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신라의 임상 의학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의학 교육 기관 ‘의학(醫學)’의 설치와 그 영향

How Did the Clinical Medicine Progress during the Unified Silla Era: Installment of the Medical Education Center ‘Uihak 醫學’, and Its Effect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3;32(1):203-239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3 April 30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3.32.203
1Associate Professor, College of Korean Medicine, Daejeon University; Research Fellow, The Institute for Medical Humanities, Inje University
2Corresponding Author : Research Institute of Science, Technology and Civilization; Department of Science Studies, Jeonbuk National University
오재근1, 신동원2,
1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 부교수 및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원. 한의학 전공
2교신저자: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및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소장. 한국의학사 전공
**교신저자: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및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소장. 한국의학사 전공 / 이메일: newsdw@jbnu.ac.kr
Received 2023 February 28; Revised 2023 March 14; Accepted 2023 April 04.

Abstract

In this research, I aimed to recognize the historical meaning of installing the medical education center, ‘Uihak 醫學’, during the Silla 新羅 dynasty. ‘Uihak’ was installed in 692, in the first year of King Hyoso 孝昭 ’s rule. ‘Uihak’ was founded by using various Chinese medical classics as its textbooks for medical education, such as the Classic of Plain Questions 素問經.

The wooden prescriptions excavated from Anapji 雁鴨池, which is thought to have been created in the middle of the 8th century, and the Chinese medical book Prescriptions for Universal Benefit 廣利方, which the envoy of Silla tried to acquire in 803, reflect the idea on medicine during that period in Silla. By this time, the field of medicine began to develop the idea to discern the locations and mechanism of disease patterns by centering on the viscera and bowels 臟腑 while making use of the herbal prescriptions based on various drugs. This means that clinical medicine founded upon the medical education achieved in ‘Uihak’ was being realized in the medical fields as well. According to the Chronicles of the Three States 三國史記, for the illness of Queen Sunduk 善德 in 636, medicine, praying, and the method of esoteric Buddhism 密敎 was tried out as a means of her cure. Comparatively, for the treatment of the first rank Chunggong 忠公 in 822, the Kingdom’s representative doctor 國 醫 with professional medical knowledge was sought out to fine a cure. The analyses of the human disease, diagnosis, treatment method, etc., given by the kingdom’s representative doctor were identical to those recommended in the medical textbooks used in ‘Uihak’. As such, we can posit that his academic background was ‘Uihak’ and the education given there.

The Classic of Materia Medica 本草經, which was also used in ‘Uihak’, was a book professionally centered on the drug branch of medicine. The Classic of Materia Medica is a terminology referring to various books on drugs, including the Shennong’s Classic of Materia Medica 神農本草經, the Variorum of the Classic of Materia Medica 本草經集注, the Newly Revised Materia Medica 新修本草, etc. Thus, we cannot specify what the classic of Materia Medica actually taught, based on only its terminology. However, based on the wooden prescriptions excavated from Anapji, and from the terminology of drugs recorded in the drug trading document Purchase List for Silla goods 買新羅物解 preserved in Shosoin 正倉院 of Japan, we can hypothesize that in the middle of the 8th century, the Newly Revised Materia Medica was indeed being circulated. Based on these evidences, we can also hypothesize that Silla was part of the network of drug trading that encompassed the entire region of Asia.

After unifying the Korean peninsula, the Kingdom of Silla actively adopted the medical educational system of Tang 唐 China. By using the obtained medical knowledge, Silla cured illnesses and used the medical knowledge on various drugs recorded in the Newly Revised Materia Medica to pursue trade with China, Japan, and other countries. Through the installation of ‘Uihak’, the same medicine has now begun to be officially used in East Asia, including Silla.

1. 시작하는 글

한반도의 고대 의학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까?1)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전염병의 유행이나 국왕의 질병 치료 등 의학과 관련된 역사적 편린들이 산재해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효소왕(孝昭王) 원년, 692년에 의학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인 ‘의학(醫學)’이 설치됐고 『본초경(本草經)』 등을 의학 교재로 사용했다는 짧은 기사가 실려 있을 뿐이다.2) 지식의 생산과 유통이 관(官) 중심으로 이뤄졌던 고대 시기, 정부에서 설립한 의학 교육 기관과 그곳에서 활용한 의학 교육 교재는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의약 관련 업무 제반에 영향을 미쳤다.3) 중국, 당(唐)의 대표 의가로 꼽히는 쑨쓰먀오(孫思邈) 역시 당시 주요 의가 집단으로 권력의 중심, 조정에서 일하고 있는 의가, 재조대의(在朝大醫)를 꼽은 바 있다.4) 볜췌(扁鵲)나 춘위이(淳于意)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최고 권력을 쥐고 있던 이들은 늘 최고 실력을 갖춘 의가들을 곁에 두고자 했다.5) 한반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 고대 시기 조정에 소속되어 있던 이들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떻게 환자를 치료했을까? 또 통일 신라 정부에서 설치한 ‘의학’과 그곳에서 활용한 의학 교재는 이후 한반도의 의약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한국 의학사 연구를 개창한 김두종은, 신라에 대해 삼국 시대에는 고유 의학의 전통을 비교적 많이 보존해왔고 중국 의약 수입에 현저한 영향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통일과 함께 당의 의약 수입과 활용에 전력을 다해 약진적인 발전을 이룩했을 뿐 아니라 당의 의학 교육 및 의료 제도를 채택해 신라의 것으로 삼았다고 분석한 바 있다(김두종, 1981: 65). 위의 주장은 통일 신라 시대 의학의 특징을 설명하는 정설로 자리 잡고 있으며, 신동원, 이경록, 이현숙 등의 후속 연구자들을 통해 보완되어왔다. 먼저 신동원은 환자를 중심으로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의 의료 기록을 재편했고(신동원, 2014: 40-93), 이경록은 고려 시대 의학을 기술하며 그 역사적 배경이 된 신라의 의료 상황, 의술, 의료 제도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으며(이경록, 2010: 39-67), 이현숙은 신라의 의료 제도, 의료인, 전염병, 당과의 교류, 종교와 의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접근을 시도하며 그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었다(이현숙, 2021: 10-20). 그렇지만 부족한 사료는 여전히 한반도 고대 시기 의학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한다. 이에 이번 연구에서는 산발적으로 존재하던 의학 교육, 임상 의료, 약물 지식 유통에 대한 선행 연구 성과를 정리하는 한편, ‘의학’의 설치를 전후하여 신라에서 벌어진 임상 의료 및 의약 지식의 변화상을 중심으로 새로운 논의를 도출해보고자 했다.

『삼국사기』에 기재되어 있는 통일 신라의 ‘의학’ 설치 기사는 김두종, 미키사카에(三木榮)를 위시한 여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김두종, 1981: 66-71; 134-5; 三木榮, 1963: 13-5; 84-6; 523; 손홍렬, 2013: 51; 134; 이현숙, 2009b: 160; 이경록, 2010: 216). 이번 연구에서는 신라, 고려, 그리고 중국, 당에서 이뤄진 의학 교육 내용을 비교하는 한편 고려 시대에 규정된 의업식(醫業式)의 내용을 토대로 『삼국사기』의 ‘의학’ 설치 기사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재해석해보고자 했다.6) ‘의학’이 처음 설치된 신라 효소왕 원년, 692년과 의업식과 관련된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고려 인종 14년, 1136년 사이에는 400여 년의 간극이 존재하는 만큼 고려 시대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 의학의 모습을 짐작하는 것은 다소 무리한 접근일 수 있다. 다만 고려의 경우 건국 초기, 신라의 의료 제도를 그대로 계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어 있고(손홍렬, 2013: 93) 의학 교육 체제 역시 서로 간에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고 있는 만큼 이를 통한 비교 역시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라 기대한다.

임상 의학에 대한 분석은 실제 사례를 매개로 진행될 때 가장 생동감 있다. 안타깝게도 신라 시대의 임상 진료 기록은 거의 전해지고 있지 않으며 선행 연구 역시 의학 서적에 실린 처방 분석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 일본 의서 『의심방(醫心方)』 중에 실려 있는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 ‘신라법사류관비밀요술방(新羅法師流觀祕密要術方)’ 등을 토대로 불교 의학과 도교 방술이 신라 의학에 미친 영향이나 중국과 다른 방식으로 활용되던 신라 약재 등을 파악했던 연구들이 대표적이다(김두종, 1981: 74-7; 三木榮, 1963: 22-3).7) 그러나 ‘신라법사방’ 등은 별도 저작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지 않으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처방 역시 간단하게 구성된 단방(單方) 형식을 띠고 있어 신라 임상 의학 전모를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이번 연구에서는 ‘의학’ 설치 이후, 8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안압지(雁鴨池) 출토 목간에 기재된 처방전과 803년 중국을 방문했던 신라 사신 박여언(朴如言)에 의해 입수됐을 것으로 보이는 중국, 당의 관찬 의서 『광리방(廣利方)』(796년 편찬)을 분석해 당시 신라 임상 의학의 경향을 추정해 보고자 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간 처방전은 특정 병증에 대처하기 위한 처방이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자생하지 않는 약재도 포함하고 있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8) 『광리방』의 성격과 내용은 이현숙의 선행 연구를 통해 상당 부분 밝혀져 있다(김두종, 1981: 70; 三木榮, 1963: 15; 이현숙, 2000a: 235-63; 2000b: 201-32). 이번 연구에서는 『의심방』, 『증류본초(證類本草)』, 『본초강목(本草綱目)』 등 관련 서적을 보강해 『광리방』 원문을 추가 복원하는 한편 그 내용을 분석해 신라에 유통되었을 임상 의학 이론과 방제의 경향성을 탐색했다. 이어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636년과 822년 신라 최고 권력자의 질병 치료 기사 중에 임상 의학의 변동이라 볼만한 내용이 있음을 포착해, 목간 처방전, 『광리방』의 활용 등과 함께 그 배경에 의학 교육 기관 ‘의학’의 설치와 영향이 자리하고 있음을 서술했다.

