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영국 의료계의 자살 논의: 자살의 비범죄화를 향하여

Medical Discourse on Suicide in Post-War Britain - To Decriminalize Suicide and Attempted Suicide -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4;33(3):733-767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4 December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4.33.733
*Assistant Professor, Yeungnam University, College of Humanities, Department of History / E-mail: hjeanhwang@naver.com
황혜진*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조교수. 영국사, 현대사, 의학사 전공 / 이메일: hjeanhwang@naver.com
†이 연구는 2021년 영남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에 의한 것임.
Received 2024 October 31; Revised 2024 November 11; Accepted 2024 December 24.

Abstract

This study aims to reconstruct the medical discourse on suicide in the late 1940s and 1950s and identify the strategies employed by medical professionals to decriminalize suicide. Despite the emergence of suicide as an important social issue in post-war Britain, the subject remained largely outside the purview of the public, policy makers and various specialist groups. However, the medical community approached the topic from a professional perspective, formed collective opinions as a specialist group, and sought to change the status quo and existing laws related to suicide. As a result, they became the only group actively engaged in the movement for suicide law reform. The strategies devised by medical professionals proved effective. They distanced themselves from moral and religious debates, framing suicide as a practical and value-neutral issue. They also adhered to a deterministic paradigm, defining suicide as the result of uncontrollable and, therefore, excusable circumstances. Factors such as mental illness, social isolation, and specific familial background were identified as major contributors to self-destruction. By focusing on cases of attempted suicide, rather than completed suicides, they shifted the debate in their favor. Finally, they argued that decriminalizing suicide would not weaken social control but instead provide a solid foundation for more efficient and powerful regulation. This discourse produced by medical professionals ultimately culminated in the passage of the Suicide Act 1961.

1. 들어가며

1961년 여름 영국 의회는 새로운 자살법(Suicide Act 1961)을 제정했다.1) 이 법률 1조는 “자살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 규정은 폐기된다”고 선언했다. 말을 바꾸면, 20세기 중엽까지 잉글랜드에서 자살은 형법에 명시된 범죄였으며 따라서 이 죄를 저지른 사람은 기소, 재판,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다소 당황스럽게 들리는 이 원칙은 전후 영국 사회가 기존의 도덕과 규범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재고의 대상이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폐기되었다. 그러나 자살을 규제하는 법률의 수정은 자주 그와 함께 언급되는 일련의 ‘허용적 입법(permissive legislation)’과 사뭇 다른 경로를 밟았다. 50년대와 60년대에 도박, 음주, 동성애, 성매매, 낙태 등에 대한 규제를 두고 전문가들은 치열한 설전을 벌였고, 이는 전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다(Newburn, 1992). 정치계 역시 소위 자유주의적 개혁을 두고 고민했으며, 일부 정치인들은 이 사안에 자신의 경력을 걸기도 했다(Moore, 2000: 177-184). 결과적으로 도덕과 법률은 점차로 분리되었고, 웨스트민트터에서는 새로운 법들이 만들어졌다. 이와 달리 자살이라는 주제는 대중은 물론이고 정책 결정자, 언론인, 전문가 집단의 관심 밖에 머물렀으며 자살법 개정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이루어졌다(Millard, 2015: 106-110; Neeleman, 1996: 253). 이처럼 인기가 없었던 자살이라는 주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발언하고, 자살법 개정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역설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자살법의 입법과 자살의 비범죄화를 관철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바로 의료계였다. 한 연구자의 표현을 빌리면, 20세기 의료계는 “전문가로서의 신념과 굳은 결의를 갖고 이 주제를 끝까지 밀어붙였으며” 일단의 의사들이 진행했던 의학적 논의야말로 “(자살)법 개혁으로 직결되는 최초의 명시적인 조치”가 되었다(Moore, 2000: 72-73).

20세기 중엽 영국 사회가 자살법에 무관심했던 것처럼, 이후에 등장하는 역사가들 역시 이 주제에 별다른 학문적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회사 연구에서 1961년 법은 기껏해야 ‘흥청거리는 60년대(Swinging Sixties)’에 이루어진 일련의 법 개정의 (중요하지 않은) 일부분으로 또는 허용적 사회로 가는 과정의 첫 단계에 속하는 여러 사건 중 하나로 간략히 언급될 뿐이었다.2) 따라서 자살법은 단독으로 연구되기보다는 동시대에 발생한 사건이나 비슷한 시기에 제정된 타법률과의 관련성 속에서 분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그 맥락 안에서 자살법 제정은 도덕성과 실정법의 분리, 도덕적 자유주의의 발현, 일탈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약화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되었다(Atkinson, 1975: 135-138; Hennessy, 2007: 505-506; Javis, 2005: 6; Millard, 2015: 104). 그러나 1958년과 1961년 사이 입법 과정을 본격적으로 다룬 거의 유일한 연구에서 쉴라 무어(Sheila Moore)는 법 개정의 배경으로서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구조 그리고 해당 주제에 헌신한 소수의 행위자들 덕분에 자살법이 제정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살법 입법으로 국가가 개인의 비정상적 행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파악했다(Moore, 2000). 크리스 밀라드(Chris Millard) 역시 자살법(과 유사한 시기에 통과된 법률들)은 정부가 개인의 불행에 적극적으로, 실질적으로, 그리고 권위적인 방식으로 간섭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고 분석했다(Millard, 2015: 103-106).

이처럼 자살법에 대한 역사가들의 (풍부하지 않은) 기존 논의는 주로 60년대 영국 사회의 허용성에 대한 가치 판단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법 자체의 경로, 내용, 결과 등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해당 입법이 사회적 무관심과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고 그 과정이 상당히 이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은 여기에 주목하지 않았고 따라서 합당한 설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앞서 언급한 무어의 연구가 자살법의 입법이 가능했던 이유를 비교적 상세하게 밝히고 있지만, 그의 분석은 자칫 소수의 유능한 (혹은 수완이 좋은) 정치가들에게 그 공을 돌리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물론 그도 의학계의 공론이 자살법 개정에 미친 영향이 결정적이었다고 인정은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당시 자살 문제에 열성을 보였던 몇몇 의사들의 발언과 활동을 언급할 뿐 의료계 전반의 의견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Moore, 2000).

이에 본 연구는 영국 의료계가 자살을 비범죄화하는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의료인들의 활동과 전략을 재구성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이들은 압력 단체를 조직하거나 집단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지극히 학술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하고 사회 전반과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했다. 이에 본고는 일차적으로 전후 의료계 내부에서 진행된 논의의 흐름을 파악하고 재구성한다. 이를 위해 『란셋(The Lancet)』, 『영국의학저널(British Medical Journal, 이하 BMJ)』, 『정신과학저널(Journal of Mental Science)』3) 등 주요 의학 학술지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 1945년과 1961년 사이에 해당 지면을 통해 발표된 자살 관련 연구논문, 강의록, 회의록, 서신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을 수합하고 분석한다. 그 결과 의료계가 일관되게 자살의 비범죄화를 요구했음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일종의 ‘전략’을 구사했으며, 그것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할 것이다. 즉, 이들은 자살의 비범죄화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접근법을 취했고, 결정론의 논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사했으며, 자살이라는 현상의 사회적 성격과 책임을 강조하고, 자살의 관리 및 통제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내놓은 주장과 근거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자살법 개정 과정을 이끌었던 정치인들에 의해 그대로 반복되었다. 이에 본 연구는 자살법 입법을 가능하게 만든 핵심적 논리의 출처가 의료계였음을 주장할 것이다.

