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학 교육 80년, 역사와 현황
Education of History of Medicine for 80 Years: History and Current Status in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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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Medical history education enables the medical students to understand the humanistic aspects of medicine and also help to promote the professionalism of doctors. It makes them understand the disappearing or emerging diseases by recognizing the historical changes and trends to respond appropriately. Therefore, it is helpful to study and understand modern medicine.
As of March 2023, 22 (55.0%) out of 40 medical schools in Republic of Korea have medical history course as an independent subject and two schools have integrated courses with medical ethics. Compared to 53.1% in 1995 and 56.2% in 2010, similar percentage of medical schools maintained the subject independently. However, the average credits of 18 schools in 2023(2.0) are higher than those of 1995(1.4) and 2010(1.2).
The number of full-time professor who specialized in the history of medicine was 2 in 1995, 6 in 2010, and 11 in 2023. Generally, a full-time professor majoring medical history tend to have other duties besides the education and research of medical history, depending on the role of the department to which he or she belongs since they are assigned to the humanities education other than medical history education.
Currently, the curriculums that have been recommended by Korea Association of Medical Colleges(KAMC), Korean Institute of Medical Education and Evaluation(KIMEE), and The Korean Society of Medical Education(KSMED), emphasize medical humanities but do not necessarily include the medical history. As a result, medical history courses have increased slightly, but the other humanities classes have increased significantly since 2000.
The knowledge of medical history will help students become a doctor, and a doctor with professionalism adapting to the rapidly changing medical environment. Students will also be able to establish the ideas they must pursue in the present era when they come into contact with numerous historical situations. And if they share a sense of history, they will inspire a sense of unity as a profession and will be more active in solving social problems such as health equity.
It is hoped that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will step forward to set the purpose and goal of the medical history education, and organize the contents of the education. Classes should be prepared so that students are interested in them, and education should be focused on how the contents of education will be able to be used in medicine. To this end, it is necessary to establish the basic learning outcomes of history of medicine, and prepare learning materials based on these learning outcomes. It is also necessary to increase the competencies of educators for the history of medicine, such as performing workshops.
With the dedication of the pioneers who devoted their energy to the education of medical history, it is expected that medical history will find out what to do in medical education to foster better doctors and provide better education.
1. 시작하는 글
역사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의미하며,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현재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의사학은 의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1). 현대의학사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쿠르트 슈프렝겔(Kurt Sprengel)은 18세기 말 역사학과 현대 의학의 근본적인 통합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역사적 감수성으로 의학 지식의 변화와 진보를 추구하고자 했다. 역사는 현재를 위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으며, 실용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의사학 교육을 통해 의과대학생들이 이론에서 가치를 찾도록 하고, 역사가 겸손과 관용을 심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학생들이 의학과 친숙해지도록 의사학 교육을 제도화하고자 했다(하위스만 등, 2022: 24).
하인리히 다메로프(Heinrich Damerow), 에밀 이센제(Emil Isensee), 칼 분더리히(Carl Wunderlich) 등 일부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대학에서 단편적으로 진행되던 의사학 교육이 의학교육에 본격적으로 포함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파리에서 세계의사학회(International Society of the History of Medicine, ISHM)가 결성된 후부터다. 의사학 연구에 대한 학자들의 호기심은 이미 발휘되고 있었으며, 이 학회 결성 후 각국의 의과대학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Sigerist, 1939: 627).
20세기 말에 이르자 역사뿐 아니라 다른 인문학 분야까지 포함하여 의료인문학 교육을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의료인문학(medical humanities)’ 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40년대 미국에서였다. 그 이전부터 의사학을 교과목으로 도입하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철학, 문학, 종교 등의 지식을 의학 교육에 활용하기 시작했다(블리클리, 2018: 36-38). 그러다 보니 의학교육에 있어서 의사학이 별도로 교육을 해야 할 분야인지, 의료인문학2)의 한 분야로 교육을 해야 할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의료인문학이 미국 의학교육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다(권복규, 2022: 506).
의학교육에서 의사학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권복규, 2022: 506-507).
1) 의사학 교육은 의학의 인문학적 측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2) 의사학 교육은 의사의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 증진에 도움이 된다.
3) 의사학 교육은 의학의 한계와 불확실성을 인식하게 해 주어 오늘날의 의료적 실천(practice)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4) 의사학 교육은 질병의 역사적 변천과 추이를 인식함으로써 소멸하거나 새롭게 등장하는 질병들을 이해하고 이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5) 의사학 교육은 의대생, 나아가 의사들이 교양을 갖추고 지식인으로서 필수적인 역량-예컨대 글쓰기-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된다.
6) 의사학 교육은 자신의 전공이나 자신이 교육받고 속한 기관의 역사를 파악하여 전통을 유지해 가면서 미래를 예측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된다.