약물은 과거, 질병 치료를 위해 가장 많이 활용되던 도구였다. 환경에 따라 취득에 제약이 있는 만큼 교역을 통한 약물 유통은 원만한 의료 행위를 수행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으며, 약물에 대한 지식이 풍성해질수록 다양한 약재 교류가 가능했다. 일본 황실도서관 정창원(正倉院)에 남아 있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는 752년 일본 귀족들이 신라의 사절 대표 김태렴(金泰廉)으로부터 구입하고자 했던 물건의 조율 기록으로 신라, 일본 간에 이뤄졌던 약물 교역의 실제적인 증거가 된다(池田溫, 2002: 75-6).9) 이번 연구에서는 선행 연구와 달리 「매신라물해」 중에 수록된 약물 정보가 중국의 본초, 약물 전문 저작인 『신수본초(新修本草)』 중에 수록되어 있음에 주목했다.10) 신라 사람들이 교역 물품을 확인하기 위해 『신수본초』를 활용했다면 당대 신라에서 활동하던 의료인들 역시 이 책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전하고 있는 한반도 고대 의학 관련 자료의 절대 부족 그리고 그 자료들이 국왕, 귀족 등 지배 계급들의 의료 행위를 반영하고 있어 신라 의학 전체를 규정할 수 없는 점 등은 이 연구가 지닌 한계다(이경록, 2010: 55).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목간 등의 출토 사료와 함께 당시 편찬된 중국 및 일본의 의학 서적 등을 참고했으며 ‘의학’에서 활용한 의학 서적의 내용, 임상 의료 과정에서 활용된 의학 이론, 약물의 활용과 약물 지식의 유통 등에 대한 논의를 유기적으로 엮어 사료 상의 공백을 채워 보고자 했다.11)

2. 의학 교육 기관, ‘의학(醫學)’의 설치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의 아들이었다. 6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던 만큼 효소왕 원년에 실시된 ‘의학’의 설치는 전대 신문왕이 수행했던 정책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문왕은 신라 중대를 개창한 것으로 평가받는 무열왕(武烈王), 김춘추의 손자로서, 조부인 무열왕 그리고 부친인 문무왕(文武王)이 추진했던 한화(漢化) 정책을 승계하고 있었다(한준수, 2012: 37-84; 이영호, 2015: 84-5).12) 한편 ‘전제 왕권’으로 대표되는 신라 중대의 통치 체제는 진덕왕(眞德王) 무렵 김춘추 세력에 의해 도입된 중국의 『당률(唐律)』을 토대로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한준수, 2012: 11-5).

국학(國學)은 예부(禮部)에 속해 있었는데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두었다.13)

의학(醫學)은 효소왕 원년[692]에 처음 두어 학생(學生)을 가르쳤는데, 『본초경』, 『갑을경(甲乙經)』, 『소문경(素問經)』, 『침경(針經)』, 『맥경(脈經)』, 『명당경(明堂經)』, 『난경(難經)』으로써 기초(業)를 삼았다.14)

신문왕 무렵 신라는 당의 육전(六典)에 준하는 체제 확립을 목표로 제도 정비를 진행하고 있었으며 관리 선발 절차 역시 국가 차원의 제도적 장치로 정형화됐다. 기성 관료에 대한 관리는 위화부(位和府)에서 그리고 신진 관료 양성은 국학(國學)에서 수행하도록 했던 것이다(이영호 외, 2016: 97-8; 한준수, 2012: 87-8). 따라서 학생들에게 전문 의학 서적을 가르치는 의학 교육 기관의 설치는 신문왕 대에 이뤄진 국학의 정비를 통한 신진 관료의 양성과 왕권 강화, 나아가 신라 중대에 이뤄지던 한화 정책의 일환으로 간주할 수 있다.15)

신라는 군자(君子)의 나라로 불리며, 자못 학문을 알아서 중화(中華)와 유사한 데가 있다.16)

737년, 신라의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이 세상을 떠났다. 당의 황제, 현종(玄宗, 재위 712-756년)은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싱수(邢璹)를 신라에 보내 조의를 표했다. 그러면서 현종은, 위 인용문과 같이, 싱수에게 신라를 중화 곧 중국과 비슷한 나라라고 평가하는 말을 전했다. 무열왕 무렵부터 수행해온 한화 정책의 결과, 이제 번이(蕃夷)가 아닌 군자의 나라라고 부를 만하다는 당황제의 평가였다(이기동, 1998: 4). 중국 대륙과 한반도는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만큼 많은 것을 공유해왔다. 전쟁, 이주, 교역 등을 통해 수많은 사람, 서적, 도구, 자연물 등이 중국에서 한반도로 그리고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졌다.17)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는 ‘문화 내적 교류’가 이뤄졌다고 평가될 정도로 한반도적인 것과 중국적인 것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오드아르네베스타, 2022: 197; 김영식, 2013: 207-22).18) 삼국 통일 이전에도 고구려에 체류하다가 『내외전(內外典)』, 『약전(藥典)』, 『명당도(明堂圖)』 등 164권의 서적을 소지한 채 일본으로 건너간 중국 오나라 사람 지총(智聰)에 대한 기록이나 백제 사람들도 의약(醫藥)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주서(周書)』의 기재를 통해 보더라도(김두종, 1981: 30; 신동원, 2014: 45-62)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의학을 매개로 한 오랜 교류가 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한국 의학 통사를 서술한 미키사카에는 한국 의학을 매개로 중국, 일본을 위시한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을 논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三木榮, 1963: 74).

대만의 의학사 연구자 리젠민(李建民)은 중국 의학이 문자화된 서적[文本] 중심의 의학을 향해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고 주장하며, 3세기까지는 금방(禁方)이 저물고 의학 경전(經典) 또는 정전(正典)이 확정되는 시기, 5세기는 소품(小品)이라 불리는 방서(方書)가 등장하는 시기, 그리고 7세기는 핵심적인 의학 경전들이 ‘황제(皇帝)의 교과서’로 불리며 세상에 공포되는 시기로 규정했다(李建民, 2016: 10-54). 효소왕 원년, 의학 교육 교재로 확정된 저작들은 의학 이론을 다루고 있는 『소문경』과 『난경』, 맥진을 중심으로 한 진단 관련 내용을 다루는 『맥경』, 약물 관련 내용을 다루는 『본초경』, 경맥 및 침구 관련 내용을 다루는 『갑을경』, 『침경』, 『명당경』 등이다. 이들은 『황제내경』이라 불리는 『소문경』, 『침경』과 함께 의학 경전 또는 정전이라 불리며 기존의 다양한 의학 경험을 증명, 수정하고 또 반박하는 중요한 틀로 자리 잡아 있었다(李建民, 2009: 65). 다시 말해 신라는 효소왕 원년, 중국 수, 당 등의 통일 왕조가 수립한 의료 및 의학 교육 체제를 상징하는 의서들을 의학 교육 교재로 확정했으며 이를 통해 당대 ‘보편 의학(universal medicine)’이었던 중국 의학과 궤(軌)를 공유하며 의학적 동질성을 확보할 것임을 공식화했던 것이다.19)

692년 신라 ‘의학’에서 채택한 의서들은 중국 당의 행정 법전 『당육전(唐六典)』(719년 편찬)에 실려 있는 의생(醫生)의 필습 의서들과 동일하다.20) 그러나, 『삼국사기』 인용 기사에 따르면, 신라의 ‘의학’은 당의 태의서(太醫署)와 달리 약물, 침, 안마, 주금(呪噤) 등의 의료 도구 및 방법에 따라 의학을 학습하는 학생을 의생, 침생, 안마생, 주금생으로 구분하지 않았으며, 의생과 침생에 대해서도 반드시 학습해야 하는 필습 의서 외에 겸비해 학습해야 하는 겸습 의서를 별도 배정하지 않았다.21) 당의 태의서에서는 주금생(咒噤生)들에게 사매(邪魅)를 제거하는 존사(尊思)ㆍ우보(禹步)ㆍ영목(營目)ㆍ장결(掌決)ㆍ수인(手印) 등의 실질적인 주금 방법을 교육한 반면(王振国, 2006: 169; 307)22) 현전 신라 ‘의학’ 관련 기록에서는 주금과 관련된 교육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김두종, 1981: 66).23) 한편 고려 성종(成宗) 조에 이르러 의약과 질병 치료를 담당하는 태의감(太醫監)에 감(監)ㆍ소감(少監)ㆍ승(丞)ㆍ박사(博士)ㆍ의정(醫正) 등이 설치됐으며 목종(穆宗) 조에는 주약(注藥)ㆍ약동(藥童), 그리고 문종(文宗) 조에는 주금박사(呪噤博士), 주금사(呪噤師)ㆍ주금공(呪噤工)ㆍ의침사(醫針史) 등이 추가 설치됐다(이경록, 2010: 184). 이어 고려 인종 14년(1136년), 의학과 관련된 과거 제도로 의업식(醫業式)과 주금업식(呪噤業式)이 확정됐다.24) 그런데 주금업식 과목으로 주금과 관련된 의서가 아닌 상과(傷科) 및 외과 관련 의서인 『류연자방(劉涓子方)』, 『창저론(瘡疽論)』 등이 포함되어 있어 고려 시대의 주금박사 등은 ‘주금’ 외에 실제적인 ‘외과 치료’를 실시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三木榮, 1963: 74; 손홍렬, 2013: 135-6).

신라의 ‘의학’이 당의 태의서처럼 의생, 침생, 안마생, 주금생으로 교육생을 구분하거나 고려의 ‘의학’ 처럼 의업식과 주금업식을 구분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삼국사기』 편찬 당시 남아 있던 자료가 제한적이었기에 의학과 관련된 내용이 일부만 채록되어 그러할 수 있다는 추측도 제기되어 있다(이현숙, 2009b: 155; 161). 다만 고려의 과거 제도가 태봉(泰封), 신라, 당의 여러 요소를 종합해 시행되고 있었던 점(허흥식, 1974: 32), 고려 의업식에서 신라 ‘의학’에서 활용되던 의서를 그대로 유지하며 단 하나 『구경(灸經)』 만을 추가하고 있었던 점 등으로 미뤄볼 때, 『삼국사기』에 기재된 ‘의학’ 관련 기록은 실제와 부합할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주금의 경우, 동시대 중국, 당에서 주금과 관련된 교육을 실시했고 신라의 의료 제도를 계승한 고려 시대의 의학 과거 과목에 주금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신라 시대의 한반도에도 주금과 관련된 수요나 의료 행위가 분명히 존재했으며 그 유산을 고려의 의학 교육 기관 ‘의학’에서 흡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효소왕 원년 신라 정부는 중국, 당의 의학 교육 기관 태의서의 교육 체제를 본 따 정부 주도의 의학 교육을 실시했다. 이른바 ‘한화정책’ 또는 ‘문명화정책’의 일환이었다. 의학 교육을 위해 『소문경』, 『난경』, 『맥경』, 『침경』, 『본초경』 등을 채택했으며 이들은 ‘황제의 교과서’로 불리는 핵심적인 의학 경전들로 한반도 의학이 동아시아 의료 체계로의 공식 편입되는 계기가 됐다. 신라의 ‘의학’이 당의 태의서처럼 의생, 침생, 안마생, 주금생 등을 분획하여 교육했는지 주금과 관련된 별도의 의학 교육을 시행했는지 여부를 단정할 수 없지만,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의학’은 당의 태의서와 달리 의생, 침생, 안마생, 주금생 등을 구분하지 않고 교육했으며 주금과 관련된 별도의 의학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Medical Education Department and Training Subjects of Silla 新羅, Goryeo 高麗 and Tang 唐

3. 통일 신라 시기에 펼쳐진 임상 의학의 한 단면

‘의학’ 설치 이후 신라의 임상 의학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현재 신라 임상 의학의 일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와 함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다름 아닌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목간 처방전과 803년 신라 사신 박여언(朴如言)의 『광리방(廣利方)』(796) 입수 시도다.

1975년 이래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신라 왕궁터 월성에 위치한 안압지에서 발굴한 목간을 공개해왔다. 그 중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소개한 198번 목간에는 여러 개의 약물 명칭과 함께 약물별 용량이 기재되어 있어 아마도 처방전이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세부 내용은 아래와 같이 잠정 결론지어져 있다(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6: 162; 이덕호ㆍ이선아ㆍ김남일, 2009: 85-91).

