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의사학* 교육의 역사적 고찰 -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

A History of Teaching Medical History in Medical Schools in Europe and America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3;32(1):175-201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3 April 30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3.32.175
Professor, Department of Medical History, Yonsei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여인석,
연세의대 의사학과 교수·의학사연구소 소장, 의사학·의철학 전공
**연세의대 의사학과 교수·의학사연구소 소장, 의사학·의철학 전공 / 이메일 isyeo@yuhs.ac
*의학의 역사를 지칭하는 학문적 명칭으로 여기서 사용한 ‘의사학’ 이외에 ‘의학사’, ‘의료사’ 등이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의학사’는 의학이라는 학문의 발전에 초점을 맞춘 역사 서술을 지칭할 때 사용되고, ‘의료사’는 의학의 사회적 측면에 초점을 맞출 경우에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의사학’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특별히 다른 유사한 명칭과 구별되는 의미로 사용한 것은 아니고 전통적으로 사용된 용어이기에 사용한 것이다.
Received 2023 March 15; Revised 2023 March 16; Accepted 2023 April 11.

Abstract

Medical history was an important part of medicine in the West from antiquity, through the Middle Ages, and until the Renaissance. Hippocrates, Galen, and Avicenna were historical figures, but they dominated the medicine of the Western world at least until Renaissance. The medicine of the past, which did not become history, still remained an important part of present medicine. In the 19th century, medicine in the past is now relativized as an object of history. At the same time, the 'practicality' of medical science was emphasized. The practicality referred to here means that, unlike previous times, medicine in the past has been historicalized, but it can provide practical help to current medicine. In particular, in the era of positivism that dominated the late 19th century, this practicality was a core value of medical history. In the 20th century, the era of scientific medicine, the new role is given to medical history. It was to give a integrated view on contemporary medicine which was subdivided into many specialized fields. Along with this, medical history, once a main part of medicine, moves to the field of history. At the same time, the rise of medical humanities in medical education becomes an opportunity to redefine the role of medical history. Seeking productive cooperation with other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that deal with medical issues, such as medical anthropology, medical sociology, and literature, will be a new task given to medical history today.

1. 서론

오늘날 의학교육에서 의료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점차 높아져 간다. 그 배경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하는 의학의 과도한 자연과학화, 관료화된 현대의료에 대한 반성, 환자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좀 더 인간적인 의료인에 대한 사회적 요청 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분야로 등장한 것이 의료인문학이다. 그런데 이처럼 광범위하고 다소 모호한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의료인문학에는 무척이나 다양하고 때로는 이질적인 요소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의료인문학을 구성하는 여러 내용 가운데 아마도 역사가 가장 오랜 것은 의학의 역사를 다룬 의사학일 것이다. 의료인문학이라는 분야가 부각되기 이전에는 현재 의료인문학이 담당하는, 혹은 거기에 기대되는 역할을 의사학이 전부 수행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의료인문학이 다채로운 내용으로 구성되며 의학교육 내에서 의사학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학교육에서 의사학의 역할과 필요성, 혹은 교육적 유용성을 검토하고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과거 의학교육에서 의사학이 수행했던 역할을 역사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작성되었다. 다만 여기서 다루는 시간과 공간이 너무 방대해서 이 글에서 언급하는 내용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선택적임은 피할 수 없는 한계이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국의 의과대학에서 이루어진 의사학 교육의 역사적 흐름을 개관해 봄으로써, 오늘날 한국의 의학교육에서 의사학의 역할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데 이 글이 참고가 되기를 희망한다.

2. 유럽 의사학의 기원과 발전

20세기를 눈앞에 둔 1892년, 저명한 고전학 잡지인 ‘Classical Review’에 한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에서 1900행 이상의 글이 기록된 2세기경의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다는 보고였다. 그 내용은 놀랍게도 갈레노스가 언급했지만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의사학적 기록,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메논이 쓴 의사학 저술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파피루스는 고전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독일의 헤르만 딜스(Hermann Diels, 1848-1922)에게 보내졌고, 딜스는 이 파피루스를 면밀히 판독하고 검토하여 이듬해인 1893년 출판했다(Diels, 1893). “런던의 익명사본(Anonymus Londinensis)”이라 명명된 이 사본은 서양고대의학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사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부분은 각종 의학 용어에 대한 개념적 정의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20명의 의학자들이 주장하는 질병의 원인에 대한 학설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중 8명은 여기서 처음 이름이 알려진 의학자였다(Jones, 1947: 2). 마지막 부분은 기원전 300년 헤로필로스 이래 생리학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이 사본에 담긴 내용은 전체적으로 보아 학설사(Doxography)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내용과 서술 방식으로 볼 때 이 사본은 의학생이 기록한 강의 노트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그렇다면 2세기 당시 의학교육에서 히포크라테스, 헤로필로스 등을 위시한 과거 의학자들의 학설을 공부하는 학설사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사본이 기록된 2세기에 활동한 갈레노스는 이러한 추정에 대해 개연성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서양고대의학의 집대성자인 갈레노스는 엄청난 양의 글을 쓰고 남긴 다작의 의학자였다. 고대 서양에서 희랍어로 글을 남긴 사람 가운데 문사철(文史哲)을 통틀어 가장 많은 분량의 글을 남긴 사람이 갈레노스이다. 19세기 초, 독일의 퀸(Karl Gottlob Kühn, 1754-1840)에 의해 발간된 갈레노스 전집은 희랍어-라틴어 대역으로 각 권 1,000여 쪽에 육박하는 책으로 20권이나 되지만, 그가 쓴 글의 1/3 정도만 남은 것이 그 정도이다. 이처럼 방대한 글을 썼기 때문에 이미 갈레노스 당시에도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러자 갈레노스는 말년에 자신이 쓴 ‘책에 대한 책’에서 자기 저술을 내용별로 분류하고 그것을 통해 의학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저술을 공부하는 순서를 제시했다. 갈레노스가 자신의 저술을 통해 의학에 입문하려는 사람에게 맨 처음 읽고 공부할 것으로 제시한 책이 『초심자를 위한 학파』였다.