2. 자살을 둘러싼 인식, 규범, 법률

자살을 법률상의 범죄로 규정하고 자살자와 자살 시도자를 처벌했던 관행의 기원과 근거는 대체로 불명확하게 남아있다. 초기 기독교는 자살을 살인의 일종으로 규정했고, 따라서 신의 계명을 위반하는 행위로 지목했다. 자살을 죄악시 하는 기독교의 입장은 중세를 지나면서 교회법(cannon law) 조항에 편입되었고, 자살로 사망한 자는 종교적 장례와 매장에서 확실히 제외되었다. 이 교회법을 근거로 10세기에 잉글랜드의 왕들은 자살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왕의 재산으로 귀속시킬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관행은 13세기에 이르러 보통법(common law) 체계 안에 확실하게 흡수되었는데, 이제 ‘자살(felo de se)’은 법률상의 중범죄로 규정되었다. 그에 따라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사후에 기소와 재판의 대상이 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으면 대부분 몰수형에 처해졌다. 확실히 자살은 종교적인 죄(sin)인 동시에 법률상의 죄(crime)가 되었다. 게다가 자살자의 시신은 잔인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졌고, 마을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은밀히 매장되었다(Chang, 2018: 160-163).

그러나 17세기에 들어 자살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점차 변화했다. 소위 자살의 세속화(secularization)가 시작된 것이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그에 바탕을 둔 제도와 관행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대두되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자살의 의료화(medicalization)가 진행되었다. 자살은 신의 저주나 악마의 사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광증의 결과 또는 광증의 표식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걸쳐 확대 되었다. 이미 1621년에 로버트 버튼(Robert Burton)은 “자기 살해는 우울증의 결과”라고 단언했다. 이제 자살은 정신질환과 단단하게 결속되었고, 이 현상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은 의사에게 있다고 여겨졌다(Solano et al., 2018: 77-80). 그 결과 17세기 이후로 자살자가 사후 재판에서 “이성을 상실한 광증”을 이유로 무죄 선고를 받는 일이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19세기 전환기에 이르면 그 비율은 97퍼센트에 도달했다(MacDonald and Murphy, 1990). 자살의 비범죄화 과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분명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자살의 의료화와 세속화가 착실히 진행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의사들이 수행한 역할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 초 잉글랜드에서의 자살이라는 주제를 탐침한 마이클 맥도날드(Michael MacDonald)는 자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정립하고 확산하는 데 의사들이 기여한 바가 거의 없었다고 단언한다. 의료인들이 아니라 철학자, 식자층, 언론인, 검시관 등 비전문가들이 17세기에 자살에 대한 태도 변화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도 의사들은 자살을 둘러싼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전문적 지식과 판단을 일반인들에게 강제할 권위와 권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있었다(MacDonald, 1989: 84-85). 보다 최근에 나온 연구 역시 이 시기 자살의 의료화는 전문가 집단의 노력이 아니라 비전문가 집단이 주도하는 여론에 의해서 이루어진 측면이 크다고 평가한다(Laragy, 2013).

19세기에 들어 자살자에 대한 사회적 태도와 제도적 처우는 점차로 나아졌다. 자살 사고 및 행동이 정신질환의 결과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그에 따라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치료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제도적인 변화도 함께 진행되었다. 일례로 1823년 매장법(Interments Act 1823)은 자살자의 시신을 잔인한 방식으로 취급하는 것을 금지하고 교회 묘지에 매장하는 것을 허용했다. 19세기 후반 개정된 몰수법(Forfeiture Act 1870)은 자살 사망자의 재산을 국가가 몰수하는 원칙을 폐지했는데, 이는 자살을 중범죄로 취급하는 법적 관행이 실질적으로 종결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처럼 빅토리아 시대를 지나면서 자살 관련 문제를 다루는 일련의 법률이 개정되고 결과적으로 자살자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었지만, 그 과정은 정치인과 법률가로 주로 구성된 자유주의 개혁가들의 손에 놓여있었다. 19세기 의사들은 자살이 “배타적으로 의료적인 문제(exclusively medical matter)”라고 주장하면서도, 그와 직결된 제도적 개혁의 과정에서는 “완전히 침묵”한 채로 남아있었다(MacDonald, 1989: 86; Moore, 2000: 51-52).

자살과 관련하여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가 경험한 변화 가운데 아마도 가장 이질적인 내용은 ‘자살 시도’를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하기 시작한 것이다. 1830년대 런던 경찰청이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한 이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체포된 자살 미수자들은 대부분 치안판사의 법정에서 약식 재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 극소수는 징역형이나 벌금형 판결을 받았다. 따라서 재판의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해당 죄목으로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이 1-2주 동안 유치장에 구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제 국가가 개인의 자살에 물리적인 방식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Anderson, 1987: 282-311). 물론 당대에 통용되었던 설명에 따르면, 자살 시도자의 구금은 범죄에 대한 처벌이라기보다는 개인과 공공의 안전을 위한 조치에 훨씬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 주장은 20세기 중엽에 중요한 논쟁을 불러올 것이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자살 시도를 범죄에 편입시킨 것이 법률 자체의 변화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뀐 것은 법 조항이 아니라 법을 적용하는 방식이었다(Moore, 2000: 44).

오랫동안 자살과 자살 시도를 따라다니던 범죄라는 오명이 탈각된 것은 20세기 중반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휩쓸고 지나간 영국 사회는 이전과 많이 달라졌고, 과거에 비정상, 일탈, 비행, 또는 부도덕이라고 규정되던 것들을 대하는 방식 역시 변화했다.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자살 및 자살 시도의 수적 증가였다. “가장 당황스러운 사회적 질병”은 전시에 일시적으로 감소했으나, 종전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BMJ, 1947: 1005; Swinscow, 1951). 한 통계에 따르면 1940년대 중반 이후 10년 동안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자살은 거의 50퍼센트나 증가했고, 1954년 기준 자살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The Lancet, 1957: 203).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고, 이 주제를 둘러싼 전문가들의 논의 역시 가열되었다. 에밀 뒤르켐(Emil Durkheim)이 1897년 발표한 『자살론 Le Suicide』의 영역본이 출간된 것도 바로 1951년의 일이었다.

의회에서 처음으로 자살법 개정에 대한 발언이 이루어진 것은 1958년 초였다.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 케네스 로빈슨(Kenneth Robinson)이 당시 내무부 장관이자 하원 원내 총무였던 랩 버틀러(Rab Butler)에게 기존의 자살법을 대체할 법률을 제정할 의사가 있는지 질문한 것이다. 이때 버틀러는 “법 개정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간결한 답변을 내놓았지만,4) 로빈슨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앞으로 약 2년 동안 새로운 자살법을 요구하며 버틀러와 내무부, 나아가 보수당 정부를 압박할 것이었다. 한편, 특정하기 어려운 어느 시점에 입장을 바꾼 버틀러는 그해 12월 내무부 산하 형법개정위원회(Criminal Law Revision Committee)에 이 문제를 검토할 것을 지시했고, 후년에는 정부 발의 법안 목록에 자살법안을 포함시켰다(Moore, 2000: 208-217; Millard, 2015: 109). 1961년 초 자살법안은 상원의 의결을 통과했고, 그해 여름 새로운 자살법이 공표되었다. 이로써 수 세기에 걸쳐 진행된 자살의 세속화, 의료화, 비범죄화 과정이 일단락되었다.

3. 전후 영국 의료계의 자살 논의

웨스트민스터에서 새로운 자살법의 필요성이 언급되고 입법을 위한 실질적인 절차가 시작된 것은 1950년대 말의 일이지만, 그 법안의 핵심적 내용이 전문가 집단 내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적어도 두 세기 이전의 일이었다. 특히 20세기 중엽에 들어 의학계는 자살이 형법상의 범죄로 다루어지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의학적 관점에서 현행법과 현 상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살을 범죄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법률 제정을 촉구하고, 이러한 비판과 제안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문적이고 실증적인 근거를 풍부하게 제시했다. 그리고 이들의 논리와 논거는 궁극적으로 자살법 개정 과정에 반영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전후 영국 의료계가 자살과 자살 시도라는 주제를 두고 벌인 논의를 재구성하고, 이들의 아젠다를 확인하며, 그 담론의 방향성을 파악하려 한다.