안압지 출토 198번 목간

[전면] 大黃一兩 (黃)□一兩 □(甫)一兩 靑袋一兩 升麻一兩 甘草一兩灸 胡同律 一兩 朴消一兩 □□□一兩

[후면] □(精)□□ 靑木香一兩 支子一兩 藍淀三分

위 목간 처방전에 대해 미카미요시타카(三上喜孝)는 737년 일본에 역병이 돌 때 제작된 전약료감문(典藥寮勘文) 중의 완두병(豌豆病) 증상 치료 단방을 소개한 뒤, 대황, 황련, 청목향 등의 단일 약물로 구성된 단방이 목간 처방전 구성 약물과 동일하다는 점에 관심을 보였다. 단 목간에 기재된 처방이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三上喜孝, 2007: 315; 이현숙, 2009a: 109). 한편 이덕호는 목간에 기재된 처방을 중국, 당의 의서 『외대비요(外臺秘要)』에 수록된 불문인어성방(不聞人語聲方), 오향환(五香丸)과 비교하며 열증과 실증에 사용되는 약물들이 다수 기입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열을 제거하고 장내의 불순물을 신속하게 제거하는 효력을 지닌 방제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이덕호, 2010: 33-6). 그러나 『의심방』 중에, 위 목간 처방전의 원형에 보다 가까운, 『기파방(耆婆方)』을 출처로 밝히고 있는 열이 나며 붓고 통증이 있는 것을 다스리는 ‘치인열종동통방(治人熱腫疼痛方)’이 기재되어 있다.

『기파방』. 열이 나며 붓고 통증이 있는 것을 다스리는 처방[治人熱腫疼痛方]. 승마(升麻) 세냥 야간(夜干) 두냥 대황(大黃) 두냥 망초(芒硝) 두냥 청목향(青木香) 한냥 치자(梔子) 한냥 감초(甘草) 반냥.25)

198번 목간 처방전에는 『의심방』에 수록된 『기파방』 인용 처방 중 야간을 제외한 승마, 대황, 망초, 감초, 청목향, 치자26) 등 모든 약물이 포함되어 있다. 또 위 여섯 개 약물이 처방전 내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 『기파방』 인용 처방에 청대, 호동률, 남정 등의 약물을 추가해 목간 처방전을 구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목간 처방전의 저자가 누구인지 처방전 작성을 위해 『기파방』 또는 『의심방』을 참고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목간 처방전을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적용 병증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어떤 질병이나 병증을 치료하고자 했는지 단언할 수 없다. ‘치인열종동통방’이 수록된 『의심방』의 『제병원후론(諸病源候論)』 인용 문장을 미뤄볼 때 목간 처방전 역시 열독(熱毒)에 의해 유발된 발열, 부종, 통증을 동반한 전신성 피부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구성된 처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7)

한편 위 목간 처방전은 기존에 알려진 『의심방』 수록 신라 유래 처방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의심방』에 수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신라법사방’은 복약시 외는 주문이거나 속수자(續隨子)와 같은 단일 약물을 활용해 적취(積聚)를 치료하기 위한 처방이었고, ‘신라법사류관비밀요술방’ 역시 노봉방(露蜂房) 단일 약물을 방중술(房中術)에 사용하는 처방이었다.28) 이와 달리 위 목간 처방전은 특정 병증을 치료하기 위해 구성된 처방으로 여러 개의 약물로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기존 처방에 청대, 호동률, 남정 등 열을 내려주는 효능을 지닌 약물을 별도 추가하고 있어 방제 구성과 관련된 전문적인 의학 및 약물 지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803년, 신라 사신으로 중국, 당을 방문했던 박여언은 『광리방』의 존재를 확인한 뒤 회남절도사 두여우(杜佑)로부터 당 정부에서 편찬한 관찬 의서 『광리방』을 입수하고자 했다. 이에 지방 관리였던 두여우는 중앙 정부로부터 『광리방』의 사본을 박여언에게 내주어도 되는지에 대한 응답을 듣고자 류위시(劉禹锡)에게 해당 내용을 문의하는 주청문, 「대회남두사도주신라광리방상(代淮南杜司徒奏新羅廣利方狀)」을 작성토록 했다(李昉 等, 1990: 3306). 현재 『광리방』 원본은 전해지고 있지 않으며, 위 주청문과 타기모토타네(多紀元胤)의 『의적고(醫籍考)』를 통해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민간에서 유행하던 중요 질병을 63개 분류로 나눈 뒤 일반인이 구하기 쉬운 약재로 구성된 586수의 방제가 수록되어 있었다는 대략적인 성격만이 밝혀져 있다(김두종, 1981: 70). 박여언이 『광리방』 사본 입수했는지 여부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비슷한 유형의 의서로 여겨지는 『광제방(廣濟方)』(723년)에 대해 그 내용을 뽑아 판에 적은 뒤 촌방의 주요 길목에 게시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져 있었던 만큼 『광리방』의 외부 유출 역시 엄격히 통제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여언 역시 어렵지 않게 해당 서적을 입수해 신라에 전달했을 것이다(김두종, 1981: 70; 三木榮, 1963: 15; 이현숙, 2000a: 243).

『광리방』. 소갈(消渴), 심장과 비장 중에 열이 있고 하초는 허약하며 차갑다. 소변을 많이 보고 점차 몸이 말라간다. 소의 젖이나 양의 젖, 날 것을 목이 마를 때 3-4홉 정도 마신다. 『증류본초』 「우유」29)

위 인용 처방은 소나 양의 젖으로 구성된 간단한 처방이지만 소갈의 발병 이유를 심장과 비장 중의 열기, 곧 장부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목간 처방전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병증의 병리 기전 이해 방식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이현숙은 『향약집성방』, 『의심방』 중에 각각 16, 32개의 『광리방』 문장이 수록되어 있음을 밝히고 관련 내용을 정리해둔 바 있다(이현숙, 2000a: 248; 252-4; 2000b: 221). 위의 성과를 토대로 『외대비요』, 『증류본초』, 『본초강목』 등으로 분석 대상 서적을 확장하면 총 90여개의 『광리방』 인용 문장을 복원할 수 있다[부록 1]. 그리고 그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임상 의학적 특징이 확인된다. 첫 번째, 기, 혈 등의 의학적 개념과 오행 이론을 활용해 병증을 파악하며 『황제내경』 의학의 연속성을 보이고 있다. 두 번째, 심열(心熱) 등 오장(五臟) 중심의 증상 분류 관점을 채택하며 중국 당의 대표 의서 『비급천금요방』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30) 세 번째, 전탕 방법, 복용 방법, 효과 여부 등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네 번째, 내복 이외에 점안, 삽입, 도포, 구법 등 다양한 약물의 활용법이 소개되어 있다. 다섯 번째, 단방 중심의 방제를 보여주지만 여러 개 약물로 구성된 복합 방제 역시 수록되어 있다. 여섯 번째, 초부, 목부, 금수부, 충어부 등 다양한 종류의 약물이 활용되고 있다. 『광리방』에 담긴 의학 지식은 서적과 함께 자연스럽게 신라에 전승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질병과 함께 일반인들도 구하기 쉬운 약재로 구성된 처방을 수록하고 있는 서적이었던 만큼 전문 의가 뿐 아니라 다수의 지식인들에게도 관련 정보가 확산됐으리라 추정된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636년 선덕여왕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술과 기도와 함께 승려들이 동원됐다. 여왕의 질병을 불교 경전에 대한 강론으로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삼국유사』에서는 밀본이 『약사경(藥師經)』을 읽자 그가 지니고 있던 육환장(六環杖)이 선덕여왕의 침전 안으로 날아들어 여우와 법척(法惕)을 찌르고 뜰 아래로 거꾸러뜨린 뒤 왕의 질병이 나았다며 궁중에서 이뤄진 불경 독송과 질병 치료 과정을 구체적이면서도 신비스럽게 묘사하고 있다.31) 반면 822년에 이뤄진 상대등 충공(忠公)의 질병 치료에서는 의관(醫官)인 ‘국의(國醫)’만 등장할 뿐 승려는 등장하지 않는다.32) 이제 독경 등 불교 의식에 기반한 치료 보다는 전문 의학 지식을 배경으로 관직에 오른 의관이 본격적으로 권력자의 질병을 진찰하고 또 치료하기에 이른 것이다.

[636년] 3월에 [선덕]왕이 병이 들었는데 의술과 기도로 효과가 없었으므로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회를 열어서 승려들을 모아 『인왕경(仁王經)』을 강론하게 하고, 10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33)

[헌덕왕] 14년(822)에 국왕에게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동복(同腹)의 아우 수종(秀宗)을 태자로 삼아 월지궁(月池宮)에 들게 하였다. 그때 각간(角干) 충공(忠恭)이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정사당(政事堂)에 앉아 내외 관원을 전형, 선발하였다. 공무를 물리친 뒤 병이 들었는데, 국의(國醫)를 불러 진맥하니, “병이 심장에 있어 반드시 용치탕(龍齒湯)을 복용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충공은] 21일간의 휴가를 청하고 문을 닫고 손님을 만나지 않았다.34)

충공의 질병 치료 과정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충공을 진료한 국의는 병증 진찰을 위해 진맥을 했고, 병증이 위치한 병소(病所)를 심장으로 국한했으며, 해당 병증을 치료하기 위해 용치탕이라는 탕약을 치료 도구로 사용했다. 진맥을 하기 위해서는 맥진에 대한 논의가 우선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692년 ‘의학’에서는 맥진과 관련된 저작으로 『소문경』, 『난경』, 『영추』, 『맥경』 등을 채택했다. 『맥경』의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는 손목에 자리한 촌관척(寸關尺) 세 개 부위와 각각의 장부를 연관시키며 병증의 위치를 특정시킬 수 있도록 매개했던 것이었다(박경, 2010: 1; 140). 두 번째, 충공의 질병을 심장과 연관시키고 있다. 충공의 질병 정황을 보다 상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질병의 경과를 마저 살펴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의 이어지는 문장에 따르면, 국의의 진료 이후 집사시랑(執事侍郞)을 역임했던 녹진(祿眞)이 충공을 찾아갔다. 녹진은 영혈과 위기의 조화[榮衛之和]가 깨져 팔다리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면 약이나 침이 아니라 이치에 맞는 말과 고상한 이야기로 ‘근심에 가득 찬 생각[鬱悒之慮]’을 깨쳐야 한다며 조리 있는 말로 충공의 질병 정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 수긍한 충공은 의관(醫官)의 치료를 물리치고 수레를 타고 왕궁에 입조해 업무에 복귀했다.35)