갈레노스가 활동하던 2세기경에는 각종 의학파들이 난립하던 시기였다. 저마다 최선임을 주장하는 많은 학설들의 홍수 속에서 초심자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각 학파가 주장하는 학설의 내용을 알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능력이 초심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판단한 갈레노스는 기존 학설들에 대한 비판적 학습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하도록 권유했던 것이다(여인석, 2006: 99). 갈레노스가 활동하던 시기를 기준으로 본다면 히포크라테스나 헤로필로스, 에라시스트라토스 등은 이미 사오백여 년 전에 활동한 ‘고대’ 의학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학은 갈레노스 당대에도 여전히 현재적이었다. 갈레노스는 히포크라테스의 저작들에 대한 많은 주석서를 저술했다. 또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많은 부분을 헤로필로스와 에라시스트라토스와 같은 고대 의학자들의 학설을 반박하는 데 할애하였다. 갈레노스에게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고대의 의학자들은 과거의 역사적 인물이지만 그들의 의학 이론은 여전히 당대의 의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대인들에게 ‘발전’의 개념이 없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갈레노스는 제공해준다.

“우리는 학식에서나 표현 방식에서 고대인들을 능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마치 자명한 것인 양 증명하지 않고 기술한 것들이 있다. 혹은 그들이 빼먹고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발견하고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1) 즉 갈레노스를 비롯한 당대의 사람들은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고대의 권위 있는 인물들이 이미 중요한 내용을 밝혀놓았으므로 자신과 같은 후대인들이 이를 넘어설 수는 없고, 다만 그들이 누락시키거나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을 명료히 하는 일만을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흔히 주석은 과거의 역사적 텍스트에 대한 훈고학적 작업으로 이해되지만, 히포크라테스 문헌에 대한 갈레노스의 주석 작업은 단순히 과거의 텍스트에 대한 훈고학적 작업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지니는 연구 활동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갈레노스의 저술 역시 후대인들에게는 히포크라테스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는 주석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 대학의 설립은 고등교육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다. 고등교육기관은 동아시아에서도 일찍부터 존재했지만, 근대적 교육 기관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서양 중세에서 기원한 대학만이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보편적 고등교육기관의 모델이 되었다. 의학교육에서도 대학의 설립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의학부는 중세 대학을 구성하는 네 학부(신학부, 법학부, 인문학부, 의학부) 중의 하나를 이루었다. 대학은 중세 후기에 유럽 각 지역에서 생겨났는데, 의학부는 몽펠리에, 파리, 볼로냐 대학이 14세기 흑사병 유행 이전 시기의 발전을 선도했다. 의학교육 커리큘럼은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갈레노스와 아비첸나 저서의 라틴어 번역 및 주석 작업의 진행과 더불어 교육 커리큘럼도 점차 구체적 모습을 띠어갔다. 대학에 따라 의학교육의 커리큘럼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교재로 사용한 책들은 『경구』를 비롯한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글 몇 편, 갈레노스 의학의 요약집과 그의 저술, 아비첸나의 『의학정전』의 일부가 주로 사용되었다(Siraisi, 1981: 97). 특히 교과서로 쓰기에 적절하게 체계적으로 기술된 아비첸나의 『의학정전』은 17세기까지도 의과대학의 교재로 사용되었다(Siraisi, 1981: 106). 교육 방법은 위에서 언급한 의학자들의 저서를 강독하고, 중세 대학의 정형화된 토론 방식에 따라 텍스트 해석상의 문제나 상충되는 의견들을 조화시키기 위한 토론으로 이루어졌다(Siraisi, 1990: 73). 이들 의학자의 구체적인 논점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도 이루어졌으나 대가들의 권위를 의심하거나 위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Siraisi, 2001: 155).

결국 중세대학의 의학교육은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아비첸나의 저술을 공부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 사이에는 5, 6백 년이, 갈레노스와 아비첸나 사이에는 7백여 년의 시간차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사람은 중세의학에서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는 의학자였다. 이 세 사람을 한 자리에 등장시킨 그림도 남아 있을 정도이다.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세인들은 몇백 년, 혹은 천여 년 이전의 역사적 인물의 저작과 그들의 이론을 공부한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역사를 공부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고대 저자들은 역사적 인물로서 상대화가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당대 의학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현재적 권위이기도 했다. 역사는 시간적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대상을 상대화하고 그를 통해 대상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현재화된 과거의 역사는 이러한 비판적 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세대학의 의학교육은 ‘역사가 되지 못한 역사’를 주된 내용으로 했다는 역설적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3. 근대적 의사학의 시작

근대적 의사학의 시작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출판된 책을 기준으로 본다면 1696년 제네바 출신의 의사 다니엘 르 클럭(Daniel Le Clerc, 1652-1728)이 쓴 『의학의 역사 Histoire de la Médecine』를 하나의 기점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초판 출간 후 3년 만에 영어로 번역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올 정도로 당시에도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의사학 저서로 인정받았다.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의술의 기원부터 갈레노스 시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만 본다면 고대의학사에 해당된다. 원래는 더욱 후대의 역사까지 다루고자 했으나 저자가 제네바 공국에서 맡은 공직을 비롯해 여러 일로 인해 집필의 시간을 내지 못해 서술은 갈레노스에서 멈추었다.2)