훌륭한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의사학 교육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시됐다(Risse, 1975: 464). 최근에는 의사의 전문직업성을 함양하는 방법의 하나로 의사학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문도 발표되고 있다(Bryan, 2013: 97-101). 1990년대 말부터 한국의학교육평가원에서 인성 함양을 위해 의료인문학 교육에 관한 내용을 평가항목으로 넣기 시작했을 때 이미 가치관이 정립되다시피 한 성인 대상 교육의 효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바 있다. 의료인문학 교육을 통해 함양하고자 하는 소양이 교육에 적합한지를 평가한 논문에서 의사학과 프로페셔널리즘은 의료법, 의료윤리, 의료커뮤니케이션과 비교할 때 의과대학의 교육과정에 도입하기 까다로운 분야로 지목되기도 했다(전우택, 2010: 25).
의사는 단순한 기능인(technician)이 아니라 지성인이자 리더로 활동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서양의학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한의학과의 관계 등 우리 사회에 내재한 여러 의료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역사적 감각을 기를 필요가 있다(권복규, 2022: 511-512).
황상익은 199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의사학 강좌 학습목표를 아래와 같이 제안했다(황상익, 1995: 91).
1) 의학과 의술의 발전과정을 학습함으로써 현대의학의 역사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2) 각 시대 의료인들의 모습을 여러 측면에서 논의함으로써 오늘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의사상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3) 보건의료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됐는지(또는 못했는지)를 검토함으로써 오늘날 보건의료 문제의 특성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4) 역사를 통해 의학과 사회가 맺어 왔던 관계를 인식함으로써 현대사회 속에서 바람직한 의학의 위치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5) 의학과 보건의료의 역사를 파악함으로써 각 시대 인간들의 구체적인 생활 모습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소개한 의사학 교육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학습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면 모든 의과대학생이 의사학을 공부해야 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2. 연구 방법
2023년 3월 현재 우리나라 40개 의과대학 홈페이지에 제시된 의학교육 과정을 참고로 하여 학년, 과목명, 학점 등을 조사함으로써 의사학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홈페이지 정보만으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려운 경우에는 그 학교의 담당 교수 또는 내용을 잘 아는 교수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여 과목 이름과 학점, 어느 학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수업을 담당하시는 교수님은 어떤 분인지, 여러 명이 수업을 담당하는 팀티칭인지, 한 분이 수업 전체를 맡고 계시는지 등을 확인했다.
의사학교실이나 의사학과가 독립된 경우는 1개 의과대학만 있으므로 의사학 전공 전임교원을 확인하기 위해 인문사회의학교실과 같이 유사 부서에 소속된 전임교수 중에서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의 역할과 그동안의 학술 활동 등을 고려하여 의사학이 주전공인지, 의료윤리나 의철학 등 역사가 아닌 다른 인문학이 주전공인지를 구분했다. 그러나 과거에 역사 관련 학회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요즘은 다른 분야에서 더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고, 반반 정도 활동하시는 예도 있으므로 인문사회의학 또는 의료인문학 전공이라고 표시된 전임교수를 대상으로 의사학 전공인지 다른 전공인지 정확히 구분하기가 어려운 때에는 역할의 반 이상을 의사학에 관여하시거나 본인의 정체성을 의사학에 두고 있을 경우 의사학 전임교수로 판단했다.
이미 두 차례에 걸쳐 각 의과대학의 의사학 교육에 대한 현황을 소개한 논문이 발표된 바 있다(황상익, 1995: 86-101; 여인석: 2010: 7-19). 본 연구에서 확인한 의사학 교육 현황과 과거의 논문에서 제시된 내용을 비교 분석하여 의사학 교육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3. 우리나라 의사학 교육 현황
2023년 3월 현재 우리나라 40개 의과대학 중에서 의사학이 독립된 과목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대학은 22개였다. 그 중에서 2개 대학은 윤리와 함께 교육하는 과목으로 개설되어 있다.
의사학이 독립되어 있지 않은 경우 의료인문학, 의사와사회, 환자의사사회, 의료윤리 등 다양한 이름의 과목이 개설되어 소위 의료인문학 과목 내에서 의사학 교육이 일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평가 기준에서 기초와 임상의학의 통합교육이 강조되면서 의사학 교육도 통합교육 내에서 시행되는 학교가 많았다.