현재 충공의 질병은 상대등으로서 중앙과 지방 관리를 심사하고 인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업무상의 고민과 과로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승현, 2020: 203). 국의가 녹진이 설명했던 발병 원인, ‘근심에 가득 찬 생각’을 심장과 연관시켜 파악했던 것은, 앞서 살펴본, 장부(臟腑) 중심으로 병증 정황을 분석하던 『광리방』 뿐 아니라 『황제내경』 이래 동아시아 의학 전통에서 지속되던 특징적인 신체관의 영향 때문이었다(가노우요시미츠, 1999: 165-83). 심장을 온몸에 혈액을 보내주는 펌프(pump)가 아닌 군주지관(君主之官)으로서 정신[神明]을 주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던 『황제내경』의 접근 방법이 내재화된 채 국의의 진단 과정에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36) 세 번째, 병소가 심장이라고 진단한 국의는 해당 질환의 치료를 위해 용치탕이라는 방제를 제안했다. 용치탕이 어떤 약물들로 구성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방제 이름으로 미뤄볼 때 용치(龍齒)를 대표 약물 즉 군약(君藥)으로 활용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37) 용치는 고대에 생존했던 대형 포유동물의 치아 골격의 화석으로 놀람과 함께 발작 증세를 동반하는 경간(驚癎), 심한 두통인 전질(癲疾), 미친 증상을 보이며 주변을 내달리는[狂走] 등 정신적인 문제를 치료하는 약물로 알려져 있다(高学敏, 2000: 1311; 馬繼興, 1995: 174). 충공의 병증 치료를 위해 단일 약물, 용치가 아닌 용치를 군약으로 내세운 용치탕을 활용했다는 것은 당시 본초 및 방제에 대한 논의가 이미 정립되어 있었으며, 『신농본초경』 이래 축적되어오던 동아시아 약물 의학의 전통과 당시 충공을 치료한 신라 국의의 의학이 합치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38)

『삼국사기』 중에는 임상 의료 기록이 충분히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편찬자들의 특정 사관(史觀)이 반영되어 있는 만큼 위의 두 사례가 당대 임상 의학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692년 효소왕 원년에 벌어진 의학 교육기관 ‘의학’의 설치, 출토 목간에 기재된 처방전과 『광리방』에 기재된 임상 의학 내용을 토대로, 636년과 822년, 당대 최고 권력자를 대상으로 진행된 두 개의 임상 진료 기록을 살펴보면, 거칠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유추해볼 수 있다. 첫 번째, 692년 효소왕 원년에 설치된 ‘의학’과 그곳에서의 교육은 의학 경전 지식을 습득한 의관들을 배출해냈으며 이들 의관들은 여러 가지 약물로 구성된 한약 처방을 활용했을 뿐 아니라 병증의 발병 위치를 장부 등을 중심으로 파악하고 그 병리 기전 역시 변별하고자 했다. 두 번째, 636년 선덕여왕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약, 기도 등의 방법 뿐 아니라 밀교의 방법까지도 동원됐다. 반면 822년 상대등 충공의 질병을 치료했던 의관, 국의는 진맥, 병증 분석 등을 통해 병이 심장에 있다고 질병 위치를 특정한 뒤 그것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 용치탕을 처방했다. 주술을 사용하거나 불경을 읽거나 하는 것이 아닌 전문 의관이 의서에 수록된 지식 그대로 임상 의료를 실천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던 것이다. 요컨대 692년 ‘의학’ 설치 이후 ‘의학’에서 진행한 의학 교육의 성과는 점차 확산되고 있었으며 의관들에 의해 실제 임상에서도 활용되고 있었다.

4. 중국, 당의 관찬 약물 저작 『신수본초』의 도입과 약물 교역

그렇다면 임상 의학 이외 분야에서 의약학 지식은 어떻게 활용됐으며 그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앞서 언급한 효소왕 원년에 도입된 여러 가지 의학 서적 중 『본초경』은 약물 관련 정보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개별 약물의 효능 뿐 아니라 약물 채집, 가공, 법제, 전탕, 복용, 효과, 투약 사례 등 약물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다루고 있어 침구를 제외한 당대 치료 의학 지식 대부분을 포괄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동아시아 의학 전통 내에서 한 권의 의학 정전(正典)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의학 지식의 축적과 함께 배제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李建民, 2016: 41). 『본초경』의 경우 동한 시대에 정리된 본초 전문 저작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의 기재 내용을 핵심 지식으로 구축한 뒤 시대별로 선별된 지식들을 눈덩이 불어나는 방식으로 축적해가며 의학 정전(正典)의 자리를 구축해갔다(가와하라히데키, 2009: 38). 『신농본초경』 이래 타오홍징(陶弘景)에 의해 편찬된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注)』 7권, 당 고종(高宗)의 명령으로 편찬된 『신수본초(新修本草)』 20권, 송 태조(太祖)의 명령으로 편찬된 『개보신상정본초(開寶新詳定本草)』 20권, 그리고 송대의 탕선웨이(唐愼微)에 의해 편찬된 『경사증류비급본초(經史證類備急本草)』 등이 모두 『본초경』이라는 이름 하에 편찬 및 정리되어 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수록 본초 수의 증가다. 730종에 불과했던 『신농본초경집주』의 수록 본초 수는 『신수본초』 844종, 『개보신상정본초』 977종에 이어 『경사증류대관본초』에 이르러서는 1,748종으로 늘어났다(岡西爲人, 1983: 106). 특히 『신수본초』의 경우 타오홍징 개인에 의해 편찬된 『신농본초경집주』와 달리 쑤징(蘇敬), 창쑨우지(長孫無忌) 등 당 정부 소속 관료 주도로 편찬된 첫 번째 관찬 본초 저작이었을 뿐 아니라 당 건국 초기 활발했던 국제 교류의 성과를 담아내고 있는 중요 약물 저작이기도 했다(尙志均, 1981: 7-8). 따라서 『삼국사기』 효소왕 원년, 692년에 설치된 ‘의학’에서 어떤 『본초』 저작을 활용했는지 확정할 수만 있다면, 당시 어느 정도 규모의 약물 의학 지식이 유통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을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아울러 『신수본초』의 수용 여부 또는 활용 방식은 중국, 당의 약물 의학 지식이 한반도에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고 유통됐는지를 설명하는 중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효소왕 원년의 ‘의학’ 설치 기사 중에 기재된 『본초경』을 『본초경집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신수본초』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39) 『본초경집주』라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는 『신수본초』의 경우 659년에 편찬되기는 했지만 비부(祕府)에 보관된 채 유통되지 않다가 당, 현종(玄宗) 무렵 의학 교육 및 의료 제도 정비를 시도하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718년에 편찬된 돈황(敦煌) 문서 중에 『본초경집주』가 포함되어 있어 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신수본초』가 아닌 『본초경집주』가 동아시아 각지에서 여전히 유통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丸山裕美子, 2006: 26-31). 이와 달리 『신수본초』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682년에 편찬된 쑨쓰먀오의 『천금익방(千金翼方)』에서도 『신수본초』와 부합하는 내용이 다수 확인되고 있어 『신수본초』가 제한적으로나마 유통되고 있었으며(于赓哲, 2020: 24) 『당육전』(719)의 기재 내용을 통해 당의 태의서에서 그 이전부터 『신수본초』를 본초 교재로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程锦, 2008: 41; 于赓哲, 2020: 42). 또 731년 일본에서 『신수본초』 사본이 작성된 만큼 그보다 앞선 시기에 한반도에 유입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김두종, 1981: 67). 정황 증거만 있을 뿐 각각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증거는 확보되지 않아 효소왕 당시 어떤 종류의 『본초경』이 활용됐을지 특정할 수는 없다.

현재까지 참고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앞서 살펴본 안압지 출토 198번 목간과 752년 신라 사절 김태렴 일행의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 귀족들이 남긴 「매신라물해」 중의 약물 관련 기록이다. 안압지 출토 198번 목간은 8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중에 포함된 호동률은 호동루(胡桐淚)라고도 불리는 한반도에서 자생하지 않는 호양수(胡楊樹)의 수지다. 659년 『신수본초』를 편찬하며 새롭게 추가된 ‘신부(新附)’ 본초에 해당한다(이덕호, 2010: 25; 32). 따라서 해당 약재를 기재한 목간 처방전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앞선 시기에 해당 약물의 효능, 적용 병증 등의 약물 정보를 기재한 『신수본초』가 한반도에 이미 유통되고 있어야 했다. 한편 752년, 김태렴을 위시한 70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신라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다. 신라 사절단에게서 필요 물품을 매입하고자 했던 일본 귀족들은 구입을 희망하는 물품 종류, 수량, 가격 등을 기록한 매입 허가 신청 문서, 이른바 「매신라물해」를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윤선태, 1997: 42-8). 그중에는 상당수의 약재 명칭이 기재되어 있어 당시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어떤 약재들이 오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느 정도의 약물 지식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Incenses and Herbal Medicines in Purchase List for Silla goods 買新羅物解, classified by Newly Revised Materia Medica 新修本草

토오노하루유키(東野治之), 박남수, 최재석 등은 「매신라물해」에 대한 앞선 연구를 통해 총 120여 종의 물품 중 45종을 향약(香藥)과 약물로 분류했다.40) 그러나 719년 『당육전』을 통해 『신수본초』가 의학 교육을 위한 약물 저작으로 지정되어 있던 만큼 『신수본초』를 근거로 위 약물을 다시 한번 분류할 필요가 있다(표 2). 『신수본초』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질병 치료에 활용되는 본초, 곧 약물로 분류하고, 『신수본초』에 수록되지 않은 것은 의식이나 제례 등에 활용하는 향약으로 분류할 경우 약물과 향약은 각각 34종과 11종이 된다(박남수, 2016: 181-3). 그 중 정향(丁香), 안식향(安息香), 용뇌향(龍腦香), 울금향(鬱金香), 아리륵(阿莉勒) 등은 『신수본초』 중에 신규 추가 약물로 별도 기재되어 있어 『신수본초』 편성 이후 해당 약물에 대한 지식이 새롭게 공유됐을 것으로 판단된다.41) 일각에선 『신수본초』에 대해 약물 활용을 규제하는 지침으로 활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于赓哲, 2020: 25) 652년 편성된 『당률소의(唐律疏議)』에서는 의사가 옛 방제(古藥方)와 본초(本草)에 의거하지 않은 채 치료하다가 환자가 사망에 이를 경우 2년 동안의 강제 노역에 시킨다는 문장이 명문화 되어 있어 김태렴 활동 당시 의학 교육용 교재로 사용되던 『신수본초』의 권위는 높아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약물 교역을 위해 『신수본초』 지식의 습득은 필수 사항이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의약 현실 뿐 아니라 교역 와중에도 어느 정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42)

『신수본초』에 따르면 정향(丁香)은 월남 북부와 중국 남부인 광주(廣州)에서, 침향(沈香)은 중국 해남(海南)과 광주(廣州)에서, 훈륙향(薰陸香)은 인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 나는 약물이었으며, 아리륵 즉 가리륵(訶梨勒)은 월남 북부, 중국 광저우, 페르시아 지역에서, 감초는 중국 섬서(陝西)에서 산출되는 약물이었다. 그리고 인삼은 한반도에서 산출되고 있었다.43)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ãdhibah, 820-912)가 저술한 『제도로(諸道路) 및 제왕국지(諸王國志)』에 따르면 “중국 동해에 있는 신라로부터 가져오는 물품은 비단, 검, 키민카우(kiminkhāu), 사향(麝香), 침향(沈香), 마안(馬鞍), 초피(貂皮), 도기(陶器), 범포(帆布), 육계(肉桂), 쿠란잔(khulanjān)이다”(무함마드깐수, 1992: 228). 당시 신라 상인들이 중국 뿐 아니라 아랍의 무슬림 상인들과도 교역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기록이다. 김태렴 역시 중국 뿐 아니라 아랍 등의 상인과 직접 또는 중개 무역을 통해 다양한 지역에서 산출되는 약물들을 입수했으며 그것을 일본에 제공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산출됐을 약물까지 포괄한다면 중국 뿐 아니라 인도, 동남아시아, 신라 등에서 산출되던 약물 모두가 신라 상인들의 교역 대상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요컨대 효소왕 원년에 설치된 ‘의학’에서는 의학 교육을 위해 중국 정부에서 확정한 의서들을 활용했다. 그중 포함된 약물 서적 『본초경』은 『본초경집주』인지 『신수본초』인지를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간과 「매신라물해」 중에 수록된 약물 관련 정보를 미뤄볼 때 8세기 중엽 신라에 당 고종 대에 편찬된 관찬 약물 전문 저작인 『신수본초』가 유통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신라 역시 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한 약물 네트워크에 편입되어 있었으며 신라와 일본의 지배층은 『신수본초』를 토대로 고급 외산 약재까지 구득(求得)하여 자신들의 질병을 치료했던 것으로 여겨진다.44)