전후에 이 전문가 집단이 자살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는 영국의사협회와 치안판사협회가 구성한 합동위원회(the Joint Committee of the British Medical Association and Magistrates’ Association)의 1947년 보고서이다. 1946년 구성된 위원회는 당시 세태를 반영하여 그 세 번째 아젠다로 자살 문제를 선정하고, 이듬해에 「자살 시도와 법률(Attempted Suicide and the Law)」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위원회는 대단히 직설적인 어조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밝히고 있다. “자살 시도를 (자살 계약을 맺거나 또는 타인의 자살을 조장하는 것을 제외하고) 법률상의 범죄로 취급하지 않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BMJ, 1956: 62; Odlum, 1958: 579; BMJ, 1958: 579-580, 1225, 1234).5) 즉,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쳐 목숨을 보존한 이들이 오히려 이후에 형법에 따라 조사를 받고, 기소되고, 재판에 서고, 판결을 받고, 심하면 징역을 사는 상황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 보고서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살과 자살 시도를 범죄로 취급하는 것을 멈추고 이를 위해 법률을 개정하라는 것이었다.

「자살 시도와 법률」은 표면적으로는 의료 분야와 사법 분야의 권위자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1961년 자살법 입법 과정을 연구한 무어에 따르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는 두 전문가 집단은 자살과 법률 사이의 관계를 두고 심각한 의견 충돌을 겪었다. 결국 양자 사이의 의견 통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의사협회 측이 자신들의 입장을 위주로 기술한 보고서의 발표를 강행했다. 치안판사협회 측 구성원들은 자살을 형법으로 다스리는 현행법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고, 보고서의 발표를 앞두고는 이 문서가 “오직 의학적 관점에서 그 문제를 다룬”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Moore, 2000: 256-267). 1940년대 중엽 두 전문가 집단이 경험했던 마찰은 이후 십수 년 동안 이어질 소요를 예고하고 있었다.

전후 자살 관련 사회 활동에 열의을 보였던 정신의학자 어윈 스텐글(Erwin Stengel)은 1952년 왕립의학회(Royal Society of Medicine) 연례 모임에서 자살 시도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발표하고, 그 내용의 요약본을 출간했다.6) 1912년 이 학회에 정신의학 분과가 설치된 이래로 기조 발표에서 자살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자살 시도 연구(Enquiries into Attempted Suicide)」의 발제자는 먼저 자살에 대한 광범위한 통계 자료를 제시하고, 자살 시도로 관찰 병동에 입원한 환자 138명의 사례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자살 시도가 주변과 사회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에 대해 논의했다.7) 특히 이 연구의 중요성은 자살 시도의 사회적 성격과 자살 행위의 이면에 있는 사회적 요소를 날카롭게 포착했다는 데 있다. 스텐글은 자살 시도를 “야누스의 얼굴”에 비유하면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복합적이고 때로는 상충하는 의도‘들’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자살 행위는 죽음, 파괴, 이탈, 단절을 지향하는 동시에 삶, 갱생, 접촉, 연결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스텐글은 또한 자살 시도는 그 행위자에게 사회와 주변을 향한 도움의 ‘호소(appeal)’라는 성격과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는 ‘역경(ordeal)’이라는 성격을 갖는다고 파악했다. 자살 시도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는 이 발표는 이후 다양한 연구와 발표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될 것이었고, 장차의 자살 논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다.

한편, 이 무렵 의학계는 자살 시도의 신고 의무를 둘러싸고 짧지만 격렬한 논쟁을 겪었다. 1952년 초 한 검시관이 자살 미수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담당 의사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면서 이 갈등은 시작되었다. 자살 실패 후 병원을 찾은 미수자를 신고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의사들이 갖는 직업적 윤리와 시민으로서의 윤리가 상충할 때 후자가 우선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의사라고 해도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부과되는 법률적, 도덕적, 현실적 의무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Jacobs, 1952). 혹은 아주 단순하게 불법 행위를 신고하지 않는 것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BMJ, 1952: 921). 반면, 자살 시도 환자를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선 이들은 의사의 직업 윤리, 특히 비밀 유지의 의무를 강조했다. 중앙윤리위원회(Central Ethical Committee) 회장이 『영국의학저널』에 직접 서신을 보내 자살 미수 사례를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치료 행위의 일부가 아니며 따라서 의사의 의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사의 의무는 환자가 겪고 있는 의학적 문제를 치료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며 “의사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그리고 환자의 이해를 위해 의료적 조치를 취했다면 자신의 책임을 다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의사가 직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유지하는 것은 ‘기본적인’ 직업 윤리이자 의무라고 일갈했다(Thwaites, 1952). 중간적 입장에 있는 이들은 사건의 심각성에 따라 시민적 의무가 우선하는 경우가 있고 직업적 의무가 우선하는 경우가 있다고 구분을 지었다. 그러나 대게는 자살 행위는 질병의 증상이고 자살 사건은 살인 사건과 다르므로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신고가 의무 사항은 아니라는 조심스러운 의견이 그 뒤에 이어졌다. 결국 이 논쟁은 광범위한 합의를 도출하는데 실패한 채로 끝났지만, 적어도 의료계 내에서는 신고 의무를 부정하는 의견이 우세했다.8)

1950년대 중반 이후로 의학계를 대표하는 주요 단체들은 자살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사협회(British Medical Association)는 1956년 연례 총회를 통해 자살과 특히 자살 시도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이 회의의 도입부에 자살 시도를 의제로 다룰 것을 제안한 것은 본머스 대표 도리스 오들럼(Doris M. Odlum)이었다. 이 열정적인 정신의학자는 자살 미수로 구치소나 교도소에 수감된 많은 이들에 대한 우려를 먼저 표명하고, 1947년 영국의사협회와 치안판사협회가 공동으로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을 동료들에게 상기시켰다. 또한 자살 시도 사건의 사법적 처벌에 대한 최근의 통계 자료를 제시하고 자살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오들럼의 문제의식에 동조한 협회원들은 그 발의안을 통과시켰다(BMJ, 1956: 62). 이 회의를 통해 영국의사협회의 원칙은 분명해졌다. 이들은 1947년 공동 협의회 보고서의 결론을 지지하고, 자살과 자살 시도를 범죄로 취급하는 법률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서 의결된 내용은 이후 영국의사협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자리 잡았고, 관련된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표명되었다(BMJ, 1958: 579-580).

이듬해에 『란셋』에는 실제로 자살 시도 혐의로 수감된 죄수들의 사례를 분석한 논문이 게재되어 동료 의사들로부터 큰 관심과 반응을 얻었다. 당시 런던 북부 할로웨이 교도소에서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필리스 엡스(Phyllis Epps)는 최근 3년 동안 자살 시도 죄목으로 그곳에 구금된 여성 100인의 사례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했다. 그 중 법원에서 징역형 판결을 받고 수감된 죄수는 6명에 불과했다. 절반을 조금 밑도는 숫자의 사람들은 미결수로 구금된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었고, 절반을 조금 넘는 숫자는 유죄 판결을 받은 기결수로 교도소 내 의료진의 보고서를 받은 후 법원의 최종 판결을 받게 될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100명 중 53명은 보호관찰(probation) 처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자살 미수로 기소된 사례의 60퍼센트 정도가 유죄 판결을 받고, 50퍼센트 이상은 보호관찰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자살 시도 사건으로 구금된 100명 가운데 42명은 자살이 불법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심지어 10명은 과거에 자살 미수로 기소된 경험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엡스는 자살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 조항이나 자살 시도의 처벌 가능성이 그들의 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Epps, 1957). 당시 자살법을 옹호하는 이들은 자살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 조항이 실질적 처벌을 불러오는 경우가 지극히 제한적이라고 파악했고, 따라서 도덕적 필요성과 자살 예방 효과를 위해 ‘명목상의 법’ 조항을 남겨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엡스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데 성공했다.