의사학을 전문으로 공부한 전임교원은 40개 의과대학을 모두 통틀어 12명이었으나 전임교원이 되면서 소속 부서의 역할 등에 따라 의사학 외에 다른 업무를 겸하고 있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각 의과대학에서 의사학 전공 전임교수를 선발하기는 하지만 의학역사 이외의 인문학 교육이나 의학 교육 담당 부서에서 해야 할 일을 겸하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의사학 교육을 독립된 과목으로 운영하는 22개 대학에서 그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가 의사학 전공인 경우 5개 대학뿐이었고, 의사학 전공 전임교원이 있는 다른 6개 대학에서는 의사학이 독립된 과목으로 개설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의사학 전임교원 유무와 의사학 과목이 독립된 과목인지 아닌지는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립된 의사학 과목은 10개 대학에서 의예과 1학년에 개설되어 있고, 8개 대학에서는 의예과 2학년, 2개 대학에서는 의학과 1학년, 1개 대학에서는 의학과 2학년에 개설되어 있었다. 또 1개 대학에서는 의예과 1학년과 의학과 2학년 등 두 개 학년에 의사학을 교육하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다. 의예과 2학년에 2개 과목이 개설된 학교도 한 학교가 있으므로 개설 과목 수는 모두 25개였다. 총 학점은 44학점으로 과목당 평균 1.76학점, 22개 학교임을 감안하면 학교별로 평균 2.0학점이 교육되고 있다. 그러나 의료윤리와 함께 교육하는 경우가 1개3) 있으므로 의료윤리에 대한 시간을 제외하면 실제 학점은 약 1.96학점에 해당한다.
의학과 1학년에 개설된 2개 대학에서는 모두 1학점이었고, 의학과 2학년에 개설된 3개 과목은 1학점 2개와 2학점 1개였다. 의학과에 개설된 총 5과목 중 4개가 1학점, 1개가 2학점인 걸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많은 의예과에 개설된 경우와 비교할 때 의학과에서 의사학 교육이 이루어지는 경우 학점이 작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조사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40개 의과대학에 이루어지고 있는 의료인문학 관련 교육은 전국 40개 의과대학에서 각각 평균적으로 9.1개 과목을 개설하여 12.3학점에 해당하는 수업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윤태영, 2021: 79). 이와 비교하면 의사학이 독립된 과목으로 운영되는 경우 전체 의료인문학 수업의 약 1/6에 해당하고, 그 외에 일부 수업에서 좀 더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에서 평가항목을 개발하면서 2007년부터 시작된 2주기 평가 기준에 “행동과학, 의료윤리, 의료관련법규, 기타 인문·사회의학 과목이나 강좌가 학년별로 최소 1개 이상 개설되어 있고 의학전문직업성과 의사소통에 관한 수업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라고 제시되었다. 이를 감안하면 2000년 이후 의사학 수업이 늘어난 것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다른 의료인문학 관련 수업이 훨씬 많이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의사학을 전공이라 할 만큼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전임교원은 10개 대학에 1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이 소속된 부서는 인문사회의학과(가톨릭대), 의료인문학교실(건양대), 의료인문·의학교육학교실(경북대), 의인문학교실(고려대), 인문의학교실(서울대), 인문사회의학교실(아주대, 인제대), 의학교육학교실(연세원주, 이화여대), 의학교육 및 의료인문학교실(인하대) 등으로 다양했고, 의사학이라는 학문 이름이 들어간 부서는 의사학과(연세대)라는 이름을 가진 1개교에 불과했다. 그 1개교의 의사학과는 의료법윤리학과와 함께 인문사회의학교실 내 한 과로 존재했다. 11개 의과대학에서 의사학 전임교원이 근무하는 부서의 이름은 아주 다양했고, 실제 업무도 의사학 교육과 연구를 벗어나 의학과 접목될 수 있는 인문학과 교육학의 다양한 영역에서 역사학 지식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4. 현재와 과거의 의사학 교육 비교
32개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1994년 12월부터 1995년 1월 사이에 이루어진 설문조사에서 18개 대학이 응답한 결과와 『의과대학교육현황』에 나와 있는 14개 대학의 자료를 통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의사학 교육은 전체 의과대학의 53.1%인 17개 의과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10개 대학(58.8%)은 의예과, 7개 대학(41.2%)은 의학과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학점은 평균 1.4학점(0.5-3학점)이었고, 수업 시간은 평균 23.6시간(8-48시간)이었다. 강좌의 명칭은 의사학이 13개 대학, 의학사가 2개 대학, 의사학 및 의료윤리가 2개였다(황상익, 1995: 89).
2010년에 41개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윤리와 함께 교육하는 2개 학교를 포함하여 23개 대학(56.2%)이 의사학 과목을 개설하고 있었고, 의예과와 의학과에 개설된 경우가 각각 반 정도였다. 의예과와 의학과에 한 과목씩 두 과목이 개설된 학교가 하나 있었으므로 총 개설 과목수는 24개였고, 학점 합계는 29.5학점으로 평균 약 1.2학점이었다.