5. ‘의학’의 설치, 동아시아 그리고 한반도 의학

선덕여왕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승려 밀본은 『약사경』을 읊고 육환장을 던졌다. 반면 고려 시대에 활동한 승려 원응(圓應, 1052-1144)은 『황제내경』에서 유래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의학 지식을 토대로 삼부맥(三部脈)을 짚었다. 그리고 맥박과 호흡의 상관 관계를 근거로 증세의 변화를 살폈다.45) 삼국 통일 이후 어느 시점부터 전문 의서를 읽고 그중에 실려 있는 의학 지식을 파악한 뒤 질병을 앓는 환자들을 구제하는 승려들이 등장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실제 신라를 대표하는 승려, 원효(元曉, 617-686)는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 의학과 『황제내경』 의학 사이의 이론적 괴리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오재근ㆍ전종욱ㆍ신동원, 2016: 346-54).

692년 신라 정부는 의학 교육 기관 ‘의학’을 설치했다. 설총(薛摠, 655-?)이 신문왕을 위해 「화왕계(花王戒)」를 이야기하며 언급했던 “좋은 약물로 기운을 보충하고 아픈 침[惡石]으로 독을 제거한다”는 논의가 이제 공식적인 의학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구현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46) 중국, 당의 태의서와 동일한 의학 서적을 활용한 교육이 제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717년, 의박사(醫博士) 관직이 설치됐으며 그 중 의학이 뛰어난 사람이 내공봉(內供奉)에 임명됐다. 동아시아 의학 전통에서 통용되던 의학 경전 지식과 함께 뛰어난 임상 의학 실력을 구비한 이들이 의학 관료로 활동하기에 이른 것이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간과 신라에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광리방』은 의학 경전의 내용을 토대로 병증의 병리 기전을 유추한 뒤 여러 가지 약물을 활용해 처방하던 임상 의학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822년 『삼국사기』에 기록된 상대등 충공의 질병을 마주한 국의가 실시한 맥진, 오장 중심의 병증 분석, 그리고 『본초경』에 수록된 약물을 활용한 방제의 구성 등은 중국, 당에서 활동했을 여느 의관의 임상 의료 행태와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다.47) 한편 「매신라물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김태렴을 위시한 신라의 상인들은 약물을 매개로 중국, 신라, 일본과 교역을 진행했으며 아랍 등지에서 건너온 상인들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접촉했다. 당대의 약물학 지식을 집성한 『신수본초』는 서로 간의 의학적 괴리를 좁힐 수 있는 중요한 도구였다. 요컨대 신라는 중국 의학을 학습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의학 교육 기관을 설치하고 중국 의학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의료 체계에 편입했다. 그리고 그 의료 지식을 토대로 일본, 아랍 등의 상인들과 교류하고 또 임상 의료를 펼쳐나갔다. ‘동아시아’에 동일한 의학이 공식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반도의 의학과 중국의 의학의 차이는 사라진 것일까? 의학 서적을 통한 의학 지식이나 이론은 공유되고 있었지만 임상 의료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만의 지역적 특수성은 언제든지 발현될 수 있었다. 고려 의서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을 편찬한 김영석(金永錫, 1079-1166)은 “송과 신라의 의서를 살펴본 뒤 뛰어나고 중요한 것을 골라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했다”48)는 글귀를 남겨 두기도 했다. 당대 고려에 중국 송의 의학과 구별되는 신라 의학의 지속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현재 한반도에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랜 의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중에는 신라 이후 한반도에서 유통되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험 처방과 의안들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Oh, etc., 2021: 63-74). 한반도와 중국 의가들이 치료하는 대상, 빈발하는 질병, 활용 가능한 의약 자원, 국가간 제도적 차이 등의 차이는 늘 존재하고 있었으며 실제적인 임상 의료 과정에 언제든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 요소들이었다. 특히 지역에 따른 자생 약물의 차이와 활용 약물의 유통 문제는 치료 도구인 약물 처방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의학’의 설치는 중국, 한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의학이 출발하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지만 이후 지역 의학의 특수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또는 한반도 의학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논의는 고려, 조선 그리고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Notes

1)

김두종의 『한국의학사』 시대 구분을 따라 원시 시대부터 통일신라 시대까지를 고대, 고려 시대를 중세, 조선 시대를 근세로 구분했다(김두종, 1981).

2)

『三國史記』 卷第三十九 「雜志」 第八. 이하 『삼국사기』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를 활용해 확인했다. https://db.history.go.kr/

3)

조선 시대의 경우 의관의 수를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관이 되면 국가 자격을 획득할 정도로 유능한 의술을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신동원, 2010: 93-5). 이와 같은 경향은 삼국, 통일신라 및 고려 시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4)

『備急千金要方』 卷第二十 「霍亂」 第六. 『비급천금요방』 원문은 孫思邈 著, 『備急千金要方』 (北京: 人民衛生出版社影印, 1994)을 활용해 확인했다. 이하 중국 인명 발음 표기는 1986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을 따랐다.

5)

『史記列傳』 105卷 「扁鵲倉公列傳」. 『사기열전』 원문은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홈페이지를 활용해 확인했다. https://ctext.org/shiji/lie-zhuan/zh/

6)

신라의 의학 교육 기관 ‘의학’에서 채택한 의서와 관련해서는 중국 당, 송 뿐 아니라 일본과의 비교 연구 역시 진행되어 있다. 이현숙은 당, 신라, 일본의 의학 교과 내용을 비교한 뒤 중국과 일본에 안마생, 주금생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근거로 신라에 안마박사, 주금박사의 제도가 채택되지 않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이현숙, 2009b: 161). 이번 연구는 중국과 신라, 신라와 고려 간 의학 내용 분석에 중점을 두고 있어 신라와 일본의 의학 교과 내용에 대한 비교 분석은 진행하지 않았다. 당, 신라, 일본의 의료 제도 및 의학 교육에 대한 비교 연구는 부족한 고대 의학의 사료적 한계를 뛰어넘는 돌파구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7)

최근 신라인에 의해 작성된 처방이 일본 의서 『대동유취방(大同類聚方)』 중에 수록되어 있다는 주장이 발표되기도 했지만 이번 연구에서는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다. 『대동유취방』의 위작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박준형ㆍ여인석, 2015: 226-37; 신동원, 2023: 54).

8)

안압지 발굴 목간 처방전에 대해서는 미카미요시타카(三上喜孝)와 이덕호 등의 선행 연구가 존재한다(三上喜孝, 2007: 315; 이현숙, 2009a: 109; 이덕호ㆍ이선아ㆍ김남일, 2009: 85-91; 이덕호, 2010: 36-8). 신라 목간의 출토 현황과 발굴 목간 내용 전반에 대해서는 이경섭의 연구 참조(이경섭, 2014: 3-129).

9)

일본을 방문한 김태렴 일행의 성격에 대해서는 윤선태, 박남수의 연구 참조(윤선태, 1997: 40-66; 박남수, 2016: 180). 「매신라물해」에 등장하는 약물의 종류와 산지에 대해서는 토오노 하루유키(東野治之), 최재석, 나가마사미카(永正美嘉) 등의 선행 연구가 있다(東野治之, 1974: 775-811; 최재석, 1996: 159; 永正美嘉, 2005: 7-83; 박남수, 2016: 211-13).

10)

『신수본초』 원문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이번 논문 작성에는 샹즈쥔(尙志钧)이 집복한 『신수본초』를 활용했다(苏敬 等撰, 尙志钧 辑校, 『唐ㆍ新修本草」 (合肥: 安徽科学技术出版社, 1981).

11)

삼국 및 고려 시대 의학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주요 사료인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는 정치적인 의미가 큰 사건을 주로 싣고 있는 탓인지 의학과 관련된 내용은 소략한 편이다. 아울러 김부식(金富軾)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경우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역사 인식을 지니고 있던 만큼 그와 부합되는 내용이 취사선택 됐을 가능성도 높다(강종훈, 2011: 25, 이강래, 2007: 106). 『고려사』의 경우 조선 초기 태조(太祖)에 의해 사료가 충분히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가 이미 지적된 바 있으며 태종, 세종 무렵 수차례 개수되기도 했다(김난옥, 2014: 11-28). 『삼국사기』 등이 지니고 있는 사료의 한계상 자칫 왜곡된 결론이 내려질 수 있기 때문에 관련 부분을 서술할 때는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자 했다.

12)

‘한화정책(漢化政策)’이라는 표현은 이기백이 제시한 이래 학계에서 통용되는 용어이지만 내용상 당식화(唐式化) 정책, 당제화(唐制化) 정책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어 있다(이영호, 2015: 108).

13)

『三國史記』 卷第三十八 「雜志」 第七 「職官」 上.

14)

『三國史記』 卷第三十九 「雜志」 第八.

15)

‘의학’이 설치되기 이전에도 백제의 의박사(醫博士)나 약부(藥部), 신라의 약전(藥典) 등 의학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던 관직이나 기관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떤 내용을 수행했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고 있지 않다(『三國史記』 卷第四十 「雜志」 第八 「職官」 中, 第九 「外官」).

16)

『舊唐書』 卷百九十九 「列傳」 第百四十九上 「新羅國」 “開元十六年 … 上謂璹曰, 新羅號爲君子之國, 頗知書記, 有類中華. 以卿學術, 善與講論, 故選使充此.” 『구당서』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를 활용해 확인했다. https://db.history.go.kr/

17)

중국과 한국 사이 교류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과 의학 분야의 교류에 대해서는 각각 장페이페이(張非非) 외와 마보잉(马伯英)의 연구 참조(張非非 외, 2005; 马伯英, 2010: 20-36).

18)

‘문화 내적 교류’라는 표현은 김영식의 『동아시아 과학의 차이』 중에 수록된 임종태의 엮은이 서문 중에서 가져왔다(서울: 사이언스북스, 2013).

19)

김영식은 한국 과학사 연구에 있어서의 중국의 문제를 ‘중심(center)’과 ‘주변(periphery)’이 아닌 ‘보편(universe)’과 ‘지역(local)’의 관점에서 다가가면 다른 관점에서의 서술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김영식, 2013: 220). 익명의 심사자께서 692년 ‘의학’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의학 교육 교재, 학생, 교수 등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만큼 그 이전부터 중국 의학의 영향권 안에 있었을 수 있다는 의견을 주셨다. 심사자의 의견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현재의 논문은 ‘의학’의 설치와 설치 시점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는데 집중하고 있어 부득이 692년 ‘의학’의 설치 시점을 강조했다.

