 건강과 질병을 바라보거나 현대의학의 시선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민을 키워내고자 한다. 의사 중심의 1세대 의료인문학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고 있으며 의료인문학은 건강 인문학의 한 하위 영역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제 인문학은 현대의학이 잘 작동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비판적 협력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6. 포스트휴먼 의료인문학의 가능성
인간적인 의사 양성을 중심으로 하는 의료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과 이에 따른 의료인문학의 변화는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포스트휴머니즘과의 조우를 가능하게 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인간중심주의와 인류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비판적 의료인문학이나 건강 인문학의 의료 휴머니즘 비판과 접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있는 개인으로서의 환자의 주관적 세계를 중시하고 공감하며, 질병을 생의학적 관점만이 아닌 온전한 전체로서의 인간이 겪는 사건으로 간주하는 의료인문학은 전적으로 휴머니즘적인 기획이다. 서사의학은 이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반면에 포스트휴머니즘은 총체적인 인간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휴머니즘의 가정을 공격한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다양한 인간 및 비인간 타자와 연결되고 결합함으로써 늘 생성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건강과 질병의 경험 역시 다양한 인간 행위자 및 비인간 사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 속에 녹아들어 있는 존재로서의 개인에게 발현된다고 믿는다. 또한 질병은 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적, 사회적 요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고 보며 의료 역시 그런 요인의 하나라고 본다. 그리고 의료인문학이 생명과학기술과 질병의 인문학적 의미를 구획 짓는 반면, 포스트휴머니즘은 다양한 생명과학기술에 의해 생성되는 질병의 경험과 의미를 융합적으로 탐구하려고 한다(McFarlance, 2022: 6).
인간애라는 전통적인 의료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현재의 의료인문학에 포스트휴머니즘은 엄청난 도전이다. 의료인문학이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휴먼이 더 이상 고정불변한 휴먼으로 존재할 수 없다면 의료인문학은 무엇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가? 포스트휴머니즘과 의료인문학의 결합에 관한 논의는 이제 막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향방을 정확히 가늠하긴 어렵지만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의료인문학의 논의를 더욱 풍성하게 하리라고 본다. 첫째, 의료 실천을 중심으로 질병에 관한 새로운 존재론을 제공한다. 둘째, 과학기술과 의료의 관계를 취약성과 돌봄의 관점에서 새롭게 볼 수 있게 한다.
1) 질병의 새로운 존재론 - 다중적인 몸과 질병 행하기
코로나 바이러스가 불러일으킨 전 지구적 공중 보건 비상상태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거나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각종 사물들을 사회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마스크, 백신, 항바이러스제, 신속 항원 검사키트, PCR검사 음성 확인서, 방역패스 등의 사물들은 인간 못지않게 코로나 국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갈등과 대립의 당사자이기도 했다. 일찍이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과학적 사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하기 위해 실험실에 직접 들어갔다. 그는 과학적 사실은 실재하며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를 정확히 반영한다는 전통적인 인식론을 거부하였다. 그 대신 과학자들이 실험 과정에서 다양한 자원과 물질을 동원하여 과학적 사실을 확립하고 확산시키는 과정을 현지 조사를 통해 밝히고, 과학적 사실은 행위자들과 물질적 객체들의 연결망 안에서 생산되고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블록, 옌센, 2017: 62-63). 비인간 행위자들이 과학 활동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네마리 몰(Annemarie Mol) 역시 의료에서 비인간 행위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몰은 병원에서 수행한 동맥경화증의 현지 조사를 통해 하나의 실재로 여겨졌던 질병이 전문 분과에 따라 서로 다른 실천을 통해 다중적으로 존재함을 밝히면서 몸과 의료는 단일 실재가 아닌 다중적임을 주장하였다. 염색된 표본과 현미경을 활용하는 병리과 의사, CT 영상을 판독하는 영상의학과 의사, 다리 저림과 맥박의 감소를 진찰하는 외과의사는 모두 동맥경화증을 다루지만 각각의 동맥경화증은 서로 다른 시선과 개입에 따라 서로 다르게 실천된다. 질병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여러 방식으로 행해진다(doing disease)(몰, 2022: 65-67, 84-92). 즉, 실재가 실천을 통해 다중화되는 것이다.
