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에 관한 생각의 뭉치의 파노라마 슈타판 뮐러빌레, 한스외르크 라인베르거 저, 현재환 역, 『유전의 문화사』 (부산 :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A Panorama of Constellation of Thoughts on Heredity Book Review on Hans-Jörg Rheinberger and Staffan Müller-Wille, Korean trans. Jaehwan Hyun, A Cultural History of Heredity (Pusan: Pusan National University Press,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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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2023;32(1):423-433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3 April 30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3.32.423
Assistant Professor, Division of the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Poha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POSTECH)
이종식,
포항공과대학교 인문사회학부 조교수. 과학사 전공
*포항공과대학교 인문사회학부 조교수. 과학사 전공 / 이메일: jongsikyi@postech.ac.kr

Abstract

This book review examines A Cultural History of Heredity as a historical account of the development of a body of thought that the authors refer to as “biological hereditarian thinking” in Europe and North America during the long 19th and 20th centuries. Rather than a standard history of modern genetics, the book, as the title properly suggests, introduces and connects various ideas about heredity. The aim of this review is to simplify the complex historical time frame and highlight some of the main themes and lines of thinking to make this masterpiece more accessible to life and medical scientists. In other words, this review seeks to provide an epistemological typology of heredity.

슈타판 뮐러빌레와 한스외르크 라인베르거의 『유전의 문화사』는 일반적인 유전학사 개설서가 아니다. 유전학이라는 대상의 외연을 명확히 정의한 후 그 대상의 시간적 변화를 말끔하게 정리하여 소개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성격을 굳이 따지자면, 두 저자가 “생물학적 유전주의 사고(biological hereditarian thinking)”라고 지칭하는 생각의 뭉치가 유럽과 북아메리카라는 공간적 무대와 장기 19세기와 20세기라는 시축 위에서 복잡다단하게 전개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담아낸 책이다. 다시 말해, 한 과학 분과로서 유전학(genetics)의 성립과 발전을 초과하는 더 거시적인 생각들의 향연, 곧 유전(heredity)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수백 년간 축적되어 온 숱한 대답들의 파노라마를 한 권에 담아낸 책이라고 평자는 이야기하고 싶다. ‘유전학의 과학사’가 아닌 ‘유전의 문화사’가 그 제목인 것도 이러한 책의 지평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책은 대체로 연대기 순으로 유전에 관한 다양한 결의 생각들을 소개하고 연결시키고 비튼다. 본 서평의 목적은 이 대작의 접근성을 조금이라도 제고할 수 있도록 역사적 시간축으로부터 비롯되는 복잡성을 잠시 차치하고 몇 가지 대표적인 생각의 유형들을 펼쳐내 정리하는 데 있다. 전문 과학사가나 의학사가뿐만 아니라 생명과학과 의과학 일선의 연구자들이 『유전의 문화사』(이하 책)로부터 영감을 찾아 나가는 데 이 서평이 미력하나마 하나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1)

‘발생’과 ‘전달’의 문제

이 책에 담겨 있는 통찰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유전의 문화사 속에서 언제나 ‘유전물질의 전달(hereditary transmission)’과 ‘개체 발생(ontogeny)’의 문제가 명확히 구별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발생’이 ‘전달’에 선행하는 논리였으며, 만약 ‘전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발생’의 일부였다. 예컨대 17세기 사람들은 한 생명체가 부모 개체로부터 비롯되어 탄생하고 발생하는 과정을 그 자체로 “일회적이고 국지적인 사건”으로 간주했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52). 즉, 번식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부모 개체의 일시적 신체 상태와 계절과 환경 등 여러 변수들이 임의로 조합됨으로써 자녀 개체의 발생이 조건지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생 관념을 따를 경우, 같은 부모 개체라도 그때그때의 조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소질의 자녀들을 낳을 수 있다고 상정된다. 여기에는 부모 개체와 자녀 개체를 포괄하는 더 거시적인 유전 구조 같은 사유가 요청되지 않는다.