1995년과 2010년의 연구에서 의사학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가 각각 53.1%와 56.2%였으며, 2023년에는 55.0%에서 의사학이 독립된 과목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점은 약 2.0으로 과거보다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과거에는 의사학이 독립된 과목이 아닌 경우 의사학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으나, 현재는 의료인문학 과목에서 의사학 교육이 조금씩이라도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과거에 비하면 의사학 교육 비중은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의사학 교육의 증가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에서 의학교육을 평가하는 기준에 변화가 생긴 것이 가장 큰 이유로 판단된다. 1주기 평가 때부터 인문·사회의학4) 교육 여부가 평가항목에서 필수항목이 되었고, ‘통합교육’을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으로 제시함으로써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을 통합하는 교육을 넘어서서 의료인문학 교육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각 의과대학에서 의료인문학 교육에 전보다 더 큰 관심을 쏟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1960년대부터 서서히 의료인문학 교육의 필요성이 제시된 후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우리나라에서도 20세기 말부터 의료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 의약분업의 실시 과정에서 환자와 일반인들이 의사의 기대만큼 의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표면화하면서부터 의학교육에서 신뢰받는 의사를 양성하는 방법의 하나로 의료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각 의과대학에서 자의든 타의든 의학 교육 과정에 인문학적 지식을 교육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 인문학의 한 분야인 의사학 교육 시간이 늘어나게 된 이유로 생각된다.
5. 의사학 교육내용의 변천과 전임교수 임용
우리나라 의과대학에서 의사학 교육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46년 4월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윤일선이 수업을 한 것이다. 윤일선은 일본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병리학자이며 의사학자인 아키라 후지나미(藤浪鑑) 교수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분으로 평소에 의사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분이었다5).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학자라 할 수 있는 김두종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그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부립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만주에서 개인 의원을 열었다. 그 후 서양의학중심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고유의 의학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만주의과대학 동아의학연구소에서 의사학 연구에 뛰어들었다(여인석, 1998: 4-5).
해방 후 만주에서 돌아온 김두종은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사학 수업을 맡았다. 1947년 4월에 윤일선, 최동, 이병도 등과 함께 대한의사학회를 창립했고, 1947년 9월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임용되면서 최초로 의사학교실 주임교수를 맡았다(황상익, 2018: 2-3). 이 때는 일본에도 의사학교실이 없던 때였으므로 획기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두종이 의사학교실을 맡은 것은 의사학이 우리나라 의과대학 체제 내에 자리 잡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여인석, 2010: 8).
김두종은 그 후로 서울대학교 병원장, 과학사학회 초대 회장, 숙명여대 총장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느라 국내 의사학 교육을 확대시키는 데에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1951년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교실에서 전임강사로 임용된 이영택이 1986년에 은퇴한 후에는 1994년 황상익이 부임할 때까지 우리나라 유일의 의사학교실이 유명무실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일부 의과대학에서 뜻있는 교수의 노력으로 의사학 교육이 이루어져 왔다.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서는 임상병리학(현재의 진단검사의학) 교실의 김중명이 1961년부터 본과 1학년에서 의사학 교육을 시작했다(김재식, 1987: 83). 또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서 1971년에 기용숙이 “의학개론”과목을 개설하면서 의사학에 관한 내용을 일부 포함하여 교육했다(전종휘, 1985: 머리말). 그 외에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등 일부 학교에서 뜻있는 분들에 의해 의사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1979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당시 인제의과대학)이 개교하면서 내과 교수이자 초대학장인 전종휘가 의예과 1학년 “의학개론” 과목에서 의사학 수업을 시작했다. 전종휘는 1985년에 『醫學槪論』을 처음 출간하면서 의사학에 관한 내용을 담았으나 1993년 2월에 퇴직하면서 “의학개론” 과목이 폐지되고, 의사학 강의도 중단되었다.
1994년에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에 의사학교실이 개설되고 이종찬이 전임교수로 부임하여 수업을 시작했다. 그 해 10월 27일, 황상익이 서울대학교 의사학교실에서 전임교수로 일하기 시작했고, 1997년에는 폐강된지 9년 만에 의사학 수업이 재개되었다. 1996년 3월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에 여인석이 전임교수로 임용되면서 의사학 교육이 시작되었다.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서는 1998년에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서홍관의 건의로 “의사학” 강좌가 재개되었다. 초기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교실 황상익이 출강했으며, 1999년 1월 1일에 ‘의사학 및 의료윤리학교실’이 개설되고, 서홍관이 주임교수로 임명되면서 의사학과 의료윤리학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4년 3월에는 강신익이 2대 주임교수이자 전임교수로 임용되었다. 그해 9월에 인문의학교실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인문의학연구소 설립을 주도하고 『인문의학』이라는 3권의 책을 발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의학 속의 인문학 교육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의사학에 대한 수업이 강화되지는 않았다.6)
울산대학교 의과대학은 2001년에 인문사회의학교실을 설립했고, 2002년 9월에 그 전부터 의사학 수업을 하고 있던 이재담이 첫 전임교수로 부임하여 수업을 맡았다.7)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서는 오래전부터 학교 설립과 함께 인류학, 문학, 사회학, 철학, 신학, 법학 등의 인문·사회학 분야와 의과학을 포함하는 과학 분야 및 의학과 의료 관련 제반 학문 간의 소통을 추구하는 인문사회의학과를 개설하고, 학부에서 교육해 왔으나8) 의사학 전공 전임교수로는 2023년에 박승만이 처음 부임했다.