이 논문의 후반부에 엡스는 자살 시도는 여느 비행(delingquency)과 달리 “치료를 필요로 하는 정신의학적 문제”라고 정의하고, “의학적 관점에서” 정신 질환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시했다. 또한 이미 정신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는 환자를 교도소나 구치소에 수감하는 것은 정신질환을 유발하거나 또는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보호관찰 담당자가 이러한 환자들을 돌보는 데 진정으로 적합한지 의문”이라며(Epps, 1957: 183), 자살 시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의 정신의학 분야와 사회보장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이라고 강조했다. 자살 시도로 기소된 이들의 절반 이상이 최종적으로 보호관찰 처분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지적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엡스의 연구는 그것이 담고 있는 실증적 데이터 덕분에 그와 입장을 같이 하는 이들에 의해 가장 자주 인용되는 글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왕립의학회 내 정신의학 분과는 1958년 1월에 열린 연례 모임에서 자살 행위와 법률의 상관관계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스텐글이 의장을 맡았고 오들럼, 엡스, 배첼러(I. R. C. Batchelor) 등이 발표자로 나섰다. 여기에서 나열된 이름만 보아도 이 회의의 방향성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오들럼은 자살에 대한 처벌주의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이유를 제시했다. 특히 자살 시도를 범죄로 다루는 관행은 현실적 이익이 없으며,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자주 들먹이는 자살을 억제하는 효과 역시 기대할 수 없다고 반복했다. 또한 자살은 법률로 다스릴 일이 아니라, 의료적·사회적 수단을 통해 관리할 사안이라는 입장을 확실히 밝혔다. 그 뒤를 이어 엡스가 1957년 『란셋』에 게재했던 자신의 연구 논문의 내용을 요약 발표했다. 여기에 덧붙여 자살 미수자를 기소하고 재판하는 것이 비효과적이고 비경제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은 검시관에 의해 정신이상 판정을 받는 반면 ‘실패’한 사람들은 형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 것은 비논리적이라며 법 적용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이어서 배첼러는 스코틀랜드 사회가 동일한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소개하여, 잉글랜드의 현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 모임의 결론은 명확했다. 자살은 의학적 문제이며 결코 범죄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사법적 개입을 규정하는 현행법을 개정할 것을 거듭 촉구했다.9)

1958년초 로빈슨이 의회에서 자살법 개정 문제를 언급한 직후, 이를 지지하는 의사들의 글이 그야말로 쏟아져나왔다. 대표적으로 오들럼은 바로 다음 달 『영국의학저널』에 「범죄로서의 자살(Suicide as a Crime)」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고, 자살과 자살 시도를 범죄로 규정하는 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여기에 힘을 더하기 위해 그는 1947년 합동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 「자살 시도와 법률」과 영국의사협회가 1956년 연례 회의에서 의결한 결의안을 재차 인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살 문제를 다룰 적임자는 경찰이나 판사가 아니라 바로 의사라는 점을 강조했다(BMJ, 1958: 579-580). 그 이후에도 『영국의학저널』에는 「잉글랜드의 자살법(English Law on Suicide)」, 「중범죄로서의 자살(Felonious Suicide)」, 「자살 시도: 법률의 개정이 필요하다(Attempted Suicide: Change in English Law Wanted)」 등 노골적인 제목의 글들이 등장했다(BMJ, 1958: 593, 1225-1226, 1233-1234). 그 중 「중범죄로서의 자살」은 자살을 형법상의 범죄로 다루는 것을 지지하는 이들의 근거를 정리하고 이어서 그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자살 성향은 정신질환의 증상이며 의료적 개입의 대상이므로, 현실적으로 “환자의 치료를 보장할 수 있는 의료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덧붙여 저자는 정신질환 및 정신장애 관련 법률에 관한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 on the Law Relating to Mental Illness and Mental Disorder)가 최근에 제출한 최종 보고서에서 일종의 희망을 발견했다. 해당 보고서의 권고사항이 법률에 반영된다면 정신질환자의 치료를 강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권한이, 사법부나 경찰이 아니라, ‘의료 제도’에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살 시도자 역시 사법적 판단을 거치지 않고 정신의학 전문가의 진단과 치료의 대상이 될 수 있을 터였다(BMJ, 1958: 1225-1226).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자살법 개정은 요원한 것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자살 문제와 자살법 개정이라는 주제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해왔던 정신의학자 스텐글은 이 무렵 「자살 시도와 법률(Attempted Suicide and the Law)」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자살과 자살 미수를 별개의 주제로 논의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저자는 글의 도입부에서 사회적인 측면에서나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자살과 자살 시도가 상이한 문제를 제기한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논의의 초점을 후자에 두고 현행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여기에서 스텐글이 자살법을 비판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이다. 자살 미수 사건에 대한 법 적용의 측면에서 원칙과 일관성이 없다는 점, 자살 시도에 대한 기소 및 처벌 가능성 때문에 자살 성향 환자가 치료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점, 그리고 자살법 옹호자들의 주장과 달리 자살 억제의 측면에서 현행법이 효과가 없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또한 정신질환 및 정신장애 관련 법률에 관한 왕립위원회 보고서에 기반을 두고 작성되어 이제는 입법이 예고된 상태에 있는 정신건강법안(Mental Health Bill)과 기존 자살법의 내용이 배치된다는 점을 지적했다(Stengel, 1959: 119). 해당 법안이 입법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법리적 문제를 미리 경고한 것이다. 이후에도 스텐글은 자살 시도를 독립된 연구 주제로 다루었고 여기에 집중하는 강의를 진행하고 논문을 발표했으며, 의료계는 이 권위자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했다(Stengel, 1960).

1960년대에 들어 자살법 입법 과정이 시작되자 이 주제에 대한 의학계의 의견 표명은 점차 잦아들었다. 그러나 기존 법률을 옹호하는 입장이 제기되거나 법률 개정의 과정이 늘어지는 조짐이 보이면, 이들은 발언을 재개했다. 일례로, 1960년 말 『란셋』에 현행법이 “잠정적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절차”를 갖추고 있으므로 새로운 자살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이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서신이 게재되었다. 그가 말하는 ‘구명’은 자살 미수자를 재판에 세워 보호관찰 명령을 내리고 정신과 치료를 강제함으로써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두 번째 자살 시도”를 저지하는 것이었다(Casson, 1960). 2주 후 발간된 『란셋』 다음 호에는 여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기존의 형법이 개인의 불운을 범죄시하고 불행을 처벌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비유가 등장했다(Ahrenfeldt, 1960). 일단 1961년 법이 통과되자, 의료계는 대체로 침묵을 유지했다(Neeleman, 1996: 252-257).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보건부(Ministry of Health)는 자살 시도자의 관리 및 치료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발표했다. 이제 자살 행위는 온전히 의학적 문제로 간주되며 ‘모든’ 자살 시도자는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원칙이 천명되었다(Millard, 2015: 110-111).

4. 자살의 비범죄화를 위한 의료계의 전략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20세기 중엽 의료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아예 관심을 두지 않거나 또는 불편하게 생각하는 주제인 자살에 대한 논의를 주도해나갔다. 이들은 전문가로서 자살과 관련된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고, 자기 파괴를 철저히 의료적인 문제로 다루고, 특히 자살과 자살 시도의 비범죄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은 1961년 입법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이처럼 전후 의료계의 입장이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문가 집단이 십수 년 동안 지속된 논쟁을 통해 구사했던 일종의 전략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덕분이었다. 물론 전후 의료인들이 처음부터 분명한 목표나 확실한 전략을 갖고 논의를 전개했던 것도 아니고, 특정 인물이나 단체가 집단적 담론의 형성을 주도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전문가들의 공론장 안에서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 방향을 잡아나갔다(Moore, 2000: 73). 이 장에서는 의료계가 자살을 비범죄화하는 과정에서 구사했던 일련의 전략을 면밀히 살펴보고, 그것이 거둔 성과를 파악하려 한다.