한편, 각각의 부모-자녀 관계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초월하는 보다 일반적인 ‘닮음’의 구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개체 발생의 ‘정상성’이 아니라 유전성 질환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비정상성’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파생되었다. 개별 생식과 발생의 고유성을 고수하는 한, 왜 특정한 가계에서 동일한 질병이 대를 이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점을 지적하며 저자들은 유전성 질병 현상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던 일부 의사들을 제외한다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자연스럽게 유전이라는 사유를 떠올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통의 예상과 달리 유전에 관한 의학적 개념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들은 정상 부모와 자손 간의 유사성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이나 우연성과 복잡성을 포기하고 규칙성에 대한 과학적 정신을 고수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유전에 대한 고찰들과 연구들은 오히려 아종 수준에서 생명을 구조화하는 변동하는 패턴들과 과정들, 즉 개별적 특성들, 질병들, 기형물들의 외양, 분포, 전달과 같은 것들에 대한 관찰들에 의해 추동되었다. 바꿔 말해, 유전은 종의 항상성보다는 변이와 더욱 관계를 가져야만 했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110, 강조는 평자).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문제

한편, 일단 개별 발생을 초월하는 일반적인 유전 관계가 상상할 수 있는(conceivable) 문제가 되자, 구체적으로 ‘어떻게’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대를 이어 전달되는 어떠한 유전물질이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이 힘을 얻게 되었다.2) 이러한 유전물질에 대해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제뮬(gemmules)’, 휘호 더프리스(Hugo de Vries, 1848-1935)는 ‘판겐(pangens)’, 아우구스트 바이스만(August Weismann, 1834-1914)은 ‘비오포어(biophors)’, 빌헬름 요한센(Wilhelm Johannsen, 1857-1927)은 ‘유전자(genes)’라는 이름을 부여했고 그 특성에 관해 상이한 추론들을 덧붙였다. 그러나 적어도 1951년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 1920-1958)이 DNA의 X선 분광사진을 찍고, 그것을 바탕으로 1953년 제임스 왓슨(James Watson, 1928-)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1916-2004)이 DNA 이중다선 구조를 ‘발견’하기 전까지, 유전물질이 ‘가시적’으로 재현되어 그 존재가 완전하게 확증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랜 세월 유전에 관한 지식은 “단순히 상식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 외양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었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82).

유전이라는 사유의 이러한 비가시적이고 따라서 반직관적인(counterintuitive) 측면에 대한 하나의 대응 방식으로서 제기되었던 것이 ‘발현’이라는 생각이다. 특정한 가계에서 반복적으로 유전성 질환을 가진 개인이 확인되는 반면, 가계의 모든 구성원이 예외 없이 해당 질병을 앓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한 개체가 조상으로부터 전달받은 모든 유전물질이 활성화되어 가시적인 모습으로 발현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 발현되는 유전물질과 비가시적으로 보존되는 유전 물질이 다르게 작동할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논리적으로 뒤따를 수 있다. 이러한 ‘발현’의 사유는 “유전 인자의 전달과 유기체의 발달에서 그것의 역할 간의 분명한 구별”을 가능케 하는, 다시 말해 ‘전달/유전’과 ‘발생’의 명확한 분리를 가능케 하는 논리적 징검다리였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143). ‘발현’의 사유의 계보에는 ‘현시적(patent) 인자’와 ‘잠재적(latent) 인자’를 구별한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 1822-1911), ‘영양질(trophoplasm)’과 ‘유전질(idioplasm)’의 쌍을 제시한 카를 네겔리(Carl Nageli, 1817-1891), ‘표현형’과 ‘유전형’을 구분한 요한센 등을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유전의 비가시성에 대한 또 하나의 반응은 일차적으로 가시적인 형질에 집중하여 그것을 정밀하게 측정하고 통계적 패턴을 파악하겠다는 사유였다. 책 제5장에 상술되어 있는 “유전에 관한 ‘생물측정학파(biometrical school)’”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대표했다. 예를 들어, 골턴은 수대에 걸친 완두콩의 가시적 형질 변화의 통계 분포를 분석하여 후손 종자들이 평균으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유전의 사유와 통계적 사유를 결합하고자 했던 칼 피어슨(Karl Pearson, 1857-1936)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전을 확률적으로 주어진 세대의 구성원들에 영향을 끼치는 인과적 조상 영향의 총합으로 간주”하기까지 했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194).