1995년 조사에서 53.1%의 학교에서 의사학 교육을 하고 있다고 답했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의학개론”과 같은 과목에서 일부 수업을 하면서 실제 시간 수는 10시간도 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3학점 48시간 교육을 시행하는 학교와 비교할 때 그 편차가 컸다. 수업은 주로 의사학에 관심을 가진 교수 한두 분이 전체 수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타 의과대학보다 앞서서 비교적 빠른 시기에 전임교수로 의사학 전공자를 임용한 의과대학 중 서울대학교, 아주대학교, 연세대학교, 인제대학교는 초기에 부서 이름에 “의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니 현재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제외하면 “의사학”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상태다. 대신 인문사회의학, 인문의학, 의인문학, 의료인문학 등 포괄적인 이름을 부서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2010년에 여인석은 “이러한 명칭은 앞으로 생겨날 다른 의과대학에서도 채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이러한 교실을 개설하는 의과대학 측의 기대와 요구가 단순히 의사학 교육에 그치지 않고 의료윤리를 포함한 다양한 의료인문학 과목의 개설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의사학 교실 및 의료인문학 교실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라고 예상했으며(여인석, 2010: 9), 현재까지 예상이 잘 적중하고 있다.
초기의 의사학 교육 내용은 교육자가 전적으로 주도하여 결정했다. 서울대학교의 김두종, 이영택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전통의학, 즉 한의학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고, 의사학 강좌는 주로 서양의학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조선의 내용을 다룰 때는 구한말의 질병이나 시대 상황, 서양의학 도입과정 등 극히 일부가 의사학 교육에 포함되었을 뿐이다. 한의과대학에서 한의학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분들이 별도로 계시고 의과대학에서 다루는 학문이 한의학과는 상관없는 서양의학이니 이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의사학 수업을 하는 방법은 역사의 시대순으로 의학의 발전과정을 소개하는 방법과 의학을 분야별로 나누어 그 분야별 역사를 소개하는 방법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의학 역사를 시대순으로 소개하는 수업의 경우 2000년 이전에 각 의과대학에서 의사학 수업을 위해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책으로 편찬된 것과 수업에서 교과서로 사용한 책을 보면 시대순으로 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9).
그런데 2000년에 재클리 더핀(Jacalyn Duffin)은 『History of Medicine』에서 시대별이 아니라 주제별로 의학의 역사를 기술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의사학 수업이 아닌 다른 과목에서 수업을 시작하면서 그 학문의 역사를 소개하는 분들이 계셨다. 또 시대별로 수업을 하는 가운데서도 수업을 맡은 교수가 자신 전공 과목의 역사를 소개하는 경우가 있었다. 『의학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더핀의 책은 주제별로 구분한 의사학 수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의사학 교육을 하는 의과대학에서 혼자 맡아서 진행할 교수가 없다면 팀티칭을 해야 할 것이고, 한 꼭지씩 수업을 나누어 맡는다면 시대순으로 하기보다 주제별로 수업을 하기가 쉬울 것이다. 실제로 시대순으로 수업을 하는 것은 역사의 전반을 꿰뚫고 있지 않으면 담당 교수로서 해야 할 역할이 쉽지 않지만, 주제별로 수업을 하는 것은 처음 의사학 교육에 임하는 교수들이 의학역사 전체를 꿰뚫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전문분야만 한 꼭지 맡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준비하기가 쉬울 것이다. 2000년대 초반에 본고의 저자 중 한 명이 수업에 참여한 세 개의 의과대학에서는 의사학 교육을 시대순에서 주제별로 바꾸기도 했다.
1990년대 말부터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의학교육 평가 기준에 인문·사회의학(의료인문학) 교육을 하는지가 평가항목으로 등장하면서 의사학 교육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하고, 의사학 교육을 별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학 교육과정에서 통합교육을 시행하면서 의료인문학의 한 꼭지로 들어가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이와 같은 추세가 반영되어 지금은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의료인문학 교육을 시행하고 있고, 인문학의 한 분야인 의사학 교육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6. 의학교육 선도기관에서 바라본 의사학 교육
1945년에 군정이 시작되고 오늘날과 같은 6년제 의학교육이 표준화된 후 약 반세기가 지나도록 의과대학에서 의사로 자라날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지가 확실치 않았다. 대학 교육을 책임지는 대학과 교수에게 교육의 자율권이 보장되었지만, 교육자가 무슨 내용을 어떻게 가르치는지도 모르고, 교육기관이 교육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하는지도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하던 대로 의사를 양성하는 일이 지속되어 온 것이다.
아무리 교육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해도 의과대학생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내용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각 의과대학에서 공유할 수 있는 학습목표가 필요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성과 바탕 교육이 강조되면서 학습목표는 학습성과로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의학교육을 선도하는 기관들이 의사학 교육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가 생겨났다.