르 클럭은 자신이 의학의 역사를 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이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한눈에 태초 이래로 질병을 예방하고 인식하고 치료하기 위해 이루어진 아주 중요한 추론과 경험을 알게 될 것이라는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Le Clerc, 1729: Préface, 쪽수 없음).” 르 클럭은 서문에서 자신 이전에 관련 주제에 대해 나온 책들을 다수 언급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의학의 역사와 관련된 책들이 17세기에 이미 적지 않게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르 클럭은 이들 책이 유명한 의사들에 대한 인물사적 기술이나 그들이 저술한 책에 대한 기술이지 ‘의학(médecine)’의 역사에 대한 책이 아님을 강조하고, 글자 그대로 ‘의학의 역사(Histoire de la Médecine)’에 대한 책은 자신의 저술이 최초라고 주장한다. “결국 나는 ‘의사들의 저작’에 대한 역사를 쓰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된 목적은 ‘의학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그들[의사들]이 의학에 가져온 변화와 발견을 쓰는 것이다(Le Clerc, 1729: Préface, 쪽수 없음).”

이처럼 르 클럭은 서문에서 자신이 이 책을 쓰는 목적과 의의를 표명하지만, 거기에 교육적 의의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의업에 종사하는 의사들이나 의학에 관심을 가지는 교양인들에 대해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적 효과를 가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지만, 좁은 의미의 의학교육, 즉 의과대학에서의 교육을 염두에 둔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일차적으로 르 클럭 자신이 대학에서 의학교육에 종사하지 않았던 개원의였다는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영어로 나온 최초의 의사학 서적이라 할 수 있는 존 프라인트(John Freind, 1675-1728)의 책 『의학의 역사 History of Physick - from the time of Galen to the Beginning of the Sixteenth Century』(1725)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의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저자는 이 책에서 갈레노스 이후 의학의 역사를 주로 다루겠다고 천명하고 있다. 그것은 앞선 르 클럭이 주로 갈레노스 시대까지를 다룬 것을 고려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이 책에서 르 클럭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그의 부족한 점을 비판하기도 하였다(Freind, 1725: 10). 존 프라인트는 정치적인 이유로 런던탑에 갇혀있는 동안 이 책을 구상하고 초고를 썼다. 이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책이 고대인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유용하거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읽을거리가 되었으면, 혹은 고대인들을 잘 모르는 사람이 그들을 알고자 하는 생각이 들도록 자극했다면 자신의 노고는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은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충분한 즐거움을 누렸으므로 별다른 불만은 없다고 덧붙였다(Freind, 1725: To the readers, 쪽수 없음). 여기서도 의학교육에 대한 동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저자는 책을 쓴 자신에게나 책을 읽는 독자에게 의학의 역사가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벼운 읽을거리 정도의 의미만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오늘날 의학의 역사에 관해 출판되는 책들을 살펴보면 한편에는 전문 연구자에 의한 심도 있는 연구서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나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치료법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흥미 위주의 ‘재미있는 의학사’류의 책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렇게 본다면 존 프라인트는 가벼운 읽을 거리로서의 의사학을 처음 시도한 사람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4. 대학에 들어온 의사학 - 독일

위에서 언급한 르 클럭이나 존 프라인트는 모두 의사학의 교육적 의의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대학에 몸을 담지 않아 교육에 특별히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말부터 의과대학에서의 교육을 염두에 둔 의사학이 등장한다. 아카데믹한 의사학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적 목적의 학문적 의사학은 독일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것은 훔볼트로 대변되는 독일 대학의 개혁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독일의 대학 개혁은 강의 노트를 읽는 구태의연한 강의 방식을 탈피할 뿐 아니라, 여러 상황에 적용 가능한 실제적인 새로운 커리큘럼의 개발을 그 내용으로 했다. 특히 17세기 말에 설립된 할레대학의 의학부는 의서 강독이 아니라 당시 유럽 의학의 스승이라 불리던 부어하브(Herman Boerhaav, 1668-1738)에 의한 도제식 교육과 사례 연구 방법을 의학교육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람멜, 2021; 67). 대학이란 아카데믹한 환경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의사학의 창시자인 쿠르트 슈프렝겔(Kurt Polycarp Joachim Sprengel, 1766-1833)이 할레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학문적 의사학의 창시자로서 슈프렝겔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다섯 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발간된 『의학의 실용적 역사에 대한 탐구 Versuch einer pragmatischen Geschichte der Arzneikunde』(1800)였다. 여기서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실용적’이란 단어가 눈에 띈다. 이처럼 방대한 학술적 작업의 결과에 어울리지 않게 ‘실용적’이란 다소 겸손한 수식어를 덧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실용적 역사’는 18세기 초반부터 독일 역사학의 내부에서 발전되어온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실용적 역사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역사 서술에서 원인과 결과를 추구함으로써 새로운 내러티브 형식을 제공하고 그를 통해 서술된 역사의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다. 둘째, 역사 서술은 당대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슈프렝겔은 ‘실용적’이란 말을 ‘실용적 교육에 목표를 둔 역사’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셋째, 문학이나 다른 장르의 글에 비해 쉽게 쓰여진 가독성이 좋은 글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넷째, 실용성은 낡은 문헌사적 전통을 극복하겠다는 의사의 표현으로, 과거의 구식 학문적 패러다임을 근대적인 것으로 대신하려는 것이다. 다섯째, 당시 있었던 고대주의자와 근대주의자의 논쟁을 품으려는 시도였다(람멜, 2021: 83-84). 실제로 슈프렝겔이 서술한 의학사는 이러한 실용성의 의미를 충실히 구현한 결과였다.