해당 시기 의학계의 논의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부분은 이 전문가 집단이 자살이라는 주제를 종교 및 윤리와 분리하여 다루었고 이와 관련된 관념적 문제에 대한 언급을 삼갔다는 것이다. 동일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던 19세기의 선배들과 달리 20세기 중엽의 의사들은 자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접어두고 현실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고 잠재적인 반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40년대와 50년대에 『영국의학저널』 등 주요 학술지에 실린 글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살에 대한 종교계의 입장이나 도덕적 판단, 철학적 논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958년 초 왕립의학회 정신의학 분과 정례 모임에서 두 번째 발표를 맡았던 엡스는 “(자살의) 이론적, 역사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접어두고 이 문제의 현실적인 측면에 집중하고자” 한다고 선언했다.10) 엡스가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이 태도는 자살을 정신질환과 결부시키고 범죄의 영역에서 제외하고자 했던 의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특성이었다.

이 전략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효과는 명확했다.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싸움을 피할 수 있었고, 반드시 필요한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전후 영국 사회가 전반적인 도덕과 종교의 약화, 국교회 권위의 하락, 사회적 통제의 완화, 실증주의의 부상을 경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것이었다. 여전히 보수적인 원칙들이 작동하고 있었고, 오래된 제도들은 유지되었으며, 고정관념과 집단 심성은 부분적인 변화를 경험했을지언정 지속되고 있었다(Hennessy, 2019). 이 모두와 전면전을 치루는 것은 전략적으로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특히 국교회는 여전히 영국식 제도와 전통의 일부로서 사회의 주요 의사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따라서 의료계가 자살에 비판적인 국교회의 논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심지어 공공연하게 반박한다면 강력한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11) 그러나 의료계는 이 문제를 회피함으로써 국교회를 비롯한 기성 권위를 적으로 돌리지 않을 수 있었고 이들과 마찰을 겪는다면 소모해야 할 에너지를 아낄 수 있었다.

한편 의료계의 이러한 전략은 보다 광범위한 개혁의 방향성 내지는 방법론과 공명하고 있었다. 이 시기 영국인들은 도덕적인 죄와 법률상의 죄를 구분해야 하며 전자를 사법적으로 판단하고 심지어 처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을 점차로 갖게 되었다. 이 새로운 사고 방식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1957년 발표된 소위 울펜던 보고서(Wolfenden Report)이다. 엄연히 법률에서 범죄로 규정된 동성애와 성매매가 증가하고 그와 같은 행위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기소, 재판, 행형 또한 늘어나자, 전후 영국 사회는 이 문제를 재고할 필요를 절감했다. 1954년 영국 정부는 이 사안을 본격적으로 다룰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위원회는 3년 간의 작업 끝에 “도덕적 이데올로기 분야를 결정하는 새로운 원칙”을 내놓았다(Hall, 1980: 1-43; Newburn, 1992: 49-70; Javis, 2005: 31-35). 그 원칙은 바로 도덕성과 합법성은 별개의 문제이며 도덕적 죄악과 법률상 범죄는 확실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따르면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비도덕적 행위는 법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Moore, 2000: 3-4). 울펜던 보고서가 도덕과 법률의 영역을 분리하고 이후 일련의 법 개정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듯이, 1950년대 의료계 역시 자살에 대한 윤리적 논의와 사법적 판단을 구분하고 후자의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자살의 비범죄화를 실현할 수 있었다.

자살을 범죄에서 제외시키기 위해서 의료계가 취했던 두 번째 전략은 결정론(deterministic model)을 일관되게 밀고 나갔던 것이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자살은 “통제할 수 없는, 따라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의 결과”이다. 즉, 자살은 개인의 잘못을 따질 수 없는 일이 되며 자살을 시도한 이를 처벌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처사가 된다. 자기 파괴를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간주하고 따라서 개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자유의지론(free will model)과는 대척점에서 있는 셈이다(Atkinson, 1975: 135-138). 1950년대에 의료인들은 개인이 자유 의지를 동원하여 자기 파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조건, 상황이 그를 자살로 몰아간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살을 결정하는 다양한 요소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했다.

의사들이 자살의 이면에 있는 요인으로 공통적으로 지목한 것은 바로 정신질환이다. 의료계는 자살이 “병적인 정신 상태의 결과물”이라는 결론에 의심을 갖지 않았다(Klein, 1953). 이를 진단하고 치료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의사에게, 특히 정신과 전문의에게 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Battle and Marshall, 1952; Batchelor, 1955: 595-597; BMJ, 1956: 813-815; Epps, 1957: 184; The Lancet, 1957: 203; BMJ, 1958: 1226, 1234; Capstick, 1960: 1182). 물론, 17세기 후반 이래로 자살의 의료화가 꾸준히 진행되었고 그 결과 자살과 질병 사이의 친연성이 이미 일종의 상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의료인들의 논리에 새로울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의사들은 이 논리의 연장선 위에서 자살 시도자들의 처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이들은 정신질환의 희생자가 되어 자살을 기도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부적절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이 ‘환자’들이 속할 곳은 현행법이 지정하는 것과 같이 교도소가 아니라,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제공할 수 있는 병원이라고 지목했다. 또한 자살 미수자를 구치소나 교도소에 보낸다면, 그 환경은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키거나 다른 질병의 병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12)

자살이 정신질환의 결과 또는 정신질환 표식이라고 할 때, 의사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지목하는 질병은 우울증이었다(BMJ, 1954: 232; Batchelor and Napier, 1954: 261-262; The Lancet, 1955: 141; Strauss, 1956; Parnell and Skottowe, 1957; The Lancet, 1957: 203; Capstick, 1960). 의학계에서 나온 자살 관련 연구들은 자살 사망자와 자살 시도자 가운데 상당수는 과거에 우울증 진단을 받은 적이 있거나 혹은 사후적으로라도 우울증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에 있었음을 밝혀냈다. 물론 자살자 또는 시도자 중 우울증 환자의 비율은 연구에 따라 다르게 파악되었다. 대다수가 우울증 환자 비율이 적어도 절반이 넘는다고 보았고(Harrington and Cross, 1959), 어떤 연구자는 그 수치가 80퍼센트에 이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Batchelor and Napier, 1953). 이 연구들은 공통적으로 질병의 유형이나 기원과 상관 없이 ‘모든’ 우울증은 자살 위험성을 동반하며, 따라서 병의 경중이나 원인을 떠나 ‘모든’ 우울증 환자는 자살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1950년대를 지나면서 자살 성향과 알코올 중독 사이의 높은 연관성을 지적하는 일이 늘어났다. 대표적으로 배첼러의 1954년 연구는 자살 시도 사례의 3분의 1 정도는 알코올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했다. 여기에는 취중에 자살을 시도한 환자나 알코올 중독 병력이 있는 환자가 포함되었다. 그는 자살 미수로 종합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례 연구를 통해 자살 성향과 알코올 과용 사이에 심리적으로 유사한, 또는 거의 동일한, 기전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알코올 의존증은 부분적으로 자살 행위이며, 자살의 방법을 예비하거나 또는 자살의 대체제를 제공한다”는 과격한 표현을 사용했다(Batchelor, 1954b). 1957년 여름 『란셋』에 발표된 한 연구도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 그 저자에 따르면, 알코올 중독 환자의 사례는 “만성적 자살 행위(chronic suicide)”와 “자살 회피 행위(avoidance of suicide)” 중 하나에 해당한다. 중독자는 알코올을 남용함으로써 자신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아니면 알코올을 통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부정적 측면을 가림으로써 죽음을 유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이 전략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고 저자는 덧붙였다(Glatt, 1957).