20)

최근 송대에 반포된 『천성령(天聖令)』(1032)을 기반으로 당의 「의질령(醫疾令)」이 복원되어 『당육전』의 기재 내용을 보완해주고 있다(天一閣博物館, 2006: 315-26).

21)

의생과 침생의 구분은 필습 의서가 아닌 겸습 의서를 통해 드러난다(陳昊, 2019: 153).

22)

송대에도 주금생들에게 주금(咒禁)ㆍ해오(解忤)ㆍ지금(持禁)을 교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마생이나 주금생에게도 서적에 대한 학습이 요구됐을 것으로 여겨지나 실제적인 기술 습득이 보다 중요했던 탓인지 교육 교재가 특정되어 있지는 않다(김호, 2012: 111-15; 123).

23)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에는 주금사(呪禁師)가 존재했고 신라에는 공봉복사(供奉卜師)가 존재했다(『日本書紀』 卷第廿 「渟中倉太珠敷天皇 敏達天皇」, 『三國史記』 卷第三十九 「雜志」 第八 「職官」 中). 미키사카에는 주금사가 상약국(尙藥局)에 속해 있던 중국처럼 신라 역시 약전(藥典) 중에 공봉복사가 속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홍순원은 김두종과 마찬가지로 당나라의 경우 의사 양성 체계에 안마박사, 주금박사와 같은 직명과 전문 부문이 있었으나 신라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며 중국과의 차이를 강조했다(三木榮, 1963: 16; 홍순원, 1989: 69). 한편 이현숙은 본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삼국사기』 기록 자체가 불충분해 그것 만으로 신라에서 해당 제도가 있었는지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이현숙, 2009b: 161). 『일본서기』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를 활용해 확인했다. https://db.history.go.kr/

24)

『高麗史』 卷七十三 「志」 卷第二十七 「選擧」一 「科目」一. 이하 『고려사』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를 홈페이지를 활용해 확인했다. https://db.history.go.kr/

25)

『醫心方』 卷十六 「治熱腫方第六」 “耆婆方. 治人熱腫疼痛方. 升麻三兩 夜干二兩 大黃二兩 芒硝二兩 青木香一兩 支子一兩 甘草半兩炙. 七味, 銼, 以水六升煮取三升, 內芒硝攪令調. 分三服, 得下利, 即差.” 이하 『의심방』 원문은 丹波康賴 撰, 『醫心方』 (北京: 人民衛生出版社影印, 1955)을 활용해 확인했다.

26)

지자(支子)는 치자(梔子)의 이명이다.

27)

『醫心方』 卷十六 「治熱腫方第六」.

28)

『醫心方』 卷卄八 「用藥石第卄六」.

29)

『證類本草』 卷十六 「牛乳」 “廣利方. 消渴, 心脾中熱, 下焦虛冷, 小便多, 漸羸瘦. 生牛羊乳, 渴即飲之三四合.” 『증류본초』 원문은 唐愼微 撰, 『重修政和經史證類備用本草』 (北京: 人民衛生出版社影印, 1982)을 활용해 확인했다.

30)

쑨쓰먀오가 이룩한 장부 중심의 의학적 성취에 대해서는 왕원쥐안(汪文娟)의 연구 참조(汪文娟, 1991: 31-3).

31)

『三國遺事』 卷第五 「神呪」 第六 「密本摧邪」.

32)

미키사카에는 국의(國醫)을 관직명이라기보다는 나라의 명의(名醫)라는 의미라고 서술했으나 근거는 없다(三木榮, 1963: 16). 위의 인용 문장 후반에 녹진의 건의를 수용한 충공이 “의관(醫官)을 사절하여 돌려보냈다”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어 ‘국의’는 ‘의관’으로 보아야 한다.

33)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三月, 王疾, 醫禱無效, 於皇龍寺設百高座, 集僧

34)

『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 「祿眞」. “十四年, 國王無嗣子, 以母弟秀宗爲儲貳, 入月池宫. 時忠恭角干爲上大等, 坐政事堂, 注擬内外官. 退公感疾, 召國醫診脉, 曰, “病在心臟, 須服龍齒湯.” 遂告暇三七日, 杜門不見賔客.

35)

『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 「祿眞」.

36)

『黃帝內經素問』 「靈蘭秘典論」. 『黃帝內經素問』. 원문은 郭靄春 主編, 『黃帝內經素問校注』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92)를 활용해 확인했다.

37)

방제를 구성하는 군신좌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리페이(李飞)의 설명 참조(李飞, 2002: 62-6).

38)

용치는 『신농본초경』 원본 뿐 아니라 『본초경집주』, 『신수본초』 중에도 실려 있어 어떤 저작이 활용됐는지를 가늠하는 단서가 될 수는 없다(尙志均, 2008: 81; 苏敬 等, 1981: 361).

39)

김두종은 『신수본초』를 채택했을 것이라고 기술했고, 미키사카에는 『본초경집주』와 『신수본초』를 병용했을 것이라고 기술했다(김두종, 1981: 67; 三木榮, 1963: 14).

40)

「매신라물해」 기재 물품의 품목 분류는 토오노하루유키(東野治之), 박남수, 최재석 등이 실시한 바 있다. 표 2는 최재석과 박남수의 연구를 근거로 재분류했다(東野治之, 1974: 775-811; 최재석, 1996: 159; 박남수, 2016: 211-3).

41)

정향(丁香)은 『신수본초』 목록 중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침향(沈香)에 대한 설명 중 ‘근안(謹案)’ 아래에 추가 기재되고 있어 『신수본초』를 편찬 과정에 새롭게 수록된 것으로 보인다. 신규 추가된 정향, 안식향, 용뇌향, 울금향, 아리륵, 소방의 『신수본초』 기재 내용은 각각 『新修本草』 木部上品 12卷 「沈香」, 草部中品之下 9卷 「鬱金」, 木部中品 13卷 「安息香」, 「龍腦香」 木部下品 14卷 「訶梨勒」 「蘇方木」 참조.

42)

마루야마유미코(丸山裕美子)는 일본의 경우 『신수본초』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지만 787년 제도 변경을 통해 정규 본초 텍스트로 인정했다고 주장했다(丸山裕美子, 2006: 35).

43)

훈륙향, 감초, 인삼의 『신수본초』 중 기재 내용은 각각 『新修本草』 木部上品 12卷 「沈香」, 草部上品之上 6卷 「甘草」, 「人參」 참조.

44)

신라 승려 경흥(憬興), 승장(勝莊)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금광명최승왕경현추(金光明最勝王經玄樞)』 중에도 가리륵, 안식향, 용뇌 등 『신수본초』에 신규 수록된 약물 명칭이 등장하고 있지만 약물에 대한 설명이 『신수본초』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불교를 매개로 한 또 다른 약물 지식이 한반도에 유통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관련 내용은 오재근ㆍ전종욱ㆍ신동원의 연구 참조(오재근ㆍ전종욱ㆍ신동원, 2016: 358-60).

45)

「淸道雲門寺圓應國師碑」, 朝鮮總督府 編, 『朝鮮金石總覽』 上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6), 351쪽.

46)

『三國史記』 卷第四十六 「列傳」 第六 「薛摠」 “良藥以補氣, 惡石以蠲毒.”

47)

당대의 의료 제도 및 임상 의학 제반에 대해서는 위겅저(于赓哲)와 판자웨의(范家伟)의 연구 참조(于赓哲, 2011; 范家伟, 2010).

48)

「豐德金永錫墓誌」, 朝鮮總督府 編, 『朝鮮金石總覽』 上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6), 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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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Appendix 1. Quotations as Prescriptions for Universal Benefit 廣利方 from Main Medical books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Table 1.

Medical Education Department and Training Subjects of Silla 新羅, Goryeo 高麗 and Tang 唐

출처 교육 기관 분류 과목 출처
신라 의학(醫學) - 『본초경(本草經)』 『갑을경(甲乙經)』 『소문경(素問 經)』 『침경(針經)』 『맥경(脉經)』 『명당경(明堂經)』 『난경(難經)』 『三國史記』 (692)
고려 의학(醫學) 의업식(醫業式) 『소문경(素問經)』 『갑을경(甲乙經)』 『본초경(本草 經)』 『명당경(明堂經)』 『맥경(脉經)』 『침경(針經)』 『난경(難經)』 『구경(灸經)』 『高麗史 (1136)
주금업식(呪噤業式) 『맥경(脉經)』 『류연자방(劉涓子方)』
소경(小經) : 『창저론(瘡疽論)』 『명당경(明堂經)』
대경(大經) : 『침경(針經)』 『본초경(本草經)』
태의서(太醫署) 의생(醫生) 필습 : 『본초(本草)』 『갑을(甲乙)』 『맥경(脉經)』 『唐六典』 (719)
겸습 : 『장중경(張仲景)』 『소품(小品)』*
침생(鍼生) 필습 : 『소문(素問)』 『황제침경(黃帝鍼經)』 『명당(明堂)』 『맥결(脈訣)』
겸습 : 『류주(流注)』 『언측(偃側)』 『적오신침(赤烏神鍼)』
안마생 (按摩生) - 『唐六典』 (719)
주금생 (呪噤生) -

* 『당육전(唐六典)』 중에는 의생의 겸습 과목이 누락되어 있다. 『비급천금요방』 기록에 근거해 추가했다(김호, 2012: 124-6) 『당육전』은 李林甫 等編, 『唐六典』 (北京: 中華書局, 2014), 410쪽을 참조했다.

Table 2.