슈프렝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사가로서의 강한 자의식이다. 이는 르 클럭이나 프라인트와 같은 앞선 시대의 저자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다. 그들은 의학의 역사를 썼지만 역사가로서의 정체성이나 자의식을 갖고 쓴 것이 아니라 애호가의 입장에서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슈프렝겔은 역사가로서 역사를 쓸 때 어떻게 써야 할지,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의학의 역사는 불편부당하게 써야 한다. 그것을 쓰는 사람은 어떤 [의학적] 체계를 신봉해서도 안 되고, 특정한 견해를 공유해서도 안 되며, 용어의 모든 의미에서 ‘절충적’이어야 한다(Sprengel, 1815: 6).” 의학사가가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를 상술한 다음과 같은 서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의학의 역사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각 시대 주요 저자들을 읽어야 한다. 그것은 그 시대 정신을 평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서가 유익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별적 견해를 한쪽에 밀어두고 의학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건전한 이성의 인도를 받아 의학자들의 저술을 모두 섭렵해야 하며, 그 시대의 정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들 의학자와 자신을 동일시해야 하며 각 저자의 생각을 그 저자의 동시대인이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파악해야 한다. 역사가는 고대인의 의학도, 현대인의 의학도 선호해서는 안 되며 각 시대의 장점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시대의 단점을 제시할 때도 동일한 불편부당함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서술된 의학의 역사는 진정한 진리의 횃불이며, 가장 풍성한 교육의 원천이다(Sprengel, 1815: 6-7).

이러한 태도로 서술된 의학의 역사는 어떠한 ‘실용적’ 유용성을 가질 수 있을까? 그에 대해 슈프렝겔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열거한다. 첫째, 의학의 역사는 잘못된 판단을 경계하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아주 동떨어지고 낯선 견해라 하더라도 중요한 발견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 이상한 이론도 무시되거나 오랫동안 망각되었던 진리를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 역사는 우리와 다른 견해에 대한 포용성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얼마나 쉽게 길을 잃을 수 있는가를 보여줌과 더불어 우리와 다른 견해 속에 진실이 있는 경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셋째, 의학의 역사는 우리 자신의 힘에 대해 의심을 품도록, 그래서 겸손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견해에 대한 맹목적 확신은 그 견해의 허위성 내지는 그 견해가 근거한 기반의 취약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대의 회의주의자이자 경험학파 의사였던 피론을 따라서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에포케], 특정 견해를 채택하지 않고 모든 견해에 대해 차별 없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태도이다. 넷째, 의학의 역사에서 우리는 타인의 오류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이 오류를 피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의학의 역사는 우리의 정신을 훈련하여 아름답게 만들며, 다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고 유익하게 사용할 수 없는 많은 지식을 우리에게 준다(Sprengel, 1815: 10-12). 의학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유용성과 장점을 열거하며 슈프렝겔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가르치다(lehren)’이다. 즉 역사가 우리를 가르쳐준다는 사실을 슈프렝겔은 되풀이해 강조한다. 이를 통해서도 그가 의사학의 교육적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다.

슈프렝겔의 역사 서술에서 두드러지는 하나의 특징은 현대에 대한 강조이다(Grmek, 1993: 12). 앞선 르 클럭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전의 서술은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와 같은 고대에 강조점이 주어졌다. 반면 슈프렝겔의 책에서는 고중세의 비중이 현저히 줄어든다. 총 5권 가운데 1권과 2권이 고중세에 할애되었고, 나머지 세 권은 모두 중세 이후 현대, 즉 슈프렝겔 당대에까지 이르는 의학의 역사로 그는 역사 서술의 하한선을 자신의 시대인 18세기까지로 잡았다. 이는 그가 역사가로서 강한 자의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단지 과거 사실의 서술에 그치지 않고, 당대 의학에 유용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실용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슈프렝겔의 역사 서술의 바탕에는 당대를 지배했던 헤겔의 역사철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역사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의학의 역사 역시 절대 이성, 혹은 신적 섭리의 점진적 전개와 발전 과정이라고 보았다. “만약 의학의 역사가 참으로 유용하고 교훈적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정신의 점진적 발전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 문명과 인간 정신이 진보해온 역사는 학문 전체와 특히 의학의 진정한 토대로 보인다(Sprengel, 1815: 4).”

슈프렝겔은 당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지식인들, 특히 프랑스의 지식인들과는 달리 계몽의, 혹은 이성의 실현 공간으로 대학을 선택했다. 당대 프랑스의 대학이 구체제의 전형으로 몰려 위축된 것에 비해, 독일의 대학은 개혁을 수용하고 새로운 커리큘럼을 개발함으로써 문화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훔볼트 대학과 같은 독일의 대학은 새로운 시민적 이상을 제시했고 슈프렝겔은 그에 발맞추어 대학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의사를 교육하고자 했다(람멜, 2021: 88-89). 슈프렝겔이 생각한 의학교육 커리큘럼의 중심에 의학의 역사가 있었다. 19세기 후반, 주도프와 같은 의사학자가 독일의 의과대학 내에 자리 잡고, 이후 상당 기간 독일의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의사학의 발전이 이루어졌던 출발점에는 슈프렝겔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 실증주의 시대의 의사학 - 프랑스