그러나 대부분의 유전 연구자들―생물측정학파까지도 포함하여―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통합하기를 추구했다. 저자들은 이러한 목표에 주목하여 유전에 대한 연구가 “현상학적 과학”이었다고 개념화한다. “실제로 탐구될 수 있는 표현형으로부터 변형이 가해질 수는 있지만 눈에 보이게 만들 수는 없는 유전형에 대한 추론들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 진의(眞義)는 표현형 너머를 향해 있었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256). 이어지는 절에서 유전에 대한 이러한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문제가 후대에 발전한 분자유전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다시 한번 논의할 것이다.

‘경성 유전’과 ‘연성 유전’의 문제

한편, 유전물질의 존재와 그것의 초세대적(transgenerational) 전달을 상정하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물질이 개체 발생과 종의 진화에 있어 얼마나 결정적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 이 맥락에서 떠오르는 것이 이른바 ‘경성 유전(hard inheritance)’ 대 ‘연성 유전(soft inheritance)’의 사고방식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경성 유전이란 유전 과정과 그 결과인 개체 발생 및 종의 진화가 사전결정적(pre-determined)이고 고정적이며 비가역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인 반면, 연성 유전은 유전, 발생, 진화를 가변적이며 경우에 따라 인간에 의해 개입되고 조작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경향을 통칭한다. 예를 들어, 세계와 생물종에 대한 신의 ‘불변의 설계’를 주장한 자연신학자들(natural theologians)―넓은 의미에서 칼 린네(Carl Linnaeus, 1707-1778)나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 1822-1884)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은 어떠한 의미에서 경성 유전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유전과 발생과 진화를 ‘무제한적인 가소성(plasticity)’에 입각하여 이해하려는 흐름도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다윈에게 심대한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진화론자 프로스페르 루카스(Prosper Lucas, 1808-1885)는 이러한 두 방향성을 모두 자신의 이론에 반영하여 “종적 유형의 불변성의 원인이 되는 ‘유전 법칙’”과 “규칙적인 유전 과정을 방해하는 종류의 유전을 일으키는 ‘본유 법칙’”을 구별하기도 했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136).3)

그러나 경성 대 연성 유전의 문제에 관하여 주목해 보아야 할 인식론적 흐름은 결국 양극단의 절충을 추구하는 가운데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유전-발생-진화 과정에 인간이 일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만약 그러한 변화가 바람직하다면 일시적으로라도 고정하고 안정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특정한 동식물 신품종을 만들어냄으로써 상업적 이윤을 도모했던 육종가들과 정원사들의 작업에 강하게 투영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은 ‘변화’와 ‘고정’이 절대적인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확산시켰다.4) 그리고 바로 이러한 변화와 고정의 인식론적 회색지대로부터 인간이 비인간 생물종의 생물학적 과정 전반에 개입하고 그것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점쳐지기 시작했다.

실험의 문제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과 다양한 동식물을 대상으로 전개되어 온 유전이라는 사유는 때때로 비가시적이고 반직관적이었으며 고도의 추론을 요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특성을 감안할 때, 현재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처럼 유전에 대한 탐구가 실험이라는 방법론과 반드시 밀착되어야 할 논리적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저자들 또한 유전에 대한 사유와 실험적 방법론의 결합을 일종의 우연적인(contingent) 사건으로 인식하며, 그 배경에는 “일반 생물학”의 성립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일반 생물학이란 “동일한 이론적 관점 하에서 모든 생명체를 다루는 활동”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214), 저자들에 따르면, 독립적으로 발전된 다양한 갈래의 지적·사회 문화적 흐름(예를 들어 생리학, 세포이론, 진화생물학의 발전 등)이 1900년경 일반 생물학의 성립으로 수렴되었다.