의료인들은 또한 신체적, 정신적 질병만큼이나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상황이 자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여러 연구에서 실업이나 부채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이 자살을 부추기는 상황적 요소로서 언급되었다(BMJ, 1947: 1005). 계급적 추락이나 사회 부적응도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겨졌다. 낮은 계급적 출신이나 불우한 환경이 자살 성향과 유관하다는 분석도 자주 등장했다(Batchelor, 1954a: 1342; Epps, 1957: 182-183). 그러나 1950년대에 이루어진 연구에서 자살을 촉발하는 위험 요소로 가장 빈번하게 지목되었던 것은 바로 사회적 고립이었다(The Lancet, 1952: 1059-1060; BMJ, 1955: 50; Walton, 1958: 885-888). 특히 노년층의 자살 문제에 집중한 논문들은 사회적 관계의 상실과 역할의 상실, 이러한 상황이 유발하는 부정적 감정 때문에 노인들의 자살률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게다가 이 연령층에 속하는 이들은 자살 기도 시 훨씬 치명적인 방식으로 선택하며, 미수에 그쳤을 경우 재시도 확률도 높아지는 것으로 드러났다(Batchelor and Nappier, 1954: 265-266; BMJ, 1956: 814-815).

1950년대에 들어 자살의 이면에 위치한 사회적 요인을 강조하는 연구들이 주목하는 또 다른 주제는 가정 환경이었다. 19세기 이래로 정신의학은 정신증과 신경증의 가장 중요한 병인으로 유전을 꼽았던 만큼, 의료 기록이나 연구 논문에서 정신질환자의 가족력을 언급하는 것은 대단히 일반적인 일이었다. 전후에 발표된 자살 관련 연구 역시 자살 사망자나 시도자 가운데 60퍼센트 이상이 정신질환 가족력을 갖고 있다고 밝혔고, 약 15퍼센트는 가까운 가족 구성원이 자살을 기도한 전례를 갖는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50년대에 나온 연구들은 여기에 덧붙여 가정 ‘환경’도 정신질환과 자기 파괴 성향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눈에 띄는 표현이 ‘결손 가정(broken homes)’이다. 예를 들어, 배첼러는 자살 미수 환자의 적게는 절반이 많게는 4분의 3이 ‘무너진 가족’이라는 배경으로 공유한다고 밝혔다(Batchelor and Nappier, 1953; Batchelor, 1954a: 1347; Batchelor, 1955: 296). 우울증 환자의 자살 행동에 대한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다른 어떤 사회적 요소보다 생애 초기에 부모가 부재했던 환경이 자살 성향과 높은 상관관계를 나타냈다(Walton, 1958: 885-886). 이처럼 질병, 환경 등 당사자가 통제할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자살 사고 및 행동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 의학 논문을 통해 끊임없이 지적되었다.

이처럼 자기 파괴적 성향, 사고, 표현, 행동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는 의학계의 연구 경향은 한편으로 당시 영국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20세기 자해의 역사를 연구한 밀라드는 20세기 중엽 이후 이 의학적, 심리적 현상에 대한 해석이 이처럼 달라진 것은 당시 영국의 정치적 맥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목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고, 이전에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던 것들이 이제는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정신건강법(Mental Health Act 1959)과 자살법의 제정으로 이어질 것이었고, 두 법률은 정부가 과거와 달리 개인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줄 터였다. 이처럼 정치적 목표와 행정적 관행, 의학적 인식은 서로 공명하고 있었다(Millard, 2015: 97-119).

세 번째로 의료계는 ‘성공한’ 자살 보다 ‘실패한’ 자살에 더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자살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했다. 대표적으로 스텐글은 1950년대 내내 자살 시도에 초점을 맞춘 강의와 발표를 진행했으며 연구 논문도 여러 편 발표했다. 1959년에는 그 연구 성과를 종합하며 자살 시도에 대한 분석이 “특별한 사회적 의미를 지니며 현실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Stengel, 1959: 114-115). 이듬해에는 자살 시도를 자살과 독립된 주제로 연구할 필요성에 대해 보다 논리적이고 학술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다. 『정신과학저널』에 실린 논문에서 그는 “자살 시도는 자신을 파괴하려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수행되는 치명적이지 않은 자해 행위”라고 정교하게 정의했다. 기존에는 자살 시도를 단순히 “실패한 자살 또는 무산된 자살”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 둘을 구분하여 다루지 않았고, 자살 시도를 자살과 같은 방식으로 또는 자살에 준하여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동기, 방법, 통계 등 여러 측면에서 자살 시도는 고유의 논리를 가지며 따라서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스텐글의 입장이었다(Stengel, 1960).

이처럼 1950년대에 의료인들이 자살 시도에 주목했던 현실적인 이유는 충분했다. 일단, 자살 사망자에 대한 법적 처벌은 19세기 이후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원칙과 규정을 논하는 것은 실익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환자가 사망한 사례를 다루어봤자 그 환자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자살 미수자의 경우에는 다시 또는 반복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했고, 실증적 자료들은 그 비율이 결코 낮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었다(Batchelor and Napier, 1952; Batchelor, 1955; BMJ, 1956: 813-815). 따라서 이들에 대한 연구는 또 다른 비극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자살 시도와 자살 미수가 사망에 이르는 경우를 수적으로 크게 능가하는 것은 분명했고, 당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자료는 전자가 후자의 7-8배가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BMJ, 1954: 232). 따라서 이처럼 막대한 숫자의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고통에 전문가로서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는 충분했다.

이 시기에 자살 시도에 대한 의료계의 논의는 그 사회적 의미와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전술했듯이 전후에 자살은 일종의 사회적인 동기와 기원, 영향을 갖는 행위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자살 시도에 대한 연구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였고, 특별히 자기 파괴적 행위가 갖는 의사 표현의 성격을 부각시켰다. 스텐글은 자살 시도가 “병적인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있음을 밝힌 최초의 정신의학자 중 한 명이었다. 자살을 기도하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그의 설명은 이후의 연구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 되었다(The Lancet, 1952: 1059-1060; BMJ, 1958: 1225). 13) 동일한 맥락에서 스트라우스(E. B. Strauss)는 어떤 자살 시도는 ‘알람’으로서의 기능을 갖는다고 파악했다. 그 역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자해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 경우 자살 시도는 일종의 이벤트 혹은 의식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분석했다(Strauss, 1956). 또 다른 연구는 자살 미수로 입원한 환자 가운데 4분의 1은 정말로 죽겠다는 의지는 없었으며 다만 “가까운 관계에 있는 타인의 태도를 바꾸려는 의도에서” 그러한 행동을 했다고 파악했다(Harrington and Cross, 1959). 결과적으로 1950년대가 지나면서 자살 사고, 위협, 미수와 같은 극단적 형태의 의사 표현에 사회가 적절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물론 개인의 도움 요청에 대한 공동체의 응답이 사법적 처벌이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Millard, 2015: 2-3).

마지막으로 의료계는 자살의 비범죄화가 사회적 통제의 약화 또는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전략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이 전문가 집단은 자살을 온전히 의료적인 문제로 다룸으로써 더욱 전문적이고 효율적인 통제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이러한 기대는 의료계의 권한 및 현실적 이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들은 당시 자살에 대한 경찰의 통제와 사법적 처벌이 기대한 효과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기존의 법률, 제도, 관행을 옹호하는 이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자살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 조항은 사회에 도덕적 준거를 제공하며 그 자체로 자살을 억제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자살 미수자를 구금, 조사, 기소하는 과정은 그들의 자살 재시도를 방지하고 치료를 강제하는 유일하고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자부했다. 현실에서 자살 시도 죄목으로 처벌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굳이 해당 법률의 존폐를 논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Wellwood, 1955; Bartholomew, 1958: 740; Casson, 1960).