프랑스의 경우 의사학이 교육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이루어진 의학교육의 개혁 덕분이었다. 혁명의 영향은 단순히 정치제도의 개혁에 그치지 않고 사회 구석구석에, 의학교육을 비롯한 의료제도 전반에 미쳤다. 혁명 이전 프랑스의 고등교육기관에서는 별도의 의사학 강좌가 없었다. 그것은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의사학자 샤를 다랑베르에 따르면 “의학 공부가 곧 역사 공부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현재의 질병을 아랍인이나 고대 그리스 사람의 눈을 통해 관찰했다. 그들은 자연을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혹은 아비첸나의 권위에 굴복시켰다(Daremberg, 1870: 2).” 1794년 기존의 의과대학을 대신할 새로운 형태의 의학교육기관인 보건학교(École de Santé)가 파리에서 문을 열었다. 여기에는 새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론과 현대적 시술을 가르치는 17개의 강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18번째 강좌로 ‘법의학과 의사학(médecine légale et histoire de la médecine)’강좌가 설치되었다(Daremberg, 1870: 3). 의사학 강좌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초대 교장이었던 투레(Michel Augustin Thouret, 1748-1810)의 영향이 컸다(Dezeimeris, 1839: 264). 그는 의사학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의학의 역사는 우리에게 유용한 사례를 제공해주므로 권장할만하며, 역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르침보다는 우리가 오류를 피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점에서 더욱 교훈적이다 (Daremberg, 1870: 4).” 당시 여기서는 의학의 역사와 관련하여 세 과목이 교수되었다. 그중 하나인 의학적 문헌학은 이 학교의 도서관장이었던 피에르 수(Pierre Sue)가 가르쳤고, 나머지 두 과목을 투레가 담당했다. 그가 가르친 과목은 ‘히포크라테스 학설’과 실제 드물게 관찰되는 사례에 대해 문헌학적 주석을 다는 ‘희귀 증례의 임상’이었다. 투레는 의철학 강좌까지 설치하고자 하는 등 교육에 많은 의욕을 보였으나, 보건학교도 혁명 직후 극심한 정치적인 변동에 휩쓸려 안정적인 운영이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투레가 세상을 떠나자 의사학 교육은 동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그래도 당분간 의사학 교육은 지속되었으나, 결국 1823년 의사학 강좌는 폐지되었다(Daremberg, 1870: VII).

강좌의 폐지 이후, 이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1830년대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는 강좌를 전담할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도 여러 사람에 의해 꼭 의학의 역사라는 제목을 달지 않더라도 역사에 관련된 강의나 저술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유명한 병리학자이자 혈액학의 선구자인 앙드랄(Gabriel Andral, 1797-1876)은 ‘일반병리학’ 강의의 대부분을 고대 그리스 의학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할애했다(Daremberg, 1870: IX). 소위 실험의학이 태동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 최근의 과학적 의학이 히포크라테스적 의미의 의학을 위태롭게 한다고 여겨서 의과대학의 교과과정에 문학과 역사가 더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정신과의사인 파르샵 드 비네(Jean-Baptiste Parchappe de Vinay, 1800-1866)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1858년 그는 의사학이 올바른 원칙을 전달하고 새로운 오류를 범하는 것을 막아주므로 의사학은 필요할 뿐 아니라 유용하다고 주장하며 콜레주 드 프랑스에 의사학 강좌를 설치할 것을 담당 부처 장관에게 강력히 촉구했다(구르비치, 2021: 121-122). 의과대학이 아닌 콜레주 드 프랑스에 의사학 강좌의 설치를 요구한 것은 마장디와 베르나르와 같은 과학적 실험의학의 대표자들이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콜레주 드 프랑스는 새로운 과학적 의학의 신전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Daremberg, 1870: 7).3) 콜레주 드 프랑스는 프랑스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형태의 교육 기관이다. 여기에는 등록된 학생이 존재하지 않고 교수는 오직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개강좌만을 진행한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따라 1860년대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 의사학 강좌가 설치되었고,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의사학자 샤를 다랑베르(Charles Daremberg, 1817-1872)가 강의를 맡았다. 그는 1864년에서 1867년까지 4년에 걸쳐 총 175강을 했고, 그 후 강의내용을 34개의 장으로 정리해 1870년 1,3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두 권의 책으로 펴냈다. 다음과 같은 이 책의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해부학, 생리학, 내과학, 외과학과 일반병리학 학설을 포함하는 의과학의 역사 Histoire des Sciences Médicales comprenant l’anatomie, la physiologie, la médecine, la chirurgie et les doctrines de pathologie générale』(1870). 단순히 의학의 역사가 아니라 ‘의과학’의 역사라고 쓴 것은 이 강의가 이루어진 콜레주 드 프랑스가 당시 프랑스 실험의학의 중심지였던 점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의 전체적 구성도 고대보다는 현대에 더욱 강조점이 주어졌다. 1권은 17세기 하비에서 끝나고, 2권은 하비 이후 17, 18세기를 주로 다루었다. 다랑베르 자신이 방대한 고전학 사전을 편찬한 일급의 고전 문헌학자였고,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의사들의 문헌을 다량 번역하고 펴낸 것을 생각하면 다소 의외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지향은 분명했다.