다중적인 몸과 의료라는 몰의 주장은 현대의학은 물론이고 의료인류학이나 의철학 혹은 의료사회학과 같은 분야가 모두 기대고 있는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 비판에서 시작된다. 몰은 이런 이분법을 ‘관점주의(perspectivism)’라고 부르는 데, 이는 질병에 관한 의사의 해석과 환자의 해석을 동등하게 다루면서도 엄격하게 구획 지음으로써 질병의 자연적 속성은 의학의 영역에, 심리사회적인 속성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의 영역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는 질병의 의미 영역에서 질병의 물리적 실재가 무시되기 쉬우며, 반면에 질병의 실재 영역에서는 의미를 전혀 다루지 않게 된다. 관점주의에서는 대상은 다양한 관점이 한데 모이는 중심점이지만 대상 그 자체는 관찰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몰, 2022: 34-36). 몰은 실천을 중심으로 의료 행위를 살피면 이런 관점주의에서 벗어나 대상으로서의 질병이 조작되고 실행되는 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몰의 관점주의에 대한 비판은 비숍이나 비판적 의료인문학/건강 인문학 진영의 의료 휴머니즘 비판과 접속될 뿐 아니라, 비판을 넘어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한 단초를 제공해 준다. 의사나 환자뿐 아니라 현미경, CT 영상, 메스, 도플러 초음파 등의 비인간 행위자 모두를 의료 실천의 전면에 등장시키는 것은 질병의 실재에서 의료 실천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의해 질병의 본질과 의료의 목표에 대한 통념이 변해가는 현대의학의 지형도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는 의료인문학과 현대의학의 더욱 복잡한 얽힘과 창조적 융합의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 될 수 있다.
2) 포스트휴먼 돌봄 - 취약성과 상호의존성 중심의 과학기술과 의료
포스트휴머니즘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휴머니즘의 인간관을 비판한다. 휴머니즘은 인간을 자율적이고 합리적이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 나갈 능력을 갖춘 존재로 가정한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인간이 얼마나 취약하고 상호의존적인 존재인지 분명해졌다. 전통적으로 취약성은 자율성이 일시적으로 혹은 영구적으로 감소하거나 결핍된 상태로 인식되었으나 최근에 이런 관계는 역전되었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혹은 상황에 따라 취약하며 자율성은 취약성의 바탕 위에서 예외적으로 발휘된다.6)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두드러졌던 돌봄 위기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간의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에 바탕으로 두지 않은 시장과 국가 중심의 돌봄 체계가 그동안 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무관심하고 실패해 왔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의료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인간관에 바탕을 둔다. 개별 환자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성을 발휘할 능력이 훼손되거나 감소되어 있는 상태에 처해있다. 따라서 의사는 연민의 감정과 덕을 바탕으로 환자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인간적인 의료를 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처럼 의료 휴머니즘의 인간애는 취약성을 능동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율성의 감소라는 수동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더구나 자율성 중심의 의료 휴머니즘은 환자-의사 관계라는 미시적 관계의 인간적 요소에 집중하므로 환자와 의사를 둘러싼 의료의 구조적 맥락을 외면할 위험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취약성에 집중하게 되면 취약성이 발현되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을 파악하고 취약성이 차별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불평등에도 눈을 돌리게 된다.
특히 장애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보는 시선에서 이런 점은 두드러진다. 의료 휴머니즘의 입장에서는 정상성을 결여한 존재에게 정상성을 회복시켜 주는 기술을 제공하는 것이 좋은 돌봄일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휴먼 돌봄에서는 장애를 다른 존재로 인정하고 그 입장에서 과학기술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과학기술이 장애인을 위한 온정적 시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의 경험이 과학기술에 주체적으로 되먹임 되고 활용되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장애를 없애고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불완전한 삶을 긍정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술로 인식된다(김초엽, 김원영, 2021: 88). 또한 휴머니즘의 돌봄에서는 과학기술에 의해 역경을 딛고 장애를 극복하는 영웅 서사가 여전히 통용된다. 이런 영웅 서사는 개인의 숭고한 노력과는 별개로 그 자체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쉽게 활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애를 생산하는 사회구조적 억압이나 불평등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포스트휴먼 돌봄은 장애가 사회구조적 관계에서 생산된다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따르면서도 장애를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돌봄의 영역에 포함시킨다.
포스트휴먼 돌봄은 대인 돌봄의 범위를 넘어서는 보편적 돌봄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보편적 돌봄에서는 인간-비인간 행위자-환경의 상호의존성을 인정하고 포용함으로써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번성하고, 지구 역시 번성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물질적, 정서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더 케어 컬렉티브, 2021: 18, 41). 따라서 가족과 국가, 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지던 돌봄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어 지구 행성이 지속할 수 있는 핵심 구성 원칙으로 제시된다.