일반 생물학이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개별 생물종의 특수성을 가로지르는 생명 현상의 보편성이 전제되자, 비로소 ‘모델생물(model organism)’을 대상으로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유전의 일반 원리를 탐구할 수 있다는 구상이 성립될 수 있었다. 이렇게 실험과학으로서 유전 연구, 즉 윌리엄 베이트슨(William Bateson)이 1906년에 최초로 명명한 바를 따라 ‘유전학’ 혹은 후대의 표현으로는 ‘고전유전학(classical genetics)’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전유전학의 대표적인 모델생물로는 멘델의 완두콩,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 1866-1945)의 초파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5)

그런데 앞선 절에서 살펴봤던 문제들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자면, 기본적으로 모델생물들은 눈에 보이고 실험자가 조작을 가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저자들에 따르면, “고전유전학은 점차 고해상도(higher resolution)로 나아가는 경향”을 따라 발전을 거듭했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247).6) 여기서 고해상도로 나아간다는 표현은 유전 구조의 더 미세한 부분으로까지 실험적 개입을 관철시키며 가시성과 조작가능성을 강화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유전학의 발전은 20세기 중후반을 거쳐 우리가 ‘분자유전학(molecular genetics)’이라고 부르는 분야의 성장으로 귀결되었다.7) 이 인식론적·역사적 경로 위에 위치시킬 수 있는 연구자들과 그들의 모델생물로 여러 암 연구자들에 의해 활용된 생쥐와 기니피그, 바바라 맥클린톡(Barbara McClintock, 1902-1992)의 옥수수, 조지 비들(George Beadle, 1903-1989)의 붉은빵곰팡이(Neurospora crassa), 웬들 스탠리(Wendell Stanley, 1904-1971)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tobacco mosaic virus), 막스 델브뤽(Max Delbrück, 1906-1981)의 박테리오파지 등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더 작은 유기체들이 모델생물로 선정되었으며, 실험 설계의 주안점 또한 생물의 복잡한 ‘체내(in vivo)’ 시스템을 실험실이라는 생명체 ‘외부’에서 더 정교하게 ‘재현’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세포 내부에서 세포 바깥에서 만들어진 설계물을 구현”하려는 ‘개입’의 전망으로 이동했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307).

“세포의 구성 성분을 추출하고 시험관 환경에서 세포 작용을 재현하는 대신, 연구자들은 세포 바깥으로 구성 성분들을 추출하여 이들을 다시 세포 내부에서 ‘창조적’일뿐만 아니라 ‘합성적으로’ 통합시키고 발현시켰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313).

‘조작’의 문제

이상에서 간단하게 톺아본 유전에 관한 다양한 생각의 뭉치는 20세기 말까지 대체로 저자들이 말하는 ‘조작주의적 유전학’으로 환원되어 갔다. 19세기 동식물 육종가들은 “유전을 주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그들이 조작 및 통제할 수 있는 ‘힘’으로 보았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223). 20세기 전반 고전유전학자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연구는 결국 “‘유전 가능한’ 인자들의 발견, 탐구, 조작을 허용했기 때문에 중요했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211). 같은 시기 록펠러재단 또한 “인간 존재에 대한 생물학적 구성과 생물학적 기능에 대한 통제가 결국 효과적인 사회 통제 수단을 제공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유전학을 비롯한 생명과학을 지원했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275). 요컨대, 조작주의는 우생학(eugenics)이나 미추린-리센코주의(Michurinist-Lysenkoism) 같은 불편한 ‘흑역사’뿐만 아니라, 고전유전학, 분자유전학, 유전체학(genomics) 같은 유전학의 ‘정통’ 계보와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8)

그러나 저자들이 제8장에서 보여주듯, 지난 세기의 “심지어 가장 완전한 유전 분석도 생물학적 현상 전체의 일부 이상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350). 유전체학과 여타 생명과학 및 의과학 제분과의 온갖 조작주의적 공수표가 실제 결과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러한 관찰은 낯설지 않다. 아마도 생물학사 및 유전학사는 앞으로도 비가시성과 가시성, 재현의 불확실성과 개입과 조작의 확신, 결정론과 비결정론, 혹은 전체론적 관점과 환원주의적 관점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자들이 그린 ‘유전의 문화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생명과학과 의과학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연구자들을 비롯한 독자들이 이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통찰 가운데 하나는 이 진자운동 가운데 한 극을, 혹은 한 좌표를 함부로 절대화하지 않는 신중함, 그리고 필요하다면 과거에 제출되었던 유전에 관한 생각의 뭉치들을 재검토하며 현재 시점에서 당연한 것들을 기꺼이 낯설게 보는 유연함이지 않을까 싶다. 짧은 서평에 다 담아내지 못한 귀한 정보와 영감이 책에 가득하다. 일독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다.