현대에 대한 강조점은 그가 의사학 교육의 유용성을 서술한 부분에도 잘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의학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의 유용성을 가진다. 하나는 일반적 유용성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유용성이다. 의사학 교육은 학생들에게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의학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장엄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히 그 존재 가치가 인정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의학의 역사가 더욱 즉각적이고 실용적인 적용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이다(Daremberg, 1870: 8). 다랑베르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먼저 의학적 관찰의 특수성에서 유래한다. 의학에서의 관찰은 물리학이나 화학에서의 관찰과 다르다. 이들 학문에서는 조건을 정확하게 규정한 동일한 현상의 반복 재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의학에서는 조건의 통제도, 동일현상의 반복 재생도 불가능하다. 가능한 것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이 남겼던 다양한 질병 관련 기록들을 지금 마주치는 질병의 양상과 비교하는 일종의 ‘비교병리학’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데, 이는 역사가 제공해주는 가장 교육적 장점의 하나이다(Daremberg, 1870: 9). 앞서 투레는 의사학의 장점으로 오류를 범하는 것을 피하게 해준다는 점을 거론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다랑베르는 오류를 피하는 정도의 소극적 장점만이 아니라 실제적 도움을 주는 더욱 적극적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실제 사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히포크라테스가 『유행병』에서 기술한 열병이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악성 열병이나 타이포이드 열병이 아니고, 오늘날 여전히 더운 지방에서 관찰되는 것과 같은 성질의 이장열 혹은 가성 연속열임을 입증한 사람은 임상의사인가 아니면 의사 역사가인가? 그것은 임상의사가 전혀 아니다. 그리스와 알제리 해안에 도착한 우리나라 군의관들은 그것이 어떤 질병인지 전혀 몰랐다. 의사 역사가, 즉 리트레 씨가 예기치 않게 그것을 엄밀하게 확인했다. […] 어떤 질병 치료에서 경동맥 결찰의 영향을 확실한 증언을 통해 확립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 역시 임상의사가 아니라 저명한 [의사] 문헌학자 드제메리(Dezeimeris) 씨였다. […] 만약 의학의 문헌을 더욱 주의 깊게 참고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청진의 맹아를 히포크라테스에서, 오늘날 독창적인 도구의 도움으로 측정할 수 있는 맥박 운동에 대한 모든 이론을 헤로필로스와 루푸스에서, 요도협착의 절제 치료술을 헬리오도로스에서, 백내장의 적출술이 고대인에게는 익숙한 수술이었다는 증거를 안틸루스에서, 일부 약의 고약한 맛을 감추기 위한 점착성 캡슐에 대한 언급을 살레르노의 문헌에서 발견하였을 것이다. […] 만약 역사가 의학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잘못이 아니라 의사들의 잘못이다 (Daremberg, 1870: 9-10).

아울러 그는 이 책이 나온 1870년의 시점에서도 이미 1800년대 초에 나온 비샤와 라에넥의 눈부신 업적을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개탄한다(Daremberg, 1870: 11).

19세기는 실증주의의 시대였다. 다랑베르와 쌍벽을 이루는 의사학자로 지금도 히포크라테스 연구의 전거가 되는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편찬자이자 번역자인 에밀 리트레는 콩트와 함께 실증주의 운동에 헌신했던 실증주의의 제2인자였다. 다랑베르와 리트레의 실증주의는 고대 문헌에 대한 엄밀한 연구와 독해를 의미하는 문헌학적 실증주의와 더불어 당대의 시대정신이 된 자연과학에 대한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태도를 함께 의미한다. 다랑베르와 리트레는 의사이자 당대 일급의 고전문헌학자였다. 그들이 고대의학의 문헌들을 ‘실증적’으로 연구함과 동시에, 그 고대의학문헌에서 현대 의학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실은 그 시대의 의사학에서 실증주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미국의 의사학 교육

미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의사학 강의는 덩리슨(Robley Dunglison, 1798-1869)이 버지니아 대학에서 토마스 제퍼슨의 제안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강의내용은 후에 책으로도 출판되었다(Moll, 1962: 207). 이후 개리슨의 『의사학 개론(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Medicine』(1914)은 미국 의사학의 중요한 성취로 여겨진다. 그러나 미국의 의사학을 의과대학 내에 확고하게 정초한 학자들은 독일, 스위스 등 유럽의 독일어권 학자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미국에 건너간 이들은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미국 의사학의 토대를 다져나갔다. 따라서 미국 의사학의 토대 형성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미국에 오기까지 유럽, 특히 독일에서 이루어진 의사학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그 배경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의사학이 의과대학 내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고 교육되기 시작한 것은 독일이었다. 슈프렝겔 이후 독일 의과대학 내에는 의사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이 자리잡기 시작했으나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1841년 당시 유럽에서 의사학 강좌가 설치된 곳은 베를린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두 곳에 불과했다(Temkin, 1958: 99). 이후 브레스라우 의과대학에도 의사학 강좌가 설치되었다. 이 강좌의 담당자는 다랑베르와 친분이 있던 해저(Heinrich Haeser, 1811-1885)였다. 그 역시 방대한 분량의 의사학 통사와 전염병의 역사에 대한 책을 쓴 바 있다(Gourevitch, 1995: 133). 20세기 초, 독일 의사학의 대표자는 누가 뭐래도 칼 주도프(Karl Sudhoff, 1853-1938)이다. 에를랑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며 여가시간에 의사학 연구에 매진하던 주도프는 1905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아 취임한 이래 푸쉬만재단의 후원으로 의사학연구소를 설립하고 1925년 은퇴할 때까지 교육과 연구 성과의 출판에 매진했다(뤼튼, 2021: 161). 주도프는 독일 학계에서 의사학이 제도화되고 전문적인 분야로 확립되는 데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의사학의 국제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었고, 많은 뛰어난 제자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독일대학에 자리를 잡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나치가 등장하고 주도프가 나치에 가입함으로써 상황이 급변했다. 나치의 박해가 시작되자 루드비히 에델슈타인(Ludwig Edelstein, 1902-1965)과 오세이 템킨(Owsei Temkin, 1901-2002)과 같은 그의 뛰어난 유대인 제자들은 대학에서 자리를 잃고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주도프의 후계자인 지거리스트는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독일 내의 전반적인 상황이 악화됨을 보고 1932년 미국으로 떠났다(뤼튼, 2021: 174). 이렇게 해서 주도프를 중심으로 있던 일군의 의사학자들이 대거 미국으로 망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망명한 의사학자들의 중심인물은 지거리스트였다. 파리에서 출생하고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아 의사가 된 지거리스트는 1925년 주도프의 후임으로 라이프 치히 대학의 의사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앞서 본 바와 같은 독일 내 정치상황의 변화로 미국으로 건너가 1932년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대학에 전임자 윌리엄 웰치(William Henry Welch, 1850–1934)의 뒤를 이어 의사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의사학연구소에 에델슈타인과 템킨과 같은 뛰어난 학자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존스 홉킨스의 의사학연구소가 세계적 명성을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거리스트는 의사학자로서만이 아니라 현실 의료에 대한 개혁에도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는 유럽에 비해 사회적 성격이 떨어지는 미국의 의료제도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실제로 캐나다의 일부 지역에 보편적 의료보험을 도입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von Staden, 1995: 174).