Incenses and Herbal Medicines in Purchase List for Silla goods 買新羅物解, classified by Newly Revised Materia Medica 新修本草

향약(香藥) 약물
薰陸香 衣香 薰衣香 薰香 槖衣香 雜香 和香 香油 白檀 鷄舌香 鬱金香 阿莉勒 甘松香 甘草 桂心 藿香 大黃 蠟蜜 芒硝蜜 蜜汁 麝香 白檀香 犀角 石腦 松子 安息香 羊膏 羊脂 零陵香 龍骨 龍腦香 牛黃 遠志 肉蓯蓉 人參 人心 蓽撥 紫根 丁香 鐵精 靑木香 靑胎 沈香 黃丹
번호 출처 권 / 편 문장
1 『외대비요』 卷第八 / 諸噎方 一十二首 廣利方. 療因食即噎塞, 如炙肉臠在咽中不下方. 吳射干六分 升麻四分 桔梗四分 木通十二分 赤茯苓八分 百合八分 紫菀頭二十一枚. 右七物切, 以水二大升, 煎取九合, 去滓, 分溫三服. 食後良久服. 忌豬肉酢物. 出第四卷中.
2 『의심방』 卷第三 / 治中風 口噤方第八 廣利方. 理中風口噤不開方. 獨活一大兩, 切, 以清酒二大升, 煮取一升半. 即大豆五大合, 熬取煎酒熱, 投豆中, 密蓋經一食久, 无過服二大合. 口噤即拗口灌之, 日三四度.
3 卷第五 / 治目息 肉方第十八 廣利方. 理目久風赤, 生息肉, 痛, 開不得方. 黃連八分, , 大棗肉四分, 竹葉兩握, , 蜜, 半合, 切, 以水二大升先煎竹葉, 取一 大升. 去竹葉, 下棗肉, 黃連, 蜜半合, 煎取四合, 去滓, 更瀘去泥重煎如稀錫夜, 即點眼中三五滴貶, 眼中令藥入.
4 『의심방』 卷第五 / 治目為物所中方第 二十七 廣利方. 療眼目築損努肉出方. 生杏仁七枚, 去皮尖, 細嚼吐於掌中, 及煖以綿纏筯頭, 點努肉上, 不過三四度, 即瘥.
『증류본초』 卷第二十三 / 杏核仁 廣利方. 治眼築損, 努肉出. 生杏仁七枚去皮, 細嚼吐於掌中, 及熱以綿裹筯頭將點努肉上, 不過四五度, 瘥.
5 『의심방』 卷第五 / 治鼻衄方第三十六 廣利方. 療鼻衄出血不止方. 濃研經墨點鼻中, 立效.
6 卷第五 / 治吐血方第四十七 廣利方. 療吐血不止方. 刺薊菜及根擣汁半升, 頓服之.
7 廣利方. 療吐血不止方. … 又方. 生葛根擣汁半大升, 頓服之. 僧深方云, 治吐血欲死.
8 卷第五 / 治喉痺方第七十 廣利方. 極要方. 療喉痹方. 馬藺子四十九枚, 搗作末, 和水服之, 立愈. 無子取根一大握, 搗絞取汁, 細細咽. 今按, 廣利方. 取根汁二大合, 和蜜一匙含之.
9 『의심방』 卷第八 / 腳氣入腹方第八 廣利方. 治卒脚氣衝心煩悶乱不識人方. 取大豆一大升, 拭去土, 以水三大升, 濃煮取汁, 頓服半升, 不定, 良久更服半升, 即定.
『증류본초』 卷第二十五 / 生大豆 廣利方. 治脚氣衝心, 煩悶亂不識人. 大豆一升,水三升, 濃煮取汁, 頓服半升, 如未定, 可更服半升, 即定.
10 『의심방』 卷第九 / 治癖食方第八 廣利方. 理癖氣腹痛兩肋脇脹滿食少方. 柴胡六分, 桔梗八分, 通草八分, 伏苓六分, 赤夕藥四卜, 栯李仁四卜, 鱉甲四分, 炙, 碎, 切, 以水二大升, 煎取九合, 食後分溫三服, 如人行七八里進一服, 忌生冷人莧.
11 卷第十 / 治癥瘕方第六 廣利方. 理癥瘕腹脹滿堅硬如石, 肚皮上青脈浮起方. 紫葛粉八分, 赤夕藥六分, 桔梗六分, 紫菀頭三十五枚, 青木香六分. 水路訶黎勒皮六分, 栯李仁十二分, 碎末, 蜀大黃十二枚, 土牽牛子四分, 擣篩, 蜜丸如梧子, 空腹服十五丸, 忌陳臭黏膩猪肉.
12 卷第十一 / 治霍乱轉筋方第十 廣利方. 治霍乱轉筋入腹方. 取鹽三合, 以水五升, 煮取三升, 以青布浸湯中, 用拭轉筋上.
13 卷第十一 / 治血利方第二十三 廣利方. 理血痢方. 酸石榴一顆, 和皮擣取汁, 蜜一大匙和, 煖頓服之.
14 卷第十一 / 治赤 白利方第二十四 廣利方. 治赤白痢白多冷痛方. 黃連八分, 厚朴五分, 炙, 當歸四分, 伏苓六分, 乾薑三分, 切, 以水一大升七合, 煎取七合, 去滓空 腹分兩服. 忌猪肉生冷.
15 廣利方. 治赤白痢白多冷痛方. … 又云, 赤白痢赤多熱方. 犀角六分, 屑, 黃芩六分, 地榆六分, 黃連八分, 甘草四分, 炙, 切, 以水二 大升, 煎取八合, 去滓, 空腹分三服.
16 卷第十二 / 治諸淋方第四 廣利方. 理諸淋小便卒不通方. 麻根二七枚, 切, 右以水二大升, 煎取八九合, 去滓, 分溫三服.
17 『의심방』 卷第十二 / 治氣淋方第六 廣利方. 理氣淋臍下切痛方. 以塩和少醋填臍中, 塩上灸二七壯, 立差.
『증류본초』 卷四 / 食鹽 治氣淋臍下刃痛, 以鹽和醋調下.
18 『의심방』 卷第十二 / 治大 小便不通方第 十二 廣利方. 理氣擁關格不通, 小便淋結, 齊下妨悶氣兼痛方. 冬葵子二大合, 生茅根一握, 以水一大升半, 煎取六大合, 去滓, 分溫 二服.
19 廣利方. 理氣擁關格不通, 小便淋結, 齊下妨悶氣兼痛方. … 又云, 關隔不通, 胞脹妨悶, 大小便不通方. 冬葵子三大合, 綿裹, 碎, 滑石十二分, 碎, 芒硝十分, 湯成下, 切, 以水二大升, 煎取八大合, 去 滓, 空腹分溫再服, 服別如人行四五里. 忌肉麵.
20 卷第十三 / 治骨 蒸病方第十四 廣利方. 理骨節熱積漸黃瘦方. 鱉甲六分. 炙, 知母四支, 大黃六分, 蔥白五莖, 豉十二分, 桑根白皮八分, 甘草四分, 炙. 切,以童 子小便一大升三合煎取八合, 去滓, 食後良久分溫三服, 服相去如人行七八里. 頻服五劑, 忌熱肉麵人莧.
21 『의심방』 卷第十三 / 治骨 蒸病方第十四 廣利方. 理骨節熱積漸黃瘦方. … 又方. 大黃四分, 切, 以童子小 便五合煎取四合, 去滓, 空腹分溫兩服, 服相去如人行四五里. 頻服五劑, 忌熱肉麵.
『증류본초』 卷十 / 大黃 治骨節熱, 積漸黃瘦. 大黃四分, 以童子小便五大合, 煎取四合, 去滓, 空腹分爲兩服, 如人行四五里再服.
22 『의심방』 卷第十三 / 治肺痿方第十五 廣利方. 療肺痿唾膿血腥臭, 連連嗽不止, 漸將羸瘦, 形容枯梖方. 紫菀頭二十一枚, 髻子充, 桔梗十二分, 微炙, 天門冬八分, 伏苓 十二分, 生百合三丈, 洗, 生地汁二大合, 湯成下, 知母六分. 切, 以水二大升煮取九合, 食後良久分溫三服, 服如人行五六里, 進一服, 要利, 加芒硝八分, 湯成下, 忌一切熱肉麵油膩菓子鯉魚.
23 『의심방』 卷第十四 / 治中惡方第二 廣利方. 療中惡客忤垂死方. 麝香錢重, 研, 和醋二合服之, 即差.
『증류본초』 卷十六 / 麝香 廣利方. 治中惡客忤垂死. 麝香一錢, 重研, 和醋二合服之, 即瘥.
24 『의심방』 卷第十五 / 治傷寒後目病方第 五十一 葛氏方. 治毒病後毒攻目方. 煮蜂巢以洗之, 日六七. 今按, 廣利方云, 蜂窠半大兩, 水二大升云. 又僧深方. 治翳.
『증류본초』 卷二十一 / 露蜂房 廣利方. 治頭痛, … 又方. 治熱病後, 毒氣衝目痛. 蜂房半兩, 水二升, 煮取一升, 重濾洗目, 日三四度. 治赤白瞖.
25 『의심방』 卷第十六 / 治瘰癧方第十三 廣利方. 療瘰成癭作孔方. 露蜂房二枚, 炙末, 和臘月猪脂, 塗孔上.
26 『의심방』 卷第十六 / 治癭 方第十四 廣利方. 療癭結氣方. 昆布二大兩, 暖水洗, 去鹹味, 寸切, 小麥三大合, 以 水二大升, 煮取小麥熟, 擇取昆布空腹含三五斤, 津液細細嚥之, 日再含. 忌生冷油膩.
27 卷第十七 / 治癬 瘡方第二 廣利方. 療諸癬瘡, 或濕痛, 癢不可忍方. 以醋磨石留黃, 塗上.
28 廣利方. 療諸癬瘡, 或濕痛, 癢不可忍方. … 又方. 苦楝皮, 燒作灰, 和猪脂塗上.
29 『의심방』 卷第十八 / 治金瘡血出不止方第九 廣利方. 金瘡血不止方. 騏麟竭末傅之.
『증류본초』 紫𨥥 / 卷十三 治金瘡血不止兼痛, 麟竭末敷之, 立止.
30 『의심방』 卷第十八 / 治金瘡血出不止方第九 廣利方. 治金瘡血不止兼痛, … 又方. 斫桑樹, 取白汁塗之.
31 『의심방』 卷第十八 / 治被打傷方第二十 劉涓子方. 治被打腹中瘀血白馬蹄散方. 白馬蹄燒令煙盡, 搗篩, 溫酒服方寸匕, 日二夜一. 今按, 廣利方云, 血化為水即下.
『증류본초』 卷十七 / 白馬莖 劉涓子治被打, 腹中瘀血. 白馬蹄燒煙盡, 取灰末, 酒服方寸匕, 日三夜一. 亦治婦人血病, 塞上. 廣利方同.
32 『의심방』 卷第十八 / 治衆蛇螫人方第 三十五 廣利方. 蛇咬瘡方. 雄黃四分, 乾薑六分, 麝香一分, 研. 擣, 篩, 以驗醋和塗瘡上.
33 『의심방』 卷第十八 / 治衆蛇螫人方第 三十五 廣利方. 蛇咬瘡方. … 又方. 暖酒淋洗, 日三良.
『증류본초』 卷二十五 / 酒 廣利方. 治蛇咬瘡. 煖酒淋洗瘡上, 日三易.
34 『의심방』 卷第十八 / 治蠍螫人方第四十四 廣利方. 貓兒糞塗螫處, 日三.
35 『의심방』 卷第十八 / 治蠍螫人方第四十四 廣利方. 貓兒糞塗螫處, … 又方. 破蜘蛛汁塗, 立止, 時始定.
『증류본초』 卷二十二 / 蜘蛛 廣利方. 治蠍螫人, 研蜘蛛汁傅之, 瘥.