그러나 의료계는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데이터를 활용하여 이들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먼저, 이들은 자살에 대한 구래의 규정이 자살을 방지하지 못한다고 확언했다. 대표적으로 엡스는 자살 미수 사건으로 구치소와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 가운데 40퍼센트 이상이 자살이 불법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심지어 전체 사례의 10퍼센트 정도는 과거에 자살 시도를 이유로 기소되거나 처벌을 받은 전적이 있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Epps, 1957). 자살 문제의 권위자들과 정신과 전문의들 역시 자살을 범죄로 규정함으로써 자살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단순하며 무엇보다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The Lancet, 1952: 1059-1060; BMJ, 1958: 579-580, 1225-1226). 의료계는 또한 자살 시도자를 처벌하는 데 일관성과 원칙이 부재한다고 지적했다. 자살 시도자의 경우 기소 여부는 운에 달려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재판 결과를 두고는 “판사의 개인적 특성 말고 다른 원칙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1955년 한 재판에서 자살 시도를 이유로 2년 형이 선고된 것이 알려지자, 의료계는 크게 분노했다(The Lancet, 1952: 1059-1060; Wellwood, 1955).

의사들은 또한 자살자와 자살 미수자에 대한 사법적 통제가 그들의 안전과 안녕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1961년 이전의 법률은 경찰관, 검시관, 치안판사, 교도관, 보호관찰관이 자살 사망자와 자살 시도자의 처우를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들 중 누구도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적 조치를 취할 능력과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어떤 환자가 어떤 치료를 어떤 장소에서 받을 것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 사법 기관 종사자들이 최적이 아님”은 분명했다. 특히 자살 미수로 기소된 이들의 절반 이상이 최종적으로 보호관찰 담당 ‘관리’의 판단과 결정에 맡겨지는 현실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이 이루어졌다(Epps, 1957: 184). 정신질환의 결과로 자살을 기도한 환자를 구치소와 교도소에 보내는 것 역시 “사회적 재활의 측면에서 최악의 방식”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현행법과 그 집행자들은 “자살 시도자의 안녕과 치료의 희망을 저해”하며 환자의 “치료 및 재활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The Lancet, 1958: 571; BMJ, 1958: 579-580).

따라서 “명백하게 정신적인 고통과 불행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전문적 도움과 치료적 조치를 취하는 역할은 사법 기관이 아닌 ‘의료 시스템’에 주어져야 했다(BMJ, 1958). 의료계는 자신들이야말로 자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적임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자신들에게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살 성향, 사고, 행동이 정신질환의 결과이자 표식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문제는 정신의학자들이 진단하고 치료하고 관리하는 게 마땅한 일이었다. 오들럼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 자살에 대한 사회적 대응과 통제가 의료인들의 손에 놓여야 하는 이유를 정리했다:

실제로 모든 자살 미수 사례는 시도 후 어느 단계에서 의사의 진료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의료진은 공동체의 다른 어떤 구성원보다 폭넓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자살 시도자와 지역 사회의 이해관계와 관련하여 이러한 사례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있다(BMJ, 1958: 580).

의료계는 또한 자살의 예방과 자살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도 전문가의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보내는 신호는 대단히 미묘하기 때문에 가족과 주변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의사조차도 그것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이 쉽지 않다(The Lancet, 1951: 1026; 1957: 203). 따라서 관련된 경험과 지식이 충분한 의사, 특히 정신의학 전문의의 판단과 개입이 적정한 시점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큰 불행이 발생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의사들은 주변의 우울증 환자들이 보이는 전조를 발견하기 위해 관심을 두라고 충고를 하면서도, 자기 파괴를 막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으로 전문의의 진단과 치료, 특히 ‘입원’ 치료를 추천했다. 1950년대 말에 나온 몇몇 연구는 자살 성향 환자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의료적 도움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자기 파괴적 행동을 저질렀음을 상기시키면서 정신의학 전문의의 더욱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이들은 전문가의 선제적인 조치와 전문 병동에의 입원 치료만이 자살을 막을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이라고 주장했다(Batchelor, 1955; Strauss, 1956; Parnell and Skottowe, 1957; Harrington and Cross, 1959; Capstick, 1960). 이와 같은 주장이 의학계, 특히 정신의학계의 권위와 권력, 심지어 현실적 이익의 증대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의료계는 또한 자살이 형법상의 범죄에서 제외되고 사법부가 이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는 경우 자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를 두고 대단히 구체적인 해결 방식을 제시했다. 1950년대 의료계가 주목하는 대안은 스코틀랜드 방식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이 시기 자살의 비범죄화를 요구하는 의사들이 가장 빈번하게 인용하는 사례를 제공하고 있었다.14) 북쪽 국경을 공유하는 이 인접국은 일찍이 자살 시도를 범죄시하는 규정을 폐기했고, 그럼에도 자살률은 잉글랜드의 3분의 2에 지나지 않았으며, 자살 문제와 자살 시도자를 선진적으로 관리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경찰에 인도되거나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대신, 환자로 분류되어 일반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만 자살 시도자가 의료적 조치를 완강히 거부하는 경우, 환자의 신변을 보증할 가족이나 지인이 부재하는 경우, 또는 공동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경우에는 ‘치안방해죄’를 적용하여 기소할 수 있었다(BMJ, 1958: 580). 그러나 해당 죄목으로 기소가 성립되더라도 자살 시도자는 병원에 구류되며 그곳에서 병원장의 책임 아래 치료와 조사를 받게 된다. 정신과 전문의가 추가적인 자살 시도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거나 조사 및 기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내리면 경찰은 그 의견을 받아들여 기소를 철회한다.15) 이는 자살을 범죄로 규정하지 않고도 자살 시도자에게 치료를 강제할 수 있고 자살 현상을 통제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실례로 여겨졌다.

의료인들은 자살을 비범죄화하더라도 규제의 공백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고, 형법이 아닌 다른 법률과 제도를 통해 자살을 관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앞서 스코틀랜드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언급한 것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일부에서는 굳이 형법이 아니더라도 1930년 정신질환 치료법(Mental Treatment Act 1930)과 그것이 규정한 ‘정신질환 진단증명서(mental certification)’ 제도를 통해 정신과 입원 치료를 강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The Lancet, 1958: 571). 또한 1957년 정신질환과 정신장애 관련 법률 조사를 위한 왕립위원회가 보고서를 발표하고 정신질환자의 치료에 대한 일련의 지침들을 제시하자, 의료계의 희망은 더욱 커졌다(BMJ, 1958: 1226). 왕립위원회의 최종 권고사항은 빠른 시일 내에 입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보고서가 자살 성향 또는 자살 미수 환자에게 치료를 강요할 수 있는 조건과 절차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6) 해당 내용이 법률화된다면 자살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률의 존립을 지지하는 가장 큰 근거 중 하나가 사라질 것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왕립위원회 보고서를 바탕으로 하는 정신건강법이 입법되자 의료계는 정신질환자의 치료와 관리를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파악했다. 이에 1959년 입법 이후 의료인들은 자신들이 자살 문제를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다고 자신했고, 경찰과 사법부의 개입을 배제하는 논리를 더욱 강력하게 개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전후 영국 의료계는 자살을 비범죄화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고, 이들의 노력은 곧 새로운 자살법 제정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5. 나가며