미국 의사학의 중심지가 된 존스 홉킨스에 의사학연구소를 만든 것은 윌리엄 웰치였다. 병리학자로 독일에 유학했던 웰치는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만드는 초기 과정부터 참여하였으며, 의학교육과 보건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미국 의학의 거인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안식년 동안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의사학연구소를 보고 존스 홉킨스에도 의사학연구소를 만들어 미국 의사학발전의 토대를 놓기도 했다. 의사학연구소를 만들었으나 그 자신 전문 의사학자는 아니었던 까닭에 지거리스트를 초청해 연구소를 맡겼던 것이었다.

지거리스트도 이전의 의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의과대학이란 틀 안에서 의사학을 연구하고 교육했지만, 이후에 더욱 첨예하게 드러나는 문제, 즉 의학의 일부로서의 의사학과 역사학의 일부로서의 의사학 사이의 문제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8권으로 기획되었으나 안타깝게 2권으로 그친 『의학의 역사』1권 서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의사학은 항상 양자, 즉 의학책이자 역사책이다. 저자에게는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중도를 취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젊은 [의과]대학생만이 아니라 이 주제에 관심 있는 일반인도 이 책에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Sigerist, 1987: xviii-xix).” 책도 그러하지만, 실제 의사학 교육에서도 대상에 따라 강조점이 조금 달라졌다. 예를 들어 존스 홉킨스의 보건대학원에서는 의료의 사회적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의사학이 교육된 반면, 의과대학에서는 의학의 과학적 측면, 즉 기초의학의 역사에 강조점이 두어졌다(Bates, 1982: 125).

한편 지거리스트는 1937년 미국 의과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의사학 교육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관련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조사한 77개의 의과대학 중 54개의 의과대학이 어떤 형태든 의학의 역사와 관련된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54개 중 28개 의과대학에서는 의사학이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며, 그중 22개 대학은 시험의 통과도 요구되었다(Sigerist, 1939: 627-662). 이러한 결과는 20세기 초의 상황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것이었다. 코델(Eugene E. Cordell)은 1904년 미국의 주요 14개 의과대학의 의사학 교육 상황을 조사했다. 그에 따르면 조사한 14개의 의과대학 중 오직 3개의 의과대학만이 14∼16시간으로 이루어진 의사학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Rosen, 1948: 613). 비슷한 조사가 1951년 미국 의사학회에 의해 북미의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에 따르면 조사한 79개(캐나다를 포함하면 86개) 의과대학 가운데 37개(캐나다를 포함하면 44개) 학교에서 정규 교과과정의 일부로 의사학이 개설되었고, 그 가운데 20개 학교가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 또 5개 의과대학에는(존스 홉킨스, 시카고, 일리노이, 위스콘신, 예일) 의사학교실과 함께 의사학 전임교수가 있었으며, 13개 의과대학에는 의사학 전임교수는 없었지만 의사학교실은 설치되어 있었다(American Association of the History of Medicine 1952: 577-578).

특별히 존스 홉킨스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 조사가 이루어진 당시(1951년) 의사학연구소의 소장은 슈라이옥(Richard H. Shryock, 1893-1972)이었고, 템킨이 부교수로 있었다. 그 외에 펠로우와 강사가 5명 있었다. 방문교수로는 유명한 과학사가인 알렉상드르 쿠아레(Alexandre Koyré, 1892-1964)가 있었다. 1951-52학년의 경우 모두 11개의 의사학 관련 강의와 세미나가 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사학 개론, 현대과학의 기원, 도서관 사용법, 미국 공중보건의 역사, 현대과학의 역사, 미국의학의 역사, 의료경제학과 의료 세미나, 19세기 병리학의 역사, 르네상스 의학의 역사, 의학문헌학 세미나, 중국의학의 문제 등. 이 모든 과목은 선택이었고, 의과대학생들에게 의사학이 필수과목이 된 것은 1958년부터였다. 대부분의 과목은 한 분기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미국의학의 역사만은 두 분기였다. 의사학에 할당된 시간은 시기에 따라 변화가 심한데, 많을 때는 50시간에서 적을 때는 14시간의 시간이 배정되었다(Bylebyl, 1982: 8).