이처럼 자율성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의료인문학에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도입하는 것은 인간적인 의사 양성이라는 전통적인 의료 휴머니즘의 목표를 갱신함은 물론이고, 의료를 돌봄 체계의 일환으로 재 개념화하는 거대한 포스트 휴먼 전환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7. 결론을 대신하여- 의료 휴머니즘의 변화와 도전을 위한 의사학 교육의 자리는 어디인가?
휴머니즘에 인간중심주의와 인류중심주의라는 두 축이 있다고 할 때, 의료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 혹은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의료 휴머니즘은 인간의 본성과 조건에 대한 탐구라는 요소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요소로 나뉜 채, 역사적 시기에 따라 방점을 달리 하긴 했지만 비교적 균형을 이루어 왔다. 물론 그 과정이 언제나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며 의료 휴머니즘이 철저하게 부정되었던 사례도 있었다. 나치와 일본제국주의 의사들은 전체주의적 이념에 철저히 도구화된 이성에 따라 잔악한 인체 실험을 시행하여 의료 휴머니즘을 배반하였고 인류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의학의 에토스이자 의료인문학의 이념으로서 인간 중심의 의료 휴머니즘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그 중요성을 크게 잃지 않고 있으며, 근대 의학교육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반면에 인간의 종적 우월성에 바탕을 둔 인류중심주의는 최근까지도 의료 휴머니즘의 주요한 축으로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자 실천으로서의 의학은 당연히 인류중심주의를 내재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후위기와 환경오염, 코로나 팬데믹의 위협에 직면하면서 인류중심주의로서의 휴머니즘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적극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지구 행성에 파국의 위험을 초래한 것은 인류세 속의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은 의료 휴머니즘 속에 숨겨져 있던 인류중심주의를 점차 문제시하고 있다. 인간뿐 아니라 다양한 비인간 사물과 환경의 상호 영향을 통해 발현되는 건강과 질병, 인간과 다양한 비인간 사물의 연합과 조정을 통해 실천되는 의료 행위,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 광물을 포함하는 지구 행성 전체를 돌봐야 할 필요성 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포스트휴머니즘의 탈-인류중심주의는 의료인문학이 기초하고 있는 건강, 질병 등의 개념을 휴머니즘의 영역 내에서만 탐구하지 않고, 그 지평을 인간 외 생물과 비인간 사물에까지 확장시킬 가능성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오늘날의 보건의료가 필연적으로 짊어지게 될 세계의 모습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동안 의료 휴머니즘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다양한 타자와 세계를 어떻게 사유하고 전유하며 포용할 것인가? 이제 의료 휴머니즘은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첫째,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인간애의 긍정적 측면을 보존하는 일, 둘째, 전 지구적 위기에서 비롯된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을 의료 영역의 안과 밖에서 성찰하는 일.
그렇다면 이런 의료 휴머니즘의 변화와 도전 과정에서 의사학 교육의 자리는 분명해진다.
첫째, 의료 휴머니즘의 인간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픈 이의 주관적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아픈 이의 필요, 욕구, 바람에 적절하게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의료의 핵심적인 목표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픈 이의 이야기를 듣고, 아픈 이를 면밀하게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는 아픈 이에 대한 존중과 공감, 연민 등의 인간적 가치를 배울 수 있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으며 훌륭한 교육 자료가 된다. 하지만 의사학 교육이 단지 사례를 제시하고 교훈을 얻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픈 이의 질병 경험은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시간성에 대한 이해, 즉 시간에 따른 몸과 질병의 변화를 면밀히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역사적 사고와 방법론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진료실에서 이루어지는 병력 청취(history taking)는 바로 역사적 사고와 방법론에 바탕을 둔 의학의 오래된 실천 행위이다. 의사와 역사가는 모두 사건의 진술이나 사료를 듣고 보는 수용의 과정과 그것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소통하는 능동적인 과정을 거쳐서 일반화한 질병이나 역사를 도출해 낸다(더핀, 2021: 671-672). 이점에 주목한 일부 근대 의학사가 들은 사료를 조사하여 가설을 입증하고 결론을 이끌어내는 역사학의 문헌학적 방법론을 의학에도 도입하였다.7) 하지만 과학주의의 득세와 함께 의학에서의 역사적 사고와 방법론은 거의 사라질 지경에 처했다. 