(1) 대한의학회의 학습목표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6년제 의학교육제도가 정립되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사학 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교수가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학교를 설득하여 교육 시간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각 의과대학에서 1990년대가 거의 끝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1999년에 대한의학회에서는 회원 단체를 대상으로 학습목표집을 발행했다. 이때 대한의사학회에서 제안한 의사학 학습목표는 서양의학사 48시간, 한국의학사 12시간을 배당하여 반드시 알아야 할 A 학습목표와 알아두면 좋은 B 학습목표를 각각 48개와 12개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서양의학사는 48시간 동안 48개의 A 학습목표와 48개의 B 학습목표를 학생들에게 교육하고, 한국의학사는 12시간 동안 12개의 A 학습목표와 12개의 B 학습목표를 교육하는 것이다.
서양의학사의 학습목표는 시대순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국의학사는 조선말에 서양의학이 도입되는 시기부터 현재까지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학습목표를 만들기 위해 학회에서는 나름대로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학습목표에 바탕을 둔 교과서를 발행하지는 않았다. 그랬으니 실제로 각 학교에서 이 학습목표 내용을 모두 교육할 수 있는 교육진을 구성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이 학습목표를 따라야 할 의무나 평가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사국가고시에 의사학을 포함하는 일도 어려웠으니 대한의사학회와 대한의학회 차원에서 상징적으로 발표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2)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인증기준
1990년대 중반부터 교육부에서 대학평가를 제도화하는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의과대학 평가를 의과대학과 의사단체 중심으로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99년에 대한의사협회의 후원을 받은 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에서는 “의료관련 인문사회계열 중 최소 1과목 이상 개설”하자는 항목을 담은 안을 제안했다(한국의과대학인정평가위원회, 1999: 55).
2004년에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 설립되어 의과대학 인정평가를 담당하게 되면서 2주기 평가항목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들어갔다(한국의학교육평가원, 2007: 49).
2-4-1 인문·사회의학 관련 과목이나 강좌를 개설하고 있는가?
[주] 인문·사회의학의 분야는 의사학, 의료윤리, 의학교육, 의료정보, 철학, 어문학, 사회학, 경영학, 의사법학, 인류학, 심리학, 행동과학, 보완대체 의학 등을 의미한다. 예방의학(의료관리, 의료정책, 역학 등)과 법의학은 교육내용에 따라 인문·사회의학분야로 분류 가능하다.
[필수기준] 임상관련 문제에 대한 판단과 도덕적 의료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행동과학, 의료윤리, 의료관련법규, 기타 인문·사회의학 과목이나 강좌가 학년별로 최소 1개 이상 개설되어 있고, 의학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과 의사소통에 관한 수업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학년별로 최소 1개 이상의 강좌를 개설해야 하는 것은 과거와 비교하여 의사학을 포함한 인문·사회의학 과목의 대폭증가를 의미했지만, 의사학을 반드시 해야 할 필요는 없으므로 각 의과대학 사정에 따라 교육목표 달성에 부합되면서 평가받기에 용이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그런데 2-4-3에서는 보완대체의학 또는 통합의학에 대한 내용이 있는지를 평가항목에 포함한 것이 특징이다. 그때까지 국내 의과대학에서 교육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보완대체의학 또는 통합의학과 비교할 때 한국의학교육평가원에서는 이미 과반의 의과대학에서 수행 중인 의사학은 더 교육가치가 낮은 분야로 취급한 것이다.
이 항목은 Post 2주기 평가기준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다가 2018년에 세계의학교육연맹(World Federation of Medical Education, WFME)의 기본의학교육(Basic Medical Eduation, BME)에 바탕을 둔 ASK2019 의학교육평가인증 기준에서 아래와 같이 바뀌었다(한국의학교육평가원, 2018: 22).
K.2.4.1 의과대학은 의료인문학 교육과정을 적절하게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ASK2019 의학교육평가인증 기준은 여러 차례 수정되었지만, 이 항목은 처음 제시된 문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의 모태가 된 세계의학교육연맹의 원문(WFME, 2015, 22)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아래에 그 원문을 제시한다.