북미 의과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의사학 교육 현황에 대한 조사는 1967-68년에도 이루어졌다. 미국의 95개 의과대학과 캐나다의 13개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이 조사의 가장 큰 특징은 설문지 응답 방식이 아니라 직접 방문을 통한 조사였다는 점이다. 조사자는 각 의과대학을 방문하여 학장, 의사학 교육 담당 교수, 교과과정 위원장, 도서관장 등을 만나 해당 학교의 의사학 교육 및 연구와 관련된 내용을 면담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발표하였다(Miller, 1969: 259).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95개 의과대학 가운데 14개 의과대학만이 의사학이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었고 25개 의과대학은 선택과목이었다. 이전 조사에 비해 필수과목인 학교의 수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1951년 조사에서는 20개교) 조사 대상이 이전에 비해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전체적인 비율에서도 낮아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 의학교육의 전반적 경향이 필수과목을 줄이고 선택과목을 늘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므로 반드시 의사학 교육에 대한 부정적 의견의 반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교육방식에서도 이전처럼 전체를 개괄적으로 훑는 통사적 강의 형태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또 일부 학교에는 통사적 강의가 없는 대신 해부학의 역사, 생화학의 역사, 미생물학의 역사 등 특정 영역의 역사를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Miller, 1969: 262-3).

북미의 의사학 교육 현황에 대한 가장 최근의 조사는 2008년 미국의사학회에 의해 북미 소재 의과대학 174개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98개 의과대학에서는 의사학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19개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의사학 교육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51개 의과대학만이 어떤 형태로든 약간의 의사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Gunn et al, 2008). 전체적으로 보아 3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의과대학에서 의사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이전의 조사 결과와 비교하면 비율이 많이 낮아진 것이다. 사실 의사학 교육의 필요성 내지는 정당성에 대한 기본적 주장은 백 년 전이나 현재나 크게 달라진 내용은 없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의사학 교육을 전체 의학교육의 유기적인 일부로 통합시키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최근 의학교육에서 강조되는‘전문주의(professionalism)’와 ‘역량(competency)’을 의사학 교육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이다(Jones et al, 2015: 637-8).

이와 함께 의사학 교육 방법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의학 이론과 실천의 발달에 대한 전통적인 통사적 강의는 점차 사라지고 현재의 의료 문제와 관련이 있는 주제나 개념, 혹은 임상적 사례를 소그룹으로 다루는 방식이 이를 대신하기도 한다. 문제중심학습(PBL)의 형식에서 역사적 사례(예를 들어 비르효의 실레지아 지방의 티푸스 조사)를 채택하여 역사적 정보를 문제중심학습에 통합하려는 시도도 있다. 또 건강불평등이나 사회적 차별, 의학문헌에 대한 비판적 접근 등의 교육에 역사적 사례를 이용하기도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생명윤리의 전통적 주제인 죽음이나 인간대상연구 등의 교육에 역사적 접근을 결합하기도 한다(Jones et al, 2015: 649).

Statistics of Courses of Medical History in Medical Schools in America

7. 맺음말

우리는 위에서 과거 이천여 년에 걸쳐 서양의 의학교육에서 의사학이 수행했던 역할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시대에 따라 그 역할이 변화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변화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고대 서양에서 의사학은 의학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역사가 되지 못한 과거의 의학은 여전히 현재 의학의 중요한 일부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시기는 짧게 잡아도 르네상스까지, 좀 길게 본다면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오면 의사학의 ‘실용성’이 강조된다. 여기서 말하는 실용성은 이제 역사화된 과거의 의학이 현재의 의학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19세기 후반을 지배했던 실증주의 시대에 이러한 실용성은 의사학의 핵심적 가치였다. 19세기에 의사학의 실용성이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역사화 되기는 했지만, 과거 의학과 현재 의학의 거리가 아직 그토록 멀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과학적 의학의 발전이 본격화되며, 그 거리는 이제 실용성으로 연결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다. 과학적 의학의 시대에, 의학의 세분화와 전문화의 시대에 의사학에 새롭게 주어진 역할은 의학에 대한 통합적 시각을 가능케 하는 가르침으로서의 의사학이었다(Moll, 1962: 208).

20세기 이후 의학교육 내에서 의사학의 유용성에 대한 이유는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학교육의 전체적 흐름 내에 의사학 교육을 위치시키려 하는 새로운 시도들도 나타나고 있다. 의학교육의 주된 흐름에 적지 않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기존의 과목들을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 교육방법과 내용을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의사학 교육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함께 의료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가운데 의료인문학과 공유할 역할과 그 안에서 의사학의 고유한 역할을 규정하는 문제 또한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의학교육의 큰 흐름 안에 의사학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문제와 의료 문제를 다루는 다른 인문사회과학, 예를 들어 의료인류학, 의료사회학, 문학 등과 의사학이 생산적 협력을 모색하는 것은 지금의 의사학 교육에 주어진 도전이자 과제가 될 것이다.

Notes

1)

De naturalibus facultatibus 2.8 (2.116-117 K.).

2)

저자는 개정판에서 갈레노스 이후 파라켈수스까지의 시대를 덧붙였으나, 분량이 많지 않고 앞선 시기에 비한다면 간단한 개요에 그친다.

3)

콜레주 드 프랑스에 의사학 강좌가 만들어진 것에는 또 다른 배경도 존재한다. 원래 담당 정부 부처에서는 파리의과대학에 만들기를 희망했으나, 파리의과대학 측이 거부하여 콜레주 드 프랑스에 만들어진 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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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Statistics of Courses of Medical History in Medical Schools in America

조사연도 조사한 학교 수 필수과목인 학교 수 선택과목인 학교 수
1904 14 3 -
1937 77 28 26
1952 79/7 20/6 71/1
1967-68 95 14 25
2008 174(캐나다 포함)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