전후 영국 사회에서 자살이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부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제는 대중과 정책 결정자들, 여러 전문가 집단의 관심 밖에 머물렀다. 반면 의료계는 일찍이 자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전문가적 관점에서 이 주제를 탐구했다. 그리고 자살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세력들 가운데 법 개정에 적극적으로 임한 유일한 집단이 되었다. 이들은 자살의 의료화를 완료하고 비범죄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진행된 논의의 와중에 다양하고 효과적인 장치들을 만들어냈다. 즉, 도덕적·종교적 논쟁과 거리를 두고 자살을 철저히 현실 또는 현상으로써 다루었으며, 자기 파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원인이 작용한 결과라는 결정론을 고수했다. 또한 자살로 인한 사망보다 자살 시도 및 자살 미수 사례에 집중함으로써, 논의의 방향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틀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살을 범죄에서 제외하는 것이 사회적 통제의 약화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전문적이고 효율적인 통제를 강화하는 기반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의학계가 축적한 자살 담론은 입법의 권한을 갖는 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으로 작용할 터였다. 웨스트민스터에서 가장 먼저 자살법 개정을 언급했던 로빈슨은 대단히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그는 1949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부터 보건 및 의료 분야와 특히 정신 건강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46년 설립된 국립정신건강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Mental Health)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1958년 당시에는 협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자살법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했을 무렵 로빈슨이 스텐글의 연구와 주장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자살 행위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복합적 동기에 대한 설명과 자살의 비범죄화를 지지하는 촘촘한 논리가 로빈슨을 움직이게 만든 결정타였던 것으로 보인다(Moore, 2000: 184-190; Millard, 2015: 106-107). 자살에 대한 의학계의 치열한 고민과 논의는 해당 분야 내부에 머물지 않았고, 결국 정치권에 문제의식과 해법을 동시에 제공하는 한편 행동과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의료계 인사가 직접 정치권에 압력을 가한 사례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오들럼은 다양한 방식으로 의료계의 중지를 그 경계 너머로 전파했다. 그는 1947년 영국의사협회와 치안판사협회가 구성한 합동위원회에 일원이었고, 그 유명한 보고서의 작성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국립정신건강협회에서 활동하면서 로빈슨과도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였고, 중요한 문제의식들을 공유했다. 1957년에는 잉글랜드 국교회가 자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조직한 위원회에 정신의학 전문가로서 참여하여 의료계의 자살 논의가 기독교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전달했다. 오들럼은 또한 내무부가 자살법 개정을 본격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열린 각종 위원회에 가장 자주 호출된 사람 중 하나였다. 버틀러와 직접 대면하거나 형법개정위원회에 출석한 적은 없지만, 입법 과정에서 오들럼의 입김이 미치지 않은 단계는 거의 없었다. 영국 자살 방지 운동의 선구자인 채드 바라(Chad Varah)가 “오들럼은 자살법 개혁에 있어 독보적인 인물이다. 이는 전적으로 그의 성전(聖戰)이었다”고 표현했을 정도였다(Moore, 2000; 190-201). 이처럼 의료계의 자살 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여러 층위에서, 1961년 입법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자살법의 제정으로 수 세기에 걸쳐 진행된 자살의 세속화와 의료화는 완료되었고 자살과 범죄를 분리하는 작업이 일단락되었다. 살펴보았듯이 그 과정에서 의료계는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그들이 제공한 의학적 논리 역시 관철되었다. 그러나 1961년 법은 실제 의료 현장에서 체감할 만한 변화를 동반하지 않았고(Millard, 2015: 118), 오랫동안 자살을 따라다녔던 죄의식과 오명을 일소하지도 못했다(Neeleman, 1996: 253-254).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가 위법이라는 원칙은 폐기했지만 타인의 자살을 돕는 행위를 위법이라고 재삼 규정함으로써 장래에 새로운 의학적, 법적, 사회적, 행정적 마찰의 씨앗을 심는 결과를 가져왔다(Shaw, 2009; Cohen, 2010). 자살법 제2조가 불러올 파장과 이에 대한 의료계의 논의는 후속 연구를 통해 밝히고자 한다.

Notes

1)

이 글에서 영국은 주로 잉글랜드를 의미한다. ‘연합왕국(United Kingdom)’인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네 ‘국가’들은 각기 상이한 법과 체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707년 통합부터 지금까지 별개의 입법 기관과 제도를 유지해오고 있으며, 웨일즈는 중세 이래로 잉글랜드와 동일한 법 체계를 공유하다가 1999년에 이르러 독립된 의회를 수립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주목하는 자살법은 정확히 말하면 영국 전체가 아니라 잉글랜드와 웨일즈에만 적용되는 규범이었다.

2)

“Permissiveness” 또는 “permissive society”는 1960년대 영국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사용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 용어를 ‘관용’과 ‘관용적 사회’로 옮기는 경우가 많지만, 이 글에서는 본래의 의미와 뉘앙스를 살려서 ‘허용(성)’과 ‘허용적 사회’로 표기한다.

3)

『정신과학저널』은 왕립정신의학회(Royal College of Psychiatrists)가 발행하는 학회지로 『영국정신의학저널 (British Journal of Psychiatry)』의 전신이다. 1853년 『어사일럼 학회지 (The Asylum Journal)』라는 제목으로 출발했으며, 2년 뒤 『어사일럼 정신과학 저널 Asylum Journal of Mental Science』로 개칭하였다. 1858년부터 1963년까지 『정신과학저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1963년 현재의 명칭이 확정되었다.

4)

Hansard, Parliamentary Debate, House of Commons, Vol. 581, Col. 1327, Febuary 6 1958.

5)

“Discussions on the Legal Aspects of Suicidal Acts,”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Section of Psychiatry, 14 January 1958.

6)

어윈 스텐글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 정신의학자 겸 정신분석가로 1938년 나치의 압제와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의사 면허를 재취득하였고, 종전 이후에는 정신과 전문의로서 자살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스텐글의 삶과 활동, 영국 의학계에 남긴 족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F. A. Jenner, “Erwin Stengel: A Personal Memoir,” G. E. Berrios and H. Freeman eds., 150 Years of British Psychiatry: 1841–1991 (London: Athlone, 1991), pp. 436–44; Uwe Henrik Peters, “The Emigration of German Psychiatrists to Britain,” G. E. Berrios and H. Freeman eds., 150 Years of Psychiatry: The Aftermath (London: Athlone, 1996), pp. 565-80.

7)

Enquiries into Attempted Suicide,”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Section of Psychiatry, 13 May 1952.

8)

“Discussions on the Legal Aspects of Suicidal Acts,”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Section of Psychiatry, 14 January 1958.

9)

“Discussions on the Legal Aspects of Suicidal Acts,”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Section of Psychiatry, 14 January 1958.

10)

“Discussions on the Legal Aspects of Suicidal Acts,”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Section of Psychiatry, 14 January 1958.

11)

1958년 잉글랜드 국교회는 J. T. 크리스티(J. T. Christie)를 대표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자살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정리하였고, 이듬해 그 논의의 결과를 정리하여 『자살은 범죄여야 하는가? Ought Suicide to be a Crime?』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국교회는 자살이 종교적 관점에서 잘못된 행위라는 점을 재확인하면서도, 이를 형법상의 범죄로 규정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해당 내용이 이후 자살법 입법에 대단히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했음은 물론이다. 자살과 자살자를 대하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규범과 태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하라: Charlotte L. Wright, “The English Canon Law Relating to Suicide Victims,” Ecclesiastical Law Journal 19-2 (2017), pp. 193-211.

12)

“Discussions on the Legal Aspects of Suicidal Acts,”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Section of Psychiatry, 14 January 1958.

13)

Enquiries into Attempted Suicide,”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Section of Psychiatry, 13 May 1952.

14)

19세기에 들어서 자살과 자살자, 자살 시도자를 다루는 방식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다른 경로를 걷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의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하라: Rab Houston, “The Medicalization of Suicide: Medicine and the Law in Scotland and England, circa 1750-1850,” J. C. Weaver & David Wright, eds., Histories of Suicide: International Perspectives on Self-Destruction in the Modern World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08), pp. 91-118.

15)

“Discussions on the Legal Aspects of Suicidal Acts,”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Section of Psychiatry, 14 January 1958.

16)

Report of the Royal Commission on the Law Relating to Mental Illness and Mental Deficiency, Cmnd. 169 (London: H.M.S.O., 1957), pp.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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