36 『의심방』 卷第二十 / 治服石淋小便難方第 三十二 廣利方云, 石氣頭痛, 煩熱, 口乾, 小便赤少方. 露蜂房十二分, 炙. 右, 以水二大升, 煎取八大合, 分溫二服. 當利小便, 諸惡石毒隨 小便出.
『증류본초』 卷二十一 / 露蜂房 廣利方. 治頭痛, 煩熱口乾, 小便赤少. 蜂房十二分炙, 水二升, 煎取八合, 分爲二服. 當利小便, 諸惡石毒隨小便出.
37 『의심방』 卷二十一 / 治婦人崩中漏下方第 二十三 廣利方. 治崩中漏下血方. 淩霄花末, 溫酒服方寸匕, 日三, 即止.
38 卷二十二 / 治妊婦漏胞方第十二 醫門方云, 夫漏胞者, 妊娠下血如故, 血下不絕, 胞乾便死, 宜急治方. 生地黃汁一升, 酒五合, 和煮一沸, 分二服. 廣利方同之.
39 卷二十三 / 治產後無乳汁方第 三十六 醫門方. 療乳無汁方. 母猪蹄二枚, 切, 通草六兩, 綿裹, 和煎作羹食之. 今按, 廣利方云, 母猪蹄一具, 通草十二分, 切, 以水大四升, 煎二大升, 去滓, 食後服一盞, 幷取此汁, 作 羹粥煎得.
40 卷二十五 / 治小 兒頭面身體瘡方 第二十七 廣利方. 療小兒面上忽生瘡黃水土方. 黃連末三分, 胡粉三分, 甘草一分, 炙, 三味, 以猪脂和, 以帛貼瘡上, 日一.
41 廣利方. 療小兒面上忽生瘡黃水土方. … 又方. 鯽魚一頭, 燒作灰, 和醬汁塗上.
42 『의심방』 卷二十五 / 治小兒癎病方第 八十九 廣利方. 核子驚癇不知人, 迷悶, 嚼舌作目方. 牛黃一大豆許, 和 蜜, 水服之, 立効.
『증류본초』 卷十六 / 牛黃 廣利方. 治孩子驚癎不知, 迷悶, 嚼舌仰目. 牛黃一大豆研, 和蜜水服之.
43 『의심방』 卷二十五 / 治小兒癎病方第 八十九 廣利方. 核子驚癇不知人, 迷悶, 嚼舌作目方. … 又方. 犀角矢尖 硏, 幷水二大合, 服之, 立効.
『증류본초』 卷十七 / 犀角 廣利方. 治孩子驚癎不知人, 迷悶, 嚼舌仰目者. 犀角末半錢匕, 水二大合, 服之, 立效.
44 『의심방』 卷二十八 / 治食噎不下方第 二十七 廣利方. 理卒食噎不下方, 蜜一匙含細細燕則下.
45 『증류본초』 卷二十 / 石蜜 食醫心鏡. 主噫不下食. 取崖蜜含, 微微咽下. 廣利方同.
46 卷三 / 滑石 廣利方. 治氣壅, 關格不通, 小便淋結, 臍下妨悶兼痛. 以滑石八分研如麵, 以水五大合, 和攪頓服.
47 卷五 / 伏龍肝 廣利方. 治吐血, 鼻衄不止. 伏龍肝半升, 以新汲水一大升淘取汁, 和蜜頓服.
48 卷六 / 甘草 廣利方. 治肺痿久咳嗽, 涕唾多, 骨節煩悶, 寒熱. 甘草十二分炙, 搗爲末, 每日取小便三合, 甘草末一錢匕, 攪令散服. 御藥院治 二三日咽痛. 可與甘草湯去滓, 日三服.
49 卷六 / 菴䕡子 廣利方. 治諸瘀血不散變成癰, 搗生菴䕡蒿, 取汁一升服之.
50 卷六 / 黃連 廣利方. 治骨節熱積漸黃瘦. 黃連四分, 碎切, 以童子小便五大合. 浸經宿, 微煎三四沸, 去滓, 食上分兩服, 如人行四五里再服.
51 卷七 / 王不留行 圖經曰 … 正元廣利方. 療諸風痙, 有王不留行湯最效.
52 卷八 / 乾薑 廣利方. 治諸蛇毒螫人欲死兼辟蛇. 乾薑雄黃等分. 同研, 用小絹袋盛系臂上, 男左女右, 蛇聞藥氣逆避人. 螫毒敷之.
又方. 治鼻衄出血. 乾薑削令頭尖, 微煨, 塞鼻中.
53 卷八 / 乾薑 圖經曰 … 正元廣利方. 金創中風痙欲死者, 取生根四大兩切, 以水三升煮取一升, 去滓分溫四服. 口噤者灌下即瘥.
54 廣利方. 治心熱吐血不止, 生葛根汁半大升, 頓服, 立瘥.
55 卷八 / 栝樓根 廣利方. 治小兒忽發黃, 面目皮肉并黃, 生栝蔞根搗取汁二合, 蜜一大匙, 二味暖相和, 分再服.
56 卷八 / 通草 圖經曰 … 正元廣利方. 療瘰瀝, 及李絳兵部療胷伏氣攻胃咽不散方中, 並用之.
57 卷八 / 芍藥 圖經曰 … 正元廣利方. 治婦女赤白下, 年月深久不差者, 取白芍藥三大兩, 并乾薑半大兩, 細銼, 熬令黃, 搗下篩, 空肚和飲汁服 二錢匕, 日再, 佳.
58 廣利方. 治金瘡血不止, 痛. 白芍藥一兩, 熬令黃, 杵令細爲散. 酒或米飲下二錢并得, 初三服, 漸加.
59 卷八 / 玄參 廣利方. 治瘰癧, 經年久不差. 生玄參搗碎傅上, 日二易之.
60 卷八 / 秦艽 圖經曰 … 正元廣利方. 療黃, 心煩熱, 口乾, 皮肉皆黃. 以秦艽 十二分, 牛乳一大升, 同煮, 取七合去滓, 分溫再服, 差. 此方出 於許仁則.
61 圖經曰 … 正元廣利方. … 又治黃方. 用秦艽一大兩細銼, 作兩貼子, 以上好酒一升, 每貼半升, 酒絞, 取汁, 去滓, 空腹分兩服. 或利便止, 就中好酒人易治.
62 卷八 / 萆薢 圖經曰 … 正元廣利方. 療丈夫腰腳痺緩急, 行履不穩者. 以萆薢二十四分, 合杜仲八分, 搗篩. 每旦溫酒和服三錢匕, 增至五匕. 禁食牛肉. 又有萆薢丸大方. 功用亦同.
63 卷九 / 紅藍花 圖經曰 … 正元廣利方. 治女子中風, 血熱煩渴者, 以紅藍子五大合, 微熬搗碎, 旦日取半大匙, 以水一升, 煎取七合, 去滓, 細細嚥 之.
64 卷九 / 牡丹 圖經曰 … 正元廣利方. 療因傷損血瘀不散者, 取牡丹皮八分, 合蝱蟲二十一枚, 熬過同搗篩, 每旦溫酒和散方寸匕服, 血當化爲 水下.
65 卷十 / 靑葙子 廣利方. 治鼻衄出血不止. 以青葙子汁三合, 灌鼻中.
66 卷十一 / 故麻鞋底 廣利方. 治鼻衄血. 鞋𩍥作灰吹鼻孔中, 立效.
67 卷十一 / 木賊 廣利方. 治瀉血不止. 木賊十二分, 切, 以水一升八合, 煎取八合, 去滓. 空心溫分二服, 如人行五里再服.
68 卷十二 / 槐實 廣利方. 治妊娠難產令易方. 水呑槐子七枚, 即出.
69 卷十二 / 楮實 廣利方. 治蠍螫人痛不止方. 穀樹白汁, 涂之, 立差.
70 卷十三 / 桑根白皮 廣利方. … 治瀉血不止. 桑耳一大兩, 熬令黑, 以水一大升三合, 煎取六大合, 去滓. 空心分溫三服.
71 廣利方. … 又方. 治蛇咬瘡, 桑樹白皮汁傅之, 差.
72 廣利方. … 又方. 治金瘡. 取新桑白皮燒灰和馬糞塗瘡上, 數易之.
73 卷十三 / 竹葉䈽 廣利方. 治金瘡, 中風口噤欲死. 竹瀝半大升, 微微煖服之.
74 卷十三 / 檳榔 廣利方. 治腳氣衝心, 致悶乱不識人. 白檳榔十二分, 爲末. 分三服, 空心暖小便五大合調服, 日再服.
75 卷十三 / 枳實 廣利方. 治小兒久痢淋瀝, 水穀不調. 枳實六分擣末, 以飲汁調二錢匕, 二歲服一錢.
76 卷十六 / 龍骨 廣利方. 治鼻中衄血及咯吐血不止. 五色龍骨作末, 吹一江豆許於鼻中, 立止.
77 廣利方. … 又方. 治心熱風癇. 爛龍角濃研汁, 食上服二合, 日再服.
78 卷十六 / 麝香 廣利方. … 又方. 治小兒客忤, 項強欲死. 麝香少許, 細研, 乳汁調, 涂口中.
79 廣利方. … 治蠶咬人. 麝香細研, 蜜調涂之, 瘥.
80 廣利方. … 治小兒驚啼, 發歇不定. 用眞好麝香研細. 每服清水調下一字, 日三服. 量兒大小服.
81 卷十六 / 牛乳 廣利方. 消渴, 心脾中熱, 下焦虛冷, 小便多, 漸羸瘦. 生牛羊乳渴即飲之三四合.
82 卷十六 / 酪 廣利方. 療蚰蜒入耳. 以牛酪灌耳中, 須臾蟲出. 入腹即飲酪二升, 自消爲黃水.
83 卷十八 / 驢屎 廣利方. 治心熱風癎. 黑驢乳食上暖服三大合, 日再服.
84 卷十九 / 雀卵 廣利方. 姙娠食雀肉飮酒, 令子心淫亂.
85 卷十九 / 雀卵 廣利方. … 又云, 姙娠食雀肉, 及豆醬, 令子面多䵟.
86 卷二十二 / 斑猫 廣利方. 治瘰癧經久不差. 斑猫一枚, 去翅足, 微炙, 以漿水一盞, 空腹呑之, 用蜜水下, 重者不過七枚瘥.
87 廣利方. … 又方. 妊娠或已不活, 欲下胎. 燒斑猫末, 服一枚, 即下.
88 卷二十三 / 安石榴 廣利方. 治吐血衄血, 以百葉石榴花作末, 吹在鼻中差.
89 卷第二十五 / 生大豆 廣利方. … 又方. 治蛇咬方. 取黑豆葉, 剉杵傅之, 日三易, 良.
90 卷二十五 / 赤小豆 廣利方. 治小兒火丹熱如火, 繞腰即損人, 救急. 杵赤小豆末, 和雞子白傅之, 乾即易.
91 卷二十九 / 馬齒莧 廣利方. 治小兒火丹熱如火, 繞腰即損. 杵馬齒菜傅之, 日二.
92 『본초강목』 第二十七 / 翹搖 熱瘧不止, 翹搖杵汁服之. 廣利方.
93 第五十 / 羊 婦人陰脫, 煎羊脂頻塗之. 廣利方.

* 원문 확인을 위해 사용한 『외대비요』는 王燾 撰, 『外臺秘要』 (北京: 人民衛生出版社影印, 1955), 『증류본초』는 唐愼微 撰, 『重修政和經史證類備用本草』 (北京: 人民衛生出版社影印, 1982), 『본초강목』은 劉衡如ㆍ劉山永ㆍ钱超尘ㆍ郑金生 编, 『本草纲目硏究』 (北京: 华夏出版社, 2009), 『의심방』은 丹波康賴 撰, 『醫心方』 (北京: 人民衛生出版社影印, 1955)이다. 약물 목록은 『외대비요』, 『의심방』, 『증류본초』, 『본초강목』 등 수록 의서의 발간 시대 순으로 정리했다. 유사 문장이 서로 다른 의서에 수록되어 있는 경우 해당 문장을 모두 싣고 점선으로 구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