2.4. BEHAVIOURAL AND SOCIAL SCIENCES, MEDICAL ETHICS AND JURISPRUDENCE
Basic standards:
The medical school must
• in the curriculum identify and incorporate the contributions of the:
- behavioural sciences. (B 2.4.1)
- social sciences. (B 2.4.2)
- medical ethics. (B 2.4.3)
- medical jurisprudence. (B 2.4.4)
ASK2019 의학교육평가인증 기준에는 세계의학교육연맹의 평가기준표에는 없는 ‘의료인문학(medical humanities)’이라는 용어가 삽입된 것이다. 세계의학교육연맹에서는 의료윤리(medical ethics) 교육을 하는지 평가를 하지만 의사학 교육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한국의학교육평가원에서 ASK2019 의학교육평가인증 기준을 적용하면서부터 ‘의료인문학’이라는 용어를 삽입해 놓는 바람에 의사학 교육을 하는 의과대학에서 평가를 잘 받기 위한 목적으로 의사학 교육을 하는 것을 허용해 놓은 결과가 되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평가기준위원들이 의료윤리 외에 의사학, 의철학 등의 의료인문학 교육에 관심이 있거나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생긴 일이 아니라 인문학10)과 사회학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1주기부터 Post 2주기까지 평가지침에서 사용하던 ‘인문·사회의학’이라는 용어를 단순히 ‘의료인문학’이라는 용어로 고쳐쓰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용어를 삽입해 놓은 결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지난 20여 년간 의학교육을 선도하고 있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과 세계의학을 선도하는 세계의학교육연맹에서는 훌륭한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의학교육을 평가하는 기준을 마련하면서 의사학 교육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3)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의 기본의학교육 학습성과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는 1995년에 처음 학습목표집을 발행한 후 수년에 한 번씩 개정한 학습목표집을 발행해 오다 2006년에 ‘학습목표집’이라는 이름으로는 마지막판을 발행했다. 그 후로 의학교육에서 성과바탕교육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면서 그 추세에 발맞추듯이 학습목표가 아닌 학습성과집 발행준비를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와 성과바탕교육이 강조되면서 학습목표집이 학습성과집으로 이름과 내용을 바꾸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2012년에 『기본의학교육 학습성과-진료역량 중심』을 발행했고, 2014년에는 『기본의학교육 학습성과-과학적 개념과 원리 중심』을 발행했다.
이보다 앞서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에서 인문·사회의학 교육에 대한 평가를 시작하자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에서도 정책과제를 통해 2007년에 『인문사회의학 교육과정 개발 연구보고서』를 발행했다. 그 후에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에 대한 학습성과를 먼저 발행되었고, 2017년에는 『기본의학교육 학습성과-사람과 사회 중심』도 발행했다. 의학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소위 인문·사회학적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가져야 할 역량을 키우기 위한 학습성과를 제안한 것이다.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에서 2017년에 발행한 『기본의학교육 학습성과-사람과 사회 중심』은 <표 3>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8개 영역을 보면 의사학에 관한 내용은 독립되어 있지 않으며, 38개의 최종학습성과에도 의학의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실행학습목표에 의학의 역사에서 공부해야 할 내용이 극소수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장차 사회에서 의사로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내용을 제시한 ‘기본의학교육 학습성과’에 의사학에 관한 내용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7. 의사학 교육의 미래를 향한 제언
현대 의학교육은 1910년 플렉스너 보고서에 바탕을 두고 있고, 플렉스너는 최초의 4년제 의학교육과정을 시도한 존스홉킨스의과대학의 교육과정에 큰 영향을 받았다. 존스홉킨스의과대학의 교육과정을 만든 4명 중 한 명으로 현대의학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는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의학교육과정에 인문학을 넣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의사학에도 조예가 깊은 그였지만 학생들이 스스로 인문학을 공부하기를 기대했다. 그는 1902년에 “교육과정이 혼잡한 현 상황에서 의사학을 필수과목으로 추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Osler, 1902: 93).
현재 대한민국에서 의학교육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한국의학교육평가원, 한국의학교육학회 등에서 마련해 온 의학교육에 관한 내용에는 의사학이 필수로 들어가 있지는 않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의사학 전공자들이 주도적으로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7년에 『인문사회의학 교육과정 개발 연구보고서』 발행을 주도한 7명의 연구위원은 대부분 의학교육에 관심이 많은 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의사학자를 포함하여 의료인문학을 전공하여 전임교수가 된 분들은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 2017년에 발행된 『기본의학교육 학습성과-사람과 사회 중심』에 참여한 명단을 봐도 의사학자는 거의 없고, 의료인문학자만 소수 포함되었을 뿐 의학교육학자들이 주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소개했듯이 많은 학자에 의해 꾸준히 의사학 교육의 유용성이 주장되어 왔다.11) 한 예로 2023년 3월 현재 두 의과대학에서 프로페셔널리즘 과목에서 의사학을 다루고 있듯이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을 위해 의사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은 서양 학자들에 의해 먼저 제기되었고(Doukas, 2013: 1624-1629), 우리나라에서도 의학 역사 속의 인물사를 통해 의학전문직업성을 함양할 수 있다는 논문이 발표되었다(박승만, 2022: 63-71).
비록 느린 속도이기는 하지만 의사학 전공자가 의과대학 전임교원으로 임용되는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의학교육에서 필수 과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임교원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의사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의학교육의 변화와 함께 이들이 존재가치를 부각시켜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학 교육을 위해 몇 가지 제언을 하자면 아래와 같다.
1) 교육 목적과 목표를 세우고 교육내용을 구성해야 한다. 의과대학생을 위한 의사학 교육은 의사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의사를 양성하는 것이다.