그렇다면 인간애라는 의료 휴머니즘의 이상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의사학 교육은 이야기와 시간성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학의 방법론을 창의적으로 의학교육에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둘째, 필자가 의료 휴머니즘의 변화와 도전을 서술한 방식 자체, 즉 역사적 사고에 바탕을 둔 비판적 성찰에 의사학 교육의 중요성이 담겨 있다. 의료 휴머니즘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 보는 데 있어서 의료 휴머니즘이 어떻게 등장했으며 어떤 변화들이 있었고 그것을 추동한 것은 어떤 맥락이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유 자체가 불가능하다. 더구나 의료 휴머니즘 앞에 놓여 있던 수많은 갈래길 중에 왜 단 하나의 길만이 선택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역사적 사고에 바탕을 둔 비판적 성찰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쟁점을 이해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하기 위해서 혹은 현재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고에 바탕을 둔 비판적 성찰 능력이 필수적이다. 현재의 과학 중심 의학교육이나 임상 예절에 국한된 실용적인 의료인문학 교육만으로 이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역사를 통해 의료에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성찰함으로써 포스트휴먼 시대에 요구되는 의료 휴머니즘의 새로운 가치에 대해서도 전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료의 본질에는 불확실성이 있다고 말한다. 의료 휴머니즘의 미래 역시 모호함과 불확실함이 가득하다. 현대의학이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불확실성에 대처하듯이, 의료인문학 역시 다양한 이해와 해석의 방법론을 동원하여 불확실성을 다루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의료 휴머니즘의 가치를 지키고 새로운 가치를 덧붙이는 일에 역사적 사고와 방법론 및 교육이 빠진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한순간에 허물어질지도 모른다.
Notes
1990년대 중후반부터 21세기 미래사회의 의료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선진 외국을 참조하여 한국 의학교육을 개편해야 한다는 요구가 생겨났다. 당시 정부가 여러 의과대학 신설을 허가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해 모인 의료 관련 단체들이 <한국의학교육협의회>를 발족시키고, 이 협의회가 <한국의과대학 인정평가 위원회>의 산파 역할을 하면서 의학교육 발전을 위한 제도적 틀이 마련되어 갔다. 그 사이 2000년에는 한국 의료계의 여러 문제점이 표출된 의사 파업이 벌어졌다. 이 사태를 기점으로 과학적 의학 이외에 리더십, 성찰 능력, 사회와의 소통 등의 교육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었고 인문사회의학 혹은 의료인문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결국 한국의 의학교육에 의료인문학이 등장하게 된 데에는 신설 의과대학 설립과 글로벌 의학교육 인정 체계의 도입과 같은 제도적, 정책적 요인과 의사 파업이라는 미증유의 사회정치적 요인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맹광호, 2004: 1-11; 전우택, 양은배, 2003: 99-101).
다음 책에서는 “humanism”을 인간주의로 번역하고 있으나 문맥상 인간중심주의가 더 정확하다(페란도, 2021: 12).
물론 이런 서술은 지나치게 서유럽 중심적인 측면이 있다. 같은 시기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고대의학의 전통이 계승, 발전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서 의료 휴머니즘 역시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슬람 문명은 서유럽에 다시 고전 의학 문헌을 전달함으로써 르네상스 시대의 의학 인문주의자들이 탄생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의사이자 철학자인 알프레드 토버(Alfred I. Tauber)는 과학적 객관성의 추구, 실증주의, 환원주의를 과학주의의 주요 요소로 꼽는다(Tauber, 2017: 168-169). 과학주의는 현상에 대한 주관적 접근을 거부하고, 관찰자와는 분리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을 추구하며, 가변적 현상의 근원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물리화학적 구성 요소를 상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사실과 가치를 엄격하게 구분 짓는 것이다.
서사의학에 관한 내용은 다음 논문의 4절을 수정, 요약하였다(황임경, 2020: 446-450).
취약성(vulnerability) 개념에 관한 논의는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노대원, 황임경, 이소영, 2022: 15-41).
대표적인 인물로 역사 병리학(historical pathology)의 창시자인 유스투스 헤커(Justus Hecker)를 들 수 있다. 그의 역사 병리학은 역사학의 인식론적 도구를 활용하여 전염병의 병리학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특히 전염병과 환경, 기상 등의 관계를 연구하여 선 페스트 같은 전염병에 관한 이해를 증진시켰다. 하지만 의학에 실험과학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역사 병리학은 쇠퇴하게 된다(하위스만, 워너, 2021: 2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