Notes

1)

생물학사에서의 이 책의 위상과 의의에 대해서는 역자 후기와 다음 서평을 참고할 수 있다(정세권, 2022). 한편, 저자들의 표현을 빌려 책의 기획의도를 부연하자면, 유전이라는 ‘인식론적 공간’의 역사를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과학철학과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방법론에 입각하여 서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본 서평의 요지는 유전에 관한 ‘인식론적 유형화’라고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유전을 ‘물질’이 아닌 ‘힘’으로 보려는 사유도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160-164.

3)

‘발생’과 ‘전달’(혹은 ‘유전’)이 분화되기 이전 시기에 ‘경성’ 대 ‘연성’과 관련된 사유가 어떻게 논의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책 제2장의 ‘전성(preformation)’, ‘후성(epigenesis)’, ‘선재(preexistence)’에 대한 논의를 참고할 수 있다. 한편, 연성 유전적 사유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 중 하나인 라마르크주의에 대해서는 책의 3장과 4장을 참고.

4)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이 이른바 ‘본성(nature)’ 대 ‘양육(nurture)’의 이분법을 그 자체로 심도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저자들은 ‘본성’ 대 ‘양육’의 프레임이 과도한 양자택일의 사유를 전제로 하거나 유도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본성’ 대 ‘양육’에 대해서는 또한 다음 문헌을 참고할 수 있다. 켈러, 2013.

5)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멘델 자신은 본인의 연구 결과를 일반화하는 데 주저했다”는 점이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215). 멘델의 완두콩 실험 결과를 “유전에 관한 일반 법칙”으로 해석한 것은 멘델 본인이 아니라 칼 코렌스(Carl Correns, 1864-1933), 더프리스, 베이트슨 같은 후대의 과학자들이었다(뮐러빌레, 라인베르거, 2022: 229).

6)

과학사 및 STS에 있어 가시화(visualization)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들을 참고할 수 있다. Daston and Galison, 2007; Galison, 2014; Latour, 1986.

7)

전자현미경, 초원심분립법 등 실험 기구 및 기술이 ‘유전학의 분자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책의 제7장에 상술되어 있다.

8)

평자 또한 마오주의 중국과 사회주의 북베트남의 사례를 중심으로 리센코주의에 내재된 무제한적 조작주의 열망에 주목한 바 있다. 이를 주의주의적 생산주의(voluntarist productivism)이라고 개념화한 다음을 참고. Yi, 2021.

References

1. 뮐러빌레, 슈타판, 한스외르크 라인베르거 저, 현재환 역, 『유전의 문화사』 (부산: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2. 정세권, 「유전의 새로운 통사(通史)를 그리다」, 과학기술과 사회 네트워크 편집부 엮음, 『과학기술과 사회 3호: 추출주의』 (서울: 알렙, 2022).
3. 켈러, 이블린 폭스 저, 정세권 역,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 (서울: 이음, 2013).
4. Daston, Lorraine and Peter Galison, Objectivity (New York: Zone, 2007).
5. Galison, Peter, Visual STS: Visualization in the Age of Computerization (New York: Rutledge, 2014).
6. Latour, Bruno, “Visualisation and Cognition: Drawing Things Together,” H. Kuklick ed., Knowledge and Society Studies in the Sociology of Culture Past and Present 6-0 (1986), pp. 1-40.
7. Yi, Jongsik Christian, “Dialectical Materialism Serves Voluntarist Productivism: The Epistemic Foundation of Lysenkoism in Socialist China and North Vietnam,” Journal of the History of Biology, 54-3 (2021), pp. 51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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