2)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수업을 준비해야 한다. 소위 인문학자들이 오랜 기간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겨 온 ‘강의’식 수업을 최대한 지양해야 한다. 머리로 공부하는 ‘학(學)’보다 행동과 마음을 통해 실제로 우러날 수 있게 공부해야 할 ‘습(習)’이 중요한 교육에서 고등학교에서부터 소규모 개인지도에 익숙해진 현세대의 교육방식으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3) 교육내용이 의학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두고 교육해야 한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가르치는 수업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과 큰 상관이 없다.
4) 3)의 내용을 토대로 의사학을 공부하는 의과대학생들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학습성과를 정립하고, 이 학습성과에 따른 교과서를 마련해야 한다. 학교별로 특색 있는 의사학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과서에는 최소한의 필수 내용만을 담고, 심화학습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히다.
5) 의사학 전공자들이 학회 차원에서 교육을 위한 워크숍 등을 개최함으로써 의사학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의 역량을 증가시킬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6) 새로운 지식을 창조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한다. 교육자가 가르쳐 주는 내용은 이미 정보기술을 이용하여 언제든 습득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를 넘어서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8. 마치는 글
의사학 전임교원이 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모든 의과대학에서 의사학 교육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얼마나 많은 양의 교육을 하고 있는지는 의과대학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거의 모든 학교에서 최소한의 의사학 교육은 이루어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임교원이 없는 상태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들이 왜 맡는지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각 교육자가 흥미를 느껴야 한다는 점이다.
의사학뿐 아니라 의료인문학 교육을 담당하는 비전공 교육자들은 모두 흥미를 느끼고 교육에 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교육생들에 대한 좋은 교육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역사에서 얻은 지식은 현재 상황에서 프로페셔널리즘을 발휘하는 의사로 자라나고, 빠르게 변화하는 진료환경에 대처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롤모델을 찾아서 더 나은 의사로 자라나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를 보이게 할 것이며, 수많은 역사적 상황을 접하다 보면 현시대에 각자가 추구해야 할 의사상을 정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의사 집단이 역사의식을 공유하면 전문직으로서의 단결심을 고취하고, 의료 불평등과 같은 사회문제 해결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모든 것이 어수선하고 부족하던 해방 직후에 의사학 교육에 힘을 쓰신 선구자들의 사상과 노고를 인식하고, 더 훌륭한 의사를 양성하기 위한 의학교육에서 의사학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더 질 높은 교육을 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Notes
의사학이라는 학문 이름 대신에 ‘의학의 역사’를 의미하는 ‘의학사’를 과목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이 있으며, 본고에서는 의사학으로 통일하여 기술했다.
본고 ‘3. 우리나라 의사학 교육 현황’에 제시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의학에서 필요로 하는 인문학적 지식을 가리키는 학문’을 의료인문학, 의인문학, 인문의학, 인문사회의학, 인문·사회의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우며, 본고에서는 ‘의료인문학’으로 통일하여 표기했다. 단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평가기준을 가리킬 때는 원문에 나타난 대로 Post 2주기까지는 ‘인문·사회의학’을, ASK2019에서는 ‘의료인문학’이라 표기했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에서는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을 제외한 나머지 의학’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 두 가지를 혼용해 왔다.
<표 1>에 2개 학교가 의사학과 의료윤리를 함께 수업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1개 학교는 3학점 중 의료윤리에 해당하는 1학점을 배제하여 계산함.
ASK2019 기준부터 의료인문학으로 용어가 바뀌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사 1885-1978》(1978년) 189쪽에 실린 글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인문의학교실 70년》 1쪽에서 재인용.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홈페이지, https://med.inje.ac.kr/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홈페이지, https://www.medulsan.ac.kr/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홈페이지, https://medicine.catholic.ac.kr/
예를 들면 의과대학 교수가 쓴 책으로 인제대의 전종휘가 쓴 『의학개론(1985)』, 경희대의 백영한이 쓴 『의학사개론(1991)』, 서울대의 이부영이 쓴 『의학개론』 3권(1994-1995)중 1권에 의학 역사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비의사로 이화여대와 한양대에서 수업을 한 허주가 번역한 『세계의학의 역사(1993)』 등은 모두 의과대학생들 대상의 의사학 교육을 위한 책으로 모두 시대순으로 소개되어 있다.
인문학의 범주를 아무리 넓게 잡아도 문학, 역사, 철학, 윤리, 어학, 예술, 종교 외에는 인문학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 외의 문과 과목은 모두 사회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심리학, 인지과학, 경제학 등에서 점점 전통적인 과학적 연구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과학’, ‘인문과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학문의 분류에서 문과는 과학이 아닌 내용을 연구하고 이과는 과학을 연구한다는 식으로 단순히 구분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의료인문학은 과학철학과 마찬가지로 문과나 이과의 학문분야로 구분되지는 않는다. 학문은 편의상 구분하는 것일 뿐 연구 방법이 변화하고 각 학문의 범주가 달라지면 구분법도 변화할 수 있고, 구분이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앞서 소개한 권복규, Risse 외에도 Doukas 등(2012), Howley 등(2020)의 보고서와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